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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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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어머니의 밥상 댓글:  조회:1097  추천:0  2014-07-26
어머니의 밥상         된장찌개를 먹을 때면 아주 가끔씩 떠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두 가지의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두 분의 어머니가 계신다. 한 분은 돌아가신 나의 친모이시고, 또 한 분은 지금의 계모이시다. 두 분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두 분의 어머니를 사랑한다.    나는 두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따뜻한 밥상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첫 번째는 나의 친모이신 어머니의 밥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몇 컷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 시절의 기억을 풍경화로 표현하자면 온통 흑백으로 칠해진 우울한 그림처럼 어두운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 그림들 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습이 있다. 구석진 곳에서 울고 있는 한 아이 모습이다. 왜 그렇게 부부싸움을 많이 하셨는지 당시 나는 몰랐었다. 몇 컷 안 되는 기억 속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매 맞는 어머니와 그 옆에서 공포에 떨며 울고 있는 나의 모습…. 슬픔으로 가득 찬 어머니의 모습과 눈물. 이 모습이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의 대부분이다.    한동안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전에도 그런 적이 종종 있었던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 그렇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도박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우리 집뿐만 아니라 외가댁에도 많은 도박 빚을 남겨서 그 빚을 갚느라 거동이 불편하신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환갑이 훨씬 지난 나이인데도 어부생활을 이어가셔야 했고, 부유했던 우리 집은 생계를 위한 화물차 한 대만을 남겨 둔 채 모든 재산을 정리해야 됐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3~4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셨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고, 집에서는 간혹 교인들이 아버지가 없는 시간에 찾아와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주님의 자식에게 용기와 격려를 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잃었던 신뢰는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운송업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야 했던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으셨고, 자신이 집에 없는 시간에 어머니가 무엇을 하며 다니는지 철없던 나에게 물으시고 주변 사람에게 물으시며 뒷조사를 하고 다니셨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부부싸움이 있었다. 부부싸움이라고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매 맞는 어머니의 모습만 머릿속에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저녁으로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머니는 물으셨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옛날 기억을 더듬으며 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기억이 오래되어서 모르겠는데 엄마가 해주던 건데…. 국물이 빨갰던 것 같고, 꼬랑내 같은 냄새가 났었지만 아주 맛있었어. 두부도 들어갔던 것 같은데 그게 제일 먹고 싶어." 그것이 된장찌개였다는 것을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어머니는 맛있는 된장찌개와 반찬들이 맛깔스럽게 어우러진 푸짐한 저녁을 준비해 놓으시고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셨다. 밥을 다 먹고 나자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며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나를 확 껴안으시더니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셨다. 영문도 모르고 품에 안긴 나는 어머니의 가슴이 따뜻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시고 나서 어머니는 만원을 건네주며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맛있는 거 사먹고 놀다오라고 하셨다. 그것이 내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어머니는 자살을 하셨다. 내가 밖으로 나간 뒤, 바로 농약을 먹고 한 많은 인생을 스스로 마무리하셨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내 귀로 똑똑히 들었었는데, 영안실에 싸늘히 누워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믿겨지지가 않았다. 큰 충격이었다.    그 뒤로 나는 명상을 만나기 전까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어머니가 새어머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친구 녀석들이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냐?” 라고 가끔 물을 때마다 나는 “아파서 돌아가셨다.”고 얼버무리고는 죽음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기 전에 얼른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 그때의 기억을 닫아 버렸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밥상의 추억이다. 가슴 아픈 순간이지만 나는 이때 느낀 어머니의 따뜻했던 가슴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어머니에 대한 유일하게 따뜻했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면 이 순간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픈 기억도 함께 해야 하기에 따뜻한 슬픔으로 아마 오래도록 기억이 될 것 같다. 자식을 앞에 놓아두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을 느낄 때면 그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와 한참을 운다. 명상에 입문하고 나서 ‘나는 누구인가?’를 쓰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 밥상의 기억이 떠올라 몇 시간을 서럽게 울었다. 그 눈물은 어머니의 선택과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그 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자식의 서러운 삶이 함께 어우러진 두 모자의 눈물이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지금의 새어머니가 오셨다. 두 번째 어머니의 밥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잠깐 가족 이야기를 먼저 해야 될 것 같다.      나는 3형제 중 막내이고 아버지는 두 번의 결혼을 하셨다. 첫 번째 결혼하신 어머니와 지금의 형들인 아들 둘을 낳으시고 이혼을 하셨다. 왜 이혼을 했는지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만남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당시 아버지는 화물차 10대를 보유한 운송업체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그 회사에 근무하던 경리였었다. 외할머니의 말로는 당시 20살이었던 어머니는 영화배우 뺨치는 이국적인 외모의 아버지를 엄청 사모했었다고 했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아버지와 결혼을 하겠다고 때를 써서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시고 그 후 내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그동안 어머니의 빈자리와 돌보지 못했던 가정, 그리고 남아있는 아들들을 위해서 이혼하신 어머니와 다시 재혼을 결정하셨다. 아니 설득당하셨다고 해야 될 것 같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문 앞에 놓인 수 켤레의 신발들과 아버지의 구두를 보았다. 아버지는 허전함을 달래보고자 친구들과 종종 재미삼아 고스톱을 치셨다. 나는 아버지 옆에서 담배 심부름을 거들며 용돈 버는 재미에 신나게 고스톱 판을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때론 똥 광에 가위눌린 꿈을 꾸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예전처럼 아버지 친구들이 고스톱을 치러 왔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무심코 방문을 열며 “학교 다녀왔습니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처음 보는 낮선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은 근심과 걱정, 한숨이 섞인 애달픈 눈빛들이었다. 그중에는 지금의 새어머니도 있었다.    새어머니가 들어오고 나서 10년 정도의 생활은 지금의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그 구박은 밥상 앞에서 더욱 심했다. 난 혼자서 밥 먹은 적이 많았다.    큰 형은 지방에 대학생이었고, 작은 형은 입시준비로 밤에야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화물차 운전을 하시느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으셨다. 또 집에 있는 날에는 장시간 운전으로 인해 잠을 청해야 하셨기에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시간도 드물었다. 집에 있는 날이면 행여나 아버지가 잠에서 깰까 봐 방문도 도둑놈처럼 소리 없이 열고 닫아야 했고, 발뒤꿈치는 항상 들고 다녔다. 조금이라도 발소리가 나면 새어머니가 당장 달려와서는 불호령을 내리셨다. 아직까지도 이때 베인 습관이 종종 나오기라도 할 때면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어쩌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을 때가 있다. 같은 밥상에서 나는 찬밥을 먹고 내 앞에는 김치만 놓여있다. 반면 형과 아버지 앞에는 따뜻한 밥과 반찬들이 풍성하다. 그 상황을 접하면 그냥 눈물이 먼저 나왔다. 참으려 해도 서러움이 밀려와 목이 메여 밥이 잘 넘어가지가 않는다. 그냥 고개만 푹 숙이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는 밥만 몇 번 씹어 삼키고는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이 같은 일들은 종종 되풀이 되었다.    이런 광경을 접하는 아버지와 형들은 어머니를 나무랐고, 그런 일들로 인해 나는 언제나 부부싸움의 화근이 되었다. 당시 나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집에서 보내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생존을 위한 눈치의 연속이었고 구박을 덜 당하기 위해서 최대한 머리를 굴려야 했다. 숨 조이는 시간들의 연속이었기에 나는 신경쇠약이라는 정신질환을 얻었다. 또 제대로 된 영양분을 섭취하지를 못해 황달과 간염 등의 질병들도 동시에 얻어 불행하고도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힘겨운 중학교 시절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부터는 집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집 앞에 있는 인문계를 선택하지 않고 차를 타고 30분은 가야 되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될 수 있으면 집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부터 집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밖에서 풀 수가 있었다. 고등학교 3년 중 반은 친구 녀석들의 집에서 보냈으며 녀석들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알아가면서 각자의 환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만 힘들고 어려운 줄로만 알았었는데 정도의 차이일 뿐 다들 비슷한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많은 친구 녀석들이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 분이 안계시고 생활 형편도 넉넉지 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환경을 접하고 그들의 고충을 바라보면서 새롭게 느낀 것이 있었다.    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 가면 밥이라도 차려주는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이 참 고마웠다. 그것이 김치 하나에 찬밥이라도 나는 그 수고로움에 처음으로 새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물론 그 마음이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생각을 다르게 하고 마음을 바꾸어 먹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새어머니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조금씩 바뀌면서 새어머니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비록 학창시절 동안 냉전은 지속되었지만 친구들의 환경을 접하면서 나는 새어머니를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군대에 가게 되었다. 6개월 만에 첫 휴가를 받고 집에 왔을 때 새어머니는 펄펄 끓는 된장찌개와 내가 좋아하는 총각김치와 오징어채 등 맛깔스런 반찬들을 장만해 놓으셨다. 나에게 고생했다고 환하게 웃으시며 따사로이 반겨주셨다.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밥상 앞에서 새어머니에 대한 생각들을 하였다.    배 아파 낳은 두 아이를 놔두고 아내로, 어머니로서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시리고 아팠을까….    자식과의 생이별이 얼마나 서럽고 슬픈 일인지 나는 그 기분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고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렇게 아픈 기억을 가지신 새어머니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원수 같은 여자의 자식을 지난 10년 동안이나 밥을 먹이고 키워준 것이다. '얼마나 미웠을까, 힘드셨을 텐데….'    입장 바꾸어 생각해봐도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신 것이다.  나는 이런 새어머니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왔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서 자신의 자식들을 흉보면서 ‘자식 키워도 다 소용없다고, 내가 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하시면서 나에게 푸념을 털어 놓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나는 어머니를 보며 이렇게 말씀 드린다. “어머니, 형들이 싫으시고 불편하시면 제가 꼭 모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편히 계세요.” 차려주신 밥상을 물리며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이렇게 너스레를 떨어본다. “밥이 참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어머니!”   
30    지금처럼 뚱뚱했어요? 댓글:  조회:966  추천:0  2014-07-09
  지금처럼 뚱뚱했어요? (눈물의 3단 찬합을 쓰신 분의 부인이야기입니다~)             1997년 IMF 한파가 몰아칠 때 불황이다, 감원이다 다 남의 일인 줄 알았다.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잘 나가던 회사가 금융회사 구조조정으로 퇴출되었다. 10년 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특별한 능력도 없던 나는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퇴출된 회사의 정리 작업 중에 함께 일했던 분의 추천으로 지금 다니는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봤다. 함께 면접 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입사를 포기 하는 바람에 내가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팀장님은 나와 같이 면접 본 사람이 더 맘에 들어서인지 처음부터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지원팀 직원이라고 해봐야 전체 10명 정도인 회사에서의 생활은 이렇게 불편하게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 말 한마디 안하고 퇴근한 날이 많았다. 1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떠나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 사교성이 뛰어난 것도, 음주가무에 능한 것도 아닌 내가 새로운 팀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팀장님.” 하고 부르면 팀장님은 다른 사람은 그냥 “팀장님.” 하는데 은영 씨만 “○팀장님.”으로 부른다고 꾸중을 하시는 등 하는 일마다 꼬투리를 잡고 잔소리를 하셨다. 그 팀장님의 특징은 화를 낼 때 불편한 사람에게는 꼭 존댓말을 쓰시곤 하셔서 기분이 좋은지 아닌지는 존댓말 여부로 확인이 가능했다.    팀장님과 하루도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업무로 나를 채용했는데 새로운 일은 점점 더디게 진행됐고 팀장님과의 관계도 계속 악화되었다.    어느 날 저녁 팀장님이 맘에 안 든다는 얘기만 계속하자 이제 그만 다니겠다고 큰소리치며 울면서 회사를 뛰쳐나오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상황을 안 중간관리자인 대리가 저녁을 사주면서 “1년만 같이 일하자. 그 이후에 떠나도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그만두면 억울하지 않겠느냐!”며 설득을 하기 시작했고 설득에 넘어간 난, 1년만 있자고 결심하고 다시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후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대리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첫 출근 하던 날, 술을 얼마나 드셨는지 출근시간에 출근도 못해 지각했다고 엄청 혼나고 계셨다. 얼굴은 검은데다가 술 냄새 팍팍 풍기고 몸은 뚱뚱하고 약간 느끼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날 이후 새로운 업무를 같이 시작하게 되었다. 전에는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 일했는데 옆에 앉아서 회사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업무를 많이 챙겨 주셨다.    한 사람으로 인해 회사생활이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경험했다. 밤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그때 그 시절의 대리님은 얼마 안 있어 다른 곳으로 이직했으나 그는 현재 내 남편이자 도반이 되었다. 무뚝뚝한 나를 대신해 약간의 애교로 나를 웃게도 해주고 내가 마음 아파 괴로울 때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고마운 남편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남편이 결혼 초에는 무던히도 속을 썩였다. 결혼하자마자 남편만 지점으로 발령 났는데 회사에서 영업하라고 압박을 하니 결국 일반적으로 증권사 영업사원들이 망하는 지름길로 가는 일임매매를 하였다. 파생상품이라는 것이 어렵다 보니 아줌마들이 스스로 투자 하지는 못하고 돈 불려 달라고 남편에게 맡긴 것이다. 남편 또한 실적에 쪼이다 보니 덥석 받았고…. 그러면서 항변하길,  “지점장님 이하 모든 영업직원들이 다 이렇게 영업해. 실적도 채우고 돈도 벌면 일석이조니 얼마나 좋아? 믿어봐!” 큰 소리 뻥뻥 치고….    이 장면을 보는 나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증권사 생활 10년 짬밥의 선배인 내가 보기에 남편은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절벽을 향해 가는 어린 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장 경험이 많아 돈을 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당시에는 남편 또한 파생금융상품 투자에 초보라 1년 동안 무려 1억씩 까먹었다. 한 달에 150만 원 정도 받으면서 두 달을 주기로 몇 천씩 대출을 받아 회사에서 정한 목표를 채우느라 힘써 계좌를 돌린 결과이다.   참다 참다 못해서 내가 한마디 하면 그날은 서로 한바탕하고 2~3일 냉전 기간을 거쳤다. 이후 잠잠하다가 또 대출 받아야 할 때쯤 되면 전쟁을 되풀이 하니 지금까지 결혼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바로 이 1년 동안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남편은 어떻게 하든지 그 상황을 타개하려고 무지하게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 왈, “그때 시장에 대해서 공부한 것처럼 학교 다닐 때 공부했으면 아마 고시도 몇 번은 붙었을 거야~”   지금은 그 동안 진 빚은 다 갚고, 남편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큰 집은 아니지만 빚 없이 집을 마련했다. 이직하고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었을 때 내게 베푼 따뜻함에 이끌려 사랑을 느껴 결혼을 했다. 결혼 초엔 무던히도 애를 먹이더니만 2002년 가을부터 명상을 시작한 이후 서로 동일한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싸울 일도 줄어들고 어느덧 마음의 여유도 생기면서.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 나에게 묻는다.   "결혼 전에도 지금처럼 뚱뚱했어요?"  "네, 지금보다는 약간 슬림했지만 기본체형은….”  "그런데 어떻게 결혼했어요?" 그러면 나는 그냥 배시시 웃는다. 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배불뚝이고 못 생겼지만 마음은 참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여보!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요.   
