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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그 뒷이야기???...
2018년 11월 24일 01시 18분  조회:2865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백화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나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중년 이상의 한국인이면 대개는 기억하고 있을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의 들머리다. 이 노래가 어떤 경로로 한국의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됐는지 알 수 없지만, 윤동주(尹東柱·1917~45) 시인이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뜻밖이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는 미국의 백인 작곡가 제임스 브랜드가 만든 곡으로, 흑인노예가 고향 버지니아를 그리워하는 심경을 그렸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곡 연도는 1911년이다. 당시 여건을 감안할 때 윤동주 시인에게 매우 빨리 전해진 셈이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타관(他關)’ ‘객지(客地)’ ‘이역(異域)’ 같은 단어들이 주는 울림은 반세기 이전인 윤동주 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그 무렵의 타관과 객지는 고달픔이나 서러움의 상징이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이라는 짧은 생애 중에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객지에서 생활했다.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로 이어지는 긴 유학생활 끝에 감옥에서 객사하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것. 오죽하면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1948년) 서문에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고나! 29세(한국식 나이 계산)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썼을까.

 

윤동주를 포함해 3남1녀의 형제자매 중 유일한 생존자로 1986년에 호주로 이민 와 살고 있는 여동생 윤혜원(82·시드니 우리교회 권사)씨는 오빠가 즐겨 부르던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에 얽힌 얘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느라 타지를 떠돌던 오빠가 고향 북간도와 부모형제를 그리면서 자주 부르던 노래였죠. 서울과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방학을 맞아 북간도에 돌아오면 동생과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아리랑’ ‘도라지’ 등의 민요와 함께 그 노래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조무래기들을 빙 둘러앉혀놓고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노래 부르던 동주 오빠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남의 나라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의 운명을 이 노래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의미심장하다.

 

윤동주 시인이 떠난 지 어언 60년. 그런데 이번엔 그가 남긴 시편들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부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윤동주의 시들이 어휘나 시행(詩行) 또는 연(聯) 배치 등에서 영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교과서나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들이 그의 육필원고와 영 다르다. 그래서 “윤동주가 원고지에 쓴 원래의 형태로 그의 시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16일 호주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에 강사로 초빙된 윤동주 연구가 홍장학(52·서울 동성고 교사)씨는 이러한 주장의 선봉에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사후에 늘어난 유작들

 

 

1999년 삼일절을 기해 윤동주 시인 유족들의 용단으로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이 세상에 나왔다. 1948년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이 발간된 지 51년 만의 일이다.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고독하게 살다 갔다. 그러나 오늘날 윤동주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의 생애를 우리 사회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동생인 고(故) 윤일주(1985년 작고·건축가, 시인) 교수를 비롯한 유가족과 연희전문 시절의 지기(知己)인 정병욱, 강처중 같은 이들이 기울인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윤일주와 정병욱은 윤동주의 유작 31편을 모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했는데 이는 발간 직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유고 시집은 그동안 윤동주 문학 연구의 유일무이한 원전으로 취급됐고,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윤동주 연구자들이 여기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 수백 편의 논저를 발표해왔다. 오늘날 이 시집은 일본어, 중국어, 영어는 물론 불어, 체코어로도 번역되어 출간됐다. 윤동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계속)

 

 

                 윤동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윤동주의 묘를 찾게 한 사진 : 1945년에 장례를 지낸 이후 윤동주는 잊혀졌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심지어 시인이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다가 1984년 봄, 미국에 살고 있는 의학자 현봉학 선생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해 8월에 중국을 방문, 옌볜의 유지들과 자치주정부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갖지 않아 그가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또한 친동생인 윤일주 교수가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중, 옌볜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12일 옌지에 도착했는데, 옌볜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오오무라 교수는 공안당국의 허가를 받아 5월14일 옌볜대학 권철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 강사와 역사에 밝은 룽징중학의 한생철 교사와 함께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지고 간 덕분에 묘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로 단장한 윤동주의 묘소 : 1945년 3월6일 윤동주의 묘가 처음 들어섰을 땐 봉분만 있었다. 같은 해 6월14일 묘비가 세워졌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의 현봉학 선생을 주축으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연증(捐贈)하고, 룽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했다. 2003년에 두 번째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윤혜원·오형범 부부의 주도로 두어 달간 공사가 진행됐다.

