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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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독서를 말하다 댓글:  조회:181  추천:0  2018-11-24
독서를 말하다               왜서 독서를 해야하는가 ? 고리끼는 라고 말하였다, 몇 년전 상해의 아이북 회원들과 담화를 하면서 독서는 제한 된 생명을 제한되지 않은 시공과 장소로 우리의 생명을 무한이 넓혀 가는 것이며 글을 쓰는것은 우리의 생명을 무한이 연장 시키는 것이라고 말한적 있다 고지능인 사람은 두가지 생명의 결합체이다. 즉 육체적 생명과 지력적 생명의 결합체이다. 육체적 생명은 자연규률의 제한을 받지만 지력적 생명은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례를 들어 내가 살던 고향에 저능 아이가 있었는데 지금 45세가 되여도 세살의  지능에 머물어 있다 수염이 더부룩 해서 아직 어머니의 잠자리에 파고 든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와서 징그러워 죽겠다고 말하군 한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60살을 살아도 세살 밖에 살지 못하는 것이라 말해야한다. 지력의 가장 기본 요소는 기억력이다, 기억력은 어제와 오늘을 련결 시켜주며 과거를 련결시켜 준다, 기억한 궤적의 련결과 결합은 그의 지력을 풍부하게 한다. 기억력이 없으면 사람은 그 당시 살아 있는 동물일 뿐 모든 경력과 지식을 상실하여 지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기억은 고급동물인 사람으로서 매우 중요한 기능이다 기억을 하는데는 두가지 방면으로 취득한다. 첫 번째는 체험적 기억이다 자기가 살아 오면서 격은 일들을 기억으로 두뇌에 저장하여 지식과 경험. 론리적 사유와 판단력으로 승화시킨다. 둘째는 간접적 기억이다. 간접적 기억의 가장 광법한 방법은 선인들이 쌓은 지식을 독서를 통해 기억으로 섭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태여나 커가면서 세상엔 모르것이 너무 많으며 지구에 사람이 살면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것이다. 완전히 미지의 세계다. 이런 것을 알려는 강렬한 호기심은 독서의 원동력이다. 자기가 살아가면서 부닥친 의문을 책에서 찾으려는 갈망도 원동력이다 . 우리는 언제나 오늘에 살며 순간순간에 살며 엄격히 말해서 일초 일초에 산다. 지나간 것은 과거이다. 어제도 과거이고 우리가 태여 나기 전도 과거이다. 우리가 태여나기 전의 기억은 오로지 책만에서만 얻을수 있다. 몸은 현재에 있지만 시간과 장소를 무한히 이동하여 몇 백년 몇 천년전으로 갈수 있다. 이것이 바로 책이다. 례를 들어 지금 아파트에 앉아서.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 홍루몽을 본다 하자. 그러면 그때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으며 사건 현장에 내가 살아 있어 이문목독 한것처럼 기억에 남는다. 만약 쉑스피어의 책을 읽으면 마치 내가 18세기 영국 런던의 대극장에서 희곡을 보는것 같다. 영국의 바이런, 불란서의 모파쌍, 로씨야의 뿌쉬낀 등등 책을 읽으면 우리는 그 세상에 산것 처럼 기억으로 남는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지력 수명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 우리의 지능은 매우 약하다 배움으로  독서로 우리의 지능을 성숙 시킨다. 즉  철학, 심리학, 미학, 론리학외에 많은 지식을  기억으로 습득하여 지능을 승화 시키며 사유와 판단력을 얻어낸다. 이전 로인들은 고 하였다. 그 뜻은 배워서 써먹어야 한다는것이다. 현대 심리학으로 말하면 정상(情商)과 지상(智商)이 동시에 구비되여 한다는 말이다  이 정상과 지상은 심리학의 범주로 말하자면 길기에 여기서 삼가한다 세상엔 책이 너무 많다, 폭팔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인류의 책을 다 읽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의 취향과 직업, 생활에 어울리게 읽어 유익한 지식을 섭득해야한다, 이에 좋은 책은 반복적으로 읽어 정통(精通)해야 한다, 수박 핥기로 읽어서는 아무것도 섭득할수 없다. 독서 필기는 독서에서 매우 중요하다. 몇년 후  독서 필기를 펼쳐 보면 기억이 새롭고 강화된다. 내가 문학에 뜻을 두고 고금중외 책을 읽을 때엔 꼭 독서 필기를 하였다. 좋은 단어, 좋은 경구를 필기책에 기록하여 다시 뒤져 보군하였다, 그 필기 책이 10권 되였는데 아쉽게도  문혁때 반란파들이 걷어가 소각되였다 사람에게는 자식을 낳아 잘 키워 자기의 유전자를 연장시키려는 본능이 있다. 그 외에 살아 가면서 자기가 걸어 온 길. 하고 싶은 말 . 정감 등을 글로 남겨 동세대와 후세에 공유하려는 본능이 있다. 책을 쓰는  모든 작가들은  책을 써서 자기의 존재 가치를 보존 하려한다. 이는 일반 사람들이 할수 없는 일이다. 직업과 권세와 부유를 떠나서 오로지 고지능 고가치의 지능을 가진 사람만이 할수 있는 일이다. 글을 쓰고 책을 낸다는 것은 기실 자기 수명의 연장이다. 모든 작가들이 비록  육체는 사라 졌어도 령혼은 지금에도 살아 있다. 이것이 바로 지력 수명을  무한이 연장하는 일이다 많은 분들이 상해에 살면서 쓴 글과 책이 없다면 앞으로 존재 했다고 력사는 기억하지 못 할것이다. 사라진 력사로 될것이다. 상해는 우리 조선족 문단의 황무지 였다. 많은 젊은 일대가 개척해 나가면 우리 조선족 문단에 길이 남을것이다. 조선족이 낯선 상해에서 분투하고 애로를 격으면서 지낸 고민과 절망. 재개와 분투의 력사 현장을 글로 남긴다면 오래오래 력사가 기억할것이다. 또한 작자의 이름도 력사에 남을 것이다 이상 두서 없이 라렬하였다, 독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것 없다        
6    시인의 번뇌 댓글:  조회:580  추천:0  2016-04-06
(시창작담)   시인의 번뇌                                  -로댕- 김 시인님; 나는 내가 왜 시인이 되였는지 지금에 와서 의심할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왜 시를 고집하며 모지름 쓰고 있는지 정신적 질환이 아닌가 의심니다. 처녀작을 발표한지 40년이 되여 오면서 온갓 풍운을 겪었지만 근 몇년 동안은 허탈감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제5 시집을 낼 시들이 있지만 더는 시집을 낼 의욕이 생기지 않아요. 내가 시인이라고 어디가서 떳떳이 자칭하기도 싫어요. 시인은 이 시대의 약자라고 생각해요, 누가 처다 보지도 않는데 머리를 치겨들고 돌아다니는 시인을 보면 한심할때가 많아요. 시인의 자존심은 극도로 추락했어요..왜서일까요 ? 사회적인 방면도 있지만 얼마간은 우리 시인들의 문제가 아닐까요 ? 더우기 우리 시인들이 우리 시단을 훼손시킨 결과가 아닐까요 ? 우리의 자존을 우리가 지켜 내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요? 심각히 반성하고 고민하고 몸부림치는 탐색으로 시의 정신을 구현하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요. 물론 저도 많은 고민을 하지만 아직 까지는 이렇다할 결론과 출로가 없어요. 다만 아래의 담화를 통해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을 따름이에요.     (1) 김 시인님; 나는 심양서탑조선족서점에 들린적이 있어요. 심양에 가게되면 꼭 들려 어떤 새로운 책이 나왔는가 보군하지요. 또한 책꽂지에 꽃인 나의 시집도 들춰 보군합니다  서점 최경리게 드릴때는 하며 말입니다. 점원에게 몇권 팔렸느냐 물어보면 선생님 뿐만아니라 다른 시책과 소설들도 사가는 사람이 거이 없어요하고 대답하지요. 하긴 십년전에 보낸 시집도 아직 꽃혀 있으니 몇년전에 보낸책은 더 말할나위 없지요. 그때마다 나는 시인의 허무감을 슬프게 느끼면서 문학인의 소외를 한탄하게 됩니다. 얼마전 심양의 만융에 이사 오신 강효삼 시인이 술 좌석에서 이런말을 하더라고요.. 흑룡강 한 서점에 들려서 자기의 시집을 몇권 팔았느냐 물었더니 점원이 말하기를 딱 한권 팔았대요. 그것도 륙월에 개털 모자를 쓴 낯 모를 사람이 사갔대요. 그 말에 웃음보를 터트리긴 했지만 심각하게 생각 되더라고요. 혹시 우리 시인들도 개털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개털 모자를 쓴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가하는 허탈감이 들더라구요. 서점에서 나오면 길거리엔 가짜 악세사리를 길바닥에 펼쳐 놓고 파는 장사꾼이 보여요. 시는 실용적으로 말하면 그 가짜 악세사리보다도 못한 지경에 이르렀음이 안타깝더라고요. (2) 김 시인님; 서탑에 가면 노래방과 상가와 커피숍과 술집과 식당마다 사람들이 붐벼요. 지금은 . 물질 자극과 정신자극을 추구하는 때에요.. 감동이 필요 없는 때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단은 감동이 없는 시가 너무 많아요.. 이것이 바로 객관과 주관에서 시가 개털모자를 쓴 신세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지요. 즉 상품이 되지 못하는것은 상품시대에서 자연이 물러나는 것이에요. 시는 영원히 상품으로 될수없는 것이에요.. 자극만을 추구하고 감동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과 감동을 주려는 시인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3) 김 시인님; 시인은 시인이란 동아리를 벗어나면 개뿔도 아니에요.. 얼마 안되는 시인들끼리 서로의 시를 보며 이렇쿵 저렇쿵 할뿐이에요..이 동아리를 벗어나서 시인이라면 누가 존경스런 분이라고 좌석 정중에 모십니까 ? 