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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 아부제,이게 무슨 변임두.> 길순이는 무작정 원도에게 매달렸다. 길순이는 지금 눈이 하얗게 뒤집어져 제 정신이 아니였다. <우리 쥔을 왜 끌고 가우.안돼우...안돼우.> <이게 왜 이래? 귀찮게...> 땅땅보순사가 자기앞을 막아서는 길순이를 탁 밀쳐버렸다. 길순이가 저만치에 나가 궁둥방아를 찧었다. <어서 들어가, 난 인차 풀려나오니까.> <여보-> 걸음이 빠른 숙자와 <<저기나>>가 뒤쫓아와서 길순이를 부축했다. <여보-> <거기 서우.> 저만치에서 준식이와 문수가 달려오고있었다. 이들도 일하다가 이쪽켠의 정경을 알아본 모양이다. 곁에 다가온 준식이는 숨을 헐떡거렸다. <거...기 서우.나...나 이 마을 갭쟁이우.무슨 일루 마을사램 잡아가는지 알구싶수.> <갑재? 갑장이 뭐야?> 순사 도놈은 마주보며 키들거렸다. <정 알고싶음 알려주지. 치안소란죄에 군견죽인 죄야. 군견이 뭔지 알만한가?>군경?군경이 뭔데?<형님, 영수 에미 데리구 들어가우. 뭐, 인차 풀려날게우. 큰일두 아니니까.> 말을 마치고 돌아선 원도는 제 혼자 썩썩 걸어갔다. <영수 아부제-> <인차 풀린다는데 이랑마우. 그러다가 얼나(애기)떨구겠수.> <순사들이라두 김선상을 어찌 해친다구.> <제수, 이럴 때가 아니우 빨리 조기술원 찾아가서 방도 세워야지.> 그렇지, 길순이는 그제야 조기운을 생각했다. 길순이는 마을로 급히 향했다.
한편 구영벽마을에서는 또다시 란리가 터졌다. 조기운과 헤여진 원도가 량수천자경찰서 순사들에게 잡혀간지 조금 지나 온성에서 나온 수비대들이 소위 가네다니의 인솔하에 강삭배를 타고 구영벽으로 덮쳐들었다. 맨앞에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최십장이 살기등등해서 섰고 그옆에는 천규가 섰다. 천규는 여기서 살았다는 조건으로 앞에 나선것이다. 천규가 원도네 집을 가리키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총잔으로 여기저기 마구 찔러보며 구석구석을 수색했다. 길순이가 도착한것은 이때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길순이는 말 한마디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남편이 큰일은 저지른것만 같았다. 천규는 길순이를 보자 고개를 숙이고 비실비실 뒤걸음쳤다. <쥔은 어디 갔는가?> 최십장이 길순의 곁에 다가서며 으르렁거렸다. <쥔은 금방 량수천자경찰서에서 잡아갔수.> 뒤미처 도착한 준식이가 길순이 대신 대답했다. 앞마당에 마을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찰서?거긴왜 끌려가?> 보매 이들은 원도의 일을 모르고있었다. 그러니 갈래가 다른것이다. <큰골에서 밭자리루 해서 장지주허구 싸우다가 군긴지 군경인지 죽였다우.> 군견? 최십장도 모르는 모양 고개를 저으며 소위한테 다가가 무슨 말인가 지껄였다. 집안에서 발칵 뒤집으며 뭔가를 찾던 병사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책 한꾸레미를 들고나왔다. <그건, 내 책인데 왜 다쳐?>마당으로 조기술원이 승만이와 상국이네를 달고 들어섰다. 이들 뒤로 숱한 인부들이 따라섰는데 모두가 광수의 친구들이여서 알만한 얼굴들이였다. <일은 하지 않구 왜 몰려와. 당장 내려갓.> 최십장이 큰소리치며 인부들에게 눈을 흡떴다. <그건 내 책이요.> 조기운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조기운은 수비대들이 강삭배타고 건너올 때부터 어제밤 일로 이들이 들이닥치는줄 알고 상국이를 시켜 이들 뒤를 슬그머니 따르게 했다. 아니나 다를가 상국이가 급히 내려와서 하는 말이 원도네 집을 뒤진다고 했다.가슴이 철렁했다. 어제밤 이들이 권총 두자루를 잃은걸 아는 조기운은 총이 원도네 집에 감추어져있는줄 알고 급히 뒤따라섰다. 눈치를 보니 아무것도 찾지 못한줄 알자 나선것이다. 조기운의 기색은 쌀쌀하기만 했다. 책은 정치와 거리가 먼 문학서적들이 대부분이라 꺼리낄것도 없었다. 조기운을 돌아보던 소위는 책을 돌려주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는 천규를 앞세우고 뒤집으로 다시 쳐들어갔다. 냄새를 맡은걸가. 한동안 역사끝에 아무것도 찾지 못한 이들은 다시 앞집마당으로 몰려나왔다. <이 마을 갭쟁이라 했지?> 최십장이 준식이 곁으로 다시 다가왔다. 총가목에 머리를 부시운 최십장은 기가 죽기는커녕 더욱 서슬푸르렀다. 총을 빼앗긴 일로 아침에 소위한테 크게 닦이웠다. 무슨 판국인지도 모르고 얻어맞은후 까무러쳤다가 요행 도망친 최십장에게는 어제밤 괴한들의 인상착의가 희미했다. 하지만 소위가 마지막에 구영벽사람들까지 의심하자 머리를 저었다. 여기 놈들이 아무리 날고뛰는 재간이 있다 해도 이런 우둔한 놀음은 못한다고 믿었다. 기껏해야 무리싸움질이나 할 놈들인데...더구나 총까지 버젓이 들고있었다지 않는가. 총은 누가 만들수도 없다. <그 놈은 어디 갔는지 모르는가?> <누구?, 광수 말이우? 그때 크게 다친후루 지금두 낫지 않아서 일두 못하우. 큰골 넘어갔을게우.> 조기운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어제밤 누가 취선당 사건을 저질렀는지 모른다.최십장은 소위한테 다가가 준식이가 한 말을 다시 옮겼다. 소위는 눈을 부릅뜨고 둘러선 마을사람들과 인부들을 쏘아보더니 승만이한테 한동안 눈길을 돌렸다. 승만이는 겁을 내는체 하면서 인차 고개를 숙여버렸다. 기실 소위도 산에 있는 군대들의 소행으로 점찍고있었다. 그런데 술집녀자의 실종이 미심쩍었다. 이 녀자가 어쩐지 구영벽과 련계되는것 같았고 줄을 따라 캐보니 원도가 걸려나왔다. 소위는 광수네쪽보다 원도를 수상하게 보는터다. 얼마든지 큰일 저지를 놈이다. 투전군들을 잡고 캐우물으면 선색을 쥘수 있지만 투전군들이 집에 불이 달리자 밤사이로 도망쳐버렸다. 