 

윤동주의 마지막 시 : 윤동주가 일본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은 시는 1942년 1월24일에 쓴 ‘참회록’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의 마지막 시는 ‘쉽게 씌어진 시’이다. 이 시는 1942년 6월3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또 다른 작품이 남아 있을 거라고 전해줬다.

 

1947년 이들 부부가 옌볜 생활을 정리하고 함경도 청진에서 살고 있을 때 교회에서 우연히 윤동주의 친구 박춘애와 김윤입을 만났다. 그때 김윤입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시 1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가지고 있다. 고향에 가면 그것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러다 이들 부부는 기다릴 형편이 못 돼 서울로 월남하게 됐다.

 

 

 

그러니까 윤동주가 감옥에서 김윤입이란 친구에게 보낸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다. 윤동주가 쓴 사실과 그 작품을 받은 사람까지는 확인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윤동주의 누이동생 부부가 보관자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의 실재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김윤입이 옥중에서 윤동주가 쓴 마지막 작품을 잘 보관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1942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해 오늘 날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 처럼.

 

 

                                   ‘영원히 빛날 한 점의 별빛’

 

 

 

여러 나라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의 60주기 추모행사 소식이 호주에 전해졌다. 윤 시인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여동생 윤혜원씨가 호주 시드니에서 19년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출생지인 옌볜 자치주에서 전해온 소식부터 전한다. 옌볜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개최한 ‘윤동주 서거 60주기 추모 모임’ 소식인데, 표현방식이 특이해 분량만 줄여 원문대로 옮겨본다.

 

[오늘은 2월16일,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 서거 60주기 기념일이다. 옌볜인민출판사 ‘중학생’ 잡지 편집부와 옌볜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눈 내리는 야외 룡정(龍井) 동산의 윤동주 시인 묘소에서 뜻깊은 추모모임을 가지였다.

 

조성일 회장은 추모사에서 “윤동주는 별을 노래한 시인답게 세대와 국경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빛날 한 점의 별빛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주기에 손색이 없는 영원히 아름다운 별의 시인”이라고 격조 높이 평가하면서 “자라나는 새 일대인 중학생들은 대를 이어 윤동주의 넋을 기리면서, 윤동주와 같은 시인을 키워낸 옌볜땅에서 제2의 윤동주 제3의 윤동주로 성장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인상적인 것은 윤동주 시랑송. 석화 시인이 윤동주의 ‘서시’를 랑송한 뒤 전체 참가자들이 함께 ‘서시’를 재차 랑송하여 시랑송을 고조에로 이끌었다. 초·고·중 대표 녀학생 5명도 윤동주의 시 ‘슬픈 족속’ ‘쉽게 씌어진 시’ ‘십자가’를 읊으면서 윤동주 시랑송에 열을 올리였다.

 

정오가 되어 추모모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참가자들은 추위에 부르르 떨었다. 숫눈길을 헤치며 룡정시가지에서 늦게야 점심상을 받았을 때 연길고급중학교 1학년 허은희 학생이 “날씨는 추웠지만 가슴은 뜨거웠다”고 속셈을 털어놓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였다.]

 

<계속>

 

 

          윤동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그의 시의 저항성은 시인의 주체의식의 사상적 핵이며 시의 령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항성은 후기시에 이르러 내면화에로 전향함으로써 전민족을 일제와 대결하는 투쟁에로 불러일으키지 못한 제약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극성한 객관적 요인 외에 그가 줄곧 학창생활을 하면서 인민대중의 투쟁과 격리되었고 그의 인생관에 강력한 영향을 준 기독교의 교리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관으로 인한 것이였다.

