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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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김시습의<금오신화> 대하여 ( 杜路飞) 댓글:  조회:10418  추천:0  2013-01-24
                                               摘 要   金时习是朝鲜王朝前期的著名文人,第一个小说作家。 他的《金鳌新话》被看作是韩国文学史上汉文小说的开始,具有非常重要的文学史意义。《金鳌新话》在人物描写和情节安排上,都突破了稗说作品的范围,成为朝鲜的第一部小说作品。 《金鳌新话》收有短篇小说5篇,其中《李生窥墙传》塑造了背叛封建礼教的一对青年情侣的形象;《万福寺樗蒲记》表现了神女对人间生活的向往;《醉游浮碧楼记》写一个青年在平壤游历古迹时,遇见一个古朝鲜时代的仙女,两人以对诗的形式抒发情怀;《龙宫赴宴录》和《南炎浮州志》描写文士韩生去龙宫的见闻和隐士朴生在梦中与阎王的对话,反映了作者对李朝统治者的愤懑。   关键语:汉文小说 金鳌新话  反映 愤懑                                                초 록   김시습은 조선왕조 전기의 저명한 문인이며 첫번 째 소설가이다. 그의 소설집《금오신화(金鳌新话)》는 한국문학사상에서 한문소설의 개척 성적인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 바 비상히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금오신화》는 인물묘사와 정절의 안배상에서나 모두 패관소설작품의 범위를 벗어난 조선의 제일 첫번 째 소설작품으로 되었는데 소설집에는 모 두 5편의 소설이 수록되었다. 그중에서《이생규장전(李生窥墙传)》은 봉 건례교를 배반한 한 쌍의 연인들의 형상이 부각되고 있으며《만복사 저포기(万福寺樗蒲记)》에서는 인간생활에 대한 신녀의 지향을 표현하 고 있다. 《취유부벽정기(醉游浮碧楼记)》에서는 한 청년이 평양의 역사고적 을 유람할 때 고조선시대의 선녀를 만나 시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서로의 정회를 토로하고 있으며 《용궁부안록(龙宫赴宴录)》과《남염부주지 (南炎 浮州志)》에서는 문사 한생의 용궁 견문과 은사 박생이 꿈속에서 염라 대왕과의 대화를 묘사하여 이씨조선의 통치에 대한 불만정서를 토로하고 있다.   키워드:한문소설 금오신화 반영 불만   차 례   서론 1.1 연구목적과 의의 1.2기존 연구사 검토 1.3 연구방법과 범위 본론 1.1 김시습의 생애 1.2. 김시습의 문학관 1.2 김시습과 1.2.1  < 금오신화>의 창작배경 1.2.2 < 금오신화> 의 형성과정 3.
139    현진건 문학의 사실주의 (이선지) 댓글:  조회:8490  추천:0  2013-01-24
         摘要   玄镇健可以说是当时韩国最优秀的短篇小说家,其作品风格与写作技巧近似于莫泊桑和契诃夫,他有着殖民体制下的生活体验,作为当时少数不愿屈从于殖民体制的一员而备受瞩目。玄镇健是韩国极具代表性的作家,提及短篇小说人们就会想起他那篇「走运的一天」。玄镇健开创了近代短篇小说,也开启了现实主义文学之门。 在韩国近代文学初步发展时期,玄镇健开创了短篇小说这一文学形式,为写实主义文学的确立奠定了基础,由此看来,他无疑在韩国文学史上占据着十分重要的地位。 玄镇健是一位在韩国文学史上具有重要地位的作家。他试图努力正视和直面殖民统治下朝鲜和朝鲜民族的面貌,他所特有的虚无意识在其短篇小说中表现得淋漓尽致,其文学作品通常并非以革命或启蒙而是以死亡和出走为结局,而这正是玄镇健式短篇小说的特色所在。本文旨在研究贯穿其整个作品世界的写实主义思想。   关键词:开创,现实主义文学,近代文学,样式                                       초 록   현진건은 한국의 그 시기에 가장 우수한 단편소설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의 풍격과 기교는 모두 모파쌍과 체호브의 풍격과 비슷하였다. 현진건은 식민지체제를 체험한 작가이다. 그 식민지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많지 않은 작가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바이며, 한국인의 단편소설하면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한국의 대표적 작가 이기도 하다. 빙허(憑虛)현진건은 근대 단편 소설과 본격적인 리얼리즘의 문을 열었다. 또한 한국문학사에서 근대문학 초창기에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바탕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빙허 현진건은 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조선의 얼굴을 직시하여 민족의 모습을 똑바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하였 으며 빙허 특유의 허무의식으로 빙허만의 단편소설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무리를 항상 어떤 혁명이나 계몽이 아닌 죽음이나 떠남 등으로 맺으며 현진건식 단편소설을 형성했다. 이러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관통된 사실주의사상을 연구하는 것이 본 논문의 취지이다.                        키워드: 개척, 사실주의 문학, 근대문학, 양식   차 례 1.서론 1.1 연구 목적과 의의 1.2 선행 연구사 연구사 검토 1.3 연구 범위와 방법 2. 본론 2.1 문제의 제기 2.2 작가의 생애 2.3 문학창작활동 3. 현진건의 작품 세계 3.1 현진건 창작 사상 3.2 현진건 소설의 특성 3.3 현진건 문학의 의의 3.4현진건 소설의 한계 4. 결론 감사말                                                  1. 서 론   1.1연구 목적과 의의   빙허(憑虛) 현진건은 근대 단편 소설과 본격적인 리얼리즘의 문을 열었다. 빙허의 수많은 작품은 1920~30년대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감으로 다가왔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한국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문학적 가치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진다. 이광수「무정」의 추상적, 낭만적 비현실성을 거부하면서 현실에 기반 한 문학을 창작하려는 작가들의 반성과 함께 20년 대에 오면 사실주의 문학에 눈 뜨게 되는데 특히 현진건은 20년대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연구는 현실적으로도 의의가 크다. 1.2 기존 연구사 검토 사실주의 작가, 단편문학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온 현진건 문학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구들은 해방이전 의 기법을 중심으로한 인상비평의 단계, 문학사적 의미 속에서 종합적 작가연구가 시도되던 60년대, 다양한 방법으로 현진건 문학세계를 파악한 70년대 이후의 경향의 세 단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3 연구 범위와 방법 단편소설에서의 성과와 함께 사실주의 작가로 평가하는 선행 연구 방향 을 넓게 수용하여 현진건 그의 사실주의 창작의 문학사적인 공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진건의 문학사적 위치에 대해서는 주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질과 가치를 밝히고 나아가서 현진건의 문학적 특질과 가치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려한다.                                            2. 본 론   2.1 문제제기 현진건 소설은 그 변모 과정을 살펴볼 때, 크게 3단계로 구분되는데, 첫째, 지식인이 보여주는 무력감과 우월의식,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사회 에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빚어지는 지식인의 사회에 대한 부적응과 갈등, 좌절,양상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둘째,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는 상화에서 궁핍하고 소외된 하층민들이 현실에 절망 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과 성격 특징에 대해 조명한다. 셋째, 위선적 이고 이중적인 인간상이다. 여기서는 불건전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 현실에서 속물근성을 지닌 인물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추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조명된다.  2.2 작가의 생애 현진건은 1900년 대구의 한국의 전통적인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격동 기에 개화 지향적인 주변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정치, 사회적으로 어렵고 혼란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가까운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대하면서 자신의 삶을 정립했다. 열한 살 때 생모를 여의고, 열여섯에 부호 집안의 딸과 결혼하고, 이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세이조중학 4학년을 중퇴하고 중국 후장대학에서 독일어를 공부 하다가 1919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생활에 절도를 유지했고, 문단의 세기말적 분위기에 초연했다. 조혼 한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여성관계에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 출옥 후 살림이 기울었고 부암동에서 양계를 하기도 했으나 1943년 향년 44세 때 폭음에 의한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2.3. 문학창작 활동 현진건이 작품 활동을 한 시기는 1920~ 1940년대라고 말할 수 있다. 1920년 11월에 발표된 처녀단편 「희생화」로부터 1941년의 장편소설 「선화공주」까지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 작가 생활 20여 년 간에 걸쳐 보여준 그의 작품량은 단편소설 25편, 장편 소설 6편인 것으로 집약된다. 현진건은 한국 근대문학의 초창기에 해당되는 1920년대 초반, 『백조 (白潮)』파의 일원으로 소설 를 발표해 문단에 데뷔한 후 근 20여 년의 작가 생활에서 혁혁한 문학적 성과를 남겼다. 그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한결같이 리얼 리즘 문학의 선구자, 또는 그 공로자로서 뚜렷한 작가임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현진건의 문학 활동은 대체로 3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등 일련의 자전적 양식의 소설을 발표했던 초기이다. 이때 작품에는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사회의 과도기적 상황 을 문제 삼아 탐색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진입한 조선사회에서 지식 인의 자의식과 갈등·좌절을 통해, 근대 사회의 중요한 요건인 사랑과 가족, 직업과 돈 문제를 추구했다. 이 시기 작품에서는 자아를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적 자아가 덜 확립된 지식인의 모습을 통해 변동기 지식 인과 그 사회를 탐구하고 있다. 44세란 극히 짧았던 생애를 통하여 그가 내놓은 문학은 민족적 비애로 충만된 민족의 수난과 역사를 성실히 증언하는 사실작가로 일관했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처녀작 「희생화」는 황석우에게서 혹평을 받았으나, 1921년 빈곤 속에서 나타나는 아내의 따뜻한 애정을 그린 「빈처」와 암담한 현실을 탈출하는 길이 술밖에 없음을 보여 준 「술 권하는 사회」 를 발표함으로써 당당한 소설가로서 인정받았다.   그는 한 시대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는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문화적으로 서구 취향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선비의식을 지탱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모순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대처하여, 생활과 문학을 하나로 일치시켜 살았던 작가이다. 그의 문학사적 위치와 선구적인 공적은 그가3.1 운동 이후에 전개된 한국의 근대문학운동에 헌신한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이라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에는 그가 근대문학을 전개시킨 선구자의 한 사람이라는 것,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한 최초의 중요한 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 기교의 가치를 보여준 최초의 작가라는 것 등 그의 선구적인 공적이 그대로 그의 문학사적인 위치이기도 하다. 3. 현진건의 작품 세계 3.1 현진건의 작가의식 문학은 그 시대의 모순을 작가 자신의 문제로 파악하고 그 모순의 본질을 올바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인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한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하여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소설에서 이러한 작가의식은 주로 작중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나타난다. 즉 작가는 작중 인물이 ‘그 시대의 사회 현상을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시대적 인식을 표출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는 당시 3대 동인지 나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경향이 짙었지만 현진건 같은 백조파이면서도 그들과는 달리 어두운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짙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선언하고 있다. “시간과 장소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치 못하는 것이다. 달나라의 소요도 그만둘 일이다. 구름바다의 유희도 그칠 일이다. 조선 문학인 다음에야 조선의 땅을 든든히 디디고 서야 할 줄 안다.” 이것을 보면 그의 작가적 의식은 다음과 같이 개괄된다. 그는 사회적 역사적 현실을 증언하는 리얼리즘의 길을 선택했으며 둘째로 그는 민족 주의적 자각이 투철했고 민족의 당면 현실을 외면한 어떠한 문학도 거부하 고 있었다. 그의 이런 면을 그의 대표작 (1924) 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라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고 숨을 걸그렁걸그렁하였다. 그때 김첨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젠장맞을 년, 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   주인공인 인력거꾼 김첨지는 돈벌이를 위해서는 빈사직전의 아내의 애원도 이렇게 뿌리치고 만다. 가난이 이 같은 비정과 냉혹함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그 같은 외면적인 표현과는 달리 내면적으 로는 아내에 대한 동정이 깔려있다. 그리고 허기진 배로 온 종일 빗속을 철퍼덕거리면서도 아내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인력거를 끌고 달리다가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기도 한다. 그리고 그 날 마침내 아내를 위해서 설렁탕 한 그릇을 사가지고 들어가지만 아내는 이미 죽어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건을 통해서 작자가 보여준 것은 일제하의 가난한 한민족의 고통이며 특히 하층계급의 인간들에게 행운의 기적도 있을 수 없다는 냉혹 한 현실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왜냐하면 김첨지는 그날 운수가 좋아서 오랜만에 돈 몇 푼을 벌게 되었지만 그날 이미 아내는 세상을 떠나버리고 다시 비극에 말려드는 것이 작품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한편 (1921)는 지식인의 고통을 표현한 것으로서 대조 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주인공은 매일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온다. 아내 는 남편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매일 보는 것은 혼자서 고민하고 술 마시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술 마신 동기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낯면이 없이 말하는 ‘사회’의 낱말 뜻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한다. “그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① 이래서 작가가 표현하는 대화 속엔 꽤 심각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아내는 이 집안의 아내만이 아니라 당시 한국사회의 어리석은 모든 민중을 상징하는 교육받지 못했고 가난하게만 살아온 민중이다. 그리고 이 같은 민중을 이끌어 나갈 책임자는 바로 여기서 남편으로 등장하는 지식인이다. 그러나 민중은 몽매하고 지식인은 무능할 뿐이다. 또 지식인은 무능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작당과 파벌의 분열만 일삼고 있다.   작자는 이처럼 민중과 지식인들 양쪽을 다 같이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 보면서 우리들의 암담한 현실을 고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정을 지적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그 같은 ‘구체적인 참상을 목격할 때에 우리의 감회가 어찌 천연할 수 있으랴,“하고 호소하고 있다. 는 이 같은 기록과 대조해 볼 때 당시의 암담한 현실을 누구 보다 정직하게 작품으로 증언하고 고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에서 더욱 끔찍한 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926년 작인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군은 낙천가요 어떤 고통도 웃고 넘기며 참아낼 수 있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므로 딴 작품들의 경우처럼 타고난 비극적 성격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과는 다르다. 어디까지나 웃음으로 끝낼 수 있는 인간형 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비극의 깊이가 따르게 된다. 그는 뼈를 저미는 추위 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배가 고파도 웃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성격도 결국은 무의미하게 된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요정에서 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음식을 주워 담다가 기생과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다. 굶주리는 처자식 때문에 굴욕을 참고 찌꺼기를 주워 담던 그는 조롱을 받다가 격분해 버리고 정신이상 자가 된다. 그래서 자식들을 기둥에 묶어놓고 집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 동안 정신이상자를 감시하고 간호하던 자신이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당시의 한국 민중이 얼마나 처참한 굶주림에 빠져 있었으며 가족을 거느린 부모들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또 이와 달리 그의 대표작으로서는 농촌 현실을 말해주는 (1925) 이 있다. 작자는 무지몽매한 민며느리제도가 저지른 한국농촌 사회의 비극 성을 폭로하고 있지만 그 같은 비극성의 근본적인 원인도 가난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된다다. 딸자식 하나를 먹여기를 수 없을 만큼 가난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남의 집에 민며 느리로 보내는 것이요, 자식이 노총각이 되도록 장가들일 밑천이 없기 때문에 그런 어린애를 민며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린 주인공 순이는 노예처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밤에는 그것보다 더욱 가혹한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미성년자로서 이 집 노총각 으로부터 당하는 그 짓은 견딜 수 없는 질곡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 짓을 매일 당하던 방에 방화하게 된다.   에서도 그랬듯이 작품의 종말은 방화로 맺어지며 그것이 비극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 같은 민중의 고통을 좀 더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과 직접 적으로 관련시켜서 작자가 마무리한 작품이 있다고 한다면 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 작품은 단편으로서의 기교면에서는 큰 뜻이 없다. 왜냐하면 단편의 구성의 묘미나 표현의 기교를 살려나간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열차 속에서 만난 한 사내의 이야기를 그대로 서술한 형식이다. 그렇지만 작자는 당시의 가난했던 백성이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 그들의 수탈 행위로 말미암아 농토를 잃고 얼마나 처참한 역경을 헤쳐 나갔는지를 생생 하게 기록문학 형식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열차 속에서 만난 인물은 17세 때 이역만리 간도로 떠났던 인물이다. 조선 백성이 조선 땅을 버리고 남의 땅을 찾아간 건 일제에게 조선 땅을 빼앗겼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거기서 끝없는 육신의 혹사와 굶주림이 이어진다. 그래서 부친은 병을 얻어 작고한다. 홀어머니는 그 후 역시 병들어 ‘흰죽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아사한다. 다음에 주인공은 부모의 유골을 버리고 현해탄을 건넌다. 역시 남의 땅이다. 규수 탄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후 다시 그곳을 떠나서 오래간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고향은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황폐해 있다. 우연히 꼭 하나 아는 사람을 만나는데 그녀는 유곽으로 팔려가서 시달리다 성병을 얻고 늙어버린 폐물로서 지금 은 일본인 집의 하녀로 있는데 바로 그녀가 옛날엔 그의 아내가 되려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26년 3월에 발행된 그의 단편집 맨 뒤에 수록되어 있다. 단편집의 이름을 이라고 했고, 이런 표현이 단편집에서 사용된 것은 오직 에서 단 한번뿐이었으며 이 작품이 이 단편집의 맨 끝에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작자는 자기문학의 결론적인 의미를 이 작품에 담았다고 짐작된다. 3.2  현진건의 문학적 특성 현진건은 식민지체제를 체험한 작가이다. 그 식민지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많지 않은 작가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바이며, 한국 인의 단편소설하면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현진건은 그 문학적 기법도 사실주의적이었으며 그의 작품 내용도 대부분 빈곤, 사회적 모순, 지식인의 고뇌 등을 다루고 있어 사회의식이 강한 작가이었음이 분명하다. 현진건 소설은 김동인 이후 주도적인 양식으로 등장한 단편소설의 기법 적인 완결을 추구하여 소설적 미학의 확립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초기 소설에서 ‘나’라는 일인칭 화자를 등장시켜 소설 속에서 성격의 초점과 서술의 초점을 일치시키면서 인물의 내면 분석의 가능하게 하였는바 문학에 있어 기교의 가치를 보여준 최초의 작가이다. 이재선은 현진건의 문학사적 위치와 그의 문학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적 단편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의 한 사람 인 현진건의 작품의 특성은 단적으로 아이러니의 틀 속에 20년대의 한국사회의 파라다임을 창조하고 있는 점이다. 그는 김동인의 단음적인 직선 구조나, 진공적 언어와는 달리 아이러니와 현실의 언어군으로써 이 땅의 근대적 사실주의 문학의 머릿돌을 놓은 작가다. 현진건의 또 다른 가장 큰 특징인 눈물로 얼룩 진 1920년대 현실의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리얼리티가 충만하게 그려냈다는 것인데 그 대표작으로「운수 좋은 날」과「고향」을 들 수 있고, 극단적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의 궁극적 고통을 참지 못해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많은 비윤 리적인 행동, 곧 비극을 비극이 아닌 것처럼 일상을 그려내듯 써낸 「서투 른 도적」,「정조와 약가」,「신문지와 철창」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같 은 소설에서 항상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서사의 핵심이 있다. 조선의 얼굴을 드러내는 소설,「고향」은 정말 뛰어난 소설적 구성을 가졌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짧은 시간 동안 기차에서 주인공과 ‘그’가 나눈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마지막에 ‘그’가 읊조리듯 부른 노래는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현진건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1인칭 화자의 고백 형식을 통하여 작가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운수 좋은 날」 이후의 작품에서는 3인칭을 도입하여 작중 인물의 삶을 좀더 치열하게 묘사하였는데, 그의 대표 단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운수 좋은 날」, 「불」, 「B사감과 러브레터」.「고향」 등이 여기에 속한다. 3.3 현진건 문학의 의의 현진건은 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조선의 얼굴을 직시 하여 민족의 모습을 똑바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며 빙허 특유의 허무의식으로 빙허만의 단편소설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무리를 항상 어떤 혁명이나 계몽이 아닌 죽음이나 떠남 등으로 맺으며 현진건식 단편소설을 형성했다. 오로지 자신의 경험밖에 쓸 줄 모르는, 장편은 안 되고 단편만 쓰는 작가라고 비판도 받았지만 그것은 현진건의 소설만이 가진 수많은 장점에 비하면 작은 부분이다. 일제 강점기에 순수문학이 아닌 현실을 그려내고 묘사하는 문학으로 작가의 위치를 굳건히 하였고 에 재직하면서는 일장기 말살 사건과 연루되어 감옥 살이도 하고 직업도 잃게 되지만 그는 끝까지 통속 소설을 쓰거나 친일을 하는 등의 행위를 전혀 하지 않고 꿋꿋이 양계나 쌀장사를 하며 살아갔다. 하지만 그도 변변치 않았는데 그래도여기서 드러나는 그의 선비정신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그의 삶과 문학은 대부분 일치 하는 경향을 보이며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과 가치 있는 문학을 제공하여 주는데 여기서 독자로서, 중국의 독자로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참 많다. 3.4  현진건 문학의 한계 현진건의 소설은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고 또 탐구해볼 수 있다. 그의“憑虛御風”에서 憑虛御風란‘허공에 의지하고 바람을 타다.’라는 뜻으로 평소 빙허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 에서 드러나듯 빙허는 현실을 허무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 경향도 있다. 그의 생애부터 시작하여, 문학관, 한계와 고민, 개별 작품을 통한 지식 인의 세계를 향한 갈등과 고민. 그것은 동인지 시대를 맞이하며 급격히 성장하던 수많은 작품의 경향 중 현진건만의 차별화된 성향이었으며, 그것을 한 가닥의 끈으로 이으려는 힘든 작업을 시도하였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 된 그가 택해야했던 글쓰 기의 고민은 그의 작품 결과보다도 더 치열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쓰인 이들의 소설에서 돋보이는 것은 한마디로 사실주의적인 면모였다. 현대의 정신을 망각한 채 과거로만 몰입하는 민족주의 문학이나 각종 문예사조를 모방하는 당시의 문학 풍토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현진건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학을 주장한다. 바로 그의 이런 작가적 의식과 창작태도가 그의 문학사적의 위치를 굳게 자리잡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수좋던 날”이 그토록 노동자의 고통을 표현한 것으로서 이 작품의 발표연대는 프로문학이 대두되던 시기이며 그것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적인 대립관계를 나타낸 적절한 소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작자는 그 같은 입장을 떠나서 다만 고통 받는 계층의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였을 뿐 프로문학적인 입장은 나타내지 않았다.                                          3. 결 론   빙허 현진건은 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조선의 얼굴을 직시하여 민족의 모습을 똑바로 인식하려는 노력을 하였 으며 빙허 특유의 허무의식으로 빙허만의 단편소설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무리를 항상 어떤 혁명이나 계몽이 아닌 죽음이나 떠남 등으로 맺으며 현진건식 단편소설을 형성했다. 오로지 자신의 경험밖에 쓸 줄 모르는, 장편은 안 되고 단편만 쓰는 작가라고 비판도 받았지만 그것은 빙허 현진건의 소설만이 가진 수많은 장점에 비하면 작은 부분이다. 일제 강점기에 순수문학이 아닌 현실을 그려내고 묘사하는 문학으로 작가의 위치를 굳건히 하였고 끝까지 통속 소설을 쓰거나 친일을 하는 등의 행위를 전혀 하지 않고 꿋꿋이 양계나 쌀장사를 하며 살아갔다. 여기서 드러나는 그의 선비정신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빙허 현진건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하며, 나는 빙허 현진건은 한민족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그러한 작가였고, 있어주었기에 앞으로도 그 이름은, 그 작품은, 그 삶은 영원히 기억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문학은 그 시대의 모순을 작가 자신의 문제 로서 파악하고 그 모순의 핵심 또는 본질을 올바로 파헤칠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한 시대에 대한 고통 스러운 지성만 작용하는 것도 아니며 문학적 언어에 대한 예리한 감성만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한 시대를 바라보는 고통스러운 지성은 나타나 있으되 그것이 문학적 언어로 잘 빚어져 있지 않으면 문학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줄어든다.   참고 자료   1. 나병철,「현진건 소설의 아이러니와 탈식민주의」,현대문학 이론학회, 2000 2. 고인환,「현진건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지식인의 근대적 자의식 연구」, 어문연구학회,2006 3. 이재민,「새 자료로 본 빙허의 생애」 4. 안남연,「현진건 소설 연구」,경일대학교,1996 5. 김중하, 『현진건연구』, 새문사, 1981. 6. 백철, 『신문학사조사』, 신구문화사, 1972. 7. 신동욱 외, 『현진건의 소설과 그 시대인식』, 새문사, 1981. 8. 이재선, 『한국단편소설연구』, 일조각, 1975. 9. 조남현, 『소설원론』, 고려원, 1982. 10. 조동일, 『한국문학사상시론』, 지식산업사, 1978. 11. 조연현, 『한국현대문학사』, 성문각,1980. 12. 고명철,「식민지 자본주의의 통속성에 대한 서사적 대응 - 빙허 13. 현진건의 장편『적도』읽기」, 『한국어문학연구 제46집』, 한국어 문학연구학회, 2006. 14. 고인환,「현진건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지식인의 근대적 자의식 연구-,,를 중심으로」, 어문연구학회, 2006. 15. 곽순애, 「1920년대 전반기 소설의 현실 인식 방법 연구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38    연암 박지원과 그의 실학사상 연구 (범지민) 댓글:  조회:9973  추천:0  2013-01-24
                                          摘 要   朴趾源是朝鲜十八世纪杰出的实学思想家和现实主义文学家,在朝鲜思想史和文学史上居有重要的地位。也是其中最喜爱文学创作并取得巨大成就的人之一。朴趾源生活的时代及写作《热河日记》的年代,是朝鲜封建社会行将步入近代社会的历史交替时代与通过燕行的亲身体验之间的差距,造就了朴趾源矛盾的心态,而这种心态又直接反映在《热河日记》之中。 在特殊的历史时代,依据作者本人特殊的生活经历和思想历程而完成的《热河日记》,无论从作品所引发的社会效应,还是从作者个人的文学创作活动,都具有非同小可的重要价值。 (참고하세요) 关键词: 朴趾源 朝鲜封建社会,实学思想 热河日记                                            초 록   박지원(朴之源)은 18세기 조선의 가장 탁월한 실학사상가이며 뛰어난 사실주의 작가로서 조선의 사상사와 문학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문학창작을 가장 열애하고 거대한 성취를 취득한 사람의 하나 이다. 박지원이 생활한 시대 및《열하일기(热河日记)》를 창작한 시대는 바야흐로 조선 봉건사회가 근대 사회로 진입하는 역사교체시대와 연경여 행을 통하여 직접 겪은 체험 사이에 낙차는 박지원으로 하여금 모순된 심 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심태가《열하일기》에 관통되었다. 특수한 역사시대, 작자의 특수한 생활경력과 사상여정에 근거하여 《열하일기》를 완성하게 되었다. 무릇, 작품이 일으킨 사회효응이든 작자 개인의 문학창작활동이든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연암의 소설작품은 그의 창작성과를 집중적으로 과시하고 있을 뿐더러 한국중세 소설문학의 고봉을 이루고 있다.   키워드:  박지원  조선 봉건사회 실학사상  열하일기 차 례 서론 1.1연구 목적과 의의 1.2 기존 연구사 검토 1.3. 연구 범위와 방법 2. 본론 2.1.1박지원의 생애 2.1.2박지원의 시대적 배경 2.1.3학문적 경향 2.2.1 연암 박지원 문학에 나타난 실학사상 연구 2.1. 2독창성과 자주성 2.1.3 법고창신 2.2.1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 2.2.2 인간성의 긍정과 평등사상 2.2.3 당대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 3. 결말                                1. 서 론 1.1 연구목적과 의의 는 박지원의 문학을 대표하는 저작으로서 "조선 시대 한문학(汉文学) 유산 가운데 근대지향적인 성격이 가장 뚜렷한 구체 적 작품분석을 통해 문학사적 의의를 재평가하는 것은 매우 의의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본 논문은 박지원의 실학사상과 그의 작품의 문학적 특성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 이 연구를 시도하는 것은 실학의 본질에 한걸음 더 접근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짚어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박지원의 실학사상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1.2 기존사 연구 연암문학은 최근들어 조선후기 한문학(漢文學) 유산에 내포된 근대지향 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부각하려는 연구경향이 대두함에 따라 그 예술 성과 문학사적 의의가 높게 평가되어 왔으나 연구대상 작품이 , , 등 수편의 단편적인 작품들에 국한되었기에 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1.3. 연구 범위와 방법 지금까지 국내외 학술계에서 박지원과 그의 작품연구는 다양하게 진행 되었고 성과가 혁혁하기에 필자는《열하일기》에 내재한 문화가치와 시대 의의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탐구하여 《열하일기》가 가진 역사의 전환의 시대의 근대계몽 가치와 의의를 재확인하려 한다.                                                                     2. 본 론   2.1 박지원의 생애와 문학활동 2.1.1 박지원의 생애 박지원(朴趾源)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를 지은 뛰어난 문장가로서 1737년(영조 13년) 서울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765년 과거에 실패한 뒤 오직 학문연구와 책을 쓰는 일에만 전념하다가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등과 학문 적으로 교류를 가지기도하고, 특히 이 시기에 박지원은 이덕무, 홍대용 등과 실학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벌이고, 이덕무 유득공 등과는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박지원은 1777(정조1)세도 정치가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은거하면서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 하였고, 그 곳의 지명을 따서 호를 '연암' 이라 하였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 (下敎)에 응해〈과농소초(課農小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생산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그의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2,1.2  연암 박지원의 시대적 배경  18세기를 전후하여 조선 후기 사회는 극심한 갈등으로 번민하면서 소리없이 요동 하며 절규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잃은 것은 삶과 삶에 대한 윤리, 그리고 행복이었고, 얻은 것은 비참과 자아 각성이었다. 연암이 그의 청소년 시절을 보내었던 18세기 중반 경의 조선사회는 영조의 노련한 통치 하에 외관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신축(辛丑)·임인(壬寅) “1721년 (경종 1)과 1722년” 두 해에 걸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옥사를 일컫는 신임 사화 이후 정계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노론과 소론간의 알력은 그 이면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2.1.3 학문적 경향   청나라에 영향을 받은 박지원의 학문적 경향은 한마디로 이용후생론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수레와 배의 효용성을 강조하였으며 과학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서양인 들을 초빙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북학사상에 있어서 더욱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측면이라고 하겠다.   서경(書經)에서는 《정덕이용후생(正德利用厚生)》‘’이라고 했지만 연암은《이용후 생정덕(利用厚生正德)》으로 순서를 바꾸었다. 경제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윤리, 도덕의 문제도 해결된다는 사상은 전통적으로 유교에서 상업은 말리(末理)라 하여 배척하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연암은 문장은 寫意(사의)에 그쳐야지, 망상이나 가식이 스며들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위주의 문장론을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글로써 놀이를 일삼 는다' 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반성과 또 한편으로 불우한 처지에서 그릇된 사회를 해학과 기지로 조롱, 풍자하는 태도를 보인 점인데, 이는 바로 모순 된 사회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그의 치열한 문학정신을 보여주는 일면 이다.   박지원의 문풍(文風)은 '열하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당시에는 상당히 신선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을 주었다. 이를 '패관소품(稗官小品)체' 라고 했는데, 중국 에서 명나라 말과 청나라 때 유행한 것이 조선에 들어와 널리 회자된다. 희곡, 소설 등의 서민적 문예에서 나타난 자유분방하고 감각적인 내용의 단문 문체로, 양반가 에서 주로 쓰이던 진부한 느낌의 장문 고문체와 많이 달랐다.   정조는 1792년에 엄중한 전교를 내려 '패관소품'체의 사용을 금지하고 주요 인물에게 반성하는 글을 쓰게 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 지목된 사람이 바로 박지원 이었고, 그 대표 저작물이 열하일기였다. 과거 시험이나 공문에 그러한 문체를 사용 하면 즉시 죄를 물어 파직하고 중국에서 패관 소품이나 소설의 수입을 일체 금지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2.2.1창작활동  한 작가의 창작사상은 사회 현실에서 형성된 것이다. 시대가 다르면 생각도 다르고 가치관도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한 작가의 사상은 현실 속에 발을 붙이고 시대를 통찰 해야 한다는 것이 연암의 창작 사상의 기틀이었다. 연암의 창작 태도는 현상과 실상 의 차이를 인식한 데서 출발한다. 물론 시대적 현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실상을 규명 하는 데서 그의 문제의식과 문학적 진실이 현시된다.   그는 청년기와 장년기에 11편의 소설을 썼는데, 현재는 9편이 전해지고 있 다.〈광문자전〉에서는 광문이라는 거지의 의리있는 도덕행동 과 사리 사욕과 명예에 눈 먼 양반을 대치시킴으로써 양반의 가식적 도덕 을 폭로·비판했다. 〈마장전 (馬駔傳)〉에서도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건강 한 도덕성과, 고결성이 퇴색되고 비속화된 양반들의 사교를 대비시킴으 로써 양반의 허식적 생활을 풍자·비판했다.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는 똥거름 치는 근로자인 주인공 엄행수 (嚴行首)의 삶에서, 서민적 덕성(德性) 으로서의 건실한 생활철학을 형상화 했다. 근로 인민의 도덕이야말로 진실 한 도덕이라고 강조하고, 엄행수는 성인(聖人)도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년기의 작품인〈양반전〉은 양반도덕의 허위성, 위선적인 양면성, 몰염치한 착취에 기반한 무위도식, 양반의 무능성에 대한 날카로운 규탄과 폭로로 관통되어 있고, 양반 몰락의 역사적 현실성과 필연성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양반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하늘에서 사람을 낼 때 4가지 종류로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선비란 것이 가장 고귀하다. 선비는 양반이라고도 부르는데 잇속이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략)" 그는 인간관계가 엄격하게 신분제에 의해 규제되고 게다가 양반사회는 당론 (黨論)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에 바탕을 둔 평등 윤리로서의 우정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폭로하고, 그 평등윤리인 우정의 세계를 희구하면서, 그것을 서민의 생활도덕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서민군상 (庶民群像)과 함께 호흡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서민군상 자체가 새로운 사회의 주도층으로 성립되어 있지도 못했다. 따라서 박지원은 역시 허생 (許生)처럼 숨어 살면서 세상을 풍자 하고 개탄하는 한 양심적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만년의 그의 사상은 구체적 개혁안의 제시에 주력하는 경향이었고, 따라서 비판력은 약화되고 개량적· 타협적인 성격을 나타냈다. 박지원의 소설은 모두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서는 이완을 통해 사대부를 비판하며 매점매석 을 통한 치부와 무인도의 이상사회 건설을 통해 당시의 경제제도의 개혁을 역설하며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에서는 부자 상민과 가난한 양반의 신분거래를 통해 양산의 허상을 폭로 하고 신분제도의 개혁을 암시하였다. 다음으로 에서는 위선적인 북곽선생과 그를 질타하는 호랑이를 통해 양반 사대주의 위선과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였고, 에서는 광문이라는 거지의 훌륭한 인품을 나타내며 인간성에는 신분의 차별이 없음을 나타내고 이를 통해 양반들의 위선을 비판하였다. 연암은 당면한 사회가 왜 낙후하고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앞으로 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이다. 소설가는 그가 바라본 삶을 표현할 수 있는 위치뿐만 아니라 그가 삶을 바라보는 위치를 결정해 줄 수 있는 어떤 본질적이면서도 장르적인 형태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 형식들은 새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고 볼 때, 연암은 독특한 안광으로 당대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근대의식의 기초인 목적 합리적인 바람직한 행위를 추구하고 있다. 비천한 신분 또는 경제적으로 빈궁한 평민들이지만 진실된 삶을 살아 가는 인간상에 긍정적 시선을 박고, 양반의 입장에서 양반 사회의 폐해를 무자비하게 질타했던 것이다. 그가 당면한 현실을 재해석한 것은 미래에 대한 대안 제시의 의미가 있으며, 이는 현실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동시에 고양시킨 혁신이라 볼 수 있다. 2.2.3  박지원 문학에 나타난 실학사상 가) 사실주의 연암은, 문장이란 누구든지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억지로 옛 사람이 쓴 고어를 생각하고 고전의 經旨(경지)를 찾으며 근엄하게 글뜻을 장중하게 꾸미려는 것은 마치 화공이 그림을 그릴 때에 원래의 모습을 다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연암은 글을 쓸 때에는 사실을 그대로 꾸밈없이 표현하는 진실이 으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연암은 거울처럼 비치는 진실이 그대로 훌륭한 글이요. 문학이라는 관점 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재나 표현에 있어 갖가지 미화 (美化)의 방법을 동원하여 위장과 수식을 일삼으면 그대로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없다고 역설하면서 당시 漢(한), 唐(당)을 도습하려던 문학계를 비판하기도 했다.   나) 독창성, 자주성  연암은 그의 문학론을 통하여 도처에서 작품에서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있다. “옛것을 본받는 사람들은 옛 것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함이 근심되고 새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그 不經(불경)됨을 근심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벌받으면서도 변화할 줄을 알고, 새것을 창조해 내면서도 능히 전거가 있다면 이 시대의 글이 옛 시대의 글과 같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법고 창신의 조화라는 것이다. 전통과 변혁의 조화를 통하여 보다 나은 창작의 세계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글이란 근본적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변천하는 시대감을 흡수하여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구현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글이란 사실에 진취가 있다. 하필이면 고대를 취할 것인가. 한당 (漢唐)은 지금과 다르고 풍요 (風謠)도 중국과 다르다. 반마(班馬)가 지금 나왔다 한들 옛적을 그대로 본받지 아니할 것이다. 신자 (新字)를 만들기 어렵다 하지만 어찌 고법 (古法)에만 구속되겠는가?   여기서 고법에만 구속되지 말고 우리의 것을 그대로 묘사하여야 하며, 지금을 근시라고 하지마는 지금이 천년 후에는 고대가 된다고 하여 낭사 (郎事)와 신자 (新字)를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연암은 속어, 속자를 배척하는 당시 古文派(고문파)들의 주장을 개탄하고 있었다. 민간의 좋은 풍습과 말을 문자로 옮겨 놓고 민요를 운율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스런 문장이 되어 진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우의 진솔함이 드러나는 자주적 성격의 글이 되 수 있음을 내세우고 있었다. (趙東一, , P.269) 이상에서 보듯 연암은, 문학은 자주적인 것이 바탕이 된 독창성을 지녀야함을 주장했다. 다) 법고창신 연암은 그의 문학론을 통하여 도처에서 작품에서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있다. 옛것을 본받는 사람들은 옛 것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함이 근심되고 새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그불경 (不經)됨을 근심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할 줄을 알고, 새것을 창조해 내면서도 능히 전거가 있다면 이 시대의 글이 옛 시대의 글과 같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법고 창신의 조화라는 것이다. 결국 글이란 근본적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변천하는 시대감을 흡수하여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구현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연암은 속어, 속자를 배척하는 당시 古文派(고문파)들의 주장을 개탄하고 있었다. 민간의 좋은 풍습과 말을 문자로 옮겨 놓고 민요를 운율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스런 문장이 되어 진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우의 진솔함이 드러나는 자주적 성격의 글이 되 수 있음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상에서 보듯 연암은, 문학은 자주적인 것이 바탕이 된 독창성을 지녀 야함을 주장했다. 연암 박지원은 고문을 반박하면서 참다운 문학의 질은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옛말과 경험을 답습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정한 의미를 음미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하는 데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연암에 있어서 풍자란 중세적 봉건사회가 무너져 가고 그 속에 서 새로운 사회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는 역사적 변화의 시대에 살면서 그 모든 추이들을 직시했던 비판적 태도로 나타난다. 라) 인간성의 긍정과 평등사상 평범한 사람 혹은 사회에서 천대받는 인물들로서 전대의 소설에서 주인 공이 될 수 없는 인물로의 광문,의 엄행수, 의 송욱,조탑타, 장덕홍이 그런인물이다. 인간성을 긍정하고 남녀 귀천에 관계없이 인간이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이는등에서 잘 나타난다.속에 드러난 작자의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허생의 아내를 통해 당시 사대부의 허위격 삻과 무능함을 비판했다.   마) 당대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  연암은 문학이야 말로 현실에서 뜻을 펴지 못한 (낙척불우-落拓不遇)의 위치에서 현실을 비판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요, 또 이를 통하여서만이 사회를 의도적으로 개선해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음 글을 통해서 그의 이러한 생각을 알아보자.   “나 같은 사람은 중년 이래 樂拓(낙척)하여 쓰러져 자산을 귀히 여기지 않고 글로써 유희를 일삼았다. 때로 궁색한 근심과 무료함이 느껴지고, 잡되고 무심한 말을 일삼고, 배우처럼 남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천하고 비루하다. 성품이 나태하고 산만하여 벌레를 새기고, 갈대를 그리는 사소한 기능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과 남을 모두 그릇되게 했다.”   이 글은 자신의 반성이면서, 한편으로는 힘의 시대에 도전하는 반주자(反朱子)적 풍자성의 과시라고도 할 수 있다. 글로써 놀이를 일삼는다. [이문위희] (以文爲戱)는 표현은, 낙척하여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사회를 비웃고 풍자하는 자조와 개선) 방법이다. 사회를 향한 일종 의 매서운 비판 정신이다. 벌레를 새기고 갈대를 그린다. (彫蟲畵蘆 [조충화노])는 사소한 기술은 곧 현실의 사실적 표현이면서 자신의 행위를 비하하여 표현한 것은 일종의 반어적 기술이다.   특히 연암은 풍자와 골계, 반어의 수단으로 비유를 자주 이용했다. 그의 적절한 비유와 속어적 표현의 묘를 통하여 연암은 경직된 유가사회의 비리 들을 골계와 풍자의 열기로 용해시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가 요구 하는 문학의 이념을 그 위에 한껏 꽃피웠다. 이상에서 연암의 문학관을 사실주의, 독창성-자주성, 골계성-풍자성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연암은 조선 후기와 시대를 함께 하는 문인으로서 사상과 문학성이 골고루 갖추어진 문인이었으며 실학을 문학에 참여시켰던 진정한 지식인이기에 손색 이 없는 문학대가이다. 3. 에 대한 총체적 고찰 3.1 의 사상내용 178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친척 박명원을 따라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여 [열하일기]를 썼다. 이 작품 집에서 정치, 군사, 경제, 천문, 지리, 문학 등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 하였는데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이용후생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호질〉· 〈허생전〉 등의 소설도 들어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인상과 조선의 제도· 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였다. 〈열하일기〉는 공간되기도 전에 이미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특히 자유 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 (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에는 그에게 자송문(自訟文: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그는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 원숙해졌고, 사회모순을 구체적 으로 지적하고 드러냈으며, 이용후생의 실학을 대성하기도 했다. 연행(燕行) 이전의 문학창작은 고문(古文)의 참정신을 본받아 당대의 현실을 창의 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문학론에 입각, 무명의 하층 민중 들을 立傳의 주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건실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이에 비추어 양반들의 윤리적 타락성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것이었는데 이같은 사상적· 문예적 특질은 < 열하일기(熱河日記) > 에서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3.2 사상적 특질 에 나타난 사상적 특질로 연암 특유의 북학론(北學論)을 지적 했다. 작품에서 제시된 그의 북학론은 청조 문물의 적극 수용을 근간으로 한 부국강병 책(富國强兵策)으로서 "淸은 미록 夷나 중화문명을 계승· 보존 하고 있는 그 문물은 화(華)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북학파 인사들의 속에서 보기 어려운 커다란 계몽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선입견과 감각에 좌우되지 않는 주체적 사고와 현실세계를 편견없이 탐구하려는 개방적 자세, 그리고 지구중심적인 종래의 비과학적 천문학설을 타파한 지구지전설(地球地轉說), 청조문물 에서 철저한 이용, 후생의 정신 을 배울 것을 주장한 중국제일장관론 (中國 第一壯觀論)등 기존의 사상적·학술적 전 통에 내재한 진보적 제요소를 통합 한 연암의 진보적 사상이 전편에 관통되어 있다.   3.3 예술상의 특질 의 문예적 특징으로 문체의 다양성을 첫손꼽는다. 이 작품 에서 연암 은 자신의 여행체험과 청조 중국의 실정을 보다 생생히 전달하 고자 고문(古文)체와 패관소설체를 망라한 다채로운 문체를 구사하고 있는 데 문어체인 고문(古文)으로 표현된 한국말 대화장면에서는 정통 고문 (古文)에서 금기시하는 조선식 한자어와 조선 고유의 속담을 즐겨 구사하여 토속어의 정취를 돋구면서 해학적 효과를 도모 하고 있고 중국인과의 대화장면 등에서는 소설적인 문체인 백화체(白話體)를 구사 하고 있다.   다음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을 피력하기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 연암 은 이 작품에서 우언과 해학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북학론 (北學論)을 중심으로한 진지한 사상적 논의들이 전개될 때마다 지리해지기 쉬운 대목 들에 해학적 한담을 덧붙임으로써 여유와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또 여행도상의 견문을 여느 연행록(燕行錄 )처럼 평면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중심의 입체적인 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정밀한 세부묘사를 통해 대상의 본질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려는 사실주의적 경향은 특히 인물묘사에서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이고 있다.                                                           4. 결 론   연암 박지원의 문단적 위치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는 작자의 생전에는 물론 사후 오래도록 공개출판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만 유포되었는데 당시의 보수적 문풍하에서는 시대착오적 반청사조 (反淸 思潮)를 풍자하고 조선을 낙후시킨 양반 사대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이 작품의 현실비판적 내용과 신랄한 표현이 용납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연암의 창작 태도는 현상과 실상의 차이를 인식한 데서 출발한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시대적 현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바탕한 실상을 규명하는 데서 그의 문제의식과 문학적 진실이 발견된다. 연암은 당면한 시대가 왜 낙후되고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한 학자는 는 "연암의 위대한 창조적 역량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모든 예술적 성과들이 집약되어 있는 명실상부한 그의 대표작"임을 강조하면서 "이 작품은 북학파의 사회개혁 사상을 집대성하고 있을 뿐아 니라 다채로운 표현기법과 특유의 사유구조를 통해 이를 효과적 으로 제시한 일종의 계몽문학으로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참고문헌   1.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한양대학교 출판원, 1994 2. 김학성, 연암의 실학사상과 허생전의 작가의식. 창작과 비평사, 1990 3. 이우성, 실학파의 문학 연암 연구, 계명대출판부, 1984 4. 고미숙 외,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그린비, 2008 5. 김인규, (북학사상의 철학적 기반과 근대적 성격), 다운샘, 2000 6. 박수밀, (박지원의 미의식과 문예이론), 태학사, 2005 7. 강동엽, 박지원의 시대인식과 문학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3        8. 김명호, 박지원 문학 연구, 실학연구입문 9. 신용하,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연암박지원의 사회신분관과 사회신분개혁사상, 한국문화, 1989 10. 김지용作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0년 11. 김명호作 성균관 대학교 2004 12. 문현경 동국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5 13. 강동엽(1988), 「80년대 이후 연암문학연구 경향과 그 전망」, 한국학                 연구 제 11집, 한국 한문학연구회. 14. 강혜선(1996), 「박지원 산문의 고문 변용에 대한 연구」,서울대학교 15. 김경희(2005), 「연암 박지원 문학의 교육 방안 – 한문소설 『열하 일기』를 중심으로」, 연세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3. .5 805)김창주(1997),「연암박지원의 문학관 연구」,『자연과학연구논문집』, 공주대학교자연과학
137    이규보의 <동명왕편>분석연구 (소우) 댓글:  조회:9986  추천:0  2013-01-24
                            摘 要   李奎报是朝鲜高丽时期诗人。字春卿,号白云居士,京畿道骗州人。他精通经史百家、佛老之书。青年时与“海左七贤”派诗人交游,经常参与他们的诗会活动,深受他们不满现实思想的影响,1190 年登同进士第,曾博览群书,并开始写作。 著有长诗《东明王篇》和《三百零二韵诗》等。他能诗善文,历任高官。在朝鲜文学史上,他是最早一个同情农民、憎恨贪官污吏、描写民间疾苦的诗人。一生写了近万首诗,仅存2000 余首。表现劳动人民生活、关心农民、热爱祖国、憎恨敌人者占多数。奠定了朝鲜现实主义诗歌的基础。 他的经典著作民族诗篇《东明王篇》里收有七千余首诗歌,是朝鮮古代第一部長篇事詩,是神話傳說歷史化和作家文學中“復活”的一個典型例子,具有強烈的幻想和浪漫主義色彩,情節離奇古怪,但有生活依據,偶然中蘊藏著必然性。語言生動活潑,風格豪放雄渾。   关键语:李奎报 东明王篇 長篇事詩 風格                                    차 례 서론 연구목적과 의의 기존 연구사 검토 연구범위와 방법 본론 1. 이규보가 살던 역사적, 사회적 배경 2. 이규보의 생애 3.
