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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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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조선족시가절" 고고성 울리다... 댓글:  조회:2848  추천:0  2019-11-04
중국조선족시가절 고고성 울렸다   2019-10-21  편집/기자: [ 김영화 ] [ 길림신문 ][ 2019-10-20 ]   19일, 연변주당위 선전부와 연변주문화라지오텔레비죤및관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주최하고 연변가무단과 연변대학예술학원에서 주관한 제1기중국조선족시가절행사가 룡정시해란강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개막식에는 연변작가협회 당조서기이며 주석인 정봉숙의 사회로 진행되는바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백경승, 저명한 작가이며 중외작가 교류캠프조직위원회 주석인 조안표, 길림성작가협회 부주석 임백, 저명한 작가이며 중국시가학회 상무리사 장경화, 저명한 시인이며 작가넷 부주필 안기, 이외에도 미국, 먄마, 라트비아 등 외국 유명 작가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장인 김기덕은 축사에서 “아름다운 중국 신선한 연변 2019년 제1기 ‘중국조선족시가절’은 ‘민족시가의 전통문화 발양, 문화관광 융합발전을 추진, 변강사회 조화로운 번영’을 취지로 한다. 또한 민족문화특색을 부각시키고 시가문화정신을 전승하며 민족문화자신감을 지켜가고 대외문화교류를 주선으로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독특한 지역, 인문자원 우세를 발휘해 건국70주년과 개혁개방 40년래 새 시대 연변인민의 생활수준과 정신면모에서 생겨난 거대한 변화로 민족시가창작과 연구에서 풍성한 성과를 이룩했는데 연변의 농후한 민족특색과 풍부한 관광문화자원을 선전, 전시하여 연변의 지명도를 알리고 문화영향력을 제고하여 ‘문화강주’, ‘관광강주’로 일떠세우기 위해 정신문화력량을 힘써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경승은 축사에서 “‘중국조선족시가절’의 발족은 중국작가협회의 력사에 길이 남을 한페지로 그동안 연변작가협회는 수많은 민족문학인재들을 배출해내며  문학창작에 힘써 왔다”면서 앞으로도 습근평 총서기의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의 인솔지도아래 연변작가협회는 새 시대 더 깊이 있고 품격있는 작품들로 번영발전하는 연변의 주선률을 노래하며 문학예술에 더 큰 기여를 희망했다.         행사에서는 특별히 리욱, 김철, 김성휘, 조룡남, 리상각, 리삼월, 한춘, 최룡관, 남영전, 박화, 정몽호 등 11명을 건국70주년 조선족 특수공헌시인으로 선정하여 상패와 영예증서를 수여했다. 이어 연변텔레비죤라지오방송 아나운서들이 무대에 올라 격정에 넘치는 시랑송을, 연변가무단과 예술학원에서 준비한 문예공연으로 시가절 분위기를 무르익혀갔다.     시인들의 큰 잔치...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 (ZOGLO) 2019년10월19일  "조선족시인들과 국내외 시인들의 만남의 장" "시와 사진, 시와 예술의 만남으로 조선족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노래한 좋은 시들이다" "소수민족지역에서 이렇게 큰 행사를 주최하다니 과히 놀랍도다" "감동 그 자체였다. 민족이 따로 없이 시와 노래로 하나가 된 축제" ... 건국 70주년을 맞으며 조선족시인들의 큰 잔치인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식이 10월 19일 국내외 시인들과 조선족시인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룡정시 해란강극장에서 성황리에 개막했다.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식 선포   연변주당위선전부, 연변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관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행사는 시랑송대회, 대형시화전, 공로시인 표창, 문예야회, 시창작세미나, 현지답사, 대형다큐멘터리제작 등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주석이 사회를 한 이날 개막식에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이 환영사를,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백경성이 축사를 했다.   환영사를 하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   김기덕 부장은 " 문화가 흥(兴)하면 국운도 흥성하고 문화가 강대해지면 민족도 강대해진다"며 "시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시가절행사를 계기로 전통문화를 고양하고 문화로써 관광산업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축사를 하는 전국정협 상무위원 겸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백경성. 백경성 부주석은 "연변문련과 연변작가협회가 설립된이래 문학예술면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육성해냈으며 따라서 좋은 작품들도 많이 나왔다."면서 "조선족의 문학과 예술은 중국 70년의 력사에 빛나는 한페지이를 장식했다. 이는 시인들과 예술인들의 헌신정신, 피타는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개막식 사회를 하는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주석 이날 조선족시단에서 혁혁한 공훈이 있는 리욱, 김철, 리상각, 한춘, 조룡남,리삼월, 김성휘,박화, 남영전, 최룡관,정몽호  등 11명 시인들을 표창했다. 그중 8명은 작고한 원로시인들이다. 