그의 시는 기법상에서도 남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상징성은 시의미의 내포와 외연을 몹시 넓히고 깊게 했으며 저항의식을 미묘하게 살려나갔다. 그것은 시의 상징성이 갖는 의미의 다의성, 암시성, 함축성, 모호성을 잘 살리였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 곧잘 하던 오빠

 

 

 

 

해마다 2월이 오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있다.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차마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내던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으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숨죽여야 했던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윤씨의 아픔과 눈물을 굳이 과거형으로 쓴 것은 언제부턴가 그 눈물자국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슬퍼하기보다 오빠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의 고고한 시편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려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북간도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공산당을 피해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주인공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중기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시가 31편밖에 실려 있지 않다. 현재 116편이 게재된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긴 채 월남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오빠 얘기만 나오면 말머리를 돌리던 윤혜원씨는 윤동주 시인 60주기를 맞는 2005년을 기점으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빠의 추모행사를 통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화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그중 하나가 ‘오빠 윤동주의 장난기’다. 세상엔 입을 꼭 다문 사진만 공개되어 윤동주는 과묵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데, 늘 조용하던 그가 유일한 여동생인 윤혜원씨에게는 무척 짓궂은 오빠였다는 것이다. 윤씨는 “앞으로 동주 오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공개하겠다. 그것들은 오빠의 밝은 내용의 시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껏 언론의 인터뷰를 한사코 피해온 그는 “동주 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 연유로 윤씨는 남편 오형범씨와 함께 서울, 부산, 필리핀, 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단식투쟁 끝 문과 진학

 

 

 

 

윤혜원씨는 1924년생으로 윤동주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독자인지라 대를 이을 장손 동주의 출생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한 윤동주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7년 만에 딸 혜원씨를 얻었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시절은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때다. 다음은 윤씨의 회고.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젖이 부족하자 동주 오빠는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 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전해듣기로는 동주 오빠가 열한 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는 워낙 책읽기를 좋아해서 오전 일찍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소떼를 몰고 산등성이로 올라가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오빠가 입었던 삼베옷 잠방이와 밀짚모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계속)


 

      윤동주, 신사머리 왜 삭발했을까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는 왜 머리를 삭발했을까.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친 윤동주의 졸업사진을 보면, 그는 당시 ‘신사머리’라고 불렸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1942년 7월, 일본 릿교(立敎)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윤동주는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이다. 

최근 한 일본 여성이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윤동주의 릿교대 시절에 대한 자료를 찾아내면서 그의 삭발이유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지난달 31일 서울 장충동 한국현대문학관에서 열렸던 ‘윤동주의 시를 읽는다·2002년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동경)’의 회원인 야나기하라 테츠코(楊原泰子)씨. 

윤동주의 시에 깊이 매료돼 있던 그는 1988년 소설가 송우혜씨가 펴낸 ‘윤동주 평전’(세계사)의 일본어판(1991)에서 릿교대학을 다니던 무렵, 윤동주의 머리 모양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봤다. 같은 대학 출신이었던 그는 1942년 릿교대학신문을 샅샅이 뒤졌고 4월초 발행된 신문에서 ‘4월 중순, 학생 단발령 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윤동주는 전시상황에서 학교측이 내린 단발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아야 했던 것.

테츠코씨는 당시의 자료를 정리한 ‘윤동주의 릿교대학 시대’라는 글을 ‘한일 독자교류 모임’에서 만난 송우혜씨에게 건네줬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2년 대동아전쟁으로 전시체제 아래 있었던 릿교대학에는 군사 훈련을 위해 육군 대좌(지금의 대령)가 부임해 학생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한편 일본의 신도(神道)를 강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는 이를 견디다 못해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학교를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 

