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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문) 조선족 상례문화의 흔적—상여--한광운 조경희
2012년 07월 16일 09시 38분  조회:9103  추천:0  작성자: 백화상조
(론문) 조선족 상례문화의 흔적상여
<조선족전통장례>세미나에서 발표
연변박물관 한광운 조경희

 
머리말
상여라 하면 사람들은 인츰 죽음을 떠 올리게 된다. 상여라 함은 죽은사람을 메여 내가는 도구로써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이 어린축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것이고 나이 많은 분들은 기억으로나 남아 있을지 상여에 대해 거론할때가 거의 없다. 필자도 어릴적에 상여를 본적이 있고 상여로 관을 메여 내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었으며 무시무시한 상여막에도 호기심으로 접근해 본적도 있었다. 상여란 어구는 민속에 접촉하면서 알게 된것이고 그전에는 <황디>라고 들어었다. 사무실에 앉아서는 상상도 못했는데 이 근래에 민간조사를 하면서 생각밖으로 <황디>를 재차 목격하게 되였다. 어릴때는 무서워서 접근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란 차원에서 친근감을 느끼면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직접 만지면서 그젯날 조상들의 넋을 떠올리였다. 다행스럽게도 2009년에 <조선족의 상례>가 길림성 비물질 문화유산 대표성 명록에 등재되여 보호를 받게 되였고 상여도 상례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서 문화유물로 보호를 받게 되였다. 아래에 상여에 관련해서 필자의 감수를 적으려 한다. 여러 전문가, 학자들께서 참고하시기 바란다.

1.연변지역 상여보존현황
조선족이 조선반도로 부터 중국에 이주해온 력사도 어언간 150년이나 된다. 비록 간고한 이주력사를 걸치고 파란곡절 많은 삶을 영위해 왔지만 민족의 전통만은 잃지않고 항시 전승해 왔다. 상여도 우리민족의 넋을 담은 문화전통으로 끈질기게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었다.
필자는 20세기80년대 후기부터 민속사업에 종사하게 되였으며 점차 문화적 시각으로 우리민족이 남겨놓은 유물에 대해 접근하였다. 필자의 고향은 훈춘이여서 자주 훈춘지역을 들락거리였다. 1989년에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훈춘에 방문갔다가 우연하게 당시의 마적달향에 <황디>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츰 박물관에 알리고 조사를 진행할것을 제의 하였다. 사실 1988년에 필자(고향은 훈춘시 삼가자향 동강자촌임)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장례식은 전통식으로 치렀으며 <황디>로 관을 메여 내갔던것이였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훈춘지역에선 이 시기에 기본상 <황디>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3명으로 구성된 룡정박물관 조사일군들은 마적달향에 도착하여 쉴 사이도 없이 <황디막>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여 실물을 보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못하였다. 1930년에 제작된 상여가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필자 고향의 상여와는 다른 인형도 있고 새도 있고 그림도 있는 상여였다. 그 형태로부터 볼때 가마형 상여였다. 아쉽게도 유물 수집에만 급급하다보니 상세한 내용조사는 못하고 그렇다할 기록도 남기지 못하였다. 허나 조선족의 대표성적인 문화유물인것만은 사실이였다. 현재 이 유물은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 소장되여 있다. 20여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보관장소가 합당하지 않은 탓으로 많이 좀이 먹어들어 갔고 시급히 수리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2008년 연변박물관에서는 조선족 민속전시를 새롭게 꾸리면서 룡정민속박물관의 상여를 본따서 김광혁이란 공예 미술가를 초청하여 원모양대로 복원해 놓았다. 대채의 길이는 4.3메터정도이고 너비는 75센치메터였다. 몸체의 길이는 260센치메터, 너비는 75센치메터, 총높이는 125센치메터였다. 조각품으로는 룡두 2개, 오리모양의 큰새 4개, 오리모양의 작은새 16개, 선비인형 1개, 동자인형 2개이다. 그림으로는 앞 룡수판(룡두를 올려놓는 반원형 나무판)에 그린 물고기가 룡으로 화한 그림, 뒤룡수판의 련꽃, 물고기 그림, 란간에 그려진 매화, 국화 꽃무늬가 있었다.

