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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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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것이 알고싶다] - 할리우드 댓글:  조회:3143  추천:0  2019-11-11
영화사전 할리우드   [ Hollywood음성듣기 ] [1]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지구.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에서 약 12㎞, 비벌리힐스 동쪽에 있는 지역.  [2] 세계적인 영화 산업의 중심지.  [3] 미국 대자본 영화 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는 로스앤젤레스 교외로 영화 산업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인구가 1천 명도 안 되는 곳이었다. 1908년 영화특허회사(Motion Picture Patents Company)사가 설립되자 많은 독립 영화사들이 미국 동부의 강력한 법적 규제와 트러스트 집단의 견제를 피해 남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1910년 겨울, 바이오그래프(Biograph)에서 일하던 D. W. 그리피스(D. W. Griffith)는 자신의 영화사를 이 지구에 두었다. 이 회사가 바로 네스터사(Nestor FilmCompany)인데 실질적으로 1911년 10월 27일 로스앤젤레스시 교외, 할리우드라고 불리우는 곳에 사무실을 열었다. 1911년까지 거의 20여 개의 독립 영화사가 할리우드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화창한 날씨, 사막과 산, 바다로 이어지는 다양한 풍경, 값싼 부동산이라는 천혜의 조건은 영화를 만드는 데 매우 이상적인 곳이었다. 땅값이 쌌으므로 페르난도 계곡에 유니버설 시티(Universal City)와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스튜디오가 들어설 수 있었다. 1920년까지 할리우드 주변에 세워진 50개의 스튜디오가 미국 영화의 90%를 제작했다. 영화 스튜디오는 매우 전문화된 제작 지향적인 공간이었다. 각 스튜디오는 영화 제작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완벽하고 신속하게 구현하기 위해 감독, 촬영 기사, 음악가, 배우를 비롯해 많은 조직과 인원을 보유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메이저 스튜디오로는 엠지엠(MGM), 패러마운트(Paramount), 20세기 폭스(20th Century Fox), 유니버설(Universal),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thers), 알케이오(RKO), 콜럼비아(Columbia) 등을 들 수 있다. 할리우드는 이 시기 연간 400~500편을 제작했는데 대개 미국인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는 영화였다. 2차 세계대전 후 할리우드는 스튜디오 시스템 붕괴로 소멸의 위기에 처했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몰락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했는데 우선 1948년 미국 대법원은 메이저 스튜디오가 영화관을 계열로 지배하는 것을 불법화했다. 또 텔레비전이 등장하여 영화 관객이 감소했고 유럽 영화가 일취월장해 세계 시장을 잠식했으며, 영화 제작의 경제적 측면에서 스튜디오 제작보다 야외 및 해외 촬영이 더 효율적인 것으로 판명됐다. 할리우드는 와이드 스크린을 도입해 로버트 와이즈(Robert Wise)의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 1965)을 성공시키는 등 대작을 연이어 내놓았으나 결국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시기 스튜디오는 임금 지불에 차질을 겪으면서 재산과 부동산을 압류 당하기 시작했으며 독립 영화사와 TV방송사에 스튜디오를 대여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오늘날 대부분 메이저 영화사들은 대기업에 속해 있으며 여전히 많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메이저 영화사는 이제 제작과 배급을 담당하면서 독립 영화 제작에 자본을 투자한다. 때때로 기자재를 대여하기도 하고, 그들이 투자한 영화나 다른 회사가 투자한 영화를 배급하기도 한다. 미국의 관객 수는 1980년대에 크게 증가해 10년 동안 총 매표 수익은 두 배로 늘어나 50억 달러에 달했고 비디오 판매와 대여도 폭발적으로 증가해 비슷한 수익을 올렸다. 동시에 세계 시장은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해 1993년 한 해에 거의 8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오늘날 메이저 영화사로는 디즈니(Disney), 패러마운트, 워너 브러더스, 엠시에이 유니버설(MCA/Universal), 20세기 폭스, 콜럼비아 트라이스타(Columbia Tristar)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최근의 영화는 이른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multi use)의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즉 개별 영화는 상영 수입뿐만 아니라 DVD와 홈 비디오, 케이블 영화 채널, 텔레비전으로 이어지는 배급 라인과 캐릭터 산업과의 연계 등으로 수익을 증폭시킨다. 세계적으로 영화는 이제 대중문화 산업의 중심이다. 영화계 뉴스는 이제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출연료 협상을 벌이는 스타, 독점 경쟁을 벌이면서 자산을 매각하고 인수해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제작자, 스타 못지않게 돈을 버는 영화감독, 2천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출연료로 받아 영화 제작 예산의 많은 부분을 가져가는 영화배우에 관한 소식이다. 영화에 드는 엄청난 규모의 자금과 흥행을 점치기 어려운 점 때문에 이미 성공을 거둔 영화의 형식과 틀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열중하기도 한다. 2003년 미국 영화 산업은 자국에서 95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으며 해외에서 108억 달러를 벌여들였다. 2003년 미국에서 2억 5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영화는 모두 7편이었다. 할리우드는 거의 언제나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하려고 하는데 이런 영화는 가장 안목이 떨어지는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는 수준으로 만들어진다.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제 2수출 품목으로 세계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으며 세계 시장에서 총수익 중 40% 이상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할리우드 [Hollywood] (영화사전)   ======================///   할리우드가 LA에 있는 있는 이유는 LA시에 한 지역이기 때문 입니다.   