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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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소위의 道, 禮, 仁의 구체적 함의는 무엇인가? 댓글:  조회:3013  추천:1  2012-07-17
道、礼、仁的具体含义是什么?   道; 中国古代哲学的重要范畴。用以说明世界的本原、本体、规律或原理。在不同的哲学体系中,其涵义有所不同。     原始涵义  道的原始涵义指道路、坦途,以后逐渐发展为道理,用以表达事物的规律性。这一变化经历了相当长的历史过程。《易经》中有“复自道,何其咎”(《小畜》),“履道坦坦”(《履》),“反复其道,七日来复”(《复》),都为道路之义。《尚书·洪范》中说:“无有作好,遵王之道;无有作恶,遵王之路。无偏无党,王道荡荡;无党无偏,王道平平;无反无侧,王道正直”。这里的道,已经有正确的政令、规范和法度的意思,说明“道”的概念已向抽象化发展。春秋时,《左传》曾有“臣闻小之能敌大也,小道大淫。所谓道,忠于民而信于神也”和“王禄尽矣,盈而荡,天之道也”之说。这里的道带有规律性的意思,表明道的概念已逐步上升为哲学范畴。   老子论道  到了春秋后期,老子最先把道看作是宇宙的本原和普遍规律,成为道家的创始人。在老子以前,人们对生成万物的根源只推论到天,至于天还有没有根源,并没有触及到。到了老子,开始推求天的来源,提出了道。他认为,天地万物都由道而生。他说:“有物混成,先天地生,寂兮寥兮,独立而不改,周行而不殆,可以为天下母,吾不知其名,字之曰道,强为之名曰大,大曰逝,逝曰远,远曰反”(《老子》二十五章)。对于老子所说的道,历来解说不一。有的认为,道是精神性的本体,是脱离物质实体而独自存在的最高原理,主张老子的道论是客观唯心主义。有的则认为,道是宇宙处在原始状态中的混沌未分的统一体,主张老子的道论是唯物主义。老子认为道生成天地万物的过程是“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万物”(四十二章)。道生成万物之后,又作为天地万物存在的根据而蕴涵于天地万物自身之中,道是普遍存在的,无间不入,无所不包。道虽存在于天地万物之中,但它不同于可感觉的具体事物,它是视之不见、听之不闻、搏之不得的,是构成天地万物共同本质的东西。所以,不能靠感觉器官去体认,也难以用普通字词去表示,只能用比喻和描述来说明它的存在。对于世界的统一性,老子作了天才的推测和描述。老子的道论,对于后世有极其深远的影响。     道论的演变  略后于老子的范蠡,把天道看成是事物发展变化的规律。他认为,人事必须“因阴阳之恒,顺天地之常”,违反客观规律,必然招致灾祸。“夫人事必将与天地相参,然后乃可以成功”。他说的天道主要指阳至而阴,阴至而阳,盈缩转化,周旋无尽的矛盾运动法则。天时于己不利时要主动退避,天时对已有利时要积极进取。范蠡受老子道论的影响,说“天道盈而不溢,盛而不骄,劳而不矜其功”(《国语·越语下》)。但他主张适时积极进取,对老子贵柔守雌的思想又有所批判和修正。     战国时期,齐国稷下道家用“精气”来说明道,把虚而无形的道看作是流布于天地之间、遍存于万物内部的“精气”。说:“凡道,无根无茎,无叶无荣。万物以生,万物以成,命之曰道。……精也者,气之精者也。气道乃生”(《管子·内业》)。老子曾把道表述为“冲气”,并说“其中有精”。稷下道家从唯物的方面进一步发展了老子的这一思想,把道表述为无所不在而又富有生机活力的精气。精气说对后来中国医学的发展有很大影响。但它赋予精气以灵性,有神秘化的倾向,与唯心主义划不清界限。     庄子是战国中后期道家学派的代表人物。他认为道是世界的终极根源,是无所不覆、无所不载、自生自化、永恒存在的宇宙本体,否认有超越于道的任何主宰。他还认为不可能给道提出明确的规定,“道不当名”,“道昭而不道”,即使取名为道,也是“所假而行”。所以只能说“夫道,有情有信,无为无形;可传而不可受,可得而不可见;自本自根,未有天地,自古以固存,神鬼神帝,生天生地;在太极之先而不为高,在六极之下而不为深,先天地生而不为久,长于上古而不为老”(《大宗师》)。对于庄子的道,当前学术界有人认为是独立自存、超越时空的绝对精神,并以《庄子》书中“物物者非物”之语为根据,证明道是非物质性的造物主;也有人认为道是指具有无限性和永恒性的、产生了天地万物并存在于其中的物质本体,并以《庄子》书中“通天下一气”之语为根据,说明道就是物质性的气。大多数学者认为庄子夸大了世界本原的神秘性,并把事物的相对性绝对化了,否定事物之间的差别,表现为相对主义,他的道论具有明显的唯心主义倾问。     韩非汲取并发展了老子的朴素辩证法,提出了关于道、德、理三者互相关系的学说,辩证地处理了它们的关系。他认为,“道者,万物之始,……万物之源”,是“万物之所然”、“万物之所以成”。把道视为物质世界的普遍规律,天地万物存在与发展的总依据。他还认为,“道”是终极范畴,是万物的普遍规律,而万物的特殊本质就是“德”,“德者,道之功”;万物的特殊规律就是“理”,道是“万物之所稽”,“万物各异理而道尽稽万物之理”。把道、德、理的关系视为物质世界的普遍性与特殊性、无限性与有限性的辩证统一。       战国时期儒家学者所著《易传》也提出关于道的学说,认为道就是对立面相互转化的普遍规律。《周易·系辞上》说“一阴一阳之谓道”,把一阴一阳相互转化视为道。又说:“形而上者谓之道,形而下者谓之器”,把道视为无形的抽象规律,与有形的具体事物区别开来。     到宋代,张载以道为气化的过程,说“由气化,有道之名”;程颐、朱熹则以道为理,表现了气本论与理本论的不同。     在中国哲学史上,道这一范畴是道家提出的,后被各家学说所接受,虽各有不同理解,但已成为宇宙本原、普遍规律性的代名词。它对于提高理论思维水平,探究事物的本原和规律性,曾起促进作用。     礼; 礼是什么?或曰礼是一种道德伦理规范,或曰典章制度,或曰自然法,或曰宗教,或曰民仪,……其实,正如有学者说的,礼什么都是,又什么都不是,礼就是礼。确实,礼是一个很复杂的文化现象,它包含了很多社会生活内容,又不完全是其中的某一种。     许多学者都试图对礼作出解释或下一个确切的定义。李安宅先生在《礼理的社会研究》中认为。礼等于文化,包括民风、民仪、制度、仪式、政令。外国学者埃德蒙利奇先生认为,礼是存在于社会地位转变的时间界线的标志,意味着一种神圣和禁忌;礼是文化的一种,是抽象观点的物质表现,神和精神的外在化;礼表现为一种等级秩序,是一种过渡的仪式;礼是一种献祭的逻辑,使捐献者在人的世界和神的世界之间架起一座桥梁。笔者认为他所说的都是仪式上、操作上的礼,即狭义礼、典礼。陈戍国先生在《先秦礼制研究》中对礼作了比较详尽和精到的阐述。他在文中援引其师沈先生的论述道:“在古代,‘礼’字本有广狭二义:就广义说,凡政教刑法,朝章国典,一概称之礼;狭义说,则专指当时各级贵族(太子、诸侯、卿、大夫、士)经常举行的祀享、丧葬、朝觐、军旅、冠昏诸方面的典礼。”沈师的定义是:“礼是现实生活的缘饰化。”关于这个定义,陈先生提供了一些来历:“凡礼:事生,饰欢也;送死,饰哀也;祭祀,饰敬也;师旅,饰威也。是百王之所同,古今之所一也。”(荀子《礼论》)“君子礼以饰情。”(《礼记·曾子问》),孔疏云:“凡行吉凶之礼,必使外内相副,用外之物以饰内情。”孙希旦《礼记集解》云:“饰犹表也,有是情而后以礼表之,故曰礼以饰情。”姜伯勤教授新近也下了个定义云:“礼是一种规范性的行为,理性化的情感,表达了一种秩序,这种秩序是一定时代和一定阶级社会生活的外在化,受民族共同心理的制约。”     其实古人对于礼的看法就很不一致,但礼作为人与禽兽根本区别的标志这一点是基本一致的。《礼记》有云:“凡人之所以为人者,礼义也。”“无别无义,禽兽之道也。”礼是人的标志、文明的标志。礼是一种人性、伦理、情感化的东西,它要求人们有理有义。这种要求对于维持统治秩序是非常有利的。于是统治阶级制订一套礼制,作为规范化的言行以约束士大夫。它与法律的不同在于它的感情因素,它是通过一种文明教化的力量约束士大夫,以代替法律那种通过野蛮强制的力量约束老百姓的手段。但问题远非如此简单。正因为礼是一种人性、伦理、情感化的东西,它远在人类进入阶级社会之前就已经存在,它在人类的形成过程中伴随着产生,如祭祀天地神灵、冠昏丧葬等,所以它不止是在士大夫中存在,在民间同样也存在着礼;它不仅在中国存在,在国外任何民族中也存在;不过其地位、作用、内容会有所不同而已。     礼与法律在约束人们的言行方面有十分相似的地方,甚至礼有时候直接代替法律惩罚人们。但礼和法律还是有很大的差别。首先,礼产生于阶级社会以前,起源于原始宗教、风俗和交换。古人云:“礼有三本:天地者,性之本也;先祖者,类之本也;君师者,治之本也。”礼以义起,它是一个群体在形成共同心理和文化的过程中逐渐产生的。在阶级社会里,它虽然有利于统治,但不是统治阶级独有的,而是属于整个群体。而法律却只是阶级社会才有的现象,它明确地为统治阶级服务,没有劳动人民的法律。法律的制定只能是群体中的少数人,但礼的形成却不可能是少数人的力量可以办到的。礼与法律比较,具有普遍性和稳定性。第二,礼与法律对人们规范的言行范围不尽相同,有交叉的地方。第三,礼对人们的惩罚重在伦理方面,但手段有时比法律更为残酷。法律的执行者只能是官府的专门机关,但礼的执行者则广泛得多,只要是相关者、长官或长者即可。第四,礼重在通过礼仪起到教化约束的作用,造成一种庄严神圣的理念的心理气氛;而法律则通过严酷的刑罚起到强制约束的作用,造成一种威严的令人畏惧的世俗的情绪状态。     礼与宗教也有许多相似的地方,比如都有一套庄严的仪式,都产生一种神圣感。但礼却不是宗教。首先,礼没有一个特定的崇拜偶象,而无论哪一种宗教,都有特定的一个或多个被崇拜的偶象。这些偶象有的是人的化身,有的是自然界的物或现象上升而来,它们都带有神的特征。虽然礼也祭祀天神、地神,这种祭祀是起源于原始宗教,在仪式上与宗教有共通之处,但这只是礼的一部分,这些神不可能是礼的崇拜偶象。这种礼的祭祀是国家世俗政权执行的,它降落到下层便是民间礼的一种,也可以说是一种民间宗教(这种宗教没有自己的组织)。而宗教的祭祀是宗教组织执行的,祭祀的神就是宗教组织的偶象。宗教组织与国家政权是相对独立的,在政教合一的情况下也是这样。第二,礼没有信徒,它属于创造它的整个群体;而宗教却有其信徒,它甚至可以相对独立于某一社会群体,其有完整的组织体系,成为群体中的群体,社会中的社会。而礼却不可能形成一个相对独立于它所属群体的社会来,相反,它是强调社会群体的统一。第三,宗教的仪式是定期举行的,是信徒参加的,即排外的;而礼的仪式是在特定环境条件下举行的(也有定期的),参加者的意义较广,具有一定的开放性。总的来说,它们的最大区别在于,礼是人情化的、理性化的,而宗教却是神秘化的、情感化的(表现为一种神圣的信仰)。礼使人对人情伦理产生神圣感和威严感,只有皈依神和偶象之后,才成为宗教。也就是说,礼比宗教少了一个中介——作为偶象的神。这样,礼与宗教的社会效果就不一样,一个礼制的国家和一个宗教的国家,其国民的性格也会产生较大的差异,具体我说不清,我只有这样的直觉而已。     可以说,礼比法律带有较浓的感情色彩,它确实不象法律那种赤裸裸的镇压功能;而比宗教却带有较强的理性色彩,它不会产生宗教狂热。我想姜教授说礼是理性化的情感,大概有这么一层意思。但这并不决定礼比法律仁慈或比宗教更有理智。因为在古代,感情和理性都被带上宗法的封建的色彩,在那个时代看来是有情感的行为往往在今天看来却是“吃人”的行为,有理性的行为却往往是愚昧落后的行为。认识到礼的历史内容之后,就不会妨碍我们得出,礼是表饰一种情感,或欢或哀或敬或威,但这种情感是有所控制的,即有度、有分的。随着社会的发展,礼也会变化发展。礼在操作上应包括礼物(不说礼器乃由于行礼所用不止器也,而物包含器)、礼仪和礼义。礼的变化发展我试举一例,也许不恰当,因为我并不是研究者。我想现在的剪彩也算是一种现代社会的礼吧,它是社会上层人物行为、感情的一种缘饰化,表达他们在工程竣工之后的高兴情感,但同时也能产生一种对金钱、权势和地位的敬仰效果。当然我这样看是很粗浅的,对于剪彩的来历、表达的意义我并不明了,或许它是近现代才有的东西,或许也与古代某种礼有渊源关系。     小结:礼在阶级社会以前就已产生,在阶级社会里,在不同的民族和地区又有不同的内容、形式和地位,它随着社会的发展而发展。礼包含社会文化的许多方面,又与它们不尽相同。它是一种感情,但又是有所节制的感情。它是一种等级秩序,但又不象法律那样使用暴力强制手段。它产生一种神圣感,又不象宗教对偶象的那种虔诚。礼可以说是意识形态的东西,但又具有可操作性。所以礼是一个非常非常复杂的东西。如果硬要我下一个定义,我也只好试一下,那就是:礼是人类文明的标志,是理性化的情感以及某一群体、某一时代的秩序,在操作上表现为特定环境下的规范性言行。如果仅仅把礼归结为包含礼物、礼仪、礼义三要素的典礼,其实是偏重于操作层面。应该说,礼就是一种情感和秩序,它属于某一群体的灵魂,只不过通过一定的仪式(使用礼物,表达礼义)加以宣扬和强化。因此,礼有两个层面的含义。如果从社会效果上来说的话,礼更重要的不是它的典礼,而是它的意识形态的含义,鲁迅等人批判礼教便是针对这一含义的。这里还须说一句,礼的情感是理性化的(即缘饰化的),它同样属于一种秩序,所以礼本质上说就是一种秩序。但这种秩序不一定具有阶级性,所以在定义中我没有使用阶级一词。     仁; 中国古代一种含义极广的道德范畴。本指人与人之间相互亲爱。孔子把“仁”作为最高的道德原则、道德标准和道德境界。他第一个把整体的道德规范集于一体,形成了以“仁”为核心的伦理思想结构,它包括孝、弟(悌)、忠、恕、礼、知、勇、恭、宽、信、敏、惠等内容。其中孝悌是仁的基础,是仁学思想体系的基本支柱之一。他提出要为“仁”的实现而献身,即“杀身以成仁”的观点,对后世产生很大的影响。《论语.颜渊》:“樊迟问仁。子曰:‘爱人’。”又“克己复礼为仁。一日克己复礼,天下归仁焉。”又《卫灵公》:“子曰:‘志士仁人,无求生以害仁,有杀身以成仁。”《庄子.在宥》:“亲而不可不广者,仁也。”清谭嗣同《仁学.界说》:“仁为天地万物之源,故虚心,故虚识。” 1.同情友爱:仁心,仁义至尽   2.果核的最近部分:杏仁儿. 不仁:(1)不仁慈,无仁德如不仁不义 (2)手足痿痹,为能运动:麻木不仁,四体不仁.   3.人、仁 “最初只有人字,后以二人相爱,人旁加二为仁,故仁由人而来。仁固可作‘仁义’解,也可作人解。我认为‘克己复礼为仁’的仁字,宜作‘人’解。以孔子之话作本论,《论语》中如‘孝弟也者,其为仁之本欤’、‘观过斯知仁矣’、‘井有仁焉’,这些仁字,都应作“人”解。而一般学者以其字之为仁,多曲为之解,求其说,而不得要领。故上例我以‘仁’字应作“人”解。否则,‘井有仁焉’,作仁义之‘仁’解,难以解通。又以其他著作为旁证,可知人、仁同义。例如《礼记表记》说,人也谓施以人以忠恩也。人与仁同义……《论语》所谓‘人者仁也’、‘仁者爱人’,即本此义。皆由于人、仁同出于一源,且关系密切。把仁字均解为‘仁义’,难以自圆其说、令人信服”   (引自黄现璠著《古书解读初探——黄现璠学术论文选》第464-465页,广西师范大学出版社2004年7月)  
76    우리민족의 전통장례문화를 이어가자--주청룡 평론원 댓글:  조회:3735  추천:0  2012-07-16
우리민족의 전통장례문화를 이어가자 (중앙인민방송국 조선말방송 오늘의 화제)   길림성인민정부발전연구중심 길림성인민정부조사연구실 중앙인민방송국조선말방송특약평론원 주청룡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우리민족의 전통장례문화를 이어가자”라는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사람은 태여나면서 그 어느때에 가서는 꼭 죽어야 한다고 세월과 어길수 없는 계약이 맺어져 있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모두 자기민족 장례문화가 있는데 사람이 죽게 되면 자기민족 장례풍속으로 장사를 지내는것으로써 자기민족 전통문화를 전수하고 있습니다. 하여 국무원에서도 장의관리조례 제 6조에는 “소수민족의 상장습속을 존중하여야 하며 자원적으로 상장습속을 개혁하는것을 다른 사람들이 간섭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족장례풍속》은 2009년 6월에 길림성정부의 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여 나라 법률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무형문화유산 “조선족장례풍속”의 전승인이며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의 회장인 현룡수 회장을 찾아 조선족의 장례풍속이 길림성 무형문화유산에 들어간 형편에서 이것을 어떻게 전승하고 보호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 보았습니다.   현회장은 조선족 장례문화의 핵심은 “효도”이며 주체는 “례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많은 세월을 내려 오면서 찬란한 우리민족 장례문화를 창조하였는데 그 내용이 아주 많고 복잡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시대에 와서 이러한 장례문화들이 많이 소실되였지만 고복(皐復: 혼을 부르는것), 렴습(殮襲: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 옷을 입히고 염포로 싸는 일), 명정[銘旌: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성명(姓名) 따위를 적은 조기(弔旗)], 안신제(安神祭), 소상(小祥: 돌제), 대상(大祥: 3년제), 청명제(淸明祭), 추석제(秋夕祭) 등 몇가지 기본적인 풍속들은 아직 보존되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회장은 또 조선족장례풍속이 길림성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것만큼 법적보호를 받고 실시되여야 하는데 연변 각 지방의 장의관에 모두 우리민족 장례문화에 맞춘 시설과 복무항목이 없어 조선족들이 자기 풍속에 맞추어 장례를 치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안타까운 점도 이야기 하면서 연변은 조선족자치주인것만큼 의례 조선족 장례문화에 맞는 시설과 복무항목이 있어야 하므로 지금 유관부문과 교섭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족의 장례풍속을 보면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로운데 이런 것을 모두 다 그대로 회복하기는 불가능 하며 또 절주가 빠른 현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통장례의 기본정신을 계속하여 전승하여야 하지만 이미 간소하여진 우리민족의 현재 장례방법을 견지하면서 거기에 전통민족특색을 첨부하는것이 바람직 하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족의 장례풍속에는 조상의 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사를 지내는 면례(緬禮)도 포함되여 있습니다. 면례는 원래 조상들의 묘를 써서 십여년이 지난 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파 헤치여 해골을 점검해 보아 깨끗하고 노란색이면 그 자리가 풍수가 좋다고 인정되여 해골을 잘 정리한 후 다시 그 자리에 묻는다던가 혹은 다른 좋은 자리로 옮길수도 있고 만일 해골이 깨끗하지 못하고 검은 색이면 그 자리가 풍수가 나쁘다고 인정되여 다른 곳을 선택하여 묻는것을 말하는데 일종의 효행이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지금은 면례가 개장(改葬) 혹은 이장(移葬)과 동의어로 되고 있습니다. “가난하면 이사하고 부유하면 묘를 옮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으면 조상의 묘소를 마음에 드는 명당이나 릉원에 옮겨 모시는것도 일종의 미덕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나라와 사회의 기본건설의 수요로 묘지를 옮기게 되면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면례가 많습니다. 현회장의 현지조사에 의하면 한번은 사회의 기본건설 수요에 의하여 연변 모 지방의 낡은 공동묘지의 묘들을 몽땅 옮기게 되였는데 많은 유가족에서는 조상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껏 우리민족 장례문화 례의를 지키면서 허용범위에서 새로운 장지(葬地) 에 옮겨 묻거나 화장터에 가서 화장한 다음 납골당이나 릉원에 모시지 않으면 하천이나 적당한 곳을 선택하여 살포(撒布)하고 있지만 일부 유가족들은 아예 파묘부터 우리의 장례문화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낮은 비용으로 맏기고는 해골을 화장하는 것을 지겨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해골을 맡은 사람들은 여러구의 해골을 한데 무져놓고 디젤유를 뿌리고 쓰레기 처리하듯이 대강 태워서 여기저기 뿌려 던지여 보기가 민망다고 하였습니다.   하여 현룡수 회장은 “조상의 해골을 쓰레기처럼 처리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문명과 인륜도덕의 차원에서 참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반드시 정규적인 화장터에 위탁하여 문화적으로, 위생적으로, 존엄이 있게 화장하여 처리하는 것을 제창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개혁개방을 하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외국으로 나가고 성시로 들어갔는데 집에 남은 늙은 부모들이 사망하면 후사처리가 문제로 나서고 있으며 또 많은 조선족 젊은이들은 자기의 전통장례규범을 몰라 일단 상사가 나면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해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장례를 치러 남들을 웃기는 일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현회장은 현시대에 와서 조선족 장례복무 사회기제를 건립하는것이 아주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정부차원에서 하기 곤난하면 민간차원에서라도 조선족 장례복무 전업대를 조직하여 일단 조선족 가문에 상사가 나면 전화 한통으로 전반 장례사무가 원만하게 해결을 보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시 조선족 장례문화를 장기적으로 이어 나갈수 있는 보증으로 되므로 지금 여러방면으로 준비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6월
75    례의와 인생 --성원작성 댓글:  조회:1998  추천:0  2012-07-16
례의와 인생   례의를 위하여 사는것이 우리민족 선인들의 일종 삶의 방식이였다고 한다면 례의를 중시하는것은 오늘까지도 우리민족이 지켜나가는 우량한 전통의 하나다.   옛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사람은 짐승과 다른데 관건은 사람에게는 례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 가면서 반드시 례의를 지켜야 하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우선 례의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례의적인 인생은 옛 선비들이 숭배한 일종 고상한 인생이였으며, 심지어 어떤 선비들은 목숨을 잃을지언정 례의만은 지키려 하였다.   고대 성현들의 고훈을 말할라 치면 례의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孔子는 “례의를 배우지 않고서는 뜻을 세울수 없다(不学礼,无以立)”고 하였으며, 《礼记》에서도 “례의와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로 래왕할때 가는것만 있고 오는것이 없으면 례의라고 할수 없으며, 또 오는것만 있고 가는것이 없어도 역시 례의라고 할수없다(礼尚往来;往而不来,非礼也;来而不往,亦非礼也)”고 하였다. 중국고대의 《诗经》에는 다음과 같은 명구가 있다. “쥐낯에도 거죽이 있는데 사람으로서 례의가 없이 되겠느냐, 사람으로서 례의가 없으면 죽기보다 못하니라(相鼠有皮,人而无仪;人而无仪,不死何为)。” 사회에서 례의는 또 한사람의 체면문제이기도 한데 체면과 례의는 실제상 갈라놓을수 없다. 례의가 있어야만 체면이 서는 것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체면을 중시하게 되는데 높은 국가간부나 주요 책임자는 더 말할것도 없고 사회에서 조금 위신이 있는 사람이라 하여도 례의를 아주 중시하게 된다.   현재 례의는 사람과 사람관계의 일반적인 준칙으로 되였으며, 남녀로소가 모두 자기나름으로 지켜야 할 규범들이 있다. 우리민족이 체면을 특별히 중시 하는것은 곧 례의를 특별히 중시하기 때문이다. 체면은 기실 례의에 감춰져 있다. 일반적으로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은 례의도 중시하게 되며, 례의를 중시하는 사람이면 왕왕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례의적인 인생에서는 례의를 생활의 중심에 놓으며, 일마다 례의를 앞세우고 이것으로 자기의 신분지위와 자존심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렇다고 할진대 례의적인 인생에는 퇴페적인 일면이 있는가 하면 또 세속적인 일면도 있다. 그것이 퇴페적이다고 하는것은 무슨일에서나 규례만 따르고 례의를 인격보다도 더 중요시하면서 언제어디서나 체면만 내 세우기 때문에 례의가 인생을 속박하고 실천을 방애하는 부정적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단 례의의 틀에 갇히우면 자유와 령활성을 잃게 되기 때문에 례의는 기실 사람들 교제에서 없어서는 안되지만 또 너무 집착해서도 안된다.   례의적인 인생이 또 세속적이라고 하는 것은 례의를 사람들 관계중의 윤활유로 응용하면 자기의 품격과 체면을 나타낼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자기의 돈을 벌려는 목적이나 승급하려는 등등의 기타목적도 실현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일마다 례의를 앞세우면 보증코 적게 밑지게 되며, 일반사람들이 처세에서 크게 성공하는 비결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의견을 적게 말하고 례물을 많이 보내면 좋은 명성을 가질수 있을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관계를 여는 열쇠를 가지게 된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고금중외 일부 품덕이 고상한 사람들이 례의를 싫어하고 호방하고 자유로움을 선호했는지도 모른다.     성원 글 2011-11-24    
74    례의를 배우는 의의 --성원작성 댓글:  조회:1965  추천:0  2012-07-16
례의를 배우는 의의    자고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례의부터 배워라"고 하였다. 례의교육은 우리 인생에서의 첫번째 교육이다. 례의는 반드시 학습과 배양, 그리고 훈련을 통해서만이 사람들의 행위습관으로 될수 있다. 우리 사회의 매개 성원들은 례의를 배우고, 례의를 전수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하여 자연적으로 우리 례의지국의 일원으로 될수 있다. 량호한 례의수양이 일단 양성되면 필연적으로 사회생활중에서 매우 중요한 작용을 발휘하게 된다.   례의는 조화로운 사람관계의 기초이다. 사회는 부동한 군체의 집합이며, 군체는 많은 개체들이 모여서 이루어 졌는데, 개체들 지간의 차별은 절대적인 것이다. 례를들면 성별, 년령, 빈부차이, 존비정도 등등이다. 례의는 사회교제의 윤활유이며 촉매제로서, 부동한 군체지간에 호상 존경하고, 호상 리해하며, 공동성을 발양하고 차이점을 보류하면서 조화롭게 지낼수 있게 한다.   례의는 사람 형상의 아름다움의 표징이다. 례의는 한사람의 내재 소질과, 외재 형상의 구체적인 체현이다. 례의는 개인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마음을 정화하고, 심신이 유쾌하며, 개인수양을 증강하는 보장이다. 례의의 핵심은 사람들에게 화목하고, 선량할것을 제창한다. 사람마다 모두 선량한 동기로 서로 교제하고, 문명시민의 준칙으로 자기를 단속한다면 소유의 사람들이 모두 마음이 편안하고 심신이 유쾌함을 체험할수 있을 것이다.   례의는 사회 문명진보의 상징이다. 조국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계승 발양하고, 사회주의 정신문명건설을 가강함에 있어서, 문명례의 선전교육은 매우 중요한 한개 내용이다.   레의는 각항 사업발전의 관건이다. 직업은 사람들이 사회상에서 생존하고, 지위를 차지하는 일종의 수단이다. 례의를 강조하면 사람들을 방조하여 리상을 실현시킬수 있고, 성공에로 나가게 할수 있으며, 전체 직공들의 단결호조를 촉진시키고, 직업에 충성하고, 강위를 사랑하며, 성실하게 신용을 지키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교제와 경쟁실력을 증강하며, 각항사업의 발전을 추동할수 있다.   례의는 가정의 화목원만의 기초이다. 가정은 혼인과 혈연관계로 맺어진 일종의 사회관계이다. 가정례의는 부부간에 사랑하고, 부모가 자애롭고, 자식들이 효순하면서 가정을 행복하게 할수 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글 2011-09-02
73    례의란 무엇인가? --성원작성 댓글:  조회:2197  추천:0  2012-07-16
  례의란 무엇인가? 례의를 숭상하고, 례의를 보급하고, 례의를 집행하는것은 나라적인 호소일 뿐만 아니라 전체 공민들이 자아소질을 높이기 위한 보편적인 요구이며, 자각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례의의 합격된 집행자로 되게 하려고 요구하면서도 무엇이 례의이고, 례의의 구체적 내용과 자기가 일상공작과 생활에서 어떻게 례의를 운용하고 집행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례의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론술하여 사람들이 례의를 리성적, 전면적, 계통적으로 료해하는데 도움을 주려 한다. 1, 례의의 정의 례의란 인류가 사회질서와 사회환경을 온정시키고, 조화로운 사회를 건립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공동으로 준수할것을 요구하는 기본적인 도덕규범과 행위규칙이다. 례의는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공동히 생활하고,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며, 풍속 혹은 습관방식으로 상대적으로 고정된다. (1), 례의의 광의적인 정의 사회학 각도에서 볼때 례의는 한개나라 혹은 한개민족의 사회문명, 도덕풍상, 그리고 생활품질을 반영한다. 무릇, 례의를 강조하는 나라와 민족은 일반적으로 모두 우수한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선진적인 인류문명을 장악하고 있다. 기업이나 단체의 각도에서 볼때, 례의는 기업문화, 기업정신의 중요한 내용이며, 기업 형상의 주요한 표현이다. 국제화의 대기업들은 모두 기업의 품위와 기업의 실력에 어울리는 독특한 전문 례의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독특한 전문 례의문화는 기업문화의 극히 중요한 내용이며, 국제적으로 그 기업을 평가하는 중요한 표징으로 된다. 개인적 각도에서 볼때, 례의에 대한 중시 정도와 운용의 능숙 정도는 한사람의 도덕수준과 문화수양, 그리고 교제능력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2), 례의의 협의적인 정의 례의의 응용방면에서 볼때, 례의의 사회교제중의 행위규범은 《례절》이라고 하고, 사람들과의 말과 행동상의 표현은 《례모》라고 한다. 자기 의사 전달의 각도에서 볼때, 례의는 사회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서로 교류하고 료해하는 일종의 기교이다. 사회 교제의 각도에서 볼때, 례의는 사람들 교제중의 매우 실용적인 일종 교류예술이고, 사람들 관계를 조절하는 훌륭한 윤활제이며, 대방을 존중하고 우호를 나타내는 효과적인 표현예술이다. 2, 례의의 분류 례의의 내용은 사회생활의 각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표현형식상 분류; 머리, 표정, 동작, 복장, 언사, 행위 등, 집행대상 분류; 가정례의, 개인례의, 공공장소례의, 직장례의, 류별내용 분류; 교류례의, 교제례의, 공무례의, 문자례의 등. 례의는 하나의 종합적인 학과로서 문화배경, 도덕법률, 공공예술 등 여러가지 학과들과 서로 련관된다. 례의에 대하여 사회의 행업별로 분류하여 본다면,  대체적으로 정무례의, 상무례의, 복무례의, 사교례의, 섭외례의 등 다섯가지로 나눌수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각 분지의 례의는 운용상에서 경우에 따라 서로 엇바꿔 쓸수 있고, 대부분 례의는 경우에 따라 서로 섞어 쓸수 있으며, 종합적으로 운용할수 있다    우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는 주요하게 조선족 전통 가정례의를 연구하며, 가정례의 가운데서도 전업적으로 장례, 제사 례의를 연구한다. 장례와 제사 례의는 결코 죽은 사람을 위한 례의가 아니다. 건전한 장례와 제사 레의를 통하여 사람들은 사회 도덕풍상을 준수할수 있고, 문화소질을 제고 할수 있으며, 조화로운 가정을 건설할수 있다. 그러므로 장례와 제사 례의야 말로 진정 없어서는 안되는 삶의 례의인 것이다.  현성원 글 2011-08-30
72    (론문) 유가 효도사상의 세가지 요소--성원 댓글:  조회:4811  추천:0  2012-07-16
儒家孝道思想的三大内容 玄 盛 元   秦汉时期的中国最初的词典《尔雅》中解释道;“善父母为孝。”(释训)《说文解字》中也解释说:“孝,善事父母者。从老、从子,子承老也。”(许慎)因此,当人们谈论儒家孝道思想的时候,往往最容易想到的就是子女赡养父母的内容,其实,儒家孝道思想不仅局限于子女赡养父母的内容,还包括其他两个层面的内容,一个是对祖先崇拜、祭祀的内容,另一个是生儿育女、传宗接代的内容。  早在殷商甲骨卜文中已经发现“孝”字,成熟的“孝”字是会意字,“老”的略字在上,“子”字在下,以此,我们可以想象出丰富的伦理、道德的含义。以金文和小篆的会意文字结构来分析我们先可以想象出;1、灵位前子孙在跪拜的形象,2、儿子驮着老父母的形象,3、爷爷怀抱小孙子的形象…等等,对于其含义我们可以想象出;一是崇拜祖先,二是赡养父母,三是传宗接代。“孝”的会意结构向我们展示了“孝”所具有的最原始、最质朴的意蕴,尽管这只是一种萌芽状态,但已经明确告诉我们了整个孝文化的出发点。正是通过对“老”和“子”这种原发性的生命关系的延伸和提升,才形成了内涵丰富、博大精深的孝文化。 对祖先的崇拜和祭祀是对生命渊源的追孝意识的体现;对父母的孝敬则是对现存活生命的珍视与关爱意识的体现;生儿育女、传宗接代则是让家族生命得以延续而谋求昌盛意识的体现。在以家庭为单位的社会里,人类的生命正是通过这三个环节的不断交替得以传承和提升。 儒家孝道思想的本质就是尊重生命意识。   一、对祖先的崇拜 随着人类进入文明社会,我们的祖先逐渐认识到生命的宝贵性,在长期而艰苦的生命活动过程中,开始重视自身存在的意义和生命本源问题,同时思考如何加强生命活力的问题。当时生产力极其落后,人的生命力也相当脆弱,人们逐渐产生对祖先的崇拜和感激的意识,同时产生祈求祖先神灵得以保佑的意识。“万物本乎天,人本乎祖”(《礼记·效特性》),“无先祖焉出?”(《大戴礼记·礼三本》)等观念的产生形成了对祖先的崇拜意识最初的思想基础。人们认识到自己的生命来之不易,是祖先们经过漫长的艰难岁月一代一代传承下来的,所以做人不能忘祖,“君子反古复始,不忘其所由生也。”(《礼记·祭义》)于是,人们开始以各种形式表达对祖先的崇敬、感激和追思之情。 在西周金文中已经发现不少关于孝的记录,大部分出现在各种祭祀活动的记录中,如《追簋》中有“用享孝于前文人”(《三代吉金文存》),《酒诰》中有“用孝养厥父母”(《尚书·酒诰》),《文侯之命》中有“追孝于前文人”(《尚书·文侯之命》)…等等。当时对祖先的崇拜意识主要以祭祀形式来表达,而孝的内容基本上还是局限于对祖先的崇拜上。由此可知,产生孝观念的文化根源直接与对祖先的崇拜意识有关。 对祖先的崇拜观念把古代氏族制度的遗存带到文明社会里来,发展成宗族制度,对于家庭结构、社会心理和意识形态方面产生了深刻影响。 早在上古殷商时期,中国盛行崇尚天地、崇尚祖先的原始宗教,到了春秋末期,崇尚天地的意识通过老子发展成道教,而崇尚祖先的意识通过孔子发展成儒教,儒教又以对祖先的崇拜思想为核心创立孝道思想加以发展,使儒教思想的内容更加丰富,更加体系化。 孔子虽主张“郁郁乎文哉!吾从周”(《论语·八佾》),但他谈论孝并不是只注重西周的文化,而是继承和发展春秋的新思想,他将孝还原成人们对祖先、父母的真实情感,为孝提供了合理的伦理依据。在回答宰我问“三年之丧”时,孔子曰:“子生三年,然后免于父母之怀。夫三年之丧,天下之通丧也。予也,有三年之爱于其父母乎?”(《论语·阳货》)由此可知,当时已经盛行的父母死后“三年之丧”并不是依据什么圣意而决定的,而是依据为回报已故父母养育之恩的具体要求而决定的。 在长期的历史大变革当中人们的意识也发生了巨大变化,孝道对祖先的以感恩为主的祭祀意识逐渐发展成为以祈求保佑为主的祭祀意识。从此,孝道对祖先的祭祀意识发展成为一种社会性制度。 “夫孝,天之经也,地之义也,民之行也。”(《孝经·三才》)孝道思想发展成为东方文化圈内一切社会行为的根本准则和从事一切社会活动的起点,故曰“夫孝,三皇五帝之本务,而万事之纲也。”(《吕氏春秋·孝行览》) 我们的先人举行对祖先的祭祀活动,制定了严格的执行制度和烦琐的程序与规范,其目的是为了确保祭祀的严肃性和唤起人们对祖先的诚意。人们坚信只要竭尽诚意进行对祖先的祭祀,就可以得到祖先神灵对现实生活的保佑,万事可以太平顺利,家族可以繁荣昌盛。 以现在的观念来看问题,对祖先的祭祀是否真有那么大的神通是尚要进一步研究的问题。可是,对祖先的祭祀活动对增强家族观念、传授优良传统、促进家族和睦等方面确实有很积极的作用。   二、对父母的孝敬 孝道思想的尊重生命意识不仅在敬宗祭祖的活动中体现,更重要的是在现实生活中珍惜和爱护现存活生命过程中体现。孝道思想把对祖先的崇拜和感恩的意识化为一种现实的意识,对生命的关怀也相应地转化于现实的伦理生活中,将基本内容发展到赡养父母、兄爱弟悌、保全自己的新境界。这就是孔子所倡导的儒家孝道思想的核心部分。 1、赡养父母 孟子道:“孝子之至,莫大乎尊亲。”(《孟子·万章上》)荀子也曾说:“能以事亲谓之孝。”(《荀子·王制》)可见,孝首先是赡养父母,诚如《孝经》所云:“夫孝,始于事亲。”关爱父母、孝敬父母,“父母之年,不可不知也。一则以喜,一则以惧。喜者何,喜吾父母在,可以时常尽孝也。惧者何,惧吾父母老。恐不能长久以尽孝也。故曰:祭而丰,不如养之薄。死而哭,不如生之顺。与其致敬于无形,不若承欢于眼。与其伤心于日后,不若尽心于生时。”(《论语·里仁》) 子女理应珍惜父母有限的生命,尽可能地保证父母长寿。当然,对父母的孝敬、对父母生命的延长,在物质层面上的赡养是必不可少的,但更重要的是在精神层面上的关怀。孝敬父母的实质在于爱、在于敬、在于尊重。孔子在论及孝敬父母的时候也多侧重于发自子女内心的真情实意。如:“子夏问孝。子曰:色难。”(《论语·为政》)“孟武伯问孝。子曰:父母唯其疾之忧。”(《论语·为政》)孔子弟子子游问孝,子曰:“今之孝者,是谓能养。至于犬马,皆能有养。不敬,何以别乎?”(《论语·为政》)这就意味着孝敬父母在物质层面上的满足只是其中的一个方面,在此基础上更要对父母有恭敬之心。“顺乎亲有道:反诸身不诚,不顺乎亲矣。”(《中庸》)其中所体现的思想就是说,孝顺父母是有原则的,孝敬父母要常常反问自己对父母尽孝是否是发自内心的诚意,如果对父母不是内心诚意,也就谈不上是孝顺父母了。从外在形式来看,孝敬父母的行为要严肃庄重,要合乎于礼:“生,事之于礼;死,葬之于礼,祭之以礼。”(《论语·为政》)“孝子之事亲也,居则致其敬,养则致其乐,病则致其忧,丧则致其哀,祭则致其严。”(《孝经·纪孝行章》)从内在情感来看,孝敬父母要怀有真诚的态度和真挚的感情,要“笃于亲”,只有心里对父母有笃诚的亲爱之情。才能做到“事父母,能竭其力”,才能做到对父母“又敬不违,劳而无怨”。 总之,对父母的孝行具有不同层次和境界,但核心是尊敬,诚如曾子所言:“其孝有三:大孝尊亲,其次弗辱,其下能养。”(《礼记·祭义》) 2、兄爱弟悌 在儒家孝道思想中,除了注重“父子有亲”,也很讲究“兄弟有序”。因为家庭的基本关系是以父母、子女、兄弟、夫妇等共同构成的,其中兄弟关系在家庭中也占有很重要的地位。 传统长幼伦理的基本规范是“兄友弟悌,长幼有序”。以兄长为主,以弟幼为从,具体的传统伦理规范要做到: 一是亲而爱之;仁爱或友爱是孝道思想的重要的道德规范,它也是正确处理人际关系的重要原则。“惟孝,友于兄弟,克施有政。”(《尚书》)对兄弟的爱也体现在祸福相同、忧乐与共上。兄弟间要荣辱与共,分享幸福,分担痛苦,把幸福送给对方,将痛苦留给自己,这是兄友弟悌最为宝贵的德行。“仁人之于弟也,不藏怒焉,不宿怨焉,亲爱之而已矣。”(孟子·万章上) 二是宽以悔之;“宽”是指宽恕、宽厚。宽恕是处理个人和他人交往时要有宽广豁达的胸怀,设身处地地为他人考虑。推己及人,平心容人,严于律己,宽以待人。古人提倡“为人兄者,宽裕以诲;为人弟者,比顺以敬。”(管仲)在家庭内部,兄弟之间讲求宽恕是非常必要的,它可以使兄弟间正确地对待他人的缺点和错误,恰当地处理自己和兄弟的关系,缓解兄弟间的纠纷和矛盾,创造一个和谐的生活氛围,有利于家庭的安定团结。对于兄弟之间的矛盾,儒家的基本态度就是要以同胞情谊为重,尽力互让,不使矛盾激化。《诗经》上有:“兄弟阋墙,外御其侮”,“兄弟虽有不忿,不废懿亲”。对兄弟要宽以诲之,就是作为兄长除了对弟弟要宽恕、宽厚外,对弟弟还有训导之责。“至于兄弟之际,吾亦惟爱之以德,不欲爱之以姑息。教之以勤俭,劝之以习劳守朴,爱兄弟之以德也:丰衣美食,俯仰如意,爱兄弟以姑息也,姑息之爱,使兄弟惰肢体,长娇气,将来丧德亏行。”(曾国藩家书) 三是表以率之;“表”指榜样、模范。道德表率,或者说道德示范是社会运行的重要机制。由于中国古代社会结构保留了原始氏族制的遗迹,特别是英雄崇拜的影响,因而对道德表率,特别是对长辈自身的道德表率作用的重视,显得尤为突出,成为“德治”、“教化”思想的重要内容,也是处理人际关系的重要准则。榜样的力量是无穷的。作为表率,影响力的体现不是靠说教,而是靠自己的身体力行,因为言传不如身教。 除了兄长对弟弟要遵循一定的伦理规范外,弟弟对兄长也要遵循一定的伦理规则。这些传统伦理规范对弟弟也提出了专门要求: 一是尊之敬之;“兄爱弟敬,……兄爱而友,弟敬而顺。”(司马光·家范)兄弟之间,最重要的是相互爱敬,“居处恭,执事敬”(《论语·子路》)遇到问题委曲求全,以保“怡怡”之乐,这是保证兄弟亲爱之道。 二是顺之从之;提到“弟”本身就包含着顺从之意。班固在《白虎通》里说:“弟者,悌也,心顺行笃也。”,“弟,悌也,言顺于兄”,“为人弟者,比顺以敬。”这些伦理规范,都是主张弟弟顺从兄长,但是也不能无原则的顺从,有道当从,无道可不从。 3、保全自己 在孝道思想中所蕴含的尊重生命意识还表现为对自我的关怀、珍爱。“身者,亲之遗体也。行亲之遗体,敢不敬乎?”(《大戴礼记·曾子大孝》)身体不仅是自己生命的承载体,同时也是父母生命因子在我们身体中的延续。善待自我、重视自我就是对父母乃至祖先健康生命因子的保全。“父母全而生之,子全而归之,可谓孝也。不亏其体,不辱其身可谓全也。”(《礼记·祭义》)“君子无不敬也,敬身为大。身也者,亲之枝也,敢不敬与?能敬其身,是伤其亲。伤其身,是伤其本。”(《礼记·哀公问》)为了保全自身的生命,为了自身安全,不登高,不临深,不处险地,游必有方。当然,伤风败俗、违科犯禁的行为更不能去做,以达到“不辱其身,不羞其亲,可谓孝矣”(《礼记·祭义》)的境界。 孔子的弟子曾子临死时对他的弟子们说:“启予足,启予手。”(《论语·泰伯》)让弟子们看到自己的身体是完整的,没有损伤,并以此感到欣慰。曾子说,自己在生活中“战战兢兢”、“如履薄冰”,十分注意不使自己的身体受损伤,这是因为他认为自己的身体是受之于父母的,其中承载了从祖先传下来的生命。 曾子等都认为,受之于父母以完整的身体,应该以完整的身体还给父母,才能使父母的生命也得以健康延续,这也是孝道思想中的一个重要内涵。“身体发肤,受之于父母,不敢毁伤,孝之始也。”(《孝经·开宗明义章》)作为一个生命体,自己的身体肯定是过去生命的承载体,生命是通过这一有形物体而贯穿于过去、现在和未来的整体。人们对自我存在、自我生命的重视,正表现人们对生命的崇高敬意。因为人的生命源于父母,父母的生命无限地往上追溯则来自天地,因此,人们对自我生命的敬意就好比对父母、对天地的敬意一样。在家族观念流行的社会背景下,强调对自身的珍视、爱惜,体现出对家族生命健康传承的责任意识。   三、对子孙的养育 祭祀祖先、孝敬父母、兄爱弟敬、保全自身只是孝道思想中的几个阶段,只有让家族的生命力不断延续下去,才是最大最终的孝。“孝有三:小孝用力,中孝用劳,大孝不匮。”(《曾子·大孝》)孝道思想体现出人的生命意识,从祖先到父母,从父母到自己,从自己到自己的后代,生命就是在这样的传宗接代的延续中得到流动、生生不息,从而也实现了人们对于生命有限的遗憾而追求永恒的一种价值取向。父母的生命传续到自己,如果不能继续延续下去,那将是一件非常严重的事。“不孝有三,无后为大”(《孟子·离娄上》),“无子为其绝世也”(《大戴礼记·本命》),正是这种思想的明显体现。生命总是在代代相传中得以延续,这也是人类有限生命对无限生命的一种追求。以关爱生命、重视生命为内容的孝道思想,正是这样的一种生命价值观。这种生命价值观既表现为渴望生命延绵不断的传递,又表现为追求生命价值的不断升华。 从人的自然生命本性来说,任何一个个体生命都是有限的、暂时的,要想获得生命的延续,而实现生命的永恒,就不得不考虑传宗接代问题。生命的延续是通过家族延续的形式表现出来的。这样,家族生命的传承与家族的兴旺发达的价值观念就联系起来了,婚姻便成了人们生命延续的一件大事。“天地不合,万物不生;大婚,万世之嗣也。”(《礼记·哀公问》)男女结婚就成了传承祖先生命的一项重要内容,生儿育女成为保持家族生命兴旺的重要手段,是人生至关重要的责任。孔子说:“父母生之,续莫大也。”(《孝经·圣治章》)只要每一代人都努力承担起传承生命的重任,家族生命就会枝繁叶茂,万代不竭。 生命传承不仅表现为绵延不断的自然和生物意义的传承,更表现为对家族生命的物质传承和文化传承乃至精神传承(包括家业、家风等),而后者是一种更有意义的价值传承。家族生命价值的物质传承的基本要求是传承家业,家族生命价值的文化传承的基本要求是传承良好的家风。孔子在回答孟懿子问孝时说:“无违。”孔子还说:“父在观其志,父没观其行,三年无改于父之道,可谓孝矣。”(《论语·学而》)具体说来就是为了好好继承先祖基业,就要继承先辈的优秀精神和优良风范。“夫孝者,善继人之志,善述人之事也。”(《中庸》)没有很好地继承先辈的优秀精神和优良风范就很难守住祖宗基业,这种人往往被认为是不肖子孙而遭贬斥,无论再大的富豪、文豪,只要后世出现一个不肖之孙,祖先几百年基业会毁于一旦。 从个体对家族生命的传承上来说,个体仅仅维持祖先遗留下来的基业是不够的,更重要的是能够在继承祖先的基础上有所创新、有所突破,要使家族生命在维持前辈的基础上有所超越,使整个家族生命意义得到辉煌发展,生命传承的意义也就体现出来。如果想使整个家族生命得到传承,其出发点便是立己身。“夫孝,始于事亲,中于事君,终于立身。”使自己的地位身份能够确立是传承生命最重要的一步。“立身行道,扬名于后世,以显父母,孝之终也。”(《孝经·开宗明义章》) “立身行道”的内涵是丰富的:“太上有立德,其次有立功,其次有立言,虽久不废,此之谓不朽。”(《左传·襄公二十四年》)诚如孔子所担忧的那样“君子疾没世而名不称也。”(《论语·卫灵公》)如果一个人在经过立德、立功、立言等三方面的努力,能够使自己垂德后世、建功立业和著书立说,最终实现超越短暂而有限的生命,获取人的永恒的生命价值。这一超越,从个人角度而言,既获得了现实生活的幸福,又实现了自身生命价值,体现了人生的意义;从家族角度而言,既可光宗耀祖、彰显其亲还可以进而福荫子孙;从社会角度而言,可以报效国家,有益于民众。立言就是著书立说,妙手著文章。如果达到了立德、立功和立言的完美结合,那么就意味着圆融了生命的意义,体现了生命的价值。这样,也就达到了孝的新境界,实现了传承家族生命和完善自我生命的统一,真正实现了个体生命价值的不朽。   结束语 百善孝为先,孝是人生立身之本、家庭和睦之本、国家安康之本,同时也是民族生存之本。 儒家思想是一门生命的学问。因此,儒家的孝道思想也就不仅表现为一种家庭伦理思想,更是蕴涵了人类关于自身生命的尊重意识和学问。孝道实际上是中国人的一种人文宗教,反映了中国人的生命永恒不息,文化绵延不断的历史意识和终极价值理想。 文明初期,人们认识到生命的宝贵性,逐渐产生对祖先的崇拜和祭祀的意识,这是孝的最原始的萌芽阶段。后来,孝道对祖先的崇拜和祭祀意识发展成为一种社会性制度。 到了春秋战国时期,孝道思想把对祖先的崇拜和感恩的意识化为一种现实的意识,对生命的关怀也相应地转化于现实的伦理生活中,将基本内容发展到赡养父母、兄爱弟悌、保全自己的新境界。这就是孔子所倡导的儒家孝道思想的核心部分。 “赡养父母”不仅要做到物质需求的满足,更是要做到精神上的关怀,达到“又敬不违,劳而无怨”,以实现对现存活生命的爱护和关怀。 “兄爱”要做到“亲而爱之”、“宽以悔之”、“表以率之”,“弟悌”要做到“尊之敬之”、“顺之从之”,以实现对家族生命的协调发展。 “保全自己”要做到不登高,不临深,不处险地,游必有方,以实现对父母行孝的基础问题和出发点。一个人的生命是以祖先为代表的宗族生命的一部分,为了对一个宗族生命负责,首先就得保重自己的生命。 为了宗族的壮大,让祖宗生命能够永久地延续下去,每世代生命个体就必须要担负起有计划地生育后代的责任,以保证本宗族的生命载体继续健康存在;同时,正是由于这些生命载体的健康存在,承载了整个家族的精神生命,使得家族生命继续得以传承、发展。否则,家族生命的延续若受到阻碍,不仅因此而犯了世间最大的不孝,也会违背家族乃至人类生存发展的基本法则。     2011.12.20 유가 효도사상의 세가지 요소 玄 盛 元   진한시기 중국 최초의 사전인 《尔雅》에서는 《부모를 잘 대하는것이 효이다.( 善父母为孝。)》(释训)라고 해석 하였으며, 《说文解字》에서도 《孝란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다. 老와 子로부터 子가 老를 받들고 있다.( 孝,善事父母者。从老,从子,子承老也。)》(许慎)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효도사상에 대하여 담론하게 되면 왕왕 가장 쉽게 생각나는 것이 자녀가 부모에게 효성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기실 유가 효도사상은 부모에 대한 효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두개방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 하나는 조상에 대하여 숭배하고 제사 지내는 내용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녀를 낳아서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내용이다.  일찍이 殷商 갑골문에서 이미 《孝》한자가 발견되였는데 성숙된 《孝》한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글짜로서 《老》의 략자가 위에 있고 《子》자가 아래에 있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풍부한 륜리적 도덕적 의미를 구상해 낼수 있다. 《孝》한자의 문자결구로 부터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이 구상할수 있다: 첫째는 자손이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형상, 둘째는 아들이 로부모를 업고 있는 형상, 셋째는 손자가 할아버지 품에 안겨있는 형상…등이며, 그 함의를 구상해 볼때 첫째는 조상을 숭배한다는 의미로, 둘째는 부모를 잘 모신다는 의미로, 셋째는 가문의 대를 이어간다는 의미로 구상할수 있다. 《孝》한자의 문자결구는 우리들에게 효의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소박한 함의를 나타내고 있는데 비록 맹아상태이지만 전반 효문화의 출발점을 알려준다. 바로 《老》와 《子》의 이런 원발생적인 생명관계의 연장과 제고를 통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의미가 심각한 효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조상에 대한 숭배와 제사는 생명본원에 대한 숭배의식과 감은의식의 체현이고, 부모에 대한 효성은 현존하는 산 생명에 대한 아낌과 보살핌 의식의 체현이며, 자식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것은 가문의 생명이 영원히 이어져 내려가 번영창성하기를 추구하는 의식의 체현이다. 가정을 단위로 하는 사회에서 인류의 생명은 바로 이 세가지 환절이 부단히 교체되는 과정에서 계승되고 제고 되는 것이다. 유가 효도사상의 본질은 바로 생명에 대한 존중의식이다.   첫번째 요소: 선조에 대한 숭배 인류가 문명사회에 들어서면서 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점차 생명의 보귀함을 인식하게 되였다. 기나긴 세월의 간고한 생명활동 가운데서 점차 자신의 생명과 그 본원을 중시하게 되였으며 동시에 어떻게 하면 생명활력을 가강할수 있겠는가를 사고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생산력은 극히 락후하였는바 사람들의 생명력도 상당히 취약하였으며 그로하여 사람들은 점차 선조에 대하여 숭배하고 감격하면서 선조영령에 기원하는 것으로 현실에서는 얻을수 없는 리상적인 보우를 얻으려는 의식이 생기게 되였다. 《만물의 근본은 하늘이요, 사람의 근본은 선조이다.( 万物本乎天,人本乎祖)》(《礼记·效特性》),《선조가 없이 후손들이 어찌 생길수 있었겠느냐?( 无先祖焉出?)》(《大戴礼记·礼三本》) 등등의 선조관념이 산생하면서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의 최초의 사상기초를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이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니며 선조들이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한세대 한세대 간고하게 이어서 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자기선조의 은덕을 모른다면 그것은 아직 기본人性을 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군자가 옛일을 돌이키며 다시 답사를 시작하는 것은 자기가 태여난 곳을 잊지않기 위해서이다.(君子反古复始,不忘其所由生也。)》(《礼记·祭义》) 그때로 부터 사람들은 여러가지 형식을 통하여 선조에 대하여 숭배하고 감격하고 그리워 하는 정을 표달하기 시작하였다. 西周시기의 金文중에서 이미 적지않은 효에 관한 기록들이 발견되였는데 대부분 여러가지 제사활동 기록중에서 나타났다. 이를테면 《追簋》중에 《用享孝于前文人》이라는 기록이 있고, 또 《酒诰》중에 《用孝养厥父母》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그리고 《文侯之命》중에 《追孝于前文人》이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 이미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은 주요하게 제사형식을 통하여 표달되였으며 효의 내용은 아직 기본상에서 선조에 대한 숭배에 국한되여 있었다. 이로부터 효관념의 문화적 근원은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과 직접적으로 련관된다는 것을 알수있다. 선조에 대한 숭배관념은 고대 씨족제도의 유존을 문명사회에 가지고 들어와 종족제도로 발전시켰으며 가정결구, 사회심리와 의식형태에 심각한 영향을 일으켰다. 일찍이 上古 殷商시기에 중국에서는 천지를 숭상하고 선조를 숭상하는 원시종교가 성행하였었는데 춘추말기에 와서 천지를 숭상하는 의식은 로자에 의하여 도교로 발전하였고, 선조를 숭상하는 의식은 공자에 의하여 유교로 발전하였는데 유교는 또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을 핵심으로 효도사상을 창립하고 발전시키여 유교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체계적으로 제고시켰다. 공자는 《다채롭구나 문장들이! 내가 주나라 문채를 따랐노라!(郁郁乎文哉!吾从周)》(《论语·八佾》)하고 주장하였지만 그가 효를 담론하면서 西周의 문화만 중시한것이 아니라 춘추의 새사상을 계승하여 효를 사람들의 선조와 부모에 대한 진실한 감정으로 환원시켰으며 효의 규례에 합리한 륜리적 의거를 제공하여 주었다. 한번은 宰我가 《三年之丧》에 대하여 묻자 공자왈 《자식을 낳아서 삼년이 지나서야 부모품에서 떨어지더라. 무릇 삼년상례는 천하의 보편 규례로 되였다. 보답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부모의 삼년사랑에 보답할수 있지 않느냐?(子生三年,然后免于父母之怀。夫三年之丧,天下之通丧也。予也,有三年之爱于其父母乎?)》(《论语·阳货》)하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그당시에 이미 성행한 부모작고후의 삼년상례는 그 어떤 聖人의 뜻에 의하여 결정된것이 아니라 이미 작고한 부모의 낳아서 키워주신 은덕에 보답하기 위한 구체적 요구에 의하여 결정되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장기적인 력사 대변혁중에서 사람들의 의식에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 났는데 효도에서 선조에 대한 감은위주의 제사의식은 점차 선조영령으로 부터의 보우위주의 제사의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로부터 효도의 선조에 대한 제사의식은 일종의 사회성 제도로 발전하였다. 《무릇 효라는 것은 하늘처럼 필연적이고 땅처럼 당연한 것으로서 백성들의 행위규범으로 되였다.(夫孝,天之经也,地之义也,民之行也。)》(《孝经·三才》) 효도사상은 점차 동방문화권에서 일체 사회행위의 근본준칙으로 되였으며 일체 사회활동에 종사하는 기점으로 되였다. 그리하여 옛사람들도 《무릇 효라는 것은 삼황오제가 창도한 근본사무로서 만사의 기본고리이다.(夫孝,三皇五帝之本务,而万事之纲也。)》(《吕氏春秋·孝行览》) 라고 하였다. 우리의 선인들은 선조에 대한 제사활동 과정에서 엄격한 집행제도와 번쇄한 순서규범들을 제정하여 놓았는데 그 목적은 제사의 엄숙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선조에 대한 성의를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였다. 사람들은 성의를 다하여 선조에게 제사 지내면 선조신령으로부터 바라는 바의 보우를 받을수 있으며 만사가 태평할수 있고 가족이 번영창성할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지금의 관념으로부터 볼때 선조에 대한 제사가 정말로 그렇게 큰 신통력를 갖고 있는가 하는것에 대하여 앞으로 더 연구하여야 할 과제이지만 선조에 대한 제사가 가족성원들의 가족관념을 증강시키고 우량한 전통을 전수하며 가족의 화목을 추진시키는 등 방면에서는 확실하게 적극적인 작용을 할수 있다는것만은 완전히 긍정할수 있다.   두번째 요소: 부모에 대한 효성 효도사상의 생명존중의식은 선조를 숭배하고 제사지내는 활동중에서만 체현되는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현실생활중에서 현존하는 살아있는 생명에 대하여 아끼고 애호하는 과정에서도 체현된다. 효도사상은 선조에 대한 숭배와 감은의식을 일종의 현실적인 의식으로 발전시키고 생명에 대한 보살핌 의식도 상응적으로 현실적인 륜리생활중에 전화시키여 그 기본내용을 《1; 부모를 잘 모시는 것, 2; 형제간에 친밀하게 지내는 것, 3; 자기를 완미하게 보전하는 것》 등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효도사상은 새로운 더욱 높은 경계에로 발전하게 되였으며 이 내용들은 공자가 창도한 유가 효도사상의 핵심부분을 형성하였다. 1; 부모를 잘 모신다.(孝敬父母) 맹자왈: 《효자의 표준에는 부모를 존중하는 그 이상이 없다.(孝子之至,莫大乎尊亲。)》(《孟子·万章上》) 순자도 말했다: 《부모를 잘 모실수 있으면 효라고 말할수 있다.(能以事亲谓之孝。)》(《荀子·王制》) 이로부터 알수있는바 효라는 것은 수선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다. 《효경》에서 말한 것처럼 《무릇 효라는 것은 부모를 잘 모시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夫孝,始于事亲。)》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부모의 년세에 주의 돌리지 않을수 없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데 기쁜것이 무엇인고 하면 내 부모가 아직 건재하여 계시기 때문에 시시로 효성할수 있는 그것이고, 걱정이 되는것이 무엇인고 하면 내 부모가 이미 늙어서 오래오래 효성을 다하지 못할가봐 그것이다. 그리하여 말했더라: 사망후 제사를 풍성히 차리느니 살아 계실때 검소하게 잘 모시기만 못하고, 사망후 통곡하느니 살아 계실때 웃으며 효순하기만 못하며, 존경을 하면서 무표정 하느니 확실하게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기만 못하며, 사망후 괴로워 하느니 살아 계실때 정성을 다하기만 못하다.(父母之年,不可不知也。一则以喜,一则以惧。喜者何,喜吾父母在,可以时常尽孝也。惧者何,惧吾父母老。恐不能长久以尽孝也。故曰:祭而丰,不如养之薄。死而哭,不如生之顺。与其致敬于无形,不若承欢于眼。与其伤心于日后,不若尽心于生时。) 》(《论语·里仁》) 자녀는 당연하게 부모의 제한된 생명을 아끼면서 될수록 오래 장수하시게끔 노력해야 한다. 물론 부모에게 효성하고 부모가 오래 장수하게끔 하려면 물질방면에서 충분히 보장하여 드려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정신방면에서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한다. 부모에게 효성하는 실질은 사랑에 있으며 존중에 있다. 공자는 부모에 대한 효도에 대하여 가르칠때 항상 자녀 마음속의 진실한 감정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子夏가 효에 대하여 묻자 공자왈 《항상 맑은 표정이 어렵니라.(色难。)》(《论语·为政》) 라고하였고 孟武伯이 효에 대하여 묻자 공자왈 《부모의 질환을 근심하여 드리는 것이니라.(父母唯其疾之忧。)》(《论语·为政》)라고 하였으며 제자 子游가 효에 대하여 묻자 공자왈 《지금 효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양만 하면 되는것으로 여기는데 기실 우리는 개나 말도 사양하고 있다.