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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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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시인 - 다이 요코
2018년 04월 25일 00시 55분  조회:2679  추천:0  작성자: 죽림
다이 요코

/ "잠자는 거리 혹은 가라앉은 지층"


시인 약력 

1963년 도쿄 출생 
1990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 잡지<마차(馬車)>
(히사무네 무츠코 씨 주재)에서 공부를 했다. 
1992년 시 잡지 <마차>의 동인이 되어 6호에 시를 첫 게재,
현재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1994년 제1시집 "개를 부르는 사람"출간 
1998년 제2시집 "영혼시장"<총서 신세대 시인들 26시리즈>출간 
1999~ 2001년 "시와 사상 시인집"에 참가했다 
2002년 제3시집 "TIME OVER"<현대 신예시인 총서 시리즈>를 출간,
이 시집으로 2003년 제13회 일본 시인클럽 신인상 후보에 올랐었다. 

.............................................................................. 
1. 달에 이르는 계단 

당신이 있던 장소... 

며칠 동안 
당신만 생각하고 있었다 
굳어져 가는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고 
문득 시선을 들자 
찻집 유리창은 
잘 닦여 있어 

큰 프레임 밖에서 
짙은 녹음이 와글거리고 있다 
태양의 방울이 
아스팔트 위를 튀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아이의 
입 주위는 
하얀 달콤함으로 빛나고 있다 

그저 한순간 
당신을 잊은 시간에 
튀어 들어온 것들 

당신이 있던 장소의 크기 

........................................................................... 
덩굴... 

유리창 너머로는 저녁놀 
향기 나는 커피 
당신과 마주 앉으면 
나는 발아(發芽)한다 

당신이 뿌려 주는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목에 흘러 넣어 
나는 새 이파리를 늘려 간다 

당신이 웃으면 
숨기고 있던 무수한 덩굴이 
슬슬 
발돋움하며 뻗어나 

그 무렵이 되어 깨닫는 것이다 
내가 담쟁이 덩굴이었다는 걸 

'이제 돌아갈까' 

당신의 말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머지 0.1mm로 
당신에게 가 닿으려 하는 
쭉 뻗은 덩굴을 

.......................................................................... 
숨바꼭질... 

이제 됐어 
부르는 소리에 뛰어나와 보면 
아무도 없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공원은 
한여름에도 춥다 

숨어 버린 건 
아이들만이 아니다 
저 벤치에서 
저 분수대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마음 
이제 됐다고 서로 용서하고 
이제 됐다고 등을 돌릴 때까지 
찾기도 하고 찾아 내기도 하고 

목소리를 듣고 
뛰어나와 보니 
나무 그늘에도 
가로등 아래도 
당신은 없다 

........................................................................... 
개를 부르는 사람... 

강을 끼고 
당신의 눈동자를 발견한 채 

개는 
당신에게 다가가려고 걷기 시작하여 
강 깊은 곳에 다리를 빠뜨렸다 

비가 그친 강 
급류에 빠져 
개가 떠내려간다 

개를 부른 것은 분명 당신이었다 
당신을 향해 걷기 시작한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 

당신은 구두를 내던지고 
강으로 내달린다 
헐떡거리며 당신을 찾는 
비쩍 마른 개를 구하려고 

개는 필사적으로 바위에 매달려 
오로지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다 

당신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는 급류로 
안타깝게 손만 뻗어 휘젓고 있다 

"강가로 돌아가라" 
괴로운 듯 외치는 당신 

뒤돌아갈 수 없는 개는 
당신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 
욕조에서... 

넘치도록 물을 넣은 욕조에 
몸을 담그면 
내가 둥글게 몸을 담근 만큼 넘쳐나 
졸졸 쏟아져 내려간다 

수증기를 올리면서 
타일 위에 무너져 
실체를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저것은 
나의 나체였다 

저것은 - 
전철을 탄 나 
전표를 끊은 나 

약속을 하고 사람을 기다리던 나 
바람맞은 나 
연애 소설을 샀던 나 

양파를 잘게 썬 
나 

욕조에 남겨진 나는 
오늘을 단단히 축소시켜 
가슴에 쌓아 놓고 
내일의 몸을 씻기 시작한다 

..................................................................................... 
욕조로부터... 