수상자 및 대리수상자와 함께  "리욱 원로시인은 해방전과 해방 후 두 시대에 걸쳐 시창작을 진행하여 조선족시단을 개척하고 정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향토신이라 지칭하기에 손색없다. 그는 조선어와 한어로 시창작을 하고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심사평을 밝혔다.(이하 략함)   모택동이 1936년에 쓴 시"시원춘설"을 읊조리는 임지원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에서는 건국 70주년 맞이 두만강천리답사 계렬활동을 펼치면서 현지답사를 통해 더 아름다운 시를 창작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물은 오늘에 전시된 시화이며 "중국조선족시선집"을 편찬해낸 것.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겸 시창작위원회 주임이자 이번 행사를 총 기획한 김영건은 "시인들은 현지답사를 통해 삶의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였고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노래하는 좋은 시화들을 창작해냈다. 오늘은 어쩌면 그동안 노력의 결실을 보여주는 자리라고나 할가. 시화를 전시하고 시선집을 펴내고 시를 읊조리고 노래와 춤으로 시와 예술의 만남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건국 7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련다."며 "'뿌리 깊은 나무'를 주제로 한 '시가 흐르는 야회는 당의 민족정책의 혜택아래 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산해관 넘어 대륙으로 대서양 건너 세계 방방곡곡으로 나가는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담아냈다. 전반 무대를 시가 흐르는 야회로 장백산의 산생, 그날의 자취를 찾아 인정의 세계로 펼쳐지는 진달래 산천으로 펼쳐지며 우리 민족의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뿌리 깊은 토대를 바탕으로 이 땅에 당당한 주인 된 오늘을 노래하고 우주의 주인으로 세상속에 그 뿌리를 뻗치는 건실한 미래를 구가하기 위한데 있다."고 말했다.   이번 야회는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서사시처럼 고도로 째이고 전반을 시의 흐름으로 풀면서 우리 무용의 최고의 경지로 옷 입고 하나의 통일된 음악으로 전반을 이어나갔으며 특수처리 등 수법으로 매 장의 아름다운 화폭을 보여주면서 서로가 어울려 하나의 예술적 무대로 중국조선족 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준 무대하 할 수 있다.     시가절의 일환으로 오후 연길 상우호텔에서 시가세미나를 개최했으며 20일에는 답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글로미디어 사진 글 문야/영상 방호범     시화전 한장면   시선집   파일 [ 43 ]                                         
1    활무대는 서로 다르지만 불멸은 같다... 댓글:  조회:2298  추천:0  2019-11-04
    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퇴계 이황 14대손으로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 - 나라 되찾을 일념 펜 대신 총을 들다.  나라 되찾을 일념 펜 대신 총을 들다.                                          친가·외가 모두 선비 집안, 독립운동으로 평생 17차례 피검, 투옥돼... 지조와 절개 번뜩이는 시 36편 남기고 광복 1년 전 베이징서 순국   9월 24일 중국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기념관의 벽시계는 9시30분에 멈춰서 있었다. 107년 전 그날의 거사 시각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 안 의사 흉상을 지나면 ㄷ자 형의 좁은 공간에 성장과 거사 과정 등이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다. 이곳 안쪽에서 유리벽 너머로 기차역 플랫폼이 내다보인다. 도착한 열차에서 승객들이 내렸다. 플랫폼의 바닥에 삼각형과 사각형 표시가 선명하다. 플랫폼의 천장에는 ‘안중근 격살 이등박문 사건 발생지’란 팻말이 걸려 있다. 1909년 10월 26일, 세계를 뒤흔들었던 현장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열차에서 내려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했다. 거리는 불과 5m. 이토에게 3발이 명중됐다.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사서(四書)와 등을 읽으며 자랐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을 익혀 명사수로도 이름났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귀국한 뒤 학교를 세우고 운영했다. 그러나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자 그는 반일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된다. 거사 5개월 만인 이듬해 3월 26일 안 의사는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31세 나이로 순국한다. 여기 또 한 명의 독립지사가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죽음으로 일제에 맞섰다. 그도 조부로부터 사서를 배우고 교육에 참여했다. 그리고는 군사학교에 들어가 명사수가 된다. 총을 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안 의사 기념관에서 떠올린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1904∼1944) 시인이다. 안 의사의 흔적을 찾아간 여행에 마침 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딸 이옥비(75) 여사가 동행해 분위기는 숙연했다. 시인은 왜 권총을 들었을까. 