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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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사계전서(沙溪全書) 상례비요(喪禮備要)-1 댓글:  조회:4679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31권 상례비요(喪禮備要)-1 사계전서[沙溪全書]에 관하여 조선 중기의 예학(禮學) 사상가 김장생(金長生)의 시문집. 저자: 김장생 제작시기: 1687년(초간), 1792년(재간), 1923년(해제본) 권수/책수: 51권 2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판본이다.   숙종이 홍문관에 김장생의 문집을 보고자 한다고 교서(敎書)를 내리자 송시열(宋時烈)이 김장생의 문인·후손들과 함께 유고를 정리해 《사계선생유고(沙溪先生遺稿)》(10권, 부록 3권)를 편찬해 1685년(숙종 11) 숙종에게 올렸고, 1687년 왕명으로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했다. 이후 후손들이 《사계선생유고》에 《경서변의(經書辨疑)》, 《전례문답(典禮問答)》,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의례문해(儀禮問解)》 등을 증보하여 1924년 《사계전서》로 간행했다. 권두에 송시열·김수항(金壽恒)의 서문이 있다. 체제는 권1은 시·소(疏)·차(箚)·계(啓)·장계(狀啓), 권2∼4는 서(書), 권5는 서(序)·발·기(記)·설(說)·공이(公移)·축문·제문, 권6∼9는 묘갈명·묘지명·행장, 권10은 연석문대(筵席問對), 권11∼16은 《경서변의》, 권17∼20은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권21∼22는 《전례문답》, 권23∼30은 《가례집람》, 권31∼34는 《상례비요》, 권35∼42는 《의례문해》, 권43∼51은 부록이다. 시는 3편에 불과하고, 소는 당시 정치와 관련된 것이 많은데, 그중 《사집의잉진십삼사소(辭執義仍陳十三事疏)》는 1624년(인조 2) 집의를 사직하면서 인조에게 올린 것으로 임금이 지켜야 할 도리와 당시의 여러 사회문제를 입대본(立大本)·회구업(恢舊業)·존홍범(尊洪範)·강소학(講小學) 등 13조목으로 나누어 논한 것이다. 《경서변의》는 1666년 송시열·임의백(任義伯) 등이 7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으로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서전(書傳)·주역·예기 8종의 유가경전의 의문되는 부분을 고찰했다. 《근사록석의》는 《근사록》의 어구해석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제가(諸家)의 설을 인용해 밝히고 간혹 자신의 의견도 붙였다. 《전례문답》은 저자가 쓴 전례(典禮)에 관한 편지 10편과 발문(跋文) 3편을 모은 뒤, 중국 역대 왕실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관한 기록을 통해 이를 고증하였다. 《가례집람》은 도설 2권과 해설 6권으로 되어 있는데, 도설은 4례(四禮)에 걸친 관계건물격식·예기(禮器)·예법절차·각종문건 서식 등이 세부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도해되어 있다. 《상례비요》는 원래 신의경(申義慶)이 지은 상례의 지침서인데 김장생이 1620년에 증보하고, 김집이 다시 교정하여 1648년 간행한 것이다. 상례의 실용을 위한 지도서로 편찬되었으며, 설명이 간략하다. 《의례문해》는 평상시에 송시열·송준길 등 문인들과 친구들이 4례에 대한 질문에 김장생이 답한 것을 모은 것으로 1646년 김집이 간행했다. 대부분 경전에 나타나 있지 않은 변칙적인 사례가 많아 우리나라의 예제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부록에는 송시열, 정홍명이 쓴 어록이 있다. 특히 송시열이 쓴 글에는 김장생이 이이(李珥)를 존숭하고 이황(李滉)을 폄하한 태도가 나타나 있고, 학문에 있어서 성혼(成渾)과 송익필(宋翼弼)에 관해서도 약간의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부록에 있는 《거의록(擧義錄)》은 정묘호란 때 김장생이 호소사(號召使)로 의병을 일으킨 일을 기록한 것으로, 참여했던 주요 인물들의 약전(略傳)이 들어 있다. 《문인록》에는 김집·송시열·송준길·이유태·강석기 등 문인 270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예학의 거두인 김장생이 유학의 근본사상으로서 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조선조 예학 연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료이다. 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상례비요(喪禮備要)범례(凡例) 《상례비요》는 원래 신의경(申義慶-서기1557~1648)이 지은 상례의 지침서인데 김장생이 1620년에 증보하고, 김집이 다시 교정하여 1648년 간행한 것이다. 상례의 실용을 위한 지도서로 편찬되었다. 1. 이 책이 비록 《가례(家禮)》를 본받아 저술한 것이기는 하나 간혹 어쩔 수 없이 보충해야 할 곳은 보충하였다. 이를테면 초종(初終)에서의 설치(楔齒)와 철족(綴足), 역복(易服)에서의 심의(深衣), 습(襲)에서의 모(冒) 및 설빙(設氷)과 소렴(小殮) 뒤의 질(絰)ㆍ대(帶) 따위는 모두 예경(禮經)에 나오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고쳐야 할 것은 고쳤다. 상주[孝子]가 출입할 적에 입는 묵최복(墨衰服)은 옛 제도도 아닌 데다 국속(國俗)에서 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방립(方笠)과 생포(生布)로 만든 직령(直領)으로 대신하였으니, 풍속을 따른 것이다. 옮겨야 할 것은 옮겼다. 대상(大祥) 장(章)의 음주(飮酒)와 식육(食肉)을 담제(禫祭) 뒤로 옮기고 천주(遷主)와 복침(復寢)은 길제(吉祭) 뒤로 옮겼으니, 이는 실로 주자(朱子) 이후에 정리된 의론들이다. 길제는 결여된 부분을 보완하려는 것이고, 개장(改葬)은 변고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사당에 관한 의절(儀節)과 사시(四時)의 시제(時祭)와 묘제(墓祭)ㆍ기제(忌祭)는 비록 상례(喪禮)는 아니지만, 상례를 마치고 나면 바로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함께 편말(篇末)에 붙였다. 이 밖의 의절과 예문 사이에도 첨가하거나 보완한 것이 많이 있으니, 이를테면 《의례(儀禮)》와 《가례》, 금제(今制)와 국제(國制)가 서로 다를 경우 우선 모두 실어 두어서 참고에 대비하였다. 2. 도설(圖說)은 일체 《가례》를 따르되 간혹 첨가하거나 개정한 부분도 있으니, 이는 열람하는 자가 자세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3. 모든 상구(喪具)는 필요한 수량을 간략하게 적었으니, 간혹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그다지 동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자로 이해하기 어려운 명목(名目)은 바로 속명(俗名)을 써서 창졸간에 알아보기 쉽도록 하였다. 4. 《가례》의 본문은 모두 한 줄로 쓰고, 첨가해 넣은 것은 모두 두 줄로 썼으며, 더러는 올리고 낮추는 것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인용한 여러 설(說)은 모두 책 이름을 제시하였고, 나의 설은 ‘나[愚]’라는 글자와 ‘살피건대[按]’라는 글자를 써서 구별하였다. 구본(舊本)에는 도설이 편수(篇首)에 실려 있으나, 이는 《가례집람(家禮輯覽)》에 자세히 나오기 때문에 여기에는 거듭 싣지 않았다.   초종(初終) 초종의 제구(諸具) 새 옷 : 환자에게 입히는 데 쓴다. 새 솜 : 숨이 끊어졌는지를 살피는 데 쓴다. 이불 : 솜이불로 하는데, 시신을 덮는 데 쓴다. 나중에 대렴(大殮)할 때에 또 그대로 쓴다. 웃옷 : 사(士) 이상은 공복(公服)이나 심의(深衣)를 쓰고, 서인(庶人) 역시 심의를 쓰나 심의가 없을 경우 직령의(直領衣)를 쓴다. 부인은 대수(大袖)를 쓰는데, 대수는 곧 원삼(圓衫)이며, 세속에서는 더러 장옷도 쓴다. 죽은 사람이 입던 옷은 고복(皐復)을 하고 나서 시신을 덮는 데 쓰며, 목욕을 시키고 나면 버리고 염습(殮襲)에는 쓰지 않는다. 각사(角柶) : 뿔로 만드는데, 길이는 6치이며, 멍에처럼 구부정하게 구부려서 한가운데가 입속에 들어가고 양쪽 끝이 위로 쳐들어지게 만드니, 치아의 버팀목으로 쓰는 것이다. 구준(丘濬)의 《가례의절(家禮儀節)》에 의하면, 젓가락을 쓴다. 궤(几) : 양쪽 머리에 발이 달린 것으로 하는데, 발을 묶는 데 쓰는 것이다. 시자(侍者) : 내외의 심부름꾼이다. 병세가 위중하면 거처를 정침(正寢)으로 옮긴다. 병세가 위중하면 거처를 정침으로 옮기고, 안팎이 안정을 기하며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는데, 남자는 여자의 손에서 숨을 거두지 않고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숨을 거두지 않는다. -《가례의절》에 “정침이란 곧 지금의 정청(正廳)인데, 거처를 정침으로 옮긴다는 것은 가장만 그렇게 하고 그 나머지 사람은 각자 거처하던 방으로 옮긴다는 뜻이다. 환자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가를 물어보아서 하는 말이 있으면 받아 적어 둔다.” 하였다. 《의례(儀禮)》 사상기(士喪記)에, “북쪽 창문 밑에다 머리가 동쪽으로 가도록 눕히고, 안팎을 청소하고 평상시 입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힌 다음, 모시는 사람 넷이 둘러앉아서 몸을 붙잡고 솜을 코 끝에 댄다.” 하였고, 그 소(疏)에 “솜은 지금의 새 솜인데, 가볍게 움직이므로 입과 코 위에 올려놓아서 숨결을 살핀다.” 하였다. ○ 살피건대, 고례(古禮)에 침상을 치우는 절차가 있으니, 《가례》 부주(附註) 및 《가례의절》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평상시에 침상을 쓰지 않으므로 이 절차는 시행할 곳이 없다. 숨이 끊어지고 나면 곧 곡(哭)을 한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시신을 이불로 덮고 남녀가 곡을 하며 가슴을 친다. 복(復)을 한다. 시자(侍者) 한 사람이 -어떤 이는 내상(內喪)에는 여시(女侍)를 쓰는 것이 옳다고 한다.- 죽은 사람이 입던 웃옷을, 왼손으로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 부분을 잡은 다음, 앞 처마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 지붕 한복판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혼령을 부르는데, 옷을 흔들며 ‘아무개는 돌아오소서.’ 하고 세 번 외친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이르기를 “남자는 이름을 부르고 여자는 자(字) 또는 관봉(官封)을 부르거나, 평상시 부르던 호칭대로 부르기도 한다.” 하였다.- 마치고 나서는 옷을 거두어 들고 내려와서 시신 위에 덮고 남녀가 곡을 하며 가슴을 치는데, 그 횟수에는 제한이 없다.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앞 처마 동쪽으로 올라가 지붕 한복판에 서서 혼령을 부르는데, 목청을 길게 뽑아 ‘아무개는 돌아오소서.’ 한다. 그러고 나서 옷을 앞으로 내리면 광주리로 옷을 받은 다음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그 옷으로 시신을 덮는다. 고복(皐復)을 한 사람은 뒤 처마 서쪽으로 내려온다.” 하였다. 【사상례】 설치(楔齒)를 하고, -각사(角柶)를 쓴다. 《가례의절》에 “나무젓가락을 입 안에 가로로 물려서 입을 다물지 못하도록 하여야 반함(飯含)을 할 수 있다.” 하였다.- 철족(綴足)을 한다. -궤(几)를 쓴다. 주(註)에 “신을 신길 적에 신이 비뚤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상주(喪主)를 세운다. 주인이란 맏아들을 말하는데, 맏아들이 없으면 맏손자가 승중(承重)하여 궤전(饋奠)을 받들되, 손님을 맞는 데 있어서는 같이 살고 있는 친족 중 촌수가 가깝고 항렬이 높은 이가 주상(主喪)이 된다. -《예기(禮記)》 분상(奔喪)에 “상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아버지가 주상이 된다.” 하였고, 그 소에 “《예기》 복문(服問)을 살펴보니 ‘임금이 주상이 되는 대상은 적처(嫡妻)ㆍ태자(太子)ㆍ적부(嫡婦)의 초상이다.’라고만 말하고 서부(庶婦)에 대해 주상이 된다는 말은 없다. 이 말과 같다면 서부의 초상에도 주상이 되는 것이니, 이는 복문의 말과 어긋나게 된다. 복문의 말은 명사(命士) 이상으로서 부자(父子)가 다른 집에서 거처하는 경우에 서자(庶子)들이 각자 친상에 주상이 된다는 것이고, 지금 여기의 말은 바로 같은 집에서 사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망인(亡人)을 위해 대공복(大功服)을 입을 사람이 그 초상에 주상이 되었을 경우, 삼년상을 치를 처자가 있다면 반드시 소상ㆍ대상 때까지 주상 노릇을 해야 하고, 망인이 친구인 경우는 재우(再虞)와 부사(祔祀)의 제사 때까지만 주상 노릇을 해도 충분하다.” 하였다. ○ 《예기》 잡기(雜記)에 “고모나 자매가 죽었을 때 남편이 죽고 그의 형제도 없을 경우 남편의 먼 친족이 주상이 되고 친정 쪽의 친족은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주상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주부(主婦)를 세운다. 주부는 죽은 사람의 아내를 말하는데, 아내가 없을 경우 주상자의 아내가 해당된다. 호상(護喪)을 세운다. 자제(子弟) 중 예법을 잘 알고 일을 잘 주선하는 사람을 호상으로 삼아서 초상에 관한 모든 일을 지시받는다. 사서(司書)와 사화(司貨)를 세운다. 자제 또는 이복(吏僕)으로 삼는다. 역복(易服)의 제구 심의(深衣) : 《의례상복도식(儀禮喪服圖式)》에 “성복(成服) 때까지 바꾸지 않고 입는데, 없으면 직령의(直領衣)를 입는다.” 하였다. ○ 여자들은 흰 장옷을 사용한다. 이에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지 않는다. 아내ㆍ아들ㆍ며느리ㆍ첩은 모두 갓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살피건대, 머리를 푸는 것은 옛 법이 아니고 《개원례(開元禮)》에서 시작된 것이다.- 남자는 웃옷의 앞자락을 걷어 올려 띠에 꽂고, -《의례(儀禮)》 사상기(士喪記)의 주에 “심의를 입는다.” 하였고, 《예기》 상대기(喪大記)의 주에 “심의의 앞자락을 걷어 올려 띠에 꽂는다.” 하였다.- 맨발을 한다. -《예기》 문상(問喪)의 주에 “신을 신지 않고 맨발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나머지 복친(服親)들도 모두 화려한 수식을 제거하며, 남의 양자로 나간 아들과 시집간 딸은 모두 머리를 풀거나 맨발을 하지 않는다. -살피건대, 아버지가 맏아들의 삼년상을 당한 경우도 똑같다.- 모든 아들은 3일을 먹지 않고, 1년ㆍ9개월의 복친은 세 끼를 먹지 않고, 5개월ㆍ3개월의 복친은 두 끼를 먹지 않는다. 친척과 이웃 사람들이 죽을 쑤어서 먹게 하는데, 웃어른이 강권하면 조금은 먹어도 좋다. -《예기》 문상에 “3일 동안 불을 때지 않는다.” 하였다. ○ 화려한 수식이란 울긋불긋하게 수놓은 비단과 금ㆍ옥ㆍ진주ㆍ비취 따위를 말한다. 관(棺)을 만드는 제구 목공(木工) 칠장(漆匠) 송판(松板) : 흰 부분이 없이 다 붉은 것이 상품이다. 두께는 2치 반이나 3치로 하되 영조척(營造尺)을 쓴다. 길이와 너비를 적절히 맞춘다. 임(衽) : 곧 소요(小腰)인데 속칭 은정(銀釘)이라 한다. 8개를 쓰는데, 관의 위아래를 봉합하는 데 쓰는 것이다. 그 제도는 길이 3치나 2치 8푼, 너비 2치 6푼, 두께 2치 2푼이나 2치의 소나무를, 중앙에서 양쪽으로 8, 9푼씩 톱으로 켜고 한가운데 8푼만 남겨두어서 고정시킨 다음, 네 모서리에서 비스듬히 쪼아 들어가 켠 양쪽을 깎아버리고 중간 8푼 부분에 이르게 되면 양쪽 끝은 크고 한가운데는 작아진다. ○ 더러는 쇠못을 쓰기도 하는데, 길이 5치의 못 20개를 관 위아래 및 네 모서리에 박는다. 송진[松脂] : 1근(斤)가량. 관 속의 봉합하는 곳에 칠하는 것인데, 만약 관의 안팎에 다 칠하려면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 소나무 검댕[松煙] : 1되가량. 관에 칠하는 것이다. 술[酒] : 소나무 검댕을 반죽하는 것인데, 풀을 쓰기도 한다. 진옻[全漆] : 7, 8홉. 밀가루를 반죽하여 관을 봉합하는 곳에 바르는 것인데, 옻을 입힌 관에다 또 칠포(漆布)를 쓰려면 2되가량이 필요하다. 검정색 천[黑繒] : 명주나 무명을 쓰고 포백척(布帛尺)으로 12자짜리인데, 폭이 좁은 것일 경우 18, 9자이다. 모두 종이를 배접하여 쓰는데, 천이 없을 경우 두꺼운 백지 7, 8장이면 된다. 관 속의 사방과 뚜껑을 바르는 것이다. 녹색 비단[綠綾] : 1, 2자. 관 속의 네 모서리를 바르는 것이다. 《예기》 상대기에 “대부(大夫)는 관의 내부를 바르는 데 검정색과 녹색 비단을 쓰고 사(士)는 녹색을 쓰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대부는 네 면은 검정색, 네 모서리는 녹색을 쓰고 사는 모두 검정색을 쓴다.” 하였다. 칠성판(七星板) : 먼저 나무틀을 관 바닥 크기로 짠 다음, 그 안에 5푼 두께의 소나무판자를 놓고 판자 위에 7개의 구멍을 북두칠성처럼 뚫어서 검은 천이나 종이로 그 윗면을 싸 바른다. ○ 더러는 판자 한쪽만을 써서 위의 제도와 같이 하기도 한다. 관(棺)을 만든다. 호상(護喪)이 목수에게 나무를 골라 관을 짜도록 하는데, 그 제도는 머리쪽은 크고 발쪽은 작게 한다. -높이와 너비와 길이는 소렴한 것에 의거하여 정하되, 대렴에서 옷을 8, 9벌 쓴다면 사방과 높이를 각각 3푼가량의 여분을 두고, 10여 벌을 쓴다면 5, 6푼의 여분을 둔다. 이 이상도 이렇게 계산해 나간다. 이불은 수치에 넣지 않는다. 높이는 칠성판과 요 및 석회의 두께를 제외하고 말하는 것이다. 지판(地板) 및 양쪽 두판(頭板)을 봉합하는 곳에는 옻을 밀가루와 버무려 메우고, 또 지판의 좌우에 각기 은정이나 쇠못을 두 개씩 걸며, 천판(天板)을 봉합하는 곳에는 옻과 은정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대렴 때에 쓴다. 송진을 납촉(蠟燭)과 버무려 관 속의 봉합한 곳에 칠하고 소나무 검댕이나 옻을 관 바깥에 칠한다. 더러는 송진을 가루로 만들어 안팎에 고루 바른 다음 쇠붙이로 지져 나뭇결을 따라 스며들게 하고 검정색 천이나 종이로 그 안의 사방과 천판을 바르기도 한다. 대부의 경우는 따로 녹색 비단을 네 모서리에 붙인다. ◆ 부고(訃告) 서식(書式) -《가례의절》에 나온다.   아무개의 친척인 아무개가 아무 달 아무 날에 질병에 걸려, 불행하게도 아무 달 아무 날에 세상을 버렸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부고합니다. 연호 월 일 호상 아무개가 아무개 님 좌전(座前)에 올림. -친척인 경우는 아무개의 친척인 아무개라고 쓴다.   살피건대, 《가례의절》에 의하면, 유사(有司)가 부고를 대신 쓰고 애자(哀子) 아무개로 일컫는데, 이것은 호상이 부고를 발송하는 《가례》의 본뜻이 아닐 성싶기에 지금 위와 같이 고쳐 쓴다. 친척과 요우(僚友)들에게 부고한다. 호상과 사서(司書)가 부고를 발송하되, 만약 호상과 사서가 없으면 주인 스스로 친척에게만 부고하고 요우에게는 하지 않는다. 이 밖의 모든 서신은 정지하고, 서신으로 조문을 해온 이가 있을 경우 모두 졸곡(卒哭) 뒤에 답한다.   [주D-001]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의 소추(蕭樞)등이 칙명을 받들어 지은, 개원 연간의 예제(禮制)를 기록한 책으로, 모두 158권이다. ‘개원’은 당 나라 현종(玄宗) 때의 연호이다. [주D-002]예기 상대기(喪大記)의 주 : ‘급임(扱衽)’ 조에 대한 원(元)나라의 진호(陳澔)의 주이다. [주D-003]예기 문상(問喪)의 주 : ‘도선(徒跣)’ 조에 대한 진호의 주이다.     습(襲) 시신을 옮기는 제구(諸具) 휘장[幃] : 흰 베를 이어서 만들거나 병풍을 쓰는데, 시신을 가리는 것이다. 평상[牀] : 시신을 옮겨다 올려놓기 위한 것인데, 없으면 문짝을 쓰기도 한다. 돗자리[席] 베개[枕] 이불[衾] : 죽을 때 덮던 것을 그대로 쓰는데, 소렴 때에는 걷어 두었다가 대렴 때에 쓴다. 집사자(執事者)가 휘장과 평상을 설치한 다음 시신을 옮기고 구덩이를 판다. 집사자가 휘장으로 시신 눕힌 곳을 가리면 시자(侍者)가 평상을 시신 앞에 세로로 설치하고, -《의례》 사상기(士喪記)에 의하면, 창문 바로 밑이다.- 대자리[簀]를 깐 다음, 거적을 걷어내고 자리를 펴고 베개를 놓아서 시신을 그 위로 옮기되, 머리는 남쪽으로 두고 이불을 덮는다. -더운 계절에는 이불 네 가장자리를 오무려 들여서 틈새가 없도록 하여 파리의 침입을 막는다.- 외지고 깨끗한 곳에 구덩이를 판다. 목욕의 제구 가마솥[釜] : 혹 대정(大鼎)도 괜찮다. 목욕물을 데우는 데 쓴다. 동이[盆] : 두 개. 쌀뜨물 및 물을 담는 것이다. 쌀뜨물[潘] : 쌀을 씻은 물인데, 머리를 감기는 데 쓴다. 대부(大夫)는 피[稷] 뜨물, 사(士)는 수수[粱] 뜨물을 쓴다. 살피건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임금의 초상에는 향 끓인 물을 쓰게 되어 있는데, 지금은 사서인(士庶人)의 집에서 간혹 쓰니, 참람한 행위이다. 목건(沐巾) : 한 개. 욕건(浴巾) : 두 개. 모두 베 1자로 만드는데, 상체와 하체에 각기 한 개씩 쓴다. 빗[櫛] : 한 개. 끈[組] : 검정색 비단이나 깁으로 만드는데, 머리를 묶는 데 쓴다. 비녀[笄] : 뽕나무로 만드는데, 길이는 4치이며, 묶은 머리를 고정시키는 데 쓴다. 양쪽 끝은 넓고 한가운데는 좁게 만들며, 남녀가 똑같이 쓴다.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나온다. 작은 주머니[小囊] : 다섯 개. 물들인 명주로 만드는데, 네 개는 손과 발의 좌우를 각각 써서 표시하여, 손톱과 발톱을 담는 것이고, 하나는 머리카락을 담는 것이다. 명의(明衣) : 《의례》 사상기에 “명의의 상(裳)은 삼베를 쓰되, 소매는 온폭으로 달아서 길이가 무릎까지 내려가도록 하고, 상(裳)의 앞뒤에는 주름을 잡지 않으며, 길이는 발등[觳] -주에 ‘각(觳)은 발등이다.’ 하였다.- 까지 내려가도록 한다.” 하였다. 목욕을 시킨 뒤 입히는 것인데, 홑옷을 쓰기도 한다. 구덩이[坎] : 《의례》 사상기에 “너비는 1자, 길이[輪] -윤(輪)은 세로이다.- 는 2자, 깊이는 3자이며, 파낸 흙은 남쪽에 쌓아둔다.” 하였다. 수건[巾]ㆍ빗[櫛]ㆍ설치(楔齒) 및 목욕한 물을 묻기 위한 것이다.   설빙(設氷)의 제구 얼음[氷] : 여름에 쓴다.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대부는 대야를 설치하여 얼음을 담고 사는 얼음을 쓰지 않는다.” 하고, 그 주(註)에 “사는 질대야에 물을 담아 쓴다.” 하였다. 《의례》 사상례의 소(疏)에 “사가 얼음을 쓰는 경우는 하사받은 경우이다.” 하였다. 대야[槃] : 동이를 쓰기도 하는데, 얼음이나 물을 담는 것이다. 평상[牀] : 민간에 있는 살평상[箭平牀]을 쓰는데, 시신을 옮겨다 올려놓기 위한 것이다.   습(襲)의 제구 평상[牀] 거적[薦] 요[褥] 돗자리[席] 베개[枕] 대대(大帶) : 너비 4치의 흰 깁으로 양쪽 가장자리를 감쳐서 쓰는데, 길이는 허리를 한 바퀴 돌려 앞에서 맺고 다시 한 바퀴 돌려 두 귀를 만든 다음,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려 신(紳)을 삼을 정도이다. 신의 길이는 아래로 상(裳)과 가지런하도록 하며, 검정색 깁으로 신의 양쪽 가장자리와 아랫단에 선을 두르는데, 안팎이 각각 반 치이다. 대부의 경우는 두 귀에도 선을 두르고 다시 너비 3푼의 오색 천끈으로 띠를 맺은 곳에 매다는데, 길이는 신과 가지런하도록 한다. 없을 경우 평소에 띠던 띠를 쓴다. ○ 부인의 대대(大帶)는 상고(詳考)해 보아야 한다. 심의(深衣) : 옷감은 희고 고운 삼베를 쓰고 자[尺]는 손가락 자[指尺]를 쓴다. -가운뎃손가락 가운데 마디를 한 치로 삼는다.- 상의는 전부 4폭에 길이는 2자 2치인데, 옆구리를 지나서 아래로 상(裳)에 연결된다. 그 제도는 삼베 2폭을 한가운데를 접어서 아래로 드리우면 앞과 뒤를 합쳐서 4폭이 되는데, 지금 직령삼(直領衫)과 같고, 단지 겨드랑이 밑을 트지 않았을 뿐이다. 그 아래로 옆구리를 지나서 상에 연결되는 곳에 와서는 대략의 둘레가 7자 2치가 되는데, 1폭마다 상 3폭에 연결된다. 상(裳) : 12폭을 서로 엇갈리게 갈라 윗부분을 상의에 다는데, 길이는 복사뼈에 이르도록 한다. 그 제도는 6폭의 삼베를 폭마다 2폭으로 가르되, 한 끝은 넓고 한 끝은 좁게 갈라서 좁은 끝의 너비가 넓은 끝 너비의 절반이 되도록 한다. 삼베를 엇갈리게 가를 적에는 넓은 끝은 1자 4치를 잡고 좁은 끝은 8치를 잡은 다음 각기 양쪽의 솔기 1치를 제하고 나면 법도대로 된다. 이때 좁은 끝이 위로 향하도록 하여 꿰매어 나가서 상의에 붙이면 상의에 붙은 곳은 대략의 둘레가 7자 2치가 되고, 상(裳) 3폭마다 상의 1폭에 달리게 된다. 또 그 아랫단 복사뼈에 닿는 곳은 대략의 둘레가 1길[丈] 4자 4치가 된다. 원몌(圓袂) : 삼베 2폭을 각기 한가운데를 접어서 상의의 길이와 똑같게 마른 다음, 가장자리를 잘라 내지 않은 채 상의의 좌우에 달고 그 아랫부분을 봉합하여 소매를 삼는데, 밑동의 너비는 상의의 길이와 같고, 점차 둥그스름하게 줄여 소맷부리에까지 이르면 그 지름이 1자 2치가 된다. 방령(方領) : 두 깃 자락을 서로 여미어 옷섶[衽]이 겨드랑이 밑에 있게 하면 두 깃이 만나는 곳은 저절로 네모가 된다. 《예기보주(禮記補註)》에 “상의의 두 어깨 위를 각기 3치씩 잘라 들여서 뒤집어 접은 다음 잘라 내고 다시 별도의 삼베 한쪽을 가지고 목 뒤쪽에서 앞쪽으로 접어 내려와서 좌우로 접어 잘라낸 곳에다 붙여 꿰매면 안팎 감이 각각 2치가 되니, 《예기》에 이른바 깃[袷] 2치가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검은 가선[黑緣] : 검은 깁을 쓰는데, 깃의 안팎에 2치씩 댄다. 《주자대전(朱子大全)》에는 1치 반으로 되어 있다. 소맷부리와 상(裳)의 가장자리는 안팎으로 각기 1치 반씩을 대는데, 소맷부리는 삼베의 겉에다 이 너비의 가선을 따로 댄다. 구준(丘濬)이 이르기를 “살피건대, 《예기》 옥조(玉藻)에는 깃은 2치, 가선은 1치 반으로 되어 있으나, 지금 《가례》에는 깃의 치수를 말하지 않고 단지 깃 가선의 너비가 2치라는 것만 말하였다. 지금 고례(古禮)와 같이 삼베를 너비는 2치, 길이는 상의의 몸체와 맞추어 깃을 삼고 1치 반의 가선을 그 위에 댄다면 한 가지 옷에 대한 거의 완전한 제도가 될 것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의례》 사상례의 ‘습 세 벌[襲三稱]’의 주에 홑옷과 겹옷을 다 갖춘 것을 벌이라 한다고 하였고, 《예기》 상대기(喪大記)에는 상의에 상(裳)을 꼭 갖추어야만 벌이라 하고, 포(袍)에는 반드시 껴입는 겉옷이 있지, 그것만을 홑으로 드러내어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검은 상의에 분홍빛 상(裳)인 작변복(爵弁服)과 흰 베로 만든 상의에 흰색 상(裳)인 피변복(皮弁服)과 검은 상의와 상(裳)에 붉은 가선을 두른 단의(褖衣) 이 세 가지 옷은 치대(緇帶)를 같이 쓰니, 지금 심의(深衣)와 공복(公服)에 같이 쓰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심의가 없으면 직령의(直領衣)를 쓴다. ○ 살피건대, 《예기》 잡기(雜記)에 남자의 상(喪)에 여자의 옷으로 염습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여자의 상(喪)에도 남자의 옷으로 염습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여자의 상에는 원삼(圓衫)이나 몽두의(蒙頭衣) 또는 장옷을 쓴다. 답호(褡 ) : 한 벌. 단령(團領)에 받쳐 입히는 것이다. 과두(裹肚) : 한 벌. 배를 싸는 것이다. 포오(袍襖) : 솜을 넣는다. ○ 여자의 상에는 상(裳)에도 같이 쓴다. 한삼(汗衫) : 한 벌. 명주나 무명을 쓴다. 고의(袴衣) : 한 벌. 솜을 넣으며, 명주나 무명을 쓴다. 단고의(單袴衣) : 한 벌. 무명이나 삼베를 쓴다. 늑백(勒帛) : 두 개. 발목에서 무릎까지 묶기 위한 것이다. 버선[襪] : 두 켤레. 솜을 넣는다. 망건(網巾) : 한 개. 검정색 깁으로 만든다. 복건(幅巾) : 한 개. 검정색의 깁이나 명주를 쓰는데, 길이는 6자이다. -손가락자이다. 아래도 같다.- 《예기보주(禮記補註)》에 “너비는 1자 4치라고 하였는데, 어떤 이는 온폭을 쓴다고도 한다.” 하였다. 《주자대전》에 “어느 한쪽을 바늘로 찔러 건액(巾額)을 삼아 가운데를 접어서 금을 그어 표시를 해 두고 곧바로 접었던 것을 쫙 편 다음, 먼저 오른쪽으로 접었던 것을 가지고 그 왼쪽에서 손가락으로 조금 들어 올려 오른쪽으로 접어 두고, 다시 왼쪽으로 접었던 것을 가지고 그 오른쪽에서 손가락으로 조금 들어 올려 왼쪽으로 접는다. 그리고 두 끝을 맞대고 실로 꿰맨 다음 그 속을 비워서 작은 가로 깃[橫㡇子]을 만들고, 다시 뒤집어서 되돌려 접은 뒤에 깃 왼쪽에서 너댓 치 사이를 비스듬히 꿰매되 왼쪽으로 둥글게 구부려 내려가서 마침내 왼쪽을 따라 두 가닥의 끝에 이르게 하고, 또 뒤집어서 꿰매다 남은 깁을 속으로 들어가도록 한 다음, 깃을 이마 앞에 놓이게 하여 감싼다. 또 양쪽 살쩍에 이르러서는 각기 띠 하나씩을 다는데, 너비는 2치이고 길이는 2자로, 머리를 감싸는 것이다.” 하였다. 《예기보주》에 “복건의 깃은 최복(衰服) 상(裳)의 깃과는 다르니, 복건의 깃은 이음매가 속으로 들어가고 최복 상의 깃은 이음매가 겉으로 나온다.” 하였다. ○ 살피건대, 예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갓도 씌우지 않고 비녀도 꽂지 않은 채 명주로 머리를 싸기만 하였는데, 이것을 엄(掩)이라 하니, 《가례》의 복건은 엄에 갈음하는 것이다. 남자의 상에 복건을 쓴다면 여자의 상에는 예전대로 엄을 쓰는 것이 옳을 성싶다. 《의례》 사상례에 “엄은 누인 명주를 쓰는데, 너비는 온폭, 길이는 5자이며, 그 끝을 쪼갠다.” 하였는데, 그 주에는 “턱밑을 묶고 나서 또 목 한가운데를 돌려 동여매는 것이다.” 하였고, 그 소(疏)에는 “엄은 지금의 복두(幞頭)와 같은데, 다만 뒤쪽의 두 가닥으로 턱밑을 묶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였다. -복두의 제도는 아래의 분상(奔喪) 조의 사각건(四脚巾) 주에 보인다. 멱목(幎目) : 한 개. 검정색 비단[帛]이나 명주를 쓰는데, 사방 1자 2치이다. 붉은색의 안감을 대고 솜을 넣어 채운 다음 네 귀퉁이에 끈을 달아 만드니, 얼굴을 덮는 데 쓰는 것이다. 충이(充耳) : 두 개. 새 솜을 쓰는데, 모양은 대추씨처럼 만드니, 귀를 막기 위한 것이다. 악수(握手) : 두 개. 검정색 비단이나 명주를 쓰는데, 길이는 1자 2치이고 너비는 5치 3푼이다. 길이에서 중앙 4치를 취하여 양쪽에서 1치씩 마름질하여 넣어 너비를 줄인 다음, 붉은색의 안감을 대고 솜을 넣어서 채운 다음 양끝 아래쪽 모서리에 각기 끈을 달아 만드니, 손을 싸기 위한 것이다. 신[屨] : 두 켤레. 검정색 명주에다 종이를 붙여서 만드는데, 길이 2자 남짓한 두 개의 흰 띠나 끈을 신 뒤축에다 가로로 묶고, 또 신 머리에다 천끈으로 신코를 만드니, 신끈을 걸어서 신기기 위한 것이다. ○ 만약 여자의 상이고 평소에 신던 꽃신이 있다면 그대로 쓴다. 모(冒) : 명주를 쓰는데, 검정색 7자 남짓, 붉은색 7자가 든다. 《의례》 사상례의 주에 “모(冒)란 시신을 씌우는 것이다. 그 제도는 자루와 같으며, 위쪽을 질(質), 아래쪽을 쇄(殺)라 하는데, 씌울 적에는 먼저 쇄로 발을 씌워 올라가서 나중에 질로 머리를 씌워 내려온다. 위는 검정색, 아래는 붉은색으로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였다.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임금은 비단으로 만든 모(冒)와 도끼 무늬를 수놓은 쇄(殺)에 철방(綴旁)이 7개이고, 대부(大夫)는 검은 모와 도끼 무늬를 수놓은 쇄에 철방이 5개이고, 사(士)는 검은 모와 붉은 쇄에 철방이 3개이다. 질의 길이는 손과 가지런히 하고 쇄는 3자이다.” 하였다. 구준은 이르기를 “모의 제도는 한쪽 머리와 한쪽 가장자리만 봉합하고 나머지 한쪽 가장자리는 봉합하지 않으며, 또 봉합하지 않은 가장자리에 아래위로 띠 세 개를 달아 묶게 되어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옛 제도를 알지 못하고서 그만 두 개의 자루처럼 꿰맨 다음에, 옷을 입히고 이불을 씌워 염을 한 위에다 뒤집어씌우니,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횃불[燎] : 밤에 뜰에 설치하였다가 이튿날 아침에 끈다. -《의례》 사상례에 나온다.   반함(飯含)의 제구 구슬[珠] : 세 개. 살피건대, 예전에는 임금만 구슬을 썼으나, 오늘날 풍속은 사(士)와 서인(庶人)이 통용하는데, 《가례의절》과 《국조오례의》에서도 이를 허용하였으니, 금ㆍ옥ㆍ엽전ㆍ조개껍질[貝] 모두가 가능하다. 상자[箱] : 구슬을 담는 것이다. 쌀[米] : 두 되. 깨끗한 물로 씻어서 정갈하게 장만한다. 사발[椀] : 쌀을 담는 것이다. 멱건(幎巾) : 삼베를 쓰는데, 사방 2자로 만들며, 얼굴을 덮는 것이다. 《의례》 사상례의 주에는 “반함할 때 떨어지는 쌀을 받는 데에 쓰는 것이다.” 하였다. 숟가락[匙] : 쌀을 뜨는 것이다. 세숫대야[盥盆] 수건[帨巾] : 상주가 손을 씻기 위한 것이다.   제전(祭奠)의 제구 탁자(卓子) 포해(脯醢) : 《예기》 단궁(檀弓)에서 이른 바 ‘찬장에 남겨둔 음식’인데, 이것이 없으면 무엇이든 있는 대로 쓴다. 《의례》 사상기에 “길사(吉事)에 쓰는 그릇을 쓴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차마 생시와 달리할 수 없기 때문에 바꾸지 않는다. 소렴의 제전 때 가서는 바꾼다.” 하였다. 술[酒] 술잔[盞] : 잔대를 갖춘다. 초[燭] : 촛대를 갖춘다. 상보[巾] : 전물(奠物)을 덮는 것이다. 축(祝) : 친척이 한다.   영위(靈位)를 설치하는 제구 휘장[帷] : 마루 안에 설치하여 내외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짚자리[藁席] 거적[薦] 돗자리[席] 습의(襲衣)를 벌여 놓는다. 탁자를 마루 앞 동쪽 벽 밑에 벌여 놓되, 옷깃을 서쪽으로 두고 남쪽을 위로 한다. -《의례》 사상례에 “수의(壽衣)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진열하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다시 돌려 진열하지 않는다.[不綪]” 하였다.[그 주에 “‘綪’은 쟁(綪)으로 읽으며 방향을 돌린다는 뜻이다.” 하였다.] 복건(幅巾) 한 개, 충이(充耳) 두 개 -망건(網巾) 한 개-, 멱목(幎目) -한 개-, 악수(握手) -두 개-, 심의(深衣) 한 벌 -단령(團領) 또는 답호(褡 )나 직령의(直領衣). 여자의 상(喪)인 경우 원삼(圓衫)이나 몽두의(蒙頭衣) 또는 장옷-, 대대(大帶) 한 개 -더러는 평상시에 띠던 것으로 한다.-, 한삼(汗衫) -한 벌-, 과두(裏肚) -한 벌-, 도포[袍]와 장옷[襖]은 있는 대로 많이도 쓰고 적게도 쓴다. 바지[袴] -한 벌. 홑바지도 한 벌-, 늑백(勒帛) -두 개-, 버선[襪] -두 켤레-, 신[屨] 두 켤레 -모(冒) 한 개- 이다. 목욕과 반함의 제구를 벌여 놓는다. 탁자를 마루 앞 서쪽 벽 밑에 벌여 놓되, 남쪽을 위로 한다. -구슬[珠] 세 개, 또는 금ㆍ옥ㆍ엽전ㆍ조개껍질[貝]을 상자에 담아서 탁자 남단에 올려놓는다.- 쌀 두 되를 사발에 담는다. -《의례》 사상례에 “축(祝)이 마루에서 쌀을 씻되 남면하며 사발을 사용한다. 그리고 쌀을 대(敦)에 담아 조개껍질의 북쪽에 올려놓는다.” 하였다.- 빗[櫛] 한 개 -끈[組] 한 개, 비녀[笄] 한 개, 주머니[囊] 다섯 개-, 목건(沐巾) 한 개, 욕건(浴巾) 두 개 -명의(明衣) 한 벌- 이다. ○ 서쪽 담 밑에 가마솥을 걸고 쌀뜨물과 물을 끓이고, 또 동이 두 개를 갖다 놓아서 목욕할 때 쓸 쌀뜨물과 물을 담을 것에 대비한다. 이에 목욕을 시킨다. 시자(侍者)가 끓인 물을 가지고 들어가면, -쌀뜨물과 물을 각각 동이에 담는다.- 주인 이하가 모두 휘장 밖으로 나와서 북쪽을 향한다. -곡(哭)을 한다.- 병중(病中)에 입었던 옷과 고복(皐復)에 쓴 옷을 모두 벗기고, -《예기》 상대기의 주에 “병중에 입었던 새 옷과 고복에 썼던 옷을 벗기고 목욕할 것을 기다린다.” 하였다.- 머리를 감기고, -쌀뜨물로 감긴다.- 빗질을 한 다음, 수건으로 말리고 머리카락을 모아 상투를 쫒는다. -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은 다음 비녀를 지른다. 여자의 상에도 끈과 비녀를 쓰며, 떨어진 머리카락은 주머니에 담는다.- 이불을 떠들고 목욕을 시킨 다음, -물로 한다. 《의례》 사상기에 “모상(母喪)인 경우는 내어자(內御者)가 목욕을 시킨다.” 하였다.- 수건으로 닦고, -상체와 하체를 합쳐서 하나의 수건을 쓴다.- 손톱과 발톱을 깎는다. -좌우의 손톱과 발톱을 각각 주머니에 담아 두었다가 대렴 때에 관 속에 넣는다. ○ 명의를 입히고 다시 이불을 덮는다.- 목욕을 하고 남은 물은 수건 및 빗과 함께 구덩이에 묻는다. -《의례》 사상례에 “주인이 들어가서 제 위치에 선다.” 하였다. 【사상례】 얼음을 갖다 놓는다. -《예기》 상대기의 주에 “목욕을 시키고 난 뒤 습과 염을 하기 전의 일이다.” 하였다. 《의례》 사상례의 소에 “먼저 얼음 대야를 들여놓고 나서 그 위에다 평상을 설치한 다음[先納氷槃乃設牀於其上袒] -단(袒)은 단(單)이다.- 대자리만 깔고 돗자리는 치운다. 그러고 나서는 시신을 옮겨 모시어 얼음의 찬 기운을 쐬도록 한다.” 하였다. ○ 사(士)는 물을 쓴다. 습을 한다. 시자가 휘장 밖에 염습할 평상을 따로 설치하고 거적ㆍ돗자리ㆍ요ㆍ베개를 벌여 놓은 다음, 먼저 대대(大帶)ㆍ심의 -심의 대신 쓰는 공복(公服)이나 직령의(直領衣) 및 여자의 상에 쓰는 옷은 모두 ‘습의 제구’에 보인다.-ㆍ도포ㆍ장옷ㆍ한삼(汗衫)ㆍ바지ㆍ버선ㆍ늑백(勒帛)ㆍ과두(裹肚) 따위를 그 위에 올려놓는다. 드디어 들고 들어가서 목욕 평상의 서쪽에 놓고 시신을 그 위로 옮겨놓는데, -옷을 입히되 섶이 모두 오른쪽으로 여며지도록 한다.- 다만 복건(幅巾)ㆍ심의ㆍ신[屨]은 착용시키지 않는다. -이불을 덮고 시자가 목욕 평상을 치운다. ○ 만약 두 팔이 뒤틀려 소매를 꿸 수 없을 경우, 시신을 염습할 평상 위로 옮길 적에 시신의 허리가 바로 옷깃 위에 놓이도록 한 다음, 시신을 같이 위로 들어올려 차츰차츰 내려놓으면서 손을 소매 속에 넣거나, 아니면 두 사람이 옷깃을 같이 잡고 시신의 하부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손을 소매 속에 넣기도 한다. ○ 살피건대,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말하기를 “복중(服中)에 죽은 자는, 습에는 소복(素服)과 흑건(黑巾)ㆍ흑대(黑帶)를 쓰고, 소렴에는 정복(正服)을 쓰되 역시 소복도 쓰고, 그 밖에는 길복(吉服)을 이것저것 쓰며, 대렴과 입관(入棺) 때에는 상복 한 벌과 길복 한 벌을 좌우에 마주 보게 넣어 둔다면, 복을 다 입고 나서는 길복으로 갈아입는 의미가 있어서 지하에서 영원히 흉복(凶服)을 입고 있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 듯하다.” 하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한 사람의 몸에 길복과 흉복을 함께 쓴다는 것은 길복도 아니고 흉복도 아니어서 온당하지 않을 성싶은데, 미처 퇴계 선생께 직접 질문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기묘 제유(己卯諸儒)들이 의정(議定)한 대로, 상중에 죽은 자는 습과 염에는 모두 길복을 쓰고 상복은 영상(靈牀)에 진열해 놓았다가 장사를 마치고 나서 철거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시상(尸牀)을 옮겨다 마루 한가운데에 놓는다. 손아랫사람이거나 어린아이의 경우는 각기 방 한가운데에 놓는다. 이 밖에도 재당(在堂)이라고 말한 경우에는 이와 같다. -아내의 상인 경우는 조금 서쪽으로 비켜서 바로 한가운데는 피한다. 《주자대전》에 나온다. 이에 전물(奠物)을 진설한다. 집사자(執事者)가 탁자에 포해(脯醢)를 차려 들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축(祝)이 손을 씻은 다음 술잔을 씻고 술을 쳐서 시신의 동쪽 어깨 부위 앞에 갖다 놓고 상보를 씌운다. -만약 날이 어두울 경우 먼저 촛불을 켜서 제물을 비추고 상보를 다 씌운 뒤에 다시 촛불을 끈다. 모든 제전(祭奠)이 똑같다. 주인 이하가 제 위치에 가서 곡을 한다. 주인은 시상(尸牀) 동쪽 전물 북쪽에 앉고, 삼년복을 입어야 할 여러 아들들은 그 아래에 앉되, 모두 짚자리를 깔고 앉는다. 동성(同姓)의 기공친(朞功親) 이하는 각기 복(服)의 차례에 따라 그 뒤에 앉되 모두 서쪽을 향하고 남쪽을 상좌로 하며, 높은 항렬의 사람들은 장유(長幼)의 차례에 따라 시상 동쪽의 북쪽 벽 밑에 앉되 남쪽을 향하고 서쪽을 상좌로 하여 거적자리를 깔고 앉는다. 맏며느리 및 여러 며느리와 딸들은 시상 서쪽에 앉되 짚자리를 깔고 앉는다. 동성의 부녀자들은 복의 차례에 따라 그 뒤에 앉되 모두 동쪽을 향하고 남쪽을 상좌로 하며, 높은 항렬의 사람들은 장유의 차례에 따라 시상 서쪽의 북쪽 벽 밑에 앉되 남쪽을 향하고 동쪽을 상좌로 하며, 거적자리를 깔고 앉는다. 첩과 여종은 부녀자의 뒤에 서되, 별도로 휘장을 쳐서 -마루 한가운데에 친다.- 안과 밖을 가린다. 이성(異姓) 친척들 중 남자는 휘장 밖 동쪽에 앉되 북쪽을 향하여 서쪽을 상좌로 하고, 부녀자는 휘장 밖 서쪽에 앉되 북쪽을 향하여 동쪽을 상좌로 하며, 모두 돗자리를 깔고 앉고 복의 차례에 따라 줄을 짓는다. 복이 없는 자는 뒤에 앉는다. ○ 내상(內喪)인 경우는 동성의 남자는 항렬이 높건 낮건 모두 휘장 밖 동쪽에 앉되 북쪽을 향하여 서쪽을 상좌로 하고, 이성의 남자는 휘장 밖 서쪽에 앉되 북쪽을 향하여 동쪽을 상좌로 한다. -《가례의절》에 “이 이후로 제 위치에 나아가 곡을 할 경우에는 다 이 의절(儀節)과 같이 한다.” 하였다.- ○ 삼년복의 경우 밤에는 시신 옆에서 잠을 자되, 짚자리를 깔고 흙덩이를 베는데, 허약하거나 병든 사람은 왕골자리를 깔아도 된다. 기년복 이하는 가까이에서 잠을 자되 남녀가 방을 달리하며, 외친(外親)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 이에 반함(飯含)을 한다. 주인은 아주 슬피 운 다음 왼쪽 어깨를 벗어 -살피건대, 《의례》 근례(覲禮)의 소에 “예사(禮事)에서 왼쪽 어깨를 벗는 것은 길사와 흉사를 따지지 않으니, 예에서는 모두 왼쪽 어깨를 벗는다.” 하였다.- 그 소매를 앞에서 허리 오른쪽에 꽂고, 손을 씻고 상자를 들고 들어가면 시자(侍者) 한 사람이 쌀그릇에 숟가락을 꽂아 들고 뒤를 따른다. -《의례》 사상례에 “축(祝)이 조개껍질을 받아 시신의 서쪽에 놓아둔다.” 하고, 또 “쌀을 받아 조개껍질의 북쪽에 놓아둔다.” 하였는데, 그 소에 “시신의 동쪽에 나아가서 받아 가지고 시신의 남쪽으로 지나가서 시신의 서쪽에 놓아두니, 입에 넣는 것은 발치를 지나가게 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축은 주인의 오른쪽에 서서 반함하는 일을 돕는다.” 하였다.- 베개를 치우고 멱건(幎巾)으로 얼굴을 덮은 다음, -《의례》 사상례에 “입에 물렸던 나무젓가락도 치운다.” 하였다.- 주인은 시신 동쪽으로 나아가서 발치를 지나 서쪽으로 가서 시상(尸牀) 위에 동쪽을 향하고 앉아 멱건을 걷고 숟가락으로 쌀을 떠서 -《의례》 사상례에 “왼손으로 쌀을 뜬다.” 하였다.- 시신의 입 오른쪽에 넣고, 아울러 구슬 한 개도 넣는다. 또 입 왼쪽과 중앙에도 이와 같이 넣는다. 주인은 벗었던 왼쪽 소매를 다시 꿰어 입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의례》 사상기에 “축이 반함하고 남은 물건들을 치운다.” 하였다. 시자가 습을 마치면 이불을 덮는다. -시자가 처음과 같이 베개를 놓은 다음, 멱건을 벗기고 먼저 망건을 씌운다.- 복건을 씌우고, -그 띠를 복건 바깥으로 내어 목 뒤로 돌려서 서로 묶어 드리운다.- 귀를 막고 멱목(幎目)을 씌운 다음, -그 끈을 뒤로 보내어 묶는다.- 신을 신긴다. -그 끈을 신코에 꿰어 발등에다 묶고, 남은 끈으로 또 두 발을 합쳐 묶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이에 심의를 입히고, -옷자락을 오른쪽으로 여민다.- 대대(大帶)를 매고 악수(握手)를 씌운 다음, -먼저 오른손을 누(樓) 가운데에 올려놓고 한 끝으로 손등을 덮고 그 끈으로 팔목을 한 바퀴 돌려 감고 나서 끈을 다시 위로 뽑아낸 다음, 또 다른 한 끝을 포개 놓고 그 끈을 손 바깥쪽으로 가게 하여 가운뎃손가락에 건 다음, 또 되돌려서 위로 감고서 남은 끈을 아래로 보내어 앞서 팔목을 묶었던 끈과 함께 손바닥 뒤 손마디 중간 부위에서 묶는다. 왼손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다.- 이에 이불을 덮는다. -만약 모(冒)를 씌운다면 먼저 쇄(殺)로 발을 씌워 올라간 다음, 질(質)로 머리를 씌워 내려와서 그 띠를 묶는다. ○ 설치(楔齒)와 멱건(幎巾)은 함께 구덩이에 묻는다. ○ 밤에는 뜰 한가운데에 횃불을 설치한다. 영좌(靈座)의 제구 횃대[椸] 수건[帕] 유의(遺衣) 의자(椅子) 좌요[坐褥] 탁자(卓子) 향로(香爐) 향합(香盒) : 향을 갖춘다. 술잔[盞] : 잔대를 갖춘다. 주전자[注] 술[酒] 과실[果] 빗[櫛] 세숫대야[盥盆] 수건[帨巾]   혼백(魂帛)의 제구 흰 명주[白絹] : 더러는 모시 3, 4자를 쓰기도 한다. 혼백을 만드는 제도는 두 가지가 있는데, 명주를 그냥 묶기도 하고 동심결(同心結)을 하기도 한다. 《가례의절》에 “명주를 묶는 제도는 명주 1필(匹)을 양쪽 끝에서 마주 말아 들여서 묶는 것이고, 동심결의 제도는 명주를 길게 접어 서로 맞꿰어 묶은 다음 위로 머리를 내고 옆으로 두 귀를 내고 나서 그 나머지를 아래로 드리워 두 발을 만들어 마치 사람 모양과 같이 하는 것인데, 두 방법 다 좋다.” 하였다. 상자[箱] : 혼백을 담기 위한 것이다. 수건[帕] : 흰 삼베로 만드는데, 혼백을 덮는 것이다.   명정(銘旌)의 제구 대나무 장대[竹杠] : 한 개. 명정을 다는 것이다. 세속에서 장대 꼭대기에 나무로 봉황의 머리를 조각하여 달기도 하는데, 물감을 칠하고 입에 구슬을 물리고 술[流蘇]을 드리운다. 받침대[跗] : 장대의 받침대인데, 그 제도는 일산 받침대와 같다. 분(粉) : 명정을 쓰기 위한 것이다. 녹각교(鹿角膠) : 분에 타는 것이다. 붉은색 비단[絳帛] : 너비는 온폭, 길이는 3품 이상은 9자, 5품 이상은 8자, 6품 이하는 7자이며, -예기척(禮器尺)으로 만든다.- 위아래로 축(軸)이 있고 실끈으로 매단다. ○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시켜 큰 글씨로 ‘아무 벼슬 아무 공의 구(柩)’라고 쓰는데, 벼슬이 없을 경우 생시에 부르던 대로 쓴다. ○ 부인은 남편으로 인하여 봉호(封號)가 있으면 ‘아무 봉호 부인 아무 관향 아무씨의 구’라고 쓰고 봉호가 없으면 ‘유인(孺人)’이라고 쓴다. ○ 무릇 부인의 봉호는 남편의 실직(實職)을 따라 쓴다. 관계(官階)의 칭호(稱號) -국제(國制)- 정1품 :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이다. 정승[議政]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라 일컫는다. ○ 종친(宗親)은 현록대부(顯祿大夫)와 흥록대부(興祿大夫)이다. ○ 의빈(儀賓)은 수록대부(綏祿大夫)와 성록대부(成祿大夫)이다. ○ 종친과 대군(大君)의 아내는 부부인(府夫人)이다. 종1품 : 숭록대부와 숭정대부(崇政大夫)이다. ○ 종친은 소덕대부(昭德大夫)와 가덕대부(嘉德大夫)이다. ○ 의빈은 광덕대부(光德大夫)와 숭덕대부(崇德大夫)이다. ○ 이상 문무관의 아내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다. ○ 종친의 아내는 군부인(郡夫人)이다. 정2품 : 정헌대부(正憲大夫)와 자헌대부(資憲大夫)이다. ○ 종친은 숭헌대부(崇憲大夫)와 승헌대부(承憲大夫)이다. ○ 의빈은 봉헌대부(奉憲大夫)와 통헌대부(通憲大夫)이다. 종2품 : 가의대부(嘉義大夫)와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 종친은 중의대부(中義大夫)와 정의대부(正義大夫)이다. ○ 의빈은 자의대부(資義大夫)와 순의대부(順義大夫)이다. ○ 이상 문무관의 아내는 정부인(貞夫人)이다. ○ 종친의 아내는 현부인(縣夫人)이다. 정3품 :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절충장군(折衝將軍)이다. ○ 종친은 명선대부(明善大夫)이다. ○ 의빈은 봉순대부(奉順大夫)이다. ○ 문무관의 아내는 숙부인(淑夫人)이다. ○ 종친의 아내는 신 부인(愼夫人)이다. 정3품 : 통훈대부(通訓大夫)와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 종친은 창선대부(彰善大夫)이다. ○ 의빈은 정순대부(正順大夫)이다. 종3품 : 중직대부(中直大夫)ㆍ중훈대부(中訓大夫)와 건공장군(建功將軍)ㆍ보공장군(保功將軍)이다. ○ 종친은 보신대부(保信大夫)와 자신대부(資信大夫)이다. ○ 의빈은 명신대부(明信大夫)와 돈신대부(敦信大夫)이다. ○ 이상 문무관의 아내는 숙인(淑人)이다. ○ 종친의 아내는 신인(愼人)이다. 정4품 : 봉정대부(奉正大夫)ㆍ봉렬대부(奉列大夫)와 진위장군(振威將軍)ㆍ소위장군(昭威將軍)이다. ○ 종친은 선휘대부(宣徽大夫)와 광휘대부(廣徽大夫)이다. 종4품 : 조산대부(朝散大夫)ㆍ조봉대부(朝奉大夫)와 정략장군(定略將軍)ㆍ선략장군(宣略將軍)이다. ○ 종친은 봉성대부(奉成大夫)와 광성대부(光成大夫)이다. ○ 이상 문무관의 아내는 영인(令人)이다. ○ 종친의 아내는 혜인(惠人)이다. 정5품 : 통덕랑(通德郞)ㆍ통선랑(通善郞)과 과의교위(果毅校尉)ㆍ충의교위(忠毅校尉)이다. ○ 종친은 통직랑(通直郞)과 병직랑(秉直郞)이다. 종5품 : 봉직랑(奉直郞)ㆍ봉훈랑(奉訓郞)과 현신교위(顯信校尉)ㆍ창신교위(彰信校尉)이다. ○ 종친은 근절랑(謹節郞)과 신절랑(愼節郞)이다. ○ 이상 문무관의 아내는 공인(恭人)이다. ○ 종친의 아내는 온인(溫人)이다. 정6품 : 승의랑(承議郞)ㆍ승훈랑(承訓郞)과 돈용교위(敦勇校尉)ㆍ진용교위(進勇校尉)이다. ○ 종친은 집순랑(執順郞)과 종순랑(從順郞)이고, 그 아내는 순인(順人)이다. 종6품 : 선교랑(宣郞)ㆍ선무랑(宣務郞)과 여절교위(勵節校尉)ㆍ병절교위(秉節校尉)이다. ○ 이상 문무관의 아내는 의인(宜人)이다. 정7품 : 무공랑(務功郞)과 적순부위(迪順副尉)이다. 종7품 : 계공랑(啓功郞)과 분순부위(奮順副尉)이다. ○ 이상 문무관의 아내는 안인(安人)이다. 정8품 : 통사랑(通仕郞)과 승의부위(承義副尉)이다. 종8품 : 승사랑(承仕郞)과 수의부위(修義副尉)이다. ○ 이상 문무관의 아내는 단인(端人)이다. 정9품 : 종사랑(從仕郞)과 효력부위(效力副尉)이다. 종9품 : 장사랑(將仕郞)과 전력부위(展力副尉)이다. ○ 이상 문무관의 아내는 유인(孺人)이다. 영좌(靈座)를 설치하고 혼백을 모신다. 시신의 남쪽에 횃대를 설치하여 수건으로 덮고 교의를 횃대 앞에 놓은 다음, -《가례의절》에 “교의 위에 좌요[坐褥]를 깔고, 좌요 위에 유의(遺衣)를 놓고, 유의 위에 혼백을 놓고, 교의 앞에 탁자를 놓는다.” 하였다.- 향로와 향합, 술잔과 주전자, 그리고 술과 과일을 탁자 위에 차려 놓는다. 시자가 아침저녁으로 빗과 세면 도구 따위의 봉양하는 도구를 생시와 똑같이 갖다 놓는다. 명정(銘旌)을 세운다. -축(祝)이 받침대를 설치한다. 영좌의 오른쪽에 기대어 세운다. 불사(佛事)를 하지 않으며, 친구나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은 이때부터 들어가서 곡할 수 있다. 주인이 아직 성복(成服)하기 전에 와서 곡하는 자는 심의(深衣)를 입는다. -《가례의절》에 “담색(淡色)으로 입는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주인이 나와서 예를 받을 경우, 조문자는 시신 앞에 가서 곡하고 다시 영좌 앞으로 나아가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한 다음, 울음을 그치고 주인을 향하여 치사(致辭)하기를 ‘아무개는 어쩌다가 일어나지 못하셨습니까?’ 한다. 주인은 맨발로 옷자락을 추어올려 띠에 꽂은 채 가슴을 치며 서쪽 계단 밑에 서서 손님을 향하여 곡과 절만 하고 답사(答辭)는 하지 않는다. 조문자는 답배(答拜)를 하고 주인과 마주 서서 슬피 곡을 한다. 예가 끝나면 조문자는 곡하며 밖으로 나오고 주인은 곡하며 안으로 들어가며, 호상(護喪)이 문밖까지 나와서 조문객을 전송한다. 이는 대개 《가례(家禮)》와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근거한 것이다. 주인이 나와서 예를 받지 않을 경우에는 조문자는 문 안으로 들어가서 시신을 바라보고 곡한 다음 울음을 그치고, 호상이 나와 접견하면 조문자가 치사하기를 ‘삼가 듣자니 아무개가 일어나지 못하셨다기에 와서 위로를 드리는 바입니다.’ 하고 두 번 절한다. 호상은 답배를 하고 답사하기를 ‘고(孤) 아무개는 이처럼 흉화(凶禍)를 당하여 특별한 위문을 받으니, 슬프고 고마운 심정 견딜 수 없습니다만, 아직 성복을 하지 않아서 감히 나와 뵙지 못하고 아무개를 시켜 절하는 바입니다.’ 하고는 이어서 두 번 절한다. 조문자가 답배를 하고 물러나면 호상이 문밖까지 나와서 전송한다. 이는 대개 《서의(書儀)》와 후종례(厚終禮)에 근거한 것이다. 지금 두 의절을 다 남겨두어서 초상이 났을 때 존친(尊親)에게는 전자의 의절을 쓰도록 하고 소원(疏遠)한 사람에게는 후자의 의절을 쓰도록 하는 바이다.” 하였다.   [주D-001]의례 사상례의 소(疏) : ‘사유빙(士有氷)’ 조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이다. [주D-002]의례 사상례의 주 : ‘모치질(冒緇質)’ 조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이다. [주D-003]의례 사상례의 주 : ‘설건(設巾)’ 조에 대한 정현의 주이다. [주D-004]예기 상대기의 주 : ‘거사의(去死衣)’ 조에 대한 정현의 주이다. [주D-005]예기 상대기의 주 : ‘설이반조빙(設夷盤造氷)’ 조에 대한 진호(陳澔)의 주이다. [주D-006]의례 사상례의 소 : ‘사유빙(士有氷)’ 조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이다. [주D-007]의례 근례(覲禮)의 소 : ‘우육단(右肉袒)’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소렴(小殮) 소렴의 제구(諸具) 평상[牀] 거적[薦] 돗자리[席] 요[褥] 베개[枕] 병풍[屛] 고운 삼베[細布] : 포백척(布帛尺)으로 20자가량이다. 잿물에 바랜 삼베나 고운 무명베를 쓰는데, 묶는 데 쓰는 것이다. 살피건대, 우리나라는 베의 폭이 너무 좁아서 반드시 반 폭을 더 붙여서 꿰매어 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고 보면 30자가량이 든다. ○ 가로로 놓는 3폭은 그 길이를 각각 4자나 3자 남짓으로 하고, 세로로 놓는 1폭은 그 길이를 10자나 9자가량으로 하는데, 시신의 장단(長短)과 비척(肥瘠)에 따라 마련한다. 폭마다 양쪽 끝을 쪼개어 세 쪽을 만들되, 가로 폭은 한가운데 8치 남짓을 쪼개지 않은 채 남겨두고 세로 폭은 3분의 2를 쪼개지 않은 채 남겨두어서, 가로 폭은 몸을 감싸서 마주 당겨 묶기에 넉넉하도록 하고 세로 폭은 머리에서 발까지를 덮어씌워 몸 한가운데에서 잡아당겨 묶기에 넉넉하도록 한다. 이불[衾] : 두 채. 한 채는 겹이불로 소렴에 쓰는 것이고, 한 채는 이금(侇衾)으로 시신을 덮는 데 쓰는 것이다.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거죽은 검고 안은 붉으며, 이불깃은 없다.[緇衾赬裏無紞]” 하였는데, 그 주에 “이불깃은 이불의 위아래의 표시이다. 염의(殮衣)는 어쩌다 뒤바뀔 수도 있지만, 이불은 위아래의 구별이 없는 것이 좋다. 무릇 이불의 제도는 모두 5폭이다.” 하였다. 《의례》 사상례의 소(疏)에 “이금의 질(質)과 쇄(殺)를 마르는 방법은 모(冒)와 같으니, 위쪽은 검은색으로 하고 아래쪽은 붉은색으로 하여 연결한 다음에 쓴다.” 하였고, 또 “이금이란 본래 시신을 덮고 관을 덮는 것으로, 입관 때에는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사를 지내려고 계빈(啓殯)할 적에도 관을 덮는 데 쓴다.” 하였다. 또 “조묘(朝廟) 및 입광(入壙)할 때 비록 이금을 쓴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또 걷어 치운다는 문구도 없다. 관을 덮는다는 말만 하였으니, 관과 함께 입광하는 일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가례》의 이른바 ‘구의(柩衣)’가 바로 이금이다. 산의(散衣) : 곧 잡옷ㆍ도포ㆍ장옷 따위이다. 상의(上衣) : 단령(團領)ㆍ직령(直領) 따위이다. ○ 《의례》 사상례에 “옷이 19벌이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열채(列采)가 아니면 -간색(間色)이다.- 쓰지 못하고, 갈포와 모시는 쓰지 못한다. -여름철에도 도포[袍]를 쓴다.-” 하였다.   환질(環絰)의 제구 백포건(白布巾) : 제도는 세속의 효건(孝巾)과 같은데, 소렴 때에 쓴다. 환질(環絰) : 삼 1고(股)로 꼬아서 만드는데, 크기는 시질(緦絰)과 같으며, 백포건 위에 쓰는 것이다. 《예기(禮記)》 잡기(雜記)에 “소렴 때의 환질은 공(公)ㆍ대부(大夫)ㆍ사(士)가 마찬가지이다.” 하고, 그 소에 “어버이가 처음 죽으면 효자가 갓을 벗으므로, 소렴 때에 가서 수식(首飾)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사는 위모(委貌)를, 대부 이상은 소변(素弁)을 쓰는 것이니, 귀천에 관계없이 다 환질을 쓸 수 있다.” 하였다. 습(襲)할 때는 환질을 벗었다가 계빈(啓殯) 때에 백포건과 함께 다시 써서 졸곡(卒哭) 때까지 간다. 살피건대, 예(禮)에 대렴에도 환질이 있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제가(諸家)의 예설을 상고해 보니 수질(首絰) 밑에는 반드시 건모(巾帽)가 있다. 따라서 그것으로 수질을 받쳐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모와 작변(爵弁)의 제도는 지금 남아 있지 않으니, 마땅히 백포를 사용하여 세속에서 만들어 쓰는 효건이나 소모(小帽)처럼 만들어야만 예법의 본뜻에 맞을 듯하다.” 하였다. ○ 내가 살피건대, 고례(古禮)에 환질은 소렴 때에 썼다가 습할 때에 가서 벗는데, 《가례의절》에는 빙시(憑尸)한 후에 벗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마땅히 예경(禮經)을 바른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예에 소렴 때까지도 머리를 풀게 되어 있으니, 고례를 따르고 싶다면 마땅히 상투를 쫒고 건과 수질을 쓰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리고 《의례》와 《예기》에 모두 ‘자최(齊衰)에 환질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없고, 단지 구준(丘濬)의 《가례의절》에 ‘참최(斬衰)를 입는 자만이 쓴다’고 하였으니, 의심스러운 일이다.   제전(祭奠)의 제구 탁자(卓子) : 두 개. 술잔[盞] : 잔대를 갖춘다. 주전자[注] 조건(罩巾) : 대나무를 쪼개어 만드는데, 명주나 삼베 수건을 씌운 것이다. 초[燭] : 촛대를 갖춘다. 세숫대야[盥盆] : 두 개. 한 개는 받침대가 있는 것으로 축(祝)이 손을 씻는 것이고, 한 개는 받침대가 없는 것으로 집사(執事)가 손을 씻는 것이다. 수건[帨巾] : 두 개. 설거지 대야[潔滌盆] : 한 개. 잔을 씻는 것이다. 새 행주[新拭巾] : 한 개. 잔ㆍ제찬ㆍ주과(酒果)ㆍ포해(脯醢) 따위를 닦는 데에 쓴다. ○ 《의례》 사상기에 “제전에는 채색하지 않은 소기(素器)를 쓴다.” 하였는데, 유씨(劉氏)가 말하기를 “영좌(靈座) 앞에는 금ㆍ은으로 된 술그릇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기를 쓴다.” 하였다.   괄발(括髮)ㆍ문(免)ㆍ좌(髽)의 제구 삼끈[麻繩] : 참최에 남자의 머리와 부인의 머리를 묶는 데 쓰는 것이다. 포두수(布頭 ) :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는 것이다. 《의례상복도식(儀禮喪服圖式)》에 의하면 부인은 6새[升]의 삼베로 머리끈을 만들며, 양쪽 끝을 묶은 다음 결발(結髮)한 뒤로 나오게 하여 드리우는 끈의 길이는 6치인데, 기년(朞年)과 대공(大功)에는 8치이고, 소공(小功)과 시마(緦麻)에는 1자이다. 《서의(書儀)》에 의하면, 괄발(括髮)이란 먼저 삼끈으로 상투를 쫒은 다음, 또 삼베로 두수(頭 )를 만들어 묶는다. 자최(齊衰) 이하는 모두 문(免)으로 묶는데, 삼베를 찢거나 명주를 감쳐서 만들며, 너비는 1치이다. 부인의 좌(髽)도 가느다란 삼끈으로 만들며, 자최 이하는 역시 삼베나 명주로 만드는데, 모두 초두(幓頭 머리를 묶는 수건)의 제도와 같다. ○ 살피건대, 《가례》는 《서의》에 바탕하여 남자의 참최에도 삼베로 두수를 만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문(免) : 삼베를 찢거나 명주를 감쳐서 너비 1치로 만드는데, 자최 이하 5세조를 함께하는 복인들이 상투를 감싸 묶는 것이다. 좌(髽)도 마찬가지이다. ○ 괄발(括髮)ㆍ문(免)ㆍ좌(髽)는 성복할 때에 가서 제거한다. 죽잠(竹簪) : 부인이 머리를 고정시키는 것으로, 모상(母喪)의 경우 개암나무로 만든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길이는 5, 6치이다. 살피건대, 고례(古禮)에는 성복에도 썼으니, 《가례》와는 같지 않다.   질대(絰帶)의 제구 수질(首絰) : 참최에는 저마(苴麻) 곧 암삼을 쓰고, 자최 이하에는 시마(枲麻) 곧 수삼을 쓰며, 시마(緦麻)에는 숙마(熟麻)를 쓴다. 그 제도는 두 가닥을 꼬아서 만드는데, 대충의 길이는 1자 7, 8치이고, 둘레는 참최는 9치, -《의례》 사상례의 소에 의하면,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으로 둘레를 재면 9치가 된다.- 자최는 7치, 대공(大功)은 5치, 소공(小功)은 4치, 시마는 3치이다. 참최에는 삼의 밑둥을 왼쪽에 놓고 이마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려 와서 그 끝을 밑둥 위에 올려놓고, 자최 이하는 삼의 밑둥을 오른쪽에 놓고 이마 앞에서 왼쪽으로 돌려 와서 그 끝을 밑둥 아래에 넣어 묶은 다음, 또 가느다란 노끈으로 갓끈을 만들어 고정시키는데, 갓끈은 아래로 드리워 턱밑에서 묶는다. 자최 이하는 삼베를 쓰는데, 방법은 마찬가지이다. 《의례》 상복(喪服)의 주에 의하면, 대공 이상은 수질에 갓끈이 있고 소공 이하는 갓끈이 없다. 《의례》 상복에 “중상(中殤) 7개월에는 수질에 갓끈을 달지 않는다.” 하였다. ○ 부인은 빙시(憑尸) 후에 쓰고 남자는 천시(遷尸) 후에 쓴다. 요질(腰絰) : 삼으로 위와 같이 두 가닥을 서로 꼬아 만드는데, 그 둘레는 참최는 7치, 자최는 5치, 대공은 4치, 소공은 3치, 시마는 2치이며, 양쪽 머리에 각기 삼의 밑둥을 남겨두고 가느다란 노끈으로 묶는데, 총 길이는 7, 8자이다. 또 허리를 돌려 와서 서로 묶는 곳에 각기 가느다란 노끈 -자최에는 삼베를 쓴다.- 을 달아서 서로 묶을 것에 대비한다. ○ 대공 이상은 그 끝을 풀어 늘어뜨리는데, 길이는 3자이며, 성복 때에 묶었다가 계빈(啓殯) 때에는 다시 풀어 늘어뜨리고 졸곡 때에 다시 묶는다. 소공 이하 및 나이 50세 이상인 자와 부인은 처음에 곧바로 묶으며, 상(殤)의 요질은 묶지 않는다. 띠를 늘어뜨리는 것은 《의례》와 《예기》에 나온다. ○ 부인은 빙시(憑尸) 후에 띠를 띠고 남자는 천시(遷尸) 후에 띠를 띤다. 효대(絞帶) : 참최에는 삼끈을 쓰는데 길이 18, 9자의 삼끈 한 가닥을 절반으로 접어 두 가닥으로 만들고 나서 각각 1자 남짓씩을 결합하여 둥근 고리를 만든다. 그런 다음 그 나머지를 합쳐서 한 가닥을 만들어 허리에 두르되 왼쪽에서 뒤로 돌려 앞에까지 와서 그 오른쪽 끝을 두 가닥 사이에 꿴 다음,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 꽂아서 요질(腰絰) 밑에 가 있게 하는데, 총 길이 8, 9자로, 곧 삼중(三重) 사고(四股)가 된다. -《예기》 간전(間傳)의 주에 “네 가닥을 꼬아서 합쳐 겹치게 하면 세 겹이 된다. 이는 한 번 꼰 것이 한 겹이 되고, 두 가닥을 합쳐 한 가닥의 노끈을 만든 것이 곧 두 겹이 되며, 이 두 노끈을 다시 합쳐서 한 가닥의 노끈을 만들면 바로 세 겹이 된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주자어록(朱子語錄)》에는 효대는 요질보다 비교적 작다고 하였고, 《가례》에는 요질과 똑같다고 하였으나, 지금으로 볼 때는 비교적 작다는 것이 옳을 성싶다.” 하였다. ○ 자최 이하에는 삼베를 각기 그 상복 베의 새[升] 수에 따라 -성복(成服) 조에 나온다.- 잘라서 양쪽 가장자리를 감치고 난 너비가 4치가량이 되게 한 다음, 그 오른쪽 끝 1자가량을 접어서 실로 꿰매어 둥근 고리를 만드는데, 총 길이는 7, 8자가 된다. 빙시(憑尸) 후에 띠를 띤다. 그 이튿날에, 죽은 이튿날을 말한다. 집사자가 소렴할 옷과 이불을 벌여 놓고, 탁자를 마루 동쪽 벽 밑에 놓고 그 위에 올려놓는데, -《의례》 사상례에 “옷깃을 남쪽으로 가도록 놓되,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접어놓는다.” 하였다.- 죽은 자가 평소 입던 옷의 다소에 따라 적절히 쓰되, 옷이 많은 경우 다 쓸 필요는 없다. 제전(祭奠)의 제구(諸具)를 차려 놓는다. 탁자를 동쪽 계단 동남쪽에 갖다 놓은 다음 전찬(奠饌) 및 술잔과 주전자를 그 위에 올려놓고 상보를 씌운다. 세숫대야와 수건 두 개씩을 전찬의 동쪽에 갖다 놓는데, 받침대를 받친 동쪽의 것은 축(祝)이 손을 씻는 것이고 받침대가 없는 서쪽의 것은 집사자가 손을 씻는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그 동쪽에 탁자를 놓고 설거지 대야와 새 행주를 갖다 놓는데, 이는 술잔을 씻고 닦기 위한 것이다. 이 일절(一節)은 견전(遣奠) 때까지 똑같다. 괄발마(括髮麻)와 문포(免布)와 좌마(髽麻)를 벌여 놓은 다음, 괄발이란 삼끈으로 상투를 묶고 나서 또 삼베로 두수(頭 )를 만드는 것이다. 문이란 삼베를 찢거나 명주를 감쳐서 만드는데, 너비는 1치이며, 목 뒤에서 앞으로 돌려 이마 위에서 교차시킨 다음 되돌려서 상투를 묶기를 마치 머리에 망건 쓰듯이 한다. 좌(髽) 역시 삼끈으로 상투를 쫒고 대나무나 개암나무로 비녀를 만들어 꽂는 것이다. 모두 별실에 차린다. -살피건대,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참최에는 삼[麻]으로 괄발하는데, 모상(母喪)에도 삼으로 괄발한다. 또 문을 할 경우 삼베를 쓴다.” 하고, 그 주에 “염을 마치고 나서 삼으로 목 뒤에서 앞으로 돌려 이마 위에서 교차시킨 다음 되돌려서 상투를 묶기를 마치 초두(幓頭)를 쓴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초두는 지금 사람들이 약발(掠髮)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삼으로 괄발한다’는 말이다. 모상에도 역시 그렇게 하기 때문에 ‘모상에도 삼으로 괄발한다’고 하였는데, 이 예(禮)는 부상(父喪)과 똑같다. ‘문을 할 경우 삼베를 쓴다’는 말은 오로지 모상만을 가리켜 한 말로, 이는 부상에는 소렴 뒤에 손님들에게 배례(拜禮)를 마치고 나면 아들들이 곧장 마루 밑 제자리로 나아가서 그때까지도 괄발을 한 채 발을 구르지만, 모상의 경우는 이때에는 다시 괄발을 하지 않고 삼베로 된 문만 쓴 채 발을 구른다. 그러므로 문을 할 경우 삼베를 쓴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부인은 방에서 좌(髽)를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삼베로 하는데, 역시 초두(幓頭)를 쓴 것과 같이 한다.” 하고, 그 소에 “좌의 모양은 먼저 머리를 틀어 큰 상투를 만들고 나서, 그 상투 위에다, 참최복을 입을 부인은 삼으로 하고 자최복을 입을 부인은 삼베로 하는데, 쓰는 방법은 남자의 괄발이나 문의 방법과 같다.” 하였다. [수질(首絰)ㆍ요질(腰絰)ㆍ효대(絞帶)ㆍ마(麻)를 벌여 놓는다.] -《의례》 사상례에 나온다. 소렴상(小殮牀)을 설치하고 효포(絞布)와 이불과 옷을 펴놓고, 서쪽 계단 서쪽에 소렴상을 갖다 놓고 거적과 돗자리와 요를 깔고 효포와 이불과 옷을 펴놓은 다음, 서쪽 계단으로 들고 올라가서 시신 남쪽에 놓되, 먼저 가로로 효포 셋을 밑에 펴놓아서 몸체를 감싸 묶을 것에 대비하고, 다시 세로로 효포 하나를 그 위에 펴놓아서 머리와 발을 덮을 것에 대비한다. 옷은 앞뒤가 뒤바뀌거나 거꾸로 놓더라도 방정하게 놓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상의만은 거꾸로 놓으면 안 된다. -《의례》 사상례에 “효포와 이불과 산의(散衣)를 펴놓는데, 제복(祭服)은 좋은 것이 속에 들어간다.” 하였다. 이에 습전(襲奠)을 옮기고, 집사자가 영좌(靈座)를 서남쪽으로 옮겨놓고 새 전물(奠物)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운다. 모든 제전(祭奠)은 다 이와 같이 한다. 드디어 소렴을 한다. -살피건대, 고례(古禮)에 의거하면 이때에 주인의 형제는 흰 두건에 환질(環絰)을 띠고 염하는 장면을 보게 되어 있다. ○ 또 살피건대, 예법에 시신을 움직이고 관을 들 때에는 모두 어깨를 벗는데, 일하기에 편하게 하려는 취지이므로 부인은 어깨를 벗지 않는다. 일을 끝마치고서는 다시 입는다. 《가례》에서 간략한 쪽을 따랐기 때문에 모두 생략하고 시신을 옮길 적에만 한쪽 어깨를 벗는 것으로 하였다. 지금 비록 고례를 일일이 다 따르기는 어렵지만 대렴ㆍ소렴 같이 큰 절목(節目)은 예경(禮經)을 따라 바로잡는 것이 옳을 듯하다. 시자가 손을 씻고 나서 시신을 들면 남녀가 다 같이 부축하여 소렴상 위로 옮긴 다음, 먼저 베개를 빼내고 명주를 펴놓고 옷을 포개어 시신의 머리를 받친다. 이어서 명주의 양쪽 끝을 말아서 두 어깨의 빈 곳을 채우고, 또 옷을 말아서 두 다리 사이를 채워 시신의 자세를 똑바르게 한다. 그러고 나서 남은 옷으로 시신을 덮되, 옷깃[衽]을 왼쪽으로 여미고 -《예기》 상대기의 주에 의하면, 임(衽)이란 옷깃인데, 생시에는 오른쪽으로 여미므로 사람이 죽을 경우 왼쪽으로 여며서 다시 풀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옷고름은 묶지 않으며, 이불로 싸되 효포로 묶지 않으며 얼굴을 덮지 않으니, 이는 효자의 마음에 그래도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며 때때로 그 얼굴을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염이 끝나면 이불로 덮는다. -《의례》 사상례에 의하면, 이불은 이금(侇衾)이다. ○ 구준이 이르기를 “《의례》에는 효포로 묶지 않는다는 말과 얼굴을 덮지 않는다는 말이 없으니, 《가례》는 대개 《서의》에 근본하였다. 만약 무더운 때 당했다면 《의례》에 의하여 염을 마치는 것이 옳다.” 하였다. ○ 살피건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옷고름은 묶지 않는다’고 한 《가례》의 설이 ‘소렴과 대렴에서 효포로 묶고 옷고름은 묶지 않는다’고 한 《예기》 상대기의 설과 같지 않다. 이는 대개 《예기》 상대기는 효포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가례》는 옷고름을 가리켜 말한 것이므로 ‘옷고름을 묶지 않는다’는 문구는 비록 같으나 그 뜻은 자연 다르다. 즉 《가례》의 뜻은, 옷깃을 이미 왼쪽으로 여민 이상 자연 옷고름을 묶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묶지 않는다[不紐]’고 한 것이다. 세속에서 더러 옷고름을 잘라 버리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 또 살피건대, 《의례》 사상례에 보이는 “습은 세 벌로 한다.”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에 “죽은 이에게 옷을 입힐 적에는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옷고름은 묶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정씨가 《예기》 상대기의 ‘소렴과 대렴에는 모두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문구를 인하여 이러한 말을 남긴 듯하다. 그러나 《예기》 상대기에 애당초 ‘습’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의례》 및 《가례》 역시 ‘습할 때에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말이 없으니, 정씨의 주는 따를 수 없을 듯하며, 습할 때에는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몄다가 소렴ㆍ대렴 때 비로소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이 예의 본뜻에 맞지 않을까 싶다. 주인과 주부가 시신에 기대어[憑尸] 곡을 하며 가슴을 치고, 주인은 서쪽을 향해 서서 시신에 기대어 곡을 하며 가슴을 치고, 주부는 동쪽을 향해 서서 역시 그렇게 한다. ○ 무릇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는 기대고,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와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는 붙잡고, 며느리가 시부모에 대해서는 받들고, 시아버지가 며느리에 대해서는 어루만지고, 형제에 대해서는 붙잡는다. 모든 빙시(憑尸)는 부모가 먼저 하고 처자가 나중에 한다. 별실에서 단(袒)을 하고 괄발(括髮)을 하며, 문(免)을 하고 좌(髽)를 한다. 남자 참최자는 단과 괄발을, 자최 이하 5세조를 같이하는 자는 모두 별실에서 단과 문을 한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이르기를 “자최 이하는 모자를 벗고 두건을 쓰고서 그 위에 문을 쓴다.” 하였다.- 부인은 별실에서 좌를 한다. -《의례》 사상기에 “빙시를 하고 나서는 주인은 단ㆍ문ㆍ괄발을 하고 효대(絞帶)를 띠고 뭇 주인은 포대(布帶)를 한다.” 하고, 그 주에 “뭇 주인이란 자최 이하이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에 “부인의 좌는 방 안에서 삼끈을 띤다.” 하였다.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부인이 남자가 습(襲 벗었던 한쪽 어깨를 다시 꿰어 입는 일)과 질(絰 띠를 띠는 일)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삼끈을 띠는 것은 제도의 질박함과 간략함이 조금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좌하는 것을 인하여 습과 질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양씨(楊氏)가 이르기를 “습과 질이라는 말에서의 ‘질’은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의 총칭이다.” 하였다. ○ 살피건대, 이상의 여러 설을 상고해 볼 때 주인은 괄발과 문을 할 적에 마땅히 효대를 띠어야 하고, 자최 이하는 포대(布帶)를 띠어야 하며, 부인은 좌를 할 적에 역시 수질을 쓰고 요대(腰帶)를 띠어야 할 것이다. 돌아와 시상(尸牀)을 마루 한가운데로 옮긴다. 집사자가 습상(襲牀)을 철거하고, -《예기》 상대기에 의하면, 휘장[帷]도 철거한다.- 시신을 그곳으로 옮기며, -《의례》 사상례에 의하면, 무(幠 덮개)는 염금(殮衾)을 쓴다.- 곡을 할 사람들은 모두 제 위치로 돌아가서 항렬이 높거나 나이 많은 사람은 앉고 항렬이 낮거나 나이 어린 사람은 선다. 【사상례】 주인이 손님에게 배례를 하고 나서 습(襲)을 하고 질(絰)을 띤다. -《의례》 사상례에 “시신을 받들어 마루에 모시면 남녀가 발을 구르고 주인은 서쪽 계단에서 내려온다.” 하고, 그 소에 “뭇 주인들도 따라서 손님에게 배례를 하고 제 위치로 가서 [주에 ‘제 위치는 동쪽 자리이다.’ 하였다.] 발을 구르고 습을 하고, [《가례의절》에 ‘습을 한다는 것은 조금 전에 벗었던 왼쪽 어깨의 상의를 걸쳐 입는 것이다.’ 하였다.] 서(序)의 동쪽에서 질을 띤 다음, [소에 ‘당상(堂上)의 동쪽 측실 앞에 나아감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제 위치로 돌아온다.” 하였다. ○ 구준이 이르기를 “예(禮)에는 손님에게 배례를 한다는 문구가 있으나, 《가례》에는 없다. 지금 보충해 넣는 것은 예가 폐해진 뒤로 예를 제대로 아는 자가 적어서 손님이나 친구로서 찾아와 염(殮)을 도와줄 경우 사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 《의례상복도식(儀禮喪服圖式)》 성복조(成服條)에 이르기를 “이 수질(首絰)은 곧 시신을 옮겨다 마루에 모시고 나서 습을 하고 질을 띨 적에 쓰는 것이다.” 하였다. ○ 지금 이 설을 상고하건대, 주인과 형제가 시신을 옮긴 뒤에는 다 같이 수질과 요질을 띠되 풀어 늘어뜨리는 것이 옳다. 이에 제전(祭奠)을 하는데, 축이 집사자를 거느리고 손을 씻고 전찬(奠饌)을 들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영좌(靈座) 앞에 이르러서 향불을 피우고 술잔을 씻고 술을 쳐 올리면, 항렬이 낮거나 나이 어린 사람은 모두 두 번 절하고 시자는 상보를 덮는다. -살피건대, 《가례의절》에 상주는 절을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주인 이하는 아주 슬피 곡하고, 대곡(代哭)하게 하여 곡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한다.   [주D-001]의례 사상례의 소(疏) : ‘상제이금(床第夷衾)’ 조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이다. [주D-002]사상기 : 이 내용은 《의례》사상기에 나오지 않고 《예기》단궁 하(檀弓下)에 나오는데, 필자의 착오인 듯하다. [주D-003]의례 상복(喪服)의 주 : ‘기중상칠월불영질(其中殤七月不纓絰)’ 조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이다. [주D-004]예기 간전(間傳)의 주 : ‘갈대삼중(葛帶三重)’ 조에 대한 진호(陳澔)의 주이다. [주D-005]예기 상대기의 주 : ‘좌임(左袵)’ 조에 대한 진호의 주이다.     대렴(大殮) 대렴의 제구 출미회(秫米灰) : 찹쌀의 재로, 껍질을 벗기지 않은 것을 써도 된다. 구준(丘濬)이 이르기를 “출(秫)은 찰벼이다.” 하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찹쌀은 살충 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또 자서(字書)에 찰기장을 출(秫)이라고도 하고 찰곡식을 범칭하여 출이라고도 하였다. 찹쌀을 용기에 담아서 굽거나 숯불로 태워서 색깔이 새까맣게 변하도록 한 다음, 8, 9말 또는 6, 7말의 가루를 만들되, 관(棺)의 고하(高下)에 따라 증감한다. 찹쌀이 없을 경우 숯가루를 채로 쳐서 대신하기도 하는데, 관 바닥에 까는 것이다. 후백지(厚白紙) : 5, 6장. 재를 깐 위에 덮는 것이다. 요[褥] : 물들인 비단을 쓰며 안감을 댄다. 가장자리를 감치는데, 길이와 너비는 관 안의 넓이에 따라 마른다. 칠성판(七星板) 위에 펼치는 것이다. 돗자리[席] : 너비는 요에 맞추고 네 가장자리를 물들인 명주로 꾸미는데, 요 위에 까는 것이다. 평상[牀] 거적[薦] 돗자리[席] 요[褥] 베개[枕] : 거적 이하 베개까지는 모두 평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고운 삼베[細布] : 20자가량. 폭이 좁으면 30자가량. ○ 가로로 놓는 2폭은 그 길이를 관 안을 감싸고 나서 두 끝을 밖으로 내어 아래로 드리울 경우 각각 양옆의 절반 부분에 와서 끝나도록 하되, 통째로 찢어서 여섯 쪽을 만들어 한 쪽은 버리고 다섯 쪽을 쓴다. 세로로 놓는 1폭은 그 길이를 관두(棺頭)에서 양옆을 감싸고 나서 그 끝이 각각 관족(棺足)의 두 모서리에 걸치도록 하되, 관의 나무가 두꺼울 경우 겨우 걸쳐지게만 하고 얇을 경우 베의 끝이 서로 닿게만 한다. 그다음, 길이를 세 등분하여 가운데의 한 등분은 남겨두고 양쪽 끝을 쪼개어 각각 세 쪽을 내는데, 폭이 좁으면 가로로 놓는 폭은 3폭을 써서 폭마다 두 쪽으로 쪼개어 한 쪽은 버리고 다섯 쪽을 쓰되, 가장자리를 감치는 폭은 반 폭을 더 잡는다. ○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대렴의 효포(絞布)는 세로로 놓는 것이 3폭이고 가로로 놓는 것이 5폭인데, 효포 1폭은 세 쪽을 만들되 쪼개지는 않는다.” 하고, 그 주에 “1폭의 양쪽 끝을 세 쪽으로 쪼개되, 한가운데는 쪼개지 않는다.” 하였다. 오씨(吳氏)는 이르기를 “가로로 놓는 효포 5폭은 통째로 쪼개고, 세로로 놓는 효포 3폭은 그 양쪽 끝만 쪼개어 세 쪽을 만들되 다만 한가운데 허리 부분만 쪼개지 않는다.” 하였다. ○ 살피건대, 가례도(家禮圖)에서 대렴의 가로 효포를 열다섯 쪽으로 쪼개어 만든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불[衾] : 두 채. 모두 솜을 넣어 만드는데, 한 채는 밑에 깔고 -곧 처음 죽을 당시에 덮었던 것이다.- 한 채는 덮는다. 산의(散衣) 상의(上衣) : 이상은 소렴 조에 나왔다. ○ 《예기》 상대기에 의하면 사(士)는 30벌이고 대부(大夫)는 50벌인데, 없을 경우 있는 대로 쓴다. 옻[漆] : 관(棺)을 만드는 제구에 나온다. 흰 모시[白苧布] : 5, 6자. 옻으로 관의 봉합 부분을 바르는 것인데, 없을 경우 유지(油紙)만 발라도 된다. 유지(油紙) : 3장. 관의 봉합 부분을 바르는 것이다. 콩가루[菽末] : 콩 2되를 말려서 가루를 만든 다음 물에 타서 쓰는데, 유지를 붙이는 것이다. 유둔(油芚) : 9장을 붙인 것 한 개, 또는 4장을 붙인 것 두 개. 관을 싸는 것이다. 가는 밧줄[小索] : 50여 발[把]. 굵은 밧줄[大索] : 10여 발. 이상의 두 물건은 관을 묶는 것이다.   빈소(殯所)를 차리는 제구 등상[凳床] : 두 개. 속칭 토막나무[塊木]로, 길이는 관의 너비에 준하고 발의 높이는 3, 4치로 하는데, 관을 받치는 것이다. 휘장[帷] : 영구(靈柩)의 사방을 가리는 것이다. 구의(柩衣) : ‘소렴의 제구’에 나온다. 병풍[屛] 장막[帟] : 작은 장막인데, 빈소 위에 쳐서 먼지를 막는 것이다. 털방석[毛氈] : 5, 6뜸[浮]. 없을 경우 볏짚 거적을 쓰는데, 겨울철에 관을 싸는 것이다.   영상(靈牀)의 제구 평상[牀] 휘장[帳] 거적[薦] 돗자리[席] 병풍[屛] 베개[枕] 요[褥] 옷과 이불[衣被] 빗질 도구[櫛具] 세숫대야[盥盆] 수건[帨巾]   제전(祭奠)의 제구 -소렴과 같다. 그 이튿날에, 소렴의 이튿날로, 죽은 지 사흘째이다. 집사자가 대렴할 옷과 이불을 벌여 놓고, 탁자를 마루 동쪽 벽 밑에 갖다 놓고 벌여 놓는데, 옷은 일정한 수효가 없고,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옷깃을 남쪽으로 가도록 하되 서쪽을 윗자리로 삼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며 벌여 놓고 다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며 벌여 놓는다.” 하였다.- 이불은 솜 둔 것으로 쓴다. -효포(絞布)는 세로로 1폭, 가로로 5폭이다. 제전(祭奠)의 제구를 진설하면, 소렴의 의식과 같다. 【사상례】 주인 및 친척들이 왼쪽 어깨를 벗고, 처음과 같이 돗자리를 깔고, 효포와 이불과 옷을 펴놓는다. -서쪽 계단의 서쪽에 대렴상을 설치하고 거적과 돗자리와 요와 베개를 벌여 놓고, 효포와 이불과 옷들을 펼쳐서 서쪽 계단으로 들고 올라가서 시신의 남쪽에 놓는다. 그리고 먼저 가로로 효포를 밑에 펴놓아서 몸체를 싸 묶는 데 대비하고, 이어서 세로로 효포를 그 위에 펴놓아서 머리와 발을 덮는 데 대비한다. 그다음에 이불을 올려놓고 그다음에 상의를 올려놓고 그다음에 산의(散衣)를 올려놓는데, 뒤집어 놓거나 거꾸로 놓더라도 가지런하게만 놓으면 된다. 《의례》 사상례에 “좋은 것을 바깥에 놓는다.[美者在外]” 하였다. ○ 구준이 이르기를 “《가례》가 《서의(書儀)》에 근본하였으나, 대렴에 효포와 옷과 이불을 펴놓는다는 문구가 없으니, 이는 간소화하는 쪽을 따라서인 듯하다. 그러나 재력이 있는 자는 당연히 예법과 같이 해야 한다.” 하였다. ○ 살피건대, 대렴의 한 절차는 폐지할 수 없을 듯하여, 지금 《의례》에 의거하여 보충해 넣었다. 관을 들어다 마루 한가운데의 조금 서쪽에 놓고, 집사자가 먼저 영좌 및 소렴의 전물(奠物)을 옆에다 옮겨놓으면, -《의례》 사상례에 “마루에 휘장을 치고, 주인 및 친척이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 서쪽을 향해 서서 왼쪽 어깨를 벗는다.” 하였다.- 역자(役者)가 관을 들고 들어가서 -《의례》 사상례에 “관이 들어갈 적에는 주인이 곡하지 않는다.” 하였다.- 대렴상 서쪽에 놓고 두 개의 등상(凳床)으로 받친다. 항렬이 낮거나 나이 어린 사람일 경우 별실에서 한다. 역자는 나가고 시자(侍者)가 -관 안에 찹쌀 재를 아주 고르게 깐 다음, 후백지(厚白紙)를 펴고 그 위에 칠성판을 올려놓고 다시 요와 돗자리를 깐다.- 이불을 관 안에 펴놓되, 네 끝자락이 관 밖에 드리워지도록 한다. -고례를 적용하여 대렴상에 올려놓고 대렴을 할 것 같으면 관에 이불을 펴놓는 절차는 없다. 이에 대렴을 한다. 시자가 아들ㆍ손자ㆍ며느리ㆍ딸과 함께 손을 씻고 나서 머리를 덮고 효포(絞布)를 묶은 다음, -고례를 적용할 경우에는 대렴상 위에 옮겨놓은 다음 먼저 베개를 치우고 염을 하는데, 옷과 이불을 씌우되 먼저 발을 덮고 그다음에 머리를 덮고 그다음에 왼쪽을 덮고 그다음에 오른쪽을 덮으며, 효포는 먼저 세로로 놓은 것을 묶고 난 다음에 가로로 놓은 것을 묶는다. 《예기》 상대기에 “효포를 묶을 적에는 고를 내어 묶지 않는다.” 하고, 그 주에 “살아 있을 때에 매는 띠를 모두 고를 내어 묶는 것은 풀기 쉽도록 하려는 것이나, 죽었을 때에는 다시 풀 일이 없기 때문에 효포를 완전히 묶어서 고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휘장을 철거한다.” 하였다.- 함께 시신을 들어 관 안에 넣고 생시에 빠진 이[齒]와 머리카락 -목욕 때 빠진 머리카락도 함께 넣는다.- 및 자른 손톱과 발톱을 관 모서리에 채워 넣고, 또 그 빈 곳을 헤아려 옷을 말아 채우되 빈틈이 없이 꽉차게 한다. 그리고 금이나 옥 또는 진귀한 보물을 관 속에 넣어서 도둑이 도적질할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한다. 이불을 거두어 넣어서 고르게 채운다. -고례를 적용하여 대렴을 한 뒤에 입관(入棺)을 할 경우에는 이불을 거두어 넣는 절차는 없어도 될 듯하다.- 주인과 주부가 관에 기대어 슬피 운 다음 부인들이 물러나 장막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이에 목수를 불러서 관 뚜껑을 씌우고 못을 박고, -은정(銀釘)을 설치할 경우 못은 쓰지 않는다.- 상을 치우고 구의(柩衣) -염이불인 이금(侇衾)이다.- 를 덮고, 축(祝)이 명정을 가져다 영구(靈柩) 동쪽에 받침대를 설치하여 세운다. 다시 원래의 장소에다 영좌(靈座)를 설치한 다음, 부인 두 사람이 지킨다. ○ 사마온공이 이르기를 “시신을 움직이거나 관을 들어 옮길 적에는 수없이 곡을 하며 가슴을 쳐야 한다. 그러나 빈렴(殯殮)을 할 적에는 곡을 그치고 시신을 편안히 모시는 데 힘써야지, 곡만 하고 말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살피건대, 고례에 구덩이 속에다 빈(殯)을 하여 흙으로 싸발랐고 주자(朱子) 역시 맏아들의 빈을 그렇게 하였으니, 《가례》에 이른바 흙벽돌을 쌓고 흙으로 싸바른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오늘날의 풍속에도 흙이나 모래로 빈을 하는 이가 있으니, 편의에 따르는 것이 옳다. ○ 《의례》 사상례에 “흙칠을 마치고 나면 주인은 제 위치로 돌아와서 벗었던 웃옷의 왼쪽 어깨를 다시 입는다.” 하였다. 《의례》 사우례(士虞禮)의 주에 “같은 때에 또 다른 빈을 할 경우 모두 궤연(几筵)을 달리한다.” 하였다. 영구(靈柩) 동쪽에 영상(靈牀)을 설치하고는, 평상ㆍ휘장ㆍ거적ㆍ돗자리ㆍ병풍ㆍ베개ㆍ옷ㆍ이불 -빗과 세면 도구- 따위의 물건들은 모두 생시와 같이 한다. 이에 전물(奠物)을 차려 놓고, 소렴의 의식과 같다. 주인 이하는 각자 상차(喪次)로 돌아가고, 중문(中門) 밖에 소박하고 누추한 방을 택하여 남자의 상차를 삼는데, 참최(斬衰)에는 거적자리에 흙덩이를 베고 자고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을 벗지 않으며, 남과 마주 앉지도 않는다. 일이 있어서 행례(行禮)할 때 어머니를 뵙는 경우가 아니면 발길이 중문에 이르지 않는다. 자최(齊衰)에는 돗자리를 깔고 잔다. 대공(大功) 이하 따로 사는 자는 빈을 하고 나서 거처로 돌아가 바깥에서 잠을 자다가 석 달이 지나고 나서 침소로 돌아간다. 부인은 중문 안의 별실에 상차를 만들거나 빈소 옆에 거처하되, 화려한 휘장ㆍ이불ㆍ요 따위를 걷어치우고, 남자의 상차에 함부로 가지도 않는다. -살피건대, 《예기》 상대기에 “부모의 초상에는 의려(倚廬)에 거처한다.” 하고, 그 소에 “중문 밖 동쪽 담벼락 밑에 나무를 기대어 세워 여막을 만들어 이엉으로 양쪽을 가리고 진흙을 발라서 꾸미지는 않는다.” 하였으며, 또 상대기에 “소상을 지내고 나서 비로소 악실(堊室)에 거처한다.” 하였다. 이는 《가례》와는 같지 않으니, 헤아려서 행하는 것이 좋다. 대곡(代哭)을 그만두게 한다.
136    사계전서(沙溪全書) 상례비요(喪禮備要)-2 댓글:  조회:3141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 제32권 상례비요(喪禮備要)-2 성복(成服) 성복의 제구(諸具) 최상포(衰裳布) : 참최(斬衰)에는 아주 거친 생포(生布), 자최(齊衰)에는 그다음 거친 생포, 기년(朞年)에는 그다음 생포, 대공(大功)에는 조금 거친 숙포(熟布), 소공(小功)에는 조금 고운 숙포, 시마(緦麻)에는 아주 고운 숙포를 쓴다. 한 사람마다 포백척(布帛尺)으로 35, 6자씩을 준비하는데, 베의 폭이 좁아서 폭을 이어야 하면 52, 3자로 한다. 효건포(孝巾布) 및 관량포(冠梁布) : 각기 입는 복에 비하여 조금 더 고운 것을 쓴다. 관량(冠梁)의 종이 : 두꺼운 종이나 배접한 종이를 쓴다. 영무포(纓武布) : 자최 이하는 각기 입는 복에 비하여 조금 더 고운 것을 쓴다. 중의포(中衣布) : 새[升]의 수는 입을 복과 같이 한다. 대나무 : 참최의 상장(喪杖)감이다. 오동나무 : 자최의 상장감이다. 《가례집설(家禮集說)》에 의하면, 오동나무가 없으면 버드나무를 대신 쓴다고 하였다. 대개 버드나무[柳]는 유(類)의 뜻을 갖고 있으니, 이는 오동나무[桐]가 동(同)의 뜻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곧 칡[葛]이 없는 고장에서 칡과 비슷한 경(顈)을 쓰는 의미이다. 띠풀[菅] : 혹은 볏짚도 쓴다. 참최와 자최의 신[屨]감이다. 삼[麻] : 부장기(不杖朞)의 신감인데, 참최의 부인도 같다. 노[繩] : 혹은 삼베도 쓴다. 대공의 신감인데, 장기(杖朞) 이하의 부인은 삼베를 같이 쓴다. 부인의 최상포(衰裳布) : 남자의 최상포에 준한다. 개두포(蓋頭布) : 남자의 관량포에 준한다. 두수포(頭 布) 죽목잠(竹木簪) : 소렴(小殮) 조에 나온다. 시자(侍者)의 옷감 베 : 조금 거친 생포(生布)이다. 바늘[針] 실[線]   남자의 복제(服制) 상복을 마를 적에는 손가락자[指尺]를 쓴다. -수질(首絰)ㆍ요질(腰絰)의 둘레가 9치 또는 7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살피건대, 상의(上衣)의 몸체를 베 두 폭을 쓰고 소매 역시 두 폭을 쓴다고 한 것은, 예전에는 삼베 폭이 반드시 2자 2치이기 때문에 세로와 가로의 방정(方正)을 취하자는 뜻에서였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삼베는 폭이 아주 좁아서 반드시 폭을 이어 써야만 옷에 몸이 들어갈 수 있고 소매에 손을 꽂을 수 있는 동시에 세로와 가로의 방정을 취하는 제도에 들어맞을 수 있다. 어떤 이는 폭을 이어 쓰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나, 이는 통달하지 못한 논리이다. 상의[衣] : 삼베 두 폭을 각각 4자 4치로 마르되, 정수(正數) 외에 솔기의 여분으로 양쪽 끝을 똑같이 1치씩 남긴다. -아래에서도 모두 같다.- 각 폭을 절반으로 접어서 길이 2자 2치의 앞뒤 두 쪽을 만들면 두 폭을 합쳐서 모두 네 폭이 되는데, 앞의 두 쪽과 뒤의 두 쪽을 접어서 금을 내어놓고 나서는, 먼저 뒤의 두 쪽을 봉합하되 윗부분 4치는 꿰매지 않은 채 남겨둔다. 그러고 나서 앞뒤의 네 쪽을 포개어 네 겹을 만든 다음, 곧 꿰매지 않고 남겨두었던 부분에서 가로로 4치를 마름질하여 들이고 이를 다시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나누어 접어서 각각 두 어깨 위에 씌우면 좌우의 적(適)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벽령(辟領)이다. -부판(負版) 1치씩을 꽂는다.- 이미 마르고 난 것을 접어서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하고 나면 그 앞뒤와 좌우의 빈 곳이 각각 사방 4치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활중(闊中)이다. 소매[袂] : 삼베 두 폭을 쓰는데, 역시 각기 4자 4치로 말라서 상의의 몸체 길이와 같게 한다. 이를 절반으로 접으면 역시 2자 2치가 되는데, 이를 각기 상의의 몸체 좌우에 봉합한다. 잘라 내지 않은 온폭을 또 각기 그 끝에 봉합하여 소매를 만든 다음, 또 소매의 끝을 아랫부분 1자만 봉합하고 윗부분 1자 2치를 남겨두어 소맷부리[袂口]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소매통[袪]이다. 동정[加領] : 별도로 길이 1자 6치, 너비 8치의 삼베를 쓰는데, 세로로 접어서 절반으로 나눈 다음, 그 아래쪽 절반은 두 끝을 각각 사방 4치씩 잘라 버리고 중간의 8치만 남겨 두어서 그것을 뒤쪽 활중(闊中)에 씌우고, 그 위쪽 절반은 전체 1자 6치를 잘라 내지 않은 채 베의 중간을 목 위에서 좌우로 나누어 맞접은 다음, 앞으로 드리워 앞쪽의 활중에 씌운다. 깃[袷] : 동정 밑에 씌우는 것으로, 길이 1자 6치, 너비 1자 4치의 삼베 한 가닥을 쓴다. 이것을 쪼개어 세 가닥으로 만든 다음, 두 가닥은 동정에다 덧대고 꿰매어 앞쪽 활중에 씌우고 한 가닥은 가로로 접어 두 겹을 만들어 뒤쪽 활중에 씌우고 나서 모두 동정을 붙이면 곧 세 겹이 된다. 양씨(楊氏)가 이른 바 ‘세 가닥으로 나누어 깃에다 붙이되, 남음도 모자람도 없이 딱 알맞게 한다’는 것이다. 대하척(帶下尺) : 세로로 된 높이 1자의 삼베를 위로 상의에 붙인 다음, 가로로 허리에 두르되 허리의 너비를 기준으로 삼는다. 임(衽) : 양 겨드랑이 밑에 붙이는 자락인데, 각기 삼베 3자 5치를 쓴다. 아래위로 1자씩 남겨두고는 그 사방 1자 외에, 위로는 왼쪽 가장자리에서 6치를 마름질하여 들이고 아래로는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6치를 마름질하여 들인 다음, 1자 깊이가 끝나는 부분에서 서로 마주 향하여 비스듬히 마름질하고 나서는 다시 그 두 가장자리를 좌우로 마주 포개어서 상의의 양 옆[傍]에 붙여 꿰매어 아래로 드리우면 마치 제비꼬리와 같이 되는데, 이것으로 치마의 양쪽 가장자리를 덮는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소(疏)에 “참최의 임(衽)은 앞자락이 뒷자락을 덮고 자최의 임은 뒷자락이 앞자락을 덮는다.” 하였다. 최(衰) : 길이 6치, 너비 4치의 삼베를 왼쪽 옷자락 앞의 심장이 있는 부분에 붙여 꿰맨다. 부판(負版) : 삼베 사방 1자 8치를 깃 아래 등에 해당되는 부분에 붙여 꿰매어 드리운다. ○ 오복(五服)의 상복 솔기는 모두 바깥쪽으로 나오도록 꿰매며, 다만 참최는 가장자리를 감치지 않고 자최 이하는 모두 감치되 바깥쪽으로 펴서 낸 다음 실로 꿰매어 고정시킨다. -《의례》에 나온다. ○ 대공 이하는 부판ㆍ벽령ㆍ최가 없다. 살피건대, 《의례》에는 오복에 모두 최ㆍ부판ㆍ벽령이 있고 《가례(家禮)》에는 대공에서 비로소 이 세 가지를 없앴다. 그러나 오늘날 예를 행하는 자들은 양씨의 설에 이끌려 비록 조부모 및 아내의 상이라도 쓰지 않으니, 이는 예의 본뜻이 아닌 듯하다. 마땅히 《가례》를 바른 것으로 삼아야 한다. 옷고름[衣繫] : 곧 소대(小帶)이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네 가닥을 안팎의 옷깃에 붙여 꿰매어 옷깃이 서로 여며지도록 한다. 상(裳) : 앞쪽은 세 폭, 뒤쪽은 네 폭인데, 앞뒤의 것을 서로 잇지 않고 폭마다 세 첩(㡇)의 주름을 잡는다. 주름을 잡는 방법은 매 폭의 위끝을 손가락으로 조금 들어올려 오른쪽으로 접고 또 조금 들어올려 왼쪽으로 접어서 양쪽이 서로 맞닿게 한 다음 실로 꿰매어 고정시키고, 그 속은 비워두어서 주름을 만드는데, 이처럼 세 번을 한다. -《예기보주(禮記補註)》에 의하면, 최상(衰裳)의 주름은 맞닿는 부분을 바깥쪽으로 나오게 하므로, 복건(幅巾)의 주름과는 같지 않다.- 치마의 길이는 편의에 따라 마르며, 또 너비 4, 5치의 삼베를 세로로 접고 앞뒤 일곱 폭에 붙여서 양쪽으로 꿰맨 다음, 허리를 한 바퀴 돌려 묶도록 하고, 양끝에 끈을 단다. ○ 오복에서 치마의 솔기는 모두 안쪽으로 넣어 꿰매며, 다만 참최의 경우는 가장자리를 감치지 않고, 자최 이하는 가장자리를 감치되 안쪽으로 말아 들여서 실로 꿰매어 고정시킨다. -《의례》에 나온다. 중의(中衣) : 곧 옛날의 심의(深衣)로, 그 제도는 습(襲)조에 보이며, 최(衰)를 받쳐 입는 것이다. 더러는 중단의(中單衣)의 제도를 쓰기도 하는데, 나쁠 것은 없다. 살피건대, 비록 참최라 하더라도 심의는 역시 삼베로 선을 두른다. 관(冠) : 풀먹인 종이를 재료로 쓴다. 너비는 3치, 길이는 정수리의 앞뒤를 씌우기에 넉넉하도록 한다. 삼베로 싼 다음 세 첩의 주름을 잡되, 대공 이상은 모두 오른쪽으로 향하도록, 소공 이하는 모두 왼쪽으로 향하도록 접어서 세로로 꿰매는데, 이를 벽적(襞積)이라 한다. 무(武)는 참최에는 삼끈으로 만들고 자최 이하에는 삼베로 만드는데, 이마 위에서 벽적에다 묶고 나서 뒤로 돌려 목 뒤에서 교차시킨 다음 앞으로 돌려 오다가 각기 귓가에서 묶는다. 굴관(屈冠)의 양쪽 끝을 무 안으로 넣은 다음 다시 바깥쪽으로 접어서 무에다 꿰매는데, 이를 외필(外畢)이라 한다. 무의 나머지는 아래로 드리워 갓끈을 만들어서 턱 밑에서 묶는다. 수질(首絰) 요질(腰絰) : 수질과 요질은 소렴조에 나온다. 지팡이[杖] : 대나무 지팡이인데, 높이는 가슴과 가지런하며, 밑둥치가 아래로 가게 짚는다. 오동나무 지팡이도 마찬가지인데, 깎아서 위쪽은 둥글고 아래쪽은 모나게 한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지팡이의 굵기는 질(絰)과 같이 한다.” 하고, 그 주에 “질은 요질(腰絰)을 말한다.” 하였다. 신[屨] : 《의례》 상복에 “참최의 간구(菅屨 띠풀로 삼은 신)는 간비(菅菲)인데, -띠풀이 없으면 짚으로 대신한다.- 외납(外納)한다. -끄트머리가 바깥으로 나오게 엮은 것이다.-” 하였고, 또 “소최(疏衰 자최)에는 소구(疏屨 거친 삼으로 삼은 신) 또는 표괴(藨蒯 풀로 삼은 신)를 신는다.” 하였으며, 또 “부장기(不杖朞)에는 마구(麻屨)를 신는다.” 하였다. 《예기》 상복소기에는 “자최 삼월의 상과 대공의 상에는 모두 미투리[繩屨]를 신는다.” 하였다. 《의례》 상복의 주에 “소공 이하는 길구(吉屨)에 신코를 꾸미지 않는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의하면, 자최에는 풀이나 삼으로 하되 마무리하고 남은 풀 끄트머리를 거두어 안쪽으로 향하게 하고, 대공에는 삼베를 쓰며, 소공에는 흰 삼베를 쓴다. 효건(孝巾) : 오복(五服)의 복인(服人)과 시자(侍者)들이 쓰는 것이다. 살피건대, 예(禮)에는 대머리인 사람은 최건(縗巾)을 쓰고 그 위에 수질(首絰)을 쓰게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 풍속에는 으레 상관(喪冠) 밑에 효건을 쓴다. 이는 비록 예의 본뜻은 아니지만 《가례의절》에도 있는만큼 풍속을 따르더라도 무방하다. 방립(方笠) 생포 직령(生布直領) : 모두 출입할 때에 쓰는 것인데, 비록 옛 제도는 아니지만 풍속을 따르는 것이 역시 좋다.   부인(婦人)의 복제 최(衰) : 삼베의 새[升] 수 및 마르는 제도는 모두 남자와 같다. 다만 대하척(帶下尺)이 없으며, 또 임(衽)도 없다. 상(裳) : 삼베 여섯 폭을 세로로 엇갈리게 찢어서 열두 폭을 낸 다음, 심의의 상(裳)과 같이 상의에 붙여 꿰맨다. 수질(首絰) 요질(腰絰) 효대(絞帶) : 이상은 모두 소렴조에 나온다. ○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가례》에 남자의 최복(衰服)은 순전히 고제(古制)를 썼으나 부인의 것은 고제를 쓰지 않았고, 아울러 질(絰)과 대(帶)의 문구도 없으니,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마땅히 예경(禮經)을 옳은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지팡이[杖] : 남자와 같다. -이상은 모두 《의례상복도식(儀禮喪服圖式)》에 나온다.- ○ 어떤 이는 《가례》에 의거하여 대수(大袖)와 장군(長裙)을 만들기도 한다. 대수(大袖) :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오늘날 부인의 단의(短衣)처럼 통이 크고 길이는 무릎까지 내려가며, 소매의 길이는 2자 2치이고, 제도는 남자의 최의(衰衣) 제도에 준한다.” 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곧 우리나라의 장삼(長衫)이다.” 하였다. 장군(長裙) : 구준이 말하기를 “삼베 여섯 폭을 열두 폭으로 마름질한 다음 잇달아 치마를 만들되, 그 길이는 땅에 닿게 하며, 제도는 남자의 최상(衰裳) 제도에 준한다.” 하였다. 《국조오례의》에 “곧 우리나라의 상(裳)이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가례》를 살펴보니, 부인의 복제는 《서의(書儀)》에 근본하여서 대수 이하는 모두 고제가 아니므로, 지금 특별히 요질 한 조항을 보충해 넣었다. 이는 예에서 남자는 머리에 중점을 두고 부인은 띠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가장 중점을 둔 것을 남겨두어서 뒷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통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개두(蓋頭) : 구준이 말하기를 “상의와 치마보다 조금 고운 삼베를 쓰는데, 모두 세 폭으로, 길이는 몸체와 같게 한다. 참최에는 가장자리를 감치지 않고 자최에는 가장자리를 감친다.” 하였다. 포두수(布頭 ) 죽목잠(竹木簪) : 모두 괄발조(括髮條)에 나온다. 신[屨] : 《의례상복도식》에 “명문(明文)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남자와 같은 듯하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참최와 자최에는 마혜(麻鞋), 장기(杖朞) 이하에는 삼베, 소공 이하에는 흰 삼베를 쓴다.” 하였다. ○ 《국조오례의》에 “모두 흰 면포로 만들되, 시비(侍婢)는 흰 가죽으로 만든다.” 하였다. 배자(背子) : 구준이 말하기를 “중첩(衆妾)의 경우 배자로써 대수(大袖)를 대신하며, 길이는 몸체와 같게 하고 소매를 짧게 한다.” 하였다. 《국조오례의》에 “곧 우리나라의 몽두의(蒙頭衣)이다.” 하였다.   동자(童子)의 복제 예에 동자는 8세 이상이라야 복을 입게 되어 있다. ○ 살피건대, 《예기》에 “동자는 관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오늘날 풍속에서 두건과 수질을 씌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 ○ 《의례》 상복의 소에 “동자는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서동자(庶童子)이다.” 하였다. 《예기》 문상(問喪)에 “동자라도 당실(當室 가장(家長)이 됨)의 경우에는 문(免)을 하고 지팡이를 짚는다.” 하였으니, 이는 적자(嫡子)를 이름이다. 당실의 동자는 비록 어리더라도 최복으로 싸 안고 있고 지팡이도 둔다. ○ 《예기》 상복소기에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는 딸이 부모상을 당했는데 남자 형제가 없어서 지팡이를 짚지 못할 경우, 시집가지 않은 딸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는다.” 하고, 그 주에 “남자 형제가 없기 때문에 동성(同姓)을 대신 상주로 삼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옥조(玉藻)에 “동자에게는 시마복(緦麻服)이 없고, 당실의 경우에만 시마복이 있다.” 하고, 또 잡기(雜記)에 “동자는 슬피 울지도 않고, 발을 구르지도 않고, 지팡이도 짚지 않고, 짚신을 신지도 않고, 여막에 거처하지도 않는다.” 하였다. 대덕(戴德)은 이르기를 “예에서 성인이 되지 않은 자에 대한 복제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성인이 되지 않은 자는 마음을 한곳으로만 쓸 수 없기 때문이요, 복을 입을 수 있는 자 또한 금지하지 않은 것은 제도로만 처리하지 않고 오직 그 능력에 맡기자는 것이다.” 하였고, 초주(譙周)는 이르기를 “동자도 소공 이상은 모두 본친(本親)의 최복을 입는다.” 하였고, 유울지(庾蔚之)는 이르기를 “예에 일컬은 동자란 똑같은 것이 아니니, 내가 볼 때는 당실이란 바로 8세 이상의 예를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당실이기 때문에 성인과 같은 것이다.” 하였고, 사자(射慈)는 이르기를 “8세가 되지 않은 자가 가까운 친족의 복을 입을 경우에는 삼베 심의가 예의 본뜻에 맞을 듯하다.” 하였다. ○ 혹자는 이르기를 “모든 복은 반드시 서로 갚는 것이므로, 장자(長者)가 동자에게 삼상 체감(三殤遞減)의 제도가 있는 이상, 동자도 장자에게 역시 그 복을 체감해야 한다.” 하였으나,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시자(侍者)의 복제 《의례》 상복의 소에 “사(士)는 신하가 없기 때문에 종이나 머슴 등이 신하 노릇을 하는데, 조복(弔服)에다 마대(麻帶)를 더한다.” 하였다. 효건(孝巾) 환질(環絰) : 이 제도는 괄발조(括髮條)에 나온다. 요질(腰絰) : 제도는 효대(絞帶)와 같으나, 그 둘레는 환질에 비하여 5분의 1을 줄인다. 생포의(生布衣) : 제도는 세속의 직령(直領) 또는 중단의(中單衣)와 같다. ○ 시비(侍婢)는 구준(丘濬) 《가례의절》의 중첩(衆妾)의 복제를 따라야 한다. 그 이튿날, 대렴의 이튿날이자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살피건대, 양씨가 이르기를 “비록 대렴은 마쳤더라도 자식 된 마음에 차마 제 어버이가 죽었다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차마 서둘러 성복을 하지 못하고 반드시 나흘이 되고 나서야 성복을 한다.” 하였으니, 이 설에 의거할 때 대렴과 성복을 같은 날에 병행해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이 더러는 염구(殮具)가 미비하다 하여 사흘이 지나서 대렴을 하고는 이어서 그날로 성복을 하기도 하는데, 예의 본뜻을 너무 잃은 처사이다. 오복의 복인들이 각기 자신의 복을 입고, -대공 이상으로서 요질(腰絰)을 풀어 늘어뜨린 자는 묶는다. 들어가서 제 위치에 나아간 뒤에는 조곡(朝哭)을 하며,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부인은 마루의 제 위치로 나아가 남쪽을 윗자리로 하여 곡하고, [《의례상복도식》에 ‘마루 동쪽에서 서면(西面)한다.’ 하였다.] 장부(丈夫)는 문밖의 제 위치로 나아가 서향하여 북쪽을 윗자리로 하고, 외형제(外兄弟) [주에 ‘이성(異姓)으로서 복을 입는 자이다.’ 하였다.] 는 그 남쪽에 있는데 남쪽을 윗자리로 하며, 손님은 그 뒤를 이어 나아가 북쪽을 윗자리로 하되 문 동쪽에서는 북면하여 서쪽을 윗자리로 하고 문 서쪽에서는 북면하여 동쪽을 윗자리로 하며, 서쪽에서는 동면하여 북쪽을 윗자리로 한다.[소(疏)에 ‘외빈(外賓)의 위치에서는 다 곡이 있다.’ 하였다.] 주인이 제 위치에 나아가면 문을 여는데[辟], [주에 ‘벽(辟)은 연다[開]는 뜻이다.’ 하였다.] 부인은 가슴만 치고 곡은 하지 않으며, 주인이 매 방면에 있는 손님을 향하여 절을 세 번씩 하고 나서, [주에 ‘먼저 서쪽에 절하고, 이어 남쪽과 동쪽에 절을 한다.’ 하였다.] 오른쪽으로 돌아 문으로 들어와서 곡을 하면 부인은 발을 구른다. 주인은 마루 아래에서 동서(東序)를 대하여 서면하고, 형제들은 모두 제 위치로 나아가되 문밖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다.[주에 ‘형제로서 자최ㆍ대공인 자는 주인이 곡을 하면 따라서 곡을 하며, 소공ㆍ시마인 자도 제 위치로 나아가서야 곡을 한다.’ 하였다.] 경(卿)과 대부(大夫)는 주인의 남쪽에 서 있고, 제공(諸公)은 문 동쪽에서 앞으로 조금 더 나간다.[주에 ‘손님들이 모두 이 위치로 나아가면 이에 슬피 곡하고 나서 곡을 그친다.’ 하였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남자는 영구(靈柩)의 동쪽에서 서향하고 여자는 영구의 서쪽에서 동향하되, 각각 복의 경중으로 차례를 정한다.” 하였다. 의식에 따라 서로 조문한다. -《가례의절》에 “모든 자손은 조부(祖父) 및 제부(諸父)의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서 슬피 곡하고, 또 조모(祖母) 및 제모(諸母)의 앞에 나아가 앞서와 마찬가지로 한다. 여자는 조모 및 제모의 앞에 나아가 곡하고는 드디어 조부와 제부의 앞에 나아가 남자의 의식과 같이 한다. 주부(主婦) 이하는 백숙모(伯叔母)의 앞에 나아가 곡하되, 앞서와 마찬가지로 한다.” 하였다.   [주D-001]의례 상복의 소 : ‘동자하이부장(童子何以不杖)’ 조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이다.     복제(服制) 1. 참최 삼년(斬衰三年) 남자 : 아버지를 위해 입는다. -《의례》 상복에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는 딸이나 시집갔다가 돌아와서 집에 있는 딸이다.” 하였다.- 맏손자로서 아버지가 죽어서 할아버지 또는 증조할아버지나 고조할아버지를 위해 승중(承重)한 자가 입는다. -살피건대, 《통전(通典)》에서 하순(賀循)이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어서 아직 빈(殯)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할아버지의 복은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서막(徐邈)은 이르기를 ‘기년이 되어 복을 벗고 나서는 소복(素服)으로 제사에 임하여서 심상(心喪) 3년에 의하여 3년을 마친다.’고 하였다.] 빈을 한 뒤에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다. 또 살피건대, 《의례경전통해(儀禮經典通解)》에서 송민구(宋敏求)가 의론하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삼년상 안에 죽고 맏손자가 할아버지를 승중하는 경우는 예령(禮令)에 그 문구(文句)가 없습니다. 대저 밖으로 장례를 치르고 안으로 영위(靈位)를 받들어 소상과 대상, 그리고 담제를 지냄에 있어 주제(主祭)하는 자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장례를 인하여 다시 참최를 제정하여 삼년복을 입도록 해야 합니다.” 한바,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는데, 지금의 복제에는 이를 빼버렸으므로 맏아들이 아버지의 상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죽은 시기가 소상 전이면 맏손자로서 승중을 한 자가 소상 때에 복을 이어받아 입고 소상 후이면 심상을 입도록 함으로써 모두 3년을 나고 복을 벗도록 하였다. 또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아버지가 죽고 없을 경우 어머니를 위하여’라는 구절의 소(疏)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3년 안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는 그대로 기년복을 입고, 아버지의 복을 벗고 나서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는 어머니에게도 그대로 삼년복을 입을 수 있다.” 하였는데, 이는 3년 안에는 자식 된 자로서 차마 그 어버이가 죽었다고 여기지 못하는 뜻이다. 어머니에게나 할머니에게나 의당 다를 바가 없으므로, 한편에서는 다시 참최를 제정해야 한다고 하고 한편에서는 기년복을 그대로 입어야 한다고 한바, 《의례경전통해》에 모두 기록해 두었으니, 어느 것을 좇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는 큰 절목(節目)이어서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 없으므로, 우선 그 설만 붙여두어서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아버지가 후사가 될 맏아들을 위해 입는다. -관직은 해면(解免)하지 않는다. 《예기》 잡기에 “아버지가 맏아들을 위하여 지팡이를 짚고 있다면 그 맏아들의 아들은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가지 못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할아버지는 손자를 싫어하지 않으므로 맏아들의 아들도 지팡이를 짚을 수는 있으나, 다만 할아버지와 같은 곳에서는 지팡이를 짚을 수 없다.” 하였다. 금제(今制)와 국제(國制)에서는 강복(降服)하였다. 《의례》 상복의 소에 “할아버지ㆍ아버지ㆍ자기에 걸친 3세(世)는 곧 맏아들을 위하여 참최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승중을 하였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 있으니, 첫째는 정통의 혈통이 승중을 할 수 없는 경우로, 적장자가 폐질(廢疾)이 있어서 종묘의 주관을 감당할 수 없는 때이고, 둘째는 승중자가 정통의 혈통이 아닌 경우로,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때이고, 셋째는 혈통이기는 하나 계통이 바르지 못한 경우로,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를 삼은 때이고, 넷째는 계통은 바르지만 혈통이 이어지지 않은 경우로, 맏손자를 세워 후사를 삼은 때이다.” 하였다. ○ 살피건대, 소에 “남의 아들을 입양하여 후사를 삼은 경우도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 하였다. 부인 : 시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이 승중을 하였을 경우 따라서 입는다. -살피건대, 승중손이 조부모의 상을 당하면 그 아내는 당연히 남편을 따라 복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그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와 이를테면 증손 또는 현손이 승중을 하여 증조부모 또는 고조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그 어머니와 할머니와 아내가 입을 복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제각각이다. 그러나 고례(古禮)에 며느리는 시부모에 대해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던 것을, 송(宋)나라 때에 와서 위인포(魏仁浦)의 상주(上奏)로 인하여 비로소 시부모에 대해 입는 복은 자최이건 참최이건 일체 그 남편을 따르되, 승중도 똑같도록 하였던 것이다.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이굴(理窟)》과 주자(朱子)의 《가례》에서도 당시 임금의 제도와 함께 남편을 따라서 입는다고는 하였으나, 시어머니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는 아무 설도 없다. 그렇다면 숭중자의 아내가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도 그럴 성싶지 않거니와, 증손과 현손의 아내 역시 남편을 따라 복을 입는다는 데는 의심이 없다. 가령 승중의 증조부가 죽었는데, 그 조모 및 어머니가 다 살아 있을 경우 그 조모는 응당 시부모에 대해 삼년복을 입을 것이요, 그 어머니도 아무리 아들에게 승중은 시켰더라도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이미 승중을 한 이상, 남편이 비록 죽었더라도 역시 복을 입는 것이 옳을 성싶다. 퇴계(退溪)도 일찍이 《예기》 상복소기의 “혈연 관계를 따라서 복을 입는 자는 따랐던 사람이 비록 죽었더라도 복은 입는다.”는 한 단락을 인용하여, 아주 정확한 논리인 듯하다고 하면서, 다만 그 남편이 아직 승중을 하지 않은 채 일찍 죽은 경우에는 또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남편이 남의 후사로 양자를 갔을 경우 아내는 따라서 입는다. ○ 남편을 위하여 입는다. 계후자(繼後子) : 양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아들이 없이 죽은 자에 대해 그 아내가 3년 안에 후사를 세웠을 경우 양자로 들어온 그 아들이 소급하여 복을 입는 절차, 이를테면 단(袒)ㆍ괄발(括髮)ㆍ성복(成服)은 일체 초상과 같이 해야 한다. 《통전(通典)》에 “소상 뒤에 양자로 들어온 자의 경우 저 상(喪)에서는 비록 강쇄(降殺)하였어도 자신의 막중한 임무는 이제 시작이다. 예제를 다시 바꾸고 달수를 멀리 잡는 것이 의리상 무에 나쁘겠는가. 그리고 지난날에는 방존(旁尊)으로서 복이 한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그의 아들이 되어 예제(禮制)의 가장 중한 데에까지 이르러 경중(輕重)이 너무도 현격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이어 계산하여 3년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승중손이 양할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다. -증조할아버지ㆍ고조할아버지의 승중손도 같다. 《의례》 상복의 소에 보인다. 첩 : 군(君)을 위하여 입는다. -군은 남편이다. ○ 이상은 금제(今制)와 국제(國制)가 같다. ○ 첩이 남편의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에 며느리가 시부모에 대해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으므로, 첩이 남편의 친족에 대해 입는 복도 여군(女君 적실(嫡室))과 같았는데, 송(宋)나라 때에 와서 시부모의 복을 올려서 삼년복으로 하였다. 《가례》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따라 행했으므로 첩의 복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의례》에 이미 여군과 같다는 문구가 있는 이상 첩이 남편의 부모에 대해 입는 복 역시 삼년복으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금제(今制)】 남자 :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는 딸 및 시집갔다가 돌아와서 집에 있는 딸도 같다. ○ 계모(繼母)를 위하여 입는다. ○ 자모(慈母 자기를 길러 준 서모(庶母))를 위하여 입는다. ○ 양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 서자가 생모(生母)를 위하여 입는다. ○ 맏손자로서 아버지가 죽고 없을 때 그 할머니ㆍ증조할머니ㆍ고조할머니를 승중할 경우에 입는다. 부인 : 남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이 승중하였을 경우 따라서 입는다. ○ 서자의 아내가 남편의 생모(生母)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이 남의 후사로 양자를 갔을 경우 따라서 입는다. 계후자 : 양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 승중한 손자가 양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 금제 이하는 모두 국제에 없다. 살피건대, 이것은 비록 당시 임금의 제도이기는 하나 지금에 와서 다 따를 수는 없고, 우선 실어두기나 하여서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국제(國制)】 남자 : 군사(軍士)로서 삼년복을 원하는 자는 들어준다. 2. 자최 삼년(齊衰三年) 남자 :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첩의 아들이 적모(嫡母)를 위해서도 같다. 국제도 같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에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하였는데,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상소(上疏)하여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에도 삼년복을 입기로 한바, 송나라 때에도 그대로 따랐다. 《가례》가 당시 임금의 제도를 따른 것이므로 지금은 마땅히 주자의 것을 따라야 하나, 그 뒤에 나온 정론(定論)은 예경(禮經)을 정례(正禮)로 삼은 것이다. 시집가지 않은 딸 및 시집갔다가 돌아와서 집에 있는 딸도 같다. ○ 《의례》 상복의 소에 “아버지가 죽은 지 3년 이내에 어머니가 죽을 경우 기년복을 그대로 입고, 아버지의 복을 벗은 뒤에 어머니가 죽을 경우 이에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다. 《통전》에서 두원개(杜元凱)가 말하기를 “만약 아버지를 장사하고 나서 어머니가 죽은 경우라면 어머니에 대한 복을 입는다.……” 하였다.[중상(重喪)을 벗기도 전에 경상(輕喪)을 당할 경우의 조항에 나온다.] 살피건대,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殯)도 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죽을 경우, 현재 상태를 차마 고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통전》의 “아버지를 빈하지 않은 상태에서 할아버지의 복을 입게 되면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유추하여 어머니에 대해 기년복을 입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 아버지의 상(喪)을 마칠 무렵에 또 어머니의 상을 당한 경우라면 역시 아버지 상의 3년 이내라 하여 그대로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 없어 일단 제설(諸說)을 덧붙여두는 바이다.- 사(士)의 서자(庶子)는 그 어머니에 대해 똑같이 삼년복을 입으나, 아버지의 후사가 될 경우에는 강복(降服)한다. -국제에는 없다.- 맏손자로서 아버지가 죽고 없어서 할머니ㆍ증조할머니ㆍ고조할머니를 승중한 경우에 입는다. -할아버지 또는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강복한다.- 계모(繼母)를 위하여 입는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강복하고, 계모가 집을 나갔을 경우에는 복이 없다.- 자모(慈母)를 위하여 입는다. 서자에게 어머니가 없어서 아버지가 자식 없는 다른 첩에게 명하여 자기를 기르도록 한 경우를 말한다. -이상은 국제도 같다. 부인 : 시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남편의 계모를 위해서도 같으며, 첩의 아들의 아내가 남편의 적모(嫡母)를 위해서도 같다. 시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는 강복한다.- 남편이 승중하였을 경우 따라서 입는다. -증조할머니와 고조할머니를 위해서도 같으나, [《의례상복도식》에 나온다.]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에는 강복하고, 남편이 남의 후사가 된 경우에는 따라서 입으며, 승중하였을 경우에도 따라서 입는다.[참최조에 나온다.] 어머니가 후사가 될 맏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예기》 상복소기에 “어머니는 장자를 위해 삭장(削杖)을 짚는다.” 하였다. 《의례》의 소에 “남편의 생존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것 역시 3세(世)를 계승한 장자(長子)이다. 금제와 국제에서는 강복하였다. 아래에서도 같다.- 계모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다. 첩 : 군(君)의 장자를 위하여 입는다. -역시 3세를 계승한 자인데, 금제와 국제에서는 강복하였다. ○ 군의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참최조에 나온다.] 【보복(補服)】 남자 : 할아버지가 죽은 뒤 할머니의 후사가 된 경우에 그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계후자 : 양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승중한 손자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를 위해서도 같다. ○ 《통전》에서 허맹(許孟)이 말하기를 “양어머니 및 양할머니가 쫓겨났을 경우 복이 없다.” 하였다. 【국제】 남자 : 군사(軍士)로서 삼년복을 입기를 원하는 자는 들어준다. 양자 : 수양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세 살 전에 거두어 양육해 준 경우를 말한다.[가례도(家禮圖)에 또 나온다.] 자기의 부모가 살아 있는 자 및 아버지가 죽었어도 장자인 경우는 강복한다. ○ 사대부(士大夫)가 천인(賤人)에 대해서도 강복한다. 자최장기(齊衰杖朞) 남자 : -《의례》 상복에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하고, 그 소에 “심상(心喪)은 그래도 3년을 입는다.” 하였다. 노이빙(魯履氷)은 말하기를 “1주년이 되면 영상(靈床)을 치운다.” 하였고, 《통전》에는 이르기를 “영연(靈筵)을 3년 동안 설치해 둘 수 없다.” 하였다. 살피건대, 《가례》가 비록 당시 임금의 제도를 따라서 아버지가 살아 있어도 어머니를 위해서 역시 3년을 입는다고는 하였으나, 주자도 일찍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있어서 어머니에 대해 기년복을 입는 것은 어머니에게 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높음이 아버지에게 있으므로 어머니를 다시 높일 수 없기 때문이니, 모름지기 《의례》를 좇아 정례(正禮)를 삼은 것이다.” 하고, 또 “노이빙의 의론이 옳다.”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제도가 예경(禮經)과 같은만큼, 오늘날 마땅히 그대로 따라야 한다. ○ 살피건대,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면 어떻게 아버지가 죽었다 하여 바꿀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모든 복은 다 처음 제정한 것으로 단안한다.” 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어머니가 죽은 지 3년 안에 아버지가 또 죽을 경우 어머니에 대해 그대로 기년복을 입게 한 것이다.- 아버지는 죽고 할아버지는 살아 있을 경우, 맏손자가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증조할머니ㆍ고조할머니를 승중한 경우도 같다. 살피건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계모와 적모를 위하여 입는다’는 구절을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는 구절 다음에 추가해야 마땅하니 ‘아버지는 죽고 할아버지는 살아 있을 경우 맏손자가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는 구절 역시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는 구절 뒤에 추가해야 마땅할 듯한데,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재가한 어머니와 쫓겨난 어머니를 위하여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복을 입지 않는다. -그래도 심상 3년은 입는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계모가 재가할 때 같이 따라간 자가 그 계모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의례상복도식》에 최개(崔凱)와 왕박의(王博義)는 계모가 재가할 적에 따라가지 않았더라도 기년복은 입는다고 하였으나, 왕숙(王肅) 및 《개원례(開元禮)》와 송나라의 법제에서는 따라가지 않았을 경우에는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 경문(經文)을 상고한바, 재가할 적에 따라간 경우만 말하고 따라가지 않은 경우는 말하지 않았고 보면, 입지 않는 것으로 단안을 내린 것인 듯하다.-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보복(補服)】 대부(大夫)의 서자(庶子)는 아내를 위하여 장기복(杖朞服)을 입고 대부의 적자(嫡子)는 아버지가 죽어야 아내를 위하여 장기복을 입는다. ○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주에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상장(喪杖)을 짚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주상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하고, 그 소에 “천자(天子) 이하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버지가 서자의 아내를 위하여 주상 노릇은 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모두 아내에 대해 상장을 짚을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의거할 때 아버지가 주상 노릇을 하면 남편은 상장을 짚지 않고 아버지가 주상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남편은 상장을 짚는다. 이는 대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서인도 그러하다. 다만 《예기》 분상(奔喪)에는 “무릇 상(喪)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아버지가 주상 노릇을 한다.” 하여 이 소의 내용과는 다르므로, [상주를 세우는 조항에 자세히 나온다.] 우선 실어두어서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 또 살피건대, 《예기》 잡기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있으면 아내를 위하여 상장을 짚지 않고 이마도 조아리지 않는다.” 하고, 그 주에 “이는 맏아들은 아내가 죽었지만 부모가 다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예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대부는 맏며느리의 상에 주상 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 남편이 상장을 짚지 않는 것이요, 만약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만 살아 있어서 어머니가 주상 노릇을 하지 않는 경우라면 아들이 상장을 짚을 수 있으되 다만 이마만 조아리지 않을 뿐이다. 이는 아울러 말해 두어서 문장의 표현 때문에 그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가례》의 부주(附註)에 “부모가 살아 있을 경우 아내를 위해서 부장기복을 입는다.”는 설도 아마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나 주석의 설에 의거할 때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만 살아 있을 경우 상장을 짚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시 상고해 볼 문제이다. 부인 : 시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시어머니를 위한 복은 남편의 복을 따른다. 남편이 승중하였거나 양자일 경우에도 같다. 【보복】 계후자 : 양아버지의 아내와 그 아들을 위해 입는다. ○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맏손자가 할머니를 위해 입는다. ○ 《통전》에서 허맹(許猛)이 말하기를 “양어머니 및 할머니가 쫓겨났을 경우에는 당연히 복이 없다.” 하였다. 【금제】 남자 : 맏아들과 여러 아들이 서모를 위하여 입는다. 서모란 아버지가 아들을 본 첩을 말한다. 부인 : 맏아들과 여러 아들의 아내가 남편의 서모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 남자 :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어머니를 위해서는 벼슬을 그만두고 심상 3년을 한다. ○ 재가한 어머니와 쫓겨난 어머니를 위해서도 심상 3년을 한다. 자최 부장기(齊衰不杖朞) 남자 :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계조모(繼祖母)를 위해서도 같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조부모 및 제부(諸父)의 형제를 위하여 아버지가 태복(稅服 상기가 지나서 소급하여 복을 입는 일)을 입을 경우 자신은 입지 않는다.” 하였다.[왕숙(王肅)은 이르기를 “형제란 아버지의 형제를 말한다.” 하였고, 장량(張亮)은 이르기를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자를 말한다.” 하였다. 아래도 같다.]- 딸은 비록 시집을 갔더라도 강복하지 않는다. ○ 서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는 입지 않는다. -살피건대, 역시 심상 1년은 입는 것이 옳겠다.- 백숙부모(伯叔父母)를 위하여 입는다. ○ 형제를 위하여 입는다. ○ 중자(衆子)를 위하여 입는다. -그 어머니도 같다.- 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고모와 자매로서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거나 시집을 갔어도 남편과 자식이 없는 자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딸이 있는 자는 자식이 없는 자로 논할 수 없을 듯하다.- 맏손자 또는 증손자ㆍ현손자로서 후사가 될 자를 위하여 입는다. -할머니도 같다. 국제에는 강복하였다. ○ 서손으로서 적손이 된 자를 위해서는 강복한다.[《의례상복도식》에 나온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전(傳)에 “적자가 있으면 적손은 없다.” 하였다.- 시부모가 맏며느리를 위하여 입는다. 부인 : -시집간 딸이 친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남편과 자식이 없는 자가 그 친형제자매 및 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소에 “남편과 자식이 없는 자는 친부모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 하였으나, 일설에는 삼년복이라고도 한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시집간 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된 형제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주에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여느 형제와 같다.” 하였다.- 재가한 어머니와 쫓겨난 어머니가 그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아들이 비록 아버지의 후사가 되었더라도 복을 입는다. ○ 남편의 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계모가 재가했을 때 전 남편의 아들로서 자기를 따라온 자를 위하여 입는다. 첩 : 여군(女君 적실(嫡室))을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는 없다.- 남편의 중자를 위하여 입는다. 계후자 : 생가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양의(楊儀)에 “벼슬을 그만두고 심상 3년을 입는다.” 하였다. -국제에도 같다. ○ 양가(養家)의 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의붓아들 : 같이 산 계부(繼父)를 위하여 입되 부자가 다 대공(大功)의 친족 관계가 없는 경우이다. ○ 양의에 “부모가 살아 있는 경우 아내를 위하여 입는 것은 고례(古禮)와 다르다.” 하였다. -이 설은 장기조(杖朞條)에 나온다. ○ 자매는 이미 시집을 갔어도 서로 복을 입는다. -이 설은 대공조(大功條)에 나온다. 【금제】 남자 : 아버지가 후사가 될 맏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어머니 및 계모와 자모도 같다. 국제에서도 같다. 첩 : 군(君)의 맏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도 같다. ○ 군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이 설은 참최 조에 나온다. 【국제】 남자 : 계조모를 위하여 입는다. 양자 : 생가의 부모가 살아 있을 경우 그 양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그러나 벼슬을 그만두고 심상 3년을 입는다. 생가의 부모가 비록 죽었더라도 장자(長子)는 기년복을 입고 벗는다. 자최 오월(齊衰五月) 남자 : 증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계증조모에게도 같다.- 시집간 딸도 강복하지 않는다. 【보복】 계후자 : 양가의 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자최 삼월(齊衰三月) 남자 : 고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계고조모에게도 같다.- 시집간 딸도 강복하지 않는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의하면, 무릇 4세(世) 이상의 체사자(逮事者 직접 섬긴 자)에 대해서는 다 자최 삼월을 입어야 한다. 의붓아들 : 같이 산 계부(繼父)를 위하여 입되 그 계부에게 아들도 있고 대공 이상의 친족도 있는 경우이다. ○ 같이 살지 않은 계부를 위하여 입는다. 이는 처음에는 같이 살았으나 지금은 같이 살지 않은 자를 말하니, 원래 같이 살지 않은 경우는 복을 입지 않는다. 【보복】 계후자 : 양가의 고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상복】 남자와 부인이 종자(宗子)와 종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고 하였다. 그 전(傳)에 “종자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종자의 아내의 복은 입지 않는다.” 하였다. ○ 살피건대, 《통전》 위령(魏令)에 “관장(官長)이 관리를 거느릴 경우 서리는 모두 자최복을 입는데, 장사가 끝나면 벗는다.” 하고, 진령(晉令)에 “서리들이 자최복을 입고 일을 보되, 대리자가 올 것 같으면 모두 벗는다.” 하였다. 3. 대공 구월(大功九月)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달수로 칠 경우 윤달도 친다.” 하였는데, 장자(張子 장재(張載)) 역시 “대공 이하는 윤달도 친다.” 하였다. 남자 : 백숙부(伯叔父)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중손(衆孫)의 남녀를 위하여 입는다. -할머니도 같다. ○ 《의례상복도식》에서 범선(范宣)이 말하기를 “예에 할아버지를 승중하여 후사가 된 자는 삼년복을 입는데, 이 경우는 적서(嫡庶)가 공통이다. 서손이 적손과 다른 점이라면 다만 아버지가 서자를 위해 삼년복을 입지 않고 할아버지가 서손을 위해 기년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손자가 할아버지의 복을 입음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없다.” 하였다. 살피건대, 할아버지가 서손을 위해서는 승중인 경우에도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 중자(衆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어머니도 같다.- 형제의 아들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부인 : 남편의 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계조모에게도 같다.- 남편의 백숙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이 남의 후사가 된 경우 생가 시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 자매가 시집갔을 경우 서로 복을 입는다. 살피건대, 이 조항에 대하여 양의(楊儀)에 “부장기복을 입는다.” 하였으나, 주자(朱子)는 또한 “자매가 시집간 뒤라면 형제에 대해서는 강복을 하지만 자매에 대해서는 강복을 한 적이 없다.” 하였다. 다만 살피건대, 《의례》 상복(喪服) 대공(大功)에 “시집간 여자가 고모와 자매를 위하여 입는다.” 하였고, 또 소에 “두 딸이 각기 출가하였을 경우 재차 강복하지는 않는데, 이를테면 두 아들이 남의 후사가 된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하였으며, 또 《가례》에 “딸이 시집가면 친정의 친족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강복한다.” 하였다. 이에 의거할 때 비록 재차 강복하지 않더라도 한 등급 강복하여 대공으로 함은 의심할 게 없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보복】 남자 :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형제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 부인 : 맏손자를 위하여 입는다. 4. 소공 오월(小功五月) 남자 : 종조조부모(從祖祖父母)와 종조조고(從祖祖姑)를 위하여 입는다. 할아버지의 형제 -그 아내까지이다.- 와 자매를 말한다. ○ 종조부모(從祖父母)와 종조고(從祖姑)를 위하여 입는다. 아버지의 종부형제(從父兄弟) -그 아내까지이다.- 와 종부자매를 말한다. ○ 종조형제자매(從祖兄弟姊妹)를 위하여 입는다. 종조부(從祖父)의 아들(5촌 당숙)을 말하는데, 이른바 재종형제자매이다. ○ 형제의 손자를 위하여 입는다. ○ 종부형제(從父兄弟 종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외조부모(外祖父母)를 위하여 입는다. 어머니의 부모를 말한다. -《의례》 상복에 “쫓겨난 아내의 아들은 외조부모에 대해 복이 없다.” 하였다. 《통전》에서 보웅(步熊)이 말하기를 “외조부를 위해서는 그래도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다. 《의례》 상복에 “서자로서 후사가 된 자는 자기의 외조부모와 종모(從母), 외삼촌에 대해 복이 없고, 후사가 되지 않았으면 중인(衆人)과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외삼촌을 위하여 입는다. 어머니의 형제를 말한다. -《의례》 상복의 소에 “이성(異姓)에 대해서는 출입(出入)에 따른 강복이 없다.” 하였다.[아래에서도 같다.] 종모(從母)를 위하여 입는다. 어머니의 자매를 말한다. -《통전》에서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한 사람으로서 내외친(內外親)을 겸하였을 경우 복을 입을 때 마땅히 가까운 쪽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외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였다.-생질을 위하여 입는다. 자매의 아들을 말한다. ○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형제자매를 위하여 입는다. ○ 자기를 젖을 먹여 길러준 서모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는 없다.- 서자가 적모(嫡母)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위하여 입는다. 적모가 죽었을 경우 복이 없다. -금제와 국제에는 없다.- 어머니가 쫓겨났을 경우 계모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위하여 입는다. -우씨(虞氏)가 말하기를 “비록 10명의 계모가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모당(母黨)에 비해 한 단계 낮은 복을 입어야 한다.” 하였다. 《예기》 복문(服問)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의 일가를 위하여 복을 입는데, 어머니의 일가를 위하여 복을 입을 경우 계모의 일가를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다.- 딸이 형제와 조카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이미 시집을 갔어도 강복하지 않는다. ○ 적손 및 증손ㆍ현손으로서 후사가 될 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그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입지 않는다. -조모도 같다. 국제에는 없다.- 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부인 : 남편의 형제의 손자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형제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고자매(姑姊妹)를 위하여 입는다. 시집간 자도 강복하지 않는다. ○ 남편의 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보복】 부인 : 시어머니가 맏며느리일 때 시아버지의 후사를 위하여 입지 않는다. 살피건대, 《의례》에 종자부(從子婦 질부(姪婦))는 대공이고 중자부(衆子婦)는 소공으로 되어 있는데, 위징(魏徵)이 주의(奏議)하여 중자부를 대공으로 올렸다. 오늘날 맏며느리가 시아버지의 후사를 위하여 입지 않는 것은 중자부와 같으니, 마땅히 대공으로 올려야 할 것이다. 계후자 : 양아버지의 아내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 《예기》 단궁 상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소공에 태복(稅服) -소급하여 입는 것이다.- 하지 않는다면 이는 멀리 사는 형제는 끝내 복을 입을 수 없다. 이래도 되겠는가.’ 하였다.” 하였는데, 그 소에 “강복하여 시마에 해당되는 자는 역시 태복하고 그 나머지는 하지 않는다.” 하였다. 5. 시마 삼월(緦麻三月) 남자 : 족증조부모(族曾祖父母 종증조부모)와 족증조고(族曾祖姑)를 위하여 입는다. 증조할아버지의 형제 -그 아내까지이다.- 와 자매를 말한다. ○ 형제의 증손을 위하여 입는다. ○ 족조부모(族祖父母 재종조부모)와 족조고(族祖姑)를 위하여 입는다. -할아버지의 종부형제(從父兄弟) 및 그 아내와 할아버지의 종부자매를 말한다.- 종부형제의 손자를 위하여 입는다. ○ 족부모(族父母 재종숙)와 족고(族姑)를 위하여 입는다. 족조부(族祖父 재종조부)의 아들을 말한다. -그 아내와 족조부의 딸까지이다.- 종조형제(從祖兄弟 재종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족형제자매(族兄弟姊妹)를 위하여 입는다. 이른바 삼종형제자매이다. ○ 증손과 현손을 위하여 입는다. -조모도 같다.- 종모형제자매(從母兄弟姊妹)를 위하여 입는다. 종모(從母)의 자식을 말한다. ○ 외손을 위하여 입는다. -조모도 같다.- 외형제(外兄弟)를 위하여 입는다. -아버지의 자매의 자식들이다.- 내형제(內兄弟)를 위하여 입는다. 외삼촌의 자식을 말한다. ○ 서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그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그러나 어머니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위해서는 복이 없다. -국제에는 없다. 살피건대, 《의례상복도식》에서 양씨(楊氏)가 이르기를 “승중(承重)한 첩의 아들은 만약 적모(嫡母)가 없거나 적모가 죽었을 경우 생모(生母)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으나, 경문(經文)에는 단지 “그 어머니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는다.”라고만 하고 다시 ‘적모가 없을 경우 생모를 위해 입는다’는 문구는 없다. 이는 승중의 의리를 중시한 뜻에서일 것이니, 양씨의 설은 좇을 수 없을 듯하다.- 서손부(庶孫婦)를 위하여 입는다. -조모도 같다.- 사(士)가 서모를 위하여 입는다. 아버지의 첩으로서 아들을 둔 자를 말한다. -《통전(通典)》에서 서막(徐邈)이 이르기를 “두 첩의 아들은 서로 서모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다.- 유모(乳母)를 위하여 입는다. ○ 형제의 손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종부형제의 아들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아내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아내가 죽고 나서 별도로 장가를 들었을 경우도 같다. 따라서 아내의 친어머니가 비록 재가했다 하더라도 복을 입는다. ○ 사위를 위하여 입는다. ○ 여자가 자매의 아들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생질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외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조모도 같다. 부인 : 남편의 형제의 증손을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형제의 손자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조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증조부모와 고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조조부모(從祖祖父母)를 위하여 입는다. -남편의 종조조고(從祖祖姑)를 위하여 입는다.[《가례의절》에 나온다.] 남편의 형제의 손자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조부모(從祖父母)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부형제(從父兄弟)의 아들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부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외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는 없다.- 남편의 종모(從母) 및 외삼촌을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는 없다.- 남편의 종부자매(從父姊妹)를 위하여 입는다. 시집간 자도 강복(降服)하지 않는다. -살피건대, 시집간 딸은 종부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당연히 보복(報服)을 입어야 함에도 《가례》에는 없으니, 이는 누락된 것인 듯하다. ○ 양의(楊儀)에 “동거자를 위하여 입는다.” 하였다. ○ 친구를 위하여 입는다. 살피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경문(經文)에 단지 ‘친구에 대해서는 시마복을 입는다’라고 하였으니, 조복(弔服)에다 마질(麻絰)을 가한 것과 같다.” 하였다. ○ 대부(大夫)가 귀첩(貴妾)을 위하여 입는다. 비록 아들이 없더라도 복을 입는다. ○ 사(士)가 아들을 둔 첩을 위하여 입는다.[이상은 금제와 국제에 모두 없다.]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주에 “여군(女君)은 첩에 대해 복이 없다.” 하였고, 《통전》에서 서막은 말하기를 “두 첩은 한집에서 함께 은혜를 입었으니, 의리상 서로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다. 【금제】 남자 : 종부형제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에도 같다. 부인 : 남편의 종부형제를 위하여 입는다. 계후자 : 남의 후사가 된 자가 생가의 외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국제】 남자 : 외삼촌의 아내를 위하여 입는다. 부인 : 남편의 양가(養家)의 증조부모와 고조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 남편의 종조고(從祖姑)를 위하여 입는다. -《가례의절》에도 같다. 양자 : 양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곧 사대부가 천인인 양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상복(殤服)] 《통전》에 “상자(殤者)에 대한 복은 해를 셀 적에 한 달을 한 해로 치고 해를 쓰지 않는다.” 하였다. ○ 《개원례》에 “장상(長殤)ㆍ중상(中殤)ㆍ하상(下殤)의 초상은 처음 죽었을 적에 목욕 및 대렴과 소렴을 성인(成人)과 같이 한다. 장상에는 관(棺) 및 대관(大棺)이 있고, 중상과 하상에는 관이 있으며, 영상(靈床)ㆍ제전(祭奠)ㆍ진식(進食)ㆍ장송(葬送)ㆍ곡읍(哭泣)의 위(位)는 성인과 같다. 희생과 명기(明器)의 경우, 장상에서는 3분하여 2분을 감하고 고복(皐復)을 하지 않으며 반함(飯含)도 없다. 또 상구(喪具)를 마련하여 장사를 지내고 나서 신주를 세우지 않으며, 우제를 지내고 나서는 영상을 제거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가례》와 정자(程子)와 주자의 설에 의하면 8세 이상은 다 신주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상복(殤服)은 차례대로 한 등급씩 강복한다. 나이 19세에서 16세까지는 장상이고, 15세에서 12세까지는 중상이고, 11세에서 8세까지는 하상이다. ○ 기년복을 입어야 할 경우에는 장상이면 대공 구월(大功九月)로, 중상이면 칠월(七月)로, -금제에는 구월로 되어 있다.- 하상이면 소공 오월(小功五月)로 강복한다. 대공 이하의 복을 입어야 할 경우에는 차례대로 강복한다. 8세가 못 되면 무복(無服)의 상(殤)인데, 하루를 한 달로 쳐서 곡만 하며, 태어난 지 석 달이 못 될 경우에는 곡도 하지 않는다. -살피건대, 정현이 말하기를 “하루를 한 달로 친다는 것은 태어난 지 한 달일 경우 하루를 곡한다는 말이다.” 하였는데, 그 소에 “이를테면 7세일 경우 한 해가 12개월이므로 84일을 곡한다는 것인데,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나 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 친속은 관계가 없다. 아들 중에서도 적장자(嫡長子)의 경우는 성인이라면 참최 삼년복을 입지만, 지금 상사(殤死)라 하여 중자(衆子)와 같이 하는 것은 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곡식이 아직 여물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상사자(殤死者)는 똑같이 대공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였고, 왕숙(王肅)과 마융(馬融)은 “곡하는 날수로 복 입을 달수를 바꾼다면 기년에 해당되는 친속일 경우 13일을 곡하고, 시마에 해당되는 친속일 경우 3일로 제한한다.” 하였다. 두 설이 같지 않으므로 일단 함께 실어두어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남자로서 이미 장가를 갔거나 여자로서 허혼(許婚)했다면 모두 상(殤)으로 치지 않는다. -《예기》 상복소기에 “남자로서 관례(冠禮)를 올렸으면 상으로 치지 않고 여자로서 계례(筓禮)를 올렸으면 상으로 치지 않는다.” 하였다. 국제(國制)에 의하면, 남자가 벼슬을 받은 경우에도 상으로 치지 않는다. 【상복】 상복(殤服)의 복제(服制) 대공 구월과 대공 칠월 : 자녀의 장상과 중상, 숙부의 장상과 중상, 고자매(姑姊妹)의 장상과 중상, 형제의 장상과 중상, 적손(嫡孫)의 장상과 중상, 남편의 형제의 자녀의 장상과 중상, -국제에는 이상의 중상은 모두 소공이다.- 대부(大夫)의 서자가 적곤제(嫡昆弟)의 장상과 중상, 공대부(公大夫)가 적자의 장상과 중상 -소에 이르기를 “적자는 바로 정통으로서, 성인의 경우 참최이나, 지금은 상사(殤死)하여서 대를 이을 수 없기 때문에 대공에 넣은 것이다.” 하였다.- 에 입는다. 금제에는 적증손과 적현손 및 형제의 자녀의 장상과 중상에 입는다. ○ 살피건대, 《의례》 상복에 “그 장상은 구월이고 중상은 칠월이다.” 하고, 그 소에 “오복(五服)의 정복(正服)에는 칠월의 복이 없으나, 이 대공의 중상에만 있다.” 하였다. 소공 오월 : 숙부의 하상, 맏손자의 하상, 형제의 하상, 고자매의 딸의 하상, -국제에는 이상은 모두 시마복이다.- 남의 후사가 된 자가 그 형제의 장상과 중상, 종부형제(從父兄弟)의 장상과 중상, -국제에는 장상이 시마복이다.- 남편의 숙부의 장상, 형제의 자녀의 하상, -국제에는 시마복이다.- 서손녀의 남편과 서손자의 아내의 장상과 중상, -금제에는 중상과 하상이 시마복이다.- 남편의 형제의 자녀의 하상, 고모가 조카의 장상과 중상, -살피건대, 고모는 곧 출가한 고모이다. 금제에는 중상과 하상이 시마복이고, 국제에는 삼상(三殤)이 모두 시마복이다.- 대부(大夫)의 서자가 적곤제(嫡昆弟)의 하상, 대부공(大夫公)의 형제와 대부의 아들이 그 형제의 서자와 고자매의 딸의 장상과 중상, 대부의 첩이 군(君)의 서자의 장상에 입는다. 시마 삼월(緦麻三月) : 서손의 하상, 종조부(從祖父)의 장상, -살피건대, 종조조부(從祖祖父)의 장상을 예에서는 비록 말하지 않았으나, 역시 시마복을 입는 것이 옳다.- 종조형제(從祖兄弟)의 장상, 종부형제의 아들의 장상, 형제의 손자의 장상, 종부형제의 하상, 고모가 조카의 하상, 종모(從母)의 장상, 남편의 숙부의 중상과 하상, 남편의 고자매의 장상에 입는다. -이상은 국제에는 없다.- 금제에는 외삼촌의 장상에 입는다. 국제에는 증손과 현손의 장상과 중상, 당고모의 장상에 입는다. [강복(降服)] 《의례》 상복의 소에 “외친(外親)은 비록 시집을 갔더라도 강복하지 않는다.” 하였다. ○ 두 아들이 각각 남의 후사가 된 경우 재차 강복하지 않는다. ○ 두 딸이 각각 출가하였을 경우 재차 강복하지 않는다. ○ 정씨(鄭氏)가 말하기를 “비록 외친이라 하더라도 두 계통은 없다.” 하였고, 가씨(賈氏)가 말하기를 “이미 양가(養家) 모당(母黨)의 복을 입고 나서 또 생가 모당의 복을 입는다면 이것은 두 계통이다.” 하였다. 남의 후사가 된 남자나 시집간 여자는 사친(私親)에 대하여 모두 한 등급씩 강복하는데, 사친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집간 여자가 강복(降服)의 기간이 차기 전에 쫓겨왔을 경우 본복(本服)을 입으나, 이미 벗고 나서 쫓겨왔을 경우 복을 다시 입지는 않는다. -《예기》 상복소기에 “소상 전에 돌아올 경우 기년복을 입고 소상 후에 돌아올 경우 그대로 끝난다.” 하였다.- 부인이 남편 일가를 위해 복을 입었을 때 상기(喪期) 내에 쫓겨날 경우 복을 벗는다. ○ 첩이 그의 사친을 위해 복을 입을 때는 중인(衆人)과 같이 한다. [심상 삼년(心喪三年)] 남자 : 《의례》 상복에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하였다. 살피건대, 적모(嫡母)와 계모(繼母)에게도 같다. ○ 맏손자가 할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할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증조할머니ㆍ고조할머니에게도 같다. ○ 쫓겨난 어머니와 재가한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양의(楊儀)에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비록 복을 입지 않더라도 심상은 입는다.” 하였다. ○ 서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스승을 위하여 입는다.” 하였다. 왕숙(王肅)이 말하기를 “예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복이 없고 조복(弔服)에다 마질(麻絰)을 가하여 입고 가서 침전에서 곡을 한다.” 하였다. 《의례》 상복의 소에 “마질이란 환질(環絰)을 말한다.” 하였다. 정칭(鄭稱)이 말하기를 “무릇 조복에 마질을 가한 자는 석 달 만에 벗는다.” 하였고,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장사를 지내고 나면 벗는다.” 하였는데, 초주(譙周)는 말하기를 “비록 복은 벗더라도 심상 3년을 한다.” 하였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스승에게는 입복(立服)을 하지 않는 법이니, 입복을 할 수 없다면 마땅히 정의의 후박과 사안의 대소에 따라 대처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선비 황간(黃榦)이 그의 스승 주자(朱子)의 상에 조복을 입고 마질을 띠었는데, 조복의 제도는 심의와 같고 마질은 관질(冠絰)을 썼다. 왕백(王柏)은 그의 스승 하기(何基)의 상에 심의에다 요질(腰絰)을 띠고, 관에 면사(綿絲)의 무(武)를 가하였으며, 왕백이 죽어서는 그 제자 김이상(金履祥)이 상을 치르는데, 백건(白巾)에다 수질(首絰)을 가하되 수질을 시마복의 것과 같이 하고 소대(小帶)는 고운 모시를 썼다. 황간ㆍ왕백ㆍ김이상 세 사람은 모두 주자의 정통 제자인만큼, 스승의 상복을 마련함에 있어서 상고한 바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후세에 스승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여 복을 입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이를 기준으로 삼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은 말하기를 “스승의 경우 그 정의(情義)의 정도에 따라 심상 3년이나 1년, 또는 9월이나 5월 내지 3월로 하고, 친구의 경우는 아무리 많이 입더라도 3월을 넘기지는 못한다.” 하였다. 부인 : 시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시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남편이 승중이나 후사가 된 경우도 같다. ○ 남편의 생가 부모 및 재가한 어머니와 쫓겨난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 서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의 아내가 그 남편의 생모를 위해서도 같다. ○ 친정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계후자 : 생가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양의(楊儀)에 나온다.-살피건대, 양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양어머니를 위하여, 그리고 승중의 양할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양할머니를 위하여도 같으며, 증조모와 고조모에게도 같다. 양자 : 자기의 부모가 살아 있을 경우 양부모를 위하여 입으며, 역시 벼슬을 그만둔다. [복제 식가(服制式假)] 송(宋)나라 때의 상장(喪葬) 식가 규정은, 재직 중에 상을 당하지 않은 경우 기년에는 30일, 대공에는 20일, 소공에는 15일, 시마에는 7일이다. 국제에는 재직 중인 자도 같으며, 외조부모에게는 15일을 더 주고 처부모에게는 23일을 더 준다.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주인 및 형제가 비로소 죽을 먹는다. 여러 자식들은 죽을 먹고, 처첩(妻妾) 및 기년인 자와 구월인 자는 거친밥에 물을 마시고 채소와 과일은 먹지 않으며, 오월인 자와 삼월인 자는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되 잔치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이때부터는 까닭없이 밖에 나가지 않으며, 만약 상사(喪事)나 어쩔 수 없는 일로 출입을 할 경우는 꾸미지 않은 말에 삼베 안장을 씌워서 타고 가마는 흰 가마에 삼베 휘장을 친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선비는 조부모의 기년복 기간 내에는 과거(科擧)에 응시하지 않아야 한다.”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이회숙(李晦叔 이휘(李煇))이 묻기를 “장자(長子)의 삼년상 및 백숙부모와 형제에 대해 모두 기년복을 입고 벼슬을 그만두지 않고, 선비는 과거에 응시를 허락합니다. 모르기는 합니다만, 벼슬을 하는 자와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그때에 다시 길복을 입어야 합니까, 최복을 입어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이러한 일은 다만 조정의 법령만을 따를 뿐이나,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에 편하지 않아 과거에 응시하고 싶지 않다면 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 벼슬자리에 있는 자의 경우 벼슬을 그만둘 수 있는 법조문은 없다. 이천 선생(伊川先生)께서도 학제(學制)를 자세히 상고해 보고서는 역시 슬픔을 무릅쓰고 상법(常法)을 지키는 일을 금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다만 어쩔 수 없어 잠시 최복을 벗었더라도, 역시 서둘러 길복으로 갈아입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아버지가 복을 입고 있으면 집안의 자식들이 음악을 연주하지 않고, 어머니가 복을 입고 있으면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며, 아내가 복을 입고 있으면 그 곁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옥조(玉藻)의 주에 “아버지가 상복을 입고 있으면 자식이 길복을 입을 수 없다.” 하였다. 무릇 중상(重喪)을 아직 벗지 않은 채 경상(輕喪)을 만날 경우에는 중상의 복을 입고 곡을 하되, 월삭(月朔)에 영위(靈位)를 설치하고 경복(輕服)을 입고서 곡을 하고 곡을 마치고 나서는 다시 중복(重服)을 입으며, 중복을 벗게 되면 역시 경복을 입는다. 만약 중복을 벗고 경복은 아직 벗지 않았을 경우라면 경복을 입고서 남은 날짜를 마친다. -《예기》 간전(間傳)에 “참최의 상에서 우제와 졸곡을 마친 뒤에 자최의 상을 만났을 경우 경시(輕視)하는 부위에는 복을 덮어씌우고 중시(重視)하는 부위에는 복을 특별히 남겨둔다.” 하였는데, 그 소에 “참최복을 받아 입을 때에 자최의 초상을 당했을 경우, 남자는 허리를 경시하므로 자최의 요대(腰帶)를 띤 채 참최의 요대를 함께 덮어씌워서 띠고 여자는 머리를 경시하므로 자최의 수질을 띤 채 참최의 수질을 함께 덮어씌워서 띤다. 남자는 머리를 중시하므로 참최의 갈질(葛絰)을 특별히 남겨두고 여자는 허리를 중시하므로 또 갈대(葛帶)를 띠지 않고 참최의 마대(麻帶)를 특별히 남겨둔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최마(衰麻)의 추세(麤細)가 같을 경우 함께 입는다.” 하였다. -《의례상복도식》에 자세히 나온다.- 두원개(杜元凱)가 말하기를 “아버지를 장사 지낸 뒤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우제를 마칠 때까지 어머니의 복을 입고, 아버지의 복을 입어서 이미 소상을 지났을 경우 어머니의 복을 입으며, 아버지의 복을 벗을 수 있을 경우 아버지의 복을 다 입은 다음 벗고 나서 어머니의 복을 입는다.” 하였다. 살피건대, 두원개의 설은 《예기》 간전과 같지 않고 《가례》와도 서로 다르므로, 일단 여러 설을 실어두어서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증택지(曾擇之 증조도(曾祖道))가 묻기를 “삼년상 중에 다시 기년상을 당한 자는 당연히 기년상의 복을 입고 그 초상에 제전(祭奠)을 하여 일을 마치고 나서 처음 입었던 복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혹자는 막 중복을 입고 있는 참에 경복으로 갈아입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혹자의 설은 잘못이다.” 하였다. -이는 마땅히 《예기》 분상(奔喪)과 《가례》의 “자최 이하는 상이 난 소식을 들으면 곡위(哭位)를 설치하고 곡을 한다.”는 조항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 살피건대, 할머니의 승중상을 당하여 장사를 지낸 뒤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마땅히 두씨의 ‘동시에 상을 당했다’는 설을 따라야겠으나, 칭호만은 복에 따라 고칠 수 없으므로 ‘애손(哀孫)’의 칭호를 그대로 쓰는 것이 옳겠다. -《통전(通典)》에 나온다. [아침에 곡한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주인 이하가 모두 해당하는 복을 입고 들어가 제 위치로 나아가서 -위차(位次)는 앞에 나온다.- 존장(尊長)은 앉아서 곡하고 항렬이 낮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서서 곡한다. 시자(侍者)는 관즐(盥櫛)의 도구를 영상(靈牀) 곁에 배설해 둔다. 조전(朝奠)을 올린다. 혼백을 받들어 내어 영좌(靈座)에 모시고 난 뒤에 조전을 올리는데, 집사자가 소과(蔬果)와 포해(脯醢)를 진설하고 축(祝)이 손을 씻은 다음 향불을 피우고 술을 쳐 올리면 주인 이하가 두 번 절하고 매우 슬피 곡한다. -조전의 전물(奠物)이 도착하고 난 뒤에 석전(夕奠)의 전물을 철상하고, 석전의 전물이 도착하고 난 뒤에 조전의 전물을 철상하되, 각각 상보를 덮는다. 만약 더운 계절이어서 음식이 부패될 염려가 있다면 한 식경 뒤에 음식물은 가져가고 술과 과일 따위만 남겨두고 상보로 덮는다. 밥 먹을 때 상식(上食)한다. 조전의 의식과 같다. -살피건대, 상을 연거푸 당했을 경우 나중에 당한 상의 성복 전에는 먼저 당한 상의 조전과 석전 및 상식을 일시 그만두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리고 부모의 상중에 죽은 자는 장사 전에는 평상시와 같이 소찬(素饌)을 올리고 우제 때에 가서 비로소 신으로 섬겨서 고기를 쓰는 것이 옳을 듯하다. 퇴계(退溪)가 어느 질문에 답한 내용 역시 이러하다. 석전(夕奠)을 올린다. 조전의 의식과 같다. -《예기》 단궁 상에 “조전은 해가 뜰 때 올리고 석전은 해가 지기 전에 올린다.” 하였다. [저녁에 곡한다.] 주인 이하가 혼백을 받들고 들어가 영상 앞에 나아가서 매우 슬피 곡한다. -살피건대, 《의례》에 의하면 조석의 곡(哭)과 전(奠)은 애당초 두 가지 일인데도 어떤 이는 한 가지 일로 여기니, 이는 잘못이다. 일정한 때가 없이 곡한다. 아침저녁으로 슬픈 생각이 날 경우 상차(喪次)에서 곡한다. 초하룻날의 경우 조전에 반찬을 진설한다. 반찬은 육류ㆍ어류ㆍ국수ㆍ쌀음식ㆍ국ㆍ밥 한 그릇씩을 차리며, 예절은 조전의 의식과 같다. -《의례》 사상기(士喪記)에 “초하룻날에 만약 천신(薦新)을 할 경우에는 안방에서 올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소에 “대렴과 소렴의 전(奠)이나 조전과 석전 등에는 모두 서직(黍稷)이 없고, 오직 안방에서 올리는 평소의 전에는 서직이 있었지만 지금 이처럼 성대한 제전에서는 이미 희생이 있는 외에 또 서직이 있다. 그러므로 안방에서 다시 밥을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大夫) 이상은 또 월반(月半)의 전(奠)이 있으므로 역시 안방에서는 밥을 올리지 않는다.” 하였다. ○ 살피건대, 삭전(朔奠)에 이미 밥과 국을 진설하였으면 그날 조상식(朝上食)에 다시 진설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어떤 이가 묻기를 “모상(母喪)의 삭전에 아들이 상주가 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무릇 상에는 아버지가 상주였으므로 지금에 와서 아들이 상주가 된다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하였다.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상주를 세우는 조항에 ‘무릇 주인이란 장자(長子)를 이르며 장자가 없을 경우 장손(長孫)이다.’ 하였는데, 지금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아들이 상주가 되는 예는 없다.’고 하니, 두 설이 서로 같지 않다. 어째서이겠는가. 대개 장자가 궤전(饋奠)을 받드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게는 은혜도 무겁고 복도 무겁기 때문이고, 삭전의 경우 아버지가 상주 노릇하는 것은 삭전은 성대한 제전이므로 높은 사람으로 상주를 삼기 때문이다.” 하였다. 《예기》 상복소기에 “부인의 상에 우제와 졸곡에서는 그 남편 또는 아들이 주상(主喪)이 된다.” 하였다. 우제와 졸곡은 모두 성대한 제사이기 때문에 남편이 주상이 된다는 것이니, 이것 역시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아버지가 주상이 된다는 것을 이름이다. 삭제(朔祭)에 아버지가 주상이 되는 것도 그 의리는 우제ㆍ졸곡의 경우와 같다. 새로운 음식물이 있으면 천신을 한다. 의식은 상식(上食)의 의식과 같다. -새로운 음식물이란 벼[稻]ㆍ기장[黍]ㆍ피[稷]ㆍ보리[麥]ㆍ콩[菽]ㆍ백과(百果)ㆍ소채(蔬菜) 등 일체의 갓 익은 음식물을 말하는데 큰 소반에 담아서 영좌 앞 탁자에 진설한다. ◆ 조문자가 전물(奠物)ㆍ부의(賻儀)를 올리는 서식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아무 물품 약간. 이상의 물건을 삼가 전인(專人)을 통해 아무 분 -《가례의절》에서는 ‘아무 관직 아무 공’이라 하였다. 여자의 상인 경우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 쓴다.- 의 영연(靈筵)에 올려 겨우 부의 -향다(香茶)나 주식(酒食)의 경우 ‘전의(奠儀)’라고 쓴다.- 를 갖추오니 삼가 흠납(歆納)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벼슬 아무 성씨 아무개 올림. -평교(平交) 이하일 경우에는 글 안에 연호는 쓰지 않는다. 다른 데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봉투에는 “아무 관직 아무 공 -여자의 상인 경우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 쓴다.- 의 영연에 글을 올립니다.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근봉(謹封).”이라고 쓴다.   ◆ 답장[謝狀]의 서식 삼년상을 당하여 아직 졸곡을 지내지 않았을 경우 다만 자질(子姪)로 하여금 답서[謝書]를 발송하게 한다. -자질이 없을 경우 족인(族人)으로 대신한다.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아무 물품 약간. 이상의 물품을 삼가 받았습니다. 존자(尊慈) -평교에는 ‘인사(仁私)’로 쓴다.- 께서 아무개 -발서자(發書者)의 이름- 의 부친 또는 모친께서 세상을 버렸다 하여 부의 -수의(襚衣)냐 전물(奠物)이냐에 따라 달리 쓴다.- 를 특사(特賜)하시므로 -평교에는 ‘주심[貺]’으로 쓴다.- 하성(下誠) -평교에는 이 두 글자를 쓰지 않는다.- 에 감사하는 심정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글발을 갖추어 사례하는 바입니다. -평교에는 ‘삼가 글발을 올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쓴다.-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올림.   봉투에는 “아무 관직의 좌전(座前)에 글을 올립니다.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근봉.”이라고 쓴다.   ◆ 조제문(弔祭文)의 서식 -《가례의절》에 나온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歲次) 간지(干支) 몇월, 간지삭(干支朔) 며칠 간지에 첨친(忝親) -관계에 따라 일컫는다.- 인 아무 관직의 아무 성씨 아무개가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의 전물(奠物)로써 아무의 부친 아무 관직 아무 공의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합니다.……흠향하시옵소서.   《광기(廣記)》에 의하면, 친지의 상에 가서 곡하지 못할 경우 사자(使者)를 보내어 전부(奠賻)의 물품을 전하게 하되 외차(外次)에 나아가 조복(弔服)을 입고 두 번 절하고 곡하며 사자를 보낸다.   ◆ 문장(門狀)의 서식   아무 벼슬 아무 성씨 아무개. 위의 아무개는 삼가 문병(門屛)에 나아가 -평교에는 ‘삼가 문병에 나아가’라는 말을 뺀다.- 아무 벼슬의 어른을 공손히 위로하고 -평교에는 ‘아무 관직’이라고 쓴다.-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평교에는 이 말을 뺀다.-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벼슬 아무 성씨 아무개 올림.   ◆ 방자(榜子)의 서식   아무 관직 아무 성씨 아무개가 위로드립니다.   ◆ 부모를 여읜 사람을 위로하는 글[疏]의 서식 승중한 맏손자를 위로할 때도 같다. -《광기》에 “길이 멀거나 연고가 있어서 조문을 가지 못하는 자는 글을 써서 위문한다.” 하였다.   아무개는 머리 조아려 두 번 절하고 말씀드립니다. -강등의 경우 ‘머리 조아립니다’만 쓰고, 평교의 경우 ‘머리 조아려 말씀드립니다’만 쓴다.- 뜻하지 않은 흉변(凶變) -죽은 사람의 관직이 높을 경우 ‘나라가 불행하여’라고 쓴다. 이 뒤에도 다 같다.- 으로 선(先) 아무 벼슬 -관직이 없을 경우 ‘선부군(先府君)’이라 쓰고, 계분(契分)이 있을 경우 ‘아무 벼슬 부군’ 앞에 ‘몇째 어른’을 더 쓴다. ○ 어머니의 경우 ‘선 아무 봉작’이라 쓰는데, 봉작이 없을 경우 ‘선부인(先夫人)’이라 쓴다. ○ 승중의 경우 ‘존조고(尊祖考) 아무 벼슬’ 또는 ‘존조비(尊祖妣) 아무 봉작’이라 쓰는데, 나머지도 모두 같다.[《주자어류》에서 어떤 사람이 묻기를 “남의 첩모(妾母)의 죽음을 조문할 경우 무어라고 일컬어야 마땅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그저 그 아들이 평소에 일컫던 대로 일컬으면 될 듯하다.” 하였다. 어떤 이의 말로는 오봉(五峯) 호굉(胡宏)이 첩모를 소모(小母)라 일컬었다고도 한다.]- 께서 갑자기 영양(榮養)을 버리셔서 -죽은 사람의 벼슬이 높을 경우 ‘갑자기 관사(館舍)를 버리셔서’로 쓰거나 ‘갑자기 훙서(薨逝)하셔서’로 쓰고, 모친의 봉작이 부인(夫人)에까지 이른 경우에도 훙서로 쓴다.[살피건대, 우리나라는 임금의 죽음을 ‘훙’으로 쓰므로 사대부는 감히 쓸 수 없다.] 만약 살아 있는 사람이 관직이 없다면 ‘갑자기 색양(色養)을 버리셔서’로 쓴다.- 부고를 받들매 놀라움과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伏惟] -평교의 경우 ‘공손히 생각건대[恭惟]’로, 강등의 경우 ‘아득히 생각건대[緬惟]’로 쓴다.- 순수하고 지극한 효심(孝心)에 사모하는 울부짖음을 어떻게 견뎌 내시겠습니까. 일월(日月)이 덧없이 흘러서 벌써 순삭(旬朔)이 넘었는데, -계절이 지났을 경우 ‘어느덧 계절이 지났는데’로 쓰고, 이미 장례를 치렀을 경우 ‘벌써 양봉(襄奉)이 지났는데’로 쓰며, 졸곡ㆍ소상ㆍ대상ㆍ담제도 각기 그 시기에 따라 쓴다.- 애통함은 어떠하며 망극함은 어떠하겠습니까. 도독(荼毒)에 걸리신 뒤로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우고(憂苦)’로 쓴다.- 기력은 어떠하십니까[何如]? -평교의 경우 ‘어떠한가?[何似]’로 쓴다.- 삼가 바라건대[伏乞] -평교의 경우 ‘삼가 바라건대[伏願]’로 쓰고, 강등의 경우 ‘오직 바라건대[惟冀]’로 쓴다.- 억지로라도 죽을 더 많이 드시어 -이미 장례를 치렀을 경우 ‘거친밥[疏食]’으로 쓴다.- 예제(禮制)를 굽어 따르십시오. 저 아무개는 역사(役事)에 얽매여 있어서 -관직에 있을 경우 ‘맡은바 직무가 있어서’로 쓴다.- 위문을 가지[奔慰] 못하니, 근심하고 연모하는 하성(下誠)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평교 이하의 경우 ‘위문하지[奉慰] 못하니 슬픔 심정 한층 더합니다’라고만 쓴다.- 삼가 글[疏]을 올리오니, -평교의 경우 ‘글[狀]’로 쓴다.- 삼가 바라건대 감찰(鑑察)하여 주십시오.[伏惟鑑察] -평교 이하의 경우 ‘복유감찰[伏惟鑑察]’ 네 글자는 뺀다.- 갖추지 못하고 삼가 글을 올립니다.[不備謹疏] -평교의 경우 ‘더 쓰지 않고 삼가 글을 올립니다[不宣謹狀]’로 쓴다.[《예기보주》에 의하면, 나이 어린 사람은 ‘불구(不具)’ㆍ‘불실(不悉)’ㆍ‘불일(不一)’로 쓴다.] 연호 월 일에 아무 벼슬 -강등의 경우 군망(郡望 한 고장 사람들이 부르는 존호)을 쓴다.- 의 아무 성씨 아무개가 아무 관직의 대효(大孝) 점전(苫前)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대효’를 ‘지효(至孝)’로 쓰고, 평교 이하의 경우 ‘점전’을 ‘점차(苫次)’로 쓴다.- 에 글을 올립니다.[疏上] -평교의 경우 ‘소상(疏上)’ 대신에 ‘장상(狀上)’을 쓴다.[배의(裵儀)에 “부모가 죽어서 나달이 오래되었을 경우 ‘애전(哀前)’으로 쓰되, 평교 이하의 경우 ‘애차(哀次)’로 쓴다.” 하였다.]   봉투에는 “아무 관직의 대효 점전(苫前)에 글을 올림.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근봉. -강등의 경우 면첨(面簽)을 써서 ‘아무 관직의 대효 점차에 올림. 군망(郡望)인 성명 아무개가 글을 근봉.’이라고 한다.”이라고 쓴다. 겉봉에는 “아무 관직 -대효 점전- 에 글을 올림.[疏上] -평교의 경우 ‘소상(疏上)’ 대신에 ‘장상(狀上)’을 쓴다.- 아무 벼슬의 아무 성씨 아무개 근봉.”이라고 쓴다.   ◆ 조부모를 여읜 사람을 위로하는 계장(啓狀)의 서식 승중(承重)이 아닌 자를 이른다. 백숙부모(伯叔父母)ㆍ고모(姑母)ㆍ형제자매ㆍ아내ㆍ아들ㆍ조카ㆍ손자의 죽음에도 같다.   아무개는 계(啓)합니다. -살피건대, 본조(本朝)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문자에 모두 ‘계(啓)’ 자를 쓰므로, 사서(私書)에는 감히 쓰지 못할 듯하다. ‘백(白)’ 자로 대신 쓰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뜻하지 않은 흉변으로 -자손에게는 이 구절을 쓰지 않는다.- 존조고(尊祖考) 아무 벼슬께서 갑자기 세상을 버리셔서, -할머니의 경우 ‘존조비(尊祖妣) 아무 봉작’으로 쓴다. 관직과 봉작이 없는 경우와 계분(契分)이 있는 경우는 이미 앞에 나온다. ○ 백숙부모와 고모의 경우 ‘존(尊)’ 자를 더 쓰고, 형제자매의 경우 ‘영(令)’ 자를 더 쓰며, 강등의 경우 모두 ‘현(賢)’ 자를 더 쓰되, 한 등급을 강등한 친척이 몇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항렬상의 서열을 더하여 ‘몇째 아무 벼슬’로 쓴다. 또 벼슬이 없을 경우 ‘몇째 부군(府君)’으로 쓰며, 계분이 있을 경우 ‘아무 벼슬 부군’ 위에 ‘몇째 어른, 몇째 형’을 더 쓴다. 고모와 자매의 경우 남편의 성씨를 써서 ‘아무 댁(宅)의 존고모(尊姑母), 영자매(令姊妹)’로 쓴다. ○ 아내의 경우 ‘현합(賢閤) 아무 봉작’으로 쓰되, 봉작이 없을 경우는 ‘현합’으로만 쓴다. ○ 아들의 경우 ‘복승(伏承) 영자(令子) 몇째 아무 벼슬’로 쓴다. 조카와 손자의 경우도 모두 같다. 강등의 경우 ‘현(賢)’으로 쓰며, 관직이 없을 경우 ‘수재(秀才)’로 쓴다.- 부음을 받들매 놀라움과 슬픔[驚怛]을 견딜 수 없습니다. -아내의 경우 ‘달(怛)’을 ‘악(愕)’으로 고치며, 자손의 경우 ‘놀라움과 슬픔을 이길 수 없습니다[不勝驚怛]’만 쓴다.- 삼가 생각건대[伏惟] -‘공유(恭惟)’와 ‘면유(緬惟)’는 앞에 나온다.- 순수하고 지극한 효심에 가슴이 무너지고 창자가 찢어지는 슬픔과 아픔을 어떻게 견뎌 내시겠습니까.[哀痛摧裂 何可勝任] -백숙부모와 고모의 경우 ‘친애는 더욱 융숭한데, 애통함과 침통함을 어떻게 견뎌 내겠습니까[親愛加隆 哀慟沈痛 何可堪勝]’로 쓴다. ○ 형제자매의 경우 ‘우애는 더욱 융숭한데[友愛加隆]’로 쓴다. ○ 아내의 경우 ‘배우의 중한 의리에 슬프고 침통한데[伉儷義重 悲悼沈痛]’로 쓴다. ○ 자질(子姪)과 손자의 경우 ‘자애가 융심함에 비통하고 침통한데[慈愛隆深 悲慟沈痛]’로 쓰며, 나머지는 백숙부모와 고모의 경우와 같다.- 맹춘(孟春)의 날씨는 아직도 차가운데, -한온(寒溫)은 계절에 따라 쓴다.- 존체는 어떠하십니까?[尊體何似] -조금 높을 경우 ‘동지는 어떠하십니까?[動止何如]’로 쓰며, 강등의 경우 ‘소리는 어떠합니까?[所履何似]’로 쓴다.- 삼가 빌건대[伏乞] -평교 이하의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너그러이 자제하심으로써 자념(慈念) -그 사람이 부모가 없을 경우 ‘원성(遠誠)’으로만 써서 연서(連書)하고 별행으로 올리지 않는다.- 을 위로해 드리십시오. 아무개는 사역(事役)에 얽매여 있어서 -벼슬자리에 있을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직접 나아가 위로를 드릴 수 없으니, 걱정되고 연모되는 하성(下誠)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평교 이하의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삼가 글을 올리오니, 삼가 바라건대 감찰(鑑察)하여 주십시오. -평교의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불비(不備) -평교의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하고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벼슬의 성명 아무개가 아무 벼슬의 복전(服前) -평교의 경우 ‘복차(服次)’라고 한다.- 에 글을 올립니다.   봉투와 겉봉의 서식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 조부모를 여의었을 때 남의 계장(啓狀)에 답하는 서식 승중이 아닌 자를 이른다. 백숙부모ㆍ고모ㆍ형제자매ㆍ아내ㆍ아들ㆍ조카ㆍ손자의 죽음에도 같다.   아무개는 아룁니다. 가문이 흉화(凶禍)로 -백숙부모와 고모, 형제자매의 경우 ‘가문이 불행하여’로 쓴다. ○ 아내의 경우 ‘사가(私家)가 불행하여’로 쓴다. ○ 아들ㆍ조카ㆍ손자의 경우 ‘사문(私門)이 불행하여’로 쓴다.- 선조고(先祖考) -조모의 경우 ‘선조비(先祖妣)’로 쓴다. ○ 백숙부모의 경우 ‘몇째의 백숙부모’로 쓴다. ○ 고모의 경우 ‘몇째의 고모’로 쓴다. ○ 형이나 누나의 경우 ‘몇째 가형(家兄), 몇째 가자(家姊)’로 쓴다. ○ 아우나 누이의 경우 ‘몇째 사제(舍弟), 몇째 사매(舍妹)’로 쓴다. ○ 아내의 경우 ‘실인(室人)’으로 쓴다. ○ 아들의 경우 ‘소자(小子) 아무개’로 쓴다. ○ 조카의 경우 ‘종자(從子) 아무개’로 쓴다. ○ 손자의 경우 ‘유손(幼孫) 아무개’로 쓴다.- 께서 갑자기 세상을 버리시어[奄忽棄背] -형제 이하의 경우 ‘세상을 떠나서[喪逝]’로 쓴다. ○ 자질(子姪), 손자의 경우 ‘갑자기 요절하여[遽爾夭折]’로 쓴다.- 가슴이 무너지고 창자가 찢어지는 슬픔과 아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痛苦摧裂 不自勝堪] -백숙부모와 고모, 형제자매의 경우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과 쓰라림을 참을 수 없습니다[摧痛酸苦不自堪忍]’로 쓴다. ○ 아내의 경우 ‘최통(摧痛)’을 ‘비도(悲悼)’로 고친다. ○ 자질ㆍ손자의 경우 ‘비도(悲悼)’를 ‘비념(悲念)’으로 고친다.- 삼가 존자(尊慈)의 특사(特賜)의 위문을 입으니, 슬프고도 감사한 하성(下誠)을 견딜 수 없습니다. -평교와 강등의 경우는 앞과 같다.- 맹춘(孟春)의 날씨가 아직은 차가운데, -한온(寒溫)은 계절에 따라 쓴다.- 삼가 생각건대[伏惟] -‘공유(恭惟)’ㆍ‘면유(緬惟)’는 앞과 같다.- 아무 벼슬의 존체(尊體)께서는 기거(起居)가 만복(萬福)하시겠지요. -평교의 경우 ‘기거’를 쓰지 않으며, 강등의 경우 ‘동지만복(動止萬福)’만 쓴다.- 아무개는 요즈음 시봉(侍奉)하면서 -부모가 없을 경우 이 구절을 쓰지 않는다.- 다행히 별다른 고통은 면하고 있으나, 직접 나아가 슬픔을 호소할 수 없으니, 목이 메이고 가슴이 미어질 뿐입니다. 삼가 글을 올리는 바입니다.[謹奉狀上] -평교의 경우 ‘진사(陳謝)’로 쓴다.- 불비(不備) -평교의 경우 앞과 같다.- 하고 삼가 글을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아무 군(郡)의 성명 아무개가 아무 벼슬의 좌전에 글을 올립니다. 근공(謹空). -평교의 경우 앞에서와 같다.   봉투와 겉봉은 앞과 같다. 조문(弔問)을 한다. -《예기》 곡례 상에 “상주는 알고 망인은 알지 못할 경우 조문은 하되 슬퍼하지는 않고, 망인은 알고 상주는 알지 못할 경우 슬퍼는 하되 조문은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단궁 상에 “죽음에 조문하지 않는 경우가 세 가지가 있으니, 외(畏)ㆍ압(壓)ㆍ익(溺)의 경우이다.” 하였는데,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외(畏)는 구렁텅이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유형이고, 압(壓)은 바위나 담벼락 밑에서 치여 죽은 유형이고, 익(溺)은 까닭없이 배를 타지 않고 헤엄을 치다가 죽은 유형이다.” 하였다. 또 《예기》 단궁 하에 “조문하는 날에는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고 음악도 연주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단궁 상에 “빈소 [주에, 삼년상이라 하였다.] 를 모시고 있을 때 멀리 있는 형제의 부음을 받을 경우 비록 시마복(緦麻服)이더라도 반드시 조문을 가나, 형제가 아닌 경우 [이성(異姓)의 경우] 에는 비록 이웃이더라도 가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삼년상 내에는 조문을 가지 않으며,……유복친(有服親)으로서 가서 곡을 해야 할 경우 죽은 친척에 대한 상복을 입고 간다.” 하였다. ○ 《예기》 소의(少儀)에 “자기보다 항렬이 높은 존장(尊長)이 상을 당했을 경우 곡할 때를 기다려야 하고 혼자서 불쑥 조문하지 않는다.” 하였고, 그 소에 “조석(朝夕)의 곡할 때를 기다려야지 아무 때나 혼자서 불쑥 조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부인의 상에는 친척이거나 그 아들의 친구로서 일찍이 마루에 올라 배면(拜面)한 자가 아닌 경우 빈소에 들어가서 술잔을 올리지 않는다.” 하였다. ○ 《광기(廣記)》에 이르기를 “무릇 죽은 자가 평교 이상인 경우 절을 하고 젊을 경우 절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상주가 두 사람 이상일 경우 아는 자에게만 조문을 한다. ○ 기년이 지났을 경우 곡을 하지 않는데, 정의가 두터울 경우 곡을 한다. 모든 조문에 다 소복(素服)을 입는다. -《가례의절》에 “금제(今制)에 국상(國喪)에만 삼베로 사모(紗帽)를 싸고 그 나머지의 경우는 허락하지 않는다. 벼슬이 있는 자는 옷은 흰 것으로 바꾸어 입을 수 있으나 갓은 바꾸어 쓸 수 없다. 벼슬이 없으면 소건(素巾)을 쓸 수 있다.” 하였다. 전물(奠物)은 향(香)ㆍ차[茶]ㆍ초[燭]ㆍ술[酒]ㆍ과일[果]을 쓴다. 내역을 적은 글발이 있으며, 음식물을 쓸 경우 별도로 제문(祭文)을 짓는다. 부의는 돈[錢]과 명주[帛]를 쓴다. 내역을 적은 글발이 있으며, 오직 친척이나 친구로서 친분이 두터운 경우에만 있는 것이다. 명자(名刺)를 갖추어 이름을 알리고, 손님과 주인이 모두 벼슬이 있을 경우 문장(門狀)을 갖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명지(名紙) -방자(榜子)- 를 마련하여 뒷면에 써서 먼저 사람을 시켜 알린 다음 예물과 함께 들여보낸다. 들어가서 곡하고 전물을 올리고 나서, 상주에게 조문하고 물러난다. 이름을 알리고 나면 상가(喪家)에서는 불을 켜고 촛불을 붙이고, 자리를 깔고서 모두 곡을 하며 기다린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주인 이하가 각기 제 위치에 나아간다.- 호상(護喪)이 나와 손님을 맞이하면 손님은 따라 들어가서 마루에 이른다. 그리고 상주 앞에 나아가 읍(揖)하며 “삼가 아무가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놀랍고 슬픈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들어가 잔이나 올리고[酹], -제전(祭奠)을 하지 않을 경우 ‘잔이나 올리고’를 ‘곡이나 하고[哭]’로 고친다.- 아울러 위례(慰禮)를 펼 것을 청합니다.” 한다. 호상이 손님을 인도하여 들어가면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서 슬피 곡하며 두 번 절한 다음 향불을 피우고 꿇어앉아서 -《가례의절》에 의하면, 손님이 여러 사람일 경우 존자(尊者) 한 사람만이 나아간다.- 차 또는 술을 따라 올리고 -집사자가 꿇어앉아서 잔을 받들어 손님에게 건네주면 손님이 받았다가 다시 집사자에게 돌려주어서 영좌 앞에 올려 놓도록 한다.-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호상이 곡을 그치게 하면 축(祝)이 꿇어앉아서 제문을 읽고 손님의 오른쪽에서 부의의 글[賻狀]을 드린다. 마치고 일어나면 손님과 주인이 다 같이 슬피 곡하고, 손님은 두 번 절한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제문은 불사른다. ○ 제전을 하지 않을 경우 분향(焚香)과 재배(再拜)만 한다.- 주인이 곡하며 나와서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면, 손님도 곡하며 동쪽을 향하여 답배(答拜)하고 앞에 나아가서 “뜻하지 않게 흉변(凶變)을 당하여 아무의 어버이 아무 벼슬께서 갑자기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죽은 사람의 벼슬이 높을 경우 ‘관사를 버리셨습니다’로 한다.- 삼가 생각건대 애모(哀慕)하는 심정을 어떻게 견뎌 내시겠습니까?” 한다. 주인이 “아무의 죄역(罪逆)이 심중(深重)하여 그 화가 아무의 어버이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삼가 제전(祭奠)과 친위(親慰)의 은혜를 함께 입고 나니 -제전을 올리지 않을 경우 ‘제전과……함께’라는 말은 없다.- 슬프고 감사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또 두 번 절하면, 손님은 답배를 한다. -살피건대, 호의(胡儀)에 “만약 조문자가 평교라면 한쪽 무릎을 내리고 손을 편 채 지팡이를 짚고 반답(半答)을 표시한다. 만약 상주가 높고 조문자가 낮다면 몸을 돌려 자리를 비켜 서서 상주가 엎드리기를 기다린다. 다음으로 낮은 자가 곧장 꿇어앉는다. 돌아 나올 적에도 모름지기 동작을 잘 조절하여 꿇어앉고 엎드리는 자세가 상주와 일치되지 않도록 한다.” 하였다.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조례(弔禮)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절할 때 손님은 답배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조문객이 왔을 때 주인이 절하여 사례하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답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의》와 《가례》에는 풍속을 따라 답배하라는 문구가 있다.” 하였다.- 또 서로 마주 보고 슬피 곡하다가, 손님이 곡을 먼저 그치고 주인을 위로하기를 “수명의 장단이란 운명에 달린 것인데, 슬퍼한들 어찌하겠습니까. 바라건대 효심을 억제하고 예제를 굽어 따르십시오.” 하고는 읍하고 나온다. 주인이 곡하며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호상은 마루까지 전송하고, 손님이 다탕(茶湯)을 들고 물러나면 주인 이하가 곡을 멈춘다. ○ 존장이 손님에게 절하는 예도 이와 같다. -만약 조문하는 예만 행한다면 각기 여차(廬次)에서 조문을 받는다. ○ 《의례》 사상례에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조문을 할 경우 휘장을 걷고 [소에 “휘장을 걷어 올렸다가 일이 끝나면 내린다.” 하였다.] 주인이 [《예기》 상대기에 “임금의 명이 있을 경우 상장(喪杖)을 버린다.” 하였다.] 침문(寢門) 밖에서 맞이하되, [주에 “침문은 내문(內門)이다.” 하였다. 《의례》 사상기(士喪記)에 “뭇 주인은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손님을 보고 곡을 하지 않은 채 먼저 문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북쪽을 향하여 선다. 조문자가 따라 들어가서 서쪽 계단으로 올라 동쪽을 향하여 서 있다가, 주인이 중정(中庭)으로 나아오면 [주에 “주인이 마루로 올라가지 않는 것은 신분이 임금보다 천하여서이다.” 하였다. 소에 “대부(大夫)의 상에 그의 아들은 마루에 올라가서 명을 받는다.” 하였다.] 조문자는 명을 전한다.[소에 “사자(使者)는 마루에 올라가서 명을 전한다.” 하였다. 주에 “명을 전하며, ‘임금께서 당신의 상 소식을 듣고 아무개를 시켜 조문하게 하였습니다. 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불행이 일어났습니까?’ 한다.” 하였다. 《국조오례의》에 “남쪽을 향하여 명을 전하며, ‘조문을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한다.” 하였다.] 주인은 곡하며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발을 구른다. 손님이 나오면 주인은 외문(外門) 밖까지 전송한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에 “부인은 영송(迎送)할 때 마루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며, 마루 아래로 내려오더라도 곡을 하지 않는다. 남자는 침문 밖으로 나와서는 사람을 보아도 곡을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부인도 평교에 있어서는 본래 마루 아래로 내려오지 않지만, 만약 군부인(君夫人)이 조문을 왔다면 마루에서 내려와 뜨락까지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되 곡은 하지 않는다. 남자 역시 평교에게는 문밖까지 나오지 않지만, 만약 임금의 명이 있다면 나와서 맞이하되 역시 곡은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예기》 단궁 상에 “공자(孔子)께서는 들판에서 곡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하였는데, 그 주에 “‘그냥 아는 사이라면 나도 들판에서 곡을 한다.’라는 말을 부자(夫子)께서 일찍이 하셨으니, 이는 반드시 영위(靈位)를 설치하고 휘장을 쳐서 예를 이루어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싫어한다는 것은 들판이나 길가가 곡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 하에 “제(齊)나라가 거(莒) 땅을 습격할 때 기량(杞梁)이 거기서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길가에서 영구(靈柩)를 맞이하여 슬피 곡하는 것을 보고 장공(莊公)이 사람을 시켜 조문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대답하기를 ‘선인(先人)의 폐려(弊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조문을 받는다면 임금님의 명에 욕됨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하였다.[《춘추좌전》에는 제나라 임금이 그의 집에서 조문한 것으로 나온다.] ○ 《예기》 단궁 상에 “문자(文子)의 상에 제상(除喪)을 하고 나서 월(越)나라 사람이 조문을 오자, 주인이 심의(深衣)에다 연관(練冠)을 쓰고 사당에 대기하고 있다가 눈물을 흘렸다. 자유(子游)가 이 광경을 보고, ‘예서(禮書)에도 없는 예이지만, 그 행동이 예에 잘 맞도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1]의례 상복의 소 : ‘서자부득위장자삼년불계조야(庶子不得爲長子三年不繼祖也)’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2]의례 상복의 소 : ‘위인후자……약자(爲人後者……若子)’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3]의례 상복의 소 : ‘부졸즉위모(父卒則爲母)’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4]의례의 소 : 상복의 ‘모위장자(母爲長子)’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5]의례 상복의 주 : ‘위처하이기야처지친야(爲妻何以期也妻至親也)’ 조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이다. [주D-006]상복 : 《의례》상복 편을 말한다. [주D-007]의례 상복의 주 : ‘첩지사여군(妾之事女君)’ 조에 대한 정현의 주이다. [주D-008]소 : 《의례》상복의 ‘무복지상이일역월(無服之殤以日易月)’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09]상복 : 《의례》상복 편을 말한다. [주D-010]소 : 《의례》상복의 ‘공위적자지장상중상대부위적자지장상중상(公爲適子之長殤中殤大夫爲適子之長殤中殤)’ 조에 대한 가공언의 소이다. [주D-011]예기 옥조(玉藻)의 주 : ‘호관현무자성지관야(縞冠玄武子姓之冠也)’ 조에 대한 정현의 주이다. [주D-012]문장(門狀) : 사대부들이 다른 사람을 방문할 때 쓰던 명자(名刺)이다. [주D-013]주 : ‘부인영객(婦人迎客)’ 조에 대한 원(元)나라 진호(陳澔)의 주이다.     문상(聞喪) 분상(奔喪)의 제구(諸具) 사각건(四脚巾) : 《주자대전(朱子大典)》에 의하면 사각건의 제도는 다음과 같다. 사방 한 폭의 삼베 한 장을 준비하여 앞쪽 양 귀에 두 개의 대대(大帶)를 달고 뒤쪽 양 귀에 두 개의 소대(小帶)를 단 다음 정수리에 덮어씌워 네 귀를 아래로 드리운다. 그리고 앞쪽의 것으로 이마를 감싸 뒤로 돌려 뒤꼭지 부분에서 대대를 묶고, 다시 뒤쪽의 귀를 거두어들여 상투 앞부분에서 소대를 묶는다. 옛날의 관(冠)을 대신하는 것인데, 복두(幞頭)라고도 부른다. 백포적삼[白布衫] 승대(繩帶) 마구(麻屨) 어버이의 상(喪) 소식을 처음 듣고는 곡을 한다. 어버이란 부모(父母)를 말한다. 곡으로써 사자(使者)에게 답하고는 또 슬피 곡한 다음 그 연고를 묻는다. -《예기》 분상에는 ‘사자(使者)’ 밑에 ‘진애(盡哀)’ 두 글자가 있고, ‘그 연고를 묻는다’는 말은 ‘또 슬피 곡한 다음’이라는 말 앞에 있다. 역복(易服)을 하고, 삼베를 찢어 사각건을 만들고 백포적삼을 입고 승대를 두르고 마구를 신는다. -살피건대, 여기에는 마땅히 머리를 푸는 절차가 있어야 하나 《가례》에 나오지 않으니, 이는 윗글의 초종(初終)의 의절에 연결시킨 것이다. 《가례의절》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는 영구(靈柩) 앞으로 나아가 재차 옷을 갈아입는다.”는 조항에 “동쪽으로 나아가 초상과 같이 머리를 풀어 흐트린다.”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처음 상 소식을 듣고는 머리를 풀고 맨발을 하지만, 분상(奔喪)을 할 때는 머리를 풀고 길을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머리를 거두어 사각건을 썼다가 집에 가서 다시 머리를 풀고 발을 벗는 것이다. 드디어 길을 떠난다. 하루에 백리(百里)를 간다. 그러나 밤에는 길을 가지 않으니, 아무리 슬프더라도 해(害)는 피하자는 것이다. -《예기》 분상에 “부모의 상에만은 별을 보고 길을 떠나고 별을 보고 길을 멈춘다.” 하였다. 중도에서도 슬픔이 북받치면 곡을 하며, 곡할 때 시끄럽고 번화한 시읍(市邑)은 피한다. 그 주경(州境)과 현경(縣境), 그 성(城)과 집이 바라보이면 다 곡을 한다. 집이 성에 있지 않을 경우 그 고을이 바라보이면 곡을 한다. 대문 안에 들어가서는 영구 앞으로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다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제 위치로 나아가 곡을 한다. 처음 옷을 갈아입을 적에는 초상 때와 같이 영구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앉아서 슬피 곡하며, 재차 옷을 갈아입을 적에는 대렴ㆍ소렴 때와 같이 한다. -《예기》 분상에 “집에 가서는 대문 왼쪽으로 들어가서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 빈소(殯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앉아 곡을 한 다음, 괄발(括髮)을 하고 한쪽 어깨를 벗는다. 그리고 마루 동쪽으로 내려와 제 위치로 나아가 서쪽을 향해 서서 곡을 하고는 [주에 “이미 빈소를 차렸으면 제 위치는 마루 아래이다.” 하였다.] 서(序)의 동쪽에서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다시 꿰어 입고 질(絰)을 갖추고 효대(絞帶)를 띤 뒤에 [주에 “집에 도착한 이튿날이 아니고 지금 질(絰)을 갖추는 것은 발상(發喪)한 지가 이미 며칠 지났으므로 여기에서 절제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소렴하기 전에 도착한 자는 집에 있던 자와 같으며, 산대(散帶)를 하지 않는 것은 시구(尸柩)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 소에 “집에 있던 자와 같다는 것은 위의(威儀)와 절도가 집에 있던 자와 같다는 말이며, 질(絰)ㆍ대(帶) 등은 본래 분상한 일수(日數)에 따라 쓴다.” 하였다.] 제 위치로 돌아가서 손님에게 절한다. 상례(相禮)하는 자가 여차(廬次)로 나아갈 것을 고한다.[주에 “여차란 의려(倚廬)이다.” 하였다.] 또 두 번째 곡을 할 적에 [주에 “집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이다.” 하였다.] 괄발을 하고 성용(成踊 발을 세 번 구르는 의식)을 한다.[주에 “모상(母喪)에는 문(免)을 한다.” 하였다.] 세 번째 곡을 할 적에도 [주에 “그 이튿날 아침이다.” 하였다.] 역시 괄발을 하고 성용을 한다.[주에 “모두 마루에 올라가서 괄발을 하고 한쪽 어깨를 벗되 마치 처음 도착한 자와 같이 한다. 반드시 두 번째 곡을 하고 세 번째 곡을 하는 것은 소렴과 대렴 때를 본뜬 것이다.” 하였다.] 모상의 분상도 모두 부상(父喪)의 분상례와 같으나, 두 번째 곡에서 괄발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분상 온 자가 집에 도착하면 집에 있는 남녀가 각기 제 위치로 나아가서 곡을 하고, 분상자는 영구 앞에 나아가서 절을 하며 곡을 한 다음, 존장(尊丈)에게는 배조(拜弔)를 하고 항렬이 낮거나 나이 어린 사람에게는 배조를 받는다. 그러고 나서 동쪽으로 나아가서 갓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버선을 벗으며, 초상 때와 같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서 어깨를 벗고 괄발을 하되, 상식(上食)할 때에는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꿰어 입고 백포두건[白布巾]을 쓰고 그 위에 환질(環絰)을 쓰며, 허리에 요질(腰絰)을 갖추어 삼 밑동을 늘어뜨리고 그 끝에 아울러 효대(絞帶)를 갖춘다.” 하였다. ○ 살피건대, 《가례》 및 《가례의절》은 《예기》와 각각 다른 점이 있어서 일단 함께 실어둔다. 집에 도착한 뒤 넷째 날에 성복(成服)을 한다. 집안 사람들과 서로 조문을 하며, 손님이 왔을 때 처음과 같이 절을 한다. 만약 아직 길을 떠날 수 없다. -《예기》 분상의 ‘아직 길을 떠날 수 없다면 [若未得行]’에 대한 소에 “이는 임금의 사명을 받들고 수행하던 일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을 경우 자기의 사사로운 일로써 공적인 일을 폐지할 수 없기 때문에, 성복을 하고서 임금이 다른 사람을 명하여 자기를 대신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하였다.- 영위(靈位)를 설치하되, 전물(奠物)은 차리지 않는다. 교의(交椅) 하나를 설치하여 시구(尸柩)를 대신하고 좌우 전후에 곡위(哭位)를 설치하여 의식대로 곡을 하되, 다만 전물은 차리지 않는다. 만약 초상집 쪽에 자손이 없다면 여기에서 의식대로 전물을 차린다. -《예기》 분상에 “분상을 하지 못할 경우 영위를 설치한 다음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성용(成踊)을 한다.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다시 꿰어 입고 수질(首絰)ㆍ요질ㆍ효대를 하고 위치에 나아가 손님에게 절을 하고 본 위치로 돌아와 성용을 한다. 또 두 번째 곡을 할 적에도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성용을 하며, 세 번째 곡을 할 적에도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성용을 한다.” 하였다. 변복(變服)을 한다. 역시 상 소식을 들은 지 나흘째이다. -살피건대, 변복은 나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아래에 성복 절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변(變)’ 자는 ‘성(成)’ 자의 잘못인 듯하다. 길에서 집에 이르기까지의 의식은 모두 위와 같다. 만약 초상집 쪽에 자손이 없다면 길에서도 아침저녁으로 영위를 설치하고 전물을 올리며, 집에 가서 변복만 하지 않을 뿐이다. 서로 조문하고 손님에게 절하는 절차는 의식대로 한다. -살피건대, 《예기》 분상에 “제상(除喪)을 하고 난 뒤에 돌아왔을 경우에도 괄발을 한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할 때 성복을 하고 분상을 하는 경우에도 마땅히 괄발의 절차는 있어야 할 듯하다. 만약 장사를 지내고 난 경우라면 먼저 묘소로 가서 곡을 하고 절한다. 묘소로 가는 자는 묘소가 바라보이면 곡을 하고 묘소에 이르러 곡을 하고 절하되 집에 있을 적의 의식과 같이 한다. 아직 성복을 하지 않았을 경우 묘소 옆에서 변복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곡을 하고 절한다. 나흘째 날의 성복은 의식대로 한다. 이미 성복을 하였을 경우도 역시 집에 돌아와 영좌 앞에서 곡을 하고 절하되 변복만 하지 않을 뿐이다. -《예기》 분상에 “분상을 하는 자가 빈(殯)하기 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경우 먼저 묘소로 가서 북쪽을 향하여 앉아 곡을 한 다음, 괄발을 하고 [주에 “위치는 동쪽이다.” 하였다.] 수질ㆍ요질ㆍ효대를 하고서 또 곡을 한다. 드디어 관을 쓰고 돌아오면 대문 왼쪽으로 들어가서 북쪽을 향하여 곡을 한 다음,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는다. 또 두 번째 곡할 적에도 괄발을 하며, 세 번째 곡할 적에도 마찬가지로 괄발을 한다. 사흘째에 성복을 한다.[소에 “분상하는 날까지 치면 나흘이 된다.” 하였다.] 만약 제상(除喪)을 하고 난 뒤에 돌아왔다면 묘소로 가서 곡을 한 다음, 동쪽 위치에서 괄발을 하고 어깨를 벗고, 수질ㆍ요질을 갖추고, 손님에게 절을 한다. 그러고 나서 또 한번 슬피 곡하고 드디어 상복을 벗는다.[주에 “묘소에서 상복을 벗고 집에서는 곡하지 않는다.” 하였다.] 자최(齊衰) 이하는 상 소식을 들으면 영위를 설치하고 곡을 한다. 존장은 정당(正堂)에서, 비유(卑幼)는 별실(別室)에서 한다. -《예기》 분상에 “자최 이하는 제 위치에 나아가 슬피 곡하고 나서 동쪽에서 문(免)을 하고 수질을 쓰고는 위치로 나아가 어깨를 벗고 발을 구른 다음, 벗었던 어깨의 소매를 꿰어 입고 손님에게 절을 한다.” 하였다. ○ 《예기》 잡기에 “집에 빈소가 있는데 [소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아직 장사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하였다.] 외상(外喪)의 소식을 접할 경우, [소에 “멀리 사는 형제의 상을 말한다.” 하였다.] 다른 방에 가서 곡을 하며, 들어가서 제전(祭奠)을 올린다.[소에 “이튿날 아침에 부모의 중복(重服)을 입고 빈소에 들어가서 전을 올림을 말한다.” 하였다.] 전을 마치고 나와서는 옷을 바꾸어 입고 위치로 나아가기를, [소에 “중복을 벗고 아직 성복하지 않은 새 상의 복을 입고 어제의 다른 방의 위치로 나아감을 말한다.” 하였다.] 처음 상 소식을 접하고 위치로 나아가던 예식처럼 한다.” 하였다. ○ 《예기》 분상에 “부당(父黨)의 곡은 사당에서 하고 모당(母黨)과 처당(妻黨)의 곡은 침전에서 하며, 스승의 곡은 사당문 밖에서 하고, 친구의 곡은 침문 밖에서 한다. 또 그냥 아는 사람의 곡은 들판에서 하되 휘장을 친다.” 하였다. ○ 관례(冠禮)ㆍ혼례(婚禮)ㆍ제례(祭禮) 중 상을 만난 경우는 모두 《예기》의 증자문(曾子問) 및 잡기에 나오므로, 여기에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 《예기》 분상에 “멀리 사는 형제의 상 소식을 이미 제상(除喪)을 하고 난 뒤에 들었을 경우에도 문(免)ㆍ단(袒)ㆍ성용(成踊)을 한다.” 하였고, 그 주에 “시마복의 경우 비록 태복(稅服)은 하지 않지만 처음 들었을 때 역시 변복(變服)은 한다.” 하였다. 만약 분상을 한다면 집에 가서 성복을 한다. 분상을 하는 자는 화려하고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 버리고, 행장이 꾸려지면 즉시 길을 떠나며, 이미 도착하여서는 자최복을 입을 자는 고을이 바라보이면 곡을 하고 대공복을 입을 자는 대문이 바라보이면 곡을 하고, 소공복을 입을 자 이하는 대문에 이르러서 곡을 한다. -《예기》 분상에 “시마는 위치에 나아가서 곡을 한다.” 하였다.- 대문 안에 들어가서는 영구 앞에 나아가서 곡을 하고 두 번 절한 다음, 성복을 하고 위치로 나아가 의식대로 곡을 하고 조문을 한다. -《예기》 잡기의 소에 “소공 이하는 주인이 성복하는 절차를 만나면 주인과 함께 성복을 하고 대공 이상은 반드시 날수를 채운 뒤에 성복을 한다.” 하였다. 만약 분상을 하지 않는다면 나흘째에 성복을 한다. 분상을 하지 않을 경우 자최복을 입을 자는 사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영위를 설치하여 회곡(會哭)을 하며, 나흘째 아침에 성복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대공복을 입을 자 이하는 처음 상 소식을 듣고 영위를 설치하여 회곡을 하며, 나흘째에 성복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매월 초하루에 영위를 설치하여 회곡을 하되, 달수가 이미 찼을 경우 다음달 초하루에 영위를 설치하고 회곡을 한 다음 복을 벗는다. 그사이에도 슬픔이 북받치면 곡을 할 수 있다.
