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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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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고전의 매력 댓글:  조회:597  추천:0  2018-04-09
                                                      고전의 매력                                                                                                       한 세 준       고전(古典)이라 하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이 떠오를가? 아마도 옛성현들의 사서삼경이나 표지가 누렇게 되여버린 낡을 책이 떠오를가? 아니면 해석이 어려운 고한어나 백발로옹이 심오한 철학을 설파하는 장면을 떠올릴가? 머리에 무엇을 떠올리든 오래된 것, 어려운 것이라 는 공통된 인상을 앞세울 법도 하다.     고전이란 오래된 글이나 고서를 이르긴 하지만 그저 오래된 책이라하여 모두 고전이라 일컫지 않는다. 고전이라 하면 오래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만한 교훈적인 책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시대를 초월하여 변함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을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만 고전이라 부를수 있다.     그런데 나로 말하면 몇해 전까지만해도 고전과 인연이 닿지 못했다. 몇글자 끄적이던 나로서는 최소한《론어》정도는 읽어봐야 하 겠다는 생각에 고전 해설서를 읽으면서 원전을 읽을 엄두는 내지 못하였다. 책에 나오는 명문장을 가끔씩 인용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읽어봐야 “고전”에 담긴 인생을 성찰하는 이야기들과 그속에 깊은 뜻이 마음속 깊이 와닿지 않았고 그냥 한 두번 읽어서는 무소득일 정도로 터득하게 어려웠고 힘들었다. 우리가 고전을 읽으면서 좌절당 하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것 같다. 지금 우리의 인식 역시 2500 년전 사람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고전에 담긴 령적인 교감을 통해 현실에 적용할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내적으로 치렬한 사색과 고민의 과정에 실제 경험으로 검증됭야 산 지혜가 될수 있는것이다.     좋은 책은 마음의 량책이다. 좋은 음식이 육신을 살찌우듯 좋은 책은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동양고전은 영양가도 풍부하지만 난해하 기에 조금씩 소화하면서 천천히 음미하여야 심신건강에 유익하다. 예 나 지금이나 설한풍속에 매화향기든 더욱 은은하듯이 란세에 특출한 인재가 등장하는것은 만고의 진리로서 지금도 변함이 없다.      로자, 공자가 출현한 이래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있달아 태여났다. 이들은 춘추전국시대라는 지극히 혼란한 시국에 각약각색 의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바야흐르로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시대, 제자백가들은 우후죽순마냥 한꺼번에 활짝 피여 향기를 풍기였는데 이것이 중화사상으로서 심원한 동양철학의 원천이 되였다.    중원에서 피여난 이 찬란한 문화는 한자문화권인 동양 전체로 확산되여 발전을 거듭해 왔다. “예수가 태여나 이 땅에 사랑의 복음 을 전하기”도 전에, “석가의 자비가 실크로드를 건너오기 훨씬 이전” 이였다. 이때 완성된 정신문화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가치나 방향 을 제시한 생생한 력사기록이며 철학사상, 인문학의 집대성으로서 각 분야를 아우르는 예술이자 문학작품이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20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공자, 맹자, 렬자,장자, 묵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을 초월한 그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 있었 던가, 이렇듯 중화민족은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일찍 미국 예일대학의 교수 폴 케니디는 “근대 이전의 모든 문명에서 중국보다 더 발달하고 선진적인 문명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고 말한바 있다.     또한 손중산선생도 “중국의 고전에는 외국의 대정치가라도 아지 보아내지 못하고 또 그만큼 뚜렷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은 가장 체계 적인 정치철학이였다.”고 말하였다. 그러고 보면 동양고전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무궁한 철두철미 실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열독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탐독하면서 깊이 생각하면 반 드시 그 수확이 클 것이며 평생을 두고 써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또 한 동양고전에 대한 관점에 따라 치국의 리론을 제시한 최고 륜리경 영의 지도서이며 인간사의 리치를 명시한 대표적이고 훌륭하기 이를 데 없는 처세의 지도서이기도 하다.     인류는 정신문화유산인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고 인 생의 길에서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으며 자기가 직접 겪어보지 못 한 인생철학을 경험하게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렇듯 고 전은 오랜 세월을 거쳐 검증된 인생과학서이기도 하다. 최근에 들어 와 인문학이나 고전에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고 경영혁신의 기반이자 수단으로 인문고전이 각광을 받고 있다. 따라서 많은 기업 들에서 인문학적인 지식기반을 갖춘 인재들을 찾고 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대니얼 핑크는 “새로운 미래가 온다. 정보화 시대에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은 다양하고 독립된 분야 사이의 관계를 리해해야 한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련관성이 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련결시키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첨단기술과 인문고전이 합쳐지여 혁신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스티브 잡스도 “나의 혁신은 인 문학의 힘을 빌렸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키운 것은 도서관이라고 했 다.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리건희회장도 《론어》, 《한비자》를 선친에게서 물려받았고 정약용의 저서에서 경영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고 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 성공한 조직의 경영자나 리더들은 거의 모두 인문고전에서 경영에 필요한 통찰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고전이야말로 단순한 지식의 저장고가 아니라 내 삶의 의미를 찾 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창의적인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소 중한 지혜의 보물고이기에 고전을 읽노라면 그 속에 슴배여 있는 지 혜와 통찰력이 오늘 날의 첨단지식과 서로 통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것으로 미래를 예견해 나가는 것은 실로 놀랍고 재미있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 경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저 옛 사람들의 남겨놓은 “문화찌꺼기”에 불과할 수도 있고 불확실한 앞날 을 환히 밝히는 횃불로 될 수도 있다. 고전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 고 우리가 고전을 잘 읽어 자신을 충실히 할 수 있다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좋은 책을 읽는것은 과거 몇 세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이야 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는 명언처럼 새책은 새 친구와 같고 고전은 옛 친구를 얻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고전이 바로 가장 진지한 옛 친구처럼 우리의 문화생활에 풍요로움을 기약한다.     고전을 그저 호기심으로, 재미로 읽어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다. 바로 베네트란 사람이 “고전의 매력과 아름다움은 느닷없이 도취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은연중에 효과를 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태도는 먼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아니면 안 된다.”했듯이 고전은 글자 그대로 탐독해야 한다.          
18    베풀며 산다는 것 댓글:  조회:568  추천:0  2018-03-31
                                            베풀며 산다는것                                                    한 세 준       사람이 사람인 이상 누구나 이런저런 욕망을 안고 산다. 도를 터 득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면 모를가 욕망의 늪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문제는 각자가 욕망을 절 제하고 안으로 해소하는 방법에 있다. 오직 만족할줄 아는 만족만이 진정한 만족이라 할 것이다.     한 시 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운 장기려(张起吕1911-1995) 박사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해방후 조선의 제1호 박사였는 데 “6.25전쟁” 시기 의상의 량심으로 인민군과 국방군 부상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성심성의로 수술치료를 해주었는데 그때는 대역부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 그는 창황중 신변에 있던 막내아들만 데리고 철퇴하는 국국의 트럭에 올라38선을 넘어야 했다. 그리하여 부인을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이북에 남게 되였다.     그는 한국 부산에 정착한후《록십자병원》을 꾸리여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혹은 싼값으로 치료하며 봉사하면서 의사의 일생을 마쳤다.     연변의 김학철 작가님도 장박사가 평양 특별병원에서 사업할 때 세차례나 장박사에게서 수술치료를 받았는데 자기이 회억록에서 그 분이 성자(圣者)중에 성자라고 칭소송하면서 그이 성품을 너무나 잘 안다고 썼다. 장박는 여느 월남자들과 달리 끝내 재혼하지 않고 아들 하나를 믿고 40여년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부산바닥에서 명성높은 병원을 경영하면서도 자기 소유로 된 집 한채도 없이 병원 옥상에 자그마한 방을 만들어놓고 독수공방하였 다고 한다. 누군가 안쓰러운 마음으로 어떻게 집 한 칸도 없이 그렇 게 사느냐고 묻자 장박사는 “나는 집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록십자 병원이 나의 집이요 서울가면 자식놈의 집이 곧 내 집이며 친구집에 갔을 때는 친구집이 곧 내 집이다. 어딜 가나 거기가 내 집인 데 어째서 나같은 집부자를 두고 집없는 사람이라 하는지 모르겠다.”라 고 대답하였단다.     당시 작가 리광수가 “당신은 바보가 아니면 성자이다”라고 했듯이 그는 물욕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진정한 바보이지 성자였다. 장기려 박사야말로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베풀면서 자신은 집한칸 없이 늘 즐겁게 살다가 간 만족할줄 아는 사람, 만족을 몸소 실천한 성자 같은 사람이였다.     말이 난 김에 나눔의 미학을 몸소 해석하며 반생을 행복하게 살았 다는 다른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세상 사람들이 거의 다 알 고있는 록펠러는 서른살에 백만장자가 되였고 만흔살에는 세계 90% 의 석유를 지배하는 세계의 석유대왕으로 미국의 최고갑부가 되였다. 그런데 쉰다섯살에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눈앞이 캄 캄해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만큼 정신적 타격은 치명적이였던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병원의 로비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거기에  씌여있는 “베푸는 자는 행복하다.”는 글귀를 읽은 순간 뒤통수를 호 되게 얻어맞은 느낌이였다고 했다. 그때 병원의 한 구석쪽에서 소란 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록펠러가 찾아가보니 치료비가 없어 주원치 료를 할 수 없다는 병원측과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볼테니 먼저 주 원부터 시켜달라는 환자의 보호자가 말다툼하고 있었다. 환자인 녀자 애는 한쪽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그 녀자애를 보는 순간, 어떤 깨달음을 얻은 록펠러는 즉시 비서를 불러 녀자애의 주원치료비를 대신 지불해 주라고 지시하면서 절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엄명하였다. 얼마후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건강이 회복된 녀자애의 모습을 보고 록펠러는 자기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였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나나탔다.그 자신의 암병도 회복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록펠러는 여생을 나누고 베푸는 삶을 영위하였다. 그렇게 널리 덕을 쌓은 덕분인지 아흔여덟살까지 복을 누리며 행복하 게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인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눔의 삶이 이렇게 행복할줄은 미처 몰랐다. 내 인생에서 나머지 43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였다.”     어찌보면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만족시키려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환언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자기 마음속의 그릇에 채워보려고 아득바득한다. 행복한 삶을 영위함에서 돈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요 잊혀진 착함이다.     록펠로의 인생총화에서 우리는 그의 고상한 가치관과 성숙한 마 음에서 나오는 도덕적 완성과 신조를 가슴에 새기게 된다. 베풀며 사 는 착한 성정은 결코 유전되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생기는 자질도 아니묘 기술이나 특별한 지식을 얻는 것처럼 계발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진정 사심을 죽여가며 베푸는 삶을 위해서 의도적인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고달픈 인생은 그로써 풍요로워질 것이다.  
17    문제시된 먹는 일 댓글:  조회:1117  추천:0  2016-03-27
                                   문제시된 먹는 일                                           한 세 준       인간은 저저히 배속에 밑빠진 주머니같은것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인간도 먹고 살아가는 동물임에 다름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라 하겠다. 맹자씨가 인간의 육체적인 면을 소체(小体), 정신적인 면을 대체(大体)라 이름하고 소체적인 면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이 별차이가 없으나 대체적인 면에서는 인간의 독특함 내지는 우수성이 있다고 설파했는데 현대인들로 말하면 “대체”가 “소체”에 먹히우는 경우가 푸술하다.     이를테면 식(食)은 난당(难当)의 색(色)에 선행하는 으뜸의 본성이 되여져 “인이 식위천(人以食为天)”이라는 성구도 만들어졌다. 아닌게 아니라 구멍난 이 주머니로 인하여 인간문명사에 첫획이 그어지고 “식문화”라는 찬란한 후광까지 쓰고 그리함으 로써 식색(食色)의 본성만이 있을뿐인 동물들과 구별을 가지게 되였다.     그런데 청조의 리립옹(李篱翁)은 인간생활 전반을 론한 자기 저서 식물편(食物篇) 에서 사람에게 밑빠진 주머니를 하사한 조물주에 대해 한바탕 불평을 늘여놓고있다. 인체의 여러기관 귀, 눈, 코, 혀, 손, 발, 몸뚱이 등이 제각기 필요한 기능을 지니고 열심히 일하고 있음은 다 아는바이다. 그런데 아무 필요도 없이 조물주로부터 하사 받은 두 기관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입과 밥통이다.     이 밥통을 하루 세끼 가득 채워야 하는 제일 생존직업이 전개되면서 인류의 진화는 간거한 려정을 걷게 되였고 원시적인 탐욕이 생겨났으며 탐욕과 잔인함과 더불어 교활성과 거짓과 부정(不正)이 성하여 날로 가심화되면서 이를 다스릴 형법이 세워지 게 되였다. 하여 황제는 어진 정치를 펼치여 백성을 감싸주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이런 질서들은 다 조물주가 인체를 설계함에서 선견지명이 모자란데서 비롯된것이라 말하고싶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입과 밥통을 만들어주었기에 화를 자초한것이다.     식물은 입과 위가 없어도 잘들만 생존하고 바위나 흙은 아무 영양도 취함이 없어 도 억천만년을 존재해왔다. 꼭 있어야 하는것이라면 어류나 패류가 물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귀뚜라미나 매미가 이슬에서 생존에 필요한것을 섭취하게 하지 않았는가? 이것들은 다 이슬이나 물에서 영양분을 취하여 서식하고 정력을 보충받아 헤염치고 날고 뛰고 울어대면서 짝짓기도 하면서 아주 자유자재로 살고있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조물주가 인간에게 입과 밥통을 줌으로써 태초부터 먹거리를 위해 피비린 사투를 벌리며 수천만년이란 기나긴 과정을 누비며 어렵사리 진화해 현대문명인에 이 르러서도 먹기 위해 헐떡거리게 된것이다. 거기에 온갖 식욕과 더불어 삶의 질을 높 이려는 욕망도 끝없으니 고달픈 생물이 된것이다. 참말이지 이 두개의 구덩이는 밑빠 진것이라기보다는 영원히 메울수 없는 골짜기나 바다처럼 되여버렸다. 사람에게 이 밑빠진 구덩이가 있는 한 식욕을 말려낼길 없게 된것이다. 밑창없는 입과 위장을 위해 인체의 다른 기관들이 분전하게 되였으니 조물주를 비난할만도 하지 않는가!     하지만 공자님은 인간의 식색이라는 이 본성을 아주 너그러운 태도로 해석하였다. 하긴 색욕을 절제한 사람은 혹 있어도 식욕을 극복한 어떤 성인군자도 없었느니 말이 다. 금욕생활로 수도한 고행자는 많아도 그 어떤 위인도 한두끼만 굶으면 먹을 생각 만 앞서게 되여 아무일도 할수 없게 되였느니 요긴한중에 요긴한 일이 아닐수 없다.     하여 우리 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도 생기고 빈배에는 애국도 없다는 명언도 만들어진것이다. 점잖음을 차려야 하는 국제회의에서 아무리 긴급하고 중요한 국제문제를 의론하더라도 오찬, 만찬이란 소화공정을 건너뛰지 못한다. 먹는 일이란 이처럼 무시할래야 무시할수 없는 생사문제라는것을 실증하고있다.     자고로 인성에 지혜로운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자긍하는 중국인들은 온갖 다툼질이나 시비를 재판소가 아닌 식탁에서 순리롭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아무리 큰 시비거리도 돌고도는 순잔속, 마주치는 건배속에 눈녹듯이 융화되며 차후의 화목과 리익도모도 기약된다는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푸짐한 먹거리 자리는 정계나 재계나, 상계를 비롯한 모든 령역에서 자기 목적과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운치있고 안전한 지름길로 되여졌다.     대저, 인간이 누리고 있는 향락이 다양하지만 으뜸으로 꼽히는것인즉 곧 식도락 으로서 식욕은 색욕이라는 다른 본능보다 금기사항이 없고 사회법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런데 먹거리와 인간의 기질 사이에는 자연히 맥락이 슴배여있어 상상이 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서양의 한 동물학자의 글을 본적이 있다. 순초식동물 들은 하나같이 그 성질이 평화롭고 유연하게 되였다. 례하여 소, 양, 말, 코끼리 등, 이와 반대로 육식동물들은 하나같이 흉맹한 싸움군이다. 이를테면 승냥이, 이리, 범, 사자, 독수리 등과 같은 동물들이다.     자연은 다툴필요가 없는 곳에서 호전적기질을 가지지 않는다. 만약 인간도 자초에 초식동물이였다면 인성이 지금보다 많이 유연하여 살생에 이골이 트지 않았을것임 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재의 인류는 육식동물, 채식동물의 두가지 본성을 다 가진 지극히 리기적인 동물로 되였으니 상냥한 성품과 모순된 잔인함을 두고 조물 주도 고개를 내저을지 모른다.     영양과잉시대에 들어와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채식에도 기울어지고 있긴 하다. 과도한 육식은 건강에나 성격형성에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각이 든 사람들 은 다 알고있다. 