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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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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에 달빛 비추거든...
2017년 06월 07일 11시 04분  조회:1108  추천:8  작성자: 김혁


. 추모수필 .
 
일송정에 달빛 비추거든...
  • 리태수 은사님의 타계를 애달퍼하며
 
김혁

 
 

 
  그날은 “슈퍼 달”이 뜬다고 했다.  5월 9일, 올 들어 가장 큰 보름달이 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부푸는 심정을 강타하며 늦은 저녁, 선생님의 부음이 들려왔다.
  잡지사의 청탁원고에 밀려 서재를 울리며 가락맞게 달리던 나의 키보드소리가 급기야 뚝 멎었다. 망지소조(罔知所措)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장이다가 창가로 다가가 서재의 뙤창을 열어젖혔다.
저리도 밝은 달이, 저리도 둥근 달이 유난스레 떠 있었다. 슈퍼달(Super Moon)은 지구와 가장 근지점에 있을 때에 보이는 큰 보름달, 저마다 소원을 빈다는 그 달뜬 밤에 비보를 들었다.
  나의 서재 “청우재(听雨斋)”에서 낮이면 저 유명한 남산의 일송정이 훤히 내다 보인다. 밤이라도 산정우에 우람하게 솟아있는 방송탑곁에 그 무슨 초대처럼 꽂혀있는 일송정 정자의 실루엣을 그나마 가려볼수 있다. 슈퍼달은 높이 떠서 일송정을 훤이 비추고 있었다.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어언 33년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열기로 가득했던 초여름의 그날을 나는 내내 잊을수가 없다. 그날을 잊을수 없는건 내가 처음으로 당시 류행이던 청바지(당시 항간에서는 홀태바지라 불렀다)를 사입은 날이였고, 또 그 새물내나는 바지를 입고 처음으로 소설가라는 린봉(麟凤)같은 존재를 만나본 날이였기때문이다.
  그때 나는 초라니(몹시 경망스럽고 야단스러운) 문학도였다. “눈 먼 장비 헛 창 질”하듯 뭣모르고 곰바지런히 설익은 필을 놀리는 극성스러운 문학도였던 나에게는 소망이 하나 있었다. 바로 룡정에 계시는 리태수선생님을 만나고픈 열망이였다. 당시 “천지”(“연변문학”의 전신), “아리랑”등 여러 간행물에 “보름달, 둥근달” 등 중편소설들을 다량으로 발표하고 라지오 매주일가에서 인기리에 방송되는 류행가요의 가사도 써내고 항일설화를 소재로 한 장막극도 써내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선생님이였다.
  나의 양모와 선생님의 사모님이 한 학교에서 근무하셨기에 그 연줄로 나는 행운스럽게 선생님을 만날수 있었다.
가슴패기에 놓고 손절구라도 찧는양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안추리며 자택에  들어섰을때 선생님은 안방에  엎디여서 한창 집필을 하고 계셨다. 선생님이 엎드려 글 쓰시는 남다른 창작방식을 오래동안 고수해 왔음을 난 기억하고 있다.
내가 들어서자 선생님은 쓰던 글을 접어두고 맞아주셨다. 유명 소설가를 만난다는 설레임과 어려움에 한밤을 설쳤는데 선생님은 그렇듯 온화하고 부드럽게 나를 맞아 주셨다.
  어줍게 소설이랍시고 어머니의 교안책 뒤장에 쓴 어지러운 소설 초고를 선생님에게 맡기고 돌아섰을때 선생님은 대문밖까지 날 배웅해 주셨다. 그러던 선생님의 눈길은 바지 아래단을 두겹 걷우어올린 나의 새 청바지에 머물렀다.
  “바지단이 좀 긴것 같구나 가서 적당히 자르려무나.”
  이것이 리태수 선생님과 나의 첫 만남이였다.
 
  그후로 나는 때때로 소설 초고지를 들고 선생님의 집으로 뛰여들곤했다. 난삽하고 미숙한 작품임에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선생님께 읽어드렸고 선생님은 빙그레 미소를 띈채 그 긴 작품들을 마지막까지 들어주고는 세세하게 수개평을 달아주시곤했다.
   어느 한번 룡정의 한 소학교 교실에서 소설합평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십대의 어린 나이인지라 내가 들고 간 소설은 편집들의 빈축을 받았다. 어린 나이인것도 있었거니와 종교색채까지 띈 소설이여서 나중에 편집들은 표절 내지 도작으로 의심하며 몰아갔다. 이때 선생님께서 상을 탁 치면서 일어섰다. 강경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혁이의 초고들을 적지않게 봤는데 아주 력량이 있는 애더구만. 내가 이 애의 부모와 일면식이 있어서가 두둔하는게 아니요. 난 혁이가 꼭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리라 믿소”
그때 나는 그야말로 왜틀비틀 걸음마 타던 아이가 큰 나무둥이에 의지해 넘어지지 않은듯한 심정이였다.
  