윤동주가 릿교대학이 있던 동경에 머물렀던 시간은 4개월 정도로 길지 않았다. 한 학기를 보내고 바로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로 옮겼기 때문. 그러나 ‘시인 윤동주’에게 있어 동경은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송우혜씨는 “옥사할 때까지 만 3년간 일본에서 살았던 윤동주가 일본땅에서 쓴 시 중에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불과 다섯 편 뿐인데, 윤동주는 이 시를 모두 동경에서 썼다”고 밝혔다. 또 “윤동주의 시는 그의 생활과 직결돼 일기와도 같다. 당시 그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정보는 윤동주의 시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도쿄 후쿠오카 교토에서는 윤동주 관련 모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매년 윤동주의 기일에 함께 모여 헌화식을 갖기도 한다.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아이자와 가끄(愛澤革)씨는 “일본사람에게는 윤동주의 시를 읽는 일이 매우 복합적인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맑은 운율로 의연하게 일어서 다가오는 시를 모국어로 쓰고 죽은 한국의 젊은 시인,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시인의 삶을 27년으로 끝나게 한 일본의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일”이라고 털어 놓았다.

1997년부터 일본 후쿠오카의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동경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 등을 후원하고 있는 동서문화사 전숙희 대표는 “윤동주야말로 모든 면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전세계인이 사랑할만한 시인”이라며 “일본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또 끊임없이 윤동주를 연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2002/9/12]


윤동주(尹東柱) 메모

                  

     
   

               미나미 구니가즈(南邦 和)   글

                  이  보  혜 (李 保 慧)      옮김 

 
 




              
     
금년(1995년) 2월 16일은 조선의 시인 尹東柱의 기일이었다. 1945년 이 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 순수하고 고고한 시인이 무언가를 크게 외치고(그것을 듣는 간수는 조선말을 몰라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는 것, 필시 원통하고 절통한 가슴의 소리였을 것이다.) 숨진 그 날로부터 오십 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 서울 시내에 있는 尹東柱의 모교 연세대학교에서는 약 1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저항시인· 尹東柱를 그리는 모임'이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朝日新聞). 그 추도식의 모습은 그 후, 한·일 공동제작의 텔레비젼 프로그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尹東柱·일본치하의 청춘과 죽음' NHK스페셜로 방영되었는데 시비 앞에서 서시(序詩)를 낭독하던 젊은 여대생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일본 국내에서도 2월 16일 尹東柱가 재적해 있던 교토(京都)의 동지사(同志社)대학에서 '尹東柱詩碑완성 기념예배'와 그 제막식이 있었는데 한·일 양국에서 2백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고 있다. 제막식이 끝나고 니이지마회관에서 한·일 다섯명의 패널리스트에 의한 심포지움이 열려서 尹東柱작품의 번역을 둘러싼 열띤 공방전이 있었다고 한다.


 또 2월 18일 토쿄 東京의 敎文館에서는 일본기독교詩人會의 후원으로 '尹東柱를 생각하는 모임이' 있었다. 한국에 地緣的 연고가 있는 시인 두 사람이 중심이 된 모임이었는데 나도 십여 명의 발기인 명단에 끼어 참석을 했다. 오후 두 시 발기인 대표의 인사와 尹東柱가 살던 시대상황에 자신의 체험을 통한 '식민지 통치' 해설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기조강연자인 宇治鄕毅씨가 '尹東柱의 생과 그 의미'라는 연제로 尹시인의 대표작인 <序詩>를 채택하여 어휘 분석에 의한 작품론을 전개해 나갔다.(우지씨는 尹東柱의 同志社大 후배이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한 달 전인 1941년 11월 20일자에 쓰여있는 <序詩>에 담긴 죽음, 하늘, 부끄럼, 바람, 고통, 별, 사랑, 길, 오늘밤… 등의 어휘가 尹東柱의 모든 작품에 이어지는 키워드이고 그때까지의 삶을 총괄하여 새롭게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이 시는 쓰여졌을 거라는 해석에는 크게 배울 점이 있었지만 내 개인적인 관심은 '치안유지법 위반' 용의의 소상한 내역이었다.


