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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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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별의별] - 碑가 悲哀하다... 댓글:  조회:2954  추천:0  2019-11-20
밀양 표충비에서 18일 또 '땀방울'... 무슨 일을 예고한 걸까 [중앙일보] 입력 2019.11.19  기자 위성욱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18일 약 1ℓ의 땀을 흘린 것으로 전해진 밀양 표충비. [연합뉴스] 국가에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것으로 유명한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밀양 표충비’에 또 ‘땀’이 맺힌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 표충비에서 18일 5시간동안 약 1ℓ의 물방울 흘러내려 민간에선 "사명대사의 우국충정", 전문가들 "결로 현상 가능성" 18일 경남 밀양시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부터 9시까지 5시간 동안 무안면 홍제사 경내에 있는 표충비에서 약 1ℓ의 땀 같은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9시 이후에는 흐르던 물방울이 멈추고 이날 오후부터는 비석이 마른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홍제사 관계자는 “올해 들어 표충비각에서 흥건하게 땀이 흐른 것은 처음”이라며 “하지만 오전 9시 이후부터 더는 땀이 흐르지 않아 비석 주변도 물이 마른 상태”라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극복한 사명대사의 높은 뜻을 새긴 비석인 표충비는 ‘사명대사비’로도 불린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 등과 함께 조선시대에 승려 신분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선 승병장이다. 무안면에 표충비가 세워진 것은 이곳이 사명대사의 출생지여서다. 사명대사는 왕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1년 동안 묘향산에 머물렀다가 고향인 밀양 영축산 동쪽 기슭에 백하암(白霞庵)이란 암자를 지어 지낸 적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은 당시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불러 포로 귀환 임무를 줬다. 스님은 일본에 들어가 협상 끝에 3000여명의 포로를 송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이유로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도 표충비에 남아 있어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표충비는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 같은 물방울이 맺혀 그 조짐을 알려줬다. 1894년 동학농민 운동,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1945년 8·15 해방, 1950년 6·25 전쟁, 1985년 남북고향 방문 등에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는 2008년 FTA 소고기 협상,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2010년 천안함 침몰, 2017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물방울이 맺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표충비에 땀 같은 물방울이 맺히는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이 비를 통해 전해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과학계에서는 아직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 밀양시 관계자는 “표충비는 좋을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도 땀을 흘리는 현상이 나타났다”며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대기가 함유한 수분이 온도 차가 있는 물체 표면에 물방울로 맺히는 결로현상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밀양=위성욱 기자  =====================///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땀 흘리는 비석     목차 정의 역사 줄거리 변이 분석 특징 의의 정의 ‘사명대사비’라고도 하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비석 면에 땀방울이 맺힌다는 증거를 기반으로 한 전설. 역사 비석에 얽힌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증거물만 있다면 인물이나 사건을 제시하여 환상적 요소를 덧붙여서 이야기를 전한다. 신기한 현상을 기후 변화에 따른 외기 현상이나 결로 현상으로 보는 등 과학적으로 해명해도 비석이 그 자리에 있는 한 민중은 비석이 지닌 영험함을 믿는다. 줄거리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어 왜병을 크게 무찌르고 일본에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삼천 명을 환국시킨 사명대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옛 표충사 터에 비를 세웠다. 이 비를 세우고 나서부터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비석 면에 땀방울이 맺혔다고 한다. 땀방울은 마치 구슬처럼 비석 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변이 이 설화는 비석을 증거물로 하여 땀을 흘리거나 피를 흘리는 데서 유래한 이야기이다. ‘땀 흘리는 표충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알려진 비석은 경남 밀양에 있는데 나라에 큰일이 있기를 전후하여 물방울이 맺혀서 몇 시간씩 구슬땀처럼 흘러내린다. 이 외에도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대제복구비는 ‘피 흘리는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전북 벽골제의 복구비에는 비석에 낫을 갈다가 다친 사람은 영원히 낫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분석 비석이 땀을 흘린다는 것은 나라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려 준다는 예지력을 믿는 민중의 신앙에 바탕을 둔다. 피 흘리는 비석에서는 본래의 자리에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을 때는 비석이 저주를 내릴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성성과 진실성을 갖춘 객관적 증거물을 바탕으로 인간의 왜소함을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특징 과 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전한다. ‘사명대사비’라고도 하는 경남 밀양 표충사에 있는 비석은 사명대사를 기리는 것이고, 전북 김제시에 있는 대제복구비는 비석 근처에 몹쓸 짓을 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면 비석이 피를 흘린다는 전설이 있다. 의의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비석이 먼저 알고 땀을 흘린다고 믿는 것은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 훌륭한 인물들이 미리 알려 줄 수도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비석에 해를 가하거나 탐욕으로 훼손하면 변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민중에게 착하게 살라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집필 박성석(朴性錫)/경상대학교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개론(김태곤 외, 민속원, 1996년) 우리 민속 문학의 이해(김열규 외, 개문사, 1979년) 출처 김제 시사(김제시 편찬위원회, 1995)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네이버 지식백과] 땀 흘리는 비석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   불교설화 땀흘리는 비석     분류 문학 > 콘텐츠모음 > 시놉시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스님의 충훈을 모시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돌을 구해온 남붕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이 비석을 보면 섬뜩하다 하여 비석옆에다 창고를 세워 혈맥을 끊으려하자 한동안 못견딜 정도로 비석이 몸부리치니 비석 몸체에 피가 흐르는 형상으로 금이 갔다.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그때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 · I5해방, 6 · 25동란, 4 19학생의거, 5 · 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 · 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 · 16 혁명 때는 5일간에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 · 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3말 8되나 홀렸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설화내용]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훗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해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 하지 않을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한 선조는 고을 원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하여 사명 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높이 3.9m 폭 97cm, 두께 70cm크기의 돌을 구해온 남붕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 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정이 간절하여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특례로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은 잔꾀를 냈다. 『저 비석은 보기만 해도 왠지 섬뜩하단 말이야. 마치 사명대사 귀신이라도 담긴 것만 같으니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나도 동감입니다. 저 비석 옆에다 담배 창고를 옮겨 짓도록 합시다.』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리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확」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라는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비석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로 달려가 고했다.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 · I5해방, 6·25동란, 4 ·19학생의거, 5· 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 ·16 혁명 때는 5일간에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 ·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3말 8되나 흘렸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아무래도 무슨 변이 있을 조짐인 듯하다며 양식이며 비상약품 등을 준비했지요.』 6·25무렵을 회고하는 주민 이씨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땀 흘리는 비석의 영험을 믿으며 크고 작은 일에 조심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우리 마을에선 사명대사의 구국 충혼이 이 표충비에 서려 있다고 믿고 있지요. 매년 관광 철이면 이 비석을 보려고 1백 여 명의 관광객이 들르는데 주민들은 너나없이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안내합니다.』 사명당 추모회 구장회 회장의 말처럼 마을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정신을 이어 대체로 정의감이 강하다는 소문이다. 비석이 땀을 흘릴 때는 사람이 땀 흘리는 형상과 똑같아서 앞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뺨으로 흘러내리는 듯 비석 전후면 머리 쪽에서 땀이 나와 비문 글귀 사이를 타고 흘러내린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외지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기후·습도 운운하지만 여러 차례 땀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저희들은 사명대사의 충혼이 서리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촌노 한 분은 자신의 믿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62년 장마 때는 보리가 썩어 나갈 정도였는데도 비석엔 습기 하나 차지 않았다.』 며 사명대사의 높은 도력을 거듭 강조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밀양 · 표충사) [네이버 지식백과] 땀흘리는 비석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 종소리가 나는 만어사 경석과 함께 밀양의 ‘3대 신비’ 로 알려진 사명대사 표충비각,ㅡ 무안면 홍제사(무안리 903-5) 내에 소재한 표충비각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제 제15호로 이 비석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그 조짐을 미리 알려 준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이 비를 신성시하고 있다. 더욱이 땀방울이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는다 하여, 그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 =========================///   밀양 "얼음골";ㅡ       종 목  천연기념물  제224호  면 적 86,612㎡ 지 정 일 1970.04.24 소 재 지 경남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산95-1외  재약산(천황산) 북쪽 중턱의 높이 600-750m쯤 되는 곳의 골짜기 9천여평을 얼음골 이라고 한다. 봄부터 얼음이 얼었다가 처서가 지나야 녹는 곳이며, 반대로 겨울철에는 계곡물이 얼지 않고 오히려 더운 김이 오른다는 신비한 곳이다. 더위가 심할수록 바위 틈새에 얼음이 더 많이 얼고, 겨울에는 반팔을 입을 정도로 더운 김이 나 "밀양의 신비"라 불리며 천연기념물 22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이 곳 얼음골은 대지의 열기가 점점 더워오는 3월 초순경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7월 중순까지 유지되며, 삼복더위를 지나 처서가 되면 바위틈새의 냉기가 점차 줄어든다.이런 신비한 이유로 밀양의 4대 신비의 하나로 손꼽고 있으며, 특히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얼음골의 신비와 함께 주변에 다양한 볼거리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인 가마볼 협곡은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절벽이 태고적부터 흘러내린 계곡물에 의해 두터운 암반이 깍여나가 계곡이 마치 가마솥을 걸어 놓는 아궁이처럼 생겼다하여 이름이 가마볼(암,수 가마볼)이 되었다 한다.    비가 온 뒤에는 녹아서 얼음이 보이지 않으며 어는 경우도 예전만큼 많지는 않다고 하는데 그래도 계곡입구에 들 어서면 냉장고 속에 들어간듯 쏴아한 얼음바람을 맛볼 수가 있다. 얼음골의 여름 평균기온은 섭씨 0.2도, 계곡물은 5℃ 정도. 물이 차서 10초 이 상 발을 담그고 있기 어렵다. 얼음골의 정식이름은 오랜 옛날부터 시례빙곡으로 불리워졌다. 우리나라에서 얼음골로 알려진 곳은 이 곳 밀양의 천황산 얼음골, 의성군 빙혈, 전라북도 진안군의 풍혈, 냉천, 울릉도 나리분지의 에어컨굴 등 네 곳이다.   이러한 곳은 특이한 기상현상으로 인하여 기상관광의 대상이 되는데, 지질학상 이 러한 지형을 애추(talus 혹은 scree)라고 한다. 단애면으로부터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풍화 산물이 단애 밑에 쌓여 만들어진 지형 을 애추라고 한다. 얼음골에서 냉기가 나오는 곳은 이 애추 사면인데 주로 주빙하 기후하에서 풍화작용에 의해 발달한 화석지형으로서, 구성물질이 모난 바위덩어리 로 되어 있다. 여름철에 이 애추사면에 산사태가 발생하여 도로의 교통을 방해하기도 한다.   수십 미터를 미꾸러지듯 쏟아지는 시원한 폭포수는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절벽과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외 백옥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란 소(沼)를 이루어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호박소가 있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만어사     옛날 옛적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이란 곳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줄 것을 부탁했다. 신승은 용왕의 아들에게 가다가 멈추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말해주었다.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그가 멈춘 곳이 만어사이다. 만어사에 이르자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고기들 또한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밀양 시내를 흘러내린 밀양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낙동강 포구 삼랑진1)의 만어산(萬魚山, 670m) 만어사(萬魚寺)에 가면 이 믿을 수 없는 전설이 사실이 되고야 만다. 크고 작은 돌이 쏟아져내린 듯 또는 쏟아부은 듯 널브러져 있는 곳을(대개 골짜기이기 쉽다) 흔히 ‘너덜지대’라고 하는데, 만어사가 안겨 있는 만어산 곳곳이 그렇다. 이런 너덜지대가 가장 크고 장관을 이루는 곳이 만어산의 턱밑에 자리잡은 만어사 주변이다. 그 규모도 장관이지만 너덜지대를 이루는 돌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전설처럼 물고기가 입질하는 모양이다. 폭이 약 100m, 길이가 약 500m 규모로 골짜기를 가득 메운 입질하는 물고기 모양의 크고 작은 검은 돌들은 신기하게도 두드리면 쇠종 소리가 난다. 그러나 모든 돌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고, 서너 개 중 한두어 개 어림으로 쇳소리가 나는데, 그 이유 또한 불분명하여 더 신비롭다. 만어석만어사 주변 골짜기 너덜지대를 가득 메운 독특한 모양의 검은 돌들은 용왕의 아들을 따라온 수많은 고기떼가 돌로 변한 것이라 한다. 이 때문에 만어석이라 불리는 이 돌들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나 종석이라고도 불린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만어사 주변 너덜지대의 돌들은 ‘만어석’(萬魚石)이라고 불린다. 동해의 물고기들이 변한 것이라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또, 두드리면 쇠종 소리가 난다고 하여 ‘종석’(鐘石)이라고도 불린다. 이들 만어석은 다른 돌보다 유난히 무겁고 야물다고 하며, 조선 세종 때에는 이 돌로 ‘종경’(鐘磬)이라는 악기를 만들려고 돌을 채집하여 시험했으나 음률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 「탑상」(塔像)편 ‘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만어산은 옛날의 자성산(慈聖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인데, 그 옆에 가락국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이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그 못 안에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羅刹女)2)가 있어 그 독룡과 서로 오가며 사귀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레와 비를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왕은 주술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해도 할 수 없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했더니 그제야 나찰녀가 오계(五戒)3)를 받았는데, 그후로는 재해가 없었다. 그 때문에 동해의 고기와 용이 마침내 골짜기에 가득 찬 돌로 변하여 각기 쇠북과 경쇠(옥 또는 돌로 만든 악기) 소리가 난다. 또 살펴보면 대정(大定) 20년 경자(庚子)는 고려 명종 10년(1180)인데 처음으로 만어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만어사가 창건된 것은 46년 김수로왕에 의해서이며, 고려 명종 때인 1180년에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비로운 고대왕국 가야시대에 세워진 뜻깊은 절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만어사는 그런 오랜 창건 역사를 기대할 만큼 고색창연한 고찰의 모습은 아니다.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과 범종각, 삼성각 그리고 요사 한 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산중 절집일 뿐이다. 다만 수로왕 때나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많은 고기떼를 이끌고 불교에 귀의해 만어사를 창건했다는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자연경관이 독특하고, 고려시대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삼층석탑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만어사 전경가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절이지만 지금의 만어사는 고려 때의 삼층석탑과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과 범종각, 삼성각과 요사 한 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산중 절집일 뿐이다. 석탑은 흔히 법당의 마당 중심에, 쌍탑일 경우에는 법당 마당의 좌우에 자리잡게 마련인데, 만어사 삼층석탑은 현재 이런 가람배치 양식에서 벗어나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절이 여러 차례 고쳐지어지면서 가람배치가 흐트러진 때문으로 보인다. 높이 3.7m 정도의 만어사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이지만, 전체적으로 지대석과 기단부가 안정적이고, 몸돌이나 지붕돌의 체감률 또한 조화로운 편이다. 지붕돌받침이 3단으로 줄어들었다거나 기단부 면석이 4매로 간소화되고, 몸돌의 굄이 1층과 2층에서는 1단이었다가 3층에서는 2단으로 불규칙해진 점들을 감안하면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탑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고려 명종 때 중창되면서 현 위치에 세워진 탑으로 보는 것이 옳을 성싶다. 그외에 기단면석과 몸돌에 귀기둥이 표현돼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으나, 지붕돌 낙수면이 밖으로 불룩한 곡선을 그리며 급하게 내려오다 처마선에서 살짝 반전하여 수평을 찾고 추녀 쪽에서는 다시 살짝 치켜올라가 반전을 이루는 모습이 독특하다. 만어사 삼층석탑고려 중기에 세워진 자그마한 삼층석탑이다. 단층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대석과 기단부가 안정적이고 몸돌과 지붕돌의 체감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 역시 너덜지대의 만어석 또는 종석으로 만들어졌는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난다. 그러나 석탑 전체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어서 더욱 신비롭다. 이런 석탑의 신비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듯, ‘석탑을 두드리지 말라’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서 있는 자리나 모습이 마치 만어석들을 굽어보는 듯한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색적인 너덜지대의 터를 다스리기 위해 세운 비보탑이 아니냐 추정하는 이도 있다. 만어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466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경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미륵바위’ 또는 ‘미륵불상’이라고 불리는 높이 5m 크기의 자연석이다. 전설 속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돌이며, 『삼국유사』 ‘어산불영’의 ‘불영’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연석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이 마치 가사(袈裟)와 같아 더욱 신비롭게 여겨진다. 이 미륵바위를 신비스럽게 하는 이야기로는 해마다 0.3㎝씩 큰다거나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활빈당이 활약할 때, 한일합방, 3·1만세운동 때 돌의 오른쪽 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으며, 그외에도 한국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때에도 땀이 흘렀다고 하는 것들이 있다. 근래에는 미륵바위를 보호하기 위한 미륵전 불사가 이루어졌다. 미륵바위 앞쪽에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소원을 빌며 쌓아올린 돌탑 무더기가 있는 바위의 아래쪽 틈으로 작은 샘이 보이는데, 이 샘물은 낙동강의 조수에 따라 물 높이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로써 만어산 너덜지대의 만어석들이 동해바다에서 낙동강을 타고 이곳까지 거슬러 올라왔다는 전설이 확실해지는 셈인가. 아무튼 너덜지대 아래로 물이 흐르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만어사는 바다를 이룬 너덜지대의 장관과 더불어 멀리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전망이 매우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만어사 너덜지대의 만어석을 두드리며 전설을 확인하는 재미와 아울러 만어석의 울림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여보는 사색의 공간으로 삼아봄이 좋을 듯하다. 돌을 두드렸을 때 그 맑은 정도가 사람 됨됨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즐겁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어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한국문화유산답사회)        
7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철학가 - 고자 댓글:  조회:2581  추천:0  2019-11-20
두산백과 고자   [ 告子 ] 출생-사망 ? ~ ? 본명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국적 중국 제(齊) 활동분야 철학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맹자(孟子:BC 372∼BC 289)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인성(人性)에 관하여 맹자와 논쟁을 벌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다만 교육하기 나름으로 그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맹자와의 논의는 《맹자》 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서만 고자의 존재를 알수 있을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자 [告子] (두산백과)  
6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법가학파 - 한비자 댓글:  조회:2831  추천:0  2019-11-20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한비자 법(法)은 드러내야 하고, 술(術)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韓非子 ] 목차 법·술·세를 함께 구사하라 개인적 원한을 공적인 일에 개입시키지 말라 한비자(기원전 약 280∼233년)의 이름은 한비이고 전국 말기 한(韓) 출신이다. 원래는 한나라의 공자로 순자(荀子)에게 배운 중국 고대의 이름난 사상가이자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원전 234년은 진왕 정(훗날의 진시황) 13년으로 진나라가 군사를 동원해 한나라를 공격해왔다. 이 해 진왕 정이 한을 공격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오랫동안 천하통일에 힘을 쏟아온 진은 6국을 제거할 결심을 하고 6국 중에 가장 약한 한나라를 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 진왕 정은 6국을 소멸시키는 자신의 숙원을 위해 인재를 적극적으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런 진왕 정이 언젠가 한비자의 저술인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읽고는 깜짝 놀라며 이 책을 쓴 사람은 틀림없이 기재일 것이며 자신의 통일대업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사(李斯)에게 감탄을 연발하며 "이 사람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사는 "이것은 한비자란 자가 쓴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진왕 정은 한비자를 얻기 위해 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한비자를 지명하며 진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고, 한왕은 진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냈다.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이자 통치술·제왕학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저주받은 비서(秘書)를 남긴 말더듬이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이자 통치술·제왕학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한비자와 이사는 사실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한비자는 말을 더듬고 말도 잘 꾸미지 못했다. 하지만 재주와 생각이 남다르고 글을 잘 썼다. 이사는 이런 한비자에 열등의식을 느끼며 자책했다. 『한비자』는 군왕들이 보라고 쓴 책이다. 한비자는 유가 학설에 반대하면서 군주의 권술(權術)에 대해 대서특필하여 훗날 군주가 전제독재로 신하를 통제하는 데 이론과 방법을 제공했다. 한비자는 한나라가 갈수록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걱정이 되어 여러 차례 한왕에게 부국강병의 모략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한왕이 씩씩하게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팠다. 또 권력을 가지고도 신하들을 제대로 통제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재능 있는 인재를 기용하여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한나라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로 허영과 사치에 빠져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갈 인물들을 등용하고 있었고, 이 자들의 지위가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들보다 더 높았다. 이에 울분을 품고 『고분』, 『오두』, 『내외저(內外儲)』, 『설림(說林)』, 『세난(說難)』 등 십만여 자에 이르는 저작을 써서 역사상 득실의 변화를 종합했다. 한왕은 당초 한비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자 비로소 한비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자청하게 했다. 진은 한비자를 억류시킨 다음 단숨에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왕 안(安)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법·술·세를 함께 구사하라 이는 한비자가 제창한 치국의 길이었다. 한비자가 말하는 '법'은 상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술'은 신불해(申不害)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한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이 "신불해와 공손앙(상앙) 두 사람의 견해 중 어느 쪽이 나라에 더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것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문제다. 사람은 열흘 이상 먹지 않으면 죽고, 아주 추운 날씨에 옷을 입지 않으면 얼어 죽는다. 그런데 옷과 음식 중 어느 것이 사람에게 더 긴요하냐고 묻는다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사람이 사는 데 꼭 있어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한비자』 「정법」) 그는 국가에서 '법'과 '술'은 사람에게 있어서 옷이나 음식과 같은 것으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법이란 먼저 관부에서 공포하여, 지키면 상을 받고 명령을 어기면 처벌받아 상과 벌이 분명하게 시행된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마음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법'이란 백성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조령(條令) 같은 것으로, 이 조령은 각종 상벌 조건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군주에 복종하면 상을 받고 저항하면 벌을 받도록 한다. '술'에 대해서 한비자는 "지금 신불해는 '술'을 공손앙은 '법'을 제창하고 있다. '술'이란 재능에 따라 관직을 주되 그 관직에 따른 직책을 맡긴 다음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지고 신하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으로 이는 군주가 장악해야 마땅하다"라고 말한다. 