1930년에 제작된 상여. 훈춘시 마적달향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1989년에 룡정조선족 민속박물관에 수집, 소장하고 있음


조선족 조각예술가 김광혁선생이 상여를 복원하고 있음(2008)
 
2007년부터 필자는 연변지역 민간조사를 규모있게 진행하였었다. 조사 주제는 상여가 아니였지만 상여를 적지않게 발견하게 되였다. 새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의 장례방식은 많이 바뀌였다. 나라적으로 화장법을 제창하는 바람에 전통적인 토장법은 거의 사그러져 갔고 깊은 산간마을에서만 아직도 가담가담 토장법은 계속 실행하고 있었으며 상여도 어느정도 사용한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상여가 있어도 멜 사람도 찿기 힘든 상황이며 동력운수도구를 사용할때가 더욱 많다. 2007년 가을 룡정시 부유향 하마래촌(현재 부유향을 취소하고 삼합진에 합병)을 조사하면서 우연하게 <황디막>을 지나게 되였는데 1970년도에 제작된 소수레에 조합해서 만든 상여를 발견하였다. 동네로인들과 문의하였는데 하마래촌의 김종식(1939년생)로인이 만든것이라 한다. 김종식로인은 하마래촌에서 태여나서 어릴때부터 목수일을 익혀왔으며 문화대혁명초기에 원래의 상여가 없어지자 수레에다 상여를 조합하는 착상을 내놓아 산길에서도 쉽게 오르내릴수 있는 중국조선족들에게만 있는 새로운 상여를 만들었다. 그 상여구조를 보면 조선족 전통의 팔간기와집 지붕을 본딴것인데 루각식 상여의 일종이라 할수 있다. 아쉽게도 이 상여는 그 당시 크게 파손되였는데 타민족의 페품수구하는 사람들이 <황디막>에 들어가 수레의 축과 바퀴테의 쇠붙이만을  빼내갔고 상여를 분리해서 사처에다 널어놓았다. 정말로 량심없는 인간들이였다. 조선족들은 옛날부터 황디막에 보통 접근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그 근처에서 장난질 하는것도 제한하였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오랜세월이 흘렀어도 인위적으로 상여가 파손되는 현상은 매우 드물었다. 필자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널려져있는 상여 부분품들을 황디막에 들여놓아 어느땐가 수집해 가려고 하였다. 헌데 그 이듬해 재차 갔는데 그 나머지 마저도 불을 때려고 누군가가 가졌갔다는 것이였다. 이렇게 이 특이한 상여는 사진으로만 남아있게 되였다. 하마래촌은 도시의 화장터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금도 토장법을 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젠 전통식 상여로 장례를 치를수가 없게 되였다.

룡정시 삼합진 하마래촌에서 1970년에 제작한 수레에 조합한 상여


하마래촌에서 제작한 상여의 부속물-혼백함

2008년 가을, 필자는 훈춘시 마적달향 마적달촌으로 내려가 재차 민간조사를 진행하였다. 본촌의 진장춘(당시71세), 정기수(당시62세) 두 로인의 안내하에 마을 서북쪽에 위치한 <황디막>으로 갔다. <황디막>은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은 없었다. 비나 눈을 막기 위한 것이였다. 이 마을의 상여는 그 구조가 매우 간단하였는데 필자의 고향마을의 상여와 흡사했다. 대채와 몸체로 구성되였는데 대채는 그 규격이 길이가 410센치메터이고 너비가 70센치메터였다. 몸체는 기둥과 보로 이루어졌는데 조선족 가옥구조와 비슷했다. 몸체의 규격을 보면 길이 200센치메터, 너비 70센치메터, 높이 68센치메터였다. 몸체 중간에 관을 놓게 되였는데 관의 규격은 보통 길이가 180-200센치메터이고 너비가 45센치메터이며 높이가 30센치메터였다고 한다. 관을 놓은후 몸체 사면은 붉은 천으로 두르고 웃지붕은 흰천으로 쳐놓는다. 그리고 흰천으로 품바를 만들어 관을 메게 앞뒤채에다 열십자로 동여 매놓는다.