29    눈물의 3단 찬합 댓글:  조회:951  추천:0  2014-07-04
눈물의 3단 찬합           4,50대 사람들에게 ‘지금으로부터 2~30년 전 대학 1년 때의 그 환경 그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겠는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가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젊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정말 보람 있게 인생을 다시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듣자마자 ‘Never!’ 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때의 생활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40대 중반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지금까지의 고생 중에서 대학 생활 때만큼 고생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대학 입학금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고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받은 기억이 없다. 등록금 및 생활비 등 모든 것은 내가 벌어서 충당했다. 입학한 첫 학기부터 생활고로 인해 눈물의 연속이었다. 그 고통이 직장에 취직할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대학생에게는 불법이었던 과외를 하면서 지하철에서 신문팔이도 열심히 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자연히 공부는 등한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과외하다 해고된 달은 돈 천원이 없어서 굶기가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3일 동안 자취방에 앉아서 물만 먹은 적도 많다.  “3일 굶고 남의 집 담을 안 넘을 사람 없다.” 그 말은 정말 진실이었다.    객지생활에서 제일 서러운 것이 차디찬 겨울에 연탄 한 장 살 돈, 밥 먹을 돈, 약 사먹을 돈도 없는 상황에서 배도 고프고 아파서 골골하면서 차디찬 방에 혼자 누워 있을 때이다. 여기에 명절까지 겹치면 정말 서럽다.    이 다섯 가지가 함께 하면 정말 외로움이 무엇인지 막막함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대학 생활 7년 동안 딱 세 번 펑펑 운 적이 있었는데 한 번은 견디다 견디다 도저히 못 견딜 만큼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울었고, 두 번은 너무나 감사해서 울었다. 1992년 12월 31일 저녁, 이 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대학졸업반이었고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날이었다. 남들은 신년을 맞이하는 즐거움에 취해 있을 시간, 나는 차디찬 자취방에서 몸져누워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불쌍해서 몇 장 준 연탄이 떨어진지도 며칠 째, 나는 또 한 번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타 오르고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미닫이문이 열리며 대학 과 친구와 그의 여자 친구가 들어왔다. 내 사정을 잘 아는 친구였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찾아 왔다면서 무엇인가 꺼내어 앞에 내려놓았다. 3단 찬합이었다. 열어 보니 정성스럽게 싼 김밥, 유부초밥, 그리고 각종 맛깔스런 반찬들이었다.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차 한 잔 건네주면서 배가 고플 텐데 먹으라고….   김밥 한 조각을 먹고 씹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그때를 떠 올리자 다시 눈물이 난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고맙다는 말이 목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 친구는 내가 먹는 동안 조용히 나가더니 약을 사 가지고 왔다. 밥 먹고 약 먹으라고…. 다시 한 번 내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맺혔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다짐을 했다. 평생 동안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매달 내 수입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내고 매달 그 이상을 나 또는 가족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쓰겠다고. 친구가 가져온 3단 찬합은 평생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그때의 다짐을 실천하며 지금의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28    뚝배기 한 그릇 댓글:  조회:899  추천:0  2014-06-25
뚝배기 한 그릇             “오늘 대전에서 잘 거지? 이따 다섯 시에 대흥동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기다려.” 중학교 3학년 고입체력장 전날 옆 반 담임이신 사회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예.”라고 대답을 하고서도 우리 담임도 아니신 분이 무슨 일로 보자 하실까 의아했다. 소규모 시골학교라서 학생과장을 겸임하셨던 그분은 엄격하시기로 유명한 분이셔서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선생님이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대덕군 관내에 있었고 체력장은 1시간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유성중학교에서 시행되었다. 대전에 사시는 고모 댁에서 자고 아침에 유성으로 가기로 하고는 고모 댁에 들렀다가 시외버스터미널에 나가 선생님을 기다렸다. 곧 선생님께서 오시더니 따라오라신다. 한참을 가시더니 어느 식당으로 들어가신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라서 자장면 한 그릇 사서 먹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고급 한식당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하며 선생님을 따라 앉았다. 검은 뚝배기 그릇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처음 본 음식이 한 그릇 나왔다.  “이 집은 우족탕을 전문으로 하는 집이야. 돌그릇을 불로 달구어놓고 탕을 담아주니 다 먹을 때까지 뜨거울 거야.   조심해서 천천히 다 먹어.” 유난히 숫기가 없었던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뜨거운 우족탕을 천천히 맛있게 먹었다. 선생님께서는 맞은편에 앉아서 먹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나의 가정 사정을 잘 아셨기에, 학비가 없는 금오공고에 진학을 권유하시면서 학교장 추천을 받아주셨다. 그 학교는 10월에 따로 무시험 전형을 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첫 부임지가 그 학교가 있는 구미였다면서 함께 가 주셨다. 그리고 교통비와 숙식비를 모두 다 내주셨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합격을 했다.    그리고 대전고에도 원서를 내보라고 하셨다. 시험보기 전날, 선생님께서 대흥동 버스터미널 앞에서 기다리라 하셔서 나갔더니, 이 분도 나를 데리고 그 우족탕 집에 가셔서 우족탕 한 그릇을 주문하셔서 또 나만 먹게 되었다. 역시 고맙다는 말씀도 못 드리고 묵묵히 먹었다.   대전고에도 합격하여 선생님들이 많이 기뻐하셨다. 대부분 선생님들은 내가 대전고보다는 학비를 내지 않는 금오공고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셨는데, 영어 담당 선생님께서는 대전고로 진학할 것을 권유하셨다. 그 선생님은 당뇨병이 심하셨고 귀가 어두우셔서 보청기를 끼셨다. 일제 시대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셨지만, 학도병에 다녀오시지 않아 졸업장을 받지 못해서 평생 평교사로 지내셨다. 편찮으시면서도 참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 그분은 내가 가정형편 때문에 대전고를 포기하는 것이 안타까워 그 고장 출신이면서 공화당 원내총무였던 어느 국회의원 사무실에 가서 장학금제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러 다녀오시다가 뒤에서 오는 기차소리를 듣지 못하시고 사고를 당하실 뻔하기도 하셨다.   유난히 허약해 보였던 제자가 힘내서 시험을 잘 보라고, 함께 드시지 못할 정도로 가격이 부담스러웠을 우족탕을 사주셨던 사회선생님께서는 많지 않은 연세에 돌아가셨다. 대사동에 사시면서 새벽에 보문산 등산을 즐기셨는데, 어느 날 새벽 여느 때처럼 등산 가시다 쓰러지셔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댁으로 데리고 가셔서 한 가족처럼 대해주셨고 나도 스스럼없이 선생님 댁에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소집되어 군대에 갔는데, 대전에서 근무하면서 종종 선생님 댁에 다니곤 했다. 그러나 제대하고 대학에 들어간 후부터 제대로 뵙지 못했다. 그리고 영어선생님께서는 정년퇴임 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5공화국 시절이어서 대학생들의 과외가 금지되어 체육과 교수님들의 자료를 번역해 드리며 공부했는데, 무리하였는지 몸이 많이 아팠다. 졸업하고 인천으로 발령을 받은 후에 대수술을 했고,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다.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놀 줄도 모르고, 항상 무슨 일에든 몸과 마음이 매여 무겁게 살아와서인지, 우울증환자가 되었다. 마음은 있어도 실행이 되지 않았다. ‘감사’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 우족탕과 함께 그분들의 제자 사랑이 떠오르고,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교사로 학교에 근무하면서 그 선생님들께서 베푸셨던 그런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그 선생님들 생각이 나면 죄스러운 마음이 크다. 스승의 날이 돌아오면 아이들 앞에 제대로 서지 못했다.    올해는 시간을 내어서 대전에 살고 계실 것이라 생각되는 옛 담임선생님을 수소문하여 찾아 뵐 것을 다짐해본다.   내리 사랑이라고, 그분들이 베푸신 은혜를 똑같은 형태는 아닐지라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베풀어보고 싶다.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을 때 베풀어 주셨던 세 선생님들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신 사회, 영어선생님이셨던 두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7    나 같은 사람 또 보면 안 되지! 댓글:  조회:1160  추천:0  2014-06-18
나 같은 사람 또 보면 안 되지!               징~ 슈~ 철거덕, 징~ 슈~ 철거덕…. ‘어? 기계가 왜 그러지? 설마!!!’  IMF로 회사는 망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겠기에 덜렁 들고 나온 풍선인쇄기계가 가끔씩 말썽이다. 풍선을 인쇄하는 일은 잔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풍선은 불면 부피팽창을 많이 하므로 불어서 인쇄를 하지 않으면 불었을 때 글자가 깨지게 된다. 꼭 바람을 불어서 인쇄를 해야 한다. 기계에 풍선을 하나씩 끼워 넣어주면, 한 칸씩 이동되며,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가고, 인쇄, 추출하는 공정을 반복하게 되는데, 하나씩 넣어주는 단순한 노동이 팔팔한 나이였던 나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기계야 고장이 나면 고치면 되지만, 문제는 납기일에 쫓기고 있을 때 주로 고장이 난다는 것이고, 고장 나서 수리공을 부르려면, 최소 10~20번 전화를 걸어야 하고 밍기적 거리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한껏 내세우는 수리공들의 태도가 더 진저리쳐진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바람을 압축시키는 컴프레서가 고장인데, 기존 거래처는 얼마나 바쁘신지 오는 데 3시간, 부품 가져다가 수리하는 데 2시간, 도합 5시간이 걸린단다. 물어물어 알아둔 새로운 곳에 급하니 서둘러 달라며 수리를 부탁하였다. 납기시간을 계산하니 2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수리공이 오면 어떻게든 2시간 안에 고쳐야 하므로, 이 궁리 저 궁리하며 생각해 보건데 정중히 부탁하는 것이 제일일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얕잡아보고 늑장부리면 낭패인데 어쩌지?     이 일을 하고 있으면 참 여러 가지 황당한 경우가 부지기수로 발생한다. 급하다고 하여 밤새워 인쇄해주면 고맙다며 오늘 중으로 송금한다고 하고선 떼어먹고, 어떤 이는 사람을 믿지 못하면 어찌하느냐며 생떼 써서 믿어주면 떼어먹고, 자신은 그런 사람 아니라며 속고만 살았냐며 눈알을 부라려서 내어주면 떼어먹고, 사업하는 사람이 그깟 5만 원 때문에 쫀쫀하게 그러지 말라며 떼어먹고, 자신도 돈을 못 받아서 그러니 받으면 준다고 기다리라고만 하고, 돈은 있는데 차비가 없다며 3만 원만 나중에 준다며 소식 없고, 100만 원 수표 보여주며 90만 원 거슬러 달래서 나중에 현금으로 달라하면 떼어먹고, 처음엔 완결, 점차 일부를 덜 주다가 결국 미수금 떼어먹히고…. 그렇더라도 ‘난 단지 믿었을 뿐이고~’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차질 없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할 땐 어찌될지 암담하기만 하였다. 얼마 후 60이 넘어 보이고 평온해 보이는 인상의 아저씨가 와서는 컴프레서를 보자고 한다. '어휴, 인상은 좋은데 나이도 많고. 믿고 정중하게 부탁할까? 아냐! 일인데 인상과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2시간 안에 빨리 고쳐야 하는데' 납품을 못했을 경우를 생각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페널티로 물어 낼 돈도 돈이지만, 줄줄이 빌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아저씨! 2시간 안에 고칠 수 있어요?" "해봐야지요." "무조건 고쳐야 됩니다. 아시겠어요?" “….” "물건을 제대로 만들어야지! 이거 툭하면 고장이고. 아저씨들은 고장 나면 돈 벌어서 좋지? 그래 남 고통이 아저씨들에겐 기쁨이라니까! 2시간 넘을 거면 아예 손도 대지 마세요!"   아무 말 없이 얼마 정도 비용이 나온다며 바삐 손을 움직인다. 심하다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10분 정도 간격으로 들락거리며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1시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전기를 넣어 보란다. 스위치를 올리자 컴프레서가 돌며 공기의 압력을 기계 쪽으로 보낸다. 성공이다!    '오! 주여, 오! 하나님, 오! 부처님, 감사합니다!' 속으론 만세를 연발했지만 겉으론 ‘수고 했습니다’ 소리도 안하고 퉁명스럽게 다음에 또 보자고 하였다. "나 같은 사람을 또 보면 안 되지!" "뭐라고? 이 아저씨가 일 잘 하고선?"    그때 아저씨와 눈을 마주쳤는데 순간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느껴졌다. 눈물이 핑 돌아 고개를 돌리곤 부끄러워 아저씨를 바로 볼 수 없었다. 그 말 속에는 자신을 무시하여 화를 낸 것도, 돈 때문에 이런 일 하는 것도 아닌, 부디 기계를 잘 다루어 자신과 같은 A/S 기사를 부르지 말라는 염려와 당부, 젊은 나이에 열심히 사는 모습이 예쁘다는 칭찬과 정이 들어 있었다.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이것저것 묻더니, 기계에 대해 설명해주며 또 볼 수 있는 거라며 오해하지 말란다. 자기는 컴프레서만 보면 그 집 상황을 다 안다고. 자네보다 더한 경우도 있다며 괜찮다고 위로를 해준다. 그 후에도 가끔씩 정기적으로 기사를 보내어 컴프레서를 점검하여 주고, 미리 조치를 취해주셔서 그 후 컴프레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지친 시기에 내 가슴을 울려준 고마운 한마디였다. 나의 잣대에 세상이 맞춰지기를 바라던 시기였다. 나의 무지가 깨지고 두들겨지는 만만치 않은 세상공부 중이었던 때였다. 하루하루를 넘기는 게 힘든 시기였지만,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 후에도 상황은 계속되었지만 비슷한 것은 있어도, 똑같은 것은 없는지 예상하고 준비한 일일지라도 막상 나의 일로 닥치면 새롭고 당황스러운 것이 삶인가 보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대입하며 선택의 기로에 설 때는 늘 외로울 뿐이다. 한 번의 실수가 하나의 경우의 수를 더하고, 경우의 수가 더해짐에 따라 나는 노회해진다. 열정이 식어야 주위가 보이는데, 다들 그러고 살고 있다. 그래도 내가 제일 잘났다는 자기 포만감과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를 갖고선 그냥들 산다.     8년이 지난 재작년에서야 그 아저씨 소식을 들었다. 몇 년 전에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더니 소식이 끊겼었는데 그 사이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전부터 배가 좀 아프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술을 찾더니만 병원에 가보니 암이셨단다. 자기는 병원에 입원해야하니 이제 진짜로 자주 보기 힘들겠다고 하시기에 걱정 말고 병원 가서 치료 잘 받으시라고 한 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알았다. 열심히 일 잘해라!" 하며 껄껄 웃으시더니 일주일 만에 돌아 가셨단다.   징~ 슈~ 철거덕, 징~ 슈~ 철거덕. 멈출 줄 모르고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는 컴프레서를 보고 있자니 그날 그분이 '나 같은 사람 또 보면 안 되지!' 하시며 웃으시는 것 같다.    
