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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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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향사람] - "타향에서도 우리 민족을 빛낼수 있는 일을 하는것" 댓글:  조회:2375  추천:0  2019-11-26
음악의 뿌리를 찾아 민족예술의 혼을 불태워 (ZOGLO) 2019년11월25일  인물이름 : 김예풍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김예풍 교수      문화부 민족민간문예발전중심 “서남연구중심”부주임, 중국소수민족음악학회 회원,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상무리사, 사천민족문화예술연구회 리사, 사천성음악가협회 회원, 사천 중국서부연구와 발전촉진회 챵(羌)학 연구원 특약 부원장 등 수많은 직함을 가지고 있는 김예풍 교수는 현재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중국소수민족예술, 음악과 무용학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예풍 교수의 주요 연구령역은 작곡과 음악리론, 민속과 의식음악 등이다.   1959년 연길에서 태여난 김예풍 교수는 남들보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음악을 시작한건 아니였습니다. 시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문학에 흥취를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늦게 손풍금을 접하게 되였고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경연에 참가해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 뒤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였고 작곡을 배우게 되였습니다. 따로 음악에 끼가 있는 건 아니였고 작곡 역시 창작이기때문에 문학과 갈라놓을수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   김예풍 교수의 아버지는 저명한 조선족 시인 김성휘 시인이다. 문학을 좋아하게 된것도 시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강박은 없었고 단지 집에 책이 많았고 책밖에 없었기 때문에 책과 친해지게 되였다고 한다.   1986년, 김예풍 교수는 연변대학예술학원 작곡학부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서 교편을 잡았다. 그 해에 마침 좋은 기회로 상해음악학원에 연수를 떠나게 되였다.   “그때 당시 연변대학 교장이였던 김삼진 교장님께서 연변의 음악을 발전시키고자는 큰 뜻을 안고 저희들에게 상해음악학원 지휘학부에서 연수할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남자 마자 바로 상해로 가서 3년동안 작곡공부를 했습니다.”   1986년,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김예풍 교수는 음악학부 작곡교연실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1998년, 아직 공부에 대한 끊을 놓지 못한 김예풍 교수는 자신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작곡학부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0년, 석사연구생을 졸업한 그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음악학부에서 4년만에 동아시아 중한일 음악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 서남민족학원이 서남민족대학으로 바뀌면서 예술학원이 새로 설립되였다. 인재가 필요했던 학교의 관계자들은 인재영입차 한국에 가서 수소문하게 되였고 김예풍 교수를 발견하고 바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의향을 물었다.   그렇게 되여 2004년, 김예풍 교수는 연변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남아 음악인,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한국에서 음악사 공부를 하면서 서남지역의 음악의 뿌리가 아주 깊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서남 지역이 저의 연구방향과 적합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서남민족대학을 선택하게 되였습니다.”   서남민족대학에 있는 약 15년동안의 시간에 김예풍 교수는 많은 일들을 했다.   선후하여 국가 과학기술기초사업 전문항목 ,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의뢰항목 (사천 음력설편), 교육부 인문사회과학연구 기획기금항목 , 사천성 교육청 교육교학개혁 과학연구중점항목 등 5개 항목을 주관했고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전문항목,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전문항목,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의뢰학목등 3개 항목을 공동 합작했다.   이밖에 , , , , 등 5권의 학술전문서적을 출판했고 화성학교재 을 출판했으며 , 등 책 2권을 번역했고 , 등 서적을 공동 편찬했다.   또한 , , 등 학술기간지에 20여편의 학술론문을 발표했고 그중 는 중국소수민족음악학회 제3회 “학회컵”론문평선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김예풍 교수는 창작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작곡한 , 등 노래는 전국음악류 핵심기간지에 발표되였다.   “머타먼 타향 사천성에서도 이렇게 무언가를 해낼수 있다는것 또한 우리 민족을 빛낼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와서 다시 돌아보면 뿌듯하기도 합니다. ”   김예풍 교수는 처음 사천에 왔을때 언어장벽때문에 힘들었다고 한다. 