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것은 아픈대로 아쉬운 것은 아쉬운대로 미련이 있어 그래서 더 아름다운 추억
http://www.zoglo.net/blog/lianyi 블로그홈 | 로그인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홈 > 연이수필요

전체 [ 6 ]

6    꿈틀이 사탕 사랑 댓글:  조회:327  추천:0  2018-04-08
꿈틀이 사탕 사랑 권연이   유달리 피곤했던 6월말의 어느 하루, 기말 시험을 앞두고 담임인 나도, 아이들도 시험 공부 준비에 많이 지쳐있었다. 점심 먹고 얼마 놀지도 못하고 아이들은 교실로 들어와서 학습지를 완성해야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완성해야 할 학습지는 한 장 두 장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한참이나 열심히 공부하던 아이들은 드디어 하나 둘씩 책상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큰 소리로 집중을 시켰지만 피곤 앞에서 아이들은 어쩌할 방법이 없었다. 연필 쥔채로 책상에 쓰러져 코를 다랑다랑 골기 시작한 아이도 있고, 엎드려 입을 ‘하’벌리고 새록새록 잠이 든 아이도 있었다. 차마 깨우지 못하였다. 목소리를 죽인체 “쉿! 다들 엎드려서 좀 자요.”라고 얘기하면서 몸짓으로 책상에 엎드리라고 하였다. 나머지 애들도 잠에 취해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5분도 되지 않아 교실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들려오는 건 다랑다랑 코 고는 소리와 새록새록 숨쉬는 소리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도 아이들과 잠간 자 버렸나보다. 어렴풋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손등이 간질간질해 났다. 손등을 긁어면서 잠에서 깨어난 나는 ‘악~’하고 소리치며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내 손등을 간지럽혔던 물건의 느낌이 너무 이상했던 것이다. 말랑말랑, 뭉클뭉클, 지렁이를 만진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내 모습을 보고 깔깔 좋아한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고 화가 머리까지 올라왔다. “누구야?”하고 나는 큰 소리로 물었다. 내 돌발 행동에 아이들은 깔깔 웃다가 삽시에 얼굴이 굳어졌다. 교실은 순간 한 겨울이 되어버렸다. 한참의 고요함 끝에 교실 끝쪽에서 나지막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제거예요. 선생님 드시라구요.” 반장 목소리였다. 항상 씩씩한 아이였는데 이렇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기는 처음인거 같았다. 나도 미안한 마음에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조용하게 물었다. “뭡니까? 무슨 장난을 친거예요?” “꿈틀이에요. 왕꿈틀이.” “그게 뭡니까? 학교에 장난감 같은 거 들고 와도 되나요?” 나는 반장이 장난감을 들과 와서 일부러 나를 놀래켰다는 생각이 들어 단단히 한 번 혼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난감 아니에요. 사탕이에요. 선생님 드시라고 드린거예요.” 반장은 좀 놀랜 목소리로 울먹울먹하며 대답하였다. “사탕이라구요?” 나는 나에게 버러져 책상 한 구석에 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분명 지렁이같이 길다랗고 불그스럼한 물건이었다. “이게 사탕이라고?” 나는 의심적어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사탕 맞아요. 선생님, 드셔보세요.” 아이들이 일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사탕이라고 말하는 그 물건은 보기만 해도 지렁이처럼 징그러웠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 화낸 것도 미안하고 지렁이를 무서워하는 걸 티내면 선생님인 내 면목도 구겨질 것 같아서 울며 겨자먹기로 한 번 쥐어보았다. 역시나 멀렁멀렁,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런 눈치를 채였는지 반장이 막 뛰어나와선 꿈틀이를 자기 손에 받아 쥐었다. 나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반장이 “선생님 드셔보세요. 이거 딸기맛이에요.”라면서 그 손을 내 입가에 가져다 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황한 나머지 얼굴까지 빨개진 나였지만 선생님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태연한 모습을 보이면서 입가에까지 온 꿈틀이를 한 입 물었다. 입에 들어간 꿈틀이는 사실 딸기 맛 젤리 사탕이었다. 하지만 절반 남은 꿈틀이를 보니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음, 사탕이구나, 미안해, 반장, 선생님은 장난감 가지고 온 줄 알고 너무 놀라 소리쳤던거야. 이 사탕 맛은 괜찮네. ”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나머지 절반 꿈틀이를 입에 넣었다. 그제야 아이들도 다시 얼굴이 환해졌다.   이튿날, 아침 자습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 아이가 수줍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선생님, 드세요.”라면서 두 손으로 무언가를 건내주었다. 받아 쥔 순간, 난 알았다. 왕꿈틀이구나! 나는 태연한 척하며 왕꿈틀이를 손등에 착 올려놓고 “오늘 꿈틀이는 무슨 맛일까?”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내가 정말 왕꿈틀이 사탕을 좋아하는 줄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아이들한테서 콜라맛 왕꿈틀이, 오렌지 맛 왕꿈틀이, 사과맛 왕꿈틀이 등등 종류 별로 다 선물 받아 ‘울며 겨자 먹기’로 먹어보았다. 솔직히 나는 왕꿈틀이가 싫었다. 하지만 왕꿈틀이는 아이들이 나에 대한 사랑이다. 좀 징그러운 왕꿈틀이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담아 나에게 시원한 콜라가 되었고  새콤한 오렌지가 되었으며 달달한 사과가 되었다. 지금 왕꿈틀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거리가 되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스트레스가 산처럼 밀려올 때, 왕꿈틀이 하나 손등에 올려놓고 장난하다가 먹어버린다. 그러면 힘들었던 모든 것이 사라진다. 왕꿈틀이는 아이들이 나에게 준 행복의 선물이다.  