이는 군주가 관직 임명과 일처리에 대한 검사,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고 잘못을 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일, 신하들을 심사하는 일 등에 대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통치에서 '법'과 '술'이 갖는 중요성은 "군주에게 '술'이 없으면 바보처럼 멍청하게 윗자리를 차지하는 꼴이 되고, 신하에게 '법'이 없으면 밑에서 난리를 피우게 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인 것이다. 영리하고 지혜로운 군주가 '법'과 '술'을 장악하여 운용하는 종합적 원칙은 "절기에 맞추어 농사를 지어 재물을 얻게 하고, 세금 제도를 정비하여 빈부를 고르게 하고, 형벌을 엄격하게 하여 간사한 악행을 끊는다. 백성들이 땀을 흘려 일해서 부를 쌓고, 직무를 잘 처리하여 귀한 지위에 오르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공적을 세워 상을 받게 하고 군주의 인자한 은혜만을 바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다(「육반」)"라고 지적한다. 그는 또 "법은 드러내는 것이 낫고 술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책략적 사상을 강조한다. 이 말의 뜻은 '법'은 널리 선전하여 집집마다 다 알게 해야 하고, '술'는 마음속에 꼭 감추어 드러내지 않으면서 백성을 통치하고 신하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勢)'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킨다. 통치자는 말과 행동을 떠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영향력도 커진다. '세'를 탈 줄 알면 좋은 사람도 나쁜 자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유능한 자를 기용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지만, 못난 자를 기용하면 천하를 어지럽히게 된다. 통치자로서 현명한 군신은 자신의 권력으로 국가를 다스리지만, 간사한 군신은 권력으로 백성과 어진 사람을 해친다. 군왕이라면 권세를 잘 이용해야 한다. 이에 대해 한비자는 우화 한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조보(造父)가 밭을 갈고 있는데 한 부자가 마차를 타고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놀라 더 이상 가려 하지 않았다. 아들이 마차에서 내려 앞쪽으로 말을 끌고 아버지는 뒤에서 마차를 밀었다. 그래도 여의치 않자 밭을 갈고 있던 조보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보는 농기구를 챙긴 다음 마차 위로 뛰어올라 말을 모는 자리에 앉은 다음 고삐를 잡고 채찍을 드니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이 고사를 이용하여 신하와 백성을 다루는 현명한 군주의 이치를 설명한다. 조보가 말을 다루는 기술이 없었더라면 있는 힘을 다해 마차를 미는 일을 도왔을 것이고, 그러면 말은 계속 버티고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보가 마부 자리에 편히 앉은 것은 그에게 말을 다루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군주에 있어서 국가는 수레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군주의 '세(권력)'는 말에 비유할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이 없다는 것은 말을 다루는 기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몸이 피로하면 국가는 환란을 면하기 어렵고, 몸을 편안한 곳에 두면 국가도 다스려져 부강해질 것이다. 한비자는 현명한 군주는 "관리들만 잘 감독할 뿐이지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지 않는다. 나무줄기를 흔들면 나무 전체 잎사귀가 흔들리게 되고, 그물의 벼리를 당기면 힘들이지 않고 그물을 펼 수 있는 이치가 바로 이런 도리다(「외저설·우하」)"라고 말한다. 또 "이익이 있는 곳에 백성들이 몰리고,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일에 선비들이 목숨을 건다(「외저설·좌상」)"고도 했다. 한비자는 군주가 나라와 백성을 통치하는 데는 효과적인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이 직접 백성을 다스릴 필요가 없고 각급 관리들을 통하여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나무줄기를 흔드는 것과 같아, 나무 전체가 흔들리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연못 주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들도 놀라 하늘로 날아가고, 연못 속의 물고기들은 바닥으로 숨는다. 또 그물을 잘 던지는 사람은 그물의 벼리만을 쥐면 되지, 그 많은 그물코를 일일이 건드리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따라서 관리는 나무줄기와 그물의 벼리에 비유할 수 있고, 군주는 이 관리들만 잘 다스리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 불을 끄는 일에 비유할 수도 있다. 관리들에게 직접 물동이를 들고 가서 불을 끄게 하는 것은 개인의 작용을 발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리들에게 채찍이나 지휘용 깃발을 들게 하여 만 명의 백성들을 지휘하면 빨리 불을 끌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구체적이고 작은 일에는 매달리지 않는다. 한비자는 또 백성들을 너무 사납게 압박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의 반란을 자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앞서 인용한 조보의 이야기를 다시 들고 있다. 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조보는 제나라 왕을 위해 마차를 몰았다. 그는 말을 길들이기 위해 백 리 동안 말에게 물을 주지 않고 갈증을 나게 만들어 말을 길들였다. 그런 다음 제나라 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제나라 왕은 화원에서 한번 시험해보라고 했다. 조보가 말을 몰고 화원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말은 화원의 연못을 보자 갈증을 참지 못하고 바로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조보가 고삐를 당기며 통제하려 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조보는 말을 갈증나게 하는 방식으로 말을 길들였지만 물을 본 말은 참지 못했고 조보도 어쩔 수 없었다. 조보는 이 일을 가지고 군주를 깨우쳤다. 백성의 생존방식으로 백성들을 길들이려 해서는 되레 반발만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개인적 원한을 공적인 일에 개입시키지 말라 사람을 기용하는 '용인(用人)' 기술은 군주 통치의 중요한 방면이다. 한비자는 이 방면에서도 많은 견해를 제기했다. 한비자의 통치모략에는 법가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한비자는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서 유능한 인재를 반드시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능한 인재는 반드시 군주를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자를 제거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강태공의 예를 소개하고 있다. 강태공이 제(齊)나라에 봉해졌다. 제나라에는 동해에 숨어사는 은사(隱士) 광율(狂矞)과 화사(華士)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천자의 대신이 되는 것도 싫고, 제후와 사귀는 것도 싫고, 남의 도움 없이 그저 스스로 농사를 지어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높은 명성도 좋은 자리도 군왕이 주는 녹봉도 싫다면서 자신들의 힘으로 살겠다고 했다. 그러자 강태공은 사람을 보내 이 두 형제를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주공(周公) 단(旦)은 그 두 사람은 모두 성현인데 왜 죽였냐고 물었다. 강태공은 이렇게 말했다. "그자들이 군왕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면 그들을 기용하여 신하로 삼을 수 없습니다. 제후들과 교류도 않겠다고 했으니 그들을 사신으로 활용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들 손으로 농사를 짓고 우물을 파서 먹고 마시겠다고 하니 상벌도 그들에게는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큰 명망도 필요 없다고 했으니 지혜가 있다한들 써먹을 수 없습니다. 또 군주의 녹봉도 필요 없다고 했으니 유능하다한들 공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관리도 싫고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참여도 않겠다고 합니다. 이는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군주가 백성을 통치할 수 있는 것은 녹봉과 형벌 아닙니까? 이런 자들에게 네 가지 수단을 모두 동원해도 소용없다면 저의 법·술·세가 힘을 잃는 것이니 죽이지 않고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외저설·우」)" 강태공은 또 이런 말도 했다. "말 같기도 하고 기린 같기도 한 천하 최고의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다그쳐도 달리지 않고 멈추라고 해도 멈추지 않습니다. 왼쪽으로 가라 해도 말을 안 듣고 오른쪽으로 가라 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 말이라면 주인에게 필요한 공구가 될 수 없고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명령을 듣지 않는 말의 표본이 되어 다른 말들도 그것을 본받을 가능성이 있으니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군주를 위해 소용이 없다면 말 안 듣는 천리마처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인재를 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재라야 유능한 인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유능한 인재의 기준을 분명하게 정했다. 또 이런 인재들을 기용하고 추천하는 용인의 원칙도 제기했다. 그는 "안으로는 친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고, 밖으로는 원수라 해서 피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법'과 '술'의 요구에 부합하고 재능이 있으며 군주에게 소용이 있다면,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낮아도, 또 친척이나 원수라도 추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런 '용인' 철학은 지금 보아도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깊은 산속이나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감옥에 갇혀 있는 범죄자라도, 요리를 하거나 소를 치는 노예라도 현명한 군주는 그 지위의 비천함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그 재능에 근거하여 대담하게 추천하고 임용하여 법도를 밝히고 국가와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여 자신의 몸과 지위를 존엄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진(晉)의 중모현(中牟縣)에 현령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진 평공(平公)이 조무(趙武)에게 "중모는 진나라의 요충지이며, 한단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오. 과인은 우수한 관리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가장 적당하겠소?"라고 물었다. 조무는 형백의 아들이 적당하다고 대답했다. 평공은 깜짝 놀라면서 "형백이라면 그대와 원수처럼 지내는 집안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조무는 "군주를 위해 국사를 말하는 데 사적인 은혜나 원한 같은 감정이 끼어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진 평공은 또 "중부(中府) 담당관으로는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소?"라고 조무에게 자문을 구했다. 조무는 자기 아들을 추천했다. 이처럼 인재를 추천할 때는 원수나 아들이라고 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 이런 예도 소개한다. 해호(解狐)가 조간자(趙簡子)에게 자기와 원수인 사람을 재상으로 추천했다. 재상에 추천된 그 사람은 이에 원한이 없어진 것이라 생각하여 사례를 하고자 해호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호는 그를 맞으러 나오면서 활시위를 당겨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면서 "당신을 추천한 것은 공적인 행동일 뿐이다. 당신이라면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과의 원한은 사적인 일이기 때문에 원한이 있다고 왕께 당신을 추천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개인의 원한이 공적인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비자는 진(秦)에서 6국을 병합하는 계책을 건의했다. 먼저 원교근공으로 6국의 합종을 깨고 한·조·위를 멸망시킨 다음 다른 제후국을 멸망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왕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고는 얼마 뒤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질투한 이사가 진왕 앞에서 "한비자는 한의 공자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려고 하시는데, 한비자는 결국은 한을 돕지 진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런데 그를 기용도 하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머물게 한 다음 돌려보내는 것은 후환을 스스로 남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구실을 달아 법에 따라 그를 죽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모함했다. 진왕은 사법관에게 명령하여 한비자의 죄를 묻도록 했다. 이어 이사는 다시 사람을 보내 한비자에게 독약을 주면서 자살케 했다. 얼마 뒤 진왕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한비자를 사면하려 했으나 한비자는 벌써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러나 진왕은 법·술·세를 결합한 한비자의 정치모략을 모두 접수했고, 실질적인 정책으로 실행해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비자의 학설이 후세에 남게 되었다. 사마천은 한비자를 두고 일을 단호하게 잘 처리했으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명쾌했지만 그의 사상은 너무 가혹하고 각박하여 은덕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유세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한비자가 『세난』 편을 상세하게 저술했음에도 결국은 진에서 죽음을 당해 그 자신이 유세에 따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몹시 비탄해 했다. 인물소개 한비자 저주받은 '비기'를 남긴 말더듬이 한비자, 그는 인성의 약점과 욕망을 끔찍하리만큼 아프게 지적한 칼날같이 예리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 무서운 지성으로 법가 사상을 집대성했고, 그것은 통치술과 제왕학으로 표출되었다. 한비자, 영광과 비극을 한 몸에 지녔던 이 학자는 법가학파의 종합판이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이런 것이었다. 군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녀야 하며 인민들의 감사를 바랄 필요가 없다. 또한 인민의 원망에도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상벌이 엄격하고 분명하면 정부를 만능으로 만들 수 있다. 한비자가 죽은 뒤 그를 숭배하는 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하나의 책으로 정리하여 『한비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비자를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던 진시황과 동문수학한 이사는 한비를 죽였지만 그의 사상은 고스란히 접수하여 날로 커져가는 그들의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한껏 활용했다. 제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킨 한비자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때문에 숱한 오해와 공격의 표적이 되었지만 그만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제왕학과 정치사상을 제시한 인물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권력관계와 그를 둘러싼 투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틀'로서 인성(人性)이란 문제를 제기했던 한비자는 존재 자체로 충격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간파한 다음 이를 제왕학(통치학)의 권술(權術)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권력론-권술론-제왕학이 그에 이르러 하나로 결합되어 가장 실감나는 이론체계로 확립되었다. 그의 이론은 깨어 있는 시대의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적용한 결과물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비극적인 최후를 면키 어려웠다. 관련이미지 2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한비자 초상화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한비자 [韓非子] - 법(法)은 드러내야 하고, 술(術)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두산백과 한비자   [ 韓非子 ] 요약 중국 전국(戰國)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BC 280?∼BC233)와 그 일파의 논저(論著). 구분 논저 저자 한비 시대 중국 전국시대 말 55편 20책에 이르는 대저(大著)로, 원래 《한자(韓子)》라 불리던 것을 후에 당(唐)나라의 한유(韓愈)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前漢)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①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무력(無力)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가(儒家)나 묵가(墨家)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공론(空論)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時世)에 즉응(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군주는 측근·중신·유세가(遊說家)·학자·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② 한비 일파의 강학(講學) ·토론으로 추정되는 편(編)으로,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와 으로,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法家)에 속하는 신자(愼子) ·신자(申子) ·상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③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등의 제편(諸編). 상고(上古)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소화(笑話)의 유(類)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④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漢代)까지의 한비 후학(後學)들의 정론(政論)으로 추정되는 제편(諸編). 편수(編數)는 가장 많으며 그 중 등은 오래된 것이고, 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刑名參同)나 법의 운용(運用:法術)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군권강화(君權强化)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⑤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등의 4편. 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정하는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본지(本旨)로 하여 신하(臣下)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심술(心術)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도가의 허정(虛靜)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전(前) 편은 정론(政論)이고, 후 2편은 편명 그대로 《노자(老子)》의 주석(注釋) 또는 해설편이다. ⑥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등 2편 모두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적평(適評)이라 하겠으나, 그들이 유가·법가·명가(名家)·도가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 ·한의 법형제도(法刑制度)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감상(感傷)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절강서국(浙江書局)의 22자본(子本)이 좋은 간본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비자 [韓非子] (두산백과) ================================///   중국사상의 뿌리 한비자의 법가 집대성     사상적으로 법가를 완성시킨 사람은 순자의 제자인 한비였다. 제자는 스승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 유가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어디에서도 스승을 언급한 곳은 없다. 존경해서였으리라. 순자는 평생의 학문적 노력을 통해 제자백가 사상을 집대성하였고, 한비는 뛰어난 머리로 법가사상을 집대성하였다. 말더듬이였으나 글은 훌륭하여, 진시황이 "오호라!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보고 더불어 놀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사기』 「노장신한열전」)고 할 정도였다. 한비자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냉정한 분석에 의거하여, 우화를 통해 구체적인 방법들을 얘기한다. "상고에는 도덕을 겨루었으며, 중세에는 지모를 쫓았고, 당금은 기력을 다투는데"(『한비자』 「五蠹」), 과거와 같은 도덕주의만 지향한다는 것은 토끼가 와서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어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어리석은 무리라고 힐난하며, 또 "의사가 사람들의 상처를 잘 빨아주고 사람들의 피를 입가에 머금는 것"(「備內」)이나, 수레 만드는 이가 다른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만드는 이가 다른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이익 때문이라는 현실적 인성론을 제기한다. 또, 한비자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신관계가 매매관계라고 말한 사람이다.1) 그는 군주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라고 생각하였고, 신하에 대한 통제 또한 군주의 이익, 즉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군주는 절대적 세를 가지고 공평무사한 법을 집행하여야 하며, 효율적인 술로 신하를 통제해야 한다는 법·술·세를 혼융한 법가정치를 주창하였다. 이 입장에서 그는 초기 법가 노선을 비판하였다. 상앙은 법은 알았으나 술이 없어 법 또한 다하지 못했으며, 신불해는 술은 알았으나 법에 통달하지 못해 술 또한 다하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2) 또, 신도의 세에 관한 주장은 미진했다고 보았다.3) 특히 한비자는 신하 제어술에 대하여, 노자사상을 흡수하여 독보적인 권모술수의 경지를 열었다.4) 한편 한비자는 정치에 관한 논의, 특히 조국 한나라의 정치 상황을 감안한 강간약지(强幹弱枝)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러나 "국부는 농사에 달려 있다"(「오두」)는 주장에서처럼 경제 방면의 중본억말(重本抑末) 사상 또한 대단히 구체성을 띠고 있다. 자연의 규율에 따르고, 농사철을 위배해서는 안 되며, 땅을 다루는 농사 지식을 익히도록 하고, 새로운 농사 도구를 개량하고, 낭비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등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에 집중하였다. 전국시대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법가는 그 변동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고, 가장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들은 전쟁과 형벌을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로 여겼다. 전쟁을 통해 천하통일을 하면 전쟁이 없어질 것이고, 형벌을 통해 사회적 죄악이 없어지면 마침내 형벌도 없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또, 실용적인 지식이나 법을 해석하는 관리만을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고 일체의 학문사상을 금지시키라고 주장한다. 한비자와 같이 순자에게 동문수학한 이사는 진시황의 재상을 하면서 강력한 법가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군주 전제제도와 중앙 집권에 큰 공헌을 하여 중국을 제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문화 이상의 결여로 법가사상 자체는 생명력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비자의 법가 집대성 (중국사상의 뿌리) ============================================///참고...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 본명은 한비(韓非)이다. 전국시대 말기에 한(韓)나라에 살던 공자(公子)로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로 태어났다.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법가를 집대성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통이라면 '한자(韓子)'라고 해야겠지만, 후에 당의 한유를 한자라 부르게 되면서, 유가가 아닌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의 우선순위가 낮기 때문에 한자 쪽을 이름 전체를 넣어서 한비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5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백가묵가 - 묵자 댓글:  조회:3009  추천:0  2019-11-20
철학사전 묵자   [ 墨子 ] 묵자 출생 - 사망 BC 479년경 ~ BC 381년경 이명 본명 : 적(翟) 직업 사상가 분야 묵가 국적 중국 시대 전국시대 초기 이름은 적(翟).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로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상가. 철기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발전하자,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은 그에 힘입어 신흥계급으로 성장하고 점차 종래의 지배계급이던 씨족 귀족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신흥계급의 입장에 서서 씨족 귀족의 정치와 지배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천하(天下)에 이익되는 것(利)을 북돋우고(興), 천하의 해가 되는 것(害)을 없애는(除)' 것을 정치의 원칙으로 하고, 그 실현 방법으로서 유능하다면 농민이나 수공업자도 관리로 채용하는 '상현'(尙賢),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는 재화ㆍ노동력의 소비를 금지하는 '절용'(節用),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약탈이나 백성 살상의 전쟁에 반대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서로 높이는 '비공'(非攻)과 '겸애'(兼愛)를 주장했다. 또 이러한 원칙과 방법에 기초를 둔 현실비판 속에서, 논리적 용어, '유'(類 : 보편), '고'(故 : 까닭, 이유)의 개념 등을 발명, 구사하여 논리적 사고를 풍부히 했다. 주요저서 墨子 53편 관련이미지 23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묵자의 동상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묵자 [墨子] (철학사전)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묵자 사랑의 정치 철학과 논리의 발견 [ 墨子 ] 이미지 크게보기 『묵자』 저자 묵적(墨翟) 해설자 강신주(인천대학교 중국학과 강사) 목차 민중 편에 서서 『묵자』의 10가지 주제 사랑의 정치철학 요청된 초월적 종교론 논리의 발견 아쉬운 묵가의 소멸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민중 편에 서서 우리는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여 진(秦)나라를 세우기 이전의 혼란의 시대를 선진(先秦)시대 혹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탐욕, 의심, 모략, 갈등, 살육의 시대였다.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이 명목적이나마 주(周)나라를 인정하고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제후국들은 천하를 차지하려고, 혹은 다른 제후국들에 병합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전쟁의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삶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일반 민중이다. 제후들의 탐욕과 강박관념에 의해 야기되었던 수많은 전쟁과 전투에서 살육되었던 사람들은, 제후들을 대표로 하는 위정자들이라기보다는 바로 이 힘없는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전국시대에 습관적으로 자행되던 전쟁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非攻]을 보인 철학자이자 실천가가 탄생하는데, 그가 바로 묵적(墨翟)이다. 전국시대에 있어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부당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을 함축한다. 따라서 묵자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강력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공동체는 묵자가 죽은 뒤에도 계승ㆍ유지되었는데 그 지도자를 거자(鉅子)라고 했다. 제자백가들 중 유일하게 선생의 이름을 학파의 이름으로 사용했던 묵가(墨家)라는 사상가 집단은 바로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묵자』의 10가지 주제 『묵자』는 묵자를 포함한 묵가들 전체의 사유와 논쟁의 기록이다. 묵가들의 철학적 주장들은 흔히 10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이 10가지 주제들은 각각 『묵자』를 구성하는 편명이기도 하다. 1. 상현(尙賢) : 현명한 사람을 숭상해야 한다. 2. 상동(尙同) : 윗사람을 높이 받들며 따라야 한다. 3. 겸애(兼愛) :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 4. 비공(非攻) : 전쟁을 금지해야 한다. 5. 절용(節用) : 재정 지출을 절제해야 한다. 6. 절장(節葬) : 장례를 간소화해야 한다. 7. 천지(天志) :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 8. 명귀(明鬼) :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9. 비악(非樂) : 사치의 상징인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 10. 비명(非命) : 주체적 노력에 반하는 숙명론을 거부해야 한다. 얼핏 살펴보아도 이 열 가지 주제들은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윗사람의 뜻을 숭상하고 따라야 한다거나 하늘과 귀신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인 차원의 사랑인 '겸애'는, 수직적인 독재론이나 하늘과 귀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초월적인 종교론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자』를 자세히 읽어 보면 이러한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이 열 가지 주제 가운데 핵심 주제인 '겸애'이며, 다른 주제들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맹자』와 『장자』, 『한비자』, 『여씨춘추』, 『회남자』 등에서 묵가의 핵심 주제로 '겸애'를 규정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묵자』의 「겸애(兼愛)」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반드시 혼란이 일어나는 까닭을 알아야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고, 혼란이 일어나는 까닭을 알지 못하면 곧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마치 의사가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과 같다. 