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http://www.zoglo.net/blog/sy10088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377 ]

107    네이트 사전 댓글:  조회:2278  추천:0  2012-07-31
    전체  항목  설명  멀티미디어     전체  단어  숙어  예문  설명       전체  단어  숙어  예문  설명     전체  단어  속담/관용구  설명       전체  음/한자  뜻풀이  단어       전체  단어  속담/관용구  설명       전체  단어  예문  뜻풀이    
106    (문화사료) 오늘의 과학상식 댓글:  조회:2356  추천:0  2012-07-31
문화사료 오늘의 과학상식 은하 충돌 우주의 대사건2009.06.06 휘어진 시공간 상대론을 이해하자2009.06.05 입덧, 왜 생기나 기생충과 숙주2009.06.04 효도하는 화학 과학의 늦둥이2009.06.03 공룡의 속도 수학의 흥미2009.06.02 엔도르핀 뇌 속의 마약2009.06.01 유기적인 생명 메디컬 일러스트2009.05.30 원자로 된 나 만물은 원자2009.05.29 사람 눈의 맹점 완벽한 진화란 없다2009.05.28 남쪽서 온 한반도 1억4천만 년간 호주 . .2009.05.27 √2를 계산해보자 수학으로 생각하기2009.05.26 마판증후군 거미손가락증2009.05.25 별 구름 우주의 낭만2009.05.23 자연과학, 학문
105    <桓檀古記>나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댓글:  조회:2750  추천:1  2012-07-30
나 의 사료적 가치; 필자(筆者)는 어떤 고기(古記)가 있을 경우 그 고기의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 책 전체를 일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 고기에 적혀 있는 개개 문구별로 사료로서의가치를 평가한다. 그럴 경우 개개 문구가 정사(正史) 문구와 충돌(衝突)하지 않거나 또는 일부 정사(正史) 문구와 충돌(衝突)하더라도 다른 정사(正史) 문구와는 부합하는 경우 다른 여러 사료를 분석하여 그 고기 문구가 신빙성(信憑性)이 있다고 판단될 때만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런데 필자(筆者)는 고기(古記) 문구를 인용(引用)할 경우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인용하면서도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인용하지 않는다. 이는 필자가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사료적(史料的) 가치를 아주 낮게 보기 때문이다. 강단사학자(講壇史學者)들은 환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모두 19세기 말이나 20세기에 들어와 위작(僞作)한 것이므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나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위작(僞作)이 아니므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들도 규원사화(揆園史話)나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제한없이 인정하는 견해와, 정사(正史) 문구와 충돌(衝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견해로 나누어 진다. 혹자는 필자에게 환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모두 위서(僞書)일 가능성이 많은데,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제한적이지만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래에 필자가 왜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지 그l 이유를 설명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5년(조선 숙종 2년)에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쓴 책으로 서문(序文),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 단군기(檀君記), 만설(漫說) 순서로 적혀 있다. 서문(序文)에는 저자(著者)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참고하여 지었다고 적혀 있고, 조판기(肇判記)에는 환인(桓因)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이 천지(天地)를 개창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 일명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神政)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으며, 태시기(太始記)에는 환검(桓儉) 이전 환웅(桓雄)의 역사가 적혀 있고, 단군기檀君記)에는 환검(桓儉)부터 고열가(古列加)까지 47명 단군과 그 재위기간 및 1,195년간의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으며, 만설(漫說)에는 유학자(儒學者)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민족의 주체의식(主體意識)을 고취하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강단사학자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는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든 위서(僞書)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 근거는 19세기 이전에는 규원사화(揆園史話) 원본(原本)이나 필사본(筆寫本)이 존재하지 않았고,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한 점, 규원사화(揆園史話)나 그 저본인 진역유기(震域遺記)는 20세기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진서(眞書)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일부 내용이 처음 인용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를 통해서이지만,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인용된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大東史綱)에서 인용되었고, 1940년에는 양주동(梁柱東)이 필사본(筆寫本)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뒤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북애자의 원본 또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筆寫本)을 구입하여 1972년에 귀중본(貴重本)으로 등록하였고,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심의의원인 이가원(李家源),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 3인이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으므로 진서(眞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현존하는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설사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었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단군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대비해 보면, 같은 점은 47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단군조선(檀君朝鮮)이 B.C 2333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각 단군에 대한 일부 역사적 사실이고, 다른 점은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 B.C 1139년에 끝났다고 적혀 있는 반면에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B.C 238년에 끝났다고 적혀 있다. 즉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전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과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사서(史書)에 모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1세 왕검(王儉) 단군에 관한 내용, 4세 오사구(烏斯丘) 단군이 순시하다가 영초를 얻었다는 내용, 8세 우서한(于西翰) 단군이 수확물에 대한 세금 비율을 정하였다는 내용(세율이 규원사화에는 90분의 1, 단군세기에는 20분의 1), 10세 노을(魯乙) 단군 때 짐승을 우리에 넣어 길렀다는 내용, 15세 대음(代音) 단군이 수확물의 80분의 1로 세율을 바꾸었다는 내용, 23세 아홀(阿忽) 단군이 동생 고불가(固弗加)에게 낙랑골(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웅갈손(熊乫孫)으로 하여금 은(殷)나라를 남정(南征)하는 군사를 살펴보게 하였다는 내용, 30세 나휴(柰休) 단군이 청구를 둘러 보고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諸侯國)의 한(汗)을 만났다는 내용, 47세 고열가(高列加) 단군 때 단군조선이 멸망했다는 내용 등등이다. 그렇다면 2 사서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왜 47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일부 같은 것이 적혀 있을까? 이는 단군세기(檀君世紀)나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짓기 이전에 존재한 저본사료(底本史料)에 48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그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 사서(史書) 모두 이 저본자료를 이용하여 사서(史書)를 만들면서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48명 단군의 역사를 B.C 2333년부터 B.C 238년 사이에 적어 넣고, 규원사화(揆園史話)는 48명 단군의 역사를 B.C 2333년부터 B.C 1139년 사이에 적어 넣었다. 그러면서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로는 너무 빈약하니까 단군세기는 단기고사(檀奇古史)를 참조하여 각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였고, 규원사화는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참조하여 각 단군(檀君)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두 사서 모두 중국의 사서 문구를 연도에 맞추어 인용해 놓았다. 그 결과 단군세기(檀君世紀)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각 단군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단기고사(檀奇古史)나 진역유기(震域遺記)에 적혀 있는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내용이 많이 전사(傳寫)되어 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어느 정도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내용이 어느 정도 들어 있을까?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대비하면 계연수나 이유립은 북애노인이 지었다는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필사하면서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 전사(傳寫)된 문구 중 역사적 문화발달 정도에 맞지 않은 내용은 많이 걸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아직도 문화발달 정도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런데 과장(誇張)된 내용은 그 시대 문화발달 정도에 비추어 가려낼 수 있지만, 가필(加筆)된 내용은 어느 것인지 가려낼 수 없다. 따라서 단군세기(檀君世紀) 문구는 다른 사서 문구와 비교 검토하여 개개 문구의 신빙성(信憑性)을 판단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규원사화(揆園史話) 문구는 어느 정도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내용이 어느 정도 들어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규원사화는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정도가 아닌 통채로 사서가 왜곡된 것으로 보인다.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보면,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에는 전승(傳承)된 설화(說話)와 중국의 사서(史書)를 인용(引用)한 내용이 들어 있다. 전승된 설화가 주(主)이기 때문에 신빙성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는 신빙성(信憑性)에 있어 심히 문제가 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과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 존재하였다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실존(實存)한 나라인지 여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전에 멸망(滅亡)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그 성격으로 나누면 전기(前期), 중기(中期), 후기(後期)로 나누어지고, 전기단군조선(前期檀君朝鮮)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적혀 있는 어국(御國) 1,500년(실제는 1,048년인데 약 1,050년을 1,500년으로 잘못 오기하였다.)이다. 그리고 중기단군조선(中期檀君朝鮮)은 수명(壽命) 1,908년에서 어국(御國) 1,048년을 뺀 860년이다. 후기단군조선(後期檀君朝鮮)은 수명(壽命) 1,908년 이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일어날 때까지 대부여(大夫餘) 시대 188년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사서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1,048년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1,048년은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의하면 왕검(王儉) 단군부터 소태(蘇台) 단군까지 전기단군조선(前期檀君朝鮮)의 역년이다. 이 견해는 왕검(王儉)이 세운 전기단군조선을 색불루(索弗婁) 단군이 무력(武力)으로 빼앗았기 때문에 전기단군조선과 중기단군조선(中期檀君朝鮮)을 별개의 나라로 본 것이다. 이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혈통(血統)이 바뀌었으므로 같은 나라로 볼 수 없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고려 때 지어진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에도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존재하였다고 적혀 있고, 북부여기(北夫餘紀)에는 해모수(解慕漱)가 일어났을 때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멸망했다고 적혀 있다. 해모수(解慕漱)가 일어난 해는 B.C 239년이므로,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의하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은 B.C 239년경까지 존속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과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병존(倂存)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적혀 있는 견해와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의하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에도 존재하였다. 그런데도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에는 왜 단군조선이 기자동래 이전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을까? 그 대답은 이렇다. 아직 사대주의 사상이 강하기 전인 고려말(高麗末) 이전에 지은 책들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이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대로 1908년(삼국유사) 또는 2,096년(단군세기)으로 적었다. 그러나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이 강한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 지은 책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 칭하면서 단군조선의 역년을 기자동래 이전으로 임의로 확 줄여 버리고, 조선은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부터 중국왕조의 후국(侯國)이 되어 중국왕조의 교화(敎化)를 받은 나라로 적었다. 규원사화(揆園史話) 저자도 단군기(檀君記)를 지으면서 당시 조선시대 시류(時流)의 영향을 받아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원래의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대로 1,908년 또는 2,096년으로 적지 않고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전에 멸망한 것처럼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확 줄이고, 그 역년 안에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 47명의 단군 이름과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집어 넣어 놓았다. 규원사화에 의할 경우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기자동래(箕子東來) 이전에 멸망하였고, 그 이후 존재한 조선(朝鮮)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아니라 주(周) 나라의 후국(侯國)인 조선(朝鮮)이라는 것이다. http://203.208.37.104/search?q=cache:bFw4H-7dpA0J:home.megapass.co.kr/~hsg8689/zz224.htm+桓檀古記의+가치&hl=zh-CN&ct=clnk&cd=1&gl=cn&st_usg=ALhdy28ayhhaK_zjjUK-xDPLxTpqgOSW5A 桓檀古記에 관하여; 우리 고대사를 알아가다 보면 말도 안됀다 싶을 정도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우리의 민족 역사의 시작은 기원전 9200년 경이고 이때 천부인이 완성되었고 나름대로의 사상체계도 갖추었다 하며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7199년의 환국(한국)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나라는 기원전 3898년의 배달제국이구요.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약 11200여년 경이고 국가의 형태로서 존재 한것은 9000여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부인에는 365일의 개념과 4년주기의 삭과 판현상(노르웨이 최북단에서 일어나는 길게는 육개월간 해가 지지 않는 현상, 남극의 동지 무렵의 기후 이상현상)을 비롯해 역법까지 모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환국에는 12개의 나라가 나누어 져 있었다 하고 오색인종을 아우른 나라 였다 합니다. 한단고기에 수록된 내용 보다도 신빙성 없어보이나 달리 보면 믿어지는 이야기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제가 아는 것이 짧아 제가 자주 가는 홈의 글을 붙이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보시길.; 유목민 마을이라는 홈페이지에서 조금 퍼온 글입니다. 桓檀古記의 가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민족의 시련기가 되면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한 민족사(民族史)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인물위주의 영웅사관(英雄史觀)에 입각하여 서술한다든지, 혹은 국난극복의 종교적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고통극복사관(苦痛克服史觀)에 입각하여 서술하는 예가 보통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사의 경우는 이러한 예와 달랐다. 국난극복이라는 면에서는 궤적을 같이하고 있으나, 잊혀진 사실을 발굴하려는 노력으로 또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노력에 있어서 내용에 다소 과장된 부분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인 줄거리에 대한 검토없이 과장된 부분만을 확대해석하여 내용전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재의 기성사학계에서 일관되게 견지되어 온 이러한 의식은 분명 수정되어져야 한다. 최근에 등장하여 이러한 경향을 지닌 우리의 민족사로, 『한단고기(桓檀古記)』,『규원사화(揆園史話)』,『단기고사(檀奇古史)』,『신단실기(神檀實記)』,『부도지(符都誌)』 등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단고기(桓檀古記)』인데 다른 책들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고 또한 각 시대별로 서술된 여러권의 책들을 합친 것이다. 분명 『한단고기(桓檀古記』(‘환(桓)’을 ‘한’으로 발음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는 새로운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어 충격적이기도 하고 일견 거부감마저 들기도 한다. 여태까지 듣고 보지 못했던, 혹은 신화로만 여겼고 배워왔던 상고시대 고조선(古朝鮮)의 역사와 그 이전시대 한인·한웅의 민족기원까지 구체적인 사실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막연하게 동경하여 왔던 대륙에서의 선조들의 활약상이 너무나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자칫 꾸며낸 이야기처럼 여겨질 우려마저 안고 있다. 현재의 역사연구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한반도에서 만주대륙으로 확대되어 지고 있고 고조선의 실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고조선의 담당자로서의 단군조선 문제나 그 이전 단계인 한인·한웅시대 문제가 역사적 사실로 거론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한인·한웅시대가 신화적 차원으로 머물러 있고서야 진정한 의미의 고조선연구는 본질을 망각한 형체가 되엉 버릴 우려가 있어 심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러한 결과는 워낙 자료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한단고기』와 같은 역사서들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배격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이러한 신화들을 신확 아닌 사실로 기록하고 있어 오히려 더 연구할 가치가 있을 터인데, 위작으로만 몰아부칠뿐 구체적인 고찰을 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 글을 쓰면서 한가지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이른바 재야사학계에서 민족사복원이라 하며 일관되게 주장해 왔던 ‘우리의 역사는 반도가 아닌 대륙을 무대로 했던 역사’라고 하는 논리이다. 이런 주장은 다소 위험한 발상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우리가 현재 우리의 삶의 터전을 부인하고 과거의 영광에만 사로잡혀 있는 듯한 오해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물론 부정적 시각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을 탈피하자는 의미에서 ‘대륙사관(大陸史觀)’을 강조하다 보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러한 잘못 때문에 오히려 기성사학계가 더욱 한반도중심의 역사관을 고수해왔는 지도 모른다. 대륙이 우리의 주무대였다는 논리는 자칫 현재의 한반도지역에 대한 애착감을 상실하게 만들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고대의 한반도 또한 대륙과 연계되어 한반도 자체가 선사시대이후부터 뿌리내려온 역사의 터전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은 경계해야 하고, 선조들의 대륙생활사는 한반도라는 한민족의 현재으 활동무대를 축으로 하여 그 연장선상에서 기원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연구되고 밝혀져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남의 땅이 되어 버린 곳을 되찾겠다고 성그히 주장하기 보다는 우리의 본래모습, 곧 “민족사의 원형”을 재구성한다는 취지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한반도지역 내부에서만의 연구로는 원형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륙과 연계해야만 올바른 정립이 가능하다는데 의의를 두고 한민족 삶의 터전에 대한 변천과 이동의 역사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한단고기를 부정하는 이유로는 크게 용어사용의 부적절 인용서적의 불분명 저술연대와 저자 문제를 들수 있습니다. 다시 유목민 마을 주인장님의 글을 보여 드리자면 『한단고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편찬자가 유명한 학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뚜렷한 업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저술연대와 저자들에 대해 의심을 하고, 용어사용의 부적절함을 내세워 내용전체를 위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해 왔지만 비전문가에 의한 편찬과 정서(正書)에서 잘못된 용어사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 내용의 검증이다. 다행스럽게도 『한단고기』에서 기술한 중국관련 기록들이 실제 중국측 사서들과 서로 일치하거나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만약 중국사서와의 일치된 부분을 놓고 그 전후의 사건들을 모두 꾸며내었다고 주장한다면, 『한단고기』의 작자는 정말로 위대한 소설가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작자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중국의 고대사서를 철저히 분석하고 대단한 상상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야 가능한 방대한 내용을 『한단고기』는 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상고시대의 철학과 사상 등에도 해박한 정도가 아닌 꿰뚫는 혜안이 있어야 가능한 내용도 담겨져 있으므로, 분명히 오랜 기간에 걸친 역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한단고기』이외의 다른 루트를 통해 알려진 책들(『단기고사』,『규원사화』등)과도 내용과 줄거리가 유사하다는 점도 위작이라는 논리하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중국문헌과의 비교검토 중국측에는 정사(正史)로 인정되는 ‘25史’외에도 『죽서기년(竹書紀年)』,『설문(說文)』,『춘추좌전(春秋左傳)』,『자치통감(資治統監)』,『산해경(山海經)』 등의 고서(古書)들이 있고, 『맹자(孟子)』,『논어(論語)』,『시경(詩經)』,『서경(書經)』등의 유가경전에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편적 기록들이 남아 있다. 한민족에 관한 기록은 한나라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이후의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등에 와서야 「동이전(東夷傳)」이나 「조선전(朝鮮傳)」으로 체계화되지만, 그 이전시대에는 중국중심의 역사서술에 단편적으로 삽입되어 있거나 사물의 기원, 이민족의 풍습 등을 소개할 때 간혹 등장하곤 한다. 우선 중국내륙지역과 가장 접촉이 빈번했던 시기로 알려지는 고조선의 실체인 단군조선(檀君朝鮮)시대의 기록을 검토해 보자. 이는 단군조선의 건국(B.C.2333)이후 중국내륙인 중원지역에 왕조라 인정할 夏·殷·周·春秋戰國時代 등이 전개되어 중국의 역사기록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1) 기독교의 구약성서에는 홍수설화가 있는데 밝혀진 바로는 슈메르문명(기원전 3천년경의 메소포타미아지방)의 홍수설화와 유사하며, 지질학적으로도 기원전 2천년전에 지구에 큰 홍수가 있었다고 한다. 홍수에 관해서는 동양의 고대사에도 유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단고기』중의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番韓世家)편에 1세 단군왕검때(丁巳50년, B.C.2284) 큰 홍수가 있었는데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치수사업을 성공시켜 이를 극복하고 그 비법을 중원지역 요순시대(堯舜時代) 순(舜)이 파견한 우(禹)에게 태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 파견하여 치수를 위한 삼보(三寶)를 전해주고 국경을 정해 유영지방(幽營地方:북경일대)과 회대지방(淮垈地方:산동지역과 양자강하류역)의 동이(東夷)제후들을 평정하여 직접 분조(分朝)를 두어 당시의 중원정치를 감독하게 하고 직접 5년마다 순수하시어 순(舜)이 네번이나 조근(朝覲)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때 전해준 삼보로는 ‘王土의 篆(문자의 일종)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 ‘물의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는 신침(神針) 일매’, ‘험하고 중요한 곳의 물을 진압할 수 있는 황거종의 보물’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적은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주었는데,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금간옥첩을 창수사자(蒼水使者)가 夏의 禹에게 준 치수의 비결”로 기록되어 있어 대비된다. 중국고대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가 있었는데 삼황으로는 염제신농, 태호복희, 황제헌원 등이다. 『한단고기』중 『삼성기』나 『태백일사』「신시본기」등에는 삼황의 인물들이 모두 한웅시대의 후손으로 중원지역에 발달된 문화를 전파하고 정착한 것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오제의 인물들도 역시 같은 계보를 지닌 것으로 나와있다. 순임금도 동이계통으로 확인되는데, 『맹자(孟子)』 이루장구(離婁章句) 하편에, - 순은 제풍에서 나고, 부하로 옮겼으며, 명조에서 졸하였는데, 동이의 땅이고, 순은 동이인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名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 라 하였고, 『한단고기』에는 순의 아버지 유소씨(有巢氏)가 단군조선의 신하로 기록되어 있다. 단군조선에서 분조를 두고 산동지방 낭야성에 5년마다 순수하였다는데, 이에 대해 『서경(書經)』虞書 舜傳을 보면, - 2월, 동쪽으로 순수하여 대종에 이르러 시일을 협의하고 협의하고 도량형을 맞추며 오례의 법을 닦고 다섯가지 옥과 세가지 비단, 두가지 산짐승과 한가지 죽은 짐승의 예물을 정리하였고, 다섯가지 제기는 제사가 끝난뒤 되돌려 주었다.(歲二月,東巡守之于岱宗,協時月正日,同律度量衡,修五禮五玉三錦二生一死執如五器卒乃復) - 고 하였다. 중국에서 최초의 왕조로 불리는 하(夏)의 시조 우(禹)가 치수사업에 성공하여 그 공으로 군장위를 이어받았는데, 우의 성공비결은 창수사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중국사람들의 춘추필법(春秋筆法:중화중심의 역사관)은 창수사자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진실을 가리고 있지만, 『한단고기』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대단히 명쾌한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현재의 중국사에서는 산동지방과 양쯔강일대 평야지대에 옛부터 동이족들이 터전을 마련하고 생활해왔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북방에서 이주해 온 종족이며, 황하문명을 꽃피운 은(殷)나라도 이들 동이계통이 세운 고대국가였다. 이러한 결론에는 중국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큰 몫을 담당하였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동이관련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그 원형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를 『한단고기』의 기록들과 비교검토해 보자. 『단군세기』 4세단군 오사구(烏斯丘)조를 보면, - 임인19년(B.C.2119) 하나라 주 상이 덕을 잃어 단군께서 식달에게 명하여 남·진·변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그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어, 동이인들이 모반을 시작하였다. 註에 태강은 익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註,太康...爲익所퇴也) - 라고 되어 있고, 『죽서기년(竹書紀年)』夏王 相元年(B.C.2146)조에는 - 원년에 견이를 정벌하고, 2년에 풍이와 황이를 정벌하고, 7년에 우이가 내빈하였다.(元年,征犬夷,二年,征風夷及黃夷,七年,于夷來賓) - 라고 되어 있다. 夏의 태강과 상은 각각 다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단군세기』는 이에 대해 두사람을 한사람으로 혼동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규원사화』「단군기」에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연대설정이 『한단고기』와 다르지만, 내용상의 흐름은 『한단고기』와 유사하여 상호 참고될만 하다. 『규원사화』「단군기」3세단군 가륵조와 4세단군 오사구조를 보면, - (가륵조)때에 夏王이 失德하여 그 신하중 찬역(왕을 추방)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식달로 하여금 남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를 정벌하니 국위가 더욱 빛났다. (오사구조) 夏王 后相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후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고 서로 통교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건의 개요를 보면 동이가 하왕 태강을 정벌하여 이겼지만 상에게는 진 것으로 되어 있고, 이는 중국의 사서들과 같은 내용이다. 중국의 고대사서에는 동이족을 구이(九夷)로 나누어 불렀다. 견이(犬夷), 풍이(風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양이(暘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현이(玄夷:鳥夷 혹 北夷) 등인데 조이(북이)의 위치가 발해북안지대일 것으로 보는 외에 다른 이족들의 중국내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대개 이들 구이는 산동반도와 회대지방(양쯔강하류역)에 분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3) 하나라와의 관계사를 한가지 더 보자. 『단군세기』 11세단군 도해(道奚)조에 - 丁卯38년(B.C.1854)... 徵民가운데 장정을 뽑아 모두 병사로 삼고 選士 20인을 夏의 도읍으로 보내 처음으로 國訓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 고 하였는데, 중국측 『죽서기년』 夏王 發 원년(B.C.1837)조에 - 發 원년, 諸夷들이 왕에게 인사하고 夷人들이 춤을 추었다.(帝發元年,諸夷賓于王門...諸夷人舞) - 라고 하여 단군조선과 하나라와의 친선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연대도 유사하고 있다. 4) 夏나라는 은나라에게 멸망하였는데 은나라를 구성한 종족은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꽃피웠으며 한자(漢字)의 기원인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사용한 종족으로 북쪽에서 내려온 동이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중원지역에서는 하와 은의 교체기에 동이족이 권력구도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한단고기』상으로는 단군조선의 결단에 의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군세기』 13세단군 흘달(屹達)조에, - 甲午16년(B.C.1767) 겨울, 殷人이 夏나라를 정벌하니 夏의 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末良으로 하여금 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殷의 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命을 내려 군대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夏의 桀王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력으로 길을 차단하며 약속을 깨려하였다. 이에 殷人들과 함께 夏의 桀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于亮을 파견하여 견이(夷)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關中의 분기땅에 점거하여 관제를 설치하였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구환은 구이를 말한다. 이는 환인,환웅의 자손이라는 의미이다. 낙랑은 고대 발해서북지역 지명이고 관중의 분기는 섬서성일대를 지칭한다. 이에 대한 중국측 기록인 전한(前漢)의 유향(劉向:B.C.77~)이 저술한 『설원(說苑)』夏王癸(桀)52년(B.C.1767)條에 보면, - 탕이 걸을 토벌하려 하므로 걸왕이 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켜 탕을 토벌하니 탕이 이에 사죄하였다.(湯欲伐桀,桀怒起九夷之師以伐之,湯乃謝罪) 라고 되어 있고, 계속하여 53년조에 보면, - 탕이 걸왕에게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다시 구이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구이가 군사를 일으켜주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탕이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토벌하여 남쪽변두리로 추방하였다.(湯不貢桀起九夷之師,九夷不起,湯乃興師伐之,遷桀南巢)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의 기사를 보면 구이(九夷)가 세력향방의 변수로 작용할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춘추필법으로도 감추지 못할 사건의 결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죽서기년』夏王 癸(桀)條에서는, - 계(걸)3년(B.C.1816)...견이인이 岐땅에 들어와 모반을 일으켰다. 6년(B.C.1813) 기땅에서 물러나고 사죄하였다.(帝癸三年...(田犬)夷人于岐以叛...六年岐踵戒來賓) - 라 하여 걸왕때 견이가 岐에 들어와 夏에 반하였다는 내용이 일치되고 있다. 『단군세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규원사화』에는 분기땅에서 철수하는 기사가 있는데, 철수이후의 기록이 또한 『단군세기』에 전해지고 있다. 단군조선이 殷을 도와 夏를 멸망시킨 후 근 4백여년 동안 은과 지속적인 친선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규원사화』 단군 흘달(벌음)조에는, - 商王 湯이 어진 정치를 크게 베풀었으므로 단제께서 말씀하시기를 ‘德이 있는 임금으로 가히 서로 침범할 수 없다’하시고 이에 그 군사를 거두시고 후에 화해하였다. - 라고 되어 있고, 『단군세기』 15세단군 벌음(흘달)조에는, - 庚辰元年(B.C.1661) 殷主 小甲(B.C.1672~)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 라고 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商湯元年(B.C.1766)條에, - 앞서 桀의 난리때 빈기사이의 땅에 침입하여 점거하고 있던 견이를 쳐서 물리쳤다.(先是,后桀之亂,(田犬)夷入居빈岐之間,成湯...興伐而攘之) - 라고 되어 있어 서로 비교된다. 5) 은나라와 지속된 4백년간의 친선관계가 단군조선 내부의 정변(政變)을 틈탄 은의 세력확장으로 깨어지고 정변을 수습한 단군조선은 마침내 은나라 내지(內地) 깊숙이 들어가 분국(分國)을 설립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역사에서 수수께끼의 나라로 전해지는 이른바 엄국(奄國)과 서국(徐國)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부분으로 동양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단군세기』 21세단군 소태(蘇台)조를 보면, - 甲辰元年(B.C.1337) 殷왕 武丁(B.C.1339~B.C.1280)이 鬼方을 쳐서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索度,令支 등을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 라고 되어 있고, 『단군세기』 22세단군 색불루(索弗婁)조에는, - 丙申元年(B.C.1285) 11월, 제께서 몸소 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殷의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黃河상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弁韓의 백성들을 淮垈(양쯔강하류유역)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 乙卯20년(B.C.1266) 때에 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孤竹君과 함께 여러 적들을 쫒아내고 南으로 이동하여 奄瀆忽에 머물렀으니 殷의 경계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땅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黎라 칭하고 西戎과 함께 殷의 제후들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단제의 교화는 멀리 恒山(하북서부지방)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 라고 되어 있다. 계속하여 『단군세기』 23세단군 아홀(阿忽)조에, - 甲申元年(B.C.1237) 황숙인 固弗加에게 명하여 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걸손을 보내 藍國君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로 하여금 殷나라 땅에 대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乙酉2년(B.C.1236) 藍國君 今達이 靑邱君,九麗君과 周?에서 회합하고 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殷나라의 城柵을 쳐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淮垈의 땅을 평정하더니 浦古氏를 奄땅에, 寧古氏를 徐땅에, 邦古氏를 淮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 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이상의 기록들은 또한 『규원사화』의 내용과도 동일하다. 전통적으로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지역인 양쯔강하류의 비옥한 평야지대인 회대의 땅에 단군조선 초기의 분조(分朝)보다 더 대규모인 분국(分國)을 설치하였는데 이 분국들이 은나라 후대의 주(周)나라와도 지속적으로 세력을 다투게 된다. 『후한서』「동이열전」 - (商王)仲丁六,征于藍夷 - 『후한서』「동이열전」殷王武乙條 - 東夷寢盜,分遷淮垈,漸居中土,所謂徐夷是也 - 『후한서』「동이열전」周王勵條 - 勵王無道,淮夷入寇,王命괵仲,征之,不克 - 『후한서』의 기록에서처럼 동이의 강성함이 은나라와 주나라와 대등하면 대등하였지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알수 있는데, 이후의 『단군세기』에는 특히 周나라와의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한편,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의 초(楚),제(濟),조(趙) 등의 나라와도 관계를 맺고있는 것으로 나오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특히 연(燕)과의 관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비롯한 주대(周代)이후의 문헌에도 동이구족(東夷九族)을 대표하여 ‘淮夷’,‘徐夷’등이 주나라와 춘추시대 제후국들과 지속적인 투쟁의 관계를 맺고 있음이 보이고 있다. 중국내륙에서의 동이족의 활동을 중국사서와 비교해서 보았는데, 중국측 문헌에는 단군조선에 대한 언급없이 중원의 왕조와 관련되는 사건에 대해서만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순임금때부터 서주(西周)까지 간간이 등장하는 ‘숙신(肅愼)’에 대한 전거가 단군조선의 ‘조선(朝鮮)’에 대한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할 뿐, 중국내 동이족과의 관련면에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숙신’과 ‘조선’을 같은 명칭에 대한 다른 시대적 한자표기로 여기고 있지만, 종족구성에 있어서는 ‘숙신’을 퉁구스계통으로 보는 등 아직 일치하지 않고 있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숙신’은 읍루(邑婁)와 물길(勿吉)로 이어지는 만주지방에 있던 고대의 종족명칭이고 호시((木苦)矢:싸리나무화살),석노(石弩:석궁)가 유명한 곳으로 알려진다. 춘추시대이후의 문헌에는 ‘조선’이란 국명이 정식으로 등장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과거의 한반도위치설에서 요녕지역으로 중심지가 이동되어지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문헌상에서도 조금씩 해석상의 오류를 수정하고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한단고기』의 고조선에 대한 역대단군들의 상세한 치세기록은 이러한 불확실한 역사에 대해 실로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고, 또한 사실들에 대한 기록이 중국과도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그 가치를 재고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헌적 비교검증외에도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한단고기』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입증하고 있으며, 특히 이 책의 천문기록에 대한 과학적 검증은 『한단고기』를 단순한 위작이 아닌 명백한 실제기록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부분적 비판도 필요하겠지만 전반적인 검토가 더 중요한 시점이 된 것을 알아야 한다. 평어;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과연 "주류"라는 자존심 가지고 이런 책에 대해 관심을 안 기울였을까요 ? 그건 터무니없는 낭설입니다. 여러분이 조금만 사회과학에 대해 공부하신다면, 그리고 역사가 어떻게 발전되어왔는지 아신다면 한단고기의 내용은 "전부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정도는 아셔야죠. 한단고기의 내용대로라면 대륙에서 "근대국가에" 걸맞는 대제국을 한민족이 세우고 놀았다는 건데 이게 맞는 소리일까요 ? 우선 '민족'이란 것을 따져봅시다. 민족이란 개념은 이십세기 '식민통치'란 압제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한민족이라는 '자각'도 일제 식민통치나, 그 이전의 몽골제국 통치에서 비롯한 것이란 말입니다. 조선시대에 언제서부터 우리가 민족 타령했습니까 ?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화두는 "중화"였습니다. 성리학적 세계관은 민중들까지 지배하였단 말입니다. 그리고 고대 시대에 무슨 민족타령입니까 ? 종족이라면 몰라도 민족이란 말은 우스꽝스럽습니다. 게다가 한단고기의 내용을 읽으면 가장 중요시되는 "하부구조"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누가 누굴 지배했느니 쳤다느니하는 기독교식 서술이 나왔지, 생산구조가 어떠하였고 세금은 어떻게 걷었으며 농사는 무얼로 지었고 하는 식의 "현실적인 얘기"는 거의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적어도 근대적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있어야 제국이고 말고 언급이나 하지, 그 당시처럼 정착농경도 발전하지 않았을 무렵에 무슨 제국 타령입니까 ? 몽골제국 같은 경우도 전세계적으로 각 국가의 생산력이 일정 수준 이상 발전한 것을 착취하고 빼앗고 소유함으로써 유지하였습니다. 이런 얘기로만 보자면 한단고기는 그 서술방향부터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부분적인 진실은 있을 터, 어디까지 참고용으로 그리고 그 진위성 증명 과정을 통해서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사대주의적 역사관이 드러나고 일부 왜곡이 있되, 중국 중심의 서술 부분에 있어선 기막힌 진실성을 보여주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비하면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럽군요. 기분이 좋으면 다 역사책입니까 ?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일본서기를 마땅히 인정해야하며, 아직도 논란이 일고 있는 임나일본부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야하며, 그리스 신화조차 예날엔 정말 신이 있구나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야죠. 혹은 이런 반론도 있을 것입니다. 김부식과 기타 무리들이 옛날 고사서를 불태우지 않았냐고. 맞는 얘기입니다. 소위 춘추필법이라는 "날조된 서술방식"이 있었고, 김부식은 자신이 참조하였던 많은 역사서를 보존조차 안 한걸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김부식이 스스로 취재 및 현장조사를 하여 역사서를 적어나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참고서적들이 분명히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가 주목받은 것은 그 내용보다도 "그나마 객관적으로 사실(史實)을 서술하고 차례차례 기술해나가는 역사서술의 방식을 확정지은 데"에 있는 것입니다. 고대의 역사서술방식이 과연 정확하였을 까요 ? 늑대 한마리 잡아서 부족이 나눠먹은 얘기가 수백년이 가다보면 무시무시한 괴물을 물리쳐 영웅이 되었다라고 윤색되기 십상인 것 아닙니까 ? 문제는 한단고기가 딱 이런 수준의 얘기를 따라가고 있단 것입니다. 한단고기의 서술방식은 과학적이지 않으며, 흠을 잡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고등학교 지리부도에서조차 우리 조상들의 강역은 중국 북부에 뻗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대책없이 중국 전체가 한민족의 터전이었느니 하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백제가 중국 동부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말해서 백제의 상인들이 중국 동부에서 그 세력을 구축하였다는 것으로 보지, 군사적으로 먹어치웠다고 보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라면 미국도 주한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니 한국 역시 미국 땅이겠죠 ? 한단고기를 보고 가치있다 여기면 스스로의 역사지식을 의심해보십시오. 서술방향부터 이상한 책은 일단 의심하고 그 진위성부터 따져보되, 부분적인 진실을 추려내야합니다.  
104    桓檀古記(한단고기) 댓글:  조회:3951  추천:0  2012-07-30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    단군세기    붑부여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한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번한세가   소도경전본훈   천부경 삼일신고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   삼신관련어귀  *역자후기*        한단고기 해제 한단고기는 이 땅이 식민지로 접어든후인 1911년 계연수桂延壽라는 분에 의해 편찬 되였다.그 내용은 삼성기와 단군세기,북부여기 그리고 태백일사의 4종의 사서史書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삼성기는 신라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을 각각 상권과 하권으로 구분하여 합친 것이니,한인· 한웅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우리민족의 시발인 한국시대의 한인으로부터 7세 한인 까지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 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하권에 신시역대기가 덧붙여있다. 단군세기는 고려때 행촌선생 이암 문정공이 전한 책으로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1세 단군 왕검으로 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했다. 북부여기는 고려말 학자인 범장이 전한책이다.국사책에서의 고구려 건국년대는 B.C.37년으로 되어있으나,실상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이 보다 두갑자(120년) 내지는 세갑자(180년)가 앞선 것으로 생각되는데,몇가지 기록상의 공통점 등으로 보아 이 북부여기가 바로 고구려의 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상권·하권·가섭원부여기로 구성되는데,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108년의 역사이다. 태백일사는 연산군과 중종때 학자인 이맥이 전한책으로,한국桓國 ,신시시대神市時代로부터  고려에 이르기 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여기엔 삼신오제본기· 한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본기가 포함되여 있는데,삼한관경본기에는 마한세가 상·하와 번한세가 상·하가 담겨있다.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실어,우리 민족의 정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이 한단고기는 고대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신앙·풍습·정치·경제·철학·교육·지리·예술 등에 관한 풍부한 자료가 담겨있다. 그리고 조국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할점을 제시하고 있다.일예를 들면 주체의식의 입장에서 볼 때, 늘 우리의 귀에 익어온 발해라는 이름도 본명인 대진국大震國으로 돌아가야 될 것이다.왜냐하면 발해라함은 남이 부르던 이름일 뿐 ,사실은 대진국임을 한단고기는 입증하고 있음이다.한가지 더 예로 들면 우리는 우리의 임금을 왕이라 말해왔다.그 왕이라는 칭호는 제후들에게나 사용하는 것으로서 역사 교육을 통해 우리는 제후나라 백성이라고 암시 받아왔던 것이다.그러나 보라.한단고기의 어디에 왕의 칭호가 있는가? 엄연히 고려시대까지 내내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실상 이 책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은 이미 우리 조국의 고대사가 대륙의 역사임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그렇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내용의 허구를 의심할 것이다.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것이,그간 우리가 배워왔던 국사와는 너무나 엄청난 차이를 이 한단고기는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삼국시대가 최초의 국가 형태를 갖춘 고대국가라고 간주했던 식민시대의 학설에 반해,그 이전에 이미 찬란한 한인·한웅·단군시대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한단고기이며,또 그 역사의 주도가 매우 주체성 있는 강국의 면모를 갖추고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필자는 이책을 번역해 가면서 평소에 주장해왔던 바 ,한반도만이 우리의 강역이라는 반도사관과 스스로 강국임을 포기하고 주체성을 상실한 식민사관의 말살을 염두에 두고,그내용의 예증에 최대의 역점을 두었다. 그어느 책보다도 많이 읽혀져야할 이러한 책이 왜 그토록 묻혀있었던가 하는 의문은,역시 우리의 사가들이 젖어있었던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심지어는 이책에 포함된 일부의 사서史書에서도 인습에 젖어있던 그간의 역사의식을 발견할 수 있으니,잘못된 역사관의 해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결코 이 한단고기를 근거가 불확실하다던가,신빙성이 없다던가,편찬자들의 학문적 업적이 뚜렸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내팽개 칠 수는 없다.그러한 선입견 자체도 논리적 근거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것이다.적어도 이책에 실린 내용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도 이책은 한국인에게 중시되어야 하고,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반만년의 역사를 들먹이며 문화민족임을 자랑하는 우리가 제대로된 상고사 하나 변변하게 전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삼국사기나 삼국유사,또는 고려사 만이 우리의 역사책일리가 없는 것이다.우리 조상들은 분명히 숱한 역사책을 편찬했고 전해왔다.그것들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던 것은 또다른 못난 조상의 탓이라고 할수밖에 없다.이 한단고기는 그렇게 사장되어온 일부의 사서들을 모은 책이다. 자국의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갖고, 그것을 자랑하며,그 얼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 또 이를 통해 민족정기를 부추기고자 하는 것은 하등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이제 이책 이 한단고기 한권을 읽어 마칠 때 쯤에는 우리의 참 된 역사와 전통,하나님 나라 백성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맥박이 고동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역자 후기에서의 로 미룬다.)                                          번역 및 주해자    임승국 (林承國)                                                                                           한단고기 범 례 *고기古記인용의 시작은 저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史》로부터라 할 수 있다.그러나 지금 그 고기古記나마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등을 한 책으로 묶어 《한단고기桓檀古記》라 이름하였다. *《삼성기三聖紀》는 두 종류가 있어 비슷하나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안함로安含老씨가 찬撰한 것으로 우리 집안에 전해 오는 책을 이제 《삼성기 전 상편  三聖紀 全 上篇》이라 하고 원동중元董仲씨가 찬撰하고 태천泰川의 백진사白進士 관묵寬默씨로부터 얻은 것을 이제 《삼성기 전 하편  三聖紀 全 下篇》으로 하여 통틀어 《삼성기 전  三聖紀 全》이라 한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흥행촌의 노인이 엮은 것으로 행촌杏村선생 문정공文貞公이 전한 책이다. 이 책도 역시 백진사白進士로부터 얻은 것이다. 진사進士의 집은 글로써 전통이 알려졌던 오래된 가문으로 본래 많은 책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제 두 종류의 사서史書가 함께 그의 집에서 나왔다 함은 어찌 다만 백 사람의 벗이 주는 선물에 비길 수 있을 건가? 조국에 만장의 광채를 비춤이라 할 것이다. *《북부여기 상ㆍ하北夫餘紀 上ㆍ下》는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찬한 것이다. 본래 《단군세기 합편檀君世紀 合編》이란 이름으로 전해지는 책이 있었던 바 삭주朔州의 이동梨洞 이진사李進士 형식亨拭의 집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백진사白進士가 간직했던 것과는 글자 하나의 차이도 없다. 이제 또 별본別本이 있어 세간에 돌아다니는 것이 있지만, 이는 그 내용이 앞의 책과는 매우 다른바가 있을 뿐만아니라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일십당一十堂 주인 이맥李陌이 펴낸 것으로 해학海鶴 이기李汽 선생이 간직했던 책이다. 대저 한단桓檀 이래로 서로 전하여 온 교학 경문을 모두 사용한 전거가 한번 보아도 뚜렷한 것들이다. 또 저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두 책의 전문이 함께 편중編中에 있어 실로 낭가朗家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의 대학 중용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오호라! 한단桓檀 이래로 전하여 온 삼일심법三一心法은 참으로 이 책에 있는 바, 모름지기 태백진교太白眞敎가 다시 일어날 토대가 되지 않을 것인가? 손도 저절로 춤을 추고 발도 저절로 춤추고 흥겨워 소리지르고 싶으니 기쁨에 미칠 지경이로다. *《한단고기桓檀古記》 모두 해학海鶴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 근면을 다하여 옮겨 쓴 것이다. 또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의 두 벗이 돈을 내어 여러분에게 부탁하여 인쇄해 내는 바, 하나는 자아自我인간의 주성主性발견으로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민족문화의 표출 이념이 됨으로써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세계 인류의 대합對合공존으로써 크게 기뻐하는 바이다. 신시개천神市開天 5808년,즉 광무光武15년의 신해 5월 광개절廣開節에 태백太白의 유도遺徒 선천宣川의 계연수인경桂延壽仁卿이 묘향산 단굴암에서쓰다.                              *林承國;1928년생.고려대 정치학과졸업 동 대학원 문학박사취득. 경희대 영문학과교수,숭실대 영문학과교수,명지대에서 한국 고대사를 강의,한국 사학회 회장,공군 정신 연구원교수,새마을 연수원 교수를 지냄.중국25사에도 능통한 그는 동양제국의 역사를 두루 비교,검토하여 고대 우리민족의 찬란했던 역사를 객관성있게 입증하는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출처: bigstar http://bluecabin.com.ne.kr/  
103    揆 園 史 話 (규원사화) 댓글:  조회:2441  추천:0  2012-07-30
서(序)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紀) 단군기(檀君紀)       만설(漫說)       단군 관련 기사 교감기(校勘記 )         교감표(校勘表 ) 揆 園 史 話 (규원사화) [역사로 기록된 고조선 이야기] ▷ 北崖子 著□ ▷ 金聲九 譯注 옮긴 이의 말 이 글은 우리의 역사를 알고 싶은 마음에《揆園史話》의 내용을 풀어 옮기고, 본서에 언급된 韓,中 史書의 관련 기록을 그 주석으로 첨가한 것이다.본서가 편역의 과정에서 이미 앞서 이루어진 책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음에, 본서 또한 이어서 이루어질《揆園史話》의 더 나은 내용을 엮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 가운데 일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나의 책으로 내어 놓는다. 김 성 구. < 일러두기 > ▶본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원본《규원사화》(도서열람번호: 貴629, 古2105-1)를 저본으로 하고, 동 도서관 소장의 필사본《규원사화》(도서열람번호: 2121.3)를 참고하여 원문을 교감한 뒤, 번역과 주석을 한 것이다. < 일러두기 > ▶원문에는 구두점과 기타 표점을 사용하였으며, 그 용례는 일반적인 용법에 준하였다. ▶원문의 인명과 지명 및 고유명사에는 밑줄을 사용하였으며, 서적명에는 꺾음 겹괄호를 사용하였다. ▶원문의 교감에 사용된 특별 부호와 그 용도는 다음과 같다. ㉮ 원괄호와 격자괄호([原](筆)): 교감에 이용된 판본의 종류를 나타낸다. 즉, 교감 대상의 두 판본간 異字를 표시하며 원본《규원사화》의 글자나 문장은 격자괄호를 사용하고, 필사본《규원사화》의 내용은 원괄호를 사용하였다. ㉯ 윗첨자의 사용((棄)[取]): 교감의 내용을 나타내는 부호로 사용되었다. 즉, 교감의 결과 버리는 문장이나 단어는 윗첨자로 표시하고, 취하는 문장이나 단어는 정상 글씨체를 사용하되, 각각의 판본 종류를 표시하였다. 두 판본의 내용이 함께 잘못된 경우에는 모두 윗첨자로 처리하고, 정정된 새로운 내용은 정상 글씨체를 사용하여 표기하였다. ㉰ 정상 글씨체의 원괄호나 격자괄호가 단독으로 사용되어진 경우는 상대편 판본에 없는 글자 또는 문장임을 말한다. < 참 고 서 적 > 기 본 서 적 《揆園史話》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한뿌리사 영인). 1990. 《揆園史話》 손진태 소장본(고려원 영인). 1989. 참 고 서 적 《史記》(2版12刷) 1992.《漢書》(1版6刷) 1990. 《後漢書》(1版5刷) 1991.《三國志》(2版11刷) 1992. 《遼史》(1版4刷) 1991. (이상 中國·中華書局校編本) 《삼국유사》 (北)리상호 옮김. 신서원 影印. 1990. 《檀君實史에 관한 考證硏究》 李相時 著. 고려원. 1990. 《神檀實記》 金敎獻 著, 이민수 譯. 한뿌리. 1987. 《揆園史話》 北崖 著, 고동영 譯. 한뿌리. 1992. 《한국고대사》 尹乃鉉 著. 삼광출판사. 1991.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徐熙乾 編著. 고려원. 1989. 《說苑全譯》 劉向 著, 王鍈·王天海 譯注. 中國: 貴州人民出版社. 1992. 《滿洲源流考》 淸·阿桂 等撰. 서울: 홍익재 影印. 1993. 《東北民族源流》 孫進己 著, 林東錫 譯. 서울: 東文選. 1992. 《說文解字經》 段玉裁 著. 臺灣: 蘭臺書局. 1977. 《中國史序說》 李春植 著. 서울: 敎保文庫. 1991. 《산해경》 鄭在書 譯註. 서울: 民音社. 1993. 《山海經校注》 袁珂校注. 中國:上海古籍出版. 1991. 《中國古代史地圖冊》 中國:中國地圖出版社編. 1991. -본 편집물은 商用出版을 제외한, 어떠한 형태로의 사용에도 그 제약이 없습니다.- HOME다음
102    부도지(符都誌) 댓글:  조회:2599  추천:0  2012-07-30
부도지符都 誌 부도지는 징심록 상교 제1지라고 하며, 우리의 상고사를 기술한 사서중에 가장 오래전의 역사를 비교적 자세히 기술한 문헌으로 서기 1953 년(단기 4286 년 )박 금선생의 프린트본으로 세상에 알려진 책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서의 저자는 영해 박씨의 시조인, 신라 눌지왕때, 치술령 망부석의 주인공인 관설당 박 제상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도지의 내용을 율과 려, 음과 성, 음상과 향상, 5 음 7 조의 율려등으로 이치를 설명한 것으로 보아, 부도지는 박 제상의 아들이며 방아타령의 대악으로 유명한 백결선생이 지어서, 사회적으로 이름있는 아버지 박 제상의 이름으로 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해 박씨의 시조인 관설당 박 제상은 또한, 천부경을 아들인 백결선생 박 문량에게 전하였고, 백결선생 박 문량은 신선사 마애불상들이 있는 단석산 깊은 곳에서 이를 해독하여, 다시 아들 박 마령간에 전하였으며, 아들 박 마령간은 이 천부의 이치를 김 유신에게 가르쳐서 김 춘추와 삼국을 통일하는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전했다고 합니다. 또한, 귀주대첩의 박 서장군도 영해 박씨의 후손이며, 근세조선의 태조, 이 성계의 왕사인 자초 무학대사도 영해 박씨의 후손이며, 세종대왕을 도와서 아악을 정리한 박 연도 영해 박씨의 후손으로, 근세조선 초기에 영해 박씨를 중하게 등용한 이면에는 풀리지 않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천부경의 내용이 적힌 징심록은 세조 반정때 숨어 버리며, 후에 금오신화의 저자인 매월당 김 시습이 이를 풀이한 금척지를 영해 박씨 문중에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 부도지가 박 금선생에 의하여 전해진 것을 보면 그것 또한 우연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 부도지는 김은수님의 해설을 겸한 역서인데 제가 처음 읽을 때 좀 혼란스러운 면이있어서 해설 부분을 제외하고 본문 부분만을 발췌한 것입니다. 김태형님의 부도지 해설서 가 비교적 정리가 잘되어 있어 함께 싣습니다. *女神 마고' 21세기에 환생 제 1장 : 마고(麻故)의 시대-김은수역- 第一章 마고성(麻姑城)은 지상(地上)에서 가장 높은 성(城)이다. 천부(天符)를 봉수(奉守)하여, 선천(先天)을 계승(繼承)하였다. 성중(成中)의 사방(四方)에 네 명의 천인(天人)이 있어, 관(管)을 쌓아 놓고, 음(音)을 만드니, 첫째는 황궁(黃穹)씨요, 둘째는 백소(白巢)씨요, 셋째는 청궁(靑穹)씨요, 넷째는 흑소(黑巢)씨였다. 두 궁씨의 어머니는 궁희(穹姬)씨요, 두 소씨의 어머니는 소희(巢姬)씨였다. 궁희와 소희는 모두 마고(麻姑)의 딸이었다. 마고는 짐세(朕世)에서 태여나 희노(喜怒)의 감정이 없으므로,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가 없이, 궁희와 소희를 낳았다. 궁희와 소희도 역시 선천의 정을 받아, 결혼을 하지 아니하고, 두 천인(天人)과 두 천녀(天女)를 낳았다. 합하여 네 천인과 네 천녀였다. 麻姑城은 地上最高大城이니 奉守天符하야 繼承先天이라, 成中四方에 有四位天人이 堤管調音하니 長曰 黃穹氏오 次曰 白巢氏오 三曰 靑穹氏오 四曰 黑巢氏也라. 兩穹氏之母曰穹姬오 兩巢氏之母曰巢姬니 二姬는 皆麻姑之女也라. 麻姑ㅣ生於朕世하야 無喜怒之情하니 先天爲男하고 後天爲女하야 無配而生二姬하고 二姬ㅣ赤受其精하야 無配而生二天人二天女하니 合四天人四天女야라. 第二章 선천(先天)의 시대에 마고대성(麻姑大城)은, 실달성(實達城)의 위에, 허달성(虛達城)과 나란히 있었다. 처음에는 햇볕만이 따뜻하게 내려 쪼일 뿐, 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없었다. 오직 8 여(呂)의 음(音)만이 하늘에서 들려 오니, 실달성과 허달성이, 모두 이 음에서 나왔으며, 마고대성과 마고도, 또한 이 음(音)에서 나왔다. 이것이 짐세(朕世)다. 짐세 이전에, 율려(律呂)가 몇 번 부활하여, 별들(星辰)이 출현하였다. 짐세가 몇 번 종말을 맞이 할 때, 마고가 궁희(穹姬)와 소희(巢姬)를 낳아, 두 딸로 하여금, 오음칠조(五音七調)와 음절(音節)을 맡아보게 하였다. 성중(城中)에 지유(地乳)가 처음으로 나오니, 궁희와 소희가, 또 네 천인(天人)과 네 천녀(天女)를 낳아, 지유를 먹여, 그들을 기르고, 네 천녀에게는 여(呂)를, 네 천인에게는 율(律)을 맡아보게 하였다. 先天之時에 大成이 在於實達之上하야 與虛達之城으로 ?列하니 火日暖照하고 無有具象하야 唯有八呂之音이 自天聞來하니 實達與虛達이 皆出於此音之中하고 大城與麻姑ㅣ赤生於斯하니 是爲朕世라. 朕世以前則律呂幾復하야 星辰巳現이러라. 朕世幾終에 麻姑ㅣ生二姬하야 使執五音七調之節하다. 城中에 地乳始出하니 二姬又生四天人四天女하야 以資其養하고 四天女로 執呂하고 四天人으로 執律이러라. 第三章 후천(後天)의 운(運)이 열렸다. 율려(律呂)가 다시 부활하여, 곧 음상(音象)을 이루니, 성(聲)과 음(音)이 섞인 것이었다. 마고가 실달대성(實達大城)을 끌어당겨, 천수(天水)의 지역에 떨어드리니, 실달대성의 기운이 상승하여, 수운(水雲)의 위로 덮고, 실달의 몸체가 평평하게 열려, 물 가운데에 땅이 생겼다. 육해(陸海)가 병렬(?列)하고, 산천(山川)이 넓게 뻗었다. 이에 천수의 지역이 변하여, 육지가 되고, 또 여러 차례 변하여, 수역(水域)과 지계(地界)가 다 함께 상하가 바뀌며 돌므로, 비로서 역수(曆數)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5]기(氣) 화(火) 수(水) 토(土)가 서로 섞여 빛이 낮과 밤, 그리고 사계절을 구분하고, 초목(草木)과 금수(禽獸)을 살찌게 길러내니, 모든 땅에 일이 많아 졌다. 이에 네 천인이 만물(萬物)의 본음(本音)을 나눠서 관장(管掌)하니, 토(土)를 맡은 자는 [6]황(黃)이 되고, [7]수(水)를 맡은 자는 [8]청(靑)이 되어, 각각 궁(穹)을 만들어, 직책을 수호 하였으며, [9]기(氣)를 맡은 자는 백(白)이 되고, 화(火)를 맡은 자는 흑(黑)이 되어, 각각 소(巢)를 만들어, 직책을 지키니, 이것으로 인하여 성(姓氏)이 되었다. 이로부터 [10]기(氣)와 화(火)가 서로 밀어, 하늘에는 찬 기운이 없고, 수(水)와 토(土)가 감응(感應)하여, 땅에는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음상(音象)이 위에 있어, 언제나 비춰주고, 향상(響象)이 아래에 있어, 듣기를 고르게 해 주는 까닭이었다. 後天運開에 律呂再復하야 乃成響象하니 聲與音錯이라. 麻姑ㅣ引實達大城하야 大城之氣ㅣ上昇하야 布幕於 水雲之上하고 實達之?ㅣ平開하야 闢地於凝水之中하니 陸海?列하고 山川이 廣圻이라. 於是에 水域이 變成地界而雙重하야 替動上下而斡旋하니 曆數始焉이라.以故로 氣火水土ㅣ相得混和하야 光分書夜四時하고 潤生草木禽하니 全地多事라.於是에 四天人이 分管萬物之本音하니 管土者爲黃하고 管水者爲靑하야 各作穹而守職하고 管氣者爲白하고 管火者爲黑하야 各作巢而守職하니 因稱其氏라. 自此로 氣火共推하야 天無音冷하고 水土感應하야 지무흉戾하니 此는 音象이 在上하야 常時反照하고 響象이 在下하야 均布聽聞姑也라. 第四章 이 때에, 본음(本音)을 관섭(管攝)하는 자가 비록 여덟 사람이었으나, 향상을 수증(修證)하는 자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물이 잠깐 사이에 태여 났다가, 잠깐 사이에 없어지며, 조절이 되지 못하였다. 마고(麻姑)가 곧, 네 천인과 네 천녀에게 명하여, 겨드랑이를 열어 출산(出産)을 하게 하니, 이에 [11]네 천인이 네 천녀와 결혼하여, 각각 [12]삼남(三男) 삼녀(三女)를 낳았다. 이가 지계(地界)에 처음 나타난 인간의 조상(人祖) 였다. 그 남녀가 서로 결혼을 하여, 몇 대(代)를 지내는 사이에, 족속(族屬)이 불어나, 각각 3000명의 사람이 되었다. 이로부터 [13]12사람의 시조는 각각 성문(城門)을 지키고, 그 나머지 자손은 향상(響象)을 나눠서 관리하고, 수증(修證)하니, 비로서 역수(曆數)가 조절되었다. 성중(城中)의 모든 사람은, 품성(稟性)이 순정(純精)하여, 능히 조화(造化)를 알고, 지유(地乳)를 마시므로, 혈기(血氣)가 맑았다. 귀에는 오금(烏金)이 있어, 천음(天音)을 모두 듣고, 길을 갈 때는, 능히 뛰고, 걷고 할 수 있으므로, 내왕(來往)이 자재(自在)하였다. 임무를 마치자, 금(金)은 변하여 먼지가 되었으나, 그 성체(性體)를 보전하여, 혼식(魂識)이 일어남을 따라, 소리를 내지 않고도 능히 말을 하고, 백체(魄體)가 때에 따라 움직여, 형상을 감추고도 능히 행동하여, 땅 기운(地氣) 중에 퍼져 살면서, 그 수명(壽命)이 한이 없었다. 是時에 管攝本音者ㅣ雖有八人이나 未有修證響象者故로 萬物이 閃生閃滅하야 不得調節이라. 麻姑ㅣ乃命四天人四天女하야 ?脇生産하니 於是에 四天人이 交娶四天女하야 各生三男三女하니 是爲地界初生之人祖也라. 其男女ㅣ又復交娶하야 數代之間에 族屬이 各增三天人이라. 自此로 十二人祖는 各守城門하고 其餘子孫은 分管響象而修證하니 曆數始得調節이라. 城中諸人이 稟性純精하야 能知造化하고 飮?地乳하야 血氣淸明이라. 耳有烏金하야 具聞天音하고 行能跳步하야 來往自在라. 任務己終則遷化金塵而保己性體하야 隨發魂識而潛能言하고 時動魂體而潛能行하야 在住於地氣之中하야 其壽無量이러라 제 2장 : 부도(不渡)의 시대 第五章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支巢)씨가, 여러 사람과 함께 젖을 마시려고 유천(乳泉)에 갔는데, 사람은 많고 샘은 작으므로, 여러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마시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차례나 되었다. 곧 돌아와 소(巢)에 오르니, 배가 고파 어지러워 쓰러졌다. 귀에는 희미한 소리가 울렸다. 오미(五味)를 맛보니, 바로 소(巢)의 난간의 넝쿨에 달린 [31]포도열매였다. 일어나 펄쩍 뛰었다. 그 독력(毒力)의 피해 때문이었다. 곧 소(巢)의 난간에서 내려와 걸으면서 노래하기를. [넓고도 크구나 천지여! 내 기운이 능가한다. 이 어찌 도(道)인가! 포도의 힘이로다.] 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지소씨의 말을 의심하였다. 지소씨가 참으로 좋다고 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포도를 많이 먹었다,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에 제족이 포도를 많이 먹었다. 白巢氏之族 支巢氏ㅣ與者人으로 往飮乳泉할새 人多泉少어늘 讓於諸人하고 自不得飮而如是者五次라. 乃歸而登巢하야 遂發飢惑而眩倒하니 耳嗚迷聲하야 呑嘗五味하니 卽巢欄之蔓籬萄實이라. 起而偸躍하니 此被其毒力故也라. 乃降巢闊步而歌曰浩蕩兮天地여 我氣兮凌駕로다. 是何道兮요 萄實之力이로다. 衆皆疑之하니 支巢氏曰眞佳라하거늘 諸人이 奇而食之하니果若其言이라.於是에 諸族之食萄實者多러라. 第六章 백소씨(白巢氏)의 사람들이 듣고 크게 놀라, 곧 수찰(守察)을 금지하니 이는 또 금지하지 아니하되, 스스로 금지하는, 자재율(自在律)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열매를 먹는 습관과 수찰을 금지하는 법이 시작되니, 마고가 성문을 닫고 수운(水雲)의 위에 덮혀 있는 실달대성의 기운을 거두어버렸다.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齒)가 생겼으며, 그 침(唾)은 [32]뱀의 독(毒)과 같이 되어 버렸다. 이는 강제로 다른 생명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수찰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눈이 밝아져서, 보기를 [33]올빼미 같이 하니, 이는 사사로이 공률(公律)을 훔쳐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의 혈육이 탁(濁)하게 되고, 심기(心氣)가 혹독하여져서, 마침내 천성을 잃게 되었다. 귀에 있던 오금(烏金)이 변하여 토사(兎沙)가 되므로, 끝내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발은 무겁고, 땅은 단단하여, 걷되 뛸 수가 없었으며, 태정(胎精)이 불순하여, 짐승처럼 생긴 사람을 많이 낳게 하였다. 명기(命期)가 조숙(早熟)하여, 그 죽음이 천화(遷化)하지 못하고 썩게 되었으니, 이는 생명의 수(數)가 얽혀 미혹(迷惑)하게 되고,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白巢氏之諸人이 聞而大驚하야 乃禁止守祭하니 此又破不禁自禁之自在律者也라. 此時에 食實之習과 禁祭之法이 始하니 麻姑閉門撤冪이러라. 已矣오 食實成慣者ㅣ皆生齒하야 唾如蛇毒하니 此는 强呑他生故也오 設禁守祭者ㅣ皆眼明하야 視似치目하니 此는 私 公律故也라. 以故로 諸人之血肉이 化하고 心氣ㅣ酷變하야 遂失凡天之性이라. 耳之烏金이 化作兎沙하야 終爲天聲하고 足重地固하야 步不能跳하며 胎精不純하야 多生獸相이라. 命期早熟하야 其終이 不能遷化而 하니 此는 生命之數ㅣ 惑 縮故也라. 第七章 이에 사람(人世)들이 원망하고 타박하니, 지소씨가 크게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져서, 권속(眷屬)을 이끌고 성을 나가, 멀리 가서 숨어 버렸다. 또 포도의 열매를 먹은 자와, 수찰을 하지 아니한 자도, 역시 모두 성을 나가,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가니, 황궁(黃穹)씨가 그들의 정상을 불쌍하게 여겨 고별(告別)하여 말하기를, [여러분의 미혹(迷惑)함이 심대(甚大)하여 성상(性相)이 변이(變異)한 고로 어찌할 수 없이 성중(城中)에서 같이 살 수가 없게 되었오. 그러나, 스스로 수증(修證)하기를 열심히 하여, 미혹함을 깨끗이 씻어, 남김이 없으면, 자연히 복본(復本) 할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시오.]하였다. 이 때에 기(氣)와 토(土)가 서로 마주치어, 시절(時節)을 만드는 광선(光線)이, 한 쪽에만 생기므로, 차고 어두웠으며, 수(水)와 화(火)가 조화를 잃으므로, 핏기 있는 모든 것들이 시기하는 마음을 품으니, 이는, 빛을 거둬들여서 비추어 주지 아니하고, 성문이 닫혀 있어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於時에 人世ㅣ怨咎하니 支巢氏ㅣ大恥顔赤하야 率眷出城하야 遠出而隱이라. 且氣慣食萄實者와 設禁守祭者ㅣ亦皆出城하야 去各地하니 黃弓氏ㅣ哀憫彼等之情狀하야 乃告別曰 諸人之惑量이 甚大하야 性相變異故로 不得同居於城中이라. 然이나 自勉修證하야 淸濟惑量而無餘則自然復本하리니 勉之勉之하라. 是時에 氣土相値하야 時節之光이 偏生冷暗하고 水火失調하야 血氣之類ㅣ皆懷猜忌하니 此는 冪光이 卷撤하야 不爲反照하고 城門이 閉隔하야 不得聽聞故也라. 第八章 더구나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이르러, 직접 복본(復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복본에 때가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해치니, 성터(城址)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성 안에 마침내 젖이 마르니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풀과 과일을 다투어 취하므로, 혼탁(混濁)이 지극하여, 청정(淸淨)을 보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황궁(黃穹)씨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곧 백모(白茅)를 묶어 마고(麻姑)의 앞에 사죄하여,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복본할 것을 서약하였다. 물러나와 [34]제족(諸族)에게 고하기를 [오미의 재앙이 꺼꾸로 밀려오니, 이는 성을 나간 사람들이 이도(理道)를 알지 못하고, 다만 혹량(惑量)이 불어 났기 때문이다. 청정(淸淨)은 이미 없어지고, 대성(大城)이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를 어찌할 것인가.]하였다. 이 때에 [35]천인(天人)들이 분거(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대성을 완전하게 본전하고자 하므로, 황궁씨가 곧 천부(天符)를 신표(信標)로 나누어 주고, [36]칡을 캐서 식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사방에 분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청궁(靑穹)씨는 권속(眷屬)을 이끌고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37]권속을 이끌고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復本)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已矣오. 出城諸人中悔悟前非者ㅣ還到城外하야 直求復本하니 此未知有復本之時所故也라. 乃欲得乳泉하야 掘鑿城廓하니 城址破損하야 泉源이 流出四方이라. 然이나 卽化固土하야 不能飮철이라. 以故로 城內에 遂乳渴하니 諸人이 動搖하야 爭取草果하니 混濁至極하야 難保淸淨이라. 黃穹氏ㅣ爲諸人之長故로 乃束身白茅하고 謝於麻故之前하야 自負五味之責하여 立誓復本之約이러라. 退而告諸族曰五味之禍ㅣ反潮逆來하니 此出城諸人이 不知理道하고 徒增惑量故也라. 淸淨已破하고 大城將危하니 此將奈何오. 是時에 諸天人이 意決分居하야 欲保大城於完全하니 黃穹氏ㅣ乃分給天符爲信하고 敎授採葛爲量하야 命分居四方이라. 於時에 靑穹氏ㅣ率眷出東間之門하야 去雲海洲하고 白巢氏ㅣ率眷出西間之門하야 去月息洲하고 黑巢氏ㅣ率眷出南間之門하야 去星生洲하고 黃穹氏ㅣ率眷出北間之門하야 去天山洲하니 天山洲는 大寒大險之地라. 此는 黃穹氏ㅣ自進 難하야 忍苦復本之 盟誓러라. 第九章 [38]분거제족(分居諸族)이 각 주(洲)에 이르니, 어느덧 [39]천년이 지났다. 옛날에 먼저 성을 나간 사람들의 자손이 각지(各地)에 잡거(雜居)하여,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거의가 그 근본을 잃고, 성질이 사나와져서, 새로 온 분거족을 보면, [40]무리를 지어 추격하여 그들을 해하였다. 분거족이 이미 정주(定注)하니, 바다와 산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내왕이 거의 없었다. 이에 마고가 궁희와 소희와 더불어 대성을 보수하여, 천수(天水)를 부어 성내(城內)를 청소하고, 대성(大城)을 [41]허달성(虛達城)의 위로 옮겨버렸다. 이 때에 청소를 한 물이 동과 서에 크게 넘쳐 [42]운해주의 땅을 크게 부수고, 월식주의 사람을 많이 죽게 하였다. 이로부터 지계(地界)의 중심(重心)이 변하여, 역수(曆數)가 차이가 생기니, 처음으로 삭(朔)과 판(?)의 현상이 있었다. 分居諸族이 繞倒各洲하니 於焉千年이라. 昔世出城諸人之裔ㅣ難居各地하야 其勢甚盛이라. 然이나 殆忘根本하고 性化猛獰하야 見新來分居之族則作群追跡而害之러라. 諸族이 已定住하니 海阻山隔하야 來往이 殆絶이라. 於時에 麻故與二姬로 修補大城하고 注入天水하야 淸掃城內하고 移大城於虛達之上이러라. 是時에 淸掃之水ㅣ大漲於東西하야 大破雲海之地하고 多滅月息之人이라. 自此로 世界之重이 變化하야 曆數生差하니 始有朔?之象이라. 第十章 황궁씨가 [43]천산주에 도착하여, 해혹(解惑)하여 복본(復本)할 것을 서약하고, 무리에게 수증(修證)하는 일에 근면하도록 고하였다. 곧 장자(長子) 유인(有因)씨에게 명하여, 인세(人世)의 일을 밝히게 하고, 차자(此子) 와 삼자로 하여금 모든 주(洲)를 순행(巡行)하게 하였다. 황궁씨가 곧 천산(天山)에 들어가 돌이 되어, 길게 [44]조음(調音)을 울려, 인세의 혹량을 남김 없이 없앨 것을 도모하고, 기어이 대성 회복의 서약을 성취하였다. 이에 유인씨가 [45]천부삼인(天符三印)을 이어 받으니, 이것은 곧 천지본음(天地本音)의 상(象)으로, 그것은 진실로 근본이 하나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유인씨가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밤에는 어둠에 시달리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나무를 뚫어서 마찰을 시켜 불을 일으켜서 밝게 비춰주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또 음식물을 익혀서 먹는 법을 가르치니, 모든 사람들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유인씨가 천년을 지내고 나서, 아들 [46]한인(桓因)씨에게 천부를 전하고 곧 산으로 들어가 [47]계불을 전수(專修)하며 나오지 아니하였다. 환인씨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인세를 증리(證理)하는 일을 크게 밝히니, 이에 햇빛이 고르게 비추고, 기후가 순조로와 생물들이 거의 안도함을 얻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48]괴상한 모습이 점점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는 3세(황궁, 유인, 환인)가 수증하기 [49]삼천년에 그 공력이 거의 없어질만큼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黃穹氏ㅣ到天山洲하야 誓解惑復本之約하고 告衆勸勉修證之業이라. 