성도의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서 학원의 통지도 잘못 전달 받을 때가 많았고 이밖에 조습한 기후,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로움 등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는 오직 학술연구 하나만 바라보고 버텨냈다.   민요악보수집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방학이면 언어도 통하지 않는 산골로 무작정 차를 몰고 지도를 보면서 찾아갑니다. 술과 간단한 안주를 사들고 마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말을 겁니다. 그렇게 함께 일도 도와주고 하면서 일이 끝나면 집으로 따라갑니다. 같이 술 한잔 기울이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춥니다. 그때 록음기를 꺼내서 록음을 하는거죠. 처음 2,3년은 그렇게 했던것 같습니다. 민요수집하느라고 방학도 없었고 명절도 없었죠.”   한번 마을로 찾아가면 며칠씩 그곳에서 묵어야 한다. 대부분 깊은 산골이라서 길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향진에 차를 세워놓고 배낭을 메고 해발이 높은 곳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산이 많다 보니 가끔씩 비가 내려서 산사태가 발생하면 산골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렇게 개학까지 나오지 못했을때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은 가기로 되였던 마을이 있었는데 갑자기 세미나 일정이 잡혀서 못가게 되였다고 한다. 그렇게 2시에 회의장에 들어가게 되였고 2시20분에 지진이 일어나서 그 마을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날이 바로 2008년 5월12일이였다.   이런 렬악한 조건을 마다하고 끝까지 견지한 김예풍 교수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김예풍 교수는 자신이 편찬한 책, 자신이 수집한 민요로 작곡을 가르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한개 민족의 민요를 가지고 작곡법을 가르치는 건 이 책이 유일합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소수민족의 음악도 공부하면서 작곡원리도 배울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   김예풍 교수의 안해 최선자 가수도 현재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에서 성악을 가르치고 있다.   김예풍 교수는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는 교단에 설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남지역 소수민족들의 문화를 조선말 책으로 편찬하여 한국,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본과 교류하는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조선족의 민족 우월성을 발휘하여 문화교류에서 교량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김성휘 시인의 뒤를 이어서 또 하나의 예술령역에서 자신의 기량을 널리 펼치는 김예풍 교수, 우리 민족의 숨은 보석이 따로 없다.   앞으로 그의 강한 정신력과 책임감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많은 본보기가 되기를 바란다.        /중국조선어방송넷
4    [그것이 알고싶다] - 2000여년전의 그린 벽화... 댓글:  조회:1861  추천:0  2019-11-26
그리스 신화 그린 관능적 벽화 伊폼페이서 첫 공개  2019년11월26일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와 스파르타 왕비 레다의 모습이 그려진 폼페이의 벽화. [EPA=연합뉴스]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이탈리아 폼페이의 관능적 벽화가 25일(현지시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됐다고 ANSA 통신이 보도했다. 고대 로마시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이 벽화는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에 의해 임신하는 그리스 신화 내용을 묘사한다. 작년 11월 폼페이 유적지 내 상류층 저택 침실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굴됐다. 2천년이 지났음에도 그림의 형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물론 색감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해 고고학계와 미술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레다와 제우스 간 관계는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내용 가운데 하나로, 고대 로마의 폼페이에선 이를 소재로 한 프레스코화가 꽤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프레스코는 벽면에 석회를 바른 뒤 수분이 마르기 전에 채색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인류 회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기술 또는 형태로 인식된다. 폼페이는 고대 로마제국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으나 서기 79년 8월 인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한순간에 폐허가 됐다. 고고학계는 지금도 폼페이에서 꾸준히 유적·유물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엔 고대 로마인들의 생활상과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벽화 등이 잇따라 출토돼 시선을 끌었다. 지난달에는 검투사들을 상대로 매춘을 한 여관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두 명의 검투사가 혈투를 벌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발굴된 바 있다.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에서 발견된 '검투사' 프레스코화. [EPA=연합뉴스]
