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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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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도시 소흥
2014년 09월 01일 07시 01분  조회:411  추천:0  작성자: 비전


역사문화도시 소흥

장학규

 

소흥하면 노신선생의 글이 떠오른다.독특한 흙기와 지붕밑으로 집집을 이어주는 장랑(대줄기 비가 쏟아져도 옷자락 하나 적시지 않고 이웃 마실을 다닐수 있는 장랑) ,길거리를 따라 얼기설기 이어진 운하,그 운하를 따라 지금은 고기잡이가 아닌 순수 관광용인 오봉선(乌篷船)이 시름 없이 떠다닌다.오봉선 하면 글만 본 사람들은 잘 모를것이다.배 양옆에 우리 미닫이 홈 같은 금이 있다.거기에 대나무로 된 "미닫이" 서너개를 활자처럼 휘여 가지런히 세운다.평시엔 그것들을 가운데 모아두었다가 일단 비가 오면 일직자로 쭉 당겨놓으면 비를 피할수 있는 요새가 된다.물론 배의 앞쪽과 뒤쪽은 막지 않는다.사공이 방향을 잡아야 하고 관광객이 주위 경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흥에 네번 갔었지만 옆에 사람이 딸려있다보니 함형술집에서 술을 먹지 못한 것이 지금도 유감이다. 한번은 저녁 아홉시에 택시 타고 달려갔으나 술집이 문을 닫아버려 어쩔 수 없이 그 옆 가게에서 회향두 사놓고 선술을 마셨었다.그런데도 다리 병신된 공을기가 간신히 매대에 엽전을 올려놓으면서 술달란 화면이 떠올라 귀신이 달라붙었는가 했었다.

소흥 가면 꼭 들러야 하는 코스 두개가 있다.
하나는 대우릉이다.
대우는  황제,염제를 이은 요 순 우중의 한사람을 가리킨다.그런데 먼저 이의가 있다.우임금 시절의 중국은 중원지역에 한한다.우가 다스린 것도 황하인데 어떻게 되여 그의 릉이 양자강 하류지방인 소흥에 모셔진건가? 중국 관광문화의 아이러니라면 과한 평가인가?

그래도 우임금은 존경할만한 분이다.아버지 곤이 막는 방법으로 홍수를 다스리다가 실패하여 순임금한데 목이 잘리운 후 후임을 맡게 된 우는 막는 방법으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소통하는 방법으로 치수에 성공한다.그 치수 방법보다 더 우리를 깨우치는건 10년간 치수과정에서 세번 집문앞을 지나지만 들르지 않았다는 "3과 가문 이불입(三过家门而不入)"이란 고사이다.요즘 관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미담이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대우릉에서 수확 하나가 또 있다.바로 중국 혼인문화에 자주 등장하는 "문당호대(门当户对)"란 성구의 유래이다.대우상이 든 대전으로 들어가는 대문 양옆으로 사자 대신 돌로 된 2미터 미만의 북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분을 상징하는것으로  "문당"이라 하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문당도 높아 혼인할적에 그 높이를 맞추어서 짝을 찾게 된다는 것이였다.

대우릉에서 30분 정도 차로 달리면 난정(兰亭)이란 곳에 이른다.먹물 먹은 사람이면 누구나 동경하게 되는 서예성지 난정,바로 동진때 서성 왕희지가 "난정집서"를 집필했던 고장이다.여느 관광지와 달리 드물게 주위에 집이나 가게들이 많지 않은 아늑하고 조용한 산골짜기이다.

정문에 들어서서 얼마쯤 걷다보면 첫 눈에 "아지"라는 비석이 보이는데 거위 "아(鹅)"자와 못 "지(池)"자가 틀림을 대뜸 알아볼 수 있다.왕희지와 그 아들 왕헌지가 한자씩 썼기 때문이다.왕희지가 "아"자를 금방 썼는데 마침 임금의 성지가 도착했고 사자를 맞이하려 간 서성대신 아들 왕헌지가 "지"자를 마감하였다 하여 부자비라고도 하는데 서예사상의 미담으로 전해진다.

 왕씨 부자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헌지가 어렸을 적엔 큰 재목감이 아니였던가 본다.그래서 10여년간 글공부를 했지만 시종 애비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한번은 나름대로 괜찮게 썼다는 글을 가지고 애비를 찾아간다.이번에도 아니라면 글공부고 뭐고 다 팽개칠 생각이었다.아닌게 아니라 그 글씨를 본 서성은 천둥같이 화를 내면서 들었던 붓을 종이우에 탁 팽개치고 나가버리는것이였다.억울해난 헌지가 어머니를 찾아가 하소연 하는데 그 글들을 찬찬히 보던 어머니가 왈

 "왜? 여기 글 같은게 있구먼은..."

그래서 그 어머니가 가리키는 글을 보니 바로 왕희지가 화를 내면서 던져버린 붓 자리라 이 말이다.

 왕희지의 글 공력을 알아볼수 있는 대목이다.그만큼 서성은 서예에 혼신을 다 받쳤던 것이다.거위 늪엔 진짜로 거위(게사니)도 보이고 ...왕희지는 거위를 아주 좋아했고 그 움직이면서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거기서 뒤로 나가면 중국에서 유일하게 강희제와 건륭제 두 조손이 함께 쓴 "어비"가 있다.물론 서성과는 비기지 못하겠지만 두 임금 모두 한다하는 서예가인것만은 틀림없다.건륭제가 이 곳에 들렀을적엔 강희제가 이미 다녀가면서 글을 남겨놓은지 몇십년이 흐른 뒤였고 할아버지가 남긴 "어비"옆에 자기도 남긴다는건 너무 무엄한 노릇이라고 인정,그래서 임금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수도 없고 또 전례도 찾아볼수 없게 "어비" 뒤면에 자기 글을 남긴것이다.아, 건륭의 흉금과 효심이여...강희는 세파를 겪은 두둑한 뱃심만큼 글이 힘 있고 패기를 보여주었다면 건륭은 태평성대를 구사한만큼 유연하고 막힘이 없는 달필을 이루었다.

서예가들의 추앙의 성서인 "난정집서"는 사라진지 오래다.전하는데 의하면 서성의 어느 직계 후손이 그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역대 통치배들이 아무리 얼리구 닥쳐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당태종 리세민대에 이르러 강압으로 아니됨을 알아채고 스파이를 파견,몇년간 그 후예와 사귄 스파이는 어느 한번 술좌석끝의 실수로 책의 행방을 알게 되여 훔쳐서 리세민한테 바쳤고 미칠것처럼 그 책에 반한 리세민이 죽을 때 "난정집서"를 무덤으로 가져갔다고 한다.실말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실마리가 생겼으니 그걸 따라가 본다? 물론 그걸 손에 넣으면 대뜸 부자가 되겠지만 그 생각 보담 서성의 글이 확실히 그렇게 대단한가 한번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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