좌석 정중에는 언제나 로반이요 돈많은 부자요 하는 권세있는 간부요 하는 분들이 차지하지요. 시인은 그것을 알아야합니다.연변의 김혁작가님게서 동창 모임을 쓴 글을 본적이 있어요..다들 외국 에 가 돈을 얼마나 벌었고. 사업해서 얼마나 성공했고 하는 돈타령인데 글 쓰는 김혁선생님은 한구석에 할말없이 가만있었다는거예요. 김혁선생으로 말하면 문학에서 혁혁한 성적이 있는 분이 아닙니까 나는 시를 쓰면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에요.자비심이 많은 우울증 시인이에요..그러면서 시를 집념하는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환갑 잔치나 결혼잔치에 가면 축의금을 주고 조용히 한구석에 앉아 못하는 술 들엇다 놨다 하다가 슬그머니 나와 버립니다. 시인의 인격은 길거리의 걸뱅이보다 좀 나을런지요. 고민입니다. (4) 김 시인님; 한번은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간적이 있어요, 나도 못 마시는 술 한잔 마셨는지라 흥분하였지요, 그래서 자작시 한수를 읽었어요. 어떤 분은 자기들 말만 말이라고 듣지를 않는것이였서요. 다 읽고 나니 어떤분이 소귀에 칠현금을 타는것이라 하였어요. 그때 나의 흥분은 풍선처럼 푹하고 터져 버린것이에요 (5) 김 시인님; 시인은 사회적로 자유로워야해요. 심지어 가정에서도 자유로워야해요. 나의 생활환경은 매우 자유로운 편이에요. 딸은 상해에있고 아들은 일본에있고 안해는 한국에 있어요. 어떤 친구는 내가 매우 고독하겠다고 말하군해요. 그러나 나는 고독을 즐기고 있어요. 시인으로 고독을 즐기지 않으면 시를 쓸수가 없어요. 안해가 집에 오면 한수의 시도 나오지 않아요. 혼자면 자유자재인 셈이죠. 집안 청소도 깨끗이 하고 멀 먹고 싶으면 멀해 먹고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독립 생활능력이 강해요. 아마 군대에 같다 왔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남자라면 반드시 군대 같다 와야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동물들을 보면 숫컷이고 암컷이고 자기가 찾아 먹습니다 사람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분공이 생겼다 하지만 먹을것은 분공함이 없이 같이해야합니다 밥 할줄 모르는 남편때문에 집을 떠나서 안절부절 못하는 안해들이 얼마나많습니까. 나는 한가지 악습이 있습니다 밤에자다가 새벽 두시면 일어나 시를 쓰던가 책을 두시간 보다가 아침 일곱시나 여덟시에 일어나지요 자다가도 무슨 령감이 떠오르면 써놓고 잡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령감을 잃어 버리군해요. 이전엔 공장에 몸 담고 있으면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무슨 기술 공장장이요, 서기요 하면서 더 자유롭지 못 했지요 .50이 되면서 다 뿌리쳤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자유로워 졌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자유는 사회의 제한된 법위내에서의 자유입니다. 지금 시대는 문혁시대와 달리 창작도 많이 자유로워졌죠 (6) 김 시인님; 시인은 항상 자기의 아름다운 정신 세계와 추구가 있는것이에요. 이 정신세계는 항상 시대의 고도에 위치하고 있어 내려다 보면 현실은 언제나 불만스러운 것이에요.. 어떤 시인은 아예 현실을 떠나 자기의 정신세계만을 시상하고 있어요. 아마 이런 현상을 모더니즘 시라 하는것이라 생각되요. 어떤 시인은 현실을 정시하며 부조리에 시상을 하고 있어요 이것이 아마 비판적 사실주의라 생각되요. 이런 문학이 있길래 사회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는것이예요. 전자는 도피라 한다면 후자는 참여예요. 소극적이라면 관조이고요. 나는 처음에는 사실주의 였지만 후는 도피시도 쓰군하거든요. 그러나 아직 사실주의가 주류예요 비판적 사실주의 시를 많이 쓰지만 정치 신경은 건드리지 않고 사회 체재도 건드리지 않아요. 모든 사회체재가 다 완벽하지 못한 결점과 웃점이 있거든요. 아마 공산주의에 간다해도 완벽하지 못할것이에요. 이것은 시인이 해결해야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젊은 시절엔 격정에 넘쳐 좋은 시 한수가 세계를 바꾸어 놓는다고 생각했어요. 알고 보니 그런것이 아니에요 공산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것인지 공상적인것인지 나는 모르나 학교에서 배운대로 라면 나는 공산주의를 신앙합니다. 공산주의가 얼마나 좋습니까 ?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되고 사회 재산이 어느 재벌들이 독차지 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공유이고 매개인은 능력이 저능이건 고능이건 능력대로 일하고 수요만큼 분배 받는, 고도의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이 있는 그런 사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 자본주의 사회나 사회주의 사회나 그런 요소들이 지금도 맹아 하고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의 재산을 복지 재단에 헌납하는 재벌이나 서민이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기금으로 내놓는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레브 똘스또이도 자기 농장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평등 사회를 꿈꾸는 실험을 하지 않앗습니까 시인에께는 이런 공산주의 보다 더 아름다운 몽환적인 정신세계가 있을수 있습니다. 모든 물질에 령혼을 불어 넣는 그런 신비의 정신 세계말입니다 공상도 시상의 원천이 될수있는것으로 그것은 시인의 자유이니까요 그러기에 시인은 현실에 항상 불만족하지요 (7) 김 시인님; 몇달전에 만융에 와 사시는 강효삼 시인께서 전화가 왔서요. 이 출간 되였는데 미안해서 선생님께 드리지 못하겠다고., 왜냐 했더니 나의 시가 한수 밖에 수록하지 않았다는것이에요. 그래서 한 수라도 수록 되였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대단한 일이냐고 어서 가지러 가겠다고 하였어요 중국 백년 문학사에 한 수가 수록 되였다는것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그래 무슨 시냐 했더니 라고 햇어요, 나의 시집 에서 리얼리즘시 과 은 김학송 시인님의 발견으로 에 수록 되였고 유미주의 시 가  최룡관 시인님에 의하여 발견된것이예요. 시인은 시를 써놓고 명시를 썼는지 일반시를 썼는지 모르는것이에요, 다 다른 시인들께서 발견되는 것이예요 (8) 김 시인님; 시인은 사상성이 있어야하며 현실과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예리한 눈이 있어야해요. 사상이 없으면 현실을 깊이 파고들지 못하니까요 모든 현상엔 모두 시로 승화할수있는 시가 존재해요. 나의 시 등 모두 길가에서 찾은 시에요. 에서 시인은 정을 동냥하러 다니는 시인이라 했어요. 물질 자극의 시대에 인정의 삭막성을 비판한시에요. 는 정조와 정신세계가 무너짐을 절규했어요. 아마 내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가 없다면 이런 현상을 시로 발견하지 못하였을 것이예요 시집 에서 석화 시인님께서 극구 찬양한 는 측은 지심을 시로 승화 시켰어요. 아무 시적 기교가 없고 무시되였지만 독자의 코를 시큼하게 하는 시에요 즉 감동이 있는 시에요 시인은 많은 책을 보아야해요, 을 보아 을 알며 을  보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알아야해요. 을 보고 깜짝 놀랄만큼 중국 문화의 심원성을 느꼈어요.. 나는 퇴계 리황의 책을 아직 보지 못했어요 시인이라면 퇴계의  4단 7정을 알아야 고운 마음으로 시를 쓸수 있다고 생각해요 즉 ,, ,,이 없으면 감동을 주는 시를 쓰지 못하니까요..시인은 마음이 어지고 선비정신이 있어야해요.  물질 자극으로인해 이 네가지 지심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그래서 나는 애상시를 많이 쓰는 원인의 하나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이 네가지 지심이 시인의 사상이자 마음으로 되여야 하니까요 (9) 김 시인님; 요즈음은 한국의 시 간물들을 보고 있어요 한국에서 어떤 시풍이 불면 연변에도 꼭 반응이 일어 나거든요. 한국에 시인들이 약 5000명이되지만 시간물을 운영하기 힘든 모양이에요 기본상 시인들이 시인의 독자이니까요 시를 발표하면 원고비는 주지 않고 5권 이상의 시간물을 사야해요, 그런데 요 이요 하는 쟁론이 가끔 보여요 이런것들이 때론 심기를 불편하게 해요. 시인들의 권위를 내세우는 현상이니까요.. 기실 시인에게는 권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요. 다만 이라던가 이라던가 하는 자격이 있을 뿐이고 존경이 있을 뿐이에요. 시를 씀에 있어서 좋은 시를 쓰는것은 원로나 초학자나 평등해야해요 초학자들도 좋은시, 명시를 쓸수있으니까요, 시인을 서렬하고 등급을 나누는 것은 시문학의 비애에요 (10) 김 시인님; 우리 중국 조선족 시단에서는 한때 리얼리즘 시와 모더니즘 시가 격돌이 있었어요 물론 한국에서 불어온 풍파겠지요.. 그런데 그의 치명적 약점은 서로 부정하는데서 비릇된것이에요..우리 시단이 발전하려면 공조가 필요해요. 창작 방법에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야해요. 모더니즘 시를 주장하는 분들이 리얼리즘 시를 비자루로 깨끗이 쓸어 쓰레기통에 처넣어도 안되는 일이지요.. 그리고 리얼리즘 시를 쓰는분들도 모더니즘의 웃점을 접목 시켜야합나다. 