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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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한국 “반려동물 장의관” 견문 댓글:  조회:2566  추천:1  2014-10-28
한국 “반려동물 장의관” 견문 지난 9월, 동국대 “상장례 비즈니스 국제 학술세미나” 참석차로 한국에 갔다가, 궁전그룹 부회장 조성필선생의 제의에 따라, 한국 경기도 김포시에 가서 “반려동물 장의관”을 견학하였다. 우리일행 네사람이 조성필선생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 아침9시에 서울을 떠나, 김포시 하성면에 도착하여 몇가지 사무를 처리한후, 정심을 먹고, 월하로에 있는 “반려동물 장의관”을 찾았을 때는 이미 오후 한시가 다 되였었다.  “반려동물 장의관”은 교회 비슷한 건물이였는데, 울안에 들어서니 사위는 쥐죽은듯 괴괴하여, 진짜로 동물의 저승세계에 들어서는 기분이였다. 장의관 정문으로 들어가니, 관장인듯한 젊은분이 나와서 우리를 맞이하여 준다. 우리가 온 뜻을 말했더니, 그분은 몹시 반가워 하시며, 우리들을 안으로 안내하였다. 그는 자기가 직접 안내원을 맡아서, 우리들에게 한곳한곳 구경시키면서 설명하여 준다. 우리가 처음에 본것은 두개의 정교하게 만든 깜직한 작은 나무상자였는데, 바로 죽은 반려동물의 시체를 담는 관이란다. 소위의 반려동물에는 주요하게 반려견이 많고, 일부 반려고양이, 반려토끼… 등도 있었다. 이곳 반려동물들은 단지 주인에게 한시기 얼마간 기쁨을 주었다는 하나의 리유만으로 죽은후에 이렇게 고귀한 대우를 받는다. 우리곳에서는 자식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을 키워주고, 하늘같은 은혜를 베푸신 부모님들마저도 사망한 후에는 이런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 다음 우리들은 반려동물들의 망혼을 기리하여, 제를 지낼수 있게 만든, 소위의 반려동물 령좌를 살펴 보았다. 반려동물 령좌는 큰 유리창앞에 깜찍하게 설치되여 있는데, 중간에 “근조(謹弔)”까지 그렇듯 하게 써놓고, 그앞에 향로와 초불대를 놓고, 그옆에는 관음의 불상까지 모셨으며, 여러가지 꽃바구니로 아름답게 장식되여 있었다. 관음보살은 원래 사람들을 보우하여 고해에서 구해 주신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동물들도 관음보살의 보우를 받는다고 하니, 그 누가 감히 동물을 짐승이라고 업신볼수 있겠는가? 큰 유리창 너머로 일반 화장터의 화장로보다 조금 작은듯한 세개의 화장로가 들여다 보였는데, 병원의 병리 실험실처럼 아늑하고 정갈하다. 천정에는 화려하게 꾸민 큰 프랑카트가 드리워져 있고,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엔젤스톤은 당신의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을 정중히 좋은 곳으로 인도 하겠습니다.” 나는 여러가지 생각을 굴리며 화장로를 들여다 보다가, 일행을 따라 걸음을 옮겨, “추모관1”이라고 쓴 문앞에 닿았다. 관장이 추모관의 문을 조금 당겨 열어놓으니, 안에서는 녀인 몇사람의 통곡소리가 새여 나오는데, 그렇듯 애절하고 처량하다. 격음장치가 잘 되여, 문이 닫혔을때는 전혀 들리지 않던 소리다. “저 사람들이 지금 개를 추모하여 우는 겁니까?” 내가 의아해 하며 물으니, 관장은 “그렇지요, 이곳에서는 반려동물을 최고의 우상으로 모십니다. 무엇때문에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잃고는 부모를 잃은것보다 더 슬퍼하시는지 아십니까? 반려동물은 평소에 주인이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던 사인 소유물로서, 주인에게 그 누구도 줄수 없었던, 심지어 부모도 줄수 없었던, 오로지 반려동물만이 줄수 있었던 특수한 기쁨과 안위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한다. 들어보니 그렇듯한 말이다. 그러니 지금 많은 경우에 부모장례에서 자손들이 우는 것은 책임감 혹은 남의 눈 때문에 가짜로 우는 것이고, 저 사람들처럼 반려동물장례에서 우는 것이야 말로 진짜 마음속으로 아쉽고 슬퍼서 우는 것이다. 우리가 기념품 진렬대 앞에 도착하니, 정예하게 가공한 추모용 유리공예품과 유리병들이 정연하게 진렬되여 있었다. 유리병 안에는 녹두알만큼한 알맹이 돌들이 담겨져 있었는데, 어떤 유리병 안에는 호두알만큼한 것도 있었다. 관장의 해석에 의하면, 그 알맹이 돌들이 바로 “휴먼스톤”이란 것인데, “휴먼스톤”이란 사람이나 동물을 화장한후, 남은 유골을 순간 고온으로 처리하여, 과학적으로 가공해 낸 준보석 결정체라고 하였다. 그러니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유골을 ”사리(舍利)”라고 하고, 속간에서는 유골속의 결정체를 “사리”라고 하는데, “휴먼스톤”이란 결국 인공적으로 만든 “사리”인 셈이다. 이 반려동물 장의관에서는 동물들의 유골을 모두 “휴먼스톤”으로 만들어 깜직한 그릇에 넣어 주인에게 돌려주며, 어떤 경우에는 녀주인들의 특수요구에 따라서 “휴먼스톤”으로 귀걸이, 목걸이, 가락지… 등 장식품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또 몇곳을 더 돌아 보고는, 휴계실의 차탁에 둘러 앉게 되였다. 우리들은 차와 커피를 마이며 서로 명함장을 교환하였다. 관장의 명함장에는 “휴먼스톤 산업기계 대표”라고 적혀있고, 그아래에 “관계회사-반려동물 장의관 엔젤스톤”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니 기실 “휴먼스톤 산업”이 그의 주산업이고, “반려동물 장의관”은 그의 부속산업이였다. 즉 한국각지에서 유골함에 담아 가져오는 사람의 유골을 “휴먼스톤”으로 가공하여 돌려주는것이 그의 주요 산업이였던 것이다. 관장은 우리들에게 “휴먼스톤”에 관한 책자를 한부씩 나눠 주면서, 자기의 창업사와 더불어, 상관 프로젝트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자기의 “휴먼스톤”의 우점에 대하여 다음가 같이 소개하였다: 1, 소중한 삶을 사셨던 고인을 명예롭게 소중하게 모실수 있습니다. 2, 유골이 친숙한 구슬모양으로 변하여 혐오감이 없습니다. 3, 납골상태에서 발생하는 결로, 변질, 악취, 해충을 방지합니다. 4, 휴먼스톤은 종교의 구별이 없습니다. 5, 유골을 산이나 강물에 뿌려 생기는 고인과의 단절감을 극복합니다. 6, 휴먼스톤 봉안방법이 간편하고 우아하며, 공간을 절약합니다. ……………………………………………… 생각해 보니, 만일 관념문제만 해결된다면, 사람의 골회를 휴먼스톤 형식으로 보관하는 것이, 지금처럼 납골당에 보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선진적인 방법임은 의심할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의 새기술 성공을 축하하여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의 머리속에는 어떻게 우리 중국조선족들의 죽음존엄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남들은 짐승들도 죽으면 전문 장의관에 모셔져 추모의 례우를 받을수 있는데, 우리들은 비록 소수민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위 나라의 우혜적인 자치권리를 향수한다는 사람들이, 그것도 자기의 자치구역내에서조차 자기식으로 장례치를 분향소 한칸 없다. 죽은 사람이 이렇게 값 없이 처리되니, 살아있는 그 자손들인들 값 있으면 얼마나 있으랴? 너무도 리해가 가지않는 부분이다.……………… 나는 머리속에 폭풍처럼 휘몰아 치는 생각으로, “반려동물 장의관”을 떠나 오면서 관장님한테 고맙다는 인사치례나 제대로 하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연변조선족예의연구회 현용수 작성 2014-10-28
196    한국 동국대학 국제 학술세미나 참석소감 댓글:  조회:3250  추천:0  2014-10-03
한국 동국대학 국제 학술세미나 참석소감   한국 《하늘문화신문》 김동원 회장의 주선으로, 나는 9월25일 한국 동국대학 국제 학술세미나에 참석하는 행운을 가지게 되였다. 김동원 회장에게 고마운 뜻을 이 글을 빌어서 다시 표시하는 바이다. 한국 동국대학에는 유명한 불교대학원이 있는데, 2000년도에 처음으로 장례문화학과를 신설하고 생도들을 받아 들였으며, 그후 2006년에 생사의례학과로 개칭하였다가, 올해 9월에 다시 생사문화산업학과로 고치면서 이번의 국제 학술세미나를 마련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거의 사라져 가는 《조선족 상례풍속》을 가까스로 무형문화재로 등록시켜 놓고, 대표성 전승인이라는 어려운 사명을 안고, 혼자서 고군작전하던 나로서는 더없이 보귀한 배움의 기회요, 연대의 장소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분명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가 《조선족 상례풍속》을 중국의 무형문화재로 등록시켰다는 것은 결코 이 문화를 중국당국에 빼았겼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정 반대로 《조선족 상례풍속》이 중국에서 합법적 문화지위를 가지고 보호를 받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 혜택은 직접 그 풍속의 소유민인 조선족에게 차려지게 된다. 중국에서 조선족 상례풍속은 종래로 문화적 차원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중국조선족 상례풍속은 이념상에서 성숙되지 못하였고, 규범상에서 통일되지 못하였으며, 민속으로서의 특색이 돌출하지 못하였다. 1980년대에 나라에서 화장을 주요목적으로 하는 장례개혁을 시작하면서, 회족, 위그르족 등 이슬람 종교를 신앙하는 열개 소수민족의 상례풍속은 국가적 보호대상에 들었지만, 조선족 상례풍속은 국가적 보호대상에 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연변을 조선족 자치주라고는 하지만 연변경내의 병원이나 빈의관에는 특별히 조선족 상가를 대상으로 하는 써비스 시설이나 써비스 항목을 따로 설치하지 않았으며, 조선족 상가에서는 어쩔수 없이 30여년 동안 기본상에서 한족식으로 장례를 치를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조선족 상례풍속은 거의 근절되여 버렸다. 이런 사회배경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전통문화를 찾아, 민족의 얼을 살린다는 신념으로,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삼성의 광범위한 조선족 집거지역을 답사하면서, 조선족 상례풍속에 대하여 상세히 발굴정리 하였고, 그 기초상에서 2009년에 《조선족 상례풍속》을 나라에 신청하여 길림성 무형문화재로 등록하였다. 2010년말, 우리는 정부 주관부문의 지지를 쟁취하여, 연변력사상 처음으로 《조선족 상례풍속》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20여개 부문의 주관령도가 참석하였고, 덕망높은 학자들과 문화인들과 합작분공하여, 여덟편의 무게있는 논문을 발표하여, 《조선족 상례풍속》의 론리성, 합법성, 필요성을 논증하였으며, 초보적으로 《조선족 상례풍속》을 문화적 차원으로 승급시켜 놓았다. 이로부터 중국 조선족에게도 나라의 인정을 받는 자기의 상례문화가 있게 된 셈이다. 풍속습관도 문화의 범주에 속하지만 아직 완미하지 못한 문화이며, 그 품위는 근근히 나라에서 존중해 준다는 차원에 그친다. 문화적 차원의 풍속으로 되려면 역사가 길고, 체계가 완미하며, 충분한 학술적 논증을 거쳐야만 하는데, 이때의 그 품위는 나라에서 존중해 준다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보호해 주고, 발양해 주는 차원으로 승급한다. 중국의 여러민족 상례풍속 가운데서, 진정 문화적 차원에 도달한 풍속은 그리 많지 못하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서 완전 해결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비록 초보적으로 조선족 상례풍속을 문화적 차원으로 승급시켜 놓았다고는 하지만, 이 문화가 진정으로 회복되고 제노릇을 하자면 아직도 많은 길을 걸어야만 한다. 첫째는 조선족 상례문화 규칙본이 나와야 하고, 둘째는 조선족 상례문화 운행 시스템이 완미화 되여야 하며, 셋째는 전 민족적으로 조선족 상례문화에 참여하고, 그 혜택을 받을수 있어야 한다. 말이 그만 길어졌다. 이번 동국대학 국제 학술세미나의 주제는 《동아시아 상장례 산업의 현황과 과제》였다. 오전 열시에 회의가 시작되였는데, 먼저 동국대 생사문화산업연구소 신정현소장의 개화사가 있었고, 동국대 불교대학원 정승석원장의 인사말이 있었으며, 동국대 전자불전문화콘테츠연구소소장인 보광스님의 축사가 있었으며, 이명수 국회의원과 박현준 프리드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그다음 오늘 회의에 참석한 지명인사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논문발표는 오전과 오후 두부분으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오전의 첫순서로 중국 호남성 장사민정학원의 왕푸즈(王夫子)교수가 《중국(대륙)의 장례 비즈니즈 현황과 장례교육》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창원 문성대학 이덕진교수가 토론발언을 하였으며, 두번째 순서로 일본 동양대학의 이노우에 하루요교수가 《일본의 현대 상장례 산업 현황과 과제》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을지대학 이필도교수가 토론발언을 하였다. 오후의 회의가 시작되면서, 먼저 오늘 회의에 참석한 중요인사들에 대한 보충소개가 있었는데, 나를 중국조선족 장례문화연구중심 이사장으로 소개하였다. 오후의 첫순서로 동국대학의 이범수교수가 《한국 상장례 산업 발전과 종사원 역활》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을지대학 황규성교수가 토론발언을 하였으며, 두번째 순서로 에프엔에스 남승현대표이사가 《장례식장 종사자의 감염관리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대전보건대학 최정목학과장이 토론발언을 하였으며, 세번째 순서로 한국장례업협회 김석제사무총장이 《한국 장례문화산업의 현황 및 전망》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서라벌대학 정문탁교수가 토론발언을 하였으며, 네번째 순서로 전국공원묘원협회 유재승회장이 《사설법인 묘지의 현황과 개선방안》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을지대학 안우환교수가 토론발언을 하였으며, 다섯번째 순서로 동국대학의 문동규교수가 《한국 상조산업의 현황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동부산대학 김기명교수가 토론발언을 하였으며, 마지막 순서로 종합토론 및 질문과 답변이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인물들의 신분과 발표된 논문의 제목만 보더라도 한국 상장례 산업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력을 일으키는 세미나인지 알수 있었다. 종합토론 순서에서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요청발언을 하였다: 《저는 중국에서 온 조선족 상례 문화인입니다. 중국에는 지금 우리겨례들이 약 2백여만이 살고 있는데, 우리 연변에만 하여도 우리겨례들이 약 80여만이 호적등록이 되여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에서 우리말 우리글을 쓰면서, 평등한 공민의 권리를 향수하며 살지만, 우리의 상례풍속은 종래로 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만큼 이민족으로서의 우리의 상례풍속은 미흡한 점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을 우리가 몇년의 간고한 노력을 겨쳐 발굴정리하고, 여러면의 학술논증을 겨쳐, 나라의 합법적 문화지위를 인정받는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자기의 추모관이 없으며, 자기의 상례문화대오가 없으며, 제 혼자 고군작전하고 있습니다. 중국조선족 상례문화는 한국 상례문화의 일부분으로서 고국의 관심과 부축이 절실히 수요됩니다. 우리를 관심하여 주십시요.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시요. 지금 중국의 발전속도는 미국을 따라가고 있는데, 언젠가는 우리도 고국을 위하여 유익한 일들을 많이 할수 있을 것입니다.… …》 한국에서 상장례의 문화적 의의는 아마도 이미 충분히 해결된 상태이고, 이번 세미나는 상장례 비즈니스가 주제인 만큼, 상장례 문화적 의의에 대하여서는 별로 론술되지 않았고, 주로 상장례 산업화에 대하여 많이 론술되였다. 몇해전까지만 하여도 한국의 가장 큰 상조회사에서 국민들에게 《우리는 결코 죽은사람을 가지고 돈벌이 하지는 않습니다.》하고 허위 보증을 하는것을 들은적 있는데, 지금은 공개적으로 죽은사람을 리용한 돈벌이 전략을 나라차원에서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아마 한국사람들이 중국조선족보다 많이 개명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연변에서 조선족 상례문화 산업을 개척할 의향으로, 조선족 기업인들과 거래한적 있었다. 이 문화를 진정 살리려면 산업화 길외에는 다른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 돈벌이 되는 산업임을 승인하면서도 《산사람 사업도 많고 많은데, 하필이면 죽은사람 사업을…》하면서 나를 이상한 사람 대하듯 하였다. 이것이 아마 연변조선족 기업인들의 보편적인 정신상태인것 같았다. 기업인으로서 상례업을 싫어하는것은 그들의 자유이지만, 그들의 상례사업에 대한 편견에 대하여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상례사업이 기실은 죽은사람 사업이 아니라, 산사람 사업, 바로 자기를 위한 사업이란것을 모른다. 상례란것은 가정에 있어서 돌아가신 부모의 은덕을 칭송하고, 전통을 되새기며, 사명을 이어받는 의식이다. 지금 보편적으로 자기의 상례풍속을 모르니, 효도가 퇴하되고, 전통이 끊어지고, 사명감이 없어졌다. 이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다시 세미나에 대하여 말해보자. 이번 세미나에서 조금 유감스러운 점이 있었다. 중국 호남성 장사민정학원의 왕푸즈(王夫子)교수가 논문을 발표한후, 창원 문성대학 이덕진 교수가 토론발언을 하면서 몇가지 질문을 제기하였는데, 통역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왕교수의 답변이 그리 석연치 못하였다. 기실 그런 문제들이 한국분들에게는 몹시 궁금한 문제들이였겠지만, 함께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동업자인 우리에게는 별로 생소한 문제들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국가 기밀도 아니므로 같은 중국의 동업자로서 왕교수를 대신하여 이덕진 교수의 몇가지 질문에 보충 답변을 올리면서 이글을 맺으련다. 질문1, 중국 장례관련 대학에서 《朱子家禮》를 가르치는가? 답변: 가르친다고 하기보다 《朱子家禮》도 중국 장례관련 학과의 필독 참고서의 하나라고 할수있다. 그러나 중국의 민간상례는 《朱子家禮》에 기준하지 않는다. 《朱子家禮》의 허다한 내용들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 전통례서인 《周禮》,《儀禮》,《禮記》등에서 온것이다. 중국은 엄청 크고, 사람이 많고, 력사가 오래기 때문에 지역별 문화적 차이가 아주 크다. 그러므로 중국의 민간상례를 간단하게 우리식처럼 漢族喪禮의 개념으로 통일적으로 인식하기 어렵다. 질문2, 중국에도 상조회사가 성행하는가? 답변: 중국에서는 한국분들이 알고있는 상조회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장례업은 쟁의가 특히 많은 업종이다. 그리하여 오늘까지도 중국 장례업은 국무원에서 1997년에 제정한 임시적인 《빈장관리조례》에 근거하여 관리되면서, 나라적으로 장례관리법이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나라에서는 화장을 주요목표로 하는 장례개혁을 실행하면서 모든 장례업을 독단해 버렸다. 그후 많은 페단들이 생겼다. 그리하여 2009년부터 나라에서는 부분 권리를 시장에 내 놓았다. 지금 중국에서는 장례업무를 기본업무와 선택성업무로 구분한다. 기본업무에는 유체운반, 유체보관, 유체화장, 골회보관 등 네가지가 포함되는데, 일률로 정부 빈의관에서 책임지고 경영한다. 선택성업무에는 장례용품, 염습, 유체정용, 례식장 등이 포함되는데, 민간인들이 회사를 세우고 경영할수 있다. 장례업은 나라에서 통제하는 특수 업종이지만, 한국분들이 만약 중국 장례업 시장에 들어 오려면 중국의 성급 민정부문에 등록하고(과거에는 국무원에 등록하였음), 당지정부 혹은 당지회사와 합작하여 선택성 장례업무 경영에 참여할수 있다. 질문3, 장례업 혜민정책이란 무엇인가? 답변: 중국의 장례업 혜민정책의 목표는 지방정부의 재정상황에 따라 점차 기본 장례업무 즉 유체운반, 유체보관, 유체화장, 골회보관 등을 전면 복리화 하는 것이다. 즉 전면 면비로 한다는 뜻이다. 이미 베이징 등 여러 대성시에서 실현 혹은 부분적으로 실현한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연변같은 경우에도 사회 최저생활보장금 등 민정보조를 받고 있는 군체에게는 기본 장례비용을 전면 혹은 부분적으로 삭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공무원이나 기업 혹은 사업단위의 직원들이 사망시 그 가족에서 장례보조금 혜택을 받고있다. 앞으로도 나라에서 기본 장례업무에 대해서는 통제를 풀지 않을 것이다. 중국 제도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질문4, 장례산업 전반에 대한 중국의 국가정책은? 답변: 적극적으로 순서있게 화장을 전면 실시하고, 토장을 제한하여 토지를 절약하며, 악습을 제거하고, 문명장례를 제창한다. 장례업은 정부에서 주도하고, 시장을 참여시킨다. 기본 장례업무에 대하여 정부에서 관리와 투입을 가강하고, 기타 선택성 장례업무에 대하여서는 시장조절작용을 발휘하여 사회 여러계층의 부동한 소비수요를 만족시킨다. 릉묘업에 대하여서는 엄격히 도시발전 규모계획 통일관리를 실행한다.    (끝)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작성 2014,10,03
195    선인들의 품위있는 죽음 앞에서 배우는 것들 댓글:  조회:2777  추천:0  2014-09-17
한국인의 삶의 질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웰다잉(well dying)’이란 말이 유행한다. 그러나 이는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마무리는 아니다. 2010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연구소(EIU)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4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의 질 지수(Quality of Death Index)’ 조사에서 한국은 32위로 최하위권으로 평가됐다. 죽음에 무관심하거나, 이를 회피하거나 혐오하기 때문에 나온 결과로 보인다.   옛날로 돌아가 보자. 국난이 아닐 때 선비들은 어떻게 죽음에 품위를 부여했을까. 1836년 2월 16일, 경기도 조안군 능내리 마현. 병상의 다산 정약용은 편지를 쓴다. “…죽는다는 것은 아침에 생겼다가 없어지는 버섯처럼 덧없는 것입니다. 생각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스스로 “두풍(頭風)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 썼듯 병마에 시달리던 때였다. 세상을 뜨기 6일 전 쓴 이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죽음을 의연히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품위는 어느 날 불현듯 생기지 않는다. 6년 전 그는 편지에 쓴다. “…인생이란 생각해보면 미리 정해진 것이 있는데, 무슨 후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천명에 붙이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군자의 도리입니다…”(『다산간찰집』)   퇴계 이황도 의연히 떠났다. “(경오년, 1570) 12월 병신일에 자제들에게 명하여 다른 이들의 서적을 기록해 돌려보내게 했다. …정오에 여러 제자들을 보았다. 선생은 ‘죽고 사는 이때에 아니 볼 수 없다’면서, 제자들을 불러 영결하며 말하기를 ‘평소 그릇된 식견으로 종일 강론한다는 것도 역시 쉽지 않았소’라고 했다. 경자일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도록 했다. 이날 아침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 하고 유시 초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일어나 앉아 편한 듯이 운명했다.”(『해동잡록』)   오늘날 선비의 전통이 끊어졌다지만 품위 있는 죽음의 전통이 가끔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사례 1=2007년 초겨울, 95세 김석기 옹은 눈길에 미끄러져 고관절이 부러졌다. 대수술 끝에 퇴원했지만 거동이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인생 숙제가 얼추 끝났으면 의식적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맞아야 한다’는 말을 나눴고 그날부터 식사량을 줄여나갔다. 이듬해 새봄이 올 무렵 목욕탕에 다녀온 뒤 음식을 끊고 물만 마셨다. 의식이 흐릿해지자 대학병원으로 옮겼지만 김옹은 링거를 못 꽂게 하고 큰아들 집으로 가자고 했다. 안방에 누운 김 옹 옆에서 아들·손자들이 옛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옹은 그만 가겠다면서 편하게 눈을 감았다. 96세. 장례 뒤 모인 자손들은 다시 통곡했다. 평소 그가 쓰던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것들 때문이었다. 사망신고 때 필요한 절차 메모지와 통장·도장·주민등록증·금전출납부,그리고 주변 지인들과 얽힌 대소사가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달력에도 졸(卒)한 날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런 모습은 죽음에 이르러 “나는 70세 이후 병이 있어도 약을 먹지 않았다. 대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평상의 일이다”라고 한 선비 기정진(1798-1879)과 비슷하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에게 죽음은 그렇게 품위 있게 찾아 오지 않는다.   #사례 2=L씨(76)는 2010년 여름에 동네 병원을 찾았더니 폐렴이라고 했다. 몇 달 치료해도 낫지 않아 정밀 검사를 받자 폐암 말기였다. 남은 시간은 6개월. 고령이라 수술도 안됐다. 가족은 그래도 항암치료, 방사능 치료를 했다. L씨는 점차 의식을 잃고 거동조차 못하는 상태가 됐다. 삭막한 병실에서 수개월 사투 끝에 그는 가족과 말 한 마디 못 나누고 숨을 거뒀다. L씨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하루 만이라도 여행하며 못 다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했지만 소원은 이뤄지지 못했다.   품격있는 죽음 맞이가 삶의 질 높여 정진홍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은 “우리 사회에서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아주 적다”고 말한다. “말년이 되면 우리 풍토가 죽음을 얼마나 황량하게 대하는지 절감하게 된다. 내 죽음이 존중받지 못하면 결국 살아온 삶이 평가절하되고 무화(無化)해 버린다는 절망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죽음이 정말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정진홍 편, 『웰다잉 전문지도 강사 매뉴얼』)  한림대 생사학 인문한국 연구단 오진탁 단장은 “진짜 문제는 사람들의 죽음 오해와 불행한 임종방식”이라고 했다.(‘의미있는 삶, 아름다운 마무리’ 창간호) 품위 있는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가톨릭대 간호대학 박재순 교수는 존엄성·자기 조절·편안함·최적의 관계·적절성·죽음 준비·부담감소를 제시한다. 이런 방식이다.   “A씨(70)는 최근 위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그는 평소 1년에 한 번씩 유언을 작성했다(죽음 준비). 가족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솔직히 대화한 뒤 살만큼 살았다며(적절성) 적극 치료를 않고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자기 조절, 부담 감소). 잠시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 후 부인과 여행을 다녀왔고, 가족·친구·친지들과 감정을 나누고(최적의 관계) 재산 등에 대해 유언했다(죽음 준비). 임종 2주 전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의 도움으로 통증을 조절 받고 편안한 가운데(편안함) 죽음이 임박함을 인지하고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존엄성). 유가족들은 고인이 좋은 곳으로 갔다고 믿게 됐다.”(‘좋은 죽음의 개념 분석’)   그렇다면 한국 노인들은 ‘품위 있는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아산정책연구원 아산서원 알럼나이 소모임 팀이 9월 6~10일 서울·경기·대구·부산·전북·경남 소재 경로당·노인정의 60세 이상 노인 74명을 대상으로 간이 조사를 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품위 있는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51.5%가 자연사·안락사·수면사를 꼽았다. 선조들은 품위사란 ‘죽음을 의식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임을 보여줬지만 오늘날은 ‘탈없이 죽는 것’ 정도로 격하된 셈이다. 품위사를 비교적 잘 아는 경우가 20.3%였다. 품위를 지키는 방식으론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연명 치료를 않는다”“죽음을 담대히 받아들인다”“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요란하지 않게 마무리한다”를 들었다.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다’는 답도 18.9%였다.   ‘품위 있는 죽음과 관련해 조상의 경험을 직접 접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거의 “없다”로 답했다. ‘품위 있게 죽기 위해 배우자나 자제와 대화하는가’라는 질문에 ‘없다’(64.9%)가 ‘있다’(31.0%)보다 많았다. ‘있다’고 한 경우 구체적으론 “치료 불가능하면 생명 연장만을 위한 처치는 말 것”“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 등을 함께 나눔. 나와 가족 모두 죽음을 천천히 준비하고자 함”“장례 절차나 비용에 대한 이야기를 함”“내가 아프게 되면 요양원으로 보내달라고 함”“죽으면 화장하라” 등이었다. ‘없다’고 한 이유는 “아프거나 특별히 죽음이 닥쳤다는 느낌이 없어서”“몸에 이상이 있다고 자식들에게 말하면 원할 때 죽지 못하게 할 것 같아서”“그냥 자다가 죽고 싶어서”“할 기회가 없어서”“말하는 게 두려워서”“자연스럽지 않아서” 등 다양했다.   죽음을 언급하기 어색해하며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분위기는 “삶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했던 공자의 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오늘날 고령화 사회는 품격 있는 죽음의 문제를 보다 자주, 공개적으로 언급하도록 요구한다. 알폰스 데켄의 말처럼 “죽음의 문제를 마주 대하는 것은 동시에 삶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됐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엔 잘 죽는 게 중요하다. 죽음을 관리하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다. [중앙일보 기사에서 발췌] (본문래원): http://www.memorialnews.net/mobile/section_view.html?no=5512
194    노부부의 황혼전쟁 댓글:  조회:3042  추천:0  2014-09-07
  노부부의 ‘황혼 전쟁’ ​ 은퇴 후 뒤집히는 집안 권력 … 남편은 화내는 아내 낯설고, 아내는 밥 달라는 남편 성가시다 …   자녀 독립 후 둘만의 19년, 준비 하시나요 한국 사회의 노인 인구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542만명(2010년)을 넘었다. ​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1인 노인 가구 못잖게 노인 부부가 함께 생존해 있는 기간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2010년 전체 가구에서 노인 부부가 차지하는 비율이 39%. 자녀가 결혼 등으로 독립하고 부부만 함께 사는 빈 둥지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노부부가 서로 적응하지 못하며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한 집에서 살지만 대화도 식사도 함께하지 않는 ‘한 지붕 별거 생활을 하는가 하면, 뒤늦게 이혼을 고려하는70대 부부도 적지 않다. ​ 빈곤과 질환 외에 노년기 부부 갈등이 100세 시대의 또 다른 그늘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황혼의 전쟁이다.   전문가들은‘100세 시대는 노년기가 길어지고, 부부가 둘이 지낼 시간이 길어진다는 뜻이라며 현재 노년기를 앞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 부부가 빈 둥지에서 함께 보낼 기간은 적어도 19년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 ★ 60∼70대 부부 ‘황혼의 전쟁’ 자녀들 출가 이후 둘만 사는 기간 평균 19년... "무슨 말만 하면 싸움, 날마다 지옥 따로 없어"   ★ 주부 이모(72)씨는 최근 제2의 권태기’라고 불릴 만큼 남편(74)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퇴직한 건 15년 전.   처음 4∼5년은 함께 여행 다니며 큰 갈등 없이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함께할 일이 없어졌다.   세 자녀가 모두 결혼하자 집에 둘만 있는 시간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씨는 복지관·주부대학을 나가며 활동반경을 넓혔다. ​ 반면 ‘복지관=경로당’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은 집안에 틀어 박혀 지내고 있다. 이씨는“집 밖으로 나갈 때 마다 남편의 잔소리가 심하다.   밖에 나갔다가도 집에 들어오기 싫어진다. 집에 아주 귀한애완견이 있는 것 같다”고 털어 놨다. 이씨 부부는 각 방을 쓴 지 8년째, 분가한 자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 이씨는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성격차이가 너무 심하다. 날마다 다투고 있으니 지옥이 따로 없다. 앞으로 갈등이 더 심해질것 같아 걱정”이라며 부부 관계 상담소를 찾았다. ​ ★ 공무원 출신인 정모(76)씨도 아내 한모(72)씨와‘한지붕 별거’생활 10년째다.   정씨는 연금으로, 아내는 가게 임대료를 받으며 돈 관리도 각자 한다.   텔레비전도 각 방에서 따로 본다. 아내가 남편에게 해주는 건 밥상을 차려주는 정도. 젊을 때부터 남편 정씨는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다. ​ 아내에게 ‘끼어들지 마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한씨는 젊었을 땐 이런 말을 참고 견뎠다. 한데 이제는 달라졌다. 쌈짓돈을 모아 가게를 차리면서부터 목소리가 커졌다.   정씨가 무슨 말만 하면 같이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 일쑤다. 아들·며느리·손자·손녀 등 10여 명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 정씨는 “무슨 말을 해도 싸움이 되니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는 게 차라리 낫다”고 말했다. ​ 고령화 시대의 그늘은 질병과 빈곤만이 아니다. 부부 관계도 그중 하나다. 평균 수명이 늘고 자녀가 독립하고 부부만 사는‘빈 둥지 기간’이 늘면서 65세 이상 노년층 부부가 겪는 갈등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 ★ 100세 시대, 그리고 ‘빈 둥지 20년 시대를 맞아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2010년 인구 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542만 명. 5년 사이 노인 인구가 24% 급증했다.   노인 인구 비율은 11.3%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두 자리 숫자를 기록했다.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고령 사회(14∼20%)로 진입하고 있다는 신호다. ​ 주목할 것은 고령화가 급속화 되면서 부부가 함께 생존하는 기간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늘고 있다는 점이다.   2010년 기준 전체 부부 가구에서노인 부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39%인 것으로 나타났다. ​ ★ 한경혜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지난해 여성 정책 연구원이 ‘100세 시대 가족’을 주제로 연 여성정책포럼에서 (베이비붐)이전 세대는 자녀를 여러 명 낳고 수명이 짧아서 자녀가 독립한 뒤 남편과 아내 단둘이 사는 기간이 1.4년에 불과했다. ​ 그러나 소자녀, 수명 증가로 베이비붐 세대(55∼63년에 출생한 세대)의 경우 부부만 사는 기간이 19.4년 이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 교수는 “자녀가 떠나고 부부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수명이 늘수록 부부 갈등과 이혼이 증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최근 발표된 서울시 정보화기획단의 2011 혼인·이혼통계’는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 결혼생활 20년 이상의 황혼 이혼이 4년 이하 신혼이혼을 추월하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2011년 70대 부부의 이혼상담 건수는 모두 118건이었다.   전체의 2.28% 수준이지만 4∼5년 전만 해도 70대는 아예 건수를 셀 수 없었다. 100세 시대의 또 다른 그늘, ‘황혼의 전쟁’이다. ​ ★ 부부 고유의 관계로 남는 70대 고위 공무원 출신 70대 남편, 온화했던 아내 툭하면 불같이 화 내 남편은 자식들에게 "이혼하고 싶다', 40대 자녀 "이 정도인지 몰랐다" 당혹   ‘종심(從心)’.공자는 70세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어긋남이 없을 만큼 성숙하고 평온한 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다르다. 70대 부부들의 갈등은 겹겹이 쌓인 세월만큼 더 두텁고 독설도 더 살벌하다.   고위 공무원 출신 임모(76)씨가 요즘 겪고 있는 갈등도 마찬가지.   최근 그는 분가해 살고 있는 자녀 2남2녀를 모은 자리에서 “요즘 너무 힘들다. 이혼하고 싶다”고 깊은 시름을 털어놨다. ​ 아주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아내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다고 했다. 중년의 자녀들에게 ‘구조요청을 한 셈이다.   임씨의 차녀(45)는 “건강이 좋지 않으신 어머니가 몇 년 전부터 눈에 띄게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부모님 사이의 골이 이 정도로 깊은 줄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임씨는 또 “예전과 달라진 어머니의 변화도 당혹스럽고, 과거의 권위가 있던 모습은 온데 간데없이 하루하루를 힘겨워하는 아버지 모습을 보는 것도 안타깝다”고 했다. ​ ★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늘어 가는 고령 부부 65세 이상 542만 명, 5년 새 24% 증가65세 이상 부부도 전체 부부의 39%, 황혼 이혼이 신혼 이혼 추월   일단 부부가 둘이서 보내는 시간 자체가 크게 늘어난 것이 원인이라 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 이호선 한국 노인상담 센터장(명지대 겸임 조교수)은 “현재 70대 부부들은 대부분 25세 전후로 결혼 했던 사람들인 만큼 평균수명을 80세로 볼 때 55년을 함께 사는 셈”이라고 말했다.   특히 70대 부부 관계는 50∼60대 때와는 현격히 다르다는 것.   50∼60대에는 은퇴 이후라도 경제적·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 자녀 결혼이라는 부부의 공동 과제도 남아 있다. 하지만 70대엔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두 사람이 보낼 시간이 늘어남으로써 부부 고유의 관계가 전면에 부각될 수밖에 없다. ​ ★ 은행원으로 정년퇴직한 정모(71)씨도 최근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경우.   정씨가 등산길에서 만난 50대 여성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아내가 외도라고 여기면서 갈등이 심각해진 것.   하지만 아내는 “10년만 젊었어도 혼사 앞둔 애들 생각해서라도 덮었겠지만,   이 나이에 참고 살 이유가 없다며 강하게 이혼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개발원 최인희(노년학 박사) 연구위원은 “100세 시대는 인생의 후반기, 즉 노년기가 연장되고 가족생활 시기가 ​ 길어진다는 뜻”이라며, “노인 부부 가구가 증가하는 만큼 배우자와의 관계가 노년의 삶에 중요한 이슈로 주목받고 있다”고 전했다.   정신적·신체적인 노화(老化) 역시 부부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는 “흔히 나이 들면 사고가 더 성숙해지고 관대 해질 것이라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며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자기 고집이 세지고 잔소리가 심해진다”고 말한다. ​ 각자 많은 경험이 축적돼 있는 만큼 내가 옳다’는 생각이 더 굳어지고, 화를 낼 때조차 ‘나는 화를 낼만하다’고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신체적인 노화로 두뇌의 유연성이 떨어지면서 감정 컨트롤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윤 교수는“노화로 두뇌 유연성이 떨어지면서 본래 경직된 성격인 사람은 경직성이 더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뇌세포 손상이 병적인 단계(치매)로 접어들면 감정 통제가 안 돼 공격적인 성향이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실제로 한 치매 환자는 처음에는 기억력이 나빠지는 정도로 증세가 나타났다가 급기야 부인을 구타한 경우도 있다.   치매가 아니더라도 우울증 스트레스 계에도 공격 성향이 높아지기도 한다.   남녀 호르몬의 변화로 여성은 나이 들수록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대범해지는 반면, 남성은 차분해지고 활동성이 줄고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경향이 강해진다. ​ ★ 김종우 경희대 한방신경정신과 교수는 “갱년기를 넘어서면 여자는 ‘양’으로 변하고 남자는 ‘음’으로 바뀐다”며 “70대 여성들은 화병이 많고, 남성들은 우울증이 많다”고 설명했다.   경제권의 변화도 갈등의 씨앗 문제의 원인, 여성 72% "남편 돌보는 기간 늘어 갈등" 자녀 출가로 완충공간도 사라져, 경제권   이전과 호르몬 변화도 한몫 남성들이 퇴직 후 경제권을 잃으면서 가정 내 권력 관계가 역전되는 것도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특히 남성이 부부 관계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다.   대부분의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힘(경제력)을 잃고 의식주 생활의 상당 부분을 아내에게 의지하고, 아내가 보살피는 불균형한 관계가 감정의 골을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이 남편-아내의 역할에 대한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갖고 있고, 가족생활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실제로 우리나라 여성 10 명 중 7명은 평균수명 증가로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부부간 갈등이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 ★ 지난해 11월 보건사회연구원이 대통령소속 사회통합위원회와 공동으로 한‘저출산·고령화 사회갈등·국민인식 조사’에서 여성의 71.9%가 남편을 돌봐야 하는 기간이 길어져 부부갈등이 발생할 것’이라고 답했다.   ‘남편 돌봄’으로 갈등이 생길 것으로 내다본 남성은 66.4%로 나타나 남녀 의식 간에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로에게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보상 심리’는 드러나지 않지만 부부간의 골을 더 깊게 만든다. ​ ★ 전업주무 이모(71)씨는 30대 때 남편으로부터 겪은 상처가 크다. 당시 남편은 누가 봐도 외도로 오해할 만한 사건을 일으켰지만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씨는 “남편이 그때 제대로 사과를 했더라면 이 정도는 아닐 거다. 그 일이 아직까지 항상 날 괴롭히고 화가 안 풀린다”고 했다.   이호선 센터장은 “부부가 떨어져 사는 기러기 생활 역시 노년에 이러한 보상 심리를 유발시키기 쉽다”고 지적했다.   그뿐만 아니다. 사회적으로 지금의 노년 세대는 격동의 한국사를 관통해온 특별한 세대다. ​ 해방 전에 태어나 1960∼70년대에 사회에 진출한 세대로, 가부장적 유교 전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국전쟁과 급격한 산업화를 겪은 세대다.   남편은 가족과 대화하거나 여가를 즐기지 못했고, 아내는 가사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사회가 크게 변했다. 여권이 신장하고 이혼도 급증했다.   윤성은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지금의 노년 세대, 특히 70대는 은퇴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도 못했고,   취약한 사회적 안전망에 어느 것 하나 보장된 것이 없는 사각지대에 놓인 최초의 세대”라고 말했다. ‘노년의 삶에 대한 문화적인 각본 없이 노년을 맞아버린 세대’라는 것이다.   ★ 노후자금만으로 안 돼 … 돈만으로 안되는 노후준비, 남편들 가부장 탈피해 가사 나누고 밥세끼 집에서 먹으려하면 안 돼, 40∼50대부터   배려하는 능력 길러야 전문가들은 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노년기 부부관계가 삶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정혜 고려대 부부상담센터소장(심리학 교수)은 과거 70대는 ‘인생의 마무리’로 인정받았고 부부관계도 조금만 참으면 종지부였다.   하지만 이제 70대 부부는 20년은 더 살아야 할 커플이다.‘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마음가짐으로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성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남편들이 가부장적 태도를 버리고 가사 분담에 적극 나서야한다는 것. ​ ★ 박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위원은 “남편은 아내도 나이 들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하루 세 끼를 집에서 챙겨 먹으려는 욕심은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직접 챙겨 먹기 힘들면 하루 한 끼쯤은 외식이나 복지센터에서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 ★ 윤대현 서울대병원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소통능력’과 ‘유연성’이다.   윤 교수는“노년 삶의 질에는 커뮤니케이션이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며 “노후 준비는 돈만으로 안 된다. 소통 능력은 갑자기 키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40∼50대 때부터 유연하게 사고하고,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는 능력을 키워야 노년의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말했다.   문제가 심각하다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각 지역 노인복지회관·사회복지회관· 건강가정지원센터에는 다양한 부부상담 프로그램이 있다.   우울증 단계에 있는 경우에는 전문의와 상담하고 약물 처방을 받아야 한다. ​ ★ 이호선 센터장은 “남은 삶을 어떻게 건강하고 의미 있고 성공적으로 보낼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상담에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적어도 1년 이상 투자를 한다는 마음으로 노력하면 반드시 좋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가족 단위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100세 시대를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사회적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100세 시대=노년기 장기화라는 점을 감안해 세부적인 정책 준비가 필요하다.   ★ 장혜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10년 현재 전체 부부 가구에서 노인 가구가 39%였지만 2030년에는 54.2%에 이를 것”이라며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지역사회·범정부 차원의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고령자를 위한 일자리를 비롯해 다양한 지역사회 참여 프로그램, 노년기 부부관계 전문 프로그램 등을 적극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옮긴글 -  
193    죽음의 도리와 품위있는 죽음 댓글:  조회:4830  추천:3  2014-09-02
죽음의 도리와 품위있는 죽음 (이 글에서의 사람 죽음에 대한 토론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비정상 죽음을 제외한, 순 평화시기 자연사에 준합니다.—편자주)   1/ 죽음에 관한 화제는 상당히 신중한 화제로서, 일반 사람들은 보통 불길하다고 여기여 몹시 꺼립니다. 그 누가 때와 장소에 틀리게 죽음 화제를 경솔히 꺼냈다가는,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핀잔을 받기가 십상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이 죽음을 이렇게 싫어하는 그 심리적 근원이 우리민족 전통 생사관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기실 그것은 지금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몰리해와, 그로부터 오는 공포감과 거부감, 그리고 문화적 빈곤에서 오는 우매하고 유치한 심리를 반영할 따름입니다. 인생의 도리가 천가지, 만가지 있지만 결국은 모두 죽음에 귀결됩니다.죽음이란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의 하나로서, 인생이란 것도 그 운행법칙을 놓고보면 기실 태여나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생로병사의 과정입니다. 죽음문제를 두려워 하고, 배척만 하면서 참답게 연구하지 않는다면, 정확한 죽음관을 수립할수 없고, 진정한 인생의 도리와 가치를 깨달을수 없으며, 참다운 가족관, 민족관에 대하여서는 더구나 운운조차 할수 없게 됩니다. 지금 죽음의 도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엄중히 추악화, 마귀화 되여 있습니다. 반드시 죽음에 대한 비뚤어진 태도를 바로잡고, 이 도리에 대담히 접근하고,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으로 심도있게 연구하여, 문명하고 인간성 있는 죽음관을 창도함으로써 그로부터 많은 적극적인 인소들을 발굴해 내야 할것입니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한번 죽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후대를 낳아 키워 자기를 계승시켜야 할 리유가 생겼고, 능력을 키우고, 재부를 창조하여 우월한 조건을 마련해야 할 리유가 생겼으며, 건강과 미를 확보하여 충분히 즐겨야 할 리유가 생겼습니다. 중국에는 《홍백희사》라는 설법이 있는데, 결혼하는것을 《홍희사》라고 하고, 사람이 죽은것을 《백희사》라고 합니다. 여기서 《희사》라는 말은 음식을 차리는 《연회》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기쁜 일》이라는 뜻에서도 완전히 틀리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은 마치도 공공뻐스와 같이 승객들이 부단히 교체됩니다. 먼저 뻐스에 오른분들이 자기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림으로써, 또 다른분들이 오를수 있게 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이 세상에 오신분들이 일정하게 생존하신후 기꺼히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여 생존하고 발전할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탄생과 죽음은 모두 사회가 발전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필연적인 조건들입니다. 만일 2천여년전의 공자나 진시황같은 분들이 자기들은 위대하다는 리유로 《장생 불로약》을 먹고는 오늘까지 죽지않고 살아 계실수 있었다면, 지구에는 언녕 대 재난이 폭팔하여, 인류는 지금쯤 거의 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되였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죽음은, 한방면으로는 기존 재부의 손실이면서도, 또 다른 한방면으로는 일종의 공간적인 공헌으로도 됩니다. 즉 일종의 《희사》이지요. 죽음이 있었으므로 하여, 인류는 한세대 한세대 계승되고 발전하여, 오늘의 고도로 발전한 문명세계에 까지 이를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원한 견지에서 볼때, 한사람의 죽음은 장구한 사회발전 행정에서 무수한 사회성원들의 부단한 교체과정의 한 순간입니다. 이런 교체과정이 부단히 지속되면서, 사회가 점차 보다 높은 경지에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견지에 서서, 사람의 죽음을 《생명의 종말》, 《사상의 정지》로만 인식하는 것은 소극적인 사유방식입니다. 이런 사유방식 때문에 몇천년을 내려오면서 사람의 죽음은 공포의 대상, 절망의 대상으로 밖에 될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관적인 견지에 서서, 사람의 죽음을 《인생의 완성》, 《사상의 승화》로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적극적인 사유방식입니다. 종교를 하지않는 사람일 지라도, 진정 이런 사유방식으로 죽음을 대할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기 인생의 원만한 완성을 위하여 열심히 생명을 빛내일 것이며, 자기 사상의 승화를 위하여 깨끗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것입니다.   2/ 사람들의 인생을 년령단으로 크게 세개 단계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태여나서 부터 시작하여, 30세 까지로 하였습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주로 발육 성장하고, 지식과 재능을 배우고, 학위를 따고, 직업을 얻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등등의 일들을 하는데, 주요하게 금후의 본격적인 인생을 위하여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31세부터 시작하여, 60세 까지로 하였습니다; 바로 인생의 주체를 이루는 본격적인 운영단계로서,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을 각자 자기 방식대로 운영하여, 자기가 지향하는 인생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고심하게 분투합니다. 마지막 세번째 단계는 61세부터 시작하여, 사망하기 까지로 하였니다; 이 단계는 인생의 고급 단계로서, 한편으로는 인생 마무리 단계라고도 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보통 젊어서부터 추진하여 오던 뜻과 사업을 정리하고, 그 기초상에서 새로운 고급적인 노년인생을 시작하게 되는데, 각자 장악하기에 따라서 그 의의가 많이 달라지며, 저 앞에 막연하게 보이는 인생 종착역과의 거리를 점점 좁히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회가 점차 노령화 되면서 지금 국제적으로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이란 말이 상당한 인기화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사전적 의미로는 정신적, 육체적인 건강과 행복, 복지와 안녕을 의미하고, 사회적 의미로는 물질적 부유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부유도 추구하면서, 진정으로 삶의 질을 강조하는 생활 방식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웰빙(well-being)이란 우리말로는 《훌륭한 삶》, 《참다운 삶》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웰다잉(well-dying)이란 말은 원래 서방 종교계에서 주장하는 《안락사》나 《호스피스》리념에서 출발하여 제출되였는데, 그 기본내용을 적극적인 견지에서 우리의 리념으로 리해하고, 해석한다면, 인생을 원만하게 마무리하고, 생명의 존엄을 잃지않는 《훌륭한 죽음》, 《품위있는 죽음》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천백년래 사람들은 모두 잘 살기 위하여 분투하여 왔으며, 행복하게 살기만 꿈꾸어 왔습니다. 이렇게 천년만년을 살것처럼 열심히 노력하며 살다가, 결국은 백년도 못 살고 어쩔수 없이 때가 되여 죽어야만 했는데, 보편적으로 상당히 피동적인 처지에 빠지여 슬프게 죽어야만 했습니다. 시대가 오늘에 이르러,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시대배경에서, 이제부터 사람들은 인생의 더 높은 차원의 질과 완미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죽음의 품위까지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진대, 삶의 도리뿐만이 아니라, 죽음의 도리도 명확히 하여야만 완정하게 인생의 도리를 터득할수 있습니다. 품위있는 죽음은 생명에 대한 최후의 존경이며,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성 있는 완성이며, 생명혜택에 대한 완미한 보답으로 됩니다. 한 사람이 젊어서는 아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었는데, 늙으막에 와서 어렵게 살다가 처량하게 죽는다면, 그런 인생은 완미한 인생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한 사람이 젊어서는 많은 고생을 하면서 파란많은 인생을 살았었는데, 늙으막에 와서 행복하게 살다가 품위있게 죽는다면, 그런 인생이야 말로 참으로 완미한 인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3/ 그럼 평화년대에 어떻게 죽는것이 품위있는 죽음이고, 어떻게 해야만 품위있게 죽을수 있겠습니까? 기실 이 문제에서는 절대적인 통일표준이란 있을수 없으므로, 문제 제기방식을 바꾸어, 어떻게 노년인생을 충실하게 사시다가,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하겠는가? 하는 식으로 해석하여 봅니다.   첫째; 삶의 열정을 계속 확보해야 하겠습니다. 노인들이 즐기는 노래에서는 《육십이 청춘》이요,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아.》…등등의 내용들이 많은데, 어찌보면 이런 내용들은 젊은인생의 미련을 못 버리고, 늙음을 긍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혐의가 있습니다. 늙은이가 어째서, 꼭 젊음을 빌어서 고무 받아야만 합니까? 기실 노년인생이 체질상에서 젊은이들만 조금 못하겠지만, 다른 각 방면에서는 보편적으로 젊은인생을 초월하는 고 효률적인 인생입니다. 퇴직을 하고는 무료하게 시간을 허송하면서, 막연히 죽음을 기다리는것이 노년인생이 아니라, 파란 많았고 유치했던 젊은시절의 중급인생에서, 보다 성숙된 고급인생에로 승급하는 것이 노년인생입니다. 노년기에 열정을 잃지 않고, 노년기의 특점에 맞게 계속 열심히 살아 간다면, 노년기에도 여전히 위대한 업적을 창조할수 있습니다. 력사상 강태공은 80세에 승상이 되여, 무왕을 도와 상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강태공이 우리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면, 최근에도 그런 근거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최근 세계 력사상의 불후 업적들을 통계한 자료에 근거하면; 35%는 60-70대 노인들이 창조하였고, 23%는 70-80대 노인들이 창조하였으며, 6%는 80대이상 노인들이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세계 력사상의 불후 업적의 64%가 60대 이상 노인들에 의하여 창조된 셈이죠. 사람의 수명이 점점 길어지면서, 앞으로는 세계 불후 업적의 70%이상을 60대 이상 노인들이 창조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둘째; 노년기에도 인생 목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출생하면서 세월과 《수명계약》이 체결되는데, 첫째; 유효기한내에 반드시 죽어야 하고, 둘째; 죽을 때 모든것을 깡그리 바쳐야 하고, 일푼도 갖고 가지 못하며, 셋째;… … 《수명계약》의 유효기한은 일반적으로 백년을 초과하지 못합니다. 이 기초상에서 자기 運의 발휘 정도에 따라 유효기한이 많이 앞당겨 질수도 있고, 또 조금 연장될수도 있습니다. 목표없이 살다보면 백년이라는 인생도 결국에는 최후 하루밤의 긴꿈에 불과 하겠지만,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살아 간다면 몇십년 사이에라도 천년업적 쌓을수 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의는 오래 살았다 하기보다, 자기가 죽은 후에라도 자기가 생전에 이룩해놓은 그 무엇들이(자식들을 포함하여) 계속 사회에 유익하게 리용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기실 대자연으로 되돌아 간다는것을 의미할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어쩌다가 한번밖에 다시 없는 인생인데, 자기 노년의 인생목표와 계획을 최소로 한 백살까지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짜로 백살까지 살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랑패 될것이 무엇입니까? 《수명계약》이 만기 되여 죽어야 할때 가서 선뜻이 죽으면 되니깐요. 한 장수노인은 환갑때에는 60성상 자기 인생 성과를 놓고, 하늘 높은줄 모르고 자랑을 늘여 놓았었는데, 90세 장수피로연에서는 허송한 지난 30년이 너무 아까워 비감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로년기에 들어서면, 젊은인생때의 목표와 계획이 기본상 완료된 형편에서, 노년인생으로 과도하는 새 목표와 새 계획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노년인생은 마치도 세월의 바다에 버려져서 정처없이 표류하는 단풍잎처럼, 하루하루 무료하게 허실됩니다. 기실 그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으로 밖에 되지 않으니, 슬픈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세째; 유언장을 미리 써 놓읍시다. 전통관념에서 유언장을 쓴다하면 이제 곧 죽기나 하는것 같은 느낌이 들겠지만, 기실 현대심리학의 연구에 근거하면, 노인들이 유언장을 미리 써 놓음으로써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더욱 유쾌하게 살수 있고, 더욱 오래 살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유언장을 쓸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어느정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품위있는 죽음》을 죽을수 있는 선제 조건중의 하나입니다. 유언장을 쓴다는 것은 한 사람이 사회나 가정에 자기의 지혜를 공헌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이렇게 보귀한 기회를 대부분 사람들은 아쉬위 할줄 모르고 무책임 하게 버립니다. 유언장은 유산 상속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량전통을 전수하고, 자기의 인생경험을 전수함에 있어서도 아주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노인들마다 모두 자기 나름으로 터득한 인생의 철리가 있습니다. 이런것들은 인류의 공동한 정신재부에 속합니다. 이렇게 보귀한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죠. 그런것들을 유언장 형식으로 써서 사회에 남긴다면, 보귀한 정신유산으로 될수 있습니다. 아직 사유가 건전할때 자기로, 혹은 젊은이에게 위탁하여 책임성 있는 유언장을 한장 써서는, 살아 가면서 고치기도 하면서 완미화 시키여, 일단 죽을 때에 자기 인생의 종지부로 멋지게 턱 찍어 놓는다면, 그런 죽음이야말로 한결 더 품위가 돋보이는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만년에 들어서서 자기가 수시로 죽을수 있다는 점을 가볍게 받아 들이고, 죽음에 대비하여 적극적으로 필요한 준비를 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평소에 죽음에 대한 소극적인 심리를 극복하고, 하루하루를 마치도 세월이 주는 액외 혜택인양 소중하게 받아 들이며, 질량있는 만년을 충실하게 살아갈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결혼해서부터 수의를 만들기 시작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자손들이 어르신들의 장수축하 선물로 수의나 관재널을 드리는 풍속도 있었는데, 고급적인 효행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자기는 영원히 죽지않을 것처럼, 죽음문제라면 무조건 거부하고 회피한다 하여도, 그 어느날엔가 반갑지 않은 죽음의 영예는 불가피적으로 당신에게 차려지게 됩니다. 죽음에 대하여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아무런 대비조치도 없이 하루하루 허송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몸이 이상해지고, 급기야 죽음을 당한다면, 그런 죽음은 초라할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마다의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보노라면, 저마다 풍부하고 전기식적인 경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파란만장 헤치며 어렵게 살아온 자기인생을 한포기 마른풀처럼 초라하게 끝내 버린다는 것은, 자기에게 미안한 일일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미안한 일이며, 자손들에게도 미안한 일입니다. 죽음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삶을 점검해 본다는 것으로 되고, 삶을 충실히 이끌어 가는 원동력으로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대답은 결국 어떻게 마지막 까지 잘 살아야 하는가로 귀착됩니다.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사유가 헝클어지기 전에 유언장을 미리 써 놓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며, 신체단련과 심리단련을 가강하여 삶의 속도를 늦추고, 미루었던 일은 즉시 시작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이란 못다한 계획을 실천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죠. 아침마다 깨여나서 눈을 뜨면서, 《오늘도 좋은 하루!—》, 신심에 차 웨치면서, 매일매일 새 아침 밝혀주는 하늘에 감사 드리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 갑시다. 저 멀리 막연하게 보이는 인생의 종착역, 거리는 하루하루 좁혀 지고 있지만도, 우린 일부러 세월과 장난을 치며, 한 삼백년 바라고 살다가 갑시다.   성원 씀 2014-09-02