남은 술집년들을 족쳐보았지만 모두가 남자품속에서 재미보다가 불시로 당한 일이라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란아의 실종소식은 백용락의 처가 가만히 알려주었다. 이번에 손실을 톡톡히 본 셈이다. 자기들이 가만히 박아넣은 밀정(백용락)이 죽었고 권총 두자루까지 잃었다. 제일 큰 사건이다. 소위도 이제 상관한테 꾸중을 들을것이다. 소위가 독살을 피우니 마을사람들은 슬밋슬밋 헤여져갔고 인부들은 일하러 내려갔다. 조기운만이 마당에 뻗치고선채 소위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가자, 소위가 손을 홱 내젓자 병사들이 렬을 짓고 언덕을 올라 나루터로 내려갔다. 최십장과 천규가 소위뒤를 바싹 뒤따라 갔다. 이들이 돌아가자 길순이한테서 원도의 소식을 들은 조기운은 준식이와 함께 량수천자로 급급히 들어갔다. 삘리리-삘리리- 밤마다 우는 물새울음소리 외롭게만 들렸다. 하늘에는 이따금 뭉게구름이 지나치며 달빛을 가로막았다. 싸치라이트 불빛이 거무칙칙한 교각과 강물우로 유령같이 배회했다. 저녁편에 큰골에서 내려온 용범이는 저녁을 치르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두만강으로 나왔다. 오늘부터 구영벽사람들은 병권령감뒤를 따라 큰골의 석골 막바지로 올라가서 또다시 나무를 베여내기 시작했다. 낮에 일에 시달려 고단하련만 지금 용범이는 힘이 부쩍 솟았다. 머리에 난 상처에 더뎅이가 앉아 오늘부터 머리를 동였던 거치장스러운 베천오리를 풀어던져버렸다.저녁에 내려오자 안해한테서 낮에 구영벽에서 벌어졌던 일을 대충 들은 용범이는 앞집으로 원도 보러 건너갔다. 경찰서에서 금방 풀려난 원도를 보고 저녁먹으러 들어오다가 길에서 숙자를 만났다. 눈치를 보니 보는 사람들이 없는지라 용범이는 용기를 내여 숙자와 저녁밀회를 약속했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통발을 건지는체 하던 용범이는 버들숲으로 도적놈같이 몸을 숨겼다. 버들숲을 뚫고들어가면 낮다란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넘어서면 가둑나무, 황철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선 나무밭이다. 나무밭속으로 곧추 들어온 용범이는 오줌을 싸버리고는 마춤한 곳을 찾아앉았다. 쿵-쿵 ,가슴이 무섭게 뛰였다. 필경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유부녀와 사통하고있는 셈이라 은연중 겁이 나기도 했다. 황차 숙자의 남편과는 친구지간이 아니였던가. 그날 새벽녘에 급작스레 황당하게 숙자와의 정사가 있은 뒤 용범이는 여지껏 다시 숙자를 건드리지 않았다. 나올가 꼭 올거야...용범이가 청을 들자 샐쭉 웃으며 거절했지만 용범이는 숙자의 마음을 잘 알고있었다. 삘-삘리리-다급한 물새울음소리가 나는가싶더니 달그락 달그락 자갈돌이 구으는 미소한 소리가 났다. 틀림없는 인기척이다. 용범이는 살금살금 나무숲을 헤치고나갔다. 달빛아래 가냘픈 그림자가 드러났다. 숙자다. <어이-> 용범이가 가만히 불렀다. 느닷없는 부름소리에 흠칫 놀라던 그림자는 발볌발볌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섭게 이런델 끌고 오긴, 할 말있음 날래 하시꽈이. 인차 집에 가야지유.> 숙자는 아닌보살했다. 이래서 녀자다. 용범이는 아무 말도 없이 뛰쳐나와 숙자의 손목을 덥석 틀어잡았다. 그리고는 숲속으로 무작정 잡아끌었다. 아이구...어델 자꾸...숙자는 마지못해 끌려가는체 했다. 용범이는 첫번처럼 수동적이 아니였다. 한번의 짜릿한 정사는 용범이를 리지를 잃게 만들었고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켰다. 곧추 처음자리로 들어온 용범이는 승냥이처럼 숙자에게 덮쳐들어 숙자를 맨땅에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숙자의 베치마자락을 들쳤다. 왜...이러지유...왜...오늘은...안되지유... 숙자가 버둥거리며 반항하는체 했지만 용범의 손이 속곳앞 섶을 터치고 아래배에 미치자 인차 평양나막신처럼 해나른해졌다. 원도네 집마당에 숱한 사람들이 모여왔다. 모두가 원도가 경찰서에서 풀려나왔다는 말을 듣고 원도 보러 모여온것이다. 원도는 말없이 섬돌우에 앉아있었다. 어제와 오늘 일은 인젠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어제 장씨가 어째서 가만있었는지 오늘 잡혀서야 알았다. 원도는 멋도 모르고 경찰서에서 큰골자위단에 준 군견을 때려죽인것이다. 그까짓 개 한마리때문에 잡혀가서 욕을 보다니...원도가 돈 있고 땅 많은 지주라는걸 알고 봐주었지만 벌금만은 면하지 못했고 귀뺨 맞는것을 면하지 못했다. 오라줄을 풀사이도 없이 멋모르는 순사 몇이 달려들어 원도를 때린것이다. 조기운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원도는 오늘 풀려나오지 못했을것이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가을잡으며 원도의 일은 자꾸 꼬이기만 한다. 어느 놈의탓이야,대체... 마당안은 웅성거렸다. 아낙네들은 길순의 곁에 모여앉아 무슨 말인가 재잘거렸고 사내들은 끼리끼리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고있었다. 상국이가 슬그머니 원도에게 다가와 귀속말을 했다. 그러자 원도는 말없이 세관쪽으로 나왔다. 세관곁에는 상국이 말대로 광수가 있었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언덕을 넘어 나루터에 내려섰다가 다시 아래켠으로 내려왔다. 광수는 지금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있었다. 숙자를 련이어 두차례나 범한 용범이는 온몸이 땀투성이 되였다. 치마자락으로 용범의 얼굴에 내돋은 땀을 훔쳐주고난 숙자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졸랐다. 