훈춘시 합달문향 마적달촌의 상여-대채

2009년 음력설이 금방 지난후 필자는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원래는 동신향에 속했는데 후에 동신향이 취소되고 천교령진에 합병)을 조사하였다. 태양촌은 20세기 30년대에 일제의 강제이주로 인해 생겨난 집단부락이였다. 주로 조선반도 경상북도 안동, 문경에서 많이 이주해 왔는데 지금도 경상도 말씨를 사용하고 있다. 태양촌 서북쪽 강변에 <황두막>(상여를  보관하는 막집)이 세워져있다. 지금도 상여가 보관되여 있다. 현재의 매장법에 의하면 이곳 주민들은 화장법이나 토장법을 모두 채용할수 있다. 허나 지금은 토장은 거의 치르지 않고 화장하는데 연길이나 도문의 화장터로 가야한다. 태양촌에 원래 오래된 상여가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시기에 없어졌다가 1970년 이후에 로인독보조에서 다시 원래의 모양대로 만들었다. 이곳의 상여는 기타 지방보다 많이 다르다. 이 상여를 만든이는 태양촌의 72세 되는 신창순로인인데 태양촌에 살다가 지금은 동신촌에서 멀지않은 하동촌에 이사하였다고 한다. 신로인은 목수재간이 있고 경상북도에서 전해진 모양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전문적인 상여조직도 있었는데 지금은 로인협회에서 관리한다. 그전에 상여소리를 하는 로인들도 계셨는데 모두 세상뜨고 가석하게도 후세에 전해주지 못하였다. 상여의 형태로 보아 전체적인 형상이 가마처럼 생긴 상여로서 본체 지붕의 위치에 자리한 덮개의 형태로 보아 자라의 등처럼 둥근 형태로 생긴 별갑형(鱉甲形) 상여인듯 하였다. 조각품은  란간에 꽂혀있는 쐐기인데 머리쪽에다 봉황과 물고기를 그렸다. 그리고 지붕 앞뒤면에 각기 두마리의 룡과 두마리 학을 그려놓았다. 지붕 중간에 붉은 룡주를 달아놓았다. 색조는 오방색을 취하였는데 대채는 누른색, 지붕은 누른색, 기둥과 보는 푸른색, 란간은 붉은색을 칠하고 몸체에는 검은색천을 두르고 푸른색, 누른색, 붉은색천으로 장식물을 만들어 달아놓았다. 휘장은 흰색바탕에 변두리에 하늘색을 대였으며 네귀에 푸른색, 하늘색, 누른색, 붉은색으로 조합해 만든 장식물을 달았다. 현재는 상여를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에 보존되여 있는 상여

이상은 필자가 민간조사 과정에 상여에 대한 직접 보고 느낀것이다. 조선족로인들은 그래도 전통적인 장례방식에 대해 고집하고 있으며 별로 사용하지않는 도구라고 하지만 버리기 아쉬워하며 우리민족의 문화전통으로 세세대대로 간직하기를 바라고 있다.

2.상여에 관련된 민속 내용
상여에 관련해서 여러문헌들에 적지않게 소개되였다. 조선의 서책에서는 상여를 아래와 같이 귀납하였다. 상여는 시체를 운반하는 기구이다. 상두, 령여라고도 한다. 상여모양은 가마와 비슷하며 가마보다 더 길고 몸체좌우에는 멜채가 길게 뻗어있어 그 량쪽끝에 채 막대기를 가로 대고 앞채 막대기 좌우로 두줄씩 끈(천)을 달아 뒤채 막대기에 붙잡아 맨 다음 중간에 일정한 간격으로 멜방망이를 좌우로 끼여 사람들이 그 사이에 들어가 끈을 어깨에 메도록 되여있다. 몸체는 단청식으로 여러가지 채색을 하고 네귀에는 기둥을  세워 우로 포장을 쳐 해빛을 가리우며 상여 뚜껑에는 련꽃 또는 봉황새등으로 장식하였다. 상여는 마을에서 일정하게 떨어진 곳에 <도가>(상두막, 상구막, 행사막)라는 집을 공동으로 짓고 그안에 보관해두고 사람이 죽으면 가져다가 리용하였다. 상여를 보관할때는 분해하였다가 사용할때마다 조립하군 하였다.[1]
여기에서 상여막이 거론되는데 상여를 보관하는데 필수적인 시설인것이다. 연변지역에서는 상여를 황두라고 부르는데 황두라는 말은 옛날 평안도나 함경도 지방에서 주로 상사때에 서로 도와주는 상호부조 조직이였던 <향도>에서 유래된 것인데 향이 황, 도가 두로 음이 와전된 것으로 인정한다.[2] 상여막은 마을에서 500메터안으로 떨어진 좀 편벽한곳에 설치하는데 15-20평방메터의 면적에 벼집지붕 모양으로 지었다. 벽면을 만들어 문을 달아 자물쇠를 잠그기도 하였고 산간지대에서 벽면도 없이 기둥과 지붕만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새나 짚으로 지붕을 얹어 놓았지만 20세기70년대후에는 세멘트기와나 붉은기와를 얹었다. 사람들은 상여막을 가까이 접근하는것을 꺼리였으며 아이들이 상여막 근처를 가지못하도록 단속하였다. 길을 가다가 상여막이 맞띄우면 길을 에돌아서 지나간다. 이렇게 상여막은 범접할수 없는 금지구역으로 되여 고스란이 유지되여 왔다.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 서북쪽에 위치한 황두막
 