192    노년의 처세 댓글:  조회:2013  추천:0  2014-08-18
노년의 처세 노인 친구님들이여....! 이제 금방 인생도리 알릴가 하는데, 사람들은 벌써 우리를 노인이라 하네요. 그것이 너무나도 싫지만은, 세월이 하는 노릇이라 떼질 쓸수도 없고, 어쩔수 없이 노인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젊어서 시작했던 뜻과 사업은 접었구요, 어제까지의 인생엔 금을 죽— 그었으니, 지금부턴 노년인생 보람차게 살야야죠, 하루하루를 금싸락 같이 아끼며.   노인 친구님들이여....! 노후 생활비용은 보장이 되여 있는지요? 아직도 그것이 미완성 단계라면, 어서빨리 그것부터 신경 써야지 않을가요? 나름대로 방법과 경로야 많겠지만도, 혹시나 방책이 궁금하다면은, 최저 생활보장금이라도 알아 보구요, 단지 자식들을 믿겠다는 생각만은 당초부터 접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자칫 자식들을 불효자로 만들수 있으니깐요.   노인 친구님들이여....! 건강보장 계획도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매일매일 신체단련을 견지하고, 어떻게 적당하게 보신약을 쓰시고, 어떻게 즐거운 오락시간을 안배하고, 어떻게 충분히 휴식을 보장하고,… 만일 당신 몸에 병이라도 있다면, 치료는 어떻게 보장하고, 치료비는 어떻게 해결하고,… 하여튼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아프면 곁에서 모두 싫어 합니다.   노인 친구님들이여....! 아직 별로 늙지 않았을때, 손에 할일이 있으면 건강에 좋답니다. 사회의 뒤울안을 두루 살펴보아 무슨 할만한 일이 없나 살펴 보십시요. 긍정코 할만한 일들이 많을 겁니다. 거기서 합당한 것을 골라서 하게 되면 수입도 늘이고, 신체도 좋아지고, 꿩먹구 알먹기랍니다. 문화부문이나 기술부문에 있던 분들은 몸에 배인 재능을 그대로 버리긴 아까워 자그마한 회사라도 간소하게 차려놓고 2차 창업도 시도해 볼만 합니다. 만일 당신이 늦둥이 큰 인물이라면 만년에 불후의 업적 쌓을수도 있겠죠.   노인 친구님들이여....! 회사를 경영하고 계시는 분들은, 아직도 마음만은 늙지않아 효익에서 계속 상승선 긋고 싶겠지만, 잘될때 적당히 경영규모를 줄이시고, 무거운 짐은 젊은이들이게 맡기시고 자기는 뒤에서 받들어만 주시면서 과로만은 절대 피면해야 하겠습니다. 억만 부자로 일찍 죽기보다, 작은 부자로 오래사는것이 낳지요. 과분한 경영투자는 절대 무리구요, 모험적인 주식투잔 생각도 마시라요, 자칫 늙으막에 쪽박차게 된다니깐요.   노인 친구님들이여....! 노인이 되였다면 노인다워야 하겠죠, 아무데나 덤벙덤벙 나서지 마시고, 함부로 여기저기 설치지도 마시며, 군소리랑 불평일랑 딲 금지구요, 욕설과 조소는 더구나 안되죠. 보면서도 안 보이는 척, 들으면서도 안 들리는 척,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야심과 욕심은 깊이 묻어 버리고, 지금부턴 조금은 어수룩하게 사는 겁니다. 마음을 잡지못해 공연히 비위 상할것 없이  ​내만 조용하면, 모두들 조용해 집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제일 편하지요. 노인 친구님들이여....! 젊은이들과 시비가 생기면, 이기려 하지말고, 져 주십시요, 이겨 봤댔자 그걸로 벼슬할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들에게 신세져야 할 몸인것을,  젊은이들은 무조건 치하해 줘야 합니다, 그들은 공자왈 맹자왈을 잘 모르므로, 그들에게 잘못하는 점이 있다 하여도, 당신이 질책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공연히 그들의 미움만 살뿐이지요. 당신은 지혜롭게 긔뜸만 하십시요, 그들은 총명하여 인츰 깨닫을 겁니다. 고치고 안고치고는 그들이 알아 할거구요. 젊은이들에게 우쭐하게 자신감 주는것이, 당신에겐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줄수 있으니, 이것이 늙은이들이 살아가는 지혜랍니다. 노인 친구님들이여.....! 돈,,,, 돈 욕심은 버리셔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 하여도  저승에는 한푼도 가져가지 못하고, 누른 종이 태운 재만이 당신 몫이랍니다. 많은 돈 남기여 자식들 망치지 마시고, 살아있는 동안에 많이 세간에 뿌려시여,  사람사는 세상에 널리 덕을 쌓으십시요. 당신 후손들이 오래오래 잘 되는 길이랍니다. 노인 친구님들이여....! 일생동안 땀흘리여 모은 재산을 너무일찍 처분하지 마십시요. 재산이 변경되였다 하더라도, 자기의 몫은 꼭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당신 수중에 재산이 얼마간 있어야, 당신 자식들도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을 받들어 모시는 겁니다. 옛 친구 만나거든 술 한잔 사줄수 있고, 어려운 사람 보면 잠시 도와 줄수 있으며,  손주녀석들에게 용돈이라도 쥐여줄수 있는 조금은 여유가 있는 노인으로 사십시요. 노인 친구님들이여....! 머리가 굳어져 멍청해 지면 안됩니다. 평소에 노래를 많이 배우시고, 뜻깊은 가사를 많이 외우십시요. 치매방지에 좋다고 했습니다. 무엇엔가 한가지 취미를 붙이시고, 재미있게 즐기면서 살으셔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남들에게 고마워 하시고, 지나간 옛일들은 모두 다 잊으시고,  호랑이 잡았노라 자랑일랑 마십시요. 늙어서 자꾸 제자랑 하는것은, 남들의 미움만 사는 노망의 짓입니다. 늙어서는 회억속에 산다 했습니다만, 우리들의 시대는 다 지나가고 없으니 아무리 회억해 봤자 허황하기만 할뿐, 래일만 생각하며 사는것이 실제적이죠. 노인 친구님들이여....! 내가 나를 사랑하면 하늘도 나를 사랑한다 했습니다. 마음은 몸의 주인이라 했은 즉, 마음따라 가는 것이 몸인데, 마음만 건강하면 몸의 병도 나을수 있지만, 마음이 약해지면 몸도 무너지고 맙니다. 건강한 마음 갖고, 즐겁게 편하게 사시다가, 때가 되여 품위있게 죽는 것이야말로 자기에게 책임지고, 가족을 위한 길입니다. 아침마다 깨여나서 눈을 뜨면서 새 하루 밝혀준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오늘도 좋은하루— 신심에 차 웨치면서,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갑시다. 저 멀리 막연하게 보이는 인생의 종착 역, 거리는 하루하루 좁혀 지고 있지만도 우린 즐겁게 한삼백년 바라고 살아 갑시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작성 2014-08-18
191    행복한 노년, 아름다운 노화, 품위있는 노후. 댓글:  조회:3294  추천:0  2014-08-16
행복한 노년,  아름다운 노화,  품위있는 노후.    평생 경험해 왔듯이 삶에는 많은 파란과 굴곡이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즐거워야 한다. 노련한 경륜으로 현명히 대처해 나가면 아름다운 노경이 될 수 있다.    노령의 시간을 공포와 원망으로 얼룩지게 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언제나 새로운 희망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1. 긍정적인 마인드 남은 시간을 죽음의 준비가 아니라 삶의 설계로 꾸며라    2. 자신에게 정성을 다해 향후 50년을 쓸 수 있는 몸을 만들어라.    3. 고독도 아름답게 인간은 누구나 홀로 태어났듯이 최후에도 홀로 남는 법을 익혀라. 모든 인연은 시절의 고리에 얽혀 있다가 고리가 풀리면 홀로가 된다.     4. 하고 싶은 일 사노라고 참고, 미뤄두었던 일의 궁금한 실타래를 주저 없이 풀어라 가보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 하고 싶었던 일, 먹고 싶은 것들을 망설일 필요가 없다.    노년에 망설이는 것은 문제가 된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5. 말년의 동반자 일의 동반자. 여행의 동반자, 사랑의 동반자, 담소의 동반자, 취미의 동반자, 함께할 때 즐거움을 더할 수 있는 친구는 노년의 보배다. 정성으로 관리하며 시간과 공간과 경제적인 덕을 지성으로 베풀어라.     6. 가족과의 관계 가족간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고 시간의 공유분을 만들어 소통의 거리를 좁혀라. 인간관계는 언제나 손익의 계산법이 서로 다르다. 섭섭함이 없도록 해야한다.    7. 飮水思源 살면서 죄 짓지 않은 이 있겠는가. 세상은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아낌없이 풀고 가라. 마음 편한 후편을 위하여 음덕과 은공에 보답을 하여 빚을 갚고 마무리를 하라.    8. 無財七施 안색은 편안하게, 눈빛은 온화하게, 말은 공손하게, 귀는 신중하게, 손발은 부지런하게, 마음은 너그럽게, 몸은 건강하게.     9. 노경의 디자인   아름다운 삶에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버릴 것은 버리고 비울 것은 비우고 다듬고 가꿀 것들로  잘 꾸미면 만종과 같은 명화가 될 수 있다.  계절을 따라 피고지는 풀꽃 같은 자연스러운 호흡은 부끄럽지 않은 희망이 아닌가.    노년의 삶을 잘 준비하자. 작년 한국 인구의 평균수명은 77세로 남자가 73세, 여자가 81세였다. 환갑을 넘기기 어려웠 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이제는 장수하는 것을 걱정하는 지경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길어진 노년을 잘 보내는 것이 가족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노년은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고, 죽어서 가는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다. 어두운 밤을 맞기 전의 황혼이 아니라, 하루 중 가장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이면서 새로운 하루를 잉태하고 스러져가는 저녁 어스름과 같은 시간이다. 같은 시간도 보기에 따라서 영원히 사라지는 어둠으로, 새로운 탄생을 예비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노년은 한 개인에게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사회적으로는 수입이 없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또 가정적으로는 더 이상 부모를 부양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국가의 복지정책도 충분하지 않고, 젊은 세대들이 노년인구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도 부족한 상태이기에 대책마련이 시급한 것이다. 국가가 풀어야 하는 문제는 논외로 하고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만을 살펴본다.   노년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노년기를 앞둔 중년기부터 고민이 시작되어야 한다. 물질적인것 만이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 홀로 있게 되는 긴 시간에 대한 준비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까닭이다. 주변에서 살펴보면 노년의 가장 큰 문제는 물질적 빈곤임을 알 수 있다. 노년을 존엄하게 보내기 위해 물질은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가 책임질 일도 많지만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는 현재의 방식도 수정이 필요하다. 아울러 준비해야 할 것은 건강쇠약과 활동의 감소에서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외로움에 대한 것이다. 과거처럼 자녀들이 모시거나 자주 찾아뵙는 환경이 아니기에 그 시간을 부부가 혹은 혼자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노인들이 큰 도움을 받는 것을 보면 신앙은 노년생활에 필수조건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건강이 허락된다면 다른 어느 시기보다 왕성하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므로 적극적인 봉사활동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궁극에는 부부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 대한 준비이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단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은 돈독한 부부애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젊은 시절부터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이 상황은 가히 절망적이다. 특히 남성에게 이 상황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가족과 사회는 건사해왔지만 정작 자신을 건사하지 못하였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는 상황에 살고 있다. 생존자체가 문제였던 시절에야 당장 내일도 예측하기 어렵지만 이제는 적어도 20년 이상을 내다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자신의 미래를 잘 알수 있으므로 노년을 신앙 안에서 지혜롭게 준비해야 하겠다.    - 가톨릭대 인간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박 문 수(프란치스코)  [출처] 노년의 삶.....파블로
190    노년을 행복하게 누리기 댓글:  조회:2383  추천:1  2014-08-13
[노년을 행복하게 누리기] 1 아들을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독립된 성인으로 인정한다. 2 며느리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3 지나친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는다. 4 특히 아들이기 때문에 생각을 강요하거나 따르도록 해서는안 된다. 5 아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조언을 할지언정 방해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1 같은 성(아버지 아들, 어머니 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2 함부로 대하거나 부정적인 감정표현을 하지 않도록 한다. 3 시집 간 딸의 궁금한 만큼의 집안 이야기(좋은 이야기만)를 해준다. 4 시댁의 안부도 묻는다. 5 사위의 좋은 점을 열거한다. 6 외손자녀를 칭찬한다. 7 외손자녀에게 딸의 좋은 점을 이야기해 준다. 1 뭐든지 터놓고 이야기 한다. 2 며느리의 취미를 살려 준다. 3 시어머니도 취미생활로 외출할 시간을 자주 갖는다. 4 고부가 같은 신앙을 갖는 게 중요하다. 5 역할분담을 하는 게 좋다. 6 며느리와 같이 아들 흉을 본다. 7 내 물건을 살 때 며느리 것도 산다. 8 딸들에게는 무관심하게 군다. 9 내 돈도 쓴다. 10 저녁식사 후엔 부르지 않는다. 11 가끔 며느리의 친정 안부에 대해 묻는다. 1 딸의 입장보다 사위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준다. 2 딸, 사위의 가정사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3 백년손님이라기보다 아들처럼 편하게 대한다. 4 사위의 취미에 동화한다. 5 가끔은 딸의 흉을 같이 본다. 6 외손자녀에게 아버지를 닮았다고 이야기한다. 7 가끔 사위가 쓸 일용품을 사 준다. 8 사위의 세상사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준다. 1 용돈을 준다. 2 욕심내는 것을 사 준다. 3 여러 가지 일을 가르쳐 준다. 4 어딘가 가고 싶은 곳에 데리고 가 준다. 5 부모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 준다. 6 부모에게 꾸중을 들은 후 위로해 준다. 7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 8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9 소꿉장난이나 게임의 상대를 해준다. 10 좋은 성적에 대해 칭찬해 준다. 1 손자, 손녀에게 부모역할까지 하려 들지 않는다. 2 손자, 손녀와 자식이 다툴 때는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3 모두에게 편한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면서 조언은 그들이 원할 때만 한다. 4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5 손자, 손녀 앞에서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 6 자식의 교육방식에 대해 무시하거나 훈계하려 들지 않는다. 7 자식에게 꼭 따져야 할 말이 있다면 따로 불러 대화한다. 8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마련해 즐긴다
189    노년을 행복하게 가꿉시다. 댓글:  조회:2633  추천:2  2014-08-10
노년을 행복하게 가꿉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빙(Wellbing)이라고 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죽는 것을 웰다잉(Welldying)이라고 하며, 사람이 사람답게 늙는 것을 웰에징(Wellaging)이라고 합니다.   사람년령에는 자연년령, 건강년령, 정신년령, 등이 있습니다. 인생의 4분의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또 4분의1은 성숙하면서 보내며, 나머지 4분의2은 늙어가면서 보냅니다.   사람이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어려운것은 아름답게 늙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일이 아닙니다.   첫째,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 사업관계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열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보통 네가지 고통이 뒤따릅니다. 질병, 고독, 빈곤, 그리고 신체공능 퇴화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삶에 대한 열정을 잃게 됩니다.   노년을 초라하게 보내지 않고, 우아하게 보내는 비결에는 열정,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 등이 있습니다. 특히 핵심적인 요소는 열정입니다.   옛날 강태공은 80세에 나라의 승상이 되였습니다. 그는 80년동안 낚시질만 하면서 허송세월 보내다가 80세에 천자를 도와 상나라를 뒤엎고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노년기에 열정을 가지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수 있습니다. 세계 력사상의 불후의 업적들을 살펴보노라면, 35%는 60-70대 노인들에 의하여 이룩되였고, 23%는 70-80대 노인에 의하여 이룩되였으며, 6%는 80대이상 노인에 의하여 이룩되였다고 합니다.   결국 세계 력사상의 불후 업적의 64%가 60대 이상 노인들에 의하여 이룩된 셈입니다.   둘째,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 사람관계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초라하게 되지 않으려면 사람관계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즉 사람관계를 자기중심이 아닌 믿음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실패한 원인에 대하여 통계하여 보았는데, 기술이나 지식 부족의 원인은 15%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 85% 원인은 모두 잘못된 사람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사람관계는 살아가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리기주의가 강해집니다. 모든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성격이 거칠어 지고 자아도취에 몰입하면서, 영웅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또는 염세적이고 운명론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비관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늙음은 초라할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람관계는 중심축이 무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1, 물질중심 사람관계는 나이 들수록 빈궁해 지고, 2, 사업중심 사람관계는 나이 들수록 무능해 지며, 3, 자기중심 사람관계는 나이 들수록 고독해 집니다. 4, 타인중심 사람관계는 나이 들수록 따르는 사람이 많고 5, 믿음중심 사람관계야 말로 아름다운 늙음이라 할수 있습니다.   셋째,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 신앙관계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신앙의 여부가 삶의 질을 확 바꾸어 놓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에 의지하기 보다 신앙에 의지해야 합니다. 신앙을 가까이 하면 정신년령이 더욱 젊어 집니다.   유난히 아름다운 저녁노을 우리는 황혼이 짙어 갈수록 더욱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후반생은 여생이 아니라 말그대로 후반생이며 비록 인생 내림길이지만 인생을 멋지게 마치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원만한 인생은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늙어서는 아름답게 죽는 것입니다.
188    (연변방송) 청명제사로 사색하여 본 우리민족 댓글:  조회:2672  추천:0  2014-04-09
(연변방송) 이밤을 함께 합니다. 방송날자: 2014년 4월 8일 방송시간: 21:05부터 21:45까지 방송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회장          --- 개 시 곡 (开始曲-我们的话题)---       안녕하십니까? 김계월입니다. 여러분 모두 청명절련휴 잘 보내셨습니까? 청명절기간 이 세상을 살다 간 선인들의 묘소를 찾아 뜻깊은 시간 보내셨겠죠?     그런데 해마다 청명이나 추석이 되면 유난히 마음이 더 씁슬해난다는 분이 계시는데요. 사연은 이러합니다.     (해마다 청명이나 추석이 되면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고역을 치러야 한다. 가문의 산소에 가서 일일이 가토도 하고 벌초도 하고나면 손에 물집이 생기고 가시덩쿨에 찔려 피가 나군 한다. 옛날에는 청명이나 추석이면 삼촌이나 형님가족들까지 떠들법석하며 가문의 산소를 찾아 함께 둘러앉아 선인들의 이야기도 주고받으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었는데... 세차게 불어닥친 한국바람으로 친척들이 한명두명 이국타향으로 나가다보니 이 몇해째는 그냥 달랑 우리 세식구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 집 상황은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다. 우리 집 산소부근 적잖은 이웃들의 산소가 이젠 주인을 잃은지 오래다. 청명과 추석이면 찾아들군 하던 익숙한 얼굴들도 못본지 오래다. 사람손이 가지 않은 키를 넘는 황량한 풀숲에 묻혀있는 임자 잃은 봉분들을 보노라면 참 마음이 안타깝다.     일년에 한번 두 번 산소를 찾는 일, 결코 형식에 그치지 않는 고인들에 대한 추모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준 선인들을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키우고 세세대대 효도문화를 이어가는 한 개 방식인데 이것이 어딘가 점점 색바래져 가는 것 같아 자못 가슴이 아프다. )     그래요, 고인들을 기리는 명절인 청명이나, 추석, 이 명절문화 핵심은 효문화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에서 말하는 사연 결코 한두집에서만 생기는 특별한 사례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수 있는 사례라고 할수 있는데요.     오늘밤에는 우리들이 현시대 숨가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효문화를 잃어가고 있는건 아닌지 한번 사색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가 합니다.               --- 간 주 곡 (间奏曲-我们的话题)---     물음(1): 청명에 산에 다녀오셨죠. 정말 앞에 남성분이 얘기했던 이런 사례, 저 역시 해마다 청명이나 추석이면 겪는 사연인데요. 그래서 참 공감이 가더라구요? 대답1: 저는 청명에 사유가 있어서 이틀 앞당겨 산에 갔었습니다. 자고로 제사는 미루지 않는다고는 했습니다만, 경우에 따라 조금 앞당기는 것은 저승의 분들도 이승의 바쁜 일상을 잘 알고 계시니 량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물음(2): 특히 앞의 그분도 얘기했지만 주변의 주인 잃은 봉분들을 바라볼 때면 저 속에 묻힌 고인들의 후대들은 내 뿌리마저 잃고 살아가는 것 같아 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대답2:  주인 잃은 봉분의 임자들은 현재 눈앞의 일상에 바쁘시다 나니, 뿌리같은 것은 미처 생각할 여유가 없는가 봅니다. 조상의 뿌리부터 확실하게 하면서, 가문을 열심히 운영해 나간다면, 모든 난제들이 방향성 있게 더욱 잘 풀릴수 있다는 도리를 그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깝죠.         물음(3): 그런데요, 돌아가신 부모님들, 혹은 조상님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보통 어떤 소망을 실현시켜달라고 기원하는데, 너무 자사적인 것이 아닌가요? 대답3: 제사의 본의가 바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거나, 불가능한 어떤 소기의 념원의 실현을 위하여, 제물을 차려놓고, 의식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으로는 의지 교류가 불가능한 초자연적, 초인간적 대상과 의지 교류를 시도함으로써, 그들의 소위의 초자연적, 초인간적 능력을 리용하려는 문화적 수단이였습니다. 바로 기독교에서의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와 비슷한 개념이죠. 제사문화는 이미 몇천년을 내려 오면서 우리 인류의 문명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으며, 과학이 세계를 통치하는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막강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인간능력의 보충수단이며, 신앙과 정감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내면서 자기의 어떤 소망을 기원하는 것을 너무 자사적이라고 나무랄바는 아닙니다. 바로 제사를 통하여 고인에게 추모와 감사의 마음를 보냄으로써 그 혜택으로 자기로서는 어쩔수 없는 어떤 소망을 실현할수 있다고 믿는 거기에 제사의 존재 리유가 있는것입니다.   물음(4):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죠, 한줌의 재로 된 고인들이 술을 부은 들 뭘 알겠고 절을 한들 뭘 알겠냐고, 장례니, 제사니 그냥 미신형식이 아닌가고 얘기하는데요.     우리 민족의 장례, 제례문화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짚어주시겠습니까? 대답4: 우리들의 장례, 제례문화는 유교의 한개 중요한 내용으로서, 2500여년전에 공자가 창시하였습니다. 그 핵심은 효도인데, 효도란 가정에서 자식들이 부모들을 대하는 기본 도리로서, 천여년래 가정을 안정시키는 점착제였으며, 사회의 안정을 보장하는 중요한 수단이였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닙니다. 시작을 알수없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완강히 생존, 생육하시면서 생명인자를 한세대 한세대 이으시여 오늘 당신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자기를 어렵게 키워 준 부모에 대해선 왕왕 감격할줄 모르고, 보답할줄 모르며,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효도가 필요하게 된거죠. 제사는 효도의 보충이며, 감사의 마음을 키우고 표현하는 수단이며, 조상들과 당신, 그리고 당신의 후손들을 이어주는 뉴대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해 할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불효자식이 사회에 나가서 남들의 존중을 받고, 남들과 우호롭게 지내면서 큰 일을 해낼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민족의 장례, 제례풍습의 핵심인 효도사상에 대해 이야기 해주신다. 나가서 효도사상이 한 민족의 세세대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물음(5): 그런데 우리 지역사회의 대도시진출 및 해외진출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멀리 떠나 타관객지에서 살다보니 앞에서와 같은 사례들도 생기는데요.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례들도 적잖게 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님의 부고를 받고서도 내가 외국에서 비싼 비행기표값을 팔아가며 달려간들 부모님이 다시 일어날 수 도 없는데 하면서 부모님이 마지막 가는 길마저도 제대로 바래드리지 못하는 자식들도 있잖습니까? 그러다보니 요즘 어떤 상가집을 가면 유난히 더 썰렁한 집들도 있잖습니까? 우리 현대인들이 너무 실용주의에 빠져 효도문화가 점점 더 색바래져 가는건 아닌지 생각을 잠간 해보게 되더라구요? 대답5: 이것은 주요하게 우리의 장례 복무체제가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은 자고로 장례를 한 군체의 공동대사로 여기고 조직적으로 처리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장례가 완전히 개인적인 일로 되였으며, 해외진출붐으로 주변에 친척, 친우가 없는 상황에서 조선족 상가에선 장례가 무서울 정도로 어려운 일로 되였습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그 시대에 맞게 우리의 장례 복무체제를 건립하고, 그 공능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근본열쇠라고 인정합니다. 정부에선 이미 《조선족 장례》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고, 대표 전승인인 제가 지금 정부의 허가를 받고 한창 방법을 대고 있으니, 이제 곧 연길에 《조선족 빈소》가 따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 맞게 조선족 장례 복무체제가 건립될 것이며, 조선족 장례문화도 더욱 세련된 모습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성원하여 주십시요.       물음(6): 이쯤 이야기 나누고보니 또 에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가 없네요. 중년층의 대도시진출 혹은 해외나들이 등 영향으로 고향에 홀로 남겨지는 로인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고있는데요. 요즘 저의 한 친구가 이런 고민을 앓고 있습니다. 아들이 금방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어 장가를 보내려고 하는데 결혼비용을 장만하기 위해 몇년만이라도 외국에 나가 돈을 벌었으면 하는데 80을 넘기신 어머님이 딸의 발목을 잡는다는것입니다. 다른 자식들이 모두 곁에 없고 이젠 하나 남은 딸마저 나를 두고 떠나버리면 나는 어떻게 사냐며 곁을 못떠나게 하고있다고 한답니다. 양로원에 모시려고 해도 죽어도 양로원에는 안간다고 하는데요. 선생님께서 이와같은 경우에 맞띠운다면 어떤 선택을 하실건가요? 대답6: 물론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모셔야죠. 우리는 이렇게 할것을 호소합니다. 어머니를 모시는 것을 부담으로만 여기지 마시고, 관념을 바꾸어 혜택이라고 여겨 보십시요. 그러면 그에 따른 더욱 훌륭한 문제 해결책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모님 년대에는 어려운 전쟁 피난길에서 노문한 부모를 힙겹게 업고 다니면서도 감히 버릴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정도 정이려니와 부모를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는 의식이 그들의 머리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젊은이들은 천벌이란 것을 근본 믿지를 않습니다. 천벌이란 기실 인과보응을 말하는데 반드시 있지요. 없을수가 없습니다.       물음(7): 그래요, 여기에서 꼭 가야 한다 가지 말아야 한다 정답이야 어디 있겠습니까만 발목을 잡는 년로하신 어머님의 의사를 거역하고 굳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난다고 할 때 불효는 피할수 없는거지 않겠습니까? 대답7: 이런 경우를 가리켜 현대판《高麗葬》이라고 합니다. 옛날 고려때에 한 농부가 자기 아버지가 노문하여 일을 할수없게 되니 쪽지게에 져서 산에 가져다 그대로 버렸습니다. 돌아 오려는데 그 농부의 아들이 그 쪽지게를 기어이 가지고 가자고 조릅니다. 왜서냐고 물었더니 그 아들이 하는 말인즉, 이제 아버지가 늙으시면 역시 이 지게로 져서 버려야 하는것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 말에 농부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 잘 모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사에서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고 있다는 최근에 와서 우리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 봅시다; 필생의 정력으로 자식들을 다 출세시켜 보내고 나니 세집에 덜렁 버려진 늙으신 아버님들, 외국에 돈벌이 간 자식들을 망연히 기다리며 빈집을 지키고 계시는 허약한 어머님들,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고독한 할아버지들, 치매에 걸린후 싸구려 양로원에 장례비까지 이미 맡겨진 불쌍한 할머님들, 빈집에서 혼자 사망한후 며칠후에야 발견된 불행한 망령들… …, 현재 우리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수있는 이런 현상들이 그래 현대판《高麗葬》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물음(8): 청명절을 금방 보내고나서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와 더불어 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봤는데요. 우리들이 바쁜 일상을 핑계로 효문화를 잃어가고있는건 아닌지 시시각각 검토해봐야 하지 않을가요? 대답8: 극히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검토를 효과적으로 가동시키려면 사회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풍기가 형성되여야 합니다. 이 방면에서 저의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심심히 느낌니다. 《조선족 장례》대표 전승인으로서 하루속히 새로운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새로운 장례풍기를 형성시켜, 멀리 떠난 우리의 효자, 효녀들을 다시 불러 들이겠습니다.
187    <청명상하도> 전폭그림 흠상 댓글:  조회:5021  추천:0  2014-03-29
国画清明上河图全图欣赏 作者:秩名 来源:中国画艺国画清明上河图 清明上河图局部一 《清明上河图》画卷,北宋风俗画作品。作者张择端,字正道,东武(今山东诸城)人。宋徽宗时为宫廷画家。少年时到京城汴梁(今河南开封)游学,后习绘画,尤喜画舟车、市桥、郭径,自成一家。《清明上河图》是他的代表作,曾经为宣和内府所收藏。绢本、淡设色,纵24.8厘米,横528.7厘米,现藏北京故宫博物院。该图描绘了清明时节,北宋京城汴梁以及汴河两岸的繁华景象和自然风光。作品以长卷形式,采用散点透视的构图法,将繁杂的景物纳入统一而富于变化的画面中,画中人物500多,衣着不同,神情各异,其间穿插各种活动,注重戏剧性,构图疏密有致,注重节奏感和韵律的变化,笔墨章法都很巧妙。全图分为三个段落。   清明上河图局部二 清明上河图局部三 清明上河图局部四 清明上河图局部五 首段,汴京郊野的春光:   在疏林薄雾中,掩映着几家茅舍、草桥、流水、老树、扁舟。两个脚夫赶着五匹驮炭的毛驴,向城市走来。一片柳林,枝头刚刚泛出嫩绿,使人感到虽是春寒料峭,却已大地回春。路上一顶轿子,内坐一位妇人。轿顶装饰着杨柳杂花,轿后跟随着骑马的、挑担的,从京郊踏青扫墓归来。环境和人物的描写,点出了清明时节的特定时间和风俗,为全画展开了序幕。   清明上河图局部六   清明上河图局部七   清明上河图局部八 清明上河图局部九 中段,繁忙的汴河码头:   汴河是北宋国家漕运枢纽,商业交通要道,从画面上可以看到人烟稠密,粮船云集,人们有在茶馆休息的,有在看相算命的,有在饭铺进餐的。还有“王家纸马店”,是扫墓卖祭品的,河里船只往来,首尾相接,或纤夫牵拉,或船夫摇橹,有的满载货物,逆流而上,有的靠岸停泊,正紧张地卸货。横跨汴河上的是一座规模宏大的木质拱桥,它结构精巧,形式优美。宛如飞虹,故名虹桥。有一只大船正待过桥。船夫们有用竹竿撑的;有用长竿钩住桥梁的;有用麻绳挽住船的;还有几人忙着放下桅杆,以便船只通过。邻船的人也在指指点点地象在大声吆喝着什么。船里船外都在为此船过桥而忙碌着。桥上的人,也伸头探脑地在为过船的紧张情景捏了一把汗。这里是名闻遐迩的虹桥码头区,车水马龙,熙熙攘攘,名副其实地是一个水陆交通的会合点。 清明上河图局部十 清明上河图局部十一 清明上河图局部十二   清明上河图局部十三 清明上河图局部十四 清明上河图局部十五 清明上河图局部十六 后段,热闹的市区街道:以高大的城楼为中心,两边的屋宇鳞次栉比,有茶坊、酒肆、脚店、肉铺、庙宇、公廨等等。商店中有绫罗绸缎、珠宝香料、香火纸马等的专门经营,此外尚有医药门诊,大车修理、看相算命、修面整容,各行各业,应有尽有,大的商店门首还扎着“彩楼欢门”,悬挂市招旗帜,招揽生意,街市行人,摩肩接踵,川流不息,有做生意的商贾,有看街景的士绅,有骑马的官吏,有叫卖的小贩,有乘座轿子的大家眷属,有身负背篓的行脚僧人,有问路的外乡游客,有听说书的街巷小儿,有酒楼中狂饮的豪门子弟,有城边行乞的残疾老人,男女老幼,士农工商,三教九流,无所不备。交通运载工具:有轿子、骆驼、牛马车、人力车,有太平车、平头车,形形色色,样样俱全。绘色绘形地展现在人们的眼前。   总计在五米多长的画卷里,共绘了五百五十多个各色人物,牛、马、骡、驴等牲畜五、六十匹,车、桥二十多辆,大小船只二十多艘。房屋、桥梁、城楼等也各有特色,体现了宋代建筑的特征。张择端的《清明上河图》是一幅描写北宋汴京城一角的现实主义的风俗画,具有很高的历史价值和艺术水平。
186    《고려장》무덤떼 팔가자에 있었다. 댓글:  조회:4336  추천:0  2013-11-17
《고려장》무덤떼 중국 연변의 팔가자에 있었다.   《고려장》(高麗葬)이란 부모가 늙어서 일할수 없게 되면, 산속에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부모를 버려 두었다가, 죽게 되면 장례를 지냈다는 전설속 고려인들의 장사 풍속으로서, 오늘날에는 늙고 쇠약한 부모를 부양하지 않고, 유기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이 《고려장》과 관련하여 두가지 판본의 전설이 있다.   한가지 전설에서는 한 농부가 자기 부친이 늙고, 일할수 없게 되니, 그를 지게에 담아 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땅굴을 파서 가두어 놓은후, 지게마저 버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함께 갔던 그 농부의 어린 아들이 그 버린 지게를 도로 가지고 가자고 조른다. 왜서냐고 물었더니 그 어린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시면, 역시 이 지게로 져서 버려야 하는것 아니냐?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농부는 크게 뉘우치고, 늙으신 자기 부친을 다시 집으로 모셔 내려와 지성으로 봉양했다고 한다.   이 전설에 근거하여, 한국에서는 1963년도에 김기영 각본, 감독으로 된 《고려장》이란 흑백영화까지 한부 찍은적이 있다.   또 한가지 전설에서는, 한 선비가 당지의 풍습대로 늙으신 자기 어머니를 버리려고 산에 업어 같는데,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자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 갈때 길을 잃을까봐 걱정되여, 나무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 놓았다. 그 선비는 이렇게도 인자하신 어머니를 차마 버릴수가 없어서,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러던 어느날, 당나라 사신이 똑같이 생긴 말 두필을 가지고 와서 고려의 대신들더러 어미와 새끼를 가려내라고 하였다. 모두들 가려내지 못하는데, 그 선비의 어머니가, 그 말들을 하루 굶긴 뒤에 여물을 주어서, 먼저 먹는 놈이 새끼이고, 양보하는 놈이 어미라고 알려 주어 문제를 풀수 있었다. 그 뒤로 조정에서는 늙은이들에게는 젊은이들에게 있을수 없는 보귀한 경험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령을 내려 늙은 부모를 버리는 악습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전설《고려장》은 우리민족의 수치라고 여겨져, 고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따름이고, 실제 력사사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전설은 결코 력사가 아니다. 그런데 전설《고려장》 원형이라고 의심 할만한 력사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여 있다. 《조선왕조실록》세종 44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4월 4일(기묘)세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사람의 자식으로 부모가 살았을 때는 효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슬픔을 다하는 것은 천성(天性)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직분(職分)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것이다. 고려 말기에 외방(外方)의 무지(無知)한 백성들이 부모가 죽으면 도리어 간사한 마음으로 즉시 그 집을 무너뜨리고, 또 부모가 거의 죽어갈 때에, 숨이 아직 끓어지기도 전에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 비록 다시 살아날 이치가 있더라도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장사지내는 날에는 향도(香徒)들을 많이 모아서 술을 준비하고 풍악을 베풀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이 하니, 어찌 유속(遺俗)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아니하였는가. 아아. 사람은 진실로 각기 상도(常道)를 지키는 천성(天性)이 있으니, 누가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리요마는, 다만 오래도록 습속(習俗)에 젖어 이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지금부터는 유사(攸司)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아 교조(敎條)를 명시(明示)하여, 가가(家家)로 하여금 구습(舊習)의 오점(汚點)을 환히 알도록 하여 자신(自新)해서 인효(仁孝)의 풍속을 이루게 할 것이다. 만약 혹시 고치지 않는다면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은 엄격히 금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 알수 있는바, 옛날 고려인들의 장사풍속에는 거의 죽어 가는 부모를 아직 숨을 거두기 전에 외사로 옮기는 풍속이 있었다. 외사란 원집 바깥에 있는 사랑채로 인식할수도 있고, 또 다른 그 어디에 특별히 마련해 놓은 자리일수도 있는데, 땅굴이나 돌무덤도 외사로 인식할수 있다. 이 풍속이 전설《고려장》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옮겨가는 대상이 일반적인 늙으신 부모가 아니라, 거의 죽어 가는(다시 살아날 이치가 있을수도 있는) 부모라는 점이며, 공동한 점이라면, 옮겨가는 대상이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로부터 세종대왕께서 교지에서 질책하신 《고려 말기 외방의 무지한 백성들》의 장사풍속이 바로 《고려장》의 유속일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전설《고려장》과 비슷한 장사 풍속이 우리 민족의 력사에 진짜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고려장터》라고 불리우는 곳이 진짜로 있었으니, 바로 중국 길림성 화룡현 팔가자 상남부락 북쪽켠에 있었다. 필자가 바로 팔가자 태생인데, 문화혁명전까지 팔가자는 서성향에 소속되여 있었으므로, 전 향적으로 운동대회를 열거나, 어떤 축제가 있게 되면, 팔가자 사람들은 명절차림을 하고, 도보로 근 10리길을 걸어서 서성으로 갔었다. 전반 구간의 큰길에 꽃의 흐름처럼 기다란 장사진을 이룬 그 장면이 참으로 가관이였다. 상남마을에서 길을 따라 북쪽으로 금방 벗어나면, 길 량옆에 키들이 풀속에 묻힌 황페한 돌무덤떼가 나타 났는데, 우리는 어른들로 부터 그곳을 《고려장터》(高麗葬地), 혹은 《고려장군묘지》(高麗葬群墓地)라고 익히 들어 왔었다. 그곳의 돌들이 모두 타곳에서 옮겨온 돌이 분명함에도 엄청나게 커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어린 소견에, 힘이 엄청 센 고려장군들이야 이깟 돌을 꽁기돌 다루듯이 하면서 적들과 싸웠을 거라고 상상도 해 보았지만, 후에야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최근에 우연히 팔가자의 그 돌무덤떼와 상관되는 재료를 접하게 되였는데, 당년의 기억들이 생생히 떠 오르며, 금방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으니, 바로 전설《高麗葬》이 실제 력사 사실일수 있으며, 어쩌면 그 유적지의 하나가 곧 바로 팔가자의 그 돌무덤떼일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그 돌무덤떼와 상관되는 전설도 대체로 우리의 《高麗葬》 전설과 비슷하였다. 즉 부모가 60이 되면 그곳에 돌무덤을 쌓아놓고, 부모를 돌무덤 안에 모시고, 먹을것을 조금씩 공급해 주는데, 렬악한 환경때문에 부모는 얼마 못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큰 돌로 돌무덤을 봉해 버리고, 장례를 지냈다고 하였다.   그 고려장터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5키로되는 곳에, 바로 한때는 발해국(기원698년~926년)의 首府로 까지 되면서 흥성했던 중경현덕부 엣터가 있다. 당지에서 《북고성》이라고 불리우는 그곳의 주위에는 지금도 당시 왕궁 성곽의 흔적이 력력히 남아 있다. 지금은 이미 국가급 력사 유적지로 지정되여 보호성 수건을 받고 있다.   1964년에 중조고고련합고찰단이 팔가자 돌무덤떼와 그 주위의 유적들을 답사한적이 있으며, 1973년에 연변박물관과 화룡문화관에서 련합으로 이 돌무덤떼를 상세히 답사한적이 있다. 력사 유적지 당안에는 이곳이 《북대무덤떼》로 명명되여 있는데, 발해때의 것으로 이미 확실하게 고증이 되였다. 그렇다면 발해때의 돌무덤떼가 고려와는 어떤 상관이 있었기에 《고려장터》라는 이름을 가졌을가? 가능하게 이 돌무덤떼는 발해국 고구려 후예들의 무덤들일수 있다. 당시 발해의 주체민족은 말갈인이라고 하였으나, 인구 대부분의 백성들이 고구려 후예들이 였다는 것은 이미 상식적인 력사 사실이다.   《북대무덤떼》에 관한 답사 자료를 살펴 보노라면, 역시 흥미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즉 상세한 답사기록이 있는 쉰네자리 돌무덤에서 열네자리 돌무덤의 남쪽벽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를 냈다는 점이다. 이미 사망한 사람을 일차성적으로 안장할 시에는 위로부터 유체를 무덤안에 넣으면 되는건데, 하필이면 통로를 낼 필요가 무었이였겠는가? 무덤에 통로를 냈다는 것은 평소에 무덤안을 드나들 필요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안장 초기에 그 무덤안의 사람이 아직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며, 가능하게 무덤안의 사람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통로였을수도 있었다. 바로 전설《고려장》 특징과도 대체로 부합되는 해석이다.   《고려장》이 실제로 있은 력사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산생 원인도 평가해야 하는데, 반드시 그 당시 력사적 환경을 료해하고, 그에 기준하여 분석해야 할것이다. 그 당시는 해마다 전란으로 정세가 몹시 불온정 하였고, 먹을것은 극도로 결핍하였으며, 장정들은 대부분 군대에 뽑혀가 끝없이 남정북전 해야하는 어려운 형편이였다고 감안할때, 《고려장》을 어쩔수 없이 택하게 되였을 당시 사람들의 처지를 어느정도 리해할수 있을것 같다. 그리고 쉰네자리 돌무덤에서 열네자리 돌무덤에만 바깥통로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장》이 결코 고구려 후예들의 보편성 풍속이 아니라, 특수경우의 특수현상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돌무덤의 규모로 보아서는 상당한 인력과 물력이 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단지 생활 형편이 어려워 늙으신 부모를 버리게 되였다고  그렇게 단순하게 평가할 문제는 아닌것 같다.   1980년도 전까지 이 고려장터는 보존이 괜찮게 되여 있었는데, 지금은 언녕 혼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부분 자리는 이미 논밭으로 되여 버렸고, 남쪽켠에는 팔가지 림업국 직공 아빠트가 빼곡히 들어 앉아 있으며, 돌들은 몽땅 아빠트를 건축하면서 기초돌로 리용되였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작성 2013-11-17  
185    실용 조선족 장례제사 규범 댓글:  조회:4633  추천:1  2013-10-22
吉林省非物质文化遗产“朝鲜族丧葬习俗”传承资料     一, 현재 지킬수 있는 조선족 장례규칙   우리민족은 자고로 효도를 모든 행위의 첫째준칙(孝为百行首)으로 삼아 왔으며, 례의를 모든 행사에서 선행(礼当万事先)시켜 왔습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의 핵심리념은 효도이고, 그 주체가 례의입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를 성의있게 지키므로써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충분히 표달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도가 무엇인지 알수 있고, 례의가 어떤지를 배울수 있으며, 자식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줄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규범은 원래 그 내용이 많고, 절차가 몹시 번잡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오늘날에는 많이 간소화 되였습니다. 아래에 장의관에 가서 화장하는 경우를 기준하여, 간소함을 견지하고, 민족 특색을 살리면서, 현재 지킬수 있는 조선족 장례규칙을 실용의 요구에 맞게 정리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의 보귀한 의견을 요청합니다.   1, 친인이 사망하면 인차 혼을 부르고, 렴습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너무 지나면 시체가 굳어지므로, 보통 한시간 이내에 끝내야 합니다. 친척이나 친구들중에 누가 할수 있는 분들이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라도 당황하시지 마시고, 인츰 상조에 련락하십시요.   2, 염습이 끝나고, 령구차에 싣기전에 고인한테 발인례를 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어 세번 허리굽혀 인사합니다.   3,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키고, 추모관이나 혹은 집에 돌아와 객실에 작은 령좌를 차려 놓고 조문객을 맞습니다. 조문객이 와서는 먼저 그 령좌앞에 가서 술을 붓고 삼배를 올립니다. 그리고 상주와 유가속을 상대로 맞인사를 하고, 위안의 말을 하며, 상가에 부의금을 건넵니다. 조문을 끝낸 손님들은 장례에 따로 참석하지 않아도 실례가 되지 않습니다. 상주는 하루밤 령좌를 지키면서, 夕奠、子時奠、朝奠만은 간단히 올리는 것이 기본 례의입니다.   4, 장례기간에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 (主妇)는 머리에 수질을 돌리여, 자기들의 특수신분을 나타냅니다. 유가속 기타의 녀성들은 머리에 몽상을 달고, 남성들은 팔에 상장을 두르는데, 사망자가 남성일 경우 왼쪽에 달고, 사망자가 녀성일 경우 오른쪽에 답니다. 장례에 손님으로 참석할때, 녀성분들은 될수록 꽃무늬 없는 단색옷을 입고, 남성분들은 될수록 검은색 양복을 입습니다.    5, 고별식이 끝나고, 화장이 끝나면 골회함 보관여부 상관없이 안신제를 지냅니다. 전통적으로 안신제는 유가족들만 지냈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안신제는 간단하게 제사상을 차리고, 강신, 독축, 초헌, 아헌, 종헌, 첨작, 유식, 사신, 이러한 순서로 진행합니다.(《안신제 지내는 방법과 절차》참조) 마지막에 기름내를 피우는데, 기름떡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으면서 상모, 수질, 몽상, 상장등을 모두 살읍니다. 다음 제단의 제물들을 치우고, 기름떡만 올려놓고, 술은 붓지말고, 상주와 주부가 함께 절을 세번 올립니다. 제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불길하므로, 모았다가 지정한 곳에 버리거나, 소각로에 가져다 태웁니다.   6, 골회함을 보관시킬 경우, 납골당에 안치하고 물러가면서 세번 허리굽혀 고별인사 하는것을 잊지 마십시요. 제사때문에 골회함을 움직여야 할 경우에는 먼저《(今日祭祀暫遷, 敢告!) 오늘 제사때문에 잠시 움직이오니 그리 아룁니다!》하고 말씀 올리고,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움직이는 것이 례의입니다.     二, 조선족 렴습의 방법과 절차   렴습전 준비 물품: 1,수의(남녀각기 웃옷 세벌, 아래 세벌); 2,버선; 3,악수; 4,실타래; 5,쌀; 6,면백; 7,명모; 8,령침; 9,렴포(130×500); 10,포끈; 11,천금; 12,지요; 13,명정   렴습 실시 인원이 갖추어야 할 물품: 1,위생복; 2,장갑; 3,마스크; 4,소독약; 5,약솜; 6,습건; 7,가위; 8,핀센트; 9,손톱깍개; 10,나무숟가락; 11,분필   조선족 장례에서 렴습(殓袭)은 현재 보존된 조선족 장례풍속에서 가장 완미하게 보존된 풍속의 하나입니다. 현재 병원에 가서 사망한 시신을 렴습할시에는 극히 제한된 시간내에 질량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렴습 실시 인원을 두사람으로 하는것이 좋으며, 먼저 세심히 소독을 하고, 고인한테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렴습을 시작합니다.   1, 皋復: 혼을 부르는 절차입니다.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 서북쪽을 향하여 흔들면서 먼저 고인의 호칭을 부르고 “돌아 오시요!”하고 세번 부릅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종이에 싼후, 령침에 넣어 고인의 머리밑에 베여 드립니다.   2, 下袭: 먼저 고인의 몸 아래를 속벌까지 내리고, 습건으로 깨끗이 닦습니다. 그 다음 아래벌을 세벌 입히고, 제쪽씩 발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버선을 신긴다음 그 종이봉지를 버선목에 넣어 드립니다.   3, 上袭: 고인의 웃몸을 속벌까지 벗기고, 습건으로 깨끗이 닦습니다. 수의를 세벌 입히고, 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반대로 여밉니다. 그 다음 제쪽씩 손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악수를 끼우고, 그 안에 넣어 드립니다. 두손을 배우에 포개여 놓고 묶는데, 남성의 경우에 왼손을 위로, 녀성의 경우에 오른손을 위로 합니다. 그다음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드립니다.   4, 饭含: 고인의 얼굴을 습건으로 깨끗이 닦고, 입안에 쌀알을 넣어 드립니다.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쌀알을 적당히 떠서 세번 넣어 드리는데,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 하고 외움니다. 전통적으로는 구슬이나 은전같은 것도 넣었댔으나 지금은 넣지 않습니다.   5, 面袭: 고인의 코구멍과 귀구멍을 약솜으로 막고, 고인의 입에도 약솜으로 채운다음 잘 다물겨 드립니다. 그리고는 약솜편으로 고인의 얼굴을 가리우고, 면백으로 머리와 얼굴을 싸서 동이고, 명모를 쓰이여 드립니다.   6, 小殓: 전폭의 렴포로 유체를 쌉니다. 그리고는 포끈으로 발목부위, 허리부위, 어깨부위, 이렇게 세 부위로 나우어 동입니다. 다섯곳 동일수도 있고 일곱곳 동일수도 있는데, 매듭은 옭매지 않고 비틀어서 끼우는 방법으로 풀어지지 않도로 단단히 동입니다. 소렴이 끝난 유체밑에 지요(地褥)을 깔고,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7, 铭旌: 흰 분필로 붉은천에 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쓰는데, 한자로 씁니다. 남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學生”으로 쓰는데, 될수록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 례를 들어 남성 사망자가 본관이 安东이였고, 성이 金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安东金公之柩” 라고 씁니다.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위의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녀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례를 들어 녀성 사망자의 본관이 全州였고, 성이 李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이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써 놓은 명정을 렴을 마친 유체우에 덮습니다.   8, 发引礼: 렴습이 기본상 끝나면, 령구차가 오기전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렴을 마친 고인의 유체 주위에 모이게 하고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 다 함께 세번 허리굽혀 례를 올립니다. 첫번째 례는 시조에게 올리는 례요, 두번째 례는 조상들께 올리는 례며, 세번째 례가 고인에게 올리는 례입니다.   9, 大殓: 전통적으로는 입관하는 절차였으나, 지금 성시에서 일률로 화장을 하기 때문에 현재로선 관을 쓰지 않으므로 령구차가 온후 유체를 주머니에 넣는 절차로 됩니다. 유체를 주머니에 넣은후 담가에 담고, 머리부터 바깥으로 나가고, 발부터 영구차에 실으며, 담가를 든 사람들이 될수록 문설주와 문턱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三, 골회함을 릉묘에 모시는 방법과 절차   골회함을 릉묘에 모시는 행사는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현대에 새롭게 생긴 풍속으로서 여기에는 두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화장이 끝난후 골회함을 직접 릉묘에 모시는 경우이고, 두번째는 납골당에 보관했던 골회함을 다시 릉묘에 옮겨 모시는 경우인데, 보통 두번째의 경우가 많습니다.   첫번째 순서: 납골당에 가서 골회함을 모셔 내올때, 먼저 골회함을 보관했던 보관함 문을 열고, 그 앞에서 상주가 머리숙이고 조용히 아룁니다: 《(今日吉辰遷宅,敢告!)오늘 길한날에 새집으로 옮겨 모시겠으니, 그리 아룁니다.》 상주는 세번 경건히 경례한후 골회함을 두손으로 받혀들고 납골당을 나옵니다. 보통 지정한 차에 앉아 릉묘까지 가게 되는데, 상주는 차에 앉아서도 골회함을 시종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가는것이 례의입니다.   두번째 순서: 릉원에 도착하여 상주는 차에서 내린후 친지들의 옹위를 받으며 골회함을 받들고 가족들과 함께 릉묘로 향해 천천히 걸어 갑니다. 년중절이여서 사람들이 특별히 많을때 좋기는 한분이 앞에서 길을 내며 인도하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세번째 순서: 릉묘에 도착한후 골회함을 릉묘대에 올려놓고, 먼저 후토를 찾아 후토제를 지냅니다. 그,다음 상주를 중심으로 일동이 골회함을 마주하여 섭니다. 사회자가 웨침니다: 《平土-成墓 讀祝입니다!- (默哀)묵념!-.》 일동이 골회함을 향하여 머리숙이고 묵념하는 사이 사회자가 축문을 읽습니다:   (維歲次 干支年某月某日) 유--세차 간지년 모월 모일 (孝子[女]某某 敢昭告于) 효자(녀)모모 감소고우 (顯考某官府君) 현고모관부군이요-(母喪-현비유인 모씨) (灰歸芚席 魂魄遊天) 회귀둔석 혼백유천 (幽宅旣成 伏愉尊靈) 유택기성 복유존령 (舍舊從新 是憑是依) 사구종신 시빙시의라 하였사와, 골회를 여기에 두시고 혼백은 하늘을 노시나이다 새 유택 다 지었사오니, 엎드려 여쭙건대 존령께서는 낡은것을 버리시고 새것에 좇으셔, 이곳에 기대시고 의지하소서.   네번째 순서: 독축이 끝나면 역공들이 서둘러서 골회함을 릉묘의 함실에 넣고 덮개를 덮고 릉묘를 봉합니다. 역사가 끝난후 상주를 중심으로 일동이 다시 릉묘앞에 섭니다. 사회자가 웨침니다: 《고 모모모 존령님의 안택을 부디 빌어 경례를 올립시다: 첫번째 경례!- 다시 경례!- 또다시 경례!-》   다섯번째 순서: 순서가 이쯤되면 안장행사는 끝났으나 전통례의에 근거하여 안택안신제사를 지냅니다. 보통 릉묘앞은 자리가 비좁으니 자리를 옮기여 따로 제사장소를 정합니다. 자리가 정해진후 제사상 차려놓고 유가족과 제사객들이 제단의 왼쪽에 서고 사회자가 제단의 오른쪽에 섭니다.   제사를 시작하여 첫순서로 가족에서 제문을 작성하여 읽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제사방법은 기본적으로 묘제사 방법을 기준하고 축문은 이미 읽었으니 만가(挽歌)만 읽으면 되겠습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은 삼천갑자 살았는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두갑자도 못삽니까? 하늘에서 오셨다가 다시하늘 가셨지만, 이세상에 쌓은공덕 달과함께 빛나리다!   식구들을 별하시고 기왕이면 가셨으니, 재난액운 오늘로써 끝을내여 주옵소서! 이가문에 아직까지 질고여건 남았다면, 깨끗하게 말끔하게 씻어가져 가옵소서!   자식손군 번영하고 백년가업 흥성토록, 존령께선 구천에서 보우하여 주옵소서!   화장하여 골회함을 직접 릉묘에 모시는 경우에는 위의 두번째 순서부터 실행하고, 안장이 끝난후 안신제사를 따로 재냅니다. 안신제사는 따로 안신제사 방법에 기준하면 되겠습니다.     四, 골회를 살포장 하는 방법과 절차   골회를 살포장 하는 것은 현재 제창하는 안장방식으로서 골회를 버린다고 생각하는것은 틀리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살포장 하였다 하여도, 안신제사와 돐제사, 삼년제사까지는 명심하고 지내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골회를 살포장 함에 있어서, 크게 네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번째: 유체를 화장하고, 그대로 날려 보내는 경우   유체를 화장한후 골회를 따로 받지않고 그대로 날려 보내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안신제사와 돐제사, 삼년제사까지는 명심하고 지내는 것이 원칙입니다.   