5    꿈의 집 댓글:  조회:253  추천:0  2018-04-08
꿈의 집   권연이     며칠 전, 집 한 채를 팔았다. 남편은 이제 집을 사고 팔고 하는데 아주 익숙해 있었다. 웬만한 부동산 직원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남편이 어느날인가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여보, 우리도 아이가 둘에 장모님님까지 하면 식구가 적지 않는데…지금 살고 있는 집이 좀 작은 거 같지 않아? 당신 항상 마당이 있고 문 열면 땅을 밟을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았어? 마당에 상추도 심고 고추도 몇 포기 심고 포도도 심어 놓고 말이야. 애들이 언제든 나가 놀고 싶으면 문 열고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그런 집 말이야. 우리도 그런 집을 한 번 장만 해볼까?” 남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마당이 있고 문을 열면 땅을 밟을 수 있다니! 이건 내가 항상 노래처럼 입에 달고 있었던 꿈의 내 집이 아닌가. 남편을 만났을 때 남편은 이미 두 칸 방이 있는 82평짜리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결혼을 하였고 거기에서 우리의 첫 애가 태어났다. 그 때만 해도 젊은 나이에 자기 소유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기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고 소중하게 챙겼는지 모른다. 그 집에서 우리는 새로운 닌생을 시작하였다. 몇 년 사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여 대출을 다 갚고 또 새로 지은 아파트 하나를 더 장만하게 되었다. 물론 대출을 갚느라 여간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통통 뛰여 오르는 집값에 힘이 났다.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은 몇 년 사이에 82평에서 110평 그리고 140평으로 커졌다. 하지만 웬지 무언가가 허전하고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은 남편도 마찬가지인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살 던 집이랑 비교를 해 보면 지금은 정말 갑부나 다름 없는데 왜 마음만은 항상 텅 빈 것처럼 해도해도 채워지지 않고 무언가가 그냥 부족한 거 같고 무언가가 그리운것 같았다. 사실 그 때 내가 살았던 집은 참 초라하였다. 열살쯤 되었을 때 우리 식구가 새 집으로 이사한다고해서 무척이나 들떴는데 정작 이사를 하고 보니 재대로 된 창문 하나 없는 그런 집이었다. 그런 집에서 우리 식구는 살림을 시작하였다. 집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래도 하학하고 나면 내 방이 있는 새 집으로 빨리 가야지 하는 마음에 설레였고 해가 지기 시작하면 텃밭에서 딴 오이에 싱싱한 상추만으로 떼우는 저녁이지만 식구들이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루 이야기 하며 웃고 떠들고 같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뒷짐 짓고 동네 마실도리를 나가시고 엄마도 부랴부랴 설겆이 해놓고 동네 아낙네들과 모여앉아 이 집 저 집 이야기하며 웃고 떠든다. 우리는 벌써 또래 친구들이랑 아지트에 모여 이야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 동네 구석구석 쓸고 다니기도 하였다. 맛있는 반찬이 생기면 옆 집 아지매도 부르고 뒷 집 삼촌도 불러서 나눠 먹기도 하였다. 물론 우리도 동네 친구들 집에서 얻어 먹기도 많이 했다. 그 땐 목에 집 열쇄를 걸고 다니는 시내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다. 그런 걸 한 번 해 보고 싶었지만 우리 집은 일년 내내 언제 한 번 문을 채울 일이 거의 없었다. 간혹 엄마가 어디 나가면 옆 집에 대고 큰 소리로 “진영엄마, 나 잠간 나갔다 올 테이까 우리 집 좀 봐주이소.”하고는 나가 버린다. 엄마는 그렇게 볼 일 다 보고 한 낮이나 밖에서 돌아 다녀도 집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뒷 집 젊은 아지매도 어디 나갈 일이 생기면 어린 애를 데리고 와서 “걸이 엄마, 우리 애 좀 잠간 봐조요. 나갔다오게”하면 엄마도 “응, 알아데이, 두고 가.”하고시우너하게 대답하고 그랬다. 그러다 누구 집 큰 잔치가 생기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이 집 사발 빌리고 저 집 접시 빌리고 또 누구 집 숟가락 빌리고 하면서 잔치를 치루었다. 동네 사람들은 남 집 잔치지만 당연 자기 일처럼 생각해주고 챙겨 주고 했다. 참 사람 냄새가 찐하게 났던 동네다. 내가 사는 집은 좀 초라했지만 그런 속에 우리 집이 있었다. 지금은 사는 집이 제아무리 크다고 해도 내 집 식구외에는 편안하게 와서 앉아 놀다갈 사람도 없고 일보러 집을 나설 때면 열쇄로 문을 두겹 세겹 채우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마음 놓고 나가는가. 그 뿐인가! 누가 문 앞에서 문을 두드려도 감히 열어주지도 못한다. 동네 나가면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몇 층에 사냐고 물어 봐도 솔직히 선뜻 대답을 못한다. 