135    사계전서(沙溪全書) 상례비요(喪禮備要)-3 댓글:  조회:3396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33권 상례비요(喪禮備要)-3 치장(治葬) 영역(塋域)을 열고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하는 제구(諸具) 표목(標木) : 일곱 개. 고자(告者) : 먼 친척이나 손님 중에서 선택하여 삼는다. 축(祝)ㆍ집사자(執事者)와 함께 모두 길관(吉冠)에 소복(素服)을 한다. 축(祝) 집사자 : 두 사람. 세숫대야[盥盆]와 수건[帨巾] : 각각 두 개. 동쪽에 두는 것은 대야받침대와 수건걸이가 있는 것으로 고자가 쓰는 것이고, 서쪽에 두는 것은 대야받침대와 수건걸이가 없는 것으로 집사자가 쓰는 것이다. 돗자리[席] : 두 개. 하나는 제석(祭席)으로 쓰고 하나는 배석(拜席)으로 쓴다. 평상[牀] 술잔[盞] : 잔대를 갖춘다. 술주전자[酒注] 찬(饌) : 주(酒)ㆍ과(果)ㆍ포(脯)ㆍ해(醢) 따위이다. 향합(香盒) : 향을 갖춘다. 향로(香爐) 축판(祝版) : 나뭇조각으로 만드는데, 길이는 1자, 높이는 5치이며, -주척(周尺)이다.- 제사 때 종이에 축문을 써서 그 위에 붙였다가 제사가 끝나면 불사른다.   ◆ 축문(祝文)의 서식(書式) 유(維) 연호(年號) 몇년 세차(歲次) 간지(干支) 몇월, 간지삭(干支朔)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토지신께 감히 분명히 고합니다. -구준(丘濬)이 이르기를 “후토(后土)의 칭호는 황천(皇天)에 대응하는 칭호이므로 사서인(士庶人)의 집에서 쓴다는 것은 참람할 듯하다. 《주자대전(朱子大典)》에 ‘토지에 제사하는 글[祀土地祭文]’이 있으므로, 지금 ‘후토’를 ‘토지’로 고칠까 한다.” 하였다.- 지금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 -또는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의 유택(幽宅)을 영건(營建)하오니, 신께서 보우하시어 후환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삼가 청작(淸酌)과 포해(脯醢)로 신께 공손히 올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천광(穿壙)의 제구 사토장(莎土匠) 기용(器用) : 이를테면 가래ㆍ도끼ㆍ삼태기 따위이다. 곡척(曲尺) : 더러는 종이를 쓰는데, 세로로 접고 나서 또 가로로 접으면 접은 한가운데의 귀가 바로 곡척과 같게 된다. 금정틀[金井機]을 재는 데 쓰는 것이다. 가는 노끈[細繩] : 10여 자. 광중(廣中)을 재는 데 쓰는 것이다. 금정틀 : 나무 네 토막으로 만드는데, 먼저 관(棺)의 길이 및 너비와 횟가루의 양을 감안하여 재단한 다음, 네 귀에 구멍을 파서 틀을 짠다. 땅 위에 놓아두고 광중(壙中)을 파내는 것이다. ○ 또 틀 위아래의 두 가로목을 하관(下棺)하기에 넉넉할 만큼 가운데를 재어서 그 밖에다 네 구멍을 뚫어 구멍마다 작은 기둥을 세워서, 하관할 때 그 기둥 밖에 세로로 긴 장대를 놓아도 안쪽으로 굴러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비하며, 또 틀의 세로 가로 네 개 나무토막 한가운데에 모두 먹물로 표시하여 사방(四方)을 알 수 있도록 한다.   폄장(窆葬)의 제구 석회(石灰) : 사면 회벽(灰壁)의 너비가 각각 8치가량이고 위에 덮는 회가 약 수삼 척의 두께라면 -영조척(營造尺)에 의한 것이다.- 1천 말이 들어가고, 사면 회벽의 너비가 대충 7치가량이라면 6백 말이 들어간다. 나머지도 다 이렇게 추산한다. 황토(黃土)와 고운 모래[細沙] : 모두 체로 쳐서 쓰는데, 각각 석회의 3분의 1의 양을 쓴다. ○ 석회ㆍ황토ㆍ모래를 버무릴 적에는 물의 양을 적절히 맞추어 쓴다. 송진[松脂] 격판(隔板) : 네 개. 석회ㆍ황토ㆍ모래를 쌓아 올리는 데 쓰는 것이다. 숯가루[炭末] : 지금은 쓰지 않기도 한다. 곽(槨) : 《가례(家禮)》에는 쓰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쓴다. 지석(誌石) 벽돌[磚] : 지석을 감추는 것이다. 명기(明器)ㆍ하장(下帳)ㆍ포(苞)ㆍ소(筲)ㆍ앵(甖) :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누가 묻기를 “명기 역시 군자(君子)로서는 그 어버이를 차마 죽었다고 여기지 못하는 뜻에서 쓰는 것입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우리 집에서는 쓴 적이 없다.” 하였다. 소판(小版) : 명기와 편방(便房)을 막는 데 쓰는 것이다. 대여(大轝) 삽(翣) 현훈(玄纁) : 현 여섯 개, 훈 네 개. -《예기(禮記)》 잡기(雜記)에 “노(魯)나라 사람의 폐백은 삼현(三玄)과 이훈(二纁)이다.” 하였다.- 길이는 각각 1발 8자인데, 집이 가난하여 갖출 수 없을 경우 현과 훈 하나씩을 써도 된다. 신주(神主) : 분(粉)ㆍ녹각교(鹿角膠)ㆍ목적(木賊)을 갖춘다. 독(櫝) : 흑칠을 하며, 신주 하나가 들어가도록 한다. 부부(夫婦)가 함께 사당에 들어가려면 그 제도를 조금 넓혀서 두 신주가 들어가도록 한다. 살피건대, 좌식(坐式)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제도이고 양창독(兩牕櫝)은 한 위공(韓魏公 한기(韓琦))의 제도인데, 가례도(家禮圖)에 모두 들어 있다. 오늘날 사람들 중에는 함께 쓰는 자도 있으나, 이는 잘못인 듯하다. 도(韜)와 자(藉) : 제도는 도(圖)에 나온다. 박판(薄板) : 회격(灰隔)의 속 덮개를 만드는 데 쓰는 것이다. 풍비(豐碑) 기둥[柱] 녹로(轆轤) 밧줄[紼] : 20발가량. 이상 네 가지는 하관 때 쓰는 것이다. -제도는 도(圖)에 나온다. 하관포(下棺布) : 15자가량. 석 달 만에 장사를 지내는데, 기일에 앞서서 장사 지낼 만한 터를 잡아 둔다. 예전에 대부(大夫)는 석 달, 사(士)는 달을 넘겨 장사 지냈으나, 오늘날은 왕공(王公) 이하 모두 석 달 만에 장사 지낸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묏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그 자리의 좋고 나쁨을 보고 잡는 것인데, 가리는 자는 더러 자리의 방위를 보고 날짜의 길흉을 가리는가 하면, 심한 자는 조상을 잘 받들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후손의 이득만 생각하니, 이는 무덤을 편히 모시려는 효자의 마음 씀씀이가 아니다. 그러나 다섯 가지 근심만은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모름지기 뒷날 도로(道路)ㆍ성곽(城郭)ㆍ구지(溝池), 세도가의 강탈, 농지 개간 -어떤 본에는 구거(溝渠)와 도로로 되어 있다.- 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또 촌락을 피하고 우물과 가마[窯]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초혼장(招魂葬)은 예가 아니라고 선유(先儒)들이 이미 논하였다.” 하였다. 살피건대, 오늘날 사람들 중에는 시신을 잃어버린 경우 의관으로 장사하는 자도 있는데, 이는 예의 본뜻이 전혀 아니다. 【기석례】 계빈(啓殯)할 기일을 알린다. -유사(攸司)가 주인에게 계빈할 기일을 청하여 손님들에게 알린다 하였다. 《가례의절(家禮儀節)》에 “묏자리를 잡고 나면 날짜를 가려서 장사에 당연히 와야 할 친인척과 요우(僚友)들에게 계빈할 기일을 미리 알린다.” 하였다. 날짜를 가려서 영역(塋域)을 열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 다음, 주인이 조곡(朝哭)을 하고 나면 집사자(執事者)를 거느리고 미리 잡아 둔 묏자리로 가서 광중을 파는데, 네 구석을 파낸 흙은 그냥 바깥으로 버리고 한가운데를 파낸 흙은 남쪽으로 버린다. 네 구석에 푯대 하나씩을 세우되, 남쪽 입구에는 두 개의 푯대를 세운다. 축(祝)이 집사자를 거느리고 가운데 푯대 왼쪽에다 남쪽을 향해 영위(靈位)를 설치한 다음, 술잔과 주전자, 주과(酒果)와 포해(脯醢)를 그 앞에 차려 놓고, -《가례의절》에 의하면, 향로와 향합도 갖다 놓는다.- 또 세숫대야와 수건 두 개를 그 동남쪽에 갖다 놓는다. 고자(告者)가 길복(吉服)을 입고 들어가서 신주 앞에서 북쪽을 향해 서면, 집사자는 그 뒤에 있다가 동쪽을 상좌로 하여 서서 모두 두 번 절하고, 고자는 집사자와 함께 모두 손을 씻는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가서 꿇어앉아 향불을 피운다.- 집사자 한 사람은 주전자를 가지고 서쪽을 향해 꿇어앉고 또 한 사람은 술잔을 들고 동쪽을 향해 꿇어앉는다. 고자가 술을 치면 도로 쏟아버리고 다시 잔을 가져다 술을 쳐서 신위 앞에 올린 다음, -《가례의절》에 의하면, 술을 땅바닥에 쏟아버리고 다시 술을 쳐서 신위 앞에 올려놓는다.-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조금 물러나 서면, 축이 축판(祝板)을 들고 고자 왼쪽에 서 있다가 동쪽을 향해 꿇어앉아 축문을 다 읽은 다음, 위치로 되돌아온다. 고자가 두 번 절하면 축 및 집사자가 모두 두 번 절하고 철상(撤床)하여 나온다. 또 주인은 집에 돌아오면 영좌 앞에서 곡을 하고 두 번 절한다.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의하면, 북쪽을 향한다.- 뒤에서도 이와 같이 한다. -살피건대, 선영(先塋)에 부장(祔葬)할 경우 별도로 주과를 차려 조상에게 고유하고, 합장의 경우 또 선장(先葬)의 신위에 고유한다. ○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위(衛)나라 사람의 부장은 봉분을 따로 만들었고 노(魯)나라 사람의 부장은 봉분을 합쳤으니, 좋은 일이다.’ 하셨다.” 하였다. 주자는 이르기를 “합장이란 묘혈(墓穴)은 같이 하되 곽(槨)은 각각 쓰는 것이다.” 하였다. ○ 정자는 이르기를 “합장은 원비(元妃)에게만 쓴다.” 하였고, 장자(張子)는 이르기를 “계실(繼室)은 따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옳다.” 하였으며, 주자는 이르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부부를 꼭 다 합장하지는 않으니, 계실은 따로 묘역을 만드는 것도 역시 좋다.” 하였다. ○ 진순(陳淳)이 묻기를 “지도(地道)는 오른쪽을 높은 자리로 삼으므로 남자를 오른쪽에 묻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제사 때에 서쪽을 상위(上位)로 삼으니, 장사 때에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드디어 광중(壙中)을 파고, 땅을 직선으로 파 내려가서 광을 만든다. 회격(灰隔)을 만든다. 광중을 다 파내고 나서는 먼저 숯가루를 광중 바닥에 깔아 두세 치를 다져서 채운 다음, 석회ㆍ고운 모래ㆍ황토 버무린 것을 그 위에 까는데, 석회 3분에 대해 고운 모래와 황토는 각각 1분의 비율이 좋다. 이들을 2, 3자의 두께로 단단히 다진다. 또 별도로 얇은 송판으로 곽(槨) 모양의 회격(灰隔)을 짜는데, 안쪽에는 역청(瀝靑)을 바르며 두께는 3치가량이다. 그 안에 관(棺)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비워둔다. 회벽(灰壁)의 높이는 관보다 4치가량 더 높게 잡는다. 이것을 석회 바닥 위에 갖다 놓고는 이에 사방으로 네 가지 물건, 즉 숯가루ㆍ석회ㆍ고운 모래ㆍ황토를 쏟아붓되, 역시 얇은 송판을 대어서 막는다. 숯가루는 바깥쪽에 쌓고 세 가지, 즉 석회ㆍ고운 모래ㆍ황토는 안쪽에 쌓되 바닥의 두께와 같게 한다. 다져서 이미 충실하게 한 다음에는 곧장 송판을 위로 조금 뽑아올린다. 그리고 다시 숯가루ㆍ석회 등을 쏟아부어 다지되 회벽과 수평을 이룬 다음 끝낸다. 이는 곽(槨)을 쓰지 않을 경우 역청을 바를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을 쓰는 것이다. -호영(胡泳)이 말하기를 “팽지당(彭止堂)은 ‘송진을 쏟아붓는 것은 북녘 지방에서는 마땅하지만 강남 지방에서는 이것을 쓰면 개미집이 되기에 알맞다.’고 하였는데, 팽지당은 반드시 상고한 바가 있을 것이니,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하였다. 지석(誌石)을 새기고, 돌 두 쪽을 사용한다. 그 한 쪽은 덮개인데 ‘아무 벼슬 아무 공(公)의 묘’라 새긴다. 벼슬이 없을 경우 그 자(字)를 써서 ‘아무 군(君) 아무 보(甫)’라 새긴다. 다른 한 쪽은 바닥이다. 거기에는 ‘아무 벼슬 아무 공(公), 휘(諱) 아무개 자(字) 아무개는 아무 주(州) 아무 현(縣) 사람인데, 아버지는 아무개 아무 벼슬, 어머니는 아무 성씨 아무 봉작(封爵)이며,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태어났다.’고 쓰고 ‘지낸 벼슬과 옮긴 직위는 무엇이고,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죽어서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아무 고을 아무 마을 아무 장소에 장사 지냈으며, 아무 성씨 아무개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은 아무개 아무 벼슬이고, 딸은 아무 벼슬 아무개에게로 출가했다.’는 내용을 서술한다. 부인은 남편이 살아 있을 경우 대개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의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묘’라 새기고, 봉작이 없을 경우 ‘아내 아무 성씨’라 새기며, 남편이 벼슬이 없을 경우 남편의 성명만 새긴다. 또 남편이 죽고 없을 경우 ‘아무 벼슬 아무 공의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 새기고, 남편이 벼슬이 없을 경우 ‘아무 군 아무 보의 아내 아무 성씨’라 새긴다. 그 바닥에는 나이 몇 살에 아무 성씨에게 출가하여 남편이나 아들로 인하여 무슨 봉호(封號)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술하는데, 봉호가 없을 경우 쓰지 않는다. 장사 지내는 날 두 쪽의 돌을 글자를 새긴 면이 서로 맞닿게 쇠끈으로 동여맨 다음, 광중 앞 가까운 지면 서너 자 떨어진 곳에 묻는다. 이는 뒷날 산등성이와 골짜기가 변천되거나 사람들이 땅을 잘못 파헤칠 것을 염려해서인데, 이 돌이 먼저 드러날 경우 누구든 그 성명을 알아보는 자가 있으면 혹 덮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에서이다. 명기(明器)를 만들고, 나무를 조각하여 거마(車馬)ㆍ복종(僕從)ㆍ시녀(侍女)를 만들어 각기 봉양할 물건을 손에 쥐이는데, 평소의 모습을 본뜨되 작게 만든다. 수효는 5품과 6품은 30벌, 7품과 8품은 20벌, 벼슬하지 않은 자는 15벌이다. 하장(下帳)을 만들고, 상장(床帳)ㆍ인석(茵席)ㆍ의탁(倚卓) 따위를 말하는데, 역시 평소의 모습을 본뜨되 작게 만든다. 포(苞)를 만들고, 대그릇[竹掩] 하나로, 견전(遣奠)하고 남은 포(脯)를 담는다. 소(筲)를 만들고, 죽기(竹器) 다섯 개로, 벼[稻]ㆍ기장[黍]ㆍ피[稷]ㆍ보리[麥]ㆍ콩[菽]을 담는다. -《의례》 기석례에 “그 열매는 모두 물에 담가서 건진다.” 하였는데, 그 주에 “끓인 물에 담근다.” 하였다. 앵(甖)을 만들고, 자기(瓷器) 세 개로, 술[酒]ㆍ초[醯]ㆍ젓갈[醢]을 담는다. ○ 이것이 비록 옛사람이 그 어버이를 차마 죽었다고 여기지 못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실제로 유용한 물건은 아니다. 그리고 포육(脯肉)은 부패하면 벌레가 일고 개미가 모여들기 때문에 더더욱 온편치 않으니, 쓰지 않아도 좋다. 대여(大轝)를 만들고, 예전의 유거(柳車)는 그 제도가 매우 상세하지만 오늘날 그렇게 만들 수가 없으므로, 세속의 것을 따라 만들어서 견고하고 편안함을 취할 뿐이다. 그 방법은 긴 장대 두 개를 써서 장대 위에다 둔테[伏免]를 덧대고 장대를 붙인 곳에 둥근 구멍을 판 다음, 별도의 작은 방상(方牀)을 만들어 그 위에 영구를 올려놓는데, 발의 높이는 2치이다. 양옆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 밖에 둥글고 긴 장부를 만들어 꽂아서 그 장부가 장대의 둥근 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바깥쪽으로 나가도록 하는데, 이 장부와 구멍 틈새가 아주 원활하도록 기름을 쳐놓아야 상여가 오르락내리락할 적에 영구가 늘상 수평을 이룰 수 있다. 두 기둥의 꼭대기 부분에 다시 네모난 구멍을 파서 횡경(橫扃)을 설치한 다음, 기둥을 꿰고 나간 횡경의 양끝에 다시 작은 경강(扃杠)을 덧대고 그 양끝에 또 횡강(橫杠)을 설치하며, 이 횡강 위에 다시 단강(短杠)을 설치하는데, 더러는 단강 위에 다시 소강(小杠)을 설치하기도 한다. 이어 새 삼[新麻]으로 큰 밧줄을 많이 꼬아놓아서 동여맬 것에 대비한다. 이는 모두 실용(實用)에 절실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므로 이 제도와 같이 할 뿐이다. 옷으로 관을 덮는 것 역시 조금 화려하게 하면 족하다. 도로에서 혹시 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을 경우 대나무로 격자(格子)를 만들어 색동끈으로 묶은 다음, 꼭대기에 마치 촬초정(撮蕉亭)과 같이 휘장을 치고 네 모서리에 술[流蘇]을 달아 드리운다. 그러나 또한 너무 높게 해서는 안 되니, 장애를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호화로워도 안 되니, 쓸데없이 미관만 취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도로가 멀 경우에는 결코 이러한 허식(虛飾)을 해서는 안 된다. 다만 많은 유단(油單 기름 먹인 삼베)으로 영구를 싸서 빗물이나 막을 뿐이다. 삽(翣)을 만들고, 나무로 틀을 짜서 네모꼴 부채처럼 만드는데, 양쪽 모서리가 높고 너비는 2자, 높이는 2자 4치로 하여, -살피건대, 삽을 만약 예기척(禮器尺)으로 만든다면 높이가 관 위로 올라와서 불편할 것이므로, 주척(周尺)을 쓰는 것이 옳다.- 흰 삼베를 씌우며, 자루의 길이는 5자로 한다. 보삽(黼翣)은 보(黼)를, 불삽(黻翣)은 불(黻)을, 화삽(畫翣)은 구름을 그리며, 가장자리에는 모두 구름 무늬를 그려 넣는데, 모두 붉은 색깔로 준격(準格)을 삼는다. -구준(丘濬)이 이르기를 “준격이란 송(宋)나라 제도에 의거한 것이다. 《주례》에는 백(白)과 흑(黑)을 일러 보불(黼黻)이라 하며, 도끼 모양으로 만든다. 예(禮)에 오직 제후(諸侯)만이 보삽(黼翣)을 쓸 수 있으므로, 오늘날 여기에 의거하여 대부(大夫)는 불삽(黻翣) 둘, 운삽(雲翣) 둘을 쓰고, 사(士)는 운삽 둘을 쓴다.” 하였다. 신주(神主)를 만든다. 정자가 말하기를 “신주를 만드는 데는 밤나무를 쓴다. 받침대[趺]는 사방 4치에 두께 1치 2푼이며, 바닥을 구멍이 뚫리도록 파내고 신주의 몸체를 꽂는다. 그 몸체는 높이 1치 2치에 너비 3치, 두께 1치 2푼이다. 윗부분에 5푼을 깎아 둥글게 만들고, 머리에서 1치를 내려와서 앞면을 깎아내고 턱을 만들어서 쪼개되, 4푼은 전식(前式)이 되고 8푼은 후식(後式)이 된다. 턱 밑은 한가운데를 파내되, 그 길이가 6치에 너비가 1치, 깊이가 4푼이다. 전식과 후식을 합쳐서 받침대 밑과 가지런하게 꽂는다. 또 그 옆을 뚫어서 가운데로 통하도록 하되, 원(圓)의 지름은 4푼인데, 턱에서 3치 6푼 아래요, 받침대에서 7치 2푼 위이다. 전면에는 분을 바른다.” 하였다. -가례도(家禮圖)에 의하면, 신주에는 주척(周尺)을 쓴다.     [계빈(啓殯)] 조조(朝祖)의 제구(諸具) 공축(輁軸) : 모양은 긴 평상과 같고 겨우 관을 실을 수 있을 정도이다. 축을 굴려서 옮기며 사람이 붙잡고 끌어당긴다. 공포(功布) : 잿물에 담가서 세척한 삼베 3자를 가지고 만드는데, 대나무로 자루를 만든다. 관 위의 먼지를 털거나 발인 때 축이 들고 역자(役者)를 지휘하는 데 쓰는 것이다.   발인(發靷)의 제구 만사(輓詞) : 두꺼운 종이로 만든 다음, 위아래에 축(軸)을 넣어서 대나무 장대에 매단다. 친구가 사(詞)를 지어 애도하는 것이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춘추좌전(春秋左傳)》에서 ‘공손하(公孫夏)가 그의 문도에게 명하여 우빈(虞殯)을 노래하게 했다.’ 하였는데, 두예(杜預)의 주에 우빈은 장송가라고 하였다. 그러니 집불자(執紼者)가 만가(輓歌)를 부르는 일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하였다. 횃불[炬] : 다소(多少)는 사정에 따라 정한다. 공포(功布) : 앞에 나온다. 방울[鐸] : 세속에서 요령(搖鈴)을 사용하는데, 군중을 지휘하는 데 쓰는 것이다. 대여(大轝) : 앞에 나온다. 초롱[燭籠] : 네 개 또는 두 개. 쇠사슬이나 대오리로 격자(格子)를 만들어 아래위로 둥근 판자를 대고 붉은 비단이나 기름먹인 종이를 씌운 다음, 그 안에 밀초[蠟燭]를 설치한다. 상여꾼[轝夫] : 상여 멜 줄을 다섯 줄로 할 경우 36인, 세 줄로 할 경우 22인 또는 20인으로 한다. 더러는 소에 메우기도 한다. 여상(舁牀) : 명기(明器)를 싣는 것이다. 영거(靈車) : 혼백(魂帛)을 받드는 것이다. 우구(雨具) : 유둔(油芚)이나 유지(油紙)로 만드는데, 대여ㆍ여상ㆍ영거ㆍ명정(銘旌)ㆍ만사 등에 모두 갖춘다. 방상(方相) : 광부(狂夫)가 하는데, 관복(冠服)은 도사(道士)처럼 꾸민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네 사람이다.- 손바닥에 곰가죽을 씌우고 황금으로 네 눈을 그리며, 검정색 상의에 붉은색 하의를 입고 창과 방패를 잡는다. 4품 이상의 경우 네 눈의 방상을 쓰고 그 이하는 두 눈의 기두(魌頭)를 쓴다. 조전(祖奠)의 제구 견전(遣奠)의 제구 의탁(倚卓) : 영좌(靈座) 앞에 설치하였던 것을 그대로 쓰는데, 상여가 쉴 때마다, 그리고 묘소에 이르러 설치한다. 흰 장막[白幕] : 남녀가 영구를 따를 적에 양옆의 가리개로 쓰는 것이다. 장막과 휘장 : 영악(靈幄)과 친척 및 빈객의 자리와 부인의 자리에 치는 것이다. 돗자리[席] : 묘에 이르러 영구를 두는 곳에 까는 것이다. 발인 하루 전날에 조전(朝奠)을 올리면서 영구를 옮길 것을 고유한다.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남자는 요질(腰絰)의 삼 밑둥을 풀어 늘어뜨린다.” 하였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오복(五服)의 친척이 모두 모여서 각기 자신의 상복을 입고 들어가 제 위치에서 곡을 한다. ○ 《예기》 상복소기에 “오랫동안 장사를 지내지 못했을 경우 주상자(主喪者)만이 복을 벗지 않고 그 나머지 마질(麻絰)ㆍ마대(麻帶)로 달수를 마치는 자는 복을 벗을 기한이 되면 그 복을 벗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주상자가 복을 벗지 못한다 함은 아들이 부모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고손(孤孫)이 조부모에게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해서 최질(衰絰)을 벗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마질ㆍ마대로 달수를 마치는 자란 기년복 이하 시마복을 입는 친척인데, 달수가 차면 복을 벗는다. 그러나 그 상복은 반드시 간수해 두었다가 장송(葬送) 때를 기다린다.” 하였다. 그러나 《개원례(開元禮)》에는 우제(虞祭)를 지내면 벗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양씨(楊氏)가 묻기를 “고례에는 계빈(啓殯)에서 졸곡(卒哭)까지 두 번이나 변복(變服)을 하는 절차가 있었는데, 《가례》에서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사마온공이 대답하기를 “날수는 매우 많은데, 오복의 친척들이 다 갓을 쓰지 않고 단(袒)과 문(免)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까 두렵기 때문에 다만 각기 자신의 상복만 입을 뿐인 것이다.” 하였다. 조전(朝奠) 때와 같이 찬품(饌品)을 차리고 축이 술을 쳐 올린 다음,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서 고유하기를 “이제 좋은 날을 맞아 영구를 옮김을 감히 고합니다.” 한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주인 이하가 모두 슬피 곡하고 두 번 절한다. 대개 예전에는 계빈의 제전(祭奠)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미 도빈(塗殯 관에다 진흙을 바르는 일)을 하지 않으니, 이 예를 적용할 곳이 없다. 그러나 절문(節文)만은 다 없앨 수 없기 때문에 이 예를 행하는 것이다. -살피건대, 오늘날 사람도 도빈을 시행할 경우에는 마땅히 고례를 써서 소렴 때와 같이 제전을 올려야 한다. ○ 《의례》 기석례에 “상축(商祝)이 영구의 먼지를 터는 데는 공포(功布)를 쓰고 덮개는 이금(侇衾 염이불)을 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동시에 당했을 경우 어머니에 대한 계빈에서 장사 때까지 아버지를 위해 전을 올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오직 어머니의 계빈의 제전과 조묘(祖廟)의 제전과 조전(朝奠)ㆍ견전(遣奠)을 차릴 따름이고, 빈궁(殯宮)에서 아버지를 위해 전을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영구를 받들어 사당에 알현시킨다. 영구를 옮기려 할 적에, -《가례의절》에 의하면, 축이 꿇어앉아서 “사당에 알현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고유한다.- 역자(役者)가 들어가면 부인은 물러나 피하고 주인과 뭇 주인은 상장(喪杖)을 거두어 쥐고 -손에 들고 땅을 짚지는 않는다.- 서서 지켜본다. 축이 상자로 혼백을 받들고 앞서서 사당 앞으로 나아가면 집사자가 전물(奠物) 및 의탁(倚卓)을 받들고 그 뒤를 따르고, 명정이 그 뒤를 따르고, 역자가 영구를 들고 -《의례》 기석례에 의하면, 공축(輁軸)을 쓴다.- 그 뒤를 따르면, 주인 이하가 곡을 하며 따른다. 여기서 남자는 오른쪽에서, 부인은 왼쪽에서 따르되, 중복자(重服者)가 앞에 서고 경복자(輕服者)가 뒤에 서서 상복으로 각기 서열을 짓는다. 시자(侍者)는 맨 뒤에 선다. 복이 없는 친척들은 남자는 남자의 오른쪽에, 여자는 여자의 왼쪽에 서서 모두 주인과 주부의 뒤를 따르는데, 부인은 모두 머리에 개두(蓋頭)를 쓴다. 사당 앞에 가서는 집사자가 먼저 돗자리를 펴면 역자가 영구를 그 위에다 머리가 북쪽으로 가도록 올려놓고 나오고, 부인은 머리에 썼던 개두를 벗는다. 축이 집사자를 거느리고 영구 서쪽에 영좌(靈座)와 전물을 동쪽을 향해 차려 놓으면, 주인 이하는 위치로 나아가 -《의례》 기석례에 의하면, 부인은 영구 서쪽에 동쪽을 향해 서고 주인은 영구 동쪽에 서쪽을 향해 선다.- 서서 슬피 곡한 다음 울음을 그친다. 이 예는 대체로 평소 외출할 적에 반드시 존자(尊者)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는 도리와 같은 것이다. -살피건대, 사당에 알현할 적에는 사당의 중문(中門)을 여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만 예문에 고사(告辭)가 없다. ○ 《가례의절》에 “오늘날 사람들이 사는 집이 대개 협착하여 영구를 공축으로 끌어 옮기기 어려우므로, 이제 혼백을 받드는 것으로 영구에 대신할까 한다. 비록 고례는 아니지만 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혼백으로 영구를 대신할 경우 전물과 의탁을 받들어 앞서 나아가고 명정이 그다음에, 혼백이 또 그다음에 따라가며, 사당 앞에 가서는 혼백 상자를 돗자리 위에 북쪽을 향해 올려놓는다.” 하였다. 드디어 대청으로 옮긴다. 집사자가 대청에다 휘장을 치고 역자가 들어가면 부인은 물러나 피한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축이 꿇어앉아서 “영구를 대청으로 옮기겠습니다.”라고 고유한다.- 축이 혼백을 받들고 영구를 인도하여 오른쪽으로 돌면 주인 이하 남녀가 앞에서처럼 곡을 하며 뒤를 따라 대청으로 나아간다. 집사자가 돗자리를 펴고 나면 역자가 영구를 돗자리 위에다 머리가 남쪽으로 가도록 올려놓고 나온다. 축은 영좌 및 전물을 영구 앞에 남쪽을 향해 차려 놓고, 주인 이하가 위치로 나아가 앉아서 곡을 하는데, 거적을 깔고 앉는다. -《가례의절》에 “오늘날 사람들이 반드시 대청이나 마루를 갖추고 있지는 않으므로, 영구를 두는 곳이 곧 대청이니, 꼭 대청이 아니어도 괜찮다.” 하였다. 이에 대곡(代哭)을 하고, 염하기 전에 했던 것처럼 해서 발인 때까지 한다. 친척과 빈객이 전(奠)과 부의(賻儀)를 드린다. 초상의 의식처럼 한다. 기물들을 벌여 놓고, 방상(方相)이 맨 앞에 있고, 그다음에 명기(明器)ㆍ하장(下帳)ㆍ포(苞)ㆍ소(筲)ㆍ앵(甖)을 여상(舁牀)에 싣고, 그다음에 명정을 받침대를 떼어내고 들고, 그다음에 영거(靈車)로 혼백과 향불을 받들고, 그다음은 대여(大轝)인데 대여 옆에 삽(翣)을 사람들에게 잡도록 한다. -《의례》 기석례에 “사당에 알현하는 날에 이미 명기를 벌여 놓았으므로, 밤에는 거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다시 벌여 놓는다.” 하였다. 저물녘에 조전(祖奠)을 진설한다. 찬품은 조전(朝奠) 때와 같다. 축이 술을 치고 나서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영원히 옮겨가는 예에 좋은 때는 머물러 있지 않으니, 이제 구거(柩車)를 받들어 삼가 길을 떠나려 합니다.” 하고는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이 나머지의 의식은 모두 조전(朝奠)ㆍ석전(夕奠)의 의식과 같다. ○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만약 영구가 다른 곳에서 돌아와서 장사를 지낸다면 떠나는 날은 조전(朝奠)만을 차려 곡하고 떠날 것이며, 장지에 가서 조전(祖奠)과 아래의 견전례(遣奠禮)를 갖춘다.” 하였다. 그 이튿날 영구를 옮겨 상여에 나아간다. 상여꾼이 대여를 뜰 안에 들여놓고 기둥 위의 횡경(橫扃)을 벗기면 집사자가 조전(祖奠)을 철상하고, 축이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서 “이제 영구를 옮겨 상여에 나아가므로 감히 고합니다.”라고 고유한다. 드디어 영좌(靈座)를 옮겨 상여 옆에 두면 부인은 물러나 피한다. 역부(役夫)를 불러 영구를 옮겨 가서 상여에 실은 다음 빗장을 지르고 쐐기를 박아 밧줄로 든든하게 동여맨다. 주인은 영구를 따라 곡을 하면서 내려와 싣는 과정을 보고, 부인은 휘장 안에서 곡을 한다. 다 실었으면 축이 집사자를 거느리고 영좌를 영구 앞으로 옮겨 남쪽을 향해 앉힌다. 이에 견전(遣奠)을 차리면, 찬품은 조전(朝奠) 때와 같으나 포(脯)가 있다. 부인은 참여하지 않는다. -고의(高儀)에 의하면, 축이 꿇어앉아서 “상여를 이미 메워서 유택(幽宅)으로 떠납니다. 이에 견전례를 드려 영원히 고별하는 바입니다.” 한다.- 견전을 마치고 나면 집사자가 포를 거두어 대그릇[苞]에 담아서 여상(舁牀) 위에 갖다 둔 다음 드디어 전물(奠物)을 철상한다. 축이 혼백을 받들어 수레에 타고 향불을 피운다. 별도의 상자에 신주를 담고 혼백은 그 뒤에 놓는다. 이때에 이르러 부인은 개두(蓋頭)를 쓰고 휘장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와 선 채로 곡을 한다. 집을 지킬 자는 곡을 하여 작별하는데, 슬피 울고 두 번 절한 다음 돌아선다. 존장은 절하지 않는다. 영구가 떠나면, 방상(方相)이 앞길을 인도하는데, 명기를 벌여 놓을 때의 순서대로 한다. 주인 이하 남녀가 곡을 하며 걸어서 뒤를 따르고, 사당에 알현하던 순서대로 따르는데, 대문을 나서서는 흰 장막으로 양옆을 가린다. 존장이 그 뒤를 따르고, 복이 없는 친척들이 또 그 뒤를 따르며, 빈객들이 또 그 뒤를 따른다. 모두 거마(車馬)를 타며, 친척과 빈객 중 더러는 먼저 묘소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더러는 성곽 밖에 나와 곡하며 절하는 것으로 작별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친척과 빈객이 성곽 밖 길가에 장막을 치고 영구를 멈추게 한 다음 제전(祭奠)을 올린다. 집에서 올리는 의식과 같다. 도중에 슬픔이 북받치면 곡을 한다. 만약 묘소가 멀다면 쉬는 곳마다 영구 앞에 영좌를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곡하고 제전을 올리며 밥을 먹을 때에는 상식(上食)을 한다. 밤에는 주인과 그 형제 모두가 영구 곁에서 자고 친척들도 함께 숙위(宿衛)한다.     급묘(及墓)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제구(諸具) -모두 앞에서와 같다.   ◆ 축문의 서식 유(維) 연호(年號) 몇년 세차(歲次) 간지 몇월, 간지삭(干支朔)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감히 토지신께 분명히 고합니다. 지금 아무 벼슬 아무 봉작(封爵) 아무 시호(諡號) -혹은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의 유택을 이곳에 정하오니, 신께서 잘 보우하시어 후환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삼가 청작(淸酌)과 포해(脯醢)로 신께 공손히 올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제주(題主)하는 제구 글씨 잘 쓰는 사람 벼루 붓 먹 축문 세숫대야 수건[帨巾] 탁자 : 둘. 하나는 붓과 먹을 올려놓고 하나는 세숫대야와 수건을 올려놓는다.   ◆ 축문의 서식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고자(孤子) -모상(母喪)에는 ‘애자(哀子)’, 부모가 다 죽었을 경우에는 ‘고애자(孤哀子)’, 승중(承重)의 경우에는 ‘고손(孤孫)’ㆍ‘애손(哀孫)’ㆍ‘고애손(孤哀孫)’이라 일컫는다. 이하 모두 이와 같다. ○ 《예기》 잡기 상에 “제사에는 ‘효자’ㆍ‘효손’이라 일컫고 초상에는 ‘애자’ㆍ‘애손’이라 일컫는다.” 하고, 그 주에 “졸곡 뒤에는 길제(吉祭)가 된다.” 하였다. 지금 살피건대, 《의례》와 《가례》의 경우 부제(祔祭)에서 비로소 ‘효’라 일컬으므로, 《의례》를 따르는 것이 옳다. 또 살피건대, 예법에 상인(喪人)은 비록 벼슬이 있다 해도 벼슬을 일컫지 않는다.- 아무개는 감히 현고(顯考) 아무 벼슬 아무 봉작 아무 시호 부군(府君)께 분명히 고합니다. -어머니의 경우 ‘현비(顯妣) 아무 봉호 아무 성씨’라 한다. 승중 조고비(祖考妣)도 같다. 백숙부모(伯叔父母)에게 고할 경우 “종자(從子) 아무개는 감히 현백부(顯伯父) 아무 벼슬 부군, 현백모(顯伯母)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감히 분명히 고합니다.” 한다. 숙부모(叔父母)도 같다. 형에게 고할 경우 “아우 아무개는 감히 현형(顯兄) 아무 벼슬 부군께 분명히 고합니다.” 하고, 형수에게 고할 경우 “아무개는 감히 현수(顯嫂)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분명히 고합니다.” 한다. 누나에게 고할 경우 “아우 아무개는 감히 현자(顯姊) 아무 성씨께 분명히 고합니다.” 한다. 아내에게 고할 경우 “남편 아무개는 망실(亡室)에게 분명히 고합니다.” 하는데, 주자(朱子)는 “망실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 일컬었다. 아우에게 고할 경우 “형은 아우 아무개에게 고하노라.” 하고, 아들에게 고할 경우 “아버지는 아들 아무개에게 고하노라.” 한다. 조카ㆍ손자 및 이 밖의 친척에도 다 이와 같다. ○ 《주원양제록(周元陽祭錄)》에 의하면, 남자 상주가 없어서 부인이 시부모에게 제사할 경우 “신부(新婦) 아무 성씨는 현구(顯舅) 아무 벼슬 아무 봉작 아무 시호, 현고(顯姑) 아무 성씨께 제사드립니다.” 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제사할 경우 “주부 아무 성씨는 현벽(顯辟) 아무 벼슬 아무 봉작 아무 시호께 제사드립니다.” 한다. 《예기》 곡례 하에 “아내가 남편을 ‘벽(辟)’이라 한다.” 하였다.- 형체는 무덤으로 돌아가고 정신은 사당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신주가 이미 이루어졌으니, 삼가 바라건대[伏惟] -항렬이 낮거나 어린 사람에게 고할 경우 ‘복유(伏惟)’ 두 글자를 뺀다.- 존령(尊靈) -항렬이 낮거나 어린 사람의 경우 ‘유령(惟靈)’이라 이른다.- 께서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르시어 여기에 의지하소서. 도착하기 전에 집사자가 먼저 영악(靈幄)을 설치하고 묘도(墓道)의 서남향으로 설치하며, 의탁(倚卓)을 놓는다. 친척 및 빈객의 상차(喪次)를 설치하고 영악의 10여 걸음 앞에 자리를 잡아 남자는 동쪽에, 여자는 서쪽에 설치한다. 상차의 북쪽은 영악과 서로 대응되게 하되 모두 남쪽을 향하게 한다. 부인의 악차(幄次)를 설치한다. 영악 뒤 묘혈 서쪽에 자리잡는다. 방상(方相)이 도착하고, 창으로 묘혈의 네 구석을 찍는다. 명기(明器) 등이 도착하고, 묘혈 동남쪽에 북쪽을 윗자리로 하여 진열한다. 영거(靈車)가 도착하면 축이 혼백을 받들어 악좌(幄座)로 나아가고, 신주 상자도 혼백 뒤에 둔다. 드디어 전물을 차리고 물러나온다. 전물은 주과와 포해이다. -영좌 앞 탁자에 차린다. 영구가 도착하면, 집사자가 먼저 묘혈 남쪽에 돗자리를 펴고 영구가 도착하는 대로 영거에서 내려 돗자리 위에 놓되, 머리는 북쪽으로 둔다. 집사자가 명정을 가져다 장대를 제거하고 영구 위에 올려놓는다. 주인 남녀가 각기 제 위치로 나아가 곡을 하고, 주인과 모든 남자는 묘혈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서고 주부와 모든 부녀자는 묘혈 서쪽 악차 안에서 동쪽을 향해 서되, 모두 북쪽을 윗자리로 한다. 의식은 길에서 행할 때와 같다. 빈객들은 절하여 하직하고 돌아가며, -《가례의절》에 의하면, 빈객은 영구 앞에 나아가 곡하고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절하면 빈객은 답배(答拜)한다. 이에 하관(下棺)한다. 먼저 나무장대를 회격(灰隔) 위에 가로로 걸쳐놓은 다음, 밧줄 네 가닥을 영구 밑의 고리에 걸어 묶지 않은 채 아래로 내려서 영구가 장대 위에 닿으면 밧줄은 뽑아버리고 별도로 고운 세포(細布)나 생견(生絹)을 접어서 영구 밑에 씌워 관을 내려놓되, 내려놓은 다음에는 다시 뽑아 내지 않고 위로 남은 부분만 잘라 버린다. 만약 영구에 고리가 없다면 곧 밧줄을 영구 밑 양쪽 머리에 씌워 영구를 내리고, 영구가 가로 장대 위에 놓이면 이에 밧줄은 뽑아버리는데, 접은 베를 쓰는 것은 앞에서와 같다. -《국조오례의》에 “먼저 긴 장대 두 개를 묘혈 입구 좌우에 세로로 놓아 고정시키고 나서 또 장대 네 개를 긴 장대 위에 가로로 놓고, 다시 장대 두 개를 회격 위에 가로로 놓는다. 이에 밧줄 두 가닥으로 관의 양쪽 머리를 한 겹 동여매어 가로 장대 위에 들어다 놓고서 사방(四傍)을 바로잡은 다음, 밧줄 두 끝으로 세로로 동여매어 긴 장대 위에 놓는다. 그러고는 한쪽 끝마다 두 사람이 잡아당긴다. 가로 장대를 빼어내고 일시에 소리를 지르며 차츰차츰 관을 내려서 회격에까지 내려가면 곽(槨) 위의 가로 장대를 빼낸다. 하관(下棺)할 때 더러는 두 기둥을 세우고 녹로를 달아 쓰기도 하는데, 아주 편리하고 좋다.” 하였다.- 대체로 하관할 적에는 아주 자세히 살피며 공을 들여야 하고 잘못하여 기울거나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주인과 형제도 마땅히 곡을 그치고 직접 들여다 보아야 한다. 하관을 하고 나서도 재차 구의(柩衣)와 명정을 정돈하되 평정(平正)을 기해야 한다. -《예기》 상대기의 주에 “삽(翣)을 곽(槨)에 넣을 경우 관을 가리게 된다.” 하였다. 《개원례》에 의하면, 삽은 묘혈 안 양옆에 기대어 묻는다. ○ 《예기》 증자문에 “‘부모의 상을 함께 당했을 경우 어느 쪽을 먼저 하고 어느 쪽을 나중에 합니까?’ 하고 물었는데,[이 구절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에 ‘함께[幷]란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가깝기가 동일한 조부모가 같은 날에 죽었음을 이른다.’ 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장사는 가벼운 쪽을 먼저 지내고 무거운 쪽을 나중에 지내며, 제전을 올릴 적에는 무거운 쪽을 먼저 올리고 가벼운 쪽을 나중에 올린다.’ 하였다.” 하였다. 《예기》 상복소기의 주에 “어머니의 장사에도 참최복을 입는 것은 무거운 쪽을 따라서이니,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감히 변복을 하지 못한다.” 하였다. 주인이 폐백을 넣고 나면, 현(玄)과 훈(纁)의 길이는 각각 1발 8자씩이며, 주인이 받들어 관 옆에 놓고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 위치에 있는 이들이 모두 슬피 곡한다. -《개원례》에 의하면, 주인이 현과 훈을 축에게 건네주고 두 번 절하면 축이 받들어 관 동쪽에 올린다.- 그 밖의 금옥(金玉)ㆍ보완(寶玩)은 모두 넣을 수 없으니, 이는 죽은 사람에게 누(累)가 되기 때문이다. 회격(灰隔)의 안팎 덮개를 덮고, 먼저 회격의 대소(大小)를 가늠한 다음, 얇은 판자 한 쪽을 마련하여 옆으로 네 회벽(灰壁)과의 사이가 꼭 들어맞도록 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들어내어 관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유회(油灰)로 메운다. 그러고 나서는 그 위에 역청(瀝靑)을 빙빙 돌아가며 조금씩 부어서 빨리 굳도록 하면 판자를 곧장 투과하지는 못한다. 두께가 약 3치가량 되면 그만 바깥 뚜껑을 씌운다. -만약 역청을 쓰지 않는다면 바깥 덮개만 써도 된다. 석회를 채우고, 석회ㆍ황토ㆍ모래 세 가지를 반죽한 것은 밑으로 들어가고 숯가루는 위에 있도록 하되, 각기 바닥과 네 측면의 두께에 비해 갑절이 되도록 한다. 그런 다음 술을 뿌리고 발로 밟아서 채우는데, 관 속이 울릴 것을 염려하여 감히 다지지는 않고 다만 양을 많이 써서 제대로 채워지기를 기다린다. 이에 흙을 채워서 점차 다지고, 흙을 내리되 1자가량 될 때마다 관 안이 울리지 않도록 곧장 손으로 가볍게 다진다. 묘소 왼쪽에서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앞의 의식과 같이 지내고, 축판(祝版)도 앞의 형식과 같다. 명기(明器) 등을 저장하고, 흙을 절반쯤 채웠을 때 명기ㆍ하장(下帳)ㆍ포(苞)ㆍ소(筲)ㆍ앵(甖)을 편방(便房)에 저장하고 판자로 그 문을 막는다. -《예기》 상복소기에 “명기를 진열하는 도리는 진열은 많이 하되, 매장은 줄이는 것이 좋다.” 하였다. 지석(誌石)을 내리고, 묘소가 평지에 있을 경우 묘혈 안 남쪽의 가까운 지점에 먼저 벽돌을 한 겹 깔고 지석을 그 위에 놓은 다음, 또 벽돌로 사방을 둘러싸고 그 위를 덮는다. 묘소가 산비탈 높은 곳에 있을 경우에는 묘혈 남쪽 두어 자 떨어진 곳에 땅을 너댓 자 깊이로 파고 이상의 방법대로 묻는다. 다시 흙을 채우고 단단하게 다진다. 흙을 내릴 적에는 역시 1자가량을 기준으로 하되, 촘촘하고 단단하게 다진다. 신주(神主)를 쓴다. 집사자가 탁자를 영좌의 동남쪽에 서쪽을 향하게 갖다 놓고 벼루ㆍ붓ㆍ먹을 올려놓은 다음, 탁자 맞은편에 세숫대야와 수건을 앞에서와 같이 갖다 놓는다. 주인이 그 앞에 북쪽을 향해 서면, 축이 손을 씻고 신주를 내어다 탁자 위에 눕혀 놓는다. 글씨 잘 쓰는 사람을 시켜 손을 씻고 서쪽을 향해 서서 쓰도록 하는데, 먼저 함중(陷中)에는 아버지의 경우 ‘고(故) 아무 벼슬 아무 공(公) 휘(諱) 아무 자(字) 아무 몇째 배항(排行)의 신주’라 쓰고, 분면(粉面)에는 ‘고(考) 아무 벼슬 아무 봉작 아무 시호 부군(府君) 신주’라 쓰며, -가례도(家禮圖)에 이르기를 “예경(禮經) 및 《가례》 구본(舊本)에는 조고(祖考) 위에 다 ‘황(皇)’ 자를 썼으나, 대덕(大德 원(元) 성종(成宗)의 연호) 연간에 성부(省部)에서 이를 금지하였으니, 이는 ‘황’ 자를 피휘한 것이다. 이제 ‘현(顯)’ 자를 쓰는 것이 옳다.” 하였다.- 그 아래 왼쪽 옆에 -살피건대, 왼쪽이란 글씨를 쓰는 사람을 기준으로 말한다. 가례도 및 《이정전서(二程全書)》의 도(圖)로 증거할 수 있다.- ‘효자 아무개 봉사(奉祀)’라고 쓴다. 어머니의 경우 ‘고(故) 아무 봉작 아무 성씨 휘 아무 자 아무 몇째 배항의 신주’라 쓰고, 분면에는 ‘비(妣)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신주’라 쓴다. -‘비’ 자 앞에도 ‘현(顯)’ 자를 붙이는 것이 옳다.- 옆에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벼슬과 봉작이 없을 경우 생시에 부르던 칭호를 쓴다. -이를테면 처사(處士)ㆍ수재(秀才) 따위이다. 아내와 자식 및 방친(傍親)의 칭호는 앞의 제주(題主) 축문에 나왔다. ○ 《주자대전》에 “어떤 사람이 ‘서자가 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신주를 쓸 적에는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고 묻자, 주자가 ‘적모(嫡母)를 피휘하려면 「망모(亡母)」라고만 쓰면 된다.’고 대답하고, 또 ‘방주(旁註)는 손위에게나 쓰는 것이므로, 손아래의 경우 꼭 쓸 필요는 없다.’ 하였다.” 하였다. 살피건대, 방친은 비록 손위라 하더라도 역시 방주를 쓸 필요는 없다.- 신주를 다 쓰면 축이 이를 받들어 영좌 위에 모셔 놓고 혼백을 상자 안에 넣어 그 뒤에 둔 다음 향불을 피우고 술을 쳐 올리고, -살피건대, 《가례》에 별도로 찬품을 차린다는 문구가 없으나, 《국조오례의》에는 제주의 전(奠)이 있으며 오늘날 세속에서 더러 시행하기도 한다. ○ 《가례의절》에 의하면, 주인 이하가 모두 꿇어앉는다.- 축판을 들고 주인 오른쪽으로 나와 꿇어앉아서 읽는다. 다 읽고 나서 품에 품고 -《가례의절》에 의하면, 축판은 불사르지 않는다.- 일어나 제 위치로 되돌아오면 주인 -《가례의절》에는 주인 이하로 되어 있다.- 이 두 번 절하고 슬피 곡한 다음 곡을 그친다. 축이 신주를 받들고 수레에 오르면, 혼백상은 그 뒤에 둔다. -살피건대, 덮개[韜]ㆍ깔개[藉]ㆍ독(櫝)은 여기에서 쓰는 것이 마땅하나, 《가례》에는 반곡(反哭)을 하고 신주를 받들고 들어가 자리에 나아간 다음에 비로소 독에 담는다고 하였으니, 의심스럽다. 집사자가 영좌를 철거하여 드디어 집으로 떠나온다. 주인 이하가 곡을 하며 뒤를 따르되 올 때의 의식과 같이 한다. 묘문(墓門)을 나와서는 존장이 거마(車馬)를 타고, 백 보(步)가량 나와서는 항렬이 낮거나 어린 사람도 거마를 탄다. 다만 자제 한 사람을 남겨두어 흙을 채우는 과정과 봉분을 만드는 일을 지켜보게 한다.   [주D-001]예기 상대의 주 : ‘보삽이불삽이화삽이(黼翣二黻翣二畫翣二)’ 조에 대한 원(元)나라 진호(陳澔)의 주이다.     성분(成墳) 평토(平土)한 뒤에는 곧장 금정틀[金井機] 안에 숯가루나 석회를 조금 깔아서 뒷날 수묘(修墓)나 합장(合葬)을 할 적에 참고토록 한다. 그러고 나서 한가운데에 표목(標木)을 세우고, 또 노끈 한끝을 표목에 맨 다음, 그 한끝을 잡고 돌려 지름 16, 7자, 합장의 경우 20여 자의 둘레를 잡아 봉분을 만드는 바탕으로 삼는다.   성분의 제구(諸具) 사토(莎土) 작은 빗돌 : 높이 4자, 너비 1자 이상, 두께는 너비의 3분의 2이다. 머리는 동그스름하게 만들고, 앞면에 글씨를 새기는데, 지석의 덮개와 같은 형식이다. 세계(世系)와 성명, 행적만 간략히 서술하여 왼쪽에 새기는데, 뒷면 오른쪽까지 넘겨서 돌아가며 새길 수도 있다. ○ 부인의 경우 남편의 장사 때까지 기다렸다가 세우는데, 앞면은 남편이 죽었을 적에 지석 덮개에 새기는 것과 같이 새긴다. 계체석(階砌石) 석상(石牀) : 합장의 경우 두 벌을 갖추기도 하고 한 벌을 쓰기도 하는데, 너비는 형편에 따라 적절히 한다. 석인(石人) : 두 개 망주석(望柱石) : 두 개. 크기는 형편에 따라 적절히 한다. 봉분의 높이는 4자로 한다. 그 앞에 작은 빗돌을 세우는데, 높이는 역시 4자이며, 받침돌의 높이는 1자가량으로 한다. -석인(石人)ㆍ석상(石牀)ㆍ망주석(望柱石) 역시 봉분 앞에 설치한다.     반곡(反哭) 주인 이하가 영거를 받들고 길에서 천천히 걸으며 곡한다. 돌아올 적에는 어버이가 저곳에 계실 것으로 여기며, 슬픔이 북받치면 곡을 한다. 집에 도착하면 곡을 한다. 대문이 바라보이면 곡을 한다. 축이 신주를 받들고 들어가 영좌에 올려놓으면 집사자가 먼저 영좌를 본래 설치하였던 곳에 설치하고, 축이 신주를 받들고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 독(櫝)에 담는다. 혼백 상자도 함께 모셔 내어 신주 뒤에 놓는다. 주인 이하가 대청에서 곡을 하고, 주인 이하는 대문 앞에 이르러 곡을 하며 들어가서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 대청에서 곡을 하는데, 부인은 먼저 마루로 들어가서 곡을 한다. 드디어 영좌 앞에 나아가 곡을 하며, 한번 슬피 울고 그친다. 조문객이 있을 경우 처음과 같이 절을 한다. 빈객 중 친밀한 이가 이미 집에 돌아갔다가 반곡을 기다려 다시 조문함을 이른다. 기년복과 대공복을 입는 자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되, -《예기》 상대기에 “기년복을 입는 자는 상을 마치도록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다. 이것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나 아내의 상을 당한 경우를 말한다.” 하였다.- 잔치에 참석하지는 않는다. 소공 이하의 복을 입는 자와 대공복을 입는 자로서 함께 살지 않는 자는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 -《의례》 기석례의 주에 “우제나 졸곡 때에는 다시 와서 제사에 참여한다.” 하였다.     우제(虞祭) 우제의 제구 세숫대야[盥盆] : 두 개. 한 개는 받침대를 갖추고, 한 개는 받침대가 없다. 수건[帨巾] : 두 개. 한 개는 걸이를 갖추고, 한 개는 걸이가 없다. 탁자(卓子) : 두 개. 한 개는 주전자 및 잔대와 술잔을 올려놓고, 한 개는 축판을 올려놓는다. 큰 상[大床] : 한 개. 찬품을 차리는 데 쓰는 것이다. 술병[酒甁] : 한 개. 병걸이를 갖춘다. 술주전자[酒注] : 한 개. 술잔[酒盞] : 두 개. 잔대를 갖춘다. 화로(火爐) : 한 개. 부젓가락을 갖춘다. 탕그릇[湯甁] 향합(香盒) 향로 : 앞에 나온다. 향안(香案) 초[燭] : 한 쌍. 촛대를 갖춘다. 축판(祝板) 과실(果實) 소채(蔬菜) : 살피건대,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정(鼎)과 조(俎)의 수는 홀수이고, 변(籩)과 두(豆)의 수는 짝수이니, 이는 음양의 이치이다.” 하고, 그 주에서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정과 조에 담는 것은 하늘에서 나는 것을 주로 하는데 하늘에서 나는 것은 양(陽)에 속하기 때문에 그 숫자를 홀수로 하고, 변과 두에 담는 것은 땅에서 나는 것을 주로 하는데 땅에서 나는 것은 음(陰)에 속하기 때문에 그 숫자를 짝수로 하는 것이다.” 하였다. 여기에 근거해 볼 때 어육(魚肉)은 홀수로 쓰는 것이 옳고 과실과 소채는 짝수로 쓰는 것이 옳다. 포(脯) 해(醢) 수저[匙箸] 육물(肉物) 어물(魚物) 면식(麵食) 미식(米食) : 이상은 한 그릇[楪]씩이다. 국[羹] 밥[飯] : 한 그릇[椀]씩이다. 살피건대, 《가례》에 찬품을 차리는 데 있어 밥과 국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명(器皿) 진열에 이미 수저가 있고, 또 축문에 ‘자성(粢盛)’이라는 문구가 있으며, 졸곡에서 찬품을 올릴 적에 주인은 국을 올리고 주부는 밥을 올리기를 우제 때의 진설과 같이 하게 되어 있고 보면, 밥과 국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간(炙肝) 초(醋) 청장(淸醬) 모사(茅沙) : 띠풀 한 줌가량. 길이는 8치이다.   ◆ 축문의 서식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고자(孤子) -부제(祔祭)에서 상주가 종자(宗子)가 아닐 경우 종자가 일컫는 대로 일컫는다.- 아무개는 -부제에서는 아버지를 제부(隮祔)할 경우 이 아래에 다만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현증조고(顯曾祖考) 아무 벼슬 부군(府君)께 손자 아무 벼슬을 제부합니다.’ 하고, 어머니를 제부할 경우 ‘현증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손부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제부하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한다. ○ 죽은 이에게 고할 경우 아버지에게는 ‘현고(顯考) 아무 벼슬 부군께 슬피 부사(祔事)를 올리려고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께로 나아갑니다.’ 하고, 어머니의 경우 ‘현비(顯妣)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슬피 부사를 올리려고 현증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로 나아갑니다.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한다.- 현고 아무 벼슬 부군께 -어머니의 경우 ‘비(妣)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 한다. 승중 조고비도 같다.- 감히 분명히 고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하는 경우, 남편이 아내에게 고하는 경우, 방친에게 고하는 경우는 모두 앞의 제주(題主) 축문에 나온다. 살피건대, 《예기》 상복소기에 “부인의 초상에는 우제와 졸곡은 그 남편과 아들이 주제(主祭)하지만, 부사의 경우는 시아버지가 주제한다.” 하였다.[이 설은 앞의 상주를 세우는 조항 밑에 나온다.] 일월(日月)이 머무르지 않아서 어느덧 초우(初虞) -재우(再虞)의 경우 ‘재우’, 삼우(三虞)의 경우 ‘삼우’, 졸곡의 경우 ‘졸곡’, 소상의 경우 ‘소상’, 대상의 경우 ‘대상’, 담제의 경우 ‘담제’라 한다.- 가 다가왔습니다. 자나깨나 애모하는 마음 편치 못하여[夙興夜處哀慕不寧]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할 경우 ‘슬픈 생각 연이어지니 그 마음 불타는 듯하다[悲念相續 心焉如燬]’ 하고, 형이 아우에게 고할 경우 ‘비통한 생각이 불현듯이 떠오르니 이 심정 어이 견디랴[悲痛猥至 情何可處]’ 하고, 아우가 형에게 고할 경우 ‘비통한 마음 그칠 수 없으니 지극한 정의 어찌하리오[悲痛無已至情如何]’ 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고할 경우 ‘슬픔과 쓰라림 스스로 감당할 수 없으니[悲悼酸苦 不自勝堪]’라 한다. ○ 고의(高儀)에 “졸곡의 경우 ‘땅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으매 오장이 문드러진다[叩地號天五情糜潰]’라 한다.” 하였다. ○ 소상의 경우 ‘숙흥야처’ 아래에 ‘조심하고 삼가서 몸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小心畏忌不惰其身]’라는 여덟 글자가 있다.- 삼가 -아들에게 고하는 경우, 아우에게 고하는 경우, 아내에게 고하는 경우는 ‘이에[玆以]’라 한다.- 청작 서수로 슬피 협사를 드리오니[哀薦祫事], -형에게 고하는 경우에는 ‘이 협사를 드리오니[薦此祫事]’라 하고, 아들에게 고할 경우, 아우에게 고할 경우, 아내에게 고할 경우에는 모두 ‘이 협사를 진설하니[陳此祫事]’라 한다. ○ 재우의 경우 ‘우사(虞事)’, 삼우의 경우 ‘성사(成事)’라 한다. 졸곡은 같으나 다만 그 아래에 ‘내일 조고 아무 벼슬 부군께 제부합니다.’ 할 뿐이다. 어머니의 경우 ‘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라 한다. 소상의 경우 ‘상사(常事)’, 대상의 경우 ‘상사(祥事)’, 담제의 경우 ‘담사(禫事)’라 한다.-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초우(初虞)] 장사 지낸 날 한낮에 우제를 지내는데, 더러 묘소가 멀 경우에는 이날을 넘기지만 않으면 된다. 만약 집과의 거리가 하룻밤 이상 묵어야 한다면 초우는 여사(旅舍)에서 행례(行禮)한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만약 여사에서 행례한다면 준비를 다 할 수 없으므로, 합문(闔門)ㆍ계문(啓門)ㆍ희흠(噫歆)ㆍ고이성(告利成)의 네 절차는 생략해도 된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부모의 상을 함께 당했을 경우 먼저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나서 그 우제와 부제를 지내지 않고 아버지의 장례와 우제 및 부제를 기다렸다가 지낸다.” 하고, 그 소에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나서 곧장 우제와 부제를 지내지 않고 아버지의 장사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의 우제를 먼저 지내고 나서 어머니의 우제를 지내되, 각기 제 상복을 입는다는 것이다. 소상과 대상에도 다 그렇게 하는데, 제사를 마치고 나서는 중복(重服)으로 되돌아온다.” 하였다. 주인 이하가 다 목욕을 하고, 혹시 날이 저물어서 미처 못할 경우 대충 씻어서 청결만 기하여도 된다. -《의례》 사우례(士虞禮)의 기(記)에 “목욕은 하되 빗질은 하지 않는다.” 하고, 그 주에 “기년복 이하는 빗질을 한다.” 하였다. 집사자가 기명을 벌여 놓고 찬품을 차린다. 세숫대야와 수건 각각 두 개를 서쪽 계단 서쪽에다 남쪽을 윗자리로 삼아 갖다 놓는데, 동쪽의 것은 대야받침대와 수건걸이를 갖추고 서쪽의 것은 갖추지 않는다. 모든 상례(喪禮)에서 다 이렇게 한다. 또 술병 한 개를 병걸이와 함께 영좌(靈座) 동남쪽에 놓은 다음, 탁자를 그 동쪽에 놓고 주전자 및 잔대를 올려놓으며, 화로와 탕그릇[湯甁]은 영좌 서남쪽에 놓는다. 다시 탁자 한 개를 그 서쪽에 놓은 다음, 축판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향안(香案)을 마루 한가운데에 놓아서 향로에 향불을 피우고, 띠풀을 묶고 모래를 모아서 향안 앞에 놓는다. -사발[椀]을 쓰기도 한다. 만약 날이 저물었으면 촛대를 갖추고 촛불을 켠다.- 찬품을 차리는 것은 조전(朝奠) 때와 같은데, -살피건대 ‘조(朝)’ 는 ‘삭(朔)’ 자인 듯하다. 또 찬품을 차릴 큰 상을 설치한다.- 마루의 문밖 동쪽에 진설한다. [채소ㆍ과일ㆍ술ㆍ찬품을 차린다.] 영좌 앞 탁자 위에 차리는데, 수저는 안쪽 한가운데에 놓고, -안쪽이란 곧 상의 북쪽 첫째 줄이다.- 술잔은 그 서쪽에, 초그릇[醋楪]은 그 동쪽에 놓으며, -다음 둘째 줄은 비워두어 진찬(進饌)에 대비한다.- 과일은 바깥쪽에 놓고, -바깥쪽이란 곧 넷째 줄이다.- 소채는 과일 안쪽에 놓는다. -곧 셋째 줄이다.- 술병에 술을 담아놓는다. -화로에 숯불을 피워서 술과 찬품을 모두 따끈따끈하게 데운 다음, 합(盒)에 담아 내와 문밖 큰 상 위에 올려놓는다. 축이 -독(櫝)을 연다.- 신주를 영좌로 모셔 내면 주인 이하가 모두 들어가서 곡을 한 다음, 주인 및 형제가 상장(喪杖)을 짚고 방 밖에 서 있다가 제관(祭官)과 함께 모두 들어가 영좌 앞에서 곡을 한다. 그 위치는 모두 북쪽을 향하여 복의 경중으로 서열을 삼아 복이 무거운 자가 앞에 서고 가벼운 자가 뒤에 서며, 존장은 앉고 항렬이 낮거나 어린 사람은 선다. 또 남자들은 동쪽에 있으면서 서쪽을 윗자리로 삼고 부인들은 서쪽에 있으면서 동쪽을 윗자리로 삼아, 줄마다 각기 장유(長幼)의 순서로 서열을 이룬다. 시자(侍者)는 맨 뒤에 선다. 강신(降神)을 하고, 축이 곡을 그치게 하면 주인이 서쪽 계단에서 내려와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은 다음 영좌 앞에 나아가서 향불을 피우고 두 번 절한다. 집사자가 모두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은 다음 한 사람은 술병을 열어 주전자에 술을 채운 다음 서쪽을 향하여 서고, -주인의 오른쪽에 선다.- 한 사람은 탁자 위의 술잔을 받들어 동쪽을 향하여 주인의 왼쪽에 서면, -주인 및 집사자는 모두 꿇어앉고 주전자를 든 자가 주전자를 건네준다.- 주인이 술잔에 술을 치고 나서 주전자를 집사자에게 건네준 다음, 왼손으로 잔대를 잡고 오른손으로 잔을 잡아 모사(茅沙)에 붓고[酹] 잔대와 잔을 집사자에게 건네준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나 뒤로 조금 물러나 두 번 절하고 제 위치로 돌아온다. -살피건대, 《가례》에 우제ㆍ졸곡ㆍ대상ㆍ소상ㆍ담제에는 모두 참신(參神)의 문구가 없고 다만 부제(祔祭)에만 있다. 그런데 그 아래 주에 특별히 ‘조고(祖考)와 조비(祖妣)에게는 참신을 한다.’고 하였고 보면, 새 신주에게는 참신의 예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생각건대, 이는 아마 3년 안에는 상주가 늘상 그 곁에서 거처하기 때문에 참신을 할 의리가 없고 들어가서 슬피 곡만 한다는 것이다. 구준이 보충해 넣은 것은 《가례》의 본뜻이 아닌 듯하다. 축이 찬품을 차리면, 집사자가 돕는다. -소반으로 어물(魚物)ㆍ육물(肉物)ㆍ적간(炙肝)ㆍ면식(麵食)ㆍ미식(米食)ㆍ갱반(羹飯)을 받들고 따라 올라가 영좌 앞에 나아간다. 육물은 술잔의 남쪽에 올리고, 면식은 육물의 서쪽에 올리고, 어물은 초접(醋楪)의 남쪽에 드리고, 미식은 어물의 동쪽에 올린다. 그러고 나서는 둘째 줄의 빈 곳에는 국을 초접의 동쪽에 올리고 밥을 술잔의 서쪽에 올린다. 살피건대, 우제에 밥과 국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우선 《가례》에 나오는 시제(時祭)의 찬품을 차리는 서차에 따라 이와 같이 진설하기는 하나,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초헌(初獻)을 하고, 주인이 주전자를 놓아둔 탁자 앞에 나아가 주전자를 들고 북쪽을 향하여 선다. 집사자 한 사람이 영좌 앞에 놓인 잔대와 잔을 가져와서 주인의 왼쪽에 서면, 주인이 술잔에 술을 치고 주전자를 탁자 위에 도로 갖다 놓은 다음 영좌 앞으로 나아가서 -집사자가 잔을 받들고 따라간다.- 북쪽을 향하여 선다. 주인이 꿇어앉으면 집사자도 -주인의 왼쪽- 꿇어앉아서 잔대와 잔을 올린다. 주인이 잔을 받아 모사(茅沙) 위에 세 번 술을 부은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집사자가 잔을 받아 받들고 영좌 앞으로 나아가 본래 놓였던 곳에 올린다. -이에 밥그릇 뚜껑을 벗겨서 그 남쪽에 놓는다. 《의례》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에 “축이 술잔[爵]을 씻어 형(鉶)의 남쪽에 놓고 드디어 대[敦]의 뚜껑을 열어 대의 남쪽에 뒤집어놓는다[卻].” 하였는데, 그 주에 “각(卻)은 뒤집는 것이다.” 하였다. ○ 주인이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뒤로 조금 물러나 꿇어앉으면, 이하 사람들도 모두 꿇어앉는다.- 축이 축판을 잡고 주인의 오른쪽으로 나와 서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읽은 다음 일어서면, -축판을 향안에 놓는다.- 주인이 곡을 하고 -주인 이하가 모두 한참 동안 곡을 한다.- 곡을 그친다. -주인이 두 번 절하고 위치로 되돌아온다. 아헌(亞獻)을 하고, 주부(主婦)가 하는데, 예식은 초헌과 같다. 다만 축문을 읽지 않고 절을 네 번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살피건대, 《가례》의 주부 조항에 “주부란 죽은 사람의 아내를 말한다.” 하였으니, 삼년상을 치를 동안 무릇 주부라고 하는 것은 모두 죽은 사람의 아내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이르기를 “동쪽에서는 희준(犧尊)에 술을 치고 서쪽에서는 뇌준(罍尊)에 술을 치매 모름지기 부부가 함께 종사해야지 어떻게 모자가 함께 종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 볼 때 초상의 경우 죽은 사람의 아내가 당연히 주부가 되고, 우제와 부제 이후의 모든 제사의 예절에는 반드시 부부가 친히 하는 것이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종헌(終獻)을 하고, 가까운 친척이나 귀한 손님 중 남자 또는 여자 한 사람이 올리는데, 예식은 아헌과 같다. 유식(侑食)을 하고 나서는, 집사자가 주전자를 들고 나아가 잔에 첨작을 한다. -메에 숟가락을 꽂는데 숟가락은 자루가 서쪽으로 가도록 하고, 젓가락은 똑바로 올려놓는다. ○ 살피건대, 모든 제사에서 유식을 하고 나서는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을 똑바로 올려놓는다는 문구가 있으나, 《가례》의 우제ㆍ졸곡ㆍ부제ㆍ소상ㆍ대상ㆍ담제에는 다 같이 없고, 《가례의절》에도 없으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주인 이하가 모두 밖으로 나오고, 축이 문을 닫는다. 주인은 문 동쪽에 서쪽을 향하여 서고 항렬이 낮거나 나이 어린 남자는 그 뒤에 북쪽을 윗자리로 삼아 두 줄로 서며, 주부는 문 서쪽에 동쪽을 향하여 서고 항렬이 낮거나 나이 어린 부녀자도 그 뒤에 북쪽을 윗자리로 삼아 두 줄로 선다. 존장은 다른 곳에 가서 쉰다. 시간은 밥 한 그릇을 먹을 시간이다. -곧 밥 한 그릇을 아홉 술 정도 떠서 먹는 시간이다. ○ 문이 없는 곳에서는 발을 내린다. 축이 문을 열면 주인 이하가 다시 들어가서 곡을 한 다음 사신(辭神)한다. -찬품을 거둔다. 축이 문앞으로 나와 북쪽을 향하여 서서 세 번 ‘어흠’ 하고는 이에 문을 열면, -또는 발을 걷는다.- 주인 이하가 모두 안으로 들어가 위치로 나아간다. 집사자가 차(茶)를 올리고, -우리나라 풍속에는 물로 대신한다. ○ 《가례의절》에 의하면, 수저의 옆에 놓는다.- 축이 주인의 오른쪽에 서쪽을 향하여 서서 공양(供養)의 예가 끝났음을 고한 다음 신주를 거두어 주독(主櫝)을 씌워서 본래의 곳으로 모시면, 주인 이하가 두 번 절하고 슬피 곡한 다음 곡을 그치고, -축이 축문을 내걸어 불사르고 축판만 남겨둔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밖으로 나와서 위치로 간다. 집사자가 철상을 한다. 축이 혼백을 묻고, 축이 혼백을 모시고 집사자를 거느리고 외진 곳 정갈한 땅에 묻는다. -구준(丘濬)이 이르기를 “만약 길이 멀어서 여사(旅舍)에서 제례를 치른다면 반드시 삼우(三虞)를 지낸 뒤 집에 가서 묻어야 한다.” 하였다. 조석전(朝夕奠)을 끝낸다.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고, 슬픔이 북받치면 초상 때와 같이 곡을 한다. 유일(柔日)을 만나면 재우(再虞)를 지내고, 천간(天干)에 을(乙)ㆍ정(丁)ㆍ사(巳)ㆍ신(辛)ㆍ계(癸)가 든 날이 유일이다. 그 예절은 초우와 같은데, 다만 하루 전에 기명들을 벌여 놓고 찬품을 차려두었다가 이튿날 일찍 일어나 소과(蔬果)와 주찬(酒饌)을 차리고 날이 밝으면 거행한다. 축이 신주를 영좌로 모셔 낸다. -축문은 ‘초우’에 나온다.- 만약 묘소가 멀어서 중도에 유일을 만난다면 역시 여사에서 거행한다. 강일(剛日)을 만나면 삼우(三虞)를 지낸다. 천간에 갑(甲)ㆍ병(丙)ㆍ무(戊)ㆍ경(庚)ㆍ임(壬)이 든 날이 강일이다. 그 예절은 재우와 같다. -축문은 초우에 나온다.- 만약 묘소가 멀어서 역시 도중에 강일을 만난다면 그대로 넘기고 꼭 집에 와서 이 제사를 거행한다.     졸곡(卒哭) 《예기》 단궁에 “졸곡을 ‘성사(成事)’라고 한다. 이날에는 길제(吉祭)로써 상제(喪祭)를 바꾼다.” 하였다. 그러므로 이 제사 때부터 점차 길례(吉禮)를 쓰는 것이다. -《예기》 상복소기에 “장사를 빨리 지낼 경우 우제는 빨리 지내나, 졸곡은 석 달이 지나야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이미 장사를 빨리 지낸 이상 우제 역시 빨리 지낸다. 우제는 신을 안정시키는 것이므로 늦출 수가 없다. 그러나 졸곡만은 반드시 석 달을 기다려서 지내야 한다.” 하였다. 졸곡의 제구(諸具) -모두 우제의 제의(祭儀)와 같다. 삼우 후 강일을 만나면 졸곡을 지낸다. 하루 전에 기명을 벌여 놓고 찬품을 차린다. 모두 우제와 같은데, 오직 현주병(玄酒甁) 한 개를 술병 서쪽에 더 놓는 것이 다르다. 그 이튿날 일찍 일어나 소과(蔬果)와 주찬(酒饌)을 차리고, 모두 우제와 같은데, 다만 정화수(井華水)를 길어다 현주로 쓰는 것이 다르다. -정화수란 곧 이른 아침에 맨 처음 뜬 물이다. ○ 예주(禮註)에 “백성들에게 근본을 잃지 않도록 가르쳐 주려는 것이지, 실제로 술잔에 치지는 않는다.” 하였다. 날이 밝아 축이 신주를 모셔내면 주인 이하가 모두 안으로 들어가 곡을 하고 강신(降神)을 한다. 모두 우제와 같다. 주인과 주부가 찬품을 올린다. 주인은 어물과 육물을 받들고 주부는 손을 씻고 닦은 다음 면식(麵食)과 미식(米食)을 받들며, 주인은 국을 받들고 주부는 밥을 받들어 올리되 우제 때와 같이 차린다. 초헌(初獻)을 한다. 모두 우제와 같은데, 오직 축이 축판을 들고 주인의 왼쪽으로 나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읽는 것이 다를 뿐이다. -축문은 초우에 나온다. 아헌(亞獻)ㆍ종헌(終獻)ㆍ유식(侑食)ㆍ합문(闔門)ㆍ계문(啓門)ㆍ사신(辭神)을 한다. -찬품을 거둔다. 모두 우제와 같은데, 오직 축이 서쪽 계단 위에서 동쪽을 향하여 서서 공양의 예가 끝났음을 고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살피건대, 《의례》에는 졸곡 때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을 삼에서 칡으로 바꾸게 되어 있으나, 《가례》에는 생략하였다. 오늘날 비록 옛것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더라도 계빈(啓殯) 때 풀어 늘어뜨린 요질을 이때에 와서는 묶어야 한다. 이로부터 아침저녁의 사이에는 슬픔이 북받쳐도 곡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침저녁의 곡은 한다. -《의례》의 정현(鄭玄)의 주에 “졸곡을 지내고 나면 다시는 안방에서 음식물을 올리지 않는다.” 하였다. ○ 《주자대전》에서 이계선(李繼善)이 묻기를 “《예기》 단궁에는 부제(祔祭)를 지내고 난 뒤에는 아침저녁으로는 곡과 절만 하고 초하루에나 제전(祭奠)을 올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횡거(張橫渠) 선생은 3년 안에는 궤연(几筵)을 철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마다 지내는 제전이 있는 것이라고 하고, 사마온공(司馬溫公) 역시 아침저녁으로 음식물을 올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이러고 보면 아침저녁의 제전은 마땅히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변함없이 행해야 하니, 예경(禮經)과는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이러한 경우는 오늘날 행하고 있는 예(禮)가 돌아가신 어버이를 후대함에도 나쁘지 않거니와, 또 참람되다고 볼 염려도 없다. 우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주인과 형제는 소식(蔬食)에 물을 마시고 채과(菜果)를 먹지 않으며, 잘 때 돗자리를 깔고, -《예기》 간전(間傳)에 “돗자리 양 가장자리의 널부러진 부들[芐] 지푸라기를 자르기만 하고 접어넣어 마무리하지는 않는다.” 하였다.- 목침을 벤다. -의려(倚廬)의 경우 기둥으로 중방(中枋)을 받쳐 올리고 창문 양옆을 가렸던 이엉을 잘라 버린다.[《예기》 상대기 및 간전에 나온다.] 【상대기】 제부(諸父)와 형제의 초상에는 졸곡을 지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간다. -양복(楊復)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우제와 졸곡에 벌써 상복을 갈아입었고 소상ㆍ대상ㆍ담제에도 모두 상복을 갈아입었으나, 오늘날 풍속에는 상복을 갈아입는 일이 없이 초상에서 대상까지 줄곧 최복만 입으니, 옛 제도가 아니다. 《서의(書儀)》와 《가례》가 세속을 따른 것은 간소한 쪽을 좇아서이다.” 하였다. ○ 율곡(栗谷)이 말하기를 “무릇 삼년상 안에는 고례(古禮)의 경우 제사를 폐지하였으나, 주자(朱子)의 말씀에 ‘옛사람은 거상(居喪)을 할 적에 최마(衰麻)의 옷을 벗지 않았고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출입 거처와 언어 음식도 평소와 아주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종묘의 제사를 비록 폐지하더라도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사이에 아무 유감이 없었으나, 오늘날의 거상은 옛사람과 다르므로, 이 한 가지를 폐지한다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하였다. 주자의 말씀이 이와 같기 때문에 아직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예법에 준하여 제사를 폐지하되, 졸곡을 지낸 뒤에는 사시(四時)의 절사(節祀) 및 기제(忌祭)와 묘제(墓祭)는 복이 가벼운 자를 시켜서 지내도록 하고 찬품(饌品)은 평상시보다 줄여서 헌작(獻爵)을 한 번으로 하는 것이 옳다. 주자는 상중(喪中)에 묵최(墨衰)로 사당에 천신(薦新)을 하였으나, 오늘날 사람은 속제(俗制)의 상복으로 묵최를 대신하여 입고 출입하므로, 복이 가벼운 자가 없을 경우 상주가 속제의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도 될 듯하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기년상과 대공상의 경우 장사를 지낸 뒤에는 마땅히 평상시와 같이 제사를 지내야 하며, 다만 음복은 받지 않는다.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시제는 폐지해도 되지만, 기제와 묘제는 위의 의식과 같이 약식으로 지낸다. 시마상과 소공상의 경우 성복 전에는 제사를 폐지하고, [오복(五服)의 친속은 성복을 하기 전에는 비록 기제라 하더라도 역시 지내지 않는다.] 성복을 한 뒤에는 마땅히 평상시와 같이 제사를 지내야 하며, 다만 음복은 받지 않는다. 복중의 시사(時祀)는 마땅히 현관(玄冠)ㆍ소복(素服)ㆍ흑대(黑帶)로 지내야 한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아내의 상을 당하여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았거나 이미 장사는 지냈어도 아직 복을 벗지 않았을 경우,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 제사를 지낼 경우 어떤 옷을 입어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하다. 우리 집은 사시(四時)의 정제(正祭)는 폐지했어도 절사(節祀)는 지낸다. 심의(深衣)와 양삼(涼衫) 따위를 입는 것도 예제(禮制)에 없는 것을 이치에 맞게 만든 것이다. ‘기(忌)’라는 것은 ‘상사(喪事)의 나머지’이니, 제사를 지내더라도 혐의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정침(正寢)에 이미 궤연(几筵)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낼 곳이 없으므로 잠시 정지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살피건대, 오늘날 아내의 상의 궤연이 정침에 있고 보면, 율곡의 말대로 기제는 형편에 따라 대청에서 지내는 것도 역시 나쁠 것은 없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 부모가 죽은 경우 남의 위소(慰疏)에 답하는 서식 -적손(嫡孫)과 승중자(承重者)도 같다.   아무개는 이마를 조아려[稽顙] 두 번 절하고 말씀드립니다.[言] -강등(降等)의 경우 ‘머리를 조아려[叩首]’라 하고 ‘언(言)’ 자를 뺀다. 유씨(劉氏)가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이마를 조아린[稽顙] 뒤에 절한다’고 할 경우 머리를 땅에 닿게 하는 것을 ‘계상(稽顙)’이라 하는데, 이는 삼년상의 예이다. 비록 평교(平交)나 강등의 경우라 하더라도 역시 이와 같이 하는데, 다만 ‘언’ 자만 뺀다. 이것은 어째서이겠는가? 고례에 조문을 받을 때는 유천(幼賤)을 불문하고 반드시 절을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아무개는 죄역(罪逆)이 심중(深重)한데도 스스로 죽어 없어지지 않아서 그 화가 선고(先考) -어머니의 경우 ‘선비(先妣)’라 하고, 승중의 경우 할아버지는 ‘선조고(先祖考)’, 할머니는 ‘선조비(先祖妣)’라 한다.- 께 미쳤습니다. 슬피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매 오장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어 보아도 돌이킬 수가 없는데, 일월(日月)이 멈추지 않아서 어느덧 순삭(旬朔)이 지나갔습니다. -계절에 따라 일컬음은 앞과 같다.- 혹독한 천벌과 죄악의 고통으로[酷罰罪苦]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치우친 천벌과 죄악의 깊음[偏罰罪深]’이라 하고,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경우 어머니도 아버지와 같다.- 온전히 살기를 바랄 수 없었으나, 그날로 은혜를 입어[卽日蒙恩], -평교 이하의 경우 이 네 글자를 뺀다.- 궤연(几筵)을 잘 모시고 구차히 목숨을 보존하고 있던 차에, 삼가 존자(尊慈)께서 내려주신 위문을 입고 나니 슬프고 감격한 나머지 하성(下誠)을 견딜 수가 없으나, -평교의 경우 ‘인은(仁恩)께서 굽어 내려주신 위문을 받고 보니 슬프고 감사하매 하회(下懷)가 간절할 뿐입니다.’ 하고, 강등의 경우 ‘특별히 위문을 받드니 슬프고 감사한 마음 참으로 깊습니다.’ 한다. ○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무릇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 친구로서 위장(慰狀)을 보내어 조문하지 않는다면, 이는 친구 간에 서로 돌보아주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므로, 예의상 먼저 글을 띄우는 것은 옳지 않으며, 부득이 먼저 띄우게 된 경우에는 ‘삼가 존자께서……견딜 수가 없으나’라는 구절은 뺀다.” 하였다.- 호소할 길이 없어서 까무라칠 지경입니다. 삼가 소(疏) -강등의 경우 ‘장(狀)’이라 한다.- 를 올리기는 하나, 황미(荒迷) 중이라 두서가 없습니다. 삼가 소 -강등의 경우 ‘장(狀)’이라 한다.- 를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고자(孤子) -어머니 상인 경우 ‘애자(哀子)’, 부모가 모두 죽었을 경우 ‘고애자(孤哀子)’, 승중자의 경우 ‘고손(孤孫)’ㆍ‘애손(哀孫)’ㆍ‘고애손(孤哀孫)’이라 일컫는다. 살피건대, 《한묵전서(翰墨全書)》에 “심상(心喪) 중일 경우 ‘신심제(申心制)’ 혹은 ‘심상(心喪)’, 담복(禫服)을 입고 있을 경우 ‘거담(居禫)’, 조부모의 상일 경우 ‘최복(衰服)’, 처상(妻喪)일 경우 ‘기복(朞服)’이라 일컫고 그 밑에 성명을 갖추어 쓴다.” 하였다.- 성명 아무개는 소를 올립니다. 아무 벼슬 좌전(座前). 근공(謹空). ○ 평교 이하의 경우 이 두 글자를 뺀다.   봉투와 겉봉은 모두 앞에서와 같다. 【가례의절】 ◆ 조부모나 부모가 죽은 경우 남의 조부(弔賻)와 회장(會葬)에 사례하는 소(疏)의 견본 서식 아무개는 이마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말씀드립니다. 아무개는 죄역(罪逆)이 심중(深重)한데도 스스로 죽어 없어지지 않아서 그 화(禍)가 선고(先考) -어머니의 경우 ‘선비(先妣)’, 승중의 경우 조부는 ‘선조고(先祖考)’, 조모는 ‘선조비(先祖妣)’라 한다.- 께 미쳤습니다. 다행히 대사(大事)를 무사히 치른 것은 모두 제친(諸親) -친척이 아닌 경우 ‘제현(諸賢)’이라 한다.- 의 상부상조하는 힘을 입어서였습니다. 이미 하조(下弔) -평교 이하의 경우 ‘임조(臨弔)’라 한다.- 를 하시고 나서 또 부의(賻儀)와 제전(祭奠)을 보내주시고 -부의뿐일 경우 ‘부의’, 제전뿐일 경우 ‘제전’이라 한다.- 장례에까지 또 욕림(辱臨)하여 주시니, -송장(送葬)을 하지 않았을 경우 이 구절을 뺀다.- 은덕의 고마움 참으로 깊어 갚을 바를 모르겠으나, 몸이 슬픔 속에 있어서 직접 전달치 못하고 삼가 대신 사례하는 바입니다. 황미(荒迷) 중이라 두서가 없습니다. 삼가 소를 올립니다. 연호 월 일에 고자 성명 아무개는 소를 올립니다. 아무 벼슬 좌전. 근공.   봉투와 겉봉은 모두 앞에서와 같다.   [주D-001]예주(禮註)에……하였다 : 예주에 대한 전거를 상고하지 못하였다. ‘백성들에게 근본을 잃지 않도록 가르쳐주려는 것[敎民不忘本]’이란 구절은 《예기》 향음주의(鄕飮酒義)에 나온다.     [부제(祔祭)] 《의례》 사우례(士虞禮)에 “그 차례로써 제부(隮祔)한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부제는 반드시 소목(昭穆)을 지킨다. 할아버지가 없을 경우 한 등급을 건너뛰어 오른다.[中一以上]” 하였는데, 그 소에 “‘중(中)’이란 건너뛰는 것을 말하고 ‘한 등급을 오른다’ 함은 할아버지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말하는데 손자는 할아버지에게로 올라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할아버지가 없을 경우 고조할아버지에게 제부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할아버지가 죽어서 아직 소상과 대상을 치르지 않았는데 손자가 또 죽었을 경우에도 할아버지에게 제부한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며느리의 부제의 경우 시아버지가 제주(祭主)가 된다.” 하였는데, 그 주에 “며느리란 적부(嫡婦)와 서부(庶婦) 모두를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부제의 제구 -앞에서와 같다. 졸곡 이튿날 부제를 지낸다. 졸곡의 제품(祭品)들을 철수하고 나서, 【사우례】 목욕을 하고 나서 빗질을 하고 손톱을 깎는다. -살피건대,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망건(網巾)이 치사(緇纚)와 흡사하다.” 하였으나, 고례(古禮)에는 다만 치사를 벗는 절차만 명시되어 있고 다시 쓰는 시기는 말하지 않았다. 부제 때에 이르러서 주인 이하가 목욕을 하고 빗질을 하는 법이고 보면, 이때에 와서 치사를 쓰는 것이 옳을 듯하나, 쓰라는 명문(明文)이 없다. 《개원례》와 두씨(杜氏)의 주장이 비록 고례와 같지 않기는 하나, 상주가 머리를 거두어 올리는 절차가 있고 보면, 치사를 쓸 근거가 될 듯하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곧장 기명(器皿)을 벌여 놓고 찬품(饌品)을 차린다. 기명은 졸곡 때와 같으며, 오직 사당에다 진설하는 것이 다르다. 사당의 마루가 좁을 경우 대청에다 진설해도 되니, 형편에 따라서 진설하는 것이다. 죽은 이의 조고비(祖考妣)의 영위(靈位)를 한가운데에 남쪽을 향하게 설치하되 서쪽을 윗자리로 삼고, 죽은 이의 영위를 그 동남쪽에 서쪽을 향하게 설치한다. 모상(母喪)의 경우 조고(祖考)의 영위는 설치하지 않는다. 주병(酒甁)과 현주병(玄酒甁)은 동쪽 계단 위에 놓고, 화로와 탕병(湯甁)은 서쪽 계단 위에 놓는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사당에 진설할 경우 탁자 한 개를 서쪽 계단 위에 설치하는데, 그것은 새 신주를 독에 담아 올려놓기 위한 것이다. 다른 곳에 진설할 경우 탁자 둘을 설치하는데, 하나는 조고비의 신주를 독에 담아 올려놓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새 신주를 독에 담아 올려놓기 위한 것이다.- 찬품을 차리는 방법은 졸곡과 같으나, 세 상으로 나누어 차린다. 어머니의 경우 두 상으로 나누어 차리고, 조비가 두 사람 이상일 경우 친한 조비에게 차린다. -《예기》 상복소기의 소에 “친한 조비란 시아버지를 낳은 조비를 말한다.” 하였다. 그 이튿날에 일찍 일어나서 소과(蔬果)와 주찬(酒饌)을 차리고, 모두 졸곡과 같다. 날이 밝으면 주인 이하가 영좌 앞에서 곡을 한 다음, 주인과 형제가 모두 계단 아래에 상장(喪杖)을 기대어 놓고 들어가서 곡을 하되 슬픔을 다하고 그친다. ○ 할아버지를 잇는 종자(宗子)의 상에 대해 후계가 될 적사(嫡嗣)가 주상(主喪)이 되어야만 이 예를 쓴다. 만약 상주가 종자가 아니면 모두 죽은 사람의 할아버지를 잇는 종자가 이 부제를 주관한다. 사당에 나아가서 신주를 받들고 나와 영좌에 모셔 놓고, -《가례의절》에 의하면, 주인 이하가 모두 간다. 축이 발을 걷고 독(櫝)을 연 다음 부제할 할아버지의 신주를 받들어 영좌에 놓는다. 내집사자(內執事者)는 할머니의 신주를 받들어 영좌에 놓되, 서쪽을 윗자리로 한다. 만약 다른 장소에 있으면 -《가례의절》에 의하면, 꿇어앉아서 고하기를 “신주를 청하여 아무 장소에 나아가고자 이에 그 독을 받들고 떠납니다.”라고 한다.- 서쪽 계단 위의 탁자 위에 놓은 다음에 독을 연다. ○ 만약 상주가 종자가 아니면서 할아버지를 잇는 종자와 따로 산다면, 종자가 대신 할아버지에게 아뢰고 허위(虛位) -지방(紙榜)을 쓴다.- 를 설치하여 제사 지내며, 제사를 마치면 치운다. 다시 새 신주를 받들고 사당으로 들어가 영좌에 모셔 놓는다. 주인 이하가 다시 영좌가 있는 곳에 나아가 곡을 한다. 축이 신주독을 받들고 사당의 서쪽 계단 위의 탁자 쪽으로 나아가면, 주인 이하가 곡을 하며 따라가기를 영구를 따라가던 순서대로 한다. 문에 이르러 곡을 그치면, 축이 앞의 의식과 같이 독을 열고 신주를 꺼낸다. ○ 만약 상주가 종자가 아니라면, 상주와 주부 이하만 다시 맞이한다. 차례대로 벌여 서서, 우제의 의식과 같다. ○ 만약 상주가 종자가 아닐 경우 종자와 종주부(宗主婦)가 양 계단 밑에 갈라 선 다음, 상주는 종자의 오른쪽에 서고 상주부(喪主婦)는 종주부의 왼쪽에 서되 어른의 경우 앞에 서고 젊은이의 경우 뒤에 선다. 참신(參神)을 하고, 위치에 있는 자는 모두 두 번 절하고 조고비(祖考妣)를 참알(參謁)한다. 강신(降神)을 하면, 만약 상주가 종자가 아닐 경우 종자가 거행하는데, 의식은 모두 졸곡과 같다. 축이 찬품을 들여온다. 모두 우제와 같다. 초헌(初獻)을 한다. 만약 상주가 종자가 아닐 경우 종자가 거행하는데, 모두 졸곡과 같다. 다만 헌작(獻爵)할 때 조고비 앞에 먼저 나아가되, -집사자가 밥그릇 뚜껑을 열어서 밥그릇 남쪽에 놓고 나면 축이 축판을 들고 주인의 왼쪽에 서 있다가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서 축문을 읽는다.- 모두 곡은 하지 않고, 그다음에 죽은 이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다르다. -축이 주인의 왼쪽에 서 있다가 남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축문은 모두 ‘초우(初虞)’에 나온다.] 만약 죽은 이가 종자보다 항렬이 낮거나 어릴 경우 절하지 않는다.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한다. 만약 종자가 자신이 상주일 경우 주부가 아헌을 하고 가까운 친척이나 귀한 손님이 종헌을 하며, 만약 상주가 종자가 아닐 경우 상주가 아헌을 하고 주부가 종헌을 한다. 의식은 모두 졸곡 및 초헌과 같으며, 다만 축문을 읽지 않는 것이 다르다. 유식(侑食)ㆍ합문(闔門)ㆍ계문(啓門)ㆍ사신(辭神)을 한다. 모두 졸곡과 같으며, 다만 곡을 하지 않는다. 축이 신주를 받들어 각기 본래의 곳으로 모신다. 축이 먼저 조고비의 신주를 감실(龕室) 안으로 모셔 갑(匣)을 씌우고, 그다음에 죽은 이의 신주를 서쪽 계단 탁자 위로 모신 다음 갑을 씌워 받들고서 영좌로 돌아와 문을 나서면 주인 이하가 올 때의 의식과 같이 곡을 하며 뒤를 따라 슬피 곡한 뒤에 그친다. 만약 상주가 종자가 아닐 경우 상주가 곡을 하며 먼저 떠나고 종자 역시 곡을 하여 보내되 곡한 뒤에 그친다. 만약 다른 곳에 제사를 지낼 경우 조고비의 신주 역시 새 신주와 같이 감실 안으로 모신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사당에 이르러 신주를 모시고 나서는 서쪽 계단의 탁자로 돌아와 새 신주를 모신다.   [주C-001]예기 상복소기 : 원문에는‘《의례》사우례(士虞禮)’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주D-001]예기 상복소기의 소 : ‘조고유삼인즉부어친자(祖姑有三人則祔於親者)’ 조에 대한 당나라 공영달(孔穎達)의 소이다.     소상(小祥) 소상의 제구 -앞에서와 같다. 관(冠) : 초상의 제도와 같으나, 다만 조금 거친 연포(練布)로 만드는 것이 다르다. 의상(衣裳) : 제도는 대공(大功)의 최복(衰服)과 같으며, 삼베 역시 같다. 살피건대, 《의례상복도식(儀禮喪服圖式)》 연제수복도(練除受服圖)에 의하면, 중의(中衣) 및 관(冠)은 연포(練布)로 만들고, 최상(衰裳)은 졸곡 후의 관의 포(布)로 갈아입는다고 하였다. 졸곡 후의 관이란 곧 대공의 일곱 새[升] 삼베인데, 대공포(大功布)는 《의례》의 경우 애당초 연포를 쓴다는 문구가 없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연제(練祭) 때의 최상은 연포를 쓰지 않는 듯하다. 오늘날 《의례상복도식》에 의거하여, 관과 중의는 연포를 쓰고 최상은 연포를 쓰지 않고 대공의 일곱 새 삼베로 개조하여 쓰는 것이 고례(古禮)에 어긋나지도 않거니와, 또 정복(正服)은 바꾸지 않는다는 소가(疏家)의 설과도 서로 합치될 것이다. 그러나 연포를 써야 한다고 한 장횡거의 설을 《의례상복도식》에서 인용하면서 그르다고 하지 않았고, 《가례》 역시 대공에는 숙포(熟布)를 쓰고 소상에 가서 연포로 바꾼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비록 연포와 최상을 함께 쓰더라도 근거가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으나, 어떠할 지는 모르겠다. ○ 《가례》에 수복(受服) 절차가 없는 것은 간편한 쪽을 따르자는 의도이므로, 개비(改備)를 할 도리가 없다면 입던 것을 그대로 입어도 좋다. ○ 또 살피건대, 《의례》ㆍ《예기》ㆍ《통전》 등의 책에는 모두 최(衰)ㆍ부판(負版)ㆍ벽령(辟領)을 뗀다는 문구가 없으나, 《가례》는 《서의》를 따라 뗀다고 하였다. 요질(腰絰) : 살피건대, 《의례》에 “졸곡에 질대(絰帶)를 벗는다.” 하고, 그 주에 “마포(麻布)를 갈포로 바꾼다.” 하였으나, 《가례》에는 졸곡에 마포를 바꾸는 절차가 없고 소상에 대(帶)를 바꾼다는 문구도 없다. 구준(丘濬)은 고례의 뜻을 따라 소상의 요질은 갈포로 만드는데, 모시풀[顈]이나 숙마(熟麻)를 써도 된다고 하였다. 갈대(葛帶)는 삼중 사고(三重四股)로 만드는데, 《예기》 간전 및 《의례상복도식》에 나온다. 효대(絞帶) : 살피건대, 《의례상복도식》에 의하면, 참최의 효대는 우제 후에 삼베로 바꾸되, 삼베는 일곱 새 삼베를 쓴다고 하였다. 오늘날 《가례》를 따라서 비록 우제의 변복(變服)은 없으나, 연제 때에 만약 고례를 써서 요질을 갈포로 바꾼다면 효대 역시 마땅히 삼베를 써야 한다. 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屨] : 승마(繩麻)로 만든다. 지팡이[杖] : 짚던 것을 그대로 짚는다. 중의(中衣) : 연포(練布)를 쓴다. 부인(婦人)의 복제(服制) : 역시 조금 거친 숙마포(熟麻布)로 만든다. 수질(首絰) : 갈포로 만든다. 요질(腰絰) : 벗는다. ○ 장군(長裙)의 제도를 쓸 경우 잘라낸다. 《예기》 간전(間傳)에 “남자는 수질을 중시하고 부인은 요대를 중시하는데, 복을 벗을 때는 중한 쪽을 먼저 벗는다.” 하였다. 축문(祝文) : ‘초우’에 나온다. 기년(朞年)이 되어 소상을 지낸다. 초상 때부터 지금까지는 윤달을 세지 않으므로 윤달이 들 경우 무려 열석 달이 된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대공복 이하는 윤달을 세고, 기년복 이상은 기년으로 끊으며 윤달은 세지 않는다.” 하였다. ○ 《개원례》에 의하면, 윤달에 죽었을 경우 상(祥)과 기일(忌日)을 모두 윤달이 속하였던 달로 정일(正日)을 삼는다. 유울지(庾蔚之)는 말하기를 “금년 섣달 30일에 죽었다면 명년 섣달이 작을 경우 그다음 해의 정월 초하룻날을 기일로 삼는다.” 하였다. 그러나 이는 기필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윤달에 죽은 경우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제삿날을 점쳐서 제사를 지냈으나, 오늘날은 첫 번째 기일만 쓴다. 이는 간촐한 쪽을 따르려는 것이다. 대상도 이와 같다. -《예기》 잡기 하에 “기년상(朞年喪)은 11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13개월 만에 상제(祥祭)를 지내고 15개월 만에 담제를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이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어머니의 상을 말한다.” 하였다. 아내의 상에도 같다.[《의례》 상복(上服)의 소(疏)에도 나온다.] 살피건대, 11개월 만에 연제를 지낸다는 것은 담제의 의식과 같이 날을 가린다는 것이다. ○ 또 살피건대,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어머니와 아내의 상은 비록 15개월 만에 상을 마치더라도, 실로 삼년상의 체모를 다 갖춘 것이다. 그러므로 11개월 만에 연제를 지내는 것도 바로 기년(朞年)의 수에 해당되는 것이니, 달수로 센다 하여 윤달까지 계산에 넣어서는 안 된다. ○ 또 살피건대, 《의례》 상복의 전(傳)에 “아버지는 반드시 3년이 지나고 나서 재취(再娶)하니, 이것은 아들의 뜻을 이루어주려는 것이다.” 하였는데, 국제(國制)에는 만약 부모의 명에 의하거나 나이 마흔이 넘었는데도 자식이 없는 경우라면 기년 후에는 재취를 허락한다고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부모의 상중에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형제가 죽은 경우 빈(殯)을 하고 나서 제사를 지낸다. 한집에 살던 자가 죽은 경우 비록 신첩(臣妾)이더라도 장사를 지낸 뒤에 제사를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지내려 한 제사란 소상이나 대상을 말한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삼년상일 경우 모시풀띠로 갈아 띠고 나서, [살피건대, 졸곡에 칡띠로 갈아 띠는데, 칡이 없을 경우 모시풀띠를 쓴다.] 연제와 대상을 모두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전상과 후상이 다 같이 삼년복의 상일 경우 후상의 칡띠로 갈아 띤 뒤에 전상의 연제와 대상을 지낼 수 있다.” 하였다. 하루 전날에 주인 이하가 목욕을 하고 기명을 벌여 놓고 찬품을 차린 다음, 주인은 뭇 남자를 거느리고 청소와 세척을 하고 주부는 뭇 부녀자를 거느리고 가마를 닦고 제찬(祭饌)을 갖춘다. 다른 것은 다 졸곡의 예식과 같다. 막차(幕次)를 설치하고 연복(練服)을 벌여 놓는다. 남자와 부인이 각기 다른 장소에다 막차를 설치하고 연복을 그 안에 갖다 둔다. 남자는 연복에 연관을 쓰고 수질(首絰)ㆍ부판(負版)ㆍ벽령(辟領)ㆍ최(衰)를 벗으며, 부인은 장군(長裙)을 잘라 치맛자락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한다. 또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 자는 길복(吉服)으로 갈아입기는 하나, 그 달이 다할 때까지 금주(金珠)ㆍ금수(錦繡)ㆍ홍자(紅紫)로 장식한 옷을 입지 않는다. 오직 아내에게만은 담복(禫服)을 입고 15개월을 다 채운 뒤에 벗는다.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소과(蔬果)와 주찬(酒饌)을 차리고, 모두 졸곡과 같다. 날이 밝아 축이 신주를 모시고 나오면 주인 이하가 모두 안으로 들어가서 곡을 한 다음, 모두 졸곡과 같으나, 다만 주인이 문밖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가 기복친(朞服親)과 함께 각기 제 상복을 입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다르다. 만약 이미 복을 벗은 자가 제사에 참여하러 왔을 경우라도 역시 화려한 옷을 벗는다. 모두 슬피 곡한 다음 그친다. 이에 밖으로 나와 막차로 나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곡을 한다. 축이 곡을 그치게 한다. 강신(降神)하고 삼헌(三獻)한다. 졸곡의 의식과 같다. -축문은 ‘초우’에 나온다. 유식(侑食)ㆍ합문(闔門)ㆍ계문(啓門)ㆍ사신(辭神)을 한다. -찬품을 철상한다. 모두 졸곡의 의식과 같다. 아침저녁의 곡을 그만둔다. 오직 삭망(朔望)에만 복을 벗지 않은 자들이 모여서 곡을 한다. -살피건대,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대부(大夫)와 사(士)는 부모의 상중에 소상을 지내고 돌아가고 나서도 삭일(朔日)과 기일(忌日)에는 종갓집에 모여서 곡을 한다.” 하였다. 이는 예전에 명사(命士) 이상은 부자(父子)가 다른 집에 살았기 때문에 서자(庶子)로서 대부나 사가 된 자는 소상에 가서는 각기 제 집으로 돌아갔으나, 오늘날은 아침저녁의 상식(上食)을 3년 동안 폐지하지 않으므로 서자들도 당연히 적자와 같이 빈궁(殯宮) 옆에서 삼년상을 마쳐야 한다. ○ 또 살피건대, 소상 뒤에는 비록 아침저녁의 곡은 그만두더라도, 상식하는 데는 마땅히 곡을 하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퇴계는 곡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니, 의심스럽다. 근세(近世) 여러 선생들은 다 이미 제전(祭奠)을 하는 이상 곡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한다. ○ 퇴계가 말하기를 “비록 아침저녁의 곡은 그만두더라도, 새벽과 저녁의 궤연(几筵) 전배(展拜)는 당연히 해야 한다.” 하였다.- 상을 당한 이래 친척으로서 서로 만나보지 못한 자는 만나볼 때 비록 복을 벗었더라도 슬피 곡한 뒤에 차례로 절한다. 비로소 나물과 과실을 먹는다. -《예기》 잡기 하에 “음료를 마시되 소금과 타락(駝駱)은 먹지 않는데, 밥을 먹을 수 없을 경우 소금과 타락을 먹을 수도 있다.” 하였다. ○ 만약 의려(倚廬)에 거처해 왔다면 소상에는 악실(堊室)에 거처한다.[《예기》 간전에 나온다.] 【상대기】 부인은 친정 부모상을 당했을 때 소상을 지내고 나면 시집으로 돌아간다. -웅씨(熊氏)가 말하기를 “《의례》 상복의 주에 ‘졸곡에 돌아갈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돌아갈 수 있는 절차이기는 하나, 실제로 돌아가는 때는 소상 후이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어버이의 상에 형제 중 복기(服期)가 먼저 찬 자는 먼저 벗고 뒤에 찬 자는 뒤에 벗는다는 것은 외지에 있은 관계로 부음을 받은 시기에 선후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 《주자대전》에서 증무의(曾無疑)에게 답하기를 “오늘날 소상과 대상의 예는 마땅히 날수와 달수를 세어 실수로 절차를 삼아야 하나, 다만 그사이의 기일(忌日)에는 오히려 별도로 제전(祭奠)을 차려야 비로소 인정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이는 적자가 이렇게 한다는 것이고, 서자는 부음을 뒤늦게 받았을 경우 변복(變服)과 제상(除喪)의 절차 역시 날수와 달수를 세어 곡을 하며 거행하고, 감히 제사는 지내지 못한다.   [주D-001]예기 간전(間傳) : 원문에는 ‘잡기(雜記)’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134    사계전서(沙溪全書) 상례비요(喪禮備要)-4 댓글:  조회:3314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34권 상례비요(喪禮備要)-4 대상(大祥) 대상의 제구(諸具) -앞에서와 같다. 사당(祠堂) : 세 칸을 정침(正寢) 동쪽에 세우는데, 땅이 좁을 경우 한 칸을 세우며, 만약 선세(先世)에 이미 세워 놓았다면 세우지 않는다. 교의(交椅) 탁자(卓子) 평상[牀] 돗자리[席] 향로(香爐) 향합(香盒) : 향을 갖춘다. 초[燭] : 촛대를 갖춘다. 모사(茅沙) 축판(祝版) 환교(環珓) : 점을 치는 도구로, 대나무 뿌리를 쓰기도 하는데, 길이는 2치이며, 쪼개어 쓴다. 술주전자[酒注] 술잔과 잔대[盞盤] 중발[椀] 대접[楪子] 수저[匙箸] 술통[酒樽] 현주통[玄酒樽] 국자[勺] 세숫대야[盥盆] : 대야받침대를 갖춘다. 수건[帨巾] : 수건걸이를 갖춘다. 화로(火爐) : 부젓가락을 갖춘다. ○ 이상의 기물들은 꼭 써야 할 수량에 따라 모두 갖추어서 곳간에 저장한 다음 자물쇠로 잠가두고 다른 용도로 쓰지 않는다. 저장할 곳간이 없을 경우 외문(外門) 안에 벌여 놓으며, 재력이 없어서 갖추지 못할 경우 그때 가서 평상시에 쓰던 그릇으로 대용한다. 관(冠) : 검정색[黲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백립(白笠)이다. 복(服) : 참포삼(黲布衫). 부인은 아황색(鵝黃色)과 청벽색(靑碧色)의 옷을 입는다. 신[屨] : 《국조오례의》에는 백의(白衣)에 백화(白靴)을 쓰는데, 부인은 순수한 소의(素衣)와 소구(素屨)를 쓰는 것으로 되어 있다. ○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벼슬이 있을 경우 백포(白布)로 모자[帽]를 싸고 백포반령포(白布盤領袍)에 포대(布帶)를 쓰고, 벼슬이 없을 경우 포건(布巾)과 백직령의(白直領衣)에 포대를 쓰며, 부인은 순수한 소의와 소구를 쓴다.” 하였다. ○ 《예기(禮記)》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성인(成人)의 상복을 벗을 경우 그 제사에 조복(朝服)에 호관(縞冠)을 한다.” 하고, 그 소(疏)에 “대상에서 슬퍼하는 감정을 줄이기 때문에 조복을 입는 것이니, 조복은 치의(緇衣)에 소상(素裳)으로 곧 길복(吉服)으로 돌아오는 정제복(正祭服)이며, 길복을 하고도 호관을 하는 것은 아직 순수한 길복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였다. -소관(素冠)이란 흰 천으로 선을 두른 것이고, 검정색 씨줄에 흰색 날줄을 넣어 짠 것을 호(縞)라 한다. -《예기》 간전(間傳)에 “대상에 소호 마의(素縞麻衣)를 입는다.” 하고, 그 소에 “대상은 비록 끝났더라도 애정(哀情)은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호관(縞冠)을 쓰고 흰 선을 두른[素紕] 마의를 입는 것이다.” 하였다. -비(紕)란 가장자리의 선으로, 삼베로 만든 심의(深衣)에 삼베로 선을 두른 것을 마의(麻衣)라 한다.- 또 간전에 “담제를 지내고 나서야 고운 옷[纖]을 입는다.” 하고, 그 소에 “담제에는 현의(玄衣)에 현관(玄冠)을 쓰나, 길제에는 마땅히 현의(玄衣)에 소상(素裳)을 입어야 한다. 지금 황상(黃裳)을 입는 것은 아직 대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제를 지내고 나서는 침관(綅冠)을 쓰니 역시 변제(變除)하는 예이다.” 하였다. -침관에는 채색 갓끈을 단다. 《운회(韻會)》에 의하면, 흰색의 씨줄에 검정색의 날줄을 넣은 것을 침(綅)이라 하는데, 침은 섬(纖)이라고도 쓴다.-소뢰(少牢)에서 ‘길제(吉祭)와 조복(朝服)’이라 하고, 그 소에 “만약 길제가 담제를 지낸 그달에 있다면 담제는 비록 마쳤더라도 아직 순수한 길복은 입지 않으며, 담제의 다음달에야 평상으로 되돌아가고 찰 것도 다 찰 수 있다.” 하였다. ○ 살피건대, 《예기》 잡기(雜記)의 소에 “경대부(卿大夫)를 근거로 하여 말하자면, 대상에서 길제까지 무려 여섯 가지의 복이 있으니, 대상에서의 조복(朝服)과 호관(縞冠)이 그 첫 번째 복이고, 대상을 마치고 나서의 소호 마의(素縞麻衣)가 두 번째 복이고, 담제에서의 현관(玄冠)과 황상(黃裳)이 세 번째 복이고, 담제를 마치고 나서의 조복(朝服)과 침관(綅冠)이 네 번째 복이고, 길제에서의 현관과 조복이 다섯 번째 복이고, 길제를 지내고 나서 현단복(玄端服)으로 거처하는 것이 여섯 번째 복이다.” 하였다. 오늘날 이 예(禮)를 본받을 경우 대상에는 미길(微吉)의 옷을 입었다가 대상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도로 미흉(微凶)의 옷을 입고, 담제에는 길복을 입었다가 담제를 지내고 나서는 미길의 옷을 입으며, 길제를 지내고 난 뒤에 가서 평상복을 입는 것이 예의 본뜻에 맞을 듯하다. 축문 : ‘초우(初虞)’에 나온다.   ◆ 부묘(祔廟)할 때의 고사(告辭) -살피건대, 구준이 말하기를 “아직 제주(題主)를 고쳐 쓰지 않았을 경우 관직과 봉작 및 칭호만 쓰고, 고(高)ㆍ증(曾)ㆍ조(祖)ㆍ고비(考妣)는 쓰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자손으로서 존속의 칭호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부제(祔祭)의 축사(祝辭)에도 오히려 ‘모고(某考) 모관(某官) 부군(府君)께 가다’라고 쓰는데, 어떻게 제주를 고쳐 쓰지 않았다 하여 존속의 칭호를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아래와 같이 고친다. ○ 5대(代)를 한 위판에 쓸 경우 자칭(自稱)은 가장 높은 사람 위주로 한다. 뒤에도 같다. 유(維) 연호(年號) 몇년 세차(歲次) 간지(干支), 몇월 간지삭(干支朔) 며칠 간지에 5대손 아무개는 감히 현오대조고(顯五代祖考)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오대조비(顯五代祖妣)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만약 3대만 제사한다면 5대는 없다.-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증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분명히 고합니다. 이제 선고(先考) 아무 벼슬의 대상이 벌써 다가와서 예법상 마땅히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께 제부(隮祔)해야 하므로, 감회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술과 과일로 경건히 고합니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만약 아버지는 살아 있고 어머니가 먼저 죽었다면 이는 아버지가 상주가 되므로, 오직 할머니의 주독(主櫝)에 제부해 두었다가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천봉(遷奉)을 고하고,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어서 이미 사당에 들어가고 나서 어머니가 죽었다면 그 축문에 ‘이에 선비(先妣)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대상이 벌써 다가와서 예법상 마땅히 선고(先考)께 제부해야 하므로’로 쓴다. 나머지는 같다.” 하였다. 살피건대, 아버지가 먼저 죽은 어머니의 상에는 대상을 마치고 나서 구준의 예설대로 고위(考位)의 감실에다 제부해 두었다가 협사(祫祀) 때에 가서 주독을 합치는 것이 옳다. 대저 《의례》에 “담제를 지내는 달에 길제를 지내되 아직 배향은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볼 때 어머니의 상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아버지의 주독과 합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 어떤 이는 말하기를 “아버지가 비록 먼저 사당에 들어갔더라도 어머니의 상을 마치고는 곧바로 증조비에게 제부하였다가 협사 때에 아버지에게 배향하는 것이 고의(古意)에 가까울 듯하다.” 하였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두 번째 기년(朞年)이 되어 대상(大祥)을 지낸다. 초상에서 이때까지는 윤달을 세지 않고 모두 25개월이며, 두 번째 기일(忌日)이다. -《예기》 잡기 하에 “기년복(朞年服)의 상은 13개월 만에 대상을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이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의 어머니 상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아내에게도 같다.] ○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이 겹쳤을 경우는 앞의 소상조(小祥條)에 나온다. 하루 전날에 목욕을 하고 기구(器具)와 찬품(饌品)을 진설한다. 모두 소상과 같다. 상차(喪次)를 설치하고 담복(禫服)을 진열한다. 이튿날 아침의 행사는 모두 소상의 의식과 같다. -살피건대, 사정(事情)이 있으면 고한다. 지금 새 신주를 부묘(祔廟)하게 되었으니, 먼저 사당에 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사(告辭)는 앞에 나온다.] 마치고 나서 축이 신주를 받들고 사당으로 들어간다. -축이 꿇어앉아서 ‘사당으로 드시기를 청합니다.’라고 고한다. 주인 이하가 모두 부제(祔祭) 때의 차례와 같이 서서 곡을 하며 뒤따라가서 사당 앞에 다다라 곡을 그친다.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의하면, 대상을 지내고 나서는 궤연(几筵)을 철거하고 그 신주는 또 할아버지의 사당에 제부해야 하나, 아직은 동쪽 가에 서쪽을 향하게 제부하였다가, 협사를 마치고 난 뒤에 천봉(遷奉)한다. 영좌(靈座)를 철거하고 상장(喪杖)을 부러뜨려 보이지 않는 곳에 버린다.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대상에는 나물을 먹되, 혜장(醯醬)으로써 먹는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상복은 반드시 벗는 날에 헐어서 여러 가난한 사람들이나 묘소를 지키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다. 옛사람은 흉사(凶事)를 혐오하지 않았으나, 지금 사람들은 불살라서 묻어버리니, 또한 상복을 혐오하는 듯하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3년이 지난 뒤에 장사를 지낼 경우 반드시 제사를 두 번 지내는데, 재차 제사를 지내는 동안 같은 때에 상복을 벗지는 못한다.” 하고, 그 주에 “장사를 마치고 나서는 반드시 연제(練祭)와 대상을 거행하기 때문에 재차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이 두 제사는 연거푸 두 번 거행하는데, 이를테면 이달에 연제에서는 남자는 수질(首絰)을 벗고 부인은 요대(腰帶)를 벗고, 다음 달 대상에 가서야 최복(衰服)을 벗는다.” 하였다. ○ 《개원례(開元禮)》에 “부모의 상에 1주년이 되어서 장사를 지낼 경우 장사를 지낸 다음 달에 소상을 지내고, 2주년이 되어서 장사를 지낼 경우 장사를 지낸 다음 달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연제를 지낸 다음 달에 대상을 지내며, 대상을 지내고 나서는 길제(吉祭)를 지내고 다시 담제(禫祭)는 없다. 또 2주년이 되지 않아서 장사를 지낼 경우는 25개월에 연제를 지내고, 26개월에 대상을 지내고, 27개월에 담제를 지낸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아버지의 상을 마치기 전에 어머니가 죽은 경우 아버지의 상복을 벗을 적에는 아버지에 대한 대상(大祥)의 복을 입고 대상을 지낸 다음, 다시 어머니의 복을 입는다.” 하고, 그 주에 “제복(除服)이라는 것은 대상의 상복을 말함이니, 앞의 상이 끝났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曾子問)에 “‘대부(大夫)와 사(士)가 부모의 상을 입고 있으면서 곧 제상(除喪)하게 되었을 때 임금의 상을 당하면 부모의 상을 어떻게 제상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임금의 상복을 입고 있을 경우 부모의 상복은 감히 입지 못하는데, 또 어찌 감히 벗을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때가 지나도록 제복(除服)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임금의 복을 벗고 난 뒤에는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禮)이다.’ 하였다. 또 ‘부모의 상복을 벗지 않아도 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선왕(先王)이 제정한 예에는 때가 지나고 나면 거행하지 않는 것이 예이다.’ 하였다.” 하고, 그 주에 “가령 이달에 임금의 복을 벗었을 경우, 다음 달에 소상 제사를 거행하고 또 다음 달에 대상 제사를 거행한다. 만약 친상(親喪)의 소상을 지내고 난 뒤에 임금의 복을 입게 되었다면 뒷날 임금의 복을 벗은 뒤에 대상 제사만을 거행한다. 그러나 이는 다 제사를 주관하는 적자(嫡子)로서 벼슬자리에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만약 서자(庶子)로서 벼슬자리에 있다가 임금의 복을 입은 경우라면 적자는 집에서 그 스스로 친상(親喪)의 예를 거행하고, 뒷날 서자가 비록 임금의 복을 벗었더라도 소급하여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다.” 하였다. 살피건대, 국제(國制)에 의하면 국상(國喪)의 졸곡 뒤에는 크고 작은 제사를 다 허락하고 있으나, 부모의 대상과 소상은 기어코 거행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일단 고례(古禮)를 실어두어서 참고할 수 있게 하였다.   [주D-001]그 소(疏)에 …… 하였다 : ‘제성복자기제야조복호관(除成服者其祭也祖服縞冠)’ 조에 대한 공영달(孔穎達)의 소에는 이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주D-002]그 소에 …… 하였다 : 공영달의 소에는 이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주D-003]그 소에 …… 하였다 : 공영달의 소에는 이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주D-004]소뢰(少牢)에서 …… 하고 : 원문의 ‘소뢰(少牢)’는《의례》소뢰궤식례(小牢饋食禮)를 지칭하는 듯하나, 이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또 본문의 ‘길제(吉祭)와 조복(朝服)’이라는 말도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상고하지 못하였다. [주D-005]그 소에 …… 하였다 : 소에 대한 원문을 상고하지 못하였다. [주D-006]예기 잡기(雜記)의 소 : 소에 대한 원문을 상고하지 못하였다.     담제(禫祭) 《예기》 상복소기에 “부모와 아내와 장자를 위해 담제를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아내가 남편에게도 담제를 지내며, 어머니의 상에도 아버지가 없을 경우 담제를 지낸다.” 하였다. ○ “종자(宗子)는 어머니가 살아 있어도 아내를 위해 담제를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적자(嫡子)는 아내를 위해 부장기복(不杖朞服)을 입는데 부장기복을 입을 경우 담제는 지내지 않으며,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만 살아 있을 경우에는 장기복(杖朞服)을 입고 담제도 지낸다.” 하였다. 하순(賀循)에 의하면 “종자가 아닌데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장기복은 입되 담제는 지내지 않는다.” 하였다. ○ “서자(庶子)는 아버지의 집에 살더라도 그 어머니를 위해 담제를 지내지 못한다.” 하고, 그 주에 “이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檀弓)의 주에 “쫓겨난 어머니에게는 담제가 없다.” 하였다. ○ “여자가 이미 시집을 가고 나서도 부모에게 담제를 지냅니까?” 하고 물으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어머니에게 담제를 지낸다는 것은 다만 남자를 위주로 하는 말이다.” 하였다.   담제의 제구 -앞에서와 같다. 길복(吉服) : 아버지가 살아 있어서 어머니에게 심상(心喪)을 할 경우 백포직령의(白布直領衣)에 참포립(黲布笠)을 쓰고 흑대(黑帶)를 띤다. 환교(環珓) 축문(祝文) : ‘초우(初虞)’에 나온다. 대상 후 한 달을 건너뛰어 담제를 지낸다. 한 달을 건너서이다. 초상에서 이때까지 윤달을 세지 않고 모두 27개월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25개월이 되어 대상을 지낸 뒤에 곧 담제를 지내서 왕숙(王肅)의 설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나, 지금은 정현(鄭玄)의 설을 따른다. 이것이 비록 예(禮)는 후한 쪽을 따라야 하는 도리이기는 하나, 타당하지는 않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삼년상의 대상ㆍ소상과 담제는 윤달도 센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기년상은 15개월 만에 담제를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이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어머니를 위해서이다. 아내를 위해서도 같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어떤 사람이 묻기를 ‘《예기》 상복소기에 「3년이 지난 뒤 장사를 지낼 경우 반드시 재차 제사를 지낸다.」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이는 연제(練祭)와 대상(大祥)만을 말한 것이라고 하고, 담제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살펴보면 또한 그와 같다.’ 하였다.” 하였다. ○ 살피건대, 앞뒤로 연이어 상을 당한 경우 앞 상의 담제를 뒤 상의 상중에 지낼 수 없는 것은 역시 차마 흉사 중에 길례를 거행하지 못해서이다. 또 뒤 상을 마치고 난 뒤에 소급하여 지내지 않는 것은 때를 넘기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도리에서이다. 주자의 뜻과 정현의 주와 《개원례》가 다 그러하다. 전달 하순에 제사 지낼 날짜를 잡아 둔다. 하순의 초에 다음 달의 3순(旬) 중에서 각 1일로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한다. 사당문 밖에 탁자를 설치한 다음, 향로(香爐)ㆍ향합(香盒)ㆍ환교(環珓)ㆍ반자(盤子)를 그 위에 서쪽을 향하게 올려놓는다. 이에 주인이 담복(禫服)을 입고서 서쪽을 향하여 서면 뭇 주인이 그다음으로 서되 뒤로 조금 물러나 북쪽을 윗자리로 하며, 자손들이 그 뒤에 두 줄로 서되 역시 북쪽을 윗자리로 한다. 집사자는 북쪽을 향하여 서되 동쪽을 윗자리로 한다. 주인이 향불을 피워 환교를 데운 다음, 상순(上旬)의 날짜로 명(命)하기를 “아무개는 내달 아무 날로 선고 아무 벼슬 부군께 삼가 담사(禫事)를 올리려 하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곧장 환교를 반자에 던져서 길(吉)과 불길(不吉)을 점치는데, 환교가 하나는 엎어지고 하나는 자빠지면 길하다. 불길할 경우 다시 중순의 날짜로 명하고 또 불길할 경우 하순의 날짜를 쓴다. 주인이 이에 사당에 들어가서 해당 감실 앞에 두 번 절하면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 번 절한다. 주인이 향불을 피우면 축(祝)이 축사(祝辭)를 가지고 주인 왼쪽에 꿇어앉아서 고하기를 “효자 아무개는 내달 아무 날로 선고 아무 벼슬 부군께 삼가 담사를 올리려고 날짜를 점친바 길일을 얻었으므로, 감히 고합니다.” 한다.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내려가면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 번 절하며, 축은 문을 닫고 물러난다. 만약 길일을 얻지 못했을 경우는 ‘날짜를 점친바 길일을 얻었으므로’의 구절은 쓰지 않는다. 하루 전날 목욕을 하고 신위(神位)를 설치한 다음 제기(祭器)를 벌여 놓고 제찬(祭粲)을 차린다. 신위를 영좌(靈座)가 있던 곳에 설치한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대상의 의식과 똑같다. [제차(祭次)를 설치하고 길복(吉服)을 진열한다.] -살피건대, 《가례》에 제차를 설치하고 옷을 진열하는 절차가 없으니, 의문스럽다. 퇴계가 말하기를 “소상과 대상 때에 옷을 진열하고 바꾸어 입는 절차를 따르지 않을 경우, 담복은 어느 때에 벗고 길복은 어느 날에 입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튿날에 행사를 하는데, 의식은 모두 대상 때와 같다. 다만 주인 이하가 모두 사당에 나아가서, 축이 주독(主櫝)을 받들어 서쪽 계단 탁자 위에 올려놓고서 신주를 모셔내어 영좌에 놓으면, 주인 이하가 모두 슬피 곡을 하되, 삼헌(三獻)에는 곡을 하지 않고 사신(辭神)에 가서 또 슬피 곡을 하며, 신주를 사당까지 보낼 적에는 곡을 하지 않는다. -신주는 아직도 할아버지의 감실에 제부한다. 【간전】 비로소 술을 마시고, -술은 먼저 단술을 마신다.- 고기를 먹는다. -고기는 먼저 마른 고기를 먹는다. 살피건대, 이 조항은 《가례》의 대상조 아래에 있는 것인데, 지금 고례(古禮) 및 《가례의절》에 의거하여 여기로 옮긴 것이다.     길제(吉祭) 주자가 말하기를 “장횡거(張橫渠)의 설에 삼년상을 마치고 난 뒤 태묘(太廟)에 협사(祫祀)를 지내고 나서 ‘제사를 마치고 신주를 환봉(還奉)한다.’는 것을 고유하는 기회를 통하여 드디어 조묘(祧廟)로 옮길 신주는 받들어 협실(夾室)로 돌려보내고 자리를 옮길 신주와 새 신주는 사당으로 돌려보낸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예에 잘 맞는 듯하다.” 하였다. ○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세대가 차례로 옮겨지고 소목(昭穆)의 서열이 서로 이어진다는 것은 그 일이 아주 중대하니, 어떻게 고유제가 없을 수 있겠는가. 예법에 삼년상 동안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횡거의 설에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협사를 지낼 적에 번갈아 옮겨 모시면 된다고 한 것이니, 발상이 완곡하고 은근하다. 이 점이 예에 잘 맞아서 선생께서 이 설을 따른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사우례(士虞禮)의 기(記)에 “이달에 길제는 지내되 아직 배향은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이달이란 담제를 지내는 달을 말한다. 사시(四時) 정제(正祭)의 달을 당할 경우 제사를 지낸다.” 하고, 그 소(疏)에 “한 달이 넘어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였다. 웅씨(熊氏)가 말하기를 “사시 정제의 달을 당하지 않았을 경우는 한 달이 넘어가기를 기다린다.” 하였다. 또 소에 “담제를 지내는 달에 사시의 정제를 지내기는 하되 아직도 아무 비위(妣位)를 배향한다고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슬픔이 가시지 않아서 마치 상중(喪中)의 기분 같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며, 아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를테면 대상 이전에는 비위(妣位)를 배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또 소에 “담제를 지내는 달의 길제에도 배향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때 다음 달의 길제에서 《의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 나오는 경우처럼 배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살피건대, 한 달을 건너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통상적인 제도이기는 하나, 담제가 만약 사시 정제의 달을 당하게 된다면 곧바로 이달에 담제를 지내니, 이는 3년 동안 제사를 폐지한 나머지 정제가 더 급하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고위(考位)와 비위(妣位)의 자리를 달리하고 축도 딴 축판을 쓰며,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합독(合櫝)을 한다. 만약 달을 건넌 경우라면 제사 때에 합위(合位)를 하는데, 의식은 시제(時祭)와 같이 하는 것이 예의 본뜻에 맞을 듯하다. ○ 또 살피건대, 아버지가 먼저 죽어서 이미 사당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어머니의 상을 마친 뒤에 본디 길제를 지내고 체천(遞遷)을 하는 절차가 없다. 그러나 그 정제(正祭)는 이를 따라 지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길제의 제구 -앞에서와 같다. 축문(祝文) 벼루 붓 먹 분(粉) 녹각교(鹿角膠) 솔[刷子] 맑은 물[淨水] 목적(木賊)   ○ 살피건대, 《가례》에는 길제와 개장(改葬) 두 조항이 없으나, 지금 고례(古禮) 및 《가례의절》에서 채록하여 보충해 넣은 것이다.   ◆ 신주를 개제(改題)할 때의 고사(告辭) -어머니가 먼저 죽었을 경우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난 뒤에 또 개제한다. ○ 살피건대, 3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비록 당시 왕의 제도이기는 하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다 고조(高祖)에게도 복(服)이 있으므로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우리 제현(諸賢)들 역시 4대의 제사는 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5대손 아무개는 감히 현오대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오대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증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분명히 고합니다. 이에 선고 아무 벼슬 부군의 대수(代數)가 벌써 다하여 예법상 신주를 옮겨 사당으로 모셔야 하므로, 현오대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오대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서는 친속이 다하셔서 신주를 조천(祧遷)하게 되었고,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증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신주를 지금 고쳐 쓰려고 하니, 세대의 차례가 차례대로 옮겨지게 되어 감회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술과 과일로 경건히 고합니다. ◆ 신주를 모셔 내올 때의 고사 5대손 아무개는 지금 체천(遞遷)하는 일로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경우의 어머니 상이라면 ‘지금 상복을 벗었기에’라고 한다.- 현오대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오대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만약 3대만을 제사한다면 ‘고조고비(高祖考妣)’라고 쓴다. 이 이하에는 각 위를 열서한다.- 에게 일이 있습니다. 아무의 친속인 아무 벼슬 부군 및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부식(祔食)하려고 신주를 정침(正寢)으로 모시고 나갈 것을 감히 청하며, 삼가 제전을 올립니다. ◆ 합제(合祭)를 지내고 신주를 묻을 때의 축문 -《가례의절》에 나온다.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5대손 아무개는 감히 현오대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오대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만약 3대의 제사만 지낸다면 ‘고조고비’라고 쓴다.- 에게 분명히 고합니다. 이제 선고 아무 벼슬 부군의 대수가 이미 다하여 예법상 신주를 옮겨 사당으로 모셔야 하온데, 선왕이 제정한 예법에 제사는 4대에서 그치게 되어 있으므로, -만약 3대의 제사만 지낸다면 ‘3대’라고 쓴다.- 마음은 비록 끝이 없으나 분수에는 한계가 있어 신주를 마땅히 조천(祧遷)하여 묘소에 묻어야 합니다. -만약 4대손 중에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가 있어서 그 집으로 옮겨 모시려 한다면 이 아래에 마땅히 ‘장차 아무 관계 아무개의 집’이라고 써야 한다.- 감회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백배(百拜) 고사하오니, -만약 본 감실에 아직 부위(祔位)가 있다면 이 아래에 마땅히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및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신주를 함께 묻어야 합니다.’라고 써야 한다.-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 조고(祖考) 이상을 합제(合祭)할 때의 축문 -고의(高儀)에 나온다. ○ 대마다 축판을 각각 달리한다.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현손 -증조할아버지의 경우 ‘효증손’, 할아버지의 경우 ‘효손’이라고 쓴다.- 아무개는 감히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증조위(曾祖位)와 조위(祖位)에 대한 축판도 이와 같다.- 께 분명히 고합니다. 아무개는 죄역(罪逆)은 다 가시지 않아도 세월은 상을 벗을 날이 다가와서,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경우의 어머니 상이라면 이 아래의, ‘세대가 차례로[世次]……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不敢不至]’를 빼버리고 시제(時祭) 축문의 ‘시유(時維)’ 이하의 말을 쓴다.- 세대가 차례로 체천(遞遷)되고 소목(昭穆)이 서로 이어지매, 선왕이 제정한 예법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삼가 청작 서수로 공손히 제사를 올리며,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과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부식(祔食)하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 새 신주를 합제할 때의 축문 -《가례의절》에 나온다. ○ 만약 담제를 지내는 달에 제사를 지낸다면 고위(考位)와 비위(妣位)는 축판을 달리한다.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아무개는 감히 현고 아무 벼슬 부군께 분명히 고합니다. 상제(喪制)란 기한이 있어서 추념(追念)의 정을 펴려 하나 미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좋은 날짜에 삼가 전례(典禮)를 따라 사당에 제부(隮祔)하려고, -만약 어머니가 먼저 죽었다면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열서(列書)하며,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경우의 어머니 상이라면 역시 고위(考位)와 비위(妣位)를 열서하고, ‘아무 관계의 상기(喪期)가 이미 다하여 예법상 마땅히 배향해야 하므로’라고 쓰고서 시제(時祭) 축문의 ‘시유(時維)’ 이하의 말을 쓴다. ○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경우의 어머니 상으로서 담제를 지내는 달에 제사를 지내서 고비(考妣)의 위(位)가 다른 경우라면, 비위에는 ‘상제란 기한이 있어서 추념의 정을 펴려 하나 미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좋은 날짜에 삼가 전례를 따라 선고께 배향하려고’로 쓰고, 고위에는 ‘아무개는 죄역은 다 가시지 않아도 세월은 상을 벗을 날이 다가와서 삼가 전례를 따라 선비(先妣)를 배향하려고’로 쓰고서 시제 축문의 ‘시유’ 이하의 말을 쓴다. ○ 만약 어머니가 먼저 죽은 경우의 아버지 상으로서 담제를 지내는 달에 제사를 지내는 경우라면, 비위에는 ‘아무개는 죄역은 다 가시지 않아도 세월은 상을 벗을 날이 다가와서 이제 좋은 날짜에 삼가 전례를 따라 선고께 배향하려고’로 쓴다.- 삼가 청작 서수로 공손히 제사를 올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담제 이튿날에 날짜를 잡아 둔다. -《의례》 사우례의 소에 “길사(吉事)는 가까운 날을 우선으로 하므로, 상순에 정침(正寢)에서 담제를 지내고서 그달에 곧장 사당에서 사시(四時)의 시제(時祭)를 뒤따라 지내는데, 역시 상순의 날을 쓴다.” 하였다. 달을 넘길 경우에도 상순의 날을 쓰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낸다. 나머지는 아래 시제의 날짜를 잡는 의식과 같다. 사흘 전에 재계를 한다. -시제의 의식과 같다. 하루 전날 신주를 옮길 것을 사당에 고한다. -술과 과실을 차려 고유하는데, 아래 삭망(朔望)의 의식과 같다. 다만 탁자 하나를 향탁(香卓) 동쪽에 따로 설치하고 맑은 물[淨水]ㆍ분그릇[粉盞]ㆍ솔[刷子]ㆍ목적(木賊)ㆍ벼루ㆍ붓ㆍ먹을 그 위에 갖다 놓는다. 주인이 술을 쳐 올리고 두 번 절한 다음 향탁 남쪽에 서 있으면, 축이 축판을 가지고 주인의 왼쪽에 서 있다가 꿇어앉아 축문을 읽어서 신주를 옮김을 고한다.[축문은 앞에 나온다.] 고유를 마치고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앞으로 나아가 고쳐 쓸 신주를 가장 높은 위(位)부터 받들어 내려서 탁자 위에 눕히면, 집사자가 옛 글씨를 씻어낸다. 다시 분을 발라서 분이 다 마르면,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명하여 손을 씻고 서쪽을 향하여 서서 고쳐 쓰도록 하는데, 함중(陷中)의 글자는 고쳐 쓰지 않는다. 분을 씻은 물은 사당의 네 벽에 뿌리고, 주인이 신주를 받들어다 본래의 자리에 모신다. 모든 위(位)를 앞서와 같이 고쳐 쓰는데, 이를테면 증조고비(曾祖考妣)는 고조고비(高祖考妣)로 고쳐 쓴다. 조고비위(祖考妣位)와 고비위(考妣位)와 부위(祔位)도 이와 같다. 이에 아래로 내려와 제 위치로 돌아가서 위치에 있는 모든 이와 함께 두 번 절한 다음 사신(辭神)을 하고 물러난다. 신위(神位)를 설치한다. -만약 담제를 지내는 달에 제사를 지낸다면 고위와 비위의 신위를 달리한다. ○ 《정자제의(程子祭儀)》에 “무릇 배향(配享)은 정처(正妻)로 그치는 것이나, 더러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재취의 소생인 경우는 자기의 생모를 배향하기도 한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인정(人情)으로 본다면 한집안에 어찌 두 아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정처를 배향하고 계실(繼室)은 따로 한곳을 만들어 모시는 것이 옳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정 선생의 이 말은 잘못인 듯하다. 《당회요(唐會要)》에 논하기를 ‘무릇 적모(嫡母)는 선후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함께 배부(配祔)하여 합제(合祭)해야 한다.’ 하였다. 이것이 옛날 제후(諸侯)의 예와는 다르지만, 이는 후세에 계실도 예를 갖추어서 아내로 맞아들였을 경우 저절로 정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횡거의 설은 추상(推想)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제기를 진열한다. -시제의 의식과 같다. 희생을 살펴보고, 제기를 씻은 다음 제찬을 갖춘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소과(蔬果)와 주찬(酒饌)을 차리고, 날이 밝으면 신주를 받들어다 신위에 모신다. -시제의 의식과 같다. 고사(告辭)는 앞에 나온다. 참신(參神)을 하고 강신(降神)을 하고 진찬(進饌)을 하고 초헌(初獻)을 한다. -축문은 앞에 나온다. 아헌(亞獻)을 하고 종헌(終獻)을 하고 유식(侑食)을 하고 합문(闔門)을 하고 계문(啓門)을 하고 수조(受胙)를 하고 사신(辭神)을 한다. -모두 시제와 같다. 신주를 들여다 모신다. -주인과 주부가 모두 올라가서 각기 신주를 받들어 주독(主櫝)에 넣어서 상자에 담은 다음, 사당으로 받들고 돌아가서 차례차례 올려놓는데, 새 신주도 정위치에 들여 모신다. 살피건대, 고비(考妣) 중 먼저 죽은 이가 있을 경우 이때에 와서 주독을 합친다. 대수(代數)가 다한 신주는 묘소에 갖다 묻는데, 만약 족인(族人) 가운데 아직 대수가 다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항렬과 나이가 가장 높은 사람의 집으로 옮겨 모시고 그가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되, 신주는 마땅히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에 맞추어서 고쳐 써야 하며, 방제(旁題)에 ‘효(孝)’ 자는 쓰지 않는다. 만약 대수가 다한 조상으로서 처음 공신(功臣)이 된 이가 있다면, 마땅히 《가례》에서 “별자(別子)로서 친진(親盡)된 조상이 있을 경우 그 신주를 묘소로 옮겨 모시고 묻지는 않는다.”고 한 것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다만 국가의 공신에 대한 대우가 매우 후하여 그 자손으로 하여금 신주를 옮기지 못하도록 할 경우, 4대의 제사를 받드는 집에서는 옮기지 못하는 신주와 함께 5대를 받들게 된다. 그런데 예법에 의거하면 신하는 5대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고조(高祖)를 모셔내어 별실에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 무릇 부위(祔位)의 신주는 본위(本位)가 사당에서 나갈 경우 역시 묘소에 묻어야 한다. 음복을 마치고, -모두 시제와 같다. 정침(正寢)으로 되돌아간다. -《예기》 상대기에 “길제를 지내고 나서 정침으로 되돌아간다.” 하였다.   [주D-001]의례 사우례의 소 : ‘시월야길제유미배(是月也吉齊猶未配)’ 조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이다.     [개장(改葬)] 살피건대, 예전의 개장은 분묘가 다른 연고로 무너져서 시구(屍柩)를 망실하게 될 경우에나 하였는데, 세속이 풍수설에 현혹되어 아무 이유 없이 천장(遷葬)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아주 잘못된 것이다.   개장의 제구 -모두 처음 장례 때의 의식과 같다. 개장을 하려면 먼저 천장할 만한 땅을 가려 잡고 나서 관(棺)을 마련하고 염상(殮牀)ㆍ포효(布絞)ㆍ금의(衾衣)를 갖춘다. -대렴의 의식과 같다. 장례를 치를 적에는 제복(制服)을 갖춘다. -《의례》 상복(喪服)의 기(記)에 “개장 때에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입는다.” 하고, 그 소에 “아버지가 장자(長子)에게와 아들이 어머니에게도 같다.” 하였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손자가 조부모의 후사가 된 경우에도 역시 시마복이며, 전모(前母)의 개장에는 중자(衆子)의 제도를 따른다. 왕숙(王肅)은 말하기를 “복(服)이 없을 경우 조복(弔服)에다 마대(麻帶)를 더 띤다.” 하였고, 구준(丘濬)은 말하기를 “나머지는 모두 소복(素服)에 포건(布巾)을 쓴다.” 하였다. ○ 살피건대, 예(禮)의 본뜻대로라면 삼년복을 입는 자는 모두 시마복을 입어야 할 것이다. ◆ 영역(塋域)을 열고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하는 축문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감히 토지신께 분명히 고합니다. 지금 아무 관계 아무 벼슬 성명 -주인이 스스로 고할 경우,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또는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 한다.- 의 택조(宅兆)가 불리하여 이곳에 개장을 하려고 하오니, 신께서는 보우하시어 후환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삼가 청작(淸酌)과 포해(脯醢)로 공손히 제사드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날을 가려서 영역을 열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 다음, 드디어 광중(壙中)을 파고 회격(灰隔)을 짓는데, 의식은 모두 처음 장례 때와 같다. ◆ 사당(祠堂)의 고사(告辭)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효손 또는 효증손이나 효현손이라고 쓴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이에 현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또는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의 체백(體魄)이 제자리가 아닌 곳에 의탁한바, 뜻밖의 환란으로 선령(先靈)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되고 두려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장차 아무 달 아무 날로 날짜를 잡아 아무 곳으로 개장하려고 삼가 술과 과실로 경건히 고합니다. 하루 전날 사당에 고유한다. -차례대로 선 다음 주독(主櫝)을 열고 천장(遷葬)할 신주를 모셔내어 참신(參神)을 하고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손을 씻고 향탁(香卓)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서 강신(降神)을 하고 향불을 올린 다음 두 번 절하고 술잔의 술을 땅바닥에 붓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술을 치면 주부는 점다(點茶)를 한다. 주인 이하가 모두 꿇어앉고 나서 ‘운운(云云)’ 하는 고사(告辭)를 고한다. 주인이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두 번 절하고는 제 위치로 돌아와서 사신(辭神)을 한다. 모두 두 번 절하고 신주를 모셔들인다. 나머지의 절차는 같다. 집사자가 구 묘소에 흰 삼베 장막을 치고, -문은 남쪽을 향하게 내고 그 밑에 돗자리를 깐다. 남녀의 위차(位次)를 마련한다. 그 이튿날 아침에 내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 각기 제 위치로 나아간다. 주인은 시마복을 입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소복을 한다. -남자는 묘소 동쪽에 서쪽을 향해 부인은 묘소 서쪽에 동쪽을 향해 서되, 다 북쪽을 윗자리로 삼는다. 부인은 삼베 장막으로 가린다. ○ 살피건대,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를 개장할 경우는 《예기》 상복소기의 ‘부모가 함께 죽었을 경우[父母之喪偕]’라는 구절의 소에 “아버지를 아직 장사 지내지 않았다면 감히 변복(變服)하지 못한다.”고 한 말을 따르겠지만, 만약 아버지를 이미 장사 지냈다면 마땅히 ‘중상(重喪)을 아직 벗지 않은 상태에서 경상(輕喪)을 당한 예(例)’에 의거하여 어머니의 개장에 시마복을 입고서 일을 마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위치에 나아가서 슬피 곡한다. ◆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축문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감히 토지신께 분명히 고합니다. 종전에 아무 관계 아무 벼슬 성명 -나머지는 앞과 같다.- 의 택조(宅兆)를 이곳에 자리를 잡아 모셨는데, 다른 환란이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장차 광중을 열어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삼가 청작과 포해로 신께 경건히 제사드리오니, 신께서는 보우해 주시고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축(祝)이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묘소를 열기 직전에 축이 먼저 술과 과실로 토지신에게 앞서의 의식과 같이 제사를 올린다. 축문은 운운한다. ◆ 묘소를 열 때의 고사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앞에서와 같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감히 현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또는 아무 봉작 아무 성씨- 께 분명히 고합니다. 이곳에 장례를 모신바, 세월이 오래되면서 체백(體魄)이 편안하지 않으셔서 이제 개장을 하려고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존령(尊靈)께서는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묘소를 연다. -술ㆍ과실ㆍ포해를 묘소 앞에 차려 놓고 주인 이하가 차례로 서서 슬피 곡한 다음 두 번 절한다. 주인이 꿇어앉아서 향불을 피우고 술을 쳐서 땅에 붓고 잔을 올린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두 번 절하고는 제 위치로 돌아온다. 축이 세 번 헛기침을 하고 운운하는 고사(告辭)를 읽고 나면, 슬피 곡하고 나서 두 번 절한다. 역부(役夫)가 분묘를 연다. -분묘를 다 열고 나면 남녀가 각각 나아가서 처음과 같이 곡을 한다. 관(棺)을 들어내어 장막 안의 돗자리 위에 놓는다. -남녀가 모두 곡을 하며 장막까지 따라가서 남자는 동쪽에 서고 여자는 서쪽에 선다. 축이 공포(功布)로 관을 닦고 이불을 덮는다. -이불은 이금(侇衾)이다. 아래에서도 같다. 시구(尸柩) 앞에 전물(奠物)을 차린다. -탁자에 보통의 의식과 같이 술잔ㆍ술주전자ㆍ향로 및 소과(蔬果)와 반갱(飯羹)을 차려 놓는다. 주인 이하가 슬피 곡하고 두 번 절한 다음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간다. 꿇어앉아 향불을 피우고 술을 쳐서 땅바닥에 부은 다음 다시 술을 쳐 올린다. 엎드렸다가 일어나 슬피 곡한 다음 두 번 절한다. 한참 있다가 술과 과실만 남겨 두고 철상한다. ○ 퇴계가 말하기를 “영좌(靈座)를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을 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아침저녁의 곡전(哭奠)은 역시 초상 때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역부가 새 관을 장막문 밖에 들어다 놓는다. -남쪽을 향하게 한다. 드디어 장막으로 나아가면 집사자가 새 관의 서쪽에 염상(殮牀)을 설치한다. -관을 바꾸지 않을 경우 설치하지 않는다. 집사자가 관을 열고 시신을 염상 위에 들어다 놓고 드디어 대렴 때의 의식과 같이 염을 한다. -퇴계가 말하기를 “개장은 옛사람이 다 상례(喪禮)로 처리하였으므로, 만약 부모를 동시에 개장한다면 염과 폄(窆)의 선후도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한 예(例)에 견주어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시구를 옮겨 상여에 싣는다. -집사자가 전물(奠物)을 치우면 축이 꿇어앉아서 고하기를 “오늘 시구를 옮겨 상여로 모시기에 감히 고합니다.” 한다. 이에 전물을 차려 제위(祭位)로 나아가서 슬피 곡하면, 축이 손을 씻고 향불을 피우고 술을 친 다음, 꿇어앉아서 고하기를 “영이(靈輀)를 이미 메웠으니, 가시면 곧 새 유택입니다.” 한다. 엎드렸다가 일어나 두 번 절한다. 발인은 처음 장사 지낼 적의 의식과 같다. 도착하기 전에 집사자가 먼저 영악(靈幄)과 영좌를 설치하고 남녀의 위차(位次)를 만든다. 시구가 도착하면 주인 남녀가 각기 제 위치로 나아가 곡을 하고 나서 묻는데, 일체 처음 장사 지낼 적의 의식과 같다. ◆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축문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감히 토지신께 분명히 고합니다. 지금 아무 관계 아무 벼슬 성명 -나머지는 앞과 같다.- 의 택조(宅兆)를 이곳에 만드오니, 신께서는 보우하시어 후환이 없도록 해 주소서. 삼가 청작과 포해로 경건히 제사드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묘소의 왼쪽에서 토지신에게 제사 지낸다. -의식은 여느 의식과 같다. 축문은 운운한다. ◆ 우제(虞祭)의 축문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앞에서와 같다.- 아무개는 감히 현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나머지는 앞과 같다.- 께 분명히 고합니다. 유택을 새로 개장하여 마지막 우제를 마치고 나니, 밤낮으로 마음이 편치 않아 울부짖어 보아도 끝이 없습니다. -처자 이하는 다른 말로 고친다.-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경건히 우제를 드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관계에 대하여 고치는 말은 초상 우제의 축문에 나온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는 장막의 영좌 앞으로 나아가서 우제를 지내는데, 의식은 초우 때와 같다. -다만 차례대로 서서 슬피 곡한 다음 곡을 그치고, 삼헌(三獻)과 사신(辭神)에는 모두 곡하지 않는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는 영좌를 철수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살피건대, 《주자어류》에 “어떤 사람이 ‘왕숙(王肅)은 우제를 지내고 나서 상복을 벗는다고 하였으나, 이와 같은 개장에 있어서는 신(神)이 이미 사당에 있은 지가 오래인데, 어떻게 우제를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주자가 대답하기를 ‘그렇기는 하나,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상고할 도리가 없다. 모름지기 사당에 가서 반곡(反哭)을 하는 것이 마땅하나, 구준의 《가례의절》에 묘소에서 우제를 지낸다고 하여 세속에서 다 그것을 준행하고 있으니, 폐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하였다.” 하였다. ◆ 사당의 고사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앞에서와 같다.- 아무개는 이제 현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또는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의 체백(體魄)을 제자리가 아닌 곳에 모셨던 것을 이미 이달 아무 날 아무 곳에 개장하여 일을 끝마쳤으므로, 삼가 술과 과실로 경건히 고합니다. 사당에 고유하고, -의식은 앞에서와 같다. 고사(告辭)는 운운한다. ○ 《주자어류》에 “개장 때에는 모름지기 사당에 고유한 뒤에 또 묘소에 고유하고, 비로소 묘소를 열고 장례를 치른다. 이장하는 예를 마치고 나서는 제전(祭奠)을 올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또 사당에 고유한 다음 곡을 한 뒤에 일을 마쳐야만 비로소 온당하다. 이장을 거행할 때에는 다시 신주를 모셔낼 필요가 없고, 고유와 제사 때에는 역시 신주를 정침(正寢)으로 모셔낸다.” 하였다. 석 달 만에 복을 벗는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부모의 개장에는 시마복을 입었다가 장사를 지내고 나서 벗는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어떤 사람이 ‘정현(鄭玄)은 시마복의 달수가 끝난 뒤에 복을 벗는다고 하였고, 왕숙(王肅)은 상을 마치면 그만 벗는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고 묻자, 주자가 대답하기를 ‘지금에 와서 상고할 수가 없다. 예는 의당 후한 쪽을 따라야 하니, 정씨의 주장을 좇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하였다. ○ 살피건대, 복을 벗을 적에 허위(虛位)를 설치하여 곡을 하고 나서 벗는 것이 마땅하다. ○ 《통전》에서 두이(杜夷)가 의론하기를 “묘소가 도적에 의해 도굴을 당하였을 경우 개장의 예에 의하여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고, 하수지(何修之)는 의론하기를 “곽(槨)에까지 미치지 않았을 경우 신궁(新宮)에 불이 난 예에 의하여 사흘 동안 곡을 할 뿐이다.” 하였다. [사당의 의절(儀節)] -살피건대, 장사를 잘 모시고 제사를 오래도록 받드는 두 가지의 일은 다 가정을 두고 사는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에 《가례》의 제례(祭禮) 몇 조항을 취하여 편말(篇末)에 붙인다.   정침(正寢) 동쪽에 사당을 세운다. -제도는 도(圖)에 나온다. 사당이 있는 집은 종자(宗子)가 대대로 수호하고, 자손들이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 ○ 무릇 집의 제도는 향배(向背)는 불문하고 다만 앞은 남쪽, 뒤는 북쪽, 좌는 동쪽, 우는 서쪽으로 친다. 감실(龕室)은 넷을 만들어서 선대의 신주를 모시며, 후손이 없는 방친(傍親)은 그 반차(班次)에 따라 합사(合祀)한다. 백숙조부모는 고조에게 합사하고 백숙부모는 증조에게 합사하며, 아내와 형제 및 형제의 아내는 조부에게 합사하고, 자질(子姪)은 아버지에게 합사하되, 모두 서쪽을 향하게 한다. 주독(主櫝)은 모두 정위(正位)와 같다. ○ 정자가 말하기를 “복이 없는 상(殤) -7세 이하이다.- 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하상(下殤) -11세에서 8세까지이다.- 의 제사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지내고, 중상(中殤) -15세에서 12세까지이다.- 의 제사는 형제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지내고, 장상(長殤) -19세에서 16세까지이다.- 의 제사는 형제의 아들이 살아 있을 때까지만 지내며, 성인(成人) -남자는 관례(冠禮)를 한 경우, 여자는 시집을 간 경우이다.- 으로서 후손이 없는 자는 형제의 손자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제사를 지낸다.” 하였다. 제전(祭田)을 두고, 현재의 전지를 계산하여 20분의 1을 취하여 제전으로 세웠다가, 대수가 다할 경우 묘전(墓田)으로 삼는데, -묘사는 1년에 한 번씩 지낸다.- 부위(祔位)도 이와 같이 한다. 모두 규약을 세워서 관가에 보고하고 저당을 잡히거나 팔지 못하도록 한다. 제기(祭器)를 갖춘다. 제상ㆍ돗자리ㆍ교의ㆍ탁자ㆍ세숫대야ㆍ화로ㆍ술그릇ㆍ밥그릇을 곳간 안에 간직해 둔다. 곳간이 없을 경우 궤짝에 넣어 두며, 간직해 둘 수가 없을 경우 바깥문 안에 벌여 둔다. 주인은 사당 대문 안에서 새벽 알현(謁見)을 하고, 주인이 새벽 알현을 할 때에는 심의를 입고 분향한 다음, 두 번 절한다. -율곡이 말하기를 “비록 주인이 아니더라도 주인을 따라 같이 알현하는 것도 괜찮다.”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한다. 주인과 주부는 가까운 곳에 외출할 경우 대문 안에 들어가서 첨례(瞻禮)를 하고 떠날 것이며, 돌아와서도 그렇게 한다. 하룻밤을 자고 돌아올 경우 분향한 다음 두 번 절하며, 열흘 이상의 먼 길을 나설 경우는 두 번 절하고 분향한 다음 “아무개가 장차 아무 곳으로 가려고 하여 감히 고합니다.” 하고는 또 두 번 절하고 길을 떠나며, 돌아와서도 역시 그렇게 하는데, 다만 “아무개가 오늘 아무 곳에서 돌아왔으므로 감히 뵈옵니다.” 한다. 달을 넘겨서 돌아올 경우는 중문(中門)을 열고 계단 아래에 서서 두 번 절하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분향한 다음 고하고 두 번 절하며, 내려와 제 위치로 돌아가서 두 번 절한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는데, 다만 중문은 열지 않는다. ○ 무릇 오르내릴 적에는 주인은 동쪽 계단으로 하고, 주부 및 나머지 사람들은 비록 존장(尊長)이라도 서쪽 계단으로 한다. ○ 모든 절은 남자는 두 번, 부인은 네 번이다.     [참례(參禮)] 참례의 제구(諸具) 햇과일[新果] 술주전자[酒注] 술잔과 잔대[盞盤] 술병[酒甁] 찻잔과 받침대 향탁(香卓) 향로(香爐) 향합(香盒) 모사(茅沙) 세숫대야[盥盆] 수건[帨巾] 설ㆍ동지ㆍ초하루ㆍ보름에 참례한다. 설ㆍ동지ㆍ초하루ㆍ보름의 하루 전날 청소를 하고 나서 재숙(齋宿)한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문을 열고 주렴을 걷어올린 다음 감실(龕室)마다 햇과일 한 대반(大盤)씩을 탁자 위에 차려 놓고, 위(位)마다 찻잔과 받침대, 술잔과 잔대를 하나씩 신주독 앞에 갖다 놓는다. 모사 그릇을 향탁 앞에 놓고, 별도로 탁자 하나를 동쪽 계단 위에 갖다 놓은 다음, 술주전자와 술잔, 잔대를 그 위에 갖다 놓고, 술 한 병을 그 서쪽에 갖다 놓고, 세숫대야와 수건 둘씩을 동쪽 계단 아래 동남쪽에 갖다 놓되 받침대와 수건걸이가 있는 것은 서쪽에 두어서 주인과 친속(親屬)이 손을 씻도록 하고, 받침대와 수건걸이가 없는 것은 동쪽에 두어서 집사자가 손을 씻도록 한다. 수건은 모두 북쪽에 놓는다. 주인 이하가 모두 옷을 차려입고 문 안으로 들어가 제 위치로 나아가서 주인은 동쪽 계단 밑에 북쪽을 향하여 서고 주부는 서쪽 계단 밑에 북쪽을 향하여 선다. 주인에게 어머니가 있으면 특별히 주부의 앞에 자리잡는다. 주인에게 제부(諸父)ㆍ제형(諸兄)이 있을 경우 특별히 주인의 오른쪽 조금 앞에 자리잡아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두 줄로 서고, 제모(諸母)와 고모ㆍ형수ㆍ누이[姊]가 있을 경우 특별히 주부의 왼쪽 조금 앞에 동쪽을 윗자리로 하여 두 줄로 선다. 또 여러 아우들은 주인의 오른쪽에 조금 물러나 서고, 자손과 외집사자는 주인의 뒤에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두 줄로 서며, 주인의 제수 및 여러 누이[妹]들은 주부의 왼쪽에 조금 물러나 서며, 자손과 부녀와 내집사자는 주부의 뒤쪽에 동쪽을 윗자리로 하여 두 줄로 선다. 모두 제 위치에 서고 나면 주인은 손을 씻고 올라가서 홀(笏)을 꽂고 주독을 연 다음 여러 고위(考位)의 신주를 받들어다 주독 앞에 놓고, 주부는 손을 씻고 올라가 여러 비위(妣位)의 신주를 받들어다 고위의 동쪽에 놓는다. 다음에 반차에 따라 합사한 신주를 모셔내되 절차는 마찬가지이며, 맏아들과 맏며느리 또는 맏딸에게 명하여 손을 씻고 올라가서 나누어서 모셔내도록 한다. 항렬이 낮은 합사한 신주도 마찬가지이다. 신주를 모셔내고 나면 주부 이하는 먼저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가고, 주인은 향탁 앞에 나아가서 강신(降神)을 한 다음 홀(笏)을 꽂고 분향하고 두 번 절하고서 뒤로 조금 물러나 선다. 집사자가 손을 씻고 올라가서 병뚜껑을 열고 술을 주전자에 채운 다음, 한 사람은 주전자를 받들고 주인의 오른쪽으로 나아가고 한 사람은 술잔을 잡고 주인의 왼쪽으로 나아간다. 주인이 꿇어앉으면 집사자도 모두 꿇어앉는다. 주인이 주전자를 받아 술을 술잔에 치고 나서 주전자를 돌려준 다음, 술잔과 잔대를 받들되 왼손으로는 잔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는다. 모사(茅沙) 위에 술을 부은 다음, 술잔과 잔대를 집사자에게 건네주고는 홀을 꺼내어 잡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뒤로 조금 물러나 두 번 절하고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온다. 위치에 서 있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두 번 절하여 참신(參神)을 한다. 주인이 올라가서 홀을 꽂은 다음 주전자를 잡고 술잔에 술을 치되, 정위(正位)에 먼저 치고 다음에 부위(祔位)에 친다. 그다음에는 맏아들에게 명하여 항렬이 낮은 여러 부위에 친다. 주부가 올라가서 찻그릇을 잡으면 집사자가 탕병(湯甁)을 잡고 따라가서 앞에서와 같이 점다(點茶)를 한다. -차를 쓰지 않을 경우는 하지 않는다.- 맏며느리나 맏딸에게 명하는 것도 앞에서와 같다. 며느리와 집사자가 먼저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오면, 주인이 홀을 꺼내어 잡고 주부와 함께 향탁 앞에 동서로 갈라 서서 두 번 절하고 내려와 제 위치로 돌아온다. 위치에 있는 여러 사람과 함께 모두 두 번 절하여 사신(辭神)을 하고 물러난다. ○ 보름날에는 술도 마련하지 않고 신주도 모셔내지 않으며, 주인이 점다를 하면 맏아들이 이를 돕고 먼저 내려온다. 주인은 향탁 남쪽에 서서 두 번 절하고 이에 내려온다. 나머지의 의식은 앞서의 의식과 같다. ○ 무릇 성복(盛服)이라 함은 벼슬이 있을 경우 복두(㡤頭)ㆍ공복(公服)ㆍ대(帶)ㆍ화(靴)ㆍ홀을, 진사(進士)일 경우 복두ㆍ난삼(襴衫)ㆍ대를, 처사(處士)일 경우 복두ㆍ조삼(皂衫)ㆍ대를 갖추는 것이고, 벼슬이 없는 자는 통상 모자(帽子)ㆍ삼(衫)ㆍ대를 쓴다. 또 이를 갖추지 못할 경우 심의(深衣)나 양삼(涼衫)을 입으며, 벼슬이 있는 자도 통상 모자 이하를 착용하지만, 이는 성복이 되지 못한다. 부인의 경우 가계(假髻)ㆍ대의(大衣)ㆍ장군(長裙)을 쓰며, 딸로서 집에 있는 자는 관자(冠子)ㆍ배자(背子)를 쓰고, 중첩(衆妾)은 가계ㆍ배자를 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奉先雜儀)》에 “무릇 성복이란 벼슬이 있을 경우 공복ㆍ대ㆍ홀을 말하는데, 공복이 없을 경우 흑단령(黑團領)ㆍ사모(紗帽)ㆍ품대(品帶)를 쓰고, 벼슬이 없는 자는 흑단령ㆍ흑대(黑帶)를 쓰며, 부인의 경우 대의(大衣)ㆍ장군(長裙)을 쓴다.” 하였다. 속절(俗節)의 경우 시식(時食)을 올린다. 속절이란 이를테면 청명(淸明)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백중(百中)ㆍ중양(重陽) 따위인데, 무릇 향속(鄕俗)에서 숭상하는 명절이다. 시식이란 이를테면 주악[角黍] 따위가 있다. 무릇 그 속절에 즐겨 먹는 것을 큰 소반에 담고 간혹 나물과 과실도 담아서 올리는데, 예절은 설날ㆍ동지ㆍ초하룻날의 의식과 같다.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속절이란 1월 15일,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 8월 15일, 9월 9일, 섣달의 납일(臘日)을 말하며, 시식이란 이를테면 약밥ㆍ쑥떡ㆍ수제비 따위를 말한다. 만약 풍속에서 숭상하는 음식물이 없을 경우에는 마땅히 떡ㆍ과실 따위의 몇 품목으로 갖추어서 삭망 참배의 의식과 같이 올려야 하며, 새로운 음식물이 있을 경우에는 모름지기 삭망이나 속절에 모두 차려 놓는다. 만약 오곡(五穀)으로 밥을 지을 수 있을 경우 마땅히 반찬 몇 가지를 갖추어서 같이 차린다. 비록 보름날이더라도 신주는 역시 모셔내며, 술도 올린다. 만약 고기나 과실 따위일 경우 새벽 알현 때에 신주독을 열고서 단헌(單獻)을 한 다음, 분향하고 두 번 절한다. 단헌의 전물(奠物)은 무엇이든 생기는 대로 올리며, 모든 음식물은 사당에 올리기 전에는 먼저 먹을 수 없다. 만약 타향에 나가 있을 경우는 꼭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 일이 있을 때 고하는 고사(告辭) -관례와 혼례에 관한 고사는 《가례》의 본편(本篇)에 나온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현손 -정위(正位)에만 고하고 부위(祔位)에는 고하지 않는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감히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증조 이하는 모두 열서(列書)한다.- 께 분명히 고합니다. 아무개 -만약 자제 이하의 경우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라고 쓴다.- 가 아무 달 아무 날에, 임금님의 은전(恩典)을 입어서 아무 벼슬을 제수(除授)받았습니다. 이는 선조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서 얻은 녹위(祿位)로서, 선조의 남은 복을 누리게 되매 감격하고 사모하는 마음 견딜 수 없어서 삼가 술과 과실로 경건히 고유합니다. -이상은 벼슬을 제수받았을 때의 고사이다. ○ 급제(及第)하였을 때의 고사는 “임금님의 은전을 입어서 아무 과(科)에 몇 등급으로 급제하였습니다. 이는 선조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서 출신(出身)에 참여한 것이니”라 하고, 생진시(生進試)에 입격(入格)한 경우는 “임금님의 은전을 입어 생원시(生員試) 또는 진사시(進士試)에 몇 등급으로 입격하였습니다. 이는 선조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서 국학(國學)에 오른 것이므로”라 한다.[《격몽요결》에 나온다.] “-앞부분은 앞에서와 같다.- 아무 벼슬이 폄강(貶降)되어 선조의 가르침을 실추시켰으므로 황공하여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만약 제부(諸父)ㆍ제형(諸兄)의 경우라면 ‘선조의 가르침을 실추시켰으므로’ 이하를 다른 말로 고친다.-” 한다. ‘삼가[謹以]’ 이후는 앞에서와 같다. -이상은 폄관(貶官)의 고사이다. “-앞부분은 앞에서와 같다.- 아무 달 아무 날의 제서(制書) -살피건대, ‘제(制)’ 자는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쓰지 못하므로 ‘교(敎)’ 자로 바꾸는 것이 옳다.- 를 받든바, 현 아무 관계께는 아무 벼슬이, 현 아무 관계께는 아무 봉작(封爵)이 추증(追贈)되었습니다. 아무개 -자제의 경우는 앞에 나온다.- 는 선조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서 조정의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은혜로운 경사를 공손히 받들어서 이처럼 포증(褒贈)까지 내려졌습니다만, 녹봉(祿俸)으로 공양(供養)해 보지 못하여 가슴이 무너지고 목이 메이는 슬픔 견디기 어렵습니다.” 한다. ‘삼가[謹以]’ 이후는 앞에서와 같다. -만약 어떤 일로 인하여 특별히 추증되었다면 별도로 고유문을 지어서 그 내용을 서술한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선조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조정의 녹봉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황은(皇恩)을 입고서 조상에게 추은(推恩)하게 되었는데”라고 한다. 《주자대전》에 의하면 “은혜로운 경사를 입은바 영광이 조상의 사당에까지 미치어 아무 달 아무 날의 고(誥) [살피건대, ‘고(誥)’ 자는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쓰지 못하므로, ‘교지(旨)’로 바꾸어 쓰는 것이 옳다.] 에서, 고위(考位)를 추증하여 아무 벼슬을 삼고 비위(妣位)를 추증하여 아무 봉작을 삼았습니다만, 오직 음용(音容)이 날로 멀어져가서 추후의 봉양은 따라잡을 길이 없습니다. 명서(命書)를 공손히 받들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여 공손히 기록하고 분황(焚黃)을 하니 슬픔만 더하여집니다.” 하였다. ‘삼가’ 이후는 앞에서와 같다. ○ 만약 구준(丘濬)의 삼헌례(三獻禮)를 행한다면, 신주를 모셔내려 할 때 고하기를 “지금 자식 아무개가 조정에 벼슬하여 돌아가신 부모님께 벼슬과 작위를 추증하게 되었으므로, 휴가를 청하여 분황하려 합니다. 이에 감히 현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신주를 모셔내어 정침으로 나아가서 공손히 제사를 드릴 것을 청합니다.” 한다. ○ 이상은 추증의 고사이다. 일이 있을 경우 고유한다. 의식은 설ㆍ동지ㆍ초하루ㆍ보름 때와 같다. 다만 차나 술을 올리고, -부위(祔位)도 함께 진설한다.- 두 번 절한다. 주부가 먼저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가고 주인이 향탁(香卓)의 남쪽에 서면, 축(祝)이 축판을 잡고 주인의 왼쪽에 선 다음 꿇어앉아서 축문을 읽고 일어난다. 이에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간다. 나머지는 모두 같다. ○ 벼슬을 제수받거나 벼슬이 폄강되었음을 고유할 때 -고사는 앞에 나온다.- 에도 나머지는 같다. ○ 추증을 고유할 경우 추증받는 감실에만 고유한다. 추증된 벼슬과 봉작으로 고쳐 쓴 다음, -고쳐 쓰는 의식은 길제(吉祭) 조에 나온다.- 주인이 신주를 제자리에 받들어다 안치하고 이에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간다. 그 이후는 같다. -《가례의절》에 “하루 전날 재숙하고 당일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찻잔ㆍ술잔ㆍ과실ㆍ포를 추증받은 주독(主櫝) 앞에 차린다. 먼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명하여 누런 종이에 제서(制書) 한 통을 베껴 쓰게 해서 소반에 담아 향안(香案) 한가운데에 올려놓고 차례대로 늘어선다. 손을 씻은 다음 독을 열고 신주를 모셔내어 제자리로 돌아온다. 향안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분향한다. 주인이 스스로 고유하기를 ‘효남(孝男) 아무개는 삼가 제서를 받든바, 현고 아무 벼슬 부군께는 아무 벼슬이 추증되고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는 아무 봉작이 추증되었으므로, 감히 신주를 고쳐 쓸 것을 청합니다.’ 하고는 두 번 절한다. 이어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명하여 신주를 고쳐 쓰게 한 다음 주인이 받들어다 주독 앞에 놓고 제 위치로 돌아온다. 강신(降神)을 하여 두 번 절하고 제 위치로 돌아와 참신(參神)을 하면, 주인 이하가 모두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술을 쳐 올리고 두 번 절한다. 주인 이하가 모두 꿇어앉고 축문을 읽는다. 주인이 제 위치로 돌아와 꿇어앉으면 그 이하가 모두 꿇어앉는다. 축이 동쪽을 향하여 서서 제서를 펼친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집사자가 베껴 쓴 누런 종이의 제서를 받들고 향안 앞으로 나아가서 축문과 함께 불사른다. 그러고 나서는 사신(辭神)을 하고 모두 두 번 절한 다음 주인이 신주를 받들어 주독에 넣는다. 이것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행하는 절차이다. 만약 휴가를 청하여 분황하는 것이라면, 은명(恩命)을 공손히 받들어 천리 밖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그 영광이 부모에게 미친 것인데, 거행하는 예수(禮數)가 단헌(單獻)에 그칠 경우 너무 간촐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제(時祭)의 예에 준하여 거행해야 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구준의 《가례의절》이 자세한 듯하여 이에 함께 기록해 둔다. ○ 주인이 맏아들을 낳았을 경우 한 달 만에 알현시킨다. 의식은 위와 같은데, 다만 축문을 쓰지 않는다. 주인이 향탁 앞에 서서 고유하기를 “아무개의 며느리 아무 성씨가 아무 달 아무 날에 아들 아무개를 낳았으므로, 감히 알현시킵니다.” 한다. 고유를 마치고 나서 향탁 동남쪽에 서쪽을 향하여 서면 주부가 아들을 안고 나아가서 양쪽 계단 사이에 서서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이에 내려와 제 위치로 돌아온다. 이후는 같다. ○ 관례나 혼례의 경우는 《가례》의 본편에 나온다. ○ 축판의 모든 자칭(自稱)은 종자(宗子)가 아닐 경우 ‘효’ 자를 쓰지 않는다. -살피건대, 집안에 상이 나도 고유하여야 한다. 《예기》 증자문에 “임금이 죽으면 축이 여러 사당의 신주를 모아다 선조의 사당에 간직한다.” 하고, 그 주에 “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흉사를 위하여 한곳으로 모이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상에도 반드시 고유하는 것이다. 혹시 수화(水火)의 재해를 당하거나 도둑이 들었을 경우 먼저 사당을 구호(救護)하여 신주와 유서(遺書)를 옮기고, 그다음에 제기를 옮기며, 그런 다음에 가재(家財)에 손을 쓴다. -《예기》 단궁 하에 “선인(先人)의 방 [종묘를 뜻한다.] 에 화재가 났을 경우에는 3일 동안 곡한다.” 하였다. ○ 퇴계가 말하기를 “신주가 불에 탔을 경우 곧바로 지난날 신주를 모셨던 곳에 허위(虛位)를 설치하고 신주를 다시 쓴 다음, 분향을 하고 제사를 지낸다. 어떤 이는 정침(正寢)에서 하는 것이 옳다고도 한다.” 하였다. 세대가 바뀌면 신주를 고쳐 쓰고 체천(遞遷)을 한다. -신주를 고쳐 쓰고 체천을 하는 예절은 길제 조에 나온다.     [시제(時祭)] 시제의 제구 -모두 우제와 같다. 수조반(受胙盤) : 한 개 숟가락[匙] : 한 개 효손 아무개는 이번 중춘(仲春) -중하(仲夏)ㆍ중추(仲秋)ㆍ중동(仲冬)으로 계절에 따라 쓴다.- 의 달에,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과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증조 이하는 모두 함께 열서(列書)한다.- 제사를 지내고,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및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부식(祔食)하려 하므로, 감히 신주를 정침(正寢)으로 모셔낼 것을 청하오며, 공손히 전헌(奠獻)하는 바입니다. -이상은 신주를 모셔내는 고사이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현손 -증조할아버지의 경우 ‘효증손’, 할아버지의 경우 ‘효손’, 아버지의 경우 ‘효자’라고 쓴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감히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증조할아버지의 경우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증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고 쓴다. 조고비(祖考妣)와 고비(考妣)도 다 이와 같다.- 께 분명히 고합니다. 계절이 흘러서 바뀌어 중춘 -계절에 따라 쓴다.- 이 돌아오니, 계절에 따른 감회에 영원히 사모하는 마음 견딜 수 없어서, -고비의 경우 ‘영원히 사모하는 마음 견딜 수 없어’를 ‘드넓은 하늘처럼 끝이 없어서’로 고친다.- 감히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공손히 제사를 올리고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및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부식하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각위(各位)의 축문이다. 조고(祖考)께서 공축(工祝)에게 명하시어 너희 효손에게 많은 복을 받아 이르도록 하고 너희 효손에게 복을 나누어 주어서, 너희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녹을 받아 논밭에서 농사가 잘 되게 하고 장수하며 오래도록 살게 하는 것이니, 이 복이 그치지 않고 오래 계속될 것이다. -이상은 음복을 받을 때의 하사(嘏辭)이다. ◆ 웃어른들에게 음복을 보내는 글 -사마온공의 《제의(祭儀)》에 나온다. 아무개는 황공히 아룁니다. -평교 이하의 경우 ‘황공’ 두 글자를 뺀다.- 아무개가 이달 아무 날에 조고께 공손히 제사를 올렸으므로, -강등(降等)의 경우 ‘아무개가……에[某以] 두 글자를 뺀다.- 집사(執事)께 삼가 음복을 보내오니, -평교의 경우 ‘집사께[于執事]’ 세 글자를 빼고, 강등의 경우 ‘삼가’를 ‘이제’로 고친다.- 존자(尊慈)께서는 굽어 받아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평교의 경우 ‘존자께서는 굽어’를 빼고 ‘받아 주시기를’을 ‘받으시오’로 고치며, 강등의 경우 이상의 말들을 모두 뺀다.- 아무개는 황공히 두 번 절합니다. -평교의 경우 ‘황공’을 빼며, 강등의 경우 ‘두 번 절합니다’를 빼고 ‘아룁니다’만 쓴다. ◆ 웃어른이 답하는 글 아무개는 아룁니다. -강등의 경우 ‘황공히 아룁니다’로 쓴다.- 그대가 효성으로 조고(祖考)께 제향을 하고서, -평교의 경우 ‘삼가 받든바 아무개가 효성으로 조고께 제향을 하고서’로 쓴다.- 그 복을 혼자만이 차지하지 않고 이 늙은이에게까지 베푸니, -평교의 경우 ‘천교(賤交)에게까지’로 쓰고, 강등의 경우 ‘천자(賤子)에게까지’로 쓴다.- 감사하고 위로되는 마음 참으로 깊습니다. -평교의 경우 ‘감사한 마음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로 쓰고, 강등의 경우 ‘사은(私恩)의 과분한 영광에 고마운 마음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로 쓴다.- 아무개는 아무 사람에게 아룁니다. -평교의 경우 ‘아무개는 아무 사람의 좌우(左右)에게 두 번 절하고’로 쓰고, 강등의 경우 ‘아무개는 아무 사람의 집사에게 황공히 두 번 절하고’로 쓴다. 제사를 이미 다 올리매 조고께서 잘 흠향하셨으니, 바라건대 아무 관계는 오복(五福)을 갖추 받아서 가족을 잘 보존하고 집안이 잘 될지어다. -이상은 음복할 때의 축사이다. 제사를 이미 다 올렸으니 오복의 경사를 너희들은 함께 누릴지어다. -이상은 웃어른이 제사에 보답하여 어른과 아이들에게 하는 축사이다. 중월(仲月)의 초순으로 날을 잡아서, 맹춘(孟春) 하순의 초에 중월의 3순 중 각기 하루를 가리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로 잡는다. 주인은 옷을 차려입고 사당 중문 밖에 서쪽을 향하여 서고, 형제들은 주인의 남쪽에 조금 뒤로 물러나 서되 북쪽을 윗자리로 삼으며, 자손들은 주인의 뒤에 두 줄로 서되 서쪽을 향하여 북쪽을 윗자리로 삼는다. 주인의 앞에 탁자를 가져다 놓고 향로ㆍ향합ㆍ환교(環珓) 및 소반을 그 위에 벌여 놓고, 주인이 홀(笏)을 꽂고 향불을 피워 환교를 훈증(薰蒸)한 다음, -《가례의절》에 의하면, 향불의 연기를 쐰다.- 상순의 날짜로 명하기를 “아무개는 장차 다음 달 아무 날로써 제삿날을 골라 조고(祖考)께 나아가 제사를 올리려 하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곧장 환교를 소반에 던져서 하나가 엎어지고 하나가 젖혀지면 길하다. 길하지 않을 경우 다시 중순의 날짜로 점치는데, 여기서 또 길하지 않으면 다시 점치지 않고 바로 하순의 날을 쓴다. 날을 얻고 나면 축이 중문을 열고, 주인 이하가 삭망 때의 위치와 같이 북쪽을 향하여 서서 모두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올라가서 분향하고 두 번 절하면 축이 고사(告辭)를 가지고 주인 왼쪽에 꿇어앉아서 읽기를 “효손 아무개는 장차 다음 달 아무 날로 조고께 삼가 제사를 올리려고 점을 쳐서 이미 좋은 날을 얻었으므로 감히 고유합니다.” 한다. -하순의 날을 쓸 경우 ‘점을 쳐서 이미 좋은 날을 얻었으므로’는 쓰지 않는다.-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내려와 위치로 돌아와서 위치에 서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두 번 절한다. 축이 문을 닫으면 주인 이하가 다시 서쪽을 향한 위치로 돌아온다. 집사자는 대문 서쪽에 서되 모두 동쪽을 향하여 북쪽을 윗자리로 삼고, 축은 주인의 오른쪽에 선다. 축이 집사자에게 명하기를 “효손 아무개는 장차 다음 달 아무 날로 조고께 삼가 제사를 올리려고 하니, 유사(有司)는 제물을 갖추고 주위를 소제하라.” 하면, 집사자가 “예”라고 응답하고 이에 물러난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마온공은 춘분(春分)ㆍ추분(秋分)ㆍ하지(夏至)ㆍ동지(冬至)만 쓴다고 하였는데, 역시 좋다.” 하였다. 살피건대, 예서(禮書)의 주에 봄 제사는 봄철이 지나면 지내지 않고 여름 제사는 여름철이 지나면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할 때 중월(仲月)에 만약 연고가 있을 경우, 계월(季月)에도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사흘 전부터 재계를 하고, 사흘 전부터 주인은 뭇 남자들을 거느리고 밖에서 치재(致齋)를 하고, 주부는 뭇 부녀들을 거느리고 안에서 치재한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술을 마시더라도 취하도록 마시지 않으며, 고기를 먹더라도 양념을 하지 않는다. 또 초상에 조문을 가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으며, 모든 나쁘고 궂은 일에는 다 참여하지 않는다. -《격몽요결》에 “시제(時祭)의 경우 산재(散齋) 4일에 치재 3일, 기제(忌祭)의 경우 산재 2일에 치재 1일, 참례(參禮)의 경우 재숙(齋宿) 1일을 한다. 이른바 ‘산재’란 문상(問喪)을 가지 않고 문병(問病)을 하지 않고 양념을 먹지 않고 술을 취하도록 마시지 않고 모든 나쁘고 궂은 일에는 다 참여하지 않는 것이며, 이른바 ‘치재’란 음악을 듣지 않고 출입을 하지 않고 마음을 한데 모아 제사 지내는 선조를 생각하면서 평소의 거처를 생각하고 평소의 웃음소리와 말소리를 생각하고 즐거워하던 것을 생각하고 맛있어 하던 것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하루 전날 제위(祭位)를 설치하고 제기(祭器)를 벌여 놓는다. 주인이 뭇 남자들을 거느리고 심의(深衣)를 입고서 집사(執事)와 함께 정침(正寢)을 쓸고 의탁(倚卓)을 닦되, 아주 정결하도록 힘쓴다. 고조고비(高祖考妣)의 신위를 마루서 북쪽 벽 밑에 남쪽을 향하게 설치하되 고위(考位)는 서쪽이고 비위(妣位)는 동쪽이다. 각기 교의(交椅) 하나, 탁자 하나로써 합설(合設)을 한다. 증조고비와 조고비, 고비를 차례차례 동쪽으로 나가며 모두 고조고비의 신위와 같이 설치하되 세대마다 각각 자리를 만듦으로써 한데 붙어 있지 않게 한다. 부위(祔位)는 모두 동서(東序)에서 서쪽을 향하게 하되 북쪽을 윗자리로 삼아 설치한다. 더러는 양서(兩序)에서 서로 마주 보도록 하여 윗사람은 서쪽으로 가도록 설치하기도 한다. 아내 이하의 경우 계단 아래에 설치한다. 향안(香案)을 마루 한가운데에 설치한 다음 향로와 향합을 그 위에 올려놓고 띠를 묶고 모래를 담아서 향안 앞 및 각 신위 앞의 땅 위에 놓는다. 동쪽 계단 위에 주가(酒架)를 설치하고 별도의 탁자를 그 동쪽에 놓은 다음, 술주전자 한 개, 퇴주그릇 한 개, 소반 한 개, 수조반(受胙盤) 한 개, 수저 한 벌, 수건 한 개, 다합(茶盒)ㆍ다선(茶筅)ㆍ다잔(茶盞)ㆍ탁염접(托鹽楪)ㆍ초병(醋甁)을 그 위에 올려놓고, 화로(火爐)ㆍ탕병(湯甁)ㆍ향시(香匙)ㆍ향저(香筯)를 서쪽 계단 위에 벌여 놓는다. 별도로 탁자를 그 서쪽에 놓은 다음 축판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세숫대야와 수건 두 개씩을 동쪽 계단 아래의 동쪽에 설치하되, 서쪽의 것은 대야받침대와 수건걸이를 갖춘다. 또 제찬(祭饌)을 차릴 큰 상(牀)을 그 동쪽에 설치한다. 희생을 살피고 제기를 씻고 제찬을 갖춘다. 주인은 뭇 남자를 거느리고 심의를 입고 도살하는 곳에 가서 희생을 살피고 주부는 뭇 부녀들을 거느리고 배자(背子)를 입고 제기를 세척하고 가마솥을 깨끗이 닦아 제찬을 갖춘다. 제찬은 각 위마다 과실 여섯 가지, 소채(蔬菜)와 포해(脯醢) 각각 세 가지, 어육(魚肉)과 만두ㆍ흰떡 각각 한 소반, 국과 밥 각각 한 그릇, 간(肝) 각각 한 꼬치, 살코기 각각 두 꼬치를 마련하되, 아주 정결히 장만한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사람들이 먼저 먹지 않도록 하고 고양이나 개, 벌레나 쥐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소과(蔬果)와 주찬(酒饌)을 차려 놓고, 주인 이하가 심의를 입고 집사자와 함께 제소(祭所)에 나아가서 손을 씻고 각 위의 탁자 남쪽 끝줄에 과실 그릇을 차리고, 소채와 포해를 서로 사이사이에 섞어 다음 줄에 차린다. 술잔과 초그릇은 북쪽 끝줄에 차리되, 술잔은 서쪽에 놓고 초그릇은 동쪽에 놓으며, 수저는 가운데에 놓는다. 현주(玄酒)와 술은 각각 한 병씩을 병걸이에 걸어놓되, 현주는 그날 정화수(井華水)를 떠다 채워서 술병 서쪽에 걸어둔다. 화로에는 숯불을 피우고 병에는 물을 담아둔다. 주부는 배자를 입고 불을 때어 제찬을 데우되, 모두 아주 뜨겁게 데워서 찬합에 담아 내와서 동쪽 계단 아래 큰 상에 올려놓는다. 날이 밝으면 신주를 제위(祭位)로 받들어낸다. 주인 이하가 각각 옷을 차려입고 손을 씻고 닦은 다음 사당 앞으로 나아가면 뭇 남자들은 고유하던 날의 의식과 같이 차례로 서고, 주부는 서쪽 계단 아래에 북쪽을 향하여 선다. 주인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주부의 앞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백숙모와 여러 고모들이 그 뒤에 선다. 형수 및 제수와 누이는 주부의 왼쪽에 서되 주모(主母)와 주부보다 어른인 자는 모두 조금씩 나와서 서며, 자손과 부녀와 내집사자는 주부의 뒤에 두 줄로 서되 모두 북쪽을 향하여 동쪽을 윗자리로 삼는다. 자리가 정해지면 주인이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홀을 꽂고 향을 피운 다음, 홀을 꺼내어 손에 쥐고 고유한다. -고사(告辭)는 앞에 나온다.- 고유를 마치고 나서는 홀을 꽂고 주독(主櫝)을 거두어 정위(正位)와 부위(祔位)를 각각 상자 하나씩에 담아서 상자마다 집사자 한 사람씩을 시켜서 받들게 한다. 주인은 홀을 꺼내어 쥐고 앞에서 인도하고 주부는 뒤를 따르며, 항렬이 낮거나 어린 사람들은 주부의 뒤를 따른다. 정침에 와서는 서쪽 계단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주인은 홀을 꽂고 주독을 열어 여러 고위(考位)의 신주를 받들어 내어 제위로 나아가고, 주부는 손을 씻은 다음 여러 비위(妣位)의 신주를 받들어 제위로 나아간다. 부위(祔位)의 경우 자제(子弟) 한 사람이 받들고 간다. 이 절차를 마치고 나면 주인 이하가 모두 내려와서 위치로 돌아온다. 참신(參神)을 한다. 주인 이하가 사당 앞에서의 의식과 같이 차례로 선다. 서는 자리가 정해지면 두 번 절한다. 만약 늙고 병든 존장이 있을 경우 다른 곳에서 쉬게 한다. 강신(降神)을 한다. 주인이 올라가서 홀을 꽂고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한다.- 홀을 꺼내어 쥐고 뒤로 조금 물러나 선다. 집사자 한 사람은 술병을 열고 수건으로 입구를 닦은 다음 술을 주전자에 담고, 한 사람은 동쪽 계단 탁자 위의 잔대와 술잔을 가져와 주인의 왼쪽에 서고, 또 한 사람은 주전자를 들고 주인의 오른쪽에 선다. 주인이 홀을 꽂고 꿇어앉으면 잔대와 술잔을 받든 자도 꿇어앉아서 주인에게 잔대와 술잔을 올린다. 주인이 받아 들면 주전자를 들고 있던 자도 꿇어앉아서 술잔에 술을 친다. 주인이 왼손으로는 잔대를, 오른손으로는 잔을 잡고 모사(茅沙) 위에다 술을 부은 다음 잔대와 술잔을 집사자에게 건네주고, 홀을 꺼내어 쥐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내려와서 위치로 돌아온다. 제찬을 올린다. 주인이 올라가고 주부가 뒤를 따라 올라가면, 집사자 한 사람은 소반으로 어물(魚物)과 육물(肉物)을 받들고, 한 사람은 소반으로 미식(米食)과 면식(麫食)을 받들고, 또 한 사람은 소반으로 국과 밥을 받들고 따라 올라간다. 고조의 신위 앞에 이르면, 주인은 홀을 꽂고 육물을 받들어 술잔의 남쪽에 올리며, 주부는 면식을 받들어 육물의 서쪽에 올린다. 주인은 어물을 받들어 초그릇의 남쪽에 올리며, 주부는 미식을 받들어 어물의 동쪽에 올린다. 주인이 국을 받들어 초그릇의 동쪽에 올리며, 주부는 밥을 받들어 술잔의 서쪽에 올린다. 주인이 홀을 꺼내어 쥐고 차례로 여러 정위(正位)의 것을 차린 다음, 여러 자제와 부녀들로 하여금 각기 부위(祔位)의 것을 차리도록 한다. 진설이 다 끝나면 주인 이하가 모두 내려와서 위치로 돌아온다. 초헌(初獻)을 한다. 주인이 올라가 고조의 신위 앞으로 나아가면 집사자 한 사람이 술주전자를 들고 그 오른쪽에 선다. -겨울철에는 술을 먼저 데운다.- 주인이 홀을 꽂은 다음 고조고(高祖考)의 잔대와 술잔을 받들고 신위 앞에 동쪽을 향하여 서면 집사자가 서쪽을 향하여 서서 술잔에 술을 친다. 주인이 술잔을 받들어 본래의 곳에 올린다. 그다음에 고조비(高祖妣)의 잔대와 술잔을 그처럼 받들고 홀을 꺼내어 쥐고 신위 앞에 북쪽을 향하여 서면 집사자 두 사람이 고조고비(高祖考妣)의 잔대와 술잔을 받들고 주인의 왼쪽과 오른쪽에 선다. 주인이 홀을 꽂고 꿇어앉으면 집사자도 꿇어앉는다. 주인이 고조고의 잔대와 술잔을 받아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모사 위에 부은 다음, 잔대와 술잔을 집사자에게 건네주어 본래의 곳에 도로 갖다 놓는다. 고조비의 잔대와 술잔을 받아서 또 그처럼 한다. 홀을 꺼내어 쥐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뒤로 조금 물러나 서면, 집사자가 간(肝)을 화로에 구워서 접시에 담는다. -《의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 “소뢰의 간을 쓸 경우 소금은 오른쪽에 놓는다.” 하였고, 《의례》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에 “간으로써 주인을 따른다.” 하고, 그 소에 “역시 소뢰궤식례와 같이 소금은 오른쪽에 있어야 옳으나,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글을 갖추 쓰지 않아서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여기에 근거할 때 시제(時祭)에도 마땅히 소금을 써야 한다.- 형제 중 나이 많은 한 사람이 간 그릇을 받들어 고조고비의 앞 수저 남쪽에 올린다. -이에 밥그릇 덮개를 열어 그 남쪽에 놓는다. 다른 각 위의 것도 같이 한다.- 축이 축판을 들고 주인 왼쪽에 서 있다가 꿇어앉아서 읽는다. -축문은 앞에 나온다.- 축문을 다 읽고 일어나면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물러나서 다른 여러 신위 앞으로 나아가 처음과 같이 헌작(獻爵)을 하고 축문을 읽는다. 각 위의 축문을 다 읽고 나면, 곧 형제나 뭇 남자로서 아헌ㆍ종헌을 하지 못할 자들이 차례로 나뉘어 본위(本位)에 속한 부위(祔位)에 나아가 의식대로 헌작을 하는데, 다만 축문은 읽지 않는다. 헌작을 마치고 나서는 모두 내려와서 위치로 돌아온다. 집사자가 다른 그릇으로 술과 간을 거두어 본래 진설했던 곳에 갖다 놓는다. ○ 무릇 부위(祔位)는 백숙조부는 고조고에게 제부(隮祔)하고, 백숙부는 증조고에게 제부하고, 형제는 조고에게 제부하고, 자질(子姪)은 고에게 제부한다. 나머지도 다 이와 같다. 아헌(亞獻)을 한다. 주부가 하는데, 모든 부녀자가 산적을 받들어다 드리는 절차나 차례로 나뉘어 부위에 헌작하는 의식은 초헌의 의식과 같다. 다만 축문을 읽지 않는 것이 다르다. 종헌(終獻)을 한다. 형제 중의 나이 많은 사람이나 장남 또는 가까운 손님이 하는데, 뭇 자제들이 산적을 받들어다 드리는 절차나 차례로 나뉘어 부위에 헌작하는 의식은 아헌의 의식과 같다. 유식(侑食)을 한다. 주인이 올라가서 홀을 꽂고 주전자를 들고 나아가 모든 신위의 술잔에 술이 가득 차도록 첨작(添酌)을 하고 나서 향안(香案)의 동남쪽에 서면, 주부가 올라가서 숟가락을 밥 한가운데에 자루가 서쪽으로 가도록 꽂고 젓가락을 올려놓은 다음 향안의 서남쪽에 선다. 모두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내려와 위치로 돌아온다. 합문(闔門)을 한다. 주인 이하가 모두 나오면 축이 합문을 하는데, 문이 없는 곳에서는 발을 내려도 된다. 주인이 문 동쪽에 서쪽을 향하여 서고 뭇 남자들은 그 뒤에 서며, 주부가 문 서쪽에 동쪽을 향하여 서면 뭇 부녀자들은 그 뒤에 선다. 존장이 있을 경우 다른 곳에서 조금 쉬도록 한다. 이것이 이른바 ‘배부르게 흠향한다[厭]’는 것이다. 계문(啓門)을 한다. 축이 세 번 ‘어흠’ 하고는 계문을 하면 주인 이하가 모두 들어가는데, 먼저 다른 곳에서 쉬고 있던 존장도 들어가서 위치로 나아간다. 주인과 주부가 차를 받들고 -국속(國俗)에는 물로 대신한다.- 고위와 비위의 앞으로 나뉘어 나아가 올린다. 부위에 대해서는 여러 자제와 부녀자들로 하여금 올리도록 한다. 음복(飮福)을 받는다. 집사자가 향안 앞에 자리를 깔면 주인은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고, 축은 고조고위 앞으로 나아가 잔대와 술잔을 들고 주인의 오른쪽으로 돌아온다. 주인이 꿇어앉으면 축도 꿇어앉는다. 주인이 홀을 꽂고 잔대와 술잔을 받아 술을 모사 그릇에 조금 붓고 술을 조금 마시면, 축이 숟가락과 접시를 가지고 모든 위(位)의 밥을 조금씩 떠서 받들고 주인의 왼쪽으로 돌아와서 주인에게 복[嘏]을 빈다. -하사(嘏辭)는 앞에 나온다.- 주인이 술을 자리 앞에 놓고 홀을 꺼내어 쥐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두 번 절하고는 홀을 꽂고 꿇어앉아서 밥을 받아 맛을 본다. 밥을 왼쪽 옷소매에 담은 다음 소매를 새끼손가락에 걸고는 술을 가져다 다 마신다. 집사자가 술잔을 오른쪽에서 받아 주전자 옆에 놓고, 밥도 왼쪽에서 받아 이와 같이 한다. 주인이 홀을 쥐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동쪽 계단 위에 서쪽을 향하여 서면, 축이 서쪽 계단 위에 동쪽을 향하여 서서 이성(利成)을 고한다. 내려와 위치로 돌아와서 위치에 서 있던 여러 사람과 함께 모두 두 번 절한다. 주인은 절을 하지 않고 내려와 위치로 돌아온다. 사신(辭神)을 한다. 주인 이하가 모두 두 번 절한다. 신주를 모셔 들인다. 주인과 주부가 모두 올라가서 각기 신주를 받들어 주독 안에 넣는다. 주인이 상자로 주독을 거두어 담아서 모셔낼 때와 같이 사당으로 모시고 돌아간다. 철상(徹床)을 한다. 주부가 돌아와서 철상을 감독한다. 술잔과 주전자 및 다른 그릇에 담긴 술을 모두 병에 옮겨 담아서 입구를 봉하는데, 이른바 복주(福酒)이다. 과실과 소채, 육식(肉食) 따위는 모두 평소 쓰는 그릇에 옮겨 담는다. 제기는 주부의 감독하에 깨끗이 씻어서 간직한다. 음복을 나눈다. 이날 주인의 감독하에 제물 고기를 조금씩 나누어 찬합에 담고 술과 함께 봉한 다음, 종을 시켜서 편지를 가지고 제물을 친구들에게 돌리도록 한다. 드디어 자리를 깔고 남녀가 다른 곳에서 음복을 하는데, 항렬이 높은 사람은 따로 한 줄을 만들어 남향으로 마루 한가운데에 동서로 나누어 앉는다. 만약 한 사람뿐일 경우에는 마루 한가운데에 앉는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차례로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 보며 앉는다. 웃어른 한 사람이 먼저 나아가 앉으면 뭇 남자들이 차례로 서서는 한 세대로 한 줄을 만들고 동쪽을 윗자리로 삼아 모두 두 번 절한다. 자제(子弟)의 연장자(年長者) 한 사람이 조금 앞으로 나아가 서고, 집사자 한 사람은 주전자를 들고 그 오른쪽에 서고 한 사람은 술잔을 들고 그 왼쪽에 선다. 헌자(獻者)가 홀(笏)을 꽂고 꿇어앉아서 -아우가 헌작을 하였을 경우 연장자가 일어서고 자질(子姪)이 헌작을 하였을 경우 연장자가 앉아 있는다.- 주전자를 받아 술을 친 다음 주전자는 돌려주고 잔을 받아 들고 축사를 한 뒤에, -축사는 앞에 나온다.- 잔을 가지고 있던 자에게 건네주면 항렬이 높은 사람 앞에 갖다 놓는다. 연장자가 홀을 꺼내어 쥐고 항렬이 높은 사람은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신다. 술을 다 마시고 나면 연장자가 엎드렸다가 일어나 뒤로 물러나서 위치로 돌아와 뭇 남자들과 함께 두 번 절한다. 항렬이 높은 사람이 주전자와 연장자의 잔을 가져오도록 명하여 앞에 놓고 스스로 술을 치고 축사한다. -축사는 앞에 나온다.- 집사자에게 명하여 차례대로 위치에 나아가 술을 두루 다 치도록 한다. 술을 치고 나면 연장자가 앞으로 나아와 꿇어앉아서 술을 받아 다 마신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나 뒤로 물러나 선다. 뭇 남자들이 앞으로 나아가 읍(揖)을 하고 뒤로 물러나 서서 마시고 나면, 연장자가 뭇 남자들과 함께 모두 두 번 절한다. 여러 부녀자들은 안에서 여자 존장자에게 음복을 올리는데, 의식은 남자와 같다. 다만 꿇어앉지 않는 것이 다르다. 음복을 마치고 나서는 자리에 나아가 앉으면 육식(肉食)을 올리는데, 여러 부녀자들이 당 앞으로 나아가서 남자 존장에게 헌수(獻壽)를 하면 남자 존장은 의식대로 답배(答杯)한다. 뭇 남자들은 안마루로 나아가 여자 존장에게 헌수를 하면 여자 존장은 의식대로 답배한다. 이에 자리에 나아가 앉으면 면식(麫食)을 올리는데, 안팎의 집사자가 각기 안팎의 존장에게 의식대로 헌수를 하며, 답배는 하지 않는다. 드디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앞에 나아가 두루 술을 치고는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 번 절하고 물러난다. 드디어 미식(米食)을 올리는데, 미식을 올리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술을 돌리고 간간이 제찬(祭饌)도 더 돌린다. 술과 제찬이 모자랄 경우 다른 술과 다른 찬을 보탠다. 자리를 파할 무렵에 주인은 바깥 종들에게 음복을 나누어 주고 주부는 안에 있는 집사자들에게 음복을 나누어 주며, 미천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 주어서 그날로 음식을 다 없앤다. 음복을 받은 자는 모두 두 번 절하고, 곧 자리를 거둔다. 무릇 제사는 사랑과 공경의 성의를 다하는 것을 주로 할 뿐이므로, 집이 가난할 경우 가산(家産)의 유무(有無)에 맞게 지내고 질병이 있을 경우 근력을 감안하여 지낸다. 그러나 재산과 조력이 가능한 자는 마땅히 의식대로 지내야 한다. -《주자대전》에 “형제가 따로 살더라도 애당초 사당은 달리하지 않으므로, 단지 형이 제사를 주관하고 동생이 집사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데, 혹 제물 따위로 돕는 것도 마땅하다. 서로 거리가 멀 경우, 제사 때에 곧바로 제위(祭位)를 설치하고 지방(紙榜)을 써서 신위마다 표기를 하여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다 지낸 뒤에는 지방을 사르는 것도 하나의 변례(變禮)일 듯하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증자가 ‘대부(大夫)의 제사에 정조(鼎俎)를 이미 벌여 놓고 변두(籩豆)를 이미 진설한 상태에서 갑작스런 일로 예를 이룰 수 없어서 제사를 폐지하는 경우는 몇 가지입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무릇 천자(天子)가 죽거나, 황후(皇后)가 죽거나, 왕이 죽거나, 왕비가 죽거나, 임금의 사당에 불이 났거나, 일식(日食)이 있거나, 삼년상을 당하거나, 자최(齊衰)나 대공(大功)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모두 폐지한다. 외상(外喪)의 경우 자최 이하에는 지낼 수 있으나, 자최 중의 제사에서는 시동(尸童)이 들어가서 밥을 세 숟가락만 떠 먹게 하고는 더 먹도록 권하지 않고, 술로 입을 가시는 의식도 입을 가시게만 할 뿐 답배하지 않으며, 대공 중의 제사에서는 술로 답배만 하고 그친다. 소공(小功)과 시마(緦麻) 중의 제사에서는 방 안에서 헌수하는 것으로 그칠 따름이다. 사(士)가 대부와 다른 점은 시마의 상중에도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이다. 제사를 받을 자가 복(服)이 없는 경우는 지낸다.’ 하였다.” 하였는데, 그 주에 “외상이란 대문 밖에서 난 상을 말한다. 사는 대부보다 지체가 낮기 때문에 비록 시마복이라 하더라도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사를 받을 자가 복이 없는 경우란 아내의 부모와 어머니의 형제자매를 말하는 것인데, 자기는 비록 복이 있더라도 제사를 받을 자가 복이 없을 경우는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 살피건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나의 집은 시제(時祭) 외에 동지(冬至)ㆍ입춘(立春)ㆍ계추(季秋)의 세 제사가 있었는데, 뒤에 동지와 입춘의 두 제사는 참람한 듯하여 불안을 느낀 나머지 그만 폐지하였다. 계추의 제사는 종전대로 아버지의 사당에 지내는데, 나의 생일날 지내니, 이는 마침 나의 생일이 계추에 있기 때문이다.” 하였고, 《주자대전》에 또 “네 계절에 토지신에게 지내는 집안의 제사가 있다.”는 말이 있다. 《가례의절》 및 《격몽요결》에도 다 이런 말이 있으니, 예를 좋아하는 집에서 채택하여 쓰면 좋을 것이다.     기일(忌日) 기일제(忌日祭)의 제구(諸具) -앞에서와 같다. ○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이 말하기를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에서는 기일제에 한 위(位)만을 차리고 정자(程子)의 제례(祭禮)에서는 고비(考妣)를 함께 제사하여서, 두 분의 설이 같지 않다. 대개 한 위만을 차리는 것은 예의 정상이고 고비를 함께 제사하는 것은 예가 정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과 같이 하고 잔치를 벌일 때 같은 상을 차리는 뜻으로 본다면, 예가 정에 근본을 둔 것인만큼 함께 지내는 것도 그만두지 못할 일일 것이다.” 하였다. 이제 현고 아무 벼슬 부군 -어머니의 경우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로 쓴다. 조고비ㆍ증조고비ㆍ고조고비도 이와 같다.- 께서 영면하신 날 -처(妻)ㆍ제(弟) 이하는 ‘죽은 날’로 쓴다.- 에 감히 -처ㆍ제 이하는 ‘감히’를 쓰지 않는다.- 신주 -고비를 함께 지낼 경우 ‘현고와 현비의 신주’로 쓴다. 조고비ㆍ증조고비ㆍ고조고비도 이와 같다.- 를 정침(正寢)으로 모셔내어 -혹은 대청으로 모신다.- 공손히 추모의 정성을 펼 것을 -처ㆍ제 이하는 ‘멀리 정례(情禮)를 펼 것을’로 쓴다.- 청합니다. -이상은 신주를 모셔낼 때의 고사(告辭)이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조고비의 경우 ‘효손’으로, 증조고비의 경우 ‘효증손’으로, 고조고비의 경우 ‘효현손’으로 쓴다. ○ 방친(傍親)과 형제, 처자의 경우는 제주(題主)ㆍ우제(虞祭) 등의 축문을 참고하면 된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감히 현고 아무 벼슬 부군 -어머니의 경우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로 쓴다. 조고비, 증조고비, 고조고비도 이와 같다. 만약 고비를 함께 제사할 경우 고비를 열서한다.- 께 분명히 고합니다. 계절이 옮겨져 바뀌어 휘일(諱日)이 다시 다가오니, -만약 고비를 함께 제사할 경우에는 ‘아무 관계의 휘일’로 쓴다. ○ 처ㆍ제 이하는 ‘망일(亡日)이 다시 돌아오니’로 쓴다.- 선인을 추모하고 계절에 감개하여 깊은 은혜 끝이 없습니다.[追遠感時 昊天罔極] - 조고비의 경우 ‘깊은 은혜 끝이 없습니다’를 ‘영원한 사모의 심정 견디지 못하겠습니다[不勝永慕]’로 고치고, 방친의 경우 이 여덟 글자를 빼고 다만 ‘감회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不勝感愴]’로 쓴다.-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경건히 제사 올리오니, -처ㆍ제 이하는 ‘이처럼 제전(祭奠)을 올립니다[伸此奠儀]’로 쓴다.-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기제사의 축문이다. 하루 전날 재계하고 제위(祭位)를 설치한다. 의식대로 설치하되, 한 위만 설치한다. -만약 고비를 함께 지낼 경우 두 위를 설치한다. 제기를 벌여 놓고 제찬을 갖춘다. -퇴계가 말하기를 “자손의 죽음이 마침 선조의 제삿날일 경우 그 기제사에 고기를 쓴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산 사람과 같이 섬기는 의리로 미루어 볼 때 미안할 듯하다. 그러나 신도(神道)는 산 사람과 다르므로 고기를 쓰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만약 사리상 좋지 않다면 고인(古人)이 벌써 언급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소과(蔬果)와 주찬(酒饌)을 차린다. 모두 의식대로 차린다. 날이 밝으면 주인 이하가 변복(變服)을 하고, 아버지의 사당인 경우 주인 형제가 참사복두(黲紗幞頭)에 참포삼(黲布衫)을 입고 포과각대(布裹角帶)를 띤다. 할아버지 이상의 경우 참사삼(黲紗衫)을, 방친의 경우 조사삼(皂紗衫)을 입으며, 주부는 특계(特髻)의 수식(首飾)을 제거하고 백대의(白大衣)에 담황피(淡黃帔)를 입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제거한다. 사당에 나아가서, -차례대로 서서 두 번 절하고 향을 피우고 고유하는 의식은 모두 시제 때와 같으며, 고사는 앞에 나온다. 신주를 받들고 정침(正寢)으로 나아온다. 의식대로 한다. 참신(參神)을 하고, -지방(紙榜)을 쓸 경우 강신(降神)을 먼저 하고 나서 참신을 한다. 강신을 하고, 진찬(進饌)을 하고, 초헌(初獻)을 한다. 의식대로 하되, -축문은 앞에 나온다.- 축문을 읽고 나서 축이 일어나면 주인 이하가 슬피 곡을 한다. -조고비까지 섬기는 경우도 같다. 《가례의절》에 나온다.- 나머지는 모두 같다. 아헌(亞獻)을 하고, 종헌(終獻)을 하고, 유식(侑食)을 하고, 합문(闔門)을 하고, 계문(啓門)을 하고, 사신(辭神)을 하고, 납주(納主)를 하고, 철상(徹床)을 한다. 모두 의식대로 하는데, 다만 음복을 받지 않고 음복을 나누지 않는 것이 다르다. 이날 술을 마시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고, 참건(黲巾)ㆍ소복(素服)ㆍ소대(素帶) 차림으로 지내다가 밤에 바깥채에서 잠을 잔다. ○ 장자(張子)의 문집에 “기일(忌日)의 변복(變服)은 증조고와 조고에게는 모두 포관(布冠)에 소대(素帶)ㆍ마의(麻衣)를 하고, 증조비와 조비에게는 모두 소관(素冠)ㆍ포대(布帶)ㆍ마의를 하며, 아버지에게는 포관ㆍ포대ㆍ마의ㆍ마구(麻屨)를 하고, 어머니에게는 소관ㆍ포대ㆍ마의ㆍ마구를 하고, 백숙부(伯叔父)에게는 소관ㆍ소대ㆍ마의를 하고, 백숙모에게는 마의ㆍ소대를 하고, 형에게는 마의ㆍ소대를 하고, 아우와 조카에게는 갈옷[褐]으로 갈아입고 고기를 먹지 않고, 서모(庶母) 및 형수에게는 똑같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였다. ○ 《격몽요결》에 “부모의 기제의 경우 벼슬이 있는 자는 관은 호색모(縞色帽)에 술을 드리우거나 참포모(黲布帽)에 술을 드리우고, 옷은 옥색 단령(玉色團領)에 백포로 싼 각대(角帶)를 착용하며, 벼슬이 없는 자는 호색립(縞色笠)이나 참색립(黲色笠)에 옥색 단령, 백대(白帶)를 착용하고, 신은 모두 백화(白靴)를 신는다. 부인의 경우 호색피(縞色帔)에 백의(白衣)와 백상(白裳)을 착용한다. 조부모 이상의 기일인 경우 벼슬이 있는 자는 오사모(烏紗帽)에 옥색 단령, 백포로 싼 각대를 착용하고, 벼슬이 없는 자는 흑립(黑笠)에 옥색 단령, 백대를 착용한다. 부인의 경우 현피(玄帔)에 백의와 옥색상(玉色裳)을 착용한다. 방친(傍親)의 기일인 경우 벼슬이 있는 자는 오사모에 옥색 단령, 오각대(烏角帶)를 착용하고, 벼슬이 없는 자는 흑립에 옥색 단령, 흑대(黑帶)를 착용한다. 부인은 화려한 옷을 제거하기만 한다.” 하였다. ○ 호(縞)는 흰색과 검은색의 혼합색이고, 참(黲)은 담청흑색으로 곧 오늘날의 옥색이다.     묘제(墓祭) 묘제의 제구 -앞에서와 같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조고비의 경우 ‘효손’으로 쓰고, 증조고비의 경우 ‘효증손’으로 쓰고, 고조고비의 경우 ‘효현손’으로 쓴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감히 현고 아무 벼슬 부군 -어머니의 경우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로 쓴다. 조고비, 증조고비, 고조고비에게도 이와 같다. 고비를 합장한 경우는 쌍행으로 쓴다.- 의 묘소에 분명히 고합니다. 세월이 흘러 계절이 바뀌어 우로(雨露)가 벌써 내리니, -한식(寒食)의 경우 세시(歲時)를 일컫고 나서 이 구절을 ‘세율(歲律)이 벌써 바뀌니’로 고치고, 단오(端午)의 경우 ‘시물(時物)이 창무(暢茂)하니’로 고치며, 추석(秋夕)의 경우 ‘흰 서리가 벌써 내리니’로 고친다.- 봉영(封塋)을 우러르며 전소(奠掃)를 하매 깊은 은혜 끝이 없습니다. -조고비의 경우 ‘깊은 은혜 끝이 없습니다’를 ‘느꺼워하고 사모하는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로 고친다.-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공손히 세사를 올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묘소 앞에서의 축문이다.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감히 토지신(土地神)께 분명히 고합니다. 아무개는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의 묘소에 공손히 세사(歲事)를 올립니다만, 이 보우(保佑)는 실로 신의 미덕에 힘입었습니다. 감히 주찬(酒饌)으로써 경건히 제사 올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토지신에게 고하는 축문이다. 3월 상순에 날을 가린다. -정자(程子)와 장자(張子)와 한 위공(韓魏公)은 다 같이 한식(寒食) 및 10월 1일에 묘소에 절하고 제사를 지냈다. ○ 회재(晦齋)가 이르기를 “《가례》를 상고해 보니 묘제는 3월 상순에 날을 가려서 거행하였으나, 오늘날 풍속이 정조(正朝)ㆍ한식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 다 같이 묘소에 나아가 절하고 전소(奠掃)를 하니, 이제 풍속을 따르는 것이 옳다.” 하였다. ○ 율곡이 이르기를 “묘제는 사계절에 다 지낼 경우 가묘(家廟)와 차등이 없어서는 미안할 듯하다. 마땅히 한식과 추석 두 절후에는 제찬(祭饌)을 잘 마련하여 가지고 가서 축문을 읽고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등의 의식을 일체 《가례》 묘제의 의식대로 하고, 정조와 단오 두 절후의 경우 찬물(饌物)을 약간 마련하여 가지고 가서 축문과 토지신에 대한 제사도 없이 단헌(單獻)을 하는 것이 옳다. 대저 이렇게 할 경우 고례(古禮)를 참작하고 금례(今禮)를 통함에 있어 타당하게 될 듯하다.” 하였다. 하루 전날 재계를 하고, 의식은 가제(家祭)와 같다. 제찬(祭饌)을 마련한다. 묘소의 매 분(分)에 대한 제품(祭品)은 시제(時祭)와 같이 한다. ○ 다시 어육(魚肉)과 미면(米麫)을 각각 한 대반(大盤)씩 차려서 토지신에게 제사한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청소를 하고, 주인이 심의(深衣)를 입고 집사자를 거느리고 묘소로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나서 묘역의 안팎을 돌되, 슬퍼하며 세 바퀴를 돌아 살펴본다. 풀이나 가시나무가 돋아난 것이 있으면 즉시 날연장으로 베어내고 청소를 한다. 청소를 마치고 나서는 다시 위치로 돌아와 두 번 절한다. ○ 또 묘역 왼쪽에 땅바닥을 쓸어내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돗자리를 깔고 제찬을 진설한다. 깨끗한 새 돗자리를 묘소 앞에 깔고 가제의 의식과 같이 제찬을 진설한다. 참신(參神)ㆍ강신(降神)ㆍ초헌(初獻)을 한다. -축문은 앞에 나온다.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한다. 모두 자제(子弟)와 친붕(親朋)이 올린다. 사신(辭神)을 하고 나서 철상을 한다. [드디어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돗자리를 깔고 제찬을 진설한 다음, -땅바닥을 쓸어낸 곳에 돗자리를 깔고 제찬 네 가지를 대반에 각각 담아서 진설한다.- 돗자리 남쪽 끝에 또 잔대와 술잔을 놓고 그 북쪽에 수저를 놓는다. 나머지는 모두 앞에서와 같다. 강신을 하고, 참신을 하고, 삼헌(三獻)을 한다. 앞에서와 같다. -축문은 앞에 나온다. 사신을 하고 나서 철상을 하여 물러난다. -주자가 말하기를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예는 묘 앞의 제사와 똑같게 하는 것이 옳다. 채소ㆍ과실ㆍ젓[鮓]ㆍ포(脯)ㆍ밥ㆍ차(茶)ㆍ탕(湯)을 각각 한 그릇씩 담아서 어버이를 모시고 신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고, 차별을 두지는 말아야 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이는 《가례》에 나오는 찬품과 같지 않으므로, 일단 기록해 두어서 참고에 대비하는 것이다.