두번째: 유체를 화장하고 골회를 받아서 따로 살포하는 경우   유체를 화장한후, 상주는 골회주머니 혹은 골회함을 받아서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지정한 차에 앉아서 예정한 살포 현장으로 갑니다. 살포현장은 강이나 산야로 할수 있습니다.   살포할때 살포자는 손에 흰장갑을 끼고, 골회를 한줌씩 쥐여서 정중히 살포합니다. 본인들의 의향에 따라서 가족과 친척 친우중에서 그 누구나 손수 살포에 참여할수 있습니다. 골회함을 기울여 쏟아 버리거나, 골회함 통채로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살포가 끝난후, 빈 골회함은 땅에 묻거나 불에 살읍니다. 그대로 버리는 일은 없도록 합니다.   살포장이 끝난후 간단히 안신제사를 지냅니다.   세번째: 납골당에 보관했던 골회함을 살포장하는 경우   납골당에 가서 골회함을 모셔 내올때, 먼저 골회함을 보관했던 보관함의 문을 열고, 그 앞에서 상주가 머리숙이고 조용히 아룁니다: 《(今日吉辰遷移,敢告!)오늘 길한날에 다른곳에 옮겨 모시겠으니 그리 아룁니다.》 상주는 세번 경건히 경례한후 골회함을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납골당을 나옵니다. 보통 지정한 차에 앉아 예정한 살포현장까지 가게 되는데, 상주는 차에 앉아서도 골회함을 시종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갑니다.   그다음 살포절차는 위와 같습니다.   네번째: 낡은묘를 면례하여 해골을 태운후 살포장하는 경우   낡은 산소를 찾아 먼저 후토에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베기전에 먼저 묘를 지켜준 산신한테 인사하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인 절차입니다,   무덤앞에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축인이 파묘축을 읽습니다. 면례에서 파묘축은 필수입니다.   삽으로 무덤을 헤치고, 관의 천개널을 뗍니다.   한 사람이 광안에 들어가 적토를 청리하고, 해골을 골라 주어 올리면, 우에서 한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칠성판 우에 사람 골격의 순서에 따라 놓습니다. 만약 시체가 완전히 해화되지 않았다면, 참대칼로 뼈에 붙은 살을 깨끗이 긁어 냅니다. 칠성판은 두께 2㎝의 널판자로 180㎝×30㎝의 규격이면 충분합니다. 종이합판으로 대신할수도 있습니다.   해골을 점검해 보고 모자라는 부분은 버드나무 가지로 대체합니다. 그다음 백포로 칠성판과 해골을 함께 감쌉니다. 일을 끝내고 헤친 무덤자리에 흙을 세삽 넣어 줍니다. 원래 비석이 있었다면 일을 끝내면서 광안에 묻어 주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해골은 화장터에 위탁하여 화장하는것이 편리합니다. 골회를 따로 받지않고 그대로 날려 보내는 경우가 많으며, 또는 골회를 받아서 따로 강이나 산야에 살포장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살포장이 끝난후, 합당한 자리를 정하여 유상이나 지방을 놓고, 간단히 안신제사를 지냅니다.     五, 안신제사 지내는 방법과 절차 (조선족제사 사회자 집행구령)   사망자의 골회함 혹은 유상을 모시고 제사상 차립니다. 상주를 비롯한 유가속은 제단의 왼쪽에 서고, 기타의 조문 객들은 제단의 정면에 서며, 사회자가 제단의 오른쪽에 서고, 집사가 그 맞은켠에 서서 술을 붇고 쏟는 시중을 듭니다.   사회자가 먼저 간단히 인사의 말을 올립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의 핵심리념은 효도이고, 그 주체는 례의입니다. 우리민족의 장례풍속을 성의있게 지키므로써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충분히 표달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도가 무엇인지 알수 있고, 례의가 어떤지를 배울수 있으며, 자식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줄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부모님 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 사랑을 가졌습니다. 오늘 부모님들은 파란많은 인생을 마치시고, 저 멀리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부모님들의 유지를 마음으로 받들고, 더욱 열심히 살면서, 자식들을 훌륭히 키우는 것으로, 구천에 계시는 그이들을 안심시켜 드립시다.   방금전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고 모모모 존령님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지금 존령께서는 형체를 금방 잃으시고, 몹시 불안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풍속에 좇아, 가속과 함께 안신제사를 정중히 올리여, 존령님의 안신과 명복을 삼가 빌겠습니다.   첫번째 순서로 降靈,開飯揷匙입니다. 존령께서 제사 받으려 강림하십니다. 일동 묵-도! (3초,묵도필입니다) 일동이 묵도하는 사이, 집사는 메밥두껑을 열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우에 저가락을 단정히 놓습니다.   두번째 순서로 독축,초헌 (讀祝,初獻)입니다. 상주부부 나와서 시립하시요. 축문을 읽어 올리겠습니다: (維歲次 干支年某月某日) 유—세차 간지년 모월모일 (孝子賢孫 敢昭告于) 효자현손 감소고우 (顯考府君○公之靈) 현고부군 ○공지령-(母喪-현비유인) (日月不居 奄及初虞) 일월불거 엄급초우 (夙興夜處 哀慕不寧) 숙흥야처 애모불녕 (謹以淸酌 庶羞哀薦) 근이청작 서수애천 (安事 尙饗) 안사에 상향하시라 하였사와 … … 일월성신 쉼 없어 벌써초우 웬일인고? 슬픈생각 아픈생각 밤낮으로 불녕하야, 맑은술과 음식으로 안신제를 올리오니, 두루 흠향 하옵소서!                  (독축 필입니다.)   상주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상주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상주주부 함께 초헌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상주부부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세번째 순서로 아헌(亞獻)입니다. 아헌자 나와서 시립하시요. 아헌자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아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아헌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아헌자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아헌자는 사망자 안해, 혹은 상주 형제가 됩니다.   네번째 순서로 종헌(終獻)입니다. 종헌자 나와서 시립하시요. 종헌자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종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종헌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종헌자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종헌으로 가문헌작은 끝나지만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종헌자는 상주의 형제로 할수도 있고, 상주의 아들로 할수도 있으며, 또 고인의 사위로 할수도 있습니다   다섯번째 순서로 첨작(添酌)입니다. 첨작자 나와서 시립하시요. 종헌후의 헌작은 첨작입니다. 전통적으로 첨작은 많아서 세번을 초과하지 않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될수록 단체로 나와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첨작자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첨작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첨작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첨작자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가속에 여쭈어 보면서 여러가지 관계로 오신 손님들이 빠뜨림 없이 모두 인사할수 있게끔 보장합니다.   여섯번째 순서로 유식(侑食)입니다. 존령께서 조용히 진지 드시는 순서입니다. 일동 묵-도! 일동이 묵도하는 사이 집사는 기침을 한번 가볍게 하고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조금 떠서 물그릇에 놓고, 반찬도 집어 놓으면서, 존령의 식사시중 드는 동작을 합니다. 그리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다시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의 저가락을 움직여 놓습니다.  (9초, 묵도 필입니다.)   일곱번째 순서로 송신(送神)입니다. 숙주 한그릇 따라 올리겠습니다. 집사가 물 한그릇 따라서  제단우에 올려놓습니다: 고 모모모 존령께서 오늘 승천하시였습니다! 존령님의 안신과 명복을 부디 빌어 모두 함께 세번 경례를 올립니다:   시조님께 첫번째 경례!- 조성들께 두번째 경례!- 존령님께 마지막 경례!- 경례 필입니다.   마지막 순서로 철찬(撤饌)입니다, 가속에서 계속하여 기름내(油香味)피우시고, 오늘의 안신제사는 이로서 끝냅니다. 오늘의 안신제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음덕을 많이 입으시고, 부디 건강하십시요! 가속에서 서둘러 제사상을 치우고 기름떢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우며 기름내 피우면서 몽상, 상장, 축문, 등 장례비품들을 모두 살읍니다. 다음 제단에 기름떡 아홉개만 그릇에 담아 올려놓고 상주와 주부만 나와서 함께 세번절, 혹은 세번인사를 올립니다. 이것으로 안신제사가 끝납니다.     六, 조선족 전통제사 순서    1, 진설(陳設) (1) 먼저 령좌를 앉히고 신주를 모십니다. (2) 령좌앞에 제사상을 진설합니다. (3) 제사상앞에 모사, 향안 등을 놓습니다. (4) 자손들이 제사상 왼편에 차례로 섭니다.   2, 강신(降神) 참신(參神) (1) 일동이 곡을 시작합니다. (2) 제주(장손)가 향안 앞에 꿇어앉아 향을 피웁니다 (3) 제주가 손을 씻고 향안 앞에 꿇어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술을 반잔쯤 따릅니다. (5) 제주가 세번 나누어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6)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7) 집사가 문을 조금 열어 강신을 맞이합니다. (8) 제주이하 자손들이 함께 삼배하니 참신입니다.    3, 초헌(初獻) 독축(讀祝) (1) 제주(초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제주는 반잔만 모사에 붓고 술잔을 신주옆에 놓습니다. (4) 집사가 메밥두껑을 열어 놓습니다. (5) 제주는 조금 물러나 머리 숙이고 꿇어앉아 부복합니다. (6) 축관이 축판을 듭니다. (7) 제 자손들이 모두 꿇어앉아 부복합니다. (8) 축관이 축을 읽습니다. (9) 축이 끝나 일동 일어나고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10) 집사가 남은 반잔의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4, 아헌(亞獻) (1) 주부(아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주부는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5, 종헌(終獻) (1) 근친(종헌자)이 손을 씻고 꿇어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근친이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6, 첨작(添酌) (1) 종헌이 끝난후 또 헌작자가 있으면 첨작이라 합니다. (2) 첨작은 많아서 세번을 초과하지 않습니다. (3) 첨작자가 손을 씻고 꿇어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5) 첨작자가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7, 합문(閤門)유식(侑食) (1) 일동이 곡을 그칩니다. (2) 메에 숟가락을 꽂고 반찬에 젓가락을 놓습니다. (3) 일동이 문밖에 나가 남녀가 서로 마주하고 섭니다. (4) 문을 닫고 아홉 숟가락 정도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8, 계문(啓門) 진차(進茶) (1) 축관이 기침을 세 번하고 문을 엽니다. (2) 집사가 국을 내리고 숙주(냉수)를 올립니다. (3) 엄숙히 잠깐동안 묵도합니다.   9, 사신(辭神) 철찬(撤饌) (1) 집사가 수저를 내리고 반개를 덮고 물러납니다. (2) 일동이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3) 신주를 내립니다. (4) 제사상을 물리고 축문과 지방을 살읍니다.   ※: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장례와 제사에서 남녀를 구별하여 두번절과 네번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연변의 조선족들은 보편적으로 세번절을 하여 왔습니다. 계속 남녀 구분없이 세번절을 하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七, 제사상 차리는 방법   조선족 장례와 제사에서는 령좌와 제사상을 보통 한상에 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족 제사에서 령좌와 제사상을 같은 개념으로 인식하여도 틀리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에도 많은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많은 번거로운 규칙들을 일일히 따를 필요는 없지만, 총체적인 분포규칙에 대하여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신위와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고, 제물 종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게 정연하게 차리면 되겠습니다.   제사상은 보통 장방형으로 된 네모상에 차립니다.   a, 상우에 먼저 흰 종이를 한벌 펴 놓습니다. b, 제사상 안쪽 중간을 신위로 하고, 유상과 지방을 놓습니다. 유상을 좀 높이 걸어 놓을수도 있습니다. c, 신위 량옆에 그릇을 놓고, 초불을 달아 각기 그 안에 세워 놓습니다. d, 신위 앞 첫줄에는 메밥, 물, 수저, 술잔, 등을 놓습니다. e, 중간에는 고기류, 생선류와 전, 적, 그리고 기타 반찬들을 정연하게 놓습니다. f, 바깥줄에 과일류, 과자류와 기타 떡류와 부식품들을 보기좋게 놓습니다. g, 령좌 아래에 술병과 퇴주 그릇을 놓습니다. K, 제물의 개수는 짝을 지우지 않고 기수로 합니다.   특정 제사상 차릴때에도 이 기본방법을 참조하면서, 적당하게 조절하여 차리면 되겠습니다.    (참고)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리면서 주의할점   제사에서 먼저 령좌를 앉히는데, 보통 북쪽에 남향으로 앉히고, 북쪽이 아니면 북쪽이라고 여기고, 그 우에 신주 혹은 지방을 모시고, 그 앞에 제사상을 차립니다.   1, 제사상 진설 원칙;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梨枾.   2, 제사상 진설 설명; 동쪽은 좌양이요, 서쪽은 우음이라, 생음식은 음이니 우편에 놓고, 익은음식은 양이니 좌편에 놓으며, 과실은 높으니 먼저 놓고, 토종따위는 낮으니 후에 놓으며, 육산물은 우이니 먼저 놓고, 해산물은 아래니 후에 놓으며, 습윤한건 음이니 우편에 놓고, 건조한건 양이니 좌편에 놓습니다.   3, 제사상 진설 분류; 신위앞 첫줄에 밥과 국을 놓고, 숟가락, 저가락, 그리고 술잔을 놓으며, 두번째 줄에는 반찬류를, 세번째 줄에는 어육류를, 네번째 줄에는 과일류를 놓습니다.   4, 제물 금기: 제사상에 개고기와 칼치, 멸치, 꽁치 등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는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조선족 제사에서 상중제, 돐제, 삼년제까지는 魂제사라고 하고, 그외의 기제, 시제, 묘제는 神제사라고 합니다. 제사상에 복숭아와 토마토는 보통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신제사 음식에 고추가루와 마늘양념을 보통 쓰지 않습니다. 신제사상에 찰떡을 놓을 경우, 붉은 팥고물을 쓰지않고, 흰 열콩고물이나 콩가루 고물을 씁니다. 이념상에서 신들은 자극성 냄새와 붉은색을 가장 싫어 한다고 합니다. 제사에서 제물의 개수는 일률로 짝을 지우지 않고 단수로 하며, 개수와 번수와 상관되는 모든 일에서 단수로 합니다. 장례나 제사는 陰에 속하고, 단수는 陽에 속하니, 음양을 평형시키는 도리입니다.   八, 돐제사와 삼년제사   돐제가 소상(小祥)이고 삼년제가 대상(大祥)입니다. 삼년제 지내고 탈상합니다. 소상과 대상은 축문이 조금 다를뿐, 제사 지내는 절차는 기본상 같습니다. 사망일이 되는 전날 저녁, 해지는 것을 기준하여 집에서 석전(夕奠)을 올리고, 사망일 자정에 새벽제를 지내고, 사망일 아침에 조전(朝奠)을 올리고, 낮에 산소에 가서 묘제를 지냅니다. 혹은 경우에 따라 전날의 석전제나 새벽제, 조전 등을 모두 취소하고, 당날의 한번 제사로 모두 끝낼수도 있습니다. 만일 산소를 쓰지 않았고, 골회함도 보관하지 않았다면, 사망일 아침에 집에서 차례를 지내는 것으로 대신할수도 있습니다. 제사날 오후가 되면 객실에 제사상을 미리 차려놓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될수록 북쪽켠에 차리되, 북쪽이 아니면 북쪽이라고 인정하고, 그에 기준하여 차립니다.   첫번째 순서; 강신,개반삽시(降神,開飯揷匙)입니다. 해 지는것을 기준하여 사회자가 자리를 정돈합니다. 제주(장례때의 상주가 제사에서 제주가 됩니다.)와 주부를 비롯하여 직계가속은 제사상을 기준하여 왼쪽에 서고, 방계친속과 기타의 사람들은 제사상 맞은켠에 서며, 사회자가 제사상 오른쪽에 섭니다. 따로 집사가 있을 경우, 사회자의 맞은켠에 서서 술을 붇고 쏟는 시중을 듭니다. 사회자가 기침을 가볍게 하며 출입문을 조금 열어놓고, 일동을 지휘하여 세번 경례 시킵니다: “존령 강림이요! 첫번째 경례!- 두번째 경례!- 세번째 경례!-” (장례나 제사에서 보통 세번절 혹은 세번경례를 하는데, 상징적으로 첫번째 절, 혹은 경례는 가문의 시조님께 드리는 것이고, 두번째 절, 혹은 경례는 조상님들께 드리는 것이며, 세번째 절, 혹은 경례가 바로 망자에게 드리는 것으로 됩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기침을 한번 가볍게 하고는, 메밥두껑을 열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우에 저가락을 단정히 놓습니다.   두번째 순서; 독축,초헌(讀祝,初獻)입니다. 제주부부가 나와 제단앞에 머리 숙이고 서 있습니다. 사회자가 높은 소리로 祥祭 축문을 읽습니다(략-제사에서 축문은 필수) 그리고 만가를 읽습니다(략-만가는 가문에서 작성할수 있음) 축문, 만가가 끝나면 제주는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제주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부부 함께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세번째 순서; 아헌(亞獻)입니다. 아헌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아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아헌자는 사망자의 반려, 혹은 제주의 형제가 됩니다.   네번째 순서; 종헌(終獻)입니다. 종헌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종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종헌으로 가속의 헌작은 끝났지만,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종헌자는 제주의 형제로 할수도 있고, 제주의 아들로 할수도 있으며, 또 망자의 사위로 할수도 있습니다.   다섯번째 순서; 첨작(添酌)입니다. 종헌후의 헌작은 첨작입니다. 전통적으로 첨작은 많아서 세번을 초과하지 않지만, 지금은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될수록 단체로 나와서 행하시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첨작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첨작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여섯번째 순서; 유식(侑食)입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기침을 가볍게 하고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조금씩 떠서는 국그릇에 세번 놓습니다. 그리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다시 단정히 꽂고, 반찬 그릇우의 저를 움직여 놓습니다. 잠시 묵도를 드립니다(9초좌우).   일곱번째 순서; 리성(利成), 사신(辭神)입니다. 사회자가 물 한그릇을  제단우에 올려놓고 웨침니다: 고 모모모 존령께서 승천하신지도 어느덧 한돐(혹은 두돐)이 됩니다! 고 모모모 존령님의 명복을 부디 빌어 다 함께 세번 경례를 올립시다: 첫번째 경례!- 두번째 경례!- 세번째 경례!-   여덟번째 순서; 사회자가 석전제의 결속을 선포합니다. 제사상은 밥과 국만 내리우고, 다른 제물들은 다치지 않고 새벽제에 다시 씁니다. 가족에서는 제사객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그들이 휴식할 장소를 알아 봅니다.   아홉번째 순서; 새벽제는 자정(0시)을 기준하여 지내는데, 그 기본절차는 석전제때와 같습니다. 새벽제가 끝나면 이튿날 묘제를 지낼경우 제사상을 정리하고, 보충할것을 보충하여, 낮에 산소나 납골당에 가지고 갈 제물들을 따로 포장하여 놓습니다.   열번째 순서; 사망일 당날 아침, 해 뜨는것을 기준하여 간단하게 조전(朝奠)을 올립니다. 메밥과 국, 그리고 간단한 반찬을 올리고, 제주 부부가 와서 술을 붓고 세번 절을 합니다. 일동이 서둘러서 아침을 먹고, 산소에 갈 차비를 합니다.   열한번째 순서; 산소를 썼거나,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였을 경우, 묘제를 산소나 납골당에 가서 지내는데, 먼저 후토에 제를 지내고, 제단에 제물을 차려 놓습니다. 그 다음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절차인데, 기본 순서는 안신제때와 같습니다.   마지막 순서: 묘제를 끝낸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이 외에도 생일제사와 환갑제사 등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위의 절차를 참조하면서 지내면 되겠고, 단 환갑제사에서 상주가 환갑옷 한벌을 갖추어 제상에 놓으며, 축문은 亡親壽神 축문을 읽습니다.   九, 청명제사와 추석제사   청명제사: 중국에서 청명은 한식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해마다 양력으로 4월5일에 들며, 몇년에 한번씩 4월4일에 들때도 있습니다. 한식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중국 춘추시기 진문공(晉文公)이 임금이 되기전에 국란을 당하여 심복신하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하게 되였습니다. 하루는 허기져 쓰러진 진문공을 개자추라는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썩- 베어내여 구워먹여 살렸습니다. 그후 고난이 끝나고 임금자리에 오른 진문공이 개자추에게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개자추는 벼슬에 뜻이 없어, 이미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에 들어가고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옆에는 헝겊에 피로 쓴 한수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 나는 구천에서도 부끄러움 없으니 임금께선 나라일에 청명하시고 또 청명하시라.”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산에 불을 놓은 그날을 한식날로 하고, 전국적으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으며, 개자추의 시구에 근거하여 이날을 청명절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청명날이 되면 술과 여러가지 과일과 음식을 마련하여 가지고, 조상과 부모님 산소에 가서 가토를 하고 성묘를 합니다. 청명때에는 삽 한자루 가지고 산소에 가는데, 묘소에 이르러 먼저 후토를 찾아서 간단하게 제물을 차려 놓고 술을 한잔 붓고 절을 세번 합니다. 묘제를 지낼때마다 먼저 후토에 제를 지내는데, 이것은 땅을 파고, 초목을 베기 전에 묘를 지켜준 산신한테 인사하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로서 자연에 대한 존중를 표시합니다. 그 다음 삽으로 봉분을 보수하고, 다듬으면서 잔디풀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것을 속칭 가토라고도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 다음, 가지고 간 제물들을 제단에 차려놓고, 가문의 항렬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세번씩 절, 혹은 경례를 합니다. 마지막에 숙주(냉수)를 올리고, 다 함께 세번절, 혹은 세번경례를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가문의 묘소가 한곳에 여러자리 있을 경우, 다른 제물들은 여러번 쓸수 있지만, 메밥과 수저만은 제각기 갖춥니다. 먼저 자기 부모의 묘소에 제사 제내고, 그 다음 직계조상의 제일 윗대부터 차례로 성묘합니다. 후토제는 부모묘소에서 한번만 지냅니다.   추석제사: 추석은 한가위라고도 하는데, 해마다 음력 八월十五일에 듭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추석에 행하여지는 여러가지 세시풍속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조상과 부모님 산소에 가서 벌초하고, 성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추석 제사음식은 다른 때 제사음식과 대비하여 음식재료와 과일을 될수록 햇것으로 쓰는것이 특징입니다. 추석이 되면 보통 농촌에서는 햇곡식이 나오게 되며, 여러가지 과일도 한창 수확계절이 됩니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가장 잘 여문 햇곡을 정성들여 고르고 찧어서 메밥을 짛고, 떡을 만들었으며, 과일도 직접 나무에서 조심스럽게 뜯어서 제물로 썼습니다. 새해 농사의 성과를 조상들에게 먼저 맛보인다는 정성이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사에 쓰는 과일은 棗栗梨枾라고 하였으니 대추, 밤, 배, 감이 그것이며, 이런것들을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옛날의 일이고, 지금은 거기에 너무 구애될 필요가 없겠습니다. 정황에 따라 사과, 귤, 바나나, 석류, 참외 등의 여러가지 과일중에서 편리한대로 자유롭게 몇가지 준비할수 있습니다.  추석제사에서는 주요하게 낫을 가지고 산소에 가서, 먼저 후토를 찾아 제사 지낸후 여름동안 산소와 그 주위에 무성히 자란 잡초들을 베여 버리는데, 속칭 “벌초”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갖고간 제물들을 제단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지내는 절차는 기본상 청명제사때와 같습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성시에서 릉원에 가서 제를 올릴 경우, 위의 절차들을 참조하면서 적당히 조절하여 행사합니다. 납골당에 골회함을 보관시켰을 경우에는, 이날 골회함을 찾아 내와 합당한 자리를 찾아 제물을 간단히 차려놓고, 위의 절차를 참조하면서 제를 지냅니다. (부록): 지방(纸榜):지방은 나무로 만든 신주의 대용품입니다. 중국 조선족의 이민사에서 사당을 짓고 선조를 모신 대부호 가문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직 집에 자그마한 祠龛이나 丧门을 만들어 놓고 부모의 신위를 모시다가 제사가 되면 신주는 모두 지방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류별에 따른 지방의 서식표 类   别 格    式 고조할아버지 顯高祖考 學生府君 神位 고조할머니 顯高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증조할아버지 顯曾祖考 學生府君 神位 증조할머니 顯曾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할아버지 顯祖考 學生府君 神位 할머니 顯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아버지 顯考 學生府君 神位 어머니 顯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남편 顯辟 學生府君 神位 안해 亡室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백부 顯伯父 學生府君 神位 백모 顯伯母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형 顯兄 學生府君 神位 형수 顯嫂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동생 亡弟 學生 (姓名) 神位 아들 亡子 秀才 (姓名) 之靈 父生前职称 顯考 (职称) 神位   지금 이 풍속은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도리대로 말하면 지금은 제사에서 유상을 쓰기 때문에 지방이 필요없지만, 전통문화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지방을 리용한다면 그로서의 리유가 서는 것입니다. 전통 지방의 서식에서 사망한 부친과 모친의 신위를 한개 纸榜에 써야 할 경우에, 북쪽을 향하여 종이를 놓고, 서쪽에 부친을, 동쪽에 모친의 신위를 씁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지방에 성명을 쓰지 않지만 지금 대다수 유가족에서는 고인의 성명을 지방에 써 넣을것을 요구하니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十○; 차례 지내는 방법과 절차   생활형편이 좋아지면서, 우리 연변에도 지금 설날이나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점잖은 가문이 적지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 가문에서 차례를 지낸다는 것은 생활에 여유가 많다는 것으로 설명이 되므로, 기왕 차례를 지낼바에는 간편함만 추구하지 말고, 의의를 깊게하고, 될수록 표준적으로 지낼것을 권장합니다. 차례 지내는 방법은 원래부터 제사나 기타 다른 행사에 비해 비교적 간단합니다. 축문을 읽지 않고, 차례상에 술은 한번만 올리며, 밥과 국은 올리지 않고,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같은 쉬운 음식을 올립니다. 차례에서 제사지낼 대상은 4대 조상까지라고 하지만 우리 연변의 경우에는 2대조상까지라도, 즉 할아버지의 신주(神主)라도 모시고 있는 가문이라면 대단한 효자가문이라고 하겠습니다.   ★ 차례상 차리는 원칙 첫줄: 시접, 잔반, - 떡국(송편)은 우측, 술잔은 좌측. 두번째줄: 어동육서(魚東肉西) - 어찬은 동쪽, 육찬은 서쪽. 세번째줄: 탕류 - 육탕, 소탕, 어탕 순. 네번째줄: 좌포우혜(左脯右醯) - 왼쪽에 포, 오른쪽에 식혜. 포(脯)—물고기 등 수산물을 가공하여 말린것 혜(醯)—찹쌀밥을 발효시켜 엿가루에 섞어 만든 전통음료 다섯번째줄: 조율이시(棗栗梨枾) -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감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 과실은 동, 흰 과실은 서.   ★ 차례상 차림시 주의사항 차례상을 차리기 전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마늘, 파 등 냄새나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정갈하고 정성을 다해 조리합니다. 복숭아, 토마토, 꽁치, 삼치, 칼치, 고추, 마늘 등은 차례상에 올리지 않으며, 식혜, 탕, 면 등은 건더기만 사용합니다   ★      차례를 지내는 법 진설(進設) 북쪽(방위상 북쪽을 뜻하나, 차례장소의 형편상 북쪽을 택할수 없는 경우가 있으므로 신위를 모시는 방향을 북쪽이라고 인정함)에 병풍을 치고, 병풍앞에 교의(神主나 혼백상자를 모신 의자)를 모신 다음, 차례상 차리는 원칙에 따라 제물을 차립니다. 제수는 간소하게 하되,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을 몇가지 더 곁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진설이 다 되면, 고인의 사진이나 지방을 교의나 제사상에 모십니다.   분향강신(焚香降神) 제주는 꿇어 앉아 향에 불을 달아 향로에 꽂고 재배합니다. 그 다음 제주가 술잔을 받쳐들면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을 따르고, 제주는 그 한잔술을 정중히 차례상에 올려 놓습니다.   참신(參神) 진찬(進饌) 헌다(獻茶) 제주와 참석자 모두 함께 재배(두번절) 합니다. 설 차례에서는 떡국, 추석 차례에는 송편을 제상에 올립니다. 물그릇에 물을 따라서, 조상어른 순서에 따라 올립니다.   개반(開飯) 삽시(揷匙) 집사가 떡국그릇의 뚜껑을 열고 차례로 적을 올립니다. 순서는 좌측부터 조부 조모순이며, 가정의례준칙에서는 조부모와 부모까지 2대 봉사만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집사가 시접에 담겨있는 숟가락을 떡국에 꽂고, 젓가락은 시접 위에 가지런히 걸쳐 놓습니다. 젓가락의 손잡이가 서쪽을 향하게 놓습니다. 흔히 젓가락을 세번 굴리고, 여기저기 제물 위에 옮겨 놓기도 하지만, 시접위에 가지런히 놓는것이 바람직합니다. 제주는 다시 재배하며, 모든 참석자는 조상이 진지 드시는 동안 조용히 서서 생전의 조상을 기리며 묵념합니다.   철시복반(撤匙復盤) 떡국(송편) 그릇의 뚜껑을 덮고, 수저를 거두어 세번 굴리고, 시접에 놓습니다.   사신(辭神) 철상(撤床) 음복(飮福) 참가자 모두가 재배를 올리고, 지방을 향로위에서 사릅니다. 모든 제사 음식을 물리며, 차례상 위쪽으로부터 다른 상으로 공손히 옮겨 물립니다. 제물을 차례상에서 거두고, 禮衣를 입은 그대로 조상이 드시고 남은 제물을 음복하는 것으로 차례는 끝나게 됩니다.   가문마다 자기 가문의 전통 가법이 있을수 있으니, 꼭 위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상에게 정성을 다하는 진지한 마음가짐이라고 하겠습니다.     十一: 면례(緬禮)와 합장(合葬)   면례(緬禮) 조선족 전통장례 풍속에 의하면, 면례란 원래 장례를 다시 지낸다는 뜻으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안장하여 십여년이 지난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째고, 해골을 꺼내여, 그 색갈과 해화정도를 살펴보아 그 색갈이 노랗고 해화가 잘 되였다면 잘 정리한후 다시 그 자리에 묻고, 만일 그 색갈이 검고 해화가 잘 되지 않았다면 산자리가 나쁘다고 인정되여 다른곳에 자리를 선택하여 묻는데, 풍수지리에 따른 일종의 효행이였습니다. 속담에 “가난하면 이사 가고, 부유하면 묘 옮긴다(穷搬家,富迁坟。)”고 하였습니다. 면례를 통하여 무거운 사상 보따리와 실제 부담을 덜수 있으므로 지금도 어느정도 현실적 의의가 있습니다.   첫번째 순서: 면례하여 새롭게 산소를 쓸 경우에는, 먼저 새로운 산자리를 정하고 굴심을 하는데, 절차는 장례때와 같습니다. 면례하여 화장할 경우에는 빈의관에 련계하여 할수도 있고, 또 자체로 태울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순서: 낡은 산소를 찾아 먼저 후토에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베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인사하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세번째 순서: 무덤앞에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축인이 파묘축을 읽습니다. 면례에서 파묘축은 필수입니다.   네번째 순서: 가속에서 상주나 대표인이 먼저 세삽을 뜹니다. 그 다음 역공들이 삽으로 무덤을 헤치고, 관의 천개널을 뗍니다.   다섯번째 순서: 한 사람이 광안에 들어가 적토를 청리하고, 해골을 골라 주어 올리면, 우에서 한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칠성판 우에 사람 골격의 순서에 따라 놓습니다. 만약 시체가 완전히 해화되지 않았다면, 참대칼로 뼈에 붙은 살을 깨끗이 긁어 냅니다. 칠성판은 두께 2㎝의 널판자로 180㎝×30㎝의 규격이면 충분합니다. 화장할시에는 종이합판으로 대신할수도 있습니다.   여섯번째 순서: 해골을 점검해 보고, 모자라는 부분은 버드나무 가지로 대체합니다. 그 다음 백포로 칠성판과 해골을 함께 감쌉 니다. 만약 해골 화장이 목적이라면 해골의 골격 순서를 맞출 필요가 없고, 버드나무 가지 얼마간을 준비하였다가 해골과 함께 처리합니다. 일을 끝내고 헤친 무덤자리에 흙을 세삽 넣어 주며, 원래 비석이 있었을 경우에는 무덤자리에 넣어 묻어 줍니다.   일곱번째 순서: 새롭게 산소를 쓰는 경우, 칠성판을 광에 묻고, 봉분을 만들고, 성분제를 지내는데, 기본 절차는 장례때와 같습니다. 화장하는 경우, 보통 골회를 받아서 산이나 강물에 뿌리여 처리한후, 안신제를 지냅니다.   합장(合葬) 합장은 돌아가신 부모를 한자리 묘소에 함께 묻는것을 말하는데, 보통 세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홀로 모시던 부모가 사망하면, 먼저 사망한 부모의 묘를 째고, 그 옆에 묻는 것이고, 둘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중에서 한곳을 면례하여, 가져다가 합장하는 것이며, 세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를 모두 면례하여, 다른곳에 가져다 합장하는 것입니다. 합장은 한 묘혈에 두개 광을 파는데, “北陰南陽, 西高東皐, 西貴東卑, 西考東妣, 西男東女,”등 전통원칙에 따라, 망자들의 머리를 북쪽을 향하게 하고, 서쪽이 顯考(사망한 부친)자리가 되고, 동쪽이 顯妣(사망한 모친)자리가 되는데, 결과적으로 男右女左가 됩니다. 지금의 경우에 보편적인 男左女右 원칙으로 합장하는 실례도 많은데, 크게 틀린다고 할수 없으며, 자손들의 리해와 선택에 따를 일입니다. 두 광 사이에 일정한 두께의 벽을 두고, 그 벽 중간에 통로를 내고 채색 사다리를 놓는데, 그 뜻인즉 두분 망령이 자주 래왕하게끔 편리하게 한다는 자손들의 지극한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사망한 부모의 두 골회함을 한곳에 합장할 경우에도, 위의 방법을 참작하여 조절하여 행하시면 되겠습니다.   면례하여 합장하는 경우에는, 면례의 절차와 매장의 절차를 결합하여 지킬것이요, 먼저 사망한 사람의 묘를 째고, 후에 사망한 사람을 겹장할 경우에는, 장례때의 매장의 절차를 따르면 되겠습니다. 합장을 끝내고, 성분제 지낼때는 합장축문을 읽습니다.      十二: 립비제사   사망한 친인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는 것도 일종 아름다운 소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물론 묘소에 반드시 비석을 세워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장례때에 묘비를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세웠다 해도 림시로 목비를 세우는 정도였습니다. 그후 조건이 허락되면 자금을 모아서 비석을 깎아 세웠는데, 일종 효행으로 간주 하였습니다.   비문의 통용 격식은 보통 정면 중간에 “故 某某某之墓”라고 내리쓰고, 왼쪽 변에는 “某年 某月 某日生”이라고 내리쓰고, 오른쪽 변에는 “某年 某月 某日卒”라고 내리쓰며, 뒤면에 고인의 생평, 혹은 자식들의 이름과 비석을 세우는 데 부의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 혹은 단체의 명칭을 쓰기도 합니다. 합장비석일 경우에는 합장된 망자들의 위치에 따라 비문을 씁니다. 이 외에도 많은 격식들이 있으니, 각 가문의 뜻에 따라 적당한 격식으로 선택할수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들은 비석을 세우는 날을 보통 음력 구월구일 중양절로 선택하며, 사정이 있는 경우에, 음력으로 칠월칠일 칠석, 오월오일 단오, 삼월삼일 양춘, 이 세날중에서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외에 주역이나 황력으로 택일을 하여 행하기도 합니다. 립비 사전에 필요한 준비공작을 원만하게 합니다.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순서: 묘소에 이르러 먼저 후토를 찾아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두번째 절차: 비석을 세울 자리에 삽으로 광을 팝니다.   세번째 절차: 광앞에서 간단한 의식을 가집니다. 축인이 석물(石物)축을 읽습니다. (석물축 략) 석물축을 읽고는 축문에 불을 달아 광안에 던집니다.   네번째 절차: 역공들이 비석을 세울 대를 쌓고, 비석을 세웁니다. 그리고 망자의 아들부터 시작하여, 가문과 단위의 주요 성원들이 차례로 흙을 한삽씩 떠서 상징적으로 묻습니다.   다섯번째 절차: 역공들이 다 함께 흙을 묻고 다짐니다.   여섯번째 순서: 제단에 제물을 차려 놓고 비석제를 지냅니다. 기본 절차는 청명이나 추석때의 묘제사와 같습니다.   十三: 조선족 장례,제사 금기사항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장례,제사와 상관되는 금기사항들이 많았으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금 와서는 많이 취소되였습니다. 하지만, 장례와 제사는 어디까지나 슬픔과 불행을 처리하는 엄숙한 행사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연히 신중한 태도를 가지게 되며, 잘못을 범할가봐 조심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에 기초하여, 지금도 사회적으로 장례, 제사와 상관되는 적지않은 금기사항들이 보류되여 있거나, 새롭게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래에 우리민족 장례, 제사와 상관하여, 현존하는 금기사항들을 몇가지 정리하여 적었습니다.   A, 성시의 병원이나, 아빠트에서 친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크게 소리내여 울지 않습니다.   B, 어린 아이들은 죽은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렴습할때 다른 곳에 피신 시킵니다.   C. 농촌의 경우, 상가집에서는 초상기에 부엌 아궁이를 막아 놓으며,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D, 령구를 내갈때 문턱이나 문설주를 다치지 않습니다.   E, 가문에 상사가 났을 때, 임신한 며느리나 임신한 딸은 장례에 참가 시키지 않습니다.   F, 사망한 사람의 생전에 입던 옷과 덮던 이불은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 처리하며, 평소에 쓰던 일용품들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기지 않고 소각처리합니다.   G, 장례나 제사에 가서는 불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누구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H, 제사상 제물은 짝을 지우지 않으며, 홀수로 합니다.   I, 장례나 제사가 지난후에는 미봉하는 부의금을 받지 않습니다.   J, 장례나 제사에 참석할때 화려한 옷과 진한 치장은 삼가합니다.   K, 친인이 객사하였다면, 사망한 지역에 가서 장사 지내고, 시신을 집으로 옮겨오지 않습니다.   L, 장례용품이나 제사소물을 살때, 흥정을 하지 않으며, 가격이 너무 비쌀경우, 사지 않거나, 다른 곳을 선택하는 것으로, 대방이 스스로 값을 낮추게끔 합니다.   M, 제사상에 개고기와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 그리고 복숭아와 토마토는 제물로 쓰지 않으며, 제사음식에 고추가루, 마늘, 파 등을 쓰지 않습니다   N, 제사상에 찰떡을 놓을 경우, 붉은 팥고물을 쓰지 않으며, 흰 열콩고물이나 콩가루 고물을 씁니다.   O, 상주와 주부는 장례를 치른해에 자기생일을 쇠지 않으며, 친척이나 친구집의 희사잔치에도 가지 않습니다.   P, 자기의 배우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삼년제 지나기 전에는 새로운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Q, 가정에서 큰 희사를 치른 해(결혼잔치를 치렀거나, 새집을 샀거나, 아이가 태여난 해)에는 보통 장례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며, 제사집에도 가지 않으며, 청명이나 추석에 자기집 산소에도 가지 않습니다(특별한 경우 제외).   … … … … … …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정리 시대상조복무중심 집행 봉사열선전화: 203-2224 자문전화: 138-9438-7438 위치: 연변병원동대문 뻐스정차점 맞은켠 5층   二○一三年十月     
184    조선족 巫俗과 저승 세계 댓글:  조회:3555  추천:0  2013-10-02
조선족 巫俗과 저승 세계     무릇 한 공동체의 장기적인 군체생활 가운데서, 일정한 력사적 환경에 의하여 산생된 어떤 한가지 풍속이, 초기에는 아무리 미신적이고 황당한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그 실행한 시간이 길면, 그것이 곧 일종의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 력사에서는 토종종교라고 할수있는 고대 巫俗문화가 있었는데, 력사 드라마에서 종종 볼수 있는 무당이 귀신을 쫓기 위하여 괴상한 동작을 하면서 굿(푸닥거리라고도 함)을 하는 바로 그런것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민족의 장례제사에 그 리념의 흔적들이 얼마간 남아 있는데, 이를테면 령혼이요, 저승이요, 귀신이요 하는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력사의 쓰레기 무지까지 뒤지면서, 이런 썩어빠진 것들마저 다시 끄집어 내여 살펴보는 것은, 거기에 우리민족의 한가닥 뿌리가 묻혀 있고, 거의 잃어져 가는 우리민족 넋의 원래의 냄새가 슴배여 있으며, 우리민족의 우세로 될수 있는 원색적인 어떤 특색과 지혜를 찾을수 있지 않을가? 하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1,    우리민족의 고대 巫俗에서는 세상의 만사만물에 모두 령혼을 부여하여 인식하였으며, 사물마다, 장소마다, 현상마다에 모두 신이 존재한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이를테면 한 집을 놓고 보아도, 성주신(집터를 관리), 궁야신(집마루를 관리), 문턱신(문턱과 문설주를 관리), 부엌신(부엌을 관리), 조왕신(음식그릇을 관리), 측신(변소를 관리), 수문신(대문을 관리), 용초부인신(지붕을 관리), 업신(쌀뒤주 관리)…등등의 신들이 있었으며, 농기구나 일상도구에도 모두 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도 오래되면 신이 될수 있었는데, 옛날 어른들이 길을 가다가 오랜 고목을 보면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는 리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심지어 질병에도 신이 있었습니다; 눈병에는 눈신, 부스럼에는 부스럼신, 전염병에는 온역신…등이 있었으며, 그 퇴치법 또한 아주 특이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화공법(불로 지지고, 뜸을 뜨는 등), 구타법(환자를 때리며 구타함, 지압, 안마 등), 경악법(환자를 깜작 놀라게 함, 딸꾹질 퇴치에 특효), 자상법(신체 특정 부위에 상처를 냄, 손가락 따는 방법으로 체증 치료 등), 봉박법(신체를 대신하여 다른 물건에 시술함), 곡물법(곡물로 시술함), 공손법(제사 등 형식으로 신에게 정성다해 공을 드림), 부적법(그림이나 글씨에 신의를 부여함), 음식법(지금의 식의료법과 비슷함), 등이 있었습니다. 2,    우리민족 고대 巫俗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魂, 魄, 靈 등 세개 부분으로 나뉜다고 하였습니다.  魂은 정신이요, 하늘나라로 올라가 神靈으로 되여 보편적인 인간세상의 선과 악을 두루 살피여 처리하고, 魄은 넋이요, 유체와 함께 땅에 묻히여 풍수지맥으로써 후손들의 흥망성쇄를 주도하며, 靈은 유령(귀신)이요, 저승에 가서 이승의 가족들이 올리는 제사음식을 먹으면서 정과를 수련하여 삼년제사까지 받고는, 이루어진 정과에 따라 령기가 되여 다시 이승에 환생한다고 하였습니다.     巫俗 리념에 따르면, 하늘나라의 최고 권위는 옥황상제이고, 그 아래에 많은 신선들이 있는데, 바로 하늘나라의 관리와 백성들인 셈이죠. 神仙이란 기실 두가지 개념인데, 즉 특정한 天職이 있는 하늘의 관리를 神이라 하고, 이를테면 天神, 雷神, 山神, 水神, 土地神, 財祿神… 등이 그것이며, 일정한 天職이 없이 자유로히 하늘을 떠돌아 다니며 자기의 재주를 부리는 하늘나라 백성들은 仙이라고 하며, 이를테면 八仙過海, 七仙女, 天仙配, 詩仙李白…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민족 고대 巫俗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가 神靈으로 된다고 하였는데, 신령이란 우에서 말한 神과 仙에서의 仙에 가깝습니다. 우리민족 전통 장례풍속에서는 장례때의 상중제사와 삼년제사까지는 저승의 혼령에게 올리는 魂제사라고 하고, 그외의 기제, 시제, 묘제 등은 모두 신령에게 올리는 神제사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분석할때 옥황상제란 노자가 말한 《道》를 상징하고, 신령이란 인간의 여러가지 전통문화를 상징합니다. 시작을 알수 없는 그 어느때부터 이미 헤아릴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갔습니다. 그 헤아릴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지능성적인 혼이 모두 하늘나라에 올라가 신령으로 승화되여 있다고 하니, 그것이 곧 우리 인류가 몇천년 내려오며 축적한 문화재부요, 그로하여 오늘의 인류문명이 이렇듯 휘황하게 발전할수 있었다는 우리 조상들 식의 사유방식입니다.   3,    우리민족 고대 巫俗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넋은 유체와 함께 땅에 묻히여 풍수지맥으로써 후손들의 흥망성쇄를 주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 전통 장례풍속에서 풍수선생을 청하여 음택의 명당자리를 찾게 된 유래입니다. 그런데 풍수관념에서는 산자리를 잘 쓰면 후손들의 흥성에 유리할수 있지만, 산자리를 잘못쓰면 도리여 후손들에게 불리하다고 하였으니, 차라리 산자리는 쓰지 않는것이 무탈을 보증하는 믿음직한 방법이 아닐가? 하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우리민족 전통리념에서 이 방법은 자식된 책임을 회피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서 자기의 운명에 규정되여 있는 귀인을 잃게 되여, 어려운 인생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을수 없고,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되며, 世代가 끊기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미신적인 관념이지요.    옛날 서민 장례에서는 보통 동네의 좌상어른이나 비교적 유식한 분을 청하여 산자리를 보게 되는데, 그 령험성에 대하여 확신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면례》라는 방법이 나오게 되였습니다. 즉, 돌아가신 부모를 안장하여 십여년이 지난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째고 해골을 꺼내여, 그 색갈과 해화정도를 살펴보아, 색갈이 노랗고 해화가 잘 되였다면 원 산자리의 풍수가 확실히 괜찮다고 확신되여, 해골을 잘 정리하여 칠성판에 모시여 다시 원 자리에 묻고, 장례도 다시 후하게 치려 드리며, 만일 그 색갈이 검고 해화가 잘 되지 않았다면 원 산자리의 풍수가 나쁘다고 인정되여 다른곳에 자리를 선택하여 묻는데, 이것을 移葬이라고 하며, 서민들의 일종의 소박하고 실용적인 명당자리 선택 방법이였습니다.    우리민족 전통 장례풍속에서 산자리 선택에는 엄격한 풍수 표준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지를 “山环水抱”의 양지쪽 비탈로 선택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북쪽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山环), 동남쪾은 하천에 안겨 있는(水抱) 양지쪽 룡맥부위에서 중심을 기준하여 합당한 자리를 골라 墓穴로 합니다. 풍수에서는 묘의 왼쪽 산맥을 左靑龍이라고 하는데, 官運을 상징하고, 묘의 오른쪽 산맥은 右白虎라고 하는데, 財運을 상징하며, 묘의 서북쪽, 즉 묘뒤에 둘러있는 산을 背玄武라고 하는데, 조상들의 陰德을 상징하고, 묘의 동남쪽, 즉 묘앞 개활지역을 面朱雀이라고 하는데, 人爲, 즉 자손들의 노력을 상징하며, 주작을 가로질러 河川이 흐르는 것을 명당자리의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으로 인정하는데, 그것은 물은 천지의 氣를 고착시키는 공능이 있고, 생명력을 상징하므로 자손들의 노력에 생기를 부여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많은 학자들은 우리의 전통 풍수술에 대하여 과학적 원리로 해석하려고 애쓰는데 기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문화는 그 자체의 당당한 존재 리유가 있으므로 그 자체의 방식으로 존재하게끔 내버려 두는 것이 좋으며, 억지로 소위의 과학에 얽매여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전세기 60년대 70년대에 있었던 “문화혁명”이 시대적 착오였다고 비판하는데, 그 리유의 하나가 바로 소위의 과학적 의식형태로 모든 전통문화를 혁명하고 개조하려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와서 과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 정확한 진리로 오식되여 있으며, 과학적으로 해석할수 없는 특별 문화들은 일률로 간사한 미신으로 의심받고, 그의 합리성이 인정받기 어려우며, 세계를 단일하게 과학적으로만 인식하려 합니다. 이것은 기실 “문화혁명”의 사유방식이 아직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는 표징입니다. 기실 과학이란 것은 근대 유렵 산업혁명의 산물로서, 일종의 선진적인 방법론일 뿐이며, 시기 제한성과 환경 제한성이 강하며, 결코 만능이 아닙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대표성 사물에 대한 반복적인 실험과 증명을 통하여, 보편성 규률과 특수성 규률을 찾아내여, 定律 혹은 论文의 형식으로 체계화, 리론화 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로선 과학적인 것이 가장 선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것이 반드시 真理인것은 아니며, 이 세계에는 아직도 과학으로 해석할수 없는, 또는 과학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많은 종교와 문화들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결코 과학을 유일 표준으로 하는 단일한 세계가 아닙니다.    현대 풍수학은 환경과학의 일종이며, 비록 고대의 풍수술에서 기원하였다고 하지만, 그 연구 대상과 연구 목적, 그리고 그 연구 방법이 이미 고대의 풍수술과는 많이 다름니다. 그리하여 현대 풍수학을 리유로 우리의 전통 풍수술에도 과학이라는 겉치레 옷을 걸치여 준다면, 그것은 2천년전에 만들어진 진시황 병마용 몸에 고급 서양복을 입히고 넥타이를 매여 주는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기실 우리의 전통 풍수술은 비록 과학은 아니지만 이미 몇천년의 생명력을 가진 일종의 생활 문화이며,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문화와 제사문화도 비록 아무런 과학적 도리가 없지만 이미 500여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아직도 그 실용가치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4,    우리민족 고대 巫俗에서는 사람이 죽어 靈은 유령이 되여 저승에 가서 이승의 가족들이 올리는 제사음식을  먹으면서 정과수련을 거쳐 령기로 되여 이승에 환생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저승이란 우리의 이승 세계(此世)와 이념적으로는 중첩이 되면서도, 또 실제 공간적으로는 영원히 서로 상관이 없는 허무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소위의 저쪽 세계(彼世)로서, 곧바로 사람들이 죽어서 소위 유령들이 모여 산다는 추상적인 세계입니다.    아래에 우리민족 고대 무속을 향도로 모시고, 전설적인 우리민족 저승세계에 들어가 특별한 려행고찰을 한번 다녀 오겠습니다;    우리민족 저승세계의 최고 권위는 염라왕이라고 하며, 그 염라왕의 밑에는 이승 사람들의 命簿를 관리하는 최판관이란 鐵面無私한 신이 있는데, 이승에서 어떤 한 사람이 자기명이 다 하여 죽을때가 되면, 최판관은 명부에 적혀 있는 그 사람의 죽을 날짜에 맞추어, 구속영장, 혹은 초청장을 발부하여 두 저승사자에게 주어서 이승에 내려가 해당 사람의 유령을 체포, 혹은 모셔오라고 명령합니다. 일반사람에게는 구속영장을, 고귀한 사람에게는 초청장을 보낸다고 하지만, 초청장이라 하여도 일방적인 강박 초청이기 때문에 체포해 가는거나 별반 차이가 없게 됩니다.    그 두 저승사자는 이승에 내려와 해당 사람을 찾은 후, 먼저 그의 혼을 유혹하여 육체를 떠나게 합니다. 혼이 떠난 육체는 곧 죽음에 진입하는데, 그것은 저승사자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요. 그들은 해당 사람의 유령을 잡아 이끌고 부랴부랴 鬼門關을 넘어서 저승길에 나섭니다. 저승길은 황천길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누가 쓴지도 모르는 《黃泉路》라는 옛시 한수 있으니 잠깐 감상하고 넘어 갑시다; 奈何桥上道奈何,是非不渡忘川河。 三生石前无对错,望乡台边会孟婆。    우리말로 해석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내하다리에 올랐으니 어찌하리오? 인간 시비도리는 망천하 넘지 못하네. 삼생석 앞에 옳고 그름 따로 없는데, 망향대옆에서 맹파녀신 만나누나.    《黃泉》이란 말을 풀이하면 원래는 지하수, 혹은 지하 暗河라는 뜻이 되지만, 전통 사망문화에 채납되여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 혹은 죽은 후의 세계라는 뜻으로 되였습니다.    전설적인 황천길 북쪽켠에서는 한갈래 강이 도도히 흐르는데, 이름은 《忘川河》라고 하며, 바로 이승과 저승의 분계선입니다.    강 량안과 저승길 량옆에 《曼珠沙华》라는 고귀한 이름을 가진 붉은 꽃들이 도처에 피여 있는데, 그 꽃모양이 마치도 하늘에 대고 그 무슨 사연을 간절히 기원하는듯 두손을 합장한것처럼 생겼습니다. 원래 《曼珠》는 꽃의 이름이였고, 《沙华》는 잎의 이름이였는데, 꽃이 필때면 잎이 아직 없고, 잎이 나오면 꽃은 이미 지고 하여, 한줄기에서 자라면서도 종래로 서로 볼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몇천년을 이렇게 서로 사무치게 그리워 하며 살다가, 한번은 드디여 용감히 천규를 위반하고 사사로히 만났는데, 그로하여 옥황상제의 벌을 받아 이렇게 저승에 와서 피면서 저승에 들어오는 유령들의 슬픈 마음을 달래여 준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이승의 다른 꽃들은 그때부터 한줄기에서 잎과 함께 자유로히 피면서 자기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할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량산백과 축영대》 못지않은 너무나 애틋한 사연입니다.    강은 점점 깊은 협곡을 이루면서 급히 흐르는데, 강을 건널수 있게 북쪽으로 이끼가 낀 외나무 다리가 댕그랗게 놓여져 있습니다. 그 외나무 다리 교두에는 《奈何橋》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奈何》란 옛문구로서 우리말로 《어찌하리오?》하는 뜻인데, 유령이 일단 이 다리를 건너 갔다고 하면 완전히 철저히 죽은 것이니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병원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모두들 유령이 아직 이 다리를 건너기 전이여서 가능했던 것이죠.    강옆에는 큰돌이 박혀 있는데, 《三生石》이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그 돌앞에 가서 서면 자기의 前世, 今世, 來世의 因果緣分을 한눈에 볼수 있으며, 인생에서 채 마무리 하지못한 인정 여건들을 팔을 한번 휙- 저어서 깨끗이 끝내 버릴수 있습니다.    교두에 《望鄕臺》가 있어서 다리를 거느기전에 마지막으로 자기가 살던곳과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영화를 보듯이 한번 휘- 돌이켜 볼수 있습니다.    그 옆에 허술한 초막이 하나 있는데, 초막앞에는 《孟婆茶》라고 쓴 기발이 걸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리를 건느기전의 제일 마지막 사무을 끝내야 합니다. 흉물스럽게 생긴 맹파녀신이 큰 바가지로 큰 차물독의 차물을 푹 떠서는 넘겨 주는데, 유령은 그 차물을 받아서 꿀꺽꿀꺽 단모금에 마여야 합니다. 그러면 여태까지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들이 금시 말끔히 지워집니다. 이승에서 그렇게도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던 그 무슨 리상이요, 포부요, 그리고 사랑, 증오, 기쁨, 슬픔, 집착, 유감… 등은 여하 불문하고 더는 필요가 없게 되니 이렇게 깨끗하게 끝내여 주는 것이죠.    孟婆茶를 마인후 두 저승사자는 앞뒤에서 유령을 옹위하여 奈何橋를 조심조심 건너는데, 눈을 싸매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 보지 못하게 합니다. 다리 아래 거세차게 흐르는 급류속에는 많은 악귀들이 우글거리는데, 일단 어림증이 나서 다리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날에는 순식간에 그 악귀들한테 넙적 먹히워 버리고 맙니다.    奈何橋를 건너서는 陰曺地府라는 저승 관아에 가서 심사를 받고 통과되면, 정식 저승에 입적한 것으로 되며, 路引을 발급받고 저승을 자유로히 떠돌며, 이승의 가족들과 제사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정식 정과수련할수 있는 자격을 가집니다.    우리의 저승에서는 18층 지옥 제도가 페지되여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이승에서의 貧富貴賤, 善惡德罪와 상관없이 정상 사망의 경우에 모든 유령들이 대체로 평등하게 됩니다. 단지 비정상 사망의 경우, 이를테면 병사, 객사, 전사, 초년사, 모함사, 어굴사, 분노사, 타살, 자살… 등의 경우에는 죽은자 마음에 아직 풀지 못한 너무 깊은 한이 서리여 있어 그윽한 저승의 환경을 깨뜨릴수 있으므로 일시 저승에 입적하지 못하고, 귀신(鬼)이나 도깨비(魔)의 신분으로 저승 입구에서 헤매고 있게 됩니다. 귀신이나 도깨비는 한사람 이상의 정상사망한 유령의 보증이 있어야만 저승사회에 입적할수 있는데, 그들은 자기를 보증하여 줄 유령을 찾아 갈팡질팡 헤매다가 왕왕 멀정한 사람을 잘못 해치는 경우가 있지요.    사람이 죽어서 유령이 저승에 정식 입적한 후에라야 정과수련을 시작할수 있으며, 그가 생전에 이룩한 공덕과 가족들이 올리는 삼년제사, 그리고 유령의 자체 노력에 근거하여 정과가 이루어져 부동한 차원의 령기로 되는 것입니다. 보시다 싶이 부모 삼년제사는 사망한 부모님들과 마음으로 교류하는 의식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과수련을 돕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사망한 부모님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이 있어야 제사가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자고로 제사에 많은 번쇄한 규례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목적이 바로 사람들이 제사를 중시하고, 정성을 다 하게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우리들은 부모님들 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오늘 부모님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고 고급적으로 갖추기 보다는 필요한 것만 갖추고,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 지낼때에도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하라는 것입니다.    유령은 이렇게 삼년동안 정과수련을 한후 그 이룩한 정과에 따라 부동한 차원의 령기로 되여 다시 이승에 환생하는데, 정과가 특출하여 높은 차원에 오른 령기는 고귀한 가문의 자식으로 환생할수 있고, 정과가 그닥지 않은 령기는 그 차원에 따라 비천한 가문의 자식으로 환생하거나, 심지어 여러가지 동물, 혹은 벌레로 환생할수도 있습니다.    우리민족이 전통적으로 아무리 가난하여도 삼년제사만은 특별히 중시하였는데, 어찌보면 사망한 부모님들의 정과수련에 한힘을 보태여 높은 차원의 령기로 되게 함으로써, 그들이 래세에 가서 좋은 가문에 환생하게 하거나, 동물이나 벌레로 환생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목적에서 산생한 풍속일수도 있습니다.  ............................................................................(끝) 2013-10-02 현성원 씀  