아이들에게도 낯선 사람은 무조건 경계해야 한다고 타이르고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절대로 알려주지 못하도록 타이른다. 모든 사람들이 예민하고 날카로운 고양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면서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살다보니 우리의 마음은 점점 허기가 지고 채우지지가 않아 외롭고 허전하기만 한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사람의 정이 고픈데 아무리 고래 같은 집에 산다고 해도 아무리 멋있는 별장에 산다고 해도 혼자라는 외로움, 정이 말라버린 우리의 마음은 쉽게 달래지지가 않는다.   그렇다. 아마도 내가 원했던 것도 더 별장 같은 집이 아니었던지도 모른다.  나와 나의 남편이 원하는 건 작더라도 내 사랑하는 가족이 살을 비비며 온기를 느낄 수 있고 또 앞 집 옆 집 사람 냄새가 나는 이웃이 있는 그런 동네가 아닐까?
4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댓글:  조회:249  추천:0  2018-04-08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권연이   어떤 지인 분이 딸 아이의 사진을 모멘트에 가득 올렸다. 숙녀의 티를 내면서 딸아이는 참 잘도 컸다. 그리고 딸아이의 사진 위에 지인분은 이런 글을 올렸다.    “사랑하는 내 딸아, 조금만 천천히 커다오.”    짧은 글이지만 공감 백배 가는 그 말에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시큰하였다.    축복을 받으며 엄마라는 나를 찾아와 열달을 내 뱃속에서 같이학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낳은 내 아이, 응아응아 힘찬 울음소리로 마취의 심연 속에서 개워 주었던 내 아이, 내 품에 안기여 작은 입술로 젖을 처음 빨던 그 순간, 진정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를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슈퍼맘으로 만들어 준 딸아이, 세상에서 비교도 안되는 크고 소중한 선물을 안겨주지 않았던가! 매일 밤 품에 안고 자장가 불러주고 누구도 알아 듣지 못하는 옹알이를 시작하면서 엄마는 행복한 수다쟁이가 되어버렸고 아장아장 걸음마 뗄 때는 넘어져서 다칠까 가슴만 조이는 겁쟁이가 되어버렸지요. 병아리처럼 내 품에 품고 있던 딸아이를 유치원으로 보내던 첫날, 울먹울먹하는 너를 두고 돌아서 나오는 엄마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꼬 내 심장 한 쪽을 떼어버리고 나오는 것처럼 아렸지만 처음으로 하늘을 향해 나는 네가 약해질까봐 고사리 같은 손을 뿌리고 돌아서는 매정한 엄마가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는 진짜로 어린 아이처럼 흐느끼며 집으로 향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엄마에게 행복한 일상만 선물하던 너가 요즘은 낯선 느김이 들 때가 많아 졌다. 내 품에 안겨 애교만 부리던 딸아이는 내가 기대고 다닐 수 있을만큼 내 키를 훠씬 넘었고 같이 속살일 이야기거리도 점점 적어지면서 둘 사이를 막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생기는 것 같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하루가 멀다시피 둘의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예민한 지 엄마인 내가 말을 한마디 하려고 해도 먼저 딸아이의 눈치부터 살피게 된다. 말은 하고 싶은데 두 마디 못 건내고는 둘이 화가 나서 삐지는 게 십상이다. 애는 애대로 화나고 나는 또 나름 내대로 속이 상하다. 더 이상 엄마 붙들고 책 읽어달라 아이스크림 사달라 떼질도 안 쓰고 어디 산책이나 놀러 가자고 하면 엄마 혼자 가라는 말에 슬쩍 상처도 받기도 하며 엄마랑 데이트는 뒷전이지만 친구한테서 연락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은근히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학 후 집에 돌아 와 숙제하는 거 같이 있어구젰다고 하지만 항상 얼굴 붉히며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혼내는 것으로 결말을 본다.     이렇게 내가 딸아이와 얼굴을 붉힐 때면 외할머니가 항상 하시는 말이 있다.    “애 뭐라 하지 말아. 너랑 어렸을 때 똑 같은데 뭐!”    그럴 때면 언제나 “내가 언제 이랬어?”라고 반발하고 나선다. 그렇지만 커가는 딸아이의 모습이 나랑 분명 닮았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도 커가는 딸아이를 보면서 어릴 적 나랑 닮은 꼴이 많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거든. 세상 만사 나랑 관계없듯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하든 나는 내 할 일만 한다든가 엄마 잔소리에 순간 화가 나서 발을 쾅쾅 구른다든가 정리정돈 제대로 안된다든가 그리고 또 씻기 싫어하는 것 까지 정말로 닮은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닌 것 같았다.    