136    조선시대 시조의 발전양상 (손정정) 댓글:  조회:8935  추천:0  2013-01-24
                                    摘 要          时调是朝鲜时期具有代表性的诗歌重要形式,时调作为一种诗歌,它以艺术的形式再现了当时社会的政治以及人民生活的真实面貌,是我们考察以及研究古时社会面貌的重要依据。        关于时调的起源有高丽中期之说,新罗末高丽初之说,高丽末之说,朝鲜初之说,朝鲜末期之说等等各种各样的说法,但是时调的形态真正形成却是在朝鲜时期。朝鲜时期,时调从兴起到发展,经历了很多,各个时期时调都呈现出不同的发展样像,对于时期我们可以从朝鲜前期和朝鲜后期两个方面来观察。对于时调内容本质的变化我们可以从作家层的变化,中心思想的变化,素材的变化,句型上的变化,以及音乐层面上的变化来考察。但是对时调的这些研究总的来说还是要进行在时调的基本特征上来。 对韩国古代文学的重要研究是了解古代人民生活的一个重要方法,而时调则是堪称韩国古代文学的精华的一种文学形式,所以对于时调的继续研究是具有重要价值。   关键语:时调 面貌 朝鲜时期 精华 特征                                          초 록   시조는 조선시기에 대표성을 띤 시가의 중요한 형식으로서 시조가 일종 시가로 되여진 후 이런 예술형식은 사회적 정치 및 인민생활의 진실한 면모를 재형하였는 바 우리들이 고대사회의 면모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의거로 되고 있다. 시조의 기원에 대하여 고려중기에 기원했다는 설, 신라말 고려초라는 설, 고려말설, 조선초기설, 조선말기설 등등 각이한 설법들이 있다. 그러나 시조의 형태의 진정한 형성은 바로 조선 시기로 보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조선시기, 시조의 흥기로부터 발전에 이르기까지 오랜 발전과 정을 겪어왔는 데 각개 시기의 시조는 모두 부동한 발전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기에 대하여 조선전기와 조선후기 두개 방면으로 고찰할 수 있다. 시조의 내용의 본질적 변화에서 우리는 작가층의 변화, 중심사상의 변화, 소재의 변화 문형상의 변화 및 음악상에서의 변화 등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그러나 시조의 이러한 연구는 총적으로 말한다면 시조의 기본 특징상에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한국 고대문학의 중요한 연구 는 고대인민들의 생활에 대해 요해하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시조 가 한국고대문학의 정화로서의 일종 문학형식이므로 시조의 발 전양상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연구가치가 있고 여겨진다.   키워드: 시조 면모 조선시기 정화 특징   차 례  서론……………………………………………………………………………. 1. 연구목적과 의의 2. 시조의 발생과 기원의 선행연구 3. 연구 범위와 방법  본론………………………………………………………………………………… 1.시조의 기원과 발생 1.1조선 전기의 시조 1.2조선 후기의 시조  2.시조양상의 변화 2.1 작가층의 변화 2.2 이데올로기의 변화 2.3소재의 변화 2.4 연행상의 차이 2.5 음악적 측면에서 시조의 흐름 3. 시조의 일반 특징 결론…………………………………………………………………………………. 참고문헌………………………………………………………………………………. 감사의 말………………………………………………………………………………                                                 서론   1. 연구 목적과 의의 한국 문학사에서 시조(時調)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시가이자, 사대부의 시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역대의 평론가들이 시조에 대 하여 지속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은 시조야말로 뛰어난 한국문학의 유산이며, 그 연원이 아득한 한국의 고유한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조의 흥성기였던 조선조 시조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는  심원한 의의가 있다. 2. 기존 연구사 검토 시조의 발생시기에 관한 논의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조가 고려말엽에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시조의 발생시기를 둘러싸고 이와 같은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시조 발생론 자체에 대한 연구사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일단 확실한 논거를 확보하고 있는 16세기를 기점으로 삼아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방법과 시각을 동원하여 그 이전 시기를 재구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한다 3. 연구범위와 방법 필자는 조선조 시대 시조의 전개 양상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학설들을 검토하였으며, 시조문학의 당담 층인 사대부와 시조와의 연관성을 찾으며 조선시대 시조 작품들을 섭렵하였다. 또한 사대부 이외 또 다른 시조의 담당층인 기녀들을 중심으로 창작된 기녀 시조도 함께 살펴보았다. 본논문에서는 특히 선행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역사주의 연구방법과 실증 주의 방법으로 조선조 시가문학의 꽃이자 ‘국민문학’이라 평가받은 조선 시대 시조의 발전양상을 문학적 측면에서 재고찰하려 한다.                                                  본론 1. 시조의 발생 뿌리 없는 나무가 무성할 수 없듯이 조선조 시조의 발생과 발전 양상을 살펴 보기전에 시조의 발생과 기원에 대하여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순리일 것이다. 시조의 기원설로는 외래기원설, 재래기원설, 그리고 향가에서 기원 했다는 설 등 여러 가자가 있다. 향가가 의미상 3개의 단락으로 되었다는 점이나,〈균여 전〉의 향가에 대한 최행귀(崔行歸)의 언급 가운데 나오는 삼구육명 (三九六名)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시조의 3장 형식과 흡사하다는 데서 나온 추리다. 시조의 발생을 두고 한국 시조형식이 고려 중엽에 발생하였다는 설, 신라말 고려 초엽설, 고려 말엽설, 조선 초엽설, 조선 중엽설 등 각이한 설법이 있으나 시조의 형태가 완성된 시기는 조선시대에 와서라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시조는 고려조 말기에 그 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하나, 시조의 형태가 완성된 시기는 조선시대였다고 하는 것이 주류이다. 하여 필자는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로 나누어서 이 문제를 살펴본다. 1.1 조선 전기의 시조의 양상 이 시기에는 단종의 퇴위에 관련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 자기들의 절개를 읊은 작품들이 많은데,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등의 절의가와 함께 15세기의 시조작품으로 한가롭고 평화로운 경치를 읊은 서경시가 등장하였다. 새로 건국된 조선왕조가 안정되면서 사대부의 여유 있는 생활이 시조의 소재가 되고, 낙관적이며 관조적인 사고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려는 긍정적 삶의 자세가 시조의 주제를 이루었다. 자연미를 감상하면서 유교적인 충의를 노래하는 것이 이 시기 시조의 특징이다.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는 4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와 그 속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평화로운 삶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은혜라는 뜻의 종장이 반복되는 연시조로서 그 뒤 계속된 서경시의 한 전형이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건국 당시의 공훈으로 권위를 유지해온 옛 세력 에게 도전하는 신흥세력의 역량이 축적되자,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지배하 는 이른바 붕당정치가 전개되었다. 이것은 그대로 시조에 반영되어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 등의 작품에서는 붕당정치로 인해 인재들에 대한 애석함, 서경덕(徐敬德)·권호문(權好文) 등의 작품에서는 자기수행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적인 자성(自省) 등이 주제로 나타났 다. 이들 유학자들은 붕당정치에 패배하고 먼 곳에서 귀양살이를 할망정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조는 세 방향에서 각기 우수한 작품을 산출하 였는데, 그 하나는 이황(李滉)의《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 (高山 九曲歌)》로, 여기에서는 정치적 이념과 태도가 저변에 깔린 채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를 시조가 수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정철(鄭澈)의 《훈민가(訓民歌)》처럼 유교적 윤리관을 주제로 하되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부류이다. 그리고 황진이(黃眞伊)로 대표되는 기녀들의 작품으로서 구체적 이고 인간적인 애정의 형상화가 시조시형을 통하여 이루어진 시들이 있다. 1.2 조선 후기의 시조의 양상 17세기의 가장 뛰어난 시인 중 한사람인 윤선도(尹善道)는, 4계절마다 각 10수씩, 총 40수로 된 연시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서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 간결하면서도 품격이 돋보이는 표현으로 세속의 자연을 시적인 흥취로 엮어 자연과의 교감을 승화시켰다. 조선 후기 시조 의 표현기교는 <어즈버,아희야, 두어라> 등의 감탄사를 쓴 영탄적인 방법과, 전원의 서경을 서술적인 방법에 의해 묘사한 것으로 크게 구별된 다.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인 유학자들에 비해 피지배계층인 서민들은 유학 자들의 미의식을 수용하는 한편 사설시조에서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소재를 선택, 희극미를 창조하였다. 사설시조는 사실적 묘사와 상징적 은유로써 표현기교를 바꾸고 있고 애정 , 패륜·육감·거래(去來)·수탈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사설시조의 발달과 함께 시조의 발달과정에 있어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평민 가객(平民歌客)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대개 문벌이나 지위가 낮고 사회적 으로 크게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끊임없는 연수를 통하여 시조의 작법과 창법을 전수하였을 뿐 아니라, 가단(歌壇)을 이루어 시조집을 편찬 함으로써 시조문학의 항구적 발전을 꾀하였다. 18세기 초반 일군의 가객들과 가단활동을 한 김천택(金天澤)은 가단 구성원들의 협조로 시조집《청구영언(靑丘永言)》을 엮었고, 김천택이 이끄 는 가단의 일원이 었던 김수장(金壽長)은 36수의 사설시조를 창작한 사람 으로《해동가요(海東歌謠)》를 엮었다.《청구영언》《해동가요》는 19 세기 후반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이 엮은《가곡원류(歌曲源流)》와 함께 작품 수가 많고 편차체제가 정연하여 3대 시조집 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신흠(申欽)과 윤선도(尹善道)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윤선도는 시조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서 손꼽힌다. 그의 작품 는 4계절마다 각 10수씩 총 40수로 된 연시조인데,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 간결하면서도 품격이 돋보이는 표현에 뛰어났으며, 속화된 자연을 시로써 승화시킨 대표작이다.   조선 후기의 시조에서 나타나는 가장 커다란 변화는 사설시조의 등장이다. 조선조 유교주의가 고려의 고속가의 인간적 성정에 대한 반명제로 나타났다고 하면 18세기 중엽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사설시조는 유교주의의 반발로 나타난 것은 좋은 대조 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 등장한 실학사상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시조가 지닌 3장체의 형식적 특성은 살리면서, 초장과 중장에는 그리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범위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일부 비판적 유학도들은 정형률을 깨고 새로운 가치관에 의하여 사설시조를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사설시조의 발달과 함께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발달과정에 있어 가장 주동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평민가객(平民歌客)의 출현이다. 이들 평민가객 들 중의 한 사람인 김수장(金壽長)이 편찬한 시조집 에는 17, 18세기에 걸쳐 활약한 가객 56인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들은 대개가 문벌이나 지위가 낮은 인물들이며, 사회 적으로 크게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로서16세기 이래 시조의 창작에 참여한 기녀들과 함께 시조문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는 바 이들의 업적을 세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로, 이들은 끊임없는 연수를 통하여 시조의 작법과 창법을 전수하고있다. 둘째로, 이들은 사설시조라는 새로운 시형을 발굴하고 발전시켰다. 현전 하는 사설 시조는 그 대부분이 작자를 알 수 없는 작품이고 또 가객들이 창작한 작품도 평시조 가 대부분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18세 기의 평민가객을 대표하는 김수 장이 36수의 사설시조를 창작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당시의 문학과 음악은 이들 평민가객에 의하여 발달하였고 동시에 이들의 독자적인 미의식인 희극미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이들은 가단(歌壇)을 형성하고 시조집을 편찬함으로써 시조문학 의 항구적인 발전을 꾀하고 있다. 김천택은 시조집 을 편찬하 였고, 김수장은 시조집 를 편찬하였다. 이들이 편찬한 , · 는 다른 시조집들에 비하여 수록한 작품수가 많고 그 편차체제(編次體制) 가 정연하여 3대 시조집이라고 일컫고 있다. 2. 시조의 변화 시조의 변화는작가층의 변화, 이데올로기의 변화, 소재의 변화, 연행상 의 차이, 음악적 측면에서의 시조의 흐름  5방면을 포괄한다. 2.1작가층의 변화 조선 전기의 시조 향유층은 대체로 양반 계층이고 당대의 명공석사 (名公碩士)에 해당한다. 초기 작가로 일컬어지는 이색(李穡)이 그러하고 정몽주(鄭夢周)도 그렇다. 그들은 노동의 현장에서 육체의 괴로움을 겪는 서민도 아니고 이별의 안타까움을 노래한 처지도 아니다. 주자학을 도입 하여 유학적인 이데올로기와 교양을 갖춘 인물들이다. 따라서 시조의 내용도 다분히 관념적이고 조학적인 것이 많았다.  조선 전기 또 주목된 다른 시조의 향유층은 당시의 기녀들이다. 기녀들의 시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양반 사대부의 시조와는 다르다. 기녀 시조는 남녀의 애정 문제 를 포함한 인간의 정서를 진솔하게 그려내어 시조의 내용과 표현에 생기를 불어넣고 서정시로서의 성격을 한층 더 발전시켰으며, 여성만이 지닌 섬세한 감정으로 진실 하면서도 절실하게 사랑을 노래한 까닭에 더욱 감동적이고 여성 특유의 우아한 정서 를 전달하고 있으며, 한국말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런 점 에서 기녀 시조는 시조의 내용과 표현 영역에서 근대 문학에 빨리 근접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기녀들의 시조가 유교의 도덕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주목 된다. 기녀들의 시조는 남녀의 애정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내어 표현 하고 있다. 조선조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인간의 감정을 억압하고 윤리와 도덕을 강조한 탓에 인간의 정서적인 측면을 도외시하는 일이 많았는데, 기녀들의 시조에는 그러한 면을 넘어 서서 인간의 진솔한 정서를 긍정적인 자세로 바라보고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기녀시조는 상실의 상황에서 노래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시조 담담층인 사대부 시조와 비교된다. 말하자면 황진이의 시적 정서와 사대부의 시적 정서는 판이하다. 한편 기녀 시조는 이별이 제재라는 점에서 고려가요와 상통하는데 고려가요가 이별의 순간을 노래한다면 기녀시조는 현재적인 이별의 상황을 노래한다. 시적 화자의 의식 면에서도 고려가요가 님과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고 있다면 기녀시조는 수평적 관계로 보고 있다. 황진이의 한시 한 수를 예로 들어보자. 밝은 달 아래 뜨락 오동잎 다 지고 서리 내려도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있구나. 누각높아 하늘과 지척의 거리 사람은 취하고 남겨진 술잔은 천이라 흐르는 물 차가운데 거문고는 화답하고 매화가지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와라 내일 아침 그대... 나...이별후 정은 물결따라 멀리멀리 가리라   또, 발화의 차이에서도 고려가요는 이별의 순간에 발화하는 것으로 직접 적이고 절박 한 발화가 이루어지는 반면, 기녀시조는 이미 지나간 과거 이므로 자아를 성찰하고 더불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간접적으로 발화 한다. 요약해 말하자면 기녀 시조는 이별 상황, 언술 방식, 태도, 갈등의 해결 등은 여요의 전통을 잇고 있지만 그것을 변용시킨 셈이라 할 수 있다.   기녀 시조는 세련된 표현 기교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순수 국어를 잘 구사하였 다는 데 그 의의가 있으며, 내용면에서는 남녀간의 애정 및 인간 의 정서를 솔직 담대하게 표현하였다는데 초점을 둔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외로운 밤을 한 허리 잘라내어 님 오신 밤에 길게 풀어 놓고 싶다는 연모의 정을 황진이만의 맛깔난 어휘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기녀들이 시조를 짓고 향유했던 문화는 시조 작가층의 확대와 더불어 시조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류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시조 를 조선 중기에 이르러 기녀들도 짓고 읊었다는 점은 후기의 가객 및 평민층으로까지 시조 작가층이 확대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한 것이며,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기녀 시조는 시조 문학 변모에 큰 역할을 하였 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2 이데올로기의 변화 고려가요는 불교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어두움을 체념과 취기(醉氣)로 넘기려 한〈청산별곡〉이나, 이별의 안타까움을 하소 연한〈서경별곡〉이나 가시리도 불교적 인연과 관련을 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시조에서는 군주에 대한 충성이 주제를 이루었고, 망국의 시점에서 방황하는 지성의 갈등을 읊었다. 전원의 한가로운 삶은 군은으로 감사하게 여기는 유교적 가치관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중화(中華)의 높은 문화를 숭상하였다. 15세기 조선의 애국주의 장령 김종서(金宗瑞ㅡ1390-1453)의 시조와 이 순신장군의 시조를 예로 들어보자 삭풍은 나모(나무) 끝에 불고 : 김종서(1390-1453) 시조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조선시대 4군6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의 호방한 기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일장검을 짚고 서 거칠 것이 없이 탁 트인 기상을 노래했다. ※ 이순신 시조 -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 시조는 임진왜란 때의 陣中作(진중작)으로, 선조 28년(1595)에 지은 것이다. 우리 옛시조 중에서 武將(무장)의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순신의 작품은 깊은 우수와 고뇌를 담고 있다. 조정은 전란중인데도 파쟁을 일삼고, 나라의 운명은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때, 홀로 적군에 맞서고 있는 장수의 마음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절대적인 열세 에서 몸을 일으켜 한 나라를 구해낸 한 장수의 위해한 힘의 원천에는 이러 한 깊은 우수와 고뇌를 노래할 수 있었던 정서와 지성이 있었음을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광식 『우리 옛시조 여행』(가람기획) 에서) 2.3 소재의 변화 작자 계층이 다르고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이 소재에 대한 관심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시조의 소재는 사대부들의 서정이 중심이 되고 그들의 생활이나 관심사가 중요 소재가 되고 있다. 이러한 소재의 변화 역시 새로운 표현도구를 요구할 것은 당연하다. 강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데는 사랑의 괴로움을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표현 기구가 필요한 것이다. 소재의 변화는 또한 이념과 작가층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에 이러한 상호작용이 새로운 장르의 개발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4 연행상의 차이 시조는 짓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어지는 현장에서 노래로 불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불려진다는 점에서도 고려가요도 같다. 그러나 그 불려지는 양상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고려가요〈동동〉이 연주되는 과정을 『악학궤범』에서는 아박(牙拍)이라는 항목에서 초입배열도 (初入配 列圖) 다음에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그 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이 적절하게 지어 부른다. 이렇기 때문에 특별히 무희나 창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부르면 된다. 이 점이 고려 가요의 연행과 다른 것이다. 고려가요의 연행에 필요한 복잡한 악기의 반주가 아니라 장고 하나나 무릎 장단으로도 시조는 불려졌다. 이러한 데 사용하기 위하여서는 새로운 장르의 창조가 필요하였다. 그것은 그 연행이 소박하다는 데 있어서도 고려가요와는 다르지만 그런 소박함이 바로 이 장르를 생성하게 된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2.5 음악적 측면에서의 시조의 흐름 시조는 시가장르로서 음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아직까지 시조의 기원과 발생시기에 관해 많은 이설이 공존하고 있지만 음악과의 연관성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성호경은 “고전시가들이 대체로 가사가 중심이 되고 악곡(선율)이 부수적인 것이 되는 문학 위주의 양상을 많이 보인다.   음악에서의 시조는 시조시(時調詩)를 노래하는 전통 성악곡이다. 본래 시조는 성악곡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노랫말인 단형시를 지칭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므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흔히 시조창이라고 한다.   시조창의 발생은 조선조 영조대의 학자 신광수(申光洙)의 (石北集)에 일반 시조에 장단을 배열한 사람은 이세춘(李世春)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시조는 가창 (歌唱)되었기 때문에 시조시를 노랫말로 하는 전통가악이라고 할 수 있다. 가곡 (歌曲)이라는 곡조로 불린 것이 가장 오랜 창(唱)이다. 이 가곡과는 달리 영조 연간에는 시조창이 나타났다. 오늘날 불리는 시조창은 크게 평시조·중허리시조 [中擧時調 (중거시조)]· 지름시조[頭擧時調 (두거시조)]·사설시조로 구분된다. 시조창 은 경제 (京制)· 영제(嶺制)·완제(完制)라 하여 지방적 차이가 있다. 초창문개설태진(初唱聞皆說太眞)                                 지금여한마외진(至今如恨馬嵬塵)                 내자장안이세춘(來自長安李世春)   조선 후기의 풍류방에서 전승된 시조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에 장악원의 음악유산을 후대에 전승시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왕직아악부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왕 직아악부에 아악부원양성소가 설치되면서 그곳에서 아악사장 이하 장악원의 후예들은 새 세대들에게 구한말의 국악 을 교육시켰다. 그런데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에서 1930년대부터 정악이 교과과정에 삽입되었고, 하규일과 임기준에 의해서 시조·가곡· 가사가 아악생들에게 전수되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3. 시조의 일반 특징 시조는 한국 고유의 정형시로서 초장,중장, 종장의 3장으로 되어있으며 형식에 따라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로 나뉜다. 시조는 읊거나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시조는 한국 시가 문학사에서 가장 오랜 생명력을 지니면 서 가장 풍성한 유산을 남겨준 문학형태이다. 엄밀히 따지면 시조는 노래로 불리었기에 음악 곡조의 명칭이라 할 수 있으며 근대에 들어와서 창가, 신체시, 자유시 등이 나타나면서 그와 구분하기 위해 3장 45자 내외의 특정한 형태를 갖춘 이 시형을 음악상의 명칭인 시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시조의 일반 특성을 다시 조목식으로 살펴보자. 시조의 특징을 조목식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①시조의 형식: 3장(초장, 중장, 종장) 6구 12음보(45자 내외)로 되어 있다. ②시조의 율격: 각 장은 4음보의 율격이다. 3·4조 ③시조의 형식상의 제약: 종장의 첫 음보는 반드시 3음절이어야 한다. ①평시조: 기본 형식의 단형 시조(短型時調)이다. ②엇시조: 평시조보다 어느 한 구가 길어진 시조이다. ③사설시조: 평시조에 비해 2구 이상이 길어진 장형 시조(長型時調). 특히 중장이 거의 무 제한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④연시조: 2수 이상의 평시조가 모여 한 작품을 이룬 시조를 말한다.                                                     결 론   시조는 한국 시가 문학사에서 가장 오랜 생명력을 지니면서 가장 풍성한 유산을 남겨준 문학형태이다. 시조의 역사가 곧 한국시가의 역사라 할 만큼 우리의 문화 유산으로서, 시조는 한국문학연구의 보배로운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시조는 한국인이 지닌 정신생활사의 일환으로서 전통적,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중요한 양식이다. 전통적 가치를 지닌 시조는 한민족의 생활, 사상, 역사가 살아 숨쉬는 시이기 때문에 시조의 특질은 곧 한민족의 특성이 된다. 또한 시조는 한민족의 미의식이 빚은 특성 적 양식이기 때문에 그러한 특성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곧 한민족 시가의 이념과 미의 식을 이해하는 길이다. 시조는 한국 사람의 심경에 가장 적합하고 또 한국 사람의 정신적 생활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시형식이였다. 그만큼 현존하는 한국 고시가의 어느 양식보다도 작품수가 가장 많다. 그래서 시가사적으로나 작가 분포로 보아 시조는 한민족의 성정에 가장 알맞은 양식이였다는 고증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시조는 향가, 속가, 가사와 같이 과거의 역사물로 끝나지 않고 현재도 창작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시조는 조선조 오백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창작되고 또 향유되었던 문화이다. 그러나 시조는 조선시대로 끝나지 않고 현재에도 그 창작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조선조 때 시조를 가리켜 '고시조'라 하여 근대 이후의 시조와 구별하기도 한다. 이처럼 시조가 현재에도 그 창작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변혁과 발전을 통해 시조의 전통이 지속적으로 계승, 창조 되리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시조의 발생과 발전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이를 통해 한국 시조 문학의 발달사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1. 권두환, 「시조의 발생과 기원」, 『고시조 연구』, 국어국문학회편, 1997. 2. 김대행, 『시조유형론』,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6. 3. 김병국, 「시조의 발생 시기」, 『한국문학사의 쟁점』(장덕순 외), 집문당, 1986. 4. 정재호, 『한국 시조 문학론』, 태학사, 1999. 5. 이연숙, 「시조발생에 대한 한 고찰」, 『국어국문학지』16집, 문창어문학회, 1979. 6. 한국시조문학론 정재호  태학사 7. 시조문학연구론 이정자 국학자료원 8. 제4판 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조동일 9. 국문학개론, 새문사, 김광순외 10. 국문학개론/김광순 /새문사/2003 11. 한국 시가문학의 탐구/전병욱지음/1999 12. 시조유형론 / 김대행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 1994 13. 한국문학통사2,3/ 조동일 / 지식산업사 / 1994 14. 이찬욱, 「시조의 형식과 미의식」《어문연구》 111호, 2001 15. 시와 시조 창작론 /이정자/ 국학자료원     감사의 말 본 논문의 과제를 설정하고 집필을 끝내고 논문답변을 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최균선 교수님의 사심없는 방조와 직접적인 지도하에 마침내 순리롭게 탈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교수님에게 심심한 사의와 경의를 올리는 바입니다.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35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세계 비교 (풍첩) 댓글:  조회:11723  추천:2  2013-01-24
                                               摘要   直到 1925年、1926年,朝鲜文坛出现反对颓废的唯美主义倾向,具备近代精神和抒情化鲜明的诗人,其代表是金素月和韩龙云。金素月作为一个民谣诗人和抒情诗人,达到了韩国近现代诗歌的高峰。金素月的代表作有: 《金达莱花》,《招魂》等。金素月开启了韩国民谣的旋律,由于他对民族诗歌形式的创新,而成为民谣诗派最卓越的诗人。 20年代与金素月一起代表韩国近现代诗坛最高水平的另一个诗人是韩龙云,他本来是禅师、独立运动家。代表作有:《君的沉默》等。他写的《君的沉默》表达了作者对人间存在的现实意味的质疑,这表现出一种韩国诗歌史上以前所没有的形而上的特征。他写的“ 君”不仅仅单指某一个对象,而是一种存在和意识的辩证结合,也就不是“ 君”的形而上的印象,所以“ 君” 沉默了。韩龙云的诗歌源自“ 君”不在的绝望,但是他使人们摆脱绝望,充满希望,坚信离别后能重逢。   关键词:金素月 韩龙云 民谣的旋律 金达莱花 君的沉默                                             초 록       1925년,1926년에 이르기까지 조선문단에는 퇴폐적 유미주의를 반대하고 근대 정신과 서정화가 선명한 시인들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 시인들로는 김소월과 한용운이다. 김소월은 민요시인고 서정시인으로서 한국 근대시가의 고봉을 이루었다. 김소월의 대표작은《진달래꽃(金达莱花)》《초혼(招魂)》김소월로부터 한 국민요적 선율이 시작되었으며 그로부터 민족시가형식의 혁신이 시작되었는 바 민요시파의 탁월한 시인이다.    20년대 김소월과 같이 한국 근대시단의 최고봉을 이룬 또 하나의 시인은 한용운으로서 그는 독립운동가요, 지사요, 사상가요, 불교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님의 침묵(君的沉默》등이 있다. 시인은《님의 침묵》에서 인간존재의 현실의미에 대하여 질의를 던지고 있는 바 이는 일종 한국시가 사상에서 전례없었던 형이상적 특징이다. 그가 쓴 “님”은 한 대상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일종 존재와 의식의 변증적 결합으로 역시 “님”의 형이상적 인상이므로 “님”은 침묵하는 것이다.    한용운의 시에서 가버린 “님”에 대해 절망하고 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에서 파탈하게 하며 한가득 희망을 가지고 이별후 다시 만남을 굳게 믿게 하고 있다.    키워드: 김소월 한용운 민요선율 진달래꽃 님의 침묵     목 차 1. 서론 1.1 연구 목적과 의의 1.2 기존 연구사 검토 1.3 연구 범위와 연구 방법 2. 본론 2.1 김소월의 생애와 문학활동 2.1.1 김소월의 생애 2.1.2김소월의 창작 배경 2.1.3김소월의 시 세계 2.2 한용운의 생애와 문학 활동 2.2.1한용운의 생애 2.2.2한용운의 창작 배경 2.2.3 한용운의 시 세계 3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비교 분석 3.1 시적 소재의 발굴에서 3.2 두 시인의 자연관 3.3두 시인의 문학사적 위치   결론 :   감사의 말:                                              1. 서 론   1. 1 연구 목적과 의의 김소월과 한용운은 1920년대 식민지 상황에서 현대문학사에 커다란 기여를 한 시인이다. 김소월과 한용운은 각기 자신들의 대표적 시집인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특색 있는 시세계를 보여 주었다. 문학의 학문적 연구에 있어 현명한 출발점은 문학작품 그 자체의 해석과 분석이다. 본고에서는 두 시인의 생애와 창작 배경 및 시 세계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하여 두 시인의 작품 그 자체에 의하여 비로소 올바른 의의가 부여함으로써 두 시인에 대해 보다 깊이 요해하는데 목적을 둔다. 1.2 기존사 연구 검토 기존 논의들은 김소월의 시는 여성적 화자로서 서정을 극대화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한용운은 불교적 세계관을 ‘님’에 대입시켜, 통속적이지 않게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들을 살펴보면 김소월의 시에서는‘한의 미학’으로 한용운의 시에서는‘님의 정체 규명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와 논란이 있었다. 김소월 연구의 경우 전통적 정서면에서의 고찰, 한용운 연구의 경우는 주로 불교사상면에서 살펴본 것 등이 있다 1.3 연구범위와 방법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에서 ‘님’의 의미는 공통적으로 상실의 주제를 보이고 있지만 두 시인은 해결방법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본논문에서는 역사주의 관점과 비교분석의 방법으로두 시인의 동일한 주제의 시에서의 부동한 시점, 독특한 풍격의 체현을진일보 연구, 분석하려 한다                                             2.  본론 2.1 김소월의 생애와 문학활동 2.1.1 김소월의 생애 김소월은1902년 9월 7일(음력 8월 6일)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에 있는 외가집에서 부친 김성도(金性燾)와 모(母)친 장경숙(張景淑)의 장남 으로 출생하였는데. 본관은 공주이다. 1904년 부친이 철도 공사중 일본인 목도군에게 맞아 정신이상을 일으키자 조부 김상주(金相疇)에게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 1909년 남산학교를 졸업 후 오산 중학교 중학부 입학. 스승인 안서(岸曙) 김억(金億)에게서 민요풍의 시를 습득하기 시작하였다. 시인은 1935년 병으로 작고하였다. 2.1.2  김소월의 창작 배경   소월이 문학 활동을 시작한 1920년 전후의 시기는 한국의 현대 문학 사상으로는 물론 사회․정치적으로 매우 뜻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시기 이다. 그것은 3.1운동이 일어나고 연이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이 자행된 때이기도 하며 이른바 그들의 문화정책으로 약간의 출판활동이 허용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며 3대 동인지로 일컫는 「창조」,「폐허」「백조」 등의 잡지가 연이어 창간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면 소월을 가리켜 「정한의 시인」이라고 불리울 만큼 그의 작품에 처절한 애수를 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대적 배경 즉 나라 없는 민족의 슬픔에서 눈뜨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예술은 시대 적 산물이며, 또 그것은 시대성을 반영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그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는 생명지향과의 대립, 극복, 융화의 변용과정을 거쳐 시를 창조한다.” “시인은 시를 낳기 위하여 역사를 의식하고, 인생의 체험을 절실하게 지각하며, 현실의 상황을 민감하게 수용하면서 자기를 극복한다. 그리고 시인은 역사와 상황을 자기의 가치의식에 따라 변용시키려 한다.”① 김소월이 작품 활동을 하던 1920년대는 3․1운동의 실패와 그 영향으로 한민족은 민족적 분노와 비창감 일색에 젖어있어, 시의 주제와 정감 역시 이러한 지배적 민족 감정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저항과 좌절, 의지와 허탈, 분노와 패배감이 뒤엉켜 그것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것에 휩쓸려 내려가는 풍조 속에 비관이 차츰 감상과 퇴폐로까지 빠져 들어가던 시기였다.   소월 역시 이러한 시기에 허락된 개인주의 삶에 뿌리를 내린 채 식민지 한과 슬픔의 미학을 구축한다. 개인주의 이상은 비록 건강한 사회에 의하 여 보장 받는다 할지라도 한계를 지니는 법이다. 하물며, 전통의 단절이 강요되고 이념과 역사가 전도된 전체를 위한 삶의 질서가 무너진 일제 식민지치하에 있어서랴... 2.1.2 김소월의 시세계 1925년《님에게》,《먼 후일》, 《못잊어》, 〈오는봄〉 《버리운 몸》, 《초혼》 《진달래꽃》,〈산유화(山有花)〉 《금잔디》〈엄마야 누나야〉 등 모두 127편을 창작 발표하였다. 1910년대의 한국의 시는 1919년 일대 전환을 이룬다. 1920년대 초의 허무와 좌절은 곧이어 등장한 김소월과한용운에 의해 단순한 허무와 좌절이 아닌 새로운 차원으로 극복,                   윤재근, 시적표현과 배경의 변용Ⅱ, 문학비평 1권 3호, p786 (박두진,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 일조각, p.37)② 승화되기에 이른다. 김소월은 김억, 김동환, 주요한 등과 함께 `민요조 서정시 [민요시]`를 다수 발표한다.  민요조 서정시란 민요적인 3음보의 율조를 기본으로 하고, 설화적인 소재를 취급 하며, 향토성 짙은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말한다. 김소월은 이러한 민요조 서정시를 창작하면서도, 정형적 율조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개인의 비애를 넘어서는 민족적 정한을 노래함으로써 군계일학 (群鷄一鶴) 의 일급 시인으로 떠오른다. 2.2. 한용운의 생애와 문학활동 2.2.1 한용운의 생애 일제 식민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이며 불교시인인 한용운은 1879년(고종 16년)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1904년 강원도 인제군 내설악의 오세암에 출가하고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하였다. 법호는 만해, 법명은 용운이다. 1919년 3.1운동을 이끈 33민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작성 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을 깨우려고 노력하였다. 1944년 5월 9일 서울 성북동에 머물던 집인 심우장 (尋牛莊) 에서 65세를 일기로 입적하니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2.2.2 한용운의 창작 배경 만해 한용운은 위대한 승려이자 행동적인 민족주의자로서 민족 운동사에 있어서도 물론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를 통해 자유 사상․평등 사상․ 민족 사상․ 민중 사상․ 진보 사상,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철학을 기미 독립 운동의 사상적 기저로서 체계화한 데서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일제 패망 직전 극도의 궁핍 속에서 심우장 냉돌 위에서 순국하기까지 보여 준 정신의 일관성과 지절은 참으로 귀한 민족적 사표가 아닐 수 없다. 만해의 문학은 그의 문학이 지닌 예술적 형상서의 우수성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그의 문학이 지닌 문학사적 위치 때문만도 아니다. 그와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일깨워 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끊임없는 실천과 행동,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념과 사상의 일관성이야말로 만해 정신의 위대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2.2.3 한용운의 시세계 한용운에게는 ,. , , , , 등이 주요 작품이 있다. '님의 침묵'은 1926년에 출판된 한용운(1879-1944)의 대표적 시집일 뿐 아니라, 20세기에 출판된 가장 중요한 한국 시집 중의 하나이다. 이 시집이 중요한 것은 모든 위대한 문학 작품이 그렇듯 하나의 새로운 언어-세계를 창조하였다는데 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님이 침묵하는 시대'로 표현 하고, 님이 침묵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나날의 삶의 괴로움을 윤리적, 정치적, 종교적 차원에서 님을 통해 성찰, 표현하면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시적 비전을 노래하고자 하였다.   그의 교양이나 이력이 남달랐기 때문에, 이 시집에 수록된 89편의 시들은 그 내용과 세계가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띤 독특한 점이 있다. 근대 시중에서도 난해한 시에 속한다. '님의 침묵'의 님을 조국, 민족, 부처 등으로 보는 기존의 단선적 견해가 대부분이지만 만해의 시가 현대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세가지 요소, 즉 시대성 사상성 문학성이 모두 치열하게 수용되어 있고 이 요소들이 한 덩어리로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3 김소월과 한용운 시에서 “님”의 의미 1920년대의 시에서 눈여겨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지향의 시이다. 특히 김소월과 한용운은 을 통해 높은 시적 성취를 달성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두 시인은 임의 상실로 자기 시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김소월은 과거로의 도피나 망각을 통한 해결을 그려냈고, 한용운은 미래 속에다 희망의 기약을 내거는 표현을 하는 각기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용운의 '님'이 가진 속뜻을 생각하면서 같은 시대에 살았던 김소월의 '님'을 비교할 가치가 있다. 김소월의 시에도 '님' 또는 이에 해당하는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 그 님이 현재의 '나'와 함께 있지 않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시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대조적이다. 3.1  김소월의 김소월은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를 받는데 내용면에서 그의 시는 집 없고 길 없는 설움과 고향상실에 따른 비애를 형상화 하여 식민지 시대의 정서를 잘 압축하고 있다. 이러한 고향상실의‘없음’과 ‘결핍’ 에서 오는 정서는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와 상통한다. 이처럼 김소월의 시에서 은 한(恨)이라는 함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恨)이라는 의미를 좀더 깊이 들여다 볼 때 동경 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을 통해 ‘한(恨)의 정서’ ‘기다 림의 정서’를 표출 하지만 그 표출하는 정서 속에 무엇인가를 동경하고 갈망하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용운은 비록 지금 여기에 '님'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믿음을 노래한다. 님의 돌아옴을 믿기 때문에 그의 시는 끝없는 절망에만 빠지지 않으며 마침내는 슬픔을 극복하고 희망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슬픔과 절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돌아오고야 말 님을 향해 솟아오르는 사랑의 힘을 노래한다. 시 《님의 침묵》에서 이런 이념이 잘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는 여러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은 두 시인이 가졌던 현실 감각과 역사 의식에서 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초 혼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3.2 한용운 시에서의 “님”의 의미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새는 차다찬 티끌이 되어서, 한 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가) 김소월의 “님”: 두 시에서의 공통점은 님과의 이별을 통한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고, 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월의 시에서 임은 "헤어진 이름이여!" "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등 각 연의 끝부분에서 보듯이 죽었거나 또는 아주 멀리 떠나가서 돌아올 가망이 없는 임이다. 그의 시가 대개 애절한 슬픔과 한의 빛깔을 띠는 것은 이 때문 이다. 그의 시가 대개 애절 한 슬픔과 한의 빛깔을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하는 님이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나에게는 기약 없는 기다림만이 있다고 할 때 절망적인 비탄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나) 한용운의 “님”: 만해의 임은 단일 의미로는 해석할 수 없는 복합성을 띠고 있으며, 삶답게 하여주는 모든 가치의 총체를 의인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을 통해 슬픔과 절망보다는 " 새 희망의 정수 박이"와 "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에서 보듯이 언젠가는 돌아올 님에 대한 사랑과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만해의 님은 현재에는 부재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님으로 희망, 사랑의 힘을 노래하였고, 소월의 님은 죽었거나, 다시 돌아올 가망이 없는 님으로 절망, 애절한 슬픔과 한의 정서를 드러내었다. 3.3 두 시인의 “님”의 부동한 양상   은 "이름이여!" "부르노라" 에서와 같이 격정적으로 슬픔을 직접적으로 영탄한 것으로 보아 세상을 떠난 임을 애타게 부르는 남성의 노래이다. 시적 화자의 부름은, 임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는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부름이기에 더욱 애달프다.    이 시는 초혼의식과 망부석 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임과의 사별에서 오는 극한적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초혼' 이라는 제목에서 나타나듯, 이 시는 죽은 사람을 소생 시키려는 전통적 고복의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대부분의 소월시가 임과의 이별을 여성적인 목소리로 노래한 것과는 달리, '초혼'은 세상을 떠난 임을 애타게 부르는 남성의 어조이다. 한 편, 떠난 임을 부르는 이 시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국권 상실로 상실감에 젖어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은 이별의 슬픔에 절망하지 않고,"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와 같이 이별을 새로운 만남의 희망으로 역전시켜 사건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에서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는 여성으로 나타나 있으며, 시적 분위기 또한 여성적인 정감이 지배적이다. "갔습니다"와 같이 존대법을 써서 경건, 간절. 애절의 모습에서 여성적이다.  그러나 만해 시의 여성주의는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면적 기법일 뿐, 그 내면에는 현실 상황에 대한 저항 의식과 극복 의지가 내재 해 있다. 즉,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국권 회복에 대한 소망을 역설적인 방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만해 시에 등장하는 '님'은 대체로 부처, 조국, 사랑, 희망, 무아, 연인 등으로 해 석된다. 그렇지만 만해에게서 '님'이란, 의 에필로 그인  에서 '님만이 임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 이라고 밝힌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삶을 삶답게 해주는 모든 가치의 총체를 의인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용운의 에 서는 님을 통해서 나라를 잃고 고난 에 처한 민중들을 위로하고 붇돋기 위해 씌인 한용운의 상징적 코드인 . 그것은 신이든, 연인이든, 자연이든,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야기될수 있는 시적 유연함이 이들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4.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특징의 비교 4.1 시적 소재 발굴에서 정형율의 민요시를 민요가락에 실어서 노래한 작품을을 선보인 김소월은 에서는 독특한 리듬감으로, 그 유명한 에서는 한국적 토착정서와 정한의 세계, 자연의 모습등을 노래함으로서 한국 고전 가사인 나 에 맥이 닿는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한용운은 직업적인 시인이라기보다는 3,1운동에 앞장서 싸운 독립투사고 혁명 가이고 불교에 귀의한 승려였듯이, 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들이 그 주를 이룬다. 그의 , 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도 아름답게 해석될수 있는 방향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연을 소재로 한 시가 많아 자연파 시인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자연이 단순한 관조가 아니고 종교적 또는 민족적 존재의 내면 탐구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라고도 불려진다. 산문체 의 긴 호흡의 유장한 리듬은 타골의 에서 영향을 받았다고도 말하지만, 불교의식의 계송법. 낭독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4.2  자연관에서의 비교 김소월은 자아실현의 주관주의적 자연관을 가지고 있다. 김소월은 민족 적으로 시대적으로 상실의 상황에서 자연을 모티브로 삼아 내면화의 규명 에 추구하였다. 소월은 근대적인 개인으로서 자아실현의 대상으로 자연을 선택했다. 그런데 소월의 자아실현의 조건은 자연뿐 아니라 부재중인 님에 대한 동경, 그리움의 정서와 함께 한다. 자연이 자아실현의 부차적인 매개 라면 님을 향한 그리움은 오히려 그의 내면을 활력으로 이끄는 중심이다. 김소월의 시는 기약이 없는 기다림만이 있다고 하는 데 대개 애절한 슬픔 과 한으로 젖어있다. 한용운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님의 돌아옴을 믿기 때문에 밝음을 시으 밑바탕에 깔고 있다. 4. 3 시작 방법에서 두 시인은 창작할 때는 상징인 사작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어, 김소월의 은 한 여자의 말투로 애인의 떠남에 대한 슬픔을 토로한다.  은 남녀간의 이별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역설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민족의 원형에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의 에는 화자는 임과 이별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 서도 만남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임은 갔지마는 언젠가는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조국의 광복에 대한 희망 을 상징하였다. 김소월과 한용운의 사작시대배경이 비슷한데 김소월은 조국을 잃음에 대하여 희망을 가지고 않고 작품에 절망이 나온다. 하지만 한용운은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갖고 어떤 날 “님”이 다시 돌아올 것은 믿다고 한다. 5. 김소월과 한용운의 문학사적 위치 김소월의 시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와 민요적 율격에 밀착되어 있다. 표면에 그리움, 슬픔, 한 등 비극적 사랑의 정감이 있으면서도 이면에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심층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초극(超克)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 참뜻이 놓여 있다.                                                 3. 결 론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는 식민지 초기에 한국시가 짊어진 두 가지 과제 (식민지 현실을 직시하면서 한국인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줄 새로운 시형식을 찾는) 를 자기 나름으로 성실하게 해결하려 한 작가들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김소월의 시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와 민요적 율격에 밀착되어 있다. 표면에 그리움, 슬픔, 한 등 비극적 사랑의 정감이 있으면서도 이면 에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심층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초극(超克)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 참뜻이 놓여 있다. 소월 시의 저변에 흐르는 한(恨)은 한민족의 심층에 깔린 정서이다. 여러 민요를 살펴보면 소월이 그의 시에서 노래한 이별의 한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소월 시는 서구 편향성의 초기 시단 형성 과정에 있어서 한국적인 정감과 가락의 원형질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민족시, 민중시의 소중한 전범(典範)이 된다. 한용운는 식민지 초기에 한국 사회의 구조를 가장 명료하게 파악한 시인 이다. 그가 파악한 한국 사회의 구조는 자기만의 사랑이며, 슬픔의 제스처이며, 탄식의 포즈 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강렬한 개인 의식으로 조명 한다. 한용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은 비록 님과 리별하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체험하고 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으며 슬픔을 새 희망으로 바꾸어 님과 만날 확고한 신념을 안고 살아간다. 여기 에는 조국을 빼앗긴 슬픔과 허탈속에 빠져있는 무기력한 인간이 아니라 어떤 역경 속에서도 광복의 그 날을 굳게 믿고 굴함없이 살아가는 지조있는 지향의 세계가 엿보인다.   참고문헌 1.이용남 외, 『한국현대작가론』, 서울: 민지사, 1984. 2. 신동욱. 『김소월 시에 관한 연구』 서울: 연세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 1990 3.김재용 외.『한국근대민족문학사』.서울: 한길사.1993 4.이영섭 외, 『新문예사조론』, 서울: 우리문학사, 1994. 5. 김영철,『김소월-비극적 삶과 문학적 형상화』서울: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4 6. 강진호.『한국근대문학 작가연구』.서울: 깊은샘. 1996 7. 박철석.『한국현대시인론』, 서울: 민지사. 1998. 8. 한용운,『님의 침묵』, 서울: 민음사. 1999. 9.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46권. 과천: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2000 10. 김소월,『진달래꽃』. 서울: 미래사. 2001 11. 신동욱,조남철 공저.『현대문학사』서울: 방송대학교 출판부. 2003. 12. 이정자. 『시와 시조 창작론』.서울: 국학자료원. 2004 13. 김종태, 『한국 현대시와 서정성』, 서울: 보고사. 2004 14.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 5권, 서울: 지식산업사. 2005 15. 최대호, 만해 지훈의 한시, 은하출판사 16. 유근조, 소월과 만해시의 대비연구, 단국대학교대학원 17. 최동선, 김소월연구, 성균관대학교대학원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34    왕교 《运气好的日子》的社会性和艺术成就 댓글:  조회:7278  추천:0  2013-01-23
