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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문익환
2018년 07월 09일 00시 17분  조회:2250  추천:0  작성자: 죽림
구약학의 대가이자 서울 한빛교회 목회자, 성서번역 책임위원이었다가 민주투사와 통일운동가로 나선 문익환 목사(1918∼1994·사진)는 시인이기도 했다. 시인 윤동주의 친구였던 문 목사는 “하나가 되는 일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와 같은 경구를 남겼다.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성동문화재단, 사계절출판사 등은 7일 서울 성동구 성수아트홀에서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란 제목의 평화콘서트를 열었다. 사계절출판사는 최근 같은 제목의 문 목사 시집을 출간했다.

가수 안치환은 “1987년 여름 문 목사를 신촌 거리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는데 그는 연설하지 않았고 울부짖었다. 열사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울부짖었다”고 회고했다. 영화 ‘1987’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이한열 영결식 연설 이야기다.

문 목사는 1918년 윤동주보다 반년 늦게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한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 소속으로 정전회담의 통역자가 돼 판문점에서 일했다. 1955년부터 한신대 교수와 한빛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1968년 이후 성서번역 책임위원으로 지내다 친구이자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계기로 58세였던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며 반독재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이후 6차례 투옥되며 11년 3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문 목사 스스로 연고를 의식하지 않았지만 안중근 의사는 명동촌 문씨네 사랑방에서 권총 연습을 했고 독립운동가 이동휘 김약연은 그 동네 지도자였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학창시절 은사였으며 ‘아리랑’의 나운규는 명동학교 선배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3·1민주구국선언을 함께한 동지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는 1918년생 4인방인 문 목사, 장 선생, 서남동 목사, 박봉랑 목사를 ‘기장 믿음의 유산’으로 명명하고 “선배들의 신앙고백은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고 회고했다.

/우성규 기자

///국민일보 


 
거리에 선 목사 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민주화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는 시인, 신학자, 목사 그리고 민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선지자였다.
▲ 거리에 선 목사 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민주화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는 시인, 신학자, 목사 그리고 민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선지자였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다"
 ㅡ문익환
 
'하나됨을 위하여' 고 문익환 목사가 분단 상징인 철조망을 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임옥상 화백 작품.  '하나됨을 위하여' All for One 235x266cm 종이부조,아크릴릭 1989
▲ '하나됨을 위하여' 고 문익환 목사가 분단 상징인 철조망을 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임옥상 화백 작품. '하나됨을 위하여' All for One 235x266cm 종이부조,아크릴릭 1989ⓒ 임옥상 화백 제공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산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 마음이었거든
한 마음
그래 그 한 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 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 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적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구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을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_ 문익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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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8년 06월 05일 (화)  김정형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문익환(1918~1994) 목사가 유원호, 정경모와 함께 일본 도쿄와 중국 북경을 거쳐 북한의 평양 땅을 밟은 것은 1989년 3월 25일 저녁이었다. 문익환을 태운 조선민항기가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안착하는 순간 해방 후 줄곧 철옹성처럼 높고 단단하게 버티고 있던 분단의 벽은 한순간에 무력화되었다. 문익환은 도착 일성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윤동주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친 장준하의 마음으로 김일성 주석을 만나러 왔다”고 성명을 낭독했다.