세월이 훨 지나 그 때 숙제 좀 참답게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도, 방 좀 치우라고 몇 번을 얘기한 것도, 무엇이나 엄마가 다 널 위해서 하는거다라는 말도 어떤 심정이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내 심정이 바로 엄마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엄마도 그 땐 지금의 나처럼 이렇게 딸아이와 같이 성장통을 같이 하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하루하루 기운이 빠지는 엄마를 보니 더 측은해 보이기만 하였다. 내가 좀 더 잘했을걸… 그 미안한 마음이 시시때때로 튀어나와 평소 하지도 않던 수다도 떨어주고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란다에 화분대도 만들어주고 꽃씨며 상추씨며 부지런히 사드리기도 했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기억도 안 나는 사람과 하루를 동행할 수 있는 것도 삼천겁의 인연이 필요한다는데 부모와 자식 사이는 오죽할까? 불교에서 하는 말이 이 생에 부모와 자식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일만겁의 인연이 쌓여야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맺은 부모와 자식의 인연, 부모가 자식을 키우고 그 자식이 언젠가 부모가 되면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는데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하고 또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가 되고 보니 내 자식만큼 소중한 것이 없으나 하루하루 힘빠지고 늙어 가는 부모님의 곁을 지켜 주는 것 또한 자식이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래 전 나랑 성장을 같이 하고 그 아픔을 같이 겪었던 것처럼….
3    죽음을 준비하다 댓글:  조회:284  추천:0  2018-04-08
  "죽음"이란 단어는 항상 무겁기만 한 것 같다. 그도 그럴듯이 "죽음"이라고 하면 눈물, 이별, 슬픔, 고통, 외로움 등과 같은 차갑고 어둡고 또한 아픈 단어들만 생각이 나니깐.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은 출생처럼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가 아닌가?  사람들은 새롭게 찾아 오는 출생에 대해서는 많은 준비를 하는 것 같다.  태어나서 입을 것, 지낼 곳, 먹을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날을 위해 출생이벤트까지 다 준비를 하는 편이다. 이렇게 출생을 위해 차곡차곡 준비를 하는 반면 죽음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죽음은 항상 갑작스럽기만 해서 우리가 제대로 된 준비를 못하는 거 였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우리는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고 싶지 않았었던걸까?   나는 어렸을 때 자주 잔병으로 앓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에 마음을 졸이군 하였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신 건지 엄마는 "니들 두고 엄마 안 죽어!"라고 하셨다. 그 말을 태산같이 믿었고 나는 “엄마 아버지는 원래 죽지 않는 거구나”라고 생각을 하였다. 죽음은 나와 상관 없는 일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열 여덟 되던 해 아버지가 뇌출혈로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처음으로 죽음이란 이렇게 가까이에서 내 주위를 맴 돌면서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이른 새벽에 일어난 일이라 급하게 병원에 도착했지만 의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뒷일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며 엄마는 의사의 옷자락을 붙들고 한번만 한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하였다. 그런 엄마를 의사는 자신들도 어쩌할 방법이 없다며 사정 없이 삶에 대한 희망을 문질러 버렸다. 난 아버지가 그저 주무시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눈 감고 있는 아버지를 부르기만해도 벌떡 일어날것 같은데 ... 엄마는 "여보! 여보!" 불러 보기도 하고 밀어보기도 하고 이럴 수 없다며 가슴을 마구 내리치기도 했으나 아버지는 끔쩍도 하시지 않았다. "아버지!"하고 불러 보지도 못한 아쉬움만 가슴에 안고 어른들한테 안기어 밖으로 나갔다. 한없이 울면서 매달리는  엄마를 두고 나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소식을 전하러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전화기를 들고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아버지가 많이 아파요! 병원이에요!" 이렇게 두 마디만 반복하였다. 차마 “죽고 있다”, “죽었다”라는 말은 입밖에 꺼내지 못하였다. 