3    [그것이 알고싶다] - 천재 화가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 미완성 그림이라고?!... 댓글:  조회:1829  추천:0  2019-11-26
천재 화가 다빈치 '모나리자' 미완성 이유 찾았다? 2019년5월8일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포함한 다수의 미완성작을 남긴 것은 오른손의 마비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6일(현지시간) 폭스뉴스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의료전문가들은 영국왕립의사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RSM저널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다빈치가 말년에 오른손 마비로 작품을 제작하는 데 애로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로마에 있는 빌라 살라리아 클리닉의 성형외과 전문의 다비디 라제리와 폰테데라 병원 신경외과 전문의 카를로 로시는 16세기의 화가 지오반 암브로지오 피지노가 그린 다빈치의 초상화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이 초상화에 등장하는 다빈치의 손은 옷으로 감겨 있는 데다 뻣뻣하고 수축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종전의 연구에서는 이를 뇌졸종 탓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두 전문가들은 다빈치가 평소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썼고 오른손으로는 채색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른손에 이상이 생긴 뒤로는 팔렛을 잡거나 붓을 쥐는 데 문제가 생긴 것으로 추정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명화 '모나리자'는 1503년에 착수됐으나 다빈치가 숨진 1519년에도 그의 화실에 남아있었고 완성작은 아니라는 것이 미술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다. 라제리 박사는 다빈치가 죽음을 앞둔 5년 동안 제자를 지도하고 데생을 계속했으면서도 상당수의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연유는 바로 오른손 마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빈치의 어색한 손은 뇌졸중 이후의 근육 경직에 의한 주먹쥔 손이라기 보다는 척골신경마비에 의한 이른바 '갈퀴손'으로 진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라제리 박사는 실족이 뇌졸중 보다는 더 설득력을 가진 원인으로 본다면서 그가 순간적으로 넘어지면서 상지골에 부상을 입은것이 척골신경마비를 초래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척골신경은 어깨에서 새끼손가락까지 뻗어있으며 손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관장한다. /한국경제
2    [별의별] - "이색 수염 겨루기 대회" 댓글:  조회:2348  추천:0  2019-11-26
'수염으로 이게 가능해?' 2019년 최고의 수염 한 자리에 (ZOGLO) 2019년11월25일  상남자들이 모여 자신의 이색 수염을 겨루는 대회가 있다. '2019 National Beard and Mustache Championships'가 그것이다. 1990년대 초부터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열린 이 대회는 이상한 모양의 콧수염, 가장 긴 턱수염까지 여러 종류의 콧수염과 턱수염 모양을 뽑는 대회로 올해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다. 크게 콧수염(Mustache),반수염 (Partial Beards), 완수염(Full Beards)으로 나뉘며 각 부문은 살바도르 달리·귀족·헝가리안·중국인 스타일 등으로 나뉜다. 지난 2017년부터는 여성 부문도 신설됐다. 미국 온라인 매체 보어드판다는 지난 23일(현지시간) 최종 결선에 오른 30인의 모습을 공개했다. 수염 대회 참가자들은 자선기금을 모으기 위해 사진촬영에 응했고 기금은 참전용사 후원과 유기동물 보호시설 등에 기부될 예정이다. 아래는 이색 수염을 자랑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이다.
1    [그것이 알고싶다] - "에밀레종" 타종소리... 댓글:  조회:4900  추천:0  2019-11-26
  1200년 전 ‘에밀레종’ 복원, SKT 첨단기술 한‧아세안 행사 빛내 2019.11.26.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디지털데일리 최민지기자] SK텔레콤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이 한‧아세안 리더들 눈길을 사로잡았다. SK텔레콤은 미디어 기술로 1200년 전 신라시대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을 복원하고 마지막 타종소리까지 고음질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SK텔레콤(대표 박정호)은 지난 25~26일 열린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5G‧인공지능(AI) 기반 성덕대왕신종 미디어아트 ▲5GX K-팝 퍼포먼스 ▲미래형 무인장갑차 등을 선보였다고 26일 밝혔다.  지난 25일 SK텔레콤은 한‧아세안 환영 만찬이 열린 부산 힐튼 호텔 로비에 설치한 5G‧AI 기반 미디어아트 ‘선향정’을 전시했다. 바른 울림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선향정은 아세안 국가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모형 구조물과 한국 전통 수묵산수화를 담은 3면의 특수 스크린으로 구성됐다. SK텔레콤은 첨단 기술을 활용해 1200년의 시간과 경주‧부산 간 공간을 넘어 천년왕조 신라 시절 성덕대왕신종을 행사장에 복원했다. 