문제는 어떻게 감동적인 시를 쓰는가, 어떻게 새로운 정서적 느낌이나 깨우치는 느낌을 주는가 하는문제에요, 을 보면 모더니즘 시와 리얼리즘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이 많아요 또한 이 두개 창작 수법을 결합한 시들도 많아요.. 모더니즘시의 창작방법의 주요한 내용의 하나가 하는 수법이에요. 그런데 한다고 해서 언어가 까다롭고 읽기가 짜증나서는 안되지요. 어떤시는 언어의 도 잘못 리해하고 시를 써요.. 언어의 이나 언어의 주장은 모두 극단적인 것이에요. 그리고 내가 저급 독자가 되서인지 모르겠지만 시적 내용이 무었인지 모를시가 많아요. 그런데 시인이 독자를 > 하는 말을 시인들은 좀 안하면 좋겠습니다.을 보면 어느 계층의 사람들이 다 리해하고 접수할수있고 감동을 주는 시들입니다 (11) 김 시인님; 우리의 시와 시정신이 어느 바루 와 있는지 가늠하기가 힘듭니다. 시 정신이란 두가지 방면으로 나타나요.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시를 쓰는가와 어떤 내용의 시를 쓰는가 하는것입니다. 시창작을 자기의 생명으로 여기는 시인과 심심풀이로 시를 쓰는 시인과 그의 시의 질이 틀리지요. 그리고 시의 정신이 다름에 따라 어떤 주제의 시를 쓰는가도 구별됩니다 나를 비릇해서 감동을 주지 못하는 시가 많아요. 지금 우리 시단에서는 시정신을 탐구하고 고양할때라 생각됩니다. 나는 시의 탈출구를 찾기위해 지금도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12) 김 시인님; 시인은 자기의 정감세계를 세상에 산포하려는 욕망과 독자를 감동시키려는 욕망이 있어요, 이것이 시인의 존재 가치에요, 돈도 안되는 시집을 왜 자비로 냅니까 ? 나는 이 방면에 체험이 있어요 무순의 한 조선족 녀생이 성폭력을 당한 기사를 읽고 분노하여 에 시를 발표한적 있어요. 그런데 림금산 부총편집게서 전화를 걸어와 당시의 계광현 총편집게서 그 시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거에요..이것이 바로 시인의 존재 가치이지요. 시인은 군중의 애달픔에 눈길을 돌려야해요 그들의 애달픔이 나의 애달픔이라 생각되거든요.. 밀항하다 죽은 민족의 슬픔을 달래기위여 쓴 , 가출한 안해를 증오하여 쓴 , 상해에서 농민공의 딸이 유치원이 부러워 란간밖에서 우두커니 바라보는 불쌍한 , 사치가 흐르는 상해와 어울리지 않게 길가에서 초라하게 앉아 강냉이를 씹어 먹는 로총각이 장가를 가지 못하는 애달픔을 노래한 . 상품경제의 기형적인 발전에 의하여 인정이 삭막해가는 등 이런 시들은 군중의 애달픔을 노래한 시로 감동이 있는시라 생각되요, 그리고 우리민족이 연해로 진출하여 격는 애달픔 , 고향의 집을 팔고 상해로 갓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한 신세가된 등 시인은 군중의 최하층을 관찰할줄 알아야해요,그래야 감동적인 시를 쓸수있어요. (13) 김 시인님; 나는 시창작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주장해요. 이것은 민족의 정체성이 무너지데서 비릇된것이에요, 시인은 민족의 발자취를 더듬어 추종하며 구가해야해요, 우리 민족은 항일전쟁 해방전쟁을 통하여 무수한 피를 흘린 민족이에요. 그리고 무수한 황무지를 개간하여 나라에 공을 이룬 민족이에요, 우리 부모들의 감정정서를 리탈하면 좋은 시가 나오지 않지요, 개혁 개방 이후 외국 로무에서 외화를 중국에 벌어 들인 민족이에요. 그리고 한국 기업을 중국에 끌어들인 교량작용을 한 민족이에요, 이와 반면에 연해로 대성시로 진출하면서 문화가 무너지고 있어요. 시인은 바로 이런 격변기에 살고있어요. 이런 현상에서 시의 소재들을 발견해야해요 (14) 김 시인님; 한 시인이 몸부림치고 있음을 발견했어요. 바로 흑룡강에서 심양 만융에 와 사시는 강효삼 시인이에요. 만융은 민족 집거구역이지만 이방인으로 많은 고독을 느끼더라구요. 초라한 옷가짐, 몇년을 신었는지 가죽이 다 달아진 신, 키가 작고 여윈얼굴, 병에 시달려 굽은 허리, 정말 볼품이 없어요, 그와 만나 술좌석을 몇번했어요 그러나 시 정신은 강렬하게 살아 있었어요. 이전에는 생활이 가난해 원고비를 벌어 생계하려고 소설, 수필, 시를 마구 닥치는 대로 썼다는거에요, 이제는 시만 파고들어 가겠다 하더라구요. 아직 열정이 대단하시더라고요..그의 시를 보면 민족정신을 발굴하는 정서가 차분히 깔려 있어요. 우리 시인들은 역경에서 혼신을 문학에 이바지 하는 그의 정신을 따라배워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것이 바로 시정신을 고양하는일이에요 (15) 김 시인님; 료녕시단의 현황은 어떠한가구요 ? 료녕은 약 30명의 시인 대오가 있어요 대부분 심양시조선족문학회(사단법인)의 산하에 활동하고 있어요. 이미 료녕시단의 판도가 구성된셈이에요. 나는 시분과 주임으로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어떻게 하면 시의 질과 량을 제고할까고, 우선 고무가 있어야해요. ,, 등 잡지에 료녕 시인특집이 나가군하지요, 이에 여러 편집 선생님들에게 감사를 드리려요, 그리고 회원작품집 이 15기 마다 시인들의 시가 실리지요. 압록강 부간에도 질 좋은 시들이 나가군합니다 우리 료녕시단은 현실과 생활에서 찾은 시소재들이 많아요, 감정이 진실하고 감동적인 시들이 많지요, 김창영, 김룡호, 박경남, 서정순, 김옥화, 박애자, 로춘애,류광순, 편도현, 김군등 성숙된 시인들과 현대파의 시 풍격을 가진 박경상, 정란등 시인들이 있지요 그리고 강효삼 시인이 오셔서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산재지구로서 모든 시풍격을 포용합니다. 연변 시인들의 말을 빌으면 시 쓰기가 편하고 행복한 곳이지요. 앞으로 시적 정신을 발양하여 더 높은 단계로 진출하리라 생각됩니다 비록 활동 기금을 구하기  힘들지만 각자가 자비를 내서라도 활동을 해야지요. (16) 김 시인님; 평론계에 좀 말해도 될런지요.비록 평론계에 대하여 아는것이 없지만. 평론계에는 편파성와 편견성과 주관 취향성을 극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들이 높은 각도에 서면 공정성이 생기고 시각이 맞춰지는것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민족의 문학을 발견하고 고양하데서 평론의 작용이 중요합니다. 작품이 몸이라하면 평론은 옷입니다,옷이 날개란 말이있지않습니까, 몸의 곡선미가 아름다우면 입는 옷도 그 곡선미를 잘 살려내 더 아름답게 단장할수 있지 않습니까. 몸이 절구통 같거나 메주덩이 같으면 아무리 잘 단장 시키려도 격에 맞지 않습니다. 러시아에서 위대한 뿌슈낀과 레브 똘스또이.체호브 등 작가들이 있었기에 위대한 평론가 벨렌쓰끼가 있는것이 아닙니까   우리 료녕 문단은 몸매가 곱지 않아서인지 평론계의 관심이 적은것 같습니다. 좀 덜 곱더라도 고운 옷을 입혀 주시면 그래도 나설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료녕에는 평론가가 없습니다. 평론가 선생님들에게 부탁하오니 밉더라도 좀 관심해주십시요   (17) 김 시인님; 중국 조선족 시단에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시인은 누구냐구요,? 존경하는 분은 많지요, 그중에도 리상각 선생님을 더 존경합니다. 그분은 나를 시와 을 맺게한 장본인 이니까요. 청년 시절 시창작에 불타 올랐을적에 그분이 나를 시단에 등단시켰습니다 그것이 70년대이지요. < 야, 너는 시가 안되니 걷어치워라>고 꽥 소리쳤다면 지금 이 신세가 안되였을지 모릅니다. 혹시 그랬다 말하더라도 꺼지지 않고 계속 시창작에 집념했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여하튼 시인이 되겠다는 욕망으로 피가 끓었으니까요, 그 분의 뒤에 나의 시가 한수 실려 있더라고요, 8년전 연변 회의에 갔을적에 드린 헌시지요 그 분은 많은 시인을 시단에 등단 시켰지요.그리고 관심도 많이 하시고요. 제가  첫시집 를 출간하였을적에 이란 수필을 써서 ( 1999년 10호)에 발표해 나를 고무격려 해주었지요, 지금도 그 수필을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가끔 들여다보며 고무를 받고있습니다 (18) 김 시인님; 저는 소방대 참군 시절에 3층에서 추락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가치에대하여 누구보다 깊이 느끼는 사람입니다, 시는 나의 생명과도 같아요,. 6개월을 병실에 누워서도 시를 썼어요. 지금 와서 보니 시가 뭐길래 ? 그러나 죽음에서 살아 나기 위한 안간힘으로 지금도 시를 씁니다. 그러기에 허탈감도 남보다 깊고 존재의 가치에 대한 추구도 남보다 강렬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저는 시를 계속 쓰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시인님; 시를 론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시인이라면 령혼과 의지의 몸부림이 있어야합니다 시단이 이런 정신이 없으면 고립의 처지에 몰리게됩니다, 애탄만 하지말고 노력해 봅시다 심양시 소가툰 화원신촌 서재에서    2010년 3월 8일          
5    한국 경제발전에 중국동포의 역할과 의의 댓글:  조회:1267  추천:1  2015-09-02