▲ 문익환

노구의 문익환을 북한으로 향하게 한 것은 통일 문제가 더 이상 정권 안보용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었다. 그는 남북을 잇는 창구 단일화의 금기를 깨기 위해 방북을 단행했다. 김일성을 만나 통일방안을 모색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9개항의 공동선언을 채택하는 등 거침없이 이어지는 그의 방북 활동은 냉전의 분단 상황 하에서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몰고 왔다. 방북 일정 하나하나가 모두 분단구조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호불호를 떠나 국민의 첫 반응은 당혹감과 놀라움이었다. 뒤이어 격렬한 논란이 이어졌다. 예상대로 극과 극이었다. 보수 쪽에서는 ‘환상적 통일주의자’, ‘돈키호테’라고 폄훼했고, 진보진영 일부에서도 “공안정국을 불러 전체 민중운동의 이익을 훼손하게 된다”며 ‘소영웅주의적 돌출행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진보진영 대부분은 ‘통일을 위한 선각자적 결단’으로 치켜세웠다. 
문익환은 4월 3일 평양을 떠나 북경과 도쿄를 거쳐 4월 13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속 영장이었다. 1976년 명동성당 ‘3·1 구국선언’ 사건으로 시작해 유신헌법 비판 성명(1978), YWCA 위장결혼 사건(1980), 5·3 인천사태와 서울대 강연(1986)에 이은 5번째 구속이었다. 법원은 그의 방북을 ‘감상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행동’으로 규정,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문익환은 수감생활 19개월 만인 1990년 10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1991년 6월 이른바 ‘분신정국’에서 장례위원장을 맡았다가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되었다. 6번째 투옥이었다. 생전에 그의 자택 거실 벽에 붙어 있는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감옥에 가라’는 글귀처럼 문익환은 이렇게 12년 동안 차가운 감옥을 드나들었다.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북간도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당시 명동은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애국지사들이 국내에서 만주와 연해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었다. 그곳에서 어울려 놀던 친구가 윤동주, 송몽규였다. 1919년 3·1 운동이 터졌을 때 그의 고향 명동촌에서도 ‘조선 독립만세’의 봉화가 타올랐다. 아버지는 구속되고 어머니는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 생후 9개월된 문익환은 어머니 등에 업혀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문익환은 캐나다 선교부가 간도의 용정에 세운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1936년 평양 숭실학교로 전학했다. 하지만 5학년 때인 1932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학교를 자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용정의 광명중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도쿄의 일본신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나 일제가 학도병을 강요하자 “일본을 위해 피를 흘릴 생각은 없다”며 1943년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옮겼다.

평탄했던 삶 장준하의 의문사 후 소용돌이 쳐

만주에서 선교사로 일하다 해방을 맞은 그는 가족과 함께 걸어서 1946년 8월 서울에 도착했다. 1947년 한신대를 졸업하고 1949년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유엔군의 통역관으로 정전회담에서 활동했다. 종전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프린스턴신학교를 마치고 1955년 봄 귀국했다. 이후 한빛교회 목회자 겸 한신대 교수로 활동하던 그가 매진한 것은 성서 번역이었다.
1968년 신·구교 합동 공동성서 번역에 참여하고 1976년 대한성서공회 성서번역위원장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이때 번역한 성경이 ‘공동번역 성서’로, 천주교에서는 2005년 ‘성경’을 내기까지 사용했다. 신구약 66권과 외경(가톨릭에서는 제2의 정경) 9권을 망라한 공동번역 성서는 1977년 4월 출간되었다.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이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하느님’(구교)과 ‘하나님’(신교)으로 각기 달리 불리던 신의 명칭이 ‘하느님’으로 통일되었다. 그동안 일어와 중국어 성경을 중역한 데서 빚어진 혼란도 거의 해소되었다. 고유명사는 원음에 충실하게 통일하고 그동안 높임말로 표현되던 예수의 말씀은 모두 예사말로 바꾸었다. 
8년간의 성경 번역은 문익환을 시인으로 만들었다. 시인은 죽마고우 윤동주와 함께 어린시절부터 꿈꿔온 소망이었다. 문익환은 1973년 6월 시집 ‘새삼스런 하루’를 펴냈다.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꿈을 비는 마음’, ‘두 하늘 한 하늘’,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등의 시집을 남겼다. 
고상하고 평탄하던 삶은 1975년 8월 17일 장준하의 의문사 후 소용돌이쳤다. 50대 후반의 ‘늦깎이’는 스스로 아호를 ‘늦봄’이라고 짓고 숨막히는 유신체제에 뒤늦게 도전장을 냈다. 1976년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되었을 때도 “구국선언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장준하의 혼이 시킨 것”이라며 의연하게 행동했다. 이후 그는 ‘재야의 대부’로 불리며 1980년대를 뜨겁게 저항하다가 1994년 1월 18일 76년간의 고단하지만 희열에 가득찬 생을 마감했다.
문익환의 죽음에 북한과의 갈등과 북한의 악의적 비방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은 그로부터 17년이 지나서였다. 당시 문익환 밑에서 통일운동을 하던 하태경이 2011년 자신의 책 ‘민주주의에는 국경이 없다’에서 문익환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해체하려다가 ‘안기부 프락치’로 몰려 화병으로 숨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문익환은 한동안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993년 “범민련으로는 북한과 대등할 수 없다. 북한과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민족회의를 만들어야 한다”며 범민련이라는 조직을 벗어나 새로운 합법적 통일운동체인 ‘통일맞이 7천만 겨레모임’을 구상했다. 그리고 1993년 12월 김일성에게 “범민련을 해체하고 통일 운동을 위해 더 크게 태어나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인 백인준이 답신을 보내 “범민련의 해체나 위상 약화를 통한 새로운 통일운동체의 결성을 반대한다”며 문익환을 안기부의 사주를 받아 범민련을 해체하려는 안기부 프락치로 몰아갔다. 이런 사실이 지하조직에 퍼지면서 종북(從北) 세력의 문익환 때리기와 비난이 본격화했다. 
사망 당일(1994년 1월 18일) 문익환은 서울의 한 식당에서 재야인사들과 점심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통일운동의 향후 노선을 놓고 재야인사들과 심하게 다퉜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내가 안기부 프락치냐”라고 고함을 치다가 밥알이 기도를 막아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환자가 많아 입원을 못하고 차 안에서 잠깐 회복한 뒤 집으로 들어갔다가 그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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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각주 1)

