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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문학비...
2019년 12월 16일 23시 46분  조회:2819  추천:0  작성자: 죽림

한국 최초 문학비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이상화 시비, <나의 침실로>

 

요약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한국인의 심금을 울린 시인.
1948년 대구 달성공원에 이상화의 처녀작 <나의 침실로>가 열한 살 아들의 필치로 쓰임.
대구 서문로의 한 시계포, 명금당 주인 이윤수가 이상화 시비를 세우자고 의견을 냄.
명금당은 문인들에게 사랑받는 장소였고, 수필가 김소운이 시비 건립을 제안, 만장일치로 합의.
대구 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의 시비가 열한 살 아들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대구 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의 시비시인이 18세 때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썼다는 처녀작 <나의 침실로>가 열한 살 아들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 세워진 문학비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상화() 이상화()의 시비이다.

문학비는 그 대상이 되는 문인에겐 영예롭고 고귀한 기념비가 되지만,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는 창의력과 문화적 자존심을 말해주는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로부터 비석에 뭔가 새겨졌다는 것은 칭송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남다른 재능을 공인받는 일로도 여겼다. 그래서 병폐도 많았는데, 조선조 때만 해도 백성들 사이에서 개꼬리비니, 수렁밭비니, 또는 꾀꼬리비니 하고 비웃음 섞인 말은 모두 그런 데서 나온 것이었다.

생전에 비석을 세우는 일이 잦은 요즘에도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별로 의미없는 내용으로 가득 찬 비석이 도로변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오늘을 후인들은 뭐라고 할지···.

그러나 이상화 시비는 그 어떤 야유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문학을 숭상해왔던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살아 있는 혼백이다.

이상화 시비는 대구 달성공원에 있다. 세워진 때는 1948년. 당시 대구에서 발간되던 시 전문지 <죽순>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세웠다. 이상화 시비가 대구에 세워지게 된 것은 시인의 고향이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시비는 충북산 오석으로 높이가 1.8m이며, 폭은 1.2m 정도다. 그 전면에는 그의 시 <나의 침실로> 중 열한 번째 연인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상화는 마흔두 살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상징적인 서정시를 주로 썼던 그는 민족의 운명이 암흑기에 있던 1943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광복을 2년 앞둔 그해는 시인의 작품에 어려 있는 민족의식을 생각해볼 때 비통한 해인 것만은 분명하다.

시인 이상화는 교편을 잡고 있던 대구 교남학교에서, 나라를 빼앗겼으면 주먹 힘이라도 길러야 한다면서 권투부를 창설했다. 시인은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은 그의 역사 이야기와 야담 듣기를 더 좋아했고, 교가에 '만주벌 바람 타고'라는 가사를 집어넣었다가 대구서에 구속되기도 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지금도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희망을 대신 노래해준 명작이다. 그 시인이 끝내 빼앗긴 땅에서 붓을 놓고 만 것이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시비에 올려지지 않은 것은 <나의 침실로>가 처녀작이기 때문이다. 상화는 이 시를 18세 때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이상화 시비의 글씨는 상화의 셋째아들인, 당시 열한 살 된 태희가 쓴 것이다.

이상화 시비를 세우자는 최초의 의견은 대구 서문로에 있던 한 시계포에서 나왔다 시계포의 상호는 명금당. 주인은 시인 이윤수였다.

이윤수는 명금당을 편집실로 해서 <죽순>을 발행해오고 있었다. 이 무렵 <죽순>의 동인으로는 이윤수 외에 유치환·이응창·오란숙·박목월·이호우·이영도·김동사 등이 있었다.

소설가 윤장근이 <대구예술> 1995년 12월호에 기고한 '이윤수와 죽순 주변'을 읽어보면 당시 명금당은 대구지역 문학인들뿐만이 아니라, 대구에 내려오는 타지역 예술가들에게도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명금당에 비 오는 9월의 어느 날이었는데, 밤색 중절모를 쓴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수필가 김소운이었다.

문인들은 그래서 술자리를 마련하게 됐고, 거기서 갑자기 김소운이 이상화 시비 건립을 제안해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고 이듬해 세우게 된 것이다.

이상화의 시에는 선비정신이 흐르고 있다. 그의 시는 오늘도 우리에게 한국혼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그 시인의 시비가 한국 최초의 문학비로 자리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문학비 -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이상화 시비, <나의 침실로> (한국 최초 101장면)

이상화

 

 ]

이상화

1901-1943. 시인. 백조 동인.

이칭별칭  무량(), 상화(), 상화()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901년 ~ 1943년
성격 시인
출신지 경상북도 대구
성별
본관 경주()
저서(작품)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나의 침실로, 몽환병, 가상, 구루마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정의

일제강점기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중의 사망」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관은 경주(). 호는 무량()·상화()·백아(). 경상북도 대구 출신. 아버지는 이시우()이며, 어머니는 김신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이일우()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의 『상화()와 고월()』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백기만·이상백()과 『거화()』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홍사용()·나도향()·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 등과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을 만나러 만경(滿)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문단 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1922)·「단조(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다.

또한 복합적인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개벽, 1925)·「비음()」(개벽, 1925)·「이별()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다. 한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는 사회참여적인 색조을 띤 원숙한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 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개벽, 1925)·「통곡()」(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파-란비」「신여성, 1926」·「선구자()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 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시원, 1935)·「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상훈과 추모

이상화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 『문학과 역사적인간』(김흥규, 창작과 비평사, 1980)
  • 『한국근대시인연구』(김학동, 일조각, 1974)
  • 「파토스와 저항」(김준오, 『식민지시대의 시인연구』, 시인사, 1985)
  • 「이상화시(李相和詩)의 연구사적검토」(최동호, 『이상화연구』, 새문社, 1981)
  • 「현대한국의 낭만주의시(詩)에 관한 연구」(김용직, 『서울대학교논문집』 14,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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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이상화 [李相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상화

이상화1901-1943. 시인. 백조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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