장례식때 상여를 동반하여 상여소리가 이어지는데 상여소리는 장례때에 부르는 노래로서 상여군들이 고인의 령구를 실은 상여를 메고 묘지까지 가면서 부르는 추도곡과 같은 노래이다. 상여소리에는 긴 상여소리와 잦은 상여소리가 있는데 집에서 상여를 멜때부터 마을을 벗어 날때까지는 긴 상여소리를 부르고 상여가 마을을 벗어나면 잦은 상여소리를 불렀다. 상여소리에서 특징적인것은 고인을 넋을 대신하여 노래 잘 부르는 선소리군이 먹이는 소리와 상여군들이 받아부르는 소리로 되여있는 것이다. 긴 상여소리는 먹이는 소리가 길고 받는 소리가 짧고 그 음악형상은 한없이 구슬프고 애절하다. 잦은 상여소리는 선소리군이 고인의 넋을 대신하여 부르는 노래인 동시에 상여행렬을 다그쳐나가기 위한 지시를 주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잦은 상여소리의 먹이는 소리와 받는 소리는 같은데 그 음악형상은 처량하면서도 활기 있는것이 특징이다. 상여가 묘지에 도착하면 이어 제사를 지내고 관을 묘자리에 묻었는데 이때 상여군들은 달구로 무덤을 다지면서 <달구소리>를 불렀다.[3] 안도현 신툰과 왕청현 태양촌에서는 20세기 90년대까지도 장례식때 상여 소리를 불렀다고 한다.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상여소리를 부르는 로인들이 세상뜨면서 점차적으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는데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연변에서 류행되던 상여소리 가사 두곡을 살펴보기로 하자.
상여소리1:
엥 엥 엥요
어이 갈고 에헤요
저승길이 멀다해도
대문밖이 저승일세
 
엥 엥 엥요
어이 갈고 에헤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다시 오지는 못하리
 
엥 엥 엥요
어이 갈고 에헤요
평풍에 그린 저닭이
홰를 치면 다시 오리
(리상철 창,김태갑 수집)[4]
 
상여소리2
북망산이 머다더니
건넌 안산이 북망일세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이길로 한번 돌아가면
어느 황천에 다시볼가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인제가면 언제오리
올날이나 일어주소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시내안산에 우지지고
차천명월이 밝아온다.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새벽접동이 지저울고
강상두루미 춤을 춘다.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5]
 