乃命長子有因氏하야 使明人世之事하고 使次子三子로 巡行諸洲러라. 黃穹氏乃入天山而化石하야 長嗚調音하야 以圖人世惑量之除盡無餘하고 期必大城恢復之誓約成就러라. 於是에 有因氏ㅣ繼受天符三印하니 此卽天地本音之象而使知其眞一根本者也라. 有因氏ㅣ哀憫諸人之寒冷夜暗하야 鑽燧發火하야 照明溫軀하고 又敎火食하니 諸人이 大悅이라. 有因氏千年에 傳天符於子桓因氏하고 乃入山하야 專修契불不出이라. 桓因氏ㅣ繼受天符三印하야 大明人世證理之事하니 於是에 日光均照하고 氣侯順常하야 血氣之類ㅣ庶得安堵하고 人相之怪ㅣ稍得本能하니 此는 三世修證三千年에 其功力이 庶幾資於不 者也라. 제 3 장 : 배달국 시대 第十一章 환인씨의 아들 환웅씨는 태여날 때부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천부 삼인을 계승하여, 수계제불 (修계除불) 하였다. 천웅(天熊)의 도를 수립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래한 바를 알게 하였다. 어느덧 인세(人世)가 의식(衣食)의 일(業)에만 편중하므로, 환웅씨는 무여율법(無餘律法) 조(條)를 제정하여, 환부(鰥夫)로 하여금 조절하게 하였다. 1조는, 사람의 행적(行蹟)은, 때때로 깨끗하게 하여, 모르는 사이에 생귀(生鬼)가 되지 않게 하고 번거롭게 막혀, 마귀(魔鬼)가 되지 않도록 하여, 인세로 하여금, 통명무여일장(通明無餘一障)하게 하라. 2조는, 사람의 취적(聚積)은, 죽은 뒤에 공을 제시하여, 생귀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게 하고, 함부로 허비하여, 마귀가 되지 않도록 하여, 인세로 하여금, 보흡무여일감(普洽無餘一憾)하게 하라. 3조는, 고집이 세고 사혹(邪惑)한 자는 광야(曠野)에 귀향을 보내, 때때로 그 사옥함을 씻게 하여, 사기(邪氣)로 하여금, 무여어세상(無餘於世上)하게 하라. 4조는, 죄를 크게 범한 자는 섬도(暹島)에 유배시켜 죽은 뒤에 그 시체를 태워서, 죄집(罪集)으로 하여금, 무여어지상(無餘於地上)하게 하라 였다. 또 궁실(宮室)을 짓고, 배와 차(車)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거주(居住)하고, 여행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에 환웅씨가 바다에 배를 띄워 시승(始承)하여 [64]사해(四海)를 순방하니, 천부를 조증(照證)하여 수신(修信)하고, 제족의 소식을 소통하여 근본을 잊지 않을 것을 호소하고, 궁실을 짓고, 배와 차를 만들고, 화식(火食)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었다. 환웅씨가 돌아와 8음2문(八音二文)을 수학하고, 역법(曆法)을 정하고 의약술(醫藥術)을 수업하며,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를 저술하니, 홍익인세(弘益人世)였다. 이는, 세대는 멀어지고, 법은 해이하여져서, 모든 사람들이 몰래 사단(詐端)을 모색하는 일이 늘어나기 때문에, 일용(日用)하는 사물 사이에서, 근본의 도를 보전하여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비로소 학문을 하는 풍조가 일어나니, 인성(人性)이 혼매(昏昧)하여, 배우지 않고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桓因氏之子桓雄氏ㅣ生而有大志하야 繼承天符三印하고 修계除불하고 立天雄之道하야 使人知其所由러라. 於焉人世ㅣ偏重於衣食之業하니 桓雄氏ㅣ制無餘律法四條하야 使鰥夫로 調節하니 一曰人之行蹟은 時時淸濟하야 勿使暗結生鬼하며 煩濟化魔하야 使人世로 通明無餘一障하라. 二曰人之聚積은 死後堤功하야 勿使陳垢生鬼하며 濫費化魔하야 使人世로 普洽無餘一憾하라. 三曰頑 邪惑者는 謫居於曠野하야 時時被其行하야 使邪氣로 無餘於世上하라. 四曰大犯罪過者는 流居於暹島하야 死後焚其尸하야 使罪集으로 無餘於地上하라. 又作宮室舟車하야 敎人居旅러라. 於是에 桓雄氏ㅣ始乘舟浮海할새 照證天符修信하고 疏通諸族之消息하며 訴言根本之不忘하고 敎宮室舟車火食之法이너라. 桓雄氏ㅣ歸而修八音二文하고 定曆修醫藥하며 述天文地理하니 弘益人世라. 此는 世遠法弛하야 諸人之暗취摸 이 增詐端故로 欲保根本之道於日 用事物之間而使昭然也라. 自是로 始興修學之風하니 人性昏昧하야 不學則不知故也라. 제 4 장 : 임검(壬儉)씨 시대(조선시대) 第十二章 환웅씨가 [75]임검(壬儉)씨를 낳았다. 때에 사해의 제족(諸族)이 천부의 이치를 강(講)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미혹(迷惑)속에 빠져, 세상이 고통스러웠다. 임검씨가 천하에 깊은 우려를 품고, 천웅의 도(天雄之道)를 닦아, 계불의 의식을 행하여, 천부삼인을 이어받았다. 갈고, 심고, 누에치고, 칡을 먹고, 그릇을 굽는 법을 가르치고, 교역(交易)하고, 결혼하고, 족보를 만드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임검씨가 뿌리를 먹고, 이슬을 마시므로, 몸에는 털이 길게 나가지고, 사해를 널리 돌아다니며, 제족을 차례로 방문 하였다. 백년사이에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천부를 조증(照證)하여 수신(修信)하고, 해혹복본(解惑復本) 할 것을 맹서하며, 부도(符都)를 건설할 것을 약속하니, 이는 지역은 멀고 소식은 끊어져, 제족의 언어와 풍속이 점차로 변하여 서로 다르게 되었기 때문에, 함께 모여 협화(協和)하는 자리에서, 천부의 이치를 강(講)하여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후일에 회강(會講)의 실마리가 되니, 인사가 번거롭고 바빠, 강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桓雄氏生壬儉氏하니 時에 四海諸族이 不講天符之理하고 自沒於迷惑之中하야 人世因苦라. 壬儉氏懷憂於天下하고 修天雄之道하며 行계불之儀하야 繼受天符三印이라. 敎耕稼蠶葛陶 之法하고 布交易稼 錄之制러라. 壬儉氏ㅣ啖根吸露하고 身生毛 하야 遍踏四海하야 歷訪諸族하니 百年之間에 無所不往이라. 照證天符修信하고 盟解惑復本之誓하며 定符都建設之約하니 此는 地遠信絶하야 諸族之言語風俗이 漸變相異故로 俗講天符地理於會同協和之 而使明之也라. 是爲後日會講之緖하니 人事煩忙하야 不講則忘失故也라. 第十三章 임검(壬儉)씨가 돌아와 부도(符都)를 건설할 땅을 택하였다. 즉 동북의 자방(磁方)이었다. 이는 2와 6이 교감(交感)하는 핵심지역이요, 4와 8이 상생(相生)하는 결과의 땅이었다. 밝은 산과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고, 바다와 육지가 서로 통하여 십방으로 갈리어 나가니, 즉 9와 1의 끝과 시작이 다하지 않는 터전이었다. 삼근영초(三根靈草)와 오엽서실(五葉瑞實)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이 금강(金剛)의 심장부에 뿌리를 내려, 전 지역에 두루 가득하니, 이는 1과 3과 5와 7의 자삭(磁朔)의 정(精)이 모여, 바야흐로 물체를 만드는 복된 땅이었다. 곧 태백산 밝은 땅의 정상에 천부단(天符壇)을 짓고 사방에 보단(堡壇)을 설치 하였다. 보단의 사이에는 각각 세 겹의 도량길로 통하게 하였다. 도랑길의 사이는 천 리였으며, 도랑길의 좌우에 각각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는 마고본성(麻故本城)에서 그 법을 취한 것이었다. 부도의 하부를 나눠 마을을 만들었다. 삼해(三海)의 주위에 둥그렇게 못에 잠기었다. 사진(四津)과 사포(四浦)가 천 리 간격으로 연결되어, 동서로 줄을 지어 둘러쌌다. 진(津)과 포(浦)사이에 다시 6부를 설치 하였다. 6부에는 제족(諸族)이 살았다. 부도가 이미 이루어지니, 웅려(雄麗)하고 광명하여 사해를 총화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제족의 생맥(生脈)이었다. 壬儉氏ㅣ歸而擇符都建設之하니 卽東北之磁方也라. 此는 二六交感懷核之域이오 四八相生潔果之地라. 明山麗水ㅣ連선萬里하고 海陸通涉이 派達十方하니 卽九一終始不 之其也라. 三根靈草와 五葉瑞實과 七色寶玉이 托根於金剛之臟하야 遍滿於全域하니 此一三五七磁朔之精이 會方成物而順吉者也라. 乃築天符壇於太白明地之頭하고 設保壇於四方이라. 保壇之間에 各通三 道溝하니 其間이 千里也오 道溝左右에 各設守關하니 此取法於麻故之本城이라. 劃都坊於下部之休하고 圖涵澤於三海之周하니 四律四浦ㅣ連隔千里하야 環列於東西라. 律浦之間에 又設六部하니 此爲諸族之率居也라. 符都 成하니 雄麗光明하여 足爲四海之總和요 諸族之生脈 第十四章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이 이주하여 지키고, 곧 나무를 베어 뗏목 8만을 만들어서,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흘려 보내, 사해의 제족을 초청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얻어서 보고, 차례로 모여들어, 박달나무 숲에 신시를 크게 열고, 수계정심(修?淨心)하여, 천상(天象)을 살핀 후, 마고의 계보(系譜)를 닦아 그 족속(族屬)을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어문(語文)을 정리 하였다. 또 북진(北辰)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정하여 반석의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전(奠)을 올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天雄)의 악(樂)을 연주하였다. 제족이 방장산(方丈山) 방호의 굴(方壺之堀)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를 새기고 그것을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하여 칠난(七難)을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 10년마다 반듯이 신시를 여니, 이에 어문(語文)이 같아지고, 천하가 하나로 되어, 인세가 태화(太和)하였다. 인하여 바닷가에 성황(城隍)을 지어 천부에게 전을 올리고, 제족으로 하여금 머물러, 집을 지어 살게 하니, 그 뒤에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졌다. 第十五章 또 예와 양(陽)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팔택(八澤)에 해시(海市)를 열어, 매년 10월에 조제(朝祭)를 행하니, 사해의 제족이 모두 지방 토산물을 바쳤다. 산악의 제족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제족은 물고기와 조개를 바쳐 송축하기를 [[76]고기와 양을 희생으로 조제에 공진하니, 오미의 피를 신선하게 하여, 창생의 재앙을 그치게 하네]하였다. 이를 가개르켜 조선제(朝鮮祭)라 하였다. 이 때에 산악과 해양의 제족이 물고기와 육(肉)고기를 많이 먹으니, 교역하는 물건이 거개가 저린 어물과 조와 가죽류이기 때문에 곧 희생제(犧牲祭)를 행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 하고, 공에 보답하게 하였다. [77]피에 손가락을 꽂아 생명을 성찰하고, 땅에 피를 부어 기른 공을 보답하니, 이는 물체가 대신 오미의 잘못을 보상하여, 재앙을 먿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즉 육친고충의 고백이었다. 언제나 세제(歲祭) 때에는 물화(物貨)가 폭주 하므로 사 진과 사 포에 해시를 크게 열고, 몸을 깨끝하게 하여, 지리(地理)를 거울 삼아, 교역의 법을 시행하여, 그 값과 분량을 정하며, 물성(物性)의 근본을 분별하여 이용하는 법을 밝혔다. 또 부도 팔택의 모양을 본떠서 뭇을 파고, 곡수(曲水)의 사이에서 보새(報塞)를 지내고, 회연(會燕)하여 제물(濟物)하는 의식(儀式)을 행하였다. 제족이 봉래산 원교봉(圓嶠峯)에서 오서(五瑞)의 열매를 얻으니, 즉 잣나무 열매였다. 봉래 해송(海松)이라 하여, 은혜롭게 오행(五幸)을 얻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사해가 산업이 일어나서 교역이 왕성하게 되므로, 천하가 유족하였다. 第十六章 시(市)에 온 사람들은 영주(瀛州) 대여산(岱與山) 계곡에서 삼영근(三靈根)을 얻으니, 곧 인삼이었다. 그것을 영주 해삼이라 하였으며, 능히 삼덕(三德)을 보전하고 돌아갔다. 대개 인삼이 그 수격(數格)을 갖추어, 자삭방(磁朔方)에서 난 것은 반드시 장생하니 40세(歲)를 1기로 휴먼하고, 13기를 1삭(朔)으로 축정(蓄精)하고, 4삭을 경과하여 씨(子)를 맺어 화(化)하니, 이러한 것은 부도의 지역이 아니고는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방삭초(方朔草)라 하니, 세상에서 불사약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 혹 작은 뿌리라도 부도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은 모두 영효(靈?)가 있으므로, 시(市)에 온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구하였다. 대저 삼근영초(三根靈草)의 인삼과, 오엽서실(五葉瑞實)의 잣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의 부인은 진실로 불암삼역(不咸三域)의 특산이요, 사해제족(四海諸族)의 천혜(天惠)였다. 제 5 장 : 오행(五行)의 화(禍) 第十七章 이 때에 도요(陶堯)가 천산(天山)의 남쪽에서 일어났다. 일차로 출성(出城)한 사람들의 후예였다. 일찍이 제시(祭市)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보(堡)의 간(干)에게서 도(道)를 배웠다. 그러나 원래 수(數)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9수5중(九數五中)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중5(中五) 이외의 8은, 1이 즉 8이라고 생각하고, 내(內)로써 외(外)를 제어하는 이치라 하여, 오행(五行)의 법을 만들어 제왕의 도를 주창하므로, 소부(巢夫)와 허유(許由) 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요가 곧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냈다.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有因)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임검(壬儉)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나갔기 때문에, 비어 있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습격하니, 묘예가 마침내 동·서·북의 삼방(三方)으로 흩어졌다. 요가 곧 9주(九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중에 사는 제왕이라 칭하여,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와 대립하였다. 때에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명협(蓂莢)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역(曆)을 만들고, 천부(天符)의 이치를 폐하여 부도(符都)의 역을 버리니, 이는 인세 두번째의 큰 변이었다. 第十八章 이에 임검씨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후손 유호씨(有戶氏)의 부자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을 하고, 공순하게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유호씨가 묵묵히 그 상황을 관찰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겼다. 이보다 먼저 유호씨가 부도에 있을 때에 칡을 먹고 오미를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키는 열 자요,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보다 나이를 100여살이나 더 먹었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직업(業)을 이어, 임검씨를 도와, 도를 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에 이르러 사자(使者)가 되어, 완미(頑迷)한 세상을 구제하니, 그가 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에 요가 유호씨의 아들 유순(有舜)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 가운데 딴 뜻이 있어, 일을 맡기고, 도와 주며, 두 딸로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이 일찍이 부도의 법을 행하는 환부가 되어, 마침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第十九章 이 때 유호씨가 수시로 경계를 하였으나, 순은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는 고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요의 촉탁을 받아들여 현자를 찾아 죽이며, 묘족(苗族)을 정벌하였다. 유호씨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꾸짖고, 그를 토벌하니, 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요는 몸을 둘 땅이 없으므로, 순에게 양위하고, 자폐(自閉)하였다. 유호씨가 이르기를, 오미의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오행(五行)의 화를 만들었으므로, 죄는 땅에 가득하고, 북두성은 하늘을 가리어, 수사(數事)가 많이 어그러져, 인세(人世)가 곤고(困苦)하여 졌다. 이는 불가불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혹 용서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알고 범하는 자는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하고 곧 차자(次子) 유상(有象)에게 명하여 권사(勸士)를 이끌고 무리를 모아 죄를 알리고, 그를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당도(唐都)를 혁파(革罷)하였다. 요는 유폐(幽閉) 중에서 죽고, 순은 창오(蒼梧)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의 무리 우(禹)가 순에게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버렸다. 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우가 곧 정명(正命)으로 입공(立功)한다고 말하고, 상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서 우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에게 항거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였다. 第二十章 우가 마침내 부도를 배반하고 도산(塗山)에 단(壇)을 설치하였다. 서남 제족을 정벌하여, 제후(諸候)라 하고, 도산에 모이게 하여, 조공을 받았다. 이는 부도 제시(符都際市)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으나, 폭돌(暴突)한 것이었다. 이에 천하가 시끄러워, 부도로 도망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우가 곧 수륙(水陸)의 길을 차단하여, 부도와 연락을 끊고, 내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감히 부도를 공격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에 유호씨가 서벙에 살면서, 묘예(苗裔)를 수습하여, 소부와 허유가 사는 곳과 통하고, 서남 제족과 연락하니, 그 세력이 심히 왕성하여, 스스로 읍(邑)을 이루웠다. 유호가 곧 권사(權士)를 보내, 우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요는 천수(天數)를 몰랐다. 땅을 쪼개서 천지를 제 멋대로 하였다. 기회를 틈타 독단(獨壇)을 만들고, 사사로이 개나 양을 기르기 위하여, 사람을 몰아낸 후, 자칭 제왕이 되어, 혼자서 처리 하였다. 세상은 토석(土石)이나 초목처럼 말이 없고, 천리(天理)는 거꾸러 흘러, 허망에 빠져버렸다. 이것은 거짓으로 천권(天權)을 훔쳐, 사욕의 횡포를 자행한 것이다. 제왕이 만약 천권을 대행하는 것이라면, 능히 일월(日月)을 개폐(開閉)하여, 만물을 조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제왕이란 수의 요체(數諦)요, 사람이 거짓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으로 칭하면, 다만 사기와 허망의 나쁜 장난이 될 뿐이다. 사람의 일이란 증리(證理)요, 세상의 일이란 그 증리한 사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니, 이 이외에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도의 법은 천수의 이치를 명확하게 증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무(本務)를 수행하게 하고, 그 본복(本福)을 받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비록 선후는 있으나, 높고 낮음이 없으며,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비록 친숙하고 생소한 것은 있으나, 끌어들이고 몰아내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해가 평등하며, 제족(諸族)이 자행(自行)하는 것이다. 오직 그 오미(五味)의 죄책을 보속(報贖)하는 것과, 대성의 일(大成之業)을 회복하는 것은, 언제나 일인 희생의 주관아래 있는 것이요, 여러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이 일은 예로부터 세상 일(人世之事)에 섞이지 아니하였다. 황궁(黃窮)씨와 유인(有因)씨의 예가 바로 이것이다. 第二十一章 또 그 소위 오행(五行)이라는 것은, 천수(天數)의 이치에 이러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방위(方位)의 중앙 5는 교차(交叉)의 뜻이요, 변행(變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하는 것은 1로부터 9까지 이므로, 5는 언제나 중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9가 윤회하여, 율(律)과 여(呂)가 서로 조화를 이룬 후에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는 기수(基數)를 이르는 것이요, 그 5,7이 크게 번지는 고리(大衍之環)에 이르면, 그 자리가 5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4,7이 있는 것이다. 또 그 순역(順逆) 생멸(生滅)의 윤멱(輪冪)은 4요, 5가 아니니, 즉 원수(原數)의 9는 불변수이기 때문이다. 또 윤멱이 한 번 끝나는 구간은 2X4=8 사이의 7이요, 5가아니다. 또 그 배성지물(配性之物)은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다섯 중에서 금(金)과 토(土)를 왜 따로 구별하는가. 그 약간의 차이 때문에 구별을 하고자 한다면, 기(氣)풍(風)초(草)석(石)따위는 어찌 같이 들지 않는가. 그러므로, 다 들자면, 수가 없는 것이요, 엄별해서 들자면, 금,목,수,화 혹은 토,목,수,화의 넷이요, 다섯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 물성(物性)을 어떤 이유로 수성(數性)에 짝지우는가, 수성지물(數性之物)은 그 원수가 9요, 5가 아니다. 그러므로 5행의 설은, 참으로 황당무괘한 말인 것이다. 이로써 인세를 증리(證理)하는 일을 무혹(誣惑)하여, 곧 천화(天禍)를 만드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第二十二章 또 그 역제(曆制)는, 천수(天數)의 근본을 살피지 못하고, 거북이나 명협의 미물(微物)에서 근본을 취하였으니, 요는 또 무슨 속셈인가. 천지의 만물이 다 수에서 나와, 각각 수를 상징하고 있는데, 하필 거북과 명협 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물사(物事)에, 각각 그 역(曆)이 있으니, 역이라는 것은 역사(歷史)다. 그러므로, 요의 역제는, 즉 거북과 명협의 역이요, 인간의 역이 아니니, 그것이, 인세(人世)와 불합(不合)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삼정(三正)을 번복하여, 구차스럽게 맞추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마침내 하늘의 죄를 끌여들였다. 역(曆)이라는 것은, 인생증리(人生證理)의 기본이므로, 그 수는 몸소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면,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증합(證合)하여 복이 되고, 역이 바르지 못하면, 천수에 어긋나 화가 되니, 이는 복은 이(理)가 존립(存立)하는데 있고, 이는 정증(正證)에 존립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은, 인세 화복(禍福)의 발단이니, 감히 삼가 하지 않을 것인가. 옛날, 오미(五味)의 화(禍)가, 한사람의 미혹에서 나와서, 만대의 산사람(生靈)에게 미치고 있는데, 지금 또 다시 역의 화가, 장차 천세(天世)의 진리에 미치고자 하니, 두렵기만 하구나. 第二十三章 천도(天道)가 돌고 돌아, 종시(終始)가 있고, 종시가 또 돌아, 4단씩 겹쳐 나가, 다시 종시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를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니, 사에는 13기(期)가 있고, 1기에는 28일이 있으며, 다시 4요(曜)로 나뉜다. 1요에는 7일이 있고, 요가 끝나는 것을 복(服)이라 한다. 그러므로, 1사에 52요복이 있으니, 즉 364일이다. 이는 1,4,7성수(性數)요, 매 사의 시작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으니, 단과 1은 같기 때문에 합하여 365일이 되고, 3사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이 있으니, 판은 사의 2분절이다. 이는 2,5,8법수(法數)요, 달이 긴 것이 1일과 같기 때문에, 제 4의 사는 366일이 된다. 10사의 반(半)에 대회(大晦)에 구가 있으니, 구는 시(時)의 근원이다. 300구가 1묘(?)가 되니, 묘는 구가 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묘를 지내서 각(刻), 분(分), 시(時)가 1일이 되니, 이는 3,6,9의 체수(體數)다. 이와 같이, 끝나고 또 시작하여, 차차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쳐서, 이수(理數)가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저 요의 이 세가지 잘못은, 허위(虛僞)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가히 부도 실위(實爲)의 도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허위는, 안에서 이(理)가 불실하여, 마침내 멸망에 이르고, 실위는, 이(理)가, 나를 언제나 만족하게 하여, 스스로 함께 존립한다. 第二十四章 유호(有戶)씨가 이와 같이 단단히 타일러서, 제법(諸法)을 폐지하고, 부도로 돌아 올 것을 권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위협이고, 모욕이라 하여, 곧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수차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모산(茅山) 진지(陣地)에서 죽었다. 이에 하중(夏衆)들이 비분하여, 죽기를 원하는 자가 수 만이였다. 이는 거의가 우와 함께 치수(治水)를 한 무리들이었다. 우의 아들 계(啓)가 이 대군을 이끌고, 유호씨의 읍(邑)으로 진격하여 오니, 유호씨의 군은 불과 수 천이었다. 그러나, 하군(夏軍)이 싸우면 반드시 패하여, 한번도 전적을 거양하지 못하였다. 계가 마침내 두려워서 퇴진하고, 다시 공격하지 못하자, 그 무리가 격양되었다. 이에 유호씨가 하중(夏衆)이 눈이 먼 것을 보고, 고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장차 서남제족(西南諸族)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읍(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제 6 장 : 잃어버린 부도의 법 第二十五章 이로부터, 천산(天山) 남쪽 태원(太原)의 지역이, 뒤숭숭하고 떠들썩하며, 주인이 없는 것과 같아서, 소위 왕이란 자는 눈이 멀고, 소위 장님은 백성이 되어, 암흑이 중첩하였다. 강자는 위에 있고, 약자는 아래에 있어, 왕과 제후를 나라에 봉하고, 생민(生民)을 제압하는 풍폐(風幣)가 만연하여 고질이 되고 마침내 서로 침탈하기에 이르니, 헛되게 생령(生靈)을 죽이고, 한가지도 세상에 이로운 것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하은(夏殷)이, 다 그 법으로 망하고서도, 끝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는 스스로 부도에서 떨어져 나가, 진리의 도를 들을 수 없게 된 까닭이었다. 어느덧 유호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성생(月息星生)의 땅에 들어가니, 즉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의 후예가, 오히려 소(巢)를 만드는 풍속을 잊지 아니하고, 고탑(高塔)과 층대(層臺)를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천부(天符)의 본음(本音)을 잊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여, 도를 와전하여,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싸우고 정벌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마고(麻姑)의 일은 거의가 기괴하게 되어, 허망하게도, 형적이 아주 없어지니, 유호씨가 두루 제족의 지역을 돌고, 마고와 천부의 이(理)를 설(說) 하였으나, 모두가 의아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 전고자(典古者)가 송구스럽게 일어나서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유호씨가 본리(本理)를 술회하여, 그것을 전하였다. 第二十六章 임검씨가 유호씨의 행상(行狀)을 듣고, 그 길을 장하게 여겨, 유호씨의 족(族)에게 교부(敎部)에 취업하게 하여 살도록 하였다. 이때에, 임검씨가 하토(夏土)의 형세를 심히 걱정을 하고, 마침내 입산(入山)하여, 해혹복본(解惑復本)의 도를 전수(專修)하였다. 임검씨의 아들 부루씨(夫婁氏)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천지가 하나의 이치가 되는 것을 증명하여, 인생이 일족(一族)이 되어, 크게 부조(父祖)의 도를 일으키고, 널리
101    중국의 금기와 숭배 댓글:  조회:3563  추천:0  2012-07-30
중국의 금기와 숭배   금기에 대해서 예부터 금기(禁忌)는 어느 나라나 있었다. 금기는 중국어로 '기휘(忌諱)'라고 한다. '기(忌)'와 '휘(諱)'라는 두 글자는 금문에까지 나오는 말로서 모두 '금기하다'거나 '두려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금기는 천벌을 무서워하는 인간의 공포심리에서부터 기인된 것으로 스스로를 단속하여 재앙을 피하려고 했던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인간의 영원한 공포 생존수단에서 비롯된 금기 고전 저서나 현존하는 야만부락의 일부 풍속 또는 일부 소수민족의 습속으로 볼 때 적지 않은 금기가 죽음을 두려워하여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생존의 수요이다. 이러한 생존수요의 박탈은 인생의 가장 큰 재앙이 되었다. 사람은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음식이 없으면 굶어 죽게 된다. 그들은 오직 신령을 침범하지 않는 다면 신령은 그들을 굶어 죽지 않도록 벌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냥꾼들은 산신령을 숭배하고 물고기를 낚는 사람들은 수령신을 숭배하며 농사꾼들은 오곡신령을 숭배하면서 신들을 침범하는 일은 금물이라고 여기게 된다.   나시족 늪에서 여자들이나 아이들의 기저귀를 씻는 것을 금기하고 있다. 용왕신을 범할까 두려워서이다. 산에서 방목을 할 때 절대 산기슭에 있는 돌이나 불을 지폈던 자리에 소변을 보지 않는다. 돌신령을 건드릴까 두려워서이다.   독룡족 집사람이 사냥하러 가거나 종자를 심으러 나가는 날에는 손님이 오는 것을 꺼려했다. 짐승을 잡지 못하거나 심은 종자가 싹이 트지 않을 걱정에서다.   노족 사냥을 가서 한족말이나 다른 민족 말을 하는 것을 금기하였다. 벼랑신이 노족말이나 장족 말밖에 알아들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른 족말을 하면 그들에게 사냥한 짐승을 주지 않는다고 여겼다.   조상숭배 장례식의 수의에는 옷깃이 없고 단추가 없어야 하는데, 중국말로 옷깃을 뜻하는 링즈(領子)는 '자식을 데리고 간다.'라는 뜻으로, 단추를 뜻하는 글자는 '자식을 잡고 놓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는 결국 죽은 사람이 산사람을 데려가는 것, 즉 죽음을 두려워한 것에서 온 것이다. 노인이 죽으면 이름이나 호와 같은 글자를 말하는 것을 금기한다. 고대에서 임금이 죽어도 이를 행했었다. 심한 경우에는 아버지의 이름에 '악(岳)'자가 있으면 평생 음악을 듣지 않거나 '고(高)'자가 있으면 떡이나 과자(''는 발음이 같은 gao)조차도 먹지 아니하였다. 주문왕이 이른바 '이름을 말하면 직접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주문왕은 고인을 생각하면 살고 싶지 않을 정도라고 했는데 그것은 고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슬퍼지고 이름만 들으면 생전의 일이 생각나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부르고 기억해야 마땅하지만 죽은 후에는 친하던 사람들도 악귀로 변한다고 여겼다. 이는 역시 죽음을 멀리해야 할 존재로 인식한 것에서 온 것이라 할 수있다.   혼인과 임신의 금기 약탈혼인의 발생 혼인이라는 婚자는 '계집 녀(女)'자 변에 '어두울 혼(昏)'자로 이루어졌는데,이는 어두운 밤에 장가를 든다는 의미이다. 『주역(周易)』에 이에 관한 작품이 있음 屯如 如 머뭇거리네. 乘馬班如 네 필의 말이 배회하네. 匪寇 비적이 아니라. 婚 혼인하는 사람들이로다. 乘馬班如 네 필의 말이 배회하고. 泣血漣如 여자는 흐느껴 우는 구나. 고대의 혼인수단이 강도와 별차이가 없는데 이는 약탈혼의 증거를 보여주는 예이다. 見豕負途 흙투성이 돼지를 보고 載鬼一車 귀신을 가득 태운 차가 보이니 先張之弧 화실을 당기려다 後說(脫)之弧 그냥 두었노라 匪寇 실은 비적이 아니라 婚 혼인하는 사람들이었노라 '초를 켜고 말에게 길을 비추다'라는 말이 『의례』에서 나오는데 이는 밤에 신부를 맞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미 약탈혼은 없어졌지만 약탈혼의 흔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부락사이의 접촉이 빈번하지 않았던 인류사회에서 근친상간은 거의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공포는 열성인자의 양성이였고, 문화적의미에서는 가정관념이 생기고 나서 '난륜'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약탈혼으로 말미암아 우수한 유전자를 취하는 것이다.   동성불혼설 앞에서 알아 보았듯이, 고대에서 이어져온 우성에 대한 관점때문에 이러한 동성불혼설이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녀가 동성이면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노라.' (『좌전(左傳)』,「희공(僖公)23년」) 동성이면 제사를 같이 지내게 되는데 여기에는 연합의 뜻이 있다. 때문에 성씨로 묶고 가르지 않으며 먹을 거리를 나누어 먹으며 똑같이 지낸다. 따라서 백 세대가 지나도 혼인은 하지 못한다. 이것이 원만한 이치라 하겠다.(『공자기어(孔子家語)』) 신비한 것이 금기가 된다   괴이한 현상과 공포 옛 사람들은 알 수 는 자연 현상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꼈다. 세월이 나감에 따라 어느 도 현상들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고, 공포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근원을 알 수 는 금기들이 있는데, 어떠한 방법을 다하여서라도 그것과 거리를 두게 된다. 원래부터 신비한 것은 금기였고, 줄곧 금기하다 보니 더욱 신비해진 것이다. 수해 은 경우 알 수 없는 자연의 재해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알 수 없는 초월한 존재에 의해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여러 신들을 만들게 된 이다.   동물의 신비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써,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맹금류의 날카로운 발톱과 날 수 있는 능력, 육식동물들의 강인한 이빨, 뱀의 재생성 등은 고대인들의 두려움과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에는 수성과 인성의 합일화된 모습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후에 많은 자연현상들의 이해와 동물들을 제압할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이러한 동물들의 신비화는 점차 희석되어 버리고 만다.   금기는 예와 교육을 형성하게 된다. 금기와 예, 그리고 교육 고대로 부터 이어져 내려온 수많은 금기들이 사람들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게 된다. 이를 더 체계적으로 제어 할 수 있게 된 방편이 예의다. 질서의 확립과 규제로 인하여 안전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존수단의 전수와 문화의 전수적 측면에서 교육은 이러한 예를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더 나아가 확실한 금기의 경계를 위해 서로에게 제제를 가할 수 있는 법을 만들게 된 것이다.   금기로 인해 생겨난 문학 문학작품에서 비판의 힘은 기성 질서에 대한 파괴로부터 나온다. 사회 규제를 위해서는 수많은 금기들이 필요했는데, 작가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금기들을 범하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금병매』에서 나오는 결말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점을 문학작품에서 이룸이었는데, 이는 인간의 욕망을 문학에서 이루어 만족시키려는 것이 된다.   금기와 숭배의 관계 두려움이 금기를 생성하였고, 두려움에 대한 경외심과 여러가지 측면들이 숭배를 낳게 되었다. 금기는 언제나 넘어서지 못할 미지의 세계인 동시에, 넘어가보고 싶은 욕망의 한계선이 된 것이다. 숭배는 알 수 없는 현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반영이 된 셈이다. 현대에서는 수많은 알 수 없는 현상들을 과학적인 근거하에 규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 역시 두려움을 없애려는 행위로 이해 할 수 있다.   해음(諧音) 중국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준수하는 금기나 길상(吉祥)을 추구하는 선호(選好)의 풍속은 종류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다. 같은 내용의 풍속들이라 해도, 지역과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들을 띠고 있다. 일단 불행과 관련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는 최대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중국인들의 기본 금기 사항이며,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들 단어들과 발음이 같아서 불행한 의미가 연상되는 각종 사물이나 행위도 금기시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해음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A와 B 두글자가 서로 다르지만 같거나 유사한 발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A를 이야기 하지만 동시에 B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음식문화에서의 해음 중국은 고대로부터 농경생활을 해왔으며, 오곡의 풍성함은 모든 이들의 바람이었다. 숭상하는 길상물 중에는 풍성함을 기원하는 바람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데, 용이 이러한 존재들 중의 하나이다. 물고기 또한 물과 비를 관장하는 영적인 존재로 여겨왔다. 『산해경』에서는 물고기를 홍수를 일으키고 가뭄을 가져오는 신비로운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물고기는 곧 오곡의 풍성함으로 직결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생선은'어(魚,yu)'라고 하는데, 이 발음은 '여유 있다' 혹은 '풍족히 남다'는 뜻의 '여(餘,yu)'의 발음과 같다.   중국인들이 생선을 특별히 선호하는 것은 항상 풍족함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식사뿐만 아니라 제사를 지낼 때 혹은 명절날이나 축하연에서 생선은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되었다. 춘절에 생선요리를 먹는 것은 필수코스인데, 이날은 특별이 잉어를 먹는다고 한다. '이(鯉)'의 발음이 '이익 된다'는 이(利,li)'와 같아서 새해에도 좋은 일이 있으라는 의미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복숭아를 먹음으로써 장수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노인들의 생일잔치에는 장수면(長壽麵)이외에 복숭아가 필수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날 등장하는 복숭아는 장수한다는 수(壽)를 붙여서 특히 '수도(壽桃)'라고 부른다. 계절적 영향으로 복숭아가 나지 않을 때에는 밀가루나 쌀가루로 만든 복숭아 모양을 한 '수도'를 준비한다.   중국의 남방에서는 귤(橘,ju)과 여지(枝,li zhi)라는 과일을 함께 베갯맡에 두었다가 춘절날 일어나서 먹는 풍속도 있는데, 두 과일의 발음이 '吉利(ji li)'와 유사하기 때문에, 새해에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각종기피 음식들 후베이(湖北)지역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일반적으로 닭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금기가 있다. 기아(飢餓)가 연상되는 기(飢,ji)와 닭 계(鷄,ji)의 발음이 같아서 신령에게 불경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장쑤성일대에는 제사 때에는 콩을 쓰지 않는데, '콩 두(豆,dou)'는 '싸우다' '투쟁하다'라는 뜻의 투(鬪,dou)'와 같은 발음이기 때문이다. 이는 집안 자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쓰지않는다고 한다. 다만 콩으로 만든 음식 중에는 두부는 종종 쓰이는데, 두부(豆腐)' 부(腐,fu)'의 발음이 '부(富,fu)'혹은 '복(福,fu)'과 발음이 같아서 재운을 상징하는 음식이기 때문에 사용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여러 가지 풍습들 한식날 불을 사용하지 않는 금기에 대해서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 충신이었던 개지추(介之推)를 추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 내용은 진나라 문공(文公)이 온갖 시련 끝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기 전 고초를 겪을 때 그에게 충성을 다한 개지추에 대해 날이 갈수록 소원해져 갔다. 개지는 괴로운 나머지 노모를 모시고 은둔해버렸다. 진문공은 살신성인의 충신인 개지추를 소홀히 대한 것에 대해 부끄러운 나머지 그를 다시 찾았으나 개지추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면산에 불을 지르면 효성이 지극한 그가 노모를 모시고 산에서 나오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3일간의 산불이 꺼진후 개지추는 노모를 부둥켜안고 불에 탄 채로 발견 되었다. 진문공은 개지추와 그의 노모를 후히 장사지내고 그가 사망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차가운 음식을 먹도록 명하였다. 바로 이날이 청명절하루 전날이라 한다. 이후에도 개지추의 죽음을 기려 날음식을 먹을 지언정 불의 사용을 금하는 풍습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신도(神茶)와 울루(鬱壘)는 본래 전설 속에 나오는 인물로서,『산해경山海經』의 기재에 의하면 도삭산(度朔山)이라는 곳에 살던 형제였다. 이 산에는 매우 거대한 복숭아나무가 있었는데, 그 잎이 삼천 리에 걸쳐 뻗어 있었다고 한다. 그 복숭아 나무의 동북방에는 귀문이 있어서 귀신들은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신도 형제는 이 문에서 지켜 서서는 악귀들을 만나기만 하면 이들을 갈대로 묶어서 호랑이에게 먹였다. 그래서 귀신들이 함부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사람들을 해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삭산의 복숭아나무가 능히 귀신을 몰아내는 효엄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하여 복숭아나무 조각을 대문에 걸어 놓고는 그 위에 '신도' '울루' 두 영제의 이름을 써 넣어서 귀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귀신을 쫓는 내용의 주문을 써 넣었고, 그리하여 도부(桃符)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壓歲錢(혹은壓巾錢)'에도 고사가 있는데, 옛날 수(巾)라는 요괴가 있었다. 이 요괴는 설날 전날 밤만 되면 나타나서 아이들을 해치곤 하였다. 손으로 깊이 잠든 아이의 이마를 만지면 아이는 놀라 울면서 열이 오르곤 하였는데, 열이 가시면 원래 총명하던 아이도 바보 같은 아이로 변하였다. 어느 부부가 설날 전 날밤 붉은 실에 동전 8개를 꿰어서 아이의 베갯 맡에 두었다. 한밤중이 되자 과연 수란 요괴가 아이에게 접근하였다. 하지만 동전으로부터 갑자기 밝은 빛이 나오면서 수는 놀라 도망을 쳤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설날 전날 밤이 되면 같은 방법으로 동전을 잠자는 아이들의 베갯 맡에 두어서, 귀신의 장난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붉은 실에 꿰어 아이를 보호하는 이 동전들을 '壓歲錢(혹은壓巾錢)'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춘절 전날 밤에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붉은 실에 꿰인 동전이나 지폐를 넣은 붉은 봉투를 주면서 축복의 덕담을 건네준다.'누른다'는 뜻의 '압(壓)'이라는 글자 그대로 이들 돈은 아이들의 베갯 맡에 눌려서 하룻밤을 지내며 새해의 도래를 기다리게 된다.
100    중한 민간관계 비망록--용수작성 댓글:  조회:2930  추천:0  2012-07-30
중한 민간관계 비망록 현용수 작성 2009년 한국의 韩민족은 조선의 조선민족과 하나의 같은 겨례로서 韩(조선)반도에서 유구한 력사를 기록하여 왔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등 력사에 대하여 지금 중국학술계와 한국학술계에서 많은 쟁의점이 있기때문에 이 방면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확인된 반도내의 삼한의 력사부터 신라, 백제, 가락, 왕씨고려, 리씨조선을 경과하여 적어서 이미 20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다.   리씨조선 말기에 와서 조정은 일본, 청조, 로씨야등 주변 대국들의 싸움에 부대끼다가 1910년에 《경술국치》를 당하여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5년간 망국노의 슬픈력사를 겪기도 하였다. 이기간 많은 애국투사들이 중국에 망명하여 여러가지 투쟁형식으로 광복운동을 활발히 벌린 반면에 반도 본토에서는 또 많은 친일분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이 전패하게 되자 잃었던 땅은 되찾았지만 미국과 쏘련의 세력범위 쟁탈에 말려들어 반도는 그만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한국과 조선은 같은 겨례이면서도 민족의 공동한 리익을 돌볼사이 없이 서로 자기의 상전국의 리익을 위하여 원쑤가 되여야만 하였다. 민족이 약소했기때문에 어쩔수 없이 당하게 된 또 하나의 치욕의 력사였다.   1950년, 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그 전해에 금방 건립된 새중국 정부에서는 나라의 동북변경이 미국의 엄중한 위협을 느끼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중국 정부에서는 한창 열기를 띤 대만수복 전역을 단연히 중단하고 군대를 돌려 조선에 파병하여 세계 초대강국인 미국과 정면대결하게 되였다. 그당시 한국의 리승만정권은 미국의 부축을 받아 건립된 정권이였기 때문에 미국의 동맹국 련합군에 편입되여 중국군과 대전하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한국과 중국은 서로 적대국가로 되였던 것이다.   1953년 휴전이후 한국 내부에서는 그칠새 없는 당파싸움으로 나라경제가 억망진창으로 붕괴의 변두리에 몰리게 되였으며 그렇다고 미국 어른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엄청난 희생을 낸 한국 국민들에게 별로 혜택을 주지도 않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당시 조선에서는 구소련과 중국의 지지에 힘입어 절대적 권위를 수립한 김일성 주석이 이미 안정된 나라환경에서 《천리마 운동》이라는 나라적 경제운동을 벌려 조선의 경제를 《세상에 부럼 없어라》하고 자랑할 정도까지 발전시켰다.    1962년 한국에서 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비록 정치상에서는 군사적 독재통치를 실시하였지만 장기간의 간고한 모색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를 살려내는 길을 찾아냈으며 《새마을 운동》과 같은 전민적 경제살리기 운동을 발기하고 대담한 경제개혁을 실행하여 한국의 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의 궤도에 올려 놓았다. 지난세기 7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였는데 그때로부터 한국 국민들의 민족정서는 점차 열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80년 5.18광주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선후하여 전두환, 로태우를 대표로 하는 극단적인 군사적 독재정권이 련속 집정하면서 정치상에서 한시기 심한 진통을 겪기도 하였지만 1988년 성공적으로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한국의 경제는 일약 세계 선진국 행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한국 국민들은 세계에 대하여 진일보 인식하게 되였으며 이때로부터 한국 국민들에게서는 군사적 독재통치를 반대하고 전민적 참여정치를 제창하는 한국식 민주의식이 산생하기 시작하였다.    1991년 쏘련의 해체와 더불어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고 랭전이 끝나면서 세계의 자본체제의 나라들에서는 전례없는 정치, 경제의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이런 세계적 대 기후에 힘입어 한국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였으며 한국 국민들의 민주의식과 민족정서는 전례없는 고조를 맞이하게 되였다. 세계의식이 크게 제고된 한국국민들은 자기민족의 약소함을 통절히 느끼게 되였으며 1990년의 독일통일에서 희망을 보아내고 반도의 남북통일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이와 반면에 조선에서는 엄중한 국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장기간 조선의 번영발전의 보장이였던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면서 조선은 갑싼 에네르기와 생산자료 공급기지를 잃게 되였으며 조선산품을 수출할 국제 시장을 잃게 되였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서거를 계기로 조선에서는 암울하고 혹독한 《고난의 대행군》을 시작하게 되였다.   중국에서는 일찍 1966년부터 시작하여 10년을 지속된 문화 대혁명으로 하여 나라의 경제가 거의 붕괴의 변두리에 이르게 되였었다. 1976년 모택동 주석의 서거를 계기로 사인방이 잡혀 나오고 이미 타도되였던 등소평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부터 1978년에는 정식으로 개혁개방 방침을 제출하고 나라의 대문을 세계에 향하여 서서히 열기에 이르렀다.   1989년에 천안문 학생사건이 일어나자 등소평은 중국 실정에 맞지않는 서방 민주사조를 과단하게 진압하면서 성공적으로 나라의 분렬을 방지하였고 성공적으로 세계적 사회주의 위기로부터 오는 거센 충격을 격퇴시켰다. 이리하여 이미 10년이나 탐색하여온 개혁개방의 대문을 더욱 자신있게 더욱 크게 열수있게 되였다. 효과적인 경제정책으로 10억 인구의 먹는 문제가 해결되자 중국에서는 더욱 대담하게 더욱 크게 경제개혁과 정치체제개혁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경제비약의 고속도로를 수건하기 시작하였다.   랭전시기 중국과 한국은 40년간이나 서로 적대국가로 지내오면서 래왕이란 거의 없다싶이 되였었다. 랭전이 끝나고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실시하게 되면서부터 중국에서는 경제가 단시기내에 기적적으로 발전한 한국을 아주 신비하게 생각하였으며 그 발전비결을 몹시 알고싶어 하였다. 한편 한국인들은 여태까지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던 중공이 옆에서 서서히 부상하여 일어나는것이 두렵기도 하고 또 호기심도 나서 여러 방면으로 시탐하던 끝에 1992년 정식 수교하기에 이르렀다.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 대량의 한국인들이 중국에 건너와 기업을 꾸리고 장사하게 되면서 중국에서 선진국 우대를 받으면서 재록신으로 떠받들기우는것이 한없이 즐거웠고 중국의 너무나 값싼 인건비에 한없이 즐거웠으며 중국의 너무나 방대한 시장에 한없이 즐거웠다. 그시기의 한국인들의 심정은 마치도 매장량을 가늠키 어려운 대형 금광이라도 발견한 심정이였을 것이다.   중국에 와서 자기민족의 우월감을 한껏 맛본 한국인들은 자연히 구세주의 안광으로 중국조선족 겨례들을 살펴보게 되였다. 자기들의 표준으로 대비해 보니 중국조선족 겨례들의 생활이 너무나 비참하다고 느낀 그들은 갖은 방법을 대여 중국조선족 겨례들을 한국에 건너가서 돈벌이 할수있게 조건을 마련하였다. 그때는 아직 중국이 WTO에 가입전이였으니깐 미국돈 한딸라에 인민페 10원까지 바꿀수 있었으므로 한국에 가서 일하여 가장 낮은표준으로 로임을 받는다 하여도 중국에서의 거의 10배에 해당되는 수입으로 될수있였다. 그후 중국조선족 겨례들의 한국에 건너갈수있는 정책성 제한이 많이 풀리고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한국에 가서 일하는것이 중국조선족 겨례들의 가장 선호하는 치부도경의 하나로 되였다.   중국경제의 발전질량이 높아감에 따라 중국에서는 점차 외국 투자인들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으며 시장관리가 보다 엄격하여졌다. 그리하여 적은 투자로 또는 총명한 머리만 가지고 중국에 와서 크게 부자되여 보자던 많은 한국인들의 꿈은 박살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필경 한국이 아니니깐 한국인들은 중국에 와서 많은 제한을 받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꿈이 깨진 한국인들은 자기들에게는 이렇게 큰 나라가 없는것이 한없이 원통하였을 것이다.    전례없이 팽창되여가는 민족의 정서에 만족을 주기 위하여 한국의 일부 소장파 학자들은 민족의 력사에서 가장 강성했던 시대를 찾게되였다. 당연히 고구려가 지목되였다. 그들은 갖은 방법을 다하여 고구려의 력사를 위대하게 부각하고 신비하게 미화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민족에게도 일찍 이렇게 강성한 시대가 있었다.》하고 민족의 자부심을 가질수 있었으리라. 심지어 일부 극단적인 한국인들은 앞으로 방법을 대여 옛고구려 땅을 중국으로 부터 되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1999년 좌우, 원래 한국에 대하여 료해가 깊지못했던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한국의 급속히 팽창되여 가는 민족정서에 깜짝 놀라면서 부랴부랴 고구려사 연구를 시작하게 되였다. 이렇게되자 한국의 학자들은 더욱 긴장해 하면서 락후하던 중국이 놀라운 속도로 강대하게 부상해 일어나는데 대한 우려로부터 《중국이 이제 강대하게 되니까 자기의 전략적 수요에 의하여 동북아의 력사를 다시 쓰려 하는것이다.》라고 추측하게 되였던 것이다.   2002년, 한국학자들이 우려하던 일이 끝내 발생하였다. 그해 6월24일 중국 지식계의 주류신문인 《光明日报》에서는 《边众》이란 필명으로 《고구려 력사연구에서의 몇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이라는 제목의 문장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고구려 정권의 성질은 반드시 중원왕조의 제약과 지방정권의 관할을 받은 고대 변강민족 정권이라고 해야한다》. 그러면서 문장은 반도력사에서 왕씨고려의 국명은 전략적 목적으로 중국 고대 변강력사상의 고구려의 국명을 도용한것이며 그후의 리씨조선의 국명은 역시 전략적 목적으로 중국 고대 변강력사상의 기자조선의 국명을 도용한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관점은 즉시 한국 학술계의 드센 반발을 일으켰다. 서울대학의 이성규 교수는 강한 분개를 표시하면서 문장을 발표하여 제출하기를 《만약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발해등 력사가 모두 중국 소수민족 력사가 되여 력사의 일부분에 편입된다면 가능하게 한국사는 중국에 흡수되지 못한 한갈래의 지류에 불과하게 되며 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야만적이고 락후한 군체의 력사로밖에 될수없다》. 심지어 한양대학의 한 교수는 문장을 발표하여 중국의 행위는《력사 제국주의》행위라고 질책하기까지 하였다.   한국 학술계의 반발에 대하여 가장 먼저 성원을 보낸 매체는 한국의 《조선일보》였는데 그들은 사설을 발표하여 중국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를 《중국이 이렇게 하는 목적은 조선족이 거주하는 동북지구와의 관계를 다시 확정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북한 지구에 들어갈 리유를 조작하려는 것으로서 고도의 전략의도가 숨겨져 있다》.   2003년 12월9일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고학회, 한국근현대사학회 등 17개의 학회에서는 서울 력사박물관에서 집회를 가지고 련합성명을 발표하여 중국에 엄정히 요구를 제출하였다; 《중국에서는 고구려사를 중국력사에 편입해 넣는 력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즉각 중지해야 한다》.   2003년12월12일 한국의 25명의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중국을 돈촉하여 력사의 왜곡을 정지시킬 결의안》을 제출하면서 한국정부는 반드시 중국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제출하여야 하며 조선과 손잡고 공동히 대응방안을 내와야 한다고 인정였다. 이 결의안은 기본상에서 한국 정부측의 긍정적 답복을 받았다.   2003년 12월13일 당시의 한국 국무총리 고건은 회의를 소집하고 중국이 동북지구의 고대사를 다시 연구하는 실정에 대처하여 한국에서도 《고구려사 연구센터》를 성립하여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공작을 가강할것을 결정지었다.   이기간 한국 각지의 여러계층에서도 여러가지 형식으로 집회를 가지고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성토하였으며 인테넷에서는 두나라 누리꾼들의 쟁론이 갈수록 치렬하고 거칠어만 갔다. 그리하여 2007년에 와서는 중국 창춘에서 열린 제6회 창춘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여자 5000m 계주 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한국팀이 시상대에 《백두산은 우리땅》이라는 문구를 들고 올라서기에 이른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한시기 한국인들을 엄중하게 자극했던 중국《동북공정》사건이다. 소위의 《동북공정》이란 중국의 한 학술연구 항목인 《동북 변강력사와 현상황에 대한 계렬연구 공정》의 간칭이였다. 《중국 사회과학원》과 동북 3성에서 공동으로 련합하여 진행하였는데  17명의 전문가들로 령도기구를 구성하고 2002년 2월에 시작하여 5년이 걸렸으며 연구자금이 인민페로 약 1500만원이 투입되였었다. 기본종지는 《중국 동북변강 력사상의 의심되는 문제와 리론상의 어려운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였었다.   중국의 동북지구는 그 지리적 위치가 특수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자고로 중요한 전략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지구였다. 1949년 새중국 성립 초기에 중국의 동북 지구는 중요한 공업기지로서 중국의 경제건설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극히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된이래 전반 나라경제의 급속한 발전속에서 중국 동북지구에서는 새로운 문제들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례하면 광업도시의 자원고갈, 대량의 기업파산, 대량의 로동자실업, 경제장성속도 침체 … … 등이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중국정부에서는 《동북 로 공업기지 우대정책》을 제정하고 동북 로 공업기지를 신속히 부축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들을 전면적으로 연구하게 되였다.    《현실문제를 철저히 해결하려면 력사문제도 반드시 명확히 해야 한다.》는 많은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여 중국정부에서는 여러부문의 론증을 거쳐 방대한 계렬 연구항목인 《동북 변강력사와 현상황에 대한 계렬연구 공정》을 비준하였다. 그당시 동북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연구경비를 자체로 해결한다는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국무원의 비준을 받고 중앙재정에서 그 연구경비를 해결하여 주었던 것이다.     소위의 《동북공정》은 방대한 계렬 연구항목으로서 그의 연구범위는 중국 동북지구의 원시사회로 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반 력사였다. 많은 한국학자들은 중국의 소위의 《동북공정》은 주요하게 고구려의 력사를 대상하는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실 고구려의 력사는 전반 《동북공정》의 한 부분일 따름이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 책임자의 한사람이며 《중국 사회과학원 중국 변강사지 연구중심》주임인 厉声은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일련의 관점을 발표하였다:   고구려는 대략 기원전 37년 좌우에 건국되였는데 초기의 수도가 지금의 중국 辽宁省桓仁县五女山城이였다. 고구려 본신은 원래 유목민족이였는데 싸움에 능하였으며 력대의 중원정권과 조선반도 남부의 정권과 싸움이 빈번하였다. 강성기에는 동쪽으로 료동까지, 남쪽으로 지금의 조선 평양까지 지역을 넓혔다. 기원427년에 수도를 평양 대성산으로 옮겼다.   기원 668년에 당조군대와 신라군대가 남북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그후 전체 고구려 민족은 점차 중원의 당인이나 지방의 다른 민족에 융합되여 버렸다. 이것이 중국 력사상 유명한 “薛仁贵东征” 이다. 당조에서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립하고 원래의 고구려 지역을 관리하게 되였다.   고구려의 옹근 700년 력사에서 400여년은 수도가 지금의 중국 경내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의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고구려를 중국 고대 변강의 한 소수민족 정권으로 인정하는데 적어서 기원 427년에 수도를 평양에 옮기기 전까지는 론쟁할 나위도 없이 중국 변강력사의 일부분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중국 송조때에 편찬된 《旧五代史·高丽传》이후의 많은 사서들 중에서는 고구려와 고려가 정확히 구분되여 있지 않으며 고구려와 200년후의 고려를 서로 혼돈한 경우가 많다. 비록 《明史》이후에 와서 다시 구분되여 있기는 하지만 근대에 와서 한국의 많은 학자들은 이런 혼돈된 중국사서의 기록들을 근거로 삼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정권이라고 론증하면서 고구려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한국력사의 한부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의 학자들은 대량의 력사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연구 분석한 기초상에서 지리위치, 가족, 성씨, 혈연관계 등 그 어느방면으로부터 찾아 보아도 고려왕과 고구려왕과의 그 어떤 계승관계를 찾아 볼수 없으며 원래 조선반도 남부의 신라의 장군이였던 고려태조 왕씨가 200여년 전의 중국 동북지구의 고구려를 계승할수 있었다는 그 어떤 합리성도 찾아볼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금 중국 학자들을 가장 피동에 빠지게 하는 문제는 새중국이 건립된 초기에 중조 두나라의 특수한 정치관계로부터 출발하여 필요한 학술연구도 없이 전통인식에 의하여 고구려가 당연히 조선의 력사라고 인정되여 왔으며 그후 곽말약이나 범문란과 같은 주류 력사학자들의 저서에서도 고구려의 력사가 줄곧 세계사의 일부분에 편입되여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정치인소가 일체를 결정하였으므로 그 어떤 다른관점이 있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지난세기 60년대에 중조 두나라가 공동히 중국 동북지역에서 련합 고고발굴을 두번이나 진행하였었는데 발굴된 고구려의 문물을 모두 조선측에 넘겨 주었던 것이다.   고구려사 문제에 들어가서 조선과 한국은 언제나 고도로 통일된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이번 고구려사 쟁론도 원래는 중국과 조선간의 력사문제로서 한국과는 나라적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었지만 한국이 도리여 주인공으로 나서서 중국 학술계와 정면대결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력사상 고구려사 문제를 가지고 제일먼저 중국과 시비를 건 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지난세기 20년대 전후의 일본이였다. 그당시 일본은 조선반도를 성공적으로 병탄하고는 진일보로 중국의 동북지역을 넘겨 보면서 고구려사 문제를 가지고 영구점령의 리유를 만들려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고구려사에 대한 관점은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 책임자의 한사람이며 《중국 사회과학원 중국 변강사지 연구중심》주임인 厉声이 중국 학자들의 고구려사에 대한 최신연구에 근거하여 발표한 관점이다.   고구려사에 대한 쟁론에 관하여 厉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그들(한국의 유관 학자들)과 쟁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원래의 학술연구 부서에 따라 연구를 진행해 나갈것이다》. 그는 비교적 락관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이번 쟁론이 진일보 엄중해 지지는 않을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한방면으로 중국 학술계에서는 절때 주동적으로 쟁론을 일으키지 않기로 결정지었고 다른 한방면으로 한국의 대다수 학자들도 보편적으로 랭정을 지키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교적 영향력 있는 몇개 주류 학술단체에서는 고구려사문제 항의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 《조선일보》의 한 기자는 한국측에서도 고구려사 문제에 대하여 반드시 랭정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중공 중앙당교의 张琏瑰교수는 이번에 고구려사 문제가 또다시 쟁론이 일게 된것은 주요하게 일부 한국학자들의 오해와 의심, 그리고 근거없는 추측때문이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张琏瑰교수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의 력사문제는 순수한 학술문제이며 력사문제이다. 그런데 만약 이 문제가 고대 중조 변경문제로 번지여 가면서 오늘의 변경문제로까지 발전한다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 지게된다》. 즉 고구려사 문제를 영원히 학술문제의 차원에 국한시키며 절대로 정치문제로 승급시키지 않는다는 립장이다.   张琏瑰교수의 관점에 의하면 고구려사 문제의 쟁론이 학술령역에서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만약 이 쟁론이 정치령역에까지 확대된다면 그때가서는 아주 위험하게 된다. 만약 지금 쌍방에서 모두 억제하지 못하여 일단 이 문제가 정치 층면에까지 올라가는 날에는 중한 량국관계에 극히 불리하게 된다. 그러면서 张琏瑰교수는 《동북아의 큰 국세에서 이미 조선의 핵문제,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징조 등 아주 불온정한 인소들이 존재하였지만 중한 량국관계에는 아직까지 원칙적인 큰 분기가 없었으므로 많은 문제상에서 능히 호상 리해하고 서로 합작할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한국과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고구려를 자기들의 옛조상의 나라로 숭배하여 왔으며 국제상에서도 이미 보편적으로 공인하고 있는 형편이였다. 력사의 진상이야 어떻던지간에 한국은 인젠 고구려와 절때 갈라질수 없는 존재로 되여 있었다. 만약 한국이 고구려를 잃는다면 그것은 세계에 향하여 자기는 조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야만민족이라는것을 승인하는 것으로 되기때문에 이미 세계의 선진민족으로 자부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이런 수치를 절때 받아들일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한국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중국의 신화가 깨여지고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인테넷에서 중한두나라 누리꾼들 사이에서부터 치렬한 쟁론이 벌어지게 되면서 한국사람들의 반중국 정서는 점차 전국의 범위에로 확대되여 나갔다. 사태의 엄중성을 느낀 중국의 학자들은 분분히 담화를 발표하여 중국이 고구려 력사를 다시 연구하게 된것은 순수한 학술문제로서 절때로 정치문제가 아니고 절때로 현실문제가 아니며 절때로 쟁론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재삼 천명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대한 모욕감을 느낀 한국사람들은 중국에 대한 혐오감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으며 중국이 력사가 길고 나라가 크다는 턱을 대고 한국을 업신본다고 인정하였다. 한국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대여 소위의 “중화문명”에 대하여 험담하기 시작하던 데로부터 점차“중화문명”의 뿌리가 원래는 한국이라고 억지부리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무슨 한국에서 연구해본결과 공자도 알고보니 원래는 한국혈통이였고 리시진도 한국혈통이였으며 천문의는 한국에서 발명하였으며 활판 인쇄술도 한국에서 먼저 발명하였으며 심지어 갑골문도 기실 한국혈통의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고 하면서 소위의 “중화문명”을 송두리채 몽땅 빼앗을 태세였다.   일이 이쯤 되자 장난치기 좋아하는 일부 중국 누리꾼들은 인테넷에 댓글을 발표하여 “한국에서 연구 고증한데 의하면 중국의 손중산도 원래는 한국혈통이였고 장개석도 원래는 한국혈통이였으며 모택동도 원래는 한국혈통이였다. 그리고 인류가 살고있는 이 지구도 알고보니 기실 한국에서 만든것이였다.” 하고 날조하면서 한국을 비꼬았다.   2008년3월14일 중국서장에서 분렬주의 폭도들을 진압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찍부터 중국을 곱지않은 눈으로 보아온 서방의 매체들에서는 또다시 인권무기를 들고나와 중국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의식형태 방면에서 언제나 서방과 고도의 일치성을 확보하여온 한국이였기에 중국에 대하여 통쾌히 보복할수 있겠다고 인정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힐 리유가 없었다. 한국의 여러 매체들에서는 일제히 중국에서 군대를 풀어 티벳 민주주의자들의 평화시위를 류혈진압했다고 보도하면서 여러가지 형식으로 중국의 소위의 독재주의 행위에 대하여 강력히 비난하였다.     2008년4월27일 북경 올림픽 성화봉송이 한국 서울구간을 지나는 기회를 타서 한국 각 계층에서는 제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심지어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번 기회에 중국에 대하여 한국의 일부 정치적 주장을 제출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한국 서울에서는 올림픽 성화봉송을 에워싸고 중국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2008년5월12일 중국사천문천에서는 8급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중국정부는 전국에 호소하여 전면 재해복구와 지원에 나섰으며 재해지구에 대한 채방과 보도에 대하여 세계에 완전개방을 실시하였다. 뒤이어 세계적으로 중국을 위문하고 중국을 지원하는 열조가 일게 되였다. 한국에서도 대통령을 포함하여 여러 지명인사들이 직접 지진피해지역을 찾아 위문하고 거금을 기부하였으며 한국의 지원봉사대도 지진피해지역에 파견되여 중국의 지진재해 구조를 돕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중국사람들은 국난속에서 한국의 선량함을 보아내고 한국에 대하여 아주 고맙게 생각하게 되였으며 한국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지게 되였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을 고험하는 관건시각에 책임지지 못하는 일부 한국의 누리꾼들은 인테넷에 또 가증스러운 댓글을 올려 “중국이 서장문제로 하여 천벌을 받았다”고 절규함으로써 많은 중국사람들의 지대한 분노를 야기시켰다.   2008년8월 북경 올림픽 개막식을 앞두고 한국의 SBS텔레비 방송에서는 국제 규례를 어기고 올림픽 개막식에 있게될 성황들을 앞당겨 일부 공개함으로써 또 한차례 중국사람들의 분노를 야기시켰는데 중국사람들 중에서는 신의없는 한국매체의 올림픽대회 중계권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렇게 되여 8월8일에 정식 개막된 북경 올림픽대회 기간에 중국의 관중들은 한국의 관중들이나 한국의 운동원들에 대하여 어느정도 혐오를 느끼게 된것이다. 중국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을 언제나 자고자대 할줄밖에 모르는 실속과 신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하였다.   한국이 중국 민심으로부터 랭대를 받게 되면서 중국의 광대한 시장을 대상하고 중국에 와서 자리잡은 한국의 적지않은 대형기업들까지 그 영향을 받게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 와서 기업하면서 중국의 실정에 대하여 비교적 료해하고 있는 한국의 기업인들은 분분히 국내에 여러가지 형식으로 멧세지를 보내여 한국에게 있어서 중국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설명하면서 한국의 민중들과 누리꾼들에게 좀 자제해 줄것을 간곡히 요구하였다.   2008년8월25일 중국의 국가주석 호금도는 북경올림픽을 결속짔자마자 한국을 방문하게 되였는데 두나라 정상들은 두나라 관계를 “전략적 협조동반자 관계”로 부상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로부터 볼수있는바 한중 두나라 정부차원에서는 관계가 여전히 아주 정상적으로 발전하고 있는것이다.   전략적 차원에서 중국은 한국에게 있어서 기실 미국과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이다. 한국도 중국에게 있어서 지구 안정을 유지하는데 아주 중요한 존재이다. 중한 민간에서 벌어진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인젠 막을 내렸으면 좋겠고 두나라의 정상관계에까지 영향주는 일은 절대로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99    (자유시) 꽃피는 봄이 오면 댓글:  조회:3418  추천:0  2012-07-30
자유시 꽃피는 봄이 오면 약암동 2010.2   이제 꽃피는 봄이오면 좌절에 얼어붙은 골짜기에서  물소리 돌돌 들렸으면 좋겠다.   근심스럽고 두려웁던 황야에서 종달새 노래소리 들렸으면 좋겠다.   원망과 불만이 가득찬던 내가슴에 따스한 해볓이 들었으면 좋겠다. 불신과 비웃음의 바람소리 멎고 우뢰소리 통쾌히 들렸으면 좋겠다.    노력의 강부터 성공의 바다에까지 멈출줄 모르는 저 흐름처럼 희망과 열정이 넘쳤으면 좋겠다   욕망의 마음을 조용히 비우고 번뇌의 먼지를 말끔히 털어내니 어느새 열리는 파아란 하늘.   겹겹이 불어오는 향긋한 꽃바람에 진달래 활짝핀 동구밖에서 까치소리 들렸으면 더욱 좋겠다.
98    (자유시) 봄바람 부는 들판에서 깨달음 댓글:  조회:3582  추천:0  2012-07-30
(자유시) 봄바람 부는 들판에서 깨달음  2008년4월-상해 황녀사가 부쳐온 글을 조금 다듬어 번역하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동년의 봄은, 너무나 쓸쓸한 들판입니다. 대지에는 아무런 볼거리도 없어서, 여길 봐도 쓸쓸하고, 저길 봐도 쓸쓸하였습니다. 따스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 오는데, 태양은 구름속에서 숨박꼭질 합니다. 갑자기 멀리서 뻐국이 소리 들리더니, 마치도 사람들에게 사과라도 하는듯: 내가 너무 늦었어요! 빨리 밭갈이 하고 파종하세요!   쓸쓸한 들판에는 풀도 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봄은 종래로 꺼리질 않고, 올때가 되니 정말로 또 왔습니다. 봄은 마치도 나에게 일러 주는듯: 올것은 어쨓든 올거고요, 갈것은 어쨓든 갈것이니, 할일은 망설이지 마시고 대담히 하세요! 갑자기 하늘에서 우뢰소리 진동하더니, 땅속에서 잠자던 종자들을 깨웁니다 빨리들 깨여 나거라! 싹을 트일때가 되였다!   春风原野悟 2008-4-上海黄女士   记忆中残存的童年的春天, 是一片荒凉的原野。 大地上辨不出象样的景致, 这里也是荒野, 那里也是荒野。 只是微微吹来了一点暖风, 还有太阳在飘云间玩捉迷藏。 突然远处传来了谷谷声, 好象是布谷鸟在道歉: 我来迟了! 快耕種吧!   荒凉的原野没有花草, 可是春天从来不嫌弃, 说来真的又来了。 春天好象提醒我: 该来的总是来的, 该去的总是去的, 该作的你就大胆作吧! 突然天边响起了轰轰声, 振醒了土壤中沉睡的种子: 快醒来吧! 该发芽了!
97    (지난 세월의 시) 계급투쟁 뚜껑 여는...(외17수) 댓글:  조회:4267  추천:0  2012-07-29
지난세월의 시 묶음 1, 무 제 68-2   초려에 높이 누워 잠이 오질 않는데 대붕의 혜안빌어 온누리가 환하구나.   현덕은 좀스럽고 맹덕은 간사한데 갈라터진 거북등에 기발만이 촘촘하다.   만세소리 가운데 신음소리 갸냘퍼라 강호를 두루봐도 와룡이 제일이야.     2, 계급투쟁 뚜껑을 여는 정월보름 사원대회 69-3-5   오늘아침 우리식구 오곡밥을 먹었지요 새해들어 좋은일을 기원하며 말입니다.   오늘저녁 사원대회 별난임무 있답니다 우리소대 계급투쟁 무슨뚜껑 연답니다.   검은떡은 낡은사회 하얀떡은 오늘사회 회억떡을 먹으면서 오늘행복 알랍니다.   벼락치는 소리런가 공작대장 호통치니 아버지가 덜미잡혀 압송되여 나옵니다.   살기차서 고함치는 혁명맹장 구호소리 목을놓아 공소하는 빈농대표 갈린소리.   존경하는 아버지야 이게어쩐 일입니까? 이아들이 너무놀라 숨도쉴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나쁜분자 타도해야 한답니다. 희망있는 이자녀는 어찌해야 하옵니까?   래세에나 다시가서 아버지의 효자되여 그때가서 오늘빚을 가배가배 갚으리다     3, 중학교 필업을 기념하여 한수 적었다. 70-2-21   혁명로선 승리했다 온나라가 붉어졌다. 무산계급 교육로선 공농병이 옹호한다.   중학교를 삼년다녀 로삼편을 외웠노라 인테나쇼 리상향해 목숨걸고 달려가자.   학생시절 끝났으니 붓과벼루 바쳤노라 고향마을 내려가서 신형농민 되여야지.     4, 벗을 떠나 보내며 71.1   하늘 땅 흔들리는 대혁명의 이 세월에 벗이여!  멀리 내다보며 큰뜻 품으시라.   분발할진대 벗이여!  기다리지 마시고 전진할진대 벗이여!  교오하지 마시라.   사업은 위대하고 임무또한 영광스러워 투쟁속의 그대여!  벗의 성공 바라노라.   (장춘으로 공부하려 떠나가는 黄군에게 부러우면서도 섭섭하고 또 기대하는 마음 으로 목책과 함께 한수 적어 주었다.)     5, 저밤새야 (76년7월 약암동 목장의 비오는 밤 붉은난에 당하고 이곳에 정배왔노라)   밤이오면 밤마다 슬피우는 저밤새야! 너이름 무엇인데 어쩐일로 우는거냐?   만만세의 호성세에 심산야곡 숨어서 고운목청 노래대신 울음이 웬말이냐?   대명천지 해밝을땐 어디가 숨었다가 밤이면 홀로나와 슬피슬피 우는구나.   어쩌면 우리전설 소녀원혼 너였느냐? 억울함 풀지못해 새가되여 또왔느냐?   가석하다! 포청천은 먼곳가고 없단다. 애닯다! 슬프구나! 새아침이 언제올고?     6, 가을소감 76-10   버꾹이 우던 소리 금방 들었습니다, 꾀꼬리 노래 소린 지금도 들립니다, 창공에선 기러기 렬을 지어 갑니다, 어느새 제비도 자취 없이 갔습니다.   소슬한 바람이 이 산천에 불어오니, 락엽은 우수수  어지러이 날립니다. 기러기가 내는 기륵기륵 저 소리는, 울음인지 노래인지  알수 없습니다.   한스런 사연을 말할 곳도 없습니다, 차라리 홀로 깊은 산에 가겠습니다. 울적한 심정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고서나 몇권 얻어 읽어볼가 합니다.   삼동이 지나면 봄은 자연 오겠지요, 그때면 만물이 또 다시 소생합니다.     7, 서원직을 탄식하며 77-7-20 를 다시 보면서   천고에 탄식할 일이로구나! 어찌하여 그리도 멍청 하였노?   맹덕이 간적인줄 일찍부터 알면서도, 결국은 그의 잔꾀에 속았구려.   스스로 찾아온 의로운 서쪽 땅, 눈물을 휘뿌리며 석별하는 그 심정,   역적의 밑에서 구구하게 지내면서도, 간담의 일편단심 변함이 없더라.   병서를 판내울땐 그 뜻도 컸으련만, 그뜻 못 이루고 조용히 사라졌구나.     8, 청명 즉흥 80-4-4   청명행사는 전국시기 진문공이 충신인 개자추를 기념하면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고난의 류랑세월에 개자추는 자기 허벅지 고기를 베여내여 임금을 구했다고 합니다. … … 세월은 흘러흘러 어디에로 갔습니까? 임금이 어리석어 충신이 죽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날이면 고인한테 절 올리며, 불효불충 자기소행 사람마다 반성했습니다.   죽은이야 흙에 묻혀 어이 알수 있으랴만, 사람들 스스로의 지극한 마음입니다. 죽은이여! 시름놓고 고이고이 잠드시라. 살아있는 사람들은 해야할 일 많답니다.     9, 청춘을 보내며 80-6   비와바람 휘몰아쳐 드는봄빛 쫓아내니, 꽃이못핀 이땅에도 여름철이 찾아든다. 늦게야온 버꾸기야 너를탓해 뭘하랴만, 철을놓혀 봄아가씨 놓힌것이 한이로다.   세상만리 인생천리 천자만홍 피였으니, 보다고운 여름아씨 청산에서 찾아보자. 이강산이 붉게붉게 단풍들어 그때가서, 추성부를 고쳐쓰며 황금가을 즐기리라.     10, 시내물의 노래 80년7월1일 장인맹산북골에서   나는나는 시내물 쉬임없이 흐르네, 험악한 산비탈을 이리저리 에돌아, 그까짓것 괴꼬리는 울거나 말거나, 오로지 바다로 흘러가세 흘러가세.   나는나는 시내물 쉬임없이 흐르네, 아츠런 벼랑에 폭포수로 쏟아지며, 그까짓것 무지개는 끼거나 말거나, 오로지 바다로 흘러가세 흘러가세.   나는나는 시내물 쉬임없이 흐르네, 버드나무 숲속을 조용히 가로질러, 그까짓것 기러기는 가거나 말거나, 오로지 바다로 흘러가세 흘러가세.   나는나는 시내물 쉬임없이 흐르네, 얼음층 밑에서도 코노래를 부르며, 그까짓것 눈보라는 치거나 말거나, 오로지 바다로 흘러가세 흘러가세.       12, 눈보라! 눈보라!   81-2 장인맹산북골에서   지난밤 하늘에선 삼백만 옥룡 싸우더니, 부서진 옥비늘이 온 누리를 덮었는데,   이 아침엔 은봉황이 몇백만이 싸우느냐? 세찬 바람 휘몰아쳐 하늘땅이 맞붙었다.   울부짖는 수림에선 은뱀들이 살판치고, 설레이는 갈숲으론 옥사슴떼 쓸어든다.   벌판을 휩쓰며 백마떼 달리는가? 가슴을 옥죄이는 날카로운 표효소리.   높은언덕 저 우에선 백작이 너울너울, 후미진 그 밑에선 흰 코끼리 둥실둥실,   송백이 가로 뻗은 기암산 마루에선, 비둘기떼 감도는가? 비단필이 날리는가?   옥선녀야! 하늘에 머리 풀지 말어라, 대자연의 차고 더움 우리함께 나눠보자.   멋지게 불어대는 휘파람소리 들어라. 은빛총각 너를 찾아 신바람 났구나.   불로약수 샘솟던 옹달샘 어디 갔나? 장수를 키워낸 유두암 어디 갔나?   옛강산을 고쳐놓아 반고도 곡할시고, 은빛세계 북국땅에 천하시인 다 모여라.     13, (즉흥시) 들  국  화 81년9월 장인맹산북골   시내가의 들국화 한송이 꺾어들고, 물소리 거슬으며 시구를 더듬노라.   봄하고 여름하면 꽃피는 계절이요, 시인들은 저마다 제 재주 뽐냈어라. 비바람에 씻겼나 푸른빛 누르르니, 때는 가을이라 지는 꽃을 어찌할고?   작은풀 조용히 야초속에 끼여자라, 오늘아침 갑자기 보라빛 꽃이 피니, 너무 철을 모른다고 웃지를  마소, 늦어피는 거기에 그뜻 따로 있으리.   (即兴诗) 野 菊 花 (汉文配字,不配韵律。-盛元)   溪边把朵野菊花,逆水追声寻佳句。   咏春歌夏盛花季,自古诗人掏尽美。 风漂雨洗青变黄,此乃时秋奈谢何?   小小花草丛中生,今朝忽开小花朵。 莫笑此花不识时,迟开自有迟开理。     14, 색시 맞어 오던날 82-2   친구옷을 빌어 입고 색시 맞어 오던날, 신부태워 차 떠나자 눈이 내렸지. 시집오는 발자욱은 메워져야 한다며, 어머님은 둥실둥실 춤을 추셨네.   늙은총각 이제서야 천생연분 만났으니, 사랑이란 별거겠나 아껴주면 사랑이지. 부부맺고 살다보면 힘들때도 있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웃으면서 삽시다.      15, 황야의 들국화 86-9-25   공명없이 서른몇해 파란많던 세월이여! 가을바람 불적마다 생각나는 그 시절.   맹산에서 세운뜻은 서북풍에 날려가고 글공부 열몇해에 나무아미 타불이여.   닦은학문 보람없고 풍화재질 시들어서 지혜는 메마르고 의지는 쇄진했네.   부질없이 술마이며 회포를 푼다마라   그 누가 나에게 위안술 부어주랴.   잃어버린 이팔청춘 찾을길 바이없고   눈앞에 보이는건 남을 나는 기러기떼.   가는 구름 눈바래며 륙현금줄 뜯노라니 지음이 그누그냐? 들어줄 사람없네.   아! 망연타 해저믄 져녁하늘   깨여진 성곽아래 괴탄이 부질없다.   오늘도 맹산에선 가을빛에 불타련만   차마다신 옛고장을 찾아가진 못하겠네.   거치른 황야에서 치하없는 들국화야    누굴위해 해마다 어김없이 피는거냐?     16, 추 석 86-9-18   약암동 산마루에 가을빛이 확연한데, 한적하던 산간길이 오늘따라 분주하다. 부모뼈가 묻혀 있는 고향의 산이기에, 제사객은 오르고 내리고 끄치질 않누나. 옛날에는 우리 모두 이고장에서 살았지요, 오랜만에 이렇게 만나니 정말로 반갑구려!   긴장한 인생살이 곤한 몸을 풀고저, 나도 아버님 산소를 의례 찾았노라. 하느님전 천복빌고, 염라왕전 지복빌고, 신령님전 재복빌고, 조상님전 가복빌어, 어머님을 모시고서 안해와 더불어서, 아들자식 키워가며 조용히 살으리라.     17, 강변따라 30리 88-6-17, 투도에서 팔가자까지 해란강변 백사장따라 걸었다.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나 볼가? 죄여진 마음을 풀어나 볼가? 걸음걸음 걷노라니 강변 백사장, 지는 해 타는 노을 강물에 비꼈구나.   버드나무 묵묵히 옛일을 사념하고, 백양나무 소곤소곤 래일을 약손는데, 물소리 거슬으며 걷고 걷노라니, 구불구불 발자욱만 기다랗게 남는구나.   옛벗들은 급제하여 하나둘 떠났으니, 비종비종 물새소리에 그리움만 더해져, 언제다시 모일가 남쪽하늘 쳐다보니, 흩어진 구름만이 유유히 흐르누나.   한때는 공명위해 험한봉도 톱았어라, 시대의 행운아도 강아지로 보았어라. 부질없이 동풍에 청춘 날려 보냈으니, 이제다시 봄이 온들 잃은 청춘 돌아오랴?   서풍이 불더니만 시대가 변했다네, 사람마다 우쭐우쭐 부자된다 분주한데, 이제다시 그까짓것 공명을 바라랴만, 세상만은 자유로와 한없이 좋구나.     18, 범을 탄 사람 90-3-20   천리만줄 알았더니 범잔등에 올랐구나, 어-허! 식은땀아 내 간담을 회롱마라. 모험의 골짜기엔 백골들이 널려있고, 머리우엔 까마귀가 나를 노려 덮쳐든다.   따-웅! 하고 내달리자 산천초목 길을 내니, 칼밭이고 불바다고 나는 상관 할바 없다. 내려서지 못할바엔 에라! 박차 가해보자, 청산별곡 주름잡아 에덴으로 몰고 가자.