  드디여 열아홉살 나던해 나의 처녀작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이 지면에 올랐다. 선생님은 그렇듯 기뻐하시면서 우리 집을 찾아 주셨다.  김재권 선생님, 오흥진 선생님, 전광하 선생님, 황병락 선생님등 룡정의 중견 문인들과 함께 밤늦게 까지 축하주를 들어 주셨다. 그리고는 밤늦게 방영하는 중앙영화채널의 심야영화까지 선생님들은 흑백의 텔레비죤앞에 오손도손 모여앉아 다 보셨다. 그 영화의 제목이 “나비의 꿈”이였음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외국영화임에도 우리 말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성우들의 더빙을 들으며 선생님은 곁에 앉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음(配音)을 참 잘 하지, 하지만 혁이야, 앵무새 따라 읊기를 해선 안돼, 자기 특색이 있는 작품을 써야지”
은사님의 그 살푼한 눈길과 목소리의 가르침을 난 지금까지도 잊을수 없다.
그날은 그야말로 어린 나의 성인식이요, 문학에로의 통과의례같은 축복의 날이였다.
  
  1986년 나는 룡정의 젊은 문인들과 함께 문학협회를 발족시켰다. 당시는 문인들이 소박받는 요즘의 풍토와는 달리 문학의 전성시대였다. 룡정 주위의 조양천, 로투구, 지신, 삼합, 백금 지역에서 문학도들이 거의 백명가까이 협회에 가입했고 선생님을 비롯해 김재권 선생님, 전광하 선생님은 흔쾌히 협회의 고문을 맡아 주었습니다. 우리가 경필로 써서 프린트 해낸 “희망봉”이라는 협회지를 까근히 읽어 주셨고 소설 합평회에도 참가해 문학도들의 글짓기에서의 병소를 족집게처럼 집어 내 주셨다.
  그후 선생님은 또 룡정에 “보름회”라는 문학협회를 발족시켰다. 지금은 이즈러져 있지만 언젠가는 보름달처럼 둥글게 되리라는 깊은 뜻이 담긴 선생님이 친히 지은 동아리의 이름이였다. 그때 연길 “길림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밤늦게 차를 타고 보름에 한번씩 열리는 “보름회” 작품합평회에 빠짐없이 참여하곤 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알기 쉽고 유머섞인 단평을 경청하고 설익은 작품을 탁마하기 위해서였다.
동아리 성원들은 일송정이 금방 복구된 비암산 자락으로 원족을 가기도 했다.  시원한 솔바람 그늘에 앉아 문학을 안주로 삼아 매운 막소주를 나누기도 했고 선생님이 가사를 지으신 “들놀이 가자, 꽃놀이 가자”를 열창하기도 했다. 그때의 그 열렬하고 진지했던 문학분위기는 열혈문학도였던 나의 뇌리에 아직도 화인(火印)처럼 남아있다.
 
  그동안 번중한 일과 창작에 딸려, 불운한 운명의 조롱에 치여 고향에도 자주 들리지 못하고 선생님도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은 나의 문학도 시절의 은사와 같은 존재로 나의 뇌리에 각인되여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의 질시를 이겨내고 6년만에 은둔해 있던 서재를 나와 자치주 “진달래”문학상 시상대에 섰을때 어쩌면 공교롭게도 미더운 선생님과 나란히 서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수년전, 선생님의 대하소설 “해란강”이 출간되였을때 나는 룡정으로 달려와 선생님을 찾아뵈였고 “연변문학”에 장문의 인터뷰를 낸적 있었다.
  그때 선생님은 나에게 손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이 앓고 있는 그 통증의 학명은 “손목 턴넬 증후군”이였다. 빨래등 가사일에 혹사하는 주부들이 흔히 하는 병이였고 또 대하소설 세 부를 펴낸 한국의 소설가 조정래가 앓았던 병이였다.
컴퓨터와 같은 기기(机器)가 아닌 육필로 한글자 한글자 수백만자의 대하소설을 펴낸 선생님이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원주필로 원고를 집필한다고했다. 가벼운 원주필을 쓰면 손목의 통증을 덜수 있을뿐더러 연필을 깎거나 잉크를 채우는 등 번거로움을 줄일수 있다는것이다. 원고지의 필적 또한 선생님처럼 단아했다. 단정한 기운의 글씨가 원고지 칸을 가득가득 채워 원고지가 아주 묵직해 보였다.

