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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조선족이 되었나 / 남영전
2021년 12월 20일 19시 46분  조회:1086  추천:0  작성자: 죽림
나는 어떻게 조선족이 되었나

            남영전




심금을 울리는 제목이다

나의 친혈육의 한많은

생명으로 엮은 이야기다

그러나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은 할머니는

담담한 어조로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할머니 생전에

준확한 이주시간을

확인했어야 하는데

할머니의 그 아픈 상처를

더 다치는 것이 두려워

더 캐어묻지 않았다

지난 20세기 40년대

직전인 것은 틀림없다

 

원적이 경북선산 도개면 궁기동

일제의 만행을 피해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 삼촌, 두 고모를 데리고

만주땅에 들어와 정착한 곳은 

길림성 휘남현 대의산향 소의산촌 

 

다행인 것은

산골사람들 마음이 후하여

이국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도와주었다 

시간이 좀 지나니

언어도 소통되어

마음 놓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그림자는

언제나 그들의 뒤를 따랐다

광복직전

일제의 731세균전 실험으로

털없는 쥐가 마을에 나타나더니

심한 쥐병이 돌아

3일안에 할아버지와 두 고모가

어쩔새없이 목숨을 잃었다

 

광복후의 중국해방전쟁

삼촌이 먼저 참군하여

사평전쟁에서 전사하였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5개월 되던 때에

아버지가 또 참군하였다

아들의 얼굴이 궁굼하다고 편지왔기에

할머니가 나를 안고

어머니가 옆에 선

나의 백일사진을

아버지의 부대로 부쳤고

아버지는 전우들과 찍은 사진을

집으로 보내왔었다

어버지의 붓글씨가 참으로

멋지다는 것이 어릴 때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유일한 인상이다

 

두살때 나는 병으로

할머니와 어머니의 속을 태웠다

여러 의사를 찾아보았고

온갖 약도 효험이 없어

하루하루 위중한 상태였다

누군가 알려주었다

20리 떨어진 어느 곳에

점 잘 치고 병 잘 보는

한 노파가 있다고 하였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나를 번갈아 업고

그 험한 20리 산고개를 넘어

그 노파의 댁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기중인데

노파는 포대기에 쌓인

나를 보지도 않고

금방 들어선 아이가 위중하니

이 아이부터 봐주자고 하면서

마을서북쪽 산모퉁이에

조그마한 산신당이

있지 않는가고 물어

그렇다고 하니 방법을 알려주었다

만약 이 방법이 효험이 없으면

이 아이는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급히 집에 돌아와 준비를 하였다

할머니는 그 산신당 앞에

제물을 차려놓고

노파가 시키는 말을 외웠다

두 발과 두 날개가 묶였지만

살아 생생하던 장닭은

빨간 벼슬이 점점 흑색으로 변하더니

골골골, 골골골, 골골골

세마디 소리를 내더니

그만 숨을 거두었다

할머니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나는 눈을 떴고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렸다

한참후에는 미음을 받았다

 

내가 5살때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할머니는 이제 하늘이 무너졌다

몇년사이에

친인 다섯을 앞세워

이제는 자신도 그들 뒤를 따르기로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그 추운 겨울밤에

바줄을 쥐고 눈덮힌 뒷산에 올랐다

마지막 담배 한대를 태우는데

사람없는 산속에서

큰 고함소리가 울렸다

“손자가 지금 울고 있는데

여기서 무슨 짓이냐고!”