하지만 우리 이곳에서는 아직도 육류소비가 줄어들줄 모른다. 아마도 가난하게 살았던 어젯날의 허기가 아직 채메워지지 않아서인것같다. 큰거리, 작은 골목들에서 양을 잡아서 거꾸로 달아맨 처절한 정경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그런 정경을 보노라면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다. 바로 아일랜드 출신인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버나드 쇼이다. 그는 가장 신랄한 글의 저자로서 좀 건방지고 불손하 며 자기과시적이였지만 노벨상까지 받았는데 94살까지 살면서도 고기한점 먹은적이 없는 철저한 채식가였다. 누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모르나 그가 죽은후 길다란 장례행 렬의 맨 뒤에 난데없이 수많은 양과 염소들이 따라오면서 구슬프게 울어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있다. 하지만 여기 양들은 사람을 감동시킬 그런 장 례행렬이 없으니…그래서인지 몰라도 영국에서는 직업백정이나 외과의사는 재판에서 증인으로 설수 없다는 법규까지 있다니 그야말로 유머스럽다고 하리라.     양들이 울부짖거나 말거나 금방 잡은 어린양의 고기는 불고기로는  일품이라 그 맛도 독특해서 미식가들이 선호하는것이다.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어린양을 죽여 가 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장면을 볼 때에는 너무 끔찍스러워 눈길을 돌리지만 고소한 고기맛의 유혹에 사로잡혀 숯불가마옆에 모여앉아 먹어대며 희희락한다.                         가죽은 벗겨져 마루바닥에서 꿈틀거리고                         꼬챙이에 꿰여진 살점들은 숯불우에서                         너무 뜨거워 오그라들면서 울부짖고있다.                         얌전한 아가씨는 냠냠 맛있게 먹어대며                         배속에 들어간 양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만포식의 희열속에 미소를 짓는다.     이처럼 인간에게 즐거운 식도락이 첫째가는 행복의 순간이라는것은 헛소리가 아닌것같다. 내 식성에 맞는 음식이 생기여 그 구멍난 주머니를 자꾸 채우다 보면 거기에 따르는 후유증으로 날따라 늘어나는것은 뱃살이다. 이률배반이라고나 할가, 몸에 여기저기 부풀어나는 비게덩어리로 하여 살빼기라는 신흥산업이 생겨나서 노다지판을 만난 외과의사들이 한시기 웃음주머니를 흔들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만물의 령장이라 자처하는 인간들만큼 령리하고 사악한 동물은 없으렸다. 지구촌에서 무적의 맹수들도 있는 힘을 다해 사냥물을 잡아야 한끼를 에때울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때나 먹고 싶으면 타동물의 고기를 배터지게 먹을수 있는 동물 로는 인간들뿐이다. 온하루 컴퓨터에 마주앉아 손가락운동만 하다가 퇴근길에 정육점 에 가서 마음에 드는 고기덩이 몇근을 사다가 제식성에 따라 지지고 볶고 료리하여 만 포식하는 세상이니 확실히 살맛이 날것이요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라 하겠다.     마(魔)가 한자 높아지면 도(道)는 한장(丈) 높아(魔高一尺, 道高一丈)진다고 인젠 다이어트산업도 가급적으로 발달해서 아무리 출렁이는 뱃살도 칼로 째고 아무리 큰 곱덩이라도 단칼에 잘라내고 뱃가죽을 꿰매버리면 만사대길이다. 하여 먹고싶은것을 마음껏, 량껏 잡수어주어도 겁날것이 없다. 이 역시 현대과학이 비대증환자들에게 하 사한 복음이라고 해야 하나?        형법에는 간통, 리혼, 성폭행…등에 대한 법조목이 구전하지만 먹는문제에서는 부도덕이니 부정이니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지만 근래에 와서 국가공무원들이 제돈이 아니라 공금으로 최고급으로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질탕 먹고 마시는 풍조가 도를 넘어서 더는 좌시할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게 되자 마침내 “나라님”께서 브레이크를 걸었는데 비록 늦었으나마 다행이다.    수많은 공직원들이 공짜로 진수성찬을 탐식하는데 습관이 되다보니 제주머니를 열어서 식도락을 즐기는데는 퍼그나 린색한지라 자연히 포식을 절제하게 되고 남산만 하던 배도 자연히 꺼져들어서 외과의사들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되였다. 이런것을 일희 일비라 해야 할지, 만백성이 박수치는 중앙의 이런 시책이야말로 일석이조가 하겠다.     바라건대 이런 영명한 시책이 림시방편으로 도지 말고 장구한 국책으로 이어졌으면 하는것이 모든 선량한 국민들의 소박한 바램이고 또한 절실한 요구이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이 풍요로운 시대, 아무리 먹으라는 입이라도 절제의 철학을 따르는것이 지혜로운 처사라 할것이다. 모두에게 도움이 될지 고사 한편을 인용한다.     춘추시대 로나라 환공(桓公)이 항상 자신을 경계하려고 기(欹)라는 그릇을 옆에 놓아두고 있었다. 공자가 그 그릇을 두고 “이 그릇은 속이 비여있으면 기울어지고 중간쯤 채워져있으면 똑바로 서고 가득 차면 엎어지므로 환공이 늘 앉은 자리에 이 그릇을 놓아두고 자신을 경계하였니라”하고 제자들에게 설파하였다.     늘 앉은자리 좌(坐),곁(右)에 두었다고 했으니 이것이 “좌우명”의 본뜻이다. 가득 차면 균형을 잃고 쓰러지고 무슨 일이나 지나치면 후회가 뒤따르는 법이다. 이 것을《주역》에서는 이렇게 경계하고있다. “끝까지 올라간 룡은 후회(亢龙有悔)” 한 다. 옛글에 과유불급이라 하였으되 넘쳐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도리는 상식이지만 누구나 다 알면서도 잘 실행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물의 령장이라 해도 참 딱하도다.                       2016년 1월 10일
16    한 사람을 알아보기란… 댓글:  조회:1279  추천:0  2016-03-20
                                     한 사람을 알아보기란…                                                   한 세 준        공자의 일생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학(学人)의 길이자 정객(政客)의 길이였다. 결과적으로서 정객으로서는 실패했으나 학인으로는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리 념이 로나라에서는 실현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제후국들의 왕을 설득하기 위하여 10년이 넘도록 주유렬국하였다. 그의 나이 50대에서 60대후 반까지의 일이였다.     공자의 명성은 이미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그 어느 나라에서도 공자의 일행을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제후국들이 정치현실이 공자의 덕치주의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반겨주지 않은 려행길이야말로 고행의 련속이였 다. 이것을 두고 후세의 많은 문장가들은 천하를 주유했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온갖 박해를 받으며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류리방황”의 길이였다.     공자가 제자들과 채나라로 가던중 어려움을 만나 일주일을 채소만 먹고 긴 려행을 하고 있었다. 수제자인 안희가 스승의 모습을 안타까이 여겨 일행이 쉬는 틈을 리용하여 마을에 들어가 어렵게 쌀을 구해 밥을 지었다. 공자가 려로에 지쳐 잠간 조을다가 밥짓는 냄새가 나서 눈을 떠보니 때 마침 안희가 솥뚜껑을 열고 뜨거운 밥을 한웅큼 쥐여서 입에 넣는것이 아닌가.     공자는 “어디서 쌀을 좀 구해온 모양이로구나…”하고 희출망외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희의 행동거지가 의심쩍었다.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스승보다 먼저 제 배를 채운다는것은 례의에도 맞지 않고 또 인간의 도로서도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안희는 공자가 가장 신임하는 제자였다.    그는 재능은 있으나 부귀공명을 구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피하여 사는 은군자적인 성격이였는데 례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공자님의 가르침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사람이였다. 더구나 안희는 굶기를 밥먹듯 했어도 례의를 어긴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찌 착한 안희가 저럴수가 있을가? 평소에 안희는 내가 먼저 먹지 않은 음식에 수저도 대지 않았는데 그 모든 것이 거짓이였단 말인가? ”     공자가 잔뜩 언짢은 기분에 잠겨있는데 안희가 밥상을 들여 공자앞에 내려놓았다. 공자는 안희를 어떻게 가르칠가 생각하다가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안희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 지내라고 하더구나" 공자는 제사 음식은 깨끗하고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야 한다는것을 안희도 알기 때문에 그가 먼저 밥을 먹은것을 뉘우치게 하려 했던것이다. 그런데 안희의 대답이 오히려 공자를 부끄럽게 했다.     "스승님 이 밥으로 제사를 지낼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여는 순간 천장에서 흙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서 제가 그 부분을 이미 먹었습니다." 그제야 공자는 “오, 원래는 그랬었구나. ” 하고 말하면서 안희 를 바로 쳐다볼수 없었다. 잠간이지만 충직하기 짝이 없는 제자를 의심했던 자신이 너무나 옹졸하 여 한심하고 부끄러웠던것이다. 그리고 련신 탄식을 거듭하였다.     공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것이 못되는구나.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 의 머리도 완전히 믿을것이 못되는구나.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것만이 진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한 사람을 리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것을 말이다.”     이 이야기는《려씨춘추》“심분람”편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열길 물속은 알수 있어도 한길 사람속은 알기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공자의 이 일화는 진실에 도달하는 어려움을 시사하고있다. 제눈으로 직접 본것,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믿 음같은것이 때로는 실체가 아닌 허상일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어느 때인가 공자는 안희를 이렇게 평가했다. “안희는 공부할 때 한번도 질문하지 않아서 어리석은것같이 보였는데 그가 나한테서 물러나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살펴보니 내가 가르쳐준바를 온전히 실천하고 있었다. 안희는 절대 어리석지 않니라.”    공자는 산과 같은 사랑, 물과 같은 지혜를 겸비한 성인이였다. 그의 어록을 담은 론어에는 지혜와 유머, 편견과 아집, 희망과 기쁨, 분노와 슬픔, 쓸데없는 자존심과 탄식 등으로 인간다움과 자기실현의 과정이 적f라라하게 드러나있다. 공자는 끝없이 배우는 사람이고 배워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성인이였다.     “나는 하루에 세번 반성한다. 남을 위해 충성을 다했는가, 친구와 사귀어 믿음을 지켰는가, 배운것을 남에게 전했는가?”하고 말한 이는 잠시나마 제자를 믿지 못하고 의심을 했던것을 철저하게 반성한 공자이다. 공자의 어록을 담은 론어는 우리가 본받 아야 할 삶의 지침서이고 라침판이다. 나의 몸과 마음부터 닦아 남을 교화한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과 학술이며 덕행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길을 몸소 보여주었다.     공자는 동양 유가학자의 조종(祖宗)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것이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동양사상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있다. 공자는 이 세상에서 유익한 벗은 곧고 바른 사람, 남을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려는 아량이 있는 사람, 보고 듣고 깨달은 견문이 넓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장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생활속에서 진리의 길을 찾아내여 보고 듣고 배워가 면서 우리 모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 되여 간다면 그보다 더 바랄것이 있으랴만 그게 잘 되지 않으니 더없이 문명했다는 현대인들은 환골탈태해도 영원히 성인 공자의 발뒤축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우리는 지금 진실과 허상이 뒤섞여 있는 세상에서 살고있다. 그것을 제대로 가려 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 네트워크시대에 들어와서 매일 홍수처럼 쏟아져나 오는 정보의 범람속에서 진가의 여부를 가려내기 어려우니 사람들은 오히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허둥대고있는 모습이 곤혹스럽지 않은가!     물론 생명체의 본질상 어쩔수 없는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모든것은 자신의 경험 과 자신의 관점에서 천지만물을 보게 된 우리 인간들이다. 인간들의 생각은 개별적으로 모두 같아질수 없으므로 다른 인간을 안다는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깨닫는게 중요하다. 다르다는것을 인정하는게 인간을 바라보는 가장 정확한 생각이 아닐가싶다     인간이 동일한 목적으로 동일하게 움직이는것이 나와 의견이 같아서는 아니라 인간으로써 공통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이기때문이다. 미워하든 고와하든 판단이 제대로 서야 할텐데 흔히 편견이 선행하니 우왕좌왕 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물욕과 리기가 횡행하는 현실생활에서 아주 상식적인 일도 진가를 분별하기 쉽지 않다. 과연 한사람의 진가를 분명히 가려보는 혜안은 어떻게 닦야 하는가?                               2016년 1월 10일      
15    (잡문) 사기군들의 이야기 댓글:  조회:1044  추천:1  2016-03-14
                                                사기군들의 이야기                                                         한 세 준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도 음달이 있듯이 인간군들속에도 인간쓰레기들이, 사기군들이 바퀴벌레처럼 번성하여 사람들을 속상하게 하고 사회를 더럽히고있다. 세상은 넓고 사기군도 많고 그들의 사기술도 시대와 더불어 가급적으로 진화한다. 그래서 “세워놓고 산 눈을 빼먹을 세상”이라고 개탄하는 소리가 많아졌다. 례하면 영국의 경제대공황시기에 스코트랜드 출생인 아서 퍼커슨이라는 악명높은 사기군은 관광객을 상대로 국회의사당과 버킹엄궁전, 넬슨제독의 동상을 팔아먹었다.      1920년대의 어느해, 아서 퍼커슨은 런던 드라팔가 광장에서 넬슨기념상을 바라 보고있는 한 미국관광객에게 접근하여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 영국이 막대한 부채에 허덕이고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넬슨기념상과 분수대등을 매각하기로 했는데 이 비밀업무를 자기가 맡고있다고 말했다.       그 관광객이 값이 얼마냐고 물으니 피커슨은 한숨을 지으면서 실은 이 유서깊은 명물을 긴급히 처리해야 하기때문에 누구라도 당장 수표를 지급하면 단돈 6000 파운드에 매각할 참이라고 했다. 그 관광객이 수표를 지급하자 퍼커슨은 운송회사가 안전하게 운송해 줄것이라 말하고는 급급히 자리를 떴다. 그 관광객은 마침내 의혹이 생겨서 운송회사에 찾아가서 자기의 소유물을 언제쯤 옮길 예정인가고 물었다가 운송 회사직원들에게 얼빠진 작자라고 문전박대를 받았다.       이렇게 사기친 퍼커슨은 런던 국회의사당 정면에 붙어있는 거대한 시계와 비킹엄 궁전까지 전과 비슷한 수법으로 팔아치운후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1925년 퍼커슨 은 미국의 한 목장주에게 접근하여 백악관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는 말과 함께 목장주가 그만한 거액이 없다고 난색을 표하자 미정부는 진심으로 백악관을 소원하는 고객에게 활부판매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속여 첫활부금으로 10만딸라를 받아 챙겼다.       퍼커슨은 자기 사기행각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하여 뉴욕 맨해튼의 자유녀신상을 택했다. 그런데 퍼커슨은 여기서 천방야담같은 사기행각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는 자유녀신상을 넋없이 쳐다보는 한 호주상인에게 접근하여 뉴욕에서 지금 대대적인 항만공사를 계획하고있는데 이 자유녀신상이 골치덩어리라면서 누구든 철거 비용을 내는 사람에게 그 소유권을 넘기기로 했다고 나발불었다. 호주상인은 당장 계약하자고 하면서 시드니에 련락하여 그만한 거액을 송금하라고 본사에 지시했다.       송금을 기다리는 동안 퍼커슨은 혹시라도 이 사람이 자유녀신상을 소유하게 되였다고 떠들고 다닐가봐 그의 곁에 딱 붙어있다싶이 하였는데 재주를 쓰다가 메주를 쓴다고 그만 실수를 하고만다. 호주상인이 이 력사적인 거래를 기념하자면서 사진을 찍자는 건의를 들어주고 만것이다.      호주로부터 송금이 늦어지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리유로 초조하게 되였는데 이를 의심하게 된 호주사람이 경찰에 신고하게 되고 마침내 두 대륙을 넘나들며 력사적인 기념물과 건물을 팔고다닌 사기군이 체포된다. 하여 5년형을 선고받고 1930년에 석방되여 만년을 보내다가 1938년에 죄많은 인생을 마쳤다.      그리고 또 한 사기군은 프랭크 애버 그네일이란 자이다. 그는 1948년에 뉴욕에 서 태여났는데 부모의 리혼으로 어려서 탈가한 그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사회적 신뢰를 얻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16세부터 21세되는 해까지5년동안 비행사, 의사, 변호사, 교사 등으로 분장하고 사기행각을 벌렸다. 그는 8개의 가명을 사용했으며 미국을 비롯한26개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위조수표로 250만딸라를 해먹었는데 1970년 프랑스에서 체포되여 프랑스, 스웨덴, 미국감옥에서 복역하였다.       그런데 웃기는것은 청소년이라고 겨우 12년도형을 받았는데 흥미로운것은 그의 사기수법이 탁월하여 미국정부를 위해 일한다는 전제하에 5년만에 석방되였다는 사실이다. “FBI”스카우트(인재물색)하여 빼내갔다. 출감이후 그는 25년동안 미국의 정부기관에서 고도의 사기술과 법제에 관한 리론과 실무를 가르쳤다. 현재 그는 금융사기의 예방과 비밀문서의 보안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로 자리매김을 하고있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많은 기관과 기업에서 애버 그네일이 개발한 위조방지 프로그램과 금융사기예방프로그램을 사용하고있기에 그는 자신이 개발한 위조방지 프로그램으로 매년 수백만딸러를 벌고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기군으로 꼽히 고있다. 자초에 그의 사기수법이 얼마나 교묘하고 정채로웠던지 미국에서는 그의 사기행각을 소재로 한 TV드라마와 영화를 제작하였다. 역시 미국식의 아이러니이다.     미국에서 다분히 변칙적인 방법으로 벼락부자가 된 도널드 트럼프란 사람이 몇년전 돈버는 방법을 책으로 펴내여 많은 돈을 벌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이름만큼이나 도박같은 인생을 사는 그는 미국 부동산업계의 큰손이며 동부의 라스베가스라 할수 있는 애틀 탠틱시티에서 거대한 도박장겸 호텔을 경영하고있다. 그가 추호의 부끄럼도 없이 자랑스레 말하는 자신의 성공담은 영락없는 사기행각으로 시작됐다. 하긴 그의 경쟁자들은 트럼프를 실제로 사기군이라고 비난하고있다.      그도그럴것이, 남의 부지에 버젓이 많은 장비를 가져다놓고 위장하거나 싸인도 없는 계약서를 확정된것처럼 들고다니며 은행원들을 불러들여 자기땅인양 속여서 첫 사업자금을 얻어낸 능갈친 자였으니 말이다.      그는 1980년 뉴욕시 한복판에 초라하고 불결한 코모도호텔을 인수하여 그랜드 하잇트로 개조하여 발판을 다졌고 1982년에는 맨해튼에 58층짜리 최고급주상복합 빌딩인 트럼프타워를 거대한 규모에 최고급의 화화디자인으로 꾸며 전문 부유층을 상대하는 트럼프타워를 세웠다. 그는 상투적인 수법으로 최적지를 확보한뒤 로련한 사냥군마냥 최악의 불경기를 기다렸다가 시기가 닥쳐오면 능란한 재주와 흡혈귀를 련상케하는 무자비한 공격성으로 달려들어 일거에 성사시키군 하였다.      물론 그의 행각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세계지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부동산 제국을 꿈꾸던가 그가 10억딸라짜리 프로젝트인 디지마힐 카지노호텔에 겁없이 손을 댔다가 실패하여 무려 100억딸라의 빚을 걸머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에 부동산시장의 호황에 힘입어 다시 호텔사업으로 재기하게 되였다. 2004년에는 신흥카지노세력에 눌려 18억딸라의 채무로 파산위기에 봉착했으나 6개월만에 구조조정에 성공하여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처럼 승패가로 헛갈린 파란만장의 트럼프인만큼 사생활 역시 스캔들의 련속이였다. 그는 수차례 결혼과 크고작은 감정위기를 겪었다. 그의 마지막 부이인 슬로 베니아 모델출신인 멜라니아 나우스는 28세의 어린나이에 환갑이 다 된 트럼프에게 마지막 아들을 낳아주었다.      미국사회에서 부자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수 있는데 첫번째는 고전적인 청교도 적인 부자들로서 엄청난 부에 비해 검소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두번째는 트럼프와 같은 부류로서 천문학적인 부를 배경으로 마음껏 화려한 삶을 구가하는 부류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세계경제를 휘여잡은 사람들이면서도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일반적인 삶을 사는 한편 빈민구제, 교육, 문화등에 막대한 기부를 하는 자선가들로서 이를테면 만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같은 부호 들이다.      상술한 사기군의 이야기는 사기군치고는 세계적으로도 큰손들이였다. 물론 사기행각을 선양할것은 못되지만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그 어디에나 사기군들이 없는 곳이 없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현세에 그 사기수법은 더욱 다양해져 전화사기, 인터넷사기 등등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사기행각이 란무하는 세상에 선량한 사람들 에게 경종이 되리라 생각되여 여기에 옮기는 바이다.      말은 그럴듯 잘 하지만 그 내용이 거짓된것을 사기라고 이름한다. 사기는 사기군들이 친다. 그 리유는 불로소득의 탐욕에 있다고 하리라. 타인의것 또는 자신의것이 아닌것을 불로소득의 이득을 구가하기 위해 사기라는 단어와 행위와 공범들이 존재한 다. 사기들군에게는 공동하게 써먹는 법보가 있다. 즉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욕심을 자극하여 상대방이 스스로 끌려들어오게 하는것이다.   사기군들은 그 사람의 허황한 욕심에 작은 불꽃을 튕겨줄뿐이다. 그래서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꽤나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다. 좀 미련하다싶을 정도로 소신껏 살면 사기당할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 세상이 돌아가는 리치를 웬간히 터득하고 그 속에서 지름길을 찾아보려는 헛똑똑이들이 항상 사기군들의 밥이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것은 돈이 판을 치는 미국땅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그런 비리를 알면서도 현재 그가 백만장자라는 사실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 하고 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의 그런 비화를 책으로까지 엮어서 더 많은 돈을 긁어모았고 그래도 그쯤한 돈에 성차지 않았던지 지금 차기 미국대통령선거에까지 뛰여들어 여기저기서 설쳐대고있다.      혼돈의 세계라도 우리의 순진한 의식으로는 미국이란 나라를 리해할수 없다. 미국은 분명 축복받은 땅인가? 아무리 사기군이 판을 치는 미국땅이라해도 트럼프와 같은자가 대통령선거경쟁에 납뜬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이비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민주, 공화 량당의 악어의 물같은 구정복의 물, 그것이 세상의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사기를 치고있는 세상이라면 그런 미국의 모습이 현재로부터 미래의 미국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6년 1월 10일      