26    나의 20대 댓글:  조회:955  추천:0  2014-06-06
나의 20대           나의 20대는 늘 우울했다. 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가진 것이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 가장 우울했던 건 가진 것이 없는 상황을 극복할 만한 긍정적인 사고가 그 시절 나에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30대로 오면서 뒤를 돌아다보며 깨닫게 된 것이지 20대는 그걸 극복할만한 위안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시 20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나의 대답은 'No'이다. 좌충우돌, 질풍노도…. 이런 단어들과 어울리는 20대는 한 번 경험으로 족하다.     1998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던 기억이 있다. 아마 나에게만 추웠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6명의 식구가 2층 슬래브 집에서 전세를 살던 시절이었는데, 집에 난방이 되질 않았다. 우리 동네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LPG가스로 난방을 하곤 했는데, 가스를 주문할만한 돈이 없어서 난방을 하지 못했다. 날씨가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집은 바깥 날씨보다 더 춥게 느껴지곤 했다.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던 아버지는 그해 겨울도 공장 하나를 정리하고는 이곳저곳을 전전하셨지만, 일을 해주고도 돈을 못 받는 상황만 되풀이 되었다. 엄마는 늘 그랬듯이 경제적인 문제로 아버지와 싸우셔서 집안의 냉기를 더욱 부추기곤 했다. 전기장판이 하나 있었지만, 형제가 4명이나 되다보니 서로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다가 먼저 드러눕는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부모님은 한 번도 전기장판을 탐내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난 지금도 추운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해 겨울,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1년에 4명씩 일본 문부성 추천으로 교환학생을 선발하는데 발탁된 것이다.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면 1년간 학비가 면제였고, 매달 8만 엔의 생활비를 지급받아 생활할 수 있었다. 발탁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아! 이제 추운 집은 벗어나는 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일본에 가서 보니 온돌시스템이 되어 있지 않아 추운 건 마찬가지였다.   일본에 갈 준비를 한참 하고 있을 때였다. 학교에서 1년에 4명씩 가게 되므로 먼저 간 선배들이 준비사항이나 여러 가지 정보를 올 사람들에게 미리 전화나 이메일로 전해주었는데 그 준비사항 중에 나를 당황케 한 목록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 갈 때 50만 원의 현금을 들고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우리는 월초에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생활비로 나오는 8만 엔은 월말에 주어지므로 그동안 살 수 있는 생활비와, 그곳에서 구입해야 할 필수생활품 등을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 근근이 생활하는 빈털터리인 나에게 50만 원은 정말 큰돈이었다.   ‘이 돈을 어디 가서 구한다?’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도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부모님한테 이야기하면 어디 가서 돈을 꾸어서라도 보태주시겠지만, 왠지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돈이 있다면 차라리 난방이 되는 집에서 단 며칠이라도 동생들을 재우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가야한다. 아니, 가고 싶다. 돈은 없다. 돈을 마련해야 한다. 어디서 마련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퍼뜩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방학 때마다 한 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 연구소의 한 박사님이 생각났다. 혼자 싱글로 사시면서 가끔씩 아르바이트생들을 모아서 맛난 것을 사주시곤 하던 분이다. 특이한 점은 점심시간마다 명상을 하신다면서 눈을 감고 몇 십 분씩 조용히 계셨고(나는 그것을 잠자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철저하게 채식을 하시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모 학교의 교수님으로 가셨다는 소문을 접하고 그 학교를 찾아갔다. 그분을 찾아간 이유는 단순했다. 그 당시 아르바이트생들을 모아 맛난 것을 사주셨으니 돈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분한테 50만 원을 꾸어 일본 경비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밥 몇 번 얻어먹은 인연으로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해서 돈을 꿀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그분 학교로 가는 동안 내가 고민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50만 원을 꾸어달라고 말을 할 때, 그분 얼굴을 보지 못하고 탁자만 멍하니 바라보다 일본 어쩌고저쩌고 앞 뒤 말은 다 빼먹고 50만 원이라는 주제어만 넣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는 것과 그분의 당혹스런 표정과 첫마디, 그리고 그 후 한참 동안 울었다는 기억밖에는 없다.   “저… 저, 50만 원만 꿔주세요.” 그분은 몇 분 정도 망설이다 어렵게 말을 떼셨다. “음. 어쩌지? 나 돈 없어…. 생각보다 가난한 사람이야. 이걸 어쩌지?” 그분도 너무 당황스런 나머지 단어로만 이루어진 대답을 하셨다.   “네…,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이미 내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미안함과 뒤늦게 느껴지는 창피함, 그리고 이젠 어쩌지… 하는 당혹감이 뒤엉켜 나오는 눈물이었다. 내 눈물을 보시던 그분은 더 당혹해하셨다.   “잠시만 기다려봐….” 그분이 잠시 나가시더니 손에 봉투 같은 걸 하나 들고 오셨다. “50만 원은 못해주겠지만, 얼마 안 되는 용돈은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 돈은 내가 그냥 주는 거야.”  그러면서 봉투 하나를 내미셨다. 나는 그 봉투를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그분 방에서 나오면서 눈물이 너무 나서 화장실로 바로 달려갔다. 화장실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서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냥 창피하고, 또 미안하고, 그리고 너무 고맙고…. 그런 감정들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되어 흘러나왔다.    한참을 울고 나서 봉투를 열어보니 20만 원이 들어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분은 그 달에 번 돈을 모두 쓰는 분이었다. 즉 있으면 쓰고 베풀고 해서 잉여재산이 없는 분이셨던 것이다. 아마도 현금서비스를 받으셨거나 옆방 교수님께 빌리신 듯 보였다.    나머지 돈은 부모님이 융통을 해주셨다. 그렇게 50만 원을 마련하고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날의 그 경험이 있어서인지 얼굴에 철판을 까는 용기가 더욱 강해졌다. 동네 소바 집에 들어가 일본어를 더 많이 경험해보고 싶어서 그러니 아르바이트를 달라고 당당히 말해 일주일에 두 번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한국어 과외를 해서 교환학생 치고는 나름 풍요로운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교환학생에서 돌아온 이후 그분께 한 학기 등록금 후원을 받았다. 교환학생에서 돌아온 첫해에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아는 지인을 통해서 그분이 내 상황을 알고 먼저 연락을 해오셨다. 그냥 주면 빚이 된다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아가라고 하셨다. 나중에 보니 아르바이트라기보다는 그냥 주는 돈이나 다름없는 아르바이트거리였지만, 그분이 내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배려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10년도 넘은 기억이지만, 그때의 그 경험으로 나는 좀 더 달라졌다. 좀 더 세상을 알게 되었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지금은 나름대로 직장을 잡고 안정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작은 평수지만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는 따뜻한 집이 생겼다. 지금 나는 소득의 일정부분을 아동후원과 몇몇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그것이 그분이 나에게 베푼 친절을 갚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 시발점이었는데, 베풀면서 내가 더 많이 얻는다는 것을 오히려 배웠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배움의 연속인 것 같다.   몇 년을 기부해도 그 20만 원은 절대 갚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소득의 일정부분을 떼어 주는 것이지만, 그분은 바닥을 박박 긁어서 주신 돈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돈을 주실 때는 “이건 그냥 주는 거야.” 내지는 “대가를 치르고 가져가는 거야….” 라고 하시는 말씀들. 돈을 주신 고마움과 함께 나를 배려해주신 그분의 마음이 느껴져 고개가 숙여진다. 고마운 그분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25    그래, 난 바보야 댓글:  조회:953  추천:0  2014-05-30
그래, 난 바보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봄방학이라 느긋한 오전, 따르릉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동서, 나야.”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속으로 피식 웃는다. ‘우린 동서지간이 아닌지가 오래되었거든요’ 그러면서도, “예, 형님.” 하면서 대꾸를 시작한다.    자궁암 초기 진단을 받은 지 몇 개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수술도 하지 않고,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의 큰 엄마이다. 떠날 때를 대비하는 것인지, 친정 식구를 곁으로 오고 싶은 것인지, 떠나면 남을 두 아이들을 아이들의 이모들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인지, 이 모든 혹은 내가 짐작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양산에서 친정 식구들이 있는 계룡산 부근으로 이사를 한 것이 거의 전부이다. 암 진단을 받고는 아등바등 살려고 노력하던 삶의 터전을 홀연히 정리하고, 계룡산 부근에서 몸이 불편하신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모든 것을 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하는 분이다.        나보다 조금 늦게 결혼을 했지만 나보다 조금 나이 많은, 참 특이한 시가(媤家)의 삶에 오로지 둘만이 나눌 수 있는 얘기들로 함께 밤을 새울 수 있는 분. 그렇게 서로의 상처의 한 부분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분. 너무 길게 하지 않으려 애를 썼건만 한 시간은 통화를 한 것 같다.    본인이 원하는 것과 너무도 차이가 나 버린 결혼 후의 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이렇게나마 풀어내면 조금은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대화 중간에는 또 아이들 아빠 이야기가 꼭 들어간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 처리 방식에 내 편을 들어주다가 못내 속이 상하는지 꼭 하는 말이 있다.   “동서, 바보야? 다 들어주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주니까 그러는 것 아니야!”  “전 남기고 싶지 않은 걸요. 제 마음에 걸림이 없도록 하고 싶은 걸요. 그래요, 전 어쩜 바보일지도 몰라요. 그냥 아이 아빠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이 제 마음이 제일 편안해서. 아이 아빠에게 바라는 게 없고, 그냥 아이 아빠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며칠 전 아이 아빠가 와서 이틀을 머물다 갔다. 고등학생인 큰 아이에게 본인이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몇 년 전보다 많이 안정되어 보였다. 아이에게 해 주는 말을 들으며 늘어난 흰 머리를 보았다. 겉으로는 그래도 그 속은 얼마나 또 편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까? 측은한 마음에 밥상도 정성으로 차려주고, 거실이나마 잠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언니가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이 아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둘은 마주치고 말았다. 그 순간은 평온한 듯 지나갔지만 결국 다음 날 전화로 온갖 소리를 들어야했다.    “너 참 이상하다. 살림 차렸다면서 어떻게 이 집에 들어오게 할 수 있니?”    이야기인 즉, 결국 내가 바보라는 거다. 어쩌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어떤 경우에도 너희들의 아빠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 아이들에게 나름 변명을 하며 내 편을 만들어야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는데 난 도무지 그런 것을 할 줄 모른다. 아빠도 힘드실 거라고. 아빠는 너희들을 사랑하고, 아빠가 잘 지내야 너희들도 좋은 거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것도 바보인지 모르겠다.    가끔 애들 아빠한테 이런 충고도 듣는다. 명상이나 수련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던 그가 어떤 수련원에서 며칠간 머물렀었는데 직장 동료 때문에 가게 되었다며 그 동료가 나보다 훨씬 낫다고 한다. 당신도 그렇게 여유 있고 활기차게 살고, 열심히 일 하라고. 그런 말을 들어도 이상하게 난 하나도 언짢지가 않았다. 아이 아빠도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구나. 그런 과정 중에 배움이 있겠지. 아~ 난 정말 바보인가 보다.     아이들 큰 아빠와 통화를 했다. 좀 답답하신 모양이다. 삶의 터전을 정리하고 가족들을 따라 처가댁 근처로 오고 나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신가 보다. 어릴 때 밖에 나갔다 오면 누군가에게 잠바를 벗어주고 오곤 해서 혼이 나기도 하셨다는 분. 마음 바탕이 선해서 가족들 모두에게 인정을 받지만 현실적인 능력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신 분. 그 어려움을 조금은 알고 있는 나. 그래서인지 가끔 전화가 오곤 한다.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어 통화하고 나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진다고 하시면서.      그런 와중에도 긴 방학 동안 사촌인 아이들끼리 함께 놀 시간을 마련해주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을 전해주신다. 나 혼자 아이들과 어려움이 많을 텐데 도움 주지 못한다고 능력이 부족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담은 미안함도 함께 전해 주신다.    지난번에 우편으로 받은 명상 책을 읽고 참 좋다고 언젠가 좀 여유가 생기면 함께 하고 싶다는 말씀도 해 주신다.    20년 가까이 아이 아빠로 인해 맺어진 관계. 지금은 아이 아빠는 빠지고 우리끼리 친구처럼 되어버린 나와 아이들의 큰 아빠, 큰 엄마.    어쩌면 바보라서~ 내가 바보라서~ 앞이 캄캄하다고 느낄 때마다 내게 전화해서 때론 걱정하고 위로받으면서 서로를 격려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또 바보로 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바보인 내가 고마운지도 모르겠다. 그래. 난 정말 바보인가봐~^^  
24    조용한 전쟁 댓글:  조회:845  추천:1  2014-05-27
조용한 전쟁         다섯 살 나던 해, 나는 신장염을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하고 나면, 물에 헹군 김치와 밥이 달랑 놓인 밥상을 받아 할머니와 나는 따로 식사를 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이라곤, 엄마가 고구마 씻은 물을 집 앞에 버리면 어디선가 숨어 있다가 잽싸게 뛰어나와 고구마 꼬랑지를 주워들고 후다닥 골목길로 뛰어 들어가곤 하던 모습이었다. 난 장난삼아 한 짓일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보니 제한된 식사에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 외갓집에 갔다가 밤에 자다 일어나 배가 고파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외할머니께서, 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싶어 하는 밥이나 실컷 먹이고 죽이자(?)는 마음으로 마음껏 밥을 먹게 하셨다고 했다. 다음날,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방문을 열어봤는데 아 글쎄, 쌔근쌔근 숨을 쉬며 잘도 자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후로 뽀얗게 살이 오르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 들과 산으로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았다고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장이 약하게 태어났는가 봐, 나는….     사실, 하루 이틀에 끝날 전쟁이 아니었다. 1초도 쉬지 않고 박동을 하던 심장도 몰랐던 일이니 만큼…. 그 전쟁은 아주 조심스럽고도 조용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혈관을 따라 돌던 혈액이 평소와는 다르게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분과 포도당이 이리저리 밀려들며 점차 그 양이 늘어나고 있었고, 하수관을 타고 쭉쭉 내려가야 하는 노폐물마저 혈관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처음 반응을 보인 곳은 얼굴이었고, 제일 먼저 눈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양쪽 볼은 사탕을 한 개씩 넣은 것처럼 불룩해져 버렸다. 약간의 시간차로 다리에도 붓기가 시작되었고, 윗배 아랫배 사정 볼 것 없이 불룩해져 왔다.   다급하다! 코의 바로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뇌하수체에 SOS를 쳤다. 호르몬 분비를 담당하고 있는 아주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곳이다. 전엽과 중엽에서는 이상 신호가 잡히지 않는데 후엽에서는 소식이 없다. 그럼 후엽에서 문제가? 다시 한 번 후엽에 SOS를 쳤지만 신호가 미미하게 잡힐 뿐이었다. 결국, 신장이 파업을 선언한 것일까?   며칠 밤샘 작업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등 뒤 갈비뼈 아래 신장이 자리한 곳에서 양쪽이 번갈아 가며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몇 번 두들겨 주면 괜찮아졌기에 계속 작업을 하곤 했었는데. 그것이 원인이었나 보다.   내 주먹 크기만 했던 신장이 갓난아기 주먹만 하게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고 했다. 혈압이 떨어지면서 모세혈관에서 여과를 하지 못하자 아예 공장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 어릴 적부터 약하던 신장이 과로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구나!' 약으로도 달래고 조혈호르몬제 주사도 맞고. 건포도처럼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소변을 만들어내려고 젖 먹던 힘까지 내어 겨우 버티고 있는 신장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놔뒀단 말인가. 주인이 누구여? 결국 새로운 신장으로 대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건포도 신장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주인님만 살 수 있다면 저는 아무래도 괜찮구먼요…."   쌍둥이처럼 꼭 같더라는 아버지의 신장을 이식받았다. 새로운 신장은 오른쪽 골반 바로 위로 이사를 왔다. 새 신장이 이사 온 지금, 몸 안에선 한창 전쟁 중이다. 식구로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처음 3년이 고비란다. 3년이 되는 올 봄엔 약 독이 심하게 올랐었고, 겨울엔 감기몸살이 지독하게 들었다. 그렇게 한고비를 겪어 넘겼나 보다.     창가에 드는 햇살에 눈이 부시는 봄날의 오후. 요즘 같은 날씨에 신장도 기지개를 켜나 보다. 살 만한 걸 보니.   고맙구나. 아직도 치러야 되는 고비가 여러 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치러지는 전쟁을 방치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의 전쟁에서 많은 것을 잃고 배웠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전하는 메시지에 항상 관심을 가지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공장이 가동되는 것을 지켜본다면 꾀를 부리던 공장들도 속속 가동을 재개하리라.   오른쪽 아랫배를 살며시 만져보면 내 손바닥 안으로 쏙 들어오는 신장. 약한 떨림마저도 따스함으로 전해져 온다. 지금도 여전히 전쟁 중이지만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23    아들이 알 수 없는 것 댓글:  조회:924  추천:0  2014-05-20
    사랑     아들 녀석이 깜빡 잊고 두고 간 도시락을 들고  이미 학교에 들어섰을지도 모르는 시간에  이것저것 재지 않고 냅다 뛰는 어미의 마음을  아들은 알 리가 없다.      내 새끼 배곯을까 백주대로에서 발견한 아들의 뒤통수에 대고  고래고래 이름을 부르며 도시락을 흔들어 대는 어미의 마음을  아들은 알 리가 없다.     동네방네 제 이름이 불린 것에 쪽팔려 하며  도시락을 가방에 쑤셔 넣기 바쁠 뿐이다.      지 새끼 세상에서 제일 예뻐 어쩔 줄 모르는 사랑이 얼굴에 뚝뚝 떨어진다마는  아들은 얼른 집에 돌아가시라고 툴툴대며  등을 돌려 학교로 들어가기 바쁘다.      쉴 새 없이 뛰어온 탓에, 언제 봐도 예쁜 탓에  어미 얼굴은 발갛고  쪽팔림에 아들은 얼굴이 발갛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몇 번을 아들 녀석 바라보느라 뒤를 돌아보는 어미건만  한 번쯤도 돌아보지 않는 아들은  그 마음을 알 길이 없다.        사랑 ∥        머리가 굵어 이제 대들기까지 하는 아들은  아비의 애잔한 사랑을 알리가 없다.  술 때문에 언제나 얼굴은 발갛고,  입에선 언제나 바보 멍충이가 연발되는 아비를  아들은 좋아할 리가 없다.  누구를 위해 얼굴이 매일 그렇게 달아오르는지 알 리가 없다.      아들 녀석 군대면회를 가던 날,  면회 장소에서 한참 떨어진 PX까지  음료수를 사기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뛰어갔다 오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비의 사랑을  아들은 알리가 없다.      원래 사랑한다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등골 휘게 일하는 재주만을 배운 아비의 마음을  지 혼자 큰 것처럼 착각하는 아들이 알리가 없다.      이제 30보다 40이 더 가까운 나이에  홀로 된 어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마는  달에 한 번 먼저 전화를 하는 것만으로 입이 귀에 걸리시는 어미의 마음을  아직도 아들은 알리가 없다.      자기를 위해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아비와 어미를  자기를 위해 사는 법을 배운 아들이 헤아리기엔  그 사랑이 너무 넓다.   
22    가난한 감사 댓글:  조회:885  추천:0  2014-05-14
가난한 감사           어느 추운 새벽, 겨울이라 늦은 시간인데도 이제서야 동이 트며 어두움을 겨우 몰아내고 있을 때, 난 훈훈한 거실 유리창으로 새벽을 보며 밖은 얼마나 추울까 싶은 생각에 차마 창은 열어보지 못한다.   아침 일찍 눈이 떠져 아무 걱정 근심 없는 마음으로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아래 길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멀리서   “재애애―첩 사-이소―, 재애애―첩 사-이소―.”하는 목청 좋은 아주머님의 목소리가 골목길을 울리고 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참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하다가 다가오는 그분을 자세히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머리에는 칭칭 목도리를 둘러싸고 두텁게 끼어 입은 옷으로 겨우 눈만 보이는 모습으로 입에는 김을 푹푹 내며 재첩 사이소―를 외치고 있었다.  얼마 전 추운 겨울에 맨손으로 생선 일을 하시며 얼어터진 손이 상처가 나고 부어서 너무 아파 움직일 수가 없다며 치료를 받으러 오신 그 아주머님이셨다. 손등과 손끝 마디마디가 퉁퉁 부어 사혈을 해 드리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참으시며 일을 하실 수 있냐고 여쭈었던 그 아주머님. 생선내장은 맨손으로 긁어내야 한다며 일 하다 보면 그렇게 시린 줄은 모르시겠다고, 그런데 생선은 전부 얼려서 나오기 때문에 장갑을 껴도 손 시린 것은 마찬가지라고 대답하셨다.    그분이 추운 겨울날 새벽에 남이 다 자고 있는 한 밤중에 일찍 일어나 재첩국을 끓여 아침 식사용 국을 만들어 팔러 다니는 것이다. 매일 새벽마다 들리는 재첩사이소의 아주머님이 그분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런데 그런 추운 새벽에 꽁꽁 언 손을 목장갑으로 겨우 가리고 재첩 통을 끌고 다니며 소리치시는 그 상황을 접한 순간 갑자기 얇은 잠옷이 전혀 춥지 않은 거실의 훈훈한 온기를 느끼며 내 마음에 처음 올라온 생각은, 저 사람은 추운 겨울에 쉬지도 못하고 얼어터진 손으로 국을 끓여 팔러 다니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며 참 감사하다 하며 그분을 내려다보고 또 다른 의미로 또 내려다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 감사가 과연 옳은 감사인가?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갑자기 나보다 힘들게 느껴지고 추워 보이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나와 비교하여 갑자기 행복감을 느낀다면 이것이 과연 옳은 감사인가?      몇 년 전 백혈병으로 골수이식 수술까지 하였으나 30대 중반의 젊은 아내와 6살 딸을 남겨놓은 채로 한 젊은 남자가 죽었다. 내 친구는 졸지에 과부가 된 것이다. 오랫동안 그토록 친했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서먹해서 그 친구와 아무런 이야기도 나눌 수 없었다. 내 남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고 아이들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단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 친구가 갑자기 불행을 느낄까봐, 내가 행복한 모습을 보이면 그 친구가 우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친구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는 불행하리라 짐작했었다.  ‘저 사람은 저 환경에서 불행할 거야’ 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그 마음 자체가 그 사람을 불행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것, 상대방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환경이 아니라 그 사람을 불행하게 보는 그 순간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난 그 친구와 드디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진심으로 그 친구의 감정에 대해 선입견 없이 물을 수 있었고 그 친구는 자유롭게 대답했다. 예전처럼 격의 없이 내 모습을 보일 수 있었고 그 친구도 자기의 사정을 불행한 일은 불행한 대로, 기쁜 일은 기쁜 대로 세월이 치료해준 상처를 내보여 주었다. 그 전처럼 자연스럽게 그 친구에게 물었다.    “어떤 가수가 하반신 불수가 되고 어느 정도 그 장애를 극복한 뒤에 방송에 나와 인터뷰하는 걸 본적이 있어. 리포터가 뭐가 제일 힘드냐고 물었는데, 뭐라 대답했는지 알아? 자신을 제일 힘들게 하는 건 사람들이 자기를 동정하는 시선이라고 말하더라구.” 했더니 친구가 대뜸, “나 그거 당하고 살고 있잖아.” 한다.  남의 불행을 보고 그 순간 드는 생각이 자기 자신의 그렇지 않은 조건을 떠올리며 감사를 한다면 그 감사는 과연 옳은 감사일까?     그 후로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고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아니요. 틀렸습니다.” 라고 대부분 대답한다.    그러나 질문을 좀 바꾸어, “다리가 한쪽이 불편한 사람을 보고 난 두 다리가 멀쩡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한다면요? 난 두 눈이 멀쩡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한다면요?” 하면 그건 옳다고 대답한다.    우리의 감사는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느끼는 감사일 때가 많다. 나는 가난한 감사라고 이름 지었다. 남의 행복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의 심성으로 받아들이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버젓한 속담을 아무 부끄럼 없이 즐기고 있다. 놀라운 격언에서 답을 찾았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는 것을 말씀하신 분이 있었다. 남의 기쁨을 같이 기뻐할 수 있고 슬픔을 같이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마음이 깨끗해져야 하는 것인지, 겨우 오랜 시간을 들여 생각해낸 그보다 더 좋은 상태는 짐작컨대, 무심의 상태에서 불행과 행복을 바라보며 적절한 도움과 기쁨을 나누며 누리는 것이리라.  비교하지 않고 감사하고 비교하지 않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감사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감사에서 벗어나 진정 존재 자체로 감사한 따뜻한 감사를 올리고 싶다.   