내 둥근 몸에 밀려 
욕조에서 넘쳐 나온 
뜨거운 물 

한순간 꼼꼼하게 
나의 요철을 읽어 낸 
뜨거운 물 

타일을 따라 
배수구로 사라져 간 
나의 형태 

가는 파이프를 지나면서 
물은 식어가고 
찬물로 돌아갈 무렵에는 
내 몸의 형태를 만진 사실도 
식어 버린다 

어디서 왔는지 물어 봐 주는 일도 없는 채 
강에 더해지는 
물 

강이라는 강에서 
바다로 모이는 
물 

저마다 전혀 새롭게 하여 
서로 녹아서 합쳐진 
바다라는 형태 

.................................................................................... 
그림자... 

황혼 속을 
사람들이 바삐 흐르고 있다 
스쳐 지나가도 
얼굴을 쳐다볼 것도 없이 

발밑으로 
조용히 퍼져 가는 그림자 

내 그림자는 
낯선 그림자에 다가가 
작게 서로 접촉하여 
한순간 하나의 형태가 된다 

길가에서 말다툼하고 있는 
두 그림자 
손이 닿는 위치에서 마주 보고 
격렬한 어조로 
서로 웃고 있다 

등을 돌려 걷기 시작한 두 사람 
초조한 발밑에서 
그림자는 길게 겹쳐져 
녹아 버린 채 
불이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 아래 
떨어지기를 거부하고 있다 

................................................................................... 
떠들썩한 시체... 

혼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소나 돼지나 생선이나 새 
몸 여기저기 밀어 넣고 
지금 살아 있는 거잖아 

소 돼지 생선 새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소나 돼지가 먹은 건초 
물고기가 먹은 플랑크톤 
새가 쪼아 먹은 벌레 
그렇다 벌레까지 
몸 어딘가에서 헤엄치고 있다 

내가 웃으면 
그들은 똑똑 소리를 내며 뛰고 
하나가 되어 소란을 피운다 
가끔 웃음이 멈추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장난을 치는 그들이 
내 심장을 간질이고 있는 탓이다 

죽을 때는 혼자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바다에서 산에서 모여든 
단순한 너희들과 흙 속에서 
끝없이 보낼 테니까 
조용할 리가 없다 
정말로 잠들 수 있을까? 

.................................................................................... 
? ... 

매일 
물음표를 떨어뜨리며 
걷고 있다 

뒤돌아보면 
물음표는 염주를 엮듯이 
내 뒤로 늘어나고 있다 

한 걸음 나아가면 
보폭만큼 
길이를 더해 가며 

역 앞의 정육점에도 이웃 마을의 CD가게에도 
마지못해 갔던 치과의사에게도 
이어져 있어서 

사람과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았던 장소에서는 
작은 몸을 서리고 있다 

내가 오간 자취는 
풀린 털실처럼 
서로 뒤얽혀서 

물음표를 더듬어 가면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 
비 그친 후에... 

한바탕 비가 지나갔다 

나는 무거운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소나기가 하늘의 칙칙함을 쓸어 가서 
나뭇잎에 남은 물방울이 
맑게 갠 빛을 비추며 미끄러져 갈 때 

내 시선 앞에서 물방울은 
슬로모션으로 나뭇잎을 떠나 
가느다랗게 뻗어 떨어져 
지면에서 부서졌다 

1초 지났다 
1초가 망가졌다 

꼼짝달싹 못하는 당신과 나의 주변에서 
두 방울 세 방울 떨어져 부서지고 
2초 3초 나의 시간이 망가져 간다 

비 그친 포장도로를 작은 장화 한 무리가 
달려 지나간다 
아이들의 순진한 손이 나뭇잎을 흔든다 

한꺼번에 떨어져 가는 물방울 
7초 8초 9초 ............ 

나는 귀를 막고 싶다 

................................................................................. 
영혼시장... 

해 질 무렵 늘 다니는 샛길에 
다 익은 참억새 이삭이 살랑거리고 있다 
귀가를 서두르는 내 발밑에 
광고 한 장이 엉켜 붙었다 
'영혼시장 
영혼 팝니다' 
시장으로 가는 약도가 첨부되어 있다 

흥미로워서 발길을 향했더니 
길가에 작은 포장마차가 한 대 
갓 없는 전구를 달고 
노랗게 떠 있다 

머리에 수건을 푹 뒤집어쓴 노인이 
"아직 새파랗게 젊은데 영혼은 왜 필요한 거야?" 
눈알을 굴리며 나는 노려본다 
"아뇨, 이런 물건은 얼마 정도일까 해서요" 
나는 허둥대며 대답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헛되지 않게 하려고 
활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팔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노인이, 떠도는 영혼에게 밧줄을 걸어 
데려오는 듯했다 
생명력이 있는 영혼은 값이 비싸다고 한다 
생존 나이에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이런 영혼이 좋아 
회사를 일으켰다 금방 죽은 남자인데 
이 꼴이 되었어도 의욕만만 해" 
라며 에메랄드빛 영혼을 손바닥에 올려 놓았다 