하긴 둘이 오래 있노라면 들통이 날수도 있다. 숲속에서 나오던 그들은 강변에 서있는 사내들을 보고 흠칫 놀라며 풀속에 몸을 숨겼다. 처음에는 자기들의 일이 꼬리를 잡혔는가 놀랐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원도와 광수였다. <이제 어쩔 셈이냐?> <오늘밤으루 다시 큰골 넘어가서 랠 새벽에 왕청쪽으로 빠져서 거기서 강동으로 빠질 셈이우. 그 년이 아래배에 칼을 맞았는데 이번에 그 년의 목숨만은 구하구싶수.> 용범이와 숙자는 처음에는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지 못했지만 차츰 일의 진상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옛수, 형님은 어느때부터 총욕심을 냈는데 한자루 가지우.> <허 진짜군, 날 주고 넌 어쩌니. 이제 강동 가자문 길에서 마적들을 만나겠는데.> <보우, 내게두 한자루 있수. 형님건 최씹장이 갖구 있던게우. 털보가 욕심 내는걸 형님 주자구 가져왔수.> 두 사내는 멀지 않은 버들숲에서 용범이와 숙자가 엿듣고있는줄 모르고있었다. 총을 가진 원도는 달빛에 권총을 비춰보며 대단히 기뻐했다. 허허, 끝내 총을 얻었군. <형님, 그 놈을 (최십장)이번에 못해치운게 제일 통분하우. 나 이제 건너가서 그 년의 목숨이나 살구면 다시 나오겠수. 내 그 놈을 못해치우면 평생 시름놓구 못살게우.> 광수는 이를 갈았다. 어제밤 첫번째로 내세운 목표를 놓친것이다. <가만,너 돈 필요하지? 상처 치료하자문 돈이 필요하겠는데...내가 집에 얼른 가서...> <그만, 그만두오. 이번에 우리가 턴 돈이 얼만지 아우? 털보는 이제 기와집 짓구 살수 있구,승만인 장가밑천 벌구두 남수. 돈걱정은 아싸리 하지두 마우.옛수, 이건 상국이 몫인데 형님이 건사했다가 류성기나 한대 마련해주오. 남은 돈은 그 놈이 극장에라두 나가면 반반한 옷견지라두 갖춰주구. 류성긴 어느때부터 내가 사준다구 했는데...> 원도에게 돈뭉치를 넘겨준 광수는 달빛이 내려앉은 두만강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내 이번에 가면서 그 놈 일이 제일 걸리우. 불쌍한 놈이요. 아버지 따라 마도강 향해오다가 자그마한 읍에서 전염병으루 아버지를 잃었다는데 죽으면서도 그 놈을 보면서 눈을 감지 못했다우. 열두살짜리가 여름동안 걸어서 개마고원 넘구 갑산지나 혜산으루 나왔수...그 놈 소원대루 가수라두 맨들었음 얼매나 좋겠수.> <그 놈 근심말어라.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내가 어떡하나 그 놈 일을 성사시켜주겠다. 그러니 넌 네 일이나 잘 알아서 해.> <형님,그런 말을 하니까 내 상국이를 대신해서 큰절이라두 올리구싶수. 한시름 놨수.형님,조기술원이 언제 떠나우?> <그 일을 네가 어떻게 아니?> <형님, 내가 왕도깨비 소리 들어두 눈치 하나루 세상사는 놈이요. 형님과 복희 아주머니 일두 알구있수.> <귀신이군...인차 떠날게야. 그 친구도 사정이 썩 좋은편은 아니니까...> <형님에겐 정말 괜찮은 친구였는데 떠난다니 정말 안됐구만.> <어떤 일은 꼬리 잡힐 건덕지가 없니?> <옷두 바꾸고 얼굴두 가려서 누구도 모를게우. 최십장은 우릴 보지도 못한채 부시웠으니까. 그런데 털보말이 큰골 장씨가 냄새를 맡았는지 수상하더라우. 내가 그래서 인차 떠나는게우. 그놈은 오늘저녁편에 개 한마리 잡아가지구 량수천자경찰서루 간사 떨러오는것 같습데.> <경찰서놈들이 나를 잡구 벌금까지 톡톡히 받아냈다구 기뻐서 그러겠지.> <죽일놈...형님 다른 일 없음 나 이 길루 승만이허구 상국이나 보구 올라가겠수.> <급해말어. 나두 너같이 큰골 넘어가겠다. 멀리까지는 바래주지 못하겠지만 이 밤에 널 혼자 보낼수야 없지.> <별소리, 만리 떠나두 종당에는 하직이라는데.>이들은 몸을 돌려 다시 우로 올라간다. <저-그 놈이 내려오는걸 언제 봤냐/> <누구 말이우?장씨?저녁편이우.> 광수가 홀연 걸음을 멈추고 원도를 돌아보았다. 광수는 원도가 지나가는 말처럼 심상하게 물었지만 무슨 낌새를 기민하게 챈것이다. <와서 술을 마시느라문 아직두 안갔을게우.> 광수는 원도가 묻는 뜻을 알아챘다. <해치우자는게우?> <그런건 아니야.> 원도는 시치미를 땄다. <하긴 그 놈이 있는 한 형님은 큰골 가두 편안하게 살지는 못할게우. 그 놈의 욕을 적게 봤수. 그런 놈은 살려둬서 쓸데없수.> <오늘밤으루 그 놈이 큰골 넘어갈가?> 원도는 혼자소리를 하며 생각에 잠겼다. 광수말이 진짜 사실이라면 오늘 같은 기회는 다시 없다. 장씨는 이제 미워하기도 싫은 놈이다.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안녕을 위해서 장씨를 죽여버리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치부장고개길옆에 숨었다가 그 놈이 지나갈무렵 감쪽같이 습격하면 산에 있는 군대들이 한짓으로 짐작할것이다. 좋은 기회다. 온몸이 달아오른 원도는 지금 후과를 생각할 여유가 없이 야수와 같은 욱기에 투척되여 있었다. 원도는 권총을 틀어잡았다. 원도와 광수가 물러가자 용범이와 숙자는 너무도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알고보니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다. <늙어죽을 때꺼정 오늘 일은 누구한테두 말해선 안되우. 알겠수?!>숙자에게 비밀을 약속하는 용범의 말은 우둔하기만 했다. 이날 깊은 밤.꿈나라로 들어간 구영벽사람들은 치부장고개쪽에서 울린 두방의 총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잠을 이루지 못한 용범이와 숙자만은 똑똑히 들었다. 끝내 큰일을 저지르는군... 