그렇게 전화를 돌리고 다시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어른들은 누구도 나에게 어디로 갔는지 말을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삼촌에게 아버지는 아직 젊었으니 상복을 양복으로 준비하라고 지시를 하고 또 누구에게는 친척 친구들에게 부고를 돌리라고 하는 걸 지켜 보던 나는 아버지가 끝내는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지금 쯤 어디에 있겠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적 학교 다니던 길 옆에 병원 태평실이라며 큰 애들이 알려준 적이 있다. 대문을 사이 두고 멀리 그 쪽으로 쳐다 보면 때론 하얀 천을 덮어 놓은 뭔가가 간혹 보이긴 했다. 큰 애들은 그것을 시체라고 하였다. 아마 아버지는 이미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어딘가에 두고 우리 식구는 친척들에게 부추김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몇 번이나 기절하였다가 겨우 정신이 들었고 기별 받고 집에 찾아 오는 손님들은 들어 올 때마다 이게 웬 청천벽력이냐고 엄마를 붙들고 울었다. 그러면 엄마는 또 한 번 기절하고 ... 그렇게 수 많은 손님들이 찾아 왔고 사람들은 아버지이야기를 나누며 어쩌면 저렇게 젊은 나이에 돌아 갈 수 있냐며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면서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니 외가니 친가니 네가 잘 했니 내가 잘 했니하며 기싸움을 하다가 말다툼으로 번져 지기도 하였다. 엄마는 기진맥진하셨는지 더는 눈도 뜨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나는 마치 영화 한 편 보는 것 같았다.  문상을 온 사람들은 모두 영사막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고 나 홀로 영화를 보고 있는 딴 세상 사람같이 느껴졌다. 그저 그 어두운 태평실에 누워있을 아버지가 혹시 깨어 나시면 놀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고 그러다 아 돌아 가셨는데...  혼자 어딘가에 두고 왔다는 잔혹한 현실에 아버지가 불쌍하여  또 응응 울기만 하였다. 나는 문상을 와서 싸우는 사람들도, 와서 반찬타령하는 사람들도 어쩜 저럴 수 있는지 이해도 가지 않았고 제발 이젠 더 이상 찾아 오는 사람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또 했다. 한 마디로  그저 이런 최악의 고통이 하루 빨리 끝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아버지는 삼일제를 치르시고 아들이 어른들과 가서 화장을 하고 뼈가루는 큰 강에 가서 뿌려 흘러보냈다. 나는 맏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바래 주지도 못하였다. 초상을 치르던 그 삼일은 고통의 삼일이었고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던 나날이었으며 죽음이 남겨주는 두려움에 시달렸던 후유증은 먼 훗날까지 아주 오래오래 나를 괴롭히였다.     하지만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날부터 우리의 목적지는 무덤이 아니었던가. 출생으로 삶을 시작하고 죽음으로 마감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쯤은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장례식에 대하여서도 . 먼저60살이 되면 그 해부터 영정 사진을 일년에 한 번씩 찍어 두어야 겠다. 제일 행복하고 밝은 얼굴로 나를 바래 주러온 손님들을 맞이해야 하니까. 장례식장에는 내가 생전 즐겨 듣던 노래를 틀어주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 떠나는 길에 좋아했던 노래를 들려 주면 내 이승에 대한 미련을 조그미나마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더 중요한건 마지막 가는 길에 노래가 없으면 좀 슬퍼질 것 같으니까.  그리고 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은 하얀 국화가 아니어도 좋다. 알록달록 백화 속에 묻어 떠나는 내 한 몸이 이 세상에서 묻어 온 꽃향기를 풍기며 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문상을 온 손님들은 나보다 내가 두고 가는 가족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부탁을 하고 싶다. 이 세상 떠나며 미련이 있다면 바로 나의 가족과 나의 친척, 친구들이다. 그들이 내가 떠나므로 하여 더 깊은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내가 먼저 태어난 것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을 간 것일 뿐 그 빈자리를 서로가 위로하며 채워주었으면 한다. 나는 나의 빈소를 찾은 모든 손님들이 모여 생전 나와 있었던 재미있는 일만 이야기하면서 좋은 추억으로 나를 보내주었으면 한다. 나도 이 세상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들만 가슴에 안고 갈거니까. 마지막으로 나의 뼈가루는 어느 조용한 숲 속 나무 밑에 뿌려 주었으면 한다. 내 몸은 죽어 재가 되었지만 내 영혼은 그 나무에 기대어 자연과 하나가 되고 또 언제인가 누군가가 내가 그리워 지면 찾아 올 곳이 있지 않을까?   