이제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10월 1일 육사가 태어난 마을을 찾았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다. 안동시청에서 퇴계로를 따라 북쪽으로 25㎞를 가면 도산서원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산 하나를 넘으면 퇴계종택이다. 다시 퇴계 묘소를 지나 고개를 내려가면 육사의 고향 원촌이다. 마을 입구에 이육사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확장공사로 휴관 중이다. 진성 이씨 집성촌인 원촌 마을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쇠락했다. 육사가 살 때만 해도 100여 호에 가까웠다고 한다. 육사의 생가는 옮겨지고 그 자리엔 지금 ‘청포도’ 시비와 시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웃한 목재(穆齊)고택에서 이옥비 여사를 만났다. 조선 철종 시기 대사간을 지낸 목재 이만유의 증손 이원봉은 육사와 8촌이었다. 이 여사는 이 집에 머물며 문학관 일을 돕고 있다. 먼저 28세 육사로 돌아간다. 1932년이다. 당시 육사는 대구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기자를 그만두고 중국 펑톈(奉天), 즉 지금의 선양(瀋陽)으로 간다. 거기서 의열단 창립멤버이자 핵심인 윤세주를 만난다. 알고 지내던 사이다. 일제 경찰의 기록에는 육사가 ‘일거리를 찾아 펑톈으로 갔다’고 돼 있다. 육사는 처음에 테러를 일삼는 의열단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육사는 결국 의열단이 설립한 난징(南京)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교한다. 군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졸업하면 일제의 요인을 해치우는 등 비밀조직원이 된다. 교장은 의열단장인 김원봉이었다. 육사는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거기서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운다. 놀랍게도 당시 육사는 권총 사격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룬 모양이다.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는 권총 5자루를 촛불을 꺼놓고 해체한 뒤 짧은 시간에 다시 조립해낼 만큼 무기를 잘 다뤘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말을 타고도 명사수였다고 한다. 나라를 찾는다는 일념으로 펜 대신 총을 든 것이다. 육사는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넉 달 뒤 귀국한 그는 언론계 복직과 문필 활동을 계획한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귀국한 지 8개월이 지난 1934년 3월 육사는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힌다. 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 일제 검거령이 내려진 것이다. 육사는 당시 일제 경찰의 고문이 혹독해 몇 차례 옷이 피로 얼룩졌다. 그가 풀려난 직후인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도산 경찰관주재소가 경성으로 보고한 ‘이원록 소행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위에 선전할 우려가 있으며 (…) 본인의 성질로 보아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육사는 이때부터 문학에 뛰어든다. 시작(詩作) 활동을 ‘행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기백을 키우고 길러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곧 행동이오.” “시를 생각하는 것도 곧 행동이오” ▎육사의 고향에 들어선 청포도 시비. 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시를 통해 당시 민족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1939년 8월 그는 지에 시 ‘청포도’를 발표한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는 스스로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시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1943년 7월 경주 남산 옥룡암에서 지인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육사는 “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라며 “‘내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일본도 곧 끝장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했다. 안동시는 최근 육사의 고향으로 이어지는 도산면 도로변에 청포도 단지를 조성했다. 올해는 ‘264청포도 와인’도 선보였다. 육사는 시를 쓰면서 말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가까웠던 신석초 시인은 “동동주를 연거푸 아홉 사발 마시고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신석초는 육사가 시를 쓰거나 술을 마실 때 즐겨 쓴 한 구절이 있었다고 했다. 에 나오는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 즐거워도 탐닉하지 않고 슬퍼도 상하지 않는다)’이다. 한결같은 자세다. 전하는 시 36편 중 ‘절정’ 등 12편이 1940∼41년에 발표된다. 하나같이 지조와 절개가 번뜩인다. 1943년에는 ‘만등동산(晩登東山)’ 등 한시 3편만을 남겼다. 일제가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데 대한 저항이었다. 1943년 4월 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떠난다. 