저에게 있어 ‘통일’이라는 사회선교적 과제는 70년대 유신독재라는 격동의 시절 한신대 재학 중 김재준, 함석헌,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등, 여러 훌륭하신 스승들의 영향을 통해 예수신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 군 생활 3년간의 철책선 근무는 민족모순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80년도 초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해방신학적 방법론을 중심으로 남미, 흑인, 여성관련 담론과 함께 역사적 예수 연구에 기반 한 민중신학과의 대화를 학문적 과제로 삼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과는 감히 비교할 순 없지만, 그간 교회와 사회의 간극을 좁힘과 동시에 교회의 경계를 넘어 사회와 통일운동에 깊게 관여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미국에서부터 ‘빨갱이목사’로 불려왔으며 사람들이 간혹 문익환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계셨다고 착각하는 향린교회 목사로 시무를 했으며, 문 목사님께서 초대이사장을 지내셨던 전태일 기념사업회 이사장도 역임한 바 있으며, 615남측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통일운동 조직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다 아시다시피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하였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향한 북미정상회담이 6월 12일로 잡혀있습니다. 물론 북미정상회담의 결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설사 무산된다 하더라도 평화통일을 향한 거보(巨步)는 결코 돌이킬 수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는 역사의 필연으로 문 목사님의 ‘통일은 다 됐어!’라는 30년 전의 카이로스적 발언이 오늘의 크로노스 시간 안에서 구체화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클로스 민중주체’의 역사적 관점에서 1980년대 중반, 재야 민주세력 최대 결집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연’) 의장으로 문 목사님께서 두 번이나 선출되었을 때, 당시 체육관의 거수기들에 뽑힌 관(官)의 대통령 대신 민(民)이 뽑은 대통령이라는 뜻에서 ‘민통령’이라 불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29년 전 1989년 3월 28일 문 목사님은 방북을 통해 김 주석과 통일방안 합의를 도출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 목사님이야 말로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1)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

1) 해방의 신학과 문익환

해방이라는 단어는 1945년 이래 우리역사를 가로지르는 핵심단어이며, 문익환 목사 또한 함께 동참했던 민중신학의 중심명제이자 기독교성서역사의 주요언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 목사님의 신학사상을 해방의 신학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문익환 평전』의 저자 김형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시인, 번역가, 언어학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예언자로서, 문익환은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불꽃같은 생을 살았다.” 그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아 대학로에서 진행된 노제에서 그의 영정이 움직이자 누군가 격정을 못 이기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해서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문익환 목사는 단순히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소속의 목사로서 사회선교와 통일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아니라, 이 시대가 낳은 진정한 예언자였다.

목사님의 독특한 삶은 그의 독특한 가족배경에 기인한다.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이 흔들리던 1899년 2월 28일 관북의 네 가문 1백 41명은 북간도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키울 것을 약속하고 함께 국경을 넘는다. 문익환의 고조부 문병규는 이 새 공동체의 웃어른이었다. 일제시대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약연, 의사 안중근 등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치고 문씨네 식객이 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장로와 전도사를 거쳐 평양신학교 졸업 후 목사가 된다. 당시 캐나다 선교부는 미국 선교부와는 달리 장차 조선의 교회는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여겨 유능한 인재를 눈 여겨 보고 있었는데, 문재린이 그 첫 수혜자가 되어 캐나다 유학을 하게 된다. 유학 후 용정의 한 교회를 섬기던 문재린 목사는 3.1 봉기에 가담했던 일로 일본영사관과 헌병대에 구속된 이후, 조선공산당 그리고 소련사령부에 차례로 체포를 당해 옥고를 치르면서 죽음의 문턱을 여러 차례 오고간다. 이는 당시 북간도의 현실이 외세가 난무하는 살벌한 전쟁터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문익환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문 목사님이 방북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을 당시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이 글은 재판정에서 어머니 김신묵 여사에 의해 직접 낭독이 되었다.)

