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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계(破界) - 2
2017년 10월 17일 11시 00분  조회:660  추천:0  작성자: 김태현
 단편소설
파 계(破界) - 2
 
도  영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알고있어 니가 어디 숨어있는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
  
      귀가에서 메아리치는 아이적의 아련한 노래소리가 가슴을 허비는데 내 나이가 벌써 지천명 언덕의 막바지로 줄달음치고 있다.
      옷섶에 지푸라기를 꿰달고 밥알이 툭툭 튀는 삶은 강냉이를 질겅거리며 무리지어 탈곡장마당에서 짚단을 헤집으며 술래잡기를 하던 시절이 호랑이가 담배를 피울 적 옛말처럼 눈앞에서 황홀하게 펼쳐진다.
      가끔, 돌아올수 없는 그 시절의 이야기가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뱀마냥 머리를 쳐들 때마다 알게 모르게 끈적끈적한 시뿌연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나에게 동년의 추억은 영원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기억속을 더듬노라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벌렁벌렁거리군 한다.
      돌아갈 수도 아니, 다시 만들어갈수도 없는 추억, 그것은 음영으로만 비낀 그림자마냥 오늘도 래일도 그리고 인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영원히  나를 동반 할것이다.
      나는 오늘도 가물가물 사라져가려는 추억의 끄트머리를 잡고 놓지 않는다.
      그것은 저녁노을이 비낀 고요한 호수에서 일렁이는 잔잔한 금물결이 아니라 사막의 끝자락에서 모래를 하늘공중으로 감아올리며 포효하는 황갈색 바람이였다…
 
 
(1)
 
      환(幻)은 어느날 두눈에 까만 테프를 붙히고 거리에 나섰다.
      눈은 감았는데도 머리끝이 보인다. 발끝도 보인다. 희끄무레한 얼굴도 보인다. 모든 것이 다 보인다. 보인다는 마음에 모든 것이 신기하게도 환하게 영상처럼 다 보인다.
      그렇지만 두눈은 시종일관 꽉 감겨져있다.
      보인다는 마음으로 생각을 모으니 모든 것이 눈앞에 생생하게 안겨온다.
      참 별일이다.
      눈을 뜨면 어차피 보이게 될 것까지도 미리 다 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희한하고 신기한가?!
      그래서 맹인들도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건가?!
      아니, 그러면 귀찮게 눈을 뜨고 다녀서 뭘 한단 말인가?! 두눈을 감고서도 모든 것을 선명하게 다 볼 수 있는데 하필이면 힘들게 눈까풀을 쳐들고 거리를 내다봐야 할 필요가 있는가?
      아서라!
      지친 눈까풀을 아예 테프로 꽉 눌러 붙혀두고 살지 그래. 눈은 본래부터 가죽이 모자라서 내여놓은 구멍이 아닐 것이다.
      환(幻)은 차량으로 붐비는 거리에 나섰지만 조금도 당황하거나 두렵지가 않았다. 그는 자기가 걸어가야 할 공간이 하얗게 보였고 또 차량들도 자각적으로 그를 피해 다녔다.
      인행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길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은 스스로 환을 비켜 스쳐갔고 환도 역시 그들과 부딛치지 않고 어렵잖게 비여있는 질서 속에 한몸을 로출시킨 채 자유자재로 걸어다닐수 있었다…
 
 
(2)
 
      삶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어느 높다란 빌딩 꼭대기에서 무작정 뛰여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원망도 없이 다만 살고 싶지 않다는 단 하나의 리유만으로 생명의 끊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환도 역시 어느 날부터인가 인생이 귀찮아졌고 두눈을 뜨고 세상을 직시하기가 싫어졌다. 즉 생명을 담보로 살기가 싫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눈으로 보기가, 눈에 보이는 것이 싫어졌을 뿐이다.
      일전 모 연구기관에서 사람들이 자살하는 원인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 우울증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환이 세상을 바라보기 싫어진 리유는 무엇일가? 그것은 환 자신도 모른다. 그 어떤 우을증 증세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턱대고 세상이 싫어졌을 뿐이다.
      두눈을 감고 있어도 환하게 보이는데 하필이면 지친 눈까풀까지 치뜨고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 리유라면 리유였다.
 
 
(3)
 