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부양만 한다면 개나 말을 사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今之孝者,是谓能养。至于犬马,皆能有养。不敬,何以别乎?)》(《论语·为政》)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물질방면의 충분한 보장은 효의 한개 방면에 불과하며 그 기초상에서 반드시 부모에 대하여 진정으로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모에게 효순함에 있어서 원칙이 있는데 자기 마음에 반문해 보아서 진정한 성의가 아니라면 부모에게 효순한다고 말할수 없다.(顺乎亲有道:反诸身不诚,不顺乎亲矣。)》(《中庸》) 외부에서 보건대 부모에게 효성하는 행위는 반드시 엄숙하고 장중해야 하며 례의에 부합되여야 한다. 《살아 계실때는 례의에 맞추어 잘 모시고 사망하면 례의에 맞추어 장례지내고 례의에 맞추어 제사 지낸다.( 生,事之于礼;死,葬之于礼,祭之以礼。)》(《论语·为政》) 《효자가 부모를 잘 모신다는 것은 집에 계실때에는 존경을 드리고, 부양함에 있어서는 즐거움을 드리며, 몸에 병이 나면 걱정해 드리고, 사망하면 애도를 들이며, 제사를 지낼때는 숭엄함을 드리는 것이다.(孝子之事亲也,居则致其敬,养则致其乐,病则致其忧,丧则致其哀,祭则致其严。)》(《孝经·纪孝行章》) 내심의 정감으로 부터 볼때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반드시 성의있는 태도와 진실한 감정이 있어야 하며 부모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오직 부모에게 충성하고 진실한 감정이 있어야만 부모를 모심에 있어서 마음과 힘을 다 할수 있으며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으며 고생하면서도 원망하지 않을수 있다. 총적으로 부모에 대한 효행에는 여러개의 층차가 있는데 핵심은 부모를 존경하는 것이다. 증자가 말한것 처럼 《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大孝는 부모를 존중하는 것이고, 其次가 부모를 괄시하지 않는 것이며, 其下가 부모가 죽지않을 정도로 부양만 하는 것이다.( 其孝有三:大孝尊亲,其次弗辱,其下能养。)》(《礼记·祭义》) 2、형제간에 친밀하게 지낸다.(兄爱弟悌) 유가 효도사상중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중시할뿐만 아니라 형제간의 친밀도 매우 강조한다. 가정의 기본관계는 부모, 자식, 형제, 부부 등으로 공동히 구성되였는데 그중 형제관계가 가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통적으로 형제관계에서 륜리의 기본규범은 《형제간에 친밀을 지키고, 이상과 제하간에 순서를 지키는 것이다.》 형이나 이상 사람이 동생이나 제하 사람을 대하는 전통 륜리규범에서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첫째는 사랑하며 관심하라. 仁愛와 友愛는 효도사상의 중요한 도덕규범이며 역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정확히 처리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효에 의하면 형제간에 친밀하면서도 해야 할것과 하지말아야 할것에서는 나라의 법을 따른다(惟孝,友于兄弟,克施有政。)》(《尚书》) 형제간의 사랑과 관심은 주요하게 화복을 함께 나누고 희노애락을 함께하는데서 체현된다. 형제간에 영광과 수치를 함께 하면서 행복은 대방에게 양보하고 고통은 자기가 감수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형제간 사랑의 가장 보귀한 덕행이다. 《인의로 동생을 대할때 노여움을 감추지 않을수 있느냐? 원망을 누르지 않을수 있느냐? 오직 친밀하게 지내며 사랑할수 있을 뿐이다.(仁人之于弟也,不藏怒焉,不宿怨焉,亲爱之而已矣。).》(孟子) 둘째는 너그럽게 대하며 깨우쳐 주라. 너그럽다는 것은 남과의 교제를 처리할때 나에게 미안한 립장의 사람을 너른 흉금으로 용서해 주며 그의 사정을 충분히 돌보아 주는것을 말한다. 내 사정이자 너의 사정이라고 평상심으로 동생을 용납해 주며 엄격히 형님표준으로 자기에게 요구하면서 너그럽게 형제간의 관계를 처리한다. 옛사람들은 《형님으로서 동생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으로 깨우쳐 주고, 동생으로서 형님을 곰상스럽게 대하는 것으로 존경하라.(为人兄者,宽裕以诲;为人弟者,比顺以敬。) 》(管仲)하고 제창하였다. 가정내부에서 형제간의 너그러움과 양보는 아주 필요한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형제간에 대방의 결점과 착오를 정확히 대할수 있으며, 형제간의 관계를 타당하게 처리할수 있으며, 형제간의 분기와 모순을 완화시킬수 있으며, 화기로운 생활 분위기를 창조하여 가정의 안정과 단결에 유리하게 할수 있다. 형제간의 모순에 대하여 유가의 기본태도는 형제의 정분을 첫째로 하고 양보를 앞세우면서 모순이 진일보 격화되지 않도록 한다. 여기에서 《먼저양보》가 중요하다. 《먼저양보》가 없이는 《서로양보》가 어렵다. 《诗经》에 있듯이 《형제간에 벽을 사이두고 서로 욕질을 해대니 담장 밖에서 남들이 손가락질 하며 비웃더라.(兄弟阋墙,外御其侮)》, 《형제간에 틀리는 일과 노여움이 있다 하더라도 형제의 정분만은 버리지 말어라.(兄弟虽有不忿,不废懿亲)》 너그럽게 대하며 깨우쳐 준다는 것은 형님으로서 동생을 너그럽게 대하여 줄 뿐만 아니라 동생을 적당히 훈계하여 깨우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들을 대할때 역시 덕으로 사랑해야 하지 방종으로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근검하도록 가르치고 로동을 익히고 소박함을 지키도록 권고하는 것이 형제를 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풍의미식 시키면서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것은 형제를 방종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방종의 사랑은 형제로 하여금 몸과 사지가 게으르게 하고 의뢰심만 잔뜩 키워놓아 장래 필연코 패덕망신하게 될것이다.(至于兄弟之际,吾亦惟爱之以德,不欲爱之以姑息。教之以勤俭,劝之以习劳守朴,爱兄弟之以德也:丰衣美食,俯仰如意,爱兄弟以姑息也,姑息之爱,使兄弟惰肢体,长娇气,将来丧德亏行。)》(曾国藩家书) 셋째는 본보기를 보이며 이끄러 주라. 본보기란 시범을 보이는 것이다. 도덕상에서 본보기를 보이는 것은 사회운행의 중요한 기제이다. 중국 고대 사회결구는 원시 씨족제도의 흔적을 보류하고 있었고, 특히는 영웅숭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로하여 도덕상의 본보기, 특히는 이상 어른들의 솔선수범 작용을 특별히 중시하여 왔다. 이것이 《덕으로 다시리고(德治)》, 《교육하여 개조시키는(敎化)》 사상의 중요한 내용으로 되였을 뿐만 아니라 역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처리하는 중요한 준칙으로 되였다. 본보기의 힘은 무궁한 것이다. 형님은 동생의 본보기로서 자기의 영향력을 말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행동으로 체현해야 하는데 그것은 행동으로 가르치는 것이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형님이 동생에 대하여 이상의 륜리규범을 준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생도 형님에 대하여 이하의 륜리규범을 준수해야 한다. 전통적인 륜리규범에서 동생에게도 역시 다음과 같은 전문적인 륜리요구가 제출된다: 첫째는 존경하라. 《형의 사랑과 동생의 존경이란,…형은 동생을 사랑하고 친밀하게 대하며, 동생은 형을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兄爱弟敬,……兄爱而友,弟敬而顺。)》(司马光·家范) 동생으로서 문제에 부딛치면 될수록 먼저 양보하면서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하며 이로써 형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 이것이 바로 형제간의 친밀한 관계를 보증하는 원칙이다. 둘째는 순종하라. 《동생》이라는 이름 본신에 이미 순종의 함의가 들어있다. 반고는 《白虎通》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생으로서 형님을 존경해야 하며 마음으로 순종하고 행동으로 충성해야 한다.(弟者,悌也,心顺行笃也。)》, 《한사람의 동생으로 되였다면 그사람에게 순종하고 그사람을 존경해야 한다.(为人弟者,比顺以敬。)》 이런 륜리규범들은 모두 동생이 형님에게 순종하라는 도리를 말하였는데 그렇다고 무원칙하게 무조건 순종하라는 뜻은 아니다. 도리가 있으면 순종하고 도리가 없으면 순종하지 않을수도 있다. 3、자기를 완미하게 보전한다(保全自己) 효도사상중에 포함된 생명존중 의식은 또 자기에 대한 보살핌과 아낌에서도 표현된다. 《몸이라는 것은 부모가 물려준 것이다. 부모가 물려준 몸으로 살아 가면서 감히 존경하지 않을수 있느냐?( 身者,亲之遗体也。行亲之遗体,敢不敬乎?)》(《大戴礼记·曾子大孝》) 신체는 자기의 생명을 담은 물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모의 생명이 슴배인 물체이며 부모생명의 나의 신체에서의 연속인 것이다. 자기 신체를 살뜰히 대하고 자기 안전에 중시하는 것은 곧 부모와 나아가서는 선조로 부터 물려 내려온 생명을 완미하게 보전하는 것이다. 《부모가 완미하게 낳아 주신 신체를 자식으로서 완미하게 부모에게 돌려 드리는것이 곧 효이다. 자기 신체가 상하게 하지 않고 자기 신체가 너무 욕보게 하지 않는다면 곧 완미하다고 할수있다.(父母全而生之,子全而归之,可谓孝也。不亏其体,不辱其身可谓全也。)》(《礼记·祭义》), 《군자는 제몸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제몸을 존경하는 것은 확실히 큰 일이다. 몸이란 것은 부모에게서 갈라져 나온 아지인데 감히 존경하지 않을수 있느냐? 자기몸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자기 부모를 상하게 하는 것으로 되며 자기몸을 상하게 한다면 가문의 근본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된다.(君子无不敬也,敬身为大。身也者,亲之枝也,敢不敬与? 不能敬其身,是伤其亲。伤其身,是伤其本。)》(《礼记·哀公问》) 자기의 신체를 완미하게 보전하기 위하여 자신안전에 특히 주의해야 하는데 리유없이 높은곳에 오르지 말고 깊은곳에 가지 말며 위험한 곳에 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유람을 갈때에도 반드시 사전에 안전조치가 빈틈이 없어야 한다. 물론 사회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죄를 범하는 일은 더구나 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저로 《몸이 욕보게 하지 않았고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으니 그래도 효를 하였다고 말할수 있노라.(不辱其身,不羞其亲,可谓孝矣)》(《礼记·祭义》) 하는 경지에는 도달시킬수 있다. 공자의 제자인 曾子는 임종하면서 자기의 제자들더러 《내발을 들어 달라, 내손을 들어 달라.(启予足,启予手。)》(《论语·泰伯》)라고 하여 자기의 신체가 완정하며 손상이 없다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놓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曾子는 자기는 평시 생활에서도 언제나 얼음위를 걷는듯 하면서 자기의 신체가 손상받지 않게 조심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자기의 신체는 부모한테서 물려 받은 것으로서 거기에는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생명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란다. 曾子처럼 부모에게서 완미한 신체를 가졌으면 반드시 완미한 신체로 부모한테 돌려 들여야 하며 그래야만 부모의 생명이 제대로 연장될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도 역시 효도사상중의 한개 중요한 내용이다. 《자기몸이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감히 회손하지 못하는것도 효의 시작이라고 할수있다.(身体发肤,受之于父母,不敢毁伤,孝之始也。)》(《孝经·开宗明义章》) 생명체로서의 자기의 신체에는 긍정적으로 무수한 조대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온 과거생명이 슴배여 있으며 생명은 곧바로 이런 유형적인 물체에 의하여 과거-현재-미래에 관통되여 있다. 사람들의 자아존재와 자아생명에 대한 중시는 곧바로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숭고한 경의를 표현하고 있다. 자기의 생명은 부모에게서 가졌지만 부모의 생명래원을 무한히 찾아 올라가면 결국 하늘과 땅이 되는데 그러므로 자아생명에 대한 존경은 결국 부모에 대한 존경과 자연에 대한 존경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가족관념이 류행하는 사회배경에서 자신에 대한 아낌과 중시를 강조하는 것은 가족의 생명을 왕성하게 높은 질량으로 후대들에게 물려주려는 책임의식을 체현한 것이다.   세번째 요소: 자손에 대한 양육 선조에게 제사 지내고, 부모에게 효성하며, 형제자매간에 친밀하게 지내고, 자기를 완미하게 보전하는 것은 효도사상중의 몇개 계단에 불과하며 오직 가족의 생명이 부단히 연속되게끔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큰 효이다. 《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작은효는 힘으로 하고 중효는 로동으로 하며 대효는 자손자리에 빈곳이 없이 한다.(孝有三:小孝用力,中孝用劳,大孝不匮。)》(《曾子·大孝》) 효도사상은 사람들의 생명의식을 체현하였는데 선조로 부터 부모에까지, 부모로 부터 자기에까지, 자기로 부터 자기의 후손에 까지, 생명은 이렇게 대를 이어서 연속되는 가운데서 쉼없이 류동하며 이로부터 사람들의 유한한 생명에 대한 유감으로 부터 영구함을 추구하는 일종의 가치관을 실현한다. 부모의 생명이 자기에게까지 와서 만약 계속 연속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주 엄중한 문제로 된다. 《불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후대가 없는것이 제일 큰 불효이다.(不孝有三,无后为大)》(《孟子·离娄上》), 《자손이 없는 것은 가문의 대를 끊는 것이다.(无子为其绝世也)》(《大戴礼记·本命》) 사람들의 자연생명의 본성으로 놓고 볼때 그 어떤 개체의 생명도 모두 유한한 것이며 잠시적인 것이다. 생명은 언제나 한세대 한세대 이어지는 가운데서 연속되는데 이것은 역시 인류의 유한생명이 무한생명에 대한 일종의 추구이다. 생명을 보살피고 생명을 중시하는 것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효도사상은 바로 이런 일종의 생명 가치관을 체현한다. 이런 생명가치관은 생명이 부단히 연속되기를 갈망할 뿐만 아니라 생명가치의 부단한 승화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생명이 부단히 연속되게 하여 생명의 영구함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득불 후대문제를 고려하게 된다. 생명의 연속은 가족 연속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가족생명의 계승이 가족 흥성의 가치관념과 서로 련계되면서 혼인이 사람들의 생명연속의 하나의 대사로 되였다. 《천지가 결합되지 않으면 만물이 생성할수 없다. 결혼하는 것으로 만세대를 계승할수 있다.( 天地不合,万物不生;大婚,万世之嗣也。)》(《礼记·哀公问》) 남녀의 결혼은 선조생명을 계승하는 중요한 내용으로 되였으며,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 가족생명의 번영창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생의 아주 중요한 책임으로 되였다. 공자는 《부모가 자식을 낳아 가문을 이어가는 것보다 더 큰일이 없다.(父母生之,续莫大也。)》(《孝经·圣治章》)라고 하였다. 오직 매 세대에서 모두 생명계승의 중임을 원만히 완수한다면 가족생명은 갈수로 왕성하게 되며 천추만대를 가도 끊기지 않을수 있다. 생명의 계승은 자연적 생물적 계승에서 표현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가족생명에 대한 물질적 계승과 문화적 정신적 계승에서 표현되는데 이 후자의 계승이 더욱 의의있는 가치의 계승이다. 가족생명가치의 물질적 계승의 기본요구는 전통가업을 계승한는 것이며 가족생명가치의 문화적 정신적 계승의 기본요구는 량호한 전통가풍을 계승하는 것이다. 孟懿子가 효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가문의 전통을 위반하지 않는 것이니라.(无违。)》라고 하였으며 또 《부친이 계실때는 그 뜻을 보고 부친이 사망한후에는 그 행위를 보아 삼년이 지나도록 부친의 원칙이 위반되지 않았다면 효라고 할수 있니라.(父在观其志,父没观其行,三年无改于父之道,可谓孝矣。)》(《论语·学而》)라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조들이 남겨놓은 전통가업과 전통가풍을 계승함에 있어서 그에 따르는 선조들의 우량한 정신과 원칙을 계승하고 견지한다는 것이다. 《무릇 효를 하는 사람들은 선인들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인들의 사적을 잘 말하더라.(夫孝者,善继人之志,善述人之事也。)》(《中庸》) 선조들의 우량한 정신과 원칙을 계승하지 못하면 전통가풍과 전통가업을 제대로 지켜내기 어렵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사람들은 《후레자식》이라고 욕한다. 아무리 대부호 대문호 가문이라 하여도 후세에 《후레자식》이 하나만 나온다면 선조들이 몇백년 동안 분투하여 이룩한 가업을 하루아침에 말아먹는 수가 있다. 선조들이 남겨 놓은 전통가업과 전통가풍을 계승함에 있어서 단지 원래의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선조의 基業을 계승한 기초상에서 창조가 있어야 하고 돌파가 있어야 하며 원래의 수준을 초월하여 전반 가족생명의 의의를 더욱 빛나게 발전시켜야만 생명계승의 진정한 의의를 체현시킬수 있다. 전반 가족생명이 건전하게 계승되고 발전하게 하려면 그 효과적인 보장수단이 바로 사회에서 자기의 지위와 신분을 확고히 수립하는 것이다. 《무릇 효라고 하면 부모를 잘 모시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군왕을 잘 섬기는 것으로 발전시키여 최종으로 사회에서 자기의 신분을 확고히 수립한다.(夫孝,始于事亲,中于事君,终于立身。)》 사회에서 자기의 지위와 신분을 확고하게 수립하는 것은 가족생명계승의 가장 중요한 조치이다. 《신분을 수립하고 도를 집행함으로써 후세에 길이 이름을 남기고 그것으로 부모를 빛내이는 것이 효도의 최고의 표준이다.(立身行道,扬名于后世,以显父母,孝之终也。)》(《孝经·开宗明义章》) 《신분을 수립하고 도를 집행한다.》는 함의는 매우 풍부한데 《가장 높은 경계는 덕을 쌓는것이고, 그 다음이 공을 세우는 것이며, 그 다음이 유훈을 남기는 것으로서 오래가도 페지되지 않는다면 이것을 가리켜 불후하다고 한다(太上有立德,其次有立功,其次有立言,虽久不废,此之谓不朽。)》(《左传·襄公二十四年》). 바로 공자가 말한 것처럼 《군자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자기가 세상에 없은 후에 자기의 이름마저 불려지지 않는 것이다.(君子疾没世而名不称也。)》(《论语·卫灵公》) 만일 한사람이 덕을 쌓고, 공을 세우고, 유훈을 남기는 등 세방면의 노력에서 모두 성공한다면 능히 자기를 후세에 길이 빛나게 할수 있으며 잠시적인 유한한 생명을 초월하여 영구한 생명가치를 얻을수 있게 된다. 이러한 초월이 개인의 각도에서 볼때 현실생활의 행복을 얻을수 있고 자신 생명의 가치를 실현할수 있으며 인생의 의의를 실현할수 있게 되며, 가족의 각도에서 놓고 볼때 조상을 빛내일수 있고 부모의 위신을 수립할수 있으며 자손들에게 복음을 마련하여 줄수 있으며, 사회의 각도에서 볼때 나라에 보답할수 있고 백성들에게 유익하게 할수 있다. 유훈을 남긴다는 것은 저작을 남기거나 전기를 남기는 것을 말한다. 만일 덕을 쌓고 공을 세우고 유훈을 남기는 것이 완미하게 결합되였다면 그것은 생명의 의의를 원만하게 완성한 것으로 되며 생명의 가치를 충분히 체현한 것으로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효도의 새로운 경계에 이르고 가족생명 계승과 자아생명 제고의 통일을 실현하며 진정으로 개인의 불후한 생명가치를 실현한다.   결속어 백가지 善行에서 효가 첫째라고 하였다. 효는 인생립신의 근본이요 가정화목의 근본이며, 국가안전의 근본이요 민족생존의 근본이다. 유가의 효도사상은 하나의 생명의 학문이다. 그러므로 유가의 효도사상에는 가정륜리사상만 내포되여 있는것이 아니라 더우기는 인류의 생명존중의식에 관한 사상과 학문이 포함되여 있다. 효도는 실제상 우리민족의 인문성 종교이며, 우리민족의 생명불멸의식과 문화발전의식의 종극적 가치리상을 반영하였다. 인류 문명초기에 사람들은 생명의 보귀함을 인식하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과 감은의식이 산생되였다. 이것이 효도사상이 산생하게 된 최초의 원시적 맹아계단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이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니며 선조들이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한세대 한세대 간고하게 이어서 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자기선조의 은덕을 모른다면 아직 기본인성을 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인정 하였다. 이런 사상들은 효도의 생명존중의식에서 생명래원에 대한 숭배와 감은의 의식을 반영하였다. 춘추전국시기에 와서 유가의 효도사상은 《1; 부모를 잘 모시는것, 2; 형제간에 친밀하게 지내는것, 3; 자기를 완미하게 보전하는것》 등등의 더욱 높은 새로운 경계에로 발전하였다. 이런 사상들은 효도의 생명존중의식에서 현존하는 산 생명에 대한 아낌와 보살핌 의식을 반영하였다. 이것은 공자가 창도한 유가 효도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부모를 잘 모시려면 당연히 물질적으로 충분히 보장해 드려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정신상에서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며 마음속으로 부터 성의를 다하여 부모를 존중하고 보살펴 드린다. 이것은 효도의 생명존중의식에서 가장 주체적인 부분이다. 형이 동생을 대함에 있어서 첫째는 사랑하고 관심하며, 둘째는 너그럽게 대하고 일깨워 주며, 셋째는 본보기를 보이며 이끌어 준다. 동생이 형님을 대함에 있어서는 첫째는 존중하고, 둘째는 순종한다. 이렇게 형제간의 친밀한 관계를 확보한다. 자기를 완미하게 보전함에 있어서 리유없이 높은곳에 오르지 않고 깊은곳에 가지 않으며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신체단련과 신체보양을 잘하여 항상 건강한 신체소질을 확보한다. 물론 사회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죄를 범하는 일은 더구나 하지 않는다. 한사람의 생명은 종족의 시조를 대표로 하는 전반 종족생명의 한부분으로서 자기의 종족생명에 대하여 책임지기 위하여 먼저 자기의 생명안전부터 확보한다. 가족생명이 번영창성하고 종족의 생명이 영구적으로 이어지게하기 위하여 매개 세대에서는 책임지고 후대를 생육하는 의무를 원만히 완성하며 본 종족의 생명체계가 계속 건강하게 계승되는것을 보증한다. 이것은 유가 효도사상의 생명불멸의식의 구체적인 체현이다. 바로 종족의 생명체계가 건강하게 존재함으로써 전반 종족의 정신생명을 담을수 있으며 종족의 생명이 천추만대 계승되고 발전하게 할수 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종족생명의 연속이 자기세대에 와서 저애를 받는다면 그것은 선조와 부모에게 최대의 불효를 범하게 되며 가족과 나아가서 인류의 생존발전의 기본법칙을 위반하게 된다.    2012-01-02
71    연구회 성립이래의 중대 활동정황 댓글:  조회:1968  추천:0  2012-07-16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成立以来的 重大活动情况 一、2009年,研究会成立,当年将“朝鲜族丧葬习俗”申请为州级和省级非物质文化遗产成功,成为延边州文化局和吉林省文化厅指定的“朝鲜族丧葬习俗”保护责任单位。 二、2010年3月29日,为了推进“朝鲜族丧葬习俗”保护工作,为了解决朝鲜族居民办丧难问题,研究会下属注册设立了“白花相助服务中心”,凡是与朝鲜族丧葬有关的所有事务上提供正统而优质的服务。 三、2010年6月3日:与韩国宫殿集团签署《我们民族文化事业协助议定书》。 四、2010年8月:应韩国葬礼业管理协会的邀请,去韩国考擦韩国传统葬礼文化和韩国葬礼业发展情况,并获得韩国“一级葬礼指导师”荣誉称号。 五、2010年8月以来,已经进行了“我们民俗文化广播演讲”6次,“我们民俗文化巡回演讲”8次。 六、2010年12月14日:在州文化局指导下,成功承办“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州民政局、市民政局、州卫生局、州教育局、延边医院等20多个单位和部门参加,发表了八篇论文,明确了保护“朝鲜族丧葬习俗”的合理性、必要性和新的内容。 七、2011年3月5日~4月5日(清明节):开展“朝鲜族丧葬文化、孝道文化宣传月”活动。 八、2012年4月开展第二届“朝鲜族丧葬文化、孝道文化宣传月”活动。 九、2012年6月9日,荣获“朝鲜族传统丧祭礼仪州级代表性传承人”称号。 十、2012年~至今,寻找合作伙伴,为实现朝鲜族殡葬服务社会化而努力。
70    조선왕조 실록 댓글:  조회:2277  추천:0  2012-07-16
조선왕조 실록 ○ 태조실록 ○ 정종실록 ○ 태종실록 ○ 세종실록 ○ 문종실록 ○ 단종실록 ○ 세조실록 ○ 예종실록 ○ 성종실록 ○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 인종실록 ○ 명종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광해군일기(정초본) ○ 인조실록 ○ 효종실록 ○ 현종실록 ○ 현종개수실록 ○ 숙종실록 ○ 숙종실록보궐정오 ○ 경종실록 ○ 경종수정실록 ○ 영조실록 ○ 정조실록 ○ 순조실록 ○ 헌종실록  ○ 철종실록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순종실록부록        
69    발 해 고 댓글:  조회:2453  추천:0  2012-07-16
발 해 고 유득공 원저 머 리 말 고려가『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후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족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 때에 고려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급히『발해사』를 써서,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 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 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압록강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누가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되었으니 고려가 무슨 수로 그 역사를 쓰겠는가?"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십여 만 명이나 되니,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이 없고 역사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자에게 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은계종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십여 만 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발해국기』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지을 수 없었단 말인가? 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 수 없구나. 내가 규장각의 관료로 있으면서 궁중의 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왕, 신하, 지리, 관청 및 관직, 의식 및 복장, 물산, 국어, 국서, 후예 국가에 관해 고찰하는 아홉 목록의 글을 지었다. 이를 세가, 전, 지로 삼지 않고 고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진년(1784) 윤삼월 이십오일 [왕에 관한 고찰] 걸걸중상 (대중상) 걸걸중상은 성이 대씨로 속말말갈인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던 자들이다. 어떤 사람은 대씨가 대정씨에서 나왔고, 배달족에 대씨가 있게 된 것은 대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8년(668)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걸걸중상은 아들 대조영과 함께 집안 식솔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가 사리라 칭하였다. 사리란 부락의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거란 말이다. 효소왕 5년(696)에 거란족인 송막도독 이진충과 귀성주자사 손만영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영주를 함락시키고 도독 조문홰를 죽였다. 이에 걸걸중상이 두려워하여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고, 오루하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측천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를 시켜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였다. 이 무렵에 걸걸중상은 이미 사망하였다. 고왕 고왕의 이름은 조영으로 걸걸중상의 아들이다. 일찍이 고구려 장수가 되었는데, 아주 용맹스러웠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걸걸중상이 사망하고 걸사비우가 패하여 죽자 대조영은 이를 피하여 도망하였다. 이해고가 그를 뒤쫓아 천문령을 넘자,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병사를 이끌고 크게 격파하여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빼서 탈출하였다.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삼으니,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이 모두 그에게 돌아갔다. 마침내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를 맺고, 부여·옥저·고조선·변한 등 바다 북쪽의 십여 국을 정복하였다. 동쪽으로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 거란에 이르고, 남쪽으로 신라와 이하를 경계로 이웃하였다. 그 나라 땅은 사방 각 오천 리에 달하였고, 호구는 십여 만 호였으며, 정예의 병사가 수만 명이었다. 또 중국의 문자를 잘 익혔으며, 풍속은 고구려·거란과 대체로 비슷하였다. 효소왕 7년(698)에 나라 이름을 진이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진국왕이 되었다. 홀한성을 쌓아 살았으니 영주에서 동쪽으로 이천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때에 해와 거란이 모두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서 도로가 가로막히자 측천무후가 발해를 침략할 수 없었다. 당나라 중종이 즉위한 뒤에 시어사 장행급을 발해에 파견하여 대조영을 위로하고 어루만지자, 고왕도 아들을 보내 중종을 모시도록 하였다. 16년(713)에 말갈이란 칭호를 버리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부여부에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비하였다. 22년(719)에 왕이 사망하였다. 당나라에서 좌문감솔 오사겸을 보내 조문하였다. 무왕 무왕의 이름은 무예로 고왕의 아들이다. 왕은 연호를 인안이란 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풍속에 따라서 관과 역을 두지 않고 곳곳에 촌락을 두었다. 말갈을 백성으로 삼았고 큰 촌락의 책임자로 도독을 두었으며, 그 다음은 자사, 그 아래는 수령이라 하였다. 동북의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신하가 되었다. 인안 8년(726)에 흑수말갈의 사자가 당나라 현종을 알현하자, 현종은 그 땅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장사를 파견하여 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무왕이 신하들을 불러, "처음에 흑수말갈이 우리의 길을 빌려서 당나라와 통하였고, 또 다른 때에는 돌궐에 토둔을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먼저 알린 뒤에 우리 사신과 동행하였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와 공모하여 우리를 앞뒤에서 치려는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동생 문예가 외삼촌 임아상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말갈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문예는 간하면서 따르지 않다가 당나라로 도망가 버렸고, 이 때문에 당나라와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인안 9년(727)에 고인의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인안 14년(732) 9월에 왕은 대장 장문휴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육군은 따로 마도산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가게 하였다.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선왕의 치욕을 씻었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문예 사건에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현종이 크게 노하여 우령군장군 갈복순에게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침략하게 하였다. 인안 15년(733)에 현종은 다시 문예로 하여금 유주의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침략하게 하였다. 또 현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성덕왕에게 부절을 주며 발해 남쪽 변방을 침략하게 하였다. 성덕왕은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 등 네 명의 장군을 시켜서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만나 공격하도록 하였다. 마침 눈이 십 척이 넘게 내리고 산 길이 험준해서 얼어죽은 병사가 반이 넘자 중도에 포기하고 되돌아왔다. 이듬해에 신라인 김충신이 당나라에 글을 올려서, 현종의 뜻을 받들어 귀국하여 발해를 토벌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현종이 허락하였으나 끝내 아무 성과도 없었다. 흑수말갈의 땅이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자, 일본 사신 아송 무시마로가 왔다. 인안 18년(737)에 왕이 사망하였다. 문왕 문왕의 이름은 흠무로서 무왕의 아들인데, 즉위하여 대흥으로 연호를 고쳤다. 왕은 국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대흥 2년(738)에 당나라에서『당례』,『삼국지』,『진서』,『삼십육국춘추』를 필사해 왔다. 대흥 3년(739)에 약홀주도독 서요덕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흥 20년(756)에 전 해 11월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을 피해 상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평로유후 서귀도가 과의도위 행유성현사부경략판관 장원간을 발해에 보내서 "금년 10월에 안녹산을 칠 것이니 발해왕은 군사 4만 명을 징발하여 역적을 평정하는 데에 돕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서귀도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고 의심하여 장원간을 억류시켰다. 12월 병오일에 서귀도가 과연 유정신을 북평에서 죽이고, 몰래 안녹산 및 유주절도사 사사명과 함께 당나라를 공격하고자 공모하였다. 안동도호 왕현지가 그 공모를 알고 정예의 병사 6천여 명을 이끌고 유성을 함락시켜 서귀도를 참수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평로절도라 칭하며 북평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대흥 22년(758) 4월에 왕현지가 장군 왕진의를 발해에 보내서, "천자가 이미 서경으로 돌아왔고, 피신해 있던 태상황을 촉에서 맞이하여 별궁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적의 무리를 소탕하게 됨에 따라 저를 보내어 아뢰게 하였습니다"고 전하였다. 그러나 왕이 그 말을 믿지 못하여 왕진의를 머무르게 하고, 따로 사신을 보내서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였다. 숙종이 왕에게 칙서 한 권을 보냈다. 행목저주자사 양승경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흥 23년(759)에 현도주자사 고남신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흥 28년(764)에 당의 사신 한조채가 발해에서 신라로 갔다. 대흥 35년(771)에 일만복을 사신으로 보내 스스로를 천손이라 칭하고 양국 관계를 외삼촌과 조카 사이로 규정하였다. 대흥 38년(774)에 유신의 일환으로 연호를 대흥에서 보력으로 고쳤다. 보력 3년(776)에 사도몽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보력 4년(777) 정월에 왕이 일본 무희 11명과 토산물을 당나라에 보냈다. 4월에 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가 사망하였다. 정원 연간(785∼805)에 다시 동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대흥 56년(792)년 2월에 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가 사망하였다. 왕이 11회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 사신 조신전수, 기촌전성, 양후사영구, 연익마려, 무생조수, 조신전계가 왔다. 대흥 57년(793) 3월 4일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원의 문왕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어 문왕의 일가 동생인 원의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있은 지 1년만에 의심이 많고 잔인하다 하여 국인들이 죽였다. 성왕 성왕의 이름은 화여로서 굉림의 아들이다. 국인들이 원의를 죽이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은 중흥으로 연호를 고치고 상경으로 도읍을 되돌렸다. 중흥 원년(794)에 왕이 사망하였다. 강왕 강왕의 이름은 숭린으로 문왕의 작은아들인데, 즉위하여 정력으로 연호를 고쳤다. 정력 원년(794)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 정력 2년(795)에 여정림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정력 4년(797)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정력 5년(798)에 일본에서 6년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대창태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왕이 두 차례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일본 사신 진인광악, 숙미하무, 숙미선백이 왔다. 정력 16년(809)에 왕이 사망하였다. 정왕 정왕의 이름은 원유로서 강왕의 아들인데, 즉위하여 영덕으로 연호를 고쳤다. 영덕 2년(810)에 두 번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영덕 4년(812)에 왕이 사망하였다. 희왕 희왕의 이름은 언의로서 정왕의 동생인데, 즉위하여 주작으로 연호를 고쳤다. 정왕이 사망하자 왕이 임시로 국가 업무를 맡았다. 이 해 9월에 신라가 숭정을 발해에 사신으로 보내왔다. 주작 2년(813) 정월 경자일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 주작 4년(815)에 전 해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왕효렴이 돌아왔다. 주작 6년(817)경에 왕이 사망하였다. 간왕 간왕의 이름은 명충으로 희왕의 동생인데, 즉위하여 태시로 연호를 고쳤다. 태시 2년(818)에 왕이 사망하였다. 선왕 선왕의 이름은 인수로 간왕의 숙부이고, 고왕의 동생 대야발의 4세손이다. 즉위하여 건흥으로 연호를 고쳤다. 간왕이 사망하자 왕이 임시로 국가 업무를 담당하였다. 왕은 남쪽으로 신라를 침략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락을 경략하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 건흥 3년(820) 윤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건흥 7년(824)에 일본이 12년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건흥 11년(828)에 일본이 발해 사신과의 사사로운 교역을 금지시켰다. 건흥 13년(830)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이진 선왕의 손자이다. 아버지 신덕이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이듬해를 함화 원년으로 삼았다. 함화 4년(834) 9월에 당나라의 사신 장건장이 발해에 왔다. 함화 11년(841) 윤9월에 하복연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함화 27년(857)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건황 이진의 동생이다. 함화 26년(857) 2월 계미일에 왕위를 이었다. 3년(859)에 오효신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장경선명력을 전했다. 5년(861) 4월에 이거정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불정존승다라니경을 전했다. 15년(871)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현석 건황의 아들이다. 왕 건황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2년(872)에 오소도가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12년(892)에 고원고가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24년(894)경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위해 현석의 아들이다. 왕 위해가 죽자 왕위를 이었다. 13년(906)경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인선 발해는 당나라 때부터 자주 학생들을 파견하여 수도의 태학에서 고금의 제도를 익히게 함으로써,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후량 및 후당 30년간에 빈공과에 합격한 사람이 10여 명이 될 정도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고 많았다. 7년(912)에 왕이 신라 등의 나라들과 비밀리에 연계를 맺었다. 12년(917)에 왕이 요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 이듬해에 요나라가 요양의 옛 성을 수리하고 발해 호구를 잡아다가 채웠다. 19년(924)에 왕이 군대를 보내서 요나라를 공격하여,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그곳의 백성들을 빼앗아 돌아왔다. 20년에 장군 신덕 등 5백여 명이 고려로 들어왔다. 이 때부터 발해인의 고려 망명이 시작되었다. 12월 을해일에 요나라 왕이 서쪽은 제거했으나 동쪽은 제거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침략해 왔다. 기유일에 요나라 군대가 살갈산에 도착했고, 정사일에 고령에 이르렀으며, 이 날 밤에 부여부가 포위되었다. 21년(926) 정월 기미일에 흰 기운이 태양을 관통하였다. 경신일에 부여성이 함락되었고, 성을 지키던 장수는 전사했다. 또 동평부가 함락되었다. 병인일에 늙은 재상이 이끄는 군대가 패하였다. 이 날 밤에 홀한성이 포위되었다. 기사일에 왕이 항복을 청하였다. 신미일에 왕이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고 양을 끌고서 신하 3백여 명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요나라 임금이 이들을 예우한 뒤에 돌려보냈다. 병자일에 요나라 임금이 측근 신하인 강말달 등 13명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 병기를 수색하도록 했는데, 발해 순라군이 이들을 살해하였다. 정축일에 왕이 다시 성을 수비하자 요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함락되어 요나라 임금이 성에 들어왔다. 왕이 그의 말 앞에서 죄를 청했고, 요나라 임금은 왕과 왕족들을 병사로 호위시켜서 성을 나왔다. 2월 병오일에 요나라가 발해국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바꾸었다. 또 자신의 태자인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임명하여 통치하도록 했다. 요나라 임금은 임황 서쪽에 성을 쌓고 왕을 그곳에 거주시키고, 왕에게는 오로고라는 이름을, 왕후에게는 아리지라는 이름을 내렸다. 오로고와 아리지는 요나라 태조와 그의 부인이 발해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을 때에 탔던 두 마리의 말 이름이다. 출처:한국기독교 성서 포럼
68    중국 25사(조선편) -중국고서 찾아보기 댓글:  조회:2878  추천:0  2012-07-16
중국 25사 조선편 http://bluecabin.com.ne.kr/ 중국 역대 왕들의 연대기인 본기(本紀)와 저명한 개인의 사적(事績)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요소로 하여 기전체(紀傳體)에 따른 중국 역대의 역사. 그 밖에 연표(年表)·계보(系譜) 또는 제도를 기록한 지(志, 또는 書) 등을 포함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필수 조건은 아니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왕(武王) 때까지 기록한 "사기(史記)"에서 시작되는데,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 가 만들어졌고,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고,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왕(乾隆王)은 이에 더하여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내어 24사 로서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인행(印行) 하였는데, 합하여 3,243권에 달한다. 민국 초에는 커사오민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 사 기-조선전 중국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상고시대의 황제(黃帝)로 부터 한나라 무왕까지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한 통사. 역대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된 기전체(紀傳體)의 효시로서, 본기(本紀) 12편, 세가(世家) 30편, 서(書) 8편, 표(表) 10편,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었다. 한서-조선전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역사서. 전 120권. 한나라 유방(劉邦)부터 왕망(王莽)의 난(亂)까지 12대(代) 230년간의 기록으로, 12제기(帝紀)·8표(表)·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구성되었다. 후한서-동이전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북옥저, 예, 한, 왜 중국 후한(後漢)의 정사(正史). 120권.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송(宋)나라의 범엽(范曄)이 저술한 책으로, 후한의 13대(代) 196년간의 사실(史實)을 기록하였다. 기(紀) 10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80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지(志) 30권은 진(晉)의 사마표(司馬彪)가 저술한것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 한, 왜 중국의 위(魏)·촉(蜀)·오(吳) 3국의 정사(正史).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한 것으로,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이다. 위 서- 열 전 고구려, 백제, 물길, 실위, 두막루, 지두우, 고막해, 거란, 오락후 북제(北齊) 사람 위수(魏收)가 저술한 역사서. 114권(本紀 12권, 志 10지, 列傳 92편)으로 되어 있다. 문선왕(文宣王) 천보(天保) 2년(551)에 만들어졌고, 현재 전하는 것은 잃어버린 부분을 송(宋)나라 때 보완한 것이다. 송 서 - 열 전 고구려, 백제, 왜 중국 남조(南朝) 송(宋)의 정사(正史). 제기(帝紀) 10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60권, 도합 100권. 487년 남제(南齊) 무왕(武王)의 칙명(勅命)에 따라 심약(沈約)이 488년에 편찬을 완성한 것으로 송나라 60년(420∼478)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진 서- 동이전 부여, 마한, 진한, 숙신씨, 왜, 비리등10국 당나라 이세민의 지시로 방현령(房玄齡) 등이 찬한 진(晉)왕조의 정사(正史). 130권. 644년 편찬.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외에 재기(載記) 30권이 있다. 주서-열 전 고려(고구려), 백제 주대(周代)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당대(唐代)의 영호덕분(令狐德)이 편찬했다. 628년(貞觀 2)에 영호덕분이 최인사(崔仁師)·잠문본(岑文本)과 함께 이 책의 편찬을 맡았으며, 진숙달(陳叔達)·당검(唐儉)도 참가하여 완성했다. 이 책은 북송(北宋) 말기에 손상을 입어 후세 사람이
