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되고 싶었다.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시를 배우고 또 썼다. 시인이 되려면 자격이 필요해 보였다. 계속 ‘등단’을 시도했다. 신문사나 문예지가 주관하는 신춘문예 혹은 신인상 수상의 훈장. 번번이 미끄러졌다. 대학 졸업 후에는 시 쓰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오전에만 아르바이트를 했다. 신문사 편집국의 우편물 수발. 하지만 그렇게 2년을 준비한 시편들이 다시 과녁을 잃었다. 준비하던 한 신인문학상이 재정 부담을 이유로 폐지된다고 했다. 책상 위로 쌓인 시 원고 뭉치는 30㎝ 넘게 자라 있었다. 독자와 만나지 못한 원고 뭉치를 보다 화가 치밀었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원고를 묶어 김수영문학상에 도전했다. 기성 등단 작가의 작품을 심사하는 여타 권위 있는 문학상과 달리 ‘응모 자격 : 신인 및 등단 10년 이내 시인’이란 문구에 용기를 냈다. 스물여섯 이기리는 그렇게 시인이 됐다. 지난 1981년 이 상이 제정된 이후 첫 비(非)등단 수상자. 그의 첫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민음사)가 이달 출간됐다. ‘이기리’는 필명이 아닌 본명. ‘이기리라’는 뜻에서 지었다.

 

27일 만난 이 시인은 “작가가 되려 끈질기게 이리저리 뛰었더니 이런 결과도 있구나 싶다”고 말했다. 민음사가 주관하는 김수영문학상은 2006년부터 기성 시인뿐 아니라 등단하지 않은 예비 시인들에게 문호를 열었지만, 수상의 영광은 줄곧 등단 시인 몫이었다. 지면을 가져본 적 없는 작가 지망생은 서울 구로구의 방에서 시의 탑을 쌓았다. “2018년은 160편, 작년엔 70편 정도 썼어요. 글쓰기에 최대치를 부여한 시간이지만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취업한 친구들은 미래를 확장해나가고 있었으니까.”

 
 

그럴 때면 ‘등단’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서호준⋅김누누 시인을 보고 힘을 냈다. 온라인과 독립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던 두 시인은 올해 각자 첫 시집을 냈다. 온라인 지면을 비롯한 소규모 출판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작가의 자격처럼 여겨졌던 등단 제도도 균열이 발생했다. 제도 바깥에서도 시인은 활동하고, 정세랑·임경선·손아람처럼 등단을 거치지 않고 활발히 독자와 만나는 작가도 많아졌다.

“이번도 등단 못 하면 작품 먼저 선보이겠다”며 다른 독립출판사에도 다른 원고 묶음을 보냈다. 작품만 좋으면 시집을 내주는 곳이었다. 그는 작가를 꿈꾸는 예비 문인들에게 말했다. “쓰고 싶은 글을 어디에든 마음껏 써보세요. 실패와 성공을 떠나 글 쓰는 것 자체가 작가로서의 시작이고 첫걸음이니까요.”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란 시구로 표제작은 시작한다. 친구의 커터칼로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지만, 화자는 자신을 끌어안은 ‘선생님에게 장래 희망을 말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정호승 시인의 시 ‘너에게’를 접하고 시인을 꿈꿨다. “유년 시절 경험한 폭력과,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사랑이나 이별에 대한 보편적인 감정을 시집에 담았습니다.”

 

“평생 글 쓰는 삶을 살아갈 것이기에 이번 수상은 그저 다른 시작인 거죠. 독자로부터 영원히 달아나지 않는 문장들을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집 마지막에 이런 제목의 시를 배치했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