                                                本科毕业论文   题    目:《运气好的日子》的      社会性和艺术成就 韩文题目: 의 사회성과      예술 성취           系    部:       东方语言学系      专    业:        朝鲜语           姓    名:          王巧           学    号:      20060420207        指导教师:        崔均善           2010年   5月    15日 毕业论文独创性声明   该毕业论文是我个人在导师指导下进行的研究工作及取得的研究成果。文中除了特别加以标注和致谢的地方外,不包含其他人或其它机构已经发表或撰写过的研究成果。其他同志对本研究的启发和所做的贡献均已在论文中作了明确的声明并表示了谢意。   作者签名:  王 巧      日期: 2010  年   5 月20    日         毕业论文使用授权声明   本人完全了解青岛滨海学院有关保留、使用毕业论文的规定,即:学校有权保留送交毕业论文的复印件,允许被查阅和借阅;学校可以公布全部或部分内容,可以采用影印、缩印或其它复制手段保存该毕业论文。保密的毕业论文在解密后遵守此规定。       作者签名: 王 巧   导师签名: 崔均善  日期: 2010   年 5  月 20日           摘 要   玄镇健的小说《好运的一天》发表于1924年,当时正值韩国的日帝强占期,整个韩民族在日本的统治之下遭受了前所未有的苦难,而其中最悲惨的莫过于处于最下层的无辜百姓。《好运的一天》通过记述一个处于韩国社会最下层的人力车夫的“好运”的一天,真实的反映了当时韩国下层人民的苦难生活。 笔者利用文献研究方法和文学批评方法等两种研究方法,在已有研究的基础上进一步进行了研究对玄镇健的《好运的一天》的社会性和艺术成就,希望通过本论文使读者更了解玄镇健的文学世界,并希能够更好地体会当时韩国下层人民的苦难生活。   关键字: 玄镇健 写实主义 反语 最下层社会                                                   초 록   현진건의 소설 은 1924년에 발표되었다, 당시는 일제가 한국 을 강점한 시기었다. 한민족은 모두 일본의 통치하 미증유의 고난을 격고있었 다. 그 중에서 최대한 고난을 당한 사람은 한국 최하층 인간들었다. 은 한국사회 최하층에 있는 인력거꾼의 “운수 좋은” 날의 기록을 통하여 당시 한국 최하층 인간의 고난한 삶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문헌연구방법과 문학비평의 방법으로  선배 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진일보 현진건의 소설의 사회성과 예술성취를 재조명하려 한다. 본 논문을 통해 독자들은 당시의 조선의 사회상과 최하층 인간의 생활상을 보다 깊이 요해할 수 있으며 현진건의 문학세계를 보다 깊이 요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논문은 여러 가지로 미흡한 점이 많지만 한국문학을 배우는 동학들 에게 일정한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해 본다.   키워드: 현진건 사실주의 반어 최하층 사회                           차례 서론------------------------------------------------------ 연구의 필요성 및 의의----------------------------------- 연구내용과 방법----------------------------------------- 본론------------------------------------------------------- 현진건(玄鎮健,1900-1943)------------------------------- 창작배경------------------------------------------------- 2.1사회적 배경------------------------------------------ 2.2문학적 배경------------------------------------------ 의 분석----------------------------------- 3.1줄거리----------------------------------------------- 3.2 반어(irony)------------------------------------------ 3.3 대화 분석-------------------------------------------- 3.4사실주의적 묘사-------------------------------------- 결론------------------------------------------------------- 참고문헌--------------------------------------------------- 감사의 말--------------------------------------------------                     1. 서론 1.1.연구의 필요성 및 의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80년대에 출생한 대부분 청년 세대들은 이미 전통 문화에 대해 소원해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전통문학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각성을 불러일으킴에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한국어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으로 말하면 한국의 전통문학에 대한 연구는 자못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특히 시공간적으로 우리와 소원해진 일제 강점기 한국사회와 인민들의 생활 상을 반영한 작품에 대한 연구는 더욱 의미를 가진다. 일제 강점기(1910-1945년)에는 한국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난을 당했 다. 이는 어느 개인의 수난이 아니라 전사회나 전민족의 대수난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작품의 연구를 통해 당시 한국 최하층 사람들의 생활상을 잘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 일대들이 유익한 계시도 받을 수 있다. 특히, 80년 대에 태어나 우월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우리 일대들에 대해서 더욱 그렇다. 현진건은 1920년대 한국 현대 단편소설의 대표적 작가로 사실주의적 소설의 집대성자이다. 여기서 연구하는 그의 걸작 은 그의 사실주의적 소설의 대표작으로서 일제 통치하에서 인력거꾼 김첨지의 “운수 좋은” 어느 하루를 펼쳐 보이면서, 당시 도시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일반화하고 있다. 은 현진건의 창작 전환점으로 작품의 사회성과 예술성취에 대한 연구는 문학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현진건의 문학사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지위로 많은 문학계의 대가와 학자들이 현진건 본인이나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해 연구하고 우수한 논문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에 대한 전문적 연구도 있지만 그리 많지 않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학자들은 대부분 이 작품의 반어에 관심을 많이 돌렸다. 그리고 이 작품의 사회성에 대한 연구도 많지 않고 연대도 멀다. 한국 학자인 변태수의 논문도 1981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여러 모로 보면서 현진건의 소설의 사회성과 예술성취에 대한 연구는 필요성가 많이 있는 것이다. 1.2. 연구내용과 방법 학술잡지, 단행본, 한국문학사 등에서 현진건의 소설에 대한 재료를 찾아 분석하고 정리한다. 선배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진일보 현진건의 소설의 사회성과 예술성취를 재조명하려 한다. 다음에는 그때의 역사적 사회 배경을 고찰하고 당시의 역사적 사회배경 속에서 을 고찰하고 작품의 예술성이 잘 드러난 부분을 찾아 깊이 있게 분석한다. 그 기초상에서 상황의 아이러니, 인물의 구체적인 심리 묘사, 현살감 있는 서술, 비속어의 사용 등 면에서 정체적으로 작품의 예술성 을 진일보 탐구한다.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사회성 과 예술성취를 나름대로 연구하여 아직 미흡한 문제를 재조명하려 한다. 문헌연구방법과 사회적 반영이론이란 두 가지 연구방법을 통해 현진건의 소설  의 사회성과 예술성취를 연구한다. 2. 본론 2.1.현진건(玄鎮健,1900-1943) 현진건은 호가 빙허로서 1900 년 8월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에 한문을 수학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중학을 졸업했고 후에 중국에 건너와 상해 호강대학 독일어전문부에서 수학했다. 1919 년 대구에서 이상화 등과 함께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고 1920 년 지에 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햤다. 1922 년에 동인지에 가담하였고 1925 년에는 사에 입사하여 사회부장 등 직을 역임하였다. 1936 년에 손기정 선수의 보도사건에 관련되어 1 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3 년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현진건의 창작활동에서 가장 눈부신 시기는 1920 년대 이다.  현진건은 파의 일원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놓은 후 근 20여 년의 작가 생활을 통해서 뛰어난 문학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많은 사람에 의해서 다양하게 거론되어 왔지만, 한결같이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로서, 또는 그 공로자로서 우리 소설사의 뚜렷한 작가임을 높이 찬양 하고 있다.   44세란 극히 짧았던 생애를 통하여 그가 내놓은 문학은 민족적 비애로 충만 된 민족의 수난과 역사를 성실히 증언하는 사실작가로 일관했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한국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격동기에 개화지향적인 주변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정치, 사회적으로 어렵고 혼란된 시대를 살아 가는 여러 가까운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대하면서 자신의 삶을 정립했다. 그는 생활에 절도를 유지했고, 문단의 세기말적 분위기에 초연했다. 조혼한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여성 관계에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 그의 문학적 특징은 사실주의의 확립에 있다. 즉, 치밀하고 섬세한 사실주의 적 묘사, 짜임새 있는 구성과 반전의 수법, '나'라는 고백적 시점의 사용, 현실에 대한 객관적 묘사 등을 통해 현대 한국 단편 소설의 특징은 단적으로 아이 러니의 틀 속에 1920년대의 한국 사회의 한 전형을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는 그에게 있어서 현실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미학적 구성 원리이며, 그의 언어는 현실과 사회에 밀착된 현장의 소리이다. 이러한 작품으로는 「빈처」, 「운수 좋은 날」, 「B 사감과 러브레터」 등이 있다. 명암, 정신 대 물질, 빈부의 대립 등 이원적 구성을 미적으로 소화하는 데 능하다.   그는 김동인, 염상섭과 함께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자이다. 전기의 작품 세계는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와 기본적 사회 단위인 가정 속에서 인간관계를 다루면서 강한 현실 인식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했고, 그 때의 제재는 주로 모순과 사회 부조리에 밀착했었다. 그리고 1930년대 후기에 와서는 그 이전 단편에서 보였던 강한 현실 인식에서 탈피하여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었다. 그는 한 시대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는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문화 적으로 서구 취향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선비의식을 지탱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모순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대처하여, 생활과 문학을 하나로 일치시켜 살았던 작가이다.   현진건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1인칭 화자의 고백 형식을 통하여 작가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단편에 능한 작가”로서 “현대 단편소설의 시조”로 불릴 만큼 한국단편소설의 기술적인 기틀을 마련한 작가로서 한국현대소설사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상에 있는 작가이다. 현진건은 한국현대문학사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철저하게 사실주의를 소설 창작에 구현함으로써 “사실주의 집대성자”로 정평이 나 있기도 하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의 무기력한 삶의 모습을 감상주의적 색채가 다분히 도배되어 있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이후의 직품에서는 3 인칭 서술방법을 도입하여 어두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을 좀더 치밀 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주요작품으로는 단편소설 ,, ,등이 있고 장편소설에 , , 등이 있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 기교적인 면만을 높이 평가하거나 자연주의적 경향을 지녔던 문학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으나 사실주의문학의 터전을 가장 공고 하게 닦아 놓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2.창작배경 2.1사회적 배경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1910년8월29일~1945년 8월 15일)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주요 시대 중 하나로, 한반도가 일본 제국의 지배아래 놓였던 시기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또 다른 표현으로 일제 암흑기, 일제 식민 통치 시대, 일본 식민지 시대, 일본 통치 시대, 일정 시대, 왜정 시대(倭政時代), 대 일본 전쟁기, 대일 항쟁기, 국권 피탈기(國權被奪期) 등이 있으나, 표준어로는 “일제 강점기” 라고 명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헌병 경찰 통치기 (무단 통치기)(1910년~1919년)”, “민족 분열 통치기(문화 통치기) (1919년~1931년)”, “민족 말살 통치기(1931년~1945년)”로 각각 지칭한다. 일제의 무단 식민 통치는 한국의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첫째, 여성의 지위 하락. 일본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았고, 그 영향 으로 한국 여성 또한 지위가 그 이전보다도 더 하락하였다. 둘째, 민족 말살과 민족성 변질.“내선일체(內鮮一體)”를 목표로 역사를 왜곡하였으며, 일본의 풍습과 문화를 이식하였다. 일본과 친일 학자들을 앞세 운 일선동조론이 여기에 이용되었다. 식민사관으로 전반적인 한국의 역사 왜곡 과 유적 파괴와 도굴 방치 및 일제의 맹수 사냥으로 인해 한반도의 시베리아 호랑이와 아무르 표범 멸종 위기. 그리고, 경제 수탈로 인한 민생 피폐 한국인 들은“죽음을 담보한 노동”에 시달렸고, 빈곤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을 발표하는 1924년은 문화 통치기에 속한데 더 중요시하는 사회성이 나타나고 있다. 또는 빙허 현진건은 1900년에 출생하고 1943년에 돌아가셨는데 딱 일제 강제기를 몸소 겪은 일이었다. 2.2문학적 배경 1920 년대의 소설은 인간개인과 그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설정에서 서사적 대결양식을 찾는다. 그리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여하는 이 시기 소설의 기본 적인 과제가 되어 소설의 발전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 시기 소설은 크게 개인주의를 내세운 유미주의와 자연주의 경향, 사회현실에 관심을 보여준 사실 주의경향을 내세운 작품으로 나뉘게 되는데 본 논문에서는 비판적 사실주의 작품들을 고찰하게 된다. 현진건은 개인의 사회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등에서 보여주듯 빈곤과 지식인의 삶의 고민의 원인을 사회에서 찾게 되며 사회비판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1919 년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학 정치를 표방하면서 분리조정 정책을 취하였다, 즉 일부 언론, 집회, 결사 등의 자유를 허가하였다. 따라서 여러 의식단체와 사회운동단체 나왔다. 현진건은 개인의 삶만을 비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가지고 있는 삶을 비통해 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에 대한 고민만이 아니고 타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으로 자기의 고민은 개인의 출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못하는 사회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진건은 처럼 꽤 무게가 있는 작품을 창작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일제 통치하에는 지식인의 고통은 김첨지의 고통과 다른 것이 없다. 그는 폐허화된 조선이 당하는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안은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의 작품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게 되었던 것이다.   3.의 작품분석 3.1줄거리   비가 추적추적 오는 어느 날, 인력거꾼 김첨지에게 행운이 불어닥친다. 아침 댓바람에 손님을 둘이나 태워 80전을 번 것이다. 거기에다가, 며칠 전부터 앓아 누운 마누라에게 그렇게도 원하던 설렁탕 국물을 사줄 수 있으리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를, 1원 50전으로 불러 세운 학생 손님까지 만났기 때문이다. 엄청난 행운에 신나게 인력거를 끌면서도 그는 마누라 생각에 내심 켕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님 하나를 흥정하여 또 한차례 벌이를 한 후, 이 “기적”적인 벌이의 기쁨을 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길가 선술집에 들른다. 주기가 얼큰히 오르자, 김첨지는 마누라에 대한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술주정을 하면서 미친 듯이 울고 웃는다. 마침내 취기가 오른 김첨지가 설렁 탕을 사들고 집에 들어온다. 무서운 정적이 감돈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이의 젖 빠는 소리만 난다. 어쩌면 이 침묵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대문에 들어서면서 괜히 소리를 지르며 허장성세를 부린다. 김첨지는 문을 왈칵 연다. 땀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김첨지는, 이년, 주야장천 누워만 있을 거냐고 하면서 발로 아내를 찬다. 반응이 없자 달려들어 머리를 흔들며 “이년아 말을 해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러다가 흰 창이 검은 창을 덮은 눈을 보게 되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린다. 김첨지는 미친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비비대며 중얼거린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3.2. 반어(irony) 반어(irony)는 원래 “은폐하다(隐蔽)”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希腊语) “eironeia”에서 온 말로, “표면적 진술과 실제의 발화 의도가 다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시대부터 인식의 방법론으로 쓰여 오다가 나중엔 수사학(修辭學)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여기엔 복잡한 분류 체계가 있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 분류 체계를 단순화하면, 크게 ‘상항적 아이러니’ 와 “언어적 아이러니”로 대별할 수 있다. 그 중“상황적 아이러니”는 “기대했던 바와 실제 벌어진 상황이 반대이거나, 바라는 바와 실제로 처한 바가 서로 반대일 경우”를 뜻하는 것이다. “첫째 번에 삼십 전,둘째 번에 오십 전——아침 댓바람에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운수 좋은 날”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보는 것이다. 팔십 전을 아침결에 번 것이다. 그 돈을 가지고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컬컬한 목을 소주 한 잔으로 적실 수 있었다. 참 좋은 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그 학교 문을 돌아나올 때 뒤에서 한 학생이 “인력거!”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일 원 오십 전만 줍시오”하는 말이 김첨지의 입에서 떨어졌다. 제 입으로 부르고도 스스로 놀라는 엄청난 액수이다. 둘이 흥정하다가 이런 차삯으로 갈 데로 갔다. 그 학생을 태우고 나선 김첨지는 스피드 스케이트를 하는 듯하였다. 정거장까지 끌어다 주고, 그 깜짝 놀란 일 원  오십 전을 정말 제 손에 쥐었 을 때 거저나 얻은 듯이 고마웠다. 졸부나 된 듯이 기뻤다. 정말로 생각할 수 없는 운수 좋은 날이었다. 오늘은 운수가 괴상하게도 좋으니까, 그런 요행이 또 한번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할 수 없기에 이 행운을 꼭 잡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거장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이어 한 사람을 태워주었다. 이 번에 육십 전을 벌었다. 길가 선술집에서 나온 친구인 치삼이를 만났다. 둘이 선술집에 들어가서 한잔 하였다. 추어탕과 구워지는 너비아니, 제육, 간, 콩팥, 북어, 빈대떡…… 등 안주를 사먹었다. 그리고 두부와 미꾸리가 든 국 세 그릇을 받아들고 제우 던 막걸리 곱배기 두 잔이 더웠다 .또 곱배기 한 잔 마셨다. 친구인 치삼이가 술을 더 마시지 말라고 했을 때 김첨지는 개의치 않고 계속 곱배기를 마시라고 하였다. 돈 몇 푼이 땅에 떨어져 다시 줏는 것을 보고 마음에서 너무 더러운 행위로 여기기도 하였다.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었다. 이상  열거한 것은 모두 운수 좋은 날이라고 하는 경우를 증거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운수 좋은 날”은 아내가 죽는 날이었다, “운수 좋은 날”이라는 특정된 환경에서 벌어진 비극의 아이러니가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그의 아내가 기침으로 쿨룩거린지 벌써 달포가 넘었다. 반듯이 누워  일어나 기는커녕 모르도 눕지 못하는 안해였다. 사흘 전부터 설렁탕 국물이 마시고 싶다고 남편을 졸랐다. 그리고 오늘 집을 나올제 아내는 김첨지에게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며 숨이 그렁그렁하여 이렇게 부탁하였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집에 붙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 경우는 이내가 자기 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운수 없는 날이었다. 김첨지가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아내가 죽음과 거리에게 더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작품의 제목인 “운수 좋은 날”은 너무나 대조적이며 상황의 아이 러니를 두드러지게 한다, 현진건은 이 작품에서 예술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것이 바로 아이러니라는 수사법이다. 3.3.대화 분석 “에이, 오라질 년, 조랑복은 할 수가 없어. 못 먹어 병, 먹어서 병, 어쩌란 말이야! 왜 눈을 바루 뜨지 못해! ” “이런 오라질 년! 조밥도 못 먹는 년이 설렁탕은 또 처먹고 지랄을 하게. ” “아따, 젠장맞을 년, 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 ” “젠장맞을 것! 이 지를 맡으며 빈 인력거를 털털거리고 돌아를 간담. 이런 발어먹을, 제 할미를 붙을 비가 왜 남의 상판을 딱딱 때려! ” “이런 젠장맞을, 술을 왜 안 부어…… ” “이놈, 오라질 놈, 왜 술을 붓지 않어. ” “빌어먹을 깍쟁이 같은 년, 누가 저를 어쩌나. 왜 남을 귀찮게 굴어! 어리구, 소리가 처신도 없지, 허허 ” “죽기는 왜 죽어. 생때같이 살아만 있단다. 그 오라질 년이 밥을 죽이지. 인제 나한테 속았다. ” “이런 오라질 년, 주야장천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 “이년아, 말을 해,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 년! ”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이상 열거한 대화를 보고 비속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년, 오라질, 젠장 맞을 등 비속어를 통해 그 시대에 특유한 습관을 보일 수 있으며 일제 통치하 에서 하층민의 궁핍상도 잘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에 하층민의 사화 상과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또한 현진건의 창작 특징 하나이다. 3.4. 사실주의적 묘사 “그 날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런 묘사는 비극의 발생를 암시할 뿐만 아니라 김첨지가 생활한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으며 독자에게 진실감도 보여 주었다. 이런 경우는 그 시대의 하층민 비참한 생활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첫번째에 삼십 전, 두 번 째에 오십 전을 벌었다, 아침에 댓바람에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 돈이 김첨지에게는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소주 한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 줄 수 있음이다.” 이런 묘사는 독자에게 하층민인 김첨지의 내심 생각을 잘 보여 줄 수 있다. 이런 갑자기 닥쳐온 벌이에 대해 김첨지의 가슴에서 나타난 생각을 명랑하게 표현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김첨지같은 인력거꾼의 궁핍상을 소설화하고 있었다. 빈곤 으로 돈이 생기자 평소에서 못 마시던 술을 사는 것과 병에 걸린 아내가 가장 먹고 싶은 설렁탕을 살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가 이미 기침으로 앓아누운지 달포가 넘었는데 약 한 첩 써본 일이 없다. “조밥도 굶기를 먹다시피 하는 형편이니,……” 병이 심해지는 것은 열흘 전에 조밥을 먹고 체하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굶기를 밥먹듯 하면 살아왔는데 돈을 벌어서 좁쌀을 사다 먹을 수 있어 마음이 급하고, 불길은 달지 않아 채 익지도 않은 것을, 숟가락은 그만두고 손으로 움켜서 두 볼이 주먹덩이 같은 혹이 불거지도록,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하듯이 먹었다. “땀과 빗물이 섞여 흐르는 목덜미를 기름 주머니가 다 된 광목 수건으로 닦으며……” 그리고 선술집에서 김첨기가 돈이 있기에 거기 있는 모든 먹거리 를 다 시키는 경우에 대한 묘사, 먹다가 아내가 죽었다는 소리를 지르는 취한 행위에 대한 묘사, 마지막 김첨지가 집에 돌아갔을 때 주위의 고요하고 괴이한 상황 묘사 및 집안에서 얘기의 “응아 소리도 입에서 나는 게 아니고 마치 뱃속에서 나는 듯하였다. 울다가 울다가 목도 잠겼고, 또 울 기운조차 기진한 것 같다.” 라고 한 묘사는 다 비극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 결론   본문의 묘사와 서술에 의하며 결론을 얻어 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현진건의 소설 의 사회성과 예술성취는 다음 같이 개괄할 수 있다.   이 소설은 1924년에 발표하였는데 한창 일제 강점시기의 제2단계의 통치기 였다. 소설은 일제 강점기에 하층민의 궁핍상과 사회 현실을 잘 나타내고 있는 바 모두 인력거꾼이지만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기에 다른 동사들을 피하여 외딴 곳에서 손님을 찾았다. 아내가 병에 걸린줄 알았지만 약을 사다 먹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 김첨지였다. 그야말로 눈물겨운 사회의 비극이다. 예술적인 성취를 말하면 은 1920년대 초기에 사실주의적 소설으로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사회상를 소설화 하는 창작 의식형태, 비속어를 이용한 것과 구조면에서 돈 벌이와 아내의 죽음 사이에 서의 모순구성, 등은 모두 사실주의적 묘사이다.. 이로써 현진건의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1920년대 한국문학, 특히 현진건 소설에서의 사실주의를 알아보고, 그것이 당시 시대와 어떠한 연관성을 갖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또한 현진건 소설에 대한 비판을 병행 함으로써 그의 소설이 가지는 한계가 사회 현실과 어떤 상관성을 가지는지 알아 보았다.                       감사의 말 논문 집필과정 최교수님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논문집필에 필요한 재료를 수집하는 방법도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에 다시 한번 진심 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1. 韓國文學論綱[韓]趙東一等著周彪,劉鉆行譯,北大出版社2003年10月第1版 2. 韓國現代文學史[韓]金允植,金宇鐘著;金香,張春植譯,民族出版社2000年 3. 韓國文學史,尹允鎮,等,編著,上海交通大學出版社2008年1月第1版 4. 韓國現代文學作品選,尹允鎮等編著,上海交通大學出版社2007年 5. 한국 현대문학 대계 . 3 , 소설 1900-1935  권영민, 민음사 [1994] 논저: 6.현진건 중단편선 ‘운수좋은날’ , 현진건, 문학과 지성사, 2008.03.05 7.현진건의 단편 소설 연구, 이준호,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1993 8.현진건의 단편소설 연구, 존 프랭클, 1993 9.현진건의 硏究, 이성희, 西江語文, 1994. 10.玄鎭建 小說의 리얼리즘, 김성수, 泮橋語文硏究 제3집, 1992. 11.玄鎭健의 作品에 나타난 社會像과 作家意識 김영민 (연세어문학, Vol.12 No.-, [1979])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P187-P205 12.玄鎭健文學에 나타난 社會性 考察 卞泰洙 (國語敎育論叢, Vol.1 No.-, [1981]) 朝鮮大學校 教育大學院 國語教育學會P207-P243 기타: 13.http://ko.wikipedia.org/wiki/현진건 14.http://www.reportshop.co.kr/detail/41/D40453.html 15.http://www.seelotus.com/gojeon/hyeon-dae/soseol/18-mun-hak-text/un-su-jo-eun-nal.htm          
133    상고가요와 향가연구 (장지운) 댓글:  조회:9549  추천:0  2013-01-23
                               摘 要       韩国三国时期之前的歌谣内容大多是通过口头传唱并记录下来的,并且只是用简单的汉字记录了它的意思,现今我们知道也只有三篇而已,具体的题材模式以及这个时期形成的独特的样式我们却很难研究,所以将这一时期的歌谣称为古代歌谣,代表作有《龟旨歌》《箜篌引》等,通过一些作品来了解并推论出三国以前文化的题材及文化背景等;乡歌作为新罗时期到高丽时期形成的文化在统一南北的新罗时期极为盛行。 这一时期的乡歌借助了汉字的音和意用乡扎标记来,录又称借字文学,形成了特有的文系,是创作文学的根源,代表作有《薯童謠》等。古代歌谣和乡歌形成了固有的文化特色,将当时民族文化的个性形象化,对韩国文化具有重大意义,是贵重的文化遗产。      关键词:口头传唱  文化和背景  乡歌 个性形象化  文化遗产                                                초 록          한국의 삼국시기 이전에 가요내용은 대부분 구두로 불리어오다가 기록된 것들이며 아울러 간단한 한자로 그것의 뜻을 기록하였는데 지금까 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세 편밖에 없으며 구체 제재모식 및 이 시기에 형성된 독특한 양식에 대하여 연구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가요를 고대가요라고 부른다.     대표작으로는 《구지가》《공후인》 [箜篌引] 등이 있는데 일부 작품 으로 3국시기 이전의 문화제재 및 문화배경 등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향가는 신라시기로부터 고려시기에 이르는 기간에 형성되어 통일신라÷ 시기에 가장 성행하였는데 이 시기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빈 향찰로써 기록하였으며 또한 빌려온 글자문학이라고도 하는바 특유한 문자체계를 형성하였다. 대표작으로는《서동요(薯童謠)》등이 있다.     고대 가요와 향가는 고유한 문화특색을 형성하였는바 당시 민족문화의 개성의 형상화는 한국문화발전에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므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되고 있다.   키워드: 구두   문화와 배경   향가 개성의 형상화   문화유산   차 례 서론…………………………………………………………………………………… 1. 고대가요의 개념……………………………………………………………… 2.고대가요의 율격……………………………………………………………… 3.고대가요의 특징……………………………………………………… 본론……………………………………………………………………… 현존작품분석……………………………………………………………………… 향가의 소개……………………………………………………………………… 향가의개념…………………………………………………………………… 향가의 발생………………………………………………… 명칭과 갈래…………………………………………………………………… 결론 상고가요와향가문학의 의의 감사의 말 참고문헌                                           1. 서 론        농경 생활을 위주로 했던 한국인민의 조상들은 농사가 시작되고 끝나는 시기마다 각각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추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는 문헌 기록이 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 (舞天), 백제의 오월제(五月祭) 등과 같은 제천 의식이 그것인데, 이 과정 에서 행해진 원시 종합 예술로서의 제의(祭儀)놀이 속에서 고대 가요가 발생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가요는 집단적 민속요와 개인적 서정가요로 분화되어 발달하여 왔다. 1,상고가요의 개념     삼국시대 이전의 노래로서 오늘날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세 편 뿐인데, 그것도 한자로 짤막하게 뜻만을 기록하고 있어 그 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시기의 노래가 특별한 양식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고대 가요'라 부른다. 초기 가요는 일정한 률동을 가진 감탄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인류의 의식과 언어가 발전하고 가요창작의 경험이 쌓아짐에 따라 점차 자유로와지면서 후렴구에다 집단적인 사상감정과 후의 개인감정을 표현하는 가사가 첨가 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상고가요란 함은 대게 한민족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예・맥족이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에 생활의 터전을 잡은 이후부터 삼국시대 초 향찰 표기의 향가, 즉 기록문학이 나타나기 이전의 가요를 지칭하는 것이다. ‘상고’라 함은 문학사에서 고대 원시 시대부터 삼국시대 이전, 즉 본격적인 국가 체제가 형성되고 기록문학이 등장할 무렵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말이고 가요(歌謠)는 민중 가운데 널리 불려진 속요와 음절을 붙여서 불려지는 노래를 총칭하는 의미의 본래 ‘악가와 속요’룰 칭하는 말이다. ‘가(哥)’는 곡과 장이 있고 절을 떼여서 음영하게 된 것이고, ‘요(謠)’는 곡이나 장이 없이 악기에 맞추지 않고 그대로 노래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역사적으로는 ‘요’가 더 오래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상고가요의 율격     상고가요의 시행은 여전히 4구체 형식을 취하고 있고 시행도 한 시행 이 두 개 시구로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형식을 띤 한 국 후세에 국문기가에 자못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 반면 내용은 인간적이나 시어는 넑두리나 푸념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말은 그 언어조직이 2음절 또는 3음절어가 거의 주를 이루는 교착 어이고 체언에 용언이 잇달아야 하나의 문장이 이루어지는 통사구조를 갖기 때문에 후세에 한국어로 번역, 해석할 때 자연히 3․4조 또는 4․4조로 가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오랫동안 한국인의 몸에 젖어 그들의 정서, 감정 표현에 적절한 음조, 음수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한국말은 굴절어인 까닭에 위에 한시처럼 엄격한 잣수율을 갖춘 정형시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시 시가 처음 4구체 우수체 시가로부터 시작되였다는 것과 조선시가 고유의 특질의 하나로 되고있는 어음상 내외구 대응의 특징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3,상고가요의 특징     상고 시대의 노래 세 편이 지니는 공통점은 그것이 모두 노래로 전해 지다가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노래들이 널리 전해진 것은 의식적인 노래로서의 가치때문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 들을 주술 또는 제의 중심의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원시적인 신앙생활과의 결부속에 집단적성격을 띠고 상위일치의 미분화 상태에 있는것이 특징이라면 상고시가 개인에 의한 문학창작의 성격을 나탄내면서 계급문학으로서 분화상태에 있는것이 특징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상고 가요는 세편뿐이다. 따라서 이 노래들이 보여 주는 문학적 의의는 그 공통성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노래들이 널리 전해진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럴 만한 이유란 의식적인 노래로서의 가치 때문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시가 문학의 장르에 대해서도 추론해 볼 수 있다.                                                                     2.  본 론   1. 현존 작품분석     상고시기의 주요한 문학작품으로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원시가요 와 고대서정가요 그리고 등이 제일 유명 하다. '구지가'는 노동이나 놀이에 노래가 수반되었다는 전통성과 보편성을 보여주는 반면에, '공무도하가'나 '황조가'는 인간 본연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어 이미 시가의 기능과 성격이 다양하게 분화되어있음을 알 수 있고 전통성과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미 상고 시대는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다양성을 지닌 시가문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는 「삼국유사」의 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북에게 머리를 내놓으라고 위협한 짤막한 노래다. 에 따르면 여러 사람이 땅을 구르면서 이 노래를 불렀더니 가락국의 시조가 태어나서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는 노랫말의 짜임이나 노래를 불러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낸 경위가 「삼국유사」의 《수로부인》에 나오는 와 매우 흡사하다    이를 근거로 의 성격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위협 적인 노래를 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소원을 이루는 주술적인 노래로 볼 수도 있고, 거북의 머리 모양이 남성의 서이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과 이 노래를 매개로 사람이 태어났다는 점을 연관시켜 해석하면 출산 기원의 노래로 볼 수도 있다.     는 조선원시사회 의 실제적내용을 전하는 상고시가의 유일한 실례라는것 그리고 조선고전문학에서 가장 오랜 원시가요라고 추정되는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귀중한 유산으로 되고있다.이 '구지가'의 성격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위협적인 노래를 불러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소원을 이루려는 주술적인 노래로 보기도 하고, 거북의 머리가 남성의 성기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과 이 노래를 매개로 하여 사람이 태어났다는 점을 연관시켜 출산 기원의 노래로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본디 노동요였던 것이 나중에 설화 속에 끼워진 것으로 보기도 하고, 동요와 흡사한 놀이의 노래로 보기도 한다.              龜何龜何 (구하구하)               首其現也 (수기현야)               若不現也 (약불현야)               燔灼而喫也 (번작이끽야)       이 가요의 기록년대를 보면 1 세기 좌우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가요가 불리우기 시작한 것은 거슬러올라가 퍽 오랜 고인시대가 아니겠는가 생각 된다. 다른말로 퍽 이전 거부기를 토템으로 하여 불리워지던 원시가요 이던 것이 가야국의 건국과 관련해서 노래되었고 후에 기재된 것이라 인정된다.      에 대한 연구도 오늘날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연구 방법 및 연구자들의 서로 다른 견지로 인해 그 해명이 많은 차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명한 학자 박지홍선생님은 에서 를 영남지방의 와의 비교 속에 주가로 추정하면서 노동 가나 무답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병욱선생님은 에서 를 영신가로서가 아나라 명령과 위혁적인 표현에 근거하여 원시시가형태로 간주하면서 구수를 남성의 생식기로 보고 원시 시대의 생명근원설에 기초한 남녀간의 구애가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김열규선생님의 에서는 원시사회 에서 희생 또는 제의무용과 함꼐 가창되는 주가라 하였으며 김병욱선생님은 에서 신가라 하였다.     위의 견해에 의하면 이 가요는 원시인들이 주술로 이용하고 있던 가요라 지적한다. 이 가요가 원래 주사였는가 주문이였는가 주언이였는가 하는 것은 가요 연구 자체의 핵심과 일정한 간격을 둘 수 있다. 상기한 것들이 후에 음악적 주원가로 변모하 였다고 할 수도 있다.     에는 거부기를 숭상하는 토테미즘의 원시자연종교사상이 반영 된다, 그리고 그 위협적인 표현을 보아 문면의 형성은 원시적인 토템사상 의식이 아직 성숙되어 가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식면에서 이 가요는 소박하고 단순하며 또한 일정한 운률조성과 시행조직에 안받침되면서 반복법, 수사학적 부름말 등의 수법도 비교적 효과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주목된다.     또는 일부 학자들은 와 신라 성덕왕때의 와의 비교를 통해 조선고대시가의 근원적형식을 립증해보려고까지 하였다. 이 는 아주 훌륭한 유일한 상고가요작품이다. 조선시가 창작사의 유구성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하여 일정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진다.     또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는 이 시기의 훌룡한 작품 이다.  일명 이라고도 한다.  公无渡河              님이여 가람 건너지 마소  公竟(终)渡河        님아 그대 가람 건느시네  坠河而死              가람에 빠져 싀오시니  将(当)奈公何           어저 님아 내 어이 하리오    와 작품의 작자, 창작동기 그리고 배경설화룰 전하고있는 가장 이른 문헌으롯서는 중국의 진나라사람 최표가 쓴 이다. 그 배경설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는 조선진졸 곽리자고의 안해 려옥이가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에 배를 저어가는데 어떤 백수광부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든채 강물을 거슬러 거니는 것이였다. 그 안해가 뒤쫓아가서 소리치며 말렸으나 사나이는 듣지 않고 계속 강을 건느다가 끝내 물에 빠져 죽고말았다. 이에 안해가 공후를 끌어다 타면서 라는 노래를 불렸는데 마디 마디가 구슬프고 처량하였다.     노래를 마치자 그도 물에 몸을 던져 죽였다. 자고가 집에 돌아가 안해 려옥에게 그 광경을 말하였다. 려옥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공후에 맞춰 그 광경을 노래를 지어서 타니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자가 없었다. 려옥은 노래를 이웃인 려용에게도 들려줬는데 이름을 이라고 하였다.     위에 배경설화를 볼 때 인간 본연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성과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부부의 순정과 절조 룰 노래한 가요라 볼수 있다, 안해는 남편이 강물에 몸에 던져 죽자  자기 도 남편을 따라 물에 빠져 죽는다. 작품의 주인공은 아주 서정적인 소유 하고 있는 사상감정세계는 그만큼 개인적이였고 사회적이였으며 또한 윤리 도덕적이였다. 다른 가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인간의 사상감정의 발현이다.     는 일련의 새로운 특징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락구를 갖추고 있다. 즉 마지막 시구가 감탄사를 가진 락구로 되여있는데 깊은 여운을 남기고있다. 이러한 시가형식에서의 낙구형태는 후세 조선 국문시가 형식발전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되고있었는데 그만큼 이 가요는 조선국문시가의 낙구형태의 연원적 연구가치를 갖고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시가는 음절수조직이 더 길어 운률미가 보다 굴곡적이고 정서깊은 등 새로운 발전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시행조직의 새로운 발전요소를 담고있는 면에서 주목된다. 즉 란 시구에서 우리는 이 시구를 두 행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 이것은 조선고대시가의 8 구체 형태에로의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향가     향가는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이어진 시가 문학으로써 고대 후기에 해당하는 남북국-통일 신라 시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 시기에 향가는 구비 전승되던 노래에서 문자에 의해 기록되는 기록문학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삼국 통일 이후 향찰이 창안됨으로써 가능 하였다. 향가를 차자문학(借字文學)이라고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문학사적으로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민족 최초로 자국 문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향가 문학은 국어 문학을 개시 하였 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향가는 단연형 정형시의 원형과 창작가요의 근원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10구체 향가의 삼단 구성이나 낙구법은 이후 고려와 조선조에까지 연결되어 한국 시가의 기층적인 구조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단연형 정형시의 원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향가는 종합 예술적이며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했던 상고대의 시가로부터 탈피하여 개인의 서정성을 노래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2. 1,향가의 개념    순수한 자기글이 없었던 때에 한국말로 된 노래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적는 향찰표기에 의해 기록되어 전하는 신라 및 고려시대의 시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향가는 에 실린 14수와 에 실린 11수 등 모두 25수의 시가를 지칭하는 장르 명칭이다. 이 시기에 제작되어 이두(吏讀)나 향찰(鄕札)로 표기된 시가.〈도솔가 兜率歌〉나 〈사뇌가 詞腦歌〉를 포함한 이 시기의 모든 시가를 총칭하는 말로 신라가요·신라시가·사뇌가라고도 한다.     중국의 시(詩)나 불교의 범패(梵唄)에 대해 '우리 고유의 시가', '시골 노래'라는 개념으로 향가라고 했다. 신라인들은 향가를 숭상했는데,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향가도 많았다. 일반인들이 유희와 오락으로 삼는 도구 였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대중포교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고유한 문화적 성격을 한반도 전역에 확대시키면서, 민족 문화 로서의 개성을 뚜렷이 형상화(形象化)시킨 귀중한 문학적 유산이다. 2.2. 향가의 발생     여기에는 많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중요한 사안별로 정리해 본다. 우선 초창기 연구자들의 견해는 조윤제의 학설로 집약해 볼 수 있다.     조윤제는 기사방법이 이두식 문자에 의해 표기되었으면 이것을 향가라고 전제하고, 향가문학의 성립연대는 부득이 그를 표기하는 이두문자의 발명 연대에서 구하였다. 여기서 조윤제가 보는 이두의 발명 연대는 신라의 통삼기, 그렇다면 향가의 성립도 역시 삼국통일의 전후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향가문학의 성립은 국문학의 형성을 의미한다고 확대해석을 시도하였다. 국문학은 항상 민족의 생활을 표현한다고 할 때 그의 성립연대는 자연 민족의 형성기인 통삼기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통삼기가 이두의 발명과 더불어 향가의 발생기로 보는 또다른 근거인 셈이다. 조윤제는 신라의 한문학도 통삼기에 와서야 제대로 발달 되었다는 사실을 보충하고 있다.     조윤제의 이같은 생각은 대체로 최근까지 받아들여져 왔다. 조동일은 그의 문학사에서, 향가가 노래를 지은 연대가 확실하고 노래를 짓게된 동기도 분명하고도 납득할 수 있게 나타나 있어서 그 출현은 문학사적 전환의 중요한 국면을 이룬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발생경위를 밝히고 있다.    굿노래를 부르며 주술을 행하던 전통 또한 새롭게 계승될 필요가 있었으며, 화랑제도가 창안되고 산천을 찾아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수련을 일삼는 기풍이 고조되자 사뇌가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또한 일반 백성의 민요도 나라에서 채택해 다듬을 수 있는 소재로만 존재하지 않고 그것대로의 오랜 전통을 이으면서 생활 내용이 복잡해지는 데 따른 발전을 보이는 한편 이따금씩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향찰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 두 방향에서 사뇌가인 향가와 민요인 향가가 나타 났다. 3, 명칭과 갈래 ① 문헌기록 ‘향가’라는 명칭이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王素與角干魏弘通,至是常人內用事,仍命與大矩和尙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明素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梵聲…明又嘗爲亡妹營齊, 作鄕歌祭之…羅人尙鄕歌者尙矣.”   “釋永才 性滑稽, 不累於物, 善鄕歌.”   “夫如是則 八九行之唐序, 義廣文體, 十一首之鄕歌, 詞淸句麗…”         향가란 명칭은 고려 문종 때(1075) 혁련정의 에 처음으로 보이고, ,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록은 고려 때의 것이지만 그 내용을 보아서는 신라 당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② 명칭   일반적으로 ‘鄕’ 즉 시골이란 말이 암시하듯 중국에 대한 한국노래의 비칭의 뜻으 로 이해되어 왔다가 점차 향가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나라 노래’, ‘우리 노래’ 등으로 풀이하고자 하는 학설도 대두되고 있다.   ․근대에 일본 학자인 오꾸라(小倉進平)의 식민사관에서 사용되기 시작 하여 자기비하적이고 부적으로 인식되어 온 단어이다. -신라 것을 ‘鄕言 ․鄕樂․鄕謠․鄕人’ 이라고 하고 唐을 ‘國’이라 한 것을 보아 사대부적 사고가 들어있다고 본 것이다..    홍기문도 ‘鄕’을 ‘國’의 의미로 해석하다가 황패강에 의해 더욱 구체화 되는데 즉 ‘향가’란 ‘國歌(나라노래)’로 한시나 한문이 아닌 한국말로 된 노래를 지칭하되, 향가라는 말로써 자기 노래를 지칭했던 신라와 고려 시대에 국한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③갈래   현전하는 작품과 용어의 개념에서 볼 때, 향가의 갈래로 크게 도솔가와 사뇌가, 그리고 불찬가의 세 갈래를 설정할 수 있다.   4, 대표적 향가작품    통일신라시대말 진성여왕대에 향가집 〈삼대목 三代目〉이 편찬되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가사가 전하고 있는 것은〈삼국유사 三國 遺事〉에 14수, 〈균여전 均如傳〉에 11수로, 모두 25수이다. 문헌상의 창작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최초의 작품은 진평왕대(579~631)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이며, 마지막 작품은 고려 광종(917~973) 때의〈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이다. 350여 년 간 당대인의 애호 속에 창작되었는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성행했다.〈보현십 원가〉 이후로 고려조에는 향가가 더이상 창작되지 않았으며 예종이 1120년에 지은 〈도이장가 悼二將歌〉를 향가의 잔존 형태로 보고 있다. 이 (薯童謠)는 현전하는 최초의 향가이며 향가중 유일한 동요이다. 善化公主主隱  善化公主니믄  선화 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그스지 얼어 두고    남몰래 사랑해 두고 薯童房乙                                    맛듕바알              맛둥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바매 몰 안고 가다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노래는 서동이 묘계로 선화공주님을 얻은 설화이다. 서동의 잠재적 갈망을 선화공주란 상대편에 전가시킨 것이다. 따라서, 주객을 전도시킨 데 수사적 특징이 있다. 국경을 뛰어 넘고 신분의 귀천을 초월한 낭만적인 한 소년의 사랑이 이 노래에 응집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의 하층인민들를 지혜에 찬미이며 왕공귀족에 멸시도 반영이다.     서동이의 꿈이 장애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는 어떤 깊은 문학적 배경 은 의식하기 어렵다. 다만, 설화의 내용에서처럼 한 영웅의 일대기가 차지 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 있다.  신라 시대 남녀의 연애는 오늘날에 비해 오히려 자유롭고 공개적이었다. 그러나, 귀족의 경우 연애는 자유로왔지만 결혼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이 노래는 "공주의 통정"을 고발조로 노래하여, 듣는 사람들의 주위와 관심을 강하게 끌게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3. 결 론       고대가요와 향가는 개인적인 사상감정 정서의 발견으로서의 개인창작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조선시가사견지에서 볼 때 이것은 획기적의의가 있는 것이다.상고가요으로서 는 조선의 유일한 원시가요작품이라는 면에서, 조선시가창작사의 유구성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하여 일정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진다.그리고 는 상랑을 위해 목숨을 건 고대인들의 강한 정열과 순진하고 소박한 노래로서 고대 동요의 정형적 형식을 띠고 있다.     원시가요와 향가는 원시적인 신앙생활과의 결부속에 집단적성격을 띠고 삼위일치의 미분화상태에 있은 것이 특징이라면 고대시가는 개인에 의한 문학창작의 성격을 나타내면서 계급문학으로서 분화상태에 있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원시가요라 할 때는 로동구호적인 성격을 벗어나 집단 적인 사상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가사가 첨가되고 운률에서도 일정한 마디를 갖출수 있는 노래를 두고 말한다. 민족 문화으로서의 개성을 뚜렷 이 형상화(形象化)시킨 귀중한 문학적 유산으로서 후세에도 아주 큰 영향 을 줄 것이다.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교수님의 사심없는 지도하에 논문을 순리롭게 완성했 습니다.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1. 조선고전문학사 (수정판) 문일환 민족출판사 2006.9 2. 김승찬, 신라향가론, 부산대학교 출판부, 1999 3. 화경고전문학연구회, 향가문학연구, 일지사, 1993 4. 나경수, 향가문학론과 작품연구, 집문당, 1995 5. 김승찬, 향가문학론, 새문사, 1986 6. 임기중외, , 1998, 아세아문화사. 7. 임기중, , (연도미표시), 현암사. 8. 백영정병욱선생10주기추모논문편찬위원회, 1992, 집문당. 9. 조동일, , 1994, 지식산업사. 10. 한국문학개론편찬위원회(편), , 1991, 혜진서관. 11. 김열규 외(1992) : 한국고전시가작품론Ⅰ, 집문당 12. 박광정(1999) : 재미있게 풀어 쓴 고전시가 문학, 좋은날 13. 성기옥(1987) : 구지가의 작품적 성격과 그 해석(1), 울산어문논집 제 3집 14. 정병욱(1988) :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5. 장덕순(2001) : 이야기 국문학사, 새문사 16. 정병욱(1993) :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7. 최두식·하상규(2002) : 고시가연구, 동아대학교출판부      
132    중,한천주교의 비교연구 외 1편 (소이연) 댓글:  조회:9679  추천:1  2013-01-23
   설명: 모 평심위원이 엄중한 정치문제가 있다고 상급에 고발한 논문임)                                                   摘要     众所周知,天主教是世界三大宗教之一基督教的一个分教。天主教、东正教和新教都隶属于基督教。但在中国基督教则是专指新教(俗称耶稣教)。虽然天主教传入亚洲已经有相当久的历史,但即使作为一名教友,也有很对人对天主教的历史并不熟悉。天主教传入中国已经有上千年的历史了,而传入韩国也有两百多年的历史了,在中韩两国,天主教都获得了不错的发展。但问及天主教的发展历史时,很多人一脸茫然。为什么会出现这样的情形,为什么大家对那些历史都不知晓?     两千多年前,耶稣做在耶路撒冷创立了基督教,而天主教与基督教是同源的,所以,至今也有两千多年的历史了。但人们对天主教的传入和发展却是一问三不知,更有甚者,问及天主教的教义时,也是模棱两可。天主教从唐代传入中国开始,历经误解、不支持,甚至迫害,直到今天,得到国人乃至政府的认可和支持,经历了一个漫长的过程;而在韩国,天主教也获得了很好的发展,现在越来越多的人开始相信耶稣,走进圣殿。天主教进入的同时也给当地国民的生活、思想带来了一定的影响。虽然一开始当地文化遭到了冲击,但随着天主教的发展,与神职人员的努力,使东西方的文化能够和谐共处,最终导致今天百花齐放的局面。     面对这种越来越好的局面,我认为每一个奉教者都应该了解自己所信仰的宗教,否则不能成为一名合格的教友。所以,作为一名奉教者的我,决定对这方面展开探讨。 关键词  天主教 中韩 历史                                         초록      이 연구과제를 선택한 이유는 본인이 천주교 신자이고 한국어학과 학생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다시피 천주교는 기독교중의 한 분파이다. 천주교와 동정교 그리고 신교가 기독교에 속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기독교는 신교의 특직이다. 천주교가 아시아에 오래전에 유입되었지만 많은 신자들이 천주교의 역사와 연변과정에 대하여 거의 모른다.     천주교가 중국에 유입된지는 천년이 넘고 한국은 이백 여년이 된다. 이처럼 천주교는 중한 양국에서 잘 발전하여 왔지만 사람들에게 천주교의 역사에 대하여 물으면 거의 몰랐다. 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2천년 전에 예수가 기독교를 창립하였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는바 천주교도 이 천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천주교의 전입과 발전과정을 거의 몰랐거니와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서조차 모르고 있다.     천주교는 당조때에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기시와 박해를 많이 받았는데 오늘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지지를 얻고 있지만 너무 긴 과정을 겪었다. 천주교는 다른 민족에 전파되면서 당지의 문화와 충돌하면서도 당지 국민들의 사상과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천주교가 발전함에 따라 동서방의 문화가 점차 조화되면서 평화공처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많은 오해가 있었고 박해당했지만 지금은 온당하게 발전하고 있다. 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천주교에 가입하고 있다. 한국에서 천주교는 자기의 TV방송국과 출판물을 가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신자들이라면 사람마다 자기의 종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합격된 신도가 될 수가 없다. 하여 본논문에서는 한 보통 신자로 이 방면에 대해 나름대로 검토하기로 한다.   키워드: 천주교  중한 역사  사상영향     차 례   논문 초록……………………………………………………………1-2   제 1 장 서론 ………………………………………………………… 3 제2장 본론 ……………………………………………………… 2.1역사의 비교 ………………………………………………… 2.1.1천주교의 역사 …………………………………………… 2.1.2중국 천주교의 역사 …………………………………… 2.1.3한국 천주교의 역사 …………………………………… 2.1.4중한 양국의 비교 ……………………………………… 2.2중,한양국 국민들의 생할과 사상에 끼친 천주교의 영향……………… 3 제3장 결론 ……………………………………………………   감사의 말 ……………………………………………………   참고문헌 ………………………………………………………                                         서론   Ⅰ. 머 리 말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17~18세기의 전환기적 사유 구조는 물론 19~20세기의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다시 말해 천주교회사 연구는 폐단의 논리를 고수해 오던 성리학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질적인 서양의 종교관념이 수용될 수 있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탈주자학(脫朱子學) 내지 반서학 (反西學)의 입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하였다.       아울러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사와 천주교회, 신자 집단의 성격,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겪게 된 민족사와 교회사의 관계도 연구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개화기나 광복 운동기에서의 교회와 국가, 현대사 안에서 차지하는 천주교회의 위상 문제도 연구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교회 내적인 문제, 즉 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교회의 정착, 천주교 신앙의 확대과정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특히 이러한 연구는 한국사의 한 분야라기보다는 실천신학의 한 분야로 이해되기도 하였고, 실제로 내용면에서 이러한 성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점도 있었다. 반면에 교회사를 민족사의 전개과정과 별개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으며, 때로는 구교론(護敎論)의 입장에 치우쳤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민족사와 호교론이라는 두 관점을 별개로 생각한다면 천주교회사에 대한 이해는 價値中立的일 수밖에 없고, 이것이 바로 교회사 연구자들의 고뇌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實證史學의 입장에서 교회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으며, 그 결과 민족사와 함께 교회사를 이해하려는 연구가 하나씩 결실을 맺게 되었다.    "가톨릭'이라는 말은 전체성, 완전성, 보편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화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가톨릭' 교회, 또는 '천주교'라고 한다." 이는 천주교용어위원회에서 정리한 개념이다.     한국의 가톨릭 교회는 중국을 통하여 전파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쓰는  '천주교' 라는 말을 그대로 함께 쓰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이라는 말은 천주교와 그 신자는 물론 교리나 가르침, 사상, 전통, 예법, 단체운동 등을 꾸미는 말로 널리 쓰인다. 그리고 동방 정교회의 작은 분파들에서도 해당 예법의 수좌 주교를 가톨릭 총대주교(KaqolikoV)라고도 한다.   조선의 학자들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천주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서양에서 들여온 서학서적들을 통해 서구 과학기술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천주교 사상과 한국의 전통 사상은 그 후 2세기 정도 탐색기를 거쳤고 1784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함께 본격적인 조선 천주교가 시작되었다.    16세기 초 전래된 서구 사상은 17세기 후반 조선의 실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학문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주요 책자는 로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천주교와 서학 을 전할 목적으로 쓰여진 책으로 종교, 윤리, 지리, 천문, 과학, 역사, 기술 등의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다.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지식인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특징이 있다. 청나라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의 선교사와 사신으로 청나라에 간 조선의 지식인 간의 교제로 로마 가톨릭, 즉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간 것이다. 주로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시파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적인 벽파에서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시파를 탄압했다. 즉, “조상을 몰라보는 사람” (무부지자[無父之者])이라는 게 박해의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성을 띤 사건이었다.     실제로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백서’에서 ‘천주교가 반대 당파를 제거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선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이 수없이 나오는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청나라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 등 활발히 성장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16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교구는 서울, 대구, 광주의 3개의 관구 안에 소속되어 있으며, 한국 내 각 교구장의 협의회인 한국 천주교 교주회의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있다.                                              본론   2.1 역사적 비교 2.1.1 천주교회의 발전약사    1) 천주교는 공교、로마공교、로마천주교라고도 한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신교와 동정교 그리고 천주교 기독교라고 한다. “천주교”는 16세기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와서 선교를 한후 중국의 원래의 명칭을 빌어 전파되었다. 전설에는 기독교는 예수가 타륵사탄에서 창설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님 탄생의 기원이며 천주교의 기원이다.    2) 고대 교회(1~604년) :교회 창설부터 311년까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참혹하게 박해하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함으로써 313년에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392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세계의 그리스도교화를 이루게 된다.   3) 중세기 교회(605~1500년)   1054년에 콘스탄틴의 총주교가 천주교회의 교황권을 거부하여 동방 정교회(東方 正敎會 그리스 정교회)를 세움으로써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 와 1차 분열이 된다.   4) 근세기 교회(1500~1965년)   1517년 천주교 신부인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교황권에 반대하고 이탈하여 개신교 (改新敎) 를 세우므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2차 분열된다.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교회의 현대세계에 대한 적응을 목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소집하였다. 교회는 안으로 자각과 밖으로 개방을 목표로 '아조르나멘토' (Aggiornamento 적응-개혁과 쇄신)란 담대한 표어로써 오늘날 세계와 대화 중에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류 구원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5)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베드로가 첫째 교황에 임명된 후, 현 교황 요한 바울로 2세까지 264대에 걸쳐 천주교회는 사도들로부터 끊임없이 이어 오고 있다. 세계 천주교 현황 (2000년 1월 1일 )신자 수는 10억 4천5백여만명으로서 전 세게 인구의 17.4% 이며 아시아 인구의 3.0%이다.    1054년, 동서 기독교가 분열하였다. 동파교회는 정교를 자청하고  서파 교회는 공교로 자칭하였다. 천주교와 교황은 독특하고 단일한 교회와 체제를 정식으로 확립하게 되었다.    중세기 천주교는 서유럽 각국 봉건사회에서 통치지위를 차지한 종교이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 후에 천주교는 유럽의 부분적 국가에서 통치지위를 잃어버렸다. 종교의 개혁운동에 대항하고 자체의 통일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천주교 로마교정에 일계열의 조치를 반종교개혁이라고 하였다. 2.1.2중국에서의 천주교회의 발전사     천주교는 처음 당조때 중국에 전파되었다가 13세기에 다시 유입되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 중국에서 천주교가 거의 없어졌다. 16세기에 천주교는 서방 식민주의 물결을 타고 또 중국에 다시 유입되었다.     1840년에 아편전쟁이 발발하여 중국이 반식민지, 반봉건의 국가가 되면서부터 선교사들이 중국에 육속 들어오면서 천주교가 발전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중국정부의 보호를 받아서 여기저기 교당과 수도원을 짓고   학교와 병원 그리고 고아원을 창설하였는바 이런저런 방법으로 천주교를 재빨리 전파하고 발전시켰다.     1840년부터 1949년까지 백년 동안의 발전을 통해 300만의 천주교 교우가 있지만 교회의 지도권은 아직도 외국 주교가 장악하고 있다. 