67    고려사 댓글:  조회:2556  추천:0  2012-07-16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열 충선 충 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 우왕 창왕 공 양 고려사(高麗史)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 139권으로 되어 있다. 1392년(태조 1) 10월 태조로부터 이전 왕조의 역사책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은 96년 37권의 《고려국사》를 만들어 바쳤다. 정도전과 정총(鄭摠)이 책임을 지고 예문춘추관의 신하들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우선 통사인 이제현(李齊賢)의 《사략》,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금경록》,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등의 체재를 참고하면서, 역대 고려실록과 고려 말의 사초(史草)를 기본자료로 삼았다. 이것은 그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1414년 하륜(河崙)·남재(南在)·이숙번(李叔蕃)·변계량(卞季良)에게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6년 대표자인 하륜이 죽자 중단되었다. 이를 잇고자 하는 논의는 세종의 즉위 후 왕 자신에 의해서 제기되고, 마침내 19년(세종 1) 9월 유관(柳觀)과 변계량 등에게 일을 맡기니, 이들은 21년 정월에 다 만들어 올렸다. 이리하여 본래의 사초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어 제칙(制勅)·태자(太子) 등을 교(敎)·세자(世子) 등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도 반포되지 못하다가 23년 12월에 다시 유관과 윤회(尹淮)로 하여금 이 부분을 실록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 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변계량의 반대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세종은 31년에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고려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42년 8월에 신개(申>)·권제(權)가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다. 이 책은 48년에 양성지(梁誠之)의 교감을 거쳐 일단 인쇄되었으나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배포가 곧 중지되었다. 세종은 다시 49년에 김종서·정인지·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김종서는 드디어 51년(문종 1) 8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최항(崔恒) 등이 열전, 노숙동(盧叔仝) 등이 기(紀)·지(志)·연표, 김종서·정인지 등이 교감을 맡았다. 열전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비판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52년(단종 즉위)에 조금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인쇄, 반포되었다. 《고려사》에 실려 있는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에는, 본기(本紀)라 하지 않고 세가(世家)라 함으로써 명분이 중요함을 보이고, 거짓 왕인 신우(申禑) 부자를 열전에 내림으로써 분수 넘치는 것을 엄하게 처벌하고 충직하고 간사함을 명확히 구분한다 하였으며, 제도를 나누고 문물을 헤아려서 비슷한 것끼리 모음으로써 계통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연대를 헤아릴 수 있게 하며, 사적을 상세하게 하는 데 힘을 다하고, 빠지고 잘못된 것을 메우고 바르게 하려 하였다는 편찬의 방침이 제시되고 있다. 이 방침은 다시 범례에서 각 항목별로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먼저 세가에 관한 것을 보면, 왕기는 세가라 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넘는 칭호도 그대로 써서 사실을 보존하며, 일상적인 일은 처음과 왕이 직접 참여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하며, 고려세계는 실록에 있는 3대추증 사실을 기본으로 삼는다 하였다. 또한 우왕·창왕을 거짓 왕조로 규정하여 열전에 강등시켰으며,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제현 등의 평론을 그대로 실을 뿐, 따로 작성하지 않도록 하였다. 세가에서는 32왕의 왕기가 46권에 수록되어 전체 분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서술의 방식은 《원사(元史)》를 모방하여 첫머리에 왕의 출생, 즉위에 관한 것을 쓰고 끝부분에 사망, 장례 및 성품에 관한 것을 썼다. 왕의 연대는 실제로는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즉위한 다음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세가 다음에는 지(志)를 두었는데, 천문·역지·오행·지리·예·악·여복·선거·백관·식화·병·형법 등 총 12지 39권으로 되어 있다. 이 지(志)도 《원사》에 준하여 분류하였으며, 실록 등이 없어져서 빠진 곳은 《고금상정례》 《식목편수록》 및 여러 사람의 문집 등으로 보충하였다 한다. 그런데 실제 고려의 제도는 당나라 것을 기본으로 삼고 송나라 것이 덧붙여지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고유의 전통이 깔려 있었다. 예를 들면, 원구(丘)·사직 등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토속적인 연등회·팔관회 의식이 중요시되었고, 중국의 아악(雅樂)과 당악(唐樂)을 사용하면서도 예로부터의 속악이 성행하였으며, 중국의 관제와 산관계(散官階)를 이용하였으나 또한 도병마사·식목도감 및 향직 등 독자적인 제도를 아울러 썼고, 당률을 채용하면서도 실제 고유의 관습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지의 맨 첫머리에는 편찬자의 서문이 놓여 있는데, 대개 일반론과 실제 사실에 대한 개설적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설명의 큰 줄기는 태조 이후 문종 때까지의 고려 전기를 제도가 정비되고 국세가 번창한 시기로 보고, 무신란 이후 몽골 간섭기에 들어서는 제도가 문란하여 나라가 쇠망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어 본문에서는 먼저 연월일이 없는 일반 기사를 쓰고 그 뒤에 연대가 있는 구체적 사실을 열거하였다. 세가·지 다음으로 표가 들어 있는데, 실제 본문에서는 연표라 하여 하나의 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를 따랐다. 제일 위에 간지를 쓰고 그 아래 중국과 고려의 연호를 썼으며, 고려 난에는 왕의 사망과 즉위 및 중국과의 관계 등 중요한 일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표에 이어 마지막으로 열전을 두었는데, 후비전(后妃傳)·종실전(宗室傳)·제신전(諸臣傳)·양리전(良吏傳)·충의전·효우전·열녀전·방기전(方技傳)·환자전(宦者傳)·혹리전(酷吏傳)·폐행전(嬖幸傳)·간신전·반역전(叛逆傳) 등 총 50권, 1,009명으로 되어 있다. 열전의 구성은 역시 《원사》를 모방하였지만, 그 서문은 이제현이 쓴 제비전(諸妃傳)이나 종실전의 서문처럼 이미 있던 자료를 이용하였다. 그 내용 중 반역전에 우왕 부자를 넣어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있고, 문신 위주, 과거 위주로 인물을 선정하여 조선 유학자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으며, 흥망사관에 입각하여 개국공신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별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전부터 있던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쓰려고 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개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종래의 편년체의 역사서술에서 기전체로 편찬된 《고려사》는 첫째, 동양의 전통적인 왕조사 편찬방식과 같이 기본적으로 이전부터 있던 사료를 선정 채록하여 그 나름으로 재구성하였으므로 역사성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둘째, 이렇게 사실을 있는 대로 쓰려고 애썼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러면서도 한편 편찬자인 유학자의 사대적인 명분론이 반영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을 큰 원칙으로 하여 고려시대를 이해하고 있는데, 첫째, 흥망사관에 의해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둘째, 무인(武人)을 천하게 보는 관념과 왕실의 권리를 도둑질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한 데 대한 정통론의 입장에서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쓰고 있다. 셋째, 원나라를 섬긴 부분에 대하여 대명관계가 확립된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사 편찬자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 이전 시기에 기록된 고려사 속 사신(史臣)의 견해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여 있다. 넷째, 고려 말 개혁론자의 견해를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에서 고려 당시의 사실과 다른 점이 생기게 되었다. (高麗史全文) 조선시대 세종의 명으로 찬진(撰進)된 편년체 고려시대사. 권초(權草)·홍의초(紅衣草)라고도 한다. 1438년(세종 20) 신개(申槪)·권제(權)·안지(安止) 등 춘추관의 사관에 의해 편찬작업이 이루어져, 42년 완성되고 48년 일단 인출되었으나, 일부의 인물평가가 공정하지 못하다 하여 반포가 중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편찬과 개찬을 거듭한 《고려국사》, 개찬 《고려국사》, 《수교(校)고려사》에 이어 네번째로 시도된 고려시대사이며, 직서주의(直書主義) 원칙에 입각하여 고려시대 당시 사용한 용어를 원래의 기록대로 직서하는 등 이 앞의 사서가 범한 오류를 시정하였다. 또 고려실록을 통해서 소략한 기사를 상세히 보충하여, 역시 앞서의 사서보다 충실을 기하였다. 그러나 편찬에 참가한 권제가 남의 청탁을 받고 내용을 고치고 자신의 조상에 대한 기술을 사실과 다르게 쓰는 등 불공정의 문제가 제기되어 반포가 중지되고, 편찬에 참여한 권제·안지·남수문(南秀文) 등은 처벌되었다. 결국 조선시대의 고려시대사 편찬은 《고려사전문》이 반포 중단된 이듬해인 1449년(세종 31)에 착수되어 51년(문종 1)에야 마무리되었다. (高麗史節要)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시대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책. 활자본. 35권 35책. 김종서(金宗瑞) 등이 왕명을 받고 찬수(纂修)하여 1452년(문종 2) 춘추관(春秋館)의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인멸된 《수교고려사(校高麗史)》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것인데, 《고려사》만큼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나 거기에 없는 사실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또 《고려사》에 누락된 연대가 밝혀져 있는 것이 많다. 기전체(紀傳體)인 《고려사》와 함께 고려에 관한 기본사료로 쌍벽을 이룬다. 초판본의 완질(完帙)은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호사문고[蓬左文庫]에 있으며, 서울대학교의 규장각도서는 11책이 낙질(落帙)된 것이다. 1932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규장각본을 영인하였는데, 이어 일본에 완질이 있음을 알자 1차 영인에 빠진 권1·권6·권18과 전(箋)·범례·수사관(修史官)·목록·발(跋) 등을 따로 영인하여 《고려사절요보간(高麗史節要補刊)》이라는 이름으로 38년에 간행하였다. 또한, 59년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에서 규장각본을 위주로 영인 간행하였고, 68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국역 출판하였다. * 이곳에 실은 자료는 한국사료연구소 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힘. 이곳에는 을 비롯한 귀중한 자료가 많이 있음.병(兵)
66    삼국유사 댓글:  조회:1954  추천:0  2012-07-16
삼국유사 1,2권         삼국유사 3,4권 삼국유사 5권          삼국유사 전문   삼국유사(三國遺事) 출처:직지 프로젝트 삼국유사 해제 는 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 고대(古代) 사적(史籍)의 쌍벽으로 일컬어져 온다. 는 왕명(王命)에 의하여 사관(史官)이 저술한 정사(正史)로서, 체재(體裁)가 정연하고 문사(文辭)가 유창하고 화려하다. 이에 비하여 는 선사(禪師) 한 개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야사(野史)로서, 체재가 짜여지지 못했고 문사 또한 박잡(駁雜)하다 하겠다. 그러나 는 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는 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이지만, 그 밖에 고조선·기자 및 위만조선을 비롯하여 가락 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배달 민족의 긍지를 갖게 해 주었다. 만약 이 기록이 없었던들 우리는 삼국 시대 이전에 우리 역사를 중국의 사료(史料)인 의 동이전(東夷傳)에 겨우 의존하는 초라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는 당시의 사서 찬술이 규범에는 벗어나는 체재의 부정연(不整然)과 내용의 탄괴(誕怪)·잡다(雜多)함이 오히려 오늘날 이 책을 더욱 귀한 재보(財寶)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소이(所以)가 되고 있다. 우선 에는 단군 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실로 는 우리의 신화와 원형적 옛 전설의 모습을 알게 하는 유일한 책으로 가위 설화 문학(說話文學)의 보고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 땅 최고(最古)의 정형 시가(定型詩歌)인 향가(鄕歌) 14수가 실려 있어 에 전하는 11수와 함께 주옥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국문학 관계로는 사서 이상의 귀한 보전(寶典)이 되고 있다. 수록한 향가의 수는 비록 많은 것이 못 되지만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진 이 전하지 않는 지금, 의 문학사적 가치는 실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에는 빠졌거나 또는 고의로 빼 버린 많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신앙 사상·민속·일화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은 모두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사관이 아닌 승려의 신분으로서 이 같은 책을 저술함에 있어, 더러는 인용서와 그 내용이 같지 않은 것도 있고, 잘못 전해져 오는 것을 그대로 수집·수록한 것도 없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책 자체가 그 서명(書名)이 말하듯이 일사 유문적(逸事遺聞的)인 것이기 때문에 따르는 불가피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저자 일연(一然)은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에 경산(慶山)에서 출생했다. 속성(俗姓)은 김씨요, 이름은 경명(景明), 자는 회연(晦然)이다. 9세 때 출가하여 남해(南海)의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했다. 22세 때에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54세 때에 대선사가 되었다. 78세 때 충렬왕(忠烈王)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왕명으로 국사의 예를 갖추고자 하였으나, 굳이 이를 사양하므로 다시 근친의 장군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궁내로 맞이해 들였다. 그러나 그는 궁성에 있기를 싫어하여 노모의 병을 빙자하고 구산(舊山)으로 내려갔다. 84세 되던 1289년 7월 8일 제자로 하여금 북을 치게 하고 자기는 의자에 앉아 여러 승려와 더불어 담소자약(談笑自若)하게 선문답을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높은 덕과 깊은 학문으로 왕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상의 대상이었다 한다. 비문에 의하면 그의 저·편저로는, 어록 2권, 게송 잡서(偈頌雜書) 3권, 조동 오위(曹洞五位) 2권, 조도(祖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 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 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 점송 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등 불서(佛書) 80권이 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이 거의 없고, 어찌 보면 그로서는 희작(戱作)이라 할 수 있어 비문에도 적혀 있지 않은 만이 유저(遺著)로 전해지고 있다. 는 모두 5권으로 다음과 같은 체재로 되어 있다. 제 1권: 왕력 제 1(신라·고구려·백제·가락 및 후삼국의 연대표), 기이 제 1(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삼국 이전의 신라의 유사) 제 2권: 기이 제 2(신라 문무왕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백제·후백제 등에 관한 약간의 유사와 가락국에 관한 유사) 제 3권: 흥법 제 3(불교 전래의 유래 및 고승의 행적), 탑상 제 4(사기와 탑·불상 등에얽힌 승전과 사탑의 유레에 관한 기록) 제 4권: 의해 제 5(고승들의 행적) 제 5권: 신주 제 6(이승들의 전기), 감통 제 7(영험·감응의 영이한 기록), 피은 제 8(은둔한 일승들의 기록, 효선 제 9(효행·선행·미담의 기록) 의 간행 연대는 확실히 알 길이 없으나 대체로 충렬왕 8년 전후, 즉 서기 1281∼1283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의 고판본으로는 중종 정덕본과 그 이전에 된 듯한 판각의 영본이 있고, 시간본으로는 일본 토교 대학본, 조선 사학회본, 계명 구락부에서 간행한 육당의 교감본과 또 육당의 증보본이 있다. 그 밖에 안순암 수택의 정덕본을 영인한 일본 교토 대학본과 고전 간행회본이 있다. 이 책의 번역은 중종 임신본(壬申本)을 원본으로 했다. 때문에 흔히 유행되는 육당 증보본과는 간혹 틀리는 곳이 있을 것이다. 원문이 너무도 난해한 구절이 많아 역자로서는 힘에 겨운 작업이었다. 특히 향가의 번역은 더구나 완벽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딴에는 충실히 다루려고 애썼다. 이번에 판을 바꾸어 내면서 먼저 판 번역에서 잘못된 부분이나 문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바로잡아 독자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삼가 제언(諸彦)의 질정(叱正)이 있으시길 빈다. 이 민 수 씀
65    삼국사기 한글본 댓글:  조회:2604  추천:0  2012-07-16
삼국사기 한글본 고구려 본기 백제 본기 신라 본기 연표(29~31) 잡지(32~40) 열전(41~50 삼국사기(원문+한글)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신라본기 연표(29~31) 잡지(32~40) 열전(41~50) 삼국사기 고(考) HOME 는 고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다. 우리는 우리 고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긍정과 부정 양측면을 다 가지고 있는 삼국사기를 연구 할수밖에 없다. 우리 고대 사서의 소멸로 인하여 삼국시대의 정사로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서로는 삼국사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다보면 가슴 찌뿌등하고 답답함을 느낀다.자신의 나라를 비하하고 중국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고구려 백제는 폄하하고 신라는 높이면서 편중되어 있다.본기 곳곳에 기술한 저자의 견해는 김부식의 사상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며 과연 김부식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의문스럽다.아무리 중국의 눈치를 본다고는 하나 너무 심하다.혹자는 그렇게 썼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오늘날 까지 살아남을수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현실적으로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을 하게도 되지만 이나라 역사 왜곡의 단초를 삼국사기가 제공했다는걸 생각하면 차라리 없었던 편이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러면 다른 사서들이 존재 했을 것이고 역사 왜곡 또한 그리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삼국사기를 이유로 다른 사서들이 모두 멸실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우리민족의 얼과 혼을 앗아가 버렸다는 것이다.반도 구석으로 몰아넣어 몸과 마음을 작은 나라에 약소국민으로 전락시켜 버려 사대주의가 당연시되는 관념의 틀을 고정시켜 버렸다.발해 멸망이후 1,000년동안 북벌을 주장한 사람은 묘청과 효종 두사람 뿐이다(TV 드라마 왕건에 나오던 궁예도 있었다).정신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고토회복의 기치는 고사하고 감히 중국을 넘본단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을 비교해 보자 중국은 춘추기법으로 저희는 높이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상대방은 낮추고 간략하게 적는다.일본은 어떤가.이건 순 날조다.고대부터 현재까지 저희가 최고라고 우기고 거기에 필요한게 있으면 무엇이던지 조작, 날조, 훼손을 한다.그리고 철판 깔고 우긴다.아주 천재적이다.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두나라와는 반대로 내것도 우리것이 아니라고 하고 상대는 높이고 우리는 낮춘다.예의바른 민족이라 그런가 겸손이 미덕인 나라라 그런가 안타까운 마음 금할수 없다. 지난주 KBS 역사스페셜 5월26일 방송된편을 보면 이정기 장군이 불과 10만명의 군사로 당나라와 전투를 벌인다.아주 정벌해 버릴 작심으로 그리한 것이다.무릇 기가 살아 있어야 한다.기가 죽어있으면 아무리 군사가 많아도 질 수 있고,기가 살아 있으면 적은 인원 불리한 상황도 극복하고 승리할수가 있는 것이다.우리민족의 기가 죽은데에는 문인중심의 유교숭배사상과 사대주의와 역사학자들의 책임이 크다하겠다.하루속히 올바른 우리 역사를 복원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의 불편 부당한 요소를 몇가지 들면 첫째 그당시 여러 우리 고대사서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군조선과 가야 발 해의 역사의 기사를싣지 않음으로서 우리 역사를 심각하게 훼손하여 오늘날 날 까지도 제모습을 찾지 못하게 한점. 둘째 전편에 걸쳐 중국을 숭상하고 우리를 비하하는 내용이 넘쳐나고 중국의 연호 호를 써야만이 연대를 알 수 있는양 빠짐없이 기술하였고 저자 견해라는 난을 통해 전편 곳곳에 중국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우리를 비하한점. 셋째 아시아 최강의 광개토대왕을 별볼일 없이 기술하고 연개소문을 난폭한 반신 으로만 묘사하고 중국의 동해안 일대 대부분을 지배하여 동이강국으로 까지 부상하였던 구태백제의 흔적을 없애버린점. 넷째 열전의 인물 50인 가운데 고구려인(7명)과 백제인(3명)은 10명뿐이고 나머지 지 40명을 모두 신라인으로 채우고 거기다 김유신편을 열전 열권중 3권에 걸 쳐실어 형평을 잃고 있으며 신라왕들에겐 문무대왕,신문대왕등의 대왕호칭 을 사용하면서 고구려나 백제의 왕들에겐 그런 호칭을 쓰지 않은점. 등 전체적으로 사대주의에 몰두하고 승자의 역사로 신라를 합리화 하고 있다.그리고 조공의 역사로 그리고 있다.삼국 공히 수백차례 조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걸 무역활동이라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외교활동이라고 두둔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거기에 동의 할 수 없다.무역은 동등한 위치에서 하는 상행위 이지만 조공은 안바치면 복속을 거부하는걸로 간주하여 쳐들어 오는 것이다.독립적인 외교활동이라고 보기도 힘들다.우리만 거의 일방적으로 갖다 바치고 지나족은 거기에 약간 답례를 할뿐이지 지나인들이 먼저 바치러 온적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그러나 한단고기 에 보면 하.은.주 시대에 지나족들이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치는 기사가 여러번 나오지만 중국역사서에는 한번도 안나온다.지나족들은 저희들이 불리한 것은 다지워 버렸다.우리는 바본가 너무 솔직한건가 모두다 기재해놓고 있다.그런데 고구려 20대 장수왕조에 보면 재위기간 79년에 조공한 기사가 47회나 나온다.아주 도배하다 시피 했다. (遣使入朝貢)이 40회 (遣使入朝貢)이 3회 (遣使入朝貢)이 1회 그밖에원년 진나라에 한번,13년, 23년,43년 위나라에 3번더 나온다.조금 다른 문구로.장수왕 64년 에서67년 4년동안은 백제장군 연신이 투항한거 빼고 8차례에 걸쳐 조공한 기사로만 채워져 있을정도이다.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고 동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던 광개토대왕에 이은 장수왕조에서 곧바로 그렇게 허구한날 조공을 갖다 바쳤을까? 비하하기 위한 과장기사는 이닌지 의심이 간다. 그리고 民饑相食이란 기사가 나온다.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걸믿어야 할지 의심이 간다.고구려 14대 봉상왕 8년7월,17대 소수림왕 8년 9월, 18대 고국양왕 6년 봄등 3회.백제 시조 온조왕33년,3대 기루왕 32년,11대 비류왕 28년 7월,24대 동성왕21년 여름등 4회 등장한다.신라엔 없다.문무왕 11년 당나라 설인귀의 표문에 대한 답장속에 한건 비칠뿐이다.신라엔 없는일이 더 강하고 더부강했던 고구려 백제에서는 여러번 있었단 말인가? 동물들도 제종족은 먹지 않는다.아무리 굶주려 굶어 죽을지언정 제종족을 잡아먹는 일은거의 없다.하물며 인간이 그것도 대동방예의지국이요 군자의 나라 대단군의 자손들이 배고프다고 사람을 잡아먹었을까? 아마도 이기사도 제민족을 비하시키기 위해서 김부식이 자의적으로 삽입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이 믿을 수 없는 민기상식 기사와 단순 조공기사(작전상 조공이거나 전후 사연이 있는 조공 기사는 제외)와 김부식의 정도에 넘치는 사대 독소는 삭제하였다.그게 오히려 사실에 부합되는 기록 일지 모른다.원문+한글본엔 그대로 실어 놨으니 궁금한 독자는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삼국사기엔 메뚜기떼에 관한 기사가 여러번 나온다.우리나라에 메뚜기떼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삼국사기엔 왜 이렇게 메뚜기떼가 자주 출몰하는 것일까? 중국을 무대로하는 펄벅의 에 나오는 그어마어마한 메뚜기떼가 삼국사기엔 고구려 8회 백제 5회 신라 25회 출현하고 있다.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는 것이다.그것도 추수기인 8,9월(음력)이다.또 4,5월(음력)에 서리가 내려 추수기인 보리를 해쳤다는 기사도 나온다.음력 4,5월이면 양력 6,7월을 이야기 하는데 우리나라엔 늦가을에나 서리가 내리는걸로 알고 있었는데 삼국시대엔 초여름에 서리가 내렸단 말인가?서리에 관한 기사도 고구려3회 백제 6회 신라 26회 나온다.이밖에도 대해 즉 홍수가 나는 계절이 우리 한반도와 다른점등 우리강역의 기후 풍토와 부합되지 않는 자연 현상들이 너무도 많다.김부식이 사대주의에 절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 이었지만 지금의 이 한반도가 우리의 강역이 아니었다는 메시지를 우리 후손들에게 주고 있는건 아닐까? 실제로 서울대 박창범 교수는 삼국사기의 일식 현상에 대한 연구로 그당시 관측위치를 연구 검토한 결과를 발표한적이있다.그의 결론은 삼국사기의 일식 관측 장소는 삼국 모두 현재의 중국으로 나왔었다. -삼국시대 위치 연구 박창범- 이상 제시한 사항들과 함께 더욱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 지기를 기대한다.역사에는 교수가 따로 없다.역사앞에는 모두가 학생이다.또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다.우리 모두의 것이다.각자 전공에 맞추어 미스테리한 부분을 밝혀 내는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또한 기대한다. 2001년 5월28일多慧 吳成泳 삼국사기(三國史記) 개설 고려시대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崔山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등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 함께 작업했지만,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머리말, 논찬(論贊)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진삼국사기표〉에는 “사대부가 우리 역사를 잘 알지 못하니 유감이다. 중국 사서는 우리 나라 사실을 간략히 적었고, 《고기(古記)》는 내용이 졸렬하므로 왕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규범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편찬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구성은 크게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연표(年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졌다. 【본기】신라 12권(신라 5, 통일신라 7), 고구려 10권, 백제 6권으로 구성되어 신라에 그렇게 편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정치 천재지변 전쟁 외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정치 부문은 축성(築城)과 순행(巡幸), 관제 정비와 인사 이동, 조상과 하늘에 대한 제사라는 종교 관례 등이 서술되어, 당시 삼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축성은 백제가 가장 많아 늘 전쟁을 치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순행은 1 2월에 많이 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수렵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던 반면에, 신라는 구휼과 권농 및 수렵 등 다양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인사 이동은 신라에서 가장 빈번하였으며, 종교 관례는 백제에서 많이 하였다. 천재지변 부문은 혜성 유성 일식 가뭄 홍수 등 600여 회의 천재와, 지진 화재 등 330여 회의 지변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주로 정치적 사건을 예언하는 기능을 하였다. 전쟁 부문은 전체 440여 회의 전쟁이 발생하는데 대체로 고구려는 이민족, 백제는 신라와 전쟁하였다. 외교 부문은 620여 회의 교섭기록이 있는데 주로 조공(朝貢)을 중심으로 한 대중국 외교가 많았다. 물론 삼국은 독립국가로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며 중국에 종속된 것은 아니었다. 【연표】 상 중 하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이 소략하다. 상(上)은 BC 57년(박혁거세 즉위)부터 274년(미추왕 13), 중(中)은 275년(미추왕 14)부터 608년(진평왕 30), 하(下)는 608년(진평왕 30)부터 935년(경순왕 9) 신라가 멸망한 다음해인 936년 후백제의 멸망까지 기록되어 있다. 【지】 제1권은 제사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제3~5권은 신라 지리, 제6권은 고구려 백제 지리, 제7~9권은 직관(職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지리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통일 뒤에 넓혀진 영토 관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사지는 5묘(廟) 3사(祀)에 대한 설명이 많이 차지하고 있고, 악지는 악기 가악(歌樂) 무(舞) 악공, 직관지는 중앙관부 궁정관부 무관과 외직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열전】기전체의 역사서로서는 열전이 빈약한 편이다. 전체 69명을 대상으로 했지만 특별히 항목을 분류하지는 않았다. 제1~3권은 김유신 열전이고, 제4권은 을지문덕 거칠부 등 8명의 열전, 제5권은 을파소(乙巴素) 등 10명의 열전, 제6권은 강수(强首) 최치원 등 학자들의 열전, 제7권은 관창(官昌) 계백(階伯) 등 순국열사 19명의 열전, 제8권은 솔거(率居) 도미(都彌) 등 11명의 열전, 제9권은 연개소문 창조리(創助利) 등 반신(叛臣)의 열전, 제10권은 궁예 견훤 등 역신(逆臣)의 열전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동안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어 왔던 것은 사론(史論)의 성격을 지닌 논찬(論贊)이다. 논찬은 신라본기 10개, 고구려본기 7개, 백제본기 6개, 열전 8개 등 모두 31개가 있다. 내용은 주로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신채호 등이 비난한 것처럼 사대적인 악서(惡書)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이 단순히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편찬된 시기와도 관련된다. 즉 이 책은 고려 귀족문화가 최고로 발전하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이런 시대는 대체로 전 시기의 역사를 정리하는 때인데, 특히 당시에는 거란 및 여진과 전쟁한 뒤 강력한 국가의식이 대두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지 유교정치 이념의 실현만이 아니라 국가의식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편찬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전근대 역사서의 특징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성을 유지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고기》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 《삼한고기(三韓古記)》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및 김대문의 《화랑세기》 《고승전》 《계림잡전》과 《삼국지》 《후한서》 《위서(魏書)》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북사(南北史)》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오히려 한국 전근대 역사서술을 한 차원 높여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 점은, 첫째 삼국을 1세기부터 완성된 국가로 파악하고 국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이해했으며, 둘째 천재지변과 인간활동을 연결시키면서 역사를 바라보고 국왕의 정치행동을 연결시켰으며, 셋째 역사를 교훈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넷째 강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였고, 다섯째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것에 잘 나타난다. 이 책은 1174년(명종 4) 사신을 통해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전에 초판을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3세기 후반에 성암본(誠庵本)이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일부만 일본 궁내청(宮內廳)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으로 1394년(태조 3)에 3차 간행, 1512년(중종 7)에 4차 간행이 있었다. 4차 간행은 현재 완질의 형태로 옥산서원과 이병익(李炳翼)이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것이 있는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크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5년 서울대학 허성도(許成道)가 25년의 노력 끝에 CD-ROM책을 출판하였다. 삼국사기(권1∼50)(三國史記(卷一∼五十)) 고려 중기 인종(仁宗) 때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에 관하여 김부식(金富軾)이 찬진(撰進)한 역사서. 보물 제723호. 《삼국사기》 중 제1권부터 50권까지의 목판본. 50권 9책. 20.7×30.2`cm. 서울 종로구 동숭동 이병익(李炳翼) 소장. 1512년(중종 7) 중간(重刊)된 간본(刊本)으로, 고려시대 처음 새긴 원판과 그 후 조선 태조(太祖) 때 개각(改刻)한 것과 중종(中宗) 때 또다시 개각한 것 등 3종의 서로 다른 판이 섞여 있다. 원판이 이미 닳아서 복구불능이 된 것, 오자 탈자 등의 결점이 있으나, 현존하는 책 중 가장 완전하고 오래된 유물의 하나이다. 삼국사기(권44∼50)(三國史記(卷四十四∼五十)) 고려 중기 인종(仁宗) 때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에 관하여 김부식(金富軾)이 찬진(撰進)한 역사서. 보물 제722호. 《삼국사기》 중 제44권부터 50권까지의 목판본. 영본(零本). 7권 1책. 19.5×25`cm.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조병순(趙炳舜) 소장. 초각본(初刻本)에 의거한 복각본(覆刻本)으로, 비록 영본이기는 하나 이것을 바탕으로 조선 중종조(中宗朝) 간본(刊本)의 와오(訛誤)와 탈락된 글자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각본(原刻本)에서 닳아 없어진 자(字)를 그대로 새겨서 글자 모양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도 상당히 많으며,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각판(刻板)한 곳도 있어, 원각본이 나온 후에도 오랜 연대가 지난 뒤에 복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판본을 고려 말기에 간각(刊刻)했을 것으로 보이며, 또 자획이 닳은 곳이 많아 간각 후 오랜 뒤에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로서는 가장 오래 된 유일한 진서(珍書)이다. 출처:진갑곤의 한자박사
64    연변조선족력사 댓글:  조회:2752  추천:0  2012-07-16
연변조선족력사 조선민족은 5천여년의 유구한 력사를 갖고 있다. 현재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19세기중엽부터 조선반도에서 이 지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련속되는 자연재해와 봉건폭정통치, 그리고 일제침략폭행에 못이겨 해마다 수천수만세대가 북으로 타향살이를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로씨아 프리모르스크변구일대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또 두만강과 압록강 북안일대에서 숨어 살았다. 두만강북안에서 대대손손 일하며 살아 온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한세기 남짓한 동안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었다. 그들은 피와 땀으로 이 땅을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또한 항일 및 해방전쟁에서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1949년 새 중국이 창건된후1952년에 연변조선민족자치구(후에 연변조션족자치주로 고쳤음) 가 창립되고 연변의 조선족은 민족구역자치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아래에 네개 부분으로 나눠 연변조선족의 백여년간 력사를 알아 본다. 제1부분 19세기 중엽부터 1910년까지 력대로 두 나라 변경지대백성들의 상호래왕은 잦았다. 더우기 조선변강백성들은 초기에 중국땅에서 계절적으로 거주하다가 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와서 집을 짓고 장기적으로 정착 거주하는데로 발전하였다. 1860년이래 조선 북부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며 1869년에는 재해가 더구나 심하였다. 살길이 막힌 조선기민들은 온 가정, 지어 온 마을이 고향을 등지고 몰래 국경을 넘어서 농사를 지었다. 하여 조선이민이 날로 늘어났는데 조선족거주구역은 두만강북안으로부터 부르하통하, 가야하 류역에로 확대되였다. 1883년9월, 청나라정부는 조선이민들을 회유해 짜리로씨야의 침략세력과 싸우게 하기 위해 특히 을 제정하였다.이 규약에 근거해 1885년에 화룡욕에 통상국을 앉혔으며 광제욕(오늘의 광개향 광소툰)과 서보강(지금의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에 통상분국을 앉히고 조선의 회령, 종성, 경원 등지와의 통상사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같은 해 두만강이북 길이가 7백여리이고 너비가 40~50리인 지역을 조선이민특별개간구로 정하고 월간국(越垦局)을 설치해 전문 조선이민의 개간사무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조선이민들이 농사를 짓는데 편리를 조성해주었다. 이 시기 연변의 조선족들은 주로 황무지를 일구고 밭농사를 하였다. 1894년도에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4개 보 (堡) 에만도 한전 25,501정보(1정보는 약 15무에 해당함)가 있었다. 1900년도에 조선족들이 룡정 동북부의 세전이벌과 룡정남부의 대교동에서 벼농사를 하는데 성공한후로부터 연변에서 벼농사가 보급되였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을 강박해 을 맺고 조선을 이른바 일본의 로 만든데서 광범한 조선족인민들의 강렬한 의분을 자아내였다. 일본제국주의가 수천수만에 달하는 반일의병과 애국문화운동에 뛰여든 지식인들을 피비리게 탄압한데서 많은 반일의병과 애국지사 그리고 봉건통치를 반대하는 농민들이 망국의 비분을 안고 분분히 고향을 떠나 북으로 연변 등 중국의 동북삼성으로 들어왔다. 하여 1909년에 이르러 연변의 조선족이 9만8,000여명으로 늘아나 연변 인구의 76.6%를 차지하였다. 1907년8월, 일본이 공공연히 헌병대를 룡정에 파견하고 청정부가 연변지역에 설치한 행정기구를 무시하고 비법적으로 이른바 를 설치하였으며 이른바 를 건립하도록 발기하고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각지의 조선족사립학교들을 위해 교과서를 편찬하고 반일사상을 주입하였다. 1906년도에 조선족반일지사 리상설이 룡정에서 반일사립학교인 서전서숙을 꾸리고 철저한 민족주의교육과 반일계몽교육을 실시한 이래 조선족반일사립학교는 연변 각지에 우후죽순마냥 건립되였다. 선후로 창립된 명동, 창동, 정동, 광성 등 많은 반일학교들은 모두 당지에서 반일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으로, 반일투쟁전개의 여론진지로, 행도중심으로 되였다. 거의 40년에 달하는 조선족인민의 곡절적인 반일투쟁이 이때로부터 서막을 열었다. 제2부분 1910년부터 1931년까지 1910년8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후 연변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거의 모두 일본제국주의 파쑈폭행에 견디지 못해 두만강을 넘어 중국에 이주했다. 1910년부터 1926년까지 도합 126,964명이 이주해왔고 1931년에 이르러 연변조선족인구는 406,341명으로서 동삼성 조선족 총인구의 64.6%를 점하였다. 조선인의 대량적인 이주는 연변지구 대면적수전개발에 인력 및 기술면의 담보를 제공하였다. 1926년에는 이미 155개소의 사립학교가 있었는데 재학생수가 3,829명에 달해 연변은 동삼성에서 학교밀도가 제일 높은 지방으로 되였다. 각 사립학교들에서는 반일으로 대량의 반일군정인재들을 양성했다. 1912년, 반일인사 서일은 왕청현에서 을 조직하고 반일민족주의를 전파했다. 1913년 지장훈, 강수희, 등 반일인사들은 동성용에서 를 건립했다. 같은 해 김약연, 리동춘, 백옥정, 김립 등 사람들은 의 토대우에서 를 창립하고 반일문화계몽운동을 광범위하게 벌렸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조선 반일독립운동의 추동하에 이미 상해와 로씨야연해주의 반일독립운동자들과 밀접한 련계를 확보하고 또 났들의 영향을 받은 연변의 반일인사들은 즉시 호응하여 반일대폭풍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그해 3월13일, 연변각지에서 온 30,000여명의 조선족농민과 사립학교사생들은 일본총령사관소재지 룡정에 모여 연변력사에서 규모가 전례없는 반일집회를 갖고 반일독립선언서를 읽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죄행을 성토했다. 일부 한족학생도 시위행진대오에 가담했다. 일제의 압력하에 지방당국은 조선족인민의 평화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했는데 당장에서10명이 숨지고 40명이 상했으며7명의 중상자가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3월17일, 1,500명의 조선족군중은 수난자들의 시체를 들고 항의시위행진을 단행했다. 4월말까지 도합86,670여명의 연변조선족군중이 다지에서 반일집회와 시위행진에 함가했다. 관준언 등 형제민족반일인사들은 천방백계로 체포당하게 된 조선족반일인사들을 엄호하고 피신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일제군경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했다. 1920년 여름, 연변조선족반일부대 은 이미 2,900여명의 장병들과 2,600여자루의 보총을 소유하고있었다. 그중 홍범도, 박경철이 거느린 명월구의 의군단, 구춘선과 안무가 지휘하는 의란구의 국민회군, 최명록이 창립한 봉오동의 군대, 서일과 김좌진이 거느린 왕청현 서대파의 부대 등이 있었다. 1920년 6월7일, 홍범도와 최명록이 지휘한 반일부대는 봉오동에서 조선주둔 일본군제19사단에서 파견한 (260여명)를 매복습격하였고 수십명을 섬멸하였다. 는 조선족반일무력이 동북경내에서 일본정규군을 대량으로 소멸한 첫 전투였다. 봉오동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침략자들은 연변의 조선족반일부대를 소멸하기 위하여1920년10월2일에 을 꺼리낌없이 도발하고 2만명에 달하는 일본정규군을 무어 피비린 을 발동했다. 그들은 2,285명에 달하는 조선족민중을 살해했고 2,507세대에 달하는 민가를 불살라버렸다. 10월하순 홍범도와 김좌진이 거느린 반일부대는 화룡현 삼도구의 청산리, 이도구의완루구, 어랑촌 874고지 등 곳에서 일본군을 련속 전승하여 근 천명에 달하는 적을 섬멸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연변지구조선족인민들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영웅적기개를 과시하였다. 이 은 연변지구에서의 반일민족주의운동의 최고봉을 표징하였다. 1920년초에 조기 공산주의자인 리동휘 등이 상해에서 조선문인쇄공장을 세워 을 비롯한 많은 진보적 서적과 간행물을 번역출판하였다. 이런 서적과 간행물들은 곡절을 거쳐 연변에 전해와 갈수록 많은 청년학생과 농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 , 등 진보적 단체를 내와 맑스주의를 전파하고 로씨야10월혁명을 선전하였다. 1921년12월, 돈화에서 를 세웠는데 그 산하에 1,300여명의 당원이 소속되여있었다. 1923년에 또 고려공산당간도지방회 및 그 인 을 세웠다. 1924년12월에 박윤서를 위수로 하는
63    민족력사 알아보기 댓글:  조회:2438  추천:0  2012-07-16
※ 단군 신화 아득히 먼 옛날, 하늘 나라를 다스리는 환인 임금님이 여러 아들을 불러놓고 물었습니다. "너희들중에 누가 세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으냐?" 여러 아들 중에서 환웅이 나서며 말했습니다. "저는 전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복이 되는 하늘 나라의 뜻을 펴서, 보다 아름답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사옵니다. 이제라도 아버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내려가 보고자 하나이다." "오, 그러하냐? 땅 위에 어느곳 사람들을 다스리고 싶으냐?" "동방에 사는 무리이옵니다. 그곳 사람들은 마음이 어질고 슬기로워 그들을 다스리면 땅 위의 으뜸이 될 것이라 여겨지옵니다." "기특한 생각이다. 그러면 네가 잘 깨우쳐서 밝고 고운 나라가 되도록 힘써 보아라." 하늘 나라의 환인 임금님은 아들 환웅의 뜻을 알고 바람을 다스리는 신 풍백, 비를 다스리는 신 우사, 구름을 다스리는 신 운사에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너희들은 동방의 나라에 내려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도록 하여라. " 환인 임금님은 신의 힘을 나타내는 천부인 세 개를 주며 말을 이었습니다. "환웅을 도와 천추 만 년까지 그 나라를 지키도록 하라." "예!" 모두들 입을 모아 답하였습니다. "아버님의 소명을 받들어 길이 동방의 나라를 수호하겠나이다. " 환웅은 농경 생활을 다스리는 3신과 3,0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아득한 구름 속을 헤쳐 태백산(지금의 묘향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백성들은 듣거라. 나는 너희들을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느니라. "환웅의 말에 사람들은 엎드려 절하였습니다."감사하옵니다. 보살펴 주소서! "환웅이 3,0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온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는 큰 시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중심지라는 뜻으로 환웅은 이 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습니다. "그대들의 슬기로움을 다하여 백성들을 잘 보살피도록 하라.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신에게 백성들이 농사를 더욱 잘 짓게 도와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부하들에게는 병을 다스리고,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일, 악하고 착한 일을 가리는 일 등을 비롯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가지의 일을 맡겼습니다. 환웅이 신시를 열어 세상을 잘 다스린 덕으로 사람들이 더욱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나쁜 짓과 싸움이 없어졌습니다. 짐승들도 사람들을 본받아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무렵 평화로운 신시에서 그리 멀지않은 산속에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마리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몹시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신단수 아래에 계시는 환웅님을 찾아가서 우리의 소원을 빌어 보자." "좋은 생각이야!" 곰과 호랑이는 환웅을 찾아가 엎드려 빌었습니다. "우리들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비나이다. "환웅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대답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하늘의 뜻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힘겨운 시련이 없이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없다." "어떤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통을 주며 말했습니다. "100일동안 굴 속에 들어가 햇빛을 보지 말고 이 마늘과 쑥을 먹으며 정성스럽게 기도하면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느니라. 이것은 오로지 하늘의 뜻으로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디겠습니다." "꼭 해내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겠습니다." 그러나 먹이를 많이 먹는 호랑이와 곰이 쑥 포기와 마늘 쪽만으로 100일을 견디기란 힘겨운 시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성미가 급한 호랑이는 겨우 37일을 견디다가 더 참지 못하고 굴 속을 뛰쳐나와 산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시련을 참고 견딘 곰은 100일째 되는 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저의 몸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이제는 저와 맞는 짝을 이루어 주소서." 이 아름다운 여인은 소원대로 뜻을 이루어 환웅과 결혼하였습니다. 단군 왕검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습니다. 이 때는 기원전 2367년경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입니다. 단군 왕검은 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그 곳은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단군 왕검은 그 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이라는 말에는 우리 민족이 나라를 세운 참뜻이 들어 있습니다.단군은 다시 자리를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가 산신이 되어 무려 1,908년이나 살았다고 합니다] ※ 고조선. 위만조선. 기자조선 1) 고조선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으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2) 위만조선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나라에 살던 조선인으로 보고 있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BC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漢)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일부지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한사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려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래서 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마한, 진한, 변한)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범금팔조(犯禁八條)를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 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3) 기자 조선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하는 나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 고조선 마지막 왕)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으며 '삼국지'는 이것을 인용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즉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 (…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가 아니라 한씨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후대에 기자를 한씨의 먼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성인을 자기의 조상으로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기자릉(箕子陵. 고려 숙종때 평양에 축조)이나 기자묘(箕子墓)가 생기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의 사대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 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와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 기자후예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기자의 후예 ] 행주 기(奇)씨 , 서(徐)씨 , 태원 선우(鮮于)씨 , 청주 한(韓)씨 [ 기자와 같이온 성씨 ] 해주, 태인 경(景)씨 , 토산 궁(弓)씨 , 봉화 금(琴)씨 , 밀양, 함평 노씨(魯)   ※ 신라(新羅, B.C.57~935, 992년간, 총 56대)-박(朴)씨 10왕, 석(昔)씨 8왕, 김(金)씨 38왕     代 왕명 재위기간 성 약사 1 박혁거세(朴赫居世, BC69~AD4) BC57~ AD4 朴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BC27년 천일창(天日槍)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2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24) 4~24 朴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삼아 정사를 맏겼다 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3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57) 24~57 朴 남해왕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인 '도솔가' 등을 지음 4 탈해이사금(脫解, BC19~80) 57~80 昔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탄생. 5 파사이사금 (婆娑, ?