“재판 시작하기 전에 내가 아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 아들은 72살이고 나는 95살이오. 익환아! 너는 우리 7천만 민족을 위해 일하고 감옥에 들어갔으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심정으로 재판을 받아라! 익환아, 그것을 기억해라! ...”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문익환의 어머니 또한 젊은 시절 기독교 여성해방 운동에 힘입어 ‘고만녜’ 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신묵이라는 새 이름을 갖는다. 이때 명동촌에서 믿을 신(信)자 돌림으로 이름을 갖게 된 여성이 50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기독교 신(新)여성운동이 얼마나 활발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신묵은 이 ‘신’자 여성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명동여학교 동창회장과 여전도사로 일하면서 용정 만세시위에 참가한 지도자였다. 문익환과 동생 문동환 형제의 민족사랑은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이었다.

2) 예수 가문, 그리고 문익환 가문

이 대목에서 나는 문익환 목사를 ‘오늘의 (작은) 예수’로 이해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가문과 문익환의 가문을 연계시켜보려고 한다. 물론 역사적 예수라고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가족 얘기는 극히 작은 몇 구절에 불과하기에 신학적 상상력을 더해 얘기를 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얘기는 서구의 전통 성서 해석 방법인 기록된 문자에서 오늘의 상황을 바라보는 ‘문자주석’(exegesis) 방식이 아닌 오늘의 상황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상황주석’(eisegesis) 방식이다. 강연자는 ‘문자주석’을 넘어선 ‘상황주석’이야 말로 예수께서 ‘사람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바, 성서의 본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진리 추구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족 또한 문익환의 가족과 같이 제국의 식민지 지배 하의 피압박민으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예수 탄생에 관한 얘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둘 다 동정녀 탄생을 말하지만, 마태가 아버지 요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누가는 어머니 마리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우선 관심하는 것은 예수의 가족이 헤롯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을 갔다는 마태의 얘기이다. 물론 마태는 그의 전체 신학 틀을 모세 오경에 맞추고 있기에 편집사적 관점에서 예수가 제2의 모세로서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해방의 역사를 펼쳐 나갈 메시아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보다 실(實) 역사적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문익환의 고조부로 시작하는 가족사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대한민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하였듯이 예수의 가문 또한 요셉 이전 세대에 다윗 왕조의 회복과 독립을 꾀해 로마와 헤롯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 요셉 또한 단순한 목수가 아니라 아들 예수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을까? 물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는 교리에 물든 사람이라면 필자의 얘기에 대해 코웃음을 치겠지만, 역사적 예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해방을 염원하는 문익환의 정신세계가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듯, 예수의 정신세계 또한 그의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은 그리 큰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언제나 한반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압박과 지배를 받았고, 그래서 외세 어느 한쪽이 지배세력이 되면 유대는 다른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과 해방을 추구해 왔다. 우리나라 근세 짧은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중국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을 때는 갑오개혁이 보여주듯 일본에 기대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고, 일본이 지배세력이 되었을 때는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미국의 세력을 빌리고자 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 탄생 직전 유대왕국은 헬라제국의 후예들인 북방 시리아의 셀류크스 제국과 남방 애굽의 프톨레미 제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바 있으며, 예수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방 세력을 대표하는 로마 제국의 지배가 가시화되자 이미 바벨론 제국의 포로에서 해방을 안겨주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인 파르티아 제국의 힘에 의지했고 이 희망은 동방박사의 출현으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한때 파르티아제국은 로마제국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낸 적도 있었고 이때 헤롯대왕은 로마로 피신을 가기도 했었다. 따라서 요셉 가족의 애굽 피신은 단순한 도피로 보기보다는 문 목사님의 가족 이야기에 견주어 볼 때, 독립운동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복음서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함일까 아니면 요셉의 죽음 또한 십자가라는 정치적 죽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머니 마리아의 얘기로 옮겨가 보자. 신학자 피오렌자는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라는 기도에서 ‘비천한 신세’를 로마군에 의한 강간 임신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갈릴리 민중 전체가 갖고 있는 반제국반식민 저항운동을 더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마리아가 노래하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은 배불리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으로 돌려보내셨다’는 구절이 유대왕국의 독립과 민중혁명을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단순한 희망사항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마카비 형제들에 의해 실현된 바 있다. 어린 문익환이 고조부부터 이어지는 선조들의 투쟁의 역사를 들었던 것처럼 어린 예수 또한 선조들의 영웅적인 투쟁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갈릴리가 마치 예루살렘의 유대주류사회로부터 밀려난 변방이었듯이 북간도 또한 변방이었다. 변방은 밀려난 자들의 한이 넘치는 땅이지만, 이 한은 공동체적으로 해방의 새 역사의 꿈을 키우는 혁명의 용광로였다. 문익환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그의 37년간의 삶은 로마제국 당시의 갈릴리의 예수가 33년간 겪었던 그 억압의 삶 자체였다. 따라서 예수가 그러했듯이 문익환 또한 출애굽으로서의 민족 해방,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인간 해방은 삶 자체의 지향이었다.