133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1 댓글:  조회:3605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35권 의례문해(疑禮問解)-1 가례도(家禮圖) 복제도(服制圖)에 출계(出繼)한 아들을 위한 복(服)이 기년(期年)으로 강복(降服)되어 있는 문제에 대하여 [문] 오복도(五服圖)의 전면 아래쪽에 논한바, 본생부모(本生父母)도 역시 출계한 아들을 위하여 부장기(不杖期)로 강복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황종해(黃宗海)- [답]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부장기 장에서 상고할 수 있으며, 가례도(家禮圖)와 정도가(鄭道可 정구(鄭逑))의 연혁도(沿革圖)도 다 이것에 근본하여 말한 것이다. 《의례》 상복의 부장기 장에 “남의 후계가 된 자가 본생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본생부모도 그를 위하여 같이 입어 갚는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같이 입어 갚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깊이 억제하여 본소(本疏)에 보인 ‘왕래하며 서로 갚는다[往來相報]’는 법과 같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이미 왕래하며 서로 갚는다고 하였고 보면, 본생부모에게도 역시 형제의 아들에게와 같이 부장기로 입어야 할 것이다.   복제도의 잘못된 곳에 대하여 [문] 복제도에 아버지의 자매(姊妹)는 부장기를 입되 시집을 갔을 경우 소공(小功)으로 강복하고, 질녀 역시 부장기를 입되 시집을 갔을 경우 대공(大功)으로 강복한다고 하였습니다. 보복(報服)으로 말한다면 강복한 경중이 서로 같지 않고, 존비로 말한다면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는 무겁게 되고 낮은 이가 높은 이에게는 도리어 가볍게 되었으니, 여기에 무슨 뜻이 있습니까? -정랑(正郞) 오윤해(吳允諧)- [답] 무릇 시집을 간 자는 한 등급만을 강복할 뿐이므로, 가례도에 우선 두 등급을 강복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잘못이니, 이 한 조항뿐만이 아니다. 조고(祖姑)에 대한 소공도 시집을 갔을 경우 시마(緦麻)로 강복하게 되어 있으나 복제도에는 시집을 가면 복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고, 종자매(從姊妹)에 대한 대공도 시집을 갔을 경우 소공으로 강복하게 되어 있으나 복제도에는 시마로 되어 있으니, 이 두세 조항은 당연히 본문을 따라 한 등급씩 강복하는 것이 옳다. 복제도의 잘못된 곳은 이 밖에도 많다. 삽(翣) 제도의 잘못에 대하여 [문] 삽의 제도에서 부채와 같되 네모졌으며 두 개의 뿔이 높다고 한 것은 대강의 설명일 뿐입니다. 그 뿔이 둥그렇게 굽어져 내려온다는 말에 무슨 큰 의문이 있겠습니까. 비스듬하고 뾰족하여진 부분부터 뿔이라고 한 것도 꼬집어 말할 만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이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그른 것임을 알고 가짜를 만들었다.’라고 하며 배척하기까지 하시니, 형의 처사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견해를 놀라게 할 것이 두려우니 아직 그냥 두고 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사(知事) 신식(申湜) ○ 신공(申公)이 《가례언해(家禮諺解)》 및 가례언해도(家禮諺解圖)를 편찬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정의(訂議)한 것이다. [답] 이미 부채와 같되 네모졌다고 하였고 보면, 높이와 너비를 다 두 자로 하여 세로와 가로를 정사각으로 한 다음 두 뿔만 네 치의 높이로 하자는 것 뿐입니다. 이제 만약 둥그렇게 굽어져 내려와서 비스듬하고 뾰족하여진 부분부터 뿔이라고 한다면 과연 네모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삽 제도의 잘못이 큰 사단은 아니므로 굳이 고집할 것은 없으나, 만약 세상의 견해를 놀라게 한다는 데 구애를 받는다면 그때마다 세상의 풍속을 따르겠다는 것입니까. 가례도 및 국조오례의도(國朝五禮儀圖)에도 다 세 개의 뿔로 되어 있어서 수십 년 전부터 온 세상이 다 세 뿔의 제도를 따랐는데, 이제 공이 편찬하고 있는 가례언해도에서만 두 개의 뿔로 고쳤으니,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세상이 놀라워할 것에 구애받지 않는 것입니까. 신주(神主)의 황(皇) 자와 현(顯) 자의 의미에 대하여 [문] 신주를 쓰는 법식이 예전에는 ‘황’ 자를 썼으나 지금은 ‘현’ 자를 쓴다고 하는데, ‘황’과 ‘현’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宋浚吉)- [답] 《통전(通典)》 및 구준(丘濬)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통전》에서 이르기를 “주(周)나라의 제도에 제후(諸侯)는 오묘(五廟)이니, 고묘(考廟)ㆍ왕고묘(王考廟)ㆍ황고묘(皇考廟)ㆍ현고묘(顯考廟)ㆍ조고묘(祖考廟)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왕(王)과 황(皇)은 모두 군(君)의 뜻이고, 현(顯)은 밝다[明]는 뜻이고, 조(祖)는 비롯한다[始]는 뜻이니, 군(君)ㆍ명(明)ㆍ시(始)의 뜻의 글자를 취한 것은 근본을 존숭하자는 의도에서이다.’ 하였다.” 하였다. ○ 경산(瓊山) 구준이 말하기를 “황과 현은 모두 밝다는 뜻으로 뜻이 서로 통한다.” 하였다.   도자(韜藉)에 대하여 [문] 도자의 제도가 《가례》의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도(圖)에만 나오니, 준용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이 말하기를, “이것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제도가 아니고, 오늘날 가례도에 나오는 것은 바로 양복(楊復)이 만든 것이다.” 하였습니다. 경산의 《가례의절(家禮儀節)》에도 ‘꼭 쓸 필요는 없다’고 한 말로 볼 때, 이 설이 옳은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이요경에게 주는 편지[與李堯卿書]’에 이르기를, “고위(考位)에는 자주색 주머니를 쓰고 비위(妣位)에는 분홍색 주머니를 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도(韜)의 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제도가 본래는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서의(書儀)》에 나왔다고 한다. 또 경임(景任)이 “가례도는 양복이 만든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어느 책에서 나온 것인가. 양복은 바로 주자의 문인(門人)인데, 신주도(神主圖)에 보면 대덕(大德)이란 글자가 있으니, 대덕은 원(元)나라 성종(成宗)의 연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 도(圖)가 아마 원나라 말엽 또는 명(明)나라 사람이 만든 것인 듯하다. 도(韜)의 제도에 대하여 [문] 도자(韜藉)는 세상 사람들이 다 쓰는 것이지만 그 제도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더러는 주신(主身)과 가지런하기도 하고 더러는 부방(趺方)과 가지런하기도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본문의 주석에 이미, “방식은 말[斗]과 같은데, 장정(帳頂)은 얇은 널빤지를 쓴다.”라고 하였으니, 그 제도를 상상할 수 있다. 부방도 함께 덮이도록 하는 것이 옳다. 본문 주석에 이른바 주신과 가지런하다는 것은 주신이 부방에 꽂히는 부분까지 통산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도자의 방활(方闊)은 주독(主櫝)의 안과 똑같이 재단하여 삼베를 겹으로 씌운 다음 명주로 싸되, 고위의 것은 자주색, 비위의 것은 분홍색으로 한다는 것이다. 도자를 자주색과 분홍색으로 쓰는 의미에 대하여 [문] 도자를 고위의 것은 자주색으로 쓰고 비위의 것은 분홍색으로 쓰는 것은 무슨 의미에서입니까? -송준길- [답] 집설(集說)에 논한 것이 있으니, 참고하면 될 것이다. 풍씨(馮氏)의 집설에 이르기를 “옛사람은 자주색을 중시하고 분홍색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있었으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검정색ㆍ노랑색ㆍ자주색을 함부로 쓸 수 없으니, 도(韜)는 분홍색 비단으로 쓰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송(宋)나라의 평상시 공복(公服)이 1품에서 3품까지는 자주색 옥대(玉帶)를 띠고 4품과 5품은 분홍색 금대(金帶)를 띠었다.” 하였다. ○ 《소학(小學)》의 주에 이르기를 “3품은 자주색을 띠어야 하고 5품은 분홍색을 띠어야 한다.” 하였다. -자주색을 숭상한 것이 예전의 제도가 아니고 바로 당(唐)나라의 풍속인데도 선유(先儒)들이 이를 준용한 것은 우선 시속(時俗)을 따른 것일 뿐이다.     부주(附註) 부주의 편입(編入)에 대하여 [문] 《가례》에 조항마다 그 밑에 해설을 붙였는데, 누가 편입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황종해- [답] 주복(周復)이 논변한 것으로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복은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주복이 말하기를 “주 문공(朱文公 주자)의 문인 양복(楊復)이 각 조항 밑에 주석을 붙인 것은 《가례》의 연구에 공로가 있다 할 만하다. 내가 이를 따로 뽑아 내어 본문 뒤에 붙인 것은 문공의 본문이 중간중간에 잘라질 성싶어서이다. 또한 문공의 이 글은 간편하고 이행하기 쉽도록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의례》와는 간혹 같지 않은 부분 -이를테면 부인(婦人)은 오늘날의 최상(衰裳)을 입는다던가 조문을 하는 자가 속례(俗禮)에 구애받아서 답배(答拜)를 하는 따위이다.- 이 있고, 서로 같은 부분도 또 자세하고 소략한 차이 -이를테면 혼례(婚禮)의 육례(六禮)와 상례(喪禮)의 염습(殮襲)에 쓰는 옷의 다소(多少) 따위이다.- 가 없지 않아서, 양복이 이따금씩 불만의 뜻이 많았다. 내가 생각건대 《의례》는 고법(古法)을 보존하였고 《가례》는 금속(今俗)을 연관시켰으며, 《의례》는 상술(詳述)하였고 《가례》는 요약하였으므로, 이는 서로 병행하여 나쁠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문공이 《가례》를 지었지만 《의례》의 글을 편집하는 데 더욱 정성을 기울였고 반드시 《의례》와 《서의》를 참작하여 상(喪)을 치르라고 유명(遺命)하였으니, 그 뜻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법을 좋아하여 예절을 다 지키고자 하는 경우라면 애당초 《의례》를 준용하면 될 것이니, 양복의 설은 다 기록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였다.     사당(祠堂) 전옥(殿屋)과 하옥(廈屋)의 제도에 대하여 [문] 전옥과 하옥에 대한 설은 보내온 견해가 옳으므로, 이제 다 고치겠습니다. 다만 《가례집람(家禮集覽)》의 도(圖) 중 오가(五架)의 제도는 어느 책에서 나온 것입니까? 만약 경전(經典)의 근거가 없다면 이 도를 빼버리고 전옥과 하옥을 두 장으로 나누어 넣을까 합니다. 어떠하겠습니까?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가례집람》 중의 하옥과 전옥의 전도(全圖)는 신의경(申義慶)에게서 나온 것으로, 대개는 의례도해(儀禮圖解) 및 하씨(何氏)의 소학도(小學圖)에 근거한 것입니다. 두 책에는 하우(下宇 서까래 및 처마)의 제도만 있고 상동(上棟 들보 및 도리)의 제도는 없었는데, 신의경이 《주자대전》의 석궁설(釋宮說)을 가지고 그 미비한 점을 보완한 것입니다. 경전의 근거가 없지 않으므로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는 《가례집람》에 나온다. 후침(後寢)에 대하여 [문] 후침의 제도를 만약 왼쪽 방과 오른쪽 방으로 한다면 세 칸의 제도가 분명하겠으나, 지금 동쪽 방과 서쪽 방으로 한 이상 아마도 두 칸으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며, 사당의 제도 역시 그러합니다. 이제 기둥을 세울 곳에 점을 찍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양영(兩楹)이라고 한 것은 마루 한가운데 두 기둥 사이를 가리켜 말한 것인데, 도리[楣]를 받친 두 기둥 사이라고 한다면 앞 중방[前庋]을 받치는 두 기둥 역시 없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옥의 제도는 동서로 다섯 칸에 남북으로 네 칸으로 하여, 방은 뒷도리[後楣]와 뒷 중방[後庋]의 사이에 있어야 하고, 뒷도리에서 들보[棟]까지와 들보에서 앞도리[前楣]까지에 걸쳐 놓는 두 개의 대들보[大栿]가 있어야 하니, 이 두 대들보의 머리가 곧 두 기둥을 세우는 곳입니다. 앞도리에서 앞 중방까지의 한 칸에 어찌 기둥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역시 구부정한 들보[曲栿]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둥은 모두 네 개가 됩니다. 이것이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 만약 네 개의 기둥을 세우는 것이 근거가 없어서 마땅히 세 칸을 걸쳐 놓는 두 개의 대들보를 앞 중방의 밑에 세워야 한다고 한다면, 무릇 양영의 사이는 행사가 매우 많고 또 영(楹)은 내영과 외영의 구별이 있으니, 그렇게 할 경우 영의 안은 있고 영의 밖은 없다는 것 역시 부당할 듯합니다. 자세히 상고하여 답신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지사 신식- [답] 후침의 제도는 앞서 공이 만든 언해도(諺解圖)에 보였거니와, 두 칸으로 하는 것은 잘못인 듯하므로, 이제 아래와 같이 도를 부칩니다.   전옥과 하옥의 제도는 뒷 중방에서 앞 중방까지 통틀어 다섯 칸에 하나의 큰대들보[樑]를 올려놓고, 대들보 위에는 남북으로 각각 짧은 기둥을 세워서 앞뒤의 도리[架]를 받치게 되어 있고 보면, 두 기둥만을 세우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의례》 및 하씨도(河氏圖)와 《주자대전》의 석궁(釋宮)에도 보이므로 다시 의심할 것이 없거니와, 영(楹) 밖의 처마와 계단 위의 남은 땅은 행사에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네 감실(龕室)에 신주를 모시는 일 앞뒤의 감실에 제사를 배치하는 일에 대하여 [문] 앞뒤의 감실에 제사를 배치하는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운운(云云)하였다. -아래의 ‘전후처(前後妻)의 합장’ 조항에 나온다. 서인(庶人)도 고조(高祖)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에 대하여 [문] 예전에 서인은 부모의 제사만을 지내었고, 국제(國制)에도 그러합니다. 이른바 서인이라는 말이 만약 이처럼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통칭이라면, 부모의 제사만을 지내는 것은 너무 간략한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송준길- [답]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비록 삼묘(三廟)와 일묘(一廟)에서 제침(祭寢)에까지도 반드시 고조까지 미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비록 서인이라 하더라도 제사는 반드시 고조에까지 미친다.” 하였으니, 지금 세상에서 이 예(禮)를 따르는 것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종법(宗法) 나이 일흔이 되면 늙어서 제사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일에 대하여 [문] 몸이 늙었다 하여 상제(喪祭) 등의 중대사를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것은 정리상 미안할 듯합니다. 어떻게 하면 변고에 대처하는 예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송준길- [답] 《주자어류(朱子語類)》에도 이것은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자대전》에 ‘사당에 고유하고 상제 등의 중대사를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글이 있으니, 상고해 볼 수 있다. 《주자어류》에서 어떤 사람이 묻기를 “나이 일흔이 되어 늙어서 제사를 자식에게 물려주면 적자(適子)나 적손(適孫)이 제사를 주관하게 되는데, 이렇게 한다면 사당의 신주를 모두 바꾸어 써서 적자나 적손의 이름으로 제사를 받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직 살아 있는데, 이렇게 하고도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그러하다. 이러한 것들이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니, 자손에게 물려주고 나서도 직접 주관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주자대전》에 실려 있는 ‘치사(致仕)하고 가묘(家廟)에 고유하는 글’에서 이르기를 “나이 일흔이 되면서 몸이 늙어 병이 들고 근력이 쇠진하여 벌써 성은(聖恩)을 입어 벼슬을 그만둘 것을 허락받았으므로, 집안일 역시 당연히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이미 죽고 어린 손자 감(鑑)이 차례상 이어받아야 하는데, 이 또한 어려서 아직 제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미 가족의 의논을 거쳐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으므로, 두 아들 야(埜)와 재(在)로 하여금 함께 도와주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장자(長子)가 후사(後嗣) 없이 죽어서 차자(次子)의 아들이 제사를 물려받는 일에 대하여 [문] 장자는 후사 없이 죽어서 그 후사를 세우지 못하였고, 차자는 죽기는 하였어도 아들이 있으며, 또 막내아들이 살아 있을 경우, 누가 제사를 받들어야 합니까? -황종해- [답] 차자의 아들이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 후사를 세울 경우 반드시 관가에 보고하는 일에 대하여 [문] 지금의 법에 후사를 세울 경우 반드시 관가에 보고하고 나서 부자(父子)의 관계를 설정하게 되어 있으나, 오늘날 더러 이 절차를 빠뜨리는 자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후사라고 할 수 없습니까? 그리고 부모가 모두 죽은 경우에는 후사를 세울 수 없습니까? -황종해- [답] 후사를 세울 경우 반드시 임금의 명령을 듣는 것이 바로 법이다. 부모가 모두 죽었을 경우 더러는 문장(門長)이 건의하기도 한다. 후사를 세운 뒤에 아들이 태어난 경우에 대하여 [문] 아들이 없어서 후사를 세웠는데 아들이 태어났을 경우 어떻게 처리하여야 합니까? -송준길- [답] 옛사람들이 시행한 경우도 역시 각기 다르므로, 예율(禮律)과 사세(事勢)를 참작하여 처리하여야 한다. 그러나 호 문정공(胡文定公 호안국(胡安國))이 시행한 사례가 필경 옳은 듯하다. 《통전》에 의하면, 한(漢)나라 제갈량(諸葛亮)이 아들이 없어서 형 제갈근(諸葛瑾)의 아들 교(喬)를 데려다 아들을 삼았는데, 교의 본래 자(字)는 중신(仲愼)이었다. 그 뒤 제갈량이 아들 첨(瞻)을 두었으나 교로 적자를 삼았다. 이 때문에 교의 자를 백송(伯松)으로 고쳤다. 교가 죽은 뒤에 제갈각(諸葛恪)은 사형을 받아 죽어서 후사가 끊어지고 제갈량은 이미 후사를 두었으므로 교의 아들 거(擧)를 보내어 다시 제갈근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 진(晉)나라 하순(賀循)은 조카 굉(紘)을 데려다 아들을 삼았다가 뒤늦게 아들을 낳자 굉을 본가로 돌려보냈다. ○ 《송조명신언행록(宋朝名臣言行錄)》의 호인전(胡寅傳)에는 문정공(文定公)의 장자(長子)로 되어 있고, 《주자대전》에는 시랑(侍郞) 호명중(胡明仲) 공이 계부(季父)의 후사로 출계(出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살피건대, 호 문정공이 형의 아들 인(寅)을 데려다 아들로 삼았는데, 뒤에 아들 영(寧)과 굉(宏)을 낳았지만 끝까지 인으로 후사를 삼았다. ○ 우리나라의 경우,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8)의 수교(受敎)에, 후사를 세운 뒤에 친아들이 태어난 경우 친아들이 제사를 받들고 입후(立後)한 아들은 중자(衆子)로 논하여 입후를 파의(罷議)하는 혼란이 없도록 하였는데, 이듬해인 갑인년(1554, 명종9)에 대신(大臣)의 건의로 남의 후사로 나갔던 자가 본생부모의 후사가 끊어졌을 경우 법대로 본가로 돌려보내고 입후하였던 집에서는 후사를 다시 세우도록 허락하여 주며, 만약 그 부모가 이미 다 죽어서 다시 입후할 수 없는 경우라면 방친(旁親)의 예(例)에 따라 반부(班祔)하도록 하였다. -인조(仁祖) 때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입후하였다가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호 문정공의 고사에 따라 입후한 아들로 장자를 삼을 것을 계청(啓請)하자 윤허하였다. 이 사실은 선군자(先君子)가 세상을 마친 뒤의 일이지만 《수교집록(受敎輯錄)》에 이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첨부하는 것이다. 아래 조항도 마찬가지이다.   장자가 후사를 세웠을 경우 차자는 제사를 받들지 않아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장자가 후사가 없어서 종형제나 재종형제의 아들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을 경우, 국전(國典)에 보이기를 단지 장자의 후사만을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사는 친아들에게로 물려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예경(禮經)에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장자의 후사만을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사는 받들 수 없게 한다면 예법이 크게 훼손된다. 이 법이 근세 어느 한 상신(相臣)의 건의에서 나온 것인데, 그만 구실거리가 되어 바꿀 수 없는 예경의 법을 버리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율곡집》 속의 ‘입후의(立後議)’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안빈(安嬪) -중종(中宗)의 후궁- 의 장자는 익양군(益陽君)이고 차자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인데, 익양군이 아들이 없어서 흥녕군(興寧君)으로 후사를 삼자, 선조(宣祖) 때의 상신 심수경(沈守慶)이 건의하기를, 대원군의 장자 하원군(河原君)으로 안빈의 제사를 받들도록 해야 한다고 한 것이 그 뒤에 마침내 잘못된 선례가 되었다고 한다. -인조 때 예조 판서 최명길이 예경을 근거로 하여 입후한 아들도 조상의 제사를 생가의 제사처럼 받들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를 윤허하므로 드디어 정식(定式)이 되었다.   형이 아들 없이 죽어 아우가 제사를 받들게 되었는데, 나중에 형의 아내가 후사를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 고애(孤哀)가 불행하여 부모가 세상을 마치기 전에 백형과 중형이 먼저 죽고 4년 뒤에 선군께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고애가 주상(主喪)을 하고 신주의 방제(旁題)도 고애의 이름을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뒤에 조비(祖妣)께서 세상을 마치셔서 고애가 또 상복을 입고 신주에 쓰는 이름 역시 그렇게 썼습니다. 지금 큰형수가 고애의 아들이나 아우의 아들을 데려다 후사를 삼아서 대종(大宗)을 받들려고 하니, 고애와 아우로서는 당연히 그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줄곧 원혐(遠嫌)을 내세워 주저하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가르쳐주십시오. -정랑(正郞) 조희일(趙希逸)- [답] 고례(古禮)에는 반드시 장손(長孫)으로 승중(承重)을 하게 되어 있으나, 송(宋)나라 때에 와서 장자가 죽을 경우 조카를 쓰지 않고 차자를 썼으니, 이는 고례가 아니다.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죽은 뒤에 이천(伊川 정이(程頤))이 태중대부(太中大夫 명도ㆍ이천의 아버지 정향(程珦))의 제사를 주관한 것도 당시의 제도이기는 하나, 예법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그 뒤에 명도의 손자 앙(昻)과 제자 후사성(侯師聖) 등이 종사(宗祀)를 논의한 사실이 《이정전서(二程全書)》에 보인다. 우리나라는 예전의 종법만을 썼으니, 장자의 아내가 후사를 세울 경우 이는 아들이 없다가 아들을 둔 것이므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 또다시 생각하여 보면 장자의 아내가 아들이 없어서 이미 차자에게로 종사(宗祀)를 옮긴 이상, 이제 와서 후사를 세운다면 반드시 분쟁의 소지가 있을 터인데, 국전(國典)의 구례(舊禮)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이정전서》에 이르기를 “이천 선생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단중(端中)을 돌아보며, ‘아들을 세우라.’ 하였으니, 이는 적자(適子) 단언(端彦)을 가리킨 것이었다. 말이 끝나자 숨을 거두었는데, 탈상(脫喪)을 하고 나서 명도의 장손 앙이 자신이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후사성이 안 된다고 하자, 앙이 ‘명도는 사당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니, 후사성이 답하기를 ‘내가 감히 사심을 가진 것이 아니다. 명도 선생께서 태중대부보다 먼저 세상을 마치셨으므로, 태중대부의 제사를 주관하신 분은 이천이신데, 지금 이천을 계승한 자가 단언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였다. 의논이 비로소 결정되자, 어떤 이가 후사성에게 말하기를 ‘명도 선생이 이미 죽었는데도 그의 장자가 입후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니, 후사성이 답하기를 ‘사당을 세운 것은 이천에게서 시작되었고, 또 명도의 장자는 죽은 지가 이미 오래다. 더구나 예전에 제후(諸侯)가 적통을 빼앗고 서성(庶姓)이 적통을 빼앗었다는 설도 있으니, 시의(時宜)에 맞추어 예(禮)를 적용할 수도 있다. 또 더구나 사당을 세운 것이 이천에게서 시작된 경우이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윤자(尹子)가 직접 주석하기를 “이 한 단락은 착오이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서 어떤 사람이 묻기를 “이천이 적통을 빼앗었다는 말은 예경(禮經)에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당시에 유명(遺命)이 있어서입니까, 아니면 후인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나 역시 모르겠으나, 다만 후사성이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하였고, 또 묻기를 “그 말이 맞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역시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 유정부(游定夫 유작(游酢))가 지은 ‘명도선생행장후(明道先生行狀後)’에 이르기를 “호주 종사(鄠州從事)가 아버지를 먼저 여의고 나서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자신이 적손(適孫)이면서도 승중(承重)을 하지 못하자, 선생이 국전(國典)을 유추하여 알려 주었다. 이것이 비로소 천하의 상습(常習)이 되었다.” 하였다. -살피건대, 명도가 이미 고법(古法)을 준행하였는데도 이천이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도 의문스럽다. 태중대부가 어찌 국제(國制)가 그렇다 하여 이천에게 제사를 주관하도록 유명(遺命)을 하였겠는가.   독자(獨子)가 대종(大宗)의 후사가 되는 일에 대하여 [문] 속설에 장자가 후사가 없을 경우 차자는 비록 독자를 두었더라도 장자의 후사를 이어 주어야 한다고 하나, 이것이 예경이나 국법에 모두 없으니 너무 동떨어진 말이 아니겠습니까? -황종해- [답] 장자가 후사가 없을 경우 《의례》 및 국전에 모두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로 후사를 삼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부터 반드시 지자로 후사를 삼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어느 재신(宰臣)이 《통전》의 설을 인용하여 그의 아우의 독자로 후사를 삼아 줄 것을 진소(陳訴)한 뒤로 그만 규례가 된 것이다. 《통전》에 이르기를 “한(漢)나라 석거(石渠)의 논의에 ‘대종이 후사가 없고 종족 중 서자(庶子)도 없을 경우 자신이 하나의 적자(適子)를 두었더라도 마땅히 아버지의 제사를 끊고 대종의 후사를 이어 주어야 하는가?’ 하니, 대성(戴聖)이 말하기를 ‘대종의 후사는 끊을 수 없으니, 적자가 남의 후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서자를 제쳐 두고 후사로 갈 수 없다는 말이다. 종족 중 서자도 없다면 당연히 아버지의 제사를 끊고서라도 대종의 후사로 가야 한다.’ 하였고, 위전경(魏田瓊)이 말하기를 ‘장자가 대종의 후사가 될 경우 종자(宗子)의 예가 성립되므로, 제부(諸父)에게 후사가 없으면 종가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나중에 그의 서자로 제부의 후사를 삼아서 다시 그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도록 한다.’ 하였다.” 하였다. ○ 정숙자(程叔子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예에 비록 장자는 남의 후사가 될 수 없으나, 만약 형제가 없고 또 할아버지의 종계(宗系)가 끊어질 형편이라면 역시 할아버지의 후사를 이어야 한다. 예전(禮典)에 비록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시의에 맞추어 예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바로 장자로 후사를 삼을 수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예경(禮經)과는 같지 않다.   차손(次孫)이 승중(承重)을 하고 죽은 뒤에 적손의 아내 및 차손의 아내가 모두 후사를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 적손은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 먼저 죽어서 아들이 없고 그의 아우는 할아버지의 복(服)을 입고 나서 또 아들 없이 죽었는데, 지금 두 아내가 각기 후사를 세우려고 합니다. 누가 승중을 하여야 합니까? -지사 신식- [답] 지난해 조희일(趙希逸)이 물어왔기에 답한 것이 있습니다. -앞에 나온 ‘형이 아들 없이 죽어 아우가 제사를 받들게 되었는데, 나중에 형의 아내가 후사를 세우는 일’ 조항에 나온다. 본종(本宗)으로 되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문] 남의 후사로 나간 자가 본생형제(本生兄弟)가 모두 후사가 없을 경우 후사를 파기하고 본종으로 되돌아가야 합니까? [답] 후사로 나간 자가 본생친(本生親)이 후사가 없을 경우 두 집안의 아버지가 서로 상의하여 본종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예전에도 그러한 예가 있으나, 두 집안의 아버지가 먼저 죽었을 경우는 아들이 마음대로 후사를 파기할 수 없기 때문에 본생친을 반부(班祔)해야 한다. 양첩(良妾)의 아들이 제사를 받드는 일에 대하여 [문] 적자가 없는 경우에 천첩(賤妾)의 아들이 비록 나이가 더 많고 또 이미 양인(良人)의 신분이 되었더라도 굳이 양첩의 아들로 제사를 받들어야 합니까? -황종해- [답] 예율(禮律)에는 그러하다. 본생친(本生親)의 칭호(稱號)에 대하여 [문] 남의 후사로 나간 자가 본생부모의 상(喪)에 있어 부득이 제사를 주관할 경우 축사(祝辭)에 칭호를 무어라고 써야 합니까? -강석기(姜碩期)- [답] 당연히 정자와 주자의 말에 의거하여 부모는 ‘현백숙부(顯伯叔父)’로 쓰고 자신은 종자(從子)로 일컬어야 한다. 이천(伊川)이 중승(中丞) 팽사영(彭思永)을 대신하여 복왕(濮王 송나라 영종(英宗)의 아버지)의 칭호를 논한 상소(上疏)에서 말하기를 “복왕은 폐하를 낳으신 아버지로서 친속으로 치면 폐하께 백부가 되고 폐하는 양자를 나간 복왕의 아들로서 친속으로 치면 조카가 되니, 이는 천지(天地)의 대의(大義)이자 사람의 대륜(大倫)이며, 마치 하늘과 땅의 위치와 같아서 고치거나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선유(先儒)들도 복왕의 칭호를 두고 논쟁한 점에 대해 질문하자, 주자가 대답하기를 “이는 단지 어버이로 일컬은 것만을 가지고 이해한 것인데, 당시에도 여 태자(戾太子 한 무제(漢武帝)의 아들)의 고사를 인용하여 황고(皇考)로 일컫고자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그럼 황고로 일컫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옳지는 않다.” 하였다. -《주자어류》- ○ 주자가 유평(劉玶)을 대신하여 지은 유평의 형 유공(劉珙)의 행장(行狀) 맨 끝에 이르기를 “종제(從弟) 평(玶)은 삼가 행장을 씁니다.” 하였다. 이는 공과 평은 곧 자우(子羽)의 아들인데도 평이 자우의 아우 자휘(子翬)의 후사로 나갔기 때문에 주자가 종제로 일컬은 것이다. [문] 후사로 나간 자가 본생친에게 생시에 이미 백ㆍ숙부로 대접하지 않았는데 유독 죽은 뒤에 와서 어떻게 백ㆍ숙부로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정자가 복왕의 칭호를 논한 글에 근거할 만한 말이 있기는 하나, 오늘날에 시행하기는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강석기- [답] 명칭이 없을 수도 없고 또 아버지로 일컬을 수도 없고 보면, 예법상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 한다. 다시 다른 의논은 용납되지 않는다.     반부(班祔) 승중(承重)을 한 장자가 후사가 없어서 반부하는 일에 대하여 [문] 장자가 후사가 없어서 차자의 아들이 제사를 받들 경우, 장자는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게 되어 동벽(東壁)의 부위(祔位)에 앉히는데, 이는 장자가 곧 지난날 제사를 받든 종자(宗子)로서 오늘은 동벽위 부위에 앉은 것입니다. 만약 노(魯)나라 민공(閔公)과 희공(僖公)의 위차(位次)로 말한다면 정통을 먼저 이어받은 자는 비록 아우라 하더라도 위차가 형의 위가 될 수 있는데, 더구나 형으로서 종자가 된 자가 도리어 제사도 받들어 보지 않은 아우의 밑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정리(情理)에 거리끼는 일입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후사가 없는 형을 제사를 받들고 있는 자의 아버지의 위에 올려놓는다면, 사(士)의 예가 제후(諸侯)의 예와 다르게 됩니다. 어떻게 하여야 정의와 예법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황종해- [답] 보내 준 질문 내용은 매우 좋다. 그러나 장자가 후사가 없이 죽어서 차자(次子)가 승중(承重)을 하였을 경우, 장자가 승중을 한 적이 있더라도 반부하여야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제왕(帝王)의 집이라면 비록 숙부로서 조카를 계승하고 형으로서 아우를 계승하여도 역시 부자(父子)의 도(道 명분)가 있겠으나, 오늘날 사삿집에서 이런 사례를 끌어다 증거를 삼을 수는 없다. 반부의 배치에 대하여 [문] 아내의 상(喪)에는 신주를 별실(別室)에 간직해야 된다고 한 고씨(高氏)의 설을 호씨(胡氏)가 비난하면서 주자(朱子)가 내자(內子)의 상에 신주를 조비(祖妣)의 신주 곁에 붙여 놓기만 한 것을 증거로 끌어대었습니다. 주자가 만인걸(萬人傑)의 아내의 상 문목(問目)에 답한 편지에서도 “조모의 감실(龕室)에 붙여 놓고 계절에 따라 동상(東廂)에서 제사한다.” 하였고, 또 《가례》 반부 조항 소주(小註)에서도 선생께서 말하기를 “형수와 제수, 아내와 며느리는 조모의 곁에 붙여 놓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큰 명절을 만날 경우 조선(祖先)에게 청하여 마루에서 제사를 지내되, 방친(旁親)을 부제(祔祭)할 경우 남자는 오른쪽에 모시고 여자는 왼쪽에 모시어 소목(昭穆)의 차례를 따르지 않으며, 사당에 모실 적에는 각기 소목에 따라 붙인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몇 조항을 근거로 할 때 모든 부위(祔位)는 다 본 감실 안에 붙여 모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거리끼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본위(本位)에 붙여야 할 후손이 어쩌다 서너 위라도 될 경우 그 많은 신주가 한 감실에 같이 들어가려면 반드시 감실이 좁아서 수용하기 어려울 우려가 있고, 또 주인의 망처(亡妻)가 있어서 이미 조비의 곁에 붙여 놓았는 데다 또 형제가 있어서 조고(祖考)의 곁에 붙인다면 이는 형수와 시동생이 한 감실에 같이 들어가게 됩니다. 아무리 동쪽과 서쪽으로 따로 앉힌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의 사리로 말한다면 필경 미안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가 진돈(陳焞)의 아내의 상 문목에 답한 편지에도 “아내가 먼저 죽은 경우 별묘(別廟)를 하고 아우가 죽어 후사가 없는 경우도 별묘를 하여 각각 한 감실을 만들어야 하지 한데 섞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례》의 반부 조항과 같지 않아서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아우와 아내는 같은 감실에 붙일 수 없다는 뜻만은 분명합니다. 또 말하기를 “반부를 마치고 나서는 가묘(家廟) 곁에다 작은 신위를 설치하여 그 신주를 모시지, 사당 안에다 별도로 신위를 설치할 수는 없다.” 하였는데, 또 《가례》의 대종(大宗)ㆍ소종(小宗) 도식 아래 소주(小註)에 주자가 말하기를 “형수의 경우 딴 곳에 설치한 뒤 그 아들이 사사로이 제사한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몇 조항을 근거로 할 때 이 또한 별실에 신주를 간직한다는 논의입니다. 장차 어느 것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송준길- [답] 인용한 몇몇 조항은 과연 서로 같지 않다. 그러나 전자의 몇 가지 설이 정론(定論)일 듯하니, 조선(祖先)에게 반부해야만 한다. 비록 형수와 시동생이 같은 감실에 들어가더라도 무슨 혐의가 되겠는가. 이른바 ‘각각 한 감실로 하여야지 한데 섞여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애당초 반부를 일컬은 것은 아니다. 반부의 위차(位次)에 대하여 [문] 부위(祔位)의 제사에 대하여 유씨(劉氏)는 주자의 설을 인용하여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신위를 설치한다.” 하였습니다. 시제(時祭)의 경우 부위의 신위는 모두 동서(東序) 또는 양서(兩序)에다 마주 보도록 설치하되, 높은 이가 서쪽에 위치하도록 한다고 하니, 이럴 경우 남녀는 구분되지 않고 다만 높은 이가 서쪽에 위치하는 것뿐입니다. 두 설이 같지 않으니, 지금 어느 설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송준길- [답] 과연 두 설이 있기는 하지만 오른쪽에 위치한다는 것은 역시 서쪽을 상위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부(夫婦)의 신주를 서로 갈라놓는다는 것도 온당치 않으므로 우리 집에서는 뒤의 설을 따른다. 조카의 아버지가 사당을 따로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 조카의 아버지가 사당을 따로 세울 경우 조천(祧遷)하여 따라갑니까?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일찍이 정도가(鄭道可)에게 질문하였더니 운운하여 답하였고, 송구봉(宋龜峯 송익필(宋翼弼))의 설도 상고할 만하다. 정도가가 말하기를 “반부에 있어 조카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조카의 아버지의 집에는 사당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선 종자(宗子)의 아버지에게 붙여 두니, 이는 역시 소목(昭穆)의 순서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조카의 아버지가 죽어서 사당을 세울 경우 조카는 또 제집 사당을 놓아두고 종자의 사당에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버지의 사당으로 돌아가 붙이는 것이니, 이는 인정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 듯하다.” 하였다. ○ 송구봉이 말하기를 “조카의 아버지는 형제의 항렬이므로, 조카가 후사가 없을 경우 당연히 할아버지에게 붙여야 하나,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어서 반부할 수 없기 때문에 종가(宗家)의 할아버지 신위에 붙여 놓았다가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그 아버지가 사당을 세우고서 조천(祧遷)하여 친할아버지를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조카의 아버지는 종형제 및 재종형제인데, 만약 친형제라면 자기의 집에 이미 사당이 세워져 있으므로 의당 그 조카를 반부하여야 하니, 어떻게 조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살피건대, 《가례》의 정형(正衡)의 설도 역시 이러하다.   삼상(三殤)에 신주를 만들어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 삼상에도 신주를 만들어 세웁니까?   상상(殤喪)에 우제(虞祭)를 마치고 나서 반부하는 일에 대하여 [문] 상상에 우제를 마치고 나서 반부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모두 뒤의 상례(喪禮)의 상상 조항에 나온다. 삼상(三殤)의 제사에 대하여 [문]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하상(下殤)의 제사는 부모가 세상을 마칠 때까지 지낸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세상에서 비록 예를 아는 집이라 하더라도 상상에 신주를 만들어서 반부하는 자가 적습니다. 정자의 말은 끝내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삼상에 신주를 만들어 반부하는 것은 《가례》에 실려 있으나 오늘날 사람들이 스스로 시행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시행할 수 없는 것이겠는가. 본생친(本生親)의 신주를,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우선 할아버지의 사당에 붙여 두는 일에 대하여 [문] 저의 생부(生父)의 대상(大祥)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형수는 후사가 없고 또 먼 곳에 살고 있어서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할아버지의 사당에 반부하고서 후사를 세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쩌면 옳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미 후사가 없는 방친(傍親)에 비길 수 없는 일이고 보면 반부한다는 것도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강석기- [답] 우선 반부하는 것이 괜찮겠다.   [주D-001]삼상(三殤) : 성년(成年)에 이르지 못하고 죽은 세 가지의 경우, 즉 장상(長殤)ㆍ중상(中殤)ㆍ하상(下殤)을 이른다. 장상은 19세부터 16세까지, 중상은 15세부터 12세까지, 하상은 11세부터 8세까지의 죽음이다.     부(附) 별실 장주(別室藏主) 3대를 제사 지내는 집에서 현손(玄孫)이 승중(承重)을 하고 고조모(高祖母)가 살아 있을 경우 별실에서 고조(高祖)를 제사하는 일에 대하여 [문] 현손이 고조의 승중을 하였어도 국제(國制)를 따라 3대만을 제사할 경우 고조의 상을 마치고 나면 당연히 신주를 묻어야 하나, 고조모가 살아 있을 경우 정리상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송준길- [답] 정리상 차마 묻지 못한다면 별실에 봉안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후사가 없는 고자매(姑姊妹)의 신주를 별실에서 제사하는 일에 대하여 [문] 고자매로서 후사가 없이 죽어 그 남편 집에 반부할 곳이 없을 경우 형편상 어쩔 수 없이 본종(本宗)에 반부하여야 되겠으나, 남편의 신주는 같이 반부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디에서 제사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별실에서 제사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첩모(妾母)의 제소(祭所) 및 칭호에 대하여 [문] 서자가 제 어머니의 제사를 지낼 때 무슨 칭호를 써서 어느 곳에서 지내야 합니까? 구준(丘濬)의 설에 의하면 “만약 적모(嫡母)가 아들이 없어서 서모의 아들이 제사를 주관한다면 역시 제 어머니를 적모의 곁에 붙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설을 준행하여도 됩니까? -송준길- [답] 정자와 주자의 설을 참고하면 된다. 첩모와 적모를 어떻게 같이 모실 수 있겠는가. 구준의 설은 예(禮)에 크게 어긋나므로 따를 수 없다. 정자가 말하기를 “서모는 사당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아들이 사실(私室)에서 제사하여야 한다.” 하였다. -《정씨외서(程氏外書)》- ○ 누가 묻기를 “첩모에 대한 칭호는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조심스럽기는 하나, 어머니라 일컬을 수 있을 뿐이지 달리 일컬을 만한 칭호가 없다. 경전(經典)에서 첩모라고만 일컬은 것은 그렇지 않고서는 다른 어머니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남의 첩모의 상을 조문할 때에는 무어라고 칭하여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조심스럽기는 하나, 그의 아들이 평소 일컫던 대로 일컬을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오봉(五峯 호굉(胡宏))이 첩모를 소모(小母)라 일컬었었고 남헌(南軒 장식(張栻))도 그렇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아(爾雅)》에도 소고(小姑)라는 글귀가 있으니, 오봉도 아마 여기에 근본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주자어류》- ○ 누가 묻기를 “아들의 생모(生母)가 죽었을 경우 신주는 무어라 일컬어야 하며, 제사는 어디에서 지내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오늘날 법의 오복연월편(五服年月篇)에서 모(母) 자 아래의 주에 이르기를 ‘자기를 낳은 자일 경우 다만 어머니라 일컫고 만약 적모를 피하려 한다면 다만 망모(亡母)라 일컫고 비(妣)라고는 일컫지 않아서 구별하는 것이 옳다.’ 하였고, 이천(伊川)은 말하기를 ‘사실(私室)에서 제사한다.’고 하였다.” 하였다. -《주자대전》. 아래도 같다.- ○ 누가 묻기를 “첩모에게 만약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낸다면 그 손자는 무어라 일컬어야 하며, 자신은 어떻게 일컬어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제사를 지낸다면 첩모는 조모라 일컫고 자신은 손자라 일컬어야 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였다.     신알(晨謁) 주인이 없으면 그 밖의 사람이 혼자서 신알을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문] 신알할 때 만약 자제(子弟)나 질손(姪孫)이 같이 살고 있다면 함께 거행할 수 있습니까? 만약 주인이 유고(有故)하다면 혼자서는 신알을 거행할 수 없습니까? -강석기- [답] 신알은 주인이 거행하는 예(禮)이므로 주인과 함께 거행하는 것은 괜찮지만, 주인이 없는데 혼자서 거행한다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출입할 때 반드시 하는 고유 첨례(瞻禮) 때의 창야(唱喏)에 대하여 [문] 첨례의 의식에서 구준의 말에 의하면, 남자는 창야를 하고 여자는 사배(四拜)를 한다고 하는데, 오늘날도 이같이 해야 합니까? 어떤 이는 창야를 읍(揖)하는 것으로 혹은 읍하는 소리로 훈을 달았습니다. 어느 것이 옳습니까? -황종해- [답] 첨례는 오늘날의 읍이고, 창야는 읍을 할 때 내는 소리이다. 중국 사신 허국(許國)이 말하기를 “야(喏) 자는 《한서(漢書)》에 나오는데, 두 손을 아래로 드리우고 읍을 하는 모양이다.” 하였다. ○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가 말하기를 “喏는 음이 야인데, 읍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연천(河燕泉)이 말하기를 “읍을 하면서 ‘창야’라고 서로 외치는 것은 아마 옛사람이 서로 읍을 할 적에 반드시 이 소리를 내어야 하지, 참회(參會)하는 자리에서 아무 말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창야란 헛기침을 길게 내는 소리이다. 송나라 사람이 오랑캐 나라의 사실을 기록하면서, 오랑캐의 읍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여 ‘벙어리 읍[啞揖]’이라고 이름하므로 뭇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거란(契丹) 사람도 손을 가슴 앞으로 올리고 소리는 내지 않는데, 이를 일러 상읍(相揖)이라 하며, 송나라 사람들이 괴이쩍게 여겼으니, 송나라 이전에는 중국 사람들이 읍을 할 때 소리를 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명나라가 원나라를 이은 이후로 읍을 할 적에 소리를 내지 않은 지가 오래이다. 그러나 창야라는 명칭만은 그래도 남아 있어서 관부(官府)에서 공좌(公座)에 오르고 하례(下隸)들이 아문(衙門)에 배열해 설 때 여전히 소리를 길게 뽑으며 읍이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창야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이는 참으로 근본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가례회성(家禮會成)》-     참례(參禮) 두 줄로 늘어서는 일에 대하여 [문] 사당서립도(祠堂序立圖)는 《가례》의 구도(舊圖)에만 의거하여 그린 것인데, 존형(尊兄)께서 잘못되었다고 하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설과 동지의 참알 조항의 주를 상고해 보니, 주인이 제부(諸父)와 제형(諸兄)이 있을 경우 특별히 주인의 오른쪽에 제위(祭位)를 마련하되 조금 앞으로 나오게 하여 두 줄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존형의 소견은 조금 앞이라는 말에 무게를 두고 두 줄에 대한 뜻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처럼 본 것입니다. 두 줄이란 두 줄로 제위를 마련하는 것을 말하는데, 주인이 아무리 높기로서니 어찌 감히 제형의 위에 설 수 있겠습니까. 결코 감히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특별히 두 줄의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주부(主婦)가 시고모와 시누이에게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뒤이니 주부의 뒤이니 하는 것이 어찌 꼭 배와 등이 서로 닿고 나서야 뒤라고 말하겠습니까. 무릇 뒷줄에 있는 것은 다 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례》의 구도에도 이와 같이 되어 있고 《가례의절》의 서립도(序立圖)에도 역시 이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어찌 꼭 다 잘못되었겠습니까. 《가례의절》의 도에 형과 아우 두 줄의 사이 서쪽에 따로 주인의 제위를 만든 것이 바로 조금 앞, 조금 뒤의 뜻에 꼭 들어맞는 것입니다. 형의 생각에는 형과 아우는 당연히 한 줄로 만들어야지 두 줄로 나누어서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한 것이나, 두 줄로 만드는 것은 형편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상고하여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사 신식- [답] 이른바 두 줄이란 제부(諸父)는 딴 줄로 하고 형제의 경우 조금 앞과 조금 뒤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두 줄로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영공(令公)의 말과 같이 여러 형들을 한 줄로 잡고 주인을 한 줄로 잡고, 여러 아우들을 또 한 줄로 잡는다면 주인과 형제 사이에 어떻게 세 줄을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을 듯하니, 《격몽요결(擊蒙要訣)》 서립도를 다시 자세히 상고하여 보십시오. 신주를 모셔 내는 일에 대하여 [문] 무릇 신주를 모셔 낸다는 것은 주신(主身)을 제위(祭位)를 설치한 곳으로 모셔 내는 것인데, 세속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주독(主櫝)만을 열고 주신은 꺼내지 않으니, 이는 잘못된 풍습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강석기- [답] 신주를 모셔 냄이란 주독 밖으로 모셔 내는 것이다. 부제(祔祭)와 시제(時祭) 조항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례의절》의 사배(四拜)에 대하여 [문] 《가례의절》에 배례(拜禮)는 네 번을 법도로 하였는데, 그 뜻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강석기- [답] 구준이 주장하는 사배는 혹시 그 고장의 풍속에 시행한 예인지도 모르겠다. 마땅히 《가례》의 재배(再拜)를 따라야 할 것이다. 퇴계가 말하기를 “《정씨유서(程氏遺書)》에 ‘가제(家祭)에는 모두 재배하는 것으로 예를 삼아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산 사람을 섬김에 있어 사배를 할 것을 재배하는 것으로 예를 삼고 있는 것은 아마 중간에 문안하는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처럼 섬겨야 하는만큼, 성의로 보아서는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지만, 이를테면 죽은 이에게 문안을 드린다는 것은 도리어 신(神)을 번거롭히는 결과가 된다. 만약 제사에서처럼 축(祝)ㆍ고유(告由)ㆍ사신(辭神) 등의 절차가 있다면 당연히 사배ㆍ육배(六拜)의 예가 있어야 한다.’ 하였다. 이를 근거로 미루어 본다면 사배ㆍ육배의 의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가례》에 축ㆍ고유 등의 절차를 막론하고 모두 재배로 되어 있는데, 경산(瓊山)은 또 모두 사배를 해야 한다고 하니, 그것이 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선강 후참(先降後參)과 선참 후강(先參後降)의 구별에 대하여 [문] 《가례》에 참례(參禮)의 경우 강신(降神)을 먼저 하고 일반 제사의 경우 참신(參神)을 먼저 한다고 하였으니,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가례》 및 《상례비요(喪禮備要)》의 묘제(墓祭)에는 모두 참신을 먼저 하고 강신을 나중에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격몽요결》에는 강신을 먼저 하고 참신을 나중에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또한 무슨 의미입니까? 우제(虞祭)에는 참신의 절차가 없는데, 과연 늘상 궤연(几筵)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신(辭神) 역시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담제(禫祭)에서는 이미 부묘(祔廟)를 한 이상 참신의 절차가 있어야 할 듯한데 역시 빠져 있으니,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무릇 신주를 모셔 내지 않고 본래의 곳에 그대로 두었다면 강신을 먼저 하고 참신을 나중에 하니, 이를테면 삭망(朔望)의 참례(參禮)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신위는 설치하되 신주가 없을 경우에는 역시 강신을 먼저 하고 참신을 나중에 하니, 이를테면 시조(始祖)와 선조(先祖)를 제사할 때와 지방(紙榜)을 쓸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만약 신주를 바깥으로 모셔 낸다면 아무 의식도 없이 신주를 볼 수 없는만큼, 반드시 절을 하고 엄숙히 해야 하니, 이를테면 시제(時祭)와 기제(忌祭)의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묘제와 담제에서는 과연 그대의 의견과 같이 참신을 한다면, 이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상중(喪中)에는 비록 늘 모시고 있다는 의리가 있다 하더라도 제사를 마치고 나서의 사신(辭神)은 하지 않을 수 없다. 《상례비요》의 묘제 제도는 《격몽요결》에 의거하여 강신을 먼저 하고 참신을 나중에 하도록 하려다가 《가례》를 고치기가 미안스러워서 그대로 쓴 것이다. 퇴계가 말하기를 “참례의 경우 본래 참신을 하기 위하여 설정한 것인데, 만약 참신을 먼저 한다면 강신 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강신을 먼저 하는 것이다. 제사의 경우 강신을 한 뒤에도 헌작(獻爵) 등의 허다한 예절이 있으므로 참신을 먼저 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다. 송구봉(宋龜峯)이 율곡(栗谷)에게 답한 편지에 “묘제에서의 참신과 강신은 이미 주자의 《가례》에 설정되어 있는 것이므로 갑자기 고치려 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을 듯하다. 또 더구나 예의 본뜻을 알기 어려운 경우이겠는가.” 하였다. 난삼(襴衫)에 대하여 [문] 난삼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지난해 선군(先君)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국자감(國子監)의 유생(儒生)이 유복(儒服)을 입고 있는 것을 본바, 남색 견(絹)으로 상의를 만들고 너비 네다섯 치의 청흑색 견으로 옷깃 및 소매끝과 자락끝을 장식하고 깃은 둥글었는데, 이를 난삼이라고 하였다. 《사물기원(事物記原)》 당지(唐志)에 이르기를 “마주(馬周)가 삼대(三代)의 삼베 심의(深衣)에다 난(襴)과 거(裾)를 달아서 난삼이라고 이름하여 상사(上士)들이 입는 옷을 삼았는데, 지금 거자(擧子)들이 입는 옷이다.” 하였다. ○ 《천중기(天中記)》에 이르기를 “당(唐)나라 태위(太尉)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의론하기를 ‘포(袍)를 입을 경우 아랫단에 난(襴)을 대되 분홍색ㆍ자주색ㆍ녹색은 모두 품계에 맞도록 하고, 서인(庶人)은 흰색으로 대도록 하소서.’ 하였다.” 하였다. ○ 명도(明道)가 말하기를 “소요부(卲堯夫 소옹(邵雍))가 처음에 이정지(李挺之)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사도(師道)가 하도 엄하여 비록 어느 야점(野店)에서라도 밥을 먹을 적에는 반드시 난삼을 입고, 앉을 적에는 반드시 절을 하였다.” 하였다. ○ 주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에 이르기를 “직령(直領)을 하는 것은 고례(古禮)인데, 위에 의(衣)가 있고 아래에 상(裳)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상령(上領)에 난(襴)이 있는 것은 금례(今禮)인데, 오늘날의 공복(公服)에서 상의(上衣)와 하난(下襴)이 서로 연결되어 옷깃과 떨어지지 않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이르기를 “송나라의 공복은 곡령(曲領)과 대수(大袖)에다 아래에 횡란(橫襴)을 달았는데, 홍무(洪武) 24년에 생원(生員)의 건복(巾服)을 제정하면서 옥색 견포(絹布)로 소매가 넓은 난삼(襴衫)을 만들어 입었다.” 하였다.   모자(帽子)에 대하여 [문] 모자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제가(諸家)의 설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천중기》 석명(釋名)에 이르기를 “모(帽)란 씌우는 것이다.” 하였다. ○ 구경산(丘瓊山)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의 모자가 두 등급이 있는데, 이른바 대모(大帽)란 곧 입자(笠子)로, 비와 해를 가리는 데 쓰는 것이고, 이른바 소모(小帽)란 사(紗)나 나(羅), 또는 단(緞)으로 만든다. 이 두 모자 외에 별도로 딴 모자는 없다.” 하였다.   가계(假髻)와 특계(特髻)에 대하여 [문] 가계와 특계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가계란 머리를 땋아서 만드는 것으로, 고시(古詩)에 이르기를 “동쪽 집 부인의 머리는 땅바닥에 닿는데, 가계를 한 미인이 도리어 사랑을 받네.[東家婦人髮委地假髻美人還承寵]”라고 하였다. 가계에 수식(首飾)이 없는 것을 특계라 한다. 《이의실록(二儀實錄)》에 이르기를 “수인씨(燧人氏)의 부인이 머리를 묶어 상투[髻]를 만들었다. 계(髻)란 잇는다는 뜻으로, 여자는 반드시 남을 잇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하였다. ○ 《주례(周禮)》 ‘부편차(副編次)’의 주에 이르기를 “부(副)란 머리를 덮어서 꾸미는 것으로 오늘날의 보요(步搖)와 같은데, 이것을 하고는 왕제(王祭)에 종사하며, 편(編)이란 머리를 땋아서 만드는 것으로 오늘날의 가계(假紒)와 같은데, 이것을 하고는 양잠(養蠶)을 하며, 차(次)란 머리를 장단(長短)의 차례대로 땋아서 만드는 것으로 오늘날의 피체(髲鬄)와 같은데, 이것을 하고는 왕을 뵙는다.” 하였다. -모두 왕후(王后)의 수복(首服)이다.     속절(俗節) 사시(四時)의 묘제 때에 가묘(家廟)에도 함께 참례(參禮)하는 일에 대하여 [문] 사시의 묘제 때에 가묘에도 참배를 합니까? -송준길- [답] 묘제와 가묘는 장소가 이미 다르므로 비록 병행하여 거행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회재(晦齋)가 말하기를 “세속에서 정조(正朝)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 모두 묘소에 나아가 참배를 하고 청소를 하니, 오늘날 일방적으로 폐지할 수는 없다. 이날 새벽에 사당에 나아가 음식물을 올리고 이어 묘소에 나아가 절을 올리면 될 것이다.” 하였다.   생신(生辰)에 대하여 [문] 《가례집설(家禮集說)》에 생신ㆍ기신(忌辰)의 설이 있습니다. 시행하는 것이 예(禮)에 맞습니까? 번거로운 것이 될 성도 싶은데,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강석기- [답] 생신과 기신의 제사는 풍선(馮善)이 창시한 것으로, 퇴계가 잘못이라고 하였는데, 옳은 견해이다. 퇴계가 정도가(鄭道可)에게 답한 편지에 “맹자(孟子)께서 이른바 예 아닌 예라는 것이 이런 유(類)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하였다.     일이 있을 경우 고유하는 일 증직(贈職)을 뒤에 써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신주에 더러는 증직을 먼저 쓰고 나서 실직(實職)을 쓰고 더러는 실직을 먼저 쓰고 나서 증직을 쓰는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강석기- [답] 송나라 때에는 실직을 먼저 쓰고 증직을 뒤에 썼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증직을 먼저 쓰고 실직을 뒤에 썼다. 우리 집 선대에서도 그렇게 하였으니, 갑자기 고칠 수는 없다.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가 묻기를 “증직을 먼저 쓰는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인데, 괜찮겠습니까?” 하니, 퇴계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풍속에서 증직을 먼저 쓰는 것은 나라의 은전(恩典)을 우선으로 하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벼슬의 고하(高下)와 일의 선후(先後)가 모두 도치되었으므로, 이를 고쳐서 옛 법을 따르려 하면서도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분황(焚黃)에 대하여 [문] 분황에 황지(黃紙)를 쓰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강석기- [답] 옛날 제도에 직첩(職牒)을 황지에 썼기 때문에 황지에 등사하여 대신 불사르는 것이나, 지금은 교지(敎旨)를 이미 백지에 쓰고 있으니 비록 백지에 써서 불사르더라도 괜찮을 듯하다. 《쇄쇄록(瑣碎錄)》에 이르기를 “당(唐)나라 상원(上元) 3년 이전에는 칙서(勅書)를 모두 백지에 썼는데, 좀이 많이 먹어서 그 뒤부터는 황지에 썼다.” 하였다. ○ 주자가 이르기를 “황지에 조명(詔命)을 등사하여 펴서 읽고 나서는 불사른다.” 하였다.   고사(告事)에 축문을 쓰지 않기도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아들을 낳아서 알현하거나 납채(納采)를 하고 나서 신랑 집에서 왕복한 혼서(婚書)를 사당에 고유할 때 모두 축문을 쓰지 않고 주인이 스스로 고유하니, 이는 말로써 고유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에서입니까? -황종해- [답] 고유할 말이 많을 경우 축판을 쓰고 적을 경우는 말만으로 고유한다. 우리 집은 축판을 함께 쓴다. 효(孝) 자와 현(玄) 자의 뜻에 대하여 [문] 《가례》에서 자칭할 때 효 자를 쓴 것은 무슨 뜻이며, 고사(告事) 조항에 원손(元孫)이라고 일컬은 것과 시제(時祭) 조항에 현손(玄孫)이라고 일컬은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답] 경사(經史)와 구준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제사에서 효자(孝子)ㆍ효손(孝孫)이라 일컫는 것은 그 뜻으로써 일컫는 것이다.” 하고, 그 주에 “제사란 효를 주로 하는 것이므로, 선비의 제사에서 효자ㆍ효손이라 일컫는 것은 제사의 뜻으로써 일컬은 것이다.” 하였다. ○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 10월에 성조(聖祖)가 연은전(延恩殿)에서 탄강하자 조명(詔命)을 내려 성조의 이름을 현(玄)이라 하고는 곧장 현(玄) 자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이보다 앞서 공자(孔子)를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에 추봉(追封)한 일이 있는데, 이때에 와서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고쳤으니, 이는 현(玄) 자가 성조의 어휘(御諱)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 구준이 말하기를 “송나라 때 현(玄) 자를 피휘하여 모든 경전(經傳) 중의 현(玄) 자를 다 원(元) 자로 고쳤다. 때문에 《가례》에 원손(元孫)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지금은 다 고쳐서 현(玄) 자를 따랐다.” 하였다. -현(玄)은 친속(親屬)이 분명치 않다는 뜻이고, 손(孫)은 후손이라는 뜻이다.     사당에 불이 났을 때 가묘(家廟)에 불이 나서 신주(神主)를 개조하는 일에 대하여 [문] 가묘에 불이 났을 경우 예법상 어떻게 해야 하며, 신주를 개조할 경우 어느 곳에서 써야 합니까? 어떤 이는 묘소에서 써야 한다고도 하는데, 이 말이 어떠합니까? [답] 경사(經史)와 퇴계의 설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이르기를 “선인의 집에 불이 났을 경우 사흘 동안 곡을 한다. 그러므로 ‘신궁에 불이 났을 때에도 사흘 동안 곡을 하였다.[有焚其先人之室 則三日哭 故曰 新宮火 亦三日哭]’고 한 것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선인의 집이란 종묘를 말한다. 노(魯)나라 성공(成公) 3년에 선공(宣公)의 사당이 불에 탔으니, 신주가 처음 들어갔기 때문에 신궁이라고 쓴 것이다. 《춘추》에 ‘성공 3년 2월 갑자(甲子)에 신궁에 불이 나니 사흘 동안 곡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그 주에 ‘예에 들어맞음을 쓴 것이다.’ 하였다. 여기에서 ‘고왈(故曰)’이라 함은 《춘추》의 글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한(漢)나라 선제(宣帝) 감로(甘露) 원년에 태상왕(太上王) 태종(太宗)의 사당에 불이 났는데, 황제가 닷새 동안 소복(素服)을 입었다. ○ 퇴계가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산야(山野)에 매장을 하고 제주(題主)가 끝나면 곧장 서둘러 반혼(返魂)을 하는 것은 신(神)이 생존하던 곳에서 편안히 있도록 하자는 의도에서이다. 하루아침에 신주가 불에 탈 경우 신과 혼이 날려 흩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이 떠돌 것이니, 곧장 전일 신을 모셨던 곳에 허위(虛位)를 설치하고 신주를 고쳐 쓴 다음, 향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어 날려 흩어진 신으로 하여금 다시 신주에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전일 이미 집으로 되돌아온 혼이 어떻게 체백(體魄)이 있는 묘소로 다시 가서 의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체천(遞遷) 최장방(最長房)의 아들이 비록 조천(祧遷)할 대수가 다하지 않았더라도 차장방(次長房)에게로 조천하는 일에 대하여 [문] 무릇 조주(祧主)는 당연히 최장방에게로 옮겨야 하나, 최장방인 자가 죽었을 경우 그의 아들이 비록 조천할 대수가 다하지 않았더라도 문중(門中)에 또 제부(諸父)ㆍ제형(諸兄)이 있으면 그 집으로 천봉(遷奉)하여야 합니까? -황종해- [답] 그러하다. 최장방에서 조주(祧主)를 고쳐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조주를 최장방에게로 옮기고 나면 신주도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에 맞는 칭호로 고쳐 써야 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절차는 신주를 천봉하는 날에 있어야 하는데, 방제(旁題)에 효증현손(孝曾玄孫)이라 일컫지 않고 증현손이라고만 일컫습니까? -황종해- [답] 그러하다. 최장방이 조주를 천봉할 수 없을 경우 종자(宗子)가 그대로 별실에 안치하는 일에 대하여 [문] 5대조(代祖)의 신주는 예법상 최장방에게 천봉하여야 하나, 어쩌다 사세가 그렇지 못할 경우 종자의 사당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만약 5대를 봉사하는 것이 참람하다 하여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별실에 봉안하고 제사 때에는 최장방이 제사를 주관하며 제자(諸子)가 대행하도록 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퇴계는 별실에 봉안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설이 예에 합당합니까? -강석기- [답] 최장방이 신주를 천봉할 수 없다면 우선 별실에 봉안하여야 한다. 4대 이후에 가서 다시 가묘(家廟)에 봉안하는 일은 참람하므로 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테면 퇴계의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는 설은 괜찮을 듯하나, 최장방이 이미 제사를 받들지 않고 있다면 이 사람으로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하다. 종자가 죽어서 숙부(叔父)가 제사를 받들 경우 조주를 도로 사당으로 모셔 들여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종자가 죽고 적손(嫡孫)이 승중(承重)을 할 경우 조주는 이미 최장방에게로 천봉하였습니다. 적손이 또 죽고 후사가 없어서 종자의 아우가 그 제사를 대신 받들 경우 그 조주는 다시 사당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까? 어떤 이는 이미 조천한 신주는 다시 사당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도로 모셔 들여야 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장방이 조주를 제사할 때에 대수가 다한 종자의 위차(位次)에 대하여 [문] 조주를 최장방에게 천봉할 경우 대수가 다한 종자는 중자손(衆子孫)의 반열에 서야 하고 사당에서 서립(序立)하는 차례대로 서지는 못합니까? -황종해- [답] 대수가 끝나서 사당이 훼철되고 나면 종가(宗家)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 있어 온 설이기는 하나, 만약 대종자(大宗子)의 경우라면 같은 예로 볼 수 없을 듯하다. -어떤 이가 “《정씨유서(程氏遺書)》에, ‘무릇 소종(小宗)은 5세(世)를 법을 삼아서 대수가 다하면 분산하나, 만약 고조(高祖)의 아들이 아직 살아 있어서 그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면 현재 종자인 자가 비록 6, 7세가 되더라도 역시 오늘날의 종자를 헤아려 본 뒤에 그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니, 종자는 군도(君道)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하니, 상고해 보아야 한다. 최장방의 뜻에 대하여 [문] 최장방의 방 자는 무슨 뜻입니까? [답] 주자의 설로 볼 때, 옛사람이 여러 대(代)가 한 대문 안에 같이 살 경우 자손들이 각각 사방(私房)을 두는데, 역시 《의례》에 이른바 남궁(南宮)ㆍ북궁(北宮)과 같은 것이다. 사당에 만약 대수가 다한 신주가 있다면 당연히 조천(祧遷)하여야 하나, 가족 중에 아직 대수가 다하지 않은 자가 있을 경우 그중 최장방인 자에게로 조천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주자어류》에서 주자가 말하기를 “하주(賀州)의 어떤 가문의 경우이다. 대문은 하나를 내어 같이 쓰고 대문 안에 두 채의 행랑을 두어서 이 행랑은 모두 아들이 거처하도록 하였으니, 마치 학사(學舍)나 승방(僧房) 같았다. 사방마다 손님이 찾아올 적이면 각기 음식을 마련하여 가지고 대청으로 올라와서 존장(尊長)을 청하여 술 다섯 잔을 같이 들도록 한 다음, 곧장 사방으로 돌아가서 술자리를 따로 마련하였다고 한다.” 하였다.   서얼(庶孼)이 최장방이 되는 일에 대하여 [문] 서인(庶人)은 고비(考妣)만을 제사 지내는 법이고 보면, 조천(祧遷)할 신주의 자손 중에 서얼이 있어도 최장방으로 볼 수 없습니까? -송준길- [답] 서얼은 지위가 비록 낮더라도 조선(祖先)에게는 똑같은 자손이다. 정자(程子)의 설에 의거하면 당초 제사를 받들지 못할 의리는 없으나, 다만 적형제(嫡兄弟)가 다 죽고 난 뒤에 제사를 받드는 것은 괜찮을 듯하다.     부(附) 불천위(不遷位) 대수가 다한 조상을 봉훈(封勳)으로 인하여 조천하지 못할 경우 고조(高祖)를 체천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불천위가 있을 경우 고조는 비록 대수가 다하지 않았더라도 체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불천위는 당연히 네 감실 외에 특별히 설치하여야 한다고 하니,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네 감실 외에 또 특별히 감실을 설치할 경우 다섯 감실이 되므로, 참람하여 그렇게 할 수 없다. 어떤 이가 묻기를 “시기(始基)의 선조를 네 감실 외에 따로 사당을 세워서 모시고자 하는데 어떠합니까?” 하자, 주자가 답하기를 “오늘날처럼 4대를 제사 지내는 것도 벌써 참람하다.” 하였고, 또 왕 상서(汪尙書)에게 답한 편지에서 “천자(天子)의 삼공(三公)과 주목(州牧)은 외방으로 나가 봉함을 받고 난 뒤에 제후(諸侯)의 예를 써서 다섯 사당을 세울 수 있으므로, 왕조(王朝)에 벼슬한 사람은 그 예가 도리어 압존(壓尊)당하여 시행할 수 없게 됩니다.” 하였다. 오늘날 다섯 사당을 세울 경우 이는 곧 제후의 예를 쓰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종가의 5대 할아버지가 불천위이기 때문에 4대 할아버지는 아직 대수가 다하지 않았는데도 신주를 모셔 내어 별실에 봉안한 것이다. 근래에 듣자니 최백진(崔伯進)이 그의 아버지가 공훈(功勳)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미리 다섯 감실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맨 처음 공훈에 책봉된 이를 불천위로 할 경우 그다음 공훈에 책봉된 이는 체천하는 일에 대하여 [문] 가묘(家廟)에 다섯 감실을 설치하는 것이 참람되다는 것은 이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다만 근세의 예를 말한다면 이광악(李光岳)의 3대가 공훈에 책봉되어 모두 불천위가 되었습니다. 세대수가 자꾸 바뀌어 이광악의 증손자에게 이르게 되면 장차 그의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못할 것이며, 4대가 공훈에 책봉된다고 가정할 경우 또 그의 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갑(甲)은 말하기를, 맨 처음 공훈에 책봉된 이만 불천위를 하고 그 나머지는 비록 공훈이 있더라도 체천해야 한다고 하고, 을(乙)은 말하기를 국가가 훈신(勳臣)을 우대하여 이미 상제(常制)를 둔 이상 그의 자손된 자로서 감히 마음대로 체천할 수는 없으므로, 불천위는 아무리 많더라도 모두 네 감실 외에 특별히 감실을 설치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말이 옳습니까? [답] 갑의 말이 옳다. 만약 4대가 연달아 공훈에 책봉된 것을 모두 체천하지 않는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사당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어디에 이런 이치가 있단 말인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맨 처음 공신이 된 자라고 말하였고 보면, 그 이하는 체천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경국대전》의 “별도로 한 실(室)을 세운다.[別立一室]”라는 문구를 가지고 별도로 하나의 사당을 세우고자 하기도 하는데, 묘(廟)와 실(室)이 과연 똑같다는 말인가. 무지망작(無知妄作)하여 7, 8대의 감실을 세우고자 하는 저런 무리들은 말할 것이 못 된다. 《경국대전》의 봉사(奉祀) 조항에 이르기를 “맨 처음 공신이 된 자는 비록 대수가 다하더라도 체천하지 않고 따로 하나의 실을 세운다.” 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상(大祥) 조항에도 나온다.   대수가 먼 불천위의 칭호에 대하여 [문] 불천위에 더러는 몇대조라고 쓰고 더러는 시조(始祖)라고 씁니다. 어느 것이 옳습니까? -송준길- [답] 선조(先祖)라고 쓰는 것이 옳다. 아니면 몇대조라고 써도 좋다. 시조라는 칭호는 태초에 사람을 탄생시킨 시조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타당하지 않을 듯하다.     심의(深衣) 심의의 제도에 대하여 [문]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의 편지에 “일찍이 한명길(韓鳴吉)이 보내 준 심의의 제도를 받은바, 내가 만든 변변치 못한 것과 퍽 달랐습니다. 이제 보내 주신 세 벌을 받아 보니 존좌(尊座)께서 만든 것이 비생(鄙生)의 소견과 맞는 듯합니다. 그리고 비생이 만든 하나의 옷은 위아래의 모든 규격이 다 고명(高明)의 것과 일치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대개 비생이 만든 것은 《가례의절》과 《가례》, 그리고 백운 주씨(白雲朱氏 주자(朱子))의 설을 많이 원용하였는데, 반드시 그렇게 하고 나서야 옷이 심수(深邃)한 뜻을 지니고 입기에도 편리합니다. 주소(註疏)와 제가(諸家)의 설들은 모두 원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문집 중 김이정(金而精 김취려(金就礪))이 만든 것 역시 의심스러운 데가 없지 않으니, 백세포(白細布)란 삼을 익혀서 짠 것이 맞을 듯하고, 면포(綿布)는 부드럽고 질겨서 옷을 짓기에 적합하므로, 꼭 삼으로 짠 것만을 베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베틀로 짜서 옷을 지을 수 있는 피륙이라면 명주와 비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베라고 이름하여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실을 짜서 베를 만든 경우에는 그 가부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답] 제가 살펴보건대, 정도가(鄭道可)가 논한 심의의 제도는 백운 주씨의 설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제도가 꼭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례》 본문의 심의를 마르는 제도가 《예기》 옥조(玉藻) 및 심의(深衣) 편의 것과 틀리지 않아서 역시 심수의 뜻을 잃지 않았는데, 무엇하러 꼭 새로운 해석을 하여 《가례》의 것과 차이를 두려고 하십니까. 상(裳)을 마르는 제도에 대하여 [문] 《예기보주(禮記補註)》의 심의의 상(裳)을 마르는 제도에 이르기를 “베 여섯 폭(幅)이면 너비가 한 발[丈] 석 자 세 치인데, 이를 한 폭씩 대각선으로 엇갈리게 쪼개어 열두 폭으로 만들면, 위로 가는 좁은 끝은 폭마다 일곱 치 서푼 남짓으로 열두 폭의 너비가 도합 여덟 자 여덟 치가 되고, 아래로 가는 넓은 끝은 폭마다 한 자 네 치 여섯 푼 남짓으로 열두 폭의 너비가 도합 한 발 일곱 자 여섯 치가 된다. 여기서 상(裳) 열두 폭의 합봉(合縫) 부분 및 앞자락의 접는 부분 한 치씩을 제하고 나면 허리는 일곱 자 다섯 치가 되고 아랫단은 한 발 여섯 자 세 치가 된다. 이러고 나면 위끝은 세 치가 더 많고 아래끝은 한 자 아홉 치가 더 많은데, 바로 잘라 버린다.” 하였는데, 이 설이 어떠합니까? 그리고 《가례》에 보인 곡거(曲裾)를 마르는 제도도 만약 《가례》의 본 조항 주에 이른바, “좁은 끝은 넓은 끝의 절반이 되어야 한다.”라는 설로 본다면 이는 3분의 1로 좁은 끝을 만들고 3분의 2로 넓은 끝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좁은 끝은 일곱 치 서 푼 남짓이 되고 넓은 끝은 한 자 네 치 여섯 푼 남짓이 되어서 《예기보주》에 나오는 상(裳)을 마르는 제도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도(圖)의 주를 보면, “넓은 끝의 너비는 한 자 네 치, 좁은 끝의 너비는 여덟 치이다.”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유태(李惟泰)- [답] 상(裳) 여섯 폭은 폭마다의 베 너비가 두 자 두 치이므로, 처음 마를 적에 넓은 끝은 한 자 네 치씩 되고 좁은 끝은 여덟 치씩이 된다. 폭마다 양쪽 가장자리 한 치씩을 봉합하는 몫과 잘려 나가는 몫으로 제하고 나면, 넓은 끝은 꼭 한 자 두 치가 되고 좁은 끝은 꼭 여섯 치가 되어 3분의 1이 흡사하다. 여기서 여섯 치가 되는 열두 폭을 위로 허리에 붙이면 꼭 일곱 자 두 치가 되고 한 자 두 치가 되는 열두 폭을 아랫단으로 보내면 꼭 열넉 자 네 치가 되니, 남는 것도 모자라는 것도 없게 되기에 족하다. 《예기》 옥조에 이른바, “심의의 너비는 소매끝의 세 배로 하고 아랫단은 허리의 두 배로 한다.”라고 한 말과 심의 편에 이른바, “허리의 봉합처는 아랫단의 절반으로 한다.”라는 말은 모두 번갈아 제시하여 서로 대비시킨 것이다. 《예기보주》의 천착됨을 말할 것이 무어 있겠는가. 곡거를 마르는 제도의 도(圖) 밑의 주에 심의의 상(裳)을 마르는 제도를 상세히 갖추어 둔 것도 바로 이와 같다. 복건(幅巾)에 대하여 [문] 복건의 제도는 상이(相異)한 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옛 제도의 본뜻을 잃지 않겠습니까? -이유태- [답]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성리대전(性理大全)》, 《예기보주》에 나오는 설로 볼 때 이미 건액(巾額)이 있고 또 깃[㡇子]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나, 국속(國俗)이 《가례》의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에 집착하여 바로 건액을 깃으로 보고 또 한쪽을 접어서 꿰매어 마치 옷깃[衣裾]의 제도와 같이 하였을 뿐이다. 한가운데를 접어서 깃을 만드는 제도를 버리고 쓰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제도인지는 《가례의절》에 나오는 도(圖)를 상고하면 될 것이고 《상례비요(喪禮備要)》에도 자세히 나온다. 《주자대전》에 의하면, 복건은 한쪽을 꿰매어 건액을 만들고 한가운데를 접어서 깃을 만든다. ○ 《성리대전》과 《예기보주》에 의하면, 검정색 견(絹) 여섯 자 남짓으로 한가운데를 접어서 두 쪽을 만든 다음, 오른쪽 접힌 부분을 또 접어서 작은 가로깃을 만든다.     거가잡의(居家雜儀) 자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가르쳐 주는 일에 대하여 [문] 자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가르친다는 말씀은 비록 경전(經典)의 전거 -《예기》 곡례(曲禮)에 “자식은 부모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하고, 그 주에 “스스로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하였다.- 가 있기는 하나, 말을 배우고 있는 어린아이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먼저 이름을 가르쳐 주고 나서야 스스로 부를 줄을 알므로, 문자(文字)가 우연히 같다는 것만으로 견강부회하여 훈고를 내어서는 아니 될 듯합니다. -지사 신식- [답] 이미 경전의 전거가 있는 이상 다른 말을 지어낼 수는 없습니다. 말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일컫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어른에게 읍하고 경의를 표하며 문안 인사드리는 예절 같은 것도 역시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처부모(妻父母)에 대한 칭호 및 자칭(自稱)에 대하여 [문] 세속에서 아내의 아버지를 범범하게는 장인(丈人)이라 부르고 서간문(書簡文)에서는 빙군(聘君) 또는 빙부(聘父)로 씁니다. 빙군이란 징군(徵君)인데, 사람들은 주자가 부옹(婦翁)을 빙군이라고 말한 것을 잘못 알아서, 비록 식자라 하더라도 흔히들 잘못 쓰고 있으니, 참으로 웃을 노릇입니다. 이를테면 빙부의 경우는 더욱 근거가 없으니, 오늘날 예경(禮經)에 의거하여 외구(外舅) 두 글자를 서간문에 쓰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는 구(舅) 자 밑에 주(主) 자를 쓰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이 설이 어떠합니까? 이미 외구라고 일컬은 이상 사위의 자칭도 당연히 생(甥) 자를 써야 합니까? 구(舅)ㆍ고(姑)ㆍ생(甥) 등의 글자는 쓰이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어서 혼동이 될 듯도 합니다. 그러나 각기 당연히 쓸 곳에 쓴다면 혐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황종해- [답] 빙군의 칭호는 세속에서 잘못 알고 쓴 지가 오래다. 편지에서 보여 준 칭호는 안 될 것은 없을 듯하다.
132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2 댓글:  조회:2905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36권 의례문해(疑禮問解)-2 상례(喪禮) 상례에 주자(朱子)의 유명(遺命)을 따르는 일에 대하여 [문] 상례는 진실로 《가례》를 좇아야 하나, 더러 소략하고 미비한 곳이 있고, 《의례》를 좇으려 하면 또 고금(古今)의 시의(時宜)가 달라서 행하기 어려운 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중도(中道)를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송준길- [답] 당연히 주자가 운명할 때의 유명으로 기준을 삼아야 하지만 기록한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에 모두 열기한다. 주자행장(朱子行狀)에 “선생의 병세가 위독할 적에 문인(門人)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상례에 대하여 묻자 소략하다고 대답했고, 《의례》에 대하여 묻자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치상(治喪)을 맡은 문인이 일체 《의례》를 좇아 상사(喪事)를 치렀다.” 하였다. ○ 언행록(言行錄)에 “제생(諸生)이 문병을 들어갔을 때 그 자리에서 청하기를, ‘만에 하나 일어나지 못하시게 된다면 《서의(書儀)》를 준용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머리를 저으셨고, ‘그렇다면 《의례》를 준용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역시 머리를 저으셨으며, ‘그렇다면 《의례》와 《서의》를 모두 참고해야겠습니까?’ 하자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윽고 편안히 숨을 거두셨다.” 하였다.     초종(初終) 고복(皐復)하는 옷에 대하여 [문] 고복하는 옷은 평소에 입던 상의(上衣)를 써야 합니까? -송준길- [답] 당연히 죽은 사람의 제복(祭服)을 써야 한다. 예경(禮經)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의례》 사상례(士喪禮)에 “고복의 경우 작변복(爵弁服)으로 하되, 상(裳)을 상의[衣]에 연결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작변복이란 치의(緇衣)와 훈상(纁裳)을 말하는데, 예법에 관(冠)으로써 옷의 이름을 짓는다. 잠(簪)은 연결하는 것이다.” 하였고, 그 소에 “사(士)는 작변복을 입고 임금의 제사를 도우니, 사가 다시 제사를 도울 때 입던 옷을 쓰는 것을 보면 제후(諸侯) 이하도 모두 제사를 도울 적에 입던 옷을 쓴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무릇 평상시에 상의를 입고 상(裳)을 입는 것이 각기 다르나, 지금 이 초혼(招魂)에서는 그 편의를 취하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상(裳)을 상의에 연결하는 것이다.” 하였다. ○ 《의례》 기석례(旣夕禮)의 “고복하는 자는 조복(朝服)을 입는다.”라는 말은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여 죽은 사람의 정신이 이를 알고서 옷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고복에 대부(大夫)는 현정(玄頳) -현의(玄衣)와 훈상(纁裳)- 을 쓰고, 세부(世婦) -대부의 아내- 는 전의(襢衣) -붉은색의 홑옷[丹縠衣]으로 색깔이 적색(素色)이다. 정현(鄭玄)은 색깔이 희다고 하였다.- 를 쓰며, 사(士)는 작변(爵弁)을 쓰고, 사의 아내는 단의(稅衣) -색깔은 검고 분홍색의 선을 두른다.- 를 쓴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에 “부인(婦人)의 고복에는 염(袡)을 쓰지 않는다.” 하였고, 그 주에 “붉은색 천으로 상의의 아랫단을 두르는 것을 염(袡)이라 하는데, 이는 시집갈 적의 성복(盛服)이요, 귀신을 섬길 때 입는 옷은 아니다. 그러므로 고복에 쓰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방씨(方氏)가 말하기를 “고복에 각기 죽은 사람의 제복(祭服)을 쓰는 것은 신(神)에 기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고복에 쓴 옷을 염습(殮襲)에 쓰지 않는 일에 대하여 [문] 고복에 쓴 옷을 염습에 써도 괜찮습니까? -송준길- [답] 예경(禮經)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상대기에 “고복에 쓴 옷은 시신에 입히지도 않고 염(殮)하는 데 쓰지도 않는다.” 하였고, 그 주에 “시신에 입히지 않는다는 것은 습(襲)하는 데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복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하는 것인데, 만약 그 옷으로 염습을 한다면 이는 산 사람의 옷을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결과가 되므로, 의리상 서로 반대된다. 《의례》 사상례에는 ‘목욕을 시킨 뒤에 버린다.’ 하였다.” 하였다.   고복에 쓴 옷을 영좌(靈座)에 놓아두는 일에 대하여 [문] 고복에 쓴 옷은 처음에는 시신을 덮었다가 습을 하고 나서는 병을 앓을 때 입던 옷과 함께 버리는데, 지금 사람은 혼백 상자 속에 넣어 두는 이도 있습니다.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황종해(黃宗海)- [답] 예(禮)에 죽을 때 입던 의상은 반드시 영좌에 놓아두게 하였으니, 오늘날 고복에 쓴 옷을 영좌에 놓아두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만약 혼백과 함께 묻는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다.     주부(主婦) 주부의 칭위(稱謂)에 대하여 [문] 《가례》의 ‘주부를 세운다[立主婦]’는 조항의 주에는 망자(亡者)의 처(妻)라 하였고, 역복(易服) 조항의 주에는 처자(妻子)의 처라는 말이 있고, 성복(成服) 조항의 주에는 처첩(妻妾)의 처라는 말이 있고, ‘각각 상차로 돌아간다[各歸喪次]’는 조항의 주에는 때가 아닌 때에 어머니를 뵙는다고 하였으니, 이상의 경우는 모두 주상(主喪)하는 자의 어머니를 가리킨 것입니다. 위위(爲位) 조항의 주에는 주부와 중부녀(衆婦女)는 시상(尸牀) 서쪽에 앉는다고 하였고, 소렴(小殮)ㆍ대렴(大殮) 조항의 주에는 주인과 주부는 기대어 곡한다고 하였고, 조조(朝祖) 조항의 주에는 모두 주인과 주부의 뒤에 선다고 하였고, 급묘(及墓) 조항의 주에는 주부와 모든 부녀는 광(壙)의 서쪽 악차(幄次) 안에 선다고 하였으며, 우제(虞祭)에는 아헌(亞獻)을 주부가 한다 하고, 졸곡(卒哭)에는 주부가 진찬(進饌)한다 하고, 부제(祔祭)에는 주부가 종헌(終獻)한다 하였으며, 소상(小祥) 조항의 주에는 주부가 중부녀를 거느린다고 하였으니, 이상의 경우는 모두 주상하는 자의 아내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위위(爲位)’ 이하의 여러 조항의 경우 망자의 처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으니, 너무도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망자의 처와 주상자의 처를 혼동하여 주부라고 한다면 더더욱 미안합니다. -강석기- [답] 초상에서는 망자의 처가 당연히 주부가 되니, 이때는 아직 총부(冢婦)에게 가사(家事)를 넘기지 않았기 때문이요, 우제와 부제 이후의 경우에는 주상자의 처가 당연히 주부가 되니, 제사의 예는 반드시 부부(夫婦)가 친히 거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종묘의 제사에는 동쪽에서는 희상(犧象)에 술을 치고 서쪽에서는 뇌준(罍尊)에 술을 쳐서 모름지기 부부가 같이 제사를 올리는 법이다. 어떻게 어머니와 아들이 같이 제사를 올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러한 경우는 그 가리킨 대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아야 한다.     역복(易服) 자최(齊衰)에 관(冠)을 벗는 일에 대하여 [문] 초종(初終)과 역복 조항에 처자(妻子)는 관을 벗고 나머지 복(服)이 있는 자는 화려한 장식을 제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부모와 백숙부모의 상 및 남의 후사(後嗣)로 양자 나간 아들이 본생부모(本生父母)의 상에 있어서는 모두 관을 벗지 말아야 합니까? 만약 《가례》를 정설로 보아서 이러한 중상(重喪)에 길관(吉官)을 벗지 않는다면 예에 너무 어긋날 듯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의 본뜻에 걸맞겠습니까? -황종해- [답] 단괄(袒括) 조항의 사마온공의 설과 《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의 변복도(變服圖)를 상고하면 될 것이다. 본생부모 및 조부모와 아내의 상에 길관을 벗지 않는 예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피발(被髮)에 대하여 [문] 피발을 하는 것은 고례(古禮)가 아닌데,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답] 피발을 하는 것은 서원(西原)의 오랑캐 풍속에서 나온 것이다. 당(唐)나라 초기에 오랑캐의 땅까지 다 통일하자 오랑캐의 풍속이 점차 중국에까지 물들어서 그 길로 이 예가 있게 되었다.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연간에 와서 전례(典禮)에 채택되어 들어갔고, 사마온공이 이를 취택하였으며, 《가례》에도 그대로 삭제하지 않았다. 《가례회성(家禮會成)》은 구준(丘濬)의 설에 근거하여 삭제하였으니, 예를 행하는 집으로써는 참으로 삭제한 쪽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행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하루아침에 버린다는 것도 비난을 면치 못할 듯하다. 또 《예기》 단궁의 주를 상고한바, “괄발(括髮)은 당연히 소렴 뒤, 시신이 마루를 나가기 전에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오늘날 풍속은 더러 성복(成服)에 가서야 비로소 괄발을 하니 이것은 잘못이다. 또 분상(奔喪)에 이르기를 “분상하는 자가 미처 빈소(殯所)로 가지 못할 때는 먼저 묘소로 찾아가 슬피 울고 나서 괄발을 한 다음 드디어 관을 쓰고 돌아온다.” 하였는데, 그 주에 “괄발을 하고서는 길을 걸을 수 없어서이다. 관은 흰색의 위모(委貌)를 말한다.” 하였다. 괄발만 하고 길을 다니는 것도 오히려 안 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풍속은 분상하는 자가 더러 피발하고 다니니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서원의 오랑캐들은 어버이가 처음 죽었을 때 피발을 하고 물동이를 들고서 물가에서 슬피 운 다음 동전(銅錢)과 지전(紙錢)을 물속에 던지고서는 그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와서 시신을 목욕시킨다. 그것을 매수(買水)라 하는데, 이를 하지 않을 경우 이웃 사람들이 불효라고 한다.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이르기를 “신유(辛有)가 이천(伊川)에 갔다가, 들판에서 피발하고 제사를 올리는 자를 보고는, 백 년이 못 되어서 이곳은 오랑캐가 되겠구나 하였는데, 마침내 육혼씨(陸渾氏)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하였다. ○ 또 《춘추좌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의 대부들이 반수발사(反首拔舍)하였다.” 하였는데, 그 주에 “반수란 머리를 풀어 흩뜨려서 아래로 늘어뜨린 것이고, 발사란 풀을 뽑아 놓고 그곳에 노숙하는 것이니, 대개 형모(形貌)와 복장을 훼손하여 걱정과 슬픔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예기》 문상(問喪)에 ‘어버이가 처음 죽었을 때 관을 벗고 비녀와 머리 싸개만 남겨 두며, 맨발을 하고 옷자락을 허리에 꽂는다.[親始死鷄斯徒跣 扱上袵]’ 하였는데, 그 주에 ‘鷄斯는 계사(笄纚)로 읽는데, 계(笄)란 뼈로 만든 비녀를 말하고 사(纚)란 《예기》 내칙(內則)의 이른바 사(縰)로서, 상투머리를 싸매는 천이다.’ 하였다. 이는 대개 어버이가 처음 죽었을 때 효자(孝子)가 쓰고 있던 관을 벗고 비녀와 상투머리를 드러내어야 하나, 아직 미처 제거하지 못한 것이고, 괄발 때에 가서 제거한다는 말이지, 그것을 상복(喪服)의 꾸밈의 하나로 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고례(古禮)를 일일이 상고하여 본바, 피발이란 말은 어느 예에나 들어 있지 않고 오직 당나라 《개원례(開元禮)》에만 있는데, 사마온공은 말하기를 ‘계사(笄纚)란 오늘날 사람들이 평일에 하지도 않는 것이고 피발은 더더욱 슬퍼하는 모습이 꼴불견이 되기 때문에 《개원례》를 따른다.’ 하였다.” 하였다. -살피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비록 상투머리를 싸매는 천은 없으나, 실제로 비녀를 써서 상투머리를 꿴다. 오늘날의 망건(網巾)으로 상투머리를 싸는 것이 사(纚)와 서로 비슷한 만큼, 오늘날은 초상에 곧바로 관모(冠帽)를 벗고 망건과 뼈비녀를 드러내었다가 괄발 때에 가서 비로소 제거하는 것이 역시 고례의 본뜻과 같을 성싶다. 그러나 감히 나 스스로 이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어서 우선 여기에 기록하여 둔다.   [주D-001]예기 단궁의 주 : ‘차투기관괄발(且投其冠括髮)’ 조에 대한 원나라 진호의 주석이다.     치관(治棺) 상구(喪具)를 미리 준비하는 일에 대하여 [문] 어떤 사람이 어버이가 늙어서 죽음이 다가오고 있을 때를 만나 상구를 미리 준비하려고 하는데 좌씨(左氏)가 말한 바와 같이 흉사(凶事)를 미리 준비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듯하니,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송준길- [답] 당연히 예경(禮經)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좌씨의 그 논리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말한 것인 듯하다. 주자의 말에, 좌씨의 예설(禮說)은 모두가 주(周)나라 말기 국가가 쇠퇴하고 풍속이 문란하여 질서가 없을 때의 예이므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예기》 왕제(王制)에 “예순에 세제(歲制)를 하고, 일흔에 시제(時制)를 하고, 여든에 월제(月制)를 하고, 아흔에 일수(日修)를 하는데, 효(絞)ㆍ금(紟)ㆍ금(衾)ㆍ모(冒)만은 죽은 뒤에 마련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늙어갈수록 죽을 날이 가까워 오기 때문에 송종(送終)의 물품들을 미리 준비하여야 한다. 세제란 관(棺)을 말하니, 그것은 쉽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해를 앞두고 마련하라[歲制]고 한 것이고, 구하기 어려운 의복들은 석 달을 걸려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에 계절을 앞두고 마련하라[時制]고 한 것이며, 쉽게 구할 수 있는 의복들은 한 달이면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달을 앞두고 마련하라[月制]고 한 것이다. 나이 아흔에 이르면 관과 수의가 모두 마련되어서 상구를 새로 만드는 일은 없이, 오직 날마다 수리나 하며 완비하지 못한 것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챙겨 볼 뿐이다. 효(絞)란 의복을 거두어 묶는 끈이고, 금(紟)이란 홑이불이니, 열닷 새의 삼베로 만든다. 무릇 이불[衾]은 모두 다섯 폭(幅)으로 만드는데, 사(士)의 경우 소렴에는 검정색 이불에 붉은색의 안감을 대고, 대렴에는 두 채의 이불을 쓴다. 모(冒)는 시신(屍身)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이 네 가지의 물건은 꼭 죽은 뒤에 마련하니, 이는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에 “상구는 군자(君子)로서 마련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니, 하루 이틀에 마련할 수 있는 것은 군자가 마련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상구란 관과 수의 따위인데, 군자가 이것을 일찌감치 마련하여 다 구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그 어버이가 오래 살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혐의해서이다. 그러나 예순에 세제를 하고, 일흔에 시제를 하고, 여든에 월제를 하고, 아흔에 일수를 하는 것은 대개 갑작스런 변고를 염려해서이다. 하루 이틀에 마련할 수 있는 물건의 경우 군자가 미리 마련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른바 효(絞)ㆍ금(紟)ㆍ금(衾)ㆍ모(冒)로, 죽은 뒤에 마련하는 것들이다.” 하였다. 구준이 말하기를 “구비하기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완제품으로 만드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지, 그 재료도 준비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하였다.     목욕(沐浴) 목욕물에 대하여 [문] 오늘날 사람들이 시신을 목욕시킬 적에 향나무 달인 물을 많이 쓰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머리를 감기는 물은 예경(禮經)에 보면 쌀뜨물을 쓰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준행해야 합니까? -황종해- [답] 목욕에 향나무 달인 물을 쓴다는 것은 《국조오례의》 군상(君喪) 조항에 있으므로, 이는 참람하여 감히 쓸 수 없다. 머리를 감기는 물은 예경에 나오는 대로 쌀뜨물을 쓰는 것이 옳다. 《예기》 상대기에 “군(君)은 수수뜨물로 머리를 감기고, 대부(大夫)는 피뜨물로 머리를 감기고, 사(士)는 수수뜨물로 머리를 감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수수나 피를 씻은 뜨물로 머리를 감기는데, 군과 사가 똑같이 수수뜨물을 쓰는 것은 사는 신분이 낮아서 윗사람에게 참람될 혐의가 없어서이다.” 하였다.     습(襲) 과두(裹肚)와 늑백(勒帛)의 제도에 대하여 [문] 과두는 곧 세속의 이른바 과두 철릭(裹肚天益)입니까? 늑백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답] 과두란 과두 철릭은 아닌 듯하다. 《가례》에 보면 과두를 가장 속에 입히는데, 이는 곧 시신에 친근한 물건이니, 필시 오늘날 배와 허리를 감싸는 물건일 것이다. 늑백은 구준의 말이 과족(裹足)이라고 하는데, 송(宋)나라 가우(嘉祐) 연간에 구양수(歐陽脩)가 고관(考官)이 되어서 주필(朱筆)로 거자(擧子)의 과문(科文)을 맨 앞에서 맨 끝까지 가로로 그어 지우고는 홍륵백(紅勒帛)이라고 하였다. 몇년 전에 어떤 한인(漢人)이 삼베 서너 자를 가지고 발에서 무릎까지를 감아서 바짓가랑이를 싸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늑백인 성싶다. 구양수의 말과도 들어맞는 듯하다. 습의(襲衣)의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미는 일에 대하여 [문] 더러는 습의를 왼쪽으로 여민다는 설도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유태- [답] 운운하였다. -뒤의 소렴 조항에 나온다. 염습에 망건과 행전을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염습을 할 적에 복건(幅巾)만을 씌울 경우 머리를 다 거두어 넣을 수가 없어서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대명집례(大明集禮)》에 보면 염습에 망건을 쓴다고 하였고, 《국조오례의》에는 망건 대신 조라(皂羅)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여기에 의거하여 조라를 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고의(袴衣)를 입힌 뒤에 두 무릎을 묶는 제도가 없어서 더러는 행전을 쓰기도 하고 더러는 당나라의 제도와 같이 화(靴) 따위를 신기기도 합니다. 이것은 또한 어떠합니까? -강석기- [답] 옛사람은 생시에도 약두(掠頭 머리를 거두어 올리는 것)를 하는 제도가 있었으니, 염습에서 머리를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몇년 전에 교관(敎官) 권극중(權克中)의 상에 내가 모단(冒段)으로 망건을 만들고 명주로 행전을 만들어 쓰도록 지시하였다. 복건의 제도에 대하여 [문] 복건의 제도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운운하였다. -앞의 심의(深衣) 조항에 나온다. 여자의 상에 엄(掩)을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여자의 상에 쓰는 과수(裹首)의 제도는 아직 정설(定說)이 없는데, 듣기를 원합니다. [답] 예전에는 남녀의 상에 엄과 과수를 함께 썼으나, 후세에 와서 관(冠)으로 엄을 대신하였다. 관이 또 너무 높아서 쓰기가 나쁘기 때문에 복건으로 관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 남자의 수식이고 보면 여자의 상에는 아직도 고례(古禮)를 따라 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염습을 할 때 심의와 함께 공복(公服)을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염습을 할 때 복건과 심의를 쓰는 것이 예입니다. 그러나 벼슬이 있는 자는 흑단령(黑團領)과 답호(褡 더그레)를 심의 속에 입히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심의와 단령은 모두 윗옷이기 때문에 껴입힐 수는 없다고도 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과연 안 될 일입니까? 또 어떤 이는 비단에다 종이를 배접하여 사모(紗帽)와 품대(品帶)의 제도처럼 만들어 쓰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떠합니까? [답] 《예기집람》에서 논한 내용이 옳을 듯하다. 고례(古禮)에 염습을 할 때 옷을 세 벌 입히되 작변복(爵弁服) -치의(緇衣)와 훈상(纁裳)-, 피변복(皮弁服) -백포의(白布衣)와 소상(素裳)-, 단의(褖衣) -흑의상(黑衣裳)에 적색(赤色)의 선을 두른다.- 를 함께 썼으므로, 오늘날 조복(朝服)과 심의를 함께 써도 괜찮을 듯하다. 사모와 품대는 너무 높아서 쓰기가 어렵다. 《예기집람》에 이르기를 “염(殮)을 하는 데 지장을 줄까 싶기 때문에 비록 벼슬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복건과 심의를 쓰는 것이다.” 하였다.   악수(握手)에 대하여 [문] 악수에 대해서는 설이 하도 많고 서로 같지 않아서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적확한 의론을 듣고 싶습니다. -송시열- [답] 예경(禮經)에 나오는 여러 설이 확실하고 분명하여 근거를 삼을 만하다. 나도 이를 논한 적이 있어 아래에 상세히 덧붙인다.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악수는 겉감은 검정색 안감은 분홍색을 쓰는데, 길이는 한 자 두 치이고 너비는 다섯 치이며, 한가운데의 양 가장자리를 한 치가량씩 줄여[牢中旁寸] 묶는 끈을 단다.” 하였는데, 그 주에 “牢는 누(樓)로 읽는데, 누(樓)란 악수의 한가운데를 줄여서[削約握之中央] 손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하였고, 그 소에 “이 옷을 악(握)이라고 이름한 것은 그것이 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악수라고 말하는 것이지, 손으로 잡음[以手握之]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악수의 한가운데를 줄여서 손을 고정시킨다는 것은, 경문(經文)에서 말한 너비가 다섯 치이며 한가운데의 양 가장자리를 한 치가량씩 줄인다는 것이니, 한가운데의 너비가 세 치이고, 이 세 치의 한가운데는 또 손가락 네 개가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네 손가락은 손가락 한 개가 한 치이고 보면 곧 네 치이다. 네 치 밖에 또 여덟 치를 남겨 두되 모두 너비는 다섯 치로 한다. 牢를 누(樓)로 읽는 것은 누(樓) 자의 훈고 중 거두어들여서 좁힌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삭약(削約)이라고 말한 것은 줄여들여서 작게 한다는 뜻이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깍지[決]를 설치하여 손등[掔]에다 연결[麗]하되 엄지손가락 뿌리에서 받치도록 하고, 악(握)을 설치하고 이에 손등에 연결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악을 설치한다는 말은 끈으로 가운뎃손가락에 걸어서 다음 손등에서 깍지 띠의 남은 부분과 연결하여 묶는다는 것인데, 이는 오른손을 말하는 것이다. 고문(古文)에 여(麗)도 역시 연(連) 자로 썼으며, 완(掔)은 완(腕)으로 썼다.” 하였고, 그 소에 “윗글의 ‘악수의 길이는 한 자 두 치이다.’로 볼 때 손을 감싸는 한 끝으로 손등을 감쌀 적에는 반드시 겹으로 하되, 위로 덮이는 천의 아래쪽 귀퉁이에 끈 한 가닥을 달아서 바로 그 가닥으로 손을 한 바퀴 감은 다음 손등 쪽의 가운뎃손가락 부위에 가서 위로 향하여 가운뎃손가락에 걸어 다시 위쪽으로 돌려 감고 나서 남은 끈을 아래로 끌어당겨서 깍지 띠의 남은 부분과 연결하여 묶는다는 것인데, 이는 오른손에 깍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깍지와 같이 묶는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오른손임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상례 하기(士喪禮下記)에서 말한 ‘악수 설치[設握]’란 왼손을 말하는 것으로, 정현(鄭玄)이 말한 ‘손에 깍지가 없을 경우[手無決]’와 같은 말이다.” 하였다. ○ 《의례》 사상기에 “악수[握]를 설치하여 어버이의 피부를 싸되, 가운뎃손가락에 끈을 걸어서 손등[掔]에 묶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완(掔)은 손바닥 뒤의 손마디 한가운데이다. 손에 깍지[決]가 없을 경우 악수의 끈 한 가닥으로 손등을 감은 다음 다시 위쪽의 본래 꿰었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다른 한 가닥과 잡아맨다는 것이다.” 하였고, 그 소에 “‘손에 악수가 없을 경우’란 경문(經文)에서 이미 ‘악수를 설치하여 손등에 연결하여 깍지와 함께 연결한다.[設握麗于掔 與決連結]’고는 하였으나, 오른손에 깍지가 있는 경우에만 의거하여 말하고 왼손에 깍지가 없는 경우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에서 말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상고하건대, 상문(上文)에서는 ‘악수는 검정색 겉감과 분홍색 안감을 쓰는데, 길이는 한 자 두 치이다.[握手用玄纁裏 長尺二寸]’라고 하였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어버이의 피부를 싸자면 손바닥 안에 펼쳐 놓고서 길이 한 자 두 치를 가지고 한가운데에서 손을 덮으면 겨우 서로 맞닿게 되는데, 이 양쪽 끝에 각각 끈을 달아서 먼저 한 가닥으로 손등을 한 바퀴 감은 다음 다시 본래 꿰었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또 다른 한 가닥으로 위를 향하여 가운데 손가락에 걸어서 먼저 손등을 감은 가닥과 반대로 돌려 손바닥 뒤쪽 손마디 가운데에서 묶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어떤 사람의 편지에 답하기를 “《의례》의 본 조항을 상고한바, 악수(握手)는 둘인데, 오른손의 경우 끈이 한 가닥뿐이고 왼손의 경우 양쪽 끝에 다 끈이 있다. 오늘날 왼손의 것을 따르는 것은 《가례》에 깍지[決]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깍지가 없는 것을 따른 것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이 소가(疏家)의 설을 보면 왼손과 오른손에 각기 악수를 하나씩 썼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는 것을 상고할 수 있다. 근세에 예(禮)를 강론하는 이들 중 어떤 이는 악수를 하나를 쓰되, 양쪽 끝 아래위 귀퉁이에 모두 끈을 달아서 양 손에 나누어 놓고는 양쪽 끝 네 치 가운데에 각기 한 가닥으로 묶어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선 나의 소견으로 말한다면 소가가 이른바 ‘너비 세 치의 한가운데는 또 네 손가락이 들어갈 뿐이다.’라는 말은 악수의 총 길이는 한 자 두 치이고 그 길이를 삼등분할 경우 각각 네 치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한가운데 네 치 쯤에서 천을 줄여 좁혀서 그 사이를 손가락 네 개가 들아갈 만한 네 치에 맞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명(釋名)》에 이른바 악(握)이란 물건을 시신의 손바닥 안에 놓아두어서 쥐게 한다는 것으로, 곧 《가례의절》에 이른바 명주 한 폭을 써서 죽은 사람의 손안에 쥐이되, 또 두 끝에 네 치씩을 남겨 두어 고정시켜서 손을 싸맬 때에 손등을 덮을 수 있는 네 치의 너비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또 이른바 ‘길이를 한 자 두 치로 하는데, 손을 감싸고 난 한 끝으로 손등을 감되 반드시 겹으로 하며, 위로 덮이는 부분의 아래 귀퉁이에다 또 끈 한 가닥을 단다.’는 것은, 악수의 한가운데 네 치를 손바닥 안에 놓아두고 나서 또 그 두 끝의 각각 네 치로 손등을 덮을 경우 반드시 서로 포개져 덮인다는 말이다. 또 이른바 ‘악수를 손바닥 안에 놓아두되, 길이는 한 자 두 치로 하고 한가운데로 손을 덮으면 겨우 서로 맞닿게 된다.’는 것은, 길이 한 자 두 치의 한가운데를 손바닥 안에 놓고서 그 두 끝의 각각 네 치로 손등을 겹으로 덮을 경우 두 끝의 너비가 겨우 서로 맞닿게 되어 손을 감싸는 데 모자람도 남음도 없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 악수 하나만을 써서 양 손에 나누어 놓는다면 경문(經文)에 이른바 ‘한가운데 한 치가량을 줄여 들인다’는 말은 한가운데 어디에다 설치한다는 것이며, 주소(注疏)에 이른바 ‘중첩으로 서로 덮는다’는 말은 어째서 나온 말이겠는가. 또 경문에 이른바 ‘악수를 설치하고 깍지를 설치하는 것’은 바로 오른손이고 사상례 하기에 이른바 ‘악수를 설치하는 것’은 바로 왼손인데, 정현이 말한 ‘왼손에는 깍지가 없다’는 말은 이것이 과연 하나의 악수를 가지고 두 손에 나누어 설치하는 것이겠는가.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겨우 서로 맞닿는다’는 것은 두 손을 하나의 악수의 두 끝에다 나누어 놓고서 묶는다면 그 두 손이 서로 맞닿아서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는데, 만약 이 설과 같이 한다면 그 겹쳐지는 부분이 묶이는 손에 가 있고 감싸는 손에는 가 있지 않을 것인데, 《가례》에 이른바 악수란 손을 감싸는 것이라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의례》 경문(經文)에는 “악수의 길이는 한 자 두 치이다.” 하였고, 기(記)에 “어버이의 피부를 싼다.[裹親膚]” 하였으며, 가공언(賈公彦)의 소에 “지금 어버이의 피부를 싼다.[今裹親膚]” 하였는데, 오늘날 그것을 자하(子夏)의 기(記)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판본의 오류로 인해 ‘금과(今裹)’를 ‘영리(令裏)’로 보았기 때문에 갈수록 의문을 불러 일으켰으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악수의 끈을 네 개로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에 대하여 [문] 《가례》 악수의 제도에는 두 끝에 각기 끈이 있다고 하였고, 《가례의절》의 경우는 네 귀퉁이에 모두 끈이 있다고 하였으나, 퇴계는 “경산(瓊山 구준(丘濬))이 네 귀퉁이에 끈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묶기에 편리하다.” 하였습니다. 그 설은 어떠합니까? -강석기- [답] 악수의 끈이 두 개라는 것은 예경(禮經)에 분명하므로, 비록 경산과 퇴계의 설이 있다 하여도 좇기 어려울 듯하다. -악수에 대한 설은 앞에 나온다. 모(冒)의 제도에 대하여 [문] 오늘날 풍속에 모를 쓰는 일이 드물고 비록 쓰더라도 더러는 그 제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씁니다. 그 제도와 의미를 자세히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송시열- [답] 예경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그 제도가 매우 좋아서 쓰지 않을 수 없다.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군(君)은 금모(錦冒) 보쇄(黼殺)에 철방(綴旁)이 일곱이고, 대부(大夫)는 현모(玄冒) 보쇄에 철방이 다섯이고, 사(士)는 치모(緇冒) 정쇄(頳殺)에 철방이 셋이며, 모든 모(冒)는 질(質)의 길이를 손과 가지런하게 하고 쇄(殺)의 길이는 석 자로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모란 시신에 씌우는 두 개의 자루로, 위쪽의 것을 질(質), 아래쪽의 것을 쇄(殺)라고 하는데, 먼저 쇄로 발을 씌워 올리고 나서 그다음에 질로 머리를 씌워 내려온다. -《예기》 왕제(王制)의 주에 ‘살아 있을 때와 같이 현의(玄衣) 훈상(纁裳)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 제도는 한쪽 머리를 봉합한 다음 또 한쪽 가장자리를 연결하고 나머지 한쪽 가장자리는 봉합하지 않고 남겨 두니, 두 개의 자루가 다 그러하다. 봉합하지 않은 가장자리는 아래위로 띠 일곱 개를 달아서 그것을 묶는다.” 하였다. ○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모란 얼굴을 덮는 것으로, 습(襲) 때부터 소렴 때까지 모를 씌우지 않을 경우 얼굴이 드러나게 되므로 습을 하면서 모를 씌우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비록 옷은 이미 입혔더라도 만약 모를 씌우지 않을 경우 시신의 모습이 드러나서 사람에게 혐오감을 준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의 주에 “상현(上玄) 하훈(下纁)은 천지(天地)를 상징한 것이다.” 하였고, 소에 “이 경문(經文)에서는 모(冒)를 총목으로 삼고 그 밑에 별도로 질(質)과 쇄(殺)는 스스로 상대가 된다고 말하였으나, 《예기》 상대기에는 모두 모를 쇄에 상대시키고 질은 말하지 않았고 보면, 모는 이미 총명(總名)이기도 하면서 또 쇄의 상대가 되어 위쪽에 있는 것의 일컬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예기》 예기(禮器)에 “천자(天子)의 당(堂)은 9척(尺)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방씨(方氏)가 말하기를 ‘양수(陽數)는 구(九)에서 끝나므로, 천자의 경우 양도(陽道)의 끝을 본받아 당계(堂階)의 높이를 9척으로 제한하는 것인데, 여기부터 내려오면서 강쇄(降殺)는 둘로 하기 때문에 더러는 칠(七), 더러는 오(五), 더러는 삼(三)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철방이 일곱, 또는 다섯, 또는 셋인 것도 역시 이러한 뜻으로서, 천자의 모 또한 아홉인 듯하다.’ 하였다.” 하였다.   조부모와 부모의 상을 같이 당하였을 경우 습렴(襲殮)의 선후에 대하여 [문] 조부모와 부모가 함께 죽었을 경우 습렴은 누구의 것을 먼저 하고 누구의 것을 나중에 하여야 하며, 만약 선경 후중(先輕後重)의 예법을 따른다면 승중손은 조부모와 부모에 있어 누구를 중(重)으로 보고 누구를 경(輕)으로 보아야 합니까? -강석기- [답] 습렴과 폄장(窆葬)은 차이가 있으므로, 선경 후중의 예법에 구애받을 수는 없고 마땅히 존비(尊卑)를 위주로 하여 조부모를 먼저 하고 부모를 나중에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례(古禮)에 근거가 없으므로 감히 이것이 옳다고 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중(喪中)에 죽은 이에게는 습렴에 길복(吉服)을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상중에 죽은 이에게는 습렴에 무슨 옷을 써야 합니까? -강석기- [답] 퇴계와 혹자의 설이 있으나 나의 뜻과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언젠가 변론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또한 옳은지 모르겠다. 퇴계가 말하기를 “상중에 죽은 이에게는 습렴에 효복(孝服)을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한번 이 옷을 쓰고 나면 지하에서 천년만년 영원히 흉복을 입은 사람이 될 것이니, 이것 역시 정리상 아주 난처한 일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습을 할 적에는 소복(素服)에다 흑건대(黑巾帶)를 쓰고, 소렴 때에는 정복(正服) 역시 소복을 쓰되 그 나머지 이리저리 넣는 옷은 길복을 섞어서 쓰며, 대렴 및 입관 때에 가서는 효복 한 벌과 길복 한 벌을 갖추어서 효복은 오른쪽에 놓고 길복은 왼쪽에 놓는 것이, 복기(服朞)가 다하고 나서 길복으로 갈아입는다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다 얻을 수 있을 뿐더러 영원히 흉복을 입는 사람이 되지도 않을 듯하다.” 하였다. ○ 신의경(申義慶)이 말하기를 “예법에 상례는 죽은 이의 입장을 따르므로 습렴에 대부(大夫)와 사(士)는 각기 입히는 옷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기》 증자문(曾子問)에 이르기를 ‘제사 지낼 대상이 죽은 이에게 복이 없는 관계이면 제사를 지낸다.’ 하였으니, 이는 애척(哀戚)의 정리가 생시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습을 할 적에는 최마(衰麻)를 쓰고 염을 할 적에는 호소(縞素)를 쓰며, 이리저리 넣는 의상은 길복을 섞어서 쓰되, 관질(冠絰)에 있어서는 높고 빳빳한 것은 불안하므로 더러 추포(麤布)로 대대(大帶)와 복건(幅巾)을 만들어 대신 쓰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하였다. -살피건대, 신생(申生)의 설은 근거가 있는 듯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온당치 못하고, 퇴계의 설은 정리에는 맞을 듯하나 또한 그 사이에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이미 생사의 사이는 다름이 있다 하여 흑건대로 변용하여 습을 하고서 또 흉복을 섞어서 쓴다면, 한 사람의 몸에 길복과 흉복을 함께 쓰는 격이 되니, 이것은 길복도 아니고 흉복도 아니어서 앞뒤로 근거가 없다. 선생의 생시에 질정을 받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또 이를테면 자최(齊衰)와 참최(斬衰)는 중복(重服)이므로 흉복으로 염을 하는 것도 정리상 그럴듯하나, 시마(緦麻)ㆍ소공(小功) 따위의 경복(輕服) 및 국휼(國恤) 중에 죽은 이에 있어서도 역시 흉복으로 습렴을 한다는 것은 행하기가 아주 난처하다. 오직 효복(孝服)을 가지고 혼백(魂帛)을 따라 출입하며 영좌(靈座)에 놓아두고서 복기(服朞)가 다할 때까지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 듯하다. 기묘 제유(己卯諸儒)의 의정(議定)에 “상중에 죽은 이에게는 습렴에 모두 길복을 쓰고 상복은 영상(靈牀)에 진열하여 두되, 만약 이미 장사를 지내고 영상을 철거하였다면 영좌에 간직하여 두고서 복기가 다할 때까지 기다리는데, 이는 곧 유의(遺衣)는 반드시 영좌에 둔다는 의미이다. 소상과 대상을 거치면서 수질(首絰)ㆍ부판(負版)ㆍ벽령(辟領)ㆍ최(衰)를 차례차례 제거하여 역복(易服)에 이르는 과정까지 일체 생시와 똑같이 하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연전에 이것을 가지고 한강(寒岡) 정도가(鄭道可)에게 물어보았더니, 도가의 답장에 “보내 주신 생각이 옳습니다. 장사를 지내기 전의 경우 생시와 같이 소찬(素饌)을 쓰고 상복은 늘상 영좌에 놓아두되, 이미 장사를 지낸 뒤라면 상복을 걷어치우고 고기를 써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처음 죽고 나서 제전(祭奠)에 포해(脯醢)를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처음 죽고 나서 반드시 포해를 써서 전(奠)을 올리는 것은 무슨 뜻에서입니까? [답] 《예기》 단궁 상(檀弓上)과 유씨(劉氏)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단궁 상에 이르기를 “처음 죽었을 때의 전물은 찬장에 남아 있는 음식을 쓰면 될 것이다.[始死之奠 其餘閣也]” 하였는데, 그 주에 “각(閣)이란 음식물을 놓아두는 찬장으로, 살았을 때 찬장 위에 남겨 두었던 포해로 제전을 올린다는 것이다.” 하였고, 소에 “전(奠)이란 귀신이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제주(祭酒)가 있어야 하나, 다만 처음 죽었을 때에는 다르게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았을 때 찬장에 남겨 두었던 포해로 제전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유장(劉璋)이 말하기를 “모든 전물을 포해로 쓰는 것은 고인(古人)이 늘상 집에 두었던 것이기 때문인데, 없으면 따로 두어 가지의 찬품(饌品)을 마련한다.” 하였다.   습ㆍ소렴ㆍ대렴의 전물(奠物)이 《가례》와 《의례》에서 서로 다른 점에 대하여 [문] 《가례》에는 습할 때의 전물을 시신 동쪽 어깨 부위 지점에 차려 놓고 시신 남쪽에는 영좌(靈座)와 혼백(魂帛)을 설치하되 대렴ㆍ소렴 때까지 모두 이렇게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가르쳐 주신 말씀에서는 소렴 때에 전물을 시신 동쪽에 차린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고례(古禮)는 그러하지만 주자(朱子) 때부터 비로소 시신 남쪽에 차린 것이 아닙니까? -황종해- [답] 《의례》에는 습과 소렴의 전물은 모두 시신 동쪽 어깨 부위 지점에 차린다고 하였고 《가례》에는 소렴의 전물은 시신 남쪽에 차린다고 하였으니, 《가례》와 《의례》를 하나의 뜻으로 합쳐서 볼 수는 없다. 시신 동쪽에서 제전을 올리는 일에 대하여 [문] 시신 동쪽에서 제전을 올리는 것은 무슨 뜻에서입니까? -송준길- [답] 《의례》의 소에 “시신 동쪽에서 제전을 올린다는 것은 처음 죽었을 때에 차마 생시와 달리하지 못하여서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주D-001]의례 사상례의 주 : ‘모치질(冒緇質)’ 조에 대한 정현의 주이다.     반함(飯含) 반함에 대하여 [문] 반함 한 문제는 옛사람의 이론이 하도 분분하여 어느 것을 좇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절충된 논리를 들려주십시오. 《가례》에서는 엽전을 썼으나, 오늘날은 통상적으로 진주를 씁니다. 이 역시 무슨 근거에서입니까? -강석기- [답] 예경(禮經)의 여러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예운(禮運) 반성(飯腥) 조항의 주에 이르기를 “반성이란 아직 화식(火食)이 없던 상고 시대의 법을 쓰는 것으로, 생쌀로 반함을 하는 것이다.” 하였고, 《예기》 단궁의 주에 “방씨(方氏)가 말하기를 ‘반(飯)이란 곧 함(含)으로, 쌀을 쓰기 때문에 반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으며, 《예기》 단궁에 “반(飯)에 쌀과 조개껍질[貝]을 쓰는 것은 차마 입을 비워 두지 못해서이므로 음식을 먹이는 도리를 따르지 않고 다만 아름다운 물건을 쓸 뿐인 것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쌀과 조개껍질을 죽은 이의 입에 채우는 것은 그 입을 차마 비워 두지 못해서이니, 바로 음식을 먹이는 도리를 따르지 않고 다만 아름답고 정갈한 물건을 써서 채우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왕극관(汪克寬)은 말하기를 “함(含)이란 무엇인가? 입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면 채우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옥식(玉食)으로 채우는 것이다. 옥식이란 무엇인가? 천자(天子)는 옥(玉)으로 반함을 하고, 제후(諸侯)는 주(珠)로 하고, 대부(大夫)는 벽(璧)으로 하고, 사(士)는 패(貝)로 하고, 서인(庶人)은 전(錢)으로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채우는 것인가? 효자(孝子)가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과 같이 하다 보니 차마 그 어버이의 입을 비워 둘 수 없다는 뜻에서이다. 《예기》 잡기에는 천자는 9패(貝), 제후는 7패, 대부는 5패, 사는 3패라 하였고, 《주례》에는 천자의 반함에 옥을 쓴다고 하였으니, 이는 아마 시대에 따라 제도가 달라서 이러할 것이다. 본 주석에는 반함(飯含)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반(飯)으로 함(含)을 한다는 것이다. 《예기》 예운 편을 참고하여 보면 반성(飯腥)이라고 하였는데, 곡량씨(穀梁氏)는 패옥(貝玉)을 함(含)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러고 보면 두 가지가 비록 다 입을 채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용도는 같지 않으므로, 반함이라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반함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안 된다.” 하였다. -살피건대, 예전에 제후가 주(珠)를 쓰자 국속(國俗)이 사와 서인들도 주를 통용하였고, 《국조오례의》에도 이를 허용하였으니, 이는 역시 시대에 따라 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함전(含錢)에 대하여 [문] 옛사람의 반함에는 모두 주(珠)와 패(貝)를 썼으나 《가례》에는 전(錢)을 썼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에서입니까? -황종해- [답] 옛사람의 반함에는 천자는 옥(玉), 제후는 주(珠), 대부는 벽(璧), 사는 패(貝), 서인은 전(錢)을 썼으니, 《가례》에서 전을 쓴 것은 서인의 예를 따른 것으로, 간편한 쪽을 따르자는 뜻에서이다. 반함 때에 주인이 머리를 푸는 일에 대하여 [문] 반함을 할 적에 주인이 머리를 풀고 행하는 것은 신종(愼終)의 뜻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고례(古禮)에 근거할 만한 데가 있어서 변형한 예절입니까? -강석기- [답] 머리를 거두는 것은 당연히 소렴 뒤에 있어야 하므로 반함할 때는 변형된 예절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머리를 푸는 예가 없었는데, 《개원례(開元禮)》에서 비로소 행하였다. 사마온공과 주자도 속례(俗禮)를 따라 행한 것이다.     명정(銘旌) 《가례》 명정 조항 주(註)의 오자에 대하여 [문] 《가례》 상례의 ‘명정을 세운다[立銘旌]’는 조항에, 3품 이상은 9척(尺), 5품 이하는 8척이라고 하고 4품의 척수는 다시 거론하지 않았으니, 무슨 뜻에서입니까? 5품 이하의 하(下) 자가 바로 오자가 아니겠습니까? -강석기- [답] 5품 이하의 하 자는 상(上) 자로 바꾸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다. 명정의 척도(尺度)에 대하여 [문] 예(禮)에 명정ㆍ현훈(玄纁)ㆍ공포(功布) 등의 척도는 본래 주척(周尺)을 말한 것이나, 오늘날은 예기척(禮器尺)을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너무 긴 것이 아닙니까? -황종해- [답] 《국조오례의》에 의거하여 예기척을 만들어 쓰는 것은 무방하다. 명정을 만약 주척으로 쓴다면 너무 짧아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놀랍게 보일 것이다. 대부(大夫)와 사(士)의 구분에 대하여 [문] 대부와 사의 구분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통전(通典)》에 보인 여러 설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도는 비록 고제(古制)와 같은지 모르겠으나, 대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은 대부로 논한다. -어떤 이는 통정대부(通政大夫)도 옛날의 하대부(下大夫)라고 한다. 《통전》에서 하순(賀循)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육경(六卿)이 천자의 상대부(上大夫)인데, 지금의 구경(九卿)과 광록대부(光祿大夫) 품계 중 이천 석(二千石)인 자가 이에 해당하고, 예전의 대부가 육경에 버금가는데, 지금의 오영(五營)의 교위(校尉)와 군수로서 이천 석인 자가 이에 해당하며, 상사(上士)는 대부에 버금가는데, 지금의 상서성(尙書省)의 승(丞)과 낭(郞), 어사(御史) 및 천 석의 현령(縣令)으로서 현직 6품인 자가 이에 해당하고, 예전의 하사(下士)는 중사(中士)에 버금가는데, 지금의 현령ㆍ현장(縣長)ㆍ현승(縣丞)ㆍ현위(縣尉)로서 현직 8, 9품인 자가 이에 해당한다.” 하였다. ○ 이구(李覯)가 말하기를 “일명(一命)이란 천자의 하사(下士), 공(公)ㆍ후(侯)ㆍ백(伯)의 상사, 자(子)ㆍ남(男)의 상대부이다. 재명(再命)이란 천자의 중사(中士), 공ㆍ후ㆍ백의 대부, 자ㆍ남의 경(卿)이다. 삼명(三命)이란 천자의 상사, 공ㆍ후ㆍ백의 경이다.” 하였다. ○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일명이란 지금의 8, 9품 벼슬과 같고, 재명이란 지금의 6, 7품 벼슬과 같고, 삼명이란 지금의 경관(京官) 5품 이상과 같다.” 하였다.   부인(婦人) 명정의 칭호는 남편의 실직(實職)을 따르는 일에 대하여 [문] 실직이 없이 자급(資級)만 있을 경우 그 아내의 칭호를 자급에 따라 쓸 수 있습니까? -송준길- [답] 당연히 실직을 따라야지, 자급만을 가지고 아무 봉작이라고 일컬을 수는 없으므로, 관향 아무 씨로 쓰는 것이 옳다. 서얼(庶孼) 부인 명정의 칭호에 대하여 [문] 서얼 부인을 아무 씨로 쓰는 것은 혐의스러울 것이 없을 듯하나, 더러는 국법대로 조이(召史)로 쓸 경우 ‘씨’ 자는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 합니까? -송준길- [답] 씨 자를 쓰는 것은 성씨를 구별하자는 것인데, 서얼이 천하기로서니 성씨를 일컫는 것이 무에 혐의스럽겠는가. 그리고 조이라고 하는 것이 법전에 맞지 않는다면, 어떤 이는 ‘아무 성씨의 구(柩)’로 써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명정과 함께 도(圖)를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 명정은 시구(屍柩)에 속하는 것인데, 위(幃) 안에 세워야 한다는 설은 어느 책에서 나온 것입니까? 《의례》를 상고해 보니, “명정은 처음에 서쪽 계상(階上)에 두었다가 중목(重木)에 걸고 난 뒤에 축(祝)이 명정을 가져다가 하관(下棺)하는 옆에 놓아둔다.” 하였는데, 그 주에 “하관하는 동쪽에 세워 둔다.” 하였고 보면, 명정이란 곳에 따라 놓아두는 장소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례》에 이른바 ‘영좌(靈座) 오른쪽에 기대어 세운다’는 것과 ‘시구 동쪽에 받침대를 설치하여 세운다’는 것이 곧 이러한 유형이 아니겠습니까. 《가례의절》의 영좌도(靈座圖)와 영상도(靈牀圖)를 보면 영상은 시구의 동쪽에 설치하고 영좌는 시구의 남쪽에 설치하되, 다만 횃대로 가린다고 하였으니, 명정을 영좌의 서쪽에 세우는 것이 《가례》의 본 주석과 아주 다르며, 소장(素帳)을 쳐서 안팎을 가리는 것은 시속에서 하는 것일 뿐이지, 예(禮)에는 근거가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만약 형의 설과 같다면 마땅히 영상의 서쪽 시구의 동쪽이라고 해야지, 영좌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영좌와 영상을 어떻게 혼동하여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또 시구를 마루 한가운데의 조금 서쪽에 두는 것은 예전에 서쪽 계단에 빈(殯)을 한 뜻에 의거한 것일 뿐입니다. 만약 형의 말씀과 같이 한다면, 시구는 서쪽 계단의 서쪽에 정남향을 하고 명정은 그 동쪽에 있게 될 것이며, 또 그 동쪽에 영상을 설치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좌와 영상을 서로 밀치고 설치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그러고 난 뒤에는 명정을 세우는 위치가 바로 시구의 동쪽 영좌의 서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횃대를 시구 남쪽에 설치한 다음 영좌를 설치하고 혼백을 모신다는 글의 내용과는 아주 동떨어지게 됩니다. 명정을 세우는 위치만 억지로 끌어다 붙이려 하고 시구와 영좌가 서로 어긋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면, 소절(小節)을 다투다가 대체(大體)를 잃는 것이라 하겠으니, 어찌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이 문제는 아주 의심스럽습니다. -지사 신식(申湜)- [답] 《가례》에서 명정을 영좌의 오른쪽에 기대어 세우라고 한 것 역시 임시로 서쪽 계단에 세워 둔다는 고례(古禮)의 뜻에서이고, 대렴을 한 뒤에 받침대를 설치하여 시구 동쪽에 세우므로 장소에 따라 그 위치가 다르게 되는 것은 영좌는 동쪽에 있고 빈소는 서쪽에 있기 때문에 영좌로 말할 경우 오른쪽이 되고, 빈소로 말할 경우 동쪽이 되어 영좌와 빈소의 사이가 되어서입니다. 《가례의절》의 도(圖)가 《가례》와 크게 다른 것은 없으나, 다만 시구가 마루 한가운데에 있으면 영좌와 마주 보게 되어 조금 서쪽으로 한다는 본뜻을 너무 잃게 될 것입니다. 도형(圖形)이 아래에 있으니, 참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보내온 편지에서, 소장(素帳)을 쓰는 것은 시속을 따라 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의례》 사상례의 ‘마루에 휘장을 친다[帷堂]’의 주에 보면, “반드시 휘장을 치는 것은 귀신은 어두운 것을 좋아해서이다.”라고 하였고, 《가례》에도 역시, 와내(臥內)에 휘장을 친다느니, 주인 이하가 휘장 밖으로 나간다느니, 습상(襲牀)을 휘장 밖에 친다느니 하였습니다. 예서(禮書)에 보이는 휘장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명정은 본시 시구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가례 도에도 휘장 안에 들어 있는 듯합니다. 다시 자세히 상고해 볼 일입니다.     친분이 두터울 경우 들어가서 곡하는 일 주인이 아직 변복(變服)을 하지 않았을 때 조문자는 변복을 하지 않는 일과 주인이 밖으로 나와 존자(尊者)를 뵙는 일에 대하여 [문] 처음 죽어서 조문을 할 때에는 무슨 옷차림을 하여야 하며, 주인이 밖으로 나와서 손님을 봅니까? -이유태- [답] 《예기》 단궁 상과 제유(諸儒)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단궁 상에 이르기를 “증자(曾子)는 갖옷[裘]을 입고 조문하고 자유(子游)는 석구(裼裘)를 입고 조문하였는데, 주인이 이미 소렴을 마치고 단(袒)ㆍ괄발(括髮)을 하자 자유가 종종걸음으로 나와서 갖옷을 입고 대질(帶絰)을 하고 들어가니,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잘못되었다. 저 사람이 옳다.’ 하였다.” 하였다. 그 소에 이르기를 “무릇 조문하는 예는 주인이 아직 변복하기 전에 조문할 경우 조문하는 자는 길복(吉服)을 입는데, 길복이란 고구(羔裘)ㆍ현관(玄冠)ㆍ치의(緇衣)ㆍ소상(素裳)이고, 또 상의를 벗어서 석의(裼衣)를 드러내는데, 이것이 바로 석구(裼裘)를 하고 조문하였다는 것이다. 주인이 변복을 한 뒤에 조문할 경우 조문하는 자는 비록 조복(朝服)을 입었더라도 무(武)를 쓰고 질(絰)을 띠는데, 무란 길관(吉冠)의 권(卷)이다. 또 상의를 덮는데, 만약 벗 사이라면 또 띠를 띤다. 이것이 갖옷을 입고 대질(帶絰)을 하고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하였다. ○ 위당(魏堂)이 말하기를 “주인이 성복(成服)하지 않았을 때 조문 온 사람은 엷은 색의 소박한 옷을 입어야 마땅한데, 요즘 사람들은 반드시 흰옷을 입고 조문하러 가니, 잘못이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살피건대, 고씨(高氏)는 ‘옛사람이 죽은 이를 조문하는데 시신에 미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흔히들 성복을 기다려서 조문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어버이가 처음 죽고 나서는 감히 밖에 나와서 손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높여야 할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하였다.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자세히 나온다.     소렴(小殮) 효포(絞布)를 폭을 잇는 일에 대하여 [문] 소렴의 베는 오초려(吳草廬)와 퇴계 선생의 설로 볼 때, 우리나라 베가 폭이 비록 좁기는 하나 그렇다고 덧대어 쓸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대렴의 베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습니까? 세간에서는 더러 지금의 베 세 폭을 찢어 여섯 조각을 낸 다음 다섯 조각을 쓴다고 하는데, 이럴 경우 너무 좁지도 않을뿐더러 옛날 베의 두 폭을 여섯 조각으로 내어 쓰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 설은 어떠합니까? -황종해- [답] 우리나라의 베는 너무 좁아서 폭을 잇지 않을 경우 대렴ㆍ소렴의 효포의 척수가 모두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폭을 잇대어서 쓰는 미안함이 좁은 베를 법도에 맞지 않게 쓰는 것보다는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대렴의 횡포(橫布)는 그대의 생각대로 한다면 아마 옛 뜻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옷고름을 묶은 고를 빼내지 않고 묶는 일에 대하여 [문] 《가례》에 보면 습(襲)할 때에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미게 하였으나, 더러는 습할 때부터 대렴 때까지 모두 왼쪽으로 여미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가례》 소렴 조항에 ‘남은 옷가지로 시신을 덮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되 고를 빼내지 않고 묶는다.’고 한 것이 만약 옷고름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모든 옷자락의 고름은 다 오른쪽에 붙어 있으므로 왼쪽으로 여밀 경우 저절로 고를 빼내어 묶을 끈이 없습니다. 그런데 왼쪽으로 여민다고 하고서 또 고를 빼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시열- [답] 《가례》가 《예기》 상대기(喪大記)와 《의례》 사상례(士喪禮)와 같지 않은 듯하니,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소렴과 대렴에는 모두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되 옷고름을 묶은 고를 빼내지 않고 묶는다.[小殮大殮皆左袵 結絞不紐]” 하였는데, 그 주에 “임(袵)은 옷자락인데, 살았을 때에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왼손으로 고를 빼내어 띠와 함께 풀기 편리하게 하자는 것이고, 죽었을 때에 왼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다시 풀지 않기 때문이며, 옷고름을 묶은 고를 빼내지 않고 묶는 것은 살았을 때에는 띠와 함께 접어서 고를 내어 묶어서 고를 빼내어 쉽게 풀기 위하여서이나 죽었을 때에는 다시 풀 일이 없기 때문에 옷고름을 다 묶어서 고를 빼내지 않는다.” 하였다. -살피건대, 《의례》 사상례의 “이에 염습을 하는데, 세 벌이다.[乃襲三稱]”의 주에 “시신을 습상(襲牀) 위에 옮겨다 놓고 옷을 입히되, 죽은 이에게 입히는 모든 옷자락은 왼쪽으로 여미고 옷고름의 고를 빼내지 않는다.” 하였고, 또 《개원례》를 상고해 보아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나 《가례》는 소렴 때에 와서 비로소 왼쪽으로 여미는데, 차마 갑자기 그 어버이를 죽었다고 여길 수 없어서 소렴 때로 물린 것이라고 하였다. 《가례》에 이른바 ‘옷고름의 고를 빼내지 않는다’는 것이 상대기의 ‘고름을 묶되 고를 빼내지 않고 묶는다’는 글과 뜻이 다른 데가 있으니, 《가례》에서 이미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되 옷고름의 고를 빼내지 않는다고 하고서 그 아래에서 또 이불로 싸되 끈은 묶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가례》의 뜻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며 소대(小帶)를 묶을 수 없다는 말인 듯한데, 이는 옷자락의 옷고름을 묶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속에서 이를 모르는 자는 소대를 떼어 버리기도 하니, 역시 우스운 일이다. 사상례의 ‘습삼칭(襲三稱)’에 대한 정현(鄭玄) 주에 비록 ‘왼쪽으로 여민다’는 설이 있기는 하나, 여러 경문(經文)을 상고해 본바 애당초 이런 뜻은 없고, 정현이 상대기의 소렴ㆍ대렴 조항에 모두 왼쪽으로 여민다는 글을 가지고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상대기에는 실로 염습할 때 역시 왼쪽으로 여민다는 뜻이 없고 소렴ㆍ대렴할 때에 가서 비로소 왼쪽으로 여민다고 하였다. 이러고 보면 당연히 《예기》 상대기와 《가례》의 설을 따라야 하며, 정현의 설은 잘못된 견해이므로 따를 수 없다. 기고봉과 퇴계의 문인들이 정현의 설을 극력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하다. 《상례비요》에 나온다.   소렴에 효포(絞布)를 묶지 않는 일에 대하여 [문] 《가례》에서 소렴에 효포를 묶지 않고 얼굴을 덮지 않는 것은 효자(孝子)의 지극한 정리 때문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시체가 들떠 움직일 것을 염려하여 곧장 효포를 묶어 버리니,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황종해- [답] 보내온 생각이 옳으니, 《가례》로 정례(正禮)를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준(丘濬)의 논리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구준이 말하기를 “《의례》에는 효포를 묶지 않고 얼굴을 덮지 않는 것은 아직은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라는 설이 없으니, 《가례》의 이 설은 아마 사마온공의 《서의(書儀)》에 근본한 것이다. 이제 만약 날씨가 더운 계절을 당하여 죽은 이의 숨이 이미 끊어지고 피부가 이미 식어서 결코 살아날 가망이 없다면 의당 《의례》에 따라 염을 마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였다.   소렴 때에 변복(變服)을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소렴을 하고 난 뒤에 환질(環絰)과 요대(腰帶)를 하는데, 요대의 끝을 풀어 늘어뜨리는 것은 이미 고례(古禮)입니다. 《가례》에서는 어찌하여 이 말을 함께 싣지 않고 요대의 끝을 풀어 늘어뜨린다는 설만을 성복(成服) 조항에 넣었습니까? 소공(小功) 이하는 소렴 이후에 변복을 하는 절차가 없습니까? -강석기- [답] 《가례》는 간략한 쪽을 좇아서 소렴 때 변복하는 절차를 제거한 것이다. 만약 고례를 좇는다면 소렴 때에는 환질과 백건(白巾)을 하고, 괄발(括髮) 때에는 효대(絞帶)를 하며, 시신을 옮긴 뒤에는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을 하고 요질의 끝을 풀어 늘어뜨리되, -성복 때에 요질의 끝을 묶었다가 계빈(啓殯) 때에는 다시 풀어 늘어뜨리며, 졸곡 때에 다시 묶는다.- 나이 50세인 자와 부인, 그리고 소공 이하는 요질을 그냥 묶고 그 끝을 풀어 늘어뜨리지 않으니, 《가례》에서 요질의 끝을 풀어 늘어뜨리는 것은 《의례》와는 같지 않다. 백건(白巾)의 포(布)에 대하여 [문] 《가례의절》 소렴 조항에 이른바 백포건(白布巾)은 어떤 베로 만듭니까? 지금 연포(練布)를 쓰고자 하나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이것은 반드시 연포를 써야 한다. 아직 성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생포(生布)를 쓸 수는 없다. 자최(齊衰) 이하는 모(帽)를 벗고 두건(頭巾)을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세속에 기년복(朞年服) 이하의 복친(服親)은 초상에 관(冠)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하나, 문(免 머리를 묶고 베수건으로 싸매는 것)은 생략합니다. 사마온공이 이른바 자최 이하는 모를 벗고 두건을 쓴 다음 그 위에 문(免)을 한다는 것은 오늘날에 준행할 수 없습니까? 이른바 두건의 제도는 어떠합니까? -황종해- [답] 나의 생각으로는 모를 벗는다는 것은 평소에 쓰던 길모(吉帽)를 벗는다는 말이고, 두건을 쓴다는 것은 이를테면 구준이 이른바 백건(白巾)으로, 세속에서 만들어 쓰는 소모(小帽) -우리나라 말로는 백감투[白 頭]이다.- 따위와 같은 것인데, 그 위에다 문(免)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부인(婦人)의 좌(髽)는 참최(斬衰)의 경우 삼을 쓰고 자최의 경우 베를 쓰는 일에 대하여 [문] 부인이 삼끈으로 머리를 묶는다고 하는 것은 참최의 경우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비록 자최이더라도 삼끈을 씁니까? -황종해- [답] 부인의 머리를 삼끈으로 묶는다는 것은 참최의 경우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자최의 경우는 베를 쓴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상복소기의 주에 “좌(髽)는 두 가지가 있는데, 참최의 경우 마좌(麻髽)를 하고 자최의 경우 포좌(布髽)를 하니, 모두 노개(露紒)라고 이름한다.” 하였다.   부인의 잠(簪)에 대하여 [문] 《가례》에는 부인의 상복(喪服)에 대나무나 나무로 잠을 만든다고 하였고, 《상례비요》에는 대나무잠은 혹 나무를 쓴다고 하였으니, 참최와 자최에 대나무나 나무를 통용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가례》와 《의례》가 같지 않아서 아래에 부록(附錄)한다. 《의례》 상복도식(喪服圖式)에 참최에는 전계(箭笄)를 한다고 하였는데, 전(箭)이란 소죽(篠竹)이다. 전계의 길이는 한 자이니, 무릇 악계(惡笄)는 모두 길이가 한 자인 것이 아닌가 싶다. ○ 처음 죽어 참최를 하려 할 때에 부인은 비녀를 뽑아 버린다. 남자들이 괄발(括髮)을 하여 마좌(麻髽)를 할 때에 가서도 아직 비녀를 꽂지 않고 있다가 성복(成服)에 가서 비로소 전계를 꽂는다. 그러나 첩(妾)이 남편의 장자(長子)에게만은 비록 참최복을 입더라도 전계를 쓰지 않는다. ○ 자최에는 악계를 하는데, 비녀의 머리가 있다. 악(惡)이란 나무의 결이 거칠다는 것이지 나무의 이름이 아니며, 혹은 진계(榛笄)라고도 하니, 진목(榛木)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비녀의 머리가 있다는 것은 마치 한(漢)나라의 각루적두(刻鏤摘頭)와 같은 것이다. ○ 여자로서 남의 집에 시집을 간 자가 그 부모를 위해서와 첩이 남편의 정실(正室) 및 남편의 장자를 위해서는 악계를 하되 비녀의 머리가 있다. 그 밖에는 명문(明文)이 없으니, 그러고 보면 기년복의 비녀는 알 수가 없다. ○ 부인은 악계로 상기(喪期)를 마치되, 오직 출가한 딸만은 졸곡(卒哭)을 지내고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면 길계(吉笄)의 머리 부분을 잘라낸 채 꽂는다. 길계란 상골(象骨)로 만든 것인데, 머리를 그대로 둘 경우 너무 화려한 장식이 되기 때문에 자르는 것이다.   포두건(布頭巾)에 대하여 [문] 《가례》에는 포두건으로 굴관(屈冠)을 받친다는 말이 없으나, 오늘날 사람들은 포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에서입니까? -황종해- [답] 살피건대, 예(禮)에 대머리인 경우 최건(縗巾)에 질(絰)을 쓰게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 풍속은 으레 상관(喪冠) 밑에 효건(孝巾)을 쓴다. 이것은 구준(丘濬)의 《가례의절》에서 나온 것으로 비록 고례(古禮)는 아니지만 또한 나쁘지는 않은 듯하다. 괄발(括髮)의 제도 및 참최ㆍ자최에 있어서의 괄발과 문(免)의 구분에 대하여 [문] 《가례》에 “남자 참최의 경우 단(袒 윗옷의 어깨를 벗는 것)과 괄발을 하고, 자최 이하는 모두 단과 문을 한다.” 하였습니다. 모르기는 합니다만 참최의 경우 괄발만 하고 문은 없으며, 자최의 경우 문만 하고 괄발은 없다는 말입니까? 이른바 괄발의 제도는 어떠한 것입니까? -송준길- [답] 《가례》의 이 조항도 과연 자세하지는 않으므로, 당연히 《예기》 상복소기와 《주자어류》로 준거를 삼아야 할 것이다. 《예기》 상복소기에 “참최는 괄발을 마(麻)로 하고, 어머니를 위해서는 괄발을 마로 하되 문은 포(布)로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어버이가 처음 죽었을 때 아들이 포로 만든 심의를 입고 길관(吉冠)은 벗되 계사(笄縰 비녀와 머리끈)는 그대로 두며, 맨발을 하고 심의의 앞자락을 거두어 띠에 꽂는다. 소렴 때에 가서는 계사를 벗고 소관(素冠)을 쓰며, 염(殮)을 다 마치고 나서는 소관을 벗고 삼끈을 가지고 목덜미에서 앞으로 돌려 이마 위에서 교차한 다음 다시 상투를 감싸 묶어서 마치 삼두(幓頭)를 쓴 것처럼 한다. 삼두란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약발(掠髮)이니, 이는 괄발을 마로 함을 말한 것이다.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어머니를 위해서는 괄발을 마로 한다고 하였으니, 말하자면 이 예(禮)는 아버지의 상(喪)과 같다는 것이다. 문을 포로 한다는 것은 오로지 어머니에게만 말한 것이다. 대개 아버지의 상에는 소렴을 한 뒤 손님에게 절하는 절차를 마치고 나서는 아들이 마루 아래의 위치로 내려가서 괄발을 하고 벽용(擗踊)을 한다. 그러나 어머니 상의 경우 이때에는 괄발은 다시 하지 않고 포문(布免)을 하고서 벽용을 하므로, 문을 하되 포로 한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괄발은 곧 머리를 묶어 상투를 트는 것이다. 정씨(鄭氏)의 《의례》 주(註)와 소(疏)에 남자의 괄발과 문 및 부인의 좌(髽)를 모두 삼두를 쓴 것처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삼두란 곧 지금의 약두편자(掠頭編子)와 같은 것으로, 목덜미에서 앞으로 돌려 이마 위에서 교차한 다음 다시 상투를 감싸는 것이다.” 하였다.   환질(環絰)에 대하여 [문] 만약 환질의 제도를 쓴다면 참최와 자최에 함께 쓸 수 있습니까? -이유태- [답] 예경(禮經)과 구준의 《가례의절》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잡기 상(雜記上)에 “소렴의 환질은 공(公)ㆍ대부(大夫)ㆍ사(士)가 똑같다.” 하였는데, 그 소에 “어버이가 처음 죽었을 때에는 효자(孝子)가 관(冠)을 벗으나, 소렴 때까지 수식(首飾)이 없을 수는 없어서 사는 소위모(素委貌), 대부 이상은 소변(素弁)을 쓴다. 그러나 환질은 귀천(貴賤)이 다 같이 쓰기 때문에 공ㆍ대부ㆍ사가 똑같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에 “군(君)의 상에 대렴(大殮)을 할 적에는 아들이 변질(弁絰)을 하고 동쪽 마루 남단에서 자리에 나아간다.” 하였는데, 그 주에 “변질이란 소변에 환질을 쓰는 것인데, 아직 성복(成服)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고, 소에 “성복을 하였을 경우 상관(喪冠)을 쓴다. 이것이 비록 대렴을 두고 말한 것이기는 하나 소렴 때에도 역시 변질은 한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이 두 조항과 제가(諸家)의 설을 상고해 보면 수질(首絰) 밑에는 반드시 건모(巾帽)로 받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대(三代)의 위모(委貌)ㆍ작변(爵弁) 따위는 오늘날에 있지 않으므로, 마땅히 백건(白巾)을 써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세속에서 쓰는 효건(孝巾)ㆍ소모(小帽) 따위도 역시 예(禮)의 내용에 맞을 듯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소렴을 한 뒤 이당(侇堂 시신을 마루에 모셔 놓음)하기 전에 모든 복(服)이 있는 자가 요질(腰絰)만 갖출 뿐 아니라 또한 효대(絞帶)까지 갖추어야 한다. 다만 참최복을 입은 경우에는 환질을 쓰고 자최복 이하의 경우는 머리에 질(絰)을 쓰지 않고 모두 문(免)만 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의례》와 《예기》에는 모두 자최에 환질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없고, 구준의 《가례의절》에는 참최복을 입는 경우에만 쓴다고 하였으니, 의심스럽다.   습(襲)과 질(絰)의 절차가 소렴 뒤에 가 있는 일에 대하여 [문] 반함(飯含)을 할 적에는 주인이 왼쪽 어깨를 벗었다가 반함을 마치고 나서는 벗었던 어깨를 다시 입게 되어 있으나, 소렴을 하고 난 뒤에 가서는 어깨를 벗고 괄발을 한다고만 말하고 벗었던 어깨를 다시 입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의례》에 보인 습과 질의 절차는 어느 때에 행하여야 되는 것입니까? -이유태- [답] 습과 질의 절차가 소렴 뒤에 가 있는 것은 《의례》 사상례에 자세히 나오고 《가례》에는 간략한 쪽을 따라 생략하였다. 《의례》 사상례에 “소렴에 주인과 뭇 주인이 윗옷의 어깨를 벗는다. 남녀가 시신을 받들어 마루로 모시고 나면 주인은 시신의 발 쪽으로 나와서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뭇 주인은 동쪽 위치로 나아가며, 부인들은 동쪽 계단 위에 서쪽을 향한다. 주인이 손님에게 절을 하되 대부(大夫)에게는 특배(特拜 사람마다에 따로 하는 절)를 하고 사(士)에게는 여배(旅拜 여러 사람에게 함께하는 절)를 하며, 위치로 나아가 용(踊)을 한 다음 마루 동쪽에서 벗었던 윗옷의 어깨를 입고 질(絰)을 하고는 위치로 돌아온다.” 하였는데, 그 주에 “손님에게 절한다는 것은 손님의 위치를 향하여 절을 한다는 말이고, 위치로 나아가 용을 한다는 것은 동쪽의 위치를 말함이며, 마루 동쪽에서 윗옷의 어깨를 입고 질을 한다는 것은 동쪽 협실(夾室) 앞이라는 말이다.” 하였고, 그 소에 “뭇 주인에게는 비록 계단을 내려온다는 문구(文句)가 없으나 당연히 주인을 따라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야 하며, 주인이 손님에게 나아가 절을 할 때에는 뭇 주인은 드디어 동쪽 계단 위치로 나아가서 주인의 위치 남쪽에서 서쪽을 향하여야 할 것이다.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주인이 서쪽 계단으로 내려온다’ 하고는 곧바로 ‘주인이 손님에게 절을 한다’ 한 것은 위치로 나아가기 이전에 먼저 손님에게 절을 한다는 것을 밝힌 말이니, 이는 주인이 손님의 위치를 향하여 손님에게 절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치로 돌아간다’는 것은 동쪽 계단 밑 서향의 위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주인이 계단을 내려오면 염(殮)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절을 하되, 절을 마친 다음에는 계단 밑으로 나아가서 또 곡(哭)을 하고 용(踊)을 한다. 이를 마치고 나서 전번에 벗었던 윗옷의 어깨를 입고 머리에 백포건(白布巾)을 쓰고 그 위에 단고(單股)의 질(絰) -예경(禮經)에 이른바 환질(環絰)로, 성복날에 벗는다.- 을 덧쓴다. 요질(腰絰)을 하되 그 끝을 풀어 늘어뜨리는데, 그 끝은 석 자로 하며, 효대(絞帶)까지 갖추고 나서 위치로 돌아온다.” 하였다. -살피건대, 구준의 《가례의절》은 환질을 쓰는 것이 《의례》와 같지 않으므로 고례(古禮)를 따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상례비요》에 나온다.   돌아와서 시상(尸牀)을 옮기는 일에 대하여 [문] 《가례》의 소렴 조항에 나오는 “돌아와서 시상을 마루 한가운데로 옮긴다.[還遷尸牀于堂中]”의 환(還) 자에 구두를 뗀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문세(文勢)로 말한다면, 목욕을 시킬 적에 시상을 마루 한가운데로 옮겨 놓고서 서쪽 계단 서쪽에서 소렴을 한 다음, 시신에 기대어 곡(哭)과 벽(擗)을 하고는 별실에서 단(袒)ㆍ괄발(括髮), 문(免)ㆍ좌(髽)를 한 뒤에 마루 한가운데로 시상을 옮기는 것으로, 곧 일관된 문자(文字)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존형께서는 반드시 별실에서 돌아온다는 뜻으로 훈(訓)을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ㆍ괄발 위에는 어찌하여 출(出) 자가 없습니까? 더구나 문ㆍ좌의 경우 자최 이하의 친족에게는 똑같이 하는 것인데, 어떻게 윗글의 ‘주인ㆍ주부’와 연결시켜 볼 수 있겠습니까. 세속에서 퇴계가 해석한 것으로 전하여 오는 말도 반드시 꼭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가르쳐 주시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지사 신식- [답] 언젠가 영공(令公)과 같이 말하는 자가 퇴계에게 물으니, 퇴계가 답하기를 “환(還)은 주인 이하가 별실에서 제 위치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였는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윗글의 ‘소렴상을 시신 남쪽에 놓고 염을 마친 다음 돌아와서 시상을 마루 한가운데로 옮긴다.[小殮牀置于尸南 殮畢 還遷尸牀于堂中]’는 구절은 부제(祔祭) 조항 ‘환봉신주(還奉新主)’의 문장으로 볼 때, 위의 설이 옳다.” 하였습니다. 세속에 전하여 오는 퇴계의 해석이 과연 의심스러운 데가 있어 참으로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이 조항의 경우는 질문에 답한 내용이 이처럼 분명한데, 어떻게 믿을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영공이 단ㆍ괄발 위에 출(出) 자가 없는 것을 가지고 의심을 하나, 이미 ‘별실에서[于別室]’라고 한 이상, 비록 출 자가 없더라도 출 자의 뜻은 그 속에 담겨 있는데, 어찌하여 의심을 한다는 말입니까. 보내온 내용에서 또 문ㆍ좌가 ‘주인ㆍ주부’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한 것도 역시 잘못입니다. 문은 비록 자최 이하의 일이지만 좌는 실로 주부의 일인데, 어찌하여 연결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환(還) 자가 주인 이하를 통괄하여 말한 것임에는 더더욱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소렴 뒤에 주인이 비로소 동쪽 계단 아래로 나아가는 일에 대하여 [문] 《예기》 곡례 상에 이르기를 “거상(居喪)하는 예(禮)는 오르내릴 때에 동쪽 계단을 말미암지 않는다.” 하였고 보면, 손님에게 절을 할 적에도 역시 서쪽 계단을 말미암아 오르내리는 것입니까? 오늘날 《가례》의 수조(受弔)에서는 주인이 곡을 하며 나와 서쪽을 향하여 재배(再拜)를 하면 손님은 또한 동쪽을 향하여 답배(答拜)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서향의 위치는 동쪽 계단 아래가 아니겠습니까. 《예기》 곡례와는 서로 어긋나는 듯하여 의심스럽습니다. -송준길- [답] 예(禮)를 상고하여 보면 처음 죽었을 적에 손님에게 절하는 위치는 서쪽 계단 아래에서 동쪽을 향하는 것이고, 소렴을 한 뒤에 비로소 동쪽 계단 아래로 나아가 서쪽을 향한다는 것이다. 《의례》 사상례에 “군(君)이 사람을 시켜 수(襚 수의 부장품 따위의 부의(賻儀))를 하면 주인이 처음과 같이 서쪽 계단으로 오르내리며, 대부(大夫)가 조문을 왔을 경우 특배(特拜)를 하고 서쪽 위치로 나아가 계단 아래에서 동쪽을 향하되 용(踊)은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서쪽 계단 아래 위치로 나아가는 것은 차마 주인의 위치에 서 있을 수 없어서이다.” 하였고, 그 소에 “소렴을 한 뒤에 비로소 동쪽 계단 아래 서쪽으로 나아가 남쪽을 향하는 것은 그곳이 주인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사상례에 “남녀가 시신을 받들고 마루에 모셔 놓으면 뭇 주인은 동쪽 위치로 나아가며, 주인은 손님에게 절을 하고 나서 위치로 나아가 용(踊)을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위치로 나아가 용을 하는 위치는 동쪽의 위치이다.” 하였고, 그 소에 “위치로 나아가 용을 하는 위치는 동쪽의 위치라는 것은 주인이 손님에게 절하기를 마치고 나서 곧바로 동쪽 계단 아래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곧 서향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예기》 잡기에 “조문하는 자는 대문 서쪽에 동쪽을 향해 위치하고 주고(主孤)는 서쪽을 향해 위치하였다가, 조문하는 자가 들어가면 주인은 마루로 올라가 서쪽을 향하고 조문하는 자는 서쪽 계단으로 올라간다.” 하였는데, 그 주에 “문 서쪽이란 대문의 서쪽이니, 주고가 동쪽 계단 아래에 서쪽을 향해 선다는 것으로, 주인이 마루를 오를 적에는 동쪽 계단을 통하여 오른다는 것이다.” 하였다. 《예기》 곡례 상에 보인, “오르내릴 적에 동쪽 계단을 통하지 않는다.”는 말은 평상시 조문객이 없을 적을 말한 것이다.   소렴을 마치고 나서 손님에게 사례하는 일에 대하여 [문] 고례(古禮)에 대렴ㆍ소렴ㆍ계빈(啓殯) 때에 모두 손님에게 절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잃고 슬퍼하는 즈음에 무슨 번거로운 절차가 그토록 많은 것입니까. 《가례》에는 생략하였으나, 구준의 《가례의절》에는 보충하여 넣었으니, 《가례》가 옳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응씨(應氏)와 구씨(丘氏)의 설이 절실한 것 같기는 하나, 옛 설을 따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예기》 잡기에 “소렴ㆍ대렴ㆍ계빈에 모두 돌아가며 절을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예(禮)에 소렴ㆍ대렴 및 계빈 때를 당하여 임금이 조문을 왔을 경우 모든 일을 중지하고 나가서 절을 하되, 만약 여느 빈객이 온 경우라면 일을 중지하지 않고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루 아래 위치로 내려가서 돌아가며 절을 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응씨가 말하기를 “소렴ㆍ대렴ㆍ계빈은 모두 상사(喪事)의 큰 변절(變節)이자 죽은 이의 몸에 절실한 일이므로, 산 자의 아픔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역시 이러한 때에 죽은 이에게 절을 하고 산 자에게 조문하기 때문에, 주인이 모두 돌아가며 절을 하여 사례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이다.” 하였다. ○ 구준이 말하기를 “예에는 손님에게 절을 한다는 문구가 있으나, 《가례》에는 없다. 오늘날 보충하여 넣은 것은 그 예가 폐지된 뒤에 예를 잘 아는 자는 적고 염을 도우러 온 손님이나 친구에게 사례는 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소렴의 제전(祭奠) 때에 주인이 절을 하지 않는 점의 의문에 대하여 [문] 《가례》에 소렴의 제전에 항렬이 낮거나 어린 자는 두 번 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도 절을 하여야 합니까? 존장(尊長)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항렬이 낮거나 어린 자를 말한 이상 효자(孝子)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구준의 《가례의절》에 효자는 절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상고하여 보아야 할 일이다. 존장은 항렬이 낮거나 어린 자의 상에 절을 하지 않는다. 《의례》 사상례에 “장사(葬事) 이전에는 배례(拜禮)가 없다.” 하였다. -뒤의 조석곡(朝夕哭) 조항에 나온다.   대곡(代哭)에 대하여 [문] 대곡의 뜻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의례》 사상례를 상고하면 될 것이다. 《의례》 사상례의 주에 “대(代)란 대신하는 것이다. 효자(孝子)가 처음 어버이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너무 슬퍼하여서 몸이 초췌해지므로, 예(禮)가 죽은 이로 인하여 산 자를 해치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대신 울어 주어서 곡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주D-001]예기 상복소기의 주 : ‘남자문이부인좌(男子免而婦人髽)’ 조에 대한 원나라 진호의 주석이다. [주D-002]의례 사상례의 주 : ‘내대곡불이관(乃代哭不以官)’ 조에 대한 정현의 주석이다.