~112) 80~112 朴 유리왕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6 지마이사금(祗摩, ?) 112~134 朴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지미왕(祗味) 7 일성이사금(逸聖, ?) 134~154 朴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8 아달라이사금(阿達羅, ?~184) 154~184 朴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현(縣)의 설치와 도로개통등 내치에 힘씀. 9 벌휴이사금(伐休, ?~196) 184~196 昔 탈해왕의 손자 10 나해이사금(奈解, ?~230) 196~230 昔 벌휴왕의 손자. 11 조분이사금(助賁, ?~247) 230~247 昔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12 첨해이사금(沾解, ?~261) 247~261 昔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13 미추이사금(味鄒, ?~284) 262~284 金 김씨 왕가의 시조 14 유례이사금(儒禮, ?~298) 284~298 昔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15 기림이사금(基臨, 289~310) 298~310 昔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16 흘해이사금(訖解, ?~356) 310~356 昔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17 내물마립간 (柰勿麻立干, ?~402) 356~402 金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이라고도 함. 18 실성마립간(實聖, ?~417) 402~417 金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19 눌지마립간(訥祗, ?~458) 417~458 金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20 자비마립간(慈悲, ?~479) 458~479 金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21 소지마립간(炤知, ?) 479~500 金   22 지증왕(智證, 437~514) 500~514 金 휘는 지대로(智大路).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23 법흥왕(法興, ?) 514~540 金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24 진흥왕(眞興, 534~576) 540~576 金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25 진지왕(眞智, ?) 576~579 金 휘는 사륜(舍輪) 26 진평왕(眞平, ?~632) 579~632 金 휘는 백정(白淨) 27 선덕여왕(善德, ?) 632~647 金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28 진덕여왕(眞德, ?~654) 647~654 金 휘는 승만(勝蔓) 29 무열왕(武烈, 604~661) 654~661 金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30 문무왕(文武, ?~681) 661~681 金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31 신문왕(神文, ?~692) 681~691 金 휘는 정명,명지(政明,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32 효소왕(孝昭, 643~702) 692~702 金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33 성덕왕(聖德, ?~737) 702~737 金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34 효성왕(孝成, ?~742) 737~742 金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35 경덕왕(景德, ?~765) 742~765 金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36 혜공왕(惠恭, 765~780) 765~780 金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37 선덕왕(宣德, ?~785) 780~785 金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38 원성왕(元聖, ?~798) 785~798 金 휘는 경신(敬信). 김주원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39 소성왕(昭聖, ?~800) 798~800 金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40 애장왕(哀莊, 788~809) 800~809 金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41 헌덕왕(憲德, ?~826) 809~826 金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42 흥덕왕(興德, ?~836) 826~836 金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43 희강왕(僖康, ?~838) 836~838 金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44 민애왕(閔哀, ?~839) 838~839 金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흥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45 신무왕(神武, ?~839) 839 金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46 문성왕(文聖, ?) 839~857 金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47 헌안왕(憲安, ?~861) 857~861 金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48 경문왕(景文, ?~875) 861~875 金 휘는 응렴(膺廉) 49 헌강왕(憲康, ?~886) 875~886 金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50 정강왕(定康, ?~887) 886~887 金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51 진성여왕(眞聖, ?~897) 887~897 金 휘는 만(曼). 음행(淫行)을 일삼고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52 효공왕(孝恭, ?~912) 897~912 金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53 신덕왕(神德, ?~917) 913~917 朴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54 경명왕(景明, ?~924) 917~924 朴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55 경애왕(景哀, ?~927) 924~927 朴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56 경순왕(敬順, ?~978) 927~935 金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 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     ※ 고구려(高句麗, B.C 37 ~A.D 668, 705년간, 총28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동명성왕(東明聖, B.C 58~B.C 19) B.C37~ B.C19 성은 고(高), 원래 성은 해(解). 휘는 주몽(朱蒙).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와 배다른 형제라고도 한다. 동부여(동부여)의 금와의 아들 대소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졸본부여)라 함. 2 유리왕(榴璃, ?~18) B.C19~ A.D18 성은 해(解). 휘는 유리(榴璃). 동명성왕 아들. 왕22년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왕33년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음. 유리명왕(榴璃明) 3 대무신왕(大武神, 4~44) 18~44 성은 해(解). 유리왕 셋째아들. 휘는 무휼(無恤). 동부여, 개마국을 쳐서 병합하고,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넓혔음. 낙랑군을 정벌함. 4 민중왕(閔中, ?~48) 44~48 성은 해(解). 휘는 색주(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대무신왕의 태자가 나이가 어려 대신 즉위함. 5 모본왕(慕本, ?~53) 48~53 이름은 해우(解憂),해애루(解愛婁). 민중왕의 형. 성품이 사납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신하 두노(杜魯)에게 피살됨. 6 국조왕(國祖, 47~165) 53~146 7살의 나이로 즉위. 영토를 확장하고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중앙 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태조왕(太祖王) 7 차대왕(次大, 71~165) 146~165 휘는 수성(遂成). 국조왕 동생. 태조로 부터 왕위 계승을 반대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학정과 횡포를 일삼다가 신대왕에게 시해됨. 8 신대왕(新大, 89~179) 165~179 휘는 백고(伯固). 국조왕의 막내동생. 차대왕의 횡포로 산에 숨어지 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후 왕위에 오름. 9 고국천왕(故國川, ?~197) 179~197 휘는 남무(南武). 빈민 구제책으로 진대법을 실시함. 국양왕(國壤) 10 산상왕(山上, ?) 197~229 휘는 연우(延優), 위궁(位宮). 고국천왕의 아우. 고국천왕이 아들없이 죽자 즉위함. 11 동천왕(東川, ?~248) 227~247 휘는 우위거(憂位居). 산상왕의 아들. 248년에 신라와 화친함. 12 중천왕(中川, ?~270) 247~270 동천왕의 아들 13 서천왕(西川, ?~292) 270~292 휘는 약로(藥盧), 약우(藥友) 14 봉상왕(烽上, ?~300) 292~300 휘는 상부(相夫), 삽시루. 왕2년과 5년에 연나라 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사치와 방탕에 빠져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게 폐위되자 자살함. 15 미천왕(美川, ?~331) 300~330 휘는 을불(乙弗), 우불(憂弗). 현도군을 공격하고 낙랑군을 점령하는 등 영토확장에 공을 세웠음. 호양왕(好讓) 16 고국원왕(故國原, ?~371) 331~371 휘는 사유(斯由), 쇠(釗).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 전사함. 17 소수림왕(小獸林, ?) 371~384 휘는 구부(丘夫). 고국원왕 아들. 왕2년에 중국 전진(前秦)으로부터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자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 18 고국양왕(故國壤, ?~391) 384~391 휘는 이련(伊連). 요동과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음 19 광개토대왕(廣開土, 374~413) 391~413 휘는 담덕(談德). 불교를 신봉하였고, 영토를 만주와 한강 이북을 차지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룩함. 호태왕(好太),영락대왕(永樂) 20 장수왕(長壽, 394~490) 413~490 성은 고씨, 휘는 거련(巨連),연(璉). 광개토대왕 맏아들. 남하 정책을 착수 하여 왕 63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음. 왕 68년에 신라의 7개성을 함락시킴. 21 문자명왕(文咨明, ?~519) 491~519 휘는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 왕3년에 부여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백제를 여러차례 침공하여 영토를 넓혔음. 명치호왕(明治好). 문자왕. 22 안장왕(安藏, ?~531) 519~531 휘는 흥안(興安) 문자왕의 맏아들. 백제와 두차례 싸움. 23 안원왕(安原, ?) 531~545 휘는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양(梁)나라, 동위(東魏)와 수교 하였음. 24 양원왕(陽原, ?~559) 545~559 휘는 평성(平成). 돌궐의 침입을 격퇴 하였으나 신라, 백제의 침공을 많이 받았음. 25 평원왕(平原, ?~590) 559~590 휘는 양성(陽城). 중국의 진(陣), 수(隨), 북제(北齊) 등과 수교함. 26 영양왕(瓔陽, ?~618) 590~618 휘는 원(元). 왕9년에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격퇴. 왕23년에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을지문덕이 섬멸 하였음.평양왕(平陽) 27 영류왕(榮留, ?~641) 618~641 휘는 건무(建武). 외교를 잘하여 수양제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왔으며, 도교(道敎)를 처음으로 받아들임.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살해당함. 28 보장왕(寶藏, ?~681) 642~668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오름. 당의 고종이 이세적(李世勣)을 보내 쳐들어오고 신라가 쳐들어와 고구려는 망하였음         ※ 백제(百濟, B.C 18~A.D660 , 678년간, 총31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온조왕(溫祚, ?~28) B.C 18~ A.D 29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2 다루왕(多婁, ?~77) 28~77 온조왕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3 기루왕(己婁, ?~128) 77~128 다루왕의 맏아들. 4 개루왕(蓋婁, ?~166) 128~166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5 초고왕(肖古, ?~214) 166~214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6 구수왕(仇首, ?~234) 214~234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함.귀수왕. 7 사반왕(沙泮) 234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沸) 8 고이왕(古爾, ?~286) 234~286 초고왕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9 책계왕(責稽, ?~298) 286~298 고이왕 아들. 10 분서왕(汾西, ?) 298~304 책계왕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 당함. 11 비류왕(比流, ?~344) 304~344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 12 설왕( ,?~346) 344~346 분서왕의 맏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 ?~375) 346~375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함. 14 근구수왕(近仇首, ?~384) 375~384 근초고왕의 큰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데 공이많음. 15 침류왕(枕流, ?~385) 384~385 근구수왕의 아들. 불법(佛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 하였음. 16 진사왕(辰斯, ?~392) 385~392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 위해서 출정하다가 병사함. 17 아신왕(阿莘, ?~405) 392~405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18 전지왕(琠支, ?~420) 405~420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 ?~427) 420~427 전지왕의 맏아들 20 비유왕(毘有, ?) 427~454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21 개로왕(蓋鹵, ?~475) 455~475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22 문주왕(文周, ?~477) 475~477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옴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23 삼근왕(三斤, ?) 477~479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진로(眞老)로하여금 토평 하게함. 24 동성왕(東城, ?~501) 479~501 이름은 모대(牟大).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25 무령왕(武寧, ?~523) 501~523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국내안정에 힘을 쓰고, 쌍현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26 성왕(聖, ?~554) 523~554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538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554년 신라를 공격, 관상성에서 전사함. 성명왕. 27 위덕왕(威德, ?~598) 554~598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침. 28 혜왕(惠, ?~599) 598~599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 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29 법왕(法, ?) 599~600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공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의 창건을 착수함. 30 무왕(武, ?~641) 600~641 휘는 장(璋). 수,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내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파하였음. 31 의자왕(義慈, ?~660) 641~660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 가락시대(駕洛, 42~532 , 490년간, 총10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수로왕(首露, 42~199) 42~199 42년 알에서 낳아서 곧 즉위. 아유타국(인도의 한 국가) 공주허황옥과 결혼함 2 거등왕(居登, ?~253) 199~259 수로왕의 아들. 어머니는 허황옥 3 마품왕(麻品, ?~291) 259~291 거등왕의 아들 4 거질미왕(居叱彌, ?~346) 291~346 마품왕의 아들. 5 이시품왕(伊尸品, ?~407) 346~407 거질미왕의 아들 6 좌지왕(坐知, ?~421) 407~421 이시품왕의 아들. 금토왕(金吐王), 김질(金叱). 왕비 용녀의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시끄러웠다. 후에 왕비를 귀양 보내고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7 취희왕(吹希, ?~451) 421~451 좌지왕의 아들. 질가(叱嘉) 8 질지왕(?~492) 451~492 취희왕의 아들 9 겸지왕(鉗知, ?~521) 492~521 고이왕 아들. 10 구형왕(仇衡, ?) 521~532 겸지왕의 아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영토를 바치고 귀순함. ※ 발해(渤海, 699~926 , 227년간, 총15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고왕(高, ?~719) 699-719 휘는 대조영(大祖榮).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동모산(東牟山, 길림성 동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함. 연호를 천통으로 함. 713년 고구려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국호를 발해로 고침. 2 무왕(武, ?~737) 719~737 휘는 대무예(大武藝).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교환하고 당나라를 공격함. 3 문왕(文, ?~?) 737~793 휘는 대흠무(大欽茂). 서울을 용천부(龍泉府)로 옮기고 관직제도를 정비 했으며 주자감(胄子監)을 설치하는 등 문화 발전에 힘씀. 4 대원의(大元義, ?~794) 793~794   5 성왕(成, ?~795) 794~795 휘는 대화여(大華與). 문왕의 손자.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치고 상경(上京)으로 서울을 옮김. 6 강왕(康, ?~809) 795~809 휘는 대숭린(大崇隣). 문왕의 아들.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함. 일본, 당나라 등과 사신왕래, 문물교환을 활발히 함. 7 정왕(定, ?~813) 809~812 휘는 대원유(大元瑜). 연호를 영덕(永德)으로함. 8 희왕(僖, ?~817) 812~817 휘는 대신의(大言義).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침. 당나라와 교류하여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임. 9 간왕(簡, ?~818) 817~818 휘는 대명충(大明忠) 연호를 태시(太始)라함. 10 선왕(宣, ?~830) 818~830 중국으로 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는 전성기를 이룩함.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회복하여 영토가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개원(카이위안), 남쪽으로는 함경남도 정평, 북쪽으로는 헤이룽강(흑룡강)에 이르렀음. 11 대이진(大彛震, ?~858) 830~858 선왕의 손자.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침. 12 대건황(大虔晃, ?~871) 858~871   13 대현석(大玄錫, ?~892) 871~894   14 대위해(大瑋?, ?~906) 894~906   15 대인찬(?~926) 906~926 103개의 성이 모두 거란에 점령되어 발해 멸망. ※ 고려시대(高麗,918~1392, 473년간, 총 34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태조(太祖, 877~943) 918~943 이름은 왕건(王建). 신라 궁예의 부하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 2 혜종(惠宗, ?~945) 943~945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3 정종(定宗, 923~949) 945~949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4 광종(光宗, 925~975) 949~975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함. 5 경종(景宗, 955~981) 975~981 휘는 주(인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음. 6 성종(成宗, 960~997) 981~997 휘는 치(治).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7 목종(穆宗, 980~1009) 997~1009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8 현종(顯宗, 992~1031) 1009~1031 휘는 순(詢).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 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함. 9 덕종(德宗, 1016~34) 1031~1034 휘는 흠(欽). 왕 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함. 10 정종(靖宗, 1018~46) 1034~1046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11 문종(文宗, 1019~83) 1046~1083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류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12 순종(順宗, 1046~1083) 1083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13 선종(宣宗, 1049~1094) 1083~1094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14 헌종(獻宗, 1084~1097) 1094~1095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15 숙종(肅宗, 1054~1105) 1095~1105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 하여화폐 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16 예종(睿宗, 1079~1122) 1105~1122 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17 인종(仁宗, 1109~1146) 1122~1146 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 등을 격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18 의종(毅宗, 1124~1173) 1146~1170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19 명종(明宗, 1131~1202) 1170~1197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쫏겨남. 20 신종(神宗, 1144~1204) 1197~1204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21 희종(熙宗, 1181~1237) 1204~1211 휘는 영.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22 강종(康宗, 1152~1213) 1211~1213 휘는숙(璹), 정, 오.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났다가 최중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23 고종(高宗, 1192~1259) 1213~1259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동안 항쟁 하였으나 결국 굴복함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24 원종(元宗, 1219~1274) 1259~1274 휘는 정(禎).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25 충렬왕(忠烈, 1236~1308) 1274~1308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26 충선왕(忠宣, 1275~1325) 1308~1313 휘는 장(璋).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에 힘을 씀. 27 충숙왕(忠肅, 1294~1339) 1313~30, 32-39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 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만에 복위함. 28 충혜왕(忠惠, 1315~1344) 1330~32, 39-44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29 충목왕(忠穆, 1337~1348) 1344~1348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30 충정왕(忠定, 1337~1352) 1348~1351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만에 폐위됨. 31 공민왕(恭愍, 1330~74) 1351~1374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32 우왕(禑, 1364~1389) 1374~1388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33 창왕(昌, ?) 1388~1389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쫏은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쫏겨나 10세때 시해됨. 34 공양왕(恭讓, 1345~1394) 1389~1392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 조선시대(朝鮮,1392~1910, 518년간, 총 27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태조(太祖, 1335~1408) 1392~1398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92년 조선왕조를 세움. 2 정종(定宗, 1357~1419) 1398~1400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3 태종(太宗, 1369~1422) 1400~1418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4 세종(世宗, 1397~1450) 1418~1450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 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5 문종(文宗, 1414~1452) 1450~1452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6 단종(端宗, 1441~1457) 1452~1455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7 세조(世祖, 1417~1468) 1455~1468 휘는 유.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수양대군(首陽大君). 8 예종(睿宗, 1441~1469) 1468~1469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9 성종(成宗, 1457~94) 1469~1494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10 연산군(燕山君, 1476~1506) 1494~1506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 병인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 반정으로 폐위됨. 11 중종(中宗, 1488~1544) 1506~1544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12 인종(仁宗, 1515~1545) 1544~1545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13 명종(明宗, 1534~1567) 1545~1567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격음. 14 선조(宣祖, 1552~1608) 1567~1608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15 광해군(光海君, 1575~1641) 1608~1623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 (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16 인조(仁祖, 1595~1649) 1623~1649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17 효종(孝宗, 1619~1659) 1649~1659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8 현종(顯宗, 1641~1674) 1659~1674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19 숙종(肅宗, 1661~1720) 1674~1720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20 경종(景宗, 1688~1724) 1720~1724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21 영조(英祖, 1694~1776) 1724~1776 타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22 정조(正祖, 1752~1800) 1776~1800 휘는 성.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23 순조(純祖, 1790~1834) 1800~1834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24 헌종(憲宗, 1827~1849) 1834~1849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25 철종(哲宗, 1831~1863) 1849~1863 휘는 변.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26 고종(高宗, 1852~1919) 1863~1907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 일어남 27 순종(純宗, 1874~1926) 1907~1910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 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62    조선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성원 댓글:  조회:2693  추천:0  2012-07-16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조선족의 소중한 문화유산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작성   一、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에게는 아주 찬란하고 풍부한 민속문화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례문화, 특히는 장례문화의 경우에는 특별히 성숙된 문화였습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장례문화는 우리민족의 전통리념과 풍속을 가장 전면적으로, 가장 완미하게 반영한 민속문화로서 우리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중국에는 《홍백희사》(紅白喜事)라는 설법이 있는데, 결혼을 홍희사라고 하고, 사람이 죽은것을 백희사라고 하며, 이 두가지를 합하여 홍백희사라고 합니다. 결혼하는것을 희사라고 하는것은 누구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중국사람들은 사람이 죽은것도 희사라고 합니다. 한방면으로 추도회를 열고 눈물을 흘리면서 장례를 치르는데, 사람들의 정상적인 정감의 표현입니다. 다른 한방면으로는 또 희사라고 하는데 확실히 희사가 맞습니다. 세상은 마치도 공공뻐스와 같이 승객들이 부단히 바뀝니다. 뻐스에 먼저 오른분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림으로써 또 다른분들이 오를수 있게 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로 먼저 이 세상에 오신분들이 일정하게 생활하신후에 기꺼히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여 생존하고 발전할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먼 옛날의 공자나 진시황같은 분들이 오늘까지도 “장생불로약”을 먹으면서 죽지않고 모두 살아 계신다면 이 지구는 지금쯤 아마 발을 옮겨 디딜 자리도 없이 비좁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례는 기실 사망자에 대한 애도뿐만이 아니라 후세에 대한 희망으로도 되며 이런 견지에서 장례문화야말로 인류문명의 척도라고 할수 있습니다. 현재 조선족의 혼례문화는 상당한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는데 대비하여 조선족의 장례문화는 장례와 함께 쓸쓸한 신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으로 관리하는 부문이 없고, 사회적으로 아무런 보호조치도 없습니다. 전국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로서의 연변에는 모두 4대 장의관이 있는데 그중에 조선족 장례풍속을 존중하여 설치한 복무시설이나 복무항목은 한가지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일입니다. 기실 우리민족의 전통적 장례문화도 우리민족의 전통적 혼례문화와 마찬가지로 우리민족의 찬란한 민속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입니다. 조선족 민속문화에서 장례문화가 빠진다면 조선족 민속문화는 자기의 완미성을 잃게 되며, 잔페문화로 될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중국 송나라때의 “朱子家禮”에서 기원했는데 몇백년을 내려오면서 점차 우리민족 고유의 장례문화로 발전하였습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의 기본리념은 유가의 사상으로서 그 핵심은 “효도”이고 그 주체는 “례의”입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활동에서는 “효도”와 “례의”의 리념이 집중적으로 표현됩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활동은 문화적 의미에서 “효도”와 “례의”를 원만히 하고 계승하는 과정으로 됩니다. 효도는 자고로 우리민족의 사회질서와 가정 관계를 유지시킨 도덕 준칙이였으며 우리민족 전통문화의 정수입니다. 오늘날 걸음 바쁜 경제 시대에서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효도의 작용은 여전히 매우 큰 현실적 의의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선인들은 장례와 제사를 통하여 효도사상을 전수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여 왔는데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이 효심이 부족하고 민족의식이 담박하게 된것이 어찌보면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가 쇠퇴된것과 련관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장례문화는 시대의 충격에 밀리여 거의 매몰되여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중화민족 대가정 속에서 당당히 자기의 한자리를 계속 확보하려면 우리의 장례문화를 버릴수 없으며 반드시 발굴하고 정리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二、 장례라는 것을 통속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사망하여 그 유체를 처리하는 의식인데, 주요하게 두가지 공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생명공능을 상실한 유체를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자연적 공능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자와의 생전의 사회관계와 정감관계를 정리하는 사회적 공능입니다. 장례는 기실 철두철미 살아있는 사람들의 문화입니다. 장례는 사망자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후에 혼백은 진짜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먼옛날 공자가 말한것처럼 《살았을때의 일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죽은후의 일을 어찌 알수 있겠는가?》(未知生,焉知死). 표면상에서 장례는 마치도 죽은사람을 위하여 그의 혼백을 하늘나라의 좋은 곳으로 보내는 성스러운 의식 같지만, 기실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도덕풍상을 지킴으로써 자기의 정신적 의탁과 심리적 안위를 얻으려는 문화적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장례는 사망자를 위하여 필요한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요하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장례는 부모나 어른들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도의 연속이고, 보충이며, 완성입니다. 경쟁이 심한 현시대에 와서 젊은이들은 자기 인생을 개척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분투해야 하는데 부모들한테 많은 미안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일정하게 성공한후에 다시 부모에게 효성하고 싶을때에는 부모는 왕왕 늙어서 사망하실때가 되거나 혹은 언녕 사망하시고 하늘나라에 가서 계십니다. 소위의 효(孝)에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부모나 어른들을 잘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나 어른이 사망하여 그들의 장례를 치른다는 뜻입니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님들의 시대에서는 부모나 어른들한테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것을 최대의 수치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모나 어른이 사망하면 장례를 될수록 후하게 치르는 것으로 자기가 효자라는 것을 표명함으로써 사회의 인정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평소에 부모나 어른들을 좀 박대했던 사람들은 더구나 장례를 성대히 치르는 것으로 자기의 수치를 감추고, 심리적 불안감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옛사람들이 장례를 특별히 중시 하게된 원인의 하나입니다. 장례를 치른후에는 또 “삼년수효”라는 혹독한 풍속까지 있었는데, 상주는 부모의 묘소옆에 움막을 쳐놓고 효복을 벗지 못한채 삼년 제사날까지 지키면서 살아있는 부모님 뫼시듯 조금도 게으름 없이 효성을 들여야 하였습니다. 이 기간에는 세수도 하지 못하고, 육식도 하지 못하며, 또 안해옆에도 가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혹독한 수련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역시 《효자》라고 불렀는데, 여기서는 효복을 입고 수효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그의 목적은 부모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도를 미봉하고 원만하게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너무나도 우매한 행위였다고 말할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락후한 사회의식 수준에서도 우량한 도덕표준을 지켜 내려는 우리의 조상님들의 고심한 노력을 엿볼수 있습니다. 둘째; 장례는 가정 의무의 새로운 분공이며, 가정의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 가정의 특정된 위치에서 특정된 가정의무를 지니고 생활합니다. 한사람의 사망은 한 가정에서 한 자리가 비게됨을 의미하는데, 필연적으로 그 가정의 원래의 평형을 파괴하게 됩니다. 특히 가정의 중요한 세대주가 사망하였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형편에서 전통 장례에서는 의례 규칙에 따라 상주(喪主)를 확정하게 되는데, 그가 곧 새로운 가정대표로 됩니다. 전통적으로는 보통 죽은자의 장남이 상주가 되였는데 지금은 만약 장남이 없다면 장녀나 맏사위가 상주로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기초상에서 가정의 기타 성원들도 모두 스스로 자기의 의무를 조절하여 새로운 형세에 적응하게 되는데, 이렇게 새로운 가정평형이 형성되며 가정의 새 시기가 시작됩니다. 세째; 장례는 사망자의 생전의 인생가치에 대한 평가이며, 총결입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기간에 정도 부동하게 재부를 창조하게 되고, 자식을 낳아 기르게 되며, 주변 사람들의 생활과 기억에 일정하게 영향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사람이 사망한후 그의 생전의 인생가치에 대하여 충분히 평가하고 총결하는것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유산을 남기는 것으로 됩니다.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면서 추도문에서 사망자의 공덕을 많이 라렬하고, 사망자의 결점에 대해선 보통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요하게 사망자의 공덕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지만, 사망자의 결점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의도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자기의 인생에 대한 재 검토 기회로 됩니다. 사람은 태여나면서부터 그 어느때엔가는 꼭 죽어야 한다고 세월과 어길수 없는 계약이 맺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장례를 통하여 자기도 어느때엔가는 저 사람처럼 죽게 된다는 것을 강렬하게 직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지난 인생에 대하여 재 검토하게 되며, 금후의 인생에 대하여 더욱 긴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존엄, 가족의 존엄, 나아가서는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대사입니다. 사람이란 생명이 있어서 사람인것이 아니라 존엄이 있어 사람입니다. 장례는 성대히 치러서 존엄이 서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치러야 존엄이 섭니다. 훌륭한 자기의 장례문화를 잃어 버리고 남의식으로 자기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처지에서는 그 무슨 존엄을 운운할 여지가 없습니다.   三、 천백년래 사람들은 모두 잘 살기 위하여 분투하여 왔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어 왔습니다. 시대가 오늘에 이르러 이제부터는 잘 죽는것도 생각해야 할 때이며 죽음의 질을 강조해야 할 때입니다. 한 사람이 젊어서는 아주 잘 살았었는데 늙으막에 와서 비참하게 죽었다면 그의 일생을 완미하다고 할수 없습니다. 반대로 한 사람이 젊어서는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다가 늙으막에 와서 행복하게 죽었다면 그의 일생은 참으로 완미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젊어서의 고생은 기실 인생의 보귀한 재부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속담에서 젊어서의 고생은 천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잘 죽을수 있겠는가? 기실 이 문제는 어떻게 죽음의 질을 제고하여 만년을 원만하게  끝마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일생을 원만하게 끝마쳤다고 평가하자면 적어서 아래와 같은 조건이 구비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 장수하신 사람이여야 합니다. 옛날에는 “인생칠십 고래희”라 하였지만 지금은 팔순, 구순이 예사로운 일이며 백세라도 그리 희한하지 않습니다. 장수한 사람의 경우에는 병이나서 사망하는것이 아니라 때가 되여 사망하기 위하여 병이 오는 것입니다. 인류의 수명이 점점 길어지면서 사회에 많은 새로운 난제가 제출되지만 인류수명의 제고는 총체적으로 인류생명의 질 제고를 의미합니다. 둘째: 행복하게 사망하신 경우입니다. 특히 마음이 편안하게, 고통이 없고 유감이 없이 미소짓고 눈을 감은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사망하실때가 되면 모종의 불치의 병으로 모진 고통을 격게 되는데 이로하여 보편적으로 죽음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말기환자라 하여도 보통 임종하시기 전까지 치료를 멈추지 않는것을 의료도덕의 기본적인 표준으로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랑비가 조성되고 병자의 고통은 가심해만 집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방의 일부 나라에서는 “안락사”라는 개념이 나오고 “호스피스”(사망전 정양호리) 모식을 도입하고 있는데 아직 완미하지는 못합니다. 진정으로 “안락사”나 “호스피스”가 현시대의 새로운 문명으로 되려면 아직 많은 사회적, 도덕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조만간에 인류의 지혜에 의하여 원만히 해결되리라고 믿습니다. 사망하는것이 인류의 필연적인 의무라고 할진대, 될수록 고통이 없이 마음 편안하게 사망하려 하는것은 전 인류의 공동한 념원일 것입니다. 세째: 존엄이 있게 사망하셔야 합니다. 자식들과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망하셔야 합니다. 사망이란 한사람 생명의 종결을 의미할뿐 결코 그 사람의 존엄의 종결은 아닙니다. 사망한 사람의 존엄은 그 사람이 세상에 남긴 공덕과 더불어 계속 이세상에 남게 되는데 그 공덕이 크면 클수록 그의 존엄도 더욱 오래동안 남게 됩니다. 자식이란 부모가 낳아주고 키워준 신체와 두뇌에 근거하여 학습하고 생활하고 사업하기 때문에 그들의 몸과 행위에는 모두 부모와 조상들의 공덕이 슴배여 있으며 그 공덕이야말로 그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기본 동력입니다. 불효자식들이 필연적으로 패망하는 리유는 바로 그들이 자기절로 자기의 기본 동력자원을 차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조건들은 기실 모두 자식들의 효성과 사회의 복리를 떠나서는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족 전통장례의 효도사상은 바로 죽음의 질을 제고하여 만년을 원만하게 끝마칠수 있는 륜리적, 도덕적 담보로 됩니다. 조선족 전통장례에는 “好死”라는 것이 있었는데 주요하게 장수하시고 공덕이 많은 로인들의 죽음을 일컬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호사”의 장례는 슬픔보다는 경축과 오락의 분위기가 농후하였으며 조문객들도 유가속에게 위로의 말보다는 치하의 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사람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백희사의 경우입니다.   四、 민족이라는 것은 인류의 장기간의 력사 과정에서 형성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그리고 공동한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을 소유한 온정된 공동체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인구 류동이 가속화 되면서 지금 와서는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이라는 조건은 많이 파괴되기 때문에 이 조건만을 가지고 한개 민족을 평가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한 민족의 특색이라는 것은 주요하게 공동한 문화, 그리고 이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민족습관, 공동한 민족심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시기는 민족의 대 융합을 촉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각 민족의 발전을 촉진하는 시기입니다. 그 어느때 가서는 일부 비슷한 민족들끼리 융합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는데 모두가 중국 경내에서 생활하고 있고 모두가 중국 공민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개 민족이 자기의 존재를 나라에 선전하고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이 주요하게는 문화입니다. 한 민족이 자기의 문화, 즉 자기의 특색을 잃는다면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됩니다.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리는것을 현시대의 개방사상이라고 여기는것은 틀리는 생각입니다. 당과 정부에서는 소수민족들의 특색문화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우대정책과 사업조례들을 제정하여 실행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 도리여 자기민족 특색문화의 보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 꺼리낌 없이 하나, 둘, 버리고 있습니다. 민족특색이 없이는 민족 대단결이 있을수 없으며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릴수록 점점 시대의 멸시를 받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세계적 특색이 바로 자기의 민족 특색이며, 자기의 민족특색이 짙을수로 자기의 합법성이 더욱 완벽하게 되며, 세계적 경쟁력이 더욱 강해지게 됩니다. 2009년 6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 장례풍속》을 각각 주급과 성급의 무형문화재 (非物质文化遗产)로 지정 하였으며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구체적인 연구와 보호사업을 책임진 단위로 지정 되였습니다. 이로부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보호가치와 발양의의가 있는 민속 문화라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였습니다. 조선족 장례문화를 보호하는 사업은 전 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어느한 부문이나 어느한 단위의 노력만으로는 완성할수 없습니다. 반드시 전 사회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우리가 계속 자기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고 시종 자기의 민족 특색을 확보한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더욱 밝을것입니다.    