14    (잡문) 온고이지신의 진의 댓글:  조회:862  추천:0  2016-03-04
                                  온고이지신의 진의                                         한 세 준               《론어》(위정편) “옛것을 읽혀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만하다.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温故而知新,可以为师矣)”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温”은 익힐“습(习)”과 의 미가 비슷하다. 그러면 “온고이지신”이 무슨 뜻이기에 스승이 될수 있다는것일가?     자고로 스승이라 하면 오히려 임금보다도 정신적으로 더 높은 존경의 대상이였다. 심지어 “부모나 왕의 잘못을 간언하라”라는 말은 고전에 있지만 스승이 잘못이 있을 때 어떻게 하라는 말은 본적이 없다. 그만큼 “온고이지신”은 단순히 옛글을 깨득하여 새로운 글을 아는 의미만이 아니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조선의 정조대왕을 사례로 들어보자. 하루는 정조가 “온고이지신”이란 무슨 말인가고 물으니 리유경이 “옛글을 익혀 새글을 아는것이옵니다.”라고 대답을 올렸다. 그러자 정조가 “그렇지 않다. 초학자들은 이렇게 보는 페단이 많은데 대개 옛글을 익히면 그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여 자기가 몰랐던 새로운것을 더 잘 알게 된다는것을 말한다.” 정조가 시독관 리유경과 경연을 하다가 주고받은 대화이다. 경연이란 임금이 학식이 높은 신하와 함께 경서를 강독하 는 행사를 이르는 말이다.     당시 정조는 즉위한지 일년이 채 안되는 때였으니 어린시절부터 책과 더불어 살 아왔던 정조의 학문이 얼마나 연박했는가를 짐작할수 있다. 그러면 옛글을 통해 새로 운것을 알려면 어떻게 글을 읽어야 할가?《예기》에 이런 글이 있다. “단순히 외워서 장악한 학문으로는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기엔 부족하다. 그냥 외우기만 한다는것은 생각보지 않는다는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옛날 우리가 공부하던 방식을 돌이켜보면 가히 깨침이 크다고 말할수 있겠다.     례를 들어 력사공부를 하면서 력사사실의 인과관계라든가 상황, 사건의 개연성을 생각하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년도만 죽어라고 외워대던 일이 새삼스럽다. 선생님들도 력사지식에서 년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 시험에도 잘 내는 문제이니 꼭 잘 외워 야 한다고 루루이 강조했다. 선생님의 말대로 사건의 년도만 기억하기에 애쓰다보니 력사사실의 인과관계 등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분석연구할 여념이 있었겠는가?     력사는 왜 배워야 하는가? 력사는 현시대의 거울이라 할진대 력사공부를 하면서 통찰능력과 미래예측능력을 얻을수 없던것은 당연하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 곧 희미 한 기억의 페지로 남으니 어찌 새로운것을 얻을수 있으며 그것을 응용할줄도 모르니 어찌 남을 가르칠수 있겠느가?그러니 무엇을 배웠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 완전하게 터득하여 자기것으로 만들라는 말이다.     유태인의 지혜의 총화라고 할수 있는 “탈무드”라는 책에도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 하면서 “책을 읽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나귀가 책을 잔뜩 싣고 가는것과 다 를바 없다”고 제시하고있다. 우리 말로 그저 공을기같은 “글뒤주”가 되지 말라는 뜻 이다. 상술한 례문은 공부나 독서함에서 지식을 습득하는것과 스스로 생각하기가 병진해야 한다는것을 깨우쳐주고있다.     두뇌에 많은 지식을 축적하고 그 지식을 운용하여 비판하고 표현하면서 경험함으로써 나만의것으로 변형시켜야만 실제 생활에 유용한 지식이 되는바 곧 “온고이지 신” 이 되는것이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것을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사고방법이 류추 라는것이다.     인류의 력사에서 최고의 현자로 꼽히는 솔로몬왕은 “3천여년전에 이미 있었던것 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태양아래 새것이란 없나니…”라 고 설파하였다. 그러니 완전한 창조는 신만이 할수 있다는 고백인것같다. 주자와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근사록(近思录)》의 핵심원리라 할수 있는“이류이추(以类而推)” 라는 말도 “가까운것을 가지고 미루어 생각하는것” 류추의 사유방식을 론한것이다.     그러나 이미 있던것에서 새로운것을 생각해내기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며 그만 큼 실천적으로 잘 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혁신적이라고 하면 “무”의 상태에서 “유”를 만드는 창신을 떠올리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아니면 모든 창조는 재창조라 하였겠는가!대화가 비카소는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하였는데 과시 계시성적인 금언이라 할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창의적인 기업인으로 칭송받는 스티브 잡스는 이 말을 인용하여 “우리는 언제나 위대한 아이디어를 뻔뻔스럽게 훔쳐왔다”라고 말했다. 1979년 어느 날, 제록스연구소를 창관할 때 “그리픽 사용자환경”기술을 보고 이것을 베킨토시에 적용한 사례를 두고 한 말이다. 아이폰도 기실은 기존의 스마트폰에 남들 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기능을 융합시켜 만들어낸 재창조품이다.     남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력사적인 발견을 한 과학자들과 음악, 미술, 문학 등의 모든 예술분야에서도 류추하지 않았더면 탄생하지 못할 작품들이 많다. 다 아는 얘기지만 뉴톤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법칙을 발견한것도, 개미가 음식물을  물고 가는 모습에서 상처봉합기술이 나왔고 옷에 붙은 엉컹퀴가시를 보고 찍찍이라 불리우는 벨크로가 만들어졌다. 발명가 조르주 드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이 프랑스 고어로 벨벳(velvet)에 해당하는 블루아르(velours)와 걸이(hook)에 해당하는 크로셰(crochet)를 결합하여 벨크로(Velcro)라고 명명했다.       쉐익스피어의《로미오와 쥴리에트》,《베니스의 상인》등 만세유전의 명작들도 실은 다른 작품들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했다고 전해지고있다. 또 옛날사람들은 속이 빈 나무를 보고 배를 만들었으며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중의 하나인 문자도 새의 발자국을 본떠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렇듯 인류력사에서 획시대적인 발명창조는 거 의 류추에 뛰여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창조적파괴전략”으로 유명해진 미국의 요세프교수는 “혁신은 세상에 없었더 새 로운것을 만드는것이 아니라 단지 자원의 결합방식을 바꾸거나 새롭게 결합해 그 가 치를 높여주는 활동”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티브 잡스도 “창조성이란 무엇인가를 련결하는것에 불과하다. 창조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아무것 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바라볼뿐이다. 보노라면 명확해진다. 과거의 경험을 련 결해 새로운것을 통합할수 있기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현시대는 혁신적인 생각과 창의력을 가진 개인과 기업이 성공하는 우승렬패의 시대이다. 남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것을 생각해 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사람 만이 남다른 결과를 낳아 도태의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다. 즉 적자생존인 이 시대인것이다. 그러나 이런 창의력이 완전이 무중생유로 새것을 창안해내는것은 아니다. 세상에 아예 없었던것,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것을 찾아헤맨다면 그냥 삽질만 하다가 한방울의 물도 보지 못하는 격으로 되기 십상이다.     말하자면 어떤 신생사물을 보았을 때 “저것이 무엇인가?”하는 단편적이고 피상적 인상에 그치지 말고 “저것이 또 무엇이 될수 있을가?”하는 창의적인 생각에 몰입한다 면 새로운것을 만들어낼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것들을 서로 련계시켜 생각하는것을 미래지향적인 구상이라 말해도 틀리지는 않을것이다. 이는 인류의 발명, 창조의 력사 가 증명하고있다. 옛것과 새것, 기술과 인문학, 제품과 감성 그리고 다양한 학문들 등 판이하게 다른것들을 합쳐서 새로운것을 새로 조합해서 새것이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창의력이 출중한 사람들이며 인류의 고기술발달의 선두주자로 된다.     세상의 다양한 령역에 숨어있는 가능과 목적이라는 실제를 찾아낼 때 우리는 새로운 풍경선을 볼수 있을것이다. “태양아래 새것이란 없나니…”라고 단언한 솔로몬왕 의 말은 진리성적인 제시이다. 그러고 보면 공자의 “온고이지신”의 교육사상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만고절창이라 하겠다. 새것은 그저 새것이라고만 여기며 무작정 없는것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세대들은 심사숙고해봐야 하리라.                                 2013년 2월 13일  
13    (잡문) “보신탕”을 말하다 댓글:  조회:880  추천:0  2016-02-27
                                                “보신탕”을 말하다                                                            한 세 준         한개 민족의 민족적특징은 언어외에도 복장문화, 음식문화, 주거문화에서 뚜렷이 체현된다. 그러나 모든것이 변한다는 절대법칙아래 잃어지고 바뀐것이 너무 많다. 우선 우리 민족의 자랑이던 한복의 운명은 풍전등화로 되였다. 남자들의 한복은 거의 절멸상태에 이르러 환갑상을 받을때나 잔치같은 민족행사때나 혹간 그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 우아한 전통미로 하여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있는 녀자들의 치마저고리도 무슨 행사때나 형식으로 입을뿐이여서 날따라 그 빛이 바래고있다.         한복이 현대복장문화의 뒤켠에 밀려난것은 입는 과정이 복잡하기때문일가? 아니면 생활화되여있는 사람이 적어졌기때문일가? 일반옷보다 더 비싸기때문일가? 다른 리유들을 더 들수도 있겠다. 례컨대 과학기술이 발전하였기때문, 편한 옷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기때문, 새롭고 멋진 벼라별 패션의 옷이 새록새록 개발되였기때문이라는 등등…전 통복장문화의 이화를 민족전통의식의 이화로 해석하면 어페인가?         다음 주거문화의 변이도 사색을 불러온다. 비좁은 생존공간에서 인구가 팽창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공간에서 오글거리며 살자면 양계장의 닭장처럼 아빠트라는 층집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서양식거주형태가 편리할지 몰라도 인간의 생명본질에 따르면 생명의 근원인 흙과 멀리하게 된것은 이률배반적으로 바람직하지는 않다. 허공에 매달려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살아가는 생태이므로 정신상, 육체상에서 건강 이 해를 입고있다. 그래서 한 선인은 흙을 멀리하면 병원과 가까워진다고 하였거늘…      이와는 조금 달리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문화만은 그 변화가 완만하여서 민족고유의 전통을 용케도 보전하고 있는데 불행중 다행이라 생각한다. 옷이나 집은 우리 몸 밖의 필수품이지만 음식은 내몸속에 들어가는것이여서 쉽사리 변화하지 않는지 모르 겠다. 단군족의 주식인 밥 그리고 김치, 된장, 고추장 등 고유음식은 체질적으로 멀 리하고는 살수 없기때문일수도 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말해주기도 하는 떡국, 송편, 만두국, 오곡밥, 동지날 팥죽, 백설기, 찰떡, 랭면… 등 다종다양한 전통음식은 그 맛도 독특하거니와 민족문화의식 을 오롯이 담고있어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왔고 또 부단히 개발하고있는 상황이다. 그 중에서도 선호도가 조금도 내려가지 않는 음식이 있는데 바로 개고기료리이다.그런데 개고기문화는 한국땅에서 두번이나 죽었다가 소생한 파란많은 운명을 겪어오면서도 지금껏 국민의 사랑을 받고있으며 호칭도 듣그럽게 변하여 “보신탕”으로 되였는데 이에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사연이 담겨져 있다.         단군족의 개고기문화에 처음 일격을 가한 녀자는 푸른 눈을 가진 프란체스카라는 녀자였다. 그녀는 한국초대대통령인 리승만의 령부인으로서 그녀가 한국땅에 들어서 면서 개고기문화가 비운의 서막을 올렸다. 당시 그 어떤 국책이든 합리화라는 과정이 생략되고 대소사가 대통령의 일언지하에 진행, 처리되였다. 그러다보니 여러장관들과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상황에서 령부인이 많은 일을 주관하게 되였다.         그녀는 어머니로 되여보지 못하였고 인간됨됨이가 별로 출중한데가 없이 경직된 성격이였다. 그러나 자기 남편ㅡ일국 대통령에 직접 미치는 영향은 막강하였다. 하긴 베개머리송사에 넘어가지 않은 위인은 아직 지구촌에 태여나지 않았으니 그녀가 주 단한 일이 성사되지 않을때가 없었다.        1946년 봄, 한국땅에 들어선 그녀는 개장집이 지천으로 널리였고 한국인들이 제일 즐겨먹는다는 사실에 기절초풍할지경이였다고 한다. 개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애지 중지하는 개를 한국인들이 잔인하게 잡아먹는다는 사실은 유럽의식으로는 도저히 리 해되지 않았고 용납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리하여 경무대(청와대의 옛호칭)가 발칵 뒤집히는 소동이 일어났고 즉시 개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엄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적차원의 명령이라도 수천년을 내려온 전통습관을 일거에 해소시킬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개고기음식금지법을 당장 내올수는 없었고 경찰을 동 원하여 개장국집을 봉쇄할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건국초창기라 국민이 헐벗고 가난했던 그 당시 개고기는 주요한 육류원천이였다. 경찰들 가운데도 개고기를 잘 먹는자들이 많은데 그 신성한 사명을 그들이 떠맡게 되였으니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었다.         국민을 설득할 방법이 묘연하던지 경찰국간부회의에서 한 사람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는데 바로 개장국호칭을 바꾸자는것이였다. 대통령부인이 개장국이라는 간판을 보고 제기된 문제이니만큼 약은 그 약이더라도 약탕관만 바꾸면 알게 뭐냐고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모았다. 그렇게 새로 명명된것이“보신탕”이였다고 한다. 기발하다고 할수도 있겠으나 결국 잔머리를 굴린셈이다.        개고기는 그냥 개고기로되, 몸을 보신하는 음식이라는 뜻이여서 원래의 개장국에 비하면 거부감을 제거해주는 아주 화려한 이름이였다. 대통령영부인의 덕분에 창씨 개명한 견공들이 성은이 망극하다고 하였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곰곰히 따지고 보 면 일종 현념비슷한 의미도 들어있다. 말하자면 그냥 그 국물에 그밥이지만 공연히 보약을 먹는듯한 환각을 형성하여 개고기 선호도를 높이였다.         결국 원래 개장국에 별로 흥미없던 사람들도 인삼록용이나 먹는듯한 기분으로 보신탕을 잡수어보신다고 너도나도 접어드는 바람에 개고기를 먹는 풍조가 일파만파 로 번져나가게 되였다. 그래서 농촌에도“늙은이 개장국에 접어들듯이” 라는 말이 생겨났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프란체스카부인의 영명한 시책으로 더많은 견공들이 인간의 보신탕의 원천으로 비장한 최후를 마치게 된것은 사실이다. 환언한다면  역으로 개고기문화가 확산일로를 걸어 인끼만점의 기묘한 음식으로 되고만것이다. 그후 “보신탕”은 사람들이 사랑을 받으면서 40여년 세월을 승승장구했다. 그러 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게 되면서 다시 한번 통렬한 견책을 받게 되였다. 거국적인 축제의 분위속에 들떠있는 한국의 모든것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개고기음식 문화가 거론되였던것이다. 원래 동양문화권에서 개고기음식문화가 공개된 비밀이였지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세계범동물애호자들이 이번 기회에 한국의 개고기문화에 확실하게 일격을 가하려고 작심한 판국이라 소위 보신탕집을 일일이 찾아 현지확인을 하고 대대적으로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런 국제적인 공세에 직면한 한국보건사회부는 역시 잔머리를 굴리여 개고기에는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비브리오균이 있다고 대서특필하여 여론을 조성하려 하였으나 눈감고“야옹”하는 작법과 같아서 아무효과도 보지 못했다. 정부로서는 진 퇴량난에 처했는데 엎친데 덮치는격으로 한국의 보신탕집이 유럽과 미국대중매체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게 되였으며 만민이 저주를 퍼부을 “야만적?”인 개잡는 모습이 유럽의 텔레비죤화면에 적라라하게 떠오른 최악의 불상사까지 맞게 되였다.         전통적인 개잡이는 확실히 잔인 그 자체였다. 잡히울 개를 나무에 달아매고 그밑에 불을 지피고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둘겨패서 죽이는데 단번에 죽이지 않고 몽둥이 찜질로 천천히 죽여야 고기가 연하고 맛이 좋다는 천하에 몹쓸 도살법이였다. 이것은 만물의 령장이 할수 있는 행태이지만 인성의 일면이 표현된다.         이런 장면이 곧이곧대로 텔레비죤화면에 올라 유럽인들의 가가호호 안방에까지 전파되였으니 개고기를 먹는 그 습관보다도 우선은 개를 죽이는 그 야만성이 천인공 노할 일이 되여 세계인들을 경악의 도가니속에 몰아넣은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 르러 국제적으로 서울올림픽에 대한 거부반응까지 거세여져서 아주 긴박하게 되였다.         하여 외무부는 외교대책에 나섰고 내무부역시 경찰당국에 명령하여 모든 보신탕집의 영업을 정지시키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게 하였다. 서울올림픽의 성패를 건 국가 적대사인데 간이 배밖에 나온 놈이라도 거역할 일이 아니였다. 보신탕이 제2차 역풍 을 맞은것이다. 