21    웃음과 울음사이 댓글:  조회:988  추천:0  2014-05-11
웃음과 울음사이             그것이 진심(眞心)은 아니었다. 참 엉뚱한 말이기도 했다.  “오늘 가서 영영 돌아오지 마세요!” 아빠의 출근길에 엄마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다섯 살 꼬마아이가 건넨 배웅인사! 악동기질로 어른들을 웃게 하려 건넨 말이 너무 짓궂었던 걸까? 아빠가 멀어질 즈음 엄마가 내 머리를 심하게 내리쳤다.  “너 그것이 무슨 소리인 줄이나 알고 하는 거냐?” 너무 놀라 엄마를 바라보니 엄마의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져 있다. 엄마는 내가 아빠에게 죽음을 암시하는 저주의 말을 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엄마의 눈물을 보고 깜짝 놀란 난 그날 하루 종일 아빠가 무사히 되돌아오기를 빌었다. 그리고 그날 아빠가 돌아와 주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엄마도 마찬가지였을까?     그 후 20년이 흐른 뒤 아버지는 위암말기 판정을 받고 몸져누우셨다. 아버지가 투병하시자 그동안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비밀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업실패로 재산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고 그 스트레스로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음’을 마주하고 계셨다. 살고 있던 집 물건들에 분홍색 차압딱지가 붙으면서 어머니는 이 모든 상황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날이 정신 줄을 잃어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머니는 간신히 비틀거리며 침대로 걸어가시던 아버지의 등짝을 사정없이 때리면서 “어떻게 살라고, 다 정리해 놓고 가라고!”라며 한참을 울면서 절규하셨다. 난 정말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말기 암 환자로 가족도 못 알아볼 정도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인 보호받아야 할 분이신데 비겁하게 폭력(?)을 행사하다니!    그래도 난 어머니를 말릴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의 등짝 폭력 사태는 이생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아야 할 무엇인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 뒤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하셨다. 난 이때를 회상하면 웃음과 애잔한 슬픔이 함께 밀려온다.   아버지는 말기 암 판정 3개월 후 한겨울에 돌아가셨다. 그 후 아버지에게 건축 자금을 빌려주었다 받지 못한 분이 남은 가족들에게 하소연을 하기 위해 찾아와 장남에게 책임을 묻겠다면서 장남 나오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셨다. 어머니는 장남인 오빠를 보호하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분이 집안 물건에 덕지덕지 붙은 차압딱지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되돌아가자 오빠가 휴지통에 무언가를 가지고 나오면서 한바탕 너스레를 떤다.    “아…. 방에 숨어 있는데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은 거야. 그런데 마침 보니 휴지통이 있는 거야, 얼마나 다행이야? 허허.”  너무나 명랑하게 말을 해서인지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그냥 한참을 웃었다. 그 상황에서 ‘웃음’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멋쩍고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을까? 방으로 돌아가서는 각자가 눈물을 훔쳤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 뒤 나는 14개월 아들 녀석의 ‘똥 덩어리’를 치울 때면 이때가 생각나 웃음과 울음이 함께 몰려온다.     아버지의 빚을 잔뜩 떠안게 된 어머니는 30년 전에 출가했던 친정으로 30년을 함께 했던 집안 가재도구들과 함께 귀환했다. 어머니 자식이었던 나도 함께 딸려서 말이다. 엄마는 생각보다는 씩씩해 보이셨다. 하지만 겨울에 한여름 옷을 입고 태연스럽게 외출을 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정신 줄을 놓으실까봐 걱정이 되어 외출 길에 함께 동행 하곤 했다.   때마침 꽃집 앞을 지나는데 봄을 알리는 꽃들을 분양하고 있었다.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흔하디흔한 꽃 화분 앞에 어머니는 쭈그려 앉으셨다. 꽃을 바라보며 한참을 울던 어머니는 마침내 미소를 지으시며 꽃이 참 곱다고 하셨다. 꽃을 보는 안목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였지만 그날 본 그 꽃은 어머니 말대로 너무나 고와 보였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꽃 화분 3개를 사들고 외가댁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곱디고운 꽃 화분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렇게 따뜻한 새봄을 맞이하셨다. 난 이 사건을 ‘꽃 화분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난 ‘인생은 해피엔딩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며 삶이 이렇게 헝클어진 채로 마무리 되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며 참 많이도 우울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가족이 ‘똥 덩어리’와 ‘흔한 꽃 한 송이’의 가치를 알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가 살아 놓고 가신 삶을 마주하며 우리 가족들은 참 많이도 달라졌다. 깊은 미소를 갖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참 장하신 일을 하신 것이 아닌가.   넓게 바라보면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향해 가고 있지 않은가. 세대를 넘어가는 지난하고도 더딘 과정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비로소 부모란 온몸으로 자신을 희생한다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 뒤 난 아버지에 대한 애잔함이 깊이 올라와 크게 울었다. 한바탕 큰 통곡 뒤 난 아버지를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살아오면서 나에겐 참 많은 ‘울음’과 ‘웃음’이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삶에서 큰 울음이 있었던 때는 큰 웃음도 함께 왔던 것 같다. 어쩌면 울음과 웃음은 본디 하나가 아니었을까?     내가 살아가는 힘은 울음과 웃음이 어우러진 그 순간에 있는 줄도 모르겠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눈가에 잔잔한 눈물이 살짝 맺혀 있을 때가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난, 웃음 속에서 울음을, 울음 속에서 웃음을 발견하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그리고 사람에게 이 웃음과 울음의 묘한 조화가 있음이 그냥 무작정 고마워진다.   
20    자각 댓글:  조회:882  추천:0  2014-04-16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절대가치이다 모든 것이 있어도 ‘나’가 없으면 소용없느니라 나는 중요하다. 모든 것은 나로 말미암으며 내가 없으면 우주가 없다.   나를 찾아가는 수련   지난번에 숙제를 내드렸죠? ‘나는 누구인가’ 하늘에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한번 고하는 의미가 있으니 솔직하게 하셔야 돼요. 마음자세에 따라서 안 좋은 부분들이 없어지기도 하고 덧붙여지기도 합니다. 그 숙제를 내드린 것은 제가 여러분을 파악하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한눈에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제가 뭐 그런 걸 봐야 아는 수준이 아니죠. 숙제의 의미는 본인들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보기 위함입니다. 그 시각을 보는 거예요. 자신이 살아온 것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치우쳐 있는가? 공정하게 보고 있는가? 시각은 공정해야 되겠죠.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내주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면 답이 나올 거예요.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을 하고 싶었으며,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해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나아갈 바를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 말씀은 드리지 않았는데 이런 방법은 자각수련(自覺修練)이라고 하여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자기자신을 깨달아가는 수련입니다. 수련에서는 이렇게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한번씩 걸러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직 안 내신 분들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갑니다.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으니 빨리 내주십시오. ‘숙제 할 시간이 있으면 수련을 하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숙제 하는 시간이 수련시간입니다.   자기자신을 한번씩 돌아보면서 울 수도 있고, 참회할 수도 있고, 대견해할 수도 있는데, 그 과정이 다 수련입니다. 수련하시는 분들은 많이 토해내야 돼요.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토해내고 많이 울어야 됩니다. 중단에 많이 맺혀있는 상태들이거든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 맺히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게다가 한이 금생에만 맺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생으로부터 대대로 맺혀온 거거든요. 그게 다 풀려 나가야 하므로 그런 기회를 드리려고 숙제를 내드린 거예요. 스스로 풀어나가는 시간, 해원하는 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그걸 하지 않으면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한번씩 뒤돌아보고 살아온 과정을 다 기록하시면서 실타래를 풀어야 해요. 그러면서 어떤 식으로라도 정리를 해야 넘어가지,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는 넘어갈 수가 없어요.   숙제 내신 것을 보니 살아온 과정이야 어떻든 지금 현재 마음가짐이 어떻구나 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더군요. 더러는 자랑위주로 쓰신 분도 있어요. ‘나는 이렇게 잘 살아왔다’ 하고(웃음) 상 받아야 된다면서 잘못한 일은 꼭꼭 숨기는 분도 계시고요. 반면 어떤 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잘한 일은 하나도 없는 분같이 쓰셨어요. 어떤 분은 끝에다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무에게도 보이지 마시라고. 태우시거나 아니면 금고 속에 넣어달라고.(모두 웃음) 그런데 자신의 그런 내용들을 다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터놓지 못하겠다면 아직은 수련할 준비가 안 되신 상태예요. 어떠한 얘기도 터놓을 수 있어야 되거든요. 만일 선생한테도 못 보이겠다는 마음이라면 수련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법이 전수가 안 돼요. 저한테 뿐만이 아니라 도반들끼리도 뭐든 꽁꽁 숨기고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셔야 합니다. 수련의 길에 들어오시면 그런 건 개의치 않으셔야 돼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 이런 말이 있죠? 본인이 한번 털어놓은 이상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요. 감히 용기가 없어서 털어놓지 못하는데, 자기자신에 대해서 스스럼이 없고 나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수련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과오를 한 겹 한 겹 벗을 수 있을 때 본성(本性)이 찾아집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한가지 거짓말을 위해서는 일곱 가지의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거짓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거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어 있어요. 그러느라고 점점 옷을 껴입게 되는 거거든요. 거짓을 감추려고 한 겹 두 겹 입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굳게 믿게 되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인해서 껍질이 악어껍질같이 두껍고 딱딱해져요.   수련하면서 허물을 벗는다는 얘기를 하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본인들이 쓰고 있는 허물이 있는 거예요. 그거 벗기가 상당히 힘이 듭니다. 감추려고 자꾸 무장을 하다 보면 껍질이 더 두꺼워져서 벗기가 힘들어요. 수련으로써, 기운으로써 허물을 벗다 보면 나중에는 흐늘흐늘해져서 쉽게 벗을 수 있게 되거든요. 수련이란 그런 과정입니다. 그렇게 자꾸 벗으세요. 마음에 지고 있는 짐을 다 벗고, 홀가분해지세요. 용서 못 할 과오는 하나도 없어요. 스스로 한번 뒤돌아보면서 왜 그랬는지를 본인들이 정확하게 끄집어 낼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된 겁니다. 자신을 보는 시점이 정확하다는 얘기거든요. 그런 시각을 보고자 합니다.     숙제를 공개합니다   다음은 자각수련 숙제를 내신 분들 중에서, 김령준 님이 제출한 내용입니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잘 되어 있어 함께 읽어보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공부를 함께 지켜보는 것도 공부의 한 방편입니다. 사실 이렇게 좋은 교재가 없어요. 다들 자신에 대해 공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수선재 2기 김령준   참 막연하지만, 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수련에서 그 실마리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숙제를 하면서 돌아보니 어려서부터의 저의 성향이 수련과 많은 연관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럿이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서 읽는 동화나 만화를 좋아하고, 뭔가 현실적인 것보다는 공상세계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단전호흡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친구 집에 놀러가서 본 소설 ‘단’은 순진했던 어린 마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그 길로 같은 이름의 수련서를 사서 그 책에 나온 대로 혼자서 수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의 목적은 순전히 ‘공중 부양’을 위해서였습니다. 3개월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해서 얼굴이 벌겋게 숨을 참아가며 했으나 별다른 느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않고 틈틈이 생각이 날 때마다 호흡을 해보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같은 저자의 ‘신단’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읽고 흥분하여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부터 ‘정심정도’를 외고, 독서실 옥상에서 수련의 방법으로 애국가를 수십 번 불러보는 등 열심히 했지만 역시나 별다른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단전호흡에의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던 것은 저를 올바로 이끌어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을 뿐, 저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나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뿌리 깊이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럭저럭 평범하게 대학생활을 하고 졸업 전, 입대를 앞둔 4학년 방학 때 도서관에서 ‘선도체험기’를 발견했습니다. 길다랗게 시리즈로 꽂혀있는 게 신기해서 펼쳐보았는데 그 동안 잠시 접어두고 있었던 단전호흡에 관한 내용이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당장에 빌려다가 탐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엇이든 한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입니다. 전자오락에 흥미를 가졌을 때는 아침에 오락실에 들어가서 점심은 넘기고, 저녁 때 나올 정도였고, 롤러스케이트에 빠졌을 때는 발톱이 멍이 들고, 빠질 때까지 타고 다녔을 정도였으니까요.   이같은 성격이, 수련의 길에 들어섰을 때도 적용이 되었습니다. 하루 2~3권씩,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책만 읽었습니다. 얼추(지금 생각하면 제대로 된 호흡도 아니었지만) 호흡을 하며 책을 읽는 동안 단전이 따뜻해지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10년만의 결실이었습니다.   생식을 하면 굉장히 수련이 잘 될 것 같은 생각에 없는 용돈 긁어 모아 생식을 시작하고, 30권을 다 읽고 나서는 저자 분을 입대 전에 한번 찾아뵈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세 번인가 찾아 뵙고는 입대를 했습니다. 훈련기간 중에 다시 1권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쯤에 백회가 허물어지는 느낌이 나면서 백회로 숨쉬는 느낌, 공기가 통하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백회가 열리면 ‘얼음기둥’ 같은 것이 박히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듯이 기운이 들어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저는 그게 열린 것인 줄은 몰랐습니다. 손발이 훈훈해지는 정도로만 느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배치를 받은 곳은 안양이었습니다. 당연히 수련을 하라는 하늘의 섭리로 생각을 했습니다. 1개월 정도 부대에 적응을 한 후로 주말만 되면 서울에 가서 수련을 하고 부대 내에서도 철저하게 생식을 했습니다.   그 해 겨울은 너무 추웠습니다. 장교 기숙사에 식당 외에는 특별한 조리시설도 없으니, 물 한 컵에 생식 몇 숟갈을 먹고 밖에 나가서 훈련을 하고 있으면 손바닥에서 어깨까지, 발바닥에서 허벅지까지 몸이 차가워져 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점심때 들어와서 난롯불을 쬐면 무릎과 팔꿈치까지 내려갔다가, 훈련을 받으러 나가면 다시 손발부터 차가움이 올라왔습니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으나 계속 밀고 나갔습니다. 저는 한번 ‘해야 한다’ 라고 규정지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규칙에 매어 경직되는 부분이 있을 정도입니다. 나중에 이 때를 생각해보니 어려운 형편에서 사시는 분들의 경험을 이런 식으로 해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회식자리에 가서도 술과 고기를 전혀 하지 않으니 간부들 사이에 ‘김도사’로 통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별나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더니 맡은 업무를 잘 처리하고, 방에 놀러오시는 분들에게 냉장고에서 사과나 두유라도 꺼내 드리고 하다보니 잘 어울리게 되고, 부대 내에서도 능력 있는 간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군대라는 여건이 아무래도 수련에는 불리한지 진도는 항상 제자리였습니다. 단전의 따스한 느낌도 없어졌던 것 같습니다. 수련에 대해서 말이 통하는 사람도 없으니 어울리기는 해도 깊이 마음을 열어놓고 대화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연히 책을 읽거나 하며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으니 이때 성격이 많이 폐쇄적으로 되었던 것 같습니다. 