길순이도 이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이 광수와 같이 큰골로 올라갔다는 일을 상국이한테서 가만히 들어 알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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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빛이 소조한 가을이다. 산에도 들에도 가을이 왔다. 풍요로운 황금빛 들녘에서 콩이 놀놀히 익어갔고 석양녘이면 사이섬에서 새꽃이 하얗게 날려왔다. 꺼껑-까투리를 찾는 장끼의 울음소리가 유정하게만 들린다. 은근하고 유정한 계절이지만 구영벽마을의 인심은 날이 갈수로 뒤숭숭해졌다. 원도가 경찰서에 잡혀갔다 온후부터 마을에서는 밤을 자고나면 불안한 소식만 터졌다. 먼저는 큰골 장지주가 술마시고 밤에 큰골 넘어가다가 치부장고개에서 산에서 내려온 군대들에게 총에 맞아죽은 소식이였고 그다음은 복희의 신비한 실종, 광수가 강동(연해주)갔다는 소식, 뒤이어 조기운이 떠난 사실이였다. 장지주의 죽음은 큰골 가서 신개지를 터치는 장덕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 장씨의 죽음과 조기운이 떠난 사실에 대해서 구영벽사람들은 쾌념한 기색이 아니였으나 복희의 신비한 실종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여러가지 이러쿵 저러쿵 했다. 그중에는 광수와 배가 맞아 도망쳤다는 엉뚱한 구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진상을 딱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구설 하나로 그쳤을뿐이였다. 어제까지 복희를 보았는데 밤사이에 없어진것이다. 그래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말인가. 옛말에서나 있을 일이다. 암만 해도 이상하기만 했다. 과부몸으로 딸 둘 거느린 녀자가 무슨 힘으로 밤사이로 떠났을가. 광수의 일도 그렇다. 처음에도 그냥 큰골에 있는줄 알고 류의하지 않았는데 큰골 가서 일하는 장덕사내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쪽에도 광수가 없다고 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광수는 또 어딜 갔단 말인가... 구영벽의 모든 일은 원도만이 알고있는 비밀이였지만 원도가 내색없으니 사람들은 복희와 광수의 신비한 실종,조기운이 까닭없이 떠난 사실,나아가 장씨의 죽음까지 원도와 련계가 있을줄은 까맣게 모르고있었다. 밤을 자고나면 뒤숭숭한 소문으로 불안하기만 했지만 그래도 밤이 오면 법석을 떨며 앞집으로 모여들어 상국이가 갖춘 레코드노래소리를 들었다. 레코드를 처음 보는 구영벽사람들에게는 얇은 판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는게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우깨산말기우로 해가 불쑥 솟아오르자 아침해살이 구영벽마을로 찬연히 쏟아졌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였다. 비운의 하루였지만 이 시각 구영벽사람들은 그것을 상상도 못하고 분주히 돌아치기 시작했다. 9월 16일, 박씨가 손가락 꼽아보며 정한 날이다. 16일이라면 래일이다.원도네는 래일이면 이사하게 된다. 그사이에 백번두 더 이사했을 노릇이나 장지주의 죽음으로 큰골마을 인심이 뒤숭숭했고 거기에다 박씨까자 나서서 중뿔나게 이사날자까지 똑똑하게 정하는바람에 줄곧 이사를 늦추었다. 병수가 죽은 뒤 한시 바삐 구영벽을 뜨자고 급해하던 길순이는 박씨가 길일을 택하자 두말없이 곱게 따랐다. 녀자들이란 원래 이런 놀음에는 큰 정성을 바쳐 따르는것이다. 하긴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하는 큰일이라 절대로 얼떨떨할수는 없는 일이다. 황차 원도 역시 장지주의 죽음으로 시간적여유를 가지고싶은지라 이사를 급해하지 않고 박씨말을 따르는체 했다.승만이와 상국이가 일하러 나가자 집안에서 서성거리던 원도는 길순이가 설겆이를 하는 사이에 인수를 데리고 마당에 나섰다. 세관뒤로 빠져나가는 준식이의 뒤모습이 얼른거렸다. 사이섬의 버들숲을 거의 절반이나 작파해버린 준식이는 얼마전부터는 재껴놓은 나무를 걷어내고있었다. 참, 오늘은 사이섬으로 나가볼가. 원도는 자기가 뚱겨주고 뒤를 받쳐주는 일이라 준식의 일에 무척 신경을 쓰고있었다. 노들갯변 봄버들...무정세월...칭칭 동여서... 집안에서 설겆이를 하는 길순이는 느닷없이 상국이가 부르던 노래 한대목이 생각나서 가만히 흥얼거려보았다. 길순이는 지금 기분이 둥-떠서 무척 흥분하고있었다. 병수가 죽은 뒤 처음으로 기분을 펴보는 길순이다. 래일에는 이사가게 된다. 큰마님... 큰마님...큰마님이 되는게다. 내내 앓던 이를 뽑았다. 복희의 신비한 실종은 길순의 가슴속에 맺혔던 응어리를 풀게 했다. 어딘가 짚이는데가 있지만 그런것을 상관할바가 아니다. 내 눈앞에서 복희라는 요물이 사라지면 되는것이다. 길순이가 집안에서 설겆이를 끝내고 밖으로 나올무렵 마당으로 옆구리에 버들광주리를 낀 덕희와 금숙이가 들어섰다. 섬돌우에 앉은 원도에게 인사하는데 길순이가 활짝 웃으며 이들을 반겼다. <랠 이사한다던데 이사집 같지 않습꾸마.> 금숙이가 집안을 기웃거리며 의문을 품었다. <우린 그저 빈몸으로 간다우.> 하긴 이사짐이래야 벽감에 모셨던 시어머니 신주를 모셔가면 된다. 그외 농짝이나 세간기물 같은 자질구레한것들은 큰골쪽에서 새것으로 갖추어놓은지라 여기것은 덕희에게 줘버리면 그만이다. <광주리 끼구 어딜 가우?> <새썸에 버들버섯이 돋았다구 해서.> 엊저녁에 비가 한줄금 내린지라 버들버섯이 살아났을것이다. <버들버섯?나두 갈가?> 기분이 좋은 길순이는 남편쪽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집에 있어도 할 일이 크게 없다. 그런데 인수가 문제다. <갈거지 누가 잡수.> 원도가 선선히 대답했다. 원도 역시 요사이에는 기분이 많이 좋아져있었다. <기랜게 아니구 인수일루 그랩지비.> <인순 저 강숙...뭐 나하구 놀지 뭐.난 오늘 일이 크게 없는데.