"그쪽의 작은 것은요?" 
"이것은 안 돼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야 
실업인지 실연인지 모르지만 인생을 살아갈 의욕이 없 
어서 
반쯤 죽음에 들어가 있는 거야" 
나는 두근거렸다 

"주인은 알 수 있나요?" 
"알지 이름을 부르면 돼 
주인의 이름을 부르면 꼼틀 움직여" 
"움직이면 어떻게 돼요?" 
"주인이 요구하면 돌아가" 
노인이 파고들 듯이 나를 꿰뚫어 본다 
나는 비위를 맞추느라 웃어 주고서 포장마차를 떠났다 

샛길을 도망치듯이 달리면서 
나는 큰 소리로 내 이름을 외쳤다 

................................................................................................ 
엄지손가락... 

어쩌다 영구차를 만나면 
두 엄지손가락을 숨긴다 
그런 버릇이 아직 
없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잃고 싶지 않은 사람도 늘고 
만나 왔던 친절한 사람들이 
많이 북적거려 
엄지손가락은 무거워졌다 

나도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에 머물러서 
가만히 감싸여 왔다 
지금도 분명 

그러다 모두들 울면서 
손가락이 가벼워져 간다 

꽉 잡은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나는 안 보려 애쓰고 있다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에 들어 있던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 
안락한 살해... 

"목덜미에 작은 구멍을 뚫어 
손가락 끝을 밀어 넣어 동맥을 눌러 주면 
산양은 잠자듯 조용히 죽어 갑니다 
죽은 산양을 내장이나 꼬리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남은 뼈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씁니다" 

TV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 
노인의 조용한 말투 
이동한 카메라 앞에서 
산양의 허리등뼈로 집짓기 놀이를 하며 놀고 있는 
아이들 

바글바글 냄비의 고기는 삶아지고 
짐승 가죽으로 만든 파오 안에서 
저녁식사가 시작된다 
가족 모두가 빙 둘러앉아 
노인도 남자도 여자도 아이들도 
모두 온화한 눈동자로 담소하면서 
한가운데의 고기에 손을 뻗어 
뼈 사이에 있는 고기조각도 잘 긁어내 
남기지 않고 먹는다 

산양을 죽인 것은 이번이 세 번째라는 장남이 
오늘의 산양은 죽기 직전에 조금 고통스러워했다고 
가장에게 야단을 맞고 있다 

식사가 끝나면 다시 
아이들이 놀기 시작한다 
소중하게 오래 쓴, 하얀 집짓기 놀이용 뼈들은 
모서리가 닳아서 둥글어지고 
어린 손의 땀이 묻어 
반들반들 엷게 빛나고 있다 

............................................................................................... 
사망자 명단... 

TV 스위치를 누르니 
오늘 아침 5시 46분에 일어난 
고베지진 광경이 비춰지고 있다 
정오 뉴스는 
사망자가 5백명에 달한다고 전하고 있다 

TV 화면에 
사망자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다 
아나운서가 이름과 나이를 
읽어 나가고 있다 

야마모토 S씨 36세 
스즈키 E씨 85세 

......................... 

아나운서의 혀는 뒤얽힐 만큼 힘이 들어 있다 
다나카 K씨 0세 

'씨'를 붙여서 죽 읽어 내려간다 
이름, 이름, 이름 
0세 K씨 

0세라면 
대참사가 아니었다면 
어린 몸에서 빠져나가는 온기를 
불러 되돌아오게 하듯 
K짱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주위사람들로부터 
짱을 붙여 불리며 사랑받은 시간이 
너무나도 적었던 
K씨 

각각의 나이로 
각각의 상세한 사정을 가지면서 
가 버린 사람들과 함께 
단번에 어른이 되어 
올라간 
0세 K씨 

................................................................................................ 
아버지... 