그런데 전번과는 달리 영업집들에서 시교의 뒤골목이나 은밀한 곳에 잠적해서 간판도 걸지 않고 영업하였거나 업주들이 제나름대로 호칭을 바꾸어 간판을 거는 기특한 발상까지 내왔다. 그 양상이 기기묘묘하였는데 이를테면 사철탕, 영양탕, 자연탕이 있는가 하면 멍멍탕, 보양탕 등 하여간 인간의 상상력이 최대로 발양되다 보니 그 호칭이 류류별별에 형형색색이였다고 한다.         그렇게 “보신탕”이 2차역풍을 맞게 되여 각이하게 변신하면서 국내외의 압력과 견제를 수용하는척 하면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았으니 습관이란 과시 제2천성이란말이 과언은 아니다. 인성도 모질고 그 심상도 악착해서 전통의 기치아래 그냥 자행되고있 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국제동물가협회의 끈질긴 압력을 겸허하게 받아 들어야 할것은 두말할것 없다.         허나 다음으로 생각할것은 개고기음식문화 자체를 비인도적이고 야마적이라며 국 제정치적압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리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인간이 문화는 정신과 물질의 지속적인 교체과정을 통해 독자적으로 생명력을 가지고 형성되는것이며 따라서 각민족에게는 고유의 음식문화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 민족의 개고기음식을 먹는것이 유럽사람들과 다르다고 야만적이라 몰아부치는것 역시 진리성적이 아니다. 우리는 프랑스인이 개구리나 달팽이를 먹고 타 이인이 원숭이 골수를 먹으며 몽골족이 말이나 양고기를 즐기고 일본인이 말고기와 물고기를 날것채로 먹고 중국인들이 오리알고 오리고기를 좋아한다는것을 야 만적이라 하지 않는다. 그만큼 상술한것들은 그 민족들의 음식문화일뿐이다.         보신탕이 외세의 문화침략에 맞서서 싸워 살아남은 개고기음식의 혈투는 가상스러운 쾌거라 할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정치사에서 외세의 정치적압력으로부터 어떻게 민족문화를 지켜내야 할것인가를 단적으로 시사하고있다. 국제정치는 분명하 게 말한다. 정치적패배도 군사적패배도 만회가 가능하지만 문화적으로 패배하면 스스로의 모든것을 잃는다는것을 확실하게 증언하고있다. 지나간 력사의 흐름을 되돌아 볼 때, 우리 민족을 뿌리채 훼멸시키려던 문화제국주의의 침략이 크게 보아도 몇번 있었지만 우리는 용케도 이겨내였다. 우리는 항상 의연한 자세로 민족문화의 정체 성을 확립하였다.         기실 인류가 진화하면서 동물에 대하여 너무나 몹쓸짓을 수없이 해왔다. 지구촌에서 공존해야 할 온갖 동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짐승이라 명명하고 임의로 학대하고 심지어 자그마한 리익을 위해 잔인하게 가두고 죽이고 위속에 처넣는 걸어다는 료리감으로 치부하며 수천년을 내려왔다. 이것이 인류문명의 발달사의 한페지이다.        다른 야생동물은 잠시 제쳐두고, 개는 확실히 우리 인류와 함께 생활해온 가장 친근한 가축이다. 견공들처럼 거짓을 모르고 충성하며 배신을 모르는 귀여운 동물은 없다. 주인이 가난해도 나무리지 않고 한지에서 자고먹으면서도 불평을 모르며 주인 을 따르는 충견이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속담이 있지만 문명의 이 시대에는 개들 의 운명이 너무나 처참하다.        만약 동물들이 말할줄 안다면“이 세상에서 조물주가 만든 최고의 실패작은 인간이며 18층지옥보다 더한 곳으로 가야할 인간들이 온갖 교활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극락이나 천당으로 가려한다”고 성토하며 저주를 퍼부을것이다. 스위스 등 나라에서는 헌법으로 모든 동물을 마취시켜 도살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우리도 동물에 대한 행동을 많이 고쳐야 할것이다.                                                                  2013년 1월 14일     
12    (시조) 3수 댓글:  조회:698  추천:0  2016-02-17
시조( 3수)   한 세 준                                              옛날엔 살길찾아                           망향의 설음안고                               오늘은 돈을 따라                                   리향의 한을 안네                                       돈이면 만사통이냐                                           허무하다 인생이                          고국을 찾아찾아                              허위허위 달려오니                                    고역이야 어떠랴만                                          이방인 설음겨워                                                동족의 모진등살                                                      고국애심을 내쫓네                           현대판 노가다에                               눈물로 세수하며                                     돈가리 쌓는다고                                           아글타글 모대겨도                                                 두어라 금의환향이                                                       찬 꿈결처럼 허황타
11    (수필) 추억의 둑덕길에서 댓글:  조회:862  추천:0  2016-02-15
                           추억의 둑덕길에서                                      한 세 준      해종일 빛과 열을 쏟아주던 해가 진한듯 머뭇거리는 황혼의 둔덕길이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추색이 산야를 물들이였는데 알알이 잘 여문 곡식들이 황금빛으로 설레이면서 한해의 풍요로움을 자랑하더니 어느새 농부들의 바쁜 일손으로 수확을 끝낸 빈논벌 두렁위에 잡초만 가을바람에 멋대로 춤춘다.    푸름을 자랑하던 나무잎새들도 속절없이 색바래여 락엽귀근의 섭리를 말해주는듯 소슬한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흩날린다. 가을은 모두가 떠나가는 계절인가, 느닷없이 허전해지는 마음을 보듬을겸하여 나는 둔덕길옆에 등이 굽어 볼모양없는 참나무에 잠시 기대앉으면 쓸쓸하게 스러져가는 가을풍경에 마음도 싸늘해지는듯, 그래도 서천을 곱게 물들이기 시작한 락조가 아직도 포근함을 안겨주는듯싶다. 저도 모르게 추억의 쪽대문이 열리며 이왕지사가 주마등같이 떠오른다.    …해마다 봄이 오면 겨우내 잠자던 이 들녘에도 한해 농사차비를 서두르는 농부들의 손길에 논판들이 일변해간다. 신록이 차차 우거지지 시작하는 초여름 모내기준 비를 끝낸 논배미마다 풍년수가 찰찰 넘친다. 물에 잘익은 흙으로 잘 감아놓은 논두렁은 마치 손으로 잘 발라놓은 부뚜막처럼 지극한 정성이 한눈에 안겨온다. 그래서 채 굳기전에 마구 논두렁을 걸어다니기가 송구스러울 정도이다.     반듯하게 써레질한 논판에 뒤동산의 풍경이 거꾸로 잠겨있어 숲속에서 우는 뻐구기, 꾀꼬리, 산비둘기같은 온갖 새들의 노래소리가가 마치 논판에 비낀 산그림 자속에서 울려오는 느낌이다. 그리고 푸른벼모가 옮겨지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논판은 마치 날을 받아놓고 기다리는 시집갈 처녀처럼 안존한 자세로 아름다운 락조를 머금고 조용히 어둠을 받아들인다.     호도거리농사라 고양이 손도 빌려쓴다는 모내기가 시작되면 일손이 딸리는 집들에서는 모내기방조군들을 청해들인다. 시내에서 온 친척, 친우들중에서 농사에 생뜨 들이 많지만 그래도 논판은 시끌벅적해져서 한결 일할멋이 난다. 마을에서 서로 품 앗이를 하기도 한다. 남정네들은 새벽이슬을 걷어차며 정성껏 자래운 모를 날라다 논 판에 펴놓고 아낙네들은 설겆이도 그냥 밀려둔채 달려나와 찬물속에 발을 잠그고 잽 싼솜씨로 모를 꽂아나가느라 해저무는줄 모른다.    큰가마밥을 먹다가 호도거리농사에 단맛을 들인 농민들은 누가 시켜서 저리 극성인것이 아니다. 그 무슨 술수나 묘수가 통하지 않는 농토란 지극정성을 쏟아붓는만큼 풍작의 희열을 안겨준다는것을 너무 잘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일을 해도 맥드는줄 모르고 일손을 재우친다. 이제야 일하며 사는 재미를 체감하게 된것이다.    새참하는 때는 더구나 향촌의 분위기가 짙어간다. 논밭머리에 실실이 늘어진 수양버들밑에 거적을 펴놓고 끼리끼리 둘러앉아 웃으꽃을 피워가며 새참에 진미를 돋군다. 남정네들은 “빤챈주”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원 들큰한 막걸리를 돌리다가 지나가는 이웃들도 불러들여 인정을 나눈다     마을에 새각씨들도 따로 둘러앉아 된장에 상추쌈을 볼이 미여지게 먹어대면서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깔깔대는 소리가 밥에 반찬거리로 되고있다. 진수성찬이 별거든가? 배고플때 먹는 쌍추쌈도 임금님의 수라상에 진수성찬보다 더 맛있다. 옛날 늙 은이들이“이밥이 뼈밥”이라 하였는데 논농사가 힘든것은 사실이니 속이 든든하게 먹어두어야 하루종일 억차게 일해나갈수 있다.    이렇게 제농사를 제열정을 다내여 하다보니 예전에 한달씩 묵여가며 하던 모내기를 일주일 넘기지 않고 깔끔하게 해낸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모내기를 끝내면 한해농사는  절반 지어놓은 셈이다. 한여름이 되여 잡풀 한포기 없는 말끔한 논판에서 오롯이 자란 벼포기들이 키돋움을 하는것을 보노라면 열병식에 나선 의병대들의 모습마냥 질서정연하고 중의머리처럼 빡빡 깎아놓은 논두렁은 풍년수를 잘 가두고있다.    풍작의 가을이 오면 벼한대 흘릴세라 논판을 깨끗이 거두어낸다. 알뜰살뜰 가을 걷이를 한 논판에는 벼그루터기만 질서정연하게 자리매김을 할뿐 그 어떤 아쉬움도 남지 않는다. 그런 정경은 눈물겨웁기도 하다. 물도랑옆에 두그루의 버드나무는 사이 좋게 이웃하고 저녁노을을 한몸에 받아안고 서있는 모습도 그렇게 정겨울수 없다. 그 모습은 마치“올농사도 그럭저럭 다 마무리되였네그려!”하며 흐뭇해하는 두 로농들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메마른 숲속에는 방금 저녁세수를 하고 나선 청순한 시골처녀의 얼굴처럼 희고 발그스레한 가을들국화가 듬성듬성 피여있다. 초가을 해지는것에 조바심치며 성급하게 울어대던 풀벌레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지 오랜 앞내가 둔덕 우에 억새풀이 설레임이 각별하게 안겨온다.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계절의 대단원을 장식해주는 들꽃이 아닌가싶다.    억새꽃이 석양을 바래주며 너울거릴때가 가장 가관이다. 억새풀들은 척박하다고 내버려진 자투리 땅에서도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씩씩하게, 모질게 자라면서 늦가을 산야를 하얗게 물들인다.  표표하게 나붓기는 억새풀의 은백색 양자를 바라보노라면 여한없는 한생의 마지막 빛남이 무엇인지 알것같으면서 추억의 쪽대문에 문고리가 되여준다.억새는 가을단풍과 함께 가을의 들녘을 아름답게 장식하면서도 단풍이 다 스러져 버린후에도 이 가을을 지켜주는 마지막 파수군으로서 비록 향기는 없어도 늦가을까지 쓸쓸히 피는 향기짙은 들국화를 동무하여 피는 대표적인 가을꽃이다. 그나마도 이런 억새의 정취와 들국화의 마지막 향기로 이 가을을 보내는 작별이 비록 인정이 아닌 계절과의 작별이라고 어쩐지 허전함은 여전하다.    석양을 등지고 너울대는 저 억새꽃의 담백한 흰물결을 보노라면 옛농가의 긴 빨래줄에 걸려 펄럭이던 하얀 무명필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벼짚을 태워 만든 잿물에 씻고 바래고 또다시 바래서 널어놓은 하얀 무명필에 백의민족녀성들의 깨끗한 마음과 정성이 오롯이 슴배여있다.    아직도 홍두깨 다듬이질을 하여 옷으로, 시집가는 딸의 첫날이불을 짓기까지 많은 손길이 수요된다. 달밝은 밤 마을길에 굼닐면 불밝은 창홍지를 울리며 밤을 새는 다듬이질소리가 방불히 들리는것같아 본능처럼 귀를 기울여본다. 고부간, 동서간, 혹은 새며느리와 올케간에 마주앉아 맞다듬이질을 하는 소리는 그처럼 가락맞고 절주있는 그윽한 울림으로 가을공기를 가르며 잔잔히 울려퍼진다. 자지러지듯 빠르게, 그 러다가 뚝 멈출듯이 느리다가  다시 크게 작게 이어지는 그 애잔한 리듬속에 우리 녀인들의 희로애락을 담아 혼연일체로 시집살이 애환과 갈등을 조화시키는 소리이다.    그러나 향촌의 이런 풍경들은 아득한 전설처럼 흘러가버렸다. 개혁개방의 춘풍이 좋은 세월을 실어와서 이젠 먹을걱정, 입을걱정은 거의 사라지고 해마다 더 좋아지리라는 풋풋한 꿈을 안고 뿌리박은 이 터전에서 억척스레 농사짓던 사람들이 허파에 돈바람이 들면서 돈따라 친구따라 도시로, 한국 등 외국으로 가노라고 아무 미련도 없이 내버린 이 마을에 이젠 백발이 성성하고 이빠진 성쌓고 남은 돌이 된 할배할매들만 남았는데 농토가 다 팔리여 마을마저 길가에 떨어진 락엽처럼 어느 바람에 산지사방으로 흩날려갈지 오리무중인 처지에 놓여있다. 향촌의 소야곡같이 귀맛좋게 들리던 다듬이질소리는 전설처럼 되여버리고 길손을 보고 한족집에 발바리가 콩콩거리는 소리가 귀전을 어지럽힌다.    백여년 개척사를 기록하고 있는 유서깊은 이 늪득마을도 인제 종지부를 찍어야 할듯싶다. 기름진 문전옥답, 뒤동산과수원에 향촌풍경에는 너무 이색적인 호화별장들과 고충아빠트단지들이 들어서서 도무지 눈에 설기만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만 일년새에 후딱 변해버린 고향땅, 농토를 잃은 향촌마을이란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듯 열심히들 살아가던 그날의 돈독하던 삶도 이제 다 사라져버린 이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버티는듯 해마다 피고지는 동구밖에 억새꽃도 언제까지 피고지 며 살풍경에 이채를 띨것인가…   “그래, 억새풀아, 이제 고희를 맞은 나도 언제가는 락엽처럼 그 어디에 날아갈지 모르니 너도 지금처럼 해마다 제멋에 자라고 피여서 나붓길수 있을소냐? ”너의 가상한 모습이 더구나 나를 울리는구나. 하늘이 준 명이 진할때까지 너처럼 최선을 다해 보는거다. 설레이는 억새풀아, 어디에 가서든 새뿌리를 내리고 잘살라고 축복하는듯한 너의 설레임에 내 마음도 끝없이 설레이는구나.  
10    (잡문) 상생의 원리 댓글:  조회:612  추천:0  2016-02-09
                                      상생의 섭리      속담에 “목구멍이 포청”이라 하였거니와 공자도 “인이식위천(人以食为天)”이라 하였으니 자고로 먹는 일이 큰일은 큰일이였다. 그런데 옛날에는 배를 불리기 위해 먹는 일이 인생대사였으나 먹을것이 흔해진 지금에는 단지 배를 불리는 문제가 아니라 영양을 따지고 신체에 끼치는 위해성을 따지게 되여서 먹는 일이 큰일이 되였다.    말하자면 예전에는 오염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먹을만한것이면 시름놓고 먹고 마시였지만 오염의 시대인 현재는 친환경이니 록색식물이니 하면서 먹거리문제로 시끌벅적하게 되였으니 역시 물질문명시대의 걸작이라고나 할가?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은 먹거리로 자연산이 별로 없다. 채소나 육식용동물이나 모두 생장호르몬을 마구 들이대여 빨리빨리 키우고 빨리빨리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된탓이 아니겠는가?    광우병문제로 때론 소고기먹기가 겁이 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소는 풀을 먹어야 되는데 동족의 뼈와 내장을 가공하여 소에게 먹이니 소가 미치지 않고 견디겠는가? 결국 인간이 소를 미치게 한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면 그만큼 보응을 받게 되는것이다.    과일난전에 먹음직스러운 과일도 그렇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만 생생하기 이를데 없고 상한 자국이 하나 없는 미끈하기만 한 과일을 보며 왼고개가 비탈려질 때가 많다. 채소농사나 과일농사를 해본 사람들은 채소의 생장과정이나 수확의 과정을 잘 알고있기때문이다. 세상에 완전완미한것이 없거니와 있다면 그게 오히려 수상쩍은 일이 아닐수 없다.    농촌에서 과수원을 경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체험이 있을것이다. 말하자면 까마귀도 제일 호함진 사과배를 쪼아먹는데 그런 사과는 정말 특별히 달착지근하다. 그리고 모종 의미에서 벌레가 먹은 과일이 더 아름답다는 이률배반현상이 존재한다. 어찌 생각하면 과일이나 채소를 먼저 맛본 벌레들에게 도리여 고마와해야 할 경우도 있다. 만약 소비자들이 남새가게에서 벌레먹은 과일이나 채소를 찾는다면 장사군들이 농민들에게 살충제를 칠 필요가 없다고 력설할수도 있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순수 자연이 만들어내는 과일은 세월의 비바람속에서 맺히고 무르익기에 어덴가 약간의 흠집이 있어야 정상인데 사람의 조화로 그 정체가 잘 가리워져 조그마한 흠집도 없이 일매지게 미끈하다면 오히려 의심스럽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무엇인가 착각하고있다.    흙은 그 자체가 숨쉬는 생명체이다. 수많은 미생물들을 비롯하여 각종 곤충들도 그속에서 서식하고있다. 당초에 생명을 가진 모든 물질은 죽어서도 그 부패과정은 종당에는 거름이 되여 토양속에서 모든 미생물을 키우는 활력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리윤창출을 목적으로 과대생산을 추구하면서 척박해진 땅을 더 착취하느라고 화학비료를 주고 면역력이 약해진 농작물을 구한답시고 밀생하는 악충에 치사의 약물을 뿌려대니 땅은 갈수록 죽어가고있는것이다.    원초적으로 비생명체인 화학비료나 농약은 고스란히 우리가 먹고있는 곡식이나 과일속에 첨가된다. 꼬집어 말한다면 인간은 스스로 만성자살을 도모하고있는 셈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에서 비생명적인것이 생명체의 숨통을 서서히 조이고있다. 지금 이 지구촌에서 하나씩 사라져가고있는 생명체속에 고급령장동물은 제외된다고 누가 장담할수 있는가?    얼핏 생각하면 자연속의 만물생존은 경쟁으로 유지되는것 같지만 사실 생물들은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제가끔 자기의 생존리유를 가지고 살아간다. 경쟁관계에 있는 생물들은 서로 피해를 주는 동시에 상호 의존하기도 하는것이다. 이를테면 개미와 진디물, 꿀벌과 꽃 등 동식물은 자연계에서 상생의 섭리를 잘 지켜가고있다.    이처럼 대자연속의 만물은 모두 순리대로 자기 완성에로 향해 가지만 오직 고급령장동물인 인간만이 자기 상실로 향해가고있다. 무작정 더 많이, 더 빨리 얻으려고 잃어가고있는것이 얼마인지 고려하지 않는다. 상생가운데 상극이 필연적이지만 상극이 곧 상생으로 되는 리치를 도외시하고있다. 사실 인류의 대자연의 정복사 내지는 지배는 상극으로만 치달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인류는 사로잡아 가두고싶은 동물은 마음대로 가두고 잡아먹고싶은것은 내키는대로 잡아먹고 먹는 방식도 삶아먹고 구워먹고 볶아먹고 쪄먹고… 천백가지이다. 중생이 숨쉬는 이 땅에서 편안함을 맛보기란 심히 어렵게 되여 유기농사를 제창하고 유기농작물을 먹을것을 바라지만 인류의 문명, 과학기술은 너무도 앞질러갔다. 농촌에도 수많은 곤충들이 희귀한것으로 되였다. 인간들이 마구 뿌려대는 엄청나게 독한 화학무기에 자연계의 많은 곤충과 미생물들이 생존위기에 떨고있다.    그렇게 흔하던 땅강아지, 풍뎅이, 무당벌레, 방아깨비, 귀뚜라미, 잠자리, 나비떼, 청개구리까지도… 그러나 그것들도 새로운 면역력을 얻어 다시 도전한다. 그러면 우리는 더 독한 현대화학무기를 개발하고... 우리가 모든 농작물에 뿌려대는 살충제가 곤충을 절멸시키는 정도라면 사람의 몸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상상할수 있다. 그리고 식물 자체가 자기보호로 배설하는 분비물도 치명상을 입힐것이다.    1980년 개혁개방전까지만도 우리 나라 농업은 각 지역의 특성과 형편에 맞는 륜작, 간작, 혼작 등과 물질순환의 원리에 따른 농업시스템 즉 유기농업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경제성장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소위 농업현대화가 가속도로 진행되는 가운데 과거의 전통적인 유기농업은 자취를 감추고말았다. 경제성장과정에 단작화(单作化), 전작화(专作化)가 날이 갈수록 가속화되여 과거 물질순환의 기본이던 경종부문(채소, 벼)과 축산부문이 분리되여 농약과 화학비료에 목을 매게 되였다.    유기농업이란 화학비료, 유기합성농약(농약, 생산조절제, 제초제), 가축사료첨가제 등 일체의 합성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물과 자연광석, 미생물 등을 리용하며 자연적인 자재만을 사용하는 농법으로 자연과 생태적공생관계를 유지하는 농업이다. 그래서 현대농업의 극단적발전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유기농산물을 선호하게 된것이다. 일체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되는것을 규제하여 씨앗으로부터 자신이 직접 유기농으로 키워서 그 씨앗을 받아서 사용하고 퇴비도 유기농으로 키운 가축의 부산물을 사용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미 되돌아설수 없을만큼 극에 이르렀다.    특히 경제작물재배에서는 환경파괴, 먹거리오염 등 문제가 나타나 소비자는 물론 생산자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준엄한 사회문제로 제기되였으며 분리된 축산의 전문화는 또 다른 문제점을 생성하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기농업은 현대농업 공해문제점을 해결할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있지만 우리는 이미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믿을수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이 역시 이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그러니 돌고돌아서 허무맹랑만을 안게 되고 필자의 졸문도 그저 묘연한 희망사항을 붙안고 공연히 시설질하는 셈이다.                                               2010년 12월  