> 원도는 어망결에 인수를 복희한테 맡기겠다는 소리를 할번 했지만 용케 말머리를 돌렸다. <아이 좋네.> 길순이는 남편에게 해쭉 웃어보이며 집안에 들어가 바삐 차비하고 나왔다. 인젠 아래배가 웬간히 큰지라 예전처럼 움직임이 날렵하지 못했다. 이들이 떠나가자 원도는 인수의 손목을 잡고 뒤마을로 들어갔다. 사이섬으로 가는 일은 오후에 다시 보기로 했다. 길순이네가 세관을 지나 인도를 넘을무렵 최십장과 소위가 엇비스듬히 맞띠웠다. 이들은 나루터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쪽편 교두에 구축하는 또치까가 완공되였지만 이들은 쩍하면 여기로 건너왔다. 조기운이 다리일을 총괄할 때에는 얼신거리지도 않더니 조기운이 떠나고 총감독이 다시 오자 이들은 다시 뻔질나게 공사장으로 나왔다. <어랍쇼.고운 만주아가씨님네 어딜 가우?> 최십장이 너덜거렸다. 소위도 희미한 웃음기를 입에 달고 녀자들을 음침하게 훑어보았다. 음전한 녀자들이군...소위는 오늘 여기로 피뜩 나왔다가 량수천자로 가야 한다. 량수천자 순찰부로 금방 발령받고 내려온 친구보러 간다. <여기 헌 투레기놈들은 말짱 고운 녀자들만 차지했다니까. 히히히...> 최십장은 벌써 머리에 감았던 붕대를 풀어던지고있었다. <아주머니구먼,빨리 넘어가우.> 뒤따라오던 천규가 길순이를 알은체 하며 최십장을 말렸다. 뱀앞에 선 개구리가 되여 길순의 등뒤에 숨어 가슴을 떨던 덕희와 금숙이는 길순이를 따라 바삐 인도를 넘어갔다. 히히히...하하하 등뒤에서 음탕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여보소, 아가씨님네들 치매 한번 들쳐보소. XX이나 한번 귀경하게...히히히.> 최십장은 녀자들에게도 악패다. 사경에서 겨우 몸을 건졌고 산에 있는 군대들의 활동이 빈번하다고 뒤소문이 흉흉했지만 겁내는 기색이 없이 더욱 우쭐거린다. 죽일 놈, 길순이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급한 걸음으로 사이섬으로 갔다. 여름에는 <<몸뻬>>를 입지 않았다고 도강을 막으며 희롱질이더니 이번에는 얼굴 곱다고 희롱질이다. 죽일 놈 치마를 들어? 굶은 범은 뭘 하구 저런 놈을 잡아가지 않수... 원도는 인수의 손목을 잡고 뒤마을로 들어갔다. 길옆숲속에서 매미들이 기세차게 울어댔다. 마을길에는 인적기 하나 없이 조용했다. 아들의 손목잡고 마실돌이를 해보기는 처음이다. 구영벽마을을 돌아보는것도 이제 마지막이다. 오다가다 잠시 이사짐 풀고 눌러앉은 구영벽,날자수로는 일년이 못되여도 해수로는 2년철을 잡는다. 여기서 원도는 갈림길이 생겼고 전환점이 생겼다. 아무래도 정이 들었다고 해야 할 곳이다. 유정천리라면 무정만리다. 얻은것이 많은만큼 잃은것도 많다. 조기운과 광수를 잃은 일이 제일 가슴아프다. 만남과 리별,재부와 정감,원도는 여기서 인생을 배웠다... 뒤마을로 들어왔던 원도는 장덕사람들을 찾아 다시 삼밭으로 향했다. 장덕사람들은 이른아침부터 삼찌기에 나섰다. 어제 물도랑과 가까운 삼밭머리에 삼구뎅이(중식가마)를 파는 토역을 마치고 밑바닥에 온돌까지 놓아 힘든 일은 마쳤는지라 오늘은 아낙네들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침나절에 삼단을 삼구뎅이에 우물정자모양으로 차곡차곡 쌓았고 해가 허리를 펼무렵에는 그우에 쑥을 덮고 다시 흙까지 덮었다. 조금 지나 삼구뎅이우로 연기가 꾸역꾸역 쏟아져나왔다. 물을 길어오우-용범이가 허리에 손을 얹고 소리쳤다. 그러자 아낙네들이 치마바람 일구며 동이로 물을 이어 날랐다.
어-널널 어여루 상사듸여찌네 찌네 삼을 찌네여보소, 농부님네 일심져서 잘 쪄보세...이 삼 쪄서 무얼 하나, 단허리에 감을시구...
용범이가 흥이 난김에 청승맞게 한대목 소리를 뽑자 물긷는 아낙네들은 궁둥이를 더 힘차게 흔들며 동이를 이고 오간다. 아래목에서 남편과 같이 일하던 숙자가 용범이에게 뺑긋 웃어보였다. 잘헌다,잘헌다.우는 애기 좆(젖)멕이듯한다... 칠성이가 생뚱같게 나서서 장타령 먹임소리를 내며 훼방을 놓았다. 와르르- 사내들은 칠성의 먹임소리에 돌멩이가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자,그만하구 담배나 먹읍세- 사내들은 기신기신 그늘밑을 찾아들었다. 아낙네들이 달기 시작한 삼구뎅이에 물을 쏟아붓자 삼구뎅이 우로 단김이 실실 피여올랐고 삼이 익는 알찌근한 냄새가 마구 뎦쳐왔다. <앞마을 김선상이 래일 이사간다구 했지?> 용범이가 화제를 끄집어냈다. <형님,우리두 따라올라가봐야지 않수?> <글쎄,그래야 되겠지.> <쳇 또 개괴기 생각났던게로군.> 득삼의 뒤를 이어 칠성이가 끼여들었다. <구데기가 우글거리는 쇠괴긴 뉘기 먹구,죽은 새끼돼지 물어오다가 김선상한테 무안받은게 뉘기라구 그따위 소릴 해.> 용범이가 당장에서 칠성의 덜미를 눌렀다. <이 사램 쓸데없는 걱정말구,아래물건이나 잘 건사하우.> 용범이가 싱글거리며 겨릅대로 칠성의 사타구니를 툭툭 건드렸다. 잠방이만 입고 앉은 칠성의 사타구니로 거무튀튀한 육실한 연장이 절반쯤 밀려나와있었는데 가만보니 그쪽의 실밥이 풀려져서 그 사이를 비집고나온것이다. 이 잠방이 혼솔이 따진것은 큰골에서부터였는데 인젠 칠성의 연장이 꺼리낌없이 해빛을 본지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 물건짝이 왜 자꾸 버둥거린다우?> 둘러앉았던 사내들은 칠성의 물건을 보자 에이쿠, 혀를 홰홰 내둘렀다. <이제 나와서 시방 할 일이 있수?> 칠성이는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물건을 안으로 밀어넣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다시 기웃거리며 기여나왔다. 만덕이는 이때에야 겨우 삼구뎅이를 덮고 불을 지폈다. 만덕이는 요사이에 장덕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고있었다. 인젠 구영벽이 재미없었고 사람들을 보기도 싫다.똑똑한 놈으로 둔갑하기는 어렵지만 머저리로 되기는 쉽다. 요사이에는 안해까지 곰상곰상하지 않는다. <혼자 우두커니 그러지 말구 사램모인 장소 가서 담배라두 태우쉬꽈이 예.