취직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나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 
았다. 병원 응급실의 오진으로, 일주일 후에 이동한 병원에 
서는 요추의 추체골절로 지금까지처럼 걸을 수 있을 가능 
성이 희박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부터는 수술 효과도 있 
으나마나 오로지 누워 있어야만 했다. 병원 침대를 비우기 
위해 보름만에 퇴원하여 집에 누워 있었다. 집 안은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나는 일자리를 잃게 될 불안까지 겹쳐 기 
분이 우울해져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는 무리하게 일어나 책장이나 가구에 화풀 
이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곧바로 달려와 내 몸을 뒤에서 못 
움직이게 붙잡았다. "상관없잖아요. 이따위 것쯤 부서져 
도" 아버지의 손을 풀어 버리려는 나를, 아버지는 슬픈 얼 
굴로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대로 나를 
침대로 데려가서 눕혔다. 조금 진정되고 나서도 아버지의 
꽉 잡은 힘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힘들이지 않으 
셔도 괜찮았는데, 진짜로 부수려는 게 아니었으니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 야단도 치지 않고 그냥 나를 꽉 
잡고만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나의 깁스가 되어 주셨다' 
몰래 아버지를 훔쳐보려다, 아버지의 시선과 마주치고 
말았다. (산문시"아버지"에서 발췌) 

................................................................................................ 
꽁치... 

퇴원했을 때는 가을이었습니다 
꽁치가 맛있는 계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싱싱한 꽁치를 골라 
노르스름하게 구워 
저녁식사에 내오셨습니다 
어중간하게 들러붙은 허리뼈를 
플라스틱제 코르셋으로 꽉 조이고 
마루에 앉아도 된다는 허가를 받은 나는 
다리를 모아 옆으로 앉으면 아파서 
오랜만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젓가락으로 꽁치의 살을 발랐습니다 
부드러운 맛이 입속에 퍼지며 
천천히 목을 넘어갔습니다 
살을 발라서 입에 넣고 
다시 더 발랐습니다 
반신이 된 생선의 몸통에 흰 뼈가 드러났습니다 
꽁치 가운데 등뼈가 뚜렷한 형태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으므로 
조금 놀랐습니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뼈를 빼서 집어 올리자 
등뼈는 두 동강 나며 
안에서 부드러운 골수가 쏟아졌습니다 
우두득, 하고 내 온몸이 반응을 하여 
내가 젓가락질을 멈춰 버리자 
이미 가족들은 고개를 숙이며 
젓가락을 놓고 있었습니다 

............................................................................................. 
수증기... 

친정에 
좀처럼 전화도 걸지 않는 못된 딸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나 별일이구나 
오늘 쉬는 날이야 

가슴속이 삐걱삐걱 아팠다 

아니 오늘은 빨리 돌아왔어요 

화제가 없어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고 있자니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언니에 대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해 주신다 

아버지가 늦으시니까 
천천히 고기감자조림을 만들고 있어 

연세 드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어두운 화제를 끄집어낸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밝게 대답해 주신다 

어라 아버지 돌아오셨다 
평소보다 10분 빠르네 바꿔 줄까? 

응 

전화 저쪽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가 들린다 
(여보, 전화예요 
누구? 
요코예요 
어, 그래 

수줍음을 잘 타는 아버지는 갑자기 어, 어, 하다가 
그래, 그래, 하다가 

오늘은 날씨가 따뜻했지 

오늘은 밖에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나는 
따뜻했어요, 라고 맞장구를 친다 

오늘은 고기감자조림이야 

그렇다면서요! 

딸과의 전화에 마음이 들뜬 아버지는 

그래 너도 몸조심해라 
여기저기 온통 그러니까 

여기저기요 

내가 내뱉은 여기저기라는 말에 
고기감자조림의 수증기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스며든다 

.............................................................................................. 
함수초... 

갑자기 어디에 닿아서 
굳게 
마음을 닫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돌고 도는 물의 
동요가 
격렬했기 때문에 

가만히 
고요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리며 

다시 
조심조심 
가냘프고 날씬한 초록을 풀어 가기 시작한다 

그 초록을 만진 손가락을 지닌 사람에게 

............................................................................................... 
비둘기 집... 

날개 사이에 컵을 들고 
수비둘기가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다 
날개를 축 늘어뜨린 나는 
온화한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수비둘기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구우 
하고 운다 
나는 무리하게 뺨을 들어올린다 
수비둘기는 또 
구우 
하고 묻는다 

수비둘기는 날개를 벌려 
나를 재촉한다 
오늘의 바람을 견디어 낸 날개 
나는 조심조심 날개를 편다 
오늘 하루의 비상으로 
군데군데 부러진 날개 

수비둘기는 
구우 
하고 슬퍼한다 

내 주위로 
뽑힌 채 떨어져 있는 깃털을 찾아 
털갈이 중인 내 털과 
튼튼해 보이는 나뭇잎을 모아 
늘어진 내 날개에 
부지런히 심어 간다 

수비둘기는 홰를 쳐서 보여 준다 
구우 
나도 홰를 쳐서 보여준다 
구우 

수비둘기는 즐거운 듯 
구우, 구우 
하고 외치고선 
다시 
온화하게 
커피를 홀짝거린다 

................................................................................................ 
내 손은... 