9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언덕에서 댓글:  조회:832  추천:0  2016-02-06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언덕에서                                          한 세 준      올겨울은 어쩐지 유별나게 지루하고 매마른 강추위가 극성을 부려서 집안에 들어 박혀 무료함을 달래야 하다가 답답한 마음으로《사기선》을 뒤적이다가 “막모도원” 이란 말을 읽으며 공연히 조바심이 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란 사기(史記)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나오는 말로서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라는 뜻이다. 아버지와 형이 모함당하여 초나라 평왕에게 죽 임을 당하게 되자 오자서는 오나라에 도망쳐가면서 친분이 깊었던 신포서에게 “나는 기어이 초나라를 뒤엎고야 말겠소”라고 하였는데 신포서는 “나는 기어이 초나라를 지켜내고야 말겠소”라고 대답했다.    후에 오자서가 오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 서울 영을 점령하였는데 초평왕의 관을 파내여“부관참시(剖棺斬屍)”한 대신 채찍으로 300개를 때리여 원한을 풀었다. 이에 산속에 숨어있던 신포서가 오자서에게 사람을 띄워 평왕의 옛신하로서 너무 지 나치지 않는가고 질책하는 말을 전했다. 이에 오자서는 심부름온 사람에게 “신포서에게 이렇게 전해라. 갈길은 먼데 해가 저물어서 하는수없이 역행하면서 막된짓을 했다고 해라”라고 하였다. 여기서“막모도원” 이란 말이 몸은 늙고 쇠약한데 아직도 해야 할 일은 많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였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촌이 점점 온난화가 가심화된다고 하니 바보같은 이 늙은이는 이제부터 한겨울 날씨도 제법 따뜻해지리라 믿었는데 그게 하니였다. 병든 자연은 간혹 이상하게 폭발한다. 이런 와중에도 흘러가는 세월을 멈출수 없듯이 그런대로 이 해도 마지막 달이 모습을 감추고있다.    그래서 해마다 맞는 희망의 새해라건만 어린애들에게는 성숙이 기약되고 늙은이 들에게는 로쇠가 한걸음 다가서는격이라 주어진 수명에서 또 한해가 줄어들었다는 생각을 보듬노라면 달라질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때론 그것이 무심하게 느껴지지 않는것 은 아마도 이몸에 휘감겨드는 썩 달갑지 않은 속절없는 년륜때문이 아닐가싶다.    고희의 고개턱에서“일모도원”을 되새기며 맞이하는 새해는 즐거움보 다 놓쳐버렸는지, 잃어버렸는지, 흘러버렸는지 알수 없는 세월의 야속함에 아쉬움만 인생의 저 문언덕에서 우쭐거린다. 그동안 나에게 차례진 촌금같은 시간을 헛되이 소모한것 같기도 해서 쓰잘것없는 온갖 욕망에 한눈 팔지말고 보다 보람있는 인생을 도모해야 하였는데 왜 그 긴긴 인생려로에서 허덕이면서 이런 생각을 못했던가…하고 어설픈 아쉬움을 얼겅채로 쳐보게 된다. 새여나오는것은 의례히 지나간 세월의 언덕너머에는 떳떳했던 일보다 모자라고 후회스러운 일만 서성거린다.    때에 어린시절 선생님들이나 어른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주자(朱子)로옹의 시가 다시금 새겨진다.                 소년이로 학난성이니    少年易老 学难成         일촌광음 불가경이라    一寸光阴 不可轻         미가지당 춘초몽인데    未觉池塘 春草梦         계전오엽 이추성이라    阶前梧叶 已秋声     한문체 칠률시이지만 누가 보아도 그 뜻을 어렵지 않게 터득할수 있다.   소년은 쉬이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나니   일촌광음도 가벼히 하지 말라   늪가의 풀은 봄꿈이 한창인데   섬돌앞 오동나무잎 가을소리를 하네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는 절창이다. 날과 달이 나를 위해 멈추지 아니하여 해놓은 일은 없이 어느덧 늙어버렸으니 누구의 허물일가?주자님의 “우성”이나 “권학문”은 다같이 세월의 무상함을 이깨워주면서 젊은시절 배우고자 하는 일에 촌음을 아끼 라는 가르침이지만 그때는 그 절실함을 깨치지 못했으니 장파한뒤 갓쓰기격이라 이제 후회를 씹은들 쓴맛밖에 더 나랴!옛날 조선조의 김인후님의 풍월도 새삼스럽다.              청산도 절로 절로 록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물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절로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水自然山水間我亦自然            已矣哉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이 시처럼 무엇이 인생인지 알기도전에 인생절반이 훌쩍 지나갔고 셈이 들만한 중년에는 먹고살기 위해 부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멈출줄 모르고 달려왔건만 지 금와서 돌이켜보면 이렇다하게 이루어놓은것이 보이지 않는다. 인생의 천리 고행길을 허위단심 오고보니 인생은 진짜 인생(忍生)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참고 인내하 는 힘겹고 고달픈 길이였다는 결론이 주어진다.    인생의 중년을 놓고봐도 가운데 중(中) 자를 쓰는데 무거울 중(重)을 써서 중년(重年)이라고 해야 할정도로 참으로 우리네 인생길은 파란곡절로 점철된것이라 하리라. 그런데 “일모도원”의 고희를 살아가는 나이에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라 하지만 힘든 일을 할라치면 팔다리 힘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욕망은 발동이 걸리지만 엔진은 맥이 없으니 어쩐단말인가?     하기사 70년여년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다보니 신체 곳곳이 마치고 찢기고 하면서 끌고다니노라 인젠 찌그덕거리는 헌수레소리같이 인젠 페기직전의 차라 자칫 욕심을 부리다가 완전 망가질수도 있기에 이제야 내몸이 귀중한줄 알겠다. 뒤늦게 깨달은 뉘우침이 올때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줄 알았다”라고 한 버나드 쇼의 묘지명이 생각난다. 노벨상까지 받은 이름난 극작가로 자신의 비석에 남기고싶은 말이 많았 을텐데 그는 덧없는 인생일사를 이렇게 한마디로 솔직하게 털어놓은것이다.    이 금언은 천언만언보다 교훈적이여서 지각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사색을 안겨줄것이고 심금을 찡하니 울려주기에 족하다. 누구나 삶의 종점 이르면 모든 허세 를 버리고 알몸을 드러내 솔질해진다고 하는데 버나느 쇼만큼 진솔한 유언이 없으 리라.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헛되이 보내고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경종으로 사색의 긴여 운이 후회많은 이 로옹의 가슴에도 매양 메아리치고있다.    이제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다. 소없는 외양간이라도 알뜰히 고치고싶은 마음이다. 로구라도 신념을 잃지말고 분수에 넘치는 집착을 다버리고 긍정적이고 아름다운것을 추구하면서 최선을 다하고싶다. 한톨의 씨앗이라도 정성들여 가꾸는 농부의 본분으로 하나의 호두알같이 인생을 마무리지으리라.    흘러간 물은 물방아를 돌릴수는 없다. 다만 나에게 차례진 하루하루를 알차게 가꿀것이다. 호두알을 쪼개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먹음직한 새하얀 속살이 구석구석 제자리에 꽉 채워져있다. 껍질때문에 크기나 모양을 스스로 정하지는 못하지만 그 한계속에서 최대한 성숙한 양자를 자랑하고있다. 누구나 주어진 삶의 공간에서 남은 여생을 실망을 모르고 가꾸노라면 한알의 잘 영근 호두알처럼 유감은 적으리라. 이것은 나뿐만아니라 인생의 후반전에서 열심히 뛰고있는 모든 인생팬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다. 최후의 승부는 후반전에 있다.    아무리 갈길 급하다해도 무모한 경쟁에는 휘말려들지 말자. 상생의 삶에는 오직 자신의 노력과 주위 사람들도 배려하며 사는길이 후회를 덜어내는 정도요 그래서 오래 사는 길이라 하겠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 “눈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서서” 의 마지막 구절로 허심탄회한 나의 막무가내한 상념을 마무리하려 한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그러나 나는 약속한 일이 있다.                                     잠자기전에 몇마일을 더 가야 한다.                                     잠자기전 나머지 몇마일을 더 가야 한다.                                                                 2013년 3월 15일                        
8    향수에 절어서 댓글:  조회:606  추천:0  2016-01-26
                           향수에 절어서                                   한 세 준      날로 린색해지는 가을해가 빛과 열을 쏟아붓느라 진한듯 서천에서 머뭇거리는 저 물녘의 둔덕길이다. 바라보니 울긋불긋 산야에 짙어가는 추색도 운치롭지만 금물결 설레이면서 풍요로움을 자랑하던 전야는 가을걷이도 언녕 끝나 말끔히 비워진 논벌에 두렁위에 잡초만 가을바람에 멋대로 춤춘다.    푸름을 자랑하던 나무잎새들도 속절없이 락엽귀근의 섭리를 말해주는듯 소슬한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린다. 가을은 모두가 떠나가는 계절인가, 느닷없이 허전해지는 가슴을 어루쓸며 등이굽어 볼품없는 참나무에 기대앉았다. 바야흐로 색바래는 가을 풍경에 마음이 썰렁해지는데 서천을 곱게 물들이기 시작한 락조를 바라보노라니 저도모르게 또 다른 향수의 정에 푹 절어든다.    도르래기 돌아가듯 계절이 바뀌여도 하좋던 봄날과 여름이 생각난다. 신록이 짙어가는 초여름, 물에 잘익은 흙으로 알뜰살뜰 잘 감아놓은 논두렁들이 네모반듯 원전화를 자랑하는데 반듯하게 써레질한 논판에 뒤동산의 풍경이 거꾸로 잠겨있어 숲속에서 우는 뻐구기, 꾀꼬리, 산비둘기같은 온갖 새들의 노래소리가가 마치 논판에 비낀 산그림자속에서 울려오는 느낌이다.     호도거리농사라 모내기가 시작되면 일손이 딸리여 여기저기서 방조군들을 청해들 인다. 시내에서 온 친척, 친우들이 모내기엔 생뜨기들이지만 논판이 시끌벅적해져서 한결 일할멋이 난다. 집집에 남정네들은 새벽이슬을 걷어차며 정성껏 자래운 모를 날라다 펴놓으면 바쁘게 아낙네들이 듣갈같이 달려와서  잰솜씨로 모를 꽂는다.    큰가마밥을 먹다가 호도거리농사에 단맛을 들인 농민들은 누가 시켜서 한결같이 극성인것이 아니다. 그 무슨 술수나 묘수가 통하지 않는 농토란 지극정성을 쏟아붓는 만큼 풍작의 희열을 안겨준다는것을 너무 잘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일을 해도 맥드는줄 모르고 일손을 재우친다. 진정 일하며 사는 재미를 체감하게 된것이다.     아픈 허리를 짚어가며 일하다가 새참하는 때는 더구나 향촌의 분위기가 짙어간다. 논밭머리에 실실이 늘어진 수양버들아래 거적을 펴놓고 끼리끼리 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워가며 새참에 진미를 돋군다. 남정네들은 “빤챈주”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원들 큰한 막걸리를 돌리다가 지나가는 이웃들도 불러들여 농가의 풋풋한 인정을 나눈다    마을에 새각씨들도 따로 둘러앉아 된장에 상추쌈을 볼이 미여지게 먹어대면서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깔깔대는 소리가 반찬거리로 되고있다. 진수성찬이 별것든가? 힘든일에 속이 출출할 때 먹는 쌍추쌈도 임금님의 수라상에 진수성찬보다 더 맛있다. 옛날 늙은이들이“이밥이 뼈밥”이라 하였는데 아닌게 아니라 모내기처럼 힘든 일이 없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모내기를 끝내면 한해농사를 절반 지어놓은 셈이다.      집집이 제농사에 제열정을 몰붓다보니 큰가마밥을 먹던때 한달씩 묵여가며 하던 모내기를 일주일 넘기지 않고 깔끔하게 해제낀다. 한여름이 되여 잡풀한포기 볼수없 이 말끔한 논판에 마치 열병식에 나선 의장대들마냥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푸르싱싱한 벼포기들이 우썩우썩 키돋움을 하는것을 보노라면 그보다 흐뭇해지는 시각이 없다.    풍작의 가을이 되면 짚오라기한대 흘릴세라 논판을 깨끗이 거두어낸다. 알뜰살뜰 가을걷이를 한 논판에는 벼그루터기만 질서정연하게 자리매김을 할뿐 그 어떤 아쉬움도 남지 않는다. 큰도랑가에 두그루의 버드나무가 저녁노을을 한몸에 받아안고 서 있는 모습도 그렇게 정겨울수 없다. 그 모습은 마치 “올농사도 잘 마무리됐네그려!” 하며 흐뭇해하는 두 로농들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그런 정경은 눈물겨웁기도 하다.      저도모르게 눈길이 저만치 듬성듬성 피여있는 들국화에 박힌다. 방금 저녁세수를 하고 나선 청순한 시골처녀의 얼굴처럼 희고 발그스레한 들국화가 어찌 그리 정겨운 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지 오랜 둔덕우에 억새풀이 설레임도 각별하다.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계절의 대단원을 장식해주는 들꽃이 아닌가싶다.    억새꽃이 석양을 바래주며 너울거릴때가 가장 가관이다. 억새풀들은 척박하다고 내버려진 자투리 땅에서도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씩씩하게, 모질게 자라면서 늦가을 산야를 하얗게 물들인다. 표표하게 나붓기는 억새풀의 은백색 양자를 바라보노라면 한생의 마지막 빛남이 무엇인지 알것같으면서 추억의 쪽대문이 절로 열린다.    억새는 가을단풍과 함께 가을의 들녘을 아름답게 장식하면서도 단풍이 다 스러져 버린후에도 이 가을을 지켜주는 마지막 파수군인양 늦가을까지 쓸쓸히 피는 들국화를 를 동무하는 의로운 가을꽃이다. 저 억새의 정취와 들국화의 마지막 향기로 이 가을을 보내는 작별이 비록 인정이 아닌 계절과의 작별이여도 허전함은 달랠길없다.    석양을 등지고 너울대는 억새꽃의 흰물결을 보노라니 옛농가의 긴 빨래줄에 걸려 펄럭이던 하얀 무명필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벼짚을 태워만든 잿물에 씻고 바래고 또다시 바래서 널어놓은 하얀 무명필에 농가녀성들의 깨끗한 마음과 정성이 오롯이 슴배여있다. 백의민족의 그 전통이 고스란히 물려내려온것이다.    홍두깨 다듬이질하여 시집가는 딸의 첫날이불을 짓기까지 많은 손길이 수요된다. 달밝은 밤 마을길에 굼닐면 불밝은 창호지를 울리며 밤을 새는 다듬이질소리가 방 불히 들리는것같아 본능처럼 귀를 기울여본다. 고부간, 동서간, 혹은 새며느리와 올케 간에 마주앉아 맞다듬이질을 하는 소리는 그처럼 가락맞고 절주있는 그윽한 울림으로 귀맛좋게 울려퍼진다. 자지러지듯 빠르게, 그러다가 뚝 멈출듯이 느리다가 다시 크게 작게 이어지는 그 애잔한 리듬속에 향촌녀인들의 희로애락을 담아 혼연일체로 시집살이 애환과 갈등을 조화시키는 소리같기도 하다.    그러나 농가의 이런 풍경들은 아득한 전설처럼 흘러가버렸다. 개혁개방의 춘풍이 좋은 세월을 실어와서 이젠 먹을걱정, 입을걱정은 거의 사라지고 해마다 더 좋아지리 라는 아롱다롱한 꿈을 안고 뿌리박은터에서 억척스레 농사짓던 사람들이 허파에 돈바람이 들면서 아무 미련도없이 도시로, 한국으로 겨끔내기로 떠나버렸던것이다.    덕대돈 번다고 다들 떠나간 마을마다에 이젠 성쌓고 남은 돌이 된 할배할매들만 남았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내가 사는 마을은 농토가 다 팔리여 동네마저 길가에 락엽처럼 어느바람에 흩날려갈지 모를 처지가 되였다. 향촌의 소야곡같던 다듬이질 소리는 더구나 전설이 되여버리고 한족집에 발바리가 콩콩거리는 소리가 듣그럽다.    백여년 개척사를 기록하고 있는 유서깊은 이 늪득마을도 인제 종지부를 찍어야 할듯싶다. 기름진 문전옥답, 뒤동산과수원에 너무 이색적인 호화별장들과 고충아빠트 단지들이 들어서서 도무지 눈에 설기만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만 일년 새에 후딱 변해버린 고향땅, 농토를 잃은 향촌마을이란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듯 열심히들 살아가던 그날의 돈독하던 삶도 이제 묵은터에 이밥먹던 얘기가 되여진 이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버티는듯 해마다 피고지는  억새꽃도 언제까지 피고지며 쓸쓸한 가을언덕에 이채를 띨것인가…   “그래, 억새풀아, 고희의 나도 락엽처럼 어디에 날아갈지 모르니 너도 지금처럼 해마다 제멋에 자라고 피여서 나붓길수 있을가? ” 너의 가상한 모습이 더구나 나를 울리는구나. 하늘이 준 명이 진할때까지 너처럼 최선을 다해 보는거다. 억새풀아, 어디에 가서든 새 뿌리를 내리고 잘살라고 축복하는듯한 너의 설레임에 시들어버린 내마음도 너처럼 끝없이 설레이는구나.                                  2014년 10월 3일         
7    포정해우(庖丁解牛)의 도 댓글:  조회:688  추천:0  2016-01-26
                              포정해우(庖丁解牛)의 도                                             한세준      고전 장자편에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이야기가 있는데 실력이 있는 도사(道士)의 모습을 그리고있다. 포정(庖丁)은 전국시대 살았던 최고의 백정이였는데 어느날 포정이 궁정에서 소를 잡고있었다. 그런데 포정이 칼을 놀리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웠다. 그 모습을 지나가다 본 문혜왕은 너무 감탄하여 포정에게 소잡는 도(道)를 물었다. 포정은 칼을 놓고 왕에게 이렇게 아뢰였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3년이 지나니 어느새 소의 겉모습은 눈에 띄지 않고 소가 부위별로 보이게 되였나이다. 그리고 또 19년이 지나니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소의 살과 뼈, 근육 사이의 틈새속을 봅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칼이 지나갑니다. 이런 기술을 터득한후 아직 한번도 실수하여 칼이 살이나 뼈와 부딪힌적이 없습니다.    솜씨 좋은 백정이 1년만에 칼을 바꾸는것은 칼을 가지고 소의 살을 베기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칼로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칼은 19년이나 되도록 수천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것과 같습니다. 소의 뼈와 살 근육 사이에는 어쨌든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그 틈새로 칼날을 넣어 소를 잡기때문에 칼날은 전혀 무디지 않는것입니다. 이것이 19년이 되여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것과 같은 리유입니다.”-양생주편(養生主篇) 포정이 중하게 여긴것은 도(道)였지만 포정의 도는 기술을 넘어선것이다. 말하자면 소를 잡는데도 길이 있다는것이요 도를 닦았다는것은 길을 닦았다는 말이다. 그가 이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것은 글로 익힌것도 아니고 머리로 익힌것도 아니였다. 소잡는 일을 소신으로 삼고 일심불란으로 소잡는 일에 몰입하였던것이다. 그도 처음엔 길을 몰라서 손이 떨렸을것이나 자기의 령혼을 소잡이에 쏟아부어 차차 길을 보안해고 3년이 지나 초보적인 실력을 키워냈다.    처음 같은 실력이라도 3년이 지나면 각자 그 차이가 알린다. 대충 살아간 사람과 포정처럼 인생과 령혼을 걸고 현장에서 고심히 분투한 사람, 그뒤 계속 10년 동안이나 분투한 사람과 다를수 밖에 없다. 무슨 일을 하든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것이 포정의 소잡이비결이자 대답인 셈이다.    실력이란 하루아침에 장악되는것이 아니라는것은 주지하는바이다. 그러면 도를 틔운 포정의 눈에 보인것은 무엇이였을가? 다른 사람이 보아내지 못한 곳, 즉 뼈와 살 사이에 난 칼이 순리롭게 지나갈 공간이였다. 이 공간을 보아낼줄 안다는것이 굉장히 중요한것이다. 바로 허(虚)를 찾아낸것이다. 허를 볼줄 안다는것이 포정의 뛰여난 재능이다.    요즘 같이 경쟁이 치렬하여 살기 어려운 세월에 남들은 답이 없다고 투덜대지만 각축장같은 경쟁마당에서 허를 보아내는 진짜 실력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갈 길을 찾아내여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다. 이것이 바로 포정의 해우의 도인것이다. 포정처럼 남들이 보아내지 못하는 길을 볼줄 아는 뛰여난 능력을 득도(得道)라 한다. 득도한 사람을 도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것이다. 어떤 분야든 최고가 되는데는 단순히 기술이 뛰여나다고 해서 되는것도 아니고 아는것이 많다고 최고가 되는것도 아니다. 그래서 박사(博士)보다 더 높은 도사(道士)가 있다고 하는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나의 처가편 한 조카는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에 갈수 없는 상황인지라 한두해 집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하루는 심양에 있는 누이집에 놀러갔다. 그번 길이 그에게는 한차례 기회의 길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는 건축부문에 들어가 말단직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30여년을 건축업에 몰두하면서 필생의 정력을 쏟아부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처럼 지금은 심양판에서 몇십명의 직원을 거느린 건축회사의 기술자이다 사장으로 재능을 떨치고있다. 비록 대학졸업증은 없어도 엄청난 큰돈을 벌었다. 어느 친척집에 결혼잔치에서 그를 만났을 때 “넌 크게 성공했는데 건축박사가 되였겠구나” 하고 치하하니 그의 대답이 걸작이였다.     “허참, 어떻게 대답 올릴가요? 좋게 말하자면 저는 박사가 아니라 땅우에서 뛰는 도사가 되고싶으니 말입니다.”     롱담 반 진담 반인 그의 말에서 생각되는바가 있었다. 박사는 쎈스를 가진 사람이라면 도사는 자기 인생을 걸고 부지런히 뛰면서 자기만의 길을 찾아낸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러데 지금은 실력보다 간판이 번듯한 사람이 선택되는 시대이다. 사회가 더 활성화되고 발전을 추동하려면 도사들을 충분히 긍정해야 순리라고 생각한다.     백명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뛰여도 도사는 한명이나 나올가말가한다. 학위만능주의에 물젖어 편향하던 시대의 풍조도 변하기 마련인가? 요즘 돌아가는 세상사를 살펴보면 반갑게도 학력보다 실력이 더 각광받는 풍조가 이루어질 조짐이 보인다. 실천이 증명하다싶이 실력자를 채용하면 확실히 효률적이라는것이 사실이다.     전국적으로 학위범람이 엄중해지면서부터 학위획득자는 무수히 많지만 창조적연구나 독창적인 기술개발을 한 학자는 많지 않다. 학교사정에 꽤 밝은 한 권위인사의 말에 의하면 해마다 수많은 박사생론문이 쏟아져나오지만 대다수가 여기저기서 뽑아서 조합한 가짜론문으로서 괄목할만한 연구과제는 별로 없다고 한다.     대학은 서책지식접수를 위주로 한 학문을 닦는 곳인가? 지식이 능력으로 전환되여 실질적인 업적을 쌓을수 있도록 준비하는 곳인가? 아니면 량자가 결합된 곳인가? 로마제국에서 처음 일떠세운 대학은 신학(神学)을 배우는 곳이였다. 동양의 고전인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의 첫머리에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고 지선(至善)의 머무름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 대학이란 본래 학문을 탐구하는것을 통하여 인격수련을 하는 고등교육 기구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풍조는 대학을 나오면 좋은 취직자리를 얻고 고등인재대우를 받으면서 시집장가를 가는데 푸른등을 켜는것으로만 인정되고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은 대학을 구직의 선행관이라 여긴다. 