            한국 경제 발전에 중국동포의 역할과 의의                                                                                  리문호     중국 조선족 동포가 한국에 진출 한지 이미 25년이 되였다. 장기간 한국 정부가 중국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고 규제가 완화되면서 그 포용 정책의 현명성은 지금에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정부가 중국 조선족에 대한 영입은 한국으로서는 경제 발전의 다시 없는 생력군을 얻은 셈이다. 중국 조선족은 자기의 근로 정신과 희생 정신으로 갖은 고생을 이겨가며 중국에서 농토를 개척하며 자기의 생활 기반과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항일 전쟁, 해방전쟁에 참가하여 무수히 많은 조선족 전사들이 피를 흘리고 희생되였기에 정치적 립지도 높은 것이다. 조선족은 그의 신근한 근로 정신과 영웅 정신, 헌신 정신으로 우수한 민족의 위상을  수립하였다.       한국 보다 먼저 중국 조선족을 영입한것은 북한 정부이다  6.25  전쟁 이후 복구 건설과 생산 발전을 위해 중국정부에 요청하여1958년에 대량의 조선족을 북한에 영입하였다. 나의 고향 집안현 한 마을에 간적이 있다. 약50여 세대가 거이 다 북한에 이주하여 짜개바지 친구라군 찾아 볼수 없었다. 심양에서 내가 소학교 5학년 때 이다. 나의 친척.동창생들도 많이 북한에 이주하여 갔다.     외 이런 말을 꺼내냐 하면 한국 정부가 뒤늦게 나마 중국조선족이란 우수한 인력자원의 역할을 알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조선족의 한국 진출은 한국 경제 발전의 커다란 도움이 되는것은 당연하다. 물론 진출을 통해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고 중국의 경제 발전과 외화 저축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고 본다.   아래에 한국 경제 발전에 조선족의 역할을 말해 보기로 한다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의 수는 방대하다. 불완전 통계에 의하면 60만명에 도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는 우선 한국의 부동산 시장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평균 2명이 전월세 집에서 살고 있다고 추산할 때 30만 가구의 집이 있어야한다. 한 가구의 월세가 평균 25만원이라 계산해 보라. 어마한 천문 수자가 아닌가. 그리고 한국정부의 정책이 좋아지면서 생활이 안정되고 저축이 늘어 감에 따라 아파트, 오피스텔, 신축빌라를 구매하는 조선족의 수가 점차 많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내수 소비에도 조선족의 역할은 큰 것이다. 조선족이 없으면 식당이 문을 닫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친구들과 대림의 한 노래방에 간적이 있다. 한국인 마담은 종국동포가 오지 않으면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하였다. 자녀 결혼은 기본상 한국에서 진행하는데 웨딩홀의 예약도  힘든 정도이다.  의식주 외에도 자가용을 구매하는 조선족도 많아 지고 있다.   건축업과 제조업, 농장.축산. 식품 가공업에서 조선족이 없는 곳이 없으며 숙련된 모습으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중소기업은 물론 식당 종업원, 가사 도우미, 파출부, 청소부,대형 마트나 상가의 쓰레기 분리원, 재활용 분리장의 선별원, 등 한국 사람이 꺼려하는 일을 조선족이 한다. 만약 조선족이 없다면 한국경제의 공백은 너무 크다. 그리고 한국이 고령화에 접어들면서 간병이란 직업이 부상하였다. 화서 효성료양원에 한 친구가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어 문병 간 적이 있다. 이 료양원에서 간병하는 사람은 모두 조선족이였다. 한 녀성 간병원이 4명의 남성 환자를 간호해야 하는데 안아서 휠채어에 태우고 샤워실에 가서 목욕 시켜야지 끼니를 챙겨야지 대소변을 받아 내고 기저귀를 채워야지 등 쉴새 없이 간호를 한다. 만약 조선족이 없다면 누가 이 일을 할것인가 ? 조선족은 천사들이다.    물론 조선족의 우수 인재들은 한국의 큰 기업에서 기술자 무역업에 종사하고 학교에서 교사도하고 면세점에서 중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비지니스에 종사한다    조선족은 이제는 단순 로동자가 아니라 문화생활의 질을 높이면서 자기들의 입지를 제고 시키고 있다. 또한 한국인들도 조선족을 멸시 하던데로 부터 조선족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조선족을 따뜻한 품으로 포용하고 있다. 얼마전 구로구 문인협회 의 요청으로 재한 동포문인협회 회원 7명이 참가하였으며 4명이 시랑송을 하였다. 한국에 가면 나는 재한 동포문인협회 활동에 참가하면서 감회가 깊다. 리동렬.김정룡 회장을 비릇해 변창렬 강호원 등 회원들의 열정은 대단하다. 김정룡은 장편소설과 칼럼집, 림금철은 시집, 장금선의 장편소설 등 작품집이 한국에서 출간되였다. 동포문학 3기의 출간은 조선족의 문화 차원이 높아짐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문학은 조선족 정신과 문화의 핵심 지주역할을 하는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는 한국 유지인사들의 주목과 지지를 받고있다.   중국 조선족은 한국이 중국 진출에 절대적인 교량 작용을 하였다. 중국어를 모르는 한국인이 조선족을 교량으로 삼은것은 총명한 짓이다 중국 조선족에게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국 유학을 다녀 온 우수 인재들이 많다. 만약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통역 인재를 배양한 후 중국과 교역했더라면 중국과의 무역 수치가 지금에 도달했는지 의문이다. 취지취재(就地取材)가 중한 경제 문화 교류의 시간을 얼마나 앞당겼는지 모른다. 조선족의 이런 인재들도 응당히 한국 진출로 보아야한다. 한국 기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실업률이 높다고 한다. 기실 일자리는 많은데 왜 실업률이 높은가. 그들의 실업률이란 개념상에서 체면적인 대 기업을 찾기 때문이다 무릇 노동 능력이 있는 조선족은 실업률이 0이다. 모두가 일자리가 있다는 말이다. 돈이 되면 인격을 불문하고 닥치는대로 일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조선족 녀성들은 한국 녀성들에 비해 덜 사치스러우며 생활력이 강하여 고생을 마다 않고 각종업에 종사하고 있다. 물론 사회구조의 원인이기도 하다. 조선족은 가정관념이 강해 로이들이 가사와 자녀를 돌봐주기에 녀성들이 가정 부담없이 업종에 종사할수있다. 한국 녀성들 대부분은 결혼하여 아이가 있게되면 가정 부담을 자기가 질머져야 한다. 한국 로인들은 자식을 세간 내보내면 해방이다. 물론 젊었을 때 고생했으니 청복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것이다.     조선족은 한국에 진출 함으로 인해 생활이 질이 제고 되였으며 이를 믿천으로 자녀들을 인재로 배양하여 북경, 상해, 청도,대련,광주, 외국에 진출하게 되였다. 그리고 많은 조선족 자녀들이 한국에 진출하여 돋을 벌어 시집,장가를 가고 가정을 이루게 되였다. 이는 응당히 모국이라는 한국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또한 한국도 조선족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여야 한다. 이는 파렴치한 말은 결코 아니다.   조선족의 한반도 통일에도 그의 작용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중조 변경에서 무역업을 하면서 북한의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문화적 교류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남한과 북한의 문화적 이질성 극복에 조선족의 영향력은 큰 것이다. 조선족은 한반도 통일의 교량 작용을 하고 있다.      총적으로 조선족이 없다면 한국 사회와 경제(특히 3D업종)는 얼마나 기형적이고 공백이 많은가 하는것이다. 조선족이 3D 업종에 종사하면서 직업병과 안전 위험에 로출되어 희생된 사람이 많다. 한국 경제 발전에 조선족의 피와 땀과 고귀한 생명이 기여 되였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로 볼때 한국 정부와 국민은 조선족에게 대하여 인간적으로 더욱 관심하고 따뜻하게 대해 줘야고 본다. 조선족들이 가장 참을수 없고 또 부득히 참아야하는 것은 멸시다. 각종 일터에서 조선족의 능력이 인정 되면서 지금은 조선족의 인권도 많이 개선 되였다고 본다. 조선족 아주마들께서 자주 듣지만 가사 도우미에 대하여 가정의 노예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사 도우미도 인격과 자존심이 있다. 여기서 가사도우미가 가장 엄중하게 인권 유린을 당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즉 아직 인권의 사각 지대에 갇혀 있는것이다. 금전 사회에 깊이 물든 한국인들도 이제는 자기의 소질을 제고하고 조선족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인도 조선족의 우수성을 따라 배워야 한다   조선족도 한국의 질서와 법을 지키고 자기의 자질을 높여야한다.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현상. 아무데 담배 꽁초를 버리는 현상, 식당이나 거리에서 고성방가, 노상방뇨 하는현상, 술마시고 싸우는 현상, 등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가리봉이나 대림에 가보면 길거리가 너무 혼잡하고 더럽다. 존중 받으려면 자질을 제고하고 자기가 자기를 단속할 줄 알아야 한다. 조선족 매개인은 조선족 정체의 위상을 지켜내야 한다.   중국 조선족과 한국인의 문화적, 감정적 동일성은 점점 커가고 있다. 지금은 조선족이 거리에 나가면 한국인과 분별하지 못하게 세련되였다. 물론 행위도 분별할수 없을만큼 세련되여야 한다. 우리는 영광스런 조선족이다. 우리의 자존을 우리가 지키자. 우리는 한국 경제과 사회 발전의 생력군이다. 우리의 피땀으로 우리의 생활과 문화를  향상하자고 부르짓고 싶다.                                                                 
4    오복이란 ? 댓글:  조회:855  추천:0  2014-02-07