분명 할아버지의 노여움이었다

할머니는 너무도 놀라

바줄을 버리고

급히 집에 들어서니

나는 이불을 차던지고

울고 있었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나를 안고 울면서

내가 20살때까지

홀로 밥을 찾아먹을 때까지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고 한다

내가 철이 든 다음

할머니는 나의 어릴 적의

일을 들려주면서

“세상사란 참으로 신기하다

사람이 착하게 살면

하늘이 돕는다”고 말하였다

 

어릴적 나의 흥취는

할머니의 옛말을 듣는 일이였다

전기 없는 산골마을

밤마다 희미한 석유등잔 밑에서

할머니의 옛말에

나는 밤가는 줄을 몰랐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별명이

동네 옛말할매라고 하였다

할머니는 그 많은 옛말을

머릿속 보따리에

다 거두어 넣었기에

할머니의 옛말은 끝이 없었다

 

내가 8세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100여리 먼 현성에 들어와

남의 집 뒷방살이를 하였다

나는 할머니가 나를 위해

새로운 고생이야기를 엮는 것을 보면서

어린 나이지만 늘상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1971년,  23세때

나는 할머니의 옛말덕분에

시를 엮어 중국문단에 데뷔하였다

하지만 그 특수시기

문학의 의미에서 나의 시는

시가 아니었다

1979년 새시대가 열리면서

나의 시는 시의 본연으로 돌아왔다

1983년, 장춘의 나의 문학은사는

나의 진보를 기뻐하여

현성에 있는 나의 집을 방문하였다

3일후, 은사가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자네 할머니는 참 대단한 분이야,

자네가 할머니를 쓰지 않으면

시인자격이 없네”

은사의 지적과 기대는

나를 크게 깨우쳤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할머니, 아버지, 삼촌을 기리는

서사시로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연이어 두차례 전국적인 대상

길림성정부의 최고문학상을 받아

조선족시인의 신분으로

중국주류문단에 서게 되었다

 

시인은 항상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

시의 활력은 새로운 창조에 있다

1985년, 그때 나의 시는

나 개인의 고봉이었다

이다음 나의 창신이란?

이다음 나의 돌파란?

환희와 박수가 끝난 다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때

사르트르가 나타났다

프랑스 존재주의 철학대가

그는 생명의 마지막순간

일생의 철학추구를 회고하여

<오늘의 희망>이란

절절한 유서를 남겼다

“오늘날 우리는 반드시

토템식 형제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신화이지만 하나의 진리이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토템미학책을 읽고

자연과 인간 혈연관계의 예술표현인 

토템미학에 흥취를 가졌는데

사르트르의 말에

나는 눈이 번쩍 띄었다

토템을 시적대상으로

새로운 장르 토템시를

창조해야 한다는 방향을 잡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민족씨족들의 토템을 찾는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신화의 고향이라 불리우는

《삼국유사》를 파고 들었다

할머니의 서민신화가

일연의 왕실신화와

한줄에 이어지는 것을 보면

민족문화뿌리를 캐는 것이

어쩌면 나의 숙명이었다

일연의 왕실신화를

하나하나 캐어보니

이전에 그냥 보통신화라고 한 것이

확실한 토템신화였다

토템정의가 이것을 말해준다

토템정의 4요소는 

토템탄생, 토템표지, 토템수호, 토템전환

그 어떤 자연물체 덕분에

세상에 나오게 된 시조는

그 고마운 물체의 상징을

자신의 성씨와 이름으로 하였다

그 고마운 물체는 또

조상과 후대를 끝까지 보호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물체로 돌아가고

생전에 필요하면

잠시 그 물체로 변했다가 돌아온다

이 신비한 물체가 곧

조상신, 토템이었다

일연의 왕실신화는

토템정의 이4요소가

완벽하고 생동하므로

진귀한 토템신화였다

일연의 토템신화에서

토템이 하나하나 나타났다

나는 그 토템을

하나하나 깨닫는 작업에 들어갔다

보통 4, 5개월

하나의 토템을 지속적으로 깨닫다보면

한수의 토템시가 나온다

제목을 보면

영물시와 토템시는

구별이 안되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영물시는 그 물체에

그 어떤 정서를 표현하고

그 어떤 뜻을 기탁하지만

토템시의 이 물체는

승화된 조상신이기에

그 물체의 형태와 특징을 빌어

조상들의 정신경지와 추구를

상징수법으로 표현하기에

과거, 현재, 미래가 이어진다

시의 표현방식은

고전과 현대의 결합이었다

1986년부터 집필에 들어가

1987년 9, 10월호 《시인》전문지에

<산혼>제목으로 토템조시

달, 곰, 학, 사슴 4수가

톱자리에 크게 나갔다

주류문단의 비평가들은 박수를 쳤다

새로운 형식

새로운 내용

새로운 시탐구라고

신문지면에서 열을 올렸다

 