(2) 시 신학 (Poem Theology)

1) 문익환의 다양한 신학 훈련

문익환은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요절한 윤동주 그리고 반 박정희유신정권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사상계의 주필 장준하와는 명동 은진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중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 퇴학을 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신학교에 입학한다. 평양신학교는 근본주의적이니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학이 활발했는데,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던 문익환에게 성서비평학은 받아들이기 힘든 학문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교수의 충고를 듣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이후 학병 거부로 인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옮겼다가 해방 후 1947년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은 문 목사는 교회를 섬기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부를 접고 귀국 자원입대하여 통역장교로 일하다 휴전 후 1954년 다시 프린스턴 신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쳤다.

이후 한빛교회 초대목사로 봉직하는 가운데,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면서 기독교사상을 비롯한 여러 지면에 설교와 글을 발표한다. 이어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에서 1년간 공부를 한다. 공부한 신학교만 만주 일본 미국의 모두 저명한 다섯 개 학교이다.(각주 2) 당시 이렇게 다양한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이 또 있었을까? 이는 문익환이 처한 시대의 난국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지만, 어쩌면 이는 그의 신학 또한 영혼처럼 자유로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2) 성서번역가 문익환

문 목사는 51세가 되던 1968년, 개역한글판 번역이 한자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독자에겐 이해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세계 최초, 개신교•가톨릭 공동성서번역 작업에 책임위원으로 8년간 참여한다. 성서번역에 매진하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고 히브리 성서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시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56세에 『새삼스런 하루』라는 첫 시집을 낸다. 이 과정에서 문익환은 제국들의 침략과 압제 그리고 추방 속에서도 야훼 신앙을 고백했던 시편 기자들과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서 우리 한민족이 펼쳐가야 할 신앙과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중반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이는 전통적인 모더니즘 시대의 체계 조직신학, 다른 말로는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으로 구분되는 백과사전적 조직신학(encyclopedia systematic theology)에 대비되는  ‘비체계로서의 신학’이라 할 수 있으며, 이야기 신학 혹은 ‘이야기 조직신학(Narrative systematic theology)’ 등으로 명명된다. 히브리성서나 헬라성서의 대부분은 이야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는 물론 모세 율법의 상당부분도 역사 이야기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구전전승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동시에 복음서에서 예수의 말은 비유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이야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예수는 민중들의 언어로 하느님 나라 이야기를 전했으며, 복음서 기록 이전 순회 이야기꾼들에 의해 전승되고 선포되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문학은 크게 이야기와 시로 구분할 수 있다. 이야기 신학에 비교하는 ‘시 신학(Poem Theology)’라는 용어는 아직 신학 세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예수가 시인이었다는 주장은 많지만, 시 신학이라는 용어가 없는 것은 ‘신학(Theo + logos)’이라는 학문 자체가 ‘logos(말 곧 논리성)’를 기반으로 하는데 반해 시는 논리를 뛰어넘는 비논리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반드시 논리학의 틀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서구신학의 주장이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희랍의 논리성에 기초한 철학적 개념 때문이며, 하느님의 나라를 기독교왕국(christendom)으로 치환하려는 서구기독교가 상대적으로 예수보다는 바울을 선호하여 왔기 때문이다. ‘예수신학’이라는 말은 없어도 ‘바울신학’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신학은 근본적으로 신의 절대 영역을 인간의 상대 영역인 언어로 제한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체 모순이다. 오히려 문 목사님은 시야말로 과학적이라고 규정한다.