96    중국 조선족 장례문화가 나라의 보호를 받기까지 댓글:  조회:4519  추천:1  2012-07-25
중국 조선족 장례문화가 나라의 보호를 받기까지 성원작성   1, 1966년에 시작된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장례제도를 실행하였다. 마을마다 丧舆契와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집체로 자금을 내여 丧舆를 만들어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편벽한 곳에 상두막을 지어놓고 보관하였으며 도감을 한 사람 선발하여 마을의 장례행사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일단 마을에서 사람이 죽게되면 굴심을 할 사람과 상여, 그리고 상여를 멜 사람들까지 통일적으로 배치하였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은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문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 하였다.   2,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조선족 전통문화에서 제일 먼저 재앙을 당한것이 상여이다. 1967년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하는 운동이 터지면서 연변각지의 상여는 거의 같은 시간에 각지의 반란파들에게 의하여 학교마당에 끌려나와 두들겨 부서지고 모조리 불타 버리고 말았으며 조선족 장례문화는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후에는 간단한 운구용 소수레로 상여를 대체하고, 장례제도를 최저한도로 간단하게 하였으며, 일체 소위의 봉건색채를 띤 장례 절차를 일률로 금지하였다. 그후로 부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점차 빛을 잃게 되였다.   3,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80년대부터 시작하여 나라에서는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모두 유체를 화장 할것을 제창하였다. 초기에 대부분 조선족 주민들은 감정상에서 일시 이렇게 화장하는 장례제도를 접수하기 어려워 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1985년에 국무원 에서는 《빈장관리에 관한 잠행규정》을 내오고, 1997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 시키면서,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유체를 화장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조례》의 총칙 제6조에는 《소수민족의 장례풍속을 존중하며, 자원적으로 장례풍속을 개혁하려는 것을 타인은 간섭하지 못한다》고 특별히 규정하여 놓았다.   4, 지난세기 80년대부터 시작하여 연변에서도 정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연길부터 시작하여 장의관을 건설하고 화장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그당시 연변의 유관 책임자들은 장례풍속 개혁방안에만 중시를 돌리고 연변은 조선족 자치주로서 조선족 장례풍속중의 부분적인 건강한 내용은 반드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것을 제출하는 사람이 없었다. 국무원에서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시킨후 각 성,시,자치구로부터 각 지급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지역의 특수 실정에 따라 각기 자기 지역의《빈장관리 방법》을 제정하여 지역성 빈장관리 사업의 법률적 의거로 삼았다. 하지만 연변은 오늘까지도 자기의 《빈장관리 방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연변의 빈장관리 사업은 줄곧 조선족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는 《길림성 빈장관리 방법》에 기준하여 진행될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연변의 4대 장의관에서는 조선족들을 위하여 따로 설치한 장례시설이라곤 한가지도 없으며 장의관의 여러가지 복무항목중에도 조선족 장례풍속에 관한 내용은 한가지도 없다. 이것이 조선족 장례문화가 사회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오늘처럼 거의 근절의 위기에 처하게 된 근본원인이다.   5, 2005년에 국무원 반공청에서 무형문화재에 대한 보호공작을 가강할데 관한 의견을 반포하면서 중국의 무형문화재 등록 공정이 시작되였다. 2009년에 연변에서도 무형문화재 등록 공작이 시작되였는데 현성원 선생은 워낙 조선족 장례풍속중의 《銘旌》을 무형문화재로 신청하였었다. 그후 현성원 선생은 연변주 문화국의 제의에 근거하여 신청내용의 범위를 넓히여 전반 조선족 장례풍속을 취급하기로 하였으며 천수산 등 로일대 민속학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중의 가장 주요한 부분들을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정리하여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라는 이름으로 나라에 무형문화재로 신청하였다. 그리하여 당년 6월에 《조선족 장례풍속》이라는 이름으로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비준되여 잃어 버렸던 우리민족의 보귀한 장례문화를 다시 찾아 올수 있었으며 현성원 선생이 창립한 연변조선족 례의연구회가 보호책임단위로 지정되였다.   6, 연변조선족 례의연구회는 2009년10월16일에 성립된 이래 아래와 같은 중대한 행사들을 진행하였다. 첫째;  2009년에 《조선족 장례풍속》을 정부에 신청하여 주급과 성급의 무형문화재 자격을 쟁취하였으며, 길림성 정부로부터 《조선족 장례풍속》 보호단위로 지정되였다. 둘째;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발굴하고 연구한 기초상에서 현재 실행되고 있는 조선족의 장례 형식과 결부시켜 《조선족 장례, 제사 지도서》(시행본)를 편찬하였으며 지금 진일보 완미시키는 과정에 있다. 세째; 2010년 12월 14일, 연변주 문화국의 지도하에 《조선족 장례풍속》세미나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주민정국, 주위생국, 주교육국, 연변대학, 연변병원, 연길장의관, 등 20여개 부문과 단위에서 참석 하였으며, 지명도 높은 민속학자들과 유관부문의 공작인원들이 참석하여 여덟편의 론문을 발표하여 《조선족 장례풍속》을 보호하는 적극적인 의의와 그 합리성을 론증하였다. 네째; 신문, 방송, 텔레비, 인테넷 등 매체를 리용하여 정기적으로 조선족 민속문화 강연을 진행하고 있으며, 연길시 문화부문과 여러 가두판사처의 요청에 의하여 각 사회구역에 내려가 조선족 민속문화 순회강연을 이미 10여차례 진행하였다. 다섯째; 《조선족 장례풍속》을 보호하는 사업에서 효과적인 경험을 모색하기 위하여, 2010년3월29일 주공상국에 《백화상조 (장례) 복무중심》을 등기하여 설립하였으며, 무릇 조선족 장례와 상관되는 모든 행사에서 시험적으로 여러가지 형식으로 봉사를 제공하여 드리고 있으며 부단히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있다. 여섯째; 《조선족 장례풍속》을 보호하는 사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시키고 조선족 장례복무 사회기제를 건립하기 위하여 연변주 민정국에 《비기업단위》의 성질을 띤 《연변조선족 장례복무중심(연변조선족 빈의복무소)》설립을 신청하여 추진시키고 있다. 그 기본종지는 장례사무가 줄곧 가정을 단위로 하여 진행되던 락후한 사회현상을 타파하고 현대식 장례복무 사회기제를 건립함으로써 가정에 상사가 나면 전화 한통으로 전반 장례사무가 경제적이고도 민속적으로 원만한 해결을 보도록 하며, 조선족 장례문화를 책임성 있는 영구성 사회 복무기제에 맡겨 건강하게 집행되게 함으로써 조선족 장례문화가 이땅에서 세세대대로 존재하여 나가도록 보증하는 것이다. 일곱째; 2012년 6월, 현성원 선생은 연변조선족자치주문화국으로부터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의 代表性 傳承人 자격을 수여받았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반공실 제공 2012월 7월 5일
95    (소설) 저승사회 고찰 보고 --성원작품 댓글:  조회:4958  추천:0  2012-07-23
저승사회 고찰 보고 성원 저 (2012.5~)   1, 바위봉 밑에서 저승문 찾았다. 이제 이틀만 있으면 추석이다. 추석날에 면례와 제사를 보아달라고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장의사들과 역사할 사람들까지 일일히 배치하여 놓았다. 하지만 한집에서만은 기어코 회장이 직접 와서 보아 달라며 통사정하니 어차피 밀어버리는 수가 없다. 그리하여 추석날 아버지 산소의 벌초때문에 이틀 앞당겨 팔가자 약암동을 찾았다. 그렇게도 번화하던 고향마을인데 지금은 모두들 성시로 외국으로 돈벌이 떠나가 버리여 이렇게 큰 마을이 거의 텅 비여 있다. 너무나 허전해지는 이 마음을 어디다 기탁할 곳이  없어 즉흥시 한수를 지어 읊었다; 고향 마을은 쓸쓸히 비였습니다, 골목마다엔 쑥대들이 무성합니다. 초가집들은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벽돌집들은 문마다에 널판자로 막았습니다. 눈앞에 삼삼하는 익숙한 그 얼굴들 저절로 불려지는 정다운 그 이름들 외국으로 갔답니다, 관내로 갔답니다, 성시로 갔답니다, 어디론가 갔답니다.   한고향에 모여 산것이 연분이였다면 오늘에 흩어진것은 운명이였으리라. 웃고 울면서 살았던 그 시절이 이대로 잊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워 당년에 첫사랑이 불러주던 그노래 입속으로 씁쓸히 되뇌여 봅니다. 어쩌면 쇄망이 복이 될수도 있습니다. 적은것을 버리고 큰것을 얻어야죠. 사람마다 자기가정 다시찾는 그때가서 우리 세상은 더욱 번창할 것입니다. 저절로 시노라고 지어 읊었더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되였다. 역전앞 량식창고 옛터에는 높은 굴뚝이 일어서고 강철공장이 들어앉아서 많이 이채를 돋군다. 그런데 역전을 중심으로 동서로 철로연선을 따라 너무나 긴 구간을 가시철망으로 교통통제를 해 버렸다. 그 까닭에 마을에서 철로를 건너 남산으로 나가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반시간 남짓이 애매한 길을 에돌아 더 걸어야만 하였다. 마치도 "자가용 없는 분들은 성묘하러 고향에 오지 마세요." 라고 하는듯 하였다. 나는 철로를 건넌후 비탈길을 따라 동글산 묘지를 바라고 올라가며 눈길이 가는대로 두루 바라보았다. 칠분회 옛터를 중심으로 남산언덕 너른 구간에 익어가는 가을의 옥수수밭외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사위는 마치도 버려진 세상인듯 너무나 조용하다. 아버지 산소에 도착하여 먼저 후토를 찾아 제지내며 山神靈한테 앞당겨 오게된 사연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낫을 꺼내여 조심스럽게 벌초를 시작하였다. 삼십여년 해마다 해온 일인지라 인젠 너무나 익숙하다. 몇해전부터 봉분에 잔디풀을 조금씩 심어놓았더니 인제는 봉분이 잔디풀에 곱게 덮이워 다른 잡풀은 별로 나지도 못한다. 벌초를 끝내고 갖고간 제물들을 공단에 차려놓고 나름대로 이름을 지어 술을 부어올리며 제사를 간단히 올렸다; 하느님전 天福을 빌어서 초헌으로 삼절이요, 염라왕전 地福을 빌어서 아헌으로 삼절이요, 신령님전 財福을 빌고 조상님전 家福을 빌고 考妣님전 安福을 빌어서 종헌으로 삼절이요하니 모두 아홉절을 올렸다. 제사를 끝내자 어쩐지 심정이 울적해 진다.  남은 제사술을 혼자서 찌워 마이며 음복하고 있노라니 저앞에 보이는 저 바위봉에 어쩐지 무지개가 서려 있는듯 하다. 불연듯 머리속에 저 바위봉에 오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리하여 부랴부랴 나머지 제물들을 종이에 싸서 공단옆에 묻어놓고 쓰레기를 깨끗이 처리하여 묻은후 약암동 바위봉을 바라고 오르기 시작하였다. 약암동 바위봉 밑에 가면 작으마한 동굴이 하나 있는데 이전 사람들은 그 동굴을 효녀동굴이라고 불렀다.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울때의 일이라고 하는데 한 효녀가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꿈의 제시를 받고 이 동굴에 들어가 육육삼십육일동안 열심히 효공을 들였다고 한다. 산신령이 그 효녀의 효성을 기특히 여겨 바위돌우에 풀이 돋아나게 하였으니 그 풀을 뜯어 달여서 어머니한테 대접하였더니 어머니의 병은 가신듯 낳아졌다고 한다. 藥岩洞이란 이름은 이렇게 온것이다. 지금도 바위위에는 그 풀들이 돋아 있는데 부녀병에 특히 효험이 있다고 한다. 나는 약암동 바위봉에 올라 제일 높은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제사술을 좀 마였더니 몸이 후끈후끈 달아 오른다. 나는 설렁설렁 불어오는 시원한 가을바람에 가슴을 헤치고 북쪽을 향해 멀리 바라보았다. 해란강이 구불구불 누벼 흐르는 60리 허래성벌판과 평강벌판이 한눈에 안겨온다. 허래성벌판 북쪽 변두리에는 북고성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먼 옛날 발해(기원698년~926년)왕때 한때는 首府로까지 되면서 흥성하였던 중경현덕부 옛터다. 1966년 전까지 팔가자는 서성향에 귀속되여 있어, 운동대회를 하거나, 그 무슨 명절축제가 있게되면 친구들과 떼를 지어 장난치며, 도보로 10여리 되는 길을 걸어 서성으로 갔었다. 그때 가장 인상 깊은것이 상남마을을 북쪽으로 금방 벗어나면, 길 량옆에 널려있는 스산한 돌무덤터였는데, 어른들 한테서 고려장터라고 익히 들어 왔었다. 그리고 그 유래도 대체로 우리의 고려장 전설과 비슷하였는데, 부모가 늙어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이곳에 돌각담을 쌓아놓고, 부모를 돌각담 안에 모시고, 먹을것을 얼마간 넣어 주는데, 그 먹을것이 떨어지면 부모는 곧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큰 돌로 돌각담을 봉해 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유관 고고자료에 의하면 이 돌무덤터는 발해왕때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능하게 이 돌무덤들은 발해국 백성들 중의 고구려 후예들의 무덤들일수 있다. 고려장 전설은 우리민족 전통례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져, 고국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은 전설일 뿐이지, 실제 력사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당시는 해마다 전란으로 남정북전 해야하는 어려운 형편이였다고 감안할때, 고려장이 실제 력사사실이라고 해도 어느정도 리해할수 있을것 같다. 지금은 이 고려장터가 언녕 혼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직공 아빠트가 빼곡히 들어앉아 있다. 발해가 망해서부터 우리 조상들이 다시 북간도에 이민와서 개척을 시작하기까지는 거의 천년이 지났다. 이 기간에 중국 동북지역은 선후하여 료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여러조대가 바뀌였지만 이 고장만은 인적이 거의 끊긴 봉페지역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이 벌판에 화룡시에 소속된 네개의 鎭級 행정구역이 들어 앉아 있는데 원주민은 원래 대부분 조선족이 였으나 지금은 한족주민들이 더 많은 비례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굴리면서 시간을 보니 정각 열두시다.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 나는것 같아서 납작한 돌을 베개삼아 머리밑에 괴고 바위위에 잠시 누웠다. 갑자기 바위아래에서는 옅은 흰 안개가 뭉게뭉게 피여 오르면서 아름다운 무지개가 서린다. 흰 안개는 내 앞에서 이리저리 엇갈리며 춤을 추다가 사라지자 바위아래에는 크고도 깊은 웅덩이가 서서히 나타났다. 학교운동장만큼의 크기에 어림증 날 지경으로 아찔하게 깊은 웅덩이다. 전에도 여기에 수없이 많이 왔었지만 이런 웅덩이를 본적이 없다. 신기하다. 내 발밑에 그 웅덩이 바닥까지 내려갈수 있는 붉은 천필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아마도 여기로 아래를 내려가라는 뜻이이리라. 나는 호기심에 그 붉은 천필을 타고 별로 어렵지 않게 바닥으로 내려갈수 있었다.   2, 천년 기다려 한번기회. 웅덩이 밑바닥에 내려가니 사위는 눈부시게 새하얀 세계인데 숨막힐 지경으로 괴괴하다. 바라보니 웅덩이 동쪽벽에 篆体로 커다랗게 《陰間》이라는 두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어느결에 저승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언녕부터 저승에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오늘 드디여 숙원이 이뤄지는 건가? 바깥에서 나는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傳承人이므로 소위의 저승세계와 사무적으로 련관이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40여년전부터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가 버리여 지면서 지금은 거의 근절이 되였다. 그리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평생 고생하시다가 노문하여 타계하시는 부모님들에게 우리식으로 장례도 변변히 치려 드리지 못하고 있다. 살아서는 그런대로 우리민족이요, 우리문화요 하면서 대단히 고귀한 신분이나 가진것처럼 자부하다가 일단 사망하면 자기민족 빈소조차 없어서 어쩔수 없이 어설픈대로 남의 빈소에 가서 우리례식을 깎아 맞추면서 장례를 대강 치루어 마지막 길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우리민족이 당금 망하는것은 아니지만 형편이 이쯤 되였으니 우리 민족 기강이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는 표징이 아닐수 없다. 우리민족 가운데는 지성인들이 많고도 많지만 어쩐일인지 오늘까지 그 누구도 우리의 장례문화만은 관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건강한 민족이라면 생일과 혼례등 맞아들이는 문화가 건강해야 할뿐만 아니라 장례와 제사등 보내는 문화도 건강해야 하는 것이다. 맞아들이는 문화는 기쁨의 문화이기 때문에 그것만 잔뜩 중시하고 보내는 문화는 슬픔의 문화라고 해서 누구나 싫어한다면 그것은 아직 성숙되지 못하였거나  혹은 퇴화되였다는 표징이다. 하여튼 중국의 민족정책은 동화정책이 아니라 단결, 평등, 공동발전의 정책이므로 중국에서 줄곧 선진 소수민족이라고 자부하여 온 우리민족에게 자기의 장례문화가 없는것이 큰 허물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민족 장례문화를 살려내고 부흥시킬 사명이 나에게 차려지게 되였다. 먹을 나이 다 먹고 이제와서 이런 사명이 차려지니 좀 당황하기는 하였지만 숙명으로 받아드릴수밖에 없다. 많은 품을 들여서 낡은 자료를 뒤지며 버려진 우리민족 전통장례문화를 다시 주어내여 알맹이를 골라 정리한후 무형문화재로 신청하였다. 이미 자치주정부와 길림성정부의 비준을 받았으며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代表傳承人 자격도 가졌다. 학문이 짧고 능력이 모자라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뜻이 있고 능력도 있으면서 나한테 찾아와 《우리 좀 같이 해 봅시다.》하는 지성인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여 기다리고 있다. 주관국에서는 많은 지지를 주고 있는데 나의 능력이 제한되여 있어서 진전이 너무나 꿈뜨다. 그리하여 매일 고민하던 중인데 우연히 이렇게 한번 저승사회에 내려와서 현지고찰을 할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참으로 천년을 기다려서 한번이나 있음직한 희귀한 기회이다. 우리 선인들이 현령하시여 나를 특히 부른것이이리라. 에라 만수! 아차! 혹시 내가 지금 죽고 있는 것이나 아닐가? 내가 제 좋은 생각만 하고 있었네. 이제 금방 바위위에 누워서 몸을 뒤척이다가 곧장 굴러 떨어지면서 머리가 박살이 나서 지금 한창 피를 토하며 숨이 끊어지는 과정이나 아닐가? 글쎄! 그건 아닐거야. 나는 저승을 위하여 좋은일을 하는 사람인데 저승에서 나를 징벌할 리유가 없다. 지금 바깥에서는 우리식 빈소 한칸 변변한것이 없다. 그리하여 내가 책임지고 연길장의관에 우리식 빈소를 한칸 꾸리기로 주,시민정국과 약속이 되여있다. 우리식 빈소를 꾸린다는 것은 우리식 저승문화가 중시를 받음을 의미하는데 저승 령도들의 체면도 서게 되는것이다. 이렇듯 자기네를 위하여 좋은일을 하려는 사람을 징벌할 리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아직 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데 내가 죽으면 나를 계승할 사람을 아직까지 물색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가령 나의 수명이 오늘로 정말 끝났다 하여도 우리민족의 저승령도를 찾아가서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대로 죽어서는 안된다. 민족대의는 이승이나 저승이나 모두 책임이 있다고 큰 소리를 쳐 봐야지. 그리하여 여기 판관에게 잘 부탁하여 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도로 이승에 나가서 계승자를 물색해 놓고 계획한 일만이라도 해놓고 다시 오기로 약속하리라.   3, 신기한 저승입구의 이모저모 나는 질서없이 생각을 굴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陰間》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동쪽벽 밑에는 커다란 샘못이 세자리나 있는데 노란샘물이 퐁퐁 솟아 오르고 있다. 말그대로 黃泉이다. 노란샘물들은 흘러나와 강을 이루어 서남쪽으로 급히 흐른다. 강 량안에 《曼珠沙华》라는 이름을 가진 붉은 꽃들이 타는 불처럼 강을 따라 피여 있는데 꽃모양이 마치도 하늘에 대고 그 무슨 사연을 간절히 기원하는듯 두손을 합장한것처럼 생겼다. 원래 曼珠는 꽃요정의 이름이고 沙华는 잎요정의 이름인데 꽃이 필때면 잎이 없고 잎이 나오면 꽃이 지고 하여 한줄기에서 자라면서 종래로 서로 볼수가 없었다고 한다. 천여년을 이렇게 미친듯이 서로 그리워 하며 살다가 한번은 드디여 용감히 천규를 위반하고 사사로히 만났는데 그로하여 천벌을 받아 이렇게 저승에 와서 핀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이승의 다른 꽃들은 한줄기에서 잎과 함께 자유로히 필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량산백과 축영대》 못지않은 애틋한 사연이다. 강을 건널수 있게 서북쪽으로 돌로 쌓은 궁형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그 다리 교두에는 《奈何橋》라고 씌여져 있다. 《奈何》란 옛문구로서 우리말로 《어찌하리오?》하는 뜻인데 혼령이 일단 이 다리를 건너 갔다고 하면 다시는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병원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모두들 혼령이 아직 이 다리를 건너기 전이여서 가능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앞에서 흐르고 있는 이 강이 바로 이승과 저승의 분계선인 《忘川河》이리라. 강옆에는 큰돌이 박혀 있는데 《三生石》이라고 씌여져 있다. 저돌은 옛날 圓澤이란 중이 원숙한후 이승의 자기 친구를 여기로 불러와 이 강을 사이두고 만나서 륜회를 약속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후 그 중의 혼령은 한 임신부의 태를 빌어 그 임신부의 아기로 다시 태여났다. 저돌앞에 가서 서면 자기의 前世, 今世, 來世의 因果緣分을 한눈에 볼수 있으며 인생에서 채 마무리 하지못한 인정 여건들을 팔을 한번 휙-저어서 깨끗이 끝내 버릴수 있다고 한다. 교두아래에 《望鄕臺》가 있어서 다리를 거느기전에 마지막으로 자기가 살던곳과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영화를 보듯이 한번 휘-돌이켜 볼수 있다. 그 옆에 허술한 초막이 하나 있는데 초막앞에는 《孟婆茶亭》이라고 쓴 茶旗가 걸려 있다. 여기서 다리를 건느기전의 제일 마지막 사무을 끝내야 한다. 맹파녀신이 큰 바가지로 큰 차물독의 차물을 푹 떠서는 넘겨 주는데 그 차물을 받아서 꿀꺽꿀꺽 단모금에 마여야 한다. 그러면 여태까지 이승에서의 기억들이 말끔히 지워진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초막안에는 맹파녀신이 보이지 않고 큰 차물독 옆에 작은 걸상이 하나 놓여있고 허술한 차탁 량옆에 긴 걸상이 하나씩 놓여 있을 뿐이다. 물을 보니 갈증이 나서 차나 좀 얻어 마일가 하여 두리번 거렸다. 그때 다리 북쪽에서 한 목동이 소잔등에 앉아 피리를 불면서 상운을 타고 다리를 건네온다. 그 목동과 소는 모두 투명한 우유빛 형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미묘한 피리소리는 아주 먼곳에서 들려오는듯 하였다. 목동은 소잔등에 앉아 나의 앞을 지나가면서도 나를 무시한채 피리만 불어댄다. 문뜩 당조시인 杜牧의 명시 《淸明》이 생각난다; 청명절날 구질구질 비가 내리니, 길손들은 저마다 혼이 끊길 지경입니다. 술집은 어디쯤 있는가고 물었더니 목동은 저멀리 행화촌을 가리킵니다. (清明时节雨纷纷,路上行人欲断魂。借问酒家何处有,牧童遥指杏花村。) 그런데 이 목동은 너무나 무례하다. 아무리 신동이라 하여도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는건가? 저으기 자존심 상한다. 그리하여 소앞에 질러가서 조금 어성을 높여서 말을 걸넸다; 《이승에서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목동이 소잔등에서 와뜰 놀라더니 피리소리가 뚝 끊긴다. 목동은 나를 알아보고는 소잔등에 앉은채  두손 모아 쥐고 나를 향하여 조금 허리굽혀 인사한다.《이승에서 오신 손님! 안녕하십니까? 신은 오늘 우리 倍達村 당직입니다. 오늘 이승에서 손님이 오신다는 통지를 받고 겸사 여기로 마중 나왔습니다. 이승과 저승은 지척이 십만팔천리라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리마을 부락장님께서 손님을 요청하셨습니다. 손님께선 여기 이 을 목에 거시면 저 다리를 건너 가셨다가 다시 건너 오실수 있습니다. 저 다리를 건너 가신후 곧장 우리마을로 들어가시여 부락장님을 찾으십시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목동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일장 설명을 끝내고 그대로 소잔등에 앉아서 나에게 《玉符》을 넘겨 주고는 또다시 피리를 불면서 유유히 떠나가 버렸다. 신선의 도고한 그 기품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4, 저승부락 부락장님을 만나다. 우리민족의 전통 저승문화는 오늘까지도 그 완미한 체계가 아직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여기 저기에 널려있는 귀신이나 신선이야기들을 모아서 살펴볼때 대체로 불교에서 기원한 이야기가 많으며 또 중국 귀신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리민족의 저승이야기에서는 대체로 중대한 직책을 맡고 있는 혼령을 王이라고 하고, 부문별 직책을 맡고 있는 혼령을 神이라고 하며, 구체적인 직책이 없이 떠돌아 다니며 좋은일을 찾아하는 혼령을 仙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집장가 못가고 처녀총각이나 유아신분으로 저승에 오게된 혼령을 鬼라고 하고, 죄를 범하고 저승에 오게된 혼령은 魔라고 한다. 鬼와 魔는 정상사망한 혼령의 보증이 있어야만 저승사회에 입적할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소위의 육도륜회에 참여할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鬼와 魔는 자기를 보증하여 줄 혼령을 찾아 갈팡질팡 헤매다가 왕왕 멀정한 사람을 잘못 해치군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화제는 다른기회에 말하고 다시 본 화제로 돌아가자. 나는 목동한테서 《玉符》을 받아 목에 걸고 《奈何橋》를 조심조심 건너니 맞은켠에 동굴입구가 보인다. 입구위에는 篆体로 《倍達千年洞》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니 여기가 바로 배달족 망혼들이 모여사는 저승마을이렸다. 입구의 량옆에는 篆体내리글로 이렇게 새겨져 있다; 《淡泊以明志(탐욕이 없으니 뜻이 밝아지고)》 《寧静而致遠(그윽이 있으니 멀리 들리누나)》 동굴안에 들어서니 앞에는 또 굳게 닫긴 큰 돌문이 나타나는데 篆体로《千年門》이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 그 량옆에 나무로 깎아만든 《大門神左將軍》과 《大門神右將軍》이 눈을 뚝 부릅뜨고 지켜서 있다. 내가 두 문신장군앞에 다가가 《고찰원 도착이요. 부락장님의 초청을 받고 왔으니 어서 안내하시요!》 하고 전달하니 좌장군이 나를 왼쪽 현관으로 안내하여 한 자그마한 돌문앞까지 와서는 머리를 숙이고 서 있는다. 내가 바라보니 돌문틀우에는 《退世人員登記事務室》이라고 쓴 문패가 걸려있다. 돌문이 스르르 열리기에 들어서니 너른 대청이 나타나는데 중앙에 큰 사무상이 하나 놓여 있고 사무상 우에는 컴퓨터가 켜지여 있다. 그리고 대청 네벽의 웃부분은 몽땅 커다란 형광막으로 가리워져 있는데 마치도 증권 교역소에 들어선 감이 난다. 그 형광막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각기 《三百年修練進度表》,《五百年修練進度表》,《八百年修練進度表》,《一千年修練進度表》, 이렇게 분류되여 있다. 보아하니 지금 저승의 사회관리수준과 과학기술 수준이 바깥세상보다 별로 락후하지 않은것 같았다. 갑자기 형광막들이 동시에 세번 껌벅이더니 《歡迎到陰間考察!》이라는 자막이 나타난다. 이윽고 형광막에 거룩한 혼령의 영상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상운을 타고 내려와 나의 앞에 와서 나의 손을 잡아준다. 그 혼령은 투명한 우유빛 형체였지만 나는 분명히 그 혼령의 우렷한 존재를 보았다. 그이가 바로 우리 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의 혼령이였다. 우리민족의 현대 저승사회에서는 주덕해주장님의 혼령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시고 있으며 그이는 현재 倍達村이라는 우리민족 망혼들이 모여사는 저승부락에서 부락장을 맡아보고 계신다. 주덕해주장왕님께서는 倍達村부락에서 현명한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18층 지옥제도와 마귀제도를 전면 페지하였으며 大同神仙제도를 건립하고 실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倍達村에서는 다른 저승구역과는 달리 혼령마다 일률로 평등하며 통일적으로 능력과 취미에 따라 우주과제를 맡아 열심히 수련하면서 조화로운 저승사회의 도화원을 건설하고 있다. 혼령이란 우주의 한개 현상이다.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는 혼령들이 우주과제를 수련하는 과정에 생명현상을 체험하기 위하여 잠깐 들리는 곳이다. 수련과제가 많지 않은 혼령은 하루 과제만 마치고 돌아 가지만 수련과제가 많은 혼령은 좀 긴 세월을 살면서 파란만장을 체험해 보고 돌아 간다. 그러나 보통 백년을 초과하지 않는다. 《천년의 한번 기회를 축하. 고찰의 원만 성공을 축원.》 주덕해주장왕님께서는 나한테 축하와 축원의 멧시지만 전달했을뿐이다. 여태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저승사회의 많은 신비한 현상들에 대해선 저절로 고찰을 통해서 하나하나 그 비밀을 풀라는 뜻이이리라. 옛날에 공자가《살았을 때의 일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죽은후의 일을 어떻게 알수 있겠냐?(未知生,焉知死)》하고 말했는데 그때로부터 이미 2500여년이 지났으니 인젠 《살았을 때의 일을 계속 알아야 하겠지만 죽은후의 일도 좀 알아야 (續知生,始知死)》할때가 된것 같다. 갑자기 대청안이 온통 금빛으로 환해지더니 한마리의 금빛수탉이 날아와 주덕해주장왕님의 왼쪽어깨에 내려 앉는다. 주덕해주장왕님은 그 금빛수탉의 부리에서 금빛 카드를 한장 뽑아 나한테 넘겨준다. 그리고는 손을 저어 작별하며 다시 상운을 타고 형광막으로 올라가서 사라진다. 나는 주덕해주장왕님을 작별하고 금빛카드를 살펴보니 《無極》이란 두 글자를 박아넣은 저승 기자증이였다. 이 기자증을 가지고 저승에서는 시공간의 제한이 없이 그 어디에서, 그 어느때에, 고금중외의 그 어떤 력사인물과도 자유로히 인터뷰할수 있는 자격이 있다.   (아래의 편장은 공개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저자)  
94    <백화상조복무중심>을 지지할데 관한 함--주문화국 댓글:  조회:3457  추천:0  2012-07-21
关于对“朝鲜族丧葬习俗”保护和传承工作, 加强政策性扶持力度的请示报告   延边州文化局: 2009年6月,“朝鲜族传统丧祭礼仪”和“朝鲜族丧葬习俗”分别被指定为“州级”和“省级”的非物资文化遗产,我们是这项非物资文化遗产的保护单位。 (一)、 “婚丧文化”是每一个民族最基本的文化因素之一,其中,丧祭文化是不可或缺的重要因素。作为一个民族不可能没有自己的丧祭文化,世界上的每一个民族都拥有自己独特的丧祭文化,一个民族如果丢失自己的丧祭文化,这个民族的文化就会失去其完美性,这个民族就会失去自己的独特性。从这个意义上讲,保护和传承民族的丧祭文化是关系到民族命运的大事,这一观点毫不为过。 朝鲜民族历来很重视婚礼、花甲礼之类的喜庆文化,现代朝鲜民族的喜庆文化特别有发展,到处可见高雅的婚礼厅、生日大厦,而且家家生意都红红火火。可是对朝鲜民族丧祭文化是没有人关心,作为全国唯一的朝鲜族自治州的延边地区竟然没有一间朝鲜民俗特色的丧礼告别厅,没有一处朝鲜民俗特色的祭祀场所,朝鲜民族的丧祭文化已经濒临绝迹的境地,抢救和保护朝鲜民族的丧祭文化已经刻不容缓。 实际上丧祭文化也是人类文明的标志,是建设文明和谐社会的很重要的因素。我们通过民族的丧祭文化可以进一步增强民族意识,可以进一步宏扬传统的孝文化,可以进一步优化社会风气。 当然,丧葬习俗是根据时代的发展要改革的。国家已经颁布新的“殡葬管理条例”,以城市为中心的有条件的地方都实行火葬,这是时代进步的象征,是造福于子孙万代的好事情,朝鲜族传统丧祭文化完全可以与新的“殡葬管理条例”结合,发挥出更积极的作用。可是朝鲜族传统丧祭文化没有得到社会上应有的重视。 长期以来,朝鲜族传统丧祭文化一直依靠民间的自然习俗来沿袭过来,熟悉朝鲜族传统丧祭习俗的老一代人已经大多过世,社会上已经出现严重的失传和误传现象。随着施行新的“殡葬管理条例”以来,根据绝大多数朝鲜族遗属还是要按自己民俗来办丧事的需求,社会上出现了一些从事丧事服务行业的民间人,这些人一般是50岁以上的中年人,没有相关的从业证书,主要从事殓袭服务,没有规范的文化标准,这些人以个人身份与医院的有关护士联系,或在寿衣店直接拉客户,根据自己的片面的知识和经验来帮助朝鲜族遗属进行所谓的殓袭服务。 应该说这些人对朝鲜族传统丧祭习俗保存方面起到一定的作用,可是他们不能保证朝鲜族传统丧祭文化的正统性和传承大计,他们之后基本上是后继无人。因此,迫切需要建立行之有效的对朝鲜族传统丧祭文化保护和传承的保障机制。 (二)、 国务院办公厅的“关于加强我国非物质文化遗产保护工作的意见”中明确指出:“地方各级政府要加强领导,将保护工作列入重要工作议程,纳入国民经济和社会发展整体规划,纳入文化发展纲要。加强非物质文化遗产保护的法律法规建设,及时研究制定有关政策措施。要制定非物质文化遗产保护规划,明确保护范围、保护措施和目标。” 国务院办公厅的“意见”中还指出:“各级政府要不断加大非物质文化遗产保护工作的经费投入。通过政策引导等措施,鼓励个人、企业和社会团体对非物质文化遗产保护工作进行资助。要加强非物质文化遗产保护工作队伍建设。” 据我们所知,如今不少省份和地区已经出台了地方性的“非物质文化遗产保护条例”,如浙江、江苏、四川、海南、新疆、宁夏、云南… …等地区。可是,我们吉林省和延边地区还没有出台这方面的政策性“保护条例”,就因为这样,更加迫切需要政府有关部门对非物质文化遗产保护工作方面加强政策性指导和扶持措施。 自从2009年6月“朝鲜族传统丧祭礼仪”和“朝鲜族丧葬习俗”分别被指定为“州级”和“省级”的非物资文化遗产以来,我们为保护和传承朝鲜族传统丧祭文化,已经进行了如下的工作: 1、通过延边护士协会的协助,已经向延吉市内各朝鲜族遗属送达了约400多份关于朝鲜族传统丧祭规范的宣传材料。 2、已经向延吉市内每一家寿衣店和每一位朝鲜族丧事服务人员手里送达了关于朝鲜族传统丧祭规范的宣传材料。 3、通过各医院领导的同意,帮助延吉市内朝鲜族遗属,已经累计进行了约100多人次丧事服务活动。 4、开设了朝鲜族礼仪研究会网站,宣传朝鲜族传统文化和相关文化知识。网站地址:http://waaw.lingd.net/ 5、为了保证朝鲜族传统丧祭文化保护工作的合法性、规范性、长期性,我们通过有关部门的批准,属下设立了“白花相助”治丧服务中心,服务范围是:殓袭、协助殡葬事宜、主持或指导丧祭礼仪等。 (三)、 以前一阶段工作当中的经验来看,经常向主管局和政府有关部门请示工作很有必要,保护和传承朝鲜族传统丧祭文化不尽是某一个团体或某一个人的事情,是全社会都要关心的事情,是关系到每一个朝鲜族人亲身利益的事情。 2010第二工作年我们有如下的计划: 1、首先在朝鲜族丧礼殓袭服务方面实现组织化、规范化,这是建立长期保障机制的必要措施。保护朝鲜族传统丧祭文化,直接进行服务是最有效的保护方法,而这些服务应该是有组织、有规范的行为,只有这样才能拯救濒临绝迹的朝鲜族传统丧祭文化。可是如今社会上的阻力比较大,长期从事这个行业的民间人各自占领自己的领地不肯与我们合作。实际上我们并不是抢夺他们的饭碗,具体作业还是要他们来负责,我们只是在这个行业组织起来实现规范化,要建立长期而可靠的保障机制而已。 2、向州民政局主管殡仪馆的部门提出建议,在州内各殡仪馆设置至少一间朝鲜民俗特色的告别厅。延边是全国唯一的朝鲜族自治州,而朝鲜族遗属却不能按自己民俗来告别亲人,这不符和党的民族政策。 设置朝鲜民俗特色的告别厅不必要搞绝对化,在现有的基础上稍微改动就可以。只要能表现出朝鲜民俗特色,只要能体现出对朝鲜族遗属的尊重,绝大多数朝鲜族遗属会感到欣慰的。 3、向州民委主管民族事务的部门提出建议,在延边地区的各中心城市设置至少一处朝鲜民俗特色的祭祀场所。怀念故人人之常情,朝鲜民族固有很丰富的祭祀文化,自古祭祀活动是发扬传统、宣扬孝道、团结族人的很重要的手段。我们应当认识到保护朝鲜族祭祀文化对于建设和谐社会有着不可忽视的作用。 要实现这些计划,除了我们努力工作外,政府各有关部门的支持和协助是必不可少的。我们诚恳向州文化局提出请示: 1、帮助我们与州卫生局和延边医院沟通,解释关于保护非物质文化遗产方面的相关政策,争取这些部门和单位对我们工作的支持和协助,为实现对朝鲜族丧礼殓袭服务方面的组织化、规范化创造有利条件。 2、帮助我们与州民政局和市殡仪馆沟通,解释关于保护非物质文化遗产方面的相关政策,向这些部门和单位推荐我们的建议,争取与他们共同认真研究相关问题的机会,为解决朝鲜民俗告别厅问题创造有利条件。 3、帮助我们与州民委的有关部门沟通,解释关于保护非物质文化遗产方面的相关政策,争取向州民委提交相关项目报告的机会,争取他们对我们项目的重视和研究并立项扶持,为解决朝鲜民俗祭祀场所创造有利条件。 以上请示是否妥当,请多指教,予以解决为盼。     请示单位: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2010-11-23
附录: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文件 延礼函字 2010第2号 关于朝鲜族丧礼殓袭服务行业 实现组织化、规范化的建议   延边州文化局、延边州卫生局、延边医院: 2009年6月,吉林省政府颁布:将“朝鲜族传统丧葬习俗”指定为“省级”非物资文化遗产,保护单位是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在朝鲜族传统丧葬习俗中“殓袭”( 给死者穿寿衣、包裹、入棺)是很重要的丧礼环节,包含很丰富的文化内涵,具有很独特的民族风格,是至今为止保存比较好的丧葬习俗之一。 朝鲜族传统丧葬习俗中的“殓袭”是纯粹属于文化范畴,与新的“殡葬管理条例”不发生冲突。 随着施行新的“殡葬管理条例”以来,根据绝大多数朝鲜族遗属要按自己民俗来办丧事的需求,社会上出现了一些从事丧事服务行业的民间人,这些人一般是50岁以上的中年人,没有相关的从业证书,主要从事殓袭服务,没有规范的文化标准,这些人以个人身份与医院的有关护士联系,或在寿衣店直接拉客户,根据自己的片面的知识和经验来帮助朝鲜族遗属进行所谓的殓袭服务。 应该说这些人对朝鲜族传统丧祭习俗的保存方面起到了一定的作用,可是他们不能代表朝鲜族传统丧祭文化的正统性,不能保证传承大计,他们之后基本上是后继无人。因此,迫切需要建立长期的保障机制。 对行业实现组织化、规范化,这是保护相关行业文化最有效的保障措施。因此我们建议:首先在朝鲜族丧礼殓袭服务行业实现组织化、规范化,逐步建立保护和传承朝鲜族传统丧祭文化的长期保障机制。 我们是吉林省政府指定的“朝鲜族传统丧葬习俗”的保护单位,对保护和传承“朝鲜族传统丧葬习俗”负有义不容辞的责任。 为了更有效进行对“朝鲜族传统丧葬习俗”的保护和传承工作,我们通过州工商部门和有关税务部门的批准,属下设立了“白花相助”治丧服务中心,经营范围是;殓袭,协助殡葬服务,主持、指导丧祭礼仪服务等。 保护朝鲜族传统丧祭文化,直接进行服务是最有效的保护方法,而这些服务应该是有组织、有规范的行为,只有这样才能拯救濒临绝迹的朝鲜族传统丧祭文化。 可是如今社会上的阻力比较大,长期从事这个行业的民间人各自占领自己的领地不肯与我们合作。实际上我们并不是抢夺他们的饭碗,具体作业还是要他们来负责,我们只是在这个行业组织起来实现规范化,要建立长期而可靠的保障机制而已。 保护和传承非物质文化遗产是全民族的事业,只靠一个人或一个团体的力量是搞不好这一事业的。保护和传承“朝鲜族传统丧葬习俗”,除了我们努力工作外,政府各有关部门和各医院的支持和协助是必不可少的。 我们诚恳向州文化局、州卫生局和延边医院提出请求: 1、作为主管局的州文化局,帮助我们与州卫生局和延边医院沟通,解释关于保护非物质文化遗产方面的相关政策和意义,争取这些部门和单位对我们工作的支持和协助。 2、作为全州卫生系统主管局的州卫生局,与我们建立保护“朝鲜族传统丧葬习俗”的工作协助关系,鼓励和支持属下的州内各医院都积极协助我们的工作。 3、作为延边最大代表性医院的延边医院,与我们建立保护“朝鲜族传统丧葬习俗”的工作协助关系,制定相关的制度或规定,支持和协助我们的工作。 以上建议是否妥当,请多指教。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2009-12-10    
92    "조선족 고별청" 설립 신청함에 대한 답복---주민정국 댓글:  조회:2509  추천:0  2012-07-21
附录: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文件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延礼函字 2010第3号 关于在延吉殡仪馆设立朝鲜族告别厅的建议   延边州文化局、延边州民政局: 2009年6月,吉林省政府颁布:将“朝鲜族传统丧葬习俗”指定为“省级”非物资文化遗产,保护单位是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丧葬习俗是根据时代的发展要改革的。国家已经颁布新的“殡葬管理条例”,以城市为中心的有条件的地方都实行火葬,这是时代进步的象征,是造福于子孙万代的好事情,朝鲜族传统丧祭文化完全可以与新的“殡葬管理条例”结合,发挥出更积极的作用。 可是朝鲜族传统丧祭文化没有得到社会上应有的重视。作为全国唯一的朝鲜族自治州的延边地区竟然没有一间朝鲜族民俗特色的丧礼告别厅,朝鲜族遗属不能按自己民俗来告别亲人,这不符合党的民族政策,不符合民族自治条例,是朝鲜族传统丧祭文化濒临绝迹的主要原因之一。 按照朝鲜族传统丧葬习俗,现在所谓的告别仪式就是吊唁和发引程序,是在朝鲜族传统丧葬习俗中最严肃、最庄重的代表性仪式。在朝鲜族传统丧礼的吊唁过程中最忌讳遗体形态外露,用棉被遮盖后必须用屏风或幔帐来遮挡遗体。遗体安放位置也不是大堂中央,应该是大堂的北侧墙边或西侧墙边。可是现在举行告别仪式的时候在众目之下把遗体暴露在大堂中央,这严重违背了朝鲜族传统丧葬习俗。 延边的朝鲜族举行丧礼完全有权利按自己民俗来告别亲人。因此,我们向州文化局和州民政局殡葬事务有关部门提出建议:首先在延吉殡仪馆设立一间或几间朝鲜族民俗特色的告别厅,逐步实现延边的朝鲜族举行丧礼都能按自己民俗来告别亲人。 设立朝鲜族告别厅应该注意以下几个方面的特点: 1、遗体安放台设在大堂的北侧墙边或西侧墙边。 2、遗体安放台用民族特色的大型屏风或幔帐来遮挡,两边有“謹弔”字样。 3、屏风或幔帐上方是黑色横幅;“故口口口告别仪式”。 4、举行告别仪式时铭旌悬挂在屏风或幔帐的右侧,挽幛悬挂在屏风或幔帐的左侧。 5、屏风或幔帐前边摆设灵台,中间高处悬挂遗像,灵台上摆放各种花束以代祭物,吊唁可以免敬酒。 6、鼓励丧主(主要当事人)着孝服。 7、唁客吊唁是分批举行,不是排长队流水式经过。 设立朝鲜族告别厅不要刻意模仿韩国告别厅的模式,当今韩国的殡葬文化是以西方宗教为主导,固有的传统殡葬文化已经严重异化。我们的朝鲜族告别厅应该着重显示中国朝鲜族的特色,传统模式和现代模式有机地结合起来,创造性地应用当今的高新技术,让朝鲜族人充分感觉到传统民族文化的高雅品位。 以上建议是否妥当,请多指教。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2009-12-10    
91    사례편람 원문보기 댓글:  조회:4438  추천:0  2012-07-18
현토주해 사례편람 이 책은 4가지 예(禮)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기 편리하게 만든 것으로 8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례(喪禮) 부분이 5권으로 제일 분량이 많다. 나머지 3권은 관례(冠禮), 혼례(婚禮), 제례(祭禮)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상단에는 몇몇 한자의 훈과 음이 한글로 적혀져 있다. (박형익) 위의 사진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수 있음   [1] [2] [3] [4] [5] [6] [7] [8] [9] [10] 기타 문헌 목록 주소 http://www.hangeulmuseum.org/sub/information/bookData/list.jsp?search=&g_class=0401  
90    중국 조선족은 동화되는가? 댓글:  조회:5333  추천:2  2012-07-18
중국조선족 동화문제 중국조선족의 동화문제를 두고 맹목적으로 락관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리유는 제법 당당하다. 첫째, 구쏘련이나 일본 등의 나라에서는 강압적인 민족동화정책을 실시하나 중국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정책이 있다. 둘째, 중국조선족의 집거구는 대개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반도와 잇대여있으므로 본토와의 래왕이 잦고, 정치, 경제, 문화, 풍속 등 제분야의 영향을 끊임없이 흡수하게 된다. 셋째, 아세아지구에서 발달국의 하나인 한국과 중국과의 수교는 특히 중국조선족한테 주는 충격이 크다. 한국의 발전된 경제와 문화의 영향은 중국조선족을 승화시킬수 있는 중요한 외적 요인의 하나이다. 이상의 관점은 전연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기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며 현상만 보고 실속을 못보는‘아Q’식 자아도취의 사유에 가깝다고 하겠다. 중국조선족의 동화는 시간문제일따름이다. 력사가 이런 대답을 주고있는것이며 오늘날 중국조선족이 처한 환경, 즉 중국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제요소가 그것을 제시해주고있다. 1. 중국조선족은 누구인가? 13억을 헤아리는 중화민족이라는 망망한 대해속에서 한방울의 물이나 다름없는 조선족은 구경 누구인가? 1986년 중국조선족 력사학계의 권위인사들이 공동집필한『조선족략사』에서는 조선족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있다. 우리 나라의 조선족은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다정한 이웃나라 인 조선으로부터 이주해온 위대한 민족이다. ……1845년 이후에 두 나라 정부의 봉금정책이 완화되면서 강을 건너와 사사로이 땅을 개 간하는 사람이 급속히 증가되였으며 따라서 조선변강의 백성들이 대량적으로 우리 나라 동북에 이주하여 정착하게되였다. 중국의 조선족을 19세기 중엽부터의 순이주민으로 간주하고있는 이 론법은 력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맞지 않는다. 조선족의 월강이주력사는 19세기 중엽부터인것이 아니라 시간을 훨씬 소급하여 내려갈수 있다. 리조시기 동지중추원사 양성지(同知中樞院事 梁城之)가 1464년에 국왕한테 올린 상소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신이『료동지(遼東志)』를 보니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고려인 은 홍무년간(洪武年間)에 3만여인이요. 영락(永樂)때 미쳐서는 4만 여인이다. 오늘 료동에서 사는 고려인은 열에 셋이며 서로는 료양 (遼陽), 동으로는 개주(開州), 남으로는 해개제주(海盖諸州)에 이르 기까지 분포되여있다.(朝鮮李朝世祖實錄 卷 34) 『료동지』는 영락 16년(1418) 명성조(明成祖)의 “천하의 군현지서를 만들어 올리라”는 어명을 받들어 한것이니 조선인은 적어도 영락10년(1412) 이전에 벌써 료동인구의 중요한 구성부분이였음을 말해준다. 당시 조선인의 이같은 인구의 래원은 원, 명의 폭력강제수단에 의해 잡혀온 포로와 리조의 부패통치, 편벽한 서북변강의 환경에 의해 생계를 유지할수 없게 된 변민들이 스스로 살길을 찾아 이주한것이다. 이같은 력사의 이주흔적을 오늘 우리는 료녕성 개현 박가구, 본계현 박보촌, 봉성현 북산촌과 서가보, 길림성 서란현 박가툰 등지에서 찾아볼수 있다. 오늘의 중국조선족은 이러한 시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여야 할 줄로 안다. 중국의 조선족은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온 이주민으로서 선조의 정기를 발굴하고 창발하여 력사의 맥을 이어가는 위대한 민족이다. 비록 본토에 남은 유민들은 벌써 다른 민족으로 동화되였지만 조선반도로 넘아간 고구려, 발해민들은 순수한 우리의 민족으로 대를 이어왔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견지에서 오늘날 중국조선족의 선조의 피와 정기를 받지 않았다고 부정할 리유는 추호도 없다. 고조선으로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는 장장 2천여년동안 조선족 선조들은 광활한 동북땅을 개척하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부여의 고조선 유적, 환인, 집안 등의 고구려유적, 녕안현의 발해촌, 돈화, 화룡, 훈춘의 발해유적들에서는 력사의 거창한 맥박이 박동치고있다. 따라서 1895년 조•중간의 봉금정책 이후를 조선족의 순이민기로 잡고있는 『조선족략사』는 중국조선족의 성질을 규명함에 있어서 력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기를 도외시하고있는것이다. 민족의 력사는 우리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창조하는 거울이며 민족정기는 민족자부심과 민족의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의 주요한 원천이다. 그 어떤 민족이든지 민족의 객관적 요소보다도 더욱 중요한것은 민족자부심과 자각이다. 만약 그것을 잃는다면 민족의 단합과 발전은 운운할 나위가 없다. 2. 중국조선족은 동화되는가? 민족구성요소중 가장 중요한것은 국토와 주권이다. 만일 국토와 주권을 잃게 되면 기타의 경제, 문화, 언어, 문자가 유린당하고 민족정기를 발동할수 없게 된다. 반대로 국토와 주권을 얻게 된다면 잇따라 경제, 문화와 언어문자가 수립될수 있어서 민족정기를 떨치게 되는것이다.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2천년간 우리의 선조들은 광활한 국토와 주권을 가졌으므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하지만 667년 라당련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망하고 926년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된 이후 국토와 주권을 잃은 백제, 고구려의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포로로 잡혀갔다. 인신의 자유를 잃은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청나라시기 조선의 포로를 매매하던 정경으로 미루어 가히 추측할수 있다. 이같이 인신의 자유가 없는 노예로 된 포로들은 부득불 동화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당서•고려전(舊唐書•高麗傳)』에 의하면 광활지로 강제 이주당한 고구려의 포로중 일부는 그후 료동으로 도로 나왔지만 절대 다수는 중원과 서북일대에서 분산되여 한족(漢族) 또는 기타 민족과 잡거하고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다른 민족으로 동화되였다고 씌여있다. 발해는 문화수준이 높고 민족의식이 강했는바 멸망된 이후에는 여전히 한개 민족으로서 그후의 금, 료에서 활동하였으며, 원조에 가서야 비로소 력사상에서 흔적을 감추었다. 그들은 동화되지 않기 위하여 발해인 내부의 대가들사이에서 통혼하는 습속을 보존하여 발해인 내부혼인을 견지하는것으로써 타민족의 속성침투를 방지하였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를 꽃피울수 있는 국토가 없고 그것을 담보하는 주권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방법이든지 통할 수가 없다. 명청시기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온 조선민족 후예들도 오늘날 호적엔 조선족이라고 적혀있지만 실질상으로는 동화된것이나 다를바 없다. 어떤 학자들은 개현 박가구, 본계현 박보촌, 서란현 박가툰 등지의 박씨들을 동화되지 않은것으로 보는 폐단도 있지만 그것은 그릇된 관점이다. 아래서 간단히 분석해보자. 혼인례의 방면; 이 세 박씨촌 한족 녀인들은 모두 종발이였으나 박씨 녀인들은 종래로 천족이었다. 서란현 박씨집에 시집온 70세의 한족 할머니는 박씨집에서 동지날에 오그랑팥죽을 먹었다고 했다. 이 세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개고기도 즐겨 먹는다. 그런데 지금 박씨들은 오그랑팥죽이 아니라 교즈를 먹고있다. 그리고 한족들도 개고기를 먹지 않는것이 아니며 지금 박씨들이 개고기를 먹는 방법도 우리 조선족과 틀리다. 또한 박보촌의 박씨들은 삼일장을 고수하고있다. 해방전까지 장례축문의 첫 구절이“당나라 백만인마가 침입하매 개소문이 그것을 격퇴하매……”로 되여있다. 하지만 오늘의 박씨들은 복장이 한족과 다름 없고 “당나라 백만대군이 입침하여 개소문이 이를 격퇴하여……”도 쓰지를 않는다. 그런데 왜 한족으로 되여있던 호적을 조선족으로 고쳤는가? 1989년 7월 개현 박가구에 가서 취재하던 중 필자는 그들의 의식속에서 한가닥 민족의 정기를 보았다. 그들은 해방전부터 줄곧 한족이나 만족으로 호적을 올렸는데 개혁개방이 되면서 자기들의 원 모습을 찾을 욕망이 일어났던것이다. 조상의 피도 속이지 않고 또 소수민족으로서 우대도 받게 되니 그야말로 일거량등이였던것이다. 이미 동화된 고대의 조선족과 현실의 박씨 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아래와 같은 동화법칙을 도출할수가 있다. 첫째, 국토와 자주권이 없는 민족은 필연코 동화된다. 둘째, 민족의 구성요소중 경제, 문화의 동화보다 언어와 풍속습관의 동화가 늦다. 셋째, 민족동화에서 최후의 보루는 관념동화이다. 박씨, 문씨, 서씨들은 이미 언어, 문자, 경제, 문화 등에서 완전히 동화되였고 풍속습관도 거의 몽땅 동화되였지만 관념상에선 아직도 동화되지 않고있다. 관념이란 곧바로 민족정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중화민국시기 개현의 박가구에서 사는 한족 형씨(邢氏)들이 마을 이름을‘형가구’로 고치려고 했을 때, 박씨들은 한결같이 일어나 관부에까지 찾아가서 고발하여 끝내 마을이름을 지켜왔던것이다. 이미 완전히 동화된것이나 다름없는 박, 문, 서씨들이 10여년 전에 갑자기 조선족으로 등록한 사실도 관념동화의 어려움을 말해주고있다. 관념상 그들은 미처 동화가 되지 않고있다고는 해도 조선족으로서의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를 잃었으므로 사실상 온전한 민족이 아니다. “비록 민족이라는 껍질과 생명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한무더기의 시체나 고기덩어리에 지나지 않는것이다.”(박성수,『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16∼17쪽) 3. 동화와 반동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까지 수천년간 력대 중국정부는 약소민족에 대하여 무지하고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실시해왔다. 조선민족도 례외가 아니였던바 백제와 고구려, 발해가 멸망된 후의 민족사는 피눈물로 얼룩져있다. 『구상서•고려전』에 보면 당나라가 료동을‘정복’한 후 관내 한족이 동북으로 천입한 것이 아니라 료동의 원주민들을 중원지구로 강제로 이주시켰던것이다. 포로된 임금과 왕자 등 귀족들은 중원으로 끌려간 후 외계와 단절된 련금생활을 해야 했고 기타는 마소같이 노예로 팔려갔다. 그들은 뿌리뽑힌 나무가 사막에 던져진 격으로 원래의 자기모습을 점차 빼앗기고 한족으로 변화되여갔다. 이같이 폭력에 의한 야만적인 강제동화는 온화한 문화적 동화정책에 비해서 동화시간을 대폭 줄일 수는 있을망정 더욱 거세찬 반항의 물결을 일으킬뿐이였다. 고구려와 발해민들은 반동화책략을 써왔던바 적극적인 방책과 소극적인 방책으로 갈라볼수 있다. 적극적인 반동화책략이란 잃었던 강토를 되찾아 다시 주권을 세움으로써 민족 자체발전의 원 토대를 수복하는것이다. 소극적인 반동화책략은 민족발전의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혈연연장으로 자기를 보존해가는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멸망된 발해인들이 발해인 내부의 통혼으로 타민족 속성의 침투를 방지하려고 시도했던것을 례로 들수 있다. 근대로부터 오늘까지 동화와 반동화투쟁은 세단계로 크게 나누어볼수가 있다. 첫째 단계; 청정부의 강압적 동화이다. 19세기 말엽 두만강, 압록강 이북지대로 조선민족들이 대량 월강하게 되자 청정부는 토지소유권 박탈로 강제동화를 시도했다. 그 구체적 수단은 치발역복(稚髮易服)이다. 당시 조선족들은 치발역복에 대하여 두가지 자세를 취하였다. 한부류는 민족의 절개를 지키고 끝까지 반항한 사람들로서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런 연고로 피땀으로 개간한 땅을 점산호한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되여 우마와 같은 생활을 해오지 않을수 없었다. 다른 부류는 솔선수범하여 치발역복하고 귀화입적하였다. 이부류는 또 다른 성질의 두가지 인물로 나뉜다. 화룡현 리영춘(李永春)은 치발역복 귀화입적하고 한족의 양아들이 됨으로써 대지주가 되여 같은 민족의 피를 짜먹는것을 락으로 삼았다. 이부류는 민족 반역자로서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헌 발싸개처럼 집어던진 자들이다. 하지만 양정학당의 창시자인 리동춘(李東春)과 같은 민족계몽운동의 선구자들은 반일구국의 책략으로 치발역복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조선민족이 귀화입적하여 토지를 소유하고 생업을 유지하는것으로써 간도땅을 반일독립운동의 기지로 만들려고 했던것이다. 당시 일제의 침략마수가 조선에 뻗쳤고 또 만주로 뻗쳐오는 시급한 상황에서 리동춘 등 계몽의사들의 귀화입적 방침은 적극적인 의의가 있다. 둘째 단계; 일제의 강압적 노화교육이다. 1932년 일제는 만주국을 세우고 식민지노화정책을 실시하였다. 1935년 9월 일제는『만주국교육방안』에서“재만조선인은 국제적 훈련이 결핍되고 도덕수양이 부족하다. 새로운 국가를 건립한 후 일본과 우리 국민지간의 융합은 상당히 어렵다. 조선민족은 새 국가를 건립한 후 일본과 우리 국민지간의 융합은 상당히 어렵다. 조선민족은 새 국가의 우환이 될것이다.”“조선인의 교육에 대해서는 동화의 방침을 실시해야 하는데 이를 만주국에서 담임하는것이 상책이다.”“간도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학교들은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의 어용도구였고 치안에 혼란을 조성하였으므로 엄격히 취제 또는 폐교시켜야 한다.”(『만주국교육방안』,재만조선인 교육개선안, 141∼166쪽)라고 하였다. 일제는 이같은 식민지노화교육 방침에 좇아 조선인 반일사립학교를 강제로 합병, 개편, 폐교시켰으며 반일애국사상이 있는 조선인 사립학교의 교직원과 학생에 대하여 엄격한 심사와 면직, 체포, 감금, 학살 등 야만적인 진압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전 동북에 조선인 학교가 도합 710개나 있던것이 1932년에 이르러서는 377개로 감소되였다. 길림성 조선인 사립학교도 308개(종교단체에서 꾸린 사립학교도 포함)였던데에서 1935년에는 231개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보통학교는 많이 늘어났는바 길림성에서 일제가 경영한 조선인 보통학교는 만주사변 전 45개로부터 1936년에는 76개였다.그리고 조선인 학교에서 조선력사교수를 폐지하고, 태극기를 걸지 못했고 조선애국가를 부르지 못했으며 일본어를 국어로 삼게 했다. 세번째 단계; 문화혁명시기 민족말살정책이다. 이시기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강압적 민족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사회주의나라에 무슨 민족의 불평등이 있는가”라고 하면서 민족문제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민족문제의 실질은 계급투쟁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시기는 민족이 융합되는 시기라는 관점을 내들고 소수민족한테 인위적이고 강박적인 융합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족은 기타 다른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민족의 언어, 문자, 교육, 문화, 풍속, 습관 등 제분야에서 독립성과 특수성이 무시당하고 한족과 똑같은 통일성, 공통성만 강조하게 하였다. 일단 누가 상대적 독립성을 이야기하면 ‘지방민족주의분자’라는 감투를 쓰게 되였다. (1) 정치방면; 1966년 주신(모택동의 조카 모원신의 가명)이 오면서부터 연변은 대혼란에 빠졌다. 그는 권력쟁탈을 위해 조선족의 대표인물 주덕해를 ‘대반역자’,‘간첩’등으로 잡았고 층층에서“크고 작은 주덕해”를 타도했으며 무장소동이라는 억울한 사건을 조작하여 연변에서 전면적인 내전을 도발하였다. 당시 조선족은 국외와 사회관계가 있다면 무조건 ‘간첩’으로 잡혔는데 연변에서만도 수천명 간부와 군중이 생명을 잃었고 불구자로 되였으며, 수만명이 련루되여 심사를 당했다. (2) 경제 방면; 1967년과 1968년은 문화대혁명중 내란이 가장 심한 시기였고 전국적으로 국민경제가 가장 큰 파괴를 당한 시기였다. 조선민족경제도 이 두해사이에 아주 심한 파괴를 당했다. 공•농업생산 총액은 1966년에 비해 1967년에는 6.3%, 1968년에는 그 전해보다 9.4%내려가고, 재정수입은 14.6%, 10.5%내려갔다. 종업원 평균로임은 감소되였는바 1968년이 1967년보다 3.9% 내려갔다. (3) 언어 방면; 그들은 소수민족언어는 “쓸데없는것”이며 “까마귀소리 같다”라고 하면서‘조선어무용론’을 극력 고취하였다. 그 결과 사회상에서 조선어의 지위가 여지없이 떨어졌고, 연변의 통용어가 되지 못한것은 물론이고 회의에서도 통역이 없었고 문건을 내려보내도 역문이 없었다. 번역기구가 취소되고 조선어문연구기구도 없어졌다. 조선문 잡지는 거의 다 폐간되였으며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원고를 한문(漢文)으로 심의, 결정한다는 규정을 지은 다음부터는 원래의 조선말 신문과 방송이 번역신문, 번역방송으로 되였다. 심지어 도서관에서는 조선문도서를 없애려고까지 했다. 조선어를 혁명해야 한다는 구호밑에 한어는 조선어를 발전시키는 주요한 원천이므로 조선어를 한어와 같게 하는 방향에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조선어의 력사적 계승성을 무시하고 조선어발전의 내재적 합법칙성을 위반하면서 한어단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이 엄중했다. 동시에 한어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다. 도시와 향진(鄕鎭) 등 조건이 허락되는 곳에서는 될수록 자식들을 한족학교에 보냈다. (4) 교육 방면; 그들은 민족교육체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조선민족의 고급인재를 양성하는것을 취지로 하는 연변대학에 으뜸가는 목표를 두었다. 그들은“민족분렬주의를 실시하는 검은 거점”이라고 하면서 연변대학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교원과 학생의 민족비례를 뜯어고쳤다. 문화대혁명 전 연변대학 학생의 민족비례는 조선족이 80%이고 한족과 기타 민족이 20% 좌우였으나 문화대혁명기간에는 정반대로 되였다. 그리고 민족대학의 특성을 보여주는 학과목을 취소하였다. 문화대혁명 전 연변대학 력사학부에서는‘중국조선족력사’,‘조선근대사’등 학과목이 설치되였으나 이때는 취소되였다. 그리고 조선어 전공학과의 주요한 취지는 조선족 중학교의 어문교원을 양성하는것이였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 조선어 전공학과의 28명 입학생 중 조선족이 11명이였고 한족이 17명이였다. 한족이 조선어 전공학과에 들어오는것은 양성취지에도 맞지 않거니와, 조선어를 모르는 한족이 조선어전공학과에 와서 근근히 몇해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족 중학교에 가서 조선어를 가르칠수 없다는것은 명백한 사실이였다. 한족학생이 부쩍 늘어나는 바람에 조선어 전공학과에서는 부득불 교수를 한어로 하였으며 심지어 현대조선어도 한어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반면에 한어 전공학과를 중지시키는 통에 조선족 중학교의 한어교원의 원천이 거의 근절되였다. 문화대혁명 전 전국 조선족교육에서는 단일민족학교 형식을 보통교육학교 운영의 중요한 형식으로 삼았으며 민족이 잡거하고 학생수가 적어서 단일민족학교를 꾸릴수 없는 곳에서만 민족련합학교를 꾸렸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단일민족학교 형식이 ‘지방민족주의’를 조장시키는 형식이라고 했다. 그 대신 민족련합학교 형식을 민족의 ‘융합’을 추진하는것으로 보았다. 1965년 훈춘에는 민족련합학교가 6개소였으나 1975년에는 17개소였고, 돈화는 조선족중•소학교 45%가 한족학교에 병합되였으며, 23%의 조선족 소학교가 없어졌다. 기타 지구도 이와 같은 상황이였다. 한편 학교에서는 조선어문교육이 여지없이 파괴되였다. 교수시간도 줄어들었다. 10년제 학교의 과정안에 보면 중•소학교의 조선어 교수시간이 소학교는 1,060교시, 중학교 540교시로서 문화대혁명 전보다 1,000여시간 적어졌다. 교수내용과 교수방법으로 보면 조선어 교수요강은 한족학교 교수요강을 수정하여 리용한것이였고 조선어교과서는 한어작품 번역교재였다. 조선족학교의 간부와 교원대오는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파괴당했다. , , 등으로 비판투쟁을 받은 사람은 부지기수인데, 연변대학에서 으로 된 사람은 29명이나 되며 그에 련루된 사람은 무려 80여명이다. 연길현 제5중학교(현재 조양천 제1중학교)의 교원과 종업원은 76명이였는데 여러가지 루명을 쓰고 투쟁을 받은 사람은 연인수로 무려 45명이였다. 그들은 라는 사상의식을 극구 선양하면서 , 를 배양했다. 그러한 수요에 따라 어문(조선어도 포함)에서 모주석 저작을 기본교과서로 하였다. 고급중학교에서는 『모택동저작선』, 소학교에서는 『모주석어록』을 기본교과서로 하였다. 물리교과서는 뜨락또르, 디젤유발동기, 양수기 등이 주요한 내용이였고 , 화학은 농업화학, 토양개량, 수학에는 부기와 측량, 조선어는 대비판문장, 소평론, 사상총화 등이였다. (5) 풍속•습관방면; 문화대혁명시기 모든 전통관념과 결렬하고 사회주의의 새로운 풍속•습관을 수립한다는 기치아래 모든것을 파괴하였다. 문화대혁명전 조선족마을에선 예전의 조선풍속에 따라 관혼상제를 지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의관으로부터 결혼, 생일, 회갑, 장례 지어는 상두막까지 불을 맞아 죽어서까지도 전통을 지킬 수 없었다. 한복이나 치마저고리는 반동적인것으로 되였고 누런 군복이여야 혁명적인것이였다. 결혼 때는 례단으로 『모태동선집』과 호미나 곡괭이가 오갔고, 혁명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였으므로 결혼날 아침까지도 일밭에 나갔다 왔다. 족보를 불사르고 혈육관계까지도 계급관계로 대체되였다. 총적으로 이시기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풍속습관 등 제분야는 뿌리뽑히다시피 되였다. 그런데 가슴 아픈것은 조선족자신이 자각적으로 이런 악과를 빚어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국제주의 혁명자의 자태로 자기의 민족적인것을 버리고 자각적으로 동화되였던것이다. 이시기에 투쟁비판을 받은 조선족간부와 군중들은 적지 않게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갔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민족절개를 굽히지 않고 자살로써 절개를 지켰다. 4. 중국조선족의 찌든 모습 오랜 력사의 비바람속에서 오늘까지 간신히 지쳐온 중국조선족은 찌든 모습으로 양상되고있다. 첫째 인구문제; 조선족 인구는 1964년의 133만 9,569명으로부터 1990년의 192만 574명에 이르게 된 사실로 보아 중국의 기타 민족의 인구장성속도보다 훨씬 굼뜨다. 1982년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964년부터 조선족인구 발전속도는 겨우 31.77%로서 전국인구의 평균장성속도(45.24%)에 비해 13.47%가 적고, 한족(43.82%), 전국 각 소수민족인구의 평균장성속도(68.24%)에 비해 각각 12.05%, 36.47%가 적다. 조선족 인구의 년평균 장성속도도 전국에서 제일 낮다. 1964년부터 1982년까지 매년 평균증장속도는 겨우 1.5%로서 전국인구의 년평균 증장속도(2.1%)에 비해 0.6% 낮고 전국 소수민족인구의 년평균 증장속도(2.9%)에 비해 1.4%, 한족(2.0%)보다 0.5%낮다. 앞으로 조선족 인구의 증장은 계속 하강선을 그을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조선족의 년령구조에서 중위수가 비교적 높고 소년아동계수(1982년 조선족인구의 28.36%)가 낮으며 로년계수가 높은데다 조선족 인구의 문화구성이 비교적 높기때문이다. 년평균 증장속도를 1.5%로 계산한다면 2000년에는 조선족 인구가 230만 7천여명으로서 겨우 30.7% 증장될것이다. (이 론문을 쓸 당시보다 10년이 지난 오늘 오히려 조선족인구는 증장폭을 보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마이너스 증장을 보여서 2백만을 초과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1982년 전국 각 민족 의 2000년의 인구예측은 다음 도표와 같다. 전국 각 민족 2000년도 인구 예측표 년도 1964 1982 1990 2000 비례(%) -------------------------------------------------------- 전국 691.220,104 100,391,400 112.3799,513 145.934,900 145.9 -------------------------------------------------------- 한족 651.296,000 936.675,000 1042.482,187 1337,806,000 142.8 -------------------------------------------------------- 조선족 1.340,000 1.765,000 1.920,597 2.307,000 130.7 ------------------------------------------------------- 좡족 8.386,000 13.383,000 14.593,330 21.243,000 159.9 -------------------------------------------------------- 회족 4.473,000 7.228,000 8.602,978 11.676,000 161.5 ------------------------------------------------------- 투쟈족 525,000 2.837,000 5.704,223 15.265,000 538.1 ------------------------------------------------------- 몽골족 1.966,000 3.411,000 4.806,849 5.909,000 173.2 ------------------------------------------------------- 묘족 2.782,000 5.021,000 7.398,035 9.007,000 199.4 -------------------------------------------------------- 인구과잉으로 세계가 아우성치고있는 오늘날 조선족 인구의 장성속도가 더딘것은 물론 좋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의 자체발전에는 아주 불리한 인소이다. 연변의 2000년의 총인구는 287만, 1,874명으로 예산되는데, 그중 조선족 인구는 107만 3,673명 정도이고 한족과 기타 민족은 180만 8,200명이다. 이제 8년 후에는 조선족의 비례가 39.5%에서 37.4%로 하강될 것이다. 이런 속도로 줄어든다면 조만간에 연변의 조선족도 기타 잡거지구의 조선족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것임을 자명한 일이다. 둘째 경제문제; 경제문제는 민족발전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 요 몇년래 연변과 기타 지구의 조선족경제는 발전을 가져왔다. 그런데 통계사업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래에 부득불 1982년의 통계자료를 따를 수밖에 없다. ①조선족의 재업(在業)인구는 91만 8,673명으로서 총인구의 52.07%인데 이는 전국의 재업인구(51.94%)와 전국 각 소수민족재업인구(49.21%)에 비하면 0.10%, 2.83% 높으며 한족의 평균수평(52.14%)과는 0.10%낮다. 조선족의 부재업(不在業)인구는 34만 5,846명으로서 총인구의 19.6%이고 그중 재학생이 8만 3,937명, 가무종사가 15만 1,375명, 승학대기 학생수가 4,027명, 국가통일배치를 기다리는 수가 564명, 취업대기인원이 1만 2,908명, 리직•퇴직인원이 3만 259명, 기타가 6만 2,777명이다. 재학생이 점하는 비중(24.27%)은 전국(18.16%), 각 소수민족(18.84%)과 비교할 때 각각 6.11%, 5.43% 높다. 가무종사인원(43.77%)은 전국(55.21%), 각 소수민족(55.65%)에 비하면 각각 11.44%, 11.88%가 낮다. 승학을 기다리는 수(1.16%)는 전국(0.10%), 각 소수민족(1.14%)에 비해 각각 1.06%, 0.02%가 높다. 국가배치를 기다리는 수(0.16%)는 전국(0..08%), 각 소수민족(0.11%)과 비교하면 각각 0.08%, 0.05가 높다. 취업대기인원(3.73%)은 전국(2.34%), 각 소수민족 (2.03%)에 비해 각각 1.39, 1.70% 높다. 퇴직인원(8.75%)은 전국 (7.92%), 각 소수민족(4.37%)에 비해 각각 0.83%, 4.38% 높다. ②조선족이 각 항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조선족 총인구와의 비례)은 전국,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의 평균수평보다 높다. 농업, 림업, 목축업,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54만 8,340명(59.69%)으로서, 전국(73.66%), 한족(72.89%), 소수민족(85.13%)과 비기면 각각 13.97%, 13.20%, 25.44% 낮다. 이는 조선족 집거구에서의 농업로동생산력이 제고되여 농촌의 일부 잉여로동력이 제2산업, 제3산업으로 전이하였음을 의미한다. 전력, 석탄가스, 수도물생산과 공급에 종사하는 사람이 4,334명(0.47%)이고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5만 8,744명(17.28%), 지질탐사 등에 1,841명(0.20%), 건축업에 1만 8,032명(1.96%), 교통운수•우전통신업에 1만 9,108명(2.08%) 상업•음식업•물질판매 등에 4만 7,841명(5.21%), 주택관리•공용사업관리와 복무업에 6,048명(0.66%), 체육과 사회복리사업에 1만 5,744명(1.71%), 교육•문화•예술업에 종사하는 인원이 4만 3,048명(4.69%), 과학연구와 종합기술복무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3,589명(0.39%), 금융보험에 3,882명(0.42%), 국가기관•정당과 군중단체에 2만 2,637명(2.50%), 기타 행업에 546명(0.06%)이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조선족 재업인구의 비중은 17.78%로서 전국(11.83%), 한족(12.30%), 소수민족(4.80%)의 평균수평에 대면 각각 5.95%, 5.48%, 12.98% 높다. 이는 연변의 민족공업에 일정한 발전이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전국과 한족, 소수민족의 평균수평과 비교할 때 조선족은 물질생산부문에의 종사보다 비물질생산령역의 인구비중이 비교적 높다. 물질생산부문의 조선족의 재업인구 비중(84.36%)은 전국(94.36%), 소수민족(95.16%)의 평균수평에 비해 각각 10%, 10.80% 낮다. 비물질생산부문 종사인원 (15.64%)은 전국 (5.64%), 소수민족(4.84%) 평균수평보다 각각 10%, 10.80% 높다. 셋째 언어문제; 와 에는 조선어와 조선문이 연변지역에서 위주로 되는 언어문자라고 규정하고있다. 하지만 연변의 조선족은 를 좇을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지금 연변의 농촌, 조선족 중•소학교, 신문사, 출판사, 잡지사, 방송국, 텔레비죤방송국, 문학예술단체, 조선학연구실체 등 분야에서는 조선족이 다수를 차지하고있는 까닭에 조선어와 조선문을 널리 쓰고있지만 조선족과 한족이 섞여있거나 조선족이 얼마되지 않는 국가기관, 공장, 광산, 상점, 림업 등 분야에서는 조선어와 조선문을 쓸 상황이 못된다. 연변지역의 많은 공장, 기업소의 사무용어와 일상대화는 일반적으로 한어로 되여있다. 그 까닭은 각 업종의 사무용어, 기술전문용어, 기계와 도구 이름 등이 거의 다 한어로 통용되기때문이며 같이 일하는 타민족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편리하기때문이다. 그리고 회의, 연설, 공문전달을 할 때면 한문으로 되여있어서 그것을 일일이 조선말로 번역하자면 많은 인력과 물력 그리고 시간을 들여야 하기에 시끄러움을 느끼기가 십상이다. 또 대부분 사람들이 한어를 알아들을수 있으므로 한어를 쓰는것을 오히려 간편하다고 느낀다. 그래서는 한켠에 밀어놓고 한어를 쓰는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언어사용에서의 동화현상은 날따라 짙어가고있다. 길림성 반석현 반석진 조선족의 언어사용실태를 례로 들어보자. 104명의 중학생을 조사했는데 그중 한어와 조선어를 겸용하는 학생이 88명, 조선어를 모르는 학생이 16명이다. 소학생 426명 중 193명이 언어를 겸용하고 223명이 조선어를 모른다. 26∼35세까지의 34명 중 33명이 겸용하고 1명이 조선어를 모르며 18∼25세의 70명 중 53명이 겸용하고 17명이 조선어를 모른다. 이상의 조사결과로부터 언어동화현상은 나이가 어릴수록 심화되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런 젊은 세대들은 연변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수 있다. 조선말을 아는 사람일지라도 한어의 충격을 받아 조선어사용에 혼란이 조성되여있다. 그런데다가 연변지방 사투리, 방언, 오역된 한자어휘 등 그외 한자어휘까지 뒤섞여있으므로 이 생겨났다. 조선족의 조선어 사용실태를 아래의 몇가지로 나누어볼수가 있다. ① 구두어에서의 한자어휘 람용:, , 등의 한어어휘들은 구두어에서 기본어휘처럼 쓰이므로 , , 등 우리의 말을 쓸 경우 어색한 기분을 주거나 의사소통이 안된다. ② 제멋대로의 한어어휘 직역: 공장장을 , 로동자를 , 랭동기를 따위로 쓰고있는데 벌써 일반화되여있다. ③ 조선말 문장구조에 한어어휘 차용: 출근을 , 퇴근을 , 휴식을 하는 등등 수두룩하다. 연변의 조선말은 한어화경향으로 번져서 범벅말이 된데다가 방언(주로 함경도 방언)에 지방사투리까지 욱실거려서 말이 아니다. 그 오염정도는 대학교의 교수, 문인들 입에서도 가끔 튀여나올 정도이다. 구두어에서의 한어와 방언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의 서사어와 탈절현상이 심하게 빚어져 조선어규범화표준이 그네타듯 뒤흔들리고 있다. 넷째 교육문제; 중국 조선족교육은 초보적으로 비교적 완정한 보통교육으로부터 대학교육, 기초교육으로부터 전업교육, 학교교육으로부터 업여교육에 이르기까지 민족교육체계가 형성되여있다. 현재 동3성과 내몽골자치구, 하북성의 조선족 잡거지구에 조선족의 중•소학교가 131개소이다. 학생수는 소학생이 10만 5,700명, 중학생이 5만 9,300명으로서 합계 16만 5천여명이며, 교직공은 소학교에 6,345명, 중학교에 5,136명 합계 1만 1,481명이다. 연변지구의 조선족 중•소학교는 도합 547개소로서 소학교가 435개소, 중학교가 112개소이다. 학생수는 소학교에 7만 3,247명이고 중학교에 4만 7,175명 도합 12만 432명이다. 교직공 수는 소학교에 4,691명, 중학교에 4,580명 도합 9,271명이며 승학률은 소학교가 96.4%, 중학교가 56.6%이다. 중국 조선족교육은 비교적 완정한 체계를 갖추었다고 하지만 교육발전이 경제발전에 적응되지 못하고있으며 사회발전 및 민족자체발전의 수요에도 적응되지 못하고있다. ① 교육구조 및 학교구성이 불합리하다. 몇년래 중등교육구조의 개혁에 따라 조선족의 직업기술교육은 일정한 발전을 가져왔으나 내지의 선진지구나 같은 지구의 한족 직업기술교육과 대비하면 발전속도가 늦고 기복이 크며 학교질량이 높지 못하다. 동3성 조선족 산재지구에 3개소(각 성에 한개소씩)의 직업학교가 있고 연변지구에 33개소(한족도 포함)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규모가 크지 않고 학생래원이 적으며 어떤 학교는 해산해야 할 상황이다. ② 농촌에서 조선족학교는 지나치게 분산되여있으며 구성이 불합리하고 학교규모가 갈수록 적어 학생래원이 결핍하고 학생들은 제대로 배울수 없다. 이는 인력, 재력, 물력의 과중한 랑비를 조성할뿐만 아니라 조선족교육의 질 제고에 직접 영향을 주고있는데, 조선족 교육위기의 주요한 한방면이다. ③ 소학교와 초급중학교의 교육질량이 하강되고 초급중학교에서의 량극분화와 학생류실 상황이 엄중하다. 1982∼1986년 심양시 조선족학교와 한족학교 학생의 급격률을 보면 한족 소학생이 97.4%, 조선족 소학생이 93.3%이고 한족 초급중학생은 77%, 조선족 초급중학생은 64%이다. 1985년 료녕성 조선족 소학교의 졸업생 승학시험의 평균점수는 78.87점으로서 전성 평균점수보다 2.83점이 낮다. 초급중학교 단계의 량극분화는 날따라 엄중해져 상당한 부분의 학생들이 초급중학교에 올라와서는 학습에 따라가지 못해 중도에서 퇴학한다. 초급중학교생이 만 3년 재교공고률은 적지 않은 농촌이 60%좌우이고 개별적 학교가 50%밖에 안된다. 이는 조선족지구에서 9년제 의무교육을 진정으로 실현하는데 직접 영향을 준다. ④ 조선족 초급, 고급중학생들이 졸업 후 더욱 높은 학교에 가서 계속 학습하거나 학교를 나와 사회활동에 참가하는 적응성이 낮다. 조선족학생, 특히 연변지구의 조선족학생들은 한어수평이 낮고 읽고 쓰는 능력이 차하므로 중등전문학교나 대학으로 간 후 한어말교수를 받아들이는데 직접 영향을 받는다. 사회로 나간 학생들은 한어수평이 낮은데다 로동기술능력이 결핍하고 취업에서 일련의 제한을 받고있으므로 취업 후에라도 능력을 발휘할수 없다. ⑤ 대학입학률이 날따라 떨어지는 추세이고 각 과목 평균 시험점수가 낮다. 1985년 료녕성 대학입학시험 각 과목성적에서 조선족학생의 평균성적과 급격률은 외국어와 조선어문을 내놓고 기타 과목에서 한족학생보다 평균성적과 급격률이 낮다. 연변지구 조선족학생의 중점대학과 보통대학의 록취률은 몇해째 뚜렷한 하강선을 긋고있는 추세이다. 연변학생의 문과와 리과의 시험과목 평균성적과 급격률도 전성의 평균보다 낮다. 다섯째 풍속•습관문제; 조선족은 아마 모방의 인 듯싶다. 해방 후 40여년간에 조선족들은 남의 것을 과대숭상하고 자기를 천시해왔으므로 민족의 참모습을 스스로 잃었거니와 빼앗겼다. 복장은 물론 집구조, 생활방식, 음식에 이르기까지 민족적인것을 상실해갔다. 이미 한복은 무대우에서나 볼수 있고 녀성들의 치마저고리는 명절이나 그 어떤 경축행사 때만 볼수 있을뿐이다. 또한 능가선무(能歌善舞)라는 조선족은 오늘날 춤과 노래에서조차 전통을 잃어가고있다. 최봉득씨가 연길시의 중학교 학생(초급중학생 172명. 고급중학생 115명)과 모 대학의 37명 학생과 51명 현임교원, 그리고 농촌학교 민영교원 37명을 대상으로 민의측험을 하였다. 그 결과 는 물음에 초급중학생 73%, 고급학생 73%, 대학생 54%, 현임교원 26%, 민영고원 54%가 고 대답했다. 또 라는 물음에는 초급생의 56%, 현임교원 20%, 민영교원 56%가 고 했다. 이상의 통계에서 보다싶이 중국조선족의 문화수용자세가 바르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감지할수 있다. 이는 민족정신의 곤핍과 무지를 설명해주고있다. 중국의 조선족은 민족적 음식문화의 영향보다는 한족 음식문화의 영향을 더 깊게 받고있다. 우선 한국의 음식문화 영향과 자연환경에 제약으로 말미암아 해어보다 육류를 많이 먹고있다. 돼지고기 소모량이 1950년대에는 매인 년평균 4.2kg이였는데, 1984년에 오면 16.24kg으로 증가된것이 그 실례이다. 료리로는 한족료리의 수법을 받아들여 볶음채를 먹기 시작하였고 밀가루음식이 많이 식탁에 오르게 되였다. 명절, 제사 때는 두부전, 콩나물, 도라지, 고사리 등으로 만든 우리 료리가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지만, 총적으로 식생활에서 우리의 음식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있는 추세이다. 볶음채가 김치, 국 등과 함께 부식의 기본으로 되였으며 물만두, 기름튀기 만두 등이 일상음식으로 되면서 젊은 세대들속에서 설기나 증편은 할줄 몰라도 물만두는 누구나 다 빚을수 있을만큼 익숙한것으로 되였다. 조미료도 이전의 생강, 소금, 간장, 후추 등 단순한 몇가지로부터 팔각, 산초, 부추꽃, 고수풀 등 다른 민족이 즐기는 조미료를 도입하여 10여가지로 늘어났다. 이상에서 보다싶이 조선족은 갈수록 인구가 줄어들어 한족과 기타 민족의 대해속에서 자기를 잃어가고있다. 순수한 자기의 언어, 자기의 교육체계가 흔들리고있으며 아울러 풍속습관과 음식까지도 동화되여가고있다. 오늘날 조선족의 모습은 동방례의지국, 백의민족의 모습과 멀리 떨어진 찌든 얼굴, 병색이 완연한 살결이다. 5. 중국조선족의 출로 찌든 모습, 병색이 낀 살결을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시키는것은 우리앞에 나선 급선무이다. 그렇다면 중국조선족의 출로는 무엇인가? 이것을 알려면 병근을 짚어내야 할것이다. 13억 인구를 수용하고있는 중국이라는 대국에서, 쉼없이 가해지는 동화의 충격속에서 조선족이 민족공동체로서의 립체적 자세를 정립하고 참된 삶을 펴나간다는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첩첩한 산, 겹겹한 물을 헤쳐가야만 버드나무 우거지고 백화가 만발한 무릉도원을 볼수 있듯이 피나는 노력의 대가가 없이는 조만간에 자기의 민족적 주체성과 동질성을 잃어버리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조류를 직시하고 문제점들을 사정없이 파헤치고 갖은 방도를 대여 나아갈 길을 타개해야 할것이다. 우선 타향의식을 버리고 본토의식을 세워야 한다. 중국조선족은 월강이민으로서 조선반도에 대한 사념을 버리지 못하고있다. 이는 동방민족의 사향의식의 표현이다. 연변자치주내의 한 백화점 통계에 의하면 1991년에만 해도 3천원을 넘기는 양복이 매대에 내놓기 바쁘게 20여벌이나 팔렸고 천원좌우의 양복이 55벌이나 팔렸다고 한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연길시의 소비수준은 성내 8개 도시의 앞자리를 차지하고있는데 전성 소비지출의 23%의 자리를 차지하고있다고 한다. 오늘날 연길시에 촘촘히 늘어선 가라오케, 나이트클럽, 무도청 등 오락시설앞에서 아연해지는 해내외 관광객들의 소행에 동감이다. 고 소문이 나있다. 그러나 조선민족이 돈이 많다는데 비해 그럴듯한 기업소나 상업실체같은 것을 일떠세운것은 많지 못하다. 먹고 입고 노는 데는 남보다 앞서지만 통이 크게 사업을 벌리는 데는 아주 등한하다. 타향의식은 중국조선족으로 하여금 주인공자태로 삶의 터전을 굳히지 못하게 방해하고있다. 흑룡강성 수화현 조선족들이 근 몇년째 한국 등 외국에서 벌어온 돈은 인민폐로 무려 1억원이 되였는데 실업체 하나 세우지 못하고 거의 다 탕진한 상황이다. 그리고 연변의 돈은 관내 사람들이 벌어간다고 말하면서도 그 어떤 위험의식도 느끼지 못하고있다. 위험의식이 없고 새 생활에 대한 개척의식이 없는 민족으로 번지고 보면 앞날의 운명은 불보듯 번연한것이 아니겠는가! 력사에 대한 무지와 자기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의 결핍으로부터 생겨나는 지비심이 지어 조선민족의 음식문화에 대한 거부까지도 낳고있다.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중 열에 아홉은 한국음식에 실망하고있다. 중국료리처럼 기름지지 못하다는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발달되여가고있는 오늘의 한국음식문화가 중국 음식문화에 침투되고있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있다. 1980년대로부터 민족식료품공업이 회복 발전하고, 재래식 음식이 사회화•상품화하면서 전통음식이 울타리를 벗어나 관내에도 진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음식은 짠지, 김치, 국수, 불고기 등이다. 특히 짠지는 연해지구로부터 서북변강에 이르기까지 그 맛과 깨끗함으로 한족음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있다. 오늘 중국조선족의 자세를 바로잡고 주체성을 세우고 조선반도의 민족과 동질성을 영원히 보장하려면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것이 가장 중요하다. 조선족의 각급 학교 특히 중학교와 소학교는 조선족의 주체적 위상과 동질성을 살려감에 있어서, 또는 그것이 후세에까지 면면히 이어져가게 함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일으키는 분야이다. 하북성 진황도시에는 2백여호밖에 안되는 조선족 마을이 있다. 그들은 완전히 한족의 사면포위에 들어있으면서도 자기의 민족학교를 갖고있어서, 동화되지 않고 조선족으로 떳떳이 삶을 빛내고있다. 보다싶이 자기의 글과 말을 가르쳐주는 민족학교가 없다면 미래 중국에서의 조선족은 얼마나 가련한 처지에 떨어지겠는가. 그리고 교육내용에서 반드시 조선력사와 중국 조선족력사에 대한 교육을 중요한 위치에 놓아야 한다. 지금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중 태반이 력사에 대해 문외한이다(연변대학 력사학부에서만 가르치고있다). 중국조선족의 동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선말과 글로 된 방송, 털레비죤, 신문, 문학예술 등 언어광장을 보다 폭넓고 보다 훌륭하게 가꾸어야 할것이며 이미 있는 언어지도기관과 언어연구실체를 발전시킬수 있는 보완작업을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만 조선어문사용과 조선어문교육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인상시킬수 있다. 이상의 사업을 잘할수 있는 담보는 경제적 뒷받침이다. 중국조선족의 교육과 모든 신문, 방송, 출판 등 사업은 모두 중국정부의 재정지출로 운영되고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발전중에 있는 나라로서의 국가경제상황은 우리의 요구를 절대 만족시켜줄수 없다. 1980년대 초에만 하더라도 필자가 몸담고있는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에서는 매년 20여종의 문예서적을 출판했는데, 지금은 10여종도 어렵게 되였다. 민족도서 출판량이 대폭 주는 형편에서 중국조선족은 정신적 식량에 굶주리고있다. 경제면에서 조선반도의 지원을 바라지 않을수 없다. 벌써 한국의 경제적 부홍은 중국조선족한테 민족적 자부심을 불러일으켰고 아울러 중국내 기타 민족(한족을 포함)의 안목속에서 조선민족의 위치도 훨씬 높여주었다. 대련시 조선족 유치원에는 36명의 어린이가 있는데 그중 한족이 6명이나 된다. 이는 조선민족의 오늘 중국땅에서의 위치를 설명해주고있는것이다. 중국의 조선족과 조선반도의 겨레들은 한 핏줄을 타고난 동질민족이다. 그리고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 있는 조선민족 역시 그러하다. 오늘날 시간이 갈수록 좁아지고있는 지구우에서 우리 민족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면서 공동으로 발전해나가는 길이 민족부흥의 길일것이다. 특히 중국조선족으로 보면 이 길만이 유일한 희망의 출로이다.