나는 나에게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매일 말해 줄 것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최고로 산 것은 아니지만 평범한 인간으로서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내 것 아닌 것에 욕심 내지 않고 만족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해 살지 않았던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또한 저 세상에서도 새로운 출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2    ‘줘마’ 그리고 빨간 댕기 천막 댓글:  조회:264  추천:0  2018-04-08
7월 중순, 청도 작가협회에서 “서녕, 서안 문화탐방”을 조직하였다. 이 번 탐방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은 또한 이 한 여름의 무더위마저 삼켜버릴 것만 같이 부풀어 걷잡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번 탐방을 이렇게 기대하게 된 건 나만의 이유가 있었다. 작년 년말, 이홍철작가와 팬미팅을 가진적이 있다. 그 때 우리는 단편소설 “줘마”를 주제로 독서토론을 진행하였는데  “줘마”는 청해성 서녕지역에 있는 장족목장의 혼인풍속을 소재로 다룬 단편 소설이었으며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줘마였다. 줘마는 무리대초원에 있는 꽤 부자 목장주의 딸이다. 줘마가 열여덟살 되는 어느날, 줘마 아버지는 천막 옆에 작은 천막 하나를 더 세워주고 그 위에 이쁜 빨간 댕기를 걸어놓고 줘마를 ‘분가’시켰다. 약초채집군과의 첫날 밤은 잠간 동안의 행복한 환상에 빠지게 하였고 은단검을 찬 사내와의 두 번째 밤은 줘마에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수치감을 주었다. 이런 숙명에 머리 숙이고 살아야 하지만 머리가 검은 양 한마리가 우리 문을 열기도전에 우리를 뛰여넘어 저 멀리로 뛰여 자유를 만끽하는 것을 보고 줘마는 이런 무형의 올가미에 걸려 반항조차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났고 채바퀴 돌듯 같은 일정으로 하루해를 지우는 지겨운 목민생활이 신물나게 싫었으며 아직도 얼마나 더 많은 남자가 거쳐갈지 모를 정거장 같은 작은 천막이 두려웠다. 그러다 끝내 작은 천막을 불태우고 가출을 한다. 하지만 줘마가 눈을 떴을 때는 깡차진 병원에 있었다. 나는 줘마가 결국은 숙명을 받아 들였는지 아니면 다시 용감하게 넓은 초원을 탈출해 항상 그리워하던 도시로 진출해 약초채집군을 찾았는지 그리고 자기가 원하던 삶을 살았는지 그   후속편이 궁금했고 줘마와 같은 운명을 지닌 장족 여자아이들이 무척이나 궁금하였다. 나는 줘마의 후속편을 마음으로 여러 번 그려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여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문명에 눈을 떴고 숙명을 믿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찾고 만들어갔다. 같은 시간의 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줘마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여자들이 과연 있을까? 아직도 빨간 댕기를 묶어 놓은 작은 천막이 있을까? 아직도 약초채집군처럼 그 천막의 의미를 알고도 단지 하룻밤을 달래기 위해 서슴없이 들어가는 무책임한 ‘수컷’들이 있을까? 나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의문들을 품고 나는 이번 서녕행에 나름 큰 의미를 두었다. 서녕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줘마’의 작자 이홍철 선생님의댁에서 지방 특색이 진한 양고기와 해발 3000여미터 청정지역에서 자란 연어회를 맛보며 서녕여행 일정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간단한 휴식을 취하였다. 이튿날, 우리의 서녕탐방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탐방은 타얼쓰로부터 청해호, 그리고 차카염전이었다. 여행이 시작되면서 해발은 2천여미터에서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고산반응도 있을 만하지만 이홍철 선생님께서 미리 해주신 조언 덕분에 다들 큰 사고 없이 그나마 잘 적응하였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우리 탐방 일행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여러 목적지의 아름다움이 기대되기도 하지만 나는 솔직히 가는 길에서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지가 더 설레고 궁금하였다. 서녕을 떠나 서쪽으로 한참 달렸더니 기복을 이루는 높은 산들이 눈에 띄이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길은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고산지역이었다. 달리는 버스 차창밖으로 보이는 꾸불꿀불한 길의 끝은 하늘과 닿아 마치 하늘로 통하는 하늘길 같았다. 