반드시 병이 생겨난 까닭을 알아야만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며, 병이 일어난 까닭을 알지 못하면 곧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묵가는 세상에 혼란이 발생하는 원인을 바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현실에서 찾았다. 결국 문제는 사랑인 것이다. 공동체의 성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했다면, 결국 공동체의 성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혼란은 종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묵가의 모든 사유는 어떻게 하면 공동체 성원들이 상호간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다. 사랑의 정치철학 묵자의 '겸애'는 '차별이 없는 사랑'이나 '상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묵가의 '겸애'를 기독교적 사랑과 유사한 '박애(博愛)'의 의미로 속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러나 겸애는 현존하는 정치적 질서나 위계적 구조를 긍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의 부모를 나의 부모처럼 여기고, 남의 집안을 나의 집안처럼 여기고, 남의 도읍을 나의 도읍처럼 여기고, 남의 국가를 나의 국가처럼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가족 제도나 정치 질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단지 '나'와 '남'의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지 모든 사회적 차별을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묵자의 '겸애'란 평등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불평등한 사랑이라고 규정될 수 있겠다. 다음으로 겸애라는 개념 속에 들어 있는 공리주의적1) 성격을 살펴보자. 묵가의 사랑은 아끼고 사랑하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물질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묵가에게 있어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겸애' 혹은 '겸상애(兼相愛)'2)라는 묵가의 주제는 항상 '교상리(交相利)'3)라는 표현과 연용해서 사용 한다. 예를 들어 참혹한 살육으로 점철되었던 전국시대 민중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인데, 묵가는 민중의 고통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추운 자가 옷을 얻지 못하며 수고하는 자가 휴식을 얻지 못하는 것, 이 세 가지가 백성들의 커다란 환난이다. 군주로서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반드시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추운 자에게 옷을 주어야 하며, 노동이나 병역으로 지친 자는 쉬게 해 주어야 한다. 백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백성에게 가장 유효한 이익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군주다. 그렇기 때문에 묵가는 "윗사람을 높이 받들며 따라야 한다"는 독재론을 피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독재를 지향하는 전체주의자들이라서가 아니라, 군주만이 유일하게 실질적인 재력과 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우리는 『묵자』의 나머지 네 주제, 즉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고 재정 지출을 절제하도록 하며, 장례를 간소화하고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군주가 겸애를 실천하려면 백성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허례허식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 하고 재정 지출을 절제해야 하며, 백성의 삶 자체를 고통에 빠뜨리는 전쟁도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청된 초월적 종교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묵가에게 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물질적 이익을 준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자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물질적인 이익을 누군가에게 제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준다면 그의 삶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학적 원리다. 이러한 점에서 묵가의 고난에 찬 실천 과정이 유래한다. 『장자(莊子)』에서는, 묵가의 무리가 "대부분 짐승가죽옷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서 밤낮을 쉬지 않았으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삶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 다시 말해 남에게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려는 사람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면 자신은 굶어야 한다. 헐벗은 자에게 따뜻한 옷을 주면 자신은 춥게 지내야만 한다. 삶에 지친 사람을 대신하여 노동을 하면 그 자신이 피로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들이 묵가의 무리였던 것이다. 묵가의 무리는, 이러한 희생이 너무나 힘든 일이긴 하지만,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확신했으며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희생 정신은 이기심이나 탐욕, 질투,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위정자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여기서 묵가는 위정자들로 하여금 겸애의 정신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운 논리 장치를 고안한다. 그 논리 장치가 바로 하늘과 귀신의 의지를 긍정하는 초월적 종교론이다. 천자는 천하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며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유하고 귀한 사람은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며 - 즉, 겸상애(兼相愛) - 서로를 이롭게 해주기 - 즉, 교상리(交相利) - 때문에 반드시 하늘의 상을 받을 것이다. 하늘의 뜻에 반하는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며 서로를 해쳐서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기 쉽다. 묵가들은 하늘과 귀신의 의지가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을까? 현대의 일부 연구자들은 묵가의 초월적 종교론을 기독교와 비교하며, 그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연구 경향은 묵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묵가들이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겸상애'와 '교상리'라는 실천적 원칙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결코 신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는 신학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당시 제사와 관련된 종교적 통념에 호소함으로써 자신들의 실천 원칙을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조상의 귀신이 있다는 믿음과 같은 종교적 통념이 통용되지 않았다면, 묵가들은 다른 논거에 의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묵가의 주장은 '신을 믿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자는 데 있었다. 논리의 발견 서양의 철학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데 비해 동양의 철학은 직관적이고 신비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성(理性)4)은 합리적 추론의 능력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유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성적인 사유는 기본적으로 어떤 주장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대는 사유다. 이 점에서 『묵자』는 동양 철학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뒤엎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묵자』는 고유한 주장과 함께 철저하게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의 이런 합리주의적 정신은 다음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어진 사람들은 취하고 버리는 것과 옳고 그른 것의 이유를 서로 알려 준다. 이유를 대지 못하는 사람은 이유를 대는 사람을 따르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을 따르며, 할 말이 없다면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묵가에서는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이유나 근거들을 세 가지로 유형화하는데, 그것이 유명한 '삼표(三表)'다. 말에 표준이 없는 경우, 이것은 비유하자면 움직이는 물레 위에서 동쪽과 서쪽을 확립하려는 것과 같아서 옳고 그름, 이로움과 해로움의 구분에 대해 분명히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말에는 반드시 세 가지 표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곧 역사적 표본과 경험적 근거, 현실적 유용성이다. 무엇에서 역사적 표본을 찾는가? 옛날 성왕들의 사적에서 찾아야 한다. 무엇에서 경험적 근거를 찾는가? 백성들의 귀와 눈으로 듣고 본 사실에서 경험적 근거를 찾아야 한다. 무엇에서 현실적 유용성을 찾는가? 형벌과 정책을 시행하여 그것이 국가, 백성 그리고 인민의 이익에 부합되는가를 살펴보는 데서 알 수 있다. 위의 세 가지로 분류된 근거가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묵자』의 열 가지 주제들이 모두 이런 근거들로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도 있다. 옛날 성왕들의 사적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또 사람들의 경험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혹은 현실적 유용성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묵가가 근거나 이유를 가지고 주장을 제기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따라서 묵가가 제시한 세 가지 근거는 당시의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정립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묵가는, 겸애라고 하는 유의미한 정치철학적 주장을 했다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려 한 사유 방식을 최초로 피력했다는 측면에서도 중국 철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묵가의 소멸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 초기에서부터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가장 유력한 사상이었다. 이것은 전국시대 중기의 맹자, 말기의 순자(荀子)나 한비자(韓非子)가 당시의 유력한 사상으로 묵가의 철학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 묵가는 춘추시대 말기에 인문 정신을 드러낸 공자와 그를 수장으로 하는 유가(儒家)에 맞서 싸웠고 이런 싸움은 전국시대 내내 지속된다. 유가와 묵가 사이의 논쟁은 너무나 강렬하고 지속적이어서 장자(莊子)가 지식인들 사이의 사상 논쟁을 '유가와 묵가의 시비논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묵가가 이렇게 격렬하게 유가를 공격했던 이유는, 유가에서는 말로만 사랑을 외칠 뿐 그 사랑의 완성이 기본적으로 자기희생과 이타적 행위에 기초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가에서는 사랑이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묵가에게는 번잡한 예절, 무용한 장례 의식 혹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음악 활동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유가의 무리가 위선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개 유가는 오만하고 자신만을 따르는 자들이어서 아랫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없고, 음악을 좋아하며 사람들을 어지럽히기에 직접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운명이 있다는 주장을 세워 할 일에 태만하므로 직책을 맡겨서도 안 되고, 상례를 중시하고 슬픔을 그치지 않으니 백성들을 자애하도록 해서도 안 되며, 옷을 기이하게 입고 용모를 치장하는 데 힘쓰기에 백성들을 이끌도록 해서도 안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가에 대한 묵가의 치열하고 지속적인 공격이 묵가 사상을 역사 속에 묻히게 만든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단명한 뒤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모든 제자백가들을 물리치고 유학만을 숭상한다"고 선언한 뒤 중국의 역사는 유학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묵가의 사상과 실천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망각되어 버렸던 것이다. 철학사적으로 묵가 사유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차별적인 사랑을 강조했던 유가들과는 달리 인간 사이의 차별 없는 사랑을 역설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중요한 그들의 공헌은 동양 철학에 대해 해묵은 편견을 수정해 준다는 데 있다. 우리는 논리와 이유를 강조했던 서양 철학과 달리, 동양 철학이 예술적이고 직관적이며 나아가 신비주의적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유나 근거에 기초를 두지 않는 철학은 가능할까? 그렇다면 동양 철학은 철학이라기보다 종교에 가까운 것이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이유와 근거를 강조했던 묵가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동양의 정신을 다시 반추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묵자』를 진지하게 읽게 되면, 우리는 동양에 합리주의적이며, 따라서 논증적인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긍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이 철학일 수 있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삶에 대한 건전한 주장과 그에 대한 충분한 근거대기 작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묵가는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늘의 의지로서 '천지(天志)'라는 외적인 권위를 도입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외적인 권위에 의해 실현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외적인 권위를 두려워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종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 경우 사랑의 대상은 타인이라기보다는 외적인 권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주체에 의해 결단되고 지속되는 정감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2. 묵가들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사회 구성원들 간의 상호 애정의 결여에서 찾았다. 그러나 사회적 혼란과 갈등은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묵가에서는 군주, 관료, 인민으로 표현될 수 있는 통치 질서를 그대로 인정한 후, 사회 구성원 상호간의 사랑을 회복함으로써 사회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런 논리라면 사회적 문제는 개개인의 자의적 결단에 내맡겨지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성원 상호간의 사랑을 유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묵자』, 묵적 지음, 김학주 옮김, 명문당, 2003. 각주 1) 공리주의(utilitarianism)에 따르면 도덕의 정당화는 더 많은 쾌락이나 이익에 대한 계산으로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좋다는 덕목은 음식을 과식했을 때 생기는 불쾌감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2) 겸애(兼愛)에 대한 자세한 표현으로, '모두를 아울러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것은 『묵자』를 보면 '겸애'를 공자 사유의 핵심 범주인 '인(仁)'으로 대치해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묵자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유를 배우면서 그를 극복해 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3) '상호간에 서로 이익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묵자』에서는 '겸애'를 '인'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교상리'를 '의(義)'로 대치해서 쓰기도 한다. 4) 이성(reason)은 '계산'이나 '이유'를 뜻하는 라틴어 '라치오(ratio)'에서 온 말이다. 라치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첫째로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고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둘째로 동기나 이유, 셋째로는 정당화다. 그래서 '라치오'로부터 유래한 '이성'이란 말은 어떤 주어진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둔 채 반성하고 사유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 거리를 두고 반성할 수 있어야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수 있고 그 행동의 이유를 발견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그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묵자 [墨子] - 사랑의 정치 철학과 논리의 발견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 묵자라는 존칭으로 일컬어지는 묵적(墨翟)의 생존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의 활동 반경을 미루어 볼 때 대략 BC 479~438年 경으로, 공자(孔子)보다 10여 년 뒤에 노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기(史記)》에는 묵자가 송나라 대부라고 적혀 있으나 노예 출신의 수공인이어서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얼굴에 입묵했으므로 묵(墨)이라 불린다는 설이 있다. 수성(守城)기구ㆍ병기ㆍ공구 등의 기계(器械) 제작에 능했으며 성곽 방위술에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주(周)나라의 사각(史角)이라는 사람의 자손에게 글을 배웠다. 그리고 공자의 유학도 배웠으나 번거로운 예의가 백성들의 생산을 저해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할 우려가 있으며 혼란한 세상을 구제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배척했다.   그의 근본 사상은 [겸애설(兼愛說)]로서, 자타를 구별하여 사랑을 차등화하는 기존 유가의 한정적 사랑(묵가에서는 이를 “별애(別愛)”라고 부름)은 개인 간에 시기(猜忌)와 도둑질, 살인과 투쟁을 유발시키며 국제간에는 전쟁을 야기 시키는 등 천하의 가장 큰 화근이라 하여 비판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겸애(謙愛)를 실천하는 것만이 이러한 사회적 병폐와 문제를 제거하여 궁극적인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이 계급이나 신분의 차등에서 벗어나 평등한 사랑을 실천할 때 사리사욕이 아닌 공리를 얻어 서로가 이익을 보게 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으니 이를 [교상리(交相利)]라 부른다.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는 [상현정치(尙賢政治)]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으로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노력에 의한 생산의 증대와 절용이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면서 귀족들의 사치ㆍ낭비ㆍ부의 편중을 지탄했다.   묵자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극히 검소하고 분수에 맞게 생활했으며 월나라 왕이 사방 500리에 달하는 봉지를 준다고 하는데도 분수에 넘는 대우는 오히려 자신의 사상과 배치된다 하여 거절했다.   그는 천하에 이로운 일이 있으면 쉴 틈이 없이 동분서주, 찾아가 할만큼 근면하여 고통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활동했는데 “정강이의 털이 부스러질 만큼 열심히 노력했다(《맹자(孟子)》).”는 정도로 호인이며 선인이었다고 한다.   제후들과 귀족들의 횡포 때문에 고통을 받아오던 백성들은 묵자의 평등ㆍ박애 사상에 크게 공감하여 당시에는 오히려 유가를 능가하는 주도적 사상이 되어 일세를 풍미했다.   그러다가 전국 시대에서 진(秦)의 통일을 거치는 동안 점차 쇠퇴하더니 한나라 때에 이르러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잊혀진 사상체계였던 묵가의 사상은 청나라 말에 이르러 묵자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묵가(墨家)는 묵자가 주창한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묵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교설을 편집한 것으로 전해진 《묵자(墨子)》 53편에 남아 있는데 상현(尙賢)ㆍ상동(尙同)ㆍ겸애(兼愛)ㆍ비공(非攻)ㆍ절용(節用)ㆍ절장(節葬) 등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당시의 일반적인 민중들의 관념에 비해서는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   신분과 지위상의 귀천ㆍ경제적인 빈부ㆍ지능상의 현우(賢愚)ㆍ힘의 강약을 불문하고 모두가 평등함을 지적하며 육친간의 친소에 따라 사랑의 지향이 달라지는 유가(儒家)의 인(仁)을 배척했다.   만민에 대한 박애 정신인 겸애(兼愛)를 주창하는 묵가는 출발점부터 유가와 대립하기 시작하여 당시의 양대 학파를 이루었으며, 상대방을 통박(痛駁)하면서 소위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서막을 올렸다.   묵가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믿는 모든 것을 타파하려고 했다. 혈연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겸애(兼愛), 인간의 숙명관을 타파하기 위한 비천명(非天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잘못된 관념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시비곡직을 바르게 가릴 수 있고 현우(賢愚)ㆍ근태(勤惰:부지런하고 나태함)만을 가지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게 묵자의 생각이다. 이 겸상애(兼相愛)와 비천명은 묵자사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겸애(兼愛)사상과 교상리(交相利)   묵자는 그의 중심 사상인 자타를 구별하지 않는 평등애, 곧 겸애를 실현시키는 방법으로 [삼표(三表)]를 내세우고 이를 공리의 기준으로 삼아 개인의 사리가 아닌 천하의 공공복리를 추구하는 [교샹리(交相利)]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표란 성왕(聖王)의 사적에 근본을 두는 [본(本)], 백성들의 직접 경험에 근거한 [원(原: 연원(淵源))]>, 국가와 백성들의 이익에 일치하는 데에 효용성을 두는 [용(用)]을 가리킨다.   그들은 오로지 남을 위해 산다는 종지(宗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는 자기의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오히려 가능한 한 삼갔다. 비락(非樂)과 절장(節葬:장례식을 검약하게 함)을 주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상현(尙賢)사상과 상동(尙同)사상   국가 제도는 안정되고 통일된 세상을 견지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 묵자의 생각이다. 천하를 한 사람이 다스릴 수는 없으므로 각인의 능력에 맞게 제후와 향장ㆍ이장(里長) 등을 임명해야 되지만 그러한 직분을 담당할 사람으로는 범인이 아닌 현자(賢者)라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여 아랫사람이 위에 있는 현자를 모방하거나 동일하게 되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상동정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평화 사상인 비공(非攻)   [비공]이란 타인을 공격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비전론이다. 묵자는 전쟁을 집단적인 살인행위로,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실제적으로도 수성 장비를 제작하고 밤낮으로 10일을 달려 자기의 조국인 송나라를 침공하려는 초(楚)나라 왕과 공성 기구 제작자인 공수반(公輸盤)을 찾아가 이를 저지시킨 일도 있다.   경제 사상인 절용   묵자는 근검절약을 주창했으며 이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를 모두 갈아서라도 천하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하리라(마정방종 이천하위지(摩頂放踵, 利天下爲之)).”고 외치며“몸을 가릴 만큼만 입고 먹을 만큼만 헤아려 먹으며 노예들과 똑같이 어울릴지언정 벼슬자리 따윈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탁신이의 양복이식 비어빈맹 미감구사(度身而衣, 量腹而食, 比於賓萌, 未敢求仕))”고 하면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농민이며 노동자ㆍ수공업자들이었던 묵자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생산의 증가를 위해서는 인구의 증가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혼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생산의 증대와 아울러 물자를 절약해 써야함을 강조했다. 길흉화복이 타고 나는 것이라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근면과 절약이 부의 원천이라고 하면서 왕후장상 등 귀족들의 호의호식과 사치ㆍ낭비를 비난하고 특권 계층에 의한 부의 독점을 지탄했다.   묵자의 제자들과 묵가의 성쇠   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활동했는데 역대의 거자(鉅子: 묵가의 최고 지도자)로 알려진 금활리(禽滑釐)ㆍ맹승(孟勝)ㆍ전양자(田襄子) 등의 활약이 두드려졌고 절용과 실리 비공 등을 주장한 학자 송형(宋銒)과 윤문(尹文)ㆍ공상과(公尙過)ㆍ허행(許行) 등등이 묵자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했다.   또 여러 계파 중 상리씨(相理氏) 무리는 동방의 제(齊)에서, 초나라 사람인 고획(苦獲)ㆍ등능(鄧陵)ㆍ자이치(子巳齒) 등은 남방에서, 상부씨(相夫氏) 무리는 서방의 진(秦)나라에서 활동했다.   그 중 별묵(別墨)으로 불리는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 등은 변론의 방법을 개발하여 묵가의 겸애사상과 철학적 입장을 밝히고 변호하면서 제가(諸家)에 대한 비평에 치중했는데 이들을 [명가(名家)]라고도 부른다.   한동안 묵가들의 활약은 유가를 압도했다.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의 학설이 하늘 아래 가득하여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쏠리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고 한탄했다. 한비자(韓非子) 또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저명한 학파를 꼽자면 유가와 묵가를 들 수 있다.” 유가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으나 그때까지도 묵자의 학설은 유가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학(顯學: 뚜렷하게 드러난 학파)’으로 꼽힐 정도로 창성했다.   묵가 집단은 거자를 중심으로 철통같은 단결력으로 조직되어 종교 집단이나 정치 집단처럼 엄격하게 활동했으며 그 조직원은 [묵자(墨者)]라고 불렸다.   복돈(腹)ㆍ맹승(孟勝)ㆍ전양자(田襄子) 등의 초기 거자들은 투철한 묵가 사상을 지니고 이를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 했으나 이후 묵가 조직에 이들 만한 사상적 지도자가 계속해 출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비자가 “묵자가 죽은 뒤 상리씨의 묵가, 상부씨의 묵가, 등릉씨의 묵가로 분열되었다.”고 전하는 바와 같이 묵가의 분파들이 서로를 별묵이라 비난하며 다투었다〈《장자(莊子)》〈천하편(天下篇)〉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국 말기 칠국의 대립 항쟁 과정에서 쇠약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진(秦)ㆍ한대(漢代)이후에는 학맥 자체가 완전히 끊어져 잊혀진 집단이 되었다.   그러다가 청대(淸代)의 고증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묵가 연구가 부활되었던 것이다.
4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유가 성악설 - 순자 댓글:  조회:2842  추천:0  2019-11-20