> 좌르륵 삼구뎅이에 물을 붓고 돌아서던 숙자는 혼자 고개를 떨구고 묵묵히 앉아있는 남편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만덕이는 대답이 없다. 호-한숨까지 톺은 숙자는 용범이쪽을 가만히 훔쳐보고는 다시 물 길러 개울가로 나갔다. 개울가에서는 아낙네들이 물을 긷다말고 모여앉아 참새떼처럼 재잘거리고있다가 숙자가 나타나자 별안간 뚝 끊었다. 수상쩍다. 왜 자기가 나타나자 개구리가 우는 늪에 돌 던진듯 말을 끊나... <무신 야기길래 쇵사리 끓듯 재글재글 합다매?왜? 끊수? 나두 들어보자이.> 숙자뒤에 따라섰던 덕녀가 <<저기나>>맞은편에 오금을 꺾고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금이 말째인지라 다른 사람들이 두번 걸음을 할 때면 겨우 한번 걸음하지만 막내딸년이 금숙이 대신 나와서 일에는 별지장이 없었다. <저기나,시방 이 안깐들이 자꾸 강숙이 엄마 소릴 해서...복희 일이야 여기서 날 내놓구 누가 더 아는 사램이 있슴두.> <여끼가(여우)고슴도티 잡아묵은 얘기하구선...강숙이 엄매야길 했다구 떼질이네.> <<저기나>>곁에 앉은 통통한 녀인이 숙자를 핼긋 훔쳐보며 <<저기나>>의 잔등을 때렸다. <복희 말은 더 하지 말랑이, 곁에 없는 사램말은 자꾸 하는벱이 아니지.> 덕녀는 <<저기나>>의 얼림수에 넘어가서 정색해했다. 더러운 년들,꼭 내 말을 한게 틀림없다. 모르는체 눌러앉으려던 숙자는 생각을 고쳐먹고 동이에 물을 담자 인차 자리를 떴다. 숙자는 <<저기나>>가 아낙네들을 휘동해서 자기를 따돌리는것을 알고있었다. <욕심 많아서 잘살겠수.> <<저기나>>가 가만히 한 소리였지만 숙자는 어쩔수없이 들었다. 물동이는 머리에 인채 숙자는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저기나>>를 쏘아보았다. <<저기나>>는 아닌보살하고 힝힝 코웃음쳤다. <참구 있으니까...제 뉘길 욕하우?> <저기나, 듣는 귀가 열두폭치매라더니 뉘기 절 욕했다구 색을 내우.> <<저기나>>는 기다렸다는듯 당장 대들었다. <내가 욕심써두 저네 보리밥 달라우, 개똥참외 달라우?> 숙자는 눈에 쌍가래톳을 세웠다. 여지껏 참고참았던 분이 일시에 터진것이다. 흥,네 년이 뒤에서 날 헐뜯어두 난 네년 남편과 살섞었다. 네 년이 계속 날 물고 늘어지면 나도 네 년을 편안하게 살지 못하게 할테다. <저기나, 말이 더럽수. 똥욕심은 장덕에서부터 센세(소문)난 일인데 왜? 내가 없는 말 했수?> <이 아낙네들은 왜 마주서면 수탉처럼 싸움질이우. 저기 남정네들이 있는데...소리 죽이우.> <왜? 일밭에 나와 지랄이야. 동네 망하게.> 아니나 다를가 인차 불호령이 날아왔다. 용범이가 눈에 독을 세우고 이편을 노려보고있었다. <까딱말라이, 자기 앞마을 김선상이 들어오구 있수.>보니 원도가 정말 인수의 손목을 잡고 이쪽으로 오고있었다. 아낙네들은 찍소리도 못했다. 아낙네들에게는 원도가 무서운 사람이였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였다. 버섯뜯기에 열중한 길순이네는 점심때가 된지도 모르고 준식이가 나무찍은 곳을 지나쳐 버들숲에 들어섰다. 아래에서 준식이와 문수가 어이어이 소리쳐 이들을 불렀지만 세 녀자는 부름소리도 듣지 못한채 무작정 우로 올라갔다. 녀자들을 부르던 준식이와 문수는 이들이 청계하쪽으로 빠져 마을로 들어가는가 여기고 집으로 들어갔다. 하얀 버들버섯은 보기에도 탐스러웠다. 금숙이는 길순이와 덕희와 떨어져 홀로 버섯을 뜯었다. 등에 걸머진 보따리가 꽉 차있었고 앞섶에 찬 주머니도 버섯으로 불룩했다. 그제야 금숙이는 두리번거렸다. 길순이와 덕희는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없었다. 문뜩 두려움이 들었다. 복희네 새끼돼지를 물어간 무리승냥이가 여기에 웅크렸다가 마을로 덮쳐든것이 아닌가. 승만이와 상국이네도 여기까지 쫓아와 승냥이 입에서 새끼돼지를 빼앗고... <덕희야-> <응-> 예상외로 덕희는 그와 멀지 않은 앞에 있었다. 덕희의 앞에서 버섯을 뜯던 길순이는 금숙의 부름소리를 듣고서야 피뜩 정신이 들었다. 여기가 어딘가, 주위는 온통 버드나무다. 에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해자리를 보던 길순이는 그제야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아래편으로 내려왔다. <어이,내려가기우-> 청계하로 나온 길순이가 소리쳤다. 조금 지나 덕희와 금숙이도 버들숲에서 나왔다. 서로 마주보던 세 녀자는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세 녀자는 모두 얼굴이 얼룩덜룩해졌고 손이 버섯진으로 거멓게 물들어있었다. <이럴 때 승만이와 문수가 봐야 하는데. 얼매나 고운가 호호호. 아무리 급해두 얼굴이나 씻기우.> 녀자들은 물가녁에 붙어앉아 저마끔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손발까지 말끔히 씻고난 이들은 언덕을 넘어 조밭을 꿰질러 길목에 나섰다. 에그머니나... 세 녀자는 동시에 가느다란 비명을 질렀다. 량수천자에서 오는 소위와 최십장을 만난것이다. 아침에도 엇비스듬히 맞띠웠는데 지금 또 맞띠운것이다. 소위와 최십장은 술을 마신 모양 둘이 모두 눈이 개개 풀려있었다. <섯,히히히,이거 ,암만 혀두 연분이 들었구만...히히히,아가씨님네 뭘 이리 많이 캤수?> 최십장이 앞길을 막아서며 흥글거렸다. 최십장은 몸가짐도 흩어져있었다. 덕희와 금숙이는 아침때처럼 또다시 길순의 등뒤로 숨어들었다. 길순이는 소위와 최십장의 탐욕스러운 눈길을 보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호젓한 곳에서 또다시 만나다니... 좌우로 살펴봐도 길손이 없고 해볕만이 노랗다. <비켜서우,집에 가겠수.> <뭐 비켜? 이 년이 보자보자 하니 뭘 믿구 그래 히히,넌 집에 가두 되지만 이 아가씨님네들은 못가 히히히.