89    한국고전종합검색 댓글:  조회:2821  추천:0  2012-07-18
아래의 주소를 클릭하시요: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古典翻译叢书 韩国文集丛刊 国学原典   朝鲜王朝实录 承政院日记 日省录   经书圣读 视频讲义 사계전서(沙溪全書) 51集 주소: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g001  
88    (전기) 아버지 전기 --성원작품 댓글:  조회:5601  추천:0  2012-07-18
                   현구(1914년~1975년)   머리말: 자고로 효도에는 세가지 내용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요, 둘째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며, 세째는 자식을 낳아서 잘 키우는 것이다. 시작을 알수없는 유구한 세월속에서, 조상들은 수없이 많은 조대를 이어 내려 오면서, 생명의 유전자를 나에게까지 전달하였으며, 부모님께서는 자연의 도리에 순응하시여, 세대의 사명을 받드시고 나를 낳아서 전부의 심혈을 쏟으며 키워 주셨다. 부모가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나를 낳아 어였한 사람으로 키워 주셨기 때문에 더욱 감사한 것이다.   나의 祖父의 명함은 대종(台宗1875~1916)이라고 하였는데, 延州玄氏 判尹公派 제廿九代 后孙으로서 세 항렬의 맏이였다. 그 아래에 둘째 문종(闻宗1878~?)이 있었고, 제일밑에 세째 정종(贞宗1880~?)이 있었으며, 그 외에 문중장손인 從兄 시종(始宗1875~?) 이 있었다. 나의 祖父는 1912壬子年에 조선 惠山에서 가속을 이끌고 중국에 들어왔다가 牡丹江 주변의 어느 한 작으마한 조선인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어렸을 적에 惠山에서 이미 선생을 모시고 《千字文》과 《訓民正音》을 조금 읽었으므로 《家禮》와 같은 책을 볼수 있었으며, 동네에서 상사가 나면 의례 집사를 맡았으므로 사람들은 평시에도 그를 《현집사》라고 불렀다. 조상으로부터 물려 내려온 훌륭한 대목(건축목수)기술이 있었으니, 가세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으며, 후기에는 牡丹江에서 주요하게 한 일본인 회사의 관사건축 공사장에서 목수로 일하였다. 나의 祖母의 명함은 옥택(玉泽1878~1916)이라고 하였는데, 조선 惠山 安东权氏 가문의 둘째 딸이였다. 역시 조상으로부터 물려 내려온 훌륭한 재봉 기술이 있었으니, 손에서는 일감이 떨어질 사이가 없었다. 스므네살 되던 해에 귀중한 일본 손마선(손으로 돌리는 재봉기)을 혼수품으로 해가지고 나의 祖父한테 시집왔는데, 선후하여 二男三女에 모두 다섯 자식을 낳았다. 그 첫째는 아들로서 이름은 공흡(公洽1902~1924)이라고 하였고, 둘째는 딸로서 이름을 갑순(甲順1905~?)이라고 하였고, 셋째도 딸로서 이름은 을순(乙順1908~?)이라고 하였으며, 넷째도 역시 딸로서 이름은 삼순(參順1910~1978)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들어와서 낳은 마지막 다섯째가 바로 나의 아버지였는데, 1914甲寅年五月廿五日생으로 이름은 진흡(珍洽)이라고 하였다. 나의 세째고모(參順)는 1978年에 돌아 가시기 전까지 연길시 대성촌에 계셨는데, 나는 그를 습관적으로 《연길고모》라고 불렀다. 연길고모는 생전에 나한테, 나의 아버지의 유년에 관한 많은 옛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그 옛이야기에 이어서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나의 아버지의 인상은 인생을 숙명으로 받아 들이면서 성실하게 살아오신 평범하기로 더 평범할수 없는 순박한 농민이셨다. 그런데 오늘, 나도 인젠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였고, 나이도 60을 넘기면서 당년의 그 아버지가 너무나 몹시 그리워 난다. 아마, 나도 인젠 늙었다는 표징이리라. 아버지가 그리워 날때마다 아버지의 그 키큰 형상이 마치도 신령인양 우렸하게 머리속에 나타난다. 아버지는 원래 이렇듯 우아하신 분이셨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덕분으로 오늘의 제가 있게 되였으며, 앞으로 우리가문의 모든것이 가능하게 되였습니다. 열심히 할께요! 힘 자랄 때까지 이 가문을 열심히 이끌어 가겠으니, 고 아버지 영령께서도 우리들을 가상히 여기시사, 많이 보우하여 주십시요! 내가 오늘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신 아버지를 위하여 전기를 쓰려는것은 아버지한테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영웅적 사적이 있어서가 아니며, 아버지가 천추에 길이 빛낼 위대한 공덕을 쌓으셨기 때문도 아니다. 아쉽지만,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한테는 모두 그런 사치한것들이 없더라! 나는 이제 2014년의 아버지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비록 서투른 솜씨이지만, 나의 글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부활시켜, 나의 생애 마지막까지 모시고 싶은 물리칠수 없는 욕심에서 이 글을 쓰게 되였다. 력사가 가치가 있게 되는것은 그것이 기록되여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거창했던 사건이나, 아무리 위대했던 인물일지라도, 기록되지 않아서 후세사람들이 그 누구도 모른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수 있겠는가? 부모를 위하여 전기를 씀으로써, 가혼을 다시 살릴수 있고, 조상들과의 감정 뉴대를 다시 이어 놓을수 있다. 나의 후대들이 세세대대로 조상을 공경하고, 부모에 효성하며, 자식들을 사랑하면서, 그로부터 조상음덕의 혜택과 보우를 특별히 받아 영원히 번영창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사적인 욕심에서, 나도 이 세상에 와서 이런저런 일들을 조금이나마 해 놓고 갔다고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이제 후에 시간이 나는대로 다시 잘 다듬어서, 우리가문의 족보와 함께 건사하련다.    제一회: 아버지의 유년시절 1914甲寅年五月廿五日, 나의 祖母가 임신이 되여 만삭이 된 몸으로 닭모이를 주다가, 손에 들고 있는 모이그릇에 닭들이 날아 덮치는 바람에 그만 놀라 넘어지면서, 그 자리에서 나의 아버지를 낳으셨다고 한다. 1914年十月의 어느날, 나의 아버지가 탄생하여 백날잔치를 마치고, 祖父는 딸랑북을 울리며 떠돌아 다니는 소경 점쟁이를 불려들여, 동전 몇잎을 놓으며 나의 아버지의 운수를 물었다. 그런데 점쟁이는 나의 아버지의 사주팔자를 물어 본 다음, 손으로 동전을 만져 보더니 불시에 하!하!하! 웃으며 《오늘 괜히 재수없어 찬밥두 못 얻어 먹겠구만!》 하면서 그만 일어나 가려 하였다. 조부가 급히 그를 붙들어 않이고, 동전을 더 첨가하면서 재삼 청구하니, 그 소경 점쟁이는 짐짓 못 이기는척 하면서 다시 앉더니, 조부의 손을 잡으면서 신비스럽게 말을 시작하였다: 《빈생 이래뵈두 하늘 대신해 말 하는 거오니, 종래루 에둘지 않소이다. 주인장께서 내말 믿으시면 액을 피할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삼년내 이집에서 두번이나 복을 입을것 같소이다.》 완전히 으름장 놓는 말이니, 점쟁이들의 상투수법이다. 《 했으니 바로 이집 아기 사주로다. 어허! 그런데 이런 몹쓸 사주도 있나? 명년에 태세 범하는구나. 크게 놀라기는 하겠지만, 다행히 거기에 그치겠고. 후년에 가서는 태세 대운 같이 가니, 부모중 누가 싫은 대루 서천에 잠깐 가야겠수다, 저 아이 운성 제왕에 이르러서, 꺼꾸로 점점 왕성하는 추세이니, 그 힘이 곧바루 부모 궁 충돌이라. 에구! 답답하이, 이잘난 사주는 당초에 틀리게나 댈 것이지! 이 아기 분명 전생에서 큰죄 범하구서, 후생에 도망을 온 아이 올시다. … …》 소경 점쟁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말소리를 조금 낮춘다:   《그런대로 이 아이를 빈생한데 맡기시면, 아이를 불문에 귀화 시킬수 있소이다. 그러면 액은 액대로 보내고, 복은 복대로 오게 할수 있소이다. 그렇게 하기 싫으시면, 새벽별을 보시면서 부자집 뒤주우에 버리시는 것이 상책이라, 언젠가는 찾아와서 가계는 이을 것 같소이다.》 이 말을 들은 조모는 몹시 성내신다, 《아니! 이거 너무 하는구만. 돈이 떨어지믄 내가 보태 주구, 옷이 파이나믄 내가 깁어 주지. 우리 종래로 남을 해꾼적 없소. 전생에서 무슨 죄를 졌다우? 살아있는 아이를 던지라니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소리우?》 조모는 동전 몇잎을 더 꺼내 점쟁이 보따리에 넣어 주면서 정식 축객령을 내렸다; 《어서 일어나 가 보소! 돈이 떨어지믄 다시 와서 허튼소리 치던가.》  소경 점쟁이는 재빨리 동전들을 주어서 보따리에 넣고는 아무말 없이 일어나 표연히 떠나가 버렸다. 1915年五月, 나의 아버지의 한돐 생일을 며칠 앞두고 조선 惠山에서 동흡(东洽1896~?–始宗의 맏아들)이란 오촌조카가 祖父를 찾아왔다. 그는 惠山에서 부모가 모두 돌아 가시자, 선산을 지키며 복상기를 지내는데, 한 일본경찰이 까닭없이 무례하게 굴기에, 분김에 그놈을 실컷 때려주고는, 그길로 도망하여 중국에 건너 와서 나의 祖父를 찾아 왔던 것이다. 며칠후 祖父네는 나의 아버지 첫돐 생일잔치를 성대히 차려놓고 동네 사람들을 청하여 모여앉아 한창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나이 셋이 들이 닥치며 동흡이를 체포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격투가 벌어졌는데, 동흡이가 골받이로 련속 둘을 쓸어 뜨렸다. 그런데 그 남은 사나이가 갑자기 祖母의 품에서 생일둥이인 나의 아버지를 와락 나꾸어 채서 높이 추켜들고는 땅에 메여칠 태세를 취하며 동흡이를 핍박하였다. 동흡이가 어쩡쩡해 있는 순간, 그 쓸어졌던 두 사나이가 재빨리 일어나 동흡이를 쳐 쓸어 뜨리고 포승줄로 묶어 버렸다. 조부와 조모가 아이를 뺏어 안고 무릎을 꿇고 백방으로 용서를 빌었다.그러나 그들은 《당신네 저 잘난 조카 때문에 지금 우리 세집 아이들이 모두 경찰서 신세를 지고 있소. 저놈을 못잡아 가는 날엔 오호련좌로 우리가 대신 죽어 줘야 한단 말이요.》하면서 동흡이를 무작정 잡아 끌었다. 동흡이는 급히 자기 보따리를 내오게 하여 풀어서, 부모의 유물이라고 하면서 은팔찌 한쌍을 꺼내여 조부한테 맡기면서 깊이 허리굽혀 인사하고는 태연하게 잡혀 갔다. 이것이 아마 그 소경 점쟁이가 말한, 나의 아버지 신상에 한번 크게 놀라기는 하겠지만, 다행이 거기에 그친다는 것이였으리라. 그후에 다시는 동흡의 소식을 못 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대종보를 찾아 보아도 그의 아래에는 다른 흔적이 없다. 1916年 설이 금방 지난 며칠후, 조선에서 祖母의 친정집 오랍이 되는 사람이 찾아와 하루밤 묵었다. 그는 인삼 장사군이 였는데, 수중에 상등 인삼 여나문 뿌리 있었다. 조모가 장차 아이들을 위하여 한뿌리 사 두었으면 하니, 그 사람은 아이처럼 생긴 제일 큰걸로 한 뿌리 골라 내놓으며,  《누님! 이건 백년 령삼이요. 사람과 다를배 없소. 중국 사람들도 알아주는 상등품이요. 누님이 장차 조카들 한테 쓰겠다고 하니 은화 몇잎만 주오.》라고 한다. 그리하여 조모는 은화 열잎으로 백년묵은 귀중한 령삼을 얻게 되였다. 조모는 그 보물을 소중히 싸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깊숙히 건사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나어린 큰고모(甲順)가 동네에 나가 아이들 앞에서 자랑하는 바람에 온 동네가 알게 되였다. 말은 번지고 번지여 마지막에는 신비한 소문으로 되였다: 현집사네 집에는 그집 막둥이 만큼이나 큰 천년묵은 령삼이 있는데, 밤이면 나와서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새벽이 되여 돌아 갈때는 은전 한잎씩 남기고 간다고 한다. 옛말에 보물은 재화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점점 커지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에 조모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였다. 그러던 1916丙辰年三月廿○日 저녁, 곡우가 이미 지났으므로 밖에서는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부는 공사장에 야근을 나가셨고, 조모는 아이들을 재워놓고, 웃방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손질하고 있었다. 불시에 음산한 바람이 불어치기에 무심결에 정지칸을 내다 봤더니, 어득시그레한 그속에서 각기 소머리, 돼지머리, 개머리를 한 도깨비가 셋이나 앉아 있었다. 조모는 너무 놀라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데, 그 도깨비들은 불시에 괴상한 소리로 웃어대더니, 사람처럼 말을 하였다; 《오호호! 우리는 하늘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내려온 야행차사 이시다. 오늘은 주로 인삼 아이를 잡으려 왔다. 그는 원래 왕모마마 옆에서 시중들던 아이인데, 하계로 도망와서 인삼 아이로 변해가지고 사람들을 속인다고 들었다. 이집에 숨어 있는줄 우리가 알고 왔으니 얼른 내 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기서 자고있는 그 아이라도 잡아가야 한단다.》 그 당시 웃방의 조모옆에서 자고있는 아이가 바로 아직 두돐이 채 되지 않은 나의 아버지였는데, 조모는 그가 전생에서 무슨 죄를 범하고 도망온 아이라던 그 소경 점쟁이 말이 언뜻 생각나서, 그에게 무슨 변이라도 생길가봐 당황한 김에, 그 인삼 감추어 둔 곳을 알려 주고 말았다. 도깨비들이 인삼을 찾아 가지고 도망가 버린후, 조모는 그 자리에 기절해 쓰러졌는데, 그대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사람 생명이 천명에 진하면 이렇게 등잔불보다도 더 쉽게 꺼져 버린다. 그해 조모의 년세가 39세였으니, 인생의 네번째 아홉고개를 끝내는 못 넘기시고, 서천으로 떠나 가시고 말았다. 조모의 출빈을 앞둔 자정 무렵, 조부는 령전에 초불을 달아 놓고 혼자서 조용히 앉아 조모의 령구를 지키고 있었다. 갑자기 바깥쪽으로 검은 기운이 휙- 불어 들어 오더니, 초불이 모두 훅-하고 꺼진다. 아마도 저승사자가 조모 데리려 오는것 같았다. 조부는 너무 놀라서 온몸에 식은땀이 쫙- 났다. 병풍 뒤에서 무엇이 얼른 거리는것 같아 자세히 보니 바로 조모였다. 조모는 새하얀 소복차림에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쪽진 모습으로 병풍 뒤에서 바람처럼 나와 조부 앞에 살풋이 앉으며 입을 여는데, 말소리는 아주 먼곳에서 들려 온다; 《애들 아부지! 나는 가옵구마. 삼삼양춘 애들이요, 오오단오 처녀총각, 칠칠칠석 신혼부부, 구구중양 우리들이오니, 그 날만은 만사 놓으시고, 꼭, 저 한테로 오셔 주시옵서!》 … …. 《덜컥!》하는 문소리에 조부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가 일몽인데, 새벽제 보려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 …. 조모의 장례를 치르고 몇달이 지난 1916丙辰年九月九日, 이날이 바로 중양절이다. 몇달전 안해 장례날의 몽사도 있었고 하니, 조부는 나의 큰고모(甲順)에게 일러서 기름떡을 몇개 굽게 하고 소물들을 좀 준비하여 가지고 모두들 함께 조모의 산소에 제사 지내려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살인도망 하여도, 사주도망 못한다》더니, 공사장에서 재목이 급히 수요된다고 기별이 왔으므로, 조부는 아이들을 집에서 기다리라고 당부하고는, 마차를 삯내 가지고, 일군을 두사람 데리고, 목재회사로 급히 가게 되였다. 수요되는 목재를 사서 싣고, 령수증을 받고, 공사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한 괴상한 거지 아이가 나타나 조부한테 조그마한 종이말이를 쥐여 주었다. 조부는 그 종이말이를 펼쳐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대로 호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공사장에 도착하여 일본인 현장감독에게 령수증을 넘겨 주면서 조부는 깜빡 잊고 그 작은 종이말이도 함께 넘겨주고 말았다. 일본인 현장감독은 그 종이말이를 펴서 찬찬히 보더니 불시에 《바가!》하면서 조부의 귀뺨을 치기 시작하였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인지라 영문 모르고 맞으며 몇걸음 뒤로 물러서던 조부는 본능적으로 그 일본인 현장감독에게 골받이를 안겼다. 일본인 현장감독은 뜻밖의 강타에 뒤로 휘청이며 물러서더니 마차에 부딪치며 쓸어졌다. 말들이 놀라 자꾸 대가리질 하더니 마차에 실었던 재목들이 그만 와그르 무너져 내리며, 그 일본인 현장감독을 깔아 놓고 말았다. 크게 놀란 말들은 마차를 끌고 내달리며 또 일본인 몇사람을 치여 놓았다. 당황해난 일본 보안대원들은 총으로 그 놀란말을 쏴 죽이고 조부한테 몰려와 집단구타를 시작하였다. 조부는 이렇게 영문도 모르고 일본 사람들 한테 맞아서 당장에서 숨이 지고 말았다. 공사장에서 함께 일을 하던 동료들이 조부의 시체를 건사하여 집으로 옮겨 와서 장례를 치루어 주었다. 먼저번 조모 장례날, 조모 혼령은 어린 아이들을 차마 이대로 버리고 갈수가 없어, 천규까지 어겨 가면서 사사로히 자기 남편에게 재화 피하는 천기를 누설히 주었건만, 천분이 없는 조부는 끝내 사주도망 못하시여, 소경 점쟁이 말대로 이집에서는 한해에 두번씩이나 복을 입게 되였다. 그후, 당시 조부를 따라 목재회사에 재목사러 갔었던 한 일군이 그 화근의 종이말이를 건사하여 가져왔는데, 거기에는 세로줄로 이렇게 씌여 있었다: 《庚戌合邦國恥》. 경술합방이란 1910庚戌年에 조선이 일본에 병탄된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국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 조선 정치인들의 反日 선동 삐라였다. 그런데 순박한 조부께서는 이런 영문을 알지도 못한채, 어머니 제사에 가려고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피하여, 다른 길을 택하여, 자기 안해를 찾아 서천으로 혼자 가시고 말았다. 그해 조부의 나이가 42세였다.   제二회: 김해김씨 가문에 입양되다 한해에 량친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된 다섯남매들 중에서, 제일 큰 백부(公洽)라야 이제 금방 15세밖에 안되였고, 그 아래로 세 고모들도 모두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 가정을 유지해 나갈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궁여지책으로 동네사람들이 주선하여, 이제 겨우 세살밖에 안되는 나의 아버지가 남의 집에 입양 가게 되였다. 그런데, 입양하려는 집에서는 아이네 가문에서 혹시 후에 아이를 도로 찾아 가기라도 할가봐 근심되여 조금 각박한 요구를 제출하였다. 즉 아이네 집에서 아이를 마을밖에 업어다가 버린 다음에, 자기네가 가서 업어 가겠다고 하였다. 나의 아버지를 《버리는》 전날 저녁, 나의 백부(公洽)는 온밤을 새면서 족보를 정리하였고, 붉은천에 나의 아버지의 학명과 생신 년월일을 써서는 자고 있는 그의 품에 넣어 주었다. 나의 고모들은 온밤을 새면서 아기 포대기와 아기 옷에 솜을 더 넣고 다시 만들었으며, 아기 솜모자도 만들고, 아기 버선과 아기 수갑도 만들었다. 이튿날 오전 巳時경에 길을 떠났는데, 때는 동지달이였지만 그날따라 날씨가 대단히 좋았다. 백부가 승냥이를 쫓기 위해 긴 장대기를 들고 앞에서 가고, 그 뒤를 큰 고모가 어린 나의 아버지를 업고 따르고, 작은 고모들이 각기 아기 짐을 들고 흑-흑- 느끼면서 큰고모 뒤를 따라 갔다. 마을 밖에 나가 한참 걸으니 허름한 상두막이 나타났다. 그곳이 바로 나의 아버지를 버리기로 한 곳이다. 큰 고모는 상두막에 들어가 건초우에 나의 아버지를 내려 놓고는 엿이랑 과줄이랑 옆에 놓고 나왔다. 나의 아버지는 무슨 일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듯 처음부터 좀처럼 울지 않았다. 백부와 고모들은 멀리 물러가 상두막을 바라보며 지키다가, 모를 사람들이 와서 나의 아버지를 업고 가는걸 보고서야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저녁녘에 보니 큰 고모가 보이지 않았다. 여러날 지나도 돌아 오지 않았다. 그렇게 40여일이 지난 이듬해 설날 아침에야 큰 고모는 절뚝거리며 집에 돌아 왔는데, 너무 지쳐서 집에 들어서자 마자 쓸어지고 말았다. 백부와 작은 고모들이 울면서 큰 고모를 부축하여 구들에 올려 눕히고, 그의 얼어 붙은 신과 버선을 간신히 벗기고 보니 열 발가락이 얼어서 몽땅 무즈러져 있었다. 그 당시 열두살 밖에 안되는 나의 큰 고모는 어린 동생에 대한 정을 차마 끊지 못하여, 어른들도 상상할수 없을 정도의 혹독한 고생을 이겨내면서 나의 아버지를 업고 가는 사람들의 뒤를 몰래 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동생을 입양하는 집이 그 당시 和龙县 头道沟 江城(广新)村의 金海金氏 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또 그집 뜰앞에 특별히 큰 비술나무가 있다는 것까지 마음속에 단단히 표식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지도를 펼치고 목단강부터 화룡현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볼때 육칠백리는 푼히 된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기차나 뻐스같은 것이 없었는데, 열두살 밖에 안되는 큰 고모가40여일 동안 엄동설한에서 어떻게 이렇게 먼길을 갔다 올수 있었는지? 연길고모도 대답 대신에 머리만 설레설레 저으시였다. 후에 큰 고모는 결국 열 발가락을 몽땅 잃었다고 한다. 그 이듬해, 1918年에 열네살 난 큰 고모(甲順)는 동네 사람들의 주선으로 한동네의 수원최씨 가문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의 명함이 내헌(乃憲)이라고 하였다. 1919年에 열두살 난 둘째 고모(乙順)도 큰 고모의 주선으로 린근 동네 김해김씨 가문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 명함이 금손(今孫)이라고 하였다. 1923年에 이미 스물두살이 된 백부(公洽)는 둘째 고모의 주선으로 연길에 있는 둘째 고모 시집 친척이 되는 김해김씨집의 딸에게 《누이바꿈》으로 장가들게 되였다. 즉 백부가 그집 딸에게 장가 들고, 자기의 작은 누이, 즉 나의 작은 고모(參順)를 그집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해에 이미 열네살 난 작은 고모(參順)도 연길 김해김씨네 집에 시집을 가게 되였는데, 남편 명함이 승진(承谮)이라고 하였다. 연길현은 화룡현과 린접되여 있었으므로, 작은 고모는 일부러 몇번 시간을 내여 큰 언니가 알려 주던 대로 비암산 마루에 올라 서쪽으로 平崗벌을 내려다 보면서, 头道沟 江城村의 그 특별히 확연하게 보이는 큰 비술나무를 찾아서 멀리 바라 보며 동생을 하염없이 그리군 하였다. 제三회: 江城村 金海 金桂贤 할아버지 나의 아버지를 입양한 和龙县 头道沟 江城村의 金海 金桂贤 할아버지는 조선 이민으로 중국에 건너 온 江城村의 제일대 개척자의 한분이시다. 1912壬子年, 이곳 새밭속에 집터를 닦고, 육간 초가 한채를 지어놓고는 본격적으로 논밭을 풀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풀어 놓은 논밭이 몇마지기 잘되여 혼자 부치기가 힘에 부치니, 또 조선 고향의 친척과 친우들을 많이 불러 들였는데, 마을은 규모가 잡힐 정도로 꽤나 크게 되였다. 그런데 1915乙卯年 봄에 모두들 한창 새해 농사 차비를 하는데, 투도구에서 성이 郭가인 지주가 관청의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땅문서를 보이며, 이 일대가 모두 자기네 땅이니 금년 가을부터는 소작료를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시비를 걸어 봤자 칼자루 쥔 놈이 이기게 되여 있으니, 金桂贤 할아버지는 차라리 한수 앞서서: 그렇지 않아도 땅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소작료는 당연히 바치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 형편도 좀 돌보와 준다면 이 지역에 논밭을 많이 많이 일구어 놓겠다고 하면서 곽지주와 교섭하였다. 그리하여 金桂贤 할아버지가 책임지고 그해 소작료를  2할만 바치고, 나머지 8할은 모두 농사지은 사람들이 가지도록 결정 지였다. 그당시 조선인들이 간도땅에 건너와 막상 밭을 일구어 놓고 보니, 그땅의 임자가 이미 어떤 중국인이나 관청의 이름으로 되여 있었기 때문에, 몇해 부치고는 그 땅임자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그 땅임자에게 소작료를 바쳐야 하였다. 이것이 중국의 조선 이민들 중에 지주가 극히 적었던 원인의 하나이다. 江城村의 金海 金桂贤 할아버지는 남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고 남보다 더 검박하게 치가하면서 가정살림은 비교적 부유하게 꾸려 놓았다. 그런데 유감이라면 할머니가 병으로 잉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는 그것이였다. 이리하여 이 가문에서는 어린 나의 아버지를 입양하게 되였던 것이다. 金桂贤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의 두 부모가 모두 계시지 않는다는 형편을 아시고는, 나의 아버지를 자신의 친자식으로 만드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아기 품속의 붉은천에 씌여진 이름을 그대로 옮겨와 성만 바꾸어 학명을 김진흡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던 1920庚申年, 金桂贤 할아버지께서는 곽지주를 도와서 큰 재화를 모면시켜 준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은 간도를 중국을 공격하는 발판으로 만들기 위하여 《훈춘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으로 부터 2만명 정규군을 간도에 파견하여 《경신년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런데 홍범도와 김좌진이 각기 인솔하는 간도지구의 두 항일무장대오는 일본 정규군과 우회하면서 선후하여 화룡 청산리, 이도 완루구, 어랑촌 야계곡 등에서 불의의 습격전을 벌려 일본군 천여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이 바로 연변 조기 항일사에서 크게 한자리 차지하는 《청산리 전투》이다. 당시에 곽지주는 관청의 징용 명령에 따라 말을 몇필 바친적 있었다. 당년 10月의 어느 하루, 金桂贤 할아버지가 곽지주네 집에 가서 장부를 알아 보는데, 갑자기 밖에서 떠들썩 하기에 나가 보았더니, 곽지주네가 며칠전에 관청에 바쳤던 한필의 말이 마차를 끌고 와서 대문밖에 서 있었다. 그런데 마차우에 실은 몇개의 싸리 광주리 안을 들여다 보니, 몽땅 꼬리표가 달린 일본군 사람머리가 담겨져 있었다. 일본군들은 전투에서 전사한 자기네 병사들을 머리만 베여 꼬리표를 달아서 싸리 광주리에 담아 내려 보낸것이다. 그런데 이 마차가 일보군 병영으로 가야 하는데 왜서 여기로 왔느냐가 문제였다. 아마도 중도에서 습격을 받고 마차부가 죽었거나 도망간 모양이였다. 곽지주는 빨리 마차를 몰아 내 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데, 집의 일군들중 그 누구도 감히 얼씬 나서지 않았다. 그리하여 곽지주는 이 마차를 몰고 나가서 일본군에게 바치는 사람에게 땅 얼마를 주겠다고 상을 내 걸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은 자칫하면 목숨과 상관되는 일이기 때문에 누구하나 선뜻이 나서지 못하였다. 곽지주는 조급하여 쩔쩔 매다가 한 어리숙한 총각머슴을 가리키며, 《내 너에게 내 며느리를 주고, 집도 주고, 땅도 좀 주겠으니, 네가 좀 갔다 오너라!》하고 소리쳤다. 그 당시 곽지주의 둘째 며느리는 몇해전에 상부하고 과부가 되면서, 자주 시아버지와 걸고들어 심술을 부리므로 집안에 조용한 날이 별로 없었다. 차리리 이 기회에 인심도 쓰고, 골치덩이도 없애고, 꿩먹구 알먹구 아닌가? 그래서 그 젊은 머슴이 우물쭈물 나서기는 하였는데, 일본군들 앞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한분이 함께 가서 일본군들 앞에게 교대하여 준다면 자기가 마차를 몰고 갈수는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곽지주는 金桂贤 할아버지 손을 잡아 흔들며 앞으로 많이많이 우대하여 주겠으니 한번 도와 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金桂贤 할아버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차마 거절할수가 없어서, 마차를 따라 일본 경찰서까지 갔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일이 순조로와 일본경관들은 金桂贤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는, 차렸하고 군례를 부치면서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치하하였다. 그후부터 곽지주는 金桂贤 할아버지를 동생이라고 부르면서, 여러방면으로 우대하여 주었으며, 점차 특수한 개인 관계를 맺었다.   제四회: 아버지의 소년시절 金海金氏 가문에서의 나의 아버지의 동년은 행복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밥을 배불리 먹을수 있었고, 옷도 좋은걸로 입을수 있었으며, 또 나이가 되니 头道沟 국민학교에 들어가 공부도 할수있게 되였다. 나의 아버지가 15세가 되던 1928年의 어느하루, 한마을에서 사는 한 金氏성의 사람이 갑자기 나의 아버지를 마을앞 강변에 불러놓고 정중히 선포하였다; 《오늘부터 너는 共产党 령도를 받는 少先队 일원이다. 조직에서 주는 임무를 목숨으로 완성해야 하며, 완성하지 못하거나 밀고하는 날에는 징벌을 받는다.》 그 당시 나의 아버지로서는 아무런 사상준비도 없는 형편에서 共产党 배에 오르게 된것이다. 혁명이란 왕왕 이렇게 자원에 의하여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에 의하여 참가하는 것이다. 그때 평강구 지방조직에서는 곽지주집을 습격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조직의 임무를 맡고, 할아버지와 그 곽지주와의  특수 개인관계를 리용하여 그 중국인 곽지주집에 들어가 내부정황을 알아 가지고 그 김씨인 공산당 공작인원에게 제공하여 주었다. 이 정보에 근거하여, 어느 깊은 밤에 공산당 적위대가 곽지주 집을 가만히 습격하여 많은 량식과 물품들을 가져갔다. 곽지주 집에서는 인차 발견하고, 안건을 투도구 일본경찰서에 보고하였다. 그 김씨성의 사람이 혐의분자로 지목되여 체포되였다. 그런데 그 김씨성의 사람은 일본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만 실성하고 말았는데, 미친사람처럼 아무사람 이름이나 마구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열두명 사람들이 또 투도구 일본경찰서에 잡혀가게 되였다. 일본경찰서에서는 잡혀온 혐의범 열두명을 절반씩 갈라 두줄로 마주세워 놓고는 서로 상대방의 귀뺨을 피터지도록 때리게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사정을 보아주는 사람은 따로 형틀에 묶어놓고 더 혹독하게 취조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어른들과 함께 일본경찰서에 잡혀간후, 金桂贤 할아버지께서는 마을 사람들을 조직하여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잡혀간 여러 사람들을 빼내오기 위하여 많은 재물과 돈을 썼다. 그때에 쓴 재물과 돈의 가치를 모두 합치면 공산당들이 그 곽지주집을 습격하여 가져간 물품가치보다 엄청 더 많았다고 한다. 보름이 지난후, 투도구 일본 경찰서에서는 혐의범 김씨가 이미 실성해 버린 형편에서 확실한 근거를 찾을수 없었고, 또 많은 마을사람들의 례물과 보증도 있고하니, 이미 거의 죽게된 그 김씨성의 사람과 후에 잡혀간 모든 사람들을 결국 석방하게 되였다. 류치장을 나올때 관례대로 문옆에 《출문 기록부》를 작성해 놓고는 이 문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싸인하고 지장을 찍게 하었다. 그 《출문 기록부》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에 대하여서는 그 누구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아버지가 문화혁명 기간에 《귀순분자》, 《변절자》등 모자를 쓰고 투쟁 당하고, 충격을 받게 된 전부의 원인이다. 1930年, 공산당이 령도한 《붉은 5월투쟁》이 연변지역을 휩쓸었는데, 당시의 중공 연변 특별지부에서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농민들을 동원하여 토지혁명을 전개함으로써 인민무장을 건립하고, 쏘베트 정권을 건립할 강령을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연길, 화룡, 왕청 등지의 여러 마을에서는 지주의 고리대 문서를 태워 버리고, 지주의 량식과 물품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해 5월27일, 중공 연화(연길,화룡) 현위에서는 약수동 웃마을에서 《약수동 쏘베트정권》 건립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두도구 강성촌 지하조직에서도 통지를 받고 20여명의 군중 대표들을 파견하여 약수동 군중대회에 참가시켰는데, 나의 아버지도 따라 가게 되였다. 대회에서 당시 만주지역 첫번째 공농혁명 정권인 《약수동 쏘베트정부》의 성립을 선포하고, 李凤三이 정부주석으로 당선되고, 王耿이 연화 현위서기로 당선되였다. 대회에서 격정에 넘치는 선전고동이 한바탕 있은후 金槿과 苏圣奎의 인솔하에 군중대오는 호호탕탕하게 룡정으로 진발 하였다. 연도에서부터 친일분자라고 지명된 집은 무조건 불을 달아 태워 버렸고, 두도구와 룡정의 일본회사 건물들을 습격하여 억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반재역 철교를 파괴하고, 레루를 뽑아 버렸다. 이것이 바로 연변의 항일 력사에서 이름이 있는 《5.30暴动》이다. 당시 룡정 일본 령사관에서는 군경과 지방 경찰들을 파견하여 진압을 시작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체포되여 갔다. 江城村에서도 여러사람이 실종되거나 체포되여 갔는데, 나의 아버지는 집에 숨어 있으면서 곽지주가 보증을 서 주었기에 별일없이 무사할수 있었다. 약수동 쏘베트 정부는 3일동안 유지되고는 결국 진압 당하고 말았다. 그해 8월에 추수폭동을 조직하면서 중공 평강구위에서는 또 사람을 파견하여 여러번 나의 아버지를 찾았지만, 모두 金桂贤 할아버지가 리유를 만들어 막아 버렸다. 金海金氏 가문의 후계를 위하여, 金桂贤 할아버지가 엄격히 단속하였으므로, 그후부터 광복이 날때까지 나의 아버지는 기본상 사회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으셨다.   제五회: 자기姓을 다시 찾다. 1935年, 나의 아버지가 22세가 되던 해에, 그당시 江城村 아래 개방지 半载驿 (지금의 和龙市 东城镇)에서 사는 全州李氏 가문의 18세 나는 큰 딸과 인연을 맺고 결혼하게 되였다. 그분이 바로 나의 어머니이시다. 나의 어머니는 명함이 경희(京姬1918~1997)라고 하였는데, 말띠로서 성격이 콸콸하고, 마음이 넓었으며, 씀씀이가 대범하였다. 명절 아침같은 날에 집에서 색다른 음식을 했다하게 되면, 식전에 먼저 온 동리에 한번 돌리고 난후에야 제집 아침식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로하여 큰 할머니로부터 악의없는 핀잔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해에 이집에는 뜻밖의 불청객이 찾아왔다. 두 녀인이 열살좌우의 한 남자아이를 데리고, 큰 비술나무 뒤의 金海金氏집을 찾아 왔던 것이다. 처음에 할아버지께서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들을 돌려 보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결국 어쩔수없이 집에 들여놓게 되였다. 두 녀인은 할아버지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하늘같이 덕을 쌓으신 金桂贤 할아버지에게 깊은 사이를 표시하고는 사연을 말하였다; 그 두 녀인중의 한분은 바로 나의 아버지의 작은 누님(參順)이시고, 다른 한분은 나의 아버지의 형수(公洽之妻-參順이 시누이겸 올케)이신데, 데리고 온 이 아이는 나의 아버지의 친 조카로서 이제 열두살이란다. 나의 아버지의 큰 형님(公洽)은 이 아이가 태여나 석달만에 돌아 가셨는데, 림종하면서 이 아이한테 꼭 자기 친 삼촌을 찾아주라고 유언하셨다고 한다. 당초에 나의 백부님께서는 어쩔수 없이 어린 자기 동생을 남의 집에 입양 보내고는 대성통곡하면서 장차 꼭 동생을 도로 찾아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몸에 병이 많았으며, 힘든일을 별반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막내 누이를 내세워 누이바꿈으로 겨우 장가 들었는데, 자기 아들이 태여났을 때는 이미 그의 생명이 경각에 이르렀다고 한다. 앞날이 얼마 없음을 예감한 그는 족보에 금방 태여난 자기 아들을 올리면서 학명을 鶴松이라고 적었다. 이것은 1924年도의 일인데, 그때 다행히도 나의 백부님께서 나의 아버지와 자기 아들을 모두 족보에 올려 놓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76년후인 지난 2000年도 《延州玄氏八修大同谱》 등록때에 우리 가문의 련계점을 쉽게 찾을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백부님께서 돌아가신후, 백모님께서는 목단강에서 혼자 어린 아들을 힘겹게 키웠는데, 그 아들이 열두살나던 해인 1935年에 한 조선인 일본상인을 따라 일본에 가기로 되였었다. 그리하여 만약 정황이 허락된다면 그 아이를 자기 삼촌인 나의 아버지한테 맡기고 갈 예산이였다. 그런데, 이 일로하여 할아버지가 몹시 충격을 받고 계셨고, 또 아이도 아직 어리기 때문에 결국 그 아이는 자기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몇해 공부를 더하고, 좀 더 큰다음, 다시 합당한 시기에 자기 삼촌을 찾아오는 것으로 약속이 되였다. 불청객들을 보내고 난뒤, 金桂贤할아버지께서는 그만 식음를 전페하시고 몸져 누우셨다. 그만큼 정신적 타격이 컸으리라. 오직 나의 아버지 하나만 믿고 강성촌 김해김씨 후계의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으며, 또 이미 결혼까지 시켰으니 이제 바야흐로 번창하여질 일만 남았는데, 운명도 무심하지, 어찌하여 이렇게 때아닌 유월에 찬서리 내린단 말인가? 인젠 나의 아버지가 할아버지 앞에서 계속 충실한 아들질을 하겠다고 하늘에 대고 맹세한다 하여도 아무런 의의가 없게 되였다. 부근의 용한 의원들을 모두 모셔 보였지만 모두 머리를 저으며 돌아갔고, 할아버지 병세는 점점 악화되여만 갔다. 하기야 의원들은 사람의 몸에난 병은 치료할수 있었겠지만, 사람의 마음에 난 병이야 어찌 치료할수 있었겠는가? 이제 곧 강성촌 김해김씨 가계가 끝나가는 시각에, 새로 들어온 며느리(나의 어머니)가 그 누구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방안을 제기하였다; 즉 할아버지한테 씨받이로 첩을 맞아 들이자는 방안이였다. 그때만 하여도 이런 방안이 사회적으로는 가능한 것이였다. 나의 어머니는 먼저 큰 할머니를 설득시켰고, 그 다음 김해김씨 가문의 일가친척들을 설득시켰다. 이런 시각에 그 누구도 이보다 더 현명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어머니는 사람을 띄여 사처에 수소문 하던끝에 웃마을 青河村의 한 소경녀인을 적임자로 지목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손수 혼수례물을 준비하여 가지고, 나의 아버지와 함께 그 소경녀인의 집에 찾아가서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청혼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이것은 1935年도의 일인데, 이때로부터 강성촌 김해김씨 가문은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되였으며, 진정한 자기의 후대를 가질수 있게 되였다. 그 소경할머니를 나도 어렸을때 많이 보았는데, 키가 작으마한 아주 청수한 분이셨다. 종래로 머리 한카락 흐트러진적이 없었으며, 저고리 한곳 구겨진 곳이 없었다. 앞못보는 소경이면서도 바느질 솜씨가 대단한 분이셨다. 옷을 만들고, 이불을 꾸미고 하는 일들이 그에게 있어서 아주 보통의 일이였다. 나는 그이를 《작은 할머니》라고 불렀는데, 그 작은 할머니는 강성촌 김해김씨 가문에 첩으로 들어와 모두 두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金成烈(1937~1998)이라고 하였는데, 몇해전에 이미 사망하셨고, 그가 남긴 자식들은 一男二女로서, 이미 모두 성가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둘째는 金成哲(1947~)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신체가 튼튼하며, 자식들은 一男一女로서, 역시 이미 모두 성가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작은 할머니가 아들을 낳게되자, 할아버지는 너무 기쁜 나머지 큰 잔치를 벌리고, 련며칠 온동리 사람들을 청해놓고, 춤도 추고, 그네도 뛰면서 마음껏 경축하였다. 할아버지는 뜰앞의 그 몇백년 묵었는지 알수없는 큰 비술나무에 그네를 매여놓고, 해마다 명절이나 경사있는 날에는 동네 녀인들이 이곳에 와서 그네 뛰면서 마음껏 즐기게 하였던 것이다. (이 유서깊은 비슬나무는 몇백년동안 평강벌과 강성촌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며 오다가, 1962年 삼년 대기황 마지막 해에 그만 액운을 당하여, 잘리우고 겁질을 벗기워 강성촌 백여명 기민들의 하루 대식품감이 되는 것으로 자기 일생을 마쳤다.) 며느리의 처사를 너무 기특하게 여긴 할아버지께서는 특별히 그 동리에 따로 살림을 한방 아담하게 꾸며놓고,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가 함께 세간 나가도록 하였다. 그 당시 나의 아버지 한테도 이미 어린 아이가 있었으니,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의 성을 다시 玄氏로 회복하도록 윤허하여 주셨다. 그때부터 나의 아버지는 학명을 현구(玄九)라고 불렀다.   제六회: 사회공작에 투신 1943年, 나의 부모들은 여덟살 나는 한 서울 녀자아이를 입양한적 있는데, 이름이 옥순이라고 불렀다. 그는 몹시 귀엽게 생겼는데, 이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빠!》, 《엄마!》 하면서 각근하게 굴었으며, 농촌에서 나무연통을 소똥으로 칠하고, 가을에 탈곡장을 소똥으로 칠하는것을 보고는 몹시 신기해 하였다. 그는 성격이 아주 쾌활하고 굴강한 녀자애여서 동네 아이들중에 녀자아이고 남자아이고 그를 이기는 아이가 없었다. 성질이 역시 굴강한 편인 나의 외사촌 누님(리순녀-영예군인, 이미사망)도 그한테는 적수가 못되여 여러번 맞아서 울었다고 한다. 1953年 팔가자에 있을때 일인데, 한번은 그가 항아리를 깨여놓아 어머니한테 야단을 당하고는 어디엔가 없어진것을 이틀이나 찾았다. 후에 찾고보니 큰 독안에 들어가 앉고는, 벼짚 방석으로 아구리를 덮어 가리우고, 이틀이나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후 그는 갓 설립된 연길의 자치주 정부를 자체로 찾아가서, 이붓 어머니가 자기를 학대한다고 고발하여, 자치주 정부에서 조사인원이 내려온적까지 있었다. 1954年에 그는 자기 친구의 소개로 개산툰의 한 군인한테 시집갔는데, 늘상 다른 남자들을 꼬여서는 말썽을 많이 일으켰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때는 1959年인데, 그는 이 동생을 특별히 사랑해 주었으며, 맛있는 과자랑 사탕이랑 많이 사왔었다. 그해 그는 또 자기친구의 남자와 눈이 맞아 가지고, 함께 조선에 건너가서 살기로 약속하였다. 그가 먼저 조선에 건너가 자리를 잡은후 어느 약정한 장소에서 그 남자와 만나 함께 월경하기로 되여 있었다. 그런데 그의 친구가 눈치를 채고 그 약정한 장소에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을줄이야. 두 녀인은 한 남자를 놓고 그곳에서 결투를 벌렸는데, 결국 세사람이 모두 제각기 헤여지고 말았다. 몇해후, 조선 황해도에서 한번 그의 편지가 왔었는데, 그후론 소식이 영 끊겼다. 나는 지금도 그 누님이 그립다. 그 누님은 참으로 전기식적인 누님이시였다. 이것은 우리가정의 한 에피쇼드이다. 1945年10月, 일본이 망하고 금방 광복을 맞이한 강성촌에, 한 학생복 차림의 20대 청년이 찾아왔다. 그가 찾는 사람인즉 바로 나의 아버지였는데 자기는 부산에서 자기 삼촌을 찾아왔다고 하였다. 동리사람들이 그를 나의 아버지앞까지 데려 와서 확인하여 보니, 그가 다름아닌 10년전에 자기 어머니와 고모를 따라 이곳에 자기 삼촌을 찾아 왔던 나의 아버지의 친 조카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鹤松이라 하였는데, 후에 万硕이라고 고쳤다. 10년전 그는 강성촌에서 자기 삼촌을 찾은후, 어머니를 따라 일본에 건너 갔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한 일본남자와 결혼하게 되였다. 그도 일본인 이붓 아버지 덕분에 일본 초등학교에 들어가 공부할수 있게 되였다. 그후 태평양 전쟁이 폭발하면서 일본 국내에서 대량으로 징병하게 되자, 그도 징병을 면치 못하고 일본군 운수부대에 편입되였다. 그러나 그는 운수가 좋았던지 전쟁마당에 끌려간것이 아니라, 선박을 타고 일본과 조선을 넘나들면서 후근부대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일본을 떠난 때가 1945年 8月초였는데, 부산항구에 건너와서 일본천황이 투항조서를 읽는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날부터 바다길이 막혔는데, 만약 일본에서 하루만 늦게 떠났더라도 자기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며, 가능하게 죽었을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들은데 의하면, 그들 운수선의 뒤를 따르던 같은 부대 운수선은 부산에 채 도착하기 전에 바다에서 일본의 투항소식을 접하였는데, 미쳐버린 일본병들은 그 선박안의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을 몽땅 바다에 처 넣었고 돌아 갔다고 한다. 그는 부산에서 일본병영이 투항기분에 혼란해진 틈을타서 탈출한후, 천신만고 겪으며 두달을 걸어 간도에 건네와 자기 삼촌을 찾아 왔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힘든길을 걸어 자기를 찾아온 친조카를 아주 반갑게 맞아 들였으며, 호적을 한집에 올리고, 한집에서 함께 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한가지 상당히 현명한 처사를 하셨는데, 그당시 중국인이나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정을 고려하여, 조카의 일본군 경력사실을 영원히 없었던 일로 하고, 단지 부산에서 아라바이트로 신문을 나르면서 힘겹게 공부를 했다고만 동리사람들 한테 소개하였다. (이분이 바로 후기에 和龙市纪检委 主任직과 和龙市检察局 检察长직에서 공작하셨던 나의 사촌형님 玄万硕(1924~1985)이다. 문화혁명기간에 그도 몹시 충격을 받았지만, 자기 삼촌의 당년의 뜻을 따라 광복직전의 그 일본군 경력만은 시종 다시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벌한 환경에서도 맞아 죽지 않았고, 후에 락실을 받고 다시 공작까지 할수 있었다.) 그후 얼마 안되여 강성촌에도 농회조직이 성립되였는데, 나의 아버지께서 강성촌 농회 위원으로 당선되였고, 나의 어머니께서 강성촌 부련회 부주임으로 당선되였으며, 나의 사촌형님 万硕이는 강성촌 농회 보위간사로 당선되였다. 온집 사람이 모두 혁명의 길에 들어선 셈이 되였다. 1947年도 한동리의 延日鄭氏가문에 좋은 혼처가 나서자,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자기들의 조카를 결혼시켜 주었으며, 새살림까지 꾸려주어 세간 나가도록 하였다. 1949年 공화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강성촌에서도 토지개혁을 시작하였는데, 모두 농회간부인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작때문에 눈코 뜰사이 없이 바삐 보냈다. 그후 얼마 안되여 万硕이는 和龙县 公安局에 발령을 받고 올라갔다.   제七회: 강성촌을 떠나다 그 당시, 나의 아버지의 마음을 항상 아프게 찌르는 일이 한가지 있었는데, 결혼하여 15年 사이에 선후하여 이미 어린자식들을 아홉이나 몽땅 요절시킨 그일이다. 나의 어머니는 가사 처리나 사회활동 방면에서는 능력이 뛰여난 분이시였지만, 어머니로서는 아직 《합격증》을 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홍진》이라는 전염병이 몹시 성행하였는데, 그때의 의료조건하에서 어린 아이들이 이 병에 전염되기만 하면 십상팔구는 죽었다. 어린 아이가 이병에 전염되지 않게 하려면, 상당히 엄격한 격리조치가 필요하였는데, 나의 어머니는 성격상에서 너무나 활동형이였기 때문에, 번마다 격리조치에서 실패 하였던 것이다. 그당시 半载驿(지금의 和龙市 东城镇)철로에서 양로단 단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의 어머니의 큰 오라버님께서는 자기 누이동생의 불행에 대하여 몹시 걱정하고 계셨다. 고심끝에 유일한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길밖에 없다고 인정하셨다. 자기 누이동생을 소위의 공작에서 해탈시키고, 좀 편한곳에 보내서 모든 정력을 아이를 키우는데 돌릴수 있게끔 새환경을 주어 보리라 생각하셨다. 그리하여 1950年에 나의 아버지를 팔가자 철로 양로단에 취직시켜 주셨고, 나의 어머니가 안정된 환경에서 편안하게 생활하면서 안전하게 애를 낳아 기를수 있게끔 하려 하였다. 그런데 팔가자 철로에 와서 나의 어머니는 또 아이 하나를 잃었다. 조금도 조용히 있을줄 모르는 나의 어머니는 안정된 환경에서도 편안하게 생활하는것이 아니라 몇몇 철로 부녀들과 함께 철로연선의 공지에 숱한 밭을 일구고는 또 제 본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던 것이다. 몹시 상심한 나의 아버지께서는 철로일을 그만 두고, 고금을 내고, 그 부근 농업 합작사에 입사하여 다시 농민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1952年도의 일인데, 그 당시 나의 아버지께서는 군대 규률처럼 엄격한 철로보다 비교적 자유스러운 농촌환경이 아이를 키우는데 더욱 합당하다고 인정하셨던 것이다. 아이를 열이나 요절시킨 나의 어머니께서도 사태의 엄중성을 느끼고, 자기의 성격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집에서 돼지나 닭같은 가축을 기르면서 의식적으로 가외 접촉을 공제하였다. 1951年 아버지한테는 5촌조카라는 이십대 청년이 찾아 왔다. 그는 이름이 원식(元植1932~1957)이라고 하였는데, 나의 세째 할아버지(贞宗)의 손자였다. 5년전에 아버지가 사망한후 사회를 휩쓸며 싸움질만 하며 다녔기 때문에 유약한 그의 어머니는 그를 단속할 방법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가문의 어른한테 보내여 단속하면 좀 사람되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가문에 대한 책임감으로 그를 밀어버릴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집에 들이고는 합당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 사이 그는 벌써 허래성 벌판의 싸움세력들을 몽땅 손에 넣고 쌀개를 피워 댔다. 아침이면 우물가에 가서 물동이를 인 고운처녀를 보면 슬그머니 옆에 접근한후 불시에 키스해 버리군 하였다. 그녀들은 물동이를 이고 있는지라 어쩔수 없이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물동이를 깨여버린 집도 여럿이였는데, 어쩔수 없이 아버지가 그 값을 배상해 주고 사과 해야만 하였다. 몇번 일자리를 찾아 일을 시켜보았지만 이미 야인이 된 그가 안착할리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를 장가 보내 주기로 하였다. 그러자 그는 벌써 허래성 벌판에서 제일 고운 처녀 몇을 점 찍어두고 있었다. 결국 이도구의 鎭川趙氏네집 큰딸이 지목되였는데, 참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처녀였다. 1952年 음력설에 혼례식을 올리고 살림까지 마련하여 주었다. 이 방법이 확실히 효험을 보아 그는 다시는 싸움질 하지 않았으며, 일도 찾아하군 하였다. 그 이듬해 아들까지 낳았는데, 아이의 이름을 忠烈(1953~)이라고 지었다. 소문에 조선에 가면 한창 복구건설시기여서 좋은 일자리를 찾을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 부부는 젖먹는 아이를 안고 조선으로 건너 갔다. 그런데 조선에서 2년후의 어느날, 그의 안해가 너무 출중하게 아름다웠던 탓에 그만 조선 깡패들의 눈에 들고 말았다. 조선 깡패들은 트집을 잡아 원식이와 싸움을 걸고는 그의 안해를 끌고 갔는데, 그의 안해는 결사적으로 반항하는 과정에 돌에 머리를 박고 자결하고 말았다. 원식이도 워낙 유명한 싸움꾼인지라 몇놈은 쓸어 뜨릴수 있었지만, 혼자서 그많은 깡패들을 당해내는 수가 없었다. 그는 아이를 구하는것이 급하였는지라, 많은 매를 맞으며 아이를 구하여 가지고 겨우 빠져 나왔다. 그는 조선에서 안해를 잃고 아이만 구해 가지고 중국에 다시 건너 왔는데, 아이를 자기 어머니한테 맡기고, 2년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1957年 그도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6세밖에 안되였다. 이것은 우리가정의 또 하나의 에피쇼드이다.   제八회: 아기 접수의식 1953癸已年四月十八日, 어머니께서는 또 아이 하나를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나였는데, 나는 어머니에게서 제 열한번째 아이로 태여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어느때보다 달랐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낳으신후 나를 볼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인젠 더는 실패를 감당할 심리능력이 없었고, 이번까지 실패하면 아버지께서는 철저히 붕괴될것만 같았다. 아버지께서는 염씨성을 가진 덕망높은 의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일련의 특수한 민속 방토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태여나자마자 생모한테는 보이지 않고, 포대기에 싸서는 이미 약속이 되여 있는 양어머니(김련분1928~2005) 한테 가져갔는데, 이집에서 백날을 지내야 하였다. 그 사이에 생모는 이집 근처에서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하였다. 생일은 《四月十八日》을 이틀 앞당겨 《四月十六日》로 종이에 써 놓았다. 그리고는 나를 안고 소 외양간에 들어가서 포대기에 소똥을 묻히면서 소똥을 밀어내는 작은 똥구멍으로 나를 바같에 빼내온후, 《쇄지야, 음매!》하고 웨친다. 새끼소가 태여 났음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나의 이름은 《쇄지》로 되였다. 《쇄지》라는 말은 농촌 사투리인데 송아지라는 뜻이다. 소는 생명력이 특별히 강한 동물로서, 새끼소는 태여나서 한시간만에 자체로 일어나 뛰여 다닐수 있다. 50年이 지난 2004년, 나의 양어머니께서 사망하시기 한해전에 나를 불러놓고 그때의 그 괴상한 행사들을 해석하여 주었다; 그 당시에 밤이 되면 아이들만 전문 업어가는 《어베》라는 死神이 있었다고 한다. 내 기억에도 이전에 아이들이 울때 어른들이 왕왕 《어베 온다.》라고 하는데, 그려면 아이들은 울음을 뚝 그치군 하였다. 나의 어머니가 또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그 《어베》가 제일 먼저 알게 되는데, 이미 열번이나 우리집에 와서 성공적으로 아이를 업어 가서 재미를 붙였기 때문에, 얼씨구나! 하면서 밤을 기다려 지체없이 인차 찾아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베》가 이번에 나를 업어 가려고 찾아 오게되면 그만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새로 낳았다는 아기가 사람이 아니라 송아지고, 생일이 다르고, 집이 다르고, 임자가 다르고, 또 소똥냄새까지 확실하게 나므로 어리벙벙해 있다가, 새벽 수탉이 울면 돌아 가야 하는데, 이렇게 백날까지 속이면 그 死神도 재미를 잃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한다. 참으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리유였지만, 나는 그로부터 죽음의 액운에서 벗어나 이미 60여살까지 살아왔으며, 그때로부터 우리집에서는 다시는 아이들이 요절되는 일이 없었다. 백일이 찬후, 덕망높은 염의사(원 팔가자 중남위생소 원로 의사, 원 중남대대서기 염의택의 부친)의 감독하에 고마운 양어머니와 나의 어머니 사이에는 《아기 접수의식》이 있었다. 아침을 끝내고, 양어머니께서 아기를 목욕시켜 업고, 팔가자 역전에 나가 가장 큰 나무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나의 어머니께서 그앞에 가서 깊은 인사를 올리고, 사례금을 바치고, 새 포대기에 아기를 바꿔 싸서 안고는 그곳으로부터 쭈크린 앉음 걸음으로 집까지 가야 하였다. 아마도 어머니의 과도 활동형 성질을 고쳐주기 위하여 염의사가 고안해낸 조치였다고 짐작된다. 그 당시 우리집은 길아래 새마을에 있었는데, 역전부터의 거리가 300m는 푼히 되였다. 전대미문의 《아기 접수의식》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구경하였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새 포대기에 싸서 안고는, 쭈크린 앉음 걸음으로 오리처럼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옮기면서 천천히 집으로 향하였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집에 그때의 그 장면이라고 짐작되는 사진이 한장 있었는데, 가석하게도 문화혁명 기간에 없어졌다. 때는 9月중순이라 정심때가 되면서 날씨는 그래도 무더워 났다. 아버지께서는 아기 먹을것이랑 두루 넣은 가방을 메고, 양산을 들고서 시종 나의 어머니 옆에서 시중 들어 주셨다. 동네의 아기 어머니들은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분분히 사탕가루, 홍탕 등 그 당시에는 아주 귀중한 아기 영양품들을 조금씩 가져다가 나의 어머니옆에서 시중 들고 있는 나의 아버지의 가방에 넣어 주었다. 한 순박한 어머니의 자식을 위한 苦行에 대하여 성원과 지지의 뜻이였으리라. 《아기 접수의식》은 저녁켠이 되여서야 끝났는데, 그 사이 염의사는 호사를 데리고 세번 현지에 나와 아기와 어머니를 진맥하고, 주사를 놓아 주었다. 어머니께서는 《오로지 아들을 위하여!》라는 하나의 신념으로 혹독한 《아기 접수의식》을 원만히 완수하셨다. 후에 어머니께서는 종종 이일을 말씀하시며, 이렇게 하면 내 아들이 다시는 죽지 않을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기는 혜택을 받는 기분으로 한없이 감사하기만 하더라고 하셨다. 지금 사람들한테 이런 처벌이 내려지면 인격모독이라고 펄쩍 뛰겠지만, 그 당시 어머니로서는 얼마나 감사한 혜택으로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그후에도 나는 자라면서 여러번 큰병을 앓았는데, 모두 염의사 덕분에 죽지않고 살아났다. 이 세상에 신선이란것이 하늘에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염의사같은 분이야말로 우리 신변에 있었던 진짜 신선인 것이다. 고 염의사의 명복을 두손모아 비는 마음이다.   제九회: 동성용에서 1956年 내가 네살나던 해에 화룡지역에서 또 홍역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께서는 또 임신중이시였다. 또 홍역이 돈다는 소식을 들은 나의 아버지께서는 너무 질겁한 나머지 부랴부랴 짐을 꾸려 가지고 집이고 밭이고 다 버리고 팔가자를 떠났다. 그리하여 새롭게 정착한곳이 지금의 龍井市 东盛涌鎭 昌盛村 자리다. 东盛涌에서 나는 2년동안의 유년기를 보냈는데, 그때의 일들이 몇가지는 어렴풋이 생각난다. 우리집은 세 세간이 한데 붙은 긴 남향집이였는데, 동쪽집이 우리집이였고, 한 50평방쯤 되였으리라 짐작된다. 가운데 집은 작은 살림방이였는데, 우리 유아원 녀선생님이 그집에 계셨다. 내가 유아원에 갈때나 올때에는 항상 그 녀선생님한테 업히워 다녔다. 우리집은 동쪽으로 뜰악 출입을 하였고, 뜨락을 나서면 동쪽 맞은켠에 검은 대문을 한, 옛 부자집 장원이 있었는데, 집체 창고로 쓰고 있었다. 동북쪽으로 옛 비행장이 멀리 보였고, 남쪽으로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맞추어 기차가 달리는것이 보였다. 동남쪽으로 나가면 농용 관개수로가 있었는데, 팔뚝같은 고기들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으며, 빨래하던 아낙네들도 방치로 서너마리는 쉽게 때려잡았다. 내가 东盛涌기간에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은 아버지한테 혹독하게 매를 맞았던 일이다. 누구네 상가집이였는데, 아버지가 상여를 메고 가는것을 보았다. 나는 장례행렬이 너무 재미있어서 따라가며 구경하였다. 아버지가 몇번 큰소리로 나를 돌아가라고 웨쳤지만 나는 들은척도 안 하였다. 불시에 아버지는 상여를 내려놓자고 호통을 쳐댔다. 상여는 열사람이 함께 메게끔 되여 있었는데, 모두들 영문 모르고 상여를 내려 놓았다. 아버지는 나한테 달려 오더니 나를 몹시 아프게 때렸다. 다시는 이런 곳으로 오지말란다. 아버지는 내가 사람주검 옆에서 서성대는것이 그렇게도 싫었으리라. 그해 시월에 나의 녀동생 善子가 태여났다. 팔가자에서 《아기 접수의식》의 세례를 겪은 어머니의 성격은 인젠 많이 침착하여 졌으며, 많이 자상하여 졌다. 아마 그 덕분이랄가? 나의 녀동생 善子는 태여나면서 부터 별탈이 없이 잘도 자랐다. 어머니는 바깥일을 별반 나가시지 않고, 집에서 아이들만 돌보았으며, 젊고 경험이 많은 아버지는 몇번 생산소대 업무 대장으로 선출되였지만 번마다 사절하였다. 얼마 안되여 전국적으로 대약진 운동이 일어나면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정치적 선전 고동의 세찬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제 겨우 잠잠해졌던 어머니의 마음은 또다시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몇번의 사원대회에 참가하여, 아기한테 젖을 먹이면서 토개때의 밑천을 꺼내여 몇번 정치발언을 한것이 공로가 되여, 어머니는 생산소대 부녀대장으로 선출되였다. 그런데 보아하니 어머니 본신도 굳이 사절하려는 뜻이 없었다. 급해난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업무대장직을 맡겠으니, 제발 집사람을 부녀대장을 시키지 말아달라고 사정하였다. 일이 이쯤되자 상급의 공작대 대장은 아버지의 사상이 너무나 보수적이라고 엄숙히 비판하면서 장편 정치연설을 하였다. 결국 아버지는 자기가 이미 대답하였으니 어쩔수 없이 업무대장직을 맡게 되였고, 어머니는 군중선출에 의하여 여전히 부녀 대장직을 맡게 되였다. 그야말로 혹떼려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붙혀 온 격이 되고 말았다.   제十회: 다시 팔가자로 이사 그럭저럭 일년을 부대끼다가 년말에 아버지께서는 룡정에 가서 사흘동안 농촌간부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런데 회의를 마치고 돌아 오니까, 집에서 맡아 기르던 생산대의 둥글소를 도적 맞혔던 것이다. 그사이 어머니께서도 어린 善子를 업고 고급사 회의에 참석하려 가고 집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유아원의 녀 선생님한테 맡겨져 그집에서 자고 있었다. 회의에서 돌아온 아버지께서는 너무 통분하여 꼭괭이로 소 외양간 나무문을 쳐부신것이 문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말았다. 후날 내가 그 나무문에 난 구멍을 보고 왜 저런가고 어머니한테 물었다. 어머니는 웃으시며, 《글쎄다. 지난밤 우리 외양간에 말승애 왔다간 모양이구나.》 하고 말씀 하시던 것이 기억난다. 그후 그 소도적은 붙잡았지만 소는 찾아오지 못하였는데, 그로하여 우리집은 생산대에 많은 돈을 물어넣게 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어린 善子가 홍역을 앓게 되였다. 그당시 아직 홍역왁찐이 보급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홍역은 사람이 죽어서도 한다는 설법이 있었다. 다행히 善子는 그번 홍역을 용하게 이겨 냈는데, 그당시 이미 제고된 의료수준과 어머니의 효과적인 간호에도 그 원인이 있었으리라. 