철학사전 순자   [ 荀子 ] 이미지 크게보기 순자 출생 - 사망 BC 298년 ~ BC 238년 직업 사상가 분야 유물론적 경향의 유가(儒家), 성악설(性惡說) 국적 중국 시대 전국시대 중국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의 유물론적 경향의 유가(儒家).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 그 시대는 전국의 7대 강국이 중국의 천하 통일을 지향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하고, 그 와중에서 진(秦)이 통일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시대였다. 그는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고 있던 중국 통일의 과제에 몰두하여, '군거화일'(群居和一)이라고 하는 질서를 지향하고 '예의'(禮義)라는 수단을 제기하였다. '군거화일'이란 천자, 제후, 사대부, 관인백리(官人百吏), 서민이 직분에 따라 일을 하고 각각 그 '직분'(職分)에 만족하는 질서를 일컫는다. '예의'는 이 '분'(分)을 결정하는 기준(귀천지등貴賤之等, 장유지차長之差, 지우능불능지분知愚能不能之分)이며, 선왕(先王 : 성인聖人)의 제작(制作)에 따른 것이다. 이 '예의'의 '분'은 '천인(天人)의 분'(分)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공통성이 이것에 의해 크게 발휘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부국강병의 문제도, 인재를 양성하는 문제도, 모두 '예의'에 의거하여 해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의'는 법가의 '법'(法)에 접근하고 있고, 인식론상으로는 도가의 영향이 농후하다. 그는 유가의 입장을 지키면서, 진(秦)의 입장에 서서 제가(諸家)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선진사상(先秦思想)의 집대성자라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순자』는 그의 언론(言論)을 모은 것이다. 관련이미지 3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순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만화로 보는 교과서 인물 [네이버 지식백과]순자 [荀子] (철학사전)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순자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 荀子 ] 이미지 크게보기 『순자』 저자 순황(荀況) 해설자 장현근(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목차 『순자』와 실천 유학 『순자』와 그 시대 『순자』의 핵심 관념 순자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순자』의 한계와 가능성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순자』와 실천 유학 사회에 대해 건강한 관심을 갖도록, 그리고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를 도덕적으로 해결하여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원만한 사람을 키워 내는 것이 유가 사상의 큰 목적이다. 그래서 유가 사상은 정치철학이자 사회철학이며, 교육철학이자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유가의 경전인 『시경』이나 『서경』, 『주역』 등이 확립된 시기를 주(周)나라 초로 본다면, 유가 사상은 5~6백 년의 온축을 거쳐 마침내 공자에 의해 처음으로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3백여 년 동안 어떤 외부 사상의 유입도 없이 중국 내에서 자생한 제자백가의 사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학문적 성취 중 하나다. 우주의 작동 원리에서 인간 내면의 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상상력과 치밀한 탐구로 수많은 학파와 사상가들이 출몰하였다. 『순자』는 정통 유가를 자임한 순황(荀況)이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초기 유가 사상을 두 번째로 집대성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담은 책이다. 전통 시대 중국을 지배해 온 정치적 이념으로서 유교 사상은 순자의 영향이 매우 컸다. 순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듣지 않음은 듣느니만 못하다. 듣는 것은 보느니만 못하다. 보는 것은 아느니만 못하다. 아는 것은 행하느니만 못하다. 학문은 그것을 행하게 되었을 때 그친다. 『순자』를 읽으면 관념적 도덕이 아니라 실천적 도덕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갈등하는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냉혹한 법치와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 인류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대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순자』와 그 시대 순자는 정치적으로 부국강병과 실리를 숭상하던 전국 시대 말기에 왕도(王道)에 대해 목청을 높였으며, 예의로 질서를 잡아가는 예치(禮治) 국가를 세우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복잡한 세금과 요역을 과감히 줄이고 투기 세력을 억제하여 농업 중심의 경제 질서를 안정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의 대변동 시대에 오히려 신분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한편, 도덕적ㆍ학문적 성취를 통한 신분 변동은 긍정하였다. 당시 중국 천하의 통일이 눈앞에 닥친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제자백가의 다양한 주장들이 통합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각 학파의 사상가들은 다른 학파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그들의 저작 또한 백과사전과 같은 성향을 띠게 되었다. 『순자』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순자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전국칠웅이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사상적으로 제자백가의 다양한 경쟁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사회적으로 계급이 동요하고 신분 변동이 극심했다. 그래서 국가간의 합종연횡이 난무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한 법가 사상이 우세한 환경이었지만 순자는 최고의 학자로서 스스로를 위대한 유가 사상가로 자임하였다. 유가 내부로 볼 때 당시는 공자를 추종하는 세력들 사이에 분파 현상이 치열하고, 특히 맹자(孟子)에 의해 공자 사상의 정치적 의미가 더욱 풍부해진 시기였다. 정부 사업으로 춘추전국시대 서적을 총정리했던 한나라 유향(劉向)은 순자가 남겼다는 수만 자의 문헌과 '손경의 책'이란 이름으로 돌아다닌 322편의 글 가운데 중복된 290편을 빼고 32편으로 확정하여 재정리하였다. 그리고 『손경신서(孫卿新書)』라 이름을 붙인 다음 「서록(敍錄)」을 달았다. 순자 본인의 초기 저작들은 그의 생전에 이미 널리 유행했었으며, 현존 『순자』의 상당 부분은 그 초기 작품들로 생각된다. 나머지는 그의 제자들의 기록과 후인들이 순자의 이름을 빌어 지은 글 혹은 다른 작품들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순자』의 모든 내용은 본인의 친필 저작 여부와 무관하게 일관된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어 순자의 기본 사상을 연구하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순자』 20권은 당나라 양량(楊倞)1)이 두 차례 정리하고 재편집하여 주석을 덧붙인 것이다. 『순자』는 대부분 각 편의 핵심 주제를 편명으로 삼고 있다. 그 30여 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하늘과 인간의 일, 정치ㆍ경제와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백과사전식의 종합적인 학문을 다루고 있다. 당나라 말기 한유(韓愈)가 "맹자는 순정하고도 지순하지만, 순자는 대체로 순정하되 조금 하자가 있다"고 평한 이래 송나라 이후의 성리학에서는 한결같이 순자 사상을 부정하고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주로 『순자』의 「성악(性惡)」2)편과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 집중되었을 뿐, 『순자』 전체를 진지하게 연구하거나 주석한 사람은 없었다. 순자가 재조명된 것은 청나라에 이르러서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양량 주석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위서 여부를 고증하였으며, 해독이 어려운 글자에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들을 종합하여 『순자』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완전한 주석서 『순자집해(荀子集解)』를 낸 사람은 왕선겸(王先謙)3)이다. 『순자』의 핵심 관념 순자는 현세의 군주를 지극히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 군주를 위대한 성왕으로 만들어 도덕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 방법은 신분에 기초한 예의를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 사고의 바탕에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하늘을 제어하고 악한 본성을 교화하며, 각종 폐단을 해소해야 한다는 사유가 깔려 있다. 1) 천생인성(天生人成), 성악(性惡), 정명(正名) 순자는 사람의 사회성을 중시하였으며, 국가 권력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는 사회 질서의 안정을 위한 예(禮)의 두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사유하였다. 하나는 신분 등급ㆍ도덕적 성취 등 각종 질서를 분명하게 구분시켜 주는 인위적 기능 즉 명분(明分)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 하여금 원만하고 만족스러운 집단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 즉 사군(使群) 기능이다. 순자 사유의 바탕은 이 두 문제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순자의 우주관과 인생관은 한마디로 자연 세계가 인문 세계에 의해 주재된다는 천생인성(天生人成)4)이다. 천지의 기운으로 세상만물이 생겨났으니 이들을 조화롭게 꾸미고 성취시키는 것은 사람, 즉 성인의 일이다. 하늘의 도와 인간 행위의 조화로 이 세계가 이루어졌으며, 예의라는 인간의 힘이 개입되었을 때 하늘은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사고다. 순자는 하늘과 인간을 완전히 나누어 생각하면서 하늘을 그저 불변하는 자연체로만 파악한다. 인간 세상의 치란(治亂)은 하늘 때문이 아니라 인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사람 스스로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초점은 인위, 즉 예를 강조하는 데 있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본질적ㆍ이성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고난 본능 혹은 동물적 욕망의 결과가 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탄생 후 사회적 존재가 되면서 인간의 악한 성질이 발현된다는 의미다. 그 발현 양태는 경쟁과 다툼이며 결과는 사회적 혼란이다. 순자가 성악설을 제기한 목적은 인위적인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질을 바꾸어 선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려는 것, 즉 화성기위(化性起僞)5)였다. 따라서 순자 성악설의 요지는 인위적 예의를 강조하는 데 있다. 순자의 인식론은 소극적인 적폐의 해소, 즉 해폐(解蔽)6)와 적극적으로 명분을 바로 세워 공공 인식에 도달한다는 정명(正名)으로 대표된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가려져 있을 때 한 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이 생겨나므로 인위의 결정인 예를 통해 쌓여가는 폐단을 해소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명분을 바르게 세움으로써 공공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위의 결정체인 예의로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인식의 헷갈림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성왕(聖王) 사람의 사회성을 강조하고 집단의 질서를 중시했던 순자는 그 질서를 관장하는 중추로서 군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선을 향해 가는 모든 인위적 행위의 표준인 예의를 만들고 주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성왕(聖王)이다. 현실 군주는 이 성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막중한 책임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최고의 준칙이 되어야 하는 만큼 군주의 지위와 역할은 높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군주인 성왕은 인륜의 극치이고 이상적 인격의 최고 형태이다. 성왕은 우선 인격적으로 완전하고 지혜가 출중해야 한다. 예의와 그것의 역사적 원칙인 통류(統類)7)를 꿰뚫고 있어야 하며, 철저히 규범을 준수하여 왕도(王道)를 실현해야 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적극적 행위를 통해 선을 쌓아가니 모든 인민의 가치 판단의 준거가 된다. 이러한 성인은 예의를 힘써 배우고 실천하여 역사에 관통하는 원칙을 깨달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즉, "길거리의 어떤 사람도 우(禹)임금처럼 성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자는 군주 정치라는 현실적 한계 때문에 기왕에 세(勢)를 얻어 군주가 된 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왕도엔 못 미치지만 믿음을 강조하며 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패도(覇道) 또한 긍정한다. 어떤 상태든지 인위적 노력만 기울일 수 있으면 예치사회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순자』의 상당 부분은 현명한 관료의 임용, 외재적 규범 확립, 복지 정책 등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ㆍ대안들을 다루고 있다. 3) 예치(禮治) 순자는 외재적 사회 규범을 통해 질서 있는 사회를 복원코자 하였다. 순자는 예의야말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질서를 구가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행 가능한 규범이며, 역사적으로 성왕의 나라에는 예의의 대원칙인 통류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ㆍ서를 통한 내부적 성인 공부, 즉 내성(內聖)의 길보다는 예의를 드높이는 외부적 왕도의 실천 즉 외왕(外王)의 길을 더 중시하였다. 순자는 역사적으로 관통하는 예의 원칙이 지금의 정치 권력에 반영되어 모든 인민들이 그로써 예의 구체적 행위를 유추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가치관의 표준이라고 생각했다. 순자는 도덕을 실천하는 현실 속의 군주를 후대의 성왕이란 뜻에서 후왕(後王)이라 불렀고, 예의가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원칙이라 보았다. 그도 공자처럼 주나라 도덕정치이념의 건설자인 주공(周公)을 따르고자 하였다. 주공의 치국 이념 속에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법칙이 선왕의 예법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순자는 예의에 통달하는 외부적 수양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의 「악론(樂論)」편을 보면 내성 공부의 중요한 일면으로 내적 심성을 도야시키는 역할 또한 중시하였다. 즉, 예의로 교화를 행하여 멋진 나라를 만들려면, 예를 통한 외부적 절제와 더불어 음악을 통한 내부적 덕성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백성들의 욕망을 적절히 만족시켜 줌과 동시에 신분에 따른 분수를 지키도록 알맞게 절제시키는 예와 악의 기능을 모두 중시했다. 교화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래서 순자가 주장한 예의치국의 핵심은 항상 다스리는 사람, 즉 치인(治人)에게 모아진다. 통치이념이나 법제(法制)의 존재 여부보다 어떤 사람이 그 원칙을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순자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천하를 주유했고 오래 살았으며 학문적 위상이 당대 최고였던 점을 감안하면, 순자의 제자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던 한비(韓非)와 이사(李斯) 외에도, 전국시대 말기에서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 초까지 유학을 이은 사람은 거의 순자의 문하생이거나 그의 제자의 제자들이 많았다. 특히 유가 경전에 대한 전승과 전파에서 순자 사상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한(漢)나라 때에 유학은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는데, 그 학문적 바탕인 경학은 대부분 순자의 학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시경』과 『춘추』, 『예기』는 순자의 제자 및 그 제자의 제자들에 의해 온전히 후대에 전승되었다. 순자 스스로도 "학문하는 방법은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를 읽는 데서 끝난다"고 할 정도로 경전을 중시했다. 『순자』 전체를 볼 때 『시경』 인용이 84문장, 『역경』 인용이 2곳, 『서경』 인용이 15항목에 이른다. 그 외에도 공자의 말과 격언 등을 인용하여 사회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는 점은 『춘추』의 비판적 글쓰기 방법을 그대로 이은 것이라 하겠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학이 사실상 경학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순자의 유학사에서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거의 모든 유가 경전의 전승이 순자와 크든 적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리학이 지배하는 송나라 이래 『순자』는 철저히 부정당하였다. 그러다가 서구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동아시아 사회를 이끌어 온 유교 그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되었다. 유학 스스로 현대 사회와 인류 전체를 향해 보다 적극적인 실천 대안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양 사회를 이끌어 온 선인들의 지혜는 몽땅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성리학적 고담준론으로만 유학을 이해하지 말고, 주자학의 극복을 통한 새로운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적극적 사회적 실천성과 건강한 삶의 성취라는 원시 유학 본래의 측면을 되살려야 한다. 현대적 시각에서 『순자』를 다시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순자는 예의라는 도덕의 틀을 통해 모든 사회 문제를 극복하려 하였다. 사람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의미하는 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순자는 예에 사회적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예는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삶과 사회의 핵심이 되었다. 공자가 유학을 보편 학문으로 승화시킨 유학 발전의 첫 번째 위업을 달성하였다면, 순자는 유학을 사회철학으로 구성해낸 유학 발전의 두 번째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법의 지배가 사회 정의의 척도가 된다. 제도보다 인간을 앞세운 것이 예이고, 사람보다 제도를 앞세우는 것이 법이다. 법을 만들고 지배하는 사람이 정치의 핵심이어야지 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정치여선 안 된다. 이를 긍정한다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순자의 예론(禮論)은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에서의 군주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덕이 있는 사람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하나는 군주라면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로 대표되는 전자의 입장은 정치적 혼란기에 도탄에 빠진 민중의 함성을 담고 있으며, 순자로 대표되는 후자의 입장은 정치적 안정기에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다. 『순자』를 읽으면 민주주의에 '갇힌' 우리의 편협한 사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것과 정치가에 대한 새로운 자기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순자』의 한계와 가능성 순자는 사람을 중시한 인문주의자였으나, 현실 군주를 인정한 상태에서 '예의'라는 절대적인 가치 기준만을 강조했다. 이는 자칫 절대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들에게 독재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가 혹독한 법치주의자가 된 것은 이런 권위주의적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외에 『순자』를 읽으면 악한 인성을 소유한 인간 세계에 어떻게 성인이 출현하게 되는지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등 일부 사상적 한계도 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과도하게 신분 등급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권리와 의무의 상호관계에 대한 제도적 구상을 하지 못한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알고 『순자』를 읽을 필요가 있으며, 배경을 버리고 보편적 사유를 끌어 내는 현대적 독해를 해야 한다. 성악설 때문에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들은 순자를 거의 매장하여 버렸다. 순자 성악설의 '성(性)'자는 맹자 성선설의 '성'자와 달리 정치적ㆍ사회적 존재로써 인간의 본성을 얘기하는 개념으로 기실 성리학자들의 정치 의식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니 순자 본인에겐 억울할 일이다. 고려시대 말엽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왕조 전체를 지배한 유학은 바로 이 성리학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순자는 금서였다. 그럼에도 성리학을 뛰어넘어 보려는 무수한 유학자들은 여전히 순자를 읽었으며, 거기서 많은 자극을 받은 듯하다. 예컨대 『순자』를 읽고 정약용의 글들을 읽으면 구절까지 유사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전통 사상의 비판적 계승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조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시도할 때 순자 사상은 대안적 사유로써 새로운 유학의 건립에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 지배자가 제멋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높은 수양ㆍ엄격성ㆍ도덕성ㆍ청렴성을 갖춘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에 미래 사회의 희망을 건다면, "공동체의 화해와 질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길러 내는 것이 법제도보다 중요하다"는 순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고, 굳이 정치와 윤리를 구별하여 학문적 정의를 내리는 서양식 사유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어떻게 이상적 인격체로서 성인이 출현할 수 있겠는가? 순자는 텅 비어 한결같으며 고요한 상태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 성인이 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성악설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악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본성은 본래 투박한데 욕망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부터 성인이 출현하고, 이 성인의 가르침 때문에 성악한 인간이 도덕적인 예치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2. 법치와 예치 가운데 어느 것이 사회문제 해결에 유용한가? 법치는 범죄를 공평하고 객관적인 법으로 강제하여 개인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벌금과 형벌로 이미 저지른 '죄의 결과'를 단죄하려는 것이다. 예치는 각종 인륜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교화를 실시하여 공동체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예의염치(禮義廉恥)에 충실하도록 철저히 가르쳐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 해결책인가. 추천할 만한 텍스트 『순자』, 순황 지음, 김학주 옮김, 을유문화사, 2001. 『순자』, 순황 지음, 장현근 옮김, 책세상, 2002. 각주 1) 양(倞)은 '경'이라고도 읽으나 당나라시대 음가는 '량'이다. 양량은 당나라 홍농(弘農) 사람으로 현존하는 『순자』의 최초 주석자이며 생몰 연대는 미상이다. 2)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순자의 주장이다. 성(性)의 실질은 정(情)이고 작용은 욕(欲)이며, 그 욕망이 만든 무질서의 결과가 악이라는 의미이다. 3) 왕선겸(1842~1917)은 호남성 장사(長沙) 사람으로 국자감(國子監) 좨주 등을 역임했으며, 신학문에 반대하고 유신파를 도살하기도 했으나, 1911년 혁명 후 낙향하여 고문헌의 주석 및 편집에 전념했다. 4) 만물을 낳는 것은 하늘이지만 그것을 성취시키는 것은 사람이라는 순자의 인문주의적 우주관ㆍ인생관이다. 5) 인위적인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질을 바꾸어 선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겠다는 사유를 말한다. 6) 한 쪽으로 치우치는 주관적 인식의 폐단을 해소한다는 순자의 지식 방법론이다. 7) 순자는 역사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원칙이 있고, 이 원칙에 입각해서 예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원칙만 이해하면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응책을 유추해 낼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현실 문제에 유추 적용할 수 있는 예의의 역사적 원칙이 곧 '통류'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자 [荀子] -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3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道學 - 정자 댓글:  조회:2143  추천:0  2019-11-20
철학사전 정자   [ 程子 ] 출생 - 사망 미상 ~ 미상 직업 철학자 분야 유교 국적 중국 시대 송나라 관련인물 주염계 중국 송나라의 정명도(程明道, 1032~1085)와 정이천(程伊川, 1033~1107) 두 형제를 말하며 이(二)정자라고도 한다. 모두 유교철학자. 주염계(周簾溪)에게서 배우고 '이'(理)를 최고의 범주로 삼아 도학(道學)을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그들은 하늘(天)을 이(理)라고 하여 달이 냇물에 그 모습이 비치듯이 천하 만물은 이 유일하고 절대인 이(理)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고, 천리(天理)가 일정한 목적 하에 우주의 질서를 세운다고 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부자ㆍ군신'도 '천하의 정리'(天下之定理)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하여 불교의 출세간(出世間)주의를 비판하고 현실의 봉건적 신분질서를 절대화 시켰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그 사상, 성격에 차이점이 있다. 명도는 천지의 움직임을 '역'(易)에 기초하여 '생생'(生生)이라고 보고, 만물(사물도 인간도 모두)은 모두 천지의 생의(生意)를 받은 '일체'라고 생각하였으며, 천지생생의 덕을 '인'(仁)이라고 하여 '만물 일체의 인'이란 관념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인(仁)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이 만물일체=물아(物我)일체로 되고, 범위를 확장시켜 종래엔 인(仁)과 병렬되어 있던 의ㆍ예ㆍ지ㆍ신(義ㆍ禮ㆍ智ㆍ信)도 모두 인(仁)으로 되어, 인(仁)은 덕(德)의 근본이고 의ㆍ예ㆍ지ㆍ신은 그 한정으로서 오상(五常)이 구조적으로 해석되어 왔으며, 이것은 주자학으로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인은 학자가 제1로 삼아야 할 것이며, 그 실현은 인의 규정에 따라서 천지 만물 만민의 생의를 직접 공감하는 체인(體認)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와 같이 명도의 사상은 직관, 체인을 특징으로 한 데 비하여, 아우인 이천은 분석적, 사변적 태도와 엄격한 도덕주의를 본령으로 하였다. 이천은 '역'(易)의 '일음일양'(一陰一陽) 즉 '도'(道)라는 명제에 대하여 음양은 기(氣)로 형이하학적인 것이고 도는 음양의 '이유'(所以)로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양자를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보았다. 윤리설에서는 '성즉리'(性卽理)의 명제를 세워 성선설을 천리로 삼아 절대화하고, 성을 천명(天命)의 성과 기질(氣質)의 성으로 나누고 또한 성과 정(情)을 구별하였다. 여기서 '천리'를 세우고 '인욕'(人欲)을 멸한다는 엄숙주의가 나오는 것이다. 이천은 '이'의 분석적 추구, '격물궁리'(格物窮理)를 강조함과 동시에 '경'(敬)을 통하여 마음을 수양하는 '거경'(居敬 ; 마음의 집중)이란 방법을 중시한다. 유일 절대한 '이'를 대상으로 하는 '궁리'는 실증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적이기 때문에 '거경'이 '궁리'의 정신적 태도로서 강조되었다. 주자(朱子)는 명도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이천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주자학의 골격을 세웠다. 주요저서 明道文集, 5권. 易傳, 4권(이천). 伊川文集. [네이버 지식백과] 정자 [程子] (철학사전)
2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성선설 - 맹자 댓글:  조회:2937  추천:0  2019-11-20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맹자   [ 孟子 , Mencius음성듣기 ] 맹자 출생 - 사망 BC 372년 추정 ~ BC 289년 추정 대표분야 유가철학 대표이론 성선설 대표학파 선진유학 대표저서 맹자 관련철학자 공자 목차 생애 해설 생애 연보 생애 해설 맹자는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났다. 공자나 맹자나 정확하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가능한 방법은 『논어』나 『맹자』에 실려 있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즉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이나, 목격했거나 관련되었던 사건들을 참고해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다.  공자는 대략 기원전 551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경에 죽었으며 맹자는 기원전 372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에 의해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로 분류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살았으며 맹자는 전국시대에 살았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까지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인 기원전 222년까지이다.  기원전 770년은 주(周) 왕실이 견융(犬戎)이라는 종족에게 쫓겨 수도를 동쪽인 낙양(洛陽)으로 옮긴 해이다. 그 전까지 중국은 주 왕실을 중심으로 많은 봉건국가들이 위성처럼 분립해 있었으며 이들은 혈연과 제사와 군사에 의해 주 왕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할 즈음을 전후해서 이러한 봉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는 패자(覇者)들의 시대였다. 패자는 주 왕실의 명목만은 존중하면서 실상은 무력으로 다른 제후들을 정복했고 그럼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 차례로 천하를 제패했던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은 5패로 불린다. 춘추시대만 해도 ― 제후국들은 실제적으로 독립한 나라였지만 ― 패자들은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주나라는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제후들도 더 이상 근왕의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 17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들은 동맹과 연맹의 결성, 외교적․군사적 전쟁을 통해 7개의 제후국으로 정리되었다. 즉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불리는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진(秦)이 이들이다. 이들은 천하를 제패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두고 약육강식의 전쟁을 전개했다.  공자는 주 왕실 중심의 봉건제를 이상적인 제도로 생각했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의 눈에서 보면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인륜이 무너져가는 윤리․정치적 혼란기였을 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철기와 우경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문화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국가차원에서 생산력을 높이려는 정책도 시도되었으며, 한편에서는 상인의 세력이 커져서 상인으로서 부에 의해 진의 재상까지 된 여불위(呂不韋) 같은 사람도 등장했다.  전국시대는 또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였다. 사회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에 관한 각종 사상이 태어났으며, 사상을 통제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중국사상사에서 가장 자유롭고 다채로운 논쟁이 전개된 시기였다. 법가, 도가, 농가, 종횡가, 명가, 음양가, 잡가 등을 표방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왕성한 사상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맹자는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학파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과 논쟁하면서 유학의 골격을 완성해갔다.  맹자孟子, 즉 맹선생의 성은 맹(孟)이며 이름은 가(軻)이다. 추(鄒)라는 지방 출신인데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거나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들에게 명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짜던 베를 잘랐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맹자는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당시의 정치적 분열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기원전 320년경에 양(梁)나라(하남성 개봉시)에 가서 혜왕에게 왕도에 대해 유세했으나, 일이 년 뒤에 혜(惠)왕이 죽은 뒤, 아들인 양(襄)에게 실망해서 산동에 있는 제(齊)나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제나라의 선(宣)왕에게 기대를 걸고 칠팔 년을 머물렀으나, 역시 자신의 이론이 채용되지 않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송(宋, 하남성 상구현), 설(薛, 산동성 등현 서남쪽)을 거쳐 일차로 추에 돌아온 뒤, 다시 문공(文公)의 초대를 받아 등(藤, 산동성 등현)으로 갔다. 역시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노魯(산동성 곡부현)를 거쳐 고향인 추로 돌아왔다. 당시의 제후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부국강병의 정치술이었다. 그러한 제후들의 현실적 관심과 맞아떨어질 여지가 없었던 맹자의 이론은 어느 제후에게도 채택되지 못했으며, 맹자는 당대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50세가 넘어서 시작했던 편력을 그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 되었을 때라고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그리고 공자의 정신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 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7편이다. 생애 연보 기원전 372년 : 중국 추鄒(산동성)에서 출생  기원전 320년 : 양梁나라에 가서 혜왕惠王을 만남  기원전 319년 : 혜왕 사망  기원전 318년 : 양왕襄王의 사람됨에 실망해서 양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감  기원전 315년 : 모친 사망, 노魯에서 장사 치름  기원전 312년 : 제나라를 떠남  기원전 311년 : 송宋에 체류. 송경을 만남.  기원전 307년 : 설薛을 거쳐 추鄒로 돌아감. 藤의 文公에게 초대 받음  기원전 305년 : 등나라에 1~2년 체류 후, 노魯를 거쳐 추도 돌아감. 