      앞에도 사람이고 뒤에도 사람이다.
      좌로 돌아서도 사람이고 우로 비껴서도 사람이다.
      보지 않으려고 애써 두눈을 꽉 감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환은 될수록이면 앞사람도, 뒤사람도, 옆사람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앞으로 한발 나서면 바로 앞사람의 길죽한 말상판과 부딪칠 것 같았다. 급하게 뒤로 돌아섰지만 어쩔 새도 없이 어떤 녀자의 갱핏한 얼굴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야?! 눈깔은 어디에 두고 다니냐?! 시퍼런 대낮에 이게 뭔 꼴이람?!”
      오밀조밀 여우처럼 귀엽게 생긴 녀자의 조그마한 삼각형 입에서 상상외로 커다란 “구렝이”가 쏟아져나왔다.
      “아니?!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되긴?! 길을 가다가 그렇게 급하게 돌아서면 어떡해요?! 어휴, 옷을 다 버렸네…”
      땀투성이된 환의 얼굴에 입도장을 찍은 녀자가 연신 퉤퉤 뱉더니 자기의 웃옷을 쳐들어보이면서 펄쩍 뛰였다.
      녀자의 황갈색 웃옷에 땀이 밴 환의 손자국이 커다랗게 찍혀있었다.
      그러나 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누가 내 뒤를 그렇게 졸졸 따라오라고 했남?! 이 너른 길을 두고 하필이면…”
      환은 저절로도 씩 웃음이 나왔다.
      (왜 사람들은 자기 잘못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남을 탓할가?! 가령 앞서가는 사람의 뒤를 밟더라도 질서만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쩐지 머리가 무거워났다.
      환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콕콕 찌르는 듯한 아픔이 머리속에서 우왕좌왕 제멋대로 활개치고 다녔다. 속이 울렁거려 금세 토할 것만 같았다. 곁에서 떠들어대는 녀자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서 희끄무레한 물체가 마치 가을 논밭에서 펄럭거리는 허수아비의 속이 빈 팔뚝마냥 앞뒤,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환의 시야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져갔다.
      길길이 날뛰던 녀자의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도 흔들흔들 펄럭거리는 허수아비의 소매자락과 함께 자꾸만 앞에서 닫겼다 열렸다를 반복하며 아리숭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우성을 치던 녀자도 점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강아지 한마리가 나타나 으르렁거렸다.
      작고 귀여운 하얀 애완견이였다.
      깃털을 빳빳하게 세우고 콩콩거리는 모습이 사납다기보다는 오히려 재롱을 부리는 것 같았다. 다가가 기름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하얀색이 가담가담 섞인 황갈색 털을 어루쓸어주고 싶었지만 두발은 굳어진듯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깨가 축 처져내려 량손도 허수아비의 건뎅거리는 텅 빈 소매자락을 방불케 했다.
      생각과 달리 몸과 행동이 따라주지 않았다. 안깐힘을 쓰면서 몸부림쳤지만 환은 간질병환자의 눈처럼 뒤집히는 동공을 의식하면서       밑둥 잘린 통나무처럼 천천히 아니, 갑작스레 길가에 쾅ㅡ 하고 너부러지고 말았다.
      허연 게거품이 게질게질 뿜겨져나오는 입가에 덩치가 큰 파리들이 날아들었다.
      온몸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면서 개암벌레마냥 동그랗게 꼬부라들고 두다리가 꽛꽛하게 경직되기 시작했다.
      길 가던 사람들도 두눈을 놓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가까이에 다가와서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보지 않고 그저 강건너 불을 구경하듯 덤덤하게 내려다볼 뿐이였다.
      환은 입을 하ㅡ 벌렸다.
      마침내 거친 숨소리가 잔뜩 벌어진 입안으로부터 간헐적으로 새여나왔다.
      갑자기 눈이 띄이였다. 살것만 같았다.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요란하게 고막을 때렸다.
      환은 드디여 잔뜩 오그라든 몸을 간신히 펼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도저히 반듯하게 올방자를 틀고앉을 수가 없었다. 몸을 바로잡으려고 안깐힘을 썼지만 머리가 자꾸만 길 밖으로 숙어졌다.
      환은 팔뚝 여기저기 울뚝불뚝 시퍼렇게 멍이 든 자욱을 들여다보며 두눈을 감았다.
      이상했다. 눈을 감고있는데도 퍼런 멍자욱은 여전히 눈앞에서 굳어져갔다.
      환은 입안 가득 물고 있던 허연 거품이 섞인 침을 길가에 콱 내뱉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바지가랭이에 먼지투성이와 함께 달라붙은 지푸래기들을 뜯어내며 눈물을 흘렸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 때문인지 아무 것도 볼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두눈을 감지 않고 똑바로 떴는데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허연 눈물이 곬을 파며 흙먼지가 게발린 얼굴 우에서 뚜르륵 시뿌연 먼지와 함께 쉼없이 굴러내렸다.
      환은 아무런 말도 없이 허리를 폈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앞을 향해 뚜벅뚜벅 긴 다리를 흔들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이상야릇한 눈길들이 멀어져가는 환의 둥그러지게 휘여진 뒤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끝을 세워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세월도 질서없이 흘러갔다.
      인생의 년륜도 가고오는 세월 속에 어느덧 반세기를 아로새겨가고 있었다. 지천명의 나이를 눈앞에 두고 환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뇌경색인지, 뇌종양인지, 간질병인지 하는 원인불명의 불치의 병에 걸려 몸무게가 백근도 안되는 “페인”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환이가 불혹의 끝자락에서 덧없이 먹어가는 나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거리던 지난 세기 90년대말, 더 정확하게 말하면 환이가 49살, 그러니 지천명으로 과도하기 직전인1999년도의 어느 여름날에 있은 일이였다…
 
 
(4)
 
      환은 한동안 창밖에 던져지는 시선조차 두려워졌다. 감히 밖으로 나가려는 엄두는 더구나 내지 못했다.
      밝고 투명한 빛갈이 두려웠고 사람들이 째려보는 송곳끝 같은 날카로운 눈길에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빵빵 순식간에 터지는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두려웠고 여기저기 나무밑에 쪽걸상을 놓고 옹기종기 모여앉은 로인네들의 뿌옇게 빛을 잃은 유리알 같은 희멀건 눈길들이 소름이 끼쳤다.
      “비켜! 비키라니까!”
      “비켜! 왜 길을 막는 거야?!”
      …
      난데없이 들려오는 짓꿎은 고함소리와 악청들이 듣기 싫었고 빨갛고 노랗고 파란색으로 영글어가는 길가의 꽃밭에서 한들거리는 나비와 가느다란 꽃가지 우에서 이꽃저꽃에 옮겨앉으며 희롱하는 빨간 잠자리마저도 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창문을 꽁꽁 닫은 방안에서도 창밖의 고함소리가 고막을 찌르는 것 같았고 두눈을 감고 있어도 화단에서 날아예는 예쁜 나비와 빨간 잠자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여기저기 도처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소리가 귀를 뚫고 얇다란 뇌막까지 산산히 짓찢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환은 얼이 나가 있었다.
      시중의병원으로 찾아갔더니 의사는 정신장애와 같은 공황속에 시달리면서 자신을 다잡지 못하고 극도의 실의에 빠져 자기를 구출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즉 자아책망 속에 갇혀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였다.
      환은 솜뭉치로 두귀를 틀어막고 두눈에 까만 반창고를 붙이고 이불을 들 쓴 채 하루종일 침대 우에서 우둘우둘 떨어댔다.
      누가 보아도 완전히 신들린 “정신병자”였다.
 