상여와 관련되는 민속내용에서 상여조직도 매우 중요한 한부분이다. 이러한 상여조직을 상여계라고 하는데 연변에서는 향도계라고도 하였다. 향도는 민간에서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무어진 생활조직이다. 향도는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우선 성원들 호상간 친목을 도모하였다. 다음으로 상사일을 서로 도와 주었다. 상여계는 전문적으로 상례와 장례를 치르는 민간조직이다. 20세기60년대 이전까지 조선족 마을에는 거의다 상여계가 건립되여 있었다. 호수가 200-300 호에 달하는 큰 마을은 단독으로 상여계를 건립하고 호수가 몇십호밖에 안되는 마을은 몇개 마을이 련합하여 상여계를 건립하였다. 18세이상 되는 남성 촌민들은 모두 상여계에 참가하며 집에 로인을 모시고 있는 경우에는 18세미만의 소년도 상예계에 가입하였다. 상여계의 관리인원들로는 존위(尊位), 도감, 집사, 소임등이 있다. 기타의 성원들은 제원(诸员) 이라고 한다. 존위는 상여계의 우두머리로서 년세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 담당한다. 상례와 제례행사에서 실제적 지휘는 도감이며 집사는 도감을 협조하여 구체적 행사를 집행하는 사람이다. 소임은 심부름군이다.[6]
2008년 9월에 필자가 훈춘시 합달문향 마적달촌을 조사하면서 상여계에 관련되는 내용을 어느정도 알게 되였다. 이 마을에는 황디월이라는것이 있는데 주로  상사때 장례식을 도와 나서는 조직이라 한다. 황디월의 좌상되는 사람을 <고운>(제보자의 발음대로 표기)이라 하는데 시신을 렴하고 부고를 내는 일을 맡아 한다. 그 아래에 <새임>(제보자의 발음대로 표기)이란 직무가 있는데 장례식의 구체적일을 맡아 처리한다. 집집이 돌아다니며 <부렴전>(제보자의 발음대로 표기. 황디월에서 거두는 비용항목)을 거두기도 한다. 이러한 <부렴전>은 옛날에는 인민페50전씩 거두었는데 현재는 10-20원정도를 거둔다고 한다. 촌민들이 모두 황디월에 참여할수 있는데 과부만은 참여 못하며 돈만 기부하면 된다고 한다. 매년 섣달 20일좌우에 황디월 회의를 소집하여 좌상을 선거한다고 한다. 그러면 매년 한번씩 좌상을 바꾸는 셈이다. 대부분 조선족 마을에서는 현재 전문적인 상여조직을 내오지 않고 로인협회에서 그 직능을 리행하고 있다. 필자가 조사한 왕청현 태양촌과 룡정시 하마래촌도 그러한 상황이였다.

3.상여의 구조와 장식물의 문화적함의
상여의 구조는 크게 가마형과 루각건물형으로 나눌 수 있다. 가마형은 전체적인 형상이 가마처럼 생긴 상여를 말하며 다시 상여 본체 지붕의 위치에 자리한 덮개의 형태로 보아 자라의 등처럼 둥근 형태로 생긴 별갑형(鱉甲形)과 지붕 량쪽에 박공 2개를 접속 고정한 박공형(朴工形)이 있다. 루각건물형은 다층 루각형태로 된 상여로서 상여의 상단을 기와집의 형태로 마감하여 기와와 처마 등을 갖춘 기와집의 구조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을 말한다. 임금이 타던 련(辇)이나 고관대작들이 타던 화려한 가교(驾轿)처럼 비슷하게 꾸며서 죽은 이가 평소에 탈수 없었던 것을 죽어서나마 한번 타보라고 하는 것이다.[7] 연변지역의 조선족 마을에서 류행되던 상여는 가마형이 대부분이며 루각건물형도 간혹 볼수가 있었다. 룡정박물관에 소장되여있는 상여는 가마형의 박공형 상여이고 왕청현 태양촌의 상여는 가마형의 별갑형 상여라 할수있다. 룡정시 하마래촌에 있었던 수레에 조합한 상여는 루각건물형이라고 할수있는데 단층으로 된것이라 할수있다.
상여는 저승(陰間)과 이승(陽間)령역, 그리고 신성(祖上神) 령역과 일상 령역의 통합, 또는 전이 단계에서 존재하며 그렇기에 상여와 그 장식물은 이 량자적 령역을 동시에 수반하는 속성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삶의 방위는 동쪽이나 남쪽에 두고 죽음의 방위는 그와 반대인 서쪽이나 북쪽에 두는 사례가 많다. 유교에서도 죽음의 방향을 북망산(北邙山: 하남성[河南省] 락양[洛阳]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의 왕후나 공경[公卿]들이 대부분 이곳에 묻혔음.)으로 두고 있다. 죽음은 두려움이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고 삶의 또 다른 연장선이다. 상여는 상례문화 안에서 가장 큰 의례 용구이며 그 장식으로 인해 화려함과 더불어 가장 구체적인 형상물이 제시되는 상징 공간이다.[8]
상여 장식물은 조선왕조시기의 유교적 상례문화와 함께 성행한 예술적 산물이다. 충렬왕 16년(1290년) 성리학과 함께 들어온 주희(朱熹,1130~1200)의 가례(家礼)는 조선 례제 (礼制)의 기본이 되였고 이를 토대로 <경국대전>(经国大典) (1469)과 <국조오례의>(国朝五礼仪)(1474)가 편찬되여 유교식 의례의 보편화가 진행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유교식 상례의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 중기까지는 고려의 불교식 화장(火葬)문화의 영향으로 유교식 매장의례는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유교식 상례문화가 정착된 계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서 중국식 가례를 수용하였지만 있는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조선반도의 실정에 맞는 부분은 받아 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버리는 형태로 취하였다. 조선왕조 후기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상례에서 가장 큰 의례 용구인 상여에서도 그 구조와 장식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호화로운 건축물화 현상이 나타나고 장식적인 측면에서는 민화적 성격을 갖춘 그림과 더불어 각종 목조 장식물이 부착되였다. 상여 장식물은 유교적 의례 활동을 통해 량반 신분으로의 상승을 보여줄수 있는 중요한 표상물(表象物)이였다. 연변의 조선족 에게는 그러한 화려함이 이어지지 못하고 서민층에서 보편화된 간이한 상여가 전승되였다. 그러나 민화적인 장식물과 그림들이 활용되였다. 상여에 나타난 민화적 소재를 보면 가구나 도자기 그리고 수예품에서 늘 볼수있는 동식물 문양들이였다. 룡정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여 있는 상여는 비교적 대표적인 장식물이 부착된 나무공예품인 것이다. 상여의 몸체의 지붕꼭대기에 꼬인 룡두가 앞뒤로 향하게 놓여 있고 룡몸뚱이 우에는 선비인형과 동자인형이 박혀있다. 룡두를 받치는 룡수판에는 룡으로 화한 물고기, 련꽃과 물고기가 각기 그려져있고 배경으로는 산, 물, 구름이 그려져 있었다. 몸체 네귀퉁이에는 오리모양의 새 네마리가 조각되여 꽂혀 있고 란간을 고정하는 쐐기머리는 오리모양의 작은 새로 조각되였다. 란간에는 사군자의 일종인 매화, 국화가 그려져 있었고 물결무늬가 보인다. 여기서 인형은 망자를 인도하는 시자(侍者)라 볼수 있고 새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령혼의 안내자라 볼수 있다. 왕청현 태양촌의 상여에는 그려진 봉황과 물고기가 보이고 룡과 학 그림이 보이며 해와 산, 구름도 보인다.
         선비인형(복제품)