131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3 댓글:  조회:2829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37권 의례문해(疑禮問解)-3 대렴(大斂) 관(棺) 속에는 요[褥]와 자리[席]를 쓴다. [문] 지금 세속에서 관 속에 요와 자리를 펴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예경(禮經)에서는 상고할 수 없습니다. -이유태(李惟泰)- [답] 《개원례(開元禮)》에 나오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대상조(大喪條)에도 나오네. 이것은 참람되거나 핍박하는 혐의스러움은 없는 것이니, 써도 괜찮을 듯하네. ○ 《개원례》의 대부사서인상대렴조(大夫士庶人喪大斂條)에 이르기를, “관 속에 쓰는 도구 가운데 회(灰), 탄(炭), 침(枕), 석(席) 따위는 모두 미리 관 안에 설치한다.” 하였다.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다. [문] 세상 사람들이 모두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데, 이것이 과연 예경의 뜻입니까? -송시열(宋時烈)- [답] 예경 및 구씨(丘氏)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 것은 고례(古禮)가 아닐 뿐만 아니라, 관 속은 비좁아서 끈을 묶을 즈음에 공경스럽지 못한 일이 많게 되니, 결단코 해서는 안 되네. 다만 민가(民家)의 당실(堂室)은 항상 협소한 것이 걱정인바, 당의 서쪽에 관을 놓아두고서 또다시 동쪽에 염상(斂床)을 설치할 경우, 혹 비좁아서 놓기 어려울 수도 있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부득이 관 속에서 대렴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네. ○ 《예기(禮記)》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임금의 상에 대렴을 하고자 할 때에는 소신(小臣)이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이 효(絞), 금(衾), 의(衣)를 펴 놓는다. 사(士)가 반(盤) 위에서 손을 씻는다. 사가 시신을 들어서 염할 곳 위에 옮겨 놓는다.[君將大斂 小臣鋪席 商祝鋪絞衾衣 士盥于盤上 士擧遷尸于斂上]”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소신이 자리를 편다’는 것은, 아래에는 왕골자리를 펴고 위에는 대자리를 펴되 조계(阼階) 위에 함께 펴 놓는 것으로, 대렴을 하는 데 쓰기 위한 것이다. 효, 금, 의 등을 펴 놓는 것은 소신이 펴 놓은 자리 위에 펴 놓아서 시신을 옮겨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士)’는 상축(商祝)과 같은 사람이다. 장차 시신을 들 것이므로 먼저 반(盤) 위에서 손을 씻는 것이다. ‘염상(斂上)’은 염하는 곳을 이른다.” 하였다. ○ 구씨(丘氏)가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이것을 보면 대렴을 관 속에서 하지 않는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속에서는 《가례(家禮)》의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가 주자(朱子)의 본뜻이 아님을 잘 모르고서 왕왕 그 설에 근거해서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옛 예가 전혀 아니다. 생각해 보건대, 《가례》는 본디 《서의(書儀)》에 근본해서 지었는바, 대개 소렴과 대렴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소렴 때에는 효를 펴기는 하나 묶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장차 관에 넣을 때에 이르러서야 묶는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옛사람들이 하는 대렴과 소렴의 제도에 대해서 알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는 간편함을 따라 함으로써 재력이 없는 자들이 상을 치르기에 편하게 하고자 하여 이렇게 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군자는 부모의 상(喪)을 검소하게 치러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이롭게 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재력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의례》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하였다.   막 죽었을 때 덮었던 금(衾)은 대렴을 할 때까지 쓴다. [문] 복(復)하는 데 쓴 옷은 습렴(襲斂)을 할 때에는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막 죽었을 때 시신을 덮었던 금(衾)도 염습을 할 때 쓰지 않습니까? -송준길(宋浚吉)- [답] 사마온공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사마온공이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의 소(疏)에 이르기를, ‘대렴을 할 때에는 두 금(衾)을 모두 쓰는데, 하나는 아래에 깔고 하나는 시신을 덮는 데에 쓴다.’ 하였다. 그러니 막 죽었을 때 썼던 금을 대렴 때에 이르러서는 바로 아래에 까는 데 쓰는바, 치워 버리고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대렴 때에는 변복(變服)을 한다. [문] 대렴 때에 변복하는 절차가 《가례》에는 없는데, 분상조(奔喪條)에 이르기를, “또다시 대렴과 소렴을 할 때와 같이 변복한다.[又變服如大小斂]”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혹자는 ‘대(大)’ 자는 연문(衍文)이라고 의심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의례》 사상례에 의거하여 보면, 대렴과 소렴 때에는 모두 변복하는 절차가 있는바, 《가례》의 본조(本條)에서는 빠진 것이네. 분상조의 글은 연문이 아니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소렴을 할 때 주인은 단(袒)을 한다. 시신을 받들어서 당(堂)에 안치한다. 빈객에게 절을 한다. 자리로 나아가 염습을 한다. 대렴을 하려 할 때에는 주인 및 친한 자가 단을 한다. -정씨(鄭氏)의 주(註)에서는 대렴을 할 때에는 변복을 한다고 하였다.- 진흙을 바르기를 마치고 주인이 자리로 돌아와 염습을 한다.[主人袒奉尸侇于堂 拜賓 卽位襲 將大斂 主人及親者袒 卒塗 主人復位襲]” 하였다.   대렴을 마친 뒤에는 빈객에게 사례한다. [문] 대렴을 마친 뒤에 빈객에게 사례를 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위의 소렴조(小斂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대렴을 마친 뒤에는 영좌(靈座)를 고처(故處)에 설치한다. [문] 대렴을 마친 뒤에 영좌를 고처에 설치하는데, 이른바 고처라는 곳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대렴을 하려고 할 적에는 먼저 관 곁으로 영좌를 옮겨 놓으며, 대렴을 마친 뒤에는 다시 고처에 영좌를 설치하는데, 이른바 고처라는 것은 당(堂)의 한가운데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 관(棺)의 앞을 이르는 것은 아니네. 당의 가운데에서 조금 서쪽에 관을 놓고 당의 가운데에 영좌를 설치하는 것이 올바른 예이네. 《가례회성(家禮會成)》의 ‘복령좌(復靈座)’ 주에 이르기를, “관 앞에 설치한다.”고 한 것과 《가례의절(家禮儀節)》에서 “관 앞에 놓는다.”고 한 것은 모두 옛 예의 뜻을 잃은 것이네. 이미 당의 서쪽에 관을 놓아두었는데, 영좌를 관의 앞에 설치한다면, 이것이 과연 고처에 영좌를 설치하는 것이겠는가. 성빈(成殯)을 할 적에는 모래를 덮거나 진흙을 바른다. [문] 일반 사람들의 집에서는 빈궁(殯宮)에 화재가 발생할까 몹시 겁내어 사빈(沙殯)을 하거나 도빈(塗殯)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예경을 보면, 군(君)과 대부(大夫)와 사(士)는 빈(殯)을 할 적에 모두 진흙을 쓰는데, 이는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네. 사마온공은 칠관(漆棺)이 마르지 않았고, 또 남방의 땅속에는 개미가 많으므로 이 제도를 폐하고 쓰지 않으면서 편리한 데에 따라서 하였네. 지금 만약 화재가 날 것이 염려스럽다면 진흙을 칠하거나 모래로 덮거나 하되 편의에 따라서 하면 될 것이네. ○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임금의 빈에는 순(輴)을 사용하는데, 사방에 나무를 쌓되 관보다 높게 쌓고 모두 진흙으로 싸 바른다. 대부의 빈에는 관을 도(幬)로 덮어 서쪽 서(序)의 벽에 바짝 당겨 놓고 나머지 세 군데에 나무를 쌓아 흙으로 싸 바르되, 흙으로 싸 바른 것이 관에 겨우 미치지 못하게 한다. 사의 빈에는 관을 땅속에 넣고 임(袵)을 땅 위로 나오게 하며, 그 위에 나무를 쌓고 진흙을 싸 바른 다음 장막으로 덮는다.[君殯用輴 欑至于上 畢塗屋 大夫殯 以幬 欑至于西序 塗不曁于棺 士殯 見袵 塗上帷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순(輴)’은 상구(喪柩)를 놓아두는 수레이다. 빈(殯)을 할 적에 상구를 순 위에 놓아둔다. ‘찬(欑)’은 모은다는 뜻인 총(䕺)과 같다. 순의 사면에 나무를 쌓아서 관의 위에까지 이르게 하고 진흙으로 모두 다 싸 바르는데, 나무를 쌓은 것이 집의 형태와 비슷하므로 ‘필도옥(畢塗屋)’이라고 한 것이다. 대부의 빈에는 순(輴)을 쓰지 않으며, 관의 한쪽 면을 서쪽 서(序)의 벽에 바짝 붙여 놓고서 나머지 세 면을 나무로 쌓되, 위쪽은 지붕의 형태로 만들지 않고 단지 관의(棺衣)로 덮기만 한다. ‘흙으로 싸 바른 것이 관에 겨우 미치지 못하게 한다.[塗不曁于棺]’는 것은, 천자와 제후의 경우에는 나무를 쌓은 것이 넓어서 관과의 거리가 먼 데 비해 대부의 경우에는 나무를 쌓은 안쪽이 협소하여 관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싸 바른 것이 관에 겨우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士)는 빈을 할 적에 사(肂)를 파고서 관을 넣는데, 사(肂)는 바로 구덩이이다. 관을 구덩이 속에 넣되, 임(袵)을 써서 뚜껑을 봉합한 부분은 파묻히지 않고 오히려 밖에 있게 하는데, 임 이상의 윗부분은 역시 나무로 덮은 다음 진흙으로 싸 바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귀천(貴賤)을 따질 것 없이 모두 휘장인 유(帷)를 치며, 오직 조석(朝夕)으로 곡을 할 때에만 이 휘장을 걷는다. 휘장을 치는 것은, 귀신은 그윽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를, “선생께서 큰아들 숙(塾)을 빈(殯)할 적에 한천암(寒泉庵)의 서쪽에 하였는데, 땅속을 2척가량 파고 너비를 3, 4척으로 하였다. 구덩이 안에는 불에 구운 벽돌을 깔았고, 석회(石灰)로 겹겹이 발랐으며, 관목(棺木)의 바깥쪽에는 흙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호백량(胡伯量)이 묻기를, ‘빈례(殯禮)를 행해야 합니까, 행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 없이 스스로 그 마땅함을 보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칠(漆)도 칠하지 않고 회(灰)도 바르지 않은 관을 쓰면서 벽돌이나 흙으로 에워싸려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하였다.   빈(殯)을 한 뒤에 주인의 자리는 북쪽을 상석(上席)으로 한다. [문] 《가례》 위위조(爲位條)의 주에 이르기를, “주인은 상(牀)의 동쪽 전(奠)의 북쪽에 앉는다. 삼년복을 입는 여러 남자들은 그 아래에 앉고, 기년복과 대공복, 소공복 이하를 입는 사람들은 모두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빈을 한 뒤에는 위차(位次)에 대해 말해 놓지 않았습니다. 이에 지금 사람들은 그대로 전(奠)의 북쪽 자리에 있으면서 남쪽을 상석으로 삼기도 하고, 동쪽 계단 아래로 가 있으면서 북쪽을 상석을 삼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것입니까? [답] 빈을 한 뒤에는 시신을 넣은 상구(喪柩)가 있는 곳을 상석으로 삼아야 하네. 주인의 자리는 북쪽을 상석으로 삼고, 중주인(衆主人)의 자리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차례로 앉는 것은 옛 예가 그런 것인데, 《가례》에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의심스럽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조석으로 곡을 한다. 부인은 당에서 자리로 나아가는데, 남쪽을 상석으로 하여 곡한다. 장부는 문밖에서 자리로 나아가는데, 서쪽을 바라보며 북쪽을 상석으로 한다. 외형제(外兄弟)는 그 남쪽에 있는데, 남쪽을 상석으로 한다.[朝夕哭 婦人卽位于堂 南上 丈夫卽位于門外西面北上 外兄弟在其南 南上]” 하였다. ○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이르기를, “시신이 염상(斂床)에 있으면서 빈을 하지 않았는데 남자와 여자가 시신의 곁에 자리할 경우, 그 자리는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이는 시신의 머리가 있는 곳이 상석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빈을 한 뒤에는 여자의 경우에는 전과 같이 당 위에 자리하되 남쪽을 상석으로 삼으며, 남자의 경우에는 계단 아래에 자리하되 그 자리는 북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이는 빈이 있는 곳이 상석이 되기 때문이다. 발인을 할 때의 남자와 여자의 자리는 다시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이는 영구(靈柩)가 있는 곳이 상석이 되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서 자리가 변하는데, 여기에는 각각 예의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영상(靈牀)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은 잘못이다. [문] 영상에 대해 《가례의절》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둔다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삼재도회(三才圖會)》에도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중국의 풍속이 으레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삼재도회》가 단지 《가례의절》에 의거해서 그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이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영상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네. 병이 들었을 때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은 생기(生氣)를 받고자 해서 그러는 것이네. 죽은 뒤에는 염습할 때부터 모두 머리를 남쪽으로 두는데, 유독 영상에서만 머리를 동쪽으로 둔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네. 빈청(殯廳)에 오래도록 등(燈)을 걸어 놓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초상 때부터 장사 지내기 전까지 모두 밤새도록 빈궁에 등을 매달아 놓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예의 뜻이 그런 것입니까? [답] 예경에 의거하여 본다면, 염습 때부터 대렴에 이르기까지와 계빈(啓殯)에서부터 발인에 이르기까지는 단지 행사(行事)하는 곳에서만 횃불을 붙여 밝혔다가 그다음 날 날이 밝으면 끄네. 빈궁에 오래도록 등을 걸어 놓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닐 듯하네. ○ 《의례》 사상례의 기(記)에 이르기를, “이미 염습을 한 다음에는 밤이 되면 중정(中庭)에 횃불을 밝힌다. 그다음 날 날이 밝으면 횃불을 끈다.[旣襲 宵爲燎于中庭 厥明滅燎]”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소렴을 할 때에는 밤이 되면 중정에 횃불을 밝힌다. 그다음 날 날이 밝으면 횃불을 끈다[小斂 宵爲燎于中庭 厥明滅燎]”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요(燎)’는 대초(大燋)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형초(荊燋)로 촉(燭)을 삼았다. 손으로 잡는 것과 대비하여 더 큰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대렴에는 촉(燭)을 잡은 자가 찬(饌)의 동쪽에서 기다린다.[大斂燭俟于饌東]”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촉(燭)’은 초(燋)이다. 찬(饌)을 진설한 데 촉(燭)이 있는 것은, 당(堂)은 비록 밝더라도 실(室)은 오히려 어두우므로 쓰는 것이다. 횃불이 땅에 있는 것은 요(燎)라고 하고, 손으로 잡은 것은 촉(燭)이라고 한다.” 하였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조조를 할 때에는 밤이 되면 문안의 오른쪽에 요를 피운다.[朝祖 宵爲燎于門內之右]”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귀신은 어두운 것을 좋아하므로 밝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상구를 실은 수레의 동쪽에는 주인이 있고, 그 사이에는 부인이 있다. 그러므로 문의 오른쪽에 횃불을 피워 밝게 해 놓고서 곡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1]이유태(李惟泰) : 1607~1684.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이며, 유학 이서(李曙)의 아들이다.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우다가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부자를 사사, 그 문하의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ㆍ윤선거(尹宣擧)ㆍ유계(兪棨)와 더불어 호서산림(湖西山林)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김집이 천거하여 희릉 참봉(禧陵參奉)이 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송시열과 송준길 등의 천거로 지평이 되고, 이후 집의, 공조 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현종 1년(1660)에 일어난 복제시비(服制是非) 때에는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그 뒤 1674년에 일어난 갑인예송(甲寅禮訟) 때 남인(南人)의 탄핵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 숙종 6년(1680)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죄가 풀려 호군에 서용되었으나 숙종 초부터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그 계통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유현(儒賢)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불만 끝에 죽었다.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喪禮備要)》,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하였다. 뒤에 소론(少論)에 의하여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인들이 고향에 금산서원(錦山書院)을 세워 제향하였다. 저서로는 《초려집(草廬集)》이 있다. [주D-002]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19년에 장열(張說)이 《현경례주(顯慶禮註)》의 내용이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달라 이를 절충하여 당례(唐禮)로 삼아야 한다고 아뢰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소숭(蕭嵩) 등으로 하여금 찬정(撰定)하게 한 책이다. 원명(原名)은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이다. [주D-003]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조선 세종(世宗) 때 허조(許稠) 등이 편찬에 착수해 세조(世祖) 때 강희맹(姜希孟) 등의 수정을 거쳐 성종(成宗) 5년(1474)에 신숙주(申叔舟) 등이 완성한 예서(禮書)로,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의 다섯 예 가운데에서 실행해야 할 것을 뽑아 도식(圖式)을 붙여 기술하였다. [주D-004]송시열(宋時烈) :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아명은 성뢰(聖賚)이며,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아버지는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배웠고,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효종조 이후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할 때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濟州道)로 유배되었으며,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조선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 《주문초선(朱文抄選)》, 《계녀서(戒女書)》 등이 있으며, 개인 문집으로는 전체 215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주D-005]구씨(丘氏) : 구준(丘濬)으로, 명(明)나라 사람이며, 호가 경산(瓊山)이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주자(朱子)의 학설에 정통하여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을 저술하였다. [주D-006]상축(商祝) : 예를 익숙하게 잘 알아서 예식의 절차를 돕는 사람이다. [주D-007]복(復) : 초혼(招魂)하는 것으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그의 옷을 공중에 내저으면서 ‘아무개 복’ 하고 세 번 부르는 것을 말한다. 혼이 옷을 보고 돌아와서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행하는 절차라고 한다. [주D-008]송준길(宋浚吉) : 1606~1672.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명보(明甫)이며,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영천 군수(榮川郡守)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였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일생 동안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숭현서원(崇賢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문묘(文廟)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어록해(語錄解)》, 《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다. 특히 이 의례문해(疑禮問解)에는 송준길의 질문이 가장 많이 들어 있다. [주D-009]정씨(鄭氏) : 후한(後漢) 때의 학자인 정현(鄭玄)을 가리킨다. 정현은 자가 강성(康成)이고, 고밀(高密) 출신이다. 마융(馬融)의 제자로, 《모시전(毛詩箋)》, 《삼례주(三禮註)》, 《주역주(周易註)》 등을 저술하여 한대(漢代) 경학(經學)의 집성자로 불린다. 특히 그가 낸 삼례 전체에 대한 주석은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으므로, 당(唐)나라의 공영달(孔穎達)은 “예(禮)는 바로 정학(鄭學)이다.”라고까지 하였다. [주D-010]순(輴) : 상구를 싣는 수레이다. [주D-011]도(幬) : 관을 덮는 천을 말한다. [주D-012]임(袵) : 관과 관 뚜껑의 모서리를 이어 붙이는 도구로, 나무를 나비 모양으로 깎아 끼울 수 있게 한 것이다. 옛날에는 관에 못을 사용하지 않고 임과 가죽끈으로 묶었다. 임의 모양새는 양쪽 끝은 크고 가운데는 가늘어서 나비 모양으로 생겼는데, 한(漢)나라 때에는 소요(小要)라고 했으며, 우리말로는 나비은장이음이라고 한다. [주D-013]외형제(外兄弟) : 이성(異姓)의 형제를 말한다. [주D-014]남쪽 : 이 부분이 원문에는 ‘面’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중국 북경대학출판사에서 나온 이학근(李學勤) 주편(主編)의 《의례주소(儀禮注疏)》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격몽요결(擊蒙要訣) : 1577년(선조10)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편찬한 책으로, 2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입지(立志)ㆍ혁구습(革舊習)ㆍ지신(持身)ㆍ독서(讀書)ㆍ사친(事親)ㆍ상제(喪制)ㆍ제례(祭禮)ㆍ거가(居家)ㆍ접인(接人)ㆍ처세(處世)의 10장으로 나누고, 사당도(祠堂圖)ㆍ시제도(時祭圖)ㆍ설찬도(設饌圖)와 제의(祭儀)의 출입의(出入儀)ㆍ참례의(參禮儀)ㆍ천헌의(薦獻儀)ㆍ고사의(告事儀)ㆍ시제의(時祭儀)ㆍ기제의(忌祭儀)ㆍ묘제의(墓祭儀)ㆍ상복중행제의(喪服中行祭儀) 등을 첨부하였다. [주D-016]삼재도회(三才圖會) : 명(明)나라 왕기(王圻)가 찬한 것으로, 총 106권이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물(人物), 시령(時令), 궁실(宮室), 기용(器用), 신체(身體), 의복(衣服), 인사(人事), 의제(儀制), 진보(珍寶), 문사(文史), 조수(鳥獸), 초목(草木) 등에 대해 도해(圖解)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주D-017]신식(申湜) : 1551~1623.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숙지(叔止)이며,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사헌부 집의, 경상도 안무어사(慶尙道按撫御史), 승지, 대사간, 대사헌, 충청도 관찰사,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지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청주의 쌍천서원(雙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의례고증(疑禮攷證)》, 《가례언해(家禮諺解)》 등이 있다. [주D-018]사상례 : 이 내용은 기석례(旣夕禮)의 기(記)에 나오는바, 기석례의 잘못인 듯하다. [주D-019]요(燎)는 대초(大燋)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燎火燋’로 되어 있는데, 중국 북경대학출판사에서 나온 《의례주소》를 보면, 화(火) 자는 대(大) 자의 잘못이라고 하였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燎大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상상(殤喪) 삼상(三殤)에 치상(治喪)하는 예 [문] 《개원례》에 이르기를, “삼상(三殤)의 상(喪)에는 죽은 처음에 목욕시키는 것과 대렴(大斂)과 소렴(小斂)을 하기를 성인이 죽었을 때와 똑같이 한다. 장상(長殤)에는 관(棺)과 대관(大棺)이 있고, 중상(中殤)과 하상(下殤)에는 관이 있다. 영연(靈筵), 제전(祭奠), 진식(進食), 장송(葬送), 곡읍(哭泣)을 하는 자리[位]는 성인을 장사 지낼 때와 똑같이 한다. 그 포생(苞牲)과 명기(明器)는, 장상의 경우에는 성인의 상에 비해 3분의 2를 감하여 한다. 오직 복혼(復魂)을 하지 않으며, 반함(飯含)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차를 밟아 장사를 치르고 난 다음에는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는다. 우제(虞祭)를 지내고 나서는 영좌(靈座)를 제거한다.” 하였습니다. 이 예는 오늘날 세상에서 쓰지 않습니까? 아니면 혹 달리 근거할 만한 예가 있는 것입니까? -승지(承旨) 홍방(洪霶)- [답] 모든 상상(殤喪)에 대해서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전의 일이네. 《가례》를 보면, 8세부터는 모두 신주를 세웠네. 조석으로 전을 올리고 상식을 올리는 것과 우제를 지낸 뒤에 궤연(几筵)을 철거하는 것은 모두 《개원례》에 의거하여 하고서 조묘(祖廟)에 부묘(祔廟)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주D-001]삼상(三殤) : 장성하기 전에 일찍 죽는 것을 상(殤)이라고 하는데, 16세부터 19세 사이에 죽은 경우에는 장상(長殤)이라고 하고, 12세부터 15세 사이에 죽은 경우에는 중상(中殤)이라고 하고, 8세부터 11세 사이에 죽은 경우에는 하상(下殤)이라고 한다. 이 삼상에 따라서 각각 상복과 상기가 달라지며, 8세 이전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 [주D-002]대관(大棺) : 관 가운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관을 말한다. 임금의 관은 세 겹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관을 대관이라 하고, 그 안쪽에 있는 것을 촉(屬)이라 하고,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을 벽(椑)이라고 한다.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군(君)의 관(棺)은 대관(大棺)이 8촌(寸)이고, 촉(屬)이 6촌이고, 벽(椑)이 4촌이다. 상대부(上大夫)의 관은 대관이 8촌, 촉이 6촌이다. 하대부(下大夫)의 관은 대관이 6촌, 촉이 4촌이다. 사(士)의 관은 관이 6촌이다.” 하였다. [주D-003]포생(苞牲) : 포(苞)는 갈대로 엮은, 어육(魚肉) 등을 담아 두는 데 쓰는 용구다. 포생은 희생(犧牲)을 포에다 담아 두는 것을 말한다. [주D-004]명기(明器) : 명기(冥器)로, 장사 지낼 적에 함께 묻기 위하여 만든 기물이다. 일반적으로 나무나 대나무, 흙 등으로 만든다. 송(宋)나라 이후로는 종이로 만든 명기를 많이 썼다. [주D-005]복혼(復魂) :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부르는 것으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그의 옷을 공중에 내저으면서 ‘아무개 복’ 하고 세 번 부르는 것을 말한다. 혼이 옷을 보고 돌아와서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행하는 절차라고 한다. [주D-006]반함(飯含) : 죽은 사람의 입속에 염을 하면서 보옥이나 돈, 쌀 등을 채워 넣는 것을 말한다. [주D-007]홍방(洪霶) : 선조(宣祖)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豐山)이고, 자는 경망(景望)이며, 호는 지계(芝溪)이다.     성복(成服) 대렴이 이미 지나갔더라도 그날 곧바로 성복해서는 안 된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혹 4, 5일째 되는 날에 비로소 입관(入棺)을 하고서 그날 바로 성복하는데, 이것은 온편치 못한 듯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성복한 뒤에 비로소 상식을 올리니, 만약 다시금 그다음 날이 되기를 기다린다면 상식을 올리는 것이 점차 지연되게 된다. 이 때문에 급하게 성복하는 것이다.” 하는데, 이 설이 어떻습니까? -정랑(正郞) 오윤해(吳允諧)- [답] 양씨(楊氏)가 이르기를, “3일 만에 대렴을 하고서는 성복할 수 있으나, 차마 그 어버이를 죽은 사람으로 대우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4일째가 되어서야 성복하는 것이네. 비록 4일이나 5일이 지나서 대렴을 했다고 하더라도 남의 자식 된 자로서 차마 곧바로 성복하지 못하는 뜻은 3일이 지나서 대렴을 한 경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반드시 그다음 날이 되기를 기다려서 성복하는 것이 인정과 예에 있어서 합당하네. 그러니 상식이 조금 지연된다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성복해서는 안 되네. 상포(喪布)는 폭(幅)을 잇대어서 쓴다. [문] 옛날에는 포(布)의 너비가 2척 2촌이었으나 지금은 포의 폭이 아주 좁은바, 반드시 폭을 잇대어서 써야 합니까? -강석기(姜碩期)- [답] 옛날에는 포의 넓고 좁음과 승수(升數)에 모두 정해진 법이 있어서 그 너비는 반드시 2척 2촌으로 하였네. 그러므로 최의(衰衣)와 몌(袂)의 가로와 세로는 모두 2척 2촌으로 하였는바, 이는 반듯한 모양새를 취한 것이네. 우리나라의 포는 그 너비가 아주 좁아 1척 5, 6촌이 되는 것도 있고 1척 2, 3촌밖에 안 되는 것도 있어서 만약 폭을 잇대어 붙이지 않으면 상복을 입을 사람의 몸이 비대할 경우에는 입을 수가 없게 되며, 옷소매 역시 짧아서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게 되네. 그러므로 반드시 폭을 잇대어서 쓴 다음에야 옷이 몸에 맞게 되고 소매가 손을 가릴 수 있게 되어서 가로와 세로를 반듯하게 하는 제도에 합당하게 되네. 혹자는 말하기를, “폭을 잇대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는 꽉 막힌 의론이네. 모든 최복(衰服)은 밖으로 폭을 줄인다. [문] 《의례》 상복(喪服)의 기(記)에 이르기를, “모든 최의(衰衣)는 밖으로 폭을 줄인다.[凡衰 外削幅]”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삼년상의 상복에서만 밖으로 폭을 줄이고, 기년복이나 대공복 이하의 상복에서는 모두 안쪽으로 꿰매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최의는 밖으로 폭을 줄이고 하상(下裳)은 안으로 폭을 줄이는 것이네. 애당초 삼년복과 기년복과 대공복의 차이를 말하지 않았으니, 최복은 모두 밖으로 폭을 줄인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네. 참최복(斬衰服)의 중의(中衣)는 가를 깁는다. [문] 최복의 안에는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받쳐서 입는 것이 예입니다. 다만 심의의 제도는 마땅히 가를 기워야 하는데, 이것은 참복에 마땅치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중의는 최복의 안에 있으니 비록 가를 깁더라도 괜찮네. 예경을 어찌 어겨서야 되겠는가. 관(冠)의 양(梁)에는 깃을 만든다. [문] 관의 양에 먼저 종이로 만든 재료를 베로 싼 다음에 깃을 만드는 것입니까? 아니면 베로 깃을 만든 다음에 종이로 만든 재료에 싸는 것입니까? [답] 종이에 풀을 먹여 재료를 만든 다음 5촌 2푼 반 너비로 재단하여 베로 싸고, 이어 그 위에다 접어서 세 개의 깃을 만들되 너비가 3촌이 되게 하고서 실로 꿰매어 붙이는 것이네. 세속에서는 이런 제도를 잘 몰라서 먼저 재료를 3촌 너비로 재단한 다음에 베로 깃을 만들어 그 위에 싸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네. 살펴보건대 치관(緇冠) 역시 종이에 풀을 먹여 재료를 만들어 8촌 너비로 재단한 다음, 그 윗부분에 길게 주름을 잡아 다섯 개의 양(梁)을 만드는데, 너비가 4촌이 되게 하는바, 여기에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네. 또 《가례》의 본문에 의거하면, ‘베로 깃을 만들고서 싼다.’고 하지 않고 ‘베로 싸고서 세 개의 깃을 만든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먼저 베로 싸고 난 다음에 깃을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네. 수질(首絰) [문] 수질에 대해서 구준(丘濬)의 《가례의절》 및 《가례》의 보주(補註)를 보면, 모두 한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썼는데, 옳은 것입니까? [답] 예경 및 주자의 주를 근거로 하여 보면, 소렴(小斂) 때의 수질은 한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쓰는 것이 마땅하며, 성복(成服)할 때의 수질은 두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쓰는 것이 마땅하네. 그런데도 구준의 《가례의절》 및 《가례》의 보주에서는 소렴 때와 성복 때에 모두 한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통용해서 썼는바, 이것은 아마도 따라 해서는 안 될 듯하네. ○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소렴에는 환질을 한다.[小斂環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환질은 한 가닥으로 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어버이가 막 죽었을 때에는 효자가 관(冠)을 벗는데, 소렴을 할 때까지 머리에 꾸밈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이 환질을 두르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자최복을 입고 머리에 규질을 둘렀다.[衣衰而繆絰] -‘衣’는 음이 자(咨)이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규(繆)’는 맨다는 뜻인 교(絞)이니, 마(麻) 두 가닥을 서로 교차하여 묶는 것을 말한다. 오복(五服)에 매는 질은 모두 그러하다. 다만 조복(弔服)에 두르는 환질(環絰)은 한 가닥으로 한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삼례도(三禮圖)》에 그려져 있는 저질(苴絰)의 제도를 보면, 환질과 서로 비슷한 듯합니다. 근래에 요장(寥丈)이 그린 그림을 얻어 보았는데, 삼을 꼬아서 만든 새끼를 구부려서 하나의 둥근 테두리를 만들고는 서로 교차하는 부분을 가는 새끼로 묶어 고정시켰으며, 밑동 부분은 왼쪽에 드리우고 끝 부분은 안으로 접어 넣은 것 같았는바, 왼쪽으로 드리운 밑동 부분이 아래에 있는 제도와 서로 부합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말한 바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으나, 아마도 요씨(寥氏)의 설이 근사한 듯하다.” 하였다.   참최복의 수질과 요질(腰絰)의 촌수(寸數) 차이 [문] 《가례》를 보면 참최복의 수질은 9촌으로 하고 요질은 7촌으로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그 상세한 내용을 들었으면 합니다. -송준길- [답] 이것은 《의례》의 글과 다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이니, 서로 참고해서 보는 것이 마땅하네. ○ 《의례》 상복(喪服)의 전(傳)에 이르기를, “참최복의 저질(苴絰)은 삼을 한 움큼 잡아서 만드는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참최복의 대(帶)를 만든다. 자최복의 저질은 참최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자최복의 대를 만든다. 대공복의 저질은 자최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대를 만든다. 소공복의 저질은 대공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대를 만든다. 시마복의 저질은 소공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대를 만든다.[苴絰大搹去五分一以爲帶 齊衰之絰 斬衰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大功之絰 齊衰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小功之絰 大功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緦麻之絰 小功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저(苴)는 씨가 있는 삼이다. 색깔로 말하면 저라고 하고, 열매로 말하면 분(蕡)이라고 한다. 참최복은 모양새가 삼인 저와 같고, 자최복은 모양새가 모시인 시(枲)와 같다.” 하였다. ○ 《예기》 단궁의 주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질(絰)은 충실하다는 뜻으로 효자에게 충실한 마음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마(麻)가 머리에 있거나 허리에 있는 것을 모두 질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구분하여 말하면 머리에 두르는 것은 질이라 하고, 허리에 두르는 것은 대(帶)라고 한다. 수질(首絰)은 치포관(緇布冠)의 규항(頍項)을 형상한 것이고, 요질(腰絰)은 대대(大帶)를 형상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주에 이르기를, “정씨(鄭氏)가 이르기를 ‘한 움큼에 가득 차는 것을 격(搹)이라고 한다. 격은 손으로 잡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손의 둘레는 9촌이다. -대무지(大拇指)와 대거지(大巨指)로 잡는 데에 의거한 것이다.- 5분의 1씩 감하여 줄여 나가는 것은 오복(五服)의 수를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수질의 둘레를 9촌으로 하는 것은, 머리는 양(陽)에 해당되므로 양수(陽數)가 9에서 극(極)에 이르는 것을 취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자최 이하부터는 강쇄(降殺)하는 뜻을 취한 것일 뿐 형상하는 바는 없다.” 하였다.   참최복의 수질에서 삼의 뿌리 부분이 머리의 왼쪽으로 오고 오른쪽으로 오게 하는 데 대한 변(辨) [문] 《가례》를 보면 참최복의 수질은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왼쪽에 있으면서 끝 부분이 뿌리 부분의 위에 가해지고, 자최복의 수질은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있으면서 끝 부분을 뿌리 부분의 아래에 매도록 되어 있는 것은 무슨 뜻에서 그런 것입니까? -송준길- [답] 《의례》의 주소(注疏)에 상세하게 논해 놓았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저질(苴絰)은 삼의 뿌리 부분이 아래에 있으면서 이마의 왼쪽에 오도록 한다. 모마질(牡麻絰)은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오도록 하면서 위에 있게 한다.[苴絰 下本在左 牡麻絰 右本在上]”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저질’은 참최복을 입는 자가 두르는 질(絰)이다. 삼의 뿌리 부분이 아래에 있으면서 이마의 왼쪽에 오도록 하는 것은, 중한 상복의 경우에는 안에서 통할(統轄)되며 양에 근본해서이다. ‘모마질’은 자최복 이하를 입는 자가 두르는 질이다.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오도록 하면서 위에 있게 하는 것은, 가벼운 상복의 경우에는 음에서 근본하며 바깥에서 통할되어서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어버이의 상에는 겉으로는 상복을 벗으나 안으로는 상복을 벗지 않는다.[親喪外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鄭氏)의 주에 이르기를, ‘상복을 입을 날짜가 이미 끝났으나 슬픔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형제의 상에는 겉으로는 상복을 입고 있으나 안으로는 상복을 벗는다.[兄弟之喪 內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의 주에 이르기를, ‘상복을 입을 날짜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슬픔은 이미 줄어든 것이다.’ 하였다. 여기에서 안에서 통할되고 바깥에서 통할된다고 말한 것은, 역시 슬픔이 안에 있고 겉에 있는 데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양에서 근본하고 음에서 근본한다고 말한 것은, 역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로서 양이 되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있어 땅으로서 음이 되는 데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삼의 뿌리 부분이 아래에 있으면서 이마의 왼쪽에 오도록 하는 것은, 아버지는 양(陽)이며 왼쪽도 양이며 아래는 안으로, 말하자면 애통함이 마음 안으로부터 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머니를 위해 두르는 질의 경우에는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오도록 하면서 위에 있게 한 것과 상대적인 것이 된다.” 하였다.   수질에 갓끈을 매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수질의 갓끈을 혹 매지 않고 드리우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갓끈을 매지 않는 것은 잘못으로, 예경의 뜻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전에 이르기를, “장상자(長殤者)를 위해서는 모두 대공 구월복을 입는데, 수질에 갓끈을 달며, 중상자(中殤者)를 위해서 대공 칠월복을 입는데, 수질에 갓끈을 달지 않는다.[長殤九月纓絰 中殤七月 不纓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수질에 갓끈이 있는 것이 중한 것이 된다. 대공 이상의 복에는 수질에 갓끈을 달고 소공 이하의 복에는 수질에 갓끈을 달지 않는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수질에 갓끈이 있는 것은 수질을 단단히 붙들어 매기 위한 것이니, 관에 갓끈을 달아 관을 고정시키는 것과 같으며 역시 턱 아래에서 붙들어 맨다.” 하였다. ○ 《가례》에 이르기를, “상관(喪冠)은 갓끈을 턱 아래에서 붙들어 매며, 수질의 갓끈은 관의 제도와 같이 만든다.” 하였다.   요질을 흩어서 늘어뜨리는 제도 [문] 요질은, 옛날에는 소렴을 마친 뒤에 3척을 흩어서 늘어뜨렸다가 성복을 한 뒤에 이르러서야 묶었습니다. 그런데 《가례》 성복조(成服條)에서 비로소 3척을 흩어서 늘어뜨린다고 말하였으며, 묶는 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일찍이 그것에 대해서 정도가(鄭道可)에게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가례》에서는 질(絰)의 제도를 말함을 인하여 흩어서 늘어뜨린다는 설을 추가로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묶는 날에 흩어서 늘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니, 보는 자가 마땅히 상세히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를 좋아하는 집에서는 한결같이 옛 예를 따라서 하는 것이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다. 그런데 하필 묶으려고 할 때에 뒤늦게 흩어서 늘어뜨려서 《가례》의 본뜻을 어긴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듯하네. 효대(絞帶)의 제도 [문] 효대의 제도에 대해서는 각자가 자신들의 소견을 고집하여 어느 한 쪽을 따를 수 없습니다. 절충(折衷)하는 설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유태- [답] 이에 대해서는 《의례》와 《가례》에 상세하게 나와 있네. 그 제도는 긴 끈의 가운데를 접어서 고리를 만든 다음에 그 나머지 끈을 합하는 것이네. 이는 전체의 띠를 통틀어서 모두 끈으로 만드는 것이네. 그러므로 승대(繩帶)라고 하는 것으로, 바로 삼중사고(三重四股)이네. 정도가가 ‘단지 고리 부분만 끈으로 만든다.’고 한 것은 잘못이네. ○ 《의례》 상복 참최장(斬衰章)의 전에 이르기를, “효대라는 것은 승대이다.[絞帶者 繩帶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삼을 꼬아서 만든 끈으로 대를 만든다. 그러므로 효대라고 한다.” 하였다. ○ 또 《가례》에 이르기를, “효대는 삼끈 한 가닥으로 만드는데, 크기는 요질의 반이다. 가운데를 구부려서 두 갈래로 만드는데, 각각 1척 남짓 되게 만든 다음 합한다. 그 크기는 요질과 같다.” 하였다. ○ 구씨(丘氏)가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주 문공(朱文公)의 어록(語錄)을 보면, 효대는 요질에 비해서 조금 작다고 하였으며, 《가례》에서는 크기가 요질과 같다고 하였다. 이제 조금 작은 것을 올바른 것으로 삼는다.” 하였다.   참최복과 자최복에 임(袵)을 붙이는 것이 다르다. [문] 상복에 임을 붙이는 제도는 자최복이나 참최복을 모두 똑같이 합니까? -송준길- [답] 《의례》 상복의 소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참최복의 임(袵)은 앞쪽 임이 뒤쪽 임을 가리고, 자최복의 임은 뒤쪽 임이 앞쪽 임을 가린다.” 하였다.   부판(負版)과 벽령(辟領)과 최(衰)에 대한 양씨(楊氏)의 의절(儀節)은 잘못이다. [문] 최와 부판과 벽령은 혹 방친(傍親)의 경우에는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이것에 어떤 설이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양씨는, 방친에 대해서는 최와 부판과 벽령을 쓰지 않는 것은 주자 이후에 의논하여 정한 것이라고 여겼네. 이에 대해서 내가 살펴보건대, 《의례》에 나오는 최상(衰裳)의 제도는 오복(五服)이 모두 같고, 단지 승수(升數)의 많고 적음만을 가지고 중복(重服)과 경복(輕服)으로 나누었는데, 부모는 중하므로 승수가 적고, 아버지로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친연(親緣)이 감해지고 아들로부터 아래로 내려갈수록 친연이 감해지며, 형제로부터 옆으로 갈수록 친연이 감해져서 가벼워지므로 승수가 많다고 운운하였네. 《의례》에는 비록 경복에 대해서도 모두 최와 부판과 벽령을 제거한다는 글이 없으나, 《가례》를 보면 대공복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를 제거하는데, 이는 후대의 현인이 더하고 줄인 뜻이네. 《가례》에 이르기를, “최와 부판과 벽령은 오직 아들이 부모를 섬기는 데에만 쓴다. 이외에는 모두 쓰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로 양씨의 설이네. 지금 예를 행하는 자가 양씨의 설에 구애되어서 비록 조부모(祖父母) 및 처(妻)의 상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이를 쓰지 않고 있는데, 이는 옛 예의 뜻을 크게 잃은 것이네. 정씨의 주에 이르기를, “앞에는 최가 있고 뒤에는 부판이 있고 좌우에는 벽령이 있으니, 효자는 애통해하고 슬퍼함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하였네. 그리고 구씨는 말하기를, “효자는 애통해하고 슬퍼함이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은 단지 가장 중한 것만을 들어서 말한 것일 뿐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자최 삼년복 이하에서 부장기복(不杖期服)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최라고 이름하면서 그 제도를 달리하지 않았으니, 《가례》의 본주에서 말한 것을 따라야 함이 옳다.” 하였는데, 구씨의 설이 아마도 제대로 말한 것인 듯하네. 기년 이하의 최복에서 활중(闊中)을 재단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문] 《가례》의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에 이르기를, “최와 부판과 적(適)은 오직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만 쓴다. 그 나머지 이를 쓰지 않는 상복의 경우에는 활중을 재단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것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살펴보건대 공복(功服)과 시복(緦服) 이하의 최복은 비록 부판과 벽령과 최를 제거하지만 활중은 자최복이나 참최복과 차이가 없네. 그러므로 양씨가 말하기를, “의복에 있어서는 길복(吉服)과 흉복(凶服)의 제도가 다르니, 최복의 영(領)은 길복의 영과 같지 않다.” 하였네. 도설(圖說)은 잘못된 것으로, 따라서는 안 되네. 장(杖) [문] 상장(喪杖)을 짚거나 드는 의절에 대해 묻습니다. [답] 예경에서 잘 갖추어 논해 놓았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대부의 상에는, 대부는 임금의 명이 있으면 지팡이를 버리고 다른 대부의 명이 있으면 지팡이를 든다. 대부의 아내는 임금 부인으로부터 명이 있을 때에는 지팡이를 버리고 세부의 명이 있을 때에는 지팡이를 남에게 맡긴다.[大夫之喪 大夫 有君命則去杖大夫之命則輯杖 內子 爲夫人之命去杖 爲世婦之命授人杖]”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대부는 임금의 명이 있으면’이라고 한 곳에서의 대부는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아들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상대기에 또 이르기를, “죽은 자의 아들은 모두 지팡이를 사용하지만 지팡이를 짚고 자리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대부와 사는 빈(殯)에 대해서 곡을 할 적에는 지팡이를 짚고, 구(柩)에 대해서 곡을 할 적에는 지팡이를 든다.[子皆杖 不以卽位 大夫士哭殯則杖 哭柩則輯杖]”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자(子)’는 모든 서자(庶子)로, 대부와 사의 서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팡이를 짚고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적자(嫡子)가 하는 일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빈(殯)에 대해서 곡할 적에 지팡이를 짚는 것은 슬픔이 공경보다 승(勝)하기 때문이다. 구(柩)에 대해서 곡하는 것은 계빈(啓殯)한 뒤에 하는 것이며, 지팡이를 드는 것은 공경이 슬픔보다 승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서자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가지 않는다.[庶子不以杖卽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적자나 서자나 모두 부모의 상이 있을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적자는 지팡이를 들고 조계(阼階)에 있는 곡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으나, 서자의 경우에는 중문(中門) 밖에 이르면 지팡이를 놓는다.” 하였다. ○ 상복소기에 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서자가 아내를 위해서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가도 괜찮다.[父在 庶子爲妻 以杖卽位可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시아버지는 적부(嫡婦)를 위해서는 상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적자는 아내의 상에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서부(庶婦)를 위해서는 상주가 될 수 없으므로 서자는 아내의 상에 지팡이를 짚고서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리에 나아가는 것으로써 말한 것은, 대개 서자는 부모에 대해서 눌려서 비록 지팡이가 있더라도 이를 가지고 자리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해 놓은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상주는 우제(虞祭)에는 방에 들어갈 때 상장을 짚지 않는다. 부제(祔祭)에는 당에 오를 때 상장을 짚지 않는다.[虞 杖不入於室 祔 杖不升於堂]”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우제는 침문(寢門) 안에서 지내므로 제사 지낸 뒤에 상장을 짚고서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부제는 조묘(祖廟)에서 지내므로 제사 지낸 뒤에 상장을 짚고서 당에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이는 모두가 슬픔을 줄여 가는 절차이다.” 하였다. ○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장자의 상에 아버지가 지팡이를 사용하면 장자의 아들은 그의 위치에 설 때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는다.[爲長子杖 則其子不以杖卽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기자(其子)’는 장자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억누르지 않는다. 이는 장자의 아들 역시 지팡이를 사용할 수 있으나, 다만 할아버지와 같이 있는 곳에서는 지팡이를 잡고 혼자 자기의 자리로 나아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 잡기에 또 이르기를,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는 부모가 살아 계시면 지팡이를 짚지 않으며 빈객에게 계상(稽顙)하지 않는다.[爲妻 父母在 不杖 不稽顙]”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적자(嫡子)의 아내가 죽은 경우를 두고 이른 것이다.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므로 그 예가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살아 계실 경우 어머니가 주상(主喪)이 될 수 없으면 아들은 아내를 위해서 지팡이를 짚을 수는 있으나, 다만 빈객에게 계상할 수는 없다.” 하였다. ○ 《개원례》에 이르기를, “상장을 짚을 적에는 오른손으로 짚고 절을 할 경우에는 양손을 땅바닥 위에 나누어 놓고 무릎을 꿇은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한다. 절을 마치고 나서는 오른손으로 상장을 짚고서 일어난다. 지금 양손으로 아울러 상장을 들고서 절하여 마치 돈수(頓首)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저장(苴杖)을 여섯 마디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문] 저장에 대해서 《가례》의 도를 보면 여섯 마디로 되어 있고, 《국조오례의》에도 여섯 마디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도 따라야만 합니까? [답] 예경에 의거하면 단지 가슴 부위와 나란하게 할 뿐이지 여섯 마디로 한다는 글은 없네. ○ 《의례》 상복의 전에 이르기를, “장(杖)의 높이는 복상(服喪)하는 자의 가슴과 나란하게 하며, 두 장은 모두 뿌리 부분을 아래로 한다.[杖各齊其心皆下本]”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상장의 길이는 요질(腰絰)과 똑같이 한다.[杖大如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요질과 똑같이 한다는 것은, 상장은 가슴으로부터 아래에 있는바, 요질과 같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팡이는 병든 몸을 부축하기 위한 것인데, 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팡이의 높고 낮음을 가슴으로써 판단하는 것이다.’ 하였다. 뿌리 부분을 아래로 하는 것은 그 본성에 순응한 것이다.” 하였다.   부인(婦人)의 복제(服制) [문] 부인의 복제는, 만약 예경에 따른다면 최의(衰衣)는 남자의 최의와 같고, 아래는 심의(深衣)와 같아 대하척(帶下尺)도 없고 임(袵)도 없습니다. 그런데 질대(絰帶)의 대소는 한결같이 남자와 같이 해야 합니까? 아니면 《가례》를 따라서 대수(大袖)와 장군(長裙)의 제도로 해야 합니까? 주자가 이른바 “부인의 상복은 남자의 최의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부인의 복제에 대해서는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와 상복도식(喪服圖式)에 최의와 하상(下裳)을 잇대고 질(絰)과 장(杖)을 갖추는 제도가 아주 잘 갖추어져 있는데, 이는 필시 주자가 만년에 정한 정론(正論)으로, 《가례》와는 같지 않으나, 예를 좋아하는 집안에서는 이를 준행하는 것이 아주 좋네. 일찍이 정도가(鄭道可)에게 물어보았더니, 그의 뜻도 그러하였네. 《상례비요(喪禮備要)》에 갖추어 실려 있으니, 쓰는 자가 채택해 쓰는 데 달려 있을 뿐이네. 동자(童子)의 복제 [문] 동자의 복제도 마땅히 효건(孝巾)과 관(冠)이 있어야만 합니까? -송준길- [답] 동자는 관을 쓰지 않으니, 어찌 효건 및 관이 있겠는가. 동자는 수질(首絰)이 없다. [문] 동자 역시 수질이 있습니까? -송준길- [답] 수질은 치포(緇布)의 규항(頍項)을 형상한 것이네. 동자는 관을 쓰지 않는데 어찌 규항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신의경(申義慶)이 말하기를, “부인은 비록 관을 쓰지 않지만 수질이 있으니, 동자 역시 있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부인의 수질에 대해서는 참으로 분명하게 말해 놓은 글이 있으나, 동자의 경우에는 서책에 드러나 있지 않으니, 신씨의 설은 의심스럽네. 정경임(鄭景任)은 말하기를, “동자의 수질에 대해서는 예경에서 상고할 바가 없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동자는 관을 쓰지 않는데 어찌 규항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간이하고도 명백하니, 공격하여 깨뜨릴 수 없을 듯하다.” 하였네. 최복(衰服)은 깁지 않고 고치지 않는다. [문] 최복이 떨어지거나 혹 만든 제도가 잘못되었을 경우에 고치고자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예경 및 주자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이르기를, “저마(苴麻)의 최복은 깁지 않는다.[苴衰不補]”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불보(不補)’는 비록 떨어져도 꿰매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였다. ○ 《주자대전》에 이르기를, “이계선(李繼善)이 묻기를, ‘어제 상사를 만난 처음에 복제(服制)를 단지 세속의 풍습에 따라서 하였는데, 구차스럽고 간단하여 올바르지 않기에 몹시 마땅찮게 여겼습니다. 이제 옛 예에 의거하여 고쳐 입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복이 이미 다 만들어졌는데 중간에 고치는 것은 온당치 않을 듯하다. 그대로 입는 것이 더 낫다.’ 하였다.” 하였다.   조부모와 부모의 상이 한꺼번에 있을 경우 성복(成服)하는 순서 [문] 조부모와 부모가 함께 죽었을 경우에 염습하는 등의 제반 일은 할아버지를 먼저 하고 아버지를 나중에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복하는 한 가지 절차만은 《통전(通典)》에 나오는 ‘아버지를 미처 빈(殯)하지 못하였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따라서 한다면, 아버지 상에 삼년복을 입는 제도가 중한 것이 되는바, 설령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에 대한 상복을 먼저 입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다만 제부(諸父)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결단코 그 부모상에 성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4일째 되는 날의 뒤로 물려서 성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의 예절은 실로 난처한 바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두 상이 하루 안에 발생하였다면 습렴(襲斂)하는 것은 마땅히 할아버지를 먼저 하고 아버지를 나중에 하여야 하네. 만약 아버지의 상이 하루나 이틀이라도 먼저 발생했을 경우에는 마땅히 먼저 돌아가신 분을 먼저 습렴해야 하네. 성복하는 것도 그러하네. 만약 할아버지의 상이 먼저 발생했다면 제부나 제형, 제손들은 승중(承重)한 손자에 구애되어 날짜를 물려서 성복해서는 안 되네. 그러나 종손(宗孫)은 부모상을 당하여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거나 머리카락을 묶을 때에 갑작스럽게 조부모의 복을 성복해서 부모에 대한 슬픔을 줄여서는 안 되는바, 아버지에 대해 성복하는 날이 되기를 기다려서 먼저 할아버지에 대해 성복하고 나중에 아버지에 대해 성복하는 것이 올바른 예일 듯하네. 그러나 이러한 예는 모두가 억설(臆說)로, 옳은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네. 상복을 입었을 때의 자리는 상복의 경중(輕重)으로 차서(次序)를 삼는다. [문] 《가례》 습후위위조(襲後爲位條)를 보면, “동성(同姓)으로 기년복과 대공복과 소공복 이하의 친족은 각각 상복의 차례대로 그 뒤에 앉는다.”고 하였는데, 우제(虞祭)를 지낼 때에는 ‘중한 복을 입은 사람이 앞에 있고 가벼운 복을 입은 사람이 뒤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백부와 숙부가 그 뒤에 있게 되는데,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사당(祠堂)에서 서립(序立)하는 차서와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황종해(黃宗海)- [답] 사당에서 서립하는 것은 상례(常禮)이네. 염습한 뒤 및 상제(祥祭)와 담제(禫祭)를 지낼 때에는 모두 상복의 경중으로써 차서를 삼네. 그러니 비록 제부(諸父)들이 상주(喪主)의 뒤에 있더라도 무슨 온당치 못한 점이 있겠는가. 오복(五服)을 입은 사람이 서로 조문하는 예절 [문] 오복을 입은 사람이 서로 조문하는 의식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황종해- [답] 구준의 《가례의절》에 따라서 행하면 될 것이네. ○ 《가례의절》에 이르기를, “-이날은 일찍 일어난다.- 복을 갖추어 입는다. -오복(五服)을 입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입을 상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는다. 요질(腰絰)을 착용하는 자는 아래로 드리웠던 삼 밑동을 묶는다.- 각자 자신의 자리로 나아간다. -남자는 상구(喪柩)의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자리하고, 여자는 상구의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자리하되, 각자의 상복으로써 차서를 삼아 늘어선다.- 거애(擧哀)하면서 서로 간에 조상(弔喪)한다. -여러 자손들이 조부(祖父)와 제부(諸父) 앞에 가서 무릎 꿇고 곡을 하여 슬픔을 다한다. 그런 다음 다시 조모(祖母)와 제모(諸母) 앞에 가서도 앞에서와 같이 곡을 한다. 여자들은 조모와 제모 앞에 나아가서 곡하며 조부와 제부 앞에 가서 곡하는데, 남자들이 한 예법대로 한다. 주부(主婦) 이하는 백숙모(伯叔母) 앞에 나아가서 곡하기를 역시 위와 같이 한다.- 자리로 돌아온다. -이것은 《대명집례(大明集禮)》에서 나왔다.-” 하였다.   [주D-001]오윤해(吳允諧) : 156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여화(汝和), 호는 만운(晩雲)이다. 문사(文詞)에 뛰어나 시(詩)와 표(表)에 능하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수찬, 교리, 응교, 예조 정랑,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강화가 성립되자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산중에 은거하였다. [주D-002]양씨(楊氏) : 송(宋)나라 장계(長溪) 사람인 양복(楊復)으로, 자는 지인(志仁)이며, 주희의 제자이다. 신재 선생(信齋先生)이라고 불렸으며, 저서로는 《가례의례도(家禮儀禮圖)》, 《가례잡설부주(家禮雜說附註)》가 있다. [주D-003]강석기(姜碩期) : 1580~164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금천(衿川)이고, 자는 복이(復而)이며, 호는 월당(月塘) 또는 삼당(三塘)이다. 김장생의 제자로 대사간, 대사성, 도승지, 이조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딸이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이 되었는데, 죽은 뒤에 강빈(姜嬪)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관작을 추탈당하였고, 그의 부인은 처형되었으며, 아들은 장살(杖殺)당하여 멸문(滅門)되었다가 숙종 때 복관(復官)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D-004]양(梁) : 관(冠)의 이마에 골이 지게 하여 세로로 잡은 줄을 말하는데, 이 줄의 숫자에 따라서 오량관(五梁冠), 사량관(四梁冠), 삼량관(三梁冠) 등으로 명칭을 달리한다. [주D-005]오복(五服) : 상복(喪服)을 입음에 있어서 다섯 가지로 차등을 두는 제도를 말한다. 이것은 가족과 친척 사이에 친소와 원근이 있기 때문에 차등을 두는 것으로, 상복의 경중을 나타내고 상기(喪期)의 장단을 결정하는 것이다. 오복에는 참최(斬衰), 자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가 있는데, 대공 이상은 친(親), 소공 이하는 소(疎)가 된다. 친소에 따라서 복을 입는 기간이 각각 다르며, 상복의 재료도 달라진다. [주D-006]삼례도(三禮圖) : 후한(後漢) 사람인 완심(阮諶)이 그린 도(圖)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정현(鄭玄)과 완심 등이 그린 《삼례도》가 있고, 《당서(唐書)》 예문지에 하후복랑(夏侯伏朗)과 장일(張鎰) 등이 그린 《삼례도》가 있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전해지는 《삼례도》는 송나라 섭숭의(聶崇義)가 찬한 것으로 2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식 명칭은 《삼례도집주(三禮圖集注)》이다. [주D-007]요장(寥丈) : 송나라의 학자인 요경(寥庚)으로, 자가 서중(西仲)이다. [주D-008]예기 …… 이르기를 : 원문에는 빠져 있는데,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9]규항(頍項) : 규항(缺項)이라고도 하는데, 치포관을 쓸 적에 비녀로 고정시키지 않고 규(頍)라는 장식으로 머리를 둘러싸서 목덜미 중앙에서 매듭을 지어 묶는 것을 말한다. [주D-010]저질(苴絰) : 씨가 있는 삼인 암삼[苴麻]으로 만든 머리띠를 말한다. 암삼은 모양이 추하여 보기에 나쁘기 때문에 참최복을 입는 자가 두르는 것이다. [주D-011]모마질(牡麻絰) : 씨가 없는 삼인 수삼[牡麻]으로 만든 머리띠를 말한다. 이것은 암삼으로 만든 것보다는 보기에 좋으므로 자최복을 입는 자가 두르는 것이다. [주D-012]정도가(鄭道可) : 정구(鄭逑 1543~1620)로, 도가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저서로는 《한강집(寒岡集)》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태극문변(太極問辨)》, 《고금충모(古今忠謨)》,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무이지(武夷志)》 등이 있으며, 특히 예설(禮說)에 밝아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심의제도(深衣制度)》, 《관의(冠儀)》, 《혼의(昏儀)》, 《장의(葬儀)》 등을 편찬하였다. [주D-013]효대(絞帶) : 상복의 제도에 있어서 참최복을 입는 자가 띠는 허리띠로, 삼을 꼬아서 만든 것이다. [주D-014]부판(負版) : 상복(喪服)의 등 쪽에 붙어 있는 너비 1척 8촌의 네모진 베 조각을 말한다. 부(負)라고도 한다. [주D-015]벽령(辟領) : 상복의 부판 양쪽 옆 깃 아래에 댄 베 조각으로, 슬퍼하는 정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加領)의 양쪽 옆과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 사방 8촌의 베를 사용하여 그 양쪽 머리를 접어 서로 붙여서 너비가 4촌이 되게 만들어 붙이는 것이다. 적(適)이라고도 한다. [주D-016]최(衰) : 참최복과 자최복에서 길이가 6촌이고 너비가 4촌이 되도록 베 한 조각을 잘라서 가슴 부위에 붙인 것을 말한다. [주D-017]적(適) : 상복의 옷깃 양쪽의 어깨 부위에 붙어 있는 너비가 4촌인 네모진 베 조각을 말한다. 벽령(辟領)이라고도 한다. [주D-018]계상(稽顙) : 두 무릎을 꿇은 다음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구부려서 하는 절로, 극도의 경건함을 나타낼 때 하는 절이다. [주D-019]이계선(李繼善) : 송나라 때 사람으로, 주자의 제자인 이효술(李孝述)을 가리킨다. 계선은 그의 자(字)이다. [주D-020]황종해(黃宗海) : 1579~1642. 인조 때의 학자이다. 본관은 회덕(懷德)이고, 자는 대진(大進)이며, 호는 후천(朽淺)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광해군 때 유생들과 함께 정인홍(鄭仁弘)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고 김장생에게 나아가 예학(禮學)을 배웠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주D-021]대명집례(大明集禮) : 명(明)나라 서일기(徐一夔)가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53권이다. 홍무(洪武) 3년(1370, 공민왕19)에 완성하였으며,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5례를 강(綱)으로 하고 그 아래에 26조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참최(斬衰) 참최 삼년(斬衰三年) [문] 참최복을 3년 동안 입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 예경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3승포(升布)를 썰어서 최(衰)를 만든다. ‘재단하여 자른다[裁割]’고 하지 않고 ‘썬다[斬]’고 말한 것은, 애통함이 아주 심한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 기(記)의 소에 이르기를, “최(衰)는 가슴 부위에 대는 것이다. 너비를 4촌으로 한 것은 그 애통함이 몸 전체에 두루 있는 것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복의 상의(上衣) 역시 그 이름을 최(衰)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의 주에 이르기를, “최(衰)는 효자에게 애통한 뜻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삼년문(三年問)에 이르기를, “저들은 삼년상이 25개월에 끝나는 것을 사마(駟馬)가 문틈을 지나가는 것처럼 빠르게 여긴다. 그런데도 저들을 따른다면, 이는 상을 마칠 때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이를 위해서 중도(中道)를 세우고 예를 제정한 것이다.[二十五月而畢若駟之過隙 然而遂之則是無窮也 故先王爲之立中制節]” 하였다. ○ 삼년문에 또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째서 기년(期年)으로 정하였는가? -주에 이르기를, ‘기년 만에 상복을 벗는 뜻을 물은 것이다.’ 하였다.- 지친(至親)은 기년으로 끊은 것이다. 천지가 이미 바뀌고 사시도 이미 변하였는바, 천지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다시 시작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형상한 것이다.[何以至期也 至親以期斷 天地則已易矣 四時則已變矣 其在天地之中者 莫不更始焉 以是象之也]” 하였다. ○ 삼년문에 또 이르기를, “어째서 3년으로 정하였는가? 융후(隆厚)함을 보태어 그렇게 한 것이다.[何以三年也 曰加隆焉爾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성인께서 처음에는 부모상을 기년으로 하고자 하였는데, 융숭함을 보태었다. 그러므로 3년으로 한 것이다.” 하였다. ○ 삼년문에 또 이르기를, “위로는 하늘에서 형상(形象)을 취하고, 아래로는 땅에서 법(法)을 취하고, 중간으로는 사람에게서 법칙(法則)을 취하였다.[上取象於天 下取法於地 中取則於人]”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3년은 윤년(閏年)을 형상하고, 기년은 한 해를 형상하고, 9개월은 사물이 세 계절[時]에 이루어지는 것을 형상하고, 5개월은 오행(五行)을 형상하고, 3개월은 한 계절을 형상한 것이다. ‘사람에게서 법칙을 취하였다’는 것은, 처음 태어나서 3개월이 되면 머리를 자르고 3년이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첩(妾)이 남편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 복 [문] 첩이 남편의 부모에 대하여 입는 상복에 대해서 우복(愚伏)에게 물으니, 이르기를, “《의례》를 보면,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 첩이 남편의 친족을 위해서 여군(女君 남편의 적처(嫡妻))과 같은 복을 입는다.’ 하였으니, 역시 기년복을 입는 것이네. 그런데 후당(後唐)의 유악(劉岳)이 지은 《서의(書儀)》에는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서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네. 그리고 송(宋)나라 건덕(乾德) 연간에 좌복야(左僕射) 위인포(魏仁浦) 등이 상주하여 《서의》의 글이 예에 있어서 마땅하다고 하니, 조서를 내려 그대로 따랐네. 지금 시부모를 위해서 참최복과 자최복을 입는 것은 실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첩은 마땅히 여군과 같은 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네. 그런데 구준(丘濬)의 《가례의절》에 나오는 첩위부당복도(妾爲夫黨服圖)를 보면 ‘시부모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여전히 《의례》의 옛글을 근거로 삼은 것이네. 그러니 지금도 억견을 가지고 삼년복을 입기는 어렵네. 이는 오직 예를 좋아하는 군자가 정례(情禮)를 참작해서 잘 상량하여 대처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네. 비록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의례》에서 말한 ‘여군과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한 글을 따르는 것이 되니, 의(義)로써 새로운 예를 일으키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네.”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정경임(鄭景任)의 설이 맞네.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 비로소 그의 후사(後嗣)가 된 자가 뒤늦게 상복을 입는 경우 [문] 어떤 사람이 아들이 없는데 미처 후사를 세우기도 전에 죽은 상황에서 그의 아내가 동종(同宗) 가운데 복(服)이 없는 사람을 취하여 장사 지내기 전후나 연제를 지내기 전후에 후사로 세웠을 경우, 뒤늦게 상복을 입는 절차는 마땅히 분상(奔喪)하는 자가 하는 예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변복(變服)을 하고 단(袒)을 하고 괄발(括髮)을 하고 성복(成服)을 하는 등의 일을 모두 초상 때의 예와 같이 합니까? 그리고 제사 지내 그 사유를 고하고, 개제(改題)하고 방제(傍題)하는 등의 일 역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상고하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사 신식- [답] 단을 하고 괄발을 하고 성복을 하는 것은 한결같이 초상 때와 같이 해야 하네. 제사 지내 그 사유를 고하는 것과 후사가 된 바의 신주 역시 개제(改題)하여야 하네. 이에 대해서는 《통전(通典)》에 상세하게 나오기에 아래에 기록하였는데, 사마조(司馬操)가 한 말이 맞네. ○ 《통전》에 이르기를, “송(宋)나라 하승천(何承天)이 묻기를, ‘어떤 부인이 남편이 먼저 죽었는데 아들은 없고 시집간 딸이 있다. 이에 그 부인이, 남편이 죽은 지 1주년이 안 되어 종종(宗從)의 아이를 남편의 후사로 삼아 이제 이미 여차(廬次)와 상장(喪杖)을 다시 만들었는데, 죽은 달로부터 1주년이 되는 날에 문득 연제(練祭)를 지내는 것이 마땅한지, 아니면 후사가 되어 나간 날을 상복을 만들어 입은 처음으로 삼아야 마땅한지를 모르겠다.’ 하니, 순백자(荀伯子)가 답하기를, ‘뒤늦게 후사가 되어 나간 것은 상(喪)을 당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고 뒤늦게 상복을 입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응당 죽은 달을 1주년으로 삼아야지, 후사가 되어 나간 날을 상복을 지어 입은 처음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가령 갑(甲)에게 아내와 아들과 딸이 있는데, 갑이 죽어서 갑의 아들이 중복(重服)을 입고 있다가 연제를 지내고 나서 갑의 아들이 또 죽어, 갑의 동생인 을(乙)이 자기 아들인 병(丙)을 갑의 후사로 삼았을 경우, 병은 이미 갑을 백부(伯父)로 여겨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상제를 마쳤는데 다시 25개월복을 지어서 입는다면, 갑의 아내와 딸은 병보다 먼저 상복을 벗는 것은 합당치 않은데, 어떻게 3주년이나 상복을 입고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대해 사마조가 힐난하기를,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후사가 된 분에 대해서 예를 다해 삼년복을 입고, 소생부모(所生父母)에 대해서는 복을 낮추어서 강복(降服)을 입는다. 이것이 중함을 받은 도(道)를 온전히 하고 자식이 된 의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부자(父子)의 이름이 후사의 명을 받은 날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겠으며, 높임을 더하는 은혜가 친부모를 하직하는 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대의는 아주 분명하여 억눌러서 빼앗는 변례(變禮)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이 죽어서 갑의 아들이 상복을 입고 있다가 연제를 지내고 나서 갑의 아들이 죽는 바람에 갑의 동생인 을이 자신의 아들인 병을 갑의 후사로 삼았을 경우, 병은 갑을 백부로 여겨 기년복을 입고서 상을 마쳤으니 다시 25개월복을 지어 입을 수 없다.’ 하니, 다시 힐난하기를, ‘병이 갑의 연제를 지낸 뒤에 바야흐로 와서 갑의 후사가 되었으니, 그의 상에 대해서는 비록 강쇄(降殺)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중복(重服)은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금 원월(遠月)로 상복을 지어 입는 것이 의리에 있어서 뭐가 손상되겠는가. 그리고 예전에는 갑을 방존(旁尊)으로 보았으므로 상복이 자최복(齊衰服)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아들이 되었는데도 예를 행함에 있어서 제도에 궁한 탓에 일이 어그러지고 의리가 이상하게 되어 깊고 얕음이 현격하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서로 이어서 똑같이 삼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의 아내와 딸은 3주년 동안 상복을 입고 있을 길이 없으며, 또 병보다 먼저 상복을 벗는 것도 합당치 않다.’ 하니,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기를, ‘갑의 아내와 딸은 2주년 동안 복을 입고서 상을 마쳐야지 어찌 3주년 동안 복을 입고 있을 수 있겠는가. 길사(吉事)와 흉사(凶事)는 각각 날짜가 있는 법인데, 어찌 반드시 병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혹자는 「갑의 상복을 벗을 때가 다 되어서 병이 후사가 되어 갔으면 병은 응당 참최복(斬衰服)을 입었다가 열흘 정도 지난 뒤에 상복을 벗으면 될 것이다.」 하는데, 나의 뜻으로는 상복을 벗기를 기다렸다가 후사로 가면 될 것으로 여겨진다.’ 하니,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기를, ‘병이 갑의 상이 처음 시작된 때에 미쳐서 후사가 되지 못한 것은, 어떤 일로 말미암아서였다. 그리고 상을 치르는 자리에 상주(喪主)가 없어서 골육의 친족들이 애달픈 마음에 이미 후사를 앉혀 놓았으니 의당 삼년상 안에 미쳐서 후사로 가야지, 어찌 예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길일(吉日)이 되기를 기다림으로써 2주년이 그냥 지나가는 것을 뻔히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이 죽어서 아내와 딸이 상복을 입고 있은 지 2주년이 되었는데, 갑의 동생인 을의 두 아들이 먼 곳에 가 있다가 돌아온 뒤에 병을 갑의 후사로 삼았을 경우, 병의 동생인 정(丁)은 백부(伯父)를 위하여 뒤늦게 기년복을 입는데, 병은 후사로 나갔기 때문에 다시 침호(綅縞)를 입고서 열흘 정도 있다가 상복을 벗어야 한다면, 얕고 깊음이 어그러지는바, 이런 잘못을 다시 해서는 안 된다.’ 하니, 이에 대해 힐난하기를, ‘을의 아들인 병이 지금 와서 갑의 후사가 되었으니, 이미 동생인 정과 똑같이 뒤늦게 기년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 또 침호를 입고서 잠시 동안 있다가 열흘 정도 지난 뒤에 제복하는 것도 안 된다. 그럴 경우에 병은 갑의 상에 있어서 끝내 하찮은 복조차도 입을 수 없어 복을 빠뜨리게 된다. 자신이 직접 갑의 아들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정에게 죽은 달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상복을 입는 제도가 있는 것만도 못하게 하고, 삼년복을 입을 자리에 처해 있는데도 하루 동안의 슬퍼함조차도 끊게 한다면, 길일이 되기를 기다리는 뜻이 여기에서 어긋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의 아내와 딸은 흉사(凶事)가 있는 이 집을 피해 별도로 길한 집을 정해 나갈 길이 없으며, 또 아내와 딸은 안채에서 노래하고 후사가 된 아들은 바깥채에서 곡해서는 안 된다.’ 하니,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기를, ‘갑의 아내는 비록 더는 최마(縗麻)를 입지 않고 호곡(號哭)하는 소리를 내지 않지만, 소복(素服)을 입고 홀로 거처하면서 후사가 된 자와 길이 슬퍼해야지, 어찌 길한 집을 정해 나가기를 도모해서야 되겠으며, 또 어찌 노래하기를 일삼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서자(庶子)는 장자(長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 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 [문]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보면 “서자의 장자가 죽었을 경우에도 삼년복을 입는다.[庶子之長子死 亦服三年]”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를 역시 행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까?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이르기를,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에 대한 설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송준길- [답] 예경 및 제유(諸儒)가 논한 바를 가지고 주자가 말한 다른 설들과 참조해서 보면, 《주자어류》에서 말한 이 조항은 분명히 기록한 자가 잘못 기록한 것으로, ‘역(亦)’ 자는 ‘불(不)’ 자의 오자가 아니겠는가. 잘은 모르겠네.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는 것과 삼년복을 입지 않는 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소가(疏家)의 설에 상세하게 나와 있네. ○ 《의례》 상복의 전(傳)에 이르기를, “자신이 서자일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이은 정체(正體)가 아니기 때문이다.[庶子不得爲長子三年 不繼祖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후사가 된 다음에야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경(經)에서 말한 ‘계조(繼祖)’는 바로 할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이다. 그런데 정씨(鄭氏)는 말하기를, ‘아버지의 후사가 된 다음에야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여 서로 같지 않은데, 서로 같지 않게 된 것은, 주(周)나라의 도에는 적자(適子)는 있어도 적손(適孫)은 없어 적손은 서손(庶孫)의 예(例)와 같아서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후사가 된 다음에야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현(鄭玄)은 처음에 의거하여 말한 것으로, 사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어 자신이 3세(世)가 되고 장자가 4세가 되어야만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마융(馬融) 등은 5세가 되어야만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정현은 의(義)로써 미루어 나가 4세가 되면 되지 5세가 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한 것이다. 비록 승중(承重)을 하였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정체이기는 하나 전중(傳重)하지 않았을 경우로, 적자가 폐질(廢疾)이 있어서 종묘(宗廟)의 주인 역할을 감당해 내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두 번째는 전중하기는 하였으나 정체가 아닐 경우로,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는 체(體)를 잇기는 하였으나 바르지 않은 경우로, 서자를 세워서 후사로 삼은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네 번째는 바르기는 하나 체를 잇지 않은 경우로, 적손을 세워서 후사로 삼은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하였다. 소에서 또 이르기를, “다른 사람의 아들을 길러 후사로 삼은 경우에도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서자는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은 정체가 아니기 때문이다.[庶子不爲長子斬 不繼祖與禰故也]” 하였다. ○ 《예기》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서자는 자신의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이은 정체가 아니기 때문이다.[庶子不得爲長子三年 不繼祖也]” 하였다. ○ 《통전》에서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은혜로 볼 적에는 아버지가 중하고, 의리로 볼 적에는 할아버지가 중한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각각 하나씩의 중한 뜻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예를 제정함에 있어서는 할아버지의 복을 지친(至親)의 복으로 하였으며, 전(傳)에서는 똑같이 지존(至尊)이라고 하였다. 이미 중한 두 분의 뒤를 이었더라도 장자가 위에 대해서 정체(正體)가 되어 장차 종묘의 중함을 전해 받게 된 다음에야 장자를 위한 보복(報服)으로 참최복을 입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전(傳)과 기(記)에서는 모두 할아버지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만약 아버지만을 이었을 경우에도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을 수 있다면 ‘불계조(不繼祖)’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례》 상복의 전 및 《예기》 대전에서는 모두 불계조라고 하여, 서자는 비록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더라도 할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았을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무릇 정체(正體)라는 것은 위에 있는 것이니, 하정(下正)은 오히려 서(庶)가 됨을 말한 것이다. 정체는 할아버지의 적손임을 이른 것이고, 하정은 아버지의 적자를 이른 것이다. 비록 아버지에게는 적자가 되었더라도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서손(庶孫)이 되므로, 아버지의 적자를 서(庶)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주(周)나라의 제도에는 대종(大宗)의 예가 있어서 적통(嫡統)을 세워 후사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종의 예가 폐해지고 적통을 세우는 법이 없어져서 아들이면 각자 후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장자(長子)와 소자(少子)가 서로 다르지 않은바, 서자가 자신의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것 역시 적서(嫡庶)를 가지고 논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종법(宗法)은 비록 다시 세울 수 없으나, 복제(服制)는 마땅히 옛 예를 따라야 한다. 이것 역시 예를 아껴서 양을 보존해 두는 뜻이니, 망녕되이 고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상복도식에서 할아버지가 적손(嫡孫)을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문] 상복도식의 제복경중지의조(制服輕重之義條) 아래에 나오는 소주(小註)에 이르기를,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는다. 만약 전중(傳重)한 경우에는 역시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주소(注疏)에 나오는 여러 설과 합치되지 않은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위의 글에서 인용한 소(疏)에 나오는 설과 《의례》 상복의 부장기(不杖期)에 대한 소 및 《가례》에서 말한 뜻으로 추론해 보면, 양씨(楊氏)의 설이 잘못된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네. ○ 《의례》 상복의 부장기조에 이르기를, “할아버지가 적손을 위해서 입는 복이다.[爲嫡孫]”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적자가 죽어서 적손이 승중(承重)하였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는 적손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장자는 아버지를 위해서 참최복을 입으며, 아버지 역시 참최복을 입는다. 적손이 승중하였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참최복을 입으나, 할아버지는 그를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 보복(報服)으로 참최복을 입지 않는 것은 부자간의 관계는 일체(一體)이나 할아버지는 손자에 대해서 본디 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것에 의거하여 본다면, 할아버지는 손자를 위해서 본디 대공복을 입으나, 전중을 하였기 때문에 가복(加服)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이다. 주자의 《가례》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즉 양씨가 이른바 ‘역시 삼년복을 입는다.[亦三年]’고 한 것은 필시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후사가 된 바의 증조와 고조를 위해서는 승중복(承重服)을 입는다. [문] 《가례》의 참최조(斬衰條)에는 단지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가 후사가 된 바의 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것이요, 후사가 된 바의 할아버지를 승중한 자가 할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것이다.”라고만 나오고, 증조와 고조에는 미치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어떤 사람이 불행하여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어 증조와 고조를 승중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조처하여야 합니까? 양씨의 주에서도 이런 경우를 보충해 넣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후사가 된 바에 대해서는 자식과 같이 하는 법이니, 오복(五服)의 친족에 대해서는 모두 똑같이 복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혹 나오기도 하고 나오지 않기도 하니, 혹 미루어 나가지 못하는 의리가 있는 것입니까? 상고하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자최삼년조(齊衰三年條)에 대해서 양씨가 주를 보충해 넣으면서 단지 ‘후사가 된 바의 처에 대해서는 자식과 같이 한다.’고만 하고, 후사가 된 바의 조모에 대해서 승중복을 입는 것은 빠뜨렸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후사가 된 바의 증조와 고조에 대한 복을 보충해 넣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본주에서 빠뜨렸는데 또 양씨가 주를 보충해 넣으면서도 빠뜨렸으니, 참으로 괴이합니다. -지사 신식- [답] 《가례》의 참최조를 보면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가 후사가 된 바의 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것이요, 후사가 된 바의 할아버지를 승중한 자가 할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것이다.”라고 하였네. 이미 그의 아들이 되었으면 비록 증조와 고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더라도 이것으로 미루어서 올라가야지,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증조와 고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오복의 친족에 대해서는 모두 복이 있는 것이 마땅하네. 어찌 미루어 나가지 못하는 의리가 있겠는가. 승중한 손자의 아내가 조부모를 위하여 입는 복 및 현손(玄孫)으로서 승중한 손자의 아내와 증손으로서 승중한 손자의 아내가 입는 복 [문] 승중한 손자가 조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그의 아내는 종복(從服)을 입어 삼년복을 입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그의 어머니가 주부(主婦)가 되어 삼년복을 입으니, 그의 아내는 본복(本服)을 입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증손과 현손이 증조와 고조의 상에 승중하였을 경우,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어떤 복을 입어야 합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승중한 자의 아내가 종복을 입어 삼년복을 입으니, 어머니와 할머니는 각자 본복을 입어야 한다.” 하는데, 이 설 역시 어떻습니까? -강석기- [답] 선유(先儒)들이 논해 놓은 바가 자못 많기에 아래에 상세하게 적어 놓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의 하순(賀循)이 이르기를, ‘그 남편이 조와 증조와 고조의 후사가 된 경우에는 그 아내는 종복을 입기를 시부모에 대해서와 같이 한다.’ -자최기년복을 입는다.-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의례》 상복을 보면 “며느리는 시부모를 위하여 부장기(不杖期)를 입는다.”고 하였는데, 송조(宋朝)에 이르러서 비로소 가복(加服)을 입었으므로 하순이 ‘자최기년복을 입는다.’고 한 것이다.- ○ 《통전》에 이르기를, “공호(孔瑚)가 우희(虞喜)에게 묻기를, ‘가령 현손이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 현손의 아내는 종복을 입어 기년복을 입는데, 증손의 아내가 아직 살아 있으면서 겨우 시마복(緦麻服)만 입는다면, 가까운 자는 가벼운 복을 입고 먼 자는 중한 복을 입게 되는바, 정실(情實)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하니, 우희가 답하기를, ‘적자(嫡子)가 있는 경우에는 적손(嫡孫)이 없는 법이다. 또 만약 종자(宗子)의 어머니가 복을 입을 경우에는 종자의 아내는 복을 입지 않는 법이다. -살펴보건대, ‘종자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에는 종자의 아내를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의례》 상복의 전에 나오는 글이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종자의 어머니가 살아 있으면 종자의 아내를 위해서 복을 입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종자의 아내는 종자와 함께 종묘의 제사를 올리는 자이다. 그런데 어찌 부부간에 복을 달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종자는 비록 어머니가 살아 있더라도 마땅히 종자의 아내를 위해서 복을 입어야 하는 법이다. 동쪽에서는 희상(犠象)에 술을 따르고 서쪽에서는 뇌준(罍尊)에 술을 따르는 것은 모름지기 부부가 함께 하여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 모자간에 함께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바, 이것과 서로 같지 않으니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현손이 후사가 되었는데, 만약 그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면, 현손의 아내는 오히려 서부(庶婦)가 되어 전중(傳重)할 수가 없다. 그러니 전중한 데 대한 복은 이치상 시어머니에게 있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송(宋)나라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시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시어머니가 늙었으니, 이는 제사 지내는 일을 자부(子婦)에게 넘겨준 것이다. 할아버지의 복을 입는 데 이르러서는, 자연 시어머니가 적부(嫡婦)가 되니, 이른바 적부가 있으면 적손부(嫡孫婦)는 없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적통(嫡統)으로서 오직 한 분뿐이므로 자부가 아직 살아 있으면 손부 이하는 적부가 될 수 없어서 서부(庶婦)로서의 복을 입는 것이다. 손부 및 증손부와 현손부는 당연히 남편의 복을 따라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한 등급을 낮추어 입어야 하므로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하였다. ○ 《의례경전통해》 상복도식에 이르기를, “본조(本朝) 건덕(乾德) 3년에 좌복야(左僕射) 위인포(魏仁浦) 등이 주의(奏議)를 올려 아뢰기를, ‘삼가 《예기》 내칙(內則)을 살펴보건대, 며느리가 시부모를 섬기는 것은 친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한다고 하였는바, 바로 시부모와 친부모는 똑같은 것입니다. 고례를 보면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이 있는데, 비록 의리에 있어서는 상고할 수 있으나, 후당(後唐)의 유악(劉岳)이 지은 《신서의(新書儀)》를 보면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이는 실로 예에 있어서 마땅한 것입니다. 대개 오복(五服)의 제도는 전 시대에서 보태거나 줄인 것이 이미 많습니다. 더구나 삼년상을 마치는 동안에는 궤연(几筵)이 그대로 남아 있는바, 어찌 남편은 거친 참최복을 입고 있는데 아내가 비단옷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부부는 일심동체인데 슬픔과 즐거움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상으로 따져 볼 적에 실로 지극한 다스림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인이 남편을 위하여서는 삼년복을 입는데, 시부모에 대해서는 기년복만 입고 만다면, 이는 남편은 높이면서 시부모는 낮추는 것이 됩니다.’ 하였다. 그 뒤 정유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하여 한결같이 남편을 따라서 참최 삼년복과 자최 삼년복을 입도록 하였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서는 자최기년복이 정복(正服)이었다. 지금 참최 삼년복을 입는 것은 남편을 따라서 입는 것이다.” 하였다. -《이굴(理窟)》에 나온다. 아래도 같다.- ○ 장자가 또 말하기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해서는 자최 삼년복을 입는다. 적손이 할아버지와 증조와 고조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는 그 아내가 종복을 입는 것도 그와 같다.” 하였다. ○ 《가례》에 이르기를,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위해서는 참최 삼년복을 입고, 시어머니를 위해서는 자최 삼년복을 입으며, 남편이 승중(承重)하였으면 종복을 입는다.” 하였다. 《대명률(大明律)》과 본조(本朝)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같게 되어 있다. ○ 퇴계(退溪) 선생이 정도가(鄭道可)에게 답하기를, “예경을 보면, 증손이 증조를 위하여 승중복(承重服)을 입을 경우에는 자기의 조모나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그 조모나 어머니가 승중복을 입고, 자기의 아내는 승중복을 입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 또 김이정(金而精)에게 답하기를, “죽은 자의 아내가 이미 복을 입었으니, 그 어머니와 할머니는 복을 입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보내온 편지에서는 《가례》 소공조(小功條)에 나오는 ‘적손이나 증손, 현손으로서 마땅히 후계자가 되어야 할 자의 아내는, 그 시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그 시어머니가 당연히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 며느리는 복을 입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는데, 그대의 말이 그럴듯합니다. 이는 아마도 그 남편은 비록 중복(重服)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시어머니나 시할머니가 맏며느리가 입을 복을 입었으면 그 며느리는 복을 입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예법의 뜻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도 함께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가 모두 살아 있으면 손자의 아내가 입어야 할 것 같으며, 두 아내 가운데 한 사람만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입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역시 아주 중대한 것이니, 경솔한 생각으로 가벼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 또 정도가에게 답하기를, “부인이 남편의 조부모에 대해서는, 남편이 승중하였으면 남편을 따라서 종복을 입습니다. 지금 증손과 현손이 증조와 고조를 위해서 복을 입었으니 그 아내는 종복을 입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의 경우에는 아마도 이른바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시어머니가 늙었다.’는 것이어서 이미 주부(主婦)의 일을 며느리에게 넘겼을 것이니, 의심컨대 그럴 경우에는 복을 입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기》 상복소기에는 이르기를, ‘종복이면서 친속의 관계에 있을 경우에는 따를 사람이 죽었어도 상복을 입는다.[屬從者 所從雖沒也 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속종(屬從)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아내가 남편을 따라서 남편의 친족에 대해서 복을 입는 것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에 의거하면, 그 남편이 이미 죽었더라도 그 아내는 역시 복을 입어야 합니다. 대개 전중을 하였더라도 증손과 현손의 복에 이르러서는, 그 이상의 윗대가 죽었을 경우에는 복을 입지 않는 것은 더불어 복이 같아서입니다.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례를 보면, 아내가 남편의 족속을 위하여 입는 상복은 모두 한 등급을 낮추어서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부모를 위해서도 기년복을 입는다. 그런데 송조(宋朝)에 이르러서 위인포(魏仁浦) 등이 주의(奏議)를 올림으로 인하여 비로소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서 한결같이 남편을 따라서 참최 삼년복과 자최 삼년복을 입도록 하였으며, 승중(承重)한 자도 모두 똑같이 입도록 하였다. 《통전》에 나오는 여러 유신(儒臣)들은 모두 송대(宋代) 이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고례(古禮)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다. 승중한 손자의 아내는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종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장횡거(張橫渠)의 《이굴(理窟)》과 주자의 《가례》 및 시왕(時王)의 제도에는 모두 “남편이 승중하였을 경우에는 아내는 종복을 입어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며, 다시 ‘시어머니가 살아 있으면 그렇게 입지 않는다.’는 설이 없다. 예율(禮律)이 아주 분명하니 지금 어찌 주자와 장자가 이미 정해 놓은 설을 버리고서 제가(諸家)들이 끌어대어 보충한 설을 따를 수 있겠는가. 더구나 위인포 등이 논한 바는 실로 지극한 이치가 있으니, 아마도 여기저기서 끌어대어 인용하고 잘못 증명함으로써 대의(大義)를 어지럽혀서는 안 될 듯하다. 지난해에 시회(時晦) 정엽(鄭曄)이, 나만갑(羅萬甲)의 아내인 자신의 딸이 시할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시어머니가 살아 있어서 삼년복을 입지 않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내가 반복해서 논하여 끝내는 삼년복을 입게 하였다. 그리고 열지(說之) 박동열(朴東說)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의 형인 박동윤(朴東尹)의 며느리 역시 삼년복을 입지 않았다. 이에 내가 송조(宋朝)에서 가복(加服)한 뜻과 예율의 뜻을 가지고 말하자, 열지가 추복(追服)하게 하고자 했다고 한다. 현손이 승중한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그 사이의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의 복은 참으로 역시 의심스럽다. 퇴계가 앞뒤로 말한 세 가지의 설이 각각 달라서 어느 하나를 따를 수 없으니, 마땅히 예를 아는 자에게 질정해 보아야 한다. ○ 혹자가 말하기를, “현손으로서 승중하였을 경우에는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 역시 모두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은 말인 듯하다. 대개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조부나 증조부를 위해 승중하였으니, 그들의 아내 역시 종복을 입어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 남편이 죽은 뒤에 그 조모와 증조모가 죽었을 경우에는 그 아내는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이유로 중함을 며느리나 손자며느리에게 떠넘기고서 자신은 단지 본복(本服)만 입는다면, 이는 한 사람의 몸이면서도 자최복과 참최복의 상에 대해서 먼저는 중복(重服)을 입었는데 나중에는 경복(輕服)을 입는 것이다. 따라서 한갓 인정에 있어서 차마 하지 못할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남편이 비록 죽었더라도 전중(傳重)한 의리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해서는 마땅치 않을 듯하다. 설령 비록 지난날에 종복을 입는 아내가 아닐지라도 만약 세대를 잇고 전중을 하는 의리가 없었다면 중간의 대서(代序)가 끊겨 연속되지 않았을 것이니, 그 증손과 현손이 어찌 스스로 승중할 수 있었겠는가. 그 손자와 증손이 비록 이미 죽어서 복을 입지 않았더라도 오히려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가 모두 정통복(正統服)을 입은 다음에야 세대의 차서가 비로소 이어져서 전중한 것이 근본이 있게 된다. 퇴계 선생께서 인용한 “종복이면서 친속의 관계에 있을 경우에는 따를 바의 사람이 죽었어도 상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실로 정확하고도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이니, 아마도 다른 의론을 용납할 수 없을 듯한데 어떨지 모르겠다. 다시금 상세히 상고해 보아야 한다.   임금과 아버지를 잃어버리고서 죽었는지를 알지 못할 경우의 예 [문] 임금과 아버지를 잃어버리고서 종신토록 찾지 못하였을 경우에 변고(變故)에 대처하는 예를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시열- [답] 《통전》에서 이미 논하여 놓았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통전》에 이르기를, “위(魏)나라 유덕(劉德)이 전경(田瓊)에게 묻기를, ‘임금과 아버지를 잃어버리고서 종신토록 찾지 못하였을 경우에 그 신하나 자식 된 자가 혼인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전경이 답하기를, ‘옛날에 허숙중(許叔重)이 이미 이런 가정을 해 놓고 의심하자, 정현(鄭玄)이 논박하여 이르기를, 「만약 종신토록 상복을 벗지 않는다면 이는 후사를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상복을 벗고서 혼인하는 것이 예를 어기는 것이기는 하나 권도(權道)를 따르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또 이르기를, “진(晉)나라의 서선유(徐宣瑜)가 이르기를, ‘정현이 이르기를, 「임금과 아버지가 죽었는데 신하나 자식으로 하여금 종신토록 심상(心喪)을 입게 하는 것은 아주 의혹스러운 것이다. 심상을 입는 것은 옳지만, 종신토록 입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하였으며, 순조(荀組)는 이르기를, ‘아버지의 나이가 수한(壽限) -중수(中壽)는 100세이다.- 에 미치면 상을 치르면서 복을 입고, 종묘를 세우는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이 어른 역할을 한다. 예에 있어서는 종신토록 상복을 입는 제도는 없는 법이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또 이르기를, “환제(環濟)가 의논하기를, ‘《춘추(春秋)》의 의리에는 「아내를 맞아들여 어머니를 봉양하고, 후사를 이어서 종묘의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혼인하여 아내를 들이는 일은 허락해 줄 수 있으나 벼슬을 하는 것은 모름지기 시대가 맑아지기를 기다리게 해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적손(嫡孫)이 상중에 있다가 후사가 없이 죽었을 경우 서손(庶孫)이 대신 입는 복 [문] 적손이 지중(持重)을 하고 있다가 상중에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서 서손이 대신 복을 입는 것은 예에 있어서 어긋나지 않습니까? -송준길- [답] 《통전》에 논해 놓은 것이 자못 상세하여 상고해 볼 수 있네. 다만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아버지가 적자(嫡子)로서 상중에 있다가 죽었을 경우에는 손자가 전중(傳重)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하게 옛일을 인용하여 오늘날을 증험한 말일 것이네. 그러나 그 내력이 상세하지 않아 의심스러운바,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아야 하네. 상복도식에서 논한 바는 유울지의 설과 같지 않은데, 조상부사대복조(祖喪父死代服條)에 나오네. 그것을 준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서막(徐邈)이 말하기를, ‘지금 보건대 여러 손자가 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후사가 없다는 것은 전혀 예의 뜻이 아니다. 예경을 보면, 「종자(宗子)가 외국에 나가 있을 경우에는 서자(庶子)가 대신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한 손자를 섭주(攝主)가 되게 하면 될 것이다. 섭주의 경우에는 본복(本服)이 예전 그대로이다. 예경을 보면, 「대공복을 입어야 할 자가 다른 사람의 상을 주관할 경우에도 오히려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를 지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여러 손자의 경우이겠는가. 만약 기년(朞年)이 되어서 이미 상복을 벗었다면 마땅히 소복(素服)을 입고서 제사에 임하며, 심상(心喪)을 입는 제도에 의거해 3년의 상기를 마치면 된다.’ 하였다. 송(宋)나라 강씨(江氏)가 하승천(何承天)에게 묻기를, ‘갑이란 사람의 아들이 먼저 죽고 갑이 나중에 죽어 갑의 적손(嫡孫)이 전중하였는데, 미처 중상(中祥 소상(小祥))이 되기 전에 적손이 또 죽었을 경우, 차손(次孫)이 있으니 이제 응당 그가 삼년복을 입어야 합니까?’ 하니, 하승천이 답하기를, ‘갑에게 이미 손자가 있으니 삼년복을 입는 자가 없게 할 수는 없다. 내 생각으로는 차손이 의당 지중(持重)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차손은 이보다 앞서 이미 자최복을 지어서 입었으니, 지금 바로 삼년복으로 바꾸어 입을 수 없는바, 중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연복(練服)을 입고 악실(堊室)에 거처하여야 할 것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범선(范宣)에게 묻기를,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은 아들이 없고 작은아들은 아들이 있는바, 누구에게 전중하여야 할지 의심스럽다.」 하니, 범선이 답하기를, 「작은아들의 아들이 응당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 하였다. 이 역시 대략 의거할 만한 것이다.’ 하였다. 배송지(裴松之)가 하승천에게 답하기를, ‘예경을 보면, 「적자이면서 전중하지 않았거나 전중을 하였으나 적자가 아닐 경우에는 모두 가복(加服)을 입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적자를 둘이 되게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범선이 말한 차손(次孫)은 본디 삼년복을 입는 도리가 없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중상(中祥)에 응당 후사가 되어야 할 자처럼 중복(重服)을 입을 수는 없다. 차손이 상주가 되어 3년을 마치는 것은 마땅하지만 삼년복을 입을 수는 없다.’ 하였다. 하승천이 사마조(司馬操)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일에 대해 논하자, 사마조가 이르기를, ‘손자가 현재 살아 있는데도 소원한 친족을 데려다가 후계자로 삼는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 의론이다. 이미 소원한 자를 세울 수 없다면 어찌 끝내 지중하는 자가 없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손자가 어찌 삼년복을 입을 수가 없겠는가. 적자이면서 전중하지 않았거나 전중을 하였으나 적자가 아닐 경우라는 것은 원래 존속친(尊屬親)이 비속친(卑屬親)을 위해 입는 복에 해당되는 것이니, 손자가 할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상복에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유울지가 말하기를, ‘적손이 죽어서 후계자로 삼을 자가 없는 상황에서 지금 할아버지에게 여러 손자가 있을 경우 전중할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차자의 아들이 거연히 지중을 하는 것은, 범선의 의론이 옳다. 적손이 이미 할아버지를 위한 상복을 입었다가 3년의 상기를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이것은 중한 의론이 이미 선 것이다. 반드시 이는 그 복을 마칠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가 적자가 되어 상중에 있다가 죽었을 경우에 손자가 전중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차손이 섭제(攝祭)하는 것은 서막이 답한 바와 같이 하고, 하승천과 사마조가 모두 「이어서 3년 동안 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1]유악(劉岳) : 후당(後唐)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전례(典禮)에 밝아서 명제(明帝)의 명으로 《신서의(新書儀)》 1부를 지었다. [주D-002]위인포(魏仁浦) : 후진(後晉)의 소사(小史)로 시작하여 후한(後漢)의 병방 주사(兵房主事)와 후주(後周)의 정승이 되었고, 송(宋)나라 초기에 우복야(右僕射)까지 되었다. [주D-003]하승천(何承天) :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람으로, 성품이 강퍅하였고, 유사백가(儒史百家)의 서책에 통달하였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주D-004]종종(宗從) : 같은 종족의 사람을 말하는데, 대부분 종조(從祖)나 백숙(伯叔)이나 형제(兄弟)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05]순백자(荀伯子) : 남조 송나라 사람으로, 진(晉)나라에서 벼슬하여 서광(徐廣)과 함께 국사(國史)를 찬수하였으며, 송나라에서는 동양 태수(東陽太守)를 지냈다. 문집(文集)이 있다. [주D-006]병(丙) : 원문에는 ‘景’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병(丙) 자를 휘(諱)하여 쓴 것이므로 병으로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07]침호(綅縞) : 침(綅)은 검은색의 날줄과 흰색의 씨줄로 짠 천을 말하고, 호(縞)는 흰색의 천을 말한다. [주D-008]정체(正體) : 종통(宗統)을 이은 적장자(嫡長子)를 말한다. [주D-009]전중(傳重) : 상제(喪祭)나 종묘(宗廟)의 중한 책임을 손자에게 전한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종법(宗法)에 있어서 적서(嫡庶)의 구별이 아주 엄하여 적자(嫡子)가 죽었을 경우 다른 서자에게 종통을 전하지 않고 바로 손자에게 전하였는데, 이를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전중(傳重)이라 하고, 손자의 입장에서는 승중(承重)이라고 하였다. [주D-010]유울지(庾蔚之) :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의 사람으로, 《예론초(禮論鈔)》를 저술하였다. [주D-011]예를 …… 뜻 : 자공(子貢)이 초하룻날 사당에 고유하면서 희생으로 바치는 양을 없애려고 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사(賜)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하였는데, 이는 예가 비록 폐지되었더라도 희생을 바치는 형식이나마 남아 있으면 오히려 기억할 수 있어서 복고될 수 있거니와, 만약 그 형식마저 없애 버린다면 이 예가 마침내 없어질까 걱정하고 아깝게 여긴 것이다. 《論語 八佾》 [주D-012]하순(賀循) : 진(晉)나라 산음(山陰) 사람으로, 자가 언광(彦光)이다.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관직에 진출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후장(厚葬)을 좋아한 나머지 심지어 음양(陰陽)의 구기(拘忌)를 이유로 상을 치르지 않고 오래도록 방치해 두기까지 하였는데, 하순이 무강 영(武康令)으로 있으면서 이를 모두 금지한 결과 정교(政敎)가 크게 행해졌다. 그 뒤에 태자 태부(太子太傅)와 태상(太常)을 지냈다. 시호는 목공(穆公)이다. 《晉書 卷68 賀循傳》 [주D-013]우희(虞喜) : 진(晉)나라 여조(餘兆) 사람으로, 자가 중녕(仲寧)이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의심나는 예(禮)가 있을 경우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자문하곤 하였다. 《안천론(安天論)》을 찬술하고 《효경(孝經)》을 해석하였으며 《모시(毛詩)》를 주석하고 《지림(志林)》 30권을 저술하였다. [주D-014]본조(本朝) 건덕(乾德) 3년 : 건덕은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연호로, 본조는 송나라를 가리킨다. [주D-015]서막(徐邈) : 진(晉)나라 고막(姑幕) 사람으로, 휘장을 드리우고 글을 읽으면서 성읍(城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사안(謝安)이 천거하여 중서 사인(中書舍人)이 되었으며, 《오경훈의(五經訓義)》를 찬정하였다. [주D-016]악실(堊室) : 상을 당하여 중문(中門) 밖의 추녀 밑에 흙벽돌로 만든 상막(喪幕)으로, 회칠한 채 아무 장식도 하지 않는다. [주D-017]범선(范宣) :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는 선자(宣子)이다. 젊어서부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였는데, 여러 책들을 많이 읽어서 박식하였으며, 특히 예에 밝았다. 《예역논란(禮易論難)》을 저술하였다.     자최(齊衰) 아내가 남편의 계모(繼母)와 적모(嫡母)와 양모(養母)와 자모(慈母)를 위해서 입는 복은 남편의 복을 따라서 입는다. [문] 아내가 남편의 계모와 적모와 양모와 자모를 위해서와 남편이 아내의 적모 등을 위해서 입는 복에 대해서는 예경에 분명한 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국전(國典)의 횡간도(橫看圖)에도 빠뜨리고서 기록해 놓지 않았는데,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강석기- [답] 계모와 적모는 생모(生母)와 차이가 없으므로 별도로 말해 놓지 않은 것이네. 그리고 양모와 자모 역시 남편을 따라서 복을 입는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네. 지난날에 의정(議政) 홍섬(洪暹)의 부인(夫人) 상에 정승 심수경(沈守慶)이 “서자의 아내는 적모에 대해서 복을 입지 않는 법이다.”라고 하면서 복을 입지 못하게 하였네. 그러나 어찌 적모가 죽었는데 서자의 아내가 복을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적자(嫡子)를 위하여 입는 복은 압존(壓尊)되어 낮추는 법이 없다. [문]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서 자최 삼년복을 입는 것은 보복(報服)으로 입는 것입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 복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기년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장자(長子)를 위해서 입는 복은 남편이 살아 있어도 오히려 삼년복을 그대로 입으니, 과중한 점은 없습니까? 의심스럽습니다. -강석기- [답] 《의례》의 소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 상복은 남편이 살아 있는가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모두 삼년복을 입는다. 이것은 아들이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 상복은 압강(壓降)되어 굽히는 의리가 있지만, 부모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 상복의 경우는, 장자는 본디 선조(先祖)의 정체(正體)이므로 압존되어 강복한다는 의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해서 굽힐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수양아들이 입는 복 [문] 이른바 수양(收養)이라는 것은 바로 세 살이 되기 전에 거두어서 기른 자를 이르는 것입니까? 이미 장성하여 데려왔을 경우에는 수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비록 아무런 혈통 관계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이미 거두어서 길렀으면 그 복은 역시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까? -황종해- [답] 이른바 수양이라는 것은 바로 세 살이 되기 전에 거두어서 기른 자를 이르네. 이미 장성한 자를 데려왔을 경우에는 수양이라고 할 수가 없네. 세 살이 되기 전에 거두어서 길렀을 경우에는 비록 아무런 혈통 관계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3년간 복을 입어야 하네. 《통전》에도 이에 대해 말해 놓았네. 중원(中原)의 각로(閣老)인 신시행(申時行)이 다른 사람의 손에 길러졌으므로 삼년상을 하였네. 족속(族屬)은 비록 은혜와 의리가 있더라도 가복(加服)을 입을 수 없다. [문] 족속에게 은혜와 의리가 있을 경우에는 혹 가복을 입어 보답하는 것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장자(張子)의 《이굴(理窟)》에 상세하게 논해 놓았네. 은혜와 의리의 경중을 헤아려서 심상을 입으면 될 것이네. ○ 장자가 말하기를, “한퇴지(韓退之)가 어려서 고아가 되어 형수에 의해 길러졌으므로 형수를 위하여 복의 등급을 높여서 더 입었다. 대개 족속의 상에 대해서는 등급을 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형수의 손에 길러졌을 경우, 은혜가 있다는 이유로 가복을 입는다면, 이는 형을 대우하는 은혜가 지극히 박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없는데 형수에게서 길러지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곳에서 길러지겠는가. 만약 족속의 친족을 위하여 상복을 입으면서 은혜가 있다 하여 등급을 더해 입는다면, 자기에게 은혜가 없는 자에 대해서는 복을 입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옛날에 어떤 선비가 어려서 형수의 손에 길러졌는데, 형수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처럼 섬겼으므로 죽어서 스스로 조처하여 자최복(齊衰服)을 입었다. 그러자 혹자가 선왕(先王)이 제정한 예가 아니라고 고해 주니, 그 말을 듣고는 마침내 그 상복을 벗었다. 그러고는 오직 심상만을 입었으며, 다시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예에 맞다고 하였다.” 하였다.   [주D-001]계모(繼母)와 …… 자모(慈母) : 모(母)에는 팔모(八母)가 있는데, 첩의 아들이 아버지의 정처(正妻)를 일컫는 적모(嫡母), 아버지의 후처(後妻)인 계모(繼母), 생모는 아니면서 자신을 길러 준 자인 양모(養母), 서자(庶子)에게 어머니가 없을 경우 아버지가 아들이 없는 다른 첩에게 자기를 길러 주도록 명한 자인 자모(慈母), 친어머니가 아버지가 죽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재가한 자인 가모(嫁母), 아버지와 이혼하여 집을 나간 친어머니인 출모(出母), 아버지의 첩으로서 아들이 있는 자인 서모(庶母), 어려서 자신에게 젖을 먹여 준 자인 유모(乳母)이다. [주D-002]신시행(申時行) : 명(明)나라 사람으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편찬하였다.     부(附)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 임금의 상과 아버지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을 경우 [문] 국휼(國恤) 중에 사상(私喪)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이유태- [답] 예경을 보면 자못 이러한 경우의 예에 대해서 조처해 놓은 것이 있으나 옛날과 지금은 마땅함이 다르니, 오직 어떻게 잘 참작해서 준행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네. ○ 《예기》 증자문(曾子問)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임금이 훙(薨)하여 아직 설빈(設殯)하기 전에 신하가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집에 돌아가 부모의 시신을 빈(殯)한 뒤에 군소(君所)로 돌아오며, 부모의 상은 은사(殷事)가 있을 때에만 집에 돌아가고 조석(朝夕)의 상식(上食)에는 가지 않는다. 그동안 대부(大夫)의 경우에는 실로(室老)가 조석전(朝夕奠) 등의 일을 섭행(攝行)하고, 사(士)의 경우에는 자손이 섭행한다.’ 하였다.[曾子問曰 君未殯而臣有父母之喪 則如之何 孔子曰 歸殯 反于君所 有殷事則歸 朝夕否 大夫室老行事 士則子孫行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은성(殷盛)의 일’이란 삭망(朔望)의 전(奠)을 올리는 것과 천신(薦新)의 전을 올리는 것을 이른다. ‘실로(室老)’는 가상(家相) 가운데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다. 대부나 사가 임금이 있는 곳에서 은사(殷事)를 할 때나 조석으로 항상 임금이 있는 곳에 있을 경우, 친상(親喪)의 조석으로 올리는 전은 대부의 경우에는 실로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 행하게 하고, 사의 경우에는 자손으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한다.” 하였으며, 소주(小註)에 이르기를, “노씨(盧氏)가 이르기를, ‘임금은 5일 있다가 빈(殯)을 한다. 그러므로 돌아가서 부모를 빈한 다음 다시 와서 임금을 빈할 수 있다. 만약 임금의 빈이 임박하였으면, 돌아가서 부모의 상에 곡하고 다시 와서 임금을 빈하며, 임금을 빈하는 것을 마치면 돌아가서 부모를 빈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임금이 훙하여 이미 설빈하였는데 신하가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조정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 상복을 입고 있으면서, 삭망이나 천신의 전(奠)과 같은 은사(殷事)가 있을 때에만 군소(君所)에 가고, 조석(朝夕)의 전을 올릴 때에는 가지 않는다.’ 하였다. 증자가 다시 묻기를, ‘이미 임금의 빈(殯)을 열었을 때에 신하에게 부모의 상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집에 돌아가서 곡(哭)하고 다시 돌아와서 임금의 장행(葬行)을 보내야 한다.’ 하였다.[曾子問曰君薨旣殯 而臣有父母之喪 則如之何 孔子曰 歸居于家 有殷事則之君所 朝夕否 曰 君旣啓 而臣有父母之喪 則如之何 孔子曰 歸哭而反送君]”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은성(殷盛)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임금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고 조석으로 전을 올리는 데에는 가서 곡하지 않는 것이다. ‘계(啓)’는 계빈(啓殯)이다. ‘귀곡(歸哭)’은 어버이의 상에 곡하는 것이다. ‘반송군(反送君)’은 돌아와서 임금의 장사를 전송하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임금의 상에 이미 발인(發引)하였는데 부모의 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임금의 영구(靈柩)를 장지로 보내는 일을 계속 수행한다. 그리고 임금의 영구를 봉(封) -폄(窆)하는 것이다.- 한 뒤에 곧바로 돌아오고, 그 아들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하였다.[曾子問曰君之喪旣引 聞父母之喪 如之何 孔子曰 遂 旣封 窆 而歸 不俟子]”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수(遂)’는 임금의 상구를 전송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불사자(不俟子)’는 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먼저 돌아오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부모의 상에 이미 발인하여 장지로 가는 길에 올랐을 때 임금이 훙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어버이의 영구를 장지로 보내는 일을 계속 수행한다. 그리하여 하관(下棺)을 마치고 나면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임금의 상에 달려간다.’ 하였다.[曾子問曰父母之喪旣引及塗 聞君薨 如之何 孔子曰 遂 旣封 改服而往]”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영구를 따라 매장하러 갈 때와 끝내고 반곡(反哭)하기 위해 돌아올 때가 아니면 길에서 관을 벗고 문(免)을 하는 경우는 없다.[非從柩與反哭 無免於堩]’고 하였다. 이때에는 효자가 머리에 문을 하고 있다가 문을 제거하고 괄발(括髮)을 하고 맨발 차림을 하고 베로 된 심의(深衣)를 입고서 가며, 감히 사상(私喪)의 복으로 임금의 상에 가지 못하는 법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대부나 사가 부모의 상복을 입고 있으나 곧 제상(除喪)하게 되었을 때 임금의 상을 당하면 부모의 상을 어떻게 제상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임금의 상복을 자신의 몸에 입고 있으면 감히 사복(私服)을 입지 못하니, 어찌 부모의 상을 제상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경우에는 때가 지나도 제상하지 못하는 법이다. 임금의 상을 제상한 뒤에 부모를 위한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은 은제(殷祭)로 거행하는 것이 예이다.’ 하였다. 증자가 다시 묻기를, ‘부모의 상을 제상하지 않고 있다가 나머지 기간 동안 복을 입는 것은 괜찮습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선왕께서 예법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때가 지나간 뒤에는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을 올바른 예로 정하였다.’ 하였다.[曾子問曰大夫士有私喪 可以除之矣 而有君服焉 其除之也如之何 孔子曰 有君喪服於身 不敢私服 又何除焉 於是乎有過時 而不除也 君之喪服除 而後殷祭 禮也 曾子曰 父母之喪不除可乎 孔子曰 先王制禮 過時不擧 禮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임금의 상이 중하고 어버이의 상이 가벼운 것은 의(義)로써 은혜를 끊은 것이다. 임금의 상을 제복(除服)해야만 어버이를 위하여 소상(小祥)과 대상(大祥) 두 제사를 지내 효심(孝心)을 펼 수 있는데, 그 예가 크므로 ‘은(殷)’이라고 한 것이다. 가령 이달에 임금의 상을 제복하였으면 바로 다음 달에 어버이의 소상의 제사를 지내고, 또 그다음 달에 대상의 제사를 지낸다. 만약 친상(親喪)의 소상을 지낸 뒤에 바야흐로 임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뒷날에 임금의 상을 제복한 뒤에야 어버이 상의 대상 제사를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제사를 주관하여야 하는 적자(適子)로서 관직에 있는 자의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서자(庶子)로서 관직에 있을 경우에는 임금의 상을 복상(服喪)하고 적자가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때에 의거하여 친상에 따른 예를 행하는 것이다. 뒷날에 서자가 비록 임금의 상을 제복하였더라도 뒤늦게 제사 지내는 법은 없는 것이다.” 하였다.   부모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을 경우에는 궤연(几筵)은 달리하고 중한 복을 입고 지낸다. [문] 먼저 당한 상의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 나중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궤연을 마땅히 한곳에 설치하여야 합니까? 그리고 상복은 어떤 상복을 항상 입고 있어야 합니까? -송준길- [답] 예경에 분명하게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으니, 상고해서 행하면 될 것이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曾子)가 묻기를, ‘아버지의 상과 어머니의 상이 한꺼번에 있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빈궁(殯宮)을 열 때부터 장사를 지낼 때까지는 전을 올리지 않으며,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빈소로 가서 전을 올린 뒤 손님들에게 빈궁을 열겠다고 고한다.’ 하였다.[曾子問曰幷有喪 孔子曰 自啓及葬不奠 反葬 奠而後 辭於賓]”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어머니의 빈궁을 연 뒤로부터 장사 지내기 위해 상구(喪柩)를 내가려고 하기 전까지는 오직 어머니에게만 계빈(啓殯)에 따른 전을 올릴 뿐으로, 빈궁에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설전(設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사 지낼 때까지는 전을 올리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이는 아버지에 대한 전을 올리지 않는 것을 이른 것이다.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돌아옴에 미쳐서는 곧바로 아버지의 빈궁에 설전하고 빈객에게 내일이 아버지의 빈궁을 열 날짜임을 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사우례(士虞禮)에 이르기를, “남자는 남자 시동을 쓰고 여자는 여자 시동을 쓴다.[男男尸 女女尸]”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우제와 졸곡제에는 남자와 여자는 시동을 구별한다.” 하였다. ○ 《주례》 춘관종백(春官宗伯) 사궤연(司几筵)에 이르기를, “돈(敦)마다 한 궤(几)를 쓴다.[每敦一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에 이르기를, “비록 합장(合葬)하거나 동시에 빈소(殯所)에 있는 경우라도 모두 궤를 달리하여 체실(體實)을 같지 않게 한다. 묘(廟)에서 제사 지낼 적에는 궤를 같이하여 정기(精氣)가 합해지게 한다.” 하였다. -이상은 궤연을 달리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내고 그 우제(虞祭)와 부제(祔祭)는 지내지 않고서 뒤에 장사 지내는 일을 마치기를 기다린다. 또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낼 때에도 참최복을 입는다.[父母之喪偕先葬者不虞祔 待後事 其葬 服斬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낼 때에도 참최복을 입는 것은 중한 상복을 따른 것으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변복(變服)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 상복소기에 또 이르기를, “참최복의 갈질(葛絰)은 자최복의 마질(麻絰)과 같다. 같은 경우에는 모두 겸하여 입는다.[斬衰之葛與齊衰之麻同 皆兼服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질을 줄여 가는 것은 모두 5분의 1씩 줄여 간다. 참최복의 상에 졸곡이 지난 뒤에 받는 갈질은 자최복의 상에 처음 죽었을 때 착용하는 마질과 크기가 같다. ‘겸하여 입는다.’는 것은, 중한 상에 거상하다가 가벼운 상을 만났을 경우에는 마질을 칙용하고 또 갈질을 착용하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 《예기》 간전(間傳)에 이르기를, “참최의 상에 이미 우제와 졸곡을 지내고 나서 자최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가벼운 것은 감싸고 무거운 것은 특별히 남겨 둔다.[斬衰之喪旣虞卒哭 遭齊衰之喪 輕者包 重者特]”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낮은 것은 양쪽에 다 시행할 수 있으나, 존귀한 것은 두 가지로 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참최의 상을 수복(受服)할 때 자최의 초상(初喪)을 만났을 경우, 남자는 허리가 가벼우므로 자최의 요대(腰帶)를 착용하고서 이것으로 참최의 요대까지 겸하여 감싼다. 부인의 경우에는 머리가 가벼우므로 자최의 수질(首絰)을 착용하고서 참최의 수질까지 겸하여 감싼다. 그러므로 ‘가벼운 것은 감싼다.’고 한 것이다. 또 남자는 머리가 중하므로 참최의 수질을 특별히 남겨 두고, 부인은 허리가 중하므로 참최의 요대를 특별히 남겨 둔다. 이것이 무거운 것은 특별히 남겨 두는 것이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두원개(杜元凱)가 운운하였다.”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적손조모상중모망조(嫡孫祖母喪中母亡條)에 나온다. ○ 이상은 지중복(持重服)이다.-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가 죽은 경우와 어머니의 상중에 아버지가 죽은 경우의 복 [문]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殯)을 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그런 경우에도 아버지의 시신이 아직 그대로 있다는 이유로 삼년복을 입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상이 장차 1주년이 되어 가는데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여전히 어머니를 위하여 삼년복을 다 입지 못하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선유(先儒)들의 설을 참고해서 짐작하여 조처할 수 있을 것이네. ○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졸하였으면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다.[父卒則爲母]’라고 한 데 대한 소(疏)를 보면, 곧장 ‘아버지가 졸하고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다.[父卒爲母]’고만 하면 충분할 것인데도 ‘즉(則)’ 자를 써서 말하였다. 이것은 아버지가 졸한 지 3년 이내에 어머니가 졸하였을 경우 그대로 기년복을 입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자 해서이다. 요컨대 아버지를 위한 상복을 벗은 뒤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라야 3년의 상기를 다 펼 수 있으므로, ‘즉(則)’ 자를 써서 그 뜻을 차이 나게 한 것이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씨(庾氏)가 서광(徐廣)에게 묻기를, ‘어머니의 상에 이미 소상(小祥)을 지내고 나서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의 상이 13개월에 이르렀을 때에는 삼년복을 다 펴서 입어야 하는데, 오히려 압굴(壓屈)이 되어 상제(祥祭)를 지냅니까?’ 하니, 서광이 답하기를, ‘살펴보건대, 하순(賀循)이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어 빈(殯)을 하지 못하였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승중(承重)한 적손은 여전히 기년복을 입는다. 이것은 차마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다르게 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를 위한 복을 입는 예를 적용하여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영연(靈筵)을 설치해 두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제유(諸儒)들이 말한 설과 태시(太始) 연간의 제도에는 모두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적손(嫡孫)은 감히 할아버지를 위하여 중한 복을 입지 못한다. 이는 차마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다르게 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날에 어머니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어찌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서 변경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두원개가 운운하였다.” 하였다. -아래의 적손조모상중모망조(嫡孫祖母喪中母亡條)에 나온다. ○ 살펴보건대, 소(疏)에서 말한 설은 비록 이와 같지만, 정례(情禮)로 헤아려 보건대 끝내는 온당치 못한 바가 있다. 만약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을 하지 못하였는데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는 차마 살아 계실 때와 다르게 할 수 없는바, 그래도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을 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로써 미루어 나가, 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상이 장차 끝나게 되었는데 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도 아버지 상의 상기인 3년 이내라는 이유로 그대로 기년복을 입는 것이 과연 정리(情理)에 있어서 합당한 것이겠는가. 두원개의 설은 기년복을 입는다는 뜻이 없는 것 같다. 어떨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상을 장사 지내지 않았을 경우에는 참최복을 그대로 입은 채 일을 하여 어머니의 빈을 행한다. [문]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내되 반드시 참최복을 입고서 지내는 것은,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변복(變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빈을 비록 각각 설치하였더라도 아버지의 상을 장사 지내기 전에는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고서 곡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황종해- [답] 《예기》 상복소기의 설이 분명한바, 이제 그것을 어겨서는 안 되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내고 그 우제와 부제는 지내지 않고서 뒤에 장사 지내는 일을 마치기를 기다린다. 또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낼 때에도 참최복을 입고 지낸다.[父母之喪偕 先葬者不虞祔 待後事 其葬 服斬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장사는 가벼운 상을 먼저 지내고 중한 상을 나중에 지낸다. ‘선장(先葬)’은 어머니를 장사 지내는 것이다. ‘우제와 부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어머니를 위한 우제와 부제를 지내지 않는 것이다. 대개 어머니를 장사 지낸 다음 날에 곧바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아버지를 장사 지내기를 마치고서 아버지에 대한 우제와 부제를 지낸 뒤에 어머니를 위한 우제와 부제를 지낸다. 그러므로 ‘뒤에 장사 지내는 일을 마치기를 기다린다.’고 한 것이다. 제사는 중한 상을 먼저 지내고 가벼운 상을 나중에 지낸다. 어머니를 장사 지낼 때에도 참최복을 입는 것은 중한 상복을 따른 것으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변복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는 길을 가면서는 아버지의 상구가 앞서 가고 하관(下棺)할 적에는 어머니의 상구를 먼저 하관한다. [문] 부모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을 경우, 길을 갈 때와 하관할 때에 장차 어느 분을 먼저 하고 어느 분을 나중에 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운운하였다. -아래의 발인급폄조(發引及窆條)에 나온다.- 아버지의 상중에 조부모가 죽었을 경우에는 대신 복을 입는다. [문] 아버지의 상에 아직 빈을 하지 않았는데 조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떤 복을 입어야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통전》을 보면, 아버지의 상에 아직 빈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고 되어 있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단지 기년복만을 입는다면 이는 상제(祥祭)와 담제(禫祭)가 없게 되는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싶네. 그렇지만 옛사람의 말이 이와 같으니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지는 못하겠네. ○ 《통전》에 이르기를, “하순(賀循)의 상복기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어서 아직 빈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 이미 빈을 한 뒤에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삼년복을 입는다. 이것은 적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를 두고 이른 것이다. 아버지를 빈하지 않았을 경우에 할아버지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은, 아버지의 시신이 아직 있으므로 자식 된 자의 의리에 있어서 아직 중한 일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울지가 이르기를,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동안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 두 상의 상주(喪主)를 겸하여서 해야 한다. 두 개의 여막(廬幕)을 따로 설치하고서 아버지의 상을 위하여 조문하러 왔을 경우에는 아버지의 상을 위해 설치한 여막으로 가서 조문을 받고, 할아버지의 상을 위하여 조문하러 왔을 경우에는 할아버지의 상을 위해 설치한 여막으로 가서 조문을 받아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우희(虞喜)가 이르기를, ‘할아버지를 위한 복을 단지 기년복만 입는다면, 전중(傳重)함이 누구에게 있게 되겠는가.’ 하였으며, 유울지가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을 하지 않았으면, 이는 평소에 살아 계신 때와 같은 만큼, 이는 아버지가 전중한 정식 주인이 되고 자기는 일을 섭행하는 것이 되어, 일에 있어서 빠뜨려진 것이 없게 된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서막(徐邈)이 이르기를,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자는 주인(主人)의 상(喪)에 오히려 주인을 위하여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를 지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더구나 여러 손자들이겠는가. 만약 1주년이 되어서 이미 제복(除服)하였다면 소복(素服)을 입고 제사에 임하고, 심상(心喪)의 제도에 의거하여 3년의 상기를 마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하였다.   할아버지의 상중에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 대신 복을 입는다. [문] 할아버지의 상을 아직 장사 지내지 않았는데 또다시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장손(長孫)은 마땅히 할아버지를 위해 추복(追服)을 입어 삼년복을 입습니까? -송준길- [답] 《의례경전통해》의 설을 근거로 삼을 수 있네. 다만 ‘연제를 지낸 뒤에 죽었으면 심상만을 편다.’고 한 것은, 꼭 맞는 것인가의 여부는 모르겠네. ○ 《의례경전통해》에 이르기를, “본조(本朝)의 석조인(石祖仁)이 말하기를, ‘조부 중립(中立)이 죽었는데, 숙부인 종간(從簡)이 성복(成服)한 뒤에 또 죽고 말았습니다. 저 조인이 적장손(嫡長孫)이니 할아버지를 이어받은 중복(重服)을 입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박사(博士) 송민구(宋敏求)가 의론을 올리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상중에 있다가 죽었을 경우에 적손(嫡孫)이 승중(承重)하는 것은 예령(禮令)에 나와 있는 글이 없습니다. 《통전》을 보면, 진(晉)나라 사람이 묻기를, 「적손이 상중에 죽었을 경우에 제사 지내는 일이 의심스럽다.」 하자, 서막(徐邈)이 말하기를, 「가령 한 손자로 하여금 섭주(攝主)가 되게 하고서 본복(本服)인 기년복(朞年服)을 입게 하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승천(何承天)은 말하기를, 「이미 차손(次孫)이 있으니 복(服)이 없게 할 수는 없다. 다만 차손은 이미 이에 앞서 자최복을 제복(制服)해 입었다. 그런즉 이제 와서 바로 복을 바꾸어 입을 수는 없다. 그러니 모름지기 중상(中祥)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연복(練服)을 입게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배송지(裴松之)는 말하기를, 「차손은 본디 삼년복을 입는 도리가 없는 법이다. 그러니 의당 상주(喪主)가 되어 3년의 상기를 마쳐야 하지만, 삼년복을 입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사마조(司馬操)가 논박하여 이르기를, 「두 설은 분명한 근거가 없다. 그러니 그 복은 삼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대저 밖으로 장사를 치르고 안으로 영석(靈席)을 받들면서 연제(練祭)와 상제(祥祭)와 담제(禫祭)를 지내는 데 있어서 주관하는 자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석조인은 명색이 적손(嫡孫)인데 그 중함을 이어받지 않고서 도리어 「종간이 이미 할아버지의 상복을 입었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살펴보건대, 《의례》를 보면, 「딸이 시집을 갔다가 쫓겨나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집에 있을 경우에는 아버지를 위해서 삼년복을 입는다.[女子嫁反在父之室 爲父三年]」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상을 만나고서 쫓겨난 경우에는 처음에는 자최기년복을 입었으므로, 쫓겨나고서 우제를 지낼 때가 되었을 경우에는 삼년복에 대한 복으로 수복(受服)한다. 이미 우제를 지내고서 쫓겨났을 경우에는 소상(小祥) 때에 역시 그와 같이 한다. 이미 제상(除喪)하고서 쫓겨났을 경우에는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두우(杜佑)는 통달한 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그 뜻을 이끌어다가 앞의 문답(問答)한 말 다음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서막과 배송지의 설은 이미 사마조가 논박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의 복은 재차 제복(制服)해야 함이 분명합니다. 또 상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상복이 있는 법입니다. 이제 석조인은 의당 관직에서 물러나 장사 지냄을 인하여 참최복을 제복해 삼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뒤로 이와 비슷한 경우이면서 이미 장사 지낸 경우에는 재차 제복하게 하여 역대(歷代)의 빠뜨린 제도를 통하게 하소서.’ 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송민구의 의견대로 하게 하였다.” 하였다. ○ 《의례경전통해》에 또 이르기를, “오늘날의 복제령(服制令)을 보면, 적자(嫡子)가 상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어서 적손(嫡孫)이 승중(承重)할 경우, 죽은 것이 소상(小祥)을 지내기 전이면 소상 때 수복(受服)하고, 소상을 지낸 후면 심상(心喪)으로 정을 펴는데, 모두 3년 동안 입고서 제복(除服)한다.” 하였다. -적손이 할머니를 위해 입는 상복과 증조나 고조의 후사가 된 자가 증조모와 고조모를 위해 입는 상복은 이에 준한다.-   조부모 및 부모의 상이 함께 있을 경우에 습렴(襲斂)하는 선후(先後) [문] 조부모 및 부모의 상이 함께 있을 경우에는 어떤 분을 먼저 습렴하고 어떤 분을 나중에 습렴합니까?   조부모 및 부모의 상이 함께 있을 경우에 성복(成服)하는 선후 [문] 조부모 및 부모의 상이 함께 있을 경우에는 어떤 분을 먼저 성복하고 어떤 분을 나중에 성복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두 조항에 대해서는 앞의 습조(襲條) 및 성복조(成服條)에 이미 나왔다.- 적손(嫡孫)이 조모의 상중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 지복(持服)하는 것과 칭호(稱號) [문] 승중(承重)한 자가 할머니의 상에 거상(居喪)하고 있는데, 얼마 뒤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는 어떤 복이 중한 복이 됩니까? 그리고 서소(書疏)를 쓸 적에 자신의 칭호를 뭐라고 씁니까? -송준길- [답] 《통전》에 논해 놓은 바가 있으니 상고해서 행할 수 있을 것이네. ○ 《통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 뇌효청(雷孝淸)이 묻기를, ‘조모를 위하여 지중(持重)하고 있는데 이미 장사를 지낸 뒤에 어머니가 또 죽었을 경우, 복제(服制)를 어떻게 합니까? 별도로 문(門)을 내고 다시 여묘(廬墓)를 세워야 합니까? 그리고 고손(孤孫)이라고 칭하지 않고 고자(孤子)라고 칭해야 합니까?’ 하니, 범선(范宣)이 답하기를, ‘예경을 살펴보건대, 응당 후상(後喪)의 복을 입어야만 하며, 적통을 계승하였으면 제부(諸父)의 위에 있는 만큼, 한 몸으로 양쪽 상의 상주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다시금 별도로 문을 내고 여묘를 세워서 바른 장소에 거처하는 뜻을 잃을 필요는 없다. 조모의 상에 연제(練祭)를 지낼 날짜가 되면 변제(變除)하고 악실(堊室)에 거처하며, 제사를 마친 뒤에 후상의 복을 도로 입으면 된다. 그리고 예경에는 서소(書疏)에서 고자나 고손이라고 칭한다는 글이 없고, 오늘날 행해지는 것이 인정에 있어서 합당하다. 고손이라고 칭하는 것은 전중(傳重)한 명목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니 조모의 복을 다 입은 뒤에 고자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두 상의 자리를 같이하여 여차(廬次)와 악실(堊室)을 오가면서 거처하는 것은 아마도 때에 맞추어 하는 예가 아닐 듯하다. 그러니 후상(後喪)이 처음 발생하였을 때에는 별실(別室)을 여차로 만들고서 두 상의 상주를 겸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두원개(杜元凱)가 이르기를, ‘만약 아버지를 이미 장사 지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고 우제(虞祭) 때에 이르러서 그만 입고, 아버지를 위해 입는 상복을 도로 입는다. 이미 연제(練祭)를 마쳤으면 어머니를 위해 입는 상복을 입는다. 아버지의 상을 제상(除喪)할 수 있으면 아버지를 위해 입는 상복을 입고서 제상한다. 제상을 마치고는 어머니를 위해 입는 상복을 입는다.’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할머니를 이미 장사 지내고서 어머니를 아직 장사 지내지 못했을 경우에는 마땅히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고, 어머니 상을 이미 장사 지냈으면 도로 할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는다. 할머니를 위한 상복이 이미 연제를 지냈으면 도로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는다. 어머니를 위한 상복이 이미 연제를 지냈으면 도로 할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는다. 할머니를 위한 상복을 이미 벗었으면 도로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고서 상을 마친다. 《통전》에 나오는 ‘부모해상지중복조(父母偕喪持重服條)’를 참고해 보면, 칭호(稱號)는 입고 있는 복에 따라서 변경해 고쳐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되는바, 할머니 상에 대한 담제(禫祭)를 지내기 전에는 애손(哀孫)이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전상(前喪)의 대상 때에는 그에 대한 상복을 입고서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문]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전상의 대상을 지낼 때 그 상에 대한 상복을 입고서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운운하였다. -아래의 대상조(大祥條)에 나온다.- 아버지의 상을 마치지 못하였으면 조모상의 담제(禫祭)와 길제(吉祭)를 지낼 수 없다. [문] 할머니의 상과 아버지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을 경우, 아버지의 상을 끝마치지 못하고서도 할머니 상의 담제와 길제를 지낼 수 있는 것입니까?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전상(前喪)의 담제는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제사 지내지 않는다. [문]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전상의 담제를 때가 지나간 뒤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두 조항에 대해서는 아래의 담제조(禫祭條)와 길제조(吉祭條)에 나온다.   아버지가 죽어 상중에 있는데 적손(嫡孫)으로서 승중(承重)하였을 경우에는 의당 상을 마친 뒤에 신주(神主)를 개제(改題)해야 한다. [문] 할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3년의 상기 안에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손자가 제사를 대신 주관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다만 신주를 예전에 제(題)한 것을 그대로 쓸 수 없습니다. 언제 개제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강석기- [답] 아마도 의당 상을 마친 뒤에 개제해야 할 듯하다. 이는 감히 그 어버이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못하는 뜻이다. 그러나 예경에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으니, 감히 옳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주D-001]은사(殷事) :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큰 제사를 말한다. [주D-002]돈(敦) : 기장밥이나 쌀밥, 조밥 등을 담아 두는 기물이다. 세발솥인 정(鼎)과 궤(簋)가 합쳐진 형태로 만들었다. [주D-003]고손이라고 …… 것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稱孤孫 存傳重之日’로 되어 있는데, 《통전》에 의거하여 ‘稱孤孫 存傳重之目’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30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4 댓글:  조회:2895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38권 의례문해(疑禮問解)-4 장기(杖期)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것은 《가례(家禮)》에서 시왕(時王)의 제도로 인해 그렇게 한 것이다. [문]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이 바로 《의례(儀禮)》의 경문(經文)인데, 《가례》에는 이 조항이 빠져 있고, 양씨(楊氏 양복(楊復))의 주(註)에서 첨가해 넣은 조항에도 빠져 있으며, 범중상미제(凡重喪未除) 조항의 아래에 있는 주에서 비로소 언급하였습니다. 이는 《가례》에서 잘못하여 이 조항을 빠뜨린 것이 아닙니까? -강석기(姜碩期)- [답] 당(唐)나라 상원(上元) 연간에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표(表)를 올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경우에도 어머니를 위하여 삼년복을 다 입도록 하기를 청하였는데, 송조(宋朝)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였네. 그러므로 《가례》에서는 그대로 따라서 한 것으로, 글이 빠진 것이 아니네.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 상복은 고례(古禮)에 따라서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 [문] 《가례》에서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과연 시왕의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 예에 있어서 시대에 따라 더하거나 줄이거나 하는 것은 역시 참으로 마땅한 바입니다. 《대명률(大明律)》을 보면, 어머니의 복을 올려서 참최 삼년복으로 하였는데, 이것 역시 시왕의 제도입니다. 오늘날 사대부들이 이미 주자(朱子)가 정해 놓은 《가례》를 준행하지 않고 또 시왕의 제도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유독 이에 대해서만 고례를 근거로 이끌어 대며 단연코 기년복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의례》 상복(喪服)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父在爲母期]” 하였는데, 이 부분의 자하(子夏)의 전(傳)에 대한 소(疏)에 이르기를, “심상(心喪)으로 삼년상과 같이 입는 것은 천고토록 바꿀 수 없는 전례(典禮)이다.” 하였네. 그리고 주자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해서 기년복만 입는 것은, 어머니에 대해서 박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귀함이 아버지에게 있어서 다시 존귀함을 어머니에게 있게 할 수가 없어서이니, 그 뜻이 엄하다고 하겠다.” 하였네. 당(唐)나라 무조(武曌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고종(高宗)에게 청하여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도 어머니를 위해서 역시 삼년복을 입게 하였네. 성인께서 정한 예를 함부로 훼손한 것은 실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데, 송조(宋朝)에서는 그대로 따라 하면서 고치지 않았네. 그 뒤 대명(大明) 때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어머니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상에서처럼 참최 삼년복을 입는 제도가 있게 되었네. 우리나라에서 고례를 따라 하는 것은, 한 집에 존귀한 분이 두 분이 없어서 두 번 참최복을 입을 수 없다는 의리를 가장 잘 얻은 것으로, 성현의 가르침을 준수한 것이고 시왕의 제도를 따른 것이네. 그러니 다시금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 것은 양씨의 의절(儀節)과 《가례》가 다르다. [문] 《가례》의 자최삼년조(齊衰三年條)에 대한 양씨의 주에서는 이미 후사(後嗣)가 된 바의 아내와 아들이 입는 것이라는 내용을 보충해 넣었습니다. 그런데 장기조(杖期條)에 대한 양씨의 주에는 또 ‘후사가 된 바의 아내와 아들이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대개 후사가 된 바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후사가 된 바 어머니를 위해서는 강복(降服)을 입어 기년복을 입는 것입니다. 존형(尊兄)께서는 이미 ‘송나라는 당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해서 아버지가 비록 살아 계시더라도 그 어머니를 위한 상복은 강복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양씨는 유독 후사가 된 바 어머니에 대해서는 강복을 입어 장기(杖期)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양씨 역시 송나라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후의 설이 서로 어긋나는 것입니까? 이것은 아주 크게 의심스러운 것인데도 범범히 보아 넘겼다가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이와 같은 곳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존형께서는 이 책에 대해서 공부를 한 것이 이미 깊고도 오래입니다. 혹 그에 대한 설이 별도로 있는 것입니까?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사 신식- [답] 양씨의 주와 《가례》를 똑같은 예로 보아서는 안 되네. 주자의 《가례》는 시왕의 제도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나, 양씨의 주는 이것과는 다르네. 양씨의 저술로는 《제례도(祭禮圖)》 14권, 《의례도(儀禮圖)》 17권, 《가례잡설부저(家禮雜說附著)》 2권이 있는데, 자못 고례를 위주로 하였네. 그 뒤에 주복(周復)이 양씨가 찬한 바를 《가례》의 각 조목 아래에 써넣었는데, 비록 《가례》와 같지는 않으나 각각 주장하는 바가 있는 것이네. 그러니 또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의례》에 나오는 ‘부재위모(父在爲母)’에 대하여 물으니, 주자가 답하기를, ‘노이빙(盧履氷)의 의론이 옳다. 다만 지금의 조제(條制)가 이와 같은바, 감히 어길 수 없을 뿐이다.’ 하였다.” 하였네. -부재모상상후철궤연조(父在母喪祥後撤几筵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이것으로 본다면 주자는 시왕의 예를 따른데 반해, 양씨가 저술한 바는 당시의 제도에 구애되지 않고서 자못 고례에서 채록하였기 때문에 차이가 있게 된 것이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연제(練祭)를 지내는 제도가 기년복을 입을 때와는 자연 구별된다. [문]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연제를 지낸 뒤에 아들이 입는 복이 조카가 입는 복보다 가벼운 듯한바, 의심스럽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상제(祥祭)를 지낸 뒤에는 궤연(几筵)을 철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문]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13개월이 지나 연제를 지낸 뒤에도 그대로 궤연을 설치해 둡니까?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대상(大祥)을 지낸 뒤에도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는 것은 잘못이다. [문]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대상을 지낸 뒤에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는 것을 폐하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답] 운운하였다. 이상에 대해서는 모두 아래의 소상조(小祥條)와 대상조(大祥條)에 나온다.   심상(心喪)을 입고 있는 동안에 서소(書疏)를 쓰는 식(式) [문]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한 경우에는 15개월이 지나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서찰을 쓸 적에 소(疏)라고 칭하거나 애(哀)라고 칭하는 것은 마땅치 않은 듯하며, 다른 사람이 회답하는 서찰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또한 완전히 일반 사람으로 자처해서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황종해(黃宗海)- [답] 자신에 대해서 심상인(心喪人)이라고 칭하는 것은, 옛글에 그러한 글이 있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길제(吉祭)를 지내지 않는다. [문]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규례에 의거하여 길제를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아래의 길제조(吉祭條)에 나온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길제를 지낼 날짜를 헤아려서 평상시로 회복한다. [문]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이미 15개월이 지나서 담제를 지낸 뒤에는 참으로 27개월이 되어서 재차 담제를 지내서는 안 됩니다. 그런즉 언제 길(吉)한 쪽으로 회복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예경을 보면 담제를 지낸 뒤에 달을 넘겨서 길제를 지낸 다음 길한 쪽으로 회복하는 제도가 있는데, 이 역시 모방해서 행해야 합니까? -강석기- [답] 보내온 글에서 말한 설이 제대로 되었네.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출모(出母)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 [문] 출모에 대한 복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에 차이가 없는 것입니까? -이유태(李惟泰)- [답] 《통전(通典)》에서 이미 논해 놓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의 하순(賀循)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어머니를 위해 입는 상복은 압존(壓尊)이 되기 때문에 굴하여서 기년복을 입는다. 출모에 대한 복을 감하지 않는 것은, 본디 이미 강복하였기 때문에 의리상 재차 압존됨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장조(杖條)에 들어 있는데, 지팡이를 짚는 경우에는 반드시 여묘살이를 하며, 여묘살이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담제를 지낸다.’ 하였다.” 하였다. ○ 《예기(禮記)》 단궁(檀弓)의 주에 이르기를, “출모에 대해서는 담제를 지내지 않는다.” 하였다. -하순의 설과 같지 않은바,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가모(嫁母)를 위해서 입는 복 [문] 아버지가 졸하고 어머니가 개가(改嫁)하였을 경우에는 아들은 어머니를 폄하하는 의리가 없는 법인데, 어찌하여 강복(降服)을 입습니까? -이유태- [답] 《통전》에서 이미 논해 놓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한(漢)나라 《석거의(石渠議)》)에 이르기를, ‘묻기를, 「아버지가 졸하고서 어머니가 개가하였을 경우에는 어머니를 위해서 어떤 복을 입어야 합니까?」 하니, 소 태부(蕭太傅)는 「기년복을 입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후사가 되었으면 복을 입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위현성(韋玄成)은 「아버지가 죽었으면 어머니를 내쫓는 의리가 없는 법입니다. 만약 기년복을 입는다면 이는 아들이 어머니를 폄하하는 것이 됩니다.」라고 하니, 선제(宣帝)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아들에게는 어머니를 내쫓는 의리가 없는 법이니, 위현성의 의론이 옳다.」 하였다. 또 묻기를, 「남편이 죽어서 아내가 어린 아들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개가하였을 경우에 그 아들은 뒤에 어머니를 위해서 어떤 복을 입어야 합니까?」 하니, 위현성은 대답하기를, 「쫓겨난 처의 아들과 똑같이 기년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였으며, 혹자는 말하기를,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서 의리를 끊는 법이 없으니, 응당 삼년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였다. 촉(蜀)의 초주(譙周)는 말하기를, 「계모(繼母)가 개가하였을 경우에도 오히려 기년복을 입는 데 의거하여 보면 친모(親母)의 경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말해 놓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아버지가 졸한 뒤에 어머니가 개가하였을 경우에는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해서 의(義)를 끊은 것이 아니니 어머니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 것이 옳다.」 하였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송(宋)나라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어머니와 아들 사이는 지친(至親)의 관계이니 본디 의리를 끊는 도리가 없는 법으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더라도 오히려 추복(追服)을 입어 기년복을 입는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가 졸하고서 어머니가 개가하였는데도 도리어 복을 입지 않는다면, 이는 아들이 스스로 그 어머니에 대한 의리를 끊는 것이 된다. 이것이 어찌 천리(天理)이겠는가. 의당 출모(出母)와 똑같이 제복(制服)하여야 한다. 진(晉)나라의 제도를 살펴보면, 어찌 25개월의 중한 복을 이런 경우에도 입게 한 것이겠는가. 이는 심상(心喪)으로 25개월복을 입게 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하였다.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가모(嫁母)와 출모(出母)를 위해 입는 복 및 가모와 출모가 아들을 위해 입는 복 [문]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가모와 출모를 위해 입는 복에 대해 예경에서는 복이 없다고 하였으나, 정리(情理)로 보아서는 온편치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가모와 출모를 위하여 복을 입지 않는데, 가모와 출모가 그 아들을 위해 복을 입는 것은 무슨 의리입니까? -이유태- [답] 《통전》 및 《의례경전통해》 상복도식에서 논해 놓은 것이 아주 상세하네. ○ 송나라 인종(仁宗) 경우(景祐) 3년에 태상 박사(太常博士) 송기(宋祁)가 아뢰기를, “집현 교리(集賢校理) 곽진(郭稹)이 태어난 지 몇 년 뒤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어머니 변씨(邊氏)가 다시 왕씨(王氏)에게 개가하였습니다. 지금 변씨가 죽었는데, 곽진이 이에 관직에서 물러나 상복을 입고 있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삼가 보건대 오복제도칙(五服制度勅)의 자최장기강복지조(齊衰杖期降服之條)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졸한 뒤에 개가한 어머니 및 쫓겨난 처의 아들이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다.’고 하였는데, 그 왼쪽에 써 놓은 주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후사가 되지 않은 자의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의 경우에는 가모를 위해서는 복이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시어사(侍御史) 유기(劉蘷)가 상주하기를, “아버지가 졸하였을 경우에 출모를 위하여 장기(杖期)를 입는 것과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의 경우에 복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주공(周公)과 공자(孔子)가 예를 정하면서 애당초 이런 설을 말해 놓지 않았습니다. 지금 박사 송기가 이르기를, ‘곽진이 관직에서 물러나 상복을 입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천성(天聖) 6년에 내린 칙령과 《개원례(開元禮)》의 오복제도와 《개보통례(開寶通禮)》에는 모두 자최강복조례(齊衰降服條例)에 실려 있는데, 송기가 말한 바와 다르지 않습니다. 또 가령령(假寧令)을 보면, ‘어머니가 쫓겨났거나 개가하였을 경우에는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비록 복을 입지 않으나, 역시 심상을 입어 애통한 마음을 편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모두 자신을 낳아 준 자를 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용도각 학사(龍圖閣學士) 왕박문(王博文)과 어사중승(御史中丞) 두연(杜衍)이 지난해에 모두 출모와 가모를 위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상복을 입었습니다. 만약 살아서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가 되었는데 죽은 뒤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되게 한다면, 반드시 명교(名敎)를 손상하게 되어 효치(孝治)에 있어서 하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지(劉智)의 《석의(釋義)》에 이르기를, ‘비록 아버지의 후사가 되었더라도 오히려 가모를 위해서는 자최복을 입는다.’ 하였으며, 초주(譙周)는 이르기를, ‘아버지가 졸한 뒤에 어머니가 개가하였을 경우에는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해서 의를 끊은 것이 아니니 어머니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 것이 옳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공리(孔鯉)의 아내가 자사(子思)의 어머니였으면서 위(衛)나라로 개가하였으므로, 《예기》 단궁에서는 이르기를, ‘자사의 어머니가 죽자 유약(柳若)이 자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생은 성인의 후손이므로 사방 사람들이 선생께서 어떻게 예를 행하는지 볼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어찌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자사가 말하기를, 「내가 무엇을 신중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하였습니다. 또 석포(石苞)가 순우예(淳于睿)에게 묻기를,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출모를 위해서 복을 입지 않는데, 가모는 출모와 같다.’ 하니, 순우예가 자사의 뜻을 인용하여 답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성인의 후예가 가모를 위해 복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 하였습니다. 옛 현인들이 정밀하게 논해 놓은 것을 상세히 살펴보면, 곽진이 상복을 입은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하니, 태상(太常)과 예원(禮院)과 어사대(御史臺)에 조서를 내려 함께 의논해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이에 한림학사(翰林學士) 풍원(馮元)이 상주하기를, “삼가 《의례》, 《예기정의(禮記正義)》, 《개보통례(開寶通禮)》, 오복연월칙(五服年月勅)을 살펴보면, 모두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출모를 위해서는 복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통례의찬(通禮義纂)》에서만은 당(唐)나라 천보(天寶) 6년에 내린 제서(制書)에서 말한 ‘출모와 가모에 대해서는 모두 삼년복으로 상을 마친다.’고 한 것을 인용하였으며, 또 유지의 《석의》에서 말한 ‘비록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일지라도 오히려 출모와 가모를 위해서는 자최복을 입었다가 졸곡(卒哭)을 마친 뒤에는 복을 벗는다.’고 한 것을 인용하여, 두 가지를 다 써 놓아 일이 서로 어긋나게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삼가 상세히 살펴보건대, 천보 6년에 내린 제서에서는 여러 아들들이 출모와 가모를 위해서 입는 복에 대해 말하였으므로 ‘모두 삼년복으로 상을 마친다.’고 한 것이고, 유지의 《석의》에서는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출모와 가모를 위해 입는 상복에 대해 말하였으므로 ‘오히려 자최복을 입었다가 졸곡을 마친 뒤에는 복을 벗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 둘의 이치가 아주 분명한바 각각 이른 바가 있는 것임은 참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더구나 천성(天聖) 연간에 내린 오복연월칙에는 ‘아버지가 졸한 뒤에 어머니가 개가하였을 경우와 쫓겨난 처의 아들은 강복을 입어 장기(杖期)를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천보 6년의 제서에서 ‘출모와 가모에 대해서는 모두 삼년복을 입어 상을 마친다.’고 한 제도는 써서는 안 됩니다. 또 오복연월칙에서는 단지 ‘어머니가 쫓겨나거나 개가하였을 경우에는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비록 복을 입지 않으나 역시 심상(心喪)으로 슬픔을 편다.’고 말하였을 뿐,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만약 전적으로 예경(禮經)의 설을 쓴다면 이는 전혀 복이 없게 되니, 오늘날의 세상에서 시행하는 것은 이치상 온당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장자로 하여금 굽혀서 여러 아들들과 똑같이 장기(杖期)를 입게 한다면 또 조제(條制)에 대해서 다시금 서로 어긋나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후사가 된 아들의 경우에는, 제사를 받들 만한 사람이 없는 경우에 한해서만 《통례의찬》과 유지의 《석의》에 의거하여 자최복을 입었다가 졸곡을 마친 뒤에 복을 벗게 하고 달을 넘겨서 제사 지낸 다음 이어 심상으로 슬픔을 펴면서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의례》와 《예기정의》와 《통전》과 《통례(通禮)》에서 말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출모와 가모를 위해서는 복이 없다.’는 말과 더불어 서로 동떨어지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후사가 되지 않은 여러 아들의 경우에는, 출모와 가모를 위해서 오복연월칙에 의거해 강복(降服)을 입어 자최장기(齊衰杖期)를 입게 하고 역시 관직에서 물러나 심상을 입어 슬픔을 펴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통례》의 오복제도에서 말한 ‘비록 기년복을 입었다가 복을 벗지만 이어 심상을 3년 동안 입는다.’는 것과 형통(刑統)이 말한 ‘쫓겨난 처의 아들은 그 복을 강복하는 것이 합당하며, 모두 25개월 내에는 심상을 입는다.’고 한 것과 그 뜻이 한가지로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논해 본다면, 국조(國朝)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전제(典制)는 옛날의 정례(正禮)와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책에 나오는 치우친 견해에 의한 설로 예경과 합치되지 않는 설들은 모두 끌어대어 써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전에 진달한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지금 이후로는 이와 비슷한 경우에는 모두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요청을 들어주어 심상을 펴게 하라.” 하였다. -상복도식에서 나왔다.- ○ 《통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 속석(束晳)이 묻기를, ‘적자(嫡子)가 출모를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데 출모가 적자를 위해서는 어떤 복을 입습니까?’ 하니, 보웅(步熊)이 답하기를, ‘출모는 적자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 하였다.” 하였다.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출모(出母)가 다시 돌아와서 자신에게 의탁하고 있을 경우에도 복을 입지 않는다. [문]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출모가 다시 돌아와서 자신에게 의탁하고 있을 경우에는 어떤 복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까? -이유태- [답] 《통전》에서 이미 논해 놓았는바, 상고해 볼 수 있네. ○ 《통전》에 이르기를, “위(魏)나라 가평(嘉平) 원년에 위군 태수(魏郡太守) 종육(鍾毓)이 아버지의 후사가 되었는데 출모에게 상주가 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도로 맞이해 와서는 스스로 제복(制服)하여 상복을 입었다. 이에 대해 송(宋)나라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아버지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 출모를 위하여 복을 입지 않는 것은 제사를 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나갔는데 도로 맞이하여 온 것은 자식 된 자의 사사로운 정이다. 적자의 경우에는 제사를 폐해서는 안 된다. 종육이 정에 이끌려서 제복한 것은 예경(禮經)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하였다.   출모(出母)와 가모(嫁母)의 경중(輕重) [문] 출모와 가모는 경중의 차이가 없는 것입니까? -이유태- [답] 주자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주자가 말하기를, “예경에서 가모의 복에 대해서는 말해 놓지 않았는데 율령(律令)에는 있다. 혹자는 그것이 같지 않은 것을 의심하고 있는데, 내가 상고해 보건대, 예경에서 가모에 대해서는 비록 친어머니의 경우에 대해서는 말해 놓지 않았으나 유독 계모의 경우에 대해서는 말해 놓았으며, 또 출모를 위한 상복은 말해 놓았다. 이는 모두가 가벼운 것을 들어서 중한 것을 밝혀 놓은 것으로, 개가한 친모의 경우에는 더욱더 복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또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의 경우에도 단지 출모에 대해서만 복이 없음을 말해 놓고 가모에 대해서는 언급해 놓지 않았다. 이것 역시 가벼운 것을 들어서 중한 것을 구별한 것으로, 가모의 경우에도 응당 복이 있는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주자의 이 설을 근거로 하여 보면 경중의 의리를 잘 알 수 있다. 또 살펴보건대, 《가례》에서는 “아버지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는 가모를 위하여 복을 입지 않는다.”고 하여 이곳과 같지 않다.- ○ 《의례》 상복의 전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출모를 위하여 상복을 입지 못한다.[爲父後者 爲出母無服]” 하였는데, 이에 대해 오상(吳商)이 말하기를, “이는 존부(尊父)의 명이 있기 때문이다. 가모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나가라고 명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출모와 같이 대할 수 있겠는가. 또 출모의 친족에 대해서는 복이 없고 가모의 친족에 대해서는 응당 복이 있다. 그러니 어찌 다시 같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자모(慈母)를 위하여 장기(杖期)를 입고 나서도 오히려 심상을 입는다. 그리고 자모의 친족을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 [문] 자모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으나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장기를 입는데, 나머지 상기 동안 심상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제사 지내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또 자모의 친족에 대해서도 복을 입지 않아야 합니까? -이유태- [답]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와 《통전》에서 이미 논해 놓았는데, 유씨(庾氏)의 설은 의심스러우니 다시금 짐작해서 해야 할 것이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자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입기는 하지만 제사는 손자 아래로는 미치지 않는다.[慈母不世祭]”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자모의 경우에는 천속(天屬)의 사랑이 없으니, 어찌 심상을 입는다는 글이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 두 가지 설을 보면 자모는 단지 양육해 준 은혜만 있을 뿐이니, 그 친족에 대해서는 복이 없는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가 졸하였을 경우에는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 및 여러 아들들이 개가한 적모(嫡母)와 계모(繼母)를 위해서 복을 입는다. [문] 적모와 계모가 개가하였을 경우에 복을 입는 것은 생모(生母)와 같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도 복을 입어야 합니까? -이유태- [답] 《통전》 및 상복도식에서 아주 상세하게 논해 놓았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상복도식에 이르기를, “주(周)나라의 제도를 보면, 아버지가 졸한 뒤에 계모가 다른 곳으로 시집갈 적에 자신이 따라간 경우에는 계모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데, 이는 보복(報服)으로 입는 것이며 끝까지 의리를 다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마융(馬融)은 말하기를, ‘계모가 아버지를 위하여 이미 삼년복을 입고서 상을 마친 뒤에 후부(後夫)에게 개가하여 거듭해서 어머니의 도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따라간 경우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복을 입는 것이며, 계모 역시 아들을 위해서 보복으로 기년복을 입는 것이다. 만약 계모가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삼년복을 다 입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계모를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다. 또 왕숙(王肅)은 말하기를, ‘자신이 계모를 따라가서 양육되었으면 복을 입고, 따라가지 않았으면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황밀(皇密)이 말하기를, ‘경(經)에서 「계모에 대해서는 친모와 같이 한다.[繼母如母]」고 칭한 것은, 아버지의 배필이 된 의리가 친모와 같음을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효자의 마음에 있어서는 감히 다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傳)에서 「계모에 대해서 어째서 친모와 같이 하는가?[繼母何以如母]」라고 한 것은,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출모(出母)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으나 계모에 대해서는 제복(制服)하지 않는 것인바, 이것은 같지 않다는 증거이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당(唐)나라 왕박의(王博義) -어떤 곳에는 왕박예(王博乂)로 되어 있다.- 가 아뢰기를, ‘《의례》 상복에서는 오직 출모에 대해서만은 쫓겨난 처의 아들만 말하였으니, 이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가 아니면 모두 복이 없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적모(嫡母), 계모(繼母), 자모(慈母), 양모(養母)는 모두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가 아닙니다. 개가한 것은 비록 쫓겨난 것에 비해서는 조금 가볍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는 끝내 의를 끊은 것이 됩니다. 계모가 개가한 것은 이미 친모가 개가한 것과는 다르며, 자모와 적모가 개가한 경우는 의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심상을 입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가 아버지가 졸한 뒤에 개가하였을 경우,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복을 입지 않으며, 승중(承重)한 자가 아니면 기년복을 입되 모두 심상은 입지 말게 하소서.’ 하니, 조서를 내려 따라 주었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개원례》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졸한 뒤에 계모가 개가할 적에 자신이 따라갔으면 기년복을 입는데 보복(報服)으로 입는 것이며, 따라가지 않았으면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송(宋)나라의 복제령(服制令)에 이르기를, ‘계모가 개가할 적에 자신이 따라갔으면 자최장기(齊衰杖期)를 입고, 따라가지 않았으면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송나라의 최개(崔凱)가 이르기를, ‘《의례》를 보면 「아버지가 졸한 뒤에 계모가 다른 곳으로 시집갈 적에 자신이 따라간 경우에는 계모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데 보복으로 입는 것이다.[父卒繼母嫁從 爲之服 報]」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현(鄭玄)은 이르기를, 「일찍이 모자간이 되었기 때문에 끝까지 그 은혜를 다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왕숙(王肅)은 이르기를, 「계모가 개가할 적에 따라가지 않았으면 계모를 위하여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다. 내 생각에, 쫓겨난 처의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 것과 아버지가 졸한 뒤에 계모가 다른 곳으로 시집갈 적에 자신이 따라갔으면 계모를 위하여 보복으로 기년복을 입는 것은, 모두 서자(庶子)의 경우에나 그렇게 하는 것이지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모두 복을 입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傳)을 보면, 「존귀한 분과 일체가 되었으므로 감히 사친(私親)의 복을 입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출모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 계모의 경우에 대해서도 말한 것이다. 계모가 개가할 적에 자신이 따라갔을 경우 계모를 위해서 복을 입는 것은 사친의 복을 입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아버지의 후사가 되었으면 복을 입지 못하는 것이다. 정현은 이르기를, 「그 은혜를 끝까지 다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적자와 서자의 경우를 구분해 놓지 않았다. 왕숙은 이르기를, 「개가할 적에 자신이 따라갔으면 그 계모를 위해서 복을 입는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이 두 가지 의론에 대해서 현재 사람들이 의혹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계모는 친모와 같으니 종시토록 친모와 같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개가할 적에 따라갔으면 복을 입고 따라가지 않았으면 복을 입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여겨진다. 그와 같이 하는 것은 친모와 같게 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의 경우에는 복을 입지 않으며, 서자(庶子)들은 모두 복을 입어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왕박의(王博義)와 최개(崔凱)의 설은 계모가 개가할 적에 자신이 따라가지 않았어도 오히려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고, 《개원례》 및 송(宋)나라의 예에는 개가할 적에 자신이 따라가지 않았으면 복을 입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에서 드러내 놓은 것이 이미 단안(斷案)이 되었다. 더구나 《의례》에서는 단지 개가할 적에 따라간 경우에 대해서만 말해 놓고 따라가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는 말해 놓지 않았으니, 따라가지 않았을 경우에는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후사가 된 바 어머니 및 할머니로서 쫓겨난 분에 대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 [문] 후사가 된 바 어머니 및 할머니가 쫓겨났을 경우에는 어떤 복을 입어야 합니까? -이유태- [답] 《통전》에서 논해 놓았네. -혹자는 이르기를, “아내는 쫓겨난 어머니에 대해서도 복을 입으니, 쫓겨난 외조모에 대해서도 복이 있는 것이 명백하다.”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쫓겨난 할머니에 대해서 복을 입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하다.- ○ 《통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 보웅(步熊)이 묻기를,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었는데 후사가 된 바 어머니가 쫓겨났을 경우, 계모가 쫓겨난 경우와 같습니까, 아니면 친모가 쫓겨난 경우와 같습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죽어서 자신이 할아버지의 후사가 되었는데 할머니가 쫓겨난 경우에는 복을 어떻게 입어야 합니까? 할아버지가 죽었거나 살아 계신 데에 따라서 복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하니, 허맹(許猛)이 답하기를, ‘예를 보면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후사가 된 바를 위해서는 아들과 같이 한다.」고 하였으니, 다시 쫓겨난 친모를 위해서 복을 입어 후사가 된 쪽의 제사를 폐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자식과 같이 한다.[爲人後者若子]」고 하였으며, 「계모에 대해서는 친모와 같이 한다.[繼母如母]」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약(若)’ 자와 ‘여(如)’ 자를 쓴 것은, 제복(制服)하는 것은 친모와 같으나 그 정(情)은 다름을 밝혀 놓은 것이다. 계모에 대해서는 친모와 같게 하니, 이는 친모와는 다른 것이며,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자식과 같이 하니, 어머니가 쫓겨났으면 역시 친자와는 다른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쫓겨난 어머니를 위해서 복을 입을 수 없으니 할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의 경우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는 지친(至親)의 관계여서 의(義)를 끊는 도가 없다. 어머니와 아들의 사이가 아닌 경우에는 쫓겨났으면 의가 끊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문에서는 쫓겨난 할머니에 대한 복을 드러내 보이지 않은 것이다. 만약 참으로 복이 없다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살아 계신 데에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1]가모(嫁母) :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다른 사람에게 재가(再嫁)한 친어머니를 말한다. [주D-002]석거의(石渠議) : 한(漢)나라 때에 황실의 장서(藏書)를 보관하던 곳인 석거각(石渠閣)에서 여러 학자들이 예에 관해서 의논한 것을 모아 놓은 《석거예론(石渠禮論)》을 말하는데, 대성(戴聖)이 찬하였으며, 모두 4권이다. [주D-003]초주(譙周) : 삼국(三國) 시대 사람으로, 자가 윤남(允南)이며, 육경(六經)에 밝았다. 《법훈(法訓)》, 《오경론(五經論)》, 《고사고(古史考)》를 저술하였다. [주D-004]가령령(假寧令) : 가령격(假寧格)과 같은 말로서, 관원에게 휴가를 주어 죽은 자의 신령(神靈)을 편하게 모시게 하는 데 대한 격식을 말한다. [주D-005]스스로 …… 입었다 : 원문에는 ‘輒自除服’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통전》 권94에 의거하여 ‘輒自制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왕숙(王肅) : 삼국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가 자옹(子雍)이며, 왕랑(王郞)의 동생이다. 숭문관 좨주(崇文館祭酒)를 지냈으며, 고귀향공(高貴鄕公)을 맞아들여서 난릉후(蘭陵侯)에 봉해졌다. 여러 경전에 대한 주석을 냈는데, 대개 가규(賈逵)와 마융(馬融)의 학설을 중시하였으며, 정현(鄭玄)의 학설을 천시하였다.     부장기(不杖期) 출계(出繼)한 아들을 위해 입는 복이다. [문] 《가례》를 보면 아들로서 다른 사람의 후사로 간 자는 그 사친(私親)을 위해서 모두 한 등급을 강복(降服)하고, 사친 역시 그 아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합니다. 이것에 의거하여 본다면 출계한 아들을 위해서는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것이 마땅한데, 권수(卷首)에 나오는 복제도(服制圖)에는 강복하여 부장기를 입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운운하였다. -위의 가례도복제조(家禮圖服制條)에 나온다.- 출계한 자는 소생친(所生親)의 상에 있어서 복(服)으로써 위차(位次)를 삼는다. 그리고 복을 입을 기간이 다한 뒤에는 제사에 참여하여 곡을 한다. [문]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가 본생친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오히려 형제의 차서로써 위차(位次)를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기년복이 다한 뒤에는 평상복을 입고서 제사에 참여하되 곡하지는 않습니까? -황종해- [답]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가 본생부모(本生父母)의 상에 대해서 역시 복의 차서를 위주로 하여 위차를 정하는 것이 비록 온당치 못하기는 하지만, 예에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네. 복이 다하였더라도 제사에 참여할 경우에는 마땅히 형제들을 따라서 곡하여야 하네. 살아 있을 적에 만나 보지 못한 조부모와 제부(諸父)와 곤제(昆弟)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뒤늦게 상복을 입더라도 자신은 입지 않는다. [문]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본국에 사는 조부모나 제부나 곤제들을 만나 본 일이 없는데, 이들이 죽어서 아버지가 뒤늦게 상복을 입을 경우에도 아들은 상복을 입지 않는다.[生不及祖父母諸父昆弟 而父稅喪 己則否]”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서 “먼 외국에 살고 있어서 미처 알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설이 어떻습니까? [답] 운운하였다. -아래의 태복조(稅服條)에 나온다.- 첩손(妾孫)이 승중(承重)하였을 경우에 소생조모(所生祖母)를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 [문] 첩손이 할아버지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는 그 아버지의 소생모(所生母)를 위해서는 비록 복이 없으나, 역시 응당 승중하여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러니 첩자(妾子)가 어머니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고 다시 심상(心喪)을 입는 예에 의거해서 입는 것이 마땅할 듯한바, 심상으로 3년간 복상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첩모(妾母)에 대해서는 손자에까지 미치지 않으니, 원래 승중하는 의리가 없네. 그런즉 응당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한 것은 그렇지가 않네. 그러나 비록 복이 없기는 하지만 어찌 갑작스럽게 상을 당하지 않은 사람처럼 할 수 있겠는가. 