 
(5)
 
      환에게는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 공복에 약 다섯알을 먹고 아침밥을 먹고 난 후 또 약 열알을 먹고 밖에 나가 운동하고 마당 한복판에 만들어놓은 정원의 화단에서 풀을 뽑는 것이였다.
       약은 간호원이 시간마다 챙겨주기에 싫은 대로 억지로 먹었지만 화단의 풀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환이 자각적으로 뽑았다.
       화단의 여기저기에 빨간 다리아꽃들이 탐스럽게 피여있었다. 사실 화단에 자란 풀이라 해봐야 부식토에 딸려온 잡풀이 고작이였다.
      한달전 환이 구급차에 실려 여기로 올 때는 한창 꽃망울이 잎속에 묻혀 부끄러움을 타던 시기였다. 그 꽃망울들이 이젠 자기만의 독특한 향기를 쏘면서 요염하게 피여 나고있다.
      환은 아롱다롱 여러가지 색갈들로 어우러진 커다란 다리아꽃을 좋아했다.
      그것도 진붉은 다리아꽃을 더욱 선호하였다.
      탐스럽게 핀 다리아꽃이 어쩌면 환의 두눈을 활짝 틔워준 것만 같았다.
      병원에 실려오던 날, 가까스로 밝고 환한 빛을 피해 얼핏 스친 눈길에 보았던 꽃이였다. 곧 망울을 터칠 다리아꽃의 연한 보라색꽃이파리의 유혹에 못이겨 자기도 모르게 화가로서의 본능적인 호기심이 머리를 쳐들었던 것이다.
      환은 바깥출입을 하면서부터 약 먹고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화단의 낮다란 벽돌담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터쳐지지 않은 빨간 다리아꽃의 통통한 망울이 호기심을 자아냈지만 이젠 막 피여나기 시작한 다리아꽃의 탐스러운 꽃이파리의 유혹에 끌려 넋을 잃고 있었다.
      화단을 관리하는 원예사한테 책망도 많이 들었지만 그런 책망과 욕설을 마이동풍으로 여기면서 귀등으로 흘려보냈다. 이젠 원예사도 지쳤는지 아예 환을 관계하려고 하지 않았다.
      환은 한가할 때면 이미 피였다가 지기 시작한 다리아꽃의 연보라색꽃이파리들을 한잎한잎 따서 화단을 둘러막은 낮다란 벽돌담에 자기 나름대로 배렬하군 하였는데 그 속에서 일종의 환락과 즐거움을 느꼈다.
      환에게 있어서 빨간 다리아꽃은 분명 누군가를 의식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누구라고 딱히 확정 지을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 확정과 믿음을 자기만의 깨달음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환에게 있어서 다리아꽃은 병원에서의 유일한 향수였고 또 그만의 쾌락을 만끽하는 소중한 존재였다.
      환은 오늘도 화단의 낮다란 벽돌담에 걸터앉아 막 시들어가기 시작한 빨간 다리아꽃을 바라보며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직도 더 피여야 할 꽃이파리들이 벌써 시들어서 가담가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환은 다가가 시들어가는 다리아꽃송이를 뜯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꽃송이는 완고하게 꽃가지에 매달려 좀체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환은 손에 완력을 써서 끝내는 시들기 시작한 커다란 다리아꽃송이를 가지에서 뜯어냈다.
      그리고는 후ㅡ 길게 한숨을 내쉬고 아예 화단의 벽돌담에 걸터앉아 시들어 떨어지기 시작한 다리아꽃잎을 한잎한잎 따서 화단의 꽃그루터기의 밑둥에 던지기 시작했다.
      맹목적으로 꽃잎을 따서 던지던 환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 꽃잎을 다시 주어 낮다란 벽돌담에 한잎한잎 곱게 펼쳐놓고 꽃송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시들어서 요염하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마지막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 다리아꽃송이는 커다랗게 벽돌담에 피여나 환을 보고 정겹게 웃었다.
      환도 웃었다.
      참말이지 죽어서 다시 피여난 다리아꽃이였다.
      “와, 걸작이네요! 다리아꽃이 다시 벽돌담에서 피였네요?!”
      언제 다가왔는지 화단을 가꾸는 원예사아주머니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치솔질을 해본 것 같지 않은 시누런 이빨을 드러내놓으며 반색을 하였다.
      “당신은 화가… 그러니까 그림 그리는 것이 전공인가 봐요? 아유, 완벽하네요. 다시 피였어요. 죽었던 다리아꽃이…”
      원예사아주머니가 곁에서 이순에 넘은 녀인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환은 나풀거리는 원예사아주머니의 검붉은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게요. 죽어서도 이렇게 다시 꽃으로 필 수 있네요. 참, 사람도 죽으면 다시 이렇게 살아날수가 있을가요? 떠나갔던 사람이나… 계절… 날아갔던 철새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예요.”
      환은 뜬금없이 꽃과 사람과 계절을 련관시켰다.
      “아유, 선생님도?!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만약 령혼이 있다면 어느 하늘가에서 떠돌고 있을지 모르지만?!”
      원예사아주머니는 두눈을 올롱하게 치뜨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정말 그럴가요?”
      “그럼요. 어림도 없죠! 귀신이라면 몰라도…”
      “그래요! 귀신이라면 모를가… 어림도 없겠죠! 세상을 떠난 죽은자의 령혼이 이생에는 없듯이…”
      환은 자기도 모르게 원예사아주머니와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다시는 생생한 꽃송이를 뜯어내지 마세요. 아직도 더 필수 있는데 이렇게 함부로 뜯어내면 어떡해요?”
      원예사아주머니의 너그러운 책망이였다.
      환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다시는 원예사아주머니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뜯어낸 꽃잎으로 벽돌담 우에 만들어놓은 자기의 작품ㅡ 다리아꽃을 넋 놓고 바라볼 뿐이였다.
      “참, 선생님은 괴짜예요. 말이 안 통한다니깐요! 그래도 미워하지 않아요. 사람이 미운 게 아니라 병이 미운 거죠! 누구는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나요?! 그런 것은 아니죠! 하지만 다시는 생생한 꽃송이를 가지에서 뜯어내여 죽이지 마세요!”
      원예사아주머니는 바라던 대답을 듣지 못한지만 일러둘 것은 따끔하게 일러둔다는 식으로 할 말을 하고는 등을 돌리더니 길다란 대나무비자루를 들고 자리를 떴다.
      환은 뚱기적뚱기적 멀어져가는 원예사아주머니의 오지독 같은 뒤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왜 살가? 무엇을 위해서 살가? 저 아주머니는 무엇을 바라고 여기서 화단을 가꾸면서 이처럼 어럽게 살가? 언젠가는 꼭 떠나갈 인생인데…”
      환은 문득 가을 논밭에 속절없이 서있는 허수아비가 떠올랐다.
      자기의 주의가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속이 텅 빈 홀쭉한 몸뚱이를 펄럭이는 허수아비,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주어진 그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허수아비… 과연 허부아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가?!
      “후ㅡ 저 다리아꽃은 죽어서도 다시 필 수가 있는데…”
      환은 끙ㅡ 하고 길게 앓음소리를 냈다.
      “선생님…?!”
      그때 누군가 환을 부르고 있었다.
      환은 부름소리를 따라 머리를 들어 바라보았다.
      “선생님, 약이요! 약 먹을 시간이 됐어요!”
      병원건물 입구에서 하얀 가운을 걸친 신경내과의 젊은 간호원이 머리 위로 손을 젓고 있었다.
      환은 다시 끙ㅡ 하고 앓음소리를 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피여있는 다리아꽃은 여전히 화단둘레를 막은 낮다란 벽돌담 우에서 곱게 웃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필 수가 있어서… 너는 죽어서도 살아서도 여전히 꽃이로구나!”
      환은 쓸쓸하게 돌아섰다.
      그때까지 병원건물 입구에서 하얀 가운의 젊은 간호원이 손을 저으며 하얀 다리아꽃처럼 환하게 웃고있었다…
 