동자인형(복제품)


룡두와 인형(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새 조각품(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새 조각품(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봉황과 물고기문양(왕청현 태양촌 상여의 부분품)

이러한 상여 장식물들은 삶의 소망을 담아 죽음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죽음을 통해 삶이 연장될 것이라는  삶에 대한 축복의 함의로 묘사되는 것이다. 옛날엔 여러가지 소재로 된 자연적인 문양들이 장소나 내용에  맞게 제작되였으며 부귀다남 (富贵多男), 부귀공명(富贵功名), 무병장수(无病长寿) 등의 의미와 같이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소망을 담아 일상 기물과 같은 친숙한 소재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였다. 기물과 상여 장식물에 많이 등장하는 것들 중에서 모란꽃은 꽃중의 왕으로 부귀와 명예를 상징한다. 모란과 다른 문양이 서로 결합되여 여러가지 의미를 나타내는데 모란을 병에 꽂은 형상은 부귀평안을 상징하며 모란과 백조 한쌍이 결합되면 백발이 될때까지 부귀를 누린다는 뜻을 나타낸다. 매화의 자연현상을 보면 늙은 줄기에서 새 가지가 돋아 나오며 추운 겨울을 견딘후 꽃이 피기 때문에 로쇠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민간에서는 매화가 다섯잎으로 되여 있기에 오복인 복(福), 록(禄), 수(寿), 희(喜), 재(财)를 표시한다고 여기여 길상 문양으로 많이 리용된다. 련꽃무늬에서 련뿌리와 줄기가 서로 얽혀 있는것은 형제자매의 우애, 련꽃열매와 씨앗은 다산을 소망하는 관념이다. 그리고 련꽃의 자연특성을 보면 비록 진흙에서 피여 나지만 어지럽게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함을 유지하며 수명 또한 길다. 룡은 옛날 봉건사회에서 하늘의 권위와 왕의 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대자연의 여러가지 동물을 상상해서 조합한 것이였다. 십장생 문양은 각각에 다른 의미가 있는데 태양은 세상을 밝게 비추어 앞날을 환하게 함을 의미하며 산은 한마음 한뜻으로 변함이 없음을 의미하며 구름은 속세를 벗어난 자유로움을 의미하며 물은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며 소나무는 굳은 절개, 참대와 학은 높은 기상을 의미하며 사슴은 선함과 평화를 상징하며 거북이는 수호신과 복을 상징하고 불로초는 불로장생을 의미한다. 부귀를 나타내는 어구에서 련년유여(连年有余)라는 말이 있다. 즉 해마다 나머지가 있게 풍족하다는 의미이다. 민간에서는 이런 의미를 련꽃과 물고기에 의탁했는데 이 동식물의 명칭은 중문으로 련년유여와 같은 발음이였다. 그리고 련꽃과 물고기의 자연속성이 부귀와 련관이 있기에 장식무늬로 같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后汉书) 《리응전》 (李膺传)에서 등룡문(登龙门)이란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을 배알하는 과정을 적고 있다. 등룡문(登龙门)은 전설적인 이야기인데 그 기본내용을 보면 황하 상류의 룡문이라는 협곡에서 해마다 봄철이면 잉어들이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 가기 위해 앞다투어 협곡을 뛰여 오르는데 그곳을 성공적으로 뛰여넘는 잉어가 룡으로 화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학문에 진력하는 선비들을 이 전설속의 잉어에 비유했고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잉어가 변하여 룡이되는 것에 비유하였던것이다.