이후 교육에 전념  기원전 289년 : 사망 관련자료 원문보기 맹자 『맹자』(해제) (PDF 파일) 관련이미지 37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맹자 초상화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맹자 [孟子, Mencius]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중국인물사전 맹가   [ 孟軻 , mèng kē ] 요약 유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교육가 이미지 크게보기 맹자 초상화 시대 전국시대 출생 - 사망 약 BC.372년 ~ 약 BC.289년 이칭 맹자(孟子) 관련 고사성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단기지훈(斷機之訓), 단기지교(斷機之敎) 목차 1.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2. 공자 문하의 적통을 잇다 3. 맹자의 시대적 배경 4. 정치적 이상주의 5. 맹자의 주요사상 1) 천인합일(天人合一) 2) 성선설(性善說) 3) 인륜(人倫)과 대장부(大丈夫) 6. 맹자의 공부법 1) 스스로 구하면 얻을 것이다 2) 꾸준히 한 마음으로 3) 다 차거든 나아가라 4) 거듭 생각하고 의심을 품어라 5) 이의역지(以意逆志) 6) 지인논세(知人論世) 7) 치밀하게 공부하되 요약할 수 있어야 7.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 8. 맹자 공부법의 뿌리인 맹모(孟母) 9. 관련 유적 1) 맹묘(孟廟) 2) 맹부(孟府) 3) 맹림(孟林) 10. 참고자료: 맹자를 읊은 역대 시 모음 1.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맹자는 이름이 가(軻), 자는 자여(子輿)이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지금의 산둥성 취푸) 부근인 추(鄒, 현 산둥성 추현 동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나라 희(姬)씨 성의 귀족공자(贵族公子) 경부(庆父)의 후예로 부친의 이름은 격(激)이고, 모친은 장씨(仉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맹자의 교육환경을 위하여 세 번씩이나 집을 옮겼었다. 저 유명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바로 그것이다. 또 맹자가 공부하는 기간을 채우지 않고 집으로 왔다고 해서 당신이 짜던 베를 끊어 경계했다는 ‘단기지훈’1)이란 유명한 고사를 통해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맹모삼천지교를 나타낸 청나라 때 그림 2. 공자 문하의 적통을 잇다 맹자 초상화 맹자가 난 곳은 공자의 탄생지인 노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취읍(현 산둥성 추현)과 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또 사숙2)하였다. 자라나면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즉 공급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유가학파의 분류상 ‘사맹 학파’로 불리며 공문(孔門)의 적통을 대표한다. 학설에 의하면 직접 자사에게서 배웠다고 하기도 하나 연대가 맞지 않는다. 맹자는 오경에 능통했으며, 『시경』과 『서경』(또는 『상서』)에 조예가 깊었다. 말년에 문인 만장, 공손추 등과 함께 책을 써서 자신의 설을 세우는 한편, 시, 서 등 유학을 강론하는 등 교육활동에도 종사했다. 그가 죽은 뒤 역대 왕조들이 잇따라 작위를 추증하여 그 위상을 높였는데, 송나라 때인 1083년에 추국공(鄒國公)에 봉해진 이래 1330년 원나라 때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1530년 명나라 때 ‘아성(亞聖)’, 1935년(민국 24)에 ‘아성봉사관(亞聖奉祀官)’ 등으로 봉해졌다. 『한서』 「예문지」에 『맹자』 11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7편만 남아 있는데, 제자들과 맹자의 언행록이 수록되어 있다. 3. 맹자의 시대적 배경 맹자 초상화 공자와 맹자의 시대적 차이는 몹시 컸다. 공자가 처했던 춘추시대는 비록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쇠퇴했고 또 춘추오패가 나타났으나, 그래도 존왕양이3)의 풍조가 남아 있었고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재건할 수 있는 희망이 적게나마 있었다. 그러나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국시대로서 주 왕실의 힘이 극도로 미약하여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도 망각할 정도에 이르렀고, 각기 제후들은 승부를 다투는 싸움을 벌여 약육강식의 난맥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폭력과 허망한 사설(邪說)이 횡행하여 천하는 극도로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은 도탄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며 갈 바를 몰랐다.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희미해져서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기자 공자께서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었다는 그 춘추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모습이었으니, 중국사 전체를 통해서도 일찍이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던 혼란시대였다. 이런 때에 맹자는 의연히 일어나 불타협의 굳은 신념으로 무력에 의한 패도를 버리고 하 · 은(상) · 주 3대의 전통인 인의왕도(仁義王道)의 덕치로 천하가 하나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여러 나라의 군주를 찾아 그들을 설득하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4. 정치적 이상주의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왕도정치에 의한 이상적인 세계의 건설을 주장하는 복고적 이상주의에 집착한 사상가였다. 맹자의 주장은 대부분이 당시의 실권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에 광분하고 있던 여러 군주에게 이(利)를 버리고 인의(仁義)를 찾으라고 했다. 불쌍한 것을 보고 못 견디는 마음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하여 왕도덕치의 근원이 임금의 덕심(德心)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이렇게 천하의 온갖 책임을 위정자 한 사람의 덕에 돌리면서도 맹자는 임금의 존재를 형편없이 격하시켰다. 즉,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라고 했다. 또 “임금은 백성과 같이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민권(民權)을 더없이 높였고 민본사상(民本思想)을 최대한으로 고취했다. 맹자는 패도정치(覇道政治)는 악덕할 뿐만 아니라 오래 가지도 못하고, 또 천하를 통일하고 참다운 왕자(王者)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보다는 백성을 사랑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으면 온 천하가 저절로 귀순심복(歸順心腹)할 것이며, 그 때에야 스스로 천하를 덕으로 다스리는 참다운 왕좌에 오를 것이요, 그것이 바르고 영원한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무력을 배제하고 덕치를 주장한 맹자는 당연히 보민양생(保民養生), 즉 민생을 중하게 강조했다. 맹자의 민생주의는 바로 맹자의 경제사상의 일환이기도 했다. 맹자는 농업생산을 진작하여 백성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안락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안정, 민생안정이 정치의 바탕이라는 생각은 오늘에 와서는 당연하지만 당시의 제후들에게는 일대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맹자의 민생안정은 제후들의 포악을 막고 반대로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장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맹자는 민생안정을 국민복리 면에서도 강조했다. “양잠을 장려하여 비단을 증산하고 가축을 증산하여 노인들에게 따뜻한 비단옷을 입히고 든든하게 고기를 먹이라”고 강조했다. 또 백성을 안락하게 살게 해주고 나아가서 백성을 교육하여 높은 경지에 이끌어 올려야 한다고 했다. 맹자의 정치사상은 필연적으로 교육사상과 연결된다. 그는 말했다. “정성껏 학교 교육을 시행하고 더 나아가 효제인의를 넓히면 노인들이 길가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일흔 살의 노인들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그런 상태로 다스린다면 바로 왕도의 임금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훗날 유가가 독존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그는 공자 다음가는 성인이란 뜻으로 ‘아성(亞聖)’으로 추앙되었지만, 당시 정치판으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러나 맹자의 이러한 티없는 선의에서 우러난 사상과 그것을 토대로 하여 설정된 여러 가지 방책은 정치제도, 사회정세, 경제정책, 문교시책, 생활태도, 학술문화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선명하게 반영되었고 폭넓게 논의되었다. 특히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민본사상은 아주 귀중한 주장으로 정치사상의 질을 높였다. 그는 공자와 더불어 ‘공맹(孔孟)’으로 불리기도 하고, 성선설에 입각하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기도 했는데, 순자의 ‘성악설(性惡說)’과 함께 중국 철학사의 중요한 쟁점을 제공했다. 5. 맹자의 주요사상 1) 천인합일(天人合一) 맹자에게 있어 하늘은 천리(天理)이자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며 또한 우주의 주재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뜻, 즉 천의(天意)의 발동자였다. 따라서 사람은 본성 속에 하늘을 지각하고 따르는 속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즉 맹자는 말했다. “영명한 본심을 극진하게 계발하면 본성을 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늘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영명한 본심을 잘 간직하고 본성을 잘 배양하면 천도를 따라 섬길 수가 있다.” 결국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과 일치 즉, 천인합일하게 마련이며, 동시에 하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자이므로 천명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 사람이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다듬고 자기에게 주어진 명수를 잘 받아,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2) 성선설(性善說) 공자의 도는 맹자에 이르러서 더욱 선양되고 빛났다. 맹자는 도의 근원을 요 · 순으로부터 시작하여 우 · 탕 · 문무(문왕(文王)과 무왕(武王)) · 주공(周公) 그리고 공자를 거쳐서 자신에 이르기까지 도의 정통을 세움으로써 유교의 체계를 확립시켰다. 사람의 본성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그 본성 속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차마 보아 넘길 수 없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인 인(仁)을 비롯해서, 옳지 않은 것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인 의(義), 어른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인 예(禮), 선악을 식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인 지(智) 등 사단(四端)이 존재하며, 인간의 이 본성은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성은 본선(本善)이라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잘못하여 우물로 빠져 들어가려는 광경을 발견했을 때 경악과 측은한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것을 금치 못하는 것은 사람의 공통적인 것이라는 것을 들어 성선설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선한 본성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맹자는 선한 본성의 발단과 적극적인 확충, 선의 본성을 잃는 일을 막자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논하고, 인간만사를 선한 본성에 따라서 처리할 것을 권했다. 사람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다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확충해 나가게 되면 성인에 못지않은 경지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지만, 만약에 그것을 잃어버리면 본래부터 선한 본성이라고는 없었던 것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타락해 버린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이 선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발전을 지향하도록 줄기차게 고무해 주는 힘이 있다. 3) 인륜(人倫)과 대장부(大丈夫) 맹자의 인생관이나 윤리관은 한 마디로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에 서 있다. 맹자는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천지에 죄 될 일이나 부끄러운 일을 안 한 것, 천하의 수재들을 모아 교육하는 것이다. 그 중에 임금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끼지 못한다.” 맹자는 가장 높은 작위를 천작(天爵)이라 했고, 인간 정치사회에서의 작록(爵祿)을 인작(人爵)이라 하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정치보다도 도를 더 존중했기 때문에 맹자는 인생의 가치를 “인을 이루고 의를 따르는” 데 두었으며, “의를 살리고 목숨을 버리라”고 했다. 나의 생명보다도 인의(仁義)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인의가 우주의 대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맹자는 대도의 윤리와 덕목을 지키는 사람을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대장부’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인(仁), 즉 천하의 넓은 집에 몸을 두고, 의(義) 즉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대도(大道)를 간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인의의 대도를 구현하고, 뜻을 못 얻으면 자기 하나만이라도 대도를 간다. 부귀에도 타락하지 않고, 빈천에도 절개를 바꾸지 않으며, 어떤 권세 앞에도 굴복하지 않으니 그런 사람이 바로 대장부이니라.” 이러한 대장부는 지대지강(至大至剛, 더없이 크고 굳셈)하고 천지에 대통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호연지기를 키우는 바탕은 바로 존심양성4)이다. 한편, 맹자는 자기향상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격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자기향상의 목표를 요 · 순 같은 성인에 둘 것을 말했다. 그리고 대장부로 큰 뜻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치는 굳센 신념이 있어야 함을 말했다. 6. 맹자의 공부법 맹자의 공부법은 공자의 공부법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계통적이다. 먼저 독서와 관련하여 맹자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독서 과정에서의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작용을 중시하여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믿는다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진심(盡心)」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공부는 자연스럽게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해나가야지 서두르거나 요령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동시에 굳센 의지와 항상심을 가지고 꾸준히 한 마음으로 해야지 용두사미식의 공부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맹자의 공부법을 몇 개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1) 스스로 구하면 얻을 것이다 맹자는 독서나 공부는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말한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 구하면 얻는데 유리하고, 구하면 내게 존재하게 된다”(「진심」상). 이 공부법을 간단하게 줄여 ‘자구자득(自求自得)’이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와 관련하여 또 이렇게 말한다. “무릇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려우리오! 사람이 구하지 않는 것이 병이니 그대가 돌아가 구하면 배울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고자(告子)」하). 맹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가 깊이 나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얻으면 삶이 편안하고, 삶이 편안하면 자질이 깊어지고, 자질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그 근원을 만나기 때문에 군자는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이다.”(「이루(離婁)」하). 이 대목을 공부나 교육과 연관 지어 보면 이렇다. 스승이 학생들을 보다 깊이 있는 공부로 이끄는 방법은 학생의 내적 동기를 계발하고 유도함으로써 스스로 구하여 얻게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지적 욕구에 기대어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얻게 하는 것이다. 2) 꾸준히 한 마음으로 “학문의 길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다. 그 놓인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고자」상). 이런 저런 잡념과 딴 마음으로 독서하는 태도를 맹자는 단호히 배격했다. 맹자는 천하에 바둑을 잘 두기로 이름난 혁추(奕秋)가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사람과 사냥 따위에 마음이 팔려 있는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냐며 “마음을 오로지 하고 뜻을 극진히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자」상)고 강조한다. 공부에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총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마음으로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머리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맹자는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를 우물을 파는 일에 비유하며 “뭔가를 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파고도 물이 안 나온다고 우물을 버리는 것이다”(「진심」상)라고 하여 공부나 독서를 견지하지 못하면 끝내는 헛공부가 된다고 지적했다. 독서나 공부는 축적이 핵심이다. 축적되지 않는 공부는 헛공부다. 쌓이는 과정 그 자체가 한 인간의 성숙도를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가 한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하라고 한 것은 공부와 독서의 핵심과 그 효과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3) 다 차거든 나아가라 인간이 성장단계를 건너 뛸 수 없듯이 공부에도 단계가 있다. 지력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공부의 질과 양은 달라지지만 그 지력과 관심에는 단계가 있다. 쉽게 말해 성장과정과 각자의 특성에 맞는 공부와 독서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흐르는 물이 웅덩이에 차지 않으면 흐르지 못한다. 군자가 도에 뜻을 두어도 글을 이루지 못하면 통달할 수 없다”(「진심」하). 물은 밤낮없이 흘러 웅덩이를 채워야만 계속 흘러 바다에까지 이를 수 있다. 맹자는 물을 공부에 비유하여 점점 축적되는 지식, 순서에 따라 꾸준히 나아가는 공부법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이 공부법은 앞에서 꾸준히 한 마음으로 공부하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꾸준히 한 마음’이 큰 테두리에서 공부의 태도와 자세를 말한 것이라면, 이 방법은 좀 더 구체적이다. 그 같은 자세를 견지하면서 순서를 밟아 단계적으로 공부하면 지식은 축적되고 지혜는 깊어져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거듭 생각하고 의심을 품어라 맹자는 오로지 마음이란 기관에 의지한 사유야말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듣고 보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듣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우선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귀와 눈은 생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물에 가려진다. 그래서 눈과 귀는 사물과 접촉하면 거기에 끌려 갈 뿐이다. 마음은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고자」상). 이 말은 실제 인식을 감성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라는 요구다. 따라서 반드시 사유를 거쳐 사물의 진실된 내면, 즉 본질을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맹자는 또 독서하면 의문이 생긴다고 주장하면서 앞서 말한 대로 “책을 다 믿느니 책이 없는 것이 낫다”(「진심」상)라고까지 말한다. 어떤 공부가 되었건 의문을 품을 줄 모르는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다. 독서나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과 관심이며, 그 호기심과 관심의 이면에는 강한 의문이 함께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이의역지(以意逆志) 맹자의 공부법에서는 작품, 특히 시를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언급이 눈에 띤다. “시를 말하는 사람이 글로 말을 해치지 않고, 말로 뜻을 해치지 않아서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것을 시를 안다고 할 것이다”(「만장(萬章)」상). 이 중에서도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이의역지란 대목에 대해서는 역대로 논란이 적지 않았는데, 대체로 두 가지 해석이 유력하다. 하나는 청나라 때 학자들의 해석으로 ‘옛사람의 뜻으로 옛사람의 뜻을 찾는 것’으로, 말하자면 ‘시로 시를 논하는 것’이다. 작품 자체를 분석하여 작가의 사상을 유추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한나라 이래 다수의 해석이다. 이 해석들에 따르면 ‘이의역지’에서 ‘의(意)’자를 독자의 사상 · 지식 · 경험 등으로 해석한다. 즉 작품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 작가의 뜻을 이해하거나 유추한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의역지’ 공부법은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우선 작가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다른 작품들을 참조하여 그것들을 근거로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을 끌어낼 수 있다. 또 이와는 달리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지식이나 주관에 근거하여 작품의 경향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나 작품과 작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절충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6) 지인논세(知人論世)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다’는 ‘지인논세’는 그 방법과 의미가 확대되면 독서나 공부의 최고 경지가 된다. 맹자는 이를 우선 책의 작가와 그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맹자는 작품과 작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인논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 사람들의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옳은가? 그러므로 (그 다음으로는) 그 세상을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로 올라가서 옛 사람을 벗하는 것이다”(「만장」하) 진정으로 그 작품을 이해하려면 작가의 경력과 사상 심지어는 감정과 인격까지 파악해야 한다. 또 그 사람의 객관적 조건, 이를 테면 그가 처했던 시대적 환경 따위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좁게는 한 작가와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이지만, 이 공부법이 확대되고 깊어지면 말 그대로 세상 모든 부류의 사람과 세상을 알고 논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7) 치밀하게 공부하되 요약할 수 있어야 모든 공부는 지나온 과정을 종합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로 요약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진짜 독서고 제대로 된 공부다. 명인들이 하나같이 제기하는 공부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맹자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넓게 배우고 상세히 해설하는 것은 되돌아가 요약하려는 것이다”(「이루」하) 맹자가 말하는 ‘상세히 해설’은 읽고 공부한 것에 대한 정교하고 세밀한 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자세히 해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요약’은 공부한 내용에 대한 간명한 개괄을 말한다. 공부는 먼저 넓고 치밀해야 하며, 그런 다음 이를 기초로 귀납하고 개괄하여 명확하게 공부한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이상 살펴본 맹자 공부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공부법이 대단히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로부터 작품과 작가를 이해하는 방법,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자신의 주관으로 요약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구체적인 방법론들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의 공부법은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단계적이기도 하다. 7.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 맹자의 어머니가 베틀을 끊고 아들에게 자극을 주었다는 기념비 맹자는 ‘마음을 다한다’는 뜻의 「진심」(상)이란 장에서 “부모형제가 모두 아무 일 없이 살아 있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천하의 재능 있는 인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며 세 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소위 ‘군자삼락(君子三樂)’이란 것이다. 인재를 교육시키는 것을 낙으로 알았던 맹자이기에 공부에서도 대단히 적극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맹자 자신이 “구하는 데는 방법이 있고, 얻는 데는 명이 있다”(「진심」상)고 했듯이 공부에도 나름대로의 규칙과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규칙에 근거하여 정확한 공부법을 잡아야 한다는 정신이다. 또 하나는 자신이 공부하는 과정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즉, 공부의 규칙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수시로 자신의 학습 행위를 그 규칙에 맞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평생을 공부해도 제대로 된 방법과 길을 모른 채 헤매다 평범한 독서인으로 남게 된다. 8. 맹자 공부법의 뿌리인 맹모(孟母) 공부에 관한 맹자의 기본 정신은 대단히 엄격하다. 이는 맹자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으며 특히, 그 어머니의 교육법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맹자의 어머니는 너무나 잘 알다시피 자식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씩이나 한 어머니이지 않은가. 맹모의 극성은 삼천지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결단(決斷)’이란 단어가 있다. 무엇인가 확고한 결정을 내리거나 굳은 결심을 할 때 ‘결단을 내린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단어의 근원지를 추적해보면 공교롭게도 맹모와 만나게 된다. 학업에 힘쓰던 맹자가 한번은 공부하다말고 밖에 나가 논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맹모는 아들을 불러다 놓고 맹자가 보는 앞에서 한동안 열심히 짜놓은 베를 칼로 서슴없이 잘라버렸다. 맹자는 깜짝 놀라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맹모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아들 맹자를 가르쳤다. “베는 실 한 올 한 올이 연결되어야 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로 한 방울 한 방울 쌓여야만 한다. 네가 공부하다말고 나가 놀았다는 것은 잘려나간 이 베와 마찬가지로 쓸모없어진다는 것과 같으니라!” 이 일화에서 이른바 ‘베틀을 끊어 가르친다’는 ‘단기지교(斷機之敎)’ 또는 ‘단직교자(斷織敎子)’의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또 여기서 ‘결단’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맹자의 고향 마을 9. 관련 유적 맹자 관련 유적은 고향 추현에 그의 무덤과 사당을 비롯하여, 그 어머니의 무덤인 맹모림(孟母林)과 ‘맹모삼천지교’와 관련된 유지 등이 남아 있다. 1) 맹묘(孟廟) ‘아성묘(亞聖廟)’라고도 부르는 맹자의 사당 맹묘는 쩌우청시 남관에 위치한다. 역대로 맹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다. 맹묘의 역사는 북송 인종 경우(景祐) 4년인 1037년에 공자의 45대손인 공도보가 연주지주(延州知州)로 있으면서 사기산(四基山)에서 맹자의 무덤을 방문하고 무덤 옆에다 사당을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에서 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참배 및 제사가 불편해서 휘종 선화(宣和) 3년인 1121년에 지금 장소에 사당을 옮겨지었다. 북송 신종 원풍(元豊) 연간에는 맹자를 추국공(鄒國公)으로 봉했으며, 원나라 때 다시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에 봉해졌다. 그 후로도 계속 맹묘를 확장하고 수리했고, 명나라 때 지금과 같은 규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맹자의 사당인 맹묘에 모셔진 맹자상 사당은 전체적으로 장방형이며, 모두 다섯 구역에 64칸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1만 2,000여 평에 이른다. 기록에 따르면 역대로 중수한 횟수만 38차가 넘는다. 현존 건축물들은 청 강희(康熙) 연간에 지진으로 기울어진 다음 다시 중건한 것이다. 아성전(亞聖殿)이 남북 중축선상에 자리잡은 사당 내의 주체건물인데, 7칸에 높이 17미터, 길이 27.7미터 깊이 20.48미터이다. 중층에 녹색 유리기와를 얹었다. 처마 밑으로 팔각기둥이 26개가 있는데 기둥 전체에 용과 봉황 그리고 꽃을 조각했다. 중축선 양 옆으로 침전(寢殿) · 계성전(啓聖殿) · 맹모전(孟母殿) · 치엄당(致嚴堂) · 도주사 · 동서무(東西廡) · 제기고(祭器庫) · 성생소 · 강희 및 건륭(乾隆) 어비정(御碑亭) 등이 늘어서 있다. 사당 내 비갈5)이나 석각만 350기가 넘는다. 그 중 이름난 것으로는 원나라 때 다시 만든 진(秦)나라 이사가 소전체6)로 쓴 ‘역산각석(嶧山刻石)’을 비롯하여 서진시대 유보(한 순제)의 묘표, 당나라 구양순의 ‘소옥화묘지명(蘇玉華墓志銘)’ 등이며, 이밖에 청나라 때 세운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 비석이 있다. 사당 안은 고목이 우거져 하늘을 가릴 정도인데 회나무가 많고 간간히 홰나무 · 은행나무 · 등나무 등이 눈에 띈다. 명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 동기창은 라는 시에서 맹묘의 나무를 언급하고 있다. “지언문 밖에는 홰나무 안에서 나무가 자라나 홰나무를 감싼 기이한 측백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측백나무가 홰나무를 끌어안았다’고 말한다. 수백 년 풍상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짙은 잎사귀가 자라고 있는 참으로 기이한 나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맹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2) 맹부(孟府) 쩌우청시 남관에 위치한 맹자 후손들의 고택인 맹부는 처음 세워진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동쪽으로 맹묘와 이웃하고 있으며, 맹묘를 북송 선화 3년인 1121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맹부도 그 무렵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 다시 지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원나라 문종 지순(至順) 2년인 1331년 맹자를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에 봉하면서 맹부도 아성부(亞聖府)로 불리기 시작했고, 명나라 때 오면서 상당한 규모를 갖추었다. 