제손(諸孫)들이 기년복을 입는 제도에 의거하여 심상을 입는 것처럼 하면 될 것이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자가 남편은 없고 딸만 있을 경우에는 자식이 없는 것으로써 논하지 않는다. [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자가 남편과 자식이 없는 경우[女適人而 無夫與子]’라고 한 곳에서의 ‘자(子)’ 자는 아들과 딸을 통틀어서 말한 것입니까? 만약 딸만 있을 경우에는 자식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까? -황종해- [답] 딸이 있을 경우에는 자식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되네. 남편과 자식이 없는 경우에도 그 부모를 위해서는 오히려 기년복을 입는다. [문] 여자가 남편과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마땅히 그 친부모를 위해서는 본복(本服)을 다 입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부모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송시열(宋時烈)- [답] 《의례》의 소로써 본다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딸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는 경우 비록 친정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남편과 끊어진 것은 아니므로 친부모를 위해서는 오히려 기년복을 입는 법으로, 시부모가 있고 없고는 마땅히 말할 것이 아니네. ○ 《의례》 상복의 부장기장(不杖期章)에 이르기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고(姑), 자매(姉妹), 딸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는 자에 대해서 입는 복이다. 고와 자매는 보복(報服)을 입는다.[姑姉妹女子子適人無主者 姑姉妹報]”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이러한 따위의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으면 이미 낮추어서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데에 해당되는데, 비록 불쌍하게 여겨 기년복을 입기는 하지만, 남편에게서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의복(義服)의 아래에 있는 것이다. 딸에 대해서는 보복을 입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딸의 경우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으면 대공복을 입으나, 돌아와서는 부모를 위해서 저절로 오히려 기년복을 입는다. 이에 보복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으므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고와 자매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으면 조카와 형제를 위해서 대공복을 입으며, 조카와 형제는 그를 위해 강복을 입어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서로 간에 기년복을 입으므로 보복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가례》의 부장기조(不杖期條)에 나오는 계모(繼母)는 가모(嫁母)의 오자(誤字)이다. [문] 《가례》의 부장기조에 ‘가모와 출모 및 아버지가 졸한 뒤에 계모가 재가할 적에 자기가 따라간 자가 입는 복이다.[嫁母出母及父卒繼母嫁而己從之]’라고 한 것은, 바로 아들이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 복입니다. 그리고 부장기조에 나오는 ‘가모와 출모가 그의 아들을 위해서 입는 복이다.[嫁母出母爲其子]’라고 한 것과 ‘계모와 가모가 자기를 따라온 전 남편의 아들을 위하여 입는 복이다.[繼母嫁母爲前夫之子從己者]’라고 한 것은, 바로 어머니가 아들을 위하여 입는 복입니다. 위에서 말한 가모는 소생(所生)의 어머니로서 아버지가 졸한 뒤에 개가한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말한 가모는 소생이 아닌 계모로서 아버지가 졸한 뒤에 개가한 계모인데, 자기를 따라온 전 남편의 아들에 대해 어머니가 입는 복입니다. 소생의 가모는 자연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데 기년복을 입으므로 강복이라고 한 것입니다. 소생이 아닌 계모가 개가하였을 경우에는 마땅히 복이 없어야 하는데, 자기가 따라갔을 경우에는 의(義)로써 기년복을 입으므로 의복(義服)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뜻이 저절로 구별되는데, 존형(尊兄)께서는 이를 같게 보아 가모가 거듭 나온 것을 의심하였으니,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모름지기 팔모도(八母圖)와 아울러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존형이 말한 설과 같다면, 개가하지 않은 계모의 경우에는 도리어 아들을 위하여 복을 입지 않아야 한단 말입니까? -지사 신식- [답] 부장기조에서 ‘계모와 가모[繼母嫁母]’라고 한 곳에서의 아래에 있는 ‘모(母)’ 자는 분명히 ‘이(而)’ 자의 오자이네. 이미 계모라고 하였는데 또 가모라고 한다는 것은 문리가 이루어지지 않네. 보내온 글에서 ‘이곳에서의 가모는 소생이 아닌 계모를 말한다.’ 하였는데, 모르겠네만, 소생의 계모가 있을 수 있는가? 자매(姊妹)간에 이미 시집갔을 경우에 서로 간에 부장기복을 입는다. [문] 《가례》의 기복조(期服條)를 보면 양씨(楊氏)가 ‘자매가 이미 시집갔을 경우에도 서로 간에는 기년복을 입는다.’고 더 첨가해 넣은 것은 의심스럽습니다. -송시열- [답] 비단 양씨의 설뿐만 아니라, 주자의 설 역시 그러하여 《의례》와 같지 않으니, 몹시 의심스럽네. 일찍이 이에 대해서 정경임(鄭景任)에게 물어보았더니, 그가 답하기를, “나의 부족한 견문으로도 항상 의심스럽게 여겨 왔는데, 고명(高明) 역시 의심하고 있었군요. 다만 자매간에 모두 시집갔을 경우에는 재차 강복하지 않는다고 듣기는 하였습니다만, 역시 그 설이 나온 출처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단지 이치상으로 볼 때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였네. ○ 《의례》 상복의 대공장(大功章)에 이르기를, “딸로서 시집간 자와 시집가지 않은 자 -주에 이르기를, ‘시집가지 않은 자는 이미 계례(笄禮)를 올리고서 시집가는 것을 허락받은 자이다.’ 하였다.- 가 세부모, 숙부모, 고, 자매를 위해서 입는 복이다.[女子子嫁者未嫁者 爲世父母叔父母姑姉妹]”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대부의 아내가 고와 자매와 딸로서 대부에게 시집간 자를 위해 입는 복이다.[大夫之妻爲姑姉妹女子子嫁於大夫者]”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두 딸이 각각 출가하였을 경우에는 재차 강복하지 않는다. 만약 두 남자가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도 그와 같다.” 하였다. ○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를, “주자가 말하기를, ‘자매는 형제에 대해서 이미 시집갔으면 강복한다. 그러나 자매에 대해서는 일찍이 강복하지 않는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자매는 형제에 대해서 시집가지 않았으면 기년복을 입고, 이미 시집갔으면 강복을 입어 대공복을 입는다. 자매간에는 도리어 강복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출계(出繼)하였을 경우에는 그 복을 다 마치도록 입는 것이 마땅하다. [문] 어떤 사람이 기년복이나 대공복을 입고 있는 중에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는 예에 의거하여 한 등급을 강복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그렇지 않네. 《통전》에서 이미 논해 놓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오복(五服)의 복제(服制)는 모두 처음 제복(制服)하는 날에 정해지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대공(大功)의 말(末)에는 시집갈 수 있으며, 이미 시집가서는 반드시 5개월 만에 그 복을 벗어서는 안 된다. 남자는 기년복에 포함될 경우, 출가하여 족인(族人)의 후사가 되었더라도 9개월 만에 복을 벗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모든 상복은 처음에 제복할 때를 기준으로 하여 단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부인의 경우에만 남편의 친족을 위해 입는 상복은 쫓겨나서 의(義)가 끊어졌을 경우 집을 나간 뒤에 복을 벗을 수 있다.’ 하였다.” 하였다.   다른 사람의 후사로 나간 자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본종(本宗)의 사람을 위해서는 재차 강복한다. [문] 출계한 자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본종의 친족을 위해서 재차 강복합니까? -송준길- [답] 재차 강복하는 것이 《의례》에 나오네. 만약 한 등급만 강복한다면 다른 형제와 차이가 없게 되네. ○ 《의례》 상복의 소공장(小功章)에 이르기를,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자매를 위해서 소공복을 입는다.[爲人後者爲其姉姉適人者]” 하였다.   여군(女君 남편의 적처(嫡妻))이 죽은 뒤에 첩(妾)이 여군의 친족을 위하여 입는 복 및 여군이 첩을 위하여 입는 복 [문] 첩이 여군을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데 여군은 첩을 위해 복을 입지 않습니다. 그리고 첩은 또 여군의 친족을 위해서 복을 입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종복의 경우에는 따를 대상이 죽으면 입지 않아도 된다.[從服者 所從亡則已]”라고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여군이 비록 죽었더라도 첩은 오히려 여군의 친족을 위하여 복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예가 행할 만한 것입니까? -송준길- [답] 여군은 첩에 대해서 복이 없네. 《의례》 상복의 주에 이르기를, “첩은 여군의 친족을 위하여 복을 입는다.” 하였으며, 《통전》에서도 논해 놓았네. 여군이 죽었을 경우에도 여군의 친족을 위하여 첩이 복을 입는 것은, 소(疏)의 설에는 비록 그와 같이 되어 있지만 예경에는 보이지 않으니, 의심스럽네. ○ 《의례》 상복의 주에 이르기를, “여군이 첩에 대해서 보복(報服)을 입는 것은 중(重)하고 강복을 입는 것은 혐의스럽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순눌(荀訥)이 유계지(劉係之)의 물음에 답하기를, ‘예경을 보면 첩이 여군의 친족에 대해서 여군과 같이 종복(從服)을 입는다.’ 하였는데, 이것은 근신(近臣)이 임금이 복을 입으면 종복하는 것과는 같으나, 임금의 어머니 쪽 친족을 위해서 복을 입는 것과는 같지 않다.” 하였다.   할아버지의 상에 기년(期年)이 지난 뒤의 복색(服色) [문] 지금 어떤 한 사인(士人)이 조부모의 상을 당하여 기년이 다하도록 소식(素食)을 하고 바깥채에 거처하기를 한결같이 상인(喪人)과 같이 하였으며, 복을 다 입고 난 뒤에도 역시 이르기를, “아버지께서 중한 상복을 입고 계시는데 자식 된 자가 어찌 감히 순전한 길복(吉服)을 입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백대(白帶)에 소복(素服)을 착용하고 지내면서 연악(宴樂)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뜻이 아주 좋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은 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성인께서 이른바 ‘맹헌자(孟獻子)는 일반 사람들보다도 한 등급 위로구나.’라고 한 것이니, 공경할 만하네. 백대와 소복 차림 역시 호관(縞冠)과 현무(玄武)의 뜻을 얻은 것이네. 그러나 대(帶)는 검은색을 쓰는 것이 중도를 얻는 것이 될 듯하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의 설이 옳네.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과거(科擧)에 응시하는 것 [문] 조부모의 상중에 과거에 응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자(程子)가 그르다고 하였으면서도 형제의 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역시 두 상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형제의 상에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온당치 못한 듯한데, 오늘날에는 선비 된 자들이 조부모를 위한 기년복을 입고 있는 동안이나 형제의 상에 장사를 지내기 전에도 모두들 과거에 응시하고 있습니다. 예경과 율문에 비추어 보면 과연 온당치 못한 점은 없습니까? 혹자는 외조부의 장사를 치르기 전에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우복은 답하기를, “비록 똑같이 기년복의 상이기는 하지만 어찌 차등이 없겠는가. 그러나 장사를 치르기 전에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 외조부의 경우에도 장사를 치르기 전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주 부자(朱夫子)가 이회숙(李晦叔)에게 답한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네. 정우복이 말한 것이 제대로 되었네. ○ 이회숙이 묻기를, “장자(長子)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고 백숙부와 형제를 위해서는 모두 기년복을 입는데, 이런 경우에는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선비인 자는 과거에 응시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관직에 나아가고 과거에 응시할 때에는 길복(吉服)을 입어야 합니까, 아니면 최복(衰服)을 입어야 합니까? 만약 길복을 착용하게 된다면 또 오복제도(五服制度)에 실려 있는 날짜와 서로 어긋나게 됩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이러한 일은 단지 조정에서 정한 법령을 준행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마음속으로 스스로 편안치 못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자 한다면, 응시하지 않아도 괜찮다. 관직에 있을 경우에는 법에 있어서 해임되거나 파면될 사유가 없다. 이천(伊川) 선생의 간상학제(看詳學制)에도 슬픔을 무릅쓰고 일상을 지키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다만 비록 어쩔 수 없어서 최복을 벗는다고는 하더라도 역시 갑작스럽게 길한 쪽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음악을 듣는 것 [문]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음악을 듣지 않는 것에도 경중(輕重)과 친소(親疏)에 따른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예의 뜻에 맞게 됩니까? -송준길- [답] 《예기》 잡기(雜記) 및 주자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상복을 입고 있으면 그 집에 있는 아들은 음악을 가까이하지 않고, 어머니가 상복을 입고 있으면 어머니에게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음악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아내가 상복을 입고 있으면 아내 곁에서는 음악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또 대공복을 입은 사람이 찾아올 때는 금슬 등의 악기를 멀리 치운다. 소공복을 입은 사람이 찾아올 때는 음악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父有服 宮中子不與於樂 母有服 聲聞焉不擧樂 妻有服不擧樂於其側 大功將至 辟琴瑟 小功至 不絶樂]”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궁중자(宮中子)’는 아버지와 같은 집에 사는 아들이다. 명사(命士) 이상이라야 다른 집에 산다. ‘음악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깥에 있으면서 음악을 듣게 되었을 경우에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다른 집에 있을 경우에는 안 그래도 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가벼운 상복을 입은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중한 상복을 입었을 경우에는 아들 역시 상복이 있으니 음악을 가까이할 수 있겠는가. 소리가 들리는 곳은 더 가까운 곳이며, 곁은 더욱더 가까운 곳이니, 경중의 절도가 이와 같은 것이다. ‘대공복을 입은 사람이 찾아온다’는 것은, 대공복을 복상(服喪)하는 자가 장차 찾아올 것이라는 말이다. 그를 위하여 금슬 등의 악기를 치우는 것도 복상하는 자의 슬픔을 돕는 뜻이다. 소공복을 입은 자는 가벼운 상복을 입은 것이므로, 그를 위해서는 음악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며, 진씨(陳氏)가 이르기를, “악기가 금슬에만 그치지는 않으나, 금슬은 항상 곁에 두는 것이어서 말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같은 자리에 있는 손님 가운데 노래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여야 한다.” 하였다.   [주D-001]호관(縞冠)과 현무(玄武) : 호관은 흰색의 관을 말하고 현무는 관 밑에 검은색 테를 두르는 것으로, 호관은 흉복(凶服)이고 현무는 길복(吉服)에 해당되는데, 아버지가 상중에 있을 때 아들이 관례를 올리면서 길흉(吉凶)이 상반(相半)되도록 이런 관을 쓴다.     자최 삼월(齊衰三月) 대종(大宗)의 아들과 대종의 며느리를 위해 입는 복 [문] 대종이 있고 소종(小宗)이 있는데, 이른바 ‘종자(宗子)를 위해서는 삼월복(三月服)을 입는다.’고 한 것은 어떤 종자를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까? [답] 《예기》 대전(大傳)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대전의 주에 이르기를, “무릇 대종의 족인(族人)인 자들은 종자와 5세가 지나서 절족(絶族)이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종자를 위하여 자최 삼월복을 입는데, 어머니와 아내도 그렇게 한다. 소종이 된 자는 본친(本親)의 복으로써 복을 입는다.” 하였다.     대공(大功) 대공복(大功服)에 이르러서 비로소 부판(負版)과 벽령(辟領)과 최(衰)를 제거한다. [문] 《가례》를 보면 대공복에 이르러서 비로소 부판과 벽령과 최를 제거하는데, 양씨(楊氏)와 구씨(丘氏)가 논한 바가 같지 않습니다. 이제 어떻게 절충해야겠습니까? -황종해- [답] 운운하였다. -위의 성복조(成服條)에 나온다.- 출계(出繼)한 자는 본친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자를 위해 재차 강복(降服)한다. [문]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가 본친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자를 위해서 입는 상복은 한 등급을 강복합니까, 아니면 두 등급을 강복합니까? -정랑 오윤해(吳允諧)- [답] 운운하였다. -위의 부장기조에 나온다.- 출계한 자의 아내는 남편의 본친을 위해 재차 강복한다. [문] 아내가 남편을 따라서 복을 입을 경우에는 모두 남편보다 한 등급을 강복하는 것이 예입니다.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의 아내가 남편의 본친에 대해서 입는 상복은 또다시 한 등급을 강복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두 등급을 강복하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네. 시어머니가 적부(嫡婦)이면서도 그 남편이 시아버지의 후사가 되지 못한 며느리를 위하여 입는 복 [문] 《가례》의 소공조(小功條) 아래에서 양씨가 말하기를, “‘시어머니가 적부이면서도 그 남편이 시아버지의 후사가 되지 못한 며느리를 위하여 입는다.’는 내용을 덧붙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시부모가 적부에 대해서 입는 복은 본복(本服)이 기년복인데, 어찌하여 소공복이라고 한 것입니까? -송시열- [답] 고례를 살펴보면, 중자부(衆子婦)에 대해서는 소공복을 입고, 적부에 대해서는 대공복을 입으며, 형제 아들의 아내에 대해서도 대공복을 입는다. -주자가 말하기를, “형제 아들의 아내에 대해서는 정경(正經)에 나와 있는 글이 없으나, 옛 제도에는 대공복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그리고 《예기》 상복소기의 주에 이르기를, “남편에게 폐질(廢疾)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사유가 있거나, 혹 죽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전중(傳重)을 받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시부모가 서부(庶婦)에 대해 입는 복으로써 입는다.” 하였네. 양씨가 더 보탠 ‘적부이면서도 그 남편이 시아버지의 후사가 되지 못한 며느리를 위해서는 소공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근거로 하여 넣은 것이네. 다만 당(唐)나라 태종조(太宗朝)에 위징(魏徵)이 중자(衆子)의 아내에 대해서는 형제 아들의 아내에 대해서와 똑같이 대공복을 입는 것으로 올렸으며, 또 적부에 대해서는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올렸네. 그러니 이제 적부에 대해서는 그가 비록 제사를 주관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중자의 아내와 똑같이 대공복을 입는 것이 옳을 듯하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자가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마땅히 아버지의 후사가 될 자를 위해서 강복해서 입는다. [문] 《가례》의 부장기조를 보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될 형제를 위해서 입는 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비록 살아 계시더라도 역시 기년복을 입는 것입니까? 강복하지 않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의례》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대공장(大功章)에 이르기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딸이 여러 형제들을 위해서 입는 복이다.[女子子適人者 爲衆昆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鄭氏)의 주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모든 형제에 대해 똑같이 복을 입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기(記)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자는 귀종(歸宗)하는 의리가 있어서 이 집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강복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할아버지가 차손(次孫)으로서 승중(承重)한 손자를 위해서 입을 경우에는 본복(本服)을 입는다. [문]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적자(嫡子) 및 적손(嫡孫)이 모두 죽어 차손이 승중하게 되었는데 이 차손이 또 죽었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는 적손에 대해서 입는 복으로 입어 기년복을 입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단지 본복인 대공복만 입습니까? -송준길- [답] 양씨의 상복도식(喪服圖式)에서 이미 논해 놓았네. ○ 상복도식에 이르기를, “범선(范宣)이 말하기를, ‘서손(庶孫)이 적손과 다른 것은, 단지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고, 할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과 손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복은 다르게 할 수 없다.’ 하였다.” 하였다.   대공복의 상을 당해서는 업(業)을 폐한다. [문] 업을 폐한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지금 보내온 글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고서야 주자가 가르친 뜻을 알았으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어찌 대공복의 상에 일을 폐하는 것은 과중하다는 이유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사 신식- [답] 업을 폐한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주자가 이미 정해 놓은 설이 있으니 또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대공복의 상에 생업을 폐하는 것은 실로 과중하네.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고례에 ‘기년복의 상과 대공복의 상에는 음악을 듣지 않고, 소공복의 상과 시마복의 상에는 음악을 듣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대공복의 상에 업을 폐하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합당한 것이네. ○ 주자가 말하기를, “거상(居喪)하는 동안에는 업을 폐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업(業)은 순거(簨簴) 위에 있는 판자인바, 업을 폐하였다고 하는 것은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을 이를 뿐이다. 《주례(周禮)》에 나오는 사업(司業)이란 것도 음악을 맡은 자이다.” 하였다.   대공복 이하의 상에서는 윤달을 헤아린다. [문] 무릇 상에서 기년복 이상의 경우에는 윤달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공복 이하의 상에는 이미 달로 헤아리는바, 윤달도 헤아려야 할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강석기- [답] 정현(鄭玄) 및 사자(射慈)가 분명하게 말해 놓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정현이 이르기를, ‘달로 헤아릴 경우에는 윤달을 헤아리고, 해로 헤아릴 경우에는 윤달이 있어도 헤아리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사자가 이르기를, ‘삼년상과 기년상은 해로 헤아려서 윤달이 없고, 구월복 이하는 윤달을 헤아린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1]귀종(歸宗) :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자가 의리에 있어서 종가(宗家)로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주D-002]순거(簨簴) : 악기를 걸어 두는 틀로, 순은 가로대를 말하고 거는 세로대를 말한다.     소공(小功) 출모(出母)의 친족에 대해서 입는 복 및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가 본생모(本生母)의 친족을 위해서 입는 복 [문] 어머니가 쫓겨났을 경우에는 어머니의 친족을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어 나간 자는 소생모(所生母)의 친족을 위해서 어떤 복을 입어야 합니까? -송준길- [답] 《의례》의 상복 및 정씨의 설에 의거해 보면, 출모의 친족에 대해서는 응당 복이 없으며,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생모의 친족을 위해서는 한 등급을 강복하는 것이 옳네. ○ 《의례》 상복의 전에 이르기를, “쫓겨난 처의 아들은 그 어머니를 위하여 자최기년복을 입는다. 그러나 외조부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입지 않는다.[出妻之子爲母期則爲外祖父母無服]” 하였다. -《통전》에 이르기를, “보웅(步熊)이 말하기를, ‘출처의 아들은 비록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복을 입지 않으나, 외할아버지는 출처의 아들에 대하여 오히려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오씨(吳氏 오상(吳商))가 말하기를, ‘출모의 친족에 대해서는 복이 없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정씨(鄭氏)가 말하기를, ‘비록 외친(外親)이라고 하더라도 두 개의 통서(統緖)는 없는 법이다.’ 하였다.” 하였다. -이미 후사가 된 쪽의 어머니의 친족을 위해서 복을 입는데, 또다시 생가 어머니의 친족을 위해서 복을 입는다면, 이것은 두 개의 통서가 있게 되는 것이다.-   가모(嫁母)의 친족을 위해서 입는 복 [문] 가모의 친족을 위해서는 복을 입습니까? -송준길- [답] 가모의 친족에 대해서는 예경에 복을 입지 않는다는 글이 없으며, 《통전》에도 말해 놓았네. 다만 《가례》를 보면, 가모에 대한 복과 출모에 대한 복은 차이가 없는데, 유독 그 친족에 대해서는 같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 《통전》에 이르기를, “오씨(吳氏)가 말하기를, ‘가모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나가라고 명하지 않았으니, 가모의 친족에 대해서는 응당 복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계모(繼母)의 친족을 위해서 입는 복 [문] 《가례》를 보면, 어머니가 쫓겨난 뒤에 계모로 들어온 분의 부모와 형제에 대해서는 소공복을 입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죽고 난 뒤에 계모로 들어왔을 경우, 그 계모의 부모와 형제에 대해서 입는 복도 이 예를 준행해야 합니까? 그리고 비록 계모가 죽은 뒤라도 역시 복을 입어야 합니까? -송준길- [답] 어머니가 쫓겨났으면 계모의 부모와 형제를 외가(外家)로 삼으므로 계모가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를 따지지 않고 모두 복을 입는 법이네. 만약 어머니가 쫓겨나지 않았을 경우에는 계모가 비록 생존해 있더라도 계모의 친족을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네. 그리고 첩의 아들의 경우에는 적모(嫡母)의 친족을 위해서 복을 입되, 적모가 죽었을 경우에는 복을 입지 않네. ○ 《예기》 복문(服問)에 이르기를, “어머니가 쫓겨나서 나갔을 경우에는 계모의 친족을 위하여 복을 입는다.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는 어머니의 친족을 위하여 복을 입는다. 어머니의 친족을 위하여 복을 입을 경우에는 계모의 친족에 대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母出則爲繼母之黨服母死則爲其母之黨服 爲其母之黨服 則不爲繼母之黨服]” 하였다. -오상(吳商)이 말하기를, “‘모출(母出)’은 자기의 어머니가 쫓겨난 것이다. ‘모사(母死)’는 자기의 어머니가 죽어서 아버지가 다시 장가든 것이다.” 하였다. ○ 정씨(鄭氏)가 말하기를, “비록 외친(外親)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두 개의 통서(統緖)는 없는 법이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우희(虞喜)가 말하기를, ‘비록 열 명의 계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음 어머니가 되는 사람의 친족에 대해서만 복을 입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외친(外親)으로서 시집간 사람에 대해서는 강복하지 않는다. [문] 외친으로서 시집간 사람에 대해서도 강복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강복하지 않네. 《의례》 상복의 소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오직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만은 본생모의 친족을 위해서는 강복하여야 하네. -이에 대한 설이 위에 나온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외친에 대해서는 비록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다고 하더라도 강복하지 않는다.” 하였다. ○ 상복의 소에 또 이르기를, “외친에 대해서는 출가하고 안 하고에 따라서 강복하는 법이 없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우희(虞喜)가 말하기를, ‘대부(大夫)가 사(士)가 된 외친(外親)을 위해서는 존귀함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역시 강복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소공복의 태복(稅服) [문] 소공복에 대해서도 태복을 입습니까? [답] 운운하였다. -아래의 태복조(稅服條)에 나온다.- 내친(內親)과 외친(外親) 양쪽을 다 겸하고 있는 경우에 그 복제(服制)는 마땅히 더 친한 쪽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문] 지금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의 몸이면서 내친과 외친을 양쪽 다 겸하고 있을 경우, 칭호와 복제를 장차 존귀하고 중한 것을 위주로 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이유태- [답] 《통전》에서 이미 논해 놓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한 사람의 몸이면서 내친과 외친을 양쪽 다 겸하고 있는데, 존비(尊卑)의 등급을 논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자기의 친족을 정(正)으로 삼아야 하는바, 소목(昭穆)을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제(服制)를 논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친한 것을 우선으로 하여야 하는바,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정을 없애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혹 족숙(族叔)이면서 동시에 이제(姨弟)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와 같은 따위가 모두 이것이다. 《예기》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남편이 그 집안에서 아버지의 항렬에 속하면 그 아내는 모두 어머니의 항렬이고, 남편이 그 집안에서 아들의 항렬에 속하면 그 아내는 모두 며느리의 항렬이다.[夫屬父道妻皆母道 夫屬子道 妻皆婦道]」 하였는데, 이는 부부는 본디 친족 관계가 없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만약 본디 외속(外屬)의 친함이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친한 이를 높이는 마땅함을 미루어 나아가야 한다. 외친은 어머니나 며느리의 예(例)에 관계되지 않는바, 소목을 어지럽히는 혐의가 없다. 그러므로 친한 바에 따라서 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외생질녀가 자기 며느리가 되었을 경우에는 외생질의 복으로 입지 않으니, 이는 친함을 따라서 복을 입는 것이다. 외자매이면서 형제의 아내가 되었을 경우에는 역시 서로 간에 복이 없는 제도를 쓰는 것이 마땅한데, 형제의 아내에 대해서 복이 없는 것은 바로 외친으로서 복이 있는 것보다 더 친한 것이다. 종모(從母)이면서 종부(從父)의 곤제(昆弟)의 며느리가 되었을 경우에는 며느리에 대한 예로써 대우해서는 안 되는바, 이는 외친의 족속이 가까우면서 존귀하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이를 미루어 나가 보면 알 수 있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1]태복(稅服) : 죽은 지 한참 지난 뒤에 비로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를 위한 상복을 뒤늦게 입는 것을 말한다. [주D-002]존비(尊卑)의 …… 있어서는 : 이 부분이 원문에는 ‘論尊卑之殺’로 되어 있는데, 《통전》 권97에 의거하여 ‘論尊卑之敍’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시마(緦麻)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적모(嫡母)가 죽은 뒤에 그 생모를 위해서 입는 복 [문] 상복도식을 보면 “승중(承重)한 첩의 아들은 할머니와 적모가 졸하여서 없을 경우, 소생모를 위해서는 본복(本服)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이 설이 어떻습니까? -이유태- [답] 후사를 이은 의리가 이미 중한 것이네. 《의례》에서는 “그 생모를 위해서는 시마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며, 다시 적모가 없을 경우에는 생모를 위해서 복을 다 펼 수 있다는 글이 없네. 양씨가 인용한 송나라 때의 제령(制令)은, 그것이 비록 《개원례》에 근본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따라 해서는 안 될 듯하네.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가 본생(本生)의 외친(外親)을 위해서 입는 복 [문]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가 본생의 외친을 위해서 입는 복은 강복합니까? -송시열- [답] 운운하였다. -위의 소공조(小功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서자(庶子)가 아버지의 다른 첩(妾)을 위해서 입는 복 [문] 서자가 아버지의 다른 첩을 위해서 입는 복에 대해서는 예문에 나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마땅히 적자(嫡子)가 서모(庶母)를 위해서 입는 복을 따라서 입어야 합니까? -황종해- [답] 이것은 《통전》에 나와 있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통전》에 이르기를, “서막(徐邈)이 이르기를, ‘양쪽 첩의 아들은 서로 간에 서모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어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아내의 적모(嫡母)를 위해 입는 복 [문] 아내의 적모를 위해 입는 복은 한결같이 아내의 어머니 항렬에 대한 복을 입는 데 의거하여 입습니까? 예문에서 드러내어 말해 놓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우복(愚伏)에게 물었더니, “상세하지가 않으니, 감히 억설(臆說)하지는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계모와 적모에 대해서는 예문에 모두 나와 있는 곳이 없는데, 이는 생모의 범위에 포함되기 때문에 말해 놓지 않은 것이네. 그 아내가 상복을 입고 있는데 그 남편이 복이 없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네. 자식이 없는 서모(庶母)에 대한 복 [문] 금문원(琴聞遠)이 서모에 대해서 입는 복에 대해 물으니, 퇴계가 답하기를, “예경에서 ‘서모를 위해서는 시마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아버지의 첩으로서 아들이 있는 경우를 가리켜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아들이 없는 첩을 위해서는 복이 없을 듯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아버지를 모시던 분이 비록 자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집안일을 대신 주간(主幹)한 분이니, 의당 시마복을 입되 날수를 조금 더해 입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아들이 없는 서모에 대해서는 과연 복이 없으니, 참으로 감히 예문을 뛰어넘어서 복을 입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경에 ‘한솥밥을 먹은 경우에는 시마복을 입는다.’는 글이 있으니, 오히려 이것에 의거하여 복을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퇴계가 이른바 날수를 조금 더해 입는다고 한 것은 무슨 말입니까? 시마복보다는 더 입고 소공복에는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 그 제도가 어떻습니까? -강석기- [답] 서모의 경우에는 비록 자식이 없더라도 만약 함께 살고 있는 분이라면 한솥밥을 먹은 것으로 보아 시마복을 입고, 만약 양육해 준 은혜가 있을 경우에는 소공복을 입더라도 역시 무방할 것이네. 남편의 증조와 고조를 위해 입는 복 [문] 아내가 남편의 증조와 고조를 위해서 입는 복에 대해서 《가례》에서는 시마복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반해, 고례에는 드러내어 말해 놓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장횡거(張橫渠)가 이미 논해 놓았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남편의 고조와 증조를 위해서는 복이 없는 것이 마땅한데, 시마복을 입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장자(張子)가 답하기를, “이 역시 고례에는 분명한 글이 없는데, 당나라 《개원례》에서 비로소 시마복을 입는 것으로 하였으며, 송나라 때에도 그대로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외삼촌의 아내를 위해서 입는 복 [문] 외삼촌의 아내에 대해서는 복이 없는데, 우리나라의 제도에는 시마복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외삼촌의 아내는 구모(舅母)라고 하는데, 고례에서는 복을 미루어 나가지 않아 상복이 없는데 반해, 《개원례》 및 우리나라의 제도에는 모두 시마복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네. 이 경우는 후한 쪽을 따라서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네. 두 첩(妾)이 서로를 위해서 입는 복 [문] 두 첩이 서로를 위해서 복을 입습니까? 입는다면 그 복을 얼마간이나 입습니까? [답] 《통전》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통전》에 이르기를, “서막(徐邈)이 말하기를, ‘예경에는 두 첩이 서로를 위해서 복을 입는다는 글이 없다. 그러나 첩은 종복(從服)을 입는 제도가 있다. 사(士)의 첩에게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으며, 첩은 종복을 입을 수가 있다. 또 같은 집에서 산 은혜가 있을 경우에는 시마복을 입는 의리가 있다.’ 하였다.” 하였다.   시마복은 강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문] 시마복은 강복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가례》의 복제도(服制圖)에는 “시마복은 출가하였을 경우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비록 시마복이더라도 오히려 강복하여 복이 없는 것입니까? -정랑(正郞) 오윤해(吳允諧)- [답] 시마복은 강복하지 않는다는 글이 예경에는 나와 있지 않네. 이는 세속 사람들이 《의례》 상복의 소에서 “외친에 대해서는 강복하지 않는다.”는 글로 인하여 잘못 와전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네. 《의례》와 《가례》로써 본다면 마땅히 강복해야 함이 의심의 여지가 없네. ○ 《의례》에 이르기를, “상복(殤服)은 대공 칠월복(大功七月服)이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종부(從父)의 곤제(昆弟)에 대해서 차마 강등하여 복을 없게 할 수 없어서이다. 대개 대공 칠월복의 제도를 만들어 놓지 않을 경우, 종부의 곤제에 대해서 장상(長殤)의 경우에는 소공복을 입고, 중상(中殤)의 경우에는 시마복을 입으면 되나, 하상(下殤)의 경우에는 복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였다. ○ 《예기》 분상(奔喪)에 이르기를, “강복(降服)을 입어 복이 없는 부인의 상에는 마(麻)를 한다.[婦人降而無服者 麻]”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강복을 입어 복이 없는 부인’은 고모나 자매의 경우 집에 있는 자에 대해서는 시마복을 입으나, 출가하였을 경우에는 강복을 입어 복이 없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이상의 두 조항에 의거하여 보면 시마복도 강복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 《가례》의 시마조(緦麻條)에 이르기를, “남편의 종부(從父)의 자매로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자에 대해서는 강복하지 않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가례》에서는 단지 이 한 조목에 대해서만 강복하지 않았으니,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모두 강복한다는 것을 역시 잘 알 수 있다.-   복제(服制)의 경중(輕重)에 대한 변(辨) [문] 오복(五服)의 제도는 성인께서 짐작하여 조처한 뜻이 지극합니다. 그러니 그 경중과 대소의 차이는 의당 인정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건대, 일반적인 상정으로 말한다면, 외조(外祖)에 대한 복이 아래로 종모(從母)에 대한 복과 같게 되어 있는데, 종모는 외삼촌과 친함이 같은데도 복은 다릅니다. 그리고 수숙(嫂叔)간에는 혐의스러워서 복을 입지 않는데 반해, 제사(娣姒)와 종부(從夫)는 서로 보복(報服)을 입습니다. 또 외삼촌은 생부(甥婦)에 대해서 복이 있는데 반해, 생부는 외삼촌에 대해서 보복을 입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따위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 뜻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송시열- [답] 경전 및 선유(先儒)들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경(經)에 이르기를, “외조부모를 위해서는 소공복을 입는다.[爲外祖父母]” 하였으며, 이에 대한 전에 이르기를, “외조에 대해서 어찌하여 소공복을 입는 것인가? 존귀하여서 가복(加服)으로 입는 것이다.[何以小功也 以尊加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외친(外親)에 대한 복은 시마복(緦麻服)에 불과할 뿐인데, 지금 의외로 소공복을 입었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존귀하여서 가복으로 입는 것이다.’라는 것은, 조(祖)는 바로 존귀한 자에 대한 이름이므로 가복을 입어 소공복을 입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 상복의 경(經)에 또 이르기를, “종모를 위해서는 소공복을 입는다. 외삼촌을 위해서는 시마복을 입는다.[從母小功 舅緦麻]” 하였으며, 이에 대한 전에 이르기를, “어째서 소공복을 입는가? 모(母)라는 이름 때문에 가복을 입어서이다. 어째서 시마복을 입는가? 종복을 입어서이다.” 하였다. ○ 당(唐)나라 정관(貞觀) 14년에 태종(太宗)이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외삼촌은 이모와 친소 관계가 서로 비슷한데, 복기(服紀)가 다르니,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니, 위징(魏徵) 등이 의논드리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외삼촌에 대해서는 시마복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종모(從母)와 똑같이 소공복을 입게 하소서.” 하자, 제서(制書)를 내려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외조부모에 대해서는 단지 소공복만 입으니, 이모와 외삼촌에 대해서는 다 함께 시마복을 입는 것이 맞다. 그런데 위징은 도리어 외삼촌에 대해서 가복을 입게 하여 이모에 대해서 입는 복과 같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어머니의 자매에 대해서 입는 복이 도리어 어머니의 형제에 대해서 입는 복보다 중한 것은, 형제에 대해서는 일단 시집왔으면 강복을 하나 자매에 대한 복은 일찍이 강복한 적이 없으므로, 그 자식 된 자가 외삼촌에 대해서는 시마복을 입고 이모에 대해서는 소공복을 입는 것이다.” 하였다. -주자의 설은 《의례》의 경문과 차이가 있으니, 다시금 상세히 알아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자매기가복조(姉妹旣嫁服條)에 나온다.- ○ 주자가 여정부(余正夫)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이모와 외삼촌은 친함은 같으면서 복은 다른데, 이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의례》의 전에서는 단지 종모(從母)에 대해서만 말하면서 ‘모(母)라는 이름 때문에 가복을 입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외삼촌에 대해서도 부(父)라는 이름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에 대해서만 유독 가볍게 하겠는가. 보내온 편지에서 ‘종모는 바로 어머니의 고(姑)나 자매(姉妹)로서 잉첩(媵妾)으로 온 자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 듯하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이해하지 못하겠다. 만약 ‘우선은 선왕(先王)이 제정한 예를 고수해야지 감히 변경시킬 수가 없다.’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신중하게 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후왕(後王)이 일어나서 시대에 맞게 예법을 제정하여 변통하는 것도 아마도 지나친 것이 되지는 않을 듯하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전에 이르기를, “남편의 형제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복이 없는 것인가? 남편이 아버지의 항렬에 속하면 그 아내는 모두 어머니의 항렬이고, 남편이 아들의 항렬에 속하면 그 아내는 모두 며느리의 항렬이다. 동생의 아내를 며느리라고 한다면 이는 형수에 대해서도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칭호라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신중히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夫之昆弟 何以無服也 其夫屬乎父道者妻皆母道也 其夫屬乎子道者 妻皆婦道也 謂弟之妻婦者 是嫂亦可謂之母乎 故名者 人治之大者也 可無愼乎]”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도(道)’는 항렬이라는 뜻인 항(行)과 같다. 동생의 아내를 부(婦)라고 한다는 것은 낮추어서 멀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婦)라고 한 것이다. ‘수(嫂)’라는 것은 존엄한 사람에 대한 칭호이다. 수(嫂)는 수(叟)와 같은데, 수(叟)는 노인에 대한 칭호이다. 이것은 남녀의 순서를 구별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자기가 어머니나 며느리에 대한 복으로써 형이나 동생의 아내에 대한 복을 입는다면, 형이나 동생의 아내는 시아버지나 아들의 복으로써 자기에 대해 복을 입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소목(昭穆)의 순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치(治)’는 이(理)와 같다. 부모와 형제와 부부간의 이치는 인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신중히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14년에 태종(太宗)이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같은 집에 살면서 한솥밥을 먹은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시마복을 입는 은혜가 있는데, 형수와 시동생 사이에 복을 입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 학사(學士)들을 모아 상세히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시중(侍中) 위징(魏徵) 등이 의논드리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형수와 시동생 사이에는 예전에는 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소공 오월복(小功五月服)을 입게 하소서.’ 하니, 제서(制書)를 내려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 뒤 개원(開元) 20년에 이르러서 중서령(中書令) 소숭(蕭嵩)이 상주하여 정관 연간에 정한 예(禮)에 의거하여 예를 정하였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정자(程子)에게 묻기를, “형수와 시동생 사이에는 예전에는 복이 없었는데 오늘날 있는 것은 어찌 된 까닭입니까?” 하니, 정자가 말하기를, “《예기》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가까운 관계를 밀어내어 멀리한 것이다.[推而遠之]’라고 하였는데, 이 설은 형수와 시동생 사이에 멀리해야 하는 혐의스러움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 고모와 형수 사이에야 무슨 혐의스러움이 있겠는가. 옛날에 이 둘 사이에 복이 없었던 것은 단지 항렬을 소속시킬 곳이 없어서였다. 지금 위에는 부모님이 계시고 아래에는 아들과 며느리가 있다. 숙부와 백부는 아버지의 항렬에 속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숙모와 백모에 대해 복이 있음이 숙부나 백부와 같다. 형제의 아들은 아들의 항렬에 속한다. 그러므로 형제 아들의 아내에 대한 복은 형제의 아들에 대한 복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형제의 경우에는 형제는 자기와 같은 항렬인데, 형제의 아내를 자기 아내의 항렬에 소속시키기는 곤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복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복이 있는 것도 옳다. 어찌 한집에 함께 산 친함이 있는데 복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또 묻기를, “이미 한집에 함께 산 친함이 있는데도 예전에는 도리어 복이 없었습니다. 어찌 형제의 아내가 죽었는데, 자신은 태연하게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정자가 답하기를, “옛날에는 비록 복이 없었지만,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마음은 저절로 있었다. 또한 인근 마을에서 상을 당했어도 방아를 찧으면서 노래로 돕지 않으며 길거리에서 노래하지 않고서 황급히 달려가서 구원해 준다. 그런데 더구나 지친(至親)에 대해서이겠는가.” 하였다. -《유서(遺書)》에 나온다.- ○ 주자가 말하기를, “형수와 시동생 간에 입는 복에 대해서는 선유(先儒)들도 복을 입어도 괜찮다고 하였다. 그런즉 위징(魏徵)의 의론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였다. ○ 《의례》 상복에 이르기를, “아내가 남편의 형의 아내와 동생의 아내를 위해서 입는 복인데, 보복으로 입는 것이다.[爲夫娣姒婦 報]” 하였으며, 이에 대한 전에 이르기를, “제부(娣婦)와 사부(姒婦)라는 것은 동생의 아내와 형의 아내이다. 어째서 소공복을 입는가? 서로 더불어 실중(室中)에 거처하였으니 소공의 친함이 생겨서이다.[娣姒婦者 弟長也 何以小功也 以爲相與居室中 則生小功之親焉]”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외삼촌은 생질의 아내에 대해서 복이 있는데, 생질의 아내는 남편의 외삼촌에 대해서 복이 없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이는 대개 외삼촌의 경우는 아버지의 몸으로부터 미루어서 나간 것이기 때문에 범위가 넓은 것이고, 생질의 아내의 경우는 남편의 몸으로부터 미루어서 온 것이기 때문에 범위가 좁은 것이다.” 하였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온다. ○ 이상은 각 조목에 따라 설명한 것이다.- ○ 《예기》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상을 당하여 복을 입는 데에는 여섯 가지 방도가 있다. 첫째는 친족의 친함 정도에 따르는 것이고, 둘째는 존비(尊卑)의 차등에 따르는 것이고, 셋째는 어머니나 처의 친족일 경우 그 이름의 차이에 따르는 것이고, 넷째는 여자로서 아직 집에 있느냐 이미 출가하였느냐의 차이에 따르는 것이고, 다섯째는 장유(長幼)의 차등에 따르는 것이고, 여섯째는 종복(從服)이기 때문에 정식 상복과 다른 것을 따르는 것이다.[服術有六 一曰親親 二曰尊尊 三曰名 四曰出入 五曰長幼 六曰從服]”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친친(親親)’이라는 것은 부모(父母)가 으뜸이 되고, 그다음이 처(妻), 자(子), 백숙(伯叔)이 되는 것이다. ‘존존(尊尊)’이라는 것은 임금이 으뜸이 되고, 그다음이 공(公), 경(卿), 대부(大夫)가 되는 것이다. ‘명(名)’이라는 것은 백숙모(伯叔母) 및 자부(子婦), 제부(弟婦), 형수(兄嫂)와 같은 따위이다. ‘출입(出入)’이라는 것은 여자가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는 입(入)과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출(出)의 경우 및 다른 사람의 후사(後嗣)가 되는 경우이다. ‘장유(長幼)’라는 것은 장(長)은 성인의 상(喪)을 이르고 유(幼)는 어린아이의 상인 여러 상(殤)을 이른다. ‘종복’이란 것은 다음에 나오는 여섯 가지 등급이 이것이다.” 하였다. ○ 《예기》 대전에 이르기를, “종복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친속 관계에 따라서 입는 속종(屬從)이고, 둘째는 괜히 따라서 입는 도종(徒從)이고, 셋째는 상복이 있는 것을 따르면서도 상복이 없는 것이고, 넷째는 상복이 없는 것을 따르면서도 상복이 있는 것이고, 다섯째는 상복이 중한 것을 따르면서도 상복이 가벼운 것이고, 여섯째는 상복이 가벼운 것을 따르면서도 상복이 중한 것이다.[從服有六 有屬從 有徒從 有從有服而無服 有從無服而有服有從重而輕 有從輕而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속(屬)’은 친속(親屬)을 이른다. 아들이 어머니를 따라서 어머니 친족의 상복을 입고, 아내가 남편을 따라서 남편 친족의 상복을 입고, 남편이 아내를 따라서 아내 친족의 상복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속종(屬從)’이다. ‘도(徒)’는 공(空)이다. 친속의 관계가 아닌데도 괜히 따라서 그 당(黨)의 상복을 입는 것으로, 신하가 임금을 따라서 임금의 친당(親黨)에 대한 상복을 입거나, 아내가 남편을 따라서 남편의 임금에 대한 상복을 입거나, 첩(妾)이 여군(女君)을 따라서 여군의 친당에 대한 상복을 입거나, 서자가 군모(君母)를 따라서 군모의 부모에 대한 상복을 입거나, 자식이 어머니를 따라서 어머니의 군모에 대한 상복을 입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도종(徒從)’이다. 공자(公子)의 아내가 친부모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데 반해, 공자는 임금에게 압존(壓尊)되어서 외구(外舅)와 외고(外姑)에 대한 상복을 입을 수 없는 것은, 이는 아내에게는 상복이 있는데도 공자에게는 상복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형에 대해서는 상복이 있는데 반해 형수에 대해서는 상복이 없다. 이는 상복이 있는 것을 따르면서도 상복이 없는 것이다. 공자가 임금에게 압존되어서 외형제(外兄弟)를 위하여 상복을 입지 못하는데 반해 공자 아내의 경우에는 상복을 입거나, 아내가 남편의 형제들을 위해서는 상복을 입지 않는데도 제사(娣姒)를 위해서는 상복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상복이 없는 것을 따르면서도 상복이 있는 것이다. 아내가 본생부모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 것은 상복이 중한 것이며, 남편이 아내를 따라서 3개월복을 입는 것은 상복이 가벼운 것이다. 어머니가 그 형제의 아들을 위하여 대공복을 입는 것은 상복이 중한 것이며, 아들이 어머니를 따라서 3개월복을 입는 것은 상복이 가벼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복이 중한 것을 따르면서도 상복이 가벼운 것이다. 공자가 임금에게 압존되어서 스스로 자기 어머니를 위하여 연관(練冠)을 쓰는 것은 상복이 가벼운 것이고, 공자의 처가 공자의 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은 상복이 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복이 가벼운 것을 따르면서도 상복이 중한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친연(親緣) 관계를 따져 보면, 아버지와 나와 아들의 세 친연이 있고 여기에서 다시 할아버지와 손자가 더해져서 다섯 친연으로 된다. 이 다섯 친연에서 다시 증조부와 고조부 및 증손과 현손이 더해져서 아홉 친연으로 된다. 아버지로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친연이 감해지고 아들로부터 아래로 내려갈수록 친연이 감해지며, 형제로부터 옆으로 갈수록 친연이 감해져서 마침내는 친연이 끊어지게 된다.[親親 以三爲五 以五爲九 上殺下殺傍殺 而親畢矣]”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위로는 아버지가 있고 아래로는 아들이 있다. 그러니 의당 하나에서 셋으로 된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와 아들은 한 몸이어서 둘로 나눌 의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세 친연에서 다섯 친연으로 된다고 한 것이다. 이 세 친연을 인하여 말해 보면, 아버지로 말미암아서 할아버지와 친연 관계가 되고, 아들로 말미암아서 손자와 친연 관계가 된다. 이는 세 친연에서 다섯 친연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 또 다섯 친연에서 일곱 친연으로 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대개 할아버지로 말미암아서 증조와 고조 두 할아버지와 친연 관계가 되고, 손자로 말미암아서 증손자와 현손자 두 손자와 친연 관계가 되는데, 그 은혜는 모두 이미 소략하다. 그러므로 오직 다섯 친연에서 아홉 친연으로 된다고만 말한 것이다. 아버지로 말미암아서 위로 올라갈수록 감해져서 고조에까지 이르고, 아들로 말미암아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감해져서 현손에까지 이르니, 이는 위로 올라갈수록 감해지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감해지는 것이다. 아버지가 같으면 기년복을 입고, 할아버지가 같으면 대공복을 입고, 증조가 같으면 소공복을 입고, 고조가 같으면 시마복을 입는다. 이는 옆으로 갈수록 점차 감해지는 것이다. 고조 이상은 복이 없다. 그러므로 ‘친연이 끊어지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통틀어서 논한 것이다.-   [주D-001]마(麻) : 조복(弔服)에 시마복의 환질(環絰)을 가한 것을 말한다. [주D-002]보복으로 입는 것이다 : 원문에는 ‘服’으로 되어 있는데, 《의례》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연관(練冠) : 친상(親喪)을 당한 사람이 일주년이 지난 뒤 연제를 지낼 적에 쓰는 거친 베로 만든 관을 말한다.     부(附) 동자복(童子服) 동자(童子)가 장자(長者)를 위하여 상복을 입을 경우에는 등급을 감하여서 보복(報服)으로 입는다. [문] 상상(殤喪)의 경우에는 모두 한 등급을 감합니다. 상(殤)에 해당되는 자가 장자(長子)의 상에 대해서도 등급을 낮추어서 입습니까? 우복은 이에 대해 답하기를, “《의례》 상복의 기(記)에 이르기를, ‘동자는 오직 당실(當室)일 경우에만 시마복을 입는다.[童子 惟當室緦]’ 하였으며, 이에 대한 전(傳)에 이르기를, ‘당실하지 않았으면 시마복을 입지 않는다.[不當室則無緦服也]’ 하였네. 그리고 대덕(戴德)은 말하기를, ‘15세부터 19세에까지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를 이른다. 그 복(服)은 심의(深衣)에 상(裳)을 입지 않는다. 성인(成人)이 안 된 사람을 위한 제복(制服)을 하지 않는 것은, 마음을 쓰는 것을 똑같이 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네. 이것에 의거하여 본다면, 시복(緦服)은 가벼운 것으로, 생각건대 당실한 동자는 족인(族人)들과 예를 행해야 하므로 입는 것이네. 그러면서도 오히려 그 제도를 완전히 갖추지 않은 것이네. 당실하지 않은 동자는 상복을 입지 않네. 소공(小功) 이상의 경우에는 당실하지 않은 자도 모두 상복을 입으며, 오직 14세 이하인 자가 마복(麻服)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에만 입지 않네.” 하고, 또 말하기를, “‘당실이 아니면 복이 없다.’고 한 것은 본디 시복을 이른 것으로, 본종(本宗)이냐 외친(外親)이냐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네. 조부모나 형제나 제부(諸父)의 상은 본디 중복(重服)이 되는 것이니, 논해서는 안 되네. ‘달수에 따라 감하여 입기를 보복(報服)을 입는 것과 같이 한다.’고 한 말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 듯하네. 앎이 있으면 슬픔이 있게 되고, 슬프면 상복이 있는 법이니, 어찌 자기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달수를 감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모든 복은 반드시 서로 보답하는 것이네. 장자가 동자의 상에 대해서 이미 감하여 복을 입으니, 동자가 장자의 상에 대해서도 감하여서 보복을 입는 것이 분명하네. 《의례》 상복의 기에 대한 주소(注疏)에 의거하여 보면, 당실한 동자는 비록 본종에 대해서는 복을 입으나, 외친의 시마복은 입지 않는바, 이것 역시 차례대로 감하는 뜻이네. 당실하지 않은 동자는 비록 본종이더라도 시마복이 없네. 그런즉 소공 이상에 대해서 어찌 차례대로 감하지 않겠는가. 오직 조부모와 증조부모의 경우에 대해서는 여자가 비록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더라도 강복하지 않는 뜻에 의거하여 동자도 감하지 말아야 할 듯하네.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네. ○ 《의례》 상복 기(記)의 주에 이르기를, “‘동자(童子)’는 관례를 올리지 않은 자에 대한 칭호이다. ‘당실(當室)’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서 가사(家事)를 이어받아 가주(家主)가 되어 족인(族人)들과 예를 행하는 것이다. 친함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은혜가 이르지 않았더라도 복이 없을 수 없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종실(宗室)의 사람들과 왕래하므로 족인들을 위하여 시마복을 입는 것이다. 그런데도 시장(緦章)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만약 시장에 들어 있을 경우에는 내친(內親)과 외친(外親)이 모두 보복(報服)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말한 당실한 동자는 단지 족인들과만 예를 행하므로 이 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복은 외친에는 미치지 않으므로 시장에 들어 있지 않고 이 기(記)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옥조(玉藻)에 이르기를, “동자는 시복의 상을 입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상을 돌봐 줄 때는 마질(麻絰)을 두르지 않는다.[童子無緦服 聽事 不麻]”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시복의 상을 입지 않는다.[無緦服]’는 것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자기에게 비록 시복에 해당되는 친족의 상이 있더라도 시복을 착용하지 않은 채 가서 주인(主人)이 시키는 일을 돌봐 주는 것이다. ‘마질을 두르지 않는다.[不麻]’는 것은, 문(免)을 하고서 심의(深衣)를 입고 마질을 두르지 않는 것이다. 동자는 예에 익숙하지 못하며, 또한 시복은 가볍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시복을 입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본복(本服)을 어길 수 없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전(傳)에 이르기를, “동자는 어째서 지팡이를 짚지 않는가? 몸이 병들 정도로 슬퍼할 수 없기 때문이다.[童子何以不杖不能病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이곳에서 말한 동자는 서동자(庶童子)이다. 아직 관례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에 문(免)을 하기만 할 뿐이다.” 하였다. ○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동자는 곡할 때에 의(偯) -의는 나오는 대로 우는 소리이다.- 하지 않고, 뛰지 않으며, 지팡이를 짚지 않고, 비(菲) -비는 짚신이다.- 를 신지 않으며, 여(廬) -여는 의려(依廬)이다.- 에 거처하지도 않는다.[童子哭不偯不踊不杖不菲不廬]”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성인(成人)이 아닌 자는 예를 다 갖출 수 없으므로 단지 최상(衰裳)에 질대(絰帶)만을 착용할 뿐이다.” 하였다. ○ 《예기》 문상(問喪)에 이르기를, “동자가 당실(當室)하였으면 문(免)을 하고 지팡이를 짚는다.[童子當室 則免而杖矣]”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적자(適子)의 경우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아들이 어릴 경우에는 최복(衰服)으로 싼다.[子幼 則以衰抱之]” 하였다. ○ 《개원례》에 이르기를, “적자의 경우에는 비록 동자라고 하더라도 역시 지팡이를 짚는다. 어려서 스스로 지팡이를 짚을 수 없을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대신 짚는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지(劉智)가 말하기를, ‘어린아이는 무지하지만, 부모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최복으로 싼다. 그 나머지 친족에 대해서는 8세가 되면 제복(制服)한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초주(譙周)가 말하기를, ‘동자는 소공친 이상에 대해서는 모두 상복을 입는데, 문을 하지 않고 마질도 두르지 않는다. 당실한 동자는 문을 하고 마질을 두른다. 14세 이하로 마질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에는 두르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사자(射慈)가 말하기를, ‘6, 7세로 비록 동자가 되지 않았더라도 그 누이가 죽었을 경우에는 베로 된 심의를 입어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최개(崔凱)가 말하기를, ‘동자는 처음 친상(親喪)을 당하였을 때에는 수식(首飾)을 제거하고 백포(白布)로 만든 심의를 입고서 성복(成服) 때까지 지낸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예경을 보면 동자에 대해서 말한 것이 서로 어긋나 일치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으로는 당실한 자는 족인들과 예를 행하니, 이는 8세 이상으로 예에 이른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당실하였으므로 그로 하여금 성인과 예를 같게 하는 것이다. 사자(射慈)가 「8세가 되지 않은 어린아이는 근속(近屬)의 복을 입음에 있어서 베로 된 심의를 입는다.」 하였는데, 혹 예의 뜻에 맞는 듯하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1]당실(當室) : 적자(適子)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가사(家事)를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나의 …… 여겨진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愚謂當室與族人爲禮者 是八歲以上及禮之人’으로 되어 있는데, 《통전》 권81에 의거하여 ‘愚謂當室與族人爲禮 若是八歲以上及禮之人’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상복(殤服) 상복(殤服)은 차례대로 점차 낮추어서 입는다. [문] 사제(舍弟)인 홍집(洪 )의 아들이 15세가 되어서 죽었는데, 《가례》에 실려 있는 바로 보면, 응당 기년복을 입어야 할 자는 중상(中殤)의 경우 7개월복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의례》의 상복조를 보면, “아들의 장상(長殤)과 중상을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대공 구월복으로 정하여 행해야 합니까? 그리고 “상복(殤腹)을 입을 때에는 질대(絰帶)를 꼬지 않고서 드리운다.[殤之絰不樛垂]”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불규수(不樛垂)’라는 것은 질대를 꼬지 않고 드리우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규수(樛垂)’라는 것은 고례(古禮)에서 성복(成服)하기 전에 요질(腰絰)을 흩어서 늘어뜨리고 묶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니면 혹 성복할 적에 대질(帶絰)을 드리우지 않는 것입니까? 종숙(從叔)으로서 응당 소공복을 입어야 할 자는 장상(長殤)에 대해서는 강복을 입어 시마복을 입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중상의 경우에는 강복하여 복이 없는 것입니까? ‘시마복은 강복하지 않는다.’는 설은 어느 책에 실려 있습니까? 그리고 대공복을 입어야 할 자는 《가례》에는 “이것으로써 강등한다.”고 하였는데, 어느 복을 입어야 합니까? -승지(承旨) 홍방(洪霶)- [답] 보내온 글에서 말한 중상의 대공복은 7개월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네. 규수에 대한 설은 소렴을 마친 뒤에 3척을 흩어서 늘어뜨리는 것을 가리켜서 한 말이네. 종숙으로서 소공복을 입어야 할 자는 장상에 대해서는 강복하여 시마복을 입고, 중상에 대해서는 강복하여 복이 없는 것이 분명하네. ‘시마복은 강복하지 않는다.’는 설은 바로 근거 없는 속설(俗說)이네. 《가례》에 이르기를, “아내가 남편의 종부자매(從父姉妹)로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자에 대해서는 강복하지 않는다. 그 나머지는 모두 강복하여 복이 없다.” 한 데에서 잘 알 수 있네. 모든 상상(殤喪)에는 년(年)을 월(月)로써 헤아린다.   태어난 지 3개월이 되기 전에 죽은 상상(殤喪)   적장(嫡長)의 상상(殤喪)도 다른 상상과 같다.   관례(冠禮)를 올리고 계례(笄禮)를 올렸거나 시집가고 장가간 경우에는 상상(殤喪)이 되지 않는다. [문]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보면, 모든 상상에는 그 햇수를 헤아릴 적에 달로써 헤아리고 해로써 헤아리지 않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태어나서 3개월이 되기 전에 죽었을 경우에는 곡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에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참최 삼년복을 입어야 할 장자(長子)가 상(殤)으로 죽었을 경우에는 다른 상상에 비하여 역시 한 등급을 더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또 《예기》 상복소기에는 “장부는 관례를 올렸으면 상상이 되지 않고, 부인은 계례를 올렸으면 상상이 되지 않는다.[丈夫 冠而不爲殤 婦人 笄而不爲殤]” 하였는데 반해, 《가례》에서는 “남자가 이미 장가들었거나 여자가 이미 시집가는 것을 허락받았으면 모두 상상이 되지 않는다.[男子已娶女子許嫁 皆不爲殤]” 하여 두 설이 같지 않은데, 지금 어느 쪽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이유태- [답] 예경 및 《통전》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상복소기와 《가례》의 설이 비록 서로 같지 않은 듯하나, 관례를 올리거나 계례를 올린 경우와 시집가거나 장가간 경우에는 모두 상상으로 하지 말아야 할 듯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서정(徐整)이 사자(射慈)에게 묻기를, ‘8세 이상의 상(殤)에 대해서는 상복을 입는데, 8세가 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상복이 없습니다. 가령 자식이 원년(元年) 정월에 태어나서 7년 12월에 죽었을 경우에는 이는 7세가 되니 복이 없어야 합니다. 혹 원년 12월에 태어나 8년 정월에 죽었을 경우에는 햇수를 따져 보면 8년이 되기는 하였으나 날짜를 따져 보면 6년이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8세가 되어 죽었다고 하는 자는 날짜가 한참 모자라고, 온전히 7세가 되어 죽은 자는 날짜가 더 많은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어 각각 이와 같이 죽었을 경우, 7세가 된 자식에 대해서만 유독 상복을 입지 않는다면 부모의 은혜가 치우치게 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무릇 예제를 따질 때에는 태어난 달을 가지고 따지지 해를 가지고 따지지는 않네.’ 하였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전에 이르기를, “상복이 없는 상(殤)일 경우에는 날짜로써 달을 대신한다. 자식이 태어난 지 3개월이 되면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며, 죽으면 곡을 한다. 이름을 지어 주기 전에 죽었으면 곡을 하지 않는다.[無服之殤以日易月 子生三月則父名之 死則哭之 未名則不哭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공자가어(孔子家語)》의 본명(本命)에 이르기를, ‘남자는 태어난 지 8개월이 되면 젖니가 나고, 8세가 되면 새 이가 난다. 여자는 태어난 지 7개월이 되면 젖니가 나고, 7세가 되면 새 이가 난다.’ 하였는데, 지금 전에서는 남자에 의거하여 말하였으므로 8세 이상을 상복이 있는 상상(殤喪)으로 삼은 것이다. 전에서 ‘반드시 태어난 지 3개월이 되어서 이름을 지어 주며 비로소 곡한다.’고 한 것은, 3개월은 한 절기(節氣)로 천기(天氣)가 변하며, 눈을 떠서 알아보는 바가 있어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여기므로 이름을 지어 주는 데 의거하여 한계로 삼은 것이다. ‘이름을 지어 주기 전에 죽었으면 곡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날짜로써 달수를 대신하는 데에 의거하여 곡하지 않을 뿐 처음에 죽었을 때에는 역시 곡해야 하는 것이다. 또 ‘날짜로써 달수를 대신한다.’고 한 것은, 태어난 지 1개월이 된 자에 대해서는 하루 동안 곡하는 것이다. 만약 7세가 되었을 경우에는 한 해는 12개월이니, 84일간 곡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부모가 자식에 대한 데에만 의거한 것이고, 나머지 다른 친족에는 관계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자식들 가운데 장적(長嫡)까지를 통틀어서 말한 것으로, 만약 성인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를 위하여 참최 삼년을 입어야 하지만, 지금 상(殤)으로 죽었을 경우에는 중자(衆子)와 똑같은 복을 입는 것은, 상으로 죽어 성인이 되지 못한 것은 곡물이 익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똑같이 대공복(大公服)을 입는 상상(殤喪)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왕숙(王肅)과 마융(馬融)은 ‘날짜로써 달수를 대신한다는 것은, 곡하는 날짜로써 복을 입는 달수를 대신한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상이 된 사람이 기년복을 입을 친족일 경우에는 13일간 곡을 하고, 시마복을 입을 친족일 경우에는 3일간 곡을 하는 것으로 제도를 삼았다.” 하였다.     부(附) 태복(稅服) 살아서 얼굴을 보지 못한 조부모(祖父母)나 제부(諸父)나 곤제(昆弟)들을 위해서는, 아버지가 태상(稅喪)을 입더라도 자신은 입지 않는다. [문]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살아서 얼굴을 보지 못한 조부모나 제부나 곤제들이 죽어서 아버지가 뒤늦게 태상을 입을 경우, 아들은 상복을 입지 않는다.[生不及祖父母諸父昆弟而父稅喪己則否]”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태(稅)라는 것은 세월이 이미 한참 지난 뒤에 비로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를 위한 상복을 뒤늦게 입는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서 본국에 살고 있는 조부모나 제부나 곤제들의 얼굴을 모두 본 적이 없는데, 이제 그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 세월이 이미 많이 지났을 경우, 아버지는 뒤늦게라도 그들에 대한 상복을 입지만, 자신은 상복을 입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조부모는 지친(至親)인데도 자신이 먼 곳에 살아서 생전에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그 상에 대해서 뒤늦게 소식을 들었을 경우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정리로 헤아려 볼 적에 끝내 온당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정씨(鄭氏)의 주가 혹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예기》 상복소기에 나오는 주(註)의 설은 참으로 의심스럽네. 《통전》을 보면 장량(張亮)이 과연 이에 대해 운운한 것이 있네. ○ 《통전》에 이르기를, “북제(北齊)의 장량이 이르기를, ‘소공복에 해당되는 형제가 멀리 살 경우 뒤늦게 복을 입지 않는 것에 대해서 증자(曾子)가 일찍이 탄식하였다. 더구나 조부모와 제부와 형제는 은혜와 친함이 아주 가까우면서도 서로 간에 사는 곳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정군(鄭君 정현(鄭玄))은 이르기를, 「사람이 할 수 없는 바에 대해서는 책임 지우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살아서 서로 간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것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것이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 소식이 단절된 탓에 아버지가 뒤늦게 부음을 듣고서 복상(服喪) 중에 거(居)하는데도 자기 자신은 복을 입지 않는다는 이 글의 뜻을 잘 따져 보면, 대개 자기와 이 세상을 산 시대가 다를 경우, 후대(後代)의 손(孫)은 선대(先代)의 친족에 대해서 뒤늦게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일 뿐이다. 어찌 서로 같은 시대에 살면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복을 입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강복(降服)하여 시마복(緦麻服)이나 소공복(小功服)을 입어야 할 경우에는 뒤늦게라도 상복을 입는다. [문] 소공복에 대해서는 뒤늦게라도 상복을 입습니다. 그렇다면 본복이 소공복인데 강복하여 시마복에 해당되는 경우에도 뒤늦게 상복을 입습니까? -송준길- [답] 《예기》 단궁 및 상복소기의 주에 상세하게 나와 있네. ○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증자가 말하기를, ‘소공복에 대해서 뒤늦게 상복을 입지 않을 경우에는 멀리 사는 형제에 대해서 마침내 복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曾子曰小功不稅 則是遠兄弟終無服也 而可乎]”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만약 이 소공복에 대하여 뒤늦게라도 상복을 입지 않는다면 재종형제가 먼 곳에 살다가 죽었을 경우, 그 소식을 듣는 것이 항상 뒤늦을 것이니, 끝내는 복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이것은 정복(正服)인 소공복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하였으며, 마씨(馬氏)는 말하기를, “증자는 상례의 도에 있어서 지나치게 슬픔에 치중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의심한 것이다. 그러나 소공의 복에 대해서는 비록 뒤늦게 상복을 입을 필요는 없는데도 뒤늦게 상복을 입는 것에 대해서는, 예에 있어서도 금하지 않는 바이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강복하여 시마복이나 소공복을 입을 경우에는 뒤늦게라도 상복을 입는다.[降而在緦小功者則稅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강(降)’이란 것은 정복(正服)보다 감하여서 입는 것이다. 숙부(叔父) 및 적손(嫡孫)의 경우에는 정복은 모두 부장기(不杖期)이나, 죽은 자가 하상(下殤)일 경우에는 모두 복을 낮추어서 소공복을 입는다. 서손(庶孫)으로서 중상(中殤)일 경우에는 대공복을 낮추어서 시마복을 입는다. 종조곤제(從祖昆弟)의 장상(長殤)일 경우에는 소공복을 낮추어서 시마복을 입는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모두 뒤늦게라도 복을 입는다. 《예기》 단궁에서 증자가 말한 ‘소공복에 대해서는 뒤늦게 복을 입지 않는다.[小功不稅]’는 것은 정복의 소공인 경우를 두고 한 말이지, 강복의 소공을 두고 한 말은 아니다. 무릇 강복은 정복보다 중한 것이다.” 하였다.   뒤늦게 상복을 입을 경우에는 전체의 달수를 다 입는다. [문] 뒤늦게 복을 입는다는 것은 상복을 입을 기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부음을 들은 경우를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까? 아니면 복을 입는 기간이 다 되어 가는데 부음을 들었어도 반드시 달수를 다 채울 동안 입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옛사람이 논해 놓은 것이 상세하기에 아래에 갖추어 놓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 원제(元帝)가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소공복이나 시마복의 친족에 대해서는 뒤늦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경우에는 전 기간의 상복을 다 입는 것이 마땅하지, 나머지 기간만의 상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하순(賀循)이 말하기를, ‘소공복에 대해서는 뒤늦게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상기(喪期)가 모두 끝난 뒤에 부음을 들었을 경우에만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만약 상복을 입을 기간 안에 부음을 들었을 경우에는 5개월간의 복을 다 입는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서막(徐邈)이 왕순(王詢)에게 답하기를, ‘정현(鄭玄)이 이르기를, 「5개월 안에는 뒤늦게 복을 입는다.」 하였고, 왕숙(王肅)은 이르기를, 「그 나머지 달의 복만 입는다. 소공복에 대해 뒤늦게 복을 입지 않는 것은 은혜가 가볍기 때문이다.」 하였다. 만약 전 기간의 상복을 다 입는다면 뒤늦게 추복(追服)을 입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마땅히 나머지 달의 복만 입어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송(宋)나라의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정현과 왕숙이 말한 바가 비록 각자 나름대로의 이치가 있으나, 왕씨의 말처럼 할 경우에는 혹 아침에 부음을 듣고서 저녁에 상복을 벗을 수도 있으며, 혹 미처 성복(成服)조차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헤아려 보면 흡족한 것이 되지 못한다.’ 하였다.” 하였다.     부(附) 변제(變除) 제복(除服)하는 달수는 처음 죽은 날로부터 헤아려서 한다. [문] 무릇 상이 그믐쯤에 발생하였으면 다음 달 초에 성복하게 됩니다. 대공복 이하의 상으로서 달수로써 한계를 삼는 상일 경우, 제복하는 것은 성복 때부터 계산하기 시작합니까, 아니면 처음 상을 당한 때부터 계산합니까? -이유태- [답] 기년복 이상의 상은 이미 모두 죽은 달로부터 헤아리는데, 유독 대공복 이하의 상에만 성복한 때부터 헤아린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치는 없을 듯하네. 마땅히 죽은 달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네.
129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5 댓글:  조회:3129  추천:1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39권 의례문해(疑禮問解)-5 심상(心喪) 스승을 위하여 입는다. [문] 스승의 상에 대해서는 어째서 정해진 제도가 없습니까? 그리고 복제(服制)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시열(宋時烈)- [답] 예경 및 제유(諸儒)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공자(孔子)가 죽자 문인들이 상복을 입으려고 하였으나 어떤 복을 입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옛날에 부자(夫子)께서 안연(顔淵)의 상을 당했을 때 마치 아들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였지만 복은 없었다. 자로(子路)의 상을 당했을 때에도 그렇게 하셨다. 그러니 부자의 상에 처하는 것을 아버지의 상을 당한 때와 같이 하되, 상복은 없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孔子之喪門人疑所服 子貢曰 昔者夫子之喪顔淵 若喪子而無服 喪子路亦然 請喪夫子若喪父而無服]” 하였다. ○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왕숙(王肅)이 말하기를, ‘예경을 보면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복이 없으니, 조복(弔服)에 마질(麻絰)을 가하고 정침(正寢)에 임하여 곡하면 된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조변민(曹弁敏)이 정칭(鄭稱)에게 묻기를, ‘조복에 마질을 가한 것은 언제 제거합니까?’ 하니, 정칭이 답하기를, ‘무릇 조복에 마질을 가한 것은 3개월이 지나면 제거한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촉(蜀)의 초주(譙周)가 말하기를, ‘비록 상복을 벗었더라도 심상(心喪)으로 3년을 지낸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지금 선생에게 수업을 받는 자들은 모두 제자의 예를 올리지 않는다. 오직 사씨(師氏)의 관직만은 왕명에 의해 둔 것이므로 제왕(諸王)이 스승을 공경하고 국자생(國子生)이 좨주(祭酒)에게 복종하여 대충이나마 고례에 의거하여 조복(弔服)을 입고 마질을 가하였다가 장사 지낸 뒤에 제거하며, 단지 심상으로만 3년을 지내지는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이르기를, “성인께서 스승을 위하여 입는 상복을 제정하지 않은 것은, 스승은 정체(定體)가 없기 때문이다. 어떠하여야 스승이 되는 것인가? 저 사람의 선함을 보고서 자신이 그것을 본받으면 곧 스승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의리를 얻어서 붕우 사이와 같은 경우도 있고,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훈도받아 형제 사이와 같은 경우도 있고, 자기 자신을 성취시켜 주어 은혜가 천지 부모와 같은 경우도 있다. 그러니 어찌 일괄적으로 상복을 제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성인이 스승을 위해 입는 상복을 제정해 놓지 않은 것이니, 심상을 입으면 된다. 공자가 죽었을 때 문인들이 조복에 마질을 가한 것도 상복이다. 그러니 상복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스승을 일정하게 정해 놓을 수 없으므로 그에 대한 상복도 일정하게 정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정(情)의 후하고 박함과 일의 크고 작음을 살펴서 대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안자(顔子)나 민자(閔子)가 공자에 대해서와 같은 경우에는 비록 참최 삼년복을 입어도 괜찮다. 자신을 이루어 준 공이 임금이나 아버지와 더불어 나란하기 때문이다. 그 차서에는 각각 깊고 얕음이 있는바, 그 정에 맞게 하면 된다. 아래로 곡예(曲藝)에 이르러서도 스승이 없는 경우가 없다. 그러니 어찌 일괄적으로 스승을 위해 입는 복제를 정해 놓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구씨(丘氏 구준(丘濬))가 이르기를, “송(宋)나라 유학자 황간(黃榦)이 그의 스승인 주자(朱子)의 상에 조복(弔服)에 마(麻)를 가하여 심의(深衣)와 같이 만들어 입고는 관(冠)과 질(絰)을 착용하였고, 왕백(王柏)이 그의 스승인 하기(何基)의 상에 심의에 대(帶)를 더하여 착용하고 질(絰)을 두르고, 관(冠)에 실로 테두리를 둘렀으며, 왕백이 죽자 그의 제자인 김이상(金履祥)이 상복을 입으면서는 백포건(白布巾)에 수질(首絰)을 가하였는데, 수질은 시마복의 수질과 같이 하되 작게 하고, 띠는 세저(細苧)로 만들었다. 황간과 왕백과 김이상 세 사람은 모두 주자 문하의 적전(嫡傳)을 이어받은 사람들인바, 그들이 만든 스승을 위해 입는 상복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후세에서 스승의 은혜와 의리를 위하여 상복을 입고자 하는 자들은 의당 이를 준용하여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이르기를, “스승의 경우에는 그 정의(情義)의 깊고 얕음에 따라서 혹 심상으로 3년을 입거나, 1년을 입거나, 9개월을 입거나, 5개월을 입거나, 3개월을 입거나 한다. 벗일 경우에는 비록 가장 중하게 입는다고 하더라도 3개월을 넘기지 않는다.” 하였다.   붕우(朋友)에 대해서 입는 복 [문] 붕우가 서로를 위해서 복을 입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이유태(李惟泰)- [답] 예경 및 선유(先儒)들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전(傳)에 이르기를, “붕우를 위해서는 마복을 입는다.[朋友麻]”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붕우는 비록 친족 관계는 아니나 도(道)를 같이하는 은혜가 있으므로 서로를 위하여 시복(緦服)의 질대(絰帶) 차림을 한다.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는 질을 두르고, 밖으로 나갈 때에는 두르지 않는다.[羣居則絰出則否]’ 하였다. 옷은 조복을 입는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군(羣)은 공자의 72명 제자가 서로 벗이 된 것을 이른다.’ 하였는바, 집 안에 있을 적에는 죽은 자를 위하여 질을 두르고 있다가 집을 나가서 길을 갈 적에는 두르지 않은 것이다. 단궁에 또 이르기를, ‘공자의 상에 제자들이 모두 질을 두르고 나갔다.[孔子之喪 二三子皆絰而出]’ 하였는데, 이것은 스승을 위하여 밖에 나갈 적에도 질을 둘렀던 것이다. 무릇 조복(弔服)에 대해서는 곧장 소변(素弁)과 환질(環絰)을 말하면서 대(帶)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떤 자가 이를 해석하면서, ‘수질(首絰)은 있으나 대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조복에는 이미 최복을 착용하고 머리에는 수질이 있으니, 길할 때에 입는 옷에 띠는 대대(大帶)를 착용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머리에 대해서는 환질을 말하였으니, 그 대는 반드시 환질과 같지는 않을 것으로, 단지 5분의 1을 제거하고서 꼬는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기(記)에 이르기를, “붕우가 모두 다른 나라에 있을 경우에는 단(袒)을 하고 문(免)을 한다. 귀국한 다음에는 그만둔다.[朋友皆在他邦袒免 歸則已]”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복을 입을 만한 친족이 없을 경우에는 마땅히 그 상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매번 단을 할 때가 되면 단을 하고, 단을 하였으면 관을 벗고서 대신 문을 한다. ‘이(已)’는 그만두다는 뜻인 지(止)와 같다. 귀국해서 상주가 될 사람이 있으면 단하고 문하는 것을 그만두는데, 상주가 될 사람이 어릴 경우에는 그만두지 않는다.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이르기를, ‘대공복을 입어야 할 자가 상주 노릇을 할 경우에는 죽은 자에게 삼년복을 입을 자가 있으면 그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소상과 대상 두 제사를 지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붕우로서 상주 노릇을 할 경우에는 우제와 부제 두 제사만 지내 주면 된다.[大功者主人之喪有三年者則必爲之再祭 朋友 虞祔而已]’ 하였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혹 함께 유학(遊學)하던 자가 모두 다른 나라에서 죽었을 경우에는 매번 단을 해야 하는 절차에 이르면 붕우를 위해서 단을 하고서 문을 하는데, 종족(宗族)의 5세(世)를 위하여 단을 하고서 문을 하는 것과 같이 한다. ‘귀국한 뒤에는 그만둔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있을 적에 단을 하고 문을 하는 것은 죽은 자에게 상주가 없어서 하는 것이고, 귀국하여 집에 도착하면 자연 상주가 있으니 그치고서 단과 문을 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예경에는 단지 ‘붕우의 상을 위해서는 마복(麻服)을 입는다.’고만 하였으니, 조복(弔服)과 같이 하되 마질(麻絰)을 가할 뿐이다. 그러나 날수에 대해서는 말해 놓지 않았다. 그리고 제전(祭奠)을 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설에 ‘친척의 상(喪)을 들은 자는 단지 위(位)를 설치하고서 곡만 해야지, 제사 지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이는 그 신령(神靈)이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 대개가 이와 같은바, 역시 두텁게 하고 박하게 하며 길게 하거나 짧게 하는 것으로써 절도를 삼는 것이 마땅하며, 한 가지로 논의를 정하기는 곤란하다.” 하였다.   [주D-001]곡예(曲藝) : 바둑이나 장기 등과 같은 하찮은 기예를 말한다. [주D-002]황간(黃榦) : 남송의 이학가(理學家)로 주자의 문인(門人)이다. 자가 직경(直卿)이고 호가 면재(勉齋)이며, 복주(福州) 민현(閩縣) 사람이다. 저서로는 《경해(經解)》, 《중용총론(中庸總論)》, 《면재문집(勉齋文集)》 등이 있다. [주D-003]왕백(王柏) : 송나라 금화(金華) 사람으로, 자가 회지(會之)이고 호가 장소(長嘯), 노재(魯齋)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하기(何基), 허겸(許謙), 김이상(金履祥) 등과 함께 금화주학(金華朱學)의 중요한 전인(傳人)으로, 금화사 선생(金華四先生)이라고 불렸다. 저술로는 《독역기(讀易記)》, 《서의(書疑)》, 《시의(詩疑)》 등이 있다. [주D-004]김이상(金履祥) : 원(元)나라 사람이다. 송나라가 망한 뒤 벼슬하지 않고 인산(仁山) 아래에 살면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으므로 인산 선생(仁山先生)이라고 불렸으며, 《상서표주(尙書表注)》, 《통감전편(通鑑前編)》, 《논어주(論語注)》 등을 저술하였다. [주D-005]어떤 …… 하였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或曰有絰有帶’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중국 북경대학출판사에서 나온 이학근(李學勤) 주편(主編)의 《의례주소(儀禮注疏)》에 의거하여 ‘或曰有絰無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조석곡(朝夕哭) 조석으로 곡할 적에는 절을 하지 않는다. [문] 상중에 조석으로 곡할 적에는 절하는 예가 있어야 합니다. 대개 산 사람에 대해서 혼정신성(昏定晨省)할 적에도 절해야 하는바, 상례에 빠진 것은 어째서입니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은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가례(家禮)》를 보면 조석으로 곡을 하면서 전을 올릴 적에는 재배(再拜)한다는 글이 있는데, 어째서 빠졌다고 하는가?”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곡을 하고 전을 올리는 것은 같은 때에 하는 일이지 각각의 두 가지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宋浚吉)- [답] 상중에 있는 사람은 항상 궤연(几筵)을 모시고 있으므로 조석으로 배알(拜謁)하는 예가 없는 것이네. 《가례》에서 ‘조석으로 전을 올릴 적에 재배한다.’고 한 것은, 조석으로 곡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설전(設奠)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네. 오늘날 사람들이 모두 조석으로 곡하는 것과 전을 올리는 것을 한 가지 일로 여기고 있는 데 대해 평상시에 그르다고 생각해 왔는데, 일찍이 《의례》 사상례(士喪禮)를 상고해 보니 과연 두 가지 일로 되어 있었네. 정우복의 설은 옳지 않네. ○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를, “묻기를, ‘효자가 시신을 넣은 상구 앞에서는 상례를 보면 모두 절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주자가 말하기를,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자제들이 절을 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부모님이 일어나서 옷을 갖추어 입은 다음에 하네. 지금은 아마도 차마 귀신으로 섬길 수 없으므로 역시 절을 하지 않는 것인 듯하네.’ 하였다.” 하였다. ○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에 이르기를,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조석으로 곡을 하는데, 자묘(子卯)를 피하지 않는다. 부인은 당(堂)에 있는 자리로 나아가는데,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곡을 한다. -이 부분의 소(疏)에 이르기를, “곧장 부인이 곡한다고 하였으니, 장부(丈夫) 역시 곡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글을 갖추어 적지 않은 것일 뿐이다.” 하였다.- 장부는 문밖에 있는 자리로 나아가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북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외형제는 그 남쪽에 있는데,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빈객은 그 뒤에 있는데, 북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주인이 자리로 나아간다. 문을 열어 놓는다. 주인이 빈객에게 절을 한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문으로 들어가 곡을 한다.……[朝夕哭 不辟子卯 婦人卽位于堂 南上 哭 丈夫卽位于門外西面北上 外兄弟在其南 南上 賓繼之 北上 主人卽位 辟門 主人拜賓 右還 入門 哭 云云]’고 하였으며, -이상은 조석으로 곡하는 것이다.- 또 이르기를, ‘철거하는 자가 문밖에서 손을 씻는다. 조계(阼階)를 통해서 올라간다. 축이 먼저 나온다. 주(酒)와 두(豆)와 변(籩)과 조(俎)가 순서대로 따라간다. 서쪽 계단을 통해서 내려온다.……[徹者盥于門外 升自阼階 祝先出 酒豆籩俎序從 降自西階 云云]’고 하였으며, -이상은 대렴의 전(奠)을 철거하는 것이다.- 또 이르기를, ‘이어 전을 올린다. 예(醴)와 주(酒)와 포(脯)와 해(醢)를 올린다. 장부가 용(踊)을 한다. 들어가서 처음과 같이 진설한다. 빈이 나간다. 주인이 절을 하면서 전송한다.……[乃奠 醴酒脯醢升 丈夫踊 入 如初設 賓出 主人拜送 云云]’고 하였다. -이상은 조석으로 전을 올리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1]혼정신성(昏定晨省) : 자식이 효성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는 것으로,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피고 아침에는 안부를 여쭙는 것을 말한다. [주D-002]자묘(子卯) : 《의례》의 주를 보면 자일(子日)은 걸(桀)이 망한 날이고, 묘일(卯日)은 주(紂)가 망한 날로, 흉한 날을 말한다고 하였다.     전(奠) 제전(祭奠)을 올릴 적에는 곡을 하고 절을 한다. [문] 《가례》의 조전조(朝奠條)와 제주조(題主條)에는 “재배(再拜)하고 곡을 하여 슬픔을 다한다.” 하였고, 천구조(遷柩條)에는 “곡을 하여 슬픔을 다하고 재배한다.” 하였으며, 우제조(虞祭條)에는 “곡하고 재배한다.” 하여 문세(文勢)가 서로 같지 않은데, 각각 뜻이 있는 것입니까? 구씨(丘氏)는 이 몇 가지 절차에 대해서 모두 ‘곡을 하고 절을 한다.’는 것으로 의절(儀節)을 삼았는데, 이것이 과연 《가례》의 본뜻에 합치되는 것입니까? -황종해(黃宗海)- [답] 구씨의 의절 역시 따를 만하네. 망전(望奠)과 삭전(朔奠)은 차이가 있다. [문] 《의례》 사상례를 보면, “월반에는 은전(殷奠)을 올리지 않는다.[月半不殷奠]” 하였는데, 월반전(月半奠)을 올리는 것은 본래 대부의 예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가묘(家廟)에서는 항상 보름날에 참알(參謁)하는 예를 행하였으니, 지금 궤연(几筵)에 대해서 어찌 완전히 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찬품(饌品)만 삭전을 올릴 때와는 차이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망전을 올릴 적에는 조금 감해서 올리면 될 것이네. 속절(俗節)에는 상식(上食)을 올린 뒤에 별도로 제철에 나는 음식을 진설한다. [문] 3년의 상기(喪期) 안에 속절을 만났을 때 삭전을 올리는 예에 의거해 조전(朝奠)을 올림을 인하여 상식까지 겸하여 올립니까? 아니면 초하루와 속절은 차이가 있으니, 상식을 올린 뒤에 별도로 주과(酒果)와 몇 가지 제찬(祭饌)을 진설합니까? -송준길- [답] 속절에 조전을 올림을 인하여 상식을 겸하여 행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대하게 하는 듯하네. 그러니 아침에 상식을 올린 뒤에 별도로 진설하는 것이 무방하네. 3년의 상기 안에 은전(殷奠)을 올릴 적에는 참신(參神)하고 강신(降神)하는 예가 없다. [문] 가묘(家廟)에는 삭망(朔望)에 참신하고 강신하는 예가 있는데, 3년의 상기 안에 은전을 올릴 적에는 참신하고 강신하는 예가 없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효자는 항상 궤연(几筵)을 모시고 있으므로 참신하거나 강신하지 않는 것이네.   [주D-001]은전(殷奠) : 성대하게 차린 전으로, 희생(犧牲)과 여러 가지 제수(祭需)를 갖추어서 올리는 전을 말한다. [주D-002]월반전(月半奠) : 월반은 한 달의 가운데인 보름날을 가리키는바, 보름에 올리는 전을 말한다.     상식(上食) 예에는 여름날에 세 차례 상식을 올리는 법이 없다. [문] 사람들 중에 혹 여름날에도 세 차례 상식을 올리는 자가 있는데,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의례》의 주소(注疏)에서 논해 놓은 바가 있네. ○ 《의례》 사상례의 기(記)에 이르기를, “죽은 자에게 평상시에 봉양하던 물품으로, 평상시처럼 밥이나 사철에 나는 진귀한 물품이나 목욕을 하는 데 쓰는 더운 물 등을 진설한다.[燕養饋羞湯沐之饌如他日]”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궤(饋)’는 아침저녁으로 먹던 밥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정씨(鄭氏)가 《논어(論語)》 향당(鄕黨)의 주에서 이르기를, ‘불시(不時)는 아침과 저녁과 일중(日中)의 때가 아닌 때이다.’ 하였다. 하루 동안에는 세 때에 밥을 먹는데, 지금 주에서 아침과 저녁만을 말하고 일중(日中)의 때를 말하지 않은 것은 혹 정씨가 말을 생략한 것으로, 역시 일중의 때가 들어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혹 죽은 뒤에는 일중의 때를 생략해 버리고서 단지 조식과 석식만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식은 3년의 상기를 다 마치도록 올린다. [문] 주자(朱子)가 ‘축 부인(祝夫人 주자의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 항상 한천정사(寒泉精舍)에 거처하면서 삭망(朔望)이면 궤연(几筵)에 와서 전(奠)을 올렸다.’고 운운하였는데, 조석으로 궤전(饋奠)을 올리지는 않았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장사를 치른 뒤에는 혹 상식을 올리는 것을 파하기도 하는데, 어떻습니까? -강석기(姜碩期)- [답] 장사를 치른 뒤에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는 것을 파하고 파하지 않는 것에 대해 평상시에도 늘 의심을 두어 왔었네. 일찍이 여러 서책을 상고해 보건대, 장횡거(張橫渠)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설 및 주자가 섭미도(葉味道)에게 답한 편지로 볼 적에는 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네. 그러나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졸곡(卒哭)이 되면 이름을 휘(諱)하는바, 이때부터 산 사람으로 섬기는 일은 끝나고 귀신으로 섬기는 것이 시작된다.[卒哭而諱生事畢而鬼事始]”고 한 부분의 아래에 나오는 정씨(鄭氏)의 주(註)와 소(疏) 및 주자가 육자수(陸子壽)에게 답한 편지, 호백량(胡伯量)과 이계선(李繼善) 등의 문목(問目)에 답한 글로 본다면, 고례(古禮)에서는 분명히 파하였네. 《가례》에는 비록 파한다는 말이 없으나, 주자가 평상시에 한천정사에 거처하고 있다가 삭망에 궤전에 와서 전(奠)을 올렸다는 글로 본다면, 조석으로 전을 올리는 것을 파한 날에는 아울러 상식을 올리는 것도 파하고, 단지 삭망에만 은전(殷奠)을 올린 것이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준거로 삼기 어려운 것으로, 오직 주자가 이른바 “후하게 하는 데 있어서 방해되지 않고 또 참람하다는 혐의가 없으면 우선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는 가르침으로 정론을 삼는 것이 마땅할 것이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예경을 보면 졸곡에도 오히려 조석으로 곡하는 것을 보존해 두었다. 만약 빈궁(殯宮)에서 제사 지내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 곡을 하겠는가. 《국어(國語)》에서는 일제(日祭)와 월향(月享)을 말하였으나, 예경 가운데 어찌 일제(日祭)의 예가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3년의 상기 안에는 궤연(几筵)을 철거하지 않으므로 일제를 지내면서 조석으로 궤전(饋奠)을 올리는 예가 있어서 마치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처럼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예를 올리는 것을 이른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섭미도(葉味道)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국어》에는 일제를 지낸다는 글이 있으니, 이는 상주가 침소(寢所)를 회복한 뒤에도 오히려 날마다 상식을 올리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졸곡이 되면 이름을 휘하는바, 이때부터 산 사람으로 섬기는 일은 끝나고 귀신으로 섬기는 것이 시작된다.[卒哭而諱生事畢而鬼事始已]”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의 주에 이르기를, “다시는 하실(下室)에서 궤식(饋食)하지 않으며, 귀신으로 제사하는 것을 이른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하실(下室)’은 내침(內寢)으로, 살아 있을 때 음식을 먹고 일을 하던 곳을 이른다. 장사 지내지 않았을 적에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섬기는 예로 섬기니, 마땅히 포해(脯醢)를 가지고 빈소에 전을 올리며, 또 하실에 서직(黍稷)을 진설하는 것이다. 초하루와 보름에 이르면 은전(殷奠)을 올리는데, 은전에는 서직이 있기 때문에 하실에 진설하지 않는다. 이미 우제(虞祭)를 지내고 난 뒤에는 마침내 제례(祭禮)를 써서 하실에서는 드디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는 하실에서 궤식하지 않는다.’는 글이 졸곡의 아래에 있으니, 졸곡을 할 때에야 하실에서 다시는 궤식을 하지 않는 것이다. 황씨(皇氏)는 이르기를, ‘우제를 지낼 경우에는 하실에서 다시 궤식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치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하였다. -《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의 졸곡부연상담기(卒哭祔練祥禫記)에 나온다.- ○ 주자가 육자수(陸子壽)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예경에 의거해 보면, 소렴에는 석(席)이 있고 우제를 지낸 뒤에는 궤연이 있는데, 다만 졸곡을 지낸 뒤에는 다시는 하실에서 궤식하지 않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육자수가 부제(祔祭)를 지낸 뒤에 궤연을 철거하려고 하자, 주자가 수백 마디의 말을 하여 통렬하게 깨뜨렸는데, 그 대강의 뜻은 ‘부제를 지낸 뒤에는 상주가 침소로 돌아가고 궤연에는 3년의 상기가 다하도록 상식을 올리니, 졸곡 뒤에는 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인 듯하다.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 호백량(胡伯量)이 주자에게 묻기를, “살펴보건대, 《의례》를 보면 시우(始虞)의 아래에도 오히려 조석으로 곡은 하되 전(奠)은 올리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서의(書儀)》에도 ‘장사 지낸 뒤에 궤식(饋食)하는 것은 속례(俗禮)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즉 궤연이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조석으로 곡만 하는 것은 오히려 산 사람을 섬기듯이 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주자가 답한 바를 보면 이것에 대해 그르다고 하지 않았다.- ○ 이계선(李繼善)이 주자에게 묻기를, “《예기》 단궁을 보면, 이미 합부(合祔)한 뒤에는 아침저녁으로는 곡을 하고 절만 하다가 초하루에 전만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살펴보건대 단궁에는 이런 글이 없으니, 의심스럽다. 혹 위의 조항에서 인용한 정씨(鄭氏)의 주(註) 및 소(疏)에 나오는 설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바, 상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장 선생(張先生)께서는 ‘3년 동안에는 궤연(几筵)을 철거하지 않으므로 날마다 올리는 제사가 있다.’고 하였으며, 사마온공(司馬溫公) 역시 ‘아침저녁으로 마땅히 음식을 올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는 이 예는 상이 다 끝나도록 행하면서 변경치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경(禮經)과 서로 합치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이러한 예에 있어서는 오늘날 세상에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예가 후한 쪽으로 하는 데에 해롭지 않으며, 또한 참람하다는 혐의도 없다. 그러니 우선은 따라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 말뜻을 상세히 살펴보면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궤식은 고례로 보면 파하는 것이 마땅하나, 세속의 풍습을 따라 후한 쪽으로 해도 해롭지는 않다고 한 듯하다.- ○ 《가례》에 이르기를, “우제(虞祭)를 지낸 뒤에는 아침저녁으로 전을 올리는 것을 파하지만,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는 것을 파한다는 글은 없다.” 하였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이 말하기를, “《가례》를 보면 비록 파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전을 파하는 날에 파함으로써 고례를 준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주자의 ‘후한 쪽으로 하는 것이 해롭지 않다.’는 말이 있으니, 행해도 괜찮다.” 하였다.- ○ 퇴계가 어떤 사람에게 답하기를, “주자가 어떤 벗에게 답한 편지에서 장사 지낸 뒤에 궤연을 철거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논하였다. 다만 《의례》에 근거해 본다면, ‘다시는 하실에서 궤식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른바 ‘궤연을 철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직 삭망(朔望)에 지내는 제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는 하실에서 궤식하지 않는다면, 부제(祔祭)를 지낸 뒤에는 다시 상식을 올리지 않을 듯하다. 다만 지금 사람들은 모두 3년의 상기가 다하도록 상식을 올리는데, 예에 있어서는 후한 쪽을 따라서 하는 것이 마땅한바, 세속의 풍습을 따라서 행하는 것도 괜찮다.” 하였다.   형제의 상을 당하였는데 후사(後嗣)가 없을 경우에 상복을 입는 중에는 궤연을 철거해서는 안 된다. [문] 동생이 죽었는데 동생의 처자식이 없을 경우에 장사 지낸 뒤에 곧바로 할아버지의 감실(龕室)에 합부하고 궤연을 철거합니까? -송준길- [답] 동생에게 비록 자식이 없더라도 졸곡을 지낸 뒤에 곧바로 궤연을 철거하는 것은 차마 못 할 일이네. 예경을 보면 아내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기년(期年)이 지난 뒤에 궤연을 철거하니, 이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네. 부모의 상중에 아들이 죽었을 경우에는 성복(成服)하기 전에는 조석으로 올리는 상식(上食)을 폐한다. [문] 아들이 부모의 상중에 죽었을 경우에는 아들의 상에 대해 성복하기 전에는 부모에게 조석으로 올리는 제사를 폐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우복은 답하기를, “《예기》 증자문(曾子問)을 보면, ‘임금이 죽었을 경우에는 축(祝)이 여러 묘(廟)의 신주(神主)를 모아 조묘(祖廟)에 보관하였다가 졸곡(卒哭)을 마친 뒤에 각각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낸다.’ 하였는데, 이를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살아 있는 자가 흉사(凶事)를 위하여 모두 모이는 것을 형상한 것이다.’ 하였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빈(殯)을 하기 전에는 조석으로 올리는 상식을 부득이 폐하여야만 할 것 같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의 설이 옳네.   [주D-001]어떤 사람 : 조진(趙振)을 가리킨다. 이 편지는 《퇴계집》 권38에 나온다.     조(弔) 조문할 적에는 서서 곡해야 한다. [문] 오늘날 사람들은 조상(弔喪)을 할 적에 서서 곡하기도 하고 엎드려서 곡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황종해- [답] 서서 곡하여야 하네. 그러나 세속의 풍습을 따라서 엎드려서 곡하는 것도 무방하네. 주인이 변복(變服)하기 전에는 조문하는 자는 변복하지 않는다. [문] 주인이 변복하지 않았을 경우에 조문하는 자는 복색(服色)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위의 친후입곡조(親厚入哭條)에 나왔다.- 내상(內喪)과 외상(外喪)에 하는 조문과 곡 [문] 평소에 만약 당(堂)에 오르지 않았다면 외상으로 삼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바로 내상을 함께 빈(殯)한 곳에 들어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강석기- [답] 내상과 외상은 함께 빈해서는 안 되는바, 들어가서 곡하는 것의 여부는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네. 부인(婦人)의 상에는 조문은 하되 곡하지는 않는다. [문] 살아 있는 자를 알 경우에는 조문은 하되 슬퍼하지 않는 것은, 예의 뜻으로 보면 참으로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로 서로 친하게 지내던 처지에서 그의 어머니 상에 조문하면서 곡하지 않는 것이 과연 인정에 맞는 것입니까? -황종해- [답] 부인의 상에는 미처 당에 올라가 뵙지 않은 자는 곡하지 않는 것이 옳네. 향인(鄕人)들 가운데에는 곡을 하는 자들이 많은데, 옳지 않네. 죽은 사람을 알지 못할 경우에는 곡하지 않는다. [문] 산 사람을 알 경우에는 조문을 하고 죽은 사람을 알 경우에는 슬퍼하는 것이 예입니다. 다만 산 사람과의 정이 두터울 경우에는 비록 죽은 사람을 알지 못하더라도 곡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강석기- [답] 죽은 자는 분별이 없는 법이니 어찌 억지로 곡을 할 수 있겠는가. 두려워서 죽은 자, 압사(壓死)한 자, 익사(溺死)한 자에 대해서 모두 일률적으로 조문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문] 두려워서 죽은 자, 압사한 자, 익사한 자에 대해서는 고례를 보면 상복(喪服)이 없다는 글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 가운데에는 이런 변고를 만난 자가 자못 많은데, 고례에 따라서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황종해- [답] 두려워서 죽은 자, 압사한 자, 익사한 자에 대해서는 조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기》 단궁에 나와 있으나, 상복이 없다는 말은 보지 못하였네. 만약 싸움터에서 전투를 하다가 죽었거나 서울로 올라가다가 바다에 빠져서 죽었을 경우에는 어찌 조문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조문을 받는 절차 및 조문하는 데 있어서의 변례(變禮) [문] 조문을 받을 때 맞이하고 전송하는 절차는 일괄적으로 똑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야차(野次)에서 서로 아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에는 역시 서로 조문해도 괜찮습니까? -송시열- [답] 예경에 논해 놓은 바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부인은 객을 맞이하거나 객을 보낼 적에 당(堂)을 내려가지 않는다. 만일 내려갈 경우에는 당 아래에서 곡하지 않는다. 남자는 침문(寢門)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만날 경우에는 곡하지 않는다.[婦人迎客送客不下堂下堂不哭 男子出寢門外見人 不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당 안쪽에서 방에 이르기까지는 부인의 일이고, 당 바깥에서 문에 이르기까지는 남자의 일이다. 자신의 장소가 아닌 데에서 곡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부인은 자신과 맞상대가 될 만한 사람에 대해서는 참으로 당을 내려가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만약 군부인(君夫人)이 와서 조문할 경우에는, 주부(主婦)가 당을 내려가 뜨락까지 가서 머리를 조아리되, 곡하지는 않는다. 남자 역시 자신과 맞상대가 될 만한 자가 조문하러 올 경우 문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임금의 명을 받든 자가 조문하러 올 경우에는 나가서 맞이하되 역시 곡하지는 않는다.” 하였다. ○ 단궁에 또 이르기를, “제나라 장공(莊公)이 거(莒)를 ‘좁은 길[奪]’ -‘奪’의 음은 태(兌)이다.- 에서 기습했는데, 이 싸움에서 기량(杞梁)이 전사하자 기량의 아내가 그의 영구를 길에서 맞이하여 슬피 울었다. 장공이 사람을 보내 조상(弔喪)하니 기량의 아내가 말하기를, ‘만약 임금의 신하가 죄를 면할 수 없다면 장차 시조(市朝)에 시체를 버려둘 것이며, 처첩은 잡혀 갇힐 것입니다. 만약 임금의 신하가 죄를 면하게 된다면 조상할 곳은 선인의 초라한 집이나마 있으니, 임금께서는 길에서 조상하여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하였다.[齊莊公襲莒于奪 杞梁死焉 其妻迎其柩於路而哭之哀 莊公使人弔之 對曰 君之臣不免於罪 則將肆諸市朝 而妻妾執君之臣免於罪 則有先人之敝廬在 君無所辱命]”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보면, 제나라 임금이 그의 실(室)에서 조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살펴보건대, 단궁의 말은 비록 이와 같이 되어 있으나, 서로 잘 아는 자가 야차(野次)에서 상구(喪柩)를 멈추고 있는 것을 만났다면 어찌 조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붕우와의 친분이 두터울 경우에는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도 조문하면서 곡한다. [문] 증자가 말하기를, “붕우의 묘에 숙초(宿草)가 있으면 곡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혹 먼 곳에 살고 있어서 연제를 지낸 뒤에 가서 조문할 경우에도 오히려 곡하지 않는 것입니까? -오윤해(吳允諧)- [답] 증자의 설은 비록 그와 같지만, 정이 두터운 자일 경우에는 곡하는 것이 뭐가 해롭겠는가. 이 역시 인정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이네. 이미 제상(除喪)한 뒤에도 조문을 받는다. [문] 제상한 뒤에 친구가 이미 상이 다 끝난 것을 모르고 와서 조문할 경우,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이유태- [답] 예경에서 논해 놓은 바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위(衛)나라 장군인 문자(文子)의 상에 이미 제상한 뒤에 월(越)나라 사람이 조문하러 왔다. 상주가 심의를 입고 연관을 쓰고 묘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조문을 받되 곡은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자유(子游)가 그것을 보고 이르기를, ‘장군 문씨의 아들이 거의 예에 가깝구나. 예제(禮制)에 없는 예를 하면서도 그 거동이 예에 맞는구나.’ 하였다.[將軍文子之喪 旣除喪而后 越人來弔 主人深衣練冠 待于廟 垂涕洟 子游觀之曰 將軍文氏之子 其庶幾乎 亡於禮者之禮也其動也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주인’은 문자의 아들이다. 심의(深衣)는 길흉(吉凶)에 통용하여 입을 수 있다. 소상(小祥)의 연복(練服)에 쓰는 관은 순전히 길한 것도 순전히 흉한 것도 아니다. ‘묘(廟)’라는 것은 신주(神主)가 있는 곳이다. 기다리기는 하지만 맞이하지는 않는 것은 조문을 받는 예이다. 곡하지는 않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곡할 때가 이미 지나갔으나 슬픔의 정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기(庶幾)’는 가깝다는 뜻의 말이다. 자유는 그가 변례(變禮)에 잘 대처한 것을 좋게 여겼기 때문에 ‘거의 예에 가깝구나. 비록 이러한 예는 없는 것이기는 하나 예를 함에 있어서 그 거동이 모두 절도에 맞는구나.’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서로 간에 알지 못하는 자가 찾아왔는데 그가 조문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닐 경우에는 곡하지 않는다. [문] 상중에 일찍이 서로 알지 못하던 자가 찾아와서 만나 보기를 청할 경우에는 곡을 하고 절을 하면서 그를 접대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죽은 자에 대해서나 산 자에 대해서 모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상사(喪事)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조문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닐 경우에는 곡을 할 필요가 없네.     문상(聞喪) 《가례》의 문상미행조(聞喪未行條)에는 ‘성복(成服)’이란 두 글자가 빠져 있다. [문] 《가례》를 보면 ‘문상변복(聞喪變服)’이라고 한 부분의 아래에 ‘성복(成服)’이란 두 글자가 없는데, 이것은 아마도 아래 글에 나오는 ‘개여상의(皆如上儀)’라는 글을 덮어써서 그런 것인 듯합니다.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상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변복하는 것을 어찌 소식을 들은 뒤 4일째가 되도록 오래 기다렸다가 하겠는가. 필시 ‘성복’이란 두 글자가 빠진 것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네. 외상(外喪)의 소식을 들었을 경우의 예 [문] 어머니나 아내의 친족의 부음을 들었을 경우에는 어느 곳에서 곡하는 것이 마땅하며, 조문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역시 조문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까? [답] 예경에서 논해 놓은 바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분상(奔喪)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친족에 대해서는 묘(廟)에서 곡을 하고, 어머니나 아내의 친족에 대해서는 침(寢)에서 곡을 하고, 스승에 대해서는 묘문 밖에서 곡을 하고, 벗에 대해서는 침문 밖에서 곡을 하고, 면식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들판에 장막을 치고서 곡을 한다. 이때에는 대체로 자리를 만들기는 하나 전을 올리지는 않는다.[哭父之黨於廟 母妻之黨於寢 師於廟門外 朋友於寢門外 所識於野張帷 凡爲位不奠]” 하였다. ○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아내의 형제로서 장인의 뒤를 이은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는 적실(適室 정침(正寢))에서 곡하고, 자기의 아들로 하여금 애곡(哀哭)하는 주인이 되게 하여 단(袒)을 하고 문(免)을 하고 곡(哭)을 하고 용(踊)을 하게 한다. 남편은 문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에 선다. 별도로 사람을 시켜서 문밖에 세워 두었다가 조문객이 오면 고하게 한다. 조문하러 온 사람이 평소에 죽은 자와 서로 친숙하게 지내는 사이이면 들어와서 곡하게 한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정침에서 곡하지 않고 처의 방에서 곡한다. 죽은 자가 그의 아버지를 승중(承重)한 자가 아니면 이실(異室 측실(側室))에서 곡한다.[妻之昆弟爲父後者死 哭之適室 子爲主 袒免哭踊 夫入門右 使人立於門外告來者 狎則入哭 父在 哭於妻之室 非爲父後者 哭諸異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부재(父在)’라고 한 곳에서의 부는 자기의 아버지이다. ‘위부후(爲父後)’라고 한 곳에서의 부는 아내의 아버지이다. 문밖에 있는 사람이 조문하러 온 자에게 고하는 것이다. 만약 조문하러 온 사람이 평소에 교유하여 친숙한 사람이면 곧바로 들어가서 곡하는바, 정의(情義)가 그런 것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아들을 애곡하는 주인으로 삼는 것은, 생질은 외삼촌에 대해서 시마복을 입으므로, 자기의 아들에게 명하여 애곡하는 주인이 되어 조문을 받고 빈객에게 절하게 하는 것이다.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에 서는 남편은 이 아들의 아버지로서, 바로 아내의 형제에 대해서는 곡하는 자이다.” 하였다.   복이 없는 경우에도 곡하는 자리를 만들어 놓고 곡한다. [문] 강복(降服)해서 복이 없을 경우에는 곡하는 자리를 만들어 놓고 곡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답] 예경에 논해 놓은 바가 있어 상고해 볼 수 있네. 비록 원래 복이 없는 경우에도 친분이 두터운 사람의 상에는 역시 곡하는 자리를 만들어 놓고 곡하는 것이 마땅하네. ○ 《예기》 분상에 이르기를, “복이 없는데도 곡하는 자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형수와 시숙 및 강복을 입어 복이 없는 부인의 상으로, 이런 경우에는 마(麻)를 한다.[無服而爲位者 惟嫂叔及婦人降而無服者麻]”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강복을 입어 복이 없는 부인’은 고모나 자매의 경우 집에 있는 자에 대해서는 시마복을 입는데, 출가하였을 경우에는 강복을 입어 복이 없게 된다. 그를 위해 곡할 적에도 곡하는 자리를 만들어 놓고 곡한다. ‘마(麻)’라는 것은 조복(弔服)에 시마복의 환질(環絰)을 가한 것이다.” 하였다.   관례(冠禮), 혼례(昏禮), 제례(祭禮)를 치르다가 상을 당한 경우 [문] 관례, 혼례, 제례를 치르려 하는데 상을 당한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송시열- [답] 고례에 각각 몇 개의 절목이 있으니, 마땅히 옛 예와 오늘날의 예를 참작해서 그에 따라 행할 뿐이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아들의 관례를 거행하고자 하여 예를 도와줄 빈객들이 와서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들어왔을 때 자최(齊衰)나 대공(大功)의 상복(喪服)을 입어야 할 친족이 죽었다는 통지를 받았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죽은 자가 동성(同姓)의 친족일 경우에는 관례를 중지한다. 이성(異姓)의 친족일 경우에는 관례를 거행하되, 관례 뒤에 하는 예주(醴酒)의 연회는 베풀지 않으며, 관례에 사용한 물건들을 모두 치우고 깨끗하게 소제한 뒤 곡하는 자리에 나아가 애곡(哀哭)한다. 만약 관례를 위한 빈(賓)과 찬례(贊禮)하는 자가 도착하기 전에 상을 당하였다는 통지를 받았을 경우에는 관례를 중지한다.’ 하였다.[曾子問曰將冠子 冠者至 揖讓而入 聞齊衰大功之喪 如之何 孔子曰 內喪則廢 外喪則冠而不醴 徹奠而掃 卽位而哭 如冠者未至則廢]”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관자(冠者)’는 빈과 찬례하는 사람이다. 만약 대문(大門) 안쪽의 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폐하고서 거행하지 않으며, 상이 다른 곳에서 발생했을 경우에는 관례를 거행할 수 있다. 다만 관례를 거행하되, 세 번에 걸쳐서 관을 쓰기만 하고 그쳐서 예주(醴酒)는 하지 않으며, 배설(排設)하였던 예주와 찬구(饌具)를 모두 철거하고서 관례를 거행하였던 자리를 소제해서 다시금 깨끗하게 한 다음, 곡하는 자리로 나아가서 곡한다.” 하였다. ○ 증자문에 또 이르기를, “아들의 관례를 거행하려고 하는데 기일이 되기 전에 자최(齊衰)나 대공(大功), 소공(小功)의 상을 당하였으면 상복을 입음을 인하여 상관(喪冠)을 쓴다.[如將冠子而未及期日 而有齊衰大功小功之喪 則因喪服而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미급기일(未及期日)’은 관례를 치를 날짜가 되기 전에 상이 있는 것이다. ‘상복을 입음을 인하여서 상관을 쓴다’는 것은, 상에 따른 성인(成人)의 상복을 착용하고서 상관을 쓰는 것이다. 자최 이하의 상인 경우에는 상복을 입은 채로 관례를 거행할 수 있고, 참최(斬衰) 이상의 경우에는 그래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상을 당하여 관례를 올릴 나이가 되었을 경우에는 삼년상 중에 있더라도 관례를 올려도 된다. 그럴 경우 먼저 상차(喪次)에서 관을 쓰고서 들어가서 세 번씩 하는 곡용(哭踊)을 세 차례 하고서 나온다.[以喪冠者 雖三年之喪 可也 旣冠於次 入哭踊三者三乃出]” 하였다. ○ 《개원례(開元禮)》에 이르기를, “관례를 올릴 달이 되면 상복을 입고 있음을 인하여 관을 쓰는 것이지, 관례를 올릴 달에 변제(變除)함을 인하여 졸곡을 지내고서 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 공자가 말하기를, “무왕(武王)이 붕(崩)하자 성왕(成王)이 겨우 13세의 나이로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다음 해 여름 6월에 장례를 마친 다음 관례를 올리고서 묘(廟)에서 조회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 말은 변제를 인하여서 관례를 올린 것이다. 이것으로써 본다면, 참최 이상일 경우에도 관례를 올리는 것은 역시 근거가 있는 것이다. ○ 이상은 관례 중에 상을 당한 경우이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혼례에 있어서 이미 납폐(納幣)를 하고 혼례를 치를 길일을 잡았는데, 신부의 부모가 죽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신랑의 집에서 사람을 시켜서 조문해야 한다. 신랑의 부모가 죽었을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도 사람을 시켜서 조문해야 한다. 상대방이 아버지의 상이면 이쪽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조문하고, 어머니의 상이면 이쪽에서도 어머니의 이름으로 조문한다. 부모님이 안 계시면 백부(伯父)나 세모(世母)의 이름으로 조문한다. 신랑이 장사를 치르고 나서는 신랑의 백부가 여자의 집에 알리기를, 「아무개의 아들이 부모상을 당하여 형제지친(兄弟之親)을 맺을 수 없으므로 아무개를 보내 알립니다.」 한다. 그러면 여자의 집에서 허락하나 감히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지 않는 것이 예이다. 신랑이 상기(喪期)를 마친 뒤에 여자의 부모가 사람을 보내어 다시 혼인하기를 청한다. 신랑이 거부하면 비로소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는 것이 예이다. 신부의 부모가 죽었을 경우에도 신랑 집에서 또한 이와 같이 한다.’ 하였다.[昏禮 旣納幣有吉日 女之父母死 則如之何 孔子曰 壻使人弔 如壻之父母死 則女之家亦使人弔 父喪稱父 母喪稱母 父母不在 則稱伯父世母 壻已葬 壻之伯父致命女氏曰 某之子有父母之喪 不得嗣爲兄弟 使某致命 女氏許諾而弗敢嫁 禮也 壻免喪 女之父母使人請 壻弗取而后嫁之禮也 女之父母死 壻亦如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유길일(有吉日)’이란 것은, 혼인 날짜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상대방이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으면 이쪽에서는 아버지의 명(命)을 칭하여 조문하고, 상대방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으면, 이쪽에서는 어머니의 명을 칭하여 조문한다.” 하였다. ○ 증자문에 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친영하여 신부가 시집으로 오는 도중에 신랑의 부모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신부가 시집갈 적에 입는 옷을 벗고 베로 만든 심의를 입은 다음 흰 명주 조각으로 머리털을 묶고서 분상(奔喪)한다. 여자가 아직 길에 있을 때 친정 부모가 죽었을 경우에는 신부가 다시 돌아간다.’ 하였다.[親迎 女在塗而壻之父母死 則如之何 曰女改服布深衣 縞總以趨喪 女在塗而女之父母死則女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여자의 경우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위해서 삼년복(三年服)을 입는다. 그러나 시집갔을 경우에는 기년복을 입는다. 지금은 이미 시집으로 가고 있는 도중이니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단지 분상하는 예를 써서 기년복을 입는다.” 하였다. ○ 증자문에 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만약 신랑이 친영하여 시집에 도착하기 전에 신랑에게 자최나 대공의 상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남자는 집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 처소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여자는 집 안에 들어가서 안의 처소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그렇게 한 뒤에 곡위(哭位)에 나아가 곡한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제상(除喪)한 뒤에 또다시 혼례를 거행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제사도 때가 지나면 다시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이 예법이다. 그런데 또 어찌 처음으로 되돌려서 혼례를 거행하겠는가.’ 하였다.[曾子問曰 壻親迎 女未至而有齊衰大功之喪 則如之何 孔子曰 男不入 改服於外次 女入 改服於內次 然後卽位而哭 曰除喪則不復昏禮可乎曰 祭過時不祭 禮也 又何反於初]”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곳에서 특별히 자최(齊衰)의 상과 대공(大功)의 상에 대해서만 물은 것은, 소공(小功)의 상과 시마(緦麻)의 상은 가벼워서 혼례를 폐하지 않으며, 혼례를 마친 뒤에 곡만 할 뿐이다. 만약 신부 측의 집에 자최나 대공의 상이 있을 경우에도 신부는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였다. 이상은 혼례 중에 상을 당한 경우이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대부(大夫)의 제사에 있어서 정조(鼎俎)를 이미 벌여 놓고 변두(籩豆)를 이미 진설해 놓고서도 예를 이룰 수 없어 제사를 중지하는 경우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아홉 가지가 있다. 천자가 붕(崩)하였을 경우, 왕후(王后)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국군(國君)이 훙(薨)하였을 경우, 국군 부인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국군의 태묘(太廟)에 불이 났을 경우, 일식(日食)이 있을 경우, 자신이 삼년상을 당하였을 경우, 자최복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자신이 대공복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모두 제사를 중지한다. 외상(外喪)의 경우에는 자최복 이하의 상에는 모두 제사 지낸다. 그러나 자최복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지내는 제사의 경우에는 시동씨를 맞아들여 3반(飯)을 올릴 뿐 더 권하지 않는다. 술로 입을 가시는 일도 시동씨에게 술잔을 주어 입을 가시게 할 뿐 수작(酬酌)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대공복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지내는 제사의 경우에는 술잔을 수작하고 그친다. 소공이나 시마복의 상을 당한 경우에는 실 안에서 헌수(獻酬)만 하고 그친다. 사(士)의 경우에 이와 다른 것은 시마복(緦麻服)의 상을 당해서도 제사를 중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 지내는 대상자가 죽은 자에 대해서 복(服)이 없을 경우에는 제사를 지낸다.’ 하였다.[曾子問曰 大夫之祭 鼎俎旣陳 籩豆旣設 不得成禮 廢者幾 孔子曰九 天子崩 后之喪 君薨 夫人之喪 君之大廟火 日食 三年之喪 齊衰 大功 皆廢 外喪自齊衰以下行也 其齊衰之祭也 尸入 三飯 不侑 酳不酢而已矣 大功酢而已矣 小功緦 室中之事而已矣 士之所以異者 緦不祭 所祭 於死者無服則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외상’은 대문의 바깥에서 난 상이다. 사(士)는 대부보다 낮아서 비록 시마복의 상을 당하였더라도 제사 지내지 않는다. ‘제사 지내는 대상자가 죽은 자에 대해서 복(服)이 없다.’는 것은, 처의 부모나 어머니의 형제자매를 이른다. 자기 자신은 비록 복이 있더라도 자기가 제사 지내는 대상자가 죽은 자에 대해서 복이 없으면 제사 지낼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대부나 사가 임금의 제사를 지내는 임무를 띠고 있어서 이미 제기(祭器)를 씻은 뒤에 부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경우에는 그대로 제사에 참여하되, 숙소만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한다. 이미 제사를 마치고 나서는 제복을 벗고 공문(公門) 밖으로 나가 곡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 나머지 예법은 분상할 때와 같이 한다. 제기를 씻기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임금에게 고하게 하고, 그 사람이 돌아온 뒤에 애곡한다.[大夫士將與祭於公 旣視濯 而父母死 則猶是與祭也 次於異宮 旣祭 釋服 出公門外哭而歸 其他如奔喪之禮 如未視濯 則使人告 告者反而後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시탁(視濯)’은 제사에 쓰는 기용(器用)을 깨끗이 씻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다. 숙소를 다른 사람들과 달리하는 것은, 길사(吉事)를 하는 사람과 흉사(凶事)를 하는 사람이 같은 곳에 묵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제기를 씻는 것을 보기 전에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임금에게 고하게 하고, 고하러 간 사람이 돌아온 뒤에 부모에 대해 곡하는 것이다.” 하였다. ○ 잡기에 또 이르기를, “백숙부(伯叔父), 형제(兄弟), 고(姑), 자매(姉妹)들이 죽었을 경우에는, 이미 제사 전의 숙계(宿戒)가 끝난 뒤이면 그대로 맡은 바 제사의 일을 모두 수행하며, 제사가 끝난 뒤에 공문(公門)을 나와 복(服)을 벗은 뒤에 집으로 돌아간다. 그 나머지는 분상하는 예와 똑같이 한다. 죽은 자가 자기와 한집에 살던 사람이면 숙소를 다른 곳으로 한다.[如諸父昆弟姑姉妹之喪 則旣宿則與祭 卒事出公門 釋服而後歸 其他如奔喪之禮如同宮 則次于異宮]”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미 제사 전의 숙계가 끝난 뒤’라는 것은, 제사 지내기 3일 전을 이르는 것으로, 치제(致祭)하려는 때이다. 이미 숙계를 한 뒤에는 반드시 공가(公家)의 제사에 참여하는바, 기년복 이하의 상은 복이 가볍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자기와 한집에 살던 사람이면 숙소를 다른 곳으로 한다.’는 것은, 죽은 자가 자기와 한집에서 살던 사람일 경우를 이른다.” 하였다. ○ 잡기에 또 이르기를, “부모의 상중에 장차 제사 지내려고 하는데 형제가 또 죽었을 경우에는 형제를 빈(殯)한 뒤에 제사 지낸다. 한집에서 살 경우에는 비록 신첩이 죽었더라도 장사를 지낸 뒤에 제사 지낸다.[父母之喪將祭而昆弟死 旣殯而祭 如同宮 則雖臣妾 葬而後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장차 제사 지내려고 한다.’는 것은 장차 소상과 대상의 제사를 지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이르기를, “무릇 산재(散齋)를 하다가 대공복 이상의 상을 듣거나 치재(致齋)를 하다가 기년복 이상의 상을 듣거나 몸에 병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산재를 면하는 것을 허락해 준다. 만약 재계하던 곳에서 죽었으면 한방에 있던 사람은 그 제사에 관련된 일을 행할 수 없다.” 하였다. 이상은 제례(祭禮) 중에 상을 당한 경우이다.   [주D-001]변제(變除) : 상례(喪禮)에 있어서 상복을 바꾸어 입으면서 거상(居喪)을 마치는 것을 이른다.     분상(奔喪) 분상하는 자는 묘소가 멀 경우에는 반드시 집을 지나쳐서 먼저 묘소(墓所)로 갈 필요가 없다. [문] 《가례》를 보면, “분상을 하는 경우에는 이미 장사 지냈으면 먼저 묘소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집은 가깝고 묘소는 멀 경우에도 반드시 집을 지나쳐서 먼저 묘소로 가야 합니까? -강석기- [답] 이미 장사 지냈을 경우에 먼저 묘소로 가는 것은 체백(體魄)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네. 그러나 집이 가깝고 묘소가 멀 경우에는 어찌 반드시 집을 지나치면서 들어가 보지 않고 먼저 묘소로 갈 필요가 있겠는가. 소공복 이하의 상에 분상하면서는 주인이 이미 성복(成服)하였으면 4일 만에 성복한다. [문]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보면, “분상하는 자가 도착하였는데 주인이 성복하는 때를 만났을 경우에는 소공복 이하의 경우에는 곧장 주인과 더불어 성복한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비록 이미 성복하였더라도 곧바로 성복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주인의 성복이 이미 지나갔으면 소공복 이하에도 4일이 지난 뒤에 성복하네.     치장(治葬) 후토(后土)에 제사한다. [문] 영역(塋域)을 열 때와 장사 지낼 때 후토에 제사하면서는 단지 일을 고하는 예를 써서 주과(酒果)와 포해(脯醢)를 진설하기만 합니까? 아니면 성대한 제사를 지내는 예로써 해야 합니까? 세속에서는 풍성하게 하기도 하고 간략하게 하기도 하여 일정한 법식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의 중도를 얻을 수 있습니까? -송준길- [답] 우리 집에서는 성찬(盛饌)을 써서 하는데, 과연 어떠한지는 모르겠네. 후토(后土)는 칭호를 고친다. [문] 경산(瓊山)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후토라는 칭호는 황천(皇天)에 대한 대칭이니, 사서인(士庶人)의 집에서 제사 지내는 것이 참람한 듯한 점이 있기는 하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상고해 보면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 지내는 글이 있는바, 후토를 토지로 고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퇴계가 정여인(鄭汝仁)에게 답하기를, “주자의 《가례》를 따라서 후토라고 칭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후토라는 칭호가 과연 참람한 것이라면, 집과 묘소가 무슨 차이가 있다고 집에서는 토지라고 칭하고 묘소에서는 후토라고 칭합니까? -강석기- [답] 구씨(丘氏)의 참람한 듯하다고 하는 설이 그럴듯하므로 내가 일찍이 《주자대전》에 의거하여 ‘토지의 신’이라고 고쳐서 칭하였네. 그러나 퇴계가 《가례》를 존숭한 것도 뜻이 있는 것이네. 후토에 제사 지낼 때에는 집사(執事)하는 자는 동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문] 후토에 제사 지낼 때 집사하는 자가 동쪽을 상석으로 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황종해- [답] 《예기》 곡례(曲禮)와 주자의 설 및 여러 유학자들이 논한 바로 미루어 보면, 서쪽을 상석으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동쪽을 상석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그 뜻을 상세히 모르겠네. -혹자는 이르기를, “《의례》 사상례를 보면, ‘묏자리를 점칠 적에는 서자(筮者)에게 명하여 주인의 오른쪽에 있게 한다.[筮塚 命筮者在主人之右]’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존귀한 자가 명할 적에는 의당 오른쪽을 경유해서 나온다.’ 하였다. 지금 동쪽을 상석으로 삼는 것은 여기에 근본을 둔 것인가.” 하였다.- ○ 《예기》 곡례에 이르기를, “자리가 남쪽을 향하거나 북쪽을 향할 적에는 서방을 상석으로 삼고, 동쪽을 향하거나 서쪽을 향할 적에는 남방을 상석으로 삼는다.[席南向北向以西方爲上 東向西向 以南方爲上]”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동쪽을 향하고 남쪽을 향하는 자리에서는 모두 오른쪽을 숭상하고, 서쪽을 향하고 북쪽을 향하는 자리에서는 모두 왼쪽을 숭상한다.” 하였다. ○ 진안경(陳安卿)이 이르기를, “지도(地道)는 오른쪽을 존귀하게 여긴다.” 하였다. ○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신도(神道)는 오른쪽을 숭상한다.” 하였다.   후토에 제사 지낼 때의 분향(焚香) [문] 《가례》를 보면 후토에 제사 지낼 적에는 분향하는 한 절차가 없는데, 그 뜻이 필시 우연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대개 분향은 양(陽)에서 신(神)이 오기를 구하는 것이고, 관지(灌地)는 음(陰)에서 신이 오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후토는 지신(地神)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음에서만 신이 오기를 구하고 양에서는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뜻이 이와 같은 듯한데, 《상례비요》에서는 후토에 제사 지낼 적에 향로(香爐)와 향합(香盒)을 갖추도록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가례》를 상고해 보면 향(香)을 올린다고 말하지 않았고 술만 붓는다고 하였으니 뜻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씨의 《가례의절》 및 《가례정형(家禮正衡)》에는 모두 향을 올리는 예가 있네. 그러므로 《상례비요》에서는 이를 인해 갖추어 놓은 것인데,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네. 선묘(先墓)에 부장(祔葬)할 때의 축사(祝辭) [문] 《상례비요》를 보면, “선영(先塋)에 부장(祔葬)할 경우에는 별도로 주과(酒果)를 갖추어서 선조(先祖)에게 고한다.……”고 하였는데, 고하는 예에 대해서 《가례》에는 기술해 놓지 않았으며, 《상례비요》에도 상세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후토(后土)에 제사 지낸 뒤에 주인이 스스로 고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그 고하는 말은 어떻게 만들며, 또한 참신(參神)하고 강신(降神)하는 예가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상례비요》에 “후토에 제사 지내고서 주인이 만약 스스로 고할 경우에는 ‘위부모관모보……(爲父某官某甫云云)’라고 한다.” 하였는데, 이른바 ‘모보(某甫)’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선조(先祖)에게 고하는 데에도 모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선영(先塋)에 부장(祔葬)할 경우에는 가벼운 상복을 입은 자로 하여금 주과(酒果)를 차려 놓고 고하게 하기를, “이제 손자인 모관 아무개가 택조를 영건하기 위하여 삼가 주과를 차려 놓고 경건하게 고합니다.……[今爲孫某官某營建宅兆 謹以酒果用伸虔告 云云]” 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참신하고 강신하는 의절 역시 마땅히 있어야 하네. 이른바 ‘모보(某甫)’라는 것은 죽은 자의 자(字)를 가리키는 것이네. 선조의 앞에서는 이름을 칭하는 것이 옳네. 옛날에는 비록 자를 칭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써서는 안 되며, 후토에 제사 지낼 때에도 마찬가지이네. 하장(下帳) [문] 하장이라는 글은 그 뜻이 무엇입니까? -송시열- [답] 하장이라는 것은 아마도 상복(上服)에 대비하여 말한 듯하네. 공복(公服)이나 화(靴), 홀(笏), 복두(幞頭), 난삼(襴衫) 따위는 몸의 위에 쓰는 물건이므로 상복이라고 하고, 상장(牀帳), 인석(裀席), 의자(椅子), 탁자(卓子) 등은 사람의 몸 아래에 쓰는 물건에 속하므로 하장이라고 하네. 이는 아래에 나오는 유장(劉璋)이 인용한 사마온공(司馬溫公) 상례(喪禮)의 진기편(陳器篇)에 나오는 설을 보면 알 수 있네. 퇴계의 뜻은 아래로 드리우는 장막 등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하네. 정도가(鄭道可)가 묻기를, “하장을 두는 까닭을 잘 모르겠다.”고 하기에, 내가 이상의 내용으로 답하자, 정도가가 말하기를, “말한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하였네.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이르기를, “주(周)나라 임금 윤(贇)이 오후(五后)의 하장을 만들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산릉(山陵)을 만들 때의 편방(便房)에서 쓰는 것으로, 자신은 상장(上帳)에 거처하고, 오후는 하장에 거처하였다.” 하였다. -상장과 하장의 설은 상고해 보아야 한다.-   소(筲)의 숫자와 오곡(五穀)의 이름 [문] 《가례》를 보면, 소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대나무를 엮어 만든 그릇으로 다섯 개를 써서 오곡을 담는다.” 하였는데, 《의례》 기석례(旣夕禮)에는 “소는 셋을 써서 기장과 피와 보리를 담는다.……” 하였습니다. 두 예가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이른바 오곡이라는 것에 대해 그 이름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강석기- [답] 《가례》와 《의례》가 과연 같지 않으니 의심스럽네. 오곡의 이름은 《맹자(孟子)》의 주에 나오니, 이것을 쓰는 것이 어떻겠는가? ○ 《맹자》의 주에 이르기를, “오곡(五穀)은 벼와 기장과 피와 보리와 콩이다.” 하였다.   삽(翣)은 주척(周尺)을 써서 만든다. [문] 삽선(翣扇)은 마땅히 조례기척(造禮器尺)을 써서 만들어야 할 듯한데, 그럴 경우 관(棺) 위로 높이 튀어나와서 온당치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 형세상 주척을 써서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송준길- [답] 주척을 써서 만드는 것이 옳을 듯하네.   [주D-001]하장(下帳) :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능묘 속에 별도로 설치하는 장막을 말한다. [주D-002]편방(便房) : 옛날에 황제나 제후가 죽었을 경우에 살아 있을 때 기거하던 것을 형상하여 묘 속에 만들어 놓은 방인데, 관목(棺木)을 이곳의 가운데에 놓는다. 중신(重臣)이 죽었을 경우에는 이 제도를 하사하여 총애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는 광중(壙中)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D-003]소(筲) : 대나무를 엮어 만든 그릇으로, 용량은 1두 2승을 담을 수 있다고도 하고, 1두, 혹 5승을 담을 수 있다고도 한다. [주D-004]삽(翣) : 발인(發引)할 적에 상여의 앞과 뒤에서 들고 가는 치장 제구의 하나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해 달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도구라고 한다. 보삽(黼翣), 불삽(黻翣), 운삽(雲翣) 등이 있는데, 보삽은 자루가 없는 도끼 모양의 문양을, 불삽은 아(亞) 자 모양의 문양을, 운삽은 구름 모양의 문양을 그린다. 문양의 색깔에 대해서는 《의례》나 《가례》, 《가례의절》이 각각 다른데, 《가례》에서는 모두 자색으로 그린다고 하였다.     작주(作主) 대부(大夫)는 신주(神主)가 없다. [문] 옛날에는 대부의 경우에는 신주가 없었습니다. 혹자는 신주가 있었다고도 하는데, 어떤 설이 맞습니까? -이유태- [답] 제가(諸家)의 설을 아래에 첨부하였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통전》에 이르기를,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찬한 《오경이의(五經異義)》에 이르기를, ‘혹자가 말하기를, 「경과 대부와 사는 신주가 있습니까?」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살펴보건대 공양씨(公羊氏)의 설을 보면 경과 대부는 땅이 있는 임금이 아니므로 협향(祫享)과 소목(昭穆)의 제도를 쓸 수 없다. 따라서 신주가 없다. 대부는 속백(束帛)으로 신을 의귀하게 하고 사는 띠풀을 묶어서 총(菆)을 만든다.」고 하였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서막(徐邈)이 말하기를, ‘《춘추좌씨전》에 이르기를, 「공리(孔悝)가 석(祏) -석주(石主)이다. 말하자면 대부는 돌로 신주를 만드는 것이다.- 을 맞이하였다.[孔悝反祏]」 하였고, 또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이르기를, 「대부는 임금의 상을 들으면 섭주(攝主) -대신 신주를 거두기만 할 뿐으로, 제사 지내기를 기다릴 겨를이 없는 것이다.- 를 하고서 간다.[大夫聞君喪攝主而往]」 하였는데, 이는 모두 대부에게도 신주가 있다는 글이다. 위로 천자로부터 아래로 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예가 있는데, 다만 그 제도에는 강쇄(降殺)가 있어 서로 다르게 하는 것이지, 어찌 후왕(侯王)만이 신주를 쓰는 제도가 있는 데에 이르겠는가. 예경을 보면 「중(重)은 신주의 도이다.[重主道也]」라고 하였다. 중을 파묻으면 신주를 세우는 법이다. 지금 사대부들의 경우에는 이미 중이 있으니 역시 신주가 있어 좌위(座位)를 구별해서 기록해 놓아야 마땅하다. 시신이 있는데 신주가 없으면 무슨 수로 구별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 《의례》 사우례(士虞禮)의 소에 이르기를, “대부와 사는 목주(木主)가 없고 폐주(幣主)로 신을 의귀하게 한다. 천자와 제후는 목주가 있다.” 하였다. ○ 《개원례》에 이르기를, “4품관 이하는 신주가 없다.” 하였다. -경전을 살펴보면 대부와 사는 신주가 없다는 글이 보이지 않으니, 있는 쪽이 좋을 것이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우리 집의 신주를 만드는 식은 제후(諸侯)의 제도에서 강쇄(降殺)한 것이다. 백옥(白屋)의 집에서는 쓸 수 없다.” 하였다.   도(韜)와 자(藉)에 대하여 [문] 도와 자가 무엇입니까? [답] 운운하였다. -위의 가례도조(家禮圖條)에 나온다.- 좌식(坐式)과 독(櫝)의 제도에 대한 변(辨) [문] 좌식과 독의 제도에 대해서는 따르고 따르지 않고는 따질 것 없이, 주자가 그르다고 하면서 배척한 말이 보이지 않으니, 후세 사람들이 두 가지를 함께 쓴다고 하더라도 무슨 큰 병통이 있겠습니까. 이미 좌식에 안치하고서 다시 독 안에 안치하여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 보관해 두는 데에서 더욱더 귀중하게 여기는 뜻을 볼 수 있으니, 대의(大義)에 있어서 뭐가 해가 될 것이 있다고 선대(先代)에 이미 쓰던 독의 제도를 철거하려고까지 한단 말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아마도 《가례》를 너무 독실하게 믿는 잘못이 혹 고집스러워 통하지 않은 데로 귀결됨을 면치 못한 듯합니다. 도(韜)와 자(藉) 두 물품도 주자가 취하지 않은 바인데, 모르겠습니다만 아울러 제거하는 것입니까? 《가례》는 원래 완성되지 않은 책으로, 소소한 예절은 후대의 현인들이 보충해 넣었는데, 그 역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한결같이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도(圖)에는 신도(新圖)와 구도(舊圖)를 아울러 실어 놓았는바, 예를 행하는 자가 스스로 택하여 버리거나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자신의 뜻만을 가지고 마음대로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내가 살펴보건대, 좌식(坐式)과 양창독(兩囱櫝)은 권수(卷首)에 도(圖)가 있으므로, 후세 사람 가운데에는 함께 쓰는 자도 있으며 좌식만 쓰는 자도 있고 양창독만 쓰는 자도 있어서, 어느 한쪽만을 따를 수 없네. 내가 일찍이 이에 대해서 의심해 왔는데, 지난해에 우연히 남옹(南雝)의 《가례》를 얻어 보고서 비로소 좌식은 사마온공의 가묘(家廟)에서 쓰던 것이고, 양창독은 한 위공(韓魏公)이 쓰던 것이라는 것을 알았네. 지금 언해본(諺解本)의 도(圖)에서는 분명하게 써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의 뜻은 반드시 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네. 주자의 뜻은, 좌식에는 하나의 신주만을 들어가게 하고, 부부를 함께 사당(祠堂)에 들이는 경우에는 사마공의 제도와 같이 하려고 한 것이네. 근세에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좌식을 폐하고 전적으로 양창독만을 썼으며, 단지 들이고 낼 때에만 좌식을 썼는데, 이는 《가례》의 본뜻이 아니네.   [주D-001]허신(許愼) : 후한(後漢) 시대 소릉(召陵) 사람으로, 자가 숙중(叔仲)이다. 경적(經籍)에 박통하여 마융(馬融)이 항상 추중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이 오경무쌍허숙중(五經無雙許叔仲)이라고 칭하였다. 저서로는 《설문해자(說文解字)》 14편이 있다. [주D-002]속백(束帛) : 흰색의 비단을 묶어서 만든 것으로, 신(神)을 의귀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는 것이다. [주D-003]총(菆) : 띠풀을 묶어서 만든 것으로, 역시 신을 의귀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는 것이다. [주D-004]중(重) : 임시로 만든 신주(神主)로, 우제(虞祭)가 되어 신주를 만들 때까지 임시로 쓰는 것이다. 사람이 처음 죽으면 중을 만들어서 신이 의귀하게 한다. [주D-005]백옥(白屋) : 평민이나 가난한 선비의 집안을 말한다. [주D-006]도(韜)와 자(藉) : 도(韜)는 물건을 싼다는 뜻으로 활 등을 넣어 두는 자루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신주를 덮어 두는 자루를 뜻한다. 자(藉)는 아래에 까는 깔개로, 신주의 밑에 까는 받침을 말한다. [주D-007]양창독(兩囱櫝) : 앞쪽에는 두 개의 문을 달아서 여닫을 수 있도록 하고, 아랫부분은 평평하고 낮게 대좌(臺座)를 만든 독(櫝)이다. [주D-008]남옹(南雝) : 명(明)나라 때 남경(南京)에 설치한 국자감(國子監)으로, 남옹(南雍)이라고도 한다.     천구(遷柩) 이미 상복을 벗은 자의 복색(服色) [문] 상구(喪柩)를 옮길 적에 이미 상복을 벗은 자는 무슨 복색을 입고 임합니까? -강석기- [답] 기년복 이하에서 시마복에 이르기까지의 친족은 달수가 다 차면 그 복을 벗어서 잘 보관해 두었다가 장사 지낼 때에 미쳐서 다시 그 복을 입으며, 우제를 마치고서는 상복을 벗네. -아래의 과기불장연상변제조(過期不葬練祥變除條)에 나온다.- 복이 없는 친족의 복색 [문] 《가례》의 소렴조(小斂條)를 보면 “5대조를 같이하는 자는 단(袒)과 문(免)을 한다.” 하였는데, 계빈(啓殯) 때부터 장사 지낼 때까지는 어떤 복식(服飾)을 입고 임합니까? -강석기- [답] 복이 없는 친족의 경우에는 예에서 복식을 말해 놓지 않았으니, 단지 조복(弔服)을 착용하기만 할 뿐이네.     조조(朝祖) 조조할 때에는 촛불을 켠다. [문] 《상례비요》의 조조도(朝祖圖)에도 촉(燭)이 있습니다. 날이 이미 밝았는데도 오히려 촛불을 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혹 조알(朝謁)하는 것을 날이 밝지 않았을 때 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촛불을 켜는 것은 날이 어둑하여 밝음을 취하기 위해서이네. 조조는 바로 조전(朝奠)을 올린 뒤에 행하네. 날이 어둑할 경우에는 촛불을 켜서 밝게 하고, 날이 밝은 경우에는 끄네. 이는 《의례》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상구가 예묘(禰廟)를 조알할 때에 촛불을 들고 먼저 들어간 자는 당에 올라가 동영(東楹) 남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서고, 뒤에 들어간 자는 당 아래 서계(西階) 동쪽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선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질명이 되면 촉을 끈다.[質明滅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계빈(啓殯) 때부터 이때에 이를 때까지는 빈궁(殯宮)에 있거나 길에 있거나 조묘(祖廟)에 있거나 할 적에 모두 두 개의 촉을 두어서 밝힌다. 이는 일찍 하는 것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제 날이 밝았으므로 촉을 끄는 것이다.” 하였다.   조조할 때에는 문을 열어 놓으며, 고하는 말은 없다. [문] 조조할 적에는 사당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 마땅할 듯하며, 역시 조고(祖考)에게 고하는 말이 있어야 할 듯한데, 예경에 써 놓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살아 있을 때에 출입함에 있어서 달을 넘겨 나가 있다가 집에 돌아왔을 경우에는 아울러 중문(中門)을 열어 놓는바,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조조할 때에는 문을 열어 놓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그러나 예경에는 고하는 말이 없으니,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네. 전(奠)을 진설하기를 처음과 같이 한다. [문] 《가례》 조조조(朝祖條)의 아래에 나오는 부주(附註)에서 인용한 “전을 진설하기를 처음과 같이 한다.[奠設如初]”고 한 데 대한 주에서 “동쪽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빈궁에 있을 때를 처음으로 삼는다면, 빈궁에서 전을 진설하면서는 본디 동쪽을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처음과 같이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유태- [답] 《의례》의 소에 이르기를, “‘전을 진설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고 동쪽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빈궁에서 조석전(朝夕奠)을 실중(室中)에 진설하였던 것과 같이 하고, 상구(喪柩)를 따라와서 이곳에서 다시 저곳의 조석전에 진설했던 포(脯), 해(醢), 예(醴), 주(酒)를 중간을 기준으로 동쪽을 바라보게 하여 자리의 앞에 진설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으로 본다면 ‘처음과 같이 한다’는 뜻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네. 이른바 ‘동쪽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 역시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서 오(奧)에 자리를 펴되 동쪽을 바라보게 하는 데 의거해서 말한 것이네. -아래의 조항에 나온다.- 신(神)은 서쪽을 바라보지 않는다. [문] 《가례》에 이르기를, “영구에 가까이 차리지 않으니, 신령은 서향하지 않아서이다. 영구의 동쪽에 차리지 않으니, 동쪽은 신위가 아니어서이다.[不統于柩神不西面也 不設柩東 東非神位也]” 하였습니다. 영구가 이미 북향하여 조알하므로 신은 서향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까? 신은 이미 북향을 하니 동쪽이나 서쪽이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동쪽은 신위가 아니어서이다’라고 하면서 반드시 서쪽에 진설하게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의례》의 본소(本疏)를 자세하게 상고해 본다면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네. ○ 《의례》 기석례의 소에 이르기를, “‘영구에 가까이 차리지 않으니, 신령은 서향하지 않아서이다.’라는 것은, 영구 가까이에는 전(奠)을 진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영구 가까이에 진설하면 영구에 통할(統轄)되게 된다. 신은 서향을 하지 않으므로 상구의 앞쪽에서 동쪽에 가까운 곳에 진설하지 않는 것이다. 신은 서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특생궤식례와 소뢰궤식례에서는 모두 오(奧)에 자리를 배설하고 동향을 하니, 서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구의 동쪽에 차리지 않으니, 동쪽은 신위가 아니다.’라는 것은, 이 역시 신위가 오(奧)에 있고 동쪽에 있지 않은 데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다. 소렴의 전(奠)을 시신의 동쪽에 진설하는 것은, 죽은 처음에는 차마 산 사람과 다르게 대우할 수 없어서이다. 대렴을 한 뒤에 올리는 전은 모두 실(室) 가운데에 차리는데, 이것도 영구에 통할되지 않는 것이다. 이 전을 실에 차리지 않는 것은, 실 가운데는 신령이 있는 곳이어서 죽은 자에게 전을 올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C-001]조조(朝祖) : 장사를 치를 적에 상구를 조묘(祖廟)로 가지고 가서 배알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1]오(奧) : 실(室)의 서남쪽 모퉁이로, 방 안에서 가장 깊숙한 곳을 말한다. 이 밖에 실의 서북쪽 모퉁이는 옥루(屋漏)라고 하고, 동남쪽 모퉁이는 요(窔)라고 하고, 동북쪽 모퉁이는 이(宧)라고 한다.     청사(廳事)로 옮긴다. 상구를 인도하여 오른쪽으로 돌게 한다. [문] 상구를 인도하여 오른쪽으로 돌게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이것은 《의례》 기석례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말을 모는 자가 채찍을 잡고 말 뒤에 선다. 주인이 곡(哭)을 하고 용(踊)을 한다. 말을 끌고서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묘문 밖으로 나간다.[御者執策 立於馬後 哭成踊 右旋出]”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오른쪽으로 돌게 하는 것은 역시 편함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방상(方相) [문] 방상과 기두(魌頭)를 광부(狂夫)가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제가(諸家)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가례집설(家禮集說)》에 이르기를, “헌원본기(軒轅本記)에 이르기를, ‘헌원씨가 주유(周遊)할 적에 원비(元妃)인 나조(螺祖)가 길에서 죽었으므로, 이를 인하여 방상시를 두었다.’ 하였다. 방상(防喪)이라고도 하는데, 방상시를 둔 것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였다. ○ 《주례》 방상시(方相氏)에 이르기를, “방상시는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황금빛으로 네 개 눈을 그리고, 검은색 상의에 붉은색 하상(下裳)을 입고, 창을 잡고 방패를 휘두르면서 대상에서 상구(喪柩)의 앞에 가는 것을 관장한다.[掌蒙熊皮黃金四目 玄衣朱裳 執戈揚盾 大喪先柩]”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정씨(鄭氏)가 말하기를, ‘곰이란 짐승은 용맹하고 위엄이 있어 모든 짐승들이 두려워한다. 곰 가죽을 뒤집어쓰는 것은 위엄 있게 보이기 위해서이다. 금(金)은 양강(陽剛)한 물건이어서 제압하는 데 쓸 수 있다. 눈을 네 개 만드는 것은 보는 것이 강명(剛明)하여 능히 사방을 볼 수가 있어 역려(疫癘)가 있는 곳을 모두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현(玄)은 북방(北方)의 색이며, 천사(天事)에 있어서 무(武)이다. 주(朱)는 남방(南方)의 색이며, 지사(地事)에 있어서 문(文)이다. 검은색으로 상의를 만드는 것은 무(武)를 위에 있게 한 것이고, 붉은색으로 하상을 만드는 것은 문(文)으로 보조하게 한 것이다. 창을 잡은 것은 치고 찌르기 위한 것이고, 방패를 휘두르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흉사(凶事)에는 사특(邪慝)한 것이 많이 따르는 법이다.’ 하였다.” 하였다. ○ 《주례》에 또 이르기를, “묘소에 도착하여 광으로 진입할 때에는 창으로 네 귀퉁이를 쳐서 방량(方良)을 몰아낸다.[及墓 入壙 以戈擊四隅 驅方良]”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방상은 방상(放想)으로 무서움에 떨게 할 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방량은 망량(罔良)이다. 《국어(國語)》에 이르기를, 「나무와 돌의 괴물이 기망량(蘷罔兩)이다.」 하였다. 장사 지낼 때에는 나무와 돌을 쓰는데, 나무와 돌은 오래되면 변하여 괴물이 되므로 처음 장사 지낼 때 몰아내는 것으로, 이 역시 압승(壓勝)하는 술책이다.’ 하였다.” 하였다. ○ 《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주례》를 보면 방상시가 묘 터에 들어가서 망상(魍像)을 쫓아낸다. 망상이란 놈은 죽은 사람의 간과 뇌를 먹기 좋아하는데, 인가에서는 당해 낼 수 없다. 이에 방상시를 묘 곁에 세워 오지 못하게 막는다. 망상은 호랑이와 측백나무를 겁낸다. 그러므로 묘소 가에 측백나무를 심고 길가에 석호(石虎)를 세우는 것이다.” 하였다. ○ 기두(魌頭) -‘魌’의 음은 기(欺)이다.- 에 대해서는 《회통(會通)》에 이르기를, “귀신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 역시 방상이다. 지금은 역귀(疫鬼)를 몰아내는 의식에 기두가 있다.” 하였다. ○ 광부가 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방씨(方氏)가 이르기를, “광(狂)이라는 것은 양 기운이 남음이 있어서 생기는 병이어서 음의 사특함을 충분히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1]방상(方相) : 광중(壙中)의 악귀를 쫓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아주 무서운 모습으로 그렸다. 눈이 네 개인 것을 방상시라고 하고, 눈이 두 개인 것을 기두(魌頭)라고 하는데, 4품관 이상일 경우에는 방상시를 쓰고 그 이하는 기두를 썼다. [주D-002]기두(魌頭) : 역귀(疫鬼)를 쫓는 나례 의식에 쓰는 귀면(鬼面)으로,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역귀를 놀라게 하여 물리치는 일을 한다. [주D-003]기망량(蘷罔兩) : 신화 속에 나오는 정령(精靈)인 기화(蘷和)와 망량(魍魎)이다. [주D-004]압승(壓勝) : 사악한 기운을 꺾어서 힘을 못 쓰게 만드는 방술(方術)의 일종이다. [주D-005]풍속통(風俗通) : 한(漢)나라 응소(應劭)가 찬한 것으로, 10권에 부록 1권이다. 《풍속통의(風俗通義)》라고도 한다. 황패(皇覇), 정실(正失), 건례(愆禮), 과예(過譽), 십반(十反), 성음(聲音), 궁통(窮通), 사전(祀典), 괴신(怪神), 산택(山澤)으로 조목을 나누어 서술하였다.     조전(祖奠) 조(祖) 자의 뜻 [문] 조전이라고 할 때의 조 자는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의례》의 주 및 제가(諸家)의 설이 같지 않으니, 참고해서 보아야 하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유사가 주인을 향하여 조전을 진설한 시간을 묻는다.[有司請祖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길을 떠나려 할 때 술을 마시는 것을 조라고 하는데 조는 시작이라는 뜻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죽은 자가 길을 떠나려 하는 것도 조라고 한다.” 하였다. ○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조라는 것은 장차라는 뜻인 차(且)이다.[祖者 且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상구를 옮기는 것이 길을 떠나는 시작이 된다.” 하였다. ○ 《한서(漢書)》 임강왕전(臨江王傳)에 이르기를, “황제(黃帝)의 아들인 누조(累祖)가 먼 곳으로 유람하기를 좋아하다가 길에서 죽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를 제사 지내면서 행신(行神)으로 삼았다. 조제를 지낼 적에는 이를 인하여 향음(饗飮)하였다.” 하였다. ○ 《백호통(白虎通)》에 이르기를, “공공(共工)의 아들 이름은 수(修)인데, 멀리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주거(舟車)가 이르는 곳과 족적(足跡)이 닿는 곳을 끝까지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를 제사하여 조신(祖神)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조라는 것은 조(徂)이니, 바로 길을 간다는 뜻이다.” 하였다.   조전에는 석전(夕奠)을 겸해서 올린다. [문] 조전은 저녁에 상식(上食)을 올린 뒤에 있습니까? 아니면 석전도 겸해서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포(晡)는 신시(申時)이네. 저녁 상식을 올린 뒤에 조전을 설행하는 데, 겸하여 석전도 행하는 것이 옳네. 이는 다음 날에 조전을 철거한다는 글로 보면 알 수 있네. 구의(柩衣)는 위는 검은색으로 하고 아래는 붉은색으로 한다. [문] 구의를 위는 검은색으로 하고 아래를 붉은색으로 하는 제도에 대해서 우복(愚伏)이 말하기를, “비단 시속에서 모두 순색(純色)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경에서도 위는 검은색으로 하고 아래는 붉은색으로 한다는 글이 보이지 않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구의는 바로 이금(夷衾)으로, 예경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소렴을 마친 뒤로는 이금을 쓰는데, 이금의 질(質)과 쇄(殺)를 만드는 방법은 모(冒)를 만드는 법과 같이 재단하여 만든다.[小斂以往 用夷衾 夷衾質殺之裁 猶冒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금 역시 윗부분은 손과 나란하게 하고, 아랫부분은 3척이 되게 하며, 비단의 색깔 및 길고 짧은 제도는 모(冒)의 질과 쇄와 같이 만든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상(床)과 대자리와 이금을 편다.[床笫夷衾]”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모(冒)는 윗부분인 질(質)은 검은색으로 하는데, 길이는 손과 나란하게 하고, 아랫부분인 쇄(殺)는 붉은색으로 하여 발을 감싼다. 이금(夷衾) 역시 이와 같아 위는 검은색으로 하고 아래는 붉은색으로 하여 서로 연결해서 쓴다. 이것들은 색깔과 모양새가 아주 흡사하나, 연결해 쓰고 연결해 쓰지 않는 것은 다르다.” 하였으며, 정씨는 이르기를, “소렴 이후에는 이금을 쓰는데, 본디 시신을 덮고 상구를 덮는 것으로, 관 속에 넣는 데에는 쓰지 않는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이금으로 시신을 덮는다.[幠用夷衾]”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금은 본디 상구를 덮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斂)을 할 때에는 쓰지 않는다. 이제 관(棺)을 덮었는데, 이 뒤에 조묘(朝廟) 및 입광(入壙)할 때에 비록 이금을 쓴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철거한다는 글도 없다. 그러니 마땅히 상구를 따라서 광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였다.   구의(柩衣)의 칭호 [문] 우복(愚伏)의 편지에 이르기를, “근일에 비로소 《예기주소(禮記注疏)》를 상고해 보았는데, 이금(夷衾)의 제도는 과연 사계장(沙溪丈)의 설과 같았네. 이에 앞서 일찍이 상세하게 살펴보지 못하여 그대로 하여금 송종(送終)하는 대사(大事)를 예경에 의거하여 다하지 못하게 하였네. 고루한 나의 잘못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는바, 송구스럽기 그지없네. 다만 《가례》를 보면 단지 구의라고만 말하고 이금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바, 이금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변해서 구의로 되었는지 모르겠네. 후세에 이금의 제도를 쓰지 않고 단지 구의만을 쓰되 오늘날에 쓰는 것과 같이 쓴 것은 송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던 것인가. 이 역시 상세히 모르겠네. 편지를 보내 질정해 주기 바라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통전》 및 《개원례》에서는 모두 이금이라고 칭하였네. 구의라는 명칭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네. 그러나 고례에 이미 분명한 근거가 있으니, 준행하여 써야 하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네.   [주D-001]공공(共工) : 전설 속에 나오는 천신(天神)의 이름으로, 전욱(顓頊)과 서로 싸워 이긴 끝에 제(帝)가 되었다고 한다. [주D-002]모(冒) : 시체를 싸는 주머니로 상반신을 싸는 것과 하반신을 싸는 것으로 나뉜다. 상반신을 싸는 것을 질(質)이라 하고, 하반신을 싸는 것을 쇄(殺)라고 칭하며, 각각 철방(綴旁), 즉 묶어서 매는 끈을 달아서 아래와 위를 묶게 되어 있다. [주D-003]재단 : 원문에는 ‘夷衾質殺之制’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制’를 ‘裁’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견전(遣奠) 방친(旁親)에 대해서도 영결종천(永訣終天)이라는 말을 통용해서 쓴다. [문] 신씨(申氏)의 《상례비요》를 보면 견전축(遣奠祝) 아래의 주에 이르기를, “방친의 경우에는 영결종천이라는 한 구절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자가 이미 채계통(蔡季通)의 제문에서도 이 말을 썼으니, 방친에 대해서 쓰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답] 보내온 글에서 말한 것이 역시 옳네. 견전을 올릴 때 절하는 예 [문] 《가례》의 견전조(遣奠條)를 보면 ‘주인 이하가 곡하고 절한다.’는 글이 보이지 않는데, 전필(奠畢)이라는 두 글자 속에 포괄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만약 과연 곡하고 절하는 뜻이 없다면 전을 올리기를 마치고서 단지 포(脯)를 거두어서 보자기 속에 넣기만 해야 합니까? -황종해- [답] 견전조에 비록 곡하고 절한다는 글이 없기는 하지만, 어찌 설전(設奠)을 하고서 곡하고 절하는 절차가 없을 수 있겠는가. 윗글을 이어서 썼으므로 말하지 않은 것이니 《가례의절》을 따라 행하는 것이 옳네.     발인(發引) 부모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을 경우에 길을 갈 적에는 아버지의 상구가 먼저 가고 하관할 적에는 어머니의 상구를 먼저 하관한다. [문] 부모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여 같은 달에 장사 지낼 경우에 길을 갈 적에는 비록 아버지의 상구가 먼저 가고 어머니의 상구가 뒤에 가는 것이 마땅하나, 하관할 때에는 어머니의 상구를 먼저 하관해도 성현께서 예를 제정한 은미한 뜻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황종해- [답] 보내온 글에서 말한 것이 옳네.     폄(窆) 수도(隧道)를 쓰는 것의 참람함 [문] 수도는 바로 천자의 예입니다. 사마온공은 범범하게 “장사 지내는 데에는 두 가지 법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참람함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해 놓지 않았으며, 퇴계는 또 말하기를, “후세에는 상하(上下)에 서로 통용하였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법을 돌아보지 않고 모두들 행하고 있는데, 과연 참람한 짓을 하는 죄에 빠져 든 것은 아닙니까? -황종해- [답] 수도는 제후조차 감히 쓰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그 아랫사람들이겠는가. 사마온공은 쓰도록 허락한 것이 아니라, 범범히 장사 지내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 것이네. 퇴계가 예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금지시키지 않은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네. 합장(合葬) [문] 합장은 같은 곽(槨)에 하는 것입니까? 단지 광(壙)만 같이하는 것입니까? 아내는 어느 방향에 부장(祔葬)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예기》 및 주자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공자가 말하기를, ‘위(衛)나라 사람들의 합장은 곽 속에 두 개의 관을 놓되 관 사이에 물건을 넣어 격리하고, 노(魯)나라 사람들의 합장은 곽 속에 두 개의 관을 나란히 놓은 채 사이를 격리하지 않고 합장한다. 노나라의 제도가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孔子曰衛人之祔也 離之 魯人之祔也 合之 善夫]”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살아서 이미 같은 집에 살았으니, 죽어서도 마땅히 같은 혈에 묻혀야 한다. 그러므로 노나라의 풍습을 좋게 여긴 것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부(祔)’는 합장하는 것이다. ‘이지(離之)’는 하나의 곽 속에 두 개의 관을 넣고서 한 가지 물건으로 두 개의 관 사이를 막은 것이다. 노나라 사람들의 경우에는 두 개의 관을 합쳐서 곽 속에 넣고 다른 물건으로 격리시키지 않았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여러 재목을 합쳐서 곽을 만들었으므로 사람들 마음대로 크고 작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통판을 써서 만드는바 두 개의 관을 함께 넣을 만큼 큰 곽을 만들 만한 큰 나무가 없다. 그러므로 합장하는 경우에는 단지 혈(穴)만 함께하고 각각 다른 곽을 사용한다.” 하였다. ○ 진순(陳淳)이 주자에게 부부를 합장하는 자리에 대해서 물으니, 주자가 답하기를, “내가 처음에 망실(亡室)을 장사 지낼 때에는 단지 동쪽의 한 자리만 남겨 두었는데 역시 일찍이 예가 어떠한지는 상고해 보지 않았다.” 하였다. 진순이 또 묻기를, “지도(地道)는 오른쪽을 존귀한 곳으로 삼으니 남자가 오른쪽에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제사 지낼 적에는 서쪽을 위로 삼으니, 장사 지낼 때 역시 이 방향으로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합장할 경우에는 관의 머리 부분을 나란히 한다. [문] 고비(考妣)의 두 상구를 같은 곽에 넣어서 장사 지낼 경우에는 길고 짧은 차이가 없을 수 없는데, 그 위쪽 부분을 가지런히 해야 합니까, 그 아래쪽 부분을 가지런히 해야 합니까? -황종해- [답] 위쪽 부분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 마땅하네. 장사 지내는 선후 [문] 광(壙)을 같이하여 장사 지낼 경우에 만약 후상(後喪)을 장사 지내기를 기다려서 광을 묻을 경우에는 그 사이의 날짜가 조금 멀다면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송준길- [답] 장자(張子)가 이미 말해 놓았는바, 아마도 그 말을 어길 수 없을 듯하네. 그러나 날짜가 만약 오래 지체된다면 그대로 준수해서는 안 될 듯하네. ○ 장자가 이르기를, “옛날에 함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먼저 장사 지내는 자는 복토(復土)를 하지 않고서 뒤에 장사 지내는 자의 상구를 넣을 때를 기다려 복토하였는데, 이는 서로 간의 날짜가 가깝기 때문이다.” 하였다.   전처(前妻)와 후처(後妻)의 합장 [문] 어떤 사람에게 계실(繼室)이나 삼실(三室)이 있을 경우에는 장사 지내고 제사 지냄에 있어서 모두 합부하여야 할 듯한데,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자식이 있는 자를 위주로 하고 자식이 없는 처는 혹 신주를 만들지 않기도 하는데 이는 예의 뜻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정자(程子)와 장자(張子)와 주자(朱子)가 논해 놓은 것이 이미 상세하여 상고해 볼 수 있네. ○ 정자가 부정공(富鄭公)에게 답한 글에 이르기를, “합장할 경우에는 원비(元妃)를 하고, 배향(配享)할 경우에는 종자(宗子)를 낳은 사람으로 한다.” 하였다. -《유서(遺書)》에 나온다.- ○ 장자가 말하기를, “부장(祔葬)하고 부제(祔祭)하는 것에 대해 지극한 이치를 극도로 미루어 나가 논해 보면, 단지 한 사람만을 부장하고 부제하는 것이 합당하다. 부부의 도는 처음 혼인할 때에는 일찍이 재차 배필을 구한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 남편은 한 번만 장가드는 것이 합당하며, 부인은 한 번만 시집가는 것이 합당하다. 지금 부인의 경우에는 남편이 죽었어도 재차 시집가지 않기를 천지의 대의(大義)와 같이 한다. 그러니 남편이라고 해서 어찌 재차 장가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중한 것으로써 헤아려 보면, 부모님을 봉양하고 집안의 후사를 이으며 제사를 계속해서 지내는 것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재차 장가가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사 지내고 합부(合祔)함에 있어서는 비록 혈(穴)을 같이하고 궤연을 같이한다고는 하지만, 비유하자면 인정에 있어서 한 방 안에 어찌 두 처가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의리로써 단정하면 모름지기 먼저 장가든 아내를 합부하고 계실(繼室)은 별도로 한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하였다. -《이굴(理窟)》에 나온다.- ○ 주자가 말하기를, “정 선생의 설은 아마도 잘못된 듯하다. 《당회요(唐會要)》 중에 이에 대해 논한 것이 있는데, 무릇 적모(嫡母)일 경우에는 선후를 따질 것 없이 모두 함께 합장하고 합제하여, 옛날 제후의 예와는 같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부부의 의(義)는 건(乾)이 크고 곤(坤)이 지극한 것과 같아 저절로 차등이 있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살아 있을 때에는 남편은 처도 있고 첩도 있으나, 아내는 하늘로 삼는 바가 둘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더구나 죽어서 배부(配祔)하는 것은 또 생존해 있을 때에 비할 바가 아닌 데이겠는가. 장횡거(張橫渠)의 설 역시 미루어 나간 것에 크게 잘못된 점이 있는 듯하다. 그러니 단지 당(唐)나라 사람들이 의논한 바에 따라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더구나 또 전처에게는 아들이 없고 후처에게는 아들이 있는 껄끄러움이 있을 경우에는 그 형세가 장차 몹시 불안하여 온당치 못하게 되는 데이겠는가. 다만 장사 지낼 경우에는 지금 사람들은 부부를 반드시 모두 합장하지는 않으니, 계실(繼室)에 대해서는 별도로 묘역을 만드는 것이 역시 옳을 것이다.”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나온다.- ○ 황면재(黃勉齋)가 말하기를, “이제 《예기》 상복소기를 살펴보면, ‘며느리는 남편의 조모(祖母)에게 합부(合祔)하는데, 조모가 세 사람일 경우에는 친한 자에게 합부한다.[婦祔於祖姑 祖姑有三人 則祔於親者]’고 하였으니, 재취(再娶)의 아내는 본래 부묘(祔廟)할 수 있는 것이다. 정자와 장자의 경우는 상고한 것이 상세하지 않으며, 주 선생이 밝혀 놓은 바가 바로 예경의 뜻에 합치된다.” 하였다. -《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에 나온다.-   영구(靈柩)의 양쪽 머리 부분에 새끼줄을 씌운다. [문] 영구 아래의 양쪽 머리 부분에 새끼줄을 씌워서 내린다는 설은, 양쪽 머리 부분에 새끼줄을 씌운다는 것으로 보면, 한 가닥의 새끼줄로 영구 바닥의 중앙 부분을 묶어서 내릴 수 있겠습니까? 《가례집설》에서는 이르기를, “지금 사람들은 양쪽 머리 부분에 나란하게 새끼줄을 씌워서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사 신식- [답] 보내온 편지에서 말한 것이 옳네. 증례(贈禮) [문] 주인이 증(贈)을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송준길- [답] 주인이 증을 하는 것은 임금이 하사해 준 것을 중하게 여겨 만들어 놓은 것이네. 후세에는 비록 임금이 물품을 보내 주는 예가 없어졌으나, 《가례》에서 존치해 둔 것은 아마도 예를 아껴서 양(羊)을 보존해 두는 뜻인 듯하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방문(邦門)에 도착하면 공(公)이 재부(宰夫)를 시켜서 현훈(玄纁)의 속백(束帛)을 부증한다.[至于邦門 公使宰夫 贈用玄纁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공(公)은 국군(國君)이다. 증(贈)은 보내는 것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증(贈)하는 데 현훈의 속백을 쓴다는 것은, 바로 광(壙)에 이르러서 하관(下棺)하기를 마쳤을 때 주인이 죽은 자에게 증하는 것을 현훈의 속백을 써서 하는 것이다. 이는 임금이 하사하는 물품은 소중한 것이므로 송종(送終)하는 데 쓰는 것이다.” 하였다.   현훈(玄纁)은 상구의 동쪽 곁에 놓는다. [문] 현훈을 상구의 곁에 놓을 때 왼쪽에 놓습니까, 오른쪽에 놓습니까? -송준길- [답] 《개원례》를 살펴보면, 상구의 동쪽에 놓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네. ○ 《개원례》에 이르기를, “주인이 속백을 받아서 축(祝)에게 준다. 주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한다. 축이 받들고서 들어가 상구의 동쪽에 놓는다.” 하였다.   [주D-001]진순(陳淳) : 송(宋)나라의 학자로, 자가 안경(安卿)이고 북계 선생(北溪先生)이라고 불렸다. 장주(漳州) 용계현(龍溪縣) 사람이다. 주자에게 잠시 배웠으며, 주자의 어록(語錄)을 기록하였다. 《성리자의(性理字義)》 등을 저술하였다. [주D-002]속백(束帛) : 비단 다섯 필(匹)을 각각 양쪽 끝에서부터 마주 말아 한 묶음으로 한 것으로, 옛날에 이를 예물로 썼다.     사후토(祠后土)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낼 때의 축사(祝辭) [문] 영역(塋域)을 열 때의 축사에는 이르기를, ‘금위모관성명(今爲某官姓名)’이라고 하는데, 장사 지내는 날의 축사에는 이르기를, ‘금위모관봉시(今爲某官封諡)’라 하고 성명을 칭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까닭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송준길- [답] 영역을 열 때와 장사 지낼 때 후토에 제사 지내는 축사에서 성명을 칭하기도 하고 봉시(封諡)를 칭하기도 하여 앞뒤가 같지 않게 하는 것은, 반드시 그 뜻이 있을 것이나 잘 알지는 못하겠네. -혹자가 이르기를, “《예기》 단궁(檀弓)을 보면, ‘임금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주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시일이 정해진 바가 있어서 장차 장례를 거행해야 되겠습니다. 청컨대 시호를 내려 주시어 이름을 바꾸게 하여 주십시오.」 한다.[請諡於君曰 日月有時 將葬矣 請所以易其名者]’ 하였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어서 휘(諱)하므로 성명을 칭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데,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제주(題主) 제주할 때의 주인 이하의 위차(位次) [문] 제주할 때에는 주인은 그 앞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중주인(衆主人)은 그 아래에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광(壙)의 동쪽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황종해- [답] 제주할 때 주인은 그 앞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니, 중주인은 그 아래에 있는 것이네. 어찌 광의 동쪽 자리에 앉아 있겠는가. 관직이 없는 자의 신주(神主)에 쓰는 칭호 [문] 관직이 없으면서 학생(學生)도 아닌 경우에 제주하면서 학생이라고 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자손들이 사조(四祖)를 쓸 경우에도 모두 합당한 칭호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인의 경우에는 유인(孺人)이라고 쓰지 않고 관향(貫鄕)만 칭하여도 역시 무방하지 않습니까? -송준길- [답] 관직이 없이 죽었을 경우에 학생이라고 칭하지 않으면 달리 칭할 호칭이 없으니, 형세상 부득이 학생이나 처사(處士)나 수재(秀才)라고 쓰되, 각각 그 마땅한 바를 따라서 쓰면 될 것이네. 부인들에 대한 유인(孺人)이라는 칭호는 써도 괜찮고 쓰지 않아도 괜찮네. 구씨(丘氏)가 말하기를, “관작이 없는 부인의 경우에는 세속에서 칭하는 것처럼 유인이라고 칭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예가 궁할 경우에는 아래에서 하는 것을 따라서 한다는 뜻이네. 부인(婦人)의 항제(行第) [문] 부인 신주(神主)의 함중(陷中)에도 ‘제 몇 번째[第幾]’라고 칭하는데, 제 몇 번째라는 칭호는 과연 형제들의 항제로, 소삼(蘇三)이니 황구(黃九)니 하는 따위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부인들도 이런 칭호가 있습니까? -황종해- [답] 옛날에는 부인들 역시 항제를 칭하였으니, 조장(弔狀)에서 기가자매(幾家姉妹)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와 부인 모두 항제를 쓰지 않네. 부인의 신주에 쓰는 칭호는 남편의 실직(實職)을 따라서 쓴다. [문] 부인의 신주에 쓰는 칭호는 그 남편의 실직을 따라서 써야 합니까?   서얼(庶孼)인 부인의 신주에 쓰는 칭호 [문] 서얼인 부인의 신주에 쓰는 칭호는 어떻게 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두 조항에 대해서는 위의 명정조(銘旌條)에 나온다.- 처상(妻喪)의 신주(神主)에 쓰는 속칭(屬稱) [문] 처상의 신주에 제주(題主)할 경우에 지금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소견을 고집하여 써서 일정한 법식이 없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쓰는 것이 마땅합니까? -강석기- [답] 주자는 망실(亡室)이라고 칭하고 구씨는 망처(亡妻)라고 칭하고 주원양(周元陽)의 《제록(祭錄)》에는 빈(嬪)이라고 칭하였는데, 주자가 정한 바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마땅하네. 아내가 남편의 상을 주관할 경우의 예 [문] 남편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그 신주를 어떻게 써야 합니까? 판서 송순(宋淳)의 상에 영광 군수(靈光郡守) 박이서(朴彝敍)가 근세 명유(名儒)들의 설에 의거하여 현벽(顯辟)으로 썼다고 하는데, 이 ‘벽(辟)’ 자가 비록 《예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과연 온당한 것인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방주(旁註)는 존귀한 바에 시행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내가 이미 제사를 주관하였을 경우에는 방주를 어떻게 써야 합니까? -강석기- [답] 아내가 남편을 제사 지내면서 벽(辟)이라고 칭하는 것은 《예기》에서 나왔으며, 주원양의 《제록》에도 “남자 주인이 없어서 며느리가 시부모를 제사 지낼 경우에는 그 축사에 ‘신부모씨제현구모관봉시현고모씨(新婦某氏祭顯舅某官封諡顯姑某氏)’라고 하고, 아내가 남편을 제사 지내면서는 ‘주부모씨제현벽모관봉시(主婦某氏祭顯辟某官封諡)’라고 하고, 남편이 아내를 제사 지내면서는 ‘모제빈모씨(某祭嬪某氏)’라 하고, 동생이 아들이 없는 형을 제사 지내면서는 ‘제모제현형모관봉시(弟某祭顯兄某官封諡)’라고 하고, 형이 동생을 제사 지내면서는 ‘제모보(弟某甫)’라고 한다.” 하였으니, 현벽이라고 칭하는 것은 근거가 있는 듯하네. 방제(旁題)에 대해서는 예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 글이 없네. -부인은 제사를 받드는 의리가 없으니, 아래에 나오는 이이순(李以恂)에게 답한 조항을 참고해서 보아야 한다.- 외조(外祖)의 신주(神主)에 제(題)하는 식 [문] 세속에서는 혹 외손으로서 제사를 주관하는 자가 있는데, 신주에는 현외조고비(顯外祖考妣)라고 써야 하며, 방주(旁註)에도 그렇게 씁니까? 그리고 외조의 신주를 혹 외손녀에게 전할 경우에는 어떻게 써야 합니까? -강석기- [답] 외손이 봉사(奉祀)하는 것조차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외손녀이겠는가. 어찌 반드시 봉사하는 자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 쓰지 않아도 괜찮네. 항렬이 낮고 나이가 어린 사람의 신주의 함중(陷中)에도 휘(諱)라고 쓴다. [문] 신주의 함중에 휘모(諱某)라고 쓴다고 할 때의 휘 자는 항렬이 낮고 나이가 어린 자에 대해서는 칭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황종해- [답] 죽은 자에 대해서 휘라고 하는 것에는 존비(尊卑)의 차등이 없네. 방제(旁題)를 쓸 적에는 쓰는 자의 왼쪽에서부터 쓴다. [문] 신주에 방제할 때 혹자는 마땅히 신주의 왼쪽에 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혹자는 쓰는 자의 왼쪽에서부터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절충(折衷)한 설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답] 하씨(何氏 하사신(何士信))의 《소학도(小學圖)》를 보면 제사를 받드는 자의 이름을 신주의 왼쪽 가에 제하는 것으로 되어 있네. 하씨의 뜻은 대개 ‘신도(神道)는 오른쪽을 높은 곳으로 삼는바, 제사를 받드는 자의 이름이 주함(主銜)의 오른쪽에 있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겨서, 스스로 새로운 설을 만들어 고친 것이네. 그런데 예에 대해 상고하는 자가 그 본뜻을 깊이 탐구해 보지 않고 도리어 《가례》에 나오는 본문의 문세(文勢)가 그런 것으로 여겼네. 그리하여 ‘기하좌방(其下左旁)’이라고 한 곳에서의 ‘좌(左)’ 자를 신주의 왼쪽이라는 뜻의 좌(左) 자로 보고는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를 따르지 않고 하씨가 그린 바를 따른 것이네. 그러나 이것은 주자의 본뜻이 아닐 듯하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살펴보건대 《가례》의 입소비장(立小碑章)에 이르기를, “세계(世系)와 명자(名字)와 행실을 간략히 기술하여 그 왼쪽에 새기되[刻於其左], 뒤로 돌아가서 뒷면의 오른쪽에 이르도록까지 두루 새긴다.” 하였는데, 이곳에서의 ‘좌(左)’ 자는 바로 ‘기하좌방’이라고 한 곳에서의 ‘좌’ 자와 문세가 서로 똑같네. 만약 혹자의 설과 같다면, 비석의 글 역시 비석의 왼쪽에서 거꾸로 써서 돌아가면서 새겨야 하는데, 이는 결단코 그럴 리가 없는 것이네. 그리고 신주의 식(式)은 비록 옛날부터 있었으나, 정자에 이르러서 그 제도가 비로소 갖추어졌는데, 《이정전서(二程全書)》에 그려져 있는 바도 《가례》의 본도(本圖)와 같이 되어 있네. 정자 문하의 여러 제자들이 편찬한 책이 어찌 소견이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풍선(馮善)이 “무릇 우(右)라고 하는 것은 모두 위쪽에 있는 상문(上文)을 말하는 것이고, 좌(左)라고 하는 것은 모두 아래쪽에 있는 하문(下文)을 말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우전십장(右傳十章)’이라 한 곳과 ‘별위서차여좌(別爲序次如左)’라고 한 곳에서의 우와 좌를 상세히 살펴보면, 좌라는 것이 아래쪽에 있는 글을 말하는 것임은 굳이 따져 보지 않더라도 저절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그럴듯하네. -퇴계가 정자중(鄭子中)에게 답한 편지에서 상세하게 논해 놓았다.- 아내가 봉사(奉祀)하거나 젖먹이 아이가 봉사하는 경우 [문] 모든 상에 있어서 자손이 없고 단지 며느리만 집에 있어 조카나 사위가 상(喪)을 주관하고 주부(主婦)가 그 제사를 받들 경우, 신주에 방제(旁題)할 적에 ‘효자모지부모씨(孝子某之婦某氏)’라고 씁니까? 아니면 예에 있어서 부녀자가 제사를 주관하는 법이 없으니 방제를 쓰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약 젖먹이 아이가 있을 경우에는 그 아이의 유명(乳名)을 방제에 썼다가 커서 이름이 정해진 뒤에 개제(改題)해도 괜찮습니까? -이이순(李以恂)- [답] 부인은 봉사하는 의리가 없네. 주원양(周元陽)의 《제록》을 보면 “며느리가 시부모를 제사 지낼 경우에는 그 축사에 ‘현구모관봉시(顯舅某官封諡)’라고 한다.” 하였네. 만약 부득이한 경우라면 혹 이에 의거해서 제주(題主)해야 하지 않겠는가. 방제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나와 있는 글이 없네. 만약 젖먹이 아이가 있을 경우에는 그 이름을 정하여 곧바로 방제에 쓰면 되지, 어찌 장성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제주한 사람에게 사례(謝禮)하는 예 [문] 《가례의절》을 보면, 주인이 제주한 자에게 재배하여 사례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 예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행해도 괜찮고 행하지 않아도 괜찮네. 제주하고서 올리는 전(奠)은 세속에서 하는 것을 따라서 더 진설한다. [문] 《가례》의 제주조(題主條)를 보면 단지 “향을 피우고 술을 따른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속에서는 별도로 성대한 전을 올리는데, 무방한 것입니까? -송준길- [답] 세속에서 하는 것을 따라 해도 무방하네. 《국조오례의》에도 제주하고 난 뒤에 전을 올리는 절차가 있네.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을 경우에 제주하는 축사에서 자기 자신을 칭하는 법 [문] 《가례》의 제주조를 보면 어머니의 상에는 애자(哀子)라고 칭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대개 아버지의 상에는 고자(孤子)라고 칭하고 어머니의 상에는 애자라고 칭하는 것은 본디 사마온공(司馬溫公)이 그 부모를 구별하여 뒤섞어서 나란히 하지 않으려고 한 데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더라도 어머니의 상에서는 애자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소장(疏狀) 중에서는 “두 분 다 돌아가셨으면 고애자(孤哀子)라고 칭한다.”는 글이 있는데, 축사(祝辭)의 말과 서간(書簡)에서 쓰는 말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황종해- [답] 고자와 애자는 모두 각각 따로 칭하여 뒤섞어 쓰지 않는 것이 사마온공과 주자의 뜻에 합치될 듯하네. 소장에서 칭한 바에 의거하여 두 분 다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고애자라고 칭하는 것도 무방할 듯하네. 퇴계의 말도 그렇네. 섭주(攝主)로 할 경우의 축사(祝辭) [문]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그 아들이 아주 어릴 경우에 아들의 이름을 봉사(奉祀)하는 자로 써넣고서 섭주가 고하는 예에 대해서는 이미 주자가 이계선(李繼善)에게 답한 편지에서 상세히 말해 놓았습니다. 다만 어린아이의 이름을 축문에 쓰면서 ‘숙흥야처(夙興夜處)’니 ‘애모불녕(哀慕不寧)’이니 하는 따위의 말을 쓰는 것은 어린아이가 칭하는 바에 어울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황종해- [답] 어린아이의 이름으로 주관을 하고서 섭주로 하는 뜻을 고하는 것이 마땅하네. 그리고 ‘숙흥야처’니 ‘애모불녕’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은 고쳐 써도 무방하네. 제주(題主)할 때의 축문은 읽기를 마친 뒤에 품에 품는다. [문] 제주한 뒤의 축문은 읽기를 마친 뒤에 품에 품는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어디에 의거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고하기를 마치고 나면 곧바로 반혼(反魂)하느라 불에 태울 겨를이 없어서 그러는 것일 뿐이네. 퇴계가 김이정(金而精)과 문답한 내용은 말뜻이 은미하고 오묘한 탓에 사람들이 혹 잘못 보고서 신주를 품에 품는 자도 있는데, 이는 우스운 일이네.   [주D-001]항제(行第) : 중국의 속어(俗語)로는 혹 배항(輩行)이라고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항렬(行列)이나 좌목(座目)을 칭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중국인들은 형제에 대해서 원근과 남녀를 구분하지 않은 채 그 순서에 따라서 칭호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자일 경우에는 대형(大兄)이라고 하고, 둘째와 셋째 이하의 경우에는 단지 숫자만을 붙이는데, 일정한 한계가 없어서 최대(崔大), 두이(杜二), 진삼(陳三), 노사(盧四), 남팔(南八), 구구(歐九), 육수(六嫂), 사랑(四娘) 따위로 칭한다. [주D-002]속칭(屬稱) : 속(屬)은 고(高)ㆍ증(曾)ㆍ조(祖)ㆍ고(考)를 말하고, 칭(稱)은 관직이나 호를 말한다. [주D-003]현벽(顯辟) : 《예기》 곡례에 이르기를, “할아버지는 황조고라고 하고, 할머니는 황조비라고 하고, 아버지는 황고라고 하고, 어머니는 황비라 하고, 남편은 황벽이라고 한다.[王父曰皇祖考王母曰皇祖妣 父曰皇考 母曰皇妣 夫曰皇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황(皇)과 왕(王)은 모두 임금의 칭호로서 높이는 말이다. 고(考)는 덕행이 이루어졌다는 뜻이고, 비(妣)는 짝한다는 뜻이다. 벽(辟)은 법도이니, 아내가 법식으로 삼는 바이다.” 하였다. [주D-004]이이순(李以恂) : 인조(仁祖) 때의 학자로, 자는 희지(煕之)이고 호는 동림(東林)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주D-005]섭주(攝主) : 제주(祭主)를 대신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자를 말한다.