오복이란 ? 리문호  이란  본래 의 에서 나온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복을 많이 말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오복이 무었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무슨 치복이요, 처복이요, 자식복이요 하며 각기 부동한 답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오복이란 무었인가를 조금이라도 알릴 필요성을 느껴 아래에 서술해 보려 한다.    첫째 복은 장수(長壽 )이다. 즉 오래 살아야 한다. 인명무상(人命無常)이란 말이 있다. 어떤 이는 태아로 죽고, 자라면서 요절하고,굶어 죽고(기실 굶어 죽는것은 가장 불쌍하고 처참한 죽음이다), 자연 재해와 각종 사고, 병으로 제명에 살지 못 하고 죽는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환경의 오염과 생태의 파괴로 인해 각종 질병이 인류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그리고 병충해와 먹거리를 쟁탈하면서 농약을 많이 써 우리가 영양소를  섭취하는 음식과 밥상도 안전하지 못하다. 내가 알기로는 축산에서 항생제를 많이 쓰기에 내성균이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또한 무균 육아는 오히려 아동의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장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장수는 재부와 학식, 직위와 총명재질, 미모와는 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란 말이 있다.사람마다의 생명체에는 수명의 시간적 암호가 내재되여 있다. 현대 과학으로는 아직 그 비밀 암호를 해독할수 없다. 하기에 사람마다 생명이 언제 소진되는가를 알수 없다. 다만 수명은 유전적 인소와 생활 습관, 생활 환경과 마음 갖춤과 관계가 있다. 현대 의학의 발전과 생활에서 질의 개선은 장수의 조건을 열어 놓는다. 무병장수는 무릇 이 세상에 온 사람들의 바람인것이다.     둘째 복은 부귀(富貴)이다.  부귀는 상대적 부귀와 절대적 부귀가 있다. 물질 재부의 향유는 상대적 부귀요 마음의 부귀는 절대적 부귀이다. 물질 재부가 많고 관직이 높다고 해서 다 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귀는 오히려 화근이될수 있다. 관직이 높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비리로 인해 패가망신 한다.정신적 재부를 가지고 여유있게 살아 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 정신적 재부를 인(仁), 의(義), 리(理), 지(智), 신(信)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물질적 재부와 정신적 재부를 다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귀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보기가 드물다.   세째 복은 강녕(康寧)이다.  편안 할 강에 편안 할 녕이다. 심신이 편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7정6욕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다. 현대 생활의 압박감, 빠른 절주, 노동과 휴식의 불균형, 등은 사람들의 심신을 해치고 있다. 망상증과 우울증, 정신분렬증 상사병 등 자살률이 높은것도 이 원인의 하나이다. 탐식, 탐욕, 시기, 질투, 그리고 일에 부닥치면 자기 부터 생각하는 소극적인 부면(負面) 성격의 소유자는 강녕할 수 없다. 모든 사물에 적극적인 태도, 열정적인 태도, 대범한 여유를 가지며 베풀줄 알고  버릴줄 아는 사람만이 강녕할수 있다. 즉 자기의 심신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강녕할수 있다. 이황 선생의 은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교재이다.      네째 복은 호덕(好德)이다.  좋은 덕이란 세가지 방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덕을 쌓고 덕을 베풀고 덕을 입는것이다.   덕이란 무엇인가 ? 에서는 지(智), 인(仁), 용(勇)  세가지를 합쳐 덕이라 하였다. 그 중  인애(仁愛)가 없으면 지와 용은 사회를 위해한다고 하였다   에서는 온(溫,온화하고 유연한 것), 량(良선량하고 인자한 것 ), 공(恭성근하고 공경한 것), 검(儉,검소하고 근로한 것), 양(讓겸손하고 사양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호덕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덕을 쌓아야 할 뿐만 아니라 부모, 처자, 친척, 옆집, 친구동료들 에게도 덕을 쌓고 베풀고 덕을 입어야 한다. 이는 사회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 받을 수 있는 기본 범주이다.  나는 재부를 모으는것 보다 자녀 교육이 가장 큰 로후 대책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우리 주위에는 비록 한 때는 가난했지만 자녀 교육을 잘 시켜 로후를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그러나 한 때는 부유했지만 자녀 교육을 홀시 한데서 무너진 가정도 허다하다.즉 자식 덕(효도)을 입으려면 자식을 덕으로 교양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다섯째 복은 선종(善終)이다.  고종명(考終命)이라고도 하는데 죽을 때 잘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죽음에는 여러가지 죽음이 있다. 정의를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는 헌신적인 죽음은 영광스런 죽음인것이다. 사고로 인해 죽는 죽음은 불의의 죽음인것이다. 사회에 죄를 지어 사형 당하는 죽음은 개 죽음이다.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는 죽음은 비명인 것이다. 자살로 죽는 것은 경생의 죽음이다.   총적으로 사람은 죽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선종은 자연사인 것이다. 즉 늙어 죽는 것이다. 죽을 때 장기적으로 고통에 시달리다 죽는것은 선종이라 말할 수 없다. 빚 더미에 앉아 죽는것은 선종이라 말할수 없다. 전통적 관념에서 객사도 선종이라 말할수 없다. 지금은 고독사가 많은데 선종이라 말할수 없다. 좀 애매한 말로 말하면 여유롭게 살다가 여유롭게 고스란히 죽는것이 선종이다.   사람마다 다 오복을 완벽하게 갖추기란 쉽지 않다. 인생에 대한 존재 가치의 인식에 따라 태도와 내용도 변화가 있다. 즉 매 사람의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에 의해 오복에 대한 리해도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 마다에게 오복이 래림하기를 바란다.    
3    병자 호란과 심양에 얽힌 한 댓글:  조회:1034  추천:1  2014-01-21
병자호란(丙子胡亂)이란 ? 리 문호 역사는 그저 역사이다. 역사에는 정의요 비정의요 하는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절대적 강자의 역사이다. 힘과 모략(謨略)으로 야심으로 기존의 질서를 뒤 엎고 패권과 왕권을 수립하는 역사이다. 약하면 얻어 맞고 멸망하는 역사이다. 중국의 역사를 봐도 이러하고 삼국 사기나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봐도 이러하다. 그중 병자년 호란은 가장 치욕적인 역사로 남아 있다. 아래에 세가지 방면으로 말해보려한다 (1), 정묘호란의 전후 (2), 병자 호란, (3), 심양 옥중에서 쓴 삼학사의 시 등이다 (1), 정묘호란의 전후 7년의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지원군의 협조하에 물리치게 되였다. 그러나 왜구의 잔인한 살인, 방화, 약탈에 조선의 정국과 경제는 장기간 회복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정의 당파 싸움에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선조가 돌아가고 광해군(光海君)이 등극하면서 당파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광해군은 동복 형인 임해군(臨海君,)이복 아우인 영창대군(永昌大君), 조카 능창군(綾昌君)을 죽이게 하고 계모 인목 대비(仁穆大妃) 가두게 한 죄로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였다. 인조(仁祖)가 등극한 후에도 당파 싸움은 그칠줄 몰랐으며 이괄(李适)의 난을 덥쳐 조선왕조는 도탄에 빠지게 되였다. 명나라 역시 임진왜란에 피폐해진 틈을 타 세종, 세조 때 꼼작 못하던 여진족이 만주에서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중국의 무순과 신빈을 관통하는 쑤즈허(蘇子河) 기슭 허투아라에서 누루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고 만주를 차지하였다. 1616년 신빈을 도읍으로 정하고 흥경이라 하였으며 년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다. 누루하치는 제왕의 자리 한(汗)에 오랐는데 바로 청나라의 태조이다. 