할리우드는 180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이 거주를 했습니다. 초창기에는 농사를 짓던 농장 지역이었습니다. Hollywood 라는 이름은 할리우드를 개발하고 할리우드의 아버지"로 알려진 H. J. Whitley 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이 사람이 이곳에 신혼여행을 와서 중국 사람이 수레에 나무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무엇을 하냐고 묻자, hauling wood(나무 운반)을 한다고 한 것에서 유래를 했다고 합니다.   도시가 된 것은 1903년입니다. 그리고 바로 1910년 로스앤젤레스 시와 통합을 하게 됩니다.   미국의 영화 산업은 초창기에 미국 동부 뉴저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Thomas Edison의 영화 사진 회사 (Motion Picture Patents Company가 대부분 제작을 했는데, 영화 필름에 대한 특허 때문에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 제작 여건이 좋지 않자, Edison의 특허를 피할 수 있는 서부로 이전을 하게 되어 1910대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 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할리우드에서는 1911년에 최초로 영화가 촬영이 되면서 파라마운트 (Paramount), 워너 브라더스 (Warner Bros), RKO (R), 콜롬비아 (Columbia)등 4대 영화사가 1920년대부터 스튜디오를 두고 영화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1900 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할리우드는 영화 엔터테인먼트의 성지와 같은 위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   두산백과 할리우드   [ Hollywood음성듣기 ] 요약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지구. 영화의 중심지. 이미지 크게보기 할리우드 간판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13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1910년에 시(市)의 일부가 되었다. 1920년 영화촬영소가 설립되면서 발전하였다. 미국의 주요 영화회사에 대한 중앙배역사무소(中央配役事務所)와 영화박물관 등이 있어 미국 영화계의 총본산 구실을 한다. 할리우드볼(Hollywood Bowl)이라고 불리는 1919년에 건설된 유명한 야외극장과 그리피스 공원에 있는 연극 원형극장, 콘크리트 앞뜰에 많은 배우들의 손바닥 또는 발바닥 도장이 찍혀있는 중국극장 등이 있다. 할리우드 지구 서쪽에 인접한 비벌리힐스 일대는 부호나 영화배우가 많이 사는 고급주택지이며, 선셋 대로(大路)가 할리우드를 동서로 관통하여 비벌리힐스와 이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할리우드 [Hollywood] (두산백과)      
1    [세계속에서] - 전쟁속에서 피여난 "순애보" 댓글:  조회:3449  추천:0  2019-11-11
6·25 와중에 꽃핀 美해병대원과 한국 여성의 '순애보'  2019.11.10.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해리스 美대사, 92세 해병대원 조지 램프먼 소개 / 1949년 주한 대사관 보안요원으로 한국에 첫발 / 대사관 근무하던 한국 여성과 사랑… 1950년 결혼 / 2015년까지 해로… "그런 여성은 또 없을 겁니다" 미국 해병대 창설 기념일(11월10일)을 맞아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가 70년 전에 주한 미국 대사관 보안을 책임졌던 90대 노(老)해병 용사를 한국인들한테 소개했다. 이 노병은 6·25 전란의 와중에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60년 넘게 해로한 것으로 전해져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해리스 대사는 10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1775년 11월10일 필라델피아에서 출범한 미 해병대가 창설 224주년을 맞았음을 알리고 축하의 뜻을 전했다. 그는 “이번에 열린 창설 기념 파티에는 1927년에 출생하고 44년 입대해 49년 미국 대사관의 첫 보안요원이 된 조지 램프먼 준위가 함께했다”면서 램프먼 준위와 찍은 사진도 게재했다. 미국이 외국에 있는 자국 대사관 등 외교공관 보안을 해병대에 맡기고 있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위해 미 해병대는 산하에 ‘대사관경비대(Marine Corps SecurityGroup)’라는 전문 부대를 두고 있다. 눈길을 끄는 건 램프먼 예비역 해병 준위와 한국의 깊은 인연이다. 그는 해병대 입대 6년차이던 1949년 신생 대한민국에 갓 설치된 미국 대사관의 보안 업무를 맡아 한국에 처음 입국했다. 램프먼 준위는 당시 대사관에 근무하던 3살 아래의 한국인 여성 이숙이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이듬해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졌다. 현역 해병대원인 램프먼 준위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서울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해 9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으로 미군 등 유엔군과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했다. 3개월 여 만에 대사관에 복귀한 램프먼 준위는 오랫동안 마음에 둬 왔던 일을 기어이 실행에 옮겼다. 이숙이씨와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1950년 10월 중공군이 북한을 도와 참전함으로써 전세가 다시 뒤집히고 말았다. 서울이 도로 적군 수중에 떨어졌고 램프먼 준위 부부는 다른 대사관 식구들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듬해인 1951년 부부는 새 삶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수도 워싱턴 외곽에 정착해 자녀 4명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램프먼 준위에게 2015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 모처럼 온가족이 이숙이씨 고향인 서울 여행에 나선 것이다. 램프먼 준위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태어나 자라고 아버지 역시 한때 자국 대사관 보안요원으로 일했던 도시 곳곳을 둘러보며 색다른 감상에 젖었다. 그런데 이숙이씨가 가족이 투숙한 호텔 객실에서 수면 도중 그만 급서하고 말았다. 향년 85세였다. 2년이 지난 2017년 램프먼 준위는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6·25 전쟁을 나와 함께 온몸으로 겪은 여성(부인)을 기리는 조그만 기념물을 서울에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녀가 해준 것처럼 나를 보살필 수는 없었을 거예요.” /김태훈 기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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