두번 련속 크게 놀란 아버지께서는 계속 이곳에서 정치에 얽매워 부대끼기 싫어졌다. 이곳에는 자기한테 불안전 인소가 너무 많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이러다가 그 어는때에 아이들한테 또 날벼락이 떨어질가봐 두려웠다. 어떻게하면 한개 가정에 차려진 두가지 대장직무에서 해탈될수 있겠는가? 유일한 방법은 이곳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원래 살던 팔가자 중남대대에 가서 다시 돌아 올것을 신청하였다. 그 당시 농촌 어디에서나 대약진 운동을 하느라고 로동력이 아주 수요되는 때였으므로, 아버지의 신청은 쉽게 비준되였다. 아버지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마을에서는 극구 만류하였으나, 이미 갈뜻이 정해진 아버지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직채 물지 못한 소값으로 사던집을 그대로 소대에 남기고, 이불 몇채와 옷 보따리 몇개만 가지고 东盛涌을 떠나게 되였다. 그해가 1958年도였으니 내가 여섯살, 녀동생 善子는 세살밖에 되지 않았다. 이때의 우리집은 이미 네식구로 불었으니, 총체적으로는 발전한 셈이였다. 东盛涌에서 룡정 기차역전까지 10여리 잘 되였는데, 어머니는 어린 善子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커다란 보짐을 이고, 아버지는 커다란 이불짐을 등에 지고, 나의 손을 잡고서 길을 떠났다. 길에서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많은 옛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 무슨 도깨비요, 귀신이요, 하느님이요, 칠선녀요 하는 이야기들이 그렇게도 재미 있어서, 나는 10여리 길이 힘든줄을 몰랐다. 아버지는 별반 말씀이 없으셨는데, 줄곧 그 무슨 일을 묵묵히 상념하고 계시는 듯 싶었다. 룡정역전에 도착하여 나는 처음으로 기차가 정착하여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가까히 가서 그 웅장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렇게 우리가정의 东盛涌생활은 막을 내렸다. 팔가자에 도착한후, 우리집은 중남대대 제1생산소대에 편입되였다. 아버지는 아이 이름이 《누가》라고 부르는 집의 아래칸을 빌어서, 온돌을 놓고 짐을 풀었다. 그집은 그당시 그 지역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전통 조선식 가옥이였는데, 이영은 짚으로 되여 있었지만, 마루가 넓은 나무판으로 되여 있는것이 특징이였다. 저녁을 먹고 자리에 누우니 천정에 도배한 신문지에 《연변일보》라는 머리글자가 도처에 보였는데, 모두 거꾸로의 위치였다. 잠이 배인 눈으로 거꾸로 된 그 네글자들을 물끄럼히 보노라니, 마치도 먼길로 이사 떠나는 우리집 식구들 같았다. 거꾸로 된 《보》자는 마치도 보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어머니 같았고, 거꾸로 된 《일》자는 마치도 목도리 두루고 나의 동생을 업은 아짐이 같았으며, 거꾸로 된 《변》자는 등짐을 메고 있는 아저씨 같았고, 거꾸로 된 《연》자는 나를 업고 있는 아버지 같았다. 그런데 저 아저씨와 아짐이는 도대체 누구인지 알길 없다. 나는 날마다 그 글자들을 보면서 잠이 들군 하였다. 집이라고 안치해 놓은후, 아버지는 외지 민공으로 떠났다. 나는 다시 유치원에 다니게 되였고,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마을을 다니며 장난도 치고, 또 새친구들도 사귀고 하였다. 우리 아래집에 나 또래의 녀자애가 있었는데, 그집 할머니는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하셔서 나는 자주 그집으로 놀러 갔었다. 그 할머니는 언제인가 면풍(口眼歪斜)이 오셔서 면상이  좀 일그러 졌는데, 이야기를 할라치면 손시늉으로 그럴듯이 표현까지 하면서 하는데, 아이들의 넋까지 뺏어갈 지경이였다. 그 당시에 아이들에게는 별로 놀이감이 없었으니, 남자애들의 과외 유회로는 주로 닥가라, 메뚜기치기, 딱지치기, 딸로치기, 다마치기 등이 있었고, 밤에는 또 《봤다꿍》이라는 놀음이 있었다. 하여튼 하루하루가 재미있기만 하였다. 그해 7월의 어느날, 유치원에서 돌아오니 우리집에 숱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급히 어머니를 부르며 들어가 보니 어머니가 한발을 큰 옹배기에 담그고 있었는데, 옹배기에는 돼지똥물이 그득 차 있었다. 왜 이러는가고 물었더니 어머니 말씀이; 《뱀한테 물렸다. 내 새끼 못보구 넘살령 하는가 했더니, 네가 왔구나. 돼지똥물이 냄새 쿠려 그렇지, 인젠 부은것이 많이 내렸다.》 어머니는 아침에 채마밭에 갔다가 뱀한테 물렸다. 머리수건을 찢어 지혈시키고 수레에 앉아 내려 왔는데, 이미 위생소에서 처치는 끝냈지만, 다리가 올리 부어나면서 통증이 심해지는 통에, 누구인가 알려준 민간료법으로 돼지똥물에 발을 잠그고 있는 중이였다. 그날밤 어머니는 통증으로 몹시 고통스러워 하면서, 눕지도 서지도 못하고 시종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내 손과 어린 선자의 손을 꼭 잡고, 땀을 비오듯 흘렸다. 우리는 돼지똥 냄새를 맡으며, 시종 어머니옆에 기대여 있으면서, 물도 떠다 드리고, 땀도 닦아 드렸다. 밤이 깊어가자 어린 선자는 어느사이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나도 자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그 사이에 죽을가봐 겁이 났다. 이렇게 어머니는 반혼미 상태에서 여러날 고생하였는데, 나는 유치원에 가지 못하고, 어린 선자와 함께 어머니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켜드렸다. 그때는 농촌 집체식당때였는데, 우리 앞집이 바로 집체식당하는 집이였지만, 나는 내가 곁을 떠난 사이에 어머니가 죽기라도 할가봐 두려워 밥 타려 가지도 못하였다. 다행히 동네분들이 우리밥을 가져다 주었길래 우리는 굶지 않을수 있었다. 며칠후,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민공에서 돌아왔는데, 산에서 민간료법으로 약을 손수 만들어 가지고 왔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우리는 너무 기쁜김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사이 우리는 울고 싶어도 감히 울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강한 의지와 자식들의 무한한 기대, 그리고 아버지의 극진한 정성에 힘입어 어머니의 상처은 점점 호전되였다. 어머니의 상처가 좀 호전되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수레에 앉혀 가지고, 10여리밖의 이도구에 있는 의사집으로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의 그때의 상처는 한달 푼히 치료 받아서 낳아졌지만, 그 상처자욱만은 1997年 어머니가 80세 고령으로 사망하셨을 때까지도 력력히 남아있는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제十一회: 약암동 흉년세월 1960年 우리는 팔가자 중남대대 남산 너머에 있는 약암동이라는 곳에서 살게 되였다. 림시로 외딴 창고를 수리하여 문을 달고, 구들을 놓고, 살림집이노라고 만들어 놓은 십여평방되는 오두막이였다. 이해가 극심한 삼년 자연재해의 첫해이며, 전국적으로 대기황이 폭발한 첫해이다. 아버지는 우리집 식구들을 안치해 놓고는 또 민공으로 떠났다. 이해 3월에 나는 소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마을 뒤의 령을 넘어 중남소학교까지 사오리길은 되는것 같았다. 그해에는 년초부터 눈이 어찌나 자주 오는지, 그곳에서 학교 다니던 기억에는 온통 허벅다리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엎어지며, 구을며, 장난치며, 다니던 기억밖에 없다. 그때에는 키가 작았으니까 그럴수도 있었으리라. 신이라는것은 헌 헝겊으로 발을 두텁게 감고, 아버지가 신던 여름 고무신안에 그대로 넣고, 노끈으로 이리저리 동여 매였다. 그때에 새신을 신고 싶다는 것은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생각이여서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헌솜옷을 뜯어 고쳐서 나의 솜저고리를 지으셨고, 모자는 머리에 아버지의 목수건을 동이고, 아버지의 옛날의 개털모자를 그대로 눌러 썼다. 나는 그래도 아버지가 광신에서 공작할때의 공문가방이 있어서, 거기에 책을 넣고 어깨에 메고 다닐수 있었지만, 많은 아이들은 가방이 없어서 헝겊보에 책을 싸서는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그런데 이런것쯤은 큰 문제가 될것 없고 얼마든지 견뎌낼수 있었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것은 먹을것이 없는 문제였다. 괜찮은 곳에서는 하루에 한사람당 쌀을 한량씩 공급하였는데, 많은 곳에서는 그것조차 없었다. 모자라는 부분은 대리식품으로 보충하여야 하였는데, 대리식품이란 사람이 먹어서 일시 죽지만 않는다면 그 무엇이든 리용이 가능한 것이였다. 봄이 되자 산의 산나물들은 땅우에 미처 돋아나기도 전에 이미 뿌리채 몽땅 거덜이 났고, 다른 풀들도 독초가 아니면 모두 먹을수 있었다. 좀 고급적인 대리식품 재료로는 비술나무 껍질이였는데, 그것을 가공하여 만든 대리식품을 《난치떡》이라고 하였다. 그다음 좀 괜찮은 재료라고 하자면 소나무 껍질인데, 소나무 껍질을 가공하여 만든 대리식품을 《송진떡》이라고 하였다. 이런떡을 먹으면 뒤가 막히면서 변을 보기 어려웠다. 그다음 또 《전분떡》이라고 하는것이 있었는데, 콩깍대를 삶아서 가루낸후 그것을 가공하여 만든것인데, 경상적으로 먹으면 낯이 딩딩 붓긴다. 이 외에도 그 당시 발굴해낸 대리식품 품종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나는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면, 어린 선자를 데리고 앞산에 올라가서 전문 쑥풀뿌리를 캐여 먹었다. 그당시 그것이 참으로 맛있었다. 저녁녘에 어머니가 큰소리로 불러서 집으로 내려오면, 온 입안에 흙이 그득하였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생활은 쾌활하기만 하였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하면서 근심걱정을 몰랐다. 어린 선자는 일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그당시 어머니는 또 임신중이시였는데, 늘상 우리들을 보고는 《얘들아! 내 이제 저기 다리밑에 가서, 너희들의 동생을 하나 데려오겠는데, 남동생이 좋겠냐? 녀동생이 좋겠냐?》하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남동생!》하고 소리 지르고, 어린 선자도 지지않고 《녀동생!》하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는 둘이서 다툼이 시작되는데, 어머니는 언제나 나의 편을 들어주셨다. 그러면 어린 선자는 항의의 뜻으로 울음을 터뜨리군 하였다. 1961年 원단전날 저녁에 동기 목재 채벌에 갔던 아버지가 돌아 오셨다. 남의 부축을 받으며 집에 들어선 아버지께서는 《에구야! 다 왔구나!》하면서 신을 신은채 구들에 쓰러지더니 일어날 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이미 만삭이 된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신을 벗겨 드린후, 나와 어린 선자가 합심하여 《어기영차》를 부르며, 아버지를 구들우의 따뜻한 가마목 쪽으로 끌어 올렸다. 이불을 덮여 드려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 보니, 피골이 상접하고, 두 눈이 푹 꺼져 들어간것이 마치도 해골 같았다. 나는 한손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어 드렸다. 아버지는 천천히 눈을 뜨시더니 낮은 소리로 《얘! 저 가방 열어보렴!》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가방을 가져다 열어보니, 거기에는 콩알사탕 두봉지가 들어있었다. 나와 어린 선자는 너무 좋아 환성을 올렸다. 나는 사탕알을 입에 넣고 녹이느라고 여념이 없는데, 어린 선자는 퐁퐁 뛰면서 사탕알을 어머니 입에도 넣어 드리고, 아버지 입에도 넣어 드리면서 부산을 떤다. 아버지는 눈을 감은채 빙그레 웃으신다. 아버지는 분명 굶어서 지치셨다. 이튿날 어머니께서 만삭이 된 몸으로 조양천에 계시는 친정집을 찾아갔다. 그때 어머니 친정집 친척들은 모두 공인호구였기 때문에 생활형편들이 비교적 좋았다. 이튿날 어머니께서는 수수쌀 한자루를 이고 돌아 오셨다. 그리고 돈도 좀 가지고 온것 같았다. 어머니의 극진한 공양속에서 아버지는 아주 빨리 원기를 회복하셨다. 원기를 회복한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며칠동안 무언가 상론하시더니 어느날 안쪽(관내)으로 떠나갔다. 음력설을 일주일 앞두고, 어머니께서는 나의 두번째 녀동생 춘자를 낳으셨다. 어린 선자는 자기 요구대로 어머니가 녀동생을 데려왔다고 우쭐해 댄다. 그 당시 어느집에서 아이를 낳게되면 공소사로부터 규정된 수량의 사탕가루와 홍탕을 살수 있었는데, 그 구매권 발급은 촌의 부녀주임이 관할하였다. 그런데 우리집은 무엇이 잘못되였는지 그 구매권을 가질수 없었다. 이 일로하여 어머니가 그곳 부녀주임과 다투시는것을 나는 여러번 보았다. 사탕가루와 홍탕은 통제상품으로서, 구매권이 없으면 돈이 있어도 살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우유가루라는것이 없었고, 모유가 없는 아기들은 보통 사탕가루와 홍탕을 찹쌀가루, 콩가루 등에 섞어 안죽이란것을 만들여 먹였다. 그런데 우리집은 사탕가루와 홍탕이 없으니, 가련한 춘자의 어린 생명이 굶어서 요절될 위협에 처하게 되였다. 음력설이 지나 며칠후, 상상밖으로 안쪽으로 떠났던 아버지가 랑패상을 해 가지고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는 굶어 죽게된 형편에서 궁여지책으로 어머니와 상론하고, 화북성 定州에 있는 어머니의 조카녀를 찾아갔다. 그 조카녀는 어머니의 제일 큰 오라버님의 딸인데, 이름이 리순녀이고, 나한테는 외사촌 누님이 된다. 초년에 부모를 모두 잃고, 셋째삼촌과 큰 고모인 우리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어렵게 살다가, 1949年 스믈두살의 나이에 참군하였다. 조선전쟁이 터지자 지원군에 편입되여 조선에 나가서 모 부대병원에서 호사로 근무하였다. 한번은 폭탄에 중상을 입은 지원군 공군부대의 朱显换이라는 기계 기술병을 간호하게 되였는데, 그 과정에 서로 감정이 맞아 자기보다 열살 우인 그사람과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후 그가 근무하던 부대병원도 미군비행기의 폭격을 당했다. 그도 폭격에 맞아 중상을 입고, 수술을 받았는데, 왼쪽 갈비뼈를 몽땅 잃었다. 전쟁이 끝난후, 그들은 퇴대하여 정식 가정을 이루고, 남편이 화북성 定州의 한 국영 기업에서 공작하고 있었다. 남편이 국영 기업에서 공작하고, 또 두분 다 국가 일급 잔페 영예군인인지라, 국가로부터 많은 무휼금이 나오므로, 그들의 생활은 그 당시 표준에서는 상당히 우월한 형편이였다. 아버지가 어려운 길을 걸어 처 조카녀의 집에 갔을때, 그들은 자기들의 초년의 은인인 고모와 고모부의 사정을 몹시 동정하면서, 많은 옷과 식품을 큰 트렁크 두개에 챙겨 드렸으며, 돈도 적지않게 장만하여 드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북경 역전에서 한 도적패에게 당하여, 트렁크 두개를 몽땅 잃었다. 다행히 돈은 몸에 간수하였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객지 귀신이 될번하였다. 어머니는 사람이 다치지 않고 몸성히 돌아왔고,  또 돈도 얼마간 살렸으니, 그까짓 두 트렁크의 물건을 운수땜 한셈 치자고 하면서 아버지를 안위하여 드렸다. 어머니는 남의 눈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조금 있는 돈으로 웃돈을 더 주면서, 다른 아이 어머니들 한테서 사탕가루와 홍탕을 좀씩 얻을수 있었다. 그런데 그까짓 돈은 인차 바닥이 났으며, 갓난 춘자는 엄중한 영양실조에 걸려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봄이 되자 아버지는 어쩔수 없이 또 민공으로 떠났다. 떠나는날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업히운 어린 춘자의 조그마한 손을 쥐고 흔들면서 손에서 놓을념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속으로 이번에 가면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할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날씨가 더워지면서, 어린춘자는 또 여러가지 질병에 걸려 괴상하게 기침을 짗으며, 열이 자주나군 하였다. 어린 춘자의 모양은 마치도 못난 새끼고양이 같았다. 어머니도 인젠 맥을 버린듯 싶었다. 어머니가 종종 혼자말로 중얼댄다: 《네 명이 박해서 죽겠으면 좀 빨리빨리 죽어라. 이그! 이그! 네가 사람 피를 다 말리우는구나…》 그런데 천명이 아직 죽을 운이 아닌 사람은 아무리 험악한 환경에서도 죽지않는 수가 있더라! 6월의 어느날, 중남대대 위생소의 염의사께서는 자기의 부인을 우리집에 보내셨다. 소문에 또 아이를 낳았다 하는데, 좀 가서 형편을 알아보라고 하셨다. 염의사 부인께서는 약암동령을 넘어서 우리집에 올때 사탕가루와 홍탕을 조금 가지고 왔다. 위생소에 약제용으로 얼마간 준비해 두었던 것이였으리라. 염의사의 부인께서 우리집에 도착하시여, 《쇄지 있냐?》 하고 나의 애명을 부르시면서 바당문을 여시였다. 불시에 “웡-”하는 소리와 함께 컴컴한 집안 가마목에서 파리떼가 연기처럼 솟아 오른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바줄의 수건을 벗겨 파리떼를 쫓아내고 보니, 집안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가마목에 큰 광주리가 놓여있었다. 그 광주리안을 들여다 보니 조끄만 고양이같은 아이 하나를 눕혀 놓았는데, 코밑에 손을 대보니 이미 숨이 알리지 않았다. 급히 돌아 나오며 큰 소리로 나의 어머니를 불렀다: 《쇄지 에미 있소? 에그! 이년이 죽은 아이를 집에 두구 어딜 동네돌이 갔나?》 앞 개천에서 빨래하던 어머니는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염의사 부인께서는 큰 소리로 어머니를 꾸짖으셨다: 《이사람아! 정신나갔네. 죽은 아이 집에 두구 어델 갔댔나?》 어머니는 어설프게 웃으며 《어디 그리 쉽게 죽기나 함둥? 저러다가 해가 지믄 또 살아 나꾸마.》. 그말을 듣고 정신이 펄쩍 든 염의사 부인께서는 《그래? 그럼 아직 안죽었니? 빨리 아이를 포대기에 싸라! 나와 같이 우리 영감한테 가자!》… …. 그후 어린 춘자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염의사는 어린 춘자를 치료하면서, 한편으로 우리가정의 정황을 대대에 반영하였고, 대대에서는 또 우리가정의 정황을 서성향 정부(그 당시 팔가자는 서성향 정부에서 관할하였다.)에 반영하였다. 서성향 정부에서는 조사인원을 우리집에 내려 보내여 조사한후, 사탕가루와 홍탕의 구매권을 보상하여 주었으며, 그 약암동 부녀주임과 대장은 처분을 받은후 어디론가 이사가 버렸다. 모두가 염의사의 덕분이다. 염의사께서는 우리 가정에 이렇게 큰 은공을 주셨지만, 아무런 보답도 받지 않으시고 이미 저 하늘나라에 가서 계신다. 고 염의사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면서, 그의 후손들이 모두 번창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제十二회: 다시 중남1대로 삼년 대기황이 끝난후, 1963年 우리집은 다시 중남대대 제1소대에 돌아오게 되였다. 《당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하더니만 우리집은 이미 다섯 식구가 되여 돌아왔다. 그 이듬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달 두고 상론하시더니, 그들이 여직까지 소중히 보관하여 오던 결혼때의 례복들을 팔기로 최후 합의 하셨다. 어머니는 당년의 일본뉴동으로 만든 검은 치마저고리 한벌과, 아버지는 당년의 쏘련니즈로 만든 국방색 결혼례복 아래웃 한벌씩 팔기로 하였다. 그당시 이런 물건들은 아주 휘귀한 것들이여서, 혼수품을 준비하고 있는 집이라면 우선적으로 욕심을 내는 물건들이였다. 사람을 내세워 모두 500원 받고 팔았다. 이돈에서 300원 주고 낡은 초가 한채를 사고, 나머지로 가정기물들도 얼마간 갖추어 놓았다. 동성용에서 이불과 옷보따리만 달랑 가지고 팔가자에 이사온후, 6년만에 있게된 자기의 집이다. 그후부터 아버지는 일년의 대부분 시간을 민공에 가 계셨고, 어머니는 낮에는 생산소대에 나가 집체일에 참가하고, 밤이면 누가어머니와 합작하여 밤늦게까지 벼짚으로 가마니 짜기 부업을 하였다. 그당시 가마니는 주로 홍수방지에 많이 쓰이였는데, 수리건설이 락후하였기 때문에 해마다 홍수가 터지군 하였다. 그리하여 유관부문에서 해마다 많은 가마니를 수구하여 저장하게 되였는데, 그 수요량이 제한없이 많았고, 지불해 주는 값도 그리 각박하지 않았다. 그당시 집체일에 참가하면 공수기입제를 실시하였는데, 일년 년말에 가서 총결산하고 분홍을 내여주었다. 일한날에 따라 계산해 보면, 하루에 잘 벌어서 그때돈으로 1원 좌우밖에 안되였다. 민공으로 가면 공수를 좀 높으게 받을수 있었는데, 하루에 거의 2원은 벌수 있었다. 그런데 가마니 짜기를 하면 하루 저녁에 다섯장은 짤수 있었는데, 한장에 그때돈으로 40전씩 하였으니 하루저녁에 2원을 버는 셈이다. 두집에서 나누어 가져도 낮에 온 하루 집체일에 참가하여 버는 수입에 맞 먹는다. 한 열흘씩 짜면 50여장 되는데, 수레에 높이 싣고 공소사에 가서 팔면 직접 현금으로 지불하여 주었으므로, 진짜 크게 횡재한 우쭐한 기분이였다. 그러나 농망기에 집체일에 참가하지 않고 낮에도 집에서 가마니만 짠다면 사원대회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 누구네나 모두 이렇게 한다면 집체는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농촌 집체경제 시기에 가마니 짜기 부업은 가정 경제수입의 가장 중요한 래원의 하나였으므로, 집집마다 거의 짜지않는 집이라곤 없었다. 우리지역에서 가마니 짜기 부업은 집체 농민들의 개인 민생문제를 보조적으로 해결하여 줌으로써, 집체틀에 얽매인 농민들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데 있어서 참으로 마멸할수 없는 력사적 공헌을 하였다. 우리집에서 선자는 열살부터 가마니 짜기에 나섰다. 그가 직접 가마나 짜기에 나서게 되니, 초기에는 좀 서툴었지만 남과 합작하기보다는 수입정황이 많이 좋아졌다. 후기에 와서 그의 가마니 짜기 솜씨는 온 동네에서도 첫손꼽힐 정도로 날쌔였는데, 우리집은 전 대대적으로도 소문이 있는 가마니짜기 대호로 되였다. 후기에는 무시로(황연 포장용) 짜기가 보급되였는데, 많은 겹손이 필요하였다. 무시로를 다 짜서 틀에서 뚜루룩 하고 끊어내면, 옆이 헤쳐지지 않게 녀인 머리태 따듯 곱게 틀어놓아야 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좁은 쪼각으로 량옆에 날개처럼 달아 놓고, 한짝을 맞추어 포개놓아야 하였다. 무시로 옆을 틀고, 꿰매고, 포개고 하는일은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였으나, 나는 어머니의 《아들우대 정책》을 리용하여 항상 뺑소니 치기가 일수였다. 그때문에 여러번 아버지한테 야단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어머니는 항상 나의 역성을  들어 주었다. 참으로 동경스러운 어린시절의 화폭이다. 1966年 문화 혁명이 폭발하면서, 응당 소하교를 필업해야할 우리들은 필업하지 못하고, 계속 소학교에 남아서 7학년이라는 특수한 학급으로 문화 혁명을 해야 하였다. 그 이듬해 드디여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게되였는데, 나는 학습성적이 워낙 좋지 못하여 그만 락방되고 말았다. 나는 정서가 퍽 가라앉아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시물시물 웃으시며, 《옛말에 빌어 먹으면서 아들 공부 시켰더니, 동지섣달에 아들한테 쫓겨났다 하더라. 중학교 떨어져 차라리 잘 됐다. 나하구 매일 소궁디나 두드리자. 농사일이 제일 좋다. 이 애비는 그 잘난 공인질은 돈을 석섬씩 준대두 싫다.》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눈을 흘기며, 《저 영감 정신 쑥 나갔어! 농중에라두 보내야 하지, 저리 어린거 어떻게 벌써 일을 시키오? 소궁디를 두드려두 알구 두드려야지. 항상 남한테 당하기만 하구두 분하지두 않은가 보지?》 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현실을 정시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당시 농중이란것이 새로 나왔는데, 교육개혁의 한개 내용으로 공반중학교에 붙지못한 아이들을 그대로 농촌에 보내자고 하니 아직 이르고, 또 그 수량이 아주 많은 정황에서 《신형의 농민을 배양한다》는 종지로 세워진 민영성질의 학교였다. 나는 어머니의 견결한 요구를 못이겨 농중 등기처에 가서 이름을 등기하였다. 정작 가보니 공반에 붙지못한 아이들이 기본상 모두 와 있었다. 같은 처지에서 의가 통한다고 우리는 기 죽지 말자고 서로 고무해 주면서, 마치도 위대한 력사적 사명이나 맡는듯한 기분이였다. 그러면서도 때아닌 이른가을 서리처럼 엄습해 오는 렬등감은 물리칠 방법이 없었다. 농중은 아직 자기의 교사도 없었기 때문에 교사를 짛는 일이 급선무였다. 학생들은 두패로 나뉘여, 한패는 지방에 남아 교사를 짛을 토벽돌을 만들고, 다른 한패는 화룡립업국 장흥림장에 가서 산장청리 부업을 하여 자금을 마련하게 되였다. 나는 산에 가는 패에 들었는데, 청춘시기에 진입하여 첫 수업으로 산에가서 두달푼히 일하였다. 일을 끝내고 지방에 돌아와 보니, 두달사이에 세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거리에 큼직큼직한 정치적 선동 구호들이 도처에 나붙어 있고, 여기저기에 대자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길옆집 벽에 붙여 놓은 한 대자보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것을 보고 나도 호기심에 가서 보았다. 대자보의 제목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유주임이 백골정과 씹을 했다.》 대충 읽어보니 대체로 자기들 령도의 부당한 작풍문제를 적발하는 내용이였다. 씹이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우리말 은어로서 성관계를 뜻하는데, 이말이 이렇게 버젓이 문자로 씌여진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나는 속으로 문화혁명 한다하더니,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소학교 마당에서 낡은것을 타파하는 대회를 연다 하기에 달려가 보았다. 마당 한 복판에서 사람이 죽으면 들어 내가는 조선족 상여가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외지에서 온 반란파들이 마차우에서 마작이요, 골패요, 년화그림 같은것들을 쉴새 없이 불속에 던져 넣는다. 심지어 양걸대의 기괴한 복장과 공구들도 불의 세례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개팔이라고 하는 한 얼꾼이 불속에서 타는 마작이 아까워 얼른 견져 내려 하다가 외지 반란파들한테 덜미를 잡혔다. 그는 운동장 교단에 끌려 올라가 머리가 땅에 닿을 지경으로 허리 굽히고 벌을 받다가, 자기로 《개팔이를 타도하자!》하고 목이 터지게 여러번 웨쳐서야 겨우 풀려 내려갔다. 전국적으로 이미 대련계가 시작되여, 학생들은 면비로 기차타고 북경에 가서 모주석을 만나뵐수 있단다. 그런데 알아보니 우리는 산에 가서 일하는 사이에 기회를 이미 놓혀 버렸던 것이다. 그후 사처에서 반란대요, 전투대요, 결사대요 하는 군중조직들이 파리떼처럼 일어나면서, 주요한 공격 목표가 각 단위, 학교, 가두, 농촌의 제1책임자였다. 팔가자진에서 진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서기, 소장, 주임, 교장, 심지어 생산소대의 대장까지, 여하튼 직무에 《장》자가 붙은 사람들과 서기, 주임들은 일률로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의 모자를 쓰고, 투쟁, 비판의 세례를 받아야 하였다. 이렇게 어지러운 정치 환경에서도 농중의 교사는 두번의 재건을 거쳐 끝내 일어섰다. 그후 《농중》을 《진중》으로 이름을 고치고, 공반과 민반의 구별을 취소하게 되면서, 공반중학에 입학하였던 팔가자진내의 학생들은 모두 진중에 와서 공부하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공반에 붙지 못하여 렬등감에 모대기던 우리들의 체면이 좀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전국의 학교계통의 형세는 점점 혼란해 지면서, 학교에서는 정상적인 교수를 진행할 방법이 없었다. 한번은 썩 늦어서 학교에 가보니, 텅빈 교실에 해방군 공작대의 한 사람이 혼자 앉아 있다. 나를 보자 그는 아주 기뻐하면서 당면 형세에 대하여 잡담을 나누었다. 갑자기 학교 웃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우리는 급히 달려나가 보았다. 한 로인이 높다란 고깔모자를 쓰고, 목에는 커다란 괘패를 걸고, 텀벙텀벙 걸어 오는데, 바지 가랭이는 흙탕물이 튕기여 지저분 하다. 저쪽 뒤에서 두 청년이 총을 메고 따라 오는데, 팔에는 서성중학교의 어느 반란파 조직의 붉은 완장을 둘렀다. 아마 십리밖의 서성으로부터 줄곧 이렇게 걸어서 기차역전으로 가는 모양이다. 높다란 고깔모자에는 검은 글씨로 《打倒金明!》이라고 씌여 있고, 목에 건 커다란 괘패에는 《和龙县头号走资本主义道路当权派-金明》이라고 씌여 있었으며, 고깔모자나 괘패의 《金明》이라는 두 글자에는 모두 붉은색으로 승표를 쳐 놓았다. 그는 대여섯 발짝씩 걷고는, 오른손을 힘없이 들었다 놓으면서 자기로 《打倒金明!》하고 웨치는데, 목소리는 신음소리처럼 너무나 애처로왔다. 그가 바로 원 중공 화룡현위 제1서기 김명이였는데, 응당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할분이 우매한 학생들의 《혁명적 행동》에 의하여 이런 무서운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나의 심령은 몹시 강렬한 진동을 받았다. 그후 그 광경이 때없이 나의 머리에 자두 떠오르면서, 그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리하여 나는 난생 처음으로 시 한수를 썼다; 초려에 높이누워 잠이 오질 않는데, 대붕의 혜안빌어 온 누리가 환하구다. 현덕은 좀스럽고 맹덕은 간사한데, 어지러운 거북등엔 기발만이 촘촘하다. 만세소리 가운데 신음소리 애처로와, 강호를 두루봐도 와룡이 제일이야.   제十三회: 귀순분자로 몰리다.  3년동안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들을 투쟁, 비판하고는 《관》을 넘은 사람은 《해방》하고, 갈아버릴 사람은 갈아버리고 하면서, 인젠 아마 한단락 마친 모양이였다. 다음 계단의 계속혁명 목표는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계급이색분자》 등 소위의 5류분자라고 한다. 우에서는 공작대를 파견해 내려왔다. 1969年3月5日, 이날은 정월 대보름날이다. 생산대에서는 저녁에 《계급투쟁 뚜껑 여는》 사원대회를 연다고 집집마다에 통지했다. 사원대회 장소는 김해룡 동학의 집이였다. 저녁을 먹고 구경삼아 사원대회 장소의 문앞에 도착하니, 집안에서 구슬픈 합창소리가 들려 나온다. 《뭇별은 졸고 별빛만 반짝이는데 생산대의 소고대회는 원한에 넘치네… …》 집안에 들어가 보니 웃방에는 남자사원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는데, 나의 아버지도 거기 계셨다. 아래정지에는 부녀 사원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는데, 나의 어머니도 거기 앉아 계셨다. 회의가 시작되자, 이미 해방받은 로 대장이 한 낯모를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우리 학생들은 바당에 서서 구경하고 있는데, 그 낯모를 사람이 우리옆을 지나갈때 술냄새가 코를 찌른다. 로 대장은 회의를 정식 선포한후, 함께 온 분은 이번에 우에서 내려온 공작대라고 소개한다. 공작대 사람이 일어나 정치 동원 발언을 한바탕 하였다. 정치 동원 발언이 끝난후, 두 부녀가 큼직한 음식 다라를 하나씩 이고 들어온다. 하나는 푸른다라, 다른 하나는 붉은 다라이다. 음식 다라를 내려놓고 그중의 푸른 다라에 덮은 흰보를 헤치니, 그 안에는 검은떡으로 그득찼다. 겨자를 섞어서 일부러 먹기 어렵게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하나의 붉은 다라를 헤치니, 그안에는 흰떡으로 그득찼다. 기름을 발라가며 먹음직스럽게 입쌀가루로 만들어 졌다. 매사람마다 검은떡 하나와 흰떡 하나씩 차려졌다. 먼저 검은떡을 먹으면서 구사회의 쓰라림을 생각하고, 그다음 횐떡을 먹으면서 오늘의 행복한 생활을 생각하란다. 어떤아이들은 검은 떡을 슬그머니 부엌 장판밑에 던져 버렸다. 나도 한입 조금 뜯어 먹어보고는 슬그머니 호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여기저기서 흐느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불시에 구호소리가 터져 나온다 《계급투쟁을 잊지말자!》, 《피눈물 원한을 잊지말자!》, 《류소기를 타도하자!》 드디여 한 부녀가 일어서서 울먹거리며, 자기의 과거사를 회억하면서 공산당과 모주석을 극구 치하하였다. 그 뒤를 이어 선후하여 대여섯 사람들이 일어나 발언하였는데, 대체적으로 구사회를 잊지말고 공산당과 모주석의 은덕을 잊지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였다. 갑자기 공작대 사람이 종이장을 들고 살기 등등하여 일어났다. 《여러분! 조용합시다. 지금부터 중남1대 계급투쟁 뚜껑을 열겠습니다.》 그리고는 살기찬 눈으로 좌우를 한번 휙- 둘러보고는 불시에 주먹을 휘두르며 벼락치듯 련속 소리를 내 지른다: 《귀순분자 현구를 잡아내라!》, 《위만툰장X X X을 잡아내라!》, 《부농분자X X X을 잡아내라!》, 《포로병X X X을 잡아내라!》… …. 두 젊은이가 벌떡벌떡 일어나더니, 그 공작대 사람이 소리치며 부르는 이름에 따라 한사람, 한사람 덜미를 잡아가지고 끌어 내온다. 모두 네사람이 잡혀 나왔다. 공작대 사람은 잡혀나온 네사람을 정지칸 남쪽벽에 기대여 세워놓고는, 머리를 눌러 90도로 사원들을 향해 허리 굽히게 하였다. 회의장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나는 아직 미처 반응을 못하는데, 어머니가 일어나시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짓이요? 없다구 사람 너무 업신보는거 아니우? 우리와는 한마디 말도 없다가 도데체 이게 누구의 수작이요?》 어머니는 손을 내 저으시며 높은소리로 항의하신다. 공작대 사람은 손사래를 치면서 《가속은 앉으라! 가속은 앉으라! 가속에서 이렇게 나오면, 혁명군중들의 혁명열정을 탄압하는 것으로 된다. 진상은 혁명적 군중들에 의하여 곧 밝혀질 것이다. 당의 정책은 언제나 탄백하면 관대하고, 항거하면 엄벌하고, … ….》 불시에 또 구호소리가 터져나온다; 《온잦 잡귀신을 쓸어내자!》, 《계급투쟁을 절때 잊지말자!》, 《모주석 혁명로선 승리 만세!》… … 나는 그 자리에 더는 앉아 있을수가 없어서, 문을 차고 도망치듯 빠져 나았다. 뒤에서는 여전히 귀신이 울부짖는듯한 구호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집에 돌아온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나는 자고있는 어린 두 녀동생을 내려다 보면서 착찹한 생각에 잠겼다. 여직까지 나는 우리도 혁명 대오내의 일원으로 여겼었는데, 오늘 알고보니 그런것이 아니질 않는가? 높은 고깔모자를 쓴 김명서기의 처참하던 모습이 또 떠오른다. 온몸에 소름이 오싹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비된 머리에는 아무런 궁리도 떠오르질 않는다. 이슥하여 어머니가 돌아 오셨다. 어머니는 아직 자지않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신다. 《별일 없을거다. 너희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너무 근심 말어라. 무슨일이 생기면 동생들을 잘 돌보아야 한다.》 새날을 잡아서, 닭이 두홰를 쳐서야 아버지가 돌아 오셨다. 아버지는 몹시 랑패상이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말도 없으시다. 어머니가 조용히 한마디 하신다. 《무슨 문제 있었으믄 제대루 말해야 할거유. 이전에 농회에서 공작할때 보지 못했소? 공산당 눈은 속이지 못하우.》 아버지는 앉아서 담배삼지를 꺼내 담배를 말면서 깊이 상념하시고 계셨다. 그러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때 열둘이 지장 찍구 나올때, 누구두 거기에 무스거 썻는지 못 봤지, 볼 경향두 없었구. 일본 경찰서에서는 〈출문 기록부〉라구 했으니깐. 그저 그러려니 했지. 거기에 공산당 하지말란 내용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야단인데.》 내가 얼른 한마디 참견하였다. 《지금은 그 지장 찍었다는 한가지 리유만으로두 반역자로 몰릴수 있으꾸마. 어디가서 ‘이사람이 일본 경찰서에 잡혀 갔다가 지장 찍고 나왔다’ 이렇게 말해봅소. 백에 백사람이 모두 ‘그사람 반역자구나’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아버지는 아무말도 없이 애꿎은 담배만 피우신다. 어머니도 더는 말씀이 없으시다. 우리는 끝없는 근심속에서 묵묵히 새날을 밝혔다.      제十四회: 조리돌림을 당하다 1969년6월, 해마다 오는 벼모내기 농망기철이다. 벼농사가 주체인 우리 고장에서는 모내기는 농사일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 환절이다. 모내기는 그당시 가장 늦어서 6월20일좌우의 《하지》전에 반드시 전면 완성하여야 하였다. 이것은 진짜 엄숙한 정치임무였다. 이때가 되면 공사의 혁명위원회(각급 정부는 이미 모두 혁명 위원회로 교체되였다)에서는 각 기관, 학교, 단위, 가두를 모두 동원하여, 성세호대한 모내기 방조대군을 조직한다. 모내기철이 되면 온 들판에 붉은기가 나붓기고, 고음 확성기에서는 미친듯한 혁명가요를 그칠새없이 방송하며, 모내기 대군은 온 들판에 새까맣게 덮여있다. 그리하여 농촌 모내기는 《모내기 대회전》이라고 시대적 이름이 붙게 되였다. 학교에서는 이때가 되면 모내기 방학을 하였는데, 농속 학생들은 직접 자기집이 소속된 소대에 내려가 사원들과 함께 모내기에 참가하게 하였다. 모내기가 시작되여 이미 며칠이 잘되는 어느날, 나는 그날도 여느때처럼 모내기 대오속에서 모를 꼽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이 있는 부녀들과 함께 저 도랑건너의 모상판에서 벼모를 뜨고 계셨고, 아버지는 써레질 소조에서 이랴! 이랴! 소를 쫓으며 써레를 놓고 계셨다. 갑자기 4소대의 《강철 반란단》의 한사람이 로대장을 찾아 무엇을 교대한다. 로대장은 인차 나의 아버지를 부른다, 《저기 현동무! 지금 소를 세우구, 이 사람 따라서 저 6대 마을 길목 거기를 가라이.》 아버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대장의 안배인지라 소를 멈추고, 두렁에 올라 신을 찾아 쥐고, 바지 가랭이를 걷은채, 그 사람을 따라 갔다. 나는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속이 자꾸 떨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리하여 저도 모르게 자주 머리를 들고 아버지가 가신쪽을 살펴 보았다. 그쪽에는 무슨 사람들인지 많이 모여 있었다. 이윽고 특수한 대오가 나타났다. 일곱사람으로 이루어진 이 《특수대오》는 중남 대대의 잡귀신들의 대표 인물들로서, 한소대에서 한사람씩 불리워 갔던 것이다. 모두들 머리에 높다란 고깔모자를 쓰고, 목에는 커다란 괘패를 걸고, 일하던 맵시 그대로 줄을 서서, 각소대의 모내기 현장을 돌면서 조리 돌림을 당하는 판이였다. 제일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은 몇해전에 중남위생소로 새로 온 조의사의 부친으로서, 부농분자라는 괘패를 걸고 있는데, 구멍이 뻥 뚫린 헌소래를 손에 들고서, 나무꼬챙이로 절주있게 두드리며 사구려를 부르듯이, 《牛鬼蛇神跑不了!牛鬼蛇神跑不了!》 이렇게 끊임없이 웨친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뒤의 사람들은 그것을 한구절씩 한구절씩 따라 웨치면서, 텀벙텀벙 따라가고 있다. 아버지의 고깔모자에는 검은 글로 《현구를 타도하자!》 이렇게 씌여 있고, 괘패에는 검은 글로 《귀순분자 현구》 이렇게 씌여 있는데, 이름자에는 모두 검은 승표를 쳐 놓았다. 그 《특수대오》가 우리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히 올수록 나는 가슴이 점점 옥죄여 들면서 숨쉬기가 가빠진다. 그들이 우리가 일하는 곳까지 다 와서 한줄로 가로 서서는 우리를 향하여 깊이 머리숙이고 죄를 청할때, 나는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그만 논밭에 그대로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시며 분명 한발 움쭐 내 디디신다. 선배 누나가 나를 얼른 부축하면서, 《얘! 너 몹시 아프구나. 빨리 집에 올라가라. 여긴 지금 그렇구나.》 나는 계속 거기에 있을 용기가 없었다. 나는 감히 아버지를 쳐다보지 못하고, 저쪽켠으로 두렁에 올라 마을로 향하였다. 논밭을 거의 벗어날 무렵, 부련듯 어머니가 근심되였다. 그리하여 방향을 돌려 어머니가 일하시는 모상판으로 달려갔다. 모상판에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두통이 나서 이제 금방 집으로 올라갔다고 한 아줌마가 알려주었다. 분명 아버지의 사연 때문에 몹시 놀라신 모양이다. 다시 큰 길에 올라 마을로 향해 올라가는데, 길에서 소학생 조무래기들이 이제 금방 그 《특수대오》의 흉내를 내면서, 재미있다고 웃고 지껄여 댄다. 나는 너무나 서글펐다. 나의 마음은 그 일로하여 이렇듯 혹심하게 아픈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그 일이 그렇게도 즐거우냐? 인정세태가 너무나 삭막함을 느꼈다. 어머니는 몸져 누우셨다. 며칠 죽 한그릇 드시지 않고, 말 한마디 하시지 않는다. 다행히 선자가 이미 부엌일을 할수 있었고, 춘자가 자기 언니 말을 곰상곰상 잘 들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진지는 제때에 갖춰 드리수 있었다. 나는 조의사를 청하여 우리집에 모셔왔다. 그도 지금 나와 같은 처지다. 그러나 그는 아주 소탈하시다. 그는 어머니를 진맥하시며 말씀하신다, 《너무 걱정 맙소! 이제 봅소, 이래다 맙꾸마. 갸네 몇이 자꾸 떠들어 그렇습꾸마. 우리라구 살지 말란법이 어디 있습둥?》 동네 아줌마들이 저녁이면 우리집에 잠깐 들려 나한테 이것저것 물으며 우리일을 걱정하여 주신다. 양어머니께서도 오셨다. 그는 달걀이랑 넣어가지고 영양죽을 쑤어왔다. 그는 누워있는 어머니 입에 죽을 한술한술 떠 넣어 들이며 어머니를 나무란다. 《빨리 이걸먹구 힘을 내오. 새끼들을 봐야지. 에미 이러구 있으니 애들두 나가 기를 못펴오.》 갑자기 어머니는 몸을 움직이며 일어나시려 한다. 나는 얼른 어머니를 부축하여 일어나 앉게 하였다. 자기 때문에 아이들도 기를 못 편다는 말씀에 정신이 드신 모양이다. 그는 양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참 드려다 보시다가 끝내 입을 여신다. 《얘들 새끼 아니믄사, 내 벌써 열번두 죽어 버렸지. 이게 글쎄 무슨 꼴이요? 어쩌믄 내연에 이런일두 다 있소?》… 그후 어머니는 아주 빨리 원기를 회복하셨다. 이 기간 아버지께서는 식구들 앞에 아주 적게 나타나시였다. 진지 드실때와 저녁에 주무실때 외에는 거의 아버지를 볼수가 없었다. 집안이 이렇게 불편하게 된것이 모두 자기의 탓이라고 여기시고, 집식구들을 보기조차 미안하였으리라. 그 사이 아버지께서는 바깥에서 또 어떤 험악한 일들을 당하셨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아무리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나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한집식구라는 생각만은 여전하였다.   제十五회: 투쟁대회에서 구타를 당하다 모내기가 끝나고, 첫벌기음도 끝나면서, 농촌은 농한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사원들은 한가할 사이가 없다. 왜냐하면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혁명을 해야 하니깐. 그당시, 농촌의 시대적 특징의 하나가 《사원대회》이다. 일년 365일중에 사원대회를 열지 않는 날이 거의없다. 사원대회에서는 생산토론도 종종 하지만, 대부분의 사원대회에서는 주요하게 계급투쟁을 진행한다. 계급투쟁을 모든 사업의 기본고리로 하였으니, 매 소대마다에는 반드시 자기소대의 계급의 적이 있어야 한다. 계급의 적이 없이 어떻게 계급투쟁을 한단 말인가? 아직 계급의 적을 확정하지 못한 소대는 계급투쟁을 억세게 틀어쥐지 않는 소대로 되기 때문에 락후한 소대로 인정받는다. 그리하여 만약 아직 마땅한 투쟁 대상이 없으면, 방법을 대여 인위적으로 한사람, 혹은 몇사람을 계급의 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는 전체 사원들을 동원하여 그 계급의 적을 투쟁, 비판하는 수단으로 전체 사원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전체 사원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전체 사원들의 생산로동을 통제한다. 이것을 가리켜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한다.》고 한다. 1969년 농한기에 들어서면서, 농촌 《계급대오 청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아버지는 낮에는 생산대에 나가 일하시고, 저녁이 되면 사원대회에 나가셔서 비판을 받아야만 하였다. 소대에서는 아버지의 옷 가슴에 손바닥만한 흰 헝겊으로 명패를 만들어 달게 하고는, 거기에 푸른 잉크로 비뚤비뚤 《귀순분자 -현구》라고 써 놓았다. 마치도 늙은 소학생이 커다란 명패를 단것 같았다. 평소에 일을 할때나, 어디를 갈때나, 반드시 그 명패가 달린 옷을 입고 다녀야 하였으며, 만약 다른옷을 입게되면 그 명패도 옮겨 달아야 하였다. 그래도 커다란 괘패를 걸고 다니기만은 많이 관대하여진 셈이다. 학교에서는 여름 방학을 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죄가 조금이라도 경감될가 하여, 생산대장을 찾아가서 방학기간에 일을 시켜달라고 청구하였다. 생산대장은 나더러 두렁서리(논두렁 풀베기)를 하라고 비준하였다. 그리하여 낮에는 사원들과 함께 논에가서 풀을 베노라면 잠시라도 아버지의 생각을 잊을수가 있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아버지가 명패 달린 옷을 입고는 비판을 받으려 사원대회에 나가시는것을 볼때마다 무엇이라고 형용할수 없이 마음이 복잡해진다. 한번은 회의 장소가 우리 앞집의 바로 옆집 마당이였는데, 내가 아래칸에 매놓은 간이침대에 누워서 불을 죽이고 상념에 잠겨 있노라니, 회의장소에서의 모든 소리들이 지척인듯 똑똑히 들려온다. 《빙빙 에돌지 말구 찍어 말하라! 당신이 변절자가 옳은가? 아닌가?》, 《당신이 공산당을 몇이나 물었는가? 로실하게 교대하라!》, 《일본 경찰서에서 당신한테 무슨 임무를 주었는가? 제대로 말하라!》 … … 그러다가도 느닷없이 구호소리가 터져나오다; 《반역자 현구를 타도하자!》, 《무산계급 독재 만세!》 정지칸을 건네다 보니 가마니 짜기를 끝내고, 녀동생들은 이미 자고있고, 어머니는 앉아서 바느질을 하시는데, 표정이 너무나 평온하시다. 나는 불을 켜고, 솜으로 귀를 틀어막은 다음, 《삼국연의》를 꺼내 펼치고, 거기에 정신을 집중한다. 옛날의 제갈량 한테서 어떤 해결책이나 찾으려는 듯이. 그러던 어느하루, 그날도 아버지는 저녁을 자시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명패달린 옷을 입고, 비판을 받으려 사원대회에 나가셨다. 나도 인젠 좀 습관이 되여서 처음처럼 그렇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날의 비판대회 장소는 탈곡장이라고 한다. 탈곡장은 우리집과 좀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높은 구호소리외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시계가 금방 아홉시를 쳤는데, 불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사람이 아버지를 업고, 두사람이 옆에서 겯들면서, 집안에 급히 들어선다. 우리는 너무 놀라 한참 멍하니 서 있는데, 그 아버지를 업고 있던 사람이 다른 두사람과 함께 아버지를 천천히 구들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여 있다. 피를 보는 순간, 나는 흥분되여 한사람의 멱살을 틀어 쥐면서 소리쳤다, 《누가 때렸소? 어느새끼 때렸는가 말이요?》 어머니는 앉아서 아버지의 옷 단추를 벗기며, 슬피슬피 낙루하신다, 《이런일이 어디있소? 사람으 어쩌믄 이렇게 치오? 모주석두 사람은 치지말라구 했다는데. … …》 나의 가슴은 금시 떵 얼어 붙는것 같다. 함께 들어 온 그 사람은 도리여 피투성이 되여,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아버지를 나무란다. 《교대할때 어째 자꾸 말을 빙빙 돌굼두? 그러니 그 외지청년들이 격분하지 않을수 있슴두?》 그러니까 아버지가 외지 청년들한테 맞았다는 말이 된다. 그들은 아무런 해석도 없이, 한마디의 안위의 말도 없이, 그대로 가버렸다. 두 녀동생은 놀라서 울음을 터뜨리는것을 나는 큰 소리로 제지시키고, 물을 떠다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얼굴과 몸의 피를 닦아 드리고, 피 묻은 옷을 벗기고, 웃방의 자리에 눕혔다. 아버지는 눈을 꼭 감고, 아무말도 없으시다. 아버지는 허리를 몹시 다친것 같았다. 내가 위생소에 가서 약을 가지고 돌아오니, 어머니는 앉아서《모택동 선집》을 펼쳐 드시고 물끄럼히 들여다 보고 계신다. 내가 아버지한테 약을 대접시키고 돌아서니,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누가 우리 적인가? 누가 우리 벗인가? 이 문제는 혁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어머니가 정신이 잘못 되신것 같았다. 나는 울면서 어머니를 잡아 흔들었다. 《엄마! 어째서 이러오? 그게 뭐라구 들구 있소?》 어머니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완곡히 말씀하신다; 《아니다. 이전에 동시영에 있을때 황순옥이 나보구 하는 말이 모를 일이 있으믄 모주석의 저작을 보라더라.》 그러면서 또 중얼거린다, 《누가 우리 적인가? 누가 우리 벗인가? … …》 어머니께서는 너무 심한 정신타격에 분명 일시 실성하셨다. 나는 급히 달려나가, 이미 주무시고 계시는 양어머니를 급히 불러 깨워서 모시고 왔다. 양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여전히 《모택동 선집》을 들고 중얼거린다. 《누가 우리 적인가? 누가 우리 벗인가?… …》 양어머니는 옷 섶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엄마가 저러다가 한잠 자구 깨난 다음 다시보자.》 하고 말씀하신다. 어머니는 새벽 세시후에 끝내 쓰러져 잠이 드셨다. 그 사이 어머니께서는 《누가 우리 적인가? 누가 우리 벗인가?… …》를 몇백번 외웠는지 나도 모른다. 이튿날 어머니는 정심때가 되여서야 깨여났다. 어머니는 깨여나서 습관적으로 정통편 두알을 입에 던져 넣고는, 물 한바가지 떠서 벌컥벌컥 마이신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가서 증세를 물으시고는, 가마니틀에 새끼를 메우면서 선자를 부르신다, 《거기 바당에 짚으 추린거 한단 가지구 오나!》 그리고는 선자와 함께 본격적으로 가마니짜기를 시작한다. 저녁녘에 가서, 다시 어머니를 관찰하여 보니, 어머니 정신은 이미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셨다. 참으로 하늘이 도우신 일이다. (그후, 나는 어머니가 또 실성하시는 일이 있을가봐 몹시 근심하였었는데, 1997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하실때까지 다시는 그런일이 없었다.) 맞아서 상한 아버지는 꼼짝 못하고 자리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20여일 누워 계셨다. 어머니는 사처에 수소문 하여, 비싼 능담을 사서 아버지한테 대접하였다. 한달후, 상처가 아물자 아버지는 다시 생산대의 일에 나가야만 하였고, 또 시시로 불리워 나가 비판을 받거나 심사를 받아야만 하였다.   제十六회: 잘못된 력사 증명 어느날 정심때 내는 학교에서 돌아 오다가 탈곡장에서 광신에 계시는 이모부를 만났다. 나는 반갑게 인사 올리고 집으로 끌었다. 그런데 그는 처음에는 좀 당황해 하더니, 머뭇거리며 《정심에 볼일이 있으니, 일이 끝나는 대로 시간을 봐서 … …》하며 얼버무린다. 집에 들어와 나는 어머니한테 이모부가 왔더라고 하였더니, 어머니는 몹시 반가와 하는 기색으로 손님의 정심을 갖추신다. 그러나 이모부는 정심에 우리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도 정심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심상은 갖춰놓은 대로 한쪽켠에 밀어놓고, 어머니는 선자의 정심시간을 리용하여 가마니를 조금이라도 짜느라고 여념이 없다. 저녁에 아버지가 돌아 오셨는데 또 랑패상이다. 《그 사람은 어디루 갔소?》 어머니가 물었더니, 아버지는 우는상을 해가지고 대답한다. 《내가 옛날에 (옛날 아버지의 광신 양부모의 집을 이르는 광신촌 사람들의 말)에서 양자로 있은게, 지금 정책에는 고농으로 된다우. 그 사람이 투도 혁명위원회 문건을 가지구 와서, 내가 증실인이라면서 도장 맞아갔소.》 그말을 듣고 어머니는 펄쩍 뛰신다, 《에구 이 귀신양반! 이즈는 제동생까지 다 잡아먹네. 그거 도장 찍었으믄 어찌오?》 어머니는 즉시 차비를 하시더니, 그길로 광신으로 떠나신다. 우리 고장에서 광신까지는 40여리 잘 되는데, 그 당시에는 교통이 몹시 불편하여 항상 이렇게 걸어다녔다. 세시간 남짓이 밤길을 걸어, 모두들 자려고 등잔불(당시 그곳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가지 못하였다)끄기전에 광신에 도착한 어머니께서는 곧추 당년의 토지개혁때에 함께 농회에서 공작했던 최서기란 분의 집을 찾아가서 밤문을 두드렸다. 그분도 그당시 한창 조사대상이였다. 그집에서 어머니께서는 모주석의 최근의 지시들을 알아 보았으며, 당년의 토지개혁때의 문건들을 찾아 대조하면서, 우리의 그 이모부의 처사가 완전히 틀렸다는 충분한 증거를 장악하였다. 그날밤은 최서기네 집에서 묵고, 이튿날 아침 《새집》에 들어가 보니, 마치 초상난 집처럼 스산하다. 그집 두 아저씨는 우리 어머니를 보고도 본체만체 하면서 인사도 없다. 어머니는 두 아저씨한테 자기가 오늘 오게된 사연을 설명 하시고, 어제밤 최서기네 집에서 장악한 증거를 알려주면서, 이제 오늘저녁에 있게 될 사원대회에서 여사여사히 하자고 약속하였다. 그제야 큰 아저씨는 아이들처럼 엉-엉- 소리내여 울면서 말한다, 《우리 형수 참으로 사리 밝은 분이시요. 어제밤 우리 두형제는 온밤 자지 못하고 도끼를 갈았소. 내 오늘 팔가자에 올라가 형님을 찍어 죽이구, 얘가 여기서 그 두상(나의 이모부)을 찍어 죽이구, 우리 다 같이 죽자 했소. 우리가 지주되는 날에 살아서 뭘 하겠소? 형수 정말로 고맙소!》 천만 다행으로, 어머니가 지체없이 광신으로 내려 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한차례의 무서운 참사가 빚어질번 하였다. 그날저녁 예상했던대로 광신에서는 사원대회가 열렸다. 나의 그 이모부는 두툼한 문건을 들고 일어나서, 높은 소리로 선독한다, 《투도 혁명위원회의 문건정신에 좇아, 당년의 당사자의 증실재료를 해온데 의하면, 해방전 위만시기에 본촌의 김계현의 집에서는 확실히 고농을 한명 고용하고 있었다. 해방후 토지개혁 당시, 농촌성분 획분표준에 의하면 응당 지주나 부농으로 회분되여야 했으나, 중농으로 잘못 획분되여 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모주석의 혁명로선의 정확한 지도아래, 잘못된 력사에 대하여 반드시 견결히 시정하여야 한다. … …》 《내 한마디 발언하겠소!》 광신에서는 듣지않던 목소리가 과단히 그 문건선독을 중단시킨다. 어머니가 일어섰던것이다. 모두들 뜻밖이였으나, 광신의 로농들은 모두 당년 토개때의 부련회 부주임인 어머니를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으기 반기는 모습이다. 《내 에 시집와서 들은데 의하믄, 이 동네의 김해김씨와 직산김씨는 모두 우리 아바이 덕분에 여기와서 발을 붙였다 합데. 아니라는 사람이 있으믄 어디 좀 일어서 보오!》 회장은 쥐죽은듯 조용하였다. 《그리구 우리 아바이가 밭을 많이 일궜지만, 일구구 보니 모두 중국 지주집 땅이였소. 해마다 소작료를 바쳤단 말이요. 그런데 우리 아바이 소갤루 밭을 얻어 부치구, 감사의 뜻으루 아바이 한테 쌀 반되라두 가져간 사람이 있으믄 어디 좀 일어서 보오!》 회장은 여전히 물뿌린듯 조용하였다. 《모두 공째루 얻어 부치지 않았소? 사람이 도리를 모르믄 은공이라두 알아야지, 어찌 은공을 원씨로 갚소? 그리구 내 갑술년에 우리 영감하구 약혼하구 에 와보니, 고농은 무슨 고농이요? 친자식보다두 더 호갱스레 살고 있었소. 어느 지주집에서 고농을 한 호적에 올리고, 공부까지 시키는 집이 있다고 합데?》 회장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마치도 당년의 부련회 부주임으로 되돌아 간듯 싶었다. 어머니는 손을 내 저으시며 계속 연설하셨다; 《토개때에 이 중농이 된것두 모두 그때 모주석과 공산당 정책에 기준한 게오. 우리 제맘대루 획분한게 아니란 말이요. 모주석 최신지시에두 토개때 획분한거 고치지 말라구 했소. 그런데 어째 이 동네서는 모주석 지시대루 하지 않는가 말이우?》 나의 이모부는 합당한 말을 찾지 못한다. 더우기 지금 자기의 장훈을 치는 사람이 자기의 친 처형인지라 더구나 어쩔줄 몰라한다. 이윽고 로 최서기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재 금방 저 로 부주임이 하시는 말씀이 한마디두 틀린게 없소. 모주석 최신지시에두 계급대오청리에서 토개때 획분한거는 고치지 말라구 했소. 로 부주임이 먼데서 우정 와서, 우리공작의 부족점을 지적해 준데 대해 감사를 드리오!》 어머니는 전면적 대승리를 걷우시였다. 그후, 이모부네는 동네여론에 못이겨 흑룡강 어딘가에 이사 갔다가, 사고로 한쪽 다리를 크게 상하셨다. 몇해후 이모부는 상한 다리를 쩔뚝이며 가속을 데리고 다시 광신으로 돌아 왔는데, 어머니가 조해하여 이모부는 과일고 술을 사 들고, 《새집》에 가서 깊이 사과 하고는 다시 화해하였다. 이 일로 하여 《새집》의 두 아저씨는 자기들의 형수인 우리 어머니를 더욱 존경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1988년 어머니 70탄신때, 큰 아저씨는 며칠품을 들여 자체로 축하문을 작성하여 가지고 와서는, 눈물을 흘리며 랑독하여 올렸던 것이다.    제十七회: 새집을 짛다. 1970년에 접어 들어, 우로부터 많은 새로운 혁명지시들이 륙속 내려 오면서, 아버지에 대한 비판은 좀 뜸해지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옷가슴의 명패도 우의 새로운 지시에 의하여 달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해 2월, 많은 유감을 남긴채 나의 중학교 시절은 드디여 끝을 보았다. 우리는 《귀향지식청년》이란 멋진 시대적 월계관을 쓰고, 마을에 돌아와 정식으로 인민공사 사원으로 되였다. 농촌에 돌아온 나는 인차 민공으로 남구 저수지 건설 공지에 올라갔다. 거기 가면 마음이 퍽 편안할것 같았다. 거기 가면 아버지를 비판하던 마을 사람들을 보지 않을수 있고, 지겨운 모내기에도 빠질수 있었다. 나는 남구민공에 가서 여러해 있을 타산을 하였다. 몇달동안 일하면서 상해지식청년 몇을 사귀였는데, 나는 그들의 소탈한 성격을 아주 흠모하였다. 그렇게 큰 대도시에서 생활하다가 언제 돌아간다는 기약도 없이 이렇게 험악한 산골에 내려와 가장 원시적인 힘든일을 해야 하였건만, 그들은 오직 하나의 시대적 정신만을 믿고, 언제나 그렇듯 쾌활하고 락천적이다.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번화한 남경로를 거니는것 같았고, 그들과 함께 끝없는 바다를 구경하고 있는것 같았다. 다시 혼자 있을 때는 내가 마치도 무리에서 버려져 방황하고 있는 한마리의 개미처럼 보인다. 아니지! 이래선 안되지! 하면서도 정신을 분발시킬 그 어떤 동력을 찾을길 없었다. 7월달에 집에서 한번 왔다 가라는 기별이 왔다.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우리의 원래 낡은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짛고 있다. 비판대상인 형편에서 너무나 아름찬 일을 벌린것 같았다. 원래보다 좀 높으게 다져놓은 기지돌 우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리고, 도리목도 올렸으니, 집의 결구는 형성된 셈이다. 이제 가시오를 올리고, 연목을 엮고, 벽을 바르고, … … 나는 며칠 묵으면서 먼저 중요한 일들을 끝내고 올라 가리라 생각하였다. 쉬는 날에 공지의 친구들이 내려와 흙을 이겨서 아시벽을 발라 주었다. 이제 가시오를 올리고, 즌새를 치고, 이영을 이여 놓아야 비가 와도 근심이 없다. 그날 우리 두 부자간은 어머니가 싸준 정심밥 보자기를 각기 허리에 차고 아침 일찍 서둘러서 다이야 평판수레에 곤두뿔 소를 메워가지고, 마을 서쪽에서 칠팔리 떨어진 먹덕고개에 구들돌 실으려 갔다. 진짜 좋은 구둘돌을 실어 오자면 몇십리밖의 전문 구둘돌 캐는 산에 가서 돈을 주고 사와야 하였지만, 우리는 그 당시 그럴 형편이 못 되였다. 그리하여 먹덕고개 강바닥의 납작하고 좀 큰돌들을 골라 주어서 구둘돌로 쓰기로 하였다. 먼저 수레를 벗겨 곤두뿔이 절로 풀을 뜯게 하고는, 우리는 여지저기 강바닥을 누비며 구둘돌 됨직한 것들을 골라 한수레 될만하게 모았다. 정심을 먹자고 음식보자기를 푸는데,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몹시 조급해 하신다. 《이거, 어제 바른벽이 다 떨어지겠다.》 우리는 정심을 먹다 말고, 서둘러 곤두뿔을 수레를 메우고, 모아놓은 돌들을 수레에 주어담기 시작하였다. 곤두뿔도 비를 맞으니 귀찮다는 뜻인지 대가리를 자꾸 흔들어 대는 바람에 실어놓은 돌들이 자꾸 도로 떨어진다. 그리하여 돌을 실으며 수시로 큰소리로 《와!-와!-》(소를 멈춰 세울때 부르는 소리)하면서 곤두뿔한테 움직이지 말라고 엄중경고를 준다. 비를 흠뻑 맞으면서 돌을 다 싣고나니 입에서는 겨불내가 확확 난다. 아버지는 숨을 돌리고 소고삐를 찾아쥐고 《이랴!》하고 곤두뿔을 내 몰았지만, 곤두뿔은 몇번 대충 힘을 써 보더니 꿈쩍하지 않는다. 살펴 보니 돌을 싣는 사이에 물의 흐름에 의하여 수레바퀴밑의 모래가 패우면서 수레바퀴가 깊숙히 빠져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수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론하고 돌을 일부 부리웠다. 그러나 수레는 여전히 꿈쩍하지 않는다. 또 부리웠다. 여전히 못 나온다. 이렇게 몇번 부리워서 거의 빈차가 되여서야 곤두뿔은 슬쩍 힘을 쓰더니 수레는 아주 가볍게 빠져 나왔다. 어찌보면 고놈 곤두뿔한테 속히운것 같았다. 이번에는 수레를 강변의 땅땅한곳에 세워놓고 물속의 돌들을 날라 올려다가 싣기로 하였다. 그런데 고놈 곤두뿔이 자꾸 도망치려 하는 바람에 나는 아버지더러 소고삐를 쥐고 지키게 하고는, 나 혼자서 분주히 달아다니며 물속의 돌들을 날라서 실었다. 한 절반 실으니, 아버지는 나더러 와서 소고삐를 쥐고 숨을 돌리라고 하고는 자기가 돌을 싣겠다고 한다. 내가 소고삐를 넘겨 받고 숨을 좀 돌리는데, 아버지가 돌 주으려 물에 들어서다가 미끄러워 그만 물에 넘어진다. 보아하니 아버지는 이미 몹시 지치셨다. 나는 아버지를 불러서 올라 오시라 하고는, 소고삐를 다시 넘겨 맡기고 계속 힘을 내여 돌을 실었다. 두번째로 돌을 다 싣고나니 나는 손가락 까딱할 맥조차 없다. 비는 어느사이 이미 그쳤다. 나는 축축한 풀우에 벌렁 들어 누웠다. 아버지는 근심 되시여 어디 상하지는 않았는가 물으신다. 나는 웃으며 《몇달 공지에서 목도채 멨더니, 인젠 밥값이나 할것 같수꾸마.》 나의 마음은 종래로 이렇게 상쾌하여 본적이 없다. 아버지는 곤두뿔을 몰아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고놈 곤두뿔이 계속 말썽을 부린다. 앞의 길이 조금만 올림막인것 같아도, 곤두뿔은 일부러 멈춰서서 떼질 쓴다. 내가 뒤에서 소리치며 젖먹던 힘까지 다내여 밀고, 아버지가 앞에서 무섭게 호통치며 채질해서야 곤두뿔은 마지못해 걸음을 옮긴다. 마치도 《당신네의 이렇게 무거운 짐을 왜서 내 혼자 끌어야 한담? 당신네도 좀 고생해 보라이!》하는것 같았다. 그러다 나니 어느덧 날씨가 어두워 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곤두뿔은 여전히 늘쩡늘쩡 늦짱만 부린다.  나는 조급하여 곤두뿔 궁둥이에 채질하며, 《이랴! 이눔의 곤디뿔아! 해가 다 넘어 갔다.》하고 소리쳤다. 곤두뿔은 귀를 벌죽벌죽 하더니, 마치도 내말을 알아 듣기나 한것처럼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아무리 올림막이라 하여도 곤두뿔은 무거운 수레를 끌고 씨엉씨엉 잘도 걷는다. 그놈이 비록 미물이지만, 저녁때가 되였다고 하니 빨리 제집에 가서 맛있는 여물을 먹고 싶었으리라. 나는 아버지한테 청들었다. 《그 고삐를 이리 줍소. 내 좀 몰아 보깁소.》 아버지는 나한테 소 고삐를 넘겨 주신다. 처음으로 해보는 소수레 운전이다. 