문을 친다 
화풀이하듯 책상을 친다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자신의 머리를 친다 
너무 감격하여 오른손으로 왼손을 왼손으로 오른손을 
(어느 쪽이었는지) 친다 
이따금 어느 때엔 
아무 죄 없는 공기도 친다 

내 눈은 
비판을 피한다 
실패를 피한다 
화내고 있는 듯한 사람의 눈을 피한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피한다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쁨을 피한다 

내 마음은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두드려 보고 
두드려 부숴도 건널 수 없다 
그렇게 몇몇 빨강 초록 파란 다리를 깨뜨려 버려 
건너지 못하고 왔으리라 

어느 날 내 손은 
부서진 돌조각을 줍는다 
줍고 주워 인력거에 가득 싣고 

달빛 비치는 밤에 꺼내어 
살그머니 소중하게 쌓아 올려 본다 

....................................................................................... 
달에 이르는 계단... 

한밤중에 
크게 심호흡을 한다 
뚝 떨어져 내린 
오늘의 노동을 
손안에 싸서 
별빛 흐르는 하늘을 향해 
살그머니 풀어 놓는다 

계단을 만들어 
달에 가자 

고요한 한밤중에 
심호흡하면 
나의 오늘이 덩어리가 되어 
뚝 떨어진다 

찌그러진 덩어리를 
거울처럼 닦아 
매일 하나씩 
튼튼하게 쌓는다 

달까지 가는 도중 
내 옆을 로켓이 
초고속으로 통과한다 
나는 그것을 곁눈질로 배웅하고 
잠들지 않은 거리의 등불을 내려다보면서 
한가로이 땀을 닦는다 

계단은 별밤을 비추고 
깜박이면서 
천천히, 천천히 
달에 가까워진다 

나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인 채 
계단 꼭대기에 앉아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커져 가는 
달을 즐긴다 

.................................................................................. 
2. TIME OVER 

오도카니... 

사람으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앉는다 
작고 둥근 테이블에는 
냉음료를 한 잔 놓고서 
유리컵의 물방울은 그대로 

나무에 덮여 있는 
초록 돔에 넘치는 빛과 그림자의 춤 
그 틈새로 보이는 바람에게 
빨려 들어가면서 

사람이 있다 
조금 떨어져서 오도카니, 오도카니 
이런저런 현실과 환상을 
나무가 촉촉하게 
듣고 있다 

사람이 있다 
나무보다 조용히 침묵하고서 
잎들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다 

............................................................................ 
녹색 길잡이... 

여름날에 밀짚모자로 
강에서 함께 물고기를 건졌지요 

열중해서 물고기를 뒤쫓는 동안 
물을 먹은 밀짚모자는 
물에 불어 찢어져 
그대로 하류로 흘러갔습니다 
뒤쫓아도 손이 닿지 않아 
결국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고 

울어 버리는 당신에게 달려가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울었던 건 
모자를 잃어버린 탓이 아니라 
아침에 어머니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귀에 거는 긴 고무줄을 꿰매 주셨기 때문 
이상하게 손가락 끝을 바늘에 찔려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기 때문 
그런데도 '자 이제 됐다'하고 
웃으며 씌워 주셨기 때문 

밀짚모자는 낡아서 당신은 
장난감으로 삼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꾸중을 듣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마치 어머니를 강에 흘러보낸 것처럼 
너무 넋을 놓고 아름답게 울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당신과 모자에 대해서 
잊을 수가 없었고 
다시는 그릴 수 없는 풍경화처럼 
지금도 그 윤곽을 따라 덧그려 봅니다 

................................................................................. 
붉은색 길잡이... 

당신이 안뜰에 끌린 것은 
여름의 해 질 무렵이었습니다 
(금붕어가 죽어 있어요) 
그 말이 요사해서 

습기 찬 흙 위에 
금붕어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작은 비늘은 아직 숨쉬고 있는 듯 
둔하게 빛나 보였습니다 

묻으려고 
(정말로 묻으려고?) 
맨손으로 흙을 팠습니다 
구덩이에 금붕어를 눕히고 
흙을 덮으려 하자 
무덤에 돌이 없는 것이 느껴져 
찾아 내어 주운 돌 
손에서 미끄러져 

앗, 하고 소리가 새어 나왔을 때 
무릎에 미지근한 감촉 
금붕어의 피가 묻어 있었던 것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듯한 붉은 색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죽어 있었는데..............) 