독립 투사의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지식인과는 반대의 길을 간 것이다. 그 무렵 이 땅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은 일제에 무릎을 꿇고 변절했다. 친일로 돌아서 침묵했다. 한 술 더 떠 일제의 앞잡이가 돼 민족을 기만하는 지식인도 있었다. 육사는 홀연히 견위수명(見危授命: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하는 선비의 길을 걸었다. 당시 중국행은 무기를 들여와 무력항쟁을 도모하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두운 밤에 더 빛나는 별빛과도 같은 행보였다. 베이징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던 육사는 1943년 7월 귀국한다. 그는 안동에서 어머니와 맏형의 소상(小祥,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을 치른 뒤 잠시 서울에 머물던 중 다시 검거된다. 이제 그의 삶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부인 안일양은 동대문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만난다. 이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딸 옥비의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이징으로 압송되기 직전이다. 육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이옥비 여사는 기자에게 “당시 아버지께서 밀짚으로 얼굴을 가린 용수를 쓴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고 증언했다. 모습이 특이해 어렸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그렇게 갈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1년여 앞두고 베이징의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했다. 당시 육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는 베이징 감옥의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 길로 달려가니 육사는 옷이 피로 낭자한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육사의 눈을 쓸어 내리면서 “육사! 조국은 우리가 맡을 테니 이제 고이 가십시오”라고 했더니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광복을 위해 온몸을 던진 육사의 마지막 모습이다. 억울한 옥살이 뒤 ‘육사’를 필명으로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성장 과정은 문사에 가까웠다. 육사의 조부 이중직은 향리에 신교육기관인 보문의숙을 세워 초대 교장을 지내는 등 민족교육에 힘을 쏟았다. 육사는 여섯 살 때 조부로부터 을 배우고 10대에 경서를 외는 등 한학을 공부했다. ‘은하수’라는 육사의 수필에는 한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묘사돼 있다. “논어나 맹자에 시전(詩傳), 서전(書傳)을 읽는 선비라면 어느 권에 무슨 장이 나올는지 모르니까 전질을 다 외우지 않으면 안됨으로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외조부 허형은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의병장 왕산 허위와 사촌이다. 육사에게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는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어머니로부터 “(나라를 찾는 날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배워온 것이 세 살 때부터 버릇이 되었다. (…)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규모’는 이 마을에 내려온 정신일 것이다. 이처럼 육사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선비요, 독립운동가인 환경에서 자랐다. 육사는 16세 때 대구로 나간다. 이듬해는 부친의 엄명으로 혼인한다. 육사는 직후 처가가 관여하던 영천 백학(白鶴)학원을 다니고 9개월 동안 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난다. 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있다. 을 쓴 김희곤(62) 안동대 교수는 “이 시기에 육사가 민족문제에 심각한 고민을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육사는 귀국해 대구 조양(朝陽)회관에서 신문화운동에 참여했다. 도서실·신문사·문화운동단체 등이 들어서 청년을 교육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하던 공간이다. 1925년에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한다. 1927년 육사가 귀국하자 대구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터뜨린 장진홍 의거다. 일경은 1600명을 투입하고도 단서를 잡지 못했다. 다급해진 경찰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육사 형제도 잡혀 들어갔다. 폭탄상자 겉면에 적힌 글씨가 육사의 동생 이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정작 거사의 주인공은 사건 1년 4개월 뒤 일본 오사카에서 붙잡힌다. 육사는 당시 혹독한 고문을 받는 등 1년 7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이때 수인번호가 264번. 필명 ‘육사(陸史)’의 유래다. 한자는 ‘식민지 역사를 베어낸다’는 뜻을 담았다. 옥고를 치른 뒤 1930년 육사는 기자가 된다. 당시 기자들은 다수가 언론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다. 1931년 육사는 기자 신분으로 2개월간 구금된다. 