맹부의 앞쪽은 관아이고 뒤쪽은 주택이다. 현재 건축은 모두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남북 길이 226미터, 동서 폭 99미터에 전당과 문 그리고 회랑이 모두 116칸이다. 대문은 검은 옻칠을 했고 양 옆에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사자가 웅크리고 있다. 문 안쪽 동서 회랑은 맹부를 지키는 수위와 심부름꾼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두 번째 문을 들어서면 정중앙에 대당(大堂)이 있는데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문무관원을 접대하며 친족과 가족의 법규 따위를 논의하는 곳이다. 당 안에는 조정에서 하사한 각종 패와 깃발이 진열되어 있다. 당 앞 동남쪽에는 해시계가, 서남쪽에는 됫박이 설치되어 있다. 동서 회랑은 맹부를 관리하는 여러 관리들의 사무실이다. 대당 뒤에는 맹자의 후손들이 거처하는 내택(內宅)과 사서루(賜書樓)가 있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3) 맹림(孟林) 맹림은 쩌우청시 동북 사기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맹자의 무덤이다. ‘신건맹자묘기(新建孟子墓記)’라 쓴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북송 경우 4년인 1037년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맹자 무덤이 발견되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 선화 연간에 현성(縣城) 남관으로 사당이 옮겨졌다. 원풍 7년인 1084년 조정에서 30만 전을 내려 무덤과 사당을 정비하게 하고 제사를 위한 땅을 사는 한편 측백과 홰나무를 고루 심었다. 청 강희제 때 이르면 제사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한 땅이 약 2만 평으로 늘었다. 맹림 내에는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울창하며 작은 시내가 남북을 관통하고 흐른다. 신도에서 무덤에 이르는 길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돌로 바닥을 깔아 향전(享殿) 대문 앞까지 통하게 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향전은 5칸이고 전 뒤에 맹자의 무덤이 있다. 무덤 서쪽 300미터 지점에 옛 무덤 3기가 있는데, 맹손(孟孫) · 계손(季孫) · 숙손(叔孫)7)의 무덤으로 본다. 맹자의 무덤인 맹림 맹자 연구서인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 10. 참고자료: 맹자를 읊은 역대 시 모음 맹모송(孟母頌) - 한(漢) 유향 孟子之母, 敎化別分. 맹자의 모친은 교화에 분별이 있었네. 處子擇業, 使從大倫. 자식이 업(業)을 택함에 있어 대륜(大倫)을 따르게 했다네. 子學不近, 斷機示焉. 자식의 학업이 비근(卑近, 알기 쉬움)할 때에 베를 잘라 가르쳤네. 子遂成德, 爲當世冠. 자식이 마침내 덕을 완성하자, 당세에 세상에서 으뜸으로 삼았네. 맹자(孟子) - 송 왕안석 沉魄浮魂不可招, 가라앉은 백(魄)과 떠있는 혼(魂)은 불러들일 수 없고, 遺編一讀想風標. 유편(遺編, 맹자) 한번 읽고 그 풍도와 본보기가 그리웠네. 何妨擧事嫌迂闊, 거사(擧事)에 있어 오활(迂闊, 멍청함)함을 싫어함이 무슨 상관이오? 故有斯人慰寂廖. 이 사람 덕분에 무료함을 위안할 수 있네. 제맹자(題孟子) - 금 조정 戰國縱橫際, 전국(戰國)이 종횡(縱橫)할 때에 姬周喪亂余. 희씨의 주나라가 난리로 어수선해졌네. 聖經渾掃地, 성인의 경전으로 혼연히 땅을 쓸었고, 爲著七編書. 7편의 책을 저술했다네. 삼천교자(三遷敎子) - 명 유준(劉浚) 孟氏三遷宅已荒, 맹씨 삼천(三遷)의 집은 이미 황폐되고, 至今猶說斷機堂. 지금은 오직 단기당(斷機堂)의 말만 전해지네. 絲成交匹勤方得. 실이 필(匹)이 되는 것은 부지런히 해야 비로소 가능하고, 身入芝蘭久自香. 몸은 지초과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 같이 오래도록 향기가 나네. 俎豆容儀非賈衒, 사고 팖에 있어 제수를 올리고 용모를 갖추었으니 經綸事業豈尋常. 경륜과 사업이 어찌 보통이겠는가. 母賢子聖誰能似, 어머니는 어질고 자식은 성스러우니 누가 그에 견주리오 故里千秋尙有光. 고향에는 아직까지 천추의 빛이 남아있네. 알맹자묘(謁孟子廟) - 청 고염무 古殿移邾邑, 고전(古殿)은 주읍(邾邑)으로 옮겨지고 高山近孔林. 높은 산은 공림(孔林)에 가깝다네. 遊從齊梁老, 제와 양나라에서 늙을 때까지 유세하면서 功續禹周深. 공적은 우왕과 주공보다 깊었다네. 孝弟先王業, 효제(孝弟)로서 선왕의 유업을 잇고, 耕桑海內心. 농사로써 나라 안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렸다네. 期應過七百, 나라의 주기가 7백년을 넘고 보니 運豈厄當今. 천운은 지금 액운이 되었다네. 辯說千秋奉, 변설(辯說, 아름다운 말)은 오랜 세월 신봉되고 精靈故國歆. 정령은 옛 나라에서 흠향(歆饗)을 받네. 四基岡上柏, 사기산(四基山) 언덕 위에 측백나무 凝望轉森森. 눈여겨보니 삼삼하게 펄럭이네. 아성맹자묘(亞聖孟子廟) - 청 애신각라(愛新覺羅) 홍력(弘歷) 戰國春秋, 又異其世. 전국춘추 또 그 세상은 기이하네. 陷溺人心, 豈惟功利. 인심을 함닉(陷溺)시키고, 어찌 공리만 찾았나. 時君爭雄, 處士橫議. 그때에 임금들은 자웅을 다투고, 처사(處士)는 멋대로 지껄였다네. 爲我兼愛, 簧鼓樹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로 생황 불고 북치는(망령된) 기치를 심었네. 魯連高風8), 陳仲廉士9). 노중련은 고풍을 불렀고, 진중자는 청렴한 선비처럼 행동했다네. 所謂英賢, 不過若是. 이른바 영재와 현인이 이와 같을 따름이었네. 于此有人, 入孝出弟. 이곳에 한 사람이 있어 집에선 효도하고 나가선 어른을 공경했다네. 一發千鈞, 道脈永系. 한 올의 실에 천근의 무게를 매달고, 도맥(道脈)을 오래 이었다네. 能不動心, 知言養氣. 부동심(不動心)에 능하고, 지언과 양기를 설파했네. 治世之略, 堯舜仁義. 치세의 책략과 요순의 인의로 愛君澤民, 惓惓余意.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주고, 내 뜻을 간곡히 하였네. 欲入孔門, 非孟何自? 공문에 들어가려면 맹자가 아니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리. 孟丁其難, 顔丁其易. 맹씨(孟氏)처럼 하기 어렵고, 안씨(顔氏)처럼 하기 쉽네. 語墨故殊, 道無二致. 묵자(墨子)와는 다르다고 하나 두 길이 아니네. 卓哉亞聖, 功在天地. 우뚝하도다! 아성(亞聖), 공은 천지에 있다네. 알맹자묘(謁孟子墓) - 청 심덕잠 夢寐懷鄒邑, 자나 깨나 추읍(鄒邑)을 그리다가 今來亞聖堂. 오늘에야 아성당(亞聖堂)에 왔다네. 斯文天不喪, 하늘도 사문(斯文)을 버리지 않아서 吾道日重光. 우리의 도가 날로 거듭 빛을 발하네. 古木森松檜, 고목 삼나무과 노송나무 사이에 豊碑峙漢唐. 한(漢)과 당나라 비석이 우뚝 서있네. 薪傳應有俟, 섶나무가 불을 전하듯 기다리고 있듯이, 誰復數筍揚? 누가 다시 영명을 드날리나? 당시적구(唐詩摘句) 無國要孟子, 맹자를 원하는 나라가 없고, 有人毁仲尼. 어떤 이는 중니(공자)를 헐뜯네. - 두목  孟母遷鄰罷, 맹자의 어머니는 이웃을 가려 옮겼고, 將軍辭第切10). 장군은 처음부터 저택을 사양했네. - 이교(李嶠) 韋生堪繼相, 위생(韋生)은 후손을 이어가길 감내했고, 孟子願依隣. 맹자는 이웃과 의지해 살기 원했네. - 맹교  참고문헌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맹자(孟子)』 『현자들의 평생 공부법』, 김영수, 역사의 아침, 2011. 『백양 중국사』, 백양, 김영수역, 역사의 아침, 2014. 관련이미지 2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맹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맹가 [孟軻, mèng kē] (중국인물사전)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맹모삼천지교가 만든 성인, 맹자     목차 사람은 본래 착하다 부동심과 호연지기 왕도정치와 정전제도 초상화가 제거되다 맹자1)는 산둥성 추현 지방 출생으로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 또는 자거(子車)다.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는데, 조숙했던 공자와는 달리 말썽꾸러기였다. 모방하려는 기질이 강하여 주변 지역의 풍습을 곧잘 흉내 냈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세 번 이사를 다니며 가르쳤다고 하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유명하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기원전 289 " data-font-image="false" data-seq="2" data-title="" desc="맹자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겼다는 일화가 담긴 삽화다. 어머니의 노력대로 맹자는 유명한 사상가로 커갔다. 중국의 화가 송인회(宋人繪)의 작품이다." hastitle="N" height="227" source="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164_000_1/20151202174840317_VEGX9UCHG.jpg/ab87_13_i3.jpg?type=m4500_4500_fst_n&wm=Y" style="border: 0px; vertical-align: top; max-width: 690px; 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width="617" /> 맹자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겼다는 일화가 담긴 삽화다. 어머니의 노력대로 맹자는 유명한 사상가로 커갔다. 중국의 화가 송인회(宋人繪)의 작품이다.     이와 관련하여 《열녀전》에 나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맹자가 어렸을 때, 그 집은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다. 그가 노는 모양을 보니, 무덤을 만들고 발로 달공2)하는 흉내를 냈으므로 맹자 어머니는 “이곳은 아이를 기를 만한 데가 못 된다.” 하고는 이제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물건을 파는 장사꾼의 흉내를 자꾸 내서, 이에 맹모는 “이곳도 아이를 교육할 만한 곳이 못 된다.” 하며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여기에서는 놀이를 하되, 제기를 차려놓고 어른에게 인사하고 겸손하며 양보하는 예를 다하는지라, 이때에야 비로소 맹모는 마음을 놓고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자식을 가르칠 만한 곳이구나.” 하며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맹자의 어머니가 모성 교육의 사표(師表)로서 후세에 길이 빛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 시대나 맹자가 생존했던 전국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부를 만큼 많은 사상가들이 나왔는데, 가령 유가 외에도 도가 · 묵가 · 법가 · 병가 등이 있었으며, 또한 황당무계하고 대담한 학설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잡다한 학설에 대항하여 유가의 이름을 크게 떨친 인물이 바로 맹자였다.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맹자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더 있다. 맹자가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가 이웃집의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돼지는 왜 잡습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무심코 대답했다. “너를 먹이려고 그런단다.” 하지만 곧 맹모는 자신의 말에 크게 후회했다. “내 듣건대 예전에는 태교(胎敎)도 있었다는데, 이 아이가 무엇을 알려고 묻거늘 내가 만일 거짓말을 한다면, 이것은 불신을 가르치는 결과가 된다.” 이런 생각에 맹모는 결국 그 돼지고기를 사다 먹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맹자는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몇 년 후에 선생님이 그를 불러서 말했다. “너는 내게서 배울 것을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 여기에 나올 필요가 없다.” 《맹자》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것으로 후세의 편찬물이며, 내용은 맹자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맹자는 노나라의 수도인 취푸(曲阜)로 가게 되었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3)의 문하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맹자는 공자가 태어난 곳에서 겨우 6리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를 흠모했고 그와 같은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얼마 후 맹자는 말 타기를 배우다가 넘어져 팔을 다쳤는데, 마침 어머니와 헤어진 지도 오래되고 하여 고향으로 갔다. 그때 길쌈을 하던 맹모가 물었다. “너의 공부가 얼마나 성취되었느냐?” 이에 맹자가 대답했다. “별로 나아진 바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맹모는 칼을 들어 길쌈하던 것을 끊으며 말했다. “네가 공부를 하다가 중단하는 것은 마치 내가 이 칼로 여태까지 애써서 짜던 이 길쌈을 끊는 것과 같다.” 맹자는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쉴 줄을 몰랐다. 이것을 맹모의 단기지교(斷機之敎)라고 한다. 증자(曾子), 기원전 504~기원전 436 그는 공자의 손자이기도 하고 또 증자4)의 제자이기도 한 자사의 문하에서 정통적인 유학을 배웠고, 수많은 제자들과 더불어 여러 나라를 주유(周遊)하며 유가의 이상을 달성하고자 했다. 마흔 살을 전후로 추(鄒)나라의 벼슬길에 올랐으나, 혼란한 세태에 실망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그가 수백 명의 제자와 함께 수십 대의 수레를 이끌고 이동할 때는 일대장관을 이뤘으며, 용기가 넘치고 기질이 강했던 그는 여러 왕들에게 이상정치를 실시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기도 했다. 여든네 살까지 제자들과 함께 공부했고, 자신의 이상을 전하기 위해 《맹자》를 일곱 편까지 썼다. 철학논술 Q. 오늘날 서울의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에서 불고 있는 학원 과외 열풍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녀 교육에 대한 어머니들의 순수한 열정이라는 긍정적 측면에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내 자녀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행태로 봐야 하는가? 사람은 본래 착하다 사람의 천성은 선할까, 악할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이고, 다른 하나는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천성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듯이, 오직 선한 것만을 따른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되며, 현자의 모범적인 삶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착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모든 잘못이나 죄는 밖에서 사람을 옭아매는 사회제도가 불완전한 데서,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의 잘못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의 예를 든다. “인간은 누구나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가령 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갑자기 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누구나 깜짝 놀라서 건지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잘 사귀어보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며, 그 아이의 지르는 소리가 듣기 거북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니···.” 이러한 맥락에서, 맹자는 인간에게 다음 네 가지의 ‘착함의 처음’이 있다고 말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시작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로움의 시작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시작이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시작이라.”5) 이를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누구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어질다고 하는 증거다. 둘째, 누구나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의롭다고 하는 증거다. 셋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예의바르다고 하는 증거다. 그리고 넷째, 누구나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지혜롭다고 하는 증거다. 그러므로 모두 이처럼 타고난 본성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착해질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착한 인간의 마음일지라도 불의 불씨나 물의 샘 줄기와 같아서 그것을 바르게 잘 이끌면 요원(燎原)의 불길이나 큰 강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꺼지거나 말라버리기 쉽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든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인간의 선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는 과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부동심과 호연지기 수양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맹자는 우리가 착한 본성의 씨앗을 잘 보존하고 널리 키워나가는 방법으로, 존심양성(存心養性)6)의 수양법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밖에서부터 찾아오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부동심(不動心)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위해, 맹자는 먼저 참된 용기(大勇)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참된 용기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다. 이는 스스로 반성해봐서, 자신을 의롭지 않다고 여기면 아무리 헐렁헐렁한 옷을 입은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겁을 내게 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 설사 천만 명의 사람일지라도 그들에게 겁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러한 용기에 의해 부동심은 길러진다. 둘째, 우리가 부동심을 얻기 위해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한다. 호연지기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것이다. 손상시키지 않고 곧게 키우면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의리에 맞는 행동을 취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면적으로 의리를 쌓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을 잠시라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한편 그것은 억지로 조장해서도 안 된다. 송나라의 어떤 사람은 자기 논에 심은 모가 잘 자라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한 뿌리 한 뿌리씩 손으로 잡아 뽑아서 올려주었다. 그리고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나는 논의 모가 빨리 자랄 수 있도록 돕느라 매우 혼이 났다.”라고 했다. 이에 놀란 그의 아들이 달려가 보니, 논의 모들은 벌써 다 말라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기(氣)를 키우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모를 억지로 뽑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맹자는 지적했다. 수양이 잘된 사람은 절대로 물질에 대한 욕심에 유혹되어 도덕적 신념이 흔들리지도 않거니와 어떤 위협이나 곤란 아래서도 인의의 행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무리 부귀하여도 음탕한 데 빠지지 않으며, 아무리 빈천하여도 주체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리 무력으로 위협하더라도 굴복하지 않는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돈이 많아지면 성적인 음란에 빠지고 술이나 도박에 취하기 십상인데, 도덕적으로 수양이 잘된 사람은 결코 그런 일에 빠져들지 않는다. 또한 사람이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비굴해져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게 마련이지만, 도덕적으로 수양이 잘된 사람은 그러하지 않는다. 아울러 웬만한 사람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무릎을 꿇기 십상이지만, 역시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원칙을 지켜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가령 복권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했다고 해서 흥청망청 쓰지도 않고, 비빌 언덕조차 없이 가난해졌다고 해도 끝까지 인간의 도리를 지켜나가며, 어떠한 위협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왕도정치와 정전제도 개인마다 스스로 수양을 잘해야 하겠지만, 한 나라가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이에 맹자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개인의 도덕적 가치를 국가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제시한다. ‘사람의 본성은 어질기 때문에, 위정자는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이른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그 정치론의 핵심이다. 왕도정치는 먼저, 공리주의(功利主義)7)를 배격한다. 맹자는 양 혜왕(梁 惠王)에게 공리주의의 폐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만약 임금께서 어떻게 하여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주장하신다면, 대부(大夫)들도 어떻게 하여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할 것이며, 또 선비나 백성들도 어떻게 하여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위아래가 서로 자기의 이익만을 얻기 위해 다투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신하 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 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어버이를 섬기고, 동생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해서 형을 섬긴다면, 그것은 인의가 아니라 이익 때문에 서로 만나는 것이 된다. 그러하면서도 멸망하지 않은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맹자는 통렬히 비판한다. 둘째, 왕도정치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항산(恒産)8)이 있어야 항심(恒心)9)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왕들은 우선 백성들의 생산 능력을 안정시켜 위로는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게 해주고, 아래로는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할 수 있게 해주며,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흉년에는 굶어 죽지 않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맹자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장해주기 위해 정전제도의 실시를 주장했다. 이 제도는 여덟 집이 한 정(井)이 되어 집집마다 100무(畝)10)의 토지를 받아 농사를 짓되, 한가운데 있는 공전(公田)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도록 하는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5무 되는 집터 안에 뽕을 심고 누에를 치면 쉰의 늙은이도 모두 비단옷을 입을 수 있으며, 닭과 돼지를 길러 새끼 치는 것을 돌봐주면 일흔의 노인도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백성들에게는 생업을 보장해준 뒤에 비로소 도덕적인 생활로 이끌어야 하는 반면, 지도층에게는 생업에 좌우되지 않고 도덕적인 생활을 솔선수범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이들에게 먹고살 만큼의 녹봉을 주되, 그렇다고 정치지도자들이 재산을 쌓아놓아서도 안 되고 부와 사치와 음란을 누려서도 안 된다. 정치지도자는 백성들에게 어질고 너그러운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 형벌을 줄여주고 세금을 가능한 한 적게 거두며,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먹고사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는 데 있다. 즉 백성들이 효성과 공경, 우애와 진실, 신의와 도덕을 닦게 하여 살고 죽는 일에 유감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맹자는 인의를 숭상하고 덕을 본위로 하는 왕도정치가 이(利)를 숭상하고 힘을 본위로 하는 패도정치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왕도정치의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천자(天子)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덕스러운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임금은 백성들의 신뢰를 받는 현자 가운데서, 선거에 의한 것이 아닌 선양에 의해 추대되어야 한다. 사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다시 세우는 세습제도나, 오늘날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방식에는 모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왜곡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덕스러운 사람을 추대해 왕으로 모시도록 하는 방식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맹자는 본 것이다. 이렇게 추대된 통치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한다. 현재의 맹림(孟林)예전 중국에서는 죽은 사람의 무덤에 나무를 심었다. 주로 무덤 뒤편에 나무를 심었는데, 그래서 공자의 무덤을 다른 말로 공림(孔林), 맹자의 무덤을 다른 말로 맹림(孟林)이라고 한다. 성현의 무덤을 다른 말로 부르는 방식이다. 만일 막강한 힘을 가진 군주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에는 당연히 백성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에는 다른 군주를 모셔올 수도 있다. 군주로서의 의무를 게을리 하여 백성들의 마음에서 멀어진 자는 왕위를 물러나게 해야 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심지어 살해해도 좋다. 폭압정치를 펴며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임금은 이미 임금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설령 그를 퇴위시키거나 죽인다 한들 신하 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초상화가 제거되다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함으로써, 인간의 지위를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아가 그는 성선설에 기초하여 인의의 도덕정치, 이른바 왕도정치를 주장함으로써 정치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공자가 주로 교육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다. 이에 반해 맹자는 군왕이나 권력자, 그리고 귀족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맹자가 그들에게 가르친 방법은 아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지와 용기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많은 군주들 앞에서도 당당했고, 막강한 힘을 가진 그들은 도리어 맹자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가 민심에 바탕을 둔 인의정치를 주장하면서도, 군주제를 선호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민주제 아래에서는 국민 개개인을 교육시켜야만 하는 데 비해, 군주제 아래에서는 왕후 한 사람만을 올바르게 이끌면 족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정치를 담당한 소수, 나아가 한 사람만 현명하면 나라는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고 믿었던 까닭이 아닌가 싶다. 한편 맹자는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자는 언제라도 물러나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초상화와 글이 문묘(文廟)에서 제거된 일도 있었다. 즉 역대의 왕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흔들 수도 있는 맹자의 정치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맹모삼천지교가 만든 성인, 맹자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1    [그것이 알고싶다] - 고대 중국 儒敎의 시조 - 공자 댓글:  조회:3280  추천:0  2019-11-20