아버지는 내 뒤에서 지휘를 멈추지 않는다, 《술기채서 좀 멀찍이 서라!》, 《웅텅개 넘을때 고삐를 나꿔채서, 천천히 넘어라!》, 《굽이돌이 돌때 즐거 돌지말구, 멀찍이 돌아라!》… …. 소수레를 몰고 탈곡장에 들어서니, 곤두뿔은 주제넘게 자체 주장하여 자기 우사칸쪽으로 수레를 끌고 꺾어든다. 나는 고삐를 확 나꿔 채며, 《아니다 이눔아! 먼저 일루 가자!》하면서 우리집 방향으로 끌었다. 그러자 곤두뿔은 아주 억울한듯 대가리를 외로 틀면서 천천히 따라온다. 집앞에 이른 우리는 눈앞의 정경에 그만 깜짝 놀랐다. 이미 맞벽을 다 발랐고, 가시오를 올리고, 즌새를 다 쳐놓았으며, 비 맞지말라고 비닐로 잘 덮어 놓기까지 하였다. 우리의 인기척을 듣고 어머니가 사랑칸 림시 거처에서 나오며 반긴다, 《우리 어른들이 왔구만. 빨리 대장인데 가서 인사하오! 오늘 동네서 우리집에 와서 숱한 고생을 했소!》 알고보니 로 대장께서 동네분들을 동원하여 우리집에 와서 비를 맞으며 온 하루 작업하여, 이미 큰 일들은 기본상 모두 해 놓았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일어선 집을 쳐다보며 멍하니 서있는데, 나는 분명 아버지 눈에서 반짝이는 그 무엇을 보았다. 《아니, 거기서 머 하오? 빨리 가 보지않구.》 어머니가 재촉하신다. 아버지께서는 대장한테 인사 가려고, 급히 빈 술병을 찾아 들고는 상점으로 갔다. 나는 곤두뿔을 수레에서 벗기여 우사칸으로 가져가면서 생각하였다; 《보아하니 아버지가 진정한 인민의 적은 아니것 같구나!!!???》   제十八회: 중풍을 맞다. 1972년 년초부터 나는 생산소대의 안배에 의하여, 부업으로 철로에 나가 적사공일을 하게 되였다. 한창 나이 젊었을 때였으니, 아무리 무거운 짐도, 아무리 많은 짐도 두렵지 않았다. 일은 비록 고되였으나, 마음은 그래도 상쾌한 상태였다. 아버지 문제가 아직 결론은 내리지 않았지만, 소대에서는 이미 새로운 계급투쟁 동향으로 엄중한 남녀작풍 문제가 있는 김씨성의 사람을 붙잡아 내왔으니, 정치운동 때마다 그 사람이 비판을 받고, 아버지는 한쪽 구석에 잊혀진채 소외시 되였다. 그해 6월의 어느날, 정치대장과 업무대장(그 당시 정치대장은 제1대장이고 업무대장은 제2대장이다)이 나를 불렀다. 그들은 나를 회의실에 불러놓고, 평소의 후배 취급하던 말투를 고쳐가지고, 정색해서 입을 열었다; 《소대에 지금 회계자리가 비였는데, 령도에서는 용수가 이 자리를 맡았으면 하오. 용수의 의향은 어떻소?》 뜻밖의 일인지라 나는 어정쩡해 있다가, 회계질을 하자면 반드시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할것이라고 생각되여 좀 주저하였다. 기실 내가 중학교 필업생이라 하지만, 학교에서 배운것은 《모주석 어록》밖에 생각나는것이 없는데, 회계라는 것은 절대로 몇마디 어록으로 할수있는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하여 나는 《내같은 주제에 어떻게 그리 큰일을 할수 있겠소.》하고 대답하면서 돌이질 하였다. 그러자 정치대장은 진짜 정치가가 되여 엄숙히 말한다. 《대채대대 회계를 따라배워 정치임무로 여기고 대담히 맡아보오. 이 일 때문에 용수를 찾은것두 령도에서 용수에 대한 신임이오. 우리 전적으루 지지해 줄것이니 근심할것 없소. 새시대 청년이라는면 대담히 중임을 떠 메야지!》 나는 할말을 찾지못하고 궁리하다가, 《그렇다믄 글쎄! 고려해 보겠소.》하고 대답해 버렸다. 《고려는 무슨 고려? 그럼 하는걸로 결정하기오! 저녁 사원대회에서 정식 선거시키겠으니, 래일부터 철로일은 그만두고 소대에 들어와 장부를 맡소.》 정치대장은 정치가로부터 다시 대장으로 돌아와 생산로동을 안배하듯 결정해 버렸다. 저녁에 집(우리는 이미 새집에 들었다)에 들어와 저녁을 먹으면서 낮의 일을 꺼냈더니 어머니께서는 두말없이 찬성하신다, 《애비 비판대상이래두 너를 시키는거 보믄, 너절루 너 앞길으 열라는 게다. 기죽지 말구, 너라두 정신차려야지! 어찌 모두 머저리 가문처럼 집에 떡 들어 앉아만 있겠니?》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근심하시는 태도이시다, 《회계부터는 큰 일인데, 애들한테 시켜놓구 그러다가 잘못되기라두 하면… ….》 《제만 밑궁기 깨깢으믄 무스게 겁나오? 혼자 못할거는 모다들어 하잴리. 한번 본때스레 해봐라!》 어머니는 여전히 지지하시는 태도이시다. 그날저녁 사원대회에서 나는 사원들의 요란한 박수소리 속에서 정식으로 소대회계로 임명되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튿날부터 철로일을 그만두고, 소대에 돌아와 회계장부를 맡게 되였다. 그해도 저물어 가는 11월27일, 아버지께서는 소대의 로동안배에 따라 화물잠에 나가서 차에 실을 사과배들을 밤 사이에 보초서는 일을 하였다. 어느날 이른아침, 아버지는 밤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섰는데, 부엌에서 아침불을 때시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급히 소리를 지르신다. 《저 아바이! 입이 어째 저러오?》 나는 이불속에서 급히 머리를 들고 보니 아버지의 면상이 한쪽으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아버지께서는 어리둥절해 하시더니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보신다. 아버지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실 뜻으로 《어!-어!-》하시더니, 바당에 그대로 털썩 쓸어지셨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악!-》소리 지르며 펄쩍 뛰여 일어나, 급히 바당에 쓰러진 아버지를 부축하여 구들에 올려 눕혔다. 이미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의 일그러진 입에서는 거품이 기질기질 나온다. 아버지께서는 중풍을 맞으셨다. 밤새 겨울의 찬 기운에 마비된 얼굴은 언제부터 일그러졌는지 아버지 자신도 모르고 계셨다. 《빨리 가서 조의사 모셔 오너라!》 어머니께서 급히 소리치시자, 나는 정신없이 위생소로 달려갔다. … … 년말에 나는 중풍에 걸려 웃방에 누워 치료받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살피는 한편, 령도의 관심과 동네 회계능력 있는 분들의 대폭적인 방조를 받으며, 50여호 300여명 사원들의 년말 결산분배 임무를 비교적 순리롭게 완수하였다. 그해 소대에서는 나에게 회계공으로 80공을 보충해 주었다. 1973년, 아버지께서는 석달 푼한 극진한 치료를 거쳐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신체는 그만 반신불수가 되여버렸다. 그후부터 아버지께서는 성질이 아주 괴벽스럽게 변했다. 손놀림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 담배를 말수 없어서 왝-왝- 소리만 지르신다. 그대로 담배를 끊겨 버릴가 생각했다가도 이제 앞날이 얼마 없는 아버지한테 너무 잔인한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담배를 말아서 불까지 붙여 들이고는, 수시로 꺼내 피울수 있게 담배를 여러대 말아서 담배통안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어디 나갔다가 돌아와 보면, 아버지께서는 말아놓은 담배를 구겨서는 사처에 뿌려 던지여 온 방안에 온통 담배 천지다. 생각해 보니 그럴짐도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자체로 담배불도 부칠수 없었으니, 담배를 말아만 놓아서 무슨 도움이 되였으랴? 공연히 심기만 상하셨으리라. 내가 며칠 훈련을 시키여 아버지는 자체로 성냥을 켤수있게 되였다. 아버지는 몹시 기뻐하신다. 나는 화룡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아버지한테 담배대통을 하나 사다 드렸다. 담배대통이 있으면 담배를 말 필요가 없이 담배를 직접 담배대통에 담아 불을 붙여 피울수 있었다. 아버지는 조금 흡족해하는 표정 같았다. 그런데 그 어느날부터 아버지께서는 갑자기 어쩐 일인지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면 욕설부터 퍼 붓는데, 말씀이 되시지 않으니 신경질이 나서 담배대통으로 문턱을 잡아 두드리다가도 대통을 사람한테 마구 뿌려 던진다. 아마도 아주 중대한 발표를 하시려는것 같았으나,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를 병자취급만 하니 분통이 터졌으리라. 나는 안전을 위하여 아버지 한테서 담배대통을 압수하였다. 그리고는 아버지앞에 가서 자세히 들어 보았다. 아버지는 《거-거-기, 거-기… …》하신다. 나는 그말과 비슷한 말들을 찾아서 한가지, 한가지 물어 보았다. 《어머니를 거기 좀 앉으라구 그럼두?》, 《아이!》아버지는 손을 내 저으신다, 《그럼 거기서 썩 물러가라구 그럼두?》, 《아이!》아버지는 머리를 저으며 손바닥으로 입을 치며 먹는 시늉을 한다. 《오! 아버지가 고기를 잡숫기 싶어 그럼두?》, 《응!응!응!》 아버지는 기뻐서 아이들 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쳐댄다. 그것도 그랬으리라. 아버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신후 별로 영양보충을 하시지 못하였으니, 몸이 허약하여져, 몹시 구춘하였으리라. 어머니는 너무 우스워 악의 없이 욕을 해댄다, 《두상짝이 호강났네. 추석두 아니구, 설두 아니구 어디가서 고기를 가져온다니?》 하긴 그랬다. 그당시 농촌에서는 보통 추석이나 설같은 명절이 와야만 소나 돼지를 잡아서 소대적으로 인구에 따라 분배하여 주었다. 때때로 추렴이란것이 있기는 하였지만, 닭이나 개를 잡아서 여럿이 함께 모여서 한때나 두때에 끓여 먹으면 그만이였다. 상품고기는 공인 호구만 대상하여, 엄격히 고기표(고기 정량 구매권) 제도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돈을 가지고도 상품고기를 살 권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하다 못해, 팔가자 림업국에 있는 나의 누나벌 되는 친척을 찾아가 방법을 대여 보기로 하였다. 내가 누나벌 되는 친척을 찾아가 사연을 말하였더니, 그 누나는 선뜻이 자기집 두근짜리 고기표를 몽땅 나한테 주면서, 아버지를 잘 공대하라고 당부하신다. 참으로 고마운 누나였다. 그로하여 나는 아버지의 생전의 소원 한가지라도 더 풀어 드릴수 있었다. 아버지한테 몇때에 나누어 고기를 대접하였더니, 그후 아버지의 정신상태는 많이 좋아졌으며, 신체도 빨리 회복되여, 인제는 쩔뚝거리며 천천히 걸어 다닐수 있게 되였다.   제十九회: 아버지의 본능  1973년5월의 어느날, 일밭에 나갔던 사원들은 기약없이 내리는 비에 쫓기워 정심전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께서 보이지 않는다. 비오는 이런 날씨에 불편한 몸으로 어디로 나갔단 말인가? 나는 비닐쪼박을 머리에 쓰고, 온 동리를 다니며 찾아보았지만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종적조차 없으시다. 누가 보았다는 사람도 없다. 오후 한시가 좀 지나서, 비는 여전히 구질구질 내리는데, 중학교를 다니는 우리 소대의 한 학생이 우리집에 찾아와서 알려준다. 《이집 아바이, 지금 저 앞산에 있슴다. 길이 미끄러워 자꾸 넘어짐다.》 나는 바지가랭이를 걷우고, 맨발로 앞산을 향해 달려갔다. 중학교의 어린 학생들이 자그마한 나무단을 등에 지고, 비를 흠뻑 맞으며 산에서 내려 오고 있었다. 중학교에서도 오늘 비올줄을 모르고, 학생들을 조직하여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여오고 있었다. 나는 비속으로 달리면서 마주 내려오는 학생들한테 소리쳐 물어보았다.《저 우에서 한 아바이를 보았니?》 학생들은 너도 나도 대답한다. 《예! 어떤 아바이 손에 낫을 들고 내려 옵디다.》, 《자꾸 신이 벗겨집디다.》… … 나는 미끄러운 올림 산길을 기를 쓰고 달려서 산등성이에 올랐다. 저 앞의 비속에서, 산을 내리는 학생들의 대렬옆에 비츨거리며 내려오고 계시는 아버지의 키큰 모습이 보인다. 두 학생이 등에 나무짐을 진채, 우리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가서, 그 두학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것도 잊은채, 아버지를 둘쳐업고 산길을 내리 미끌기 시작하였다. 한 학생이 달려와서 아버지의 벗겨진 고무신과 나무낫을 나한테 넘겨준다. 나는 신을 아버지한테 신기고, 낫은 아버지의 바지띠에 질러 넣었다. 낫날에는 새끼를 감은채로 있는것을 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할때가 아직 일을 시작하기 전인것 같았다. 아버지는 나의 등에 업히운채 입으로 《왜재!》, 《왜재!》하고 중얼거린다. 나는 대뜸 아버지가 지금 근심하시는 것은 집앞 터밭의 울바자 감이라는것을 알아 들을수 있었다. 워낙 며칠전에 림업국 제재공장으로 부터 재목을 가공하고 남은 변두리 널잎들을 한차 사기로 하였는데, 그 널잎으로 울바자를 하면 오래 견디기도 하고, 또 보기도 좋았다. 그리하여 아직 마당의 울바자를 세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본능적인 책임감으로부터 자기의 현재 신체 상황을 잊은채, 습관적으로 나무낫을 찾아들고, 산으로 바자감 하려 떠났던 것이다. 책임감이란 아버지 사랑의 주요한 표현 방식이다. 어머니 사랑은 주요하게 보살핌으로 표현되지만, 아버지 사랑은 주요하게 책임감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어머니 사랑은 직접적으로 느낄수 있고, 항상 따스하지만 아버지 사랑은 간접적으로 깨달을수 있을 뿐이며, 어떤때는 아프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몇천년 내려오면서, 어머니 사랑에 대한 노래는 수없이 많지만, 아버지 사랑에 대한 노래는 듣기 어려운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아버지는 심한 촉한에 걸려 끝내 다시 몸져 눕고 말았다. 몇달간 치료를 거쳐 좀 차도가 보이는듯 하더니, 벼 싣걱질을 시작한지 며칠되는 어느날, 갑자기 또 중태에 빠져 버린다. 의사가 와서 진찰해 보고는 재풍이 왔다고 한다. 보통 이런 형편에서는 환자가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아주 적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대로 돌아가신다면 평생두고 유감스러울 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아버지의 회갑년 문앞까지 왔다가, 아버지한테 회갑상을 차려 드리지 못하는 그것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날 아버지 병문안을 오신 광신의 큰 아저씨한테 제의 하였다. 《이제 탈곡이 끝나서, 오는 양역설이 아니면, 음력설에 아버지한테 회갑상 차려 드립시다. 원래 환갑날이 명년의 음력 오월스므닷새지만, 지금 형편을 봐서 그때까지 견지할것 같지 못합니다.》 큰 아저씨는 나의 제의에 찬성하면서도, 문제를 하나 제기한다. 《환갑은 미룰수는 있어도, 앞당기지는 않는다구 하더라. 별일 없을가?》 나는 전통례법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했거니와, 그 당시는 전통적인 례법을 타파하는 시대였으므로, 별로 고려없이 손을 내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로선문제두 아니구, 당의 정책문제두 아닌데 뭐가 두렵습니까? 례법은 례법이구, 실제 상황이 특수하니까, 그럼 너무 어긋나지 않게, 음력 정월 초 이튿날루 하면 되겠습니다. 환갑날은 아직 안되였지만 환갑년인 갑인년에는 이미 들어섰으니, 옛법에두 너무 어긋나는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특수한 상황에서는 환갑두 이렇게 셀수있다는 새법을 우리집에서 만듭시다.》 그리하여 최종으로 아버지의 환갑 잔치날을 이제 오는 음력설 이튿날로 결정하고, 여러 친척들한테 두루 통지하여 준비시키기로 하였다. 하늘이 아버지한테 혜택을 베푸셨는지, 음력설이 다가 오면서 아버지의 병세는 많이 호전되였다.   마지막회: 환갑을 쇠다. 1974년 갑인년 정월 초이튿날, 우리는 계획했던 대로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우리집에서 정성껏 차렸다. 많은 친척들은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할것없이 온집식구 총동원하여 왔다. 동네에서는 어느집에서나 부조금을 가지고 모두 참석하였다. 동네 어른들도 귀순분자 아버지를 꺼리지 않고, 흔쾌히 아버지 옆에 배동하여 앉아서 함께 축수를 받았다. 대대에서도 빈하중농대표 한분을 파견하여, 아버지의 환갑을 축하하러 왔다. 큰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간력을 읽었는데, 문제가 되는 귀순사건을 대담히 빼 버렸다. 그렇다고 그누구도 구호를 부르며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간력 랑독이 끝나자,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벽을 짚고 안깐힘을 쓴다. 한 동네 어른이 부축하여,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성공한다. 아버지는 일어서서 손만 자꾸 내 저을뿐 말씀이 되시지 않아서 입으로 《헉-헉-》 바람소리만 내다가 끝내는 한마디 인사말에 성공한다. 《감사--하오!》 이윽고 축수가 시작되였다. 나부터 시작하여,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 큰 아저씨가 큰 소리로 부르는 명단에 따라 조용히 나와서 아버지의 환갑을 축하하여, 술을 붓고 큰절을 올렸다. … 아버지의 환갑잔치는 생각밖으로 아주 의의있게, 아주 성공적으로 치려졌다. 아버지는 환갑잔치를 치른후 신체가 아주 빨리 회복되여서, 몇달후부터는 지팽이를 짚고 또다시 천천히 걸어 다닐수가 있었다. 너무나도 생각밖의 효과였다. 1975년9월의 어느날, 아버지가 갑자기 실종되였다. 그날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을 먹고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시고, 어머니와 나는 생산소대로 일하려 나가고, 선자와 춘자는 학교로 갔다. 그런데 정심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동네돌이 나가시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가까운 동네집들을 다니며 찾아 보았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할수없이 먼저 정심을 먹고 다시 찾아 보았지만 여전히 어디에서도 아버지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오후 로동 출근시간이 되여서 사원들이 제가끔 자기 일터로 나가는데, 적비조 사원들이 아침에 우리 아버지가 철로 방향으로 나가시는것을 보았다고 알려준다. 나는 부랴부랴 역전으로 나가보니, 오후에 화룡에서 내려오는 객차를 탈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오전차를 타시고 긍정코 화룡으로 올라갔으리라 짐작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역전 직반실에 들어가 사정하고, 화물차의 꼬리바곤에 앉아 화룡으로 올라갔다. 나는 화룡역전에 내려서 곧추 나의 사촌형님네 집으로 찾아갔다. 화룡에는 그집밖에 다른 친척이 없었다. 그런데, 화룡 사촌형님네 집에도 아버지는 없었다. 그당시 사촌형님은 문화혁명 충격을 받고, 먼 변강농촌으로 하방되여 내려갔으므로 집에 계시지 않고 형수님만 계셨는데, 아버지가 오신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 아버지가 어디 갔단 말인가? 반신불수로 걸음도 겨우 한발작 한발작 옮기시는 형편에서, 아버지가 가면 어디로 갈수있단 말인가? 내가 다시 화물차 꼬리차에 앉아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중이였다. 어머니도 온 오후 찾으면서 갈만한곳은 모두 가보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다. 우리는 그날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나는 앞산에 올라가 두루 찾아 보았다. 혹시 앞산에 올랐다가 맥이 진하여 어디에 눕지나 않았는지? 나는 온 오전 남산을 샅샅히 훑으며 찾아 보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는다. 정심때가 되여 나는 허기찬 배를 안고 집으로 내려오니, 뜻밖에도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누워 계신다. 그리고 광신에 계시는 큰 아저씨께서도 와서 계신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고 큰 아저씨한테 사연을 물었다. 큰 아저씨께서는 너무도 생각밖이라는 뜻으로 련속 머리를 저으시며 말씀하신다, 《… …신새벽에 바깥에서 무슨 인기척 같은게 나길래, 귀를 귀울어 들었는데, 인차 다시 조용해 지더라. 다시 한잠자구 아침에 일어나 바깥에 나가보니, 마루에 한사람 앉아있었다. 가까히 가서 찬찬히 보니 글쎄 팔가자 형님이 아니겠니? 아마 새벽에 우리집에 도착한것 같은데, 우리를 깨우지 않느라구 마루에 앉아 날새기를 기다렸구나. 어떻게 왔는가구 물어봐두 말두 방정히 하지 못하지. 그래서 아침 대접시킨후 소수레로 명신역까지 실어다가 객차에 이렇게 모시고 왔다. 여기와서 형수님말 들어보니, 가능하게 네 아버지는 하루낮 하루밤을 걸어서 우리집에 온겄갔구나. 40여리 길이다. 명신에서 큰물은 또 어떻게 건넜구? 이렇게두 우리형제 보구퍼 하는걸 우리는 모르구 있었지. 우리가 언녕 자주 와서 뵜어야 하는건데… …》 큰 아저씨는 목이메여 말을 잇지 못한다. 그랬다. 40여리 길이다. 명신에서 강성촌 마을을 들어 가려면 또 해란강 물을 발 더듬하며 건네야 하였다. 성한 사람이 걷자하여도 벅찬 거리인데, 반신불수의 병자가 마비된 한쪽다리를 지팡이에 의거하여 간신히 옮겨놓으면서, 오로지 동생들을 찾아 보겠다는 마지막 일념으로 20여시간 물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완성한 기적의 거리라고 하겠다. 아버지 머리에서는 이미 피곤하다든가, 배고프다는 감각은 모두 마비되여 버렸으리라. 그리하여 자기의 마지막 소원을 상식을 초월하는 자기의 노력으로 성공적으로 실현하셨다. 인간 신체의 능력에는 제한이 있겠지만, 인간 정신의 잠재력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것이다. 너무나 지치신 아버지는 또 다시 몸져 누우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행운이 다시 아버지한테 찾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병세는 점점 악화되여만 가더니, 국경절 이튿날 세번째로 재풍을 맞았다. 의사가 와서 진찰해 보고는 인젠 빨리 후사를 준비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친척들한테 두루 알려, 아버지가 아직 임종하시기전에 모두 한번씩 와서 보도록 하였다. 아버지가 세번째로 재풍을 맞아서 세주일후, 1975년 10월22일, 음력 九월十八일 亥時, 가속과 많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아버지께서는 평온하게 숨을 거두시였다. 종년61주세였다. 고 아버지 묘소는 지금, 길림성 화룡시 팔가자진 중남촌 약암동 동글산 마루에 모셔져 있다. 고 아버지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2011년10월 초고   2013년 9월 정리   著者: 延州玄氏判尹公派卅一世孫; (八修大同譜127p/第五倦) 延邊朝鮮族禮儀研究會會長—玄龍洙          
87    문헌신, 불교신, 무속신 관력 항목-106개 댓글:  조회:4603  추천:0  2012-07-17
  문헌신, 불교신, 무속신 관력 항목 찾아보기-106개  ㄱ-ㄴ-ㄷ... 순서 관련신(바로가기)  요약  강림도령  85. 강림도령 강림도령은 죽을 때가 된 사람을 데리러 오는 세 명의 저승차사(差使) 중 하나이다. 강림도령은 미혼 젊은이의 영혼이라고도 ...  건달바  23. 건달바 1. 개요 건달바(乾達婆)는 범어로 Gandharva로 식향(食香), 심향(尋香), 심향행(尋香行), 향신(香神), ...  검무신장  54. 검무신장 무속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이라 간략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중심...  굼반다  21. 굼반다 1. 개요 굼반다는 프레타와 함께 수미산 중턱 남쪽의 ‘유리’라는 지방을 관장하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의 권속이다....  궁희  2. 궁희(穹姬) 마고의 딸로서 궁희의 존재를 문헌이나 민간전승에서 찾기는 쉽지 않으며, 다만 『환단고기』나 『부도지(符都誌)』 등 이른바...  금와  103. 금와 금와왕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동부여의 왕이며, 금와(金蝸)라고도 표기한다. 서기전 1세기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  김수로  100. 김수로왕 김수로왕은 가락국(또는 금관가야) 그리고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그의 탄생과 치적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찰  26. 나찰 1. 개요 나찰은 원래 고대 인도의 신으로, 불교에 들어온 이후로는 악귀(惡鬼)의 총칭이 되었다. 범어로 락샤사(Raks...  단군  92. 단군 단군(壇君)은 우리 민족의 시조이다. 고조선(古朝鮮 : 檀君朝鮮)의 첫 임금이며, 단군(壇君), 단군왕검(壇君王儉), 단웅천왕...  당산  64. 당산 마을의 성역인 당산에 깃들어 있는 당산신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마을의 태평과 풍요, 번영은 물론이요, 병마나 재액(...  대천왕  39. 대천왕 소천세계가 천이 모여 중천세계가 되고 이 중천세계가 천이 모인 것을 대천세계라 이른다. 이 대천세계는 소천세계, 중천세계, ...  도시대왕  76. 도시대왕 도시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아홉 번째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지장...  둔갑신장  47. 둔갑신장 둔갑은 우리나라 민담이나 전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술법으로 마음대로 자기 몸을 감추거나 다른 것으로 변하게 하는 것을 말...  마고  1. 마고 보통 마고(마귀)할미 전승은 해남, 옹진, 강화 등 주로 해안 도서지방에서 현재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지역전설로서 거인신화의 대표...  맹인귀  60. 맹인귀 귀신은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주체라고 믿는 대상으로 간략히 설명될 수 있다. 귀신은 우리나라 사람의 신앙행...  묘신  118. 묘신 묘신은 12지에서 네 번째 동물로 호랑이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묘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배경과 ...  미신  122. 미신 미신(未神)은 12지에서 여덟 번째 동물로 양으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미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  백마신장  36. 백마신장 백마신장은 옥황상제님을 호위하는 근위대 신장이다. 또 백마를 타고 다니면서 인간을 보호해주는 신장이기도 하다. 또 백마를...  백제치우  14. 백제치우 1. 개요 백제치우는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백제(白帝)로 이해할 수 있으며 서방을 관장한다. 『한단고기』는...  백호  18. 백호 사신은 청룡(靑龍, 東), 백호(白虎, 西), 주작(朱雀, 南), 현무(玄武, 北)의 오방신(五方神)을 말한다. 사신사상은 전...  범왕  44. 범왕 1. 개요 범천은 산스크리트어로 브라흐마데바(Brahmadeva)라고 하며, 범천왕(梵天王), 범왕, 바라문천이라고도 한...  벼락신장  35. 벼락신장 무속에서의 신장의 개념은 불교에서의 신장 개념과 약간 다르다. 물론 무속에서 섬기는 신장들 중 상당수는 불교에서 연원...  변성대왕  73. 변성대왕 변성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여섯 번째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지장...  부단나  24. 부단나 1. 개요 부단나(富單那)는 범어 Putana의 음사로 냄새나는 귀신, 아귀를 말하며, 때로는 열병을 앓게 하는 귀신이...  비류  110. 비류(沸流) 비류(沸流)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비류는 백제의 건국시조이다. 즉, 백제 미추홀(彌鄒忽 : 여러 설이 있으나...  비사문  30. 비사문 1. 개요 비사문천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네 명의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 중 북쪽을 지키는 천왕으로 다문천왕(多聞...  비사사  22. 비사사 1. 개요 비사사는 사천왕의 휘하인 사천왕 8부중의 하나로 지국천(持國天) 휘하의 귀신이다. 비사사는 시체의 고기를 먹...  사신  120. 사신 사신(巳神)은 12지에서 여섯 번째 동물로 뱀으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사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  사해조정용궁신장  48. 사해조정용궁신장 용궁신장은 옛 삼개포구에서 행해졌던 마포나루굿에 등장한다. 굿은 육지에서 하는 나루굿(대동제)과 배를 한강에 띄어놓...  산신  42. 산신 1. 개요 산신은 산에서 산을 지키며 산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한다는 신으로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모든 자연물...  살귀  62. 살귀 귀신은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주체라고 믿는 대상으로 간략히 설명될 수 있다. 귀신은 우리나라 사람의 신앙행위...  삼신  38. 삼신 삼신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아기를 점지하고, 인간세상에서 출산을 돕고, 산모와 갓난아기를 보호하는 신이다. 삼신의 어원은 ‘...  삼족오  9. 삼족오 삼족오를 달리 금오(金烏) 혹은 준오(烏)라고도 부른다. 태양에 까마귀가 산다는 신앙은 『초사(楚辭)』, 『산해경(山海經)』 ...  삼태육성제대신장  56. 삼태육성제대신장 무속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이라 간략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서낭신  63. 서낭신 1. 서낭신 서낭신은 민간에서 일반적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는 신이다. 신수(神樹)에 잡석을 쌓아 놓은 돌무더기...  선관도사  67. 선관도사 보통 사람은 우연히 피동적이며 일시적으로 귀신과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무당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능동...  성주신  79. 성주신 성주신은 집의 건물을 수호하는 신이다. 주로 집의 건물만을 수호하는 기능이 있다. 따라서 집의 건물은 원칙...  소희  3. 소희 마고의 딸로서 소희의 존재를 문헌이나 민간전승에서 찾기는 쉽지 않으며, 다만 『환단고기』나 『부도지(符都誌)』 등 이른바 재야사...  송제대왕  70. 송제대왕 송제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세 번째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지장보...  수신(하백)  34. 수신 수신은 바다, 강, 하천, 연못, 우물 등 물을 관장한다는 신이다. 해신(海神), 용왕신(龍王神), 하천신(河川神), 독신(瀆...  술신  125. 술신 술신(戌神)은 12지에서 열한 번째 동물로 개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술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배...  신신  123. 신신 원숭이는 인간과 가장 많이 닮은 영장동물로 갖가지의 만능 재주꾼이고, 자식과 부부지간의 극진한 사랑은 사람을 뺨칠 정도로 섬...  아수라  28. 아수라(阿修羅) 1. 개요 아수라는 아소라(阿素羅), 아소락(阿素洛), 아수륜(阿須倫)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수라(修羅)라고...  안당불사  82. 안당불사 주로 집안에 거주하면 자손들의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신이다. 가택의 여러 신령인 가신들에 대해서는 매년 10월에 각 가정에...  야차  27. 야차 1. 개요 야차는 인도의 『베다』에 나오는 신적 존재이다. 야차란 명칭은 산스크리트어 야크샤(Yaksa)의 음역으로 약차...  염라대왕  72. 염라대왕 염라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다섯 번째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지장...  영등할멈  46. 영등할멈 영등신, 즉 영등할멈은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 특히 제주도에서 널리 섬겨진 외래 여신으로서 본래 해녀채취물의 증식 보호신이...  오관대왕  71. 오관대왕 오관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네 번째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지장보...  오신  121. 오신 오신(午神)은 12지에서 일곱 번째 동물로 뱀으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오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  옥황상제  33. 옥황상제 옥황상제는 천신, 즉 하늘의 신령이라는 의미로, 하늘의 중심, 하늘 자체를 신격화하거나 하늘에 있는 초인적인 신격을 믿음으...  온조  111. 온조 온조의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사망한 해는 기원후 28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제의 건국시조이며, 엄밀한 의미에서는...  외양간신  81. 외양간신 외양간신은 소중한 소를 키우는 외양간을 수호하는 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를 가족으로 여겨서 한 집에서 사는 하인이나 동물...  용  25. 용 1. 개요 용(龍)은 용신(龍神)이나 용왕을 가리킨다. 용신앙의 시원은 인도의 나가(naga)신앙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  용왕  45. 용왕 1. 개요 용신은 재래의 수신과 불교와 도교의 용신이 습합되어 형성된 국가수호신으로서, 그리고 왕실의 조상신으로서 국가적...  우사  97. 우사 우사(雨師)는 말 그대로 비를 주관하는 신이다. 우사의 일반적인 모습은 새털 같은 수염이 난 장대한 사나이로 왼손에 용이 ...  운사  96. 운사 운사(雲師)는 구름을 관장하는 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운사는 단군신화에 풍백, 우사와 함께 소개된다. 풍백(風伯), 우사(雨...  웅녀  90. 웅녀 웅녀(熊女)는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 나오는 우리 민족의 시조모(始祖母), 즉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  월직사자  84. 월직사자 월직사자(月直使者)는 죽을 때가 된 사람을 데리러 오는 세 명의 저승차사(差使) 중 하나이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강림...  위화  50. 위화 위화(葦花)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위화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주몽(朱蒙)의 어머니인 유화(?∼서기전 24)의 동생...  유신  124. 유신 유신(酉神)은 12지에서 열 번째 동물로 닭으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유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배...  유인  98. 유인 1. 개요 유인은 신라시대 인물인 박제상에 의해 지어졌다고 하지만 위서(僞書)임에 확실한 부도지에 나오는 존재로 다른 문...  유화  52. 유화 유화(柳花)의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서기전 24(동명왕 14)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  인신  117. 인신 인신은 12지에서 세 번째 동물로 호랑이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인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배경과 ...  일월성신  11. 일월성신 넓게 정의를 내리자면 일월성신은 낮과 밤을 상징하며 인간에게는 행운과 수명을 내려주는 신령이다. 관복을 가지런하게 입은 일...  일직사자  83. 일직사자 일직사자(日直使者)는 죽을 때가 된 사람을 데리러 오는 세 명의 저승차사(差使) 중 하나이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강림...  자신  115. 자신 자신(子神)은 12지에서 첫 번째 동물로 쥐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자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배경...  작두신장  55. 작두신장 무속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이라 간략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중심...  적제복희  12. 적제복희 1. 개요 적제복희는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적제(赤帝)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남방을 관장한다. 『한단고기』는...  전륜대왕  77. 전륜대왕 오도전륜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마지막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지장...  정신귀  61. 정신귀 귀신은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주체라고 믿는 대상으로 간략히 설명될 수 있다. 귀신은 우리나라 사람의 신앙행...  제석신  29. 제석신 1. 개요 제석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수미산 위의 제석천을 주관하는 천신으로 인드라로 불리는 인도의 신령이...  조왕신  80. 조왕신 조왕신은 부엌을 수호하는 신이며, 그 기원은 불을 다루는 데서 유래한 것 같다. 이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원시시대이...  주몽  112. 주몽(朱蒙) 주몽(朱蒙)은 기원전 58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19(동명성왕 19)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구려의 ...  주작  16. 주작 사신은 청룡(靑龍, 東), 백호(白虎, 西), 주작(朱雀, 南), 현무(玄武, 北)의 오방신(五方神)을 말한다. 사신사상은 전...  지하대신  66. 지하대신 지하대신은 할머니신으로 지하에서 점에 관한 것을 주관하는 신이다. ‘대신’ 이라는 것이 원래 점을 주관하는 신령인데 천왕...  진광대왕  68. 진광대왕 진광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첫 번째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지장보...  진신  119. 진신 진신(辰神)은 12지에서 다섯 번째 동물로 쥐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진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배...  창부대신  43. 창부대신 ‘창부(倡夫)’는 무당의 남편이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며, ‘창부대신(倡夫大神)’은 광대신(廣大神)을 가리키는 말로 한...  천복대감  53. 천복대감 무속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이라 간략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중심...  천왕대신  49. 천왕대신 천왕대신은 여신으로 하늘에서 점에 관한 것을 주관하는 신이다. ‘대신’ 이라는 것이 원래 점을 주관하는 신령인데 천왕...  천하대신  65. 천하대신 천하대신은 땅에서 점에 관한 것을 주관하는 신이다. ‘대신’이라는 것이 원래 점을 주관하는 신령인데 천하대신 이외에도 천...  청룡  17. 청룡 사신은 청룡(靑龍, 東), 백호(白虎, 西), 주작(朱雀, 南), 현무(玄武, 北)의 오방신(五方神)을 말한다. 사신사상은 전...  청제대웅  13. 청제대웅 1. 개요 청제 대웅은 『한단고기(桓檀古記)』의 삼신오제본기에 등장하며 동방을 관장한다. 『한단고기』는 한국 상고의...  초강대왕  69. 초강대왕 초강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두 번째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지장보...  최초의남자  86. 최초의 남자 최초의 남자는 한국의 창세신화에서 천지가 생겨나고 맨 처음 그곳에 살게 된 인류의 시조로서의 남자이다. 창세신화는 인간...  최초의여자  87. 최초의 여자 최초의 여자는 한국의 창세신화에서 천지가 생겨나고 맨 처음 그곳에 살게 된 인류의 시조로서의 여자이다. 창세신화는 인간...  축신  116. 축신 축신은 12지에서 두 번째 동물로 소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축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배경과 결합...  치우천왕  93. 치우천왕 1. 개요 치우천왕(蚩尤天王)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왕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倍達國)의 제14...  칠성신  31. 칠성신 칠성(七星)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의미한다. 북두칠성은 그 국자부분이 향한 방향을 통해서 방위뿐 아니라 각 계절을 알 수...  태산대왕  74. 태산대왕 태산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일곱 번째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지장...  팔만사천제대신장  32. 팔만사천제대신장 신장은 장군의 신격으로 원래 이 신은 도교의 신으로서 오방오제설(五方五帝說)을 기초로 한 전설적 성격이 있으며,...  평등대왕  75. 평등대왕 평등대왕은 명부의 시왕 중 여덟 번째 왕이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명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지장...  풍백  95. 풍백 풍백(風伯)은 바람의 신을 부르는 말로 풍사(風師), 기백(箕伯), 비렴(飛廉), 방천군(方天君) 등으로 불리었다. 바람은 주...  풍우신장  94. 풍우신장 신장이란 신들의 군인들을 말한다. 요사한 귀신이나 악귀들을 물리쳐주며 각신들에게 예속되어 그 신들을 보호한다. 그 중 풍...  프레타  20. 프레타(아귀) 1. 개요 아귀(餓鬼)는 범어 프레타(Preta)를 번역한 말로, ‘사자의 영혼’ 등을 지칭하는 귀(鬼)에 굶주...  한웅  105. 환웅 환웅(桓雄)은 신시(神市)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환인(桓因)의 명을 받아, 혼돈의 세상을 갈라서 세상을 만들었다. 천부의 ...  한인  104. 한인 환인(桓因)은 하늘의 주신(主神)이며, 만물의 아버지이다. 또 세상이 있기 이전부터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일설에...  해모수  99. 해모수 해모수(解慕漱)는 만주의 북동부에 있는 북부여의 시조다. 천제가 대요(大遼)의 의주(醫州) 지방에 있는 흘승골성 (訖升骨城)...  해부루  107. 해부루(解扶婁) 해부루(解扶婁)는 부여의 왕이자, 금와의 아버지이다. 나이가 많아도 왕자가 없어 산천에 기도하였다. 어느 날 왕이...  해신  126. 해신 해신(亥神)은 12지에서 열두 번째 동물로 개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해신은 처음 수호신과 방위신의 성격에서 다양한 사상적 배...  현무  19. 현무 사신은 청룡(靑龍, 東), 백호(白虎, 西), 주작(朱雀, 南), 현무(玄武, 北)의 오방신(五方神)을 말한다. 사신사상은 전...  호구별상  57. 호구별상 ‘호구별상’은 천연두 즉 마마를 주관하는 신령이다. 매우 심술맞고 변덕도 심하여 무속에서 가장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신이다...  홍역귀  59. 홍역귀 귀신은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주체라고 믿는 대상으로 간략히 설명될 수 있다. 귀신은 우리나라 사람의 신앙행...  황제  8. 황제 황제는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다. 고래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중국신화의 내용에 따르면 황제는 중앙부의 상제였으며, 나머지 동서남...  훤화  51. 훤화 훤화(萱花)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훤화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주몽(朱蒙)의 어머니인 유화(柳花:?∼서기전 24)의...  흑제왕검  15. 흑제왕검 1. 개요 흑제왕검은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백제(白帝)로 이해할 수 있는데, 북방을 관장한다. 『한단고...   오방대제 관련 神 찾아보기-31개 ㄱ-ㄴ-ㄷ...순서 관련신(바로가기)  요약  검무신장  54. 검무신장 무속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이라 간략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중심...  당산  64. 당산 마을의 성역인 당산에 깃들어 있는 당산신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마을의 태평과 풍요, 번영은 물론이요, 병마나 재액(...  둔갑신장  47. 둔갑신장 둔갑은 우리나라 민담이나 전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술법으로 마음대로 자기 몸을 감추거나 다른 것으로 변하게 하는 것을 말...  마고  1. 마고 보통 마고(마귀)할미 전승은 해남, 옹진, 강화 등 주로 해안 도서지방에서 현재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지역전설로서 거인신화의 대표...  백마신장  36. 백마신장 백마신장은 옥황상제님을 호위하는 근위대 신장이다. 또 백마를 타고 다니면서 인간을 보호해주는 신장이기도 하다. 또 백마를...  백제치우  14. 백제치우 1. 개요 백제치우는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백제(白帝)로 이해할 수 있으며 서방을 관장한다. 『한단고기』는...  백호  18. 백호 사신은 청룡(靑龍, 東), 백호(白虎, 西), 주작(朱雀, 南), 현무(玄武, 北)의 오방신(五方神)을 말한다. 사신사상은 전...  벼락신장  35. 벼락신장 무속에서의 신장의 개념은 불교에서의 신장 개념과 약간 다르다. 물론 무속에서 섬기는 신장들 중 상당수는 불교에서 연원...  비사문  30. 비사문 1. 개요 비사문천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네 명의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 중 북쪽을 지키는 천왕으로 다문천왕(多聞...  사해조정용궁신장  48. 사해조정용궁신장 용궁신장은 옛 삼개포구에서 행해졌던 마포나루굿에 등장한다. 굿은 육지에서 하는 나루굿(대동제)과 배를 한강에 띄어놓...  산신  42. 산신 1. 개요 산신은 산에서 산을 지키며 산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한다는 신으로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모든 자연물...  산신군웅신장  58. 산신군웅신장 산신군웅신장은 산신을 호위하는 호법신이다. 주로 호랑이로 대표되는 산신의 권속과 마찬가지로 여러 모습으로 변신하여 산신...  삼태육성제대신장  56. 삼태육성제대신장 무속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이라 간략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성주신  79. 성주신 성주신은 집의 건물을 수호하는 신이다. 주로 집의 건물만을 수호하는 기능이 있다. 따라서 집의 건물은 원칙...  용  25. 용 1. 개요 용(龍)은 용신(龍神)이나 용왕을 가리킨다. 용신앙의 시원은 인도의 나가(naga)신앙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  작두신장  55. 작두신장 무속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이라 간략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중심...  적제복희  12. 적제복희 1. 개요 적제복희는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적제(赤帝)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남방을 관장한다. 『한단고기』는...  주작  16. 주작 사신은 청룡(靑龍, 東), 백호(白虎, 西), 주작(朱雀, 南), 현무(玄武, 北)의 오방신(五方神)을 말한다. 사신사상은 전...  지신  78. 지신 지신(地神)이란 집터를 관장하는 터주신이다. 집터라는 말은 집이 들어앉은 밑자리의 땅으로 울안을 총칭하는 말이다. 울안에...  지하대신  66. 지하대신 지하대신은 할머니신으로 지하에서 점에 관한 것을 주관하는 신이다. ‘대신’ 이라는 것이 원래 점을 주관하는 신령인데 천왕...  천복대감  53. 천복대감 무속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이라 간략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중심...  천왕대신  49. 천왕대신 천왕대신은 여신으로 하늘에서 점에 관한 것을 주관하는 신이다. ‘대신’ 이라는 것이 원래 점을 주관하는 신령인데 천왕...  천하대신  65. 천하대신 천하대신은 땅에서 점에 관한 것을 주관하는 신이다. ‘대신’이라는 것이 원래 점을 주관하는 신령인데 천하대신 이외에도 천...  청룡  17. 청룡 사신은 청룡(靑龍, 東), 백호(白虎, 西), 주작(朱雀, 南), 현무(玄武, 北)의 오방신(五方神)을 말한다. 사신사상은 전...  청제대웅  13. 청제대웅 1. 개요 청제 대웅은 『한단고기(桓檀古記)』의 삼신오제본기에 등장하며 동방을 관장한다. 『한단고기』는 한국 상고의...  치우천왕  93. 치우천왕 1. 개요 치우천왕(蚩尤天王)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왕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倍達國)의 제14...  팔만사천제대신장  32. 팔만사천제대신장 신장은 장군의 신격으로 원래 이 신은 도교의 신으로서 오방오제설(五方五帝說)을 기초로 한 전설적 성격이 있으며,...  풍우신장  94. 풍우신장 신장이란 신들의 군인들을 말한다. 요사한 귀신이나 악귀들을 물리쳐주며 각신들에게 예속되어 그 신들을 보호한다. 그 중 풍...  현무  19. 현무 사신은 청룡(靑龍, 東), 백호(白虎, 西), 주작(朱雀, 南), 현무(玄武, 北)의 오방신(五方神)을 말한다. 사신사상은 전...  황제  8. 황제 황제는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다. 고래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중국신화의 내용에 따르면 황제는 중앙부의 상제였으며, 나머지 동서남...  흑제왕검  15. 흑제왕검 1. 개요 흑제왕검은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백제(白帝)로 이해할 수 있는데, 북방을 관장한다. 『한단고...      
86    중국 민속중의 귀신달의 래력과 금기 댓글:  조회:3246  추천:0  2012-07-17
中国民俗中的“鬼月”的来历以及禁忌       农历七月,是我国民俗传说中的“鬼月”,道教中称之为“中元节”,关于鬼月来历的说法不一,本人列出如下各种,大家自己慢慢体会吧。   来历一:   据说每年农历六月三十日,掌管地狱的地藏王菩萨(就是阎罗王),便会打开鬼门,放出饿鬼,一直到七月三十日才关上鬼门。   我国古时候多数人们相信有鬼神存在。传说凡是正常死的人,都可以投胎转世。那些罪孽深重,意外横死的人,死后变成“大庙不收,小庙不留”的孤魂野鬼。这些嗷嗷待哺的无主孤魂,游荡人间。有的恶鬼还会趁机骚扰世间活人,使人们遭到凶险意外而丧命。因此,每年这段时间意外死亡的人,往往被附会为“被鬼抓走了”。   为了让阴阳二界的人鬼都平安,我国自古以来,便有在七月设醮普渡的习俗。人们认为,为这些鬼魂举行“普渡”礼,一方面可以使他们早日脱离地狱之苦,另一方面希望他们不再骚扰世间活人。所以每年七月除了行“普渡”礼外,还在路旁多烧些冥纸,以广结冥福。后来演变成“放火灯”、“敬好兄弟”的习俗。   由于这样的普渡含有祈祷平安的意味,所以民间除了在七月十五中元节用丰盛的祭品祭拜各方“好兄弟”外,也请戏班演戏酬神,并大开流水席宴宾客,花费十分宠大。如今提倡节约,改良民俗,虽然仍有普渡活动,却精简多了。   会形成农历七月诸事不宜的文化习俗,是因往年七月是一串天灾人祸频传的日子,容易使人对这段时间心存恐惧,现今社会,许多的禁忌已渐渐禁不起时代的考验,但仍有些却是科学仍无法解释的事。   来历二:   每年农历7月14日是中元节又叫鬼节或着叫盂兰节是祭祀孤魂野鬼的大节日。   中元节源自道教,后来佛教改为现现在俗称的鬼节。盂兰节在印度语中意指“倒悬”,“倒悬”指的的是释迦十大第子目莲的母亲死后后受饿鬼之苦,不能吃东西。后后来得到释迦帮助。用百味五果供养十方神佛并藉功德救母亲。所以现在为了祭祀孤魂都在鬼月农历7月举行普渡会,现在叫鬼节。   一般来说古时候都不愿在这个月作嫁娶等重要事。   中元节的习俗   (一)普渡普渡时家家门前都会摆设祭品于供桌,屋檐下挂纸灯,用来照路,使孤魂野鬼能找到供养他们的地方。普渡通常以寺庙为中心,附近居民将祭品拿到寺庙来祭拜。   (二)放水灯是港口边特有的活动,目的是普渡水中的孤魂野鬼,因为靠海边,常会有人戏水溺毙或船员出船遭遇不幸的情形,所以除了陆地上的孤魂野鬼,也照顾水中的。台湾以基隆中元祭的放水灯活动最有名,每年中元节都吸引大批民众前往参观。   (三)抢孤台湾某些地方盛行在中元时举行「抢孤」的活动,孤棚是由在四根柱子所构成,上面涂满牛油,参赛者分成四队,从四个方向爬上孤棚,在孤棚的顶端,四边都有祭品在上面,先抢到的队伍获胜。这项活动在头城中元已成为最重要的活动,并吸引许多观光客前往参观。   来历三:   关于鬼节的来历,传说地藏菩萨,也就是人们常说的[阎王爷],他的母亲去世后来到阴朝地府,被关在牢房里少不得受十八层地狱的种种折磨,地藏菩萨是个孝顺的儿子,看到母亲受罪心中不忍,在七月十五这天竟恂私情,让看守牢房的小鬼偷偷把牢门打开放他母亲出来,谁知这一开牢门不要紧,牢房中的小鬼们蜂拥而出跑到人间为害百姓,所以就有了“七月半,鬼乱窜”之说。那些跑回家乡的鬼纷纷向家人索要钱财以便回去用来生活和打通关节希望早日托生。后来人们把这一天就定为[鬼节].鬼节这天,人们要烧纸钱,摆供品祭奠故去亲人的亡灵。   一般认为七月十五是鬼节的正日,亦是鬼门大开的日子,这时侯阴气最重,所以当晚最好不要出街,以免撞鬼,另外,最好亦不要到河边或海边等地,以免不小心失足,就成了水鬼的替身。除此之外,最好不要乱说一些不吉利或得罪灵界的说话,以免招惹阴灵。     2、别拍肩膀从灵学的角度来说,人的身上有三把火,分别在头及两个肩膀上,所以鬼月的时候最好不要随便拍别人的头及肩,以免熄掉他身上的火,让好兄弟有机可乘。   吃饭时不可以将筷子插在饭碗之上,其形状如同香插在香炉上,会招来好兄弟来与你分享食物;   3、不可吹口哨,当心好兄弟喜欢你;经过坟地时,口中要不断默念“对不起,打扰了!”并保持肃穆不可吹口哨,以表示对好兄弟的尊重。   4、不可去危险水域戏水,传说中“水鬼”会找人当替死鬼,以便投胎;   5、不可偷吃祭拜的祭品,与鬼争食,恐遭来厄运;   6、床头不挂风铃,因风铃会招阴;也不玩碟仙。   住家门口前别种容易卡阴的榕树,另外屋子内也别乱挂风铃,不玩碟仙、不上阴庙,这样可以减少阴灵上身的可能。   7、夜晚,少去荒郊野外或偏僻的地方,八字轻的人怕会撞见好兄弟;   8、地上的零钱及红包袋,不要乱随便捡起来;不要随便捡起路边的钱,因为这些钱可能是好兄弟们的,要不然这些就是冥婚招亲用的。   9、路经丧事场所,嘴里及心里不可有不敬的念头或言语;   10、忌乱踩冥纸或乱烧冥纸;   11、别乱靠墙休息没事不要乱靠墙,因为好兄弟平时最喜欢依附在墙上休息,此举很容易引鬼上身。   12、收好衣服防鬼“借”   晚上睡觉或天黑以前,要把晒在外头的衣服收回来,以免被鬼借去穿。半夜勿晒衣服;(半夜衣服的影子,很吓人的)   13、别乱照相夜游时最好不要乱照相,否则好兄弟会入镜与你合影,手电筒也不要往树上乱照,以免惊动喜欢附着于树梢上的好兄弟。   14、吃饭时不可以将筷子插在饭碗之上,其形状如同香插在香炉上,会招来好兄弟来与你分享食物;   诸多禁忌,族繁不及备载。其实,只要不影响正常生活作息,倒是宁可信其有不可信其无。对于许多人来说,不论灵验与否,至少也能求个心安。   有人习惯随身带着开运避邪物品,像带着庙里求来的护身符、佛珠,或粗盐、糯米等避煞物;十字架或者具特殊能量的矿石等。       鬼月禁忌:1、姓名勿直呼晚上不要穿戴绣有自己姓名的衣物,以免元神被附身,另外最好避免连名带姓的直呼别人名字,否则一旦给好兄弟听到后,会趁机取走他的三魂六魄,同时若听到有人喊自己的名字时,也千万不要立刻回头或回应。
85    전설중의 중국 주요 신선 라렬표 댓글:  조회:3698  추천:0  2012-07-17
传说中的中国主要神仙列表     由于此列表及小说《狮驼国》的人物设定,与原中国神话说法略有不同,并有自创的神祗,供爱好者参考。   盘古氏-又称元始天王,一名,浮黎元始天尊。 三清: 元始天尊 灵宝天尊 又名太上道君 道德天尊 又名太上老君(西游记里也称为太上道祖) 六御 中央玉皇大帝 妻:王母娘娘,又称为 西王母 北方北极中天紫微大帝 南方南极长生大帝,又名玉清真王,为元始天王九子。 东方东极青华大帝太乙救苦天尊 西方太极天皇大帝 (手下:八大元帅,五极战神(天空战神,大地战神,人中战神, 北极战神和南极战神)) 大地之母:承天效法后土皇地祗 五方五老: 南方南极观音 东方崇恩圣帝 三岛十洲仙翁东华大帝君(即东王公,名金蝉氏,号木公) 北方北极玄灵斗姆元君(佛教中二十诸天的摩利支天) 中央黄极黄角大仙 中央天宫仙位表 千里眼 顺风耳 金童 玉女 雷公 电母(金光圣母) 风伯 雨师 游奕灵官 翊圣真君 大力鬼王 七仙女 太白金星  赤脚大仙 广寒仙子(姮娥仙子)嫦娥 玉兔 玉蟾 吴刚 天蓬元帅 天佑元帅 九天玄女 十二金钗 九曜星 日游神 夜游神 太阴星君 太阳星君 武德星君 佑圣真君 托塔天王李靖 金吒 木吒(行者惠岸) 三坛海会大神哪吒 巨灵神 月老 左辅右弼 二郎神杨戬 太乙雷声应化天尊王善王灵官 萨真人 紫阳真人(张伯端) 文昌帝君 天聋 地哑 三官大帝:天官 地官 水官 四大天王: 增长天王、持国天王、多闻天王与广目天王 四值功曹: 值年神李丙 值月神黄承乙 值日神周登 值时神刘洪 四大天师: 张道陵、许逊(字敬之,号许旌阳)、邱弘济、葛洪 四方神 青龙孟章神君、白虎监兵神君、朱雀陵光神君、玄武执明神君。 四渎龙神 黄河 长江 淮河 济水河神 马赵温关四大元帅: 马元帅 又名马天君,又称华光天王、华光大帝 赵元帅 即武财神赵公明,又名赵玄坛 温元帅 温琼,东岳大帝部将 关元帅 关羽。 五方谒谛:金光揭谛、银头揭谛、波罗揭谛、波罗僧揭谛、摩诃揭谛 五炁真君:   东方岁星木德真君 南方荧惑火德真君 西方太白金德真君 北方辰星水德真君 中央镇星土德真君 五岳 东岳泰山天齐仁圣大帝 南岳衡山司天昭圣大帝 中岳嵩山中天崇圣大帝 北岳恒山安天玄圣大帝 西岳华山金天愿圣大帝 (五岳帝君:东岳帝君,名金虹氏,东华帝君弟。其它四岳帝君为东华帝君的四个 儿子。) 及 碧霞元君 五斗星君:   东斗星君 西斗星君 中斗星君 南斗星君 北斗星君 六丁六甲: 六丁为阴神玉女 丁卯神司马卿 丁已神崔巨卿 丁未神石叔通 丁酉神臧文公 丁亥神张文通 丁丑神赵子玉  六甲为阳神玉男 甲子神王文卿 甲戌神展子江 甲申神扈文长 甲午神卫玉卿 甲辰神孟非卿 甲寅神明文章 南斗六星君 第一天府宫:司命星君 第二天相宫:司禄星君 第三天梁宫:延寿星君 第四天同宫:益算星君 第五天枢宫:度厄星君 第六天机宫:上生星君 北斗七星君:(《狮驼国》中的北天七皇) 北斗第一阳明贪狼星君 北斗第二阴精巨门星君 北斗第三真人禄存星君 北斗第四玄冥文曲星君 北斗第五丹元廉贞星君 北斗第六北极武曲星君 北斗第七天关破军星君 (《狮驼国》中的北斗七星君为北斗星君的另一个称号:天枢、天璇、天玑 、天权、玉衡、开阳、摇光。 天枢、天璇、天玑、天权合起来又称为斗魁或璇,后三星组成斗柄,称杓) 八仙: 铁拐李、汉钟离、吕洞宾、何仙姑、蓝采和、韩湘子、曹国舅、张果老 增长天王手下八将:庞刘荀毕、邓辛张陶,其全名为 刘俊、荀雷吉、庞煜、毕宗远;邓伯温、辛汉臣、张元伯、陶元信(四目) 九曜星 金星 木星 水星 火星 土星 罗睺(蚀星) 计都星 紫炁星 月孛星 十二元辰 子丑寅卯等 二十八星宿 亢金龙、女土蝠、房日兔、心月狐、尾火虎、箕水豹、斗木獬、牛金牛、氐土貉、虚日鼠、危月燕、室火猪、壁水獝、奎木狼、娄金狗、胃土彘、昴日鸡、毕月乌、觜火猴、参水猿、井木犴、鬼金羊、柳土獐、星日马、张月鹿、翼火蛇、轸水蚓。 三十六天将 蒋光 钟英 金游 殷郊 庞煜 刘吉 关羽 马胜 温琼 王善 康应 朱彦 吕魁 方角 耿通 邓伯温 辛汉臣 张元伯 陶元信  荀雷吉 毕宗远 赵公明 吴明远 李青天 梅天顺 熊光显 石远信 孔雷结 陈元远 林大华 周青远 纪雷刚 崔志旭 江飞捷 贺天祥 高克 (三十六天将的版本是最多,以上仅供参考) 地上天仙表 姜子牙(亦为东华帝君,估计是木公的接班人) 蓬莱三仙: 福禄寿三星,   福神天官大帝,另一说是西汉杨成,又一说中是唐阳城   财神赵公明、(一说比干范蠡为文财神);   寿星南极仙翁,女寿星:麻姑 真武大帝,又名九天降魔祖师、玄武元帅。 龟蛇二将(又名太玄水精黑灵尊神、太玄火精赤灵尊神) 小张太子与五大神龙 黎山老母、镇元子 龙王东海龙王敖广 南海龙王敖钦 西海龙王敖闰 北海龙王敖顺 井海王 神霄派诸神 紫微北极大帝 玉清真王(南极长生大帝)--元始天王第九子 神霄八帝(多为道教虚构),玉清真王与神霄八帝合起来又称为神霄九宸大帝 东极青华大帝、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黄帝)、九天雷祖大帝等。 (太乙天帝、六天洞渊大帝、六波天主帝君、可韩真君、采访真君) 九司三省与北极四圣 九司:玉府判府真君、玉府左右待中、玉府左右仆谢、天雷上相、玉枢使相、斗枢上相、上清司命玉府右卿、五雷院使君、雷霆都司元命真君 三省:雷霆泰省、雷霆玄省、雷霆都省 北极四圣: 天蓬元帅(猪八戒) 手下天罡大圣、九天杀童大将(北斗第八星,又称天杀大神)、雷使者等。 天佑(猷)元帅 翊圣元帅 玄武元帅 真武大帝 另有:五方雷王、五方雷霆大帝 阴曹地府 北阴酆都大帝 五方鬼帝: 东方鬼帝蔡郁垒、神荼,治桃止山 鬼门关 西方鬼帝赵文和,王真人,治嶓冢山 北方鬼帝张衡、杨云,治罗酆山; 南方鬼帝杜子仁,治罗浮山; 中央鬼帝周乞、稽康,治抱犊山 罗酆六天(以下为宫名,六天为守宫神) 纣绝阴天宫、泰煞谅事宗天宫、明晨耐犯武城天宫、恬昭罪气天宫、宗灵七非天宫、敢司连宛屡天宫 地藏菩萨 十殿阎王秦广王、楚江王、宋帝王、仵官王、阎罗王、平等王、泰山王、都市王、卞城王、转轮王 其这将、臣:   首席判官崔府君、钟魁、黑白无常、牛头马面、孟婆神 上古神话诸神 混沌天神--较正式的说法,盘古为开天辟地之始神,但仍有部分传说中,混沌早于盘古 而生。 创世神 天吴、毕方、据比、竖亥、烛阴、女娲 上古四方天帝与辅神: 太阳神炎帝与火神祝融共同治理天南一万二千里的地方 少昊与水神共工建立天西一万二千里的地方 颛顼与海神禺强(又名冬神玄冥)治理天北一万二千里的地方 青帝伏羲与九河神女华胥氏及属神句芒治理天东一万二千里的地方 黄帝时代的诸神 陆吾、英招、离珠、金甲神(此神应是其它神的一种化身说,根据他我虚拟了狮驼国中的金甲雷神) 蚩尤、风伯雨师、赤松子、力牧、神皇、风后、应龙、魃、夸父、大力神夸娥氏、 大庭氏、五龙氏 炎帝,又称为神农氏 炎帝的女儿 女娃(后化身精卫鸟) 瑶姬,在《狮驼国》中又名婉华仙子。 还有一个小女儿,其名不可考,(拙著《狮驼国》中为炎天圣母) 少昊母为皇娥、长子春神句芒、次子秋神蓐收 颛顼的后代 四子:虐鬼、魍魉、送穷鬼、梼杌 后代:老童、太子长琴、黎、重、彭祖(孙) 帝俊 天上妻子:羲和、常羲 人间妻子(省略) 女丑、羿 鲧 妻女喜。 尧 又名:放勋, 妻女皇; 舜 姓姚,名重华,妻娥皇,女英; 禹,父鲧,妻女娇,又名涂山氏,系九尾白狐精 三皇: 指天地人三皇,分别是伏羲、神农与女娲。 五帝: 通常指 黄帝 颛顼 帝俊 尧 舜 其它--后天著名仙真表 房中之祖--彭祖 纵横始祖--鬼谷子 文始真人--尹喜 南华真人--庄子 求仙使者--徐福 茅山仙祖--三茅真君 万古丹王--魏伯阳 太极真人--刘安 诙谐岁星--东方朔 太平教主--于吉 役使鬼神--费长房 竹林狂士--嵇康 水府仙伯--郭璞 净明教主--许逊 蓬莱(都)水监--陶弘景 天师--寇谦之 情仙--裴航 扶摇子--陈抟 显化真人--张三丰 王重阳与全真七子(长春子丘处机、玉阳子王处一、广宁子郝大通、 清净散人孙不二、长生子刘处玄、长真子谭处端、丹阳子马钰) 其它--民间神灵不完全列表 天妃娘娘 城隍 土地神 门神 秦叔宝、尉迟敬德 床神(又分床公床母,前者又称九天监生明素真君,后者又称九天卫房圣母天君) 喜神 厕神紫姑 石敢当 小儿神项橐 朱天大帝崇帧 茶神陆羽 花神 染织二圣梅、葛 酒神杜康 土工祖师神鲁班 纺织神黄道婆 蚕神马头娘(山海经载为西陵氏,嫘祖) 狱神皋陶 梨园神唐明皇 马神 青蛙神白玉蟾 | 驱蝗神刘猛(取猛将军之意) 蛇王施相公(施全) 痘神张帅 农神后稷 瘟神:又称五鬼或五方力士,人间又有称五瘟,其中春瘟张元伯、夏瘟刘元达、秋瘟赵公明、冬瘟钟士贵、总管中瘟史文业。 窑神太上老君 贼神时迁 穷神 神管仲 武穆王岳飞 周公、桃花女 欢喜神和合二仙寒山、拾得 纯本书虚构主要仙魔表 太古猿君 魔佛老人 千面天妖 地心古龙 圣手仙王 圣手文王  天罗王(道教中为三清的一种化身) 乾坤大仙 颠倒老祖 穹天老祖 先天老祖 无极老祖 无为老祖  霹雳老祖 藤祖 幻仙子 清弥天诸神 阴阳法王 毒龙山千毒沼沼底---蟒神(有双翼) 南海深处一千里以下的---海皇(章鱼怪); 兽帝(九蛇头加龟背)(九婴与相柳借天地交合之气所造怪物) 霸王(长白山天池的箭恐龙) 天子梼杌(颛顼之子,住在北方玄冰宫)| 不坏林王狻猊(住在南方热带密林中,身坚胜铁,刀枪不入) 平天大圣牛魔王 覆海大圣蛟魔王 移山大圣狮驼王 驱神大圣野象王  浑天大圣鹏魔王 通风大圣弥猴王 齐天大圣美猴王 西天灵山仙佛表 三世佛:南无过去、现在、未来 注:通常三世佛分横三世佛与竖三世佛。 竖三世佛: 过去佛的燃灯上古佛,加上现在世的释迦佛(原名:悉达多),以及未来 世的弥勒佛 横三世佛: 中间是释迦牟尼佛,右有文殊菩萨,左立普贤菩萨; 右边是西方极乐世界的阿弥陀佛,两旁是观世音菩萨和大势至菩萨; 左边为东方净琉璃世界的药师佛,两旁日光菩萨和月光菩萨。 (因都有如来在,所以本文中就不增加三世佛这个名词.西游原著里,提 及了南无过去现在未来佛,本书中称之为三世佛。) 四大金刚: 五台山秘魔岩神通广大泼法金刚 峨眉山淸凉洞法力无量胜至金刚 须弥山摩耳崖毗卢沙门大力金刚 昆仑山金雫岭不坏尊王永住金刚 五方佛 东方不动(身)佛;南方宝生佛;中央毗卢遮那佛; 西方阿弥陀佛;北方不空成就佛。 八菩萨: 观音菩萨、普贤菩萨、文殊菩萨、地藏王菩萨、灵吉菩萨、大势至菩萨、日光菩萨、月光菩萨 十大弟子:   舍利弗智慧第一 目犍连神通第一 阿难陀多闻第一 优波离持戒第一   阿那律天眼第一 大迦叶头陀第一 富楼那说法第一 迦旃延论议第一   罗睺罗密行第一 须菩提解空第一 十八罗汉:   托塔罗汉 探手罗汉 过江罗汉 芭蕉罗汉 静座罗汉    骑象罗汉 看门罗汉 降龙罗汉 举钵罗汉 布袋罗汉    长眉罗汉 开心罗汉 喜庆罗汉 挖耳罗汉 笑狮罗汉    伏虎罗汉 沉思罗汉 骑鹿罗汉  十八伽蓝 美音 梵音 天鼓 叹妙 叹美 摩妙 雷音 师子 妙叹 梵响 人音 佛奴 颂德 广目 妙眼 彻听 彻视 遍视 二十诸天: 日天(又名日宫天子) 大梵天 多闻天 金刚密迹 鬼子母神;月天 (又名月宫天子) 帝释天 持国天 大自在天 摩利支天; (大)辩才天 (大)功德天 增长天 散脂大将 婆竭龙王;韦驮天(战神塞犍陀) 坚牢地神 广目天 菩提树神 阎摩罗王。 其它: 金顶大仙、阿傩、伽叶。 婆罗门教诸神 佛祖摩诃婆罗佛与婆罗三世佛(此四佛全部为虚构、以下人名为与如来有关的仙、人) 频婆娑、阿罗蓝、郁陀、提婆达多 主要大神:大梵天、湿婆楼陀罗、雪山女神杜尔迦、群主 婆罗八部(婆罗门天龙八部)-(婆罗八部为虚构,以下诸神为印度创世诸神)   水神伐楼那 土神陀湿多 风神伐由 日神苏里耶 天帝因陀罗 道神普善 保护神毗湿奴 阿修罗:底提耶与檀那婆 火神婆由。