183    (연변방송) 우리민족 장례문화 현존 문제점--2013년 댓글:  조회:9180  추천:0  2013-09-23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2013 추석특집 《우리민족 장례문화》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현룡수 회장: 답례) 2013년 추석이 갓 지나고 이제 오래지 않아 우리 민족의 이묘같은 많은 장례문화가 집중되여 진행되는 중양절이라고 불리우는 음력 9월 9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여 이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 민족 장례문화를 깊이있게 조명해보고자 우리 민족 장례문화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현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현회장께서는 우리 중국조선족 장례문화에 현존하는 문제점은 어떤것들이 있다고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현재 우리 중국조선족 장례문화에 존재하는 문제점들로는 첫쩨; 우리민족 장례규범에 대하여 익숙히 알고 계시던 분들은 이미 모두 사망하시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가문에 상사가 나도 구체적으로 장례를 지도하여 줄 분들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장례는 문화적 색채가 없어지고, 단순히 부패되여 가는 유체를 처리해 버리는 《환경위생》사무로 전락되였습니다. 둘째; 출국 로무인원이 많아지고 대성시에 간 분들이 많아 지면서 빈집을 지키고 있는 노인들이 많아 졌습니다. 그리하여 고독사, 임자없는 주검, 사망후 며칠후에 발견 등 현상들이 자주 발생합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장례를 한개 군체의 집단적인 행사로 인정하고, 서로 도우며 처리하여 왔으며, 종래로 사적인 개인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조선족 장례는 완전히 사적인 개인일로 되여 버렸으며, 친척이나 친구들이 대부분 외국에 나가있는 형편에서 가문에서 장례 치르기가 상당히 딱하게 되여, 부득불 민간의 도움 인원을 찾아 대충처리해 버릴수 밖에 없습니다. 세째; 우리 연변을 전국에서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라고는 하지만 현재 연변경내에는 병원부터 빈의관까지 조선족 장례를 대상으로 한 복무항목이 한가지도 없으며, 조선족 풍속으로 장례를 치를수 있는 장소나 시설이 한곳도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이제부터는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뿌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지요? 현룡수 회장: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의 뿌리를 찾아보면 바로 중국 송조(기원960~1279)때의 《朱子家禮》이며 원시조는 곧바로 朱熹(기원1130~1200)가 되는 것입니다. 14세기말 고려국(기원918~1392)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유교의 례의서 《朱子家禮》(家禮혹은 文公家禮라고도 함)를 들여 왔습니다. 그후 조선왕조 (기원1392~1910)가 성립되여 태종12년 (기원1412)에 조정에서는 전국에 령을 내려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서 모두 중국 유교의 례의서 《朱子家禮》 를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성종16년(기원1485)에 《經國大典》이 정식 출범하면서 조선왕조의 조정과 민간에서는 장례와 제사를 포함한 일체 행위표준과 례의규범이 모두 중국 유교의 례법에 기준하게 되였습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은 중국고대의 유교문화 원고유존들을 비교적 완정하게 보존하고 있는데, 이런 원고유존들은 바로 오늘의 중국 중원문화에서는 이미 거의 찾아 볼수 없는 것들입니다. 조선왕조 중기의 학자인 申義慶(기원1557~1648)은 《喪禮備要》라는 책을 써서 《朱子家禮》의 상례에 상관되는 부분들에 상세하게 주석을 달았으며, 조선왕조 말기의 학자인 李縡(기원1680~1746)는 《朱子家禮》에 기초하여 거기에 또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가례 풍속과 리념을 보태여 넣으면서 《四禮便覽》이란 책을 써서 조선민족의 《冠婚喪祭》례의 규범들을 전면적으로 저술하였습니다. 이것으로 《朱子家禮》의 우리 민족화가 최종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의 기본리념은 유가의 사상으로서 그 핵심은 “효도”이고 그 주체는 “례의”입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에서는 “효도”와 “례의”의 리념이 집중적으로 표현됩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활동은 문화적 의미에서 “효도”와 “례의”를 원만히 하고 계승하는 과정으로 됩니다. 중국 조선족 선민들 대부분은 1850년 이후에 조선반도로 부터 중국 동북지구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였는데 100여년 력사의 연혁을 거쳐 점차 당대 중국의 한갈래 소수민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중국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여러지역에서 들어왔는데 그들이 중국에 가지고 들어온 장례풍속도 지역에 따라 정도 부동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특정된 환경에서 장기간 공동히 생활하는 가운데서 점차 중국특색의 조선족 장례문화가 형성되였습니다.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장례제도를 실행하였는데 마을마다 丧舆契와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집체로 자금을 내여 丧舆(조선족 전통장례에서 썼던 운구 공구, 香徒, 灵輀라고도 함)를 만들어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편벽한 곳에 상두막을 지어놓고 보관하였으며 도감을 한 사람 선발하여 마을의 장례행사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일단 마을에서 사람이 죽게되면 굴심을 할 사람과 상여, 그리고 상여를 멜 사람들까지 통일적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은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족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 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는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장례제도를 극도로 간단하게 하였으며 일체 소위의 미신색채를 띤 장례 절차를 일률로 금지하였습니다. 그후로 부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점차 빛을 잃게 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80년대부터 시작하여 나라에서는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모두 유체를 화장 할것을 제창하였습니다. 1997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국무원의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 시키면서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유체를 화장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나라에서《조례》를 제정하여 화장제도를 실시하게 된것은 시대가 발전했다는 상징으로서 자손만대에 덕을 쌓는 좋은 일이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의 기본리념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자연발생적 힘에 의하여 간신히 지탱해 오던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더는 사회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점 암담해져 가면서 오늘에 와서는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였습니다. 만일 시급히 조치를 대여 구급하지 않는다면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철저히 매몰되고 말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기본내용에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기본내용에는 초상, 안장, 제사, 이렇게 세가지가 있습니다. 초상이란 사람이 사망하여서부터 안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며, 안장이란 사망한 유체를 매장, 혹은 화장하는 과정을 말하며, 제사란 유체를 안장한후에 진행되는 일련의 의식들과 기념행사들을 말합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관혼상제 문화에서 상례문화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가례 지침서인 “사례편현(四禮便覽)”은 모두 8권으로 되여 있는데 상례부분만으로 5권을 차지합니다. 우리민족의 선인들은 우리민족의 전통습속과 전통리념을 정리하여 상례에서 집중적으로 표현시켰는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례문화는 우리민족의 대표성 문화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핵심은 효도사상입니다. 효도사상은 유교의 대표성 사상으로서 천백년래 사회질서와 가정관계를 유지시킨 기본적인 도덕 준칙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孝为百行首” 라고까지 하였는데 그 뜻인즉 효도가 모든 행위중에서 첫번째로 지켜야 할 준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상제문화에서는 효도사상이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조심스럽게 술을 붓고 무릎꿇고 절을 하는 등의 동작은 바로 효도의 대표성적인 표현동작입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바로 장례를 통하여 효도사상을 전수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여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이 효심이 부족하고 민족의식이 담박하게 된것이 어찌보면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가 쇠퇴된것과 관련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효도라는 “孝”자는 아들이 늙으신 아버지를 업고 있는 형태로 이루어 졌는데 그 뜻인즉 부모를 공경하고 잘 받들어 모시라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은 평소에 자기 인생의 개척을 위하여 분투하면서 부모에게 많은 미안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에서 일정하게 성공을 거둔후 다시 부모를 생각하게 될때에는 부모는 어느덧 늙어서 사망하게 되거나 언녕 사망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례와 제사는 부모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부모한테 전달하고 반성하며 용서를 비는 역활을 합니다. 효도사상은 동방사상의 정수이며 우리민족의 보귀한 정신 유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를 보호하고 발양시켜려는 기본 목적이 바로 효도사상을 보호하고 발양시키려는 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현재 우리들이 지킬수 있는 조선족 전통장례로는 어떤것들이 있다고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병원에서 사망하여 화장하는 경우를 기준하여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친인이 사망하면 인차 혼을 부르고 염습을 해야 하는데 이 절차는 될수록 전문인원이 하도록 하십시요. 우리 장례 복무열선에 련락하면 됩니다. 2, 염습이 끝나고 령구를 차에 싣기전에 고인한테 영결례를 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어 세번 허리굽혀 인사합니다. 3,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키고 객실, 혹은 례당에 작은 령좌를 차려 놓습니다. 조문객이 와서는 먼저 그 령좌앞에 가서 술을 붓고 세번 인사합니다. 상주는 하루밤 령좌를 지키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간단히 올리는 것이 기본 례의입니다.  4, 장례날 장의관에 가서 고별식을 할때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 (主妇)는 머리에 베천오리를 동이여 자기들의 특수신분을 나타냅니다. 유가속 기타의 녀성들은 머리에 몽상을 달고 남성들은 팔에 상장을 두르는데 사망자가 남성일 경우 왼쪽에 달고, 사망자가 녀성일 경우 오른쪽에 답니다.장례에 손님으로 참석할때 녀성분들은 될수록 꽃무늬 없는 단색옷을 입고 남성분들은 될수록 검은색 양복을 입습니다.  5, 고별식이 끝나고 화장이 끝나면 골회함 보관여부 상관없이 안신제를 지냅니다. 전통적으로 안신제는 유가족들만 지냈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안신제에서는 제사상 차리고 술을 붓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상주와 주부, 가속(상제), 친속(복인), 사돈, 단위조문객, 친구조문객, 기타 조문객, 이런 순서로 합니다. 마지막에 기름냄새를 피우는데 기름떡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운 다음 제단의 제물들을 치우고 기름떡만 올려놓고 술도 붓지말고 상주와 주부가 절을 세번하면 됩니다. 제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불길하므로 모았다가 지정한 소각로에 가져다 태웁니다.  6, 골회함을 보관시킬 경우, 보관처에 안치하고 물러가면서 세번 허리굽혀 고별인사 하는것을 잊지 마십시요. 고혼의 안정을 바라는 의미에서 제사때마다 번번히 골회함을 움직일 필요가 없으며, 꼭 움직일 경우에는 먼저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움직이는것이 례의입니다.    김동선 기자: 계속해서 우리 민족 전통장례의 하나의 중요한 내용인 염습의 기본 절차를 알아보지요? 현룡수 회장: 조선족 장례 - 염습(연변에서는 매시라고도 함)은 현재까지 보유되고 있는 조선족 장례 습속에서 가장 중요한 습속의 하나입니다. 전통적으로 염습은 동네의 덕망이 높은 분이 와서 하게 되였는데 가속에서도 협조할수 있습니다. 현재 병원에서 염습할시에는 극히 제한된 시간내에 질량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염습 실시 인원이 반드시 두사람 이상이여야 하며 먼저 소독을 하고 고인한테 한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엽습을 시작합니다. 1, 皋復: 혼을 부르는 절차입니다.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 서북쪽을 향하여 흔들면서 먼저 고인의 시호와 성명을 부르고 “복-, 복-, 복-”하고 웨침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령침에 넣어 고인의 머리밑에 베여 줍니다. 2, 下袭: 먼저 고인의 아래몸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그다음 아래벌을 세벌 입히고 제쪽씩 발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버선을 신긴다음 그 종이봉지를 버선목에 넣어 줍니다. 3, 上袭: 고인의 웃몸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수의를 세벌 입히고 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반대로 여밉니다. 그 다음 제쪽씩 손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악수를 끼우고 그 안에 넣어 줍니다. 그리고는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주는데 녀성의 경우에는 오른쪽에, 남성의 경우에는 왼쪽에 감습니다. 4, 饭含: 고인의 얼굴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고 입안에 쌀알을 넣어 줍니다.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쌀알을 적당히 떠서 세번 넣어 주는데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하고 외침니다. 전통적으로는 구슬이나 은전같은 것도 넣었댔으나 지금은 넣지 않습니다. 5, 面袭: 고인의 코구멍과 귀구멍을 약솜으로 막고 고인의 입에도 약솜으로 채운다음 잘 다물겨 줍니다. 그리고는 약솜편으로 고인의 얼굴을 가리우고 면백으로 머리와 얼굴을 싸서 동입니다. 6, 小殓: 전폭의 염포로 유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쌉니다. 그리고는 포끈으로 발목부위, 허리부위, 어깨부위, 이렇게 세 부위로 나우어 동입니다. 다섯곳 동일수도 있고 일곱곳 동일수도 있는데 매듭은 옭매지 않으며 비틀어서 끼우는 방법으로 풀어지지 않도로 단단히 동입니다. 소렴이 끝난 유체밑에 지요(地褥)을 깔고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7, 铭旌: 흰 분필로 붉은천에 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쓰는데 한자(汉字)로 씁니다. 남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學生”으로 쓰는데(시호만은 반드시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 례를 들어 남성 사망자가 본관이 安东이였고 성이 金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安东金公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위의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녀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례를 들어 녀성 사망자의 본관이 全州였고 성이 李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이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써 놓은 명정을 고인의 유체우에 덮습니다. 8, 永決礼: 염습이 기본상 끝나면 령구차가 오기전에 그 자리에 있는 가속들을 모두 불러 고인의 유체옆에 모이게 하고는 함께 세번 허리굽혀 영결례를 시킵니다. 9, 大殓: 전통적으로는 입관하는 절차였으나 지금은 성시에서 일률로 화장을 하기 때문에 관을 쓰지 않으므로 유체를 주머니에 넣는 절차로 됩니다. 유체를 주머니에 넣은후 주머니를 보기좋게 여며 놓아야 하며 담가에 담고 반드시 머리로 부터 바깥으로 나가며 담가를 든 사람들이 문설주와 문턱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김동선 기자: 현재 중국조선족 장례에서 존재하는 문제점들로는 어떤것을 짚을수가 있을까요? 현룡수 회장:추도식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할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류행되는 조선족들의 장례에 대하여 몇가지 지적할것이 있습니다. 1, 부모상의 경우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킨후 상주는 부모님의 마지막 하루밤만은 곁에서 지켜드리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정성들여 올리는것이 자식된 기본의 도리입니다. 이 방면에서 한족분들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는데 우리 조선족들은 대부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민족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2, 장례의 매개 절차마다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 인사를 올리는 것이 우리의 례의입니다. 염습이 끝나면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하고, 랭동상에 령구를 보관하고서도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하며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고서도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합니다. 이렇게 고인한테 매번 인사를 올릴때마다 당신의 령혼은 한층 깨끗하게 되며 숭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에서 유가속들은 모두 상복 차림을 하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입니다. 지금과 같은 번개식 장례에서 상복제도를 전부 회복한다는것은 어려움이 많겠지만 앞으로의 조선족식 장례에서는 그래도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는 머리에 베천오리를 동이여 자신들의 특수신분을 똑똑히 나타내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방면으로 조건을 창조할것입니다. 4, 아직까지 우리 연변에는 우리 조선족식의 고별청이 없는것이 큰 유감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장례에서는 친인의 유체를 남들한테 보이는것을 제일 꺼려 왔는데 지금 우리는 통일식 고별청에서 장례를 치르다 나니 어쩔수없이 친인의 유체를 많은 사람들 앞에 전람시키게 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연길장의관에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할데 관한 건의를 주 민정국 유관부문에 제출하였는데 주 민정국에서는 이미 문건을 내여 우리의 건의를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의가 하루속히 현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5, 사회적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건전히 해야 합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가서도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전될수 있게 됩니다. 지금 가문에서 상사가 나면 가속에서는 몹시 당황하고 조급하게 됩니다. 지금은 시장경제 시대인데 계속 이렇게 어렵게 장례를 치룰순 없습니다. 유가속에서 장례복무 기구에 전화 한통만 걸면 모든 장례 행사가 OK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시대상조 장례복무 중심을 설립하였는데 도움이 필요한 노인과 환자들을 등록하고 매일 문안전화 형식으로 추적봉사를 하여 드리며, 사망하였을 경우 회원의 우혜표준으로 장례를 치려 드립니다.   김동선 기자: 현재 보유되고 있는 전통제사로는 어떤것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제사란 원래 조상과 부모의 은덕을 칭송하고 근본을 되새기며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의식으로서 자손 된 도리와 살아있는 사람의 도리를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를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지내 왔으며 근본을 잊고 조상의 제사를 소홀히 하면 가문이 망한다고 철칙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전통제사는 특별히 엄격하였으며 우선 목욕제계를 하고 냄새가 나거나 자극성 있는 음식을 삼가 하면서 제사를 위하여 정성것 준비하였습니다. 제사는 크게 1,기제(忌祭); 2,시제(時祭); 3,묘제(墓祭). 이렇게 세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그 구체적인 분류에는 또 많은 종류들이 포함되여 있었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현재 연변지구에서 보유되고 있는 제사 행사들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있습니다: 기제(忌祭)에 소상(돐제); 대상(삼년제)이 남았고, 시제(時祭)에 청명제; 추석제; 환갑제가 있으며, 묘제(墓祭)에 면례; 합장; 비석제, 등이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이 제사상을 차리고 제사 지내는 법에는 어떤 순서나 절차가 필요합니까? 현룡수 회장: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먼저 제사상을 차리게 되는데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에도 많은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많은 번쇄한 규칙들을 일일히 따를 필요는 없지만 총체적인 분포 규칙에 대하여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기왕에 제사상 차릴 바에는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정성을 넣어 제물을 차리며 제물 종류가 합리하고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게 정연하게 차립니다. 제사상은 보통 장방형으로 된 네모상에 차립니다. a, 상우에 먼저 흰 종이를 한벌 펴 놓습니다. b, 령좌 안쪽 중간에 지방과 유상을 놓습니다. c, 령좌 량옆에 그릇을 놓고 초불을 달아 각기 그 안에 세워 놓습니다. d, 유상 앞 첫줄에는 각기 메밥, 국, 수저, 술잔, 등을 놓습니다. e, 중간에는 고기류, 생선류와 기타 반찬들을 놓습니다. f, 바깥줄에 과일류, 과자류와 기타 부식품들을 놓습니다. g, 령좌 아래에 술병과 퇴주 그릇을 놓습니다. 제물의 개수는 짝을 지우지 않고 기수로 합니다. 제사 종류에 따라 이 기본방법을 참조하면서 적당하게 조절하여 차리면 됩니다. 첫돐제사나 삼년제사와 같이 집에서 올리는 제사는 출입문을 조금 열어놓고 그 제사와 상관되는 축문을 읽은 다음 효자(상주가 제사에서는 효자)와 주부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붓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가속(상제), 친속(복인), 사돈, 단위조문객, 친구조문객, 기타조문객, 이런 순서로 합니다. 마지막에 술 한잔 다시 붓고 다 함께 절을 세번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청명제나 추석제와 같이 산에 가서 올리는 제사는 먼저 후토를 찾아 간단한 제물을 놓고 후토제를 올립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통보하여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그다음 봉분을 조심스레 정리하는데 청명때는 삽으로 흙을 올리니 가토라고 하고, 추석때는 낫으로 풀들을 베니 벌초라고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 다음 가지고 간 제물들을 제단에 차려놓고 가문의 항렬 순서에 따라 술을 붓고 세번씩 절을 올립니다. 마지막에 술한잔 다시 붓고 다 함께 절을 세번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아름다운 덕담들을 나눕니다.    김동선 기자: 조선족 장례 제사에서 금기시해야 할 사항들로는 어떤것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A, 도시의 병원이나 아빠트에서 친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크게 소리내여 울지 않습니다. B, 어린 아이들은 죽은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염습할때 다른 곳에 피신 시킵니다. C. 농촌의 경우, 상가집에서는 초상기에 부엌 아궁이를 막아 놓고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D, 령구를 내 갈때 문턱이나 문설주를 다치지 않습니다. E, 가문에 상사가 났을 때 임신한 며느리나 딸은 장례에 참석 시키지 않습니다. F,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입던 옷과 덮던 이불, 그리고 평소에 쓰던 일용품들은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웁니다. G, 장례나 제사에 가서는 불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누구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H, 장례 용품이나 제사 소물을 살때는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I, 장례나 제사가 지난후에는 보충 부조금을 받지 않습니다. J, 장례나 제사에 참석할때 화려한 옷과 진한 치장은 삼가 합니다. K, 친인이 객사 하였다면 사망한 지역에 가서 장사 지내고 시신을 집으로 옮겨오지 않습니다. L, 제사상 제물은 짝을 지우지 않으며 홀수로 합니다. M, 제사상에 개고기와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 그리고 고사리, 복숭아는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N, 상주와 주부는 장례를 치른 해에 자기 생일을 쇠지 않으며 친척이나 친구집의 희사 잔치에도 가지 않습니다. O, 자기의 배우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삼년제 지나기 전에는 재차 혼인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P, 가정에서 큰 희사를 치른 해(결혼잔치를 치렀거나, 새집을 샀거나, 아이가 태여난 해)에는 보통 장례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며 제사집에도 가지 않으며 청명이나 추석에 자기집 산소에도 가지 않습니다(특별한 경우 제외).     김동선 기자: 현재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져 가는 현상을 어떤 면에서 찾아볼수 있을까요? 현룡수 회장: 우선, 지금 우리민족의 많은 젊은이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장례개념은 별로 없고 한시 급히 화장하여 시름을 놓으려 하며 이듬해 부모의 제사날이 돌아와도 자식으로서 반드시 부모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도리를 모릅니다. 다음, 우리민족은 성씨앞에는 모두 본이 붙습니다. 례를 들면 “김해김씨요”, “전주리씨요” 할때의 “김해”요 “전주”요 하는 그 부분들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성씨보다 본을 더욱 중시하여 왔습니다. 중국의 호적부에서는 성씨만 다루고 본은 다루지 않지만 조선족 성씨에서는 본이 있으므로 하여 같은 성씨의 여러가지 혈통을 구분할수 있습니다. 조선족 성씨의 본은 한족 성씨제도보다 우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망자의 명정을 쓰면서 보노라니 지금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기 성씨의 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성씨의 본을 모른다는것은 자기 가문의 근본을 잊었다는 것으로 풀이되며 자기의 민족특성을 버리기 시작한 첫번째 행동입니다. 셋째: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에서 유가속들은 모두 상복 차림을 하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장례에서는 상복차림은 근본 찾아볼수 없고 상주도 일반 조문객들과 마찬가지로 겨우 상장이나 두르는 정도이고 많은 경우에는 심지어 상장도 두르지 않습니다. 네번째: 우리민족의 전통장례에서는 친인의 유체를 남들한테 보이는것을 제일 꺼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초상이 나면 유체를 인차 염습한후 이불로 덮어 놓고 병풍이나 만장으로 가리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통일식 고별청에서 통일식 장례를 치르다 나니 어쩔수없이 친인의 유체를 많은 사람들 앞에 전람시키게 됩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지는 원인을 어떤 면에서 찾아보고 계십니까? 현룡수 회장: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 변혁기에 접어들면 필연코 많은 전통 문화들이 충격을 받고 매몰되게 됩니다. 5.4운동에서는 공자의 사상이 충격을 받았고 문화혁명 동란 시기에는 “전통”이란 수사가 붙은 모든 문화들이 충격을 받았으며 그후의 개혁개방, 역시 사회의 대변혁이라고 할수 있는데 사상위주의 사회가 경제위주의 사회로 바뀌여지면서 또 많은 전통 문화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라진 전통문화를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회복시킬수 있습니다. 가치가 있고 쓸모가 있는 전통문화들은 다시 발굴하여 찌꺼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취하여 회복시키고 보호하고 발양시킴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위하여 더욱 훌륭히 복무하게 할수 있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라에서 개혁개방을 하면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도 우리의 혼례문화나 회갑문화와 마찬가지로 회복될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당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상층계층과 지식계층에서는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하는 사람조차 없게 되였으며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로서의 연변에서, 4대 장의관중의 그 어느 한곳에서도 조선족 유가족들을 대상하여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한곳이 없습니다.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십년이 지난후 우리민족은 다시금 우리의 전통장례문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의식하게 되였으며 지난해에는 조선족 전통장례가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진다면 그 위해성이 참으로 클줄로 압니다. 현룡수 회장: 민족이라는 것은 인류의 장기간의 력사 과정에서 형성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그리고 공동한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을 소유한 온정된 공동체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인구 류동이 가속화 되면서 지금 와서는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이라는 조건은 많이 파괴되기 때문에 이 조건만을 가지고 한개 민족을 평가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한 민족의 특색이라는것은 주요하게 공동한 문화, 그리고 이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민족습관, 공동한 민족심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시기는 민족의 대 융합을 촉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각 민족의 발전을 촉진하는 시기입니다. 그 어느때 가서는 일부 비슷한 민족들끼리 융합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는데 모두가 중국 경내에서 생활하고 있고 모두가 중국 공민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개 민족이 자기의 존재를 나라에 선전하고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이 주요하게는 문화입니다. 한 민족이 자기의 문화, 즉 자기이 특색을 잃는다면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됩니다.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우리민족의 기본문화인 “관혼상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화인데 우리민족이 첫돐생일문화, 결혼문화, 회갑문화, 등에서 이미 확고한 특색적인 문화체계를 수립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상제문화에서 자기의 체계를 수립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민족이 상제방면에서 자기의 확고한 특색적인 문화체계를 수립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족문화는 자기의 완미성을 잃게 됩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할 필요성은 두개 방면으로 보아낼수 있습니다, 한 개 방면은 민족의 발전의 수요로 부터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하여 우리민족의 장례를 우리식으로 치르는 것은 민족의 특색을 보호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증강하며 민족의 동일성을 가강하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다른 한 방면으로 민족의 소질제고의 수요로 부터 우리민족의 장례를 우리식으로 치르는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적 효도문화를 발양하여 우리민족의 사회를 화목하고 질서있는 사회로 건설하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민족 장례문화에 민족특색을 부여하려면 어떤 과제들이 우선돼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목전의 우선적인 과제로는 우리민족식의 장례시설을 설치하고 우리민족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연길장의관에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할데 관한 건의를 주 민정국 유관부문에 제출하였습니다. 주 민정국에서는 이미 문건을 내여 우리의 건의에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의가 하루속히 현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장례복무체제를 건립하고 건전히 해야 합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면 조선족 유가족에서 조선족 장례규범에 대하여 잘 모른다 하여도 자기 민족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는 의향만 있으면 장례복무 기구에 전화 한통을 걸어 모든 장례행사가 우리 민족식으로 OK가 될수 있습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내부건설을 가강하면서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가서도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전될수 있게 됩니다.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백화상조 (장례) 복무중심을 설립하였는데 정부와 사회 각 계층의 다함없는 지지와 참여가 필요합니다.    김동선 기자: 조선족 장례문화를 보호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현룡수 회장: 2009년 6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와 《조선족 전통장례》을 각각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非物质文化遗产)로 지정하였으며 연변주 문화국이 주관부문으로 되고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구체적인 보호사업을 책임진 보호단위로 되였습니다. 이로부터 조선족 전통 상제문화는 보호가치와 발양의의가 있는 민속 문화라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였습니다.그러나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보호하는 사업은 전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우리 연구회의 노력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반드시 정부의 유관부분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사회의 상관 계통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전사회적인 참여가 실현되여야만 기정한 목적에 도달할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연구회는 사회의 상관 계통, 특히는 의료계통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상당히 힘들게 공작하고 있습니다. 의료계통의 많은 분들, 특히는 주요 책임자들이 우리의 공작에 대하여 리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공작은 더욱 힘들게 되며 우리 공작의 진전은 더욱 꿈뜨게 됩니다. 나라에 아직 정식으로 무형문화재 보호법이 나오지 못한 조건하에서 우리들의 공작은 부득불 많은 길을 에돌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내부적으로 “조선족 장례와 제사 실용편람”을 정리해 냈습니다. 우리의 장례복무 중심에서는 지금 이 실용편람에 근거하여 복무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충분한 실천을 통하여 고칠것은 고치고 보충할것은 보충하면서 연변의 민속연구 학자나 전문가들과 함께 “조선족 장례와 제사 규범”을 편찬해 낼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조선족의 상제문화도 자기의 체계를 확고하게 수립하게 되며 우리민족의 문화재부가 더욱 묵직하게, 더욱 찬란하게, 더욱 완벽하게 될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김동선 기자: 맺는말 본 민족의 특색과 전통을 버리는것을 현시대의 개방사상이라고 여기는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당과 정부에서는 소수민족들의 특색문화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우대정책과 사업조례들을 제정하여 실행하고 있지만, 우리 민족 자신이 도리여 자기민족 특색문화의 보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 꺼리낌 없이 하나, 둘, 버리고 있습니다. 민족특색이 없이는 민족 대단결이 있을수 없으며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릴수록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게 됩니다. 민족특색이 짙을수록 자기의 합법성이 더욱 완벽하게 되며 세계적 경쟁력이 더욱 강해지게 됩니다. 우리 조선족의 전통적 상제문화는 우리민족의 전통적 관혼상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입니다. 만일 조선족 민속문화에서 상제문화가 빠진다면 조선족의 전반 민속문화는 자기의 정체성을 잃게 되며 잔페문화로 전락할수밖에 없을것입니다. 조선족 상제문화를 보호하고 계승하는 사업은 전 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어느 한 부문이나 어느 한 단체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수 없는 계통공정입니다. 반드시 전 사회적인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우리가 계속 자기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고 시종 자기의 민족 특색을 확보한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더욱 밝을것입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2013년 9월 21일
182    (연변방송) 추석에 깃든 전통문화의 향연--2013년 댓글:  조회:3352  추천:0  2013-09-16
2013년 추석 맞이 특별기획 《추석에 깃든 우리 민족 전통문화의 향연》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문화연구회 현룡수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이제 사흘후면 우리 민족 전통명절인 추석입니다. 추석은 우리 민족 4대명절의 하나로 그 력사가 참 길다고 볼수 있을것입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주급, 성급 무형문화재《조선족장례풍속》의 보호책임단위이며,현룡수회장은 《조선족장례풍속》의 대표성 전승인입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산하에는 또 상조기구도 갖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주로 어떤 단체이고 또 산하의 상조기구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맡아하고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주 문화국의 령도를 받는 사회 단체로서 무형문화재 《조선족 장례풍속》 보호단위입니다. 무형문화재 보호는 원래 정부 차원의 공작인데, 우리는 정부 유관부문의 위탁을 받고 상관되는 문화정리공작과 보호전승공작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연구회 산하에 《시대상조 복무중심》이 있는데, 조선족의 장례문화 보호와 시대적인 조선족 장례 어려움을 해결한다는 취지로 세워진 기구입니다. 현재 우리는 주 노인협회, 주 노령위원회 등과 공동으로 연변 황도계 성립을 준비하고 있으며, 연변에 조선족 장례장소와 시설을 갖추는 문제를 가지고 유관부문과 교섭중입니다. 세계적으로 60세이상 노인 비례가 10%를 넘으면 노령사회라고 합니다. 연변 호적에 따른 노령 비례는 원래10%정도였는데, 현재 연변의 실제 노령비례는 30%에 육박합니다. 우리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원래 80만으로 집계되여 있는데, 외국에 나가 노무에 종사하는 인구, 북경, 청도, 등 대성시에 나간 인구, 그리고 각 대학과 전문학교에 간 학생을 포함하면 이미 50만의 연변적 조선족 인구가 바깥에 나가 있으며, 연변에는 30만 정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비하여 노인과 병자들은 기본상에서 모두 연변 본지에 남아 있는 형편이며, 이로하여 현재 연변에 남아있는 조선족들 중 세명중에 한명은 노인이 아니면 병자인 셈입니다. 특히 빈집을 지키는 노인들이 많아 지면서, 고독사, 임자없는 주검, 사망후 며칠후에 발견 등 현상들이 자주 발생하며, 가문에 상사가 나도 장례치르는 것이 큰 난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장례를 한개 군체의 집단적인 행사로 인정하고, 서로 도우며 처리하여 왔으며, 종래로 사적인 개인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조선족 장례는 완전히 사적인 개인일로 되여 버렸으며, 단지 유체를 처리하는 《환경위생》차원의 사무로 전락되였습니다. 이것은 기실 우리민족의 사회적 위망에 대한 엄중한 위협으로 됩니다. 친인이 사망하여 그 존엄을 쓰레기처럼 처리해 버리는 그런 유가족이 사회에 나가 아무리 제노라고 우쭐한들 그 수준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이렇게 자기 친인의 죽음존엄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민족에 대하여, 나라에서 존중할들 얼마나 존중하겠습니까. 장례문화는 꺼리고 피하기만 할것이 아니라, 싫은대로 중시하지 않으면 안될 일입니다. 산사람들의 도덕수준과 우리민족의 존엄과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상조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노인과 병자들을 등록하고 매일 문안전화 형식으로 추적 봉사를 하여 드리며, 일단 사망하였을 경우, 회원의 우대 표준으로 장례를 전부 책임져 드립니다. 이미 30여명이 등록하였습니다.   김동선 기자: 사흘후면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 추석입니다. 현회장께서 먼저 추석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주시죠? 현룡수 회장: 추석은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의 하나로써 해마다 음력 8월 15일로 중추절(仲秋節), 가위, 한가위라고도 한다. 추석을 명절로 삼은 것은 삼국시대부터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 때에 왕녀 두사람이 6부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어 7월 15일부터 한달 동안 매일 일찍 모여서 길쌈을 하였다. 8월 15일에 이르러서는 그 성과의 많고 적음을 살펴 진 쪽에서 술과 음식을 내놓아 승자를 축하하고 가무를 하며 각종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그 말이 변하여 가위가 되었다. 가배라는 말은 가운데 라는 뜻으로 보이는데, 곧 음력 8월 15일은 만월이므로 이것을 뜻한 것으로 볼수 있으며, 진편에서 이긴 편에게 잔치를 베풀게 되므로 갚는다는 뜻에서 나왔을 것으로도 유추된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의 추석음식들로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추석에 중국의 한족들은 월병을 먹는것이 특징이고,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은 소고기를 먹는것이 특징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 추석의 대표적인 절식으로는 송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송편속에는 콩· 팥· 밤· 대추 등을 넣는데, 모두 햇것으로 한다. 열 나흗날 저녁 밝은달을 보면서 가족들이 모여 송편을 만드는데,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며, 잘못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해서 처녀, 총각들은 송 편을 예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또한, 임신부의 태중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궁금할 때에는 송편 속에 바늘이나 솔잎을 가로 넣고 찐 다음, 한쪽을 깨물어서 바늘의 귀쪽이나 솔잎의 붙은 곳(나무에 붙었을 때의 접착부분)을 깨물면 딸을 낳고, 바늘의 뾰족한 곳이나 솔잎의 끝쪽을 깨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이를 점치기도 한다.   특히 올벼로 만든 송편은 올벼 송편이라 부른다. 추석의 차례상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술이다. 추석 술은 백주(白酒)라고 하는데, 햅쌀로 빚었기 때문에 신도주(新稻酒)라고도 한다. 추석 때는 추수를 앞 둔 시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풍족해진다. 사람들의 인심 또한 후해서 추석 때에는 서로 술대접을 하는 수가 흔하다. 또 이 때의 가장 넉넉한 안주로 황계(黃鷄)를 들 수 있는데, 봄에 알을 깬 병아리를 길러서 추석 때가 되면 잡아먹기에 알맞게 자란다.  또 옛날에는 명절에 어른에게 선사하는 례물에 닭을 많이 썼다. 친정에 근친을 하러 가는 딸은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가지고 갔으며, 경사가 있을 때에도 닭을 선물했으며,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손쉬운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특히 사위가 찾아오면 장모는 닭을 잡아 대접하는 일이 흔했다. 녹두나물과 토란국도 추석의 절식이다. 녹두나물은 소양(消陽)한다고 하지만 잔치상에 잘 오르고, 토란은 몸을 보한다고 해서 즐긴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추석에는 주로 어떤 행사와 놀이를 해왔습니까? 현룡수 회장: 추석에 행해지는 세시풍숙으로는 벌초, 성묘, 차례, 등이 있고,민속놀이로는 닭싸움, 소놀이, 거북놀이, 강강수월래, 줄다리기, 원놀이, 가마싸움, 씨름, 반보기, 올게심니. 밭고랑 기기, 활쏘기 등을 들 수 있다.  (1) 벌초와 성묘   추석에 조상의 무덤에 가서 여름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주는데, 이를 벌초라 한다. (성묘에 대해선 아래에 구체적으로 설명.)  (2) 차례    추석에 산으로 벌초하려 가지 못할 경우, 집에서 추석차례 지내는 것이 바람직 하다. 전통적으로는 추석 이른 아침에 사당을 모시고 있는 종가(宗家)에 모여 고조(高祖)까지의 차례를 지낸다. 차례 지내는 절차가 설날과 다른 것은 흰떡국 대신 메[밥]를 쓰는 점이다. 제물은 신곡으로 만들어 진열하며, 고조 이상의 윗대는 10월에 시제라 해서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3) 소놀이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뒤 알맞은 시간에 소놀이는 진행된다. 먼저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농악대가 풍물을 울리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상쇠의 선도에 따라 한바탕 신나게 풍물을 울리며 어우러져 놀다가 소놀이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그 위에 멍석을 뒤집어 씌우며, 뒷사람은 큰 새끼줄로 꼬리를 달고, 앞사람은 막대기 두 개로 뿔을 만들어 소이 시늉을 한다. 소를 끌고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농집이나 그 해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의 집으로 찾아간다. 대문 앞에서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고 외치면 주인이 나와서 일행을 맞이한다. 소를 앞세우고 일행은 앞마당으로 들어가 농악을 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면 주인집에서는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대접한다. 마을 사람들은 한참 놀다가 다시 소를 끌고 다른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여러 집을 찾아가  해가 질 때까지 어울려 논다.  (4) 원놀이.   옛날 서당 교육은 훈장을 초빙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명절이 되면 훈장도 고향에 가서 차례. 성묘를 하게되므로 서당은 며칠 ㅜ시게되고 학동들은 자유롭게 놀 수가 있다. 이럴 때에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와 가마싸움이 있게된다.   원놀이란 학동들 중에서 공부를 많이 했고 재치있는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은 뱃성이 되어 원님께 소장을 내어 그 판결을 받는 놀이인데, 오늘날의 대학에서 모의 재판과 유사하다.  (5) 반보기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끼리 장소와 날짜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을 반보기라 한다. 옛날에 시집간 여자들은 마음대로 친정 나들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녀 사이에 중간지점을 정해서 서로 즐기는 음식을 마련하여 한나절 동안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푸는 것이 반보기인 것이다. 이와같이 반보기란 서로 중간 지점에서  한나절 동안만 상봉하여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6) 올게심니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다 묶어 기둥이나 대문위에 걸어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 한다.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주찬(酒饌)을 마련하여 이웃을 청해서 주연을 베풀기도 한다.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해에 종자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당에 천신하거나 터주에서 올렸다가 먹었다. 올게심니를 하는 것은 다음해에 풍년이 들게 해달라는 염원의 뜻이 담겨져 있다. 이외에도 추석과 관련된 많은 민속놀이가 있지만 시간 관계로 소개를 략함.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추석에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비롯해서 이미 타계하신 가족의 어른신들을 찾아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또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있습니다. 현회장께서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주시죠? 현룡수 회장: 답; 산소에 찾아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일은 후토를 찾아서 산신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명태 한꼬리나 과일 세알을 제물로 놓고 술을 한잔 따라 올리고 세번 절을 하면 되겠습니다. 흙을 파고 초목을 베기전에 먼저 산신의 허락을 받는다는 뜻으로서 대자연에 대한 존중을 표시합니다. 그다음 낫으로 조심조심 벌초를 시작합니다. 많은 분들의 경우 먼저 벌초를 하고 후에 후토제를 지내는데 크게 틀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도 대자연의 한 성원이라는 리념에서 대자연에 대한 숭배를 조상에 대한 숭배의 앞순서에 놓는것이 리치에 맞습니다. 산소는 신성한 곳으로서 그곳에서 함부로 흙을 파고 함부로 나무를 찍고 풀을베고 하는것은 삼가하여야 할 바입니다. 산소에 가서 벌초를 깨끗이 끝내고는 갖고간 제물들은 제단에 차려 놓습니다. 제물을 차린후 일동이 그앞에 정연히 서서 제주주부부터 시작하여 항렬의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세번씩 절을 합니다. 제사순서에는 초헌, 아헌, 종헌, 첨작 등 순서가 있지만 지금 조선족 장례와 제사가 많이 간소하여진 형편에서 구태여 순서에 구애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남자재배 즉 두번절, 녀자 쌍재배 즉 네번절 규례가 있었는데 우리 연변에서는 종래로 세번절을 하였왔으므로 계속 그대로 남녀 구분없이 세번절을 하면 되겠습니다. 매사람의 헌작이 끝난후 제주가 메밥을 조금 떠서 물그릇에 놓고 반찬도 조금 집어 놓으면서 식사시중 드는 동작을 합니다. 그리고 일동이 기립한채로 9초동안 묵도합니다. 그다음 숙주 즉냉수 한그릇 혹은 술한잔 부어 올리고 일동이 다 함께 세번 절을 올립니다. 이것으로 제사는 끝납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정하여 일동이 모여앉아서 제물들을 음복하면서 재미있게 덕담들을 나눕니다. 그다음 납골당에 가서 골회함을 놓고 제사 지내는 경우를 말씀 드립니다. 납골당 보관상에서 골회함을 꺼내올때 먼저 세번 경례를 올리고 낮은 소리로 “오늘 추석제사 올리려고 함을 잠시 움직이오니 부디 놀라질랑 마십시요!” 하고 여쭙니다. 그리고 골회함을 조심스럽게 안고 나와 합당한곳에 안치하여 놓은후 그앞에 간단히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순서는 우에서 말씀드린 산에 가서 성묘하는 순서를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제사가 끝나면 골회함을 다시 보관상에 모시고 낮은 소리로 “다음번 다시 찾아 뵐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요!”하고 인사하고 물러갑니다.  추석제사상 차리는 방법 추석제사상 차리는 방법을 말씀드리면 제일 안쪽 중간에 메밥과 물그릇, 수저, 술잔 등을 놓고 그앞에 고기류, 생선류와 여러가지 반찬들을 놓으며 제일 바깥줄에 과일류와 과자류 기타 떡류와 부식품들을 정연하게 보기좋게 차려 놓습니다. 한가지 제물의 개수는 짝을 지우지 한고 단수로 합니다. 제사상 차리는 규칙으로는 “홍동백서, 생동숙서, 어동육서, 두동미서, 조률시리…” 등이 있는데 자기가 묘소를 마주하여 서서 묘소의 위치를 북으로 인정합니다. 한곳에 묘소가 여러자리 있을경우 다른 제물들은 여러번 쓸수 있지만 메밥과 수저만은 제각기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총적으로 제사상 차릴때 가장 중요한것은 성의입니다. 성의만 있었다면 그까짓 규칙같은 것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한들 크게 문제될것이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올리는 제물에 대해서는 어떤 주의할점이나 또 제사나 차례 지낼때 금기시해야 할 사안은 없습니까? 현룡수 회장: 답;1;복숭아와 삼치, 갈치 꽁치 등 끝에 '치'자다 든것은 사용하지 않습니다….어째서…? 답; 복숭아는 사랑의 상징이므로 제사에 합당치 않고 ‘치’자는 전통적으로 임금의 통치에 도전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금지되였음. 2. 고춧가루와 마늘양념을 하지 않습니다….왜서?... 답; 초상부터 삼년제까지의 魂제사에는 고추가루 마늘양념을 쓸수 있지만 그후의 차례, 묘제등 神제사에서는 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민간신앙에서 붉은색은 귀신이나 신령을 쫓아 버리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신령이 제사받으려 내려 왔다고 붉은색을 보고 공연히 쫓겨 나지요. 그리고 고추나 마늘은 또 자극성 음식이므로 신령들이 그 제물을 먹을수 없습니다. 3. 붉은 팥을 안쓰고 흰고물을 사용합니다….왜서?... 답:… 차례 음식에 붉은 고추가루를 쓰지 않는것과 같은 도리. 4.전통적으로 제사에 쓰는 과일은 조율시리라고 하였으니 대추, 밤, 감, 배가 그것이며 이것들을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옛날의 일이고 지금은 거기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겠습니다. 계절에 따라 사과, 수박, 참외, 석류, 귤 등의 여러가지 과일중에서 편리한대로 자유롭게 몇가지 준비하면 되겠습니다. …   김동선 기자: 추석에 산소에 가서 성묘할때 주의할점들로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산소에 가서 성묘할 때 우선 안전에 주의해야 합니다. (1) 산불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뱀이나 벌에게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3) 추석에 산소에 가서 술마실수도 있으니 음주운전해서는 안된다. (4) 교통안전에 주의를 돌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5) 이외 음식안전에 주의하라 (6) 이외 기타 보충 설명 ■독사에 물린 경우    ■벌초하다 베인 경우  답;… 재수가 없어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자체로 응급조치를 하고 지체말고 병원으로 최고 속도로 달려가야 합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 장례문화에서 지켜야 할것들은? 현룡수 회장: 장례문화, 특히 제사에서 지켜야 할 것들;  제사는 선조와 사망한 부모들과 마음으로 교류하는 의식입니다.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이 있어야 제사가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자고로 제사에 많은 번쇄한 규례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목적이 바로 사람들이 제사를 중시하고, 정성을 다 하게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우리들이 부모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오늘 부모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기 보다는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를 지낼때에도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조상과 부모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가속 관념과 정감의 뉴대를 건실하게 할수있으며, 또 그로부터 조상 음덕의 혜택과 유익한 계시를 받을수 있으며, 후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수 있습니다. 민족의 전통을 이어가고, 가문의 뉴대를 이어가기 위하여 제사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의가 없는 제사는 지내지 않은편이 좋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3년 9월 16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181    장백조선족자치현 조선족장례문화 이어간다. 댓글:  조회:4679  추천:0  2013-08-23