 
(6)
 
      환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신경내과의 젊은 간호원한테 부탁해서 얻어온 붓으로 도화지에 자기만의 수묵화를 그렸다.
      인물화도 그리고 난초도… 여직껏 이처럼 재미나는 일을 왜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젊은 간호원은 맨날 붓끝에 까만 먹물을 묻혀 도화지에 뭔가를 그리고있는 환에게 호기심을 가졌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아무런 말도 없이 곁에 서서 고즈넉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환이 휘두르는 붓에 하얀 도화지가 새까맣게 꽉 채워졌지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끝내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돌아서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환은 매일 아침밥과 함께 약을 먹고 난 후이면 누가 시키기라도 한듯 붓을 챙겨들었고 횡성수설 알 수 없는 말들을 입 속에서 중얼거리며 하얀 도화지우에 그림을 그리군 했다.
      “선생님, 오늘은 무얼 그리셔요?”
      한번은 젊은 간호원이 환에게 물었다.
      “저기 저 정원 화단의 다리아꽃을 그리려고 하는데 왠지 잘 안돼요?”
      그 말에 젊은 간호원은 가까이에 다가가 환의 붓이 휘젓고 지나간 까만 자욱을 세심히 들여다보았다.
      “아유?! 맞아요! 그러니깐 이것이 꽃이구만요. 아니, 그런데 다리아꽃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국화, 가을에 핀다는 국화꽃에 더 가깝구만요. 그리고 저기 저 그림은 어쩐지 사람의 머리카락… 그러니까 인물화인 것 같군요. 하여튼 선생님은 그림에 재간이 있다니깐요!”
      젊은 간호원은 그제야 환이 그린 것이 꽃이라는 것을 대충 파악한 것 같았다.
      환은 어설프게 웃었다.
      병원의 화단에 핀 다리아꽃을 주제로 그린다는 것이 생각 밖에 그만 국화꽃이나 인물화가 될 줄은 자기도 몰랐다.
      그 자신도 찬찬히 다시 들여다보니 어쩐지 국화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다리아꽃이면 어떻고 국화꽃이면 어떠랴? 아무튼 시간 나는대로 짬짬히 그리다 보면 제대로 된 그림이 그려지겠지!”
      환은 자기가 그린 몇장의 그림에 자기 나름 대로 만족하였다.
      비록 손이 떨려 여기저기 맹인이 제멋대로 막대를 휘젓고 지나간 것 같았지만 하나의 령혼이 붓끝에서 새로운 삶을 안고 꽃으로 부활되고 있지 않는가?!
      환은 자신이 그린 국화꽃그림을 한식경이나 들여다보았다.
      젊은 간호원이 인젠 점심시간이 되였다고 알렸지만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림만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저기요, 이 그림의 제목을 무엇이라고 달면 좋을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제목을 써넣을 수가 없네요.”
      환은 점심시간이라고 재촉하는 젊은 간호원에게 물었다.
      “아유, 선생님도? 저같은 일개 간호원이 어찌 이처럼 오묘한 뜻이 담긴 그림에 감히 제목을 달 수 있겠어요? 눈을 씻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뭐가 뭔지 잘 분간하지  못하는 화맹(花盲)인데…”
      젊은 간호원이 손사래를 치며 급급히 돌아섰다.
      “괜찮아요. 여기 이 그림이 가을국화잖아요. 그럼 국화로서의 어떤 품위를 상대해서 제목을 달 수가 있지요. 세간에서는 국화가 만물이 시들고 퇴락해가는 시절에 홀로 피여나 현세를 외면하고 품위 있게 산다고 해서 정절과 은일(隐逸)함의 상징으로 일컫고 있어요! 과연 어떤 제목이 어울릴가요?”
      환은 자기도 모르게 그림에 깊이 푹 빠져들었다.
      사유의 세계와 문학의 세계, 그리고 실천덕목인 생활 자체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추구되여온 종합예술의 한 분야라고 할수 있는 수묵화의 기교와 비법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그림에 깊이 빠져들고 또 그 그림이 숨겨진 품위를 자기만의 상상 속에서 승화시켜보기도 한다.
      젊은 간호원은 환의 지청구에 자리를 뜰념을 못한 채 선자리에서 오래동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보세요! 어쩌면 이 국화꽃의 핍진한 그 향기가 모름지기 코밑으로 들어오는 것 같지 않아요?!”
      환은 상상의 련못에 깊이 빠졌다.
      “그러게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쩐지 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잘 모르겠어요!”