“시작이란 이미지를 정확하게 그리고 그 이미지로 표현된 감정의 빛깔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이에 맞는 말을 찾아내는 일에서 시작되거든요. 이점에 있어서 시는 철두철미 과학적이에요. 시는 언어의 예술이기 때문에 적절한 말이 없으면 새 말을 만들어도 돼요.”(각주 3)

인간 역사 속에서 시와 종교는 거의 같은 형태로 내려왔다. 예배의 무게 중심이 개신교에서는 설교에 있지만, 이를 제외한 찬송과 기도는 모두 시어(詩語)이다. 복음서의 헬라어를 예수가 사용했던 아람어로 역번역했을 때, 학자들은 예수의 언어가 본래 시어였다고 논증한다. 마태복음의 5-7장의 산상수훈의 언어들은 대표적이다. “저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빠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저 들에 피는 꽃을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자연을 노래하는 글은 시어체일 수밖에 없을뿐더러, 비유 곧 이야기로 분류되는 예수의 짧은 비유 말씀들은 거의 대부분이 히브리 시의 특징인 대비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곧 이야기가 아닌 시인 것이다. 히브리 성서는 율법과 예언과 지혜 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혜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편이다. 히브리 성서의 중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예언서 중 후기예언서는 어떠한가? 대부분이 시어체이다. 결국 히브리 성서의 40%가 시다. 성서의 시 신학을 오늘에 몸소 재현한 이가 문익환 목사님이다.

왜 목사님은 시를 그토록 사랑했는가? 시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시는 대부분의 설교가 지향하는 일방적 방식인 가르침과 설득보다는 읽는 사람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여백이 있는 대화의 방식이다. 하나 둘 셋의 삼단논법을 통해 상대방의 입을 닫는 결론을 끄집어내려고 하기 보다는 예상하지 못한 성찰 단어를 통해 보다 높은 단계인 깨달음의 세계로 상대를 이끌어낸다. 그건 시인들 자신들이 경험하는 그 영적 혹은 신비의 세계가 언어로 결코 설명되거나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익환은 서구의 전통신학의 훈련을 받은 신학자이긴 했지만, 본래 그의 품성이 갖고 있는 이상형으로 말미암아 언어의 틀을 깨는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조직신학 서적으로 분류되는 『히브리 민중사』도 매장마다 종국에는 시로 끝맺고 있다. 혁명은 감성이 주도하는 시적 통찰력에서 일어나지,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3) 시편 1편 번역 비교와 우리말로 신학하기

시편은 무엇인가? 시편은 삶의 현실 앞에서 김정을 표현하는 운율을 담은 시이자 하느님과의 대화이자 기도이다. 시편은 새 역사를 향해가는 믿음 위에서 출발하며, 시편 속에서 우리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들 가운데 현존하면서 생명과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에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렇게 함으로 청중 자신들의 삶과 역사 안으로 초대한다. 그렇다면 시어(詩語)가 우리의 가슴을 흔드는 순수 우리말일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다. 문 목사님 또한 이 부분에 엄청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시편 1편을 공동번역과 이전 개역한글과 비교해 보자.

시편은 노래로 하는 시이자 기도이다. 반복되는 운율과 박자가 중요하다. 시는 전체 내용도 중요하지만, 하나하나의 단어가 갖는 함축성은 더욱 중요하다. 시에서 단어 하나는 전체의 생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개역과 공동번역의 첫 단어는 그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하면서 하나의 서술체로 변해가는 단어와 그냥 “복 되어라!” 하는 선언의 차이는 단순한 단어가 차이가 아니라 시 전체의 생명을 좌우하고 있지 않는가?

구조상으로 보더라도 개역은 ‘복 있는 사람은’ 으로 시작하여 ‘묵상하는 자로다/ 하리로다/ 같도다/ 못하리로다/ 망하리로다’ 곧 ‘다.’ ‘다.’로 끝나는 다섯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딱딱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공동번역은 중간이 끊어지지 않는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 되어라!” 하는 축복 시어로 시작하고 또 중간에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하는 감탄 시어로 연결되면서 ‘다’(보살피신다)라나 결어는 끝에 딱 한번 나온다.