84    전설중의 저승세계 십전 영라왕 댓글:  조회:4022  추천:0  2012-07-17
在中国民间广为流传的传说中的阴间十殿阎王   阎王,即阎罗王,或称阎罗大王,也称阎魔王。阎魔,即琰摩、琰摩罗,原系梵语之译音。阎王原是古印度神话中阴间的主宰,有兄妹双王之说,称兄治男魂,妹治女魂。以阎王作为阴间的主宰,掌管地狱轮回,大约在南北朝时传入中国。    原来阎王只有一人,由治事分现为五人,其僚佐有十八人。唐代时,就有天帝册封阎罗王,并由其统率五岳卫兵之说,同时也有地狱分为十殿,十殿均有主,称地府十王。十王各有名号,合称十殿阎王。    明清以来,十殿阎王之说盛行,以致有替代道教原有的东岳大帝主宰生死之势。但是民间少有专门奉祀十殿阎王的庙观(除了四川酆都)。一般均在当地城隍庙内设阎王殿,奉祀十殿阎王。各王诞辰之日,虽然也有香火,但主要奉祀十殿阎王,当是在为亡魂举行超度科仪之时,以祈求各殿阎王开释亡魂,使其早日受度升天。   这十殿阎罗王分别是:   第一殿,秦广王蒋,二月初一日诞辰,专司人间夭寿生死,统管幽冥吉凶、善人寿终,接引超升。功过两半者,送交第十殿发放,仍投入世间,男转为女,女转为男。恶多善少者,押赴殿右高台,名曰孽镜台,令之一望,照见在世之心好坏,随即批解第二殿,发狱受苦。   1.如是善人寿终之时,有的接引往生天堂,或西方极乐。    2.如是功过两半的男女,死后送交第十殿放投生人间。有的男转生女;有的女人转生男。    各按照在世时所造的业力、因缘,分别去接受果报。凡是在世恶行较多,善行较少的人,则引入殿石的高台,名为‘孽镜台’。台高一丈,镜子大约十圈围。向东悬捣,镜上并有书写七字:‘孽镜台前无好人’。被押解来此的多是在世行恶的鬼魂,自然见到自己在世时心地奸险的情形;以及死后赴地狱受苦的惨状。此时才知道:‘万两黄金带不进去,只有一辈子的罪孽,随着灵性到地狱来。’照过孽镜台后,再押解第二殿、开始被分发到不同的‘受刑所’,由地府的将军使用刑具,令罪魂们受尽诸种苦痛。其罪刑与罪因详情如下:    (1)自杀者的罪刑:假如有世人,不去思考天地生人,父母养育身体,珍贵异常,恩重如山的道理。尚有父母恩,众生恩、君亲恩、三宝恩等四恩未报。未奉到勾帖,阳世寿数未尽,就擅自轻生、生杀、上吊、服毒、投水等等的人,都是有罪的。除了因有坚守‘忠孝节义’的行为者,而因此牺牲生命者,死后可为神职之外,假若是因细小的忿恨,或因犯罪的羞事被发觉而即轻生者,追究其所犯的罪刑,并未至死刑的地步。也有的想嫁祸、加害他人,而弄假成真,轻生气绝以上诸种行为,门神、灶神,立即押解本殿,收入饥饿所与干渴所受刑。这些自杀的鬼魂,每逢戌、亥日,完全如临死时一般痛苦。一切痛苦的情境,照原来的样子,再出现一次。有的七十天,有的一、二年之后,押解其魂魄,再回到寻死的地方,受悔恨折磨之苦。并且不许接受羹饭、纸帛银钱等祭品的祭拜。假如自杀的鬼魂忏悔,恶心守藏,不现出鬼影魅形来惊吓人;也不乱找替死的人。那么等遭他牵累的人,已经脱离牵累,是日门神、灶神,仍然将此鬼犯押解到本殿,转发第二殿。重新考查校对他的功与过,或从重加刑,或再另递交各殿,配发地狱去受苦。假如曾经生现形影吓人或找寻替死的人,或用这些言语吓人、诈人;虽然未至于令人死亡;那么即使以前曾经行诸善事所有地狱也一概不准免其罪刑。若是轻生已死之后,毫不收敛鬼魅的形影,以致惊吓到人,令人丧命的话;立即命命 青面獠犽的鬼役,勾到各地狱去受苦。满一百日后,再发配入阿鼻大地狱,永远用锁链吊扣住,不许超生。    (2)诵经溘脱字句之罪刑:凡是修行人、出家人、道士、拿人家的钱,为人拜诵经忏,念诵遗漏字句、或页卷的;就会来本殿,发进补经所。罪魂各个送入内藏经忏,黑暗的小房间内。所有他所遗漏的字句之处,一概都签写明白,补诵清楚。此处设有油灯,贮存数十斤的油。只用一根细线点,有时明亮、有时黑暗,不能一口气就很快的补写完成,且通常一字要罚写百遍以上。    (3)修行起贪图供养者的罪刑:如果原本清净修行的出家人或道士,却发出贪心,枉求供养以享受世人的施福者,也得在此补经忏悔。此乃诫告出家的修行人,在世受众生供养,应肯受苦磨练,一切应利益众生,千万不要享受过多。不然死后补经所里便有一份。看来以白阳修士之性命双修,火宅炼性较为可靠,在家修亦可修成,上帝有命也属应运之法。    (4)诚心修行,弘扬佛法者之利益:一般在家修持的善男信女或尼姑,十分虔诚,心口如一地拜念一切经、咒、佛唬。即使有错误、遗漏,然而重在诚心,而不重在字句。此等诚心修持之人,古佛降旨可不补经,每月初一,并将其功德记录于善籍之中。世间之人,若于每年的二月初一日,向西方至诚地神拜,学习阿弥陀佛甘灵王清净,利益一切众生的庄严万德。将平常忆念行持佛号,及诵经、持咒、严守戒律,行内功外德,发大愿力,祈当生得证极乐世界的性德。并且发誓精进修持,尽力地宏扬佛法,利益一切众生。那么寿终之后,立即蒙佛接引,往生极乐。   第二殿,楚江王历,三月初一日诞辰,司掌活大地狱,凡在阳间伤人肢体、奸盗杀生者,推入此狱,另发入到十六小狱受苦,满期转解第三殿,加刑发狱。楚江王主掌大海之底,正南方沃燋石下的活大地狱。此地狱纵横八千里(五百由旬),另设十六小地狱:    一名黑云沙小地狱    二名粪连泥小地狱    三名五叉小地狱    四名饥饿小地狱    五名燋渴小地狱    六名脓血小地狱    七名多铜斧小地狱    九名驻铁铠小地狱    十名豳量小地狱    十一名鸡小地狱    十二名灰河小地狱    十三名研截小地狱    十四名剑叶小地狱    十五名狐狼小地狱    十六名寒冰小地狱    如在阳世曾犯以下罪恶:   拐骗少年男女。欺占他人财物。损坏他人的耳、目、手脚。介绍疗效不明的医生、药物来谋不道德的利益。役使的婢女,已经壮年,却不让家人赎回,恢复自由之身。在议结婚姻之时,为了贪图对方的财富、地位,故意隐瞒自己的年龄,以诈骗婚姻。在二家尚未合婚确定之前,已确知男方或女方,实在是染有恶疾,重病,或是有奸淫、窃盗,品德低裂之人。为了赚取介绍费,不惜昧着良心,而含含糊糊地掩饰过去,不将实情相告,以致误人一辈子的幸福者。    以上的罪恶的事迹,一一地考查所犯事件的多少,时间的长久,有没有造成祸害,或变生严重的事端。如有,即命令狰狞、赤发等鬼,将之推入大地狱受苦。另外,也有应其罪恶之大小,再发放到其它小地狱受苦。以上受刑期满,再转交押解到第三殿,加重刑罚,并发入此殿之地狱去受苦。    劝世上的善男、信女等,应有以下善行:常将玉历中的内容,解说给世人知道,使他知所警惕。或将玉历印赠流传。看到人生病,即为请医生治疗,或好药相赠,盼其早日康复。遇到贫穷、苦难的人,就炊煮粥饭供食,或布施金钱救济他等。    以上善行之人,若能同时悔改前非,则特赐恩准将功抵过其余未能相抵的罪,则宽予勿论。在寿尽命终之时,就交由给第十殿,发放投生珍贵的人道福地。如有能爱惜众生,不妄杀害生灵者。以训示劝导儿童,不要伤害昆虫者。于三月初一日时,发愿戒杀放生者。    以上善行之人,命终之时,不用入所有地狱,立即交第十殿,发放往福报深厚的地方。     第三殿,宋帝王余,二月初八诞辰,司掌黑绳大地狱,凡阳世忤逆尊长,教唆兴讼者,推入此狱,受倒吊、挖眼、刮骨之刑,刑满转解第四殿。 宋帝王主掌大海之底,东南方沃燋石下的黑绳火地狱。此地狱宽广八千里(五百由旬),也另设十六小地狱:    一名咸卤小地狱    二名麻缳百纽小地狱    三名穻肋小地狱    四名铜铁刮脸小地狱    五名刮鲁小地狱    六名钳挤心肝小地狱    七名挖眼小地狱    八名铲皮小地狱    九名需刖足小地狱    十名拔手甲小地狱    十一名吸血小地狱    十二名倒吊小地狱    十三名刀截小地狱    十四名蛆蛀小地狱    十五名击膝小地狱    十六名割心小地狱    如在阳世时,曾犯以下罪恶:    不认为领袖、主官的恩德最大,以人的生命最重要,或当官,有地位之时,对主官不忠诚,存心背叛,不顾恤他人的生命。赽行公盼的人,见了利益,就忘了道义,缺乏爱国、爱民之心。身为丈夫的人,不行道义;身为妻子的,言行不柔顺。身为养子,受长期养育的恩惠;等到得了财产,立即忘恩负义,不顾父母之养,而回去生父生母身边的人。佣人,或受人之托办事,却辜负、背叛。职员或基层士官兵,背叛主管或长官。为业主办事,同事间却伙同设计诈财。犯罪入狱,却越狱潜逃。或者因罪押解他方,中途逃走;因为押运的官兵曾经具名连保,以致连累了这些官差的亲属。经过漫长的时间,又未向事主忏悔,弥补其损失。虽然事后多做善事,仍需发入地狱,承受诸种苦刑。为了讲究风水的年运,以致阻止丧家出殥,埋葬;令亡者不得入土为安。造坟挖士时,看见地下埋有别人的棺椁或尸骨,却不马上停止,换另外的龙穴;以致伤损他人的尸骨。为人管事,私自偷窃,漏列金钱、粮食,占人便宜。祖先的墓地不去祭扫,久而遗失踪迹。引诱他人犯法;挑拨是非,制造纠纷,欺骗人打官司,伤人和气。写匿名信诬蔑别人。乱写公告,文章,毁损别人的名誉。捏造退婚的字据,以帮人解除婚约。造假契约,来往书信,以诈取别人的钱、债券。本未加注明,也未签名,随便套描别人的签名样式,假刻别人的印章。目的用以添加、删改帐目,让后人受害。以上事件有违犯的查对事的轻重,命派大力鬼先推入大地狱受苦。另外再依所犯事情之类别,配入小地狱。   世人假若能于二段初八日,发誓立愿,持戒永远不再违犯。死后就准许转发别的福地,不用进地狱受苦。     第四殿,五官王吕,二月十八日诞辰,司掌合大地狱,又名剥剹血池地狱,凡世人抗粮赖租,交易欺诈者,推入此狱,另再判以小狱受苦,满日送解第五殿察核。五官王掌管的地狱在大海之底,正东方沃燋石下的合大地狱。此地狱宽广各八千里(五百由旬)。也另外设有十六小地狱。    一名池小地狱。    二名炼竹韱小地狱。    三名沸汤浇手小地狱。    四名掌流液小地狱。    五名断筋剔骨小地狱。    六名肩刷皮小地狱。    七名肤小地狱。    八名鐏峰小地狱。    九名铁衣小地狱。    十名木石土瓦小地狱。    十一名戮眼小地狱。    十二名飞灰塞口小地狱。    十三名灌药小地狱。    十四名油豆滑跌小地狱。    十五名刺嘴小地狱。    十六名碎石埋身小地狱。   世人若犯以下事件者,配入此处:    (1)漏税不缴。    (2)耍赖不给租金。    (3)买东西用重秤,以占人家便宜。    (4)配合假药,当真药卖人,延误人治病,或加重病情者。    (5)泡过水的米,仍当好米卖人。    (6)买东西时用假银子(钱)给商家。或者将零头的钱扣下不给。    (7)卖一些惑人心思,引人虚荣的香油、香水、鲁粉、丝绸、绫罗、色情影带书刊等物品。    (8)路(车)上遇见跛足、残废的老人、幼童,不立刻让路、让坐。    (9)暗中霸占,诈欺一些较无知识的乡民,以及年老、幼小的人,或者肩挑贩卖,辛苦赚取微薄利润的人。    (10)受人话付,寄线失家书,不很快地交付给对方,误人掀讯息。    (11)窃取街道上铺的砖,或石块,以及夜晚照明的灯、萤,造成交通危险。    (12)穷人不安分守己,贪图意外之财。    (13)富人不怜老恤贫,多行救济。    (14)假如有人来借钱,起先答应借贷,到时候却故意落空不借,以致误了人家的大事。    (15)见人生病,家中收藏有药物,却吝啬不提供出来。    (16)有很有效的方剂,却秘藏于己,不传授出去。    (17)煎过的药渣、或碎碗、杂物、废弃的器械,乱放在街道上,影响车、人的行走(垃报宜分类)。    (18)无缘无故养驴、马等兽类,以致连、粪妨础碍行人或环境卫生。(动物宜圈养好)。    (19)田地无法率作,不租给他人懂植,故意荒蕉废弃。    (20)损坏他人的墙壁。    (21)用咒语、法术、驱使鬼神,来捉弄人。    (22)乱造惊人之言,以惊吓人。    以上事端,经查核所犯事件的大小,命令鬼卒,先推入各大地狱去受苦。再另外判发所属罪业的小地狱,去受苦刑。期满之后,再押解送到第五殿,考察审核其功过。世人假若在每年的二月十八日这一天,发誓、悔改、不再违犯的话,可以免入本殿各地狱受苦。假如钞写玉历全书;或者续加古今因果报应的事迹,在各殿的章句之后,来劝化人为善,流传后代,使阅读的人从此悔改,免于犯错,则中自有功德。     第五殿,阎罗天子包,正月初八日诞辰,前本居第一殿,因怜屈死,屡放还阳伸雪,降调此殿。司掌叫唤大地狱,并十六诛心小狱。凡解到此殿者,押赴望乡台,令之闻见世上本家,因罪遭殃各事,随即推入此狱,细查曾犯何恶,再发入诛心十六小狱,钩出其心,掷与蛇食,铡其身首(包公即善于用铡刀),受苦满日,另发别殿。   阎罗天子说:‘我本来是居于第一殿;因为可怜冤死的人,屡次放还阳间伸冤,洗雪清白,所以降调司掌大海之底,东北方沃燋石下的叫唤大地狱。并管理十六个诛心小地狱’。    所有分发到本殿的鬼犯,均已经受尽前述的地狱之苦,且已受罪很多年。亦即在前四殿查核没甚么大过错的,每人各按七日之期,解到本殿。这些人,在本殿也查不出丝毫作恶的事迹。其尸到五七日,没有不腐败的。    这些鬼犯都说:“在世还有善愿尚未完了,有的说修理、建盖寺院、桥梁、街路;开河沟,挖水井;或者辑集劝善的书与文章等等善事尚未完成。或是放生的数目未圆满;父母尊亲奉养或死葬之事尚未全备周到;另有受恩而未报答”。    为了以上等原事,研求准许放还阳世。因此没有一个不是立下誓愿,一定要做好人的。    本王我听了,说:“你们以往在世之时,恶名召彰,神鬼了解得非常清楚。在如同已到江水中间的船,发现漏水,要补已迟了。可见阴间要是没有怨恨的鬼;阳间就少有仇怨的人。真正修养德行的人,世间真是难得少有。现在来到本殿的鬼犯,照过孽镜台后,自然知道自己是恶类。不用多说!牛头马面押上高台去望乡吧!”在此所设之高台,名叫‘望乡台’。‘望乡台’的面半圆形,朝向东、西、南三向。此台的弯面有八十一里;台后平直,如同弓弦。北方,以剑树立为城墙。台高四十九丈。以刀山为山坡,砌成六十三级的阶。   善良的人,不用登上此台;功过相半的人,已发放往生轮回去了。只有作恶多端的人,才登台一望:下面的情景,实令人有感而悲:站在此地时,故家乡如在眼前;所有的男女家人,亲友的言语、行为,都看得见、听得见。在此看见老老少少,再也不遵从自己死亡前的吩咐与教训。所有自己以前决定的事,也全变换了,如今已一件件地改掉。辛苦赚来的财物,竟被搬运一空。先生再娶小老婆;太太也再度改嫁,相守的甜蜜岁月早已忘了。田地、财产、也被瓜分了。原来清楚的帐目,被贪污得混溷不清。死人欠活人的帐,分文都难少;活人所欠他的,由于失去证是据,一概耍赖,恶形恶状地搪塞掉。所有的错误、罪恶,全推给死人,认为死后他并不知道,也可避开责任。所有父亲、母亲、妻子的族人,全怀怨地评论死后的自己。儿女个个心怀私心;朋友则早已失去信用。或是略有几个亲友,想念自己在世的情分,抚棺哭几声;一回头,马上又冷笑两声,所谓出于颜面之情。以前在世时所造的罪恶,逐渐出现恶报。儿子因犯罪,被系入狱;或被坏朋友带坏了。女儿则生了怪病;或被人奸淫。事业瓦解了;房屋被火烧了。大大小小的家产,很快地消耗光了。其实,作恶得到报应的,又何只是阴魂呢?有些阳间的人,也会亲眼目睹自己的恶报。    所有邪恶的鬼犯看了以上情景后,押入叫唤大地狱内。仔细地考查曾犯何种罪恶后,再分发进入诛心小地狱去受受苦。小地狱内,各地埋设险恶的木桩;用铜蛇做成的链子;用铁铸的狗做土堆,将人缙绑、压制住手脚。再用一小刀,将人开破肚,钩出心脏。一块块地割下来,心给狗吃;肠子给蛇吃。   如此受苦期满之日,痛止皮肤完好,再分发以下各地狱去受苦:    一名将不敬鬼神、猜疑是否有因果报应等心肠割掉的小地狱。    二名将杀害生命等心肠割掉的小地狱。    三名将善愿未完,就先行罪恶等心肠割掉的小地狱。    四名将亲近邪恶,行为错误、违背正理;学习方术,妄想长生等心肠害掉的小地狱。    六名将计较名利、是非,移祸他人等心肠割掉的小地狱。    七名将强奸妇女;设计令妇女失贞;引诱妇女委屈地顺从自己的淫意;或者不论有无谋 害之意,与妇女贪恋淫乐等心肠割掉的小地狱。    八名将损人以利己等心肠割掉的小地狱。    十名将偷窃、盗取别人财物;昧着良心,耍赖而不还显债等心肠割掉的小地狱。    十一名将忘恩负义,以仇报怨等心肠割掉的小地狱。    十二名将好斗、好赌、好胜,以致牵连、干累他人塑心肠割掉的小地狱。    十三名将为了名利、欺骗、诱惑大众等心肠割掉的小地狱。    十四名将自虽未亲自加害,但却狠毒地教唆他人去害人,等心肠割掉的小地狱。    十五名将妒嫉善善良、贤能等心肠割掉的小地狱。    十六名将执迷不悟,死不改过;诽谤他人等心肠割掉的小地狱。    世间的人,凡是犯了以下罪行,即入此等地狱:    不信因果,阻止别人行善事。    借名去庙寺拈香礼佛,却谈论别人的是非。    烧毁劝善的书藉籍、文章。    礼拜神、佛,却吃食荤肉。    厌恶别人念佛、诵咒。    作佛事:如普渡、超渡亡魂,观音法会、浴佛节等时,不吃素,不持戒,清净身、口、意三业。    诽谤学佛、修道的人。    识字的人,不肯将古今报应的故事,劝世的文等,念给未识字的妇幼等人知道。    挖掘别人的坟墓,再予以填平灭迹。    放火蔓延,焚毁山林;或疏于防犯家人,以致失火延烧邻居。    射箭或用枪枝,射杀丽离兽。    引诱、逼迫几疾病,廋弱的人来比赛体。令其自卑或伤身。    隔墙抛掷瓦石,误伤行人。    用毒药在河流中毒杀鱼类。    放置射杀鸟类的火枪暗器;造捕杀鸟类的陷阱;或以盐卤、毒药等洒于草地。    死猫、毒蛇等物不埋入深土中,以致有人挖出;留下的洞穴,害人丧命。    冬天春天寒陈时开垦,挖掘土原,令虫类陈死;拆墙、改,致令人受寒受饿。    私人的身份,却僭用官家的头衔,以势力霸占民。    无缘无故僰塞水井、水沟,致令人饮水不便。    如果违犯了以上各项罪事的,即押赴望乡台,发入叫唤大地狱。受苦之后,如果应该割碎心脏的,就押交给各层小地狱,判罪受刑。刑期满后,转解第六殿,查对有无其它的罪。   假如世人在世时,不论有否犯前项等罪事,凡能在正月初八日吃素,持戒身、心、意清净者,誓愿不再犯罪的话,不仅本殿各狱的刑罪可以避免,并且准许请求第六殿减轻刑罚。    除了杀生害命;亲近邪恶;行为违反正理;男奸淫毒害妇;妇人贪净、泼悍、妒恨;损害妇女名誉节操;偷盗财物,昧心耍赖;忘恩报怨;以及在生时执迷不悟,即使见闻劝善的文章句子,也不立即悔改的人以外,其余则一概可轻易地减刑。   第六殿,六城王毕,三月初八日诞辰,司掌大叫唤大地狱,及枉死城,忤逆不孝者,被两小鬼用锯分尸。凡世人怨天尤地,对北溺便涕泣者,发入此狱。查所犯事件,亦要受到铁锥打、火烧舌之刑罚。再发小狱受苦,满日转解第七殿,再查有无别恶。六城王掌理大海之底,正北方沃燋石下的大叫唤大地狱。宽广八千里(五百旬)。四周另有十六小地狱。    一名常跪铁砂小地狱。    二名屎泥浸身小地狱。    三名摧流血小地狱。    四名钳嘴含针小地狱。    五名割肾鼠咬小地狱。    六名棘网蝗钻小地狱。    七名碓捣肉浆小地狱。    八名裂皮 擂小地狱。    九名衔火闭喉小地狱。    十名桑火小地狱。    十一名粪缺小地狱。    十二名牛雕马躁小地狱。    十三名窍小地狱。    十四名头脱壳小地狱。    十五名腰斩小地狱。    十六名剥皮揎草小地狱。    世人若犯以下罪事,即入此地狱:    怨天尤地;讨厌风,咒骂雷;喜欢晴,厌恶雨。    对着北方(天空)大小便,或哭泣等。    偷窃神佛装坠法身时内藏的宝物。    刮取神圣佛像法相上的金银宝物。    随便乱呼叫神佛的名讳。    不尊敬、爱惜有字之纸、与经书。    寺庙、道观、宝塔的前后,泼洒、堆积污秽的东西。    家中供养神佛的法像,于厨灶中煮食荤、肉等不洁的东西;尤其吃牛肉、狗肉,对佛、神、更是大不敬。    家中保存、收藏违背正理的书籍,黄色书刊,色情影带等。    烧毁涂损劝善的书籍、文章、器物。    随意雕刻、绘制神圣的图像在日常使用器具上,例如:太极图、日月、七星,和合二圣、王母、寿星,所有的仙佛,三世诸佛的形相或*字花样等,在一切衣服、器具上。    在衣裙上绣上龙风的图像。    浪费、糟蹋五谷。    囤积米粮,期待卖高价钱。    犯以上的罪事,都发入大叫唤大地狱。再查出所犯的事件性质,分发至小地狱受苦刑。期满再转解第七殿,考查有无第七殿管辖的罪恶。世间的人,能在三月初八日,聒素、持戒,清净身口意,发誓立愿:今后不敢再犯以上的诸罪;并且能够每逢五月十四、十五、十六日;十月初十日,持戒不行房事。同时,立愿此后要辗转劝诫别人。如此,则准许免受以上诸小地狱的苦刑。   第七殿,泰山王董,三月二十七日诞辰,司掌热恼地狱,又名碓磨肉酱地狱。凡阳世取骸合药、离人至戚者,发入此狱。再发小狱。受苦满日,转解第八殿,收狱查治。又,凡盗窃、诬告、敲诈、谋财害命者,均将遭受下油锅之刑罚;泰山王掌管大海底,西北方沃燋石下的‘热恼大地狱’。此地狱周围八千里(五百由旬),并另设十六小地狱:    一名捶自吞小地狱。    二名胸小地狱。    三名笘腿火逼坑小地狱。    四名丫杈抗发小地狱。    五名犬咬胫骨小地狱。    六名燠痛哭狗墩小地狱。    七名剆顶开额小地狱。    八名顶石蹲身小地狱。    九名貒鸨上下啄咬小地狱。    十名皮猪拖小地狱。    十一名吊笚足小地狱。    十二名拔如穿腮小地狱。    十三名抽肠小地狱。    十四名骡踏獾嚼小地狱。    十五名启手指小地狱。    十六名油釜滚烹小地狱。    凡是在阳世,曾犯以下罪事,发入本地狱受刑:    炼食红铅、阴枣、人胞,等壮阳动淫的药物害人。    酗酒,以致做出违悖常理,动乱横暴,令亲人伤心的事。    浪费不节省,挥难无度,令前人辛苦之成果,毁于一旦。    用抢夺、设计引诱,诈骗贩卖的方式,诈取钱财。    盗取棺材内的衣物宝饰。    盗取死尸,或死骨来当药。    将他人最爱的亲人、戚友,予以离散。令两地思念,相见不得,痛苦万分。    将不喜欢的童养媳,卖给人当婢女、小老婆,毁其一生的幸福。    听任妻子,或溺爱的女儿,堕胎者不予劝诫,致犯杀生之重罪。    纠结朋友赌博,致令输钱,败家;影响一个庭,陷入贫苦之中。    为人师表的人,教导学生不严格,以致误他人子弟的前程。    不顾所犯事情的轻重、前后,猛力拷打学生、婢女、佣人以泄愤。令受打者冤苦莫名。含恨不宣;而且暗伤得病,终生痛苦者。    仗着财势雄厚,欺凌侮辱乡里的人。   第八殿,都市王黄,四月初一日诞辰,司掌大热大恼大地狱,又名恼闷锅地狱。凡在世不孝,使父母翁姑愁闷烦恼者,掷入此狱。再交各小狱加刑,受尽痛苦,解交第十殿,改头换面,永为畜类。都市王掌管大海之底,正西方沃燋石下的‘大热恼大地狱’。此地狱宽长八千里(五百由旬)。另设十六小地狱。   一名车崩小地狱。    二名悉锅小地狱。    三名碎剐小地狱。    四名 孔小地狱。    五名翦小地狱。    六名常圊小地狱。    七名断肢小地狱。    八名煎肢小地狱。    九名炙髓小地狱。    十名爬肠小地狱。    十一名焚膲小地狱。    十二名开膛小地狱。    十三名 利胸小地狱。    十四名破顶撬齿小地狱。    十五名 割小地狱。    十六名钢叉小地狱。   世人若犯以下罪事,发入此殿地狱:不知孝道,双亲在世时不能奉养;双亲去世后,不能予以安葬。致令父母,翁姑惊恐、害怕、愁悉、烦恼。假若不快忏悔前非,胡涂过日一久,灶神先将这些男女,记下名字,上奏 玉帝,减少或除去衣食的福报与禄位。并听任邪鬼随身作崇。死后要受前面各殿地狱的诸种刑后,再押解送到本殿。牛头、马面各鬼卒倒拖此等鬼犯,掷入大地狱去受苦,再交个小狱分别加刑。受尽痛苦后,解交第十殿的‘转劫所’内,改头换面,永远投胎为畜生。假如有世间的善男信女,遵信‘玉历宝钞’中之所述。立即忏悔前非,于四月初一日,发誓改过,不再犯错。并且无论何月何日;无论早上、晚上,如对 灶神立誓:‘从今以后,知道改过。’无论何时均能不再犯错。若能如此,则在临死之时,自宅的灶神,将其分作三等处理:有的在额上写一“遵”字;有的写“顺”字;有的写一“改”字。    交勾使与鬼卒,带到第一殿;并依次带到第七殿。即使有犯各殿诸罪,也都减去一半的刑罚。并且不用解送本殿来受苦,立即交第九殿。如果经查未犯放火等阴毒的罪事的话,随即交给第十殿,分别发放投生人道。至此 玉帝特别加恩批示说:‘假若再能传抄,印行玉历宝钞,使世间的男男女女等,知所警惕的话,从第一殿到第八殿,各种苦刑,都可以避免。第九殿再查,假如也没有犯本殿之过错,立即交给第十殿,发往投胎到有福气的地方,出生为人。’   第九殿,平等王陆,四月初八日诞辰,司掌丰都城铁网阿鼻地狱。凡阳世杀人放火、斩绞正法者,解到本殿,用空心铜桩,链其手足相抱,煽火焚烧,烫烬心肝,随发阿鼻地狱受刑。直到被害者个个投生,方准提出,解交第十殿发生六道(天道、人道、地道、阿修罗道、地狱道、畜生道)。平等王掌理大海之底,西南方沃燋石下的‘阿鼻大地狱’。此地狱围绕、重迭。其周围广八千里(五百由旬)。在密密铺设的铁网之内,另设十六小地狱。   一名敲骨灼身小地狱。    二名抽筋擂骨小地狱。    三名鸦食心肝小地狱。    四名狗食肠肺小地狱。    五名身溅热油小地狱。    六名脑箍拔舌拔齿小地狱。    七名取脑猬填小地狱。    八名蒸头刮脑小地狱。    九西羊搐成醢小地狱。    十名木夹顶 小地狱。    十一名磨心小地狱。    十二名沸汤淋身小地狱。    十三名黄蜂小地狱。    十四名蝎钩小地狱。    十五名蚁蛀熬 小地狱。    十六名孙赤毒蛇钻孔小地狱。   世人犯以下罪事,应入本地狱:    犯了元首、帝王所制定的法律条例中,像十恶中的极恶;应受凌迟,斩头,绞刑,枪决等罪事。这些鬼犯在先前各殿地狱受诸种种苦刑后,解送到本殿受刑。 放火焚烧房屋,毁人家财、生命。制造迷惑人心性的思想、方法、或团体(蛊毒)等。    或者制造令人心识迷幻的药物,如安非他命、吗啡、大麻等。 专门为人堕胎的人。    专门诱惑少男、少女‘性犯罪’,伤害发育未成熟的身心。或者,强暴未成年少女。    绘画黄色的图画、书籍,拍摄黄色的影片,以扰乱人清净的心。致读书人无心于课业;修行人退失道心;造成疾病更为严重,人人不安于室者。    炼制有害社会的违禁药物,例如:迷幻药、各种使人失去听觉,语言能力的毒药或堕胎药。    假如犯了以上罪事的人,若自从听闻‘玉历宝钞’的内容,能立即毁去淫书淫画的画稿与印刷的锌版,不再印行。将制造违禁药物的方法,配方销毁;息止一切邪恶的念头,从此不再传授以上的邪术者。若能如此,则准许免去各种苦刑。并立即交给第十殿,发放投胎人道。反之,如果闻知此‘玉历’的报应内容,仍然去做以上的罪事的话,则罪刑不能得到宽贷。且要从第二殿开始受苦刑;直到本殿,加重刑罚,添设极刑的刑戮;诸如:将空心的铜柱,其中以火煽热,到能焚烧、荡毁心肝的程度;而后用链子炼住手脚,抱住炽热的铜柱,此苦可想而知,世人应知勿犯。   在遍受各小地狱的诸种刑罚之后,再发入‘阿鼻大地狱’,受各种苦刑:    有尖刀穿过肺脏、胸部。口中含着挖出的心脏,渐渐陷入地狱幽暗的深处,诸如此种痛苦将永无休止。一直要到那被害者的家,家业复原;死者个个另投人身。当年所画的黄色图片及画籍、影片;所印行的毒药配方;所有鬼犯亲手印行,及辗转钞刻的书、图、影片等物完全消失、毁灭尽净后,才可准许提出此‘阿鼻大地狱’。再解交第十殿,发放投生人道,故犯此等罪业的人,通常是生生世世都困在‘阿鼻大地狱’内,因为所造业力循环难消。世人假若未犯以上的恶事;而且肯在四月初八日;或在初一、十五日吃素、清净身、口、意三业,而后立下心愿:收买色情的书、画、影片;色情的邪术、器物、药物,聚集来焚毁,并劝此商人,从此勿再卖这种伤风败俗的东西。或者印行,传抄此‘玉历宝钞’。使能辗转,一个传一个地劝化世人向善者。则在命终之时,灶神在他的额端上写下‘奉行’两字。从第二殿起,到本殿,凡是曾做各种罪事的,都可以此功德,减轻其罪刑。若是富者、有权势的人,能严格缉拿放火的凶徒;搜集色情的画、书,刻版,予以公开销毁;并公告禁止所有遗害人间的物品,则准予庇荫现世的子孙,科甲绵绵,富贵不绝。贫穷、苦难、孤独、病老的人,假若肯尽力请人印行,传钞‘玉历宝钞’,以劝化世人的话,准予立即送交第十殿,发往福地去投生。   第十殿,转轮王薛,四月十七日诞辰,专司各殿解到鬼魂,分别善恶,核定等级,发四大部州投生。男女寿夭,富贵贫贱,逐名详细开载,每月汇知第一殿注册。凡有作孽极恶之鬼,着令更变卵胎湿化,朝生暮死,罪满之后,再复人生,投胎蛮夷之地。凡发往投生者,先令押交孟婆神,酴忘台下,灌饮迷汤,使忘前生之事。转轮王,殿居阴间沃燋石外,正东方,直对五浊世界的地方。设有金、银、玉、石、木板、奈何等六座桥。专门管理各殿押解到此的鬼魂,分别核定其罪福的大小,发往四大部洲的适当地方投生。该投生为男身,或女身 长寿、或短命 生富贵之家,或投生贫贱之家。将这些投生的人,一一地详细记载。每月汇集起来,通知第一殿,在注册后,送呈‘酆都城’,由酆都大帝交办。 再根据阴律,分为:   胎生、卵生、湿生、化生;无足、两足、四足、多足、等类。    各类的生灵,死后为鬼。再依罪业、功德之大小,依次投胎: 有些一年或一季即死;有些朝生暮死,反复地依罪变换。 不管是必定被杀而死,一律送到‘转劫所’内,考查、计算其在世时所犯的过错,分发各方去受报应。到了岁终之时,汇集受报情形,送交‘酆都城’由酆都大帝备案。有些人在阳世熟读佛典、经咒的读书人;或勤诵经咒的僧人道士。因犯罪被勾到阴间时,由于念诵佛经、咒语,以致诸地府将军不能用刑,使他暂时来逃避刑罚受苦报的人,就押解到本殿处理。    按照姓名,注明所犯罪刑,并且绘出本来的面目,名叫‘堕落生册’。依据此册,押交孟婆尊神(孟婆神)的‘醧忘台’下,灌饮迷汤,再派鬼卒押投人胎,令其转世时,死于母胎腹中。或者出生才一、二天即死;或百天、十天;或一年、二年,即很快死亡。如此便可使他忘记在世所学的三教真言、咒语。    之后,再命命厉害的鬼卒,勾到各地狱,考查、察究前生所做恶事,补受苦报。 凡是解到功过各半;以及已受苦报期满;功少过多的鬼魂,立即勘酌其罪功,订定来生的福报后,投胎:有些来生美丽;有些来生丑陋;有些生活安乐;有些生活劳苦。确定发往何方富贵、贫贱之家的人,即交到 孟婆神的‘醧忘台’下,饮食‘孟婆汤’后投胎。    在本殿点名发放,投胎人道之时,常常有妇女苦苦哀求,供称:还有切齿含恨的冤仇未报,甘心当饿鬼报仇,不愿做人。’经询问其情由后,其状况大多是:“未出嫁的少女,或原本是心地贞洁的妇女,因为被读书中的不良少年、中学生、大学生等看上,由于贪爱她的美貌,或者图谋夺取其财物,乃献尽殷勤;百般投其所好,用尽计策,不择手段地诱惑成奸。”有的骗说:‘我还没结婚,一定会请媒婆去说亲迎娶。’有的甜言蜜语,欺骗婢女,企图纳为小老婆。有的骗说答应奉养她年老的双亲;或允许抚养她前夫的子女。此等好话说尽,以致误认真情,而被骗取感情,痴心地以为遇到可以依托终身的人,因此柔顺地听从他的要求。自从失身相与,玩弄一久厌心渐生,将答应的婚事与约定,一再拖延,不愿履行,企图始乱终弃。或甚至反而口出恶言,激扬丑闻,以致令父母、兄弟知道;被亲友、邻居轻视、鄙弃。遭来无情的责备与羞辱。此等冤曲无处申诉,而羞忿过度自杀;或者得到气郁的肝病而死亡。   死后在阴间知道,这个负心的贼,这次的科举考试将考中。顿时忿恨难消,悲号哭泣地要求准予索命。阎王细查,发觉果然是事实;但该生阳寿实未终了,同时,他的祖德未享受完尽。本殿姑且准许该女鬼带着‘令牌’,进入考试的地方。阻止、惑乱他的考试;或者更换榜上的名字。再等到命终该绝之日,准予地府将军带至冤仇人的住处进门索命,勾到第一殿查核罪事,判断罪刑之轻重。世人假若在四月十七日,发誓要立下信心,尊奉 ‘玉历宝钞’所述,知所警惕地做事。并且常常将以上的内容,向亲友们介绍、谈说的话,下辈子发往阳世做人时,不受轻视,不会遭遇官吏刑罚,身体不会受到水、火之灾等的伤害与灾祸。‘转劫所’地方宽一万一千二百里(七百由旬)周围上下都是铁的栅栏。其中分八十一个处所。每一个处所都有亭台,并有判官、官史设案记事。栅栏外,另有羊肠样的细小道路,共有十万八千条,盘旋弯曲地通往‘四大部洲’。路上暗得伸手不见五指,众鬼死生投胎,进出都走于此路。可是由外望入,却又亮如水晶,所有情事,丝毫隐藏不得。判官派遣官吏、鬼卒,轮班把守。各鬼进进出出,都按初生本来的面目,很容易可以分办。所有掌理这些事情的判官、官吏,都是在世孝顺父母、友爱兄长,和睦亲友,岣时行戒杀,放生的大善人。死后送入此所,查办所有轮回、转劫等事情。办过五年后,假如没错误,就加级、调升,予以奖励;假如怠惰,或者专权跋扈、刚愎自用;不配合所有判官、官吏妥善会议后决定办理的发放事宜;或者有失察、致鬼犯漏列、逃走、隐匿的话,则奏请降职、贬官。凡是在世不孝、及杀生繁多的凶魂,受过各殿的地狱所施加的苦刑后,经转发交由‘转劫所’内时先用‘桃花枝’抽打致死。死后化为畜魂,将他改头换面,发进羊肠小路,投胎为畜生。      ************************************   所有的禽兽、鱼虫,要经过上万、上千、上百次沦堕的劫难,才能受苦期满,故知是为苦海。像胎生的牛马等禽兽;卵生的龙类蛇鸟;湿化生的蝴蝶、蜜蜂、蛆虫之类,都是要不断地轮回受报,在此四生中,不得出离。等到劫数已满,若能连续三世不伤世物之命,方可使再投生为人。这些由动物投生为人的,均叙述明白,记在册籍上,奏呈给第一殿,批注判定其来生的因缘、福报。再发放往生到 ‘四大洲部中’,出生为男、女人。发放之前,要先交‘醧忘台’下由孟婆神处理。   醧忘台与孟波神   醧忘台为孟婆神所管理。    孟婆神生于西汉。幼年时即熟读儒家的四书、五经;并庄敬地诵读佛经。其修道功夫炉火纯青至:“凡是过去的事不思;未来的事不想,现在的事不执”。在世时,专心意志地劝人戒杀、吃素。享年八十一岁时,童颜鹤发,始终守精,未损童贞。只知道自己姓孟,当时的人都称她孟婆奶奶。后入山修真,一直到东汉时仍在。世上有人由于灵机深厚,能够知晓前世的因果,因为喜欢耍弄智巧、术数,露泄了阴间的天机。致令世间人妄认前生的眷属,棱乱了世情,致使善恶报应未能公平。因此玉皇大天尊敕命孟婆阿奶为幽冥之神,建造‘醧忘台’。准予选拔鬼吏供使乎唤。将第十殿所拟定,发往何地为人的鬼魂,用采自俗世的药物,合成似酒非酒的汤,分为‘甘、苦、辛、酸、咸’等五味。所有的鬼魂在转世前,派饮此汤,使忘记前生的事。药力同时带往阳间,令其或因多思伤脾而流涎;或因多喜多笑而多汗;或因多虑多忧而流涕;或因多怒而流泪;或因惊恐而流唾。各令带一分、二分、三分的病。在世为善的人,令其眼耳鼻如四肢较以往更精、更明;更强、更健。作恶的人,使其声音、神智、魂魄、意志消耗,逐渐疲惫衰弱;令使自我警惕、忏悔,重新为善。   ‘醧忘台’位于第十殿,冥王殿前六桥之外。高大如方丈,四周的廊房有一百零八间。有一条通道,通向东方,仅一尺四寸宽。所有奉令押解到的男女鬼魂,在各廊房中,都设有杯子,招各鬼饮下此汤,多饮少饮不论。假如有刁蛮、狡猾的鬼魂,不肯吞饮此汤的话,脚下就会出钩刀,将他绊住;并以铜管刺喉,令其受尽痛苦后,强迫灌吞。所有鬼魂饮下‘醧忘汤’后,各派鬼役、鬼卒,搀扶着从通道送出,推上麻绳的‘苦竹浮桥’。     桥下是红水横流的山涧。由桥中向前一望,对岸的‘赤名岷岩’上,有斗大的粉字四行,写着:    为人容易做人难; 再要为人恐更难。 欲生福地无难处; 口与心同却不难。    鬼魂们正在看读之时,对岸跳出又高又大的二个鬼。分别扑到水面,令两旁的鬼魂个个吓得站立不稳:一个是头戴乌纱帽,身穿体面的礼服、锦袄。手拿着纸笔,肩上插着利刀,腰上挂着刑具,睁着圆滚滚的大眼精,哈哈大笑。他的名字叫‘活无常’。一个是面上污垢、流血,身穿白衫,手捧算盘。肩上背着米袋,胸前悬挂银纸钱,愁眉紧锁,声声长叹。他的名字叫‘死有分’。    此二大鬼,催促推落鬼魂魂们,落于红水横流之内。根器道行浅薄的,在此欢呼可以幸运地得生人身;根器道行深厚的,则大声悲伤哭泣,自恨在世时未能修出世的好功德,以致如今痛苦悔恨又是苦海的根源,又是回到轮回起点,此身体不知何时才能超出生死苦海啊!男女鬼魂等,如醉如痴地,纷纷各依因缘,投生于各房舍中将生的胞胎之内。由于阴间、阳世的改变,气悉昏昏。再加上胎身颠倒,不能自由,于是双脚用力一踢,蹬破胞胎,奔出娘胎。哇!地一声落地,开始了一生的形形色色。一般众生,由于长久累月地贪好世间各种五欲、滋味;尤其杀生数多,迷失了众生本有的如来佛性。辜负了皇母恩典,以及 玉皇大帝,诸佛神明的训诫之恩。从未想到如何做是善终,如何修得成‘佛菩萨’;如何做会恶死,堕落‘三恶道’;自己成为拖尸的鬼,枉为一世之人,又将堕为无间地狱的鬼魂。  
83    전통가정의례-통과의례 댓글:  조회:3194  추천:0  2012-07-17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개인은 한 종류의 집단에서부터 다른 집단으로 옮겨가 지위가 바뀌거나 생의 중요한 사건이 되풀이될 때 인간이 치르는 일정한 집단적 의례를 통과의례라 한다. 개인은 가족, 친족, 촌락의 구성원으로서 그 개인의 사건은 사회집단 전체의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한 사회집단의 성원은 그 사회가 규정한 일정한 시기에 모두 동일한 형태의 의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통과의례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사회구조나 문화의 차에 따라 강조하는 의례가 다르고 절차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도 역사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규범과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현재까지 우리 생활에 반영되어 있는 통과의례는 조선시대의 잔영이 많다. 조선은 주자의 가례 를 충실히 따른 유교의 이념적 사회였으며 효를 그 근본으로 하였다. 따라서 출산과 관례, 혼례 외에도 상례와 제례를 중시하는데 모든 통과의례가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고 조상을 받드는 데 집중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통과의례 중에도 관례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모두 일반에서도 가정의례로 행해지고 있으며, 관례는 의식으로서 공공의 기관이나 장소에서 행사로 치르는 경향이 있다. 출산의례 기자의례 출산의례는 한 개인의 생이 시작되는 의례로써 통과의례의 첫번째 과정이다. 아들이 대를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전통사회에서 자녀를 낳지 못한 여인들은 각종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기자(祈子,아이를 갖도록 비는 행위)를 하였다.   자식이 없는 여자들은 산천이나 명승지 혹은 절을 찾아다니며 자식을 갖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렸다. 그 치성의 대상물은 대부분 돌과 바위인데, 그 중에는 남자의 성기를 도작한 것이 많았다. 또 금줄을 훔치거나 금줄에 달렸던 고추를 몰래 훔쳐다 다려 먹거나 삼신상에 올려 놓았던 쌀을 훔쳐다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다.  기자행위는 정해진 절차나 의례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무한히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기자신앙에 담긴 여인들의 자식에 대한 간절한 정성과 생명체에 대하여 지녔던 존엄성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중요한 정신적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산의례 삼신할멈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기 낳는 일을 맡고 있다는 신을 삼신할멈이라 불렀다. 갓 태어난 아기의 엉덩이에 파란 멍이 있는 것도 삼신할멈이 얼른 세상에 나가라고 엉덩이를 밀어내서 그렇다고 믿었다. 해산 때에는 우선 아기를 낳기 전에 짚을 깔고 아기의 안전한 탄생을 빌며 삼신할멈을 위한 삼신상을 차려 놓는다. 아기를 낳은 후에는 고마움의 표시로 흰 쌀밥과 미역국을 먼저 올리는 습속이 있는데 이는 21일(삼칠일) 동안 계속된다.   이러한 습속은 인간능력으로는 어렵다고 생각되는 불행을 절대적 존재에 귀의해서 미리 막을 수 있다는 자기 암시의 효과가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 고유의 하늘 숭배 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샤머니즘의 유습이다. 금줄 금줄은 마을사람과 외부 사람에게 성스러운 산고에 접근해서 아이와 산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대문 기둥 윗부분에 쳐 두었던 신호의 줄이다. 같은 식구가 아닌 경우 금줄 쳐진 집안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태어나면 새끼줄에 고추, 숯, 짚 등을 달고 딸의 경우에는 숯, 미역, 솔잎, 종이 등을 달아두어 아기의 성별을 알렸는데 금줄은 보통 21일 동안 쳐 두었다. 이는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이 들락거리면 삼신할멈이 노해서 아이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기 때문이었으나 면역능력이 없는 아기의 보호기능을 하는 매우 과학적인 풍습이다. 돌   아기가 태어난 지 만 1년이 되는 생일에 행하는 의례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옛날에는 아기들의 사망률도 높았으므로 1년 동안 아무 탈없이 성장하여 첫돌을 맞는 일은 특별히 중요하여 잔치를 크게 베풀었는데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풍습이다.   돌에는 백설기와 수수경단, 송편과 국수 그리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로 돌상을 차려주는데 의미가 담긴 상차림이다. 백설기는 깨끗하고 순수한 정신을, 붉은 빛의 수수경단은 액운을 면하라고, 배가 볼록하게 빚은 송편은 식복이 있으라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은 열매를 맺듯이 자손이 번영하라는 축복의 뜻으로, 국수와 타래실은 수명장수를 비는 뜻으로 준비했다.   또 돌잡히기를 하는데 돌상 위에 돈과 활,화살과 붓,벼루 먹을 놓고 아이가 첫번째 잡는 것으로 아기의 장래를 점치며 기뻐하는 풍습이다. 이때 돈은 부귀를, 붓은 학문을, 활은 용맹을 상징하며 여아일 경우에는 색지, 자, 실을 놓는데 이는 바느질 솜씨를 여성 기예의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성년의례 소년 소녀가 성장한 어른으로 진입하는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는 통과의례로 관례(冠禮)와 계례라는 성년의례가 있었다. 관례는 남자에게 상투를 틀고 어른의 평상복을 입히고 관을 씌우고 술마시는 예법을 가르치며 별호를 지어주는 의례로 남자 나이 15세에서 20세 사이에 행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혼의 습속이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실제로 12세나 13세에 관례를 치루었다. 계례는 여자에게 비녀를 찌르게 하는 의례로 비교적 간단한 절차다. 처녀나 총각은 머리를 땋아서 늘어뜨리고 다니다가 관례와 계례를 치를 때 머리를 걷어서 얹게 되는데 근세에 와서 혼례와 혼합되어 부수적으로 행해지다가 개화기 이후에 사라지고 1973년부터 20세가 되는 5월 세번째 월요일을 성년의날로 제정하게 되었다.    관례와 계례 자세히 보기 혼례 함보내기 혼례는 혼인 또는 결혼이라 하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결합하는 의례로 일생 의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혼례를 대례 혹은 인륜지대사라고 불렀다. 혼례는 가족이라는 새로운 사회집단을 형성하는 의의를 갖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장가가기 혹은 장가들기라 하여,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고 최소한 3일을 지낸 후에 신부를 데리고 자기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혼인이 이루어졌다. 양가에서 혼담이 오가고 대례를 치르기 전까지의 과정을 의혼이라고 한다. 먼저 신랑측에서 신부측으로 혼인을 청하는 이른바 사주단자라 칭하는 납채를 보내면 신부측에서 이를 허락하는 내용의 택일단자를 보내는 연길을 보내면 혼례날이 합의된다. 이를 받은 신랑집에서 다시 송복이라 하여 신부옷감, 이불, 패물, 술, 떡을 싸서 신부짐에 보내는 것인데 지방에 따라 행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납폐라 하여 납폐서와 폐백을 신부집에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이를 받고 신랑집에 답서를 보내는 행사는 대례 전의 중요한 일로 여긴다. 함에 넣는 물건은 지방과 계층, 빈부에 따라 다르지만 신부의 상,하의 두 벌과 패물, 혼서지는 반드시 넣는다.   함은 흔히 함진애비라 하여 하인에게 짊어지게 하거나 지방에 따라서는 동네에서 첫아들을 낳은 복많은 사람이 짊어지게 하였는데 요즘은 신랑 친구들이 함을 지는 풍속이 생겼다. 함은 신부어머니나 복많은 여인네가 상을 펴고 그 위에 받거나 시루를 놓고 받기도 한다. 대례 신부집에 도착한 신랑은 신부의 어머니에게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전하는데 쌍을 지어 사는 기러기를 신의, 화목, 정절의 상징으로 믿는 것과 관련된 풍습이다. 신부집에서 미리 차려놓은 대례상 앞에서 신랑과 신부는 맞절을 나누고는 술을 한 모금씩 세 번 나누어 마신다. 이는 술을 교환하면서 하나가 된다는 부부결합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는 의식인 첫날밤을 치룬다. 이때 가까운 친척들이 신방의 창호지를 뚫고 엿보는 신방엿보기의 풍습이 있는데 옛날에는 나이 어린 신랑과 성숙한 신부의 결합이 많았기에 신부가 신랑의 연소함을 비관해서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러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신랑과 신부에게 아쉬움과 조바심의 마음을 갖게 하는 하나의 놀리기 풍습이다. 신행 신부집에서 치루는 대례를 마치고 몇달, 몇년 만에 가기도 한다.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일을 우귀 또는 신행이라 하고 신부가 시집에서 처음으로 시부모에게 인사를 올리는 예를 견구고례, 폐백이라고 한다. 신부 가마가 신랑집 가까이 오면 사람들이 나아가 목화씨, 소금, 콩, 팥 등을 뿌려 잡귀를 쫓는다. 또한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설 때 대문간에다 짚불을 놓고, 곡식 가마니를 갖다 두어서 이를 타넘게 하는 것은 혹시 신부를 따라 올지도 모르는 귀신을 막고 또 새식구를 맞이하여 재수가 좋아 풍년이 들라는 뜻에서였다.                회갑례 평균 수명이 짧았던 시절에 60을 넘긴다는 것은 크게 복받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녀들은 잔치를 준비하여 일간친척과 친지들을 초대하고 큰 잔치상을 마련하며 좋은 옷을 해드려 잔치날 회갑의 주인공은 이 옷을 입고 마련한 자리에 앉는다. 자녀들은 만수무강하시라는 헌수배례를 올리고 장성한 자녀일지라도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워 주인공께 효도를 다한다. 잔치는 보통 당일에 한하지만 예전에는 3일 동안 광대 등을 불러 놀게 하며 지나는 이들에게도 음식을 대접하는 등 온동네가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회갑상은 큰상차림으로 편, 숙실과, 생실과, 유과 등을 높이 괴어 색을 맞추어 놓는다. 정성껏 높이 쌓은 음식은 헐어서 먹기 어려우므로 따로 큰상 앞에 입맷상을 차려 회갑주가 시장하지 않도록 한다. 큰상의 괴는 높이와 음식의 종류는 홀수로 하는데 유밀과, 강정, 다식, 당속, 생실과, 건과, 정과, 편, 건어물, 편육, 전유어, 적 등을 놓으며 입맷상은 주로 면상을 차리는데 김치, 나물, 편육, 찜, 전유어, 숙과류, 생실과, 음료를 올린다.   상례 상례절차 한 개인으로서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통과의례이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영원히 이별하는 분리의례가 된다. 상례는 상중에 행하는 모든 의례를 말하는 것이다. 상례를 중시하는 태도는 죽음을 단절로 보지 않고 또 다른 연장이라고 보는 우리 민족의 인생관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죽음이 아주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인식하여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 는 표현을 쓴다. 돌아가신 어른은 아주 떠나간 것이 아니라 항상 주변에 머물면서 후손의 일을 돌보고 간섭하며 이끌어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한가지로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했다. 죽음이 확인되면 임종을 지켜보던 가족들은 곡을 시작하고, 지붕에 올라가서 죽은 이의 옷을 들고 죽은 이의 이름을 세번 부르며 '복(復)'을 외치는 고복의례를 행한다. 이는 떠난 혼을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는 의례로 곡과 고복은 마을 사람들에게 죽음을 알리는 구실을 한다. 고복의식이 끝나면 미련을 끊고 죽은 이를 반듯하게 해서 목욕시키고 죽은 이와의 관계에 따라 상복을 입게 되는데 이를 '성복'이라고 한다. 상복을 갖추어 입으면 정식으로 문상객을 받고 제사상을 차려 놓고 혼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며 다음날 묘에 운반할 상여를 준비한다. 상여를 메는 상두꾼들은 상여의 상태를 확인하고 상주들의 슬픔을 달래며, 죽음을 또 다른 태어남으로 인식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상여놀이를 벌인다. 다음날 날이 밝으면 관을 상여에 안치하고 상여 앞에서 마지막 제사인 '발인제'를 지낸다. 제사가 끝나면 상여가 미리 잡아놓은 묘역에 도착하고, 입관한 후 봉분을 다지고 돌아온다. 상여놀이 상여가 나가기 전날에는 상두꾼들이 모여 상여 점검을 하고 상가에서 마련한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빈 상여를 메고 놀이판을 벌이는 상여놀이를 하는데 전남 지역에서는 최근까지 다시래기라는 상여놀이가 이어지고 있다. 상두꾼들은 빈 상여를 메고 실제 상여가 나가듯 운구 시늉을 그대로 하는데 이때 죽은 이의 사위를 상여에 태우고 논다. 이때부터 앞소리꾼이 상엿소리를 메기고 상두꾼들이 뒷소리를 받고 마을 사람들은 상여 주위에 모여들어 춤을 추고 상엿소리를 함께 따라 부르며 흥겨운 놀이판을 벌인다. 상두꾼들은 판소리를 비롯하여 북춤과 병신춤을 추면서 개인 장기를 선보이고 거짓 상주놀이나 굿을 하면서 마을사람들의 신명을 돋군다. 이러한 상여놀이는 사별의 슬픔을 웃음과 신명으로 바꾸어 놓아 산 사람들이 현실의 삶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슬기이며, 이승에서의 죽음을 저승에서의 새로운 태어남으로 보고 죽은 이의 저승길을 축복해 주는 우리 민족의 내세관이 반영된 관습이다. 묘다지기 묘터의 산역꾼과 상두꾼들은 흙을 무덤 위에 쌓고서 흙이 단단하게 다져지기까지 여러 차례 땅을 다지는데 이를 덜구찧는다고 한다. 덜구꾼들이 흙을 다지는 동작은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흙을 다질 때는 "에에에 달공" 하면서 요령잽이 선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히 오른발을 앞으로 내며 두 손도 역시 앞으로 뻗어 손뼉을 치는데 짝을 맞추어 무용을 하듯이 동작을 취한다. 이러한 덜구동작은 아주 숙달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정교한 동작이다. 이는 힘든 노동을 쉽게 돕는 노동요의 기능을 하며, 산중에 홀로 남겨진 외로운 시신을 위한 축제이며 슬픔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슬기이기도 하다. 덜구질이 끝나면 잔디를 입히고 봉분 앞에 비석과 망두석을 설치한다. 상장례 용구 방상씨 탈은 눈이 네 개 달린 가면으로 악귀를 쫓는 상징적인 기능이 있다. 방상씨는 영구 앞에서 묘지까지의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며 묘지에 도착해서는 먼저 광내에 들어가 사방 모퉁이를 창으로 쳐 광내의 잡귀를 없앤다. 그리고 하관할 때가 되면 방상씨 탈을 썼던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달아난다. 그러지 않으면 잡귀들의 훼방에 죽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방상씨 가면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장례행렬에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영구차의 도입으로 그 풍습은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상여를 사용하는 전남 나주와 진도 지방에서는 바가지 또는 무서운 가면을 꽃상여 앞에 두고 이를 방장이라 부르고 있어 방상씨의 유습이 전해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전통예절 바로 알기                                                        (노래) 강병철과삼태기-삼태기메들리    
82    저승에 대한 전설 댓글:  조회:3525  추천:0  2012-07-17
阴曹地府的传说      话说清末民初之时,有一位名叫黎澍的法律界名人,他在年约十九岁时,于某夜睡梦中,见一人前来找他,说有事相请,他看来人非常礼貌恭敬,于是就随口答应了,之后来人也就告辞。过了四、五天,原先梦到的人又在黎先生睡梦中出现,且用马车接他前去一公堂(后来知道是地府)开始升堂审问罪犯,从此这位黎先生就在每天午后或晚间睡梦中进入地府干了四、五年的冥判(就是阴间的法官,现在电视连续剧正在上演的包青天也是冥判转世,所以包公日能理阳,夜能断阴)。后来他的朋友为了利益世道人心,向他详细询问了阴间的种种,并汇集成了“幽冥问答录”一书。以下是该书内容的节录: 问(黎先生的朋友):您在阴间是归谁指挥?担任什么职务?管辖范围为何?有无职员?且阴界为何会找您当冥判? 答(黎先生):我是东岳大帝的部下,担任分庭庭长的职务,管辖范围为华北五省,专门负责死亡十个月内之死者的善恶事件,超过这个期限的另有负责的官吏,除了有陪审员四人外,供使唤的鬼卒有无数多,而阴界找我当判官的原因,我曾托同事调查过,据他说是因我在好几世前曾当过冥判,又刚好碰上八国联军攻破北京,中外军民死者甚多,阴间太过忙碌,所以才会找我帮忙。 问:您为何只当了四、五年的冥判?又您有那么好的机会当上阴间的官,来世是否可免去轮回呢? 答:我因不想当太久的阴官,好几次请辞都没获准,后来我念诵金刚经二千遍后才得以免去,至于想超出轮回谈何容易,就是我本身也不可免,据我托同事调查,我来生将投生在河南省南阳县一带,但现已事隔数十年,说不定原先在阴间所注定的会因我在这数十年间的所作所为又有变动了呢! 问:阴间的食、衣、住、行如何? 答:阴间也有饮食,但比不上阳间的饮食美好,而且阳间人不能食用,在那儿的鬼道众生每吃一次就可饱多日,并不需一日三餐,对于阳世所供的食物,鬼神只能闻其气味;穿的衣服则与阳世服装相同;又虽有床铺、棉被等,好像都不见使用,只见鬼魂随处依靠,闭目休息,不像阳间人要睡上七、八小时;另外阴间还有小规模的街道商店,大部分是卖一些饮食、杂货(可用阳间所烧下去的纸钱购物);至于鬼众走路都甚为快速,不像人类那么的缓慢。 问:鬼有年节喜庆及家庭眷属吗?那儿的气候如何呢? 答:鬼道有节庆,无星期,也有应酬、婚娶与生育,他们婚嫁的对象不必是阳世原来的眷属,他们结婚所生的小孩是人死后的馀气所投胎,这些小孩长大后是无法再投胎的,在阴间虽然有日夜,可是却不见有日月星辰,整天都有如四川大雾或华北黄沙吹起般的昏暗。另外那儿虽有四季之分,可是夏天不如阳间热,冬天却比阳间还冷,而且虽然不见风雨霜雪,但阳世刮风雪时,阴间都会感受到寒冷。 问:阴间有法律吗?您如何判罪鬼的罪,又冥判判罪有错误的情形发生吗? 答:好像不见有阴间的法律,但判罪时却不用思考就可很自然做下决定,至于判罪的轻重是以罪鬼犯罪的动机与犯罪所造成的后果来衡量。譬如偷钱的动机是被生活所逼,且被偷的人是一富翁,被偷的钱对这富翁而言并不影响他的生计,那么这偷钱罪鬼的罪就较轻;万一偷病人或穷人买药、买米的钱,而使他人病死或饿死,甚至为了偷钱还杀了人,那么这罪鬼的罪就非常重了。至于冥判判罪绝不会发生错误,因为阴界对于罪鬼犯罪的罪状都有经过精密的调查及握有确实的证据,所以判起来非常公允,从无错误的情况。 问:阴间的刑罚有多少种? 答:阴间刑罚的种类很多,而且比阳间残忍百倍!我奉劝世人,宁可在人世间接受惩罚,却不可在阴间受刑,因为阳间的刑罚,罚完就没事,可是阴间的刑罚是刑了又刑,罚了又罚的。譬如在阳间杀了十条人命,了不起就枪毙一次,但在阴间却要枪毙十次,同时还会被判转生十世都被人杀,就是地藏经所说的锯解、刀山、油锅、碓磨等刑罚也都是确有其事,令人惨不忍睹。另外还有带著牛头马面等面具的鬼神,专门来吓一些凶狠的鬼魂呢! 问:人的善恶,鬼神如何能知道呢?犯了罪的鬼魂难道就不会狡辩吗? 答:鬼神能听到也能看到人所不能听到、看到的东西,而且人的头上会随著他行为思想的善恶而发出红、黄、白、黑等光(红、黄、白色为善念所发出的光,黑色则为恶念),鬼神们都看得一清二楚。若人的思想随起随灭与他的作为关系甚微小的,阴界固然不会去记载,但若念念不忘某种事情,则虽未见于行动,却早已被鬼神所记录,若付之于行动,则功罪自然更清楚了。我曾见过很多犯罪的鬼魂极力为自己辩解,但通常将犯罪记录给他们看时,就多半会俯首认罪。若碰到一些极端狡猾的鬼魂,譬如要判他刑时,他忽然念起经来,则我们会先判他投胎数次,但却非常短命,等他投几次胎而忘记经怎么念时,再来治他的罪。 问:阴间最尊重的是什么德行?最痛恨的罪业是什么? 答:阴间所最尊重的德行,在男为忠孝,女为节孝,这两种人就算有罪行也会从轻发落,我就曾见过一位在八国联军攻打我国时为国牺牲的清朝提督名叫○○○的直接升往天界;所最痛恨的罪业就是杀及淫两件事,其中杀业比淫业的罪更重,若为了淫而杀人,罪更加一等,古人说:“百善孝为先,万恶淫为首”,说得一点也没错。 问:大修行人死后也要到阴间听候审判吗?当今世上甚多修行教派,到底阴间较重视什么教派? 答:阴间所管的都是带著罪业或平平凡凡没大善恶的鬼魂,若大修行人死后立刻登上天界,根本不从阴界经过,就算功行较浅,升天稍慢,须从阴界经过,阴间的官吏也都会起立让开,直到他魂魄如上楼梯般渐飞渐高的升天而去。至于阴间所尊重的包含儒、道、佛等教派,但其中最尊重的要算是佛教。 问:阳间请和尚或道士为亡者超度,到底能不能利益到亡人? 答:和尚或道士诵经为死者超度的目的在为他增长福德,减轻罪业,但这只是助缘,并非绝对的主因,而且超度到底有没有好处还必须因人而异,譬如生前大善的人死后立刻往生天界,或生前大恶的人死后马上堕入地狱,他们都不用或根本无法享受到超度的功德,只有一般生前没有大善恶的人于死后可获得诵经超度的功德。另外诵经人道行的高低与诵经功德之大小也有重大关联,如果是高僧或孝子贤孙诵经壹卷,可抵得上凡僧十倍之功德,但凡僧至诚念诵也会有相当利益,只有无道行又不诚心的人所念的利益很少甚至毫无利益,不过却也不会因此而有罪过。又诵经最好在亡者死后四十九日内为之,过了这段期间,亡者可能已经投胎转生,超度功德必需要经过好几转才会利益到他们,无法收到即时的效果。 问:念佛诵经的功德既然如此大,为什么阴间诸鬼不自己念佛诵经,以求解脱超升呢? 答:一到阴间,就自然有鬼魂本身的业力会障碍他修行,因此修行应趁一口气还在时赶快去做,如果指望等到断气后再修行,到时恐怕已是无能为力了。 问:阴间为何常找阳间的人当阴间的官差呢? 答:因为富贵的人家有众神守护,且供使唤的仆役又多年青力壮,阳气旺盛,所以当他们家中有人过世时,阴间鬼魂无法接近去摄受死者的魂魄,又例如武将死在军营时,他四周警卫森严,枪炮林立,营中士兵也都年青力壮,阳气逼人,一般鬼魂也都没办法接近死者魂魄,诸如此类的情形,就有赖阳间人的生魂当阴差去执行了,因此阴界常有用阳人当差的情况。 问:凶死的人身首不全,他的鬼魂跟平常寿终正寝的鬼是否不同?又鬼的容貌会不会逐年衰老? 答:凶死之鬼魂除面容稍显模糊,表情好像蛮痛苦的,且伤处带有血痕外,其馀与一般鬼魂并无差别,至于鬼的容貌都与他死时相同,并不会因年久而变衰老。 问:人死灵魂离体时会不会感到痛苦? 答:一般而言,人的死亡都是因疾病而来(老死者也是内在生理机能败坏所导致),这时候灵魂离体就好像开门外出般的毫无痛苦,且脱离肉身后反而会有疾病霍然痊愈的舒服感觉。但死者若迷恋家眷、财产或世间的种种,这时灵魂就不容易脱离肉身而会产生如乌龟脱壳般的巨大痛苦,因此一个人在生前应培养淡泊之心,对于妻子、财产等不要过分贪恋,如能做到这样,那么他死时之灵魂离体会如脱掉衣服般的毫不费力。 问:鬼跟人谁多?是人怕鬼还是鬼怕人?鬼和人的疆界如何划分? 答:阴间的鬼比阳间的人多得多,来来往往擦身而过的比比皆是,他们与人的疆界似有似无,实在很难讲得清楚,但鬼在阳间行走时多走在道路两旁或阴暗的地方,且人怕鬼,鬼也怕人,尤其是正人君子,鬼必敬而远之,但对于心术不正或运气差的人,则鬼多喜欢捉弄他们。因此人类从午后到晚间,走路时尽量不要走道路两旁或阴暗的地方,而且走路应缓慢或稍微发出声响,让鬼有时间避开,以免出其不意与鬼相撞,人固然会起鸡皮疙瘩,鬼也会觉得不舒服的。 问:人死后真有转生的情形吗?如何去证明呢? 答:人有生必有死,有死也必有生,它的道理就如同每一件事物只要有作用就必定有反作用一样。例如我们吃了东西,一定会有排泄,这是非常简单明了的,但因人死后所存在的是个精神体,而非物质的原素,所以无法用求证物质原素的方法来探索精神体的来去,而只能用精神来领会精神,宗教修行的作用就刚好能提炼人的精神成分,提高精神的效能,所以只有在宗教的经验中可求证到人类生死轮回的现象。 问:人死后就是鬼吗?为什么人死后有的会显灵,有的却毫无音讯呢? 答:除非是超出轮回的圣者,否则人死后会有六道轮回的,而由于鬼道只是属于六道轮回中的一道,因此人死后并不一定就是鬼,如果轮回在鬼道者,在有必要或由于阳世眷属请人作法召请时,他是有可能显灵,但死后生天、下地狱、或转生为畜牲道者,就不会愿意或无法再来显灵了。又阳寿已尽,已经到了该死年龄而死去的人,不论他是凶死或善终,都会纳入一个规则的系统,就好像部队改编一样,直接从一个部队向另一个部队报到,这时他们就没有机会在外闲逛,显灵的情形就比较少。但如命不该绝而死的人,他们的鬼魂在未被鬼界收容发落之前,并没有立即可归宿的地方,只得在外东闯西荡(中阴身),而在这闯荡期间,与人相遇的机会就很大了。 问:历史上有很多伟大的人物,如孔子、孟子等人,为什么后人再怎么祭拜他们,也不见他们显灵呢? 答:要知道虚空、宇宙及世界都是无限的,众生也是无限的,那些伟大的圣贤豪杰为了他们自己的愿力来到我们的地球世界,从事教化这世界众生的工作,当他们的任务完成到某一预期程度时,他们就会离开这地球世界而进入另一个世界,继续依据他们的愿力去教化另一世界的众生,他们以无限的愿力往返于无限的宇宙、世界间,教化无量无边的众生,如果以我们这个极其有限的时空观念来探索他们的来龙去脉,自然是莫测高深的事了,因此若以他们显灵与否来批评他们的存在,就大错特错了。 问:阴间有洋人吗?如果有,彼此言语如何相通?若无洋人,则洋人死后归何处审判?又鸟兽死后的魂魄仍然是鸟兽的样子吗? 答:我当冥判时,因为刚好碰到八国联军攻破北京之后,中外军民因战争而死的很多,所以我在阴府曾看过有洋人到案,且能很自然的通晓他的语言,但据我所知,中国的冥府就已经不只一处,那么欧美各国应该也有他们的冥府方合情理。至于鸟兽的魂魄是属于阴界中另一处所管辖,而我从未在地府各处游历过,所以我不了解这方面的事。(了悟子评:知之为知之,不知为不知,是智也。其人坦诚磊落,正气凛然,令人敬佩,不可怀疑。) 问:鬼有消灭的期限吗?阳间的坟墓是不是他们休息的地方呢? 答:我所看到的鬼,有古老到宋朝、元朝的,但唐朝以前的鬼则从未看见过,大概是因年代久远,早已轮回转生去了。至于阳间的坟墓确为鬼魂栖息的地方,但鬼因怕阳气,所以每天上午八点到十一点都躲著不出来,一直要到午后才会渐渐出来活动。 问:鬼为什么怕鸡叫呢? 答:鸡叫代表天快亮了,鬼因为怕天亮后阳光出来时的阳气,所以一听到鸡叫就会感到不安,而不得不躲藏起来,但有德行的福德鬼(如土地公、城隍爷等),则并不怕鸡叫。   孟婆的传说是一个陷阱     这个世界上存在着太多的假象,一不留神,我们就会落入一个精心构造的陷阱。     孟婆的传说就是一个陷阱。据说,阴间的鬼魂在投生之前都要在孟婆那里喝一碗汤,这碗汤能令他忘却前生,转世投胎。这个神话千百年来被无数人深信不疑,多少个在阳间饱受苦难的灵魂,毫不犹豫地将那碗汤一饮而尽,为的是迎来一个崭新的人生。可是谁又能知道,下一步迎接他们的却是一个惊天大阴谋呢?        要了解这一阴谋,首先要从食物问题着手。在阴间要不要吃东西呢?答案是肯定的,逢年过节人们为亲人鬼魂准备的祭礼食品就是证明。不过人们在献上祭品时大概都没有想过:地狱里的工作人员他们吃什么呢?        当然,十殿阎罗可以在庙里受到祭祀,不用担心饿肚子,可那些受不到祭祀的鬼卒们有什么可吃呢?文献中没有上级机关也就是天庭给地狱的财政拨款记录,地狱也非工非农,大概可归入第三产业或公益事业范畴,缺少经济来源,地狱鬼卒成千上万,吃饭的问题如何解决?        一位阴间神灵的行为给了我们一条线索,他就是在无数画家笔下兼职模特的猛男钟馗。一提起他,有的人也许会恍然大悟:他是吃鬼的呀!对,钟馗是吃鬼的。阴间的工作人员经常到阳间出差的,也就是他和黑白无常等少数几个。黑白无常工作内容简单,铁链一抖锁住鬼魂回去就可复命,还赶得上吃工作餐。钟馗就不一样了,他的职责是追捕逃出地狱的鬼魂。常年在外,吃饭就要自己解决,这也就让我们发现了地狱里的秘密:原来,他们是把鬼魂作为食物的。        这时我们再来审视有关孟婆的传说,一个大阴谋的轮廓就逐渐浮现了出来。据传成书于宋代的《玉历宝钞》里记载,孟婆的上班地点是地狱里的最后一站,喝完汤鬼魂们就直接投胎,而到了明清,孟婆的工作单位却换成了鬼魂们刚进地狱时的接待站,为什么呢?这是问题之一。孟婆汤有甘、苦、辛、酸、咸各种不同的味道,为什么要搞出这么多的口味呢?这是问题之二。地狱里有很多刑罚,如油炸、汤煮、热煎、清蒸、咸卤、捣浆等,为什么这些刑罚那么像食品加工程序呢?这是问题之三。将这三个问题一串,再加上地狱里的机构设置,我们不难发现,整个地狱同时就是一个食品加工的流水线:        第一站孟婆,给鬼魂们灌下各种风味的汤,如果有胆敢不喝的,就用钩刀绊住双脚,铜管刺喉强灌,鬼魂们人事不省之时,就是灌汤包初步作成之日,经奈何桥送入下一站。        第二站,十殿阎罗之一秦广王,秦广王处的主要建筑是孽镜台,号称照人善恶,其实乃检查食品的透视机。检验完毕后,包子胚们送入。        第三站,十殿阎罗之二楚江王。楚江王处有若干小地狱,如五叉、铜斧、多铜斧、斫截、剑叶等,这些明显是用在食品切割方面的,切割完成后,包子胚们送入冷库——寒冰地狱保鲜,寒冰地狱前面又有狐狼地狱,作用相当于看守冷库大门的看门狗。等到再从寒冰地狱运出来,包子胚们就要上笼了。牛头马面最常用的是什么兵器?两股叉。它们就用这种餐叉,叉着自己喜欢口味的包子,去其余各殿煎炒烹炸,准备盘中美餐。所以,从古到今流传的地狱惩罚恶行的传说,事实上却是鬼卒们饕餮的盛宴!        很多悲惨的故事都被加上了一个阳光的结尾,为的是让人们保留一点希望,却不管有多少人被这个结尾欺骗。然而现在是二十一世纪,我们企盼着人文奥运,我们学过了三个代表。为了保护大多数人们的利益,不让他们成为地狱里的小吃,我们要掀起这层虚伪的面纱,如果你要下地狱,希望你能听见我们的呼喊:        飞奔吧!灌汤包,跑出地狱,不要让钟馗抓到你。        原来在人间遇到的鬼都是从地狱跑出来的自由战士.钟馗人们还以为他是正义的,结果他不过是地狱来的灵魂终结者,你遇到的鬼可能会吓到你,其实它只是想向你求助或者警告,但可惜阴阳两隔它喝拉孟婆汤已经丧失说话能力,在你面前张牙舞爪只不过是想向你诉说它的悲惨遭遇,而人们不明就里只余恐惧.也不想想他以前也是人为什么要吓你,只是想警告人们不要重倒他的覆辙!所以看到鬼能收留的收留,相貌欠佳的烧点香送送,不用大惊小怪.看到钟馗泼点童子尿或黑狗血什么的.        另外从一个人看贴后的反映就知道这个人死后会受到什么待遇,比如很多人看贴不回,因为看贴不回有各种原因,所以死后味道不同,死后一般会清蒸,这样才能保持不回贴的人的原汁原味.然后就是很多人一个顶字了事,这种人就很懒,一身膘肉也不好吃,所以只开膛破肚取内脏,搞个水煮汤什么的,肉不好吃内脏还是一样的.另外还有就是满嘴脏话的,这种人嘴臭肉也臭,不吃么?不会,这种人一般是油炸,中国几千年的油炸臭豆腐就是这么来得,阳间自然不能油炸人,阴间可以啊,比油炸臭豆腐好吃多拉.还有就是有种人不相信权威,总是唱反调,不同意我以上的资料的,死后一般就是拿铁棍穿起来烧烤,因为烤全人的时候人不会失去意识,只会感觉到疼痛,疼痛使人思想运算飞快(人急生智嘛),便于好好反省自己的错误思想.好好回贴的人一般就聪敏,有思想有道德有品质,到拉阴间小鬼拿不住你把柄,想吃你又想不出什么办法来,剩的费事,把你随便找个角落一丢完事,说不定你还是可以来阳间再混混的。
81    전설중의 소위 황천길 설화 댓글:  조회:3722  추천:0  2012-07-17