룡수판에 그려진 련꽃과 물고기(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룡으로 화한 물고기(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지붕앞면에 그려진 룡두(왕청현 태양촌의 상여 문양)


지붕뒷면에 그려진 학(왕청현 태양촌 상여)


사군자 무늬중의 국화와 매화(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사군자 무늬중의 국화와 매화(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그리고 사군자에 속하는 매화, 란초, 국화, 참대는 색채가 담담하고 향기가 청신하며 그윽하고 외진곳에서 자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력대의 문인들은 그들의 생태적 특성을 군자의 도덕적 심성이라든가 절개와 련관시켜 관념적인 대상물로 보았다. 오리(鸭)는 갑옷이라는 갑(甲)이 있어 장원급제함을 나타내고 원앙은 부부금실을 뜻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의 삶의 소망은 삶의 흔적으로 상여 장식물에 남아 있었으며 또한 망자에게 죽은 이후에도 삶이 있다면 새롭게 재탄생되는 념원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맺는말
상여는 다만 사람이 죽은후 시체를 운반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문화적 함의가 농후한 공예품으로 보아야 한다. 장시기동안 인간의 삶과 죽음의 령역에서 령혼을 이어주는 역할을 착실히 해온 상여는 비록 일상생활에서 도외시 될때도 많았지만 신비하면서 상징적인 표상물로서 매우 큰 인상을 남기였다. 조선족의 상례문화에서 빠뜨리면 안되는 상여는 현재 흔적으로만 남아있어 어느땐가 소실되지 않을가 하고 우려심이 들때가 많다. 상여를 박물관의 소장품만이 아닌 민간의 상례문화에서의 표연품으로도 활용되였으면 한다. 어떻게 보면 정중한 상례의식이 아니라 예술이 담긴 표연항목으로 재현 하는것도 바람직한 것이다. 조선족 상례가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여 있는 상황에서 상여를 상례문화의 중요한 구성 부분으로 간주하고 방법을 모색하여 보호하고 어떻게 하나 그것이 재현되게 하는것이 방향인듯 싶다. 우리 모두 합세하여 조선족의 상례문화의 흔적-상여를 문화적 차원에서 적극 보호하고 리용해야 한다.

2010년12월2일


[1] 조선민속사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4년
[2] 조선민속사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4년
[3] 조선민속사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4년
[4] 민요집성 김태갑 조성일 편주 연변인민출판사 1981년 216페지
[5] 민요집성 김태갑 조성일 편주 연변인민출판사 1981년 217페지
[6]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7-민속사 민족출판사 1998년
[7] <삶과 죽음의 경계,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리현경 민속학연구 제25호
[8] <삶과 죽음의 경계,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리현경 민속학연구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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