누루하치는 군사를 일으켜 요동 땅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1618년 천조(天朝)의 나라 명에서 조선에 지원군 요청하에 강홍립(姜弘立)을 5도 원수(元帥)로 삼아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명군과 합세 하였지만 이듬해에 대패하여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조선으로 도망가지 못한 조선 군대는 깊은 산속에 숨어 살았았는데 지금의 요녕성 개주현 산골의 박씨촌 마을이 그 실례이다. 그들은 우리 말을 모르는 한족이 되였다. 누르하치는 승승장구로 승리하여 도읍을 심양으로 옴겼으며 심양을 성경이라 하였다. 누르하치가 죽고 여덟번째 아들 홍타시(洪他時)가 뒤를 이어 1636년 4월에 등극하였는데 바로 청나라의 태종이다. 임진 왜란을 겪은 50년 후 1627년(인조5년) 정묘(丁卯)년 정월에 홍타시는 아민(阿敏)에게 군사 3만을 내주어 강홍립, 박난영을 길잡이로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을 점령하였다. 구실인 즉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아 준다는 것이였다. 여러 성이 함락되자 세자를 전주쪽으로 내려 보내고 인조는 29일에 강화로 피난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지자 화의하기로 결정하고 2월 15일에 원창부령 이구(李玖)를 왕의 아우 원창군이라 가장하여 무명 1만 5천필, 면주 200필,백저포 250필, 호피(虎皮) 60장, 녹피(鹿皮) 40장, 왜도(倭刀) 8자루, 안구마(鞍具馬) 1필을 보내고 3월 3일에는 형제지국 맹약을 맺었다. 정묘호란은 한 단락 지었으나 수십일 동안 청천강 이북은 거이 폐허가 되였다. 10년후 병자호란이 일어 났는데 아래에 보기로 하자 (2), 병자호란 (ㄱ), 병자 호란의 배경 1632년 홍타시는 내몽고를 점령하고 1636년 4월에는 국호를 청(淸)으로 정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하였다. 병자호란의 시발은 이러하다. 병자년 이른봄에 무신동지(武臣東知) 이곽(李廓)과 첨지(僉知) 나덕헌(羅德憲)이 춘신사(春信使)로 심양에 갔는데 마침 3월 11일은 홍타시가 황제를 참칭(僭稱)한 날이였다. 그들은 이곽등을 위협하여 참석하라고 하였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여 따르지 않았다.. 녀진족 관리들이 구타하여 옷이 찟기고 갓이 부서졌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이곽등이 돌아올때 한(漢- 청의 황제를 일컬음)은 답서를 주어 가져가게 하였으나 오는 도중에 버렸다. 이해 늦은 봄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두 장수가 인렬왕후의 조제(弔祭)를 드리러 왔는데 청나라 십왕자(十王子)가 인조에게 드리는 글을 보내 왔다. 내용인 즉 화호(和好)를 끊지 말며 이곽등이 의식에 참가하지 않을것을 비난하는 글이였다. 조정은 벼슬 자리를 잃고 있는 이명등에게 접대를 분부하였는데 너무 소홀하였다.장령(掌令) 홍익한이 상소를 올려 사신의 목 베기를 청하였다. 기미를 알아 챈 호장은 민가에서 말을 빼앗아 달아 났다.묘당(廟堂)에서는 그제야 겁이 더럭나 만류했으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인조는 곧 팔도에 교서를 내려 척화(斥和)할 뜻을 효유하였는데 서로로 가져가던 교서가 호장에게 빼앗겨 트집 거리가 되였다 조선은 명나라 신하의 나라로 임진왜란 때 명의 지원을 받았으며 주인을 두개 모실수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홍타시는 서정(西征)에 후방 조선을 큰 걸림돌로 삼았다. 청은 후환을 없애고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병자 호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세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조선 조정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논란이 분분했으며 청의 사신을 목 베고 국교를 끊자고 했다. 양반, 선비, 사대부의 나라가 붓과 세치 혀로 강대한 제국의 창칼을 맞서기는 만무하다.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면 무었하는가 ? 역사는 정의(正義)가 없다. 강자는 승리하고 약자는 멸망한다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은 정세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화친을 주장하였으며 이에 영의정 김유도 동조하였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 교리(校理) 윤집(尹集,) 수찬(修撰)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등이 대표로 하는 척화파가 우세였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가 옥신각신 싸우는 바람에 비운의 대세로 기울어져 갔다. 인조는 소역(小譯)을 특명으로 청나라에 보내 화해를 전하였으나 한이 소역에게 라는 답변을 가지고 왔다. 조정에서는 또 타투다가 결국 박노(朴魯)를 보냈으나 기일을 지키지 못했다 (ㄴ),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12월 9일 청병 수천이 압록강 얼음타고 건너 들어오고 뒤 이어 청에 편입된 몽골군을 망라하여 20만 대군이 잇다라 강을 건너 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비켜 놓고 성읍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직진하는데 각진의 조선 군사들은 겁 먹고 감히 막지 못하니 그야말로 승승장구가 따로 없었다. 12월 14일에는 청군이 이미 서울 가까이에 이르러 인조는 창황히 대궐을 떠났다. 서울안의 사대부들은 남녀노소를 부추기고 피난 가느라 수라장이였다. 인조는 강화로 가려 하였으나 적의 추격이 두려워 남한산성으로 도주하였다. 성안에는 서울과 지방군사 1만 2천명, 문무관과 산관이 200명, 종실과 삼의사가 200명, 하리가 백명,하종관이 데리고 있는 노복이 백명이였다. 이런 오합지졸로 대적하기는 역부적이였다.청병은 산성으로 진군하여 16일에는 완전히 산성을 포위 하였다. 뒤따라 태종 홍타시도 그믐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편 강화도의 군사는 싸우지도 못하고 뿔뿔히 흩어졌으며 피난 간 빈궁(嬪宮)과 봉림, 인평 두 대군 및 부인은 청군게 붙잡혀 남한산성으로 끌려같다. 남한 산성이 포위된후 각 지방의 군사들은 감히 증원을 하지 못했으며 소부대가 증원 왔다해도 패배하고 흩어졌다. 하지만 성안에서는 이런 정황을 통 모른채 화친파와 척화파 간에 갈등이 심하였으며 응원을 고대하며 벝이고 있었다. 고립무원의 상황하에 비축한 양식이 떨어지고 대세가 기울어 짐을 안 인조는 결국 항복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청의 한(漢)과 인조(仁祖) 간에 오고간 서신의 내용을 중점을 따 인용한다. 이조의 서한 ; 한의 서한; < 오직 시서를 일삼고 전쟁을 익히지 않았다 했지만 지난번 기미년(己未年)에 너는 까닭 없이 우리를 침노(주; 1619년 광해군 11년에 지원군을 명에 보내 녀진족과 싸운 일)했지 않느냐 ? …> 인조의 서한; 이렇게 서한이 오고가고 사신이 오고 가면서 인조왕의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척화파를 내주고 세자를 인질로 보내며 해마다 청에 세공을 받히기로 하였다. 그리고 명 나라에서 준 고명(誥命,주; 고는 천자가 이르는 말, 명은 천자가 명령 하는 말)과 책인(冊印, 주; 임명장과 도장)을 받히며 명과 국교를 끊고 청의 정삭(正朔,주; 그 나라의 신하가 되어 따르는 것) 받들기로 하였다. (ㄷ)해마다 청에 세공(歲貢)할 물목은 ; 황금(黃金); 100냥, 백금(白金); 1,000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00부, 단목(丹木); 200근, 환도(環刀); 20파(把), 호피(虎皮); 100장, 녹피(鹿皮);100장; 차(茶); 1,000 포, 수달피(水獺皮); 400장, 청서피(靑鼠皮); 200장, 호초(胡椒); 10 두(斗), 호요도(好腰刀);26 파, 호대지(好大紙); 1,000권, 호소지(好小紙); 1,000권, 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 4령, 각양화석(各樣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00 필, 각색세주(各色細紬); 2,000필, 마포(麻布);400필, 각색면포(各色綿布); 10,000필,포(布); 1,000필, 쌀 (米); 10,000 포(包).이다 (ㄹ) 1월 29일 최명길은 오달제와 윤집을 결박 시켜 성문을 나와 청군에 인도하였다. 인조왕은 그들에게 두분의 부모 처자를 종신토록 모시겠다고 약속 하였지만 몇 해동안 쌀을 내려 주고는 다시 은전(恩典)이 없었다. 김상헌과 홍익한은 후에 심양에 잡혀 갔다 1637년 1월 30일 인조와 세자는 남융복(藍戎服)을 입고 서문으로 성을 나갔다. 홍타시 한은 일찌기 삼전포(三田浦)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남쪽에 9층 계단을 만들어 황색 장막을 치고 황색 일산(日傘)을 세우고 군사를 줄세워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다. 군진이 엄숙하고 병기가 해빛에 번쩍이고 있다. 인조는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려 항복하였다. 서울은 약탈방화 살인으로 페허가 되여 버렸다. 향교동구(鄕校洞口)에서 부터 좌우의 붓방(筆肆), 행랑(行廊)과 대광통교(大廣通橋),소광통교(小廣通橋,주; 서울의 종로,종루 남쪽 청계천에 있는 다리)에 이르기 까지 좌우 인가는 모두 불타버렸으며 도처에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불모로 세자와 대군이 심양으로 잡혀 갔으며 사대부의 부녀자와 민간인 아녀자 3만이 끌려가 청의 종, 첩으로 되였다. 