해발 3000미터가 넘는 이 곳에 초록의 잔디이불을 덮고 있는 고산 언덕에는 구름송이 같은 양때들, 시커먼 야크들이 여유를 부리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이런 풍경은 우리가 살던 도시에서의 긴장감과 다급함을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파란 하늘, 초록의 언덕, 하얀 양떼, 까만 야크, 너무 간단하고 분명한 색갈들이 또 다른 한 세상을 만들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이마허에서 차카호 염전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다시 ‘줘마’에 대한 토론을 벌리였다. 그러다 문득 ‘줘마’다!라는 소리에 다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달리는 도로 옆 언덕에 큰 천막과 아주 정교한 작은 천막이 눈에 띄였던 것이다. ‘줘마’는 이미 우리에게 장족 여자아이를 일컫는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우리 일행은 차를 잠간 세우고 ‘줘마’의 집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천막을 찾아 어른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천막의 주인은 우리에게 쑤유차와 야크젖으로 만든 요쿠르트 그리고 짬바까지 내주셨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우리는 이 작은 천막의 주인여자는 이미 두 살짜리 아이가 하나 있었으며 지금도 평생을 같이 할 운명의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어린 여자가 아버지도 없는 아이를 데리고 이 넓은 초원에서 언제 나타날지도 모를 남정네를 무작정 기다리지 말고 혹 대도시로 나가 도시생활을 해 볼 생각은 없냐고 물었더니 어린 여자아이는 숙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은 초원이 그냥 좋다고 한다. 이 ‘줘마’는 이홍철작가의 ‘줘마’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모든 ‘줘마’가 다 초원을 탈출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을 한 나에게는 다소 충격이었다. 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목적지로 달리는 내내 차창밖으로 띄염띄염 보이는 ‘줘마’의 천막에 시선을 빼았기였다. 큰 천막 옆 몇미터를 사이 두고 세워진 천막, 그 작은 천막 속에서는 아직 수많은 ‘줘마’들이 전통에 이은 삶을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렇다면 ‘줘마’들은 과연 행복할까? 저 작은 천막 속에서 전통대로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를 남편을 마냥 기다리며 숙명대로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할까? 아니면 이홍철작가 필하의 ‘줘마’처럼 숙명에 반항을 하고 자기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일까? 인류 문명은 예나 지금이나 채바퀴처럼 앞으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인류 문명 또한 인류가 머문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도시 문화가 점점 이 곳으로 침투해오면서 이 곳 사람들 역시 새로운 문화에 눈을 뜨며  전통과 새로운 것이 서로 부딪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이 새롭게 재구성될 것이며 행복에 대한 이해도 서로 달라지게 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큰 용기를 가지고 초원 탈출 시도를 한 ‘줘마’에게 큰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비록 첫 탈출은 실패로 끝을 맺었지만 이미 ‘줘마’는 자아에 눈을 떴으며 자신이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만족과 행복은 정비례 관계라고 생각한다. 현실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면 행복지수도 올라 갈 것이고 반대로 현실에 대한 불만이 클 수록 행복지수 역시 떨어질 것이다. ‘줘마’는 자신의 행복을 남한테 기대하였던데로부터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대로 용감하게 실제행동으로 옮겼으니 앞으로도 숙명이라고 생각했던 그 운명과 싸우는 투지는 점점 왕성해질 것이며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반면 여행길에서 만난 ‘줘마’처럼 현실에 적응을 하고 전통을 이어가면서 그 삶의 자체를 행복으로 생각하는 ‘줘마’도 있었다. 탈출을 시도한 ‘줘마’가 전부가 아니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줘마’를 만든 장족의 혼속에 대해 뒤떨어지고 무지하다는 생각을 하고 ‘줘마’가 불쌍하다고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건방진 생각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줘마’천막에 대한 토론은 여행길의 지루함을 달래주었으며 탐방일행 모두가 이런 이색적인 문화에 대해 더 넓은 마음으로 포옹할 수 있게 하였다. 과연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은 내가 스스로 느끼는 느낌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느낌일까? 내 눈에 불쌍하게만 보였던 ‘줘마’가 과연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했을까? 여행길에서 만난 ‘줘마’를 보면서 나는 다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행복은 오로지 나만이 느낄 수 있고 나만이 감히 말할 수 있는 느낌이다. 행복은 제3의 누군가가 판단할 자격이 없으며 행복은 오직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 