      젊은 간호원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간호원아가씨는 사군자(四君子)에 대해 들어봤어요?”
      환은 그림에 숙맹인 젊은 간호원이 어쩐지 처량해보였다.
      “사군자요? 알아요! 알구말구요! 식물중의 매화, 란초, 국화, 대나무를 일컬어 그림에서 사군자라고 하지 않아요? 치, 선생님도,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어요?”
      젊은 간호원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웃었다.
      “어, 그런 뜻은 아니고! 때문에 옛날 덕과 학식, 인품을 두루 갖춘 사람을 일컬어 ‘군자’라고 하였어요! 특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가진 군자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던 유교사회에서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이 ‘사군자’를 선비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고 좋아했어요.”
      환은 말고가 터지니 자기도 모르게 일련의 국화꽃을 비롯한 ‘사군자’에 대해 줄줄이 엮기 시작했다.
      젊은 간호원은 두눈을 올롱하게 뜨고 환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여기 이 그림에 그렇게 심각한 내용이 담겨져있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저 선생님이 한가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젊은 간호원이 미안한듯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며 심각한 기색을 지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 ‘사군자’를 통해 변함없는 뜻과 마음을 나타내고 고아한 경지를 추구하고자 해요. 예로부터 매화는 선비의 아취를 지니고 란초는 제왕과 같고 국화는 호걸과 같은 풍채를 지니고 대나무는 대장부의 기백을 지녔다고 했어요!”
      환은 신이 나서 일장 설화에 들어갔다.
      “때문에 옛날부터 ‘사군자’를 벗에 비유하여 일컬은 말이 있어요. 알려줄가요?”
      환은 잠시 말을 끊고 뜸을 들여 젊은 간호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저는 이 그림에 그런 심오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젊은 간호원이 반색을 하였다.
      환은 일부러 건 가래를 뗐다.
      “옛날부터 ‘사군자’를 벗에 비유하여 일컸기를 봄에 피는 매화는 “고우(故友)”, 섣달에 피는 매화는 “기우(奇友)”, 란초를 “방우(芳友)”, 그리고 국화는 “일우(逸友)” 또는 “가우(佳友)”, 대나무는 “청우(清友)”라고 했어요. 이 말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 매화 “고우”와 “기우”는 오랜 벗과 진기한 벗을 상징하고 란초 “방우”는 꽃다운 벗을, 그리고 국화 “일우”와 “가우”는 뛰여난 벗과 아름다운 벗을 상징하며 대나무 “청우”는 맑은 벗을 상징한다고 해요. 그러니 정말 옛 선인들의 말들이 얼마나 신기해요?”
      환은 황홀한 자아감각에 빠졌다.
      말할수록 신비의 경지에 다닿는듯한 정취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이 국화꽃그림의 제목을…?!”
      갑자기 젊은 간호원이 환성을 질렀다.
      “뭔데요?”
      환은 젊은 간호원의 반 쯤 벌려진 발가우리한 삼각형입술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국화가 ‘일우’, 또는 ‘가우’, 즉 뛰여난 벗과 아름다운 벗을 상징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 국화꽃그림을 ‘일우례찬’이라고 하면 어때요? 제목을 그냥 ‘국화’라고 달면 너무 유치하고 번연할 것 같아서요!”
      젊은 간호원은 두눈에 신비한 물음을 담고 환을 바라보았다.
      환은 그 말에 다시금 어깨가 움쭐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래, 바로 그거예요! ‘일우례찬’ 정말 마음에 들어요.”
      환은 웃었다.
      오랜만에 처음 웃어보았다. 날 것만 같았다.
      “그럼 인젠 점심식사를 드셔야죠. 그리고 약도…”
      “그래야지요! 먹어야죠. 먹어야 살고 먹어야 그림도 그리고 먹어야…”
      환은 제멋에 도취되여 중이 념불을 외우듯 끊임없이 중얼거리다 말고 병실을 나가는 젊은 간호원의 가냘픈 뒤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래 먹어야지요! 먹어야…”
 