 다음에 몇 사람의 발표가 있었는데 종군위안부 문제 고발詩를 썼고 한국인 피폭자 문제 등에 깊은 이해와 관심을 나타내는 이시카와(石川逸子) 시인이 등단하여 尹東柱 작품의 순수성과 그 시법의 특성을 (눈이 오는 지도)를 낭독하여 시사하고 나서 尹東柱에게 바치는 자작시를 읽었다.


 다음엔 재일한국시인 최화국 씨가 "尹東柱는 나보다 세 살 연하입니다…"로 시작, 동시대를 살던 尹東柱의 너무나도 순수, 무방비로 인했던 불행을, 또 전일본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시절의 '特高'와의 교제술에 관해서 자신의 체험을 술회하였고 한글시의 일본어 번역에 대해서도 엄한 지적이 있었다. 올해 여든 한 살인 이 현역시인의 진솔한 언변도 이 날의 큰 수확이었고 특히 원문대로 낭독된 <序詩>의 여운은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사실 나는 자신이 조선반도에서 성장했다는 것 외에는 尹東柱를 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므로 양해를 구해놓고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에 찍었다는 준수하고 단정한 사진의 인상을 말한 다음, 긴 세월 재판소라는 특수직장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써 '우리 말'을 사랑한 이 시인에게 그 작품의 일본어 번역을 강요한 관헌의 잔혹성과 시인 尹東柱가 받은 굴욕의 깊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후, 그 모임을 주관했던 시인으로부터 보내온 '대학통신' 속에 고당요(高堂要)라는 사람이 쓴 '모순의 사람 尹東柱'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내가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던 尹東柱와 모국어, 그리고 일본어와 윤동주에 관해서의 '언어'와 '시인'의 관계가 단도직입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인용을 해보려고 한다.


 "尹東柱에 관해 일본어로 쓰는 것은 매우 적당치 않다. 일본어는 尹東柱에게 있어 어거지로 배워야 했던 이국의 언어이고 모국어로 말하는 것을 금지당하면서 강제적으로 사용해야 했던 언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모국어로 시를 썼다 하여 반일적, 항일적 행위로서 체포되었다. 경찰서에서 자신이 쓴 한국어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중략-


 그는 자신의 시적 세계, 문학적 세계를 심화, 추구, 연마하기 위해서 일본어로 문학을 배워야 했다. 좋아하는 시인 릴케와 프랑시스 잼을 읽은 것도 주로 일본어였다……"
 高堂씨의 문장의 일부분이지만 예리한 필치로 尹東柱에게 접근하여 "내가 그에게 끌리는 것은 '모순의 사랑', 안으로 찟긴 혼의 상처를 별 수 없이 껴안고 있는 사람, 고뇌뿐이 아니라 허무에 시달리면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모순의 사람' 尹東柱를 강조하고 있다. 나의 尹東柱 이해를 돕는 큰 길잡이이고 새삼 그 시점에서 尹東柱의 사람과 작품에 다가가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尹東柱는 일본 통치하의 가혹한 상황에서 '치안유지법'이라는 시대의 악법에 의해 체포 구류되었다. 그리고 '옥사'라는 비극적 최후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악업과 잔학성을 상징하는 '순교의 사랑'을 '저항의 사랑'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작품에 접해 가면 그 어디에도 노골적인 저항의 자세나 정치적인 문구는 없다. 오직 내성적인 우수에 찬 서정시인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사상성을 지니는 의지의 시인이다. 여기서도 현대에 있어서의 尹東柱 평가에 큰 모순을 보는 것이다.


 나는 길지 않은 발언의 마지막을 尹東柱 작품 <자화상>의 낭독으로 맺었지만 이 시는 그의 전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尹東柱의 이름이 일본의 시단이나 매스컴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십수년 남짓이지만 한국에선 김소월, 이육사 등과 필적되는 '국민시인'으로서 일찍이 그 작품과 사람이 크게 평가되어 있다. 작년 가을 한국에 갔을 때 윤동주시집을 입수해 왔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내 한글 실력으로 읽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 후 입수한 尹東柱全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伊吹鄕역)>와 평론 <尹東柱·그의 기독교性(森田進저)>, 또 尹棟柱詩篇의 일본어역 등을 실마리로 해서 나 나름의 '尹東柱메모'를 시도해 보고싶다. 이 작업은 나의 본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조선반도에의 뜨거운 그리움과 이국땅에서 옥사한 애절한 시인에게 깊은 애도로서 보내는 나의 頌歌이며 鎭魂歌이다.