2003년 6월

중남민족대학 추건군교수가

사천대학 등 4개 대학 련합으로

나의 토템시 세미나를 가졌다

그해 8월

42수의 토템시집 《원융》 출판

2004년 7월, 율원소적 저서

《남영전 토템시 감상》 출판

2005년 10월, 율원소적 편찬

시서화집 《시서화의 시대 공진》 출판

2006년 3월 북경 수도사범대학에서

“남영전 토템시 연구”세미나 진행

논문집 《남영전 토템시 연구》(1월)

전각집 《남영전 토템시 지구인》(8월)

2007년 또 3권의 관련도서 출판

논문집 《남영전 토템시 탐론》(4월)

논문어록집 《남영전 토템시 정수》(6월)

마명규 저서 《남영전 토템시학》(12월)

 

주류문단의 토템시열과 달리

조선족문단은 시야비야의 쟁론이

인터넷공간을 채웠다

일찍 한국도서상 저서

《중국 조선족문학의 어제와 오늘》의

저자 한림대학 정덕준교수는

남영전토템시를 어떻게 보는가의 주제로

2008년 6월 장춘에서 

장춘사범대학과 공동으로

한중세미나를 가져 한국측에서는

서지월시인, 김영미교수가 논문 발표

2009년 12월, 한국에서 3차례 세미나 진행

부산 부경대학 세미나

울산 울산문화원 세미나

진주 한국국제대학 세미나

 

근간에는 조선족문단에

토템시비평가 한분이 나타났다

그는 작가 현춘산선생(1950--)

교원출신으로 장편소설 1부와

수필집 2권을 출판한 그는

중국고전문학을 즐겨읽기에 또

수편의 중국역사소설을 발표

시야비야하는 토템시 정체가 궁금하여 

2018년에 하성량의 토템저서

《토템과 중국문화》(666페지)를

세번이나 정독하고

일연의 《삼국유사》

이어령의 《한국문화상징사전》 등

관련자료를 파고들어

끝내 토템학설을 깨달았다

현춘산선생의 해설문은

김창영시인의 공감으로

2020년 6월부터

《료녕신문》 화요일 문화판에

매기 한편씩

2021년 6월까지(평론 포함)

일년동안 연재되었다

이 기간의 해설문은 주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토템을 근거로

남영전 토템시이에 등장한  토템은

우리 민족 여러 씨족들의 토템이란 것을

증명하여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하였다

지금은 또 영물시와 토템시의

구별점의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남영전 토템시 상징이미지 해설문을

위챗에 올려 독자들의 환영을 받는다

 

2020년 4월《길림신문》이 펼친

‘문화를 말하다’ 시리즈에서 나는

<토템과 성씨의 기원>을 말하면서

우리 민족의 시조는

호가 단군(坛君)이고

이름이 왕검(王俭)이라 하였더니

한 독자가 펄쩍 뛰었다

“단군은 이름이고

왕검은 왕의 호칭인데

무슨 동화같은 얘기냐고?”

생각밖의 반문에 나도 놀랐다

단군의 호와 이름이 나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새겨진 것은

35년전인 1985년이었다

토템시를 목적으로

단군신화를 파고들 때

‘단군왕검(坛君王俭)’ 네글자에

호와 이름을 고증하였다

①일연의 《삼국유사》에

古朝鲜(王俭朝鲜)표제

②사마천 《사기》의 조선전에

옛 평양성을 王俭城이라고 칭한 말

③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옛 평양은 王俭의 자택지란 말

이 세학자의 기록에

王俭이 단군의 이름이란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이 독자는 왜

이름 왕검을 임금호칭이라 하고

호를 또 이름이라고 하는가?