인물세계사 공자 동아시아 인문주의의 원형이 된 고대 중국의 사상가 [ 孔子 ] 출생 - 사망 B.C. 551 ~ B.C. 479 일생을 바쳐 학문을 좋아하고 목숨을 걸고 실천을 중시한다. 망하려는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천하가 잘 다스려질 때는 나아가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무시당한다. 정의가 행해지는 나라에 살면서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부자라든지 지위가 높다든지 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논어], ‘태백’(泰伯)편 중에서 ===============================================///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공자   [ 孔子 ] 출생 - 사망 BC 551년 ~ BC 479년 시대 춘추 시대 직업 사상가 출생지 노나라 이명 자 : 중니(仲尼) 국적 중국 목차 생애 사상 영향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이며 유교의 시조이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의 자(子)는 존칭으로, '선생'이라는 뜻을 지닌다. 생애 중국 춘추 시대 말기에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언행과 사상에 대해서는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인 오경을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가난한 가정환경 속에서 부모를 일찍 여의었지만, 학문에 힘써 17세에는 관리가 되어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노나라의 정치에 실망하여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상을 정치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오랜 방랑 생활에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정치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사상 주나라의 봉건 질서가 쇠퇴하는 춘추 말기,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심해지자 공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나라의 초장기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최고의 덕을 사람에 대한 사랑인 '인(仁)'으로 보아 그의 사상적 중심으로 삼았고, 정치에 있어서는 위정자가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교화하는 이상적 지배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의 인은 부모 형제에 대한 애정인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한 사상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禮)'의 형식을 강조하였다. 또한, 공자의 신(神)에 대한 개념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압박하는 존재가 아닌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로서의 신이었다. 영향 공자는 제자들에게는 물론 본인 스스로에게도 인의 실현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으며, 그 영향력은 살아생전에도 지대하였다. 공자 사후에도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유지되었으며, 특히 맹자는 제자백가 사상의 난립 속에서 세력이 약해져갔던 공자의 사상을 다시 일으켜 전파하였다. 그 후 전국 시대 말기에 순자는 다른 학파의 사상도 받아들여 공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고 집대성하였다. 관련이미지 12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공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공자 [孔子]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공자 『논어』(해제) 생애 해설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손이다. 아버지 숙량흘은 안씨의 딸 징재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다리 장애인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그가 안씨의 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자 그 딸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혼인을 했다. 야합(野合)이란 숙량흘은 70살이 넘었는데 안징재는 16세여서 예에 맞지 않음을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나, 아무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 안씨가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다. 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오목하게 들어간 고로 인하여 구(丘)라고 이름 지었다. 공자가 출생한 후 곧 숙량흘은 죽어서 방산(防山)에 묻혔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의 위치를 몰라, 어머니가 돌아가자 거리에 빈소를 차렸다. 지방의 나이든 여인이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자 공자는 어머니를 방산에 합장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여 자라서는 계씨의 창고지기도 하고 축사지기 노릇도 하였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長人)'라고 부르며 이상하게 여겼다. 공자의 나이 20세 무렵 계씨가 선비들에게 잔치를 벌여 대접을 했다. 공자도 가서 참여하려고 했는데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쫓아내며 "계씨는 선비를 대접하자는 것이지, 너 같은 놈을 대접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 이후 공자는 발분망식하여, 공자의 나이 34세 때에는, 노나라의 대부 맹리자(孟釐子 : 삼환의 하나인 맹손씨)가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그는 맏아들 맹의자(孟懿子)에게 "공구는 성인(은나라 탕왕)의 후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여공에게 양위한 분이다. 정고보(正考父)에 와서 여러 임금을 보좌함에 그 공손함이 지극하였다. 내가 듣자하니 성인의 후손은 비록 세상을 맡아 다스리지는 못하나 반드시 통달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지금 공구는 나이가 젊고 예를 좋아하니 아마 통달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니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라는 당부를 남길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실제로 맹의자는 공자에게 예를 배웠고 『논어』에 나온다. 공자 나이 35세에,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과 닭싸움을 하다가 다투어 후소백의 집터를 침략하여 집을 늘려 지었다. 평소에도 계평자는 못된 짓으로 노나라 대부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가 평소 집안의 힘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것을 싫어했던 소공도 가담하여 그를 몰아내려고 군사를 이끌고 쳤는데, 계평자는 맹씨 숙손씨의 세 집안과 더불어 소공을 공격했다. 소공의 군대는 패배했고, 소공은 제나라로 도망갔다. 그 뒤 노나라에 난리가 나자 공자는 제나라에 갔다.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그를 통해서 경공과 통하려고 했다. 제나라 태사(太師)와 더불어 음악을 논하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를 들은 다음 배우려고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자 제나라 사람들이 칭송했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다른 날에 또 정치를 묻자 공자는 "정사는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하자, 경공이 기뻐서 장차 공자를 봉하려고 하자, 안영(晏嬰)이 반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유자(儒者)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래 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禮服)을 성대하게 차려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논어』를 보면 공자는 "안영은 타인과의 교우 관계가 몹시 좋았다.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더욱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5-17)라며 안영을 찬양하고 있다. 그 후 경공이 공자를 보더라도 예를 묻지 않았다. 다른 날 경공은 공자에게 "선생을 계씨처럼 받들지는 못하더라도, 계씨와 맹씨 사이로 대접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까지 하였다. 경공은 나중에 "내가 늙었는지라 등용하지 못하겠다" 하니,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계씨는 공실을 업신여기고 배신이 국정을 잡으니, 이 때문으로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 바른 길(正道)을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벼슬을 포기하고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닦으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공산불요가 비 땅을 근거로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 볼 곳이 없음을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과 호 지방에서 일어나 왕이 되었다. 이제 비 땅이 비록 작지만,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고, 가려고 했다.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를 막자, 공자는 말하였다. "나를 부르는 자는 어찌 아무 생각이 없었겠는가? 만약 나를 써준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성사되지는 못 했다. 그 뒤에 정공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로 삼았다. 일 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공자는 나이 56세에 대사구로 말미암아 재상의 일을 대리하면서 기뻐하였다. 또 정치를 어지럽힌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삼 개월 만에 염소나 돼지를 파는 자는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는 걸을 때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읍으로 오는 사방의 손님들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대접받고 돌아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해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 하면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을 한 말이 끄는 수레 30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이에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이 종일 구경하면서 정치에 태만했다. 그러자 공자는 제사고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위나라 영공이 묻기를 "노나라에서는 녹봉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하자, "곡식 육 만(약 2000섬)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에서도 곡식 육 만을 주었다. 얼마 지난 뒤에 공자를 참소하는 일이 생기자 공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열 달 후 위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로 가면서 광 땅을 지나는데, 광 사람들이 공자를 노나라의 양호로 착각하고 공자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한 관계로 5일 동안을 구금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위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공자는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만났다. 부인은 갈포(葛布)로 만든 발(휘장) 안 쪽에 있었다. 공자가 문으로 들어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부인은 발 안에서 재배를 했는데, 차고 있던 패옥이 쨍그렁 소리를 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지 않지만, 만나는 예로 답을 합니다" 하였다. 이 일로 자로가 화를 냈다. 공자가 조나라에서 송나라로 가는 도중,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를 익혔다. 송나라 사마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쓰러뜨렸다. 제자들이 떠나기를 재촉하자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진나라를 정벌해서 세 읍을 빼앗았고,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회계에서 쳐부수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무는 3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계속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는 항상 침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나라를 떠나갔다. 또 포 지방을 지나면서 반란자들이 공자를 붙잡아두고 괴롭히며 말하기를, 만약 위나라로만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놓아주겠다 하였다. 그러자 일행은 곧 맹세를 하고 동문으로 나갔다. 그러나 공자는 곧장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묻기를 "어찌 맹세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강요된 맹세는 귀신도 듣지 않는다" 하였다. 위령공이 늙어 정사에 태만하고 공자를 쓰지 않자, 공자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1년만 되어도 좋고, 3년이면 성과를 낼 텐데" 하고 위나라를 떠나갔다. 공자는 서쪽으로 조간자(趙簡子)를 만나려고 황하에 이르렀을 때, 두명독과 순화가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 황하 강물에 서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름답다, 물이여! 저렇게도 출렁거리는구나!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함은 운명이로구나!" 자공이 감히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말하였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晉)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세력을 잡지 못했을 때는 그 두 사람 말을 들은 뒤에 정사를 했는데, 세력을 잡은 뒤에는 그들을 죽이고 정사를 하고 있다. 나는 들으니 '태를 쪼개 어린것을 죽이면 기린이 들판에 오지 않고, 연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으면 교룡이 음양을 합하지 못하고, 둥지를 뒤엎고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 군자는 자기와 같은 부류를 해침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도 의롭지 못함을 오히려 피할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마을로 돌아와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며 슬퍼하였다. 가을에 계환자가 병이 들어 수레를 타고 노나라의 성을 보며 "옛날이 나라가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에게 죄를 얻어 흥하지 못하였구나" 하고 탄식하며, 아들 계강자에게 "내가 죽거든 너는 노나라의 정승으로서 반드시 공자를 모셔와라" 하고 당부하였다. 아버지를 장사한 다음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려 하자, 공지어가 말하였다. "옛날에 우리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하고, 끝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 하면, 또 다시 제후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제자인 염구를 불러들였다. 자공은 염구를 환송하면서 당부하기를 "자네가 등용되거든 곧 공자님을 부르게 하라" 하였다. 공자가 진·채의 국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에서 공자를 초빙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채의 대부들이 모의하면서 "공자가 초나라에서 등용되면 우리들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에워싸고 억류하자 식량이 떨어졌다. 따르는 이들은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공자가 강송(講誦)과 현가(弦歌)를 그치지 않자, 자로가 성을 내며 "군자도 곤궁함이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군자는 원래 곤궁한 것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혼란에 빠진다"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자로를 불러 말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했는데, 우리의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우리가 아직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니! 우리가 아직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억류하고 있으니!" "대답이 그것뿐이냐! 자로야, 어진 이는 필히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라면 어찌 백이·숙제가 있었겠으며, 지혜로운 이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억류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있었겠는가?" 자로가 나오고 자공이 들어가니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선생님의 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천하에 어느 누구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낮추시면 어떨까요?" "자공아, 솜씨 좋은 농부가 씨를 잘 뿌린다고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가 기술을 잘 발휘한다고 꼭 사람들 뜻을 맞출 수는 없다. 군자는 도를 닦아서, 강기(綱紀)하고 통리(統理)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너는 네 도를 닦지 않고, 포용되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자공아, 네 뜻은 원대하지 않구나!" 자공이 나가고 안연이 들어와 뵈니 공자가 말하였다. "안연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의 도가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님께서는 밀고 나아가시면 되지, 남이 용납하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그가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못함은 나의 부끄러움이나, 도를 크게 닦았는데도 써주지 않음은 임금들의 부끄러움(잘못)입니다. 용납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냐, 안씨의 아들이여! 만약 네가 재물이 많다면, 나는 너의 관리인이 되리라." 이에 자공을 시켜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소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마침내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불러들이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만이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도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 후 육예를 편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다. 공자가 72세 때 자로가 위나라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공자가 병이 깊은 후 자공이 찾아왔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다가 "자공아, 왜 이제야 오느냐?" 하였다. 공자는 탄식하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哲人)이 시들려나!"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된지라 아무도 나를 받드는 이가 없구나. 어제 저녁 나는 은나라 식으로 제사 받는 꿈을 꾸었으니, 나의 선조가 은나라 사람임이라"고 말하였다. 그 뒤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나라 애공은 만사(挽詞)하기를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니, 나는 괴로운 아픔 속에 있네. 아아 슬프다! 이보(尼父 : 仲尼 존칭)시여!" 하였다. 이에 자공이 말하기를 "애공 임금은 노나라에서 죽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는 써 주지 않고, 죽어서야 만사하여 시호를 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다. 그래서 '공리(孔里 : 공자 마을)'가 되었다. 공자 무덤에서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歲時 : 새 해를 맞을 때)에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와 대사의 예를 행하였다. 한나라 고조 황제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太牢 : 천자에게 드리는 제사)로 제사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사마천은 말하기를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 하였다.(이상 『사기』 「공자세가」의 내용임) [네이버 지식백과] 생애 해설 (공자 『논어』 해제) ===================================/// 중국사상의 뿌리 공자의 가르침     공자의 출현은 중국, 아니 인류의 큰 행운이다. 키 크고 잘생겼으며, 구수한 목소리에 술 잘 마시고 사람 좋아하는 인간, 솔직담백하고 항상 세상일에 열변을 토하는 사람, 끊임없이 탐구하며 옳은 일에 고집불통인 공자는 참으로 위대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였다. 독서와 사색을 겸하는 공부 방법, 재능에 따라 달리 가르치는 교수 방법으로 공자는 그 이전 중화문명의 진수들을 집대성하여 유가 및 제자백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공자는 탁월한 언어감각을 지닌 학자이다. 예를 들어 공자의 어록인 『논어』엔 "군자유(君子儒)가 되라"고 한다. 임금의 아들[君子]이라는 기존 개념에 도덕적 의미부여[儒]를 함으로써 군자의 뜻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인(仁)이 그렇고, 예(禮)가 그렇고, 그의 철학적 개념이 모두 그렇다. 그러면서도 그는 "옛사람의 말을 옮겼을 뿐 창조하지 않았다"고 겸손해 한다. 예를 중시한 주나라에서 큰일을 치르는 의식에 밝은 유들은 예식을 돕는 상례(相禮)와 교육활동으로 생계를 꾸려갔는데, 공자는 거기에다 기존의 사상적 유산인 6예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리고 마른 고기 한 묶음만 가져오면 각지에서 찾아온 가난한 자, 강도·건달까지도 가리지 않고 열성으로 가르쳐 그들을 전통문화의 계승자로 만들어냈다. 참으로 위대한 역사의 기적이다. 그의 관심은 땅 위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는, "아직 사람도 섬길 수 없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논어』 「선진」)고 대답한다. 사람과 사회를 중요한 인식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개인의 수양과 품덕을 특별히 강조한 도덕주의자였으며, 상식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입장에서 과거의 일에 대해 연구하고 정의하였다. 예컨대 삼년상을 치를라치면 산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며 합리적인 항의를 한 재아를 어질지 못한 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식으로 태어나 삼 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기"(「양화」) 때문이라는 인간적인 이유를 단다. 이렇게 전통의 현대적 해석에 성공한 공자는 기존의 『시』 『서』 『예』 『악』 『역』 『춘추』를 재정리했고, 이로써 유가는 경전을 갖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학파가 될 수 있었다. 고문헌에 대한 선별·편찬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나, 체계적인 이론이 바탕이 되어 줌으로써 오히려 육경의 의미는 더욱 승화되었다. 『예기』 「경해 經解」편은 공자의 육경에 대해, "사람됨에 온유하고 돈후하란 것이 『시』의 가르침이다. 소통하여 멀리 알라는 것이 『서』의 가르침이다. 폭넓고 어진 삶을 살라는 것이 『악』의 가르침이다. 정밀하고 미묘한 것을 잘 재어 보고 헤아리라는 것이 『역』의 가르침이다. 공손·검약하고, 엄숙·경건하라는 것이 『예』의 가르침이다. 사건을 잘 비유하여 말을 하라는 것이 『춘추』의 가르침이다"라고 논평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 스승보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교육에 종사하면서 스승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유복(儒服)이라는 독특한 복장을 하며 동질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유'가 한 학파의 칭호가 된 것은 공자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스승의 사상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제자들 사이에 급속히 분파가 생겨났다. 『순자』 「유효」편은 이들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었고,1) 구체적으로 제자들 이름을 거명해 자궁(子弓)을 공자의 정통으로, 자사와 맹자를 정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잡학한 사람으로, 자장(子張)씨의 유는 말만 그럴듯하게 늘어놓은 자들로, 자하(子夏)씨의 유는 의관만 정제하고 있는 사람들로, 자유(子游)씨의 유는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로 비판하기도 한다. 『한비자』 「현학」편엔 "공자가 죽은 뒤 자장의 유, 자사의 유, 안(顔)씨의 유, 맹(孟)씨의 유, 칠조(漆雕)씨의 유, 중량(仲良)씨의 유, 손(孫)씨의 유, 악정(樂正)씨의 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는 사실은 유가가 쇠락했다기보다 발전했다는 징표이다. 즉, 이러한 분파 투쟁을 통해 이론적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뉜 초기의 유가 사상가들에겐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된 사상 형식·개념·범주가 있었다. 정치와 윤리를 일체화시킨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학문과 정치 사이를 오간 유가 사상가들은 첫째, 선왕 특히 요·순(堯舜)과 문·무(文武)의 도를 자신들의 깃발로 삼았다. 둘째, 전통 문화유산이며 공자가 정리한 육예를 모든 교육과 삶의 모범으로 삼았다. 셋째,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논어』 「안연」)는 가르침에 따라 군신·부자·귀천·상하·친소의 구분이 엄격한 예의를 숭상하였다. 넷째, 인·의·예·지·충·효·신·애·화·중(仁義禮智忠孝信愛和中) 등을 사회생활을 실천하는 데 공통된 기본 개념이자 범주로 삼았다. 다섯째, 모두가 공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받들었다. 따라서 덕·중용·정명(正名) 등 공자의 주장은 항상 유가의 주된 관심 대상이었다. =========================/// 대사구(大司寇, 형조판서) 시절의 공자 초상화   중국인물사전 공자   유교의 시조 [ 孔子 , kǒng zǐ ] 요약 중국의 대 철학자이자 사상가 이미지 크게보기 대사구(大司寇, 형조판서) 시절의 공자 초상화 시대 춘추 전국시대 노나라 출생 - 사망 BC.551년 ~ BC.479년 목차   1. 불우했던 개인 생애 2. 정치적 야망을 접고 교육에 전념하다 3. 공자 출현의 시대적 배경 4. 공자와 유가학파 5. 공자 사상의 핵심 - 인(仁) 6. 공자의 인재관과 교육관 1) ‘유교무류(有敎無類)’ - 평등한 인재 교육을 강조한 공자의 인재론 7. 공자에 대한 재평가 8. 관련 유적 9.  공자의 인생 회고록 10.  공자 가문의 영욕사 11.  공자의 유머 1) 유머 사례 2) 공자의 모습에 대한 도학자들의 평 3) 공자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논어』 4) 마음을 움직이는 위트 12.  공자연보 1. 불우했던 개인 생애   공자는 춘추 전국시대 즉 고대 노예제도가 차차 봉건제도로 옮아가던 시대에 노나라 추읍(陬邑, 지금의 산둥성 취푸(曲阜))에서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가졌을 때 니구산(尼丘山)에서 백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후일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인 중니(仲尼)에 ‘니’자가 들어간 것도 기도를 드렸던 니구산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전한다. 공자의 선조는 송나라의 귀족 출신이었으나 송에서 정치적 실패로 노나라로 망명하였다. 공자는 세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귀족 집안의 소사1)가 되었다가 나중에 노나라의 관리가 되기도 했으나 단기간의 임관에 불과했다. 19세에 결혼을 한 공자는 24세에 어머니 안씨를 잃었고 66세 때 부인이 죽었으며 69세 때는 아들 백어(伯魚)마저 세상을 떠나는 등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말년도 매우 불우했다. 그의 제자 안자(顔子, 안회)가 자기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을 때 통탄하던 공자의 모습(『논어』)을 보면 그가 일찍이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난 후 오늘에 이르러 부모와 아들과 수제자마저 보내는 심정이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2. 정치적 야망을 접고 교육에 전념하다   공자는 10여 년 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각처에서 유세2)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등 자기의 정치적 이상 실현을 도모했으나 그 기대와 희망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68세 때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는 세월을 한탄하며 관직을 단념하고 시, 서(書), 역(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육경을 풀이 및 정리하고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요, 순, 문왕, 무왕, 주공을 높이 받들어 숭배하고 고대의 사상을 집대성했으며 유가와 가학3)을 창립했다. 당시에 공자는 ‘하늘이 허락한 거룩한 성인(聖人)’, ‘하늘이 세상을 위해 목탁으로 삼으신 분’이라는 영광스런 명칭을 얻었고, 후대에 ‘지성(至聖)’, ‘지성선사(至聖先師)’, ‘만세사표(萬世師表)’, ‘문선황제(文宣皇帝)’, ‘문선왕(文宣王)’, ‘소왕(素王)’ 등으로 받들어졌다. 그의 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인(仁)을 이상의 도덕이라 하여 효제4)와 충서5)를 이상의 근거로 삼았고, 후에 그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록을 기록해 놓은 『논어』 7권이 현재 전해진다. 노자를 만나는 공자의 모습을 나타낸 벽돌 그림 3. 공자 출현의 시대적 배경   공자가 태어난 춘추시대 사회 실정을 보면 공자의 출현은 시대의 당연한 요청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사회 실정에 대해 『한서』 「화식전(貨殖傳)」에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주(周)나라 왕실이 쇠하여 예법이 무너지고 제후들은 제멋대로 사치하고 방자해졌다. 선비와 서민들은 각기 본분을 지키지 아니하여 농사에 힘쓰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상업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만 많아져 쌀과 곡식이 부족한데 상품은 넘쳐흐른다. 제 환공, 진 문공 이후로는 예의가 크게 무너져 위아래가 없고 나라마다 정치가 제각각이고 집집마다 풍속도 제각각이며, 욕망은 제한이 없고 분에 넘치는 일이 허다하다. 상인은 구하기 어려운 상품을 마구잡이로 사다 들이고 공인(工人)은 사치스런 기물을 제조하기에 바쁘다. 선비는 정도에서 벗어난 학설과 유행만 좇은 공부에만 몰두하며, 호사스러운 자들은 헛된 명예를 위하여 진실은 배반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친다. 폭도라도 나라를 뺏은 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고 왕위를 찬탈한 자는 영웅이 된다. 예의가 군자의 마땅한 도리가 되지 못하고 형벌도 소인을 무섭게 하지 못하여, 부자들은 헛된 우상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개와 말에게도 고기를 먹여 배부르게 하는데 가난한 자들은 떨어진 베옷에 콩잎을 먹고 물만 마실 뿐이다. 군주를 도와주면 비록 그 출신이 노예의 신분이었더라도 사대부와 같이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권모술수를 모르면 배고픔을 면치 못한다.” 맹자는 이러한 공자의 시대를 평가하기를,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희미해져 요망하고 간사한 말들과 폭행이 심하여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세태에 공자가 이를 심히 염려하여 『춘추』를 지었다고 했다.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공자의 모습 4. 공자와 유가학파   비석에 새겨져 있는 공자상(시안 비림박물관) 『한서』 「예문지(藝文志)」는 중국 고대의 여러 학파를 아홉 종류로 분류하여 1) 유가류 2) 도가류 3) 음양가류 4) 법가류 5) 명가류 6) 묵가류 7) 종횡가류 8) 잡가류 9) 농가류 학파의 특징을 논술하였는데, 그 중 유가류(儒家類)라 한 것은 공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유가학파를 말한다.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유가의 학파는 주(周)나라 때의 ‘사도(司徒)’6)라는 관직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그 임무이다. 음양의 이치를 따르고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임금을 바르게 도와 사회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근본사상은 인(仁)과 의(義)이며 인의사상이 유교의 경전인 육경을 통하여 구체화된다고 하였다. 역사적 학통을 보면, 요 · 순과 문왕 · 무왕을 본받고 이를 집대성한 공자를 만세의 스승으로 받들고, 유가학파의 도가 모든 학파 중에서 으뜸이며 동양의 모든 학술 · 문화의 사상적 근원으로 그 전통을 이루어온 것이라고 하겠다.” 중국 철학사상사에 있어서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그 전과 후를 획기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서양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가 갖는 위치와 같은 것으로 본다. 공자사상은 도가처럼 자연주의도 아니고 묵가의 공리주의도 아니며, 성실성과 불변함을 지닌 인간가치에 관한 학문이며 인간을 중심으로 파헤친 인생철학이다. 그런데 공자의 사상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인(仁)은 자기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완성까지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공자는 인을 도덕실천의 최고 목표로 삼은 것이다. 5. 공자 사상의 핵심 - 인(仁)   유가 사상은 ‘인(仁)’으로 통용되는 공자의 중심사상이다. ‘인’은 유도(儒道)의 근본이며 인류애의 근본사상이다. 이 ‘인’에 관하여서는 『논어』에만 105자에 달하며 사서에 나타나 있는 ‘인’ 자를 모두 합하면 272자가 된다. 이로 볼 때 유교에서 얼마나 ‘인’자에 치중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인’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 혼자 존립할 수 없으며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 도와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중용』에서는 “仁者, 人也(인자, 인야: 인은 곧 사람이다)”라 하였고, 『맹자』에서는 “仁也者 人也(인야자 인야: 인이라는 것은 사람이다)”라 하였으니, ‘인’은 곧 사람, 다시 말하면 ‘인’은 인간 자체의 성실성 있는 가치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인’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의 길(仁道)’은 곧 ‘사람의 길(人道)’과 서로 통한다. 공자는 ‘인’ 사상에 대해서 뚜렷한 정의를 밝히지 않았고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때와 장소에 따라 인물에 따라 각각 그 답이 달랐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라 했으나 다른 제자의 질문에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서(恕, 관대함)가 그것”이라 하기도 했고 “집에 있을 때는 공손하고 일을 할 때는 신중하고 남과 사귀는 데는 성실한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또 공자는 증삼에게 내 도는 한결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제자가 증참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하자 “충서(忠恕)가 그것”이라 했다. 