 
(7)
 
      환의 소장품이 한가지 더 늘어났다.
      책이 아닌, 그리고 수석도 아닌 두터운 도화지와 화선지에 그린 그림들이였다.
      몇달전부터 시중의병원의 신경내과에 입원하여 치료받으면서 그렸던 그림들, 즉 옛날부터 일컬어왔던 사군자중의 국화꽃을 비롯한 여러장의 수묵화였다.
      그가운데서 병원의 젊은 간호원이 제목을 달아준 “일우례찬”의 그림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미술부에 의뢰하여 정교한 액자까지 화려하게 맟춰서 서재에 걸어놓았다.
      비록 자기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그려온 수채화거나 유채화에 비하면 또 다른 경지의 신선함이 있었고 뛰여난 품위가 돋보였다.
      수채화는 화선지 우에 물감을 올려놓는 방법으로 그리는데 물론 화선지에 물감이 스며들기도 하지만 그것이 주되는 목적이 아니라 물감을 화선지 우에 얹는 것이였다. 그렇게 화선지의 섬유질을 확대하여 보면 화선지 우에 물감이 올라가 있는 것이 특징적이라면 수묵화는 또 다른 예술의 진품이였다.
      말 그대로 수묵화는 쉽게 종이에 먹으로 염색을 하는 방법과 흡사하다. 흔히 먹을 화선지 우에 칠하면 그것이 종이에 염색이 되는 것처럼 종이의 단면을 확대해서 보면 종이 우에는 수없이 많은 섬유질로 되여있는데 이 섬유질을 염색하는 방법과 같았다. 그렇게 뒤면까지 먹이 찍혀 나오는 것은 염색이 많이 된 것이고 뒤면에 연하게 나오는 것은 염색이 조금 된 것이였다.
      수묵화는 이처럼 천에 그림을 그리듯 먹을 칠했 을 때 종이 속으로 먹이 스며들게 하여 제작하는 것이 주원인으로 수채화에 비해 현란한 기교와 방법이 따로 있었다.
      환은 지금까지 그려온 수채화에 대한 호감도가 갑작스레 떨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것도 시중의병원에서의 한차례 입원치료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니 지금까지 그려온 모든 수채화가 알게 모르게 멀리로 가볍게 사라지는 듯한 진통같은 아픈 느낌이 들었다.
반면 알게 모르게 수묵화의 그 전통적인 현란하고 부드럽고 미묘한 종합예술의 눈부신 경지가 자신의 화실에서 환하게 펼쳐지는 듯한 지고무상한 신선한 쾌감들을 올올이 맛 보는것만 같았다.
 
 
(8)
 
      환은 국가문화부에서 조직한 중국국제과학기술성과박람회에 출시할 유화 “호랑이”가 곧 마무리단계에 들어섰는데 한켠에 방치해둔 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꾸만 수채화의 “사군자(四君子)”에 신경이 씌여 도저히 “호랑이”의 천연적인 색조와 물감을 맞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모시간은 바야흐로 다가오는데 화선지 우에서 달려가는 붓끝의 령감은 줄곧 진한 먹물 속에 푹 잠겨 수묵화란 생소한 경지에서 “사군자”의 진한 품위를 안고 활기차게 넘나들었다.
 
 
(9)
 
      환은 일상이 분주해졌다.
      그만큼 사는 멋이 새로와졌다.
      눈에 새까만 반창고를 붙힌 채 활보하던 거리에 좀처럼 나서지 않았다. 물론 다시는 눈두덩에 반창고따위를 붙히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20평방메터 되는 화실에서 분주히 돌아쳤다.
      두눈을 뜨고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물건들이 수두룩했다.
      찾고찾아도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환은 눈에 보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하루의 코스를 열었다.
      창가에 줄 세워 가지런히 놓인 범꽃무늬의 화분통부터 시작하여 늦게나마 새롭게 알고 편애하게 된 “사군자(四君子)”인 매화, 란초, 국화, 대나무의 이파리에 먼지 하나 낄세라 털어내고 닦아내고 안달을 떤다.
      반나절이나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드디여 마주앉은 화선지 우에 지금까지 배우고 실천하고 익숙하게 그려왔던 유화와 수채화의 기본바탕을 떠나 남보기에도 낯설고 생소한 먹과 물감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령감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갔다.
      꽃의 구상에서 자유로이 나래치다가도 이외로 사람에 대한 인물구상에 몰두하여 심각해지기도 했다.
      이른바 한올한올의 머리카락이라도 그 모근이 닿는 살과 피부 사이의 모양을 섬세하게 드러내려고 붓을 두손으로 눌러댔다가 살짝 옅은 동작으로 괴상한 몸짓까지 해가며 수묵화란 생소한 미술의 경지에 푹 빠져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허우적거렸다.
      환의 붓이 지나가는 자욱마다 듬성듬성 메마른 가을의 산등성이에 야하게 모습을 드러낸 검은 바위마냥 방안 여기저기에 화선지가 방바닥에 거칠게 널려 발 내디딜 틈도 없었다.
 