128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6 댓글:  조회:2926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40권 의례문해(疑禮問解)-6 성분(成墳) 무덤을 만드는 법 [문] 원분(圓墳)과 마렵(馬鬣) 중에 어느 제도가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예기》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예전에 부자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옛날에 보니 봉분을 쌓는 것을 당(堂)처럼 쌓은 것이 있고, 제방처럼 쌓은 것이 있으며, 하(夏)나라 때의 가옥처럼 쌓은 것이 있고, 도끼처럼 쌓은 것이 있다. 나는 도끼처럼 쌓는 것을 따르겠다.」고 하였는데, 바로 세속에서 이른바 마렵봉(馬鬣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子夏曰 昔者夫子言之曰 吾見封之若堂者矣 見若坊者矣 見若覆夏屋者矣 見若斧者矣 從若斧者焉 馬鬣封之謂也]” 하였습니다. 이것에 의거해 보면 마땅히 마렵봉으로 표준을 삼아야 하는데, 지금 세속에서는 이 제도로 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宋浚吉)- [답] 마렵봉은 원분에 비하여 흙을 덮는 것이 조금 넓으니 모서리 부분을 약간 깎아 낸다면 혹 견고하고 완전하게 될 것 같네. 우리 집안에서는 대대로 이 제도를 따라서 봉분을 만들었네. 봉분을 만들고 올리는 전(奠) [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보면 봉분을 다 만들고서 올리는 전이 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역시 ‘비록 올바른 예는 아니나 세속을 따라서 하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봉분을 다 만들고서 올리는 전은 예경(禮經)에서는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으니, 감히 설을 새로 만들지는 못하겠네. 분묘가 도적의 침입을 당하여 파헤쳐졌을 경우의 예 [문] 분묘가 도적의 침입을 당하여 파헤쳐졌을 경우에 변고에 대처하는 절목(節目)을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답] 옛사람이 이에 대해서 논해 놓은 것이 많으니, 변을 만난 경중을 살펴보고서 짐작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뿐이네. ○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동진(東晉) 대흥(大興) 2년에 사도(司徒) 순조(荀組)가 표(表)를 올려 아뢰기를, ‘왕로(王路)가 점차 통행할 수 있게 되어 사인(士人)들이 총묘(塚墓)를 살필 수가 있어서 흉한 소식이 많이 들려오는데, 조야(朝野)에서 행하는 바가 같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분묘가 훼손되었을 때의 제도는 개장(改葬)하면서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제도에 포함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과 왕자옹(王子雍)이 모두 이르기를, 「관이 부서져서 시신이 드러나는 것은 애통함이 극에 달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도적들이 분묘를 파헤치는 일을 만난 것은, 이치에 있어서 경중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두이(杜夷)가 의논드리기를, ‘묘를 이미 수리하여 회복시킨 뒤에 들었으니, 의당 《춘추(春秋)》에 나오는 「새 궁궐이 화재가 나자 곡(哭)은 하였으나 상복은 입지 않았다.」는 데 의거하여 하소서.’ 하였다. 강계(江啓)가 다시 표를 올려 아뢰기를, ‘살펴보건대 정현(鄭玄)이 이르기를, 「직접 시신을 넣은 상구(喪柩)를 보았을 경우에는, 상복을 입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정현의 뜻과 같이 할 경우에는, 상구를 보았으면 상복을 입고 보지 않았으면 입지 않는 것입니다. 임영(臨穎)이 앞서 올린 표(表)에서는 「개장할 적에 시마복을 입는 것은 길복(吉服)을 착용하고서는 흉한 일에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그 분묘가 파헤쳐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개장할 때의 예에 의거하여 시마복을 입었으나, 달려가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미 수리하여 회복된 경우에 미쳐서는 오직 심상(心喪)을 입으면서 호소(縞素)로 된 심의(深衣)와 백책(白幘) 차림을 하고 3개월 동안 곡림(哭臨)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송(宋)나라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사람의 자식 된 자의 정(情)은 끊어질 때가 없는 법이지만 성인(聖人)께서 예로써 끊어 놓았다. 그러므로 개장할 때에 입는 복은 시마복(緦麻服)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복이 비록 가볍지만 정(情)을 쓰는 것은 아주 중한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어버이의 시신을 넣은 상구가 부서져서 시신이 드러났다는 것을 들었거나 다시 개장할 경우, 상복을 만들어 입고서 황급히 달려가는 것이 마땅하며, 비록 이미 분묘를 수리하여 회복시켰다고 하더라도 응당 달려가 임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참으로 길이 막혀서 못 간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시마복을 지어서 3개월 동안 입었다가 벗는 데 의거해서 입어야지, 어찌 장사를 지내는 일에 갈 수가 없다는 이유로 태연하게 상복을 입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양(梁)나라 천감(天監) 원년에 제(齊)의 임천헌왕(臨川獻王)을 낳은 첩(妾)인 사씨(謝氏)의 묘가 파헤쳐졌는데, 연문(埏門)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소자진(蕭子晉)이 전중(傳重)을 하자, 예관(禮官) 하수지(何修之)가 의논을 올리기를, ‘개장할 적에 시마복을 입는 것은 상구를 보면서 상복을 입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경우는 단지 분묘의 흙이 있는 부분만 파헤쳐졌고 곽(槨)이 있는 곳까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새 궁궐에 불이 났을 경우의 예에 의거하여 3일 동안 곡을 하기만 할 뿐입니다.’ 하니, 황제가 예의 뜻을 제대로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주D-001]그러므로 …… 복은 : 이 부분이 원문에는 ‘故改葬素服’으로 되어 있는데, 《통전(通典)》 권102에 의거하여 ‘故改葬所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연문(埏門) : 무덤 속으로 통하는 길 입구에 세워 놓은 문을 말한다.     부(附) 허장(虛葬) 허장(虛葬)을 하는 것은 그르다. [문] 사람이 죽었는데 그 시체를 찾지 못하였을 경우에 대해, 성현의 말씀 중에 어찌하여 이에 대처하는 도리를 말해 놓은 것이 없습니까? 혹 초혼장(招魂葬)을 하거나 혹 유의(遺衣)를 가지고 장사 지내는 것은 예에 있어서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허장을 하는 것이 그르다는 것에 대해서는 선유(先儒)가 이미 말해 놓은 것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에 대처하는 도리가 없다고 하는가. 내가 일찍이 몇 가지 조목을 초록(抄錄)해 놓은 것이 있기에, 아래에 상세히 적어 놓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동진(東晉)의 원제(元帝) 때 원괴(袁瓌)가 표를 올려 초혼장을 금지시키기를 청하면서 이르기를, ‘고(故) 복야(僕射) 조복(曹馥)이 도적들의 변란에 죽었는데, 적손(嫡孫)인 조윤(曹胤)이 초혼장을 하였습니다. 성인께서 예를 제정함에 있어서는 정(情)을 인하여 가르침을 일으켰는데, 곽(槨)을 가지고 관(棺) 주위를 둘러싸고, 관을 가지고 시신 주위를 둘러싸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시신이 없으면 관이 없는 것이고, 관이 없으면 곽이 없는 것입니다. 조윤은 시신이 없는데도 장사를 지내면서 그윽한 곳에 있는 혼기(魂氣)를 불러왔으니, 이는 덕(德)에 있어서는 의(義)를 어그러뜨린 것이고, 예(禮)에 있어서는 실물이 없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감군(監軍) 왕숭(王崇)과 태부(太傅) 유흡(劉洽)도 모두 초혼장을 하였습니다. 청컨대 금단(禁斷)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였다. 또 박사(博士) 완방(阮放), 부순(傅純), 장량(張亮) 등이 의논을 올린 것도 원괴가 올린 표와 같았으며, 하순(賀循)의 계사(啓辭)에도 ‘원괴가 올린 바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순조(荀組)가 초혼장을 하는 것의 그름에 대해 의논을 올린 것도 역시 앞서와 같았는데, 혹자가 ‘한(漢)나라의 신야공주(新野公主)와 위(魏)나라의 곽순(郭循) 등이 모두 초혼장을 하였다.’고 하니, 순조가 답하기를, ‘말세에서 행한 바가 어찌 올바른 예이겠는가.’ 하였다. 또 혹자가 ‘교산(喬山)에 황제(黃帝)의 무덤이 있는데, 이것은 신령을 장사 지낸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당시 사람들이 황제를 그리워하여 그 의관(衣冠)을 가지고 장사 지낸 것이지, 그 신령을 장사 지낸 것은 아니다.’ 하였다. 우보(于寶)가 초혼장을 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면서 말하기를, ‘저곳에서 형신(形身)을 잃어버리고서 이곳에서 무덤을 판다는 것은, 죽은 자의 몸이란 빌려서 있을 수가 없는 법인데, 없는 것을 어찌 거짓으로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화를 당한 곳에서 혼령을 맞이하는 예를 갖추어서 종묘(宗廟)에 편안히 모시고 슬픔과 공경을 다하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공연(孔衍)이 올린 금초혼장의(禁招魂葬議)에 이르기를, ‘혼령을 불러서 장사 지내는 것은 시골구석에서나 하는 예입니다. 빈장(殯葬)을 하는 뜻은 본디 형신을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장사를 지낸 날에 신령을 맞이하여 돌아와서 하루라도 차마 혼령이 떠나 있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그 혼령을 불러와서 장사 지내는 것은 인정(人情)에 반하는 것이고 성전(聖典)을 어지럽히는 것이니, 의당 금지시켜야만 합니다.’ 하였다. 이위(李瑋)가 이에 대해 힐난하여 말하기를, ‘백희(伯姬)는 불에 타서 죽었는데도 숙궁(叔弓)은 송(宋)나라에 가서 공희(恭姬)를 장사 지냈습니다. 송옥(宋玉)은 선현(先賢)이고 광무제(光武帝)는 명주(明主)이며, 복공(伏恭)과 범준(范逡)은 모두 의리에 통달한 사람인데도 모두 공주(公主)를 초혼장으로 장사 지냈습니다. 그러니 어찌 초혼장이 모두 시골구석의 예이겠습니까.’ 하자, 공연이 말하기를, ‘공희(恭姬)가 불에 타 죽은 것은 궁한 처지일수록 더욱더 바름을 지켜야 함을 밝힌 것이니, 반드시 형신이 다 타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몸이 다 타서 재가 되었을 경우에도 골육은 비록 재가 되었지만, 타고 남은 재는 형신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실체인 재를 매장한 실제는 버려두고서 도리어 혼을 불러 장사한 데에 해당시킨단 말입니까. 초혼장을 하는 것은 모두 말세에 올바른 예를 잃어버린 행위인 것으로, 성인께서 제정한 옛 제도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북해(北海) 공사흠(公沙歆)의 초혼론(招魂論)에 이르기를, ‘산 사람에게 나아가 죽은 사람에게 미루어 가고 인정에 의거하여 예법에 대처한다면, 초혼하는 데 대한 이치가 통할 것입니다. 혼을 부를 경우에 반드시 장사 지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대개 효자는 마음을 다하고 슬픔을 다할 뿐입니다.’ 하였다. 진서(陳舒)의 무릉왕초혼장의(武陵王招魂葬議)에 이르기를, ‘예경을 보면 초혼장을 지낸다는 글이 없습니다. 그러니 예에 의거하여 재단하는 것이 마땅한바, 초혼장을 하겠다는 요청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장빙(張憑)의 초혼장의(招魂葬議)에 이르기를, ‘예전(禮典)을 보면 혼령을 불러 장사 지낸다는 글이 없습니다. 만약 빈 관을 가지고 장사 지내어 마지막 가는 길을 받든다면 원형(原形)을 장사 지내는 실제가 아니며, 혼령을 매장하여 구원(九原)에 갇혀 있게 한다면 신령을 섬기는 도를 잃는 것입니다.’ 하였다. 박사(博士) 강연(江淵)의 의논에는 이르기를, ‘장(葬)이라는 말은 감춘다는 뜻인 장(藏)으로, 시신을 넣은 상구를 폐장(閉藏)하는 것이지, 혼령을 폐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신이 없으면서 빈(殯)을 하고 빈을 하지 않았으면서 무덤에 파묻는 것은, 자신의 마음대로 하고 헛된 것을 조장하는 것으로 예에서 허락한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송나라 유울지(庾蔚之)가 논하기를, ‘장(葬)은 형체를 감추는 것이고, 묘(廟)는 귀신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계자(季子)가 「혼기(魂氣)는 가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혼령을 불러서 장사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였다.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이르기를,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혼기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形魄)은 땅으로 돌아간다. 장사 지내는 것은 체백(體魄)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혼기와 같은 것은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참으로 체백이 없으면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낼 뿐이다. 혼기는 장사 지낼 수가 없는 법인데도 반드시 묘소를 만드는 것은, 역시 헛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초혼장이 올바른 예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선유가 이미 논해 놓았다.” 하였다. ○ 《통전》의 망실시구복의(亡失尸柩服議)에 이르기를, “유지(劉智)가 이르기를, ‘장사(葬事)를 마치고서 변복(變服)을 하는 것은 상례에 있어서의 큰일이 끝났기 때문이다. 만약 시신을 넣은 상구가 없다면 장사를 지내고서 변복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다. 추위와 더위가 한 번 돌아가고 나면 정복(正服)이 끝나는 법이다. 이 때문에 수질(首絰)을 제거하고서 연관(練冠)을 착용하는 것이다. 어버이의 시신을 넣은 상구를 잃어버렸을 경우에도 효자의 정에 있어서는 상제를 다 마치고자 하는 법이다. 그러니 1년이 되어 연관을 착용함으로 인하여 이에 최질(衰絰)을 바꾸어 입는 것은, 비록 그러한 고사(故事)가 없으나 제복(制服)함에 있어서 편안한 바이다.’ 하였다.” 하였다. ○ 《개원례(開元禮)》에 이르기를, “시신을 넣은 상구(喪柩)를 잃어버렸으면 변제(變除)하기를 일반적인 예와 같이 한다.” 하였다.   [주D-001]초혼장(招魂葬) : 죽은 자의 시신을 잃어버려서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생전에 착용하던 의관(衣冠)이나 신발 등을 가지고 혼을 불러 매장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교산(喬山) : 옛날에 황제(黃帝)를 장사 지낸 곳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지역에 있다. 옛날에 황제가 형산(荊山)의 정호(鼎湖)에서 정(鼎)을 주조하고는 득도(得道)하여 신선이 되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자, 신하와 후궁 가운데 황제를 따라서 올라간 자가 70여 명이었으며, 미처 용의 몸에 올라타지 못한 자들은 용의 수염을 잡고 올라갔는데, 수염이 끊어져서 황제가 가지고 있던 활과 함께 떨어졌다. 이에 사람들이 활과 용의 수염을 잡고 통곡하고는 이를 가지고 교산에 장사 지냈다. [주D-003]백희(伯姬) : 춘추(春秋) 시대 때 노(魯)나라 선공(宣公)의 딸로 송(宋)나라 공공(共公)의 부인이 된 여인이다. 공희(共姬), 공백희(恭伯姬)라고도 칭한다. 공공이 죽은 뒤에 절개를 지키고 있던 중 송나라 궁궐에 불이 나자 사람들이 모두 불을 피하라고 권하였는데도 ‘부인으로서의 의리를 어기고서 살아남기보다는 차라리 의리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 낫다.’ 하고는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주D-004]송옥(宋玉) : 이 부분이 원문에는 ‘송왕(宋王)’으로 되어 있는데, 《통전》 권103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송옥은 전국(戰國) 시대 초(楚)나라의 시인으로, 굴원(屈原)의 제자인데, 굴원이 쫓겨나 있다가 죽은 것을 불쌍하게 여겨 초혼부(招魂賦)를 지었다. [주D-005]변제(變除) : 상례(喪禮)에 있어서 상복을 바꾸어 입으면서 거상(居喪)을 마치는 것을 이른다.     부(附) 권장(權葬) 임시로 매장하는 것은 그르다. [문] 임시로 매장하는 것은 난리가 났을 때 매장하는 데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사람들은 아무런 일이 없는 평상시에도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예와 법률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황종해(黃宗海)- [답] 임시로 매장하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니, 심지어 아무런 일이 없는 평상시에도 행하는 것은 몹시 형편없는 짓이네.     개장(改葬) 개장할 때의 영좌(靈座) [문] 개장할 때의 영좌는 의자(椅子)에만 설치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만약 유의복(遺衣服)이 있을 경우에는 의자 위에 놓아두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그렇네. 개장을 할 때 아침저녁으로 곡(哭)을 하고 전(奠)을 올리고 상식(上食)을 올린다. [문] 퇴계 선생이 말하기를, “개장할 때에는 단지 영좌(靈座)만을 설치하며,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린다.” 하였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전은 설전(設奠)하지 않는 것입니까? -강석기(姜碩期)- [답] 영좌를 설치하였다면,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고 전을 올리는 것은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네. 개장할 때에도 역시 가벼운 상을 먼저 개장하고 중한 상을 나중에 개장한다. [문] 상(喪)을 인하여 개장할 경우에는 또 전상(前喪)과 후상(後喪)의 경중(輕重)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퇴계 선생께서 처음에는 ‘개장의 경우에는 정을 빼앗는 뜻이 신상(新喪)에 비해서 차이가 있으니, 가벼운 상을 먼저 장사 지내는 예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가, 뒤에는 또 말하기를, ‘개묘(改墓)하는 것을 옛날 사람들은 모두 상례(喪禮)로써 대처하였다. 그러니 자신의 억견(臆見)을 가지고 새로운 예를 만들어서 행하기보다는, 한꺼번에 상을 당한 예에 비추어서 행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어느 쪽을 따라서 해야 합니까? -황종해- [답] 퇴계의 후설(後說)이 마땅한 듯하네. 개장을 할 때의 우제(虞祭) [문]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를, “어떤 자가 묻기를, ‘개장의 경우에는 신주(神主)가 이미 사당에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어떻게 우제를 지낼 수가 있습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그와 같기는 하나 지금은 모두가 상고할 수가 없네. 역시 모름지기 사당에 돌아와서 곡을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근거해 보면, 개장할 때에는 마땅히 우제를 지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구씨(丘氏 구준(丘濬))의 《가례의절(家禮儀節)》에는 우제를 지내는 절차가 있어서 지금 사대부들은 모두 이를 준행하고 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송시열(宋時烈)- [답] 주자의 설이 참으로 맞네. 다만 왕숙(王肅)이 말하기를, “이미 우제를 지내고 나서는 제복(除服)한다.” 하였으며, 주자는 또 한 가지 설을 말하면서 운운하였네. 아마도 구씨가 이를 인하여 미루어 나가서 의절(儀節)을 만든 것인 듯하네.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게. ○ 주자가 말하기를, “개장할 적에는 모름지기 사당에 고한 뒤에 묘소에 고해야 한다. 묘소를 열어서 장사를 지내고, 장사를 마치고 나면 전을 올리고 돌아와서 또다시 사당에 고하고 곡한 뒤에 일을 끝내야만 바야흐로 온당하게 된다. 장사를 지낼 적에는 다시금 신주를 내올 필요가 없으며, 고하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침(寢)으로 신주를 내온다.” 하였다. -《주자어류》에 나온다.-   개장할 때에는 어머니를 위해서도 역시 시마복을 입는다. [문] 개장복조(改葬服條)에는 단지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입는다.’고만 하였고,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개장하는 경우에는 복이 없는 것입니까? -황종해- [답] 아버지를 말하였으면 어머니는 그 속에 포함되는 것이네. 퇴계가 말하기를, “어머니를 위해서는 시마복을 입지 않는 것은, 집안에 두 사람의 존귀한 분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 설은 잘못된 것이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예를 보면, 개장을 할 때에는 시마복을 입는다.[禮 改葬 緦]” 하였고, 왕숙(王肅)은 말하기를, “부모가 아니면 복이 없다.” 하였으며, 《의례》 상복(喪服)의 소(疏)에 이르기를,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 복도 같다.”고 하였네. 어찌 어머니를 장사 지내면서 복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며느리는 시부모를 개장할 적에 시마복을 입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딸은 입지 않는다. [문] 며느리는 시부모를 개장할 적에 역시 시마복을 입습니까? 《통전》을 보면 ‘출가한 딸은 그 부모를 개장할 적에 시마복을 입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살펴보건대, 예경의 뜻은 응당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할 자의 경우에는 개장할 때에 마땅히 시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네. 고례를 보면, 아들의 아내는 시부모를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는데,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서 등급을 올려 삼년복을 입는 것으로 하였네. 그런즉 개장할 적에도 시마복을 입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의례》 상복의 기(記)에 이르기를, “개장을 할 때에는 시마복을 입는다.[改葬 緦]”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여자자(女子子)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은, 부인(婦人)은 다른 집으로 출가하는 법으로, 본가(本家)에 있는 여자자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말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통전》에서 이른바 ‘출가한 딸은 시마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인 듯하네. 승중(承重)한 자는 개장할 적에 시마복을 입는다. [문] 개장할 적에 승중한 손자도 역시 단지 소의(素衣)에 포건(布巾)만 착용하는 것은 아닙니까? -강석기- [답] 승중한 경우에는 비록 증손이나 현손에 이르러서도 장자(長子)와 더불어 차이가 없으니, 시마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네. 어찌 단지 소복만 입겠는가. 《통전》에서 이미 이에 대해 논해 놓았네. ○ 진(晉)나라의 보웅(步熊)이 묻기를, “개장할 경우에 손자가 할아버지를 위해서도 마땅히 시마복을 입어야 한다. 다만 할아버지에게 수중(受重)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에 할아버지의 묘가 무너졌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니, 허맹(許猛)이 이르기를, “아버지가 졸하여 손자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할아버지를 개장할 경우에는, 비록 할아버지에게서 수중하지는 않았지만 상주가 되는 데 의거하여 본다면, 비록 할아버지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지는 않았으나 역시 시마복을 입고서 개장하여야 한다.” 하였다. -《통전》에 나온다.-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를 개장할 경우에는 사당에 고한다. [문]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아직 장사를 지내지 못하였는데 어머니를 개장하기 위해 사당에 고할 적에는 주과(酒果)를 여러 신위(神位)에 두루 진설해야 합니까? 그리고 주인(主人)이 스스로 고할 경우, 아버지의 상을 장사 지내지 않았으니 흉복(凶服)을 입고 사당 안에 들어가는 것은 온편치 않다는 이유로 자제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신주를 받들고 나가서 고하게 합니까? -송준길- [답] 주과는 본디 일을 고하기 위하여 진설하는 것이니, 단지 본감(本龕)에만 설전(設奠)하는 것이 옳네. 그리고 주인이 스스로 고해야지, 어찌 대신 고하게 할 수 있겠는가. 흉복을 입고 사당에 들어가는 것은, 부제(祔祭)를 지내는 데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네. 장사를 마치고 사당에 고할 경우에는 곡읍하는 절차가 있으니 마땅히 신주를 내와야 하네. 아버지를 장사 지내기 전에 어머니를 개장할 경우에는 중복(重服)을 입고 전(奠)을 올린다. [문] 아버지의 상을 아직 장사 지내지 못하고서 어머니의 묘를 개장할 경우, 묘를 열 때에는 마땅히 중복을 벗고서 시마복을 입어야 합니까? 그리고 시마복을 입고 일을 마친 후 곧바로 중복을 입는 것이 마땅한데, 비록 전상(前喪)에 대해서 전을 올릴 때에도 역시 중복을 입고 행합니까? 또 시마복을 입었을 때에는 지팡이 역시 짚지 않아야 합니까? -송준길- [답] 예문(禮文)에 의거해 보면, 비록 전상에 대해서 일이 있더라도 역시 중복을 입고서 해야 하는 것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네. 만약 시마복을 입고 있을 때라면 지팡이 역시 짚지 말아야 하네. ○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이르기를,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는 먼저 어머니를 장사 지낼 때에도 참최복을 입고 지낸다.[父母之喪偕其葬 服斬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낼 때에도 역시 참최복을 입는 것은 중한 상복을 따른 것으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변복(變服)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장사 지낸 뒤에 어머니를 개장할 경우에는 시마복을 입고 일을 행한다. [문] 아버지의 상을 이미 장사 지내고 어머니를 개장할 경우에는 시마복을 입고 일을 마칩니까? 예문을 보면 “무릇 중한 상복을 아직 벗지 않았는데 가벼운 상복을 입는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가벼운 상의 상복을 만들어 입고서 곡하며, 중한 상의 상복을 벗을 때에도 역시 가벼운 상복을 입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유독 개장하는 경우에만 다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말한다면 비록 참최복을 입고 있더라도 어머니를 개장함에 있어서는 시마복을 입고서 일을 마치는 것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 살펴보건대 《예기》 상복소기를 보면,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는 먼저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그 우제와 부제는 지내지 않는다. 또 먼저 어머니를 장사 지낼 때에도 참최복을 입는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낼 때에도 역시 참최복을 입는 것은 중한 상복을 따른 것으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변복(變服)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역시 중한 것으로써 가벼운 것을 억누르는 뜻이 있는 듯합니다. 이제 참최복을 입고서 어머니를 개장하는 경우에도 혹 똑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정자(正字) 정홍명(鄭弘溟)- [답] 이미 장사 지낸 경우와 아직 장사 지내지 않는 경우는 차이가 있네. 개장할 적에 시마복을 입는 것은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네. 전모(前母)와 계모(繼母)와 출모(出母)와 가모(嫁母)를 개장할 적에 입는 복 [문] 전모와 계모와 출모와 가모를 개장할 적에는 모두 복이 있는 것이 마땅합니까? [답] 《통전》에 모두 분명한 글이 나와 있네. 그러나 서광(徐廣)의 말은 역시 의심스러운 듯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 호제(胡濟)의 개장전모복의(改葬前母服議)에 이르기를, ‘예경에는 이에 대한 장(章)이 없다. 그러므로 계모를 개장할 때 입는 복을 취하여 그를 기준으로 삼아 행하고 있다. 전모나 계모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전모를 개장하면서는 중자(衆子)가 개장하는 제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여겨진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유진지(劉鎭之)가 묻기를,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가 다른 곳으로 개가하였다가 죽어 이제 개장을 하게 되었는데, 복을 입어야 합니까?’ 하니, 서광(徐廣)이 답하기를, ‘개장을 할 때 시마복을 입는 것은 오로지 아주 중한 데 대해서만 입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개가하였으니, 아이에게 상복이 있다는 글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을 인하여 예를 만들어 제복(制服)을 해서 임하게 한 것은, 중한 쪽을 따르는 의리에 나아가고 마음이 가는 데 따라 하는 이치에 합당하다. 그러나 역시 그렇게 하도록 하지 못하게 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였다.   개장을 할 적에는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않고 바깥에서 거처한다. [문] 개장을 하면서는 이미 시신을 넣은 상구를 보았으니, 다른 시마복의 상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3개월이 다 지나가도록 출입하지 않으면서 소식(素食)을 하고 바깥채에서 거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송준길- [답]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않고 바깥채에서 거처하는 것이 옳네. 관직에서 해임되지 않았으니 출입하지 않으면서 소식을 먹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개장할 적에 제복(除服)하는 절차 [문] 개장할 때 입는 시마복을 제복하는 절차에 대해서 제유(諸儒)들이 논한 바가 같지 않습니다. 이제 예에 있어서의 바름을 잃지 않고자 한다면 어느 설을 따라서 해야 합니까? -강석기- [답] 주자께서 정해 놓은 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네. ○ 《의례》 상복의 기(記)에 이르기를, “개장을 할 때에는 시마복을 입는다.[改葬 緦]”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鄭氏 정현(鄭玄))의 주에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을 위해서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나,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반드시 시마복을 입는 것은, 직접 시신을 넣은 상구를 보면서 상복을 입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시마복은 3개월 동안 입었다가 복을 벗는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가씨(賈氏 가공언(賈公彦))의 소에 이르기를, “‘시마복은 3개월 동안 입었다가 복을 벗는다.’고 한 것은, 개장을 할 때 입었다가 복을 벗을 때에는 역시 천도의 한 절기를 법받아서 하기 때문에 3개월 동안 입고서 복을 벗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정현(鄭玄)이 말한 세 가지 경우는 애통함이 지극한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인바,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나,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도 개장할 때에는 역시 이와 같이 복을 입는 것이다.” 하였다. ○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의 개장의(改葬議)에 이르기를, “시마복은 3개월이 지나서 복을 벗는다.” 하였다. -이상은 정씨(鄭氏)와 가씨(賈氏)와 한 문공이 반드시 3개월이 지나서 제복하게 한 것이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위(魏)나라의 왕숙(王肅)이 말하기를, ‘사도(司徒) 문자(文子)가 자사(子思)에게 개장할 때의 복에 대해서 물으니, 자사가 말하기를, 「예경을 보면 부모를 개장할 적에는 시마복을 입었다가 복을 벗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친(至親)을 송종(送終)하면서는 차마 복을 입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그러니 부모가 아니면 복이 없는 법이며, 복이 없을 경우에는 조복(弔服)에 마(麻)를 가한다.’ 하였다.” 하였다. ○ 《개원례》에 이르기를, “이미 개장을 마쳤으면 복을 벗는다.” 하였다. ○ 구씨(丘氏)의 《가례의절》에 이르기를, “개장을 마친 뒤에는 별도의 장소로 나아가 시마복을 벗고 소복을 입는다.” 운운하였다. -이상은 자사 및 왕씨(王氏)와 《개원례》, 구씨가 개장을 마친 뒤에 곧바로 제복하게 한 것이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어떤 자가 묻기를, ‘개장을 할 때 입는 시마복에 대해서, 정현은 「시마복의 달수를 다 입고서 복을 벗는다.」고 하였고, 왕숙은 「개장을 마치면 곧바로 복을 벗는다.」고 하였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지금에 와서는 상고할 수가 없네. 예가 의심스러울 때는 후한 쪽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니, 정현의 말과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네.’ 하였다.” 하였다.     반곡(反哭) 반혼(反魂) [문] 예를 보면 반곡한다고 말하였는데, 혹자는 여묘살이를 하는 것이 더 좋다고도 합니다. 어느 쪽을 따라서 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논한 바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율곡이 말하기를, “반곡을 하는 것이 참으로 올바른 예이기는 하나,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따라 해서 드디어 여묘살이를 폐하고는 반혼을 하여 집으로 돌아와 처자와 한곳에서 거처하는 바람에 예가 크게 무너지게 되었다. 무릇 어버이의 상을 당한 자가 스스로 잘 헤아려서 하나하나 예에 따라서 행할 수만 있다면, 예에 의거하여 반혼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혹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예전의 풍속에 따라 여묘살이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신주(神主)를 받들고 자리로 나아가 독(櫝)에 넣는다. [문] 《가례》 반곡조(反哭條)에 이르기를, “축(祝)이 신주를 받들고 들어가 자리로 나아가 독에 넣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묘소로부터 올 적에는 독에 넣지 않고 영거(靈車)에 넣어서 오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평상시의 제사를 지낼 적에는 신주를 넣은 독을 받들어 서쪽 계단의 탁자 위에 놓고서 독을 열어 신주를 받들고서 자리로 나아가네. 이번 경우에는 평상시 제사를 지낼 때와는 같지 않으므로 신주를 받들고 곧장 들어가서 자리로 나아간 다음, 이어 독에 넣는다고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묘소로부터 올 적에는 독에 넣지 않았다가 지금에 와서 비로소 독에 넣을 리가 있겠는가. 이 부분은 융통성 있게 보아야 하네. 다른 집에 사는 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문] 예를 보면 크고 작은 상(喪)에 연제(練祭)를 지낸 뒤와 장사를 치른 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송준길- [답] 예경 및 주자의 설에 상세하게 나와 있네. ○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대부(大夫)나 사(士)는 부모의 상에 있어 종가(宗家)에서 복상하다가 연제를 지낸 뒤에 본가로 돌아간다. 그리고 매달 초하루와 기일에는 종가에 가서 곡읍한다. 제부(諸父)와 형제(兄弟)의 상에는 졸곡을 지낸 뒤에 집으로 돌아간다.[大夫士父母之喪旣練而歸 朔日忌日則歸哭于宗室 諸父兄弟之喪 旣卒哭而歸]”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명사(命士) 이상은 부자(父子)가 서로 다른 집에서 산다. 서자(庶子)가 대부나 사가 되었는데 부모의 상을 만났을 경우에는, 빈궁(殯宮)이 적자의 집에 있으므로 연제를 마친 뒤에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매달 초하루와 돌아가신 날이 되면 종자의 집으로 가서 곡하는데, 빈궁에 가서 곡하는 것을 이른다. 제부와 형제에 대해서는 기년복을 입어 상복이 가벼우므로 졸곡을 마치고는 곧바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부인은 부모의 상에는 연제를 지낸 뒤에 돌아간다. 기년이나 9개월의 상에는 장사를 지낸 뒤에 돌아간다.[婦人喪父母 旣練而歸 朞九月者 旣葬而歸]”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상부모(喪父母)’는 부인에게 부모의 상이 있는 것이다. 연제를 지낸 뒤에야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자는 출가하였을 경우에는 조부모 및 아버지의 후사가 된 형제를 위하여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 ‘복구월자(服九月者)’는 본디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데 강복하여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경우를 이른다. 이런 경우에는 슬픔이 줄어들므로 장사를 지낸 뒤에 곧바로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기에 이르기를, “여자자(女子子)로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자는 그 부모를 위하여 졸곡 이후에는 길계(吉笄)로 바꾸어 착용하는데, 화려한 문양으로 성대하게 장식한 머리 부분은 꺾고서 착용하고, 포(布)로 머리카락을 묶는다.[女子子適人者爲其父母 卒哭 折笄首以笄 布總]”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졸곡을 마치고는 길계를 착용하는데, 상(喪)에 있어서의 큰일이 다 끝나면 여자는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서 길계를 착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길계의 머리 부분을 꺾는 것은, 장식이 너무 화려하기 때문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여자는 이미 연제를 마치고서는 남편의 집으로 돌아간다.’ 하여, 이곳의 주와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는데, 저기에서 돌아가는 것은 소상(小祥)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으로 그것이 정법이며, 이곳에서 돌아가는 것은 혹 유고(有故)가 있을 경우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 《의례》 기석례(旣夕禮)에 이르기를, “형제가 나가면 주인은 절하면서 전송한다.[兄弟出主人拜送]”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형제’는 소공(小功) 이하의 사람을 말한다. 다른 집에 사는 사람으로서 대공복을 입는 사람도 이때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이 형제들은 돌아가신 처음에 모두 와서 상에 임하였다가 빈(殯)을 마치고 나면 각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며, 조석(朝夕)의 곡을 할 경우에는 빈소(殯所)로 나아간다. 장례 날짜가 되어서 빈을 열 경우에는 장례를 지내는 곳으로 왔다가 반곡(反哭)을 함에 이르러 각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우제와 졸곡제를 지냄에 이르러서는 다시 와서 참여한다. 그러므로 《예기》 상복소기에서 ‘시마복과 소공복을 입는 사람은 우제와 졸곡제를 지낼 때에는 모두 문(免)을 한다.[緦小功 虞卒哭則皆免]’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다른 집에 사는 사람으로서 대공복을 입는 사람도 이때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는 것은, 대공 이상의 친족은 재물을 같이하는 도리가 있지만 다른 집에 사는 친족일 경우에는 은혜가 가볍기 때문에 각자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섭하손(葉賀孫)이 묻기를, “제 며느리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본가로 갔다가 졸곡을 마치고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예기》 상대기를 보니, 거기에 이르기를, ‘부인은 부모의 상에는 연제를 지낸 뒤에 돌아간다. 기년이나 9개월의 상에는 장사를 지낸 뒤에 돌아간다.’ 하였습니다. 이에 제가 비록 다시 돌아가서 남은 달수를 다 마친 다음에 돌아오라고 하기는 하였으나, 잘못 돌아와서 있었던 달을 다시 채워 넣어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인하여 생각건대, 다른 사람이 혹 어머니의 집에 머물러 있을 경우에는 피차간에 불편한 바가 있어서 연제를 지낼 때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기에 돌아오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달수를 채워 넣는 것은 오늘날에 추복(追服)을 입는 것과 같으니, 뜻은 역시 후한 데 가까운 듯하네. 그러나 혹 불편한 점이 있다면, 돌아와 있으면서 거처를 하고 음식을 먹는 절차를 변경하지 않으면 될 것이네. 그리고 의복은 변복(變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하였다.     우(虞) 우제를 지내는 시각 [문] 초우제(初虞祭)는 일중(日中)에 지내고 재우제와 삼우제는 모두 질명(質明)에 지내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예경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의례》 사우례(士虞禮)에 이르기를, “일중이 되어서 제사를 지낸다.[日中而行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아침에 장사를 지내고 해가 중간에 왔을 때인 일중에 우제를 지낸다. 군자가 일을 거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신정(辰正)을 쓰는 법이다. 재우와 삼우는 모두 질명에 지낸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신정’은 아침과 저녁과 일중의 때를 이른다. 아침에 장사를 지내는 일이 있으므로 일중이 되었을 때 우제의 일을 행한다고 한 것이다. ‘재우와 삼우는 모두 질명에 지낸다.’는 것은, 아침에 장사 지내는 일이 없으므로 모두 질명에 우제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침의 신정을 쓰는 것이다.” 하였다.   아버지의 상에 어머니를 천장(遷葬)하여 합장(合葬)할 경우에는 먼저 아버지에 대한 우제를 지내고 다음 날 어머니에 대한 우제를 지낸다. [문] 아버지의 상을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았는데 어머니의 묘를 천장하여 아버지와 함께 장사 지낼 경우, 장사 지내는 것은 비록 먼저 가벼운 상을 장사 지내나, 전(奠)을 올리는 것은 마땅히 중한 상에 먼저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신상(新喪)에 대한 우제는 마땅히 집에서 지내야 하고, 개장(改葬)에 대한 우제는 마땅히 막차(幕次)에 나아가서 지내야 하는바, 형세상 서로 방해되는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예기》 및 주자의 설에 의거하여, 아버지에 대한 우제는 장사를 지낸 날 반곡(反哭)한 뒤에 지내고, 어머니에 대한 우제는 다음 날 지내야 하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는 먼저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그 우제와 부제는 지내지 않고서 뒤에 장사 지내는 일을 마치기를 기다린다.[父母之喪偕先葬者不虞祔 待後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어머니를 장사 지낸 다음 날에 곧바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아버지의 장사를 마치고서 아버지에 대한 우제와 부제를 지낸 뒤에 어머니를 위한 우제와 부제를 지낸다. 그러므로 ‘뒤에 장사 지내는 일을 마치기를 기다린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묻기를, ‘《예기》에 운운하였습니다. 함께 장사 지내고 함께 전(奠)을 올리더라도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먼저 하고 나중에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이것에 대해서는 비록 그 뜻을 상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그 법이 모두 예경에 실려 있으니, 자신의 뜻으로 더하거나 빼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하였다.   갈장(渴葬)을 하는 경우에 우제는 빨리 지내고 졸곡은 반드시 3개월이 되기를 기다려서 지낸다. [문] 미처 기일이 되기 전에 장사를 지내는 경우에도 우제와 졸곡을 역시 일반적인 예에 의거하여 지낸다면, 온당치 못한 뜻은 없습니까? -송준길- [답] 예경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부장(赴葬)을 하는 경우에는 우제도 빨리 지낸다. 그러나 3개월 지난 뒤에 졸곡제를 지낸다.[報葬者 報虞 三月而後卒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보(報)’는 ‘부(赴)’로 훈독(訓讀)하는데, 급하고 빠르다는 뜻이다. 집안이 가난하거나 혹은 다른 연고가 있어서 3개월이 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죽은 뒤에 곧바로 장사 지내는 것이다. 이미 빨리 장사를 지냈으면 우제도 역시 빨리 지내는데, 우제는 귀신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므로 나중에 지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직 졸곡만은 반드시 3개월이 지나기를 기다려서 지내야 한다.” 하였다.   시동(尸童)은 반드시 어린아이로 할 필요가 없다. [문] ‘시동’이라고 할 때의 ‘동’ 자는 본주(本註)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비록 언문으로 해석하고자 하더라도 제대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동에게는 반드시 죽은 자의 옷을 입히는데, 이는 동자가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닙니다.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예기》 증자문(曾子問)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그러나 예(禮)를 보면 주공(周公)이 태산(泰山)에서 장사 지낼 적에 소공(召公)을 시동으로 삼았으니, 반드시 어린아이를 시동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공자가 말하기를, ‘성인(成人)의 영혼에 제사 지내려면 반드시 시동씨를 세운다. 시동씨는 반드시 손자를 세운다. 손자가 너무 어리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손자를 안고 있게 한다. 손자가 없으면 동성의 손자 항렬 가운데에서 택한다.’ 하였다.[孔子曰 祭成喪者 必有尸 尸必以孫 孫幼則使人抱之 無孫則取於同姓可也]” 하였다.   지팡이는 기대어 놓는다. [문] 실(室) 바깥에 지팡이를 기대어 놓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실 바깥의 동쪽에 기대어 놓아야 합니까, 아니면 서쪽에 기대어 놓아야 합니까? -송준길- [답]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상주는 우제(虞祭)에는 방에 들어갈 때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 부제(祔祭)에는 당에 오를 때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虞 杖不入於室 祔 杖不升於堂]”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우제는 침문(寢門) 안에서 지내므로 제사를 지낸 뒤에 지팡이를 짚고서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슬픔을 줄여 가는 절차이다.” 하였으며, 《의례》 사우례(士虞禮)에 이르기를, “주인이 지팡이를 기대어 놓고 들어간다.[主人倚仗 入]”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주인이 북쪽으로 돌아가서 지팡이를 서쪽 서(序)에 기대어 놓고 들어간다. 서쪽 서에 기대어 놓는 것은 고례에 우제를 지낼 때 남자와 여자가 순서대로 서 있기를 초상 때와는 반대로 하여 반드시 남자는 서쪽에 서고 여자는 동쪽에 서는데, 당을 오르내릴 적에는 남자 역시 서쪽 계단을 통해서 오르내린다. 그런데 실에 들어갈 적에는 서쪽 서에서 가까우므로 그대로 기대어 놓고서 들어가는 것이니, 편리함을 취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였네. 지금 《가례》에서는 위차(位次)가 옛날과는 바뀌어져서 장부는 동쪽에 있으면서 서쪽을 상석으로 삼네. 그런즉 지팡이를 기대어 놓는 것도 역시 동쪽 벽 아래에 놓아야 하네. -혹자는 이르기를, “주인과 형제들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 반드시 서쪽 계단을 통해서 오르내리니, 옛날의 제도를 변경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3년 안에는 계단 아래에 자리한다. [문] 우제를 지낼 때에는 주인이 들어가서 영좌(靈座) 앞에서 곡하니, 마땅히 그대로 당 위에 서 있어야 할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3년 안에는 계단 아래에 자리하는 법은 없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가례》를 보면, 우제에는 주인 이하가 당 위의 자리에 있고, 졸곡 때에는 우제와 같이 하며, 연제와 상제(祥祭)와 담제(禫祭) 때에도 모두 위의 의절대로 하는데, 오직 부제(祔祭) 때만은 종자(宗子)와 주부(主婦) 및 상주(喪主)와 상주부(喪主婦)가 양쪽 계단 아래에 나누어 서 있는다고 운운하였네. 우제 때에는 참신(參神)하는 절차가 없다. [문] 《가례》를 보면 우제를 지낼 적에는 참신하는 절차가 없습니다. 그런데 구준(丘濬)의 《가례의절》에서 이를 보충해 넣은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가례》를 보면, 우제와 졸곡제와 대상제와 소상제 및 담제에는 모두 참신한다는 글이 없으며 단지 부제(祔祭)에만 있는데, 그 아래의 주에서 특별히 조고(祖考)와 조비(祖妣)에게 참신한다고 말하였네. 그러니 그 신주(新主)에 대해서는 별도로 참신하는 예가 없음이 분명하네. 이는 퇴계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구씨가 이를 보충해 넣은 것은 아마도 《가례》의 본뜻이 아닐 듯하네. 생각건대 이른바 참신이라는 것은 참알(參謁)하는 것이네. 길제(吉祭)의 경우에는 이미 그 자리에서 신주를 받드니, 그 신주를 헛되이 보아서는 안 되네. 그러므로 반드시 절을 하고서 알현한 다음에 강신(降神)을 하는 것이 예이네. 새 신주에 이르러서는 3년 안에는 영좌(靈座)에 받들어 안치해 두고서 효자가 항상 그 곁에 거처하고 있으며, 연제를 지내기 전에는 또 조석으로 곡을 함으로써 살아 계실 때 혼정신성(昏定晨省)하던 것을 본받아 행하여 일찍이 하루라도 영좌의 앞에 있지 않은 적이 없네. 그러니 비록 제사를 지내는 날을 만나더라도 참알해야만 하는 뜻이 없네. 그러므로 이 예를 설행하지 않고 단지 들어가서 곡을 하여 슬픔을 다할 뿐인 것이네. ○ 퇴계가 정도가(鄭道可 정구(鄭逑))에게 답하기를, “우제를 지낼 적에 참신하는 절차가 없는 것은 빠진 것이 아니네. 이때에는 산 사람을 섬기듯이 섬기고 앞에 계신 듯이 섬기는 두 가지가 함께 있는 즈음이므로 참신하는 절차를 제거하여 생전에 항상 곁에서 모시는 뜻을 드러내 보이고, 강신하는 절차를 행하여 황홀한 사이에 신령이 내려오기를 구하는 것을 보이는 것이네. 이는 아주 정미롭고도 곡진한 곳인데, 경산(瓊山 구준(丘濬))이 경솔한 뜻으로 첨가해 넣은 것이네. 그러니 주자가 정해 놓은 것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네.” 하였다.   우제를 지낼 적에는 밥과 국이 있다. [문] 우제의 유식(侑食) 절차 아래에는 삽시(揷匙)한다는 글이 없습니다.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이 퇴계에게 묻기를, “이때에는 주인이 비통하고 혼미하여 예를 갖출 겨를이 없으므로 삽시하고 정저(正筯)하는 것이 단지 제찬(祭饌)을 올리는 처음에만 있는 것입니까?” 하니, 퇴계 선생께서도 역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혹자는 이르기를, “원래 밥과 국이 없는 것이다.”고 하는데, 이 설이 어떻습니까? 모든 제사에는 주인이 첨주(添酒)를 하는데, 우제를 지낼 적에는 집사(執事)가 첨주를 합니다. 그리고 절하는 예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퇴계가 비록 정한강의 설에 대해서 옳다고는 하였지만, 그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네. 나의 생각으로는, 《가례》의 구찬조(具饌條)에서는 우연히 밥과 국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유식조(侑食條)에서는 또 숟가락을 꽂는다는 글이 없으므로 이런 의심이 있게 된 것으로 여겨지네. 그러나 진기조(陳器條)에 이미 숟가락과 젓가락이 있고, 또 축문(祝文)에서는 ‘자성(粢盛)’이라고 말하였네. 그리고 또 졸곡의 진찬조(進饌條)에는 ‘주인이 국을 받들고 주부가 국을 받들기를 우제에서 제찬을 진설하는 것과 같이 한다.’고 하였네. 그러니 이때에도 밥과 국이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네. 이미 밥과 국이 있으면 삽시를 하는 절차는 유식(侑食)하는 때에 있어야 할 듯하네. 그런데 주인이 황급하고 혼미하여 예모(禮貌)를 다 차릴 수가 없으므로 집사가 행하는 것이며, 역시 절하는 절차도 없는 것이네. 상중(喪中)의 축문에서는 주인의 관직(官職)을 칭하지 않는다. [문] 상을 당한 사람의 경우에는 축문에서 관직을 칭하지 않습니까? -송준길- [답] 여러 예서를 상고해 보면, 상을 당한 사람은 관직이 있더라도 칭하지 않네. 남편이 아내를 제사 지낼 적에는 자식이 축문을 읽지 않는다. [문] 남편이 아내를 제사 지낼 적에 다른 집사(執事)하는 자가 없을 경우에 그 자식이 축문을 읽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머니를 제사 지내는 것은 불가한 점은 없습니까? -강석기- [답]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머니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과연 온당치 못하네. 조상을 제사 지낼 경우에는 압존(壓尊)이 되므로 오히려 그렇게 해도 괜찮네. 집사가 없을 경우에는 스스로 축문을 읽는다. [문] 모든 제사에서 집사하는 자가 없을 경우에는 축문을 스스로 읽습니까? -강석기- [답] 그렇게 해도 괜찮네. 우제를 지낼 적에 어머니가 아헌(亞獻)을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문] 상례에 있어서 아들이 주인(主人)이 되고 어머니가 주부(主婦)가 되어 예를 행할 즈음에는 서로 간에 꺼려지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제와 부제를 지낼 즈음에 이르러서는 아들이 초헌을 하고 어머니가 아헌을 하는 것은 더욱더 온당치 못합니다. 장자(張子 장재(張載))의 ‘동쪽에서는 희준(犧尊)과 상준(象尊)에 술을 따르고, 서쪽에서는 뇌준(罍尊)에 술을 따르는데, 모름지기 부부가 함께 일을 해야 한다. 어찌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예를 행해서야 되겠는가.’라는 설로써 본다면, 우제와 부제를 지낼 적에 아헌은 주인의 아내가 해야 할 듯합니다. 다만 《가례》의 주부조(主婦條)의 주(註)에 이르기를, “죽은 사람의 아내가 없을 경우에는 주상자(主喪者)의 아내가 한다.”고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의 아내가 현재 살아 있는데, 주상자의 아내가 주부가 되는 것은, 《가례》의 뜻에 어긋나는 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초상과 우제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은 이르기를, “《가례》의 본조(本條)에서 이미 ‘죽은 자의 아내가 없으면 주상자의 아내가 한다.’ 하였는데, 이른바 ‘죽은 자의 아내’는 주인의 어머니가 아니겠는가. 염습(斂襲)하고 반함(飯含)할 때의 곡하는 자리를 조금 당기거나 물리거나 하여 서로 똑바로 마주 대하지 않게 한다면 아마도 보기 민망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낮은 자가 초헌을 할 경우에는 존귀한 자가 아헌을 해서는 안 되네. 정한강(鄭寒岡)이 일찍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퇴계 선생에게 질문하자, 퇴계 선생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네. 이제 마땅히 퇴계의 설을 따라야 하네.” 하였습니다. 이 말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나의 생각으로는 퇴계의 설은 아마도 온당치 못한 듯하다고 여겨지네. 지난해에 강복이(姜復而 강석기(姜碩期))가 물어 왔기에 대략 논한 바가 있는데, 그것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면 될 것이네. -위의 초종입주부조(初終立主婦條)에 나온다.- 차(茶)를 올린 뒤에 조금 늦추어 사신(辭神)을 한다. [문] 모든 제사에서 차를 올린 뒤에 곧바로 사신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인 듯합니다. 혹 서 있거나 엎드려 있거나 하여 조금 늦추어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강석기- [답] 서 있으면서 조금 늦추어 하는 것은 괜찮으나, 엎드려 있는 것은 근거가 없네. 이성(利成)의 뜻 [문] 이성을 고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은 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이성의 뜻에 대해서는 예경에 상세하게 나와 있네. 후세에는 이미 시동(尸童)을 쓰지 않으니 아마도 행할 필요는 없을 듯하나, 《가례》에 이미 있으니 행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하네. ○ 《예기》 증자문(曾子問)의 주에 이르기를, “‘이(利)’는 기른다는 뜻인 양(養)과 같다. 공양(供養)하는 예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의례》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의 소에 이르기를, “축(祝)이 시동씨에게 이성(利成)이라고 고한다. 예가 끝났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만약 예가 끝났다고 하면 시동씨를 떠나보내는 듯한 혐의스러움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단지 이성이라고만 말하는 것이다. 대개 옛날에는 제사를 지낼 적에 시동씨가 있었는데, 시동씨를 섬기는 예가 끝나면 이성을 고한다. 이것이 비록 주인에게 고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시동씨로 하여금 듣고서 일어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 아래에서 곧바로 이르기를, ‘시동씨가 듣고서 일어난다.[尸謖]’고 한 것이다.” 하였다.   우제를 지낼 적에 사신(辭神)하는 절차는 시제(時祭)를 지낼 때와는 같지 않다. [문] 사신하는 예가 우제를 지낼 때와 시제를 지낼 때가 같지 않은데, 우제의 경우에는 신주를 거두어서 갑(匣)에 넣은 뒤에 주인 이하가 곡을 하고 재배(再拜)를 하며, 시제의 경우에는 주인 이하가 사신을 하고 재배를 한 뒤에 신주를 넣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강석기- [답] 상세하지가 않네. -혹자는 이르기를, “우제를 지낼 때에는 신주를 움직이지 않으므로 먼저 신주를 거둔 뒤에 절을 하고, 시제를 지낼 때에는 장차 신주를 받들어 서쪽 계단에 있는 탁자 위의 독(櫝)에 거두어 넣으므로 나가지 않고 먼저 절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옳은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주D-001]갈장(渴葬) : 장사를 지낼 기일이 되기 전에 미리 장사를 지내 매장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부장(赴葬) : 가난이나 기타의 사정으로 인하여 빨리 지내는 장사를 말한다. 본디 사(士)는 죽은 뒤 3개월이 지나서 매장하고, 매장한 뒤 곧바로 우제를 지내며, 우제를 지낸 뒤 곧바로 졸곡제를 지내는 것이 예인데, 다른 사정이 있을 때에는 부장으로 치른다.     졸곡(卒哭) 현주(玄酒) [문] 제사를 지낼 적에 현주를 쓰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강석기- [답] 예경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예기》 향음주의(鄕飮酒義)에 이르기를, “준(尊)에 현주(玄酒)가 있으니, 백성들에게 근본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尊有玄酒 敎民不忘本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술이 없었으므로 물을 가지고 술 대신 예를 행하였다. 그러므로 후세에서는 이를 인하여 물을 일러 현주라고 하였다.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예가 생겨난 유래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예운(禮運)의 주에 이르기를, “매번 제사를 지낼 적마다 반드시 현주를 진설하여 놓기는 하나, 실제로는 현주를 가지고 잔에 따르지는 않는다.” 하였다.   제찬(祭饌)을 진설할 적에는 밥을 왼쪽에 놓는다. [문] 시제를 지낼 적에 제찬을 진설하면서 밥을 오른쪽에 놓고 국을 왼쪽에 놓는데, 상기(喪期) 안에 제찬을 진설하는 데 대해서는 분명한 글을 볼 수가 없습니다. 혹자는 ‘3년 안에는 살아 있을 때를 형상하여 밥을 왼쪽에 놓고 국을 오른쪽에 놓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저의 잘못된 생각으로도 일찍이 그럴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졸곡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길례(吉禮)를 써 신도(神道)로써 섬깁니다. 그런즉 이때에만 유독 살아 있을 때를 형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황종해- [답] 제찬을 진설할 적에 밥을 오른쪽에 놓고 국을 왼쪽에 놓는 것은, 그 뜻을 잘 모르겠네. 숟가락을 꽂으면서 손잡이 부분을 서쪽으로 향하게 하는 데 이르러서는, 오른쪽을 숭상하는 것이네. 그런즉 왼쪽에 진설하는 뜻을 더욱더 모르겠네. 나의 생각으로는 3년 안에 상식(上食)을 올릴 경우에는 살아 계실 때를 형상하여 왼쪽에 밥을 놓고 오른쪽에 국을 놓는 것이 옳을 듯하네. 이미 죽은 나의 벗인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여식(汝式)이 일찍이 말하기를, “예경을 보면 밥은 사람의 왼쪽에 있고, 국은 그 오른쪽에 있으며, 술과 장(漿)은 그 사이에 있다.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면서 이와 다르게 진설하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하였네. 삶고 익힌 것으로 제찬을 갖추고, 신령을 대신하여 술로 제사를 지내며, 숟가락을 꽂을 때 자루 부분을 서쪽으로 놓는 것은 모두 산 사람을 봉양하는 도를 쓴 것이네. 그런데 제찬을 진설하면서는 죽은 이를 봉양하는 뜻을 끌어온 것은, 역시 그 가리키는 바를 상세히 모르겠네. ○ 《예기》 곡례에 이르기를, “무릇 음식을 올리는 예는 왼쪽에는 효(殽)를 놓고 오른쪽에는 자(胾) -음은 측(側)과 사(史)의 반절이다.- 를 놓으며, 밥[食] -음은 사(嗣)이다.- 은 사람의 왼쪽에 놓고, 국은 사람의 오른쪽에 놓는다. 회(膾)와 자(炙) -음은 자(柘)이다.- 는 바깥쪽에 놓고, 식초와 장은 안쪽에 놓으며, 삶은 파인 총예(蔥㳿) -㳿의 음은 예(裔)이다.- 는 끝에 놓고 술과 미음은 오른쪽에 놓는다. 포(脯)와 수(脩)를 놓을 경우에는 포의 가운데를 굽히되[胊] -음은 구(劬)이다.- 왼쪽에 놓고, 포의 끝이 오른쪽을 향하도록 한다.[凡進食之禮 左殽右胾 食居人之左 羹居人之右 膾炙處外 醯醬處內 蔥㳿處末 酒漿處右 以脯脩置者 左胊右末]”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뼈에 고기가 붙어 있는 것을 ‘효(殽)’라고 하고, 고기만을 크게 자른 것을 ‘자(胾)’라고 한다. 뼈는 단단하기 때문에 왼쪽에 놓고, 고기는 부드럽기 때문에 오른쪽에 놓는다. 밥을 왼쪽에 놓고 국을 오른쪽에 놓는 것은 마른 것과 물기가 있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회(膾)와 자(炙)는 진미이므로 효와 자의 바깥쪽에 놓고, 식초와 장은 음식의 맛을 내는 데 주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효와 자의 안쪽에 놓는다. ‘총예(蔥㳿)’는 찐 파로 또한 절인 채소류이니, 두(豆)라는 그릇에 담아 놓는다. 그러므로 끝에 둔다. 주(酒)와 장(漿)은 술만 놓거나 혹은 미음만 놓는데, 국의 오른쪽에 놓는다. 만약 함께 차리게 되면 왼쪽에는 술을 놓고 오른쪽에는 미음을 놓는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포(脯)’의 말뜻은 시작이니, 시작하면 곧 이루어진다. ‘수(脩)’ 또한 포이다. 수의 말뜻은 다스림이니, 다스린 뒤에야 이루어진다. 얇게 저민 것을 포(脯)라 하고, 불려서 생강과 계피를 안에 넣어 다진 것을 단수(腶脩)라고 한다. ‘구(胊)’는 가운데를 굽힌 것이다. 구는 왼쪽에 놓는다. 포와 수를 술의 왼쪽에 두는 것은 마른 것을 양(陽)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였으며, 여씨(呂氏)가 이르기를, “그 끝이 오른쪽으로 향해 있는 것이 먹기에 편한바, 포(脯)와 수(脩)를 먹는 자는 끝을 먼저 먹는다.” 하였으며, 방씨(方氏)가 이르기를, “밥은 육곡(六穀)을 위주로 하여 만든다. 곡식은 땅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양(陽)의 덕을 일으키므로 왼쪽에 놓는 것이다. 국은 육생(六牲)을 위주로 하여 만든다. 희생은 하늘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음(陰)의 덕을 일으키므로 오른쪽에 놓는 것이다.” 하였다. ○ 《의례》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에 이르기를, “주인이 당(堂)으로 올라가 실(室)로 들어간 다음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특조(特俎)와 어조(魚俎)가 들어오면 두(豆)의 동쪽에 진설한다. 주부가 서(黍)와 직(稷)을 담은 두 돈(敦)을 조(俎)의 남쪽에 놓는데, 서쪽이 상위(上位)이다. 또 갱(羹)을 담은 두 개의 형(鉶)을 두(豆)의 남쪽에 진설하는데, 남쪽을 바라보도록 진설한다.[主人升 入 復位 俎入 設于豆東 主婦設兩敦黍稷于俎南 西上 及兩鉶芼 設于豆南 南陳]” 하였다. -이상에서 말한 몇 가지 설을 살펴보건대, 모든 제사에서 제찬을 진설할 적에는 국은 서쪽에 있어야 하고 밥은 동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 국이 동쪽에 있고 밥이 서쪽에 있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는 아마도 당시의 속례(俗禮)에서 나온 것인데, 《서의(書儀)》에서 그것을 따르고, 《가례》에서도 역시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인 듯하다. 그러나 마땅히 《가례》에 의거하여 밥을 왼쪽에 진설해야지,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제를 지낼 때와 졸곡제를 지낼 적에는 이성(利成)을 고하는 것이 다르다. [문] 이성을 고하는 것을 혹 서쪽을 바라보고서 고하고 혹 동쪽을 바라보고서 고하는 차이가 있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우제는 상제(喪祭)이므로 서쪽을 바라보고서 고하고, 졸곡제는 길제(吉祭)이므로 동쪽을 바라보고서 고하는 것이네.   [주D-001]현주(玄酒) : 물을 말한다. 물의 빛이 검기 때문에 현(玄) 자를 붙인 것이며, 태곳적에는 술이 없어서 제사를 지낼 때 술 대신 물을 썼으므로, 제사나 의식에 쓰는 물을 말한다.     부(祔) 부제(祔祭)를 지낼 적에는 종자(宗子)가 사당에 고한다. [문] 부제를 지낼 적에 종자가 사당에 고하는 것은, 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에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 말로써 부제를 지낼 감실(龕室)에 고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그렇네. 고(考)를 합부(合祔)할 적에는 조비(祖妣)가 두 사람 이상이면 아울러 제사 지낸다. [문]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보면, ‘부제를 지낼 적에 만약 조비가 두 사람 이상이면 단지 친한 자만 배설하는데, 바로 구(舅)를 낳은 어머니 한 위(位)이다.’ 하였습니다. ‘구(舅)’ 자를 가지고 보면 이는 어머니를 합부하는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부묘할 경우에는 조비는 비록 두 사람 이상이더라도 아울러 배설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조비에게 어머니를 합부할 경우에는 단지 구를 낳은 조비에게만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네. 만약 조고에게 아버지를 합부할 경우에는 전후(前後)의 조비에게 아울러 제사 지내야 하네. 부제를 지낼 때의 축사(祝辭) [문] 선고(先考)의 부제를 지낼 경우에는 비록 증조고비의 양위(兩位)를 아울러 배설하더라도 비위(妣位)는 축사에서 거론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종자(宗子)가 고할 적에도 역시 망자(亡者)의 이름을 쓰지 않습니까? -송준길- [답] 비위를 축사에서 거론하지 않고 망자의 이름 역시 쓰지 않네. 이는 모두 《가례》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마땅하네. 종자(宗子)가 고할 적에는 망자가 존귀한 분이면 부군(府君)이라고 칭한다. [문] 부제를 지낼 적에 망자에게 고하는 축문을 종자가 칭하는 바에 따를 경우에는 ‘애(哀)’ 자를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한데, ‘부군’이란 글자는 그대로 씁니까? -송준길- [답] ‘애(哀)’ 자는 쓰지 않은 것이 옳을 듯하네. 부군은 바로 존경하는 말로, 옛날 사람들은 형에 대해서도 역시 부군이라고 칭하였으며, 항렬이 낮거나 어린 사람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네. 할아버지의 상중에도 손자가 죽으면 할아버지에게 합부한다. [문]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합부하는 것이 예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궤연(几筵)이 그대로 있을 경우, 손자의 상에 대한 부제를 어느 곳에서 지내야 합니까? -송준길- [답] 무릇 합부하는 것은 소목(昭穆)을 따라서 하는 것이네. 조부모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마땅히 한 세대를 건너뛰어서 고조(高祖)에게 합부하네. 지금 할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으니 상을 치른 지는 비록 얼마 안 되었더라도 오히려 할아버지에게 합부하는 것이 마땅한바, 이는 소목이 같기 때문이네. 이에 대해서는 예경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왕부(王父)가 죽어서 아직 연제나 상제를 치르지 않았는데 손자가 또 죽었을 경우에도 오히려 왕부에게 합부한다.[王父死未練祥 而孫又死 猶是附於王父]”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손자를 할아버지에게 합부하는 것은 예에 있어서 반드시 그런 법이다. 그러므로 할아버지가 죽어 비록 연제나 상제를 치르지 않았더라도 손자가 또 죽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할아버지에게 합부한다.” 하였다.   주첩(主妾)의 상에는 임금이 스스로 부제를 지낸다. [문] 첩으로서 여군(女君)의 대리 역할을 하고 있던 자의 경우, 그 상은 다른 여러 첩들과는 다를 듯한데, 역시 등급에 따른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답] 잡기(雜記)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주첩이 죽어 남편이 친히 상주(喪主)가 되면, 부제(祔祭)는 남편이 친히 지낸다. 그리고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는 그 첩이 낳은 아들이 지낸다. 빈(殯)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정침(正寢)에서 하지 않는다.[主妾之喪則自祔至於練祥 皆使其子主之 其殯祭不於正寢]”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여군이 죽어서 첩이 여군의 역할을 대신한 경우의 예이다. 이 첩이 죽었을 경우에는 임금이 그 상을 주관하고, 그 부제는 임금 스스로가 주관한다. 연제와 상제의 경우에는 그 아들이 주관한다. 여군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은 첩일 경우에는 임금이 그 상을 주관하지 않는다.” 하였다.   첩모(妾母)의 부제(祔祭) [문] 첩모가 죽었는데 할아버지의 첩이 없고 또 고조의 첩이 없을 경우에는 어떤 신위(神位)에 합부하여야 합니까? [답] 《예기》 상복소기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으며, 다시 주자(朱子)의 설로써 참고해 보아야만 될 것이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첩이 죽었는데 첩이었던 조고(祖姑)가 없을 경우에는 제사에 쓰는 희생을 바꾸어서 적조고(嫡祖姑)에게 합부해도 된다.[妾無妾祖姑者易牲而祔於女君可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첩은 마땅히 첩이었던 조고에게 합부하여야 하나, 첩이었던 조고가 없을 경우에는 한 대(代)를 건너뛰어 합부하는데, 이는 고조의 첩에게 합부하는 것이다. 이제 또 고조의 첩이 없을 경우에는 첩을 부제(祔祭)할 때 쓰는 희생을 적조고를 부제할 때 쓰는 희생으로 바꾸어서 적조고에 합부하여야 한다. ‘여군(女君)’은 적조고를 이른다.” 하였다. ○ 두문경(竇文卿)이 주자에게 묻기를, “《예기》에 이르기를, ‘첩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입기는 하지만 아들 아래로는 미치지 않으며, 제사는 손자 대에서 그친다.[妾母不世祭於子 祭於孫止]’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첩은 첩이었던 조고에게 합부한다.[妾祔於妾祖姑]’ 하였습니다. 이미 상복이 아들 아래로는 미치지 않으니 또 어찌 합부할 만한 첩조고가 있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합제(合祭)하는 것은 몇 대에 이르러서 그치는 것입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이 조항은 상세하지가 않기에 예전에 예서를 읽으면서도 매번 의심하면서 물어서 상고하기를 기다렸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첩모의 경우에는 아들 아래로는 상복이 미치지 않으니, 영원히 첩조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소에서 말한 설은 아마도 따를 수 없을 듯하다.” 하였다.   부제를 지낼 적에는 밥과 찬을 왼쪽에 진설한다. [문] 부제를 지내면서 제찬을 올릴 적에 조고(祖考)로써 주를 삼을 경우에는 마땅히 예경에 의거하여 밥을 오른쪽에 놓고 국을 왼쪽에 놓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아울러 우제(虞祭)를 지낼 때와 같이 한다.’고 하였는데, 우제를 지낼 때 진설하는 것은 ‘조전(朝奠)을 올릴 때와 같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제와 조전은 살아 있을 때를 형상하여 밥을 왼쪽에 놓고 국을 오른쪽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조고의 앞에도 역시 막 죽은 자의 예를 써서 진설해야 하는 것입니까? -황종해- [답] 우제 이후의 제사부터는 왼쪽에 진설하네. 3년 안에 조석으로 상식을 올릴 경우에는 살아 계실 때를 형상하여 오른쪽에 진설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네. 부제를 지낸 뒤에는 제사를 지내면서 ‘효(孝)’라고 칭하고, 담제(禫祭)를 지내기 전에는 서소(書疏)를 쓸 적에 ‘애(哀)’라고 칭한다. [문] 정한강(鄭寒岡)이 묻기를, “담제를 지낼 때의 축문에서도 오히려 고자(孤子) 또는 애자(哀子)라고 칭하니 담제를 지내기 전에는 그대로 고자나 애자라는 칭호를 쓰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니, 퇴계가 답하기를, “그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여겨진다.” 하였으며, 우복(愚伏)은 이르기를, “한갓 축문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위로해 준 데 대해 감사하는 글에서도 역시 그대로 써야 한다.” 하였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의례》와 《가례》에서는 모두 부제를 지낼 적에는 ‘효(孝)’라고 칭한다고 하였고, 또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는 제주(祭主)가 효자(孝子)니 효손(孝孫)이니 하고 칭하고, 상을 치름에 있어서는 상주가 애자니 애손(哀孫)이니 하고 칭한다.[祭稱孝子孝孫 喪稱哀子哀孫]”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제사는 길제(吉祭)이다. 졸곡(卒哭) 이후에는 길제가 되므로 축사(祝辭)에 효자나 효손이라고 칭하고, 우제(虞祭) 이전에는 흉제(凶祭)가 되므로 ‘애’라고 칭하는 것이다.” 하였네. 《가례의절》의 경우에는 “우제에서부터 담제에 이르기까지는 선조에 대해서 ‘효’라고 칭하고 망자(亡者)에 대해서 ‘애’라고 칭한다.”고 하였는데, 마땅히 예경을 올바른 것으로 삼아야 하네. 경임(景任 정경세(鄭經世))이 “담제를 지내기 전에는 서소(書疏)에서 그대로 고자나 애자라고 칭해야 한다.”고 한 설은 옳은 설이네. 부제를 지낸 뒤에는 베로 만든 망건(網巾)을 착용한다. [문] 퇴계 선생이 말하기를, “우제를 지낼 때부터는 점차 길례를 쓰는 것에 대해서는 예문에 대충 갖추어져 있으니, 망건을 착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예문에서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으니, 대개 망건의 제도는 후세에 나온 것이므로 예문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인 듯하다. 다만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시마(緦麻)와 소공(小功)의 친족은 우제(虞祭)와 졸곡제(卒哭祭)에 참여할 경우 문(免)을 한다.[緦小功 虞卒哭則免]’ 하였다. 상사(喪事)는 애통함을 위주로 하므로 비록 점차 길한 쪽으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도리어 애통함을 꾸미는 복식을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말하면 우제에는 망건을 착용하지 않아도 무방할 듯하다.”고 운운하였습니다. 퇴계의 이 말을 상세히 살펴보면, 우제에 망건을 착용하는 것이 비록 온당치 못하기는 하나, 졸곡 이후에는 쓰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 지금 사람들 가운데에는 혹 졸곡을 지낸 뒤에 베로 만든 망건을 착용하는 자도 있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고례(古禮)를 보면 친상(親喪)에서는 소렴 때에 계사(笄纚)를 제거한다고 하였고, 《개원례》에는 이르기를, “남자는 머리털을 묶고서 거친 베로 된 파두(帕頭)를 착용하고, 여자는 머리털을 묶어서 좌(髽)를 한다.” 하였으며, 두우(杜佑)는 이르기를, “옛날에는 책(幘)이 없어서 여섯 자 되는 비단 띠로 머리카락을 묶었는데, 그 형상이 새 꼬리와 같았으며, 계(笄)를 가지고 가로로 꿰고서 그 위에 관을 썼다. 그러다가 후한(後漢) 때 상을 당한 자들이 거친 베로 파두를 만들어 썼으니, 이는 바로 계사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였으며, 구씨(丘氏)는 이르기를, “지금의 망건은 계사와 서로 비슷하다.” 하였다. 다만 고례에서는 단지 사(纚)를 제거하는 절차만을 말하고 도로 베푸는 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또 부제를 지낼 때에 이르러서 주인 이하가 목욕하고 머리를 빗으니, 이때에는 마땅히 사를 써야만 할 것 같은데, 분명하게 나와 있는 글이 없다. 《개원례》 및 두씨의 설이 비록 고례와는 같지 않으나, 상인(喪人)은 마땅히 머리카락을 한곳에 거두어 모으는 뜻이 있으니, 근거가 있는 듯도 하네. 그러나 어떨지는 모르겠네.   [주D-001]주첩(主妾) : 정처(正妻)가 죽어서 정처의 역할을 대신하는 첩을 말한다. [주D-002]계사(笄纚) : 계는 비녀를 말하고, 사는 머리카락을 묶는 비단으로 된 띠를 말하는데, 사의 길이는 대개 6척가량 된다. [주D-003]파두(帕頭) : 관모(冠帽)의 하나인 복두(幞頭)로, 각이 지고 위가 평평한 관이다. 사모(紗帽)와 같이 두 단으로 되었으며, 뒤쪽의 좌우에 각(脚)이 달려 있다. 절상건(折上巾), 연과(軟裹) 등으로도 불린다. 건(巾)에서 비롯된 것으로, 후주(後周)의 무제(武帝) 때 머리를 감싼 데서 복두라고 불린다. [주D-004]좌(髽) : 북상투로, 부인이 상중에 머리털을 풀어 묶기만 하고 싸개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D-005]책(幘) : 머리를 싸매는 헝겊을 말한다.     소상(小祥) 소상(小祥)의 연복(練服) [문] 소상을 지낼 때 입는 연복에 대해서 혹자는 ‘단지 연(練)으로 관(冠) 및 중의(中衣)만을 만든다.’라고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최(衰)와 상(裳)을 모두 연으로 만든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옳은 것입니까? -송시열- [답] 선유(先儒)들이 논해 놓은 바를 아래에다가 죽 적어서 참고하는 데 대비하였네. ○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상복도식(喪服圖式)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연제(練祭)를 지낼 적에 재차 수복(受服)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전에 비록 분명하게 말해 놓은 글이 없지만, 이미 연제를 지내고서는 공최복(功衰服)을 입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예를 기록하는 자가 여러 차례 말하였다. 《예기》 복문(服問)에 이르기를, ‘삼년상에 이미 연제를 지낸 사람이 다시 기년의 상을 당하여 이미 장사를 마친 경우에는 그 공최복을 그대로 입는다.[三年之喪旣練矣 期之喪旣葬矣 則服其功衰]’ 하였으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삼년상의 상복을 입는 동안에는 비록 소상을 마치고 공최복을 입게 되었더라도 다른 사람의 상을 조문하지 않는다.[三年之喪 雖功衰 不弔]’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부모상의 상복을 입고 있으면서 연제를 끝내고 공최복을 입고 있을 때 재종형제가 요사(夭死)하여 그의 조부에게 합부할 경우에는, 자신은 연관을 쓴다.[有父母之喪尙功衰而祔兄弟之殤 則練冠]’ 한 것이 이것이다. 살펴보건대, 대공포(大功布)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는데 7승포와 8승포와 9승포이며, 강복(降服)은 7승포가 가장 중한 것이 된다. 참최복의 상에는 이미 연제를 지내고 나서는 공최복을 입는데, 이는 대공 7승포로써 받아 최(衰)와 상(裳)을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의례》 상복(喪服) 참최장(斬衰章)의 가씨(賈氏)의 소(疏)에 이르기를, ‘참최복의 상에는 처음에 거친 베로 만든 상복을 입는다. 장사를 지내고 난 뒤와 연제를 지내고 난 뒤 및 대상(大祥)에는 점차 가는 베로써 수식(修飾)을 한다. 참최복의 경우에는 처음에 최와 상은 3승으로 하고 관(冠)은 6승으로 한다. 이미 장례를 치른 뒤에는 관의 승수를 받아서 최와 상은 6승으로 하고 관은 7승으로 한다. 소상 때에는 또 그 관을 만든 베의 승수를 받아서 최와 상은 7승으로 하고 관은 8승으로 한다.’ 하였다. 또 ‘시집을 간 여자자(女子子)가 돌아와서 아버지의 집에 있다.[女子子嫁反在父之室]’고 한 부분의 소에 이르기를, ‘소상에 이르러서는 최는 7승, 총(總)은 8승으로 받는다.’ 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예기》 간전(間傳)에 이르기를, ‘소상에는 연관을 착용한다.[小祥練冠]’ 하였는데, 이에 대한 공씨(孔氏 공영달(孔穎達))의 소에 이르기를, ‘소상에 이르러서는 졸곡을 지낸 뒤의 관의 승수를 받아 그 최를 만들며, 연(練)으로 만든 관으로 그 관을 바꾼다.’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이 예(例)에 의거하여 앞 부분에 개록(開錄)해 갖추어 놓았다. 횡거(橫渠) 장자(張子)의 설에는 또 이르기를, ‘연의(練衣)는 반드시 단련(鍛鍊)한 대공포로 상의를 만든다. 그러므로 공최(功衰)라고 하는 것이다. 공최는 상의(上衣)이다. 위에다가 최를 붙이므로 통틀어서 공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수복(受服)의 위에다가 붙인다. 수복이라고 칭하는 것은 이것으로 인해 이름을 얻은 것이다. 수복은 대개 처음 상을 당하였을 때 입는 참최복의 최를 받아서 변복(變服)에 붙이는 것이다. 그 뜻은, 상(喪)은 시간이 오래되면 변하여 가벼워지게 되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마음을 속에서 빨리 잊지 않고자 해서이다.’ 하였다. 장횡거의 이 설을 근거로 하여 보면, ‘대공의 최로써 받는다.’고 한 것은 전(傳)이나 기(記)의 주소(注疏)의 설과 같다. 그리고 ‘단련한 대공의 포로 상의를 만든다.’고 한 것은, 단지 연으로 중의(中衣)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시 연으로 공최(功衰)도 만드는 것이다. 또 성복(成服)하는 처음에 길이가 6촌이 되고 너비가 4촌이 되게 최를 만들어 가슴 부위에 붙였던 것을 취해 공최의 위에 붙이는 것이다. 이는 공최는 비록 점차 가벼워지나, 길이가 6촌이 되고 너비가 4촌이 되게 만든 최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애통한 마음을 대번에 잊지 않고자 한 것이다. 이 설은 선유들의 설과 차이가 있다. 이제 양쪽을 다 기록해 두니,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가례의절》에 이르기를, “운서(韻書)를 보면 ‘연(練)’은 물에 담가서 익힌 실이라고 하였다.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삼년상의 연관도 같다.[三年之練冠]’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소상을 지내고 나서 쓰는 관을 이른 것이다.’ 하였으니, 소상에는 별도로 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복문(服問)에 이르기를, ‘삼년의 상에 연제를 지낸 뒤에 공최복을 입는다.[三年之喪旣練矣 服其功衰]’ 하였으니, 소상에는 별도로 최(衰)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연제에는 연의(練衣)를 입되 누런 빛깔의 천으로 안을 대고 연한 붉은 빛깔의 천으로 연의의 옷깃과 소매에 가선을 두른다. 칡으로 만든 요질을 띠고 미투리를 신는다.[練 練衣 黃裏縓緣 葛腰絰 繩屨]’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연의는 최를 받쳐서 입는 중의이다.’ 하였다. 지금은 관은 조금 거친 베를 쓰되 숙마포(熟麻布)로 만들고, 부판(負版)과 적(適)과 최(衰)는 쓰지 않으며, 요질은 칡으로 만들고 마구(麻屨)는 삼끈으로 만들어야 할 듯하다. 소상에는 수질(首絰)을 제거하고 오직 칡으로 된 요질만을 남겨 둔다.” 하였다. ○ 지난해에 내가 선사(先師)인 구봉(龜峯)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예경을 보면 이미 ‘연제에는 공최복을 입는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졸곡을 지낸 뒤에는 관(冠)의 승수로써 그 최를 받는다.’고 하였는데, 졸곡의 관은 바로 공최이다. 그러니 공최가 과연 생마포(生麻布)로 만드는 것이겠는가. 고례(古禮)와 근고 시대 제유(諸儒)들도 역시 알기 어렵다고 하였는바, 이제 수천 년 뒤에 태어나서 자신의 견해만을 옳다고 여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니 단지 송나라 선유들의 설 및 주자의 《가례》를 가지고 정해야만 할 것이다. 주자는 《가례》에서 이미 숙포(熟布)로 공최복을 만드는 것으로 정하였으며, 소상에는 연포(練布)를 쓴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묵최(墨衰)에 대해 묻는 데에서 질문하였다. 성복장(成服章) 아래의 묵최에 대해 물은 조항에 나오는데, 거기에서 ‘이미 장사를 지내고는 갈삼(葛衫)으로 바꾸어 입으며, 소상에는 연포로 바꾸어 입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장횡거(張橫渠)의 ‘연포를 쓴다.’는 뜻과 서로 합치된다. 고례에서 포(布)를 쓰는 뜻을 인하고, 장횡거가 이미 정해 놓은 의논을 채택하고, 주자에게 질문한 말로써 참고하고, 《가례》에서 ‘공포(功布)는 익힌 것을 쓴다.’고 한 구절에 의거한다면, 소상에는 숙마포(熟麻布)를 쓰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예기》 단궁(檀弓)의 소에 이르기를, “정복(正服)은 변경시킬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 설은 아마도 잘못된 것인 듯하다. 예경을 보면 “연의는 대공포(大功布)로 만들므로 그것을 일러 공최(功衰)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가례》를 보면 “대공(大功)에는 숙포로 옷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런즉 연복(練服)은 최(衰)와 상(裳)을 모두 아울러서 연포를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어찌 중의(中衣)만을 연포로 쓰겠는가. ○ 다시 살펴보건대, 상복도식(喪服圖式)의 연제수복도(練除受服圖)를 보면, “중의 및 관은 연포로 만들고, 최와 상은 졸곡이 지난 뒤에 관의 승수로써 받는다.”고 하였는데, 졸곡이 지난 뒤의 관은 바로 대공 7승포로 만든 것이다. 대공포는, 《의례》의 경우에는 원래 연포를 쓴다는 글이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연제를 지낼 때의 최와 상은 연포로 만든 것을 쓰지 않는 듯하다. 지금 상복도식에 의거하여 연포로는 관과 중의를 만들고 최와 상은 대공 7승포로 고쳐 만들어 연포를 쓰지 않는다면, 아마도 고례와 어긋나지 않고 소가(疏家)의 ‘정복은 변경시킬 수 없다.’는 글과 서로 부합될 것이다. 장횡거의 ‘연포를 쓴다.’는 설과 같은 경우는 상복도식에서 이를 인용하면서 그르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례》에서도 역시 “대공복은 숙포로써 만든다. 소상에는 연포로 바꾸어 입는다.”고 하였다. 그런즉 비록 연포로 만든 최와 상을 아울러 쓰더라도 역시 근거 없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설이 어떨지 모르겠다.   갈질(葛絰) [문] 갈질은 바로 옛날에 졸곡제를 지낼 때 받아 입던 복인데, 구씨(丘氏)는 연복(練服)의 질(絰)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것을 준행해야 합니까? 그리고 졸곡 때 입는 갈질은 마전한 것을 써서 만듭니까, 아니면 거친 것을 써서 만듭니까? -송준길- [답] 졸곡 때 복을 받아 입는 것은 후세에서 행하지 않고 있네. 구씨가 갈질을 연복의 질이라고 한 것은, 고례에 딱 합치되는 것이네. 예경에서는 애당초 숙(熟)이라고 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거친 것을 쓰는 듯하네. ○ 《의례》 상복(喪服)의 참최(斬衰)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우제와 졸곡제를 지낸 뒤에는 마복(麻服)을 벗으며, 갈대(葛帶)는 세 겹으로 한다.” 하였다.   삼중사고(三重四股)의 제도 [문] 삼중사고의 제도는 어떤 것입니까? -송준길- [답] 《예기》 간전(間傳)에 상세하게 나와 있네. ○ 《예기》 간전에 이르기를, “우제와 졸곡을 지낸 뒤에는 마복(麻服)을 벗고 갈복(葛服)을 입으며, 갈대는 세 겹으로 한다.[旣虞卒哭去麻服葛 葛帶三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장사를 지낸 뒤에는 갈질(葛絰)로써 허리의 마질(麻絰)을 바꾸되 전보다 조금 작게 하며, 네 가닥을 꼬아 포개어 서로 겹치게 하면 세 겹이 된다. 대개 한 가닥을 꼰 것이 첫 번째 겹이 되고, 두 가닥을 합하여 하나의 끈으로 만들면 이것이 두 번째 겹이 된다. 두 가닥을 또다시 합하여 하나의 끈으로 만들면 이것이 세 번째 겹이 된다.” 하였다.   최(衰)와 부판(負版)과 벽령(辟領)을 제거한다. [문] 연제를 지내고 나서 최와 부판과 벽령을 제거하는 것이 《의례》와 《예기》와 《의례경전통해》와 《통전》에는 보이지 않는데, 《가례》에서는 어디에 근거하여 변제(變除)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까? -송시열- [답] 주자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서의(書儀)》를 인하여 나름대로 참작해서 정한 것이네. 이는 후대의 현인이 시대를 인하여 더하고 줄인 제도이네. 만약 고례를 따라서 한다면, 최와 부판과 벽령을 제거하지 않아도 안 될 것은 없네. 다만 이미 사마온공과 주자의 정정을 거친 것이니, 따라서 행하여도 역시 괜찮을 것이네. 어머니를 위하여 11개월이 지나서 연제를 지낼 경우에는 윤달은 계산에 넣지 않는다. [문] 예경을 보면, 달로써 헤아릴 경우에는 윤달을 헤아리고, 해로써 헤아릴 경우에는 비록 윤달이 있더라도 헤아리지 않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를 위해 상복을 입을 경우에는 11개월이 되어서 연제를 지내니, 역시 달로써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만약 윤달이 있을 경우에는 윤달도 헤아리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를 위해 상복을 입을 경우에는 비록 15개월이 지나서 상을 마치지만, 그러나 실은 삼년상의 체(體)를 갖추고 있는 것이네. 그러므로 11개월이 지나서 연제를 지내는 것은 실은 기년(期年)의 수에 해당되는 것이네. 그러니 달로써 헤아리는 것으로 보아 윤달도 계산에 넣어서는 안 되네. 남편이 아내를 위한 상을 치를 적에도 역시 11개월이 지나서 연제를 지낸다. [문] 혹자가 이르기를, “11개월이 지나서 연복(練服)을 입는 제도는 바로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치르는 예이다. 남편이 아내를 위한 상을 치를 적에는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 설 역시 근거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혹자가 말한 설은 잘못되었네. 예경의 여러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기년복의 상에는 11개월이 지나서 연제를 지내고, 13개월이 지나서 상제를 지내고, 15개월이 지나서 담제를 지낸다.[朞之喪 十一月而練 十三月而祥 十五月而禫]”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鄭氏)의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를 위해 상복을 입을 경우를 두고 이른 말이다. 아내를 위한 상복을 입을 적에도 역시 이와 같이 펼 수가 있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남편이 아내를 위해 상복을 입을 경우의 연월(年月)과 담제와 지팡이를 짚는 것도 어머니를 위한 상과 같다.” 하였다. -《의례》 상복의 장기장(杖朞章) 및 위처장(爲妻章)의 주소(註疏)에 나온다.-   남편이 아내를 위한 상에서는 소상(小祥)의 날짜를 점친다. [문] 아내를 위한 상에서는 11개월이 지나서 소상을 지내는데, 마땅히 날짜를 택하여 제사를 지내어야 합니다. 날짜를 택하는 예를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답] 《가례》를 보면, 대상과 소상은 초기(初忌)와 재기(再忌)의 날짜를 써서 제사 지내므로 날짜를 점치는 한 가지 의절(儀節)을 쓸 곳이 없고, 단지 담제를 지낼 적에만 날짜를 점치는 의절이 있네. 그런데 담제라는 것은 길제이네. 그러므로 먼저 상순(上旬)의 날짜로써 명하네. 남편이 아내를 위한 상일 경우에는, 소상은 11개월이 지나서 제사를 지내네. 그러니 제사 날짜를 점치는 것은 담제 때 날짜를 점치는 것과 같은 의절로써 점치되, 먼저 하순(下旬)의 날짜로써 명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 《예기》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무릇 날짜를 점칠 때에는 열흘 밖의 날을 ‘먼 어느 날’이라고 하고, 열흘 안의 날을 ‘가까운 어느 날’이라고 한다. 상사에는 먼 날을 먼저 점치고, 길사에는 가까운 날을 먼저 점친다.[凡卜筮日旬之外曰遠某日 旬之內曰近某日 喪事先遠日 吉事先近日]”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번 달 하순에 다음 달 상순을 점치는 것은 열흘 밖의 먼 어느 날이다. 상사(喪事)는 장사 및 소상과 대상의 두 상제(祥祭)를 이른다. 이는 슬픔을 빼앗는 뜻으로, 효자가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 단지 부득이하여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먼 날로부터 점치기 시작하여 의당 급하게 하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효심을 조금이나마 펴게 하려는 것이다. 길사(吉事)는 제사 및 관례(冠禮)와 혼례(昏禮) 따위를 이른다.” 하였다.   연제(練祭)와 상제(祥祭)와 담제(禫祭)를 지내려고 하다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의 예 [문] 퇴계의 상제례문답(喪祭禮問答)을 보면, 누가 묻기를, “다른 사람의 후사(後嗣)가 된 자가 후사가 된 어머니의 상복을 입고 있던 중 복을 마치고서 장차 담제를 지내려고 하다가 또다시 후사가 된 어머니의 부모상을 당하였을 경우, 담제를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니, 퇴계가 말하기를, “어찌 길제를 지낼 수가 있겠는가. 복이 다하기를 기다려서 별도로 날짜를 택하여 다음 달에 지내는 것이 인정과 예문에 있어서 합당하다.”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이유태(李惟泰)- [답] 외조(外祖)를 위한 상복은 바로 소공 오월(小功五月)이니, 반드시 다섯 달이 지나 복이 다한 뒤에 담제를 지낼 경우, 이는 3년에다가 5개월을 더하는 것이 되네. 그 뒤에 만약 기년복의 상이 있을 경우에는 1년을 또 더 연장시켜야 하며, 또 불행하여서 기년복의 상을 거듭해서 당하였을 경우에는 장차 4, 5년이 지나서도 탈복(脫服)하지 못하게 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예경에 나오는 여러 설로 미루어 보면, 삼년상이 겹쳤을 경우에는 이미 졸곡이 되어 갈질(葛絰)로 바꿨으면 전상(前喪)의 연제와 상제를 지낼 수가 있다고 하였으며, 그 나머지 상에 대해서는 애당초 거론하지 않았네. 그러니 빈(殯)을 한 뒤에 연제와 상제를 지낼 수 있는 뜻을 이에 의거해서 알 수가 있네. 나의 생각으로는, 기년복 이하의 상에서부터는 이미 빈을 한 뒤에 날짜를 택하여 연제와 상제와 담제를 지낼 수 있고 반드시 복이 다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을 듯하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질정(質正)해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네. ○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부모의 상중에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형제가 또 죽었을 경우에는 형제를 빈한 뒤에 제사를 지낸다. 같은 집에서 살 경우에는 비록 신첩이 죽었더라도 장사를 지낸 뒤에 제사를 지낸다.[父母之喪 將祭而昆弟死 旣殯而祭 如同宮 則雖臣妾 葬而後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제사를 지내려고 한다.’는 것은 소상과 대상의 제사를 지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삼년상이 겹쳤을 경우에는 졸곡이 되어 갈질(葛絰)로 바꾼 뒤에 전상(前喪)의 연제나 상제의 제사를 지낸다.[三年之喪 則旣顈 其練祥皆行]”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전상과 후상(後喪)이 모두 삼년복을 입는 상일 경우에는, 그 후상을 이미 갈질로 받아 입은 뒤에는 전상의 연제와 상제를 지내는 예를 행할 수가 있다. ‘기경(旣顈)’이란 것은, 우제를 지낸 뒤 수복(受服)할 때 갈질로써 허리의 마질(麻絰)을 바꾸는 것이다. 경(顈)은 풀이름으로, 갈(葛)이 나지 않는 지방에서는 경으로 대신한다.” 하였다.   날짜가 지나서도 장사 지내지 못하였을 경우, 연제와 상제에 변제(變除)하는 절차 [문] 날짜가 지나서도 장사 지내지 못하였을 경우, 3년이 다 되는 날에 이르렀으면 그 복제를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연제와 상제 역시 어떻게 해야 마땅합니까? -이유태- [답] 《예기》 및 《통전》의 여러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이르기를, “오래도록 장사 지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상을 주관하는 자만 제상(除喪)하지 않고, 그 나머지 마(麻)로 달수를 마치는 자는 제상한다.[久而不葬者 惟主喪者不除 其餘以麻終月數者 除喪則已]”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상을 주관하는 자’는 아들이 부모에 대해서와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와 고손(孤孫)이 조부모에 대해서의 경우를 이른다. 장사를 지내지 못했으므로 최질(衰絰)을 벗지 못한다. ‘마로 달수를 마치는 자’는 기년복(朞年服) 이하 시마복(緦麻服)을 입는 친족까지이다. 주인이 장사를 지내지 못하여 갈옷으로 바꾸어 입지 못하므로 마복을 입고 있다가 달수가 차는 때에 이르면 제복하며, 주인이 장사를 마치기를 기다려서 제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상복(喪服)은 반드시 잘 간수해 두어 장사 치를 때를 기다려야 한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형제의 상에 상복을 입는 경우에는 상기(喪期)가 다 되었으면 제상(除喪)한다. 그러나 매장할 때에는 또다시 상복을 입는다.[爲兄弟 旣除喪已 及其葬也 反服其服]” 하였다. -《개원례(開元禮)》에는 우제를 지내고서 제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또 이르기를, “3년이 지난 뒤에 장사 지내는 경우에는 반드시 두 번의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제사는 사이를 두고 지내고 동시에 지내지 않으며, 제사를 지낸 뒤에 제상한다.[三年而後葬者必再祭其祭之間不同時 而除喪]”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효자가 무슨 사고 때문에 제때에 미쳐서 장사를 지내지 못하였을 경우, 중간에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를 지낼 날짜가 되어도 시신을 넣은 상구(喪柩)가 아직 그대로 있어서 제복(除服)할 수가 없었다. 이제 뒤늦게 장사를 마치고서는 반드시 연제와 상제 두 제사를 지내야 하므로 ‘반드시 두 번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의 두 제사는 잇달아 두 차례에 걸쳐 거행하며, 같은 때에 한꺼번에 지내서는 안 되는바, 이달에 연제를 지냈을 경우에는 남자는 수질(首絰)을 제거하고 여자는 요대(腰帶)를 제거하며, 다음 달에 상제를 지내고서 최복(衰服)을 벗는 것이다.” 하였다. ○ 《개원례》에 이르기를, “부모의 상에 1년이 지나서 장사 지낼 경우에는 장사 지낸 다음 달에 소상을 지내며, 그 대상은 2년 만에 지내는 예에 의거해서 지내고, 담제 역시 그와 같이 한다. 만약 2년이 지난 뒤에 장사 지내는 경우에는 장사를 지낸 다음 달에 연제를 지내고, 또 그다음 달에 대상을 지내며, 대상을 지내고는 곧바로 길제를 지내고 다시 담제를 지내지는 않는다. 2년이 되기 전에 장사 지내는 경우에는 25개월 만에 연제를 지내고, 26개월 만에 상제를 지내며, 27개월 만에 담제를 지낸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한 달 만에 담제를 지내는 것은 27개월의 숫자를 끝마치기 때문이다.” 하였다. ○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동진(東晉)의 서영기(徐靈期)가 묻기를, ‘친상(親喪)을 오래도록 장사 지내지 못하였을 경우에 출가한 딸은 응당 상복을 벗어야 합니까?’ 하니, 장빙(張憑)이 답하기를, ‘예경에 이르기를, 「상을 당하여 오래도록 장사 지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상을 주관하는 자는 제상(除喪)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주인은 제상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정적(正嫡)인 남자 한 사람에게만 홀로 시행할 길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중자(衆子)인 남자와 여자를 총괄해서 이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이미 출가한 딸에 대해서는 응당 제상해야 한다고 별도로 말해 놓은 분명한 글이 없다. 지금 논하는 자들은 이미 시집간 딸은 기년복을 입는 데 의거하여 논하였으므로 「의당 제상하는 예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정(情)을 인하고 뜻으로써 조처한다면, 유독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딸은 다른 집으로 출가하였을 경우에 강복(降服)을 입어 기년복을 입는 제도를 따르게 하였으나, 거상(居喪)하는 예에 이르러서는 중한 복을 입는 자와 같게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천성은 다 빼앗기가 어려운 것이고, 중한 근본을 갑자기 가볍게 할 수가 없어서이다. 그런데 하필 이미 강복을 입게 해 놓고서 모든 것을 기년복의 상과 같게끔 한단 말인가. 예라는 것은 인정을 따르는 것일 뿐이며, 예가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중한 쪽을 따르는 법이다. 만약 최질(衰絰)을 벗고서 빈궁(殯宮)에 처하게 하고, 길복(吉服)을 입고서 관구(棺柩)를 대하게 한다면, 이는 효자가 편안하게 여기는 바가 아닐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진(晉)나라 두읍(杜挹)이 묻기를, ‘죽은 며느리를 아직 장사 지내지 못하였는데 내가 복을 입어 기년이 이미 다 지났으나, 상주가 될 사람이 없어서 제복할 수가 없다.’ 하니, 서막(徐邈)이 답하기를, ‘살펴보건대, 예경을 보면 「남편은 응당 제복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곧 아랫사람의 상에 대해서는 대부분 예를 다 갖출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변복(變服)하는 것이 마땅하며, 장사를 지낼 때에 이르러서 다시 복을 입어도 불가할 이치가 없다.’ 하였다.” 하였다. ○ 또 이르기를, “송(宋)나라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형제의 상에 상복을 입는 경우에는 상기(喪期)가 다 되었으면 제상(除喪)한다. 그러나 장사 지낼 때에는 또다시 상복을 입는다.[爲兄弟 旣除喪 及其葬 反服其服]」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자자(女子子)와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남자(男子)는 모두 그에 해당되는 복에 따라서 상복을 벗는데, 이는 다른 곳으로 가서 굴(屈)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소복(素服) 차림으로 심상(心喪)을 입으면서 장사를 지낼 때가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다만 지금 세상에서는 아랫사람의 상에 대해서는 가볍게 보아, 처(妻)의 상에 있어서도 오히려 지팡이를 짚는 것과 담제를 지내는 절차를 삭제하였으며, 다시는 장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복하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의논하는 자들은 아랫사람의 장사를 지내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증상(烝嘗)을 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다. 만약 일이 지체되어 복을 입을 기간이 지나갔더라도 역시 빈(殯)이 궁(宮)에 멈추어 있는데 음악을 사당에서 연주하는 일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길사(吉事)와 흉사(凶事)가 서로 침범하는 것은 마음에 있어서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다.’ 하였다.” 하였다. -《통전》에 보인다.-   기년복을 입는 자의 연제를 지낸 뒤의 복색(服色) [문] 기년복을 입은 자가 소상을 지내고서 제복(除服)한 뒤에는 곧바로 길복(吉服)을 착용합니까? -송준길- [답] 제사를 지낸 뒤에는 소복(素服)으로 갈아입되 기일(忌日)에 입는 옷의 색깔과 같이 하며, 뒷날을 기다려서 비로소 길복을 입는 것이 옳네. 11개월이 되어서 입는 연복과 기년복의 중함 [문]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어머니의 상에 복상(服喪)할 경우 11개월이 지나서 연복을 입습니다. 아들은 연복을 입었는데 질손(姪孫)은 그대로 최질(衰絰)을 입으니, 어찌하여 중한 자는 가벼운 복을 입고 가벼운 자는 도리어 중한 복을 입습니까? -강석기- [답] 3년의 상을 특별히 아버지를 위해서 굽힌 것이며, 상제와 담제의 제도는 베의 승수(升數)가 본래 기복(朞服)과는 현격하게 구별되네. 그런데 어찌 연제가 되어 변복(變服)하는 절차를 가지고 다시 도리어 가벼운 복을 입는다고 의심한단 말인가. 소상이 지난 뒤에도 상식(上食)을 올릴 적에는 곡을 한다. [문] 《가례》를 보면 소상에 조석곡(朝夕哭)을 그치므로,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로 인해 상식을 올리면서 하는 곡을 폐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3년의 상기 안에 전(奠)을 올리면서 곡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식 된 자가 애통해하고 사모하면서 상을 마치는 도리가 아닙니다. -강석기- [답] 소상이 지난 뒤에는 비록 조석으로 곡하는 것을 그만두기는 하지만, 상식을 올릴 때에 이르러서는 곡읍(哭泣)하는 절차가 있는 것이 마땅하네. 퇴계가 곡을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따라서는 안 될 듯하네. 근래에 여러 선생들이 모두 ‘이미 제전(祭奠)이 있으니 곡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아마도 제대로 된 것인 듯하네. 소상이 지난 뒤에는 제복(除服)하지 않은 자들이 모여서 곡한다. [문] 《가례》의 ‘소상이 지나서는 조석으로 곡하는 것을 그친다.[小祥 止朝夕哭]’고 한 부분의 주에 이르기를, “초하루와 보름에 아직 복을 벗지 못한 사람은 모여서 곡을 한다.” 하였는데,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우복(愚伏)은 말하기를, “평소에도 이에 대해서 의심을 두어 왔는데, 뒤에 《예기》 상대기(喪大記)를 상고해 보니, 거기에 이르기를, ‘대부나 사는 부모의 상에 있어 종자의 집에서 복상하다가 이미 연제를 지냈으면 본가로 돌아간다. 그리고 매달 초하루와 기일에는 종자의 집으로 가서 곡읍한다.[大夫士 父母之喪旣練而歸 朔日忌日則歸哭于宗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종자의 집은 빈궁(殯宮)을 이른다.’ 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가례》의 이 조항은 의심할 바가 없다. 대개 고례가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鄭愚伏)의 설은 증거가 있는 것이네. 다만 태복(稅服)을 입는 것이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듯하네. 소상이 지난 뒤에는 아침과 저녁에 전배(展拜)를 한다. [문] 연제가 지난 뒤에는 비록 조석으로 곡하는 것을 그치기는 하지만, 아침과 저녁에 궤연(几筵)에 전배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있어서 합당할 듯합니다. 퇴계 선생께서도 역시 허락하였다고 하니, 준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그렇게 해야 할 듯하네. 그러나 주자의 설로 본다면 3년의 상기 안에는 항상 곁에서 모시는 의리가 있으니, 아침저녁으로 참배하는 것은 역시 어떨지 모르겠네. 다시금 상세히 알아보아야 하네. 추복(追服)을 입은 사람의 변제(變除) [문] 친상(親喪)의 소식을 몇 달이 지난 뒤에 듣고서 비로소 분곡(奔哭)할 경우, 그 성복(成服)은 참으로 집에 있었던 형제들보다 뒤늦은바, 집에 있었던 형제들과 같은 때에 변제해서는 안 됩니다. 집에 있었던 형제들이 담제를 지낼 적에 추복을 입은 자도 그 제사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까? -강석기- [답] 변제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주자가 이미 정해 놓은 정론이 있네. 지난번에 정자(正字) 황석(黃奭)이 유배되어 순천(順天)에 있으면서 이러한 따위의 예절에 대해서 물어 왔기에, 내가 역시 그런 내용으로 답하였네. 만약 형제가 담제를 지낼 경우에는 추복을 입은 사람은 길제에 참가해서는 안 되네. ○ 주자가 말하기를, “친상에는 형제 가운데 먼저 상기(喪期)가 찬 자는 먼저 제복(除服)하고 뒤에 상기가 찬 자는 뒤에 제복하는데, 이는 외방(外方)에 있으면서 상을 들은 데 선후(先後)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주D-001]연(練) : 가공한 베를 말한다. [주D-002]최(衰) : 상복의 가슴 부위에 붙이는 네모난 베 조각을 말한다. [주D-003]공최복(功衰服) : 삼년상을 당하여 소상(小祥)이 지난 뒤에 입는 참최복(斬衰服)을 말한다. 참최복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마포(麻布)의 승수(升數)가 대공복(大功服)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마포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주D-004]증상(烝嘗) : 가을철과 겨울철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봄 제사는 향(享)이라 하고, 여름 제사는 약(禴)이라 하고, 가을 제사는 상(嘗)이라 하고, 겨울 제사는 증(烝)이라고 한다. [주D-005]태복(稅服) : 죽은 지 한참 지난 뒤에 비로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그에 대한 상복을 입는 것을 말한다.     대상(大祥) 대상이 아직 지나지 않은 동안에는 찾아온 자를 잠깐 나가서 볼 수가 있다. [문] 《가례》의 대상조(大祥條)에, ‘대상이 아직 지나지 않은 동안에는 찾아온 자를 잠깐 나가서 만나 볼 수 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유태- [답] 지난해에 정도가(鄭道可)가 묻기를, “이 단락을 말해 놓은 뜻을 감히 알지 못하겠다.”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송(宋)나라 때의 속례(俗禮)에는 아직 대상이 지나지 않은 동안에도 이 복을 입고서 나가 다른 사람을 알현하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예를 아는 군자가 한 일이 아니다. 주자가 이 때문에 옮겨서 대상의 복으로 삼은 것이다.” 하자, 정도가가 말하기를, “말한 것이 올바른 뜻을 얻은 것 같다.” 하였네. 한꺼번에 상을 당한 자는 전상(前喪)의 대상을 지낼 때에는 그 복을 입고서 제사 지낸다. [문] 한꺼번에 친상을 당한 경우에는 전상의 대상 제사를 지낼 적에 백립(白笠)과 백의(白衣)와 망건(網巾)과 백대(白帶)를 착용하며, 제사를 마친 뒤에는 도로 후상(後喪)의 최복(衰服)을 착용합니다. 그런데 길복(吉服)을 입었다가 곧바로 흉복(凶服)을 입는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바가 있습니다.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 아직 상기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아버지의 상을 벗을 때에는 일단 제상(除喪)을 하는 데 따른 복을 입었다가 일을 마친 뒤에 도로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는다.[有父之喪 如未沒喪而母死 其除父之喪也 服其除服 卒事 反喪服]” 하였습니다. 이른바 ‘제상을 하는 데 따른 복’이라는 것이, 《가례》에서 이른바 ‘장부는 참사(黲紗)로 만든 복두(幞頭)와 참포(黲布)로 만든 삼(衫)을 착용하고, 부인은 아황색(鵝黃色)과 청벽색(靑碧色)과 조백색(皁白色)으로 만든 옷과 신발을 착용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이는 오늘날 세속에서 착용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더욱더 길한 복이 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전상의 대상 제사를 지낼 적에는 그 상복을 입고 들어가서 곡한 뒤에 대상의 복을 입고서 제사 지내며, 제사를 마치고는 도로 후상(後喪)의 복을 입는 것이 옳네. 비록 시복(緦服)이나 공복(功服)의 가벼운 복을 입는 상에 대해서도 역시 중한 상복을 잠시 벗고서 그 복을 입는데, 더구나 이런 경우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리고 대상의 복은 본디 길복이 아니네. 그러니 또 어찌 의심을 해서야 되겠는가. 엄릉 방씨(嚴陵方氏)가 말하기를, “제상을 하는 데 따른 복을 입었다가 도로 상복을 입는 것은, 전상에 대해서 끝마침이 있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하였네. 대상 뒤에는 망건(網巾)을 착용한다. [문] 대상이 지난 뒤에 착용하는 검은색의 망건은 소호(素縞)의 빛깔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포(白布)로 망건을 만들어 착용하는 것은 세속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데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또한 연제(練祭)를 지낼 적에는 누런색으로 속을 대고 옅은 붉은색으로 가선을 두르는 것으로 중의(中衣)의 꾸밈을 삼는데, 중의는 최복(衰服)을 입을 때 속에 입는 옷일 뿐이니 혐의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망건은 관 안에 쓰는 것이니, 비록 검은색으로 하더라도 이것과 서로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송준길- [답] 검은색과 흰색의 거친 말총을 섞어서 만들어 쓰는 것이 어떻겠는가? 백포로 만들어 쓰는 것은 역시 고례가 아니네. 아버지를 계승한 종자(宗子)의 집에서는 상제(祥祭)를 지낸 뒤에 새 신주(神主)를 우선 사당의 동쪽 벽에 안치하였다가 길제(吉祭)를 지낸 뒤에 정위(正位)에 모신다. [문] 제 선고(先考)께서는 실은 아버지를 계승한 종자인데, 최장방(最長房)으로서 고조(高祖)의 신주를 가묘(家廟)에서 받들었으며, 선비(先妣)의 신주를 동쪽 서(序)의 서쪽을 향하고 있는 자리에 안치해 두었습니다. 이제 선고의 상제(祥祭)를 지낸 뒤에 우선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 선비의 자리에 함께 안치하고,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전에 있던 곳에 도로 안치하였다가 협제(祫祭)를 지낼 때에 이르러서 자리를 배설할 경우에 자리를 변경하여서 남쪽을 바라보는 자리에 안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조천(祧遷)하는 신주와 새 신주를 모두 한 줄에 앉히기를 시제(時祭)를 지낼 때의 의절(儀節)과 같게 합니까? 아니면 협제를 지낼 때에도 오히려 서쪽을 바라보는 자리에 안치하였다가 협제를 지낸 뒤에 세대(世代)가 바뀌는 신주를 조천해 낸 다음에 사당으로 돌아가서 비로소 남쪽을 바라보는 자리를 만들어서 차례대로 체천(遞遷)합니까? 구씨(丘氏)의 《가례의절》을 보면, “《가례》를 보면 시제를 지낼 때 이외에는 일찍이 협제를 지내지 않았고, 또 새 신주를 어느 곳에 배설하는지 모르겠다.”고 운운하였습니다. 그리고 체천하는 절차가 곧장 대상조(大祥條)의 아래에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어느 쪽을 따라야 합니까? 우복(愚伏)에게 물어보았더니, 답하기를, “전상(前喪)의 경우에는 계장(契丈)께서 종자로서 죽은 아내를 조묘(祖廟)에 합부(合祔)하여 동벽(東壁)의 서쪽을 바라보는 자리에 안치한 것은 참으로 마땅한 것이네. 지금 이 상제의 경우에는 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에 여러 위(位)에 옮기겠다고 고하고서 동쪽의 한 감(龕)을 비워 두어 새 신주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그다음 날에 대상의 제사가 끝나면 본감(本龕)의 남쪽을 바라보는 자리에 새 신주를 봉안하고, 그다음에 선비를 따라 들이는 것이 예에 있어서 순할 것이네. 만약 주자께서 만년에 논한 바에 의거하여 협제를 지내기를 기다린 뒤에 사당에 들이고자 한다면, 역시 새 신주를 별도의 장소에 임시로 안치하거나, 혹은 궤연에 그대로 둔 채 끊이지 않게 받드는 것이 마땅하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자리에 합부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이는 존귀한 분으로 하여금 낮은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으로, 이런 예는 없을 듯하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천한 신주와 새 신주는 한 줄에 놓아도 서로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네. 그러나 다시금 사계장(沙溪丈)에게 물어서 행하게.” 하였습니다. 잘 참작해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송준길- [답] 주자가 만년에 학자들에게 준 편지를 보면, 합부(合祔)하는 것과 조천(祧遷)하는 것은 두 가지의 일이네. 상제(祥祭)를 지내고 나서 궤연(几筵)을 철거하고 조묘(祖廟)에 합부하며, 협제를 지내기를 기다렸다가 조천하는데, 뜻을 쓴 것이 아주 면밀하여서 후세 사람들이 어길 수가 없을 것이네. 구씨가 운운한 것은 그 뜻을 잘 모르겠네. 자네 집의 경우로써 말을 한다면, 비록 종가(宗家)의 조묘에 나아가 합부할 수는 없지만, 우선 자네의 집에 있는 사당의 동쪽 서(序)에 안치하고서 협제를 지내기를 기다리는 것이 주자의 뜻을 잃지 않는 것일 듯하네. 이미 동쪽 서에 안치하였으면 부득불 선비(先妣)와 더불어 같은 곳에 안치해야 하는바, 이는 존귀한 분으로 하여금 낮은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세가 그러한 것이네. 정경임(鄭景任)이 주자의 초년에 논한 설을 따르고자 한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네. 그대로 궤연에 두거나 임시로 별도의 장소에 안치하게 한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예의 본뜻에 어그러지는 것이네. 그러니 아마도 따라서는 안 될 듯하네. 길제를 지낼 적에는 새 신주를 우선 합부하는 자리에 내갔다가 사당에 들인 뒤에 정감(正龕)에 봉안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하네. ○ 주자가 이계선(李繼善)에게 답한 편지에서 운운하였다. ○ 양씨(楊氏)가 운운하였다. 이상의 두 설은 모두 《가례》의 대상조(大祥條)에 대한 부주(附註)에 나온다.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합부할 경우에는 조상에게 아울러 고한다. [문]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어서 이미 사당에 들였는데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는 단지 선고(先考)에게만 고하고서 합부하고 선조(先祖)에게는 아울러 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일이 있을 경우에 조상에게 고하는 것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주를 부묘(祔廟)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데 고하지도 않고 갑(匣)에 넣는단 말입니까. 저의 망녕된 생각으로는 비록 어머니가 죽어 아버지에게 합부하면서 체천을 하지 않더라도, 선조에게 아울러 고하는 것은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선조에게 아울러 고하더라도 역시 무방하네.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상제(祥祭)를 지낸 뒤에 궤연을 철거한다. [문]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경우, 13개월이 되어 대상(大祥)을 치른 뒤에도 혹 궤연을 철거하지 않은 채 3년 동안 그대로 상식(上食)을 올리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고례가 아니기는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거상(居喪)함에 있어서는 능히 예법을 말미암아서 하는 자가 드문데, 유독 이러한 따위의 일에 대해서만은 예에 따라서 하고자 한다면, 비단 인정에 있어서 온당치 못한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예가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후한 쪽을 따른다는 것은 옛날에도 역시 그러한 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상제를 지낸 뒤에도 그대로 상식을 올리다가 재기(再忌) 때에 이르러서 철거하는 것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강석기- [답] 주자의 설에 의거해 보면, 노이빙(盧履氷)의 의논을 좋게 여기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시왕(時王)의 제도를 감히 어길 수가 없었던 것일 뿐이네. 《가례》에서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어머니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역시 이러한 뜻이네. 지금 우리나라의 제도에서는 이미 고례를 쓰고 있으니, 이는 바로 주자가 따르고자 하던 것이네. 그러니 다시 의심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금 세속에서 혹 상제를 지낸 뒤에도 궤연을 철거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네. 그리고 혹 그대로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있는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의 후사로 간 자가 본생친(本生親)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더욱더 놀라운 것이네. 이것은 모두 예경(禮經)의 죄인인바, 효자의 지극한 정에 있어서는 어찌 정이 다할 때가 있겠는가마는, 선왕께서 제정한 예를 감히 지나쳐서 할 수는 없는 것이네. ○ 《의례》 상복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父在爲母朞]” 하였으며, 이에 대한 전에 이르기를, “어째서 기년복을 입는가? 지극히 존귀한 분이 계실 경우에는 사존을 감히 다 펼 수 없어서이다.[何以朞也至尊在 不敢伸其私尊也]” 하였다. ○ 노이빙(盧履氷)이 말하기를, “예경을 보면,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해서는 기년(朞年) 동안 상복을 입은 다음 영좌(靈座)를 제거하고 3년 동안 심상(心喪)을 입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조부모가 살아 계신데 자손의 아내가 죽었을 경우, 하방(下房)의 궤연 역시 재주년(再周年) 동안 설치해 두는데, 이것은 아주 형편없는 짓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노이빙의 의논이 옳다. 다만 지금의 조제(條制)가 이와 같은바, 감히 어길 수 없을 뿐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표문(表文)을 올려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도 어머니를 위해서 삼년복을 다 입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송조(宋朝)에서는 당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쓰면서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 또 말하기를, “상례(喪禮)는 모름지기 《의례》를 따르는 것으로 정식(正式)을 삼아야 한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 것은, 이는 어머니에 대해서 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귀함이 아버지에게 있으므로 다시 존귀함이 어머니에게 있게 할 수가 없어서이다.” 하였다. ○ 우리나라의 제도에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해서는 11개월이 지나서 연제(練祭)를 지내고, 13개월이 지나서 상제(祥祭)를 지내며, 15개월이 지나서 담제(禫祭)를 지낸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상제를 지낸 뒤에도 상식(上食)을 올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문] 앞서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13개월이 지나서 상제를 지낸 뒤에는 궤연을 철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가르침을 받들었습니다. 다만 지금 《퇴계집(退溪集)》을 보니, 김이정(金而精 김취려(金就礪))이 묻기를, “심상(心喪) 중에 있는 사람이 조석(朝夕)으로 제사를 지낼 적에 입는 복에 대해,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은 ‘옥색(玉色)의 단령(團領)을 입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백포의(白布衣)를 착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예경의 뜻에 합치되는 것입니까?” 하니, 퇴계가 답하기를, “옥색의 옷을 입는 것은 과연 온당치 못하니, 백포의를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심상 중에 있는 사람은 상제를 지낸 뒤에는 제사를 철거하니, 조석으로 제사를 지낼 적에 입는 옷에 대해서는 참으로 논하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런데 퇴계 역시 백포의를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3년이 다하도록 상식을 올리는 것도 역시 근거할 만한 예문이 있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상제를 지낸 뒤에는 부묘(祔廟)한다는 것이 예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 글이 있으니, 조석으로 제사를 지낼 적에 입는 옷에 대해서는 논할 바가 아니네. 퇴계가 아마도 세속에서 하는 것을 따라서 말한 것일 뿐인 듯하네. 담제를 지내기 전에 서소(書疏)에 쓰는 칭호 [문] 담제를 지내기 전에 서소에서 쓰는 칭호는 어떻게 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위의 부제조(祔祭條)에 나온다.- 상복은 불태우거나 파묻지 않는다. [문] 모든 상복은 이미 제복(除服)한 뒤에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장자(張子)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장횡거(張橫渠)가 이르기를, “제기(祭器)와 제복(祭服)은 일찍이 귀신에 대해서 쓴 것이기 때문에 감히 다른 용도로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불태우거나 파묻는 예가 있다. 최질(衰絰)이나 상관(喪冠)이나 상구(喪屨)에 이르러서는 뜯어서 없앤다는 글이 보이지 않는데, 오직 지팡이에 대해서만은 궁벽진 곳에 버린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궁벽진 곳에 버린 것은 언젠가는 누군가가 함부로 쓰게 되는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러니 어찌 즉시 불태우거나 파묻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일찍이 ‘상복은 죽은 자를 위하여 입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표하기 위하여 입는 것이므로, 상복을 공경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예기》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자최의 상복 차림으로는 기대어 앉지 않으며, 대공복 차림으로는 근로(勤勞)하는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齊衰不以邊坐大功不以服勤]’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슬픔이 속에 있음을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지, 상복을 공경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상복을 뜯어 없애는 것은 반드시 제복(除服)하는 날에 하는데, 뜯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거나 혹 묘지기에게 주어도 된다. 대개 옛날 사람들은 흉사(凶事)를 싫어하지 않았는데, 지금 사람들은 혐의스럽게 여긴다. 그러니 집에 남겨 두는 것은 인정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느니만 못하다. 불태우거나 파묻는 것도 역시 상복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였다.   대상(大祥)을 지낸 뒤에는 윤달을 헤아린다. [문] 대상을 지낸 뒤에는 윤달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선유(先儒)들의 설에 의거해서 보면, 대상과 소상은 해[年]로써 헤아리니, 윤달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마땅하네. 담제의 경우에는 본디 상제(祥祭)를 지낸 달 가운데에 들어 있고, 비록 정씨(鄭氏)가 말한 ‘한 달을 뛰어넘는다.’는 설을 따르더라도, 이는 오히려 달[月]로써 헤아린 것이네. 그런즉 담제를 지낼 때 윤달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네. 《가례》에서 이른바 윤달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초상(初喪) 때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를 통틀어서 말한 것이지, 반드시 상제를 지낸 뒤만을 두고 이른 것은 아니네. 장자(張子)의 설이 분명한 듯하네. ○ 정현(鄭玄)이 이르기를, “달로써 헤아릴 경우에는 윤달을 헤아리고, 해로써 헤아릴 경우에는 윤달은 헤아리지 않는다.” 하였다. ○ 장자가 말하기를, “삼년상에서는 담제를 지낼 때 윤달 역시 달수에 넣어서 헤아린다.” 하였다.     [주D-001]최장방(最長房) : 최고 어른의 방이란 뜻으로, 한집 안에 여러 사람이 살 경우에 그 가운데 최고 어른이 사는 방을 말한다. 옛날에 사당(祠堂)에 만약 친진(親盡)이 된 신주가 있어 체천(遞遷)해야 하는데 족인(族人) 가운데 친진이 되지 않은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 가운데 가장 어른의 방으로 신주를 옮겨서 제사 지내었다. [주D-002]협제(祫祭) : 협향(祫享)과 같은 말로, 고대에 천자나 제후가 멀고 가까운 조상의 신주(神主)를 태조묘(太祖廟)에 함께 모아 놓고서 지내던 대합제(大合祭)를 말한다. 이 협제는 대사(大祀)이므로 대부나 사의 경우에는 사사로이 거행하지 못하고 임금에게 물어서 허락을 받아야만 지낼 수가 있었다. [주D-003]계장(契丈) : 친구들 간에 칭하는 경칭(敬稱)으로, 여기서는 송준길의 아버지인 송이창(宋爾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27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7 댓글:  조회:2635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41권 의례문해(疑禮問解)-7 담(禫) 담제(禫祭)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문] 상례에는 담제가 있는 경우도 있고 담제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마땅히 담제를 지내야 하는 것은 몇 가지가 있습니까? -이유태(李惟泰)- [답] 《예기(禮記)》 및 주자(朱子)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이르기를, “부모와 아내와 장자를 위해서는 담제를 지내고 제복(除服)한다.[爲父母妻長子禫]”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마땅히 담제가 있어야 하는 상에는 이 네 가지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도 역시 담제를 지내며, 자모(慈母)의 상에 아버지가 안 계실 경우에도 역시 담제를 지낸다.” 하였다. ○ 상복소기에 또 이르기를, “종자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경우에도 아내를 위하여 담제를 지낸다.[宗子母在爲妻禫]”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적자(嫡子)가 아내를 위하여 지팡이를 짚지 못한다. 지팡이를 짚지 못하면 담제를 지내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아내를 위하여 지팡이를 짚을 수가 있으며, 또 담제를 지낼 수가 있다. 종자가 아닌 경우에는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담제를 지내지 못한다.” 하였다. ○ 상복소기에 또 이르기를, “서자는 아버지의 곁에서 살 경우, 어머니를 위하여 담제를 지내지 못한다.[庶子在父之室則爲其母不禫]”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명(命)을 받지 못한 사(士)로서 부자(父子)가 같은 집에 사는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하순(賀循)이 이르기를, ‘출모(出母)를 위해서는 장기(杖期)로 하며, 담제를 지낸다.’ 하였다.” 하였다. ○ 《예기》 단궁(檀弓)의 주에 이르기를, “출모를 위해서는 담제가 없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여자의 경우 이미 출가하였으면 부모를 위하여 담제를 지냅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예경에서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 어머니를 위해서는 담제를 지낸다.’고 한 것은, 단지 남자를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하였다.   아내의 상중에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그 아들은 담제를 지내지 못한다. [문] 처(妻)의 상을 당한 자가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를 아직 지내지 않았는데 참최(斬衰)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아내의 연제를 지낼 때를 당해서는 마땅히 기복(期服)을 입어야 하고, 상제를 지낼 때에도 역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상제를 지낼 때 연복(練服)으로 바꾸어 입은 뒤에는 어떤 복을 입고 상례를 마치는 것이 마땅합니까? 담제의 경우에는 중한 상복이 몸에 있다는 이유로 참으로 제사를 폐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그 아들은 이미 13개월이 되어서 상제를 지내고 연복을 벗고 상관(祥冠)을 쓰고 있으니, 15개월이 되어서 담제를 지낼 때를 당해서는 그 아버지가 제사를 주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도 역시 어머니를 위한 담제를 폐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스스로 그 제사를 섭행(攝行)하고서 복을 벗어야 합니까? 그리고 이 아들은 현재 할아버지를 위한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있는데, 이제 만약 기년복을 벗고 곧바로 담복(禫服)을 입는다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가령 어머니를 위한 담제를 폐하고서 할아버지를 위한 상을 이루고자 할 경우, 어머니를 위한 상복(祥服)을 벗는 것은 어느 때에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정홍명(鄭弘溟)- [답] 아버지의 상에 이미 졸곡을 마친 뒤에는 바야흐로 아내를 위한 두 상제(祥祭)를 행하는 데, 포의(布衣)와 효건(孝巾)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며, 담제의 경우에는 지낼 수가 없네. 그러나 그 아들은 아버지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상복(祥服)을 입고 있을 수가 없으니, 담제를 지낼 날짜에 이르러서 단지 위(位)를 설치하고 곡을 한 다음에 복을 벗을 뿐이네. 그 아버지의 경우에는 참최복의 상을 다 마친 뒤에는 때가 지나간 뒤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예법에 의거하여 다시 제사 지내지 않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네. 이러한 따위의 예는 바로 억측하여 만들어 낸 설로서 근거가 없는 것이니, 감히 올바른 예라고 하지는 못하겠네. 적손(嫡孫)이 할아버지의 상을 위한 담제를 지낼 때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의 예 [문] 승중(承重)한 손자가 장차 할아버지를 위한 담제를 지내려고 할 적에 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어머니의 상을 마치기를 기다린 뒤에 담제를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 숙부(叔父)들은 어느 때에 탈복(脫服)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宋浚吉)- [답] 상중에는 담제를 지낼 수가 없으며, 때가 지나서 뒤늦게 제사를 지내어서도 안 되네. 제부(諸父)들의 경우에는 어찌 적손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를 설치하고서 제복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후사(後嗣)가 된 바의 어버이 상중에는 본친(本親)의 담제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문] 후사가 된 바의 어버이를 위한 상중에 소생(所生) 어버이의 담제를 만났을 경우, 제사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까? 소생의 집에 다른 형제가 없을 경우에는 부인(婦人)이 제사를 행합니까? 그리고 축사(祝辭)는 어떻게 합니까? 부인이 제사를 주관할 수 없을 경우에는 후사로 나간 자가 비록 최질(衰絰)을 걸치고 있는 중이라도 오히려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까? 부인 가운데 담제를 지내는 것이 마땅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담제도 역시 지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모르겠습니만, 어떻습니까? -강석기(姜碩期)- [답] 담제는 길제(吉祭)이네. 몸에 중한 상복을 입고 있을 때는 참여해서는 안 되네. 그대의 집과 같은 경우에는, 큰며느리가 비록 살아 있기는 하지만 집에 있지 않고, 그대는 복(服)이 이미 다하였으며, 또한 제복(除服)할 만한 다른 형제도 없으니, 그런 경우에는 담제를 설행하지 않는 것이 옳을 듯하네. 부모의 상중에는 할머니를 위한 담제(禫祭)와 길제(吉祭)를 지내서는 안 된다. [문] 할머니의 소상(小祥)을 지내기 전에 참의(參議) 숙부(叔父)께서 세상을 뜨셨는데, 숙부의 장자인 후여(厚輿)가 승중(承重)하여 대신 상을 주관하였습니다. 이제 할머니의 담제를 지낼 날짜가 머지않았는데, 숙부의 상이 아직 3년의 상기(喪期) 안에 있습니다. 이 경우 담제의 제사를 지낼 때 승중한 자가 어떤 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담제 뒤에는 길제를 지내고 부묘(祔廟)를 행하는 것이 예법인데, 참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길제를 행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 어떻습니까? -이경여(李敬輿)- [답] 아버지의 상중에는 할머니의 담제에 참여해서는 안 되며, 여러 숙부들이 사유를 고하고서 행하면 될 것이네. 길제는 지내서는 안 되네. 그러니 아버지의 상을 마친 뒤에 지내는 것이 마땅하네. 그리고 승중한 손자는 아버지의 상은 비록 마쳤더라도 할머니를 위한 담제를 뒤늦게 지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네. 대개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담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주자의 설에 나와 있네. -위에 나오는 송준길에게 답한 조항과 이 조항은 같지 않은 듯한바, 마땅히 참고해서 보아야 한다.-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전상(前喪)의 담제는 때가 지나간 뒤에는 제사 지내지 않는다. [문]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대상과 소상은 그에 따른 복을 입고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상의 담제와 같은 것은 후상(後喪)을 제복하기 전에는 지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렇다면 끝내 전상의 담제를 폐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담제는 길제로, 상중에 지내서는 안 되는바, 이 역시 ‘흉한 때에는 길례를 차마 치르지 못한다’는 뜻이네. 주자의 설에 의거해서 보면 뒤늦게 지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역시 분명하네. ○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를, “묻기를, ‘《예기》 상복소기에 「삼 년의 상기를 마친 뒤에 장사를 지내는 경우에는 반드시 두 번 제사를 지낸다.」 하였는데, 정씨(鄭氏)의 주에 이르기를, 「연제와 상제만 지내며 담제는 지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보기는 의당 그와 같이 보아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담제의 복색(服色) [문] 담제를 지낼 적에 변복(變服)하는 절차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강석기- [답] 지금 혹자의 말 가운데에는 ‘담제 때에는 곡읍(哭泣)하는 절차가 있으니 갑작스럽게 완전히 길한 복식을 착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네. 세속에서는 혹 그 말을 써서 소복(素服) 차림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자도 있네. 그러나 《예기》 잡기(雜記)와 간전(間傳)의 글로써 본다면, 상제 때에는 조금 길한 복을 착용하였다가 제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도로 조금 흉한 복을 착용하네. 그리고 담제 때에는 완전히 길한 복을 착용하였다가 제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조금 길한 복을 착용하네. 그렇게 하였다가 길제(吉祭)에 이르러서는 평상시에 착용하던 물품을 패용하지 않는 것이 없네. 그러니 혹자의 ‘담제 때에는 갑작스럽게 완전히 길한 복식을 착용해서는 안 된다.’는 설은 따라서는 안 되네. 그리고 퇴계(退溪)가 답한 바는 전후가 같지 않아서 어떤 복색을 착용하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할지 모르겠네. ○ 《예기》 잡기의 주에 이르기를, “담제를 지낼 때에는 현관(玄冠)에 황상(黃裳) 차림을 하고, 담제를 마치고서는 조복(朝服)에 침관(綅冠) 차림을 하고, 한 달을 뛰어넘어 길제를 지낼 때에는 현관에 조복 차림을 하고, 길제를 마치고 난 뒤에는 현단(玄端)을 입고 거처한다.” 하였다. ○ 《예기》 간전의 진씨(陳氏) 주에 이르기를, “담제를 지낼 때에는 현관에 조복 차림을 하고, 제사를 마치면 머리에는 섬관(纖冠)을 착용하고 몸에는 소단(素端)과 황상을 착용한다. 길제를 지낼 때에 이르러서는 평상시에 착용하던 물품을 패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다. ○ 퇴계가 김숙부(金肅夫) -김우옹(金宇顒)이다.- 의 물음에 답하여 이르기를, “이제 만약 ‘오히려 곡읍(哭泣)이 있다.’는 글 때문에 완전히 길한 옷을 착용하는 것이 온편치 않다고 여긴다면, 단지 구씨(丘氏)의 설에 의거하여 소복(素服) 차림을 하고서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지사(知事) 신숙정(申叔正)이 말하기를, “구씨가 말한 ‘소복’은 아마도 흰색의 의복이 아닌 듯하다. 중국 사람들은 무늬가 없는 옷을 가지고 소복이라고 하는데, 모든 국기(國忌) 및 흉례(凶禮)에서는 모두 푸른색의 소복을 착용하고, 부자(附子)를 제거하는데, 속례(俗禮)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며, 조상(弔喪)을 할 때에도 역시 이에 의거하여 행한다. 《가례의절》에서 말한 ‘소복’은 혹 이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였다.- 또 정도가(鄭道可) -정구(鄭逑)이다.- 의 물음에 답하면서 이르기를,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에 복을 진설하고 복을 바꾸어 입는 절차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담복을 벗는 것이 어느 때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며, 길복을 착용하는 것이 어느 날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혹자가 말하기를, “호(縞)에 대해서 이미 말하기를, ‘검은색의 씨줄에 흰색의 날줄로 짠 것이다.’라고 하고, 섬(纖)에 대해서 또 말하기를, ‘검은색의 씨줄에 흰색의 날줄로 짠 것이다.’라고 하고, 침(綅)에 대해서는 또 말하기를, ‘검은색의 씨줄에 흰색의 날줄로 짠 것이다.’라고 하여, 세 글자가 모두 똑같은 색인바, 이것은 몹시 의심스럽다. 《운회(韻會)》를 상고해 보면, ‘침(綅)은 흰색의 씨줄에 검은색의 날줄로 짠 것으로, 통용해서 섬(纖)이라고 쓰기도 한다.’ 하였다.” 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정송강(鄭松江)이 중국에서 이른바 참(黲)이라는 것을 구해 왔는데, 마치 오늘날에 이른바 반수색(半水色)과 같았으며, 이른바 호(縞)라는 것은 바로 흰색의 날줄에 검은색의 씨줄로 짠 것이었다.”고 하는바, 역시 의심스럽다. 그리고 고서(古書)에서 무릇 호(縞)라고 말한 것은 모두 흰색이다. 《시전(詩傳)》 소관(素冠)의 주에서는 비록 검은색의 날줄에 흰색의 씨줄로 짠 것이 호(縞)라고 훈독하기는 하였으나, 출기동문(出其東門)의 주에서는 “호(縞)는 흰색이다.” 하였고, 공씨(孔氏)는 말하기를, “호는 얇은 비단이다. 물들이지 않았으므로 색이 희다.” 하였으며, 《예기》 증자문(曾子問)의 ‘포심의호총(布深衣縞總)’의 주에서는 “호는 생백견(生白絹)이다.” 하였고, 잡기의 “장사를 지낼 때 사(史)는 연관을 착용한다.[葬時史練冠]”고 한 부분의 주에 이르기를, “호관(縞冠)이다.” 하였으며, 《운회》와 《이아(爾雅)》에서는 “호(縞)는 호(皓)이다.” 하였으며, 《문선(文選)》의 설부(雪賦)에서는 “만 이랑이 다 희다.[萬頃同縞]” 하였으며, 한고조기(漢高祖紀)에서는 “병사들이 모두 호소(縞素)를 입었다.” 하였다. 그리고 《의례도(儀禮圖)》에서는 “담제를 지낸 뒤에는 침관(祲冠)을 착용한다. 담제를 지낸 뒤에 관의 색깔이 이와 같은즉 담제를 지내기 전에는 반드시 더욱 흉할 것이다.” 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의 제도와 구씨의 《가례의절》에서 상복(祥服)에 순백색을 쓴 것은 근거한 바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담제를 지낼 적에는 길복(吉服)을 입고 거애(擧哀)한다. [문] 《가례》 보주(補註)에 나오는 석량 왕씨(石梁王氏)의 설을 보면 담제에는 의당 길복으로 바꾸어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담제 때에도 역시 거애하는 절차가 있으니, 길복을 착용하고 거애하는 것은 혹 온당치 못한 듯도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강석기- [답] 담제는 길제이니 길복을 착용하지 않아서는 안 되네. 삼년상이 끝나도 효자는 비통하고 슬픈 마음이 있으니, 비록 길복을 착용하고 곡읍하더라도 정례(情禮)에 있어서 어그러지지는 않을 듯하네. 담제를 지낸 뒤에는 조금 길한 관(冠)을 착용하고, 길제를 지낸 뒤에는 순전히 길한 관과 복을 착용한다. [문] 담제를 지낼 적에는 예에 의거하여 길복을 착용하고, 제사를 마치고는 거친 초립(草笠)을 착용하여 옛날에 침관(綅冠)을 착용하던 것을 모방하며, 길제를 지낼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순전히 길한 복을 착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황종해(黃宗海)- [답] 담제를 지낸 뒤에는 거친 흑립(黑笠)을 착용하였다가 길제를 지낼 때에 이르러서 길한 의관(衣冠)을 착용하는 것이 무방하네. 담제를 지낸 뒤의 복색(服色) 및 길제를 지낸 뒤의 복침(復寢) [문] 일찍이 듣건대, 도헌(都憲) 신경진(辛慶晉)이 길제를 지낸 뒤에 비로소 순전히 길한 복을 착용하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고 하는데, 예의 뜻이 그러한 것입니까? 우복(愚伏)은 말하기를, “《예기》 간전(間傳)에 이르기를, ‘담제를 지냈으면 섬(纖)을 입는다.[禫而纖]’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검은색으로 날줄을 삼고 흰색으로 씨줄을 삼아 짠 것을 섬이라고 한다.’ 하였다. 대개 길제를 지내기 전에는 담제를 비록 마쳤더라도 오히려 섬관(纖冠)에 소단(素端)과 황상(黃裳)을 착용한다. 그러니 신군(辛君)이 행한 것은 예를 제정한 뜻을 잘 얻었다고 할 만하다. 오직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은, 예경에 반드시 길제를 지내기를 기다려서 먹는다는 글이 없다.”고 운운하였습니다. 담제를 마치고 섬관에 소단을 착용한다면 대(帶)는 역시 흰색의 대를 착용합니까? 그리고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길제를 지내고 나서는 평상시의 침실로 돌아간다.[吉祭而復寢]” 하였으니, 술을 마시고 고기를 마시는 것은 마땅히 이때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는 의외로 담제조의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담제를 지낸 뒤에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은 예에 있어서 합당하네. 정침(正寢)으로 돌아가는 것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것보다 중하므로 길제를 지낸 뒤에 있는 것이네. 담제를 지낸 뒤에는 비록 소단(素端)을 착용하기는 하나, 백대(白帶)를 착용하는 것은 지나친 듯하네. 담제를 지낸 뒤에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 [문] 호백량(胡伯量)이 주자에게 묻기를, “근래에는 상제(祥祭)를 단지 재기(再忌) 때에만 지내는데, 비록 의복을 바꾸어 입지 않을 수는 없으나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한 절차만은 달을 넘겨서 하는 것으로 절도를 삼고 싶습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달을 넘겨서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퇴계가 말하기를, “주자께서는 왕숙(王肅)의 설이 예경의 본뜻을 얻은 것이라고 여겼으므로, 《가례》에서 대상(大祥) 뒤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게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퇴계의 설은 주자의 ‘달을 넘겨서 하는 것이 옳다.’는 뜻과 어긋나는 듯합니다. -강석기- [답] 살펴보건대, 주자가 비록 왕숙의 설 -중월(中月)을 상월(祥月)의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을 옳은 것으로 보았으나, 《가례》에서는 정씨(鄭氏)의 설 -중월을 한 달을 뛰어넘는 것으로 보았다.- 을 썼네. 《가례》에서 비록 ‘대상을 지낸 뒤에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고 하였으나, 호백량에게 답하면서는 또 ‘달을 넘겨서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네. 이는 각자 나름대로 그 뜻이 있는 것이네. 《가례》에서 ‘대상을 지낸 뒤에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고 한 것은, 본디 《예기》 상대기(喪大記) -상대기에 이르기를, ‘상제를 지내고서는 고기를 먹는다.[祥而食肉]’ 하였다.- 에서 나온 것으로, 《예기》 간전(間傳) -간전에 이르기를, ‘담제를 지낸 뒤에는 예주를 마신다. 처음에 술을 마시는 자는 먼저 예주를 마신다. 처음에 고기를 먹는 자는 먼저 건육을 먹는다.[禫而飮醴酒始飮酒者 先飮醴酒 始食肉者 先食乾肉]’ 하였다.- 의 설과는 같지가 않네. 그러니 이는 대개 별도로 한 설을 만든 것이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상제(祥祭)를 반드시 10일이 지난 뒤에 지내었네. 그러므로 오히려 이날에 고기를 먹어도 괜찮았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상제를 재기(再忌)의 날짜에 지내니, 이 한 가지 의절은 결단코 행해서는 안 되네. 이것은 《가례》를 미처 재차 수정하지 못한 부분이네. 세상 사람들이 혹 상제를 지내는 날에 고기를 먹으면서 말하기를, ‘《가례》를 준행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실로 풍교(風敎)를 해치는 것이네. 그러니 마땅히 《예기》 간전 및 사마온공(司馬溫公)과 구씨(丘氏)의 설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네. 내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답하면서 “예경을 보면, 5개월복과 3개월복의 상에는 장사를 지낼 때가 가까워 오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기년복과 9개월복의 상에는 이미 장사를 지내고 나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삼년복의 상에는 상제를 지내고 나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신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상대기에 상세하게 나온다.- 상복이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은 오복(五服)이 모두 그런 것으로, 대개 고례가 그런 것이네. 《가례》의 대상조(大祥條)에 나오는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신다.’는 글은 실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네. 그러나 역시 반드시 재기가 되는 날에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라고 한 것은 아니네. 이는 ‘달을 넘겨서 하는 것이 옳다.’고 한 가르침으로 보면 잘 알 수가 있네. 그리고 《소학(小學)》은 바로 주자가 완성해 놓은 책인데, 거기에서는 사마공(司馬公)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르기를, “무릇 부모의 상에 거상하는 자는 대상을 지내기 전에는 모두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바, -이것은 상대기의 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것으로 참고해 보면 주자의 본뜻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네. 그러나 그 위의 글에서 인용한 사마공의 말에는 이르기를, “옛날에는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담제를 지낸 뒤에 예주(醴酒)를 마셨다. 처음에 술을 마시는 자는 먼저 예주를 마시고 처음에 고기를 먹는 자는 먼저 건육(乾肉)을 먹는다.”고 운운하였네. -이것은 간전의 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풍속에서는 이것에 의거하여 행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 역시 후한 쪽으로 하는 도리이니, 지금도 따르는 것이 마땅하네. 다만 사마온공이 말한 ‘오십 세 이상이 되어 혈기가 이미 쇠하여 반드시 술과 고기를 먹어서 몸을 보호해야 하는’ 자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네. 이와 같은 사람은 상제(祥祭)를 지낸 뒤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도 역시 크게 예를 어그러뜨리는 데에는 이르지 않는 것이네. ○ 주자가 이르기를, “25개월이 되어서 상제(祥祭)를 지낸 뒤에는 곧 담제이니, 왕숙의 설과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지금은 정씨의 설을 따르고 있다. 그것이 비록 예가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후한 쪽을 따라서 한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온당치는 않다.” 하였다. ○ 사마공이 이르기를, “이른바 ‘중월(中月)에 담제를 지낸다.’고 하는 것은, 대개 담제가 상제를 지내는 달 안에 있는 것이다. 역대로 대부분 정씨의 설을 따랐고, 지금 율칙(律勅)에서는 삼년상일 경우에는 모두 27개월이 되어서 제복(除服)하니, 이를 어겨서는 안 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담제를 지낸 뒤에는 예주를 마신다. 처음으로 술을 마신다는 경우에는 먼저 예주를 마시는 것이다. 처음으로 고기를 먹는 경우에는 먼저 건육을 먹는다.” 하였다. ○ 구씨가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예기》를 보면, ‘담제를 지낸 뒤에는 예주를 마시고 건육을 먹는다.’ 하였다. 담제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아직 고기를 먹거나 술을 마셔서는 안 되고, 단지 예주를 마시고 건육을 먹을 뿐이다. 그런데 하물며 대상 때이겠는가. 이제 담제 뒤에 비로소 묽은 술을 마시고 말린고기를 먹는다면, 거의 예경의 올바른 뜻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주D-001]오복(五服) : 상복(喪服)을 입음에 있어서 다섯 가지로 차등을 두는 제도를 말한다. 이는 가족과 친척 사이에 친소와 원근이 있기 때문에 차등을 두는 것으로, 상을 당한 사람이 죽은 사람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에 따라 상복의 경중을 나타내고 상기의 장단을 결정하는 것이다. 오복에는 참최(斬衰), 자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가 있는데, 대공 이상은 친(親), 소공 이하는 소(疎)가 된다. 친소에 따라서 오복을 입는 기간이 각각 다르며, 상복의 재료도 달라진다.     부(附) 길제(吉祭) 담제(禫祭)가 중월(仲月)에 있으면 곧바로 길제를 지낸다. [문]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길제를 지내고 나서는 평상시의 침실로 돌아간다.[吉祭而復寢]” 하였는데, 이에 대한 진씨(陳氏)의 주에 이르기를, “길제는 사시(四時)에 지내는 상제(常祭)이다. 담제를 지낸 뒤에 같은 달에 길제를 만나면 길제를 마치고서 침소로 돌아간다. 만약 담제를 지내는 달이 길제를 지내는 달이 아닐 경우에는 달을 넘겨서 길제를 지낸 뒤에야 침소로 돌아간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전에 가르침을 받들었는데, “만약 진씨의 설과 같이 한다면, 가령 6월에 담제를 지내고서는 반드시 중월이 되기를 기다려서 길제를 지낸다면 7월이 지나고서 8월에 이른 뒤에야 지낼 수가 있다. 아마도 이런 이치는 없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이제 담제를 지낸 달의 하순에 길제를 행하려고 한즉 또 달을 뛰어넘어서 길제를 지낸다는 뜻이 아니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길제’라는 것은 바로 상을 마치는 별제(別祭)로, 본디 사시에 지내는 상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진씨는 ‘사시에 지내는 상제이다.’라고 하면서, 반드시 중월(仲月)에 지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우복(愚伏)에게 물어보았더니, 답하기를, “《의례》 사우례(士虞禮)의 기(記)에 이르기를, ‘달을 뛰어넘어서 담제를 지낸다. 이달에는 길제가 되어도 오히려 배향하지는 않는다.[中月而禫是月也吉祭 猶未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의 주에 이르기를, ‘시월(是月)은 담제를 지내는 달이다. 사시의 정제(正祭)를 지내는 달을 만났으면 제사 지내며, 역시 달을 뛰어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였고, 웅씨(熊氏)는 이르기를, ‘제사를 지내는 달을 만나지 않았으면 다음 달을 기다린다.’ 하였다. 진씨의 주에서 말한 ‘달을 뛰어넘어서 길제를 지낸다.’는 설은 대개 여기에 근본한 것이다. 내가 생각해 보건대, 담(禫)이 비록 담담(澹澹)하여 평안스러운 뜻이기는 하나, 효자의 마음에서는 오히려 차마 갑작스럽게 침실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또 반드시 달을 뛰어넘어서 길제를 지내는 것이다. 외제(外除)를 하면서 달을 뛰어넘고서도 또다시 한 달을 뛰어넘는 것은 비통하고 그리운 마음이 그치지 않아서 평상시로 회복하는 절차를 더욱 늦추는 것이다. 보내온 편지에서 ‘상을 마치는 별제’라고 한 것은 제대로 말한 것이다. 사우례의 기에서 ‘이달에 길제를 지낸다.’고 한 것은, 평상시로 돌아가는 것을 급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정제(正祭)를 지내는 것을 급하게 여긴 것이다. 대개 3년 동안 제사를 폐하였으니, 조상을 추모하는 효자의 마음에 있어서 편안치 못한 바가 있으나 상을 마치지 못하였으므로 아울러 거행할 수가 없는 것일 뿐이다. 지금 이미 상제(喪制)가 다하여서 담제를 지내는데 담제가 또 상순(上旬)이 되기 전에 있을 경우, 정제를 지낼 달을 만나서 차마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정침(正寢)에서 담제를 지내고 나서 곧바로 동순(同旬) 안에 사당(祠堂)에서 정제를 지내는 것이다. 정씨의 주를 보아도 역시 ‘달을 건너뛰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지낸다.’는 글이 있으니, 달을 건너뛰는 것이 정상적인 제도이나, 정제를 지낼 달을 만났을 경우에는 달을 뛰어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묘제(廟祭)를 지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진씨의 주에서 말한 ‘사시의 상제(常祭)’라는 것은 단지 길제의 이름을 해석한 것일 뿐이지, 반드시 중월이 되기를 기다려서 지낸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사계장(沙溪丈)에게 나아가 질정해 본 뒤에 행하라.”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정우복(鄭愚伏)의 설이 맞는 것이네. 길제를 지내면서 제주(題主)를 고칠 때 축사(祝辭)에서 조선(祖先)의 칭호(稱號)를 쓴다. [문] 제주를 고칠 때의 축사를 구씨는 고조(高祖)와 증조(曾祖)라고 칭하지 않고 단지 모관모봉(某官某封)이라고만 칭하였습니다. 지금 《상례비요》를 보니, 날짜 아래에 이미 자손의 속칭(屬稱)을 썼는데도 조고와 증조에 대해서는 칭위(稱謂)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과연 합당한 것입니까? 졸곡제를 지낸 다음 날에 합부(合祔)하면서는 곧장 증조라고 칭하고, 3년이 지난 뒤에는 도리어 모관(某官)이라고 칭해서야 되겠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곧장 속칭을 쓰고서 오직 제위(諸位)를 개제(改題)한다는 뜻으로 고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유태- [답] 구씨의 《가례의절》에서 제위(諸位)의 속칭을 쓰지 않은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였으므로 《상례비요》에서 고치고자 하였으나, 미처 고치지 못한 것이네. -《상례비요》를 다시 판각(板刻)할 때에는 선인(先人)께서 말씀하신 뜻으로 고쳐야 한다.- 오대조(五代祖)에게 고하면서는 현손(玄孫)이라고 자칭(自稱)한다. [문] 오대조에게 고할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칭하면서는 마땅히 오대손(五代孫)이나 내손(來孫)이라고 해야 하는데, 지금은 현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현손은 바로 고조에게 고할 때 쓰는 칭호입니다. 어떻습니까? -황종해- [답] 예경에 이르기를, “증조(曾祖) 이상에 대해서는 모두 증조라고 칭한다.” 하였는바,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현손이라고 칭하는 것도 괜찮네. 그러나 오대손이라고 칭하는 것도 역시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내손이라는 칭호는 옛날에는 비록 있었으나, 선현들께서 쓰지 않은 바이니, 감히 그것으로 설을 만들지는 못하겠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길제(吉祭)를 지내지 않는다. [문]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15개월이 지나 담제를 지낸 뒤에는 길제를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길제는 바로 사시(四時)에 지내는 제사 이외의 별제(別祭)이네. 대개 상을 당한 뒤 3년 동안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법이네. 그러므로 상을 마치고 나서는 조묘(祖廟)에서 합제(合祭)를 지내고, 이어 체천(遞遷)하는 예를 행하는 것이네. 그러나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아버지가 제주(祭主)가 되는 법이네. 주자가 두문경(竇文卿)에게 답한 편지 -상중제사조(喪中祭祀條)에 나온다.- 로 보면, 비록 아내의 상이라고 하더라도 가묘(家廟)에서 지내는 사시의 정제(正祭)를 모두 폐하네. 그러나 범백숭(范伯崇)에게 답한 편지 -역시 상중제사조에 나온다.- 로 보면, 비록 부모의 상중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정제는 폐하지 않는 듯하네. 그러니 다시금 상고해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네. 아내의 상중에도 가묘의 정제를 과연 폐하지 않고 아내의 상은 또 부위(祔位)여서 체천하는 예가 없다면 상이 끝난 뒤에 길제를 지내는 것은 의미가 없는 듯하니, 설행해서는 마땅치 않을 듯하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의 길제 [문]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어 이미 사당(祠堂)에 들어갔을 경우에, 어머니의 상을 마친 뒤에 지내는 길제 역시 반드시 달을 뛰어넘기를 기다려서 지내야 합니까? -송준길- [답] 그렇게 해야 할 듯하네. 아버지의 상중에는 할머니의 길제를 지내서는 안 된다. [문] 할머니의 상과 아버지의 상을 한꺼번에 당한 자가 있을 경우에 아버지 상을 마치기 전에는 할머니의 담제와 길제를 행할 수 없는 것입니까? [답] 운운하였다. -위의 담조(禫條)에 나온다.- 신주를 파묻는 곳 [문] 조천(祧遷)한 신주는 어느 곳에 파묻습니까? -송준길- [답] 주자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주자가 말하기를, “단지 이천(伊川)의 설과 같이 양쪽 섬돌 사이에 파묻으면 된다. 우리 집의 가묘에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양쪽 섬돌의 사이는 사람들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는 곳이니, 정결함을 취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가묘에 어찌 이른바 ‘양쪽 섬돌’이 있겠는가. 단지 정결한 곳을 택해 파묻으면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시조묘(始祖墓)의 곁에 파묻느니만 못하다. 시조묘가 없어서 난처하기에 단지 이와 같이 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예경을 보면 ‘양쪽 섬돌 사이에 보관해 둔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부득이하여 단지 묘소에 파묻을 뿐이다.” 하였다.   [주D-001]외제(外除) : 부모를 위하여 상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비록 상기가 다 되어 상복을 벗었더라도 마음속으로는 그대로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주D-002]속칭(屬稱) : 속(屬)은 고(高)ㆍ증(曾)ㆍ조(祖)ㆍ고(考)를 말하고, 칭(稱)은 관직이나 호를 말한다.     거상잡의(居喪雜儀) 외우(外憂)와 내우(內憂)의 구분 [문] 아버지의 상을 외우라고 칭하고 어머니의 상을 내우라고 칭하는데,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혹 서로 바꿔서 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옳습니까? -송준길- [답] 기고봉(奇高峯)의 설이 아마도 제대로 된 것인 듯하다. ○ 기고봉이 말하기를, “정계함(鄭季涵) -정철(鄭澈)이다.- 이 ‘내간(內艱)이 아버지의 상이고 외간(外艱)이 어머니의 상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그 설을 반박하여 공격하였는데, 이계진(李季眞) -이후백(李後白)이다.- 역시 계함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어째서 아버지가 내(內)가 되고 어머니가 외(外)가 되는가?’ 하니, 그가 답하기를, ‘어머니는 외가(外家)이므로 외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 설이 올바르지 않기에 주자(朱子)의 행장(行狀)을 상고해 보니, 어머니의 상을 내간(內艱)을 만났다고 한 곳이 있어서 내가 두 사람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그 뒤에 우연히 《포은집(圃隱集)》의 연보(年譜)를 보니, 그 가운데 아버지의 상을 내간이라고 하고 어머니의 상을 외간이라고 한 것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다음에야 또 두 사람의 말이 전해 들은 바가 있으며, 세속에서 잘못 전해진 지도 역시 이미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상중에 종족(宗族)의 상이 있을 경우에는 가서 곡한다. [문] 상중에 종족의 상이 있을 경우에는 비록 시마복(緦麻服)이나 소공복(小功服)의 친족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가서 곡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기왕 중복(重服)을 입고 갈 수는 없으니, 어떤 복을 입고 가야 합니까? -황종해- [답] 《예기》 단궁에 이르기를, “자신이 빈소(殯所)를 모시고 있을 적에는 먼 촌수인 형제의 상을 들으면 비록 시마복을 입어야 할 사이라도 반드시 가야 한다.[有殯聞遠兄弟之喪 雖緦必往]” 하였네. 기왕에 상차에 가는 이상 그에 맞는 복을 입고서 곡하는 것이 마땅하며, 물러 나와서는 도로 중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네. 외조부모나 스승의 상일 경우에도 역시 가서 곡하지 않을 수 없네. 지난해에 내가 아버지의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율곡(栗谷)의 상에 분상(奔喪)하였는데, 그 뒤에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허물로 삼는 자가 있었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 사람에게 ‘허물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리어 식자들에게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하자, 그가 드디어 비방을 멈추었네. 상중에 이성(異姓) 친족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도 가서 곡한다. [문] 《예기》 단궁을 보면 “부모의 상중에 있더라도 먼 촌수인 형제의 상을 들으면 그에 해당되는 상복을 입고 가서 곡한다. 이성일 경우에는 비록 이웃집에서 상이 발생했더라도 가지 않는다.[有父母喪而聞遠兄弟之喪 則服其服而往哭之 異姓則雖隣不往]”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소(親疎)와 후박(厚薄)이 일정하지 않으니 아마도 일률적으로 단정하기가 어려울 듯한데,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이성(異姓)의 은혜는 비록 강쇄(降殺)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 복이 동성의 시마복보다 중할 경우에는 아마도 이것으로 단정하여 가서 곡하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하네. 상중에도 제사를 지낸다. [문] 고례에는 비록 상을 당한 3년 동안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글이 있으나, 역시 그대로 따르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의 중도에 맞게 할 수 있습니까? -송준길- [답] 정자와 주자 및 여러 선생들의 설에서 상고하여 적당하게 조처해야 할 것이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이천(伊川)이 이르기를, ‘3년의 상기 동안에는 옛날 사람들은 일을 모두 폐하였다. 그러므로 제사까지도 모두 폐하였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일을 모두 폐하지 않으니 어떻게 제사만을 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사도 지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다. 그렇지만 역시 100일이 지난 뒤에야 지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奠)을 올리는 예는 역시 행할 수가 없고, 단지 술과 음식과 의물(儀物) 따위만을 진설해 놓은 뒤에 제사를 주관하는 자가 가서 절만 할 뿐이다. 만약 100일 안에 제사를 지내야 할 경우에는 혹 종백숙(從伯叔)이나 종형제(從兄弟) 등이 지낼 수가 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또 묻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손자로 하여금 지내게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해도 괜찮다.” 하였다. ○ 주자가 또 이르기를, “기년이나 대공, 소공, 시마복 등의 복은 오늘날의 법에 날수가 아주 적으니, 곧바로 가묘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절할 수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시마복의 상에도 제사를 폐하였으나, 오늘날 사람들이 그대로 행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였다. ○ 두문경(竇文卿)이 주자에게 묻기를, “남편이 아내의 상을 치르면서 아직 장사 지내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장사 지내었으나 제복(除服)하지 않았을 경우, 시제(時祭)를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제사를 지내는 않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제사를 지낸다면 어떤 복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아마도 제사를 지낼 수 없을 듯하다. 우리 집에서는 사시(四時)의 정제(正祭)는 폐하지만 절사(節祀)는 그대로 두고서 단지 심의(深衣)에 양삼(涼衫) 따위를 착용하고서 지내는데, 이 역시 의(義)로써 새로운 예를 일으킨 것으로, 정례에서는 상고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기제(忌祭)는 상(喪)의 뒤끝에 지내는 제사이니 혐의스러운 점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정침(正寢)에 이미 궤연(几筵)을 설치해 놓아 제사 지낼 곳이 없으니, 역시 잠시 중지해야 할 듯하다.” 하였다. ○ 주자가 호백량(胡伯量)에게 답하기를, “천신(薦新)하고 고삭(告朔)하는 것은 길(吉)과 흉(凶)이 서로 뒤섞이게 되니 행해서는 안 될 듯하다. 그러니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폐하여야 하며, 이미 장사를 지냈으면 가벼운 복을 입은 자나 혹은 이미 상복을 벗은 자로 하여금 사당에 들어가서 예를 행하게 하면 될 것이다. 사시의 대제(大祭)는 이미 장사 지냈더라도 지내서는 안 된다. 한 위공(韓魏公)이 말한 ‘절사(節祀)’라는 것은 역시 천신하는 것과 같이 행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증광조(曾光祖)에게 답하기를, “집안에서 지난해 거상(居喪)할 적에 사시의 정제는 감히 거행하지 못하였으나, 속절(俗節)에 천향(薦享)하는 것은 묵최(墨衰)를 입고 행하였다. 이는 대개 정제에서 삼헌(三獻)하고 수조(受胙)하는 것은 거상하고 있는 자가 행할 바가 아니지만, 속절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일헌(一獻)만을 하며 축문을 읽지 않고 수조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답하기를, “상중에 있는 삼 년 동안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다만 옛날 사람들은 거상하면서 최마(衰麻)의 옷을 몸에서 벗지 않고, 곡읍(哭泣)하는 소리를 입에서 끊이지 않으며, 그 출입과 거처와 언어와 음식을 모두 평소와 확연히 다르게 하였다. 그러므로 종묘의 제사를 비록 폐하더라도 유명(幽明) 간에 양쪽 다 유감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거상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과 달라서 졸곡제(卒哭祭)를 지낸 이후에는 곧바로 묵최(墨衰) 차림을 하고는 출입과 거처와 언어와 음식 따위를 모두 평소에 하던 대로 하여 폐하지 않고 유독 이 제사를 지내는 한 가지 일만을 폐하니, 온당치 못한 바가 있을 듯하다. 내가 삼가 생각해 보건대, 이 의리로 조처하고자 할 경우에는 마땅히 거상하는 예를 스스로 반성해 보아서 과연 능히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모두 다 고례(古禮)에 합치되게 할 수 있다면, 곧바로 제사를 폐하여도 의심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묵최 차림으로 출입함을 면치 못하거나, 혹 다른 합당치 못한 바가 오히려 많을 경우에는, 졸곡을 마치기 전에는 부득이 예에 준해서 우선 제사를 폐하고, 졸곡을 마친 이후에는 《춘추좌씨전》의 두씨(杜氏)의 주(註)에 나오는 설을 대충 모방해서 하여, 사시에 제사를 지낼 날을 만나면 최복(衰服)을 입고서 궤연(几筵)에서 특사(特祀)를 지내고, 묵최를 입고서 가묘(家廟)에서 상사(常祀)를 지내면 될 것이다.” 하였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33년 조의 전(傳)에 이르기를, “무릇 임금이 훙(薨)하였을 경우에는 졸곡을 마치고서 선조의 사당에 합부(合祔)하고, 선조의 사당에 합부하고 나서 신주를 만들어 특별히 정침(正寢)에서 제사를 지내고, 사당에서 증제(烝祭), 상제(嘗祭), 체제(禘祭)를 지낸다.[凡君薨 卒哭而祔 祔而作主 特祀於寢 烝嘗禘於廟]” 하였는데, 이에 대한 두예(杜預)의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천자나 제후의 예로, 경이나 대부에게 통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개 졸곡을 마친 뒤에는 특별히 상례(喪禮)를 써서 새로 죽은 자에 대해 정침에서 제사 지냈다. 이에 종묘나 사시의 상사(常祀)는 저절로 예전과 같이 지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 양복(楊復)이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아들의 상 때문에 성대한 제사를 거행하지 않고 사당 안에 나아가 천신(薦新)하였는데, 심의(深衣)에 복건(幅巾) 차림을 하였다가 제사를 마친 뒤에 도로 상복을 입었다.” 하였다. ○ 율곡(栗谷)이 말하기를, “주자의 말이 이와 같으니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예경에 준해서 제사를 폐하였다가 졸곡을 마친 뒤에 사시(四時)의 절사(節祀) 및 기제(忌祭) -묘제(墓祭)도 같다.- 에 대해서는 가벼운 복을 입은 자로 하여금 -주자는 상중에 묵최 차림으로 사당에서 천신하였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속제(俗制)의 상복을 묵최에 해당시켜 이를 착용하고 출입한다. 그러니 만약 가벼운 복을 입은 자가 없을 경우에는 상인(喪人)이 속제의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 천신하게 하되, 찬품(饌品)은 평상시보다 줄이고 단지 일헌(一獻)만 올리며, 축문을 읽지 않고 수조(受胙)도 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하였다. ○ 송구봉(宋龜峯)이 율곡에게 답하기를, “생포(生布)로 만든 두건과 옷은 아주 흉한 옷이며, 시제(時祭)는 아주 중한 길례(吉禮)입니다. 아주 흉한 옷을 입고 아주 길한 예에 나아가는 것은, 옛날에는 그런 예가 없었습니다. 주자가 묵최 차림으로 예를 행한 것은 차마 순전히 흉한 옷을 입고서는 신명(神明)을 접할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선현들이 조처한 것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는 법이니, 삼가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중에 선조에게 제사 지낼 때 입는 옷 [문] 장사를 지낸 뒤 사당에 제사 지낼 적에 베로 만든 직령(直領)에 효건(孝巾) 차림을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가례》에 나오는 묵최의 제도를 오늘날에 회복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근세에는 졸곡 때 수복(受服)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있는데, 성복(成服)할 때의 효대(絞帶)를 두르고는 사당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어떤 대를 두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마땅히 베로 만든 직령에 효건 차림을 하고서 제사를 지내야지, 이외에는 달리 입을 만한 옷이 없네. 묵최는 바로 진(晉)나라 양공(襄公)이 진(秦)나라를 칠 적에 입었던 옷인데, 주자 때에 이를 인하여 속제(俗制)로 삼은 것으로, 본디 고례가 아니라 오늘날 풍속에서 이른바 심의(深衣)라고 하는 것과 같은 데 불과할 뿐이네. 지난번에 우성전(禹性傳)이 퇴계에게 물어서 그 제도를 회복하려고 하였는데, 아마도 온당치 못한 듯하네. 효대를 띠고 사당에 들어가는 것은 과연 온당치 못하니, 별도로 포대(布帶)를 갖추는 것이 혹 무방할 듯하네.   [주D-001]묵최(墨衰) : 검은색의 상복으로, 묵최질(墨衰絰)이라고도 한다. 고대에 거상(居喪)을 함에 있어서 집에 있을 적에는 백색 상복을 입고 거상하였는데, 전쟁이 있어서 군직(軍職)을 맡아 출정(出征)할 경우에는 검은색 상복을 입고 출정하였다. 진(晉)나라 양공(襄公)이 문공(文公)의 상을 치루지 못한 채 출정하면서 이 옷을 입고 나갔다. [주D-002]특별히 …… 지내고 : 이 부분이 원문에는 ‘特祀於主’로 되어 있는데, ‘特祀於寢’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서소(書疏) 본생친(本生親)의 상을 당하였을 때 서소를 쓰는 식 [문]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본생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 부장기(不杖期)의 복을 입습니다. 그럴 경우에 다른 사람이 위로하기 위해 보낸 글에 답하는 편지에서 본생형제와 똑같이 고자(孤子)나 애자(哀子)라고 칭해서는 안 될 것이며, 다른 사람이 위로하기 위해 보내는 글에서도 역시 구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종해- [답]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본생부모의 상을 위해서는 상인(喪人)이라고 칭할 뿐, 고자나 애자라고 칭해서는 안 되네. 다른 사람이 조문하기 위해 보내는 글에서도 단지 상인으로만 대우할 뿐, 대효(大孝)나 지효(至孝)라고 칭해서는 안 되네.     시제(時祭)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일(丁日)과 해일(亥日)을 쓴다. [문]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정일이나 해일을 쓰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송시열- [답] 경전에서 논해 놓은 것이 상세하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의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 이르기를, “내일 정해일에 황조고께 제물을 올려서 세시(歲時)에 지내는 제사를 올릴 것입니다.[來日丁亥用薦歲事于皇祖]”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정(丁)이 반드시 해(亥)를 만난 날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어느 하루를 들어서 말한 것일 뿐이다. 태묘(太廟)에 체협(禘祫)을 지내는 예에 이르기를, ‘날짜는 정해일을 쓰는데, 정해일을 얻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기해(己亥)나 신해(辛亥)도 쓰며, 이것도 없을 경우에는 참으로 해(亥)가 들어가는 아무 날이나 쓰면 된다.’ 하였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정이 반드시 해를 만난 날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어느 하루를 들어서 말한 것일 뿐이다.’라는 것은, 일(日)에는 십간(十干)이 있고 진(辰)에는 십이지(十二支)가 있는데, 다섯 강일(剛日)을 여섯 개의 양진(陽辰)에 배치하고, 다섯 유일(柔日)을 여섯 개의 음진(陰辰)에 배치하는바, 갑자(甲子)나 을축(乙丑) 등과 같은 것이다. 일(日)로써 진(辰)에 배치시키되, 정일(丁日)을 정해 두지 않았으므로 ‘정이 반드시 해를 만난 날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경문(經文)에서 ‘정해(丁亥)’라고 한 것은 모두를 갖추어서 실을 수가 없으므로 단지 이날 하루만을 들어 정으로써 해에 당한 날을 말한 것이며, 그 나머지 혹 기(己)가 해에 당하였거나 혹 정이 축(丑)에 당한 날 등도 모두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정해일을 얻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기해나 신해도 쓴다.’는 것은, 정씨(鄭氏)가 이르기를, ‘이것은 길사(吉事)이므로 먼저 가까운 날을 쓰는데, 오직 상순(上旬)에 들어 있는 날을 쓴다.’고 하였다. 만일 상순 안에 혹 정이나 기가 해와 짝하는 날을 얻지 못하거나 혹 상순 안에 해로써 일에 배치되는 날짜가 없으면, 나머지 음진(陰辰) 역시 쓴다. ‘이것도 없을 경우에는 참으로 해가 들어간 날이면 된다.’라는 것은, 바로 을해(乙亥)가 그것이다. 반드시 해이어야 하는 것은, 살펴보건대 음양(陰陽)의 식(式)을 따지는 법을 보면, 해는 천창(天倉)이 되는데, 제사라는 것은 복(福)을 구하기 위하여 지내는 것으로 밭에서 농사짓기에 마땅하여야 하므로, 먼저 해가 들어간 날을 취하고, 상순에 해가 들어간 날이 없어야 나머지 진(辰)을 쓰는 것이다.” 하였다. ○ 유창(劉敞)이 이르기를, “정사(丁巳)니 정해(丁亥)니 하여 모두 정(丁)에서 취하였는데, 정에서 취하는 것은, 경(庚)보다는 3일 앞이고 갑(甲)보다 3일 뒤이기 때문이다. 대저 교제(郊祭)는 신일(辛日)로 점치고, 사제(社祭)는 갑일(甲日)로 점치고, 종묘제(宗廟祭)는 정일(丁日)로 점치는바, 해(亥)에서는 취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석가(註釋家)들은 십간(十干)의 정(丁)이나 기(己)를 논하지 않고, 전적으로 십이지(十二支)의 해(亥)에서 취하여 해석하였는바, 경문(經文)의 뜻을 아주 크게 잃은 것이다. 일(日)에는 십간이 있고, 진(辰)에는 십이지가 있어서 다섯 강일(剛日)로써 여섯 양진(陽辰)에 배치시키고, 다섯 유일(柔日)로써 여섯 음진(陰辰)에 배치시키는바, 갑자(甲子)니 을축(乙丑)이니 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일(日)로써 진(辰)에 배치시켜 정축(丁丑)이나 정묘(丁卯) 혹은 정사(丁巳), 정미(丁未), 정유(丁酉), 정해(丁亥) 등 정일(丁日)을 정해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단지 정일에 해진(亥辰)이 당하는 날 하루만을 들어 말한 것이다. 그 뜻은 혹 기(己)로써 해(亥)에 당하거나 혹 정(丁)으로써 축(丑)에 당한 날도 모두 쓸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이르기를, “갑(甲)보다 3일 앞은 신(辛)이고 갑보다 3일 뒤는 정(丁)이며, 경(庚)보다 3일 앞은 역시 정(丁)이고 경보다 3일 뒤는 계(癸)이다. 정일과 신일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 날인데, 다만 계일(癸日)은 쓴 데가 보이지 않는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경(庚)이라는 말은 경(更)이며, 신(辛)이라는 말은 신(新)이며, 정(丁)에는 정녕(丁寧)의 뜻이 있다.” 하였다.   재계(齊戒) [문] 시제(時祭)와 기제(忌祭)는 모두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계를 함에 있어서는 3일간 하고 1일간 하는 차이가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 살펴보건대 《개원례》 재계조(齊戒條)의 주를 보면, “무릇 산재(散齋)는 대사(大祀)에는 4일, 중사(中祀)에는 3일, 소사(小祀)에는 2일간 하며, 치재(致齋)는 대사에는 3일, 중사에는 2일, 소사에는 1일간 한다.” 하였으며, 퇴계는 말하기를, “시제는 지극히 신명(神明)을 섬기는 도이고, 기제와 묘제(墓祭)는 후세에 풍속을 따라서 지내는 제사로, 제사의 의식에 있어서 같지 않은 점이 있으니 재계를 함에 있어서 어찌 차이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네. 이것으로 본다면 제사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서 재계하는 날짜도 역시 그에 따라서 다른 것이네. 제사 지낼 때의 구기(拘忌) [문] 제가 묻기를, “제사를 막 지내려고 할 때 집안에 비복(婢僕)들의 상이 발생하거나 혹 아이를 출산하는 부인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우복(愚伏)이 답하기를, “예를 보면, 부모의 상에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형제의 상이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빈(殯)을 한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연제(練祭)와 상제(祥祭) 두 제사를 말하는 것이네. 그리고 같은 궁(宮)에 살 경우에는 비록 신첩(臣妾)의 상이라고 하더라도 장사를 지낸 뒤에 제사를 지내네. 이것으로 본다면 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집안에 해산하는 부인이 있을 경우에는 정결하지 못하여 제사를 지낼 수가 없네.” 하였으며, 또다시 묻기를, “재계할 적에 혹 상가를 오간 사람을 꺼려서 보지 않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우복이 답하기를, “초상이 나서 염빈(斂殯)을 할 적에 일을 돌보아 준 자는 꺼려서 피하더라도 지나친 것이 아니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의 설이 옳네. 4대까지 제사 지낸다. [문] 오늘날 사대부들의 집에서는 혹 4대를 제사 지내기도 하고, 혹 3대를 제사 지내기도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맞습니까? -송준길- [답] 3대를 제사 지내는 것이 바로 시왕(時王)의 제도이네. 그러나 고조까지 마땅히 제사 지내야 하니, 이에 관해서는 비단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분명한 가르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동방의 선현들 가운데 퇴계나 율곡 등 여러 선생들이 모두 고조까지 제사 지냈다고 하네. ○ 어떤 사람이 정자에게 묻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고조를 제사 지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정자가 답하기를, “고조는 그에 따른 복(服)이 있으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매우 그른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고조까지 제사 지내고 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오복(五服)을 입는 것은 일찍이 차이가 없어서 모두 고조까지 상복(喪服)을 입는다. 상복을 입는 제도가 이미 이와 같으니, 제사를 지내는 것도 모름지기 이와 같이 해야 한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정자의 말에서 상고해 보면, ‘고조는 복이 있으니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칠묘(七廟)나 오묘(五廟)라도 역시 고조에서 그치며, 비록 삼묘(三廟)나 일묘(一廟)에서부터 정침(正寢)에서 제사를 지내는 데에 이르러서도 역시 반드시 고조에까지 미친다. 다만 소삭(疎數)이 같지 않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제사를 지내는 본뜻을 아주 잘 얻은 것 같다. 이제 《예기》 제법(祭法)으로 상고해 보면, 비록 ‘제사는 반드시 고조에까지 미친다.’는 글은 찾아볼 수가 없으나, 월제(月祭)와 향상(享嘗)의 구별이 있다. 그런즉 옛날에 제사를 지내면서 멀고 가까움을 따져 소삭을 정한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예기》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대부는 대사(大事)가 있을 때 그 임금에게 여쭙고, 간협(干祫)은 그 고조에까지 미친다.[大夫士有大事省於其君 干祫及其高祖]’고 하였는데, 이것은 삼묘를 세우고서도 제사는 고조까지 지낸 증거로 삼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사서인(士庶人)은 몇 대를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옛날에는 1대마다 하나의 묘(廟)가 있어서 그 예가 아주 번다하였다. 지금은 이미 묘를 세우지 않으며, 또한 예에 있어서도 크게 흠결이 있는바, 4대를 제사 지내는 것도 역시 해로울 것이 없다.” 하였다.   지자(支子)가 스스로 제사 지낼 수 있는 경우 [문] 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지자가 스스로 주관할 수 있는 제사의 경우에는 마땅히 신주(神主)를 남겨 두고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스스로 주관할 수 있는 제사’라는 것은 무슨 제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지자가 수령(守令)이 되었을 경우에 신주를 받들고 가는데, 어떻습니까? -황종해- [답] 퇴계와 구봉(龜峯)이 논해 놓은 바가 있네. 나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바로 반부(班祔)하는 신주라고 여겨지네. 지자의 처 및 아들과 손자의 신주를 일찍이 종가(宗家)에 반부했는데 이제 종자(宗子)가 선조(先祖)의 신주를 받들고서 먼 곳으로 갔을 경우, 그 남편이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집에 남아 있으면서 스스로 그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마땅하지, 종자를 따라서 멀리 옮겨 가게 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네. 지자로서 수령이 된 자가 신주를 받들고서 가는 것은 예에 있어서 올바른 예가 아닌 것으로, 역시 난리를 치른 뒤에 임시방편으로 권도(權道)에 따라서 한 것일 뿐이네. ○ 퇴계가 말하기를, “사시(四時)에 지내는 정제(正祭) 이외에 기일에 지내는 제사나 속절(俗節)에 지내는 제사는 지자도 역시 지낼 수가 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이주(二主)는 비록 종자를 따라가더라도 지자가 마땅히 주관하여 지내야 할 제사의 신주는 지자에게 남겨 두고서 따라가지 않는다.” 하였다. ○ 구봉 송익필(宋翼弼)이 이르기를, “지자가 스스로 제주(祭主)가 되어 지내는 제사는 바로 예(禰)나 조(祖)를 이은 소종(小宗)이다. 바로 《가례》 사당장(祠堂章)에서 이른바 ‘제사를 지낸 다음 날에 차위(次位)의 자손으로 하여금 제사 지내게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띠풀과 모래와 붉은 실 [문] 《가례》에서 ‘띠풀을 묶고 모래를 모은다.[束茅聚沙]’라고 한 것이 무슨 뜻입니까? 제시조조(祭始祖條)의 소주(小註)에 이르러서 비로소 ‘띠풀을 8촌 정도의 길이로 잘라 붉은 실로 묶는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다른 제사를 지낼 적에는 붉은 실로 묶지 않습니까? -송준길- [답] 제가들이 논해 놓은 바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가례집설》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묻기를, ‘띠풀을 묶고 모래를 모으는 것은, 땅에다가 모래를 모으고서 띠풀을 묶은 것을 에워싸서 세워 놓는 것입니까?’ 하기에, 그렇다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띠풀을 쓰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술을 거르는 것은 띠풀로써 한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술의 탁함을 거를 때는 띠풀을 사용해서 걸러 맑은 술이 되게 하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하였다. 그러자 다시 묻기를, ‘띠풀 묶음을 소반에 담고 거기에 술을 따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정자가 이르기를, 「강신(降神)을 하면서 술을 따를 적에는 반드시 땅에다 붓는다.」 하였으며, 《가례》에도 역시 같게 되어 있다. 소반을 쓴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씨(劉氏)가 제초조조(祭初祖條)에 보주(補註)를 내는 데 이르러서 비로소 띠풀을 담는 소반이 있으며, 띠풀을 8촌 정도의 길이로 잘라 붉은 실로 묶어서 소반 안에 세워 놓는다고 하였다. 유씨가 반드시 상고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제(時祭)의 각 조항마다 주석으로 달아 놓지 않았으며, 또 단지 초조(初祖)에게 제사 지낼 적에만 쓴 것인 듯한바, 감히 근거로 삼지 못하겠다.’ 하였다. 또 묻기를, ‘띠풀을 혹 세 묶음을 쓰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살펴보건대, 「술을 가지고 띠풀 묶음 위에 세 번 제주(祭酒)한다.[三祭于茅]」는 것은, 술을 가지고 세 번 띠풀 위에 붓는 것이지, 세 단의 띠풀에 붓는 것이 아니다. 어찌 그 숫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근래에 다른 책을 보니 「매 위(位)마다 한 차례 술잔을 올리는데, 술 석 잔을 가지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더욱더 잘못된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부위(祔位)에는 진설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다. ○ 《주례》의 주에 이르기를, “반드시 띠풀을 쓰는 것은 그 모양새가 유순하고 결이 곧으며 부드럽고 결백하여 제사를 받드는 덕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회통(會通)》의 주에 이르기를, “띠풀을 한 움큼 정도 잘라서 붉은 비단으로 단을 묶어 모래 위에 세워 놓는데, 단에는 구멍이 있어서 술을 부으면 밑으로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축모(縮茅)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의례》 사우례에서 저(苴)라고 한 것이 띠풀을 쓴 시초인 듯하다.” 하였다.-   과일의 품수(品數) [문] 《가례》를 보면 시제를 지낼 적에 과일은 6품을 쓰는데,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5품을 쓴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격몽요결》은 대개 사마온공(司馬溫公) 및 정자(程子)의 의절(儀節)에 근본을 둔 것으로, 어떤 사람들은 항상 그르다고 하고 있네. 《예기》를 읽어 보면 혹자의 설이 근리(近理)하다는 것을 알 것이네. 지금 사람들이 6품의 과일을 갖추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4품이나 혹 2품을 쓰면 아마 예의 뜻에 합치될 것이네. ○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鼎)과 조(俎)는 기수(奇數)로 하고, 변(籩)과 두(豆)는 우수(偶數)로 하는데, 이것은 음양(陰陽)을 구별하는 뜻이다. 변과 두에 담는 내용물은 물이나 흙에서 나는 것으로 한다. 감히 맛을 가미하여 설만하게 하지 않으며, 물건 수를 많이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이는 신명과 교감하는 뜻이다.[鼎俎奇而籩豆偶 陰陽之義也 籩豆之實 水土之品也 不敢用褻味而貴多品 所以交於神明之義也]” 하였다. ○ 장락 진씨(長樂陳氏)가 말하기를, “정(鼎)과 조(俎)에 담는 과일은 천산(天産)을 위주로 하여 담는데, 천산은 양(陽)에 속하므로 그 숫자는 기수(奇數)로 한다. 변(籩)과 두(豆)에 담는 과일은 지산(地産)을 위주로 하는데, 지산은 음(陰)에 속하므로 그 숫자는 우수(偶數)로 한다.” 하였다.   살아 계실 때 먹지 않았던 물품으로는 제사 지내지 않는다. [문] 살아 계실 적에 먹지 않았던 물품을 가지고 제사 지내는 것은 아마도 좋아하던 것으로 제사 지낸다는 뜻이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만약 자손이 대대로 지키면서 바꾸지 않는다면 그 역시 굴도(屈到)가 마름을 천신하라고 한 데 대한 기롱에 가까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과연 인정(人情)과 예문에 합당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황종해- [답] 보내온 글에서 한 말은 맞는 말이네. 그러나 여러 위(位)에 아울러 진설할 경우에는 감히 한 사람에 대해서만 다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네. 제사에는 생어육(生魚肉)을 쓰지 않는다. [문] 《가례》에서 말한 어육(魚肉)은 생어육입니까? 율곡은 생어육을 썼는데, 이를 따라서 행해도 무방합니까? -송준길- [답] 《가례》에서 이른바 어육은 생어육이 아니라 바로 어탕(魚湯)과 육탕(肉湯)이네. 율곡이 생어육을 쓴 것은 비록 《서의(書儀)》에 근본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의례》 궤식례(饋食禮)와 다르기에 일찍이 집안에서 질정하면서 우계(牛溪)에게 물어보았더니, 답하기를, “생어육과 숙어육(熟魚肉)을 뒤섞어서 쓰는 것이 비록 고례이기는 하지만, 《가례》에 이르러서는 주자가 이르기를, ‘연기(燕器)로써 제기(祭器)를 대신하고, 상찬(常饌)으로써 조육(俎肉)을 대신한다.’고 하였으니, 생어육을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였네. ○ 《의례》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의 주에 이르기를, “제사는 익힌 음식을 올릴 때부터 비로소 궤식(饋食)이라고 한다. 궤식이란 것은 먹이는 도이다.” 하였다. 또 특생궤식례에 이르기를, “식례(食禮)를 할 적에는 묘문 바깥의 동쪽에서 음식물을 익힌다.[亨于門外東方]”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형(亨)’이란 익힌다는 뜻인 자(煮)이다. 돼지고기와 물고기와 토끼고기를 솥에 넣어서 익히는데, 각각 한 번씩 익힌다.” 하였다. ○ 《예기》 교특생에 이르기를, “제사를 지낼 적에 크게 벤 날고기나 잘게 자른 고기나 물에 데친 고기[爓] -음은 잠(潛)이다.- 나 완전히 익힌 고기[腍] -음은 이(而)와 심(審)의 반절이다.- 를 사용하여 제사 지내는데, 어찌 신이 흠향하는 바를 알아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주인이 스스로 그 공경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腥肆爓腍祭 豈知神之所饗也 主人自盡其敬而已]”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제사 지내는 예를 함에 있어서는 혹 날고기를 크게 썬 것을 올리거나, 혹 날고기를 잘게 썬 것을 올리거나, 혹 고기를 물에 살짝 데친 것을 올리거나, 혹 고기를 완전히 익힌 것을 바치는데, 이것이 어찌 신이 과연 어떤 것을 흠향할 것인가를 알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주인이 자신의 공경스러운 마음을 다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   제사 지낼 적에는 소주(燒酒)를 쓰며, 복숭아[桃]와 잉어[鯉]는 쓰지 않는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복숭아와 잉어 및 소주를 제사에 쓰지 않는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기름으로 볶은 음식물을 쓰는 것도 역시 온당치 않다.”고 하는데, 과연 모두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복숭아와 잉어는 제사에 쓰지 않는다는 것이 《공자가어(孔子家語)》 및 황씨(黃氏)의 설에 나와 있네. 소주의 경우에는 원(元)나라 때 나왔으므로 경전에 보이지 않는 것이네. 우리나라에서는 문소전(文昭殿)에서 일제(日祭)를 지낼 적에 여름철에는 소주를 쓰며, 율곡 역시 “상중에 조석으로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여름철의 경우에는 청주(淸酒)는 맛이 변하므로 소주를 쓰는 것이 좋다.”고 하였네. 기름으로 볶은 음식물을 쓰지 않는 것은 《의례》에서 나왔네. 지금 세속에서 반드시 밀과(蜜果)와 유병(油餠)을 써서 제사 지내는데, 이것은 고례에는 맞지 않는 듯하네. ○ 《의례》 사상례(士喪禮)의 기(記)에 이르기를, “전물(奠物)로 쓰는 구(糗 볶은 쌀)는 모두 기름에 볶지 않는다.[凡糗不煎]”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기름으로 볶으면 설만하게 되는바,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모든 구(糗)는 단지 그냥 구일 뿐이며, 기름을 써서 볶지 않는다.” 하였다. ○ 《공자가어》에 이르기를, “과일의 종류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복숭아는 낮은 것이어서 제사에 쓰지 않고 교묘(郊廟)에도 올리지 않는다.” 하였다. ○ 황씨의 《일초(日抄)》에 이르기를, “잉어는 제사에는 쓰지 않는다.” 하였다.   제사 지내는 시각의 이름과 늦음에 대하여 [문] 일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적에 혹 일찍 지내기도 하고 혹 늦게 지내기도 하여 일정한 식이 없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하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선유들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의례》 소뢰궤식례를 보면, 대부가 제사를 지낼 적에 종인(宗人)이 제사 지낼 시간을 묻기를, ‘내일 날이 밝을 때에 제사를 지낼까요?[旦明行事]’ 하였다. 그리고 《예기》 예기(禮器)를 보면, 자로(子路)가 계씨(季氏)의 집에서 제사 지낼 적에 이른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여 저녁 늦게 제사를 마치고 물러나 나오자, 공자가 그것을 보고 잘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周)나라의 예이다. 그러나 예는 늦게 지내는 잘못을 저지르기보다는 차라리 일찍 지내는 것이 낫다. 그러니 비록 해가 뜨지 않았을 때 제사를 지내도 괜찮은 것이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오경(五更)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선생의 집에서는 사중월(四仲月)을 맞아 시제(時祭)를 지냄에 있어서는 하루 전에 의자와 탁자를 씻어 엄하게 마련하였으며, 그다음 날에는 새벽녘이면 이미 제사가 끝나 있었다.” 하였다.   제찬(祭饌)을 진설하는 식 [문] 시제를 지내기 위해 제찬을 진설하는 데 있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세 가지의 소채(蔬菜)로 평상시의 소채와는 다른 것인 듯하며, 포해(脯醢)는 두 가지 물건인데 소채의 줄에 아울러 진설한다면, 이는 소채가 한 줄이 되고 포해가 두 줄이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초(醋)는 숟가락과 국의 사이에 진설하는 것을 준행해도 되는 것입니까? 《가례》에서 말한 제찬은 바로 당시에 쓰던 음식물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에도 역시 살아 있을 때 드시던 것을 써서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만약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오는 사서인제찬도(士庶人祭饌圖)와 같이 한다면, 지나치게 소략하지 않겠습니까. -황종해- [답] 이른바 세 가지 소채(蔬菜)라는 것은 침채(沈菜)와 숙채(熟菜)와 초채(醋菜) 따위가 그 속에 포함되는 것이니, 무슨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포해는 두 가지 물품이니 각각 따로 진설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도(圖)에서 합하여 진설한 것은 잘못된 것이네. 예를 제정한 뜻으로 미루어 보면 포(脯), 숙채(熟菜), 해(醢), 침채(沈菜), 청장(淸醬), 초채(醋菜) 등은 서로 사이사이에 배설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격몽요결》에 그렇게 되어 있는 듯하네. 초가 숟가락과 국 사이에 있는 것은 준행해도 무방하네. 살아 계실 때 드시던 상찬(常饌)으로 제사 지내는 것도 역시 괜찮네. 《국조오례의》의 도(圖)에서는 비록 운운한 바가 있지만 집안의 재력에 맞게 하여야지, 어찌 그에 구애되어서 하겠는가. 향을 피운 뒤에도 재배(再拜)한다. [문] 《가례》를 보면 삭망(朔望)의 제사에는 향을 피우고 술을 부은 뒤에 각각 재배하고, 시제(時祭)를 지낼 때에는 단지 술을 부은 뒤에 한 번만 재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뜻은 무엇입니까? -송준길- [답] 향을 피우고 재배하는 것은 양(陽)에서 신명(神明)이 오기를 구하는 것이고, 술을 부은 다음에 재배하는 것은 음(陰)에서 신명이 오기를 구하는 것이네. 시제를 지낼 때 한 번만 재배하는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 듯하네. 그러므로 《상례비요》에서는 삭참례(朔參禮)에 의거하여 두 차례 재배하는 것으로 보충해 넣었는데, 제대로 된 것인지는 모르겠네. 초헌(初獻)을 올릴 적에 밥그릇의 뚜껑을 연다. [문] 제사를 지낼 적에 밥그릇의 뚜껑을 여는 것은 언제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제사를 지낼 때 밥그릇의 가운데에 숟가락을 꽂는 것은 비록 유식(侑食)할 때가 있으나, 뚜껑을 여는 것은 응당 초헌(初獻)을 올린 뒤와 축문(祝文)을 읽기 전의 사이에 열어야 하네. 《의례》의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를 보면 알 수가 있네. ○ 《의례》 특생궤식례에 이르기를, “축(祝)이 잔을 씻어 술을 따른 다음 형갱(鉶羹)의 남쪽에 올린다. 드디어 좌식(佐食)을 하고 뚜껑을 열라고 명한다. 그러면 좌식을 하면서 돈(敦)의 뚜껑을 열고 그 뚜껑을 돈의 남쪽에 뒤집어서[却] -却의 음은 앙(仰)이다.- 놓는다.[祝洗爵 奠于鉶南 遂命佐食啓會 佐食啓會 却于敦南]” 하였다.   술로 제사 지내는 것[祭酒] [문] 술로 제사 지내는 것은 신(神)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논어》 향당(鄕黨)에 이르기를, “임금이 제사한 뒤에 먼저 먹었다.[君祭先飯]”고 한 곳에서의 ‘제(祭)’도 역시 술로 제사한다는 뜻입니까? 그에 대한 주에 “마치 임금을 위하여 음식을 맛보는 것처럼 하는 것으로, 감히 객례(客禮)로 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뜻은 주객(主客)의 예와는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데도 주자가 이렇게 이른 것은 어째서입니까? 전에 가르침을 받들건대, “존장(尊丈)을 모시고 식사를 할 경우에는 나이와 덕의 공경스러움이 부형(父兄)과 같은 자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 연장자에 대해서는 제사를 하여도 혹 괜찮을 듯하다.”고 운운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복(愚伏)은 이르기를, “《예기》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주인은 손님을 인도하여 제사한다.[主人延客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연(延)은 인도하는 것이다.’ 하였네. 《논어》의 주에서 이른바 ‘감히 객례(客禮)로 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이네. 만약 임금이 제사하기를 기다려서 제사하고 임금이 먹기를 기다려서 먹는다면, 이는 객례로 자처하는 것이네. 연장자를 모시고서 밥을 먹을 때 제사하는 것이 마땅하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사계장(沙溪丈)의 설이 헤아려 짐작한 것이 마땅함을 얻었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의 설이 제대로 된 것이네. 다만 옛날에는 좌중(座中)의 상객(上客)이 술로 제사하였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제사하지 않았네. 국자좨주(國子祭酒)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네. 그러나 《가례》에는 “사시(四時)의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위(正位)에 있는 사람은 모두 술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고례와는 같지 않은데, 그 뜻을 상세히는 모르겠네. 부위(祔位)에 작헌(酌獻)할 때에는 조선(祖先)보다 나중에 올린다. [문] 《가례》에 이르기를, “고조의 제사를 막 마치고서는 곧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고조에게 합부한 자에게 술을 따라 올리게 한다.[纔祭高祖畢 卽使人酌獻祔于高祖者]” 하였는데, 고조에게 합부한 자는 바로 증조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보다 먼저 술잔을 받아먹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송준길- [답] 이런 부분은 마땅히 융통성 있게 글을 보아야 한다. 어찌 먼저 받아먹을 수 있겠는가. 염(厭)의 뜻 [문] 《가례》 사시제(四時祭)의 합문조(闔門條)에 ‘이른바 염(厭)이다.’ 하였습니다. 염의 뜻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송준길- [답] 《예기》 증자문(曾子問)에 상세하게 나오네. ○ 《예기》 증자문의 주에 이르기를, “‘염(厭)’은 바로 배부르게 먹는다는 뜻인데, 신이 흠향하는 것을 이른다. 염에는 음염(陰厭)과 양염(陽厭) 두 가지가 있다. 음염이란 것은, 시동씨(尸童氏)를 맞이해 오기 전에 축(祝)이 잔을 따라서 올린 다음 주인(主人)을 위해서 귀신에게 말을 하여 흠향하도록 권하는 것인데, 이때에는 깊숙하고 고요한 실(室)의 구석에서 한다. 그러므로 음염이라고 하는 것이다. 양음이란 것은 시동씨가 일어난 뒤에 좌식(佐食)이 시동씨의 자리 앞에 있는 천조(薦俎)를 철거하여 서북쪽 모퉁이에다가 설치하는데, 방 안의 밝은 곳을 찾아서 설치한다. 그러므로 양염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제정한 뜻은, 귀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기에서나 여기에서나 신이 흠향하여 실컷 먹을 수가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한 번 밥을 먹을 때 아홉 숟가락을 떠서 먹는 뜻 [문] 《가례》에서 한 번 밥을 먹을 때 아홉 숟가락을 뜨게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퇴계가 말하기를, “한 번 밥을 먹을 때 아홉 번 숟가락을 떠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복은 말하기를, “일찍이 중국 사람들이 밥을 먹는 것을 보니, 작은 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데, 이를 다 먹으면 또다시 올리고, 이를 또 다 먹으면 또다시 올린다. 이것에 의거해 보면 한 번 밥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통틀어서 말한 것으로, 구반(九飯)은 바로 작은 절차이다.” 운운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의례》와 《예기》의 주와 소에서 상고해 볼 수 있으며, 정우복의 설이 그럴듯하네. ○ 《의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의 주에 이르기를, “식(食)이란 것은 큰 이름이고, 작게 헤아릴 적에는 반(飯)이라고 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천자는 열다섯 번 숟가락을 뜨고, 제후는 열세 번 숟가락을 뜬다. 아홉 번 숟가락을 뜨는 것은 사(士)의 예이다. 세 번 숟가락을 뜨고, 또다시 세 번 숟가락을 뜨고, 또다시 세 번 숟가락을 뜬다.” 하였다. ○ 《의례》 특생궤식례의 주에 이르기를, “세 번 숟가락을 떠서 예가 한 번 이루어진다. 또다시 세 번 숟가락을 뜨고, 또다시 세 번 숟가락을 뜨면 예가 세 번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곡례에 이르기를, “밥을 세 번 떠먹는다.[三飯]”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삼반(三飯)은 세 번 숟가락을 뜨고서 배부름을 고하고 다시 권하면 이에 다시금 먹는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삼반을 마치고 나면 주인이 객을 인도하여 크게 자른 고기인 자(胾)를 먹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집 안에서 토신(土神)에게 제사 지내는 예 [문] 《격몽요결》에 이르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주자가 집에 있을 적에 토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사시(四時) 및 세말(歲末)에 모두 제사를 지냈다. 지금 비록 사시의 제사를 다 갖추어서 지낼 수는 없으나, 봄과 겨울철의 시사(時祀)를 지낼 때에 별도로 약간의 제찬(祭饌)을 마련하였다가 가제(家祭)가 끝난 뒤에 북쪽 뜰의 정결한 곳을 깨끗이 소제하고 단을 쌓은 다음, 토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다만 수저를 진설하지도 않고 또한 유식(侑食)하고 진다(進茶)하는 의절도 없으니, 응당 밥과 국도 진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다면 묘소에서 토신에게 제사 지낼 적에도 역시 밥과 국은 진설하지 않는 것입니까? 나라에서 산천(山川)과 묘사(廟社)에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밥과 국과 숟가락과 젓가락을 진설하지 않습니다.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참으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율곡이 토신에 대해서 제사 지낼 적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진설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송준길- [답] 세상에는 집 안에서 토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행하는 자가 없네. 만약 행한다면 묘소에서 토신에게 제사 지내는 데 의거하여, 밥과 국과 숟가락과 젓가락을 갖추는 것이 마땅하네. 《가례》를 보면 묘소에서 토신에게 제사 지낼 적에 ‘소반과 술잔과 숟가락과 젓가락을 그 북쪽에 진설하며, 나머지는 위와 같이 한다.[設盤盞匙箸于其北 餘幷同上]’는 글이 있으니, 밥과 국이 있는 것임이 분명하네. 구씨(丘氏)의 《가례의절》에도 역시 숟가락과 젓가락이 있네. 그러니 집 안에서 토신에게 제사 지낼 경우에는 의당 차이가 없게 해야 할 것이네. 《격몽요결》에서는 간략함을 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제사 지내려고 하다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의 예 [문] 제사 지내려고 하다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위의 문상조(聞喪條)에 나온다.-   [주D-001]체협(禘祫) : 고대에 제왕이 천신(天神)이나 시조(始祖) 등에게 지내던 제사의 총칭(摠稱)으로, 아주 성대한 의식의 제사를 말한다. [주D-002]강일(剛日) : 십간(十干) 중에 갑(甲), 병(丙), 무(戊), 경(庚), 임(壬)이 들어간 날을 말한다. 을(乙), 정(丁), 기(己), 신(辛), 계(癸)가 들어간 날은 유일(柔日)이라고 한다. [주D-003]천창(天倉) : 별 이름으로, 서남(西南)의 칠수(七宿) 가운데 누수(婁宿)에 속하는데, 오곡(五穀)을 보관하는 곳이라고 한다. [주D-004]유창(劉敞) : 송(宋)나라 사람으로, 자가 원보(原父)이고 호가 공시(公是)이며, 임강(臨江) 사람이다.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를 지냈으며, 학문이 깊고 넓어서 불로(佛老)에서부터 복서(卜筮), 천문(天文), 방약(方藥), 지지(地志)에 이르기까지 대략의 뜻을 궁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예악(禮樂)의 일에 있어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반드시 그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춘추전(春秋傳)》, 《칠경소전(七經小傳)》, 《공시집(公是集)》 등을 저술하였다. [주D-005]소삭(疎數) :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사당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제사를 자주 지내고 드물게 지내는 차이가 있는 것을 말한다. [주D-006]향상(享嘗) : 향(享)은 봄 제사이고, 상(嘗)은 가을 제사이다. 왕은 칠묘(七廟)를 갖추는데, 시조(始祖)와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祖), 고(考)에 대해서는 매달 지내고, 원조(遠祖)는 체천(遞遷)하여 월제(月祭)를 지내지 않고 단지 사시제(四時祭)만을 지낸다. 《禮記 祭法》 [주D-007]간협(干祫) : 협제(祫祭)는 대사(大祀)이므로 대부나 사가 사사로이 거행하지 못하고 임금에게 물어서 허락을 받아야만 지낼 수가 있다. 이때 대부와 사는 고조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다. 간(干)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으로, 낮은 자가 높은 이의 의례(儀禮)를 행한다는 뜻이다. 《禮記祭法》 [주D-008]이주(二主) : 영정(影幀)과 사판(祠版)을 말한다. [주D-009]굴도(屈到)가 …… 기롱 : 굴도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 대부(大夫)인 탕(蕩)의 아들인데, 식성이 마름을 좋아해서 그의 일가 노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제사에 꼭 마름을 쓰도록 하오.” 하였다. 그런데 그가 죽어서 소상(小祥)을 지낼 때에 그의 아들 굴건(屈建)이, “우리 아버지는 사욕(私慾)을 갖고 국법에 저촉되는 일은 일찍이 하지 않았다.” 하면서, 제사상에 차려 놓은 마름을 치우게 하였다. 《國語 卷17 楚語上》 [주D-010]각각 한 번씩 익힌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谷一爨’으로 되어 있는데, 《의례주소(儀禮注疏)》에 의거하여 ‘各一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일초(日抄) : 송(宋)나라의 학자인 황진(黃震)이 지은 것으로 모두 1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D-012]사중월(四仲月) : 중춘(仲春), 중하(仲夏), 중추(仲秋), 중동(仲冬)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초조(初祖) 초조를 설위(設位)할 때와 선조(先祖)를 설위할 때의 차이 [문] 《가례》를 보면 초조를 제사 지낼 적에는 단지 한 위(位)만 설치하고서 고(考)와 비(妣)를 아울러 제사 지내고, 선조를 제사 지낼 적에는 고와 비 두 위를 나누어 설치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강석기- [답] 초조를 제사 지낼 경우에는 단지 한 위에 대해서만 지내므로 한 위만 설치하여 고와 비를 아울러 제사 지내고, 선조를 제사 지낼 경우에는 한 위에만 제사 지내는 데 그치지 않으므로 고와 비 두 위를 나누어 설치하고서 겸하여 향사(享祀)하는 것이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묻기를, ‘동지(冬至)에는 시조(始祖)를 제사 지내는데, 이는 어떤 조상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혹자는 성(姓)을 받은 시조로, 채씨(蔡氏)의 경우에는 채숙(蔡叔)과 같은 따위를 이른다고도 하고, 혹자는 가장 처음에 백성을 낸 시조로, 반고(盤古)와 같은 따위를 이른다고도 한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입춘(立春)에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어느 선조를 제사 지내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시조로부터 아래로 제2세 선조 및 자기 자신 이상의 6세조까지를 제사 지내는 것이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어째서 단지 두 위만을 설치하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단지 뜻으로만 향사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또 이르기를, “묻기를, ‘선조를 제사 지내면서 한 분만 지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는 단지 한 기(氣)이다. 만약 영당(影堂) 안에 각각 패자(牌子)가 있을 경우에는 안 된다.’ 하였다.” 하였다.   띠풀을 묶을 적에 붉은색의 실로 묶는다. [문] 띠풀을 묶을 적에 붉은색의 실로 묶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시열- [답] 운운하였다. -위의 시제조(時祭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예(禰) 예제(禰祭) [문] 예제의 뜻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격몽요결》에는 빠져 있는데, 이 역시 무슨 뜻이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율곡이 말하기를, “예묘에 제사하는 것은 아마도 친근한 데 대해서 너무 풍성하게 하는 것인 듯하다.” 하였네. 그러나 선유들의 설로써 참고해 보건대, 제사 지내는 것도 무방하네. 지금 예를 좋아하는 집안에서는 지내는 경우가 많네. -송구봉(宋龜峯)이 말하기를, “예묘에 제사 지내는 것은 제사 가운데에서 큰 것으로, 《소학(小學)》이나 《가례》에 이미 그에 대한 의절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런데도 《격몽요결》에서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 《가례집람(家禮輯覽)》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사당을 예라고 한다. 예라는 것은 가깝다는 뜻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계추(季秋)는 만물이 이루어지는 처음의 때이므로 역시 그 유(類)를 형상하여 제사 지낸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우리 집에서는 예전에 상제(常祭)를 입춘(立春)과 동지(冬至)와 계추(季秋)에 세 번 지냈다. 그 뒤에는 입춘과 동지에 두 번만 지냈는데, 체협(禘祫)의 제사와 가까워서 온당치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침내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계추에만 예전에 의거하여 예묘에 제사 지내면서 내 생일에 제사 지냈는데, 이는 마침 내 생일이 계추에 있으므로 이날을 써서 제사 지낸 것이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예제를 지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그것은 지내도 무방하다.” 하였다.   시제(時祭)와 예제(禰祭)를 지낼 시기가 지나갔을 때의 예 [문] 시제 및 예제를 혹 사고가 있어서 중월(仲月) 및 계추(季秋)에 지내지 못하였을 경우, 다음 달로 미루어서 지내도 괜찮습니까? 우복은 말하기를,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過時不祭]’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그달이 지나간 뒤로 물려서 지내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닐 듯하네. 그러나 진씨(陳氏)의 주(註)를 상세히 살펴보면, 또 춘제(春祭)는 봄철이 지나갔으면 지내지 않고, 하제(夏祭)는 여름철이 지나갔으면 지내지 않는다고 한 것 같네. 그렇다면 비록 계월(季月)에라도 역시 지낼 수 있는 것이네. 그러나 예제의 경우에는 10월로 물려서 지내기는 어려울 듯하네. ‘계추에는 만물이 이루어진다.[季秋成物]’고 한 글이 어찌 10월에서 취한 것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퇴계가 일찍이 말하기를, “중월이 지나갔으면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경의 뜻과 합치되지 않기에 항상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었네. 정우복의 설이 바로 나의 견해와 합치되네. 예제를 10월에 지내는 것은 참으로 이른바 ‘때가 지나간 뒤에 지내는 것’이네.     기일(忌日) 기제(忌祭)의 뜻 [문] 기제의 뜻은 무엇입니까? -송준길- [답] 기(忌)라는 것은 크나큰 슬픔을 머금고 있어서 다른 일에는 미칠 수 없음을 이른 것이지, 제사의 이름이 아니네. 송(宋)나라 유학자들이 비로소 의(義)로써 새로운 예를 일으킨 것이네. 이에 대해서는 예경 및 선유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예기》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기일에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忌日不樂]” 하였다. ○ 《예기》 제의(祭義)에 이르기를, “군자에게는 종신(終身)의 상(喪)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일을 말한 것이다. 기일에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상서롭지 않아서가 아니다. 기일에는 내 마음이 한곳으로만 쏠리기 때문에 다른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기울일 수가 없어서이다.[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 忌日不用 非不祥也 言夫日 志有所至 而不敢盡其私也]” 하였다. ○ 《예기》 제의에 또 이르기를, “기일에는 반드시 슬퍼한다.[忌日必哀]” 하였다. ○ 장자(張子)가 이르기를, “옛날 사람들은 기일에는 전(奠)을 올리는 예를 하지 않고 단지 슬픔을 바쳐서 변함이 있는 것을 보였을 뿐이다.” 하였다. ○ 장자가 또 이르기를, “무릇 기일에는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서 제위(諸位)를 배설하지, 한 분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당 밖으로 맞이하여 내와서 다른 장소에 배설하는데, 이미 내오게 되었으면 마땅히 제위에 고하여야 한다. 비록 존자(尊者)의 기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맞이하여 내온다. 이것이 비록 예전에는 없던 것이기는 하지만, 예를 만든 뜻으로 미루어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기제가 없었다. 근래에 와서 여러 선생들이 바야흐로 상고하여 이에 미친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기일에 당(唐)나라의 사대부들은 예전의 예법에 의거해 효복(孝服)을 입고 조문을 받았다. 그 뒤 오대(五代) 때에 어떤 사람이 기일에 조문을 받자 어떤 사람이 조문하였는데, 드디어 그 자리에서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그 뒤에는 단지 다른 사람이 보내 주는 위로의 편지만을 받고, 접견하지 않으면서 사례하는 글만 주게 되었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어떤 사람이 여행 중에 사기(私忌)를 만났을 경우, 묵고 있는 집에서 탁자를 설치하고 향을 피워도 괜찮습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이와 같이 미세한 곳에 대해서는 옛사람들도 일찍이 말해 놓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의리에 있어서 크게 해롭지 않을 경우에는 행하여도 역시 무방할 것이다.” 하였다. ○ 매번 사대부들의 집에서 기일에 부도(浮屠)의 법을 쓰는 것에 대해 논하면서 ‘불경(佛經)을 외우고 추도제(追悼祭)를 지내는 것은 몹시 비루한 것이어서 괴이하게 여길 만한 것이다. 이미 그런 이치가 없는데도 그렇게 하는 것은, 선조로 하여금 혈식(血食)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집에서는 먼 선조의 휘일(諱日)을 만날 때마다 아침 일찍 신주(神主)를 중당(中堂)으로 꺼내 와서 삼헌(三獻)을 올리는 예를 행하였으며, 온 집안이 스스로 소식(疏食)을 하였고, 그 제사에 쓴 음식물은 빈객들을 접대하는 데 썼다. ○ 선생께서는 후사(後嗣)가 없는 숙조(叔祖)를 위하여 기제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손님을 만나 보지 않았다. 이상은 모두 《주자어류》에 나온다. ○ 《안씨가훈(顔氏家訓)》에 이르기를, “기일에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바로 부모님의 망극한 은혜에 감모(感慕)되어서 비탄에 잠겨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빈객을 접대하지 않고 일반적인 사무를 처리하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비통한 마음으로 지낼 수만 있다면 어찌 깊은 방 안에 들어앉아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혹 깊은 방 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으면서 웃고 떠들기를 마음대로 하고, 맛 좋은 음식을 성대하게 마련하여 재계하는 동안에 먹으면서도 급박한 일이 있거나 아주 가까운 친척이나 친한 친구가 왔는데도 전혀 만나 보지 않는 자가 있는데, 이는 대개 예경의 본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왕방경(王方慶)이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예경을 보면 단지 기일만 있고 기월(忌月)은 없다. 만약 기월이 있으면 곧 기시(忌時)가 있게 되고 기세(忌歲)가 있게 되는바, 더욱더 이치와 근거가 없게 된다.’ 하였다.” 하였다.   기일이 윤달에 있거나 그믐날에 있을 경우의 예 [문] 어떤 사람이 윤정월(閏正月)에 죽었을 경우에는 기제를 본정월(本正月)에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만약 윤정월을 만났을 경우에는 어느 달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큰달의 그믐날에 죽었으면 뒤에 작은달을 만났을 경우에는 29일을 기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뒤에 다시 큰달을 만났을 경우에는 또 30일로 기일을 삼는 것이 마땅합니까? 작은달의 그믐날에 죽었을 경우에는 뒤에 큰달을 만나면 29일을 기일로 삼아야 합니까? 아니면 역시 그믐날을 중하게 여겨 30일을 기일로 삼아야 합니까? -송준길- [답] 《통전》의 여러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혹자는 “윤달에 죽었을 경우에 뒤에 윤달을 만나면 마땅히 본월(本月)을 기일로 삼아야 하고, 윤달의 죽은 날에도 소식(素食)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운운하였네. 그리고 큰달의 30일에 죽었을 경우에는 뒤에 작은달을 만났으면 마땅히 29일로 기일을 삼고, 큰달을 만났으면 마땅히 30일을 기일로 삼아야 하네. 작은달의 그믐날에 죽었을 경우에는 뒤에 큰달을 만나면 마땅히 그대로 29일을 기일로 삼아야 하는바, 30일이 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 《통전》에 이르기를, “범녕(范寗)이 말하기를, ‘윤달이라는 것은 여분(餘分)의 날짜를 가지고 달을 불어나게 한 것일 뿐으로, 정식의 달이 아니어서 길흉(吉凶)의 대사(大事)에 모두 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자가 초하루를 고하지 않으며, 상을 당한 자가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 《개원례(開元禮)》에 이르기를, “윤달에 죽은 자는 상제(祥祭) 및 기일을 모두 윤달이 붙은 바의 달을 바른 달로 삼는다.” 하였다. ○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금년 말 30일에 죽었는데, 다음 해 마지막 달이 작을 경우, 지난해 29일에는 어버이가 살아 있었으니, 응당 다음다음 해 정조(正朝)를 기일로 삼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윤달에 죽은 자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알 수가 있다.” 하였다.   기제(忌祭)와 삭망제(朔望祭)가 서로 겹칠 경우의 예 [문] 조상의 기일이 만약 정조(正朝)나 동지(冬至)나 삭망(朔望)에 있을 경우에는 제례(祭禮)와 참례(參禮)를 어느 것을 먼저 지내야 합니까? -강석기- [답] 송구봉이 이르기를, “만약 고조의 기일을 만났을 경우에는 기제를 마친 뒤에 이어 참례를 행하고, 증조 이하의 기제를 만났을 경우에는 참례를 마친 뒤에 기제를 지낸다. 이것이 바로 시조(始祖)를 먼저 제사 지낸다는 뜻이다.” 하였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고(考)와 비(妣)를 아울러 제사 지낸다. [문] 기제에 혹 고와 비를 아울러 제사 지내기도 하고 혹 단지 한 위(位)만 제사 지내기도 하는데, 어느 쪽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존귀한 분에게 일이 있을 경우에는 아랫사람에게까지 미칠 수가 있으나, 아랫사람에게 일이 있을 경우에는 감히 존귀한 분을 끌어들이지 못한다.[有事於尊者 可以及卑 有事於卑者 不敢援尊]” 하였습니다. 이것에 의거해 본다면 부군(府君)의 기일에는 부인(夫人)을 배제(配祭)할 수 있으나, 부인의 기일에는 감히 부군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기일에 고와 비를 아울러 제사 지내는 것이 비록 주자의 뜻은 아니나, 우리나라의 선현들께서 일찍이 그렇게 행하였으며, 율곡 역시 말하기를, “두 위를 아울러 제사 지내는 것이 마음에 편안하다.” 하였네. 그러니 존귀한 분을 끌어온다는 혐의는 아마도 피할 필요가 없을 듯하네.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문공(文公)의 《가례》를 보면, 기일에는 단지 한 신위만을 설치해 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고, 정씨(程氏)의 《제례(祭禮)》를 보면, 기일에는 고비를 함께 배향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지금 살펴보건대, 미산 유씨(眉山劉氏)가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이천(伊川) 선생에게 묻기를, ‘기일에는 양쪽 신위에 제사를 지냅니까?’ 하니, 이천 선생이 답하기를, ‘단지 한 신위에만 제사 지낸다.’고 운운하였다.” 하였는바, 이곳에서 말한 것과는 서로 다르니 의심스럽다. 다시금 상세히 알아보아야 한다.- 두 예가(禮家)의 설이 같지 않다. 대개 한 신위만 설치하는 것이 정례(正禮)이고, 고비(考妣)의 신위를 함께 배향하여 제사 지내는 것은 인정에 근본을 둔 것이다. 만약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고 자리를 펼 때에 궤(几)를 같이 놓는다는 뜻으로 미루어 보면. 인정에 근본하는 예도 역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였다. ○ 퇴계가 말하기를, “기일에 두 분의 신위를 합하여 제사 지내는 것은 옛날에는 그런 예가 없었다. 다만 우리 집에서는 전부터 합하여 제사 지냈으니, 지금 와서 감히 가벼이 의논할 수가 없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기일에는 단지 제사 지낼 바의 신위에 대해서만 제사 지내고 감히 배제(配祭)하지 못하는 것은, 애통함이 제사를 지내는 분에게 있기 때문이다. 고비를 한꺼번에 배제하는 것은 예에 있어서 올바른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대부들 가운데에는 배제하는 사람이 많으니, 세속에서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도 심하게 해로운 데에는 이르지 않을 듯하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일(忌日)의 변복(變服) [문] 기일에 입는 옷의 색깔은 옛날과 지금의 마땅함이 다른데, 어떻게 하면 예를 제정한 뜻에 어그러지지 않겠습니까? -송준길- [답] 마땅히 장자(張子)와 주자(朱子)의 설 및 퇴계나 율곡 등 여러 선생들이 말한 것을 참작하여 행하여야 하네. ○ 횡거(橫渠)의 《이굴(理窟)》에 이르기를, “증조고(曾祖考)와 조고(祖考)를 위해서는 모두 포관(布冠)을 하고 소대(素帶)에 마의(麻衣) 차림을 한다. 증조비(曾祖妣)와 조비(祖妣)를 위해서는 모두 소관(素冠)에 포대(布帶)와 마의 차림을 한다. 아버지를 위해서는 포관에 포대와 마의와 마구(麻屨) 차림을 하고, 어머니를 위해서는 소관에 포대와 마의와 마구 차림을 한다. 백부와 숙부를 위해서는 모두 소관에 소대와 마의 차림을 하고, 백모와 숙모를 위해서는 모두 마의와 소대 차림을 한다. 형을 위해서는 마의와 소대 차림을 하고, 제질(弟姪)을 위해서는 갈옷으로 바꾸어 입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 서모(庶母) 및 형수를 위해서는 똑같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였다. ○ 《가례》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경우에는 주인과 형제들이 참사(黲紗)로 만든 복두(幞頭)에 참포(黲布)로 만든 삼(衫)과 베로 싼 각대(角帶)를 착용하고, 할아버지 이상의 경우에는 참사로 만든 삼을 착용하고, 방친(旁親)의 경우에는 조사(皂紗)로 만든 삼을 착용한다. 주부(主婦)는 특계(特髻)의 장식을 제거하고 흰색의 대의(大衣)와 담황색의 피(帔)를 착용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다. ○ 《주자대전》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고조로부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의 기일에 착용하는 의복과 음식을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백숙부모(伯叔父母)와 형제, 손자, 질자(姪子), 재종형제, 삼종형제의 기일에는 또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횡거(橫渠)는 기일에 입는 의복에 여러 등급을 두었는데, 지금은 아마도 갑작스럽게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니 제사를 주관하는 자는 참복(黲服)이나 소복(素服)으로 바꾸어 입는 것이 옳다.’ 하였다.” 하였다. ○ 《주자대전》에 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묻기를, ‘기일에 변복하는 것에 대해서 여씨(呂氏)는 증조 이하로부터 각각 등급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주자가 말하기를, ‘당(唐)나라 사람들은 기일에 참복을 입었으나 지금은 일찍이 만들어 두지 않았으니, 단지 흰색의 생견(生絹)으로 만든 삼과 대(帶)에 참건(黲巾)을 착용하기만 하면 된다.’ 하였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나에게는 본디 견(絹)으로 만든 삼과 견으로 만든 건(巾)으로 된 조복(弔服)이 있어 기일이 되면 그것을 입었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참건(黲巾)은 어떻게 만듭니까?’ 하고 물으니, 주자가 말하기를, ‘사(紗)와 견(絹)이 모두 괜찮으나 나는 사로 만든다.’고 하였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참건의 제도에 대해서 물으니, 주자가 말하기를, ‘파복(帕複)과 서로 비슷한데, 네 짝의 띠가 있으며, 마치 복두(幞頭)와 같이 만든다.’ 하였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선생께서는 모부인(母夫人)의 기일에 참흑색(黲黑色)의 베로 만든 삼(衫)을 착용하였는데, 건(巾)도 역시 그러하였다.” 하였다. ○ 정도가(鄭道可)가 묻기를, “담복(禫服)을 한 벌 남겨 두었다가 매번 기일을 만날 적마다 그 복을 입고서 곡을 하고 전을 올리는 예를 행하는 데,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퇴계가 답하기를, “기(忌)라는 것이 비록 종신(終身)의 상이기는 하지만 담제(禫祭)와는 같지 않으니, 담복을 남겨 두어서 종신토록 입는 옷으로 삼는 것은 분명 선왕께서 예를 제정한 본뜻이 아닐 것이다. 증삼(曾參)은 효성스러웠으나 역시 그런 일을 행하였다고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 정도가가 또 묻기를, “기일에 백립(白笠)을 착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퇴계가 답하기를, “아마도 이상할 듯하다.” 하였다. ○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이르기를, “부모님의 기일에는 관직이 있는 자는 호색(縞色)의 모수각(帽垂脚)이나 참색(黲色)의 모수각에 옥색의 단령(團領)과 백포(白布)로 싼 각대(角帶)를 착용하고, 관직이 없는 자는 호색의 입(笠)이나 참색의 입에 옥색의 단령과 백대(白帶)를 착용하며, 모두 흰색의 신발을 신는다. 부인의 경우에는 호색의 피(帔)에 흰색의 상의와 흰색의 치마를 착용한다. 할아버지 이상의 기일에는 관직에 있는 자는 오사모(烏紗帽)에 옥색의 단령과 백포로 싼 각대를 착용하고, 관직이 없는 자는 검은색의 입에 옥색의 단령과 백대를 착용한다. 부인의 경우에는 검은색의 피에 흰색의 상의와 옥색의 치마를 착용한다. 방친(旁親)의 기일에는 관직에 있는 자는 오사모에 옥색의 단령과 오각대(烏角帶)를 착용하고, 관직이 없는 자는 검은색의 입에 옥색의 단령과 검은색의 대(帶)를 착용하며, 부인의 경우에는 단지 화려한 복식만을 제거한다.” 하였다. -호(縞)는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색이다. 참(黲)은 옅은 청흑색으로, 바로 오늘날의 옥색(玉色)이다.-   기제(忌祭)와 묘제(墓祭)에는 구운 고기를 쓴다. [문] 시제를 지낼 적에 삼헌(三獻)에는 각각 구운 고기를 올리는데, 기제와 묘제를 지낼 적에도 역시 그와 같이 합니까? -송준길- [답] 기제를 지낼 적에 삼헌을 하면서도 마땅히 구운 고기를 올려야 하네. 묘제는 비록 시제보다는 격이 낮지만, 《가례》의 본주에 “집에서 제사 지낼 때와 같이 한다.”고 하였으니, 삼헌을 올리면서 구운 고기를 올리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한꺼번에 제사 지낼 때의 축사(祝辭) [문] 고(考)와 비(妣)를 한꺼번에 제사 지낼 경우에는 고사(告辭)와 축사(祝辭)에 한두 마디 말을 더 써넣어야 할 듯합니다. -송준길- [답] 참으로 그렇네. 고사(告辭)의 ‘원휘지신감청(遠諱之辰敢請)’ 아래에 마땅히 ‘현고현비 -할아버지 이상도 모두 같다.- 신주출취(顯考顯妣神主出就)’ 운운이라는 말을 더 써넣고, 축사(祝辭)의 ‘세서천역(歲序遷易)’ 아래에 마땅히 ‘모친 -고(考)와 비(妣)를 칭하는 바에 따른다. 할아버지 이상도 모두 같다.- 휘일부림(某親諱日復臨)’ 운운이라는 말을 더 써넣어야 하네.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나온다.- 휘(諱)의 뜻 [문] 기일을 휘일(諱日)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졸곡이 되면 이름을 휘한다.[卒哭而諱]’고 할 때의 ‘휘(諱)’ 자의 뜻입니까? 졸곡 이전에는 어버이의 이름을 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기(忌)’ 자는 ‘금(禁)’ 자의 뜻으로, 슬픔을 머금고 있어서 다른 일에는 미칠 겨를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네. ‘휘(諱)’ 자는 바로 ‘피(避)’ 자의 뜻으로, 그 뜻이 서로 가까우며, 또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가령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을 경우[如有不可諱]’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죽는 것을 이른다. 죽는 것은 사람들이 능히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가휘(不可諱)라고 한 것이다.” 하였네. 휘일이라고 할 때의 ‘휘’ 자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휘일이라고 할 때의 ‘휘’ 자와 ‘졸곡이휘(卒哭而諱)’라고 할 때의 ‘휘’ 자는 출처는 비록 서로 같지 않으나, 피한다는 뜻은 같은 듯하네. 졸곡이 되어서 이름을 휘한다는 것은 시(諡)로써 칭하고 이름을 칭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이는 신도(神道)로써 대우하는 것이며, 역시 졸곡 전에는 곧장 그 이름을 칭함을 이르는 것은 아니네. 다만 시(諡)를 쓰고 이름을 휘함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네. 기제(忌祭)의 축사(祝辭) [문] 《가례》를 보면 기제의 축문(祝文) 끝 부분에 ‘나머지는 모두 같다.[餘幷同]’고 운운하였는데, ‘청작서수(淸酌庶羞)’ 아래에는 시제(時祭)의 축문에 의거하여 ‘지천세사(祗遷歲事)’라는 글자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소상(小祥)에서는 상사(常事)라고 하는데, ‘상(常)’ 자는 무슨 뜻입니까? 기제에서는 쓸 수가 없는 것입니까? -이이순(李以恂)- [답] 구씨(丘氏)의 축문에 이르기를, ‘공신전헌(恭伸奠獻)’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집에서는 항상 이것을 쓰며, 퇴계 역시 이 말을 쓴다고 하였네. 상사는 《의례》 사우례(士虞禮)와 《예기》 증자문(曾子問)에서 나왔네. 그것을 기제에 쓰는 것은 괜찮을지 모르겠네. ○ 《의례》 사우례의 기(記)에 이르기를, “이 상사에 제물을 올립니다.[薦此常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고문(古文)에는 상(常)이 상(祥)이 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천기(天氣)가 변하면 효자가 그리운 생각이 들어 제사를 지내니, 이것이 그 상사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그 상사를 올립니다.[薦其常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한 해의 상사를 올리는 것이다.” 하였다.   체사(逮事)한 조부모(祖父母)의 기제(忌祭) [문] 고비(考妣)의 기일에는 참으로 거애(擧哀)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조부모 이상의 기일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곡을 하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송준길- [답] 구씨의 《가례의절》에 따라 행해야 할 듯하네. ○ 《가례의절》에 이르기를, “고비 및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조고비(祖考妣)의 경우에는 거애하고, 돌아가신 지 오래된 조고비의 경우에는 거애하지 않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체사한 조고비에 대해서는 거애하는 것이 마땅하네.-   상중(喪中)에 조선(祖先)의 기제를 지낼 경우에는 일헌(一獻)만 하고 유식(侑食)하는 절차는 없다. [문] 삼 년의 상기 안에 조선의 기제를 지낼 적에 《격몽요결》에 의거하여 일헌만 행할 경우에는 역시 유식은 하지 않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유식 역시 성대한 제사를 지낼 때의 예이네. 단지 한 잔만 올릴 경우에는 유식하는 절차는 없네.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의 기제를 지낼 경우에는 고기를 쓴다. [문] 선고(先考)의 상중에 선비(先妣)의 기제를 지낼 경우에는 마땅히 고기를 써야 합니까? -송준길- [답] 신도(神道)는 다름이 있으니 고기를 써도 무방하네. 퇴계가 논한 바가 인정과 예문에 아주 합당하네. 다만 상중에 죽었을 경우에는 이와는 다르네. 무릇 전물(奠物)은 죽은 자가 남겨 놓은 음식을 가지고 전을 올리는 법이네. 막 죽었을 적에 어육(魚肉)으로 전을 올리는 것은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분을 섬기듯이 하는 도가 아니네. 조석으로 올리는 전 및 상식(上食)을 올리면서는 소채(蔬菜)를 쓰다가, 우제(虞祭)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신도로 섬기어 육찬(肉饌)을 쓰는 것이 좋을 듯하네. 지난해에 정도가(鄭道可)에게 물어보니, 그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네. ○ 퇴계가 말하기를, “아들이나 손자가 죽은 날이 마침 조선(祖先)의 휘일(諱日)일 경우 그 기제에 고기를 쓰는 것은,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사람을 섬기듯이 하는 의리로써 미루어 보면 온당치 못한 듯하다. 그러나 신도는 산 사람과는 다르니 고기를 써도 무방할 듯하다. 만약 이치에 있어서 방해된다면 옛사람들이 이미 말해 놓았을 것이다.” 하였다.   종자(宗子)를 장사 지내기 전에는 조선(祖先)의 기제와 묘제는 지자(支子) 역시 지내지 않는다. [문] 종자가 죽어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조고의 기제와 묘제를 상가(喪家)에서는 마땅히 폐하여야 하는데, 다른 집에 살고 있는 개자(介子)가 있어서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면, 이 역시 예에 있어서 어그러지는 것은 아닙니까? 우복(愚伏)은 답하기를,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사(士)의 경우에는 시마복(緦麻服)의 상을 당해서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제사 지내는 대상자가 죽은 자에 대해서 복(服)이 없을 경우에는 제사를 지낸다.[士緦不祭 所祭 於死者無服則祭]’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종자의 상은 바로 조고(祖考)의 정통복(正統服)인 상이니, 장사를 지내지 않았으면 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鄭愚伏)의 설이 옳네. 친척에 대한 복(服)을 입고 있는 중의 제사 지내는 예 [문] 시제(時祭)를 지내려고 하다가 복이 있는 친척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성복(成服)을 하기 전에는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될 듯한바, 참으로 날짜를 새로 점쳐서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기일(忌日)은 바로 아들 된 자의 종신(終身)의 상이니, 대공이나 소공, 시마와 같이 가벼운 복을 입는 상을 만나서도 폐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살펴보건대, 《격몽요결》에서 논한 바가 인정과 예문에 합당하니, 그것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하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대부(大夫)의 제사에 있어서는 정조(鼎俎)를 이미 벌여 놓고 변두(籩豆)를 이미 진설해 놓고서도 예를 이룰 수가 없어서 제사를 중지하는 경우가 있다.[大夫之祭 鼎俎旣陳 籩豆旣設 不得成禮]” 하였다. -위의 문상조(聞喪條)에서 송시열의 질문에 답한 내용에 나온다.- ○ 《격몽요결》에 이르기를, “기년복과 대공복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장사를 지낸 뒤에는 마땅히 평상시와 같이 제사를 지내되, 다만 수조(受胙)하지는 않으며,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시제는 폐해도 되며, 기제와 묘제는 대략 위의 의식과 같이 지낸다. 시마복과 소공복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성복을 하기 전에는 제사를 폐하며, -오복(五服)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성복을 하기 전에는 비록 기제라도 역시 지내지 않는다.- 성복을 한 뒤에는 마땅히 평상시와 같이 제사를 지낸다. -다만 수조하지는 않는다.-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시사(時祀)를 지낼 적에는 마땅히 현관(玄冠)에 소복(素服)과 흑대(黑帶) 차림으로 제사를 지낸다.” 하였다.   [주D-001]안씨가훈(顔氏家訓) :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가 지은 책으로,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치(序致), 교자(敎子), 형제(兄弟) 등 20항목으로 나누어서 입신치가(立身治家)하는 법에 대해 서술하였다. [주D-002]특계(特髻) : 머리털을 묶는 방식의 하나로, 가계(假髻)와 같은 것이다. [주D-003]참건(黲巾) : 원문에는 ‘衫巾’으로 되어 있으나, 《주자대전》 권63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파복(帕複) : 머리카락을 묶는 두건(頭巾)을 말한다. [주D-005]상사(常事) : 일상적인 제사란 뜻이다. [주D-006]체사(逮事) : 체(逮)는 급(及)과 같은 뜻으로, 섬기는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즉 자신의 부모가 자신의 증조부모나 고조부모를 섬기는 것을 자신이 직접 본 경우로, 자신이 직접 뵌 증조부모나 고조부모를 말한다. [주D-007]수조(受胙) : 제사를 지낸 뒤에 제관(祭官)이 번육(膰肉)을 나누어 받는 것을 말한다.     묘제(墓祭) 묘제의 뜻 [문] 묘제의 뜻은 무엇입니까? -강석기- [답] 선유(先儒)들이 논해 놓은 것이 상세하여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통전》에 이르기를, “삼대(三代) 시대 이전에는 묘제가 없었다가 진 시황(秦始皇)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묘의 곁에 침(寢)을 지었다.” 하였다. ○ 《통전》에 또 이르기를, “옛날에는 종자(宗子)가 다른 나라로 가고 서자(庶子)에게 묘(廟)가 없을 경우, 공자(孔子)가 제사를 지내려는 사람의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하여 멀리서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계절에 맞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니 지금의 상묘의(上墓儀)는 혹 의거할 바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신도(神道)는 그윽한 것을 숭상한다. 그러니 묘역(墓域)의 가까운 곳에서 더럽혀서는 안 되는바, 의당 묘역의 남쪽 산문(山門)의 바깥에다가 깨끗한 자리를 마련하여 신위(神位)를 만들고서 평소에 먹는 대로 시찬(時饌)을 진설하여 요제(遙祭)를 지낸다. 한 묘역에 여러 기의 묘소가 있을 경우에는 묘소마다 각각 신위를 만들고 소목(昭穆)의 열을 다르게 하되, 서쪽을 상석(上席)으로 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 주인이 손을 씻고 전작(奠爵)을 올리되 삼헌(三獻)을 올리고서 그치고, 주인 이하가 읍(泣)을 하면서 하직하며, -정령(精靈)에 감모(感慕)되므로 읍(泣)만 있고 곡(哭)은 없는 것이다.- 여찬(餘饌)을 먹는 자들은 다른 곳으로 피해 가, 분묘(墳墓)가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이 효자의 정에 맞는 것이다.” 하였다. ○ 당(唐)나라 시어사(侍御史) 정정칙(鄭正則)의 《사향의(祀享儀)》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묘제를 지낸다는 글이 없었다. 그 뒤에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처음 대업(大業)을 이룰 적에 향리(鄕里)로 출정을 나간 여러 장수들에게 조서를 내려 ‘유사(有司)가 소뢰(少牢)를 제급(題給)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묘소에 배소(拜掃)하면서 향사(享祀)하게 하라.’ 하였다. 그 뒤에 조공(曹公)이 교현(喬玄)의 묘를 지나가면서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글이 아주 비통하였다. 한식(寒食)에 묘제를 지내는 것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의 칙령에 이르기를, “한식에 묘소에 올라가는 것은 예경에 그런 글이 없다. 그런데 근래에는 서로 전하여 점차 풍속으로 되었으니, 묘소에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여 배소례(拜掃禮)와 같이 하되, 음악은 연주하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유자후(柳子厚)가 말하기를, “매년 한식날이 되면 들판과 도로에 사녀(士女)들이 두루 퍼져 제사를 지내는데, 종들과 거지들까지 모두 부모의 묘소에 올라갈 수가 있어서 마의(馬醫)나 농부와 같이 아주 미천한 자의 귀신들까지 자손의 뒤늦은 봉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가례(嘉禮)에서는 야합(野合)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다. 대개 연향(燕享)과 제사는 바로 궁실(宮室) 안에서 하는 일이다. 그런데 후세의 습속은 예를 폐하고 답청(踏靑)을 나가 풀을 깔고 앉아 음식을 먹게 되었으므로 묘소에도 역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예경에서도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단(壇)을 만들고, 아울러 총인(冢人)을 묘제의 시동씨로 삼는 것과 같은 경우는 역시 때때로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예는 아니다.” 하였다. ○ 정자가 또 말하기를, “묘지기는 묘제를 지낼 경우에 시동씨로 삼는다. 구설에 후토(后土)에 제사 지낼 때 시동씨로 삼는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또 말하기를, “분묘에 가서 절하는 것은 10월 1일에 하는데, 서리와 이슬에 느꺼워서 그러는 것이다. 한식이 되면 또 일반적인 예에 따라서 제사를 지내는데, 음식은 집안의 재산 정도에 맞게 한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한식이란 것은, 《주례(周禮)》를 보면 사시(四時)에 불을 바꾸는 제도가 있는데, 계춘(季春) 때에 가장 엄하게 한다. 이는 대화심성(大火心星)이 이때에 지나치게 높이 있으므로 먼저 불을 피우는 것을 금하여 지나치게 치성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미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므로 모름지기 며칠 분의 양식을 마련해 두어야 하며, 이미 먹는 것이 있으므로 다시금 그 조상을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한식과 시월 초하루에 전묘(展墓)하는 것은 역시 초목이 처음으로 자라나고 처음으로 죽는 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가례집설(家禮集說)》에 이르기를, “병주(幷州)의 풍속에,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이 지난 뒤가 개자추(介子推)의 몸이 불에 탄 날이므로 3일 동안 금화(禁火)하고 찬 음식을 먹었는데, 이것을 일러 한식이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이날에 묘소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는바, 장자의 설과는 다르다. 《사문유취(事文類聚)》에도 역시 이 두 가지 설이 있다.- ○ 주자가 말하기를, “묘제에 대해서는 정씨(程氏) 역시 옛날에는 없던 것으로 단지 습속을 인해서 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리에는 해가 되지 않으니, 사시에 지내는 제사보다 간략하게 지내면 괜찮을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묘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해 놓은 글이 없다. 그러나 비록 친진(親盡)하였을 경우에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역시 무방할 듯하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묘제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다만 지금 세속에서 행해진 지 오래되었으므로 폐할 수 없을 듯하다. 또 분묘(墳墓)는 옛사람들의 족장(族葬)과는 같지 않다. 그런즉 한곳에 합하여 하나로 해서 제사를 지내거나 나누어서 멀리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역시 온편치 않을 듯하다. 이러한 따위의 제사는 풍속에 따라서 각각 제사 지내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횡거(橫渠)의 설을 보면, 묘제는 옛 제도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또 스스로 묘제례(墓祭禮)를 찬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주례》에 원래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또 말하기를, “묘제는 옛 제도가 아니다. 비록 《주례》에 ‘묘인(墓人)을 시동씨(尸童氏)로 삼는다.’는 글이 있으나, 이것은 혹 처음에 후토를 제사 지낼 때 그렇게 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시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지금의 풍속에는 모두 그렇게 하며, 또한 크게 해가 되지도 않아서 나라에서도 역시 10월에 상릉(上陵)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였다. ○ 주원양(周元陽)의 《제록(祭錄)》에 이르기를, “혹 다른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어서 제때에 미쳐 선영에 배소(拜掃)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한식에 집에 있으면서 사제(祠祭)를 지내도 괜찮다.” 하였다. ○ 한 위공(韓魏公) 집안의 제식(祭式)을 보면, 한식에 묘소에 올라가서 제사를 지냈으며, 또 10월 1일에도 묘소에 올라가는 의식과 같이 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만약 자신이 갈 수 없으면 친한 자를 보내어 대신 제사 지냈다. ○ 《가례》의 보주(補註)에 이르기를, “남헌(南軒)이 이르기를, ‘묘소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옛 예가 아니다. 그러나 《주례》를 상고해 보면 총인(冢人)이라는 관직이 있어 묘소에 제사를 지낼 적에 항상 시동씨가 된다. 이것은 성대하였던 성주(成周) 시대에도 참으로 또한 묘소에 제사를 지내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예를 제정한 본뜻은 아니지만, 인정에 있어서 차마 그만두지 못하는 바에서 나온 것인데, 의리가 심하게 해로운 데 이르지 않을 경우에는 선왕들께서도 역시 그에 따라서 허락했던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묘제(墓祭)를 지내는 날짜 [문] 《가례》에서 묘제를 반드시 3월에 지낸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정조(正朝)와 한식(寒食)과 단오(端午)와 추석(秋夕)에 지내는 제사는 그 경중에 대해서 말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오늘날의 풍습으로 말을 하면 정조가 중할 듯한데, 《격몽요결》의 경우에는 단지 한식과 추석에만 성대한 제사를 지내고 정조와 단오에는 간단하게 설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강석기- [답]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한 것은, 생각건대 주자 역시 세속의 풍습을 따라서 한 것일 뿐이네. 네 절일(節日)의 제사는 바로 우리나라의 풍습이네. 율곡의 뜻은 봄과 가을을 중하게 여겼으므로 한식과 추석에는 삼헌(三獻)을 올리고 나머지 제사에는 단지 일헌(一獻)만 올린 것이네. 그러나 고례에서는 역시 고거(考據)할 바가 없으니, 단지 인정을 참작해서 예를 정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뿐이네. -가묘(家廟)에서 차례를 아울러 지내는 데 대한 문답(問答)은 위의 속절조(俗節條)에 나온다.- [문] 주자의 가법(家法)을 보면 묘소에 성묘하는 것은 한식 및 10월 초하루에 하였는데, 《가례》에서는 단지 3월 상순에만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묘소에 성묘하는 것도 역시 10월 초하루는 쓸 수가 없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주자가 평상시에 묘제를 행하면서는 한 위공(韓魏公) 집안에서 제사 지내는 법식과 같이 하였는바, 《가례》에서 말한 것과는 과연 같지가 않네. 지금 영남(嶺南) 사람들은 단지 한식 및 10월에만 지낸다고 하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제사를 네 절일에 행해 온 지가 이미 오래되어, 비록 마의(馬醫)나 농부와 같이 하찮은 자의 귀신일지라도 자손들에게 뒤늦게 봉양을 받지 않은 자가 없네. 이것으로 생각해 보면 세속을 따라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네. [문] 일찍이 듣건대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께서는 사명일(四名日)에 삭망(朔望)과 속절(俗節)의 예에 의거하여 제사를 지냈고, 사중월(四仲月)의 경우에는 한결같이 《가례》에 의거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묘소에 올라가는 것은 《가례》 및 한 위공과 주 부자(朱夫子)가 행한 바에 의거하여 3월 상순과 10월 초하루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는 예를 좋아하는 자가 마땅히 준행하여야 할 바인데도 오히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세속의 예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서일 뿐입니다. 이제 옛날의 예를 헤아리고 오늘날의 예를 참고해서 단오와 추석 두 절일에는 사당에서 제사 지냄으로써 여름과 가을의 두 중일(仲日)에 지내는 시제(時祭)를 해당시키고, 정조의 경우에는 삭망에 제사 지내는 예절에 의거하며, 묘소에 올라가는 경우에는 한결같이 한 위공과 주 부자가 한 것을 따라서 한식 및 10월 초하루에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종해- [답] 사명일에 지내는 묘제는 참으로 지나친 것임을 알겠네. 율곡이 한식과 추석에는 성대한 제사를 지내고 정조와 단오에는 간략하게 지내고자 하였는데, 그 뜻이 좋은 듯하네. 다만 조상 때부터 수백 년 동안 행해 온 것을 못난 우리들이 감히 쉽사리 고칠 수는 없네. 보내온 글에서 말한 뜻도 역시 좋으나, 분명하게 단정할 수는 없네. 친진(親盡)이 된 조상의 묘제 [문] 선조(先祖)와 조고(祖考)의 산소가 한 산에 같이 있을 경우에 단지 조고에게만 제사 지내는 것은 미안하기에 선조의 산소에도 대략 술과 과일을 진설하여 정례(情禮)를 펴고 싶습니다. 우복(愚伏)은 말하기를, “찬품(饌品)을 풍성하게 하고 간략하게 하는 구별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한 해에 한 번 제사 지내면 된다.”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단지 조고의 산소에만 제사 지내는 것은 과연 미안한 것이네. 그러나 비록 한 산에 같이 있더라도 시제(時祭) 때 같은 당(堂)에 있으면서 아울러 향사(享祀)받는 것에는 비할 것이 아니니, 단지 일헌(一獻)만 올리는 것이 오히려 아예 지내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네. 우복의 설은 지나치게 고집스러운 것이네. 묘제를 지낼 때의 복색(服色) [문] 율곡의 《격몽요결》에 나오는 묘제의(墓祭儀)를 보면, 주인(主人) 이하가 현관(玄冠)에 소복(素服)과 흑대(黑帶) 차림을 한다고 운운하였습니다. 관직이 있는 자는 반드시 백단령(白團領)을 착용하는데, 품대(品帶)는 착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묘제를 지낼 적에 소복에 흑대 차림을 하는 제도는 다른 데에서는 상고해 볼 곳이 없네. 관직이 있는 자는 반드시 백의(白衣)에 각대(角帶)를 착용하는 것도 역시 옳은지 여부를 모르겠네. 《의례》를 보면 대상(大祥)의 제사에도 길한 쪽으로 가는 복을 입네. 상제(喪祭)를 지낼 적에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데, 더구나 묘제를 지낼 때이겠는가. 내가 관직에 있을 때에는 선인(先人)의 예를 써서 홍의(紅衣)에 품대를 두르고서 제사를 지냈는데, 예에 맞는 것인가의 여부는 모르겠기에, 다시금 예를 아는 자에게 물어서 정하려고 하였네. 묘제를 지낼 때는 진찬(進饌)하고 유식(侑食)하는 절차가 없다. [문] 《가례》를 보면, 모든 제사에는 진찬하는 절차가 초헌(初獻)을 올리기 전에 있으며, 유식하는 절차는 종헌(終獻)을 올린 뒤에 있습니다. 그런데 묘제를 지낼 적에만 이 두 가지 절차가 없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들판에서 행하는 예가 가묘(家廟)에서 행하는 예보다 등급이 낮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집안에서는 《격몽요결》에 의거하여 삼헌을 올리기 전에 어육(魚肉)과 소과(蔬果)를 한꺼번에 올리고 삽시(揷匙)하고 정저(正箸)하는데, 옳은 것인가의 여부는 모르겠네. 묘제의 축사(祝辭) [문] 《격몽요결》에 나오는 묘제의 축사를 보면 정조(正朝)에는 ‘청양재회(靑陽載回)’라 하고, 단오(端午)에는 ‘초목기장(草木旣長)’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보면, 정조에는 ‘세율기경(歲律旣更)’이라 하고, 단오에는 ‘시물창무(時物暢茂)’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쪽의 설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두 설이 서로 간에 아주 다른 것은 아니네. 삼헌(三獻)을 올린 뒤에 엄숙한 자세로 기다린다. [문] 묘제를 지낼 적에는 합문(闔門)하는 절차가 없으니, 또한 엄숙한 자세로 기다린 뒤에 냉수를 올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그렇게 하는 것이 옳네. 여러 위(位)에 대한 제사를 마친 뒤에는 토지(土地)의 신에게 제사 지낸다. [문] 조선(祖先) 및 자손(子孫)이 같은 산에 산소가 있을 경우에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여러 위에 제사 지내기를 마친 뒤에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여러 위에 대한 제사를 마친 뒤에 최고로 존귀한 분 산소의 왼쪽에서 행하는 법이네. ○ 《가례집설》에 이르기를, “묻기를, ‘후토(后土)에 제사 지내는 것이 어찌하여 묘제를 지내기 전에 있지 않습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내가 나의 어버이를 위하여 묘소에 와서 세사(歲事)를 지낼 적에는 정성이 오로지 묘에 가 있다. 그러니 토지신은 자연 뒤에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대개 나의 어버이가 있고서야 바야흐로 이 신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찬(祭饌) [문] 《가례》를 보면 ‘후토에 제사 지낼 때에는 네 개의 소반으로 한다.’ 하여, 단지 소반의 숫자만 말하고 어떤 제물을 쓴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 [답] 윗글의 구찬조(具饌條)의 주에서 이미 “다시금 생선과 고기와 미식(米食)과 면식(麵食)을 각각 하나의 큰 소반에 진설하여 후토에게 제사 지낸다.”고 하였으니, 이곳에서 ‘네 개의 소반으로 한다.’고 한 것과 실로 서로 간에 조응(照應)하는 것이네. 다만 주자가 일찍이 자식들에게 경계시키기 위해 보낸 글에서 이르기를, “묘 앞에 진설하는 것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하였기에, 우리 집에서는 이에 의거하여 행하고자 하네.   [주D-001]조공(曹公) : 조조(曹操)를 이른다. 조조가 한(漢)나라 말기에 삼공(三公)의 지위에 이르렀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02]대화심성(大火心星) :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심수(心宿)에 있는 크게 붉은빛을 내는 별로, 화성(火星)이라고도 한다. [주D-003]금화(禁火) : 불을 피우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춘추 시대 때 진(晉)나라의 충신이었던 개자추(介子推)가 불에 타 죽은 것을 애도하기 위하여 개자추가 죽은 날이 되면 사람들이 신령이 불 피우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면서 불을 피우지 않고 찬밥을 먹었다고 한다. [주D-004]한 위공(韓魏公) : 송(宋)나라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한기는 자가 치규(稚圭)이며, 상주(相州) 사람이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고, 가우(嘉祐) 연간에 정승에 제수되었다.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덕량(德量)과 문장(文章), 정사(政事)와 공업(功業)에 있어서 송나라 제일의 정승으로 칭해진다. [주D-005]사명일(四名日) : 사명절(四名節)과 같은 말로, 설, 단오, 추석, 동지를 말한다.