61    (연변방송) 2012우리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에 관하여 댓글:  조회:3566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음력설 특집(두번째 시간) 《전통과 현대의 융합》 방송주제:《우리 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에 관하여》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절연구회 현성원 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 답례) 반갑습니다.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 련휴가 끝났지만 아직도 전통명절인 정월보름을 약 일주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오늘은 음력설특집 두 번째 시간으로 《우리 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은 혈연관계로 맺어진 한집안 - 친족의 그 계보를 도표식으로 적어둠으로써 가족의 변화상황을 적어둔 족보를 과거에는 아주 중하게 여겼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족보에 대한 개념이나 관심이 조선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족보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습니다. 가족 모든 구성원들의 변화를 적어둔 전체 가족의 족보의 모든 것은 제쳐두고라도 자기 한 가족의 구성원들의 변화양상을 적어둔 가족의 변화양상을 기록해두고 후대에게 전해주는것 또한 현대인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특히 오래전에 시작된 핵가족시대, 자기 한가족구성원들의 변화마저 후대들에게 남겨주지 못한다는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하여 오늘은 전통명절기간을 리용해 우리 민족 족보의 의미와 중요성을 짚어보고 우리 민족 성씨와 호칭을 알아보는것도 전통문화를 살리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봅니다. 먼저 현회장께서 족보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주시죠? 현룡수 회장: 족보란 지금말로 하면 한 가족의 기본 력사당안자료입니다. 우리는 족보에서 자기가족의 시조를 알수있고 자기가족의 전통을 알수 있으며 그 시조로부터 어떻게 발전하여 오늘까지 오게 되였는가? 하는 전반과정을 알수 있으며 자기친척의 범위와 갈래 그리고 그 관계를 가계보를 통하여 알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 이어서 족보의 의미와 기원에 대해서 거론해주시겠습니까? 현룡수 회장: 일찍 삼국시기 신라에 벌써 족보 비슷한것이 생겨나 왕공귀족들이 리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족보란 계급사회의 등급제도의 산물로서 그 의의는 주요하게 자기가문의 정통성과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그후 고려에서는 양반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양반이란 주로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문무관원들을 일컬으는 말입니다. 지금말로 하면 국가공무원인 셈이죠. 고려에서는 文宗(기원1047년)때부터 상놈도 제한적으로 자기성을 가질수 있었다고 하는데 보통 가문에서 그누가 조정에 등용되여 벼슬을 하게되면 그 가문은 곧 출세하여 량반가문이 되므로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거나 또는 선조명이나 출신지역의 지명으로부터 성을 결정한후 그사람을 시조로 하고 그사람에게 봉해진 식지혹은 출신지역을 본관으로 하여 계보를 작성하여 기록하여 내려 오는데 그것이 후에와서 족보가 되는 것입니다. 식지란 봉지라고도 하는데 봉건사회에서 벼슬을 하게되면 벼슬의 급별에 따라 봉해주는 토지와 관리구역으로서 양반가문 경제수입의 주요래원이였으며 세습할수 있었습니다.     김동선 기자: 과거에는 족보가 지배층 즉 귀족이나 왕실에서 신분을 가려보기 위하여 피줄의 갈래를 잊지 않으려고 기록한 비망록의 기능을 하고 또 한 가족의 신분을 나타내는 도표식 책으로서 그 부작용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만민이 평등해진 오늘날에 와서 족보를 신분상승의 어떤 원인으로 될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족보의 가치를 다르게 리해하는것이 필요하지 않을가 생각하는데 현회장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족보의 가치는 신분증명보다는 가족의 뿌리를 알고 가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며, 가족과 친척의 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가족관념을 가강하고 가문의 뉴대를 형성시키며 가문의 매개성원들의 사명을 강조하기 위한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연변 조선족 가정의 족보는 문화혁명때에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아 이미 기본상 근절되였습니다. 개혁개방을 하고 한국과의 국교가 맺어지고 한국의 종친회와의 련계를 다시 회복하게 되면서 적지않은 가문에서는 다시 자기의 족보를 가지게 되였으며 선조와의 련계점을 성공적으로 찾고 자기가정 성원들을 족보에 보충하여 기입해 넣은 가정도 적지 않습니다.      김동선 기자: 족보는 가족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이 있고 또 그 체계는 어떻게 정해져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족보는 가문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인 체계는 비슷합니다. 맨 앞에 가문을 자랑하는 서문이 있고 시조를 포함해 주요한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밝혔으며 시조와 조상들가운데서 력사에 《이름난 인물》의 사적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시조 아무개로 시작하여 가문성원들의 이름을 세대를 나누어 항렬의 순서에 따라 적고 매 사람의 이름에 곁붙여 자, 호, 생졸년월일 그리고 생전에 지낸 대표적인 벼슬, 간단한 략력, 안해의 본과 성씨, 무덤의 위치 등을 적어넣었습니다. 딸은 출가외인이라 하여 보통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어떤 가문에서는 사위의 성과 이름을 밝히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성이 모두 같으므로 이름만 적었으며 그것도 적서의 구별을 두어 본처의 자식은 《적》으로, 첩의 자식은 《서》로 갈라 적었으며 외손자인 경우 보통 밝히지 않지만 또 일부 밝힌 가문도 있습니다.   보통 족보는 해당 문중에서 스스로 자기 문중의것을 작성하였고 이밖에 족보와 성질은 같지만 형식과 내용이 약간씩 다른 가첩과 가승이란것도 있었습니다. 가첩이란 직계친족만 적어둔것이며 가승은 가문의 직계친족과 그 가문의 사적을 적어놓은것입니다. 족보를 중요시함에 따라 해당 가문의 종친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종보와 그중 어느 한갈래의 종친만을 밝힌 지보란것도 생겨났습니다.   왕실에서는 왕족의 족보를 전문 다루는 부서를 내오고 전체적으로 총괄하였는데 그것을 종부시라고 불렀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말에 친척이란 말과 인척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별하여 나온 것입니까?   현룡수 회장: 친척이란 피줄과 결혼관계로 련결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친척은 크게 친족, 인척 두가지 부류로 나눕니다. 친족은 피줄관계로 련결된것인데 흔히 집안이라고 합니다. 인척은 결혼관계로 련결된것을 말합니다.   친족안에는 직계와 방계로 구분되는데 직계는 할아버지, 할머니-아버지, 어머니-아들, 딸-손자, 손녀-증손자, 증손녀 등과 같이 피줄이 직접 잇달아 물린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가족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방계와 구별하기 위하여 《친할아버지》, 《친손자》 등 《친》자를 붙여 부르기도 합니다. 방계는 큰(작은) 할아버지-큰(작은) 아버지-조카 등과 같이 몇 대우에서 갈라져나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인척가운데서 어머니켠을 외켠(외척), 안해켠을 처켠(처척)이라고 하였으며 시집간 딸은 친족성원에서 빼버렸으나 사실상 고모, 고모부, 고모사촌 등은 실제생활에서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되여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이런 친척을 우리 민족은 그 관계의 멀고가까움을 밝히는데 하나의 척도로 써왔는데 그것이 바로 촌수입니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촌수를 밝히기 시작하였습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 민족이 촌수를 밝히기 시작한것은 대체로 고려시기부터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4세기 문인 리색이 《4촌회》라는 말을 쓴것도 있고 또 《고려사》에 외사촌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쯤으로 추증하는것이 옳을것 같습니다.     김동선 기자: 촌수는 어떻게 나누게 됩니까?   현룡수 회장: 촌수는 부부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세대를 한촌으로 셉니다. 때문에 부부사이는 촌수가 없고 대수가 점차 벌어짐에 따라 촌수는 많아집니다. 따라서 촌수가 적을수록 가까운 친척이고 촌수가 많을수록 먼 친척으로 됩니다.   직계에 속하는 친척은 대수가 곧 촌수인데 부모와 자녀사이는 1촌이고 할아버지와 손자사이는 2촌입니다. 그러나 부를때에는 절대로 촌수로 부르지 않으며 증조할아버지와 증손, 고조할아버지와 현손사이도 촌수는 각각 3촌, 4촌이지만 부를때에는 절대로 촌수로 부르지 않습니다.   방계(곁갈림)에 속하는 친척의 촌수는 먼저 어느 조상에서 갈라졌는가를 따져보고 그 조상과 자신과의 촌수에다 알려고 하는 대상과 그 조상과의 촌수를 합하면 됩니다. 례를 들면 조카와 자신과의 촌수는 이렇게 캘수 있습니다. 조카는 형 혹은 동생의 자녀로서 자신과는 아버지를 통하여 련결된 곁갈림입니다. 그러므로 조카와 자기와의 촌수는 자기와 아버지의 촌수에다 조카와 아버지와의 촌수를 합하면 됩니다. 즉 자기와 아버지와는 1촌이고 조카와 자기 아버지(조카에게는 할아버지)는 2촌이므로 자신과 조카는 3촌이 됩니다.     김동선 기자: 촌수는 친족뿐만 아니라 인척을 가릴때에도 쓰이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외켠의 친척은 어머니와 그 친척과의 촌수에다 자기와 어머니와의 촌수(1촌)을 합한 수와 같은 촌수입니다. 례를 들면 어머니의 남동생은 어머니와 2촌이므로 자기와는 3촌 즉 외삼촌이 됩니다. 처켠에 대해서는 알아보려는 사람과 자기 안해와의 촌수를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례를 들어 안해의 작은 아버지는 안해의 3촌이므로 처삼촌이라고 부릅니다.   촌수로 친척의 멀고가까운것을 나타내는데 형제벌의 친척은 4촌, 6촌, 8촌과 같이 짝수(우수)로 나가며 큰(작은)아버지, 조카벌의 모든 친척은 3촌, 5촌, 7촌과 같이 홑수(기수)로 나갑니다. 이것은 촌수가 련결마디를 나타내는것으로서 세대와 세대사이에는 그를 낳은 부부가 끼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5촌형, 칠촌아우, 6촌조카, 8촌조카라는것은 있을수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만약 촌수의 척도로 재면서 친척을 따져나가면 수없이 많고 그 갈래도 대단히 복잡할겁니다. 그럼 대체 어느 범위까지 친척을 보는것이 바람직할가요?  현룡수 회장: 고려와 리조시기에는 서로 범위에서 얼마간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로 친족은 7~10촌까지, 인척은 5~6촌까지를 친척으로 보았으며 리조시기 법에는 친족이 10촌까지로 되어 있으나 실제생활에서는 대체로 8촌까지 보았습니다.     김동선 기자: 친척의 범위에는 친족, 외켠, 처켠외에 사돈도 친척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우리말에 사돈이 한호적이란 말도 있습니다.《아언각비》란 책에 《친척》이란 《척》에는 외척, 처척, 인척을 들고 있는데 여기의 이 인척이 곧 당시 사돈집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돈은 친척가운데서 제일 먼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돈의 팔촌》이라 하게되면 친척이라고 할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먼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생활에서 사돈과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매부와 처남사이는 일반적으로 매우 가깝습니다.      김동선 기자: 친척의 촌수를 안후 그 호칭이 따로 있는데 이것을 친척호칭이라고 하면서 일상생활가운데서의 말차림에서 극히 조심하며 례절을 지키려고 애쓰는것이 우리 민족의 우수한 품성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민족 친척호칭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지요. 먼저 직계친족을 부르는 말로는 어떤것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현룡수 회장: 예, 그러지요. 3대 할아버지, 할머니는 《증조》를 붙여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라고 부르며 3대 손자, 손녀는 《증손》을 붙여 증손자, 증손녀라고 부릅니다. 4대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조》를 붙여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로 부르고 4대 손자, 손녀는 《현손》을 붙여 현손자, 현손녀로 부릅니다. 5대이상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는 대수를 그대로 붙여 5대할아버지, 6대손자 등으로 부릅니다. 직계친족가운데서 형의 안해를 흔히 형수, 아우의 안해를 제수라고 부르며 누이의 남편을 매형, 혹은 매부라고 부릅니다.     김동선 기자: 그럼 방계친족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방계친족을 부를때에는 같은 항렬에 속하는 4촌, 6촌, 8촌형제를 친형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각각 《종》, 《재종》, 《삼종》을 붙여 종형제, 재종형제, 삼종형제 등으로 부릅니다.   아버지항렬에 속하는 큰아버지를 백부, 작은아버지를 숙부라고 부르며 흔히 숙부를 삼촌이라고 하는데 직접 촌수로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런 친삼촌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촌, 칠촌, 구촌백부와 숙부는 각각 《종》, 《재종》, 《삼종》을 붙여 부릅니다. 이것은 할아버지항렬을 부를때에도 할아버지와 구분하여 할아버지의 형제를 종조부로 부르며 따라서 증조할아버지의 형제를 재종증조부, 고조할아버지의 형제를 삼종고조부로 부릅니다.   아들, 손자항렬에서도 친조카와 오촌, 칠촌, 구촌조카 그리고 친손자와 형제의 손자를 구별하기 위하여 《당》, 또는 《종》, 《재종》, 《삼종》등을 붙였습니다. 이를테면 사촌의 아들은 5촌으로서 당질(오촌조카)이며 륙촌동생의 아들은 7촌으로서 재종질(칠촌조카)이며 팔촌의 아들은 9촌으로서 삼종질(구촌조카)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추리로써 형제의 손자는 6촌으로서 재종손, 륙촌의 손자는 8촌으로서 삼종손이라고 부릅니다. 누이의 딸은 생질, 고모사촌은 고종형제라고 합니다. 이밖에도 친족을 부르는 말에는 넛할아버지(아버지의 외삼촌), 넛손자(누이의 손자), 올케(오빠와 남동생의 안해) 등이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인척을 부를때에는 어떻게 부릅니까?   현룡수 회장: 인척을 부를때에도 촌수를 캐는 법은 같으나 부를때, 외켠에는 《외》, 어머니의 자매는 《이모》, 처켠에는 《처》를 붙여 부르며 안해의 부모를 장인, 장모로 혹은 가시아버지, 가시어머니로 부릅니다. 이모의 아들딸은 이모사촌이 되고 처남과 처형제의 아들딸들은 처조카로 되며 안해의 삼촌은 처삼촌으로 부릅니다.   우리 민족은 친척교제에 있어서 비록 구분은 우에서 말한것처럼 촌수가 밝혀져 있으나 직접 상대하여 말할때는 될수록 가깝게 부르는 풍속이 있습니다. 즉 례를 들면 구촌조카를 당면해서 부를때 《구촌조카 왔는가?》하지 않고 《조카 왔나?》라고 하는 식입니다. 웃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함경도나 연변 등지에서는 《아바이》, 《클아배》,《아매》,《맏아매》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지역적으로 혹은 방언적으로 친척, 가족내에서 친근감을 줄수 있으나 많은 장소에서는 소개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좋기는 소개는 구체적으로 촌수에 따라 하고 부를때는 장소를 고려하여 해당된 표준어를 쓰는것이 좋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연변에서는 형의 안해 즉 《형수》를 직접 대면하여 부를때  보통 《아주머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보다 친근감을 줍니다. 《아주머니(아줌마)》라는 말은 그전에는 외삼촌어머니와 고모, 이모 등과 자기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한 녀들을 부를때 쓰이였으나 지금은 주로 형수,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 또는 젊은 남의 안해를 부를때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형의 안해》를 공식적인 장소에서 남에게 소개하거나 또는 직접 부를때에는 타인의 안해와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형수》라고 부르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연변에서는 또 언니의 남편을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역시 친근감은 있지만 제대로 부르려면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아저씨》라는 말도 그전에는 외삼촌과 고모부, 이모부 등과 자기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남자들을 부를때 쓰였으나 지금은 주로 여자들이 언니의 남편, 혹은 친척관계가 없는 젊은 남자들을 부를때 씁니다. 때문에 《자기 언니의 남편》을 공식적인 장소에서 남에게 소개하거나 또는 직접 부를때에는 타인의 남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형부》라고 부르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동서끼리 혹은 시누이와 올케가 서로 부를때 《형님》, 《언니》, 《동생》등으로 부르며 특히는 여자들이 시형과 시아우를 자기 자식들이 부르는대로 《큰아버지》, 《삼촌》 등으로 부르는것은 친근감을 돋구는 친척호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련의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제대로 촌수에 따라서 정확히 부르는것이 바람직합니다.     김동선 기자: 친척관계를 나타내는 말가운데 항렬이라는것이 있습니다. 항렬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현룡수 회장: 항렬이란 친족가운데서 세대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인데 어떤 사람의 자손가운데서 세대수가 같아서 형제벌되는 사람들을 같은 항렬이라고 하며 그들의 아버지벌되는 사람들을 아버지항렬, 아들벌되는 사람들을 아들항렬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재래로 이름을 지을때 《항렬자》 즉 《돌림자》를 썼습니다. 이 《항렬자》에 근거하여 성과 본이 같은 사람끼리 이름만 보고도 대체로 항렬을 가릴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름짛을때 《항렬자》즉 《돌림자》를 쓰지 않고 각각 제멋대로 짓는 현상이 수두록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년세 많은분이 집안에 계시는 경우, 항렬자를 따져서 이름을 짓는 집도 있기는 합니다.     김동선 기자: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민족 족보와 촌수, 친척호칭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봤는데요. 아래에 계속해서 우리 민족 성씨에 대한 개념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부계를 중심으로 하여 각기 자기의 성씨를 갖고 서로 융화하며 발전하여 오지 않았습니까?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일반인을 가리켜 한자말로 《백성》이라고 하였는데 그뜻인즉 《백가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나오기 썩 오래전인 원시사회나 노예사회, 봉건사회초기때만 해도 성씨가 많지 않았고 그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에서만 사용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이 없는 일반인들은 《천민》혹은《상놈들》이라고 불리였으며 이름은 《돌쇠》나 《똥애》처럼 아무렇게나 지어 부르는것이 고작이였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평등의식이 강조되고 인격존중이 하나의 사회적 원칙으로 됨에 따라 점차 누구나 성씨를 갖게 되었습니다.      김동선 기자: 한 인간을 부를때 특정된 호칭은 보통 이름을 부르는것이 통례인데 대개 사람들의 이름은 언어에 따라, 민족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조선, 중국을 비롯한 적지않은 나라들에서는 이름앞에 성씨를 붙여 부르며 일부 서방국가들에서는 성과 부칭, 이름을 붙여서 부릅니다. 우리 민족은 성씨에는 주로 몇가지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우리 민족의 경우, 이름앞에 붙이는 성씨는 일반적으로 같은 족속을 나타내는 칭호인데 한문투를 따서 보통 무슨 《씨》, 무슨 《가》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허》란 성을 부를때면 《허씨》,  혹은 《허가》라고 합니다. 《백성》이라고 하지만 실지 조선민족의 성씨는 100가지를 훨씬 초과해 수백가지에 달합니다. 옛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65성이 기록되여 있고 그후에 나온 《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으로 근 5백가지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한국은 1975년 국세조사에서는 249가지 성으로 되어 있으며 김씨가 전체 한국인구의 21.9%, 리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로 한국총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에 고대사회에서 조선 고유말로 된 성이 있었을수도 있지만 아직 고증할 문헌기록이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조선의 력사문헌으로서 가치가 가장 큰 문헌중의 하나로서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를 들수가 있을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사람의 앞에다다 출신지방의 이름을 붙여서 혈연관계 혹은 지방소속관계를 밝힌 사실이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옛날 백제왕실의 성인 《부여》같은것입니다. 백제왕실은 고구려왕실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자연 이 두 왕실의 출신지방이 같은 《부여》였기 때문입니다.   백제왕실의 《부여》란 성외에도 사, 연개, 협, 해, 진, 국, 목, 백 등 큰 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277년(?)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성은 《고》씨인데 고구려에는 이밖에도 장, 양, 리, 오, 두, 왕 등 큰 성이 있었으며 이런 큰 성을 가리켜 우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라왕실의 성은 박, 석, 김이 위주였고 그 외에 최, 안, 설, 남, 손, 정, 배, 리 등 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헌에 나오는 이러한 성씨들은 대부분이 왕실귀족의 성씨였지 백성들의 성씨는 아니였습니다. 《삼국사기》에 고위계층 즉 왕실이나 귀족들가운데서는 성씨가 점차로 보급되여 가고 있었으나 백성(인민대중)들은 성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숱한 평민들은 이름만 나오고 성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고구려의 온달, 신라의 계백과 관창, 고구려의 창조리, 백제의 도미, 신라의 솔거, 지은 등 평민들에게는 그것이 성씨인지 이름만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성씨에 대해서 살펴보면 우에서 례를 든 왕실의 성씨들을 내놓고도 을지문덕, 연개소문, 명림담부 등의 을지, 연개, 명림 등 성씨가 나오는데 그 뜻이 아마 당시 고구려의 고유어로 되어 있는것 같고 한자를 그대로 쓴 성이 아닌듯 싶습니다. 조선에서 한자성을 널리 쓰기 시작한것은 아마도 후신라때부터라고 보는것이 타당할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바로 중국과의 군사, 정치, 외교래왕이 전의 다른 어느 시기보다 잦았을뿐만 아니라 후기신라 귀족들의 한자말이 열도가 올랐었기 때문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은 당시 신라의 지명을 모두 한자식 이름으로 고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신라의 귀족들은 모두 한자성을 붙였습니다. 이로부터 고려, 리조에 이르기까지 한자성이 위주로 널리 퍼졌고 왕실이나 귀족들내에서 한자성씨를 숭상하고 그 유래를 신비화했거나 또는 한자성씨를 국가의 공로자에게 상으로 주는 이른바 《사성》이라는 제도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백성들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일반백성들의 경우에는 성씨가 보급되지 못하고 이름만 붙여 불리운것이 조선력사 반만년에 깔리운 하나의 상황이였습니다. 고려文宗(기원1047년)때부터 비양반가정에서도 자기성을 가질수있었다고 하지만 극히 제한적이였으며 지어 리조말기에 이르러서도 성이 없는 백성들이 상당수준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전국적범위내에서 통일적으로 호적등기를 하게 되자 조선반도 전 국민이 비로서 성씨를 다 쓰게 되었던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성씨를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성씨가 봉건사회에서 혈연관계 즉 피줄을 상징하는외에도 계급적 차원에서 신분의 귀천을 상징하는 표징이기도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특히 리조시기에 들어와서 유교가 국교로 됨에 따라 남존녀비와 《3강5륜》사상이 풍조로 되었으며 따라서 혈통관념이 보다 강하게 성씨에 깃들게 되었으며 정통이냐? 아니면 갈래이냐? 하는것을 무섭게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에 앞서 한 성씨안에서도 시조가 누구냐 그리고 그 시조가 발상한 고을이름이 어떠냐에 따라 《본》이란 개념이 생기게 되고 엄격이 그것을 준수하여 벌써 리조초기에 귀족들은 한자성앞에다가 발상지명을 덧붙여 《전주리씨》, 《밀양박씨》하고 불렀습니다. 시조의 발상지는  출신지역이 될수도 있고 또 벼슬하여 받은 봉지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고대에 있어서는 성씨 자체가 발상지 이름으로 된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름앞에 선조의 발상지(원래의 성)을 붙이는것이 거의 통례로 되었는데 한자성씨가 보급됨에 따라 발상지 이름이 따로 《본》이란 명칭으로 성씨앞에 붙게 되였습니다. 그후 한 종족에서도 그누가 벼슬하게 되면 따로 가보을 창설하고 성은 원래의 성을 그대로 쓰고 본은 자기의 봉지명으로 고쳐서 따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는데 주요하게 자기의 공덕 혹은 근친의 공덕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같은 성씨에 여러가지 본이 생겨나게 된것입니다. 그때로부터 본이란 기실 한 가족의 발상지만 대표하게 되였으며 지금은 같은 성씨의 다른 종친을 구분하는 의거로 많이 리용됩니다. 이것을 《본관》혹은 《관향》, 《향관》이라고 합니다.   사회, 력사적 변천으로 하여 본관의 이름이 지금은 없어졌거나 또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여진것도 허다합니다. 이를테면 문화 류씨, 가주 한씨, 반남 박씨, 무송 윤씨 등입니다. 《문화》는 신천군안의 옛고을이였고 《가주》는 정주군 가산고을의 별칭이며 《무송》은 고창군 무장고을의 별칭이며 《반남》은 라주군 소속에 있던 별칭이다. 하지만 이런 변천은 성씨의 본관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상기 본관의 개념이 바로 혈연갈래를 가르는데 두고있기 때문에 그냥 옛날지명을 그대로 부르면서 련속되여 왔던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오늘 끝으로 한마디 마무리 말씀을 해주시 바랍니다.   현룡수 회장: 기록에 의하면 리조시기에 본이 가장 많은것은 김씨였는데 499본에 달하였고 리씨는 451본에 달하였으며 최씨는 326본에 달하였고 박씨는 309본에 달하였습니다. 장씨는 245본, 림씨 216본, 조씨 200본 등의 차례로 선보입니다. 본이 많다는것은 그만큼 력사적으로 벼슬을 한사람이 많다는 방증이 되겠죠.   리조후기부터 시작하여 같은 본끼리도 서로 멀고가까운것을 현상이 많아졌는데 족보를 캐여 같은 본안에서 그 문벌이 누구의 자손인가 그리고 자기 혹은 타인과 어떤 관계인가를 밝히였습니다. 하여 본안에 또 파가 생겼습니다.   그러던것이 일본인들이 조선반도를 침입하자 강산도 나라도 잃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이처럼 소중히 하여오던 성과 이름마저 《창씨개명》을 당하게 되었으니 일본제국주의자의 눈에는 조선민족의 성씨와 본, 이름이 하나의 민족적 얼을 받침해 주고 있는 《문화재》로 보였을것입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식민주의자들이 그 숱한 약소민족과 약소국가를 침략하고 략탈하고 유린한 민족적죄행중에서도 유독 일본제국주의자가 다른 식민주의자들도 못했던 죄악 즉 피압박민족의 성씨와 이름까지 빼앗은 추행을 저질러 침략만행에서 간악성의 으뜸으로 꼽히였습니다.   이렇듯 치욕스러운 력사도 끝나고 오늘날에는 끔찍스러운 추억으로 남았으나 하나의 리치 즉 나라, 강산, 민족, 성씨, 피줄 등 개념이 민족재생과 번영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노는가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 맺 음 말 - M     오늘 《클릭, 우리 사는 세상》코너에서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 회장을 모시고 임진년 음력설특집 《전통과 현대의 융합》두 번째 시간으로《우리 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 봤습니다. M      오늘날에 일컫고 있는 우리 민족의 성씨는 무려 230여가지나 됩니다. 일설에는 270여가지로도 말하는데 그중에는 흔히 볼수 있는 리, 김, 최, 안, 정, 박, 윤, 석, 조, 한 등 성씨가 있는가 하면 인, 맹, 공, 탁, 호, 예, 단, 이, 반, 요 등 이른바 벽성도 있으며 황보, 독고, 제갈, 선우, 서문, 동방 등 복성도 있습니다.   슬기로운 우리 민족이 성씨를 쓴 력사는 이미 천년도 넘는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민속학적인 의미에서 볼때 대대로 성을 물리면서 피줄의 흐름을 이어온 자체가 하나의 력사이며 조상들의 지혜로운 유산입니다. 때문에 일제가 《동조동근》을 강요하면서 창씨개명까지 협박했던 그 살벌한 민족수난의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자기의 성씨를 잊지 않고 따라서 자기가 조선민족임을 잊지 않고 줄기차게 살아왔던것입니다.   물론 글로벌화된 오늘날에 와서 종친이요, 한 성씨요 하는 혈연개념이 희박해질수도 있고 또 그 어떤 다른 목적에 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속학적인 각도에서, 력사적인 흐름에서 성씨의 유래를 캐여보는것은 력사지식면에서도 하나의 도움이 될수 있을뿐만 아니라 세계가 날로 좁아져서 마침내 지구촌이라는 개념으로 이 세계를 평가하는 오늘날, 우리 친지들이 가족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다시 한번 새겨보는데서 또 한자리에 마주앉아 담소하는데서나 혹은 기타 교제장소에서나 모두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앞으로 우리는 자신의 족보와 촌수, 호칭, 성씨를 더욱 더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M   이 시간 프로기획과 진행에 김동선이였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월요일 보내십시오.      ※ 주해: 여기 구체 방송내용과 발언시간을 나름대로 정해두었습니다. 꼭 이대로 하시라는것은 아닙니다. 보충할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고 약 33~34분정도로 준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2년 1월 30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2년 1월 30일 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hanmail.net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2년 1월 18일  
60    (연변방송) 2013음력설 효도문화특집 댓글:  조회:2455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2013년 계사년 음력설 특집 M 오늘은 두번째 시간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 회장께서 나와 주셨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우리민족 효도와 장례문화 책임보호단위로서 산하에 《장례효도 연구사무실》을 설치하고 우리민족의 장례와 효도문화의 구체문제에 해석을 드리며 《시대상조》를 설치하고 장례와 효도의 구체 어려움을 해결하여 드립니다. 김동선 기자: 안녕하십니까? (현룡수 회장: 답례) 오늘 현회장님을 모시고 《유가 효도사상의 세가지 핵심요소로부터 본 우리 민족 효문화를 짚어보고 효행을 어떻게 실천할것인가?》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현회장께서 먼저 유가 효도사상의 세가지 요소에 대해서 짚어주시기 바랍니다. 현룡수 회장: 사람들이 효도라고 하면 흔히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이 자녀가 부모에게 효성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실 유가 효도사상은 부모에 대한 효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두개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상에 대하여 숭배하고 제사 지내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를 낳아서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내용입니다. 일찍 은상 시기 갑골문에서 이미 《효(孝)》한자가 발견되였는데 《효(孝)》한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글짜로서 《로(老)》의 략자가 위에 있고 《자(子)》자가 아래에 있습니다. 《효(孝)》한자의 문자형상으로 부터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이 구상할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손이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형상, 둘째는 아들이 로부모를 업고 있는 형상, 셋째는 손자가 할아버지 품에 안겨있는 형상…등이며, 그 함의를 구상해 볼때 첫째는 조상을 숭배한다는 의미로, 둘째는 부모를 잘 모신다는 의미로, 셋째는 가문의 대를 이어간다는 의미로 구상할수 있습니다. 《효(孝)》한자의 바로 《로(老)》와 《자(子)》의 이런 원발생적인 형상을 통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의미가 심각한 효문화를 해석할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가 효도사상의 본질은 바로 생명에 대한 존중의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효를 크게 세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첫째는 지난 생명에 대한 숭배, 둘째는 지금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애호, 세째는 앞으로의 생명에 대한 책임 등입니다. 지난 생명에 대한 숭배는 조상에 대한 숭배와 제사로 체현되고 지금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애호는 부모에 대한 효성, 형제간의 화목, 자기 건강에 대한 확보 등으로 체현되며 앞으로의 생명에 대한 책임은 자식을 낳아 키워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것으로 체현됩니다.   김동선 기자: 방금 현회장께서 유가 효사상의 첫번째 요소는 선조에 대한 숭배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어떻게  해석할수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인류가 문명사회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점차 생명의 보귀함을 인식하게 되였습니다. 당시의 생산력은 극히 락후하였고 사람들의 생명력도 상당히 취약하였으며 그로하여 사람들은 점차 선조에 대하여 숭배하고 감격하면서 선조영령에 기원하는 것으로 현실에서는 얻기 어려운 리상적인 보우를 희망하는 의식이 생기게 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이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니며 선조들이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한세대 한세대 간고하게 이어서 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자기선조의 은덕을 모른다면 그것은 아직 기본인성을 갖추지 못한 짐승보다 못한것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서주시기의 금문중에서 이미 적지않은 효에 관한 기록들이 발견되였는데 대부분 여러가지 제사활동 기록중에서 나타났으며 그때의 효의 기본뜻인즉 바로 제사지난다는 뜻이였습니다.   김동선 기자: 일찍 상고 은상 시기에 중국에서는 천지를 숭상하고 선조를 숭상하는 원시종교가 성행하였었는데 춘추말기에 와서 천지를 숭상하는 의식은 로자에 의하여 도교로 발전하였고, 선조를 숭상하는 의식은 공자에 의하여 유교로 발전하였는데 유교는 또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을 핵심으로 효도사상을 창립하고 발전시켜 유교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체계적으로 제고시키지 않았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공자는 《론어》에서 효를 담론하면서 춘추의 새사상을 계승하여 효를 사람들의 선조와 부모에 대한 진실한 감정으로 환원시켰으며 효의 규례에 합리한 륜리적 의거를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그당시에 이미 부모 작고후의 《삼년상례》라는 것이 성행하였는데 공자왈:《자식을 낳아서 삼년이 지나서야 부모품에서 떨어지더라. 무릇 삼년상례는 천하의 보편규례이니라. 보답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부모의 삼년사랑에 보답할수 있지 않느냐?》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부모 작고후의 《삼년상례》는 그 어떤 성인의 뜻에 의하여 결정된것이 아니라 이미 작고한 부모의 낳아서 키워주신 은덕에 보답하기 위한 구체적 수요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장기적인 력사 대변혁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의식에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 났는데 효도에서 선조에 대한 감은위주의 제사의식은 점차 선조영령으로 부터의 보우위주의 제사의식으로 발전하였고 또 그로부터 효도의 선조에 대한 제사의식은 일종의 사회성 제도로 발전하였다고 하던데요.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효도사상은 점차 동방문화권에서 일체 사회행위의 근본준칙으로 되였으며 일체 사회활동에 종사하는 기점으로 되였습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선조에 대한 제사활동 과정에서 엄격한 집행제도와 번쇄한 순서규범들을 제정하여 놓았는데 그 목적은 제사의 엄숙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선조에 대한 성의를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사람들은 성의를 다하여 선조에게 제사 지내면 선조신령으로부터 바라는 바의 보우를 받을수 있으며 현실에서는 근본 불가능했던 효과가 산생하여 만사가 태평할수 있고 가족이 번영창성할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지금의 관념으로부터 볼때 선조에 대한 제사가 정말로 그렇게 큰 신통력를 갖고 있는가 하는것에 대하여 앞으로 더 연구하여야 할 과제이지만 선조에 대한 제사가 가족성원들의 가족관념을 증강시키고 우량한 전통을 전수하며 가족의 화목을 추진시키는 등 방면에서는 확실하게 적극적인 작용을 할수 있다는것만은 완전히 긍정할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부모를 잘 모신다는것은 유가 효도사상의 핵심요소의 하나가 아닙니까? 이것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현룡수 회장: 효라는 것은 우선 부모를 잘 모시는 것입다. 이것은 살아있는생명을 존중함에 있어서 첫번째 내용입니다. 《효경》에도 《무릇 효라는 것은 부모를 잘 모시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고 기록되여 있습니다. 또 《론어 리인》에도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부모의 년세에 주의돌리지 않을수 없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데 기쁜것이 무엇인고 하면 내 부모가 아직 건재하여 계시기 때문에 시시로 효성할수 있는 그것이고, 걱정이 되는것이 무엇인고 하면 내 부모가 이미 늙어서 오래오래 효성을 다하지 못할가봐 그것이다. 그리하여 말했더라: 사망후 제사를 풍성히 차리느니 살아 계실때 검소하게 잘 모시기만 못하고, 사망후 통곡하느니 살아 계실때 웃으며 효순하기만 못하며, 무뚝뚝하게 시중만 드느니 확실하게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기만 못하며, 사망후 슬퍼 하느니 살아 계실때 정성을 다하기만 못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효에는 두가지 내용이 있는데 하나는 형제간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형님은 동생을 사랑하고 일깨워 주고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 하고 동생은 형님을 존중하고 순종하며 도와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효도에서 주장하는 표준적인 형제관계입니다. 또 한가지 내용은 자기 신체에 대한 보호입니다. 우리의 신체는 부모한테서 전수받은 것으로서 자기 생명만 담겨있는것이 아니라 부모와 전반 종족의 발전희망과 유전인자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위하여 전반 종족을 위하야 자기건강을 확실하게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자녀는 당연히 부모의 제한된 생명을 아끼면서 될수록 오래 장수하시게끔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부모에게 효성하고 부모가 오래 장수하게끔 하려면 물질적으로 충분히 보장하여 드려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정신방면에서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합니다. 부모에게 효성하는 실질은 사랑에 있으며 존중에 있지 않을까요?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공자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가르칠때 항상 자녀 마음속의 진실한 감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항상 맑은 표정》을 하고 《부모의 질환을 근심하여 드리는 것》은 효도의 기본 태도입니다. 제자 자유(子游)가 효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지금 효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양만 하면 되는것으로 여기는데 기실 우리는 개나 말도 사양하고 있다.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부양만 한다면 개나 말을 사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와 같이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물질적 충분한 보장은 효의 한개 면에 불과하며 그 토대우에서 반드시 부모에 대하여 진정으로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살아 계실때는 례의에 맞추어 잘 모시고 사망하면 례의에 맞추어 장례지내고 례의에 맞추어 제사 지내야 합니다. 또 효자가 부모를 잘 모신다는 것은 집에 계실때에는 존경을 드리고, 부양함에 있어서는 즐거움을 드리며, 몸에 병이 나면 치료하여 드리며, 사망하면 애도를 들이며, 제사를 지낼때는 숭엄함을 드리는 것입니다. 총적으로 부모에 대한 효행에는 여러개의 층차가 있는데 핵심은 부모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증자가 말한것 처럼 《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제일 큰효는 부모를 존중하는 것이고, 그다음이 부모를 괄시하지 않는 것이며, 제일 아래가 부모가 죽지않을 정도로 부양만 하는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력사적으로 볼때, 중국이나 조선이나를 막론하고 력사에 길이 남을 효자, 효녀들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김동선 기자: 예, 그렇습니다. 중국력사에 효자이야기가 많습니다. 옛날에 중국의 효자 《로래자》는 여든이 된 나이에도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때때옷을 입고 어리광을 부렸다고 합니다. 위대한 사상가인 공자님은 《부모님이 살아계실때는 먼 길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부모님에게 근심걱정을 끼쳐드린다고 걱정해서 그랬던것입니다. 중국고대의 《곽거》라는 효자는 자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어린 자기 아들을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땅에 묻으려고 땅을 파다가 많은 금은보화가 발견되여 아이도 살리고 모두 잘 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되지만 부모는 죽으면 다시 없다는 고대의 효도 관념이지요.   김동선 기자: 조선 신라시기에 효녀 《지은》이라는 녀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자기의 몸을 노비로 팔아서 늙고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는 력사기록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남아있습니다. 이외에도 조선력사기록에는 많은 효자, 효녀들이 있는걸로 압니다.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조선력사책에는 《손순》이라는 효자가 있는데 그도 중국의 《곽거》처럼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서 자기 어머니의 밥그릇을 다투는 철없는 자기의 아들을 버리려고 구덩이를 파다가 돌로 만든 종을 발견하였는데 그 종을 매달아놓고 치니까 그 소리가 궁궐까지 전해졌습니다. 임금이 그 소리를 듣고 가보라고 해서 신하들이 달려가서 알아보고 돌아와서 그 사연을 국왕에게 알리자 국왕은 손순의 효심을 높이 사서 국가적으로 효자 《손순(孙顺)》을 포상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신라시대에 《향득사지(向得舍知)》라는 효자는 흉년이 들어 아버지가 굶어서 거의 죽게 되자 자기의 허벅지살을 베여 삶아서 대접시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조에 와서는 유교가 국교로 정해졌기 때문에 효자, 효녀들의 이야기가 더구나 많습니다.   김동선 기자: 과거날에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그렇게 중시하고 제창해 왔던 효문화가 현재에 와서는 시대발전변화에 따라 좀씩 색바래져 가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현회장께서는 이 면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지요? 현룡수 회장: 예, 가정을 단위로 하는 농경문화의 바탕우에서 생겨난 효 사상은 전통유가사상의 핵심적인 사상의 하나로 되었습니다. 서방문화의 강력한 충격하에 유교문화권에서의 지도리념이던 유가사상은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유가사상중의 효사상도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업화, 도시화가 가속화되여 농경사회가 해체됨에 따라 대가족제도도 점차 핵가족화되여 가게 되었는데 이것도 전통적인 효사상이 색바래지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김동선 기자: 물론 현실생활속에서 과거날의 효자, 효녀들처럼 효행을 하기는 참으로 어려울것입니다마는 그래도 방법이나 방식, 또는 정도는 부동하더라도 우리 민족 고유의 효문화는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현회장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효문화는 우리의 훌륭한 문화전통이므로 계속 발양하고 이어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적인 생활방식에 맞게 효행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심청이처럼 림당수에 몸을 던진다거나 손순처럼 어린 자식을 버리려고 해서는 안되는거지요.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면 3년동안 부모산소에 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한다는것은 현대사회에서는 도저히 행할수도 없거니와 행해서도 안되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삼년제사만 제대로 지내도 효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마땅히 현대생활의 방식과 생활의 리듬에 맞게 효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국의 24효 이야기나 우리민족의 많은 전통 효자이야기들은 어찌보면 효도를 극단화 우매화 기형화 시켰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옛효 이야기들에서 찌꺼기를 버리고 좋은것만 채납하여야 하겠습니다.   김동선 기자: 그럼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어떻게 효를 행해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많은 방법이 있을것입니다만 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배우자와 자녀를 데리고 자주 부모님 찾아뵙기 2. 명절과 휴일을 부모님과 자주 보내기 3. 부모님을 위한 생신 축하연 마련하기 4. 부모님에게 직접 음식 만들어 드리기 5. 매주 부모님에게 전화하기 6. 부모님에게 용돈 넉넉히 드리기 7. 부모님에게 카드(교통카드, 전화카드 등) 만들어 드리기 8. 부모님의 과거 이야기 경청하기 9. 부모님에게 인터넷하는 법 가르쳐 드리기 10. 자주 부모님 사진 찍어 드리기 11. 부모님에게 사랑 표현하기 12. 부모님의 마음 헤아리기 13. 부모님의 여가 활동 돕기 14. 혼자 사시는 부모님의 재혼 돕기 15. 정기적으로 부모님 건강검진 해드리기 16. 부모님에게 알맞은 보험 들어드리기 17. 부모님과 자주 마음 속 이야기 나누기 18. 부모님을 모시고 중요한 행사 참석하기 19. 부모님에게 자식이 다니는 직장 보여드리기 20.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 혹은 전에 살던 곳 찾아가기 21. 부모님과 함께 운동하기 22. 부모님 일에 적당히 참여하기 23. 부모님을 모시고 옛 친구분 방문하기 24. 부모님과 옛날 영화 함께 보기   김동선 기자: 효행에서 중요한 두 번째 요소인 형제간에 친밀하게 지낸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수 있을까요? 현룡수 회장: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효에서 두번째가 되지요. 가정의 기본관계는 부모, 자식, 형제, 부부 등으로 공동히 구성되였는데 그중 형제관계가 가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전통적으로 형제관계에서 륜리의 기본규범은 첫째는 사랑하며 관심하라는것입니다. 둘째는 너그럽게 대하며 깨우쳐 주라는것입니다. 셋째는 본보기를 보이며 이끌어 주라는것입니다. 본보기란 시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도덕상의 본보기, 특히는 이상 어른들의 솔선수범 작용을 특별히 중시하여 왔습니다. 형님은 동생의 본보기로서 자기의 영향력을 말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행동으로 체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김동선 기자: 형님이 동생에 대하여 이상의 륜리규범을 준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생도 형님에 대하여 이하의 륜리규범을 준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전통적인 륜리규범에서 동생에게도 역시 다음과 같은 전문적인 륜리요구가 제기됩니다. 첫째는 존경하라는것입니다. 동생으로서 문제에 부딛치면 될수록 먼저 양보하면서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하며 이로써 형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는것인데 이것이 바로 형제간의 친밀한 관계를 보증하는 원칙입니다. 둘째는 순종하라는것입니다. 《동생》이라는 이름 본신에 이미 순종의 함의가 들어있습니다. 이런 륜리규범들은 모두 동생이 형님에게 순종하라는 도리를 말하였는데 그렇다고 무원칙하게, 무조건 순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도리가 없으면 순종하지 않을수도 있겠죠.   김동선 기자: 유가 효사상의 세번째 핵심요소는 자손에 대한 양육이라는 점은 어떻게 해석이 가능합니까? 현룡수 회장: 선조에게 제사 지내고, 부모에게 효성하며, 형제자매간에 친밀하게 지내고, 자기를 완벽하게 보전하는 것은 효도사상중의 몇개 내용입니다. 여기에 또 가족의 생명이 부단히 연속되게끔 담보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큰 효라고 할수 있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한세대 한세대 이어지는 가운데서 연속되는데 이것은 역시 인류의 유한생명이 무한생명에 대한 일종의 추구입니다.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 효도를 하는 길중에는 자기의 자식을 낳아 잘 기르는것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삼천가지 불효중에 자식이 없는것이 제일 큰 불효》라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지금 적지않은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극도로 자사적인 무책임한 경향이라고 비평하고 싶습니다. 자기의 자식을 잘 키우고 가르쳐서 이 세상에서 유용한 쓸모있는 인간으로 만드는것은 기실 사람으로서의 기본의무의 하나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3년2월 11일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163.com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3년 2월 7일