선향정은 성덕대왕신종 타종 소리로 각국 정상과 대표단을 환영했다. 범종에는 정상이 입장할 때마다 각국 국기가 형상화되고, 특수 스크린에는 한국의 사계를 표현한 초고화질(12K) 수묵화가 살아있는 듯 움직였다. 여러 개 산수화 영상을 자연스럽게 결합시켜 초고화질 동영상으로 구현하는 SK텔레콤 ‘엣지블랜딩’ 기술이 더해졌다.  성덕대왕신종은 2003년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타종이 중지됐다. 이에 SK텔레콤은 마지막 타종 소리 음원을 AI 기반 미디어품질 개선 기술 ‘5GX슈퍼노바’를 통해 잡음 없는 고음질(FLAC) 음원으로 16년만에 복원했다.  ... ...   윤용철 SK텔레콤 커뮤니케이션센터장은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한국의 5G, 인공지능, 미디어 기술 우수성을 해외 정상과 대표단에게 소개하는 최고의 쇼케이스가 됐다”며 “앞으로도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5G‧AI 기반 실감형 콘텐츠를 지속 선보여 한국 ICT 위상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최민지 기자 =================================///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종이다. 설화에 따라 에밀레종으로 부르거나 봉덕사에 걸려있던 종이라 하여 봉덕사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1],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조선시대인 1460년 봉덕사에서 영묘사로 이전되었으며, 다시 191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높이는 3.75미터, 입 지름은 2.27미터, 두께는 11~25센티미터이다.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실측한 결과 18.9톤이다.[2] 1992년 제야(除夜)에 서른세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하였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타종하였다. 그 뒤 2001년 10월 9일, 2002년 10월 3일, 2003년 10월 3일에 타종행사를 열었으나, 이후로는 보존을 위해 이를 금하고 있다. ====================/// 일명 에밀레종인 성덕대왕 신종은 국보 29호이고 첨성대는 국보 31호입니다. 국보의 지정번호는 결코 국보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정순서를 나타낼 뿐이죠. 이 두 유물이 국보로 지정된 때는 1962년 12월 20일이라네요. 다음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것을 옮긴 것입니다.   국보는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 것 중에 제작연대가 오래 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유례가 드물고 우수하며 특이하거나,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것을 지정한다. 국보는 관보(官報)에 고시(告示)한 날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국보로 지정되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국보지정의 연혁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하여 지정되었고, 1955년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유형문화재를 모두 국보로 지정하였으며,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이 법에 의하여 1963년 728점에 이르는 지정문화재 중 116점을 국보로 지정하였다. 2001년 11월 현재 지정된 국보는 303호에 이르고 있다. 국보의 지정번호는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니고 지정된 순서를 말한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 천재학습백과 초등 스토리텔링 한국사 에밀레종의 전설     교과과정 초등학교 > 5학년 > 2학기 > 사회 5-2 > 1. 우리 역사의 시작과 발전 > 4) 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 목차 1. 눈물이 깃든 종 2. 내용 정리 1. 눈물이 깃든 종 “어째서 종소리가 이리 탁하단 말이오?” 경덕왕의 말에 봉덕사1) 스님들이 고개를 떨구었어요. “이 종은 선왕이신 성덕 대왕2)을 기리기 위한 것이오. 그런데 종소리가 이래서야 되겠소이까!” 옷자락을 팽 하니 뿌리치며 경덕왕은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어요. 스님들은 화가 난 경덕왕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구부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잠시 뒤, 주지 스님3)이 먼저 말문을 열었어요. “종이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정성이 부족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힘을 내서 시주4)를 모아 오세요.” 주지 스님의 말에 한 스님이 대답했어요. “좋은 종을 만들려면 정성어린 시주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신라의 백성들은 가난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맞습니다. 귀족들은 사치를 누리고 있지만 백성들은 가난하여 매일 끼니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시주를 얻는 것은 힘들 뿐 아니라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스님들 모두 근심어린 얼굴로 백성들을 염려했어요. 결국 봉덕사 스님들은 경덕왕이 죽을 때까지 제대로 울리는 종을 만들지 못했어요. 경덕왕의 뒤를 이은 혜공왕이 다시 봉덕사를 찾아왔어요. 