환향녀에 대한 이야기는 다 아는 사실이다 병자호란 후에도 청은 명나라를 치는데 조선의 보병,기병, 수군들을 충당 시켰으며 물자를 공급하게 하여 시달림이 끝임 없었다. (ㅁ) 이런 치욕의 병자호란으로 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은 줄곧 도탄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치욕을 당하면서 국토만은 자손에게 물려 준 것은 다행이 아닐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청국에 편입되어 지금은 한국(북한을 포함해)이라는 나라가 중국의 서부의 루란(樓蘭)이라는 나라처럼 종적을 감췄는지 모른다. 또한 페쇠적이고 보수적인 양반제도와 유생들이 죽은 글을 고집하여 나라 일을 그르쳤는지 반사(反思)해 보아야한다. 그때 왜 청은 조선을 통치하여 자기 땅으로 편입하지 않고 그것으로 끝났는가 ? 그것은 청이 그 보다 더 큰 고기 덩이 서정(西征)의 전략적 욕심이 있어 후방에 정신을 분산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청나라 황제가 담략가이며 정치가이며 모략가로서 영웅호걸임을 충분히 설명한다. 그때 양반제도의 조선에서는 절대로 이런 인재가 나올수 없다는 것을 후세로서 우리는 한탄할 뿐이다. 이 문장의 서두에서 말한것 처럼 역사는 강자의 역사이다. 또 다시 말해서 반역의 역사이다. 반역이 없으면 역사는 발전하지 못한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한반도라는 땅에 모국이 존한다는 것은 행운중의 행운이고 다행중의 다행이다. 현대인 누구던 한 민족이라면 소중히 여겨야 할것이다. (3) 병자호란 때 심양에 얽힌 한 1637년 삼학사 홍익한(洪翼漢), 오달재(吳達濟), 윤집(尹集)이 척화한 죄로 청나라의 성경 심양에 잡혀왔고 1642년에는 김상헌(金尙憲)이 심양에 잡혀와 투옥 되였다. 그들은 청나라 황제 홍태극(洪太極)이가 자기의 신하로되여 준다면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송죽같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홍익한은 붓을 달래서 < 천만 번 죽더라도 마음에 달게 여기고 피를 북에 바르면 넋은 하늘을 날아 고국으로 날아 갈것이다> 라 하였다. 여기에 심양 옥중에서 쓴 김상헌과 삼학사의 시를 소개한다. 瀋獄送秋日感懷 金尙憲 忽忽殘方斷送秋 (홀홀잔방단송추) 一年光景水爭流 (일년광경수쟁류) 連天敗草西風急 (연천패초서풍급) 羃碛寒雲落日愁 (멱적한운낙일수) 蘇武幾時終返國 (소무기시종반국) 仲宣何處可登樓 (중선하처가등루) 騷人烈士無窮恨 (소인열사무궁한) 地下傷心亦白頭 (지하상심역백두) 어느덧 이국에서 가을철 보내니 한 해 세월은 물보다 빠르구나 하늘가 시든 풀에 서풍이 세차고 겹겹 싸인 찬 구름에 지는 해 슬프다 이 몸 어느 날에 고국에 돌아 가랴 고향을 바라 볼 높은 루각도 없구나 마음 열렬한 선비의 크나 큰 한은 옥 안의 시름으로 머리가 또 희네 瀋獄踏靑日詠懷 洪翼漢 陽坡細草坼新胎 (양파세초탁신태) 孤鳥樊籠意轉哀 (고조번롱의전애) 荊俗踏靑心外事 (형속답청심외사) 禁城浮白夢中來 (금성부백몽중내) 風飜夜石陰山動 (풍번야석음산동) 雪入靑凘月窟開 (설입청시월굴개) 饑渴僅能聊縷命 (기아근능료루명) 百年今日淚沾腮 (백년금일루첨시) 양지바른 언덕에 가는 풀 새싹 움트는데 조롱안에 갇힌 외로운 새처럼 마음만 애닲아라 남의 나라 답청하는 풍속 상관할 바 있으랴만 궁 안에서 즐겁게 술 마시던 일 꿈속에 떠오르네 밤 바람이 돌을 들춰 싸늘한 산 흔들리고 눈은 성애로 녹아 달은 활짝 밝구나 배고프고 목말라 애오라지 실날 같은 목숨 이어 가니 하루가 백년인듯 지루해 눈물이 뺨을 적시네 瀋獄寄內南氏 吳達濟 琴瑟恩情重 (금슬은정중) 相逢未二朞 (상봉미이기) 今成萬離別 (금성만이별) 虛負百年期 (허부백년기) 地闊書難寄 (지활서난기) 山長夢亦遲 (산장몽역지) 吾生未可卜 (오생미가복) 順護腹中兒 (순호복중아) 우리의 사랑 그지없는데 서로 만난지 두해가 안 되서 오늘은 아득히 헤어졌으니 백년의 가약 허사가 되였구려 먼먼 이국에서 글 보내기 어렵고 산이 첩첩하여 꿈 또한 더디오 내 살기를 짐작할 수 없으니 뱃속의 아이나 잘 부탁하오 除夜 尹集 半壁殘燈照不眠 (반벽잔등조불면) 夜深虛館思悽然 (심야허관사처연) 萱堂定省今安否 (훤당정성금안부) 鶴髮明朝又一年 (학발명조우닐년) 벽에 가물거리는 등잔불 보며 잠들지 못해라 밤 깊은 허전한 방에서 오늘 따라 심란도 하여라 늙으신 어머님 오늘도 편안하신지 시름 많은 백발로 또 한 해를 맞겠구나 이상 심양에 얽힌 한을 삼학사와 김상헌의 시로 소개하였다.나는 심양에 살면서 고궁에 가 볼 때마다 그들의 시가 생각난다. 지조 높은 조선의 선비 삼학사는 형장의 이슬로 되였다. 그러나 선비와 유생의 지조로서 나라를 구원 할수 없는 친통한 교훈을 남긴다. 형세를 판단하지 못 한 결과는 국난을 초래한다.고구려가 당에 멸망한 후 신라, 고려, 조선은 줄곧 당, 료, 금, 원, 명, 청에 세공을 받히며 신하의 나라로 되였으며 성을 쌓지 못하고 군대를 발전하지 못하는 감시와 통제를 받아 왔다. 굴복으로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로 부터 해방되였지만 대국들 사이에 끼여 또 분단이란 아픔을 가지고 있다.글로벌 시대에 어떻게 발전과 통일을 할것인가 ? 이는 민족 앞에 나선 가장 큰 과업이다. 과연 이를 완성할 수 있는 인물이 한반도에 나올수 있는가 ? 현재로서는 의문이다.
2    왕희지의 <란정서>와 천고에 쌓인 베일 댓글:  조회:961  추천:0  2014-01-21
왕희지의 와 천고에 쌓인 베일 중국 절강성 소흥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12km 떨어진 난저산 자락에는 난정(蘭亭)이란 원림이 있다. 이는 중국에서 서예의 성지(聖地)라 불리우는 곳으로 중,한,일 서예계에 널리 알려진 곳 이기도 하다. 필자가 금년 6월 1일 이 곳에 갔을 이미 을 치렀으며 중국 서예의 최고 상인 이 성대히 페막한 후 였다. 아직 상품화의 물결이 휩쓸리지 않아 노점상들의 잡다한 싸구려 소리가 없는 조용한 난정에는 세월의 고풍을 자아 내는 검은 이끼가 돋힌 , 정자, 곡수류상(曲水流觴), 강희 황제의 를 임모하여 돌에 조각해 세운 석, 문아(文雅)한 왕희지의 사당이 수죽(修竹)과 수림, 못에 고느즉히 어울려 깊은 묵향의 음운과 옛 정서를 담고 있다. 필자는 수림속 개활진 곡수류상처에 이르러 마음은 동진영화9년 즉 기원 353년 3월 3 짇 날로 간다. 이 날을 이라고도 하는데 주(周)나라 때 부터 내려 오는 풍속으로 강가에 나가 세수를 하고 몸을 씻으며 액운을 떨어 버리고 묵은 때를 벗는 수계제(修禊祭)를 지낸다. 왕희지는 소흥 명문가족의 명사와 제자 사안(射安), 사만(射萬), 손작(孫綽), 서풍지(徐豊之), 등 41명을 난정에 초대하여 수계제를 지낸다. 수계제를 지낸 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는데 바로 이 것이 곡수류상이다. 곡수의 량켠에는 왕희지를 포함해 42명의 명사가 주런히 앉아 있다가 술잔이 물결 따라 누구에게 가면 시녀가 건져주어 마시게 하는데 마시고는 반드시 시를 지어야 한다. 만약 시를 짓지 못 하면 벌주 3두(斗)를 마셔야 하는데 1두는 지금으로 말하면 반근이니 한 근 반을 마셔야한다. 술은 소흥의 명술 황주이다. 이리하여 11명은 각기 2수, 15명은 각기 1수 를 지었으며 16명은 벌주 3두를 당하였다. 시들을 걷어 한데 모으고 서문을 쓰게 되였는데 손님들의 제의하에 왕희지가 쓰게 되였다. 왕희지는 그 날 따라 기분이 좋고 주흥이 도도하여 쥐의 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을 들고 누에 고치로 제작한 잠견지(蠶繭紙)에다 28행 324자의 붓글을 썼다. 이것이 바로 훗날 서예계에 지고무상으로 떠 받들린 혹은 이다. 왕희지는 집에 돌아와 몇 번이고 다시 베껴 쓰려 하였지만 처음 쓴 경계에는 미치지 못 하였다. 는 당 나라에 이르러 과 송 나라에 이르러 로 왕희지는 의 추대를 받게 되였다. 당 나라의 서예가 손과정은 성공 된 서예의 창작 요소를 말할 때 5합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이무한 (神怡務閑), 감혜순지(感惠徇知), 시화기윤(時和氣潤), 지묵상발(紙墨相發), 우연욕서(偶然慾書) 이다. 왕희지는 를 쓰는 당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령감적으로 모두 극치에 도달하였음을 말해 준다. 왕희지는 평생 거위와 난초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그는 거위와 난초에서 서예 창작의 령감을 얻었으며 필묵을 숙련 시켰다. 에는 갈 지(之)가 20자 들어 있는데 한 글자도 같은 것이 없으며 수면에서 거위가 헤엄치는 각양각색의 평온한 자태와 같다. 그리고 필획은 란초가 바람에 나붓기는 것 같은 자유자재의 풍격이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것은 잠견지이다. 잠견지는 고려지라고 불리우는데 중국에서는 생산할 수 없었던 종이로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우리의 선조들의 지혜으로 제작한 종이였다. 명주와 같이 하얗고 비단과 같이 질기며 먹물이 잘 배여 중국에는 흉내낼수 없었던 몹씨 부러워하는 종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 조각도 발굴된 것이 없으며 제지 기술도 영영 실전되고 말았다. 왕희지는 죽으면서 를 가보로 진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27ㅇ년 동안 아무 사회적 효과를 내지 못하고 가문에 묻혀 있었으며 왕희지의 7대 손 지영 (智永)이 소장하고 있었다. 지영은 월주 영흠사 스님이 되여 물려 줄 자손이 없게 되자 죽으면서 자기의 제자 변재(辨才)에게 물려 주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서예에 대하여 조예가 깊으며 왕희지의 서예를 특별히 숭상하였다. 