59    (연변방송) 2011정월보름 특집 댓글:  조회:2937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정월보름 특집 《전통과 현대의 융합》 방송주제:《우리 민족 전통명절 정월대보름 세시풍속》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 답례) 반갑습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 전통명절 정월보름입니다. 우리 민족의 주요한 전통명절 정월 보름은 음력 정월 15일로서 대보름 혹은 상원절로도 불리웁니다. 상원이라는 낱말은 어떻게 나왔으며 그 유래는 어떻습니까?   현룡수 회장: 음력 1월 15일을 정월 보름, 혹은 대보름이라고 하며 또 상원절이라고도 합니다. 상원절이란 도교계에서 부르던 명절명칭인데 이에 대응하여 음력 7월15일을 중원이라 하고 음력 10월15일을 하원이라고 합니다. 보름명절은 보통 14일부터 시작하여 16일 까지입니다.   김동선 기자: 정월 보름 사금갑조 신일(愼日)이라고도 하던데 어떻게 되어 이렇게 부르게 되었고 또 력사기재에는 어떤 기록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음력 정월의 쥐날[子日]·용날[辰日]·말날[午日]·돼지날[亥日]은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입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신라 경주(慶州) 습속에 정월 첫 번째 쥐날·용날·말날·돼지날을 신일로 여겨 조심하고 삼가서 일을 접어둡니다. 원래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488) 정월 대보름날, 까마귀·쥐·용·말·돼지의 기이한 예조(豫兆)가 있어 왕이 거문고상자[琴匣]의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쥐·용·말·돼지의 날을 신일로 삼았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속담에도 달도(怛忉)라 하며, 슬퍼하고 근심하며 금하고 꺼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달도가(怛忉歌)'라는 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정월 16일 시골 풍속에 어떤 활동도 하지 아니하고 나무로 만든 물건을 집안으로 들여놓지 않으며 기일로 여기니 역시 경주의 유풍(遺風)을 이은 것 같다”라 하여 조선시대에는 16일을 기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금갑(琴匣)의 화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사금갑조(射琴匣條), 혹은 서출지(書出池)의 고사를 뜻합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의 정월 보름 명절행사는 그 전날이 14일날부터 시작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14일날의 풍속에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정월 14일을 작은 보름이라고도 하는데 전통적으로 이날에는 가난한 집에서 부자집 비자루를 빌어다가 자기집 마당을 쓴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인즉 부자집의 운을 빌어서 자기집의 가난운을 말끔히 쓸어버리고 새해부터 좀 셈평이 펴이라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날에는 벼짚으로 왼새끼를 꼬아서 대문, 창고문, 출입문의 문고리에 매놓는데 재물이나 복이 들어만 오고 나가지 말라는 뜻이고, 황토를 물에 풀어 대문, 창고문 혹은 농기구에 복자를 써놓는데 액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뜻입니다.   평소에 밖에 그대로 지저분히 놔 두었던 농기구나 공구들을 이날이면 모두 창고에 넣어 건사하는데 새해에 재수없는 일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날에 치는 점이 새해를 대표한다고 하여 윷돌이나 해몽의 방법으로 새해의 운수를 점쳐 보기도 한답니다.   일부지방에서는 14일에 명절를 쇠고 15일부터는 일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옛날 량반들이 가난한 서민들과 명절을 함께 쇠기 싫어서 보름날에는 일군들에게 밥을 아홉그릇 먹이고는 나무를 아홉짐 해오게 하였다는 풍속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정월 보름이 시작되는 15일의 풍속에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정월보름 혹은 대보름을 전통적으로 烏忌日이라고 하는데 까마귀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오기일의 유래에 대하여 조선의 권1에는 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 제21대왕 비처왕(소지왕)이 즉위한 지 10년인 무진년(기원488)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습니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나와 앞길을 막으며 울어댔습니다. 쥐는 사람의 말을 하면서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시오.” 그리하여 왕은 말을 탄 기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뒤쫓도록 하여 남쪽 피촌에 이르렀는데 두 마리 메돼지가 나와서 서로 싸우니 그장면이 신기하여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의 소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기사가 말을 타고 길가에서 배회하고 있을 때 갑자기 길가의 못이 쫙 갈라지며 어떤 노인이 나와 책을 꺼내어 바치는 것이였습니다. 그 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기사는 이책을 가져다 왕에게 바쳤습니다.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열어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느니만 못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한문관이 급히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서민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임금님인줄로 압니다”라고 하니 왕은 그러히 여겨서 그책을 열어보았습니다. 그 책속에는 “거문고 갑을 쏘아라(射琴匣).”하고 씌여 있었습니다. 왕이 궁궐로 들어가 거문고갑을 찾아 궁수들을 명하여 쏘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평소에 내전에서 분향하던 까까머리중과 궁주가 들어 몰래 사통하면서 왕을 사살할 간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까마귀 때문에 그만 발각되여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상亥일, 상子일, 상午일 등의 날에는 온갖 일을 삼가고 꺼려서 감히 하지 않았으며 점차 전반 정월을 愼重月로 삼아 매사에서 조심하였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삼아 찰밥으로 제를 지냈으며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이 나와서 책을 주던 그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하였는데 바로 오늘 한국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그 옛못입니다.   이외에도 보름행사로 또 소나 말, 닭의 울음소리 내기, 떡돼지 만들기, 싸리나무로 불때기 등 많은 풍속들이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 정월보름 명절행사에는 아주 풍부한 음식문화와 놀이문화들이 포함돼 있는걸로 압니다. 정월 보름날 주요 음식들로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보름날의 전통음식은 오곡찰밥입니다. 신라 비처왕은 까마귀 덕분에 큰 액을 모면하고 그 은공에 보답하고저 매년 정월 15일에 까마귀에게 제사 지내기로 결정하고 문무백관들에게 까마귀가 무슨 곡식을 좋아하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누구도 알지 못하니 할수없이 쌀, 보리, 조, 기장, 콩 등 다섯가지 알곡을 한데 섞어서 밥을 지어 까마귀 제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보름날에는 오곡밥을 지어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월 보름날에는 또 귀밝이술을 빼놓을수 없습니다.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는 보름날에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대보름날 아침에 어른신께 데우지 않은 찬술을 한잔 드시게 하여 귀가 밝아지길 바라고 또한 일년 내내 좋은 소식만 들을수 있기를 기원하였는데 이를 '귀밝이술(이명주:耳明酒)'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부럼깨기행사가 있었습니다. 부럼이란 일종의 견과류(단단한 껍데기의 열매)인데 추석에 선산에서 벌초하면서 뜯어다가 건사하였다가 대보름날 아침에 깨물면서 "일년 열두달 내내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원합니다. 부럼을 깨물때 '딱'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소리는 부스럼 잡귀가 가장 싫어하는 소리여서 잡귀들은 모두 도망간다고 합니다. 부럼이 없는곳에서는 날밤, 호두, 잣, 땅콩 등으로 대체합니다. 또 평안도 의주의 풍속에 젊은 남녀가 이른 아침에 엿을 씹는데, 이것을 '이굳히엿'이라 하며, 부럼깨기와 비슷한 행사입니다. 이외에 대보름의 시절 음식과 나물들로는 오곡, 즉 찹쌀, 찰수수, 팥, 차조, 콩을 섞어 밥을 지어 먹습니다. 대보름엔 아홉 가지 나물에 아홉 번 밥을 먹고 나무 아홉 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집 이상의 성이 다른 사람 집의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합니다.     정월대보름날은 오곡에 보통 먹는 멥쌀 대신 찹쌀을 넣습니다. 찰밥은 멥쌀밥보다 영양분이 풍부하고 차진 기운이 많아 소화도 잘 된다고 합니다. (卷 第一)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보면 신라 제 21대 소지왕(炤智王)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날아온 까마귀가 왕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래서 보름날 까마귀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정월대보름을 「까마귀 제삿날(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합니다.   나물들로는 봄이 오면 풀과 나무 그리고 온갖 동물들이 힘찬 도약을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몸이 나른하고, 자꾸 졸리며, 입맛도 없어져 공부나 일을 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겨우내 푸른 채소를 충분히 섭취하지 못한 우리 몸은 부신피질호르몬(항(抗) 스트레스 작용을 함)을 만들어내는 비타민이 거의 고갈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날씨가 따뜻해져서 갑자기 체온이 올라가게 되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피부혈관이 확장돼 피가 살갗 쪽으로 몰리면 자연히 내장의 피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고, 소화액의 분비도 떨어져 식욕부진이 생기는데 이게 ‘춘곤증’이라고 합니다. 이때 우리는 자연에게서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복이 있었습니다. 새봄이 오자마자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온 들판에는 파릇파릇 온갖 나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보면 요즘 우리가 먹는 나물은 산나물 96종류, 들나물 60종류, 재배채소 23종류에 달한다고 전합니다. 겨우내 부족했던 비타민과 무기질을 보충하기 위한 우리 조상들의 나물먹기는 슬기로움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정월 보름이면 많은 전통민속놀이들이 있는데 례를 들면 줄다리기, 망월, 달집태우기, 놋다리 밟기, 고싸움놀이, 차전, 석전, 나무쇠싸움, 홰불싸움, 연띄우기, 윷놀이, 다리밟기 등이 있고 또 중국조선족들의 보름날 민속놀이에는 주로 성주풀이, 망월, 다리밟기, 얼음판뒹굴기, 윷놀이, 홰불싸움, 연띄우기, 줄다리기 등이 있지 않습니까? 먼저 조선반도에서 전해져 온 줄다리기부터 알아보겠는데요. 줄다리기 놀이속에는 어떤 문화가 슴배여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충청도 풍속에 동네별로 편을 갈라 동아줄을 서로 힘껏 잡아당기는 시합을 벌이는데, 이것을 줄다리기, 혹은 줄싸움이라 합니다. 줄싸움에서 줄을 끌어간 편이 이기는 것이며, 그 동네가 풍년을 차지하게 됩니다. 줄다리기에서 이기려면 줄을 당기는 사람들이 힘에 세야 할뿐만 아니라 지휘를 잘 해야 하며 또 응원도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의 줄다리기 놀이와 비슷합니다. 경기지방 풍속도 이와 같았고, 또 승려들도 이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달집태우기 민속놀이는 어떻게 진행되며 또 어떤 문화적 함의가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달집태우기는 어른들의 불놀이입니다. 이 달집은 달이 막 떠오르는 순간에 불을 붙여 태워야 하는데 달집에 먼저 불을 붙이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립니다. 맨 먼저 달집에 불을 지르면 총각들은 장가를 가고 득남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달집 불에 콩을 구어 먹기도 했는데 그러면 한 해 동안 이빨을 앓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달집의 불이 활활 잘 타고 연기가 많이 날수록 마을이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산불위험으로 불가능한 놀이입니다. 김동선 기자: 그럼 놋다리 밟기 놀이는 어떻게 진행됩니까?    현룡수 회장: 일종의 살막이 놀이인데 안동지방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부녀자들 중의 늙고 허약한 사람들이 성 밖으로 몰려나와 차례로 길게 한 줄로 죽 늘어 엎드린 다음 한 어린 소녀를 선녀로 선출하여 좌우에서 손을 잡아 붙들어 부축하면서 그 위를 왔다갔다 걷게 합니다. 그러면 어린 소녀가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의 등을 딛고 걸어 다닙니다. 그 어린 소녀가 "이것이 무슨 다리인가?" 하고 유창한 가락으로 선창을 하면 엎드려 있는 부녀자들은 일제히 "청계산(淸溪山) 놋다리지" 하고 후창(後唱)을 합니다. 이렇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 저쪽에서 이쪽으로 왔다 갔다가 하면서 놀다가 새벽닭이 울어야 그칩니다. 금년 연변텔레비 음력설야회에 이 놋다리 밟기 장면과 비슷한 춤이 있은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고싸움놀이는 어떤 놀이입니까?   현룡수 회장: 원래 “고”라는 것은 저고리 고름을 맸을때 동그란 고리모양을 말하는데 고싸움의 고란 바줄과 벼짚으로 크게 둥그런 고리 모양을 만든후 룡처럼 몸체을 길게 늘인것을 말하며, 두개의 고가 서로 맞붙어 싸움을 벌인다 해서 고싸움이라 부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놀이는 정월 초순경 10세좌우의 어린이들이 길이 5∼6 m의 고를 만들어 애들 고싸움부터 시작됩니다. 다음날에는 아래 ·위 마을 15세 가량의 어린이들이 합세하고, 이를 구경하던 20여 세의 청년들까지 참가하여 점차 규모가 커집니다. 이때가 대개 정월 10일경이 되는데,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고싸움 분위기에 휩싸여 두 마을의 책임자들이 모여 대항전을 벌이기로 합의하고 대형고를 만들며 준비에 들어갑니다. 대형고가 완성되면 14일 밤에 각기 당산제(堂山祭)를 지내고 15일은 쉰 다음 16일에 고싸움을 벌이는데, 오전에는 두 마을 합동으로 농악굿을 하고, 오후에 고를 메고 싸움터에 집결합니다. 고를 멘 줄패장들이 돌진하여 상대방의 고를 찍어 눌러 땅에 닿게 하는데, 먼저 땅에 닿는 편이 지는 것으로 합니다. 그 사이 농악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싸움은 격렬하게 전개됩다. 싸움은 20일까지 계속되는데, 승부가 나지 않으면 2월 초하룻날 줄다리기로 결판을 냅니다.   김동선 기자: 이번에는 차전과 석전 놀이에 대해서 설명을 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차전놀이는 동네별로 편을 갈라 외바퀴 수레를 밀고 나와 싸웁니다. 승부를 겨루어 그 해의 풍년을 점치는데, 쫓기는 편이 흉년이 든다고 합니다.   석전(石戰) 놀이는 두마을 사람들이 두 패가되어 몽둥이와 돌을 들고 맞서 함성을 지르며 싸움을 벌이는데, 패하여 달아나는 편이 지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놀이이므로 인명피해가 나지않게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속설에 이기는 지방에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나무쇠싸움은 어떻게 하며 이 놀이를 통해서 우리 민족은 어떤것을 추구했습니까?   현룡수 회장: 나무쇠 싸움은 목우전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나무로 만든 소끼리 싸움을 한다는 민속놀이로 매년 음력 정월보름을 기하여 초순경부터 시작됩니다.   줄다리기가 서로 당기는 것인데 대비해, 나무쇠 싸움은 그와 반대로 서로 밀어부쳐 상대를 눌러버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삼각형으로 아름드리 소나무를 얽어놓고 거기 직각이 되게 가로대를 얽어놓으면 마치 대형 탱크처럼 웅장합니다. 이 나무쇠를 30여명이 어깨로 받쳐들고 그 위에 대장·중장·소장 등이 타고 나무쇠를 지휘합니다. 정월 13일경 두편은 서로 풍악을 울리고 시위를 하는데 기발을 날리며 호호탕탕하게 부락을 돌고, 말을 탄 장군들은 서로의 우세함을 과시합니다. 14일 밤은 술과 풍악으로 각각 사기를 돋군뒤 15일이 되면 아침부터 풍악과 기, 서낭대를 앞세우고 앞뜰인 갯벌로 나갑니다. '오왜승전이요'하고 소리 높이 외치며 두 나무쇠를 서로 겨루다가 서로 높이 들어 맞부딪칩니다. 그리고 밀어서 한편을 땅에 닿게 누르면 이기게 되는 것인데, 진 편은 이긴 편에게 술을 사고 대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왕의 9.3축제에서 고싸움 놀이와 이 목우싸움놀이 표현이 있었던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홰불싸움은 어떤 놀이입니까? 현룡수 회장: 청장년들은 저녁밥을 일찍 먹고 불이 잘 붙는 싸리나무 묶음에 삼대를 섞어 홰대를 만들어 가지고 달맞이하기 좋은 산으로 올라가 농악을 울리면서 한바탕 놉니다. 그러다가 보름달이 솟아오르면 저마다 홰불을 붙여들고 농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기세를 올립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춤을 추고나서 맞은편 산의 홰불군들과 신호를 주고받은 다음 량편에서 환성을 지르며 들판으로 달려나가 논밭으로 이리저리 뛰여다니면서 저마다 넓은 면적의 잡초에 불을 지르거나 혹은 상대편의 홰불을 두들겨 꺼버리기도 합니다. 홰불놀이는 홰불군들이 일제히 달려나가 상대편 진지를 먼저 빼앗는 편이 이기는것으로 됩니다. 이긴 편의 홰불군들은 다시 농악을 울리면서 홰불을 들고 춤을 추며 승리를 경축합니다.   정월보름날에 전통적으로 진행된 홰불놀이는 의례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힘과 용기를 돋구는 경쟁놀이였으며 겨울을 난 들쥐들과 메뚜기알, 해충의 번데기, 돌피와 잡초의 씨를 태워버리는 등 농사에 해를 끼치는 모든것을 태워서 없애버리는 유익한 놀이이기도 하였습니다. 홰불놀이를 《들불놀이》, 《쥐불놀이》라고도 합니다.   김동선 기자: 연띄우기는 어떻게 하게 됩니까?    현룡수 회장: 다양한 종류의 연(鳶)에 얼레를 만들고 거기에 연줄을 감아 연을 공중에 띄워 바람의 방향에 따라 연을 날립니다. 연놀이는 겨울부터 시작하여 늦봄까지 즐기는 놀이로 우리민족 풍속에서는 연을 겨울부터 정월 보름까지 날립니다. 속설에 의하면 고려 때 최영(崔瑩) 장군이 탐라(眈羅)를 정벌할 때 연을 만들어 썼다고 합니다.  연을 날리다가 다른 사람의 연줄과 서로 맞걸어 남의 연줄을 끊어 놓으면 이겼다고 좋아하는데, 이것을 연싸움이라 합니다. 연싸움을 심하게 하는 사람은 사금파리 가루나 구리 가루를 연줄에다 바르기도 하는데, 그러나 연줄을 거는 방법과 연을 날리는 방법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중국조선족의 정월 보름날의 주요한 민속놀이의 하나인 먼저 성주풀이에 대해서 알아볼가요?    현룡수 회장: 성주풀이에 대하여 전번의 음력설 특집에서 간단히 언급한적이 있습니다. 우리연변의 안도현 장흥향 신툰촌에서는 오늘까지도 해마다 설과 보름이면 성주풀이를 진행하여 왔다고 하는데 참으로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촌에서 농악대를 조직하여 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집집을 찾아다니며 축복하여 줍니다. 매 집 앞마당에 이르러 “이집문 좀 여소, 문안열면 아니 간다오.”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그집에서 접시에 기름을 담아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불을 답니다. 그다음 대야에 쌀을 담고 등잔을 그우에 놓고 밖으로 들고 나와 마당에 상을 놓고 그 우에 놓습니다. 그러면 농악대 성원들이 그 상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는데 한 사람이 높은소리로 성주풀이를 부르며 그집을 축복하여 줍니다.   농악대는 마당복판에 놓은 상주위를 돌면서 한바탕 성수나게 춤을 추고는 또 다음집으로 찾아 갑니다.   우리민족의 神에는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숭상하는 가택신(家宅神)이 있고, 부락에서 숭상하는 부락신(部落神)이 있으며, 무속에서 숭상하는 무신(巫神)과 그 밖의 잡신 등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숭상하는 신으로는 성주신, 조왕신, 문신, 측신, 지신, 업신, 삼신, 제석신, 조상신, 왕신(王神), 정신(井神) 등 11종이 있으며, 마을신에는 136종이 있고, 무신으로는 114종이 있습니다. 이밖에 잡신들 까지 모두 합치면 민간신앙에서 숭상되는 신은 지금까지의 통계에 모두 273종이나 됩니다. 그중 성주신은 가택을 주관하는 신으로서 가택의 령혼입니다. 한가문의 안택과 번영은 사람들의 노력만이 아닌 가택의 인소에도 원인이 있다는 이런 리념이겠죠. 해마다 성주신을 존중하고 축복하여 주어야 그 집에 복이 깃든다고 전통적으로 믿어왔습니다. 자기가 살고있는 집을 건출물로서가 아니라 신으로 높이 모셔 받들라는 뜻입니다.   김동선 기자: 망월 즉 달바라보기도 정월 보름의 중요한 민속놀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망월은 주로 어떻게 진행됩니까?   현룡수 회장: 보름날에 동산에서 휘영청 떠오르는 둥근달을 구경하는 것을 망월, 혹은 달맞이라고 합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 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그해에 재수가 좋다"고 적혀 있습니다. 망월놀이는 보통 앞에서 언급한 달집태우기와 함께 진행합니다. 달이 뜨기 전 뒷동산에 올라가서 생솔가지를 꺾어 모아 불은 지로고, 그 연기로 달을 그을린다고 합니다. 달이 떠오르면 가장 먼저 달을 본 사람이 "달 봐라"라고 고함을 지르면,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달을 향해 큰절을 하며 각자의 소원을 기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놀이는 산불위험이 있어서 한국에서도 이미 금지했다고 합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보름달이 떠오르는 그 순간을 리용하여 망월제를 지내기도 합니다. 망월제는 보통의 망월놀이보다 좀 엄격하고 고급적인 행사로서 새해에 대한 축복도 보다 체면스럽고 다방면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정월 보름이 되면 다리밟기라는 민속놀이도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다리밟기에 대해서 설명을 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다리밟기를 踏橋라고도 하는데 달이 뜰 무렵에 다리밟기를 하면 그해에 내내 다리가 튼튼하다고 합니다.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지역의 크고 작은 다리를 모조리 찾아가서 건네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또 열두다리만 골라 건네는 방식도 있고, 또 다리[橋]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자기 나이 수만큼만 다리를 밟는 방식도 있습니다.   다리밟기는 본래 중국의 설날 풍속이라고 하는데 한나라때부터 시작하여 북경일대에서는 청나라때에도 아주 성행했다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얼음판 뒹굴기는 어떻게 하게 됩니까?   현룡수 회장: 달맞이가 끝나고 다리밟기가 끝나면 강에 나가 얼음판 우에서 실컷 딩굽니다. 그러면 주로 허리병이 다 떨어진다고 합니다. 한어에서 얼음을 氷이라 하고 병도 病이라 합니다. 발음이 같은것을 리용하여 얼음신을 속여서 귀찮은 내몸의 병을 얼음우에 떨어놓는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김동선 기자: 윷놀이는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놀이의 하나인데 그속에는 어떤 문화적 함의가 포함돼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윷놀이는 조선의 삼국시대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놀이로서 아마도 선사시대의 부족이나 씨족의 명칭인듯 합니다. 네개의 매를 던져서 도, 개, 걸, 윷, 모라는 결과를 얻는데 이는 각기 돼지, 개, 양, 소, 말 등 가축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해마다 년초에 농사의 풍흉을 占치는 卜術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윷을 던져서 주역의 64괘를 도출해 낼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가족, 친척,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마당, 안방, 시장의 빈터에서 남녀노소가 어울려 즐기는 놀이거리가 되어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정월 대보름에 16일날 풍속에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보통 보름행사는 14일에 시작하여 16일에 끝냅니다. 연변의 조선족들은 보름날이 아닌 16일을 까막닭의 날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烏忌日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찌하여, 언제부터 하루 밀리게 되였는지는 아직 해명할수가 없습니다.   저의 기억에 의하면 과거 저의 어머니는 보름날 저녁에 오곡밥을 지어서는 굴뚝목에 가져다 놓고, 16일 신새벽이 되면 명심하고 일어나서 급히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짚단을 하나 넣고 불을 지폈습니다. 그 연유를 물은즉 까마귀는 굴뚝에서 가장 먼저 연기나는 집부터 찾아가 까마귀밥을 먹고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집은 그해 내내 별탈이 없이 무사할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보편적으로 까마귀를 흉조로 여기고 각 방면에서 싫어하며 까마귀 울음소리만 들려도 퉤- 하고 침을 뱉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烏忌日 문화의 또 다른 변종이라고 생각됩니다.   김동선 기자: 정월 보름 명절에 금기시하는 금기사항같은것은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대보름 금기로 김치가 있는데, 그맛있는 김치도 보름날에는 먹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물, 눌은밥, 고추가루를 먹으면 그해에 벌이나 벌레에 쏘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찬물을 마시면 여름내 더위를 먹고 놉을 얻어 일을 할 때마다 소나기가 오기 때문에 찬물을 마시지 말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비린 것은 여름에 파리를 불러오고 몸에 부스럼이 생긴다고 여겨서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나물도 먹지 말라고 하는데 첫술에 나물을 먹든지 또는 나물을 많이 먹으면 그해 논밭에 잡초가 무성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속설이니까 상관하지 마시고 그냥 드셔도 괜찮을 것입니다.    농사와 관련된 금기사항이 수없이 많습니다. 보름날 아침에 키가 작은 사람이 찾아 오면 그해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지 못한다고 여겨 경북 지방에서는 금기입니다. 또 보름날엔 음식을 장만해도 칼질을 하지 않는다던가, 빨래를 널지 않는다던가 하는것도 풍년농사와 관련된 금기입니다. 그리고 보름날 물동이를 이면 그해 큰소나기로 인해 홍수가 져서 농사를 망친다고 하였으며, 보름날 머리에 빗질을 하면 편두통이 생긴다고 하며 이런것도 금기에 들어 있었습니다. 하여튼 아까 까마귀 전설에서 언급했듯이 전반 정월은 愼重月이므로 매사에서 조심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출연연사: 감사합니다.   ※ 주해: 여기 구체 방송내용과 발언시간을 나름대로 정해두었습니다. 꼭 이대로 하시라는것은 아닙니다. 보충할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고 약 33~34분정도로 준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58    (연변방송)2011음력설 특집--2 댓글:  조회:2011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2011년 신묘년 음력설 특집 (두번째 시간) 방송주제:《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세배돈을 정확히 알고 쓰게 할것인가?》 출연연사: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조선언어문학학부 학부장 우상렬 교수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회장     김동선 기자: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 답례) 반갑습니다. 우리 민족 전통명절 음력설과 정월보름이 방금 지났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이미 받은 세배돈을 다 썼을수도 있고 또 지금 한창 세배돈을 어떻게 쓸가 고민하는 아이들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2011년 02월 15일자 흑룡강신문에 할빈시 향방구에 사는 한 어린이가 설기간에 받은 세배돈 1만3500원을 이틀새에 다 써버렸다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전 그 기사를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또 한 어린이는 자신이 받은 세배돈을 부모님이 다 빼앗아 건사했다고 법원에 이건 불법이라면서 신고한다는 전화를 했더라는 사연도 들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현상들이 비일비재인거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두분을 모시고 자녀들이 세배돈의 의미을 정확히 알고 올바르게 쓰게 하자는 취지에서 이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두분께서는 이런 현상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갖고 있습니까?   우상렬 교수: 교육자의 각도에서 이런 현상을 보고 느낀 점을 간단하게 3분 정도 말씀주십시오. (세배돈사용에서 틀린 점을 주로 거론해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설이면 본격적으로 아이들한테 세배돈을 주기 시작한것은 아마도 개혁개방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문화혁명전에도 설에 세배하는 풍속은 있었지만 세배한 후에는 치하의 덕담이나 듣고 콩알사탕이나 엿가락 같은 것을 얻어 먹을수 있었으며 간혹 새학기 학용품으로 연필이나 필기장, 혹은 책가방같은 것을 선물 받을수 있었습니다. 그당시 경제수준은 락후하였지만 돈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높아서 십전이면 콩알사탕을 사서 온동네 아이들이 모두 나눠 먹을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생활형편이 많이 좋아졌으며 사회의 모든 세포가 돈으로 운영되는 세월이므로 설에 아이들한테 세배돈을 얼마간씩 주면서 금전관념과 소비관념을 심어 주는것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설문화라고 생각됩니다. 탈은 세배돈을 너무 많이 주어서 생깁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너무 많으면 탈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부모의 천성일진대 자고로 자식에 대한 사랑에도 현명한 사랑과 아둔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세배돈을 너무 많이 주는것은 현명한 처사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잘못하면 자기의 자식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방금 우에서 말한 현상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바가 아주 큽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설에 웃어른에게 세배를 하면 어르신들은 세배를 한 자녀나 손자, 손녀 혹은 마을청년들에게 일정한 액수의 세배돈을 주지 않았습니까? 여기에는 어떤 문화가 내포돼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세배돈이라는 것은 기실 현대에 와서 새롭게 산생한, 아직 그리 성숙되지 못한 우리민족의 례물문화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족들은 옛날부터 명절이나 생일이면 아이들한테 “红包”라는 것을 줍니다. “红包”라는 것은 돈으로 주는 례물인데 아이들에게 줄때에는 단지 용돈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좋은 행운을 만나서 앞으로 많은돈을 벌라는 보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한어에서 红이라는 것은 행운을 상징하며 리익을 의미하므로 붉은색갈은 전통적으로 한족들이 특별히 사랑하는 색갈입니다. 그리하여 명절이나 희사를 치르는 행사때에는 주위가 온통 붉은 색갈입니다. 우리민족의 주요한 문화의 뿌리는 모두 한족들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데 세배돈이라는 이 신생 례물문화도 기실 한족들의 “红包”문화에서 배워 온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배돈의 진정한 함의는 새해에 아이들에게 많은 행운이 차례지라는 어른들의 바램입니다.     김동선 기자: 지금 사람들, 특히 젊은 부모나 그 자녀들은 이 세배돈의 의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것 같습니다. 조부모나 부모들은 그저 세배돈을 많이 주는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것 같고 또 세배를 하는 어린이들은 세배돈을 많이 받으면 좋은줄로만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 되면 원래 세배돈의 의미가 퇴색되고 변질되는게 아닙니까?   우상렬 교수: 이 면에 대한 견해 약 3분 정도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세배돈이라는 것이 아주 선진적인 문화라고는 말할수 없지만 어느정도 시대를 반영하는 문화입니다. 이제 금방 우에서 언급 하였다 싶이 세배돈의 진정한 함의는 새해에 아이들에게 많은 행운이 차례지라는 어른들의 바램입니다. 세배돈 자체가 벌써 행운의 시작이지요. 아이들의 행운을 가동해 주는겁니다. 중국 사람들은 화는 단독으로 오지않고 행운이 오면 쌍으로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어른이 오늘 아이들의 행운을 가동해 주었으니 후에 이 아이들에게 더 큰 행운이 적어서 한번은 꼭 차례진다는 일종의 믿음에 가까운 바램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부유한 집 어른들은 행운 시작의 첫 차원을 높이는 의미에서 아이들의 예상을 초월하여 세배돈을 엄청나게 많이 주게 되는 것입니다. 행운이란 바로 뜻밖의 기쁨을 의미하죠. 사전에 예상했던 일은 대단히 좋은 일일지라도 행운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세배돈 문화는 반드시 진정으로 아이들의 건강성장에 유리한 방향에로 발전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동선 기자: 그럼 이제부터 우리 부모들이나 조부모들이 자녀나 손자, 손녀들에게 세배돈을 줄때 어떤 면에 주의를 돌려야 할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지요?   우상렬 교수: 이 면에 대한 견해 약 3분 정도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도대체 아이들에게 세배돈을 얼마쯤 주어야 적당량인가 하는 표준은 있을수가 없습니다. 세배돈을 주겠으면 자기집 형편에 따라서 적당히 주되 그 표준은 자기로 정해야 할것입니다. 좋기는 세배돈과 례물의 형식을 결합하여 세배돈은 상징적으로 하고 례물을 주체로 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봅니다. 형편이 좋아서 많이 주었다고 하여도 결코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내돈을 내자손들에게 선물하는데 그누가 간섭합니까? 관건은 아이들에게 적극적인 금전관념과 소비관념을 심어주는 동시에 창업관념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부자집에서는 아이들에게 부자집 조건에 부합되는 기업관념, 사회관념, 자선관념을 심어주고 가난한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우선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간고하게 창업하여 꼭 성공해야 한다는 관념을 심어줍니다. 아이들과 아이들 사이에 서로 비기면서 주눅이 들수도 있는데 경쟁의식을 심어줌에 있어서도 질줄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이길줄 모르게 된다는 도리를 가르쳐 줍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부모들은 흔히 자녀에게 세배돈을 준후 그 돈을 전부 몰수하여 대신 건사하였다가 일부만 자녀에게 주거나 또는 전혀 주지 않고 자신들이 전부 써버리는 경우도 있는데요. 계속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자녀들의 불만을 야기시킬수가 있고 모순이 격화될수도 있으며 또 할빈시 향방구의 손강어린이처럼 극단적인 세배돈 사용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녀들이 세배돈을 올바르게 관리하게 하고 정확하게 사용하게 하는것은 우리 부모님들의 책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우리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세배돈을 준후 그 세배돈 관리를 어떻게 하게 인도하여야 할지를 주제로 본격적인 토론을 하도록 하지요? 먼저 우교수님부터 말씀주십시오.   우상렬 교수: 교육자의 립장에서 이 면에 대한 견해 약 3분 정도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우리민족은 중국에 들어와서 생활한지도 이미 백여년의 력사가 있고 이미 한족들을 포함한 여러민족들과 평등한 공민이라는 것을 헌법으로 보장받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이민의 근성을 완전히는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주요표징의 하나가 바로 우리에게는 아직 한족들의 그런 강렬한 금전의식이 결핍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조선족은 대부분 한국에 가서 돈벌이 하기 때문에 본지방에서 풋돈을 벌면서 어렵게 장사하는 한족들보다 비교적 돈벌기가 쉽습니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돈에 대한 애착심이 한족들보다 못합니다. 조선족들은 한국에서는 소처럼 벌어서 중국에 와서 정승처럼 쓴다고 하는데 세배돈도 이런 의식의 한가지 표현이라고 봅니다.   현유의 교육체제에서 아이들을 전혀 단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선 우리의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우리가 자랄때의 그 시대의 아이들과 완연히 다릅니다. 그당시 금전사상은 사악한 사상으로 취급되여 시대적 비판을 받았지만 지금은 금전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영웅이요 강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세배돈 사용문제에서도 간섭하고 제한하기 보다 적극적인 방면으로 인도하는 편이 현명한 처사라고 봅니다.     해답 요점: 우상렬 교수님께서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세배돈 관리가 어려운 경우에는 부모가 대신 관리하되 아이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고 또 세배돈 관리가 가능한 자녀에 대해서는 올바른 관리방법과 사용방법을 알려주면서 아이가 세배돈을 정확하게, 올바르게 사용하게 하도록 적극 인도하는 쪽과 구체 교육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주십시오.   현회장님께서는 세배돈에 깃든 민속문화에 대해서 자녀에게 설명해주면서 세배돈을 올바르게 알고 관리하게 하는 면에서 구체적 교육방법을 설명주십시오.     김동선 기자: 그럼 우리의 자녀들은 세배돈을 어떻게 유익하게, 올바르게 써야 할까요?   우상렬 교수: 자녀들의 립장에 서서 이 면에 대한 견해 약 3분 정도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공부하는 의무외에 아직 사회적 의무가 없기 때문에 돈으로 자체로 할수있는 일이 그리 많지 못합니다. 학비를 댄다던가, 학용품을 산다던가, 컴퓨터를 산다던가 하는 문제는 모두 어른들의 일이고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깁니다. 아이들은 세배돈을 받아서 대부분 경우에 유희나 오락에 다 써 버립니다. 유희나 오락은 바람에 날려보내는 연기와도 같아서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탕진할수 있습니다. 유희나 오락에 돈을 많이 썼다고 하여도 그 당시 감수가 조금 다를수 있지만 결코 건강지수거나 지력상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치게 오락에 빠져들면 오히려 파괴성 흔적만 남기고 자기이 심신을 해치게 됩니다. 어른들은 세배돈을 준후 이 점을 반드시 아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며 적당히 단속과 인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동선 기자: 끝으로 두분께서는 세배돈의 정확한 관리와 사용에서 올바른 방향을 간단하게 짚어주십시오.   우상렬 교수: 이 면에 대한 견해 약 3분 정도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세배돈이 많으면야 유익하게 쓸곳이 많고도 많습지요. 제가 만약 세배돈을 유익하게 쓰는 자문위원회에서 사업한다면 수선 권장하고 싶은것은 여러가지 보험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식을 사는것도 좋은 일입니다. 결국 몽땅 밑졌다 해도 유희장에 처넣는 돈보다는 훨씬 가치있게 소비한 셈입니다. 돈을 버는 시험을 해 봤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명승지 유람이나 외국 유람을 하는것도 아이들의 성장에 아주 유리한 일입니다. 잠시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아이의 이름으로 은행에 저축하였다가 후에 그 어느때에 좋은 착상이 불시에 떠오르면 그 돈을 찾아내와 실시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김동선 기자: 두분,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출연연사: 감사합니다.     ※ 주해: 여기 구체 방송내용과 발언시간을 나름대로 정해두었습니다. 꼭 이대로 하시라는것은 아닙니다. 보충할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고 약 33~34분정도로 준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1년 2월 21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1년 2월 21일 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hanmail.net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1년 2월 17일