혼자서 자기 위주로 생활을 하다보니 좀 이기적으로 되었고, 남에 의해 자신의 생활을 침범 받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제대 무렵, 이제는 도장에 나가서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물색을 하던 중, 서울 압구정동의 초선대와 종로의 신선도를 놓고 생각하다가, 이도해 수사님이 계신다는 신선도에 가기로 했습니다. 국철이 있어서 교통편도 좋았습니다.   이 때부터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와공 중에 이수사님이 지나가면 후끈한 바람이 스칠 정도였으니 수련이 잘 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끝나고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도담을 나누는 시간은 여지껏 경험한 적이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군생활 2년 간을 힘들게 인내해 온 수련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재미가 들면 끝을 보는 성향은 또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하단축기법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서울에서 부대까지 2시간 반 정도의 거리를 하단축기 자세로 걷고, 앉은 상태로 갔습니다.(당연히 사람들이 이상하게 봤을 겁니다. -.-;) 단전이 딴딴해질 정도로 기운이 모일 때도 있었습니다. * 하단축기법 : 단전에 기를 모으기 위한 수련법입니다.   왕복 5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 도장에 출퇴근했습니다. 수련하는 즐거움을 생각하면 멀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밤늦게까지 수련한 후 도장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기운이 모이기 시작하니까 잠들기 전이나 수련 중 약간씩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별 의미는 두지 않았지만 수련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재미를 더해주었습니다.   제대 무렵 신체검사에 ‘경미한 폐결핵’의 의심이 간다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수련하는 사람은 그런 거 안 걸려’ 하면서 무시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맞았던 것 같습니다. 영양부족과 추운 생활에 기운도 없었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으니까요. (그 때 몸이 좀 상한 것 같습니다.)   수련을 많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제대하면서부터 신선도에서 사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수사님의 말에 따라 생식도 그만 두고 이것저것 잘 먹었습니다.   선생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선계에 가고 싶다』는 한참 전에, 사가지고 오는 차 안에서 다 보았을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렇게 재미있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해 얘기를 들을 때면 베일에 싸인 분인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가르침을 받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꿈에, 선생님이라고 하시는 분을 뵈었습니다. 좋은 징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 날 이수사님을 도와 『선계에 가고 싶다』 책을 나르다가 점심을 먹으러 인사동 추어탕집에 들어갔는데, 그 때 이수사님이 인사를 넙죽 하시더군요. 저도 얼결에... 선생님이셨습니다.   하루종일 흥분상태로 보내고 도장에 들어와서 다른 분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부러워하는 빛이 눈에 역력... ^^ 그 후 수련장을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또 심사를 통해 수련생을 뽑는다는 말을 전해듣고 어떻게든 입회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부터 제 좌우명이 되다시피 한 것이  ‘지하철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는 한이 있어도 나는 수련을 택할 것이다’였습니다. 영혼의 발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익선동 수선재의 첫 수련날이 되었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정성껏 때를 밀고(^^) 와서 앉아 있는 가슴은 두근거렸습니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겠죠? 편안하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너무나 친근하고 좋았습니다. 이 날 이후 또 한번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 정리 나는 누구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는 것 몇 가지는, 선계 수련에 일찍 입회하여 선배로서의 솔선수범을 보여야 하는 나, 스승님께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나, (거창하지만)우주의 일부로서 우주의 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나, 현재의 몸을 있게 해 주신 부모님의 자식으로서의 나... 각각의 위치에 따라 내가 맡아야 할 일이 주어져 있으며, 그것들이 결국은 나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번 생만 살고 끝나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물질보다는 영혼의 진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내 앞에 닥치는 모든 공부를 나에게 넉넉한 부분인 인내와 의지로서 뚫고 나가야 합니다. 나에게 가장 모자란 부분은 사랑입니다. 남을 위하는 마음... 나라는 벽을 없애고 우주와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를 상당 부분 차지하는 이기심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며, 현재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나의 진화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나'입니다...     호흡은 인간의 마음을 가라앉혀줌으로 인하여 본성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 본성에 연결이 되어 떠나지 않도록 해주고 그 본성 속으로 계속 추구해 갈 수 있도록 해주니, 이 호흡에서 뜨면 모든 것이 멀어지는 것이니라. 호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19    박경리선생의 삶과 문학 댓글:  조회:1888  추천:0  2013-11-19
박경리선생의 삶과 문학(작가론) 문혜영   박경리 선생(본명: 금이今伊)은 1926년 10월 28일, 경남 충무시 명정리 서피랑 꼭데기 허름한 집에서 태어납니다. 선생 스스로 ‘불합리한 출생’ 이라고 말한 바대로, 선생은 아버지는 있으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이나 다름없는 성장기를 보냅니다. 14살 때 4살 연상인 어머니와 결혼하여, 18세에 그를 낳은 아버지는 바깥으로만 떠돌면서 딴 살림을 차렸습니다. 어머니에게 혹독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사랑을 구걸하듯 하여 자신을 낳은 어머니, 선생에게 있어 아버지는 증오심과 반항심의 대상, 어머니는 연민과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부모를 바라보며 사회 기존 관습이나 질서 전부를 위악적인 것으로 규정할 만큼 반항 정신이 강했던 선생은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공부는 별로 였고, 소외감과 고독감을 보상이라도 받듯 독서와 시 쓰기에 몰두합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선생은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6.25 전란 중, 행방불명이 되었던 남편은 50년 말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뒤이어 세 살짜리 아들마저 잃게 되고 외동딸 영주만 남게 됩니다. ‘불합리한 출생’ 보다 더욱 가혹하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자존심에 흠집이 남지 않도록 몸부림치던 선생은 불행의 탈출구로 문학을 생각하고 더욱 틈틈이 시 습작을 하게 됩니다.   그 무렵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상업은행 본점에 다니던 선생은 소설가 김동리 선생에게 자신이 써둔 시작 원고를 보일 기회를 가집니다. 습작 원고를 읽고 나서 김동리 선생은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평가하면서 시보다 소설을 써보라고 권합니다. 그 권유에 따라 소설을 쓰게 되고, 김동리 선생의 주선으로 에 55년 , 56년에 이 추천 완료되면서 정식으로 한국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됩니다. 57년 단편 로 현대 문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59년 장편 를 발표하면서 대중의 인기도 얻게 됩니다.   선생의 초기 작품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내력을 많이 담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성이나 홀어머니를 부양하는 딸이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64년 발표한 은 자전적 작품으로 거기에 등장하는 황해도 연백의 연안여고 선생 ‘남지영’의 모델이 바로 박경리 선생 자신이고, ‘차기석’의 모델은 선생의 남편입니다. 이러한 선생에게 60년 4.19의 경험은 박경리 문학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단편에서 장편으로 옮겨갔고, 박경리의 세계가 넓혀졌습니다. 이제 시선이 개인과 가족의 고통을 넘어 민족과 인류의 보편성을 다루는 데까지 뻗치게 됐다는 평을 받습니다. , ,, 등 굵직한 장편들을 내놓으면서, ‘내성문학상’, ‘한국여류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도 오릅니다.   69년 8월부터 선생은 의 집필을 시작합니다. 당초는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1권 분량으로 예상했던 소설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딸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에 연재를 시작했으나, 결국 다섯 살 서희가 쉰셋의 나이가 되어 평사리의 최참판댁 옛 땅을 찾을 때까지 반세기의 세월을 선생 자신을 유폐시킨 채, 25년이란 세월 동안 온갖 군상의 삶과 한 시대의 역사를 그려냅니다.   ‘소설은 혼자 하는 작업, 외로운 시간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어요.’ 라고 말하던 선생은 1부의 서문에서, ‘대매출의 상품처럼 이름 석 자를 걸어놓은 창작행위, 이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나를 묶어버린 그 숱한 정신적 속박의 사슬을 물어 끊을 수는 없을까? 자의로는, 그렇다. 도망칠 수는 없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술회하며, 그 고통의 시간을 ‘빙벽에 걸린 자’, ‘주술에 걸린 죄인’이라 표현합니다.   그러한 고통으로 엮어진 를 선생은 ‘강 같이 흐르는 모든 생명의 흐름’이라고 한마디로 축약합니다. 한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집단적 생명 자체가 뭉뚱그려진 숙명을 그려 낸 것인데, 그것을 쓰게 한 것은 ‘서러움’이었다고 2001년 나남출판사에서 새롭게 발간한 의 서문에서 밝힙니다. ‘지도 한 장 들고, 한번 찾아와 본 적이 없는 악양면 평사리, 이곳에 토지 기둥을 세운 것은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전 5부, 21권의 는, 69년 8월에 시작하여 94년 8월까지 집필기간 25년, 원고지 3만 1200매의 분량으로, 1897년부터 1945년까지 반세기에 걸친 한국사회의 기나긴 격동기에 주인공 ‘서희’를 중심으로 700여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 대서사극입니다. 이 방대한 작업을 위해 선생은 인물 족보나 이야기의 어떤 틀도 미리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저 손이 닳도록 들여다보던 을유문화사의 를 동무 삼아 인물들이 제 생명력으로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기록해 나갔다고 합니다. ‘삶이란 틀 속에 끼우면 이해도 안 되고 해석도 안 됩니다. 문학도 그렇지요.’ 복잡한 인물들과 사건이 얽히는 소설을 머릿속에 세밀하게 기억해두고 써나가다 보니 생활인으로는 건망증도 심하고 세상일에 관심도 끊은 채 바보처럼 살았다고 회고하기도 합니다.   를 집필하면서 작품의 배경이 되는 경남 하동의 평사리 악양 들판과 만주땅 용정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면서도 사실적으로 생생히 묘사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책이 다 나온 뒤, 그곳을 둘러보고 선생 자신도 불가사의하게 생각할 정도였는데, 이에 대해 선생은 지리와 기후를 비롯한 관련 책자를 읽고, 상상력과 직관력으로 쓴 것임을 밝혔습니다. 선생에게 있어 상상력은 글을 쓰는 원동력입니다. 선생은 상상력 없는 글은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그러한 상상력은 많은 독서가 밑거름이 되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2500여개의 독특한 어휘와 방언, 속담, 풍속, 제도 등을 담은 사전이 발간될 만큼 는 민족문화의 보고(寶庫)로 꼽히는 작품이며, 세 번이나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국제적으로도 호평을 받고 있으며, 여러 번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국민 대다수가 세계에 가장 알리고 싶은 우리 문인과 작품으로 박경리 선생과 를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 의 운명도 선생의 삶처럼 평탄한 길을 걸어오지 못했습니다. 69년 에서 처음 시작한 의 연재는 여러 매체를 거치게 됩니다. 72년 으로 자리를 옮겨 2부를 연재하고, 78년 다시 과 에 3부를, 81년 으로 옮겨 4부를 연재합니다. 그리고 83년부터 (87년부터 제호가 으로 바뀜)에 5부를 연재합니다.   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집필된 만큼 이를 펴낸 출판사도 여럿입니다. 4부(12권)까지 삼성출판사에서 초판이 출간됐고, 이어 88년 지식산업사에서 박경리문학전집으로 개정판을 냈습니다. 완간본(16권)은 93~94년 솔출판사에서 나왔으며 1998년 출판권을 반납함에 따라 구간도서로 존재하다 2002년 나남에서 총 21권으로 새롭게 펴냈습니다.   출생부터 시작된 선생의 고난은 집필 중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71년, 유방암 수술로 붕대를 가슴에 동여맨 채 병마와 싸우며 밤새워 원고를 메웠고, 70년대 말, 사위인 시인 김지하가 투옥되자 손자 원보까지 돌보며 글을 썼습니다. 80년엔 남편도 없이 시집살이를 하게 된 외동딸 김영주의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원주 단구동으로 이주하여,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28년을 원주에서 살았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4,5부를 탈고하였으며, 완간 이후에는 간간이 산문을 기고하고 시집을 출간하는 것 외에 작품 활동은 최소화한 채 토지문학관 건립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토지 집필실이었던 단구동의 집은 토지개발로 인해 후에 토지문학공원으로 조성되었고, 선생은 원주 매지리에 새롭게 조성된 토지문학관에 칩거하면서 후배 소설가들을 위한 창작실 지원과 밭농사, 집필로 은둔생활을 합니다. 로 명예를 얻었으나 그 명예를 좇아 세상으로 나오는 대신 어려운 후배작가들의 글쓰기를 돕는 것으로 만년의 생을 보냅니다. 후배 작가들을 뒷바라지 하며 ‘하숙집 아줌마’를 자처하고 손수 텃밭에서 일군 유기농 채소들로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작가들이 먹을 반찬을 한 두 가지씩 만들어 식당으로 내려 보내곤 했습니다.   91년부터는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 객원교수로 출강하며, 95년에는 강의 노트 를 냅니다. 선생은 ‘인생이 행복하였으면 문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 문학적 요소는 인간에 대한 동경으로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코 문학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나는 인간으로서 행복을, 인간으로서 참됨을 갈망하여 왔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니까 토지만큼이나 굴곡졌던 선생의 불행한 삶은 선생의 문학을 낳게 한 불씨인 셈입니다.   를 탈고 후, 9년 만인 2003년 선생은 소설 를 에 연재하기 시작합니다. 쓸 수 있는 기력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창작의지를 불태우지만, 후속으로 해방 이후 반세기의 지식인 사회를 다루려던 는 건강악화로 3회로 아쉽게 막을 내립니다. 선생은 정치인보다 지식인을 더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물 밑 지식인들의 의식싸움과 그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회색 지식인이 우리 사회 전체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다루려 했던 것입니다.   선생은 생명과 생존의 가치를 최고로 두었습니다. 생명과 생존 이상의 진실은 없다며, 그게 있음으로써 문학도 있는 거라던 선생은 ‘글쓰기보다 사는 일이 더 중요하다, 문학은 본질이 아니라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저 밥하고 풀 뽑는 일처럼 일상적인 일이 더 본질적이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생명사상으로 선생은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환경운동가였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닭장과 거위장 문을 열고, 손수 기른 상추에 아침을 먹고, 텃밭을 일구고, 마당의 돌을 고르고, 뒷산에 올라 칡덩굴을 뽑으며 살았습니다. 토지문학관을 세우면서도 선생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늪지대에 도랑을 치고 수로를 만들어 밭으로 일구는 일이었습니다. 물길을 열어주고, 흙의 숨길을 열어주는 것이 선생의 생명사랑 삶이었습니다.   선생은 ‘역사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혁명은 수없이 되풀이했지만, 생명의 평등을 위한 혁명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며 ‘인간을 위해 다론 종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간위주의 환경운동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나와야 한다.’고 말할 만큼 생명운동, 환경운동에 앞서 가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고혈압과 당뇨 등 지병을 안고 지내오다가 2007년 7월 폐암 선고를 받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지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주에서 흙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흙이 모여 있는 곳이 토지요, 토지가 있는 곳이 곧 선생의 모든 것이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었던 셈입니다. 저항과 한의 정서에서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되돌아 온 선생은 주변의 치료 권유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텃밭에 농약을 치지 않았던 것처럼 선생은 자신의 육신에게도 억지를 부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10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2008년 5월 5일 82세의 일기로 대하소설 와 수십여 편에 달하는 장, 단편소설과 수필집, 시집들을 남기고 선생은 생을 마감합니다.   한평생 소설을 써왔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했던 선생은 마지막 여명의 시간에도 시를 썼습니다. 시는 나의 직접적이고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한 목소리를 지닌 것이라면서 시작의 즐거움을 토로하던 선생의 문학생애는 공교롭게도 습작 시로 출발하여 유작 시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중에서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처럼, 한 생애 큰 생명으로 살아오신 선생은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더 큰 생명의 품으로 홀가분하게 떠나 가셨습니다. 