피가 묻은 사람은 당신뿐 
그것이 무엇인가의 증거처럼 
당신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고 

그러고 나섰지요 
씻어도, 씻어도 
핏자국이 무릎에 
되살아나게 된 것은 

.......................................................................... 
쳥색 길잡이... 

당신의 키는 무럭무럭 자라서 
몸 전체가 약간 
꽃 색깔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부풀기 시작한 가슴이나 
약간 둥그렇게 살이 붙은 궁둥이 
그런 부드러움이 찾아오는 것을 
당신은 매우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포동포동해져 가는 것은 
축제가 끝난 후의 담력 시험이나 
숲 속에서의 은둔지 만들기 
폐허 탐험이나 외나무다리 건너기 
이야기로 가득 찬 모험으로부터 
내쫓기는 것이었습니다 

위험하니까 
인기가 없으니까 
여자 아이잖아 여자 아이니까 
몸이 포동포동해져 가는 것은.......... 

그리고 
당신의 꽃무늬 원피스를 비쳐 보고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무서운 시선과도 
이따금 만나지던 걸 보면 
야자 아이가 되는 것을 
당신은 무서워하고 있었지요 

거울 앞에서 
새하얀 레이스가 곁들어진 
느슨하게 꿰매어진 폭신함을 
처음 가슴에 대었을 때 
당신은 그것이 
자신을 묶는 것처럼 생각되어 
어제의 자신과 연결 지을 수가 없어 
가슴이 답답하고 
갑자기 당신을 약하게 만들어 버린 정체가 
두려워져서 저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역...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우산을 찾았습니다 

외로워서 
사람을 찾았습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발밑을 비추며 
달려갔습니다 

우산은 찾았지만 
사람은 찾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람은 
많이 있었습니다 

파란 우산 
체크무늬 우산 

비닐 우산을 쓰고 
젖은 포장도로에 줄 지어 서 있습니다 

다만 내 우산을 잡고 씌워 줄 사람을 
찾지 못하고 

추워서 
옷깃을 세웠습니다 

외로워서 어쩔 수 없이 
보조를 맞추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어 
우산을 깊이 내려 썼습니다 

........................................................................................... 
은폐... 

공기를 정육면체로 잘라 
냉장고 안쪽에 보관했다 

오늘 살짝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꺼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일주일간 그대로 놔두고 
다른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두세 달 똑같이 해 나갔다 

일곱 달이 지날 무렵에는 
공기에 대해 잊어 가고 있었다 

굳히느라 넣어 둔 붉은 젤리를 오랜만에 
냉장고에서 꺼내려 했을 때 
갑자기 그 공기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일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래도 그대로 방치했다 

하지만 

냉장고 안쪽에서 그것은 
가사상태의 생물처럼 
얼룩에 색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날 단 한 곳이었던 
호흡할 수 없는 공간이 
이제는 이르는 곳마다 흩어져 있다 

......................................................................................... 
하나의 카테고리... 

'빈 깡통'이라고 부른 날부터 
그것은 내 앞에서 빈 깡통이 되었다 

질감은 단단하고 차가웠지만 
손안에서 
그것은 곧바로 내 체온을 공유하고 
같은 온기를 가지는 것이었다 

하나의 이름을 붙여 주지 않으면 
하나의 결론에 이르지 않으면 
무수한 관계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가볍군요 
의외로 부드러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손힘으로 부술 수 있으니까 
색도 형태도 때로는 바뀌는 것이지요 

되고 싶은 모습이 되어 있습니까 
우리들 
어디까지 바꿔질 수 있을까요 

손안에서 무언의 그것은 
생물이 아니라는 것 외에 
정체도 알 수 없고 
찬찬히 바라보고 만지고 확인해 볼 수밖에 
없다 

이름을 붙여 주지 않으면 
그것은 미완의 모습으로 
지금도 새로운의문을 
불러일으키게 했을 텐데 

................................................................................. 
정육면체... 