 
(10)
 
      환은 두문불출하고 스무평방메터 남짓한 화실에만 들어박혀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무지의 한계에서 오로지 느낌으로만이 마주할 수 있는 그림의 세계이고 하늘높이 치닿는 상상의 화려함이였다.
      그러나 어찌보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였다.
      꿈에조차 그려보지 못한 수묵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허황한 것 같았지만 이제는 그 허무함이 하나의 꿈같은 유혹이 되여 해빛과 비와 물방울에 어울린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칠색무지개와 같았다.
      환의 메마른 두눈에 한줄기 푸른 빛깔의 선이 그려졌다.
      환영과 환호, 부드러움과 향기 속에 소외되여가던 욕망과 우러름이 하나의 성스러운 빛깔이 되여 하늘과 무한한 땅 사이를 이어놓았다.
      환은 환영 속에 두 팔을 자유자재로 벌렸다.
      세상 모든 것을 보듬어안을 자신감이 생겼다.
      환은 드디여 두눈에 까만 반창고도 붙히지 않은 채 홀가분하게 화실을 떠날 수 있었고 새들이 지저귀고 사람들이 오가며 환호하고 들끓는 바깥세상에 한발을 내디딜수가 있었다.
      용기!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지도 않고 또 손으로 만질수도 없는, 하나의 완정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보석같은 결정체, 진실된 “용기!”였다.
비 온 뒤의 땅을 품어안는 무지개의 신성함이랄가, 그것은 바로 하늘과 땅이 하나의 빛깔로 어울어져가는 오로라의 물결 같은 이 세상 극치의 아름다움이였다.
 
 
(11)
 
      환은 한장의 그림을 놓고 오래동안 사색에 잠겼다.
      왼손에 오각별을 단 군모를 정중하게 받쳐들고 오른손에는 새빨간 비닐가위를 씌운 “모주석어록”책을 가슴 앞에 든 소녀가 량볼에 보조개를 파며 씩씩하게 서있는 반신상이였다.
      쌍태머리가 귀가에 보일듯말듯 드리우고 조금은 걀죽한 닭알형의 얼굴에 청초함이 다분하고 쌍겹진 두눈과 량볼에 살짝 패인 보조개로 하여 웃음을 짓는 듯하였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순수한 모습으로 매력적인 자력을 뽐내는 데 비해 목에는 연한 불색스카프를 두르고 가슴 앞에는 끝머리를 살짝 드리우고 허리에는 군용혁띠를 착용한 채 입가에 가느다란 실웃음을 지으며 어딘가를 바라보는 처녀ㅡ 상해지식청년 오청화를 그린 그림이였다.
      “후ㅡ”
      환은 가슴이 꺼지듯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림을 바라보는 두눈에 푸른 샘물같이 찰랑거리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였다.
      살짝만 건드려도 떨어질듯 커다란 맑은 눈물방울이 눈초리 끝에 매달린 채 화실을 비추는 태양의 광선과 어울려 방안에 은보라색빛깔을 뿌렸다.
      똑또르르, 좌르륵…
      환의 착잡한듯 담담한 얼굴에서 순식간에 맑은 샘줄기가 터진듯 눈물이 량볼을 타고 쏟아져내렸다.
      “아버지…?!”
      환의 조금 벌어진 입안에서 목갈린 웨침소리가 거칠게 새여나왔다.
      “아버지… 아버지…?! 설마 우리 아버지가…?!”
      아버지가 만년에 심장병으로 병원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환은 아버지의 “좌천”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향지식청년배치사무실에서 사업하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좌천”되여 쟈피거우의 탄광에서 퇴직전까지 광산로동자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림종전에도 역시 한마디로 40여년전의 모든 것을 일축하였다.
      “부질없어라!”
      환은 아버지의 말씀을 리해하지 못했다.
      가슴 속에 옹이로 남아있는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40여년전의 모든 것을… 이젠 아무 것도, 그리고 더는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아버지는 힘들게 마지막숨을 톱으면서도 어머니와 우리 자식들에게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않으셨다. 다만 그 누구에겐가 던지듯이 알아듣지도 못할 어눌한 소리로 련거퍼 세번  같은 말을 반복하기만 하였다.
      “부질없어라! 부질없어라! 부!ㅡ질!ㅡ없!ㅡ어!ㅡ라!”
       아버지는 마지막 삶을 병원의 한평방메터도 않되는 침대우에서 살다가 향년 70세를 한달 앞두고 2008년 무자년 8월20일에 총망히 운명하셨다. 가시는 걸음이 무엇이 그렇게도 급하셨던지, 그리고 또 무엇이 그처럼 아쉽고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던지 우뭉하게 꺼진 두눈확에 처연하게 비친 두눈을 감지도 못하셨다.
      그후 아버지의 유물을 정리하다가 낡고 퇴색한 나무궤 밑에 깔려있는 연한 불색스카프와 그림 한장을 발견하였다.
      바로 상해지식청년 오청화를 그린 그림이였는데 날자를 보니 1975년도의 겨울이였다.
      이 그림이  상해지식청년 오청화의 연한 불색스카프와 함께 아버지의 유물 속에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2)
 
      환은 오래도록 묵상에 잠겼다.
      긴 추억의 짓꿎은 허허벌판에서 쉽사리 헤여나오지 못했다.
      모든 것이 악몽과도 같은 혼잡한 세월이 만들어낸 아픔이였고 상처의 딱지가 앉은 흔적들이였다.
 