18    100번이나 불합격 통지를 받은 당신에게 댓글:  조회:1801  추천:0  2013-11-07
[아침논단] 100번이나 불합격 통지를 받은 당신에게  이민진 재미작가   이처럼 아름다운 봄날 합격보다 불합격 통지를 받는 지원자가 더 많을 텐데 당사자도 힘들겠지만 그들이 거절당할 때 찢어지는 가슴이 한둘일까? 나는 신문 스포츠면은 거의 읽지 않는다. 하지만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분이 김연아 선수가 한국인이라고 제목을 뽑은 것을 보고 약간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 이 우승자가 금메달을 목에 건 뒤 태극기로 온몸을 감싸고 얼음을 지치며 인사를 했다는 부분에 가서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부족(部族)’의 뿌리를 발견한 순간 나는 원초적 감정에 휩싸였다.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젊은 스케이트 선수가 국제적 경기 불황으로 고통 받고 있는 나라의 기상을 드높였다는 점에 감사한다. 만약 그녀가 우승하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는가?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이길 수는 없다. 때로 우리는 좌절한다. 때로 그 좌절은 오래간다. 나는 첫 소설이 출간되는 데 12년이 걸렸다. 물론 이유는 많다. 옹고집, 무지, 시간, 돈, 가족, 건강 문제 등 실로 많은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1995년부터 2007년까지 나는 정말 많은 글을 썼고, 출판사로 보냈지만 번번이 돌아온 것은 거절의 말뿐이었다. 지금도 내 책꽂이에는 거절 편지로 가득 찬 두꺼운 파일이 있다. 거절당한 것은 소설만이 아니었다. 수필, 연구지원서, 저작권 협상제안서, 장편, 소설 초록…… 모든 거절 편지는 큰 상처를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옳은 말을 한다. 실패를 무릅쓰고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이야말로 그 사람을 만든다고 말한다. 다 맞는 말이다. 그처럼 오래 실패를 거듭하면서 나는 엄청난 창조적 자유가 실패 속에 있다는 것을 어렵사리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처럼 거절당하고 있을 때, 정말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서 나를 위해 외치던 말들은 이런 것이었다. 세수도 하지 말고, 일주일 내내 게으르게 뒹굴어도 돼. 나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실컷 사먹어. 한 달치를 다 먹어도 돼. 풋,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은 1,2월에 대학 입시 결과가 나오지만, 미국 대학들은 요즘 한창 입학허가서를 보낸다. 이처럼 아름다운 4월의 봄날, 합격 통지보다 불합격 통지를 받는 지원자가 더 많을 것이다. 자녀들이 거절당하는 것을 보는 부모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부모들 역시 마음이 찢어진다. 거절당하는 아픔이 어디 입시생들만 겪는 일이겠는가. 요즘처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어려운 시절에는 누구나 여기저기서 숱하게 거절당한다. 직장을 잃기도 하고 사업이 망하기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일이 확산되고 있다. 아무도 나쁜 소식을 원치 않지만, 나쁜 소식은 오고야 만다. 어쩌란 말인가?   아마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소설가 지망생으로 지낸 지 3~4년쯤 되던 해, 끝없이 계속되는 거절을 겪으며 나는 자신감이 무너졌다. 나는 좌절했고 분노했고 모욕감에 고통스러웠다. 명진 언니가 두 가지 말할 게 있다고 했다. 첫째, 내가 계속 거절당하는 게 안됐다는 것, 두 번째가 기막혔다. “나가서 100번 거절당해봐.”   “뭐라고?!!” 경악하는 나에게 언니는 말했다. “100번 거절당하다 보면 수락도 몇 번은 될 거야. 내 말 믿어.” 언니는 마케팅 전문가였다. 마케팅 관련 통계의 마술인가 싶었다.   100번 거절당하러 다니는 과정에서 나는 우리들 인간이 얼마나 적응력이 높고 얼마나 회복이 빠른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뭔가 출판될 수 있도록 노력할 때마다 내 작업이 발전했다. 마이클 조던의 그 유명한 말이 있잖은가. 자기 일생에 실패한 슛이 9000개나 된다는! 김연아도 아마 그만큼 엉덩방아를 찧었을 것이다. 작가로서 나는 그보다 더 많이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만큼 연습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100번의 거절을 경험하라던 언니의 제안은 훌륭했다. 언니는 잠시 나쁜 때를 겪는 것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별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줬다. 물론 그 나쁜 때에 겪는 좌절과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함께 아파해줬다는 게 더 중요하다. 내가 단 한 글자도 출판하지 못하고, 단 한 푼도 못 벌 때 언니는 나의 사명과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언니가 내 책을 내줄 수는 없었지만 나에 대한 믿음을 보여줌으로써 나를 일으켜 세웠다.   김연아 선수가 우승한 다음날, 나는 뉴욕에서 온 얇은 봉투 하나를 받았다. 연구 지원 신청에 대한 거절 편지였다. 나는 그날, 그냥 게으름을 피우기로 하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흔아홉 번 더 실패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야 했으니까.  
17    위대한 산악인 댓글:  조회:1454  추천:0  2013-10-28
위대한 산악인   2007년 6월 7일 [도올인터뷰] 히말라야 16좌 세계 첫 완등 `진정한 영웅` 엄홍길 [중앙일보] `죽을 고비 수천 번 … 꿈•열정으로 이겨냈죠.` 마지막 300m가 3000m보다 긴 느낌 정상에 섰을 땐 모든 걸 잊었어요. 그 위험한 산에는 왜 가냐고요 ?     아마 지금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한가한 언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언설도 너무 한가하다. 너무 제멋대로인 것이다. 한가하기 때문에 제멋대로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 보편적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순결한 지고의 목표를 향해 매순간 생사의 기로가 결정되는 치열함, 그 열정과 진실이 실종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열정과 진실을 위장하려 해도 그러한 위장이 통할 수 없는 삶의 긴박감과 필연성, 그 극적인 사례를 나는 엄홍길의 로체샤르 등정에서 본다. 히말라야에는 8000m 이상의 봉우리가 14좌 있다. 이 14좌를 완등한 사람이 세계적으로 열두 사람 있는데, 그 명단 중 세 사람이나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다. 일본인도 끼여 있지 않은데. 우연적일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사실은 퍽 충격적이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도전은 고구려 기질을 이어받은 진취적 기상과 모험정신, 신라인의 전략성과 지구력, 백제인의 섬세한 감각 그 모두를 합친 한국인의 품성과 기질을 잘 나타내 준다. 나는 평소 이창호의 바둑과 엄홍길의 등정을 어김없는 우리 민족 저력의 발로로서 우러러보았다.   그런데 알피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히말라야 완등은 16좌가 되어야 한다는 전설이 있어 왔다. 위성봉이지만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가 주봉으로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16좌의 전설을 달성치 못했다. 그런데 엄홍길은 이 전설에 도전장을 냈다. 2000년 K2에 올라 14좌 완등을 달성한 그는 2004년 5월 5일 얄룽캉을 오르는 데 성공했다. 최후의 도전은 로체샤르! 로체샤르는 로체 옆에 있는 봉우리지만 평균 70도가 넘는 각도로 깎아지른 빙벽이 3000m나 뻗어 있는 거대 직벽이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기에 충분한 히말라야 난공불락의 최난등 코스로서 그 외연(巍然)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엄홍길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두 번째 도전 때는 베테랑 산우(山友) 황선덕, 박주훈을 불귀의 객으로 보냈다. 정상을 불과 150m 눈앞에 두고 아차 하는 순간에 디디고 있던 빙판이 떨어져 나가는 판상눈사태가 벌어졌다. 밧줄이 스르르 그의 장갑을 태우면서 빠져나가 버렸다. 만약 밧줄이 그의 몸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면 그 순간에 같이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2006년 3월 16일 세 번째 도전을 위하여 출발했다. 70일의 사투 끝에 8200m 지점까지 올랐으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로체샤르의 신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겸허하게 퇴각했다. 정상 정복보다도 더 어려운 결정이었다.     2007년 3월 19일 서울을 출발한 4차 등반을 앞두고, 엄홍길은 나 도올을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나는 일본 중앙알프스에서도 그에게 등반훈련을 받았다. 나의 모험심도 그칠 줄 몰랐다. 사실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따라 최소한 베이스캠프까지는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4월 중순까지 나에게 전 대원의 사인이 든 엽서를 보내왔다. 지난달 31일 그가 드디어 로체샤르를 등정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나는 눈물이 쏟아졌다. 누구보다도 그의 삶의 갈망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 수없는 절망의 순간들을 상상하고 있었기에. 3일 오후 4시50분 나는 편집국에서 베이스캠프(5220m) 철수를 앞둔 엄 대장과 긴 통화를 시작했다. 그의 첫마디는 "아이쿠 선생님! 기적입니다! 기적!" 그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먹이는 듯했다.   -우선 대체적 상황을 좀 설명해주오.   "기상조건이 최악이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설상가상 몬순 시즌이 닥쳤습니다. 모든 팀들이 다 철수하는 판인데도 저는 집요하게 버티었지요. 요번만은 로체샤르의 신(神)이 저를 받아 주리라는 묘한 믿음이 있었어요. 에베레스트 쪽으로는 폭설이 쏟아지는데 로체 쪽으로 갑자기 날씨가 개기 시작했어요. 기적이었죠. 이 마지막 일주일간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저는 히말라야 등정의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상에 올랐을 때 그 순간의 느낌을 말해주오.   "정상 오름이 최후적 목적임에는 분명하지만 요즈음은 맹목적 등정(登頂)이 아닌 등로(登路)의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캠프 4(8100m)에서 정상까지 고도 300m라지만, 실제적 루트는 3000m보다 더 긴 느낌이죠. 더구나 그 3분의 2가 인간의 발자취가 한 번도 스친 적이 없는 초등(初登)코스예요. 그러니 그 위험은 예측을 불허해요. 대원 4명이서 겨우 산소 한 통! 물 반 리터! 보통 최후에 산소 두 통은 가지고 떠나는데 위험상황 때문에 무게를 줄이기 위한 겁니다. 그 갈증과 호흡곤란, 기아, 탈진, 영하 40도의 추위에 당하는 동상, 13시간의 사투 끝에 도달했을 때 와아~ 뭐라 말씀드리면…."   -그 순간의 느낌을 좀 말해 달래 두.   "아이쿠 선생님, 인간이 극도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아니 모든 것을 잃어버려요. 내 손발의 동작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아(無我)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인간의 언어로 전할 수 있는 '느낌'이 없어집니다. 지원사들의 깃발을 들고 사진 한 장 찍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등정의 기쁨과도 같은 감정의 노출조차 사치가 됩니다. 오직 어떻게 내려갈까 하는 일념뿐이었죠."   -그래서….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폭설이 개고 순간 티베트, 네팔 쪽으로 사통팔달 환하게 시야가 트이더라고요. 그런데 때는 이미 오후 6시 반! 미션 임파서블의 시간이었죠. 등정은 보통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입니다. 오후 6시 반 등정은 있을 수 없는 얘기예요. 달밤에 70도 빙벽을 착지(着地)된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산해야 하니까요. 아이젠을 더듬거리며. 그런데 설상가상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죠. 대원 변성호가 설맹에 걸린 겁니다."   설맹(雪盲)이란 만년설의 반사광을 너무 쏘여 순간적으로 망막 파괴가 일어나 시력을 상실하는 병인데 시각장애인과 같이 앞을 못 본다. 2005년 초모랑마 휴먼원정대를 결성케 만든 그 주인공 박무택도 바로 설맹으로 최후의 동반자였던 장민을 먼저 하산시키고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다. 엄홍길은 칸첸중가(8586m) 등반 때 박무택과 비부아크(Bivouac.아무 장비 없이 정상 부근에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움) 했던 기억도 있다. 요번에 변성호까지 박무택의 비극을 맞게 할 수는 없었다.   "200m짜리 밧줄에 의지하면서 제가 앞장서고 그 바로 뒤에 성호, 그 뒤에 상현, 그 뒤에 셰르파, 타이트하게 움직이면서 앞 못 보는 성호를 인도해 갔습니다. 총 25시간의 사투! 저는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발자국에서 생사가 갈라지는 빙벽, 암벽, 암 빙벽의 준험한 직벽에서 한 단락 끝나면 소리치고 또 소리치고, 죽을 고비는 수천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이스에서 무전신호가 왔지만 장갑 벗고 마스크 벗고 전화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엄홍길의 위대함은 바로 그러한 상황판단과 절제력에 있다. 그는 운명에 순종하면서도 신적 경지에 도전하는 괴력이 있다. 나는 갑자기 얄궂게 질문을 던졌다.   -그 위험한 산엔 도대체 왜 가오?   "아이쿠, 선생님! 왜 가다니요? 저는 전생(前生)이 산(山)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바위였고 나무였고 바람이었습니다. 인간은 제아무리 문명의 장대함을 과시해도 하나의 자연물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산과 저는 엄마와 자식 관계 같습니다. 산에서 죽어도 엄마 품에서 죽는 것이죠. 산이 있음으로 해서 제가 존재할 뿐입니다. 산이 곧 나고, 제가 곧 산이죠."   -그대의 성공을 기도한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로체샤르 직벽을 달밤에 내려올 때 우리는 인간이 6척 단구를 가지고 자연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살아있다는 사실만 순간순간 확인될 뿐 의식이라는 존재만 둥둥 떠내려 왔습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무의식적 집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최악의 조건에서도 꿈과 열정만 있으면 ….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다는 신념 없이는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증발해버렸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러한 꿈과 열정을 가진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등반은 그러한 능력의 한 표현일 뿐이죠."   -귀국하면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지은이와 현식이를 껴안아주고 싶습니다."   딸 지은은 초등학교 4학년이고 아들 현식은 2학년이다. 이것이 인류 사상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완등의 전설을 만든 엄홍길과의 대화였다.        
16    조물주 이야기 댓글:  조회:1924  추천:0  2013-10-12
조물주 이야기 소 은 주 내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 아마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일거야. 궁금하니? 정말 궁금하면 내 얘기 끝까지 잘 들어준다고 약속해야 돼. 왜냐하면 이 얘기는 끝이 중요하거든. 그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음 장을 펼쳐 봐. 확 펼치지 말고 조심스럽게. 옛날 옛날 아주 머-언 옛날엔 이 넓고 넓은 우주에 오직 한 존재만 있었대. 그 이름이 '조물주'였는데 나중에 이 세상 모든 걸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지은 거래. 조물주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여서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혼자 살았더래.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라고 해서 에 나오는 '손오공' 같은 걸 생각하면 안 돼. 어쨌든…… 아무 것도 없는 깜깜한 우주에서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조물주는 혼자 숨쉬고 혼자 놀고 혼자 잠자면서도 별로 심심한 줄을 몰랐대. 조물주는 노래하기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게 되었더래.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나 혼자만 듣기는 아까운데…… 이 넓고 넓은 우주에 왜 나 혼자만 있는 거지? 세월이 흐를수록 조물주는 자꾸만 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외롭지 않을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조물주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더래. 깜깜하기만 한 이 우주에 반짝 반짝하는 뭔가가 잔뜩 뿌려져 있으면 어떨까? …… 그래, 반짝거리는 뭔가가 잔뜩 뿌려져 있으면 정말 좋겠다! 조물주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글쎄, 이 넓고 넓은 우주에 온갖 보석처럼 아름다운 별들이 '뿅' 하고 나타난 거야. 거참, 신기하네. 조물주는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별, 진주처럼 생긴 별,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 같이 생긴 별들 사이를 신나게 노래 부르며 돌아다녔대. 그러다가 뾰족뾰족하고 울퉁불퉁하게 생긴 별들에 부딪혀 자꾸 멍이 들었더래. 저 별들이 다 둥글둥글하면 정말 좋겠다! 그랬더니 세모나고 네모나고 길쭉한 별들이랑 울퉁불퉁하던 별들이 모두 동글동글해진 거야. 와--- 정말 신기하네. 내가 생각한 대로 되다니! 조물주는 정말 자기가 생각한 대로 새로운 것이 우주에 생겨나는 건지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 의심스러워졌대. 그래서 아무 것도 없었던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하나 되짚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더래. 그런데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 거야. 우연히 생긴 일이었나? 아- 모든 게 생각한 대로만 된다면 정말 좋겠다! 그 순간, 별들이 감쪽같이 '펑' 하고 사라졌다가 다시 '뿅' 하고 나타났다가 뾰족뾰족한 모양의 별들이 모두 둥글둥글해진 거야. 어라? 어떻게 된 거지? 어쨌거나 별들이 동글동글하니까 더 좋은걸. 빙글빙글 돌아가는 별도 있으면 정말 좋겠다! 이번엔 어떻게 됐을까? 별들이 마치 딸꾹질이라도 하듯이 움찔거리더니 저절로 빙빙 돌기 시작하더래. 세상에! 나한테 진짜로 이런 능력이 있었나봐. 이제 함부로 생각을 하면 안되겠구나. 고운 별들이 가득 수 놓인 우주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조물주는 천-천-히 생각에 잠겼단다. 어떻게 하면 이 우주가 더욱 밝고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 뭔가 아주 따뜻하고 환한 빛이 군데군데 있으면 정말 좋겠다! 여기서 '뿅' 저기서 '뿅' 사방에서 뿅뿅뿅…… 소리와 동시에 우주의 여기저기에 이글이글 불타는 눈부신 별이 나타났어. 바로 그 이름도 찬란한 '태양'이지. 태양이 생겨나자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 조물주가 보기에도 눈이 휘둥그래지는 그런 일이 말야. 태양 가까이 있는 몇몇 별들에서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며 점점 크게 자라는 '생명체'가 나타난 거야. 저건 뭐지? 내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데…… 이 세상에 처음 나타난 생명체는 별로 보잘것없는 난쟁이 녹색식물뿐이었대. 이건 너무 심심한 걸. 좀더 재미있는 녀석들이 뭐 없을까? 조물주는 머릿속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다양한 모습의 생명체들을 끝도 없이 상상하기 시작했어. 이것들이 모두 난쟁이 녹색식물만 있는 곳에 함께 있으면 정말 좋겠다! 하면서 말이지. 이제 눈치챘어? '정말 좋겠다!' 가 조물주 '마법의 주문'이란 걸.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식물들과 곤충들, 동물들이 차례차례 생겨나게 된 거래. 