> 최십장이 막아서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소위도 실실 웃으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니,이게 무신짓이우...물러서우...> 이미 버섯짐을 벗어던진 길순이가 덕희와 금숙이를 결사적으로 막아섰다. 길순이밖에 처녀들을 보호할 사람이 없었다. 히히히...두 사내는 음탕하게 웃으며 점점 육박해왔다. 참새같이 할딱거리고선 덕희와 금숙이는 이 사내들이 오래전부터 자기들에게 눈독을 들인 일을 모르고있었고 금방전에 자기네가 물가녁에서 얼굴을 씻을 때부터 자기네를 엿보고 길목을 지켜선 일을 까맣게 모르고있었다. 절대 돌연적인 일이 아니다. <빨리,달아나...빨리.> 길순이가 두 사내의 앞을 막으며 소리질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길순이는 최십장이 날린 발길에 아래배를 드세게 얻어맞고 쓰러졌고 덕희와 금숙이는 사나운 매한테 치운 꿩 신세가 되였다. <엄마아...> 두 처녀는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버섯짐이 길바닥에서 길순의 신세같이 뒹굴었다. <안되우...안...돼...시...시집두 못간 체네들인데...> 아래배를 험악하게 채운 길순이는 낯이 하얗게 바래진채 비틀거렸지만 그래도 덕희와 금숙이를 구하겠다고 모지름을 썼다. <이 년아,갈길이나 갈게지 웬 상관이냐.> 금숙이를 잡고 조밭속으로 들어가던 최십장이 자기앞을 막아서는 길순이에게 또 발길을 날렸다. 윽-길순이는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몸을 꿈틀거렸다. 불시에 눈앞이 노래지며 하늘땅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길순이는 조밭속으로 끌려들어간 덕희와 금숙이가 발악하는 줄도,두 사내가 마구 폭행을 가해 금숙이와 덕희가 졸도하는줄도 모르고 길바닥에 반듯이 누워 눈에 정기를 잃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몸뻬>>가랭이 아래로 피가 흘러내렸다... 시간이 불시에 멎는듯한 정적이 지나갔고 조밭속에서 이름모를 산새들이 푸드득 푸드득 날아다녔다...
10
구영벽마을은 쥐죽은듯 조용하기만 했다. 하늘도 땅도 굳어진것만 같았다. 길순이는 락태한후에도 피가 멎지 않아 생명을 다투었다. 상국이가 원도의 분부받고 량수천자로 의원 부르러 간 뒤 마을에서는 또다시 불상사가 터졌다. 사람들은 모두 강가로 모여갔다. 옥생각을 먹은 덕희가 가만히 나가 두만강에 몸을 던진것이다. 준식이가 덕희의 몸을 안아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덕희의 몸은 싸늘히 식어갔고 손발이 뻣뻣이 굳어졌다. 자기의 삶과 앞날을 동경하여 꿈으로 살던 덕희는 해빛이 소조한 가을날에 아버지와 사랑했던 문수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갔다. 너무도 절통하니 눈물도 없었다. 덕희를 우깨산자락에 묻을 때까지 누구나 얼굴이 철통같이 굳어져있었다. 밤에 문수와 승만이가 칼을 품고나서는걸 원도가 귀쌈을 때려서 주저앉혔다. 길순이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있었다....
원도는 오늘도 언덕에 올라서서 다리공사장을 지켜보고있었다. 벌써 련 사흘째나 여기에 붙어서서 공사장을 지켜본다. 구영벽사람들은 요사이 원도의 지휘에 따라 하나같이 움직이였다. 사이섬으로 나가던 준식이와 문수는 다리공사장으로 나갔고 득삼이와 용범이,칠성이네 장덕패들까지 농사일을 젖혀놓고 다리일에 나섰다. 나왔수다- 상국이가 언덕에 선 원도에게 미리 약정한 암호를 보내고는 층계를 타고 17호기둥타입현장으로 올라왔다. 휘틀안과 비계우에는 구영벽사람들로 득실거렸다. <나왔수!> 상국의 말대로 소위와 최십장이 층계아래로 왔다. 일을 저지른 뒤 오늘 처음으로 공사장으로 나온것이다. 준식이가 손세를 보이자 휘틀안에서 세멘몰탈을 다지는 작업을 하던 승만이와 문수가 휘틀벽을 꽝꽝 잡아쳤다. 무슨 일이야?17호기둥을 그냥 지나치던 소위와 최십장은 의아하게 올려다보다가 급급히 층계를 타고 비계우로 올라왔다. 언덕에 섰던 원도가 손세를 보이지 상국이와 재필이,용범이네가 층계우에 세멘몰탈을 지고 올라오는 인부들을 막으며 층계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사고났수 사람 살리우-> 용범이와 재필이가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좋은 기회다. 층계우에는 인부 하나 없이 비여있었고 인부들의 시선이 모두 물에 빠진 상국이 몸에 집중되였다. <왜 ? 이랴? 씹새끼들 벽은 왜...> 최십장은 말도 끝맺히지 못한채 준식이한테 떠밀려 휘틀안에 굴러떨어졌다. 동시에 소위도 미리 대기하고 선 칠성이한테 떠밀려 최십장 꼴이 되였다. <칙쇼...> 소위가 기여일어나며 총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총을 꺼내들사이도 없었다. 만단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섰던 문수가 쇠파이프로 소위의 뒤통수를 드세게 내리깠다. 퍽-둔중한 소리와 함께 소위는 찍소리도 못하고 물기가 이지르르한 세멘몰탈에 코를 박으며 쓰러졌다. 일격에 골통이 묵사발이 되였다. <개새끼들...> 최십장이 바삐 휘틀벽에 붙어서며 허리춤을 더듬거렸지만 승만이의 칼에 아래배를 질리우고는 비틀거렸다. 대뜸 피가 콸콸 흘러내렸다. <새끼야,알구나 듁어(죽어),취선당 닐은 우리가 했다. 그때 니가 듁어야 했는데...> 승만이는 다시 한번 최십장의 가슴께로 칼을 박았다. 개새끼야, 넌 이렇게 죽어두 아깝다. 빨리-휘틀안에 있던 인부들이 일제히 손을 써서 미리 파놓은 세멘몰탈구뎅이에 소위와 최십장을 묻어버렸다. 우에 섰던 준식이가 다시 원도에게 손을 홱 저었다. <비계가 내려앉수!-> <비계가 바지 벗는다!> 칠성이가 아우성치며 도끼로 비계를 비끄러맨 참바를 내리찍자 비계가 우르르 무너져내리며 층계까지 허물어버렸다. 