나는 단군신화를 알만한

두 문인친구에게 문의하였다

생각밖에 그들 모두

이 독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내가 1대3 소수였다

문제의 장본인은 이승휴의《제왕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원문을 찾았다

답안이 나왔다

이승휴가 《단군신화》를 고쳤다

신화원형을 다치는 것은 금물이란 것을

중국신화통인 이승휴가 모를 리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이승휴(1234—1300)는 일연보다

28년 후생이지만 같은 동시대사람이고

둘 다 중국신화통인 학자 

또 다 조정과 관련이 있기에

그들은 그 무엇이 통하는 것 같았다

1280년

이승휴는 충렬왕께 간언한 탓으로

46세의 젊은 나이에 면직당하고

집에서 우울한 은거생활을 하였다

1282년전후

일연은 김부식의 과오를 바로잡으려고

평생의 노력으로 《삼국유사》를 엮었지만

비난을 받아 간행되지 못하였다

국존으로 책봉되었던 일연은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 병으로 누웠다

 

신화통이고 시인인 이승휴가

《삼국유사》의 가치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이승휴는 또

새로운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이대로 가면 민족의 시조는

이름조차 없어진다는 고민에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죽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 아닌 방법은

그 문제의 곰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생각끝에

천신의 손녀가 약을 먹고

사람이 되어 단군을 낳는다

그래서 그는 눈가림으로

《제왕운기》를 엮었다

《제왕운기》는 7언, 5언 식의 사시(史诗)

상권(上卷)은 중국반고시대로부터

원나라의 흥성시기까지

하권(下卷)은 단군조선으로부터

충렬왕시대까지의 역사를

화룡점정(画龙点睛)식으로 엮었다

모두 700여행, 4350자

원문에 단군관련 기록은

딱 2행 14자

“初谁开国启风云?

释帝之孙名檀君。”

그 누가 개국의 풍운을 열었는가?

천제의 자손 이름은 단군이다

고친 단군신화는

주해를 다는 식으로

뒷방에 슬쩍 넣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왕운기》는

충렬왕이 싫어할 이유가 없고

유교학자들이 반대할 근거가 없어

1287년에 쉽게 간행되었다

하지만

시인 이승휴는 자신의 죄를 알기에

더 고통에 빠져 1300년 4년만에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1360년 이승휴의 60주년 기일에

《제왕운기》는 재차 간행되었고

조선조로 바뀐 1413년에

제3차 간행이 되어

가짜 단군신화가 판을 쳤다

이리하여

제사장인 坛君이

단수신 아들 檀君이 되었고

본이름 왕검(王俭)은 아예 잃어버렸다

 

반문한 독자가 고맙다

그 반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坛君과 檀君을

구별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모신 檀君이

가짜란 것을 몰랐을 것이다

 

요지음

중국판본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权锡焕,중국 陈蒲清 역해

湖南长沙岳麓书社

2009년 2월 제1판 인쇄)

이 악록사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가치있는 고적을 발굴하는 출판사

중국의 역해자 陈蒲清이

토템학설, 토템숭배관념으로

《삼국유사》를 조명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는 계시가 크다

 

陈蒲清의 해설을 들어보자

“단군신화는 고조선개국시조

坛君의 신화이다

신화는 왕왕 역사의 투영(投影)이다

환웅이 태백산정에 내렸다는 것은

옛날 묘향산일대는

고조선 원시씨족들의 발원지

고고학도 증명하는 바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

전형적인 문화유적지대다

곰과 범이 한 동굴에 살았다는 것은

곰토템씨족과 범토템씨족이

사이좋게 지냈다는 것을 말한다

곰이 사람으로 변했지만

범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곰토템씨족이 범토템씨족보다

더 흥성했고 더 발전했기에

곰토템씨족이 주도권을 가져

수령이 되었다는 말이다”

진포청의 해설은 참으로 확실하다

이렇게 토템학설로

신화분석을 하면

역사진상이 밝혀진다

 

‘坛君王俭’ 네 글자를

토템학설로 어떻게 해석하는가?

