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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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과 농심
2012년 07월 31일 16시 45분  조회:1243  추천:0  작성자: 최고관리자
조선반도에서의 화전이  조선후기에 와서 크게 확산되였다면 우리의 이민 1세들의 화전도 역시 그 시기를 첫시작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다르다면 지역이 다르고 월강해서 화전을 일구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 치발역복한 력사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런 력사를 회피하고 그저 서민들의 화전 력사만 언급해보자. 화전이란 밭이 될만한 산비탈이거나 평지에 먼저 불을 지르고 다음 밭을 일구는것을 일컫는데 말그대로 불이 붙은 밭이다. 이런 화전에 의거하여 농사짓는 농민들을 화전민이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족들의 선조가 화전민들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줄로 안다.

화전밭을 조선에서는 부대밭이라고도 이름했고 개간지, 처녀지, 신개지, 화대기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렀다. 조선의 장편소설《철쇄를 마스라》중에서 화전밭을 일구는 리얼한 묘사 한단락이 있는데 서간도에 이주한 이민 1세들이 화전밭을 일구는 풍경이다. “…련일 산불이 일어서 신개지가 터지는바람에 한쪽에서는 씨붙임을 한 곡식이 퍼렇게 돋아나고있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부대밭을 뚜져댔다.올해는 철수가(절기) 늦다고들 하지만 봄소나기가 온지도 오래였다.봄비를 맞은 밭들에는 봄보리가 퍼렇게 푸르러가고 올감자싹도 어방지게 갸웃이 머리를 내여밀더니 새까맣게 독을 질렀다.해볕을 받아 밭들은 연록으로 물들어갔다. 그런데도 아직 새로 부대밭을 내는데서는 시꺼멓게 타다남은 등걸에서 불이 일었고 새까만 땅에서 재가 날렸다.사람들은 기를 쓰고 늦은 별감자,넓적감자따위 감자눈을 박았고 귀밀과 찰조씨,기장씨따위를 묻어나갔다…”너무도 핍진하게  그려서 눈앞에서 보는듯하다. 필자는 이 단락을 암송하다싶이 하고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이민 1세들의 당시의 생활상이기도 하고 우리 선조들의 농심(农心)이였다. 다시말하면 농경사회의 농심을 극대화한 전통생활상이였고 자기의 번지수가 박힌 땅에 대한 화전민들의 무한한 욕구였다. 어른들의 회상에 의하면 그 시기는 호림방화라는 개념이 전무했기에 련일 산불이 나도 무심했고 오히려 신개지가 터진다고 기뻐했다. 더우기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봄에 고사리가 많이 난다고 흥얼거렸다니 화전과 화전민들간의 력학관계도 엿볼수 있다.  화전은 명줄이기도 했다.

밭자리를 셀 때의 단위는 필지라고 한다. 의존명사인 필지는 구획된 논이나 밭,  림야,  대지따위를 세는 단위지만 시골에서는 지금도“자리” 라는 사투리로 단위를 쓴다. 산비탈의 한필지의 밭을 일구기 위해서 우리의 이민 1세들은 사활을 거는 대가를 치렀다.  2년전에 기자가 방천 촌을 취재했는데 방천촌은 20세기 초엽까지 버들숲만 우거졌다고 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월강민들에 의하여 순차적으로 “헤무즈”,“양관 평”으로 두리뭉실하게 불리우던 이곳 방천의 촌사는 두만강 우안의 함경도이주민들이 화전민으로 건너오고 화전밭을 개간하면서부터 시작되였다.  선인들의 입으로 전해져오는 개척전 방천의 모습은 강가와 벌판에 버들숲이 우거지고 간혹 변방군인들의 눈길을 피해 가만히 월강한 조선변민들이 일군 화대기밭 몇필지에서 피만 푸르게 자랐다고 했다.  피농사,  보리농사,  감자농사만 알던 그 시절 피농사는 변민들이 해해년년으로 익숙히 짓던 농사다. 방천촌의 력사를 캐고들면 우리는 “곡선월경”이란 낯선 력사와 만난다. 방천촌으로의 조선이주민들의 이주는 대개 청정부가 봉금령을 실시하던 시기 로씨야 극동지구 하싼지역으로 먼저 건너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이주 정착했다고 하는데 월강하여 이침에 건너와서 농사하고 저녁에 돌아가면서 유격농사를 하는 과정에서 방천지역사정을 잘 알기에 결국 로씨야- 중국이라는 곡선이주를 택하고 두개의 국경을 넘은셈이다.

방천촌의 개척사는 우리 민족들의 이주초 개척축소판이다. 두만강 좌안지구 즉 연변의 력사는 깊은 산골의 화전밭으로 시작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동만땅은 우리 민족들의 불을 놓고 다시 화전밭을 일구었다는 추이가 나온다. 하지만 이 시기에 건너온 이주민들은 민간에서 흔히 “골치”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상놈이라는 뜻이지만 량반이든 상놈이든 모두가 농경사회의 화전민이였고 “농부일생무한…농사천하지 대본”을 근본으로 아는 농심들이였다.

   그 농심으로 산비탈과 들에 수천필지의 화전밭을 일구었고 오늘 우리들이 경작하는 밭이 있게 했다. 우리 조선족들의 전통생활에서 화전밭 개념은 개척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오게 되고 고난의 이주력사를 공증하는 견증자로 남는다. 우리 선조들의 삶속에는 오늘을 반성하는 소재들이 무진장하게 묻혀있는데 이 속에는 화전밭이란 목록도 끼여있다. 화전민이 개척정신이 전통의 바탕으로 되는 리유는 여기에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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