중국  천주교는 외국 세력이 지배하는 종교로 되었다.     50년대에 중국 천주교는 “독립자주적이고 자체로 꾸리는 꾸린다”는  반제애국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십년 대동란중에 천주교는 엄중한 박해를 받아 원기를 손상받았다. 신도 뿐만 아니라 성직자도 박해받았다. 그런데 이런 잔인무도한 박해를 겪었지만 헌신적인 예수의 자민들은 자기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살벌한 시대에도 그들은 모두 자기의 신조를 잘 지키었다. 그처럼 일종의 신앙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어 가슴속에 사랑과 힘이 가득차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하게 되어 당과 정부에서 실시한 종교신앙자유정책의 덕분에 중국 천주교는 재빨리 회복되었고 발전하게 되었다. 몇 십년의 발전을 거쳐 중국천주교는  자기의 권리를 찾게 되었고 천주교 애국종교조직 중국 천주교애국회를 성립하였다.   개혁개방 후 중국 천주교애국회는 희망소학교 70여개. 유치원 30여개,  진료소 200개를 건립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중국천주교의 신도가 530여만이나 된다고 한다. 지금 전국 각지에 교당이 6000동, 대수도원 12개소, 수녀회 70개가 건설되었다.   2.1.3 한국 천주교의 역사 1.한국 천주교회 성립의 배경  1) 대외적 배경 :   16세기 말엽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문물과  종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던 한국은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마태오 릿치가 쓴 「천주실의」이다. 마태오 릿치는 기존 중국 문화를 바탕으로 해 천주 교 신앙을 전파시키는 선교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도 천주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천주실의」는 진리에 목말라하던 소수의         실학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17세기까지는 지식과 사회문화운동의    대상이었을 뿐 실천적 신앙의 대상은 아니었다. 2) 대내적 배경 :   문화의 변동으로 15세기 리씨 조선의 건립이래 조선의 지도 이념이었던 주자학은 18세기 후반에 그 긍정적 역할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는바 이에 지식인들이 성리학의 가치를 대체할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념적인 면에서 볼 때 서학이란 천주교를 가르키는 것이다. 3) 사회적 배경 : 18세기 후반 신분제 사회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는데 서학 즉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기초한 이론은 한국에 천주교가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있는 활력소로 되었다. 2. 교회의 성립   위에 설명한 배경하에 천주교가 일종의 학문으로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기독교의 인권과 평등사상은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 을  얻게 되었다. 이벽, 정약전, 권일신 등 신앙 선조들은 중국의 교리서를 통해 몸소 신앙을 실천하였고, 주어사를 중심으로 강학을 시작하다가 마침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는 이승훈에게 교리를 더 깊이 배워오게   하였다.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이벽,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교회를 성립하였다. 이벽은 이승훈이 중국에서 가져온 서적들을 연구한 후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 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양반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전교를 시작하였고, 점차  신분의 차이를 건너뛰게 되었다. 그러나 1789년 윤지충에 의해 조상제사 문제가 생기자 그것으로 인해 갈등이 생긴 양반층들이 떨어져나가고 하층 계급의 서민들속에서 더욱 순수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갔다. 3. 가성직 제도와 성직자 영입 운동    1786년부터 지도급 신도들은 북경의 교회제도를 본따서 주교직과   사제직을 맡아 교회의 발전을 꾀했다. 이것이 가성직 제도로서 2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이 제도의 타당성을 북경의 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북경의 주교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우쳐 주었고, 이에 조선교회는      성직자를 조선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1794년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활동했으나,   1801년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조선교회는 그 이후 33년간 성직자가 없이 지내면서 계속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교회부흥운동을 펴나갔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183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16세는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초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소 주교는 조선으로 오는 도중 병사했고,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프랑스인 모방, 샤스땅 신부와 소 주교의 후임인 앵베르 범 주교가 차례로 입국하게 된다. 4. 방인 성직자 배출      교우의 수가 늘어나면서 범 주교는 방인 성직자 양성을 꾀한다. 그는 3명의 소년을 마카오에 보내고자 그 적격자를 물색하는 한편, 학생을   가르쳐 짧은 기간에 신부가 되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그 결과 1838년에 4명의 장년 신학생을 얻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 때까지 성직자 를 맞아들이기 위해 열두번이나 북경에 왕래한 정약전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 이승훈의 친손이던 29세의 홀아비 이재용(도마) 마카오에서  유학하던 최방제(프란치스코)의 맏형 최 베드로 등이었다.)   범 주교는 이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정하상과 이문우는 몇 해 사이에 신품을 받게 될 것 같았으나 이듬해 일어난 기해박해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8월 24일에 방인으로서는 최초로 서품을 받고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하지만 1846년 6월에  체포된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조선의 조정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노력하나 결국 실패한다. 이에 9월 16일에 한강가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된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에 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신부가 된다. 그는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전교와 저술활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1861년 6월 과로로  쓰러져 보름만에 사망하게 된다. 5. 천주교 박해   천주교는 조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받게 된다.  그 중에서도 네 차례의 큰 박해가 있었는데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이다. 박해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사상적 원인 - 유교사상과 그리스도교 평등사상의 충돌. 2) 사회적 원인 - 조상 제사문제 3)정치적 원인 - 당파싸움의 방편(남인에 대한 박해) (1) 신유박해 (1791년)이 때 주문모 신부와 300여명의 신도들이 순교하 였다. (2)  기해박해 (1839년): 이 때 성직자 세 명과 신도 200명이 순교하게 된다. (3) 병오박해 (1846년): 이 때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많은 신도들이 순교하게 된다.   (4) 병인박해 (1866년): 대원군의 탄압으로 9명의 성직자와 8천 여명의 신도들이 순교하게 된다. 6. 오늘의 한국 천주교     천주교는1886년에 한불통산조약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된다. 이 후 일제시대, 6.25 등을 겪으면서 점차 음지에서 양지로, 간헐적 탄압을 받아 오면서도 꾸준히 발전해 왔다. 한국천주교회는 현재 103명의 성인을 배출하였고, 14개의 교구를 가진 교회로 발전했다. 한국천주교회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순교자들의 피를 바탕으로 이 땅 위에 세워졌다. 2.1.4 한국 천주교의 연구    한국은 일본을 통해 천주교를 접촉하였지만 전파되지는 못하고 명나라 때까지 중국을 통해 정식으로 전파되었다. 천주교는초기에 양국에서 다 박해를 받았지만 신앙에 대한 신도들의 열성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준엄한 시각에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일부분 사람들이 희생했지만 교회는 장구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시대의 발전은 피의 대가를 필요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현세적 입신양명만을 목적으로 하는 유교사상이 성하였다. 겨우 시문이나 지어서 벼슬자리에 앉은 이후 사상적 결함으로 당파 싸움이 노골적으로 계속 되었다.      한국 실학 운동의 선구자는 이수광(1563~1628)이었다. 그는 동서고금의 348종의 책을 읽고 그 개요를 부문 별로 정리하여1614년 20권으로 된 『지봉유설』이라는 일종의 백과사전을 편찬하 였는데 그 속에 『천주 실의』, 『만국여도』등을 수록하였다. 170여 년이 지나 그의 후손 중에서 이경도, 이순이, 이경언 등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이후 천주교 사상은 백여 년 간 묻혀 있다가 경기도 광주에 숨어살던 이익과 그의 제자 안정복에 의해 다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모두 남인 파의 학자들로 그 제자들 중에는 이가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기양, 이윤하, 황사영, 김범우 등의 천주교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779년 겨울, 권철신은 앵자산에 있는 주어사의 천진암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천주교리 강학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정약전, 이승훈, 김원성, 이총억 등이 참가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출발하여 호랑이가 많은 높은 산을 넘어 100 리를 걸어가 자정 쯤 그 절에 도착하였다.     이 강학회는 10여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다. 이 강학회가 끝난 뒤 정약전은 『십계 명가』를, 이벽은 『천주 공경가』를 지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벽은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여 진리를 깨달은 후, 천주님께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그 복음의 씨앗을 전파하기 위하여 만나는 남인 학자들마다 가르쳐 주었다.    2.2 중한 양국 국민들의 생활과 사상에 끼친 영향     명조와 청조 시대의 천주교 선교사는 수학가、역사가、천문가、 예술가 그리고 선교사를 겸한 신분으로 중국에 들어왔다.  그들은 천주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동시에 서방에 발달한 과학기술을 가져왔다. 그중에서 천문역법、 수학、 농전수리 광학, 건축학、 물리학、 생물학、 철학、 음악、예술 여러 방면에서 중국의 과학기술과 문화발전에 큰 추진력이 되었다. 동시에  선교사들도 서방에게 중국문화를 소개해 주었다. 마테어리치는 등을 라틴문으로 번역하여 서방에 전파하였다. 그는 서방에 중국 문화를 소개한 첫사람이다. 18세기 30년대 선교사가 조국에 보낸 편지에 중국 문화와 역사 풍속습관을 많이 소개하였 다. 동시에 많은 문학작품를 외국어로 번역하였다. 선교사들은 학문적으로 굶주린 중국사람들에게 풍부한 정신양식을 가져다 주었다. 중국 문화 발전의 석표에 공전의 이색적인 곡선을 그려준 셈이다.    에서는 중국 근대발전에 대한 천주교의 공헌에 대해 이렇 게 쓰고 있다. “천주교와 사회 사업이 중국사회문화의 하나로 되고 중국 근현대사회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 천주교는 사람에게 남을 자기 처럼 사랑하는 관용정신을 격려하고 물질향수와 부패타락을 반대하였다.     전국 정치 협상 회의 위원 중국 천주교 애국회 부주석 류박년 (刘博年)는 중국 천주교회는 사회의 약세군체에 관심과 배려를 많이 돌려 희망소학교. 유치원, 양로원을 자주 도와주었다고 말하였다. 수녀가 병원에 가 환자를 돌보주었다.     가난한 사람과 허약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우리 천주교의 일관된 종지이다. 천주교는 도박과 폭음과 주정 등 악습을 반대 하였다. 중국 천주교회의 타이름으로 한 실족한 청년은 인생의 방향을 찾은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화해사회 건설에 공헌하고 있다.                                         결론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형성되고 종교는 번성한다. 사람의 능력은 유한 하여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들의 기본적 욕구이다. 사회질서의 윤택함과 인간다움의 생활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종교의 기능은 중요하다. 천주교는 중한 양국 역사의 질곡 속에서 민중의 애환을 보듬어 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멘토 역할을 다하였다.  반듯한 사회형성을 위해 천주교는 나름대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천주교는 초기박해를 순교로 극복하며 성장하여 한국의 민주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종교가 종교 간 갈등으로 인한 국론통합의 장애가 되어 국민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 종교갈등은 사회와 종교 간의 간극이 커지고, 종교 간의 이해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종교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기능할 수 있는 사회적·종파적 통합의 의식과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종교 간의 대화와 소통을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 어를 동시에 작동시켜, 종교가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고, 선진 법치주의의 활착을 향도하는 국민의 우군으로 자리매김되어, 항상 종교에 대한 감사함이 넘치는 내일을 기대한다. 종교는 결코 아편이 아니다. 종교는 사회통합을 위한 진한 향기이다.      현재 종교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의론도 많고 오도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가 천주교에 대해 바로 알게 되면 그들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오해했던 천주교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던 것을 배움으로 새로운 안목을 가져보자.      우리가 바로 알아야 자기 신앙심이 견정해지는게 아닐까? “산의 정상에 오르는데 여러 가지 길이 있듯이, 구원의 길 역시 여러 가지다.” 이것을 세상사람들과 타 종교는 좋게 볼 진 몰라도 성경적으로 위배되는 이 발언과 또 그들의 행태를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사실 상 천주교나 교황, 추기경 등은 많은 이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천주교가 시대의 추세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 통합, 종교 다원주의가 오늘날의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다. 이에 유일하게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기독교 뿐이다. 이 땅에 있는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지 모르나,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늘나라에 가는 길은 단 하나 뿐이다. 종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신적 지주가 되는 인생관, 세계관, 내세관을 제시한다. 종교는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해 주고, 내세에서의 행복과 영원한 삶을 제시해 준다.   가톨릭 교회는 여러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 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 키기를 원한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2항 참조).     세계의 여러 종교를 볼 때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여 타민족을 배척하는 폐쇄적인 종교는 결코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다. 참 종교는 모든 인류와 우주 전체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종교를 창시한 이들의 사상 속에 이미 인간의 보편적 염원과 이상을 배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사의 말   논문 작성에 많은 지도를 하여 주셨고 심열하여 주신 최균선선생님께 삼가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격려와 응원을 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과 학우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나에게 자료를 제공해준 왕건공 신부님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드립니다.     참고문헌   1.《官府、宗族与天主教--17-19世纪福安乡村教会的历史叙事--宗教与中国社会研究论丛》 张先清 中华书局 2009-5-1 2.《两头蛇——明末清初的第一代天主教徒》黄一农 上海古籍出版社 2006-8-1 3.《中国天主教史人物传》方豪 宗教文化出版社 2007-8-1 4.《中国天主教基础知识》任延黎 宗教文化出版社 2003-9-1 5.《中国天主教评述》顾裕禄 6.《天主教研究论辑》赵建敏 宗教文化出版社 2006-9-1 7.《当代天主教》傅安乐 东方出版社 1996-6-1 8.《한국천주교회사 (上,中,下)》 서울 교회사 연구소 1995   9.《한국천주교회 창역사 논고》변기영(卞基榮),  광주, 천진안성지, 1997 10.《한국천주교회사의 용위》 주재용(朱在用), 서울 천주교 중앙협의회, 1970 11.《한국천주교회사 연구》 이원순(李元淳), 서울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소, 1986 12.《한국천주교회사(上,中,下)》유홍열(柳洪烈), 서울 천주교출판사, 1962                                       摘要   长篇小说《九云梦》,是朝鲜17世纪小说家金万重(1637—1692)的代表作之一。关于小说的主题问题,学术界一向众说纷纭,莫衷一是。现将其大体归纳为三种不同观点,主要批评了佛教的禁欲主义,歌颂了男女主人公的爱情自由和个性解放。 小说《九云梦》着重反映了儒家“修身齐家、治国平天下”的立身扬名思想。主要体现了富贵功名是一场春梦的人生虚无主义观念。这些观点,都从不同角度触及到了这部长篇所显示的本质的东西,但在对这部长篇真正思想内涵的把握上,显然缺乏全面性、准确性、科学性。本文认为, 《九云梦》有明显的佛教倾向,表达了作者“富贵功名,如一场春梦”的佛教“空观”思想。   关键词:金万重 九云梦 富贵功名“空观”思想 초록 장편 소설 은 조선 17 세기 소설가 김만중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소설의 주제 문제에 대해 학술계에서 의론이 분분하여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서로 다른 관점을 세가지로 귀납할 수 있다. 주요하게 불교의 금욕 사상을 비평한 것, 남녀 주인공의 연애자유와 개성해방을 찬양하였다는 것 등이다.   은 착중하여 유가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사상을 반영 하고 있다. 주요하게는 부귀공명은 일장춘몽이라는 인생허무주의 관념을 체현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모두 부동한 각도에 이 장편소설에서 현시된  본질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장편 소설에 담긴 진정한 사상내함을 파악하는 데서 전면성, 정황성, 과학성 등 면에서 부족하다. 본논문은 에는 분명히 불교경향이 엿보이고 작자의 "부귀공명은 일장춘몽 같다(富貴功名,如一場春夢) "의 불교의  "공관(空观)" 사상이 체현되고 있다고 본다. 이 문제가 본논문에서  필자가 천명하려는 골자이다. 키워드: 김만중 구운몽 부귀공명 공관사상   목차   초록 …………………………………………………………………………………2 1 서론……………………………………………………………………………… 4 2 본론……………………………………………………………………………… 5 2.1 김만중의 생애 및 창작동기………………………………………………… 5 2.1.1 김만중의 생애……………………………………………………………… 5 2.1.2 김만중의 창작동기………………………………………………………… 5 2.2 대표작의 줄거리…………………………………………………  7 2.3 이해와 감상 ……………………………………………………………………9 2.4 주제와 사상적 배경………………………………………………………… 10 2.5 내용 연구 …………………………………………………………………… 12 2.6구운몽적 환상의 의미 ………………………………………………………14 3 결론……………………………………………………………………………… 16 감사의 말 ………………………………………………………………………… 17 참고문현…………………………………………………………………………… 18   1 서론 1.1 “구운몽”연구사 구운몽은 환상설화와 소설의 완결편으로서, 불교사상을 허구적으로 극대화한 독보 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고전문학의 한 정점을 점령한다고 할 수 있으 며 그에 따라 구운몽은 많은 고전소설 가운데에서도 가장 풍성한 연구량을 생산해 내었고, 더불어 그만큼의 다양한 연구 방법과 논란의 갈래도 만들어 내었다. 그 가운데서도 구운몽의 연구사는 거의가 구운몽이 지닌 사상이 무엇이냐고 따져온 것이라고 할 만큼 사상 문제에 직결되어 왔다. 애초에 구운몽에 대한 사상풀이는 유,불,도(儒,佛,道) 삼교사상의 화합내지 혼합설이 등장하였고 이가원(李家源), 김기동(金起東)에 의해 불교사상으로 좁혀져 논의되다가 정규동(鄭銈東)에 의해 불교사상의 공관(空观)으로 훨씬 좁혀져 논의 되어 이제는 대승불교(大乘佛教)의 중심인 금강경(金剛經)의 공관(空觀)으로 굳어진 추세이다. 구운몽에 대한 학계의 주제관의 갈래는 대체로 불교적인 주제로 보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 그리고 불교적인 주제로 보는 측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리고 非佛敎的인 主題라고 보는 측은 제각기 달라서 “꿈같은 세계를 지양한 참세계 즉 본질적인 세계에 대한 확신을 준 것” 이라고 학자도 있고, 성현경교수는 “불교사상이 근저에 있기는 하지만 유교적 부귀공명을 지향한 것” 이라고 보았으며 김병국교수는 심리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재생체험의 생생한 경험 자체가 주제”이 바로 구운몽의 주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구운몽의 주제는 분명 불교 사상과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불교 교리의 핵심이랄 수 있는 금강경의 공사상(空思想)이 바로 그 주제라고 보는 정규복(丁奎福)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며 본논문의 논점을 나름대로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1.2 구운몽 연구 목적과 의의 서포 김만중이 지은 구운몽은 한국 고전 소설 중에서도 커다란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연구사의 뿌리가 다른 고전소설 작품들에 비해서 깊은 편이다. 또한 현재에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구운몽 속에 담겨진 다양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각적인 연구가 구운몽에 대한 해석의 견해를 다양하게 함으로써 상충된 견해가 나타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즉, 아직도 구운몽에 대한 연구는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연구 방법론의 선택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로는 기존의 견해 중 하나를 선택해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기존의 학자들이 연구해왔던 견해에 동조하는 것으로, 구운몽을 해석하는데 있어 자신만의 뚜렷한 해석 방법을 얻기 어렵고 자칫하면 작품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 중 일부만 보게 된다는 점에서 나로선 취하기 어렵다. 또 다른 방법은 기존의 연구들을 부정하거나 기존의 연구에 각주를 다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독창적인 해석과 기존의 연구보다 더욱 깊이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러한 견해들이 자칫하면 단순히 부정을 위한 부정이 될 수 있으며 다른 견해들과의 차이를 뚜렷이 보일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기존의 다양한 견해들이 구운몽의 어떠한 특성들에 주목했는가를 살펴보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방법론적 접근은 작품과 연구들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또한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작품에서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다는 점은 이러한 작업을 더욱 필요하게 만든다. 이런 작업들이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 ꡔ구운몽ꡕ과 그간의 견해들 사이에 미약하지만 새로운 징검다리를 놓아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본논문의 성격을 구운몽과 그간의 연구들 사이를 잇는 작업으로 규정지었다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은 기존의 연구들 중 어떤 부분들과 그 관계망을 만들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구운몽이 구현하고 있는 세계관이 어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구운몽”은 다양한 사상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상관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 혹은 서포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창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구현하고 있는 세계관이 다르게 나타난다. 하여 기존의 연구들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상당한 혼선을 빚고 있다. 따라서 작품에 나타난 세계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작품의 원전 비평 및 비교 문학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비교의 방법, 구조주의 비평방법으로 저작 시기 논증, 구운몽의 표기 문자론, 그리고 비교 문학적 연구를 검토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본논문의 집필을 시도하고자 한다.  구운몽의 인생 무상은 인생이 무상하고 허무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허무 하니까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영웅 소설과 몽유 소설을 변형 시켜 결합한 소설이다. 기본 구도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 속에서 이루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꿈 속의 일이 허망한 한바탕의 꿈인 것을 깨닫는다. '현실 - 꿈 - 현실'의 과정을 그리고 있으나 양소유가 8 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독특하게 꾸미고 있고, 8 명의 여인들이 각기 개성적으로 행동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 등장 인물들의 심리 상태 등을 우아하고 품위 있는 문체를 통해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지은이의 창작력이 돋보인다. 유교, 도교, 불교의 화합을 이루고 있는 이 소설은 소설적 흥미는 물론, 사상적 깊이까지 더하고 있어 지식 계층의 독자를 확보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본론 2.1김만중의 생애 및 창작동기 2.1.1김만중의 생애 김만중의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이다. 아버지 익겸(益謙)은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부수찬 (副修撰)이 되고 헌납 (獻納)· 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任用,录用)되어 대제학 (大提学)·대사헌(大司宪)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被。。。放开)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没落为庶民) 그도 왕을 모욕 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초에 시작된 예송(禮訟)에 뒤이어 경신환국·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1] 2.1.2 창작 동기 가) 개인적 동기 :   노모(老母)를 위로하기 위해 창작.(김만중의 어머니는 청춘과부로서 가난한 살림살이를 이끌어 나가면서도 오직 두자 식에 마음을 붙여 정성껏 길러 여생을 즐기려 했는데, 그 장자 만기를 잃어버리고 또 만중조차 유배지로 자주 귀향가게 되어 허무한 삶을 한탄하며 살았다. 김만중은 그 같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즐겁게 하는 글을 쓰고 싶었을 것이고, 이 작품 역시 작가 자신의 생명의 원천인 그의 어머니를 향하여 내면화된 결과라 하겠다. 즉 이 작품은 어머니를 위해서 쓰면서 어머님께 지금 현실의 고통은 한 순간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싶었고, 한편으로 삶의 유한성과 허망함을 극복하는 영생의 길을 갈망하여 자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 나) 문학적 동기 :   한국인은 한국어(韓國語)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민족자주문학론'을 내세운 그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창작에 임함 사상 : 유·불·선 사상이 혼합되었으나 불교사상이 주가 되고, 김만중이 바라던 이상의 세계를 묘사     불교적인 부분: 핵심적 주제를 이루는 사상으로 유복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부친의 얼굴조차 못한 것을 전생의 죄악이라고 보는 데는 인과응보사상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의 구절 "보살 대도를 얻어 모두 극락세계로 갔더라" 라는 것에서 불교적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유교적인 부분: 입신양명, 부귀공명 (당시 양반 사회의 이상적 인생관)은 자기를 길러 준 어머니의 은혜와 스스로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있는 데는 유교적인 효사상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일부다처제의 모순을 안고 있으며, 조선조 귀족 사회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3) 도교적인 부분: 작품의 비현실적 내용을 이루는 신선 사상은 부귀 영화 끝의 허무감을 그린 것은 도교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2.2 “구운몽” 의 문본(文本) 연구 2.2. 1소설의 경개 내용은 당(唐)나라 때 천축(天竺)으로부터 육관 대사(六觀大師)라는 고승(高僧)이 중국에 와서 큰 절을 세우고 제자를 모아 불도(佛道)를 강론(講論)한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가 성진(性眞)이었다. 어느날 성진은 대사의 심부름으로 용궁에 가게 되었는데, 용왕의 융숭한 대접에 술을 몇 잔 마시고 돌아온다. 한편 선녀 위진군(魏眞君)은 팔선녀(八仙女)를 대사에게 보내 약간의 보물을 선사한다. 길 중간에서 팔선녀와 성진이 만나게 되어 서로 희롱하다 돌아온다. 절에 돌아온 성진은 선녀들을 그리워하며 속세의 부귀 영화만 생각한다. 끝내 그는 죄를 얻어 지옥에 떨어지고 다시 인간 세상에 환생하여 양소유(楊少遊)가 된다. 한편 팔선녀도 같은 죄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각각 다시 세상에 환생한다. 양소유는 차례로 그들 여덟 여인과 인연을 맺게 된다. 드디어 벼슬은 승상에 이르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린 양소유의 화려한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회남 수주현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난 성진[양소유(楊少遊)]은 15세에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어사의 딸 '진채봉'을 만나 혼약하고, 난을 피해 있다가 과거를 보러 올라가던 중 낙양의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고, 경사에 이르러 거문고를 타는 여자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정경패'를 만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경패의 시비인 '가춘옥'과도 인연을 맺는다. 하북의 왕이 역모하려 아니 양소유는 절도사로 나가 이를 다스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인 줄 알고 만난 여자가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상경하여 예부 상서가 된 양소유는 황제의 누이인 '난양 공주'의 퉁소 소리에 화답한 인연으로 부마로 간택이 되는데.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물리치다가 옥에 갇힌다[2]. 토번왕이 쳐들어 오자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 양소유는 토번왕이 보낸 여자 자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고, 백룡담에서는 용왕의 딸인 '백릉파'를 도와 주어 인연을 맺는다. 그 동안에 난양 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을 이루지 못하여 실심한 정경패를 만나 보고 그 인물에 감복하여 제 1 공주인 '영양 공주'를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의 벼슬에 오르고, 영양 공주 난양 공주 2처와 진채봉, 계섬월, 가춘옥, 적경홍, 심요연, 백릉파의 6첩을 거느리게 된다. 작품의 제목에 나오는 '아홉'이라는 숫자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상징한다. 그러나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아 이제는 승상의 벼슬에서도 물러나 한가히 그의 여생을 즐기던 양소유는 어느 가을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리고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문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이때 한 노승을 만난다. 때마침 찾아온 어느 고승에게 불도(佛道)에 귀의할 것을 말하자 그 도승은 쾌히 승낙하고 짚고 온 지팡이로 난간을 두드린다. 그러자 모든 것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손에 백팔 염주를 들고 있고 까칠까칠한 중의 머리를 한 자기(성진) 뿐이었다. 당황한 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귀 영화는 하룻밤 꿈이었고 자기는 분명히 연화 도량(蓮花道場)의 성진이었다. 꿈을 깬 성진은 황망히 대사 앞에 뛰어가 엎드린다. 팔선녀도 이어 들어와 제자되기를 청한다. 후에 대사는 도(道)를 성진에게 물리고 천축으로 돌아가고 팔선녀는 성진이 앞에서 계속 도를 닦아 후에 아홉 사람은 모두 극락 세계로 갔다고 한다. 소설은 이원적 환몽 구조를 지닌 일대기 형식, 곧 액자소설(환몽세계 부분) 현실 세계 → 환몽세계 → 현실복귀이다. 이처럼   '구운몽'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조신 설화와 그 구조를 같이 하고 있다. 성진이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형이하학적 세계로 내려가 온갖 욕망을 성취하였으나, 그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고 형이상학적 세계로 복귀하는 꿈의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현실과 꿈의 세계를 이중(二重)으로 그리고 있는 이 구조는 결국 인생의 무상함, 삶의 덧없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작품 구조 상 꿈의 세계로 되어 있는 양소유의 일생은 오히려 현실적이고, 현실 세계로 되어 있는 선계(仙界)는 오히려 신비로운 꿈의 세계이다. 현실 세계(선계)   성진과 8선녀: 천상 세계 수도자로서의 의지(불교적). 8선녀에 미혹되어 불도 수련에 회의함 파계(天上) 환몽 세계(인간계)   양소유와 8부인: 지상 세계 영웅으로서의 생애(유교적), 세속적 욕망의 성취 단계.  입신 양명, 일부다처의 향락적 생활 환생(地上) 현실 세계로 복귀(형이상학적 세계)    미혹과 환몽을 거쳐 대각(大覺)의 경지로 이룸 각성(天上) ① 1 단계 :   육관 대사가 제자 5, 6백 명을 거느리고 서역천축국으로부터 형산(衡山)의 연화봉(蓮華 峰)에 수도할 즈음에 남악(南岳) 위부인(魏夫人)이 상제의 명에 따라 선동 옥녀를 거느리고 머문다. 그 때 수부에 갔다가 산으로 돌아오던 육관 대사의 수제자와 위부인의 명을 받고 육관 대사에게 문안드리고 돌아가던 팔 선녀가 만나게 된다. 그 후 여덟 개의 명주로서 인연을 맺고 산문으로 돌아온 성진이 팔 선녀와 인간 세계를 동경한 때문에 육관 대사의 노여움을 사서 중국 회남도(淮南道) 수주현(秀洲縣)의 양씨집에 환생하기까지의 과정. ② 2 단계: 속세에 환생한 성진, 즉 양 소윤는 과거에 응시하려고 가는 길목에서 규수 진채봉을 만나 혼인하려 했으나 구사량의 수해로 진소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노모에게 이를 얘기했더니 도인 두연사에게 혼처를 부탁한다. 소유는 그곳에 찾아가서 제일부인 정경패와 그의 몸종 가춘운을 맞는다. 그러니까 팔 선녀 중 네 선녀가 인간으로서 양소유를 만나기까지의 행동 단계. ③ 3 단계: 양소유가 사신, 원수로 활약하면서 팔 선녀를 모두 만나게 되기까지의 행동 단계. ④ 4 단계: 양소유가 승상이 되어 팔 선녀 중 여섯 명은 첩이 되고 두 공주는 부인이 되어 모두 궁중에 모여 단란한 세월을 보내는 시기. ⑤ 5 단계: 인간 양소유가 속세에서 불도로 소생하여 팔 선녀와 더불어 다시 극락 세계로 귀의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데까지. 대부분의 우리 나라 고대소설이 한결같이 그렇듯이 "구운몽"도 중국을 무대로 했다. 하지만 "구운몽"의 세계는 당나라처럼 광활한 무대가 아니며 그 많은 등장 인물들의 활동을 자유자재로 표현 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그 무대가 선계와 인간 세계 등 두 세계에 걸쳐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흡사 단테의 "신곡"처럼 이차원의 세계를 일차원의 세계로 구성시키고 있는 구성의 묘를 거두고 있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언뜻 보면 이율배반적인 것 같으면서도 수긍되는 점이 많고, 산만한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작가적 역량을 과시하는 점이라 하겠다.   2.2.2 이해와 감상 조선 숙종 때 김만중 ( 金萬重 )이 지은 고전소설. 이본에 따라 1책부터 4책까지 분량이 다양하다. 1725년(乙巳年, 영조 1)에 간행된 금성판(錦城板) 한문목판본을 비롯하여 국문방각본· 국문필사본 · 국문활자본· 한문필사본·한문현토본 등 50여 종이 넘는 많은 이본이 전한다. 김만중은 노론 벌열층(閥閱層)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당시로서는 이단시되던 불교나 패서(稗書)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이 소설을 지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작자의 종손인 춘택(春澤)은 김만중이 속언(俗言)으로 많은 소설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남정기 南征記 〉 만 뚜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규경 ( 李圭景 )의 ≪ 오주연문장전산고 ≫ 의 〈 소설변증설 小說辨證說 〉 에 의하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오라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어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 경우에도 어머니 를 위하여 속성으로 지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규경은 특히 이 작품이 김만중이 귀양갔을 때 지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었다. 즉 그가 장희빈(張嬉嬪)의 아들 균( 悠 )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선천에 귀양간 숙종 14년(1688)인지, 아니면 장희빈이 인현왕후 ( 仁顯王后 ) 대신 왕후로 책봉된 기사환국으로 숙종 15년에 남해로 귀양갔을 때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근래에 ≪ 서포연보 西浦年譜 ≫ (일본 天理大學 소장)가 출현함으로써 일단 선천 귀양시기로 확실해지고 그 완성은 남해 귀양시기로 추정된다. 이재 ( 李縡 )가 〈 구운몽 > 의 대지(大旨)를 인생의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는 데 둔 바와 같이 〈 구운몽 〉 의 주제는 역시 대승불교의 중심인 금강경의 ‘ 공(空) ’ 에 있다. 공은 표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 같지만 이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역설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 구운몽 〉은 ≪ 금강경 ≫ 이 소설화 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2.2.3 주제와 사상적 배경 인간의 부귀공명(富貴功名)이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 즉 이는 불교적인 '제행무상관(諸行無常觀)'에서 온 것이므로 이 소설은 또한 인생의 무상함을 독자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구운몽"은 불교 사상을 중심으로 한 불교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소설의 주요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은 불교 사상만이 아니라 유, 불, 선(儒佛仙)사상의 융합 상태를 이루고 있다. 그가 유복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부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것을 전생의 적악이라고 보는 데는 불교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깃들어 있고, 자기를 길러 준 어머니의 은혜와 스스로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있는 데는 유교적인 효 사상이 있으며 영화 끝의 허무를 그린 것은 도교 사상의 영향이라 하겠다. 유가적인 부귀영화는 사실상 김만중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상이었고, 선망의 적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욕망이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이상의 삶을 갈망한 끝에 한바탕 꿈을 꾸어 본 것이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 보니 그것은 분명히 꿈이었고 따라서 허무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처해 있던 환경과 현실이란 확실히 그 꿈과는 같지 않았던 것이다.[3] 여기에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고, 스스로의 처지는 더욱 허망함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에 몸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그는 종교심을 발휘하여 평소에 잘 이해되고 있던 불교에라도 귀의해 볼까 하는 심정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인간 생명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이상의 낙원이란 과연 없는 것일까? 김만중은 이와 같이 꿈의 세계보다도 더 이상적인 세계를 갈망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극락 세계를 동경하여 천상으로의 영생의 길을 떠났다. 이렇게 볼 때 "구운몽"은 불교 위주의 소설이기도 하지만 유교적인 이상세계는 언제나 서포의 염두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설에는 또한 여성들의 생활 해방을 갈구하는 구절도 있지만 여자들 스스로가 일부 다처주의를 자인하는 언사가 많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그 당시 유교 사회의 귀족이나 양반들의 생활 이념에 따르는 일부다처주의의 옹호가 어느 만큼 깃들어 있어 보인다. 2.2.4 구운몽적 환상의 의미   인간 의식의 내부에 소용돌이치는 상충적 갈등, 즉 욕망의 내향 운동과 외향 운동의 부단한 반복은,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환희와 고뇌, 광명과 암흑, 천국과 지옥 등 모든 상충적 이미지 패턴을 낳는데 이 순간에 느끼는 좌절과 상실의 심연 에서 재생하는 이미지로부터 인간은 신(神, God)의 모습을 창안하였다. 서양에 있어 서, 신의 이미지는 이러한 인간 욕망의 상충적 양면성의 중간에 서서, 이를 화해시 키는 조정자 내지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양에 있어서는 수 천 년 동안이나 이 재생 또는 구원의 이론이, 어떤 조정자로서의 인격을 심상화(心像化)하지 않고, 오직 인간 자신이 스스로 희구하는 '전인격으로서의 자기' 속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구운몽에서 성진의 마음 속에 소용돌이친 번뇌는 그 양극성을 화해할 인격적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만 이는 오로지 자기 실현에의 노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 전체의 내용처럼, 인생은 어떻게 보면 한순간의 꿈과 같을 수도 있다.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덧없듯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 단순히 무더운 여름날 잠시 눈 붙이는 오침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꿈과 인생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꿈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병도 있다고 하던데, 어쩌면 그 병이 정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름대로 명확하게 꿈과 현실을 구별하고 있는 우리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것이고, 꿈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와 정반대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실제의 인물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꿈이 아닌 것이냐`. 이러한 대사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꿈이 현실의 바탕이라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가장 보고 싶은 것이 무의식적으로 꿈에 나온다는 설, 현실이 꿈의 바탕이 된다는 설도 있다.                                         3 결론   이 작품의 기본설정은 주인공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 속에서 실현 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꿈 속의 일이 허망한 한바탕의 꿈인 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김시습의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같은 몽유소설(夢遊小說)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꿈 속에서 이룬 욕망성취가 오히려 허망하고, 꿈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화합이 이루어진다고 한 점은 다른 몽유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몽유소설과는 달리 꿈 속의 주인공인 양소유의 삶이 ‘영웅의 일생’에 따라 전개되는데, 투쟁이 약화되는 대신 남녀의 만남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은 영웅 소설의 일반적인 양상과는 거리가 있다. 결국, 〈구운몽〉은 몽유소설과 영웅소설을 변형시켜 결합한 작품이라 하겠다. 한편, 〈구운몽〉은 현실-꿈-현실로 바뀌는 과정이나 양소유가 8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미있게 꾸며 독자를 사로잡았다. 또한, 8명의 여인이 각기 개성을 갖추도록 배려를 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환경·인물·심리를 우아하고 품위있는 문체를 활용하여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것에서 작자의 뛰어난 창작력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소설적 흥미를 유지하고, 품격을 높이며, 사상적 깊이를 가지도록 하여 유식한 계층까지도 독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구운몽〉은 이후의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구운몽〉자체를 늘리거나 축소하여 개작한 작품이 계속 나왔을 뿐만 아니라, 〈구운몽〉과 같은 설정을 하면서 다른 사건을 결합시킨 작품들도 대거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구운몽〉은 고소설 창작에 전형적인 모범을 제시하여 소설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어, 〈춘향전〉과 더불어 고소설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감사의 말     논문 작성에 많은 지도를 하여 주셨고 심열하여 주신 최균선선생님께 삼가 감사 의 말씀을 올리며 격려와 응원을 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과 학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올립니다.                       참고문헌                           [1] 丁奎福 九雲夢硏究 고려대학교출판부 1974 [2] 金戊祚 西浦小說硏究  螢雪出版社  1974 [3] 丁奎福 九雲夢原典의 硏究 一志社  1977 [4] 赵东一 韓國小說의 理論 知識産業社 1977 [5] 金烈圭·申东旭 金萬重硏究  새문社 1983 [6] 丁奎福 韓中文學比較의 硏究 高麗大學校出版部 1987 [7] 丁奎福 韓國古小說史의 硏究 韓國硏究院 1992 [8] 金炳国九雲夢硏究-그幻想構造의 心理的 考察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68 [9] 丁奎福 九雲夢의 比較文學的 考察高麗大學校論文集 16 1970 [10] 成賢慶 李朝夢字類小說硏究-특히 九雲夢과 玉樓夢을 中心으로- 국어국문학 54 1971 [11] 金一烈 九雲夢과 雲英傳의 比較硏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75 [12] 金圭泰韩国古典文学大全集 (4) 13. 설성경, 구운몽 연구, 국학자료원, 1999 국어국문학회, 고소설 연구1, 태학사, 1997 김병국, 저작 시기 변증, 1997 정규복, 구운몽연구, 고려대출판부, 1974 박하철, 구운몽 연구:사상과 구조 및 교육방안을 중심으로, 인하대 교육대학원, 2000 이경수, 구운몽 연구 : 사상과 작가의식을 중심으로, 경희대 교육대학원, 1995 조동일, 한국소설의 이론, 지식산업사, 1977 김병국, 구운몽, 집문당, 1990   [1]金戊祚 西浦小說硏究  螢雪出版社  1974   [2]丁奎福 韓中文學比較의 硏究高麗大學校出版部 1987   [3]金一烈 九雲夢과 雲英傳의 比較硏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75  
131    이백의 음주시 연구 (려원) 댓글:  조회:10185  추천:0  2013-01-23
                                         摘 要       众所周知,唐诗是中国非常宝贵的文化财富。特别是李白的作品占据着唐诗无法动摇的地位。李白留给了后诗人九百多首诗篇。这些熠熠生辉的诗作,表现了他一生的心路历程,是盛唐社会现实和精神生活面貌的艺术写照。 作为“盛唐之音”的代表,李白的作品以其独特的浪漫主义和无穷的生命力成为千古绝唱。他成功的完成了从初唐以来诗歌革新的历史使命,为中国古典诗歌的革新和中国古典文化的发展做出了卓越的贡献。 研究李白的饮酒诗不仅有助于我们了解当时诗歌的基本面貌,也对将来诗歌的发展进一步指明了方向。李白的诗中意向很多,本论文着重对他饮酒诗中飘逸豪放和浪漫主义的表现做一个细致的研究。   关键词:唐诗 李白 诗风格 饮酒诗 豪放飘逸 浪漫主义                                               초 록    세인들이 다 알다시피,당시(唐诗)는 중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이백의 시작품들은 당시에서 한마디로 평판할 수 없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걸작들은 현재 약900여수가 유전되고 있다. 이런 시 들은 이백의 평생의 포부와 미학사상을 표현하였으며 성당시기 사회 현실 과 정신 생활을 예술적으로 집중화하고 있다.    “성당지음”의 걸출한 대표로 되어 있는 그의 시작품들은 독특한 낭만 적 풍격으로 하여 천고절창이 되었고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다.그는 초당이래 시가 혁신의 역사적인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였는데 중국 고전시가의 혁신과 중국고전문학의 발전에 크게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이백의 시창작 풍격을 연구하는 것은 당조시기 시가의 기본면모를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뿐만 아니라 중국고대 시가들을 한걸음 더 이해할 수 있고 미래 시가의 발전을 위한 방향을 가일층 모색할 수 있다. 이백의 시가들은 이미지가 아주 많은데 본고는 이백의 음주시 중의 낭만주의와 호방표일한 풍격을 재조명하려 한다. 키워드: 이백 시풍격 음주시 호방표일 낭만주의   차 례 논문초록…………………………………………………………………………1~2 제1장  서론……………………………………………………………………4~5 제2장  본론……………………………………………………………………6~10 2.1이백의 생애…………………………………………………………………6~8 2.2대표적인 음주시의 분석…………………………………………………8~10 2.2.1 장진주(将进酒)의 분석 2.2.2 월하독조(月下独钓)의 분석 제3장 결론………………………………………………………………… 12~13 감사의 말………………………………………………………………………14 참고문헌………………………………………………………………………15                                      제1장 서 론       본 고는 이백의 생애와 그를 대표하는 음주시를 둘러싸고 이백의 창작 사상과 그의 문학관에 대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백은 중국 시가사에서 대표적 시인이다. 흔히 당시를 중국 문학의 꽃으로 비유하는데 이백이야말로 당시 가운데 꽃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이다. 또한 이백의 시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위치에 있으며 현전하는 이백의 시는 약 천 수에 달한다. 이백의 시는 당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백은 천재시인이라 불린다. 그는 시를 지을 때 퇴고 없이 일필 휘지로 써 내려간다. 이백은 호방하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시를 썼으며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이백하면 음주 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의 시가들 중에서 많은 것이 정치서경시이다, 이것들은 시인의 비범 한 포부,분방한 격정, 호쾌한 기개를 충분히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 (盛唐)시가 앙양되고 분발한 전형적인 음조를 집중으로 대표하였다. 이백 의 시가 제재는 아주 다양한데 7언절구,5언절구와 고체시등 있다. 이백은 술의 친구이어서 음주시는 대표적이고 유명하다.     이백은 성당문화 속에서 배출된 천재적 시인이어서 성당시가의 기(气)와 정이 이백의 시가들에서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그의 시가창작은 열정 으로 넘치고 있으며 기특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다. 장쾌한 경치 도 있고 자연스러럽고 명쾌한 경지도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래서 이백의 매력은 바로 성당의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이백의 강렬한 감정의 분출에 의해 과장된 비유,풍부한 상상 등 낭만주의 표현 기법과 신화전설을 능란하게 운용해서 호방한 기개, 앙양된 정조, 기특한 형상과 비범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어서 강렬한 예술감화력을 발산한다. 게다가 생생하고 명랑하고 우미하고 청신 한 언어를 구사하였기에 아름답고 눈부시여 이목을 끌며 천고에 길이 이름 을 남기게 되었다.    본 고에서는 이백의 많은 작품중에서 음주시를 위주로 고찰하고 있다. 이백의 시의 제재는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하지만, 그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백은 직감적으로 술고래를 떠올리 게 된다. 그것은 이백은 시선인 동시에 주선이라는 두 이미지가 결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부는 이백을 평하여 ‘술 한 말에 시 백 편(李白斗酒詩百篇)이라 하였다. 이렇듯 이백과 술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이백시에서 음주시가 차지하는 영역은 초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본 고에서는 이백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이백의 음주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본 론   2.1 이백의 생애   술과 달의 시인 이백은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이며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로 당대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중국 문학사상 굴원 을 잇는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시선(詩仙)’ 이라고 불린다.(이백은 시선, 두보는 시성, 왕유는 시불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태백성을 보고 출산했기 때문에 자를 태백이라 했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조상이 농서 성기(현재 감숙성 천수현 부근)사람, 조상이 수나라 말엽에 서역으로 흘러들어감,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생,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면주(지금의 사천 면양지방)에 거주하여서, 어릴 때부터 촉나라에서 수학,유람함. 25세 때에 혼자 몸으로 촉나라를 나와서 임협방도(의협을 신뢰하고 도리를 찾는것)와 교유간알(신분이 높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통해 벼슬의 고위직에 올라,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 들을 평안하게 하는" 큰 뜻을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동정, 금릉, 양주 등지를 유람했으며 수년후, 전 재상이었던 허어사 의 손녀와 결혼을 하여 안륙(지금의 호북 안륙)에 머물러 살았으며,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양양,낙양,태원 등지를 유람했다. 후에 또한 공소   부등 "죽계육일"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과 함께 동노에서 은거하였다.    천보 초기에 오균이라는 도사의 추천으로 임금의 부름에 장안으로 들어가, 한림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귀족들로 여러 차례 비방을 받아, 천보 34년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나와 개봉을 중심으로 제, 노, 회, 사, 강동사이 북으로는 유연 일대까지 왕래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이백은 노산에 은거하였으며 계속해서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면밀히 주시하였고 후에 영왕 인의 막부에 참가하게 되었다. 숙종 지덕 2년 영왕 인은 패배하고 이백은 연루되어 욕양에서 옥살이를 하게되고 이듬해 야랑으로 유배가는 도중에 사면을 받고 무창, 욕양, 의성 각지를 전전했다. 대종 보응 원년에 친척 아저씨인 당도(지금의 안휘성 당도현)현령인 이양빙의 집에서 병사했다.     그는 불운을 겪었고 복잡한 사상을 가진 천재적인 시인이며 또한 자객, 은사, 도인 등과 같은 기질을 지니기도 했다. 유가, 도가 그리고 협객 등 세 가지 사상을 몸소 실천했는데, ‘공성신퇴 (功成身退:공을 세운 후 물러 나자)’ 는 그의 일생을 지배한 주도적 사상이었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이백은 그의 천거로  43세 때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이백은 너무 기뻐 ‘남릉에서 애들과 이별하고 서울로 가노라 [남릉 별아 동입경]’라는 시에서 양천대소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노라. 이 장부가 아무 렴 촌에 묻혀 살소냐? 라고 호기롭게 읊었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 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장안을 떠났다. 현종 의 마음에 들어 호탕하고 방탕한 생활을 3년간 지속하며 당시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을 벗기도록 하였으며, 현종의 애첩 양귀비 (楊貴妃)에게 벼루를 들고 서있게 했던 기인이다.      장안에서 보낸 3년의 정치 생활은 이백의 창작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정치적 이상과 암울한 현실은 첨예한 갈등을 보였으며, 가슴 속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과 불만이 쌓였다. 분노는 훌륭한 시를 낳았고, 그래서 , 등의 시에는 옛 선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으 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훌륭한 명작들을 써나갔다.    이백은 후세 사람들에게 9백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렇게 빛나는 작품 들은 그 일생의 마음 역정을 표현한 것으로, 성당(盛唐)시기 사회의 현실과 정신생활 모습의 예술적인 묘사이다. 이백은 일생동안 원대한 포부를 품고 한치의 속임도 없이 업적을 쌓으려는 바램을 표현했다. 어려서부터 협객 을 좋아해서 그에 대한 많은 시를 썼는데, 이 그중 대표작이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 (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 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 (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 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 (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2.2 대표적인 음주시    이백이 술을 좋아하였다는 사실은 그를 주선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에서 충분이 증명된다. 그의 벗 두보가 “이백은 술 한 되에 시를 백 편이나 쓴다”고 읊은 사실과 이백 자신이 “백년은 삼만 육천일, 하루에 삼백 잔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사실에서도 음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음주는 삶의 충족을 위해 마신 것만은 아니였다. 영원한 것으로의 지향, 유한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마셨다. 이백은 술을 마시 면 마음이 쾌활하고 호방해졌다. 