그는 황제로 된 후 민간에 소장된 왕희지의 필적을 2300여 첩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만을 수집 못 해 한스러워 하였다. 그는 사람을 파견하여 변재를 찾아 가게 하였으나 번번이 빈 손으로 돌아 왔다.변재는 모른다고 딱 잡아 떼였던 것이다. 이세민은 강산과 황후를 제외하고 어떤 대가를 치렀으라도 를 손에 꼭 넣을 정도로 집착하였다. 이세민은 감찰어사 소익(蕭翼)을 불러 네가 가서 찾아 오라고 하였다. 소익은 당 태종에게 왕희지의 서예를 몇 첩 얻어 가지고 산동 선비로 가장하여 영흠사에 갔다. 몇 달 동안 접촉하면서 소익은 변재의 신의를 얻었다. 하루는 소익이 왕희지의 서예을 변재에게 보이면서 진품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변재는 유심히 바라 보다가 진품이 맞다고 하면서 자기에게도 있는데 보려면 내일 오라고 하였다. 이튼 날 변재는 자랑스럽게 침실의 대들보에 구멍을 파고 숨겨 두었던 왕희지의 필적을 소익에게 보여 주었다. 다 ! 그토록 당 태종이 찾으려던 이다 ! 몇 일 후 소익은 변재가 강으로 목욕 간 틈을 타서 영흠사에 들어가며 문 지키기 중에게 스님께서 정건(淨巾)을 가져오라 시켰다며 들어가 를 도적질해 줄행랑을 놓았다. 당 태종은 를 받아 쥔 후 용안에 희색이 만면해 당장 소익을 원외랑(員外郞)으로 진급 시켰으며 변재에게는 왕을 속인 죄로 처벌이 마땅하나 사면하고 비단 삼천필과 량곡 삼천석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변재는 소익에게 배반 당한 원통감과 목숨처럼 여긴 를 도적 맞히고 나서 병들어 일년이 못 되여 죽었다. 이로하여 황제인 이세민의 인격에는 큰 오점을 남겼으나 가 사회적 효과를 발휘하는데는 크게 기여 하였다. 소익의 비 도덕적인 행위는 지금도 중국 소장가들의 질책을 받고 있다. 당 태종은 최고의 서예가들을 시켜 임모하고 탁본하게 하였으며 십여첩을 가족이나 대신들에게 하사하였다. 지금 북경고궁박물관에 있는 는 그때 풍승소(馮承素)가 임모한것으로 필법, 묵기(墨氣),행관(行款),신운(神韻)이 원래의 것과 근사한 것이다. 당 태종은 죽을 때 를 순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후량의 휘주 절도사 온도(溫韜)가 소릉(昭陵)을 도굴 하면서 행방은 사라졌다. 또 어떤 설은 당태종과 순장한 는 모품이며 진품은 당 태종의 아들 이치가 가지고 있다가 이치가 죽은 후 무측천과 함께 순장되어 건릉(乾陵)에 있을 것이라 한다. 역대 서예가들이 쓴 의 모본은 수 천 첩이 넘는다. 그 누구나 서예가면 왕희지의 서예 경지에 오르려고 노력 하였던 것이다. 는 서예의 경서일 만큼 서예가들의 심리를 휘여 잡았다. 각종 베일에 쌓인 서성 왕희지의 , 그의 행방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천고에 남아 있다 !
1    서울의 아침을 여는 사람들 댓글:  조회:745  추천:0  2012-07-27
                  서울의 아침을 여는 사람들                                       새벽 네 시다. 밤새껏 거리를 비추던 가로등은 슴벅이며 혼곤히 졸고 있다. 유흥가 나 상가들의 오색 명멸하는 네온등들은 지치여 생기 잃은 빛을 간신히 발산하고  있다. 조락하는 오동 나무, 포플라 나무 가로수 잎  사귀는 소리 없이 길가에 떨어 지며 마가을이 왔음을 암시 하고 있다. 싸늘한 기운이 명암이 엇갈린  골목 마다 고요히 흐른다. 이맘 때면 거리의 인행로는 분주해 지기 시작한다. 골목에서 샛길에서 하나 둘 집에서 나온 검으틱틱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첫 차를 타려는 사람들이다. 네시 반이면 버스 정류소 마다 삼삼오오의 사람들이 모여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사람을 줏어 가고 또 줏어 가도 버스 정류소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서울의 수 만개 버스 정류소 마다 이러한 광경이다.각 버스 로선마다 버스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대부분은 건설 현장으로 가는 사람들이고 소 부분은 청소,음식점으로 출근 하는 사람들이다.버스 안은 공기가 혼탁하다. 세수를 하지 않은 해볓에 끄슨 얼굴들이 보인다. 몇일을 목욕하지 않았는지 몸에서는 가끔 악취가 풍기는 사람도 있다.  어제 밤 피곤을 달래기 위해 마신 술기가 아직 깨여 나지 않아 시큰한 술 냄새가 차 안을 진동 한다. 어떤 사람은 생파 냄새와 생마늘 냄새 지독하게 난다. 중국 조선족은 중국의 음식 습관대로 생대파를 먹기 좋아 한다. 한국인은 이해 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러나 호방하고 성격이 활달한 중국 조선족에게는 결코 불미스런 것은아니다. 생파 한 대면 소주 둬냥을 마신다. 또한 힘든 체력 노동에서 생파는 혈액 순환을 돕는 피로 회복제일 수도 있다. 가끔 모텔이나 여인숙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 가는 서울 아가씨들이 차에 오르는 것이 보인다. 외박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양복 신사들도 가끔 끼여 있다.그들은 버스에 오르면 코를 벌름거리며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나 체면을 지키기 위해 가까스로 참는 모습이다. 출근하는 인력들은 대부분 여행용 가방을 메고 창 모자를 썻다. 옷은 기본상 더러움에 잘 타지 않는 검은 색상이다. 그들의 몸에는 끓는 고혈이 흐른다. 현장에서 쌓인 피곤을 풀기 전에 이 아침에도 지친 다리를 끌며 노동 현장으로 나간다. 30대에서 60대 년령의 방대한 건설 군체이다. 버스에서 한 사람의 통화 내용을 들을수 있다. < 어제는 정말 힘들었어, 지금도 졸려,... ... 그래 잘 있어> 새벽에 통화 하는걸 보면 중국에 있는 안해인 것 같다. 그들은 오늘도 고달픈 노동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려는 사념으로 친지들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귀여운 자식과 부모가 얼마나 생각 나랴. 어떤 젊은 부부는 결혼하고 갈라 진지 십여년이 넘는다. 피덩이 같은 아이를 부모에게 맏기고 나온 사람도 많다. 또 어떤 사람은 자녀가 공부하는 창가에 햇살 한줌 뿌려 주려고 나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3D 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멸시와 기시에도 꾹 참아 가는 사람들이다. 나의 한 후배 친구도 한국에서 이렇게 버스를 타고 출근 하였을 것이다. 그가 한국으로 오는 전날 나와 심양에서 술 좌석을 같이 하였고 2차로 커피숍에서 밤 늦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에게 한국에 가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알려 주지 못할 딱한 사정이 있어서인지 가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상해에 갔다가 심양에 돌아 오니 친구들이 알려 주기를 그는 한국에서 죽었다 하였다. 그것도 세집에서 죽은 뒤 열흘이 지나 발견 되였다 한다. 정말 비참하다. 주위에서 다른 사람도 이렇게 죽었다는 소식을 종종 들은 바 있다. 현장으로 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현장에서 사고로 죽은 사람들과 피곤이 쌓여 심장 마비, 뇌출혈,뇌혈전으로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나의 한 동창생은 한국에서 말기 암병에 걸렸다. 고향에가 죽으려고 하였으나 비행기 탑승을 거부당하였다. 링겔 주사를 달았기에 비행중 사망되면 공항측으로 부터 책임을 질까바 거부당한 것이다. 결국 몇일이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건설 현장에서 추락 사고, 감전 사고, 붕괴 사고로 죽은 사람이 많다. 물론 그들은 각자의 애환과 가치관 그리고 목적이 있어서이다. 왜서 이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해야 하는가 ? 너무나 단순한 물음이고 너무나 단순한 답변 이기는 하지만 정답은 없다. 앞으로 역사가 기록하고 답변함이 좋을 듯 하다.   가리봉, 대림, 구로, 가락동, 등 지역은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집중 거주 지역이다. 그 만큼 인력 사무소도 수백개 널려 있다. 인력 사무소 현관 마다 수십대의 봉고차들이 대기하고 있다. 버스에서 전철에서 내린 노동자들이 인력 사무소 앞에 까맣게 모여 붐빈다. 다섯시가 되면 거리가 봉고차들로  막히고 밀린다. 현장으로 가는 장관이다. 서울만 하여도 십여만의 인력이 이렇게 현장으로 나갈것이라 추산된다.저급 인력을 실은 봉고차들이 서울 거리를 빠져 나가고 나면 번짝번쩍 빛나는 자가용 승용차들이 붉은  쌍눈을 켜들고 거리에서 조수처럼 밀려 간다. 그들은 한국의 고급 인력 들이다. 한달 로임이 오 백만 이상 받는 귀족 로동자 들이다.   한국은 절주의 긴박감과 삶의 압박감이 사람을 지배하는 나라이다. 조금의 여유도 없는 나라이다. 한 발자국이라도 떨어 지면 천길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이 속에서 조선족은 참고 견디여 왔다. 한국은 인력이 수요되고 조선족은 돈이 수요 되기 때문이다. 자본의 공포는 언제나 조선족의 머리우에 먹장 구름처럼 드리워 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비장한 아침이다. 서울의 아침에 조선족의 피의 파도가 도도히 사품쳐 흐른다. 그 피의 흐름 우에 시뻘건 태양이 솟을 것이다. 서울이여, 너는 아는가, 아침은 중국 조선족 동포의 혈파(血波)의 충격에 동트고 열린다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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