토템탄생인

박혁거세, 석탈해, 김수로가

어떻게 성씨와 이름을 얻었는가를

보면 인차 답이 나온다

박혁거세는 깨고나온 알이

박처럼 둥글다고 하여

박씨성을 가졌고

동천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났다고 하여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석탈해는 알을 깨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脱解)

까치토템의 작(鹊)자

왼쪽면을 떼어 昔씨성으로 하였다

김수로는 6개 알중

먼저 나왔다고 이름을 수로(首露)

그 함과 알이 금빛이라고

김씨성으로 하였다

이 세시조 모두 완벽한 토템표지다

坛君王俭은 더욱 전형적이다

곰씨족이 범씨족보다 우월하기에

곰씨족이 진정한 왕이다

그래서 왕씨성을 가졌고

나라를 다스리는 인물은

겸손하고 검소한 품행

겸검덕(谦俭德)을

갖추어야 하므로

이름을 검소할 검(俭)으로 지었다

그 시기 나라를 다스리는 수령은

제사장(祭祀长)이었기에

제단(祭坛) 坛자로

호를 坛君이라 하였다

호와 이름 모두 완벽한 토템표지다

이렇게 토템학설로

토템신화를 검토하면

그 시대 역사사실이 밝혀진다

 

《삼국유사》를 연구하는

한 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삼국유사》를 연구하는

전문저서가 250종

논문은 5000편이 넘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많은 연구저서 

토템학설로 조명한 것은

한편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안타까와

나는 글 두편을 쓰려 하였다

<삼국유사는 왜 누명을 못벗는가?>

<시조단군은 왜 이름을 잃었는가?>

앞의 글은 이미 초고가 나왔고

뒤 글을 쓰고 있는중

이 급한 원고청탁으로

급히 여기까지 달려왔다

이제 이 글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우리 민족신화사의 엄청난 비극

이 비극의 장본인은 누구인가?

그 쟁론이 분분했던

춘추전국시대에 들여보자

그 많은 날카로운 입들

신화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근원적인 진실을 말하는 것이

신화라는 걸 현명한 학자는 알았다

노자는 신화를 깨닫고

천인합일천지인사상으로

그 유명한 《도덕경》을 펴냈다

하지만 공자는 신화를 부정하여

괴력란신설을 퍼뜨려

노자가 좋아하지 않았다

공자는 또 《상서(尚书)》를 엮으면서

‘成王败寇’(성왕패구)

성공, 승리하면 왕이고 패하면 구

이 엉터리말을 만들어

탁록전쟁에서 패배한 치우를

역적, 마귀로 비난하였다

사마천은 《사기》를 엮을 때

공자의 말을 오히려 괴담으로 여겼지만

김부식때부터 우리는 공자의

말을 성지(圣旨)로 모셨기에

우리의 시조는 참으로 불행해졌다

 

1992년

중국역사학자 임창화(任昌华)는

치우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의 근거는

한 철학대가의 말을 인용

고대의 부락전쟁은 정의, 비정의,

옳고 그름이 없다. 그때의 부락충돌은

융합을 촉진하고 생산발전을 촉진하는

진보적인 역할을 하였다

중앙에서는 임창화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8년 북경 올림픽직전에

탁록에 염제, 황제, 치우 삼조상의

웅위로운 조각상을 세웠다

 

이번에

한국문화번역원과 중국악록사가

손잡은 중국판본 《삼국유사》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계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여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는

토템학설을 받아들여

《삼국유사》를 조명한다면

우리 앞에는 세계에서 자랑할만한

문화유적 보석이 나타날것이고 

잃어버린 시조의 이름도 되찾을 것이며

일연은 민족 문화사에서 높이 모셔야 할 

세계적인 문화인물이란 것을 알게 되어

자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2021.12. 14 장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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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 하이퍼시 명언 10 / 최흔 2021-05-25 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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