传说中的所谓黄泉路   传说中一种喝了可以忘记所有烦恼、所有爱恨情仇的东西,当你离开这个世界去到另一个地方的时候,它被端在孟婆手里,奈何桥前。人生在世,多苦多难,这一碗下去,是种释然,彻彻底底地与前世做了一个了断。那些爱过的人啊,那些放不下的事啊,那些滚滚红尘中的纠葛都会随着“孟婆汤”的入喉,永远凝固于走上奈何 桥上那欲言又止、充盈泪水的黯然一回眸,化做缥缈,淡淡散去。是不舍?还是挥刀割袖的决断?都已经不在重要了;因为——忘了,忘了所有种种。   在《阎王经》中说,鬼魂在各殿受过刑罚后,依序解送至下一殿,最后转押至第十殿,交付给转轮王。第十殿掌管鬼魂投生,凡被送到这里来准备投生的鬼魂,都会先被押到由孟婆神所掌管的醧忘台下灌饮迷汤,让鬼魂们忘却前生。   相传孟婆汤的做法,先取在十殿判定要发往各地做人的鬼魂,再加入采自俗世的药材,调合成如酒一般的汤,分成甘、苦、辛、酸、咸五种口味。凡是预备投生的鬼魂都得饮下孟婆的迷魂汤,如有刁钻狡猾、不肯喝的鬼魂,它的脚底下立刻就会出现钩刀绊住双脚,并有尖锐铜管刺穿喉咙,强迫性的灌下,没有任何鬼魂可以幸免。 相传有一条路叫黄泉路,有一条河叫忘川,河上有一座桥叫奈何桥,走过奈何桥有一个土台叫望乡台,望乡台边有个老妇人在卖孟婆汤,忘川边有一块石头叫三生石,孟婆汤让你忘了一切,三生石记载着你的前世今生,我们走过奈何桥,在望乡台上看最后一眼人间,喝杯忘川水煮。今生有缘无份,又何必强求?   “孟婆汤”是一个中国的古老传说,这在澜子家一本古书上记载着。在那个传说中人是生生世世轮回反复的。这一世的终结不过是下一世的起点。生生世世循环的人无法拥有往世的记忆,只因为每个人在转世投胎之前都会在奈何桥上喝下忘记前程往事的孟婆汤。所以,走在奈何桥上时,是一个人最后拥有今世记忆的时候。这一刻,很多人还执着于前世未了的意愿,却又深深明白这些意愿终将无法实现,就会发出一声长长的叹息。这也是这座连接各世轮回的桥命名为奈何桥的原因。   {鬼门关} 鬼门关:这里是进入鬼国的必经关卡。无论是谁来到这里都必须接受检查,看看是否持有鬼国通行证一一路引。这是人死后到鬼国报到的依据。路引长3尺,宽2尺,是用黄色的软纸印做的,上书“为丰都天予阎罗大帝发给路引和普天下人必备此引,方能到地府转世升天”。同时,路引上面盖有“阴司城隍、丰都县府”三个印章。凡是人死后入殓(1ian)或火化时烧掉它,就会随灵魂来到地府,所到之处才能畅通无阻。   路引一说起源于唐太宗贞观年问。丞相魏征梦斩泾河老龙,唐太宗李世民受到牵连而被阎罗王传讯到了地府,当阎罗王问明情况后,知道李世民是一个贤明的君主,他不但文韬武略,而且安邦定国,创造了唐朝初年的盛世局面即“贞观之治”。于是决定放李世民还阳。临行前,阴天子委托阳天子把鬼国护照“路引”带回阳间,发给善臣善民,使他们死后凭此路引进入鬼国首都——丰都,可以免受地狱众鬼欺凌和刑罚折磨。所以自唐以后,路引就象圣物一样被流传了下来,从无变动。所以这种路引只有好人才能买到,作恶的人是买不到的。以前来丰都旅游的人都要为家里的老人买一份路引回去,以表示自己的孝心。因此,以前丰都城里的路引非常流行,很多人就靠卖路引为生,使得丰都鬼城名声远扬。   鬼门关前为新刻的十六大鬼,传说是阎罗王专门挑选的一批恶鬼来此镇山把关的。他们对劣迹斑斑、恶性未改的亡魂野鬼盘查得格外苛刻、严格,不使一个蒙混过关。这组石刻体现的是鬼城民俗文化的“惩恶扬善”和“善有善报、恶有恶报”的主旨,揭示的是鬼城民俗文化蕴含的丰富的人文精神。它以写实和夸张相结合的手法并按大众审美心理要求塑造鲜明生动的艺术形象,渲染烘托鬼城特有的文化氛围,形象个性突出,神态生动,造型新颖,具有一定的视觉冲击力。   {两岸花} 传说,很久很久以前,城市的边缘开满了大片大片的彼岸花,也就是曼珠沙华。守护彼岸花的是两个妖精,一个花妖叫曼珠,一个是叶妖叫沙华。他们守候了几千年的彼岸花,可是从来没有见过面,因为花开的时候,花开时看不到叶子,有叶子时看不到花,花叶两不相见,生生相错。他们疯狂地想念着彼此,并被这种痛苦折磨着。终于有一天,他们决定违背神的规定偷偷地见一次面。那一年的曼珠沙华红艳艳的花被惹眼的绿色衬托着,开得格外妖冶美丽。神怪罪下来,这也是意料之中的.曼珠和沙华被打入轮回,并被诅咒永远也不能在一起,生生世世在人间受到磨难。从那以后,曼珠沙华又叫做彼岸花,意思是开放在天国的花,花的形状像一只只在向天堂祈祷的手掌,可是再也没有在城市出现过。这种花是开在黄泉路上的,曼珠和沙华每一次转世在黄泉路上闻到彼岸花的香味就能想起前世的自己,然后发誓不分开,在下一世再跌入诅咒的轮回。   {黄泉路}  【黄泉路简介】 黄泉路在中国的神话和宗教典籍中是指人死后到阴曹地府报到时走的路。 【人死后的说法】   在中国,传说人死后,会有阴间的捕快黑白无常来捉拿人的魂魄,把他们带到阴曹地府去接受阴间大法官阎罗王的审判,以决定他们是升天做神仙;或再次投胎做人;还是打入十八层地狱去受苦。人的魂魄到阴间报到要走很长一段路,过很多的关;黄泉路一是对这些关和路程的总称;另一种是专指这一路程中的一段叫黄泉路的路。   有人认为,人的阳寿到了就会死,这是正常的死亡,正常死亡的人首先要过鬼门关,过了这一关人的魂魄就变成了鬼,接下来就是黄泉路,是接引之路。在黄泉路上还有很多孤魂野鬼,他们是那些阳寿未尽而非正常死亡的,他们即不能上天,也不能投胎,更不能到阴间,只能再黄泉路上游荡,等待寿阳到了后才能到阴间报到,听候阎罗王的发落。在黄泉路上有火红的彼岸花。彼岸花是一般认为是生长在三途河边的接引之花。在那儿大批大批的开着这花,远远看上去就像是血所铺成的地毯, 又因其红的似火而被喻为”火照之路” 也是这长长黄泉路上唯一的风景与色彩. 人就踏着这花的指引通向幽冥之狱。花香传说有魔力,能唤起死者生前的记忆。 接下来还要过忘川河,奈何桥,跨过三生石,喝孟婆汤等等。   因此中国人有时称人死了叫赴黄泉。   {奈何桥} 关于此桥,存在两种流行的说法,一种叫做奈河桥,另一种叫做奈何桥。二者有一定的联系,但是有区别。   奈何桥/奈河桥abyss bridge (a Buddhist place); the Bridge of No Return   【奈河桥】   “奈河”,是佛教所说的地狱中的河名。《宣室志》第四卷对此有所记载:“行十余里,至一水,广不数尺,流而西南。观问习,习曰:‘此俗所谓奈河,其源出地府’。观即视,其水皆血,而腥秽不可近。”因河上有桥,故名“奈河桥”。桥险窄光滑,有日游神、夜游神日夜把守。桥下血河里虫蛇满布,波涛翻滚,腥风扑面。恶人鬼魂堕入河中,就好似《西游记》第十回中的描写:“铜蛇铁狗任争餐,永堕奈河无出路”。不由让人想到阴间奈河的恐怖。《西游记》第十一回:判官道:陛下,那叫做奈何桥。若到阳间,切须传。   民间传说:人死亡后魂都要过奈河桥,善者有神佛护佑顺利过桥,恶者被打入血河池受罪。《丰都宗教习俗调查》一书对此有过详细的描写:“……桥分三层(或三座),善人的鬼魂可以安全通过上层的桥,善恶兼半者过中间的桥,恶人的鬼魂过下层的桥,多被鬼拦往桥下的污浊的波涛中,被铜蛇铁狗狂咬。每年香会时,香客争以纸钱或铜板掷入池内,并以炒米撒入池中,以为可以施给饿鬼。许多老年香客,喜欢从上走过,以为走过此桥,死后可以免去过奈河桥之苦。”由此可见,建国前一些善男信女到桥前烧香化纸,施舍钱物的虔诚,只求死后佛能护佑过奈河桥。   [编辑本段]【奈何桥】   相传有一条路叫黄泉路,有一条河叫忘川河,上有一座桥叫奈何桥。走过奈何桥有一个土台叫望乡台,望乡台边有个老妇人在卖孟婆汤,忘川河边有一块石头叫三生石,孟婆汤让你忘了一切,三生石记载着你的前世今生。我们走过奈何桥,在望乡台上看最后一眼人间,喝杯忘川河水煮,“今生有缘无份”又何必强求?   “孟婆汤”是一个中国的古老传说,这在澜子家一本古书上记载着。在那个传说中人是生生世世轮回反复的。这一世的终结不过是下一世的起点。生生世世循环的人无法拥有往世的记忆,只因为每个人在转世投胎之前都会在奈何桥上喝下忘记前程往事的孟婆汤。所以,走在奈何桥上时,是一个人最后拥有今世记忆的时候。这一刻,很多人还执着于前世未了的意愿,却又深深明白这些意愿终将无法实现,就会发出一声长长的叹息。这也是这座连接各世轮回的桥命名为奈何桥的原因。http://baike.baidu.com/view/58459.htm   【三生石的传说】   人死后,走过黄泉路,到了奈何桥,就会看到三生石。它一直立在奈何桥边,张望着红尘中那些准备喝孟婆汤、轮回投胎的人们。   传说三生石能照出人前世的模样。前世的因,今生的果,宿命轮回,缘起缘灭,都重重地刻在了三生石上。   千百年来,它见证了芸芸众生的苦与乐、悲与欢、笑与泪。该了的债,该还的情,三生石前,一笔勾销。   2、【现实中的三生石】   三生石是一块状貌奇钦磊落的巨石,在与飞来峰相连接的莲花峰东麓,是“西湖十六遗迹”之一。该石高约10米,宽2米多,峭拔玲珑。石上刻有“三生石”三个碗口大小的篆书及《唐·圆泽和尚·三生石迹》的碑文,记述“三生石”之由来。石上多唐、宋时的题词石刻,大多已不可辨认,只有元至正元年(1341年)秋九月太史杨瑀、翰林张翥等人的题词仍清晰可见。   缘定三生的故事   师名圆泽,居慧林,与洛京守李源为友,约往蜀山峨嵋礼普贤大士。师欲行斜谷道,源欲沂峡。师不可,源强之,乃行。舟次南浦,见妇人锦裆负婴汲水,师见而泣曰:“吾始不欲行此道者,为是也,彼孕我已三年,今见之不可逃矣,三日浴儿时,顾公临门,我以一笑为信。十二年后,钱唐天竺寺外,当与公相见。”言讫而化。妇既乳儿,源往视之,果笑,寻即回舟。如期至天竺,当中秋月下,闻葛洪井畔有牧儿扣角而歌曰:“三生石上旧精魂,赏月吟风不用论,惭愧情人远相访,些身虽异性常存。”源知是师,乃趋前曰:“泽公健否?”儿曰:“李公真信士也,我与君殊途,切勿相近,唯以勤修勉之。”又歌曰:“身前身后事茫茫,欲话因缘恐断肠,吴越江山寻已遍,欲回烟棹上瞿塘。”遂去,莫如所之。   这真是一个动人的故事。它写朋友的真情、写人的本性、写生命的精魂,历经两世而不改变,读事令人动容。   富家子弟李源,因为父亲在变乱中死去而体悟人生无常,发誓不做官、不娶妻、不吃肉食,把自己的家捐献出来改建惠林寺,并住在寺里修行。寺里的住持圆泽禅师,很会经营寺产,而且很懂音乐,李源和他成了要好的朋友,常常坐着谈心,一谈就是一整天,没有人知道他们在谈什么。   有一天,他们相约共游四川的青城山和峨眉山,李源想走水路从湖北沿江而上,圆泽却主张由陆路取道长安斜谷入川。李源不同意。圆泽只好依他,感叹说:“一个人的命运真是由不得自己呀!”于是一起走水路,到了南浦,船靠在岸边,看到一位穿花缎衣裤的妇人正到河边取水,圆泽看着就流下泪来,对李源说:“我不愿意走水路就是怕见到她呀!”李源吃惊地问他原因,他说:“她姓王,我注定要做她的儿子,因为我不肯来,所以她怀孕三年了还生不下来,现在既然遇到了,就不能再逃避。现在请你用符咒帮我速去投生,三天以后洗澡的时候,请你来王家看我,我以一笑作为证明。十三年后的中秋夜,你来杭州的天竺寺外,我一定来和你见面。”   李源一方面悲痛后悔,一方面为他洗澡更衣,到黄昏的时候,圆泽就死了,河边看见的妇人也随之生产了。三天以后李源去看婴儿,婴儿见到李源果真微笑,李源便把一切告诉王氏,王家便拿钱把圆泽埋葬在山下。李源再也无心去游山,就回到惠林寺,寺里的徒弟才说出圆泽早就写好了遗书。   十三年后,李源从洛阳到杭州西湖天竺寺,去赴圆泽的约会,到寺外忽然听到葛洪川畔传来牧童拍着牛角的歌声:   我是过了三世的昔人的魂魄,赏月吟风的往事早已成为过去;惭愧让你跑这么远来探望我,我的身体虽变了心性却长在。   李源听了,知道是旧人,忍不往问道: “泽公,你还好吗?”牧童说:“李公真守信约,可惜我的俗缘未了,不能和你再亲   近,我们只有努力修行不堕落,将来还有会见面的日子。”随即又唱了一首歌:   身前身后的事情非常渺茫,想说出因缘又怕心情忧伤;   吴越的山川我已经走遍了,再把船头掉转到瞿塘去吧!   牧童掉头而去,从此不知他往那里去了。   再过三年,大臣李德裕启奏皇上,推荐李源是忠臣的儿子又很孝顺,请给予官职。于是皇帝封李源为谏议大夫,但这时的李源早已彻悟,看破了世情,不肯就职,后来在寺里死去,活到八十岁。   --   这个故事歌颂了人生最宝贵的东西——情义。圆泽禅师和李源的故事流传得很广,到了今天,在杭州西湖天竺寺外,还留下一块大石头,据说就是当年他们隔世相会的地方,称为 “三生石”。 【三生石】   人死后,走过黄泉路,到了奈何桥,就会看到三生石。它一直立在奈何桥边,张望着红尘中那些准备喝孟婆汤、轮回投胎的人们。   传说三生石能照出人前世的模样。前世的因,今生的果,宿命轮回,缘起缘灭,都重重地刻在了三生石上。   千百年来,它见证了芸芸众生的苦与乐、悲与欢、笑与泪。该了的债,该还的情,三生石前,一笔勾销。   忘川河  【解释】   ①在中国的神话传说中,人死之后要过鬼门关,经黄泉路,在黄泉路和冥府之间,由忘川河划之为分界。忘川河水呈血黄色,里面尽是不得投胎的孤魂野鬼,虫蛇满布,腥风扑面。   忘川河上有奈何桥,奈何桥边坐着一个老婆婆,她叫孟婆,要过忘川河,必过奈何桥,要过奈何桥,就要喝孟婆汤,不喝孟婆汤,就过不得奈何桥,过不得奈何桥,就不得投生转世。   ②忘川(Lethe) ,希腊神话中不和女神厄里斯(Eris)的女儿和遗忘的化身,又是冥府的河流或平原的名字。   【三途河”与“忘川河”的关系】   传说1.   “三途河”与“忘川河”是同一条河,国外称“三途河”中国谓之“忘川(河)”。   传说2.   “忘川(河)”是汇入“三途河”最长的支流之一。   三途河也叫做“三途川”。传说中,“三途河”是生界与死界的分界线。因为水流会根据死者生前的行为,而分成缓慢、普通和急速三种,故被称为"三途"。   就像生与死只有轮回可以跨越一样,渡过“三途河”的方法也只有一个,那就是“三途河”上的渡船,除此之外别无他法。然而渡船是要付船费的,没有路费的灵魂将不能登上渡船,就算登上了,也会被船夫丢进“三途河”。那些无法渡河的灵魂在轮回欲望的驱使之下,会涉水渡河,但是“三途河”的河水不但没有浮力,而且还具有能够腐蚀灵魂的剧毒。那些下水的灵魂将永远没有上岸的机会了,只能变成“三途河”里的水鬼。永远无法转生的痛苦和彻骨冰冷的河水使那些水鬼对其它还有轮回希望的灵魂产生了妒忌。只要有灵魂落水,他们就会一拥而上,将其拉入河底也变成和他们一样的水鬼。   【孟婆汤】   "相传"有一条路叫黄泉路.有一条河叫忘川.河上有一座桥叫奈何桥.走过奈何桥有一个土台叫望乡台.望乡台边有个老妇人在卖孟婆汤.忘川边有一块石头叫三生石.孟婆汤让你忘了一切.三生石记载着你的前世今生.我们走过奈何桥.在望乡台上看最后一眼人间.喝杯忘川水煮."今生有缘无份"又何必强求?   "孟婆汤"是一个中国的古老传说,这在澜子家一本古书上记载着。在那个传说中人是生生世世轮回反复的。这一世的终结不过是下一世的起点。生生世世循环的人无法拥有往世的记忆,只因为每个人在转世投胎之前都会在奈何桥上喝下忘记前程往事的孟婆汤。所以,走在奈何桥上时,是一个人最后拥有今世记忆的时候。这一刻,很多人还执着于前世未了的意愿,却又深深明白这些意愿终将无法实现,就会发出一声长长的叹息。这也是这座连接各世轮回的桥命名为奈何桥的原因。  
80    조선족 성씨 본관 한조 대조표 댓글:  조회:5590  추천:0  2012-07-17
※ 본 자료는 성씨와 본관의 한자표기를 돕기 위한 자료입니다. 따라서 본관의 종류에 있어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이미 통합된 구본관이 한자표기의 참고를 위해 포함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 姓 본관(本貫) 가씨 賈氏 소주(蘇州) 간씨 簡氏 가평(加平) 갈씨 葛氏 남양(南陽) 감씨 甘氏 회산(檜山) 강씨 姜氏 금천(衿川) 진주(晉州) 康氏 순천(順天) 신천(信川) 영강(永康) 용인(龍仁) 재령(載寧) 진주(晉州) 彊氏 진주(晉州) 개씨 介氏 여주(驪州) 견씨 堅氏 천녕(川寧) 甄氏 황간(黃磵) 경씨 慶氏 청주(淸州) 景氏 태인(泰仁) 해주(海州) 계씨 桂氏 수안(遂安) 고씨 高氏 개성(開城) 고흥(高興) 안동(安東) 용담(龍潭) 장흥(長興) 전주(全州) 제주(濟州) 횡성(橫城) 곡씨 曲氏 면천(沔川) 용궁(龍宮) 공씨 公氏 김포(金浦) 孔氏 곡부(曲阜) 곽씨 郭氏 선산(善山) 의령(宜寧) 청주(淸州) 해미(海美) 현풍(玄風) 구씨 丘氏 평해(平海) 具氏 능성(綾城) 창원(昌原) 邱氏 은진(恩津) 국씨 鞠氏 담양(潭陽) 궉씨 鴌氏 순창(淳昌) 선산(善山) 권씨 權氏 안동(安東) 예천(醴泉) 근씨 斤氏 청주(淸州) 금씨 琴氏 봉화(奉化) 기씨 奇氏 남원(南原) 덕양(德陽) 행주(幸州) 길씨 吉氏 선산(善山) 해평(海平) 김씨 金氏 강릉(江陵) 강서(江西) 강진(康津) 강화(江華) 개성(開城) 경산(慶山)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산(光山) 광양(光陽) 광주(廣州) 교하(交河) 금산(錦山) 금산(金山) 금화(金化) 김녕(金寧) 김제(金堤) 김해(金海) 나주(羅州) 낙안(樂安) 남양(南陽) 남평(南平) 당악(唐岳) 당진(唐津) 대구(大邱) 덕수(德水) 도강(道康) 도주(道州) 동래(東萊) 명주(溟州) 무장(茂長) 문화(文化) 밀양(密陽) 배천(白川) 보령(保寧) 보은(報恩) 부안(扶安) 부평(富平) 분성(盆城) 사천(泗川) 삼척(三陟) 상산(商山) 상주(尙州) 서흥(瑞興) 선산(善山) 선성(宣城) 설성(雪城) 수안(遂安) 수원(水原) 순천(順天) 시흥(始興) 신주(愼州) 신천(信川) 아산(牙山) 안동(安東) 안로(安老) 안산(安山) 안성(安城) 안악(安岳) 양근(楊根) 양산(梁山) 양주(楊州) 언양(彦陽) 여수(麗水) 연기(燕岐) 연안(延安) 영광(靈光) 영덕(盈德) 영동(永同) 영암(靈巖) 영양(英陽) 영월(寧越) 영천(永川) 영해(寧海) 예안(禮安) 예천(醴泉) 오성(筽城) 오천(烏川) 옥천(沃川) 용궁(龍宮) 용담(龍潭) 우록(友鹿) 우봉(牛峰) 울산(蔚山) 웅천(熊川) 원주(原州) 월성(月城) 은율(殷栗) 의성(義城) 장연(長淵) 전의(全義) 전주(全州) 정산(定山) 정주(貞州) 진도(珍島) 진례(進禮) 진잠(鎭岑) 진주(晉州) 진천(鎭川) 창원(昌原) 청도(淸道) 청주(淸州) 청풍(淸風) 춘양(春陽) 태원(太原) 파평(坡平) 풍산(豊山) 함창(咸昌) 해평(海平) 해풍(海豊) 희천(熙川) 나씨 羅氏 군위(軍威) 금성(錦城) 나주(羅州) 능성(綾城) 수성(壽城) 안정(安定) 남씨 南氏 고성(固城) 영양(英陽) 영양(穎陽) 의령(宜寧) 남궁씨 南宮氏 함열(咸悅) 내씨 乃氏 개성(開城) 노씨 盧氏 경주(慶州) 곡산(谷山) 광산(光山) 광주(光州) 교하(交河) 김해(金海) 만경(萬頃) 밀양(密陽) 신창(新昌) 안강(安康) 안동(安東) 의주(義州) 장연(長淵) 파주(坡州) 풍천(豊川) 해주(海州) 路氏 개성(開城) 魯氏 강화(江華) 광주(廣州) 밀양(密陽) 함평(咸平) 뇌씨 雷氏 교동(喬桐) 단씨 段氏 연안(延安) 당씨 唐氏 밀양(密陽) 대씨 大氏 밀양(密陽) 도씨 道氏 고성(固城) 都氏 성주(星州) 팔거(八莒) 陶氏 풍양(豊壤) 독고씨 獨孤氏 남원(南原) 돈씨 頓氏 목천(木川) 동씨 董氏 광천(廣川) 동방씨 東方氏 진주(晉州) 두씨 杜氏 두릉(杜陵) 만경(萬頃) 마씨 馬氏 목천(木川) 장흥(長興) 麻氏 영평(永平) 만씨 萬氏 강릉(江陵) 강화(江華) 개성(開城) 광주(廣州) 영풍(永覽) 익곡(翼谷) 진강(鎭江) 홍주(洪州) 매씨 梅氏 충주(忠州) 맹씨 孟氏 신창(新昌) 명씨 明氏 서촉(西蜀) 모씨 牟氏 함평(咸平) 목씨 睦氏 사천(泗川) 묵씨 墨氏 광령(廣寧) 요동(遼東) 문씨 文氏 감천(甘泉) 강릉(江陵) 개령(開寧) 남평(南平) 명주(溟州) 안동(安東) 장연(長淵) 정선(旌善) 창원(昌原) 취성(鷲城) 門氏 송림(松林) 인동(仁同) 인천(仁川) 미씨 米氏 재령(載寧) 민씨 閔氏 여흥(驪興) 박씨 朴氏 강릉(江陵) 개성(開城)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주(廣州) 구산(龜山) 군위(軍威) 나주(羅州) 노성(魯城) 면천(沔川) 무안(務安) 문의(文義) 밀양(密陽) 반남(潘南) 봉산(鳳山) 비안(比安) 사천(泗川) 삼척(三陟) 상산(商山) 상주(尙州) 선산(善山) 성주(星州) 순창(淳昌) 순천(順天) 여주(驪州) 영암(靈巖) 영해(寧海) 운봉(雲峰) 울산(蔚山) 웅진(熊津) 월성(月城) 은풍(殷豊) 음성(陰城) 음죽(陰竹) 의창(義昌) 의흥(義興) 인제(麟蹄) 전주(全州) 정선(旌善) 죽산(竹山) 진원(珍原) 창원(昌原) 춘천(春川) 충주(忠州) 태안(泰安) 태인(泰仁) 평산(平山) 평주(平州) 평택(平澤) 함안(咸安) 함양(咸陽) 반씨 潘氏 거제(巨濟) 광산(光山) 班氏 개성(開城) 고성(固城) 평해(平侮) 방씨 房氏 남양(南陽) 수원(水原) 용성(龍城) 方氏 상주(尙州) 온양(溫陽) 龐氏 갈양(褐陽) 개성(開城) 대원(大原) 배씨 裵氏 경산(京山) 경주(慶州) 곤산(昆山) 김해(金海) 남해(南海) 달성(達城) 대구(大丘) 분성(盆城) 성주(星州) 영암(靈巖) 협계(俠溪) 흥해(興海) 백씨 白氏 남포(藍浦) 대흥(大興) 수성(隋城) 수원(水原) 양산(梁山) 임천(林川) 직산(稷山) 태인(泰仁) 해미(海美) 범씨 范氏 금성(錦城) 변씨 卞氏 개성(開城) 밀양(密陽) 초계(草溪) 팔계(八溪) 邊氏 원주(原州) 장연(長淵) 황주(黃州) 복씨 卜氏 면천(沔川) 봉씨 奉氏 하음(河陰) 鳳氏 경주(慶州) 부씨 夫氏 제주(濟州) 빈씨 彬氏 담양(潭陽) 대구(大丘) 빙씨 氷氏 경주(慶州) 사씨 史氏 거창(居昌) 임강(臨江) 장사(長沙) 전주(全州) 진주(晋州) 청주(靑州) 사공씨 司空氏 효령(孝令) 상씨 尙氏 목천(木川) 서씨 徐氏 남양(南陽) 남평(南平) 달성(達城) 당성(唐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연산(連山) 이천(利川) 장성(長城) 절강(浙江) 평당(平當) 서문씨 西門氏 안음(安陰) 석씨 昔氏 월성(月城) 石氏 양주(楊州) 충주(忠州) 해주(海州) 홍주(洪州) 화원(花園) 선씨 宣氏 보성(寶城) 선우씨 鮮于氏 태원(太原) 설씨 卨氏 경주(慶州) 薛氏 경주(慶州) 순창(淳昌) 偰氏 경주(慶州) 섭씨 葉氏 경주(慶州) 성씨 成氏 창녕(昌寧) 소씨 蘇氏 진주(晉州) 邵氏 가량(加良) 경주(慶州) 공주(公州) 남양(南陽) 인천(仁川) 전주(全州) 청산(責山) 평산(平山) 손씨 孫氏 경주(慶州) 나주(羅州) 밀양(密陽) 부평(富平) 수주(樹州) 안동(安東) 월성(月城) 일직(一直) 청주(淸州) 평해(平海) 송씨 宋氏 김해(金海) 남양(南陽) 덕산(德山) 문경(聞慶) 서산(瑞山) 신평(新平) 야성(冶城) 양주(楊州) 여산(礪山) 연안(延安) 영주(榮州) 용성(龍城) 은진(恩津) 진천(鎭川) 청주(淸州) 합천(陜川) 홍산(鴻山) 홍주(洪州) 松氏 화순(和順) 수씨 水氏 김해(金海) 운제(雲梯) 순씨 舜氏 임천(林川) 파주(坡州) 荀氏 연곡(連谷) 임천(林川) 창원(昌原) 홍산(鴻山) 승씨 承氏 광산(光山) 연일(延日) 昇氏 송도(松都) 시씨 施氏 절강(浙江) 柴氏 금화(金化) 능향(綾鄕) 태인(泰仁) 신씨 愼氏 거창(居昌) 申氏 고령(高靈) 아주(鵝洲) 영월(寧越) 영천(永川) 영해(寧海) 은풍(殷豊) 죽산(竹山) 천안(天安) 평산(平山) 辛氏 영산(靈山) 영월(寧越) 심씨 沈氏 부유(富有) 삼척(三陟) 청송(靑松) 풍산(豊山) 안씨 安氏 공산(公山) 광주(廣州) 동주(洞州) 순흥(順興) 안산(安山) 안성(安城) 죽산(竹山) 지곡(池谷) 충주(忠州) 탐진(耽津) 태원(太原) 흥녕(興寧) 애씨 艾氏 연풍(延豊) 전주(全州) 한양(漢陽) 야씨 夜氏 개성(開城) 봉성(峯城) 석천(石淺) 원평(原平) 양씨 樑氏 남양(南陽) 梁氏 남원(南原) 남해(南海) 제주(濟州) 청주(淸州) 충주(忠州) 楊氏 남원(南原) 밀양(密陽) 제주(濟州) 중화(中和) 청주(淸州) 하음(河陰) 慈氏 자요(遼陽) 어씨 魚氏 충주(忠州) 함양(咸陽) 함종(咸從) 엄씨 嚴氏 경원(慶源) 영월(寧越) 여씨 余氏 의령(宜寧) 呂氏 곡산(谷山) 성주(星州) 함양(咸陽) 연씨 延氏 곡산(谷山) 燕氏 곡산(谷山) 덕원(德原) 영평(永平) 전주(全州) 정평(定平) 평주(平州) 連氏 나주(羅州) 전주(全州) 염씨 廉氏 곡성(曲城) 봉성(峰城) 서원(瑞原) 파주(坡州) 영씨 永氏 평해(平海) 예씨 芮氏 남양(南陽) 부계(缶溪) 수원(水原) 의흥(義興) 청풍(淸風) 오씨 伍氏 부흥(復興) 吳氏 고창(高敞) 군위(軍威) 금성(金城) 나주(羅州) 낙안(樂安) 동복(同福) 두원(荳原) 보성(寶城) 연일(延日) 울산(蔚山) 장흥(長興) 전주(全州) 평해(平海) 함양(咸陽) 함평(咸平) 해주(海州) 화순(和順) 흥양(興陽) 옥씨 玉氏 의령(宜寧) 온씨 溫氏 봉성(鳳城) 옹씨 邕氏 순창(淳昌) 옥천(玉川) 雍氏 옹진(饔津) 파평(坡平) 왕씨 王氏 강릉(江陵) 개성(開城) 안동(安東) 제남(濟南) 청주(淸州) 해주(海州) 용씨 龍氏 홍천(洪川) 우씨 于氏 목천(木川) 禹氏 단양(丹陽) 원씨 元氏 원주(原州) 袁氏 비안(比安) 위씨 韋氏 강화(江華) 魏氏 장흥(長興) 유씨 柳氏 경주(慶州) 고흥(高興) 문화(文化) 서산(瑞山) 선산(善山) 영광(靈光) 유주(儒州) 전주(全州) 정주(貞州) 진주(晉州) 풍산(豊山) 흥양(興陽) 兪氏 강진(康津) 고령(高靈) 금산(金山) 기계(杞溪) 무안(務安) 인동(仁同) 창원(昌原) 천녕(川寧) 劉氏 강릉(江陵) 강화(江華) 거창(居昌) 문화(文化) 배천(白川) 중원(中原) 충주(忠州) 한양(漢陽) 庾氏 무송(茂松) 육씨 陸氏 옥천(沃川) 윤씨 尹氏 기계(杞溪) 나주(羅州) 남원(南原) 무송(茂松) 서흥(瑞興) 양주(楊州) 영천(永川) 예천(醴泉) 옥과(玉果) 칠원(漆原) 파평(坡平) 포주(抱州) 함안(咸安) 해남(海南) 해주(海州) 해평(海平) 은씨 殷氏 행주(幸州) 음씨 陰氏 죽산(竹山) 이씨 伊氏 은천(銀川) 태원(太原) 李氏 가평(加平) 가평(嘉平) 강릉(江陵) 강양(江陽) 강진(康津) 강화(江華) 강흥(江興) 개성(開城) 견주(見州) 결성(結城) 경산(京山) 경원(慶源)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부(古阜)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산(光山) 광양(光陽) 광주(廣州) 금구(金溝) 금마(金馬) 금산(金山) 길주(吉州) 김포(金浦) 나주(羅州) 남평(南平) 농서(隴西) 단성(丹城) 단양(丹陽) 담양(潭陽) 대흥(大興) 덕산(德山) 덕수(德水) 덕영(德永) 덕은(德恩) 도안(道安) 문의(文義) 벽진(碧珍) 보령(保寧) 봉산(鳳山) 부안(扶安) 부여(扶餘) 부평(富平) 사천(泗川) 상산(商山) 서림(西林) 서산(瑞山) 서천(舒川) 설성(雪城) 성주(星州) 수안(遂安) 수원(水原) 수주(樹州) 순천(順天) 신평(新平) 아산(牙山) 안산(安山) 안성(安城) 안악(安岳) 양산(梁山) 양성(陽城) 양주(楊州) 여주(驪州) 여흥(驪興) 연안(延安) 염주(鹽州) 영성(靈城) 영월(寧越) 영주(永州) 영주(瀛州) 영천(寧川) 영천(永川) 영해(寧海) 예안(禮安) 옥구(沃溝) 온양(溫陽) 완산(完山) 용구(龍駒) 용궁(龍宮) 용인(龍仁) 우계(羽溪) 우봉(牛峰) 울산(蔚山) 원율(原栗) 원주(原州) 월성(月城) 음죽(陰竹) 익산(益山) 익양(益陽) 인제(麟蹄) 인주(仁州) 인천(仁川) 임강(臨江) 장기(長鬐) 장수(長水) 장천(長川) 재령(載寧) 적성(積城) 전의(全義) 전주(全州) 정선(旌善) 정읍(井邑) 지평(砥平) 진보(眞寶) 진성(眞城) 진안(鎭安) 진위(振威) 진주(晉州) 진천(鎭川) 차성(車城) 창녕(昌寧) 천안(天安) 철성(鐵城) 청송(靑松) 청안(淸安) 청양(靑陽) 청주(淸州) 청해(靑海) 초산(楚山) 충주(忠州) 태안(泰安) 태원(太原) 통진(通津) 평산(平山) 평양(平壤) 하빈(河濱) 한산(韓山) 함안(咸安) 함평(咸平) 홍주(洪州) 흥양(興陽) 異氏 밀양(密陽) 인씨 印氏 교동(喬洞) 연안(延安) 임씨 任氏 관산(冠山) 장흥(長興) 정안(定安) 평산(平山) 풍산(豊山) 풍천(豊川) 林氏 경주(慶州) 금성(錦城) 길안(吉安) 나주(羅州) 보주(甫州) 부안(扶安) 선산(善山) 안동(安東) 안음(安陰) 안의(安義) 예천(醴泉) 옥구(沃溝) 옥야(沃野) 울진(蔚珍) 은진(恩津) 익산(益山) 장흥(長興) 전주(全州) 조양(兆陽) 진천(鎭川) 평택(平澤) 풍천(豊川) 회진(會津) 장씨 張氏 결성(結城) 구례(求禮) 나주(羅州) 단양(丹陽) 대원(大元) 덕수(德水) 목천(木川) 무안(務安) 부안(扶安) 순천(順天) 안동(安東) 예산(禮山) 옥구(沃溝) 옥산(玉山) 울진(蔚珍) 인동(仁同) 장연(長淵) 전주(全州) 지례(知禮) 진안(鎭安) 진천(鎭川) 청송(靑松) 평양(平壤) 풍덕(豊德) 해주(海州) 홍천(洪川) 흥덕(興德) 흥양(興陽) 흥해(興海) 章氏 거창(居昌) 莊氏 금천(衿川) 장연(長連) 蔣氏 아산(牙山) 전씨 全氏 감천(甘泉) 경산(慶山) 경주(慶州) 기장(機張) 나주(羅州) 부여(扶餘) 성주(星州) 옥산(玉山) 옥천(沃川) 완산(完山) 용궁(龍宮) 정선(旌善) 죽산(竹山) 천안(天安) 팔거(八莒) 평강(平康) 함창(咸昌) 황간(黃澗) 田氏 개성(開城) 남양(南陽) 남원(南原) 담양(潭陽) 연안(延安) 영광(靈光) 우봉(牛峰) 태산(泰山) 평택(平澤) 錢氏 문경(聞慶) 점씨 占氏 한산(韓山) 정씨 丁氏 금성(錦城) 나주(羅州) 압해(押海) 영광(靈光) 창녕(昌寧) 창원(昌原) 程氏 하남(河南) 鄭氏 경주(慶州) 고성(固城) 광산(光山) 금성(錦城) 김포(金浦) 나주(羅州) 동래(東萊) 봉화(奉化) 삼가(三嘉) 서산(瑞山) 야성(野城) 연일(延日) 영덕(盈德) 영일(迎日) 온양(溫陽) 장기(長鬐) 장흥(長興) 전주(全州) 진주(晉州) 창녕(昌寧) 철산(鐵山) 청산(靑山) 청주(淸州) 초계(草溪) 팔계(八溪) 하동(河東) 함평(咸平) 합천(陜川) 해주(海州) 제씨 諸氏 칠원(漆原) 제갈씨 諸葛氏 남양(南陽) 조씨 曺氏 가흥(嘉興) 옥천(玉川) 용담(龍潭) 장흥(長興) 창녕(昌寧) 탐진(耽津) 趙氏 광주(廣州) 김제(金堤) 배천(白川) 상주(尙州) 순창(淳昌) 양주(楊州) 옥과(玉果) 옥천(玉川) 임천(林川) 직산(稷山) 진보(眞寶) 창녕(昌寧) 태원(太原) 평산(平山) 평양(平壤) 평일(平一) 풍양(豊壤) 한산(韓山) 한양(漢陽) 함안(咸安) 횡성(橫城) 종씨 宗氏 니파(泥彼) 모압(毛押) 인의(仁義) 임진(臨律) 통진(通津) 황원(黃原) 鍾氏 두원(荳原) 영암(靈岩) 정의(旌義) 천안(天安) 통진(通津) 풍덕(豊德) 하음(河陰) 좌씨 左氏 청주(淸州) 주씨 周氏 상산(商山) 상주(尙州) 안의(安義) 철원(鐵原) 초계(草溪) 朱氏 신안(新安) 나주(羅州) 능성(綾城) 장수(長水) 전주(全州) 준씨 俊氏 청주(淸州) 지씨 智氏 봉산(鳳山) 池氏 청주(淸州) 충주(忠州) 진씨 晉氏 기계(杞溪) 남원(南原) 秦氏 중원(中原) 진주(晉州) 풍기(豊基) 陳氏 광동(廣東) 양산(梁山) 여양(驪陽) 청주(淸州) 차씨 車氏 연안(延安) 창씨 倉氏 아산(牙山) 여산(礪山) 장성(長城) 昌氏 강릉(江陵) 공주(公州) 아산(牙山) 여산(礪山) 장성(畏城) 채씨 菜氏 영양(穎陽) 蔡氏 인천(仁川) 진천(鎭川) 평강(平康) 采氏 여산(礪山) 척씨 拓氏 곡산(谷山) 천씨 千氏 금계(金溪) 영양(潁陽) 天氏 연안(延安) 우봉(午峯) 초씨 楚氏 파릉(巴陵) 肖氏 제주(濟州) 최씨 崔氏 간성(杆城) 강릉(江陵) 강화(江華) 개성(開城) 경성(鏡城) 경주(慶州) 계림(鷄林) 고부(古阜) 곡강(曲江) 공주(公州) 광주(廣州) 괴산(槐山) 나주(羅州) 낭주(郎州) 동주(東州) 등주(登州) 명주(溟州) 무주(茂朱) 부안(扶安) 삭녕(朔寧) 상원(祥原) 상주(尙州) 수성(隋城) 수원(水原) 승령(僧嶺) 아산(牙山) 양주(楊州) 양천(陽川) 여수(麗水) 연풍(延豊) 영암(靈巖) 영주(永州) 영천(永川) 영흥(永興) 완산(完山) 용강(龍崗) 용궁(龍宮) 용주(龍州) 우봉(牛峰) 원주(原州) 월성(月城) 전의(全義) 전주(全州) 직산(稷山) 창원(昌原) 천녕(川寧) 청송(靑松) 청주(淸州) 초계(草溪) 충원(忠原) 충주(忠州) 탐진(耽津) 통천(通川) 하동(河東) 한남(漢南) 해주(海州) 화순(和順) 황주(黃州) 회령(會寧) 흥해(興海) 추씨 秋氏 전주(全州) 추계(秋溪) 탁씨 卓氏 광산(光山) 탄씨 彈氏 진주(晋州) 해주(海州) 태씨 太氏 남원(南原) 영순(永順) 협계(陜溪) 판씨 判氏 해주(海州) 팽씨 彭氏 용강(龍崗) 절강(浙江) 편씨 片氏 금천(衿川) 절강(浙江) 평씨 平氏 충주(忠州) 포씨 包氏 풍덕(豊德) 표씨 表氏 신창(新昌) 풍씨 馮氏 임구(臨胊) 피씨 皮氏 괴산(槐山) 홍천(洪川) 필씨 弼氏 대흥(大興) 하씨 夏氏 달성(達城) 河氏 진주(晉州) 한씨 漢氏 충주(忠州) 韓氏 곡산(谷山) 단주(湍州) 당진(唐津) 대흥(大興) 삼화(三和) 서원(西原) 신평(新平) 안변(安邊) 정평(定平) 청주(淸州) 한양(漢陽) 함씨 咸氏 강릉(江陵) 양근(楊根) 항양(恒陽) 해씨 海氏 김해(金海) 허씨 許氏 공암(孔巖) 김해(金海) 양천(陽川) 태인(泰仁) 하양(河陽) 현씨 玄氏 남원(南原) 성주(星州) 수원(水原) 순천(順天) 연주(延州) 창원(昌原) 천녕(川寧) 팔거(八莒) 형씨 邢氏 진주(晉州) 호씨 扈氏 보안(保安) 전주(全州) 胡氏 토산(兎山) 파릉(巴陵) 홍씨 洪氏 남양(南陽) 당성(唐城) 부계(缶溪) 염주(鹽州) 청주(淸州) 풍산(豊山) 회인(懷仁) 화씨 化氏 진주(晉州) 황씨 黃氏 단양(丹陽) 덕산(德山) 상주(尙州) 성주(星州) 우주(紆州) 의창(義昌) 장수(長水) 제안(濟安) 창원(昌原) 평해(平海) 항주(杭州) 황주(黃州) 회덕(懷德) 황보씨 皇甫氏 영천(永川) 황주(黃州)    
79    우리민족 전통혼례 연구 댓글:  조회:4746  추천:0  2012-07-17
남귀여가 [ 男歸女家 ]   남자가 신부가 될 여자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른 뒤 그대로 처가에서 살다가 자녀를 낳아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돌아오는 한국 고유의 혼인 풍속의 하나. 부귀부가(夫歸婦家) 또는 서류부가(壻留婦家)라고도 한다. 혼인의 형태는 크게 취가혼(聚嫁婚)과 초서혼(招壻婚)으로 나누어진다. 취가혼은 혼인을 하여 처음부터 남자 집에서 사는 것인데, 이것은 철저한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혼인 풍속이다. 이에 대하여 초서혼은 솔서혼(率壻婚) 또는 데릴사위라고도 하며, 평생 동안 처갓집에서 사는 경우와 어느 일정한 기간 동안만 사는 경우가 있는데, 남귀여가혼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혼인 형태이다. 남귀여가 혼인 풍속은 고대부터 있어 온 일반적인 혼인 풍속으로 생각되는데, 기록상으로는 그 기원이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에서 비롯된다. 서옥제란 여자집에 서옥(壻屋)이라는 작은 집을 지어 혼인한 딸 내외를 살게 하는데, 그들이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야 비로소 사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제도였다. 이 혼인 풍속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남자가 처갓집에 머무는 기간이 점점 짧아졌다.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는 가례(家禮)를 존중하는 사상이 더욱 강조되어, 혼인과 동시에 아내가 남편의 집으로 들어가는 형태의 취가혼 정책을 강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남귀여가의 풍속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비판을 받으면서도 남귀여가 혼인 풍속은 지속되어 왔다. 그러다가 조선의 제13대 왕인 명종(재위 1545∼1567) 때에 이르러, 혼례는 예전과 같이 신부의 집에서 치르되 3일째에 신랑 집으로 가서 옛날의 혼인 풍속대로 행하자는 반친영제(半親迎制) 또는 삼일신행제(三日新行制)가 제창되면서 이것이 관습으로 굳어졌다. [출처] 남귀여가 | 두산백과     '시집가다'와 '장가들다' 시집가다'라는 말이나 '장가들다'라는 말에서 어른들은 갑순이와 갑돌이가 꽃가마 타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시골의 즐거운 잔칫날을 연상한다. 이날은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갑순이와 갑돌이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떡과 잔치국수에 술을 마시고 춤추며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인다. 여기에서 '시집가다'라는 말과 '장가들다'라는 말의 어원은 무엇일까? 그리고 왜 여자는 '시집간다'고 흔히 말하고 남자는 '장가든다'고 말하는 것일까? '시집가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여자가 신랑을 맞아 혼인을 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시집'은 결혼한 남자의 집을 말한다. 그곳은 바로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사는 집이고 신랑이 함께 사는 집이다. 여자가 결혼하면 자기가 살던 친정집을 떠나서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사는 시집으로 가서 산다는 의미에서 여자가 혼인하는 것을 '시집간다'고 표현하게 되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보면 '싀집'이라는 어휘가 나온다. "싀집에 가 여러 해 돌아오디 아니 더니" 또 옛 문헌 〈오륜〉에는 "싀어미 잘 섬기라(善事吾姑)"는 글이 있다. 이때의 '싀'가 '시'로 발음하고 표기도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가 '시집간다'고 하는 것은, 새로이 남편이 사는 시부모 집으로 가서 시부모를 새로이 부모로 섬기며 산다는 뜻이다. 여기서 '싀집'은 지금의 '시집'으로 변한 것이다. 여자가 새로운 어른들을 모시고 섬기며 살아가는 새로운 집인 '싀집'에 가는 것이 시집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싀집'은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인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여인이 늘 마음을 써 섬겨야 한다는 뜻을 살려 '시(媤)'자를 우리가 새로 만들어서 '시집'을 한자어로 '시댁(媤宅)'이라고 쓴 것이다. 그리고 '장가들다'라는 말도 사전적 의미로는 역시 '남자가 신부를 맞아 혼인을 하다'의 뜻이다. 그런데 남자의 경우는 '장가간다'는 말보다 '장가들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것은 말 그대로 남자가 결혼하여 장인 장모가 사는 집 즉, '장가(丈家)'로 들어가서 산다는 뜻의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는 모계사회였고 그래서 남자는 결혼을 하면 바로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서 살았다. 그래서 남자는 결혼을 하게 되면 데릴사위로서 신부 집에서 일을 해주고 살았다. 첫 아이를 낳으면 비로소 독립해 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고구려 때의 풍속에 따르면 혼인식을 하고 나서는 신랑은 장인, 장모의 집에 들어가서 신부와 함께 신혼생활을 하였다. 그야말로 장인 집 곧 장가(丈家)에 들어가 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장가든다'고 하는 것은 신랑이 장인 장모가 사는 집으로 들어가서 신부하고 함께 산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다. 지금은 이러한 풍습이 없어졌지만 '장가들다'라는 말에는 아직도 그 유습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또 전통 결혼에서는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이 사흘 동안 신부 집에 묵어야 하는데 이것도 모계사회의 결혼 유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요즘의 신혼부부가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신부 집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시부모집으로 가는데 이것도 그런 유풍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계사회였을 때에는 남자가 장가를 들었고 부계사회로 되어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 양상으로 어휘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결혼하여서 장가에도 안 들어가고 시집에도 안 가고 그냥 신혼집으로 가는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말에는 생활의 진솔한 모습과 풍속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우리가 쓰는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얼을 반영해주는 거울이다.    조선시대의 혼인제도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랑을 조건으로 혼인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유교는 효도관념에 의해 생식력을 기본조건으로 삼아 자손보존이라는 면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개인끼리의 의사에 의한 결합이라기보다는 집안끼리의 계약이라는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집안 어른들끼리의 협의에 의하여 결정되었던 중매결혼이 성행하여 왔다. 그리고 혼인을 정하는 조건의 하나로 가문을 자세히 따졌다. 그것은 혼인에 의해 새로 생기는 사돈집과 처가, 그리고 외가라는 인척관계 사이에 작용하는 사회적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함으로써 비롯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점에서 혼인은 생활권의 확대라는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회경제적인 지위가 낮은 사람들 사이의 혼인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통혼권도 생활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생활권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그것에 비해서 좁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① 친영혼례(親迎婚禮)의 규범 조선시대의 혼인 절차는 六禮(納采, 問名, 納吉, 納徵, 請期, 親迎)를 중히 여겨 왔으나, 중종 이후부터 유교를 생활 규범에까지 적용시키는 개혁을 하였고 이에 四禮의 절차에 따라 혼례를 행하였다. 四禮는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으로 한국 혼례 절차의 이상형이며 양반 계층에서는 그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했던 규범이다. 이 가운데 四禮의 마지막 절차인 親迎이라는 의식은 신랑이 신부집에 와서 신부를 데리고 본가에 가서 혼례를 치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혼속이었던 서류부가혼은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임에 반해 친영은 혼례를 신랑집에서 치른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주자가례」에 의한 혼례가 민간 서민층에서 일반적으로 실행되어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② 반친영혼례(半親迎婚禮)의 규범 16세기에 서화담 선생의 주장에 의해 전통혼속과 朱子四禮를 절충하여 삼일대반(三日對飯)이라는 반친영의례가 보급되었다. 반친영은 일부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16세기경부터 행하기 시작하여 일반 서민에게 보급된 것은 18세기경으로 추측된다. 반친영이란, 예식은 신부집에서 하되 신부집에 머무는 기간을 단축하여 삼일만에 신랑집으로 가서 친영의례를 거행하도록 하는 의례이다. 반친영혼례는 혼담, 사성, 택일, 함, 초행길과 대례, 마지막으로 대례를 치른 후의 의례로서 신행, 현구고례, 근친의 절차에 따르는 것이다. 이처럼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신랑집으로 가는 관습은 고대로부터 20세기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 혼인은 '위로는 조상을 받들고 아래로는 후사를 잇기 위한’ 거창한 명분을 위한 것이었다. 시집의 가부장적인 질서에 적응해야 함은 물론 시집의 대를 잇는 것이 여성의 제일 가는 사명이었다. 또한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의 무거운 족쇄가 여성의 삶을 억압하였다. 이에 조선시대에는 혼인하는 딸에게 시집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생활 교육과 성교육이 행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 여성들이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그저 아들을 낳는 기계에만 머물렀을까? 그렇지는 않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시대의 영향으로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혼인풍습이 그대로 전해졌다. ‘남귀여가혼’은 말 그대로 혼인 후 남자가 여자 집에 머물며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조선 초기까지 광범위하게 행해진 혼인 주거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집에 살고 있는 여성의 발언권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셀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혼인 제도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이를 ‘친영제도(親迎制度)’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세종대왕은 즉위 17년(1435년) 3월에 파원군(坡原君) 윤평(尹坪)과 숙신옹주(淑愼翁主)와의 혼인을 친영의식으로 치르는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친영제도를 행하는 사대부는 극히 드물었으며, 조선 후기(17세기 말∼18세기 초)에 와서야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혼례의 의미    1. 혼례(昏禮)  혼례는 가례(家禮) 중 사례(四禮)인 성년례·혼인례·상장례·제의례의 하나로서 남자와 여자가 혼인해 부부가 되는 의식절차를 정한 것이다. 혼인의 의식절차를 정한 예절이라면 '혼례(婚禮'라고 해야 할 텐데 '혼(昏)'자를 써서 '昏禮(혼례)'라고 하는 까닭은 혼인예식은 해가 저무는 시간에 올리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혼인예식을 해가 저무는 시간에 올리는 이유는 혼인이란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예식인데 그것은 음(陰)과 양(陽)의 만남이므로 그 시간도 양인 낮과 음인 밤이 교차하는 시간인 해가 저무는 때가 합당하다는 취지이다. 그것을 예서(禮書)에서는 "양이 가고 음이 오는 까닭을 취한 것(取陽往陰來之義)"이라고 했다.  하루 중에 양과 음이 교차하는 시각은 아침과 자녁의 두 번이 있는데 저녁을 택한 이유는 고례(古禮)의 혼인예식 장소를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을 차리는 장소로 정했고, 혼인예식이 끝나면 곧바로 첫날밤을 차리는 합궁례(合宮禮)를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혼례와 예단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무분별하게 절차없이 호화혼수 예단을 주고받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어, 올바른 혼례절차와 예단을 알아야 할것이다.      2. 혼인(婚姻)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일을 혼인(婚姻)이라 하는 이유는 '婚(혼)'은 장가든다는 뜻이고 '姻(인)'은 시잡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장가들고(婚) 시집간다(姻)'는 말이 된다. 장가든다는 뜻의 글자가 '婚(혼)'이 된 까닭은 저녁때 (昏)에 여인(女)을 만나는 것이 장가드는 것이고, 시집간다는 뜻의 글자가 '姻(인)인 까닭은 고례(古禮)에 여자의 집에서 신랑감을 구하는 데는 반드시 중신하는 부인인 매씨(媒氏)에 의해야 했으므로 여자매씨로 인(因)해 남자를 만나는 것이 시집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인은 음과 양이 합하여 삼라만상이 창조되는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일이며,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짝을 찾는 순수한 인정(人情)에 합하는 일이기 때문에 고례(古禮)에는 "천지의 이치에 순응하고 인정의 마땅함에 합하는 것(順天地之理 合人情之宜)이 혼인이라"고 했다.   3. 혼인례의 의의   혼례란 젊은 남녀가 하나로 합쳐 위로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아래로는 자손을 후세에 존속시켜 조상의 대를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치르는 혼인의 예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혼인을 일러 '인륜 도덕의 시원이며 만복의 근원' 이라 했다. 혼인이란 우리의 일생에 있어서 그만큼 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 또한 혼인의 중요한 의의가 있다.   첫째 의의는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사람은 성년이 되면 먹고 입고 자는 것과 다름이 없는 성의 욕망을 갖게 되는데 아무데나 함부로 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일부일처의 혼인이라는 관계를 이루어 낸 것이다.   둘째는 고유한 정신적 관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우선 사랑으로 결합하여 부부가 서로 공경하며 서로 참아 가는 도리를 지켜 평생 동안의 고락을 같이하여 일생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세째로는 가정이라는 하나의 공동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 점이다. 이 사회생활의 첫 바탕이 바로 부부의 가정이며, 여기서 자녀를 낳아서 기르고 다함께 평안하게 사는 공동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네째로 혼인은 하나의 제도에 따르는 것이다. 제도란 관습 도덕 법률 등 사회의 종합적인 규범을 말한다. 규범이란 우리의 사상이나 행실이 일정한 이상의 모든 먹적을 이루기 위해 마땅히 지켜야 할 법칙이며 원리이다. 그러므로 혼인은 결국 이러한 제도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혼인이란 남녀 두 사람의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 가정이라는 공동생활을 통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측면에서 예로부터 인생의 일대 경사로서 축복을 받아 온 것이다.                       4. 혼례의 역사 혼인제도와 결혼 풍속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변천되어 왔다. 이 관행은 관습에 의하여 인정되고 후에는 법에 의하여 공인되었으며 마침내 하나의 사회제도가 되었다. 혼인은 인간의 가장 큰 대사이므로 예단의 유래도 이에 의하여 진지하고 경건한 제도에 따르게 되었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혼례는 아내를 맞는 예(禮)라 했고 아내를 맞는데는 반드시 해질(日沒)때를 택하여 예를 올렸으므로 혼례라고 하였다. 의식절차는 육례제, 사례제, 현대 혼례제로 변천되어왔다.예기(禮記)에 기록되어 있는 고례(古禮)절차는 중국의 주(周) 나라 시대부터 시행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느 시대부터 어느 정도 시행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으나 아무튼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시행되어오던 혼례의 근본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예단도 역시 혼례제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혼인의 전통적 의미와 기본 절차] 1. 혼인(婚姻)의 의미 * 혼(婚)은 신랑이 신부(女)집에 가서 날저문(昏) 저녁에 '장가든다'는 뜻이고,    인(姻)은 신부(女)는 신랑을 따라(因) '시집간다'는 뜻이다.  (1) 성장한 남녀가 부모와 사회의 인정을 받아 장가 들고 시집 가서 가정을 꾸리는 것  (2) 일생 중 가장 뚜렷한 인생의 전환점이 됨(人倫之大事)  (3) 생사의 문제와 달리 혼인은 사람이 선택하는 일  (4) 서로 다른 남녀가 상대를 정해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므로 여러 절차를 거쳐 신중하게 이루어짐 2. 전통 사회에서의 혼인의 시기  (1) 남자: 30세 전후  (2) 여자: 20세 전후  (3) 조혼(早婚) : 성인이 되기 이전의 어린 나이에 일찍 결혼하려는 풍습 ○ 조혼의 원인: 고려 시대에는 원나라에 보내는 공녀 문제로,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간택 문제 등으로 일찍 혼인하는 풍습이 생겨남 3. 혼례의 기본 절차: 대개 6단계로 이루어짐  (1) 의혼(議婚) : 중매인을 통해 혼인을 논의하는 것으로, 남자 집에서 청혼을 하고 여자측에서 허락을 함  (2) 납채(納采) : 남자측에서 여자측에 혼인이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절차로 신랑의 사주(四柱,생년,월,일,시)를 적어 보냄  (3) 납기(納期) : 여자 집에서 남자 집에 혼인 날짜를 정하여 알림  (4) 납폐(納幣)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예물(비단)을 보내고 받음(오늘날의 '함들이' 행사)  (5) 대례(大禮) : 남자가 몸소 신부의 집을 방문하여 혼인을 치르는 예식(혼례-장가듦)  (6) 우귀(于歸) : 혼례가 끝난 후 신랑이 신부를 안내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옴(시집감, 오늘날의  '신행(新行)'이라한다.) (대례 후 수개월 또는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친정에 있기도 하지만 보통 3일만에 우귀[삼일신행]를 한다. 시댁에 다다르면 신랑이 직접 가마문을 열어 새색시를 데리고 들어간다.  우귀를 하고 신랑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일찍 시부모님께 큰 절을 올린다.   이를 현구고례(見舅姑禮)라 한다.  신부는 이 예를 올리기 위해 시부모에게 폐백(弊帛)을 드린다. )     ‘장가를 간다’는 말에 담긴 역사 [2011.11.28 제887호] [출판] 조선 가족사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었다… 가족과 연관한 사연을 통해 당대 역사의 안팎을 들여다본   “식후에 광선이 남원의 장인가로 돌아갔다. 광연과 어린 누이동생 봉례가 울어 눈물이 줄줄 흐른다. 형제간에 지극한 우애의 정이 어려서부터 나타나니 우리 집안의 기맥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당세의 명문장가인 유희춘(1513~77)이 쓴 에 나오는 구절이다. 광선은 유희춘의 손자로 그가 처가에 간다고 하니 동생들이 슬피 운다. 처가에 다녀온다는데 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며느리 아닌 딸로서의 정체성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재직 중인 이순구씨가 쓴 (너머북스 펴냄)을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광선은 당시 전북 남원의 김장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혼인을 하고 4일 만에 집을 찾았다가 다시 장인 집으로 돌아가고, 한 달쯤 뒤에 두 번째로 본가에 와서 40여 일을 머물다 다시 장인 집으로 돌아갔다. 앞의 구절에 나오는 대목은 두 번째로 장인 집으로 돌아가는 시점이다. 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못 볼 듯 아쉬워하는 이유는 광선이 처가로 완전히 살러 가기 때문이었다. 유희춘은 ‘남원의 장인가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귀남원장가’(歸南原丈家)라고 썼다. 저자는 여기서 ‘귀’(歸)를 단순히 갔다는 표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중국에서 ‘귀’는 여자가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인 시집으로 간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조선에서는 남자에게 적용했다. 조선의 혼인 습속은 대개 여자 집에서 혼인식을 하고 여자는 여자 집에 그대로 머물고 남자가 자신의 집과 처가를 오가거나 아예 처가에서 지냈다. 장가를 ‘간다’는 표현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의 제도가 곧 선진적인 것이며, 중국처럼 되기를 바랐던 조선의 관리들은 혼인에서 외가를 중히 여기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나 남자가 장가드는 혼속은 오히려 양반가에서 더 확고했단다. 조선은 중기까지 남자가 여자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신랑이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생활하는 형태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이 성행했다. 저자는 조선시대 여성이 친정과 긴밀했다는 흔적을 에서도 찾는다. 계축년(1613년, 광해군 5)에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내치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해 서궁에 가두었다. 는 당시 사건을 인목대비의 관점에서 쓴 책인데, 그는 광해군에게 이런 말을 한다. “대군(영창대군)으로 말미암아 이런 화가 부모와 동생에게 미치니 어찌 차마 들을 수만 있으리까? 내 머리를 베어서 표를 보이니 대군을 데려다가 아무렇게나 처치하고 아버님과 동생을 놓아주옵소서.” 영창대군을 지키는 것이 이미 틀렸다고 생각하고 훗날을 생각해서 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아들 영창대군을 내놓을 테니 친정을 보호해달라는 인목대비의 제안은 조금 섬뜩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목대비가 살던 17세기는 남귀여가혼이 점차 줄어들고 남자 집 거주가 늘어나는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어쩌면 모성애보다도 강한) 친정에 대한 소속감, 딸로서의 정체성이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그토록 많은 역사 속 유교적 현모양처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선, 지금까지 좋은 아내, 훌륭한 어머니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신사임당부터가 실제로는 개인적 성향이 현모양처와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신사임당(1504~51)은 16세기 인물인데, 17세기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시집살이를 하지도 않고, 딸도 제사를 지내고 재산도 똑같이 상속받아서 여자들은 딸로서의 정체성이 며느리로서의 정체성보다 더 강했다. 율곡의 을 보면 신사임당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뿐 아니라 본인의 재능과 기호에 몰두한 사람으로 비친다. 반면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는 “자녀가 잘못이 있으면 훈계를 하였으며…”라는 딱 한 줄만 묘사돼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신사임당이 유교적으로 훌륭한 어머니로 전해지는 이유는 송시열이 신사임당의 그림에 찬사를 보내며 “오행의 정수를 얻고 원기의 융화를 모아… 마땅히 율곡을 낳으실 만하다”라는 다분히 성리학적인 품평을 한 탓이다. 신사임당은 38년간 친정이 있는 강원도 강릉에서 살았고 서울에서는 10년 정도 살았다고 한다. 저자는 신사임당이 유교적 전통의 현모양처라기보다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이상적 어머니상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재능에 집중하며 율곡이나 큰딸 매창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여유를 주는, 열린 자세의 현명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부부가 사이좋았던 이유 흔히 가부장적 사회로 인식되는 조선에서 부부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는 대목 또한 흥미롭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사회 운영의 상당 부분을 가족에 일임한 국가가 있었다. 가족의 안정과 부부 화합은 조선의 절대적 과제였다. 저자는 혼인이 개인 의지가 아니라 집안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사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끼리 이뤄졌다는 점도 이유였으리라 말한다. 저자가 꼽은 이유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조선시대 부부가 동거 비율이 낮았고, 이것이 부부 갈등의 첨예화를 막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조선은 중기까지 남귀여가혼에 따라 남자가 처가와 본가를 오가는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부부가 실제 만나는 날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배를 가거나 외직에 파견되는 경우까지 따지면 떨어져 있는 시간은 더욱 길어진다. 실제 의 유희춘은 40년 동안 부부 생활을 했지만 실제 동거 기간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가는 시간의 분리뿐만 아니라 공간적 분리도 시도했는데, 안방과 사랑방의 구분이 그렇다. 오늘날처럼 부부가 한 공간에 밀착해 지내는 문화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책에는 이들 이야기 외에도 재산을 두고 올케와 주먹다짐을 한 안씨 부인, 족보에서 ‘서’(庶)를 빼려고 부도덕한 일도 서슴지 않았던 서자 노수 등 가족과 연관한 조선의 사연들이 담겼다.     조선의 가족 천개의 표정 / 이순구 지음 / 너머북스 조선시대를 떠올리면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 사회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 하지만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 쓴 이 책을 읽어보면 조선시대 가족이 통념만큼 남성중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에 따르면 조선 초기 사림파의 종장(宗匠)으로 불리는 김종직(1431∼1492)은 그의 아버지 김숙자의 고향이 경북 선산(구미)이었지만 외가인 경북 밀양에서 나고 자랐고, 혼인 후에는 밀양을 떠나 부인 조씨의 고향인 김산(경북 김천)에서 생활했다. 왜 그랬을까. 조선 시대, 특히 16세기까지 혼인은 대체로 남자 쪽이 움직이는 시스템으로, 혼인을 하면 여자는 그대로 친정에 머물고 남자가 자신의 집과 처가를 오가거나 아니면 처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신사임당도 혼인 후 20년 가까이 강원 강릉 친정에 머물며 율곡을 낳고 길렀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불리는 이 같은 혼인 풍습은 18세기까지 이어진다. 남귀여가혼은 고려 이래 내려오던 혼인 풍속으로, 신부 집에서 결혼식을 치른 뒤 부부가 일정 기간 신부 집에서 사는 전통이다. 결혼한 딸이 바로 출가하지 않으니, 혼인한 딸에게도 아들과 똑같이 재산을 나눠주고 가정에서 여성의 권위를 인정했다. 남귀여가혼의 관습 때문에 당시에는 여자 집의 영향력이 컸음은 물론이다. 요즘도 ‘장가(丈家)간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장인 집에 들어간다’는 말로 이 같은 혼인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사 또한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지냈다. ‘윤회봉사’나 ‘분할봉사’를 통해 딸이 친정 부모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것. 가령 아버지 제사를 올해는 큰아들이 지내고 내년에는 작은아들이 지내는 것은 윤회봉사고, 아버지 제사는 아들이, 어머니 제사는 딸이 맡으면 분할봉사다. 저자는 “현재 여자들이 명절 제사에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몸이 고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다’는 생각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며 조선의 이런 관습이 남아 있으면 오늘날 며느리들이 겪는 ‘명절 스트레스’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부계성이 강화되면서 딸의 정체성보다 며느리의 정체성이 더 강해진다. 남자들이 장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시집을 가 ‘시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여성들은 딸로서의 권리는 잃어갔지만 며느리나 적처로서의 권리와 위치는 더 강하게 보장받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시대 ‘칠거지악’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실제로 이 때문에 부인이 쫓겨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양자제도 등 다른 방식을 통해 해결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남자에게 여자는 단순히 여자가 아니었다. 여자 집안의 대표자였다. 서양과 달리 여자들이 혼인 후에도 자신의 성(姓)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여자 집안의 대표자라는 표시였다. 조선의 여자들이 성적 이미지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은 중국과 달리 성적 파트너라기보다는 집안 공동 운영자의 이미지가 더 강했던 이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책은 적처와 적자, 종부, 종손, 양자, 서얼, 첩, 기생 등 다양한 구성원을 등장시킨 갖가지 사연을 통해 가족 중심이었던 조선 사회를 흥미롭게 비춰준다. 저자는 “조선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살았다. 그들의 사연은 가족을 매개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며 “나에게 흥미로웠던 조선 사람들의 사연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미있는 이야기이자 공감이나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김도연기자 kdychi@munhwa.com
78    조선족의 인생과 례의 댓글:  조회:2526  추천:0  2012-07-17
朝鲜族人生与礼仪   一、朝鲜族是个讲究礼仪的民族,一个人从出生到死亡都有很多的礼节,从出生礼一直到丧祭礼。出生礼包括忌绳礼、抓周礼和冠礼、笄礼。   1、忌绳礼:朝鲜族家庭一旦有新生儿出生,就在门口或是房檐上系上一条草绳,如果生了男孩就在草绳上挂上辣椒,如果生了女孩就在草绳上挂上木炭和松枝松叶,这根草绳要挂二十一天的,也是通过二十一天的宁静生活让产妇和婴儿得到更好的休息,这也是朝鲜族特有的产俗,亚洲其他少数民族中是非常罕见的。   2、抓周礼:抓周礼是朝鲜族比较重视的孩子一周岁生日礼,生日这一天给孩子穿上华丽的民族服装,然后在他面前摆放抓周桌,孩子抓到什么说明长大后会成为一个怎样的人,比如抓到米和铜钱,说明长大会成为老实本分的人,抓到线和长命锁,说明长大后会成为一个老实本分的人等等,这也是父母对孩子未来的一种美好的期待。   3、冠礼和笄礼是朝鲜族的一种成人礼,一般在15-20周岁的时候举行,举行成人礼,就说明已经成人了,随着时代文明的变迁,成人礼逐渐被婚礼所代替。   二、朝鲜族的婚俗礼仪繁多,大体上有议婚、纳彩、纳币、迎亲等程序。议婚亦称会面,通过媒人商议婚事。纳彩,就是订婚,男方家和女方家相互交换书信或一些仪式,以确定婚姻关系。纳币,是指新郎家向新娘家送彩礼。迎亲就是结婚典礼。这分为新郎礼和新娘礼,前者包括奠雁礼、交拜礼、合卺礼、接大桌等,后者包括接大桌、舅姑礼等。   三、接大桌是朝鲜族特有的婚俗,是给新郎和新娘摆一个放有各种食品的长方形大桌,以表示祝贺的仪式。接大桌分为新郎礼桌和新娘礼桌,礼桌的摆设基本相同。喜案上最为醒目的是煮熟了的整鸡,鸡嘴上衔着通红的辣椒。这源于朝鲜族古时的鸟崇拜习俗,鸡为属阳的鸟,可驱邪,而且辣椒色红,也属阳,可辟邪,籽多隐喻着多子多孙。   四、家谱 朴氏家牒:1982年全国人口普查时发现,有一部分中国朝鲜族的祖先,早在明末清初即已定居在东北境内,比如辽宁省盖县朴家沟村,姓朴的朝鲜族,在当地定居已有300年的历史,还有这里展示的朴氏家谱是在吉林省舒兰县小城乡朴家屯收集过来的,这个朴氏家谱是民国初期,朴贵森的爷爷把朴家祖先八代姓名及亲属关系,亲自用毛笔抄录下来的,相传在清康熙年间,他们由沈阳附近的朴家堡衣带迁入到此地,并且开发了这一带,所以地名叫朴家屯,如今这个朴氏家谱是研究朝鲜族早期迁入历史,及朝鲜族迁入时间上限等方面成为了极其珍贵的资料。   朝鲜氏族统谱,也就是朝鲜族的姓氏谱书,它收录了朝鲜族姓氏517条,中国古代姓氏1078条,系统介绍了朝鲜族各姓氏的渊源及变化的过程。   五、传统教育和近代教育 朝鲜族历来重视教育,形成了一种崇尚知识,敬重师长的民族理念。"再穷不能穷教育,再苦不能苦孩子",这句话充分反映了朝鲜族的重教意识。朝鲜族不论在城镇还是在穷乡僻壤,都在住地就近办起各种形式的学校,宁可挨饿也要把孩子送入学校接受教育。 朝鲜族具有宁啃树皮,也不能让孩子没学上的光荣传统。在十九世纪中叶以前,朝鲜族冒禁迁入。因为生活贫困办不起学校,只能办一些简陋的私塾和学堂,对学童进行《朝鲜语文》《千字文》《四书五经》之类的封建伦理教育。 "千字文"是朝鲜族学习汉文的入门书籍,是书堂、私塾的汉文初级教材。 "明心宝鉴"也是书塾里用的教材,是朝鲜高丽末期的学者秋适所编,共收录了150多条古今名言、警句,这是一本规范人的行为道德的重要谱书。   六、民间信仰 朝鲜族的民间信仰,其历史久远,早在远古时期已形成敬畏"鬼神","万物有灵"的观念,产生出具有一定文化影响力的民间信仰习俗。朝鲜族的民间信仰种类繁多,主要有家神崇拜、部落崇拜、巫俗信仰等。   巫俗信仰 朝鲜族的巫俗信仰其历史悠久,起源于远古时期的辟邪祈福的祭祀活动。巫俗信仰,主要通过巫师的跳神方式来表现出来,反映出人们原本的欲望和要求。民间流行的巫俗形式有村落跳神、家内跳神、咒术、占卜等。   家神信仰 过去,人们认为家宅的里里外外都有神灵守候着,通过对神灵的敬仰和祭祀来祈求家庭幸福,子孙平安。在传统社会里,人们供奉祖先神、成造神(上梁神)、灶王等的家神的方式来祈愿家庭的平安。家庭主妇,恭敬家长,为家庭成员备好穿着和饮食。人们在家具刻上"寿福",也在衣服绣有象征"富贵"和"福"的蝴蝶或蝙蝠状的纹样来祈求平安。并且在制作糕或果类的模子上刻有"喜"字并且一代一代地传承下去,以祝愿家人的健康。 七、回甲是60岁老人的生日,其意为已经度过干支纪年的整整一个轮回,回婚礼是庆祝结婚60周年的仪礼。回甲举行的贺宴叫做"寿宴",意味着对长寿的祝贺。 "回甲"又称"花甲",是朝鲜族为六十岁的老人举办的生日宴席。因为按传统历法天干地支推算法,六十年看作是一个循环单元。因此,朝鲜族把六十周岁堪称是人生道路上的分水岭,人一过这个年龄就算长寿,颇为讲究。 这里展示的一对贺联,是池章会先生的母亲李太夫人过花甲时,由池先生的世交全秉熏先生书赠的,这幅贺联高度赞扬了李太夫人,勤勉持家,教子有方的高尚品格,也真诚的祝愿李太夫人健康长寿。   八、丧舆 丧舆,朝鲜族的运柩工具,又称"灵舆"。木制,状如大抬轿,出殡时置灵柩于架内。过去各村都设叫做"丧舆契"的民间组织,由参加这个组织的村民共同出资制作此具,共同使用,并在村里较偏避的地方建"丧舆房",指定专人妥善保存。   九、丧祭礼 朝鲜族自古以来,将孝道视为万行之首,非常重视丧礼和祭礼。丧礼主要包括临终、招魂、小敛、大敛、出殡、埋葬、立碑等程序进行。安葬时要请风水先生选择墓地,棺材放人墓穴时,在山坡墓穴里,头部朝山顶,而平地则头部朝北。 祭祀桌上食物的摆放顺序非常讲究,是按照红东白西,鱼冻肉细的顺序摆放的,而且是单数为吉祥的。   十、头发饰物 龙簪和玉簪是朝鲜族妇女参加比较重要的场合所戴的发簪。 分缝簪是朝鲜族妇女梳头时起到分缝作用的。   十一、朝鲜族对餐具非常讲究,每个人都有自己各自的餐具,是不混用的,铜制的餐具是朝鲜族比较富裕的家庭才有的。   十二、结婚典礼中包括交拜礼,交拜桌上摆着青松翠竹、枣、栗子,还有一对按照雄东雌西的顺序摆放的活鸡,鸡是朝鲜族的吉祥物,新郎要身穿官服,因为男子结婚也如科举及第一样是人生中的大事,所以结婚当天新郎是允许穿官服的。   结束语 经历过坎坷曲折的迁徙过程的朝鲜族,在长期的社会实践中,开创了富裕而文明的生活家园,向世人展示了朝鲜族特有的民族传统和民俗文化。在经济快速发展,社会高度进步的今天,200万朝鲜族人民,以辛勤的劳动建起更加宽广、和谐的生活家园,谱写美丽动人的生活篇章。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