우주에 새로 생겨난 많은 생명체들이 점점 똑똑해지고 잘 자라나는 걸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중에 유난히 조물주의 마음을 끄는 별이 하나 있었더래. 사파이어 보석처럼 푸른빛을 띠는 자그마한 별이었는데, 그래,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지구'야. 지구는 그 겉모습도 아름답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하나같이 잘 자라고 사이도 아주 좋아서 지구의 푸른빛은 늘 생기로 가득 차 있었대. 조물주는 날마다 지구를 둘러보고 가면서 기쁨의 노래를 흥얼거렸단다. 그 때 조물주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가 '커져라 작아져라' 였는데 하루는 조물주가 기분이 하도 좋아 온 우주가 꽝꽝 울리도록 커다란 소리로 그 노래를 밤새 불렀다지 뭐야! 그런데 그 노래는 어떻게 부르는 거냐구? 글쎄, 거기까진 나도 들은 바가 없는 걸. 하지만 그 노래가 어떻게 끝나는 건지는 알 것 같아. 너도 눈치챘어? 어쨌거나, 그 바람에 작은 동물들은 한없이 작아져 현미경이 아니면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큰 동물들은 커지고 또 커져서 '울트라사우르스'처럼 아주 큰 공룡이 생겨났더래. 울트라사우르스가 얼마나 크냐 하면 몸길이가 삼만 밀리미터도 넘을 정도였다지 아마. 조물주는 이제 외롭다는 생각 같은 건 할 틈이 없게 되었어. 울트라사우르스, 알노사우르스, 카마라사우르스,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큰 공룡들이, 툭 하면 작은 동물들이나 식물들을 못 살게 구는 일이 자꾸만 벌어졌거든. 식물들은 자라기도 전에 싹이 뜯기고 작은 동물들은 늘 무서움에 떨고 그보다 더 작은 곤충들은 알에서 부화되기도 전에 밟혀 버려서 점점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던 거야. 아아-- 이제는 노래도 맘대로 못 부르겠구나. 조물주는 날마다 지구에 와서 큰 공룡들이 식물이나 작은 동물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감시를 해야만 했단다. 아이구, 골치야. 저런, 저런 못된 녀석들을 그냥…… 조물주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지구의 하늘에선 번쩍번쩍 번개가 내리치고 네 이 놈들------! 조물주가 화난 소리로 고함을 지르면 하늘이 꽝꽝 울리면서 천둥이 쳤다지. 정말 좋겠다!는 빼고 불러야 했는데… 조물주의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면 지구엔 주룩주룩 비가 내리게 됐던 거고. 아무래도 내가 큰 실수를 했나 봐. 조물주는 가까이에 있는 작은 별 하나를 따서 지구를 향해 휙- 던졌어. 조물주가 무심코 던진 별을 맞고 지구는 크게 상처를 입게 되었지. 작은 동물, 식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울트라사우르스처럼 거대한 공룡들도 하나 둘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죽어 버리더래. 이크!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지구에서 점점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져 가는 걸 보면서 조물주는 이제 그 어떤 생각도 하기 싫어졌대. 노래하는 것도 그만두고 아주 아주 오랜 세월을 잠만 잤더란다. 자다 자다 지친 조물주가 어느 날 잠에서 깨고 보니 기분이 아주 상쾌했던 모양이야.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우주를 둘레둘레 살펴보다가 푸른빛이 점점 흐려져 가는 작은 별 하나를 보았더래. 저건 지구 아냐! 그 아름답던 빛은 다 어디로 갔지? ……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별 때문이로구나. 조물주는 이제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도 멋대로 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우게 되었대. 조물주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린 지구의 많은 생명들을 고이고이 땅 속에 묻어주면서 다시는 조그만 실수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더래. 그 후로 조물주는 지구를 더욱 특별한 별로 만들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노래도 부르지 않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지구 설계도를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어. 우주 반쪽에 커다란 투명 종이를 펼쳐 놓고 모래 한 알에서부터 바위, 산, 강, 바다, 대륙… 또 곳곳에서 살아 갈 무수한 생명체들 하나 하나까지 설계도를 다 그리는데 만도 몇 억 년이 걸렸더래. 물론 지난번의 교훈도 잊지 않았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명체는 별 상관없지만 공룡처럼 너무 커서 너무 많이 먹어야 하는 동물을 만들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말야. 또 하나, 주물주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소란이 일어나지 않게 지구를 잘 가꾸고 살필 지혜로운 동물이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더란다. 이 넓고 넓은 우주를 다 살펴보려면 시간이 하도 많이 걸려서 지구만 살피고 있을 수가 없었거든. 더구나 생명체가 있는 별들은 언제 어떤 큰 일이 벌어질지 조물주도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몇 억 년이 흐른 어느 날, 드디어 조물주는 지구 설계도를 완성하고는 너무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더래. 설계도를 꼼꼼히 살펴가며 새로운 지구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동안, 조물주는 자신이 얼마나 장대한 존재인가를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되었대. 지구의 온갖 것을 다 만들고 나서 맨 마지막으로 가장 까다로운 과정이 남아있었을 때, 아아으--- 졸려. 조물주는 자기도 모르게 하품이 계속 나오는 걸 어쩔 수가 없었대. 하긴, 지구 설계도 만드느라고 몇 억 년씩이나 잠 한숨 못 잤으니 얼마나 졸렸겠어? 그래도 그렇지, 이제 최고의 작품이 막 탄생하기 직전인데 졸음에 겨워 하품을 계속 하고 있다니, 조물주는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다가 큰 고민에 빠졌어. 내 일생 일대 최고의 작품이 될 텐데 이러다 다 망쳐버리겠군. 한숨 푹 자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나을까 어쩔까? 조물주는 역시 조물주다워서 계속 터져 나오는 하품을 꾹꾹 눌러 참고, 자신을 닮아 지혜롭고 신비스러운 생명체가 지구 곳곳에서 생겨나도록 마지막 힘을 다해 생각을 깊-이 모았더래. 그 특별한 존재에겐 더불어 아주 특별한 숨결들도 불어넣어 가면서. 물론, 정말 좋겠다!도 빼놓지 않았겠지? 그 특별한 존재는 과연 뭘까? 바로 우리 '인간'이야. 인간에게 불어넣어진 아주 특별한 숨결들은 도대체 뭘까? 잘 생각해 봐.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독특한 점을 말야. 우선, 인간은 말을 할 수 있지. 이렇게 책도 볼 수 있고. 두 발로만 걸어 다니면서 손으로는 필요한 걸 스스로 만들어낼 줄도 알지. 설계도를 만들어서 어마어마한 건축물들도 지을 줄 알고. 또, 인간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함께 즐기고, 그림도 그릴 줄 알지. 게다가 지혜롭기까지 하고 말야. 또 있어. 우리가 사는 별을 아끼고 이 우주를 사랑하는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을 지녔다는 것.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대. 조물주가 마지막으로 우리 인간을 만들면서 하나 하나마다에 온 사랑을 담아 심어준 것이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는 있고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하나씩 지니게 되는 것, 모든 생명체 가운데 인간을 가장 신비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는 조물주의 마음 한 자락! 바로 '영혼'이란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영혼의 소리에 귀기울이면 자신이 조물주처럼 얼마나 장대한 존재인가를 느낄 수 있대. 인간의 영혼에는 '마법의 스프링' 장치가 되어 있어서 태어날 때의 순수한 마음을 잘 간직하고 살면 영혼의 키가 쑥쑥 자라나지만, 마음에 때가 많이 낄수록 영혼의 키는 쭉쭉 줄어들어 버려서 콩알만큼 작아지기도 한대. 영혼의 키는 어디까지 자라날 수 있느냐고? 그야 물론 온 우주를 다 덮을 만큼 커-다랗게지! 내가 말했잖아. 인간은 누구나 조물주의 마음 한 자락씩을 갖고 있다고. 인간 모두의 영혼이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하나가 되면 온 우주를 다 덮고도 넉넉한 조물주의 마음이 되는 거래. 어때? 네 영혼의 키는 지금 과연 얼마만할지 궁금해지지 않니? 네 영혼이 전혀 느껴지지 않거나 콩알만큼 작게 느껴지더라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인간이 제 아무리 무시하고 버리려고 해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게 영혼이라고 하니까 말야. 마음에 때가 낄 새가 없도록 네 마음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면, 네 영혼의 키가 부쩍부쩍 자라서 언젠가는 조물주에게 가 닿을 거야. 인간을 다 만들어 놓고 나서 조물주는 한잠 푹 잤을까? 아니면 아직도 쿨쿨 자고 있을까? 혹시 실수한 건 없는지 살피느라고 여태 못 자고 있을까? 글쎄, 거기까진 나도 아직 들은 바가 없는 걸. 아마 요즘도 가끔 번개 치고 천둥 울리고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도 하는 걸 보면, 조물주가 쿨쿨 잠만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 또 모르지. 자면서 그 옛날 옛적 생각으로 잠꼬대를 하느라고 그러는 건지도. 그럼 눈은 왜 내리느냐고? 아! 그건 내가 들어서 확실히 아는 건데 말이지, 눈은, 조물주처럼 순수하고 창조적인 마음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조물주가 선물로 보내는 거래. 별 모양의 하얀 솜사탕으로! 의심 나면 현미경으로 눈송이 하나 하나를 잘 살펴 봐. 아마 똑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을 걸. 이 넓고 넓은 우주에 똑같은 별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눈 내리는 날, 가만히 두 눈을 감고 혓바닥을 내밀어 봐. 혓바닥에 닿으면서 사르르 녹아 드는 눈송이 맛은 설탕 안 들어간 솜사탕 맛일 테니까! 어쨌든, 순수한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 말이 틀림없다는 걸 단박에 알게 될 거야. 내 얘기 재미있었니? 그렇담 친구들에게도 꼭 들려주길 바래. 혼자만 알고 있기엔 좀 아까운 얘기잖아? 그럼, 안녕. 참! 날마다 잠들기 전에 네 영혼의 키가 얼마만큼 자랐는지 네 마음에게 물어보는 거 잊지 말고. 그럼 진짜 안녕!! 지구의 모든 친구들이 이 얘기를 듣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15    박하사탕 댓글:  조회:1595  추천:0  2013-09-19
박하사탕       아침 8시 15분. 오늘도 조금 일찍 도착해 출근 도장을 찍는다. 바다를 낀 시골 마을. 노인들이 많아서 마을 청년회의 평균 연령이 60~70대인, 시내에서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면 보건지소가 나의 일터이다. 늘 근무시간보다 훨씬 일찍 오지만 도착하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옹기종기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할머니 천천히 오셔도 돼요. 이렇게 추운데 떨고 계시면 어떡해요.” 괜히 마음에 찔려서 할머니께 심술이다. 그러면 늘 한결같이 같은 대답. “그래, 내 다음부턴 늦게 오께. 도통 늙으면 새벽에 잠이 있어야 말이제.” 도리어 미안해하시며 주름으로 얼굴 가득 채우시며 웃으신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을 담는 그릇이 넓어져서인지 모두 서로가 많이 닮으셨다. 심지어 할머니와 할아버지, 성에 상관없이 얼굴은 닮으신 것 같다.^^ 발령 받은 지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제 겨우 매달 약 타러 오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과 이름을 대충 외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 어르신들이 무척 싫어하시는 것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병원 가야 하니 자녀들에게 연락하라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당신 이름을 여쭙는 것이다. 자주 오는 당신을 기억 못하시는 것을 참 섭섭해 하신다. 연세가 드시면 '섭섭 바이러스’에 더 잘 감염된다고 했던가? 처음엔 뭐 그런 걸로 화내시나 의아했었다. '1:익명의 다수'라는 극히 개인적인 마인드가 몸에 베여 있고 ‘타인에 대한 관심 결핍증’까지 앓고 있으니 죄책감은 거의 없었다. 그저 대면하는 순간 친절하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다보니 명절 때나 보는 자식보다 더 자주 보는 사람이 이름 하나쯤은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몇 번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실망하시는 것을 본 후부터는 잘 기억나지 않으면 일단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며 시간을 끄는 잔머리가 생겼다.^^; 이렇게 보건지소 주변 몇 개 마을에서 찾아오시는 어른들을 만나게 되고 혼자 계시는 독거노인 분들을 방문하면서 유독 마음이 쓰이는 몇 분이 생기게 되었다. 마음이 쓰이는 이유는 단지 병이 중하다거나 혼자 사신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지구에 태어나 사는 사람치고 사연이 없고 한이 없는 분들이 계시겠느냐만 그 중 몇 분들은 살아온 삶을 단지 비관이나 후회만으로 살고 계시지는 않으시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중 한분이 강 할아버지다.   처음 이분을 선임자로부터 인계를 받고 집을 방문 했을 때가 기억난다. 집 주소를 보고 찾아 갔을 때 여느 독거노인의 집과 달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두 내외분만 사신다고 들었는데….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신식 이층 벽돌집이었다. 한눈에 봐도 가족이 함께 사는 마을 이장이나 유지의 집쯤으로 보였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중년의 남자가 나왔다. “강00님 계십니까? 방문 진료 왔는데요.” 무심히 듣더니 손끝으로 담벼락 쪽을 가리켰다. "저쪽 문으로 가보세요.”라고 하고는 쌩~들어간다. 가리킨 곳을 보니 옛날 집에 있던 행랑채 비슷한 곳을 판자로 덴 문이 보였다. ‘담배’라고 적힌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니 형광등이 없어 한낮에도 어둡고 추운 부엌이 나왔다. 조금 더 들어가니 창문만한 방문이 보였다. 아마 담배를 떼다 파시며 생활을 이어가시는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를 몇 번 부르자 방문이 열리면서 누워계신 하얀 할아버지 얼굴이 보였다. 눈은 백내장으로 많이 상하셨지만 정신은 맑으셨고 말도 또박또박 하셨다. 머리 위에는 조금 전에 보던 신문이 놓여 있었다. 방문 진료 왔다니 연신 반가워하시며 못 일어나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연탄을 쓰는 방이었지만 다행히 따뜻했다.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혈압을 재드리러 방으로 들어가기를 시도했다. 작은 문으로 최대한 웅크리고 들어갔는데 금방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방이 너무 좁아 내가 들어가 앉으면 두 분이 누워 계실 수 없게 되어서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병간호를 하시다가 얼마 전 어두운 부엌에서 넘어져 얼굴을 다치셨다고 한다. 얼굴엔 반창고를 크게 붙이셨지만 너무 선하신 얼굴이다. 혈압하고 당뇨 수치가 정상이라는 말 한마디에 다시 함박웃음이시다. 방 입구에서 할아버지 팔만 빌려 혈압을 어정쩡한 자세로 재어 드렸다. 이 모습이 재미있으셨는지 할머니가 연신 방긋하시며 까만 봉지를 주섬주섬 주신다. “담배만 팔아서 줄건 없어. 한 달에 한 번 보건소 처자들 오면 줄려고 전에 영감이 따로 담아뒀지.” 하신다. “할머니 뭔지 몰라도 안 주셔도 되요. 다음 달에 또 찾아올게요….” 하며 나오려는데 할머니가 입구에 누워계시는 할아버지 옆구리를 찌르시며 어서 건네주라며 성화시다. 어둡고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분들을 뵙다가 외롭고 힘든 내색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두 분의 온화한 모습이 그날 내내 참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지내시며 저런 웃음을 지으시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 후 그 마을 담당 자원 봉사자에게 강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큰집에 살던 중년 남자는 양아들이고 다른 자녀는 없으셨다. 살림은 부족하지 않게 사셨는데 할아버지가 월남 전쟁 때 다리를 다치셔서 못 걸으시게 되면서 행랑채로 내려오시게 되셨다고 한다. 거두어 키운 양아들이 이젠 노부부를 모른 체 한다고 마을에서도 꽤 미움을 받는 모양이었다. 정작 할아버지 할머니는 끝까지 아들에게 짐이 안 되려고 판자로 만든 행랑채에서 조금씩 담배를 팔아 생활하시고 계신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상황이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양아들을 원망할 텐데 강 할아버지 부부는 오히려 그것을 감사의 대상으로 여기신다. 그렇게라도 아들이 자신들을 버리지 않고 옆에 살아줘서 든든하고, 간간이 담배를 팔아 그 나이에도 용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부러울 것 없이 사신다고 했다.   엔도르핀이 다량 분비되는 '감사'. 우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간의 감정인 '감사'. 어쩌면 감사하는 마음이란 좋은 일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곳에 더욱 요긴하게 쓰라고 주신 조물주님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연세가 80이 넘으시고 고혈압에 걷지도 못하시지만 맑은 정신으로 정정하게 사시는 비결을 알 것도 같았다.   그날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야무지게 묶인 까만 봉지를 열어보니…. 박하사탕이다. 아랫목에서 마음 놓고 몸을 녹여서인지 엉겨 붙어 있다. 나는 한 달분 약을 전해 드리고 할아버지께 한 달 치 박하사탕을 처방받았다. 하나 떼서 입에 넣으니 싸하고 달콤한 박하향에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김혜정(1980년생, 보건소 간호사) 2005년 명상입문 6년차 된 간호사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프신 어머니와 할머니를 보아서인지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사는 이유, 죽는 이유, 사사롭게는 살며 겪는 다양한 일에 대한 궁금증이 무척 커졌을 때 명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명상 학교에서 제가 궁금하게 여기던 것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명상을 통해 배운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14    작가 정을병의 마지막 글 댓글:  조회:1550  추천:1  2013-09-13
  작가 정을병의 마지막 글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 좋을 때도 슬플 때도 그 원천적인 외로움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의 영적인 고향에 친한 사람들을 모두 두고 혼자 지구에 온 게 분명했다. 칠십 나이가 되도록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여러 가지 시련을 겪었어도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몰랐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지 나는 진리를 찾았다. 진리는 화려한 곳, 부유한 곳, 아름다운 곳, 깨끗한 곳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었다. 위에서보다는 아래에서, 앞에서보다는 뒤에서,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에서, 편리한 곳보다는 불편한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닷물의 속의 고기가 바닷물에 싸여 그 물의 존재를 모르듯 나는 은총 속에 있으면서 그걸 몰랐다. 나는 이제 신과 한 덩어리가 된다. 한 방울의 물이 바다와 합치듯이, 내 인생 속에 들어온 모든 경험은 모두 내게 책임이 있었다. 나는 그 책임을 이 글을 쓰면서 용서받고 싶다. 그리고 감사하고 사랑한다. 2008년 10월   누명을 쓰고 감옥을 갔다 온 사실에 대하여 누군가가 묻자 돌이켜 보면 난 아주 교만한 사람이었어요. 혼자 지독히도 우쭐대고 잘난 척했죠. 지주였던 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집안에는 교만이라는 유전인자가 있는 것 같아요. 문단의 원조로 행세하면서 남을 막 깔아뭉갰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어느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던 게 그 때문이에요. 횡령죄는 무죄였지만 내가 저지른 진짜 죄는 교만이었지. 그 업보를 받은 거요. 