걸어온다 이쪽을 향해 온다 
라고 하지만 당신은 
일정한 면만을 이쪽을 향하게 하고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간다 달려간다 
라고 하지만 나는 
일정한 면을 정면이라 결정하고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나 당신 이외의 사람들과 마주 보는 면은 
언제나 각성시켜 잘 연마하여 
약간의 트러블에는 
도덕적이고 인도적인 포즈로 
아슬아슬 벗어날 수 있을 정도는 
단련되어 있다 

당황하는 것은 한 측면이다 
(어제 당신을 어디선가 보았습니다 
의외인 면이 있군요) 
등의 말을 들으면 
아직 분명히 의식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 
코멘트마저 요구받으면 

곤란한 것은 등 뒤쪽이다 
오늘도 노출시켜 놓은 무방비한 모습 
비뚤어지지 않았냐? 더러워지지 않았나? 
가끔 숨어 버리고 싶다 

밑바닥을 말하자면 그건 공포다 
나 자신에 있어서나 
당신에 있어서나 
뒤집히면 무엇이 나타날 것인가 

완전히 둥근 형태가 되어 아직 
구르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때때로 알맞게 모서리를 갈아 내고 
굴러오는 사람도 있다 

........................................................................................... 
아침 햇살 드는 베란다... 

장난감 상자도 낙서도 없는 
조용한 거실에서 
아침 바람이 빠져나가는 일요일 

나보다 조금 일찍 잠에서 깨어난 당신은 
베란다의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 꼬리 모양 실내 화단에 
흰 물뿌리개로 물을 뿌리고 있다 

방을 등지고 있는 당신은 
나를 눈치 채지 못하고 돌아보는 기척이 없다 
흰 티셔츠가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다 

(고마워요) 
말을 걸려고 가까이 다가가니 
당신의 가슴께부터 무릎께에 걸쳐 
그림자 같은 것이 나타나 
조금씩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것이 지금 
당신 너머에 놓여 있다 
그것이 꽃이나 베란다 난간이라고 알게 될 무렵에는 
당신은 윤곽을 남긴 채 흐릿하게 투명해져서 
허리 주변에 분재의 빨간 꼬리가 
뿌옇게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있잖아요 어떻게 되어 버린 거예요?" 

대답이 없다 

팔의 윤곽을 잡고 
방으로 끌어들인 다음 
나는 있는 모든 재료로 아침식사를 만들어 
반투명의 당신에게 집어넣어 보지만 

........................................................................................... 
흰 고양이... 

긴 꼬리가 있었다 
투명해지는 듯한 진주의 윤기 
갓 태어난 부드러움으로 

작은 생명의 모습에 
아침 출근이 전보다 조금 
즐거워졌을 무렵 

꼬리가 절반 잘려 있었다 
조금 남은 꼬리털은 뜯겨지고 
체액이 스며 나와 
애처롭게 짓무르고 있었다 

볼 때마다 
남은 꼬리는 검붉은 번데기같이 되어 
말라붙어 짧아지다가 
어느 아침 
뿌리로부터 없어져 버렸다 

상처를 들여다보는 나에게 
지나가던 사람이 말했다 
라이터 불에 잘린 거예요! 

목적은 잘라 버리는 것이었을까 
비명을 듣는 것이었을까 
상처 
버려진 꼬리 
한 개의 라이터 

소년이 잘라 버린 건 
고양이 꼬리가 아니라 
마음의 심지에서 부드럽게 자라날 
자신의 팔 다리 

잘못 잘라 냈고 
잘못 잘린 

............................................................................................ 
비눗방울처럼... 

태어나서 사라져 버린 
주홍빛 물빛 레몬빛 
농담이 있는 보라색과의 
관계 

똑같이 맥박이 뛰는 시간 속에서 
그럼에도 시간은 마음의 뜨거움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들 

팍, 소리가 나게 다리를 밟고서 
'당신을 잊을 수 없다' 고 
외치며 찍은 발자국도 역시 
바람이 지워 간다 

그것은 슬픔 일일까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도 
계속되고 있던 그 사람도 
사라져 갔다 

꽃잎의 상처를 보여 준 
그 여름의 해바라기도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해가 뜨고 지듯이 짧은 반원을 그리며 
태어나선 사라져 간 

갖가지 사람들 
갖가지 이야기들 

남는 건 
단 하나의 무지갯빛을 띤 커다란 원 
거기에 비치고 있는 나 

빙글빙글 돈다 
그것은 슬픈 일일까 

..................................................................................... 
잠자는 거리 혹은 가라앉은 지층... 