 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동북부의 북간도 明東에서 출생했다. 이 지역은 현재도 조선족의 자치구로 알려져 있지만 증조부 尹在玉시대에 이주했다고 한다. 부친은 尹永錫, 모친은 金龍, 여동생 惠媛과 역시 시인인 남동생 一柱, 光柱가 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조부 尹夏鉉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東柱는 조신하고 차분한 성격, 그 안에 강인한 의지를 지녔던 소년이었다고 한다. 소학교부터 중학으로 이어지는 친구에 한국의 간디로 불린 목사 文益煥이 있다.
 1932년 東柱는 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시절부터 그의 문예활동은 시작되었다. 그 후 崇實중학, 다시 光明학원중학부로 전전하고 있으나 이미 延吉에서 발행된 「카톨릭 소년」에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의 지도> 등의 동화를 발표해 온 尹東柱는 이 숭실시절에 학우회지 <崇實活泉>의 편집을 맡았었고 詩 <空想>을 발표하고 있다.



空想-


내 마음의 탑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와 허영의 天空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한 나의 空想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自由로이 헤엄친다
황금 知慾의 수평선을 向하여


 尹東柱가 다닌 恩眞, 崇實 이 두 중학교는 反日色이 짙은 학교였다. 총독부가 각지에서 신사를 건립하고 국민정신총동원이라는 구호아래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尹東柱의 모교인 崇實은 '참배냐, 폐교냐…'를 협박하는 총독부를 향해 'NO'를 고집하여 1938년 폐교되었다. 이 사건은 필시 尹東柱의 다감한 청춘기 정신형성 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光明학원중학부 편입 후에 4학년, 5학년을 통틀어서 '일본어의 성적이 가장 나빴다'고 하는 尹東柱였다.
 그가 의식적으로 문학에 뜻을 세운 것은 중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문제에서 의과대학에 가라는 부친과 대립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택한 그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는 사촌이며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친구 宋夢奎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송몽규는 이미 중학시절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콩쿨 꽁트부문에 당선되었을 정도로 조숙한 文才인 한편,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는 등 과격한 사상과 행동력의 소유자였다.


 윤동주가 입학한 1938년 당시의 연희전문은 민족주의의 기풍으로 꽉 찬 학원 중의 하나였으며, 이 시기에 그가 가장 신뢰하던 국어학자 최현배가 어떤 사건에 연좌되었다는 이유로 강제사직을 당했다. 그러나 이 연희에서의 4년간이 윤동주로서는 가장 여유롭고 가장 자유롭게 삶을 구가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라고들 말한다.(송우혜 지음<청춘의 시인>에서).
 이 시기에 그는 정병욱(후에 서울대학의 고전문학교수)이라는 생애의 지기와 만나고 존경하는 선배 시인 정지용과도 교류하고 있다. 1941년 12월 연희전문을 졸업(학제단축으로)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도일, 입교대학 영문과에, 그 두 달 후에는 교토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옮겼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연희 재학시부터 일본 유학 무렵(23∼24세)의 것이고 이 시기에 이미 自選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간행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西日本新聞의 井手俊作기자의 신문연재를 '빼앗긴 시혼-발굴·尹東柱의 옥사'에서 이 박행한 시인의 생애와 비참한 죽음의 사실, 그 슬프도록 투명하고 고고한 詩정신에 접할 수가 있었는데, 그 '빼앗긴 詩魂'이 말하듯이 우리말의 소멸 위기감을 안고 있던 국어학자 최현배에게 강렬히 기울고 있던 윤동주는 단연코 한글로 시를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內鮮一體 정책하에서의 한글교육 폐지(1938년) 강행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그러나 창씨개명 실시라는 일제통치 하에서 어쩔 수 없이 平沼東柱가 된다. 그것이 일본 유학에의 渡航증명서를 얻어낼 수 있는 필수 요건이어서였다.