취중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고 도취 속에서도 각성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술에 대한 시를 볼 때 잠꼬대 같은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표현 속에 엄연한 객관화 정신이 있었으며 동시에 정확한 작시 기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2.2.1 “장진주(将进酒)”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그대 보지 않았는가 황하수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奔流到海不復回               기운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그대 보지 않았는가 고당의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의 슬픔을 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 푸른 실 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이 뜻을 얻었을 때엔 모름지기 환락을 다해야 하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나에게 재능을 주었으니 반드시 쓸데 있을 것이다. 千金散盡還復來 천금 다 써버려도 다시 손에 돌아올 날 있으리 烹羔宰牛且爲樂 양고기를 삶고 쇠고기를 저며서 술 잔치를 즐겨보자 會須一飮三百杯 모름지기 술은 한 번에 3백잔은 마셔야지 岑夫子         잠부자여 丹邱生         당구생이여 進酒君莫停        지금 곧 술을 권하여 하니 잔을 멈추지 말아요 與君歌一曲        그대 위해 한 곡조 시를 읊으리니 請君謂我傾耳聽 청컨대 그대는 나를 위해 귀 기울여주오 鏡鼓饌玉不足貴 아름다운 음악 맛 좋은 음식은 귀한 것이 못된다 但願長醉不用醒 다만 소원은 오래 취하여 깨지 말기를 古來聖賢皆寂寞 옛 성현들은 죽으면 그뿐 잊혀지지만 惟有飮者留其名 술 잘 마시는 사람만이 그 이름을 남겼다 陳王昔時宴平樂 옛날 진왕은 그의 평락관에서 주연을 베풀고 斗酒十千愁換謔 두주를 만금에 사서 마음껏 즐기고 노닥거렸다. 主人何爲言少錢 집주인인 내가 어찌 돈이 적다 말하겠는가 徑須沽取對君酌 모름지기 술을 사서 그대에게 권하겠노라 五花馬                 다섯가지 꽃 무늬의 말 千金衣                 천금의 모피 呼兒將出換美酒 아이 불러 끌어내어 맛 좋은 술과 바꾸어 與爾同銷萬古愁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우수를 쫓아 버리자       이 시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개탄하고 술을 마셔야만 우수를 잊을 수 있다는 이백 특유의 술철학이 담겨있다. 황하가 분류하는 것 같은 웅대한 시, 자유분방, 종횡무진으로 구사한 화려한 시구에는 억제하기 어려운 인생의 비애가 넘쳐 흐른다.     이 시와 비교하여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내용상 이질적인 면이 보이고 있 는데 예하여“조여청실막성설(朝如靑絲暮成雪)”에서‘아침에 푸른 실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對酒》에서는 어제의 홍안 소년 오늘은 백발(昨日 失顔子 今日白髮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용 상에 있어서도 대조를 보이고 있는 곳이 있는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하고 《把酒問月》에서는 바라 는 것은 노래 부르고 술 마실때 달빛이여 깊이 비쳐다오 금술독 속 (唯願當歌對酒時 月光長照金樽裏 ) 까지 라고 표현하고 있다.       달과 술은 서로 이질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한 데 묶어서 다루어 보려는 의도는 그만큼 이백의 시의 특수성 때문이다. 한 편의 시 속에서 그는 달과 술을 동시에 소재로 활용하는 경우가 다른 시인에 비하여 많을 뿐만 아니라 이 계열의 시가 유명하다. 이백의 시에는 달과 술이 동시에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시 제목에서도 이러한 현상 이 나타나고 있는데 月下獨酌등이 바로 그런한 예이다.   2.2.2                  달 아래에서 혼자 마시다 花問一壺酒 꽃나무 사이에 놓인 한 단지 술은 獨酌無相親 서로 친한 벗도 없이 혼자 마신다 擧杯邀明月 술잔을 들고 밝은 달 맞으니 對影成三人 내 그림자까지 모두 셋이 되었다 月旣不解飮 달은 이미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부질없이 내 하는 대로 따른다 塹伴月將影 얼마 동안 달과 그림자를 벗으로 行樂須及春 행락은 오로지 봄이 가기 전에 즐기는 것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바장이고 我舞影凌亂 내가 춤추니 그림자 어지럽게 흔들린다 醒時同交歡 술이 깨어서는 함께 즐기고 醉後各分散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 氷結無情遊 길이 무정한 놀이를 그들과 맺어서 相期邈雲漢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기약한다.       밝은 달 아래 꽃나무 사이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달과 그림자를 벗 삼아 마음이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며 즐기는 심경을 독특한 기법으로 노 래하고 있다. 전부 4수로 되어있는 이 시들은 각각 착상이 다르다.    중국문화는 장르중에 시는 역사적으로 주총을 이루었고 특히 당대에 있어서는 최성기를 이루었다. 당대에서도 성당이 당시의 절정기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은 이백이다. 이백은 진보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낭만주의를 굴원 이래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렇기 때문에 당조때 두보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어 기봉을 이루었다면 이백은 진보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다.     이백은 반평생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는데 전국 수많은 명산과 대천을 다니며 조국의 자연을 찬미하는 많은 분량의 우수한 시들을 썼고, 시를 통해 자유를     사랑하고 해방을 갈망하는 심정을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 속에 기묘한 산천은 거스르고 머무르지 않으려는 그의 성격과 완벽 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백은 조국을 매우 사랑하고 백성을 보살폈으며 현실을 인식했던 위대한 시인이였으며, 전쟁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는 열정을 담아 보내는 노래를, 통치자들의 불쌍한 병사 들에 대한 무정한 채찍질을 담은 시들을 썼다. 이백은 또한 많은 악부시를 지어, 노동자들의 힘든 생활을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표현 했다. 이백의 시는 ‘붓이 떨어져 비와 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가 되어 혼을 울리는’ 예술적 매력을 담고 있는데, 이것도 이백 시의 가장 뚜렷한 예술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풍부한 자아실현의 주관적 정서의 색채가 매우 강하고, 감정표현에 있어 위세당당하고 일사천리한 기세를 담고 있다.     시는 항상 상상, 과장, 비유, 의인 등의 기법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신기하며 사람을 감동시키는 경지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이백의 낭만주의 시가 사람들에게 자유분방함과 신선같이 뛰어난 운치를 주는 원인이다.     이백의 시는 이전 낭만주의 창작의 성과를 이어받아 반역사상과 호방한 풍격으로 성당시대의 낙관적이고 진보적인 창조정신 및 봉건질서에 만족 하지 못한 잠재된 역량을 반영하며, 낭만주의 표현영역을 넓히고 기법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상당한 수준까지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을 실현시켰다. 이런 한 성과로 인해 그의 시는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의 새로운 절정이 되었다. 이백은 당대 시가의 혁신에 대해서 뛰어난 공헌을 했다. 그는 진자앙 시가의 혁신적인 주장을 계승하여 이론과 실천에서 시가혁신의 최후 성공을 거두었다.                                                       3. 결 론     이백의 위대한 시편들은 성당시대의 상승발전하는 기백을 반영하였다.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그는 극대한 용기로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항에 몰두하였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질책과 열려있는 밝은 정치를 하고자 이에 투쟁하였다. 이러한 완강한 투쟁정신과 자유해방의 열정에 대한 추구는 그의 시가에서 적극적인 낭만주의 정신의 핵심이었다.   ‘성당 (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짧은 일생에 천만고의 시름을 안고 있는 인생, 무엇으로 그 시름을 잊고 이 인생의 무상을 극복할수 있을가 술이 야말로 바로 그 시름을 녹여 없애는 것이며 선물이라는 대 전제하에 과연 이백다운 종횡무진의 낭만과 과장으로 호기로운 음주예찬을 펼쳐가는 작품이다. 취중인 만큼 과장도 호기도 백배로 부풀어 있는 가운데 또한 은근히 때를 얻지 못한 자신의 불우의 분한을 시종 그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자연과 인생은 하나의 사랑으로 귀의가 되어있다. 산천초목이며 일월신성이다. 그러한 중에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달과 꽃과 새와 바람과 구름은 그의 술자리에 동참하여 항상 이백과 함께 하였다. 이백에게 있어서 자연은 적극적 능동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서 이백의 음주시는 그저 단순한 작시하는 그러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천인하일의 경지로 들어가는 입장에서 파악 될 수 있다고 보며 이러한 면에서 새로운 각도로 해석을 시도해 보아야 하며 이백의 음주시를 더욱 더 음미해보아야 한다.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 문헌   1. 孫宗燮, 『李杜詩新評』, 정신세계사, 1996 2. 郭沫若, 『李百과 杜甫』, 까치, 1996 3. 張基槿, 『李太白評傳』, 乙西文化社, 1987 4. 金學主, 『中國文學史』, 新雅社, 1993 5. 丁範鎭, 『中國文學史』, 學硏社, 1993 6.《李白诗歌鉴赏集》,巴蜀书社 1998年2月 7. 《李白集》山西古籍出版社,2004年6月 8. 安旗:《李白全集编年注释(上、下)》巴蜀书社,2000年4月第1版 9. 王寅明著:《李白全传》长春出版社,2002年7月第一版 10. 霍松林、尚永亮:《李白诗歌鉴赏》,上海教育出版社,1989年 11.《李白诗》,人民文学出版社,2005年5月 12. 王步高:《唐诗鉴赏》,南京大学出版社,2006年7月 13.   박충룩저, 북경민족출판사, 2003년10월제1판 14. 이창룡, 『李百』, 건국대학교출판부, 1994 15. http://www.ccnt.com.cn/literature/wenxue/shiren/libai.htm
130    안수길의 장편소설에 담긴 민족 비극의식 (증녕) 댓글:  조회:8925  추천:0  2013-01-23
                                         摘 要       安寿吉作为韩国著名的移民作家,在战争时期写出了很多著名的小说,主要有《초련필담》(初恋笔谈)《북간도》(北间岛)《원각촌》圆觉村〉《여수》( 旅愁)《제3인간형》(第三人间型)等。     其中最为著名的就是具有代表意义的北间岛,《北间岛》代表了安寿吉小说创作的最高水平。《北间岛》描述了朝鲜移民李昌润一家四代人,在中国吉林延边的生活及土地之争,成为韩国民族文学的重要作品。此书通过描述朝鲜民族的移民史来表现朝鲜民族的深刻悲哀意识。同时也透漏出朝鲜民族的深刻的民族精神,不但代表农民阶级,同时也代表了朝鲜整个民族。之所以研究安寿吉,主要通过研究北间岛,是想通过作家的笔下描写,去了解当时在社会深刻变动下受难的朝鲜人民,当时社会的深刻变革和人民的精神世界,折射出的宝贵的民族精神。     关键词:安寿吉 北间岛 朝鲜文学 民族意识                                       초 록     안수길은 한국 이민작가들중에서 가장 유명한다.그는 전후 유명한 소설 을 많이 썼다.《초련필담》,《북간도》,《원각촌》 《여수》(旅愁) 《제3 인간형》(第三人间型)등 있다.     그중에서 장편소설《북간도》는 안수길의 창작에서 최고수준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조선이민 이창윤 일가 4대의 사람들이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 살면 벌어진 토지쟁탈을 묘사하고 있는데 한국민족문학에서 중요 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설은 조선민족의 이민사로 조선민족의 심각 한 비애의식을 묘술하고 있다.     이 비애의식은 조선민족의 심각한 비극의식을 표현하고 있는바 비단 농민 계급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전체 조선 민족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안수길의 소설《북간도》는 중국에 이민한 이창운일가의 생활려정에 대한  묘사을 통해 그 시대의 심각한 사회변혁과 인민들의 정신세계를 펼쳐보이 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 안수길을 연구하려면 그의 대표작《북간도》중심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작가의 붓끝에서 묘사된 정경을 통하 여 당시 사회의 심각한 변동 속에 고난을 겪는 조선인민들의 정신세계 및 굴절반사되어 나온 보귀한 민 족정신을 더 깊이 요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차 례 초록 ………………………………………………… 1-3 제1장 서론……………………………………………… 1 제2장 본론 ……………………………………………  1-9 1.안수길의 생애 및 창작세계…………………………    1-3 2.대표작줄거리…………………………………   3-4 3.이해와 감상……………………………………………    4-5 4.소설의  상징성…………………………………………   5-7 5.소설에서 보여준 장면의 의미,비극적 미학…………   7-9 제3장 결론………………………………………………  9 안수길 소설중에 문학예술…………………………… 10-12 감사의 말……………………………………………… 13-14 참고문현…………………………………………………… 14                                    1. 서 론       안수길은 한국 이민작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다. 사상사적 측면에서 고찰하여 보면 『북간도』(1959~1967)를 비롯하여 『북향보』, 『성천강』 등 장편 소설은 모두 조선민족 선조들의 개척의지나 강한 민족의식을 문제삼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렇게 출발 초기에는 만주에 머무르며 조선 이주농민이 대륙에서 흙과 싸우는 모습을 그리는 농촌소설에 주력했으며,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도시 소시민의 생활 단면을 그리는 많은 장·단편을 발표하였다.     안수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고향의 이중성과, 작품을 쓰게 된 동기인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수길은 항상 ‘어떻게 사느 냐’를 고민하며 산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안수길 소설의 진정한 문학적 사상성은 작품 속에 강렬히 반영된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안수길의 작가정신은 민족이 처했던 역사적 조건과 그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적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려는 데 그 근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2. 본론   2.1 안수길의 생애 및 창작 세계      간도 용정 광명고등여학교의 교감을 지낸 아버지 용호(镕浩)와 어머니 김숙경(金淑卿) 사이의 2남 1녀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 흥남으로 이사해 소학교를 다니다가 1922년 만주 간도로 이주했다. 1926년 간도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동맹휴교 사건과 관련해 자퇴했다.     1928년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했으나, 이듬해 광주 학생사건으로 15일간 구류생활을 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学] 고등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집안 사정과 학비문제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1932년 박영준·이주복·김국진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북향 北乡〉을 펴냈고, 1936년 간도일보사 기자로 근무하다 1937년 만선일보사로 옮겨 염상 섭·송지영·이석훈 등과 함께 일했다. 1945년 6월 건강이 악화되어 만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8·15해방을 맞았으며 3년간 과수원에서 요양했다. 1948년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경향신문사에 입사해 문화부 차장, 조사부 부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는 해군 정훈감실 문관으로 복무했고, 1952년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용산고등학교 교사,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59년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강사, 1960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1935년 〈조선문단〉에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콩트 〈붉은 목도리〉 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의 문학세계는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8·15해방 이전까지로 만주에서의 직접 체험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만주에 사는 한국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민족 수난사의 의미와 결부시켜 폭넓게 제시했는데, 창작집〈북원 北原〉(1943)과 장편〈북향보 北乡谱〉(1944)가 그것이다.     이 시기 그의 작품경향은 개척 이민의 전사(前史)에 해당되는 〈새벽〉 · 〈벼〉·〈원각촌 圆觉村〉 등과 1932년 이후 만주 개척이민의 현단계를 다룬 〈새마을〉·〈목축기〉 등의 두 갈래로 나뉜다. 이들 초기 소설들은 '어떻게 사느냐' 라는 문제를 민족적 단위에서 파악하려는 작가 정신이 밑받침되고 있다. 둘째, 월남한 이후 1950년대까지로 〈여수 旅愁〉(백민, 1949. 5)·〈밀회〉(문예, 1949. 10)·〈제3인간형〉(자유세계, 1953. 6)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작품들의 창작배경은 8·15해방과 월남, 6·25전쟁이다. 앞의 두 작품이 만주에서의 체험과 관련된 것이라면, 뒤의 것은 6·25전쟁과 관련된 것이다. 제3인간형이란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변질된 세 사람의 지식인상을 뜻하며, 이것 역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에 대한 작가적 탐색 이다.     셋째, 1950년대 말기 이후로 기념비적인 장편 〈북간도〉가 그 대표 작이다. 이 작품은 만주로 이민간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4대에 걸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순응주의자들의 자기기만을 폭로하고 비순응주의자의 생활태도를 옹호하는 과정을 통해 예술적 성과를 얻고 있으며 그의 민족적 리얼리즘의 가치를 탁월하게 드러낸다. 그외 소설집으로 〈초연필담〉(1953)·〈제2의 청춘〉(1958)·〈이화에 월백하고〉(1978) 등이 있다. 1954년에 아시아자유문학상, 1967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2.2 대표작 줄거리      의 중심 내용이 한민족의 근대사를 배경으로 그 수난의 현장에서 살아온 인물들의 삶의 양상을 그린 작품이므로 이러한 문학연구 경향과 자연스레 합치되었던 것이다. 실제 역사적 인물들이나 사건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작가 안수길이 재창조한 허구의 인물들이 여기에 직접 뛰어들어 함께 어우러진다.     이 작품이 시작되는 1870년대의 함경도는 고종 ‘기사정오(己巳丁午) 북부 육진의 대흉작’이 휩쓴 때이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주민들은 굶어죽을 지경이 되자 두만강 가운데 있는 기름진 땅, 사잇섬에 도둑농사라도 짓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대사상에 젖어 있던 정부에서는 ‘월강죄 (越江罪)’라 하여 강을 건너는 것을 법으로 엄중히 금하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와중에 이한복은 야음을 틈타 감자를 캐어 오게 되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태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한복은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강북, 즉 간도 지방(두만강의 북쪽은 북간도, 압록강 건너는 서간도라 칭함)이 우리 영토라는 것을 입증 하는 정계비가 백두산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답사를 다녀온 결과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월강은 합법적으로 인정되고 간도 이민은 공공연히 이루어져 수많은 동포들이 남부여대(男负女戴)로 강을 건너게 된다.    이한복도 그의 가족과 최칠성, 장치적 일가와 함께 강을 건너 비봉촌 이라는 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청국 관헌에 세금을 내고, 흑복변발을 하고 입적하면,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고 마음대로 농사를 짓게 해주겠다는 청국측으로부터의 압력이 들어오게 된다. 오직 스스로의 힘밖 에는 믿을 곳이 없는 이주민들에게는 삶의 길을 찾기 위해 대표를 선출하여 청국인으로 귀화시켜 토지 소유문제를 처리케 하는데 여기에서부터 인물들 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갈등이 시작된다.   2.3 이해와 감상    안수길은 가장 대표적 한국 이민작가이다. 예전에 다른 이민작가의 부족점이 많다. 그는 연소시대에 이민생활을 경험하였기에 이민생활에 대해 잘 요해하고 있다. 이민시기에 그는 일보의 특파원으로 이민의 진실한 생활을 많이 접촉하였다. 사회 의식과 계급의식은 그의 소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소설을 통해 안수길의 입장과 사명 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소설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인물 유형 이 나타나게 된다.     이한복,이장손,이창윤,이정수,이창덕등은 저항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입적 요구에 끝까지 반대하며 이주자라는 특수한 정치적·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으로 수난기인 비극적 시간 속에서도 민족정신과 의지를 굽히지 않고 저항하면서 사는 이한복 일가가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관습과 가치관을 고수하면서 시대에 대응한 인물들로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정수의 직업은 교사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대로 농사꾼 집안에서 보자면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면모일 뿐만 아니라 이는 실제 안수길의 개인적 경험이 작품에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당시 시대 상황과 적절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 데서 오는 철저하지 못한 작가의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에 있어서 한계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최칠성, 최삼봉, 최동규는 반동적 인물들이다.이한복 일가가 어려운 현실에 저항하며 살아갔던 인물들이라면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간 사람들도 있다. 농민에게 땅이란 그들의 생명과 같은 것이며 땅의 소유는 그들의 삶의 목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순응 태도는 다시 민족의식에 역행하는 반동적 인물과, 반민족 적이지는 않지만 그때그때 자신의 이익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기회주의저 인물로 나눌 수 있다. 두번째가 바로 반동적 인물유형으로 나타나는 최칠성 일가이다.     세번째로 현실 순응이라는 면에서는 같을지 모르나 최칠성 일가와는 달리 중심 인물인 이한복네와도 큰 대립 없이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해 가는 장치덕,장현도 일가가 있다. 이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사회·정치·경제적 변화과정에서 근대의식을 지닌 인물들로 적극적이고, 사회적으로 적응을 잘하며, 낙천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내 기도 한다.   2.4 소설의  상징성     1930년대 당시 식민지 상황이라는 특수한 환경하에서 시대적 각성에 따른 성숙된 작가 의식의 발로로써 소설의 장편화 경향이 나타났다. 민족 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다루기 어려웠던 시기이기에 개인이나 가족을 단위로 하여 당대의 사회 모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가족사 소설의 양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북간도』는 50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소설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30년대의 그것과는 차별성을 띠고 있다. 대부분의 가족소설 또는 가족 사소설은 단일 가문 내에서 세대간의, 인물들간의 갈등이 주류를 이룬다.     그렇지만 소설 『북간도』는 이한복, 최칠성, 장치덕 3가의 중심 구조로 그들의 인간성을 가문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그리고 있다. 대에 따라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의 차이는 있으나 인간형의 근본 바탕에서는 가문적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어 여타의 작품들과는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앞서 이한복 일가의 특성을 얘기할 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물 유형’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적어도 우리 나라와 같이 유교사상의 영향하에 있었던 사회에서의 가족사적 전개 구조는 필연적으로 남성 중심의 인물 유형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족적 인물의 전형성은 결국 여러 가족의 설정과 그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북간도로 이주해 온 한인들의 다각적인 삶의 자세와 변천상을 지속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수법으로 인정된다. 문학적 관심을 총체적으로 민족적 단위 로 확산시켰다는 데서 이 작품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작가의 전지적 시점이 지나치게 개입되어 있는 것이 인물을 사건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10여년에 가까운 기간에 걸쳐 씌어졌다고는 하나 1·2·3부에 있어서는 한인과 청인이 갈등의 축을 이루고 비봉촌을 중심으로 삶의 본질이 땅과의 투쟁과 결부되나, 4·5부에서는 일제와의 대결이 중심을 이루고 삶의 뿌리를 이전 과는 변질된 초기 상업자본주의가 나타나 있어, 당시 사회구조적 문제로 대두되는 이러한 실정들이 연관성이 결여된 채 두 토막이 난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잠깐 작품 속의 용정을 살펴볼 것 같으면 실제로 안수길이 20여 년을 생활했던 곳으로 1924년 그의 나이 14세 때 북간도에 있는 부모 곁으로 가서 청년기의 성장이 용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작가로서의 꿈을 키웠던 체험의 공간이다. 비봉촌이 1910년 이전에 이주한 이주농민의 삶을 형상화하기 위한 허구의 공간이라면, 용정은 1910년 이후의 간도 이주민의 독립운동 활약상과 교육사상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의 체험 공간 에서 재창조된 곳이다.   2.5 소설에서 보여준 장면의 의미,비극적 미학     이 작품은 2중적 대결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민족간의 대결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각기  다른 가치와 삶의 적응태도에서 발생하는 한인 이주민 사이의 갈등이다. 이민족과의  대립적 관계는 다시 청국과 일본이라는, 한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주변국가들과의  대립이 작품 1,  2부에  나뉘어  나타나고  있다.     청국식  흑복변발(墨服边发)과 입적에  대한  요구, 일본의  조선 침략이  구체화  되면서 빚어지는 갈등과  이러한  시대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 가에  따라  동족내에서도 차차 문제들이 발생한다. 친일적 사고와 행위를 통하여 불의와 타협하는  근대인의  삶의  한  형태를  제시하고  있는 장현도는 당시 현실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하여 신분계층의 변화를 시도한 그리고 성공하는 인물유형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주제가  등장 인물간의 대립과  충돌의 ‘엉크러짐’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고  볼 때, 이 소설의  중심  갈등은  이한복  일가를 정점으 로 하여  배신과  타협의 길을  걷는 최칠성과  장치덕  일가 사이의 갈등 으로 표출된다. 그것의 의미는  청국과의  대립을  통한 국토회복의  의지 와 일제와의  대립을 통한 국권회복 의지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분적으로는 농민이지만, 고향보다는 새로운 희망으로 개간되는 개척지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해 가는 이민족이다. 그래서 농민이기 보다는 유랑민족의 성격이 짙은 집안 내력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민족혼을 고수하며 이민족과 이주지라는 시대현실 상황에서 저항적 자세로 살았던 인물의 유형들이 주로 나타난다.     민족 주체성으로 상징된 이한복 일가의 제1,2부에서는 청인 지주 동복산과 결탁한 최칠성 일가와, 제 4,5부에서는 일본과 결탁한 장현도 일가와의 갈등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2. 6 장편소설《북간도》결구미학    소설 《북간도》는 이한복, 최칠성, 장치덕 3가의 중심 구조로 그들의 인간성을 가문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그리고 있다. 대에 따라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의 차이는 있으나 인간형의 근본 바탕에서는 가문적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어 여타의 작품들과는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앞서 이한복 일가의 특성을 얘기할 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물 유형’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적어도 우리 나라와 같이 유교사상의 영향하에 있었던 사회에서의 가족사적 전개 구조는 필연적으로 남성 중심의 인물 유형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족적 인물의 전형성은 결국 여러 가족의 설정과 그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북간도로 이주해 온 한인들의 다각적인 삶의 자세와 변천상을 지속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수법으로 인정된다. 문학적 관심을 총체적으로 민족적 단위 로 확산시켰다는 데서 이 작품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두뇌를 통하는 방법에는 사실의 정확성이나 논리가 필요하고 심장을 통하는 경우에는 생동하는 감동이 요망된다. 논리 위주의 전달 방법이 과학적 방법이요, 감동 위주의 방법이 예술적 방법인 것이다. 역사학, 철학, 법률학, 사회학 등등의 인문과학(人文科学)이 여기에 속하게 된다.     넓은 뜻으로 문학을 정의하는 경우 모든 문자로 씌어진 것이 이 범주 안에 든다. 그러나 글자로 씌어졌다고 해서 역사, 철학, 법률학 등등이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학이라고 하면 역사나 철학 같은 것과 엄연히 구별되는 그 어떤 개념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이 좁은 뜻으로 본 문학일터인데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한다면 그것은 ‘말의 예술’로 요약될 것이다.                                          3. 결론       본 논문은 만주조선인문학을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이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집중적으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들을 그 연구대상으로 잡았다. 만주조선인문학을 중국 조선족문학의 시원이라고 확인할 때 안수 길과 그의 작품은 바로 만주조선인문학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소설에 대한 연구결론은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 확인과 직결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수길은 만주 이민역사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식민지 억압 시대에 대한 치열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의도적으로 만주 이주민의 개척사를 다루었으며 그것이 그의 초기 소설세계를 이루고 있다.     역사의식과 시대적 현실이 모순되고 배척되는 상황 속에서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토대하여 절대적 억압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것이 작가 안수길의 현실 인식이었다. 그러면서 작가는 형이상의 이념 성찰에 날카로우면서도 형이하의 억압적인 인간 조건을 비약하지 않고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하여 작품화 했다.     그의 이러한 작가 정신은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토대한 이주 민의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에 이어지면서, 단지 만주 체험소설이나 망명문학이 아닌, 정착 지향의 향토문학으로 정립, 성장할 수 있었다. 본논문은 이런 취지에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을 텍스트의 의미 담론과 서사구조의 통합분석이라는 방법으로 접근해보았다.     감사의 말   논문완성과정에서 최균선교수님께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참고문헌   张春植 ( 2007)《身份认同的不同而引起的文学表现之不同》 闵玹基编《韩国流移民小说选集》启明大学出版社 吴养镐 (1988)《韩国文学与间岛》文艺出版社  吴养镐(1996)《日帝抢占期满洲朝鲜人文学研究》文艺出版社 김용성(1991), 「한국현대문학사 탐방」, 현암사. 金允植(1982), 「韩国近代作家论」, 一志社. 金允植(1985), 「鼓吹民族历史意识的作家安寿吉」 志学社 민현기(1989), 「한국 근대소설과 민족현실」, 문학과 지성사 朴昌顺(1990), 「北间岛研究」 朴永根(1992), 「한국문학대사전」, 고려출판사 박은숙(2002), 성균관대 박사논문 계곤(2002) , 경남대 박사논문 벽호(1993), 김윤식 편,
129    한국 전후 소설의 비극미학 (왕은녕) 댓글:  조회:8493  추천:1  2013-01-23
                                   摘 要       6.25战争给韩国人民留下了深重的灾难,这些苦难不是由他们自身引起的,也不该由他们来担负这个责任,而是社会单方面施加予他们的,因此他们的绝望是一条没有尽头的遥远的路。     战后韩国的小说文学,在当时混乱的社会环境下,呈现出复杂的局面。这时期,许多作家以战后小说家的身份登上文坛。其中以描写历史剧变期的农村人民生活而出名的河谨灿尤其受人瞩目。在这样的时代背景下,反映苦难农村人民,就这一点自身而言,已经是具有跨越性意义的。河谨灿的诸多作品中,最有名的是他的处女作《受难2代》,清楚地反映了作家河谨灿的创作倾向。 《受难2代》中失去一支手臂的父亲背着失去一条腿的儿子过独木桥的画面,将战后小说的悲剧性美学展现的淋漓尽致。我认为《受难2代》所表现出来的战后小说的悲剧性美学不失为一个新的研究课题。   关键词:韩谨灿,受难2代,战后小说,苦难,独木桥,农村人民                                          초  록   6.25전쟁은 한국 민중에게 깊은 고통을 남겨주었다. 그들의 고통이 자신들이 책임질 문제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여된 고통이기에 그 절망은 헤어날 길이 없는 아득한 것이 되고 만다.   전후 한국의 소설 문학은 그 당시의 사회적 혼란 속에세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 시기에 많은 작가들이 전후 작가로 등단하였다. 그 중에세 역사적 격변기의 농민생활을 잘 묘사한 것으로 유명한 하근찬은 유난히 주목 받았다. 이러한 시대에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하근찬의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주목 되는 것은 그의 데뷔작 이다. 하근찬의 작품 세계의 뚜렷한 성향도 "수난2대"에 잘 나타나고 있었다. 한국 전쟁을 소재한 소설들, 가령 최인훈의 , 황순원의 , 박경리의 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전쟁이란 무엇이고, 왜 있어야 하고 역사는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실존의 몸부림을 치는 반면 「수난2대」의 두 부자는 '소극적'인 대응법을 취한다. 이들은 기껏해야 운명론의 무드에 빠지거나 아니면 팔자타령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와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를 생존 본능의 확인을 통해서 잊으려 하거나 뛰어 넘으려 하는 것이다.   이소설에서 팔 하나 잃은 아버지가 다리 하나 잃은 아들을 업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장면은 한국 전후소설의 비극적 미학을 잘 표현해 주었다. 가 보여준 한국 전후소설의 비극적 미학은 새로운 연구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키워드:하근찬, 수난2대, 전후소설, 고통, 외나무다리,   차 례   서론 하근찬의 생애 및 창작 세계...................................................................3~5 본론 2.1평가..................................................................................5~6 2.2줄거리...............................................................................6~8 2.3이해와 감상 ...................................................................................8~10 2.4소설의 소재 상징성..............................................................................10 2.5이해 문제.............................................................................................11 2.6소설에세 보여준 장면의 의미........................................................11~12 2.7의 비극적 미학 ...........................................................12~13 결론………………………………………………………………………………… 13 감사의말....................................................................................................13   참고문헌..............................................................................................13~14                                         1. 서 론   1.1. 하근찬의 생애 작가 하근찬은 1931년 경북 영천에서 출생했다. 전주 사범을 다니다 교원 생활을 했고, 동아 대학의 토목과를 다니다가 중퇴를 했다. 1957년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가 당선된 뒤 작가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군에 입대한 시절을 제외하고 그는 계속 교육 관계를 전문 으로 다루는 신문사와 잡지사에 관여하다가 최근에는 직장을 갖지 않고 창작에만 몰두하고 있다. 같은 작품이 그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학교 생활이 다루어진 자전적인 작품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 하고 있는데 농촌의 학교는 그의 많은 작품의 배경이 되어있다. 등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서는 서울을 무대로 한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이 작가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 이유는 작가의 유년 시대와 청년 시대의 개인적 경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ㅡ나는 고향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우쭐우쭐 활개짓을 하며 부르는 를 참으로 좋아한다. 달밤 같은 때 먼 곳에서 이 칭칭이 소리가 흘러오면 절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어떤 공동의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팔도의 가지가지 민요의 가락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슬픔인 것이었다. 슬픔이라는 어휘가 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은데, 뭐라고 할까, 한이라고 할까 정한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유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작가로서의 자신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하근찬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농촌과 농촌 인구에 대한 혈연적 동정이야말로 하근찬 세계의 핵심이고 그것은 그가 그의 고향에 대한 애정에서 작가로서의 근거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등이 모두 전쟁의 직접 피해자를 다루고 있다. 의 두칠이도 의 아버지도 불구의 몸으로 돌아온다. 더욱 기막힌 것은 불구인 그들을 도와 주는 아무런 사회적 장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에서는 많은 전사 자들이 배경으로 나오고 이들의 가족에게 재앙의 소식을 차마 전달 하지 못하는 마음씨 약한 우체부의 얘기가 나온다. 은 전쟁이 끝난 후 엉뚱하게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의 얘기 이다. 그러니까 전쟁의 파괴적 영향력으로 인한 황폐성이 하근찬 소설의 집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2. 하근찬의 창작세계 하근찬의 작품 세계는 처음에는 농촌을 소재로 형성되었다. 그의 농촌은 폐쇄된 자연이 아니고,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연관된 현실이라는 점에서 문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실존주의의 영향과 전후파적 취향이 영향을 미치던 1950년대 후반기에 소설 영역에도 지적 허영과 관념적 난삽함이 적지 않게 성행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농촌은 사회적 변화에서 유리된 자연공간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수난과 고통을 가장 절실하게 축적해온 삶의 현장이다. 농촌의 삶과 현실이 역사적 상황의식에 대응되어 문제성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이다. 전체적인 내용이 생활 속의 절실한 인정과 역사적 수난의 아픔이며, 그 아픔을 이기고 일어서는, 삶에 대한 강한 집념인 점에서 창작의 당연 하고도 새로운 본령을 일깨웠다. 또 (1959)이나 (1963)은 주체적인 민족의식이 토착적인 세계 속에서 외래적인 것과 갈등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들로서, 이처럼 농민 생활과 농촌 현실에 대한 그의 꾸준한 관심은 1950년대를 넘어서면서 농민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자기 아들을 징용에서 빼주지 않는다고 면사무소에서 대변을 보는 아낙네를 그린(1961), 전사통지서를 배달하지 않고 물에 띄었다는 죄로 해고당하고 웃는 등에서는 역사적 현실 속에 드러난 사회의 모순에 대해 강한 고발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리고 하근찬은 현실의 어두움을 그리면서도 해학미를 잃지 않고 있는데, 이는 농촌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농민들의 삶과 그 애환을 작품 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대부분의 전후 작가들이 전쟁의 상처로 황폐해진 도시 소시민의 내면세계와 메커니즘에 관심을 기울이던 것과는 달리, 그는 인정과 향토성이 짙은 농촌을 배경 으로 그들이 겪는 민족적 수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것도 작가가 의식적으로 농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고 작중 인물과 작가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동일성에서 똑바로 나오는 공감이요 사랑이다. 헐벗고 기운 없는 한국의 시골 사람 들이 적어도 50년에서 60년에 이르는 고달픈 시기에 하근찬에게서 아주 친근한 대변자를 찾게 된 것이다                                            2. 본 론   2.1. 줄거리. 그래서 다음은 를 중심으로 연구하려고 한다.이 소설의 주인공 박만도와 그의 아들 진수는 순박하고 선량한 이 땅의 민중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이 뒤틀어져 가는, 말하자면 역사의 피해자들인 셈이다. 박만도는 일제 말기에 징용되어 남양군도에서 비행기 활주로를 닦는 노역으로 내몰린다. 그 상황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비행장을 닦는 일에 동원되었는데, 굴을 파려고 산허리에 다이너마이트 를 장치하여 불을 당기고 나서려는 순간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당황한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했던 굴로 들어가 엎드렸다가 팔을 잃었 다. 그의 얄궂은 운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해방이 되어 귀국은 했으나 이번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민족의 분열이었고, 동족상잔의 끔찍한 전쟁이었다. 박만도가 일제 말기에 징용 으로 내몰렸듯이 이번에는 그의 아들 진수가 이 전쟁에 징집되었다. 그러 나 왜정의 그 혹독함이 지나가듯 동족상잔의 광풍도 지나가고 진수가 돌아 온다는 통지가 온다. 박만도는 삼대 독자인 아들 '진수'가 돌아온다는 통지를 받고 마음이 들떠서 일찌감치 정거장으로 나간다. 그런데 그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이라 하니 많이 다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는 팔이 없어서 늘 주머니에 한쪽 소맷자락을 꽂고 다닌다. 아들의 귀향 생각에 휩싸여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린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면서, 언젠가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옷을 널어 말리면서 사람들이 지나가면 물 속으로 들어가 얼굴만 내놓던 일을 생각한다. 정거 장으로 가는 길에서 '진수'에게 주려고 고등어 두 마리를 산다.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만도'는 과거의 일을 회상한다. 일제 강제 징용에 의해 남양의 어떤 섬에 끌려갔었다. 비행장을 닦는 일에 동원되 었는데, 굴을 파려고 산허리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하여 불을 당기고 나서 려는 순간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당황한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장치 했던 굴로 들어가 엎드렸다가 팔을 잃었다. 기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하는데도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만도'는 초조해진다. "아부지" 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로 돌아선 ‘만도'는 다리를 하나 잃은 채 목발을 짚고 서 있는 아들을 보고 눈앞이 아찔해진다. 자신이 한쪽 팔을 잃어버린 것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에게 닥친 재앙을 그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도'는 분노를 씹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가다가 주막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부정을 나타낸다. 술기운이 돈 ‘만도'는 ‘진수'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수류탄에 그렇게 된 것을 알게 되고,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살겠냐는 아들의 하소연에 아들을 위로한다. 외나무다리에 이르러 ‘만도'는 머뭇거리는 ‘진수'에게 등에 업히라고 한다. ‘진수'는 지팡이와 고등어를 각각 한 손에 들고 아버지의 등에 슬그머니 업힌다. ‘만도'는 용케 몸을 가누며 조심조심 걸어간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2.2. 이해와 감상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은 아버지 ‘박만도’,아들 ‘진수’, 주막집 여편네 세 명이 있었는 데 박만도는  일제시대 때 강제 징용되어 끌려갔다가 외팔이 신세가 되지만, 일제에 대한 분노나 원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자신의 운명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 아들의 부상에 화가 치밀지만 이내 체념하고 현실에 순응하고마는 정적 인물,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다. 박진수는6.25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온 상이군인으로, 아버지 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정적인물이다. 주막집 여편 네는 쾌활하고 스스럼없는 성격의 소유자요, 작중 보조 인물로서, 만도 와 진수의 심리 상태를 표면으로 드러나게 하며, 두 사람 사이의 침울한 분위 기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6·25 동란이지만 구성상 대칭 관계에 있는 또 다른 배경은 태평양전쟁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겪은 태평양전쟁과 아들이 겪은 6·25 동란이 시대적 배경과 함께 인물의 삶의 조건을 형성 한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은 경상도 농촌인데, 이 농촌이란 배경은 농민 들의 삶의 현장으로서보다는 전쟁의 피해를 입어야만 했던 사람들, 특히 자신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로 부각 된다.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겪은 수난은 그들 가족 단위의 수난 이자 한민족이 겪은 수난의 의미를 지닌다. 즉, 2대에 걸친 한 가족의 수난은 민족사적 수난의 하위 개념이자 대유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다. 고등어를 든 '진수'를 업고 '박만도'가 건너는 외나무다리는 바로 주제를 표출하는 배경이면서 유기적 구성의 훌륭한 장치로 작용한다. '외나무다리' 자체가 지니는 그 생김새의 허술함과 불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르는 강물 속에 오랜 세월 동안 놓여 있었다는 그 항존의 강인함이 곧바로 주제 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비극적 역사의 상징인 동시에 극복의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인 셈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민족의 수난과 비극을 그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부자가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행위를 통해 불구인 상황을 협동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민족 의 비극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소설의 표현상 특징이다. 대충 말하면  세 가지가 있다. ① 과거와 현재의 교차를 통해 회상 또는 연상의 기법을 적절히 구사한것, ② 사실적 묘사, 토착어의 구사 등을 통해 인물의 성격과 상황, 분위기를 제시한것. ③ 오전에서 오후로의 이동을 통해, 희망에서 절망으로, 상승에서 하강으로의  분위기 변화를 자연스럽게 끌고간 것이다. 이 소설에는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 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 되겠나, 그제?”란 말이 있다. 여기 서 독자는 어떤 어려움이 그들 앞을 가로막아도 어떻게든지 살아가는 민중 들의 질긴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는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겪은 가족사적 비극을 통해 한민족의 수난사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버지 는 일제 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가 팔 하나를 잃고 불구의 삶을 살아간다. 아들 진수는 한국전쟁으로 다리를 잃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가계를 이어가는 뿌리들이 이렇게 불구자가 된다면 그 가계의 삶이란 간난 신고의 연속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들의 고통이 자신들이 책임질 문제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여된 고통이기에 그들의 절망은 헤어날 길이 없는 아득한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이 부자는 어디에서고 만날 수 있는, 질곡의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 이웃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자의 아픔을 집중적으로 그림으로써 수난의 시대를 살았던 민족의 아픔을 극화하는 작품이 된 것이다. 2.3. 소설 소재의 상징성 문학 작품에 있어서의 인물과 행동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 외부 현실에 대한 일직선적인 대응 관계에 의해서 의미를 갖기보다는 (그런 경우도 흔하지만) 상징적인 대응 관계로 해서 빚어지는 수가 많다. 이 소설에서 ‘주막'과 ‘술'과 ‘외나무 다리', 고등어등 소재들이 나왔다. ‘주막’은 낭만적 환상과 실제적 현실이 부딪치는 장소요 만도와 진수의 마음이 합일하는 공간이다. ‘술’은 절망에서 긍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고 역사의 어려움 혹은 삶의 어둠을 카타르시스 시켜주는 피와 눈물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특히 그중에서 외나무 다리와 고등어 두 소재는 만도 부자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주제 표출과 작품의 유기적 구조에 이바지한다. '고등어'는 부자 화해의 계기, 분위기의 전환, 부자 간의 온정 확인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면서 부자 협동에 의한 수난 극복의 소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외나무 다리'는 앞에서는 아들이 한쪽 다리를 잃고 나타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뒤에서는 '협동'이 수난을 극복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의미를 내포하면서, 부자간 협동에 의한 수난 극복의 현장으로 활용된다.   이 소설에서 외나무다리는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읍내로 나갈 때이며, 두 번째는 아들을 업고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올 때이다. 첫째 장면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기쁨에 가득차 있다. 둘째 장면에서는 한쪽 다리를 잃은 아들로 인해 슬픔 과 절망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외나무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와 아들은 이러한 절망감을 딛고 일어선다. 한 다리를 잃은 아들이 한 팔을 잃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넘으로써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소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 문제를 같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만도가 불구가 된 아들을 처음 만났을 때, '에라이 이놈아!' 라고 화를 낸 것은 어떤 심정이었겠는가? 충격과 놀라움과 아득한 절망의 표현 이지, 결코 아들 진수가 제 몸을 건사하지 못했다는 책망의 표현은 아니다. 엄청난 운명의 비극 앞에 참담해진 마음이 진수에 대한 모진 소리로 드러난 것이다. 둘째: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아들은 6 · 25로 불구가 된다. 이러한 비극적 설정을 통하여 작품이 의도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명백하다. 이 소설은 한 가족사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한 민족사의 비극을 보여 주면서 수난을 극복하는 삶의 의지, 역사적 시련 극복의 한 모습을 나타 낸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부자가 외나무 다리 건너는 장면)은 전후 소설이 거둔 비극적 미학의 절정으로 평가받는 장면이다. 외나무 다리는 ‘위태하게 살아온 두 사람의 삶(=민족의 삶)'을 상징하는 배경으로, 다리 하나를 잃은 진수의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황혼의 이 외나무 다리를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건너는 장면은 실로 장엄한 비극이요, 만일 두 사람이 건너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으로 상황을 설정했다면, 그 비극성은 치열해질 것이고, 전쟁이 두 사람에게 남긴 상처 의 고통이 독자의 심상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와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그 자체만으로도 비극은 충분하고, 그러기에 무사히 외나무다리를 건너게 했던 것이 조화스럽게 여겨진다. 이를 두고 한국 문학 속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라고 극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 의견도 있다.  ‘그 자체로서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이며 굳센 생활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결말이 문제 의 더욱 철저한 망각을 가져 온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계속되어 온 수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고 그건 그것대로 버려 두고, 피해를 받은 대로 어려운 대로 서로 도우며 어떻게든지 살아나가는 것이 객관은 어떻든 주관만 편하게 가지는 것이 택할 길이라는, 끈덕지나 소극적인 인간상을 암시적으로 완결시키고 있다.'   유종호 교수는 하근찬 소설의 특징을 '독자들에게 전쟁의 현장을 목격시킴 없이 전쟁의 야수성을 가장 다부지게 고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농촌 사람들의 삶을 다룸에 있어서 전후 작가의 한 사람인 하근찬이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50년 전쟁의 파괴의 흔적이다. 그의 작품 으로서 동시대의 전후 작가들이 흔히 그랬듯이 전쟁을 전쟁현장에서 다룬 것은 거의 없다.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전쟁이 국토의 대부분의 주민들 에게 끼친 상흔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에 서로 다른 전쟁 통에 불구의 몸이 되는 재앙을 다루고 있는 에서부터 작가의 관심은 전쟁의 야수성을 고발하는 것으로 작가적 출발을 도모하고 있다.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그러한 수난이나 비극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구를 딛고 살아갈 의욕을 다지게 된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서로의 결손을 채워가며 힘들지만 외나무 다리의 위태로운 현실을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것이다. 이 장면은 앞으로 이 부자가 살아가게 될 삶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용머릿재라는 높고도 험난한 고개가 버티고 있는 것이, 그들의 앞으로의 삶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힘들지만 둘은 힘을 합하여 고난을 개척해 나갈 지 모른다.                                       3.  결론   는1957년 신춘 문예 당선작이면서 하근찬의 데뷔작이다. 대개 작가들의 성향은 데뷔작에서 이미 굳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하근찬의 작품 세계의 뚜렷한 성향도 "수난2대"에서 읽을 수 있다. 이를테면 정치나 역사와는 상관없이 순박하고 선량하게 살아오는 이 땅의 민중들의 삶을 통해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를 조명한다. 처녀작 에서부터 하근찬이 끈질기게 현실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관점으로 채택한 것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농촌 사람들의 그것이다. 이는 그가 주로 농촌 사람들을 다루고 그들의 가난함과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가 그들을 깊은 공감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겨레의 수난을 가장 무방비 상태로 당해야 했고 또 가장 가혹한 형태로 겪어야 했던 농촌 사람들의 고단함을 보여 줌으로써 그는 겨레의 수난과 삶의 실상을 가장 정직하고 참되게 보여 줄 수 있었다는 점은 하근찬 문학이 거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러한 주제의식에 있다. 이대에 걸친 가족의 수난, 그리고 앞으로 험난한 길이 버티고 있는 고통의 현실, 오로지 의지 하나로 헤쳐 나가야 하는 처지, 이런 것들을 모두 극복하고 마침내 수난의 시대를 끝내게 될 것이다.가 보여준 한국 전후소설의 비극적 미학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근찬의 소설 에 대한 재고찰과 분석을 통하여 독자들이 이 소설이 가지는 문학사적 의의에 대하여 보다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인식을 얻으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전후소설 연구에 일정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감사의 말     논문완성과정에서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1. 김병민 연변대학 출판사 2003년 6월 2. 윤윤진 상하이 교통대학 출판사 2008년 1월 3. 金永琪 著 《韓國文學의 源流》1988녀 6월 10일 4.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2판) 제3권, 지식산업사, 1989년판 5. 조동일 “한구소설의 리론” 지식산업사, 1993년판 6. 김경선 외국교학과연구출판사, 1998.10 7. 김근총, 김응준, 리성권     연변인민출판사 10월 1판 8. 柳宗鎬 9.원문   전자판 2009 10.장사선, 2008    11.두산세계대백과 서울:2009 12. 金允植. 趙南哲共著 “韓國近代作家論”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1997년 2월15 일 발행 13.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7. 14. 윤윤진등 상해교통대학출파  2005.9 15· 김선, 한국당대소설, 서울:예문당, 1998.    