광주학생사건 이후 일본을 배척하는 격문을 대구에 뿌린 배후로 지목된 것이다. 육사는 신문기자를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육사는 일생 17차례 피검, 투옥된다. 육사는 일제의 탄압이 가혹해지는 생의 마지막에 시 ‘광야’를 썼다. 이 작품은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에 발표된다. 시로 쓴 유언이었다.   ▎육사의 마지막 시 ‘광야’의 시상지인 ‘쌍봉·윷판대’에서 바라본 왕모산과 낙동강. 앞에 펼쳐진 들판은 원촌의 강 건너 마을인 내살미다. 개화 지식인이면서 의병의 기개 지녀 이육사문학관 건너편 산에는 ‘광야’의 시상을 다듬은 곳이 있다. 원촌 마을을 떠나면서 그곳에 들렀다. 깊은 산속에 큰 강이 흐르고 이런 탁 트인 들판이 있을까 싶은 곳이다. 육사는 옥중에서 일제에 맞서는 용기와 광복의 희망을 심었다. 그러면서 순국하는 그날까지 일제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찾기 위해 기꺼이 권총을 든 눈 속 매화 같은 선비였다. 이옥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 현장에서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며 “아버지도, 기회가 주어졌으면 총을 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상은 “그에게는 시보다도 문학보다도 조국이 더 컸었다. 조국을 찾은 뒤에야 시도 있고 문학도 있었다”고 기렸다. 이육사에게 광복은 곧 지조이자 절개였다. 하얼빈에 동행했던 도진순(57)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육사는 개화 지식인이면서 의병의 기개를 지니고 옥중에서 유언을 남겼다는 점에서 안 의사와 닮았다”고 말했다. 한학을 공부하고 명사수가 된 것도 공교롭다. 물론 사상은 차이가 있다. 육사는 나이가 안 의사보다 25년 아래다. 기록은 없지만 육사는 틀림없이 안 의사를 흠모했을 것이다. 육사는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 생명을 던져 의를 취하다)’란 말이 딱 들어맞는 선비가 아닐까. [박스기사] 한국의 ‘별’ 이육사 | 북간도의 ‘별’ 윤동주 - 출신, 사상, 시 세계 달랐지만 일제에 맞서다 옥중 순국 ▎민족시인 이육사(왼쪽)와 윤동주.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의 시는 한국과 중국 조선족 교과서에 모두 실렸다. 이육사는 ‘민족시인’으로 불린다. 묘비에도 그렇게 새겨져 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또 다른 민족시인이 있다. 올 초 란 영화로 친숙해진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이다. 두 시인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이육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윤동주는 북간도(北間島)로 불린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서 출생했다. 그래서 옌볜의 김승종(53) 시인은 “윤동주는 북간도의 ‘별’, 이육사는 한국의 ‘별’로 밤하늘 별처럼 남북에 드리운 한줄기 빛”이라고 표현한다. 또 이육사와 윤동주는 이상화·김소월과 더불어 한국은 물론 옌볜 조선족의 교과서에도 작품이 동시에 실린 시인이었다. 북한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두 시인의 성장 배경은 판이하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선비 집안에서 자랐다. 윤동주는 살기 어려워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디아스포라(離散: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집단) 3세다. 육사가 요즘 말로 ‘금수저’라면 윤동주는 ‘흙수저’라고나 할까. ‘살신성인하는 좌경적 유교’가 육사의 사상적 바탕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최근 중국이 윤동주의 국적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룽징의 윤동주 생가를 찾아가면 입구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고 한글·한자로 함께 쓴 바윗돌이 세워져 있다. 중국이 윤동주 시인을 중국인으로 만들려고 한 이른바 동북공정 역사 왜곡의 흔적이다. 이곳에 들른 한국 관광객들이 “윤동주 시인을 중국이 빼앗으려 하고 있다”고 분노하는 이유다. 사상적 바탕을 보면 이육사는 유학이다. 김관웅 옌볜대 교수는 “그것도 살신성인하는 좌경적인 유교”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군사훈련까지 받은 이육사를 “직업적인 혁명투사”로 표현한다. 이에 비해 윤동주는 기독교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또 서구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시(詩) 세계도 달랐다. 이육사는 선비의 기개로 일제에 항거하고 타협할 줄 몰랐다. 반면 윤동주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언제나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했다. 육사의 시 ‘광야’, ‘절정’은 선비풍이 느껴진다. 윤동주의 시 ‘참회록’, ‘서시’는 속죄하는 인간을 그린다. 김관웅 교수는 “윤동주는 투사이기보다 항일을 양심적으로 실천했다”고 평가한다. 두 시인이 주는 감동의 포인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윤동주의 나이는 이육사보다 13년 아래다. 활동무대도 서로 달라 생전에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두 시인 모두 일제에 맞서다가 옥중에서 순국했다. 그만큼 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었다. 불멸의 공통점이다.  /글 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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