장백현 우량한 조선족장례문화 이어간다 편집/기자: [ 최창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12-31 08:33:38 ] 클릭: [ ]   향도계지도일군 교체의식 해마다 거의 한번씩 열리게 되는 장백조선족자치현 현성조선족향도계 계원대회가 새해 양력설을 계기로 12월29일, 장백허씨네 식당에서 소집되였다. 회의는 지난 1년간의 향도계사업과 3년간의 향도계 리사회사업을 총화한 기초상에서 기바꿈선거로 새로운 지도부를 내왔다. 그리고 새해의 장례직책을 짊어질 리사회 리사장, 총도감, 도감, 총무와 유사명단을 공포함과 동시에 교체의식을 진행했다. 회의는 또 장백조선족들의 사망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존재하는 문제와 부족점을 찾고 금후 우리 민족의 장례를 보다 문명하고 간편하게 치를데 대해 연구토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장백현당위와 현인대, 현정부, 현정협의 지도일군들과 전임 현장들이 회의에 출석, 다년간 조선족향도계가 장례를 아주 문명하게 치르고있는데 대해 높이 찬성하고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장례문화를 세세대대로 이어나갈것을 요구했다. 장백조선족자치현 현성조선족향도계는 장백진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이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를 계승발양하고 세세대대로 이어 나가기 위해 설립한 군중성적인 민간조직이다. 자치현성립과 더불어 5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장백현성 조선족향도계는 시종 문명하게 장례를 치르고 사망자가족을 위해 돈을 적게 쓰고 그들의 뒤근심을 크게 덜어주어 사회의 한결같은 호평을 받고있다. 알아본데 따르면 장백현은 지금까지 향도계조직에 가입한 호수가 무려 2568여세대에 달한다.   새해 총도감 남경호씨 새해 리사장 김성원씨 기여가 많았던 선배님들 장백조선족자치현 조선족장례문화 이모저모  (원문)중국조선족상장문화의 변천에 관하여 염송심   들어가는 말:    상장문화는 인간이 사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일련의 사회활동 즉 사망관 臨終배려 喪葬儀式 造墓 立碑 祭祀 등 제반활동을 의미한다. 상장문화는 민족전통문화의 중요한 내용으로써 환경의 변화와 시대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한다.    조선족은 19세기중엽부터 20세기중엽의 100년간에 자연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조선반도에서 중국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월경민족이다. 그들은 중국동북지역에 이주한 후 주로 압록강 도문강 송화강 목단강 등 하천의 유역에서 농경생활을 영위하면서 점차적으로 크고 작은 집거구역을 형성하였으며 비교적 온정하게 조선민족의 전통문화를 보존하여 왔다. 하지만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부동한 지역에서 이주하였기에 그들의 풍속습관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함경도식 경상도식 평안도식으로 규납할 수 있다. 조선족상장문화의 기본내용과 형식은 조선반도에서 유래 되였지만 부동한 시기 중국의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특히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중한수교 등 중대한 역사시기를 거치면서 생사관 가치관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내용으로부터 형식까지 비교적 현저하게 변화 되였다. 총체적인 추세는 번잡하고 봉건미신적인 내용과 형식이 많이 사라지고 현실적 문명적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본문에서는 조선족상장문화 관련문헌자료를 정리하고 연구한 기초위에서 필자가 다년간 동북지역의 조선족사회에 대한 조사연구 자료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조선족상장문화의 변천 및 그 원인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검토하여 보려고 한다. Ⅰ 20세기 60년대 이전 조선족의 상장문화    조선족은 예로부터 상장례의를 중시하여 왔는데 이것은 영혼불멸관념과 조상숭배사상의 반영이고 또한 전통儒學孝사상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60년대 이전 조선족은 기본상 조선반도 민족의 전통적 상장예의 습관을 지켜 왔다. 그 현저한 특점으로 상여계와 토장을 들 수 있다. 1. 상여계    상여계는 조선족들이 상장儀式을 치르는 민간조직이다. 20세기 6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족마을들에는 거의 모두 상여계가 있었는데 18세 이상의 남성들은 모두 이 조직에 참가하였다. 작은 마을에서는 몇 개 마을이 공동으로 하나의 상여계를 형성하였다. 상여계에는 尊位 都監 執事 所任 등 직무와 喪具를 보관하는 건물 喪輿房이 있었다. 존위는 마을에서 덕망이 높은 어르신이 맡는데 명예상으로는 가장 높은 권위자이지만 상장의식의 구체사무를 처리하지는 않는다. 도감은 상장의식을 지도하는 사람이고 집사는 구체적인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이며 소임은 도감의 심부름을 듣는 사람이다. 마을에 상사가 발생하면 먼저 존위에게 보고하고 존위가 도감으로 하여금 상가에 가서 상장의식를 지도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出殯하기전에는 집사가 상가에 가서 구체적으로 지도하고 도감은 오직 출빈하는 날에 상가에 가서 친히 지도한다.    상여방은 상구와 장례식에 쓰는 그릇들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보통 마을에서 5~6리 떨어진 위치에 짓는다. 상여는 관을 운반하는 도구로서 길고 짧은 나무토막과 包帳 仰章 등으로 구성 되였는데 보통 12명에서 18명이 메는데 상여군들은 상여의 양쪽에 서서 어깨로 상여를 메여 내간다. 한마을에 상사가 발생하여 장례식을 치를 때 상여계 계원들은 반드시 모두 참가하여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참가하지 않는 자는 벌금을 받는다. 상여계는 매년 년 말에 총결회의를 열고 일년간의 사무를 총결 짓는 동시에 존위와 도감을 改選한다. 20세기 60년대까지 조선족들은 대부분 상여계에서 장례식를 치렀다.    청말 부터 1931년 만주사변 전 까지 시기에는 중국조선족마을의 행정조직이 건전하지 못하였기에 상여계는 일면으로는 마을사람들의 상장의식를 치르는 호조합작 조직으로 공동체의 단결과 화목에 크게 기여하였고 일면으로는 마을사람들의 공덕을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면 마을 사람들 중에 분쟁이 일어나거나 어느 가정에 불효자가 나타나면 상여계에서 해결하고 처벌 교육을 하였다. 일제가 동북을 점령한 후 상여계는 다시 상장의식만 치르는 민간조직으로 전환 되였다. 2. 토장습속     토장은 예로부터 조선족들이 시체를 安置하는 주요 방법 이였다. 조선족들은 마치 나무가 땅속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잎과 가지가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조상을 땅속에 정중히 모셔야 자손들의 안녕과 번영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20세기 60년대 이전시기 조선족들은 상사가 발생하면 모두 토장을 하였는데 그 장례식의 구체적 절차는 다음과 같다.    장례식을 치를 때 우선 먼저 喪主 主婦 護喪 祝 司書司貨 등 인물을 확정한다. 상주는 상제의 주요 대표인물로서 장례식의 전부 과정을 주관한다. 부모가 세상을 뜨면 장자가 상주로 되고 장자가 없으면 장손이 承重하여 상주의 역할을 한다. 아내가 사망하면 남편이 상주로 된다. 초혼이 끝나면 상주는 상복을 입는다. 父喪이면 왼팔 소매를 끼지 않고 母喪이면 오른팔 소매을 끼지 않는다. 주부는 장례나 제사 때 상주를 협조하는 여성을 말한다.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 초상에는 死者의 부인이 주부고 虞祭후에는 상주의 부인이 주부역할을 한다. 사자나 상주가 모두 부인이 없을 때에는 同姓친척중에서 選任한다. 호상은 장례식 때 상가집을 대신하여 여러 가지 사무를 처리하고 지도하는 총책임자인데 사자의 이웃이나 친구 중에서 장례의식에 익숙하고 성품이 믿음직한 남성을 선정하여 맡긴다. 축은 장례 때 각종 축문을 읽는 사람이고 司書는 訃告나 銘旌을 쓰는 사람이며 司貨는 장례에 필요한 비용을 관리하고 賻儀金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20세기 60년대 이전까지 조선족의 장례절차는 臨終 招魂 襲 小殮 大殮 成服 弔問 遷棺 發靷 出殯 安葬 등과 같았다. 臨終은 자식들이 부모님의 임종 시 신변에서 지키면서 유언을 듣고 사망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招魂은 사망이 확인되면 死者의 혼을 불러오는 의식이다. 사자의 먼 친척이나 친구가 사자의 옷을 가지고 지붕위에 올라가거나 집 앞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사자의 이름을 부르고 服- 服- 服-을 세 번 반복하여 웨치는것을 말한다. 초혼에 사용했던 옷은 지붕위에 올려놓았다가 출빈하는 날에 태우거나 대염을 할 때 관안에 넣는다. 초혼 후 상제들은 머리를 풀고 哭을 한다. 상장의식에서 사자의 부인 아들과 딸 며느리 장손 등을 喪制라 하고 그 외 친척들은 服人이라고 한다. 상제와 복인이 哭을 하는 방식은 좀 다르다. 상제는 "애고- 애고-" 하고 복인은 "어이- 어이-" 한다. 초혼부터 출빈까지 상가집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것을 금지하며 상제들은 세수를 하거나 이발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襲은 사자를 목욕시킨 후 壽衣를 입히는 절차이다. 보통 사자가 결혼 때나 환갑 때 입었던 민족전통복장을 입힌다.    小殮은 힌 천으로 사자의 몸을 싸고 동여매는 절차이다. 천을 싸기 전에 먼저 飯含의식을 치르는데 사자의 입에 물에 담가놓았던 쌀 3술과 동전 3매를 넣는 것을 가리킨다. 쌀을 넣을 때 "백석, 천석, 만석" 이라고 웨치고 동전을 넣을 때는 "백냥, 천냥, 만냥" 이라고 웨친다. 그 다음 솜으로 눈 귀 코 입을 막는다. 그 후 사자의 두 손을 교차시켜 배위에 얹혀 놓는데 남성은 왼 손을 위에 여성은 오른 손을 위에 놓는다. 시체를 동여맬 때 세 곳 또는 다섯 곳 또는 일곱 곳을 동이며 가장 많기는 열두 곳까지 동인다. 보통 사망당일에 초혼을 하고 그 다음날에 소염을 한다. 소염 후 시체를 七星板 위에 올려놓는다. 칠성판은 보통 넓이 40 센치메터, 길이 170 센치메터의 나무 반자인데 표면에 북두칠성과 비슷한 7개의 동그라미를 그려 놓았다 하여 칠성반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체를 屛風 또는 包帳으로 막아놓고 식탁 위에 술 과일 고기 등 식품을 차려올린 후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낸다. 소염부터 출빈까지 제사상에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을 올리는데 이것을 上食이라고 한다.    大殮은 시체를 관에 넣는 절차이다. 조선족의 관은 보통 장방형인데 위부분에 "上"자 밑부분에 "下"자를 써놓거나 또는 화살표를 그려 앞과 뒤, 머리와 발 부분을 구별한다. 평안도식 관은 梯형으로 머리 부분이 넓고 다리부분이 좁다. 그리고 앞면에 "上"자를 쓴다. 보통 관의 길이는 1.8메터 넓이는 1.4메터 높이는 30센치메터이다. 조선족의 관은 지역과 관계없이 색을 칠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을 崇尙하는 민족특성이라고 본다.    成服례는 대염이 끝난 후 사자의 자녀들과 기타 친척들이 상복을 입고 치르는 의식을 말한다. 성복례 전에는 상주만이 상복 즉 힌 색 두루마기를 입었다. 성복례 때 상복은 남 상제는 머리에 힌 모자와 벼짚으로 만든 屈巾을 쓰고 몸에 소매가 넓은 麻布두루마기를 입고 왼쪽가슴에 麻布오래기를 꼽고 허리에 마포치마를 두르고 작은 다리에 脚絆을 치고 발에 마신을 신었다. 여 상제는 풀었던 머리 가락을 다시 올려 얹은 후 머리에 힌 천 오리를 매고 마 또는 벼짚을 꼬아서 머리를 동이고 머리위에 麻布片을 덮고 몸에 소매가 좁은 마포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에 마끈을 매고 발에 마신이나 짚신을 신는다. 喪杖은 사망자가 남성이면 참대막대기를 짚고 여성이면 버드나무막대기를 짚는다.     성복례 후 弔問객을 접대한다. 조문객을 맞을 때 남상주는 마당에서 哭을하고 여 상제는 방안에서 곡을 한다. 성복례 전에는 조문객을 접대하지 않고 다만 사자와 관계가 좋은 친구들이 問喪을 할 수 있다. 문상은 술도 붓지 않고 절도 하지 않는다. 조문객은 문상 시 靈座앞에 술 한 잔을 부어 올리고 절을 세 번한 후 상주 및 복인들과 맞절을 한번 한다. 그 시기 조문객들이 가지고 오는 부의금은 보통 酒 초(臘) 挽章 등 이였다. 조문객의 조문이 끝난 후 성복제사를 지낸다. 제사의 절차는 焚香 初獻 告祝 亞獻 終獻 侑食 등과 같았다.    遷棺은 관을 실내에서 상여에 옮기는 절차이다. 경상도와 평안도식 장례식은 관을 옮길 때 문턱 또는 창턱에 바가지나 사발을 엎어 놓고 관으로 눌러 깨뜨린다. 이런 풍속은 두 가지 상징의미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사자는 다시 이집의 밥을 먹지 않는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사자는 저승에 가면 완정한 食器를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관 시 문틀에 부닥치는 것과 문턱 두개를 넘는 것을 금지한다. 조선족의 전통가옥은 안 방문으로 천관할 수 있기에 문턱 하나만 넘는데 세 칸짜리의 만족 또는 漢族식 가옥은 문턱 두개를 넘어야 하기에 창턱으로 천관한다.    出殯은 관을 상여에 실고 묘지로 운반하는 절차이다. 상여가 출발하기 전에 發靷제를 지낸다. 靈柩를 상여에 실은 후 상여 옆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상제들이 男女老少 순서로 술 한 작씩 붓고 靈柩를 향하여 절을 세 번씩 한다. 제사가 끝난 후 상여가 출발하는데 상여가 집을 떠나는 것을 발인이라고 한다. 상여가 출발하기 전에 도감이 큰 소리로 축문을 읽는데 대체 그 뜻은 "靈柩는 지금 출발하여 幽宅으로 향한다. 낡은 것과 받은 선물을 모두 가지고 영원히 떠난다." 축이 끝나면 喪輿隊는 동시에 상여를 메고 앞으로 나간다. 조선족전통장례는 나이 많은 사람이 사망하면 好喪이라고 하여 출빈할 때 喪輿歌를 부른다. 상여를 안내하는 사람이 상여의 위 또는 앞에 서서 손에 銅鈴이나 힌 수건을 흔들면서 상여가를 두 마디를 부르면 상여대 회원들이 함께 副歌를 불러 호흡을 맞춘다. 주요 내용은 사자가 인간 세상을 떠나기 아쉬워하는 마음과 고향산천과 가족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기대 사항를 반영하였다. 길림지구 경상도식 장례의식의 상여가를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引唱: 친인들아 나는 가노라. 우리는 지금부터 영별이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여기를 떠나 어디로 가는가? 북망산천이 나의 거소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저승까지 가는데 몇천리냐? 문밖을 나서니 咫尺에 있구나.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애들아 비통해하지 말아라. 생사병로는 인지상정이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후사는 너희들게 맡기노라. 화목하게 잘 지내다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내말 명심하고 잊지말아라. 내 몸은 이미 쓸모없는 존재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달도 盈缺이 있고 별도 移轉하노라. 제비는 秋去春回하노라.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래년 청명과 추석이 오면 산소를 모시는 것을 잊지 말아다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    상여는 때론 세 발작을 가고 두 발작을 후퇴하고 때론 걸음을 멈추고 가족과 친척들게 路費를 빌었다. 상제나 복인들이 상여 앞에 가서 절을 하고 돈을 낸 후에야 다시 앞으로 나가군 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식 장례식은 상여가 나갈 때 종이돈을 뿌리였다. 安葬은 관을 묘지에 묻는 일을 말한다. 묘는 보통 장례식 전일에 파 놓는다. 묘지는 통풍이 좋은 양지 즉 "左靑龍 右白虎" 이고 머리는 산계를 이고 발은 하천을 향한 곳을 선호한다. 묘지를 파기 전에 먼저 開土祝文을 읽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묘지의 깊이는 보통 70센치 좌우이다. 관을 묻을 때 산에 있는 묘지는 머리가 산정을 향하게 하고 평지의 묘지는 머리가 북쪽을 향하게 한다. 관을 땅 밑에 안치한 후 銘旌을 덮는다. 명정은 보통 넓이 40센치 길이 1메터의 붉은 천에 먹으로 사자의 籍貫과 姓氏를 쓴 것을 말한다. 명정을 덮은 후 상주가 옷섶에 오방토를 떠서 관의 사주와 중간에 뿌린 후 모든 일군들이 삽을 들어 흙으로 관을 묻는다. 한족들은 묘를 뾰족하게 만드는데 반하여 조선족들은 묘를 饅圓형으로 다진다. 함경도식 묘는 祭壇과 后土제단을 만드는데 경상도와 평안도식 묘는 후토제단을 만들지 않고 묘 오른쪽 2메터 거리에 소나무 한 그루 심거나 납작한 돌을 山神제단으로 삼는다. 이 시기에는 보통 출빈 후 3일제를 지내고 사자의 생일 사망일 청명 단오 추석 그믐에 제사를 지냈다. 생일제사 기일제사와 그믐 제사는 집에서 지내고 청명과 추석 제사는 산소에 가서 흙을 올리고 벌초한 후 지낸다. Ⅱ 20세기 80년대 이후 조선족상장습관의 변천     1966~1976년까지의 문화대혁명시기 조선족의 전통적인 상장례의습관은 봉건미신으로 간주되여 파괴 되였으며 민간상여조직 상복제도 상장절차 등이 거의 사라졌다. 개혁개방 후 특히 중한수교 후 조선족과 한국의 교류가 빈번하게 진행됨에 따라 어떤 전통적인 상장례의습관은 회복 되였지만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라 내용으로부터 형식까지 많은 변화를 보인다. 1. 상여계와 토장습관의 변화     20세기 80년대 이후 동북3성의 산간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여전히 토장을 하고 민간장례조직 상여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장례조직의 명칭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본문에서는 길림성장백조선족자치현의 상여계를 예로 토장을 하는 조선족지구의 상장례의 의식의 변천에 대하여 약술하려 한다. 필자는 2010년 초에 장백현조선족사회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장백현에서는 상여계를 향도계라고 하는데 만주국시기에 설립 되였다고 한다. 문화혁명시기에 페지되였는데 개혁개방 후 다시 회복 되였다. 원래는 農戶위주였는데 1986년부터 職工위주로 변하였고 1996년부터 농호와 직공을 구별 하지 않고 모두 가입할 수 있는 상여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지금 계원의 수는 2300여호에 달하는데 이는 장백현조선족호수의 거의 전부 라고 한다.    입계비는 시대의 발전과 물가의 상승에 따라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추세인데 최초의 50전으로부터 1원 5원 10원 20원 50원 100원으로 2010년부터는 150원으로 올랐다. 호를 단위로 입계비를 받는데 한사람이 내면 전체 가족성원들이 계원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장백현 향도계는 조선족의 장례식을 치르는 독립건물 장례당이 있는데 면적은 120평방메터에 달하다. 이 건물은 1996년 계원들이 모금하고 민족사무위원회 민정국 등 현 정부기관에서 지원을 받은 기초위에 향도계 책임자들의 노력으로 석회 모래 목재 등을 구해다가 지었다고 한다. 장례당을 짓기 전에는 어느 민족이나 구별 없이 현 병원의 太平房에서 상사를 처리했는데 풍속습관 위생 등 여러 면에서 많은 불편이 있었다고 한다.     장백현 향도계에는 도감 3명 총무 1명 유사 4명 등 구체적으로 상사를 처리하고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군들이 있는데 이 8명에게 매년 수고비 1000원씩 준다고 한다. 조선족장례당에서는 평균 매년 60여 차례의 장례식를 치르고 있다. 상여계의 회원계원가정에 상사가 발생하면 시체를 직접 장례당에 옮겨 오고 상여계일군들이 상가집의 협조 밑에 모든 장례식을 치러준다. 이를테면 수의를 입히고 시체를 싸고 입관하고 명정을 쓰고 영당을 설치하고 부의금을 받고 묘지를 선택하고 출빈 안장까지 모두 책임지고 처리한다.    관을 운반하는 방법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변하였는데 상여를 쓰지 않고 대신 화물차로 운반한다. 장례비용은 사자가 계원가정의 성원일 경우 장례비 400원을 내고 타향사람이 장백현에서 객사하였거나 농촌사람이 현 병원에서 사망하여 조선족상여계 장례당에서 장례식을 치를 경우 계원보다 200원을 더 받는다. 곤난한 가정이나 저 수입 계원들은 무료 또는 장례비를 절감하여 받는다. 그러나 현성에 사는 비계원조선족가정에 상사가 발생하여 조선족 장례당에서 장례식을 치를 경우에는 벌금으로 1500원을 내야 한다.     2001년부터 향도계를 지도하고 감독하는 조직기구 理事會를 설립하였는데 7명의 前任도감으로 구성 되였다. 그 중에는 이사장1명 비서장1명 재무독감1명 등 3명의 상무이사와 4명의 이사가 포함 된다. 이들은 향도계 전체계원회의에서 선발된다. 이사회가 설립된 후 자금을 축적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12만원에 달하였다. 이 자금은 주요하게 喪具구입 장례당수리비 전기세요금 물세요금 상여차 임대요금 등 지출과 일군들에게 주는 수고비에 쓰인다.    현성 외에 장백현 경내 촌마을들에도 크고 작은 향도계가 있는데 그 운영방식이 현성의 향도계와 같지는 않았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마록구진 2도강촌 향도계에서는 3년에 10원의 입계비를 받고 상가집에서 100원을 받는다. 동촌에 사는 한족들도 향도계에 가입할 수 있다. 다만 자기민족의 습관대로 장례식을 치를 따름이다. 농촌마을에는 현성의 향도계와 같은 조직기구와 관리절차도 없고 장례당도 없다. 오직 매년 촌에서 추천한 당번도감이 상가집에 가서 향도계 계원들을 지도하여 장례식을 치른다. 계원들은 모두 무상으로 일을 돕는다. 개혁개방 후 조선족농촌의 대량적인 인구유동으로 지금 남아 있는 인구는 거의 노약자와 환자이기에 상여계가 있어도 인력부족으로 독립적으로 장례식을 치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므로 마을에 상사가 발생하면 조선족 한족을 가리지 않고 온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향도계가 없는 마을에서는 상가집에서 장례식 절차에 익숙한 사람을 모셔다 그의 지도하에 장례식을 치른다. 부의금은 모두 현금으로 하는데 농촌에서는 20~50원이 보통이고 관계가 가까운 사이면 100원을 낸다. 현성에서는 100원이 보통이고관계의 원근에 따라 200원~ 500원 부동한 금액을 한다. 장백현 향도계는 중국정부의 상장제도를 준수하고 移風移俗을 제창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묘지를 선택할 때 경작지와 인공림 그리고 도로에서 3키로메터 이내의 땅을 차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형사범죄자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봉건적 미신활동을 페지 시켰다. 소염 시 사자의 입에 쌀과 동전을 넣는 구습을 취소하였고 상여가도 부르지 않는다. 옛날과 같은 상복을 입지 않고 힌 천을 허리나 팔에 매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명정을 쓰는 방법도 변하였다. 이전에 남성은 學生某公之柩, 여성은 孺人籍貫姓之柩 라고 쓰던 것을 지금은 남성은 學生姓名之柩, 여성은 孺人姓名之柩 라고 고쳤다. 상복도 이전의 효모나 굴건을 쓰지 않고 麻로 만든 두루마기도 입지 않는다. 喪杖도 짚지 않는다. 보통 힌 천을 허리나 머리에 동이는데 상제일 경우 남자는 허리에 여성은 머리에 힌 천을 동인다. 복인일 경우 남자는 왼팔에 여성은 오른팔에 힌 천을 동인다. 다만 상제와 복인이 쓰는 힌 천의 길이와 넓이가 같지 않을 따름이다. 상제의 것이 길고 넓으며 복인의 것이 짜르고 좁다.    그리고 현재 토장을 하는 조선족들은 대다수가 묘 앞에 비석을 세우거나 소나무를 심어서 표기한다. 어떤 집에서는 묘위에 잔디를 移植하고 또 아주 개별적인 현상이였지만 콩크리트와 벽돌로 묘지주위에 호성을 쌓은 사례도 보였다.    총적으로 필자는 장백현의 향도계는 조선족의 호조협작의 우량전통을 발휘하는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안정과 조화로운 발전에도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혁개방 후 조선족 인구 출생율이 낮고 인구유동이 빈번한 사회 환경 속에서 향도계는 조선족구성원들의 심리적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2. 화장제도와 조선족 상장예의 절차의 간소화     20세기 80년대 후 중국정부에서 화장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함에 따라 교통이 불편한 산골을 제외한 대부분지방에서 모두 화장을 하게 되였다. 화장의 절차는 보통 초혼 염 출빈 화장 등과 같다. 일반 2일장 즉 사망 후 다음 날에 출빈을 하지만 간혹 사망당일에 출빈하는 현상도 있다. 습 소염 대염 성복례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염이라고 통칭한다.     화장방식은 성시와 농촌이 차이를 보인다. 성시에서는 관을 빈의관에서 마련해둔 簡易棺을 사용하는데 빈의관의 차를 불러 직접 시체를 실어다 보관하고 상가집에다 영당을 설치하고 벽에 명정과 유상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고 조문객을 접대한다. 출빈하는 날 상제와 복인 그리고 모든 빈객들이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화장터에 가서 遺體고별의식에 참가한다. 고별식에 참가할 때 빈객들은 힌 종이로 만든 작은 꽃을 가슴에 단다. 고별식이 끝나면 빈의관의 일군들이 시체를 화장터에 밀고 가서 태운다. 농촌에서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나무반자로 관을 만든다. 대염 후 시체를 온돌위에 놓고 병풍이나 만장으로 시체를 막은 후 영당을 설치하고 조문객을 접대한다. 출빈하는 날 관을 상여차에 실은 후 밖에서 제사상을 차리고 발인제를 지낸다. 어떤 지방에서는 관을 상여에 실어서 마을 밖 2~3리까지 메여 내간 후 다시 차에 실고 화장터에 간다. 보통 화장터가 촌에서 멀리 떨어진 시내에 있기에 교통적인 불편과 경제적 부담으로 남 상제와 몇몇 일군들만 화장터에 가고 다른 사람들은 대문 밖 까지만 바랜다. 화장터에 도착한 후 이미 집에서 발인제를 지냈기에 유체고별식을 하지 않고 직접 화장한다. 화장을 할 때 경상도식은 장자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라고 웨친다. 시체를 태울 때 관 칠성반 초혼의 등 사자의 유물과 상제의 상복을 모두 같이 태워버린다.    길림 요녕 흑룡강지구의 대다수 조선족들은 시체를 태운 후 화장터 부근의 산이나 강가에서 제사상을 차려 놓고 산신제 또는 降神祭를 지내고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린다. 기독교신자들은 골회를 직접 연통을 통해 하늘로 날려 보낸다. 사자의 영혼을 천당으로 보낸다는 뜻이다. 화장 후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기에 묘도 비석도 없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연변함경도식장례식은 화장한 후 골회를 먼저 화장터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산에다 매장하거나 또는 화장 후 직접 산에다 매장한다. 매장 전 먼저 후토제를 지내고 묘를 판 후 벽돌로 작은 집을 짓고 골회함을 안치한 후 콩크리트로 덮개를 만들어서 덮은 후 흙을 올리고 비석을 세운다.    조선족의 대다수 사람들은 제사를 취소하는 것은 자손들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개혁개방 후 조선족인구의 유동성이 커서 대부분 청장년들이 외국이나 큰 도시에 가서 생활하고 있기에 고향으로 자주 돌아올 수 없어서 묘를 세운다 해도 옳게 관리할 수 없고 또 정성껏 제사를 모실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산소를 옳게 모시지 못하여 자손들 자신이 심리부담을 느끼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묘지를 잘 못 선택하면 도리어 자손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기에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면 그런 걱정이 없다고 한다. 다른 일면으로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생사관과 효도관이 변하여 靈魂不滅論 來世論 등을 믿지 않기에 죽은 사람의 무덤에 가서 절을 하고 기복하는 것은 심리적인 위로는 될 수 있어도 진정한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생전에 실제적으로 효도를 드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효도라고 생각한다. 묘를 멋지게 장식하고 제사를 잘 모시는 방식으로 효도를 드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위적인 효도라고 생각한다.    화장제도가 실시된 후 조선족 상장문화의 많은 번잡한 절차와 형식이 간소화 되였다. 이는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른 자연발전 추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일면으로 빈의관과 화장터의 비용이 너무 비싸기에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한 가정에서는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화장터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원래부터 경제조건이 좋지 않은데다 화장비용에 교통비용까지 너무 부담이 크다고 한다. 또는 라는 怨聲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다른 일면으로 대다수 조선족들은 시체를 화장한 후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기에 모든 제사가 취소 되여 형제자매들이 부모님제사를 이유로 함께 모여서 정을 나누고 혈연의식과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기회가 점점 적어지기에 친족들사이의 관계가 갈수록 희박해지고 멀어지고 있다. 결 론:조선족상장문화변천의 원인    조선족의 전통적인 상장문화는 영혼불멸 조상숭배관념과 효사상의 산물이며 그 기본내용과 형식은 조선반도에서 유래 되였지만 환경의 변화와 시대의 발전에 따라 상응하게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총적인 추세는 현실적이고 문명하고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간소화 되였다. 조선족상장문화 변천의 주요원인을 규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중국 상장제도의 영향이다. 20세기 80년대 이후 화장제도의 보급으로 하여 산림지구를 제외한 대다수의 조선족들은 시체를 화장한 후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고 묘지를 만들거나 비석을 세우지 않기에 아울러 제사도 취소시켰다. 다만 원래조상의 산소만 청명 추석 그믐 등 전통명절에 고향에 돌아가서 전통대로 제사를 지낸다.    둘째는 거주문화의 영향이다. 현재 조선족의 거주문화는 아주 크게 변화하였다. 연변지구의 소수 농촌마을을 제외한 기타 지방의 조선족마을에서 새로 지은 벽돌집은 거의 만족이나 한족식의 세 칸짜리 집이다. 때문에 출빈할 때 관이 문턱을 두 번 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문으로 나온다. 시내에 사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층집에서 살기에 환자가 병원에서 사망한 후 시체를 직접 빈의관 또는 장례당에 옮겨가서 장례식을 치른다. 때문에 천관식 같은 절차는 없어졌다. 그리고 농촌 성시를 물론하고 상여로 출빈을 하지 않고 일률로 차로 출빈한다. 장례식이 끝나면 보통 식당에 가서 손님을 접대한다. 이것은 여성일손이 부족한 원인도 있겠지만 집의 면적이 작고 구조가 변하였기에 손님접대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인구유동의 영향이다. 조선족농촌청장년인구의 대량적인 유동으로 상여계조직이 있더라도 인력부족으로 장례를 치르기에는 너무 어렵다. 하기에 잡거지역의 조선족마을에서는 조선족 한족을 가리지 않고 어느 집에 상사가 발생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또한 외지나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자손들이 제때에 고향에 돌아와서 산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낼 수 없기에 화장 후 묘지도 비석도 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면 당일부터 상복을 벗고 청명 추석 그믐 등 전통명절의 제사를 제외한 기타 제사를 모두 취소한다.     넷째, 외래문화의 영향이다. 중한수교 후 한국교회의 지원으로 조선족거주구역에는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신도의 수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기독교신자의 가정에 상사가 발생하면 목사나 집사를 모셔다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사자의 영혼을 천당으로 보내기 위해 화장할 때 골회를 연통을 통해 직접 하늘로 날려 보낸다.    다섯째, 생사관 가치관 변화의 결과이다.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라 조선족의 생사관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귀신이나 내세 같은 것을 믿지 않고 현실생활에 충실하고 부모생전에 효도를 드리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무덤을 장식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한족문화의 영향이다. 조선족은 장기간 한족과 접촉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한족상장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조선족들도 한족의 상장금기습관을 따른다. 예를 들면 출빈 전에 부의금을 전달하며 장례가 끝난 후에 전달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것은 상가에 또 상사가 발생하게 된다는 혐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춘절기간에 상사가 발생하였을 때 외부에 소식을 퍼뜨리지 않고 직계 친척들이 모여서 조용히 입관한 후 시체를 殯儀館이나 장례당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정월5일이 지난 후 부고를 전하고 장례식을 치른다. 또한 상가집의 사람들은 상사가 발생한 해에 출생축하잔치 혼례식 환갑잔치와 같은 경사에 참가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들은 불길한 소식으로 명절이나 경사의 분위기를 파괴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180    [길림신문]:《조선족장례》때문에 로심초사하는 사람 댓글:  조회:2818  추천:0  2013-08-21
사라져가는 조선족장례문화 왜 살려야 하나?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8-20 14:27:23 ] 클릭: [ ]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 《조선족장례풍습》은 우리의 효와 례의 《조선족장례풍습》은 우리의 효와 례의임을 강조하는 현룡수회장  /사진 김성걸 2009년도에 《조선족장례풍습》은 주급과 성급 무형문화유산으로 확정되였다. 《조선족장례풍습》이 무형문화유산으로 대접받고있지만 갈수록 《조선족장례풍습》이 사라지고 외면받고있는게 또한 현실이다. 이러한 무가내한 현실속에서도 사라져가는 조선족장례문화의 부활을 주장하면서 《조선족장례풍습》의 보호와 발전, 계승을 위해 로심초사하고있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의 현룡수회장이다. 19일, 기자는 《조선족장례풍습》보호계승 지정책임단위인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을 만나 날이 갈수록 사라져가고있는 《조선족장례풍습》의 현상황과 우리는 왜 장례풍습을 외면해서는 안되는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현룡수회장은 《조선족장례풍습》의 핵심은 효도사상이며 이는 천백년래 사회질서와 가정관계를 유지시켜온 동방민족의 도덕적준칙이며 또한 조선민족의 우량한 전통이라고 인정했다. 생활풍속의 변천은 민족의 동질성을 상실할 우려가 있기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수 있다는것이 현회장의 일가견이다. 현회장은 고인에 대한 장례풍습의 여러가지 내용은 전통유교사상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있는건 사실이지만 간단하게 해석하더라도 웃어른들에 대한 효를 통한 자녀들의 교양으로 이어질수도 있지 않을가 하고 말했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란 말처럼 효와 례의를 바탕으로 한 장례풍습을 통한 자녀교양과 가족소통이 장례풍습이 갈수록 잊혀져가고있는 오늘날에 더더욱 소중하고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회장은 《조선족장례풍습》을 보호하고 계승, 발전시키는것은 조선족일상생활의 대사이며 조선족 천가만호에 관계되고 조선족 매개인과도 관계되는 대사라고 인정했다. 또 당전 우리가 조화사회를 구축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는데 있어서 효도사상을 선양하는것은 여전히 적극적인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회장이 《조선족장례풍습》의 계승과 보호에 마음이 급한데는 원인이 있다. 바로 과거 조선족전통장례풍습을 잘 알고있는 로인들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줄어들고있고 가정에서 상사가 났을 때 장례풍습을 지도해줄 사람이 없고 조선족들이 상사를 치르는 가운데서 효와 례의 사상을 담은 문화적인 색채가 오늘날 기본상 사라지고 없기때문이다. 더우기 오늘날 조선족들의 경우, 출국한 사람이 많고 혼자사는 로인들이 많아 고독사하거나 사망후 여러날이 지나서 발견되는 일들도 심심찮게 발생하고있고 장례도 풍습이나 절차도 무시한채 대충대충 치러버리는 등 안타까운 현상들이 조선족 장례문화의 빠른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주장이다. 현회장에 따르면 예로부터 조선족은 상사가 나면 서로 돕고 위로하는 풍속습관이 있었으며 종래로 상사를 개인적인 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많은 상사는 가족에서 개인적으로 처리하고있으며 여러가지 원인으로 친척친우들을 부르기 어렵기때문에 상사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고있다. 여기에 비법적인 상조기구들이 개입하면서 지나치게 높은 장례봉사가격을 요구하는것도 조선족상가집의 경제적인 부담을 가중시키고있다. 현룡수회장이 설립한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조선족의 전통장례풍습문화를 발굴하고 계통적인 연구와 편찬사업을 해오고있다. 이들은 정부와 상관부분에 합리적인 건의를 제기하여 조선족장례풍습문화를 보호하고 계승, 발전시키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조선족장례풍습봉사기구를 건립하여 조선족의 우량한 장례문화가 세세대대로 전승되여나가기 위한데 취지를 두고 많은 실제적인 일들을 해나가고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의 다년간의 노력으로 《조선족장례제사편람》 편찬사업이 곧 마무리되는데 올해안으로 출판발행되여 조선족장례에 실용적인 지도작용을 놀게 될 전망이다. 2009년 12월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연변주민정국에 연길시장의관에 조선족고별청을 설립할데 관한 건의를 제기하여 주민정부문의 동의를 얻었다. 제대로 된 조선족장례풍습봉사기제를 건립하기 위해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는 올해 2월에 연구회산하에 시대상조봉사센터를 설립하고 조선족들이 상사치르기 어렵고 상사비용부담이 큰 문제를 해결해주고있을뿐만아니라 조선족장례풍습 전문문화일군들도 양성하여 조선족장례풍습의 보호와 계승, 발전이 장기적으로 이어지게 하는데 일조하고있다. 이외에도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는 도움이 수요되는 로인들과 환자들을 무료로 등록하고 추적봉사를 제공하고있는데 이미 30여명이 등록했다. 현룡수회장은 《현재 조선족장례풍습의 보호와 계승, 발전은 시장운행행위일뿐만아니라 사회공공사업이기도 하다》면서《반드시 정부의 지지를 받아야 하며 사회적인 관심과 광범한 조선족군중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 《사람은 살면서 행복해야할뿐만아니라 사망되여서도 존엄이 수요된다》고 부언했다. 바로 조선족장례풍습의 보호와 계승, 발전은 우리 민족 스스로의 미루어버릴수 없는 중요한 문화사업이며 또한 세세대대로 보호, 발전, 계승시켜나아가야 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때문이다.
179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철학편 댓글:  조회:6706  추천:0  2013-07-22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1, 이번까지 몇기에 나누어,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의 기본 맥락을 더듬어 가면서, 그 유래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알아 보았습니다. 원래는 《조선족 전통 생사관 연구》라고 제목을 달았다가, 과제가 너무 아름찬것 같았고, 또 이미 중앙민족대학 崔榮根 연구윈의 비슷한 과제의 박사론문이 있으므로 하여, 무의미한 중첩과 충돌을 피하여,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으로 고치고, 내 나름대로의 방식과 관점으로 자유롭게 천술하여 보았습니다. 앞으로 계속하여 시간이 되는대로 우리민족 전통 사망관에 대하여 나의 직업적 시각으로 다시 한번 참답게 관찰해 보려고 하는데, 결코 우리민족 특색을 특별하게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민족 전통리념과 전통지혜에서 적극적인 것을 골라내여 유익한 유산으로 남기고 싶을 뿐입니다.   2, 인생의 도리가 천가지, 만가지 있지만 결국은 모두 죽음에 귀결됩니다. 그리하여 모종의 의미에서 인생이란 결국 죽음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고난의 행군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생명의 결속이라고 하기 보다, 생명의 완성이요, 령혼의 승화라고 하는것이 도리에 맞습니다. 자기가 지금 살아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직 진짜 삶이 아닌 것처럼, 자기가 이미 죽었음을 자각할수 있다면 그것 역시 진짜 죽음이 아닙니다. 그 만큼 죽음은 영원한 미지의 세계입니다. 죽음은 과학으로 연구하기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의학도 죽음앞까지 와서 걸음을 멈춥니다. 죽음은 그래도 종교적, 문화적,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비교적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에 와서 아직 과학적으로 해석할수 없는 특별 관념들은 대부분 미신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신의 구체적 표준에 대하여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미신이란 추악한 것이며, 시대적으로 퇴페적이고 락후한 관념을 대표합니다. 근대 유럽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뉴톤, 와트, 에디손 등 대 발명가들에 의하여 과학적 연구방법이 탄생하였습니다. 과학적 연구방법이란 대표성 사물에 대한 반복적인 실험과 증명을 통하여, 보편성 규률과 특수성 규률을 찾아내여, 定律 혹은 论文의 형식으로 체계화, 리론화 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한 결론을 과학적 도리라고 정의 하자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기본표준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첫째는 본질성입니다. 과학적 도리는 반드시 사물의 본질을 설명할수 있어야 합니다. 표면 현상만 설명하는데 그친다면 그것은 과학적 도리라고 할수 없습니다. 둘째는 통일성입니다. 과학적 연구방법으로 증명해낸 결론은 그 누가 그 어느때에 몇번이고 다시 증명하여도 그 결과가 같아야 합니다. 동일한 사물에 대하여 이사람의 증명과 저사람의 증명이 서로 다르고, 이때의 증명과 저때의 증명이 서로 다르다면, 그것은 과학적 도리라고 할수 없습니다. 세째는 예측성입니다. 과학연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바로 목전 사물의 발전 추세에 대하여 정확하게 내다 보고, 휼륭한 새 방안을 미리 내오려는 것입니다. 사물의 발전 추세에 대하여 예측 하지 못하거나, 그 예측이 틀린다면 그것을 과학적 도리라고 할수 없습니다. 오늘에 와서 과학적 도리는 유일 정확한 도리로 오식되여 진리와 거의 동의어가 되여 있습니다만, 기실 과학이란 일종의 방법론일 뿐이며, 결코 만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도리라고 하여 반드시 真理인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것이 가장 휼륭한 것이고,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는 것은 이미 몇백년의 세계적인 근대력사와 현대력사가 증명하였으며, 또 계속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세계적 기술연구 령역에서 과학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도 죽음앞에서는 영원한 실패자입니다. 과학은 죽음을 지연시킬수 있을뿐 완전히 막지는 못합니다. 죽음은 두번 다시 할수 없으므로 과학적 방법으로 죽음의 본질을 실험할수 없습니다.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인 령혼에 대해서도 사람이 죽은후에 관찰할수 없기 때문에 죽은후의 령혼은 소실된다고 의심합니다. 하지만 관찰할수 없다는 것이 소실되였다는 것과는 다르지요. 존재 방식이 바뀌였을 수도 있으니깐요. 노자와 공자가 죽은지 이미 2500여년이 되였지만, 그들이 창시한 도교사상과 유교사상은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존재하면서 찬란한 빛을 뿜고 있지 않습니까?   3, 사람이란 생명과 령혼의 결합체입니다. 철학적 개념에서 생명은 물질의 범주에 속하고, 령혼은 정신의 범주에 속합니다. 철학이란 세계를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방법론인데, 세계를 크게 물질과 정신이란 두개 범주로 나누고, 물질이 먼저냐? 정신이 먼저냐? 하는 문제에 대한 관점에 따라 유물론과 유심론으로 나눕니다. 유물론에서는 세계의 본질은 물질이며, 물질이 1차적이고, 정신은 2차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와 반대로 유심론에서는 세계의 본질은 정신이며, 정신이 1차적이고, 물질이 2차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유물론 시각에서 죽음이란, 생명물질 쇄망과 정신활동 정지에 불과하고, 유심론 시각에서 죽음이란, 령혼이 하늘로 승화하는 신격적인 사건입니다. 유물론의 경우 사람의 일생을 비통속에서 끝내야 하고, 유심론의 경우 사람의 일생을 虛僞속에서 끝내야 하는데, 기실 이 두가지 관점이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모두 편차가 있습니다. 우리는 별도로 《唯能論》을 숭상합니다. 우리의 《唯能論》은 焉敢生心 사회변혁을 목적으로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사람의 죽음을 더욱 생활에 가깝게 합리적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4, 우리 《唯能論》에 의하면 우주의 본질은 결코 물질이 아닙니다. 정신도 아닙니다. 우주의 본질은 에네르기(能量)입니다. 물질이란 고도로 조합화 된 에네르기로서, 특정된 시공간에서 특정된 조건에 의하여, 각종 형식으로 조합된 형태성 에네르기 입니다. 정신이란 고도로 지능화 된 에네르기 입니다. 바로 각종 정보를 포함한 우주의 에네르기가 고급적인 뇌 물질의 고급적인 사유운동에 의하여 가공되여 나온, 비 형태성 에네르기 입니다. 에네르기야말로 우주의 일체 운동을 추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소입니다. 우리 인류가 생활하고 있는 지구에는 주로 두가지 에네르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성 에네르기로서, 례하면 물리에네르기, 화학에네르기, 생물에네르기, 핵에네르기, … 등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성 에네르기 입니다; 례하면 과학, 기술, 지식, 정보, 정신, … 등입니다. 자연성 에네르기는 지구 고유의 물질성 에네르기로서, 그 존재형식을 부단히 변화시킬수 있을뿐, 소멸하거나 생성하지는 못합니다. 사회성 에네르기는 특수한 자연성 에네르기가 기나긴 세월의 진화와 우질화를 통하여 형성된 비 물질성 에네르기 입니다. 사회성 에네르기에서 사람의 정신이 가장 강유력한 지도성 에네르기 입니다. 지구상에서 물질성 에네르기가 사회성 효과를 가져 올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성 에네르기도 물질성 효과를 가져올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 에네르기는 모두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추동하는 필연적은 인소로서, 그 어느 한가지라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우주 블랙홀(黑洞), 여기에서 가장 희미하고, 가장 작은 흰점 하나도 모두 우리의 태양과 비슷한 항성입니다. 5, 우주에서 99.99% 이상의 지역은 물질이 아닌 虛虛 時空間입니다. 時란 시작도 끝도 없이 영구함을 말하고, 空이란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끝없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주의 대부분의 시공간은 텅 비여 있는 것이 아니라, 기실 여러가지 우주 에네르기로 충만되여 있습니다. 우리 지구와 태양을 포함하여 하늘에 은싸락처럼 널려 있는 은하수와 무수한 별들은 기실 우주에서는 너무나 미세한 존재이며, 우주 에네르기 무한 운동 과정에 대비할때, 일종의 반짝 존재형식에 불과합니다. 현대 물리학과 화학에는 “物質不滅定律”이란 것이 있는데, 기실 우주에서는 불멸하는 것이 물질이 아니라 에네르기 입니다. 그러므로 우주학에서는 “能量不滅定律”라고 합니다. 우주에서 물질은 지구에서와 달리, 생성, 성장, 성숙, 쇄망, 등 과정을 겪습니다. 우주에서 물질의 생성은 블랙홀의 대 폭팔에 의하여 진행되는데, 블랙홀이란 우리 은하수 범위와 비슷한 광범한 지역의 모든 물질과 에네르기가 우주 특유의 힘에 의하여 탁구알만한 한점에 수축되면서 거대한 흡인력을 과시하고 있는 지역을 말합니다. 블랙홀의 생성은 물질이 자기 사명을 완수하고 에네르기로 전환되는 과정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빛까지도 송두리채 흡수되여 들어 가므로 이 지역을 관찰할때는 마치도 우주에 검은 구멍이 뻥 뚤린것처럼 어둡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을 우주의 “黑洞”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블랙홀에 물질과 에네르기가 부단히 흡수되여 들어가 反物質로 되면서, 언젠가는 끝내 내외 압력 평형이 파괴되면서 거대한 폭팔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주학에서 “宇宙大爆炸”라고 합니다. 우주 대폭팔은 반물질이 다시 물질로 환원되고 조합되는 과정으로서 폭팔에 의하여 많은 에네르기가 방출되는 순간에 많은 物質元들이 생기면서 새 물질원자들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곧 새 물질의 기원이며, 이로부터 항성, 행성을 포함한 수없이 많은 물질들이 조합되면서 새 일대 물질가족의 기니긴 려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개 블랙홀에서 폭팔하여 생성된 물질들이 보통 한개 은하수 가족을 형성하는데, 그들은 거대한 팽창력으로 전 방위적으로 기나긴 시간을 통하여 확산되여 나갑니다. 그리하여 그 어느때에 가서 이 가족 물질들이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영향력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희박해 진후, 각기 다른 블랙홀에 흡수되여 들어 가면서, 이 가족 물질들의 사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은 에네르기 유일한 조합형식은 아닙니다. 우주 대폭팔중에서 블랙홀의 크기와 특성에 따라 에네르기는 여러가지 조합형식을 가질수 있으며, 물질이 아닌 다른 더욱 고급적인 조합물을 생성시킬수도 있습니다. 이런 조합물이 장기적인 진화와 우질화를 거쳐, 혹시 우리 인류의 생명형식보다 더욱 고급적인 차원에 도달할수도 있습니다. 가령 그 어느때에 가서 우리 인류가 지구밖의 문명을 발견한다면, 그 문명형식이 꼭 우리 인류처럼 생명을 기초로 한 지능형식만은 아닐 것입니다. 혹시 더욱 고급적인 에네르기 조합물을 기초로 한, 더욱 고급적인 지능 형식일수도 있습니다. 오늘까지 이 방면에 대한 인류의 지식고는 여전히 공백으로 되여 있습니다.   6, 상식적으로 物質은 많은 分子들로 구성되였고, 분자는 많은 原子들로 구성되였으며, 원자는 또 原子核과 電子로 구성되였고, 원자핵은 또 質子와 中子로 구성되였습니다. 현대 과학가들은 또 질자를 분해하여 跨克라는 립자까지 발견하였습니다. 이렇게 무한히 세분하여 내려 간다면 그 극한은 의심할바 없이 “無”에 도달하게 되며, 빈 공간만 남게 됩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말하는 原子요, 電子요, 質子요 하는 등등의 개념은 물질 성분 결구의 부동한 차원의 기본 단위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본 단위 본신의 크기가 그 기본 단위 활동 궤도의 크기에 대비하여 볼때, 몇만분의 일, 몇억분의 일, 혹은 그 보다도 더욱 미소합니다. 유관 자료에 의하면 태양 직경이 약139만키로, 지구 직경이 약1.3만키로,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도는 궤도의 직경은 약3억키로가 됩니다. 이 수치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형상적으로 비유해 볼수 있습니다; 가령 지구의 공전 궤도를 직경이 300m되는 올림픽 운동장 만큼 축소 한다면, 태양은 운동장 중앙에 놓인 직경이 약 1m 되는 고무풍선에 상당하며, 지구는 운동장 주위를 도는 직경이 약1cm 밖에 안되는 작은 유리알에 상당합니다. 보시다 싶이 지구 공전 구역의 절대 대부분 지역은 텅빈 공간이며, 거기에는 각종 우주 에네르기가 충만되여 있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시각을 바꾸어, 가령 물질의 기본원소인 원자를 올림픽 운동장 만큼 크게 확대 한다면 어떻게 될가요? 그때에 원자핵은 운동장 중앙에 놓인 축구공에 상당하며, 전자는 운동장 주위를 도는 유리알에 상당합니다. 가령 계속하여 또 원자핵, 질자, 跨克까지 차례로 운동장 만큼 크게 확대한다면 그 결론은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소위의 물질이란 기실 내부로나 외부로나 텅 빈 공간이며, 단지 여러가지 형식으로 조합된 에네르기가 충만되여 있을 뿐입니다. 물질은 우주의 한개 보통성원에 불과하며, 우주의 유일한 대표가 아닙니다. 물질이란 기실 우주 에네르기의 일종 표현일 따름이며, 단독으로 우주 본질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7, 유심론은 관념론이라고도 하는데, 유심론에서 말하는 정신에는 인간 정신외에 또 초인간 정신이란 것이 있습니다. 즉 하늘, 땅, 산, 강, 나무, 바위, 동물, …등 모든 자연성 물질에 모두 정신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서 유심론은 주로 신을 믿고, 종교신앙을 가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신을 믿고, 여러가지 종교신앙을 가지고 있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리하여 그 누가 경솔히 유심론이 이렇게 저렇게 틀린다고 말했다가, “그럼 지구의 70%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틀리는 관념으로 살아 간단 말인가?” 하는 식의 질문을 받게되면 답변이 궁굼할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정신이란 지능성 활동으로서, 의식적, 주관적, 지배적인 힘입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주관적으로 자기의 행위를 지배합니다. 사람에게는 또 신앙이 있습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정신이 아니라 사회적 한 부류 사람들이 공동으로 준수하는 집단적 정신입니다. 신앙에 예속되지 않는 정신은 성숙된 정신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신은 신앙에 의하여 자기의 가치를 사회에 나타냅니다. 정신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유물론과 유심론에서는 각기 부동한 견해가 있습니다. 유물론에서는 사람의 두뇌가 인체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계의 각종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접수한후, 일련의 사유와 실천의 가공과정을 거치여 정신이 산생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유심론에서는 정신이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며, 이 정신이 생명을 선택하여 사람을 이룬다고 주장합니다. 세계는 여러가지로 해석할수 있으며, 또 그 해석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운영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견해와 다른 남의 견해의 합리성을 볼줄 알아야 하며, 자기만 옳고, 남의 것은 틀린다는 식의 태도야 말로 기실 가장 틀리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이미 물질이란 고도로 조합화 된 형태성 에네르기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신도 고도로 지능화 된 비 형태성 에네르기라고 하는데 어째서 그러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가 “과학기술은 제일 생산력”이라는 등소평의 명구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력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생산력이란 원래 생산인, 생산공구, 생산대상, 이 세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하면서 등소평에 의하여 과학기술도 생산력으로, 그것도 일약 제일 생산력으로 승급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의 성공적인 조화의 결과입니다. 위대한 사상의 사회발전에 대한 결정적 역활, 선진 과학기술의 생산활동에서의 결정적 역활, 훌륭한 작전방안의 전투승리에서의 결정적 역활, 사람 지혜의 사람 행위에서의 결정적 역활, 이런것은 기실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확실한 현실입니다. 정신이 비록 사물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일을 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완전한 에네르기라는 것은 의심할바 없으니 구구히 더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이란 것도 기실 우주 에네르기의 일종 표현일 따름이며, 단독으로 우주 본질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8, 우리들이 생활하는 주위의 시공간은 우주 시공간의 일부분으로서,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우주 에네르기가 잠재하여 있습니다. 우주 에네르기는 자연성 에네르기와 사회성 에네르기의 구별이 따로 없이 혼돈의 형식으로 우주 공간에 충만되여 존재합니다. 그 누가 에네르기 원자재가 수요된다면 우주에는 그런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으니, 당신은 아무런 대가도 내지 않고 수요에 따라 그것들을 가질수 있으며, 또 자기것으로 만들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택과 학습의 방식으로 우주 에네르기 원자재를 받아들여, 사유와 실천의 방식으로 가공하여 고급적인 정신 에네르기로 승화시킨후, 마음의 창고에 저장 하였다가, 그것으로 다시 자기의 행위를 지도하여 더욱 고급적인 효과를 가져 옵니다. 사상은 우주 에네르기를 인입하는 대문입니다. 사유와 실천은 우주 에네르기를 정신 에네르기로 가공하는 공장입니다. 마음은 정신 에네르기를 저장하는 창고입니다. 사상을 전 방위로 해방하고, 사유와 실천을 만부하로 가동하고, 마음을 바다같이 넓혀 보십시요. 그러면 당신은 가장 충족한 우질 에네르기를 받아 드릴수 있고, 가장 고급적인 정신 에네르기로 가공해 낼수 있으며, 가장 충분한 정신 에네르기 완성품을 저장할수 있습니다. 당신이 용기가 부족합니까? 당신 주위 우주에 용기가 얼마든지 있으니 어서 받아 들여 용맹한 사람 되십시요. 당신이 유관 지식이 부족합니까? 당신 주위 우주에 유관 지식이 얼마든지 있으니 어서 받아 들여 박사가 되십시요. 당신이 신체가 허약합니까? 당신 주위 우주에 건강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니 어서 받아 들여 무병장수 하십시요. 당신이 지금 돈이 모자랍니까? 당신 주위 우주에 돈 벌 기회가 얼마든지 있으니 어서 그 기회 잡고 부자 되십시요. 당신 인생에서 무엇이 수요되면, 당신 주위 우주에는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어떤 에네르기가 있습니다. 관건은 당신이 진정 그것들을 가지려 하는가? 그것을 가지기 위하여 그 어떠한 노력도 하려 하는가? 하는 마음 가짐에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 그것들을 가지려고 마음 먹었고, 또 그것을 위하여 그 어떠한 노력도 하려 한다면 당신 주위 우주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않고, 당신이 요구하는 에네르기를 충족하게 공급하여 줍니다. 이렇게도 수지 맞는 좋은일에 체면 차릴 리유가 없습니다. 어쩌다 한번 온 인생인데, 풍요로운 인생 살아보고 죽기 위하여 대담히 우주에 향하여 욕심을 부려 보시지요.   9, 사람이란 생명과 령혼의 결합물이고, 사람의 죽음은 생명의 완성이요, 령혼의 승화입니다. 사람에게서 생명물질과 령혼은 엄연히 구별되면서도 완미하게 결합되여 있습니다. 변증법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대립물의 통일이지요. 생명물질은 주로 물과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핵산,…등 여러가지 유기물질과 여러가지 미량원소로 조합 되였는데, 사물 발전의 한단계 과정에 불과 합니다. 생명물질의 조합형식이나, 운동형식에 문제가 생기면 인체에는 소위의 장애가 생기는데 병에 걸렸다고도 합니다, 그 장애가 엄중해 져서 생명물질 운동이 중지된다면 그것이 곧 인체의 죽음입니다. 정신이란 인체 뇌물질의 주요 운동공능으로서 구체적으로 분석, 선택, 창조, 기억, 지령, 등 공능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특색적인 공능이 창조성 공능이고, 가장 중요한 공능이 지령성 공능입니다. 지령성 공능에는 인체 내부 운행에 대한 식물성 지령 공능과 인체 외부 행위에 대한 동물성 지령 공능, 두가지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뇌의 공능에는 또 喜怒哀樂, 驚恐愛慾, …등 감정성 공능이 있는데, 인체의 생명활동에 대하여 보조적인 작용을 합니다. 뇌가 직접 훼손을 당했거나, 인체 생명활동이 정지되면서 뇌에 대한 영양물질 공급이 중지 된다면 뇌의 죽음이 오는데, 인체의 내부나 외부에 대한 지령성 공능이 중지되므로 인체의 전반 생명활동이 중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물의 각도에서 해석한 사람의 죽음 현상입니다. 생명현상은 지구의 특수한 현상입니다. 리론상에서 생명현상이 지구에만 있는 유일한 현상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지구외의 다른 성구에서 생명의 자취를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 생명이 형성되는 과정은 단세포 물질이 고급적인 생명물질로 조합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에네르기가 생물로 조합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생명은 부모 생육의 방식으로 생명인자를 한세대 한세대 물려 주면서 이어져 내려 가는데, 정상적인 경우에 매 세대의 생명마다 모두 출생, 성장, 성숙, 로쇠, 사망, 등 과정을 거칩니다. 생명의 발전은 이 몇개 과정을 원만히 거쳐야만 비로서 자기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생명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죽음을 또 령혼의 승화라고 하였습니다. 령혼이란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람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주요하게 령혼이 있기 때문에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정도 부동하게 물질 재부와 정신 재부를 창조하게 되며, 자식들을 낳아 기르게 되며, 주의의 사람들과 여러가지로 인연을 맺고 정분을 쌓게 되며, 사회의 여기 저기에 자기존재의 흔적과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그의 령혼은 상관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고, 사회의 기록에 남게 되며, 그가 생전에 이룩한 어떤 성과에 남게 됩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그가 죽은 후에 그가 생전에 이룩한 그 무엇이 계속 사회와 가정에 유익하게 리용되는 과정에서 체현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사람이 죽은후에 령혼이 소실된 것이 아니라, 그 존재방식이 개인적인 방식에서 사회적인 방식으로 승화한 것입니다.   10, 인생의 도리가 천가지, 만가지 있지만 결국은 모두 죽음에 귀결됩니다. 그리하여 모종의 의미에서 인생이란 결국 죽음을 바라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고난의 행군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생명의 결속이라고 하기 보다, 생명의 완성이요, 령혼의 승화라고 해야 합니다. 자기가 지금 살아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직 진짜 삶이 아닌 것처럼, 자기가 이미 죽었음을 자각할수 있다면 그것 역시 진짜 죽음이 아닙니다. 우주의 본질은 결코 물질이 아닙니다. 정신도 아닙니다. 우주의 본질은 에네르기(能量)입니다. 물질이란 고도로 조합화 된 에네르기로서, 특정된 시공간에서 특정된 조건에 의하여, 각종 형식으로 조합된 형태성 에네르기 입니다. 정신이란 고도로 지능화 된 에네르기 입니다. 바로 각종 정보를 포함한 우주의 에네르기가 고급적인 뇌 물질의 고급적인 사유운동에 의하여 가공되여 나온, 비 형태성 에네르기 입니다. 우주의 99.99% 이상의 지역은 물질이 아닌 허허 時空間입니다. 時란 시작도 끝도 없이 영구함을 말하고, 空이란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끝없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주의 대부분의 시공간은 텅 비여 있는 것이 아니라, 기실 우주 에네르기로 충만되여 있습니다. 사람의 정신이란 지능성 활동으로서, 의식적, 주관적, 지배적인 힘입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주관적으로 자기의 행위를 지배합니다. 사람에게는 또 신앙이 있습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정신이 아니라 사회적 한 부류 사람들이 공동으로 준수하는 집단적 정신입니다. 신앙에 예속되지 않는 정신은 성숙된 정신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신은 신앙에 의하여 자기의 가치를 사회에 나타냅니다. 세계는 여러가지로 해석할수 있으며, 또 그 해석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운영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견해와 다른 남의 견해의 합리성을 승인할줄 알아야 하며, 자기만 옳고, 남의 것은 틀린다는 식의 태도야말로 기실 가장 틀리는 태도입니다. 사상을 전 방위로 해방하고, 사유와 실천을 만부하로 가동하고, 마음을 바다같이 넓혀 보십시요. 그러면 당신은 가장 충족한 우질 에네르기를 받아 드릴수 있고, 가장 고급적인 정신 에네르기로 가공해 낼수 있으며, 가장 충분한 정신 에네르기 완성품을 저장할수 있습니다. 당신 인생에서 무엇이 수요되면, 당신 주위 우주에는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어떤 에네르기가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 그것들을 가지려고 마음 먹었고, 또 그것을 위하여 그 어떠한 노력도 하려 한다면 당신 주위 우주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않고, 당신이 요구하는 에네르기를 충족하게 공급하여 줍니다. 어쩌다 한번 온 인생인데, 풍요로운 인생 살아보고 죽기 위하여, 대담히 우주에 향하여 욕심을 부려 보시지요.   (전부 끝, 스크랩 불허)   