126    사계전서(沙溪全書)의례문해(疑禮問解)-8 댓글:  조회:2733  추천:0  2012-08-10
사계전서(沙溪全書)제42권 의례문해(疑禮問解)-8 사당(祠堂) 사대(四代)를 제사 지낸다. [문] 삼대(三代)를 제사 지내는 것이 참으로 시왕(時王)의 제도이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의논에는 모두 ‘고조(高祖)는 복(服)이 있으니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퇴계 선생께서는 말하기를, “선비로서 예를 좋아하는 집에서는 고례(古禮)를 따라서 사대를 제사 지내는 것도 역시 참람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사유를 갖추어 선묘(先廟)에 고하되, 조천(祧遷)해 내지는 않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宋浚吉)- [답] 오늘날과 같이 사대를 제사 지내는 것이 비록 고례와 국법에는 어긋나지만, 우리 집에서는 정자와 주자의 설을 따라서 역시 사대를 제사 지내고 있네. 자네 역시 우복(愚伏)의 말에 의거하여 조천해 내지 않아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네. 종가(宗家)에서는 삼대를 제사 지내고, 장방(長房)은 고조를 받들 수 없다. [문] 고조를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저희 집안에서 삼대를 제사 지내는 것은 선대 때부터 이미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고조의 신주를 종자(宗子)의 집에서는 이미 친진(親盡)이 되어 체천(遞遷)하였으며, 선고(先考)께서 최장방(最長房)으로서 제사를 받들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만약 사대를 제사 지내고자 하여 그대로 받들면서 체천하지 않는다면, 마치 탈종(奪宗)하는 것만 같아서 실로 아주 온편치 않은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미 종가에서는 체천하였더라도 사대를 제사 지내는 것이 본디 예의 뜻에 합치되니, 이러한 사유를 갖추어 고하고서 그대로 받들면서 제사 지내도 불가한 것이 되지는 않습니까? 곡절을 상세히 헤아려서 다시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종가와 더불어 서로 어긋나게 되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다시금 여쭙는 바입니다. -송준길- [답] 자네가 이미 종자가 아니고 종손(宗孫)이 따로 있으니 과연 마음대로 단정해서는 안 되는바, 그대로 신주를 받들면서 제사 지내기는 어려울 것 같네.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울 경우에도 장자(長子)를 폐하고 똑똑한 차자(次子)를 세워서는 안 된다. [문] 적자(嫡子)가 없고 단지 첩(妾) 소생의 두 아들만 있는데, 장자는 어리석고 패만스러워 제사를 받들 수가 없고 차자는 조금 똑똑하여서 유명(遺命)을 내려 제사를 받들게 하였는데, 미처 성문(成文)하지 못하고서 죽었을 경우는 마땅히 유명에 따라서 똑똑한 자를 택해 차자에게 전해야 합니까? 아니면 마땅히 예경에 의거하여 장자에게 전해야 합니까? -이상형(李尙馨)- [답] 장자를 폐하고 차자를 세우는 것은 비록 아버지의 문기(文記)가 있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유명만 있는 경우이겠는가. 장서손(長庶孫)이 있으면 차서자(次庶子)가 제사를 받들어서는 안 된다. [문] 적자가 없고 단지 다른 비첩(婢妾)에게서 난 아들 둘만 있는데, 장자가 종량(從良)되었으나 먼저 죽고 차자는 아직 속신(贖身)되지 못하였습니다. 부득이 누군가를 택하여 제사를 받들게 할 경우 마땅히 장자의 아들에게 전해야 합니까, 아니면 생존한 자에게 전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들 가운데 똑똑한 자를 택하여 취사선택하는 것은 인정과 예문에 있어서 어떻습니까? -이상형- [답] 장자의 아들 및 차자가 모두 종량(從良)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장자의 아들이 마땅히 제사를 받들어야지, 우열을 가지고 취사선택해서는 안 되네. 새벽에 배알하면서는 분향(焚香)을 한다. [문] 《가례》를 보면 새벽에 배알하면서는 대문의 안에서 분향을 하고 재배(再拜)하는데, 《격몽요결》의 경우에는 분향하는 절차가 없습니다. 평소에 어느 쪽을 따라서 행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서의(書儀)》와 《격몽요결》에는 모두 분향하는 절차가 없으나, 우리 집에서는 《가례》를 따라서 항상 분향을 하네. 네 절일(節日)의 묘제(墓祭)에는 아울러 가묘(家廟)에 참배한다. [문] 정조(正朝)와 한식(寒食)과 중오(重午)와 추석(秋夕) 등에 지내는 절사(節祀)를 세속에서는 모두 분묘에서 행하고 가묘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데, 이것은 정례(情禮)에 있어서 온당치 못합니다. 정조와 중오에는 가묘에서 제사 지내고, 한식과 추석에는 분묘에서 배소(拜掃)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상형- [답] 우리 집에서는 사시의 묘제를 지내는 날 아침에 가묘에서 간략하게 전(奠)을 올리네. 중원절(中元節)에는 소찬(素饌)을 쓰지 않는다. [문] 중원(中元)은 바로 7월 15일로, 오늘날의 세속(世俗)에서 숭상하는 날일 뿐만 아니라 《가례》의 속절(俗節)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한 위공(韓魏公)은 부도(浮屠)의 법을 써서 소제(素祭)를 지냈는데, 주자는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송준길- [답] 주자가 말한 ‘7월 15일에는 쓰지 않았다.’라는 것은, 소찬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네. 새 물품은 얻는 대로 즉시 천신(薦新)한다. [문] 천신하는 한 절목은, 《가례》의 초상을 치르는 예에 보면, 새 물품이 있으면 천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효자의 마음은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사람을 섬기듯이 하여 그 어버이를 잊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례》 사당장(祠堂章)을 보면 단지 초상(初喪)의 한 절목에 의거하여 그를 인해 천신하는 예를 하는데, 혹 새 물품이 있으면 각 물품마다 반드시 천신한다고 하였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가묘(家廟)에서의 예는 궤연(几筵)에서의 예와는 다르니 마땅히 오곡(五穀) 가운데에서 한두 가지 맛난 것과 채소나 과일 가운데에서 두세 가지 물품으로 한다. 예경에 봄에는 부추를 천신한다는 따위의 말이 있는데, 이는 바로 제사 지낼 적에 천신하는 것이다. 하찮은 물품을 다 천신할 수는 없다. 사시(四時)마다 각각 제사가 있으니 제사 지낼 때에 써도 무방하다.”고 합니다. 두 가지 뜻 가운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이상형- [답] 천신하는 물품은 시절에 따라 곧바로 천신해야지, 어찌 사시의 제사를 지낼 때까지 오래도록 기다리겠는가. 삭망(朔望)의 전에 올리면 되네. 만약 삭망이 조금 멀면 곧바로 천신해도 되네. 봄보리, 올벼, 오이, 가지, 수박, 참외, 청어, 조기 등의 물품은 철에 따라 얻는 대로 천신하며, 희귀하거나 먼 곳에서 나는 물품은 평상시에 늘 얻을 수 있는 물품이 아니니, 아마도 천신해서는 안 될 듯하네. 이 뜻이 어떨지 모르겠네. 보리와 밀과 햅쌀은 천신한다. [문] 《가례》를 보면 천신하는 예는 별도로 한 가지 의절입니다. 그러나 오곡과 같이 밥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상식(上食)을 올릴 적에 밥을 지어서 천신하며, 채소나 과일 따위에 이르러서도 역시 조석전(朝夕奠) 및 상식을 올릴 때 겸하여 천신하는 것도 역시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찍이 듣건대 구봉(龜峯)의 집에서는 천신하는 물품의 종류를 정해 놓은 항식(恒式)이 있었다고 하는데, 상세한 것을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오곡을 어찌 하나하나 모두 천신할 수 있겠는가. 보리나 밀 및 햅쌀과 같은 것은 밥을 짓거나 혹은 떡을 만들어서 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네. 구봉의 집에서 천신한 물품의 종류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어 본 바가 없네. 사당에 불이 나 새로 신주(神主)를 만들 적에는 예전의 신주는 땅에 파묻는다. [문] 집에 불이 나 가묘(家廟)에까지 미쳤을 경우에는 신주를 새로 만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신주가 욕을 당하여 불결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마땅히 깨끗하게 씻어서 개제(改題)해야 합니까? 만약 새로 만들 경우에는 제주(題主)한 뒤에 예전의 신주는 묘소에 파묻어야 합니까? -송준길- [답] 만약 부득이 신주를 새로 만들 경우에는 예전의 신주는 묘소에 파묻는 것이 좋을 듯하네. 난리가 났을 때에는 묘주(廟主)를 받들고 가거나 혹은 임시로 파묻는다. [문] 난리를 만났을 경우에 가묘를 조처함에 있어서 끝내 좋은 방도를 얻지 못하겠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신도(神道)는 고요한 것을 좋아하므로 떠돌아다니는 중에는 받들고 가서는 안 된다. 그러니 묘소에 파묻는 것도 역시 한가지 방도이다.” 합니다. 그런데 다만 생각건대, 몇 년이 지난 뒤에는 다 썩어 나무는 문드러지고 글자의 획은 모양새를 이루지 못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난리를 겪어 본 자들이 상세히 아는 바입니다. 그러니 한 상자 안에 잘 봉안하여 지거나 이고 가 직접 자신이 보호하면서 머물러 있는 곳에서 받들어 보호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온편치 못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썩어 버리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기야 하겠습니까. 만약 불행하여서 온 집안이 화가 미치는 것을 면치 못할 경우에는, 또 다른 것을 어찌 논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삼 년의 상기(喪期) 동안에는 궤연의 경우 결단코 파묻어 두고서 혼자만 몸을 피해 가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더욱더 받들고 가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산 사람이 먹는 것을 가지고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올리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가묘를 조처하는 도리가 아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원(書院)과 향교(鄕校)에 있는 위판(位版)에 이르러서는, 파묻어서 안치해야 한다는 의논 역시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가(私家)의 신주와는 사체가 다른바, 아마도 쉽사리 단정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이른바 ‘신도는 고요한 것을 좋아하니 신주를 받들고 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오활하고 어리석은 자의 말이네. 평소에 벼슬살이를 하기 위해 먼 지방에 가는 자도 역시 신주를 받들고 가는데, 유독 난리를 만나 떠도는 중에만 어찌 받들고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집에서는 정유년의 왜란(倭亂) 때 해서(海西) 지방으로 피난하면서 신주를 받들고 갔는데, 함을 제거하고 신주만 상자에 넣어서 말 등에 실어 봉안하고 가서 잘 보존할 수가 있었네. 그리고 지난해에 오랑캐들이 가까이까지 내려왔을 적에는 내가 세자를 따라서 전주(全州)로 갔는데, 체찰사가 오랑캐들이 임진(臨津)까지 내려왔다고 잘못 듣고는 거제도(巨濟島)로 옮겨가 장차 배를 타고 갈 계획을 하였네. 그때 큰아이는 군대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달려갔고, 단지 나이 어린아이만 집에 있으면서 온 가족을 거느리고 금산(錦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영남(嶺南)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어느 곳에 머물러 있게 될지 알지 못하여 도로에 내버리는 걱정이 있을까 걱정스러웠네. 이에 그 아이로 하여금 커다란 궤짝을 만들어 그 안에 신주를 담아서 사당 안의 땅에 파묻게 하였네. 그 뒤 난리가 잠잠해지고 나서 한 달도 채 못되어 곧바로 도로 꺼내어 봉안하였네. 지금 만약 또다시 변란이 있게 된다면 가게 되는 곳으로 봉안하고 갈 뿐이네. 삼 년의 상기 동안에는 궤연의 경우 아침저녁으로 상식하는 예가 있으니, 더욱더 파묻어 두어서는 안 되네. 향교와 서원의 위판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똑같이 논해서는 안 되네.   [주D-001]이상형(李尙馨) : 1585~164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덕선(德善)이며, 호는 천묵재(天默齋)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인조 때 성균관 학록(成均館學錄)이 되었다가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 병조 정랑, 옥과 현감(玉果縣監), 홍문관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경서(經書)에 정통하였고 음양(陰陽), 지리(地理)에도 밝았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뛰어났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남원(南原)의 요계서원(蓼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천묵재유고(天默齋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주D-002]종량(從良) : 아버지가 양인(良人)이고 어머니가 천인(賤人)일 때, 그 자식이 아버지의 신분을 좇아 양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주D-003]속신(贖身) : 노비가 대역(代役)을 세우고 양민(良民)이 되는 것으로, 속량(贖良)이라고도 한다. [주D-004]중원절(中元節) :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 가운데 하나로, 음력 7월 보름의 백중(百中)을 말한다. 백종일(百種日), 백중절(百中節),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우리 민속에서는 이날 일손을 놓고 서로 모여 음식을 차려 놓고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도가에서는 1월 15일을 상원(上元)이라 하여 천관(天官)이 복을 내리는 때라고 하고, 7월 15일을 중원(中元)이라고 하여 지관(地官)이 죄를 구해 주는 날이라고 하며, 10월 15일을 하원(下元)이라고 하여 수관(水官)이 액운을 막아 주는 날이라고 한다.     초종(初終) 조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아버지에게 폐질(廢疾)이 있을 경우에는 대신 궤전(饋奠)을 올린다. [문] 조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주가 실성을 하였거나 폐질을 앓아 집상(執喪)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적손(嫡孫)이 대신 집상을 해서는 안 됩니까? -이상형(李尙馨)- [답] 조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 적자(嫡子)에게 병이 있어서 집상할 수 없는 경우는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상에 아들인 광종(光宗)이 병이 있어 집상할 수 없어서 조여우(趙汝愚)가 영종(寧宗)이 적손이라는 이유로 후사로 세워 삼년복을 입게 한 것과 같은 점이 있네. 그러나 사가(私家)의 경우에는 제왕가(帝王家)의 경우와는 다르니, 단지 대신 궤전을 올리게 할 뿐 삼년복을 입게 해서는 안 되네.     성복(成服) 아버지의 상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아들이 아버지 대신 복을 입는다. [문] 전일의 문목(問目)에 대한 답 가운데 “《예기》 상복소기를 보면, ‘빈(殯)을 하지 않았으면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이 있다.”고 하였는데, 본편을 두루 상고해 보았으나,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과연 어느 편에 나오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통전(通典)》에 실려 있는 하순(賀循)의 설에 나오는데, 나 역시 《의례》 상복(喪服)의 기(記)와 전(傳)을 상고해 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기에 의심하고 있었네. 모르겠네만, 두우(杜佑)가 《통전》을 지으면서 하순의 본집(本集)과 《진서(晉書)》의 예지(禮志)를 보고서 기록한 것이 아닌가 싶네. 이른바 ‘아버지가 죽어서 아직 빈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에 대해 내가 일찍부터 의심하고 있었네. 승중(承重)하여 할아버지를 위한 복을 입으면서 단지 기년복만 입을 경우에는 대상(大祥)이 없으며 또 담제(禫祭)도 지내지 못하여 마치 후사가 없는 자의 상처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옳겠는가? 적손(嫡孫)이 대신 상을 주관할 경우에는 그 아내는 삼년복을 입는다. [문] 조부모의 상에 적손이 아들 대신 상을 주관하는데, 대신 상을 주관하는 자의 아내가 삼년상을 대신 행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 합당한 것입니까? [답] 대신 상을 주관하는 자의 아내는 마땅히 삼년상을 대신 행하여야 하네. 고례를 보면, 며느리는 시부모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였네. 그런데 송(宋)나라 태조조(太祖朝)에 위인포(魏仁浦) 등이 의논하기를, “남편이 참최복을 입고 있는데 아내가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은 슬픔과 즐거움을 같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체이니 삼년복을 입는 것으로 올려야 합니다.”고 하였네. 그러므로 《가례》에서는 삼년상으로 한 것이네. 뒤늦게 성복(成服)하는 자는 달수가 다 찬 뒤에 별도로 전(奠)을 올리고서 제복(除服)한다. [문] 친상(親喪)의 소식을 몇 달 뒤에 들었을 경우에는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같은 때에 제복할 수 없으므로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를 재차 지내야 한다는 설이 있는데, 주상(主喪)하는 자의 경우에는 참으로 그렇게 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비록 제자(諸子)라고 하더라도 역시 재차 연제와 상제를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축사(祝辭)의 말을 만드는 것 역시 곤란할 듯합니다. 만약 13개월이 되어서 삭전(朔奠)을 올릴 경우에는 고하는 말과 변복(變服)하는 절차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형제간에 서로 다른 상복을 입고서 연제와 상제를 각자 지내는 것도 예에 있어서 큰 변례(變禮)입니다. 만약 상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수삼 개월이나 되도록 한참이 지난 뒤에 들었을 경우에는 부득불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두 달 뒤에 들었다면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같은 때에 변복하는 것도 역시 예에 어긋나는 데에는 이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송준길- [답] 한 달 안에 뒤늦게 성복한 경우에는 비록 기년(期年)이 되지 않았더라도 마땅히 형제와 같이 연제와 상제를 지내야 하네. 그러나 만약 몇 달이 지난 뒤에 성복하였다면 별도로 전을 올리는 것이 마땅하네. 그리고 비록 제자라고 하더라도 장자(長子)의 이름으로 축사를 써서 사유를 고하고 지내야 하네. 수양(收養)아들이 수양부모를 위하여 입는 복 [문] 어떤 족인(族人)이 세 살 때부터 종모(從母)의 집에 수양아들로 가서 평상시에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 은혜와 의리가 아주 중한데, 그 종모의 남편의 상을 당해서는 복제(服制)를 마땅히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우리나라 국전(國典)의 양자(養子)의 예에 의거하여 자최 삼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르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기를, ‘세 살 전에 거두어서 기른 경우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한 살이나 두 살 된 어린아이를 이르는 것이지, 세 살 된 아이까지 아울러 가리켜서 말한 것은 아닌 듯하다. 더구나 관청에 문서를 올려서 부자간이라는 명분을 정하지도 않았으며, 또 그 사람의 제사도 받들지 않았으니, 한갓 거두어서 길러 준 은혜만 가지고서 삼년상을 치르기까지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듯하다. 그러니 심상(心喪)으로 기년복만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뜻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세 살 전’이라고 하는 것은 세 살 이전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례》 팔모도(八母圖)의 양모조(養母條) 아래에는 ‘삼세이하(三歲以下)’라고 하여 중간에 하나의 ‘이(以)’ 자를 더 써 놓았으니, 이것으로써 저것을 참고해 보면 글의 뜻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나라의 제도와 선유(先儒)들의 설에 모두 실려 있으니,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예라는 것은 인정을 말미암아서 제정하는 것이니 거두어서 길러 준 은혜가 친부모와 같은 점이 있을 경우에는 부득불 부모로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현인이 이런 경우에는 삼년상을 입는 제도로 정하여 은혜에 보답하는 바탕으로 삼게 한 것입니다. 관청에 문서를 올려 입안(立案)한 것과 제사를 받들었는가의 여부는 논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다만 이 사람에게는 자기를 낳아 준 친부모가 있으니, 기년복을 입고서 제복(除服)한 다음에 심상으로 삼 년의 상기를 마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만, 제복하지 않은 사이 평상시 출입할 적에 입는 복은 단지 백의(白衣)에 백대(白帶)와 초립(草笠) 차림을 하여, 기년복을 입는 사람과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후사로 간 자가 본생부모(本生父母)를 위하여 입는 복과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도 아니면 한결같이 부모의 상을 당한 사람과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만약 제사를 받들 경우에는 속호(屬號)와 방제(傍題)를 어떻게 쓰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세 살 전에 거두어서 기른 경우라는 것은 한 살이나 두 살 된 어린아이를 이르는 것이지, 세 살 된 아이를 이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은, 그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네. 그리고 거두어서 길러 준 은혜는 갚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니, 관청에 고해서 입안했는지의 여부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네. 다만 삼 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지나치게 중한 듯하네. 그러니 기년 동안 입은 뒤에 최복을 벗고서 백의에 백대와 흑초립(黑草笠) 차림을 하고 심상을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속호 및 방제는 고례에 근거로 삼을 바가 없어서 감히 말하지 못하겠네.   [주D-001]통전(通典)에 …… 설 : 《통전》 권97에 “하순(賀循)의 상복기(喪服記)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어서 아직 빈(殯)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으며, 이미 빈을 한 뒤에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조석곡전(朝夕哭奠) 상식(上食) 궤연(几筵)을 벗어나 있을 경우에는 삭망(朔望)에 조석으로 바라보면서 곡한다. [문] 상을 당한 자가 병이 들어서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는 것을 직접하지 못할 경우, 비록 침방(寢房)에 있더라도 억지로 병을 무릅쓰고 궤연을 바라보면서 곡하는데, 이것은 인정에 있어서는 그렇게 해야 하나 예모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궤연을 벗어나거나 묘소나 여막을 떠나가서 다른 곳에 가 있을 경우에는 단지 삭망에 바라보고서 곡만 할 뿐입니까? 주자는 상중에 한천정사(寒泉精舍)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예를 행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형- [답] 상을 당한 사람이 병이 있어서 상식을 올리는 데 참여할 수 없을 경우에 침방에 있으면서 곡읍(哭泣)하는가의 여부를 어떻게 예로 정해 놓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궤연을 벗어나거나 묘소와 여막을 떠나가 있을 경우에는, 만약 조금 멀어서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올라갈 수 없으면 바라보면서 곡을 해도 괜찮을 것 같으며, 아주 먼 곳에 있으면 곡읍할 장소가 없어서 형세상 예를 행할 수가 없을 것이네. 주자가 상중에 한천정사에 거처하고 있을 때 예를 행한 절목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네. 단지 삭망에는 돌아와서 궤연에 전을 올렸다는 글만 있을 뿐이네. 삼 년의 상기 안에는 생신(生辰)에 전(奠)을 올린다. [문] 선고(先考)의 생일이 마침 계추(季秋)에 있어서 삼 년의 상기를 마친 다음에는 그날을 인하여 예제(禰祭)를 지내려고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삼 년의 상기 안에 설향(設享)할 경우에는 역시 예법에 맞지 않는 짓을 한다는 기롱을 면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송준길- [답] 궤연에서 하는 것은 사당(祠堂)에서 하는 것과는 다르니, 삭전례(朔奠禮)로 설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제례(祭禮)가 아니니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네. 삼 년의 상기 안에는 삭망과 속절(俗節)에 먼저 궤연에 예를 올린 뒤에 가묘에 예를 올린다. [문] 삼 년의 상기 안에는 중한 바가 궤연에 있습니다. 그러니 삭망이나 속절 등에 올리는 예를 모두 궤연에 먼저 올리고 난 뒤에 가묘에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그렇게 해야 할 듯하네. 상식(上食)을 올릴 적에는 신령을 대신하여 지내는 제사가 없다. [문] 산 사람은 식사를 할 때 반드시 제사를 지내니, 삼 년의 상기 안에 조석으로 상식을 올릴 때에도 마땅히 신령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절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예에 써 놓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신령을 대신하여 지내는 제사는 바로 제사 지낼 때의 예이네.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는 경우에는 지내지 말아야 하네. 상식을 올릴 때에는 촛불을 켜 놓는다. [문] 삼 년의 상기 안에 조석으로 상식을 올릴 경우, 예경을 보면 촛불을 켜 놓는 절차가 없는데, 전부의(奠賻儀)에는 촛불을 켜 놓는다는 글이 있습니다. 그리고 퇴계 선생 역시 말하기를, “상식을 올릴 때에 촛불을 켜 놓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은데, 가난한 집에서 납촉(蠟燭)을 계속해서 쓰기는 실로 어려우니, 등잔을 대신 켜 놓아도 무방하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준행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답] 신의경(申義慶) 및 송 여성(宋礪城)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네. ○ 신의경이 말하기를,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임금은 당 위에 촛불 두 개를 켜 놓고 당 아래에 촛불 두 개를 켜 놓는다. 대부는 당 위에 촛불 하나를 켜 놓고 당 아래에 촛불 두 개를 켜 놓는다. 사는 당 위에 촛불 하나를 켜 놓는다.[君堂上二燭 下二燭 大夫堂上一燭 下二燭 士堂上一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상(喪)이 있으면 마당 한가운데에 밤새도록 횃불을 켜 놓았다가 새벽이 되면 횃불을 끄는데, 햇빛이 밝지 않으므로 촛불을 켜 놓아야만 제찬(祭饌)을 비출 수가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납촉이 없었는바, 횃불[火炬]을 일러 촉(燭)이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촉을 잡은 자가 찬(饌)의 동쪽에서 기다린다.[燭俟于饌東]’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촉(燭)은 조(照)이다. 찬(饌)은 동당(東堂)의 아래에 진설한 찬이다. 촉을 쓰는 것은, 당(堂)은 비록 밝더라도 실(室)은 오히려 어두우므로 쓰는 것이다. 횃불이 땅에 있는 것은 요(燎)라고 하고, 손으로 잡은 것은 촉이라고 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앞서 소렴(小斂)에서 방(房)에 옷을 진설할 적에 촉이 없었던 것은, 호(戶)에 가까운 곳에서 하여 밝았기 때문에 촉이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의례》 사상례에는 이르기를, ‘이에 전을 올리는데, 집사가 촉을 잡고서 조계를 통하여 올라간다.[乃奠燭升自阼階]’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촉을 잡은 자가 먼저 당에 올라가 실 안을 밝힌다. 질명(質明)이 되면 촛불을 끈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계빈(啓殯) 때부터 이때에 이를 때까지는 빈궁(殯宮)에 있거나 길에 있거나 조묘(祖廟)에 있거나 할 적에 모두 두 개의 촛불이 있어서 밝힌다. 이는 이른 시간에 하는 것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제 날이 밝을 때에 이르렀으므로 촛불을 끄는 것이다.’ 하였다. 《주례》 추관(秋官)에는 이르기를, ‘사훤씨(司烜氏)는 부수(夫遂)를 가지고 해에서 명화(明火)를 취하여 이로써 제사에 밝은 촉을 지공(支供)하는 일을 관장한다.[司烜氏掌以夫遂 取明火於日 共祭祀之明燭]’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부수는 양수(陽遂)이다. 해에서 불을 취하는 것은 양의 깨끗한 기운을 얻고자 해서이다. 촉을 밝히는 것은 이로써 찬(饌)을 진설하는 것을 비추고자 해서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제사를 지내는 날 아침에 찬을 당(堂)의 동쪽에 진설하는데, 날이 밝지 않았으므로 촉을 가지고 비추면서 한다.’ 하였다. 《예기》 예기(禮器)에는 이르기를, ‘자로(子路)가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 되어 제사를 지낼 때에는 날이 밝기 전부터 시작하여서 날이 어둡도록 끝나지 않아 촉을 밝히고 계속하였다.[子路爲季氏宰 逮暗而祭 日不足 繼之以燭]’ 하였다. 이상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서 촛불을 쓰는 의절이다. 그리고 《가례》에서는 촛불을 쓰는 의절을 말해 놓지 않았는데, 유독 조문객이 왔을 적에만 특별히 설치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귀신은 그윽하고 어두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빈소(殯所)에는 반드시 휘장을 설치하여 가려 놓는다. 조문객이 바깥으로부터 들어와서 전을 올릴 적에는 비록 아침이나 한낮이라 하더라도 촛불을 켜서 밝게 비추지 않을 경우에는 찬물(饌物)을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특별히 설치해 놓고서 기다리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면 이른바 ‘연촉(燃燭)’이라고 할 때의 촉은 바로 조문객이 가지고 와서 전(奠)으로 올리는 촉인데, 죽은 자의 혼령이 알게 하고자 하여 아울러 전장(奠狀)까지 읽어서 고하는 것인가? 또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보면, 대부와 사와 서인의 상에 분묘를 조성하는 일을 이미 마친 뒤에는 별도로 광(壙)을 덮은 데 대한 전을 진설하는데, 대낮에 무덤가에서 촛불을 켜 놓고서 전을 올린다. 이것이 우리 동방에서 묘제(墓祭)를 지낼 적에 촛불을 쓴 시초이다. 그러나 그 뜻을 잘 모르겠다. 이제 우선은 예경의 설을 따라서 이른 새벽이면 촛불을 켜 놓고 지내고 이미 밝았으면 촛불을 끄고 지내면 될 것이다.” 하였다. ○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말하기를, “《가례》를 보면 크고 작은 제사에 모두 초를 쓰는 의절이 없는데, 《의례》에는 ‘날이 밝으면 촛불을 끈다.’는 글이 있고, 《예기》에는 ‘날이 어둡도록 끝나지 않아 촛불을 밝히고서 계속하였다.’는 말이 있다. 이것으로 보면 촛불을 쓰는 것은 단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이지, 귀신을 섬기는 도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오직 전례(奠禮)에서만은 반드시 향촉(香燭)을 쓰는 것은 어째서인가? 생각건대 한집안의 사람들은 정신이 서로 접함에 있어서 참으로 다른 것을 벌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바깥에서 온 사람의 경우에는 모름지기 밝은 빛과 그슬어 태우는 연기의 도움에 의지하여야만 유명(幽明)과 유무(有無)의 즈음에 통할 수가 있는 법이다. 이것이 촛불을 쓰는 이유인 듯하다. 사리에 통달한 자와 끝까지 토론해 볼 생각을 하였으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또 보건대, 대낮에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면서도 역시 반드시 초를 갖추면서 마치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고 있다. 무릇 산과 들판은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니 짤막한 불꽃이 어찌 바람을 견뎌 내어 오래도록 꺼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촛불을 미처 켜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찬품(饌品)을 이미 진설해 놓고 밥과 국이 이미 다 식었는데도 감히 술잔을 올리지 못하고 혹 갓을 벗어 덮어 놓기도 하고 혹 보자기를 펼쳐서 휘장처럼 쳐 놓기도 하느라 분주하게 오가면서 촛불을 켜 보지만 켜졌다가는 금방 꺼져서 끝내 예를 이루지 못하게 되는바, 이 점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피우(避寓)하는 중에는 상식을 올린다. [문]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만약 집에 전염병이 돌아 형세상 다른 곳으로 가서 피해 있을 경우에는 조석으로 올리는 상식은 어떻게 합니까? 피우해 있는 곳에서 궤연을 설치하고서 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신주를 받들고 나가는 것은 온편치 않아서 궤연을 설치할 수가 없다면 대충 밥과 국을 진설해 놓고 지방(紙榜)을 써 놓고 상식을 올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온편치 않다고 여기고는 그 궤연을 떠날 때 탁자를 놓고 국수와 떡과 과일과 술을 진설해 놓고 갔는데, 이 뜻이 어떻습니까? -이상형- [답] 역질(疫疾)이 발생해 부득이 피해 나가 있을 경우에는 신주를 받들고 가 외방(外方)에다가 궤연을 설치해 놓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는 것이 좋을 듯하네. 지방을 써 놓고 상식을 올리는 것과 어떤 사람이 한 일은 근거가 없는 것이네.   [주D-001]부수(夫遂) : 양수(陽遂)와 같은 말로, 오늘날의 볼록렌즈처럼 햇빛을 한곳으로 모아 불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든 거울을 말한다. [주D-002]피우(避寓) : 역질(疫疾) 등이 발생하였을 경우에 이를 피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가서 임시로 사는 것을 말한다.     분상(奔喪) 분상할 수 없을 경우에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성복(成服)한다. [문] 왕명을 받들고 중국에 들어가 있거나 혹은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거나 혹은 변란을 만났거나 혹은 풍랑에 막혀서 제때에 미쳐서 분상할 수 없을 경우, 성복 등의 예절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상형- [답] 외방에 나가 있어서 곧바로 분상할 수 없을 경우에는 마땅히 있는 곳에서 성복해야 하네.     치장(治葬)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 지낼 적에는 허위(虛位)를 설치한다. [문] 후토(后土)에 제사 지낼 적에는 신위(神位)를 설치한다고 한 것은, 단지 허위를 설치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의자에 설치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단지 허위만을 설치할 뿐이네. 예경에 의자나 탁자에 설치한다고 말하지 않았네. 탄격(炭隔)과 유회(油灰)의 변(辨) [문] 《가례》를 보면 회격(灰隔)을 만들 적에 숯을 쓴다는 글이 있는데, 지금 세속에서는 쓰는 자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선대감(先大監)을 장사 지낼 적에 유회를 썼다고 하는데, 어디에 쓰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탄격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쓰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공용(功用)이 어떠한지는 모르겠네. 지난해에 선묘(先墓)를 조성할 적에 외곽(外廓)과 삼물회(三物灰) 사이에 유회를 많이 썼으며, 또 외곽의 천개(天蓋) 위에 삼물회를 단단하게 쌓을 수 없을까 염려되어 다시 많은 양의 유회를 쓰고는 사람들을 시켜서 밟게 하였네. 장사를 치를 적에는 소찬(素饌)으로 손님들을 대접한다. [문] 경산 구씨(瓊山丘氏)가 이르기를, “장사 지낼 적에 친척이나 손님이 오면 먼 길을 온 사람에 대해서는 복(服)이 없는 친족으로 하여금 소찬을 차려서 대접하게 하는 것은 역시 해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전에 듣건대 한강(寒岡) 정도가(鄭道可)를 장사 지낼 때에는 조문객이 3, 4백 명이나 왔고, 최명룡(崔命龍)을 장사 지낼 적에도 역시 수백 명이 왔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경우에는 비록 대접하고자 하더라도 상가(喪家)의 재력으로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니, 일률적으로 논해서는 안 되네.   [주D-001]유회(油灰) : 오동나무 기름에 석회를 개어서 만든 것으로, 서로 잇댄 부분의 틈을 메우거나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데 사용한다. [주D-002]회격(灰隔) : 관(棺)의 주위에다가 석회(石灰)를 채워 넣어서 단단한 벽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D-003]삼물회(三物灰) : 관의 주위에 벌레가 들어가는 것을 막고 도굴을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넣는 석회, 가는 모래, 황토를 말한다. [주D-004]천개(天蓋) : 관(棺)을 덮는 뚜껑 부분을 말한다.     제주(題主) 아들의 상을 당했을 경우에 제주하는 것과 축문을 쓰는 법 [문] 아들의 상에 아버지가 상주(喪主)가 되었을 경우에는 제주하는 것과 우제(虞祭)와 졸곡(卒哭) 등의 축사에 마땅히 ‘부고우(父告于)’라고 써야 합니까? ‘부(父)’ 자 말고 달리 쓸 만한 온당하고 합당한 글자가 있습니까? 그리고 제주할 적에는 마땅히 ‘자모관모신주(子某官某神主)’라고 써야 합니까? -이상형- [답] 아들의 상에 아버지가 상주가 되었을 경우에는 축사에 ‘부고우자모(父告于子某)’라고 하여 아들의 이름을 곧장 쓰는 것이 마땅하네. 남편의 상에는 남편의 동생이나 조카로 하여금 축사(祝辭)의 주인이 되게 한다. [문] 남편의 상에는 아내가 상주가 되니 고하는 축문에는 ‘처모씨(妻某氏)’라고 쓰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아내가 병이 있어 광(壙)에 임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남편의 동생이나 조카 및 사위가 대신 고합니까? 이들마저 모두 없을 경우에는 대신 제사하는 것과 고하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상형- [답] 남편의 상에는 아내가 비록 광에 임하더라도 만약 동생이나 조카 및 사위가 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축문을 쓰는 것이 마땅하며, 없을 경우에는 다른 친한 바의 사람으로 고하게 해야 하네. 제부(弟婦)의 신주에 제주하는 예 [문] 어떤 사람이 죽은 동생 부부의 상에 상주가 되었을 경우에 그 동생의 신주에는 ‘망제(亡弟)’라고 쓰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부의 신주에는 어떻게 써야 합니까? -송준길- [답] 제부라고 쓰면 될 것이네. 서얼(庶孼) 및 사모(私母)의 신주에 제주하는 예 [문] 서얼은 사부(士夫)와 차등이 있는데 제주할 경우에는 현고(顯考)나 현비(顯妣)라고 써도 무방합니까? 고(考)와 비(妣)라는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의 칭호로 숭호(崇號)가 아닌 듯하니, 현(顯) 자를 없애고 단지 고와 비라고만 칭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첩자(妾子)가 어머니의 신주에 제하면서는 양인(良人)의 경우에는 마땅히 ‘모양인모씨(母良人某氏)’라고 쓰고, 천인(賤人)일 경우에는 ‘모서인모씨(母庶人某氏)’라고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이 설이 어떻습니까? -이상형- [답] 서얼이 비록 천하기는 하지만 부모님을 존경하는 도는 어찌 다른 사람과 다르겠는가. 현고(顯考)나 현비(顯妣)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네. 그러나 다만 첩모(妾母)의 아들일 경우에는, 주자가 적모(嫡母)를 피하여 단지 망모(亡母)라고만 칭하고 비라고는 칭하지 않아서 구별하였다는 설이 있네. 어머니가 양인인지 서인인지는 그 자식 된 자가 구분할 필요는 없네.     개장(改葬) 고비(考妣)를 개장하여 합장(合葬)할 때 현훈(玄纁)과 삽선(翣扇)과 곽(槨)을 쓰는 식 [문] 만약 선비(先妣)를 개장하여 선고(先考)와 합장할 경우에 현훈과 삽선 따위의 물품은 각각 마련하여 쓰는 것이 마땅합니까? 그리고 고와 비를 한 곽에 함께 모시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현훈과 삽선은 각각 마련해서 써야만 할 것이네. 옛사람 가운데에는 한 곽에 함께 모시는 자도 있었네. 그러나 나의 견해로 생각해 보건대, 그럴 경우에는 광중(壙中)이 지나치게 넓어서 쉽사리 무너질 것이니, 두 개의 곽을 쓰되 곽 사이에는 석회(石灰)를 채워 넣는 것만 못할 것이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권장(權葬) 난리를 만나 임시로 매장하였을 경우에는 뒤늦게라도 신주(神主)를 세우고 우제(虞祭)를 지낸다. [문] 어떤 한 선비가 상을 당하여 미처 장사를 치르기도 전에 오랑캐의 변란을 만나 부득이 임시로 매장하였는데, 사세가 아주 급박해서 조전(祖奠)이나 견전(遣奠) 등의 예를 모두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 오랑캐들이 조금 물러가고 나서 비로소 장사를 지낼 계획을 하였는데, 조전이나 견전 등의 예는 모두 이미 할 때가 지나갔습니다. 이를 그만두자니 인정과 사리에 있어서 온편치 않고, 뒤늦게 행하자니 어느 때에 행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임시로 매장했던 곳을 파서 상구를 받들고 나온 뒤에 조전을 행하고, 상구를 이미 상여에 실은 뒤에 견전을 행하면 예의 뜻을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주를 미처 만들지 못하였으며, 우제 등의 예 역시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이를 지연시키다가 수삼 년이 지나도록 행하지 못하게 된다면, 형체는 땅으로 돌아가고 정신은 의귀할 곳이 없게 될 것인바, 정례(情禮)로 헤아려 볼 적에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친상(親喪)을 안장(安葬)하지 못하여 신주를 만들지 못하였고 우제를 지내지 못하였을 경우, 상기(喪期)가 비록 다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자식 된 자가 어찌 탈복(脫服)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연제(練祭)와 상제(祥祭) 및 변복(變服)하는 절차 역시 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이제 만약 속히 개장하기가 어려울 경우, 우선 먼저 목주(木主)를 마련해서 고하는 말을 올린 뒤에 쓰고, 우제를 지내고서 봉안한다면, 이와 같이 하고 난 뒤에는 연제와 상제 등의 예 역시 혹 행할 수 있어서 예에 어그러지지 않게 되겠습니까? 옛날에 하자평(何子平)이 8년 동안이나 장사를 치르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 역시 어찌 상구가 빈소에 8년 동안이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혹 지금 임시로 장사 지낸 자처럼 하여 제대로 잘 장사 지내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보내온 글에서 말한 곡절은 모두 나의 뜻과 더불어 서로 합치되네. 만약 오랫동안 개장하지 못할 경우에는 먼저 신주를 쓰고서 우제를 행하면 될 것이네. 하자평이 8년 동안 빈소에 있었던 것은 임시로 매장하는 것조차도 역시 못 하였던 것인 듯하네.   [주D-001]하자평(何子平)이 …… 것 : 하자평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람으로, 효성이 뛰어났다. 60이 다 된 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여 기근과 전란으로 8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는데, 그 사이에 마치 어린애처럼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더울 때는 시원한 곳을 피하고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南史 卷73 孝義傳上 何子平》     반곡(反哭) 반혼(反魂)할 때에는 묘소에 하직 인사를 하지 않는다. [문] 반혼할 때 주인 및 친척이나 빈객들이 모두 묘소에 곡하면서 하직 인사를 하는데, 예에는 이런 절차가 없습니다. 하찮은 절차이므로 생략한 것입니까? -송준길- [답] 반혼할 때 묘소에 곡하고 절하지 않는 것은 뜻이 오로지 신주(神主)에게 있기 때문이네. 세상 사람들이 묘소에 곡하고 절하는 것은 아마도 예의 뜻이 아닐 듯하네.     우제(虞祭) 우제를 지낼 적에는 목욕을 하고, 부제(祔祭)를 지낼 적에는 머리를 빗고 손톱을 깎는다. [문] 《가례》의 우제조(虞祭條)를 보면 ‘주인 이하가 모두 목욕을 한다. 자최(齊衰) 이하는 머리를 감는다.’ 하였으며, 부제조(祔祭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가 목욕하고 머리를 빗고 손톱을 깎는다.’고 하였습니다. 목욕하는 것과 머리를 빗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까? 목욕을 할 경우에는 머리를 빗고 손톱을 깎는 것은 경중이 없을 듯한데도 이와 같이 구별해서 말한 것은 무슨 뜻이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우제조에는 비록 목욕한다는 글이 있으나 이는 대략 머리카락을 말려서 깨끗하게만 하고 머리카락을 빗질하지는 않는 것이며, 부제조에 이르러서 비로소 목욕하고 빗질하고 손톱을 깎는데, 대개 목욕하는 것은 단지 물로 씻기만 할 뿐인 것이고, 빗질하는 것은 물로 씻고서 또 빗으로 빗질하는 것으로, 경중의 차이가 없지 않네. 기년복의 상에도 우제를 지내기 전에는 머리를 빗지 않는다. [문] 예경에서 말한 ‘자최’라는 것은 대부분 기년복을 가리켜서 말한 것인데, 우제조에서 말한 ‘자최즐발(齊衰櫛髮)’이라는 것은 삼년상을 가리켜서 말한 듯합니다. 대개 기년복을 입으면서 어찌 3개월이나 지나도록 빗질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송준길- [답] 이것은 삼년상이 아니라 기년복의 상을 말한 것이네. 기년복의 상에는 발인(發引)하기 전에는 빗질을 하지 않는 것이 인정에 가까운 것이 되니,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삼년상과 기년상에 머리카락을 빗는 것은 우제와 부제로써 나누어 구별한 것이네. 우제에서부터 상제(祥祭)와 담제(禫祭)에 이르기까지 및 시제(時祭)와 기제(忌祭)와 삭참(朔參)에 모두 신주를 꺼내 온다. [문] 예의 뜻을 살펴보면, 제사를 지낼 때에는 마땅히 신주와 독(櫝)을 서쪽 계단에 있는 탁자 위에 받들어 안치하였다가 독은 탁자에 남겨 두고서 신주만을 꺼내 의좌(倚座)에 앉혀 놓고 예를 행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서는 전부터 시제를 지낼 적에 독까지 함께 의좌에 앉혀 놓아, 탁자 위에 독을 놓아두는 한 가지 절차는 일찍이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부제를 지내면서 전에 하던 대로 행하여도 역시 무방하겠습니까?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송준길- [답] 무릇 ‘신주를 꺼내 온다.’고 말한 것은 단지 신주만을 의좌 위에 안치해 놓는 것을 이르는 것이네. 우제와 졸곡과 상제와 담제를 지낼 때 및 시제와 기제와 삭참을 행할 때에도 모두 그렇게 하네. 독까지 아울러 의좌 위에 놓고 예를 행하는 것은 아주 온당치 못하니, 한결같이 예의 뜻을 따라서 행하여야 하네. 우제와 시제를 지낼 적에 작헌(酌獻)하는 의절 [문] 우제와 시제를 지낼 때 작헌하는 절차를 보면 조금은 같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부제를 지낼 경우에는 어느 쪽을 따라서 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한결같이 우제를 지낼 때의 예에 따라서 하면 될 것이네. 우제와 졸곡과 연제와 상제에 사신(辭神)하는 의절이 부제나 시제나 기제를 지낼 때의 의절과 다른 이유 [문] 대상과 소상과 졸곡에 사신하는 의절은 모두 우제 때와 같이 하는데, 우제를 지낼 적에는 바로 신주를 거두어 넣은 뒤에 사신하는 절차가 있는바, 부제 및 시제와 기제를 지낼 때 사신한 뒤에 신주를 거두어 넣는 의절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이러한 따위의 예절은 미세한 것이라서 알 수가 없네.     졸곡(卒哭) 현주(玄酒)는 졸곡제와 부제에서부터 시제와 기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쓴다. [문] 제사를 지낼 적에 현주를 쓰는 뜻은 《예기》에 대략 드러나 있는데, 시제에는 쓴다는 글이 있으나 기제의 경우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단지 길제(吉祭)에만 쓰는 것입니까? 삼년상의 제전(祭奠)을 올릴 적에는 졸곡제에서 비로소 진설하며, 또 부제에서도 쓰는데, 연제와 상제에서는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이상형- [답] 현주는 졸곡제에서 쓰며, 또 부제 및 시제에도 보이네. 소상(小祥)과 대상(大祥), 담제 및 시조제(始祖祭), 예제(禰祭), 기제(忌祭)의 경우에는 윗글에 나왔기 때문에 다시금 조목조목 말하지 않는 것이네.   [주D-001]현주(玄酒) : 제사나 의식에 쓰는 물을 말한다.     소상(小祥) 소상에 정복(正服)을 변복(變服)해야 하는가. [문] 연복(練服)에 대해서 《상례비요》에 이르기를, “만드는 제도는 대공최복(大功衰服)과 같이 만들며, 베 역시 같다. 만약 고쳐서 마련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가례》에 의거하여 예전 것을 그대로 입어도 괜찮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례》의 진연복조(陳練服條)에 대한 주에는 ‘예전 것을 그대로 입는다.’는 글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퇴계 선생은 《예기》의 주에 나오는 ‘정복은 변복하지 않는다.’는 설을 인하여 연최(練衰)를 입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퇴계의 가르침이 만약 고례(古禮)와 서로 합치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준행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기》의 주에 나오는 설 및 퇴계의 가르침이 만약 고례의 뜻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대로 입는다는 설은 아마도 구차스러움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다만 상인(喪人)이 삼 년의 상기 안에 항상 최복(衰服)을 착용하고 있을 경우, 일 년이 됨에 미쳐서는 옷이 다 떨어져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고쳐서 만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가례》에 ‘연포(練布)로 관(冠)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연복(練服)으로 관을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른바 ‘정복은 변복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다시 고쳐 지어서는 안 되며 단지 예전의 옷을 마전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오직 고쳐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전해도 안 된다는 뜻입니까? -송준길- [답] 《가례》를 보면 졸곡(卒哭) 아래에 나오는 양씨(楊氏)의 주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우제와 졸곡을 지내고 나면 수복(受服)이 있었고, 연제와 상제와 담제에도 모두 수복이 있어, 이로써 슬픔이 점차 줄어들면 복도 점차 가벼워지는 것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복을 자주 바꾸어 입는 것은 번거로운 형식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므로 《서의(書儀)》와 《가례》에서는 수복이 없으니, 이는 간략함을 따른 것이다.” 하였네. 양씨의 설로써 본다면 《가례》에서는 소상 때 입는 복을 변복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네. 퇴계의 말은 고례와 같지 않네. 내가 일찍이 황종해(黃宗海)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해 놓은 것이 자못 상세하니, 가져다가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만약 상복이 다 떨어져서 모양새를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고례에 의거하여 다시 만들어 입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네. 《가례》에서 이른바 ‘연복으로 관을 만든다.’고 한 것은, 아마도 연포로써 관을 만든다는 것인 듯하네. 참최복(斬衰服)의 연복은 옷 가를 깁지 않는다. [문] 고례를 보면 연복은 검붉은 색으로 단을 대는 것을 가지고 꾸밈을 삼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참최복을 변경시켜서 자최복으로 만들 때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모두 깁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옛날을 참작하여 오늘날에 통하는 뜻에 있어서 제대로 된 것이어서 세속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고례를 보면 연복은 검붉은 색의 단을 대어 최복을 꾸민 것이 아니네. 최복의 안에 중의(中衣)가 있어 심의(深衣)의 제도와 같이 만드는데, 초상(初喪)에는 생포(生布)로서 옷깃과 소맷부리와 하변에 가선을 대고, 소상에 이르러서는 연포로써 중의를 만들며 또 검붉은 색으로 단을 대어 꾸밈으로 삼네. 그 위에 입는 상의와 하상은 예전 그대로 두고 깁지 않네. 참최복을 변경시켜 자최복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연제를 지내고 상제를 지내는 날에 조문을 받는다. [문] 옛날 사람들은 기일에도 오히려 조문을 받는 예가 있었습니다. 그런즉 대상과 소상을 지내는 날에 친척이나 빈객들로서 와서 보는 자들은 곡하고 절을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빈객이 오면 주인이 먼저 곡하고 대접해야 하네.   [주D-001]정복(正服) : 예의(禮儀)에 규정된 바의 올바른 복장으로, 조복(朝服), 제복(祭服), 상복(喪服) 등에 있어서 각자에게 해당되는 복식을 입는 것을 말한다.     대상(大祥) 상제(祥祭)와 담제(禫祭)를 지낼 적에 옷을 바꾸어 입는 절차 [문] 《가례》를 보면, 대상을 지낼 때 입는 복 가운데 참포(黲布)로 만든 복두(幞頭)의 제도는 실로 시인(詩人)이 말한 ‘호관(縞冠)’의 색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씨(丘氏)의 《가례의절(家禮儀節)》 및 《국조오례의》에 반드시 순백색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순백색은 점차 길한 데로 나아간다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이미 이것이 시왕(時王)의 제도이니, 이것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경을 보면, 담제를 지낼 때에는 현관(玄冠)에 조복(朝服) 차림을 하고, 제사를 마친 뒤에는 머리에는 섬관(纖冠)을 착용하고 몸에는 소단(素端)과 황상(黃裳)을 착용하며, 달을 넘겨서 길제(吉祭)를 지낼 때에는 현관에 조복 차림을 하고, 이미 길제를 지내고 난 뒤에는 현단(玄端) 차림으로 지냅니다.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담제에서는 상이 끝났다고 할 수가 없으며, 반드시 길제를 지낸 뒤에야 일반 사람과 같아지는 듯합니다. 그런데 《상례비요》에는 이러한 곡절이 하나도 없으며, 담제조(禫祭條)에서는 ‘길복(吉服)을 진설한다.’고 하였으니, 고례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가례의절》에는 이르기를, “주인 이하는 모두 소복(素服)을 착용한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소복’이라는 것은 대상 때 입는 옷을 변복하지 않은 채 입는 것입니까? 과연 그렇다면 현관에 조복을 착용하는 예와 전혀 상응하지 않으니,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이제 고례의 뜻에 의거하여 참작해서 행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가례》의 담제조를 보면 진복(陳服)하는 한 가지 의절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송준길- [답] 대상(大祥)을 지낼 때의 복에 대해서 예경에는 호관이라고 하였는데 반해 《가례》에서는 참포로 된 복두와 참포로 된 삼(衫)을 착용한다고 하여, 고례와 차이가 있네. 그리고 구씨의 《가례의절》 및 《국조오례의》에서는 또 순백색의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하여 더욱더 고례와 같지 않네. 그런데 선왕조(先王朝)에서 《국조오례의》에 의거하여 백립(白笠)을 착용하는 제도를 쓰도록 다시금 신명(伸明)하였으니, 이제 감히 어길 수가 없네. 담제를 지낸 뒤의 복색에 대해서는 혹 흰색을 쓰기도 하고 혹 길복을 착용하기도 하여 사람마다 소견이 각자 다르네. 퇴계(退溪)가 김숙부(金肅夫)의 물음에 답하여 이르기를, “이제 만약 ‘오히려 곡읍(哭泣)이 있다.’는 글 때문에 순전히 길한 복을 착용하는 것을 온편치 않다고 여긴다면, 단지 구씨의 설에 의거하여 소복 차림을 하고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으며, 또 정도가(鄭道可)의 물음에 답하면서는 이르기를, “소상과 대상에 복을 진설하고 복을 바꾸어 입는 절차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담복(禫服)을 벗는 것이 어느 때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며 길복을 착용하는 것이 어느 날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여, 전후로 답한 바가 같지 않은바, 어느 복으로 정해야 마땅할지 모르겠네. 《가례》의 보주(補註)에는 이르기를, “담제 때에 막차를 설치하고 복을 진설하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대개 소상에는 연복(練服)으로 바꾸어 입고, 대상에는 담복으로 바꾸어 입고, 담제에는 의당 길복으로 바꾸어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기》 간전(間傳)에서 말한 ‘담제를 지냈으면 섬(纖)을 입고 장신구는 착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禫而纖無所不佩]’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는데, 이 설이 아마도 제대로 된 듯하네. [문] 상제(祥祭)와 담제(禫祭)의 복제(服制)에 대해서는 옛날과 오늘날의 마땅함이 다르고 논설한 것이 여러 갈래여서 어느 한쪽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저의 뜻으로 헤아려 보건대, 상제의 복은 시왕(時王)의 제도를 따라서 백립(白笠)에 백대(白帶)와 거친 베로 만든 옷을 착용하고, 담제 때에는 예경에 ‘담제에는 현관(玄冠)과 황상(黃裳) 차림을 하고, 제사를 마친 뒤에는 섬관(纖冠)에 소단(素端) 차림을 한다.’는 글이 있으니, 이제 복을 진설하고 복을 바꾸어 입는 절차에 의거해 흑립(黑笠)에 가는 베로 만든 직령(直領)과 흑대(黑帶)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마친 뒤에는 섬색(纖色)의 입(笠)과 섬색의 대(帶)를 착용하며, 길제(吉祭)를 지낼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순전히 길한 복을 착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상고해 보면 황면재(黃勉齋)가 착용하였던 담복(禫服)인 현의(玄衣)와 황상은 바로 길복(吉服)으로, 소복(素服)이 아님이 분명하네. 무릇 이른바 ‘담(禫)’이란 것은 담담하여 평안하다는 뜻이니, 이때에 길한 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 나아가겠는가. 만약 반드시 소가(疏家)들이 말한 ‘상제에서부터 길제에 이르기까지는 변복하는 데 여섯 가지가 있다.’는 설과 같이 할 경우, 끝내 고례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네. 주자가 이미 《가례》에서 채록해 넣지 않았으니 지금 다시 논해서는 안 되네. 이제 흑립에 흑대와 백의(白衣)의 제도를 쓰고자 하는 것은 이미 고례가 아니며, 또 《가례》의 뜻도 아니며, 구씨의 《가례의절》과도 차이가 있으니, 새로운 예를 만들어 내서야 되겠는가. 부묘(祔廟)할 때 궤연(几筵)에 고하는 말 [문] 신주를 부묘할 때 사당(祠堂)에 고하는 말을 하는 의절(儀節)이 마땅히 대상제(大祥祭)를 마친 뒤에 있어야 합니까? -송준길- [답] 마땅히 대상제를 마치고 궤연을 철거하고 부묘를 하기 전에 있어야 하네.   [주D-001]섬(纖) : 가로로 넣은 올은 검고 세로로 넣은 올은 흰색인 천이다.     길제(吉祭) 길제를 지내기 전에는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문] 고기를 먹는 한 가지 의절을 길제를 지내기를 기다려서 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뜻대로만 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으며 후한 쪽으로 하는 데에 해로움은 없는 것입니까? 그리고 만약 담제를 지낸 뒤에 곧바로 고기를 먹는 것이 마땅하다면, 역시 밖으로 나가 집안 어른들을 찾아뵐 수가 있으며, 연락(燕樂)의 경우가 아니면 비록 잔술이라도 반드시 사양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길제를 지내기 전에 고기를 먹는 것은 선현들 가운데 행한 분이 없으니 아마도 자신의 뜻대로만 함을 면치 못하는 것일 듯하네. 집안의 어른들을 찾아뵙고 잔술을 마시는 것은 모두 무방하네.     시제(時祭) 시제를 지낼 때에는 주인이 신주의 앞에서 인도한다. [문] 시제의 봉주취위조(奉主就位條)에 ‘주인이 앞에서 인도한다.’고 한 것은, 주인이 신주의 앞에 있으면서 인도하여 오는 것입니까? 담제를 지낼 때에도 역시 앞에서 인도하여야 합니까? -송준길- [답] ‘앞에서 인도한다.’고 한 것은 주인이 신주의 앞에 있으면서 인도하는 것이네. 담제와 예제와 길제 때에도 역시 시제를 지낼 때와 같이 하여야 하네. 그런데 《가례의절》과 《가례정형(家禮正衡)》에는 모두 ‘앞에서 인도한다.’는 글이 없으니, 감히 설을 만들지는 못하겠네. 제사를 지낼 적에 집사(執事)가 없을 경우에는 주인이 스스로 축문(祝文)을 읽는다. [문] 제사를 지낼 때 집사가 없을 경우에는 축문을 읽고 제육(祭肉)을 받는 등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혹자는 이르기를, “집사가 없을 경우에는 제육을 받는 절차는 생략하는 것이 마땅하고, 축문은 주인이 스스로 고하여야 한다.” 합니다. 그런데 퇴계 선생은 이르기를, “장겸선(張兼善)은 축문을 읽을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축문을 써 놓기만 하고 읽지는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구차하고 간략하게 하여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중에서 스스로 그 마음을 다하는 일이다.” 운운하였습니다. 이 두 설이 어떻습니까? 그리고 퇴계 선생이 말한 장겸선이라는 사람은 어느 시대 사람입니까? -송준길- [답] 축문을 읽을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주인이 스스로 읽는 것이 오히려 읽지 않는 것보다는 낫네. 장겸선은 어느 시대 사람인지 모르겠네.     기제(忌祭) 기제를 지낼 때에는 재계(齊戒)를 한다. [문] 《가례》의 기제조(忌祭條)를 보면, 기제를 지내기 하루 전에 치재(致齊)하고 변복(變服)하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속에서는 제사를 지내기 3일 전에 소복(素服) 차림으로 치재를 하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이 예가 후하게 하는 데 가까우니, 세속의 예를 따라서 해도 무방하겠습니까? -이상형- [답] 기일이 되기 3일 전부터 소복을 입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과중한 듯하네. 하루 전에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무방할 것이네. 내가 젊었을 적에는 기일이 되기 며칠 전부터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나, 지금 나이가 든 뒤로는 단지 하루 동안만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데, 역시 마땅한 것인지는 모르겠네. 이러한 따위의 예는 비록 세속에서 하는 것을 따라 해도 괜찮네. 그러나 변복하는 것만은 따라서 할 필요가 없네. 기제를 지낼 때의 복색 [문] 기일은 바로 군자가 종신토록 상(喪)이 있는 날이니 복색을 평상시와 더불어 차이가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속에서는 단지 백대(白帶)만을 띠고 있는바, 이는 몹시 온편치 않습니다. 담제를 지낼 때 썼던 입(笠)을 남겨 두었다가 기일에 쓰려고 하는데, 이것이 혹 온당치 않다면 조금 검어서 마치 참색(黲色)과 같은 색의 입을 쓰는 것이 괜찮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서(注書) 길재(吉再)는 이날에 채소를 먹고 물을 마셨는데, 어떤 선비가 찾아왔으나 사절하고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채소를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은 그 뜻이 아주 좋으나, 손님을 사절하여 만나 보지 않은 것은 상중(喪中) 때보다 등급을 높인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일찍이 듣건대, 구봉(龜峯)께서는 담제를 지낼 때 썼던 입(笠)을 남겨 두었다가 대기(大忌) 때 착용하였다고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나의 경우에는 대기 때에는 흑포립(黑布笠)을 착용하고서 제사를 지내네. 손님이 왔는데 만나 보지 않는 것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를 행하는 자가 있기도 하나, 나는 행하지 못하였네. 온당치 못한 점은 없겠는가? 부모님의 기일에 먼 곳에 나가 있을 경우에는 망곡(望哭)을 한다. [문] 부모님의 기일에 만약 먼 외방에 나가 있어서 날짜에 미쳐 돌아올 수 없을 경우에는 망곡을 해도 괜찮습니까? -이상형- [답] 자식 된 자가 기일을 만나 무슨 까닭이 있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할 경우, 그날이 되면 묘소가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곡하는 것은 정례(情禮)에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바로, 의심할 것이 없네. 부모님의 상중에 자녀에 대한 제사가 있을 경우의 예와 외조(外祖)의 복중에 어머니의 제사가 있을 경우의 예 [문] 제가 묻기를,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녀가 있을 경우, 부모의 상을 당하여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그에 대한 기제(忌祭)와 묘제(墓祭)를 모두 폐해도 괜찮습니까? 그리고 장사를 지낸 뒤에는 마땅히 소찬(素饌)으로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 아니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차이가 있으니 고기를 써서 제사를 지내도 무방합니까?” 하니, 우복(愚伏)이 말하기를,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폐하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네. 그리고 장사를 지낸 뒤에는 제사를 지내면서 고기를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묘제와 기제는 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만 이미 시집간 딸이 죽어서 그 남편과 같은 광(壙)에 묻혀 있을 경우, 외손(外孫)은 반드시 외조의 상을 이유로 그 아버지의 제사를 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낸다면 같은 광의 묘역에서 제사 지내면서 어찌 그 어머니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마복(緦麻服)의 상복을 입고 있으면 제사 지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미루어 나가 보면, 외조의 상을 당하였으면 마땅히 그 아버지의 제사를 폐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시마복의 상복을 입고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길제(吉祭)를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그런즉 묘제와 기제는 폐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우복이 답하기를, “보내온 편지에서 말한 바가 제대로 되었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이 답한 것이 옳은바, 나의 견해도 역시 그렇네. 기년복이나 대공복이나 소공복을 입고 있는 중에 기제와 묘제를 지낸다. [문] 제가 묻기를, “기년복과 대공복의 상에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기제(忌祭)와 묘제(墓祭)를 같이 사는 자는 지내지 않고 따로 사는 자는 지냅니까? 그리고 시제(時祭)는 따로 사는 자 역시 장사를 지낸 뒤에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시마복(緦麻服)과 소공복(小功服)의 상에는 성복(成服)하기 전에는 기제 역시 폐할 수가 있는데, 성복한 뒤에는 시제 역시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니, 우복이 답하기를, “예를 보면, 대부(大夫)의 제사는 정조(鼎俎)를 이미 진설하고 변두(籩豆)를 이미 진설하였을 때 자최(齊衰)나 대공(大功)의 상이 있을 경우에는 폐하고 외상(外喪)일 경우에는 행하는 데, 외상은 바로 따로 사는 자의 상이네. 《예기》 증자문편(曾子問篇)의 제22조에서 상고해 볼 수가 있는바, 이를 잘 참작해서 지낸다면 거의 예에 맞게 할 수 있을 것이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지난해에 증자문편을 상고해 보니, 《격몽요결》에 나오는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제사를 지내는 의절이 그것과 서로 합치되었으니, 그것과 같이 행하여도 무방할 것이네. [문] 제가 묻기를, “《격몽요결》을 보면, ‘기년복과 대공복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시제(時祭)는 폐해야 하며, 기제와 묘제는 간략하게 지낸다. 장사를 지낸 뒤에는 평상시와 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나, 다만 제육(祭肉)을 받지는 않는다. 시마복과 소공복의 상을 당했을 경우, 성복을 하기 전에는 비록 기제라도 마땅히 폐하여야 한다. 성복을 한 뒤에는 평상시와 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나, 다만 제육은 받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시마복의 상복을 입고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글과 서로 합치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니, 우복이 답하기를, “비록 고례와 서로 호응되지는 않지만, 역시 참작하여 조처한 것이 아주 좋으니, 준행해도 괜찮네.” 하였습니다. -송준길- [답] 정우복이 답한 것이 옳네.   [주D-001]외상(外喪) : 먼 곳에 사는 형제의 상을 말한다.     묘제(墓祭) 묘제는 날짜가 되기 전에 미리 제사 지내기도 한다. [문] 지금 할아버지의 묘와 아버지의 묘가 각각 몇십 리 밖에 떨어져 있는데, 사시(四時)의 묘제를 지낼 때 제사를 나누어서 지낼 만한 다른 자손이 없어서 하루 안에는 결단코 양쪽 묘에 제사를 지내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영남 지방의 풍속에는 으레 며칠 전에 조상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당일에는 고비(考妣)의 묘에 제사를 지냅니다. 이 역시 주자가 제석(除夕)이 되기 전에 미리 제사를 지낸 뜻에 합치되며, 또한 노복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송준길- [답] 날짜가 되기 전에 미리 제사 지내는 것 역시 주자가 행한 바이니, 영남 지방의 풍속이 마땅함을 얻은 것이네. 묘제는 다음 날에 제사를 지내도 된다. [문] 《가례의절》에 이르기를, “이단(履端)의 제사를 해를 걸러서 행하는 것은 아마도 온당치 못한 듯하다. 이제부터는 다음 날에 지내고자 한다.” 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옳은 듯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다른 절일(節日)도 역시 그렇습니다. 당일에 형세상 두루 다 제사 지낼 수 없을 경우에는 《가례의절》에 따라서 다음 날에 제사 지내는 것이 날짜가 되기 전에 미리 제사 지내는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날짜가 되기 전에 미리 제사 지내는 것에 대해 비록 주자의 가르침이 있기는 하지만, 다음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더욱 편하고 마땅할 듯하네. 묘제를 지낼 때의 복색(服色) [문] 묘제를 지낼 때의 복색에 대해 율곡은 소복(素服)을 착용한다고 하였는데, 세속에서는 길복을 통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을 따라서 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묘제를 지낼 때의 복색에 대해서는 달리 상고해 볼 만한 곳이 없네. 전에 강복이(姜復而)가 물어 왔기에 《통전》을 상고해 보니, ‘천자가 배릉(拜陵)하여 곡림(哭臨)함에 있어서 어찌 길복을 착용하고 곡할 리가 있겠는가.’라는 내용이 있었네. 이것으로 본다면 율곡이 소복을 착용한다고 한 것이 제대로 된 것인 듯하네. 부모님의 묘가 아래와 위로 나뉘어 있을 경우에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의절 [문] 지금 어떤 사람의 아버지 묘소는 뒤에 있고 어머니 묘소는 앞에 있으며, 석물(石物)은 아버지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제사를 지낼 때 아울러 행하고자 하니 어머니의 묘를 등지고서 예를 행하게 되었는바, 실로 몹시 온편치 않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각각 설행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제사를 지내는 것과 비석을 세우는 것을 마땅히 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합하여 설행하여야지, 두 곳에 나누어서 각각 설행해서는 안 되네. 고비(考妣)의 두 묘소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경우에는 제사를 지내고 배례(拜禮)를 할 적에 겸하여 행한다. [문] 선비(先妣)의 묘역이 좌우가 비좁아서 합장을 하거나 쌍분(雙墳)으로 하는 것이 모두 편치 않은 바가 있으며, 앞면 역시 비틀어진 것이 급박하여 아래와 위로 똑바로 봉분을 만들 수가 없으므로 부득이 조금 왼편으로 치우친 아래쪽에다 새 묘혈(墓穴)을 잡았는데, 그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 실제로는 아래와 위의 분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아래와 위의 분묘의 형세가 이미 서로 똑바르지 않고, 좌향(坐向) 역시 서로 같지 않습니다. 세속에서 상하로 분묘를 쓴 경우 절할 적에는 존위(尊位)에서 겸하여 절하고, 제사를 지낼 적에는 존위에서 겸하여 설행하는데, 산맥이 서로 곧고 좌향 역시 같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의 형세는 이와는 다르니 정리(情理)에 있어서 온편치 못하여 장차 묘를 옮겨서 아래의 혈(穴)에 합장하려고 하는데, 묘를 옮기기 전에 제사를 지내고 배례를 할 적에는 겸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아니면 각각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고와 비의 두 묘가 서로 간의 거리가 멀지 않을 경우에는 비록 좌향이 조금 다르더라도 제사를 지내고 배례를 할 때에는 겸해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네. 이미 상하의 분묘로 만들었다면 천장(遷葬)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천장하는 것은 중하고도 어려운 일이네. 고조와 증조의 묘에 제전(祭田)이 없을 경우에는 여러 자손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낸다. [문] 저희 집에서는 나라의 제도를 따라서 단지 삼대만을 제사 지내는데, 선고(先考)께서 최장방(最長房)이라서 증조의 신주를 받들고 있었습니다. 선고와 더불어 증조를 같이하는 항렬이 지금 모두 돌아가셨으므로 담제를 지낸 뒤에는 마땅히 조천(祧遷)해 내야 하는데, 제전이 없어서 묘제 역시 장차 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묘가 할아버지의 묘 위에 있어 사시(四時)에 제사 지내면서 할아버지의 묘에만 제사 지내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그러므로 대략 주과(酒果)를 진설해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다만 고조의 묘제를 폐하고서 지내지 않는 것은 근본에 대해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자손들로 하여금 법으로 삼게 하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이에 종인(宗人)들과 상의하여 《가례》에 의거해 해마다 한 차례 제사 지내는 예를 같은 성(姓)의 자손들이 돌아가면서 행하기로 하였는데,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보내온 글에서 말한 뜻이 아주 좋네. 동종(同宗)의 자손들과 상의하여 지낸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주D-001]이단(履端) : 책력(冊曆)을 정하는 원점(元點)이란 뜻으로, 정월 초하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부(附) 상제례답문변의(喪祭禮答問辨疑)] 변론한 조목이 대부분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의 글에 나와 있으므로, 이 편에서는 다시 중복해서 기록하지 않았다. ○ 퇴계가 이중구(李仲久)에게 답하기를, “어머니의 상중에 자신이 죽어 그 아들이 대신 상을 주관하는 데 대한 의문은, 이쪽에서도 몇몇 집이 이런 경우를 당하였으므로 와서 묻는 자가 있었기에 이전의 전적(典籍)을 두루 상고해 보았으나 의거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에 한 집에는 알지 못하겠다는 내용으로 답하였고, 그 뒤에 다른 한 집에는 ‘보내온 글에서 말한 갑(甲)의 말과 같이 하라.’는 내용으로 답하면서 그 사이에 의심을 두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여 조처하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끝내 어떻게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리로써 말을 한다면, 갑이 말한 ‘축문(祝文) 및 봉사(奉祀) 따위는 모두 장손(長孫)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마땅한바, 이 때문에 추복(追服)을 입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는 것은, 바뀔 수 없는 이치인 듯합니다. 그리고 을(乙)이 말한 ‘그 아들이 이미 복을 입었으니, 그 손자는 추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은 그럴듯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상(喪)을 삼년상으로 마치지 않을 수 없는 데에는 어쩌겠으며, 또 상주(喪主)가 없는 상은 없는 법이어서 그 축문(祝文)에 이름을 쓰지 않고는 행할 수가 없는 데에는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예경을 보면 부인(婦人)이 상을 주관한다는 글이 없으니, 총부(冢婦)가 상을 주관하면 된다는 설은 또 행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금(古今)의 사람들이 이런 변고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할 것인데도 예문을 모아 놓은 책인 《의례경전통해》 따위의 책에서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해 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이 때문에 더욱더 의심이 들어 감히 결정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부득이 이러한 문제를 처리해야 할 경우에 이른다면, 끝내 앞에서 이른 바와 같이 할 뿐입니다.” 한 데 대하여 《의례경전통해》에 이르기를, “석조인(石祖仁)의 할아버지 중립(中立)이 죽어 장사를 지내지 못하였는데, 숙부인 종간(從簡)을 할아버지의 후사로 세웠으나 또 죽고 말았다. 그러자 석조인이 스스로 적손(嫡孫)으로서 추복 입기를 청하니, 박사(博士) 송민구(宋敏求)가 의논을 올리기를, ‘상복을 재차 제복(制服)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적자(嫡子)로서 조부(祖父)를 위하여 추복을 입는 자는, 아버지가 죽은 것이 기년(期年) 이내여서 자기의 복을 아직 제복(除服)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변복(變服)하는 절차를 인하여 장사 지내기 전의 우제(虞祭)와 이미 장사 지낸 뒤의 졸곡제(卒哭祭)와 기년복의 연제(練祭)를 참최복을 입고서 지내고 남은 달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며, 죽은 것이 기년 뒤여서 자기의 복을 이미 제복하고서 길복(吉服)을 입고 있을 경우에는, 여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다가 쫓겨난 경우에 본종(本宗)의 복을 이미 제복하였으면 추복을 입을 수 없는 예를 써서 하는 것이 마땅한바, 추복을 입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하였다. 《의례경전통해》에 이런 설이 있으니, 근거가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 퇴계가 김형언(金亨彦)에게 답하기를, “사당(祠堂)에 있는 세 개의 감실(龕室)을 늘려서 네 개의 감실로 만들려고 하는데 비좁아서 곤란할 경우, 동쪽 벽에다 하나를 더 만드는 것보다는, 내 생각에는 서쪽 벽에 하나를 더 만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개 서쪽 벽은 동향이 되는바 이 자리는 본디 시조(始祖)가 앉는 높은 자리인 것입니다. 이제 이곳을 고조(高祖)의 감실로 삼는다면, 비단 고조를 높은 자리에 앉힌다는 의미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체천(遞遷)하여 서쪽으로 보내는 차례를 잃지 않는 것이니,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신주를 동쪽에 앉혀 서쪽을 향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경우는, 옛 예법에 근거가 없습니다.” 한 데 대하여 고조를 서쪽 벽에 부묘(祔廟)하여 하나의 감실을 더 만들어서 돌려 앉히는 것은 아마도 온당치 못한 듯하다. 이는 이미 소목(昭穆)의 제도가 아닌데, 반부(班祔)하는 제도로 삼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 퇴계가 김경부(金敬夫)에게 답하기를, “소상(小祥) 때 별도로 복(服)을 만들지 않는 것은 주자께서 알맞게 헤아려 덜어 내고 보태어 현실에 맞도록 한 예입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이 매우 합당합니다.” 한 데 대하여 -묻기를, “소상에 별도로 복을 만들어 입는 것은 옛날의 제도입니다. 《가례》에 의거해서 보면, 비록 연복(練服)을 진설한다고는 하였으나, 별도로 연복을 만든다는 글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예기》 단궁을 보면, ‘연제에는 연의를 입되 누런색으로 속을 바친다.[練衣 黃裏]’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정복(正服)이기 때문에 변경해서는 안 된다. 연(練)으로 중의(中衣)를 만들어 최복(衰服)을 받쳐 입는다.’ 하였습니다. 이제 별도로 복을 만들어 입지는 않고 단지 연관(練冠)만 쓰고 수질(首絰) 이하는 제거하려고 하며, 또 연포(練布)로 최복을 받쳐 입는 중의를 만들려고 합니다.” 운운하였다.- 《예기》 단궁의 소에서 말한 ‘정복(正服)이기 때문에 변경해서는 안 된다.’라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 퇴계가 김경부에게 답하기를, “제가 의심스럽게 여긴 바도 역시 보내온 글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다만 만약 불태우는 것이 마땅하다면, 《가례》에서 무슨 까닭으로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점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한 데 대하여 -묻기를, “《예기》를 보면 ‘지팡이는 부러뜨린다.’고 하였으면서도 최복을 불태운다는 글이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최복을 불태우는데, 이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예기》 곡례에 이르기를, ‘제복(祭服)은 해지면 불에 태운다.[祭服弊則焚之]’고 하였는데, 최복 역시 제복이니 불에 태우는 것이 옳을 듯도 합니다. 혹은 예경에 의거하여 불에 태워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자도 있는데, 그 설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횡거(橫渠)의 《이굴(理窟)》에 이르기를, “상복(喪服)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혹 묘지기에게 주어도 된다.” 하였는바, 이것으로 본다면 불에 태워서는 안 된다. ○ 퇴계가 김경부에게 답하기를, “지난번에 담제(禫祭) 때 상복을 갈아입는 절차에 대해 물어 오셨는데, 과연 의심할 만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상복을 갈아입는 것은 예의 큰 절차입니다. 과연 담제를 마치고 처음으로 길복(吉服)으로 갈아입는다면, 《가례》에서 분명하게 말하여 사람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해 놓았을 것입니다. 어찌 범연하게 ‘모두 대상(大祥) 때의 의식과 같이 한다.’고만 해 놓았겠습니까. 길복을 진열한다는 예문이 없는 것은, 상복으로서 점차로 변해 가는 것은 당연히 진열을 하지만, 길복으로서 평상복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히 진열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미 제사를 지낸 뒤라면 상복을 변경하는 절차는 또한 어떻게 하여야 옳겠습니까? 신주(神主)를 독(櫝)에 모신 뒤에 변복(變服)을 한다면, 이는 신(神)에게 고하지 않고 상을 마치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주를 독에 모시기 전에 길복으로 갈아입는다면, 길복을 입은 뒤에는 신에게 상을 마쳤다고 고하는 절차에 있어서 전혀 할 일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모두가 온당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일찍이 예경을 보니, 담제 이후로는 길사(吉事)가 되는데, 그 사이에 복을 갈아입는 절차가 아마 대여섯 번은 있었습니다. 《주례(周禮)》는 예절의 번다하기가 이와 같아서 후세에는 일일이 따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례》에서는 단지 이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이제 만약 ‘오히려 곡읍(哭泣)이 있다.’는 글 때문에 완전히 길한 옷을 착용하는 것을 온편치 않다고 여긴다면, 단지 구씨(丘氏)의 설에 의거하여 소복(素服) 차림을 하고서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 데 대하여 구씨가 말한 소복을 입는다는 설은 상세하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어느 때 길복을 착용한단 말인가? 소복 차림으로 들어가 곡한 뒤에 길복 차림으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예기》를 상고해 보아도 역시 이 뜻과 같다. ○ 퇴계가 김경부에게 답하기를, “위에서 말한 예는 더욱더 난처한 일입니다. 고례에 따라서 한다면 장사를 지내기 전에는 행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이러한 일은 인가(人家)에 흔히 있는 일인데, 연제(練祭)나 상제(祥祭)는 반드시 고례를 따라서 장사를 지낸 뒤에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 혹 장사를 제때에 지낼 수 없게 되어 이로 인해 큰 제사를 폐하게 될 경우에는 몹시 난처하게 될 것 같은바, 결국은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또한 첨위(僉位)께서 상의하여 잘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 데 대하여 -묻기를,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부모의 상중에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형제가 또 죽었을 경우에는 형제를 빈(殯)한 뒤에 제사를 지낸다. 같은 집에서 살 경우에는 장사를 지내고서 제사를 지낸다.’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제사는 대상과 소상의 제사를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례》 상복의 전(傳)에는 이르기를, ‘집안에 죽은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를 위하여 석 달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지금 여동생이 남편의 집으로 시집간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상을 치르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가 이곳에서 죽어서 이곳에서 빈을 하였으니, 이것은 같은 집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비(先妣)의 담제를 마땅히 석 달 동안 거행하지 말아야만 합니까? 또 졸곡이 되기 전에는 사시(四時)의 길제(吉祭)를 지낼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삭망(朔望)에 참알(參謁)하거나 제철에 나는 음식물을 천신(薦新)하는 것과 같은 따위는 행하여도 무방합니까?” 하였다.- 만약 때가 지나서도 담제(禫祭)를 지내지 못하여 대제(大祭)를 폐하고서 오래도록 소복을 입고 있게 된다면, 형세상 부득이 별도의 장소에서 제사를 지내야만 할 것이다. ○ 퇴계가 안동 부사(安東府使) 윤복(尹復)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전에도 간혹 기일을 만나 손님을 대접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의 기(忌) 때문에 손님을 소찬(素饌)으로 대접하는 것은 이미 미안한 것이다.’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손님이 주는 고기를 받아 두었다가 뒷날 먹는다고 하면, 이는 더욱더 부당한 일이기 때문에 으레 감히 고기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저께 단자(單子)를 받았을 적에 미처 살펴보지 못하였다가 날이 저문 뒤에야 그 속에 노루고기와 전복 등의 물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이미 받은 것이라고 하여 그냥 둔다면 전에 했던 것이 헛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재차 사양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에 삼가 사람을 보내어 두 가지 물품을 하인에게 돌려 드립니다. 삼가 미약한 정성을 굽어살피시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한 데 대하여 비록 상중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어육(魚肉)을 줄 경우에는 받아서 제전(祭奠)으로 올리거나 노친을 봉양하면 될 것이다. 기일(忌日)에 고기를 사양하여 받지 않는 것은 상정(常情)에서는 구속되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의(用意)의 세밀함은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는 바이다. ○ 퇴계가 이강이(李剛而)에게 답하기를, “구경산(丘瓊山)이 그린 가례악수도(家禮握手圖)를 보면, 두 조각의 네 모서리에 모두 끈을 매달아서 묶기에 편하게 하였는데, 이제 이에 의거하여 만들어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데 대하여 구씨의 그림에 네 모서리에 모두 끈이 있는 것은 《의례》의 뜻이 아니니, 따라 해서는 안 된다. ○ 퇴계가 정자중(鄭子中)에게 답하기를, “반부(班祔)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아내는 조비(祖妣)에게 반부한다.’고 하였으니, 말씀하신 바가 옳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있는 처는 부제(祔祭)를 지내고서 신주(神主)를 궤연(几筵)에 도로 모셨다가 상이 끝남에 미쳐서 다른 실(室)에 따로 안치하거나 혹은 아들의 실에 별도로 안치하여야 합니다.” 한 데 대하여 별실에 신주를 보관한다는 설에 대해서는 양씨(楊氏)가 그르다고 하였다. ○ 퇴계가 답하기를, “서얼(庶孼)에 대한 복(服)에 대해서 사람들이 대부분 의심스러워서 물어 오는데, 《가례》와 《대명률(大明律)》 등의 서책에 실려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례경전통해》는 바로 고례를 모아 놓은 것이라서 수록해 놓지 않은 것이 없는데도 역시 그에 대한 글이 없어 평소에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옛날 사람들은 적서(嫡庶)의 구분이 비록 엄하였으나 골육(骨肉)의 은혜는 차이가 없어서, 오늘날 사람들이 서얼을 마치 노예처럼 대우하는 것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제복(制服)에 있어서 차별이 없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확실하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한 데 대하여 -상동(上同)- 서얼(庶孼)에 대한 복은, 그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첩자(妾子)나 적자(嫡子)나 그 정이 차이가 없다. 첩자가 죽었을 경우에 그 아버지가 곡읍(哭泣)하면서 복을 입으니, 적형제(嫡兄弟)가 어찌 대수롭지 않게 보아서 복을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미루어 나가면 그를 위한 복은 백숙부(伯叔父)와 종자(從子)와 종부형제(從父兄弟)에게 모두 복이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예는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퇴계가 ‘알 수 없다.’고 답하였는데, 천속(天屬)의 친족이 어찌 귀천(貴賤)으로 인해 차이가 있겠는가. 퇴계 역시 우리나라의 야박한 풍속에 구애되어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탄식스럽다. 고례를 보면, 적서의 구분은 처첩(妻妾)의 구분으로써 말을 하였지, 형제의 구분을 가리켜서 말하지는 않았다. ○ 퇴계가 말하기를, “만장(挽章)을 광(壙) 속에 넣는 것에 대해서는 예경에는 비록 근거가 없으나, 세속의 풍습에 따라서 넣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대개 광 속에 넣지 않으면 마땅히 둘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데 대하여 -상동- 광 속에 잡물(雜物)을 넣어서는 안 될 듯하다. ○ 퇴계가 김백영(金伯榮)에게 답하기를, “모삭(某朔)이라고 칭하는 것은 월건(月建)으로 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고문(古文)에서 상고해 보니 실은 모두 삭일(朔日)의 간지(干支)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옛사람들은 삭일을 중하게 여겼으니, 삭일이 차이가 나면 날짜가 모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반드시 표출하여 말한 것입니다.” 한 데 대하여 모삭이라고 칭한 것은 월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삭일의 간지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서경(書經)》 이훈(伊訓)에 보인다. ○ 퇴계가 말하기를, “부판(負版)과 몌(袂)는 폭(幅)을 잇대어 써서는 안 될 듯하다.” 한 데 대하여 -상동(上同)- 부판의 촌수(寸數)가 부족하거나 의신(衣身) 및 몌(袂)가 짧을 경우에는 몸체가 뚱뚱한 자는 입을 수가 없을 것이니, 짧아서 맞지 않게 하기보다는 폭을 잇대어 쓰는 것이 좀 더 나을 것이다. ○ 퇴계가 말하기를, “참최복(斬衰服)은 폭을 줄입니다.” 한 데 대하여 -상동- 최의(衰衣)는 바깥으로 그 폭을 줄이고 하상(下裳)은 안으로 폭을 줄이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솔기와 같은 것이다. 오복(五服)의 최의는 모두 바깥으로 폭을 줄이는바, 비단 참최복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의례》 상복(喪服)의 기(記)에 이르기를, “무릇 최의는 바깥으로 폭을 줄이고, 하상은 안으로 폭을 줄인다.”고 하였다. 《의례》를 보면, 폭을 줄일 경우에는 각각 좌우에서 1촌씩을 줄여서 바느질을 한 나머지로 삼는 것이지, 완전히 잘라 내는 것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속폭(屬幅)은 포의 폭을 이어 붙이되 변폭(邊幅)을 잘라 내지 않고 2척 2촌을 다 쓰는 것이다. 이것이 속폭과 삭폭(削幅)이 다른 점이다. ○ 퇴계가 김이정(金而精)에게 답하기를, “《가례》의 본문에 의거하여 대상을 마치고 신주가 사당에 들어가게 되면 본래부터 삭망의 전을 행한 자는 사당에서 행하는 것이 합당하고, 본래부터 행하지 않았던 자는 전을 드려야 할 신주를 청하여 정침(正寢)으로 모셔 와서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 데 대하여 삭망에 전을 올릴 때를 당하여 신주를 정침으로 내오는 것은 과중한 듯하다. ○ 퇴계가 답하기를, “옛사람들은 국 속에 채소가 들어 있을 경우에는 젓가락을 사용해서 먹었으니, 국그릇에 젓가락을 올려놓아도 무방합니다.” 한 데 대하여 -상동 ○ 묻기를, “제사를 지낼 때 국그릇에 젓가락을 올려놓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였다.- 국그릇에 젓가락을 올려놓는 것은 고례가 아니니, 접시 위에 젓가락을 바르게 놓는 것이 옳을 듯하다. ○ 퇴계가 말하기를, “아침저녁으로 무덤에 올라가 곡하는 것은 본디 올바른 예가 아닙니다. 더구나 이곳에서는 곡하기를 폐하고서 저곳에서는 곡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러한 따위의 일은 군자가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 데 대하여 -상동 ○ 묻기를, “소상을 지낸 뒤에는 아침저녁으로 곡하는 것을 그치니, 여묘살이를 하는 자가 혹 상제(祥祭)를 지낸 뒤에 아침저녁으로 무덤에 올라가 곡하는 것도 역시 그만두어야 합니까? 혹자는 이르기를, ‘여묘살이를 하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며, 곡하는 것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무덤에 올라갔을 경우라면 인정상 곡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니, 곡한다고 해서 뭐가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삼 년의 상기 동안에는 상인(喪人)은, 비록 ‘연제를 지낸 뒤에는 곡하지 않는다.’는 글이 있으나, 무덤에 올라가거나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을 올릴 때에는 곡읍하는 절차가 있는 것이 마땅하다. ○ 퇴계가 답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 자의 경우에는 13개월이 지나서 상제를 지내고 나면 그날에 반혼(返魂)하고, 반혼한 뒤에는 거처와 음식을 한결같이 상례(喪禮)에 의거하여 하면서 재기(再期)를 마치며, 재기가 지나고 궤연(几筵)을 철거하는데, 이른바 ‘심상(心喪)’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한 데 대하여 -상동-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13개월이 지나 대상(大祥)을 지낼 때 궤연을 철거하고 부묘(祔廟)하며, 15개월이 지나서 담제를 지내고 나면 상을 마치고서 심상의 제도를 행하여 다시는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는 의절이 없어지게 된다. 퇴계 선생이 ‘재기가 지난 뒤에 궤연을 철거한다.’고 한 것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 듯하다. ○ 퇴계가 답하기를, “죽은 사람의 신(神)과 혼(魂)이 여기저기 떠돌며 의지해 머물러 있을 곳이 없는데, 축(祝) 한 사람이 그 정신과 혼을 불러 와서 목주(木主)에 붙어 있게 하는 책임을 맡은 것입니다. 신이 목주에 의지해 있으면 곧 사람과 더불어 가까이 접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축문을 읽기를 마치고는 가슴에 품어 이로써 불러와서 붙어 있게 해 사람과 서로 접하는 뜻을 보이는 것입니다. 성인께서 예를 제정하여 신이 오기를 구하는 도와 효자가 어버이를 사랑하여 정성스럽기를 생각하는 의리가 여기에서 극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데 대하여 -상동- 구씨의 《가례의절》을 보면 “축이 읽기를 마치고는 그것을 가슴에 품고, 불사르지는 않는다.”고 운운하였다. 만약 신주를 축의 품속에 품는다면, 어찌 불경스럽고 설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또 여성 위(礪城尉) 송인(宋寅)이 축문을 가슴에 품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신령이 이제 막 신주에 의귀하였으나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불로 축문을 태울 경우 혹 놀라 흩어질까 염려된다.”고 운운하였는데,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무릇 축문은 제사를 마친 뒤에 곧바로 불에 태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슴에 품는 것은, 제사를 마친 뒤에는 곧바로 반혼(返魂)하느라 축문을 불태울 겨를이 없어서 그러는 것으로, 그 뜻은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할 뿐이다. ○ 퇴계가 답하기를, “대개 옛사람들은 초상으로부터 우제, 졸곡, 연제, 대상, 담제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에 따른 수복(受服)이 있어서, 차례로 승수(升數)를 늘리고 점점 슬픔을 줄여서 상을 마치게 됩니다. 소상은 1주기이니 크게 변경하여 줄이는 한 마디가 됩니다. 그래서 머리에 쓰는 수질(首絰)을 벗지만 따로 한 승수를 더한 누인 베로써 관을 만들고, 몸에 있던 부판(負版)과 벽령(辟領)과 최(衰)를 제거하지만 따로 한 승수를 더한 베로 최복(衰服)을 만들어 입으며, 또 별도로 한 승수를 더한 누인 베로 중의(中衣)를 만들어서 최복 밑에 받쳐 입습니다. 연관(練冠)과 연중의(練中衣)가 있기 때문에 연(練)이라고 말한 것일 뿐이지, 아울러 최복까지 누인 베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한 데 대하여 연복(練服)은 비단 연중의만 말할 뿐아니라 연최상(練衰裳)까지도 아울러 말하는 것으로, 마땅히 대공(大功)의 포(布)로써 최복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최(功衰)라고 이르는 것이다. 《예기》의 소에 나오는 ‘단지 연중의만을 입는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선유(先儒)들의 설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바, 횡거(橫渠)와 회암(晦菴)이 모두 연최상을 입는 것으로 정하여 《예기》의 소에 나오는 설과 다르게 하였다. ○ 퇴계가 우경선(禹景善)에게 답하기를,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죽은 자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깍지를 끼운다.[設決 麗于掔]’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악수(握手)의 길이는 1척 2촌이다. 이 악수의 두 끝으로 손을 감싸고[裹手二端] 손등에 두르는데, 반드시 중첩되게 한다.’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단(二端)’이라고 한 곳에서의 ‘이(二)’ 자가 금본(今本)에는 ‘일(一)’ 자로 되어 있으니, 이는 필시 한 획이 떨어져 나간 것이 분명합니다.” 한 데 대하여 ‘과수이단(裹手二端)’이라고 한 곳에서의 ‘이(二)’ 자는 틀린 것이며, ‘일단(一端)’이라고 한 ‘일(一)’ 자가 맞다. 이 부분의 소에 이르기를, ‘먼저 일단(一端)을 가지고 손을 한바퀴 감은 다음 또다시 일단으로 위를 향하게 해 가운데 손가락에 건다.’고 운운하였는바, 이를 합하면 이단(二端)이 된다. ○ 퇴계가 답하기를, “정군(鄭君)이 큰 화를 거듭해서 당하였다고 들었습니다.……분상(奔喪)의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예로부터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제가 알지 못하니, 어찌 근거 없이 망녕되이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예를 잘 아는 사람에게 널리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짐작으로 말해 본다면, 중상(重喪)을 당하여 이미 성복(成服)을 한 뒤이면 가는 도중에는 중상의 복을 그대로 입고 가고, 거기에 이른 뒤에 다시 성복의 예를 행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대개 중상의 복을 입고 있던 중에 다시 경상(輕喪)을 당하였을 경우, 경상의 일을 행할 때에는 경상의 옷을 입고서 하고, 일을 마쳤으면 중상의 복을 다시 입는다고 합니다. 이는 중복(重服)이 평상시에 입는 상복(常服)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데 대하여 -상동(上同)- 어머니의 상에 분상할 때에는 가는 도중에 중한 상복을 입고 갈 수는 없을 듯하다. ○ 퇴계가 답하기를, “삼년상 중에 가묘(家廟)에 제사를 지내도 괜찮은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선현들의 정론이 있습니다. 이제 묵최(墨衰)가 없는 것 때문에 여러 가지 의논이 분분하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자제(子弟)가 있는 사람은 자제에게 대신 행하도록 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자제가 없어서 스스로 행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복색(服色)은 전일에 옥색이라고 잘못 논하였는데, 그것은 정말로 잘못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말한 ‘백의(白衣)’는 바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말한 ‘백포의(白布衣)’이니, 그런대로 괜찮을 듯합니다. 그런데 곤란한 점은 관(冠) 또한 백포(白布)로 하는 것으로, 이는 더욱더 괴이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이제 또 하나의 설을 얻었는데, 제도를 새롭게 만들어서 백색의 포로 관과 의복을 해 입는 것보다는, 《가례》에서 말한 ‘묵최’의 복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 제도는 오늘날의 직령의(直領衣)의 모양과 같이 만들고, 관 또한 검은색을 사용하여 만들되, 한결같이 시자(侍者)의 관복과 같이 만들어 입고서 행사하는 것입니다.” 한 데 대하여 -상동(上同)- 묵최의 제도는 애당초 고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진(晉)나라 양공(襄公)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다시금 본받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날의 세속에서 말하는 ‘심의(深衣)’라는 것도 역시 묵최와 같은 것이다. ○ 퇴계가 말하기를, “역시 그것이 정확히 어떤 포(布)인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면포(綿布)는 질기니 면포를 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한 데 대하여 -상동 ○ 묻기를, “김이정(金而精)이 심의를 면포로 만들었는데, 제가 백마포(白麻布)를 써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이정이 말하기를, ‘무릇 예에서 마포(麻布)라고 말한 것은 마포이고, 단지 포라고만 말한 것은 모두 면포이다. 그러므로 대렴과 소렴에 쓰는 효(絞)는 모두 면포로 만드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이 설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면포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송(宋)나라 말기에서 원(元)나라 초기에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으며, 그 이전에는 면포를 쓴다고 말한 적이 없다. 김이정이 말한 목면포(木綿布)를 쓴다고 한 설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 퇴계가 말하기를, “어머니가 이미 부모라고 하였는데 그 자식 된 자가 어찌 외조부모를 위해서 복을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데 대하여 -상동 ○ 묻기를, “어머니의 양부모를 위해서도 역시 외조부모의 예에 의거하여 소공복(小功服)을 입어야 합니까?” 하였다.- 양외조부모(養外祖父母)에 대해서 외조부모를 위해 입는 복으로 복을 정하는 것은, 예에 있어서 어떨지 모르겠다. ○ 퇴계가 허봉(許篈)에게 답하기를, “비록 그런 뜻을 겸하여 내포하고 있기는 하나, ‘내(內)’라고 하고 ‘외(外)’라고 한 글자는 실로 묘(廟)의 내외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한 데 대하여 -묻기를, “《예기》 제의(祭義)에 이르기를, ‘치재는 안에 대해서 하고, 산재는 밖에 대해서 한다.[致齊於內 散齊於外]’ 하였는데, 이에 대해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치재는 마음에 구차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따위이고, 산재는 술을 마시지 않거나 냄새나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과 같은 따위이다.’ 하였으며,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내(內)라고 하고 외(外)라고 한 것은 묘(廟)의 안과 밖으로써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진씨의 설이 더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두 가지 설이 다 이치가 있으니 두 설을 아울러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였다.- 묘의 내외로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마음과 몸의 내외로 보아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 퇴계가 정여인(鄭汝仁)에게 답하기를, “남편이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 그 아내는 본생(本生)의 시부모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 것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저의 뜻을 외람되게도 다 말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예경에서 말한 대공복을 입는다는 글을 어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공복만을 입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인정에 가깝지 않아서 이와 같이 후한 쪽으로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한 데 대하여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의 아내는 그 본생의 시부모를 위해서는 예경에 따라서 대공복을 입어야지, 가복(加服)을 입어 기년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거처하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공복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 퇴계가 김사순(金士純)에게 답하기를, “‘개장(改葬)할 때에는 시마복을 입는다.’고 한 곳에서 말한 ‘아내’는 아들의 아내를 이르는 것입니다. 딸은 그 속에 저절로 포함되는 것입니다.” 한 데 대하여 ‘개장할 적에는 아들과 아내는 시마복을 입는다.’고 한 곳에서 말한 ‘아내’는 죽은 자의 아내이지 아들의 아내를 이른 것이 아니다. 삼년복을 입는 자는 시마복을 입는 것으로, 딸은 출가하였을 경우에는 복이 없다. 고례를 보면 며느리는 시부모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으며, 출가한 딸 역시 기년복을 입는바, 이들은 모두 시마복을 입는 자 중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통전》을 보면 출가한 딸은 그 부모를 개장할 때에는 시마복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의례》의 본뜻이 아니다. ○ 퇴계가 금문원(琴聞遠)에게 답하기를, “예를 보면 중월(仲月)이 지나갔을 경우에는 시제(時祭)를 거행하지 않으나, 궁한 집에서는 대부분 중월이 되기 전에도 매번 이를 핑계 삼아 폐하니, 이것은 도리어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준아(寯兒)에게 이와 같은 때가 있을 경우에도 역시 금하지 않고 지내게 하였더니 드디어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한 데 대하여 《예기》 증자문의 주에 이르기를, “사시(四時)의 제사는, 봄철 제사를 지낼 때를 당하여 혹 어떤 일로 인하여 지내지 못하고 폐하여 이미 여름철이 되었을 경우에는, 오직 여름철의 제사만을 지내며 다시 봄철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때가 지났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예에 있어서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체협(禘祫)과 같이 큰 제사일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하였다. 이 《예기》의 주로써 본다면 중월이 지났다고 하여 시제를 거행하지 않는 것은 고례와 합치되지 않는다. ○ 퇴계가 이평숙(李平叔)에게 답하기를, “기년복(朞年服)과 9개월복의 상을 당하였을 때 침실로 돌아가는 절차는 《예기》 상대기를 상고해 보니, ‘기년복의 경우에 여막(廬幕)에 거처하며 초상이 끝날 때까지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는데 어머니의 복을 입는 경우이다.’ 하였는데, 이는 오직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 자가 상을 다 마치도록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나머지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이르기를, ‘아내를 위하여 자최(齊衰) 기년복이나 대공포최(大功布衰) 9월복을 입는 사람은 모두 3개월 동안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오직 이 두 가지 경우에만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 나머지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데 대하여 고례를 보면, 아내의 상에는 11개월이 지나서 소상을 지내고 13개월이 지나서 대상을 지내고 15개월이 지나서 담제를 지내어 어머니 상의 기년복과 같게 한다. 《예기》 상대기에서 ‘위처(爲妻)’라고 한 글은 위 구절에 속하게 해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예기》에서는 이를 잘못 읽었으며, 퇴계 선생 역시 그대로 이에 따라서 잘못 답하였다. ○ 퇴계가 정도가(鄭道可)에게 답하기를, “주척(周尺)으로 할 경우에는 지나치게 작을 듯합니다. 혹자는 ‘고(高)’는 ‘광(廣)’ 자의 잘못이 아닌가 의심하는데, 상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한 데 대하여 -묻기를, “《가례》를 보면 축판(祝板)은 장(長)이 1척이고 고(高)가 5촌이라고 하였는데, 주척을 쓴 것입니까? 광에 대해서는 말해 놓지 않았는데, 광은 몇 촌으로 합니까?” 하였다.- 축문을 읽을 때에 판을 세워 놓으면 이것이 바로 고가 되며, 역시 판의 광이 된다. 글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 퇴계가 정도가에게 답하기를, “주자가 유평보(劉平父)에게 준 편지에 지자(支子)가 스스로 제주(祭主)가 되어서 지낼 수 있는 제사에 대한 설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지자가 주관하는 바의 제사는 아마도 기제(忌祭)와 절사(節祀) 따위의 제사인 듯합니다. 이제 만약 일체의 제사를 모두 종자(宗子)에게 다 맡게 하고 지자로 하여금 제사를 지낼 수 없게 한다면,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여겨 등한시하는 사이에 제수 물품을 도와주는 것마저도 법식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중자손(衆子孫)들로 하여금 선조를 향사하는 예를 완전히 잊게 하고 종자 혼자서만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을 떠맡게 할 것이니, 이것은 아주 온당치 못합니다.” 한 데 대하여 지자가 스스로 주관할 수 있는 제사는 바로 예(禰)를 잇고 조(祖)를 이은 따위의 소종(小宗)이 지내는 제사로, 바로 《가례》 사당장(祠堂章)에서 말한 ‘제사를 지낸 다음 날에 차위(次位)의 자손으로 하여금 스스로 제사 지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이 아니며, 기제나 절사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이를 끌어대어서 같게 보아서는 안 된다. ○ 퇴계가 정도가에게 답하기를, “형은 이미 세속의 풍속을 따르고 있으니 동생 혼자서만 고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 데 대하여 -묻기를, “저의 가형(家兄)이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어 나갔으므로 초기(初期)에 복을 벗을 적에 단지 검은 초립(草笠)에 옥색의 옷을 착용하였습니다. 이제 제가 참색(黲色)의 제도를 쓸 경우에는 한 궤연(几筵) 안에서 복색이 서로 다르게 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였다.- 형이 이미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어 나갔으니 형제간에 복이 다른 것은 예에 있어서 당연한 바로, 세속의 풍속을 따라서 하는 일이 아니다. ○ 퇴계가 조카인 이영(李寗)에게 답하기를, “고례를 보면 첩 역시 신주가 있으니, 이제 신주를 만들어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에는 굳이 신주를 만들 필요가 없이 단지 위판(位版)만 써도 될 것이다.” 한 데 대하여 신주는 분수를 범하는 일이 아니니 천인(賤人)이라는 이유로 다시 위판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주D-001]의례경전통해 : 원문에는 ‘疑禮通解’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儀禮通解’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월건(月建) : 각 달의 간지(干支)로, 음력 12개월을 십이지(十二支)에 맞추고 매월마다 이에 따른 월건이 있는데, 이는 북두성(北斗星) 자루가 초저녁에 가리키는 방향에 의하여 명칭을 붙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음력 11월에는 북두성 자루가 정북인 자방(子方)을 가리키며, 12월에는 축방(丑方), 1월에는 인방(寅方), 2월에는 묘방(卯方)을 가리킨다. [주D-003]상동(上同) : 이 부분은 편집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퇴계의 이 답변은 김이정(金而精)의 문목(問目)에 대한 답이다. 아래에 나오는 내용도 역시 김이정의 문목에 답한 것이다. [주D-004]공최(功衰) : 삼년상을 당하여 소상(小祥)이 지난 뒤에 입는 참최복(斬衰服)을 말한다. 참최복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마포(麻布)의 승수(升數)가 대공복(大功服)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마포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주D-005]악수(握手) : 죽은 자의 시신을 염습할 적에 손을 감싸는 천을 말한다. 베나 비단으로 만든다. [주D-006]정군(鄭君) : 정곤수(鄭崑壽 : 1538~1602)로, 자는 여인(汝仁)이고 호는 백곡(柏谷)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퇴계의 문인이다. [주D-007]예기 …… 글 : 《예기》 상대기에 ‘期 居廬 終喪不御於內者父在爲母爲妻 齊衰期者 大功布衰九月者 皆三月不御於內’라고 한 곳에서의 ‘爲妻’를 가리킨다.
125    성공으로 이끄는 명언록 800가지 댓글:  조회:2472  추천:0  2012-08-08
▶성공으로 이끄는 명언록 800가지   ●재미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오로지 그 일에 집중하라. -유철수 ●성공이란 가고 싶은 길을 계속 가는 것입니다. –구본형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그릇된 믿음을 버리는 것이 성공을 향한 첫걸음이다. -앤드류 매튜스 ●성공에 중요한 요소는 지식과 창조력이다. -에릭 브리 뉼슨 ●나의 관심은 주로 미래에 있다. 여생을 거기서 보낼 것이니. ―C.K. ●어른은 누구나 가르칠 아이가 필요하다. 그래야 어른도 배우게 된다. ―F.C. ●순간은 눈 깜짝할 사이지만 기억은 영원하다. ―B.M. ●마음의 평화란 생의 갈등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을 이겨내는 능력에서 온다. ―무명씨 ●名望을 잃으면 숨쉬고 있지만 죽은 사람. ―S.S. ●우리들 대부분은 초라한 옷차림과 엉터리 가구들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그보다는 초라한 생각과 엉터리 철학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문제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할 때 해결책을 늘어놓기란 참 쉬운 법. ―M.F. ●노력하지 않아도 그대로 굴러오는 것은 나이뿐. ―G.P. ●말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얘기를 음악이 들려 준다. ―H.C. ●비통에 젖어 본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남을 동정할 수 있다. ―J.G. ●사람들은 비밀을 알려주기는 꺼리지만, 교환하자면 선뜻 응한다. ―「선 샤인」誌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도 그걸 깨지지 않게 지키는 것은 인간의 의무. ―J.G. ●기억이란 우리 모두가 지니고 다니는 일기장. ―M.H. ●젊은이들은 밤중에 태어나서 이튿날 아침 해돋이를 처음 보는 갓난애들 같기 때문에, 어제란 으례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서머셋 모옴 ●지옥에서 가장 끔찍한 자리는 인생의 중대한 문제에 중립을 취했던 사람들의 차지. ―빌리 그라함 ●신문이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약을 올려 그 사태에 관해 어떤 행동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야 한다. ―마크 트웨인 ●나는 내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보다는 그 분의 손자가 어떤 사람이 될지에 더 마음을 쓴다. ―에이브러햄 링컨 ●민주주의는 사랑처럼 외면과 무관심을 제외한 어떠한 공격에도 살아 남을 수 있다.―P.S. ●병원침대란 정지해 있는데도 요금미터기가 마구 돌아가는 택시와 같은 것. ―G.M. ●권력과 인내가 겨룰 때에는 인내 쪽에 내기 돈을 걸어라. ―W.B.P. ●묻는 걸 겁내는 사람은 배우는 걸 부끄러이 여기는 사람. ―덴마크 속담 ●자유를 사랑함은 남을 사랑하는 것. 권력을 사랑함은 제 자신을 사랑하는 것.―윌리엄 해즐리트 ●바쁘게 움직이는 정신은 굴러가는 눈덩이같이 자꾸 커진다. ―E.G. ●위협해서 나쁜 짓을 막는 것보다는 구슬러서 착한 일을 시키기가 더 쉬운 법. ―R.S.S. ●가진 것을 깡그리 빼앗아 버렸을 때는, 그 사람을 더 이상 다스릴 수가 없다. 그는 자유민이기 때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서 법에 묶여 사는 것이다. ―키케로 ●우리가 숨길 수 없는 두 가지 사실: 술에 취한 것과 사랑에 빠진 것. ―안티파네스(희랍 극작가, 前 4∼5세기) ●성장을 위한 성장은 암세포의 논리에 불과하다. ―H.A. ●남자들은 어리석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適時에 바보인 척할 줄 아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 필요한 때 바보인 척할 줄 아는 것은 슬기로운 여자의 기본적 자질. ―폴 엘드리지(美 작가て교육자) ●어린애가 하는 짓을 하기엔 너무 크고 어른들이 하는 일을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가 10대. 10대들이 아무도 하지 않는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은 이 때문. ―「리드」誌 ●권태는 도덕가의 가장 큰 문제거리. 인류가 저지르는 범죄의 적어도 절반 이상이 권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빚어지기 때문. ―버트런드 러셀 ●세상에는 놀라는 사람도 많지만 반란을 만난 혁명가보다 더 놀라는 사람은 없다. ―P.G. ●남에게 돈을 주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정신건강을 진단할 수 있다. 후한 사람 치고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칼 메닝어 박사(美 정신의학자, 1893∼ ) ●과거의 연극은 인생이 송두리째 비쳐진 거울이지만, 오늘의 연극은 인생을 들여다보는 열쇠구멍. -A.H.G. ●미래란 다른 문을 통해 돌아오는 과거. ―A.H.G. ●훌륭한 여행자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사람. 완벽한 여행자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사람. ―L.Y.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물론 가끔 미치광이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치광이 같은 소리를 듣고도 그것을 분간할 줄 모른다면 똑같이 미치광이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해리 S.트루먼 ●모든 사람이 남보다 잘하는 일 한 가지.―자기 글씨를 알아보는 것. ―J.A. ●자유는 정신을 숨쉬게 해주는 산소. ―모세 다얀 ●꿈을 현실로 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빨리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 ―J.M.P.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믿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알지 못하는 사람은 우리를 기만한 일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뮤엘 존슨 ●내 인생은 나를 울화통 터지게 만드는 어떤 바보의 손에 달려 있다. ―J.H.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찾는 가장 쉬운 길은, 지금 당장 그 바보상자(TV)를 끄는 것. ―J.H.S. ●자신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한번도 놀라보지 못한 사람은 가장 위대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사람. ―J.F. ●겸손한 사람에 오만하지 말고, 오만한 자에게 겸손하지 말라. -제퍼슨 데이비스(19세기 美 정치가) ●신사로 태어나는 것은 우연이지만 신사로 죽는 것은 노력의 결정. ―B.G. ●강을 다 건널 때까진 절대 악어를 집적대지 말라. ―C.H. ●모범이란 남에게 영향을 주는 주된 일이 아니라, 유일한 일. ―알베르트 슈바이처 ●분노할 때는 천천히. 시간은 충분하니까. ―랠프 월도 에머슨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묶어 두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존 A.셰드(美 교육자) ●자유를 지지한다면서도 선동을 두려워하는 자는, 천둥과 번개 없이 비가 내려 주기를 바라는 사람. ―프레드릭 더글러스(18세기 美 노예폐지운동가) ●거북은 아무도 몰래 수천 개의 알을 낳지만 암탉이 알을 낳을 때면 온 동네가 다 안다. ―말레이지아 속담 ●더 많이 알면 더 많이 용서하는 법. ―캐서린 大帝 ●남을 처벌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을 항상 경계할 것. ―프리드리히 니체 ●개인이나 국가 모두에 가장 두려운 일은 권력의 상실이 아니고 감각의 상실이다. ―N.C. ●날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기어 가라는 말에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헬렌 켈러 ●약속을 잘하는 사람은 잊기도 잘하는 법. ―토마스 풀러(英 목사) ●전문가보다 더 고약한 사람은 제가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 ―A.A.C. ●울지 않는 지혜, 웃지 않는 철학, 어린이들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위대함을 멀리하게 해주소서. ―K.G. ●교육의 비결은 학생들을 존중하는 데 있지요. ―랠프 월도 에머슨 ●안정이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메테르니히(19세기 오스트리아 정치가) ●명예롭지 못한 권력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유머 없는 권력. ―E.S. ●미국의 위대성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개명되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과오를 시정할 능력을 가졌다는 데 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19세기 프랑스 정치가) ●논쟁에서 무식한 사람한테 이기다니 어림없는 말씀. ―W.G.M. ●임금을 주는 것은 고용주가 아니다. 고용주는 단지 돈을 관리할 따름이고 임금은 노동자들이 만든 생산품에서 나온다. ―헨리 포드 ●원칙보다 특권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곧 둘 다 잃게 된다.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젊은이들은 타산적일 만큼 많이 알지 못한다. 바로 그러니까 젊은 세대는 노상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며 그것을 이룩한다. ―펄 벅 ●컴퓨터는 인간이 어림잡아 상상하는 수고를 많이 덜어 주었다. 하지만 비키니수영복도 꼭같은 공헌을 했다. ―「내셔널 업저버」誌 ●나는 현명한 외면보다는 열정적인 실책을 더 좋아한다. ―아나톨 프랑스 ●賞에 관해 누구나 알아둬야 할 한 가지 일은, 모차르트가 생전에 아무런 상도 타 본 적이 없다는 사실. ―H.M. ●우리를 망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 만약 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이 장님이라면, 나는 구태여 고래등 같은 집도 번쩍이는 가구도 바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벤저민 프랭클린 ●젊은이들이 평생을 두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다. ―L.O. ●같은 책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맺은 우정처럼 빠르게 뭉치는 우정은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것. ―어빙 스턴 ●우리는 적어도 매일 한 곡의 노래를 듣고 한 편의 시를 읽고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해야 하며 가능하면 몇 마디 도리에 맞는 말을 해야만 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거짓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단 한번만 거짓말을 하기는 어렵다. ―「텍사스 뉴스」誌 ●어떤 사람들은 휴가여행을 떠날 때 온갖 물건들을 다 갖고 가면서도 예절을 빼놓고 간다. ―「타임스 리퍼블릭」誌 ●연설은 연애와 같다. 어떤 바보라도 시작할 수 있으나 끝마무리를 짓는 데는 꽤 기술이 필요하니까.―맨로크프트卿 ●진정으로 매력적인 여성은 젊은이에게 원숙을, 늙은이에게 젊음을 느끼게 하고, 중년남자를 완전히 자신감 있게 만들어 주는 여자. ―B.T. ●혁명이란 낡은 사회가 새 사회를 잉태한 결과. ―H.F.S. ●완벽한 아내란 완벽한 남편을 기대하지 않는 아내. ―무명씨 ●통계는 正義를 대신할 수 없다. ―H.C. ●내일이란 오늘의 다른 이름일 뿐. ―윌리엄 포크너 ●복수를 하려고 벼르는 사람은 입는 상처의 치료를 않는 법. ―프란시스 베이컨 ●수천 그루의 나무로 울창해진 숲도 한 톨의 도토리로부터 비롯된 것.―랠프 월도 에머슨 ●친절이란 귀먹은 사람이 들을 수 있고 눈먼 사람이 볼 수 있는 언어. ―마크 트웨인 ●사람에겐 친구와 고독이 아울러 필요하다. 여름과 겨울, 낮과 밤, 운동과 휴식이 필요하듯. ―P.G. ●남몰래 하는 선행은 땅 속을 흐르며 대지를 푸르게 가꾸어 주는 지하수 줄기와 같은 것. ―토머스 칼라일 ●민주주의는 감정이 아니라 선견지명이 낳은 제도. 긴 안목으로 설계하지 않은 체제는 얼마 못 가 무너질 것이다. ―C.Y. ●贖罪羊을 찾는 것은 사냥 중에서 가장 쉬운 사냥.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침묵은 대화의 안전지대. ―A.H.G. ●이 세계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손들한테 빌린 것임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자연보호주의자다. ―「오더븐」誌 ●모든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다같이 진실에 귀기울이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새뮤얼 존슨 ●진심으로 기도를 올려 무언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랠프 월도 에머슨 ●성공하는 사람이란 남들이 자기에게 던지는 벽돌로 든든한 기초를 쌓아가는 사람.―D.B. ●친구에게 돈을 꾸려거든 먼저 친구와 돈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필요한지 결정할 것.―A.H.H. ●우리는 두려움의 홍수에 버티기 위해서 끊임없이 용기의 둑을 쌓아야 한다.―마틴 루터 킹 목사 ●살아간다는 것은 변화함을 뜻하고, 변화한다는 것은 성숙함을 뜻하고, 성숙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 간다는 뜻. ―H.B. ●상식은 본능이요, 그것이 많은 사람은 천재. ―조지 버나드 쇼 ●떡갈나무가 넘어질 때는 온 숲 속에 그 넘어지는 소리가 메아리치지만 수많은 도토리들은 미풍에 소리없이 떨어져 새로운 씨앗이 된다. ―토머스 칼라일 ●조숙한 아이보다 더 지겨운 존재는 그 아이의 어머니. ―J.W.M. ●아픔 없이 자기 자신을 다시 만들 수는 없는 법. 제 자신이 곧 대리석이자 그걸 쪼는 조각가가 돼야 하기 때문. ―A.C. ●세상은 결과만을 알고 싶어 한다. 남에게 産苦를 말하지 말고 거기서 얻은 아기만 보여줘라. ―A.H.G. ●때로 푹 쉬도록 하라. 한 해 놀린 밭에서 풍성한 수확이 나는 법. ―오비드(고대 로마 시인) ●공직을 맡은 자는 스스로를 공공재산으로 생각해야 한다. ―토머스 제퍼슨 ●먹는 것에 대한 사랑보다 더 거짓 없는 사랑은 없다. ―조지 버나드 쇼 변혁에 저항하는 보수주의자도 변혁을 주창하는 진보주의자만큼 가치 있다. ―W.D. ●오래오래 결실 있는 삶을 살아가는 한 가지 비결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을 용서해 주는 것. ―A.L. ●詩란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 끝나는 것. ―로버트 프로스트(美 시인) ●자기 이웃에서 자행되는 탄압과 차별을 외면하면서 세계의 다른 쪽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일에 더 분노하기 쉬운 것이 인간. ―칼 T.로완 ●노동은 사람에게서 세 가지 큰 악―권태와 非行과 궁핍―을 덜어 준다. ―볼테르 ●영웅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용감한 것이 아니고 다만 5분 동안만 더 용감할 뿐이다.―랠프 월도 에머슨 ●神은 움직씨[動詞]이지 이름씨[名詞]가 아니다. ―R.B.F.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그것을 읽은 체할 때 그 책은 성공한 것.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불만은 진보의 아버지. ―데이비드 록펠러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될 수는 없다. 영웅이 지나갈 때 박수쳐 줄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W.R. ●무엇을 증명하려면 논리가 필요하지만 무언가를 발견하자면 직관이 필요한 것.―H.P. ●사람들은 자기 일이나 자기네 정치는 하찮게 여기지만 노름판은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조지 버나드 쇼 ●칭찬은 샴페인과 같다. 거품이 꺼지지 않았을 때 갖다 바쳐야 된다. ―R.R. ●건강을 지닌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희망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아라비아 속담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국회의원을 뽑고 싶다고 하면서도 결국 뛰어난 政商輩에게 표를 찍고 만다.―O.P. ●어떤 사람에게 이미 마음을 열어줬으면 그 사람에게 입을 다물고 있지 말라.―찰스 디킨스 ●질투를 느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말 것. 결코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니까. ―G.B. ●충고란 우리가 이미 대답을 알면서도 대답을 몰랐으면 싶을 때 요청하는 것. ―E.M.J. ●명예롭지 못한 성공은 양념을 하지 않은 요리와 같은 것. 그건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지만 맛은 없을 것이다. ―조 파테어노(美 풋볼코치) ●외교관계는 인간관계와 같이 끝이 없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니까. ―제임스 레스턴(美 시사평론가) ●독신으로 지내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다. 독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 ―B.S. ●칭찬하기를 포기하면 큰 잘못. 매력적인 것을 매력있다고 말하기를 포기할 때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 ―오스카 와일드(英 시인) ●자기는 어떤 활동 분야에서나 자동적으로 대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바보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은 자기가 결혼생활에 자동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S.H. ●일들이 잘못될 경우 사람들은 대통령을 비난하기를 좋아한다. 그건 대통령이 치러야 하는 고역. ―존 F.케네디 ●한 여자의 이상적인 남성으로 남아 있으려면 독신으로 죽는 길밖에 없다. ―P.P. ●우리는 구세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첫 반평생을 보내고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나머지 반평생을 보낸다. ―E.W.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늙지 않는 법. 고령으로 죽더라도 젊음을 간직한 채 죽는다. ―A.W.P ●기적은 가끔 일어난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게 하자면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C.W. ●따분한 인간이 되는 비결은 모든 것을 하나에서 열까지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 ―볼테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도구는 우리의 귀. 즉 상대편 말에 우선 귀를 기울여 듣는 것. ―딘 러스크(前 美국무장관)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라. 그 사람은 자기를 믿지 않는 그 무엇을 믿고 있으니까. ―F.M. ●무엇이라도 좋으니 당장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 그것은 많은 엉터리 조치를 낳는 어머니.―대니얼 웹스터 ●권태의 치료제는 호기심이지만 호기심을 고치는 약은 아무 것도 없다. ―M.F.A. ●가장 좋은 선물은 모두가 서로를 감싸주는 행복한 가정. ―M.M. ●황금시절을 헛되게 보내지 말라고들 경고하지만, 어떤 황금시절은 헛되이 지나갔기 때문에 황금시절이라 한다. ―J.R. ●영웅들이 없는 민족은 장래가 없는 민족. ―M.M. ●일어서서 자기 주장을 펴는 데도, 앉아서 귀기울여 듣는 데도 꼭같이 용기가 필요한 법. ―C.H.V. ●재능 가운데 가장 소중한 재능은 한 마디면 될 때 두 마디 말하지 않는 재주. ―토머스 제퍼슨 ●어느 정도의 반대를 받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연이 바람을 받아야 높이 뜨는 것처럼. ―J.N. ●일을 배우는 길은 그 일을 하는 것. ―에스토니아 속담 ●요리법이 발달되고 나서 사람들은 필요한 것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음식을 먹는다. ―벤저민 프랭클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상대방이 스스로 알도록 하라. 그러면 그는 당신을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誌 ●醫術이란 自然이 병을 고쳐 주는 동안 환자가 기분 좋도록 해주는 기술. ―볼테르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아이들을 낳아 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J.H. ●그 사람이 함께 어울리기를 피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J.C. ●누구나 바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다. 불행한 것은 그런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몽테뉴 ●富의 재분배보다는 기회의 재분배가 더 중요하다. ―A.H.V. ●발견을 위한 참다운 항해는 새 땅을 찾아내는 것보다도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데 의의가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프랑스 작가) ●위트는 대화의 양념이지 主食은 아니다. ―윌리엄 해즐리트(英 수필가) 유행은 빛이 바래지지만 멋은 영원한 것. ―이브 생 로랭(프랑스 디자이너) ●오래 묵을 수록 좋은 것 네 가지: 오래 말린 땔나무, 오래 묵어 농익은 포도주, 믿을 수 있는 옛친구, 읽을 만한 원로작가의 글. ―프란시스 베이컨(英 작가) ●인생에 가장 성공적인 사람은 대체로 가장 훌륭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 ―벤저민 리즈레일리 ●가장 위대한 에너지源 가운데 하나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긍지. ―스포크 박사(美 소아과의사)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공것을 주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관찰하는 것. ―A.L. ●친구를 비판하는 것이 마음 아플 때는 비판해도 좋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느낄 때는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 ―J.R. ●나는 총칼을 든 10만 대군보다 한 장의 신문을 더 두려워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공손하기 때문에 잃는 단 한 가지는 만원 버스의 좌석. ―에이레 속담 ●역사란 피할 수 있었던 일들의 集大成. ―콘라드 아데나워 ●사춘기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바로 열병 같은 것. ―R.A. ●강요된 것이 아닌 윤리가 진정한 윤리. ―C.S. ●사람들은 한 잔 술에 귀여운 양이 되고, 두 잔에 질주하는 얼룩말이 되고, 석 잔에 포효하는 사자가 되고, 넉 잔에 어리석은 나귀로 되돌아간다. ―터키 속담 ●전쟁에서 상처받지 않는 군인은 없는 법. ―J.N. ●논란이 분분한 문제에 관해 역성들지 않고 사리 바르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유머감각이 풍부한 사람. ―L.F. ●어떤 비밀을 남몰래 지키고 있을 때 그 비밀은 우리 머슴처럼 고분고분하지만, 일단 그것을 발설하고 나면 상전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려 드는 법. ―T.P.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주는 것. ―아나톨 프랑스 ●눈여겨 볼 때와 눈감아 줄 때를 아는 아내가 良妻. ―A.H. ●겁쟁이도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만이 불안을 이겨 낼 수 있다.―M.M. ●어떤 민족을 이해하고 싶거든 그들의 민속춤을 보고 민요를 들어라. 결코 그들의 정치인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기울이지 말라. ―아그네스 데 밀(美 무용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마치 2루로 도루하면서 한 발을 1루에 둘 수는 없듯이. ―F.B.W. 우울증을 고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몸을 잊고 남의 몸에 관심을 갖는 것. ―G.A. 자존심은 수양의 결실. 사람의 위엄은 자기 자신에게 '노'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성장한다. ―A.J.H. 아이들을 너무 행복하게 해주어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행복이야말로 모든 건전한 사람이 성장하는 분위기이다. ―토머스 브레이(英 목사) 가장 위대한 기도는 인내. ―석가모니 섬세하고 친절한 마음씨, 섬세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은 혀, 이 두 가지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배필. ―L.P.S. 우리 시대의 그 숱한 야만적 작태는 그것을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일이다. ―M.M. 利己主義는 인간의 천성이요, 無私는 후천적 교양. ―J.G. 긴 논쟁은 쌍방이 다 옳지 않다는 증거. ―볼테르 궂은 날씨는 창 안에서 볼 때 더 우울해 보인다. ―J.K. 전통이란 한 민족의 즐거운 추억. ―J.F.C. 고향이란 예전에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듯. ―W.D.T. 나무를 심는 사람은 자기 이외에 남들도 사랑하는 사람. ―영국 속담 독서가들은 책을 읽고서 기억하는 부류와 책을 읽고 잊어버리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W.L.P. 스포츠팬들이 이름없는 선수에게 야유하는 법은 없다. ―R.J. 음악은 감정의 速記法. ―레프 톨스토이 돈이 많고 건강하면서도 은퇴하는 것은 멋진 일. 그러나 돈이 많고 건강하면서 일을 계속하는 것은 더욱 멋진 일. ―B.V. 저 좋은 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말을 듣게 된다. ―L.L.L. 당신 자신의 부도덕성과 싸우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라. 그리고 새해를 맞을 때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라. ―벤저민 프랭클린 자녀에게 관심깊은 부모가 있고 집에 읽을 만한 책이 많은 아이는 가엾은 아이가 아니다. ―S.L. 미리 계획을 세워라―노아가 方舟를 모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았다. ―G.F.C.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는 모두 사회에 기여한다. 낙관론자는 비행기를 만들고 비관론자는 낙하산을 만들어 내니까. ―G.S. 증오는 질질 끌면서 하는 자살과 같은 것. ―D.V.S. 과학은 아무리 발달해도 지혜가 아니고 상식이다. 지혜란 지식과 판단력이 조화된 것. ―R.C. 현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적을 믿어야 한다. ―데이비드 벤구리온 하느님은 우리가 일할 때는 우리를 존중해 주고 우리가 노래할 때는 우리를 사랑한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훌륭한 모범은 거만한 법. 그 거만한 모범을 따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별로 없다. ―마크 트웨인 인내란 참을 수 없는 것을 숨기는 기술. ―F.P.J. 시간은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의 재산이요, 유일한 재산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뿐이다. 결코 그 재산을 남이 우리 대신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칼 샌드버그 칭찬하면서도 부러워하지 않고, 뒤좇지만 모방하지 않고, 찬양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지도자로 앞장서지만 남을 속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겐 축복이 내릴지어다. ―W.A.W. 아담이 외로울 때 하느님은 그를 위해 열 명의 친구를 만들어 주지 않고 한 아내를 만들어 주었다. ―C.V. 인간은 완전하게 될 순 없으나 점점 나아질 수는 있다. ―E.S. 환경오염문제에 대한 회의를 여는 것은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껌 포장지를 줍기보다 더 쉬운 일. ―B.V. 행복이란 손 닿는 데 있는 꽃들로 꽃다발을 만드는 솜씨. ―B.G. 이웃 없이 지낼 만큼 돈 많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덴마크 속담 손해 본 일은 모래 위에 새겨 두고, 은혜 입은 일은 대리석 위에 새겨 두라. ―벤저민 프랭클린 문명이란 상황이 아니라 움직임이고, 항구가 아니라 항해이다. ―아놀드 토인비 진정으로 어떤 논쟁을 매듭짓고 싶으면 "당신 말이 옳은 것 같군요"라고 말하도록 노력할 것. ―F.F.W. 정의를 지향하는 인간의 자질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지만, 불의로 기울기 쉬운 인간의 경향은 민주주의를 필수불가결하게 한다. ―R.N. 능력이 적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잘못.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칼 세이건 창조적인 소수가 이끌어 주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존속할 수 없다. ―H.F.S. 아이를 성공적으로 다루는 비결은 그 부모가 되지 않는 것. ―M.L. 진정한 성공은 성공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 ―P.S. 남들이 당신 칭찬을 하게 하라. 당신이 제 자랑을 하는 것보다 두 배나 널리 퍼질 테니까. ―W.R.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아이스크림을 숟갈에 듬뿍 뜨다 떨어뜨렸을 때 실망하긴 마찬가지. ―J.F. 결혼하기는 쉽지만 결혼생활을 계속하기는 조금 어렵다. 평생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연 최고의 예술에 속한다. ―R.F. 서로 나눈 기쁨은 두 배나 더 기쁘고 서로 나눈 슬픔은 절반밖에 슬프지 않다. ―스웨덴 속담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품고 어리석은 자는 남들만 의심한다. ―H.A. 조용한 군중들 편에 서면 십중팔구 옳은 쪽에 끼게 된다. ―N.W. 어떤 사람이든 당신이 선량한 사람이라고 해주면, 실제로는 그렇게 선량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앞으로는 선량한 사람이 되려고 한층 더 노력할 것이다. ―C.V.M. 인생에서 맨 처음 하는 악수, 아기가 고사리 손으로 부모의 손가락을 감아 쥐는 악수야말로 가장 뜻 깊고 훌륭한 악수. ―M.B. 펄펄 끓는 국을 마시다 혀를 데이고도 같이 국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국이 뜨겁다는 것을 알리지 않는 사람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 ―유고슬라비아 속담 사교적인 사람이 되려면 남이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더라도 아무 소리말고 배울 것. ―T. 믿음이란 아직 어두운 새벽에 노래하는 새와 같은 것.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 인도 시인) 가을은 모든 잎이 꽃으로 변하는 제2의 봄. ―알베르 까뮤(1913∼1960, 프랑스 작가) 가끔 실패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안이하게만 산다는 증거. ―우디 알렌(美 유머작가) 장기가 끝나면 將軍도 士卒도 다시 장기망태기로 들어간다. ―이탈리아 속담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을 때의 당신이 당신의 참다운 모습. ―앤 랜더스(美 칼럼니스트) 사람은 누구나 돈이나 편견이 개재되지 않는 한 쉽사리 문제의 양면을 볼 수 있다. ―C.C.P. 연민이란 내 마음 속의 남의 괴로움. ―J.L. 내가 오늘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내 인생의 하루를 그것과 바꾸고 있으니까. ―H.M. 세상은 사람의 야심과 반드시 완전한 조화를 이루도록 돼 있지 않은 곳. ―칼 세이건(美 천문학자) 자신이 지닌 재주는 무엇이든 십분 발휘하라. 가장 아름답게 노래 부르는 새들을 제외하고 다른 새들이 노래하지 않는 숲이 있다 치자. 그 얼마나 적막할 것인가! ―헨리 반 다이크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일찍 일어날 뿐. ―P.P. 같은 1달러라도 교회에 가져 갈 땐 커 보이고 가게에 가져갈 땐 작아 보인다. ―F.C. 사람들을 때려서 지도할 수는 없다. 그것은 폭력행사이지 지도력의 발휘는 아니다. ―D.D.E. 주체의식이 너무 강한 사람은 자기가 어떤 잘못도 저지를 수 없다고 느낀다. 주체의식이 너무 없어도 마찬가지. ―D.B. 아이와 천재에게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으니 탐구심이 바로 그것. ―E.G.B. 언제나 신선한 달걀로 남을 수는 없다. 병아리로 부화되든지 곯든지 해야 한다. ―C.S.L. 역사라는 게임은 최선의 사람과 최악의 사람들이 중간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제쳐놓고 저희들끼리 하는 게임. ―E.H. 정반대가 된다는 것도 모방의 일종. ―G.C.L. 충돌했을 때 더 안전한 자동차를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행자를 개조할 방법은 없는 듯. ―B.V.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발전이 아니라 그 부작용. ―D.F. 이 세상은 돈만 많으면 남들이 보는 눈도 달라진다. 부자가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면 다양한 기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두 군데 직장에 다니면 부업을 가졌다고 눈총을 받는다. ―K.M. 요사이 젊은이들은 머리가 장발이라 해서 취직할 수 없다고 불평하지만, 머리칼이 거의 다 빠지고 허옇게 센 사람이 직장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어다. ―빌 본(美 언론인て기고가)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박사가 되려고 기를 쓴다고 초조해 하지 말 것. 사람들이 모조리 박사가 되면 마지막 남은 청소부는 재벌이 될 테니까. ―월터 커넌(기자て뉴스해설자) 사람들은 슬픈 일이 닥칠 때마다 "오,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하고 질문을 하지만,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 한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다. ―P.S.B. 아이들의 버릇을 고치려면 남들에게 아이들 칭찬을 하되 아이들이 엿듣게 할 것. ―H.G. 학교는 재능을 녹여 능력으로 바꿔 주는 제련소. ―R.L.S. 우주여행을 하고 싶어들 하지만 조심할 것. 인구가 이대로 증가하다가는 우주여행에서 돌아와 보면 다른 사람한테 자리를 뺐겼을지도 모르니까. ―K.M. 눈 감고 무조건 따라오라는 소리를 듣고 눈을 살짝 뜨고 엿보지 않는 사람은 바보. ―J.F. 결혼생활은 한 가지 값진 교훈을 가르쳐 준다. 언제나 말하기에 앞서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생각하면 결국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 그것. ―J.M. 우리가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는 한 가지 최선의 것은 우리의 후손들의 수를 대폭 줄여 주는 것. ―O.M. 아무런 장애도 없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틀림없이 아무 데로도 뚫리지 않은 길. ―F.A.C. 미래를 어느 정도 현실 속에 도입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현명한 정부의 비결. ―빅토르 위고 예절이 바르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서 해야 할지 아는 기술. ―M.D.S.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 웃음을 참는 것은 인간적. ―L.O. 인간의 조상이 무엇이냐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오로지 인류를 욕되게 하는 짓을 안 하도록 조심하면 된다. ―H.B. 어제는 경험, 내일은 희망, 오늘은 경험을 희망으로 옮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순간. ―B.S. 나는 자기의 스케줄에서 나를 위해 시간을 찾아 주는 친구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자기의 스케줄을 보지도 않고 나를 위해 시간을 내 주는 친구를 더욱 소중히 여긴다. ―R.B. 수다쟁이란 다른 사람들이 불이 났다고 생각하게끔 연기를 피워 놓는 사람. ―D.B. 할 권리가 있다고 해서 하는 일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F.A.C.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하는 말 뒤에 꼭 "그러나...." 하고 이어지는 이유는 무얼까 ―M.J. 우리 세대는 편할 때가 없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어른을 존경해야 한다더니 이제 와서는 젊은 세대를 존중하라고 하니. ―M.S. 아침과 봄이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 되는가를 보면 당신의 건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H.D.T. 제1급의 인간은 제1급의 인간을 고용한다. 제2급의 인간은 제3급의 인간을 고용한다. ―L.R. 개를 한번 쓰다듬어 주면 계속해서 내내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F.P.J. 누구든지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류머티즘과 사랑을 믿지 않는다. ―M.V.E.E. 용기는 흔히 통찰력의 결핍에서 나오는 한편, 비겁은 대개의 경우 훌륭한 정보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피터 유스티노프(英 배우) 모든 논쟁에는 양면이 있고 논쟁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흔히 그 양면 때문이다. ―M.M. 마치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것이 칭찬인 경우도 있다. 그것은 당신이 다른 사람의 생활 속에 편안하고 신뢰감을 주는 요소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이스 브라더스(美 여류심리학자て1927년생) 오랫동안 게을리한 의무야말로 나중에 무섭고 두려운 대상이 된다. ―촌시 라이트 당신이 먼저 등을 구부리지만 않으면 남이 당신 등에 올라타지 못할 것이다. ―마틴 루터 킹 코끼리가 싸우면 죽어나는 건 발밑의 풀. ―아프리카 속담 "이 행동에 대해 나에게 책임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면 당신에게 책임이 있는 일. ―표드르 도스토예프스키 우리는 흔히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우리 뜻대로 되기를 바라서 기도를 한다.―헬가 B.그로스 모욕을 주는 사람은 모래 위에 글을 쓰는 것 같지만, 그 모욕을 받은 사람에게는 청동에 끌로 판 것처럼 새겨진다. ―조반니 과레스키 아무리 좋고 알뜰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때로는 그들이 옆에 없을 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법. ―앤 쇼 가장 위대한 예술가도 한때는 초심자였다. ―「파머스 다이제스트」 滿潮에는 모든 배가 떠오른다. ―존 F.케네디 누구에게나 청춘이 지나가 버렸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실제로는 그것이 훨씬 뒤의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미니언 먹로클린 누군가 말하기를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모두 건강한 사람이란 언제 "예스"라고 하고, 언제 "노"라고 말하며, 언제 "히야!" 하고 소리질러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W.S.K. 일단 무엇에 빠져 들었다 하면 감기처럼 나을 때가 되어야만 끝나는 법. ―E.J.S. 아직 이 세상에서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위험한 영역이 있다. 그것은 대륙이나 해양이 아닌 사람의 마음. ―A.E.C. 사람이 만약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친지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 우리는 더 다정하게 할 것이다. ―Q. 문화와 번지르르한 겉모양은 서로 다른 것. ―랠프 월도 에머슨 젊은이가 좀 젠체하더라도 비웃지 말 것. 어떤 얼굴이 자기에게 맞는가 찾기 위해서 이 얼굴 저 얼굴을 시험해 보고 있을 따름이니까. ―L.P.S. 근심걱정은 대개는 재상연된 것. ―C.M. 세상은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 못된 심술장이. 그러나 대담한 사람이 이 심술장이에게 대들어 그 수염을 움켜잡으면 놀랍게도 수염이 힘없이 뽑혀진다. 그것은 겁장이들을 쫓아 버리려고 살짝 붙여 놓은 가짜수염이니까. ―올리버 웬델 홈스(1809∼94, 美 학자) 누구나 그 가슴 속에는 한때 시인이었다 시들어 버린 혼이 깃들어 있는 법. ―S.K. 권력에 대한 탐욕은 힘이 아니라 약함에 뿌리박고 있다. ―에리히 프롬 환희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단지 음악처럼 느끼는 것이니까. ―마크 트웨인 시간이라는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좋은 일.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기왕이면 훌륭한 방향의 발자취를 남기는 것. ―제임스 B.캐블 나는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다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다. ―캐서린 햅번 찾아갈 어머니가 있는 한, 결코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다. ―사라 O.주이트 요즘 흔히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은 일을 적게 해 몸에 탈이 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로레인 핸스베리 나는 매일 저녁 모든 근심걱정을 하느님께 넘겨 드린다. 어차피 하느님은 밤에도 안 주무실 테니까. ―메리 C.크라울리 자존심 때문에 바보짓을 삼갈 따름인데, 신중하다거나 얌전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도 많다. ―J.B.프리스틀리 내 아버지가 누구였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버지를 어떤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느냐는 점이다. ―앤 섹스튼 너무 열렬한 사람은 언제나 남들에게는 성가신 존재. ―올번 구디어 노아가 진정 지혜로웠다면 파리 두 마리는 찰싹 때려 잡았어야 할 것 아닌가. ―헬렌 카슬 전쟁을 악하다고 보는 한, 전쟁의 매력은 계속 남을 것이다. 전쟁을 만일 천박하다고 여긴다면 인기가 없어질 테지만. ―오스카 와일드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위대한 일을 해보시겠는가 ―로버트 H.슐러 춤출 줄 아는 사람이 제일 유연하게 움직이기 마련. ―알렉산더 포프 언론이 자유롭고 국민 모두가 글 읽을 줄 아는 나라에서라면 만사가 안전할 것이다. ―토마스 제퍼슨 솔직한 것이 동정보다 낫다. 동정이란 위로를 하면서도 무언가 숨기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레텔 에를리히 나는 사람이 지나치게 유능해지는 것이 싫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인간미가 없기 때문에.―펠릭스 프랭크퍼터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은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정한 모험이기 때문이다. ―니키 조반니 당신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이 별로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런 일들을 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모한다스 K.간디 때때로 낭비해 보는 것은 대단히 유쾌한 일. 그것은 습관이라는 무감각한 타성에 의해 절제하는 것을 막아 준다. ―서머셋 모옴 사람의 표정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표정은 연륜이 우리 얼굴에 남기는 서명일 뿐. ―도로시 C.피셔 남에게 호감을 주려면 많은 생각과 노력과 철두철미한 결단력이 필요하다. ―레이 D.에버슨 들은 대로만 옮기고 그 이상 보태서 꾸밀 줄 모르는 앵무새에게서 우리 누구나 배울 점이 많다. ―「조크와 수수께끼 책」 언제나 자기는 속기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속고 있다―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신뢰한다는 그 흐뭇한 기쁨을 깜빡 모르며 지내니까. ―앤드루 V.메이슨 평범한 날이여, 그대의 귀한 가치를 깨닫게 하여라. ―매리 J.아이리언 아이들이 자라면, "우리는 왜 태어났어요"라고 묻는 때가 닥쳐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부모 자신이 그때까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면 정말 놀라운 일일 것이다. ―헤이즐 스코트 설사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열의를 가지고 하라. ―끌로딘느 꼴레뜨 나는 사나운 폭풍우에 미쳐 날뛰는 바다를 보았고, 조용하고 잔잔한 바다, 그리고 어둡고 침울한 바다도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변덕 속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마틴 벅스봄 중년이란 한두 주일 뒤면 기분이 전처럼 좋아지겠지 하는 생각을 언제나 하면서 지내는 때. ―돈 마키스 자기 사상의 밑바탕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안와르 엘 사다트 중대한 위기에 처한 경우엔, 고비를 넘길 때까지만은 악마와 함께 가도 좋다. ―불가리아 속담 행복 가운데는 두려운 행복도 있다. ―토마스 후드 품위가 깃든 주름살 앞에서는 고개가 숙여진다. 행복한 노년에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새벽의 신선함이 있는 법. ―빅토르 위고 낙관적이어서 해로울 것은 없다. 나중에도 얼마든지 울 수 있으니까. ―L.S.L. 자녀에게 물려 줄 최상의 유산은 자립해서 제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 ―이사도라 덩컨 친구에게서 나는 제2의 나를 본다. ―I.N. 별로 거론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간섭으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하다. 즉 이해나 비타민, 또는 운동이나 칭찬과 마찬가지로 혼자서 즐길 수 있는 私的인 세계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필리스 먹긴리 참다운 자선은 그것이 면세가 되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댄 베네트 점자를 읽는 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로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경이, 즉 낱말을 만지면 그 말도 사람을 만지듯 감동시키는 경이로움이 있다. ―짐 피빅 권리는 그것을 지킬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로저 볼드윈 마음은 극히 주관적인 장소이므로, 그 안에서는 지옥도 천국이 될 수 있고 천국이 지옥으로 될 수도 있다. ―존 밀튼 장미의 향기는 그 꽃을 준 손에 항상 머물러 있다. ―아다 베야르 사람은 자기의 꿈―과거에 대한 추억의 꿈과 미래를 향한 열렬한 꿈―을 가져야 한다. 나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련다. ―모리스 슈발리에 지극한 사랑 앞에서는 그 무엇이나 제 비밀을 털어놓는다. ―조지 W.카버 성난 말에 성난 말로 대꾸하지 말 것. 말다툼은 언제나 두번째의 성난 말 때문에 비롯되니까. ―H.I.M 지혜는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경험은 어리석음 속에서 얻어진다. ―사샤 기트리 언제나 문제 해결의 최선책은 남의 돈을 들이는 것인 듯. ―밀튼 프리드먼 다른 운전자들에게서 정중한 대접을 받으려면 경찰차를 모는 수밖에 없다. ―H.C. 건전한 판단력은 정신의 경비원. 수상쩍은 생각이 머리 속으로 들어가는가 나가는가 감시하는 일이 그 임무. ―대니얼 스턴 자수성가한 사람 중 가장 솔직한 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말 힘들게 정상에 도달했지요. 한 걸음마다 게을러지려는 자신과 싸웠고, 나의 무지를 깨우쳐야 했거든요." ―J.T. 문제를 직면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면하지 않고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제임스 볼드윈 시대를 변화시킬 만큼 큰 인물이 아니거든 시대를 따라 변하라. ―G.T. 생태계 보호라는 것에도 一長一短이 있다. 마치 공기 중에 어느 정도 불순물이 있어야 더욱 아름다운 노을이 생기듯이. ―B.V. 자기의 말을 그저 들어 주기만 해도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B.E. "단 한 번의 인생"이니까 함부로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변명. ―빌 코플랜드 임금과 물가가 맞물고 반복 인상되는 과정에서 정말 문제는 모두들 올라가려고만 들지 내려서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 ―H.C. 친구나 매일 대하는 여러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에 맞서기란 가장 힘든 영웅적 행위 가운데 하나. ―T.H.W.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태만"이라고 한다면, 어느 회사, 정부 관청, 골프클럽, 대학교수진 치고 어느 정도씩 "태만"이 없는 데가 없을 것. ―J.W.G. 아이들?? 잘 참는 것은 그 외에 딴 방법도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 ―마야 안젤루 다수란 때로 바보들이 한쪽에 많이 몰려 있기 때문에 형성되는 것. ―클로드 맥도널드 나는 누구나 다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개중에는 만일 그들이 나를 좋아하면 지금보다 나 자신이 더 못나게 느껴질 사람들도 있기 때문. ―헨리 제임스 자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녀를 갖기에 족할 만큼 성숙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결혼의 가치는 어른들이 자식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고 아이들이 어른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피터 드브리스(美 작가て언론인) 거울은 사실을 보여 주지 詩를 보여 주지는 않는다. ―메이 사튼(美 시인) 큰 거짓말은 마른 땅 위에 오른 큰 물고기와 마찬가지. 그것은 안달을 하며 날뛰어 몹시 성가시지만 당신을 해칠 수는 없다. 가만히 놓아 두면 제풀에 죽고 마는 법. ―조지 크랩(英 시인) 이제는 세계의 문제들을 피해서 달아날 수 있는 곳이라곤 없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思考도 세계적인 것으로 되어야만 한다. ―시어도 로스잭(美 작가)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만 목발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도 없다. ―제임스 볼드윈(美 흑인작가) 용서하는 것과 용서 받는 것은 같은 일을 달리 말한 것. 중요한 것은 불화가 해소되었다는 것. ―C.S.루이스(英 작가) 인간은 결코 산을 정복하지 못한다. 우리는 잠시 그 정상에 서 있을 수는 있지만 바람이 이내 우리의 발자국을 지워 버린다. ―알린 블럼 모이가 풍족하면 병아리들은 모이를 놓고 서로 싸우지 않는다. 우리 인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돈 마키스(美 언론인)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끝없는 자유의 심연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소련 작곡가) 새로운 사상을 대했을 때 느끼는 고통의 정도를 가지고 자신의 나이를 판단할 수도 있다. ―존 누빈 어머니가 될 것인지 안될 것인지를 뚜렷한 의식으로 선택할 수 있기 전에 어떤 여성도 스스로 자유로운 여자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마가레트 생거(美 산아제한운동가) 두렵거나 당황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면 결코 모험을 할 수 없다. ―줄리어 소렐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다고 느낄 때 오는 고독감은 가난 중의 가난. ―테레사 수녀 어떤 사람이 자기는 원칙적으로 그 일에 찬성한다고 말할 경우, 그 사람은 그것을 실천에 옮길 의향이 전혀 없음을 뜻한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프러시아 정치가) 동정과 이해가 따르지 않는 "정직"은 정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敵意이다. ―로즈 N.프랜즈블로 무질서하게 사는 이점의 하나는 끊임없이 멋진 발견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A.A.밀른(英 시인) 비눗물 맛을 모르는 사람은 개를 목욕시킨 적이 없는 사람. ―프랭클린 P.존스 오래된 규범의 가치에 의심을 품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파기하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엘리자베드 제인웨이 재능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재능을 실현하기 위해 걸어야 할 어려운 과정을 밟을 용기를 지닌 사람은 드물다. ―에리카 종 아무리 높은 왕좌에 앉아 있을망정, 사람은 궁둥이로 앉게 마련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 유머. ―타키 이른 아침의 산책은 그날 하루를 위한 축복. ―헨리 데이비드 도로(美 작가, 1817∼1862) 산책은 위대한 예술이다. ―헨리 도로(美 작가) 아기가 태어날 때 삼신할머니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호기심이다. ―엘리노어 루스벨트 부자가 되는 지름길은, 값이 싸고 습관적으로 쓸 수 있는 데다가 세금이 공제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 ―「선샤인 매거진」 인간들이 사리사욕을 위해 남을 속이는 것은 전적으로 신만이 져야 할 책임.―헨리 해스킨스 인간이 추위와 굶주림, 갈증에 대비하는 이외의 모든 것은 오직 허식이며 낭비일 뿐이다. ―세네카 전쟁에서 이등상이란 없다. ―오마 브레들리 무엇이 이 세상을 움직여 가는지 이해할 나이가 되면 당신은 현기증이 심해서 그것에 대해 신경쓸 겨를이 없게 된다. ―C.R.깁슨 무지개는 하늘이 성낸 것을 사과하는 것. ―실비아 A.보이롤 자녀들의 교육 내용에 지나치게 간섭한 대가는 부모보다 우둔한 자손이 생겨나는 것. ―프랭크 A.클라크 짐스럽다고 육봉을 떼어낸 낙타는 이미 낙타가 아니다. ―G.K.체스터튼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시작한 첫 네 시간 동안만큼 헛된 희망을 품는 때도 아마 이 세상에 없으리라. ―댄 베네트 천둥도 그럴싸하고 인상적이지만 정작 그 일을 해내는 것은 번개. ―마크 트웨인 한겨울에도 움트는 봄이 있는가 하면 밤의 장막 뒤에는 미소 짓는 새벽이 있다. ―칼릴 지브란 첫눈에 반하기란 쉽지만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은 두 사람이 여러 해 동안 마주 보고난 뒤의 일. ―샘 레번슨 30세가 넘으면 사람은 자기 주관을 갖게 된다. ―베터 미들러(美 가수) 우리는 자명종 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벽에의 무한한 기대감으로 깨어나는 법을 익혀야 하고 또한 스스로 늘 깨어 있어야만 한다. ―헨리 데이비드 도로(美 작가) 예술은 창조자와 감상하는 사람이 서로 만나는 환희의 광장. ―도미다 고지로(일본 작가) 생명력은 살아 남는 능력뿐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능력에서도 드러난다. ―F.스코트 피츠제럴드(美 소설가) 힘과 인내를 알고자 한다면 나무를 벗으로 삼으라. ―할 보런드(美 자연주의자) 봄이란 구두가 온통 진창에 푹푹 빠지더라도 휘파람을 불고 싶은 기분이 저절로 샘솟는 계절. ―D.L. 상냥함은 차분한 열정. ―J.J. 우리는 정부를 가져야 하지만 매처럼 이를 감시해야만 한다. ―M.F. 세상 일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고 신뢰감 넘치는 어린아이의 눈빛을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H.H.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택하려 들지 말라. 또는 언제 죽을 것인가도.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따름이니까. ―존 바에즈(美 가수) 예술 작품 그 자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슨 씨앗을 뿌리게 될까 하는 사실이다. 예술은 죽고 한 장의 그림은 사라질 수 있다. 남는 것은 오직 그것이 뿌린 씨앗. ―호안 미로(스페인 화가) 행복한 가정이란 빨리 온 천국과 다름없다. ―J.B. 아무 것도 시도할 용기를 갖지 못한다면 인생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빈센트 반 고호(네덜란드 화가) 세상의 천재적 작품 속에는 우리의 머리 속에도 한번은 떠올랐으나 우리 스스로 버린 사상이 깃들여져 있다. 우리 스스로 생각했다가 내버린 생각들이 새삼 위엄을 갖추고 되돌아왔음을 발견한다. ―랠프 월도 에머슨 남을 밑으로 끌어내리려면 자기 자신도 불가불 그와 함께 끌어내려야만 한다. 그러니 남을 끌어내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도 놓치고 만다. ―매리언 앤더슨(美 흑인 여가수) 과학의 임무는 지구를 떠맡는 노릇이 아니라 도덕적 상상력을 물려받는 일이다. 왜냐하면 도덕적 상상력이 없으면 인간과 믿음 그리고 과학이 함께 멸망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 ―제이컵 브러노프스키 우습지 않은가 집시점장이를 비웃는 사람이 경제학자의 말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신시내티 인콰이어러」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표정을 나는 미워한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탐구하고, 더 많이 보고,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얼굴은 싫다! ―마리아 톨치프 땅은 봉사해 준 대가로 나무를 붙들어 두지만 하늘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무를 자유롭게 내버려 둔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인생살이를 서로 덜 힘드는 것으로 만들려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조지 엘리어트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할 일이 없는 것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권태. ―헨리 하스킨스 사람을 침묵시켰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존 모리 독창성이란 탐험되지 않은 땅. 카누를 타고는 갈 수 있지만 택시를 타고는 도달할 수 없는 곳. ―앨런 앨더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어야 사람이다. ―최현배(한글학자) 위대한 사상은 날개와 아울러 착륙장치도 필요로 한다. ―C.D.잭슨 만약에 개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과 사귀는 노릇만큼이나 개들과 친하게 지내는 일도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카렐 차펙(체코 극작가) 사람들은 남을 증오하는 데 왜 그렇게도 고집스럽게 집착하는가 증오를 떨쳐버릴 경우 그들은 고통과 씨름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제임스 볼드윈(美 흑인작가) 글이란 한번 인쇄되면 스스로의 생명을 지니게 되는 법. ―캐롤 버넷(美 배우) 자기가 생전에는 결코 그 밑에 앉아 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늘을 드리워 주는 나무를 심을 때에 그 사람은 적어도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D.E.트루블라드 우리가 지금 당장에 의견의 차이를 해소시킬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 세상이 다양성을 누리도록 함께 노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존 F.케네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자 고집하는 사람은 결코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앙리 F.아미엘(스위스 시인)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당한 절차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효율적"인 정부라면 독재정치를 해도 된단 말인가 ―투어굿 마설(美 흑인대법관) 문학을 좋아하고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 속에 사랑이 있다는 증거다. ―박목월(시인) 오늘이란 신어야 할 신발과 같은 것. ―스티브 올렌 신이 진실로 인간이 날기를 바랐다면 공항까지 가는 일을 더 쉽게 해주었을 것이다. ―조지 원터스 그림자를 두려워 말라. 그림자란 빛이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비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루스 E.렌컬 나이란 성숙해지기 위해서 치르는 비싼 대가. ―톰 스토파드(현대 영국 극작가) 무덤 앞에서 흘리는 가장 가슴 아픈 눈물은 고인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과 행하지 못한 행위 때문에 나오는 것. ―해리엇 비처 스토우(美 작가, 1811∼1896) 한 민족을 가장 진실되게 표현하는 것은 그 민족의 춤과 음악이다. 사람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애그니스 도 밀(美 무용가, 1906∼)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선고하기보다는 차라리 죄인을 풀어주는 위험을 무릅쓰는 편이 낫다. ―볼테르 교육이란 이 세상 여기저기에 흔하게 널려 있는 유일한 것이며, 아무나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조지 호레이스 로리머 낡았으나 편안한 의자가 하나도 없는 집은 혼이 없는 곳. ―메이 사턴 아무리 편협한 고집장이라도 한때는 편견에 얽매이지 않았던 어린아이였다. ―메어리 드 루르드 修女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날이 있다. ―도산 안창호 신용카드보다 부모를 더 존경하던 시절의 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간편했다. ―로버트 오벤 우리 모두의 심성에는 어린 카우보이, 어린 개척자가 뛰놀고 있다.―루이스 라무어(美 작가) 한 곳의 불의는 모든 곳에서 정의를 위협한다. ―마틴 루터 킹(1929∼1968) 대체로 인간은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너무 선하거나 언제나 선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조지 오웰(英 작자) 당신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하루는 시작된다. ―존 차디(美 시인) 우주의 대변동이라도 어린아이가 헛간 한 구석에 죽어 있는 참새의 주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광경만큼이나 감동스럽지는 못하다. ―토마스 새비지 영원이란 생각해 보면 무서운 것이다. 어디에서 끝이 날지 알 수 없으니. ―톰 스토파드(체코 태생 英 작가, 1937∼) 인생이란 용기에 따라서 펴질 수도 있고 움츠러들 수도 있다. ―어네이스 닌(프랑스 태생 美 작가, 1903∼1977) 우리는 목구멍을 틔우기 위해서 기침을 하고 가슴을 틔우기 위해서 한숨을 쉰다. ―T.S.매슈스 이 급변하는 시대에 한가지만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용서를 비는 일이 유혹을 물리치는 일보다 더 쉽다는 사실이다. ―솔 켄던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한용운 정치란 워낙 비싸게 먹히는 것이라서 오늘날엔 선거에서 지는 데도 막대한 돈이 든다. ―윌 로저스(美 배우, 1879∼1935) 첫눈이 내려도 가슴이 떨리지 않는 것은 늙어간다는 징조. ―버드 존슨 女史(故 린든 B.존슨 美 대통령 미망인, 1912∼) 진보란 필요한 것은 가능하다는 신념과 더불어 시작된다. ―노만 카즌스 최상의 거울은 친구의 눈이다. ―게일족 속담 훌륭한 예술이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로이 아자크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 일이 바로 나의 왕국이다. ―토마스 칼라일(스코틀랜드 수필가, 1795∼1881) 꽃을 받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당신이 아직 꽃향기를 맡을 수 있는 동안에는. ―리너 혼(美 흑인가수, 1917∼) 애정을 낭비했다고 말하지 말라. 애정이란 절대로 낭비되지 않는 것이다. ―헨리 W.롱펠로우(美 시인, 1807∼1882) 선물을 품위있고 정중하게 받는 것은 보답할 것이 없더라도 보답하는 셈이 된다. ―리 헌트(英 수필가, 1784∼1859) 행복이 진정 육신의 편안함과 근심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는 것이라면, 가장 행복한 존재는 어떤 남자나 어떤 여자가 아니고 미국의 암소일 것이다. ―윌리엄 L.펠프스(美 교육자, 1865∼1943) 어느 누구의 인생에도 대수롭지 않은 날이란 없다. ―알렉산더 울커트(美 저널리스트, 1887∼1943)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고. ―마틴 루터 킹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의 존재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나의 존재를 위해서도. ―로이 크로프트 만일 당신이 비밀을 바람에게 털어 놓았다면 바람이 그것을 나무들에게 털어 놓는다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 ―칼릴 지브란 누구든지 전에는 젊었을 때가 있지만 누구나 전부터 나이가 든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속담 나의 길을 밝혀 주고, 항상 인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도록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친절과 미, 그리고 진리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집을 사지 말고 이웃을 사라. ―유럽 속담 시골 풍경을 감상하면서 걷는 일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멋진 경치는 한 곡의 음악과 같다. 그것은 적절한 박자로 감상되어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도 속도가 너무 빠르다. ―폴 스코트 모우러 진보란 단순성을 복잡하게 만드는 인간의 능력. ―투르 하이에르달(노르웨이 인류학자, 1914∼)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 그것은 가장 파괴적인 감정이다. 자아라는 다람쥐 쳇바퀴 속에 갇힌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밀리슨트 펜위크(前 美 하원의원, 1910∼)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매일 무엇인가 하도록 하라. 이것이 당신의 의무를 고통없이 행하는 습관을 얻는 황금률이다. ―마크 트웨인 나는 음악을 메뉴처럼 생각하고 있다. 매일 똑같은 것을 먹을 수는 없다. ―카를로스 산타나(멕시코 출신 기타연주가, 1947∼)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 ―신채호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시간이 없다. ―테레사 수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성공이란 사다리를 올라갈 수는 없다. ―美 속담 어떤 교향악단도 강아지를 보고 웃는 2살짜리 계집애의 웃음소리와 같은 음악을 연주해내지는 못했다. ―번 윌리엄스 삶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여자의 최고급 화장품. ―로살린드 러셀(美 여배우, 1913∼1976) 자녀들에게 독립해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부모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 ―프랑크 클라크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권하지 말라. ―스페인 격언 타협은 훌륭한 우산이지만 허술한 지붕. ―제임스 러셀 로웰(美 외교관, 1819∼1891) "눈에는 눈으로"란 옛 법을 따르면 우리는 모두 장님이 되고 말 것이다. ―마틴 루터 킹 행복은 때때로 열어놓은 줄 몰랐던 문으로 몰래 들어온다. ―존 배리모어(美 배우, 1882∼1942)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배운 것과 똑같은 사실을 나는 우리 집 정원에서 배우게 되었다. 하느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최선이다. ―오벤스 코미디 필러스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여인은 함께 울 수 있는 여인. ―엔조 비아그 어린이는 의문부호의 바다로 둘러싸인 호기심의 섬. ―셸 석유회사 광고 지구와 대륙과 대양의 형태를 발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의 망상이었다. ―다니엘 J.부어스틴 우정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가끔 계획된 활동 사이의 예상치 못했던 공간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공간이 생기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중요하다. ―크리스틴 리펠트와 어니스트 칼렌바흐 버릴 수 있는 조국이 있다면 그것은 애당초 지니지 않았던 조국이다. ―김소운 고기를 낚으러 가는 노인의 가슴 속엔 언제나 어린 소년이 들어 있다. ―J.콜더 조셉 메아리를 들으며 본디의 소리를 기대하진 말라. ―「365개의 인용구가 담긴 달력」에서 건축물에서 가장 견실한 돌은 토대의 맨 밑에 놓인 돌. ―칼릴 지브란(시리아 시인, 1883∼1931) 이상이란 별과 같아 아무도 거기 이르지 못한다. 하지만 바다의 수부들처럼 우리는 그걸 보고 항해코스를 그린다. ―칼 슈츠(독일 태생 美 정치가, 1829∼1906) 한 여자를 자유롭게 할 때마다 우리는 한 남자를 해방시킨다. ―마거리트 미드(美 여류 인류학자, 1901∼1978) 유머는 한 줄기 시원한 여름 소나기처럼 대지와 대기, 그리고 당신을 모르는 사이에 정화시켜 준다. ―랭스턴 휴스(美 흑인작가, 1902∼1967) 하나의 아이디어는 티끌이 될 수도 있고 마법으로 변할 수도 있다. 거기에 적용하는 재능에 따라. ―윌리엄 번배크 여자들의 힘이 점차 증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두뇌의 힘이지 팔뚝의 힘은 아니다. ―비벌리 실스(美 소프라노 가수, 1929∼) 우리가 눈감아 버리면 점점 크게 번져가는 것이 범죄의 속성. ―배리 파버 행복한 결혼생활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헬렌 거헤이건 더글러스(美 여배우, 1900∼1980) 우리가 자연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정부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앤슬 애덤스(美 사진작가, 1902∼) 식사 후 식탁에 손을 짚고 일어서려 할 때 테이블이 먼저 밀려나가면 식사조절을 시작해야 할 때. ―「조가비」에서 인생행로에 삼진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들이는 것은 절대 금물. ―베이브 루스(美 야구선수, 1894∼1948) 애국심이란 선조의 땅을 지키는 마음이라기보다 후손의 땅을 보존하는 마음이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스페인 철학자, 1883∼1955)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둬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할 때가 있다. ―휴 프래더 우리의 마음 속에는 발견되지 않은 성격의 대륙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탐험하는 콜룸부스가 되는 사람은 복되도다. ―「생명의 말씀」에서 문명이란 개인과 개인을 결합시키고, 그 다음에 가족과 가족, 인종과 인종, 국민과 국민, 국가와 국가를 결합시켜 하나의 커다란 통일체로, 즉 인류의 통일체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지그문트 프로이드 고위직의 입후보자를 조반용 시리얼을 사고 팔 듯 사고 팔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이다. ―애들레이 스티븐슨(美 정치가, 1900∼1965) 호기심이란 기꺼이, 자랑스럽게, 열심히 자기의 무지를 실토하는 행위. ―S.레오나드 루빈슈타인 꿈을 단단히 붙들어라. 꿈을 놓치면 인생은 날개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 ―랭스턴 휴즈(美 흑인 시인, 1902∼1967) 문제란 사람이 최선을 다할 기회. ―듀크 엘링턴(美 흑인 작곡가, 1899∼1974) 10월의 미류나무는 겨울로 가는 길을 밝히는 횃불. ―노바 S.베어 입으로 말하는 사랑은 외면하기 쉬우나, 행동으로 증명하는 사랑은 저항하기 어렵다. ―W.스탠리 무니햄 민주주의의 바탕에는 평범한 사람에게 비범한 가능성이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해리 에머슨 포스딕(美 성직자, 1878∼1969) 빈들빈들 노는 것이 좋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일을 하면 마음이 흡족해진다. ―안네 프랑크(1929∼1945) 개울 바닥에 돌이 없다면 시냇물은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칼 퍼킨스 행운이 들어오거든 의자를 권하라! ―유태 격언 "무슨 어려운 일을 겪고 계신가요"하고 물어보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시몬 베유(프랑스 철학가, 1909∼1943) 자기 연민은 처음에는 깃털요처럼 따스하고 아늑하지만 딱딱하게 굳으면 거북살스러워진다. ―마여 안젤루(美 흑인 작가, 1928∼) 당신도 가끔 속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로렌스 J.피터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두 사람 사이에 한순간이라도 시간이 끼어들게 내버려두면, 그것은 자라서 한 달이 되고, 일년이 되고, 한 세기가 된다. 그러면 너무 늦어진다. ―장 지로두(프랑스 극작가, 1882∼1944) 자유의 기능은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 ―토니 모리슨(美 흑인 소설가, 1931∼) 결혼은 뚜껑을 덮어 놓은 음식. ―스위스 속담 나는 여성이 어리석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남자와 어울리게 만드셨기 때문에. ―조지 엘리어트(英 소설가, 1819∼1880) 신발이 어디가 끼는지는 신고 있는 사람만이 안다. ―서양 속담 소문은 빨리 퍼지지만 진실만큼 오래 가지는 않는다. ―윌 로저스(美 배우, 1879∼1935) 남을 시궁창에 붙잡아 두려면 자기도 시궁창 속에 있어야 한다.―부커 T.워싱턴(美 흑인 작가, 1856∼1915) 가정의 난로가가 가장 좋은 학교. ―아놀드 H.글래소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가를 말하?? 않고, 얼마나 많이 해냈는가를 이야기하라. ―제임스 링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안다는 것과 크게 다르다. ―찰스 케터링(美 실업인, 1876∼1958) 인내는 한 번 뛰는 장거리 경주가 아니라, 숱한 단거리 경주의 연속이다. ―월터 엘리어트 인생이란 더러 끔찍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매혹적이고 활기에 찬 경험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삶을 철저하게 누렸다. 한쪽 귀에는 탄식소리가 들려 오더라도, 다른 쪽 귀에는 언제나 노랫소리가 들렸다. ―숀 오케이시(아일랜드 극작가, 1880∼1964) 한 사회의 자유는 그 사회의 웃음의 양과 정비례한다. ―제로 모스텔(美 코메디언, 1915∼1977)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배운다는 것. 돈이란 잃거나 도둑맞을 수가 있고 건강과 정력은 약해질 수가 있다. 그러나 머리 속에 넣어둔 것은 영원히 당신의 것.―루이 라무르(美 작가) 이 세상에 친절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한 수인 아무도 뒷걸음질을 해서 미래로 갈 수는 없다. ―조셉 허거샤이머 사람들은 자아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나 자아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하는 것. ―토마스 사스 일인자가 된다는 것은 일인자의 자리를 지키는 일보다는 쉽다. ―빌 브래들리(美 상원의원) 눈을 보고 눈싸움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늙어간다는 증거. ―두그 라슨 유머란 깊이있는 관찰 결과를 다정하게 전달하는 방법. ―리오 로스튼 사랑이란 두 사람이 놀고 둘이 다 이기는 게임. ―에바 가보(여배우) 인내의 참된 비결은 참는 동안 다른 할 일을 찾는 데 있다. ―「델 펜슬 퍼즐스 앤드 워드 게임스」에서 실패의 99%는 항상 핑계를 대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조지 W.카버 예의범절이란 마치 수학의 0과 같은 것.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다른 것에 붙여지면 가치를 크게 더해 주니까. ―프레이어 스타크 말수가 적을수록 남들이 더 귀를 기울이는 법. ―애비게일 밴 뷰렌 에티켓이란 졸리는데도 좌중에서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 ―하이먼 버스튼 사람들은 삶이란 작은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무언가 큰 것만을 성취해 보려고 한다. ―프랭크 클라크 민주주의는 투표가 아니라 공정한 개표로 가늠하는 것이다. ―톰 스토파드(英 극작가) 한가함이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여가가 생겼다는 뜻이다. ―플로이드 델 행복한 결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계약이다. ―O.A.바티스타 지식은 도서관에서 잠을 자고 있지만 지혜는 도처에서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조시 빌링스 웃음소리는 울음소리보다 멀리 간다. ―히브리 격언 타고난 성격 탓으로 화를 자초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남까지 못살게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루드야드 키플링(인도 태생의 英 작가) 윙윙거리는 모기의 소리만큼 심술과 적의를 그토록 작은 부피에 응집시킨 것은 없다. ―엘스페스 헉슬리 도와달라는 말을 듣고 도와주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도와주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 ―칼릴 지브란(레바논 시인) 사랑하고 일하며, 때로는 쉬면서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인생, 그 인생에 감사하자. ―헨리 밴 다이크(美 교역자 작가) 하고자 하는 일은 착수하기 전에 충분히 연구하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굶는다. 사람은 비록 승려라 할지라도, 스스로 경작해서 먹어야 한다. -백장회해 한번에 한가지씩만 일을 하라. 한 손으로 아무리 빨리 친다고 해도 소리는 나지 않는 법이다. 모든 일이란 서로 상응하는 것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치도 백성의 바라는 바에 따라서 비로소 효과를 내는 것이다. -한비자 할 일을 찾아낸 자는 축복받을 지어다. -토마스 칼라일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오직 하나의 의미는 신이 원하시는 이 짧고 제한된 시간 속에서 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뒤돌아 볼 때다. -파스칼 행복 대부분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과 그것에 의거한 행복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에 가서는 유쾌한 것으로 변하게 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되게 한다. 인간의 마음은 진정한 일거리를 찾을 때처럼 유쾌한 기분이 드는 때가 없다. 행복하기를 바라거든 먼저 일을 시작하라. 실패한 생애는 대개 그 사람이 전혀 일을 가지지 않았거나 일이 너무 적었거나 혹은 자신의 일을 못찾고 방황했을 때이다. -힐티 현재 종사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과 다른 길이라 할지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동안에 처음의 희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대성하는 수도 있다. 또 현재의 일이 자기의 희망과는 직접 관계가 없더라도 먼 장래를 두고 본다면 전혀 허망한 일만은 아닌 것이다. 헨리 포드는 처음부터 자동차 사업에 대성할 포부로 자동차 공장의 직공이 된 사람은 아니었다. 그 일에 흥미를 가지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동안에 한 계단씩 올라가서 세계 제일의 자동차 기업주가 된 것이다. 목표와 방향이 뚜렷하지 못할 때라도, 그날그날 자기 일을 충실히 해나가는 사람은 길이 절로 열린다. 오늘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이다. 그것은 앞날을 기약하는 한 알의 씨앗이다. - G. 그로우트 훌륭한 사람은 오직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만 늘 바란다. -로망 롤랑 훌륭한 직업은 시종일관 자기희생과 투지, 그리고 창의력이 있어야 수행되는 것이다. -막스 비어붐 큰 일에는 진지하게 대하지만 작은 일에는 손을 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몰락은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된다. -헤르만 헤세 큰 일이 필요하다면 작은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작은 일도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큰 일이라고 지레 겁먹지 마라. 큰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작은 일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소진되는 에너지는 일의 크기와는 무관하다. -김용삼 참으로 위대한 일은 언제나 서서히 이루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게 성장해 가는 법이다. 참으로 중요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 생활에 있어서 단순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천직 의식이 있다면 모든 직업은 위대한 것이다. -올리버 웬델 홈즈 2세 청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다음 세 마디뿐이다. 즉 일하라. 더욱 더 일하라. 끝까지 일하라. -비스마르크 자기가 좋아하고 믿는 일을 하기만 하면 성공은 자연히 찾아온다. 자기가 지금하고 있는 일, 이미 한 일을 마음으로부터 즐기는 사람은 행복하다. -괴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반밖에 쓰지 않는다면, 그것이 갑절 힘들어 질 것이다. 자기가 할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로 하여금 다른 행복을 찾게 하지 말라. 그에게는 일이 있고 인생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칼라일 자기에게는 너무나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사소한 일이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너무 과분한 일이기 때문이다. -표치 자기 일을 멸시하는 자는 먹을 양식과 싸운다. -스퍼전 자신의 일에 열중하여 고민을 몰아내라. 하찮은 일로 자신의 행복을 파괴하지 말라. 자신의 일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칼라일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평가하고 점검하라. '괜히 일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번쯤은 고민해 보자. 작은 일에 너무 열중하면 큰 일을 하지 못한다. -라 로슈푸코 적은 것을 꾸준히 축척시켜라. 큰 일은 작은 일이 축척해 나가서 도달된다. 적절한 일에 적절한 사람. 적재적소(適材適所). -비스마르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먹기만 하고 일을 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을 만드셨다면, 그 인간은 아마도 입만 있고 손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부류로 일만 하고 먹지는 못하게 되어 있는 인간을 만드셨다면, 아마도 그 인간은 손만 있고 입은 없었을 것이다. 입과 손을 동시에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하면서 먹고, 먹으면서 일하자. 어느 한 쪽에만 치중하는 불구자가 되지 말자. -링컨 전심전력을 다하여 덤빌 수 있는 일이라면 인간은 대개의 경우에는 성공할 수 있다. -찰즈 슈워프 전에 일어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훗날에 있을 일의 스승이다. -사기 정직한 노동이 사랑스러운 얼굴을 만든다. -토마스 데커 제화공은 좋은 신발을 만든다. 왜냐하면 신발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에머슨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이 맡아야 한다. 지금 당장 안 되는 일일수록 지금 당장 그 일을 착수 해야한다. 우선 하려는 의욕 위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1% 밖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하더라도 착수해야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가장 즐거운 생활이다 인생의 짜릿한 흥취란 새로운 일을 하는 데 있다. -앤드류 매튜스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이 흐트러지기 쉬우니 마땅히 정적 속에서도 깨어나 밝게 비춰볼 것이요, 일이 있을 때는 마음이 흩어지기 쉬우니 마땅히 깨어난 속에서도 침착함을 주로 할지니라. -채근담 일이 즐거우면 인생은 낙원이다. 괴롭다면 그것은 지옥이다. -고르키 일이 즐거운 것이라면, 일해서 얻은 것은 무엇이든 기분 좋은 것이다. 일의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그 쾌감도 한결 더하다. -고리키 일하는 것, 이것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파브르 일하는 것이 즐거울 때 인생은 얼마나 기쁜가! 일하는 것이 의무일 때 인생은 얼마나 노예와 같은가! -막심 고리끼 일하라. 더욱 일하라. 죽을 때까지 일하라. -비스마르크 일하러 갈 곳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 간에 참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골치 아픈 존재다. -조지 버나드 쇼 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하여 일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톨스토이 일의 괴로움이야말로 참다운 기쁨이다. 그러나 도중에서 그만 둔 일,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둔 일은 마침내 산더미같이 쌓여서 사람을 괴롭힌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괴로운 일이다. -푸브리우스 일이란 기다리는 사람에게 갈 수도 있으나,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자만이 획득한다. -링컨 일이란 남성이 무엇임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에피크로토스 일이란 본래 육체로 하는 것이지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글씨를 쓰더라도 먼저 손을 놀려야 한다. 일의 시초는 육체의 발동에 있다. 무엇을 해야한다는 마음은 있으면서 막상 시작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이 있는데, 우선 시작부터 하고 나면 일은 진전되게 마련이다. 머리 속에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말고 가볍게 손발을 놀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카네기 일이란 사람 수가 많다고 빨리 되는 것은 아니다. -손자병법 일이란 쉽게 생각하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다. 일이란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알맞은 정도를 목표로, 그리고 약간 빠듯하게 스케줄을 세워두면 잘 된다. -다케우치 히토시 일이란 한데 뭉쳐진 큰 덩어리가 아니다. 매일매일 분량을 나누어 처리해야 하는 조그만 조각들이다. 일을 너무 지나치게 한다는 인간을 본 적이 없다. 힘써 일하라. 장시간 일하라. 이것이 나의 신념이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몸이 망가지는 법이 없다. 걱정하거나 자신의 힘을 무시해서 몸을 무리하게 사용하니까 병이 나는 것이다. -찰즈 에반즈 휴즈 일을 만들면 일이 생기고, 일을 줄이면 일이 준다. -명심보감 일을 몰고 가라. 그렇지 않으면 일이 너를 몰고 갈 것이다. -프랭클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지만 일을 바르게 보는데도 한가지 방법뿐이다. 곧 일 전체를 보는 것이다. -존 러스킨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 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 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 만 높다 하더라. - 양사언 독서는 해박한 인간을 만들고, 필기는 정확한 인간을 만들며, 대화는 민첩한 인간을 만든다. -괴테 오늘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참고 견디라. 이것이 내일을 찬미케 하는 유일한 길이다. - R. L 캘리엔 젊어서 덕을 닦지 못하고 재산도 쌓지 못한 사람이 늙고 병들어 후회 한들 무엇 하리. - 法 句 經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 있게 하기를 배웠다. - 플루타크 영웅전 교사는 촛불과 같아서 스스로를 다하여 학생을 계발(啓發)한다. - 루피니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애호하며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 슛타-니파라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 같은 은덕을 어디다가 갚사오리. - 정철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은 모르는 척 하지만 아비가 돈 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자식들은 모두 다 효자가 된다. - 세익스피어 일을 한다는 것은 마치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비록 아홉 길 팠다 할지라도 샘물이 나오는 데까지 미치지 못 한다면 우물을 포기함과 같으니라. - 맹자 만사(萬事)에 중용(中庸)이 으뜸이다. 모든 과도(過度)는 인류에게 고통을 가져 온다. - 플라우루스 포에눌루스 그대 자신의 생활을 즐기라. 자기의 생각을 남과 견주어 보지 말라. - 꽁도르세 쉬운 일도 없지만 마지 못해 하면 어렵게만 된다. - 테렌티우스 현명한 사람을 볼 때는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라. 어리석은 사람을 볼 때는 자기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조용히 반성한다. - 공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분노를 격동케 하느리라. - 성서 오늘을 붙들어라. 되도록 이면 내일에 의지하지 말라. 그 날 그 날이 일 년 중에서 최선의 날이다. - 에머슨 시간을 잘 붙잡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 이즈레일리 우선 좋은 책을 읽으라. 그렇지 않으면 전혀 그 책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소로오 어떤 사람이 헌신적 이면 우리는 그가 위선 이라고 비난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 경건하다고 비난하며 만일 그 사람이 겸손하면 그 겸양을 약점으로 간주하고 그가 관대하면 우리는 그의 용기를 오만 이라고 부른다. - 부루달루 인내와 노력이 두 가지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없다. 인내야 말로 환희에 이르는 문이다. - 야나콥스 근면은 행운의 어머니이다. 반대로 게으름은 인간을 그 가 가장 바라는 어떤 목표에는 결코 데려다 주지 않는다. - M.D 세르반테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여라. 이 것이 곧 아는 것이다. - 공자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웃음으로 넘겨보라. 찡그린 얼굴을 펴기만 ?求? 것으로 마음도 따라서 펴지는 법이다. 웃는 얼굴은 얼굴의 좋은 화장일 뿐 아니라 생리적으로도 피의 순환을 좋게 하는 효과가 있다. 웃음은 인생의 약 이다. - 알랑 논 밭은 잡초로 말미암아 손상되고 사람은 탐욕에 의해서 손상된다. - 法句 經 바다는 메워도 욕심은 못 메운다. - 한국 속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험치 않다. 적을 모르고 나만 알면 승패가 없다.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그 싸움은 반드시 위험하다. - 손자 천재를 만드는 것은 1 퍼센트이고 99 퍼센트는 노력이다. - 에디슨 중상과 비방에 대한 대답 그 것은 묵묵히 자기의 의무를 지키는 것이다. - 와싱턴 노여울 때는 열 까지 헤아려라. 노여움이 더욱 심하거든 백 까지 헤아려라. 노여움은 우리들의 수명을 짧게 하는 요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이 요물을 경계해야 한다. - 제퍼슨 눈물 젖은 빵은 먹어 본 사람만이 그 진가를 안다. - A. 링컨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다. - 성서 말을 삼가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 T.풀러 우리의 큰 원수는 방황과 주저이다. 할까 말까 하여 머물러 있는 것이 방황이요 주저이다.- 안창호 명성은 아지랑이이고 인기는 우연이며 부에는 날개가 있다. 오직 한 가지 영속하는 것은 품성이다. - 그릴리 우리가 아무 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음에 또 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다. - 성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 - 파커(T. Parker) 친해하는 미국 국민들이여, 당신의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라. - 케네디(J.F.Kennedy) 노병(老兵)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 맥아더(D. Macarthur) 무실(務實)·역행(力行)하고 충의(忠義)·용감(勇敢)하라. - 안창호(安昌浩) 우리는 전투(戰鬪)에는 졌지만, 전쟁(戰爭)에는 아직 지지 아니했다. - "드골(de Gaulle) 이것은 인간의 한 작은 일보(一步)지만, 인류를 위해서는 거대한 도약(跳躍)의 일보이다. - 암스트롱 (N. Armdtrong) 학문과 예술만이 인간을 신성(神性)에까지 끌어 올린다. - 베토벤(Beethoven)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 - 파스칼(Pascal) 자비·검약·겸허를 몸가짐의 삼보(三寶)로 하라. - 노자(老子) 법은 도덕의 최소한 - 옐리네크(Jellinek) 머리 위에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 내 마음에는 도덕률 - 칸트(I. Kant)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동물 - 프랭클린(B. Franklin) 산적(山賊)을 멸(滅)하기는 쉬워도 심중(心中)의 적을 멸하기는 어렵다. - 왕양명(王陽明) 덕(德)은 중용(中庸)을 지키는 데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천재(天才)란 하늘이 주는 1%의 영감과, 그가 흘리는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 - 에디슨(Edison) 청소년기는 제2의 탄생이다. - 루소(J. J. Rousseau) Boys, be ambitious. - 클라크(Clark) 내가 십오(十五)에 학(學)에 뜻(志)을 두고, 삼십에 서고 - 공자(孔子) 지혜·용기·전체가 조화될 때 정의가 실현되고, 또한 만인의 행복을 보장하는 이상 국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 플라톤(Platon) 인생을 진실하게 그리고 전체로써 보아라. - 에피쿠로스(Epicurose) 남에게 부정하게 대하지 말 것이며, 남이 나에게 부정하지 못하게 하라. - 마호메트(Mahomet) 자기와 남의 인격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 - 칸트(I. Kant) 사람은 삶이 두려워서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들었다. - 스펜서(H. Spencer) 회화(繪畵)는 말없는 시요,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 - 시모니데(Simonides) 만물의 근원은 물 - 탈레스(Thales) 만물의 근원은 원자 -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만물의 근원은 불 -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ros) 인간은 만물의 척도 -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Socrates) 나는 세계 시민이다. - 디오게네스(Diogenes) 그래도 지구는 돈다. - 갈릴레오(G. Galileo) 앎은 힘이다. - 베이컨(F. Bacon) 인간의 마음은 출생할 때에는 백지(白紙)와 같다. - 로크(J. Locke) 진실된 우정이란 느리게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조지 워싱턴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의심할지 모르나 당신의 행동은 믿을 것이다. ―L.C. 기회란 횃대에 앉는 일이라곤 없는 새[鳥]와 같은 것. ―C.M. 내심 없는 인간은 기름 없는 등잔불과 같다. ―앙드레스 세고비아 가장 현명한 사람의 머리 속에도 어리석은 구석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결함이 남들한테 나타나면 견딜 수 없이 짜증스러운 법. ―네덜란드 격언 당신이 뭣으로 바쁜지 얘기해 주면 당신이 어떤 인물의 사람인지 나는 곧 알아맞힐 수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아무리 괴로운 시간이라 해도 한 시간은 60분을 넘지 않는다. ―모리스 맨덜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사람은 코미디언,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한 뒤에 웃게 만드는 사람은 유머리스트. ―조지 번즈 우리로 하여금 12월에도 환한 장미꽃을 볼 수 있게 하려고 신은 우리에게 기억력을 주셨다. ―J.M.B. 환상이 없는 곳에 과학이 없고, 사실을 무시하면 예술이 성립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산은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르고 눈은 거기 쌓였기 때문에 치울 뿐. ―N.N. 교양이란 화를 내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은 채 어떤 얘기라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로버트 프로스트(美 시인) 아는 게 많다고 모두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게 많으면 어떤 지도자를 따라야 할지 선택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M.D. 전혀 웃지 않는 사람과 잘 웃는 사람을 경계할 것. ―아놀드 H.그라소 우리의 최대의 영광은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것이다. ―골드 스미스 시간은 모든 것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는 자연의 섭리. ―S.C. 사람은 꿈이 후회로 바뀔 때 비로소 늙는 법이다. ―존 배리모어 진실의 색은 단연 灰色. ―앙드레 지드 때로 아무 일도 아니할 자유가 없는 사람은 정말 자유를 모르는 사람이다. ―키케로 決定은 깨끗이 곧게 잘라지는 날카로운 칼이고, 未定은 이리 치고 저리 쳐도 자르질 못해서 날만 상하고만 무딘 칼이다. ―C.C.T. 칭찬이란 당신이 믿어본 적이 없는 당신에 관한 말을 남이 하는 것. ―F.F.W. 뉴스와 시시한 루머가 다른 점은 큰 소리로 말하는가 작은 소리로 말하는가의 차이일 뿐. ―F.P.J. 충고란 할 때는 말로 주고 싶고, 받을 때는 되로 받?? 싶은 법. ―W.A. 민주주의란 지도자들이 어려운 일을 기차게 해낸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시민들이 예사일을 기차게 잘 해낸다는 것으로서 판가름이 난다. ―존 가드너 추억은 번 돈을 한 잎 두 잎 세듯, 차근차근 소중히 간직하시도록. ―칼 샌드버그 실수는 인간이 하는데, 그 탓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더욱 인간적. ―B.G. 형성할 때 매우 조심해야 되지만 바꿀 때는 더욱 조심해야 되는 것이 輿論.―조쉬 빌림즈(美 유머리스트, 1818∼1885) 아버지 한 사람이 백명의 학교 스승보다 낫다. ―조지 허버트(英 시인, 1593∼1633) 명성이란 영웅적 행동이 풍기는 芳香. ―소크라테스 대화를 잘하는 으뜸가는 비결은 다음 어떤 말이 나올지 아무도 알아 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 ―M.B. 어떤 사람과 유산을 나눠 가질 때까지는 그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요한 카스파르 라바테르(스위스시인, 1741∼1801) 다른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행은, 자기의 富를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富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벤저민 리즈레일리(英 정치가, 1804∼1881) 나는 독서를 못하는 왕이 되기보다는 비록 초라한 골방이지만 책이 가득찬 방이 있는 가난뱅이가 되겠다. ―머코리 사랑할 시간도 충분치 않은데, 증오할 시간이 어디 있으랴! ―B.C. 성패는 시기가 좌우한다. 시기를 맞추는 것은 방법을 아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A.H.G. 가진 것이 망치밖에 없을 땐 세상의 모든 문제가 못대가리로 보이게 마련. ―에이브라함 마즐로 不道德의 근원은 나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버릇. ―제인 아담즈 傳統이란 불의의 사태를 예방하는 집단적인 노력. ―M. McL. 함께 웃은 사람은 잊혀져도 같이 운 사람의 이름은 못 잊는 법. ―아랍 속담 낮에는 너무 바빠 근심이 없고, 밤에는 너무 졸려 걱정할 겨를이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L.A. 사다리란 그 위에서 편히 쉬라고 만든 게 아니라, 한쪽 발이 버틸 동안 다른쪽 발로 더 높이 올라가라고 만든 발판. ―토마스 한슬리 따분하기는 매한가지야. 하기 싫은 일들을 노상 하고 있거나, 하고 싶은 일들을 아예 못하거나―에릭 호퍼 뭘 하고 싶은지 잘은 모르겠는데 가슴이 아파 오고, 그래도 좋은 것은―봄의 열병. ―마크 트웨인 상처 입은 굴이 진주를 만든다. ―랠프 월도 에머슨 급진주의자란 두 다리가 모두 허공에 둥둥 뜬 사람. ―프랭클린 D.루즈벨트 행운아란 있는 법. 그러나 그들은 요행을 바라지 않고 힘껏 뛴 사람들. ―바브 잉엄 자연의 순환은 단순한 반복현상이 아니다. 극장에서의 [앙코르]와도 같이 열렬한 재청에 의한 것이다. ―G.K.체스터튼(英 언론인て작가, 1876∼1936) 다이어먼드도 숯이나 석탄 같은 탄소의 응결체. 다른 점이 있다면 서로 다른 압력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일 뿐. ―「클래식 크로스워드 퍼즐」 매순간을 잘 감시하라. 이는 제가 가져온 것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살금살금 빠져 달아나는 도둑과 같은 것. ―존 업다이크(美 작가, 1932∼ ) 나는 절대로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없다. 미래는 너무도 빨리 닥쳐오기 때문에. ―앨버트 아인슈타인 사노라면 항상 무언가 배우게 마련. 그 대부분은 내가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나를 깨우치는 것. ―빌 본 태어난다는 것은 신의 섭리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일 뿐. ―헨리 워드 비처(美 목사, 1813∼1887) 두려움은 혼자 간직하되 용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온 세상을 두루 헤매도 스스로의 마음 속에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찾을 수 없는 법. ―랠프 월도 에머슨 인생은 단 한 번뿐. 그러나 올바르게 일하면 한 번이라도 족한 것. ―F.A. 한 사람의 志願者는 억지로 끌려온 열 사람보다 낫다. ―아프리카 속담 역사는 되풀이된다. 이는 역사가 잘못된 이유의 하나. ―C.D. 책이란 우리 마음 속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로 쓰여지는 것. ―프란츠 카프카 잘못을 정당화하다 보면 잘못이 갑절로 늘어난다. ―프랑스 속담 꾸지람 뒤의 격려는 소나기 뒤에 나오는 태양 같은 것.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인간이 창조하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자연을 표절할 뿐. ―J.B. 대화란 의견이 다르면서도 토론이 계속될 수 있음을 뜻한다. ―D.M. 철학자란 자기가 일찍이 겪지 못한 어려운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래라 저래라 충고하는 사람. ―W.R.L. 우연의 일치란, 이름을 밝히기 싫어하는 신이 가져다 준 하나의 작은 기적. ―H.Q. 著者를 고를 때는 친구 고르듯 신중히. ―W.D. 겁이 앞서다 보면 논리는 후퇴하기 마련. ―L.F. 사람들은 직관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규칙을 만든다. ―K.A.F. 거짓말을 해서 속이지 않을 수 없던 그런 사람을 우리는 미워한다. ―빅토르 위고 무식이 환경을 크게 오염시킨다. ―F.F. 검열이란 그 사회의 자신부족을 반영한다. ―포터 스튜어트(P.S.)(美 법관) 약속은 가장 늦게 하는 사람이 가장 잘 지킨다. ―장 자크 루소 말하는 권리는 자유의 시작일진 모르지만, 그 권리를 소중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월터 리프먼 인간의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압도적 다수는 "친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케네스 클라크卿 모든 일에 인내심을 가지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St. F.S. 매사를 그리고 모든 사람을 지겨워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지겨운 존재다. ―F.T. 어떤 것을 덮어놓고 希求하기에 앞서, 이미 그것을 획득한 사람의 행복을 주의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L.R. 누구나 화낼 줄은 안다. 그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꼭 화를 내야 할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정도껏, 올바른 때에, 올바른 목적을 위해, 올바른 방법으로 화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내를 보고 대양이 존재함을 믿는 것, 그것이 신념이다. ―W.A.W. [나]를 잃으면 [나]를 알 수 없다. ―H.D.T. 모든 것은 더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때까지 단순화해야 한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도 저녁초대를 정중히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자유인이다. ―J.R. 아무도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이 읽는 책을 읽어라. 그러나 그들보다 딱 1년 뒤에.―랠프 월도 에머슨 남의 발을 밟고 서지 않은 자만이 굳건히 설 수 있다. ―F.P.J. 생존은 벌어들임으로써 가능하나, 삶은 베풂으로써 가능하다. ―H.I.M. 진보란 만족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법이 없다. ―F.T. 역경은 원칙을 시험하는 기회. 역경없이 자신이 정직한지 아닌지 알 수 없다.―헨리 필딩(英 소설가) 사색없는 독서는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에드먼?? 버크 어떻게 하는지 아는 사람은 쉽게 일자리를 얻지만, 왜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을 부리는 윗사람이 된다. ―C.W. 자기 의견을 바꿀 줄 모르는 사람은 괸 물과 같다. 마음 속에 독사만이 우글거리는 사람. ―윌리엄 블레이크(英 시인) 올 여름에도 미국민의 ⅓은 초라한 집에서 옷도 제대로 못입고 밥도 제대로 못먹으며 살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휴가라고 부를 것이다. ―J.S.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려는 것은 울리는 종을 멈추려는 것과 같다. ―S.A. 사랑할 만한 것은 사랑하고 미워해야 할 것은 미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인간. 그리고 그 차이를 분간하는 데 쓰는 것은 두뇌. ―로버트 프로스트(美 시인) 치료되기를 바라는 것도 바로 치료의 일부. ―세네카 惡法은 최악의 폭군 ―E.B. 폭력은 무능한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 ―아이작 아시모프(美 공상과학소설가) 태풍이나 폭풍우는 피해 갈 수 있어도 서두름이란 악마를 앞서 갈 수는 없다. ―J.B. 깨끗한 양심처럼 더없이 폭신한 베개는 이 세상에 없다. ―프랑스 속담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다. 매일 웃으면서 살테니.―하비브 부르기바(튀니지 외교관) 사람이 어릴 적에 보여 준 재주대로 자란다면 이 세상에 천재가 못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어린이가 어두움을 두려워하는 것은 용서하기 쉬우나, 어른이 광명을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인생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 인류의 나이가 몇 살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인류가 철이 들 나이는 되었으리라는 것쯤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가이드워드 남에게 손가락질할 때마다 세 개의 손가락은 항상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잊지 말 것. ―무명씨 하나의 진실을 말살하려고 들 때마다 두 개의 진실이 생겨난다. ―B.C. 나의 취미는 독서, 음악감상, 그리고 침묵. ―에디스 시트웰(英 시인) 반대하는 것이 신성한 것은 아니다. 반대할 권리가 신성한 것이다. ―T.아놀드 회의주의자란 벽에 써놓은 뚜렷한 글씨를 보고도 가짜요, 僞書라고 우기는 사람. ―M.B. 심장이 오늘 깨달은 것, 머리는 내일쯤 가서야 이해한다. ―제임스 스티븐슨 아끼는 사람은 가난해 보이면서 알부자가 되고 헤픈 사람은 부자로 보이면서 가난해지는 사람. ―N.W. 나는 통계숫자로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진실만 빼놓고는. ―G.C. 위인과 만나거든 너의 좋은 인상을 남기도록 하되, 소인과 만나거든 그 사람의 좋은 인상만을 남기도록 하라. ―사뮤엘 테일러 콜리지 그 사람 하나만 보고는 사람 됨됨이를 모르는 법. 그 사람의 친구들을 살필 것. ―H.E.F. 친구와의 견해차이는 참으면서도 낯선 사람과의 견해차이는 異端이요 陰謀로 몰아붙이는 것이 인간.―B.애트킨슨 본능이란 마음의 코. ―제라당 부인 인기가 없어도 잡아가지 않는 사회. 나는 자유사회를 그렇게 정의한다. ―애들라이 스티븐슨 불로소득은 외상, 언젠가는 청구서가 날아오기 마련. ―F.P.J. 누구나 다 즐겁게 해주려면 결국 아무도 즐겁게 해줄 수 없다. ―이솝 친구를 고르는 데는 천천히, 친구를 바꾸는 데는 더욱더 천천히. ―벤저민 프랭클린 목마르기 전에 미리 우물을 파 두어라. ―중국 속담 과거 없는 聖人, 미래 없는 죄인은 없다. ―고대 페르샤 속담 새에겐 둥지가 있고, 거미에겐 거미줄이 있듯, 사람에겐 우정이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英 시인)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빼놓곤 이 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세금이 매겨진다. ―마크 트웨인 남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가 앞으로 지나가야 할 다리를 파괴하는 사람. ―G.H. 철학이란 정장을 하고 나온 상식. ―O.B. 누구나 거의 다 역경을 견디어 낼 수는 있지만, 한 인간의 됨됨이를 정말 시험해 보려거든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 ―에이브러햄 링컨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 광경: 꽃이 만발한 감자밭, 순풍을 받고 달리는 범선, 아기를 낳고 난 뒤의 여인. ―에이레 속담 비평가들의 말에 신경을 쓰지 마라. 비평가를 찬양하는 동상이 세워진 적은 없다.―장 시벨리우스 시간이란 곡마단 같은 것. 늘 보따리를 싸서 다른 데로 옮겨 가버리니까. ―B.H. 고함을 질러 길들인 말이 속삭이는 소리에 복종할 것으로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 ―F.P. 당신 자신이 되어라. 그러면 당신보다 더 나은 적격자가 어디 있겠는가 ―F.G.  