1. 꿈 

전철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도서관과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어 
프레젠테이션 준비는 끝났다 
쉬는 시간에는 
쇼윈도를 보러 다니고 
붉은 샌들을 신어 보았다 
오늘 밤의 초대 자리에는 
질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휴일에는 그림을 보러 갈까 
영화를 보러 갈까 수영장을 갈까 
고민이다 

바라보는 만큼의 
뭐든 다 있었으므로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나는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반들반들한 대지 
지표는 서늘한 탄력이 있고 
만져 보니 파르르 흔들린다 

집이 없다 빌딩이 없다 
풀도 나무도 나 있지 않았다 
바라보는 만큼의 
지평선 구석구석까지 
젤리 상태의 지층이 뒤덮여 있다 

투명한 지층을 들여다보니 
내가 사는 거리가 
화석처럼 잠들어 있다 

2. 일과 

이 반들반들한 대지 위에서 
나는 
기를 게 없다 

손에 닿는 것 어루만지는 것 
꼭 껴안는 것 
무엇 하나도 

젤리 상태의 지층에 심어 놓을 
씨앗 한 톨도 

다만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하늘을 채우는 물빛과 짙은 감색 
한순간의 오렌지색만이 
여기에 남겨진 전부였다 

나는 그것을 
'당신'이라고 부르며 
매일같이 바라보고 살았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조용하게 사랑할 수 있었다 

당신의 눈부심에 몸을 떠는 것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무너져 
금세 나는 
혼자임을 깊이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기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쏟아지는,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뿐 

3. 또 하나의 눈뜸 

눈을 뜨는 것으로 시작되는 꿈을 
밤마다 꾸고 있다면 
하물며 그것이 
채색과 소리와 질감으로 가득 찬 
일련의 이야기로 이어져 있다면 
현실과 꿈의 구분을 
어디서 그으면 되는 것인지 

어제 
젤리 상태의 지층에 가라앉는 
꿈을 꾸었다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내가 사는 거리로 내려갔다 

오래 살아 정이 든 방문을 열고 
그리운 벽지를 더듬어 가자 

그는 담요에 덮여 
희미한 숨소리를 내고 있다 

눈을 뜨면 
의심할 것도 없이 양복으로 갈아입고 
여느 때의 회사로 향하는 
그런 잠자는 얼굴이다 

그리고 나는 
파르르 차가운 젤리 상태의 지표 위 
오늘도 꿈에서 깨어났다 

대지에 수직으로 
발딱 일어서면 
이 신체의 모든 무게로 
정말로 
가라앉을 수 있을까 

일어서 보자 그리고 가자앉는다면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자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잠을 깨우러 가자 

이 지층 아래 
작은 상자 모양의 방에서 
그 사람이 아직도 
또 하나의 눈뜸을 
믿고 있다면 

4. 곡괭이를 든 남자 

"부술까요 이 지층을" 
당돌하고 뜨겁게 말을 건네 온, 처음 보는 남자는 
곡괭이를 치켜들었다 

다음 순간 
지층으로 솟아오르듯 나타난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놔둬! 방해하지 마라!" 

사람들은 표정 없이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흔들흔들 손발을 움직이며 
곡괭이를 든 남자에게 
우르르 일제히 몰려간다 

"이봐! 그만둬" 

겹쳐지는 사람들의 무게로 
지표는 조금씩 움푹 패어간다 

"그만둬! 눈을 떠!" 

곡괭이를 든 남자와 사람들은 
산처럼 쌓인 시체처럼 겹쳐져서 
눈 깜짝할 사이에 
젤리 상태의 지층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그 자초지종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라앉을 때 곡괭이를 든 남자는 
"죽은 듯이 살지 마라!" 
절규하고 있었다 

남자들을 삼켜 버린 구덩이는 곧바로 
원래대로 메워졌으나 
지층 밑으로 밀려 올라오는 진동으로 
지표는 파르르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곡괭이를 든 남자가 아직도 
외치고 있다 

5. 조용하게 끝없이 

이봐요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부드럽게 
안개처럼 연기처럼 
만지면 조금 끈적끈적해서 
잘 알 수 없는 것이 
공기처럼 
너무나 미량으로 
조금씩조금씩 내리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이것이 거리를 완전히 묻어 버린 것의 정체입니다 
보이지 않습니까 역시 그렇게 
잘 보이지는 않는군요 
안 됩니다 
잠이 들면 그대로 매장되어 버립니다 
당신의 발 아래 
벌써 조금 쌓이기 시작하고 있군요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던 걸까요 
아무도 눈치 챌 수 없었던 동안에 
이렇게 평평하게 
이렇게 넓게 
모든 것이 푹 감춰질 정도로 
모두 
잠들어 있었던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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