178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제사편 댓글:  조회:7379  추천:1  2013-07-01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세번째 부분: 제사(祭祀)   유래(由來): 제사의 본의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거나, 불가능한 어떤 소기의 념원의 실현을 위하여, 제물을 차려놓고, 의식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으로는 의지 교류가 불가능한 초자연적, 초인간적 대상과 의지 교류를 시도함으로써, 그들의 소위의 초인간적 능력을 리용하려는 문화적 수단이였습니다. 제사문화는 이미 몇천년을 내려 오면서 우리 인류의 문명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으며, 과학이 세계를 통치하는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막강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인간능력의 보충수단이며, 신앙과 정감의 표현입니다. 중국 西周시기의 金文에서는 제사가 “孝”로 표시되여 있습니다. 례를 들면 《追簋》에 “用享孝于前文人”이란 문구가 있고, 《酒诰》에 “用孝养厥父母”란 문구가 있으며, 《文侯之命》에 “追孝于前文人”이란 문구가 있는데, 모두 제사를 뜻합니다. 이로부터 ”孝”의 사상이 초기에는 고대의 제사활동에서 기원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일찍이 上古 殷商시기에 중국에서는 천지를 숭상하고, 선조를 숭상하는 원시종교가 성행하였었는데, 그 당시 제사 대상이 주요하게 일월성신, 나라강산, 선조선왕, 등이였습니다. 춘추말기에 와서 천지를 숭상하는 의식은 로자에 의하여 道敎로 발전하였고, 선조를 숭상하는 의식은 공자에 의하여 儒敎로 발전하였습니다. 유교는 또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을 핵심으로 孝道사상을 창립하고, 발전시키여, 유교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체계적으로 제고시켰습니다. 유가사상이 보급되면서부터 人文 제사의 주요 대상이 선조와 사망한 부모로 되였습니다. 제사는 선조와 사망한 부모들과 마음으로 교류하는 의식입니다.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이 있어야 제사가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자고로 제사에 많은 번쇄한 규례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목적이 바로 사람들이 제사를 중시하고, 정성을 다 하게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우리들이 부모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오늘 부모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기 보다는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를 지낼때에도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조상과 부모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가속 관념과 정감의 뉴대를 건실하게 할수있으며, 또 그로부터 조상 음덕의 혜택과 유익한 계시를 받을수 있으며, 후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수 있습니다. 민족의 전통을 이어가고, 가문의 뉴대를 이어가기 위하여 제사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의가 없는 제사는 지내지 않은편이 좋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 보아도, 시작을 알수없이 아득히 먼 옛날, 지구에 생명인자가 생기면서 부터, 어류, 류인원, 현대인, 이렇게 기나긴 과정의 생명진화를 경과하여 왔으며, 우리의 선조들이 유구한 세월을 통하여 험악한 환경에서 완강히 생존하시면서 한세대 한세대 간고하게 이으시여 당신에 까지 내려온 것이며,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를 낳으시고, 전부의 심혈을 쏟으여 어렵게 키우시여 오늘에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자기 생명의 존재만 알고, 선조와 부모의 은덕을 모른다면, 그의 생명은 아직 동물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문명 생명으로서, 현명하고 공덕이 많으셨던 우리의 조상들과 陰德의 뉴대가 이어질수 없으며, 다재다난한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생전에 쌓으신 공덕이 후대들에게 직접적으로 물리적으로 혜택을 주는 것을 陽德이라고 하고, 간접적으로, 정신적으로 두고두고 혜택을 주는 것을 陰德이라고 합니다. 유물의식으론 물론 해석이 안 되죠. 조상 음덕의 혜택을 얼마만이라도 받으시려거든 조상과 부모를 숭상하고, 그들과의 정감뉴대를 건실하게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조상 음덕이란 없다고 의심하십니까? 녜! 그럼 정말로 없습니다. 조상 음덕이란 있다고 믿으십니까? 녜! 그럼요, 확실히 있습니다.   분류(分类):조선족 제사는 크게 네가지 류형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1)、상중제(喪中祭); 바로 장례기간과 그후 3년 탈상하기전의 제사활동을 말합니다. 례하면 成服祭, 成墳祭, 虞祭, 安神祭, 卒哭, 小祥, 大祥 등입니다. 그외에도祔祭, 禫祭, 吉祭 등이 있다 하지만, 중국 조선족 장례풍속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2)、시제(时祭); 冬至에 시조의 제사를 지내고, 立春에 고조이상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며, 매계도 중간달(음력 二월、五월、八월、十一월)에 고조까지 선조들의 제사를 지냅니다. 오늘 시제라고 할수 있는 행사는 정월 초하루날의 茶禮를 들수 있고, 기타의 시제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3)、기제(忌祭); 부모가 돌아가신 날을 忌日이라고 하는데 小祥(돐제)과 大祥(삼년제)을 포함하여 매년 이날에 지내는 제사가 곧 기제입니다. 지금 대상후의 기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4)、묘제(墓祭); 원래는 청명, 단오, 추석, 중양에 산에 가서, 묘자리가 있는 모든 선조와 부모의 묘를 다듬고, 묘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은 청명과 추석에만 산에 가서 묘제를 지냅니다. 그외에 祠堂祭, 禰祭, 練祭, 年中節祭 등이 있었다는데, 우리 중국 조선족 장례풍속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금 조선족 제사풍속은 보존된것이 많지 못하며, 순서와 내용은 지방에 따라 많이 조절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볼수 있는 기타의 제사들로는 또 生辰祭, 祀甲祭, 石物祭 등이 있습니다.   지방(纸榜): 사진기술이 없었던 과거에는 망자의 遺像을 만들수 없었으므로 사당에 조상들의 位牌를 모두 나무로 깎아 만들어 모셨습니다. 지방은 위패의 림시 대용품으로서 매번 제사에 즈음하여 종이를 접어 만들었는데, 제사가 끝나면 살으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중국 조선족 불운의 이민사에는 중국에 이민 와서 사당을 짓고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면서 뜨르르하게 사신 대부호 가문은 없었습니다. 또 있을수도 없었습니다. 단지 평소에 집에 자그마한 祠龛이나 丧门을 만들어 놓고 부모의 神位를 모시다가, 제사가 되면 위패는 모두 지방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류별에 따른 지방의 서식표 类   别 格    式 고조할아버지 顯高祖考 學生府君 神位 고조할머니 顯高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증조할아버지 顯曾祖考 學生府君 神位 증조할머니 顯曾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할아버지 顯祖考 學生府君 神位 할머니 顯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아버지 顯考 學生府君 神位 어머니 顯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남편 顯辟 學生府君 神位 안해 亡室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백부 顯伯父 學生府君 神位 백모 顯伯母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형 顯兄 學生府君 神位 형수 顯嫂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동생 亡弟 學生 (姓名) 神位 아들 亡子 秀才 (姓名) 之靈 父生前职称 顯考 (职称) 神位   지금 이 풍속은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도리대로 말하면 지금은 제사에서 유상을 쓰기 때문에 지방이 필요없지만, 전통문화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지방을 리용한다면 그로서의 리유가 서는 것입니다. 전통 지방의 서식에서 조부 조모의 신위를 한개 纸榜에 써야 할 경우에, 북쪽을 향하여 종이를 놓고, 서쪽에 조부를, 동쪽에 조모의 신위를 씁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지방에 성명을 쓰지 않지만 지금 대다수 유가족에서는 고인의 성명을 지방에 써 넣을것을 요구하니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제사상(祭桌):제사에서 먼저 령좌를 앉히는데 보통 북쪽에 앉히며, 그 원인은 방위에서 남쪽이 양이 되고, 북쪽이 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북쪽이 아니면 북쪽이라고 여겨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아래의 제사상 진설원칙을 장악할수 있습니다. 령좌를 앉히고 그우에 신주 혹은 지방을 모시고, 그 앞에 제사상을 차립니다. 령좌와 제사상을 한상에 할수도 있습니다.   제상진설 원칙;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李枾.   진설원칙 해설; 동쪽은 左陽이요, 서쪽은 右陰이라, 익은 음식은 양이니 좌편에 놓고, 생 음식은 음이니 우편에 놓으며, 과실은 높은곳에 달리니 먼저 놓고, 토종따위는 보통 땅밑에 있으니 후에 놓으며, 육산물은 땅위에 있으니 먼저 놓고, 해산물은 물밑에 있으니 후에 놓으며, 건조한건 양이니 좌편에 놓고, 습윤한건 음이니 우편에 놓습니다.   제상진설 분류; 신위앞 첫줄에는 밥과 국을 놓고, 숟가락, 저가락, 그리고 술잔을 놓으며, 두번째줄에는 반찬류를 놓고, 세번째 줄에는 어육류를, 네번째 줄에는 과일류를 놓습니다.   제물의 개수는 일률로 짝을 지우지 않고 단수로 합니다.   제사순서(祭祀程序):   진설(陳設) (1) 먼저 령좌를 앉히고 신주를 모십니다. (2) 령좌앞에 제사상을 진설합니다. (3) 제사상앞에 모사, 향안 등을 놓습니다. (4) 자손들이 제사상 왼편에 차례로 섭니다.   강신(降神) 참신(參神) (1) 일동이 곡을 시작합니다. (2) 제주(장손)가 향안 앞에 꿇어 앉아 향을 피웁니다 (3) 제주가 손을 씻고 향안 앞에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술을 반잔쯤 따릅니다. (5) 제주가 세번 나누어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6)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7) 집사가 문을 조금 열어 강신을 맞이합니다. (8) 제주이하 자손들이 함께 삼배하니 참신입니다.    초헌(初獻) 독축(讀祝) (1) 제주(초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제주는 반잔만 모사에 붓고 술잔을 신주옆에 놓습니다. (4) 집사가 메밥두껑을 열어 놓습니다. (5) 제주는 조금 물러나 머리 숙이고 꿇어앉아 부복합니다. (6) 축관이 축판을 듭니다. (7) 제 자손들이 모두 꿇어 앉아 부복합니다. (8) 축관이 축을 읽습니다. (9) 축이 끝나 일동 일어나고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10) 집사가 남은 반잔의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아헌(亞獻) (1) 주부(아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주부는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종헌(終獻) (1) 근친(종헌자)이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근친이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첨작(添酌) (1) 종헌이 끝난후 또 헌작자가 있으면 첨작이라 합니다. (2) 첨작은 많아서 석잔을 초과하지 않습니다. (3) 첨작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5) 첨작자가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합문(閤門)유식(侑食) (1) 일동이 곡을 그칩니다. (2) 메에 숟가락을 꽂고 반찬에 젓가락을 놓습니다. (3) 일동이 문밖에 나가 남녀가 서로 마주하고 섭니다. (4) 문을 닫고 아홉 숟가락 정도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계문(啓門) 진차(進茶) (1) 축관이 기침을 세 번하고 문을 엽니다. (2) 집사가 국을 내리고 숙주(냉수)를 올립니다. (3) 엄숙히 잠깐동안 묵도합니다.   사신(辭神) 철찬(撤饌) (1) 집사가 수저를 내리고 반개를 덮고 물러납니다. (2) 일동이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3) 신주를 내립니다. (4) 제사상을 물리고 축문과 지방을 살읍니다.   지금은 이런 제사순서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으나, 한번 저세상 부모님에게 지극한 마음을 표시하고 싶으신 분들은 제사소물을 풍성히 차리기 보다, 이런 제사 원칙들을 구체적으로 알아 두었다가, 혹은 지도를 받으면서 라도, 한번 제대로 되는 제사를 지내 보는 것도 바람직 합니다.   우제(虞祭):장례가 끝난후의 첫번째 제사인데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가 있습니다. 우제는 망령이 금방 신체를 잃고 몹시 불안해 하므로 련속 세번 제를 지내여 안신시킨다는 뜻입니다. 우제는 일반적으로 집에서 지내는데 초우제는 장일 당날에 산을 내린후 해가 지기전에 지냅니다. 초우제를 지내고 상가에서는 모두 상복을 벗습니다. 재우제는 장일후의 첫번째 柔日(乙、丁、己、辛、癸),즉 초우제의 이튿날, 혹은 사흩날에 지내고 삼우제는 재우제후의 첫번째 刚日 (甲、丙、戊、庚、壬)즉 재우의 이튿날에 지냅니다. 지금 장례후 한번 안신제 지내는 것은 보편 현상이지만, 련속 세번 우제를 지내는 경우는 극히 드믑니다.   안신제(安神祭): 길림성 연변지구 조선족 장례풍속중의 안신제는 전통 우제와 조금 구별됩니다. 전통 안신제는 장일 이튿날 다시 산에 올라 새 봉분앞에서 지내는데, 냄비에 기름떡 세개를 구우면서 기름냄새를 피운다음, 기름떡이 익으면 제단에 올려놓고, 상주를 비롯하여 일동이 다 같이 세번 절을 합니다. 전통 안신제에서는 술을 붓지 않고 곡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민족은 고려때에 불교를 숭상하면서 부터 제사에서 의례 향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이민 들어와서 백성들은 향을 얻기 어렵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가문에서부터인가 시작하여 기름 냄새 피우는 것으로 향 냄새를 대신하게 되였었는데, 그것이 전해져 내려 오면서 오늘에는 이미 우리 연변의 안신제 문화의 독특한 내용으로 고착되였습니다. 지금도 산촌에서는 이 풍속이 여전히 보존되여 있는데, 안신제사의 의미는 우제와 기본상 같습니다. 지금 성시의 장의관에서는 유가족들을 위하여 뒤울안에 많은 제단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유체를 화장한후 유가족과 손님들이 다 함께 소위의 안신제를 지내는 것으로 장례를 끝냅니다. 고인의 띠에 해당되는 제단을 찾아 골회함, 혹은 유상을 신주로 하고, 제단에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상주로 부터 가문의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를 하며, 손님들도 모두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사가 끝난후, 불을 피워 기름내를 피우면서, 혼 부른 옷과 상장 등을 모두 살읍니다. 소위의 안신제가 끝난후 손님들을 모두 식당에 모셔 식사시키는 것으로 장례행사가 전부 끝납니다.   소상(小祥):돐제가 바로 소상입니다. 사망일 전날 저녁 해지기전에 집에서 석전제를 지내고 사망일 자정에 새벽제를 지내고 사망일 낮에는 산소에 가서 묘제를 지냅니다. 지금도 이 습속은 의연히 성행하며 절차는 경우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대상(大祥):두돐제가 바로 대상인데 삼년제 라고도 합니다. 제사의 절차는 기본상 돐제때와 같습니다. 삼년제가 지나면 혼백을 살으거나 묻어 버리고 탈상합니다. 몽상을 벗었다고도 합니다. 지금도 이 습속은 여전히 성행하며 절차는 경우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수효(守孝): 중국에는 고대로 부터 “三年守孝”라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사망하면 장례를 치른후에 아들은 여전히 상복을 벗지 못하고 반드시 삼년동안 집에 머물면서 부모를 추모해야 하였습니다. 이 삼년 수효기간에는 결혼을 하지 못하며, 오락을 하지 못하며, 연회에 가지 못하며, 고기를 먹지 못하며, 부부는 한자리에 들지 못하며, 가속에서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삼년수효의 상관 규정에 대하여 력대의 황제들까지도 감히 함부로 위반하지 못하였으며, 관청에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벼슬을 사임하고 집에 와서 삼년수효를 마친 후에 다시 복직해야 하였습니다. 林语堂이 쓴 《苏东坡传》에서는 북송의 문학대가인 소동파가 부모의 사망때문에 선후하여 두번이나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 돌아와 삼년수효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만큼 삼년수효 규례는 중국사람들의 심중에 天規처럼 뿌리 박혀 있습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에서 상주의 삼년 복상기 제도도 중국의 삼년수효 규례에 기초한 것으로서 여전히 그 뿌리가 깊습니다. 이미 서거한 조선의 김정일 위원장도 부친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후 온 나라국민과 함께 어렵게 삼년수효를 마친 후에야 정식으로 위원장직에 올랐던 것입니다. 이 삼년수효와 상관하여 《论语·阳货篇第十七》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宰我问:“三年之丧,期已久矣。君子三年不为礼,礼必坏;三年不为乐,乐必崩。旧谷既没,新谷既升,钻燧改火,期可已矣。”子曰:“食夫稻,衣夫锦,于汝安乎?”曰:“安。”“汝安,则为之!夫君子之居丧,食旨不甘,闻乐不乐,居处不安,故不为也。今汝安,则为之!”宰我出。子曰:“予之不仁也!子生三年,然后免于父母之怀。夫三年之丧,天下通丧也,予也,有三年之爱于其父母乎?” 우리말로 해석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재아문,“삼년상 기한이 너무 깁니다. 군자가 삼년동안 례를 차리지 않으면 례를 버리게 되고, 삼년동안 례악을 울리지 않으면 례악을 망치게 됩니다. 묵은 곡식을 다 먹으면, 새 곡식을 받아 들여야 하고, 불씨도 해마다 바꿔야 하는데, 일년이면 충족하다고 봅니다.” 공자왈,“이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니 네 마음이 편안 하드냐?” 재아왈,”물론 편안하였지요.” 공자왈,“네 마음이 편안하였다면 그렇게 해 보아라. 군자는 상례기간에 무슨 음식 먹어도 맛이 없고, 무슨 음악 들어도 기쁘지 않고, 앉으나 서나 불안하니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니라. 너는 그래도 편안하였다 하니 그럼 너 맘대루 해 보려무나.” 재아가 나간후 공자왈,“저애는 너무 인의롭지 못하구나. 자식들은 태여나서 삼년후에야 부모품에서 떨어지니라. 그러니 삼년상 치르는 것은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니라. 저애도 삼년동안 자기 부모한테서 사랑을 받았으련만?” 이상의 론어 기록에서 알수 있는바 전통적인 삼년수효 규례는 공자의 전부터 이미 있었으며, 공자는 단지 그 규례의 합리성을 진일보 강조하였고, 자식으로서 부모의 바다같은 은정에 전부 보답할수는 없지만, 자기를 낳아서 걸음마 타기까지의 약 삼년의 사랑만에라도 보답하는 척 하여 성의라도 표시해야 하는것 아니냐? 하는 뜻이였습니다. 吉林省长春息园公墓에는 “孝子坟”이란 묘가 있는데,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清末光绪년간에 신경(지금의 장춘)에는 王梦醒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모친이 사망하자 장례를 치르고, 묘옆에 움막을 지어 놓고, 상복을 입은 채로 수효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그는 익은 음식을 먹지 않고 생쌀만 먹었는데, 아침에 한줌의 생쌀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키면, 그것이 온 하루의 끼니로 되였습니다. 당시에 한 부대의 장관이 그와 절친한 사이여서, 늘상 그한테로 와서는 한담하고 돌아가군 하였는데, 그가 道敎에 대하여 상당히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은 점차 그를 살아있는 신선으로 여기면서 그의 모친 묘에 제사 지내 주고는 동전과 지전들을 놓고 가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따위 돈들을 상관하지 않으니, 결국에 류랑애들이 그 돈을 모두 주어 가군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많은 재부가 있는 걸로 알고 한 부랑뱅이가 그를 찾아 와 목에 칼을 들이 대며 돈을 내 놓으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가 돈을 내놓지 못하자 그 부랑뱅이는 칼로 그의 목을 찔러 놓고 도망쳤습니다. 이튿날 경찰이 왔을 때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누구의 짓이냐?고 물으니 그는 그저 고개만 저었습니다. “그럼 하늘이 한 짓이란 말이냐?” 경찰이 짜증내며 물으니 그는 대뜸 고개를 끄덕이였습니다. “하늘이 한 짓이라면,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 자를 잡아서 징벌할 방법이 없구나.” 경찰은 수사를 걷우고 말았습니다. 1934년에 그는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그의 모친묘에 합장시켜 주고, 그 묘를 “孝子坟”이라고 이름을 달아 주었습니다. 일본이 동북을 점령한후, 신경을 수도로 위만주국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시내 확장건설을 하면서 “孝子坟”을 옮기려 하였는데, 누가 묘를 파면 누가 쓰러지군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믿지않고 작탄으로 폭팔시키려 하여도 작탄이 폭팔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선통황제 부의까지 동원하여도 별 방법이 없었답니다. 그리하여 “孝子坟”이 령험하다는 소문이 전 동북에 퍼지게 되여, 많은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여기를 찾아서는 향을 태우고 제사 지내고는 돌아 갔다고 합니다. 1958년 9월, 장춘시 인민정부에서는 “孝子坟”을 잠시 다른곳에 옮겼다가, 50년이 지난 2008년에 长春息园公墓에 정식으로 자리를 정하고, 지방 문물로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청명제(清明祭):매년 청명, 단오, 추석, 중양이면 산에 올라 묘를 다듬고 제를 지내는데 지금 단오와 중양에는 산에 가지 않습니다. 청명때에는 삽 한자루 가지고 가는데 묘소에 이르러 먼저 후토를 찾아서 산신에게 제를 지냅니다. 그 다음 삽으로 가볍게 봉분을 보수하고 다듬는데 속칭 가토라고도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다음 제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가문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합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지금 이 습속들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습니다. 성진에서 납골당에 골회함을 보관한 사람들은 이날 골회함을 찾아 내와서는 산비탈 공용 제단에 가서 제사 지내는데 절차들은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추석제(秋夕祭):추석에는 낫 한자루 가지고 산에 가는데 봉분우에 자라난 풀들을 깨끗이 베여 버립니다. 이것을 속칭 벌초라고도 합니다. 제사 지내는 절차는 기본상 청명제때와 같습니다. 지금 이 습속들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데 절차들은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후일계속 - 스크랩 불허)
177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안장편 댓글:  조회:6139  추천:1  2013-06-25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두번째 부분: 안장(安葬)   굴광(掘圹):굴심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묘혈을 파는 절차로서 전통적으로 마을의 喪與契 치상조직에서 책임지고 해결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은 주로 고려때 부터 역술풍수에 대하여 독특한 체계를 갖추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고려에서는 道詵국사가 풍수주맥을 이루고 있었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그 주맥을 無學대사가 계승, 발전시키게 되였습니다. 조선태조 이성계의 전주 이씨 가족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이성계의 고조부 穆祖가 그의 부친 陽茂장군이 사망하자 산소를 쓸 명당자리를 찾아 고려팔도를 돌아 다니던 중, 강원도 한지방에서 한 도승의 혼자 하는 말에서 계시를 받고, 5대안에 가문에서 대왕이 나올수 있다는 명당자리를 발견하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소 백마리로 開土祭를 지내고, 금으로 만든 관을 써야 한다는 부가 조건이 있었습니다. 목조는 어려운 살림 형편에서도 지혜를 발휘하여, 白牛(흰소) 한마리를 얻어서 百牛(백마리 소)를 상징시켜 잡아서는 開土祭를 지냈고, 금빛나는 귀리짚으로 관을 엮어서는 금관을 상징시켜 부친을 모시고 그곳에 정중히 묻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오늘 한국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하사전리에 있는 준경묘(濬慶墓)입니다. 그때로 부터 제 5대에 와서 전주 이씨 가문에는 과연 이성계라는 비범한 인물이 나타나 고려의 최고 장군자리까지 올랐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을 세우고 태조가 되였던 것입니다. 그후 이씨 조선은 27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518년간 유지되였습니다. 오늘에 와서도 한국에서는 중대한 선거에 즈음하여 일부 候選人들이 풍수인을 내세워 명당자리를 찾아서는 부모나 조상의 묘를 이장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민족은 지금도 음택의 풍수를 상당히 중시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에서 장지 선택에는 엄격한 풍수학적 표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지를 “山环水抱”의 양지쪽 비탈로 선택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북쪽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山环), 동남쪾은 하천에 안겨 있는(水抱) 양지쪽 룡맥부위에서 합당한 자리를 골라 墓穴로 합니다. 풍수학 각도에서 묘의 왼쪽 산맥을 靑龍이라고 하는데 官運을 상징하고, 묘의 오른쪽 산맥은 白虎라고 하는데 財運을 상징하며, 묘의 서북쪽, 즉 묘뒤에 둘러있는 산을 玄武라고 하는데 陰德을 상장하고, 묘의 동남쪽, 즉 묘앞의 개활지역을 朱雀이라고 하는데 人爲, 즉 사람의 노력을 상징하며, 주작을 가로질러 하천이 흐르는 것을 명당자리의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으로 인정하는데, 그것은 물은 천지의 氣를 고착시키는 공능이 있고, 생명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장지가 결정되면 그 옆에 후토(산신에게 제 지내는 제단)를 만들고 술과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고 먼저 산신에게 제를 지냅니다. 그 다음 묘혈의 좌향을 정하고 굴심을 시작하는데, 일반적으로 묘혈의 길이 중간 연장선이 맞은켠 동남방향으로 멀리 보이는 제일 높은 산봉우리와 일직선을 이루도록 합니다. 묘혈은 일반적으로 길이 2m, 너비 60cm, 깊이 80cm 좌우로 합니다.   상여(丧舆):상여는 장례에서 쓰는 運柩 공구로서, 중국의 옛 문헌 《禮記雜記》에서는 柩輿, 喪車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고, 주희의 《家禮》에서는 靈車로 기록되여 있으며, 우리민족의 《四禮便覽》, 《喪禮備要》등에서 처음으로 喪輿라고 기록되여 있습니다. 李縡의 《四禮便覽》에 따르면, “大與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하기 힘들므로 喪與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쓰여 있습니다. 《世宗實錄》, 《純宗國葬錄》에 따르면 大與는 국장에 사용되는 기구였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喪與란 기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大與를 소형화한 小與인 셈입니다. 그런데 《世宗實綠》에서도 大與로 기록되여 있는걸로 미루어 보아, 喪與는 조선중기 이후에 와서야 산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장례제도를 실행하였는데, 마을마다 丧舆契와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집체로 자금을 내여 丧舆를 만들어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편벽한 곳에 상두막을 지어놓고 보관하였으며, 도감을 한 사람 선발하여 마을의 장례행사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일단 마을에서 사람이 죽게되면 굴심을 할 사람과 상여, 그리고 상여를 멜 사람들까지 통일적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은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 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족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 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은 종래로 장례를 한 가정의 사사로운 일로 여긴것이 아니라, 마을을 단위로 하는 한 공동체의 공동한 대사로 여기고 공동히 협조하여 처리하였습니다. 우리민족 상여문화에서는 우리민족 전통 생사관이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아래에 여섯개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상여결구, 둘째; 꼭두각시, 세째; 채색그림, 넷째; 상여놀이, 다섯째; 상여행렬, 여섯째; 상여소리 등입니다.   첫째; 상여결구: 아래에 상여의 상관 문제에 대하여 길림성 룡정민속박물관에 수장된 조선족 상여를 모델로 설명을 드립니다. 조선족 상여의 주체는 목제 구조로서, 제조 공예상 쇠못을 쓰지 않으며, 기본상에서 무음식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1,상여틀; 굵기가 6×18㎝이고, 길이가 5m인 두개의 방목으로 너비가 60㎝의 담가 모양의 틀을 짭니다. 상여틀 밑에 다섯개, 혹은 여섯개의 멜채를 같은 거리로 가로 놓는데, 매 멜채의 길이는 2m좌우입니다. 출상할때 관을 상여틀 중간에 올려 놓고, 매 멜채의 량쪽 말단에 붉은 천띠를 매여 전체 멜채를 련결하며, 상여꾼들이 상여를 멜대 붉은 천띠를 어깨에 올려놓고 두손으로 앞의 멜채를 잡습니다. 한개 멜채 량옆에 상여꾼을 각기 한명씩 둘수도 있고 두명씩 둘수도 있습니다. 2,운각; 운각이란 관을 보호하는 장치로서, 상여틀 위의 관의 네변에 각기 높이 60㎝의 기둥을 세우고, 규격이 250×60㎝인 네모틀을 받들게 하며, 네모틀 앞뒤에 각기 반경이 50㎝인 반원형 나무판자를 고정시켜 룡수판과 룡미판으로 하며, 앞뒤 룡수판과 룡미판을 세개의 나무오리로 련결시켜 고정시키고, 그위에 천, 혹은 나무 합판으로 덮어 운각지붕으로 하며, 운각지붕 중간에 두마리의 운룡이 머리를 앞뒤로 서로 몸체를 꼬고있는 조각을 고정시켜 놓습니다. 3,陽蓋帳; 양개장은 천으로 하는데, 색갈은 임의로 선택할수 있고, 양식은 임의로 장식할수 있으며, 3m길이에 1.5m너비로 하며, 운각의 앞뒤에 각기 X형으로 대나무 오리를 고정시키고 그위에 양개장을 펼쳐서 고정시킵니다. 상여의 양개장은 해볓과 비물을 막는 작용을 하며, 또 가마의 화개처럼 고귀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조선족 상여의 결구를 놓고 볼때 의심할바 없이 고대 왕공귀족들이 출행할때 쓰는 가마를 모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마는 앉음식이지만 상여는 누움식이므로 규모상 상여는 가마보다 크고 깁니다. 사람들은 상여를 특별히 화려하게 장식하는데, 서민으로서 한평생 고생만 하면서, 평소에는 가마에 앉아 볼 형편이 못 되였지만, 죽어서 나마 한번 가마에 모시여 귀족의 신분으로 저승에 보냄으로써, 청빈하게 죽은 망혼을 위로해 주려는 뜻도 있습니다.   둘째; 꼭두각시: 조선족 상여에는 여러개의 꼭두각시를 달아 놓았는데, 조선족 전통 나무인형 조각예술이 바로 이 꼭두각시에서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상여 꼭두각시의 작용은 주로 두개 부류로 나눌수 있습니다; 1,상징성, 례하면 염라왕, 신선, 운룡…등입니다. 2,실용성, 례하면 새모양의 걸개…등입니다. 상여 꼭두각시의 형태는 주로 세개 부류로 나눌수 있습니다; 1,인물형; 례하면 염라왕, 명부사자, 악공, 시중꾼 동자…등입니다. 2,동물형; 례하면 운룡, 봉황, 천학, 神鳥…등입니다. 3,식물형; 례하면 목란꽃, 국화꽃, 매화꽃, 련꽃…등입니다. 조선족 상여 꼭두각시는 주로 네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저승길을 인도하여 망령이 기로에 잘못 들어서는 것을 방지, 2,망령을 보호하여 사악한 기운의 침습을 방지, 3,망령을 안무하여 공포심리와 불온정 정서를 극복. 4,망령을 시중들어 순리롭게 황천 목적지까지 도착. 우리의 선인들은 사람이 죽어도 령혼은 살아 있다고 믿었으며, 사망이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고, 저승이란 령혼들이 모여 사는 다른 형태의 세계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세째; 채색그림: 조선족 상여 운각의 네면에는 다채로운 채색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주요하게 목란꽃, 국화꽃, 매화꽃, 련꽃 등 四君子 꽃도안입니다. 이것으로 사람이 죽은 후에 더욱 고귀해 지고, 더욱 행복해 지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조선족 상여 룡수판에는 일반적으로 룡머리 도안이 그려져 있고, 룡미판에는 일반적으로 어룡, 혹은 학의 도안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어룡 도안에는 “魚化龍”이란 글이 씌여져 있는데, 중국《后汉书-李膺传-登龙门》에 기재된 잉어가 룡문을 뛰여 넘고 룡으로 되였다는 전설을 뜻하는듯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인들은 죽어서라도 출세하고 번신할것을 꿈꾸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족 전통 리념상에서 학은 장수를 상징하는 길조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상징하는 조선족 상여에도 학의 도안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선인들이 죽음을 일종의 장수, 혹은 영구한 장수로 인정하였다는 것으로 추정할수 있습니다.   넷째; 상여놀이: 1,상례놀이 역사;   장례식 때 歌舞를 행하는 풍습은 일찍이 《隨書-高句麗傳》에 기재되여 있는데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초종때에는 울며 곡하고, 출상때에는 북치고 춤추며 노래하면서 죽은이를 떠나 보낸다)" 고 하였습니다. 또 이같은 역사서의 기록뿐만 아니라 통구의 무용총(舞踊塚)이나 안악3호분 벽화의 악대행렬도와 무악도(舞樂圖), 그리고 팔청리(八淸里) 벽화고분의 잡기도 등에서도 장례의식에 가무나 잡기, 주악으로써 장송(葬送)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도 문무왕 13년(673년) 김유신을 장사지낼 때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내 주악하며, 금산원(金山原)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또 일본서기에도 가무로써 장례의식을 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가무가 죽은 사람에 대한 장송의례로서 쓰여진 것은 유교식 상례 이전부터 자리잡혀 있었습니다. 이같은 유습은 조선시대까지도 계속되여 당시 유학자들의 논란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성종(成宗) 5년(1474년) 정월조에는, 성악(聲樂)과 배우백희(排優百戱)로써 이른바 시체놀이(娛尸)하는 삼남지방의 풍속을 예조에서 논단할 것을 상계(上啓)하고 있고, 성종 20년(1489)에는 부녀의 장례에 시체놀이(娛尸)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유시를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례에서 시체놀이(娛尸)하는 풍습은 전형적인 유교사회로 일컬어지던 조선중기까지도 계속 유지되였습니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풍습이 상여놀이로 발전하여 전해지면서, 각 지방마다 장례가 있게되면 나름대로 상여로 놀이를 벌렸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해마다 지방에 따라 상여축제가 열리는데, 이미 전통적인 문화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각 팀에서는 특제한 상여를 메고 집체적으로 여러가지 정채로운 기교를 표현함으로써 죽음의 공포의식에서 벗어나, 죽음의 례사로움과 오락성, 그리고 죽음과 생활과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합니다. 죽음에 대한 존중은 기실 삶에 대한 중시로 되며,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로 됩니다. 사망한 부모님들을 미안하게 저승으로 보내신 분들, 그러시고 서도 자기의 소위 찬란하고 가치있는 삶을 꿈 꾸신다면, 어서 깨달으시고 부모님들 망령앞에 진심으로 참회해야 할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식들의 리해와 존중, 그리고 자신과 자식들 사업의 발전을 얻을수 있습니다. 자식이란 기실 부모와 조상들이 당신에게 베푸시는 음덕의 충실한 집행자입니다. 문화적 관점에서 부모와 조상들이 구천에서 당신에게 내리시는 벌책과 은혜는 대체로 자식들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입니다.   2,상여놀이 내용; 옛날에는 호상(好喪)시에 이른바 “상여놀이”라 하여, 출상 전날 밤에 상주의 친구들이 빈 상여를 메고 “상여소리”를 하면서, 북을 치고 춤을 추면서 동리를 돌아다니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출상 전날 밤에는 또 동리사람들이 모여서 오락을 벌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비통해 하는 상주를 웃기기 위하여, 주로 재담이나 노래, 그리고 우스운 병신춤을 추기도 하였습니다. 상여놀이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습니다. 례로서 황해도에서는 북과 장구를 치면서 상여를 메고 망자의 아들 딸의 집 등을 돌고,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아들 딸, 친척, 친구의 집 등을 도는데, 골목길에 횃불을 달아 놓아 골목길을 훤히 밟게 합니다. 그런데 상여가 공동우물을 지날 때에는 우물을 덮고 지나가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을을 돌아다닐 때 상여 뒤를 따라가던 유족들은, 자기 집에 다가가면 미리 가서 상여를 맞이하고, 제물을 차려놓고, 곡을 하며, 상여꾼에게 술을 대접합니다. 경상도에서는 집밖에 넓은 터나, 집 마당에서 북을 치고 〈상여소리〉를 하는가 하면, 전라도에서는 상여꾼들이 출상연습을 겸해서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놀이에서 〈상여소리〉는 대체적으로 죽은 이의 인품이나, 성격, 공덕 등을 나타내거나 망자의 유언을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상여놀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사람에게 볏짚을 씌워 말이 되게 하고, 상주를 태워 돌아 다니다가 친구들이 번갈아 가며 상주를 희롱하는 연기를 하기도 하고, 웃기는 등, 노래와 재담과 춤으로 여흥을 합니다. 례로서 “진도다시래기” 경우, 첫째과장에는 가상제(假喪制)가 상제 앞에서 희롱하고 웃기는 놀이를 하고, 둘째과장에서는 소경인 거사와 중, 사당의 삼각관계에 얽힌 이야기를 풍자한 놀이를 하고, 셋째과장에서는 “상여소리”와 북춤, 그리고 허튼춤을 마구 춤니다. 총적으로 이와 같은 마을에서의 상여놀이는, 유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通過儀禮)였다고 할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마을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의 의지가 담겨있는 예능이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다섯째; 상여행렬: 상여행렬이란 바로 발인행렬이며, 전통적인 출상대오입니다. 상여행렬이 출발하기전에 먼저 발인의식을 진행하는데, 조선족 전통 장례의식에서 가장 륭중한 의식입니다. 출상일 아침에 조전을 끝내고, 관을 천구하여 상여에 싣습니다. 그다음 상여 운각을 올려 놓고, 양장을 펼쳐 고정합니다. 상여앞에 병풍을 펼쳐놓고, 그 앞에 간단히 제사상 차려놓고, 발인제를 지냅니다. 상주가 술을 붓고 세번 절을 끝내면 축인이 발인축문을 랑독합니다;”靈輀旣駕,往卽幽宅,載陳遣禮,永決終天(령여가 곧 떠나시니, 가시는 곳은 유택입니다. 보내시는 례의 올리오니, 하늘끝에 영결입니다.)” 발인축문이 끝나면 상여꾼들이 구령에 맞추어 상여를 메고 일어섭니다. 상여꾼들은 또 구령에 따라 먼저 상여를 세번 가볍게 들석여 놓는데, 망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올리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상징합니다. 그 다음 지휘자가 작은 구리종을 흔들며 구슬픈 목청으로 상여소리를 뽑는데, 상여꾼들은 한소리로 화답하며 걸음을 뗍니다. 조선족 상여행렬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순서로 걸어 갑니다: 제일앞: 명정(铭旌-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써 넣은 붉은 기발) 그다음: 요여(腰舆-령여, 고인의 혼백과 명함을 담은 작은 가마) 그다음: 만장(挽幛-고인을 추모하는 만사를 써 넣은 여러 색갈의 기발) 그다음: 공포(功布-긴 베천 오리를 달아 맨 기대, 길을 인도) 그다음: 상여(丧舆-령구를 실은 큰 가마) 그다음: 가족(家属-상주와 상제들이 곡을 하며 뒤따름.) 그다음: 조객(唁客-장례에 참석한 손님들이 묵묵히 뒤따름.) 마지막: 상차림(祭物-아낙네들이 상차림 보따리를 이고 뒤따름.) 일부 지방에서는 요여의 앞뒤에 각기 운삽(雲翣)과 불삽(黻翣)을 든 저승무사를 안배하는데, 그들은, 뿔이 난 도깨비 탈을 쓰고 저승길을 방해하는 악귀를 쫓거나 잡아 죽이는 춤을 추면서 망자의 혼백을 장지까지 호송합니다. 상여가 마을 어구에 이르면 로제를 지냅니다. 로제는 보통 망자의 친구, 제자, 동업자들이 주도 하는데, 상여를 내리고, 간단한 제상을 차리고, 만사를 읽은 다음, 술을 붓고 삼배 한후 부의금을 냅니다. 로제가 끝나면 상여는 다시 출발합니다. 만일 호상(好喪-망자가 장수한 노인)일 경우에는 오락의 분위기가 비교적 짙은데, 상여가 굽이돌이, 올리막 길, 다리, 큰나무 등을 만나게 되면 지휘자는 상여소리로 저승길 로비가 모자란다고 노래 하면서, 제자리 걸음을 하면서 앞으로 나가질 않습니다. 그러면 상주는 황망히 상여 앞에 달려 나와 상여꾼들에게 절을 하면서 술과 돈으로 상여꾼들을 위로 합니다. 이때의 상여꾼들은 저승에서 고용한 役士의 신분이므로 神에 해당합니다. 상주의 위로를 받고 상여는 다시 출발하는데, 그 돈은 보통 사후에 상여 사용비로 “丧舆契” 장부에 기록됩니다.   여섯째; 상여소리: 상여소리는 향두가(香徒歌), 혹은 만가(挽歌)라고도 하는데 상여를 메고 장지로 가는 과정에 선소리꾼과 상여꾼들이 부르는 로동가로서 호상에서 많이 부르고 액상에서는 보통 부르지 않습니다. 좀 느린 행진 절주로서 원래는 상여꾼들의 걸음을 맞추기 위하여 부르게 되였는데, 과거 저목장에서 목도꾼들이 큰 나무를 메여 나르며 부르던 목도소리와 그 목적이 같습니다. 상여소리 부르는 기본형식은 선소리꾼이 작은 구리종을 흔들며 가락을 뽑으면 상여꾼들이 한결같이 소리내여 화답하는데 그 가락이 참으로 구슬프고 비장합니다. 아래에 두수의 상여소리를 례로 적습니다; (선소리꾼이 한 소절씩 부르면 상여꾼들이 《에요!데요! 어럼마!데에요!》로 화답합니다.)   北邙山이 머다더니 門前山과 통했고나 黃泉길은 험악하야 많은사람 옹위하에 난생처음 가마타고 마지막길 떠났니라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이진다 서러마라 명년삼월 돌아오면 너는다시 피련마는 우리인생 한번가면 다신오질 못한단다.   銘旌功布 앞을서니 황천길이 분명코나 앞동산에 두견새야 네가나를 불렀느냐 뒷동산에 접둥새야 너도나를 기다리냐 두견접둥 우지마라 내가지금 가고있다.   인제가면 언제올가 돌아올날 기약하자 東方花開 春風時에 꽃이피면 다시올가 말머리에 뿔이나면 구실삼고 다시올가 까마구가 희어지면 어물넘쩍 다시올가 석돌에다 진주심어 싹이나면 다시올가 쪼약돌을 모아모아 높다랗게 광산되야 정을맞아 차에실려 덜렁덜렁 돌아올가 평풍안에 그린장닭 두나래를 활활치며 나를잡아 잡수시오 말을하면 돌아올가. 북망산천 도착하면 사토집을 짛어놓고 송죽으로 울을삼고 두견접동 벗이되야 바람소리 들으면서 쓸쓸함을 달래이며 저하늘의 별과함께 해와달을 보내리라. 자손들이 늘어서서 평토제사 지낼적에 魚東肉西 左脯右醯 삼색과실 채려놓고 꼽싹꼽싹 절을하며 放聲大哭 측은타만 에라인젠 그만해라 나도갈길 급하니라. 어화둥둥 식구들아 저화둥둥 벗님네들 살아생전 많이먹고 늙기전에 많이놀며 부모자식 어루면서 재미있게 잘사시오.   상여소리 [진도만가] (선소리꾼이 한 소절씩 부르면 상여꾼들은 《애-애-애-애- 애애애 애애야!》로 화답합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은 삼천갑자 살았는데, 요네나는 어찌하여 두갑자도 못사느냐?   어렸을때 들었니라 노인들이 하는말이 사람죽어 묻힌다는 북망산이 머다더니, 어느결에 닿았느냐 북망산이 눈앞이다.   흰구름도 돌아가고 날짐승도 피해가는 으슬으슬 저승길을 무서워서 어찌갈까?   못가겠네 못가겠네 무서워서 못가겠네 한번가면 다시못올 저승길을 못가겠네.   염라대왕 부르시니 어느어명 거역할가 내차라리 갈바에는 당당하게 가야하지.   비단금포 수의입고 금의환향 금띠띠고 육진삼베 몸에감고 일곱매로 동여서는 오동관에 편히누워 꽃상여에 들려서는 명정공포 앞세우고 진도만가 들으면서 흥얼흥얼 이승떠나 조상동네 찾아갑제 명년가서 청명추석 제사술랑 잊지마소.     안장(安葬):장지에 도착한후 상여에서 관을 내리우고, 간단한 제사가 있은후 네사람이 헝겊띠로 관을 듭니다. 그러면 녀자 상제들이 관을 붙잡고 소리높여 통곡합니다. 관을 천천히 이미 파 놓은 광에 넣는데, 머리 부분이 서북쪽으로, 발 부분이 동남쪽으로 되게 하고, 좌향을 바로 잡습니다. 주부가 공포로 관위의 흙과 먼지를 닦습니다. 호상이 명정을 풀어 관을 덮습니다. 상주가 옷섶으로 새흙을 세번 나누어 받아서 광중에 골고루 뿌려 넣는데, 이것을 “사방토”라고 합니다. 그 다음 모두들 일제히 삽을 날려 흙을 묻습니다. 그다음 봉분을 만드는데, 형태는 반구모양으로 보기 좋게 하며, 봉분의 동남변에 제단을 만들고 성분제를 지냅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흙을 묻으면서 소리를 뽑으며 달구질을 하는데, 땅과 수평으로 평해지면 평토제를 지냅니다. 그리고는 다시 봉분을 만듭니다. 안장이 끝나면 후토를 잘 정리하는데, 정해진 그 자리를 다시 움직이지 않습니다.   반곡(返哭)반혼(返魂):안장을 끝내고 빈 상여를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곡을 하는것을 返哭이라고 하고, 혼백을 다시 집으로 모셔 가는것을 返魂이라고 합니다. 하산하여 집에 돌아 와서는 다시 령좌를 차리고 신주를 모시고 그 뒤에 혼백을 모시고 일동이 한참 곡을 합니다. 상주가 삼배하고 곡을 그칩니다. 이것을 卒哭이가고 합니다. 혼백은 집에 자그마한 祠龛이나 丧门을 만들어 놓고 모시다가, 삼년제를 지내고 탈상한 후에 묻거나 살음니다.   면례(缅礼):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사람의 령기는 뼈에 슴배여 있다는 관념이 있었는데, 그리하여 부모가 사망 하였어도, 그들의 뼈만 잘 건사 한다면 능히 저승의 부모들과 감응교류를 할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緬禮란 원래 장례를 다시 지낸다는 뜻으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안장하여 십여년이 지난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째고 해골을 꺼내여 그 색갈과 해화정도를 살펴보아 그 색갈이 노랗고 해화가 잘 되였다면 잘 정리한후 다시 그자리에 묻고 다시 장례 지내는 것을 말하며, 만일 해골의 색갈이 검고 해화가 잘 되지 않았다면 산자리가 나쁘다고 인정되여 다른곳에 자리를 선택하여 묻는데, 遷墳, 혹은 移葬이라고 하였으며, 풍수지리에 따른 일종의 효행이였습니다. 지금은 도로나 기타건설의 수요에 의하여 移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담에 “가난하면 이사 가고 부유하면 묘를 옮긴다(穷搬家,富迁坟。)”고 하였으니, 형편이 허락 되시면, 좋은 명당자리를 찾아 부모님들을 옮겨 모시는것도 아름다운 소행이라 하겠습니다. 면례는 일반적으로 묘의 좌향에 근거하여 길일을 택하여 진행합니다. 면례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순서: 면례하여 새롭게 산소를 쓸 경우에는 먼저 새로운 산자리를 정하고 굴심을 하는데, 절차는 장례때와 같습니다. 면례하여 화장할 경우에는 빈의관에 련계하여 할수도 있고, 또 자체로 태울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순서: 낡은 산소를 찾아 먼저 후토에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베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인사하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세번째 순서: 무덤앞에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축인이 파묘축을 읽습니다. 면례에서 파묘축은 필수입니다. 네번째 순서: 가속에서 상주나 대표인이 먼저 세삽을 뜹니다. 그다음 역공들이 삽으로 무덤을 헤치고 관의 천개널을 뗍니다. 다섯번째 순서: 한 사람이 광안에 들어가 적토를 청리하고, 해골을 골라 주어 올리면, 우에서 한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칠성판 우에 사람 골격의 순서에 따라 놓습니다. 만약 시체가 완전히 해화되지 않았다면 참대칼로 뼈에 붙은 썩은 살을 깨끗이 긁어 냅니다. 칠성판은 두께 2㎝의 널판자로 180㎝×30㎝의 규격이면 충분합니다. 화장할시에는 종이합판으로 대신할수도 있습니다. 여섯번째 순서: 해골을 점검해 보고 모자라는 부분은 버드나무 가지로 대체합니다. 그 다음 백포로 칠성판과 해골을 함께 감쌉니다. 일을 끝내고 헤친 무덤자리에 흙을 세삽 넣어 줍니다. 낡은 묘비는 낡은 묘광에 넣어 묻어 버리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일곱번째 순서: 새롭게 산소를 쓰는 경우, 해골을 감싼 칠성판을 광에 묻고 봉분을 만들고 성분제를 지내는데, 기본 절차는 장례때와 같습니다. 화장하는 경우, 보통 골회를 받아서 산이나 강물에 뿌리여 처리한후, 안신제를 지냅니다.   합장(合葬): 보통 음양학설에서는 “以南爲陽, 以北爲陰, 陽以東始, 陰以西高, 男左女右…”등을 기본원칙으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민족 저승문화에서는 “陰以西貴” 기본원칙에 근거하여, 또 “西高東皐, 西貴東卑, 西考東妣, 西男東女, 右男左女” 등 구체원칙들이 만들어 졌습니다. 해가 남쪽에 치우쳐 있으므로 남쪽이 陽이 되고, 북쪽이 陰이 되는 것이며, 天上의 日月은 동쪽을 시작으로 하고, 地上의 江河는 서쪽을 시작으로 하므로, 陽界에서는 동을 爲首로 하는 것이고, 陰界에서는 서쪽을 爲上, 爲貴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 이념상의 저승세계 중심도 저 멀리 서북쪽 하늘 가에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 사당에서는 령좌를 앉힐때에 반드시 북쪽켠에 남향으로 설치하며, 조상들의 위패는 서쪽을 高位로 하여 동쪽으로 내려가며 차례로 모시며, 조부 조모의 경우, 조부를 서쪽에, 조모를 동쪽에 모십니다. 평소 제사상 차리고, 紙榜 쓰는 방법도 기본적으로 이 원칙에 기준합니다. 합장은 돌아가신 부모(顯考妣)를 한자리 묘소에 함께 묻는것을 말하는데, 전통적으로는 우리민족 저승문화의 “西高東皐, 西考東妣” 원칙에 근거하여, 현고비들의 머리를 모두 북쪽을 향하게 하고, 현고를 서쪽에, 현비를 동쪽에 모셨습니다. 이렇게 되여 우리민족의 오래된 합장묘는 보편적으로 ”男右女左”가 된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 사망한 부모님들의 골회함을 합장 할시에 구경 어느 원칙을 따르는 것이 정확하냐? 하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전통원칙이냐? 혹은 자유원칙이냐? 하는 문제만 존재하며, 전통원칙이든 자유원칙이든 중요한것은, 늦어서 나마 이미 사망한 부모님들에게 성의를 다 하여, 아래 자손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합장에는 보통 세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홀로 모시던 부모가 사망하면 먼저 사망한 부모의 묘를 째고 그 옆에 묻는 것이고, 둘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중에서 한곳을 면례하여 가져다가 합장하는 것이며, 세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를 모두 면례하여 다른곳에 가져다 합장하는 것입니다. 합장은 한개 묘혈에 두개 광을 파는데, 두 광 사이에 일정한 두께의 벽을 두고 그 벽 중간에 통로를 내고 채색 사다리를 놓는데, 그 뜻인즉 두분 망령이 자주 래왕하게끔 편리하게 한다는 자손들의 지극한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그다음 흙을 묻어 매장하는데 절차는 초상때의 안장과 같습니다. 돌아가신 두 부모님의 골회함을 릉묘에 합장할 경우에도, 위의 방법을 참작하여 조절하며 행하시면 되겠습니다. 합장을 끝내고 성분제 지낼때는 합장축을 읽습니다.    죽음에 대한 존중은 기실 삶에 대한 중시로 되며,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로 됩니다. 사망한 부모님들을 미안하게 저승으로 보내신 분들, 그러시고 서도 자기의 소위 찬란하고 가치있는 삶을 꿈 꾸신다면, 어서 깨달으시고 부모님들 망령앞에 진심으로 참회해야 할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식들의 리해와 존중, 그리고 자신과 자식들 사업의 발전을 얻을수 있습니다. 자식이란 기실 부모와 조상들이 당신에게 베푸시는 음덕의 충실한 집행자입니다. 문화적 관점에서 부모와 조상들이 구천에서 당신에게 내리시는 벌책과 은혜는 대체로 자식들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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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초상편3 댓글:  조회:6569  추천:1  2013-06-20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명정(铭旌):명정이란 망자의 신분을 써 넣는 기발입니다. 명정의 재료는 반폭으로 두메터 좌우 길이 되는 붉은천으로 하며, 그 우에 흰글로 망자의 시호(諡號), 본관, 성씨 등을 써 넣습니다. 고대에 명정이 망자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필요하였다면, 지금은 단지 하나의 장례문화로 남아 있을 뿐이므로, 쓰는 방법도 보통 통일시호, 통일격식을 사용합니다. 조선족 남성 망자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學生”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이라고 쓰고, 녀성 망자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명정을 쓰는 격식은 남성 망자의 경우에 만약 그의 성이 金씨였고 본관이 金海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金海金公之柩》라고 쓰고, 녀성 망자의 경우에 만약 그의 성이 李씨였고 본관이 全州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라고 씁니다. 다른 성씨, 다른 본관도 모두 이 격식에 맞추어 써 넣으면 됩니다. 諡號란 일찍 중국 주나라때부터 사용되여 왔는데, 원래는 제왕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관리, 혹은 명류들이 죽은후에 조정에서 그들 생전의 공덕에 근거하여 붙여주는 칭호입니다. 그리하여 제왕이나 명류들이 죽은후 보통 시호로 사책에 기록 됩니다. 후에 일반인들에게도 죽은후에 상류의 시호법을 본따 사사로히 소위 시호를 붙여 주는 관습이 생겼는데, 私諡, 혹은 民諡라고 합니다.  조선족 남성 망자들에게 붙여지는 “學生”이란 시호는 民諡에 속하는데, 이 칭호는 원래 고려시대에 서당을 다녔거나 또 다니고 있는 사람만이 쓸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벼슬이 없는 하층 兩班집 자제나, 상층 常民 자제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서 쓸수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學生”은 벼슬을 하지 못한 유생들에게 폭넓게 쓰였으며, 그후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일반 서민중에서 보편적으로 쓰게 되였습니다. 현재 중국의 조선족들은 남성 망자의 시호를 일률로 “學生”으로 쓰는데, 중국 조선족의 겸손한 낮은 자세 처세원칙에 부합됩니다.  “孺人”이란 칭호는 원래 宋徽宗때에 通直郎부터 承议郎까지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였는데, 명나라때에는 7품, 청나라때에는 9품부터 7품까지 별슬아치 안해의 품계였으며, 고려, 조선시대에서는 9품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였습니다. 비록 말단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였지만 벼슬을 하지 못한 “學生” 안해들의 아무런 품계도 없는 것 보다는 한차원 높은 셈입니다. 상징적으로 “孺人”은 신분이 있고, 교양이 있는 부인에 대한 존칭이였습니다. 《石窟一征》이란 중국 지방지 기재에 의하면, 월동객가 지구에서는 본토인이나 객가인이나 부녀의 묘비에 모두 “孺人”이란 시호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민간전설이 있습니다; 송나라 마지막 황제인 赵昺(일설에서는 송나라 명장 文天祥 )이 몽골군의 추격을 당하여 월동객가 산구에까지 왔었습니다. 마침 집체적으로 나무하려 떠나 가는 당지의 부녀들이 저마다 기다란 멜대를 어깨에 메고, 자연적으로 길게 한줄로 늘여서서 호호탕탕하게 산길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창을 메고 행군하는 병사들의 대오 같았습니다. 몽골군들은 멀리에서 그 광경을 보고 대부대 구원병이 오는 줄 알고 창망히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후 송나라 황제는 객가지구 부녀들의 그번 행동이 너무나 고마워, 특별히 황제의 명의로 객가지구 부녀들에게 일률로 “孺人”이란 시호를 하사한다고 선포하였답니다. 그 어명이 오늘까지 전하여 내려 오면서, 오늘도 그 지방의 부녀들의 묘비에는 모두 시호를 “孺人”이라고 쓴다고 합니다. 송조 마지막 황제때가 되면 고려에서는 25대왕 충렬왕 시기가 되며, 왕실에는 이미 9품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로 “孺人”이란 칭호가 있었습니다. 이상의 전설이 비록 우리민족의 전설은 아니지만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뿌리가 바로 중국 송조때에 大儒家 朱熹의 《주자가례》라는 것을 감안할때, 오늘 날 우리민족이 녀성 망자의 명정에서 시호를 일률로 “孺人”이라고 쓰는 그 유래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명정을 써서는 령구를 가리운 병풍에 걸어 놓는데, 출상할때 기발을 만들어 상여앞에서 들고 길을 인도하며, 하관할때 관우에 덮어서 함께 묻습니다. 지금도 이 풍속은 의연히 성행하는데, 화장을 실시하는 성진에서는 이미 명정을 기발로 쓰지 않습니다. 지금 쓰는 명정의 규격은 너비 30cm좌우로 하고 길이 150cm좌우로 하는데, 쓰는 격식은 위와 같고 흰 석필이나 흰 분필로 써서는 이미 렴습을 끝낸 유체우에 덮었다가 함께 화장합니다.   성복(成服)조문(吊唁):대렴이 끝나면 주부와 상제들도 상복을 바꿔 입는데, 남자 상제들은 머리에 베천으로 만든 굴건과 상관을 쓰고, 몸에는 베천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벼짚과 베천오리로 꼬아만든 요질을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주부(主妇, 고인의 안해, 혹은 상주의 안해)와 녀자 상제들은 머리와 몸의 장신구들을 풀어내고 머리에 베천으로 만든 수질을 두르고, 몸에는 베천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벼짚과 베천오리로 꼬아만든 요질을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복인들은 일률로 상장을 다는데 남자상에는 왼쪽에, 녀자상에는 오른쪽에, 남자들은 팔에, 녀자들은 머리에 답니다. 상복을 바꿔 입고 일동이 제사상 앞에서 한참 곡을 한후 성복제를 올립니다. 전통적으로 상복은 다섯종으로 나누고 복상기는 삼년부터 삼개월 까지 모두 여섯급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들은 보통 상제와 복인으로만 나누는데 상제만 삼년 복상기를 규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복인으로 취급하고 복상기가 따로 없습니다. 복상기란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야 하는 기한입니다다. 성복제가 끝나면 조문객들을 접대하기 시작합니다. 남자 상제들은 모두 마당에 나가 상장(상사에 쓰는 지팡이)을 짚고 머리 숙이고 가지런히 서서 조문객들을 맞이합니다. 부상일 경우에는 대나무 지팡이, 모상일 경우에는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습니다. 대나무는 성품이 곧고, 굳으므로 남성을 상징하고, 버드나무는 성품이 유연하고, 번식력이 강하므로 여성을 상징합니다. 조문객들이 뜰안에 들어서면 남자 상제들은 곧 소리내여 곡을 합니다. 조문객들은 정문으로 집안을 들어 가는데, 문앞에 도착하여 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내면, 집안에서는 일동이 모두 일어서서 곡을 시작합니다. 상주와 주부, 그리고 녀자 상제들은 웃방에 서서 곡을 하고, 복인들은 아래 정지에 서서 곡을 합니다. 조문객은 집안에 들어선후 묵묵히 제사상 앞까지 걸어가서, 고인의 신위 혹은 유상을 향하여 세번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는 상주와 가속을 상대로 한번 맞절을 하고는 안위의 말을 합니다. 조문객은 물러 가면서 부의금을 상가에 주는데, 상가에서는 받은 부의금을 일일히《조객부》에 기록합니다.       상식전(上食奠):아침에 해뜨는걸 기준하여 조전을 올리면서 겸하여 아침진지도 올리며, 저녁에 해지는걸 기준하여 석전을 올리면서 겸하여 저녁진지도 올립니다. 그 뜻인즉 생시와 마찬가지로 고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제사상에 먼저 밥과 국, 반찬을 올리고 수저를 놓습니다. 곡소리 가운데서 집사가 밥두껑을 열고 제사상 앞에서 고인의 식사 시중을 드는 동작을 합니다. 그리고는 옆에 시립하고 서 있는데 그 뜻인즉 고인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양치물 한그릇 떠서 올리고 삼배하고는 밥과 국, 반찬을 물립니다. 이것으로 그번 상식전은 끝납니다. 매번의 상식전 절차는 기본상 같습니다. 매번에 올리는 음식 종류는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기준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사람을 산사람 모시듯 한다는 장례의 기본원칙입니다.   문상(聞喪)분상(奔喪):타지방에서 부모의 부고를 받았다면 즉시 목을 놓아 곡을 해야 하며, 한참 곡을 한후에 곡을 끊고 사망 연유를 물어보고는 또 계속 곡을 합니다. 부모가 사망했다는데도 곡을 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망칙한 일이 없다고 여깁니다. 만약 장례에 가지 못할 형편이면 본지방에서 날자를 맞추어 성복제를 지냅니다. 타지방에서 부모의 부고를 받고 급히 부모의 장례에 가는것을 분상이라고 합니다. 멀리 목적지가 보이면 곧 곡을 시작하는데, 곡을 하면서 집으로 달려가며, 문앞에 가서는 곡소리를 더욱 높이고, 부모를 부르며 집안으로 엎어질듯 달려 들어 갑니다. 이때 집안에서도 곡소리로 맞이하며, 일동이 함께 령구앞에서 목을 놓아 통곡합니다. 전통적으로 상가에는 반드시 곡소리가 있어야 하며, 곡소리가 높을수록 효자가문이며, 슬피 우는 사람일수록 효자, 효부라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행이 그 가문의 흥성발전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며, 불효는 필연적으로 천벌을 받아 후대가 끊기게 된다고 보편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부모에게 좀 소홀했던 자손들은 자기들에게 차례질 소위의 천벌이 두려워 장례에서 수단을 다하여 효성을 표연함으로써 자기들의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거날에 장례가 특별히 사람들의 중시를 받게된 원인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시대에서는 유물론적 과학적 교육을 주체로 하여 많이 받아 왔고, 문화적 교육은 인위적이로 의식형태의 제한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하여 사람의 죽음을 대함에 있어서도 한 생명의 영구한 결속으로만 인식하고, 령혼의 승화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죽는 사람의 경우에는 특별히 절망스럽고, 고통스럽게 되고, 가속의 경우에는 죽는 친인이 두려워져 멀리하게 되며, 장례를 근근히 불결해진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으로만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인과보응"에 대해서도 종교의 설교일뿐 실제생활에서는 과학적 도리가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불효를 범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물론적 과학적 생사관이 죽음이란 특수 과제 앞에서 상대적으로 문화적 생사관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점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이 사는 사회는 과학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문화도 필요하고, 종교도 필요하며, 또 인정도 필요합니다. (후일 계속---스크랩 불허)