13    하하하, 바닥이라는 것은 댓글:  조회:1560  추천:1  2013-09-01
  하하하, 바닥이라는 것은   인생의 정점을 살고 있는 아해들에게   자네들 철저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적 있나? 한 번도 없어? 쯧쯧. 그렇다면 나와 함께 그 세상 한번 놀러 가보지 않겠나? 그 세상은 자네들이 살고 있는 곳과는 차원이 다르네. 그러나 저러나 자네 지금 만족하나? 뭐 만족하면 그리 살구…. 사실, 가기 전엔 아주 죽을 맛이네. 내 어찌하면 안 내려가 보려고 여기저기 대롱대롱 하느님께 변명도 하고, 협박도 하고, 협상까지 해봤다네.   돈이 없다는 것. 또 그 때문에 친구도 만날 수 없다는 것. 주변에 그 흔한 남자도 없다는 것. 첨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네. 내 이제껏 버텨온 건 알량한 자존심 하나 때문인데 그게 사실 외적인 것도 받쳐줘야 가능했거든. 근데 그런 거 하나 없이도 내 진짜 잘날 수 있는지는 자신이 없었네. 솔직하게 말하면 고거라도 없으면 내 nothing! nothing!!이지. 그래서 왜 정점일 때 놓아버리라고 하는 줄 알겠나? 그게 아름다운 것이야. 내 지나고 보니 알겠네. 결국은 그거더라고.   요 정점이라는 자 계속 붙들고 있으면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네. 우울증 생기지. 우울증? 이게 아주 고~얀 놈일세. 지금 죽고 싶어 죽겠다고? 그러면 이놈 한번 불러보게. 즉효약이지. 요놈이 도지면 조물주님이 와도 소용없지 싶어. 그 누군가? 그래, 유명한 여배우 000. 그 처자도 정점 세상의 너희 동족 아니던가? 그렇게 바닥 세상 안 가려고 아등바등했다지? 근데 함 보게. 바닥 세상에 안 가려다 이놈한테 굴복했잖아. 또 누구 있나? 영화배우 000. 내 그 아가씨 나이치고 연기 잘한다고 좋아했는데 그리 허망하게 자살하고 말데? 내 자꾸 남의 치부만 드러내어 비판하는 것 같나?   그러면 내 이야기를 한번 해 봄세. 내 풋풋한 20살 시절, ‘허준’ 이라는 드라마가 유행이었어. 나와 같은 이름의 ‘예진아씨’가 사모해 마지않는 허준 의원님께 "이 환자 양기가 모자라옵니다. 양기가 모자란 듯하옵니다." 라고 조곤조곤 말하곤 했었지. 내 그때 늦봄바람 살랑거림에 남자친구가 얼마나 사귀고 싶든지! 주위 친구들 3, 4월에는 나하고만 다니려 하더니 남자친구 생기자 다들 떠나데? 그래서 나도 외치고 다녔지. “아~ 양기 모자라, 양기 모자라.” 헤헤. 아직 결혼도 안 한 처자가 입이 너무 걸걸하지? 근데 어쩌나 내 진짜 이리 말하고 다녔는걸. 정 듣기 거북하면 이 부분만 살포시 가려주게. 마침 키 178cm의 S대 법대 다니는 동갑네기 남학생이 홀연히 나타났네. 이 정도면 처음 사귀는 남자친구치고는 외적인 조건으로는 꽤 괜찮지 않은가? 아, 근데 나 이 아해랑 사귀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네.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지, 허영심은 또 어떻고. 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그 아이 인생도 나름 힘들었겠구나 하고 측은함은 드네. 1등만 해오다가 그쪽 동네에서는 안 알아주니까 거짓말 해대었을 테고 이름만 예진이었던 여자친구를 ‘허준의 예진아씨’ 닮았다고 떠들어 대는 통에 내 얼마나 쪽팔렸는지 아나? 그래서 그 아이 친구 어느 날 나보고 曰, "에이, A급은 아니네~"   자네들 밑바닥이 얼마나 편한 줄 모르지? 이 세상에서는 술 그득하게 마신 후에 발가벗고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대통령 아저씨 앞에서 부를 수도 있고, ‘모래요정 바람돌이’를 우리 선생님 앞에서도 부를 수 있는 용기를 준다네. 한번쯤 그렇게 해볼 수 있는 것 멋있지 않은가? 내 좋아하는 시 구절 중에 ‘Heaven as Blanket, Earth as Pillow’라는 게 있네. 이것이 정답이네, 정답이야. 바닥에 있으면 온 세상 다 자네 것이네 이게 다 자네 것이라고. 그러니 정점에 있는 아해들 나와 함께 바닥세상 한번 같이 살아보지 않겠나?   고만 좀 질질 짜거래이. 미안하다. 첫 마디부터가 호통질이어서. 내 너희들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안타까우니까 그런 것이지. 나도 같이 바닥인생 사는 처지인데 너희들 맘 이해 못하겠느냐? 너거들 말이다, 잘 생각해 보거라. 사실은 너거들 진짜 편하게 살고 있는 거다. 누가 돈 벌어오라고 카나, 또 잘 보일 미끈한 남정네가 있나? 섹시한 여성이 있나? 그래, 얼라들, 니들은 성적 걱정할 필요도 없다. 꼴등인데 뭐. 누가 니한테 기대 안하니까 얼마나 부담 없고 좋노? 왜? 내 이 카니까 기분 나쁘나? 아니 데이, 잘 들어 보거 레이….   바닥이라는 것은 니가 그만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거다. 니 쪼매만 공부해봐라. 1등짜리 그놈 아는 밤낮 공부해야 겨우 그 자리 지킬 수 있는데 니는 하루 10분만 투자 하면 10등 20등 오르는 건 금방이데이. 또 지금 니 모습에서 쪼매만 꾸미도 사람들 반응 좀 보래이. "이제 보니 미남인데?", "눈이 초롱초롱 한데?" 맘만 먹으면 세상 남자들 여자들 다 니께 될 수 있다꼬. 그라고…. 또 누구 있노? 그래! 돈도 없고 세상에서도 버림받아서 거지 노릇하는 아해들 좀 보소. 너거들 부끄럽나? 아니데이. 누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멀쩡한 눈 있는데 맹인인 척하면서 지하철 한 칸 한 칸 안 다치고 넘어가노. 그거는 대단한 재주데이. 또 한 바퀴에 최소 3만 원은 안 버나? 이거 공짜 세상공부, 연기공부 또 돈 주고는 절대 살 수 없는 '용기' 라는 힘을 주지 않나? 내사 그거 아무도 못하는 대단한 기라고 생각한다.   아 그라고, 딴 사람 등쳐먹고 사는 아해들. 내 안다 너거들 돈 없고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능력은 안 되고. 그래서 익힌 능력이 살살거리고 남자 비위 맞춰가면서, 여자 비유 맞춰가면서 살아야 하는 것. 근데 그게 참~힘든 것이제. 내 보니까 여자들은 쉴 새 없이 외모 가꿔야 하고 남자들은 여자들 모성애 자극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쉽게 끌 수 있는지 쉽게 자극시킬 수 있는지 연구하고 연습해야 되지 않냐꼬? 근데 야들아 그래 살면 안 피곤하나? 안 피곤하다꼬? 니는 안 피곤해도 상대방은 안 그렇데이. 겉으로는 니한테 미안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피 같은 돈 그리 쉽게 줄라 카나? 돈 없는 거는 너무 티내지 말기라. 니 한 몸 니가 책임질 줄 알아야제.   근데 말이다. 내 궁금한 것 하나있다. 너거들 바닥인생 살지 만서도 진짜 ‘찌질이’ 들이가? 내 너거들 하고 얘기해보니 만만찮은 자존심은 다 있데? 그래…. 내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선물하나 주려고. 원래 이거는 너무너무 비싼 기라서 맨입에는 안 줄라켔는데. 거지왕 김춘삼이가 부하 돈 다 끌어준다고 해도 안 줄라고 켔는데 내 오늘은 술 한 잔 했는지 알딸딸해서 그냥 말하께.   사실은… 생각만 쪼매 바꾸면 된다. 만날 남한테 손 벌릴 궁리하고 한탄할 적에, 잘 보일 궁리할 때, 살 뺄 시간에, 표정 연습할 적에, ‘내 우짜면 남한테 손 안 벌리고 잘 묵고 살아 보겠노?’ 이 생각만 하면 된데이.   참~~ 쉽제이? 그래. 뭐 하라는 것도 아니고 생각만 하면 된다카이. 못 믿겠다꼬? 그러면 내 실화를 하나 들려주께. 너거들 ‘앤디(Andy)’아나? 신화의 ‘앤디(Andy)’. 그놈 아는 신화의 막내이고 꽤 곱상하게 생긴 아해인데, 정 모르겠으면 인터넷 함 찾아 봐라 내가 그거까지 찾아줘야겠나? 수업료도 안 받는데. 그놈아가 10년 동안 그 그룹에서 속된말로 ‘무존재’ 였거든. 심지어 팬들도 ‘앤디’가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 잘 몰랐다 카더라. 특기도 엄꼬, 인기도 엄꼬, 뭐 할지도 모르겠제. 보통 사람들 같으면 벌써 그만둬도 그만뒀을 끼다. 근데 나는 갸가 10년 동안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우결’ 을 통해 알게 됐데이. 이제는 ‘앤디’ 카면 동네 아줌마들도 다 안다 아니가. 그놈아가 요즘 1등 신랑감 아니가. 나도 실은 갸가 좋다.   내 여러 말 안 한다. 첨에는 니 해오던 대로 살아도 된다. 근데 생각만 바꿔라 그러면 한 달 아니 일주일만 지나도 무슨 소식이 올 끼다. 내 경험으로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정점 세계에 한번 가게 되걸랑 내 수업료 대신 이거 하나 부탁할께. ‘바닥’ 이라는 자 만나면 큰 절이나 한번 해라. 내 바람은 그것뿐이데이.     허당(虛堂) 김예진    
12    예수인터뷰 댓글:  조회:1424  추천:0  2013-08-29
예수인터뷰 중에서 An Interview with Jesus     율법사 니고데모와 대화 시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못 봅니다’는 말씀을 통하여 거듭남에 대하여 설명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어떤 뜻인지요? In the conversation with Nicodemus, the scribe of the Jews, you explained about born again by talk, “Except a man be born again, he cannot see the Kingdom of God.” What is the true meaning of born again of which you spoke?     몸이 태어남이 ‘하나’라면 마음의 태어남은 ‘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이지요. 몸의 태어남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마음의 태어남은 정신적인 것이어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It can be said that being born of body is ‘the one’ then being born of mind is ‘the two’. This is born again. I mentioned this as being born of body is a material aspect, but being born of mind is spiritual aspect.     마음은 곧 우주이므로 정신적인 자각으로부터 우리는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음은 곧 인간의 모두를 말하는 것이자 우주와 인간의 유일한 연결고리이기도 하지요. 인간이 위대한 것은 바로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성인도 죄인도 될 수 있거니와 하늘과 우주에 일체가 될 수 있음에 기인하는 것이지요. As the mind is in other words the universe, therefore we can make the foundation to return to Heaven from the spiritual awareness. Mind signifies very everything of human and at the same time it is only connecting link between the Universe and human. The reason why human beings are great is caused not only they become either saints or sinners depending on how they use their minds, but also they become one with Heaven and the Universe.       예수님께서 당시 바라시던 종교의 성격은 무엇인지요? 사랑과 실천의 종교인지요? 차별이 없는 평등한 종교인지요? 거듭남의 종교인지요? 예수님의 사상의 근본은 무엇인지요? What was the character of religion you desired? Was it the religion of love and practice? Was it religion of equal without discrimination? Was it religion of being born again? What was the basis of Jesus’ ideology?     사랑이지요. 우주의 파장에서 가장 근본을 이루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값진 것이 없지요. 인간들은 사랑을 빙자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나 그러한 사랑이 아니라 진정 상대방을 위하는 사랑이 하늘의 사랑이지요. It is love. What forms the basis the most in waves of the Universe is love. There is nothing more precious than love. People try to fulfil their desire in the name of love, it is not such type of love but the love that truly in favour of others is the love of Heaven.     인간들이 스스로 진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사랑입니다. 인간은 사랑으로서만이 진정 진화의 파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요. 사랑으로 세상을 보면 ‘하늘의 파장’ 달리 말하면 인간의 상태로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우주의 마음을 알게 되지요. 부활이나 평등은 사랑을 펴는 방법이지요. The easiest way for humans to evolve is very love. I thought human could truly receive the wave of evolution by love only. One will know “the wave of Heaven”, the mind of the Universe when one looks at the world with love, in other words, “the mind of mother” in the state of human. Resurrection or equality are the means to spread the love.       실제로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샘플로라도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는지, 아니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여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면 후에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가 만들어 지는 것으로 생각하셨는지요? 아니면 사후에 천상 천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셨는지요?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죽어서 천당 가자는 목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How do you think a Savior should save the world specifically? Was it your goal to build the kingdom of God actually as an example on Earth, or did you think the kingdom of God would come about naturally if the minds of people of the world changed by delivering the words of God? Or was it your goal to construct the kingdom of Heaven in Heaven after we die? What do you think of goal to enter heavenly kingdom after death which Christian mention?     구세주는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은 지역적으로 한계가 분명하나 말씀은 기록하여 전파하면 보여주지 않아도 되므로 범위가 상당히 넓어집니다. I think the Savior should save the world through the word. Showing by action has the obvious limitation within districts, but if it is the word, the range becomes considerably wider because it doesn’t need to be illustrated once it has been recorded and propagated.     샘플로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으며 제가 깨달은 하늘의 뜻을 전파하다 보면 그 뜻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언젠가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늘의 뜻대로 운영되는 나라가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I didn’t think about building up the kingdom of Heaven as an example, however I thought one day the kingdom of God in other words a country governed by Heaven’s will would come into existence at some time if I propagated the mean of Heaven which I was enlightened about and as it would passed onto many other people.     저의 말로 인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뜻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한 개인의 힘, 즉 일방적인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It will not be like the minds of people in the world change due to my word and become the kingdom of God. It is because the will against the will of God always will be existed in this world. The kingdom of Heaven will be difficult by a person’s power that is one side power no matter how great the person is.     우주는 항상 균형을 잡고자 하는 힘이 존재하므로 그 힘에 의해 반대의 힘이 발생됩니다. 따라서 극선이 존재하면 극악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인 것입니다. 제가 많은 사람들을 하늘로 인도하려 하면 그렇지 않은 힘도 영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존재이유를 더욱 부각시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The power which try to control the balance always exists in the Universe, therefore the counter power are generating by such power. Thus it is the law of this world that if there is the extreme good then the extreme evil will also come into existence. If I try to lead many people to Heaven, then the power against it will also displays its influence. This brings to the fore the existent reason of religion but it will also function which is not to.     인간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도 몸을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육신이란 그것 자체로서 고난도의 공부를 시키는 면이 있으며, 갖은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후에는 육신을 벗어나므로 생전에 비해 간단하게 천국, 즉 우주의 경지를 아주 쉽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변하면 (비워지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은 맞으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Even though human want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while they are on Earth, it is difficult in many cases in reality because they have a body. Physical body itself has an aspect to give a study of ordeal and it can’t be free from frequent temptation. Therefore Heaven, that is the state of the Universe, can be easily understand after death because one is moved from physical body comparing to while one is alive. It is right that human can go to the heavenly kingdom once one’s mind is changes (empty) but that is not easy task.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의 나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신 것인지요, 아니면 ‘나=본성’을 말씀하신 것인지요? 성서의 70여 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人子’라는 말과’나’라는 말은 어떤 관계인지요? From the word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And who follow me will….’, is I indicating you as Jesus or are you saying I=Original Nature? What relationship are there between the words ‘the Son of man” which is used in 70 occasions in the Bible and the word ‘I’?     여기에서 ‘나’는 우주의 본성입니다. 이 본성을 전달하는 제가 대표성을 지니는 것이지요. 우주란 그 실체를 쉽게 보여줄 수 없으므로 그 실체를 알고 느끼고 전달하는 제가 우주임을 표현한 것이지요. 인자라는 말도 역시 동일한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사용한 말 중에 나라는 표현은 문장 내에서 사용하기에 따라 인간 예수를 지칭하는 경우도 있고 하늘이나 우주를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I” means the Original Nature of the Universe in here. I have the representative who conveys this Original Nature. The Universe can’t show its essence easily, I expressed that I am the Universe because I am the one who know, feel and deliver that essence. The expression “the Son of Man” has the same meaning. The expression “I” of all the expressions used in the Bible can be indicated to “Jesus” as a person or it can be indicated to Heaven or the Universe.   예수인터뷰중에서 문화영 In the book “Interview with Jesus” Suroso 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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