혜공왕은 아직도 비어 있는 종루5)를 바라보며 스님들에게 부탁을 했어요. “아버님의 꿈을 꼭 이루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희들이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스님들은 종을 만들기 위해 다시 시주를 받으러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봉덕사 주지 스님이 낡고 허름한6) 집에 들러 어렵게 말을 꺼냈어요. “조금이라도 좋으니 시주를 해 주십시오.” “주지 스님이 직접 오시다니…….” 가난한 집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이를 데리고 나왔어요. “저희 집에 있는 것이라곤 이 아이뿐입니다.” 여인은 아이를 주지 스님에게 건네려 했어요. “아, 아닙니다. 아이를 시주로 받을 수는 없지요.” 주지 스님은 깜짝 놀라며 얼른 발길을 돌렸어요. 가난한 집에 시주를 하라고 한 것을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했지요. 그 날 밤 주지 스님은 꿈을 꾸었어요. 깜깜한 하늘에서 한 줄기 빛과 함께 이런 말소리가 들려 왔지요. “봉덕사의 종을 제대로 울리려면 그 아이가 필요하니 어서 데려오거라.”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꾼 주지 스님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어요. 주지 스님은 밤새 고민을 하다 아침이 오자 곧바로 여인을 찾아갔어요. “부인, 전에 말씀하신 아이를 시주로 내어 주시겠습니까?” “꼭 원하신다면 보내 드려야겠지요.” 여인은 아이를 내어 주며 눈물을 흘렸어요.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주지 스님도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여인을 위로했어요. 얼마 후, 봉덕사에서는 새로운 종을 만들며 아이를 넣었어요. “부디 좋은 세상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거라.” 주지 스님은 아이의 넋을 위로하는 기도를 올렸어요. 그러자 그 동안 계속 깨지고 찌그러지던 종이 너무도 쉽게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마침내 종이 완성되었어요. 성덕 대왕 신종(국보 29호)통일 신라 시대의 범종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범종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상원사 동종과 함께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종이다. 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혜공왕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봉덕사로 찾아왔어요. “그토록 기다리던 종이 완성되었다니……, 어서 울려 보거라.” 혜공왕의 명을 받은 스님들이 힘껏 종을 쳤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종소리는 엄마를 간절하게 부르는 아이의 소리 같았어요. 종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할 때 한 여인이 털썩 주저앉으며 목놓아 울었어요. “아가야, 네가 나를 원망하는구나. 이 어미를 용서해 다오.” 그녀는 얼마 전 아이를 시주로 바친 여인이었어요. 사람들은 어미를 부르는 듯 슬픈 소리를 내는 이 종을 ‘에밀레종7)’이라고 불렀어요. 성덕 대왕 신종의 비천 상(飛天 象)종에 조각된 비천 상은 신라의 여러 문양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에밀레종은 높이가 3.75미터, 무게 18.9톤에 이르는 거대한 종이에요. 크기뿐만 아니라 겉면에 새겨진 조각은 너무도 아름다우며, 소리 또한 세계의 어떤 종에서도 들을 수 없는 뛰어난 음을 들려 주지요. 에밀레종은 우리 조상이 남긴 최고의 보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답니다. 2. 내용 정리 신라의 경덕왕은 선왕인 성덕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종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종을 만들지 못하고 죽자 그 뒤를 이은 혜공왕이 스님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어느 날 봉덕사 주지 스님은 꿈에서 아이를 넣어야만 종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지 스님은 지난 날 아이를 시주로 내놓겠다던 집을 찾아가 아이를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종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소리는 마치 ‘에밀레’ 하고 아이가 어머니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종을 에밀레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출처: 생방송 한국사 3 [네이버 지식백과]에밀레종의 전설 (천재학습백과 초등 스토리텔링 한국사)   ===============================/// 한국문학 에밀레종설화     구분 고전 저자 작자미상 작품해설 구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사물이 왜 그러한지를 설명해 주는 유래담(由來譚)에 속하는 설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에밀레종이 어린애를 희생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에밀레종은 신라(新羅) 제36대 혜공왕(惠恭王) 6년 12월에 완성된 봉덕사종(奉德寺鐘) 또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이칭(異稱)인데, 이 종에 대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하나는 나라에서 주종(鑄鐘) 작업을 계속 실패하게 되자 모든 사람이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주종 실패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부처님께 시주할 것이 없으니 어린애라도 가져가라’고 한 여인의 불경한 말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인은 그 여인의 아이를 데려와야 종이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절의 주지(住持)는 정재(淨財)를 거두러 다녔던 중들을 불러 어떤 여인이 그러한 말을 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왕명(王命)으로 여인의 아이를 빼앗아다가 끓는 쇳물에 어린 애를 던진다. 