175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초상편2 댓글:  조회:5560  추천:1  2013-06-14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발상(發喪):혼을 부른후 고인이 여전히 소생하지 못한다면 상주(喪主)는 서둘러서 상복을 바꿔 입습니다. 고인의 장자, 혹은 장손이 상주로 되고, 가속의 성원들은 모두 상제(喪制)가 되며, 기타의 친척들은 모두 복인(服人)이 됩니다. 상주가 이미 결혼하였다면 머리에 삼베로 만든 굴건(屆巾)을 쓰고, 아직 결혼전이라며 머리에 벼짚과 삼베 오리로 거칠게 꼬아 만든 수질(首絰)을 두르며, 몸에는 삼베로 만든 상포(喪袍)를 입고, 허리에는 허름한 요질(腰絰)를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전형적인 옛날 죄수 차림새이지요. 삼베옷(麻衣)이 바로 신라때의 죄수복이였는데, 삼베옷을 상복으로 하는 것은 상주가 부모를 살려내지 못한 죄인이란 뜻이랍니다. 동네 좌상어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고인의 혼백을 접습니다. 혼백이란 이미 육체를 떠난 고인의 영혼을 부착시켜서 임시 거처하시게 한다는 상징물입니다. 령구앞에 령좌를 차리면서 혼백을 중앙에 모시는데, 령구은 이미 생명공능을 상실하고, 자기사명을 완수하여 이제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대상이고, 혼백에 부착되여 있는 영혼이야 말로 바로 오늘 장례를 치러서 저승으로 륭중히 떠나 보내게 되는 중심 대상으로 됩니다. 상주가 상복을 바꿔 입은후 일동은 상주를 배동하여 령좌앞에서 곡을 시작합니다. 곡소리로 초상이 났음을 온 동네에 알리며, 그 곡소리가 높을수로 효자 가문이라고 동네 사람들의 호평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에 부자집에서 상(喪)을 당하게 되면 높은 소리로 곡을 할수있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쓰기도 하였습니다. 곡을 하는것을 호곡(號哭), 혹은 애호(哀号)이라고 하는데, 고인의 가속, 즉 상제들이 곡을 할때에는 “애고! 애고!(哀告)”하는 소리를 내고, 고인의 친속, 즉 복인들이 곡을 할때에는 “어이! 어이!(厄矣)”하는 소리를 냅니다. 장례는 일반적으로 삼일장, 오일장, 칠일장으로 하고 짝수일(双日)로 하지 않습니다. 음양학설에 원리에 의하면 喪事는 음(陰)에 속하고, 홀수는 양(陽)에 속하는데 장례와 장례날자가 서로 음양이 평형되여야만 이번에 당한 상(喪)의 위기를 최소한으로 극복하고 안전하게 넘길수 있다는 철학적 관념입니다. 그렇지 않고 2일장, 4일장처럼 짝수일로 한다면 喪事가 같은 陰氣에 힘입어, 가문의 위기가 가배로 엄중해 질수 있다는 관점이지요. 그리고 쌍수를 둘로 나누면 “같다” 혹은 ”중복되다”로 표현 되지만, 홀수를 둘로 나누면 “다르다” 혹은 “특수하다”로 표현 되므로 장례의 모든 상관 사무에서 홀수를 채용함으로써 장례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이런일이 중복되지 말기를 바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장례에서는 제물의 개수도 짝수로 하지 않으며, 혼을 부를때도 홀수로 세번 부르며, 절을 할때도 홀수로 세번씩 하며, 한잔술도 홀수로 세번 나누어 붓습니다. 우리민족이 장례시에 삼베천으로 상복을 지어 입는 풍속은 신라의 애국지사인 마의태자를 기념하면서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三國史記卷第十二》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935년 10월,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힘이 없게 되자,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하였습니다.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버릴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견결히 반대하였으나, 결국 이미 무능해진 왕실에 의하여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작성되었습니다. 태자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왕에게 사직을 고하고, 개골산(皆骨山: 金剛山)에 들어가 바위옆에 초막집을 짓고, 나라를 구하지 못한 죄인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당시 죄수복인 삼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내다가 한을 품고 죽었습니다. 그후 민간에서는 그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부르면서 가문에서 상(喪)을 당했을 적마다 생전의 그를 본따, 삼베로 거칠게 만든 허름한 죄수복을 입는것으로 망자(亡者)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시하게 되였다고 합니다.   소렴(小殮):렴습(殮襲)이라고도 하는데 유체를 목욕시키고, 유체에 수의를 입히고, 유체를 천으로 싸서 묶는 절차로서 마을의 덕망이 있는 분들이 책임지고 집행합니다. 집행인은 먼저 고인의 얼굴을 깨끗이 하고, 몸을 더운물로 닦고, 수의를 입히고, 명모를 씌우고, 악수를 끼우고,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남좌녀우로 고인의 손에 감아 놓으며, 버선을 신기고, 반함을 진행합니다. 수의를 입히면서 옷섶을 좌로 여미고, 단추를 채우지 않고, 고름을 매지 않는데, 이미 속세를 해탈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민족은 결혼을 하면서 부터 안해는 두 내외의 수의를 만들기 시작하고, 남편은 두 내외의 관에 넣을 봇(봇나무 껍질)을 준비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수의를 만듬에 있어서 평소에는 감을 마련하고, 만드는 것은 사년에 한번씩 있게 되는 윤달에 만들었는데, 윤달은 공짜달로서 저승과 상관되는 그 무슨일을 하여도 탈이 없다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환갑이 되면 자손들이 수의를 선물하는 전통도 있었는데, 효행으로 인정되여 왔습니다. 수의는 전통적으로 비단이나 명주같은 고급감으로 하였으며, 삼베옷은 죄수복이니 수의로는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와서 왜정시기에 나라가 빈궁해 지고, 물자가 결핍하게 되면서 삼베로도 수의를 만들게 되였는데, 삼베수의가 유체의 해화를 촉진시키고, 뼈의 색갈을 곱게 하는 공능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점차 삼베수의가 보급되였습니다. 수의는 보통 흰색으로 하는데, 만약 망자가 아직 출가전의 처녀거나 총각일 경우에는 색갈이 있는 고운 수의를 선택하며, 인형, 혹은 화상으로 망자의 신랑, 혹은 신부를 만들어 두었다가 입관할때 함께 넣어 줍니다. 그렇지 않고 망자의 처녀나 총각 신분 그대로 저승에 보낸다면 처녀망자는 “손각시”로 되고, 총각망자는 “몽달귀신”이 되여, 사람들을 해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민족 저승문화에 의하면 저승의 최고 관리자는 염라왕이고, 여러 부서에서 구체 직책을 맡고 있는 영혼은 神이라고 하고, 직책이 없이 한가히 보내고 있는 영혼은 仙이라고 하며, 출가전에 죽은 영혼은 鬼神라고 하고, 죄를 범하여 징벌을 받아 죽었거나, 자살해 죽은 영혼을 魔鬼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도깨비란 것이 있는데 주로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승의 호적 제도에서 귀신은 정상적으로 죽은 한사람 이상의 소개가 있어야 입적할수 있고, 마귀와 도깨비는 정상적으로 죽은 두사람 이상의 소개가 있어야 입적할수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소개인을 찾아 갈팡질팡 헤매다가 왕왕 애매한 사람들을 붙들어서는 죽게 한답니다. 그리하여 동네의 그 어느집에서 비 정상적인 죽음 사건이 생겼다면 재액과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로 자기집 대문에 처용랑(處容郞) 화상을 그려서 붙여놓는 풍속이 있습니다. 처용랑(處容郞)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의 헌강왕(憲康王)이 동해의 개운포(開雲浦)에 유람했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해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 안개가 온통 뒤덮이여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왕이 모사에게 물었더니, "이것은 동해 룡왕이 심술을 부리는 것이오니, 그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한가지 하사이다" 하고 모사가 대답합니다. 대왕은 곧 룡왕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울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자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걷힙니다. 그래서 그곳을 개운포라고 하였답니다. 대왕의 뜻에 감사하여 룡왕은 일곱 동자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기리하여 춤추며 음악을 연주합니다. 룡왕은 돌아 가면서 동자 한 사람을 대왕에게 바쳤고, 대왕은 그 동자를 서울로 데려가서 정사를 보게 하고,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처용은 급간(級干)의 지위에 올라 특별히 고운 미녀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심을 품은 역신(疫神)이 인간의 모습을 해 가지고 처용 아내의 침실에 침입했습니다. 처용이 밤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침상우의 이불밑에 발이 네개 보였습니다. 그것을 본 처용은 화를 내기는커녕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떴습니다(처용가: 동경 밝은 달밤에 밤드리 노닐다가, 들어가 자리 보니 가라리 네히러라, 둘은 내해요 둘은 뉘해언고, 본디 내해다마는 앗아날 어찌할꼬?). 역신은 처용의 이런 태도에 너무나 송구하여 그의 앞에 굻어 앉아, "제가 공의 부인을 너무 사모하던 끝에 이런 과실을 저질렀는데, 공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 바다같은 마음에 탄복합니다. 앞으로는 공의 화상(畵像)을 보는 것만으로 모든 악귀들이 공의 문 앞에서 얼씬하지 못하게 할것을 맹세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처용랑(處容郞)의 문자나 화상을 그려서 문짝이나 기둥, 벽 따위에 붙여서 전염병이나 악귀를 쫓는 풍속이 생겼답니다.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놓는 것은, 고인께서 지금부터 시작하여 자식들을 포함한 속세의 모든 일에 관심을 끄시고, 일심으로 헝클어진 실타래만 풀면서 안온한 마음으로 영원히 휴식하라는 뜻이랍니다. 이승과 저승은 필경 길이 다르니, 부모의 망령이 저승에 가서도 자식들을 잊지못해 이것저것 참견하면서 로심초사 하신다면, 저승에 계시는 부모의 망령에게 미안한 일일뿐만 아니라, 이승의 자식들에게도 참으로 고달픈 일이 된답니다. 반함이란 고인의 입에 쌀알을 넣는 절차인데,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세번에 나누어 쌀알을 고인의 입안에 넣어 드립니다. 쌀알을 넣을때 첫 숟가락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하고 외칩니다. 그 다음 구슬 세알, 혹은 은전 세잎을 하나씩 넣는데, 차례로 “백량이요”, “천량이요”, “만량이요”하고 외칩니다 (지금은 보통 엽전으로 대체 하거나 혹은 넣지 않습니다). 반함을 하는 의미는 고인께서 머나먼 저승길을 가시면서 써야할 식량과 로자를 충분히 마련해 보낸다는 뜻입니다. 반함이 끝나면 입을 다물구고, 약솜편과 면백으로 얼굴을 싸고, 전폭 백포로 전체 유체를 싸고, 백포오리(绞带라고도 함)로 고인의 어깨부위, 허리부위, 발목부위 등 세곳을 각각 묶고(다섯곳 묶기도 하고 일곱곳 묶기도 하는데, 묶을때 옭매지 않고 오리를 비틀어 묶습니다), 칠성판 위에 지금(地衾)을 펴고, 그 위에 렴습을 마친 유체를 모시고, 유체위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대렴(大殓):바로 입관하는 절차입니다. 전형적인 조선족 관의 모양은 장방형 립방체인데 관체와 관 덮개로 이루어 졌습니다. 먼저 령좌를 치우고, 유체를 옮기고, 관을 자리에 놓습니다. 입관할때 먼저 관 덮개를 내리고, 관 바닥에 칠성판을 깔고, 그우에 지금(地衾)을 펴고 그우에 렴을 마친 유체를 넣고 자세를 조절한 다음, 고인의 생전의 옷견지들과 아끼던 물건들로 공간을 채웁니다. 고대의 왕실, 혹은 부자집에서는 장례때 입관하면서 수장품으로 귀중한 물건들도 넣고, 진짜 은전들도 많이 넣었습니다. 고인이 저승에 가서 지내는 환경을 이승과 같은 표준으로 리해하면서, 저승에 가서도 돈과 재물이 많아야 고인이 행복할수 있고, 또 저승에서 고인이 행복해야만 이승의 자손들도 행복할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고대에서는 수장품을 모두 실물로 선택하였지만, 근대에 들어 와서 나라가 혼란하고, 도굴이 우심해 지고, 또 점차 과학상식이 보급되면서 수장품은 거의 모두가 상징적인 물건으로 대체되였습니다. 장례용 지전이거나, 종이로 만든 물건을 불에 살으는 것이 그 실례입니다. 그리고 저승으로 돈, 혹은 물건을 보내는 방법상에서도 직접 실물을 수장하는 방법을 쓰던 데로부터, 제사를 지내거나, 혹은 상징물을 불에 살으는 방법으로 대체하게 되였습니다. 유체를 관에 넣을 때, 사전에 봇을 준비해 두었던 가문에서는 봇 껍질로 유체를 싸는데, 봇 껍질은 부패를 방지하고, 유체를 깨끗하게 해화시키는 공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 입관한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고, 관 덮개를 덮고, 은정을 박아 봉관하고, 구의(柩衣)로 관을 덮습니다. 그리고  다시 병풍이나 만장을 당겨 놓아 령구를 가립니다.   수령(守靈):우리민족 전통 효도관념에서는 부모가 사망하면 그 경우가 어떻든 상관없이 모두가 자손들의 불효로서 그 죄가 참으로 심중하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부모를 살려내지 못한 죄이지요. 그러므로 상주는 전통 죄수복인 허름한 삼베옷을 입고, 죽물만 먹으면서, 장례가 끝날때까지 한시도 령구옆을 떠나지 않고 벌을 받습니다. 이것을 수령(守靈)이라고 하는데, 이제 얼마 안되는 시간 후이면 저승길을 영영 떠나가시게 되는 부모의 망령을 기리하여, 영결전의 마지막 얼마 안되는 시간이나마 함께 하여 드림으로써, 부모 생전에 채 드리지 못한 효도와 情意를 다소나마 표시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대부분 상주 어른들은 부모의 유체를 빈의관 랭장실에 물건처럼 맡기고는 제집에 돌아가 다리를 쭉 펴고 실컸 제잠을 자고, 장례날 아침에 버젓이 빈의관에 나오는데, 참으로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지난밤 부모님께서는 추우신 랭장실에 고독하게 홀로 갇혀서 얼마나 슬피 우셨을가? 우리의 인성이 어찌하여 이 정도까지 되였을가? 지금 조선족의 소위 장례는 장례라고 할수없으며 단지 유체처리라고 할수밖에 없습니다. 쓰레기 처리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밤에 부모님의 령구를 지키지 않는 현상은 아마 이 세상에서 우리 조선족이 유일한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 조선족은 죽은후 령구를 지켜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이미 가치가  떨어졌다는 표징이 아닐가 두렵습니다. 조선족의 죽음이 값이 없다면, 살아있는 조선족은 값이 얼마나 될가요?  현대 과학적 관점에서 많은 경우에 사람이 사망하시여 몇시간, 혹은 더 긴 시간동안에 의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육체의 공능은 이미 모두 상실 되였지만, 그들의 의식은 아직 완전히 사라진것이 아니므로 자기의 유체를 수숩하면서 당신들이 하는 모든 말을 그들이 듣고 계실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망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많은 사람들의 진술이 이미 이점을 증명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망 당날로 유체를 화장해 버리는 것은 망자에게 너무나도 잔혹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망자 생전에 끼친 미안한 일들에 대하여, 반드시 제사나 참회의 방식으로 망자의 용서를 빌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것이 병의 근원이 되거나, 재화의 발단으로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과보응 관념입니다. 저승과 이승은 공간상에서는 서로 상관이 없지만, 리념상에서는 중첩이 되는 세계이므로 저승의 영령들이 얼마든지 신통력을 발휘하여, 이승의 사람들에게 도움, 혹은 징벌을 줄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리하여 제사문화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민족 저승문화에 의하면 저승사자가 망자의 영혼을 모시고 저승으로 떠나는 시간이 장례 마지막 밤의 자정이라고 합니다. 삼일 장례일 경우, 첫날 밤 자정에도 떠날수는 있었지만, 저승사자들은 하루라도 제사음식을 더 맛보려는 욕심에서 마지막 날까지 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례날자가 길수록 저승사자들에게는 기쁜 일이며, 망자 영혼에 대한 보살핌에도 더욱 신경을 쓰게 된답니다. 망자의 영혼은 낮에는 양기가 너무 강하여 혼백에 부착되여 감히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밤의 자정이 되면 상주, 혹은 기타 가속 사람들의 꿈, 혹은 환각에 현령하시여 유언같은 것을 남기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밤에는 친속과 친구들이 상주를 동무하여 함께 밤을 새면서 령구를 지키는데, 자정이 되여 망자의 영혼이 현령하실수 있는 시간에 맞추어 새벽제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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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초상편1 댓글:  조회:5255  추천:0  2013-06-09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죽음이란 무었일가? 사회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사람들이 고달픈 인생을 마무리 하고, 영원히 휴식하려 떠나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년 퇴직과 비슷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음도 모종의 의미에서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진정으로 축복을 받아야만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자기의 정당성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2000여년전에 庄子라는 분은 자기 부인이 사망하자 양푼을 두드리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하여 한족들은 사람이 죽는것을 “白喜事”라고 하면서 명심하고 삼일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도 과거날에는 好死를 축복하여 즐겁게 오락을 놀면서 장례를 치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조선족은 어찌하여 죽음을 이렇게도 무서워 하고, 싫어하고, 홀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친인들의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을 한번 곰곰히 살펴 보십시요, 쓰레기를 처리하는 과정과 대비하여 그 구별점이 어느정도 됩니까? 이렇게 치하없이 초라하게 떠나보낸 친인들 망혼이 어떻게 구천에서 시름놓고 휴식할수 있겠습니까? 조상덕과 음덕과의 뉴대가 끊어지니, 당신이 하는 사업이 어떻게 흥성발전할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존중하지 않으면 점차 늙은 부모와 어른들이 싫어지게 되며, 결국 자기 자식들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내 부모가 싫듯이, 앞으로 내 자식들도 내가 싫겠으니, 그런 자식에게 많은 투자 필요가 뭐냐? 차라리 그 돈 남겨서 내 로후에 쓰리라. 이것이 죽음을 존중하지 않아 초래하게 되는 악성순환 효과이며, 우리민족 퇴화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을 존중하시라, 죽은이의 망령을 진심으로 축복하여 주시라, 관념을 바꾸시라, 필경은 그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하는 길인데 축복으로 보내주시라. 현재 우리민족 생사관은 엄중한 기형병에 걸려 있습니다. 세상의 천가지 만가지 도리가 결국은 모두 죽음에 귀결되는데, 사는것만 중시하고 죽음을 홀시하니 어떻게 좋은 결과가 나을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을 중시하십시요. 이것은 우리민족이 더욱 성숙될수 있는 중요한 도경의 하나입니다. 오늘부터 기를 나누어 무형문화재인 《조선족 장례풍속》의 내용에 따라 거기에 깃든 여러가지 전설들을 살펴 보면서 우리민족 전통 사망관에 대하여 한번 진지하게 해부하여 보려고 합니다. 우리민족 현시대 성숙된 생사관 수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였으면 합니다.   무형문화재《조선족 장례풍속》은 모두 세가지 부분으로 나뉘여 있습니다. 첫째부분은 초상, 둘재부분은 안장, 세째부분은 제사입니다.   첫번째 부분 초상:   속광(属纩):우리 선인들은 사람이 호흡을 멈추는것을 사람육체의 죽음을 판정하는 기본 표준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병자가 림종하게 되면 병자의 코밑에 솜 한쪼각을 찢어 놓고 살피는데 솜털이 팔락팔락 움직이다가 일단 멈추면 병자가 호흡이 정지되였음을 설명하므로 육체가 죽었다고 판정합니다. 이를 가리켜 “숨을 거두었다.”, “숨이 넘어갔다.” 혹은 “숨이 끊겼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민족 생사관에서 한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고 판정하자면 육체가 죽은후 영혼까지 완전히 떠나가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우리민족 전설에서 사람의 영혼은 사람 육체에 들어갔다 나왔다 할수 있는데, 나왔을 때는 새하얀 쥐의 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먼 옛날의 어느 한 밤에 안해가 남편과 함께 자면서 꿈에 기여 다니는 새야얀 쥐를 보고 밟아 죽였더니, 그의 남편이 영원히 깨여나지 못하고 그길로 죽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그 새하얀 쥐가 바로 그의 남편의 영혼이였던 것인데, 코고는 소리가 지겨워 잠시 나와 바람 쇠다가 그런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고복(皋復):고복이란 초혼(招魂)이라고도 하는데 혼을 부른다는 뜻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사람의 영혼이야 말로 육체의 모든 활동을 지배할수 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방법을 대여 영혼만 육체를 떠나지 않게 할수 있다면 육체는 죽었다가도 다시 소생시킬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미 숨이 끊긴 사람이라 하여도 방법을 대여 혼이 돌아오게 노력해 보아서 여전히 소생하지 못하면 그때에야 비로서 확실하게 죽었다고 판정합니다. 동방의 전통문화에 의하면, 우리의 이승(此世)세계와 이념적으로 중첩되면서도, 또 공간적으로는 영원히 서로 간섭이 없는 허무한 형식으로 저승(彼世)이라는 세계가 존재합니다. 저승이란 곧바로 사람들이 죽어서 영혼들이 모여 산다는 추상적인 세계인데, 그 저승세계의 최고 권력자는 염라왕이라고 합니다. 그 염라왕의 밑에는 판관이라는 무서운 신이 한분 계시는데, 그의 직책이 바로 이승 사람들의 명부(命簿)를 관리하는 일이며, 명부란 즉 천명에 따라 八字의 형식으로 매 사람들의 출생 날자와 사망될 날자를 적은 장부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장부에 적힌 자기의 죽을 날자를 절때 거역할수 없으며, 그리하여 속담에 “살인도망 할수 있어도, 팔자도망 못한다.”고 하였답니다. 저승에서는 속세를 초탈하여 령산에 기를 묻고,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 다니는 영혼을 선(仙)이라고 하고, 저승에서 일정한 직책을 맡고 있는 영혼을 신(神)이라고 합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신통력이 대단하여 사람들은 물론 일반 신선들 보다도 그 재주가 뛰여났기 때문에 저승에 쳐 들어가 판관을 핍박하여 명부를 내놓게 한후, 자기의 죽을 날자를 먹으로 뻑- 지워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손오공은 오늘까지도 죽지않고, 소설, 영화, 그림 등 여러가지 형식으로 세상에 생생하게 계속 살아 있는가 봅니다. 우리민족 저승문화에서도 한 사람이 자기명이 다 하여 죽을때가 되면 저승에서 최판관이라는 신이 명부에 적혀 있는 그 사람의 죽을 날짜에 맞추어, 구속영장, 혹은 초청장을 발부하여 두 저승사자에게 주어서 이승에 내려가 해당 사람의 령혼을 체포, 혹은 모셔오라고 명령합니다. 일반사람에게는 구속영장을, 위대한 사람에게는 초청장을 보낸다고 합니다. 하지만 초청장이라 하여도 일방적인 강박 초청이기 때문에 체포해 가는거나 별반 차이가 없게 됩니다. 그 두 저승사자는 이승에 내려와 해당 사람을 찾은 후, 먼저 그의 령혼을 유혹하여 육체를 떠나게 합니다. 그러면 그 령혼은 육체를 떠나 잠시적으로 집 룡마루 서북쪽 상공에서 헤매고 있게 되는데, 육체는 그로하여 의식이 없어지면서 숨이 끊기고 죽음 상태에 진입합니다. 이때 그 누가 그 령흔을 다시 돌아오라고 간절히 부른다면 그 두 저승사자는 혹시 만에 한번씩이라도 상식밖의 실수를 범하여 그 령혼을 다시 돌려 보내는 수가 있답니다. 떠났던 령혼이 일단 돌아오면 육체는 다시 소생할수 있지요. 옛날부터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족 장례풍속》에서 혼을 부르게 된 유래입니다. 《조선족 장례풍속》에서 혼을 부르는 방법은, 생전에 고인과 관계가 좋던 사람이 구새목, 혹은 지붕우에 올라가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 룡마루 서북쪽 방향을 향하여 흔들면서 먼저 고인의 이름, 혹은 시호를 부르고 “옥보-옥보-옥보-” 하고 웨칩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종이에 싼후 고인의 머리밑에 조심히 괴여 드립니다. 혼을 부를때 원래는 “복(復)”을 불러야 “돌아오라!”는 뜻이 되는 건데, 글을 배우지 못했던 우리 선인들은 중국에 금방 들어 와서, 평소 장례을 맡아보던 도감이 혼을 부르는 소리를 잘못 기억한것 같습니다. “복”을 길게 부르면 “보-옥”이 되고, 세번 부르면 “보-옥, 보-옥, 보-옥”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선인들은 무슨 원인인지는 몰라도 앞의” 보” 소리를 듣지 못하고, 뒤의 ”옥” 소리부터 기억했나 봅니다. 그리하여 “옥보-옥보-옥보-”가 되였지요. 비록 잘못 전해진 방법이기는 하지만 우리 연변조선족은 중국에 들어와서 100여년동안 장례에서 줄곧 이렇게 혼을 불러 왔기 때문에 이미 특색적인 연변조선족 “고복”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조선족 장례풍속》에서 혼을 부르지 않았다면 보통 고인한테 책임을 다하지 못한것으로 치부되며, 장례후에 가족들의 꿈에 죽은 사람이 자주 나타나 문책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장례후에 가족들의 꿈에 죽은 사람이 자주 나타나면 장례때에 혼을 제대로 불렀는가 추적 확인해 볼 필요가 있으며, 다시 안신제사를 지내여 아직 유감이 풀리지 않아 저승에 입적하지 못하고 있는 영혼을 안정시키여, 시름놓고 저승에 입적할수 있게 해야 합니다. 제사와 명상은 이승과 저승을 련결하는 기본 도경이요 방법입니다.    사자밥(使者饭):사람이 사망하여 수시(收屍)를 마치고 큰 쟁반우에 밥 세사발, 술 석잔, 초신 세짝과 엽전 세잎을 놓고 이 쟁반을 윗방문 밖의 마루에 놓아 두는데 이것을 사자밥이라고 하며, 그 뜻인즉 고인을 모시려 오는 두분의 명부사자를 위로해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의로 한사람분을 더 놓아서 두 명부사자가 서로 다투게 하여, 고인에 대한 통제를 좀 소홀하게 하려는 심산이 있습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사자밥에 간장을 뿌리는데 그 뜻인 즉, 두 명부사자가 음식을 짜게 먹게 하여, 저승길에서 자주 물을 찾아 마이게 함으로써 그사이 강박적으로 끌러가는 고인의 영혼이 충분히 다리쉼을 하게 하려는 심산이랍니다. 우리민족 구전설화에 《동방삭설화(東方朔說話)》라는 것이 있는데, 여러가지 판본이 있으며, 공동한 점이라면 동방삭이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한갑자가 60년이니 삼천갑자면 십팔만년이 됩니다. 참으로 아무리 설화라고 하여도 그리 쉽게 상상해 낼수 있는 수명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중의 한 설화가 바로 장례때의 사자밥과 련관이 있습니다. 먼 옛날 동박삭이라는 한 심술궂은 아이가 있었는데, 전문 눈먼 봉사들을 우롱하는것을 쾌락으로 삼고, 살구에 똥을 발라 봉사들에게 주는가 하면, 똥구덩이에 봉사들을 유인하여 빠지게 하는 등 별의별 악한 짓을 다 저질렀습니다. 한 맹인 신선도 한번 우롱을 당하고는 너무 격분하여 이제 명부 사자에게 일러 바치여 너를 잡아가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크게 겁을 먹은 동박삭은 다시는 악한짓을 하지 않겠으니 제발 살려 달라고 그 맹인 신선에게 손이야 발이야 빌었습니다. 그러자 그 맹인 신선은 이제 명부사자들이 너를 잡으려 오면 좋은 음식과 돈으로 여사여사히 잘 대접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겨우 그번 죽음을 모면하고는 그후부터 동방삭은 전문 장례집만 찾아 다니며 사자밥을 정성들여 차려서는 명부사자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그후 동방삭이 정말로 죽을 차례가 되여 명부사자들이 그를 데리려 왔다가, 이미 그의 후한 대접을 많이 받아 온 지라 인정상 그를 잡아 갈수가 없어서 그의 구속영장에 적혀 있는 그의 수명 ”三千日”에 한획을 내리그어 “三千甲”으로 만들고는 그대로 돌아 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공짜로 삼천갑자를 살고 난 후에 동방삭은 인젠 천문지리에 통달하고 신통력이 뛰여나 저승사자에게 통 잡히질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저승에서는 계교를 꾸미여 저승사자로 하여금 노인으로 변장하고는 내가에서 숯을 물에 씻게 하였습니다. 한 지나가던 사람이 와서 무얼 하느냐? 물어 보기에 “숯을 자꾸 씻으면 하얗게 된다고 해서 씻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더니 그사람은 “허!허! 내가 삼천갑자 살아도 처음 듣는 소리군.”라고 합니다. 그말을 듣고 저승사자는 그가 바로 동방삭이라는 것을 알고 얼른 저승으로 잡아 갔다고 합니다. 이 설화에서 우리는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고 신통력이 뛰여났다 하여도 한번은 반드시 죽어야 하며, 또 필연적으로 죽게 된다는 우리민족 전통 생사관의 한 측면을 엿볼수 있습니다.   (후일 계속---스크랩 불허)
173    (정협제안) 조선족 장례풍속을 존중할데 관한 건의 댓글:  조회:3086  추천:0  2013-05-20
(州政协第十二届一次会议提案) 关于尊重朝鲜族丧葬习俗的建议   一、简要介绍 中国有句“红白喜事”之说法,结婚叫做“红喜事”,死人叫做“白喜事”,两者合起来叫做“红白喜事”。丧葬属于“白喜事”,关系到千家万户,关系到每一个人,是人们生活当中不能回避的一个很重要的大事。 通常说的“朝鲜族丧葬习俗”是朝鲜族的代表性习俗之一,是朝鲜族家礼文化“冠、婚、丧、祭”中的“丧礼”和“祭礼”部分,是朝鲜族传统文化和传统理念集中体现的习俗。 朝鲜族丧葬习俗的基本理念是儒家思想,其核心是“孝道”,其主体是“礼仪”,因此,朝鲜族丧葬习俗不仅是朝鲜族举行殡葬和祭祀的习俗,也是传承孝道理念,圆满礼仪规范的重要手段。 朝鲜族丧葬习俗大体上可分为;1初丧,2安装,3祭祀等三大部分,其中,“初丧”包括收屍、招魂、孝服、寿衣、殓袭、铭旌、吊唁、守灵、夜奠…等内容,“安装”包括掘圹、丧輿、发引、安葬…等内容,“祭祀”包括虞祭、安神祭、小祥、大祥、 清明祭、秋夕祭…等内容,附加还有缅礼、合葬…等内容。   二、朝鲜族丧葬习俗现状 1、熟悉朝鲜族丧葬习俗规范的老人大多已经过世,家族里没有人可指导具体丧礼规范,朝鲜族办丧中文化色彩已经基本消失。 2、如今朝鲜族出国的人多,家里空巢老人也随之增多,孤独死、无主亡魂、死亡几天后被发现…等现象时有发生。 3、现在的办丧基本上是“自丧自办”状态,家里突然出丧事,一时招不来亲戚、朋友,很多朝鲜族家属的办丧确实是一件很为难的事情。 4、2009年6月,在州政府有关部门的关心下,“朝鲜族丧葬习俗”分别被指定为州级和省级的非物质文化遗产。   三、存在的问题 1997年,国务院《殡葬管理条例》规定;“尊重少数民族的丧葬习俗;自愿改革丧葬习俗的,他人不得干涉。”,如今“朝鲜族丧葬习俗”被指定为州级和省级的非物质文化遗产,而国家的《非物质文化遗产法》也已经开始施行,在办丧过程中合理实施“朝鲜族丧葬习俗”是朝鲜族丧户的合法权益,应该得到有关部门的关心和尊重。 可是,如今在尊重朝鲜族丧葬习俗方面存在一些问题; 1、如今,延边地区从医院到殡仪馆,没有专门以朝鲜族丧葬习俗为对象的服务设施和服务项目。 2、朝鲜族患者在医院死亡,有关“尸体护理”事项通常以朝鲜族的特殊丧俗为由交给家属自行处理。以延边医院为例,殡仪馆虽然安排了协助员工,可是因为民族不同、文化不同等原因朝鲜族丧户一般不愿意雇用他们。就此,在医院附近“寿衣店”当职员的一些朝鲜族人,与前来购买寿衣的朝鲜族患者家属私下约定,患者断气,就以家属帮工身份进入病房,利用殡仪馆灵柩车到达之前的间隙,给尸体草草实施所谓的“殓袭”,技术不专业,质量不保证,收费不合理。 当今时代是21世纪,社会构造发生很大变化,可是朝鲜族丧俗活动依然以落后的原始自然方式来进行,这与时代的大背景不谐调,造成朝鲜族办丧不方便和丧俗文化的衰退。   四、解决方法 提案者认为;医院跟随时代的发展,进一步加强规范化建设,恢复和加强对死亡护理的管理是很好的方法。医院不仅是治病救人的地方,也是不治患者死亡的地方,医院不可能把所有患者都能治好,总有一部分患者是要死亡的。因此,医院既然收治患者,不要因为死亡就放弃,要精心负责任到死亡护理,在死亡护理过程中对民族习俗和宗教习惯给予充分的尊重,使死亡患者得到最后的安宁,使家属的哀思得到充分寄托,这在护理学上叫做“尸体护理”。 在现代医学护理角度上“尸体护理”是一种不可或缺的内容,涉及到心理学、社会学、宗教学、民俗学等多方面的问题。 现代护理学对“尸体护理”有如下的定义; “尸体护理”也称“死亡后护理”,“死亡后护理包括死亡后的尸体护理和死亡后家属的护理。做好尸体护理既是对死者的同情和尊重,也是对家属最大的心理安慰。尸体护理(Postmortem care)是对临终患者实施整体护理的最后步骤,也是临终关怀的重要内容之一。在尸体护理过程中应尊重死者和家属的民族习俗和宗教习惯的要求,护理人员应以唯物主义的死亡观和严肃认真的态度尽心尽责地做好尸体护理工作及对死者家属的心理疏导和支持工作。”(摘自;全国高等院校本科护理学类专业用教材《基础护理学》第十五章临终护理,第346页) 提案者在北京“同仁医院”了解到,他们是把过去所谓的“太平间”改成“医院殡仪服务站”,配备一流的现代化相关设备,实行承包管理。所谓的“尸体护理”是由医院的专业护工负责执行,他们那里的护工并不是农民工,基本上都是护理专业专科以上的毕业生,素质很高,对于全国不同民族、不同宗教的不同丧俗都有所了解。 五、建议事项 1、延边医院和州内各县市医院都要恢复和加强对“尸体护理”的管理;当今时代的医院应该具备“尸体护理”功能,医院恢复“尸体护理”功能不仅符合国际公认的现代医学护理理念,也有助于医院提高自己的品位。 2、不要以朝鲜族的特殊丧俗为由把朝鲜族死亡者尸体交给家属自行处理,这并不是尊重朝鲜族丧俗的举措,很容易误解为对朝鲜族丧俗的歧视,就因为此举引发了朝鲜族办丧难、增加不必要的费用、丧俗文化衰退…等一些不应该发生的不良后果。 3、禁止民间的“三无人员(无证、无资、无术)”随便进入病房乱摸尸体、乱搞殓袭、乱收费用。“朝鲜族丧俗”不应该成为某些人谋取暴利的手段,医院不应该成为民间人随便进来利用“朝鲜族丧俗”的名义赚钱的自由市场。 4、由于医院的人力和资源有限,解决上述建议的有关事项可能暂时存在一些实际困难,不妨限期与医院外的合法资质的殡仪服务专业单位进行合作,在共同运营过程中共同探索根本上解决问题的长久方案,这也是很不错的选择,内地很多医院都是采取这种方法的,关键是医院始终不要放弃对“尸体护理”的管理权。   望有关部门对上述提案能够引起重视,并予以积极的回应为盼。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二O一三年五月十八日    (本提案已经提交)  
172    《高丽棒子》와 《떼놈》의 유래 댓글:  조회:4810  추천:0  2013-05-13
《高丽棒子》와 《떼놈》의 유래 중국의 汉族과 반도의 고려안민족(우리민족을 통칭하여 조선민족이라 하자니 한국인이 분노하고, 韩민족이라 하자니 조선인이 분노하고 하니, 차라리 국제관습에 따라 한국, 조선 그리고 세계각지에 분포되여 있는 우리계례들을 통칭하여 ‘Koreans고려안’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하겠다--필자)은 지리적으로 서로 이웃하고 살면서, 력사상에 평화합작의 시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죽기 내기로 싸운적도 있었으며, 민간래왕에서는 서로 존경도 하고, 때로는 서로 욕질도 하면서 오늘까지 미운정, 고운정 키워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결코 우리에게 완전무결한 세계가 아닙니다. 많은 결점과 불편이 존재하죠. 그리하여 때로는 우리 본의 아니게 분노와 불평이 폭발합니다. 욕설은 분노와 불평을 해소시켜 줄수 있는 일종의 렬성 “항생소”입니다. 람용해선 안되죠. 우리는 욕설이라는 이 렬성 “항생소”를 공제성 있게 사용하여, 분노와 불평을 조기 처리함으로써 진일보의 폭력적 행위를 피면할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두말없이 폭력부터 들이 댄다거나, 욕설을 전주곡으로 폭력에 돌입한다면 그것은 작은 모병에 큰 수술을 들이대듯이 천부당 만부당 합니다. 그 누구를 욕설한다는 것은 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대방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문명하지 못한 인권침해 행위로서, 엄중하면 법률적 책임까지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쩔수 없이 욕설이 터져나올 경우, 욕설의 대상을 구체적인 그 누구로 하지말고, 될수록 모 사건, 혹은 모 사물을 대상하여 빙자하여 욕설하는것이 비교적 안전합니다. 욕설도 일종의 문화입니다. 좀 거치른 문화지요. 욕설에는 서술식, 은유식, 성어식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한 민족의 습관, 특성, 기질을 나타냅니다. 특히 성어식 욕설일 경우, 그런 욕설의 유래에는 그 민족의 문화적, 력사적 사연이 내포되여 있습니다. 이런 유래를 밝히므로써 구체적으로 어떤 적극적 의의가 있겠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장원한 견지에서 민족의 렬근성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강, 자존, 자애에 유익한 계시가 될수 있을것 같습니다.   1, “高丽棒子”의 유래 전번 한시기에 중국의 그 무슨“공정”으로 인하여 중한 민간에서 인테넷을 통하여 치렬한 쟁론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중국의 전통문화가 원래는 모두 자기들의 것이였다고 떼질을 쓰자, 중국의 누리꾼들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분통이 터져서 한국인들을 “高丽棒子”라고 욕합니다. 중국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조선인이나 한국인을 욕할때 “高丽棒子”라고 욕함으로써 가장 통쾌하게 욕했다고 여깁니다. 그럼 이 “高丽棒子”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며, 언제부터 어찌하여 중국인들이 조선인이나 한국인을 폄하하는 욕설이 되였는가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일설에서는 동북에서 “棒子“란 옥수수를 뜻하니, ”高丽棒子”란 바로 “고려 옥수수”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리유는 아주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력사상에 고려에서는 옥수수를 심지 않았고, 주로 벼와 조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또 일설에서는 “만주국” 왜정때 많은 조선인들에 일본군대에 편입되여 들어 왔는데, 그들은 왜놈들의 권세를 등에 업고 조선 녀인들의 빨래방치 비슷한 방망이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걸핏하면 중국인들은 두들겨 팼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특별히 미워하여 ”高丽棒子”라고 욕하게 되였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도 성립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高丽棒子” 의미를 가진말이 이미 “만주국”전의 청나라의 문헌에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의 王一元이라는 사람이 康熙五十年(公元1711年)전후에 쓴것으로 짐작되는 《辽左见闻录》이라는 문헌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한단락의 기록을 볼수 있습니다: “朝鲜贡使从者之外,其奔走服役者,谓之’棒子’。其国妇女有淫行,即没入为官妓,所生之子曰’ 棒子’,不齿于齐民。鬓发蓬松,不得裹网巾;徒行万里,不得乘骑;藉草卧地,不得寝处火炕。盖国中之贱而劳者。”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조선에서 조공 바치려 온 사종자 외에, 뛰여 다니며 복역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방자’라고 부르더라. 그 나라에서는 여자가 음란한 행위를 하여, 즉 관기로 들어가지 않고 낳은 자식을 ‘방자’라고 부르는데 제민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머리가 헝클어 져도 망건을 써선 안되고, 만리를 걸어 가도 수레나 말을 타선 안되며, 맨봉당에 짚을 깔고 자면서도 온돌에서 자선 안된다. 나라에서 비천하고 일만 하는 자들이다.” 여기에서 “방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고려안들은 이 “방자”라는 말이 너무나 익숙합니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의 시중군이 바로 “방자”가 아닙니까? 조선의 옛문헌에서는 “방자”를 한자로 “房子” “帮子”, “膀子”,등으로 표기가 되여 있으며, 한국 《두산백과》에서는 “방자”라는 관직은 고려시대에서는 “관청이나 관인에게 분급되여 잡직에 종사하는 말단의 이속”이였고, 조선시대에서는 “지방관아에서 심부름하던 남자 종, 또는 조선 초기 각사(各司)에 있던 비녀(婢女)중에서 뽑아 궁중의 작은 일을 보살피게 하던 시녀”라고 해석이 되여 있습니다. 이상에서 알수 있는바 “방자”는 일종 관직의 이름이였는데 관청, 혹은 관인의 심부름꾼 직급이였습니다. 王一元의 《辽左见闻录》에서 우리는 조공 바치려 중국에 온 조선 사절단 중에는 “棒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사절단 양반들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따라 온 “방자”들이란 것을 알수있습니다. 비록 “방자”에 대하여 조선 옛문헌과 한자 표기법이 서로 다르지만, 王一元의 문헌에 있는 “棒子”와 같은 뜻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辽左见闻录》은 오늘까지 중국에서 발견한 “朝鲜棒子”기록이 있는 가장 이른 문헌이며, 여기에서 나오는 “朝鲜棒子”가 곧바로 “高丽棒子”의 원형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朝鲜과 高丽는 종래로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동의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高丽棒子”가 조선인들을 욕하는 말로 되였는가? 이 문제의 답안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유관 력사문헌들을 찾아 그 당시 조선 사절단을 따라 중국에 들어온 “방자”들의 정황에 대하여 료해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조선 사절단의 청조 방문견문들로 수집된 《燕行录》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헌으로는 《老稼斋燕行日记》이며 작자는 金昌业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일기에서 자기가 康熙五十一年(公元1712年)에 자제군관 신분으로 조선 조공 사절단에 편입되여 중국에 왔다간 견문들을 상세하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燕行录》에서 다음과 같은 정황들을 료해할수 있습니다: 1,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에 한번 오는것을 큰 횡재의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량반들이나 ”방자”들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조공 사절단에 편입되여 들었갔다. 그리하여 金昌业의 그번에는 량반이 43명에, “방자”무리는 무려 498명이나 되였다. 이렇게 방대한 “방자”무리들을 몇십명의 량반들이 미처 관리해 낼수가 없을 정도였다. 2, 당시 청조 조정에서는 주변 번속국에서 사절단을 파견하여 조공 바치려 올때, 연도의 지방관청에서는 사절단에게 주숙과 식사 등 방면에서 여러모로 편리를 제공하라고 명을 내렸다. “조선방자”들은 이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량반들의 눈을 피해 민가와 여인숙, 술집, 점포 등에 들어가 도적질에 혈안이 되였다. 심지어 강탈하고 살인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3, 백성들이 피해를 보고 관청에 가서 고소하면 관청에서는 조정의 명이 있는지라 “조선방자”들을 처분하지 못하고 조선 사절단에 넘겨 주었다. 그러면 조선 사절단에서는 륭중한 의식을 열고 그 “방자”들을 처벌하는데, 많은 중국 백성들 앞에서 그 “방자”들을 형틀에 묶어놓고 엉덩이를 노출시킨후 특별한 조선식 방망이(棒子)로 엉덩이를 묵사발이 되게 때려준다. 이런일로 하여 중국의 백성들은 조선식 방망이(棒子)에 대하여 특별한 인상을 가지게 되였으며, 폄하의 뜻으로 시중꾼 “방자”들의 중국호칭을 방망이 “棒子”로 한것 같다. 4, 그런데 이런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면서, 조선 사절단이 지나가는 연도의 중국 백성들이 원래는 “조선방자”들만 미워하던 데로부터, 점차 조선 사절단 본신을 싫어하게 되였으며, 그 루명을 결국 전반 고리안민족이 쓰게 되였다. 이상의 자료에서 알수 있는바, 옛날 “조선방자”들의 그 문명하지 못했던 행실에 의하여 “朝鲜棒子”, 혹은 “高丽棒子”가 점차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가장 폄하하여 욕하는 말로 되여 버렸던 것입니다.     2, “떼놈”의 유래 중한 민간관계가 그리 우호롭지 못했던 전한 시기에 인테넷에서 중국 누리꾼들이 한국인을 “高丽棒子”라고 욕하면, 한국 누리꾼들은 중국인을 “떼놈새끼”, 혹은 “똥떼놈”이라고 욕합니다. 한국 인테넷에 들어가 두루 살펴 보니, 한국인들이 중국인을 “떼놈”이라고 욕하는 데는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ㄱ; 얼굴을 씻지 않고 때투성이로 다니는 놈 ㄴ; 떼를 지어 쓸어 다니는 놈 ㄷ; 똥같이 더러운 놈 ㄹ; 지저분한 놈 ㅁ; 미개한 놈 ㅂ; 망할 놈 … … … … … … 하여튼 이러루한 의미였습니다. “떼놈”의 유래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더니 “위키백과”에 다음과 같은 해설이 나옵니다; 되놈은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한국어 명칭 중의 하나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떼놈이라는 변형된 표현도 쓰이나, 되놈이 공식 표준어이다. '되놈'에서 '되'라는 말은 본래 두만강 인근의 만주에 살던 민족(여진족)을 이르는 말이었다. 한국어원학회에서는 사람을 뜻하는 '돌'과 '이'가 결합되어 '돌이'라고 하던 것이 도리 → 도이 → 되로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 이 말이 사람을 낮잡아 일컫는 '놈'과 결합되어 여진족을 비하하는 말로 쓰였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하여 명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왕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굴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청나라를 비하하는 말로 널리 쓰이면서 중국인 전체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정착되었다. 사람이 많아 집단 행동을 잘 한다고 하여 "떼놈"에서 유래했다거나, 큰나라(大國) 사람이라고 해서 "대(大)놈"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민간 어원설에 해당한다. 이상의 해석은 “떼놈”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중에서 가장 정연하게 정리된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상의 해석에서도 이 해석을 증명할만한 확실한 근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근근히 “추정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직접근거가 없으면 간접 근거라도 찾아야 어느정도 설복력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계속 인테넷에서 바다 바늘찾기를 하다가 서울 북쪽에 “되너미고개”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검색하여 보았습니다. 한국《문화일보》에 게재일자가 “2010년 11월 22일”로 된 ”미아리고개, 왜 ‘되너미고개’라 불렸나?”하는 제목의 문화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고지도에 되너미고개(적유현·狄踰峴)라고 표기돼 있다. 여진족 또는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 되놈이 이곳을 넘어 서울에 침입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돈암동(敦岩洞)은 순우리말 이름인 ‘되너미’를 한자 소리를 따서 표기한 것이다. 다행으로 “떼놈”의 유래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증명할만한 근거라도 찾은셈이 되였는데, 그 근거가 바로 “되너미고개”입니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분석한 기초에서 “떼놈”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 “떼놈”이란 말은 전통적으로 여진족(만족의 전신) 또는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던 “되놈”이란 말에서 온 것이다. 2, 조선 고지도의 서울 “되너미고개”는 워낙 “되놈고개”를 문명한 어구로 다듬은 것이고, 그것이 한자로 “狄踰峴”으로 표기된것은 한자의 뜻글 공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한스러웠던 병자호란 력사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狄踰峴”을 뜻풀이 하면 “오랑캐가 넘어온 고개”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확실하게 알수 있는바, “되놈”에서의 “되”는 곧바로 한자”狄(di)”의 발음을 본딴 것이며, 북방 오랑캐란 뜻으로 력사상에서 주로 여진족을 가리켰었다. 3, “되놈”이란 말은 원래 여진족을 비하하는 말로 씌였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하여 조선의 종주국이였던 명나라가 망하고, 또 조선왕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에 굴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청나라 군대가 서울로 넘어 왔던 고개를 “되놈고개”라고 이름을 부치면서 청나라를 비하하는 말로 널리 쓰이다가 점차 중국의 전체를 비하하는 말로 확대되여 고착되었다. (끝)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정리 2013-05-12  
171    (연변방송)이밤을 함께 합니다. 댓글:  조회:3139  추천:1  2013-04-16
연변인민방송국 《이밤을 함께 합니다.》 2013 년4월4일 저녘9시 프로기획:한태익 아나운서:윤련월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 현룡수   안녕하십니까? 윤련월입니다. 오늘이 바로 청명절이네요. 24절기의 하나인 청명은 음력설, 단오명절, 추석명절과 함께 우리 민족의 4대 전통명절로 되고 있습니다. 청명에는 조상이나 돌아가신 친인들의 산소에 가서 가토를 하면서 고인들을 기립니다. 청명절을 맞으며 오늘밤은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 회장을 모셨는데요. 우리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전승 발전시키는데 여생을 바쳐가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방송사연 들으시고 전화참여 하시려는 분들은 생방송실 전화 2561111번이 열려 있으니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간주곡___ 인사나누고 (1) ;아나운서: 어느 민족에게나 다 자기 민족특색에 맞는 장례문화가 있지요. 현회장께서는 어떤 특수한 인생기회에 의하여 우리 조선족 장례문화에 접근했고, 어떻게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사업을 맡게 되였는지요? 현회장: 저의 고향은 화룡 팔가자 약암동이란 곳인데, 가정의 제 11번째 아이로 태여났습니다. 저의 앞에서 이미 열명의 형님, 누나들이 홍역에 걸려 요절되였습니다. 제가 태여나게 되자 자식을 이미 열이나 잃고 붕괴의 변두리에 처한 아버지께서는 당지의 용한 의원을 찾아 방토를 실시하였습니다. 하여 제가 태여나자마자 어머니에게는 보이지 않고, 포대기에 싸서 이미 약정되여 있는 양모에게 가져갑니다. 그리고는 그집 소 외양간에 가서 포대기에 소똥을 묻히면서 소똥을 밀어내는 구멍으로 빼 내오고 “쇄지야! 음매!”하고 부릅니다. 쇄지란 송아지란 뜻이죠. 그때부터 모두들 저의 이름을 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며칠전의 력서장을 한장 뜯어서 포대기에 넣어 줍니다. 저의 출생부란 뜻이랍니다. 그당시에 전문 아이들만 업어가는 “어베”라는 귀신이 있었는데, 우리집에서 이미 아이 열이나 업어 가서 재미를 붙였으니, 그 귀신이 저를 가만 놔둘리 없지요. 그리하여 제가 태여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귀신이 그날 저녁에 또 저를 업어가려고 옵니다. 그런데 이번에 와서는 그 귀신이 갈피를 잡을수 없게 됩니다: 이름을 들어보니 짐승 이름이고, 또 확실히 소똥냄새도 나고, 생일을 보니 이미 며칠전에 태여난 송아지인지라, 결단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유예하는 사이에, 어느덧 새벽이 되여 수탉이 울면 그 귀신도 돌아 가야 합니다. 이렇게 백날을 속이니, 귀신도 단념하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황당한 방토였지만, 다행히도 그후부터 우리집에서는 다시는 아이들이 요절되는 일이 없었으며, 제아래에 또 두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성공적으로 살아나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물론 시대가 발전한 혜택이였지요. 그 당시 마을밖에는 도가집란것이 있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들어 내가는 상여를 넣어두는 집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어베라는 귀신이 그집에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도가집을 상당히 무서워 하였죠. 그러던 1967년도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저는 소학교 마당복판에서 상여가 불에 활활 타는것을 보았습니다. 어디서 온 반란파들인지 마차에 상여를 실어와서 태웠습니다. 그무슨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한다고 하였습니다. 개팔이라는 한 얼치기가 상여가 타는 불속에서 무엇을 건져내려 하다가, 덜미를 잡혀 교단에 끌려 올라가, 머리가 땅에 닿게 허리 굽히고 벌을 받다가, “개팔이를 타도하자!”고 열번 웨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문화혁명전까지만 하여도 마을에서 명정과 만장을 앞세우고, 호호탕탕한 상여행열은 민속놀이 못지않은 경관이였습니다. 숱한 아이들이 따라가며 구경했죠. 그 상여군들속에서 저는 저의 아버지도 여러번 보았습니다. 저의 고모의 말씀에 의하면 저의 할아버지가 바로 집사였는데, 목단강 지역에서 장례제사를 맡아 주지하시던 분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16병진년에 일본 보안대원들한테 집단폭행을 당하고 억울하게 사망하셨습니다. 제가 늙으막에 와서 역시 장례문화를 다루게 되였는데, 아마도 우리 가문의 숙명인가 봅니다. 제가 할아버지의 의발을 이어 받았죠.   (2);아나운서: 어떤방면의 것을 깊이 연구하고 성과를 내자면 연구학자들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지지도 매우 주요합니다. 남편이 전문 조선족 장례문화를 다루니 안해는 어떤 태도였습니까? 뭐라 안 하던가요? 현회장: 다행스러운것은 그당시 저의 안해는 한국에 가고 저의 옆에 없었습니다. 많은 시끄러움을 덜었죠. 제가 하고싶은 대로 할수 있었으니깐요. 지금도 그 사람은 제가 하는 노릇이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캐여 물어면 이것 저것 얼버무려서 관을 넘지요. 실상을 알고나면 앞으로 무서워서 저의 옆에 오지 않을가봐 걱정입니다. 그래서 안해를 파악있게 설복시킬 묘한 방안을 한창 연구중인데, 이미 효과가 있음직한 방안을 몇가지 연구해 냈습니다.   (3);아나운서: 자제분들은 아버지의 사업에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현회장; 저는 딸이 없고, 아들놈이 둘입니다. 두번째 놈이 또 고추를 달고 나오자 정신을 바싹 차리게 되였습니다. 아들이 둘이란 것은, 잘 키우면 룡 두마리, 잘못 키우면 승냥이 두마리를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휘초리를 휘두르며 두놈을 공부에 몰아 넣었습니다. 이미 두놈 모두 대학필업 시켰고, 큰놈은 중국과대 연구생까지 마쳤습니다. 많은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 저의 뜻을 따라 주었으니 고맙죠. 저의 안해는 아들난 죄로 그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또 북경에 집까지 사 주다나니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물론 저도 조금은 고생을 했지만도. 아이들이 크면서 세대차이가 있다나니 사회에 대한 관념상에서 자주 충돌이 생깁니다. 저는 전통적인 사유이고, 아이들은 현대적인 사유이니 조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사업에 너무 집착하니깐 아이들도 인젠 리해를 표시하면서 여러방면으로 관심하고 협조합니다.   (4);아나운서: 조선족례의연구회를 조직한 초기에는 여러가지 애로사항들이 매우 많았겠는데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요?  연구회 성립초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금 문제였습니다. 연구회를 하기전에 기술개발유한회사를 꾸리고 “종합제설기”라는 설비를 자체로 설계하여 특허을 받은후, 결국 자금이 모자라 개발을 못하고, 헐값으로 양도하다나니, 많은 자금을 손실 보았습니다. 다행히 친구들이 도와주고, 정부의 지지에 힘 입어서 무형문화재 등록신청에도 성공하였고, 성공적으로 유관 세미나를 개최하여 주민정국, 주위생국, 등20여개 부문대표가 참석하였으며, 이름있는 민속학자들이 참석하여 8편의 무게가 있는 론문을 발표하여 연변 민속보호 사업의 합리성과 가능성을 론증하였습니다. 연변 문화사에서 조선족 장례풍속 세미나는 처음이였죠. 지금은 정력을 집중하여 《조선족 장례제사 편람》을 편찬하고 있는데, 바야흐로 완미중에 있습니다.   (5);아나운서: 요즘 조선족들이 출국이 많아지면서 독거로인들이 많게 되였지요. 그리고 가문에 상사가 나면 조선족들은 여러방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런 실정에 비추어 장례대행 기구도 내왔다면서요? 현회장:그렇습니다. 조선족 장례문화가 쇄퇴된것이 큰 문제일 뿐만 아니라, 조선족들이 장례치르기 어려운 문제도 시대적 난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현대 로인들의 가장 큰 특점은 자식들과 갈라져 사는 것인데, 반려가 함께 있는 로인들은 그런대로 서로 등이라도 긁어줄수 있지만 독거로인들은 감기에 걸려도 물 한컵 떠다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집에서 고독사 한 로인들, 사망되여 며칠후 발견된 망령들을 자주 접촉하게 됩니다. 지금 시대에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니까 젊은이들이 부모를 옆에 모시고 있으면서 보살필 사이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리가 어려운 로인들은 보통 경로원에 맡겨지는데 정부에서 꾸린 경로원은 그런대로 사람 사는곳 비슷하지만 개인적으로 꾸린 경로원은 그 정황이 상당히 복잡합하다. 시대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미 한참 왔지만, 우리들의 현재 장례봉사체제는 고대보다도 더 락후합니다. 그리하여 연구회 산하에 “시대상조(장례)복무중심”을 설립하게 되였습니다.   (6);아나운서: 조선족 장례에 대하여 연구하고, 또 장례대행사를 경영하면서 여러가지 안타까운 현상들을 보았다는데 어떤일들이 가장 인상적이였습니까? 현회장: 인상에 남는 일들이 많지요. 한번은 서른살 좌우의 젊은 색시가 아이를 업고 와서 자기 아버지가 사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장례치를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괜찮은 형편이죠. 한번은 철남의 한 사회구역에서 련락이 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썩은내가 코를 찌르고, 사처에 마이고 버린 술병과 먹다남은 명태낙지가 널려있었으며, 시체는 이미 며칠전에 사망한 망령이였습니다. 참 딱한 일이죠. 이런 망칙한 꼴을 피면하기 위하여, 한 불치병 독거로인은 자기 죽을 시간을 미리 계산하고는 절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후 시간에 맞춰 불시에 죽으니 가속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장례봉사체제가 이 꼴입니다. 장례문화를 살리려면 먼저 장례 어려움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7);아나운서: 조선족 장례문화를 어떻게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요? 현회장: 우에서 이미 말씀 드렸다 싶이 우리의 장례문화를 계승발전시키려면 먼저 조선족들의 장례치르기 어려운 시대난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어도 장례치를 사람조차 변변치 못한데 장례문화 발전이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죠. 현재 우리 연변에는 병원으로 부터 빈의관까지 조서족 장례풍속을 존중하여 설치한 설비나 항목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장례봉사체제는 고대보다도 더 락후합니다. 고대에는 마을마다 상여계, 황두월이라는 민간 상조 조직이 있어서 집에 상사가 나도 별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집 장례는 제가 책임져야 하니, 주위에 친척, 친구가 없는 분들의 경우 참으로 딱한 사정입니다. 부득불 한족수의상점에서 일을 보는 조선족 직원들을 고용하여 쓰는데, 비용이 비싸고 복무가 규범적이지 못하며, 질량 보장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미 주민정국, 주위생국, 연변병원 등 유관부문에 제출하였는데 이제 곧 해결방안이 나올겁니다.   (8); 아나운서: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이 주급, 성급 문형문화재로 지정되게 하기 위하여 어떤면에서 노력을 기울였는지요? 현회장: 조선족 전통장례가 주급 성급 무형문화재로 되였는데, 제 혼자의 노력으로 된것이 아닙니다. 수선 정부 유관부문에서 지지하고, 유관 학자들이 협조한 결과입니다. 2009년은 나라에서 무형문화재 등록을 시작한지 이제금방 두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족을 포함하여 전국의 57개 민족중에서 장례문화를 무형문화재로 신청한것은 우리 조선족이 유일하였습니다. 장례문화는 좀 특수한 문화지요. 그리하여 그 신청의 합리성에 대하여 주의 주관부문 주요령도자들까지도 의심을 표시하게 되였습니다. 저는 합리한 도리와 충분한 리유를 찾아 가지고 그이들과 내심하게 교섭하여 끝내는 정부측의 지지를 쟁취하였습니다. 제가 주장한 리유라면 우리 조선족 장례문화는 중국의 그 어느 다른 민족의 장례풍속과는 달리, 고대중국 유가문화의 원고유존으로서, 원래는 중국에서 기원하였는데, 현재의 중국에선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찾아 볼수 없는 아주 보귀한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민족의 가례문화가 고대중국의 유교문화를 오늘까지 보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족 장례문화가 중국의 무형문화재로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지요. 그런데 아직 성급에 그쳤는데, 앞으로 더 노력하여 나라급으로 승급시킬 타산입니다.   (9);아나운서: 현회장님께서는 우리 민족 전통 장례제사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 이미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요. 이방면에서 앞으로 어떤 바램과 타산들이 있는지요? 현회장: 수선먼저 조선족 장례문화를 현재의 락후한 민간차원으로 부터, 시대적이고, 전업적이고, 민족적인 고급차원으로 승급시켜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금후의 계획과 목표가 있습니다: 첫째; 시대상조를 효과적으로 운영하여, 조선족 장례봉사 사회적 기제를 건립하고, 조선족 장례 봉사인원 배양기지를 건립한다. 둘째; 《조선족 장례제사 편람》을 완성한다. 셋째; “조선족 장례풍속”을 나라급 무형문화재로 승급시킨다. 넷째; 조선족 장례풍속 전승기지를 건립한다.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아직은 비밀입니다. 여기의 일곱가지 계획과 목표만 완성하자 하여도, 아마 백년은 걸려야 할것 같습니다. 제가 죽을때까지 죽을힘을 다 하여 분투하여도 다 완성할수 없는 아름참 계획과 목표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백년의 목표를 바라고 매일매일 열심히 출근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어느날에 염라왕님께서 “이번에는 당신이 죽을 차례요!”하고 통지를 보내오면, 저는 “예! 알겠습니다!”하고는 흔쾌히 사신을 따라서 저승에 가겠습니다.   간주곡---- 아나운서: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제사문화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여생을 바쳐가고 계시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님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오늘 방송을 들으시고 어떤 감수가 있는지요? 전화참여 하시려는 분들은 생방송실 전화 2561111번을 눌러 주시길 바랍니다.   아나운서 맺음말; 해마다 청멸절이 돌아오면 혁명렬사들을 추모하고, 조상들을 기리는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이고, 미덕입니다. 오늘날 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님과 같은 분들이 있어, 우리 조선족 장례문화가 대를 이어 계승,발전할수 있을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다 되였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방속 기대하여 주십시요. 안녕히 계십시요.     2011년4월4일        