128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및 기타 (류감나) 댓글:  조회:11898  추천:0  2013-01-23
                                        摘 要       被誉为20世纪的天才作家——罗稻香,在他短暂的一生中创作出了一系列杰出的作品,从前期的浪漫主义文学到后期的现实主义文学,展现出了他非凡的文学才能。这一转变主要体现在后期的短篇小说《桑树》、《水碓》、《哑巴三龙》、《池亨根》等中,描写工人、农民、店员、仆人等下层社会人民的生活,同情他们的遭遇,揭露了剥削阶级的丑恶本质和社会黑暗。而《哑巴三龙》是他的代表作,是浪漫性与现实性双重结合的佳作。 本稿主要通过对《哑巴三龙》的人物形象分析,进一步增进大家对罗稻香的了解,并对他的浪漫文学和现实文学进行剖析,向大家传达一种爱的真谛。在当代现实情况下,无论室哑巴三龙对主人的忠诚还是对少奶奶的真情,都是值得回顾和吟味的。   关键词:三龙 创作思想 浪漫性和现实性 爱的真谛                                        초 록   20년대 조선의 천재 작가 나도향은 그처럼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일계열의 수작들을 남겼다. 초기의 낭만주의 문학에서 사실주의문학으로 도약하여 비범한 문학적 역량을 과시했다. 이 도약은 주로 후기의 단편 소설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 예를 들면《뽕》,《물레방아》,《벙어리.삼룡이》,《지형근》등, 노동자、 농민、상점 판매원、하인등 하층사회 인민의 생활 묘사를 통하여 그들의 불행을 동정하고 착취계급의 추악한 몰골과 사회의 어두움을 폭로했다. 그중에서《벙어리 삼룡이》는 그의 대표작으로 낭만성과 사실성이 결햡한 훌륭한 작품이다. 소설《벙어리 삼룡이》에서 주인공은 못생겼지만 마음이 매우 착한 하인 이다. 늘 새서방의 학대를 받는 새색시에 대한 그의 감정은 처음의 인간적인 동정으로 부터 차츰 사랑으로 변한다. 그 시대 이런 사랑은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천방야담에 불과한 것이었다. 삼룡이는 주인집 아들에게 쫓겨난 주인집에 불을 지르고 불속에서 구해 낸 새색시의 품에서 웃음을 머금고 죽어간다. 지금까지 많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의 문학적인 가치라든가 예술 특색만 연구 하였는데 작품이 가지는 중요 사회 가치와 현실적 의의는 소홀이 하고 있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소설은 조선 하층인민의 무지몽매를 묘사함 으로써 그 시기 사회 현실과 여자의 비참한 사회 지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사람들 에 하나의 진리를 밝혀 주었다, 즉 진정한 사랑 은 그 무엇에도 비할 바 없다는 것이다. 소설이 “불”을 결말로 한 것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절정을 이룰 뿐만 아니라 주제를 승화시켰다. 본논문은 《벙어리 삼룡이》의 인물형상분석을 통하여 나도향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을 한층 넓혀주고 그의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분석함으로 써 인간의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전달하고 싶다. “벙어리 삼룡이”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라든지 새색시에 대한 진정이라 든지 모두 재음미 할 가치가 있다.   키워드: 삼룡이 창작사상 낭만주의문학과 사실주의문학 사랑의 의미   차례 서론.. 4 1. 연구목적 및 의의.. 4 2.연구내용 및 방법.. 5 3. 나도향과 그의 작품세계.. 5 본론.. 6 1. 소설의 경개.. 6 2.인물형상 분석.. 7 2.1.삼룡이.. 7 2.2새색시.. 9 2.3새서방.. 9 3. 나도향 문학의 사실성과 낭만성.. 9 4.사랑의 의미.. 10 5.  '불'의 이중적 의미.. 10 결론.. 11 1. 작품의 주제와 중심갈등.. 11 2. 나도향 문학의 특질.. 11 3. 나도향 문학의 사회적 의의.. 12 감사의 말.. 13 참고문헌.. 14                                            서론 1. 연구목적 및 의의   20년대의 천재 작가 나도향(羅稻香)의 문학사적 평가는 이미 보편화 되고 확고한 성과를 구축했다 할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사실주의 문학으로 도약해서 비범한 문학적 역량을 과시했던 나도향은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수작들을 남겼다. 최근 파리에서 열린 제2차 유럽 한국학회에서 폴란드의 바르샤바대학 교수 오카레크 최 여사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나도향의 작품이 북한에서 출판되어 뜻밖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윤식이 “우리 문단에서 추도사를 제일 많이 받은 문인으로는 나도향 오른편에 나설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듯이 그는 1920년대 ‘天才 文士’ 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던 작가이다. 나도향의 초기작품은 그 치졸함으로 문예사조상 어떤 호칭도 붙이기 어려울 뿐더러 작품이전, 혹은 소설이전이라고 혹평을 받기도 하였고, 센티멘탈의 과잉 또는 감상적 낭만주의 경향으로 일축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나도향은 과소평가 되였거나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미완성 이기는 하지만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의욕적인 탐구를 하면서 여러 가지 가능성 을 발현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너무나 일찍 요절한 도향의 작품세계나 경향에 대한 해석이나 논의는 주로 낭만 적 경향과 사실적 경향이라는 문예사조적 측면, 이와 관련된 미학적 성격 내지 사회 학적 측면에서 진행되다가 70,80년대 들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의 연구방법으로 발전하여 도향 소설의 면모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의 단편소설 『벙어리삼룡이』를 중심으로 한국 문학사에서의 작가적 이미지와 문학 적 가치에 대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첫째, 작가의 작품은 그가 살아온 삶과 유리되어 쓸 수 없는 것임을 염두에 두고 나도향의 생애에서 비롯된 창작사상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둘째, 단편소설 『벙어리삼룡이』에서 표현된 순수한 사랑과 비극적 결말을 중심 으로 소설의 낭만성과 근대의식을 살펴보며 작품이 한국문학에서 지니고 있는 가치 를 재평가하면서, 낭만미학으로서 본 단편소설을 재음미 할 수 있는 근거을 논술 하고자 한다. 나도향에 대한 학자들의 평론문장은 많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다 인정한다. 필자는 작기의 창작사상과 미학적 추구를 다시 발굴하고 천명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본과제의 연구를 통하여 나도향에 대한 현대독자들의 인식을 한층 높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 김윤식, 『염상섭 연구』, 서울대 출판부, 1987, p.337 ) 2.연구내용 및 방법 나도향은 1925년 《여명》 창간호에 한국 근대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단편중의 하나인 를 발표하면서 사실주의 작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본과제는 선인들의 평론과 연구성과를 비롯하여 현유의 재료에 근거하여 나도향의 단편소설 『벙어리삼룡이』의 주요내용과 예술성과를 재조명하려 한다. 3. 나도향과 그의 작품세계 나도향(羅滔香, 1902~1926)은 1902년 서울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 났다. 그의 본명은 경손 (慶孫)이고, 도향은 호이며, 성인이 되어서는 나빈 (羅彬)이라는 필명을 썼다。1902년 출생하여 1926년 요절함으로써 불과 6,7년의 짧은 문학 활동을 하였지만, 20년대 활발한 창작활동을 보여 주었다. 3·1운동 이후 「백조」 동인으로 문단활동을 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중편소설 「청춘」 (1920년 탈고, 1923년 단행본 발간), 장편소설 「환희」(『동아일보』1922.11.21~1923.3.21),단편소설 「벙어리삼룡이」  (『여명』,1925.7),「물레방아」 『조선 문단』, 1925.9)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소설30여 편과 수필 · 평론 20여 편을 남기고 있다. 나도향은 물질로 인해 파생되는 인간성의 상실 등 현실과 환경에 의해 변모해 가는 인간 속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준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해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었는데, 그러한 결과는 현실과 상황에 따라 변모되는 인간 속성에 대한 탐구와, 성을 물질과 교환가치로서만 인식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정신으로 나타났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파의 동인이 된 나도향이 선택할 수 있는 문예사조는 낭만주의였지만, 후기에는 차츰 자성적 객관성을 띠기 시작한다 모두어 말하면 작품들보다도 사실주의에까지 지향해서 도향 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라고 하는 것이 상식이다.                          (조동일, 『한국문학 통사5』, 지식산업사, 1988, p.123. )                                              본론 1. 소설의 경개 소설은 '나'라는 1인칭 서술자가 등장해서 15년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자의 존재는 비일상적인 삼룡의 행위와 그가 관련된 소설의 스토리에 신비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이를 변형된 액자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서두 부분을 제외한 소설의 본문은 전지적 작가 시점과 관찰자적 시점이 교차하는 양상을 보인다. 시점 통일의 결여성이지만 이는 작가가 인물의 내면적인 갈등과 사건의 극적인 전개를 효과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이러한 시점의 혼용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소설은 착취사회에서 돈이 없는 “죄”로 인간 이하의 천대와 모욕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가난한 사람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그는 보기 역겨 우리만치 추하게 생긴데다가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이다. 그는 주인을 섬기고 위하는 것이 자기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으며 마을 아이들이 놀려대고 주인아들놈이 무턱대고 때려도 묵묵히 순종하기만 한다.   그러나 그는 착하고 아름다운 새아씨가 주인아들놈에게 학대를 받는 것을 보고는 참지 못한다. 나중에 새아씨를 비호한 것이《죄》가 되어 죽도록 매를 맞고 쫓겨 나게 되자 마침내 반항에로 나간다. 분노한 삼룡이는 주인집에 불을 지른후 그 속에 뛰어들어 구원을 바라는 주인아들놈을 밀쳐 버리고 새아씨를 구해내오나 심한 화상으로 숨지고만다. 삼룡은 스물 세 살이 되기까지 아직 이성과 접촉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이다. 그해 가을 오생원은 영락한 양반의 딸을 삼만 냥의 거금을 주고 자기 아들과 결혼 을 시킨다. 새색시는 아름다운 외모에 참한 인품을 지녔다. 그러나 새색시는 새서 방으로부터 매일 맞으면서 산다. 삼룡이는 새색시가 왜 맞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 다가 주인 아씨를 동정하게 된다. 삼룡은 어느 날 먹지 않던 술에 만취되어 실컷 얻어맞고 길에 자빠진 어린 주인 을 업어다가 방안에 뉘인다. 새색시는 삼룡의 충직한 마음에 감동하여 비단 헝겊 으로 부시 쌈지 하나를 만들어 준다. 이 비단 쌈지를 본 새서방은 삼룡과 새색시의 관계를 오해한다. 그는 새색시를 마당에 내동댕이 치고 부시 쌈지를 갈갈이 찢는다. 말도 못하고 코가 땅에 닿도록 용서를 빌던 삼룡은 의분이 솟구쳐 새서방을 내어 던지고 새색시를 둘러맨 채 주인 영감에게 달려가서 하소연을 한다. 이튿날 아침 새서방은 삼룡을 채찍으로 마구 때린다. 그때부터 벙어리는 안방 출입이 금지되나 자기의 내면에서 이상한 감정이 싹트는 것을 느낀다. 어느날 계집 하인으로부터 주인 아씨가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삼룡은 안방으로 뛰어들 어 자살하려던 아씨를 말리려 실랑이질 한다. 이 일로 삼룡은 더구나 오해를 사서 어린 주인에게 쇠몽둥이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쫓겨난다. 삼룡은 드디어 믿고 의지하던 모든 것이 자기의 원수 라는 사실을 알며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자기 역시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날밤 난데없이 오생원의 집이 화염에 쌓인다. 삼룡은 주인을 구한뒤에 새색시를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매달리는 새서방을 뿌리친다. 마침내 불길 속에 서 새색시를 구해내나 색시를 땅에 내려놓자 곧 목숨이 끊어진다. 집은 모조리 불타고 그는 새색시 의 무릎위 누워 있었으며 울분은 불과 함께 사라졌는지 그의 입가에는 평화롭고 행복한 웃음이 엷게 나타나 있었다. 2.인물형상 분석 2.1.삼룡이 →  “벙어리 삼룡이”는 나도향의 초기 경향인 낭만적, 감상적 정신과 “여이발사” 등에서의 자연주의적 객관적 관찰의 정신이 결합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품에서 세계 인식은 현실적이다. 벙어리 삼룡이는 불구자로서의 운명과 하인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가지고 있고 아가씨는 아름다운 외모의 정상인으로써 주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어 그 단절은 확고하다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이 소설의 낭만적 요소는 삼룡이라는 인물의 설정이다. 즉 삼룡이는 비록 불구이고 보잘것없는 인물이나 그의 혼만은 순결하다. 이는 문학사에 있어 불구자, 혹은 백치의 천진성, 충직성과도 연관된다 하겠다. 앞서 말한 신분적 제약과 신체적 불구의 벽은 소설의 결미에 가서 삼룡의 순결한 사랑에 의해서 그 벽을 없애 버린다. 즉 그의 죽음은 현실적인 醜와 고난의 마침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라는 점이다. 그 찰나에서 작품이 멈춤으로 인해 낭만성은 더욱 고조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고뇌의 대명사인 삼룡이. 그는‘키가 본시 크지 못하여 땅딸보로 되었고, 고개가 빼지 못하여 몸뚱이에 대강이를 갖다가 붙인 것 같다. 얼굴이 몹시 얽고 입이 크다. 머리는 불밤송이 모양으로 언제든지 푸하여 일어섰다. 그래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 마치 옴두꺼비가 서서 다니는 것 같이 숨차 보이고 더디어 보인다.’라고 되어 있다. 주인공 삼룡이는 벙어리이다. 사회적 통념으로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못된다. 그러나 그는 착하고 충직하다. 자신의 신분적 굴레를 인정하고 개인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는 박해를 받고 그 박해마저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으로 통해 그때 사회의 렬근성과 하층인민의 무지몽매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하인으로부터 새색시에 대한 학대와 자신에 대한 가혹한 행위에 점차 반항하게 되고 끝내는 주인집에 불을 지르는 인물로 변모해가는 동적 인물이다 어느 한 구석도 사랑스런 구석이 없는,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가장 비참한 모습의 삼룡이이건만 그의 영혼은 너무나 순결하여 결국엔 죽음 앞에서 신분의 벽을 뛰어 넘어 새색시를 가슴에 안을 수 있게 되었다. 불이, 아니 죽음이 모든 고통과 절망에서 해방시켜 주는 이 작품을 보면서 인간으로서 많은 혜택을 받고 태어난 자신에 감사하며 아직도 우리 주위에 많은 벙어리 삼룡이들을 따뜻한 마음 으로 감싸 주는 새색시 같은 여자는 아니더라도, 진정한 사람이 될것을 다짐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에 너무나 충분하다. 2.1.1사랑을 위해 미친 삼룡이 주인공은 추한 외모에 벙어리이고 보잘 것 없는 하인이지만 영혼만은 순결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이것은 불구자 혹은 백치의 천진성과 충직성을 그래도 보여준다. 이러한 삼룡이가 연모하는 주인 아씨는 신분적 제약과 신체적 불구라는 벽 저편,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러나 삼룡의 순결한 사랑은 이 벽을 없애고야 만다. 불 속에 타 죽고자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주인 아씨를 구해내고, 그는 '행복한 미소를 띈 채' 죽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는 현실적 죽음이 갖는 추(醜)와 고난의 이미지가 없으며, 사랑이 완성되는 짧은 순간으로 나타난다. 이 찰나의 낭만성에서 작품이 멈춤으로써 짙은 낭만성을 가지게 된다 벙어리를 사람으로 알지 않는 주인 아들은 말 못하는 벙어리라고 오고가며 주먹으로 허리를 지르기도 하고 발길로 엉덩이를 찬다.그러면 벙어리는 어린 것이 철없이 그러는 것이 도리어 귀엽기도 하고, 또 그 힘없는 팔과 힘없는 다리로 자기 의 무쇠같은 몸을 건드리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앙증하기도 하여 돌아서서 빙그레 웃으면서 툭 툭 털고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 버린다. 주인 아들이 자기를 때릴 때 그는 속으로 '아니다. 그는 나의 주인의 아들이다. 그는 나의 어린 주인이다.' 하고 참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얼른 잊어버리었다. 그러 다가도 동넷집 아이들과 혹시 장난을 하다가 주인 아들이 울고 들어올 때에는 그는 황소같이 날 뛰면서 주인을 위하여 싸웠다. 새색시에 대한 사랑에 빠진 삼룡이는 어떤 날 밤 자던 몸으로 마당 복판에 머리 를 푼채 내동댕이가 쳐지고 온몸에 피가 맺히도록 얻어맞은색시을 보고 의분의 마음이 뻗쳐 올라왔다. 그래서 미친 사자와 같이 뛰어들어가 새서방님을 내어던지 고..새색시를..둘러메었다.. 평소의 삼룡이답지 않은 모습은 진정한 사랑의 힘이 비할 바 없이 위대하다는 진리를 밝혀준다 2.1.2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삼룡이. 삼룡이는 내쫓길 때 “벙어리는 죽은 개 모양으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대갈빼기를 개천 구석에 들이박히면서 나가 곤드라졌다가 일어서서 다시 들어오려 할 때에는 벌써 문이 닫혀 있었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그의 마음으로는 주인 영감을 찾았 으나 부를 수가 없었다. 그는 비로소 믿고 바라던 모든 것이 자기의 원수갈 것을 알았다. 그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자기도 또한 없어지는 것이 나을 것을 알았다”.이런 대우를 받은 삼룡이는 얼마나 슬픈지 잘 알게 된다.  자신이 지른 불이지만 생명의 위험에 불구하고 제일 먼저 구할 사람이 주인 영감이다. 여기서 매를 맞고 쫓겨나면서도 끝내 불길 속에서 주인 영감을 구해내는 삼룡이의 충직한 성격과 주인에 대한 깊은 감정은 남김없이 드러난다. 보다시피 작가는 삼룡이의 낭만주의적인 형상을 통하여 자본주의사회가 인간을 얼마나 못살게 굴고 모욕하며 학대하는가를 날카롭게 폭로, 비판하 였으며 참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속에서도 가슴 깊이 간직되고 빛을 뿌리는 근로인민들의 깨끗한 양심과 도덕적 우월성을 힘있게 긍정, 확인한있다. 보다시피 삼룡은 입체적 성격의 인물이다. 즉 삼룡에게 있어 주인 아씨는 애정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주인의 부당함과 자신의 처지를 일깨우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이처럼 작품의 진행에 다라 점차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각성해 가는 인물이 바로 삼룡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성은 방화로 이어진다. 즉 부당한 억압에 대한 복수와 반항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자신의 애정을 승화시키는 이중의 의미를 담은 방화이다. 2.2새색시 영락한 양반의 딸로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집을 와서 남편으로부터 갖은 수모와 학대를 받는 여인이다. 벙어리의 눈으로 보아서는 감히 손도 대지 못할 만큼 선녀같은 색시는 그렇게 예쁘고 유순하고 얌전하다. 이처럼 인정이 있을뿐만 아니라 사리에도 밝아서 삼룡이를 싫어하지 않고 잘 해 주는 착하디 착한 녀인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의 완미한 여자가 남편에게 매일같이 학대받고 나중에 더러운 누명을 쓰고서도 해명할 길이 없어 끝까지 참고 견디다는 것은 당시 여자의 비천한 사회 지위에서 기인되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안해는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유가사상의 영향으로 반항정서가 결핍한 탓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2.3새서방 오생원의 삼대 독자로, 버릇이 없고 새색시와 삼룡이에게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주인 아들이다. 하인과 여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주인 아들은 그 시대에 일종인물의 전형적인 대표이다. 그 시대의 악습을 철저히 폭로해 낸다.   상기한 인물형상분석에서 알 수 있다싶이 작가는 착취사회에서 학대받 고 유린당하는 근로인민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사랑, 당대사회에 대한 예 리한 비판과 항거의 정신, 이러한 인민적이며 인도주의적인 사상감정을 강한 낭만주의색조와 생활과 인간성격에 대한 간결하고 섬세하며 생동한 사실주의적 묘사를 통하여 주어지고있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한 특점이다. 3. 나도향 문학의 사실성과 낭만성 기존의 많은 평가들이 나도향의 문학을 이분화시켜서 전기에 해당하는 작품은 짙은 낭만주의적 경향을 띠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실주의로 경도되었다고 주장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향 문학은 사실성을 근간으로 한 낭만주의 성향의 작품이라는 평가가 총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에서 머슴 삼룡이가 지닌 외모나 신분의 열등 의식은 현실에서 도저히 그 장애를 뛰어넘을 수 없는 운명적 한계로 규정되고 있다. 정당한 이유없이 새색시에 대해 열등감에 휩싸인 새서방의 구박과 냉대를 받는 새색시에 대한 삼룡의 연민은 어느새 사랑으로 변하게 되지만 삼룡이 그것을 현실적 구현 행위로 구체화시킬 수 있는 일은 죽음밖에 없다. 삼룡의 주인집 방화 사건은 사전에 치밀하게 주도된 행위가 아닌 순간적 감정의 결과이다. 결국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새서방을 뿌리치고 새색시를 안고 화염 속에서 죽어가는 삼룡이의 개인적인 비극이 인 것이다. 4.사랑의 의미 작가 나도향이 추구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에서 백미를 이룬다, 불구의 벙어리 신분 또한 머슴이라는 천민 출신의 삼룡이, 그런 삼룡이가 보이는 주인에 대한 충직은 동물적인 본능에 가깝다. 삼룡은 새색시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차츰 눈을 뜨게 되지만 결국 방화로써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가 문학사에 남긴 뚜렷한 발자취는 작가의 명료한 시대 인식도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순박한 벙어리 삼룡이의 신분을 뛰어 넘는 새아씨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에 있다고 불 수 있다. 그것은 흉측한 몰골의 외양을 지닌 삼룡이의 정열과 사랑을 미학적으로 표현한 나도향의 문학 정신과 천재적인 구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룡은 죽음을 통해 자기를 속박해 온 모든 것들로 부터의 해방과 그 해방을 통해서 근원적인 생의 회복을 발견하게 된다. 죽음을 통해 참된 삶을 찾는 삼룡이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오묘한 신비감이 도는 유머적 낭만 미학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삼룡이의 방화를 통해 새 서방에 대한 간접 살인과 그토록 연모하던 새아씨를 품에 안고 죽음으로써 대담한 자기 구현의 낭만성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5.  '불'의 이중적 의미 이 소설에서의 '불'은 여러 가지의 상징성을 띤다. 삼룡이의 가슴 속에 타오르는 열정을 불로 비유하여, 언젠가 폭발하게 될 연정이 '휴화산'처럼 잠재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했고, 나중에 이 불길은 걷잡을 수 없는 연모의 감정으로 화하고, 그런 것들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모든 소멸케 하고자 하는 파괴의 본능이 꿈틀거리게 되며, 드디어 불을 통해 삶을 청산한다. 그러므로 불은 연정과 울분의 의미를 함께 지닌다고 하겠다. 즉 ‘불’은 무화(無化)를 통한 재생, 죽음을 통한 부활, 불행의 청산을 통한 평화, 슬픔을 사르는 행복 등으로 이중적 의미를 띠고 있다. 불을 통해 자신을 억압해 온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근원적인 결말 처리 방식은 1920년대 중반 신경향파 문학의 한 조류와도 연관되는 것이다. 당시에는 지주, 소작의 관계라는 대립적 구성을 기본으로 살인과 방화로 끝을 맺는 이른바 '살인, 방화 소설'이 유행한 바 있는데 이 작품도 결말은 그러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6.작품의 주제와 중심 갈등 1.1주제: 이 작품의 주제는 크게 ‘신분적 불평등에 대한 항거’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과 죽음을 통한 합일의 희열’, 이 두 가지 측면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신분적 불평등에 대한 항거의 경우에는 중심축의 하나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초점화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오생원의 집에서 쫓겨난 뒤 불을 지르지만, 그 행동은 계급의식의 각성보다는 인간적 울분의 표현에 가까운 것이고, 삼룡에게 애정을 보였던 주인을 살려 내는 행위는 삼룡이가 그토록 바라는 것은 인간적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의 주제는 사랑을 포함한 인간적 삶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1.2 중심 갈등: 1.2.1 내적 갈등: 몹시 애상의 정서가 그의 가슴을 저리게 하였다. 한 번이라도 아씨를 뵈올 수가 있으면 하는 마음이 나더니 그의 마음의 넋은 느끼기를 시작하였다. 센티멘틀한 가운데에서 느끼는 그 무슨 정서는 그에게 생명 같은 희열을 주었다. 그것과 자기의 목숨이라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1.2.2 외적 갈등: 그 이튿날 아침에 그는 주인 새서방님에게 물푸레로 얼굴을 몹시 얻어맞아서 한쪽 뺨이 눈을 얼러서 피가 나고 주먹같이 부었다. 그 때릴 적에 새서방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 흉측한 벙어리 같으니, 내 여편네를 건드려!” 하고 부시 쌈지를 빼앗아 갈가리 찢어서 뒷간에 던졌다. 주인 아들의 오해와 학대로 터무니없는 억눌림을 당하게 된다. 2. 나도향 문학의 특질 낭만성과 사실성의 경계를 중심으로 살펴본 나도향의 문학의 특질과 작가적 개성을 결론적으로 살펴본다면 도향의 단편들은 네개 특점이 있다. 첫째,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낭만적 성향과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인간적 측면에서의 긍정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다, 둘째,등장인물의 개성과 성격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역사와 행위의 동기가 꾸준히 대중의 호기심과 정시를 자극한다. 셋째, 사건의 극단성을 들 수가 있는데 에서 보이는 결말 부분의 방화나 에서 보이는 근친 살인 등의 반전은 독자에게 카타르시스의 쾌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넷째, 나도향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인물들의 개성과 사건, 배경, 동기 등이 어우러져 창출한 소설 미학의 독창성과 입체성이다. 여하튼 도향이 초기에 낭만주의로 출발하다가 후기에는 사실주의로 극단에서 극단으로 비약한 데는 자신이 갖는 작가적 기질에서보다, 낭만주의가 소설 문학에는 부적당하다는 점에서 와, 당시의 문학적 사조가 일변된 것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 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 론   나도향의 문학 세계를 결산하는 데 있어서 그 문학적 가치의 우열을 논하기 보다도 그의 작가 수업을 통한 작풍의 비약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그의 문학은 앞으로 더욱 새로운 각광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점쳐 본다. 보다시피 나도향의 소설은 초기의 감상적 낭만주의의 경향에서 후기에 이르면 대상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사실주의적 경향으로 변모했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를 기조로 하면서도 사실주의적인 기법과 정신이 공존하는 나도향의 후기 소설이 지닌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벙어리의 운명과 맹목적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입체적인 성격 창조와 설득력 있는 사건의 전개를 통한 작품에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정신과 사실주의적 기법이 종합된 이러한 성취는 '불'이라는 적절한 상징적 장치의 사용과 더불어 이 작품을 나도향의 대표적으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성격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주인공 삼룡이는 소극적인 인물에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방화(防火)를 저지르는 적극적인 인물로 변화하고 있다. 즉, 삼룡이는 주인에게 순종하는 하인으로 전형적 인물이었지만, 자신을 발견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입체적 인물로 발전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불 속에 뛰어들어 고결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 죽음에 의해 일체의 고뇌가 사라지고 예속적인 관계가 청산되는 극한적 결말 처리 방법이다. '불'과 '죽음'에 의한 종결은 당대 신경향파 소설의 결말 처리 방식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여 주지만, 이를 계급 의식의 고취라는 도식적(圖式的)인 주제로 확대시키지 않은 점이다. 방화와 죽음이라는 결말 처리 방식이 신경향파의 소설과 유사한 것일 뿐이지, 결코 그들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삼룡이가 주인 아씨를 안은 채 웃으면서 죽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한 순간이나마 이루는 결말 처리는 이 작품을 낭만적인 소설로 읽히게 하는 것이다.  나도향에게 이 작품은 초기의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의 진실한 애정과 그것이 주는 인간 구원의 의미를 탐색한 작품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모두어 말하면 바보 스러운 외면 속에 숨겨진 진실성이 독자를 감동시키는, 일종의 '바보 문학'인 셈인데, 바보스러움은 어두운 시대적 상황을 정면으로 대결할 수 없을 때 취해지는 일종의 이면적(裏面的) 공략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소설은 이색적인 것이 되었다.  [출처] 벙어리 삼룡이|작성자 철앤서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 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 기본자료 1. 주종연 외 엮음, 『나도향 전집 상 · 하』, 집문당, 1988. 2. 나도향, 『환희』, 소담출판사, 1996. 3. M.S. 까간, 진중권 옮김, 『미학강의 I』, 샛길, 1989. 4. J.Salsby, 박찬길 역, 『낭만적 사랑과 사회』, 민음사, 1985. 5. 김윤식, 『염상섭 연구』, 서울대 출판부, 1987. 6. 김학동, 「한국 낭만주의의 성립」,『문예사조』, 문학과 지성사, 1986. 7. 박상준,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신경향파』, 소명출판, 2000. 8. 이재선, 『한국단편소설연구』, 일조각, 1975, 9. 이재선, 『한국현대소설사』, 홍성사, 1986. 10. 정호웅외, 『장편소설로 보는 민족문학사』, 열음사, 1993. 11. 구인환, 『한국 근대 소설 연구』, 삼영사, 1977. 12. 김상일, 「나도향 해설」, 『나도향 단편선』, 을유문화사, 1973 ※ 논문 1. 곽순애, 『1920년대 전반기 소설의 현실인식 방법연구-김동인 ,나도향, 2. 염상섭, 현 진건의 소설을 중심으로-』, 명지대학교 박사논문, 2002. 3. 김경희, 『나도향 연구』, 연세대학교 석사논문, 1977. 4. 김지희, 『나도향 중 · 장편 소설연구』, 상명대학교 석사논문, 1998. 5. 김충실, 『나도향 작품연구』, 경희대학교 석사논문, 1982. 6.남기홍, 『나도향 문학의 전기적 고찰』, 인하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127    한국어계 본과생 졸업논문집 (참고용) 댓글:  조회:8268  추천:0  2013-01-23
    한국어를 배우는 전국 각지 본과생 여러분께 산동성 청도시 빈해학원 동방언어학원 2010년 졸업생, 2011년도 졸업생들의 일부 논문을 묶어서 여기에 올리니 참고가 되리라 믿습니다. 널리 이용해 주시기 바람니다.                        편자 :  최 균 선
126    (단편소설) 아버지의 소원 댓글:  조회:10880  추천:4  2013-01-19
                            아버지의 소원                                      최 균 필                                                   1            오늘도 아버지는 간편한 운동복차림에 태양모를 쓰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환갑이 래일모레인 아버지가 열심히 아침달리기를 시작한것은 두달전이였다. 그래서 인지 별스레 저녁마다 기상예보는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보시는것이였다. 아버지는 어떤 날에는 낚시가방에 도시락까지 챙겨가지고 다니셨다. 아버지가 심기 편해서 하고싶은 일을 하시는데는 식구들이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학교 3학년에 다니는 딸애 해련이가 야외활동에 갔다와서는 늘 재잘거리던 참새입이 한발이나 되여있었다. 애에미가 웬일인가고 물어보아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다가 느닷없이 울음보를 터뜨렸다.     《엄마, 난 래일부터 다른 학교에 전학할래요 우리반 애들이 나를 마루탠스 (马路天使)손녀라면서 입을 삐죽거리며 놀려대요》 《너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냐?》     애어머니는 금시 두눈이 화등잔이 되여서 다급히 물었다. 《정말이예요.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왔다면서 왜 길바닥을 쓰는 일을 하나요? 아직도 돈을 더 모아야 하나요?》      어린애의 말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엄마, 할아버지가 누런 쪼끼를 입고 공원거리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길을 쓰는 걸 제가 직접 보았단 말이예요, 애들도 알아보고 수군거렸어요. 아이, 창피해!》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늘 종달새처럼 은방울을 굴리더 죄꼬만 입에서 뚱딴지 같은 소리가 흘러나오자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할말을 찾지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두달간 나는 아버지가 아침운동을 하러 다닌다기에 “한 백살 앉 으세요”하고 은근히 축원까지 하였는데 아버지가 길바닥을 쓸다니?세상에 아무리 불효자식이라도 남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늙은 애비를 거리에 내쫓아 길을 쓸게 하지  못할것인데 이게 무슨 괴변인가?     나는 오리무중에 빠져들면서도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번져간다는 예감이 들면서 가슴이 답답해났다. 이제까지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란 나로서는 고생을 사서 하는 아버지가 전혀 리해되지 않았다.    《여보, 일의 내막을 알아보기전에는 아무것도 모른체 합시다. 해련아, 너도 까딱 말하지 말아야 돼, 알겠니?》이렇게 다짐장을 눌러두고 서재에 들어가 피울줄 모르는 담배를 두대나 태우면서 이 두달 동안의 아버지의 행각을 추적해보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매달 로임을 타면 아버지에게 꼬박꼬박 500원씩 소비돈을 드리였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소비돈이 모자라서 청결대에서 부업을 하다면 우리가 돈을 더 드 리면 될일이지만 마작도판도 모르고 담배도 끊으신 아버지가 그럴리 없었다. 점잖은 아버지가 생각없이 행동해서 자식의 얼굴을 깎는 일을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 다면 아버지는 우리 몰래 무언가 작정하시고 “돈벌이”를 하시는게 분명하였다. 그게 무어길래 아들며느리의 눈마저 속이려드는것일가?     평시 아버지는 아침운동을 하고 간이음식점에서 기름튀기 두어개에 콩물로 아침 을 에때우고 낚시질하러 가신다고 하면서 보통 집에서 아침을 들지 않았다. 이제보니 며느리의 부담을 덜어주느라고 그런 연극을 노시는데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더없이 민망스러웠다. 자식은 그냥 사랑나무의 곁가지에 불과한것일가? 생각해보니 하루종일 낚시질을 하셨다는 분이 아침에 입고나간 운동복에 더러 워진곳 하나 없었고 쇠치네 한마리 없이 그냥 마른 낚시주머니만 달랑 들고 들어 오셨다. 옛날 동북에서는 줄낚시에 반두까지 떠서 강물에 고기를 씨를 말린다는 소리 도 듣던 아버지의 솜씨에 죽은 고기 하나도 걸리지 않는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아침 달리기를 하면 집주위에서 해도 되겠는데 하필이면 자전거를 타고 공원거리에 가서 하신다고 한다. 그 모든것에 주의를 돌리지 못한 나도 한심하다. 그 수수께끼가 오늘 우습게 풀리면서 가슴에 유감과 아픔이 주렁주렁 맺혔다.     하여간 신체단련이나 하시고 소일거리로 낚시질을 하는것이지 식탁에 반찬깨나 보태자고 하는 일도 아니니 무심하게 지나쳤던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강 줄거리를 세워보고나서 식구들과 무언극을 벌리면서 며칠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기다리던 일요일이 돌아와자 옆집에 자전거를 빌려타고 아침단련을 나가신다는 아버지를 미행했다. 해련이 말대로 정말 길바닥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확인된다면 어쩌지? 하는 근심에 페달마저 천근같이 무거워났다.     해련이가 헛본것이나 되였으면, 그리고 아버지가 젊은이들처럼 열심히 달리는 강건한 모습을 보았으면 우리 마음속에 비구름이 싹 가시련만…하는 마음으로 요행에 턱걸이를 하고있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가 아버지는 아빠트구역을 벗어나 리촌공원 방향으로 향했다. 공원거리를 벗어나 골목어귀에 있는 허술한 신수리부 옆에 자전거 를 세우더니 노동복에 누런 조끼를 받쳐입더니 신수리부뒤에서 커다란 참대비자루를 꺼내들고 천연덕스레 큰 길을 쓱쓱 쓸어나기시작했다.     환갑나이가 코앞이지만 노망 쓸 나이는 아니다.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이 이 청도에 모이고 그런 자식들을 따라와서 만년에 복을 누리는 조선족들이 20만도 더 되지만 이런 창피스러운 일을 하시는것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나의 요행심리는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졌고 그 밑에서 나의 문드러진 체신과 자존심이 버둥거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비자루를 분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이 명치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한평생 아글타글 아들을 대학공부를 시켜서 당당한 공무원으로 만들고 자가용을 굴리며 내노라하는데 이건 참으로 말도 안되는 일이다. 명에 없는 호강을 누리는것도 아니고 아무리 일에 전 인생이라도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였다. 동료들이 알면 나를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뒤소리를 할것이니 생각만해도 얼굴이 근질거렸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다고 고향마을에서 아버지와 이웃으로 절친하게 지내던 낯 익은 아저씨가 내버려도 주어갈 사람이 없을만큼 형편없는 자전거를 타고 오더니 신 수리부에 척 들어앉지 않는가. 우리 아버지는 최덕보라 하고 그 아저씨는 최덕팔이라 하지만 본이 달라서 사돈에 팔촌도 아니다. 그러나 공교롭게 이름자도 비슷하고 해서 모르는 사람은 친형제로 오해할만큼 절친한 사이였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세월의 소 용돌이속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오늘까지 붙어다니였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참군했다가 퇴오한후 흥안령기슭에 있는 군마창에 배치되여 월급쟁이가 되였다. 그 덕에 고향마을 원근에서 손꼽는 미인이였던 어머니에게 장가 들어 우리 남매들을 낳았다. 덕팔아저씨도 그때쯤 가정을 이루고 생산대장을 하면서 부지런한 농군으로 인생을 영위했다. 두사람은 자식을 낳기전부터 아들딸을 낳으면 사돈을 맺자고 약속까지 한 사이였다. 그런데 두 집에서 다 대포를 찬 놈들이 태여나 는바람에 사돈간은 웃음거리로 남고 분김에 아예 결의형제를 맺았단다.     고향마을 사람들은 거개 일본놈들의 이른바 개척민으로 이 땅에 오게된 사람들의 후손들이였다. 그러다보니 동성동본은 별로 없고 성씨가 같은 집이 여러호 있었다. 생일이 조금 늦은 덕팔아저씨는 동생이 되였다고 한다.  두분의 우정이야 어찌되였든 나는 눈앞에 벌어진 일에 신경이 쓰이며 속이 왈칵 뒤집혀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저만치 멀어지자 덕팔아버지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죄송합니다. 》     《아니? 늬 룡호아닝겨? 간부어른이 이 아침에 웬 걸음인기여?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 아저씨는 반색하면서도 무슨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저으기 불안해 하는 얼굴이였다.    《아저씨네도 이 청도에 와서 살게되였다는 말을 들었지만 인차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참, 한국에 나가시여 돈도 잘벌었다는 소식을 풍편에 들은것 같은데요. 그런데 어찌하여 신수리를 하나요? 》 《말두 말게나. 내일은 말할라치면 장편소설이 될기여, 8년을 불법체류자로 있으면 서 돈깨나 벌었지만 운수가 꺼벅거려서 나중에 공사장에서 부상입고 이렇게 절를발이 빙신이 되고 수지도 않맞는 신수리를 하는 신세가 되였당께. 아따 그런데 인제 과장님도 되였다꼬 자가용까지 타고다닌다면서 여기는 무슨 일로 왔능교? 아버지는 잘 있능겨?》     제법 능청을 떠시는 덕팔아저씨의 얼굴엔 불안과 의혹이 물결치고 있었다. 《예. 잘 계셔요. 근데 아저씨는 로인협회에 다니면서 마작이나 노시고 문구나 치면서 향수해야 할 년세에 이게 웬 고생이십니까?》     아저씨는 대답을 하기 싫은지 흐릿한 하늘을 쳐다보시며 이윽토록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한지 분명 말못할 사연이 있을것 같았다. 아저씨의 곡절많은 인생에도 찬란한 한페지가 있었다. 원근에 소문난 힘장수인 그는 해마다 씨름판에서 황소를 타던 분이였다. 그러던 아저씨가 세월과의 씨름에서는 맥꼴없이 지레 패배한듯 너무 조로한 모습에 가슴이 알찌근해났다.     하긴 아저씨만 불쌍한게 아니다. 지금 길바닥을 쓸고있는 아버지도 한국로무 10년을 인생고해를 헤쳐온 고달픈 “선장”이 아닌가? 수십만을 헤아리는 조선족 남녀 동포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돈을 벌고있다는것은 직접 보지 않아도 가히 상상할수 있는 일이다. 어떤 일을 하든간에 개도 안먹는 그 돈때문에 온갖 기시와 홀대를 받으면서 고역을 겪어야 하는 처지이다. 아저씨가 벽돌장을 등에 지고 가파로운 발판 을 오를때 삼킨 눈물인들 얼마며 흘린 땀인들 얼마였으랴,     더구나 불법체류자 딱지가 붙으면 뼈빠지게 일해도 돈을 받지 못하기가 일쑤이고 녀자들은 릉욕당해도 그 돈때문에 그냥 당하고마는 경우가 푸술하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피눈물에 젖은 돈인줄 모글고 그냥 덕대에서 내려온 뭉치돈인가 할수도 있다. 그러나 울며겨자먹기로 코리아드림에 넋을 잃은 사람들의 그 모순된 심정을 어찌 나혼자의 주관판단으로 가늠할수 있으랴,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드디어 입을 여시였다.    《참, 나 팔자가 드러워서. 나도 본래는 이런 신수리쟁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어, 근데 늬 아버지가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우격다짐해서 이런 꽃 가마에 들어앉았지 뭐냐? 》   덕팔아저씨는 불만아닌 불평을 한숨에 버무려 토해냈다.  《우리 아버지는 아침운동도 하시고 낚시질에 재미를 보는데 아저씨는 잔돈 버는 재미를 보는것 같군요》     나는 짐짓 모른체 하고 변죽을 쳤다. 그러자 덕팔아저씨는 성난듯이 구시렁거리 다가 마침내 실토정을 했다.  《룡남이 늬 지금 모르고 하는 소린디, 사실 말이야, 우리 다 계획이 있고 시작한 일인거야, 하긴 몇날 며칠 목에 피대를 세우며 다투기까지 했지만 말이다. 우린말야 고향갈 채비로 이렇게 푼돈벌이라도 한당께, 자네 모르는 모양인데 늬 아버지 저 기서 지금 길청소를 하고 있지 않나뵈? 》     덕팔아저씨는 턱짓으로 저 멀리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고향에 돌아가다니요? 공기좋은 청도에서 손자손녀를 돌보며 만년을 편안히 보내는게 오죽 좋으셔서 그럽니까? 저희 아버지가 그래요? 고향가신다고? 고향얘기 는 가끔씩 하셔도 고향에 가시겠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요》    《이런 젠장, 늬 아버지 제아들도 속였단말인겨? 그러게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릴 하고 앉았구먼, 우리 고향가서 목장사업 한번 해보자꼬 약속한기여, 자네 정말 몰랐는기여? 시방? 한국에 못사는 사람들 소꼬리 구경도 못하고 산다네. 잘사는 사 람들도 가물에 콩싹나듯이 큰맘 먹고 사치를 부린다네. 나 말야, 자네 아버지서껀 고향가서 목장 한번 본때나게 꾸려놓고 소꼬리 한국에 수출할라꼬,그래서 푼전 이라도 보탤락꼬 이 짓을 시작했지 뭐야,》    《그런 셈판이였군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 언제부터 길바닥을 쓸었는가요?》  《이런, 귀신곡할 노릇있나, 자네 아버지는 아들 며느리의 동의를 얻어서 시작한 걸로 아는데, 그래서 대학문을 나온 놈이여서 인정사정 다 안다고 칭찬했는디…》    《이런 내막 감감 몰랐습니다. 그저 아침달리기를 한다니까 그런줄로만 믿었 지요. 아버지두 참,》나는 우거지상이 되여 목소리를 낮추었다.    《응 그런 일이였군, 늬아버지와 난 말이네 대구에서 백리가량 떨어진 가야산 기슭에 있는 거창소목장에서 한 5년 같이 일했다네. 깊은 산골이여서 불법체류자가 숨어살기로는 제격이였네. 평생 소궁둥이 두드리면 산지라 하는 일도 재미났고, 》     덕파아저씨는 하던 일감을 밀어놓더니 이야기주머니를 풀 잡도리였다.     …동북지구에서 한국에 나간 사람들 거개가 호미대학 출신들인지라 건설현장이나 어장이나 목축장 같은데서 말등 일을 하기가 보통이였다. 고국이라고 허위단심 찾아 가서 돈보따리 챙길줄 알았는데 가서 보니 꿈이 너무 알락달락 했다. 그래서 한번 갔다 온 사람들은  돈밖에 모르고 인정미가 말라버린 못살곳이라고 욕사발 퍼붓는다.     가지고 간 웅담이랑 록태랑 선물받은 친척들이 입이 반색했지만 그때뿐, 괜히 지들에게 부담이 될가봐 차차 멀리하더라는것이였다. 고리대로 수만원을 내메치고 갔는데 진짜 생각해주는 친척도 없고해서 혼자 여기저기 노가다판에서 개돼지 소리를 들으며 피땀을 흘렸다.     그는 제 뚝힘을 믿고 한국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피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 사고가 나서 다리를 상하게 되였다. 오고갈데가 없게 된 덕팔아저씨의 사정을 안 아버지가 목장의 사장에게 사정하여 함께 일하도록 주선해주어 함께 끓여먹으며 5년 세월을 형제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덕팔아저씨는 불법체류자신고를 내고 먼저 귀국하였다.     덕팔아저씨의 고생담을 마음에 새기니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났다. 