과시 틀린 말은 아니로되 대학들이 원색적인 광환이 색바래지고 그 무슨 면허증이나 자격증을 발급하는 기관으로 이질화한다면 그것도 고등교육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그저 직장을 얻으려면 직업전문학교에서 기술을 배워도 될수 있다. 돈도 대학생졸업생보다 더 잘 벌 기회도 있다. 간판은 낮아도 실력이 있기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저마다 대학에만 매달리지 말고 전문화의 길로 나가는것도 바람직하다. 그런데도 공부소질이 아니면서 부모의 허리가 새우등이 되도록 짜내며 굳이 대학에 가야만 하는걸가? 남들이 다 가니까, 사회에서 폼을 내며 살려니까. 그럴수 밖에 없다면 명지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본다.     지금 외국서 도금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온 류학생, 박사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대학졸업증을 쥐고 동분서주해도 취업은 여전히 난관이다. 이런 상황에서 “직장을 찾는데 눈높이를 낮추라. 그러면 희망이 보일것이다”라는 기성세대들의 충고를 자주 듣게 된다. 이것은 붙는 불에 랭수를 끼얹기가 아닌가? 자기 꿈을 펼쳐보기도전에 현실과 타협하라는 충고가 선의적일지라도 평생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것인가에 대한 고민조차 허망하다고 하는 말과 같다고 불만일것이다.     나와 친분이 있는 한 교수는 대학생의 취업난을 가리켜 “비전문화된 인력들이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경쟁하는것”이라며 인력이 필요한 곳은 있지만 내실화된 인력은 적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니 애초에 자신이 하고싶은 일, 취직하고싶은 곳을 마음속에 정해놓고 그곳에서 원하는 전문화된 상품으로 자기를 부상시키는 일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취업관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미 부모님의 피땀으로 얼룩진 대학졸업장을 쥐고 이대로 주저앉을수도 없지 않는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보다 그 누구를 아느냐가 더 실용적이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명문대를 나와도 상황은 여의치 못하다. 개천에서 나올수도 있을 룡이 멸종직전이다. 그래서 방관자로 깨닫게 되는것은 알고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는 힘이 될수 없다는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배우는것은 아는것이 힘이라는것이다. 알고있다는것은 단지 잠재적인 에너지에 불과하다. 우리가 배운 그 고정관념을 깨기전에는 늘 허둥대기 마련이다. 대학졸업증을 능사로 여기지 말고 포정해우의 도를 되새기면서 열심히 하다보면 길이 보일것이다. 격변하는 시대,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 어떤 경쟁을 등지고 살아갈수 있을가? 경쟁하지 않고도 편안히 살수 있는 철밥통의 일자리는 아무데도 없다.     적자생존의 현시대에 어디서든 선수교체는 피면할수 없는 관문이다. 발달국가에서는 종신직업자란 없다고 한다. 평생에 최소한 5-6번은 직장을 바꾸어야 살아갈수 있다고 한다. 실력이 없는 촌보난행이라는 설명이 되겠다. 그러니 항상 자기를 갈고 닦아서 새로운 나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다음기 선수교체에서 도태를 피할수 없다.     한번 이기기는 쉬워도 그 이김이 련속적이라는 법은 없다. 중공17기4차전원회의에서 호금도주석은 “지난날의 선진은 지금의 선진이라 할수 없고 지금의 선진을 영원한 선진이라 할수 없다. 지난날 소유했던것을 지금도 소유한것이라고 할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큰 따끔한 일침이다.    글이 빗나가는것 같지만 《론어》의 맨 첫머리의 “학이시습(学而时习)”이란 말이 떠오른다. 자기가 모르던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고 그 배운것을 깨달음에 도달시키라는 말인즉 학(学)은 머리로 배우는것이고 습(习)은 새끼새가 자기절로 날기를 련습하다가 어느 순간에 하늘높이 날아간다는 뜻으로서 습은 몸으로 하는 배움의 완성이다. “학”만 있고 “습”이 없다면 하다못해 비자루를 가지고 땅바닥도 제대로 쓸줄 모를수 있다. “학”은 있으되 “습”이 안되니 말이다.    생각하면 2500년전 “학습”이라는 단어를 이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 공자님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닌것 같다. 포정해우의 도와 비슷한 맥락인것 같다. 종신교육이야말로 인생에 가장 필요한 프로젝트가 아닐가싶다. 무한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학”과 “습”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여 실력자가 되여야 할것은 자명하다. 이 사바세계에서 내 살길을 찾으려면 실력자가 되는길 밖에 없다. 인생길을 힘겹게 가노라면 어느 굽이에서 뱀처럼 묵은 껍질을 벗으며 부단히 갱신해야 살아남을것이다.     포정해우의 이야기는 짧아도 시사하는 바는 크고 넓고 깊다. 지금은 겨울이다. 겨울이 이미 왔거니 봄인들 멀소냐? 새해에도 꿈을 안고 나래를 퍼덕이는 새 세대들에게 하고싶은 말은 “구하라, 그러면 얻을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것이다”와 함께 진정한 실력자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2년 1월 13일  
6    (칼럼) 격변시대의 인류의 과제 댓글:  조회:757  추천:0  2016-01-25
   격변시대의 인류의 과제                                        한 세 준      1765년 겨울의 어느날,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난로옆에 앉아서 증기기관의 원리를 발명하여서부터 그 원리를 리용하여 방적기에 사용한것은 그후 5~6년후의 일이였다. 그전에는 사람의 힘이나 소와 말, 또는 바람이나 지렛대를 리용하여 동력을 얻어쓰던 인류는 증기기관의 힘으로 동력을 생산하여 기계를 움직이는데 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산업혁명이 고고성을 울리며 시작된 일대 거변이였다.    방적기만 달라진것이 아니라 대장간의 용광로크기와 쇠를 련마하는 함마의 무게도 날따라 달라졌다. 이렇게 여러부분의 왕성한 생산활동으로 대서양연안국가들은 철로를 부설하여  증기기관차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바다에는 황포돛대가 아니라 증기 의 힘으로 항행하는 군함이 생겨났으며 그 군함위에는 대포가 장치되였다.    이렇게 지구의 반대편에 위치한 서구라파에서는 산업혁명의 물결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었건만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자부하던 조선땅에서는 예나다름없이 아주까리기름등잔에 불심지를 바늘로 돋구며 낡은터에서 이밥먹던 이야기를 하고있었고 왕권은 쇠진해갔으며 란신적자들의 매관매직과 부패한 관리들의 폭정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욱적거렸다. 마침내 19세기전반에 이르러 총포를 앞세운 산업화물결이 아프리카남단을 에돌아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진출하자 아세아의 여러나라들이 그 기세앞에서 연약한 풀잎처럼 쓰러졌다.    인도고원과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운 섬들 그리고 윁남과 중국까지 산업화의 격류속에 휘말려들게 되였다. 당년 아편전쟁은 단순히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산업사회로 한발 먼저 진입한 나라와 그러지 못한 나라간의 군사력불균혀을 증명하는 전쟁이 였으며 농경사회와 산업화간의 일대 격돌이기도 하였다. 사회이동의 시간차가 국가운 영을 좌우지하고 있다는 력사의 견증이다.    그후 2백여년도 더 지난 21세기전반에 들어선 지금 지구촌 곳곳에 산업화물결 보다 훨씬 더 거센 정보화물결이 인터넷이라는 통로를 따라 사람들이 사는곳이면 어디든지 스며들고있는 현실이다. 산업화사회에서 힘의 원천은 에너지다. 사람들은 더 강하고 편리한 에너지를 얻기위해 나무와 숯으로부터 석탄과 석유를 포함한 화석원료 에서 마침내는 위험한 원자력까지 동원된 현실이다.    이와는 달리 지식정보화사회의 엔진은 컴퓨터와 통신 그리고 소프트웨어가 결합 된 lT정보기술이다. 이 정보기술의 중심에는 0과1이라는 두개의 수자가 있는데 이것을 비트라고도 한다. 우리는 지금 바야흐로 원자시대에서 비트의 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디지털이라는 말은 지디트라는 영어단어에서 왔는데 예전에 사람들이 셈이 들어 셈을 셀때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하는 동작에서 유래된 말로서 손가락하나를 이미 하며 동시에 하나의 수자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수자에 흔히 10진법을 사용하지만 경우에 따라 2진법,12진법, 16진법 으로도 사용한다. 컴퓨터라는 이 괴물은 멀쩡하게 생겼지만 꿩처럼 두개밖에 세지못 한다. 그래서 0과 1이라는 두개의 수자를 컴퓨터의 기본단위로 설정하여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령역에 적용하고있다. 이 0과 1이라는 두 수자의 조합이 2진법을 구성하는 비트이다. 비트란 디지털사회를 구성하는 최소의 기본단위로서 물질사회에서의 원자와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이 사회이동현상을 원자시대에서 비트사회에로 이전이라 칭하기도 한다.    비트는 또한 컴퓨터와 반도체의 기억용량을 재는 기본단위로 1M(메가)는 백만비트, 1G는 10억비트1T(테라)는 1조비트이다. 세계의 선두를 달리고있는 반도체업계에서는 몇G 기가 비트단위이상의 반도체를 상용화했고 한국통신을 비롯한 몇개의 네 트워크중심의 컴퓨터용량은 이미 수십테라비트를 초과하고있다. 비트는 컴퓨터와 통신의 련산능력, 기억능력, 속도를 재이는 긱본단위인 동시에 글자와 그림, 그리픽영상을 분해하고 조합하는 기본단위이며 소프트웨어란 이들의 조합을 연주하는 다양한 명령체계이다. 좀 쉽게 말한다면 비트는 컴퓨터통신을 운영하는 기본단위인동시에 탁월 한 정보인식기능을 가지고있다.    비트의 정보인식기능이 디지털사회를 촉발하는 원동력으로서 그 구성요소는 앞에 서 말했듯이 0과 1이다. 허나 이 0과 1은 단순한 수자개념이 아니다. 컴퓨터에서 0 신호를 보내면 빛이 차단되고 1신호를 보내면 빛을 통과시킨다. 하나는 음, 하나는 양이라는 의미로서 이 음양의 조합으로 글자를 인식하기도 하고 만들어내기도한다.    옛동양의《주역》에서도 음양의 조합으로 세사만물의 생성원리를 설명했듯이 디 지털세계에서는 0과 1이라는 두개 수자의 련속적조합으로 세상사를 그려낸다. 영어 한글자의 조합은 8비트이다. 조선어 한글자는 받침이 있기에 최다 16비트의 조합을 필요로 한다. 처음 영어를 기초로하여 설계한 컴퓨터에서 조선어가 너무나 완벽하게 그것도 여지있게 쉽사리 적응할수 있는 문자라는것이 놀랍고도 신나는 일이라 할 때 우리는 또한번 세종대왕님에게 성은이 망극하다 해야 할일이 아닐가?    디지털세계에서 글은 말할것도 없고 아름다운 칠색무지개도 0과 1이라는 두개의 수자와 서로 분화되였다 다시 조합된다. 디지털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개체의 독립적운영이다. 례를 들어 오래된 록음테프나 필림으로 감겨있는 영화의 한장면을 다 시 재생시켜 감상하려면 우리는 몇번이고 수고스레 되감기를 하면서 찾아야 하는 아 날로그(기계적)방식을 취해야 하였다.    아날로그세계에서는 서로의 지경이 모호하여 찾아보기 힘들지만 디지털세계는 그 지경과 매듭이 확실하여 세번 지정하면 세번 노래가 나오고 다섯번 지정하면 다섯번 화면이 곧바로 뛰여나온다. 이리하여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류더미에서도 찾아보고 싶은 정보를 지정하면 곧바로 그 목표를 향해 직행한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의 각방면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바 산업사회에서는 숙련공의 역할이 아주 중요시되고있다.    례를 들어서 여러가지 세밀한 도구로 복잡한 모형을 다듬는 일은 10년, 20년 경력을 가진 기술원이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을 밑에 두고 후계자를 키우는 방식이 관 례였다. 하지만 컴퓨터자동화로 무장된 정보화사회에서는 프로그램에 의해 인간이 도 달할수 없는 한계를 뛰여넘어 아주 미세한 동작까지 대행해준다. 초보자에게 아주 어렵고 까다롭던 일도 단기간에 습득할수 있도록 하는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젯날의 숙련공은 순식간에 구닥다리로 되여 컴퓨터를 다룰줄아는 신입사원이 앞으로 나설수 있는 사회가 된다.    기술을 습득하려면 처음부터 모든 단계를 거쳐야 했던 산업사회에서는 우리 기술진이 선진국의 벽을 뛰여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정보화사회로 전화하면서 현재의 디지털기술은 백년이상의 시간차를 단숨에 극복하면서 세계일등급의 제품을 만들어내는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로 되였다. 디지털혁명은 기술적문제에서 뿐만아 니라 기구조직운영에서도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사회의 조직은 전통적으로 계단식조직으로 하나의 결재서류를 가지고 과장, 부장, 리사, 사장, 회장 등 여러단계를 거쳐야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하지만 이러한 조직운영이 번거롭고 비효률적인 운영방식으로서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최고의사결정 자를 향해 직위와 장소를 불문하고 등거리에서 꼭 필요한 한두단계만 거치면 바로 의사결정이 내려질수 있다.    인터넷이라는 이 괴물이 모든 정보화흐름마당에서 누구나 직거래할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놓은것이다. 기술의 디지털화가 사회조직의 디지털화에 영향을 주고있는것 이다. 소위 서렬이라는것도 아날로그조건으로 조직전체가 하나의 발탁으로 디지털사 회로 전화하다보면 각조직의 리더들이 갑자기 젊어지고 전문성을 갖춘 인재발탁이 생 겨나는 현상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것이며 정년퇴직이라는 제도 역시 아날로그체제로 나이가 퇴직의 조건이라는 문제에 론란이 일어날수 있을것이다.    이렇듯 인류는 지금 디지털이 주도하는 미지의 세계로 매진하고있는것이다. 그젯날엔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것이 인간의 오래된 덕목이였다. 그러나 인젠 많은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디지털방식의 로동이 땀흘리며 힘들게 일하는 경우보다 더 효과적인 시대에 진입한것이다. 지금와서 생산력의 차이는 사람의 차이로부터 사회환경의 차이로 쾌속이전하면서 각일각 다가오고있다.    이 사회의 이동이 최첨단디지털로 무장한 정보화사회가 컴퓨터통신, 소프트웨어가 서로 융합된 정보기술이 빛의 속도로 정보로 교환하고 무한대한 사이버공간을 리용하여 새로운 소재와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인간이 원하는것은 무엇이든 만들어내 고 조작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고있다.    정보기술은 생명공학과 융합해 새로운 생명을 복제생산하고 무기와 결합하여 목표물을 자기절로 정확히 찾아는 폭탄을 만들고 인형과 결합하여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필요로하는 가무와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도맡아하고 더나아가서 때론 주인을 동무해 주는 가정부같은 도우미로봇의 탄생도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이런 로봇도우미를 쓰 면 가사일이 고되고 시끄럽다고 투정질을 할 일도 없고 로임이 적다거나 제때에 주지않는다고 시비를 걸일도 없게 된다. 더우기는 도우미가 내집 귀중품을 몰래 챙겨가지고 도망가는 일도 생기는 일은 까마득한 옛말로 될것이다.    이런 시대가 과연 올것인가?그러나 이미 현실로 되여 우리 코앞까지 다가와있다. 미국이나 일본, 한국을 비롯한 LT선진국들에서는 이미 시장에서 이런 로봇이 선을 보이고있다. 아마 이런 로보트의 발전속도는 휴대폰성장보다 훨씬 더 빠를것으로 예 상된다. 소재와 제조기술은 사람들이 원하는것이라면 무엇이든 구현할수 있는 소프트 웨어의 개발능력이 이미 확보되였다.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천차만별의 기능과 얼굴모습을 가진 가정용 도우미로보트가 한가정의 성원이 되여 주인이나 아이들의 동무도 하여주고 빈집을 지키다가 낯선사람이 들어와 이상한 행동을 할라치면 110에 신고도 하고 애들의 영어공부도 도와 줄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로보트의 몸놀림도 예전에 비하여 더욱 유연해지고 반도체로 무장한 기억력은 인간의 한계를 뛰여넘을것이다.    또한 프로그램에 따라 24시간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로보트, 방금 숨을 죽인 수백도의 고열용광로속에서 로벽의 이상상황을 점검하는 로보트 등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넉근히 자기 사명을 완수할수 있는 로보트등 빙산 일각같은 일이다. 21세기는 상상력의 세기이다. 과학의 발달과 기술력의 비약은 인간 이 상상할수있는것을 개념화할수 있고 따라서 현실화할수 있다. 오직 시간문제이다.    우리가 창조해낼수 없는것은 오직 상상할수 없는것뿐이다. 상상력은 힘이고 국가의 자산이다.지금 우리에게 부족한것은 바로 이 상상력이고 그것의 비전이다. 문명의 진보는 산업사회로 전화하면서 농경사회를 버린것이 아니라 산업화의 힘으로 더욱 강 화시키고있다. 이는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서 한세대안에 농경사회, 산업사회, 정보화 지식사회를 경험하고있는 지금, 사회이동을 촉진하면서 이 3대사회를 3위1 체로 잘 융합시키는것이 선진사회로 이행하는 필수사항이며 주요과제로 나서고있다.    그런데 지금 디지털이라는 고기술이 비상한 속도로 우리 사회의 모든 령역에서 자기 능력을 과시하며 우쭐하고 있지만 자체의 제약성이 있기도 하다. 즉 아날로그라는 뼈대에 기대지 않고는 아무일도 성사시킬수 없다. 우리는 아직도 아날로그 시 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말하자면 디지털사회의 출현은 아직까지는 추상개념이며 아날로그시대헤 대한 배제개념은 더욱 아니라는 말이다.    시침, 분침, 초침으로 돌아가는 시계나 자동차, 함선, 비행기 등에 장착된 각종기 기를 포함한 모든 령역에서 련속적으로 변화다양하게 흐르는 물리량을 표시하는 모든 기기는 아날로그적이여야 한다. 디지털이라는 고기술이 아주 빠르게 일정한 시점에서 상태를 표현하는데는 선수이지만 뛰여넘어서는 안되는 물리량을 표현하는데서는 한계가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디지털세계의 창조력은 경이롭지만 여전히 아날로그와의 융합을 통해 상호보완하면서 발전하는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디지털사회의 인터넷에는 좋은점만 있는것이 아니다. 이 인터넷 인프라를 타고 수많은 불건전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것은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지금 남녀로소가 다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이라는 문명기기에 카메라기능까지 갖추어져 있어 많은 편리를 주지만 때론 몰래카메라 사건들이 비일비재여서 개인의 은사와 비 밀스러운 장면들이 찍히여 세상에 공개되여 말썽거리가 되고있다. 게다가 쓰레기 메일이나 악성바이러스로 공격당하는 사이버공간의 불한당들도 골치거리이다.    물론 인터넷의 역기능때문에 시대의 발전이 주춤거릴수는 없다. 정보화사회의 이전은 컴퓨터와 통신, 소프트웨어가 서로 융합되고 디지탈과 아날로그가 “디지ㅡ로그” 가 되여 인간이 “신의 경지”를 넘보는 고능률사회를 지향하고 있음에랴, 지금 지구인 들은 앞다투어 그곳을 향해 질주하고있다. 서둘로 그곳으로 가지않는다면 먼저 간 자들의 먹이로 된다고 력사가 경고하고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새로운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보장해줄것인가도 미지수이다.    전동적관념에서 본다면 인간의 경제적가치는 로동시장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였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된다. 한편 소프트웨어 프로그램과 정교한 컴퓨터 네트워크가 로동력을 대신하여 보다 적은 인력으로 보다 많은 일을 할수 있다면 직장인원감축이 라는 위기도 예고하고있다.    일찍 전국제기계협회 회장이였던 원피싱어는“보다 정교해지는 컴퓨터시스템에 의해 가장 중요한 생사요소인 사람들의 역할은 계속 감소될것이라 경고하면 향후 30~40 년내에 제조업부문에서 세계전체의 재화를 생산하는데 현재로동력의 2%정도 면 가능할것이다.”라고 정망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일침이다. 가령 그의 예측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현재의 발전추세로 보면 원피싱어의 예언은 롱담이 아닌것같다.    그런데 요긴한것은 대부분 사람들은 현재 발생하고있는 이러한 변화에 대처할 준비가 되여있지 않다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이 과거처럼 변화와 속도와 폭도가 느리게 진행된다면 지금처럼 살아도 된다. 아침 8시에 출근하여 4시에 퇴근하고 적당히 내직장에서 얼렁뚱땅 살다보면 진급도 하면서 그럭저럭 늙어갈것이 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격변시대이다. 그런즉 실업의 위기의식도 가지고 일시적현상이 아니라는것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새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부와 기업들에서 욕심내는 직업들을 창출해도 오직 준비가 되여있는 사람들의 몫일뿐이다. 단순한 로동력밖에 가지고있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에 떡이다. 미래는 전문가들의 경제적부를 차지하는 지식사회이기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추세를 리해한다면 이에 따르는 자기혁명이 필수적이다. 정보화사회에서 빈부격차는 산업사회에서의 량극화보다 훨씬 더 심각해질수 있다. 이것은 인류가 미래사회에서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삶의 과제이다.  