사램 살리우- 사램들이 물에 빠졌수- 물에 빠진 준식이와 칠성이네가 소리지르며 허우적거리자 뒤따라 휘틀안에서 일하던 승만이와 문수네가 물에 뛰여들어 복새통을 피웠다. 일은 예상대로 말끔히 해치웠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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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구영벽마을은 짙은 안개속에 잠겨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꿈나라에 빠져있었다. 강삭배가 은밀히 오가며 전신무장한 일본병사들을 실어날랐지만 이 시각 구영벽사람들은 꼬물도 모르고있었다. 군복을 차려입고 권총을 찬 미쯔우라는 첫배로 건나와서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미쯔우라곁에는 경기관총이 걸려져있었고 뒤에는 맞아서 얼굴이 만신창이 된 천규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한개 중대가량 되는 병사들이 미쯔우라의 지휘에 따라 두길로 나누어 구영벽을 청통같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상리공생을 말하고 세뇌를 운운하던 미쯔우라가 아니다. 조선땅으로 들어온지 오라지만 자기네 군인까지 서슴없이 해치는 조선사람들을 처음 본다. 어벌짝이 대중없이 큰놈들이다. 총가진 군대도 아닌 놈들이 이런 일까지 치다니. 일본사람들은 머저리가 아니다. 어느모로 보나 이 땅에 군림한것만치 강한 사람들이다. 더구나 미쯔우라는 비상히 총명한 사내다. 소위와 최십장의 실종은 취선당사건과 련계된다는것을 알아챈 그는 천규를 잡고 족쳤다. 천규도 잘 모르는 일이지만 소위와 최십장이 다리공사장에서 실종되였다는 단서만은 알아냈다... 밤새 굳어지기 시작한 세멘몰탈속에서 소위의 시체를 파낸 미쯔우라는 한동안 아연해졌다. 탕- 새벽공기를 찢으며 뒤마을쪽에서 총성이 터졌다. 토벌이다!토벌이다-누군가 소리치자 또다시 총소리가 울리며 아우성소리가 터졌다. 어느덧 집이영이 타는 매캐한 연기가 밀려왔다. 불은 장덕사람들의 집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삽시에 구영벽마을은 불바다가 되였고 란장판이 터졌다. 곤히 자다가 놀라깬 사람들이 병정들에게 몰려 앞마을로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천규가 부들부들 떨며 원도네 집을 가리키자 병사 둘이 총을 받쳐들고 짓쳐들어갔다. <이거 암만 해두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다이...어험.> 안방에서 쉬던 병권령감이 정지에 있는 원도내외에게 기척소리를 냈다. 늙은 몸이라 새벽잠이 없는 령감이다. 원도네가 이사한다고 했지만 넘어오는 기척이 없자 궁금해서 알아보러 어제 큰골에서 넘어온 병권령감이다. <글쎄유...> 원도도 벌써 깨여서 밖의 동정을 듣고있었다. 쿵-쿵-마당에서 다급한 발걸음소리가 들리는가싶더니 쾅-출입문이 군화발에 열려졌다. 일본병서 둘이 장승처럼 뻗치고섰다. <안되우!->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락태해서 의식까지 잃고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길순이가 벌떡 일어나며 원도를 막아섰다. 탕- 앞선 병사의 총이 불을 뿜었다. 가슴을 맞은 길순이는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이불우에 무너져내렸다. <엄마아,엄마...> 놀라깨여난 영수와 인수가 길순의 몸우에 덮쳤다. 뒤에 선 병사의 총구가 영수를 겨누고있었다. 개새끼들...노랭이들아... 원도의 권총이 먼저 불을 뿜었다. 뜻밖의 총격을 당한 두 일본병사가 너부러졌다. 병권령감이 안방에서 뛰쳐나오며 영수와 인수를 끄잡아 일으키고 뒤문으로 재빨리 몸을 피했다. <아바이,영수와 인수를 부탁합니다-> 이것이 원도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원도는 일체를 불문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 길만이 영수와 인수를 구하는 길이다. 노랭이 새끼들아...쪽발이들아... 탕-탕-탕- 언덕우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원도는 피를 콸콸 쏟으며 섬돌우에 쓰러졌다. 여보-여보- 당신 어디에 있수...영수야...인수야...아버지는 간다...아버지가...가물가물 의식이 가면서 원도는 침침한 빛 한점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이것이 원도가 세상을 떠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본 새벽빛이다. 같은 시각 승만이와 상국이도 이불밑에서 반항 한번 못해보고 총에 맞아 숨이 졌다. 준식이는 호미를 들고 병사들에게 다려들다가 아래배에 총창을 맞고 창자를 흘리며 숨져갔다... 원도네 앞마당은 끌려온 구영벽사람들로 빼곡이 차있었다. 아이 울음소리 욕소리...주검을 본 아낙네들은 기혼해 넘어갔다. 원도의 참상에 사내들은 소리없이 눈물을 지었다... 일본놈들은 득삼이와 용범이를 비롯한 풍리,길주 사내들을 모조리 끌어갔다... 구영벽에는 맨 아녀자들만 남았고 집은 모조리 타서 재더미로 되여버렸다. 구영벽은 새벽부터 호곡소리로 지동쳤다... 이때로부터 구영벽은 페허로 되였고 사람 그림자 얼씬거리지 않았다. 량수천자사람들과 장덕사람들은 밤이면 구영벽페허에서 귀신이 운다고 낮에도 오기를 꺼렸다.여보-아들아-내 딸아-애 아부지-... 정말 구영벽페허에서는 밤마다 귀신이 울었다. 새하얀 옷을 입은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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