 최현배에 의해 우리말에 눈을 뜬 윤동주에게 있어 한글에 의한 詩행위는 글자 그대로 죽음을 건 선택이었다. 그의 작품으로서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이 다음의 작품이다.

  <序  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작품의 제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독자 개인의 감수성에 맡겨질 일이지만 나는 프롤로그로서의 그것이기보단 오히려 에필로그로서의 죽음을 예감한 終詩(유서)로도 생각되어진다. 24세에 이미 이 경지에 도달해버린 요절시인의 천재성과 비극성을 거기서 보며 마음이 아파온다. 尹東柱의 작품에는 거의 삶의 정의와 생활의 추구에 괴로움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의 尹東柱 이해를 위해서는 그 작품들 저변에 깔려있는 기독교적 윤리관과 유교적 정신의 자세, 그리고 조선어가 갖는 표현의 깊이에 관해서의 학습과 인식이 요구된다. 이번 봄의 京都·同志社大 심포지움에서도 尹東柱작품의 번역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한다. 그 一例로서 序詩의 첫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에 관해서 번역자인 伊吹鄕씨와 주최측과의 질의응답이 있었다고 듣는다.


 伊吹씨 번역에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라고 되어있는 하늘은 우리들의 표면적인 지식으로선 하늘 이외로는 생각할 수 없는 어휘이지만 어원적으로는 이 나라의 고유 數詞인 '하나'에 유래하고 있어 空, 天, 神 또는 天國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죽는 날까지 天을 우러러'로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森田進씨 번역에는 '天을 우러러'로 되어 있으며 이 두 줄에 대해 森田씨는 '동남아세아적 윤리관인 恥…는 여기선 수직적인 天上에의 視線과 이어져 있다. 이 청렬하기까지 한 의지야말로 조선의 기독인이 터득한 순절의 의지이다'라고 尹東柱를 찬양하고 있다.
 윤동주가 체포된 것은 1942년 7월 14일이었다. 완전한 기습체포였으니 그의 경악과 실망은 어떠했으랴 상상이 간다. 그의 구체적인 용의사실이 밝혀진 것은 1970년이 한참 지나서 윤동주 연구가인 宇治鄕毅씨에 의한 '特高月報' 복각본의 열람에 의해서였다. 윤동주의 수난의 계기는 사촌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친형제처럼 성장해 온 宋夢奎의 사상과 행동을 눈여겨오던 '特高'의 먹이로 말려들은 불행이었다.


 그 부분의 사정을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었던 高熙旭(당시 三高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사건은 송몽규씨가 경찰의 要觀察人이었기 때문에 생긴 거지요. 宋을 경찰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줄 모르고 함께 '우리 민족의 장래' 또는 '독립운동' 등을 주거니받거니 한 거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경찰이 깡그리 엿듣고 미행해서 사건을 만든 거였어요…"
 그리고 高熙旭은 尹東柱의 인품을 "체격은 마른 편이고 흰 얼굴에 목소리는 좀 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온화하고 침착한 면이 있으면서 반면 정열적이었지요. 무척 공부를 잘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전형적인 창백한 인텔리라는 인상이었구요. 항상 우리 민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민족주의적인 색조가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산 동지의 증언인 만큼 현실감이 있다. (宋友惠 지음 <尹東柱-청춘의 시인>에서)


 그러나 생체실험의 희생이 되어 숨졌다고도 말해지는 尹東柱 옥사의 진상은 아직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

  

               ⊙ 미나미 구니가즈가 윤동주獄死 50년을 맞아  

                                     <자유문학> 1994년 봄호에 발표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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