아버지의 피땀에 절은 돈으로 명문대학을 나와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였고 아빠트도 사놓고 승용차까지 굴리면서 제잘난듯 살고있는 자신을 다시 한번 질책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 철부지인 해련이마저 손바닥만한 얼굴이 깎인다고 할아버지가 하는 일에 입이 한발이나 나와 있으니 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섭섭해 하실가?      아버지가 아침마다 쓸어놓은 공원거리에 자가용을 굴리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였고 아이러니였다. 하느님이 내려다보고 코웃음칠 일이요 황천에 계시는 어머니의 빈축을 살 일이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더 듣고 앉을수가 없었다. 나는 상점에서 맥주병이랑 통졸임이랑 가득 사서 덕팔아저씨에게 건네고 자리를 떴다.    《아버지에게는 제가 왔다갔다는 말 잠시 하지 마세요. 두분을 보기가 부끄럽 습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의 뜻을 이제 더 잘 알았습니다. 》     심한 자책감에 뜨거워진 얼굴을 돌리며 나는 자전거를 밀고 터벅터벅 걸었다. 아스팔드길우에 보이지 않지만 자국마다에 착잡해진 내마음이 찍히고 있었다.                                                                         2.     아버지는 인생의 초년에는 그래도 행운아였다. 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한 이듬해 군대모집에 합격한것이였다. 전공사에 참군지원자들이 수십명이였는데 경쟁을 이기고 마을처녀들의 흠모의 눈길을 받으며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의 배낭에는 공개 할수 없는 많은 비밀들이 들어있었다. 딸을 둔 집집마다에서 우리 아버지를 사위감 으로 찍어놓고 은근히 벼르고들 있었던것이다.     그 시절, 참군하려면 3대에 이르기까지 성분이 좋아야 하였다. 빈하중농에서도 극빈이였던 우리 집안에서 태어난 아버지인지라 거칠것 없었다. 그즈음 웃음거리가 하나 있었다. 마을에서 내노라하던 덕보와 덕칠이라는 두 젊은이가 입오신청서를 내고 은근히 경쟁을 불태우고 있었다. 덕팔이도 가정성분에 나무릴데 없고 허우대가 훤칠해서 징병을 책임진 군관의 첫눈에 들었단다. 어디서 소문이 새였는지 눈치빠른 집들에서는 딸을 덕팔에게 주려고 서로 다투어 중매군을 띄우는 판이였다.     아버지는 신청해놓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속셈을 해두고는 속이 든든해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신체검사를 하던 날 아버지는 무사통과되였는데 소문난 잔치 먹을게 없다는 격으로 자신만만하던 덕팔이는 평평족이여서 미역국을 먹게 되였던것이다. 당장 군인가족이 된듯싶어 떡치고 닭잡고 야단법석을 치던 덜팔이네는 락담실망했다.     이튿날 공사 무장부간사와 징병온 군관이 덕팔이네 집을 지나쳐 덕보네 집을 찾아오자 마을이 들썽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원래 되여도 좋고 안되여도 좋다는 뱃심 을 가지고 있던차라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흥안령변방부대에서 3년간 복무하고 퇴대하여 흑하군마창에 배치받았다. 조상대대로 땅을 뚜지고 살던 농사군의 집안에 국록을 타먹는 사람이 나왔으니 마을사람들이 부러워할만도 하였다.     아버지가 취직한 군마창은 원래 일본관동군 기병대의 병영이였다. 그래서 군마 사양실은 철갑모를 줄지어 엎어놓은것같은 구조였다. 그 당시 값으로 해방패자동차 한대와 맞먹는다는 종자말들은 매일 좁쌀에 홍당무우를 먹였다. 아버지는 손에 선 일 이였지만 열심히 일하였다. 월급쟁이가 된 아버지는 저마다 눈독을 들이던 마을에 일 등 미인에게 장가들어 군마창에 새살림을 꾸렸고 거기서 내가 태어났던것이다.     몇해후 내가 학교갈 나이가 가까워오자 아버지는 한족사람들 천지인 흥안령 골짜 기에서 하나 아들을 한족아이로 키우는것이 마음에 걸린다며 월급봉투를 던져버리고 지구를 수리하려 마을로 돌아오고말았단다. 마을사람들은 어렵사리 얻은 철밥통을 제발로 차던진 아버지를 두고 뒤공론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오리는 오리무리를 따라야 한다며 후론이야 여하튼 죄다 귀등으로 흘려버렸다.      그러나 제일 기뻐한것은 덕팔이였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 친구가 남모르게 반 가웠던것이다. 생산대에서는 아버지가 농사일에는 숙맥이라고 양돈장사양원을 시켰다. 무슨 일을 하나 직심인 아버지는 아무 군말이 없이 맡은 일에 열심하도 했다. 그러나 농사일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건달농사군취급을 하였다.     남들이야 콩팔칠팔 하든말든 아버지는 돼지죽을 끓인다 돼지불을 깐다, 씨붙임을 시니킨다 하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군대까지 갖다온 놈이 결국 이노릇 밖에 못하는 신세가 되였다고 깨고소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술 더 뜨는 식으로 생산대장인 덕팔에게 두방을 차리자고 건의했다. 두부팔아 푼돈을 벌고 사료도 해결하는 일거량득인지라 덕팔이는 대찬성이였다.    물론 처음으로 집체두부방을 차리자니 곤난이 많았다. 다행히 이웃 한족말을의 인심고운 생산대장이 기술자를 파견하여 두부방도 꾸려주고 가마도 걸어주고 기술전 수도 하여주어서 무난히 두부앗기에 들어가게 되였다. 첫두부를 앗는 날, 마을에 노인들과 아이들이 구경거리나 생긴듯 두부방의 뜨시한 구들에 모여앉아 아버지의 첫솜씨를 구경하였다.     사람들이 눈길아래서 첫두부를 앗자니 조금 긴장하기도 했지만 워낙 눈썰미가 빠른 아버지는 한족기술자에게서 어느새 솜씨를 익혔는지 첫시작에 대성공이였다. 마을사람들도 덩달아 환성을 올렸다. 두부방은 여러가지로 인기를 끌었다. 비누도 표제를 하던 시절인지라 마을 아낙네들이 머리를 감거나 빨래를 하는데 제격이였다. 그래서 두부콩을 갈기도 전에 다투어 물통이랑 대야랑 갖다놓고 대기하고있었다.    아버지는 한족두부를 앗는 기술을 배웠지만 차차 순조선족두부를 만들어내게 되였다. 우유빛도 아니고 그대로 눈덩이같이 하얗고 아기의 볼기짝처럼 야들야들한 두부는 대환영을 받았다. 집집에서 드문히 콩이랑 쌀이랑 들고와서 두부를 바꿔 가면서 흥성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끼니마다 두부를 먹을 형편이 아니여서 어떤 날은 잘 나가지 않으며 소수레에 싣고 중심툰에 가서 팔았다.     아버지가 《사구려》를 부르지 않아도 중심툰에 사람들이나 공소부에 물건사러 왔던 아낙네들이 조선두부를 먹어본다고 곧잘 모여들군했다. 그러노라니 구설수에 많이 오르기도 했다. 한족사내들이나 하는 일을 멀쑥하게 생긴 조선나그네가 앞치마 를 두르고 두부장사를 하니 어디 모자란다는둥, 월급을 팽켜치고 콩물이나 주무는 신세가 되였다는둥 벼랄별 의론이 귀전을 때렸다. 그러나 아이를에게 민족교육을 시키려는 아버지의 속심을 곁사람들이야 어찌 알수 있으랴, 그래서 그따위 후론에 아예 마이동풍이였다.    한편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고 소문이 소문을 낳아서 최두부쟁이, 조선두부라면 귀를 가진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였다. 이웃마을들에서 주문이 들어오게 되자 하루 한판씩 하던것을 두세판이나 하게 되였다. 두부찌끼가 남아돌게 되자 소들에게도 먹이게 되였다. 바싹 여위였던 소들의 엉덩짝에 살이 오르고 힘꼴을 쓰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해졌다. 그래서 모범사원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런 경력을 가진데다가 돌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살 사람이라는 평판이 자자한 아버지는 호도거리농사가 시작되자 양돈장과 두부방을 도맡았다. 물론 도맡았대야 사양장에 득시글거리던 크고 작은 돼지들이 제비놀음에 뽑혀 개인집으로 시집을 가다보니 텅빈 돼지우리와 엉성한 두부방뿐이였다.     아버지는 대부금을 내여 전기화 두부방을 꾸리고 굴암퇘지 다섯마리에 새끼돼지 스므마리를 사다넣고 사육하기 시작했다. 도거리농사 2.3년에 쌀독이 넘쳐나고 인심 이 풋풋해졌다. 머리를 잘쓰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벽돌집을 짓고 텔레비를 산다 모터 찌끌을 산다하며 야단이였다. 한편 로동력이 없거나 농기계, 성축이 없는 집들에서는 점점 살림이 각골해져서 빈부차가 나기시작했다. 그리하여 일컬어 신지주들이 나타났 고 땅값으로 쌀이나 받아먹는 신빈고농들이 륙속 나타났다.     아버지는 땅과 씨름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치부계획이 있었다. 두부방 을 확대하고 마을에 김과부를 조수로 쓰면서 양돈장의 몫인 사료지에 배추까지 심 어서 김치장사도 벌였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철교공사장이 생겨나자 거기 식당에 두부를 공급하게 되여 한동안 재미를 짧짤하게 보았다.     아무튼 아버지는 극성이였다. 노인들이 돼지우리에 관자널을 마판으로 깔면 돼지 들이 탈없이 잘 큰다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뒤공론이 분분하건말건 면례해간 낡은 묘지를 쫓아다니며 관자널을 파내다가는 돼지우리에 마판으로 깔아주었다. 아닌게 아니라 진탕속에서 자고 먹던 돼지들이 깨끗한 널판자위에서 딩굴고 자면서부터 돼지 들이 무럭무럭 잘도 컸다. 그러나 아버지는 귀신사촌이라는 별호를 달게 되였다. 그 바람에 담차기로 이름난 김과는 해가 설핏하면 일손을 팽개치고 줏자를 놓았단다.     그렇게 몇해가 꿈처럼 흘러가고 조선족들은 돈냄새에 깊이 절어들어갔다. 땅을 팽개치고 도시진출한 사람들이 늘어나기시작했다. 상점을 차린다. 파마점을 한다. 식 당을 경영한다…하여튼 돈이 될만한 구멍을 다 뚫어가고있었다. 처녀애들이 먼저 시내바람을 일으키더니 논과밭에서 땀흘릴줄 밖에 모르던 아낙네들의 치마폭에도  돈바람이 감돌아치기 시작하였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할 때 아버지는 고향 땅에 심을 남다른 꿈을 키우기시작했다.                                                                     3.   마침내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한국문이 열리고 코리아드림이 만주대지를 휩쓸어 갔다. 그러지 않아도 시내바람에 농토가 버려지고 처녀들의 씨가 마르게 된 판에 한국에 시집가는 바람마저 불어쳐서 숙성한 처녀들은 꿈에 천보기보다 더 드물게 되 였고 마을에 남은것은 장가들곳 없는 로총각무리들뿐이였다.     바람이 세찬데 고요히 서있을 나무가 어데 있으랴. 한국로무수출바람이 불어칠 때 아버지는 남산언덕 무연한 초판에 목장을 꾸릴 타산을 하고 부지런히 양돈장을 경영했으나 한판 크게 해보자면 꽤 큰돈이 있어야 했다. 이리저리 궁리를 짜던 아버 니도 마침내 조류에 휩쓸려 한국행을 하게 되였다.     외가의 가까운 친척들이 한국에 있는게 다행이였다. 한달에 인민페 만원씩 벌수 있다는 대구 가야산속의 목장에 나와 일하라는 편지가 오자 부랴부랴 수속을 마친 아버지는 10년을 기약하고 한국땅에 들어서게 되였다. 다행히도 아버지가 일하게 된 거창이라는 목장의 사장은 한국인치고 보기 드물게 후덕한 사람이였다고 한다. 게다 가 아버지가 제집을 하듯이 직심으로 일하는 바람에 작업반장까지 시키며 신임했다.     먹고 자는데도 돈이 들지 않고해서 한달에 만원소시가 남았다. 일은 고되였지만 저금액수가 불어나는 재미로 외로움과 향수의 감정을 말리며 일하고 또 일하였다. 아들 룡남이가 서안과학기술대학에 붙게 되자 더구나 힘이 솟았고 금자탑과 희망탑이 나란히 솟게 되였다.     남사장이란 사람은 경상도 대지주의 아들로서 한국농축협회 리사로 덕망도 높고 뜻도 높은 사람이였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동북의 송화강류역에 자기의 해외목장을 하나 차리고 싶어하던차였다. 그런데 인연으로 얽힌 세상에서 아무 반연도 없이 거금을 투자하기가 주저되여 여태껏 벼르고만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속만 앓던차에 좋은 인연으로 부지런하고 직심인 최덕보라는 사람이 제발로 찾아와서 여간 기쁘지 않다고 했다. 그는 무슨 속셈이 있어 서였던지 명절때면 아버지를 청하여 술상을 마주하고 속심말을 털어놓는 무랍없는 사이가 되였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도 고향에 목장을 꾸려볼 꿈이 있다며 젊은 시절에 군마창에서 말을 사육하던 이야기랑 해주었다. 마침내 소리를 낼수 있는 두손벽이 마추치게 된셈 이다. 그때부터 남사장은 음으로 양으로 목장경영기술이랑 방법이랑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불법체류자 색출하려고 면에서 사람들이 내려온다는 정보가 있으면 아버지를 산속 방목장에 빼돌리고 내려온 내무서사람들에게 소꼬리탕도 대접하고 소갈비짝도 쥐여주면서 감싸주다보니 아버지는 10년을 내 무사하게 일할수 있었다.     그렇게 있다가 드디어 불법체류자 신고를 내고 아들집에 돌아왔던것이다. 10년 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였으련만 아버지는 별로 늙지 않고 끼끗하셨다. 산좋고 물이 맑은 가야산 산속에서 산탓인지 아니면 고향에 목장을 꾸리겠다는 꿈을 안고 산탓인지 모른다. 아무튼 손녀를 안고 눈물이 글썽한 아버지의 모습에 다하지 못한 효성을 다짐한 나였다.    10년세월을 가족과 떨어져 세월을 쪼개며 살면서 아글타글 돈을 벌어 나의 뒤바 리지를 해주셨고 공직생활후 100평도 넘는 너렁청한 고급아빠트까지 마련해준 아버 지는 나에게는 참으로 위대한 분이다. 그렇게 위대한 아버지의 목장꿈은 이 아들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깨여버렸을것이다.     그러나 본성은 버리지 못한다고 그렇게 가석하게 깨여진 꿈끄트러기를 아버지가 가슴깊이 품고있다가 다시 그 꿈을 부풀리게 되고 별로 가망이 없을줄 짐작하면서도 길을 쓸어서라도 돈을 모아 고향을 지킬 목장을 꾸리겠다는 집착을 다시 먼지와 땀으 로 보듬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수 없다. 옛말 그른데 없다고 부무님들은 근심과 걱정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그런데 나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고향꿈을 얼마나 챙기였는가? 아무리 자문해도 대답이 궁한 나이다.     절름발이 덕팔아저씨의 어설픈 꿈도 눈물겹지 않으랴, 나는 천방백계로 이 노인 들의 꿈을 이루어드리리라 다짐했다. 무거운 짐을 부리워놓은듯 가슴이 저으기 개운 해졌다. 나는 자전거에 올라앉아 페달을 힘있게 밟았다. 바람이 씽씽 귀전을 스친다. 그날 저녁 나는 안해와 딸애를 몰래 불러내다 산책하며 아침에 내가 보았던 아버지 의 모습과 속사정, 덕팔아저씨의 갸륵한 마음을 자초지종 이야기해주었다.     《듣고 보니 우리가 너무 리기적이였어요. 아들며느리는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 하는데 아버님은 길을 청소하고 계시다니 말이 안돼요. 여보, 우리 무슨 방도를 댑시 다. 네?》안해는 딸애를 꼭 껴안으며 비장한 결심을 내리는듯 진지해졌다.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요?아버지는 10년의 피땀을 한순간에 우리 아빠트에 소모해버렸소. 아버지는 돈은 내주었지만 그분 자신의 꿈은 내버리지 않았으니 내가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구려》     사실 여기 리창구에 새 아빠트를 살 때 아버지를 노엽게 했더랬다. 아버지는 고향 에 대한 아집을 버리지 못해 하였고 나는 만년에 향수시킨다는 실속없는 말로 아버지를 설복했다. 예로부터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아버지는 눈물을 몰래 삼키면서 나에게 지고말았을것이다. 며느리사랑은 시아버지라고 며느리말이라면 끔뻑 죽는 시늉이라도 할 아버지 자신도 며느리마저 어린손녀에게 그럴듯한 집에서 자라게 하는게 않좋으냐며 간청하는 바람에 큰맘 먹고 꿈을 접으셨을것이다.     새집에 들어서서 한동안은 무엇인가 내켜하지 않는 모습이였지만 차차 시내사정 에 익숙해지고 손녀의 손을 잡고 바다구경도 나가는 멋이 새롭던지 차차 기색이 좋아 지셨고 나도 만금심을 다 털어버렸다…더구나 해련이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아침 저녁으로 데려다주고 데려오며 무럭무럭 커가는 두벌자식의 사랑에 모든것을 체념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아버지가 구부정해서 거리를 쓸며 나가는 모습이 흡사 무언의 항의를 하는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나는 할말을 잃었다.                                                                    4.   산에들에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 추석을 며칠 앞두고 공교롭게도 나에게 할빈 출장갈 기회가 차례졌다. 나는 할빈에서 공무를 마치자바람으로 10년만에 외 할 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가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벌, 고개 를 푹숙인 탐스러운 벼이삭들이 풍년을 자랑하고 있었고 길가 옥수수밭에는 오동통한 아기들을 서너개씩 없고 근엄하게 서있는 옥수수대들이 유별나게 정겨웠다. 역시 농 민의 피줄은 속이지 못하는가보다.    그러나 마을풍경은 이색적이다. 옛날같으면 머리에 보퉁이를 떠들썩 뻐스에서 오르내릴 조선족 아낙네들은 보이지 않고 어두운 얼굴의 노인 몇분이 나와 함께 차에 서 내렸을뿐이다. 마을뒤 높지 않은 산언덕은 민둥산 그대로였고 마을길은 울퉁불퉁 수레길 그대로였다. 그대신 여기저기 한족마을들은 번듯한 벽돌집들로 꽉차있었다. 황페해진 고향마을, 시대의 추세인가?  아니면 변해버린 인심의 걸작들인가?    중학교때 우리가 심은 수양버들만이 가지를 흐느적이며 어서오라 반겨주었다. 거목이 된 버드나무를 보노라니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저 버드나무들이 백양나무들처럼 쭉쭉 빠진 재목들이였다면 언녕 베여졌을것이다. 그러면 나같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터전을 잡은 사람들은 잘 생긴 나무들인가? 꼭 그런것만은 아닐것이다. 지금 아버지가 못생긴 저 버드나무처럼 고향에 돌아와 땀 으로 걸구고 피로써 지켜낸 고향땅을 다시 지켜나서려고 하는것이니 어찌 아버지 세대들의 마음을 못났다할수 있으랴,     바람에 우수수 락엽이 날린다. 나의 마음에도 락엽같은 스산함이 고패쳤다. 외할 머니네 집은 인민공사때 지은 초가집 그대로다. 오래동안 손길이 가지 않아서 지붕은 헌삿갓을 눌러쓴듯 했고 군데군데 밭고랑이 깊이 패여있다. 벽체는 주저앉을대로 주저앉아 당금이라도 와르르 무너질것 같이 위태롭다. 낯선사람이 들어서자 검둥개가 대달아오며 컹컹 짖어댔다.     찌그러진 정주문이 비시시 열리며 외할머니가 문설주를 집고 내다보았다. 나는 짐짝을 든채로 달려가 외할머니를 부축했다. 나를 업어 키우신 외할머니의 여윈 어깨 는 가냘프게 떨고있었다. 외삼촌내외가 한국에 나간후 손자의 뒤바라지를 하며 살아 가는 할머니는 몹시 지쳐있었다. 외할머니가 이렇게 되도록 너무 무심했던 자책감에 할말을 잃었다. 옛말에 외손자를 다 키워놓으면 개를 추긴다더니 내사 그 쪽이다.     방안에 들어가 앉기바쁘게 외할머니는 하소연했다.    《이거 분통이 터져 어디 살갔어? 산사람은 다 빠져나가고 죽은 사람도 쫓기는 세월이 되였으니 말이다.》듣던 소문대로 농촌사회가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였다. 문화대혁명때 개잡은 포수처럼 우쭐대던 방길만이라는 자의 일은 더구나 격분을 자아 냈다. 약삭빠르기로 소문난 그는 몇년전 한국에 시집보낸 딸의 덕분에 현성에 올라가 개장집을 차리고 얼렁뚱땅 돈뭉치나 쥔 자였다. 그자는 외삼촌을 전화로 어떻게 구슬 렸는지 도맡은 과수원을 헐값으로 넘겨받은 자리로 한족사람에게 10년동안 경영권을 팔아넘겼단다. 과수원 임자가 된 그 한족은 과수원 가운데 있는 나의 어머니의 산소 마저 옮기라고 호령질했단다.     외가집 한집만이 겪는 일이 아니였다. 개척민시절부터 일구기 시작한 논밭들이 야금야금 한족들이 차지하고있다. 특히 방길만같은 자들의 롱간질에 넘어가 농토를 버리고 고향을 떠나버린 사람들이 얼만인지 모른다. 그러는 사람들을 내가 무엇이라 고 평판해야 하는가? 나도 고향을 벗어나 도시민이 되려고 기를 쓰고 공부했고 뜻대 로 도회지인이 되여 떵떵거리며 살지 않는가?     인생에 무슨 규률이 없듯이 삶의 방식은 저마끔이고 선택은 자유이다. 흘러가버 린 조선족마을들, 이런 살풍경에도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려고 로심초사하신다. 늙 으막에 무슨 고생을 사서 하려는지, 걱정에 앞서 의구심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여지 껏 동전한푼 고향건설에 보태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스스로 가소롭기도 하다.     나는 그때까지 마을에 남아 농사짓는 중학교동창 용호를 찾아 촌민위원회를 찾아 갔다. 그는 어릴때부터 뜨개소였는데 의협심도 강해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이였다. 그가 촌장으로 있을 때 방만길이가 기신기신 기어들어 또 수작을 꾸밀때 논도랑에 거꾸로 처박아놓고 다시 마을에서 얼씬거리면 모가지를 비틀어놓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단다. 그말을 들으니 해묵은 체증이 다 가셔진듯 속이 시원했다.     마을에 김국철이라는 어리숙한 사람이 있었는데 한국수속을 마치고 촌정부에 땅 을 뜰여놓으려고 하던차에 어디서 낌새를 챘는지 방만길이가 도둑고양이처럼 기어들 어 6만원 현금을 내놓으며 10년기한부로 임대계약을 하자고 쑥덕이고 있을 때 용호가 들이닥쳐 다짜고짜 밖에 끌고나가 논도랑에 처박았던것이다. 그후 방가는 다시 마을에 얼씬거리지 못했다며 마을사람들이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내가 용호에게 찾아온 사연을 말했더니 그저 사람좋게 웃기만 하다가 대꾸했다.    《여, 동창생, 생각은 좋지만 한발 늦었네. 일전에 덕팔아저씨가 찾아와서 땔나 무골과 산등성이 한전 10쌍을 70년기한으로 도맡겠으니 잠시 아무에게도 주지 말라 고 했네. 선불금은 불원간 갖다바치겠으니 단단히 부탁해놓고 갔어…》    늙은소 콩밭쪽으로 한다더니 아버지가 덕팔아저씨를 보내서 목장자리까지 맡아놓 은 판이다. 참대빗자루와 목장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으니 참말로 경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의 가슴속에서는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 드리라는 결심이 룡트림하였다.    《허, 빈대떡이 안팎이 있나. 역시 고향사람이니 잘된 일이군, 그런데 나 송아 지 300마리를 실어가지고 온다면 나와 계약을 맺을수 있는가? 》     나는 뒤처리를 제쳐놓고 장훈을 불렀다. 용호는 눈이 휘둥그래서 꿀먹은 벙어리 상을 하다가 일이 아이들 장난이 아니니 촌민위원회에서 토론하여 결정하겠다고 좀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이튿날 촌민위원의 결정을 거쳐 내 요구대로 협의서를 작성하 였다. 목장은 주식형태로 하기로 하고 20% 주식을 땅값으로 치고 투자측은 80%의 주식을 보유하면서 생산경영권을 행사하며 총투자액 100만원을 현공상관리국에 등록하고 법인이 법적보호를 받는다는 조항을 덧붙이고 락착을 지었다.     나의 통큰 설계에 어안이 벙벙해진 촌위원들은 일이 성사되면 민둥산은 무상으 로 내줄수 있다면 선심을 썼다. 역시 고향에 뿌리깊은 정을 가진 마을사람들은 고향 에 찾아와서 고향을 지키겠다는 진심된 마음과 한줄로 이어진것이다. 이튿날 나는 어머니 산소에 올라가 술을 부어놓고 오래오래 앉아있었다.     눈아래 내가 처음 배움의 첫걸음을 뗀 소학교가 한눈에 안겨왔다. 지금은 페교가 된지 오래되여 운동장은 염소나 게사니들의 놀이터가 되여있다. 나는 어제 저녁 조카 의 작문책을 들춰보다가 본 구절이 떠올랐다. 누나같은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떠나가 고 학교가 페교된 일을 두고 쓴 글이였다. 글은 서툴렀지만 내 마음을 울리기엔 충분 했다. 《…누나같은 우리 선생님 떠나가고 학교도 문을 닫았다.우리는 인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다…》     조선족학교가 페교된후 아이들은 고개넘어 한족소학교에 편입되었다. 중국말 잘 몰라 선생님께 꾸지람 받고 머리큰 아이들에게 놀림당하여 어린것들이 무리싸움도 드문히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가기를 싫어하다못해 버들숲에 책가방을 팽겨치고 뻥을 치다고 집에 돌아오군 했다. 저 어린것들이 철없이 보낼 시간도 잠간 이다. 장차 그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누구를 원망할가? 아무 뒤생각 없이 농토를 버 리고 무작정 도시에 들어온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누가 담보할수 있을가?    청년들은 거개 한국기업에 목매고 당분간은 호의호식하며 멋스럽게 산다. 그러나 그것도 절대적은 아니다. 일전에 청도에 진주한 한국중소기업들이 백여개의 기업주가 야반도주를 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그바람 기업에 붙어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조에 실업자가 되고말았다. 글로벌시대, 우리 조선족들이 자기 기업은 없이 남에게 얹혀사는것이 장구지책이 될수 있는가? 나로서는 해답이 막연한 의난문제일수밖에 없다. 이런 형편을 아버지네 세대들이 고향에서 버티면 얼마나 버틸수 있는가? 지금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고향을 다시 찾고 고향을 지키겠다는 그 꿈을 뒤받침해주는 길밖에 없을줄 안다.                                      5.          출장에서 돌아오자바람으로 나는 안해와 토론하고 차를 팔았다. 아버지에게는 차가 크게 고장 나서 수리소에 입원시켰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기업가 친구에게서 빌 고 저축통장까지 털어서 기본자금 50만원을 마련했다. 조만간 기회를 보아서 작은 집으로 옮겨가고 집값에서 위돈을 벗길 작정이다. 이제 내가 할일은 때가 될떄까지 일요일마다 아버지 대신 길을 쓸어놓는것이였다. 오늘도 일요일날 나는 아버지 먼저 공원거리에 달려가 길을 쓸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자루를 꽉 밟는 사람이 있었다. 올려다보니 독기어린 아버지의 눈이 나를 쏘아보고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일요일마다 이상하게 길이 깨끗하다 싶더니 과연 네 수작 이였구나. 내가 너희들을 속이고 이일을 하는것은 해석이 필요없지만 너는 어쩌자고 이러는거니?》 《아버지, 이렇게 하는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 지의 꿈을 알아냈습니다.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그 꿈의 한자락이 되고싶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벌써 붉어있었다. 《그래, 여기서 긴말을 할수 없으니 이만하고 집에 돌아가 얘기하자꾸나》     그날 저녁 나는 그동안의 일을 말씀들였다. 촌위원회와 맺은 계약서와 저축통장 을 내놓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에 발벗고 나서겠노라고 결심까지 곁들었다. 아버지 는 나무람하시면서도 대견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면 감격해마지 않아했다.     아버지도 그동안 길만 쓸고있은것이 아니였다. 남사장의 투자를 다구쳐서 거의 성사시키고 있던차였다. 아버지는 남사장이 먼저 송아지 500리를 살 돈과 목장의 시 설물 건설비로 따로 돈을 보낸다는 확인서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송금승인서도 청도 한국총령사관에 인편으로 보내왔다고 하셨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아버지는 일단 일을 시작하면 정부의 목축업장려정책에 따라 중국농업은행에서 대부금을 낼수 있다면서 저금통장을 안해앞에 밀어놓으셨다. 70년 계약을 했으니 나도 아버지 목축장에 주식을 가지고 싶다며 도로 통장을 아버지앞에 갖다놓았다. 50만원에서 20만원은 해련이 명의로 해놓고 30만원은 아버지 주식으로 해야 앞으로 리사회에서 발언권이 있다고 도리를 따져드렸다. 아버지도 역시 손에 쥔 돈이 사업의 길에 든든한 지팽이라는것을 아시는지라 나중에는 접수하고 말았다. 한껏 즐거워지신 아버지는 꼬마주주인 해련이를 무릎위에 앉히고 농담삼아 말했다.   《너 아빠말 알아들었냐: 이제 대학가서는 목축업을 배우거라. 그래야 네가 덕보목축장의 리사장이 될수 있거든, 안그래? 허허허》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만시름 털어내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의 꿈자락을 한귀퉁이 들어준다는 자호감에서 나도, 안해도 밝게 웃었다.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형통하다는 고훈을 상기하며 나는 아버지의 귀향길이 활짝 열릴것을 기원하였다.     한달후 모든 일이 다 성숙되자 아버지는 즐거움은 앞세우고 석별의 정은 뒤에 남기고 덕팔아저씨와 귀향길에 올랐다. 뿌리박은 터, 사랑하는 고향을 못잊어하시다 가 드디어 고향으로 가시는 아버지의 그렇게 밝을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가 고향으로 가기까지는 너무도 먼길을 걸어오셨던것이다.     덕팔아저씨도 다리를 저는 사람같지 않게 팔팔했다. 내가 작은 어머니라고 부르 는 덕팔아저씨의 안해는 그저 좋다고 덩덕꿍이다. 그렇다, 고향이란 우리 모두에게 피줄처럼 당기는 길이 아니랴! 아버지는 홀가분한 차림이지만 수많은 금빛송아지들을 몰고가는것이다. 멀지 않은 앞날 남산덕이에 포동포동 살찐 송아지떼가 구름처럼 흐를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위에 아버지의 드팀없는 향토애가 무지개처럼 곱게 비낄것이다. 나는 속으로 공직생활에서 정년퇴직하는 날, 고향으로 곧추 달려가리라고 속다짐했 다. 내 다짐은 결코 헛말로 되지 않을것이다. 인제 내 마음속에서 나서자란 고향이 새로운 모습으로 부상되였음에랴!                    2010년 6월 1 일 수화에서 탈고                     2012년 연변문학
125    한국드라마 한계에 이르렀나? 댓글:  조회:10657  추천:2  2013-01-18
                           한국드라마 한계에 이르렀는가?                                       진 언      드라마는 행동하는 인간을 내세워 생활, 정감활동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예술형식으로서 사회, 인간의 인생화랑이다. 그래서 시대적상황에 근사한 인물과 내용으로 오락성만 아니라 반성할 의미를 창출해야 한다. 드라마제작의 첫목적이 리윤의 추구이 지만도 동시에 사람들의 정서에 영향을 줄수 있는 유익한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대부분 한국드라마들은 극정을 이루기 위하여 조작된 어거지삼각관계(약 99%), 불치병, 교통사고, 거의 모식으로 된 인위적인 기억상실계기, 신데렐라스토리…등이 기본모식이 되여있다. 한국드라마의 고질병인 뻔연한 설정 즉 입양 등을 계기로 한 출생비밀, 주요인물의 돌발사, 자극을 시도한 비론리적, 비현실적이며 극단적인 선악대결의 구도, 시대착오적인 전통적가치관념, 결혼관, 재벌집안의 반대, 고부간의 갈등, 구시대적인 캐릭터의 반복, 지루한 일상대화를 비롯한 진부한 에피소드의 전개등은 한국드라마가 새돌파구를 찾지못하고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게 한다.     드라마의 기본선은 애정의 갈등, 결혼풍파, 삼각관계와 지극히 리기적인 자기 보호에서 출발한 모략 등이다. 애정은 문학예술의 영원한 주제이지만 그먼저 인생의 주제이다. 한국드라마의 거의 모두가 애정풍파 스토리의 기본선으로 되여있고 기타 사업 등 생활내용은 애정선을 이어나간는 가교(架桥)로 설정되여있다. 드라마를 보면 한국사람들은 애정ㅡ이성지합을 위해 죽고사는것처럼 인지된다. 애정은 생활의 기본내용이고 인생의 동력이지만 삶의 목적자체일수는 없으며 인생자체일수 없다.     태여나 남녀간의 사랑을 위해 산다는것은 너무 단순한 인생이다. 인생이 있기에 애정이 있지만 애정이 있기에 인생이 있는것은 아니다. 남녀의 결합을 도외시하고도 인생을 빛나게 살아간 사람들이 많다. 드라마마다 애정이 주선이라면 전형성을 잃는다. 전형환경과 전형인물이란 말을 쓰기싫고 쓰지 않는다해도 그 모든, 온갖 예술은 종국적으로 전형성을 모르고 형성될수 없다.     말하자면 가정적연극의 울타리를 좀 벗어나 사회문제까지 소급되여 예술창작의 외연을 넓혀가야 복잡다단한 현실생활에 밀착될수 있다. 거기서 거기이고 그나물에 그밥인것같은 묵은 소재가 아닌 더 독특하고 다양한 소재를 다루어야 좋으련만 그냥 스토리가 비슷비슷하게 순환적이 되고있다. 모두어 말하면 시청자에게 말초신경적이고 무의미한 메시지가 아닌 보다 의미로운것을 전달하여야 한다는말이다.     많은 드라마를 접한것같지만 드라마속의 전형인물과 더불어 련상되는 드라마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전형환경속에 전형인물의 부각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생동하고 진실하게 그려지지 못한 인물이 대부분이기때문이다. “사랑이 뭐길래”,“달빛 가족”과 같은 많은 우수한 드라마들은 세월이 오래가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전형성을 띤 인물들과 그들의 생활적인 대화ㅡ정감교류의 진행과정과 장면들이 생생하다.     며칠전 상영이 끝난《메이퀸》은 여느드라마보다 생활적이고 스토리가 잘 짜였지만 악행의 전개가 더 어찌될수 없는지경에까지 올라가서 결국 악이 저절로 포기한듯 선에 사과하고 선은 악을 용서하고 포용하는것으로 총총히 막을 내렸다. 다른 드라마처럼 일상대화의 련속으로 한집의 용량을 채우려하지 않고 스토리위주로 시종 긴장성을 유지하다가 보니 흡인력이 강하게 되였지만 그만큼 모순갈등의 절정에 치달아오를수록 그 해결이 막연했을것이다. 결국 권선징악이 아니라 중용지도이다.     물론 캐릭터,에피소드 위주이면 갈등요소가 빈약하다고 느낌을 줄수도 있겠지만 소토리 위주의 한계의 극복에서 드라마의 성패가 결판나지 않을가 생각한다. 스토리의 긴밀한 전개로 하여 초반에는 재미있지만 갈등이 해결되면 앞에서 극에 이르도록 진행된 악행의 의미가 흐지부지해지고 결국 “그렇구 그렇지 뭐”하는 허무감만 안겨주면 좋지않다.《동해야 웃어라》는 결말을 보며 시청자들이 공연히 신경질적이 될 소지가 많아 시간을 랑비하고 정신건강에 리롭지 못한 실락감을 안게 된다.     끝에서 동해와 도진이가 얼싸안고 화해할게면 왜 그렇게 갈등을 격화시켜 권선징악의 정당함을 유인해놓고 결국 한바탕의 인위적조성이였다는 사실로서 시청자들의 정서를 희롱했는가? 왜 갑자기 새와가 지고지순한 녀자가 되는지 이렇게 갑작스러운 캐릭터의 변화는 감정발전의 론리에 맞는지? 생명의 은인인 동해에게 인간으로서 차마 해선 안될 악행을 자행했음에도 인과보응은 왜 두루뭉실인가?    보느라면 갑자기 바뀐 홍사장과 봉이엄마의 캐릭터가 결말을 이상하게 몰아가는듯 하다. 홍사장은 갑자기 량심의 가책(?)을 느끼고 동해에게 자기의 지분을 몰아줄것이며 봉이엄마의 가정적인 설득에 빠진 김선우가 잘못을 뉘우치고 자수할것이고 이로써 도진이 처리문제가 남는데…김준국장의 암투병이 형제의 꼬인 실타래를 푸는 열쇠가 되여 화해하며  동해가 용서해 줄것이라는 예감이 짙어가고…     입만 열면 “이 자식이”란 말이 튕겨나오는 도진이나 그럴때마다 꼬박꼬박 존대하는 멍청한 동해나 서로가 용서하지 않을것같아 보이는데 나중엔 어이없게도 시청자들을 화해무드에 마주앉힌다. 하긴 칼을 놓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 있지만 왜 선량한 사람만이 관용해야 하는가? 악인 갑자기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선인이 되는모식, 이것은 관용의 미학도 아니다. 동해는 태생적으로 모지라는 사람인가? 동해는 머슴같은 처지를 천성적으로 달게 접수하고 즐기는것는 바보로 되여있다.     물론 인생이 론리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므로 정답이 있을수 없고 정감이 고정불변이 아니기에 고정적모식이 있을수는 없지만 무릇 어떠한 드라마이든 인물의 성격발전의 론리, 심리변화의 론리, 인식발전의 규률, 더나아가서 생활의 론리가 지켜져야 인물의 정서생활과 그로써 전개되는 장면, 장면들에 진실감이 확보된다.     작가들이 서로 합작한듯 현실적으로 보편적이 아닌데도 마냥 상류층의 가정을 전형환경으로 삼고 재벌가에 들어가려는 녀자들의 추구가 공동한 주제이고 한국사회에 삶의 모식인듯이 비싸게 구는 녀자들에게 필이 꽂히는듯한 비현실적인 갈등들… 한국인들의 혼인관, 특히는 재벌가의 혼인생리가 드라마처럼 돼먹었다면 한국사회가 미시적으로 야단난다는 싱거운 우려심까지 안겨준다. 이는 거의 관례로 되였다.    드라마《반짝반짝 빛나는》은 별다를것 없는 뻔한 스토리에 감질나는 녀자들의  흥미유발이 목적인듯 애정행각에 양념을 넣어 버무린다음 작가 개인의 미흡한 가치관을 비벼넣은것같다. 우선 개념이 정립되여있지 않다. 원칙적으론 애가 바뀌는 바람에 덕을 본 정원이가 대박이 난 “신데렐라”이고 그덕에 불행해졌다가 이제서야 제자리를 찾은 금란이의 조우는 너무나 조작감이 느껴진다.    친딸의 캐릭터를 악녀로 형상화하고 가짜딸을 선한 품성과 이미지의 녀자로 부각하였는데 이는 혈통에 대한 부정인가? 또 가난한 남자는 아빠자격도 없는것처럼 그림으로써 현실성, 진실성을 등져버렸다. 이런 억지스러운 설정에 설득력이 떨어져 배우들의 능란한 연기로 분위기를 창출해도 작가의 전지적인 서술이 한계를 넘었기에 지각있고 개념있는 시청자들은 작가가의 시도에 넘어가지 않는다. 배우들의 캐릭터가 자주 바뀌여 혼란되고 우롱당하는듯한 느낌들을 주고있다.     구도상에서 공통점인 출생의 비밀과 선정적으로 자극하려는듯 바닥없는 악행의 련속, 그리고 선천적으로 부족하여 늘 당하는 약자들, 거의 어머니와 다름없는 이상 녀자(자기스승)와 열련에 빠지는 년하남의 현실성없는 애정극 등은 한국청년들의 진실한 애정가치취향을 오도하고있다. 그러나 녀자들의 형상들은 결국 전통관념에서 대남자주의가 뒤집어져 “대녀자주의”가 군림한듯한 인상을 주면서 한국녀자들은 다 암펌이고 악녀였다가 천사처럼 거룩하게 변하는 스토리뿐이다.     현재 드라마작가들중 90%이상이 녀성들이라니 결국 거의 모든 가정드라마가 잘못은 남자들만 저지르고 남주인공들은 쩍하면 뺨을 얻어맞으면서도 항상 녀자들을 남자종처럼 배려하는 인상을 주는데 녀성작가들의 리상향을 지양하는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작품성이 뛰여난 수작들도 있지만 총체적으로 여전히 한계점에 이르렀으며 그 개선의 여지가 불투명하다고 여겨진다.     요즘 상영되는 “사랑했나봐”는 제목에서 보여주다싶이 사랑을 위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한 악녀의 형상으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해석할수 있는가? 모순갈등의 초점은 선정이가 윤진에게 딸을 보여주느냐 마느냐로 잡아놓고 극정을 끌어나가는데 마치 선량은 나약성이고 선량함은 악을 전승하지 못하며 선량한 자는 무능하고 악한 자는 언제나 한수 앞선다는 격이 되였다.  작자가 선악의 의미를 바람직하게 해석하지 못하고있다. 선정이의 끝없는 모략과 악행의 성공, 그리고 그냥 기만당하는 여러 인물들, 끝에 가서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다. 제목처럼 누가 누구를 “사랑했나봐”인가? 드라마가 길어질수록 짜집기가 분명해지고 구멍이 더 많이 생긴다. 선정이가 설정한 교통사고, 어리숙한 경찰, 유진의 지력부족의 설정 등등....반대로 선정이는 무소불위이고 온 사회체계가 그의 손길에 따라 운행되는듯싶다. 한국 사회가 정말 그럴가? 오도하고 있을뿐이다.       사건의 발전속에 관중이 예상하지 못한 돌발사건으로 극정을 부단히 고조에로 끌어올려야 하는데 저지르는 악행이 인간의 도를 넘어서 “저럴수 있나?”하는 의문이 앞서면 벌써 생활의 론리. 인간감정의 발전론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어긋나게 되고 드라마를 연장하기 위한 억지로 해석될수밖에 없다. 더 물러설자리가 없게 함으로써 아무 여지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질질 끌어가다가 역시 “제가 잘못했어요. 그럴수밖 에 없었어요. 용서해 주세요…”등 틀에 박힌 수법으로 끝낸 다면 역시 관중의 감정은 우롱당한것이고 유치한 오락성이 목적이였다는 결론에서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각색과 각색지간의 충돌은 갈라놓을수 없는 관계로 얽혀서 돌아가고 심지어 악연으로 맺어지기도 하면서 이야기는 심각해진다. 이는 악과 선의 투쟁으로 될수도 있고 “악”으로 락인 찍힌 선과 인습과의 투쟁이 될수도 있다. 흔히 선이 악을 전승하는것이 관례이다. 어떻게 긴장한 국면을 조성할것가?     흔히 드라에서 보다싶이 관중은 알고있는데 이야기속의 인물은 그런줄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례하면 일촉즉발의 시각에 관중들은 주인공을 위해 손에 땀을 쥐게 된다. 드라마에서는 흔히 시간제한의 수법을 쓰는데 이야기속에 모종 사건을 이야기속에 묻어두고 잔뜩 곪기게 하거나 때아닌 때에 폭발하게 하면 관중을 긴장속에 잡아둘수 있다. 그러나 론리성에 맞게 끌고나가면서 긴장을 고조시켜야 한다. 그냥 복선을 깔고나가면서 관중을 안타깝게 만드는데 이것은 상용수법이다.     텔레비죤드라마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은 본질적으로 한가지인바 곧 관점이고 태도이며 동작이다. 인물의 실질인즉 동작으로서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가이다. 인물의 행동이 인물의 성격을 극화한다. 인물은 또한 일종 계시이기도 하다. 작가의 직책은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부동한 인물들의 부동한 품성과 성격 특징들을 관중앞에 현연시켜 인생현장을 체험시키는 일이다.      인물은 관중과 함께 극적동작을 이끌어가는 정절점을 찾게 한다. 동일성도 역시 인물의 한개 방면인것이다. 동작인즉 인물이다. 한사람이 하고있는 일은 말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표명한다. 이처럼 인물은 씨나리오의 근본적인 기초이고 이야기의 심장이며 령혼과 신경계통이다. 인물의 진실성결여는 령혼의 문란과 같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특수하고 보기드문 사람이 아니라 극히 흔하고 평범한 인물을  택해야 한다. 선정이같은 악녀가 전형성인가? 많은 영화들에 악녀들의 악행으로 드라마가 도배질는데 인간악이 극도에 이르렀고 사회악으로 번져가고있지만 사회, 시대의 주류로 될수는 없다. 악녀가 횡행하는 드라마를 보느라면 한국은 악녀들의 천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스토리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혹자는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로 보면 되지 실생활과 련계시킬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만 너무 무지한 언동이다.     반면적인 교육가치는 있을지 모르나 긍정적인 미학가치는 반상적이다. 악에서 진,선미에 대한 지향이 더 강해지게 하지만 여기서는 벌써 별개의 문제이다. 이렇게 된데는 작가의 상상력의 한계 에도 불구하고 사전제작이 아닌 당일치기식제작으로 총총하게 쓰이고 드라마의 완성도가 미흡, 독창성부재, 관중의 이목만 노린 코드의 적용, 캐릭터의 개연성의 미달 등에서 드라마가 외곡된다. 근원은 상업병을 앓고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혹평할게면 왜 한국드라마를 보느냐? 하고 반문할것이다.      필자가 전문 시간을  파하여 연구성각도로 보는것은 아니고 띄이는대로 건너뛰며 본다해도 전후의 맥락을 이어볼수 있다. 드라마의 절주가 느리고 느리다는 설명이 되겠다. 햄리트는 하나이지만 천명의 관중에 천명의 햄리트가 있듯이 오가는 대화를 귀동냥해도 극정의 흐름을 짐작할수 있다. 여주니 본다거나 보이니까 눈에 띄는것이라 한다면 구차한 해석이겠지만...     각설하고, 텔레비죤드라마의 생명력은 인문정신과 인성의 본질을 시사하는 영원한 주제발굴의 심도와 광도에서 고양된다는것을 밝히고싶다. 자타가 모르는바는 아니겠지만도 이는 창작기교문제가 아니라 창작사상, 정신경지의 문제이다. 텔레비죤극은 응당 내재정신과 건전한 정감내함이 융화되여야 상품화된 텔레비죤극으로서는 이를 실현하기 어렵다. 여기서 드라마의 한계선이 그어지는것은 틀림없다. 아무튼 소감도 각각이요 비평도 각자 시청자들의 고유된 권리라서 일가견도 아닌 감수를 횡설수설 적어보았다.                                                  2012년 12월 26일ㅡ 013년 1월 29일 수정 
124    깎아내리기와 춰올리기 댓글:  조회:8117  추천:5  2013-01-13
                                                  깎아내리기와 춰올리기                                                           최 균 선        인류가 차차 개화되여 남을 깎아내리는 기량을 터득하면서 모두에게 존재하는 보편적인 심리가 되였고 교만성은 인간의 불치의 의난증이 되였다. 그 괴이한 심사는 또 시기와 질투, 원망과 불평, 음모와 궤계의 뿌리가 되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남을 깎아내리는것으로 자신을 과시하는데 특별히 특장을 가진 사람들이 따로 있다.     현시대엔 남을 깎아내리기 위해 타방의 허물을 후벼내거나 실수할 때를 기다리는 자들이 더구나 지천으로 득시글거린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파내려는 그들의 저의는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려는것으로서 더 이상 과시할것이 없을 때 쓰는 얄팍한 수작질이다. 그네들은 결국 은닉한 위선자로서 수요에 따라 올무를 놓고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음모가로 전락한다. 제딴엔 아무리 잘난척해도 실제는 못난이들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대화시 대방을 무지한자로 취급하는데 습관되였다. 례하면 “당신은 모르고 있을테지만…당신은 알턱이 없으니…”라는 식으로 허두를 떼면서  대방의 기를 죽이려하며 그러는것이 능사인줄 안다. 혹시 제3자는 화자가 무불통지한 전문가라고 오해할수도 있겠지만 높이 뛴다고 해야 장판방에 벼룩에 불과하다. 이처럼 입만 열면 남을 비방하고 깎아내리려 급급해 하는 그네들은 다른 사람을 검지 하나로 손가락질 할때 나머지 세손가락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걸 모르는 우자들이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 헐뜯는(貶毁ㅡ폄훼)본성은 자고로 어느 계층보다 문인들의 특허이다. 중국 남조의 소통(蕭通)의 ≪문선(文選)≫에 수록된 론문(論文) 에  “문인(文人)들이 서로 가볍게 여기는것은 옛날부터 그리해 온것이다.(文人相輕, 自古而然) 반고는 동생 반초(班超)에게 보냈다는《여제초서(與弟超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사람이란 자신의 좋은 점을 드러내는데는 뛰여나지만, 문장이란 한가지만 있는것이 아니므로 모든 종류를 두루 잘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점때문에 각자의 장점을 가지고 서로 다른 사람의 단점을 경시하는것이다. 속된 말로 “자기 집안에 있는 몽당비자루는 천금처럼 여긴다(家有弊帚,享之千金)”라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보지 못한데서 생긴 페해이다.”보다싶이 문인들이 자기 문장을 내세우고 다른 동료의 문장을 깍아내리는것은 고금이 따로 없다는것을 알수 있다.     남을 깎아내림으로 상대적으로 자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것은 일종 자위일수도 있지만 너무 너절한 자위이다. 유독 우뚝한 가로수를 우듬지를 잘라 키를 낮추는것과도 또 다른 유치한 작동이니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남을 깎아내리기 위해 존재하는듯 유리한 모든것이 자신을 위한것으로 생각하기에 남이 제보다 못나기만 바라고 실제적으로 남보다 “잘나려고” 욕심부리지만 체질상 포용력이 부족하기에 구제불능이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지라 실제 형편없으면서도 탁월한체하면 착시(错视)현상,착각현상이 생기게 할수도 있는데 비정한 심리이다. 누구나 제잘난 멋에 살고 아니면 잘난척이라도 해야 하는 시대이기에 적당히 자기를 홍보하는것은 있을법한 일이나 노상 잘난척하면 과유불급이라 곁사람들의 비위만 더부룩하게 만들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로부터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를 받고싶어한다. 이는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남이 잘되는 꼴은 한사코 못보아주는 통병때문에 천방백계로 남을 헐뜯고 깎아내려야 직성이 풀리고 그러지 못하면 배가아파 실면하는것은 인격심리문 란이다. 그렇게 남을 헐뜯고 나서는 스스로 비겁함을 자각하고 허탈감에 빠지기도 할것이니 말이다. 그러지 않아도 진짜 잘난 사람을 흠모하기전에 질투의 가시가 온몸에 돋히는게 인간심사인데 잘나지도 않으면서 젠체하면 너무나 허무하지 않으랴,     왜냐하면 심보가 그렇게 돼먹었다는것은 자기가 인격장애자이고 근원적으로 자신감의 결핍증에 걸려있다는것을 잘 알고있기때문이다. 남을 속이면 약빠르다는 일면이 있지만 제속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자신을 기편하는것은 우자중에서도 제일 상받을 우자이다. 수림이 깊으면 벼라별 새가 다있고 사람은 천층만층 구만층이니 인간사회에 무슨 사람들인들 없으랴만 그네들을 위해서는 장송곡처럼 슬픈이 일이다.     시도때도 없이 드러내고 잘난척하는것도 보기가 되우 거북하거니와 대방을 깎아내리며 은근슬쩍 자기를 춰올리는 작태는 간능하고 고차원적이라 하겠으나 더없이 야비하고 가증스럽다. 이 부류의 사람들의 상투적수법은 대방을 무조건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것인데 그 역효과로 자기를 높인듯이 생각하며 말투가 늘 훈계조이다.     나는 이런 사람과 상종해본 체험이 있는데 자기 전공이야말로 최고의 학문인듯이 자고자대하며 타인의 지향, 이를테면 문학창작같은것을 “소인”이나 할짓이라고 여기였다. 사이비도 아닌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조개떡하나 가지고 서울가랴, 하는 속담이 있던지…기초의 기초학과를 가지고 너무 거센체하는 그 자태가 가소롭다고나 해야 하나? 작정하고 남을 깎아내리고 자기를 춰올리려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심한 장애가 온것이므로 맹물에 명태대가리가 놀듯이 제멋에 놀아대게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각설하고, 국제사회에서도 타방을 깎아내려 자기의 약점을 미봉하려 하거나 그로써 자기를 춰올리려는 얄팍한 짓거리들이 진행형이여서 세인들을 웃기고 있는데 이 지구촌에서 양키들을 첫손가락으로 꼽아야 할것이고 버금으로 그 추종국을 천거해야 할것이다. 례컨대 근간에 제리속에 따라 중구난방 지어내는 도무지 일관되지 못한 언론들에서 남을 깎아내리는데 우리 배달족들이 달인수준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리속이 배배꼬인들 왜 저정도밖에 안되는가 개탄이 나온다.     자초에 의사소통을 위해 창제된 언어이지만 인식이 선행된다. 환언하면 하나의 사물을 잘 나타내는 여러 관념속에서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요소를 추출하고 종합하여 얻은 관념 즉 개념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 개념의 사용에서 형상성, 생동성보다도 정확성을 더 강구한다. 존재가 곧 리유이다. 특정된 창조물의 존재에 자존심이 삶은 시래기가 되였단들 개념을 바꾸면 존재가 사라지는가?     그러나 단순한 개념문제가 아니라 관념, 내지는 리념문제로 하여 개념을 외곡하는것은 참으로 비릿하다. 타방을 깎아내리다 못해 더 깎아내릴것이 없던지 대방의 성과물이 자기네것을 닮은것 같다고 자아를 위안하거나 기술은 있는데 외계의 압력을 의식해서 남의 손을 빌었고 그래서 실패한것처럼 타발하는둥 구지레한 변명에 침방울을 튕기는데 기자님들의 일가견인가? 오늘은 또 종주국의 소위 전문가의 입을 빌어 지난세기 50년대 구식기술수준이라느니 등유를 썼다느니 실패할것이라니 희망사항들을 추단하며 아픈 배에 자위의 부앙을 덧붙이고있다…     그렇다면서 왜들 호들갑인가? 어용문인이 정치메가폰 아니면 앵무새로 충당되였는가? 그런데 앵무새는 제혀를 씹는격의 헛소리는 하지 않는다. 눈감고 야웅도 분위기에 맞게 해야 재미있다. 개체사이에 남을 깎아내리고 자기를 춰올리는 심사는 역시 인지상정이니 그리 생각하면 되지만 국가차원에서 그렇게 얄팍하게 나오면 곁에서도 빤히 들여다보여 민망스럽다. 초민에게도 그렇게 보이는데 국제적인 안목이야 오죽하랴 싶으며 역시 우리 민족의 원초적비애를 짓씹어보지 않을수 없다.     농촌에서는 “앗사리, 아싸리(그럴 바에는 오히려) ”그만두라고 충고하는 말을 잘 썼다. 일본어에도 “あっさり” 가 있는데 깨끗이,  선선히, 산뜻하다의 뜻이다. 심통이 비틀어진 난쟁이가 키다리의 목을 쳐서 키를 낮추려하던들 제키가 커지는가? 참으로 우스운 사유방식이다. 그런 작태는 참으로 꼴불견이요 너무너무 가련하다.                                                                           2013년 1월 13일