5    ((칼럼) 륜리경영의 도 댓글:  조회:867  추천:0  2016-01-25
                                 륜리경영의 도                                         한세준      동양 고전은 지혜의 곳간이다. 수천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생동성이 넘치는 이야기들은 저마다 자기특색으로 단장하고 연출하는 인생대하드라마이다. 또한 그속에 가지가지 요소가 맛있는 료리처럼 잘배합되여 감칠맛이 있는가 하면 그속에 감동과 교훈이 있고 력사에 살다간 수많은 영웅호걸들과 이름없는 민초들의 영욕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마천의《사기》나 소설《초한지(楚汉誌)》를 펼쳐보면 려불위(吕不韦)라는 사람을 만나볼수 있는데 위나라 복양(濮阳) 지금의 하남성안양시 활현(今河南省安阳市滑县)인으로서 양적(阳翟)의 갑부로서 이웃나라에까지 명성이 자자한 장사군이였다. 그는 여러나라를 래왕하면서 귀한 물건을 사두었다가 때가 되면 비싸게 되넘겨 엄청난 부를 쌓았다. 또한 력사상 가장 특이한 투자로 성공해 한때 세상사람들을 놀래운 투자 달인이라해도 손색이 없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가 생전에 시도한 가장 큰 거래는 자기의 전재산을 한사람에게 투자하여 필생의 지혜를 다한 노력끝에 세상을 놀래우는 성공을 했고 그 성공으로해서 몰락하여 비참한 죽음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일생의 흥망사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상징적지혜와 교훈을 던져주고있다. 당시 려불위가 살고있던 조나라에는 자초(子楚)라는 진나라 공자가 볼모로 잡혀있었다. 자초는 진나라 소양왕의 손자이자 후날 효문왕이 되는 안국군의 아들이다. 안국군(安国君)은 일찍 스무명도 넘는 아들들을 두었는데 자초는 그중에 하나였다. 자초의 생모인 하희(夏姬)는 안국군의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자초를 낳은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자초는 어머니의 정을 모르고 자라다가 그나마 스무살에는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지고 말았다.    자초는 비록 볼모로 잡혀와 감시를 받으며 궁핍한 생활을 하고있었지만 왕족의 자긍심만은 잃지 않았다. 하루는 자초가 공손건과 함께 조나라의 수도 한단의 큰길을 지나고 있을 때 진나라 왕손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속에 려불위도 있었다. 그는 소문만으로 듣고있던 자초를 직접 보려고 사람들 틈을 헤집고 앞으 로 나가서 자초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폈다. 장사에 귀재인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진나라 공자라…값진 물건이구나.”하고 궁리하며 한번 만나보기로 작심하였다.    려불위는 그때부터 진나라 왕실의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고 자기의 숨은 야망을  충족시킬만한 인물이므로 자초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한두번 대면하고나서 위인 됨을 알게 된 려불위는“내가 당신의 가문을 크게 일으켜줄수 있습니다.”하고 직언 하였다. 이에 자초가“먼저 당신의 가문을 크게 번영시킨후 내 가문을 크게 일으켜주시오.”하고 웃으며 말했다. 이에 려불위는“저의 가문은 당신의 가문에 기대여 커질것입니다.”라고 하자 자초도 말뜻을 알아차리고 서로 마음을 털어놓고 교제하는 사이가 되였다. 이는 목숨을 건 위태로운 도박에 다름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멸문지화를 당할수도 있는 일이였다. 이리하여 려불위는 자초가 본국과 끈이 닿도록 련결해주는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돈을 풀어 진나라 태자 안국군의 총애를 한몸에 지닌 화양부인(华阳夫人)에게 접근하였다. 그녀는 안국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려불위는 진귀한 보석과 노리개를 가득 담은 진귀한 옥함에 자초의 친필서찰도 함께 넣어 화양부인에게 전하였다.    려불위가 꾸민 자초의 친필서에 화양부인을 향한 자초의 지극한 효심이 구구절절 흘러넘쳐서 부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였다. “어쩌면 어릴 때 내가 저를 무릎에 앉 혔던 일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니 참말 놀랍기 그지없구나.”하면서 심부름군에게 려불위라는 자에게 내가 자초의 효성에 감복하였다고 전하라고 일렀다.    이리하여 자초와 화양부인 사이에 우호적인 끈이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려불위는 화양부인과 대면하여 아름다운 미모로 남을 섬기는 사람은 그 아름다움이 스러져 사랑을 잃기전에 일찌감치 후사를 정하는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구슬렸다. 려불위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화양부인은 태자가 기분이 좋아있을 때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 다.“조나라에 볼모로 가있는 자초는 매우 현명하여 오가는 사람들이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나이다. 소첩이 다행히 태자마마의 사랑을 입어 후궁이 되였지만 아직 슬하에 자식이 없으니 자초를 후계자로 세워 후일 소첩이 로쇠하면 이몸을 의탁할수 있도록 하여주기를 바라나이다.”    미녀의 눈물은 웅변보다 효험이 있는 법이라 태자는 선선히 응낙하였다. 그리하 여 자초는 후계자로 지목되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석에 누워있던 소양왕이 죽고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고 화양부인 옹후가 되였다. 그런데 안국군도 즉위하여 1년만에 죽고말았다. 그리하여 태자 자초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장양왕(庄襄王)이다. 자초는 왕위에 오르자 화양부인을 태후로 높이고 려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候)로 봉하고 락양의 10만호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이제 려불위는 한낱 장사군으로부터 한나라를 좌우지하는 대승상으로 되여 그 권력이 막강했다. 그러니 려불위의 투자는 처음 생각과 같이 충분한 수익을 얻은 셈이다. 만약 려불위의 작전이 여기서 마무리를 지었다면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가 편안히 죽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인생사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얼기설기 엉켜진 인연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려불위에게는 일찍 2백냥을 주고 사들인 열여덟살인 주희(朱姬)라는 애첩이 있었는데 미모도 뛰여났지만 음욕이 어찌나 강한지 세상에서 두번째라면 서러워할 정력녀였다. 려불위도 그동안 수많은 녀자를 점했지만 주희만큼 만족스러운 녀자는 없었다니 두 사람은 천생 찰떡궁합인지 몰라도이런 끈질긴 인연으로 하여 려불위를 파멸 로 이끌어간 악연이라고도 할것이다.    당시 자초가 조나라 볼모로 있으면서 본국으로 당장 갈수도 없었고 려불위와의 밀약도 있었는지라 려불위네 집에 드나들며 술자리가 빈번했다. 그때마다 처첩중에서 외모가 뛰여나고 춤잘추는 주희에게 반해있던차 한번은 술이 거나해진 자초가 려불위에게 주희를 달라고 청들었다. 사마천의《사기렬전》에도 당시 려불위는 화가 났지만 전재산을 밀어넣고 자초에게 장래를 기탁한만큼 녀자를 흔쾌히 응낙했다고 기록되여있다. 그런데 주희가 이미 배속에 려불위의 씨가 들어있었다.    이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하기로 약조하고 주희가 자초에게 옮겨않은후 예정된 날부터 두달이나 늦게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영정(嬴政)이였고 자초는 곧 주희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 그후 려불위 노력으로 자초는 볼모로 있은지 7년만에 주희와 함께 조나라를 탈출하여 진나라로 돌아가서 함양에 안주했는데 그때 주희가 낳은 아들 영정은 6살이였다.    임금으로 등극한 자초는 3년밖에 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자초의 아들 정이 13 세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였으니 그가 바로 시황제(始皇帝) 영정이였다. 려불위의 아들로 추정되는 영정은 려불위를 존중하여 상국(相国)으로 모시고 중부(仲夫)라 불렀 으니 진나라는 려불위의 천하게 된셈이다. 그의 투자는 세대를 뛰여넘어 부의 세습까지 성공한 력사가 여기까지만 기록되여다면 투자의 성공의 법칙이 훨씬 단순했을지 모른다. 허나 려불위의 인생은 이렇게 빛나는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진나라 시황 영정은 차차 나이가 들면서 강력한 군주로 부상되였다. 진시황 10년에 려불위는 실각되여 촉땅으로 쫓겨났다. 려불위의 실각하게 된 스캔들의 중심에는 한녀인이 서있은데 그가 바로 시황제의 생모인 주희였다. 본래는 려불위의 애첩이였다가 자초의 품에 안겼지만 자초가 일찍 죽는바람에 그 외로움을 달래고저 옛날 주인이였던 려불위와 다시 정을 통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지만 시황제가 나이가 들면서 국사를 돌보기 시작하자 려불위는 태후와의 불륜이 들통나면 재앙이 떨어질것을 예견하고 주희와의 치정을 청산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계략을 꾸미였다.    당시 함양에서 남근이 크기로 이름난 로애라는 자를 식객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한후 연회의 여흥을 빙자하여 음탕한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로애의 음경에 오동나무로 만든 작은 수레바퀴를 꿰고 걷게 하였다. 과연 이 소문이 그의 예상대로 태후의 귀에까지 전해져 얼마후 그남자를 손에 넣고싶다는 청탁이 왔다. 여불위는 로애를 가짜 궁형을 시켜 환관으로 둔갑시킨후 태후의 시중을 들게 하였는데 그들은 치정에 빠져 마음껏 음욕을 풀었다. 그러다보니 태후는 로애를 끔찍하게 여기여 모든 결정을 로애가 내리도록 권력을 주었다. 하여 로애를 따르는 자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한다.    그러다가 시황제 9년되는 해 밀고가 들어와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로애와 태후가 간통하여 이미 아이 둘이나 낳았았고 상국인 려불위가 이 일에 동참한것이 밝혀졌다. 궁지에 몰린 로애가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려했으나 사전에 들통나서 실패하고 로애는 사지를 찢어죽이고 두 아이들까지 죽여버렸다.    려불위도 원래 참형을 당해야 마땅하나 선대부터의 공로를 감안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촉땅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음독자살하여 다사다난한 한생을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가 53세였다. 그리고 주희도 우울병에 시달리다가 죽었다고 한다. 려불위의 이아기에서 계시되는 말이 있으니“힘있는 곳에 녀성이 있다”는것이다. 춘추전국의 란세속에서도 녀자들이 언제나 남자들의 운명에 개입하여 그 영향력을 과시했다는 점은 계시하는바가 크다.    만약 화양분인이 없었다면 려불위의 투자는 성공할수 없었고 시황제를 임신한 주희가 없었다면 려불위의 투자는 격세유전이 되지 못했을것이며 아이러니컬하게도 려불위는 바로 주희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였으니 힘있는 곳에 녀성이 있다는 말이 확실히 맞는 말이다. 21세기는 녀성의 세기이다. 모든 비즈니스 경영자들은 앞으로 녀성들의 마음에 쏙드는 디자인으로 녀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상품을 개발하지 못하는 경영자는 희망이 없다.    이점에서도 려불위의 이야기는 지극히 현대적이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경쟁의 핵심이 된 인재중용시대에“사람을 투자하라”는 말은 현시대의 중요화제이다. 2500년전에 려불위가 사람에게 투자했다는것은 그의 상인으로서으 혜안을 보여주는 대단히 탁월하고 지극히 현대적인 안목이다. 그가 일찍 제후국들을 주유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안광이 없었다면 그 당시 누구의 눈에도 불모지였고 빈 “깡통주식” 에 불과한 자초에게 투자하여 불행한 사람을 왕으로 만들었고 결국 “그의 가문에 기 대여 자기 가문을 빛낸다”는 자기의 계획을 이루어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구도 홀로 위대해질수는 없다. 이는 수천년간을 걸쳐 검증된 진리이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여 자신을 키우는 인생지혜는 현세대에 와서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인생철학이다. 리익을 취함에서 려불위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상품가치를 헤아리는 안목에서 놀라운 센스를 가지고있었지만 이미 마음의 등불이 꺼진 상태였던 그로서 리익과 정의의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 사람을 상품으로만 생각했고 필요하면 취하고 위기가 닥치면 함정을 파서 그 사람을 파멸에로 밀어넣었다. 그러나 결국 그 자신도 다른 사람에 의해 상품화되면서 그 가치를 잃게 된 순간 버려지게 되였다. 경영자는 리익을 내야 한다. 럲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 허나 오직 리익에만 매달리는 경우에도 망할것이다.     팔고사며 리해득실을 다투는 령역에서 인간다운 위대한 정신들이 살아숨쉬는 륜리륜리경영에 대한 목마름이 아쉬운 지금 그 리익에 자신이 망하지 않도록 항상 마음의 등불을 켜고 돈너머 세계의 희구를 헤아려볼줄 알아야 한다. 리익을 꾀하는 욕망과 리익의 정당함을 묻는 륜리경은서로 배치되는것은 아니다. 그것들의 가속기와 부레이크같은것이다. 사람들은 왕왕 욕망을 달성한 즐거움속에서 질주할 때는 위기 파악이 희미해진다. 그것이 파멸로 향한 질주이기도 한것이다.    그렇다. 리익으로 향한 길은 전용고속도로가 아니다. 륜리경영은 갈때는 가고 멈춰야 할 때 멈출줄 아는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언제인지를 분별해 파악하는것이다. 어려워 보이지만 쉬운일이다. 모든 운전자가 다 알고있는 주행원리이다. 신호등이 없 어서 사고가 나는것이 아니다. 지키려는 원칙과 지키려는 마음이 없기때문이다. 마음의 신호등이 이미 꺼져있으니 어찌할고……?    지금도 마음의 신호등이 꺼진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리익만을 향해 위험한 질주를 서슴치않고 감행하고 있는 현대판 려불위들에게 들려주고싶었던 중국고전의 한토막 이야기이다. 2500년전이나 지금 모든것은 변하고있지만 인간들만 별로 변한것이 없는것같다. 아마도 인간은 한없이 느리게 진화하는 동물이여서인가보다.                         2014년 1월 15일  
4    약자는 슬프다 댓글:  조회:1883  추천:0  2013-05-07
                                   약자는 슬프다                                            한세준       세상은 천태만상이요 인간은 천층만층 구만층이라 하나 크게 강자와 약자로 나눌수 있고 달리 잘난자와 못난자로 나눌수도 있겠다. 이렇게 숙명적으로 어느 한 부류에 귀속되여있으나 강자를 표방하고싶어하고 잘난 사람이 되고싶어하는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다보니 못나도 “잘난척”, 모르면서도 “아는척”, 없어도 “있는척” 하는것을 일컫는 이른바 “3척”이 답습되여왔다. 저저마다 제잘난 멋에 사는 이 풍진 세상에서 돈 없고 힘 없고 빽이 없는 “약자”들이 “3척” 을 터득하지 못하면 더구나 병신, 바보취급을 당하기 마련이라 웬간히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면 거개 다 “3척”으로 난국에 응부할수도 있고 체면유지도 할수 있으니 가히 처세의 입문이라 하리라.     하여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 처세의 입문을 본능적으로 습득하여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활용하여왔다. 맑은 날 막대를 세우면 그림자를 볼수 있듯이 손자병법보다 더 신통력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허구픈 웃음이 나오는것은 무엇때문일가? 밤 자고나면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때인지라 사상의 옷이라 하는 말속에서 기기묘묘하게 변해가는 세상인심에 절로 슬퍼지는것을 말릴수 없다.     일전에 “연변일보”에 실린 박××녀사의 글에 “3소”라는 말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인정세태를 읽을수 있어 다시한번 개탄하게 되였다. 소위 “3소”란 집집의 마누라들이 코리안드림의 격랑을 타고 한국에 나가 돈을 벌어오게 되자 단군족의 전통적인 대남자주의는 자라목처럼 움츠러들고 돈 잘버는 마누리말에는 무조건 “옳소”가 따르고 멋대로 하는 마누라의 처사에도 무작정 “맞소”가 내달아오고 옳고그름이야 어떠하든 마누라의 주장이라면 지엄한 어명처럼 “맞소”라는 “3소”를 노래가사처럼 외우며 아양을 떠는 현대나그네들의 궁상을 거품없이 그려낸 기사를 보면서 생각이 얽히고서리였다.     하긴 산설고 물설은 타국땅에서 기시를 받을대로 받으며 몇몇해를 고생속에 돈을 벌어온 안해이니 감지덕지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나서 그럴수도 있겠다고 리해력을 달려보기도 하나 딱히 그런것만도 아닌것 같다. 남들처럼 멋을 내며 살아야 하는데 사무한신이라 돈지갑은 비여있어 마누라가 내주는 용돈을 쪼개써야 하고 그전처럼 풍류를 즐기다 가는 천둥벼락은 둘째치고 쪽박차고 나앉게 되였으니 내노라 하던 “바깥량반”들이 고충이 한두가지가 아니란다.     원래 절반 하늘을 떠이였다는 녀성들이 상품경제시대에 들어와서 경제적으로 자립할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진 차에 더구나 한국바람이 불어치자 남자가 꼭 “바깥량반”이고 안해가 꼭 “집사람”이여야 할 리유가 없게 되였다. 일심동체라는 부부사이에서도 돈 잘 벌고 못 벌고에 따라 “강자”와 “약자”로 금이 그어지는 판인가? 한 가정은 사랑으로 얽힌 한개 소집단으로서 부모자식간의 사랑은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이지만 부부간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리기적성분이 다분하게 된 이 시대이다.     사랑에는 보험이 없다. 약자로 전락된 “바깥량반”들이 계속 “3소”타령이나 부르면서 “안사람”의 그늘밑에서 안일만 탐내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아무리 착한 마누라도 “하늘같은” 세대주의 미운 꼴을 내내 눈 감아줄수는 없을것이다. 거의 류행어로 된 “구조조정”이란 말이 먼저 가정내에서 자연스럽게 실현되니 이 아니 비애인가? 한편 제구실을 못하여 약자로 몰리운 남자들은 구제불능이며 아무도 동정할수 없으렸다.     그런데 진정 약자의 비애를 절감하게 되는것은 가정울타리를 벗어나 력사 사회적 시각으로 볼 때의 우리 민족의 수난의 력사이다. 조선력사를 좀 읽은 사람들은 모두 “병자년국치(丙子国耻)”라는 단어를 기억할것이고 세월을 거슬러 민족의 슬픔을 두고 통탄해마지 않을것이다.     “병자호란” 직후에 “환향녀(还乡女)”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전패후 조선의 꽃같은 딸들이 수없이 청나라 포로로 끌려가 온갖 수모와 릉욕을 당하였다. 1637년 1월 30 일 인조대왕이 소현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서대문을 지나 한강 동쪽기슭의 항복식장에 끌려나와 누루하치에게 이마에 피터지도록 언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사죄를 하면서 청나라를 섬기겠노라고 약속한후에야 비로소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그후 청국에서는 그동안 겁탈해갔던 우리 민족의 딸들을 고향으로 되돌려보냈는데 그녀들을 “환향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렇게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부모형제들이 있는 고향에 천신만고로 돌아왔건만 그녀들을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고 설 자리도 없었다. 유교관념에 물젖은 당시 사회에서 녀자가 한번 몸을 버렸다면 페기처분이 된 물품의 신세로 되고말았던것이다. 환향녀들은 더러운 녀자의 대명사가 되였고 질시의 대상이 되여버렸다.     기실 부패한 리조왕조의 무능으로 인하여 희생양이 된 그녀들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건만 “잘난 남자들”이 알량한 권위를 휘둘러 또 한번 내쫓은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 환향녀들은 자살해버리고 그러지 못한 녀자들은 “화냥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기구한 목숨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그 말의 변종으로 화냥년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대대로 내리 정조를 내버린 녀자들에 대한 욕설이 되였던것이다. “환향녀”라는 말은 우리민족 녀인들의 피눈물 젖은 수난의 력사의 대명사로 되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아무리 막말을 하고싶더라도 이 말만은 부디 삼가하였으면 한다.     동서고금의 력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약자는 약자라는 그 한가지 리유만으로도 눈물겹도록 슬프고 고통스럽다. 지금은 예전에 비하여 사람마다 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있는데 여유가 조금 있으면 남을 조금이라도 보듬을줄 아는게 상례인데 저저히 일신의 향락만 추구하는 극단적인 리기주의시대의 풍경선을 그리고있다. 선인들의 배운자가 더 교묘하고 가진자가 더 각박하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돈이 활개치고 진리가 주눅이 들어버린 이 사회에서는 노력한것보다 더 많은것을 얻고 실력은 없지만 분에 넘치게 대접받고 자신의 일신영달을 위해 아첨을 일삼는 사람들이 강자인듯 행세하나 기실 더없이 불쌍한 약자들이라 말하고싶다. 일찍 자취를 감추었던 관상쟁이, 점쟁이들이 공공연히 사주팔자를 뇌까리며 신비한 표정으로 돈을 벌고있는데 옛날 고관대작들도 머리숙였다는 그들앞에서 공손히 꿇어앉아 점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그 기대에 찬 눈길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분명 돈과 직위를 가져다줄 남편복이라든가 녀자복이 무더기로 쏟아질것이라는 길한 징조일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가련한 령혼들이 아닐수 없고 동정할수 없는 정신적약자들이라 락인찍어야 할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아무리 추하게 생겼다 하더라도 부자이면 가장 아름다운 미인을 안해로 맞아들일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론단이 지금 이 사회에서 실증되고있다. 아닌게아니라 남방의 한 늙은 부자는 “내가 돈을 내흔들지 않아도 녀자들이 나를 줄쳐따른다. 그것은 나의 돈때문이 아니라 나의 매력때문이다”라고 흰소리를 쳤다는데 참 야물딱진 호언장담이다. 그가 공방형의 등에 업히지 않았다면 과연 매력을 들먹일수 있단 말인가? 답은 그속에 있다.     그 반증으로 돈이 없는 수많은 남자들이 다 늙도록 련애 한번 제대로 못하고있는 실정에서 우리는 그들을 불쌍한 약자라고만 기시할수도 없을것이다. 때론 한국 텔레비죤프로에서 동남아의 젊은 아가씨들이 잘 살아보겠다고 정든 땅, 부모형제들을 떠나 한국 농촌에 시집와서 살면서 더없이 행복하노라고 각본에 따른 미소를 지어보일 때 공연히 슬퍼지는것은 내가 고루해서인지 모르겠다.     아무도 돈냄새에 취하지 않는다고 할수는 없으리라.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개 가진자의 피곤한 하품소리로서 못 가진자에겐 흰소리로밖에 안 들릴것이다. 결국 못 가진자, 힘이 없는자들만 약자가 아니라 가진자라도 정신적으로 연골증에 걸린 약자들도 이 세상에 많다는 결론은 결코 자기위안이 아니라는 나의 납함이다.     하긴 아무 대책도 없이 막무가내한 약자타령만 늘어놓고보니 더욱 슬퍼지는 마음이다. 이 세상에 모든 약자들은 숙명적인 존재들인가? 나에게는 정답이 없다. 다만 믿고싶은것은 강자 약자의 계선도 많이는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것이다. 그렇다고 경제적인 “강자”가 되여보려고 너나없이 코리안드림에 뛰여든다는것도 능사는 아닐터.     나의 하늘아래 강자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삶을 열심히 가꾼다면 상대적으로 강자가 되는것이 아닐가? 주어진 삶을 제나름대로 개척하면서 살아갈 때 약자의 타령도 어느새 시들해지고 약자로 된 비애도 새 삶의 도전을 부르는 강자의 웨침으로 될수 있으리라.                                             2011년 6월 13일        