그 뒤에야 종이 완성된다. 다른 하나는 종을 만드는 공장(工匠) 일전(一典)이 계속 주종에 실패하자 모두가 비난한다. 종을 만들지 못하자 일전의 누이는 자기의 부덕(不德)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여긴다. 그 때 시주 온 중이 그녀에게 어린애를 인주(人柱)로 해야 종이 완성된다고 일러준다. 누이는 고민하다가 오빠를 위하여 자신의 딸을 주종을 위해 바친다. 그래서 종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두 이야기는 주종을 위해 어린애를 강제로 빼앗아 희생시키는 경우와 자진하여 희생하게 하는 데에서 서로 대조적인 관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모두 인신공희담(人身供犧譚)의 모티프를 담고 있다. 현대소설 가운데 박용숙(朴容淑)의 단편 과 박용구(朴容九)의 장편 은 모두 이 설화를 소재로 작품화하고 있다. 관련이미지 25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에밀레종설화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종이다.  봉덕사에 걸려 있던 종이라 하여 봉덕사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742년부터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봉덕사에 달았다가 조선시대인 1460년수해로 봉덕사가 없어지자 영묘사로 옮겼으며, 다시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였다. 1915년8월 종각과 함께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높이는 3.75미터, 입 지름은 2.27미터, 두께는 11~25센티미터이다. 무게는 1997년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실측한 결과 18.9톤이다.   성덕대왕신종의 특징;ㅡ 성덕대왕신종의 특징은 장중하면서도 맑은 종소리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에밀레종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로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세 번 타종되었다. 이 종이 만들어진 770년 12월 14일 이후 그것이 종각에 걸려 있는 한 변함 없이 서라벌에서 울려온 종소리였다. 낮게 내려앉은 저음이지만 그 맑은  여운은 긴 파장을 이루며 한없이 퍼져 나가는 그 소리는 장중하면서 맑은 소리였다. 사람들은 이 소리를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다."고 하였다.   에밀레 종;ㅡ 성덕대왕신종이 에밀레 종으로 바뀌게 된 시기는 명백히 일제 강점기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한 자료는 없다. 따라서 계획적이고 의도를 알 수 있는 단서는 1925년8월 5일자 조선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작문예란에 렴근수라는 무명인의 이름으로 《어밀네 종》 동화가 올라있다. 얼마 후 친일 극작가 함세득이 많은 살을 붙인 희곡을 써서 현대극장에 올린다. 성덕대왕신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순한 동화처럼 씌었던 렴근수의 단편 동화 《어밀네 종》은 에밀레 종 이야기가 최초로 나타난 자료이며, ‘어밀네’를 처음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즉 에밀레종이란 말은 일제치하에 친일극작가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출처문화재청 자료 ==========================/// 천년고도 경주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리를 내는 종이 있다. 771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이다. 이 종에는 가슴 아픈 설화가 전해진다. 당시 구리 12만근으로 큰 종을 만들기로 했으나 아무리 해도 쇠가 붙지 않았다. 한 승려의 조언대로 갓난아기를 쇳물이 끓는 가마에 넣었더니 종이 깨지지 않았다. 이후 종을 칠 때마다 죽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낸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예전에 인신공양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과학자들이 검증에 나선 일이 있다. 1998년 국내 한 연구기관이 에밀레종에서 시료를 채취해 분석했더니 사람 뼈에 있는 인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인신공양이 없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제조 과정에서 인골 성분이 쇳물 위에 떠올라 제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아기 울음과 흡사한 “에밀레~ 에밀레~”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일까. 이는 맥놀이 현상과 관련이 깊다. 맥놀이란 진동수가 비슷한 두 소리가 중첩돼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종소리는 치는 표면의 위치에 따라 진동수에서 미세한 차이가 발생한다. 이 소리들이 뒤섞여 신비스러운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에밀레종 소리가 이번에 국내 최첨단 기술로 복원됐다. 25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환영만찬에선 새로 복원된 에밀레종이 단연 인기였다. 각국 정상들은 종을 배경으로 깊은 울림의 종소리를 들으며 기념촬영을 했다. 에밀레종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2003년부터 타종이 중단됐으나 SK텔레콤은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해 종소리를 살려냈다. 