이런 말은 자공(단목사)도 하고 있어서 충서야말로 ‘인’일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주관에 따라 어떻게라도 해석이 가능한 반면 그 어느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에 대한 학설들이다. 이는 공자가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기를 기피했고 사람에 따라 말을 달리 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도 ‘인’의 개념에 대한 규정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 그 어느 ‘덕(德)’도 ‘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는 반면, 그 어느 것만으로는 그 내용이 대변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인’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고 선(善)은 어디에라도 적용되는 반면, 어느 것으로도 포착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논어』 「자로(子路)」편 18장에는 엽공과 공자가 정직에 대해 문답한 것이 나와 있다.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자식이 고발했다는 말을 듣고 공자는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숨기는 것이 정직”이라고 하였다. 어떤 덕이든 그 형식적인 면에 얽매이면 도리어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니, 공자가 ‘인’의 규정을 회피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은 사랑이다”라는 정의는 애정이 결핍된 사람에게는 교훈이 되겠지만 이 정의로 고정시켜 버리면 적군도 사랑하고 악인도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인’에 대하여 완벽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그때그때 적절히 대응한 것은 저울이 평형을 이루려면 상대의 무게에 따라 추의 무게나 위치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는지,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모르듯 우리 범부중생이 성자철인의 속 깊은 뜻을 어이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공자가 정의를 안 내린 이 ‘인’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간의 최고 선이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겠다 싶다. 또 그것이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실천적 윤리임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공자의 사당인 공묘 대성전에 모셔져 있는 공자의 상 6. 공자의 인재관과 교육관 1) ‘유교무류(有敎無類)’ - 평등한 인재 교육을 강조한 공자의 인재론   공자는 춘추시대 후기를 살면서 평생 교육과 학술 활동을 펼친 사상가이자 교육가였다. 공자의 교육활동은 중국 인재사와 교육사에 있어서 계획적이고 전문화된 대량의 인재창출의 시초를 열었다는 점에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은 상(商) · 주(周) 때부터 국가 차원의 교육기관과 체제를 갖추고 귀족과 그 자제들에게 시 · 서 · 예 · 악을 가르쳐 자질을 향상시켰다.(『순자(荀子)』 「왕제(王制)」)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여 실행한 이런 교육은 너무 형식적이라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재를 대량으로 배출할 수는 없었다. 춘추시대 및 그 이전의 이름난 군주를 비롯하여 장수와 재상 및 기타 인재들 중에 귀족학교에서 배출된 사람은 없었다. 공자는 교육에 있어서 귀족의 독점을 타파하고 사학(私學)을 창립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최초의 인물이다. 공자는 사학을 창립하여 각계각층의 자제들을 키웠는데, 스스로 ‘가르침에 부류는 없다’는 뜻의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그가 길러낸 제자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뛰어난 학생만도 7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학생들 대부분이 노나라 사람이었지만 진(晉) · 정(鄭) · 송 · 오 · 초 등에서 온 사람도 있었으며, 맹의자 · 남궁적(南宮適) 등과 같이 귀족 집안 출신이 있는가 하면 안회 · 증삼 등과 같이 빈곤한 집안 출신도 적지 않았다. 또 염옹은 신분이 최하층민이었고, 공야장은 죄인의 몸이었다. 공자의 교육활동은 인재 배양을 독립된 사회활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인재와 관련한 이론 연구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는 인재 발전사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인재관과 관련하여 공자는 애인7)과 존현8)을 강조했다. 그는 “인(仁)이란 곧 사람이므로 어버이를 어버이로 받드는 것이 옳고, 어진 사람을 존경하고 의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라고 했다.(『예기』, 『중용』) 공자의 교육 목적은 어진 선비를 많이 배출하는 데 있었다. 공자가 가르친 내용으로는 시 · 서 · 예 · 악 · 어(御) · 사(射)가 있었는데, 기본 경전과 예악은 물론 말타기와 활쏘기까지 익히게 하여 학생이 보다 전반적인 지식을 습득한 인재들로 커가도록 의도했다. 공자의 교육방법은 생활 속의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교육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문(文, 지식) · 행(行, 실천) · 충(忠, 국가관) · 신(信, 신용)을 내세웠다. 이는 최초의 인재 평가기준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두고 여러 나라를 돌며 책임 있는 자리에서 일을 해보고자 하였으나, 공자가 활동했던 춘추 후기는 약육강식으로 대변되는 전국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당시 각국이 원했던 인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다. 서주(西周) 시대로의 회귀를 갈망했던 공자의 정치사상은 당연히 이런 풍조와 맞지 않았고 현실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자의 위대한 점은 여기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과 경험을 종합하여 이를 교육과 학술에 재투자했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겪었던 불운을 거울삼아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존현(尊賢)’이란 용인관을 내세운 점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정치적 이상은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교육적 이상은 오늘날까지 살아 현대인의 삶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7. 공자에 대한 재평가   1949년 중화민국이 성립한 이래 공자에 대한 논쟁은 주로 공자의 사상에 나타나는 계급적 속성 문제와 철학적 속성 문제에 집중되었다. 계급적 속성 문제는 중국 역사시기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 문제와 한데 얽혀 대단히 복잡하게 전개되었는데, 주진(周秦, 주나라와 진나라) 봉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자 사상의 계급적 속성에 대해 대체로 다음 네 가지 견해를 제기한다. 1) 귀족 노예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2) 봉건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3) 노예주 귀족에서 변화한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4) 평민의 이익을 대변한다. 다음 공자의 철학적 속성 문제에 대한 견해 역시 크게 네 가지로 대표된다. 1) 공자는 무신론자이며 그의 천도관(天道觀)은 유물주의적이다. 2) 공자 사상은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두 가지 성분을 아울러 갖고 있다. 3) 공자는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4) 공자는 은 · 주 이래 전통적인 천명관념을 계승한 유심주의자다. 공자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와 차이는 있었지만 그가 수립한 사상체계와 교육사상 등은 지금까지 엄청난 영향을 발휘했고 또 여전하다. 그의 사상체계에 보수적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는 급변하는 시대상을 자신의 주관으로 파악하고 이를 전통사상과 연계하여 새로운 시대적 이념과 사상을 제기한 진보적인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다. 실제 정치에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가 만년에 정리한 역사, 철학, 사상, 교육, 예술, 정치윤리 등과 관련된 이론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각국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공자를 주인공으로 한 공연의 모습 8. 관련 유적   공자와 관련한 유적은 중국 전역에 남아 있다. 특히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삼공(三公)이 가장 유명하다. 삼공이란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의 저택인 공부(孔府)를 말한다. 삼공을 포함한 관련 유적을 아래에 정리해둔다. ① 창평니산부자동(昌平尼山夫子洞): 산둥성 취푸시 동남 30킬로미터 창평향 니산 동쪽 기슭 ② 궐리방(闕里坊): 산둥성 취푸시 공묘동장 밖 궐리가 중부 ③ 공자고택문(孔子故宅門): 산둥성 취푸시 공부대문 서측 ④ 공택고정(孔宅故井): 산둥성 취푸시 공묘 동로 시례당 뒤 ⑤ 문례당(問禮堂): 산둥성 취푸시 성 동북 1킬로미터 주공묘 동로 내 ⑥ 시례당(詩禮堂): 산둥성 취푸시 공묘 동로 내 ⑦ 행단(杏亶):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전 앞 ⑧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문 북폐 동측 ⑨ 수사서원(洙泗書院): 산둥성 취푸시 공림 동북 1킬로미터 ⑩ 무우태(舞雩台): 산둥성 취푸시 성 남쪽 2킬로미터 ⑪ 춘추태(春秋台): 산둥성 취푸시 성 남쪽 8킬로미터 식감촌 내 ⑫ 석문사(石門寺): 산둥성 취푸시 성 동북 26킬로미터 석문산 남쪽 기슭 ⑬ 관천정(觀川亭): 산둥성 취푸시 니산 공묘 대성문 동남 ⑭ 공자문소처(孔子聞韶處): 산둥성 쯔보시 성 동쪽 소원촌 ⑮ 협곡(夾谷): 장쑤성 공유현 성 서북 15킬로미터, 위공자 상로회제후 ⑯ 호산(虎山):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남쪽 기슭 비규령 동북 ⑰ 공자애(孔子崖):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옥황정 서남 ⑱ 공자등림처방(孔子登臨處坊):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남쪽 기슭 홍문궁 앞 반도 위 ⑲ 공자소천하처(孔子小天下處):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옥황정 동남 태평정 위 ⑳ 공망산(孔望山): 장쑤성 롄윈강시 신포 남쪽 2.5킬로미터 ㉑ 학당강(學堂崗): 허난성 창위안현 성 북쪽 5킬로미터 ㉒ 격경처(擊磬處): 허난성 급현 남관, 상전 공자증재차 격경습락 ㉓ 현가태(弦歌台): 허난성 화이양현 성 밖 서남 모퉁이 ㉔ 문아태(文雅台): 허난성 상추(商丘)현 동남 1.5킬로미터 태지 위 ㉕ 부자애여쇄서태(夫子崖與曬書台): 허난성 닝청현 동북 32킬로미터 망산진 서남 기슭 ㉖ 공자문례처(孔子問禮處): 허난성 락현시 노성 동관 ㉗ 공자묘(孔子墓): 산둥성 취푸시 공림 내 남부 ㉘ 공자묘(孔子廟): 산둥성 취푸시 성내 ㉙ 대성전(大成殿): 산둥성 취푸시 공묘 내 ㉚ 규문각(奎文閣): 산둥성 취푸시 공묘 내, 동문문여 십삼어비정 사이 ㉛ 십삼어비정(十三御碑亭):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문 앞 ㉜ 니산공자묘(尼山孔子廟): 산둥성 취푸시 동남 30킬로미터 니산 동쪽 기슭 ㉝ 확상포(矍相圃): 산둥성 취푸시 내, 공묘 서측, 상국가로 남쪽 ㉞ 공림(空林): 산둥성 취푸시 성 북쪽 1킬로미터 공자의 무덤인 공림 공자의 사당인 공묘 공자의 저택인 공부 9.  공자의 인생 회고록   공자는 만년에 자신의 70 평생을 단 38자의 문장으로 개괄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짧은 자서전 내지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열다섯 무렵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무렵에 내 뜻을 세웠고, 사십 무렵에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오십 무렵에는 하늘이 준 사명을 알게 되었다. 육십대에는 순종하게 되었고, 칠십이 넘자 마음 가는대로 따라가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논어』 「위정(爲政)」편) 위 38자의 회고록은 공자가 70이 넘자 인생을 회고하면서 제자들에게 구술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삶을 정리하면서 감개무량한 심경을 고백한 것으로 본다. 10.  공자 가문의 영욕사   공자의 가문은 역대로 통치자들에 의해 크게 중시되어 많은 특혜를 받았다. 따라서 가문의 영속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공자로부터 공덕성(孔德成, 1920~2008)에 이르기까지 77대가 되고 있는데, 그 동안 공씨 가문은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을 몇 가지 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1) 오대 후량(後粱) 건화(乾化) 연간(911~912)에 공부9)에서 청소를 담당하던 공말10)이란 자가 공자의 42대손 공광사(孔光嗣)를 죽이고 공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는 사건이 일어났다. 18년 뒤 공광사의 아들 공인옥이 당 명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사건을 밝히자 공말은 처형되었다. 이 일로 공인옥은 공씨 가문을 다시 일으킨 중흥조(中興祖)로 존중되었다. 한편, 공말의 후손들은 이 사건으로 ‘가문 밖의 가짜 공씨’란 뜻의 ‘외원위공(外院僞孔)’, 줄여서 ‘외공(外孔)’으로 찍혀 족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2) 북송 말기 제 48대 연성공(衍聖公, 공자의 후손을 이렇게 높여 불렀다) 공단우(孔端友)가 강왕(康王)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저장성 취저우(衢州)에 살게 되니, 이를 남쪽 지역의 공씨 가문이라는 의미로 ‘남종(南宗)’이라 한다. 그 동생 공단조(孔端操)는 취푸에 남아 가문을 이으니 이것이 ‘북종(北宗)’이다. 실제로는 남종이 공씨 가문의 장손 후예들이지만 취푸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남종과 북종이 정통을 놓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 명나라 홍치(弘治) 연간(1488~1505)에 와서야 비로소 황제에 의해 북종이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3) 종법제도에 따라 적장자는 윗대를 잇는 계승자다. 공씨 가문은 장자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장자가 아들이 없으면 반드시 가장 가까운 혈통을 골라 장손의 자리를 잇게 했는데, 조카가 장손 자리를 이을지언정 동생이 장손 자리를 이을 수는 없게 했다. 11.  공자의 유머11)   공자의 유머는 자연스럽다. 『논어』에는 유머러스한 공자의 말이 많은데, 이는 공자가 실제로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정감 넘치고 이치에 합당한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성리학의 기세가 너무 강했던 탓에 공자 이후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는 14년 동안 송 · 위(衛) · 진(陳) · 채(蔡) 사이를 떠돌아 다녔는데, 여의치 않은 경우가 열에 아홉이었지만 그 때마다 늘 의연하게 대처했다. 세상에 대해 상심하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고향인 노나라에서 계환자12)와 양화13) 같은 인물을 만나는 바람에 진(晉)나라로 가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하 가에서 “물이여, 물이여!”14)라며 탄식한 것이 그런 경우였다. 환퇴란 자가 공자를 해치려 하자 “환퇴 그가 나를 어쩌겠는가?”15)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은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시 스스로 만족하고 유유자적하는 군자의 두려움 없는 기세라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진 · 채 · 여(汝) · 영(潁)에서 왜 그렇게 특별히 오래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다. 1) 유머 사례   공자의 침착하고 유유자적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진(陳)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무려 7일 간을 굶었을 때의 일이다. 제자들은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자는 꼿꼿하게 혼자서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침착하고도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제자들에게 “우리가 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어쩌다 이곳에 버려졌느냐?”16)고 물었다고 한다. 이 대목은 우리가 공자에게 가장 탄복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17) 또 한 번은 공자와 제자들이 길에서 흩어져 서로를 잃어 버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동문에서 공자를 보았다면서 그 행색이 마치 ‘상갓집 개’ 같더라고 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공자는 “다른 건 몰라도 상갓집 개란 말은 그럴 듯하구나.”라 했다. 2) 공자의 모습에 대한 도학자들의 평   공자는 인정(人情)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공손하면서도 편안했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다. 천리 밖까지 찬바람이 쌩쌩 도는 도덕군자인양 점잔을 빼는 그런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자나 주자와 같은 송나라 유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공자의 모습은 바뀌어 버렸다. 도학적 관점에서 공자를 논하면 공자의 본래 모습을 잃게 마련이다. 그들은 마치 보통 사람이 하는 행동을 성인은 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모름지기 도학적인 송대 유학자들이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공자는 거침없이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유비18)라는 자가 공자를 만나러 왔다. 공자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거나 문지기를 시켜 집에 없다고 하라 했다. 그런데도 유비가 가지 않고 문 앞을 얼쩡거리자 공자는 일부러 유비가 들으라고 비파를 연주했다.19) 공자가 왜 그랬을까? 주자는 공자가 유비를 몹시 싫어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고 했다. 그와는 달리 청나라 때 학자 최술은 다른 해석을 했다. 그는 이 대목이 후세 사람이 멋대로 갖다 붙인 것이라면서, 성인께서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냐고 했다. 역사학자 고힐강은 최동벽의 이런 견해에 불만을 나타내며, “경서(經書)와 공자 · 맹자를 지나치게 신봉하여 도처에 선입견과 주관이 물들어 있다.”20)라고 했다. 3) 공자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논어』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논어』의 멋을 알려면 먼저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들을 음미해야 하는데, 그 중에는 유유자적하면서 한 말, 솔직담백한 말, 외부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 말, 그냥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 유머러스한 말, 심지어는 농담 및 욕까지 다양하다. 요컨대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이 사적으로 나눈 대화체 실록(實錄)으로, 공자의 진면목을 다시 볼 수 있다. 진지함과 농담이 적당히 섞인 조용하고도 차분한 이 실록으로부터 우리는 공자의 진짜 성품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몇 가지 대화 내용을 인용한다. “그게 바로 나다!”21) 공자는 제자들에 대해 전혀 격이 없었다. 철학과 종교에 대해 강의하면서도 후대의 정자처럼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의에 집착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공자는 “너희들 내가 너희들한테 뭐 숨기는 것이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나 숨기는 것 하나 없다. 지금까지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너희들에게 알려 주지 않은 적이 없다. 그게 바로 나다.”라고 말한다. 정겨운 모습이 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농담이야!”22) 공자는 자신이 한 농담에 대해서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한번은 제자인 언언이 성재(城宰, 성의 우두머리)로 있는 무성(武城, 산둥성 더저우에 있는 현) 지방을 방문했는데, 집집마다 책 읽는 소리와 거문고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공자는 싱긋이 웃으며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했다. 그러자 언언이 공자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까?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얘들아 언(偃)의 말이 옳다.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을 뿐이니라.”라고 말했다. 공자가 한가하게 제자들과 나눈 대화의 말투는 보통 이러했다. “나는 점아를 따라 가겠다.”23) 제자들에게 각자의 바람을 물어보는 대목이다. 모두들 매우 즐겁게 자신의 포부 등을 얘기했다. 공자는 딱딱한 겉치레 말이 아닌 은근한 정을 담은 말로 분위기를 끌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 끝나자 증석(증점)은 자신의 ‘바람’은 관직을 하는 것도 아니오, 조정과 종묘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공자는 “무슨 상관이냐? 나는 그저 각자의 바람을 듣고 싶을 뿐이니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증석은 비파의 굵은 줄을 한번 퉁겨 소리가 울리게 한 다음 비파를 내려놓고는 일어서서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그 부분을 대략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말로 바꾸어 보면 이렇다. “3월과 4월 사이 새 옷을 입고 양음산24) 중정공원(中正公園)으로 놀러 갑니다. 어른들 대여섯이 아이들 예닐곱을 데리고 수영장에서 논 다음, 근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다가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는 것입니다.”25) 이 말을 들은 공자는 한숨을 내쉬면서 “점(點)아! 나는 너하고 같이 가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네 말에 전적으로 뜻을 같이 한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앞에서 진지하고도 점잖게 자신의 바람을 말한 것에 뒤이어 증석이 이렇게 느긋하게 분위기를 풀어 버리니 자연스럽게 유머 작용을 한 것이다. 공자도 흔쾌히 그 뜻을 알아주었다. “말을 탈까, 활을 쏠까?”26) 누군가 공자를 두고 “공자는 정말 위대하다. 그렇게 박학다식하면서도 특기 하나 없으니.”라고 비꼬았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나한테 무슨 특기를 가르쳐 주려고? 말을 탈까? 아니면 활을 쏠까? 아무래도 말을 타는 것이 낫겠지?”라고 말했다. 이 대목은 진짜 유머의 멋이 물씬 느껴진다고 평가한다. “그래? 어찌 그럴 수가!”27) 공자가 공명가(公明賈)28)에게 위나라 대부 공숙문자(公叔文子)에 대해 묻기를 “정말로 그 사람 말하지도 웃지도 욕심부리지도 않느냐?”라 했다. 그러자 공명가는 “그렇게 말한 사람이 부풀려 한 말입니다. 그 분은 말할 줄도 웃을 줄도 아는데 다만 그럴 만한 때라야 말을 하고 웃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싫어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자는 “그러냐? 정말 그러냐?”라고 말했다. 이런 중첩된 말투는 『논어』에 흔히 보이는 회화체 필법이다. “사야, 네 능력 밖이다.”29) 자공은 말을 아주 잘 했다. 한번은 그가 “남이 저를 아무렇게 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듯이 저도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공자는 “사(賜, 자공의 이름)야, (말은 쉽다만) 내가 보기에 네가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 번 냄새 맡고는 그냥 일어서다.”30) 이 대목은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것으로 꼽히는데, 최술은 또 위작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별 것 아닌 대목이다. 그저 공자가 꿩의 냄새를 맡아보고는 구역질이 나 먹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대목은 「향당편(鄕黨篇)」에 보이는데, ‘향당편’은 주로 먹는 것에 관한 얘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새 한 마리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내려앉았다. 자로(중유)가 가만히 다가가서 “들새로구먼. 마침 잘 왔다!”며 잡아서는 공자에게 드렸는데, 공자는 서너 번 냄새를 맡아보더니 들새의 비린내가 싫어 먹지 않고 그냥 일어섰다. 원래 들새는 2~3일 말렸다가 먹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무슨 거창한 도리를 찾아내려 할 필요가 있을까? “여럿이 하루 종일 죽치다.”31) 공자 왈 “여럿이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 좋은 말 한 마디 않고 사사로운 꾀나 부리고 있으니, 정말 힘들구나 너희들!” 여기서 맨 뒤의 ‘정말 힘들구나 너희들’이라는 말은 ‘잘 하는 짓이다’라는 말이다. 주자는 이 대목을 ‘장차 근심과 해가 있을 것이다’라고 풀이했지만 이것은 ‘잘 하고 있구나, 너희들’이라는 한적한 말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와 똑같은 말투가 또 한 군데 더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이다.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쓰는 일 하나 않는구나. 정말 잘 하는 짓이다! 장기나 바둑 같은 것도 있지 않느냐? 그런 곳에라도 신경을 쓰는 것이 아무데도 마음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32) 유머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연스럽고 조용한 방에서 친한 친구와 나누는 한담 같이 전혀 꾸밈없고 허세 부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논어』다. 한번은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어찌 담에 매달려 있기만 하고 먹지도 못하는 표주박과 같을 수 있나?”33) 또, “팔아야지! 암, 팔아야지! 나는 누군가 나를 사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34)라는 말도 했다. 이 구절은 현명한 군주가 자기를 등용하길 기다린다는 뜻으로, 속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이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준비해 두었다가 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친한 친구와 한담을 나누는 분위기라면 오해는 사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을 너무 진지하게 읽는다면 그 맛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공자가 사람을 욕한 대목도 적지 않다. 오늘날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떠냐는 물음에 공자는 “아, 째째한 인간들이니 인간 축에 끼지도 못한다.”35)라고 대답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아, 밥만 축내는 그 밥통들, 어디다 쓰겠느냐!” 정도가 될 것이다. 친구 원양을 욕하는 대목에서 공자는 “늙어서 죽지 않으면 도적이야!”라고 한 다음, 그것도 모자랐던지 몽둥이를 들고 땅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원양의 정강이를 때렸다. 염구를 욕하면서 “내 제자가 아니니라. 얘들아 북을 울리고 공격을 가해도 좋다!”36)라고까지 말했다. 제자에 대해서까지도 이렇게 화를 낸 것은 염구가 권력자 계씨(季氏)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었다. “유(由)야는 제 명에 못 죽을 것이다.”37) 이 말은 자로(중유)를 두고 한 욕으로 곱게 죽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4) 마음을 움직이는 위트   진짜 위트 넘치는 공자의 말을 독자들은 평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가장 좋은 보기 중 하나가 『공자가어』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다. 자공이 죽은 자에게도 지(知)가 있냐고 묻자 공자는 대뜸 “네가 죽으면 알게 되겠지.”라고 대답했다. 이는 자로가 비슷한 질문을 했을 때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38)라고 대답한 것처럼 위트가 넘친다. “말하지 않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어쩌겠는가? 이런 사람은 정말이지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39) “아는 걸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40) 이런 대목들도 같은 종류로 본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잘못하는 것이다.”41) 또 “남이 나를 몰라준다고 걱정하지 말고 알아 줄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라.”42)라는 대목은 알 ‘지(知)’43)자를 가지고 대단히 좋은 문장을 만들었는데, 위트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다. 공자는 화통한 사람이었다. 나오는 대로 말해도 모두가 이치에 합당했다. 그는 자신의 발로 여러 곳을 실제로 돌아다녔고, 또 쉬우면서도 친근한 말로 사람과 접촉했다. 부모를 섬길 때는 봉양만 해서는 안 되고 존경해야 한다면서 “봉양이야 개나 말도 다 할 수 있는 것이야.”44)라고 말한다. “부자가 될 수만 있다면 나더러 마부가 되어 수레를 몰게 해도 기꺼이 하겠다.”45)는 말도 한다. 모두가 참으로 꾸밈없는 말들이다. 여러 곳을 몸소 다녔기 때문에 늘 유머러스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나왔다. 미국의 대문호 칼 밴 도렌(Carl van Doren)은 공자의 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계문자(季文子, 계연)가 세 번 생각하고 난 다음 행동한다고 말하자 공자가 “두 번, 그 정도면 되네.”46)라고 말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는 아무리 좋은 일도 지나치면 못쓴다는 뜻으로 결단과 실천을 강조한 대목이다. 12.  공자연보   BC.551: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태어남 BC.549(3세): 아버지 사망 BC.535(17세): 어머니 사망 BC.533(19세): 결혼 BC.532(20세): 아들 공리 출생 BC.522(30세): 자로(중유), 증석(증점), 염경, 염구, 염옹 등의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 BC.518(34세): 노나라 대부 맹리자(孟釐子)가 죽으면서 그의 맏아들 맹의자(孟懿子) 등 두 아들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를 배우라고 당부함 BC.517(35세):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 BC.502(50세): 노나라 권신 공산불요(公山弗擾)가 공자를 부름 BC.501(51세): 처음 벼슬을 하여 노나라 중도재(中都宰, 산둥성 중도 현령)가 됨 BC.500(52세): 다시 사공(司空, 정1품 관직)이 되고 다시 대사구(大司寇, 형조판서)가 됨 BC.497(55세):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감 BC.496(56세): 광 땅에서 액운을 만남. 필힐이 부름 BC.495(57세): 위나라 영공을 만나 벼슬하고 남자(위령공의 부인)를 만남 BC.494(58세): 벼슬을 그만두고 위나라를 떠남 BC.492(60세):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로 가다가 환퇴에게 액운을 당함 BC.489(63세): 진나라 채나라 초나라를 거쳐 위나라로 돌아감 BC.488(64세): 다시 위나라(출공 재위4년)에 벼슬을 함 BC.484(68세): 노나라 계강자(노나라의 실권자)가 공자를 부르자 고국을 떠난 지 14년 만에 노나라로 돌아감. 이후 유약, 증삼, 자하(복상(蔔商)), 자장(전손사) 등의 제자를 가르침 BC.483(69세): 아들 공리 사망 BC.481(71세): 제자 안회 사망. 제나라 진항이 임금을 시해하자 노나라 임금에게 토벌을 간청했으나 실현되지 않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사로잡히자 낙심하여 『춘추』 저작을 절필함. BC.480(72세): 자로가 위나라 난리에 사망 BC.479(73세): 공자가 세상을 떠남 참고문헌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맹자(孟子)』 『공자전(孔子傳)』, 전목(錢穆), 삼련서점(三聯書店), 2002. 『논공자적유묵(論孔子的幽黙)』, 임어당(林語堂), 무소불담합집(無所不談合集) 『유머와 인생』, 김영수옮기고엮음, 아이필드, 2003. 『용인』, 리수시편저, 김영수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3. 『백양 중국사』, 백양, 김영수역, 역사의 아침, 2014. 『중국역대명인승적대사전』, 상해문예출판사, 1995. [네이버 지식백과] 공자 [孔子, kǒng zǐ] - 유교의 시조 (중국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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