  각박한 표현 같지만 요즘들어 치렬한 자세와 의식을 지닌 작가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작가혼은 오간데 없고 속도나 경쟁 그리고 의뭉스러운 독선만이 보인다. 돈후한 아량은 없고 녹쓸은 명예의 상패에 기대여 후배들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전배(前輩)들도 보인다.
  이러한 독선과 명리만이 란무하는 풍토속에서 선생님과 같이 룡정의 궁벽한 서재에 묻혀 육필을 고수하는 이들은 시대에 떨어진 모습으로 오인(误认)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진정 부박한 속도의 가치에 저항하면서 한 획, 한 획 새겨나가는 철저한 장인정신의 표출이 아닐가! 선생님이 마주 앉아 집필한 낡은 밥상, 겉가위를 알뜰히 씌운 키를 넘는 원고지 더미를 목전에서 지켜보며 나는 문학가의 장인정신이란 무엇인가? 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3년전,  고향 룡정에 대한 궁극적인 사랑과 고향의 력사와 인물을 재다시 발굴, 조명하려는 가상한 각오로 3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나를 선생님은 반겨 맞아주셨다. 아픈 몸으로 기어이 술 한잔 사주겠다고 했다. 집에서 불과 사거리 하나를 건너는 짧은 거리도 택시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한 몸이였지만 선생님이 지팽이에 의지해 기어이 나를 잡아끈 곳은 샤브샤브 고기집이였다.
  선생님이 평생 고기붙이와는 멀리하고 수도자들처럼 줄곧 소식을 하셨다는데 대해 아는 이가 적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선생님은 양고기를 드셨다.
  “혁이, 팔십이 다 돼서 먹어 본 고기맛이 참 좋데그려”
   오목눈이 붕어눈이 되고만 나의 경아한 반응에 선생님이 앓는 사람같지않게, 비쩍 마른 어깨를 들썩이며 홍소를 터뜨리셨다.
  병마에 시달리면서 치료에 배합하기 위해서는 몸을 추슬려야한다는 의사의 식단조절 권고에 수도자처럼 깨끗한 음식습관을 여태 고수해 왔던 선생님은 산수(伞寿)의 나이를 앞두고 “파계”를 한것이였다. 그날 나는 선생님의 강한 생활의지에 다시 한번 감동을 머금었다.
 
  지난 2015년, 선생님의 문학생애 기념 55주년을 맞으며 축사를 도맡은 나는 억석당년(忆昔当年)으로 어젯날 문학스승과의 사제의 정을 다시 떠올렸다. 축사의 말미에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이 읊은 “등왕각서(滕王阁序)”의 한구절을 선생님에게 삼가롭게 드렸었다.
  “老当益壮 宁移白首之心(늙은 몸 씩씩하니 백발이 된다고 초심을 움직이랴)”
그렇게 선생님의 건강을 기망했건만 그로부터 2년이 못되여 선생님은 달빛을 즈려밟고 이승의 강을 넌느셨다.
   요즘 들어 우리의 문학은 무서운 진통과 부침을 겪고 있다. 그젯날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로 알려진 인끔 높던 내 고향 룡정도 그 물굽이를 피해갈수는 없었다.
  하지만 룡정에는 선생님과 같이 수수하나 뿌리깊은 나무처럼 고향땅의 “파수군”을 자청하고 나선 선배들이 계셨다. 은사님과 같은 로익장들의 계시와 가르침이 이어져 내려가는 한 강경애, 안수길, 최서해, 윤동주, 김창걸등 기라성 같은 문호들을 배출한 룡정지역의 문학은 저 일송정처럼 사철 짙푸르게. 저 배꽃처럼 수수하나 강인하게, 저 해란강의 흐름처럼 면면하게 이어나갈것임을 나는 오늘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은사님을 보내며 “역보역추(亦步亦趋)”라는 성어 한구절을 마음속에 갈무리한다.
또 역(亦), 걸을 보(步) , 추창할 추(趋). “스승이 걸어가면 따라서 걷고 스승이 종종걸음을 하면 따라서 종종걸음을” 했던 스승 공자와 제자 안연의 이야기.
  그 이야기처럼 나 또한 우리 문화의 발상지 룡정에서 또 한명의 “파수군”으로 거듭날것을 구구절절 애재(哀哉)의 문구 행간에 담아 서약해본다.
  일송정 푸른 솔을 비추는 달이 오늘도 우련히 밝다… …
… …
 
2017년 5월 11일.
 
“연변문학” 2017년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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