슬픈 에밀레종 소리에는 백성의 안녕을 염원하는 대왕의 애민정신이 녹아 있다. 종에 새겨진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큰 소리는 천지에 진동하고 있으나 귀로 듣고자 해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국가 지도자들이 들어야 하는 큰 소리는 바로 민심(民心)의 소리다. 그것은 귀가 아닌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다. 1200년 만에 ‘큰 소리’가 이 땅에 복원됐지만 마음으로 듣는 지도자가 없다. 애끊는 민심의 소리가 ‘에밀레’ 소리보다 슬프다.   /배연국 논설위원 ///세계일보 ===================================/// [fn스트리트] 성덕대왕 신종 파이낸셜뉴스2019.11.26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공유 더보기 인쇄 글자 작게 글자 크게 한국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물 가운데 하나가 종이다. 삼국유사에는 한국종이 6세기부터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500년 동안 수많은 종이 제작됐다. 현존하는 한국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오대산 상원사종(725년)이다. 그러나 모양과 소리가 아름답기로는 성덕대왕 신종(771년)을 최고로 꼽는다. 성덕대왕 신종은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인신공양의 슬픈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35대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대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구리 12만근을 내려 큰 종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덕이 부족한 탓인지 아무리 해도 쇠가 붙지 않아 실패를 거듭하다 세상을 떴다. 아들 혜공왕 때에 이르러 어느 여인의 갓난아기를 끓는 쇳물에 던져넣자 놀랍게도 종이 완성됐다. 이후 종을 칠 때마다 죽은 갓난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덕대왕 신종에는 과학의 신비도 함께 스며 있다. 김석현 교수(강원대)는 "미세한 비대칭성 맥놀이 현상이 아기울음 같은 소리를 내게 한다"고 분석했다. 맥놀이란 주파수가 비슷한 두 소리가 중첩돼 규칙적으로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현상이다. 그에 따르면 종을 칠 때 표면의 위치에 따라 두께와 모양의 차이로 미세한 차이를 지닌 진동수의 소리가 난다. 이 소리들이 뒤섞여 에밀레종 특유의 신비스러운 소리가 난다는 설명이다. 성덕대왕 신종이 1200년 시간의 벽을 넘어 한·아세안 정상회담 만찬장에 신비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25일 부산 힐튼호텔 만찬장 입구에서는 실물의 5분의 4 크기로 재현된 에밀레종이 각국 정상들을 맞았다. SK텔레콤이 최첨단 5세대 이동통신(5G)과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입체 홀로그램 이미지와 음원을 복원한 것이다.   신종은 각국 대표단이 입장할 때마다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이들을 환영했다. 한국과 아세안의 평화와 공동번영도 기원했다. 전통문화와 최첨단 과학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어서 더욱 뜻깊다. /염주영 논설위원  ///파이낸셜뉴스 ===================================/// ▲  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는 성덕대왕신종.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신라시대 궁궐터인 월성 곁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경주시 인왕동)은 들러야 할 이유가 많은 곳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너른 마당에 서있는 큰 범종 소리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다. 신라 771년 12월 14일에 만들어진 한국의 대표하는 범종으로 국보 29호다. 범종(梵鐘)은 불교 사찰에 걸려 있는 커다란 종으로 성덕대왕신종 또한 봉덕사라는 절에 있었다. 아쉽게도 녹음된 종소리가 나오지만 진중하고 여운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가까이 다가가면 종의 표면을 장식한 꽃구름 속의 선인(仙人)과 2쌍의 비천상(飛天像)을 볼 수 있다.    ▲  범종 앞에 서면 녹음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  멋진 그림이 새겨져 있는 성덕대왕신종.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종소리가 좋아 몇 번 더 들었는데 별칭처럼 '에밀레~' 하고 울지 않는다. 박물관 문화해설사에게 이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에 대해 물어보았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듣게 됐다. 인신공양설화는 동아시아 문화권에 흔히 나오는 설화인데, 놀랍게도 에밀레종 설화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처음 나왔다고 한다. 이전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고. 에밀레종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1925년 8월 5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창작문예란에 실린 렴근수(廉根守) 작가의 이라는 동화다. 1943년 친일 극작가 함세덕이 희곡 을 집필하고 현대극장에 상연했다. 이후 에밀레종 설화는 급속도로 대중 속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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