      …
      금방 하학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오청화가 뒤를 따른듯이 집안에 들어섰다.
      그날따라 오청화의 목에는 얇고 연한 불색스카프가 걸려있었다.
      언제나 풀색 군복을 입고 군모를 단정하게 쓰고 허리에 군용혁띠까지 두르고 다니던 모습에 비해 한결 신선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런 오청화를 넋 잃고 바라보다가 문득 창작의욕이 솟구쳐 무작정 그녀를 구들 한가운데 세워놓고 모델로 삼아 고등학생의 서투른 솜씨로 인물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오청화는 말없이 야릇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이 마치 막 피여나는 다리아꽃을 방불케 했다.
      나는 집에 있는 길다란 밥상 우에 도화지를 펴놓고 가로 세로 휙휙 필을 날리며 난생처음 사람을 모델로 인물초상화를 그려갔다.
      한식경이나 꼼짝않고 모델이 되여준 오청화는 연필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감상하면서 환성을 내질렀다.
      “와?!탠차이! 니유우탠차이화쟈더치즈!(哇-?!天才?! 你有天才画家的气象质!와 ㅡ 천재네요! 화가의 기질을 타고났나 봐요!)”
      오청화는 구들 우에서 폴짝폴짝 뛰며 어랜애마냥 천진하게 손벽까지 짝짝 쳐댔다.
      “썬머야…?!(什么呀?! 무슨…?!)”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오청화 앞에서 몸둘바를 몰라했다.
      곁에서 말없이 지켜보시던 엄마마저 다가와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히야, 우리 수현이가… 정말 네가 그린 그림이 맞는거니? ‘꾸냥(姑娘, 처녀)”을 신통하게도 그렸구나! 우리 수현이에게 이런 재간이 있는 줄 몰랐네.”
      엄마마저 신기해하며 칭찬하자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림을 그린 나마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통하게도 오청화의 모습이 밥상 우의 도화지에 고스란히 복제되여있었던 것이다.
      오청화는 한동안 말없이 그림만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머리를 갸우뚱하고 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나풀거렸다.
      “띠띠!뿌,쭈쐔! 쩌이거화게워싱부싱? 워류거찌낸바!(弟弟!不, 洙铉! 这个画给我行不行? 我留个几年吧! 동생, 아니 수현! 이 그림을 나에게 주면 안돼요? 기념으로 남기려구요!)”
      오청화의 얼굴은 빨갛게 타오르는 동녘의 태양과도 같았다.
      “띠띠!(弟弟! 동생!)”라고 부르던 오청화의 호칭이 갑자기 “쭈쐔!(洙铉! 수현!)”으로 바뀌어졌다.
      “커이!(可以! 되구말구요!)”
      나는 통쾌하게 대답했다.
      “게이니! 니 나저!(给你!你拿着! 자, 받아요!)”
      나는 그림종이를 둘둘 말아서 오청화에게 건네주었다.
      “뿌,쭈쐔!니짜이쩌이거화즈쌍챈거쯔호마?(不,洙铉!你在这个画纸上签个字好吗? 아니, 수현! 그림에 싸인을 해줘요.)”
      “씨잉!(行! 그럴게요!)”
      나는 그림을 다시 밥상 우에 펼쳐놓고 아무런 주저심도 없이 “1975년 11월27일”이라고 날인을 밝힌 후 그 밑에 “환”이라고 예서체로 휘갈겨썼다.
      오청화는 한동안 묵묵히 들여다보더니 그 의미를 몰라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쭈쐔!쩌이거썬머쯔?(洙铉! 这个什么字? 수현, 이게 무슨 글자예요?)”
      나는 오청화의 물음에 머쓱하게 나만의 수줍움에서 깨여났다.
      나는 조선민어로 “환”자인데 한어의 “환썅(幻想)”과 같은 뜻으로서 나의 미래 지향적인 꿈을 담아 예명을 “환”자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오청화는 또 한번 환성을 질렀다.
      “쭈쐔!니유쩐메이호더링깐나?!호썅파! 니이훠우이띵요준땅거쭈웅궈유밍더따화쟈!(洙铉! 你有真美好的灵感呐?! 好想法?! 你以后一定要准当个中国有名的大画家! 수현, 정말 멋진 아이디어네요. 좋은 생각이예요. 당신은 앞으로 꼭 중국의 유명한 대화가가 될 거예요!)”
      나는 오청화의 칭찬을 들으며 또 한번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것은 분명 되는대로 밥상 우에 종이를 펼쳐놓고 그린 하나의 습작품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날 오청화의 극찬속에 하루종일 기분이 둥둥 떠있었다…
 
      환은 이름모를 애수에 푹 잠긴 채 말없이 오청화를 그린 그림을 네모나게 접어서 다시 불색스카프로 곱게 감쌌다.
      그리고는 반백이 흐르기 시작한 머리를 쳐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세월은 덧없이 40여년을 줄달음쳐왔다. 그러나 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였던가?!
      돌이켜보니 먹물과 화선지 우에 얼룩진 고달픈 인생 뿐이였다.
 
 
(13)
 
      환은 한통의 낯선 전화를 받고 아연해지고 말았다.
      수도 북경에서 걸려온 장거리전화였는데 국가문화부에서 조직한 2012중국국제과학기술성과박람회 준비위원회의 입선작 선정 통지였다.
      입선작으로 뽑힌 작품은 뜻밖에도 유채화 “호랑이”가 아닌 력대 영웅들과 선비들의 절찬 속에 종합에술의 당당한 품위를 지켜온 매화, 란초, 국화, 대나무 등 “사군자(四君子)”중의 하나인 국화를 그린 수묵화 “일우례찬”이였다.
 
 
ㅡ 파 계(破界) – 2 ㅡ
 
2017년 9 월 <연변문학> 제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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