3    계사년 벽두에 부쳐 댓글:  조회:978  추천:1  2013-03-17
         계사년 벽두에 부쳐                                     한 세 준         계사년 새해는 뱀과 함께 시작되였다. 너나없이 룡꿈꾸기에 무던히도 바빳던 한 해를 보내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명한 뱀해를 맞는다. 우려와 희망이 뒤섞이기는 어느 해나 마찬가지지만 나로서는 어쩐지우려쪽이 한결 무거운듯 싶어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그래서 금년이 뱀의해라는 점에서 저그마한 위안이라도 얻는다.     십이지(十二支)의 동물중 뱀같은 영물은 또 없으리라.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꼬드겨 선악가를 따먹게 한 죄로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기여다니는 운명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였다. 룡과 마찬가지로 뱀도 업보를 현세에 받는 인과의 동물이다. 뱀은 자비로운 동물이 아니다. 뱀이 한번 화를 내기시작하면 그의 미움에는 끝이 없다고 한다. 뱀이 랭혈동물이여서인지 뱀은 빨리 깨우치는 동물이라고 정평이 나있다.     계사년ㅡ뱀해는 깊이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며 해답을 추구하는 해라고 한다.력사 를 돌아보면 뱀띠해는 결코 조용하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띠풀이 책에서는 이것은 뱀띠해가 열두동물의 주기가운데서 가장 음의 힘이 강한 해로서 양의 힘이 가장 강한 룡띠해에 이어지기때문이란다. 뱀의 지혜가 본받을마한것임을 인생의 많은 경우에 확 인하게 되는데 특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형편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따라 서 뱀띠해는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모든것이 조용한것이 매우 조용하게 보이지만 예측 할수  없다고 하여 미신적인 경향이 강한 한해이다. 뱀은 느림과 절제의 미학을 일찍부터 깨닫고 체현한 동물이다. 우리는 어줍잖게 세계제일을 부르짖는다. 인제 룡꿈에서 깨여나 뱀의 랭철함을 배워야 하지 않을가?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기만도 적당해야 약이 되는법이다. 모든 동물들은 자기보존에 필요한만큼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나 인간만은 그 이상의 능력을 구비하게 된 탓에 오히려 불행하게 되였는지도 모른다. 이전에 비해 우리들의 생활조건은 많이 좋아졌다고 단언할수 있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잘사는 티를 내고 격식을 따지며 사치를 비길 때 우리 나라에는 아직 도 1억이상의 농민빈곤부축호와 수천수만의 도시 최저생활보장인구가 있다는것을 잊지 말고 우리나라는 아직도 세계 농산물수입대국이며 자원결핍문제가  나라의 지속발전을 제약하는 병목으로 되고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인구당 GDP는 아직도 세계 백위권밖에 있어 의연히 최대발전도 상의 나라라는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심심찮게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우리 나라 음식랑비는 놀라울 정도라고 한다. 특히 공금으로 베풀어지는 연회석상의 랑비는 더구나 한심하여 아무리 진수성찬이라 하여도 절반도 못먹고 쓰레기로 처리되며 어떤 회의는 고급호텔에 들고 고급기념품을 발급하며 사무청사와 회관은 지나치게 크고 설비가 고급이여서 그 기품이 비범하고 호화롭기 그지없다.     이런 공금랑비의 사회풍조에 대해 민중들은 극도로 증오하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뿐만아니라 이런 요사한 풍조가 우리 이곳 농촌에까지 파급되여 촌사람들도 결혼잔치와 환갑잔치는 물론 어른들이나 젊은이들의 생일까지도 전용뻐스를 세내여 시내에 들어가 고급호텔에서 떡벌어지게 차려놓고 한바탕 호기를 피운다. 그렇게 돈 주고 산 음식들을 절반도 못먹고 내버리며 그것도 성차지 않아 2차,3찬전까지 련속 작전을 하고야 체면이 서는듯 한다.     지금 농촌이 저말 이처럼 잘살가? 혹시 한국나들이에서 목돈을 번 사람은 괜찮은 지 모르겠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 풍조에 같이 휩쓸리다보니 황새따라 가려다가 뱁새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처럼 가랭이가 찢어져도 울며겨자먹기로 흉내낼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절용을 하는것은 잘 쓰기 위해서이다. 아낄줄만 알고 잘 쓸줄 모르는 것, 그것은 진정한 의의의 절용이라 할수 없다. 수만금을 모은들 잘 쓰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랴!소처럼 벌어서 쥐처럼 먹으라는 속담 그른데 없다.     옛선사의 “바가지”란 시가 떠오른다.                 담을줄 알기에 비울줄도 압니다. 비울줄 알기에 담을줄 압니다. 비우는 지혜를 익혔으니 새 생명 담고 담으리라 (전문)      비우면 더 새롭고 좋은것을 담을수 있으련만 놓지 못하고 눌려 압사하는 사람들, 모모한 정치인, 대기업인, 큰대자가 붙은이들이 놓지 못하는것은 놓을 물건이 너무 많고 무거워서일가? 놓을줄 알아야 하고 놓는것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그렇지 못 하니 그들을 따라 배워야 할 젊은 세대들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걸가?     놓을줄 알고 비울줄 아는것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이 애기가 아니라 력사를 창출하고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진리요 지혜인것을 그들도 모를리 없으련만…부란 분뇨와 같은것이여서 그것이 축적되면 악취를 풍기지만 널리 퍼뜨리 면 비옥하게 한다고 말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검소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로 가기는 어렵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이다. 송나라 때의 장지백(张知白) 은 재상이 되였음에도 지방의 서기로 있을때처럼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것을 가식이라 하면서 비난하자 장지백은 “지금 내 봉록으로는 온가족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기에 충분하다네. 그런데 검소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로 가기는 어려운게 인지상정일세 지금 내봉록이 어찌 항상 있겠으며 내몸이 어찌 항상 보존되겠는가? 하루아침에 지금과 달라지면 내가족 은 사치에 습관된지 오랜지라 감자기 검소해질수 없어 반드시 살곳을 잃을걸세 ‘소학’” 아무리 풍요롭게 산다해도 항상 사치를 경계하고 절용하라고 선인들이 깨 우쳐주고 있는것이다.     쌀미(米)자를 파자(破字)하면 八十八이 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한알의 벼를 수확하기 위하여 여든 여덟번의 손길이 미쳐야 한다고 풀이했다. 그처럼 농부의 정성 과 피땀이 담긴 소중한 쌀이다. 맹자는 일찍 덕은 근본이라고 재(财)는 말단이라 하면서 근본을 밖으로 하고 말단을 안으로 하여 본말이 전도되면 대부들은 어떻게 하면 네집안을 부유할것만 생각하고 선비나 일반 평민들도 어떻게 하면 내 한몸에 리 롭게 할수 있을가만 고민하게 될터이니 이처럼 서로가 리익만 추구하면 나라가 위태 로워질것이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전에 비해 갈수록 심산이라고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그 만이고 꽁잡는게 매이고 눈앞에 보이는것을 먼저 삼키는 자가 임자라고 한다. 꿩만 잡으며 그것을 어떻게 잡았든간에 상관없이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낸다. 이러한 뻔뻔함과 약삭빠름은 지금도 이땅에 판을 치고있다. 이런 현상에 익숙해진 사람한테 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정직함이나 륜리도덕 같은것은 필요없고 먹을만한 것이면 언제든지 먼저 차지하려 안달복달이다.     한편 일반인들은 꿈에도 상상못할 해괴한 일들이 하루 멀다하게 터져나오고 사람 들이 먹거리를 가지고 술수를 부려 분유사건이요, 하수도기름이요 가짜 닭알이요 하는 판이니 인제 누구를 믿고 무엇을 시름놓고 먹는단 말인가? 요즈음은 산동성의 많은 양계장에서 닭사료에 고항생제를 투여하여 속석으로 키운 닭은 40일이면 몸무 계를 10근으로 늘인다고 하는데 이는 수의약관리조례에 일찍 금지된 약물로서 인체 에 유해한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런데 더 한심한것은 도축장에 검역원들도 조작된 증명서를 발급하고 있으며 실 제적으로 표본조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실정이다. 이렇게 검역에 무사통과된 닭 고기는 물류중심에 집중되였다가 여러 매장에 운송된다고 신문은 폭로하고있다. 하긴 이런 불량위험식품의 출현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계속 심심찮게 연출되는 대하드 라마로서 아직 발견되지 못한 사례는 또 얼마인지 귀신이나 알노릇이다.     어느 때, 어떻게 당할지 모르는 속고 속히우는 이 비리한 사회현상이 뱀해에는 좀 다스려지리라고 기대해 본다. 현실에서 백번 죽었다 깨여나도 조명받을수 없는 왜 소한 사람들, 가진것이 없어 그 존재가 미미한 사람들, 선한 꿈을 꾸지만 그 꿈을 이 룰수 없어 하냥 시대의 변두리에 떠밀리여 허둥대는 사람들, 헉헉거리며 억척스레 팔 다리를 놀리며 억척같이 살려해도 울고싶은 약세군체들, 이 해는 형세를 관망하는 사람의 해는 아니라고 하지만 밝은 해살과 따스함이 차례지기를 못내 기원해 본다.                                 2013년 1월 5일
2    더불어사는 세상 댓글:  조회:911  추천:0  2013-02-09
                                   더불어사는 세상                                             한세준       아침에 밖에 나와보니 겨울날치고는 제법 따스하고 화창한 날씨다. 스적스적 걸어서 마을 뒤동산에 올라오고보니 날씨도 좋고 하여 내친김에 모아산까지 가볼 욕심이 생겼다. 눈 덮인 자연의 풍경을 감상하며 신작로를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모아산에 이르렀다. 삼림공원 주변에는 벌써 많은 승용차들이 서있고 알락달락 겨울차림새를 한 많은 유람객들이 제나름대로 겨울산풍경을 즐기고있었다.     나도 올 겨울철에 집에만 박혀있다보니 처음 와보는 모아산 눈 덮인 설경이 너무 아름다왔다. 누가 봄산이나 가을산만 좋다고 했는가? 눈덮인 겨울산은 단풍든 가을산이나 록음방초 우거진 여름산보다 더 이채롭고 기백이 있어보인다.     검푸른 절개를 자랑하며 흰 눈을 떠이고 거연히 서있는 락락장송들,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했음직한 아득히 펼쳐진 눈덮인 림해, 언제 보아도 드팀없이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있는 크고작은 바위들, 어느 모로 보아도 여느 계절보다 더 매력적이여서 매일 많은 인파가 이곳을 찾아 설레이니 모아산 설경은 많은 유람객을 유혹할만한 리유가 아닐가 생각한다.     수많은 도시시민들이 어지러운 소음과 혼탁한 기류가 요동치는 세멘트장벽 틈새에서 무대책으로 당하다가 이곳에 와서 아름답고 매혹적인 설경을 즐기면서 가슴이 확 열리게 심호흡을 하기도 하고 쌓였던 스트레스도 확 풀어버리는, 그야말로 더없이 행복한 순간순간이 아닐수 없으리라! 비록 기암절벽이나 아름다운 폭포수는 없을지라도 언제 와도 대자연의 순수를 송두리채 우리에게 선사하는 자연의 배려에 우리는 항상 감사한 마음뿐이다.     엎어진김에 절이라고 모아산정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따라 산중턱에 이르니 산기슭보다는 딴세상이다. 바람도 세차고 기온도 제법 쌀쌀한 한겨울 날씨다. 하긴 이 한겨울에 로구를 끌고 젊은이들을 따라 정상에 오르려는 생각부터가 주제넘는 집착이라 생각하니 발걸음은 자연히 집으로 향하였다.    신작로를 따라 얼마쯤 가노라니 갑자기 승용차 한대가 내앞에 멈춰서더니 한 사십대 중반의 녀성분이 차에서 내려 인화 5대를 가려면 어떻게 가느냐며 공손히 길을 물었다. 보아하니 처음 와보는 손님 같아서 자상히 길을 알려주었더니 어데까지 가느냐며 차에 타라는것이였다. 마을 입구까지 태워다주면서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 가라며 덕담까지 하여주니 너무 감사했다. 그래, 세상살이 나혼자 사는거 아니다.    더불어사는 이 세상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힘이 아니라 우리 서로 배려하면서 함께 사는 힘이 아닐가?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더 잘살아보려고 무리를 지었고 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니 사람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고리가 바로 배려하며 산다는것이다. 서로 주고받는것 그리고 례의범절이나 법, 질서, 제도 같은 모든것들이 서로를 위한 배려에서 나온것이다. 옛 성인들인 공자나 소크라테스 같은 위인들이 각각의 여러가지 표현으로 세상살이 도리를 강조했지만 거기에 관통되여있는 기본원칙 역시 최종적으로 서로가 배려하며 사는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살만한것이다.     비록 경쟁지상주의에 쫓기며 살아가고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배려의 본능이 잠재해있다.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남을 돕는 일은 물질이나 돈으로만 하는것이 아니다. 짐을 든 사람을 위하여 엘레베터 버튼을 눌러주는 아이, 붐비는 뻐스안에서 로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주는 아줌마, 초보운전자에게 길을 양보해주는 운전기사… 이렇게 사소한 배려일지라도 모이고 련결되여 우리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것이 아닐가?    사랑한다는것 역시 베푸는 일이요, 나누는 일이다. 주면 줄수록, 나누면 나눌수록 넉넉해지고 풍성해지는 마음, 우리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사랑의 신비는 줄 때만 빛을 낸다. 그러니 사랑의 심성은 마치 옹달샘처럼 퍼내면 퍼낼수록 맑게 고인다. 퍼내지 않고 그냥 두면 흐리고 상하다 썩고만다. 그러니 많이 베풀수록 많이 돌아온다. 주는 일 자체가 종당에는 받는 일이니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주고싶어서 주는것이다. 때론 가치판단기준이 서로 다를수 있지만 그 가치는 받는 사람이 혼자 누리는게 아니라 고스란히 쌓여있다 다시 돌아오게 되여있다.    돌아올 때는 다른것으로 바뀔수도 있는바 행복감일수도, 찬사나 존경일수도 있다. 그리고 돈으로 바꿀수 없는 가치일 때가 많다. 하지만 배려는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하는게 아니다. 원하는것을 배려하다보면 그 대가가 돌아오게 되고 성공은 그렇게 이루어지는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 자기 자식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똑같을수는 없지만 지금 독신자녀를 키우는 아줌마들에게는 “머리숙여 자식의 소”가 되려는 정신이 너무 지나친것 같다.     요사이 과잉보호, 과잉관심으로 자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간섭하면서 자식들로 하여금 한순간도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한다. 각종 과외공부나 취미생활마저도 어머니의 치마바람으로 조정하는것이 자식을 잘 교육하는것으로 착각하는 어머니들이 많은것 같다. 심지어 한술 더 떠서 등하교시 자가용승용차로 모시고 다녀야만 직성이 풀려하는 부모들도 많다. 이렇게 젊은 부모들이 왕왕 범하는 무조건적이고 눈먼 배려와 사랑은 자식에게 오히려 독이 될수도 있다.     때론 한 가정의 공동한 생존과 행복을 위하여 상황에 따라 지나친 배려를 자제하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예전에 어느책에서 본 한 지혜로운 어머니의 현상이 지금도 나의 머리에 생생히 떠오른다.     알베르라 부르는 외아들을 둔 어머니는 비록 고등교육을 받은적은 없지만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이 거지가 될판이였다.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가 푸짐히 차려놓은 저녁식탁을 보고 깜짝 놀란 아버지가 “정신 나갔소? 당신 지금 어쩌자는거요.” 하면서 화를 냈다. 그때 어머니는 상냥한 어조로 “어서 앉으세요. 우리에게 즐거움이 필요한 때는 래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예요. 잠자코 잡숫기나 하고 힘내세요.”라고 말했다. 참으로 슬기와 지혜가 넘치는 어머니였다. 그 당시 알베르는 어머니의 만류도 마다하고 미국에서 프랑스 빠리로 갔다. 얼마후 빈털터리가 된 알베르는 하는수없이 어머니에게 급전을 보냈다. “굶어죽어요. 알베르!” 어머니로부터 급히 보내온 답전 “굶어라. 엄마.” 이 답전을 보는 순간 알베르는 정신이 버쩍 들었다.     어려울 때마다 항상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자라온 그에게 배려의 줄이 끊겨 이제 밑바닥으로 추락한것이다. 옛 성인들은 아픈만큼 성장해진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바닥을 치고 일어나 종당에는 성공을 이루었다. 후날 어머니는 그때 그 일을 두고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줬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였지만 그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자기절로 일어나지 못할것 같아서였단다.”이런 경우 말장난 같지만 배려하지 않는것이 더 큰 배려가 될수 있다는이 어머니의 지혜를 지금 우리 시대 어머니들이 조용히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불어 함께 사는 이 세상은 마치 맞물려 돌아가는 치차와 같아 배려라는 윤활유가 말라버리면 틀림없이 덜커덕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순리롭게 돌아갈수 없을것이다. 사람은 능력이 아니라 남에게 베푸는 배려로 자신을 지켜간다. 괴테는 “노력하는자가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정말 멋있는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배려하는자가 구원을 받는다.”라고 믿고싶다. 배려는 사소한것이지만 위대한것이다. 우리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가노라면 이 사회는 더욱 조화롭고 아름다와질것이다. 누가 보아도 좋을것 같은 글이 있어 아래에 적어본다.    앞을 못보는 사람이 물동이를 이고 한손에 등불을 들고 걸었다. 그와 마주친 사람이 물었다.  “정말 어리석군요. 당신은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니십니까?” 그가 말했다. “당신이 나와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잔불은 나를 위한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것이랍니다.” 바비 하리다스가 한 이야기이다. 바비 하리다스는 인도의 승려로서 히말라야산중의 한 마을에서 탄생하였으며 12살에 집을 떠나서 밀림속에서 고행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진정한 스승은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깨달은 그는 1953년부터 침묵의 수행을 시작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말 대신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작은 칠판에 글을 써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것이 차츰 세상에 알려져 “바비 하리다스 칠판”으로 유명해졌다. 자연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동화, 단편소설, 수필 등을 써서 세인들의 격찬을 받았다.                                  2011년 1월 20일  
1    (시) 망향가 댓글:  조회:798  추천:0  2013-01-30
                                       망향가                            고국이 고향인데 망향가란 웬말인가                          늙은몸 끌고 천방지축 동분서주해도                          석삼년 긴 세월 닭알가리마저 쉬쓿고                          고역의 로구에 잔병만 휘청거리여라                            서러운 세방살이, 차거운 베개가에                           밤마다 꿈마저 노그라질법 하건만                          처량한 저 달빛이 서리처럼 내리여                          눈물젖은 향수의 정도 얼어드누나                            간밤도 비몽사몽 어수선한 잠결에                          손자손녀, 마누라를 얼싸 껴안고                          그리움 지팽이삼고 귀향길 걷는데                          다리는 달리고 수심만 꼬꾸라졌소                                                   랭랭한 달님과 나 그림자 셋이서                          한숨을 안주삼아 굽을낸 소주병에                          타향의 설음만 한가득이 채웠다오                          오, 고국땅에서 망향가란 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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