1    여자였던 나를 찾아서... 댓글:  조회:515  추천:0  2017-10-11
나는 여태 그저 이름만 여자였댔나 보다. 항상 편한 것만 찾았다. 편한 운동화, 편한 티, 편한 추리닝, 편한 가방까지. 이런! 운동화, 옷, 가방까지 편한 삼종세트가 내 전부였다. 아, 아니지!편한게 또 있었네. 편해진 얼굴에 편해진 몸매, 그리고 편해진 마음가짐까지 이건 뭐 편한 육종세트였네요. 결혼 전까지만 해도 아니, 큰 애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렇지 않았다. 브이라인 얼굴은 아니지만 뽀얀 피부에 애기 같이 통통한 얼굴은 귀여움으로 통했고 섹시한 몸매는 아니지만 그래도 봐줄만한 정도의 여자였다. 그런 날 좋다고 하는 남자를 만나서 두 애의 엄마가 된 오늘, 문득 돌아보니 행복한 일상이었지만 여자가 아닌 아내로 엄마로만 살았던거 같았다. 향긋한 향수, 스킨, 에센스, 로션, 영양크림에 여러 색깔의 립스틱으로 가득했던 나의 화장대는 달랑 스킨 로션이 전부였고 스커트, 원피스, 블라우스 대신 늘어진 티와 반바지와 츄리닝이 내 옷장을 꽉 차지하고 있었다. 어디 이것 뿐인가. 신발장에는 운동화가 한 가득. 한 쪽 구석에 아주 유행에 뒤처진 그나마 여자의 상징인 힐이 마지막 남은 자기의 자리를 필사 지키듯 외롭게 구차하게 애처롭게 버티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이런 나에게 짜개바지 친구가 던진 한 마디가 생각이 났다. “아줌마, 아줌마가 맞지만 아직 젋었는데 자기 관리 좀 들어가야 하지 않나?”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그 친구는 오늘의 내 모습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매일 예쁘게 화장한 얼굴을 이 각도 저 각도 맞추어 셐라 찍어 올리고 높은 힐에 에스라인 만들어 자신있게 매장에서 쇼핑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하진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나와 너무 아득하게 먼 거 같아서 감히 생각조차 못했다. 멍하니 거울에 비친 초라한 모습을 보다가도 작은 애 우는 소리에 달려가 애달래랴 하학하고 들어 오는 큰 애 간식 챙기랴 밤 늦게 회사일 보고 들어 오는 남편 저녁 챙기랴 거울 속에 비친 초라한 모습과 그 때 우울한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듯 깨끗이 잊어진다. 하지만 친구의 진심 묻은 그 한 마디가 여자로서의 내 자존심을 건드린 게 분병하였다. 밥 하는 아내와 애 돌보는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의 내 자존심을 건드린게 분명하였다. 밥 하는 아내와 애 돌보는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의 나를 찾아봐야 하지 않겠? 더 늦기 전에 말이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한번도 해 보지 않았던 다이어트를 시작하였다.  짜증이 날 정도로 배가 고프고 먹고 싶었지만 친구의 자기 관리 좀 하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꾸욱 참아왔다. 한 가지를 포기하면 다른 한 가지가 찾아온다고 싫어하던 운동을 견지하고 배고픔을 견뎌냈더니 군턱이 사라지고 허리 라인이 찾아왔다. 이제는 셀카를 찍어도 군턱 걱정이 없어졌고 살짝 내가 좋아했지만 욕심내지 못했던 옷도 넘 볼 수 있게 되였다. 점점 자신감이 생겨났고 우울했던 내 기분도 차차 개나리 진달래가 피는 봄날처럼 화사해지는 것만 같았다. 1키로에서 2키로로 또 3키로로 떨어지면서 몸은 가벼워졌고 마음은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듯 했다. 나도 예뻐지고 싶었다. 그냥 여자가 아니라 예쁜 여자가 되고 싶었다. 매장에 가서 오래 전에 찍어 두었던 옷을 사서 몸에 걸치고 아주 오래간만에 얼굴 맛사지도 받았다. 룰루랄라 발걸음을 끊었던 미장원에 가서 헤어스타일도 바꾸어 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지만 나도 이렇게 예뻐질수 기 있구나 하는 생각에 설레고 가슴이 다시 뛰는 것을 느꼈다. 나도 여자였다. 아내이기 전에 엄마이기 아주 전에부터…예쁜 것을 좋아하는 그런 여자였다. 오늘도 거울을 들여다본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단 십분일지라도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런 의미에서 그 시간만큼은 여자의 자존심을 지키고 여자의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예쁘게 써보자고… 잃어버렸던 여자였던 나를 다시 찾자고…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