57    (연변방송)2011음력설 특집--1 댓글:  조회:2876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음력설 특집 (첫번째 시간) 방송주제:《우리 민족 전통명절 음력설 세시풍속과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 출연연사: 연변주당학교 정보연구실 천만수주임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회장   김동선 기자: 두분,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 답례) 반갑습니다. 이제 사흘만 있으면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입니다. 우리 민족의 주요한 전통명절은 력사시기에 따라 부동하지만 음력설은 그 어느 시기에나 최대의 전통명절로 되었다고 하던데요? 현룡수 회장: 이미의 史料고증에 의하면 신라때에 우리민족은 이미 설을 명절로 삼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양, 동지 등 날을 9대 명절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설이 중요한 명절로 자리잡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설의 어원에 대해서 설명해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설의 어원에 대하여 많은 설법들이 있는데 완전하게 고증된 설법은 아직 없습니다. 저는 별도로 歲日(혹은 歲一)說을 주장합니다. 설이란 나이를 한살 더 먹는 날이라는 뜻에서 한어문구로 歲日이 됩니다. 그리고 설이 한해의 제일 첫날이라는 뜻에서 한어문구로 歲一가 됩니다. 우리민족 구전문화의 규률에 대비할때 이 날이 오랜후에 날로 되는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근근히 저의 견해이므로 참고로 제공하는 바입니다.   김동선 기자: 력사기재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어느때부터 설을 쇠였다고 기록되여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설날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명절로 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고증할수는 없으나 우선 태음력법(历法)에 기준한다는 점을 감안할때 6세기 좌우에 중국으로부터 태음력법을 받아들인후의 일이라는 것은 의심할바 없습니다. 한편 력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수 있습니다. 신라편에는 “신라진덕왕 5년 봄, 정월 초하루날 왕이 조원전에 나앉아 백관들의 신년축하를 받았다. 이때부터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의례가 시작되였다.”고 씌여있고, 중국의 '수서(随书)'에는 신라인들은 “매년 정월초하루날 아침에 서로 축하를 올리며 왕은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에게 제사를 올린다”고 기록되여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민족은 신라때부터 이미 설을 명절로 하였다는 것까지는 확실하게 고증이 된 셈이죠.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 음력설 명절행사는 섣달 그믐날부터 시작된다고 들었는데요. 섣달 그믐날 행사는 주로 어떤것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전통적으로 섣달그믐날이면 집안팍을 깨끗이 청소하고 묵은 먼지를 말끔히 떨어 냅니다. 그리고 설그림을 사서 붙입니다. 섣달 그믐날부터 주부들이 설날 음식을 만드느라 아주 분주하지요. 바깥어른은 윷돌이나 화투를 가지고 새해 운수를 점쳐 보기도 합니다. 그믐날까지 가족들이 기본상 다 모이게 되므로 집안이 특별히 흥성하여 명절기분을 한결 짙게 합니다. 지금은 온가족이 모여앉아 여러가지 놀이도 놀고 또 을 보면서 각자의 새해 운수를 찾아 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오락이지요.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음력설이면 설날 첫 행사로 세상 뜬 4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차례를 지내던데요. 우리 연변지역에서는 잘 지내지 않지만 조선반도나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다 지내고 있습니다. 차례는 어떻게 지냅니까? 현룡수 회장: 생활형편이 좋아지면서 우리 연변에도 지금 설날에 차례를 지내는 집이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병풍이나 만장을 둘러치고 그 앞에 차례상을 진설하고 설음식을 갖추어 놓는데 밥과 국은 놓지 않습니다. 차례에서 제사지낼 조상은 4대 조상까지라고 하지만 지금은 2대조상까지라도, 즉 할아버지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있는 가문이라면 대단한 효자가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조상의 신주는 위패로 할수도 있고 지방으로 할수도 있으며 또 유상으로 할수도 있는데 병풍에 걸어 놓거나 제상우에 세워놓습니다. 그다음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부어 놓고 가문의 항렬 순서에 따라 나와서 남자는 두번절을 하고 녀자는 네번절을 합니다. 그리고 부부 함께하는 절일 경우에 세번절을 하는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사에서 절이라 하면 일률로 세번절을 하는데 우리민족의 제사문화가 장기간 무시 당하면서 아마 한족들의 삼국궁(三鞠躬)을 모방한것 같습니다. 금후부터 다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김동선 기자: 차례가 끝나면 자손들이 부모와 조부모에게 세배를 드리던데요. 우리 민족 음렬설 행사가운데서 이 세배 역시 아주 중요한것 같던데요? 현룡수 회장: 차례는 새해를 맞아 돌아가신 조상들을 참배하는 행사이고, 세배는 새해를 맞으며 살아 계시는 분들이 서로 참배하는 행사입니다. 절은 상대방에게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동작으로서 우리민족 행위례절의 기본이므로 반드시 남자절, 녀자절을 구분하여 제대로 익혀 두어야 합니다.   세배시 류의해야 할 사항   - 세배 순서는 부부간 세배를 제일 먼저 해야 합니다.   - 다음에 집안의 제일 어른과 배우자가 자리에 앉으면 그 아래 가족이 모두 함께 동시에 세배합니다.   - 다음으로 집안의 어른 순서대로 세배를 드리는데 제일 아래사람 즉 손군은 절을 가장 많이 해야 하지만 세배돈을 가장 많이 가질수 있으니 역시 우쭐할 일입니다.   - 세배는 병으로 누워있는 어른에게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 명령조인 “앉으세요”, “세배 받으세요”이렇게 말은 하지 않으며 “세배 드리겠습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것이 좋습니다.   - 세배를 할때에 절하는 자체가 인사이므로 아무말없이 절을 한후 덕담을 기다리여 어른의 덕담이 끝나면 이에 화답하는 례로 겸손하게 축하의 얘기를 하는것이 좋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설날이 되면 아래 사람들이 웃어른에게 세배를 한후, 웃어른들이 세배돈은 주면서 덕담도 하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덕담이란 설날 아침에 서로간에 주고 받는 인사의 말, 혹은 축하의 말입니다. 보통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혹은 “새해 부자 되세요!” 아러한 말들입니다. 어른한테 세배를 올리면 어른들은 세배돈을 주면서도 역시 덕담을 하십니다. 보통 하시는 덕담으로는 “새해에는 공부를 더 잘해서 대학갈 차비 해야지!” 혹은 “새해에는 또 키 한뼘은 커야지!” 이러한 말들입니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동네의 다른 집 로인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올리는 것을 동네세배라고 합니다. 동네세배는 일반적으로 남성 중청년들이 많이 하는데 "로인님께서 과세에 안녕하십니까?" 하고 절을 올리면 세배를 받는 로인들은 "새해에 장가갈 꿈이나 꿨는가?" 혹은 "새해에 횡재할 꿈이나 꿨는가?"하고 답례합니다. 그리고는 세배를 올린 사람에게 엿가락 혹은 술을 선물합니다. 최근에는 동네 세배풍습이 전화로 서로 인사를 올리는 형식으로 바뀌였으며 가정세배에서도 어린아이들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세배를 드립니다.   김동선 기자: 설날이 되면 우리 민족은 깨끗한 옷이나 새옷을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 혹은 세장이라고 하던데요. 이 면에서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정월 초하루날 아침에는 남녀로소 구분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옷을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岁粧)이라고 합니다. 이 설빔은 보통 한번 입어서 대보름날까지 입습니다.   김동선 기자: 설날 아침에 먹는 음식은 세찬이라고 하는데요. 주로 어떤 음식들이 들어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해마다 설이 돌아올 무렵이 되면 집집마다 엿을 달인다, 두부를 앗는다, 술을 곤다, 떡을 친다 하며 매우 분망히 보냅니다. 특히 섣달 그믐날이나 설날 아침에 들려오는 찰떡치는 소리는 명절의 기분을 한결 돋구어 주었습니다. 잡거지구에서 살고있는 조선족들은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음력설용으로 돼지를 한 마리 길러 설무렵에 잡거나 시장에 나가 돼지고기 100킬로그람 정도 사서 설과 보름기간에 먹습니다. 설명절에 먹는 음식은 다채롭고 풍성합니다. 그중 가장 전통적인 음식으로는 떡국입니다. 때문에 상대방에게 자기의 나이를 말할 때 "떡국을 몇그릇 먹었습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변일대를 비롯한 함경도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지방에서는 떡국보다 찰떡을 먹는것이 오랜 습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상도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설날에 만둣국을 먹는데 만두를 따로 만들지 않고 한족식 죠즈를 싸서 고기국에 넣고 끓입니다. 압록강 류역에서 살고있는 평안도사람들은 칡뿌리가루에 쌀가루를 섞어서 만든 칡뿌리 설기떡을 설날의 특별음식으로 먹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고정적이고 통일적인 세찬이 없이 저마다 자기가 즐기는 음식을 먹으며 지난날처럼 많은 공력을 들여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나가 음식을 사들이거나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죠즈를 설날의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김동선 기자: 설날 아침에 마시는 술은 세주라고 하던데요. 세주에는 어떤 문화가 포함되여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세찬을 먹을 때 새해를 의미하는 세주라 하여 누구나 다 술 한잔씩은 마입니다. 재래적인 습관에 세주불온(歲酒不穩)이라 하여 설날 아침에는 찬술을 마입니다. 이것은 봄을 맞는 의미에서 생긴 풍습이라 합니다. 지난날 설날에 마시는 술로는 청주, 탁주, 토주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자기 집에서 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상점에 가서 자기가 마시고 싶은 흰술이나 맥주를 사서 마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설날 아침에 집집마다 대문에 그림을 붙이는데 이것을 세화라고 하던데요. 세화에는 어떤 문화가 함유되여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일반적으로 복을 부른다는 의미로 장생불사를 의미하는 열가지 길상물의 그림을 붙였습니다. 그 열가지 길상물들로는 태양, 산, 강물, 바위,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백학, 사슴 등입니다. 어른중에 누가 삼재가 들었을 경우에는 호랑이 그림을 대문에 붙이여 액막이를 합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호랑이나 매의 그림은 양기가 너무 강하여 삼신을 해한다고 인정되여 정부나 회사의 사무실로 옮겨지고 가정의 액막이에는 처용의 화상이나 부적으로 대체합니다.   김동선 기자: 설날이 다가오면 우리 민족은 집집마다 세첩을 붙이는 풍속도 있던데요? 현룡수 회장: 설날에 대문에 써 붙이는 주련이 세첩(歲帖)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설을 춘절이라고 하는데 봄의 명절이라는 뜻입니다. 해마다 설은 립춘을 사이두고 비슷하게 드는데 금년은 립춘 바로 전날이 설이 됩니다. 지금도 설날이면 한족들은 명심하고 문에 세첩을 붙이는데 춘련이라고 하며 한족 가정의 특유한 경관으로 되여 있습니다. 력사자료에는 우리민족도 옛날에는 세첩을 부쳤다고 기재되여 있습니다: 立春大吉, 人間五福來, 開門百福來, 萬事亨通 등 글을 쓴 붉은종이를 대문에 붙이는 풍속이이요. 지금은 세첩을 붙이는 조선족 가정이 많지 못합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 설명절 민속놀이에는 여러 가지가 있던데요. 주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설명절의 전통적인 민속 놀이로는 성주풀이가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놀이패를 조직하여 단장을 괴상하게 하고는 징, 꽹과리, 북과 장단 등을 치면서 동네의 잘사는 집을 돌아 다니며 광대춤도 추고 지신 밟기도 하면서 새해의 풍농과 안택을 기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면 축복을 받은 집에서는 쌀과 엿가락같은 것으로 사례하였습니다. 성주신은 우리민족의 집터를 관리하는 신으로서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민요 가 바로 이 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노래가락입니다.    윷놀이 윷놀이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명절놀이입니다. 둥근 나무토막이나 열콩 따위로 한쪽을 깎아서 네쪽으로 만들고 이것을 던져서 엎어지고 잦혀지는 모양을 셈하여 말을 쓰는 놀이입니다. 보통 많이 사용하는 장작윷은 길이 15~20센티미터, 직경3~5센티미터 정도의 륜목(轮木) 두개를 각각 반으로 쪼개여 만듭니다. 놀이방법은 윷판을 놓고 쌍방이 각각 윷을 던져 나온 결과대로 말 네개를 진행시켜서 최종점을 통과하는 편이 이기는것입니다. 과거에는 윷놀이를 통해 농사의 흉풍이나 전쟁의 승패를 점치기도 하였습니다.   고누놀이 별 다른 놀이감이 없던 시절, 아이들이 가장 먼저 익히는 놀이였습니다. 제 말이 나란히 셋이 되면 상대것을 하나씩 떼여내는 놀이입니다.단 들어낸 곳엔 다시 말을 놓을수 없습니다.이렇게 해서 말로 다 채워지면 빈곳으로 움직여 말을 셋으로 정렬시키면서 다시 상대것을 따먹는 놀이입니다.   제기차기 남녀로소 누구나 쉽게 할수있는 놀이입니다.발을 한번씩 딛고 차는 ‘맨제기’,제기를 차는 발을 바닥에 딛지 않고 계속 차는 ‘헐렁이’,두발을 바꿔가며 차는 ‘쌍발차기’가 있습니다.   널뛰기 조선조 량반사회에서는 녀자들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억제해 왔으므로 널뛰기는 순전히 서민계층 녀자들의 놀이로서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널 량끝에 한사람씩 올라와서 줄을 잡고 천천히 뛰기 시작합니다. 이때 널 가운데 한사람이 앉아 널을 널 받침우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가장 높이 뛴 사람이 이기거나 상대편을 떨어뜨리면 이기게 됩니다.   팽이치기 팽이에는 아래쪽은 뾰족하게 깎고 우는 평평하게 깎아 만든 보통 팽이와 아래우 모두 뾰족하게 깎아 만든 불팽이가 있습니다. 얼음판이나 땅바닥에 손으로 팽이를 돌린 다음 가는 막대기에 헝겊 또는 삼실을 달아 만든 팽이채로 쳐서 세게 돌리는데 여러 아이들이 저마다 팽이를 힘껏 친후 일제히 팽이채를 거두고 가장 오래 도는 팽이를 장원으로 뽑습니다.   이외에도 연띄우기, 쥐불놀이, 농악놀이 등 여러가지 놀이가 있었습니다.   김동선 기자: 설날 저녁무렵에 우리 민족은 대문이나 출입문에 채를 걸어놓는 등 행사가 있던데요. 이 행사들은 주로 어떻게 합니까? 현룡수 회장: 설날 아침 또는 그믐날 밤에 조리를 벽에 걸어두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복조리라고 합니다. 이는 조리가 쌀을 이는 기구이므로 그해의 행운을 조리로 일어서 취한다는 뜻에서 비롯된것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설날밤이 되면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인가에 내려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고는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만일 누가 신을 잃어버리면 그 신임자는 그해 운수가 나쁘다고 합니다. 이날 밤에는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우에 체를 걸어두고 마루우의 신을 모두 집안으로 들여 놓습니다. 이것은 야광귀가 셈을 셀때 두개밖에는 셀줄 모르므로 체의 구멍을 세여보면서 하나둘, 하나둘 하노라면 시간이 흘러가 새벽닭이 울어 신도 신어보지 못하고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두분께서는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 세시풍속의 우월성에 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천만수 주임: 현룡수 회장: 세시풍속이란 길고긴 세월속에서 형성된 풍속인 만큼 우리 민족 전통문화의 화석이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명절인 음력설 세시풍속을 통하여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무한한 희망속에서 살아 왔으며 일년대계의 첫시작을 특별히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재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도 과거에 비해 그 의미가 크게 부여되지 않고 있을뿐만 아니라 또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서 우리의 전통명절이 점점 색바래져 가는것 같아 참으로 가습아픕니다. 두분께서는 이 면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천만수 주임: 현룡수 회장: 지금은 옛날의 자유농경시대가 아니라 고도로 긴장화 된 시장경제시대이기 때문에 시대에 맞지않는 많은 세시풍속들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잊혀졌던 세시풍속들을 다시 찾아내여 거론하는것은 옛시대를 미련해서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뿌리를 잊지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표성적인 세세풍속에 대하여 정부로부터 조치를 대여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동선 기자: 두분께서는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 전통문화가 점점 색바래져 가는 문제의 원인을 어떤 면에서 찾아보고 계십니까? 천만수 주임: 현룡수 회장: 물론 가장큰 원인은 시대의 변화겠지요. 시대가 변하니 사람도 변하고 환경도 변하고 인품도 변하고 습관도 변합니다. 그다음 정부의 관심여부에도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백성들은 자연 민간인이 아니라 일정한 정부체제속의 군체이기 때문에 정부의 인도가 특히 중요한 인소로 되여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두분께서는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음력설 세시풍속에 깃든 문화의 우수성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고 또 어떤 방법으로 우리 민족 전통문화를 전승하고 발전장대시켜 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천만수 주임: 현룡수 회장: 대표성적인 세시풍속에 대하여 정부에서 선택성 있게 발굴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세시풍속들이 특별히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하기보다 그런 세시풍속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특색을 살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색을 잃으면 민족을 잃게 됩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 문화를 전승, 발전시키려면 정부 각 해당부문과 민간단체, 사회 구성원들의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각 부문과 각 단체, 사회구성원들은 응당 어떤 노력을 해야 할가요? 천만수 주임: 현룡수 회장: 설날 휴가가 되면 전면 휴식할것이 아니라 유관 부문에서는 조직적으로 대표성적인 세시풍속들을 표현시키여 우리민족 민속문화를 더욱 다채롭게 꾸미여 가는것이 바람직 하다고 봅니다.   김동선 기자: 두분,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출연연사: 감사합니다.   ※ 주해: 여기 구체 방송내용과 발언시간을 나름대로 정해두었습니다. 꼭 이대로 하시라는것은 아닙니다. 보충할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고 약 33~34분정도로 준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1년 1월 31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1년 1월 31일 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hanmail.net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1년 1월 27일
56    (아리랑방송)2010조선족전통장례의식에 대하여 댓글:  조회:2351  추천:0  2012-07-16
프로그램명 > 도착시간 10월 27일 수요일 아침 7:40분 시방송국 3층 방송날자 2010년 10월27일 수요일 아침 8:00~8:40 주 제 조선족전통장례의식에 대하여 래 빈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 현성원 책임편집 황경옥 사 회 자 림영권, 서윤옥 심 열 태 장 총 편 편집부주임 담당 PD 김명신 김정길 김건호 강순선 ---프로그램 节目头--- 남: 조선족들의 많은 풍속습관, 명절등이 여러 세대를 지나면서 점점 풍요로워지고 조선족들만의 특색이 있는 문화유산으로 이어져나가고 있습니다. 녀: 하지만 유독 조선족장례의식에 대한 관념만이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교체하면서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남: 아침부터 부득불 장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니 불쾌하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조선족전통례의문화를 계승시켜 나가려면 모든 조선족들의 동참과 관심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는 생각이 듭니다. 녀: 그리하여 저희 >프로에서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주 회장님을 생방송실에 모시고 점점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살아지고 있는 조선족전통장례의식에 대하여 알아볼수 있는 좋은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애청을 기대합니다. ---프로그램 로고송---- ********************************************************************* 물음: 1. 지금 조선족전통장례의식을 국가비물질문화유산으로 신청하련다고 들었는데요. 준비상황은 어떠합니까? *조선족 전통장례는 지난해 전국적 제2차 비물질문화유산 항목 등록시에 이미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지정 되였습니다. 이제 명년에 전국적 제3차 비물질 문화유산 항목 등록공작이 있게 되는데 우리는 이 기회에 조선족 전통장례를 나라급으로 승급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2. 현시대 조선족들이 장례에 대한 의식은 어떠합니까? *한개 민족으로서 자기의 장례문화가 없다는 것은 장례보다 더욱 슬픈 일입니다. 자기의 장례문화가 없는 민족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민족이 아니면 한창 퇴화되는 민족입니다. 나라의 “빈장관리 조례”의 원칙하에서 장례를 자기민족식으로 치르려는 것은 사회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민족자치의 기본권익입니다. 지금의 걸음바쁜 경제시대에서도 절대 다수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장례를 될수록 자기민족식으로 치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자기민족의 전통장례에 대한 견해가 다르고 사회적으로 아직 장례복무체제가 완비하지 못하며 우리식 장례시설이 부족한 등등의 원인으로 하여 지금 우리민족 장례의 기본권익은 아직 완미한 보장을 받지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3. 장례에 대하여 연구한다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것 같은데요. 어떤 계기로 이 방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되였습니까? *저는 원래 연변성원기술개발유한회사를 운영하면서 투자를 유치하여 국가 특허항목들을 개발하는 사업을 하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민족의 전통장례 문화령역이 완전 무정부 상태라는것을 놀랍게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무작정 뛰여 들었죠. 이제 60을 다 먹고 무슨 재수고 운수고 상관이 없습니다. 죽기전에 민족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유익한 일을 할수 있다면 그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4.지금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어떤 형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민족이 자기식으로 장례를 치르려면 주관상에서 객관상에서 많은 제한들을 받고 있습니다. 주관상에서는 장례의 민족적, 사회적 의의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장례를 될수록 간단하게, 될수록 빠르게 치르려는 관념이 앞서게 됩니다. 객관상에서는 사회적으로 장례복무체제가 아직 완비하지 못하며 우리식 장례시설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조선족들이 치르는 장례는 문화적 함의가 사라지고 사무적인 의의만 남았습니다. 5. 어르신들은 조선족전통장례의식에 대하여 알겠지만 특히 현시대의 젊은이들은 이에 대한 관심이 적을듯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조선족 전통장례에 대하여 알고 계시는 분이 물론 많지 못합니다. 그런데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보호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과제는 장례의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의의가 거의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현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장례는 단지 사무적인 행사일 뿐입니다. 현시대의 젊은이들한테 전통적인 관념을 접수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하여 전수의 방법보다는 사회적으로 전통문화 봉사체제를 건립하고 장기적으로 견지하는것이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6. 비록 연변지구에 같이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지만 지방마다 장례를 치르는 방법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어떠한지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였지만 지금은 연변지역에서 주류적으로 화장을 실시하기 때문에 그 차별을 가려보기 힘듭니다. 우리는 조선족 전통장례를 보호함에 있어서 지난해 길림성 정부에서 공포한 무형문화재 “조선족 전통장례”의 범례를 기준으로 합니다. 7. 예전부터 조선족례의에 대하여 연구해온 분들도 많았을것 같은데요. 그들의 연구재료가 많은 도움이 되였을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난해 조선족 전통장례를 무형문화재로 신청할때 선배님들의 연구성과들이 물론 큰 도움이 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족 전통장례를 보호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과제는 어떻게 현실에 맞게 실시하는냐? 하는 문제입니다. 학자들은 력사적, 문화적 차원에서 민속을 연구하였다면 이 민속을 어떻게 현실에 결합시켜 보호하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과제입니다. 8. 조선족전통장례의식을 이어 받자고 하여 예전의 고정된 장례의식을 그대로 옮겨 받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의 현시대에 알맞게 하기 위하여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가 지금 보호하는 것은 조선족 전통장례의 전통의식인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 부분입니다. 조선족 전통장례문화의 핵심은 효도사상인데 당전의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효도사상은 아주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우리의 공작은 시종 이 효도사상을 발양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9. 조금은 슬픈 문화라고도 할수 있는데요. 이에 대하여 연구, 보급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들도 많았을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중국에는 홍백희사라는 설법이 있는데 결혼하는것을 홍희사라고 하고 사람이 죽은것을 백희사라고 합니다. 결혼하는것을 희사라고 하는것은 누구나 모두 찬성하는 상식이지만 사람이 죽은것도 희사라고 하는것은 사람들이 좀 접수하기 어려워 합니다. 그러나 변증법적으로 문제를 본다면 사람들이 한편으로 죽는것이 확실히 일종의 희사입니다. 세상은 마치도 공공뻐스와 같이 승객들이 부단히 바뀝니다. 먼저 뻐스에 오른분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림으로써 또 다른분들이 오를수 있게 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죠. 먼저 이 세상에 오신분들이 일정하게 생존하신후에 기꺼히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여 생존할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옛날의 공자나 진시황같은 분들이 오늘까지도 장생불로약을 먹으면서 죽지않고 모두 살아 계신다면 이 지구는 지금 발을 옮겨디딜 자리도 없을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장례문화는 혼례문화와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틀리는 관념에 의하여 사회상에서 장례문화는 확실히 기시당하고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슬픈일입니다. 10. 어떤 문화든 보급하려면 자신으로만의 연구보다는 사람들이 받아들일수 있어야만 늘리 보급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장례의식에 대한 생각을 더욱 잘 보급시키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우리는 연구회 산하에 “백화상조(장례)복무중심”을 설립하고 무릇 조선족 장례와 상관되는 모든 행사에서 합리한 가격으로 정성껐 봉사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조선족 유가족에서 유사시 우리 복무열선에 전화 한통만 걸면 그가문의 전반 장례행사는 우리민족식으로 원만하게 OK입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외지의 장례손님들도 우리민족의 장례범절을 료해하게 됩니다. 이 봉사체제를 장기적으로 견지하여 나간다면 우리의 장례문화도 장기적으로 보호받게 됩니다. 11. 지금의 조선족들은 자식들이 고향을 떠나 돈벌이를 하면서 로인들이 혼자 계시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에 대하여서는 어떤 조치가 없으신지요? 가속에서 위탁만 하신다면 우리는 가속에서 요구하는 차원에 따라 전반 장례를 도맡아 치러드립니다. 그리고 전반 장례과정을 비디오 촬영하여 가속에게 드립니다. 12. 조선족장례의식을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신청하는데 대하여 정부나 각 단위에서의 지지정황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주로 세가지 방면으로 공작을 진행합니다. 첫째는 조선족 전통장례문화에 대여 발굴하고 연구하며, 둘째는 정부나 사회의 유관부문에 합리한 건의를 제출하며, 세째로 전통장례에 대한 지도와 봉사를 진행합니다. 우리 연구회의 주관부문이 바로 연변주 문화국인데 우리들은 각 방면에서 상당히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연변주 민정국, 연변주 위생국, 그리고 연길시 위생계통에서도 우리들의 공작에 대하여 많은 협조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길시 문체국과 연길시의 여러 가도 판사처의 적극적인 협조하에 우리는 이미 세차례 강연을 조직하였으며 또 앞으로 계속 조직할것입니다. 특히 연변방송국과 연길아리랑방송의 지지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계속 열심히 공작하여 유관 각 부문의 지지와 협조를 쟁취할것입니다. 13. 많은 분야의 업종을 선택할수 있는데도 마다하고 누구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업종에서 일을 하시면서 마음이 무거울때도 많았을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한사람이 사회를 위하여 할수있는 역활은 극히 제한되여 있습니다, 저희들의 노력에 의하여 우리민족의 한부분 전통문화가 성급 무형문화재 자격을 가지게 되였다는것은 아직 만족할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안위를 느끼게 됩니다. 계속 노력하여 국가급 자격까지 따내야 합니다. 14. 조선족의 전통례의문화를 더욱 잘 이끌어 나가기 위하여 앞으로의 어떤 계획과 작은 소망이 있으시다면 말씀주시렵니까? 지금 많은분들은 민족특색을 버리는것을 현시대의 개방사상이라고 착각합니다. 나라에서는 소수민족 문화특색을 보호하게 위하여 많은 우대정책과 사업조례들을 내 놓았지만 우리들이 도리여 자기 문화특색의 보귀함을 모르고 하나, 둘 꺼리낌없이 버리고 있습니다. 민족의 불행이 아닐수 없습니다. 조선족 전통문화를 보호하는 사업은 전 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어느한 단체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반드시 전 사회적인 지지와 참여가 필요합니다. 정부나 사회의 주요 직능부문에서 공작하시는 분들중에 우리민족의 운명을 관심하시는 분들이 좀 많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결속어: 시대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모든것을 전통적인것보다는 편리한것을 좋아하지만 조상들이 후세대에게 남겨준 문화는 버리지 말고 이어받아 나가야 하지 않는가고 생각됩니다. 이 시간 책임편성에 황경옥이였습니다.
55    (연변방송)2010추석특집 : 우리민족 장례문화-2 댓글:  조회:2482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추석특집 생방송: 우리민족 장례문화-2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회장 발언부분)   1,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져 가는 현상 (2분) 첫번째: 지금 우리민족의 많은 젊은이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장례개념은 별로 없고 한시 급히 화장하여 시름을 놓으려 하며 이듬해 부모의 제사날이 돌아와도 자식으로서 반드시 부모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도리를 모릅니다. 두번째: 우리민족은 성씨앞에는 모두 본이 붙습니다. 례를 들면 “김해김씨요”, “전주리씨요” 할때의 “김해”요 “전주”요 하는 그 부분들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성씨보다 본을 더욱 중시하여 왔습니다. 중국의 호적부에서는 성씨만 다루고 본은 다루지 않지만 조선족 성씨에서는 본이 있으므로 하여 같은 성씨의 여러가지 혈통을 구분할수 있습니다. 조선족 성씨의 본은 한족 성씨제도보다 우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망자의 명정을 쓰면서 보노라니 지금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기 성씨의 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성씨의 본을 모른다는것은 자기 가문의 근본을 잊었다는 것으로 풀이되며 자기의 민족특성을 버리기 시작한 첫번째 행동입니다. 세번째: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에서 유가속들은 모두 상복 차림을 하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장례에서는 상복차림은 근본 찾아볼수 없고 상주도 일반 조문객들과 마찬가지로 겨우 상장이나 두르는 정도이고 많은 경우에는 심지어 상장도 두르지 않습니다. 네번째: 우리민족의 전통장례에서는 친인의 유체를 남들한테 보이는것을 제일 꺼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초상이 나면 유체를 인차 염습한후 이불로 덮어 놓고 병풍이나 만장으로 가리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통일식 고별청에서 통일식 장례를 치르다 나니 어쩔수없이 친인의 유체를 많은 사람들 앞에 전람시키게 됩니다.   2,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지는 원인 (3분)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 변혁기에 접어들면 필연코 많은 전통 문화들이 충격을 받고 매몰되게 됩니다. 5.4운동에서는 공자의 사상이 충격을 받았고 문화혁명 동란 시기에는 “전통”이란 수사가 붙은 모든 문화들이 충격을 받았으며 그후의 개혁개방, 역시 사회의 대변혁이라고 할수 있는데 사상위주의 사회가 경제위주의 사회로 바뀌여지면서 또 많은 전통 문화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라진 전통문화를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회복시킬수 있습니다. 가치가 있고 쓸모가 있는 전통문화들은 다시 발굴하여 찌꺼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취하여 회복시키고 보호하고 발양시킴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위하여 더욱 훌륭히 복무하게 할수 있습니다. .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라에서 개혁개방을 하면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도 우리의 혼례문화나 회갑문화와 마찬가지로 회복될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당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상층계층과 지식계층에서는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하는 사람조차 없게 되였으며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로서의 연변에서, 4대 장의관중의 그 어느 한곳에서도 조선족 유가족들을 대상하여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한곳이 없습니다.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십년이 지난후 우리민족은 다시금 우리의 전통장례문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의식하게 되였으며 지난해에는 조선족 전통장례가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3,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진 위해성(3분) 민족이라는 것은 인류의 장기간의 력사 과정에서 형성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그리고 공동한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을 소유한 온정된 공동체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인구 류동이 가속화 되면서 지금 와서는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이라는 조건은 많이 파괴되기 때문에 이 조건만을 가지고 한개 민족을 평가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한 민족의 특색이라는것은 주요하게 공동한 문화, 그리고 이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민족습관, 공동한 민족심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시기는 민족의 대 융합을 촉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각 민족의 발전을 촉진하는 시기입니다. 그 어느때 가서는 일부 비슷한 민족들끼리 융합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는데 모두가 중국 경내에서 생활하고 있고 모두가 중국 공민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개 민족이 자기의 존재를 나라에 선전하고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이 주요하게는 문화입니다. 한 민족이 자기의 문화, 즉 자기이 특색을 잃는다면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됩니다.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우리민족의 기본문화인 “관혼상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화인데 우리민족이 첫돐생일문화, 결혼문화, 회갑문화, 등에서 이미 확고한 특색적인 문화체계를 수립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상제문화에서 자기의 체계를 수립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민족이 상제방면에서 자기의 확고한 특색적인 문화체계를 수립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족문화는 자기의 완미성을 잃게 됩니다.   4,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할 필요성 (2분)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할 필요성은 두개 방면으로 보아낼수 있습니다, 한개방면은 민족의 발전의 수요로 부터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하여 우리민족의 장례를 우리식으로 치르는 것은 민족의 특색을 보호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증강하며 민족의 동일성을 가강하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다른 한 방면으로 민족의 소질제고의 수요로 부터 우리민족의 장례를 우리식으로 치르는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적 효도문화를 발양하여 우리민족의 사회를 화목하고 질서있는 사회로 건설하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5,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특색을 부여하려면 우선적인 과제 (3분) 당전의 우선적인 과제로는 우리민족식의 장례시설을 설치하고 우리민족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연길장의관에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할데 관한 건의를 주 민정국 유관부문에 제출하였습니다. 주 민정국에서는 이미 문건을 내여 우리의 건의에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의가 하루속히 현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건전히 해야 합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면 조선족 유가족에서 조선족 장례규범에 대하여 잘 모른다 하여도 자기 민족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는 의향만 있으면 장례복무 기구에 전화 한통을 걸어 모든 장례행사가 우리 민족식으로 OK가 될수 있습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내부건설을 가강하면서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가서도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전될수 있게 됩니다.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백화상조 (장례) 복무중심을 설립하였는데 정부와 사회 각 계층의 다함없는 지지와 참여가 필요합니다.   6, 조선족 장례문화를 보호하려면 어떤 노력이? (3분) 작년 6월에 조선족 전통장례는 이미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조선족 전통장례문화의 적극적인 의의에 대하여 충분히 긍정한것이며 반드시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발굴하고 보호하고 발양해야할 필요성을 제시하였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조선족 전통장례의 보호단위로 지정 되였는데 지금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발굴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사업을 펼쳐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보호하는 사업은 전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우리 연구회의 노력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반드시 정부의 유관부분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사회의 상관 계통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전사회적인 참여가 실현되여야만 기정한 목적에 도달할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연구회는 사회의 상관 계통, 특히는 의료계통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상당히 힘들게 공작하고 있습니다. 의료계통의 많은 분들, 특히는 주요 책임자들이 우리의 공작에 대하여 리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공작은 더욱 힘들게 되며 우리 공작의 진전은 더욱 꿈뜨게 됩니다. 나라에 아직 정식으로 무형문화재 보호법이 나오지 못한 조건하에서 우리들의 공작은 부득불 많은 길을 에돌수 밖에 없습니다.   7, 우리민족의 현실적인 장례문화를 구축하려면 어떤 노력이? (3분) 우리 연구회는 이미 내부적로 “조선족 장례와 제사 실용편람”을 정리해 냈습니다. 우리의 장례복무 중심에서는 지금 이 실용편람에 근거하여 복무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충분한 실천을 통하여 고칠것은 고치고 보충할것은 보충하면서 연변의 민속연구 교수님들과 함께 “조선족 장례와 제사 규범”을 편찬해 낼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조선족의 상제문화도 자기의 체계를 확고하게 수립하게 되며 우리민족의 문화재부가 더욱 묵직하게, 더욱 찬란하게, 더욱 완미하게 될것입니다.    2010-09-26