문법적으로 보더라도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려면 1절의 의인이 악인의 길에 가까이 다가가는 세 개의 형용구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개역은 ‘좇지 않는다’라고 하는 강한 어조가 맨 앞에 등장하므로 이후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가 갖는 의미가 퇴색하고 말았다. 반면 공동번역은 ‘가지 아니하고,’ ‘거닐지 아니하며,’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점진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 역동감을 더하고 있다.

끝으로 시어를 보자. 개역의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리고 공동번역의 “제 철따라 열매 맺으리,”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를 비교하면 후자가 주는 표현의 생동감은 비할 바가 없다.

이후에 출간된 개역개정판과 표준새번역도 개역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표준새번역에서 약간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한갓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겨가 ’흩날린다’는 문구와 ‘까불린다’는 문구를 비교해 볼 때, ‘까불린다’는 표현이 우리말의 강점을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겨가 악인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더 깊은 신학적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 발제자가 시무했던 향린교회는 홍근수 목사시절부터 지난 25년 동안 국악예배를 드려오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서는 얘기할 게 많지만, 시편에 관련해서 한마디만 하고자 한다. 예배 시에 시편교독문을 읽는데, 본인은 원시편이 노래로 하는 것이기에 이를 국악풍의 짧은 가락으로 인도자와 회중이 교대로 부르는 형식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담당 교인들과의 작업을 통해 만들었다. 이때 만약 문 목사의 공동번역 시편이 없었더라면 많은 부분 생동감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2013년 부산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에서 “The Korean Traditional Hymn in Connection with Ecumenical Spirituality”란 워크샵을 향린교회 단독으로 주최한 바 있었다. 당시 보통의 워크샵은 많아야 2, 30명인데, 여기에는 200명이 참가 신청을 하고 큰 호응을 얻은 바가 있었다. 예배 전체 틀을 국악으로 바꾸는 일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일단 시편 교독문이라도 국악풍의 가락에 공동번역의 시어를 사용하면 한국교회 개혁에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 지난 4월26일 수유동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목요강좌에서 문익환 목사의 신학에 대해 강연하는 필자 조헌정 목사

목사님의 회고에 따르면 중학생 시절 학교 문예지 편집 일을 맡았던 윤동주가 목사님에게도 시 한편을 써내라고 하여 한편을 보냈더니 ‘이게 어디 시야’하면서 되돌려 받게 되면서 시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번역에 참가하면서 시를 쓰게 되는데, 그러면서 상상하기를 만약 동주가 살아 있어 시편 번역을 도와주었더라면 자신은 영영 시를 써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각주 4) 문 목사님께서 히브리 성서 정신에 바탕을 두고 조선인의 정신과 감성을 융화하여 얻어지는 가락과 언어를 발굴함으로서 투명하고 섬세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구축한 것을 생각할 때, 역사의 모순을 느끼게 한다.

문익환의 짧은 시 두 개를 읽어보자.

예수의 기도 6(각주 5)-

새벽 하늘 퍼렇게 멍든 가슴으로 와락 다가서시는이시여
가까워지다 멀어지다 멀어지다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로
이 새벽에도 이 외로운 감방으로 찾아오시는이시여
당신은 오직 사랑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진실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희망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자유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우리의 노래만 들어도 목이 메이시죠
우리의 기도만 들으면 눈앞이 캄캄해지시죠
아 -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당신의 슬픔에 얻어맞으며
노래도 잃고 기도도 막히는 바닷가 모래알들에 지나지 않는가요

익히 잘 아는 꿈을 비는 마음(각주 6)의 시작 부분이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각주

(각주 1) 본 강연에서 신의 호칭은 공동성서번역을 따라 ‘하느님’과 ‘야훼’로 부르고, 신구(新舊)라는 언어가 규정하는 무의식적인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 구약성서는 제1성서 혹은 히브리성서로 신약성서는 제2성서 혹은 헬라성서로 부른다. 필자가 굳이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ᄒᆞᆫ’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에게 있어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아래 ㆍ의 발음은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 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ㅏ’ 소리 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둘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강조와 토착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국문학적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자를 붙이는 것 또한 맞지 않다. 현재 세계 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 대신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각주 2) 이 중 세 개의 신학교가 필자와 겹친다.
(각주 3) 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서울: 삼민사, 1991), 139쪽.
(각주 4) 문익환, 『혁명의 해일』 (서울: 청노루, 1988), 118쪽.
(각주 5) 상게서, 36쪽.
(각주 6)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서울: 실천문학사, 1992).

/조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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