123    《개척 100년 기념탑》아래에서 댓글:  조회:7435  추천:1  2013-01-12
                                      《개척 100년 기념탑》아래에서                                                      (청도)최 균 필       지난 봄, 20여년만에 흑룡강성에 있는 처가마을에 다녀왔다. 청도의 중산공원에 벗꽃이 만개하여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북국의 명주, 할빈 지구에 들어서니 아직도 음달진 곳에는 겨울장군이 퇴각하는 흔적인듯 채녹지 않은 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수화현 흥화민족자치향으로 떠난 뻐스는 손님이 많지 않아 빈자리를 실었건만 3시간이나 숨가쁘게 내달렸다. 처가마을의 변천이 한두가지가 아니였지만 그중에서도 질척거리던 흙길이 세멘트로 잘 포장되여있는것이다. 시원하게 탁 트인 신작로 량켠 에는 금방 물이 오른 수양버들이 여윈 가지를 흐늘거리며 나를 반겨주는듯 하였다.     차에서 내려 마을어구에 들어서던 나는 저도모르게 못박힌듯 서버렸다. 동시에 감동 그 자체인 탄성이 터져나왔다. 상상밖에도 우리 글로《흥화개척100년》이라고 큼직하게 쓴 검은 대리석 기념탑이 우뚝 솟아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것이다. 글자마 다 금빛으로 빛나고 탑꼭대기에는 전형적인 조선황소가 남향하고 호기롭게 누워있 었는데 디자인이 잘 조화되여 있어 하나의 예술품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누가 주도하여 내놓은 걸작인지 모르나 여기 흥화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기발한 창조물이였고 개척민의 후대들이 튼튼히 뿌리박고 있음을 말해주는 력사의 견증물이 기도 하였다. 비록 대도시인의 신분에 걸맞는 정장을 하고 있었지만 껍데기를 벗기면 뛸데없는 농민의 아들인지라 마음이 숙연해지고 머리가 숙여지였다. 고향떠나 타향살 이 한평생에 처음 느껴보는 감격이여서일가 눈물까지 핑 돌면서 가슴이 찡해났다. 그렇게 이윽토록 굳어져있는데 처조카가 마중나와 나의 감동을 깨뜨렸다.     나는 조카에게 이 탑을 언제. 누가 세웠는가 하는 등 많은 궁금증을 한꺼번에 풀려는듯 무더기 질문을 들이댔다. 조카의 말에 의하면 15년전에 마을사람들이 한국으로, 연해지구로 대거 떠나면서부터 천여호가 넘던 조선족대집거지가 일시에 무너지고 이젠 겨우 180호 남짓이 남았다고 한다.     속절없이 흘러가버린 북방의 어미지향, 뿌리박은 옛터가 풍전등화가 되는것을 가슴조리며 지켜보던 마을어른들이 잡초가 무성하던 빈집터와 내버리고 간 터밭들에 2년동안 콩과 강냉이농사를 지어 모은 돈으로 이렇게 기념탑을 세우고 주위에 각가지 꽃들을 심어놓아 더욱 이채를 띠게 하였다.     천하지대본인 농사로 세세대대를 이어오며 이 땅을 가꾸어온 향토에 대한 애착심 은 근간을 굳게 지키려는 로세대들의 충정이였다. 일찍,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허허 만주벌판이였던 이 땅에 새삶의 첫괭 이를 박아 어언 100년의 력사를 기록해왔다.     흑토지대에서도 곡창으로 이름높은 어미지향으로 가꾸어온 긴긴 세월 그들이 흘린 피땀인들인들 얼마랴! 그렇게 일떠세운 가원은 후대들에게 물려준 값치를수 없는 대물림보배이다. 이런 땅에《개척 100주년 기념탑》을 일떠세운것은 여러가지로 깊 고 깊은 함의가 새겨져있다. 그래서 더욱 하나의 력사적장거인것이다.      마을은 이미 돌이킬수 없이 황페해졌지만 기름진 논벌에 생명수로 넘치는 거도는 세멘트로 잘 포장되여 있고 량켠에는 애솔들이 불철주야 농토를 지키는 초병인양 줄져서있다. 선진농업국인 일본땅에서나 볼수 있는 수전지대의 현대화농토건설의 모 습이 여기 조선족집거지인 흥화민족자치향에서 새롭게 보니 새농촌건설을 도모하는 정부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 땅의 로농들의 웅숭깊은 향토애 가 얼마나 끈덕진가를 절감하게 되였다.     청도에 앉아서 풍문으로 듣던바와는 여러가지로 다르게 민족혼이 뿌리채 날려 간것이 아니고 아직도 남은 사람들이 가꾼 향촌의 풍경화는 농민의 아들인 나의 가슴을 달구고도 남음이 있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지만 자기 가원을 굳건히 지켜가는 흥화사람들은 켤코 못난 사람들이 아니다.     땅을 뚜지며 사는 농부에게는 흙이 하늘밑의 전부이고 삶이며 생활의 가락이고 혼이고 숨결이다. 그뿐이 아니다. 피와 살과 뼈에 이르는 농부의 생명 그 자체이다. 땅이 있어야 고향도 있고 나라도 있고 민족도 있거늘 그 옛날 우리의 보습대일 땅 한 뙈기 없는 비애를 지금 젊은이들은 미처 알지 못하고있다. 그래서 선배들이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듯 이땅을 지켜 로심초사하는것이 아니랴,    하지만 시대의 역설인가? 여기저기 반상적인 정경 또한 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흥화민족향에서 제일 인기를 끌던 민족중학교와 소학교의 햇빛 찬란하던 창가마다에서 랑랑하게 울려나오던 글소리도 시들해지고 민족의 생력군들이 미래를 떠멜 새싹들이 생기발랄하게 뛰놀던 운동장도 괴괴하고 다만 꽃씨 들을 멀리 날려보내고 말이 없는 민들레의 처연한 모습만 나의 지성을 후벼대였다.     환득환실의 섭리로 시린 가슴을 달래야 하는가? 천여명 학생들이 오구작작 떠들며 우리 말, 우리 글을 배우던 민족교육의 보금자리가 어이 이렇게 되였는가? 지금은 고작 16명 학생을 붙안고 맴돌며 완전페교를 기다리고 있다니 염통이 번져질 일이 아닌가?  민들레밭이 되여버린 학교운동장만 상심을 불러오는것이 아니였다. 흥화향 의 2천정보도 넘는 수전에 벼농사짓는 조선족농민은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촌민위원회는 대지주가 되고 촌민들은 작은 지주가 되여 밭머리에도 얼씬하지 않고도 정보당 7천원을 꼭꼭 받아내며 도시사람들처럼 쌀을 사먹으니 삶의 질적향상일가? 비전이라 할가? 제땅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들이 모두 건달농사군으로 환골탈태 하였으니 변화무쌍한 이 시대의 명물이라 할가부다. 그나저나 흥화촌의 로농들은 외국으로 연해지구로 돈벌러 나간 자식들의 메마른 가슴에 아름다운 고향의 풍경을 안겨주려고 해마다 식수하고 알뜰히 가꾸면서 조상의 개척지를 지키고 있는것만으로 도 다행이요 곁에서 보는 내 마음에도 믿음이 태산처럼 높아졌다.     더구나 흥화민족향에 2천정보의 수전을 한족들이 일정기간 임대하여 농사는 지을수 있으나 빈집을 사거나 세를 들어사는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는 흥화촌의 토 정책이 에누리없이 시행되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한족집이 한호도 없어서 불행중 다행이랄가. 그렇게라도 자기의 터전을 지키려는 그 마음이 마음을 훈훈하게 하였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혈관속에 농부의 피가 흐르고 있는 탓인지 몇십년만에 처가의 터밭에서 괭이를 잡아보았다. 이랑을 짓고 강냉이, 원두, 감자같은것을 심노라니 땀벌창이 되였지만 넥타이매고 농부의 흉내를 내는것만으로도 기분이 별로였다. 지금은 청도에서 사무한신으로 남부럽지 않게 만년을 호강하며 보내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고향에 돌아가서 아담한 기와집이나 사들고 터밭이랑 가꾸고 닭개짐승도 키우면서 인생의 겨울철 살아온 한생을 정리하면서 한적한 농가생활을 하고싶은 충동이 가끔 이는것은 농민의 아들이기때문이리라.     처가마을을 떠나기전 다시 기념탑아래 오래오래 서있노라니 생각의 갈피들이 억천갈래로 얽히고 서리였다. 세월이 흘러 기념탐을 세운 늙은이들이 세상을 떠나고나 면 산지사방에 뿔뿔이 흩어졌던 후손들이 고향의 땅을 찾아올런지 쓰잘데없는 걱정과 소망에 마음이 더구나 착잡해지는것은 내가 너무 감성적이여서일가? 나는 들꽃 한묶 음 돈독히 묶어서 기념탑언저리에 놓았다. 그리고 흘러가는 백년 조선족마을, 모래알 처럼 흩어져가는 민심의 이변을 이제 또 백년만큼은 지켜달라고 두손모아 빌었다.      타지방에 적을 둔 로옹이지만 농토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다를데 있으랴, 우리가 스스로 자기 가원을 버린다면 물러설 자리가 없다. 천애지각에 흩어져있더라도 조상  들이 물려준 보배로운 땅을 잃지 말고 넋이라도 있거들랑 고향에 돌아와 울바자 말뚝 을 다시 튼튼히 박아다오. 타향에는 민족의 넋이 잠들 자리가 없느니라.                                                                2011년 9월 10 일                                                                                                청도에서    
122    (교수단론) 한국어 읽기 기본지식 댓글:  조회:9295  추천:1  2013-01-08
                                       한국어 읽기 기본지식   ※ 낭독훈련의 필요성:     한국어교수에서 읽기(낭독)훈련은 문장을 읽고 이해, 터득시키는 기본적인 교수 수단이다. 낭독은 한국어 표준말과 문화어의 의미를 올바르게 장악고 어휘를 비롯한 다른 지식을 섭취하고 누적하며 글에 담겨진 사상감정에 감화되면서 어감능력을 제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어로 사유하고 기억력제고시키는 등 좋은 점이 있는 것은 물론 작품 감상의 입문이라 할 수 있다. 1. 단어발음에서의 음절의 력점(力点)    말할 때 단어안에 있는 음절들은 꼭같이 발음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다른 것 보다 높거나 길거나 세게 발음되는 것이 많다. 예: 《도라지》에서 “라”는 다른 음에 비하여 높게 발음되며 《개미》에서 “개” 가 길게 발음되며 《침략자를 타도하자!》에서는 “침”,“타”가 다른 음절에 비하 여 세게 발음된다.     이와 같이 하나의 단어안에서 어느 하나의 음절을 특별히 두드러지게 발음하기 위하여 그것을 다른 음절보다 좀 높거나 길거나 세게 발음하는 현상을 력점  (소리 마루)이라고 한다. 단어의 력점에는 고저력점 (높이마루), 장단력점(길이마루) 강약 력점(세기마루)이 세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아버지,》《어머니》에서 “버”와“머”는 다른 음절에 비하여 높게 발음된다. 하나의 음절로 된 어근(말뿌리)의 뒤에 토가 붙으면 그 어근은 높은 소리 이다. 예: 《낫이 잘 든다》에서 《나》가《시》보다 길고 높게 발음된다. 그래서 《나》에 길이로 나타나는 소리마루가 있게 된다. 또 《배우자》에서 “배”에 힘을 주어 발음하게 된다, 1) 고저력점: 이란 다른 음절보다 특별히 길게 발음되는 것을 말한다. ※  두개의 음절로 된 단어의 경우에는 보통 첫음절에 높이마루가 온다. 예:   。    。     。     。       。   。    。         집에,  날다.  먹다.  잡으면,  조국, 나라, 혁명, 세개의 음절일 경우에는 보통 가운데 음절에 고적력점이 온다.      。     。      。       。 예:  혁명화, 나라일, 학교문,  붉은기.  ※  네개의 음절로 된 단어에서는 보통 세번째 음절에 고저역점이 온다. 예:      。        。       。         。   해바라기, 버드나무, 믿음직한,  조국통일 ※  네개 이상의 음절로 된 단어인 경우에는 마지막으로부터 두번째 음절에 고저력 점이 온다.        예:        。           。            。          。     항일유격대,  현대화건설,  사회주의건설, 2) 장단력점: 단어안의 음절들 가운데서 다른 것보다 특별히 길게 발음되는것이다. 예: 《멀리》에서 “멀 ㅡ리” 나무열매를 나타내는 “밤”은 “낮과 밤”이라고 할 때의 “밤”보다 길게 발음한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모든 단어들이 장단력점이 있는 것 이 아니라 일부 단어에 굳어져서 규범화 된것이다. 예:                                     사람,  모든,  환히,   덥다. 좋다, 예: 눈(과 귀) , 눈(~과 비), 밤(~과 낮), 밤(~과 대추), 4. 강약력점: 이란 단어안의 음절들 가운데서 다른 음절에 비하여 특별히 길게 발음함   예:   、       、       、     、 침략자를 몰아내고 조국을 해방하자, ※ 단어의 세기마루는 발음을 우아하게 하는가 못하 는가, 말소리흐름을 아름답게 하는가 못하는가를 규정짓는 기초단위이다.     ※ 조선말의 길이마루는 모음을 발음하는 시간적 길이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일정한 단어에 고정되여 나타난다. 례하면 《눈과 비》에서 《눈》은 길게 발음하며《눈과 코》에서 《눈》은 짧게 발음하여 그 뜻을 구별한다.     ※ 조선말의 길이마루는 발음을 유창하고 여유있게 만들며 모양, 행동, 정도, 생각 등을 길이로 나타내거나 강조할수 있어 어조의 명료성을 적극 보장한다. 길이마루는 고정된 길이마루와 형상적인 길이마루가 있다. 례하여《아버지》는 일상 생활에서 길이마루가 잘 나타나지 않게 발음하나 영화대사나 시읊기에서는 감정의 기조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지”에 길이마루나 세기마루가 온다.     고정된 길이마루는 어근의 첫소리에만 오며 길이마루가 있는 어근뒤에 다른 단어 가 합쳐졌을 때도 그 길이를 유지한다. 례: 물,(야, 물, 물을 가져오너라)에서는 속도, 세기마루가 달라질수 있다. 사람, 곱다, 대단하다. 알다. 말 ㅡ말썽군, 끌다 ㅡ끌리다. 눈 ㅡ눈서리     향상적길이마루는 형태, 소리의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의 임의의 소리마루에 올 수 있다. 례: 노르스름하다. 환하다. 보들보들하다.  ※ 역점의 갈래: 역점에는 단어역점과 문장역점이 있다. ※ 읽기에서는 흔히 어느 한 뜻을 강조하기 위해 떨어지는 논리적력점이 있다. 예: 김파씨는 내일 북경으로 가십니까?      김파씨는 내일 북경으로 가십니까?     김파씨는 내일 북경으로 가십니까?     김파씨는 내일 북경으로 가십니까? ※ 표현적끊기(심리적끊기)도 있다. 예: 그의 동 그 란  얼굴에는 웃음이 함빡 담겼다. 5.ㅡ절음현상:이란 받침으로 된 자음이 일단 끊어졌다가 발음되는 것을 말한다. 즉 한 단어안의 형태부와 형태부가 이어질 때 앞형태부의 끝에 오는 자음이 일단 막힘소리로 되었다가 다시 그 소리가 뒤에 오는 형태부의 첫소리모음에 이어져서 발음되는 것을 말한다. 예: 부엌안 → (부억안 →부어간) 옷안(옷안 → 옫안 → 오단 ) 웃어른 → (욷어른 →우더른) 홑옷(홑옷 →혿옷 →호돗) 끝없이 → (끋업씨 →끄덥씨) 닭우리 (닥우리 → 다구리 6. 동화현상: 한 단어안에서 어느 한 소리가 다른 소리의 영향을 받아 그와 같거나 비슷한 소리로 바끼어 발음되는 것을 동화현상이라 한다. 한국어의 동화현상에는 순행동화, 역행동화, 호상동화 등 여러가지가 있다. ※ 순행동화: 순행동화란 앞에 있는 음이 뒤에 있는 음을 동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 달나라→(달라라),  설날 →설랄, 들놀이 → 들로리, ※ 역행동화란 순행동화와 반대로 뒤에 있는 음이 앞에 있는 음을 동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 십년 → 심년,  톱날 →톰날,  옆문 →염문,  돕는다 →돔는다 맏누이→ 만누이,  밭머리 →반머리, 벗나무숲에 토끼네가 화목하게 살았네 → 번나무수페 토끼네가 화모카게 사랃네, 나무를 깎는다  → 나무를 깡는다. ○천리→철리, 농업산량→ 농업살량 , 진리 → 질리 ※ 그러나 한자어의 형태부와 형태부 사이에서는 “ㄴ”가“ㄹ”로 동화되지 않는다. ○ 생산량→ 생산량 , 모순론 →모순론, 손노동 →손노동 ※ 그러나 한자음 “렬”과“렬”과 관련된 발음에서는 “ㄹ”이 발음되지 않는다. ○ 대렬→ 대열 , 규률 →규율,  가렬하다 →가열하다 비률 →비율 ※ 호상동화란 린접되어 있는 음들이 서로 영향을 주어 동화되는 것을 말한다. ○  십리 →심니,          학력 →항력→ 항녁 폭력 →퐁력 → 퐁녁, 법률 → 범률 → 범뉼 7. 된소리화 현상에도 주의해야 한다. ○ 삽자루 →삽짜루 , 핵심 →핵씸, 닦자 →닦짜, 늦봄 →늦뽐 , 빛갈 →빛깔, 있소→ 있쏘, 걷기 →걷끼, 옷감 →옷깜, 식당 ㅡ식땅 등등 8. 자음의 약화 및 탈락 현상 ○ 아홉→아옵, 일흔살 →이른살, 간단하다 →간다나다, 대담하다 →대다마다, 가히 →가이, 용감히 →용가미, 일이 많아서 힘겹다 →이리 마나서 힘겹따, 중앙인민정부 →주앙인민정부. 영웅인물을 노래하자→ 여웅인무를 노래하자 9. 자음의 탈락현상 ○ 덧이 →던니, 앞이마 →암니마, 홑이불 →혼니불, 부엌일 →부엉닐, 나무단→ 나묻단, 뱃사공 →밷싸공 등,→→→ ※ 발음훈련: 5. 말의 끊기:    문장안의 여러 단어들 사이에서 생기는 잠시적 휴지를 말한다. 례: 《우리는 오늘 계획을 완성했다.》에서《오늘》뒤에 휴지를 두지 않으면《오늘의 계획》을 완성한 것으로 되며 휴지를 두면 《어떤 계획》을《오늘》완성한것으로 된다. ※※※호흡과 띄여쓰기 예: 아버지가방안으로들어간다.     아버지가 방안으로 들어간다     아버지가방 안으로 들어간다.     아버지 가방안으로 들어간다. ※ 한국의 띄어쓰기는 호흡관계와 탈절된다.  예: 네가 그렇게 나를 대할 줄 몰랐다. 네가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므로 한국식 띄여쓰기대로 휴지를 두면 말이 류창해질 수 없다. ※ 끊기의 네가지 갈래 1) 긴 끊기《///》, 문장이 끝났늘 때 쉬는 대목으로서 문장부호 점《.》, 느낌표 《!》물음표《?》,줄임표《……》등이 오는 곳에 오는데 그 길이는 두박자 혹은 세 박자이다. 2) 보통끊기《//》,문장안에서 비교적인 언어단위 뒤에, 독립성분의 뒤, 쉼표,주격토, 호칭어, 제시어, 뒤에 떨어진다. 그 길이는 보통 한 두박자이다. 3) 짧은 끊기 《/》언어적단위 사이에 떨어진다. 그 길이는 한박자이다. 4) 순간끊기: 는 문장안에서 단위들사이의 호상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끊기가 있는것을 모를 정도로 짧다. 휴지와 같다. 례: 나는 조선족이다. // 우리는 자기의 민족을 사랑한다. ///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민족이기를 그만 두어야 한다./// 아니 그런가? 례: 과문에서 풍경을 그린 구절을 찾고// 이런 묘사의 작용을 말하시오/// 례: 물질문명/ 정신문명/ 문명의 꽃이 만방에/ 향기를/ 풍긴다// 5) 논리적끊기: 논리적끊기는 맞물림성분, 독립성분, 제시어, 확대된 문장성분, 복합문을 이루는 단일문, 인용어의 앞뒤 등에 둔다. 례: 아버지께서는 //《그렇다. //이것이 //너의들에 대한 //나의 희망이다//》라고 하셨다./// 례: 아// 얼마나 애절하게 그렸으며 //얼마니 애타게 기다렸던가/// 6) 형상적끊기:는 격동된 감정을 나타낼 때 긴끊기를 둔다. 례: 오, 어머니 조국이여/// 4. 읽기투: 글을 읽는 형식으로서 독보식읽기투, 연설식읽기투, 느낌식읽기투, 입말식 읽기투 등이 있다. 입말식 읽기투는 말과 같이 생동하게 들리며 이야기의 논리성 이 강하게 표현되며 억양의 이름이 입말과 아주 비슷한 곡선을 그린다. 소설, 실화, 수필 등의 환경묘사, 심리 묘사를 전달할 때에는 입말식일기투와 흐름식읽기투를 경우에 맞게 조화시켜야 할것이다. 5. 억양: 예:  에루화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에루화 두둥실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민족 자치주 세웠네.      이런 가사를 읽을 때는 억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억양이란 말소리의 높낮음으로 나타나는 음악적 흐름을 말한다. 억양은 말소리흐름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민족적감정과 직접적으로 련관된 중요한 언어 요소이기도 하다. 억양의 바탕으로 되는 요인은 단어발음의 높낮이와 문장의 소리마루 그리고 끊기 등이다. 억양의 문자론적 기능은 문장의 갈래를 갈라주는것과 같은 구조의 문장에서 뜻을 가려주는것이다.     례: 《연희학생 공부하세요》↘     《연희학생! 공부하세요?》↗ 연희가 공부하고있다는 것을 알려줄 때《공》에 힘을 주고 《하세요》 를 급격히 낮추어 알림을 표현하 면 연희가 공부를 하는지 다른 무엇을 하는지 따져 물을 때에는 《하》에 힘을 주고《세요》를 높인다. 례:《무슨 일이 있었습니까?》에서는 《무슨》을 좀 높이며《니까》를 낮추어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묻는 뜻을 나나태고 《일》을 높이고 《니까》를 높이여 사건이 있었는가를 묻는 뜻을 나타낸다. 억양의 정서적기능은 높낮이 흐름선에다 목소리의 빛갈이 섞이여 긴장과 정서를 함께 전달하는것을 가리킨다. 정서적 억양은 문장의 모든 단위에서 다 표현될 수 있으며 문장안의 어느 한 소리토막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같은 구조의 문장안에서 여러가지 정서로 나나타 어조를 달리한다. 례: 라성교의 국제주의 정신은 얼마나 인심을 격동시키는가! ↗     례: 개혁개방정책은 얼마나 좋은가. (감탄) 례: 그게 정말이요? ↗ (의혹과 놀램) 억양의 형태에는 흐름억양과 맺음억양이 있다. 흐름억양은 문장안의 어느 한 단 위에서 이루어지는 높낮이 흐름선이다. 흐름억양은 소리토막, 또는  소리 매듭들의 사이를 이어주거나 끊어준다. 흐름억양은 뜻억양과 느낌억양으로 나눈다. 맺음억양은 말의 매듭을 짓거나 문장이 끝났을 때 쉬는 대목에서 이루어지는 억양이다. 맺음억양 에는 말끝을 낮추는 형태(↘ ), 말끝을 높이는 형태 ( ↗ ), 말끝을 낮추었다가 올리는 (↘↗)형태 , 말끝을 평평하게 끄는 형태( ㅡ )가 있는데 문장의 끊기와 맺음에서 두루 쓰인다. 억양은 소리의 높낮이가 기본이 되면서 소리의 장단, 강약, 음색도 첨가된다. 억양은 문장의 끝에서나 중간에서 나타나면서 문장의 내용을 정밀하게 전달하며 다양한 사상감정과 태도를 나타낸다.     억양의 기본형태는 하강억양, 상승억양,평행적억양, 하강상승억양 등이 있다.                ↗ 례: 하나, 둘, 셋이나 된다.     철남이랑 영숙이랑 모두 간다니? ↗     영호는 왜 아직 안올가? ↗ 난 못갈것 같은데요. ↘ 옛날 옛적에 개와 고양이가 살았는데…     뭘? ↗ 6. 말의 속도 말(낭독)의 속도란 단위시간내에 발음하는 말소리의 많고 적음이다. 글의 종류와 내용에 따라 그 기준속도가 부동하다. 전달하는 글의 읽기는 1분동안에 250 ㅡ260자, 설명하는 글의 읽기는 240 ㅡ250자, 선동하는 글의 읽기는 230 ㅡ240자, 예술적산문 의 글 읽기는 220자 ㅡ230자, 신문독보는 240 ㅡ250자, 시읊기는 150 ㅡ170자이다. 첫 네가지의 글을 말로 할 때에는 1분동안에 각각 10자씩 더해준다.즉 말하는것은 어쨌든 글을 읽기보다 좀 빠르게 되여있다. 글을 읽거나 말을 할 때 중요한 단어와 차요한 단어, 말하는 사람의 감정의 높이, 듣는 사람에 대한 고려 등이 작용하여 자기도 모르게 완급이 생기게 되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단어는 느리고 기타는 빠르다.    례: 김군!나는 더 참을수 없다. 나는 나부터 살리려고 한다. 이때까지 는 최면술에 걸린 송장이였다. 제가 죽은 송장으로 남(식구)들을 어 찌 살리랴, 그러려면 나는 나에게 최면술을 걸려는 무리들, 험악한 이 공기의 원류를 쳐부시려고 하는것이다. 7. 말소리흐름의 율동성: 말소리흐름의 율동은 말소리의 높이, 세기가 대조되고 균형을 이루면서 이루어 진다. 즉 음절에 주는 힘의 량과 세기에서 나타난다. 율동성이란 음절에 힘을 주고 안주는 것이 끊임없이 대조되면서 흐름을 힘있게 끌고나가는 음악적 선율이다. 한국 말 (조선말) 의 율동성은 소리마루의 특성과 거의 같다.단어의 세기마루는 첫음절에서 온다. 그래서 첫음절의 세기는 율동감을 주게 된다. 례: //  // /   // // /    // //      // /. // / 집, 파도, 말마디      두힘으로도 나타난다. 례: 학교로.간다.  강은 깊다. // //, // //, // //.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한국의 표준어와 조선의 문화는 여러면에서 차이를 보이고있는데 특히 표준어와 문화어는 억양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표준어에서는 음의 높낮이 변화가 심하 지 않고 음절사이의 구분도 분명하지 않아 물흐르듯이 말을 한다, 문화어에서는 음의 높낮이 변화가 분명하고 단어나 음절군을 끊어서 강하게 말한다. 례:위대한 지도자동지께서는 오늘도 천리길 마다하지 않으시고 황해남도 재령광산을 시찰하셨습니다. 8. 낭독에서의 감정 낭독에서의 감정: 우선 감정의 집중표현단위를 잘 찾아야 한다.. 기쁨을 표현하 거나 분노를 나타낼때 모든 말마디에 감정을 똑같이 분배하여 표현하지 않고 어느 한 부분에 집중하여 본질적인 감정, 정서를 표현한다.. 례하여 《너도 갈래?》라고 의문과 불쾌감을 표시할 때 감정을 토 (어미)《도》 에다 집중시키고 그밖의 말마디들은 상대적으로 약화시킨다. 낭독형상기교 존경과 흠모의 감정은 깊은 소리빛갈을 기본으로 하며 속도는 좀 느린편이고 높낮이는 미미하나 그대신 깊은 소리빛갈이 높이마루를 대신 한다. 억양은 느낌식 투가 좋다.  만족과 긍지의 감정은 맑은 소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만족과 미소를 지은 표정을 짓고 소리를 억제하는 기분상태를 유지하는것이 좋다. 기쁨과 자랑으로 가득찬 격정의 감정을 맑고 힘있는 목소리빛갈을 배치한다. 발음상태는 웃으면 서 이야기할 때와 비슷하다. 사랑의 감정은 맑은 소리빛갈에 속하나 세지 않고 부드러운것이 특징이다. 시종 웃는 표정을 가져야 한다. 적개심, 증오의 감정은 맑고 탄력있는 소리     빛갈이다. 슬픔과 비분의 감정은 어둡고 들뜬 빛갈이여야 하며 말소리는 코에 울리고 우울하다. 비분을 나타낼 때에는 목소리가 굵고 낮으며 웅숭깊다. 숭엄한 감정과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형상할 때에는 깊은 소리바탕에 낮고 부 드러운 사색적인 빛갈을 표현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을 형상할 때는 목소리는 얕은소리를 가볍게 낸다. 9. 낭독에서의 소리빛갈 맑은소리: 정확한 발음법에 의한 가공이 없는 목소리빛갈이다. 속삭임소리: 날숨을 골고루 솔솔 내면서 성대를 진동시키지 않는 소리이다. 깊은소리: 밑배에서 울려나오는 날숨을 극도로 억제하면서 목청을 가볍게 울리는 목소리이다. 얕은소리: 깊은소리에 비해 목청을 많이 진동시키며 음색은 맑다. 거센소리: 목을 조이는 솔이다. 부저인물을 형상할 때 자주 쓰인다. 뜬소리: 입이 크게 벌려지지 않고 목청에서 울리는 소리가 목구멍과 코안, 앞이마 쪽으로 울려나가면서 불안정하게 울리는 소리이다. 굵은소리: 자기의 원래의 목소리보다 굵게 내는것을 말한다. 코소리: 코의 공명을 받아내는 소리빛갈이다. 이외 여러가지 소리가 있으나 략한다.  례문: 례문: (변학도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연신 감탄한다.) 과연 선녀가 하강하였도다, 과연 춘향이렸다,  으하하하ㅡ어디 보자, 춘향아, 뜯어볼수록 한군데도 나무랄데가 없고나. 오늘부터 네가 수청을 들도록 할터이니 그리 알라. [춘향] 그 무슨 말씀이오이까. 소녀 비록 천기소생이 오나 연전에 구관사또 자제와 백년가약을 맺은터라 지금은 유부녀이옵니다. 소녀 죽어도 송죽 같은 마음 변할리 없아온즉 그런 분부 거두시옵소서. [변학도] 허, 고년이 목소리 또한 은쟁반에 구슬이 굴러가는듯 하고나. 내 네 뜻을 알겠다만은 굴러오는 떡함지를 차던지지 말고 수청들도록 하라 [춘향] 사또님 아무리 위협해도 오동추야 달밝은 밤 님생각에 잠못들고 눈물이 바다되고 한숨이 모여 바람 되는 춘향이니 그리하지 못합니다. [변] 에라,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그래 수청을 들터이냐, 아니 들터이냐? [춘향] 물에 비친 달은 잡을수 있어도 이 춘향이 마음은 변할리 없으니 그리아시오。 저는 백번죽어도 한번 먹은 마음 변치않나이다. [변학도] 뭣이?  못해!? 네 이년, 관장의 명을 거역함은 곧 죽을 죄임을 모르느냐! [춘향] 사또님, 유부녀 겁탈하는 것은 죄가 아니오이까? [변학도] 저런저런, 저년이 죽고 싶어 환장했는고? 이년 듣거라, 반역하는 죄는 릉지처참하라 하였고 관장을 조롱하는 자는 엄한 형벌에 처하라 하였니라. 죽는다고 억울해 하지 말어라. [춘향] 법이 그러하오면 유부녀를 겁탈하는 죄는 어찌 다스리라 하였나이까? (변학도 너무 분해서 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고래고래 소리치니 탕건이 벗어지고 단마디에 목이 쉬였다.) [변사또] 무엇이 어쩌고 어째? 저년을 형틀에 달아매고 호되게 쳐라, 례문: 내가 나선 고향은 우물에서 룡이 날아올랐다는 아름다운 전설을 새기고 있는 룡드레촌에서 엎디면 코앞인 룡강동, 마을앞에는 맑디맑은 해란강이 흘러 쇠치네도 흔했고 서쪽으로 비암산이 병풍처럼 둘려 있어서 산좋고 물맑은 고장이였다. 더구나 유서도 깊은 비암산은 걸음발을 타면서부터 수없이 오른 락원의 봄동산이요 내 좁은 가슴에 높이높이 솟아있던 불멸의 기념탑이였다.     봄이면 진달래 꽃불이 산을 불태우고 여름이면 개나리, 함박꽃이 흐드러지던 비암산 구석구석을 참빗질하며 돌아다녔고 아스라하던 칼바위를 푸른 하늘에 우짖는 종달새처럼 포르르 날아오르기도 했다. 가을이면 산포도, 산딸기를 따먹으면서 연지 곤지 바르던 옆집에 귀동녀며 뒤집에 조앙녀랑 오구작작 즐거움을 휘뿌리던 꽃동산 이요 수난의 동년시대였건만 그냥 정답기만 하였던 동화속에 에덴이였다.                   님의 침묵         한용운 ↗↘↘↘ ↘↘ ↘↘ ↘↘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  ↗↗    ↗↘↘↘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  ↗↘↘ ↘↘ ↘↘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  ↘↘↘ ↘↘↘↘ ↘↘↘↘↘↘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 ↘↘↘↘↘↘↘ ↘↘↘↘↘↘  적은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한국어교원들을 대상한 특강 2009년 3월 20일
121    (교육에세이) 조선족소학교 교재의 한어성어실태 댓글:  조회:12643  추천:2  2013-01-05
                   조선족소학교 교재의 한어성어실태                                      최균선   조선족소학교단계에서 현대한어상용자1300-1800자 좌우, 상용단어, 3000-4000개 좌우를 장악해야 하고 적어도 20만자의 과외독서를 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 기되고있는데 교과서에는 학생들을 계발, 인도할수 있는 성어도 포함되여있다. 현재 조선족소학교 한어교과서에 학년별로 장악해야 할 성어를 보면 개인으로서는 곤혹을 안겨주는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아래에 작성한 성어도표를 보자   조선족소학한어교과서의 성어의 사용실태             一年级成语 四面八方, 五颜六色, 七上八上, 九牛一毛, 车水马龙, 刀山火海, 目不识丁, 左右开弓, 一叶扁舟, 十全十美, 百战百胜, 百里挑一, 千千万万, 万水千山, 喜闻乐见 ,山清水秀, 鸟语花香 ,欢天喜地, 一帆风顺, 心明眼亮, 坐立不安, 万紫千红, 急中生智, 当机立断, 舍己为人, 鸦雀无声, 守口如瓶, 自高自大, 自以为是, 如鱼得水, 鱼米之乡, 鱼水情深, 众所周知, 自作聪明 ,狼吞虎咽, 虎头蛇尾,  良师益友, 言而有信, 言行一致,  一言为定, (共 40个)              二年级成语 助人为乐, 大吃一惊, 龙争虎斗,  五谷丰登 ,春华秋实, 瓜果飘香, 天高云淡, 泪如雨下, 繁荣昌盛, 心宽体胖, 顶天立地, 不速之客, 念念不忘, 手舞足蹈, 追根究底, 集思广益, 顺水推舟, 拔苗助长 , 万事大吉, 张灯结彩, 天寒地冻, 眉开眼笑, 火烧眉毛, 冷言冷语,  千家万户, 鸦雀无声, 福如东海, 寿比南山, 脚踏实地, 装模作样,  妙手回春 ,心服口服, 奇思妙想, 刮目相看, 居心不良, 固步自封,  碌碌无为, 披星戴月, 亡羊补牢, 饱经风霜 ,筋疲力尽, 改头换面,  改天换地, 袖手旁观, 交头接耳, 汗马功劳, 移山倒海, 百感交集,  熟视无睹, 莫名其妙, 虎口脱险, 风吹日晒, 温故知新, 无微不至,  豁然开朗, 出尔反尔, 刨根问底, 含苞欲放, 落叶归根 ,居安思危,  今非昔比, 开诚布公, 水泄不通, 赞不绝口, 惹是生非, 心甘情愿,  按兵不动, 深思熟虑 ,胆大包天, 问心无愧, 稳操胜券 ,滚瓜烂熟,  察言观色, 坐井观天        (共 74个)      三年级成语 进退两难,  内柔外刚,  得不偿失,  惟妙惟肖,  狡兔三窟,  遥遥领先  得过且过,  得寸进尺,  得天独厚,  得心应手,  得道多助,  狐假虎威, 守株待兔,  刻舟求剑,  狗仗人势,  瓜熟蒂落,  画龙点睛,  生龙活虎,  锦上添花,  板上钉钉,  语无伦次,  名副其实,  君子一言,  驷马难追, 别具一格,  遮天蔽日,  独树一帜,  出手不凡,  胡作非为,  悠然自得, 梦寐以求,  调兵遣将,  羊肠小道,  抛砖引玉,  添砖加瓦, (共35个)      四年级成语 泪如泉涌,  拾金不昧,  变幻莫测,  熟视无睹,  不计其数,  数九寒天,  求同存异,  忍无可忍,  女娲补天,  嫦娥奔月,  后羿射日,  精卫填海,  开天辟地,  夸父追日,  鹊桥相会,  疑邻偷斧,  掩耳盗铃,  杯弓蛇影,  画蛇添足,  自相矛盾,  愚公移山 ,  惊弓之鸟,  弦外之音,  百家争鸣,  笨鸟先飞,  一石二鸟,  如饥似渴,  马不停蹄 ,  大器晚成,  文武双全,  雷厉风行,  忆苦思甜,  绳之以法,  心照不宣,   风调雨顺,  心灰意冷,  语无伦次,  油腔滑调,  隔墙有耳,    (共39个)       五年级 碧血丹心,  促膝谈心,  过犹不及,  手足无措,  雨后春笋,  万木逢春  莺歌燕舞,  阳春三月,  闻鸡起舞,  滥竽充数,  大智若愚,  掌上明珠,  浑水摸鱼,  龙飞凤舞,  羊肠小道,  蛇影杯弓,  鸡飞蛋打, 兔死狐悲,  猴年马月,  马到成功,  牛刀小试,  聊胜于无,  有口皆碑,  抛砖引玉,  添砖加瓦,  废寝忘食,  正中下怀,  老态龙钟,  衣冠楚楚,  笑不露齿, 心驰神往,  鹬蚌相争,  郑人买履,  口若悬河,  (共 34个)       六年级成语 蒸蒸日上, 所剩无几, 欣喜若狂, 大喜过望 ,殊途同归 ,百川归海, 来龙去脉, 骑马找马, 化险为夷, 虚无缥缈, 物极必反, 乐极生悲, 平分秋色, 大相径庭 , 一针见血,   言不及义,  淋漓尽致,  掌上明珠,  故弄玄虚,  以卵击石,  健步如飞,  异口同声,  坐立不安,  提心吊胆,  无可非议,  盖世无双,  屡见不鲜,  司空见惯,  十拿九稳,  谆谆教导,  囫囵吞枣,  无可厚非,  因人而异,  络绎不绝,  滴水成河,  积水成渊,  饮水思源,  细水长流,  孜孜不倦,  琢玉成器,   畏首畏尾,  如释重负,  冰释前嫌,  忐忑不安,  富丽堂皇,  雕梁画栋,  鳞次栉比, (共47个)     첫째, 학생들의 년령특징, 인지규률, 학년학습요구, 그리고 매개 성어자체에 함유 된 의미에서의 심도, 수량 등에 근거하여 정밀하게 계산되고 수록한것이라고 보기에 는 문제가 있는것같다. 도표에서 보여주다싶이 각학년에서 배울 성어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많은 성어를2학년에 안배한데는 무슨 특정된 요구, 규률성이 있는지? 각각의 교과서를 보면 일차성적인 대비가 없기에 그런줄 몰랐는데 이렇게 학년별로 비교 해보니 납득이 안되지 않을수 없다. 2학년생인 손자가 성어해석을 물어올때마다 난색을 짓지 않을수 없다. 중국어의 성어는 거지반 그 형성된 유래가 있기에 그것부터 말해주자면 력사배경, 력사인물, 이야기자체내에 난해한 어구들이 있어서 해석에 설명이 붙게 되고 설명에 구구한 풀 이가 따라야 한다. 이 점은 해당학부모들이 공동하게 느끼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둘째, 한자를 거의나 오려붙이는 어린 아이들에게 이런 난해하기도 한 성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있으며 아이들은 또 얼마나 고달플것인가 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한것은 한어성어의 형태, 의미, 조선어성어와 다른 특 이성, 공통성, 상사성 등 여러 측면에서 연구되여야 하는 문제기때문이다. 그 실제를 필자의 수준이 닿는정도로 대략 고찰해 보았다.     난점 1) 동형동의(同形同义): 동형동의성어는 조선어에 한자성어와 한어성어의 형태와 의미 등에서 비슷한것을 말한다. 조선어성어와 한어성구의 발음도 비슷하고 의미도 거의 같은것도 적지 않다 례하여   “ 四面八方 (사면팔방)”  “百战百胜 (백전백승)” “万紫千红  (만자천홍)” “言行一致 (언행일치)” “万事大吉 (만사대길)” “万寿无疆  (만수무강)”  “袖手旁观 (수수방관)” “温故知新 (온고지신)” “震天动地  (진천동지)” “乘风破浪 (승풍파랑)” “深思熟虑 (심사숙고)” “过犹不及  (과유불급)”  “雨后春笋 (우후죽순)” “不计其数 (부지기수)” “画蛇添足  (화사첨족)” “百家争鸣 (백가쟁명)” “一石二鸟 (일석이조)”  “大器晚成  (대기만성)”  “狐假虎威 (호가호위)” “守株待兔 (수주대토)”  “锦上添花 (금상첨화)” “异口同声 (이구동성)” “天真烂漫 (천진란만)”  “龙头蛇尾 (룡두사미)” “天下无双 (천하무쌍)” “有始有终 (유시유종)”  “不可思议 (불가사의)” “千变万化 (천변만화 )”“千山万水 (만수천산 )” 등등이다. 난점2) 조선어에서 한자성어는 일부분이 한어에서 기원되였지만 필경 다른 언어이므로 뜻 은 같지만 성분이 다른 때도 있다. 례하면 아래와 같다. “山清水秀(산자수명)””  “穷奢极欲 (흥청망청)”  “念念不忘 (오매불망)” “拔苗助长(조장발묘)”  “眉开眼笑 (파안대소)”  “开天辟地 (천지개벽)“ “大公无私 (대공무사)” “得不偿失 (촉진척퇴)”  “崇山峻岭 (태산준령 )” “乐极生悲(흥진비래)” “络绎不绝 (련락부절) ” 등이 있다.    난점3) 조선어성어와 한어성구에 일부분은 표현한 뜻은 같지만 표현방식이 전혀 같지 않다. 중국어에서는 성어이지만 조선어에서는 속담으로 나타날수도 있다. 례를 들면 “隔墙有耳”은 조선어성어에 없지만 같은 뜻을 표현하는 속담이 있는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이다.  이런 속담은 사자성어의 의미해석이다. 사자성어가 추상성을 가지고있다면 속담 이 아주 형상적이고 구체적으로 그 성어의 의미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조선족학생들 이 이런 성어를 배울때 뜻을 잘 모르면 또는 의미를 더 잘 리해시키려면 조선어 속담 으로 번역하되 의역해야 하는데 저학년 아이들로 말하면 두가지가 다 난제이다.  俗语意译型도 그렇다. 례하여“目不识丁” 은[《구당서·장홍정전(舊唐書,張弘靖傳)》에 나오는바 “지금 천하가 태평하니, 그대들은 활을 잡고있는것보다 정(丁) 자 한자를 아는것이 더 낫다.”라는 말에서 유래함] 낫놓고 기윽자도 모른다. 일자무식 과 대응된다. 더 례를 들어보자.  ○ 鸦雀无声: 쥐죽은듯이 조용하다  ○ 亡羊补牢: 소잃고 외양간 고치다    ○ 隔墙有耳: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 以卵击石; 계란으로 바위치기  ○ 对牛弹琴: 소귀에 경읽기, 소귀에 해금타기  ○ 易如反掌: 땅짚고 헤염치기/누워서 떡먹기/식은죽먹기  ○ 华而不实: 빛좋은 개살구  ○ 挥金如土: 돈을 물쓰듯 한다.   ○ 形影不离:  바늘가는데 실간다  ○ 胆小如鼠: 노루가 제방귀에 놀란다.   전설이나 우화나 신화에서 유래된 이런 성구들을 학습시킬 때 자세한 아야기를 들려주면 그 뜻을 보다 쉽게 알수 있고 잘 기억할수 있겠으나 저급학년 아이들에게는 “우이독경”이나 소귀에 해금타기가 되기 십상이다. 례를 들어보자. “画龙点睛”: [량 (梁)나라 때의 화가 장승요(張僧繇)가 네마리 룡을 그렸는데 그중 두마리에 눈을 그려넣자 룡이 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      “闻鸡起舞”:《진서·조적전(晉書·祖逖傳)》에서 유래된것이다. 동진(東晉)때 조적(祖逖)과 그의 친구 류곤(劉琨)은 늘 서로를 고무격려하여 한밤에 닭우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일어나서 무예를 련마하였다는 고사,     “刻舟求剑”: 초나라 사람이 배에서물 속에 칼을 떨어뜨리고 배가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위치를 뱃전에 표시하였다가 나중에 칼을 찾으려했다는 고사,     “滥竽充数”:《한비자·내제설상(韓非子·內儲說上)》에서 제선왕(齊宣王)이 피리소리를 좋아하여 삼백명이 같이 연주하도록 시켰는데, 남곽(南郭) 선생은 원래 피리를 불줄모르면서 그 무리에 끼여들어 머리수만 채웠다는 고사,     “杯弓蛇影”:옛날, 진(晉)나라의 악광(樂廣)이란 사람이 손님들을 식사에 초대하였는데, 손님중 한사람이 벽에 걸린 활이 술잔에 비친것을 술잔속에 뱀이 있다 고 오인하고 뱀을 삼켰으니 독에 중독되였다고 생각하여 병에 걸렸다는 고사,      精卫填海: 정위조(精衛鳥)가 동해 바다를 메우다. [《산해경·북산경(山海經·北山經)》에서,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에 빠져죽은후 원한이 맺혀 그 령혼이 정위조로 변하여 서산의 나무가지와 돌을 물어다 동해바다를 메우고자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하였다.  回头是岸: 불교에서 말하는 ‘苦海无边,回头是岸(고해는 끝이 없으나, 깨달으면 극락)의 뜻은 괴로움과 고난은 바다와같이 한도 끝도 없으나 불법을 깨닫기만 하면 그런 고해(苦海)에서 해탈할수 있음을 말하는 고사, 夸父追日: 《산해경·해외북경(山海經·海外北經)》에 나오는 신화적인물인 과부가 태양을 좇다가 목이 말라서 황하(黄河)와 위수(渭水)의 물을 다 마시고도 갈증이 풀리지 않아 북쪽으로 물을 찾으러가는 도중에 목이말라 죽었는데, 그가 남긴 지팡 이가 드넓은 숲을 이루어 그 숲을 등림(鄧林)이라고 부르게 되였다는 고사, 등등은 해석에 해석을 덧붙여야 하고 해석해도 웬간한 어른들도 잘 기억될수 없는것들이 많아서 소학교아이들에게는 더구나 막연할것이 틀림없다. 이한 문제들은 학부모로 써 곤혹스럽지 않을수 없으며 심사숙고를 자아내지 없을것이다. 난점 4: 소학교한어교과서에 나타난 성구사용환경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동태환경 즉 문 장에서 나타난것(극히 적음)이고 다른 하나는 정태환경 즉 단독으로 나타난것이 다. 성구가 정태적으로 나타난 상황에도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본문에서 나온 성어 를 복습하기 위해 제기된다. 례컨대 련습중에 “读一读,写一写”등이다. 이 부분은 학생들에게 배운단어들을 귀납하고 공고하기 위해 설계한것같고 또 한가지는 본문 뒤에 “读读背背” “背诵积累”등 형식의 련습문제에서 나타난다. 이 형식은 한족소 학교어문교과서의 성구출현모식과 상사하다. 민족어이든 외국어이든 단어공부는 구체적어경 즉 문장속에 그 쓰임과 함께 습득 해야 리해가 빠르고 잘 기억되며 활용하기 유리하다. 이것은 언어학습의 규률이다. 하지만 우리 소학교의 한어교과서에서 성어학습은 기계적인 암송을 전제로 하기에 옛날 서당에서 뜻을 알고모르고 대구 외워두었다가 차차 그 뜻을 익히는격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횡적, 종적으로 비교하면서 편찬했으리 라 생각되면서도 필자로서는 그냥 곤혹스럽기만 하다. 현재 교과서에 나타난 성구들은 한어지식이 웬간한 학부모들이여야 지도가 가능 할것은 사실이다. 왜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기억이 사라지기도전에 한어학원 으로 뛰여가는가 하는 문제는 심히 심사숙고할 일이 아닌가싶다. 그리고 상술한 서술 에 담겨진 이런저런 의문들은 한어전문가로서의 일가견도 아니고 엄밀한 론리결구를 가져야 할 론문이 아니라는것을 먼저 언명해 둔다. 잘 모르긴 하겠지만 조선족소학교의 한어교수는 한족학교어문을 기준치로 삼고 될수록 동보(同步)를 지양힌것이라 사료된다. 아래에 한족소학어문교과서에서 성구의 사용실태와 대조해보면서 조선족소학교한어교과서들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실용적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한족속학교어문교과서에 성구들은 기본상 과문에서 나오는것을 기준으로 한것같다. 한족애들은 우리 아이들의 학습환경보다 우월할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외국어”를 갓배우는 소학생들의 년령특징과 그에 따른 인지능력의 계단문제 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하긴 혼자 끙끙거려보는 문제이지만도…. 전업자도 아닌 일개 학부모의 시점에서 2학년에 다니는 아이의 한어숙제와 복습 을 지도하면서 매양 부딪치는 난제이길래 소감은 각별하지만 체득은 천박하여 지식점, 인식점 등에서 틀린곳이 많으리라 생각하면서 읽는 이들의 량해를 구하는바이다.     新课标成语表   小学一年级成语 百花争艳,  春意盎然,  春暖花开, 湖光十色, 跋山涉水,  亭亭玉立, 生机勃勃, 千姿百态,  花枝招展,  姹紫嫣红, 连绵不断, 莽莽苍苍,  无边无际, 江山如画, 汹涌澎湃,  锦绣河山,  崇山峻岭, 高耸入云, 巍然屹立,  赤日炎炎, 繁星闪烁, 皓月当空,  花好月圆,  群星灿烂, 旭日东升, 阳光明媚, 艳阳高照,冰雪消融 草长莺飞, 春光明媚,春回大地,春色满园,春色宜人, 落叶纷纷,鸟语花香, 秋高气爽, 天寒地冻,万籁俱寂,银装素裹,莺歌燕舞, 雨后春笋,白雪皑皑春回大地, 万物复苏,柳绿花红,莺歌燕舞, 冰雪融化,泉水丁冬,百花齐放 百鸟争鸣, 三心二意,七上八下,五颜六色,山清水秀,万紫千红, 和风细雨 鸟语花香, 千山万水,千方百计,东张西望,万里无云, 欢歌笑语,春暖花开 百花齐放, 春风拂面,古往今来,尊老爱幼, 亭亭玉立,美丽动人,花枝招展 心满意足, 爱不释手,长命百岁,小巧玲珑,生龙活虎, 年幼无知,千奇百怪 日里万机, 人命关天,勤奋好学,废寝忘食,百读不厌,相敬如宾, 团结友爱 活泼可爱, 五谷丰登,欢天喜地, 热血沸腾,经久不衰,垂手可得,叶公好龙 塞翁失马, 守株待兔,亡羊补牢,画蛇添足,蒸蒸日上飞黄腾达, 呼风唤雨 美不胜收, 滥竽充数   小学二年级 成语 万象更新, 抱头鼠窜, 鸡鸣狗盗, 千军万马, 亡羊补牢, 杯弓蛇影, 鹤立鸡群, 对牛弹琴, 如鱼得水, 鸟语花香, 为虎作伥, 黔驴技穷, 画龙点睛, 抱头鼠窜, 虎背熊腰, 守株待兔, 鹤发童颜, 狗急跳墙, 鼠目寸光, 盲人摸象, 画蛇添足, 鹤立鸡群, 鸡鸣狗盗, 鹬蚌相争, 蚕食鲸吞, 蛛丝马迹, 龙争虎斗, 龙马精神, 龙飞凤舞, 龙腾虎跃, 龙骧虎步, 龙潭虎穴, 龙跃凤鸣, 车水马龙, 指鹿为马, 兔死狐悲, 鸡犬不宁, 心猿意马, 狼吞虎咽, 眼高手低, 目瞪口呆, 胸无点墨, 头重脚轻, 手足轻深, 口是心非, 手疾眼快, 手疾眼快, 耳闻目睹, 头破血流, 眉毛清秀, 袖手傍观, 口出不逊, 飞蛾扑火, 金蝉脱壳, 积蚊成雷, 蟾宫折挂, 蚕食鲸吞, 蜻蜓点水, 螳螂挡车, 蛛丝马迹, 螳螂捕蝉, 黄雀在后, 见多识广, 察言观色, 高瞻远瞩, 左顾右盼, 调兵遣将, 粉身碎骨, 狂风暴雨, 旁敲侧击, 千辛万苦, 眼疾手快, 生龙活虎, 惊天动地, 七拼八凑, 胡言乱语, 改朝换代, 道听途说, 千呼后拥, 东倒西歪, 眼高手低, 口是心非, 头重脚轻, 有头无尾, 前倨后恭, 东逃西散, 南辕北辙, 左顾右盼, 积少成多, 同甘共苦, 半信半疑, 大材小用, 先人后己, 有口无心, 天经地义, 弄假成真, 举足轻重, 南腔北调, 声东击西, 转危为安, 东倒西歪, 反败为胜, 以少胜多, 由此及彼,手无缚鸡之力   小学三年级语文(下)成语和四字词语   群芳吐艳,姹紫嫣红,落英缤纷,郁郁葱葱,喷薄而出, 旭日东升,夕阳西下,皓月当空,崇山峻岭,悬崖峭壁, 层峦叠翠,苍翠欲滴,光彩夺目,万紫千红,挨挨挤挤, 小巧玲珑,成千上万,饥寒交迫,皑皑白雪,长途跋涉, 各式各样,应有尽有,沉默不语,不约而同 亡羊补牢,南辕北辙,惊弓之鸟,孤单失群,和颜悦色,连绵不断,恍然大悟,买椟还珠,各式各样,光阴似箭,日月如梭,受益无穷,鸦雀无声,情不自禁,人山人海,诚心诚意,博览群书,孜孜不倦,勤学好问,学而不厌,坚持不懈,竭尽全力,业精于勤,专心致志,聚精会神,废寝忘食,锲而不舍,脚踏实地 异口同声,神气十足,四面八方,七嘴八舌,迫在眉睫,喜出望外,端端正正,如愿以偿,蹑手蹑脚,左顾右盼,匆匆忙忙  寸草不生,夜幕降临, 古往今来,五湖四海,迫不及待,目不转睛,应有尽有,恋恋不舍,无影无踪,荒无人烟,趔趔趄趄,名不虚传,游人如织,栩栩如生,琳琅满目,爱不释手,清晰可辨,一模一样, 感激不尽,交口称赞,闻名遐迩,五官端正 栩栩如生,翩翩起舞,恋恋不舍,历历在目,面面俱到,头头是道,源源不断,彬彬有礼,息息相关,蒸蒸日上,津津有味,滔滔不绝,天地荒芜,人烟稀少,提心吊胆,面如土色,熊熊大火,零零星星,夸父追日,女娲补天,金光四射 四面八方,七嘴八舌,成千上万 人山人海,诚心诚意, 惟妙惟肖,零零星星,结结实实,郁郁葱葱, 异口同声,大惊小怪,南辕北辙,   小学四年级成语 德高望重,为人师表, 因材施教, 良师益友, 言传身教, 诲人不倦, 良师益友,春风化雨, 润物无声, 循循善诱, 潜移默化, 和蔼可亲, 无微不至,亲密无间, 形影不离, 亲如手足, 情同手足, 一见如故, 不分彼此,推心置腹, 心心相印, 明月清风、 春花秋月、 浩月千里、 风清月朗,皓月当空, 玉兔东升, 金风送爽、 雁过留声、 秋色宜人、 天朗气清,一叶知秋, 秋风萧瑟、 秋雨绵绵、 秋风习习, 文思敏捷, 聪明过人,一鸣惊人, 足智多谋, 才华横溢, 出类拔萃, 亭台楼阁, 富丽堂皇,雕梁画栋, 古色古香, 别有洞天, 鳞次栉比, 金碧辉煌, 高楼大厦,人山人海, 摩肩接踵, 万人空巷, 座无虚席, 门庭若市, 高朋满座,车水马龙, 川流不息, 水泄不通, 络绎不绝, 举袖为云, 挥汗如雨,人声鼎沸, 花团锦簇, 繁花似锦, 百花齐放, 万紫千红, 五颜六色,含苞欲放, 百花齐放, 五彩斑斓, 迎风吐艳, 姹紫嫣红, 拔苗助长,守株待兔, 自相矛盾, 掩耳盗铃, 亡羊补牢, 滥竽充数, 夸父追日、嫦娥奔月、 后羿射日、 精卫填海、 女娲补天、 哪吒闹海, 四面楚歌、纸上谈兵、 背水一战、 负荆请罪、 卧薪尝胆、 洛阳纸贵, 数九寒冬、寒气逼人、 冰天雪地、 天寒地冻、 滴水成冰、 鹅毛大雪, 鹅毛大雪、粉妆玉砌、 冰天雪地、 银装素裹、 大雪初霁   鸟语花香、 百花齐放、繁花似锦、 桃红柳绿、 春色满园、 春意盎然, 喜上眉梢, 兴高采烈,眉飞色舞,.喜笑颜开、 欣喜若狂、 心花怒放,  湖光山色、 山清水秀、山明水秀、 青山绿水、 山水一色, 山水相依, 妙手回春,. 华佗再世,扁鹊重生,.悬壶济世、 杏林高手,  精忠报国、 爱国如家、 为国捐躯、碧血丹心、 保国安民, 忧国忧民, 五彩缤纷, 五彩斑斓, 五颜六色,五光十色, 姹紫嫣红, 万紫千红, 多姿多彩, 色彩斑斓, 绚丽多彩,花红柳绿, 流光溢彩, 手不释卷, 孜孜不倦, 凿壁偷光, 不耻下问, 废寝忘食, 悬梁刺股,桃李满天下,国家兴亡匹夫有责、   六年级语文上册成语   波澜壮阔, 水平如镜, 拔地而起, 奇峰罗列, 形态万千, 云雾迷蒙, 连绵不断, 危峰兀立, 怪石嶙峋, 云横秦岭, 孤风突起, 目之所及, 千山一碧, 日益密切, 兴国安邦, 高不可攀, 盛气凌人, 万古长青, 千锤万凿, 排山倒海, 一涌而出, 翻天覆地, 天之骄子, 小心翼翼, 颇负盛名, 和蔼可亲, 纹丝不动, 居高临下, 满腔怒火, 一如既往, 绞尽脑汁, 随心所欲, 一本正经, 应接不暇, 粉妆玉砌, 彤云密布, 返朴归真, 苟延残喘, 蹑手蹑脚, 不拘一格, 罪魁祸首, 晨钟暮鼓, 神秘莫测, 遮天蔽日,   五年级上册成语 临危不惧, 披头散发, 淋漓尽致, 争先恐后, 惊心动魄, 近在咫尺, 鬼斧神工, 无与伦比, 不可思议, 浩浩荡荡, 人声鼎沸, 风和日丽, 绚丽多姿, 耀眼华丽, 多姿多彩, 纵横交错, 盘根错节, 翩翩起舞, 焕然一新, 昂首阔步, 至理名言, 心旷神怡, 出其不意, 冥思苦想, 汗流浃背, 镇定自若, 面面相觑, 莫名其妙, 人困马乏, 喜从天降, 得意忘形, 万籁俱寂, 丢盔弃甲, 眉开眼笑, 神机妙算, 叫苦连天, 惊慌失措。 闻所未闻, 围魏救赵, 破釜沉舟, 隔岸观火, 调虎离山, 烟熏火燎, 翻来覆去, 新陈代谢, 吐故纳新, 应接不暇, 惊恐万状, 汹涌湍急, 势不可挡, 不可开交, 井然有序, 舍己救人, 巍然屹立, 生死攸关, 不堪设想。 不知深浅, 刻舟求剑, 郑人买履, 懊悔不已, 气急败坏, 畏缩不前, 和蔼可亲, 闻明遐迩, 落荒而逃, 津津有味 郁郁葱葱,暴风骤雨烈,   六年级语文下册成语 书声琅琅, 议论纷纷, 人才济济, 大名鼎鼎, 千里迢迢, 风尘仆仆, 文质彬彬, 衣冠楚楚, 世世代代, 日日夜夜, 原原本本, 浩浩荡荡, 曲曲折折, 口口声声, .聚精会神, 千钧一发, 五湖四海, .满目琳琅, 顶天立地, 流光溢彩, 沁透心脾, 锱铢必较, 悬崖峭壁, 赞叹不已, 嘘寒问暖, 波澜壮阔, 非分之想, 初出茅庐, 如饥似渴, 成竹在胸, 迫不及待, 别具一格, 不假思索, 接二连三, 莞尔一笑, 始料未及, 无拘无束, 无价之宝, 同心协力, 伶伶俐俐, 端庄典雅, 富甲一方, 困惑不解, 出乎意料, 腰缠万贯, 解囊相助, 寒风呼啸, 汹涌澎湃, 忐忑不安, 天涯海角, 无济于事, 无怨无悔, 泣不成声, 工艺精湛, 宏伟杰作, 阡陌纵横, 波光粼粼, 屋宇错落, 古柳参差, 宛若飞红, 车水马龙, 人声鼎沸, 驻足观看, 鳞次栉比, 摩肩接踵, 熙熙攘攘, 戛然而止, 一丝不苟, 惟妙惟肖, 狂涛骇浪, 暴风骤雨, 腾云驾雾, 壮志豪情, 步履沉重      조선족소학교의 한어교수에서 성어(성구)교수는 의연히 창조적실천과 개혁을 요구하는 일대 난제이다. 교사는 한어교과서의 특점에 근거하여 학생들의 인식규률과 결합하여 편집의도를 모를것은 없지만 실제적인 교수모식을 탐색해야 하리라 생각다.                             2012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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