170    (중앙방송)청명특집 인터뷰 답변고 댓글:  조회:2694  추천:1  2013-04-03
중앙인민방속국 조선말 방송 청명특집 인터뷰 답변고   1. 청명의 유래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서 립춘으로부터 다섯번째 절기가 됩니다.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15도씩 움직이면 한절기가 듭니다. 청명이면 지구가 립춘으로부터 이미 60도 움직인 위치입니다. 이미 일년의 1/6이 지나간 셈이죠. 송조때의《歲時廣記》에는 “청명이란 만물이 청신하고 명려하다는 뜻이니라.(清明者,谓物生清净明洁)”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청명은 또 습관적으로 한식이라고도 하는데, 기실 청명과 한식은 계산하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동지날 부터 105일이 되는 날이 바로 한식인데, 보통 청명 전날에 들며, 또는 청명날과 청명이튿날에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식의 유래에 대하여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개자추(介子推) 설이 비교적 대표적입니다. 중국 춘추시기에 진문공(晉文公)이라는 임금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력사상 유명한 춘추 7패중의 두번째 패왕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임금이 되기전에 한번은 국란을 당하여 심복신하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하게 되였습니다. 하루는 굶어서 허기져 쓰러진 진문공을 개자추라는 한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썩- 베어내여 구워먹여 살렸습니다. 그후 고난이 끝나고 임금자리에 오른 진문공이 개자추에게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개자추는 벼슬에 뜻이 없어 이미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에 들어 갔으므로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옆에는 헝겊에 피로 쓴 한수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 나는 구천에서도 부끄러움 없으니 임금께선 나라일에 청명하시고 또 청명하시라.”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산에 불을 놓은 그날을 한식날로 하고 전국적으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으며 개자추의 시구에 근거하여 이날을 청명절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2. 언제부터 청명절을 쇠는 풍속이 생겨났는지요? 청명풍속은 중국 춘추시기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청명에 성묘하는 풍속은 공자에 의하여 시작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2500여년이 되지요. 그러다가 당나라 개원년간 당현종때에 와서, 중국에서는 청명성묘를 한식성묘로 공식적으로 고쳤습니다. 당시의 조선반도는 통일신라시기였는데, 당나라와의 밀접한 관계에 의하여 한식성묘 풍속이 신라에까지 받아 들여진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후 송나라때에 와서 중국에서는 한식성묘가 다시 청명성묘로 복귀되였지만, 조선반도에서는 조선왕조가 시작되면서 한식은 이미 설, 단오, 추석과 함께 4대명절에 속하게 되였습니다. 우리민족은 한식날에 주로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며 성묘를 합니다. 우리 조선족이 중국에 건너온 초기에만 하여도 여전히 한식을 쇠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장기적인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차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지금 와서는 한식의 개념은 거의 없어지고, 청명개념으로 일반화 되였습니다. 3. 한족과 대비할때 우리민족의 청명절 풍속에는 차이점이 존재하는가요? 있다면 어떤 차이점들인지에 대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청명풍속은 주나라때에 중국에서 기원하여, 통일신라때에 우리민족에게 접수 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의 청명풍속은 형식상에서는 중국과 기본상 비슷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상에서는 차이가 컸습니다. 그 차이는 주요하게 성묘하는 방법상에서 표현됩니다. 현재에도 한족들의 성묘방법과 우리민족의 성묘방법은 많은 다른점을 나타냅니다. 우리민족의 성묘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소에 도착하면 먼저 후토를 찾아 후토제를 지냅니다. 그다음 삽으로 가볍게 묘소를 손질하는데, 속칭 가토라고 합니다. 그다음 제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사회자가 술을 따르고 다함께 절를 세번 하는데 강신이라고 합니다. 그다음 제주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따르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헌작이라고 합니다. 헌작에는 초헌, 아헌, 종헌, 첨작 등 절차가 있습니다. 소유의 사람들이 모두 헌작이 끝난후, 사회자가 신령의 식사를 시중들어 끝내고는, 숙주 한잔 따르고, 모두 다 함께 절을 세번 올리는데, 이것을 사신이라고 하며, 이것으로 성묘가 끝납니다. 성묘가 끝나면 자리를 정하고 모여앉아, 갖고간 제물들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능원에 가서 성묘할때에도 이 방법을 참조하며 적당히 조절하여 지냅니다. 골회함을 찾아내와 제사지낼때에는 후토제가 취소됩니다. 한자리에 조상들의 묘가 여러자리 있을때, 부모묘에 먼저 성묘하고, 그다음 윗대 순서에 따라 성묘하는데, 후토제는 부모묘에서 한번만 지냅니다.   4. 우리민족의 청명절 풍속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습니까? 전통적으로 청명절 풍속에서는 들놀이, 연날리기, 활쏘기, 식수, 성묘 등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풍속은 성묘였습니다. 중국 송나라때에 장택단이 그린 《청명상하도》에는 그당시 민간의 청명풍속이 생동하게 표현되여 있습니다. 현재 우리민족의 청명풍속에는 주요하게 성묘와 들놀이가 있습니다. 성묘라고 하면 또 청명날에 연변각지 소학교 학생들의 렬사비 성묘활동을 빼 놓을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묘를 끝내고, 새봄맞은 산길을 밟으면서,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도 참으로 기분이 좋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5.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모든 전통풍속을 그대로 계승할수도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들은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고스란히 계승할수 있고, 또 어떤 내용들은 현단계 실정에 맞게 개량할수 있는것들입니까? 우리민족은 중국에서 “례의민족”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우리민족 장례제사문화의 핵심은 효도이고, 그 주체가 바로 례의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전통 장례제사문화에서 보호하고 계승해야 할것이 바로 효도와 례의입니다. 자고로 “효도가 행위의 으뜸이요, 례절이 만사의 먼저니라.(孝为百行首,礼当万事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이 효도와 례의를 잃는다면 조선족이 아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민족의 “효도”와 “례의”의 우량한 전통은 시대의 충격에 의하여, 지금 많이 색바래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민족 장례제사 방법은 많이 간소화 되였는데, 원래 우리것이 아닌 미신적인 찌꺼기들이 많이 섞이여 있습니다. 례하면 종이돈를 살은다던가, 종이집을 살은다든가 하는 것들이지요. 우리는 길림성 무형문화재《조선족장례제사풍속》보호책임단위로서 현재의 혼란한 조선족 장례제사 방법을 정리하고, 간편화, 규범화, 민족화시킬 목표를 내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직도 민간차원의 락후한 조선족 장례제사문화를 시대적이고 전업적이고 민족적인 문화로 승급시킬 것입니다. 이 목표를 위하여, 우리는 《조선족 장례제사 편람》을 편찬하고 있는데, 지금 진일보 완미중에 있습니다.   6. 현재 청명절에 대해 사회적으로 어떤 그릇된 인식이 존재하는가요? 청명절에 대한 인식이라면 주로 제사에 대한 인식입니다. 현재 사회적으로 제사에 대한 옳다고 할수없는 인식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제사에 대한 미신적 인식이고, 또 하나는 제사 무용론입니다. 제사를 한장의 민속종이라고 한다면, 정면에는 문화라고 씌여있고, 반면에는 미신이라고 씌여 있습니다. 문화적 태도로 제사를 지내면 유익한 신선효과를 얻을수 있지만, 미신적 태도로 제사를 지내면 해로운 마귀효과를 얻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 무용론자들에 대하여서는, 그들이 제사 문화론을 비난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들의 제사무용론을 존중할 것입니다.   7. 어떻게 하면 옳바른 청명문화리념을 수립할수 있습니까? 청명문화리념이란 곧바로 제사문화리념이지요, 우리민족의 제사문화는 단지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라, 조상과 부모의 은덕을 잊지않고, 또 자손들에게 효도의 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하여 영원히 필요한 것이며, 없어서는 안되는 민속문화라는 리유로 민족과 함께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새롭게 성행하는 생화 증정이나, 인테넷 추모 등 방법에 대하여, 물론 아주 시대적이고 신사다운 방법이지만, 어디까지나 민족 제사문화의 보충으로 될수 있을 뿐, 민족 제사문화를 대체할수는 없다고 인정합니다. 제사는 일종 마음을 표시하는 의식입니다.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부모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부모에게 드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없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기 보다는,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를 지낼때에도 형식에만 강조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정성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속 관념과 마음의 뉴대를 건실하게 할수있으며, 또 그로부터 유익한 방조와 계시를 받을수 있으며, 후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수 있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답변고 2013-04-03
169    (연변방송) 2013청명과 한식문화 댓글:  조회:3704  추천:0  2013-04-01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2013 청명절 특집 방송주제:《청명과 한식문화 및 장례문화, 성묘객들이 주의할 점》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 현룡수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들: 답례) 반갑습니다. 올해는 4월 4일에 청명이 들었습니다. 청명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혹은 릉원으로 성묘하러 갑니다. 성묘 때문에 산에 들어가거나 릉원에 찾아갈 때 화재예방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조그마한 불씨라도 대형 화재를 불러올수 있다는 점을 명기해야 할것절입니다. 오늘은 청명과 한식에 깃든 우리 민족문화와 장례문화 및 이러한 문화를 어떻게 전승, 발전시킬가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 보기 위해 현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청명은 원래 24절기의 하나로서 다섯 번째 절기가 시작되는 날을 말하고 한식은 조선시대에는 설과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하는 명절이라는 점에서 구별이 있습니다. 현회장께서 먼저 청명에 깃들어 있는 문화를 짚어주시기 바랍니다.   현룡수 회장: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서 립춘으로부터 다섯번째 절기가 됩니다. 립춘을 원점으로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15도씩 움직이면 한절기가 듭니다. 청명이면 지구가 립춘으로부터 이미 60도 움직인 위치입니다. 이미 일년의 1/6이 지나간 셈이죠. 《세시백문》에 이르기를 “만물이 이때에 이르러 생장하는데 모두 청신하고 명려하다”고 하였습니다. “청명”이란 말은 여기에서 나온것이라고도 합니다. 청명은 또 습관적으로 한식이라고도 하는데 기실 청명과 한식은 계산하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동지날 부터 105일이 되는 날이 바로 한식인데, 보통 청명 전날에 들며, 금년과 같이 청명과 같은날에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식은 조선왕조시기에 설, 단오, 추석과 함께 4대명절에 속했습니다. 한식날은 조상의 무덤을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성묘의 날입니다. 한식날에 성묘하는 풍속은 중국 당나라때에 조선반도의 신라에서 받아 들인것으로 추정됩니다.   김동선 기자: 한식은 우리 민족 4대 전통명절로써 여기에는 많은 유래와 민속문화가 동반되여 있습니다. 현회장께서 계속하여 한식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한식 유래에 대하여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두가지 설이 비교적 대표적입니다. 한가지는 개자추(介子推) 설입니다. 중국 춘추시기 진문공(晉文公)이 임금이 되기전에 국란을 당하여 심복신하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하게 되였습니다. 하루는 허기져 쓰러진 진문공을 개자추라는 한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썩- 베어내여 구워먹여 살렸습니다. 그후 고난이 끝나고 임금자리에 오른 진문공이 개자추에게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개자추는 벼슬에 뜻이 없어 이미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에 들어가고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옆에는 헝겊에 피로 쓴 한수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 나는 구천에서도 부끄러움 없으니 임금께선 나라일에 청명하시고 또 청명하시라.”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산에 불을 놓은 그날을 한식날로 하고 전국적으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으며 개자추의 시구에 근거하여 이날을 청명절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한가지 설은 改火설입니다. 고대에서는 지금처럼 성냥이 보급되지 않아 민가에서 불을 사용할때에는 부엌이나 화로에 상기적으로 보관해 두었던 불씨를 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불씨가 오래되면 활력이 없어진다고 여기여 불씨를 일년에 한번씩 바꿉니다. 이때면 조정에서 의식을 가지고 마른 버드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일으켜 그 불씨를 각 지방관청에 나누어 줍니다. 그러면 각 지방관청에서는 책임지고 그 불씨를 관활지역의 가가호호에 나누어 주는데, 전통적으로 이날이 바로 동지후의 105일째 되는 날이였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민간인들을 장악하고 관활하는 일종의 통치수단이 였습니다. 순수한 새 불씨를 받기 위하여, 집집마다 하루전부터 낡은 불씨를 철저히 청리하고 기다렸다고 하였으니, 이날에는 부득불 찬음식을 먹을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이날을 한식이라고 하게 되였답니다. 이외에도 몇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략합니다.   김동선 기자: 제사를 지내거나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차림에 있어서 알아두어야 할 점은 어떤것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산소에 찾아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일은 후토를 찾아서 후토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명태 한꼬리나 과일 세알을 제물로 놓고 술을 한잔 따라 올리고 세번 절을 하면 되겠습니다. 흙을 파고 초목을 베기전에 먼저 산소를 지켜준 후토신에게 인사하고, 허락을 받는다는 뜻으로서, 대자연에 대한 존중을 표시합니다. 그다음에 삽으로 조심조심 가토를 시작합니다. 많은 분들의 경우, 먼저 가토를 하고 후에 후토제를 지내는데, 크게 틀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도 대자연의 한 성원이라는 리념에서 대자연에 대한 숭배를 조상에 대한 숭배의 앞순서에 놓는것이 리치에 맞습니다. 유가의《가례》에서는 꼭 이렇게 하여야 한다고 씌여있지는 않지만,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리념에서 산소는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신성한 곳으로서 그곳의 일토일석, 일초일목에는 모두가 우리 조상들의 령기가 슴배여 있으므로, 그곳에서 함부로 흙을 파고, 함부로 나무를 찍고, 풀을베고 하는것은 조상들 앞에 엄숙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능묘에 가서 제사 지낼때에도 먼저 후토제 지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골회함 찾아 놓고 제사 지낼때에는 후토가 없으니 이 절차가 없어집니다.   김동선 기자: 제사법에서 어떤 점에 주의를 돌려야 합니까?   현룡수 회장: 제사는 일종 마음을 표시하는 의식입니다.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부모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부모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없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기 보다는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를 지낼때에도 형식에 그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속 관념과 마음의 뉴대를 건실하게 할수있으며, 또 그로부터 유익한 방조와 계시를 받을수 있으며, 후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수 있습니다. 성의가 없는 제사는 차라리 지내지 않은편이 좋습니다. 우리민족의 재래의 제사법에는 엄격한 절차 구분이 있었습니다. 크게는 강신, 초헌, 아헌, 종헌, 첨작, 사신, 이러한 절차입니다. 여기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지만, 그 기본절차에 대하여 알아두고, 될수록 따르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강신이라는 것은 신령이 제사받으려 내려온다는 뜻으로, 제주가 술을 붓고 다 함께 절을 하는 절차이고, 초헌은 주부가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절차이며, 아헌은 가족들의 차례가 되겠고, 종헌은 친척들의 주요 성원의 차례가 됩니다. 종헌이란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올리는 술이란 뜻이 되겠으나, 지금은 가문 성원들이 모두 술을 올리고 인사하려는 요구에 만족주기 위하여 차수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종헌후에 붓는 술은 첨작이라고 하는데, 주로 가속과 친척외의 손님들의 차례로서, 재래식 제사법에서는 역시 세번을 초과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사신이란것은 제사가 끝났으니 인젠 신령을 돌려 보낸다는 뜻으로, 이때는 제주가 술 대신에 숙주(랭수) 한그릇 올리고, 메밥을 조금 떠서 물에 놓고, 잠간 기다렸다가, 다 함께 세번인사하고 제사를 끝냅니다. 김동선 기자: 제사를 지내거나 차례상을 차릴때 금기시해야 할 것들로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장례,제사와 상관되는 금기사항들이 많았으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금 와서는 많이 취소되였습니다. 하지만 장례와 제사는 어디까지나 슬픔과 불행을 처리하는 엄숙한 행사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연히 신중한 태도를 가지게 되며 잘못을 범할가봐 조심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에 기초하여 지금도 사회적으로 장례,제사와 상관되는 적지않은 금기사항들이 보류되여 있거나 새롭게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래에 우리민족 장례,제사와 상관하여 현존하는 금기사항들 가운데서 몇가지 정리하여 적었습니다. A, 성시의 병원이나 아빠트에서 친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크게 소리내여 울지 않습니다. B, 어린 아이들은 죽은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염습할때 다른 곳에 피신 시킵니다. C. 농촌의 경우, 상가집에서는 초상기에 부엌 아궁이를 막아 놓고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D, 령구를 내갈때 문턱이나 문설주를 다치지 않습니다. E, 가문에 상사가 났을 때 임신한 며느리나 임신한 딸은 장례에 참가 시키지 않습니다. F,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입던 옷과 덮던 이불은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 처리하며, 평소에 쓰던 일용품들 가운데서 특히 중요한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기지 않고 처리합니다. G, 장례나 제사에 가서는 불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누구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H, 제사상 제물은 짝을 지우지 않으며 홀수로 합니다. I, 장례나 제사가 지난후에는 보충 부의금을 받지 않습니다. J, 장례나 제사에 참석할때 화려한 옷과 진한 치장은 삼가합니다. K, 친인이 객사하였다면 사망한 지역에 가서 장사 지내고 시신을 집으로 옮겨오지 않습니다. L, 장례용품이나 제사소물을 살대 시장식 흥정 삼가합니다. M, 제사상에 개고기와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 그리고 복숭아와 토마토는 제물로 쓰지 않으며 제사음식에 고추가루, 마늘, 파 등을 쓰지 않습니다 N, 제사상에 찰떡을 놓을 경우 붉은 팥고물을 쓰지 않으며 흰 열콩고물이나 콩가루 고물을 씁니다. O, 상주와 주부는 장례를 치른해에 자기생일을 쇠지 않으며 친척이나 친구집의 희사잔치에도 가지 않습니다. P, 자기의 배우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삼년제 지나기 전에는 새로운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Q, 가정에서 큰 희사를 치른 해(결혼잔치를 치렀거나, 새집을 샀거나, 아이가 태여난 해)에는 보통 장례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며 제사집에도 가지 않으며 청명이나 추석에 자기집 산소에도 가지 않습니다(특별한 경우 제외). 김동선 기자: 지금 새로운 청명절에 고인을 추모하는 방법 즉 제사법이 많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생화 증정이나 인터넷 추모 등 방법이 전형적인데요. 이런 제사방법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장례와 제사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조상과 부모의 은덕을 잊지않고, 또 자손들에게 효도의 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하여 영원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으로 태여난것은 결코 우리들이 능력이 아닙니다. 바로 조상들과 부모들의 덕분이지요. 인류가 다른 동물보다 진화가 빠르게 된 원인의 하나가 바로 인류라는 이 고급동물은 보은의식이 특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은공을 모르는 자를 보통 짐승보다 못하다고 욕합니다. 새롭게 성행하는 생화 증정이나 인테넷 추모 등 방법에 대하여, 물론 아주 시대적이고 신사다운 방법이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민족 제사문화의 보충으로 될수 있을 뿐, 민족 제사문화를 대체할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제사문화는 단지 고인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되는 민속문화라는 의미에서 민족과 함께 계속 존재할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요즘 우리 주 각급 해당 주관부문과 각 업체들에서는 우리 민족문화 특히 민속문화의 보급과 발전을 위해서 많은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듣자니 이번 청명을 계기로 현회장께서 주요직책을 맡고 있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는 우리 민족장례문화와 성묘문화를 규범화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청명, 한식기간에 적지 않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하던데요? 주로 어떤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는 주관 부문의 건의에 의하여 매년 3월 5일부터 4월 5일, 즉 청명날까지의 한달을 “조선족 전통장례문화 선전월”로 하였습니다. 금년에는 장례문화 선전을 주요하게 인테넷을 통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연변 “조글로”에 우리 연구회의 공간을 설치하였는데, 장례문화 전업지식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민속문제도 다루고, 봉사정보도 제공합니다. 인테넷에 들어와 구글이나 네이버 검색란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혹은 “조선족전통장례”라고 쳐서 넣으면 즉각 우리 공간에 들어 올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공간에 들어와 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우리 민족문화의 가장 중요한 내용의 하나인 민속문화를 발전장대시키려면 각급 당위와 정부 각 해당 부문의 중시가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런 업종에 종사하는 많은 연구부문과 전문가, 학자들의 노력이 있어야 할것이고 또 민속문화 관련 업종 기업소들에서도 자기의 맡은바 책임과 의무, 사명을 다 하여야 하지 않을가요?   현룡수 회장: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 문화국의 지도하에 《조선족 전통장례》세미나를 주최하여, 20여개 정부부문과 유관단위에서 대표를 파견하여 참석하였으며. 8명의 민속학자들이 여덟편의 론문을 발표하여 우리주 민속문화 보호에 리론적 지침을 확정하였습니다. 민속문화 보호에서 정부가 중시하고, 유관부문이 노력하고, 전반 민족이 참여하여야 하는데, 이 몇가지 요소를 보장하려면 말로만이 아니라 반드시 실제적으로 정부에서 유관 정책을 제정하여야 하며, 구체적인 조직조치가 따라가야 하며, 필요한 투자가 보장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연변의 병원부터 빈의관까지의 전반 빈장과정에 조선족 풍속을 위한 시설이나 항목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민속보호방면의 유관 조례를 내오기가 상당히 힘들며, 책임단위로서의 우리의 공작도 유관부문의 협조와 배합이 잘 되지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며, 필요한 투자란것은 꿈도 꿀수없는 형편입니다. 앞으로 민속문화 보호방면에서 해야할 일들이 아주 많고 점점 간거할것 같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우리 민족 민속문화연구 기지라고 할수 있는 연변조선족례의문화연구회와 민속문화의 보급과 발전을 추구할수 있는 창구도 운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분으로서 앞으로 우리 민족문화 특히 민속문화의 전승, 발전장대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할 타산입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는 주요하게 세가지 방면으로 사업을 펼쳐가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미 간편하여진 조선족 장례방법을 견지하면서, 거기에 민족특색을 첨부하여, 실용적이고도 민족적인 《조선족 장례제사 편람》을 편찬하고 있는데, 지금 진일보로 완미중에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이미 유관 인민대표위원을 통하여 주 인민대표대회에 “조선족 빈장관리 조례”를 제정할데 관한 건의를 제출하였으며, 주 민정국, 주 위생국, 연변병원 등 유관 부문에 《조선족장례풍속》을 보호할데 관한 구체적인 건의들을 제출하여 적극적인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세째, 우리는 산하에 《시대상조 복무중심》을 설치하였는데, 종지는 조선족들의 장례치르기 어려운 시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대는 언녕21세기에 들어섰지만 우리민족 장례제사문화는 아직도 락후한 민간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족들의 출국인원이 많아 지면서 집에는 홀로사는 로인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리하여 고독사, 사망되여 며칠후 발견, 장례에 사람 모자라는 등 현상이 비일비재입니다. 우리는 무릇 조선족 장례제사와 상관되는 모든 방면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가장 우질적인 봉사를 제공하면서 조선족 장례가 진정으로 간편하고도 문화적인 민속 활동으로 되게끔 노력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민간차원의 락후한 장례문화를 현대적이고 전업적인 고급차원의 문화로 승급시킬 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조선족 장례제사 자문전화: 138-9438-7438 조선족 장례제사 복무열선: 203-2224 연구회주소: 연변병원동대문남쪽정차점 맞은켠 5층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3년 4월 1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3년 4월 1일 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기자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hanmail.net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3년 3월 28일
168    죽음 체험기 댓글:  조회:5503  추천:0  2013-03-28
스페셜 리포트 0.35평 관 속에 누워 죽음을 통해 묻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 지난 5월 12일 서울 서초동 능인선원에 있는 죽음 체험 수련장 ‘지구별여행자’에 16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유서, 묘비명, 자서전을 쓴 후 입관 직전의 모습. 맨 끝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저승사자가 서 있다. 나는 죽었다. 나는 600×1900×450㎜ 크기 나무 관 안에 누워 있다. 누런 삼베로 만든 수의를 입고 손과 발은 흰색 끈으로 꽁꽁 묶여 있다. 이 생의 마지막 양식이라며 입에 넣어 준 생쌀 한 숟가락은 조금 전에 다 삼켰다. 움직일 수 없다. 옆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고, 무릎을 굽힐 수도 없다. 얼굴이 가려운데 긁을 수도 없다. 캄캄하다. 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다. 10분 정도 지났다. 답답함이 아늑함으로 바뀐다. 엄마 자궁 속이 이러했을까? 이때 밖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나는 지금 죽음 체험 수련 중이다. 지난 5월 12일 죽음체험수련원을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지구별여행자’(구 ‘아름다운 삶’·대표 김기호)가 진행하는 행사에 16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지구별여행자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능인선원 내 방 한 칸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이날 체험 참석자는 50~60대가 대부분이고, 30대 초중반의 젊은 여성 두 명과 30대 후반 부부도 있었다. 자서전 쓰기, 죽음 명상, 유언장 쓰기, 묘비명 쓰기, 입관 체험 등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4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지구별여행자는 매달 한 번씩 죽음 체험 수련을 한다. 개별 신청자도 있고, 기업이나 관공서 등 단체 체험도 한다. 2002년부터 총 1만5000명이 죽음 체험을 거쳤다고 했다.        내가 취재를 위한 체험을 한 이날, 미국의 인터넷 매체 VICE라는 곳에서 촬영단이 찾아왔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입관 체험 문화는 한국에만 있어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신기해 한다. CNN이나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도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자신이 촬영되길 원치 않는 참가자는 미리 얘기를 해 달라고 했다. 최대한 죽음 체험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오후 4시50분. 조용한 음악과 함께 자서전 쓰기가 시작됐다. 출생에서부터 초·중·고등학교 입학과 졸업, 결혼과 출산, 회사 입퇴사 등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는 시간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이력서가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 여백을 한 자 한 자 채워 가며 내 인생을 슬라이드처럼 돌려본다. 두 번째 자서전 양식이 놓여 있다.        ‘내 인생의 3대 뉴스는?’        ‘이번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이번 삶에서 내가 배운 교훈은?’        ‘만약 나에게 삶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은?’        수련도우미이자 자원봉사자 하지원(여·50대)씨가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2년 전 이맘때 임종 체험을 했다고 한다.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강력한 동기 때문에 자살시도를 했고, 불행 중 다행으로 1차 시도에 실패한 후 이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한번 죽어 보십시오” 하고 죽음 체험을 권유했다. 하씨는 죽음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을 다 놓치고 죽으려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죽음 체험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간호학을 공부한 그는 전공을 살려 뒤늦게 웰다잉 프로그램 보조강사로 일하는 중이다.        오후 5시30분. 김기호 대표의 강연이 시작됐다. 일명 죽음학 강의. 그는 “죽음도 하나의 여행상품”이라고 했다. 우주적 존재가 되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이 체험을 ‘지구별 여행’이라고 불렀다. 그는 100장이 넘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넘겨가며 차분히 강연을 이어갔다. 동영상과 애니메이션, 사진과 통계 자료를 활용한 강연은 흥미로웠다. 강연의 요지는 “2차원에 사는 개미들에게 3차원에 사는 우리의 존재가 안 보이듯, 죽음은 현실의 너머에 있고 죽음 체험은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 여행과 같다”는 것이다.        오후 6시30분. 수의를 갈아입는다. “수의는 아래부터 입으십시오.” 금색 보자기를 풀어 수의를 보자 죽음 체험을 한다는 게 실감난다. 태어나 처음 만져보는 수의를 내가 직접 입는 기분, 묘하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지 않다. 죽은자는 갖고 갈 게 없다. 양쪽 발목을 묶고, 허리까지 꽁꽁 동여맸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참석자들에게 촛불을 하나씩 나눠 주고 형광등을 끈다. 나의 부고 일지, 유언장, 묘비명을 쓰라고 했다. 하나씩 써 나갔다.     “묵언하십시오. 죽는 날인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유언장 쓰면서 99%는 웁니다. 통곡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속으로 ‘진짜 유언장도 아니고, 가상 체험인데 설마 99%가 울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나의 부고 일지를 먼저 쓴다. ‘나는 오늘 ( )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 )했던 사람이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나의 죽음을 가장 슬퍼할 사람은 ( )일 것이다.’ 이어서 유언장을 쓴다. 내 앞에는 편지지 두 장이 놓여 있다. ‘진짜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면?’ 상상해 본다.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이 하나둘 스친다. 버킷리스트에 적어둔 여행지들이 좌르르 떠오른다. 한 자 한 자 적어 나간다. 담담하게 시작한 유언장 반 장이 채워지면서 점점 감정이입이 돼 간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에게 이 생의 마지막 말을 남기면서 코끝이 시큰해진다.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참으려 하는데 눈물이 줄줄 흐른다. 도우미가 조용히 다가와 휴지를 한 움큼 뽑아 놓고 간다. 어느새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있다.        오후 7시30분. 입관할 시간이다. 산 중턱에 내가 들어갈 관이 입을 떡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저승사자를 따라 500미터 정도의 숲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영혼의 거리는 3미터입니다. 앞사람과 거리를 유지하십시오.” 한 손에는 촛불을, 한 손에는 나의 묘비명과 유언장을 들고 산으로 향한다. 어느새 어둑신하다. 서쪽하늘에 주황빛 노을이 서려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빌딩의 조명이 하나둘 켜진다. 바람이 차다. 싸한 공기가 감싸면서 오한이 느껴진다. 내 관 앞에 섰다. 관 속에 들어갔다. 도우미 두 명이 다가와 흰 천으로 손과 발을 꽁꽁 묶는다. 관 뚜껑을 덮는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깜깜하다.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쾅! 쾅! 쾅!” 관 뚜껑 위에 망치질을 한다.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 이따금 김기호 대표가 질문을 던진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1.14㎡(약 0.35평)의 공간에 누워, 나는 언젠가 내가 가야할 길을 이렇게 먼저 가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20분? 30분? 시간 개념이 무화됐다. 누군가 꺼내 주지 않으면 나는 관에서 나갈 수도 없다.        “자 이제, 당신은 다시 태어날 시간입니다.”        관 뚜껑이 열린다. 먼발치 도시의 조명에 눈이 부시다. 일어나 앉는다. 봄밤 바람이 피부에 확 닿았다. 새롭다. 바람에 풀꽃들이 한들거리는 것도 새삼스럽다. 나는 가장 짧은 시간에 먼 여행을 다녀왔다. 너무나 강렬한 체험이었다. 출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257100008 죽음 배우는 사회 죽음책 쏟아지고 죽음체험 해보고 웰다잉 강사 키우고 죽음준비학교 만들고… 죽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예일대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출간 6개월 만에 15만부가 팔렸고, 한국죽음학회 최준식 회장(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은 4월 말 ‘죽음학 개론’ ‘임종 준비’를 동시에 냈다. 생사학연구소 오진탁 소장(한림대 철학과 교수)이 4월 말 ‘자살 예방, 해법은 있다’를 출간했다. 부제는 ‘죽음 이해가 삶을 바꾼다’. 오진탁 소장은 총 50권짜리 ‘생사학 총서’를 기획 중인데, 그 첫 책인 ‘삶, 죽음에게 길을 묻다’를 펴내기도 했다.        ‘웰다잉(Well-dying·아름다운 마무리)’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웰다잉 칼럼니스트’라는 신종 직업도 생겼고, 복지재단들은 웰다잉 전문강사를 적극 육성 중이다. 전국 복지관에서는 일반인을 상대로 ‘죽음준비학교’를 부지런히 연다. 정부 역시 ‘웰다잉’에 무게를 두고 각종 정책에 이를 반영하는 추세다. 지난해 한림대 생사학연구소는 인문한국지원사업단(HK)에 선정됐다. 이 사업은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것으로, 한림대 생사학연구소는 향후 10년간 매년 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또한 지난해 초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을 창립, 존엄사와 임상실험 등 생명을 둘러싼 첨예한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왜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일까. 오진탁 생사학연구소장은 “삶의 질(웰빙) 문제를 넘어 죽음의 질(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접어들면서 생긴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사회 지도층의 자살이 늘고, 학교폭력이나 왕따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도 죽음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 요소”라고 밝혔다.        웰다잉은 노인이나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웰다잉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죽음 이해가 삶을 바꾼다’는 측면에서 죽음을 현상학적·인식론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로, 죽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부하는 부류다. 또 한 부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는다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등 인생의 마지막 길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들이다.        먼저 전자를 보자. 이들에게 죽음 공부는 ‘삶 공부’와 동의어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사후세계는 존재하는지를 탐구하고 임종체험 등을 통해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히 사는 것이 목표다. 죽음체험수련원인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과거에는 자살을 시도했거나 죽음이 머지않은 노인 등 물리적인 죽음과 가까운 사람들이 주로 찾아왔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20대도 찾아오고 30대 젊은 부부도 많이 온다. 기업 등 단체 체험 역시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삼성전자 서비스, 한화생명, JTBC 등의 기업체로 찾아가 죽음 체험 교육을 했다. 임종 체험자가 남긴 소감문을 몇 개 보자.        “삶은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을 100년, 1000년 살 것같이 집착하면서 산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심하면서 겸손하게 살겠습니다.”(정희영·57)        “방향성 없는 ‘성공’에 집착하던 내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죽음을 경험하신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계속 눈물이 났습니다.”(장소현·22)        한국죽음학회의 성격도 비슷하다. 명칭과는 달리 연구자 중심이나 학술적인 단체가 아니다. 일반 대중과 함께하는 장으로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하자”는 게 목표다. 2005년 창립 당시 최준식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죽음부터 배워라.”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있는 ‘한국죽음학회’ 사무실은 현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대표 손명세·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장) 사무소로 쓰고 있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식물인간이나 질병의 말기처럼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가 됐을 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두는 의향서다. 병원에 입원해 생명유지장치를 주렁주렁 달지 않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겠다는 사람들이 의식이 건강할 때 미리 작성해 두는 것이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이름: )는 명료한 정신 상태에서 직접 이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합니다. 건강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진단과 치료에 대하여 나 스스로의 의사 표시가 불가능해질 때 담당 의료진과 가족들이 이 사전의료의향서에 기록된 나의 뜻을 존중해 주기를 바랍니다.”        실천모임은 3년 전 민간단체로 출범했는데, 지금까지 1만명 정도가 이 의향서를 작성했다. 사무실(02-2281-2670)에 전화하면 우편으로 의향서 서식을 무료로 보내준다. 본인이 직접 작성한 후 ‘사전의료의향서’와 동봉된 두 장의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확인증’ 역시 본인이 보관한다. 8000명까지는 실천모임 사무소에서 보관했지만 개인정보 유출의 문제가 있어 더 이상 보관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전의료의향서 자체는 법적 효력이 없으나 판례법상 효력을 갖는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위급한 병으로 입원할 경우 병원에 의무기록과 함께 첨부하면 중대 자료가 될 수 있다.        지난 5월 13일 오후,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사무실을 찾아갔다. 실천모임은 웰다잉에 관심있는 자원봉사자 12~13명의 도움으로 운영된다. 한 대뿐인 전화기에서 쉴 새 없이 벨이 울렸다. 자원봉사자 권창중(69)씨와 틈틈이 대화를 나눴다. 그 역시 아내와 함께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뒀다고 했다. 그는 “병원에서 불필요한 생명연장장치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집에서 편안하게 임종을 맞으려 한다”고 했다. 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70대로, 작성 이유는 권씨와 비슷하다고 한다. “자식들은 처음엔 동의하지 않았지만 여러 번 설득 끝에 우리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70대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다. 백발 단발에 금테 안경을 쓰고 빨간 립스틱을 곱게 바른 그는 우아했다. 노부부의 사랑과 존엄사를 다룬 프랑스 영화 ‘아모르’의 여자 주인공을 연상시켰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사는 장영자(75)씨. “참 고우시다”고 말을 건네자 “우리 바깥양반 아프기 전에는 더 고왔는데”라며 미소 지었다. 그는 “이 집은 전화가 잘 안 돼. 할 때마다 통화 중이야. 그래서 찾아왔어”라고 했다. 그가 사전의료의향서를 쓰기로 한 것은 병상에 있는 남편을 보면서다. 그의 남편은 3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이 없는 상태다. 큰 병원 세 곳을 전전하다가 치료 가능성이 희박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요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는 “나는 저 짓 안 하려고. 딸이 둘인데, 내가 쓰러지면 병원에 데리고 가지 말라고 했어. 병원에 입원하면 살아있는 사람을 너무 고생시켜”라며 “내가 친구들 여러 명한테 바람 넣었어. 나 따라서 이거(사전의료의향서) 쓴 사람 많아”라고 말했다. 그는 “시신기증도 하려고. 잘 살았는데 뭘 더 바라겠어. 아무 여한 없어”라며 자리를 떴다.        전문가들은 ‘웰다잉’을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부터 버리라고 충고한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죽음이 슬프고 두렵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죽음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나는 순간”이라고 하고, 생사문제연구소 오진탁 소장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오 소장은 “한국은 죽음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특히 강하다”고 지적한다.        김명민과 하지원 주연의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 단적인 예가 나온다. 극중 직업이 장례지도사인 하지원은 바람직한 죽음 문화 정착을 위해 입관체험을 진행하지만 노인들의 거센 항의로 행사가 중단된다. 노인 참가자들은 “나보고 죽어보라는 거냐. 노인네들 모아 놓고 희롱하는 거냐”며 폭언을 해댄다. 기자가 월간조선 근무 당시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2004년 호스피스 간호사 최화숙씨가 쓴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 발간 직후 독자들의 항의를 종종 받았다. “아름다운 죽음이 말이 되냐? 왜 재수 없게 그런 제목의 책을 냈냐”는 항의였다. 화장장이 들어서면 인근 땅값이 떨어지고, 엘리베이터에 ‘4’ 대신 ‘F’가 적힌 것도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다.        오진탁 소장은 “죽음 준비, 죽음 체험이라는 직접적 표현 대신 ‘웰다잉’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되면서 서서히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웰빙’의 연장선상에서 ‘웰다잉’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무조건 외면하는 풍조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는 것이다.     품위 있는 죽음을 추구하는 사람 역시 늘고 있다. 인공호흡기, 강심제와 승압제, 혈액투석, 체외순환 등 생명유지장치를 주렁주렁 매달면서 여명을 늘리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진행한 ‘생명나눔 국민인식도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72.3%가 연명치료 중지에 찬성했다.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의 자료에 의하면 1년에 18만명 정도의 만성질환자가 말기 상태로 사망하는데, 이 중 15만명 정도가 인공호흡기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서울아산병원 환자 대상 조사결과는 더욱 분명하다. 내과계 중환자실 환자 중 생명유지장치 사용을 원한다는 대답은 1%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 미국 대부분의 주와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독일 등은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제도가 허용돼 있고, 일본 역시 1998년부터 사전의료의향서를 존중하기로 결정했지만, 한국은 사전의료의향서에 대한 허용 지침이 없어 병원마다 제각각이다.        2009년 김할머니 사건으로 촉발된 존엄사 논쟁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김할머니 사건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환자가 폐암 조직검사를 받다가 과다출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자녀들이 김할머니의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며 소송을 건 사건이다. 김할머니는 입원 전 자녀들에게 “혹 내가 식물인간 혹은 의식불명 상태가 되면 인공호흡기를 끼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대법원은 유가족의 손을 들어줘 연명치료 중지를 인정했다. 김할머니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면 당장 생명이 위독하다는 병원 측의 말과는 달리 인공호흡기를 뗀 지 201일 만에 존엄사했다.        이후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신상진 의원과 김세연 의원이 존엄사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일단 종교계의 반발이 거세다. 생명경시 풍조를 낳는다는 이유다. 또한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국가의 생명권 보호에 관한 헌법적 가치와 충돌하는 문제도 있다. 다시 말해 존엄사는 국가의 생명보호의무와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곧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된 제도화 방안이 마련될 전망이다.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사위원회(이하 생명윤리심의위)에서는 지난해 12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제도화 특별위원회’(위원장 이윤성·서울대 의대 법의학과 교수)를 구성했다. 의료계, 법조계, 종교계, 시민사회단체 등 18명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협의체인 이 위원회는 매달 1회 이상 논의를 거쳤으며, 5월 29일 최종 공청회를 갖는다. 공청회에서 합의된 사항을 생명윤리심의위에 보고할 예정이며, 이를 기반으로 제도화 여부와 가이드라인을 결정할 방침이다.        존엄사의 제도화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정의, 생명의 절대성과 사회적 효율성 등 기본 가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소설가 서영은은 일찌감치 이런 유서를 써 뒀다.        “의식이 없을 때는 절대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이며, 장례는 가족 친지들과 간소하게 치를 것이며, 화장한 재는 산의 나무 밑에 뿌려서 거름이 되게 해 주면 좋겠다.…” 출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257100009     죽음체험수련원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        “사(死)테크를 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지구별여행자’(구 ‘아름다운 삶’)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생긴 임종 체험 수련원이다. 2002년에 정식으로 문을 열어 12년째 운영 중이다. 비영리단체로 능인선원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자원봉사자들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된다. 개인 참가자를 대상으로 매달 한 번씩 정기적으로 수련을 진행하며, 오붓한 체험을 원할 경우 부부 단위의 신청도 받는다. 청소년들의 자살예방 교육으로 호응이 높다. 참가자가 10~20명일 때 수련의 몰입이 잘 된다고 한다.        지구별여행자는 한 출세지향주의자의 대대적인 전향에 의해 탄생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김기호(48) 대표.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후 대한항공에 입사해 기획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6년 가을까지만 해도 출세를 향해 맹목적으로 전진하는 엘리트주의자였다”고 고백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도 했다. 그가 삶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 것은 임사체험자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다.        이후 그는 어린 시절에 묻어두었던 꿈을 다시 꺼냈다. 더 늦기 전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실천하기로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길에 올라 호주 퀸스랜드대학에서 호스피스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귀국한 후 1999년부터 북한산 인근에서 봉사자들을 모아 죽음 교육을 시작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을 주제로 진행한 교육에 관심과 호응이 점점 늘었다. 그는 “행복해지려면 죽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을 알면 삶이 더 아름다워진다”며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면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사(死)테크라는 말을 씁니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17세부터 죽음을 생각하면서 현재를 충실히 살았습니다. 그의 말대로 죽음은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죽음을 알면 삶이 더 빛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죽음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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