54    (연변방송)2010추석특집 : 우리민족 장례문화-1 댓글:  조회:3329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방송 추석특집 생방송: 우리민족 장례문화-1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회장 발언부분) 1, 조선족 장례문화의 현존 문제점: (3분) 현재 우리 중국의 조선족, 특히는 연변 조선족 장례문화의 현 상황을 살펴본다면 한마디로 두리뭉실하게 되여 있습니다. 이 두리뭉실한 장례를 문화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저 최근의 류행이라고 말할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나라에서는 “빈장관리 조례”를 내오고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화장제도를 실시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후손만대에 복을 마련하고 덕을 쌓는 훌륭한 제도입니다.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가 오늘처럼 이렇게 두리뭉실하게 된것은 결코 화장제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는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이미 제모양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엄중히 훼손되여 있었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라에서 개혁개방 동풍이 불면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도 우리의 혼례문화나 회갑문화와 마찬가지로 회복될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상층계층과 지식계층에서는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하는 사람조차 없게 되였으며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로서의 연변에서, 4대 장의관중의 그 어느 한곳에서도 조선족 유가족들을 대상하여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한곳이 없습니다. 부모의 장례를 자기 민족식으로 치르는 것은 자기민족의 얼과 존엄을 지키는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민족이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점을 알지못하고 있습니다.   2,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뿌리 (3분) 조선족 전통장례문화의 산생과정과 발전사를 살펴 본다면, 그의 본질은 기실 중국의 유교사상에 기초하여 조선족의 전통 습속과 리념을 표현시킨 유기적인 결합문화 라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15세기초,  리조 조선이 성립된후 태종12년(기원1412년)에 조정에서는 전국에 령을 내려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서 모두 중국 유교의 례의서 《주자가례》를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성종16년(기원1485년)에 《경국대전》(经国大典)이 출범하면서 리조의 조정과 민간에서는 정식으로 상제례의를 포함한 일체 행위규범과 례의활동에서 모두 중국 유교의 례법에 기준하게 되였습니다. 유교의 상제례법을 실행하여 몇백년을 내려 오면서 거기에 또 조선 민족의 많은 우량한 전통습속과 리념을 보충해 넣으면서 점차 조선민족 자체의 독특한 상제문화가 형성 되였습니다. 중국 조선족 선민들 대부분은 1850년 이후에 조선반도로 부터 중국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였는데, 100여년 력사의 연혁을 거쳐 점차 당대 중국의 한갈래 소수민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상제제도를 실행하였는데, 마을마다 향두월(香徒月)이요 상여계(丧舆契)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이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문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시작된후 1967년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하는 운동이 터지면서 연변각지의 상여는 거의 같은 시간에 당지의 학교마당에 끌려나와 두들겨 부서지고 모조리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후에는 간단한 운구용 소수레로 상여를 대체하고, 장례제도를 최저한도로 간단하게 하였으며, 일체 소위의 미신색채를 띤 장례 절차를 일률로 금지하였습니다. 그후부터 당시의 락후한 경제조건하에서 각지의 조선족 주민들은 점차 간단하게 치르는 이런 장례제도에 습관되였으며, 조선족 전통 상제문화는 점차 빛을 잃게 되였습니다.   3,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기본내용 (3분)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기본내용에는 초상, 안장, 제사, 이렇게 세가지가 있습니다. 초상이란 사람이 사망하여서부터 안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며, 안장이란 사망한 유체를 매장, 혹은 화장하는 과정을 말하며, 제사란 유체를 안장한후에 진행되는 일련의 의식들과 기념행사들을 말합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관혼상제 문화에서 상례문화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가례 지침서인 “四禮便覽”은 모두 8권으로 되여 있는데 상례부분만으로 5권을 차지합니다. 우리민족의 선인들은 우리민족의 전통습속과 전통리념을 정리하여 상례에서 집중적으로 표현시켰는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례문화는 우리민족의 대표성 문화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핵심은 효도사상입니다. 효도사상은 유교의 대표성 사상으로서 천백년래 사회질서와 가정관계를 유지시킨 기본적인 도덕 준칙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孝为百行首” 라고까지 하였는데 그 뜻인즉 효도가 모든 행위중에서 첫번째로 지켜야 할 준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상제문화에서는 효도사상이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조심스럽게 술을 붓고 무릎꿇고 절을 하는 등의 동작은 바로 효도의 대표성적인 표현동작입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바로 장례를 통하여 효도사상을 전수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여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이 효심이 부족하고 민족의식이 담박하게 된것이 어찌보면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가 쇠퇴된것과 관련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효도라는 “孝”자는 아들이 늙으신 아버지를 업고 있는 형태로 이루어 졌는데 그 뜻인즉 부모를 공경하고 잘 받들어 모시라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은 평소에 자기 인생의 개척을 위하여 분투하면서 부모에게 많은 미안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에서 일정하게 성공을 거둔후 다시 부모를 생각하게 될때에는 부모는 어느덧 늙어서 사망하게 되거나 언녕 사망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례와 제사는 부모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부모한테 전달하고 반성하며 용서를 비는 역활을 합니다. 효도사상은 동방사상의 정수이며 우리민족의 보귀한 정신 유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를 보호하고 발양시켜려는 기본 목적이 바로 효도사상을 보호하고 발양시키려는 것입니다.   4, 현재 우리들이 지킬수 있는 조선족 전통장례 (3분) 병원에서 사망하여 화장하는 경우를 기준하여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친인이 사망하면 인차 혼을 부르고 염습을 해야 하는데 이 절차는 될수록 전문인원이 하도록 하십시요. 우리 장례 복무열선에 련락하면 됩니다. 2, 염습이 끝나고 령구를 차에 싣기전에 고인한테 영결례를 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어 세번 허리굽혀 인사합니다. 3,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키고 객실, 혹은 례당에 작은 령좌를 차려 놓습니다. 조문객이 와서는 먼저 그 령좌앞에 가서 술을 붓고 세번 인사합니다. 상주는 하루밤 령좌를 지키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간단히 올리는 것이 기본 례의입니다.  4, 장례날 장의관에 가서 고별식을 할때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 (主妇)는 머리에 베천오리를 동이여 자기들의 특수신분을 나타냅니다. 유가속 기타의 녀성들은 머리에 몽상을 달고 남성들은 팔에 상장을 두르는데 사망자가 남성일 경우 왼쪽에 달고, 사망자가 녀성일 경우 오른쪽에 답니다. 장례에 손님으로 참석할때 녀성분들은 될수록 꽃무늬 없는 단색옷을 입고 남성분들은 될수록 검은색 양복을 입습니다.  5, 고별식이 끝나고 화장이 끝나면 골회함 보관여부 상관없이 안신제를 지냅니다. 전통적으로 안신제는 유가족들만 지냈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안신제에서는 제사상 차리고 술을 붓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상주와 주부, 가속(상제), 친속(복인), 사돈, 단위조문객, 친구조문객, 기타 조문객, 이런 순서로 합니다. 마지막에 기름냄새를 피우는데 기름떡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운 다음 제단의 제물들을 치우고 기름떡만 올려놓고 술도 붓지말고 상주와 주부가 절을 세번하면 됩니다. 제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불길하므로 모았다가 지정한 소각로에 가져다 태웁니다.  6, 골회함을 보관시킬 경우, 보관처에 안치하고 물러가면서 세번 허리굽혀 고별인사 하는것을 잊지 마십시요. 고혼의 안정을 바라는 의미에서 제사때마다 번번히 골회함을 움직일 필요가 없으며, 꼭 움직일 경우에는 먼저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움직이는것이 례의입니다.   5, 염습의 기본 절차 (3분) 조선족 장례 염습(연변에서는 매시라고도 함)은 현재까지 보유되고 있는 조선족 장례 습속에서 가장 중요한 습속의 하나입니다. 전통적으로 염습은 동네의 덕망이 높은 분이 와서 하게 되였는데 가속에서도 협조할수 있습니다. 현재 병원에서 염습할시에는 극히 제한된 시간내에 질량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염습 실시 인원이 반드시 두사람 이상이여야 하며 먼저 소독을 하고 고인한테 한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엽습을 시작합니다. 1, 皋復: 혼을 부르는 절차입니다.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 서북쪽을 향하여 흔들면서 먼저 고인의 시호와 성명을 부르고 “복-, 복-, 복-”하고 웨침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령침에 넣어 고인의 머리밑에 베여 줍니다. 2, 下袭: 먼저 고인의 아래몸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그다음 아래벌을 세벌 입히고 제쪽씩 발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버선을 신긴다음 그 종이봉지를 버선목에 넣어 줍니다. 3, 上袭: 고인의 웃몸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수의를 세벌 입히고 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반대로 여밉니다. 그 다음 제쪽씩 손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악수를 끼우고 그 안에 넣어 줍니다. 그리고는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주는데 녀성의 경우에는 오른쪽에, 남성의 경우에는 왼쪽에 감습니다. 4, 饭含: 고인의 얼굴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고 입안에 쌀알을 넣어 줍니다.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쌀알을 적당히 떠서 세번 넣어 주는데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하고 외침니다. 전통적으로는 구슬이나 은전같은 것도 넣었댔으나 지금은 넣지 않습니다. 5, 面袭: 고인의 코구멍과 귀구멍을 약솜으로 막고 고인의 입에도 약솜으로 채운다음 잘 다물겨 줍니다. 그리고는 약솜편으로 고인의 얼굴을 가리우고 면백으로 머리와 얼굴을 싸서 동입니다. 6, 小殓: 전폭의 염포로 유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쌉니다. 그리고는 포끈으로 발목부위, 허리부위, 어깨부위, 이렇게 세 부위로 나우어 동입니다. 다섯곳 동일수도 있고 일곱곳 동일수도 있는데 매듭은 옭매지 않으며 비틀어서 끼우는 방법으로 풀어지지 않도로 단단히 동입니다. 소렴이 끝난 유체밑에 지요(地褥)을 깔고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7, 铭旌: 흰 분필로 붉은천에 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쓰는데 한자(汉字)로 씁니다. 남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學生”으로 쓰는데(시호만은 반드시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 례를 들어 남성 사망자가 본관이 安东이였고 성이 金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安东金公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위의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녀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례를 들어 녀성 사망자의 본관이 全州였고 성이 李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이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써 놓은 명정을 고인의 유체우에 덮습니다. 8, 永決礼: 염습이 기본상 끝나면 령구차가 오기전에 그 자리에 있는 가속들을 모두 불러 고인의 유체옆에 모이게 하고는 함께 세번 허리굽혀 영결례를 시킵니다. 9, 大殓: 전통적으로는 입관하는 절차였으나 지금은 성시에서 일률로 화장을 하기 때문에 관을 쓰지 않으므로 유체를 주머니에 넣는 절차로 됩니다. 유체를 주머니에 넣은후 주머니를 보기좋게 여며 놓아야 하며 담가에 담고 반드시 머리로 부터 바깥으로 나가며 담가를 든 사람들이 문설주와 문턱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6, 현재 조선족 장례에서 존재하는 문제점 (3분) 추도식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할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류행되는 조선족들의 장례에 대하여 몇가지 지적할것이 있습니다. 1, 부모상의 경우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킨후 상주는 부모님의 마지막 하루밤만은 곁에서 지켜드리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정성들여 올리는것이 자식된 기본의 도리입니다. 이 방면에서 한족분들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는데 우리 조선족들은 대부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민족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2, 장례의 매개 절차마다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 인사를 올리는 것이 우리의 례의입니다. 염습이 끝나면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하고, 랭동상에 령구를 보관하고서도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하며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고서도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합니다. 이렇게 고인한테 매번 인사를 올릴때마다 당신의 령혼은 한층 깨끗하게 되며 숭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에서 유가속들은 모두 상복 차림을 하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입니다. 지금과 같은 번개식 장례에서 상복제도를 전부 회복한다는것은 어려움이 많겠지만 앞으로의 조선족식 장례에서는 그래도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는 머리에 베천오리를 동이여 자신들의 특수신분을 똑똑히 나타내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방면으로 조건을 창조할것입니다. 4, 아직까지 우리 연변에는 우리 조선족식의 고별청이 없는것이 큰 유감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장례에서는 친인의 유체를 남들한테 보이는것을 제일 꺼려 왔는데 지금 우리는 통일식 고별청에서 장례를 치르다 나니 어쩔수없이 친인의 유체를 많은 사람들 앞에 전람시키게 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연길장의관에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할데 관한 건의를 주 민정국 유관부문에 제출하였는데 주 민정국에서는 이미 문건을 내여 우리의 건의를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의가 하루속히 현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5, 사회적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건전히 해야 합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가서도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전될수 있게 됩니다. 지금 가문에서 상사가 나면 가속에서는 몹시 당황하고 조급하게 됩니다. 지금은 시장경제 시대인데 계속 이렇게 어렵게 장례를 치룰순 없습니다. 유가속에서 장례복무 기구에 전화 한통만 걸면 모든 장례 행사가 OK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백화상조 장례복무 중심을 설립하였는데 합리한 수금 표준으로 정통적이고 높은 질량의 전면복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7, 현재 보유되고 있는 전통제사 (2분) 제사란 원래 조상과 부모의 은덕을 칭송하고 근본을 되새기며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의식으로서 자손 된 도리와 살아있는 사람의 도리를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를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지내 왔으며 근본을 잊고 조상의 제사를 소홀히 하면 가문이 망한다고 철칙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전통제사는 특별히 엄격하였으며 우선 목욕제계를 하고 냄새가 나거나 자극성 있는 음식을 삼가 하면서 제사를 위하여 정성것 준비하였습니다. 제사는 크게 1,기제(忌祭); 2,시제(時祭); 3,묘제(墓祭). 이렇게 세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그 구체적인 분류에는 또 많은 종류들이 포함되여 있었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현재 연변지구에서 보유되고 있는 제사 행사들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있습니다: 기제(忌祭)에 소상(돐제); 대상(삼년제)이 남았고, 시제(時祭)에 청명제; 추석제; 환갑제가 있으며, 묘제(墓祭)에 면례; 합장; 비석제, 등이 있습니다.   8, 제사상 차리고 제사 지내는 법 (3분)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먼저 제사상을 차리게 되는데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에도 많은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많은 번쇄한 규칙들을 일일히 따를 필요는 없지만 총체적인 분포 규칙에 대하여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기왕에 제사상 차릴 바에는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정성을 넣어 제물을 차리며 제물 종류가 합리하고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게 정연하게 차립니다. 제사상은 보통 장방형으로 된 네모상에 차립니다. a, 상우에 먼저 흰 종이를 한벌 펴 놓습니다. b, 령좌 안쪽 중간에 지방과 유상을 놓습니다. c, 령좌 량옆에 그릇을 놓고 초불을 달아 각기 그 안에 세워 놓습니다. d, 유상 앞 첫줄에는 각기 메밥, 국, 수저, 술잔, 등을 놓습니다. e, 중간에는 고기류, 생선류와 기타 반찬들을 놓습니다. f, 바깥줄에 과일류, 과자류와 기타 부식품들을 놓습니다. g, 령좌 아래에 술병과 퇴주 그릇을 놓습니다. 제물의 개수는 짝을 지우지 않고 기수로 합니다. 제사 종류에 따라 이 기본방법을 참조하면서 적당하게 조절하여 차리면 됩니다. 첫돐제사나 삼년제사와 같이 집에서 올리는 제사는 출입문을 조금 열어놓고 그 제사와 상관되는 축문을 읽은 다음 효자(상주가 제사에서는 효자)와 주부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붓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가속(상제), 친속(복인), 사돈, 단위조문객, 친구조문객, 기타조문객, 이런 순서로 합니다. 마지막에 술 한잔 다시 붓고 다 함께 절을 세번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청면제나 추석제와 같이 산에 가서 올리는 제사는 먼저 후토를 찾아 간단한 제물을 놓고 후토제를 올립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통보하여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그다음 봉분을 조심스레 정리하는데 청명때는 삽으로 흙을 올리니 가토라고 하고, 추석때는 낫으로 풀들을 베니 벌초라고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 다음 가지고 간 제물들을 제단에 차려놓고 가문의 항렬 순서에 따라 술을 붓고 세번씩 절을 올립니다. 마지막에 술한잔 다시 붓고 다 함께 절을 세번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아름다운 덕담들을 나눕니다.   9, 조선족 장례 제사와 상관되는 금기 사항 (1분) A, 성시의 병원이나 아빠트에서 친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크게 소리내여 울지 않습니다. B, 어린 아이들은 죽은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염습할때 다른 곳에 피신 시킵니다. C. 농촌의 경우, 상가집에서는 초상기에 부엌 아궁이를 막아 놓고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D, 령구를 내 갈때 문턱이나 문설주를 다치지 않습니다. E, 가문에 상사가 났을 때 임신한 며느리나 딸은 장례에 참석 시키지 않습니다. F,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입던 옷과 덮던 이불, 그리고 평소에 쓰던 일용품들은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웁니다. G, 장례나 제사에 가서는 불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누구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H, 장례 용품이나 제사 소물을 살때는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I, 장례나 제사가 지난후에는 보충 부조금을 받지 않습니다. J, 장례나 제사에 참석할때 화려한 옷과 진한 치장은 삼가 합니다. K, 친인이 객사 하였다면 사망한 지역에 가서 장사 지내고 시신을 집으로 옮겨오지 않습니다. L, 제사상 제물은 짝을 지우지 않으며 홀수로 합니다. M, 제사상에 개고기와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 그리고 고사리, 복숭아는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N, 상주와 주부는 장례를 치른 해에 자기 생일을 쇠지 않으며 친척이나 친구집의 희사 잔치에도 가지 않습니다. O, 자기의 배우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삼년제 지나기 전에는 재차 혼인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P, 가정에서 큰 희사를 치른 해(결혼잔치를 치렀거나, 새집을 샀거나, 아이가 태여난 해)에는 보통 장례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며 제사집에도 가지 않으며 청명이나 추석에 자기집 산소에도 가지 않습니다(특별한 경우 제외).   10, 총 결 어 (3분) 2009년 6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와 《조선족 전통장례》을 각각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非物质文化遗产)로 지정 하였으며 연변주 문화국이 주관부문으로 되고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구체적인 보호사업을 책임진 보호단위로 되였습니다. 이로부터 조선족 전통 상제문화는 보호가치와 발양의의가 있는 민속 문화라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였습니다.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리는것을 현시대의 개방사상이라고 여기는것은 틀리는 생각입니다. 당과 정부에서는 소수민족들의 특색문화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우대정책과 사업조례들을 제정하여 실행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 도리여 자기민족 특색문화의 보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 꺼리낌 없이 하나, 둘, 버리고 있습니다. 민족특색이 없이는 민족 대단결이 있을수 없으며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릴수록 점점 시대의 멸시를 받게됩니다. 자기의 민족특색이 짙을수로 자기의 합법성이 더욱 완벽하게 되며, 세계적 경쟁력이 더욱 강해지게 됩니다. 우리 조선족의 전통적 상제문화는 우리민족의 전통적 관혼상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입니다. 만일 조선족 민속문화에서 상제문화가 빠진다면 조선족의 전반 민속문화는 자기의 완미성을 잃게 되며, 잔페문화로 될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족 상제문화를 보호하고 계승하는 사업은 전 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어느한 부문이나 어느한 단위의 노력만으로는 완성할수 없습니다. 반드시 전 사회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우리가 계속 자기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고 시종 자기의 민족 특색을 확보한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더욱 밝을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010-09-16
53    (론문) 사망의 절대성과 상대성--차홍란 댓글:  조회:3970  추천:0  2012-07-16
(发表在2012.12) 论死亡的绝对性和相对性                                                          车红兰     摘要:死亡,自古以来始终以它独特的神秘性引人深思。死亡的困扰是任何一种试图对人生作总体思考的哲学都不可回避的问题。面对死亡时,我们经常感到无法克服的恐惧,即使活着痛苦,也不敢走向死亡,也许瞬间的死亡比活着的痛苦要少得多,可人越接近死亡,就越贪恋生命,害怕死亡,人类无法控制贪生的心态。但是,当我们把死亡通过绝对性和相对性来理解之后,就会发现死亡不是一个难以接受的事情。 On death and its significance  Che  Honglan Department of Social Sciences, Yanbian University, Yanji ,Jilin province133002,China 关键词:死亡   绝对性 相对性 中图分类号:        文献标示码:             文章编号: Abstract: Death, since ancient times for its unique mystery is always thought-provoking. Death is any kind of trouble trying to think of the overall philosophy of life for all can not be avoided. The face of death, we often feel unable to overcome the fear, even if the pain alive, did not dare to die, perhaps the moment of death than the pain of living is much less pleasant closer to death, the more eager for life, fear of death, human beings can not control the greed mentality. However, when we die by the absolute and relative to understand, you will find difficult to accept death is not a thing. Keywords:  death, absolute,relativity       死亡不单是有机体的生命终止问题,而且涉及到灵与肉、死灭与不朽、必然与自由等一系列重大哲学问题,成为一个人们不能不猜的斯芬克斯之谜。自有哲学以来,人们也就开始了对死亡之谜的哲学思考,死亡问题是中外古今哲人说不完、道不尽的永恒课题之一。然而,在哲学和医学的指导下,死亡理论可以被清理和总结。 一、死亡的绝对性   死亡的绝对性是指世人皆知的可视性死亡。   马克思主义辩证唯物主义认为“世界是物质的,物质是运动的,物质的运动永远不会终止,一种运动形式的消失标志着另一种运动形式的开始。”[1]生命的本质是机体内同化、异化过程这一对矛盾的不断运动,而死亡则是这一对矛盾的终止。世界上任何具体事物都必须经历产生、发展和消亡的过程,从来没有只生不灭的具体事物。有生亦有死,凡生必定死,这是不依人们的意志为转移的客观规律。在宇宙的时空长河中,人类作为一个具体的总体,也必然经历一个从产生到消亡的过程,经历一个人类生死过程。朱熹主张死是一种自然规律,是生命的归宿,同时,他认为,“天地间无非气,人之气与天地之气常相接,无间断,人自不见。人心才动,必达于气,便这与屈伸往来相感通。”[2]在人类存在的这段人类历史长河中,人类的延续、发展和进步,就是在一代代的个体生命不断产生又不断灭亡的自然过程中实现的。在此漫长的过程中,如果人类的个体生而不死、死而不生,人类就不存在。生命个体的死亡是既定的,无数生命个体从古至今的既定死亡,构成了人类历史或任何有机体生命发展史的历史性。   赫拉克利特是西方哲学史上最早对死亡进行哲学思考的哲学家。他从唯物主义的自然哲学的角度对死亡本性问题作了积极的探讨,坚持从自然界本身、从人的本身出发来解释人的死亡,断言“死亡就是我们醒时所看见的一切。”[3]人死后,无呼吸,无心跳,无温度,无意识……停止供氧、供血,神经系统迅速瓦解,周身鲜活的细胞不复存在,生命丧失了能动性,变成了一具僵硬而乏味的尸体。“按照全脑、心和肺这3个重要生命器官机能不可逆中止发生的起始部位,人们可以将身体死亡分为脑死亡、心脏死亡和肺死亡。”[4]脑死亡指全脑功能不可逆中止所引起的死亡。任何严重的脑外伤、脑疾病和障碍中枢神经系统的毒物,甚至电击、辐射和放射线,都可以引起全脑功能的不可逆中止而发生脑死亡。脑死亡发生时,大多数情况下心肺功能将很快随之不可逆中止,一般呼吸停止先于心跳停止。但有时心脏和或肺的功能仍然可以以某种形式维持着,不言而喻,这时脑死亡的诊断应十分严格。心脏死亡指原发于心脏功能不可逆中止所引起的死亡。此时心跳停止先于呼吸和脑功能的完全停止。心脏死亡最主要的原因是心脏本身的严重损伤或疾病。其他原因如各种原因的休克、电流通过心脏的电击、具心脏毒性的毒物中毒等也能引起心脏功能不可逆中止而死亡。肺死亡又称呼吸死亡,指原发于肺或呼吸功能不可逆中止所引起的死亡。此时呼吸停止先于心跳和脑功能的完全停止。肺死亡最主要的原因是肺或呼吸系统的严重损伤或疾病、机械性窒息、障碍呼吸功能的毒物中毒及所有能引起呼吸中枢、呼吸肌麻痹的因素。过去人们习惯把呼吸、心脏功能的永久性停止作为死亡标志,但众所周知,脑是机体的统帅,是人类生存不可缺少的器官。一旦脑的功能永久性停止,个体的一生也就终结,这就产生了关于死亡概念更新的问题,“脑死亡”的概念逐渐被人们所接受。 二、死亡的相对性  相对死亡则是指死亡的非可视的那一部分。 无论人类还是动物,甚至包括一些有质量的植物,一切生命的死亡都不是像人们有目共睹的那样一了百了干净彻底。目前,人们对死亡的认识,不仅仅停顿在视力范围所见到的,即绝对死亡的那一部分,而且也提到相对死亡的非可视部分。其实,从最远古的先民到当代广众,人类的内心从来也没有忽视过死亡隐秘着的另一面。特别是中华民族面对死亡时,常常会说出两个词儿“在天之灵”和“九泉之下”。这天上的与地下的,正是对绝对死亡与相对死亡两大部分的一种暗喻。西方的柏拉图给哲学下了一个流传千古的定义:“哲学是死亡的练习。”[5]柏拉图强调,人生目的在求真善美,但永恒的真善美,只有在死亡之后,并且主张灵魂不死论。德国神学家Moltmann提出死亡万岁的口号,这成为伊斯兰原教旨主义的行动纲领。恩格斯指出:“死亡或者是有机体的解体,除了构成有机体实体的各种化学成分,什么东西也没有留下来;或者还留下某种生命本原,或多或少和灵魂相同的东西,这种本原不仅比人,而且比一切活的机体都活得更久。”[6] 今天按照二十一世纪的认识水准,撩开灵魂二字的面纱,它的本质说来也很简单,灵魂,就是对人们大脑能量的一个统称。大脑能量是每个生命的主宰,虽然目前科学技术尚不能识察到它的全部行踪,只对其中的脑电、脑磁等能量有了初步的握定。不过不可否认,在地球万类生命中,人类所以聪智,正是因为拥有了杰出的大脑,而大脑的应用,又必须区分出两个部分:一个是大脑脑体(通过解剖可以看得见的部分),另一个是大脑能量(肉眼看不见的部分)。作为一种非可视的、上乘的精神之花,大脑能量从来就不是易朽易烂的物质。它全然不同于人的肉体,肉体质地的不耐用,决定了它最后不得已的废弃。大脑能量拥有最精锐的运动形式,它的特点是永远的循环往复,聚合弥散。无形的大脑能量,与一切有形的大脑组织相对应、相匹配。这里所说的与绝对死亡并列着的相对死亡,也主要就是指大脑能量不灭不朽的这一部分,以及它们循环回返的目的地。这一切都不在表象,所以又堪称死亡的本质。   进一步来讲,人之精神与肉体有完全不同的性质。人的肉体之身是一种实在之物,它只能占有一定的空间,存在于一定的时间之内;而人之精神虽然是人之肉体的一种派生物,但它却能够不受肉体的束缚,既可游于无限的空间,又可回溯和后行于无穷的时间。一般而言,人们既离不开对物质的摄取以维持身体的存在;同时,人们也离不开精神性的关系,它是人维持一个人的存在的根本。离开了精神性的关系,人也许还活着,但却不是作为人而活,只是作为一个物而存在着。当一个人很多与他人、与许多的人建立各式各样的关系时,虽然肉体经过一定的时间必然的死去,但精神关系不一定随着身体死亡而死亡。人在精神关系中,给物注入意识,此时这个物就不是单纯的自然之物,它具有了某种价值,使社会或一些人愿意去欣赏、保存。创造了这些物的主人,由于将自己的精神和意识贯进了其中而得以使生命永存。而当创造出的物越价值,它在世间被保存得越长,相对死亡也来临得越慢。    三、 死亡的绝对性和相对性   死亡具有绝对性和相对性对立统一的属性。   首先,绝对死亡和相对死亡是统一。绝对死亡和相对死亡是相互渗透和相互包含。一方面,相对之中有绝对,绝对寓于相对之中。任何相对死亡都包含有绝对的颗粒。另一方面,绝对之中有相对,相对是绝对的一个成分。绝对和相对,总是“你中有我,我中有你”相伴而生,即没有离开绝对死亡的相对死亡,也没有离开相对死亡的绝对死亡。   “生命是蛋白质的存在方式,这种方式本质上就在于这些蛋白质的化学组成部分的不断自我更新。”[7]生物体内同化与异化的相互转化就是生物体生与死的相互转化。生命体的死亡并不意味着生命体物质组成及其能量的消灭,随着物质分解重组、能量转移转化,这些又将成为其他生命体的一部分。生与死原本没有意义,生命只是物质循环、能量流动过程中的载体而已。即作为个体的人,一旦生命力消逝,他的肉体就开始了与其他一切有机物相同的化学变化,分解成水、二氧化碳等元素,但这些元素不会消失,将永远地存在于世。人的死是一个从哪里来,回到哪里去的自然过程。而且死亡后,人类可以继续保存精神架构。如果人类在人生有限的时间里,吸取科学文化知识,积极投身社会实践,以圣贤为榜样,甘于忍受无边寂寞之苦,常怀律己之心,常修为政之德,常祛贪欲之念,义无反顾地承担人生加以人类的重任,潇洒自如地走完人生道路,成为一个对社会有所作为的人,当死亡的阴影笼罩的时候,人类可以给子孙或社会留下宝贵的精神财富,如勤俭持家,艰苦奋斗,面对逆境,自强不息。死亡是美好的,并不是说生命不值得珍惜,而只是在强调死亡是生命历程中不可缺少的自然环节之一,是一个自然的过程,完全不必过于看得过重,完全可以淡然处之。死亡不是一种痛苦,而是生命应有的归宿,人性的、生活的句号。   死亡的绝对性和死亡的相对性是对立的。生,活着,死,意味着一切都结束。从根本意义上来说,生是一个人一生的追求与希望,如果一个人死,他没有追求与梦想。生的时候,人会有喜怒哀乐,会感受到人生的酸甜苦辣,然而,人死后彻底失去了所有的感觉,失去原来生存时所拥有享受的一切,死亡具有绝对性的。弗洛伊德认为“人不仅有生的本能,也有死的本能。”[8]我们都了解人求生本能的顽强,却不愿意接受弗洛伊德求死本能的观点,也许弗洛伊德就是看了太多不珍惜生命的人,他们的行为毫无理性可言,只好作这样解释。契诃夫曾经说过“死亡是人类最了不得的导师。”[9]死亡带给人的教诲深入骨髓,也许只有死亡才能让人明白生是怎么回事。死亡的存在及其必然性能使我们珍惜生命,去积极地建构健康与合理的人生观及人生态度,并注重自我生命的保护。正因为死是生的本质,我们只有活得精彩,活得充实,才不会觉得“该死”。相对永恒的死亡,生就显得十分短暂。正是这种短暂给了人类一个限制,让人类思考着作出选择,在生命的区间中放入有意义的事物;使人类感到存活是多么贵重、值得珍视的。死亡是一个不可逃避的问题,我们迟早都要面对,微笑着淡然地面对才显现出我们不虚此生。而要做到这一点,就需要我们将生命塑造得充实、趋于完美;对生活多一份欣慰,少一份埋怨,多一份坦然,少一份茫然。   万物有生就有亡,存在只是一个过程。死亡的面前我们似乎只能无能为力了,事实上也的确如此。然而面对死亡的绝对性和相对性我们唯一还可以值得庆幸的就是,我们还可以对它进行设想,并据这些设想而加以阐述。也就是这样,在人类中诞生了死亡哲学,它是专门为死亡而诞生的一门学问,永远负载在每一个的身上,直到人世间不再存在着会思考的生命。因为只有会思考,更确切地说只有可进行复杂思考的生命结束的时候,哲学才可能失去它的意义。   参  考  文  献 [1] 江德兴.马克思主义哲学原理[M].苏州:苏州大学出版社,2001:32. [2]朱熹.答黄道夫-朱文公文集卷58[M].上海:商务印书馆2009:891. [3]赫拉克利特.赫拉克利特著作残篇[M]. 广西:广西师范大学出版社,2007:206. [4]http://www.babyschool.com.cn/ask/detail_old_1271111.html[EBOL].中国育婴. [5]王晓朝译.柏拉图全集[M].北京:人民出版社,2003:287. [6]于光远译编.自然辩证法[M].北京:人民出版社,201:121 [7]中共中央马克思恩格斯列宁斯大林著作编译局编.马克思恩格斯选集[M].北京:人民出版社,1995:6. [8]车文博译注.弗洛伊德文集[M] .长春:长春出版社,2004:34. [9]汝龙译注.契诃夫短篇小说选[M].北京:人民文学出版社,2002:67.    作者简介:车红兰(1969-)女,吉林省龙井市人,延边大学马克思主义学院  硕士,研究方向:马克思主义意识形态和宗教学.    (본편 론문은 저자의 요구에 의하여 외부수집 스크랩 불허입니다.) (기사) 조선족 전통문화를 적극 선전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회장은 조선족 전통문화를 선전하기 위하여 2010년부터 2012년 사이에 연길시 각 가두 판사처와 손잡고 여러 사회구역을 돌아 다니며 이미 조선족 전통문화 강의를 10여차례 진행하였으며 연변방송국과 연길 아리랑 방속국과 손잡고 조선족 전통문화 라디오 강의 생방송을 이미 8차례 진행하였다.
52    조선족 장례문화 선전월 활동 전개 댓글:  조회:2533  추천:0  2012-07-16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리사회에서 연구 결정하여 금년부터 해마다 3월5일부터 4월5일 청명날까지를 로 정하였다. 해마다 이 기간에 조선족 장례문화와 효도문화에 대한 선전을 주제로 여러가지 의의있는 활동들을 조직할 계획이다.
51    한국의 전통장례 현황에 대하여 견학 댓글:  조회:3184  추천:0  2012-07-16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회장은 한국장례업관리협회와 한국궁전그릅의 요청으로 2010년 7월에 한국에 가서 유관부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민족 전통장례에 대하여 견학하였다. 한국 전통장례 일급지도사 인증서 증정 한국 궁전그릅 김연회 회장과 한국 장례업 관리협회 고두환 수석고문과 기념사진 한국에서의 견학사진 일부
50    우리민족 우리문화 찾기 협력 조인식 댓글:  조회:2649  추천:0  2012-07-16
“우리민족 우리문화 찾기 협력 협의서”에 관한 설명   A, 중국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길림성 연변주 문화국의 령도를 받는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 장례문화 연구 단체이며 길림성 정부에서 공포한 성급 무형문화재 “조선족 장례풍속”의 지정 보호 단위입니다. 현재 회원 58명에 회장 한명, 부회장 두명, 비서장 한명, 그리고 상무리사 다섯명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하에 “조선족 장의연구 사무실”과, “백화상조 (장례)복무중심”을 두고 있으며 여섯명의 정식 직원을 두고 있습니다.   B, 한국의 “궁전그룹”은 한국의 전통 장례문화와 현대 장례문화를 성공적으로 결부시켜 휘황한 성과를 이룩한 주도성 기업으로서 민족의 장례문화를 현대화, 표준화, 체계화, 국제화의 방향에로 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C, 2010년6월3일, 연변주 로인협회 전평선(원 자치주정부 부주장) 회장님의 주선으로 한국 궁전그룹의 김연회 회장은 중국 연길에 와서 연변 조선족 례의 연구회의 현성원 회장을 만나 보고 중국 조선족 장례문화 사업을 협조할 문제를 가지고 광범히 토론한 기초상에 “중한 조선족 장례문화 협력 협의서”를 체결 하였습니다.   D, “협의서”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락실하기 위하여 쌍방은 6~7월의 합당한 시기에 한국 서울에서 두번째 모임을 가지고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제정하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궁전그룹의 정통적인 장례 리론과 상식들을 배우고 선진 경험들을 견학하기로 하였습니다.   연변 조선족 례의 연구회 2010년 6월 6일
49    中, 조선족 전통장례 '省級 무형문화재' 지정 댓글:  조회:2677  추천:0  2012-07-16
中, 조선족 전통장례 '省級 무형문화재' 지정 최종편집 2010.03.25 17:29:34    (뉴데일리뉴스) 한국인의 관혼상제 중 하나인 전통 장례문화가 중국 지린(吉林)성 '성급(省級)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재중 동포매체 조글로미디어(www.zoglo.net)는 24일 연변 인터넷 방송을 인용, "우리 조상들이 중국 땅에 정착해 생활하게 되면서 독특한 중국의 장례문화를 형성했다"고 보도했다. 연변조선족례의(禮義)연구회 현성원 이사장은 연변 인터넷 방송과 인터뷰에서 "조선족 장례의 핵심은 효도 사상이며 사망한 사람한테 술을 붓고 절을 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은 효도사상의 집중적 표현이다"며 "이런 의식을 통해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어떻게 공대하고 존중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방송은 "조선족 전통장례는 일반적으로 초혼, 염습, 성복제, 조문, 발인제, 안신제 등 순으로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며 약 100년 전 동북 3성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간 조선족들이 우리와 비슷한 장례문화와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소개한 뒤 최근 화장이 일반화되고 장례절차가 간소화되면서 적지 않은 상제 의식이 생략됐으나 부모와 조상을 공경하는 조선족의 미풍 양속만은 변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영하 교수는 '조선족 장례문화의 중국 성급 무형문화재 지정'에 대해 중국문화 당국이 소수민족 보호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대비해 수 년 전부터 추진해 온 사업 결과로 본다며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최근 이주해 간 소수민족인 데다 한국-조선족의 문화가 유사한 상황에서 중국이 특정 종목을 정부 문화재로 지정,우리와 갈등을 발생시킬 소지도 있다"고 논평했다. 그는 이어 "7∼8년 전부터 윈난(雲南), 광시좡주(廣西壯族) 등 소수민족들의 문화유산 지정 사업을 추진해 온 중국이 이제 연변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 같다"며 "중국은 조선적 사회에 대한 문화적 관심이 한국과 감정적인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또 한국은 조선족이 중국인이라는 현실을 감안, 상호 역사적인 경험을 존중하고 협조하면서 조선족 문화재가 세계에서 인정 받도록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press@newdaily.co.kr [자유민주·시장경제의 파수꾼 - 뉴데일리/newdaily.co.kr] Copyrights ⓒ 2005 뉴데일리뉴스 - 무단전재, 재배포 금지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43230 조선족장례문화 계승, 보존하기 위해 (2010-9-8 19:15:09) 연변일보>>사회>>사회일반(제6면)     조선족전통장례가 지난해 6월에 성급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조선족전통장례풍속을 계승, 보존해나가기 위해 일전에 "백화상조(장례)봉사쎈터"를 설립했다.  생활절주가 갈수록 빨라지면서 중국조선족의 장례절차도 차츰 간소화되여 자체의 특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어떤 가정에서는 조선, 한국과 중국 한족의 풍속이 서로 뒤죽박죽이 된 장례를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 40~50대들도 조선족전통장례절차를 몰라 가정에 갑작스레 불상사가 생겨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조선족전통장례문화를 보호하고 조선족사망자 유가족들의 장례행사에 도움을 주기위해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설립한 "백화상조(장례)봉사쎈터"는 앞으로 조선족장례와 제사에 관련되는 모든 행사를 도맡아 전통적으로 치러주기로 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리사장 현룡수씨는 "백화상조(장례)봉사쎈터"에 와 표준적인 수의를 구매한 유가족에게는 전문훈련을 거친 봉사인원을 파견해 렴습을 무료로 해주고 저소득 보장호는 50%의 비용을 할인해준다고 말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또 주민정국에 건의해 연변장의관 3호청을 조선족고별청으로 만들기로 했다. 현룡수리사장은 "백화상조(장례)봉사쎈터"가 봉사체계를 완벽화하고 조선족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한다면 우리 조선족의 전통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존되여 내려갈수있을것이라고 전망했다.                                                                   최미란기자
48    (포럼) 한 민족이 자기의 상제문화가 없어선 안된다--성원 댓글:  조회:3863  추천:0  2012-07-16
一个民族不可能没有自己的丧葬文化 《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 主题发言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玄盛元   各位领导,各位专家,各位佳宾,同志们,朋友们: 2009年6月,“朝鲜族丧葬习俗”被指定为吉林省非物质文化遗产,从此,朝鲜族丧葬习俗不再是迷信活动,不再是陋习,是一种宝贵的朝鲜族传统民俗文化。 我们要继续加强我们民族的文化建设,将朝鲜族丧葬习俗提升为有根系、有体制的更高一级的真正的朝鲜族丧葬文化,为提高朝鲜族文化质量而增添宝贵的成分和营养。 为了实现这一目标,我们要探讨如下的几个学术性问题: 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历史发展中的作用; 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传统民俗中的位置; 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现实生活中的意义。 今天我们召开“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首先要探讨以上几个学术性问题,在此基础上,集中讨论怎样保护朝鲜族丧葬习俗的问题。 下边,根据我在这几年对朝鲜族丧葬习俗的研究和一年多的保护朝鲜族丧葬习俗工作中的经验,发表我的浅薄的观点。   一、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历史发展中的作用 李朝太宗12年(公元1412年)朝廷下令全国效仿中国的《朱子家礼》,李朝成宗16年(公元1485年)颁布《经国大典》,全面实行推崇儒教,排斥佛教的政策,从此,包括丧祭礼仪在内的李朝社会的一切礼仪活动,都推行中国儒家的礼仪。 朝鲜后期学者李縡在中国《朱子家礼》基础上还掺和朝鲜民族很多传统习俗和理念,编纂《四礼便览》,全面阐述朝鲜民族“冠婚丧祭”礼仪规范,李朝宪宗10年(公元1844年)首次发行。 中国朝鲜族的先民,多是在1850年以后,自朝鲜半岛迁入到中国东北地区定居的,经过100多年的历史沿革,逐渐发展成为当代中国的一支少数民族。 中国朝鲜族丧葬习俗是朝鲜半岛丧葬文化的一个分支,中国朝鲜族在朝鲜半岛的本源地比较广泛,他们带到中国来的丧葬习俗,也按地方大同小异,他们在中国特定环境下共同生活的过程中,还逐步形成了中国特色的朝鲜族丧葬习俗。 文革以前,中国朝鲜族基本上还是实行从朝鲜半岛带过来的传统丧葬制度,村村有“丧舆契”之类的民间相助治丧组织,集体出资打造丧舆,在村外僻静处盖库房保管,选一人当都监,负责管理有关丧葬的事务,村里出丧事,统一安排丧舆抬夫和掘墓人。座上大人(村里最高年长者)严格监督村里举行的每一次丧祭仪式,以此,治理家风、端正族风,保证民族传统代代相传。 朝鲜族丧葬习俗的基本思想是传统的儒家思想,其核心是“孝道”,是千百年来维持社会秩序和家庭关系的东方民族的道德准则。在朝鲜族传统丧葬活动中集中表现孝道思想,朝鲜族的先人们就是利用葬礼和祭祀的形式传授孝道思想,继承民族传统的。 所谓的“孝”是具有两种含义:一是孝敬,二是办丧。在我们祖先的时代里对父母长辈不孝是天大的罪孽,普遍信奉“孝为百行首”,“人间百善孝为先”,深信“犯不孝,天诛地灭,误祭祀,断子绝孙”。因此,一旦父母长辈去世,就尽最大努力去办好厚葬,向社会表明自己是大孝子。平时曾经对父母长辈欠孝的人更是要利用厚葬的手段来掩盖自己的耻辱,填补心理的空虚。这是古代朝鲜人重视葬礼的重要原因之一。 葬完之后还有“三年守孝”之特习,就是在父母坟前打草棚守墓三年。在这期间不洗脸、不吃肉、不回家,确实是苦行。这种人也叫做“孝子”,他们苦行的目的就是弥补在父母生前没有尽到的孝道。现在来看是很愚昧的行为,可是我们从中可以看出我们的祖先在落后的古代意识形态的条件下还是要坚持优良道德准则的一片苦心。 朝鲜族丧葬习俗伴随朝鲜族先民进入中国以后,默默分担朝鲜族先人们死亡之痛苦和悲伤,默默安抚朝鲜族先人们对于死亡的恐惧和失望,默默指挥每次朝鲜族葬礼之大事,与朝鲜族先人们一起走过来了一百多年的风风雨雨,凝聚着朝鲜族先人们的深厚情感和理念。 二、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传统民俗中的位置 民族是人类在历史上形成的共同语言、共同地域、共同经济生活以及表现于共同文化上的共同心理素质的一定历史阶段的共同体。随着时代的发展,如今在中国,共同地域、共同经济生活不再是代表一个民族的重要特征。中国有56个民族,他们都是中国公民,都是在中国境内生活,可以自由流动。在这种情况下一个民族向社会展示自己的手段主要是自己的特色文化,没有自己的特色文化,或者抛弃了自己的特色文化,这个民族已经失去了以民族自居的社会基础,在素质和各方面都已经丧失了优势。 一个民族不可能没有自己的丧葬文化,如果没有自己的丧葬文化,或者是抛弃了自己的丧葬文化,这个民族很可能是还没有成熟的民族,或者是正在退化的民族。 我们朝鲜族民俗文化中不可能没有自己的丧葬文化,如果没有自己的丧葬文化,我们民俗文化就失去其完美性。 朝鲜族历来很重视喜庆的民俗文化(抓周、结婚、花甲等),而当今正在进入辉煌期,到处设有婚礼厅、生日厅,厅厅响彻祝福歌。 可是朝鲜族的丧葬文化的处境好比是遗弃在北邙山坡的古碑,人人惧而远之,任凭风吹雨打,没有人管理,没有任何保护措施。 其实,朝鲜族丧葬习俗是朝鲜族传统“冠婚丧祭”文化中不可或缺的重要部分,朝鲜传统家礼指导书《四礼便览》共四册八卷,仅是“葬礼”部分就占五卷,其他“冠礼”、“婚礼”、“祭礼”只占各一卷,可见,朝鲜族先人们欲把民族的传统习俗和理念集中表现在葬礼中,朝鲜族葬礼可以说是最能代表朝鲜民族的民俗文化。 中国有句“红白喜事”之说法,结婚叫做“红喜事”,死人叫做“白喜事”,两者合起来叫做“红白喜事”。结婚叫做“喜事”,人人皆知。可是中国人死人也叫做“喜事”。一方面哭鼻子办丧事,是人之常情。还一个方面叫做“喜事”,而确实是“喜事”。世界好比是公共巴士,先上车的乘客到了目的地下车,就有空间新的乘客能上车。世界也是一样,先出生的人生活好自己一生以后慷慨死去,就有空间新的生命能诞生。假如孔子、秦始皇至今还是服用“长生不老药”而未死,他们已经是两千多岁,这个地球人满为患,很可能已经爆炸了。因此,丧葬文化不仅是表示对死者的哀悼,也是表现对活人的希望。 千百年来,人们都是为了过好日子而奔波,为幸福生活而奋斗。时代到了今天,我们应该还要考虑如何死的好,如何提高死亡质量的问题。正确处理死亡问题的民族,才是有前途的民族。生老病死是人间常事,朝鲜族民俗文化并不是贪喜文化,不应该只为结婚、生孩子、生日等喜庆之事而服务,应该还要为死亡等悲痛之事而服务,这才是成熟民族文化的正确态度。   三、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现实生活中的意义 所谓葬礼通俗地讲就是人死以后处理其遗体的仪式,主要具有两种功能:一是将失去生命功能的遗体送还自然的自然功能,二是终结与死者的社会关系和情感关系的社会功能。 葬礼实际上对于死者来说是毫无意义的。人死以后魂魄到底去哪里谁也说不明白。古代孔子曰:未知生,焉知死。就是说“活着时候的事情还没有搞明白,怎能知道死后的事情呢?”。表面上看葬礼好象是把死者的灵魂送到美好天国的仪式,其实不然。葬礼实际上是活人为获得精神依托和心理安慰的文化手段。因此,葬礼不是为死者所必要的,而是为活人所必要的。 葬礼在现实生活中大体上具有如下的几种意义: 葬礼是孝道的延续,补充和完成。 当今时代竞争激烈,年轻一代在开辟自己人生路的征途上往往是照顾不周自己的父母。取得一定的成功以后再回来要好好孝敬父母的时候,父母往往已经是太老了或者是已经去世不在了。 人们通过葬礼可以以自己的方式弥补对父母生前未尽到的孝道,可以向已故父母表示愧疚,请求宽恕,得到安慰。 葬礼是家庭义务的新分工,是家庭的新出发点。 人生活在一个家庭,都赋予特定地位和特定义务。一个人的死亡意味着一个家庭里空了一个位子,必然破坏原来的家庭平衡。如果是一家之主去世更为如此。在这种情况下葬礼上照例首先确定丧主,他就是家庭的新代表。传统来讲丧主必须是长子、长孙,而如今若没有儿子,长女、女婿也可以当丧主。在这个基础上家里的其他成员也自动调节自己的义务,形成家庭的新的平衡,开始家庭的新的生活。 3、葬礼是对于死者生前人生价值的评估和总结。 人生在世,创造财富,生儿育女,建功立业。因此,人死后充分评估他的生前人生价值,这就等于给活人留下有用的精神遗产。人们办丧开追悼会,一般在悼词中多讲死者的功德,不讲死者的缺点,这是因为死者的功德对于活人是有意义的,可是死者的缺点对于活人是没有任何意义的。 4、葬礼是人们对于自己人生进行反省的机会。 人一出生就决定某一天注定要死,这是不可违背的天约。人们在办丧的时候强烈意识到人对死亡的无可奈何,与此同时反观自己,感觉到对人生的紧迫感。 5、葬礼是关系到自己尊严、家族尊严、民族尊严的大事。 人是有尊严的,自己父母的葬礼也办不好,何以谈尊严?办丧有体面不一定要场面大,而是应该有自己民族特色,有成熟而精炼的章法,这样的葬礼才有体面的。 6、葬礼是传统教育的有效形式。 人们通过父母的葬礼,可以给孩子们传授孝道思想,可以给孩子们讲讲祖先的优良传统,增强孩子们的家族观念和民族观念。 … … … … … … … …   四、关于保护朝鲜族丧葬习俗工作中的几个问题 自从去年6月,朝鲜族丧葬习俗被指定为省级非物质文化遗产以来,做为保护单位的我们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为了不辜负时代赋予我们的历史使命,在保护朝鲜族丧葬习俗的工作中,积极开展了一些新的尝试。 我们主要以三个方面开展工作:1、发掘、研究、整理,2、提出合理化建议,3、指导、服务。 1、在一年多的工作当中,我们对朝鲜族传统丧葬习俗进行一系列的发掘、研究工作,已经初步整理出来了结合现实朝鲜族丧葬活动的新的丧礼程序。在新整编的过程中我们着重考虑了以下三个方面:1、遵守国家的“殡葬管理条例”,2、精简而不草率,沉痛而不凄惨,3、突出显示朝鲜族特色。现在的主要问题不是去粗取精,如今糟粕、精髓都被冷冻,只要择精恢复就是。我们在新整编的朝鲜族丧礼程序中增加了读祝文和诵挽歌的内容,祝文和挽歌本来就是我们朝鲜族传统丧葬文化最精彩的一部分,此一举已经受到社会的普遍欢迎和肯定。今后我们不断总结经验,不断进行改进,与有关部门和有关学者们合作,为编纂一本完整的现代朝鲜族丧礼指导书而继续努力。 2、在向政府的相关部门和社会的相关单位提出合理化建议方面,虽然效果不甚理想,我们还是义不容辞,继续坚持。 第一个提出的建议:作为朝鲜族自治州的延边地区的四大殡仪馆中竟然没有一间朝鲜族告别厅,这显然是美中不足。就此,我们已经向有关方面提出了“在延吉殡仪馆设立朝鲜族告别厅的建议”,而且,州文化局的积极沟通和努力的结果,有关部门已经下文件认可和同意了我们的建议。下一步我们准备向有关部门提供拟设置的朝鲜族告别厅内部设计图和仪式程序,希望在这次研讨会上评估解决。 第二个提出的建议:朝鲜族丧葬习俗中“殓袭”(给死者穿寿衣、包裹)是一项很重要的程序,是每一家朝鲜族遗家属首要关切的事项。不过,这一领域现在却变成了社会上的一些人捞取钱财的自留地。这是我们民族没有保护好自己丧葬文化的后果。社会上的有些人专门利用朝鲜族遗家属的悲痛、着急的心情,诱骗他们提供一些糊涂服务以后,狮子大开口要钱,没有讲价的余地,其主要场所就是医院和福利院。就此,我们向延边州卫生局和延边医院等相关部门和相关单位提出了“在殓袭领域实现规范化、组织化的建议”,而且,已经得到了州卫生局、州护士协会等有关部门的积极的响应。可是,因为部门之间还是缺乏沟通,大部分医疗单位和福利单位还是没有完全理解我们的善意,客观上给社会上的那些人提供了可乘之机。 3、我们认为保护朝鲜族丧葬习俗最行之有效的方式是在丧葬活动中直接给朝鲜族遗家属提供指导和服务。我们不能指望每一位朝鲜族人都要熟悉朝鲜族丧葬知识,我们还没有权利处罚损害朝鲜族遗家属利益的那些人。在这种情况下我们能作到的只能是建立一支有规律、有素质的自己的丧葬服务队伍来占领这个领域。可是要占领这个领域,没有各地医院和福利院的协助是不可能的。我们三番五次地请求各地医院和福利院协助我们工作的基本理由就在于此。 在指导性工作方面,我们已经在延吉市各街道办事处进行了关于朝鲜族传统孝文化的演讲,已经在延边广播电台和延吉广播电台的早晨直播节目中进行了关于朝鲜族丧葬习俗的广播演讲,今后我们继续推进这方面的工作。我们还开设了咨询电话,认真解答各地朝鲜族遗家属提出来的有关丧葬的各种问题。 在服务性工作方面,我们已经在工商管理部门注册设立了“白花相助(丧葬)服务中心”,还缺少什么手续我们会继续补办。我们严格管理收费标准和服务质量,凡是与朝鲜族丧葬有关的所有事务上提供具体的、全面的指导和服务。一旦家里出丧事,只要拨打我们的服务热线,繁琐的丧葬事务就可以又体面又方便地OK了。我们的服务工作跟殡仪馆的工作并不发生冲突,恰恰相反,我们的服务工作就是殡仪馆工作的补充和提升。 我们认为设立朝鲜族丧葬服务中心是保护朝鲜族丧葬文化的有效保障。我们把朝鲜族丧葬服务中心搞好,而且长期坚持下去,只要功能健全的朝鲜族丧葬服务中心继续存在,朝鲜族的丧葬文化就可以继续发扬光大。 我们研究会是社会团体,在财务上没有国家的财政补帖,没有任何部门的经费支持。我们为民族保护民俗文化,可是事业经费都是靠个人出资,靠自力更生。在这种情况下设立朝鲜族丧葬服务中心,以服务养保护是唯一可取的解决方法,政策上也是支持的。 如果朝鲜族丧葬服务中心经营的不好,会直接影响保护朝鲜族丧葬文化的事业,如果朝鲜族丧葬服务中心经营的很好,必然促进保护朝鲜族丧葬文化事业的发展。 经营朝鲜族丧葬服务中心,自然涉及到争取服务对象的问题,我们只能以市场模式提供服务。现在个体户拼命与我们争抢客户,这不仅影响我们的经营效益,而且,严重阻碍我们事业计划的实施。 对此,我们制定了如下的对策方案: 抓住“保护单位”这一使命,争取政府扶持和行政支持; 充分利用广告、演讲等手段,继续扩大知名度和影响力; 提高服务质量,增加服务项目,进一步满足客户的要求; 加强与医院、福利院等相关单位的沟通,争取协助和支持; 联系有关部门,逐步实现职业培训、持证上岗的行业管理方法。   总而言之,保护朝鲜族丧葬文化是全社会性的事业,单靠一个部门、一个团体的努力是远远不够的,只要政府支持,各部门协助,全社会参与才能完成。 我们相信今天的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对于我们民族的丧葬文化事业具有积极而深远的意义,对于今后我们的工作会起到积极的推动作用。 谢谢! 201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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