124    한국인사가 정리한 <중국의 개혁, 개방사> 댓글:  조회:2899  추천:0  2012-08-08
중국의 개혁, 개방사 중국의 15억정도 되는 인구는 대단한 자원임과 동시에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은, 진, 한, 오호십육국, 수, 당, 송, 원, 명, 청,나라시대에 그들이 세계의 중심국가라고 했던만큼 아시아지역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중의 하나가 서양의 물문을 빨리 받아들임의 요인도 속할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로 닫혀있던 중국이 자유화 물결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대 중국의 개방·개혁의 진행과정과 홍콩반환후의 모습 후 변화된 중국의 모습을 알아 보겠다. 또한 이러한 기회를 통해 중국의 개방사를 알게해준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1.배경 1)개방전의 중국 ♠1949년~1952년 1949년~1952년까지의 경제회복기를 통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한 후 1953년 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함으로써 소련의 스탈린주의식 개발전략인 '불균형 성장모델'을 모방하여 중공업 우선 발전 전략의 계획경제 체제를 채택하게 된다. 1949년 이전의 중국경제는 8년간의 항일 전쟁과 약 4년간의 국공내전으로 파탄상태에 있었으며 농촌은 극히 피폐되어 있었다. 1951년 평화적으로 태베트를 해방하고 나자 타이완과 진먼.횡후.마주등이 섬과샹깡.아오먼만을 제외한 중국대륙 전체는 통일이 되었다. 1950년 겨울부터 개혁.개방전의 중국은 우선재산 소유제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종전의 사유재산제를 폐지하고 사회주의 공유제라는 공유재산제를 도입하였다. 이는 중국농촌의 정치,사회.경제.사상에서의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대대적인 반혁명적 세력의 진압을 실행하여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전제정치를 공고히 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에서 내전이 폭발하였고,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이름으로 펑떠화이를 사령관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여 북한지원에 투입되었고, 1953년 7월 정식으로 정전협의가 타결되고 한국전쟁은 끝이 났다. 1950년과 52년사이에 중국에서는 정권의 안정분야에서 「공동강령」의 원칙에 따라 민주정치를 통해 지방의 각급 정권을 수립하는 동시에 위로부터 아래로 국가 기본제도로서의 인민대표대회 제도가 건립되었다. 이어서 국가기구의 편제를 정비하여 간소화하는 작업도 이어지게 되었다. 중화민공화국의 건국 후 중국정부는 소수민족 지구에 민족적인 자치구역 정책을 실행하여 민족의 평등.단결.공동발전을 실현한 것이다. 1951년 겨울부터 다음해 봄에 국가기관과 경제부문, 각 기업과 사업의 단위마다 반부패, 반낭비, 반관료주의를 추방하는 '3방운동'을 전개하는 정치를 해나가기 시작하였고, 1952년 중국 정부는 국유화과정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불법적인 개인기업가들을 소멸해 버리기 위해 '5반운동'을 전개한다. 이때는 또한 농업과 기타 중요한 농·공업 생산성과는 모두 역사상 최고기록을 초과하고 있으며, 국내외무역도 모두 신속한 회복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1953년~1957년 1953년 중국은 계획적으로 대규모의 근대화를 향한 발전에 착수했는데, 그 발전 방침은 중국공산당이 제출한 '과도시기의 총노선'이라는 것이었다. 즉, 마오쩌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개조를 기본적으로 완성하기까지는 하나의 과도시기이다. 이 과도시기에서의 당의 총노선과 총임무는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할 것이며, 기본적으로 국가의 공업화와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적 상업의 사회주의에로의 개조를 실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53년~57년)이 소련의 도움으로 실시되었다. 이 계획은 농·공업의 연평군 성장률은 11.9%에 달하였고, 그 가운데 공업은 연 18%, 농업은 4.5%, 경공업은 연 12.9%, 중공업은 25.4%의 성장률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1차5개년 계획 동안 중국지도자들은 노동력 활용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집약적 공업투자에 치중하여 실업문제가 야기되었고, 농업부문의 성장률을 저하시켰으며 국제수지 불균형의 문제를 악화시켰다. 1954년은 제1계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고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켜서, 중국이 법치국가로 나가는 중요한 지표가 제시되었다. 1955년 런따 제2계 제2차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 병역법」과 법규.조례를 통과시켜, 인민군의 의무병역제, 계급제, 봉급제를 실행하여 인민군 정규화의 중요한 조치와 지표를 마련했다. 여름이후로는 개체농업과 수공업과 자본주의적 상공업을 사회주의로 개조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급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56년에는 농촌지역에서는 토지개혁, 농업합작화, 농촌인민공사등의 방식을 통하여 소유제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도시에서는 국민당정부가 운영하던 공영기업은 몰수, 사영공상기업은 '공사합영'으로, 개인수공업은 '합작화'방식으로 소유제를 개조하여 사유재산제도를 기본적으로 폐지하였고 해마다 공유제의 비중을 높여 갔다. 1957년 2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전국에 5백만 이상의 지식인들이 있는데, 그가운데 10%이상은 우파라고 추산하여, 재능있는 지식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을 제거하였다. ♠1958년~1960년 1958년에는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는 것이 목표였고 모택동은 농.공업 분야의 침체일소와 비약적인 발전을 목표로 한 2차5개년 계획(1958~62년)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노동력이 조직화되어 농촌지역에서는 '농촌인민공사'가 조직되었고 농촌의 집체화를 통한 '정사합일'체제가 확립되었다. 농민의 재산은 모두 인민공사에 헌납하여 공동소유로 하였고 생활은 남녀 공동 합숙소에서 생활하였는데 1959년부터 3년간의 홍수, 가뭄, 해충등의 자연재해로 인하여 농업생산량이 격감하는 등 실패를 맞게 되었다. 1960년7월 소련정부는 갑자기 일방적으로 몇 백개에 달하는 계약을 철회하고, 자연재해로 인하여 60년에서 51년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참고]집체소유제 : 사회주의적 전민소유제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적 성격을 가지는형태. ♠1961년~1965년 대약진운동은 많은 문제점들을 남기고 실패함에 따라 중국 당국은 대약진 정책을 수정하였는데, 모택동이 후퇴하고, 등소평이 전면에 나서서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1962년말이 되자 상황이 많이 호전되면서 농업생산력과 생산 수준도 더이상 하락하지 않았다. 1963년에서 65년까지 다시 지속적인 조정이 있어서 공업총생산은 국민소득과 국가재정수입, 주요농업, 공업 생산량에 있어서 1957년을 초과하였다. 이에따라 경제적 장려제도가 부활되고 정권수립 후 처음으로 농업부문의 성장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자유시장제가 도입되고 전문관료와 기술자의 경영 참여가 허용되었으며, 농업생산성이 향상되는 등 정책은 비교적 성공적이어서 중국경제는 급속히 회복되었다. 하지만 모택동이 권력회복을 위하여 유소기와 등소평을 주자파로 몰아 처절한 권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경제상황을 마비시키게 된다. ♠1966년~1976년 문화대혁명시기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이 당시의 실세 권력자인 유소기. 등소평등 소위 실무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일으킨 문화적 정풍운동으로 시작 되어 모택동과 그 추종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1975년 당시 총리인 주은래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 기술의 '4개현대화'를 제시하였고, 주은래 및 모택동의 사망후 화국봉이 이를 승계 추진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은 등소평 집권 후 중국을 개혁.개방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1976년 9월9일 사망한 모택동이 후계자로 지명한 화궈펑은 명백히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다. 화궈펑은 요즘의 강택민처럼 당시 중국공산당 주석 중앙군사 위원회 주석, 국무원 총리 등 당·정·군의 최고위직을 모조리 독점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강택민이 최고 실력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회의의 막후 실력자는 따로 있었다. 11기 3중전회는 덩 샤오핑의 뜻대로 진행됐고, 덩샤오핑의 뜻에 따라 개혁개방 정책이 결정됐다. 화궈펑의 집권시 중국공산당은 66년부터 76년까지 10년동안 계속 된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의 어수선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홍위병들 이 중국 대륙 전역을 누비며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문화대혁명은 76 년 1월8일저우언라이(주은래)총리가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종말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4월5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베이징 중심부의 천안문광장에 홍위병 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의 손에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모하는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시민들은 잠시후 자신들이 가 져다놓은 꽃다발을 치워버리려는 공안경찰 인민해방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에는 1만여명의 공안경찰과 인민해방군이 출동, 곤봉으로 광장에 모여있던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해 해산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1차 천안문사태였다. 9월9일에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7월6일에는 주 더가 세상을 떠났다. 중국공산당 1세대를 이끌던 세 개의 '큰 별'이 잇달아 떨어진 것이었다. 10월6일 중국공산당은 화궈펑에게 당중앙 주석과 당중앙 군사위원 회 주석을 맡기는 결정을 내렸다.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명한 화궈펑이 무력을 쥐고 있는 예지엔잉 당시 국방부장과 잘 '협의' 한 결과였다. 10월14일 중국공산당은 4인방이 '분쇄'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화궈펑은 당·정·군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국면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인방을 분쇄해놓고도 문화대혁명은 찬양하는, 헷갈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요즘도 중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베스트셀러 '교봉'은 "4인방이 없는 문화혁명이 계속되던 시기" 라고 표현, 중국 지도자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그런 분위기에서 77년 7월에 열린 제10기 3중전회는 등소평을 당 부주석과 중앙군사위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로 복권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군을 쥐고있는 예지엔잉이 "덩샤오핑 동지 같은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적 손해"라면서 복권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1977년~1978년 1978년 10개년 경제개발계획을 확정하고 급속한 발전을 추구하는 급진정책을 계획하였다. 농업의 기계화 및 120개의 대형 프로젝트건설 추진 등 중국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킨다는 의욕적인 계획으로 부족한 자본과 기술을 서방이나 일본으로부터 도입하겠다는 방침이었으며 '양약진'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비현실성으로 경제를 더욱더 어렵게 하였으며, 농업생산량은 저조하였고, 경공업투자부족으로 생필품은 품귀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경제를 중시하는 실용주의노선 표방과 양약진 추진 동안 실무파들의 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1978년 12월 당 11기3중전회에서는 사회주의 현대화,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의 기본방침이 채택되어 등소평 노선이 확정되고 1979년 4월 중앙공작회의에서 '조정.개혁.정돈.향상'의 신팔자 방침을 채택함에 따라 중국은 모택동의 계속혁명론을 포기하고 혁명보다는 경제 건설에 치중하는 실용주의 노선에 의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기 간 부분간 우선순위 기술선택 지원수단 유인체계 1차5개년 계획기(1953~57) 중공업, 경공업, 농업 자본집약적 대규모 소련원조 물질적유인 대약진기(1958~65) 중공업, 경공업, 농업 노동집약적 소련원조 중단 자력 갱생 비물질적 유인 경제조정기(1961~65) 농업, 경공업, 중공업 자본,노동집약적 자력 갱생 물질적요인 문화대혁명기(1966~76) 중공업, 농업, 경공업 노동집약적 자력 갱생 비물질적요인 2)중국의 개혁,개방후 ♠농업개혁시기(1979년∼83년) 경제개혁을 농촌에서부터 시작한 이유는 첫째가, 중국최대 다수의 인구인 70% 이상이 농촌에 거주하였고 농민과 농업문제가 중국혁명과 건설의 근본 문제이다. 둘째로, 농촌인민공사 체제는 실행과정에서 생산효율의 저하로 농업생산의 정체를 가져와 중국 경제발전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었다. '농업생산 책임제'는 생산대 소유의 토지를 여러종류의 청부생산제하에 분배하는 방식으로 토지는 여전히 공유제이나 농민이 자주적으로 생산 및 경영하도록 하는 거이다. 1980년 중국정부는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농업생산 책임제를 실시토록 하여 2~3년 후에는 약 90%이상의 생산대대에서 농가생산 책임제가 시행되었다. 또한 이중 경영체제를 수립하여 집체경영과 개인경영을 다같이 중시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농촌경제개혁은 1980년대 중반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도시상공업개혁시기(1984년∼88년) 도시를 중심으로 한 개혁으로서 1984년 10월 당 12기 3중전회에서 경제개혁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채택하였다. 첫째로, 기업의 활성화를 중심 고리로 하여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는 자주권을 확대시키며, 기업경영과 관리방식을 개혁하여 공장장에게 생산.일반관리 권한을 주고 기업활동의 전반에 걸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공장장책임제가 실시되었다. 둘째로, 시장메커니즘의 제한적도입으로 상품가격과 노무가격의 왜곡과 가격체제를 조정 개혁하였고, 셋째로는 기존의 경제체제하에서 국가가 기업의 관리라는 미시적 경제활동에 따라 거시적 경제 관리 업무에 소홀히 하였던 바, 거시경제 조정체계를 수립.건전화시키는 일이다. 넷째는 공유제를 주체로 한다는 전제하에 다양한 소유제경제를 발전시키고, 마지막으로는 국가.집단.개인간 그리고 중앙과 지방간의 합리적인 국민수입분배국면을 형성한다. ♠치리정돈시기(1988년∼91년) 1988년 봄 가격개혁의 실시단계에서 소매몰가의 폭등으로 인플레이션심리가 만연되어 상품 사재기, 예금인출등의 사태가 발생하였고, 하반기에는 물가가 상승하여 '경제환경에 대한 처리, 경제질서에 대한 정돈'이라는 조정정책을 실시하였다. 1989년 6월 천안문사태를 계기로 주도권을 장악한 보수파는 정권 및 테제 불안의 비상시국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치리정돈'정책을 이용하여 비교적 안정되었다. 또한 1991년에는 북경 아시아게임의 성공적 개최로 유리하게 작용되었고, 1991년 8월3년간의 긴축정책을 종결하였다. ♠개혁심화·개방확대시기(1992년∼1997년) 1992년 등소평은 개혁.개방의 확대와 심화를 독려하는 내용의 소위 '남순강화'를 발표하였고, 이를 위하여 경제발전을 가속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이 담화는 1992년 2월 당 중앙 2호 문건으로, 1992년 3월 당정치국 전체회의에서 당 중앙 4호 문건으로 구체화 되어졌다. '남순강화'의 '개혁.개방 가속화'요구 내용은 당 14기 전국대표 대회에서 그대로 수용되어 경제운용 기본노선의 근간이 되었으며, 현재 중국이 추진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탄생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경제체제 개혁에 있어서 국유기업의 경영체제를 시장 대응형으로 전환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였으며, 대외개방에 있어서는 '4년개방'으로 불려지는 전 방위 지역 개방과 무역, 금융, 백화점 등 3차 산업을 개방하고, 무역체제 개혁을 통한 시장개방작업을 추진하였다. 강주석과 주부총리는 '상해방'은 연고지인 상해를 향후 95계획의 중점발전지역으로 밀어붙여 광동성등 다른 연해지역과 내륙지방의 반발을 샀으며, 특정지역에 대한 편파적인 특혜라는 분위기가 지도부내는 물론 다른 지방에 팽배해 있었다. 등시대에는 지방에 대폭 경제권한을 위임하는 방임자세를 취했지만 3세대 지도자들은 중앙의 권위강화가 바로 체제의 안정과 지결된다는 판단에서 위임권한의 회수에 전력하였다. 즉, 95계획안은 각 파벌과 지방세력이 자기의 이익을 위한 힘겨루기 이며 장기발전전략보다는 지역적인 파당권익만이 반영되는 비효율적인 타협안이었다. ♠개혁·개방 연표 ▲77년 7월=덩샤오핑 복권 ▲78년 12월=11기 3중전회에서 4개 현대화노선 채택 ▲79년 1월=미국과 수교 ▲79년 2월=리셴녠,계획경제를 위주로 시장경제를 보조수단으로 하는「주보론」수립 ▲79년 6월=제5기 전인대 2차회의,「조정·개혁·정돈·제고」현대화8자 방침 결정 ▲80년 8월=선전 주하이 산터우 경제특구 지정 ▲84년 10월=제12기3중전회,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경영 사태로 자오쯔양 총서기실각.장쩌민 총서기 취임 ▲91년 3월=국민경제·사회발전 10개년계획(1991~2000)발표 ▲92년 2월=덩샤오핑,남순강화로 개혁·개방 촉진 ▲92년 10월=당 14전대회,「사회주의 시장경제」표현 결정 ▲93년 3월=헌법개정안 채택 ▲93년 6월=주룽지 국무원 부총리,인플레억제책 시행 ▲94년 7월=회사법,대외무역법 제정.주룽지 제1부총리 경제대권 장악 ▲97년 9월=세계은행, 2020년 중국 GDP규모 미국,일본이어 세계3위 전망 ▲98년 3월=주룽지 총리 취임 3)중국의 이론 피라미드 '사회주이 초급단계론'이 전체의 기본을 이룬다. 그리고 사회주의이기는 하나 아직 생산력이 낮은 초급단계에 처해 있는 중국에서 채택해야 할 목표노선으로서 이 하나의 중심과 두 기본점이 제출되었다. 그 내용은 경제건설이 모든 활동이 중심목표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본 노선이 네가지 기본 원칙과 개혁.개방의 견지라는 것이다. 지금하나의 중심과 두 기본점이 목표하는 바는 경제발전 수준을 낮은단계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점에 있어서는 경제건설이 지상명제이고, 그 방법론은 네가지 기본원칙으로 공산당 독재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개혁.개방으로 경제발전을 꾀한다고 한다. 2.중국의 개혁, 개방후 1)등소평사망에 따른 중국 등소평<1904∼1997>의 죽음은 중국경제에 대혼란 사태는 오지 않았다. 중국경제는 등소평이 없어도 자생력이 있으며, 정권승계되 이미 다 이루어진 상태여서 강택민체제가 갓 출범한 정권이 아니기 때문에 큰 혼란은 없었다. 오히려, '세계 최대의 개발도상국'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고, 등소평에 이어 개방정책기조를 그대로 이어받는게 확실했다. 새 정권은 과거의 계획경제로 되돌아가진 않을 것이다.되돌아가면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개혁 그 차체가 빚은 급격한 사회변화도 다른 불안 요인으로 지적된다. 국영기업 효율화 등의 여파로 실업자 1억명 이사이 발생, 대거 도시로 몰려들고 있어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또한 등소평이 평소 시장 경제의 '필요악'이라고 지적해온 빈부차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관료의 부패와 권한 남용에 대한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강택민 주석을 비롯한 3세대 후계지도자들은 고도성장 위주의 등소평 노선으로 인한 부작용을 시정하는 차원으로 인플레억제, 지역간 경제격차 해소,농업중시,국유기업 활성화등의 정책을 적극실시,등이후 시대의 체제안정을 확보하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등소평 등소평은 중국을 부국을 향한 시장경제 사회로 개방한 인물로서 위대하다. 1980년 이후 등소평이 제시한 중국의 3단계발전전략은 주효했다. 첫단계로 1980년부터 1990년까지는 GNP를 2배로 성장하여 의식주를 해결하고, 두 번째 단계로 1991년부터 2000년가지는 GNP를 두배로 늘려 개발 도상국가의 중간 정도로 끌어올리며, 마지막 단계로 21세기의 중엽까지는 중국을 현대화한다는 것이 등소평이 미국 기자들에게 한말이었다. 키도작고 서방경제에 그리 해박해보이지도 않는 부도옹등소평이 이런 구상을 발표하면서 중국의 GNP를 4배로 성장하여 1인당 GNP 1,000달러인 제2단계를 2000년에 마무리짓겠다고 할 때에 믿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등소평의 구상을 5년이나 앞당겨 1995년에 달성하여 세계7위의 경제 대국이 된 위대한 날, 위대한 국민이라 할 수 있다. 등소평이 개혁이전이 중국은 전형적인 계획경제국가였다. 상품소매가격의 97%를 국가가 결정했고, 공업용 원자재 출고가격의 100%를 국가가 결정했다. 그러나 등소평의 개혁 정책 추진이후 1994년 중국 상품 소비가격의 국가 결정론은 7.2%로 줄어들었고, 국가가 가격을 지도하는 부분이 2.4%로, 중국이 시장경제에 가격을 자유화시킨 비율은 물 90.4%가 되었다. 공업용원자재도 국가가 가격을 결정하는 부분은 14.7%, 국가가 가격을 지도하는 부분은 5.3%로 시장에서 자유롭게 가격이 결정되는 부분이 80%로 늘어났다. 이쯤되면 완전 개방이라고 해도 좋다. 등소평의 개방과 개혁 정책이 수행되면서 1995년가지 중국에는 10만개에 이르는 각종시장이 생겨났다. 이 중 농산물 도매 시장이 2100여개, 공업용 도매 시장이 600여개, 생산품 원자재 시장이 800여개, 그리고 소규모 상업 체인망은 무려 1천 400만개나 늘어났다. 이리하여 1995년 현재 중국은 시장 상품 가격 지배율이 90%가 넘는 국가가 되었다. 대외개방은 4개의 연해 지역에서 경제 특구와 해남 대특구라는 이름으로 시험적으로 시작되었다. 4년 후에는 대외개방 경제 특구가 열 네 곳으로 늘어났다. 1985년에는 양자강과 주강, 그리고 민남의 세 삼각주로 개방했다. 이어서 1988년에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그리고 환발해 지역을 개방하여 연해 지역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였다. 뒤이어 중국은 장강 내륙14개 도시를 개방하여 연해 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국경 지역에 이르는 전 중국 개방을 단행했다. 2)홍콩반환 ♠영국의 홍콩강점 홍콩은 원래 광동성, 신안현에 속하며 주강구 연해의 작은 어촌이다.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은지 10여년후 청조가 태평천국(1853-1864)의 난에 의해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아편무역을 합법화하기 위해 1856년 10월 광주의 황포에서 청조 관헌이 영국 국기를 걸고 있던 중국인 소유 상선 "애로우호"에 타고 있는 해적을 체포하자 영국의 광주주재 영사는 이 배는 영국선이라고 우기며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프랑스와 공동 출병, 1957년말 광주를 침략하여 소위 '제2차 아편전쟁'을 발동했다. 1858년 5월 영불 연합군이 천진 입구의 대고의 포대를 함락하자, 청조 함풍제(재위 1851-1861)는 영국·프랑스와 각각 을 맺었다. 그러나 후에 이를 내심 반대한 청조의 공격에 후퇴당했던 영불은 다시 1860년 7월 2만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9월 천진을 점령, 명·청간의 번영을 상징했던 북경 근교의 황궁 원명원을 철저히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10월 북경을 함락, 청조를 굴복시켜 각각 을 체결했는데, 영불은 이 에서 일체를 다시 인정받아 천진을 추가로 개항시키고, 또 영국은 홍콩섬 맞은편 '구룡사지방'(현재 구룡반도 남부의 계한가 이남의 영토)을 할양받고, 영불 연합군은 군사비 배상으로 각각 800만냥을 받기로 결정했다. 한편 러시아는 이 강화를 중간에서 조정한 대가로 1858년의 에 이어 1860년 11월 에 의거 동북지역인 흑룡강 이북의 영토와 우수리강 이동의 연해주 및 쿠릴열도(사할린)를 포함한 100만㎞²의 광대한 영토를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획득했고, 이후 19C말까지 서북지역의 51만 Km2를 또 획득해 갔다. 그외에도 중국은 상해로부터 서쪽으로 양자강 상류까지의 주변 일대는 영국의 세력하에, 대만과 복건성 및 만주와 한반도는 일본 지배하에, 산동 일대는 독일의 세력하에, 만주 위쪽과 외몽고·내몽고 일대의 긴 북쪽지역은 러시아의 세력하에, 그리고 남쪽 광동·광서·해남도·곤명 일대는 프랑스의 세력하에 각각 배타적으로 편입되었다. 게다가 1895년 청이 중일전쟁 패전이후 열강이 다투어 중국에게 '조차'를 요구할 때, 영국은 1898년 6월 9일 다시 홍콩 부근을 광동일대의 프랑스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북경에서 중·영란 것을 체결하여 지금 심천 이남의 신안현의 심천하 이남과 구룡반도 계한가의 이북지구의 넓은 지역과 이 부근에 속한 235개 도서를 99년간 조차해 갔다. 후에 이 중국대륙과 연결된 지역을 '신계' 즉,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칭해지게 되었는데, '신계'의 빌리는 기간은 1997년 6월까지로 했다. 위의 모든 할양받은 지역과 빌린 지역을 합쳐 간단히 '홍콩'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신계' 지역은 홍콩 전체 면적의 92%를 점할 정도로 크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댓가로 어떤 보상도 받은 바 없다. 이처럼 힘없는 중국은 완전히 제국주의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 떨어지게 되고 열강은 엄청난 이익을 중국을 포함해 전세계로부터 탈취해 간 것이다. ♠홍콩중국에 반환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됨에 따라 중국대륙은 50년동안 1국가 2체제(일국양제)유지를 약속을 했지만, 적지않은 홍콩인들과 외국자본이 해외로 빠져 나갔으며, 중국정부가 상하이등 연안도시들을 무역항으로 집중육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홍콩이 '자유항'으로써의 이점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을 하였지만, 반환이 된 후 증시는 좋았고, 부동산 경기 또한 좋았다. 즉, 경제력만 놓고 보면 홍콩은 중국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것이다. 중국의 자본이 홍콩으로 진출하였고, 중국과 화안이 합작으로 설립한 은행도 생겨났으며, 홍콩의 부족한 인력난을 인건비도 싼 중국 출신 인력이 매워졌으며, 문화적 동질성까지 공유하여 홍콩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3.중국의 개혁, 개방 후 문화 현대 중국인의 색생활은 아침 일직 북경의 거리를 나가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거리 곳곳에 있는 유조 또는 유배라 불리는 밀가루 음식과 조로 쑨 죽 또는 두장을 사서 먹거나 집으로 가지고 가서 먹는다. 점심 또한 마찬가지이고, 저녁은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서 먹지만 현대 생활에 그럴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북경을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에는 외식 산업이 성업중이다. 중국의 노점상들은 현대화를 정돈된 도시로 파악하는 정부정책에 밀려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이 그렇듯 국가도 세금 걷기에 불리한 노점상을 고깝게 볼 리가 없다. 더욱이 공산화 50주년을 맞아 가로사업을 대대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노점상들의 어려움은 적지 않다. 또한 개방과 함께 할인마트인 '까르프'의 중국식 표기인 지아러프는 '가정에 기쁜 복'이라는 특유의 감각으로 만들어진 신조어다. 한국에서 '이마트'나 '킴스클럽'으로 알려진 대형할인마트는 중국 대도시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아러프의 성공이후 '홈클럽'이라는 할인마트가 생기는 등 종류도 다양해 졌다. 이곳도 한국의 할인마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가전제품에서 식료품까지 모든 것을 구비해 놓고 있다. 백화점, 이제는 시들어가지만 그래도 천진은 중국에 여행온 여행객들이 쇼핑을 위해 들리는 곳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건이 싸고, 종류가 많은 곳이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대형백화점과 거리시장이 있는 '빈장다오'(濱江道)다. 이곳은 중국을 대표하는 쇼핑공간중에 하나다. 특히 빈장다오의 거리를 타고 길게 뻗어있는 노점상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거리상점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중국공산화 50주년을 맞아 완전히 현대식 상가로 변모했다. 우선 좌판 자체가 금지되면서 상점들이 완전히 상가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규모에서의 위용은 잃지 않아, 지금도 거대한 상가가 밀집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남대문을 생각나게 한다. 중국에서도 백화점은 이미 쇄락해가는 조루현상을 보이고 있다. 할인마트 등 가격이나 질에서 급격하게 도전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화점은 모든 제품이 안정적인 품질로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할인마트와는 변별력을 갖고 운영되고 있다. 중국에서 이혼율은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최근들어 급증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신장된 여권과 여성의 고등교육화로 인한 결혼 필요성 감소, 경제적 독립이 늘어가면서 더욱 심해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4.중국의 현시점 1999오늘의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이 설계하고 장쩌민이 시공하는 새로운 역사적 실험이 진행중이다.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실험은 자주 대신 개방을,투쟁대신 개혁을 새로운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자본주의는 경쟁이나 투쟁이 아닌 협력과 모방의 대상이며 부의 축적은 전체보다 개인이나 소집단에 의해 선도될 수 있다는 참으로 혁명적인 발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1997년 말 기준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60달러에 달해, 사상처음으로 '저 소득 국가(785달러 이하)'에서 벗어나 '중등소득 국가(786∼3125달러)'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국민총생산(GNP)도 1조달러를 돌파, 국가별 순위에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이어 7위 에 올랐다. 지난 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채택이래 중국의 발전은 실로 눈부시다. 79년부터 97년까지 중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9.8%에 달한다. 지난 78년 대외무역액은 206억달러로 세계 27위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난해는 3251억달러를 기록, 10위로 껑충 뛰어올랐다.78년 1억 7000만달러에도 못미쳤던 외환보유고는 97년말 1399억달러로 불어나, 일본에 이어 세계 2위가 됐다. 여기에 홍콩의 외환보유고(928억달러)를 합치면 중국은 외화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된다. 세계의 투자가 중국으로 몰리고 있다는 얘기다. 문화혁명의 대혼란에서 벗어나 경제 건설을 국가 제1목표로 설정 한 뒤, 12억 중국인들은 20년만에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경제 기적' 을 이룩했다. 이들의 고도 성장세는 이미 한국을 추월한지 오래이고, 세계경제강국의 대열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97년 여름부터 아시아를 휩쓴 경제위기에도 끄덕하지 않고, 올해 8%에 육박하는 성장을 이룩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무서운 '성장의 관성'은 향 후 수년 동안 쉽게 무너질 것 같지도 않다. 여기에다 주룽지(주용기)정부는 올 초 국유기업과 정부개혁, 금융개혁 등 3대 개혁과제를 설정하고, 3년내에 이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이에 따라 올 한해 국유기업과 정부부문에서 수많은 실업자가 쏟아져나오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주룽지 정부는 개혁 드라이브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다. 이미 중국은 일부 품목에서 세계 제1, 2위의 '공장'이 돼 있다. 컬러TV의 경우 중국은 세계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차이홍 캉자 등의 전자업체는 세계적인 TV수출업체로 발돋움하고 있다. 냉장고 에어컨 VCR VCD 컴퓨터 등 중급기술 제품들도 생산능력 과 기술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시멘트도 중국이 최대 생산국이며, 화학비료는 세계 2위이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연간 소득 1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이 3000만명에 달하고, 3000달러 이상의 중산층이 1억에 달하는 엄청난 내수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이 거대시장은 외국인 투자를 부르는 가장 큰 흡인력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대중국 투자의 감소세를 말하기 도 하지만, 이 시장을 외면할 기업은 별로 없다. 이에따라 21세기에 도 중국의 '세계 공장' 역할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북대태평양과기발전센터는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된 1,2,3층 수천평 매장은 IBM, 컴팩, 삼성,LG등 외국유명 업체와 리엔샹 베이다팡정등 국내 업체들로 가득차 있으며, 2002년까지 이 건물 옆에 20층짜리 ‘연구개발빌딩’이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은 전시-계약-판패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미래 정보산업의 메카가 될것이다. 군사면에서 중국은 21세기에도 지속적인 군사력 강화를 추진할 것이지만,'경제 우선'의 원칙에 따라 '다극화'와 '평화공존'의 외교 노선을 견지할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은 그동안 '경제를 먼저 발전시키면,군사 현대화도 가능하다'는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내부적으로 군사 현대화에 박차를 가해왔다. 중국은 이 군사력을 '전쟁 억 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경제를 '중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당분간 국가 에너지를 몰두할 것으로 예상된다. 급속한 경제발전 혜택이 중국 전지역에 골고루 미치지 못했다.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21세기 첨단산업과 우마차를 이용하는 운송수단스카이 라인이 화려한 도시와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는 농촌이 공존하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부유 도시에는 호화 빌딩과 호텔들이 즐비하고 승용차가 자전거전용도로를 점령할 정도로 급증한 반면 이에 비례해 매연과 범죄,매춘,노동착취,마약문제도 폭증했다. 중국인들은 모든 사람이 가난한 것은 참아도, 불평등한 것은 참지 못하는 심리가 있다. 지역간의 지속적인 경제불균형은 사회불안요소로 이어질 수 밖에없다. 따라서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부연해지역과 서부내륙지역의 경제 격차를 해소하는것이 시급하다. 5.중국과 우리나라 지난해 홍콩에 대해서는 100억 달러의 흑자를, 중국에 대해서는 28억 달러의 흑자를 보았다. 2000년에는 홍콩과의 교역규모는 250억 달러, 중국과의 교역규모는 450억 달러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따라서 이중 홍콩으로부터는 230억 달러의 흑자를, 중국으로부터는 30억 달러의 흑자를 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는 최근 교역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00년에는 중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 의존도가 26.3%, 2005년에는 33.4%, 2010년에는 39.9%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중국과 홍콩을 합칠 경우 우리 수출의 17.4%를 차지해 미국을 제치고 최대시장으로 부상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이는 한국의 대 중국 의존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향후 중국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통찰하고 대 중국정책을 펴나가야 한다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의 생산력과 홍콩의 자본·기술·관리·마켓팅 능력등이 합쳐지면 곧바로 한국 제품과의 경쟁범위가 확산될 것이 예상되고 해외시장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며 우리의 최대 경쟁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더구나 중국은 매년 유치되는 외자가 400억 달러에 이르러 한국의 외자유치가 시작된 1962년부터 1995년까지 투입된 외국자본 총액인 180억 달러와 비교할 때, 중국 1년간 외국인의 투자액이 30여년간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투자액 보다도 2배 이상 많다는 놀라운 점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홍콩 사이의 관계는 날로 긴장될 것으로 전망되므로 한국은 제품의 가격·품질·기술면에서의 경쟁력 제고와 합리적인 기업운영, 국제경쟁력 및 협상능력 제고, 정부의 올바른 경제정책, 정치적 신의와 역량증대 등으로 중국과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반드시 중국과 선린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강화해 남북한의 힘을 집중·단결하고 경쟁력을 제고해서 우리의 대 중국 경쟁능력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6.중국의 미래성 중국은 지난 96년 3월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21세 기 '중국경제 청사진'이라 할 수 있는 '9·5계획과 2010년 장기목표 요강(이하 요강)'을 채택했다. 이 '요강'은 제9차 5개년 계획기간 (1996년∼2000년) 동안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8%로 유지하고, 오는 200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지난 80년의 4배 수준(약 1000달러)으로 끌어올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2010년까지는 국민총생산(GNP)을 2000년의 2배로 배증시킨다 는 계획이다. 이에 앞서 지난 87년 중국은 '3단계 발전 전략'을 통 해 21세기 중반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중진국 수준(약 4000달러)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결국 중국은 1인당 국민소득을 2000년까지는 1000달러로, 2010년까지는 2000달러로 끌어올려 '소강(약간 여유가 있음)'을 실현한다 는 계획이다. 한국과 대만 등이 이미 여러해 전에 달성한 경제 목표를 중국은 21세기중반까지의 과제로 설정한 셈이다. 하지만 '요강'에는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중국인들의 경제적 욕구만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요강'은 중국의 '전통적인 계획경제 체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과 경제성장 방식을 '조방형'에서 '집약형'으로 전환한다는 2개의 체제전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전자는 '생산관계'의 개혁을, 후자는 '생산력의 발전'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울러 '요강'은 농업에서부터 교통운수 통신 에너지 기계 전자 석유 자동차 건축 등 각 산업 분야와 과학기술 교육 국유기업 개혁 등 장기 개혁 과제를 설정하고 있다. 경제구조의 근본을 바꾸고, 사 회 모든 부문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이다 중국은 최근까지 연평균 12%의 경제성장률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2010년까지 8~9%, 2020년까지 8%의 성장을 지속한다면 2020년의 중국은 국민총생산이 미국을 능가하여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불과 앞으로 20년이면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정부는 전국토를 벤처기업과 첨단지식경제의 동부, 자원공급지역인 서부, 서부개발을 지원하고 동부의 산업을 이어주는 중부를 각각 특색있게 개발한다는 전략하에 전국토 3분대게발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목표는 건국100주년인 2050년까지 8,000-1만달러 수준까지 끌어 올려 부강하고 문명하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중국경제가 세계경제호조, WTO가입,확대재정정책 효과 등에 힘입어 올해를 기점으로 상승기조로 전환될 것이라는 중장기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 중국의 미래는 그러나 온통 장밋빛만은 아니다. 향후 수 년간 중국지도자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실업과 정치 민주화 문제가 될 것이다. 2000만명을 넘는 실업자들은 생존권 확보를 위한 시위에 나서는 등, 이미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불안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들의 불만은 대학생 지식인 기업인 등의 정치 민주화 요구 와 결합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 주도의 정치체제를 고 수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길게 보면 중국은 한 세기 전 서구 열 강의 '반식민지' 상태로부터, 21세기를 앞두고 세계사의 전면에 다 시 등장하는, '100년만의 대반전'을 이룩했다. '중국의 세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7.에필로그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한국의 속담이 있다. 정말 중국은 10년 동안에 1인당 국민 소득을 2배로 올린 세계의 유일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통계에서 보면, 일본은 35년이 걸렸고, 미국은 50년, 한국은 17년이나 걸린 것을 중국은 단 10년에 달성한 나라이다. 그들의 15억인구의 힘은 이렇듯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좀더 잘 살기 위해 개방을 택한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힘을 발휘하였다. 요즘 내가 느끼는 중국은 모든 물건에 MADE IN CHINA로 새겨 놓았다. 즉 그들은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여 모든 물품의 공급의 기지가 되어버린 듯 하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욱 더 심화 될 추세일 것이다. 21세기의 중국은 중국인 자신들만 자기 나라에서 먹고 입고 사는 시대가 아니라, 중국인이 만든 모든 제품이 전 세계인에게 공급되는 시대일 것이다. 거기다가 세계제일의 자유무역을 자랑하는 홍콩까지 포함하니 그거대한 땅과 거대한 노동력이 나는 부러울 수 밖에 없다. 내가 중국인에게 바라고 싶은 점이 있다면, 잠시나마 회사에 머무르고 있던 시절 중국과 거래를 하였는데, 행동이 타국에 비해 좀 느리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좀더 민첩해 지는 것과 더불어 우리나라와 중국간의 사이에 있는 북한과의 관계가 평화와 번영을 함께 달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최대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끝으로, 중국에관한책과, 홈페이지등의 자료등이 무수히 많은 것을 보고 놀랐고, 사회주의로만 인식하고 있던 나에게 중국의 개혁·개방사는 중국의 새로운 면을 보는사고전환의 기회를 주었다.   출처: 서적참고
123    한국역사 대사기 댓글:  조회:3559  추천:0  2012-08-08
한국역사 대사기 【1】 ※ 12해리 영해 선포:1978 대한 민국의 영해를 12해리로 한다고 널리 세계에 알린 일. 한국의 영해 범위는 1978년 4월 30일부터 발효된 영해법에 따라 12해리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제주 해협에서 만종전과 같이 3해리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제주 해협 및 모든 영해에 무해 통항(無害通航 : 외국의 배가 어떤 나라의 평화, 안전, 질서를 해치는 일이 없이 그 나라의 영해를 지나가거나 항구에 출입하기 위해 영해를 지나가는 일)원칙이 적용된다. ※ 2·8 독립 선언:1919 1919년 2월 8일에 일본의 도쿄에서 조선의 유학생들이 선포한 독립 선언. 일본의 도쿄에 있던 조선 기독 청년 회관에서 유학생 600여명이 친목회 명목으로 모여서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채택하여, 그것을 일본 의회에 보내는 한편, 일본에 있던 외국 외교 기관과 언론 기관 등에 배포한 항일 투쟁 사건이다. 그 결과 대표자 60여 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8 독립 선언은 사전에 국내 각계 지도자들에게 은밀히 알려져 있었던 일로서 그 뒤에 일어난 3·1 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다. 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은 이광수로 알려져 있다. ※ 3·1 운동:1919 1919년 3월 1일에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 통치에 맞서서 일어난 온 겨레의 항일 민족 독립 운동. 기미 독립 운동이라고도 한다. 1910년 일본의 강압으로 주권을 빼앗긴 뒤 국민의 항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을 즈음, 국내에서는 종교계, 교육계 지도자들 사이에 은밀히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진행되어 크리스트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 측 2명의 33인이 민족 대표로 선정되고, 총대표로 손병희를 추대하였다. 마침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 : 국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려고 거사일을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학생과 시민들이 탑골 공원에 모여들었고, 하오 2시에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2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시위로 들어갔다.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운동은 3월과 4월에 걸쳐 절정에 이르렀으며, 중국 동북 지방과 하와이 등지로까지 퍼져 나가 이 운동이 시작된 지 3개월 동안 211곳에서 200여 만 명이 참가하였다. ※ 4·19 의거:1960 1960년 4월 19일에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 부패와 부정 선거에 항거하여 일으킨 전국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의 책임 문제 등으로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국회를 통한 대통령의 간접 선거를 피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탄압하여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직접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뒤 1954년의 총선거와 1960년 3월 15일의 총선거에서도 자유당 정권은 부정 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시켜 민주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와 같은 일당 독재와 부정 부패 및 부정 선거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감정이 이 4·19 의거로 폭발하게 되었다. 학생과 시민의 시위는 곧 다른 지방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 민주 정치의 발전을 기대하는 애국적인 학생과 시민들의 거센 시위는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승만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 5·16 군사 혁명, 민주당 정권 붕괴:1961 제2공화국을 맡은 민주당이 처음부터 신파와 구파의 세력 다툼으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가져오자 군부 내의 일부 인사 중 박정희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 내의 혁명 세력은 조직을 규합했다. 드디어 1961년 5월 16일 새벽을 기해 행동을 개시하여 무혈 혁명으로 장면의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서울 중앙 방송국을 통하여 혁명 공약 6개 조항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혁명 정부는 6개 조항의 공약대로 군정을 펴나갔으며, 1963년에 접어들어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끝내고 민정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3일에 실시한 총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이로써 ‘제3공화국’의 탄생을 보았다. ※ 6·10 만세 운동:1926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항일 만세 운동. 본래 이 날은 전국적인 항일 만세 운동을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그래도 학생들이 주동하여 황제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민중들이 합세하여 시위 운동이 확대되었는데, 이 운동은 3·1 운동이래 주권 회복을 바라던 우리의 민족 정신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킨 것으로 뒷날의 광주 학생 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 8·15 광복으로 주권 회복:1945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1910년 이래 일제의 지배를 받아 오던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에 주권을 되찾게 되었다. 광복의 직접적인 계기는 연합군의 승리에 있었다. 연합군은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그 선언의 내용을 거부하고 항쟁을 계속하자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게 되었고, 그 결과 일본은 마침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은 결코 연합군의 승리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간접적으로는 국내에서의 끈기 있는 독립 투쟁과 국외에서의 항일 무력 투쟁, 그리고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이 뒤따랐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오랜 독립 투쟁의 결과 연합국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고, 1943년 11월의 카이로 회담과 1945년의 포츠담 선언에서 독립을 보장받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중·일 전쟁 이후 중국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 간도 참변:1920 1920년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한 사건. 경신참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조선 내의 일본군과 관동 지방에 파견된 일본군 및 연해주 지역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동원하여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 급진 개화파 갑신정변 일으킴:1884 급진 개화파는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민씨 세력이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고, 빨리 근대화를 이루려는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자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나라가 청·프 전쟁에서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1884년 10월에 새로 설치된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모신 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 만에 실패하고,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 갑오개혁 단행:1894 갑신정변의 실패로 세력이 꺾였던 개화 세력은 동학 운동의 반발을 계기로 다시금 내정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 동학군의 진압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성공하자 조선 정부에 대해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정부는 그들의 개혁 요구에 대해 이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거절하며 일본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경복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세력을 몰아 낸 다음, 개화파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개혁을 단행하였다. 1894년 7월, 새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은 개혁 추진 기관인 군국 기무처를 설치하고, 3개월 동안에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걸친 208건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개혁의 기본 정신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마련하여 그것을 고종이 공포하도록 하였다. ※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1876 강화도 조약은 강화도에 침입한 일본의 군함 운요호에 대한 우리 포대의 발포 사건을 구실로 일본의 강요에 의해 1876년에 맺어졌다. 한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을 맺음으로써 쇄국 정책을 버리고, 일본에게 부산, 인천, 원산의 세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침략의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유럽 여러 나라들도 적극적으로 한국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 경부 고속 도로 개통:1970 서울과 부산 사이를 잇는 경부 고속 도로는 1968년 2월 1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970년 7월 7일에 완공 개통되었다. 도로의 규모는 길이 428km, 너비 22.4m인 4차선 도로이다. 이후 이 도로는 수도권과 영남 공업 지역, 부산과 인천의 2대 수출입항을 잇는 산업의 대동맥구실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과 부산 사이를 1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지역 간의 균형 있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 경인 고속 도로:1968 서울과 인천을 잇는 고속 도로. 정식 이름은 ‘서울∼인천 간 고속 국도’이다. 도로의 규모는 길이 29.5km, 너비 20.4m인 4차선 도로이다. 1967년 5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68년에 개통된 한국 최초의 고속 도로이다. 이 도로의 완성으로 서울과 인천의 산업 기능을 더욱 긴밀하게 묶어 하나의 큰 공업권으로 발전시켰다.   【2】 ※ 경인선 개통:1899 경인선은 서울(구로)과 인천을 잇는 길이 27km의 복선 철도로, 1899년 9월 18일에 먼저 제물포(인천)와 노량진 사이가 개통되었고, 이듬해에 한강 철교의 준공과 함께 나머지 구간이 연결되었다. 날로 늘어나는 교통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1965년에 복선으로 만든 데 이어 1974년에는 전철로 바뀌었다. 1964년 11월에 경인선 개통일인 9월 18일을 ‘철도의 날’로 정하여 그 날을 기념하고 있다. ※ 고구려, 태조왕 즉위:53 고구려는 고대 왕국 중의 하나로,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다스렸다. 국민성이 억세고 날쌔어 중국과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민족의 방파제 구실을 하였다. 태조왕은 고구려의 제6대 왕(재위 53∼146년)이자 유리왕의 손자인데, 신하들이 추대하여 7세에 왕위에 올랐다. 56년(태조왕 4년)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고구려 영토를 넓혔으며, 국가 체제를 부족국가 형태에서 중앙 집권 형태로 바꾸는 등 강력히 대외 발전을 꾀하여 고대 왕국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 고려:918 중세의 통일 왕조. 왕건이 후삼국의 분열을 수습하여 세운 나라이다. 918년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뒤로부터 1392년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우기까지 34대 475년간 계속된 왕조이다. 태조 왕건은 본래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태봉(후고구려)의 왕인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궁예를 몰아 내고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918년). 건국 후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는 통일 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호족 세력을 통합하고, 발해 유민을 흡수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초기에는 호족 세력이 강성하여 왕권이 위협당하기도 했으나, 광종 때에 이르러 신구 세력의 교체를 통해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 성종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문종 때에는 최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뒤 밖으로 여진의 압력을 받은 데다가 안으로 사회 모순이 격화되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의 난 같은 내란이 잇달아 일어났고, 내란이 수습되기도 전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그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약을 틈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권문 세가의 방해로 실패하고, 그 동안 지방에서 성장해 온 중소 지주층의 신진 사대부 세력은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과 연합하여 권문 세가의 세력을 꺾어 새 왕조 조선을 열게 되었다(1392년). ※ 팔만 대장경 완성:1251 팔만 대장경은 1011년(고려 현종 2년)에 거란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어려움에 빠지자,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의 안전을 꾀하려고 만든 것이다. 처음 만들기 시작한 때부터 무려 24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제1차로 처음으로 펴낸 대장경은 과 두 가지이다. 제2차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피란한 고려 조정이 또다시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고 세력을 물리치려고 대장경판을 만든 것이다. 1236년(고종 23년)에 강화도에 장경 도감(대장경을 펴내기 위한 임시 관청)을 두어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1251년(고종 38년)에 완성하였다. 이것이 곧 오늘날 남아 전하는 이다. 의 경판수는 모두 8만 1,258판인데, 앞뒤로 새겨져 있어서 면수로는 모두 16만여 면에 이른다. 판목의 크기는 세로 24cm 안팎, 가로 69.6cm 안팎, 두께 2.6∼3.9cm로 후박나무에 새겨져 있다. 이는 해인사 대장경판이라 하여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한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 멸망:BC108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조선반도 최초의 국가로, 단군 왕검이 세웠다고 한다. 주위의 부족을 정복하면서 강대해져, 기원전 4세기경에는 중국의 연(燕)나라와 맞설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방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만주 남서부 일대와 요서, 조선반도 북부 지방에서 그 세력을 떨치다가 기원전 2세기경 이주민인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배 계급은 토착 세력과 연맹을 맺고, 중국과 조선반도 남방 사회와의 중계 무역을 통해 강성해졌다. 그러나 요동 지역에 대해 위협을 느낀, 한(漢)나라의 침입을 받아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기원전 108년). ※ 고종 퇴위:1907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63∼1907년) 고종은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세자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었다. 가장 혼란한 시기에 왕위에 올라 명성 황후(민비)와 대원군의 정치 싸움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동학 운동, 을사조약 등 큰 사건이 잇달았다. 1907년에 일본의 압력으로 제위에서 물러났으며, 1910년 조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뒤에는 이태왕으로 불리었다. 1919년에 일본의 음모로 독살당하였다. ※ 광주 학생 운동:1929 1929년 11월에 전라 남도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 운동.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본 한국 남학생이 일본인 학생을 때림으로써 두 나라 학생들 사이에는 편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학생들끼리의 싸움이었던 것이, 광주 일보의 공정하지 못한 보도와 일본 경찰의 일방적인 한국 학생의 탄압을 계기로 차차 민족 감정으로 번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1929년 11월 3일). 당시의 민족 단체였던 신간회는 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하는 데 힘썼으며, 그에 따라 학생들도 스스로 그들의 운동을 한 단계 높여 민족 운동화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마침 광주 장날인 11월 12일을 기하여 일제히 시위 운동에 들어가, 독립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 구석기 시대:BC500000년경 조선반도에서의 구석기 시대는 약 50만 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한반도의 전국 각지에서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구석기인들이 전국에 넓게 퍼져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기 구석기의 유물은 평남 상원군 검은모루,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충남 공주군 석장리, 충북 제천군 점말 동굴과 청원군 두루봉 동굴 등지에서 출토되었고, 후기 구석기의 유물은 충남 공주군 석장리와 함북 웅기군 굴포리에서 출토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옮겨 다니면서 사냥과 고기잡이로 생활하였고, 불을 사용했으며, 소박한 원시 미술도 남겼다. ※ 국채 보상 운동:1907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운동. 1907년에 서상돈, 김광제 등이 대구에서 금주와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회를 조직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등 언론 기관의 협조로 일반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펴 나갔으나, 일진회의 방해와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우리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 정신을 발휘한 구국 운동이었다. ※ 귀주 대첩 승리:1019 1019년(현종 10년)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3차로 침입해 오자 고려군은 곳곳에서 그들을 잘 막아 싸웠다. 이에 소배압은 사잇길로 개경으로 진격했으나 강민첨의 군사에게 패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이 길목을 지키던 강감찬이 귀주에서 그들을 맞아 싸워 거의 전멸시켰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하며, 이 때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 김구(암살):1949 백범(白凡) 김구는 1893년 18세에 동학당에 가입해, 접주가 되어 이듬해 해주에서 동학군을 지휘하였다. 1896년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감형된 뒤에 탈옥하였다. 3·1 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으로 있으면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한편 장개석[蔣介石]의 국민 정부와 긴밀한 유대를 맺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온 힘을 기울이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애쓰던 중 1949년에 암살당하였다. 저서에 가 있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당선:1992 김영삼은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나, 1947년 경남 고등 학교를 거쳐 1952년 서울 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 제3대 총선 때 26세로 최연소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제5대 국회 의원에 재선된 이래 제14대까지 모두 9차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84년에 민주화 추진 협의회 공동 의장, 1986년에 신민당 상임 고문을 역임하고87년에 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어 12월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1990년에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의 3당이 통합되어 민주 자유당이 창당되자 민주 자유당 대표 최고 위원이 되었고, 1992년 8월에 민주 자유당 총재에 취임하였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7·4 남북 공동 성명:1972 1972년 7월 4일 한국과 조선 당국은 남북 조절 위원회를 구성 운영할 것을 합의하고 발표한 공동 성명. 7·4 남북 공동 성명이라고도 한다. 평화적 통일을 전제로 한 여러 문제를 민족 주체성에 입각한 남북 간의 직접 대화로 해결하고자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하에 남북 간 사전 교섭을 거쳐 이루어졌다. 통일 원칙으로서 외세의 간섭이 없는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해결을 들고 있다. 또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을 것과 군사적 충돌을 방지할 것 등 여러 가지가 나타나 있다. ※ 남북 상호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1974 1974년 1월 18일,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한국 정부의 조선에 대한 제의. 주요 골자는 ① 통일 수단으로 무력이나 폭력을 상호 포기할 것 ② 남북은 서로 내정 간섭을 하지 않을 것 ③ 현행 휴전 협정의 효력을 유지할 것 등이다. ※ 남북 적십자 회담:1971 남북간 이산 가족 찾기를 목적으로 열린 남북의 적십자사 대표자 회담. 1971년 8월 대한 적십자사의 ‘1천만 이산 가족 찾기 운동’제의에 따라 남북 적십자 대표가 서울과 평양에서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다. ※ 노량 해전 이순신 전사:1598 노량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운 마지막 해전으로, 1598년 (선조 31년)에 노량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른 싸움을 이른다. 이 싸움에서 왜적의 전함 400여 척을 쳐부수고 적군을 물리쳤으나, 이순신 장군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 싸움을 마지막으로 조선과 왜국 사이에 벌어진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3】 ※ 목판 인쇄물 다라니경:751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나온 불경. 본래의 이름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1966년에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을 복원 공사하던 중 탑 안에서 발견되었다.이것은 8세기 중엽(751년) 이전에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로서 신라 시대에 이미 인쇄술이 발달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 단군(고조선 건국):BC2333 에 따르면, 단군은 천제(天帝:하느님)인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熊女 : 곰이 변하여 된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단군 왕검은 기원전 2333년에 평양성을 도읍으로 정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이후 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겨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자(箕子)를 임금으로 삼은 다음,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 그 때 단군의 나이가 1,908세였다 한다. 이후 오늘날까지 단군을 겨레의 시조로 받들고, 환인이 환웅을 인간 세상에 보낼 때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할 만하다(弘益人間)’고 판단한 것을 건국 이념으로 새기며, 오늘날 교육의 기본 정신으로 삼고 있다. ※ 대동여지도:1861 조선 말기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조선반도의 지도. 1861년(철종 2년)에 김정호 자신이 판목에 새겨 초판을 펴내었고, 1864년(고종 원년)에 다시 펴내었다. 특히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전도를 22첩으로 나누어 각 첩을 책처럼 접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사용할 때는 2개 또는 3개씩 펴 놓고 볼 수도 있고, 모두 다 펴 놓고 전도를 한눈에 볼 수도 있다. 각 첩은 가로 8, 세로 12로 나눈 모눈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모눈 하나가 사방 10리가 되게 하였으므로, 각 첩은 가로가 80리(32km)로 결국 축척 16만분의 1지도가 되는 셈이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청구도를 만든 다음, 다시 27년 동안 조선반도를 몸소 걸어다니면서 실제로 측량하여 만든 지도로서 그 정확함이 오늘날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1914 러·일 전쟁 10주년을 맞은 1914년에 러시아인들의 반일 감정이 높아지자,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들은 러시아인들과 연합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이상설, 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은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이상설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만주에 사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 대한 민국 정부 수립:1948 광복 후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북위 38°선을 경계로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가, 1948년 8월 15일에 조선반도의 합법 정부로서 대한 민국이 수립되었다.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 총리로 하는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그 동안 남한을 통치했던 미 군정은 새 정부에 통치권을 이양하였다. 대한 민국 정부는 그 해 12월 12일에 유엔 총회에서 승인을 받았고, 다음해 1월 1일에 미국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민주 공화국이었다. ※ 대한 민국 임시 정부:1919 1919년 4월 13일에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조국 광복을 위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민족의 지도자 수십 명이 임시 정부를 세우기로 약속한 뒤 상하이 보창로에 임시 독립 사무소를 설치하고, 각 도의 대의원 29명이 의정원에 모여 헌법적인 임시 헌장 10 개조를 초안, 심의하여 민주 공화 정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헌장(헌법)과 나라의 국호, 연호가 선포되어 1919년 정식으로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원칙적으로 임시 정부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 분립 형태의 민주 공화 정부임을 분명히 밝히고, 1945년까지 27년 동안 유지되었다. 임시 정부는 중경[重慶]까지 여덟 번이나 옮겨다니면서도 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1948년의 대한 민국으로 연결되었다. ※ 대한 제국 성립:1897 1897년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 자신을 황제라 일컬어 자주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근대 국가로의 발전을 기약하여 관제를 개혁하고, 사회, 경제적인 자강 운동을 펴는 한편 민의가 반영되는 개혁 정치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끝내 자체 내의 모순과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 대한 항공 여객기 피격 사건:1983 1983년 9월 1일 승객 269명을 태운 대한 항공(KAL) 여객기가 소련 공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사할린 해역에 추락한 사건. 이 사건으로 승객 269명(15개국 국민)이 모두 사망하였다. 소련은 아무런 방비가 없는 민간 여객기를 미사일로 격추한 야만적인 행동에 대하여 세계의 모든 자유민들로부터 크게 규탄을 받았다. 피격된 지 1주년이 되는 1984년 9월 1일, 충남 천안군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위령탑이 세워졌다. ※ 독립 신문 발간:1896 1896년 4월에 독립 협회에서 발행한 독립 신문은 처음으로 발행한 현대식 일간지로서,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서재필이 주동이 된 독립 협회의 기관지로서 자유 민권의 성장과 국민 계몽을 목표로 하여 국민들에게 근대 사상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으나, 정부의 독립 협회 탄압으로 유명 무실화하였다. ※ 독립 협회 성립:1896 독립 협회는 1896년 7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 서구 근대 사상과 개혁 사상을 가진 인사들에 의해 조직되어, 민중을 계몽하고 온 겨레의 자주적 노력으로 자주 독립과 자유 민권의 성장을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독립 협회의 급진적 개혁 요구와 세력의 신장에 점차 위협을 느껴, 오히려 독립 협회를 비난하면서 보부상을 중심으로 조직된 황국 협회를 앞세워 그 활동을 탄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단체 대립과 충돌이 일어나자, 그것을 핑계로 독립 협회를 모함하여 해산시키고 그 간부를 투옥시켰다(1898년 11월). ※ 동의보감:1610 1613년에 한의학자이며 전의이던 허준이 엮은 동양 의학서. 1596년(선조 29년)에 선조의 명에 따라 엮은 것으로 1610년(광해군 2년)에 완성하여 1613년에 펴내었다. 모두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용은 내과학인 내경편 4편, 외과학인 외형편 4편, 유행병과 부인병·소아병 등을 다룬 잡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편, 목록 2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해 놓았다. 이 책은 동양 의학의 기본 이론에다 풍부한 임상 경험을 더하여 체계적이며 실용적으로 엮은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의학술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 최제우가 동학 일으킴:1860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에 최제우(崔濟愚)가 일으킨 종교이다. 당시 세도 정치로 말미암아 사회가 매우 어지러웠고, 외국 세력이 들어와 민심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최제우가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천주교)에 반대하고, 예부터 내려 오던 하느님 숭배 사상과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이룩한 것이 동학이다. 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을 기본 교리로 하는 이 동학이 삼남 지방을 비롯하여 경기, 황해도 지방까지 크게 퍼지자 나라에서는 이를 사교(邪敎)로 규정,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이어 최시형(崔時亨)이 다시 교조가 되어 교세를 크게 넓혔다. 동학은 1894년(고종 31년)에 발생한 동학 운동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조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고쳐 계속 교세를 넓히기에 힘썼다. 한편, 동학은 이 때부터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파로 갈리었다. ※ 동학 운동:1894 1894년에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중 운동. 갑오 농민 전쟁 또는 동학 혁명이라고도 한다. 역사상 외국의 세력에 대한 항쟁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면서 편 가장 큰 민중 운동이다. 동학 운동의 핵심은 악정(惡政)에 대한 항거, 내정 개혁 요구, 외국 세력의 배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의 싸움에서 동학군이 패전하고,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동학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동학 운동의 의의는 부패한 지배 계급에게 정치 개혁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민중의 자각을 크게 높인 데 있다. 그리고 외국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굳건히 심어 놓은 데 있다. ※ 마라난타, 백제에 불교 전함:384 에 따르면 인도의 스님이었던 마라난타는 384년(백제 침류왕 1년)에 중국의 진(晋)나라를 거쳐 백제에 와서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고 한다. 그 후로 백제에 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 마산 3·15 의거:1960 1960년에 자유당 정부의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여 일어났던 의거. 1960년 3월 15일에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규탄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발포하여 사태를 진압하였다. 같은 해 4월 11일, 앞서 희생된 김주열(金朱烈) 학생의 시체가 바닷가에 떠오르자, 이에 흥분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다시 궐기함으로써 4·19 의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 대전 엑스포 개막:1993 산업 발달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각 나라의 생산품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만국 박람회(엑스포)는 1851년에는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한국이 최초로 국제 박람회에 참가한 것은 1889년(고종 26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였다. 그 때 출품한 것은 갓, 모시, 돗자리, 가마 등이었다. 1993년에는 사상 최대 규모의 대전 엑스포가 8월 7일 개막하여 11월 7일까지 93일 동안 성황리에 계속되었다. ※ 만적의 난:1198 고려 신종 1년(1198년)에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 운동. 만적은 개성의 북산에 공사 노비가 모인 자리에서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우리네도 상전 밑에서 고생만 할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면서 난을 일으킬 것을 의논했다. 이에 여러 노비가 찬동하여 관노는 관청에서, 사노는 성내에서 들고일어나 권신과 상전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살라 버린 뒤에 정권을 잡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한 사노의 밀고로 계획이 사전에 드러나, 노비 해방을 위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 망이·망소이난:1176 1176년 고려 명종 때 충청 남도 공주의 명학소에서 일어난 천민의 난. 천민 수공업자의 집단 거주 지역인 명학소에 살던 천민들이 망이·망소이의 주도 아래 일으킨 신분 해방 운동이다. 고려 무신 정권하에서 일어난 천민의 저항 운동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이들은 공주를 점령한 후 북진하여 1년 반 동안 청주와 아산 등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 남부까지 휩쓸었다. 정세유가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난을 계기로 정부는 향·소·부곡 등 천민 거주 지역을 군현으로 승격시키는 등 천민의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게 되었다. ※ 명량 해전:1597 1597년(선조 30년) 9월 16일에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왜군 함대를 크게 쳐부순 싸움. 적의 함대 133척이 조수(潮水)의 흐름을 따라 명량으로 쳐들어온 것을, 12척의 병선으로 맞아 격전 끝에 적선 31척을 쳐부순 싸움이다. 그 싸움으로 우리 수군이 빼앗겼던 제해권(制海權)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고, 왜적의 기세를 크게 꺾어 놓았다.   【4】 ※ 묘청의 난:1135 고려 인종 때(1135년) 묘청이 일으킨 난. 당시 이자겸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한 데다 밖으로는 새로 일어난 금나라가 고려에 압력을 가해와 사회가 크게 불안하였다. 이에 서경 출신 귀족들은 개경파 귀족을 몰아 내고 개혁 정치를 실시하고자 서경 천도와 금나라 정벌,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 등 보수적인 개경파 귀족들이 이에 적극 반대하므로, 묘청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묘청의 무리는 한때 자비령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으나, 김부식의 토벌로 1년 만에 진압되었다. 이 난이 있은 뒤 고려 지배층의 보수화가 더욱 심해져 북진 정책은 좌절되고 말았다. ※ 무신의 난:1170 고려 때 무신들이 일으킨 변란.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와 무신에 대한 여러 가지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에서 일어났다. 좁은 뜻으로는 정중부의 난(1170년)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무신의 난 모두를 가리킨다. 무신의 난이 처음 일어난 것은 현종 때의 김훈, 최질의 난이며, 그 뒤 정중부의 난으로 본격화하여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등이 잇달아 집권자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여 무신 정권 시대를 이루었다. ※ 문익점 원나라에서 목화씨 가져옴:1363 고려 말기의 학자, 문신인 문익점은 1363년에 사신의 한 사람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그 곳에서 처음으로 목화밭을 보았고, 솜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를 인도에서 들여온 지 오래지 않은 터여서, 목화씨나 그 재배 방법이 나라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막고 있었다. 그런데 문익점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와, 정성껏 심어 가꾸어 그 재배에 성공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 세종 22년에 영의정 벼슬이 내려졌다. ※ 물산 장려 운동:1923 1923년부터 물산 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우리 민족 경제 자립 운동. 일본에 빼앗긴 경제권을 회복하려는 경제 자립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입어라, 먹어라, 써라. 조선 사람 조선 것.”이라는 구호 아래 자급 자족, 국산품 애용, 소비 절약, 금주, 금연 등의 실천 요강을 마련하고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 발해 멸망:926 발해는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대조영이 말갈족을 이끌고 지금의 만주 지방 부근인 길림성돈화현 동모산에서 자립하여 세운 나라이다(698년).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하였는데 뒤에 발해로 고쳤다. 국력을 크게 떨쳐 한때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중기 이후 계속된 왕위계승을 둘러싼 지배층의 내분이 피지배층인 말갈족을 자극하여, 그들이 차차 발해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면서 힘이 약해져 228년 만인 926년에 거란족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926년). ※ 백제, 16관등과 공복 제정:260 백제는 고구려·신라와 더불어 삼국 시대를 이룬 조선반도 고대 왕국 중의 하나이다. 고구려의 한 갈래인 위례 부락에서 시작하여 3세기 말인 고이왕 때 고대 왕국의 기틀을 마련, 260년에는 왕 아래에 16등급의 관리를 두고 등급에 따라 옷 색깔을 달리 하기도 하였다. 이후 4세기부터 크게 발전하여 경기도·충청도·전라도와 황해도·강원도의 일부까지 차지하는 등 세력을 뻗쳤으나, 계속되는 고구려의 압력과 신라와의 투쟁에 밀려 660년에 소정방과 김유신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에게 서울이던 사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하였다. ※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마라톤 우승:1936 베를린 올림픽은 1936년에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렸던 제11회 올림픽 대회로, 49개 나라에서 4,308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특히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였고, 남승룡 선수가 3위를 차지하여 우리 민족의 장한 기상을 온 세계에 떨쳤다. ※ 병인양요:1866 1866년(고종 3년)에 프랑스의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에 대원군이 카톨릭 교도들을 박해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죽임을 당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열고자 로스(Ross)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일부는 서울로 쳐들어왔으나 문수 산성과 정족 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부대에 패하여 한 달 만에 물러갔다. 그 결과 프랑스의 위신은 크게 떨어지고, 이에 자신을 얻은 대원군은 더욱 쇄국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 보장왕 때 고구려 멸망:668 보장왕은 고구려의 제28대 왕(재위 642∼668년)으로, 영류왕의 아우였는데,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그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은 뒤 668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평양성이 함락되자, 대신들과 함께 항복하여 고구려는 70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 뒤 당나라에 잡혀 갔으나 사평대제백원외동정(司平大帝伯員外同正)에 책봉되고, 677년에 요동주 도독으로 조선왕에 봉해졌으나 말갈족과 함께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다가 귀양가 여생을 마쳤다. ※ 봉오동 전투:1920 1920년에 조선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 홍범도가 지휘하는 간도의 대한 독립군이 국내에 들어와 큰 전과를 올리자,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려고 대한 독립군의 본부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던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와 합세하여 일본군을 간도 왕청현 봉오동으로 유인, 포위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것은 독립군이 조직된 이래 첫번째로 거둔 통쾌한 승리로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출동한 일본군을 다시 크게 무찌른 전투가 청산리 대첩이다. ※ 부여 멸망:346 기원전 1세기경 부여족이 세운 나라인 부여는 지금의 중국 동북 지방 북부의 눙안과 장춘 지방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5부족 연맹체로서,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업과 목축을 겸한 생활을 했다. 풍습에는 영고라는 제천 의식이 있었고 정치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마가, 저가, 구가, 우가라 불리는 부족장들로 구성된 귀족들이 맡아 보았다. 뒷날 부여 왕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국호를 동부여라 고쳤다. 346년에 전연의 모용황에게 멸망하였고, 그 후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되자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 사사오입 개헌:1954 1954년 11월 29일에 사사오입 원칙을 적용하여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불법으로 통과시킨 사건.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 개정안이었는데, 국회의 표결에서 재적 의원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헌법 개정에 필요한 재적 의원 3분의 2인 136표에 1표가 모자라 부결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이틀 후에 203명의 3분의 2는 사사오입하면 135명으로 충분하다는 이론을 내세워 가결되었음을 다시 선포하였다. 그 표결 과정은 물론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한 내용 모두가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우리 헌정사상 큰 오점을 남긴 개헌이었다. ※ 살수 대첩:612 612년에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양제의 침입을 맞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크게 무찌른 싸움.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구려를 누르려 했으나, 고구려가 먼저 돌궐을 몰아 요서 지방을 공격하자 양제가 몸소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제는 먼저 요동성을 공격하는 한편, 따로 30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직접 평양으로 쳐들어왔는데, 이를 맞은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하여 그들을 평양성 부근까지 유인한 다음, 그들이 속은 것을 알고 후퇴할 때 살수에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그 때 살아 돌아간 수나라 군사는 불과 2,7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며, 그 비참한 패전으로 수나라는 내란이 일어나서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1145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김부식이 임금의 명을 받아 엮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책으로, 오늘날 남아 전하는 우리 민족 역사책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기전체로 된 것으로 내용은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류(志類), 열전(列傳)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두 50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고려 때 간행된 것 가운데서 7권만이 성암 고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이계복이 간행한 목판본이 경주의 옥산 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 삼국유사:1285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一然)이 엮은 역사책. 지은 연대는 대개 1281∼1283년(충렬왕 7∼9년) 사이로 보고 있다. 그 내용은 고조선, 대방, 부여 등의 역사를 간략히 기록한 후,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가 정사(正史)인데 대해 는 야사(野史)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정사에 빠진 사실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특히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전설, 설화 및 불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고, 또한 신라 향가 14수가 실려 있어서 고대 어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늘날 고려 때의 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이계복이 다시 펴낸 것이 전한다. ※ 신라, 삼국 통일:676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 우리 민족을 통일한 일. 화랑도 정신으로 국민 정신을 통일하고 한강 유역 점령으로 경제적인 힘을 갖춘 신라는 660년(무열왕 7년)에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 668년(문무왕 8년)에는 고구려마저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 내어 3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만 차지하게 되어 고구려 영토이던 중국 동북 지방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하여 그 전까지 정치, 사회, 문화를 달리했던 우리 민족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할 수 있게 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민족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게 되었다. ※ 삼별초의 난:1270 강화도에 있던 삼별초가 몽고의 세력에 저항하여 일으킨 반란. 몽고의 침략 아래서의 조정에 대한 반란이자 항몽의 싸움이었다. 최씨의 무인 정권이 무너지자 강화도에 피란해 있던 조정은 환도 문제로 논란이 심했다. 개경환도(開京還都)는 몽고에 굴복하는 일이라 하여 삼별초에 속하는 무신들은 환도를 주장하는 문신들과 맞서게 되었다. 몽고에서 굴욕적인 약속을 하고 돌아온 왕이 삼별초를 설득하였으나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 결국 환도가 결정되고 삼별초를 해체시키자는 조정의 결의가 있었다. 이에 삼별초는 몽고의 공격을 예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1,000여 척의 배로 강화에 있는 가족들과 재물을 싣고 남으로 내려가 진도를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배중손이 지휘하는 삼별초군은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잡았으나, 관군과 몽고군에 밀려 일부는 달아나고 일부는 탐라(제주도)로 들어가 저항하였다. 조정에서 회유책을 써 보았지만 그들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합군의 탐라 공격으로 결국 삼별초는 항몽 정신만 남긴 채 저항하다가 진압되고 말았다. ※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 인쇄:1234 상정고금예문은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가 국가나 사삿집의 예문(예법을 밝힌 글)들을 모아 엮었다는 책으로, 이라고도 한다. 이규보의 문집인 에 이 책을 1234년(고종 21년)에 금속 활자로 28부를 인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책은 전하지 않는다. ※ 새마을 운동:1970 지역 주민들의 생산 기반과 생산 능력을 개발하여 소득 수준을 높이고, 의식 개혁으로 인간 정신의 계발과 사회 개발을 촉진하는 국민 대중 운동. ‘새마을 만들기 운동’, 또는 ‘잘 살기 운동’이라고도 한다. 새마을 운동은 한국에서 1970년 4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제창하여 이듬해인 1971년부터 범국민 운동으로 전개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져 운동의 이념과 전개 방법을 직접 배워 가기도 했다.   【5】 ※ 서울 아시아 경기 대회 개최:1986 1981년 11월 26일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 경기 연맹(AGF) 임시 총회에서는 제10회 아시아 경기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할 것을 만장 일치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 서울에서 제10회 아시아 경기 대회인 서울 아시아 경기 대회가 열렸다. 86 아시안 게임이라고도 한다. ※ 서울 올림픽 대회:1988 1988년에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 경기 대회. 1981년 9월 30일에 독일의 바덴바덴시에서 열린 제84차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대 27의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치고, 제24회 올림픽 대회를 서울로 유치하게 되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그리고 세계에서는 열여섯 번째로 올림픽 대회를 여는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 대회는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서울을 비롯하여 수원, 부산, 대전, 대구, 광주, 성남시 등의 여러 경기장에서 열렸다. 운동 경기 외에도 국제 회의, 한국 도자기전, 한국 복식전, 한국 회화전, 민속놀이 등 27종의 각종 문예 행사가 개최되었다. ※ 세종 즉위:1418 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재위 1418∼1450년)으로, 이름은 도,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충녕 대군으로 있다가 2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곧 이어 왕위에 올랐다.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청렴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에 대한 자문과 왕실의 교육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궁중에 정음청(正音廳)을 두어 1443년에는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과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편 관습도감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다. 과학 기술 부문에도 관심을 가져 장영실로 하여금 측우기를 만들게 하고, 궁중에 흠경각을 세워 과학 기구들을 비치하게 했다. 그 밖에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을 발명 제작하여 천체를 관측하고, 역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전제 상정소를 두어 전제와 세제를 정비했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북방 변경 지방을 개척하여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 상류에는 4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일본과는 제포, 염포, 부산포의 3포를 열어 무역을 허락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국교를 지속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英陵)이다. ※ 항일 운동, 소작 쟁의:1921 소작 쟁의는 일제 시대에 한국인 소작인들이 일본인 지주들에 대해 벌였던 쟁의이다. 노동 쟁의와 더불어 항일 운동의 하나를 이루었으며, 1921년 이후에 발생해서 1930년에 절정에 달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한국인에게 강제로 토지를 빼앗은 일본인은 소작권 박탈과 소작료의 부당 징수를 요구했다. 이에 항거하여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다. ※ 순도, 고구려에 불교 전함:372 순도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중국에서 귀화한 승려로, 372년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의 명령으로 사신을 따라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들어왔다. 그것이 조선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시초였다. 고구려에서는 그에게 초문사(肖門寺)라는 절을 지어 주었다. ※ 시월 유신 선포:1972 시월 유신은 1972년 10월 17일을 기하여 단행된 일종의 자체 혁명으로서, 이를 계기로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이 체제는 유신 헌법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이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한 1972년 12월 27일부터 시작되어 1981년 3월 1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자 끝이 난 셈이다. ※ 항일 운동 단체, 신간회 조직:1927 신간회는 1927년에 조직된 민족 최대의 항일 운동 단체로, 민족의 단결과 정치,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를 배격하는 등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앞서 1920년대에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와 이를 따르는 여러 단체가 조직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서로 다투게 되었는데, 민족주의자들이 이러한 대립을 피하기 위해 민족 단일 조직을 갖기로 하고 이상재를 회장으로 조직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교묘한 탄압과 사회주의 계열의 중상 모략으로 만주 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에 해산되었다. ※ 신라:356 고대 왕국 중의 하나.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삼국 시대를 이루었다. 진한의 한 나라였던 경주 평야의 사로(斯盧)가 발전한 나라로서, 사로는 초기에는 박, 석, 김씨의 세 부족이 연맹하여 지도자인 이사금을 선출하였으나, 이들이 주체가 되어 점차 사로 6촌이라는 6부족 연맹체를 이루고, 1세기경에는 기마 전투 기술을 도입하여 주변의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 왕국의 체제를 갖추었으나, 내물왕 즉위 해인 356년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쓰는 등 왕권을 강화해 나갔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화와 토착 문화를 잘 융합시킴으로써 힘을 길러 삼국을 통일하였다. 통일 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워 평화와 번영을 누리다가 8세기 후반부터 여러 가지 사회 제도의 모순이 드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못하고 10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고려에게 나라를 넘겨 줌으로써 신라 천 년의 영화는 끝이 났다. ※ 신미양요:1871 1871년(고종 8년)에 미국 군함이 강화도 일대에 쳐들어온 사건. 1866년(고종 3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하자고 대동강으로 와 소란을 피우자 평양 군민이 배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하여 미국은 조선을 책망하고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북경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 아시아 함대를 출동, 강화도 일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미국의 군함은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등을 공격하였다. 그 때 조선은 무장 어재연(魚在淵) 등이 나서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양쪽 군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미군은 물러갔다. 그 결과 흥선 대원군은 의기 양양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게 폈다. ※ 일본에 신사 유람단 파견:1881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와 김홍집 등이 일본의 근대 문물 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부에서는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으로 신사 유람단을 조직, 1881년(고종 18년)에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간 일본에 머무르면서 근대 시설과 여러 가지 제도 및 산업 시설까지 두루 살피고 돌아와 보고 들은 것을 소개함으로써 개화 정책의 추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신석기 시대:BC4000년경 우리 민족은 대체로 기원전 4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초기에는 주로 해안이나 강변에서 어로, 수렵, 채집으로 생활하였으며, 말기에 이르러 조, 피, 수수 등의 곡식을 생산하는 농경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 신재효:1812 1812∼1884 조선 말기의 가인(歌人). 호는 동리(桐里)이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중년 이후의 여생을 판소리 연구에 바쳐 많은 판소리 사설을 썼다. 고종 때에는 그 때까지 계통 없이 불려 오던 소리를 통일하여 등의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그 대화 어구도 고쳐 독특한 판소리 문학을 이룩하였다. 그의 작품 는 광대의 경전이라 일컬어지며 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 아관 파천 사건:1896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1년을 지낸 사건. 일본은 청·일 전쟁이 끝난 후 명성 황후가 침략적인 태도를 취하자, 1895년에 명성 황후를 시해하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웠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 황제는 일본의 만행을 피해 1896년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 1년을 머무르면서 그 곳에서 모든 정치를 행하였다. 그 동안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에 넘어갔다. ※ 황영조, 히로시마에서 마라톤 우승:1945 아시아 경기 대회는 아시아 지역 국가 간의 우호와 친선 및 평화를 목적으로 4년마다 올림픽 대회의 중간 해에 열리는 것으로, 한국은 6·25 전쟁으로 제1회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제2회 마닐라 대회부터 참가하였으며, 특히 1986년에 열린 제10회 대회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한편 1994년에 일본에서 열린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는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을 하기도 하였다. ※ 안익태, 애국가 작곡:1937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는 일본 구니타치 음악 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에 유럽에 건너가 작곡을 공부하였고, 1937년에 를 작곡하였다. 그 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름 있는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등 큰 활약을 보였으며, 결혼한 뒤에는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여러 번 귀국하였고, 3회에 걸쳐 서울에서 국제 음악제를 개최하였다. 생전에 그는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 등 세계의 200여 교향악단을 지휘함으로써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로 이름을 떨쳤다. 1965년 문화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등의 작품이 있다.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저격:1909 안중근은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신이 경영하던 상점을 팔아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에 대한 의군 참모장이 되어 의병을 이끌고 함경 북도 경흥까지 쳐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일제 침략자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과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역에 내리자, 그를 쏘아 죽이고 이듬해 려순 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묵을 남겼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 옥포 해전:1592 임진왜란 때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함대가 일본 함대를 무찌른 해전. 옥포 싸움이라고도 한다. 1592년(선조 25년) 5월, 경상 남도 장승포의 옥포 앞바다에서 우리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함 50여 척을 발견하고, 이를 동서로 포위하여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함들에게 맹렬히 포격을 가하여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적함 26척을 격침시키는 큰 전과를 올림으로써 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 날 하오에는 합포(合浦) 앞바다에서도 적의 대형함 5척을 발견하고, 이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 운요호 사건:1875 1875년(고종 12년)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경기만에 불법으로 침입함으로써 일어난, 강화 수비군과 일본군과의 충돌 사건. 강화도 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이 쇄국 정책을 굳게 지키자 일본은 무력으로라도 문호를 열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군함을 보내어 먹을 물을 구한다는 구실로 강화도 물길을 따라 초지진 포대에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이에 강화도 수비군이 포를 쏘아 위협하자, 그들도 맞서 포를 쏘면서 초지진을 부수고 영종진까지 부순 다음, 군사와 주민들을 죽이고 무기와 그 밖의 물자를 빼앗아 돌아갔다. 일본은 이듬해 이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군함을 앞세우고 나타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결국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게 되었다. ※ 최초의 근대적 학교 원산 학사 설립:1883 원산 학사는 최초의 근대적 학교로, 1883년에 함경 남도 덕원 주민들이 원산에 세웠다. 문예반 50명, 무예반 200명으로, 산수, 물리, 양잠, 외국어, 법률, 지리, 국제법 등 근대 학술과 무술을 가르쳤다.   【6】 ※ 위만 조선 건국:BC194 위만은 부하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한 중국 연나라 사람이다. 고조선의 준왕은 그를 믿고 후대하여 북방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에 위만은 유민(流民)들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을 쫓아 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위만 조선을 세웠다. ※ 위화도 회군:1388 고려 말에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킨 사건. 우왕이 즉위한 뒤 고려가 친원 정책으로 기울자, 명나라는 원나라가 다스리던 쌍성총관부 자리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분개한 고려에서는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론이 일어나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는데, 처음부터 이에 반대하던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 이르러 진군을 멈추고 회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스스로 회군을 단행하여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귀양보내어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이어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세우면서 신흥 사대부들이 세력을 얻어 조선을 여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 ※ 윤봉길(폭탄 투척):1932 항일 의사인 윤봉길은 1930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 상하이의 홍구(紅口)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서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등을 죽이고, 노무라 해군 대장과 시게미쓰 공사 등 많은 일본군 병사들을 부상하게 하여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오사카로 붙잡혀 간 뒤, 결국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 을미개혁:1895 을미사변 후 일제에 의해 수립된 친일 내각에서 추진한 개혁. 갑오개혁의 정신을 이은 것으로 그 내용은 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소학교 설립, 우편 제도 실시, 연호 사용, 군제 개편과 단발령 시행 등이다. 그러나 을미사변 후 크게 악화된 배일 감정으로 국민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단발령은 국민의 자존심을 크게 해쳐 그 때문에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 을미사변:1895 1895년(고종 32년)에 일제가 명성 황후를 살해하고 일본 세력의 강화를 꾀했던 정변. 삼국 간섭 후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이 크게 줄어든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그것을 만회하려 했으나, 명성 황후 등 민씨 세력이 침략 정책을 고집하자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일본인 자객들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 등 침략 세력을 죽인 다음, 친일파 인물들로 내각을 꾸며 갑오개혁 후 중단되었던 개혁을 다시 단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잔인 무도한 일본의 행동은 국제적으로 여론을 크게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배일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러한 배일 감정을 틈타 침략 세력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 을사사화:1545 1545년(명종 1년)에 왕실 외척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사화. 중종은 장경 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문정 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는데, 두 왕후에게 모두 동생이 있어 그들이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하자 그 외숙인 윤임이 득세하여 사림을 많이 등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뜻을 이루지 못한 사림들은 명종의 외숙 윤원형의 밑에 모여 기회를 엿보다가,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즉위하여 윤원형이 득세하게 되자 윤임 일파를 모함하여 모두 제거하였다. 그것이 곧 을사사화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었는데, 윤원형 일파의 모함으로 그 여파는 그 후에도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 의자왕 백제 멸망:660 백제의 마지막(제31대) 왕(재위 641∼660년)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무왕 33년(632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641년에 왕위에 올랐다. 642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미추성 등 40여 성을 빼앗고, 윤충을 시켜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쳐서 성주인 품석(品釋) 등을 죽였다. 그 뒤에도 당항성, 요차성(지금의 상주)을 쳐서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늘그막에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며, 성충과 같은 충신의 말을 듣지 않다가 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계백 장군으로 하여금 황산벌에서 싸우게 하였으나 패하였다. 그 뒤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 그 곳에서 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 이봉창이 일본 국왕에게 폭탄 투척:1932 서울에서 태어난 이봉창은 가정이 어려워 국민 학교를 중퇴하고 점원과 기관차 운전 수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192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 직공이 되었다. 그는 일본 사람 밑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그들의 횡포와 압박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1931년에 중국 상해로 건너가 김구가 지도하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 일본 천황 암살을 결심하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32년에 일본 천황이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로 끝나고 붙잡혀 사형당했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받았다. ※ 이승만 대통령 취임:1948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배재 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가, 1897년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 협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민영환의 도움으로 1904년에 7년 만에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대학 등에서 배우고,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9년에 상해에 임시 정부가 세워지자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었고, 1933년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총재와 민주 의원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48년에 제헌 의회 의장에 뽑히고,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그 해 광복절에 취임하였다. 제2대,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장기 집권과 자유당 정권의 부패로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 의거가 일어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하와이에 망명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이차돈(순교):527 이차돈은 신라 법흥왕의 가까운 신하로 일찍부터 불교를 믿었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려 하였으나, 고유 신앙과 고유 습속에 젖은 뭇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이차돈만이 불교를 받들 것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순교할 것을 자청하여,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에 반드시 기적이 있을 것이라 예언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목이 잘리자 과연 그의 예언대로 젖빛같은 흰 피가 솟구치고 천지가 캄캄해지더니 꽃비가 쏟아져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한다. 이에 모두 놀라고 감동했으며, 527년에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률사의 석당(石幢)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며, 그 곳에 자세한 사실이 적혀 있다. ※ 인조 반정:1623 조선 인조 1년인 1623년에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과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 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인조)으로 모신 사건. 광해군의 실정으로 비롯된 서인들의 무력 정변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으나 당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자신을 옹립한 대북파들의 문란한 정사에 말려들어 자포 자기 상태가 되었다. 이이, 정인홍 등의 모함으로 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 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 대비마저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의 이귀, 김자점, 김유, 이괄 등이 반정을 모의 거사하여 성공하고, 인목 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을 왕으로 받들었다. ※ 임오군란:1882 1882년(조선 고종 19년) 6월에 일본식 군제(軍制)와 민씨 정권에 반항하여 일어난 구식 군대의 병란. 신식 군대의 양성과 군제 개혁에 불만을 품던 차에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와서 난을 간섭하게 되고, 일본과 강제로 제물포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 임진왜란:92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온 싸움.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이라 하며, 정유년에 또다시 쳐들어온 싸움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조선은 선조 때에 접어들어 양반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으면서 국방을 소홀히 하였는데, 이처럼 조선이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와 대륙 침략을 꿈꾸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정군을 편성하여 1592년(선조 25년)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5월 2일에 서울이 함락되고 6월에 평양을 빼앗겼으나, 해상에서는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특히 거북선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내륙에서는 각계 각층의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항전하였다. 그러나 7년 동안 계속된 전란으로 조선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에 조정은 유비 무환을 깨닫고 훈련 도감을 만들어 무예를 닦게 했고, 각 지방에도 교관을 두어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도 재래식에서 개량, 발명하여 대비하게 되었다. ※ 고려 중기에 전주 관노들의 난:1182 전주 관노들의 난은 고려 중기에 일어난 천민의 난이다. 명종 12년(1182년) 경대승 집권시 전주의 사록(司錄) 진대유와 상호장(上戶長) 이택민이 백성을 수탈하자, 기두(旗頭)였던 죽동 등이 중심이 된 전주 관노들이 난을 일으켜 한때 전주를 점령하였다. 정부에서는 박유보에게 군사를 주어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일품군과 승병들이 이를 진압하였다. ※ 정묘호란:1627 1627년(조선 인조 5년)에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싸움. 광해군을 몰아 내고 즉위한 인조가 친명 배금 정책을 쓰고,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철산의 가도에 진을 치고 요동 회복을 꾀하자,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후금이 그들의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침입했다. 후금의 태종은 광해군의 폐위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의주, 정주, 곽산을 거쳐 황해도 평산에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에 정봉수와 이입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용골 산성과 의주 지방에서 적과 싸웠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인조는 강화로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본래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조선과 쉽게 화약이 이루어져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 정유재란:1597 1597년(선조 30년)에 조선에 다시 쳐들어온 왜군과의 싸움. 임진왜란의 3년여에 걸친 화의가 깨지자 왜군이 다시 침입하였는데, 이 때에는 이미 조선 관군과 의병이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명나라의 원군도 곳곳에 와 있어서 쉽게 막을 수 있었다. 다시 기용된 이순신의 활약으로 본국과의 연락이 어렵게 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을 핑계로 달아남으로써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게 되었다. ※ 제5공화국 성립:1980 1979년 10월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후,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새 헌법의 발효로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81년 2월 25일에 제11대 전두환 대통령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3월 3일에 취임하고, 그 해 3월 25일의 총선거로 제11대 국회가 구성됨으로써 출범하였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출에 의한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하여 중임을 금하였다. 주요 정책은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 사회 건설, 정의 사회 구현, 교육 혁신과 문화 창달로 집약될 수 있다. ※ 일본과 제물포 조약 체결:1882 임오군란으로 공사관이 불타고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은 군란 후 군함과 병력을 보내어 제물포에 상륙시킨 다음, 조선에 대하여 임오군란의 책임을 묻고 협상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이유원을 보내어 협상을 하고 제물포 조약을 체결(1882년)하게 하였는데,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 공사관에 일본 경비병을 주둔시키도록 하는 한편,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가면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7】 ※ 제암리 학살 사건:1919 3·1 운동 때 일본 군대가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주민을 집단 학살한 사건. 수원 제암리 무차별 학살 사건 또는 수원 예배당 사건이라고도 한다. 1919년 4월 15일에 아리타라는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본 군경이 제암리에 몰려와서 크리스트교인, 천도교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한 뒤 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또한 일제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렀으며, 인근 교회와 민가 등 31호에 불을 질러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상처를 입었다. 일제의 이러한 만행은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였으며, 스코필드는 현장의 참상을 사진에 담아 미국에 보내어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1982년에 당시 문화 공보부(현재의 문화부)에서는 제암리 학살 현장의 유물 발굴과 조사에 나섰으며, 같은 해 10월에 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하였다. ※ 고려 멸망, 조선 건국:1392 고려 말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사대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 반대 세력을 물리친 다음,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1392년). 마지막 왕조였던 조선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 관료 사회를 이룩하였으나, 중기 이후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서유럽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건국 후 519년 만에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1910년). ※ 조선어 학회 사건:1942 1942년 10월에 우리말의 말살을 꾀하던 일제가 조선어 학회의 회원을 민족주의자로 몰아 검거 투옥한 사건.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학술 단체임을 가장한 비밀 결사라고 거짓으로 사건을 꾸며 회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하다가, 8·15 광복을 이틀 앞두고 공소를 기각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학회는 해체되고, 편찬하려던 원고의 많은 부분이 없어졌다. ※ 중종 반정:1506 1506년(연산군 12년)에 성희안,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을 왕으로 세운 사건. 연산군이 여러 번의 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을 죽이고 나라를 어지럽혀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지자, 연산군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관직에서 쫓겨났던 성희안은, 박원종, 유순성 등의 도움을 얻어 연산군을 내쫓고 진성 대군을 새 임금으로 세울 것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훈련원에 장사들을 모은 후 먼저 왕의 외척인 신수근 형제를 죽이고, 궁중으로 들어가 대비의 명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 대군을 왕으로 세웠다. 이 왕이 곧 중종이며, 이로써 연산군은 강화도의 교동으로 쫓겨났다. ※ 진주 민란:1862 1862년(철종 13년)에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을 겪던 농민들은 새로 부임한 진주 병사(兵使) 백낙신이 가혹한 탄압과 착취를 일삼자, 양반 출신의 농민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관아를 습격하고 환곡을 불태우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보내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 난을 계기로 이후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 진주성 싸움:1592 임진왜란 때에 진주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큰 싸움. 제1차 싸움은 1592년(선조 25년) 10월 5일에 일어난 싸움으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며, 진주성 대첩이라고도 한다. 약 3만의 왜군이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자, 진주 목사 김시민은 성을 타고 오르는 왜군에게 화약, 끓는 물, 돌 등을 퍼부어 6일간의 대접전 끝에 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달아났다. 이 싸움에는 의병 대장 곽재우의 응원의 힘이 컸다. 이 싸움의 승리는 적으로 하여금 다른 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제2차 싸움은 논개(論介)의 죽음으로써 잘 알려진 싸움이다. 제1차 싸움에 크게 패한 왜군은 이를 복수하려고 1593년 6월에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에 명하여 5만의 왜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왜군은 귀갑차 등 특수한 병기로 물밀듯이 쳐들어와 치열한 공방전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전사하고, 진주성은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자 김천일을 비롯한 수십 명의 의병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의로운 논개는 적장을 안고 남강에 빠져 죽었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했던 싸움으로 성 안에 있던 군인과 백성 등 약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 천리 장성 축조:642 천리 장성은 고구려 시대에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성이다. 당은 초기에는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하였으나, 태종이 즉위한 뒤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에서는 이에 대비하여 천리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장성은 북부의 부여성(지금의 승안 지역)과 남부의 비사성(지금의 뤼다 지역)을 잇는 방어선으로서 연개소문이 총책임자가 되어 다스렸다. ※ 철기 시대:BC400년경 한반도에는 기원전 400∼기원전 300년경에 중국 계통의 청동기와 더불어 철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2세기 초기에는 대동강 유역 지방에서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쓰였으며, 기원전 1세기 말에 한사군이 설치되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철기가 발달하여 북방 군장 국가로부터 남방 군장 국가로 퍼져 나갔다. 철기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은 옛 돌무덤이나 널무덤 따위에서 나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 청동기 시대:BC1000년경 한반도에서 청동으로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 쓴 시기는 기원전 1000년경에 해당한다. 청동기 시대라 하여 생활 도구를 모두 쇠붙이로 만들어 쓴 것은 아니고, 농사에는 여전히 나무로 만든 도구, 석기 등을 쓰고 있었다. 다만 청동기 시대에는 토기나 석기가 많이 발달되어 그 모양이 청동기의 모양과 비슷해져 간 것이 특색이다. ※ 청산리 싸움:1920 1920년 10월에 만주 지방에 있던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의 독립군이 화룡현 청산리계곡에서 5만의 일본군을 맞아 크게 쳐부순 싸움. 이라고도 한다. 1920년 8월 하순에 왕청현 서대파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가, 일본군이 독립군에 대해서 협공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에 독립군은 김좌진 장군을 총사령으로 삼아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삼림 속에 잠복하고 있다가, 3면으로 청산리를 포위한 일본군의 일부가 백운평 삼림으로 들어섬으로써 첫 전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500여 명의 일본군을 전멸시킨 독립군은 그 날 밤으로 포위망을 뚫고 갑산촌에 이르러 다시 천수평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거의 섬멸하였다. 이어 일본군의 사단 사령부가 있던 어랑촌을 전격적으로 공격하여 일대 혈전을 벌인 끝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 청산리 싸움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3,300여 명에 이르렀고, 우리 독립군도 10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싸움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그 뒤 그 곳의 우리 동포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해 왔다. ※ 최씨 무신 정권 시작:1196 무신의 난 이후 서로 정권을 다투던 무신들 가운데서 최충헌이 1196년(명종 26년)에 아우 최충수와 함께 권신 이의민 일당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그 뒤 그는 민중의 저항 운동과 사원 세력을 억누르고 최씨 일문의 독재 정치의 기틀을 닦았다. 이후 4대 60여 년 간 최씨 일가는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그 장관이 되어 정치 권력을 휘잡고, 도방과 삼별초 등 사병 집단을 키워 세력을 넓히면서 정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러나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서울을 옮기고 독재를 행하다가, 1258년(고종 45년) 최의가 유경, 김인준 등에게 살해됨으로써 몰락하게 되었다. ※ 측우기:1441 비가 내린 양을 재는 기구. 조선 세종 23년(1441년)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했고, 그 뒤 개량에 힘써 세종 24년(1442년)에 측우기라고 이름하였다. 이 측우기는 무쇠를 써서 깊이 42.5cm, 지름 17cm의 둥근 통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천문 관계 일을 맡아 보던 관상감(觀象監)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아 비가 그친 다음에 그 둥근 통에 담긴 빗물의 깊이를 재었다. 이 측우기는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만든 측우기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자연 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농업 생산에 이용하는 한편, 자연 재해를 이겨 내려고 애쓴 조선 시대 과학자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 태극기(국기 반포):1883 한국 국기인 태극기가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고종 19년(1882년)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갈 때 처음으로 사용한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한국 국기로서 태극 도형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정해졌을 것이다. 태극기를 국가에서 공식적인 국기로 반포한 것은 고종20년(1883년) 음력 1월 27일인데, 이 때는 오늘날과 같이 그 규격과 도식이 분명하지 않았고, 다만 태극을 가운데 두고 네 귀에 건(乾), 곤(坤), 감(坎), 이(離)의 4괘를 배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조국이 광복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49년에 국기 제정 위원회가 구성되어, 여러 번의 회의 끝에 그 해 3월 25일에 음양과 4괘의 배치안을 확정했다. 이어 국기봉도 한국의 꽃인 무궁화 봉오리를 상징한 것으로 하고, 색깔은 국기 깃면의 색깔과 조화를 이루 도록 금색으로 하였다. ※ 판문점 휴전 회담:1953 6·25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판문점에서 유엔군측 대표와 조선측 대표가 만난 회담. 휴전 회담은 처음 1951년 7월에 개성에서 열린 회담을 시작으로 하여 같은 해 10월에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겼으며,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 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1973 평화 통일을 위한 한국 정부의 외교 정책을 밝힌 선언. 6·23선언이라고도 한다. 곧 1973년 6월 23일에 한국 정부가 ①남북조선은 서로 상대방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도발 행위를 하지 않는다. ②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북한이 국제 연합을 비롯한 국제 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③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라 하더라도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문호를 개방한다고 밝힌 선언이다. ※ 한·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1882 미국은 1880년에 슈펠트 제독을 부산에 보내어 일본 영사를 중개자로 하여 수교 요청을 하였으나 조선쪽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조선에 영향력이 있던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에게 수호 통상을 알선해 주도록 요청하여 1882년(고종 19년) 3월에 슈펠트는 청나라 사신 마건충, 정여창과 함께 인천에 들어와 조선 정부의 전권 대관 신헌, 부관 김홍집과 4월 4일에 전문 14관으로 이루어진 한·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에 따라 1883년 5월에 초대미국 전권 공사 푸드가 입국하여 비준서를 교환하였고, 조선 정부에서도 전권 대신 민영익, 부관 홍영식을 미국에 보내어 양국의 역사적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서양 여러 나라들 중 미국은 한국과 국교를 맺은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 한·영 수호 통상 조약 체결:1883 1882년에 한·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청나라의 알선으로 체결되자 청나라 주재 영국 공사 웨이드가 청나라 북양 대신 이홍장에게 한·영 수호를 청탁하여 한·영 회담이 열렸다. 그 결과 량국은 앞서 체결한 한·미 수호통상 조약과 같이 14개조로 작성하여 양국이 조인했으나,영국 정부는 이 조약이 한·일 수호 통상 장정(章程)과 차이가있다는 이유로 비준을 보류하고, 청나라 주재 공사 파크스를 전권 대신으로 보내어 조선 정부의 전권 대신 민영목과 더불어 수정을 가하여 전문 13관의 한·영 수호 통상 조약과 그 부속 통상 장정 3항목을 작성, 조인하였다. 이에 따라 1883년(고종 20년) 4월에 파크스가 다시 와서 비준 교환을 마치고, 총영사로 애스턴을 상주하게 함으로써 양국의 국교가 시작되었다. ※ 한·일 신협약:1907 1907년(융희 1년)에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빼앗기 위한 마지막조처로서 강제로 맺은 조약. 정미 칠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도 한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일본이 통감의 권한을 강화하여 국권을 완전히 빼앗으려고 맺은 조약이다. 조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곧 법령 제정권, 관리 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하여 통감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조처로 대신 아래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였고, 경찰권을 빼앗았으며, 경비 절약을 구실로 한국군을 해산하기까지했다. 또 언론을 탄압하고 집회, 결사의 자유권마저 빼앗는 등 국권을 완전히 빼앗음으로써 사실상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말았다. ※ 한·일 의정서:1904 1904년 2월 23일에 한국은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합의한 외교 문서. 러·일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한국은 엄정중립을 선언하였는데, 일본은 그것을 무시하고 한반도를 그들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억지로 합의하게 한 약정이다. 6개조로 된 의정서의 내용은, ① 한국 정부는 일본의 시정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②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전을 꾀해야 한다. ③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다. ④ 제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 사태가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곧 대처하며, 한국 정부는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다. ⑤ 한국은 일본의 승인없이 제3국과 이 협약에 위배되는 협약을 맺을 수 없다는 등이다. 이 의정서에 따라 1904년 5월에 러시아사이에 맺었던 모든 조약을 폐기시켰고, 경인선, 경의선철도 부설과 통신망 가설 등의 이권을 그들이 차지하기도 했다.   【8】 ※ 한일 합방:1910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이 이른바 한일 합방 조약을 강압적으로 맺게 하여 대한 제국의 통치권을 빼앗은 일.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도 한다. 일본이 한반도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한 것은 1876년에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맺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일본이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자 1904년에는 한·일 의정서를 억지로 약정하여 고문 정치로써 한반도를 자기네 세력권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1905년에는 다시 을사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두어 보호 정치로써 침략에 박차를 가하였다.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정미 7조약을 맺게 하여 통감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사실상 식민지화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09년 10월에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사에게 암살당하자 일본의 침략 정책은 더욱 구체화하고 가속화해 갔다. 먼저 송병준이 이끄는 친일 단체 일진회를 앞잡이로 내세워 한일 합방 공작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는 1910년에 3대 통감 데라우치가 ‘합방 후의 대한 통치 방안’을 가지고 부임하여 총리 대신 이완용 등과 비밀리에 합방 공작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그 해 8월 22일에 형식적인 어전 회의를 거쳐 그 날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조인하고, 8월 29일에 합방 조약을 공포함으로써 조선은 개국 519년 만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 한산 대첩:1592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왜군을 무찔러 크게 이긴싸움.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이다. 1592년 7월 8일 당시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좁은 견내량(통영 수도)에 정박중인왜군의 함대를 유도 작전에 의해 외해(外海)로 끌어내었다. 이것은 견내량이 좁아서 큰 싸움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군이 모두 외해로 나왔을 때 이순신은 공격명령을 내려 학익진(학이 날개를 펴듯이 진을 치는 전법)으로 적을 포위하는 한편, 거북선을 앞세우고 각종 포를 발사하여 적선 6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왜군이 남해를 돌아 황해로 나가 황해도와 평안도에 상륙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중요한 싸움이었다. ※ 행주 대첩:1593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은 한성을 되찾기 위해 1593년(선조26년)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행주로 들어갔다. 그러자 차차 퇴각하여 한성으로 모이고 있던 왜군은 3만여 명의 군사로 9차례에 걸쳐 맹공을 가해 왔다. 그러나 권율은 몸소 물을 떠 나르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부녀자들까지 치마에 돌을 담아 날라 군사들을 도움으로써 왜군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이 때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잘라 돌을 담아 나른 데서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의 3대첩의 하나이다. ※ 헤이그 특사 사건:1907 1907년(광무 11년)에 고종 황제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비밀리에 보내어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무력적 침략의 부당성을 주장하려던 사건. 헤이그 밀사 사건이라고도 한다. 1905년에 일제는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럴 즈음인 1907년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린다는 정보가 들어와, 4월에 고종 황제는 이상설과 이준에게 회의에 참석할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가서 만국 회의에 나가 실상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들은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 황제에게 회의 참석의 주선을 부탁하는 친서를 전하고, 그 곳에서 러시아 공사관서기였던 이위종과 함께 6월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들은 의장인 러시아 대표를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 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과 일본의 협박으로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의 파기를 회의 의제로 삼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 참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해 그 곳에서 자결하였다. 이 사건의 결과로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의 강요, 구한국 군대의 해산이 잇달았다. ※ 홍경래의 난:1811 조선 순조 11년(1811년)에 평안도 출신인 홍경래가 일으킨 반란.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의 우군칙 등과 더불어 서북 지방에 대한 정부의 차별을 구실로 난을 일으켜 스스로 평서 대 원수라 일컬었다. 4개월 동안 계속된 홍경래의 난으로 한때 청천강 이북의 땅이 그의 손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마침내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난은 하층 양반과 중소 상인 및 유랑 농민이 합세하여 부패한 조정에 항거한 사건으로, 그 뒤 여러 곳에서 일어난 민란에 영향을 끼쳤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19세기 초에 서북 지방을 뒤흔들어 놓은 대규모의 농민 항거 운동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 황산 대첩 이성계:1380 1376년에 침입했다가 홍산싸움에서 최영에게 크게 패하고 물러난 왜구가, 1380년에는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진포(금강 하구)에 침입, 충청·전라·경상3도의 연안 지방을 마구 약탈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이르렀다. 이 때 최무선 등의 장수가 화통,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하여 모두 불태워 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구는 더욱 발악하여 그 피해가 매우 컸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도 순찰사로 임명하여 이 지방의 방위를 맡겼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이끌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하여 황산 북쪽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은 최영의 홍산 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 길이 빛날 만한 싸움으로, 이 싸움을 계기로 왜구의 침입이 뜸해졌다. ※ 황산벌 싸움:660 660년에 백제의 계백 장군이 신라의 군대를 맞아 싸운 싸움. 신라의 군대가 탄현(지금의 대전 동쪽)을 넘어 황산(연산)을 공격하자, 백제의 계백 장군은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을 지키면서 신라군을 4차례나 무찔렀으나, 끝내 패하여 죽고 말았다. 이 싸움의 패배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멸망하였다. ※ 후고구려:901 신라 말기에 궁예가 세운 나라. 신라·후백제와 함께 후삼국을 이루었다. 북원의 호족 양길에게 의지하던 궁예가 세력을 길러 양길을 물리치고 901년에 세운 나라로, 904년에는 나라 이름을‘마진’이라 하였다가, 911년에는 ‘태봉’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고 경기도·강원도·황해도의 대부분과 평안도·충청도의 일부까지 아울러 후삼국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으나, 궁예의 성격이 포악하여 부하에게 쫓겨나고,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어 고려를 세웠다(918년). ※ 후백제 건국:900 후백제는 신라 말기(900년)에 남서 해안을 지키던 장군 견훤이 신라의 혼란을 틈타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독립한 나라로, 신라·후고구려와 함께 후삼국을 이루었다. 중국의 오나라·월 나라와 통교하면서 영토를 넓혀 고려와 패권을 다투었으나, 935년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은 고려에 투항하고, 이듬해 아들 신검이 선산과 황산 싸움에서 고려에 크게 패함으로써 멸망하였다. ※ 훈민정음:1443 조선 제4대 세종이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46년(세종28년)에 창제 반포한 글자(한글), 또는 그것을 해설한 원본 이름.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한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이에는 ① 우리말을 적기에 알맞은 글자가 있어야 하겠다는 자주 정신 ② 일반 백성이 다 쓸 수 있게 해야겠다는 민본·애민 정신 ③ 누구든지 일상생활에 쉽게 쓸 수 있게 해야 겠다는 실용 정신이 담겨져 있다. 초성(자음)은 발음 기관을 본떠 ‘ㄱ,ㄴ,ㅁ,ㅅ,ㅇ’과 같은 기본 글자를 만들고, 이에 획을 더하여 모두 17자를 만들 었고,중성(모음)은 하늘, 땅, 사람의 3재(三才)를 기본으로 하여 ‘촵,ㅡ,ㅣ’를 만들고, 이를 위아래와 좌우로 어울러 모두 11자를 만들었다. ※ 흥선 대원군:1863 조선 왕조 고종 때의 왕족, 정치가.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며,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철종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자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어릴 때 이름)이 왕위에 오르자, 1863년 대원군이 되어 실권을 잡고 대신 정치를 보살폈다. 그는 우선 안동 김씨의 세력을 몰아 내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였으며,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썼다. 그리고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내게 하며, 사치와 낭비를 금하여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꾀하였다. 그의 과감한 개혁정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국민 생활의 안정에 이바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경복궁의 재건으로 재정을 무리하게 지출했고, 서원의 철폐로 유생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어 카톨릭교를 박해하는 등, 쇄국 정치를 고집하다가 며느리인 명성 황후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1907년(광무 11년)에 대원왕(大院王)에 봉해졌다. ※ 최초의 통신 방송 위성, 무궁화 1호 발사:1995 무궁화 1호는 한국 최초의 방송·통신 복합 위성으로, 크기는14.2×17.4×19.6cm이고, 무게는 발사 중량 1,463.3kg, 위성체 635kg의 최첨단 디지털 방송·통신 위성이다. 정부가 국내 최초의 방송·통신 복합 위성을 발사하기로 하고 지난 1990년 7월 한국 통신에 위성 사업단을 설치, 맥도널 더글라스, 록히드 마틴 등 발사팀과 공통으로 설계, 제작했으며 5년만인 1995년 8월5일 미국 플로리다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 기지에서 델타2호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무궁화 위성은 동경 116°, 적도 상공 3만 6,000km에서 정지 궤도로 위치하고 있고, 형태는 3축 자세 제어 방식의 날개형이며, 4∼5개월 간의 궤도 시험을 거쳐 1996년 초부터 통신 및 방송 분야의 서비스가 이루어진다. 수명은 10년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발사체 책임 회사인 맥도널 더글라스사가 정상적인 발사에 실패함으로써 그보다 훨씬 짧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무궁화 위성의 위성 방송 시청 지역은 조선반도, 중국 연변, 산동 반도, 일본 오키나와, 러시아 연해주에 이르러 중국, 러시아 등지의 동포들에게 한국 방송을 보내 줄 수 있기도 하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22번째로 방송·통신 위성 보유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 최초의 인공 위성, 우리별 1호 발사:1992 우리별 1호는 한국 최초의 인공 위성으로, 정식 명칭은 킷샛(KITSAT)이고, 크기 50×80cm, 무게 50kg의 소형 과학 위성이다. 1989년부터 한국 과학 기술원 인공 위성 연구 센터가 영국의 대학과 공동으로 설계, 제작했으며, 1992년 8월 11일 중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 우주 과학 기지에서 위성 발사체인 아리안 42P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우리별 1호는 지구 상공 1,325km에서 적도면과 66도 기울어져 원에 가까운 궤도를 그리며 110분에 지구를 한 바퀴씩 도는데, 하루에 6번, 한 번에 15분 정도 우리 지구국과 통신이 가능하다. 지구 표면 촬영, 우주선 측정, 음성 데이터, 화상 정보 교신 등의 실험을 하게 된다. 수명은 5년이며, 수명이 다 하면 낙하하면서 소각되어 사라진다. 한편, 1993년 9월 26일에는 순수 한국 기술로 설계, 제작된 우리별 2호가 아리안 V59로켓에 실려 쿠루 기지에서 발사되었다. 이것은 지구 궤도에 5년간 머물며 101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씩, 하루 14번 돈다. ※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1991 남북한은 1991년 12월 31일, 한반도를 비핵화 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 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며,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을 하였다. 비핵화 공동 선언의 주요 내용은 ①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配備), 사용의 금지 ②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③ 핵 재처리 시설 및 우라늄 농축 시설 보유 금지 ④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해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에 대한 상호 사찰 ⑤ 공동 선언 발효 후 1개월 이내에 남북 핵 통제 공동위 구성 등이다. 이 공동 선언은 남북이 각기 발효에 필요한 내부 절차를 거쳐 1992년 2월 평양에서 열린 제6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문서를 교환했다. ※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 서울 개최:1990 남북 고위급 회담은 1988년 조선의 연형묵 총리가 정치 군사 문제에 대한 협의를 하기 위해 제안한 것으로, 1990년 7월 남북 고위급 회담에 대한 의제와 시기 등이 합의되어 마침내 남북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제2차(1990.10 평양), 제3차(1990.12 서울), 제4차(1991.10 평양) 회담을 거쳐 제5차(1991.12 서울) 회담에서는 남북 합의서를 채택, 서명했고 제6차(1992.2 평양) 회담에서는 합의서 문건을 정식 교환하여 발효시켰다. 이 회담은 제7차(1992.5 서울) 회담을 거쳐 현재 제8차(1992.9) 회담까지 이루어진 상태이다. ※ 경부선 개통:1905 경부선은 1901년(광무 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05년에 개통되었다. 일제 때에는 부산과 선양, 부산과 베이징까지 연장 운행되어 일제의 대륙 침략에 이용되었다. 지금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간선 철도로서 수도권과 영남 공업 지역간의 대량 수송을 맡고 있으며, 길이는 444.5km이다. 1974년에는 서울과 수원 사이가 복복선 전철로 바뀌었다. ※ 대조영, 발해 건국:698 대조영은 발해의 시조(재위 699∼719년)로, 왕호는 고왕(高王)이다. 668년에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의 대장군이 해고의 군사를 천문령에서 크게 쳐부수고, 고구려와 말갈의 유민들을 모아 읍루의 동모산에 홀한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다(699년).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진(震)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해로 고쳤다. 발해는 북쪽에 있는 돌궐과 손을 잡고 당나라를 견제하면서 안으로 말갈족의 통합에 힘써, 옛 고구려 땅의 대부분과 지금의 연해주 지방에 걸치는 커다란 나라를 이루었다. ※ 신한 청년단 조직:1919 신한 청년단은 1919년 상하이에서 서병호, 여운형, 김구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가장 오래 된 해외 독립 운동 단체로서 ‘신한 청년보’를 발행하여 교포들에게 독립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게 하는 등 외교 활동에도 힘썼다. ※ 안시성 싸움:645 645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에 침입했을 때 안시성에서 벌어졌던 당나라와의 싸움. 당 태종은 고구려의 요충지인 안시성을 함락시키고자 하루 5∼6회씩 60여 일에 걸쳐서 포위, 공격했으나,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성 주민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후퇴할 때 당태종은 양만춘에게 송별의 예를 다 했다고 야사에 전해내려 온다. ※ 이괄의 난:1624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에 일어난 난. 이괄은 인조 반정에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에 봉해지고, 그 뒤 평안도병마 절도사로 좌천되어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다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아들이 잡혀 가자 부하인 기익헌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한때 서울을 점령하고, 인조는 공주로 피난했으나 서울 점령 하루만에 정부군에 패하여 이괄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달아나 선동함으로써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122    우리말의 력사 댓글:  조회:2307  추천:0  201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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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한국 신화 모음 댓글:  조회:3252  추천:0  2012-08-07
한국 신화 모음   왜 한국 신화는 푸대접을 받는 걸까? 다른 나라들의 신화는 신비롭게까지 읽히고 제법 많이알려졌는데 우리의 신화는 슬프게도 외면을 받고 있다. 우리도 위대한 천손강림형(天孫降臨型)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 신화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한국 신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태양 숭배이다. 하늘에 있는 신들이 땅에 내려와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는 건국 신화가 한국 신화의 주가 되어 있다. 고조선을 연 단군은 천제(天帝) 환인(桓因)의 손자로서 천제의 서자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군의 건국 신화는 단순 명쾌하지만, 거기에 철학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천제의 명령을 받아 지상에 내려와 나라를 열고 백성을 다스리는 구조가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나 신라, 가락국의 시조는 알에서 태어난 천손(天孫)으로서 난생(卵生) 신화가 건국 신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천손강림형(天孫降臨型)의 수직적 세계관에 뒷받침되고 있다.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에는 국가의 쟁취나 양여(讓與), 신술(神術)에 의해 승패를 다투는 일도 있으나, 잔혹성이나 잔인성이 그다지 수반되지 않는다. 이들 신들이 민간에 전승되어 오는 사이에 수평형의 신이나 인격신(人格神)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느님   우리나라에서는 신을 하느님,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것은 특정한 성격을 가진 신이 아니다. 전지전능한 절대신이다. 하느님은 하늘(우주)에 있는 신 즉 천제(天帝)이다. 을 하늘, 을 하나라고 하는데 하느님은 하늘의 신을, 하나님은 하나의 신을 의미한다. 은 하나이며 동시에 전체이고 무한대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천(天)이다. 韓, 漢, 汗, 干, 一, 天 등의 문자가 최대 최고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천(帝)을 본뜬 것이다. 한국의 최고신은 천제이며,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의 아버지(환웅)은 천제(환인)의 서자이다. 환인은 하느님, 하나님의 취음자(取音字)임에 틀림없다. 고조선, 고구려, 신라, 가락 등의 시조는 천손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와 건국의 시조가 되는 것처럼 천손강림형의 신화가 중심이 되어 있다.   환인과 환웅   천제인 환인에게 환웅이라는 서자가 있었다. 환웅은 언제나 하계(下界)를 내려다보며 하계에 생각을 쏟고 있었다. 그것을 안 아버지 환인은 환웅이 하계에 내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계의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면서 환인은 환웅에게 명령했다. 고. 환인에게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하사 받은 환웅은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정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거기를 신시(神市)라고 이름 지었다. 하계에 내린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의 신들과 곡식, 목숨, 병, 선, 악 등 인간계의 3백60가지 일을 다스리고 인간계를 다스렸다. 환웅을 환웅 천왕이라고도 부르는데, 천신이 된 일도, 나라를 연 일도 없다. 나라를 연 단군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천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리라.   신이 내려온 신단수(神檀樹)   환웅이 내려온 것은 태백산정의 신단수 밑으로서, 즉 신단수를 거쳐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단수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학설은 많이 있지만 현조하는 서낭당(城隍堂)의 옛말 형태인 듯하다. 돌멩이를 만두 모양으로 쌓아올려 그 한가운데에 나무를 세우는 신목(神木)사상이라고 생각된다. 신목에 신이 접하거나 강림하는 형태는 성황 신앙의 강신(降神) 의식에서 볼 수 있다. 한국의 신들은 대개 신목을 통하여 강림하는 경우가 많다. 강신을 알리는 것은 신목에 매단 방울의 소리나 신목의 흔들림이다. 방울이 가장 많다.   세개의 신기(神器)   환웅이 하계에 내려올 때 천제인 환인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는다. 이 천부인 세 개는 무엇일까? 그 종류에 대해서 확실한 바는 없으나, 신령이 접한, 영검이 현저한 신기이다. 검과 거울과 방울이라고 생각된다. 방울 대신에 곡옥(曲玉)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무당에서는 지금도 검과 거울과 방울이 쓰이고 있다. 환웅이 신들과 하계의 제사(諸事)를 다스린 것도 이 천부인 세 개로써 했다고 생각해도 좋다.   곰이 인간(女子)이 되다   같은 동굴에 사는 한 마리의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인간이 되고 싶다고 빌었다. 보다 못한 환웅은 신령이 접한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곰과 호랑이에게 주고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된다고 일렀다. 그리하여 곰과 호랑이는 동굴에서의 은거가 시작되었다. 곰은 20일 만에 여자가 되었는데 그 여자는 웅녀(熊女)라고 한다. 호랑이는 은거를 참지 못해 인간이 되지 못했다. 곰과 호랑이의 신화는 토템 신앙에 의한 것으로서, 곰을 조상신으로 하는 부족이 이겨서 남고 호랑이를 조상신으로 하는 부족의 패퇴를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고조선의 시조 단군(檀君)   웅녀는 인간이 되었으나 혼인 상대자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신단수 앞에 나아가 아이를 내려 달라고 빌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환웅은 웅녀에게 신령(神令)에 의해서 수태를 시킨다. 이윽고 웅녀는 아들을 낳는다. 웅녀는 바로 성녀(聖女)로서 처녀 수태로써 아이를 낳는다. 웅녀를 어머니로, 천제 환인을 할아버지로, 강림한 신(환웅)을 아버지로 하여 난 아이이므로 단군 왕검이라고 이름 지었다. 단군 왕검(檀君王儉)은 당고(唐高)가 즉위하여 50년인 경인년(BC2333년), 서울을 평양에 정하고 조선국을 열었다. 후에 서울을 백악산의 아사달로 옮기고 1천5백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의 호왕(虎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바쳤으므로 단군은 기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장당경(臟唐京)에 옮겼으나,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산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 이 때 나이 1천9백8 세였다. 구월산에 환인, 환웅, 단조의 삼성(三聖)을 모신 삼성사가 있고, 각지에 삼신(성)을 모시는 사당이 있으나, 역사적 사실을 수반한 것은 아니다. 기자가 단군 왕검의 왕위를 이어 조선 왕국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중국의 사대사상(事大思想)이 가져 온 것으로서, 본래 단군 신화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해모수(解慕漱)   만주 북동쪽에 있던 북부여의 시조이다. 천제(天帝)가 대료(大僚)의 의주(醫州) 지방에 있는 흘승골성(訖升骨城)에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내려왔다. 거기에 서울을 정하고 북부여국을 열어 그 왕이 되어 스스로 해모수라고 이름했다. 천제가 스스로 나라를 열어 시조가 된다는 신화가 특징적이며, 천제의 이름이 해모수라는 것도 진기하다. 해모수가 천제가 아니라 천제의 서자이거나 그 직계손이었다고 생각된다. 성인 는 해(太陽)와 같은 음으로서 천손(天孫)을 의미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해모수와 관계가 있고 동부여 출신이라고 한다.   해부루(解夫婁)와 금와(金蛙)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는 천제의 명을 받아 북부여를 물려 주고 동쪽으로 피해 가서 동부여를 일으킨다. 부루는 왕위 계승자를 얻지 못해 산천에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부루가 탄 말이 곤연(鯤淵)이 이르러 큰 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 돌 속에서 금빛 개구리의 모습을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으므로 금와라고 이름 붙이고 왕자로 맞았고, 부루가 죽은 후 왕위를 이어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양아버지가 된다.   수신(水神) 하백(河伯)과 그 딸들   성북(城北)의 청하(靑河=지금의 압록강)에 하백이라는 수신이 있었다. 하백에게는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라는 세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자매들이 웅심연(熊心淵)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왕이라고 자칭하는 자가 나타나 자매 중에서 왕비를 선택하려 했다. 동생들은 빠져 달아났으나 유화는 정을 통하여 수태를 했다. 유화는 집을 쫓겨났다. 유화와 정을 통한 것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도 하고 단군이라고도 한다. 하백이 그 남자(신)의 신통보(神統譜)를 확인하기 위해 신기(神技)를 겨룬다. 사슴과 수달, 표범, 꿩, 매 등으로 변신하여 재주를 겨루지만 하백보다 뛰어난 신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천제의 아들임을 안다. 남자(신)는 자취를 감추고, 하백에게 쫓겨난 유화는 태백산 남쪽에 있는 우발수(優渤水)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거기를 지나가던 동부여의 금와왕에게 구조된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朱蒙)   금와왕은 유화를 방에 유폐했다. 하늘에서 유화를 향해 빛이 비치었으므로 유화는 빛살을 피했으나 빛살은 유화를 쫓았다. 빛살을 감수(感受)한 유화는 갑자기 산기(産氣)를 일으켜 다섯 되들이 되만한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은 불길하게 생각하여 그 알을 멧돼지의 먹이로 주었으나 멧돼지는 먹지 않았으며, 길에 버리면 마소도 피해서 지나갔고,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알을 감쌌으며, 쪼개려 해도 쪼개지지 않으므로 마침내 어머니인 유화는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데에 두었더니 알의 껍질을 깨고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이것이 조선의 난생 신화이다. 앞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는 단정하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하고 마술에도 신동(神童)이었다. 활의 명수를 주몽이라 부르는 풍속에 따라서 주몽이라고 이름지어졌다. 활을 잘 쏘고 마술에 뛰어난 데에 수렵민이나 기마족들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난생 신화인 점에서 주몽의 출생 신화를 남방계 신화라고도 하지만, 태양 신앙에 바탕을 둔 천손강림형(天孫降臨型)의 변형이라도 볼 수 있겠다. 그 알은 태양을 본 뜬 것이리라. 주몽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일설에는 단군이라고 한다)를 아버지로 하는 천손이며, 수신 하백을 어머니편의 조부로 하고 태양신과 수신의 복합 신화를 이루어 수직적 세계관이 그 기둥이 되어 있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주몽의 어머니는 부여왕의 시녀로서 천제가 보낸 계자(鷄子=병아리)가 배태시켰다고 한다. 주몽의 어머니가 시녀라고 하는 것은 사대적 중화사상(中華思想)이 가져온 것이다.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   금와왕에게 양육된 주몽은 왕이 공포를 느낄 만한 신동이었다. 왕자들은 뒷일을 두려워하여 주몽을 죽이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난다. 주몽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세 추종자를 데리고 동부여를 벗어나 남하하여 엄수(淹水)에 이르렀다. 갈 길을 막은 엄수를 향하여 하고 주몽이 외쳤더니, 물고기와 거북이 줄을 지어 다리를 놓아 건네 주었다. 추격자가 다가왔을 때 물고기와 거북은 자취를 감추어 진로를 막아 버렸다. 무사히 졸본주(卒本州)에 이른 주몽은 거기에 고구려국을 열고 왕이 되었다. 천제의 가호에 타고 난 신술(神術)로써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과의 싸움에 이겨 고구려의 기틀을 굳혔다. 주몽의 성은 해씨(解氏)였으나, 고구려를 세우고 고씨(高氏)로 이름하였다. 해(解)는 태양 해와 같은 음이며 높으므로 성을 고(高)로 정했다. 주몽은 활동 범위는 넓었고 힘차고 능동적이며 더구나 신술에 뛰어난 천손으로서 후에 기린을 타고 아침을 왕래하여 천정(天政=하늘을 다스리는 일)을 볼 만큼 신인(神人)이었다. 제위 19년 9월, 하늘에 올라간 채 돌아오지 아니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박혁거세도 난생 신화와 관련된 왕으로서 경주 양산(楊山)의 나정(羅井)에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 신라가 진한(辰韓)이라고 불리던 무렵 진한은 여서 고을로 이루어졌고 각 고을의 우두머리는 각기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로서 이(李), 애(崖), 배(裴), 정(鄭), 설(薛)씨의 시조였다. 이 시조들은 명활산, 대수산, 금강산 등 각기 다른 산에 하늘에서 내려와 번영하여 한 나라를 열 만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래서 여섯 고을을 다스릴 왕을 보내 달라고 염천(閻川)의 둑에서 하늘을 빌었다. 기원이 천제에게 사무치어 나정 쪽에 이상한 정기가 번개빛처럼 땅을 비추었다. 그 곳을 보니 한 마리의 백마가 큰 보랏빛 알 앞에서 예배하고 있었다. 여섯 고을의 우두머리들을 본 백마는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알을 쪼개었더니 속에서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동자가 나타났다. 이 이상한 모습에 놀란 사람들은 동천사(東泉寺)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고 태양과 달은 황황히 빛나고 있었다. 눈부시게 번쩍이는 연유로 해서 혁거세라고 이름지었고, 일명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고, 성인 박은 박과 같은 큰 알에서 태어난 데에 연유하나, 성과 이름이 모두 는 어의를 지니고 있다. 혁거세는 신동이라는 명서이 높았고, 13세(BC57년)에 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이라고 바꾸었다. 사라(斯羅)니 사로(斯盧)라고도 불렀고, 후에 신라가 되었는데, 경이니 을 뜻하는 신라어라고 생각되고 있다. 혁거세는 나라를 연 후에 61년째에 하늘에 숨었다(죽었다). 신체는 하늘에 날아올라가 오체(五體)가 나누어져 다시 내려왔다. 흩어진 신체를 모아서 장사 지내려 했으나 뱀이 나타나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오체를 따로따로 묻었기 때문에 오릉(五陵)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하늘이 명하여 오체를 따로따로 묻었다고도 한다. 또 혁거세, 왕비, 남해왕(南海王), 유리왕(儒理王), 파사왕(破娑王)의 오성(五聖)을 매장한 것이 오릉이라고도 한다. 오릉은 현재 경주에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의 동자   신라의 탈해왕(脫解王) 경신년 3월 8일의 일이었다. 호공(瓠公)이 월성(月城)의 서리(西里)를 걷고 있자니 시림(始林)에서 무엇이 빛나며 하늘에서 보랏빛 구름이 거기를 비추고 있었다. 그가 시림에 쫓아가 보았더니, 하늘에서 비추는 자운(紫雲) 한가운데에 금궤 하나가 있었다. 금궤는 나뭇가지에 걸리었고, 궤 속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호공의 보고를 받은 탈해왕이 시림에 가서 궤를 열었다. 속에는 한 동자가 자고 있었다. 혁거세의 고사(故事)를 본떠 알지(閼智)라고 이름지었다. 알지는 신라어로 어린이란 뜻이다. 알지를 안고 왕궁에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이 다투어 줄을 지어 기뻐하며 춤추었다. 탈해왕은 길일(吉日)을 택하여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알지는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하고 평생토록 왕위에 앉지 않았다. 금궤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을 김(金)이라고 정했고 6대손인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미추 이후 신라의 왕위는 자손 김씨가 계승했다. 알지는 금궤에서 태어났지만, 이것도 난생신화로 간주된다.   구지봉(龜旨峰)에 내려온 김수로(金首露)   천지 개벽 이래 이 지방은 아직 나라도 없고 나라 이름은 물론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는 시대였다. 아홉 개의 부족이 들이나 산에서 살며, 아도간(我刀干)을 비롯한 아홉 장(長=干)들이 각기의 부족을 다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漢)의 건무(建武) 18년(BC42년) 3월, 김해 북쪽에 있는 구지봉(거북이 엎드려 있는 형상의 바위가 봉우리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구지라고 한다)에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구간(九干)을 선두로 하여 2,3백 명의 백성이 거기에 모였다. 그러나 사람의 목소리는 나면서도 형체가 없었다. 그러자, "천제가 나에게 명하여 이 땅에 내려 나라를 열고 왕이 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가 하늘에서 여기에 내려왔노라. 너희는 산정을 파서 흙을 움켜쥐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환희 용약하리라." 하고  가사를 거르쳐 주었다. 구간들은 그 가르침대로 백성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보니 보랏빛 새끼줄이 하늘에서 스스로 내려와 지상에 닿았는데 새끼줄 끝에는 붉은 천에 싸인 금궤가 있었다. 궤를 열자 황금빛 알이 여섯 개 있었는데 그 모양이 태양처럼 둥글었다. 사람들은 놀라며 기뻐했다. 공손하게 알을 예배하고 천으로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옮기어 평상 위에 안치해 두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열이틀째가 지난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모여서 궤를 열었더니 여섯 개의 알이 모두 까져서 여섯 동자가 나타났다. 동자의 용모가 크고 단정하였으므로 방으로 맞아들여 배하(拜賀)하고 온 정성을 다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 십수일 후에는 키가 9척이나 되었고 용모는 용의 얼굴에 눈썹은 팔채(八彩)요 눈매는 순왕(舜王)과 비슷했다. 동자 중 한 사람이 그 달 15일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세상에 먼저 나타났으므로 수로(首露)라고 이름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고 했다. 수로는 성인이나 최고의 사람이라는 어의를 가진다고 한다. 또 알에서 태어난 다른 다섯 동자는 각기 가야국(伽倻國)의 왕이 되었다. 후에 가야국이 합체하여 여섯 가락국(駕洛國)이 되고 수로는 그 시조가 된다.   신라의 왕이 된 용왕의 동자(童子)   가락국의 해변에 한 척의 배가 표착했다. 수로왕은 신하와 함께 북을 치며 맞으려 했으나, 배는 계림(신라)을 향해 떠나 버렸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탈해가 수로왕과 왕위를 겨루다가 졌으므로 배를 타고 신라로 피했다고 한다. 계림의 아진포에 닿은 배는 혁거세의 고기잡이 소임을 맡은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에게 발견되었다. 배를 기슭에 끌어와 보니 배안에는 길이 20척, 폭 13척이나 되는 큰 궤가 하나 실려 있었다. 아진의선은 궤의 길흉을 하늘에 점을 치고 나서 뚜껑을 열었다. 궤 속에서는 단정한 동자와 일곱 개의 보물과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7일간 대접을 받은 동자가 입을 떼었다. "나는 용왕국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스물여덟 명의 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인간의 태에서 나서 대여섯 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의 아버지 함달파왕(含達婆王)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왕비로 받았으나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대왕은 인간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는 일이라 불길한 징조라고 하시며 궤를 만들어 그 속에 넣고 일곱 개의 보물과 노비를 배에 실어 띄웠습니다. 그 알에서 난 것이 나입니다. 그 때 아버지는 인연이 있는 곳 도착하거든 나를 열고 집안을 일으키라고 빌어 주셨습니다. 항해를 하는 중에 돌연 용이 나타나서 배를 지키면서 여기로 끌어다 준 것입니다. 동자가 궤의 뚜껑을 열어 알의 껍질을 깨고 빠져 나왔다는 데서 탈해(脫解)라고 하고, 까치(鵲)에 의해 아진의선이 배를 발견하고 궤를 열었기 때문에 작(鵲)에서 조(鳥)를 빼고 석(昔)을 성으로 하였다. 후에 신라의 제 4대 왕이 되고,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또는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표착형 난생 신화이지만, 용왕의 불교 전설과 난생 신화의 복합이라고 볼 수 있다.   지하에서 나타난 탐라의 삼성(三姓) 시조   지금의 제주도를 탐라현이라고 부른 시대에 양(良), 고(高), 부(夫)의 세 사람이 지하에서 나타났다고 에 적혀 있다. 그것에 따르면, 사람이 없던  태고적 세 신인(神人)이 주산(主山)의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毛興)구멍에서 뛰어나왔다. 첫 번째를 양을나(良乙那), 두 번째를 고을나, 세 번째를 부을나라고 했다. 세 사람은 사냥을 하여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고 고기는 먹었다. 어느 날 동쪽 바다에 나무상자가 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열어 보았다. 나무상자 속에는 다시 돌상자가 있었다. 홍대자의(紅帶紫衣)를 입은 사자(使者)가 딸려 있었으므로 함께 돌상자를 열었다. 거기에 푸른 옷을 입은 세 아가씨와 망아지와 오곡의 씨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저는 일본국의 사자인데 저희 국왕은 세 아가씨를 낳아 말씀하셨습니다. '서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섬의 산에 신의 세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와 장차 나라를 연다는데 짝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세 딸을 데려 가거라.' 하고 저에게 명하셨으므로 모셔 왔습니다. 거느리시어 큰 소원이 성취되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사자는 재빨리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세 사람은 나이 순서대로 각각 아가씨를 취하고, 활을 쏘아 대지를 나누어서 샘물 맛이 좋고 기름진 땅에서 살았다. 그 후로는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송아지와 망아지를 기르며 줄거운 나날을 보냈고 자자손손 번영해 나갔다. 이것이 제주도의 시조이다.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 따르면 한라산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산의 북쪽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신이 사람이 되었다고 하여 한라산이 세 신인(神人)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대지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것과, 일본국의 왕녀를 시집 보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용왕과 왕자 처용랑(處容郞)   신라의 헌강왕(憲康王)이 동해의 개운포(開雲浦)에 유람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해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온통 뒤덮어 길을 잃고 말았다. 왕이 점쟁이에게 물으니, "이것은 동해의 소행이오니 무슨 좋은 일을 하사이다" 하고 대답했다. 대왕은 곧 용왕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울 것을 약속했다. 그러자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걷히었다. 그래서 개운포라는 이름이 생겼다. 대왕의 뜻에 감사하여 용왕은 일곱 동자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기리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했다. 용왕은 동자 한 사람을 대왕에게 바쳤고, 대왕은 서울로 데려가서 정사를 보게 하고, 이름을 처용이라고 지었다. 처용은 급간(級干)의 지위에 올라 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심을 품은 역신(疫神)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처용의 아내 침실에 침입했다. 처용이 밤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침상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본 처용은 화를 내기는커녕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향가인 로 전해진다)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떴다. 역신은 처용의 이런 태도에 감복하여 그의 앞에 나아가, "제가 공의 부인을 사모하여 지금 과실을 저질렀는데 공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공의 상(像)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맹세하며 약속합니다." 하였다. 이후 풍속으로 처용의 문자나 그 상을 그려서 문이나 기둥, 벽 따위에 붙여서 악귀를 쫓는 것은 이 처용랑 전설에 연유한다.   삼신(三神)과 산신(産神)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이라 하며, 영검이 현저한 전지전능한 절대신으로 숭앙한다. 환인은 천제이다. 환웅은 천제의 아들로서 천제의 명령을 받들어 인간계를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다. 단군은 환웅과 웅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고조선을 연 시조이다. 삼신은 단군 신화에 유래하며, 환인은 전지전능한 천제로서 숭앙 받고, 환웅은 인간(=단군)을 창조한 산신(産神)으로서, 단군은 개국의 국신(國神)으로서 숭앙을 받고 있다. 산신(産神)에게 빌면 자식을 얻는다는 신앙이 있다. 이것은 웅녀가 환웅에게 자식 배게 해 달라고 기원하여 그 소원이 이루어져 단군을 낳았던 것에 연휴한다. 환인이나 환웅, 단군은 천손강림형 신화로서 수직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동일한 신앙 대상으로 친다. 삼신(三神)에게 비는 것은 동시에 산신(産神)에게 비는 것이기도 하다. 단지 산신보다 삼신이 훨씬 넓은 전지전능의 신들로 숭앙을 받고 있다.   산신(山神)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가락국의 김수로 등 건국 시조는 천제의 명령을 받들어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이다. 그 시조들은 나라를 다스려 그 임무를 다하면 하늘로 돌아간다. 즉 죽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 되돌아가 숨어서 신이 된다. 시조의 대부분이 나무숲이나 산에 내려오기 때문에 하늘로 돌아갈 때는 그 순서를 다시 밟는다. 산에 숨어서 신이 되는 것은 산이 하늘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산에 숨어서 산신이 되는 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시조 즉 귀인에 한하며, 그들은 반드시 천손이었다. 그것이 시대와 함께 일반의 왕이나 승려, 무인(武人)들까지 산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그것은 하늘을 숭배하는 신앙과 불교가 무속 신앙 등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산사(山寺)에는 산신당의 사당(성황당)에 고승(高僧)이나 무인의 상이 모셔져 있는 것도 그런 원인으로 인한 것이다. 본래 산신과 같은 숭고한 신앙 대상이었으나, 시대와 함께 그 숭고성이 희박해졌다. 민간 신앙에서는 곳에 따라서 삼신과 산신을 혼동하는 데도 있다.   고려의 왕건과 산신의 손자   백두산에서 내려와 부소산에서 살며 아내를 맞이한 호경(虎京)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가 마귀 할멈을 만나 그 남편이 된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그 6대손에 해당한다. 산의 대왕(산신)이 된 호경은 부소산의 아내와의 사이에 강충(康忠)이 태어나고, 강충과 구치의(具置義)와의 사이에 태어나 손호술(損乎述=寶育)은 삼한(三韓)의 통솔자가 될 것을 예언 받는다. 보육(寶育)은 지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도를 튼다. 어느 날 꿈 속에 혹령산에서 남쪽을 향하여 소변을 했더니 삼한이 물에 잠기어 은(銀)바다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형 이제건(伊帝建)은 "너는 필경 하늘을 떠받칠 기둥이 될 것을 낳을 것이다." 하고 딸인 덕주(德周)를 아내로 주었다. 덕주는 두 딸을 낳았고, 밑의 아이를 진의(辰義)라고 했다. 재주가 뛰어나고 미목이 수려한 진의는 언니가 본 꿈(오악산에서 소변을 보니 천하가 물바다가 되는)을 샀다. 그러자 예언대로 당나라의 천자가 될 자(후의 당의 숙종이라고도 한다)가 진의의 집에 나타났다. 아들을 낳으면 이 활과 화살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아들을 낳아 작제건(作帝建)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작제건은 어느 날 서해의 용왕의 청으로 늙은 여우를 퇴치하여 구해 준다. 그 답례로서 용녀(龍女)인 창민의를 아내로, 버들 지팡이와 돼지를 받는다. 용녀는 남편에게는 비밀히 용궁에 왕래하고 있었으나, 남편에게 그것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남편이 그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용녀는 용궁에 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용녀는 네 아들을 낳았고, 그 맏이를 용건(龍建)이라고 이름지었다. 용건은 꿈에 미녀를 만나 아내로 맞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것을 꿈부인(夢夫人)이라 하고 삼한의 어머니가 될 점괘가 나왔다. 왕건은 꿈부인한테서 태어나 고려를 일으켜 그 왕이 된다. 이 영웅 전설에서는 살아서 산신이나 용왕의 사위가 되고 꿈점이 적중하는 것이다. 선화 전설에서 영웅 전설로 변해 가는 재미가 있다.   신목(神木)과 성황신(城隍神)   부락의 수호신은 대개 서낭신이다. 부락의 고개나 뒷산에 모셔져 있다. 그 사당을 서낭당이라고 한다. 서낭신은 신목이나 고승(高僧), 무인(武人) 등이 있고, 때로는 이라고 쓴 신위(위패)이다 특정 신앙 이념을 가진 신이 아니라, 원시 종교신으로서 절대신으로 신앙하고 있다. 본래는 사당이 없이 돌멩이를 쌓아 올린 만두형의 석탑으로서, 중심에 나무를 세웠다. 신이 하늘에서 수목에 내려온다고 믿고 있었다. 후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목 자체를 신으로 무시게 되었다. 그것이 신목이다. 이것을 서낭대, 별신대, 소도(蘇塗) 등으로 부르고, 부락의 수호신이나 경계신(境界神)으로서 마을 경계에 모셨다. 이것은 삼한 시대의 하늘을 모시는 제사의 유풍이며, 단군 신화에서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단수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태양 신앙이 가져온 신목 신앙이다. 신목에 방울이나 어폐(御幣) 등을 매달아 강신(降神)을 비는 제사는 무속 신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낭신은 무속 신앙의 절대신으로서 널리 분포되어 있다.  
120    우리민요 《성주풀이》유래 댓글:  조회:4264  추천:0  2012-08-07
우리민요 《성주풀이》유래   【해설】   경상남도 지역에서 전승되는 성주신의 내력을 노래한 서사무가. 1925년 당시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구포리에 살던 맹인조합장 최순도(崔順道)가 제공한 무가책의 자료를 손진태(孫晋泰)가 그의 저서 (1930)에 수록한 것이 유일본이다.   ‘성조(城造)풀이’로 되어 있으며, ‘성조신가’ 또는 ‘가신유래가’라고도 하는데 한자와 한글의 혼용으로 쓰여졌고 4ㆍ4조 가사체의 정확한 율조로 다듬어져 있으며 수사가 세련되어 있다. 【개관】 ▶종류 : 무가(巫歌), 서사무가(敍事巫歌) ▶성격 : 서사적, 운율적, 신화적 ▶주제 : 성조신 탄생의 비범성 ▶의의 : 신화와 영웅소설의 매개하는 위치 【내용】   1,『서천국(西天國) 천궁대왕(天宮大王)과 옥진 부인(玉眞夫人)은 나이 40이 가깝도록 혈육이 없어 불전(佛前)에 아이를 낳는 정성을  드리고 태몽을 얻은 후에 잉태한다. 옥진부인은 10개월이 찬 후에 옥동자를 낳아 이름을 성조(成造)라고 짓는다. 성조는 15세가 되어 옥황께 상소하여 솔씨 서말 닷 되 7홉 5작을 받아 지하궁 공산(地下宮空山)에 심는다. 성조가 18세 되었을 때 결혼하나 아내인 계화씨(桂花氏)를 박대하고 주색에 방탕하여 나라 일을 돌보지 않는다. 대왕이 성조를 황토섬에 귀양 보내니 고생이 막심하여 성조가 무인도에서의 곤경을 혈서(血書)로 써 보내니 대왕이 귀양을 푼다. 성조는 귀양에서 돌아와 부인과 정회(情懷)를 풀고 5남 5녀를 낳아 키운다. 성조가 나이 70에 열 자식을 데리고 자신이 심은 나무들을 돌아본 뒤 온갖 연장을 마련해 재목을 베어 국궁(國宮), 관사(官舍) 및 백성의 집을 짓는다. 집짓기를 마친 성조는 입주 성조신이 되고, 부인은 몸주 성조신이 되며 , 아들 다섯은 오토지신(五土之神)이, 딸 다섯은 오방부인(五方夫人)이 되었다.』   2,『서천국 국반왕과 옥진부인은 혼인하여 살다가 사십이 가깝도록 혈육이 없어 부처님께 치성을 드린 뒤 잉태하여 옥동자를 낳아 이름을 성조라고 짓는다. 성조는 15세가 되었을 때 옥황께 상소하여 솔 씨 서 말 닷 되 칠 홉 오 작을 받아 지하궁 무주공산에 심는다.   성조가 18세 때 황휘궁의 공주 계화씨와 혼인하나 주색에 빠져 아내를 박대하고 국사를 돌보지 않으므로 신하들이 대왕께 주달하여 성조를 황토섬이라는 무인도에 귀양을 보낸다. 성조는 무인도에서 기한(飢寒)이 자심하고 고생이 극심하던 중 혈서로 편지를 써서 청조(靑鳥)에게 매어 계화부인에게 보낸다.   계화부인은 성조의 편지를 받고 시모인 옥진부인에게 말하여 천궁대왕으로 하여금 성조의 귀양을 풀도록 한다. 성조는 무인도에서 돌아와 계화부인과 화목하게 살며 5남 5녀를 낳아 키운다.   성조의 나이 70에 이르렀을 때 10명의 아들과 딸을 데리고 시냇가에서 쇠 열닷 말을 일어 내어 온갖 연장을 만들고 무주공산에 심어 두었던 재목을 베어 내어 궁궐 및 백성들의 집을 짓는다. 집짓기를 마친 성조는 입주 성조신이 되고 계화부인은 몸주 성조신이 되고 아들 다섯은 오토지신(五土之神)을 마련하고 딸 다섯은 오방부인(五方夫人)을 마련한다.』 【소재의 상징성】   성조신이 가정의 신(神)이므로 여기서는 집에 대한 의미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신화에서 집은 소우주, 우주의 모상, 신전 등의 상징성을 가진다. 이는 동 서양이 모두 같으며 서양의 경우는 문이 많다는 점을 들어 여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무속에서는 성지(聖地), 만신전(萬神殿)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어느 곳보다도 많은 신이 집에 존재하게 된다. 가옥신인 성조, 대지와 집안 땅의 신인 터주, 부엌과 불의 신인 조왕, 재산 및 가운(家運)의 신인 업주, 그리고 일부 지방에서는 뒷간의 신인 측신도 신봉하고 있다. 【다른 작품과의 관련성】   이 무가는 동래지방에서 수집된 것인데, 경기지방에서 수집된 무가 ‘성주풀이’와는 약간 다르다. 천사광씨와 지탈부인 사이에 태어난 황우양은 목수인데, 옥황상제의 명으로 천하궁(天下宮)의 무너진 집을 고치기 위하여 집을 비운다. 그 사이 소진랑이라는 자가 황우양의 아내를 납치하여 동침을 요구한다. 아내는 이를 거부하고 구메밥을 먹고 있었다. 꿈자리가 이상하여 점을 쳐 본 황우양은 이런 사실을 알고 돌아와 소진랑에게 잡혀갔던 부인을 되찾는다. 그 후, 황우양은 성조신이 되고 부인은 집안의 지신(地神)이 된다. 이상은 경기무가의 대강의 내용으로 훌륭한 집을 짓고, 가정의 난관을 극복하여 성주신이 되는 것은 ‘성조푸리’와 같으나, ‘성조푸리’와 같은 일대기 구성은 보이지 않는다. 【감상】   이 무가는 왕자라는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성조가 혼인 후 부인을 박대한 죄로 시련을 겪고 부부가 재결합하여 아들과 딸을 낳고 집을 지은 뒤 가정을 수호하는 신으로 좌정한다는 무속신화이다.   부부의 분리와 재결합을 통하여 가정의 핵심 요소로서 부부의 애정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는 경기 지역의 〈성주풀이〉(성주본가)와 일치하나,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부부와 함께 아들과 딸이 등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솔 씨를 미리 심어 재목을 키우고 쇠를 일어 내어 연장을 만든 뒤 재목을 베어 내어 주거를 이룩한다는 점에서 목재 가옥의 축조 과정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음을 본다.   그뿐만 아니라 가옥의 주신으로서 남신인 성조신과 가옥의 터주신으로서 여신인 성조신, 그리고 오방오토 의 남녀신을 의도적으로 균형있게 설정하고 있음을 보아 남신과 여신의 조화를 강조하였음이 드러난다. 이 무가는 우리나라 무속신화이면서 무속 서사시이다.   성조의 일대기는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 유형을 따르고 있으며, 등의 가요가 삽입 되어 서사적 국면을 장식하고 있으므로 서사시의 공식적 서술방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은 가정을 지키는 신인 성조신(成造神)의 내력을 풀어 이야기한 무가로서, 우리나라 서사 무가 가운데 대표적인 유형의 하나이다. 본문에 수록된 부분은 작품 중 신의 출생을 노래한 부분으로서, 풍부한 소재와 다채로운 표현 등 무가의 문학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작품의 구조를 보면  '출생→시련→공업 성취→신으로 좌정' 등의 순서로 이어지는 신의 일생담 중 출생 부분에 해당한다. 아이를 낳는 치성을 통해 주인공이 비범하게 탄생한다는 내용은 신이나 영웅의 일생을 표현할 때 흔히 나타나는 요소이다. 즉 영웅설화의 구조와 일치한다.   신의 출생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무가의 규모는 매우 웅대하며, 무속 신앙의 폭 넓고 다채로운 우주관(宇宙觀)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그 소재와 표현이 다양하기 그지없다. 인물의 탄생을 표현한 것 중 백미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본문 이후의 계속되는 전개에 있어서도 그 내용이 매우 다채로우며 표현이 세련되고 다듬어져 있어 무가의 높은 문학성을 잘 보여 준다.   이 작품의 문학사적인 의의는 무가의 문학성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서 큰 의의를 지닌다. 특히 이 작품의 구조는 신화와 영웅 소설의 구조를 매개하는 위치에 놓이는 것으로서 큰 중요성을 지닌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기자 치성의 요소는 우리나라 고전 소설에 매우 폭 넓게 나타나는 요소로서 주목된다. 무가에서 파생된 민요 또는 잡가, 축원무가, 서사무가. 성주풀이는 네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민요의 성주풀이로서 굿거리 장단에 경기소리의 선율로 불려지는 분장체 노래로서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대화연으로 서서히 내리소사’ 라는 후렴이 붙는 민요를 말한다. 이 민요는 무가에서 파생된 노래로 볼 수 있으며 중부지역 민간에서 널리 불려진다. 두번째는 잡가로서 성주풀이다. 형식은 가사체로서 4 · 4조 연속체이며, 내용은 ‘성주본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에 제비원이 본이로다’로 시작하여 제비원에서 자란 소나무 재목을 베어다가 집을 짓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노래 역시 성주굿 무가에서 파생된 잡가라고 생각한다. 셋째는 축원 무가로서 성주풀이를 말하는데 성주굿에 구송하는 성주축원을 말한다.   제비원에서 자란 소나무 재목을 베어다가 집을 짓고 온갖 집치장을 하고 세간을 들여놓은 후 농사짓는 과정과 아들을 낳아 길러 과거에 급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 농민들의 소박한 행복관이 담겨진 축원무가이다. 넷째는 서사무가 성주풀이인데 가정수호신이면서 가옥의 신인 성주신의 유래를 서술한 무속신화를 말한다. 성주굿이나 안택에서 구연되는데 경기 남부지역에서 전승되는 와 경남 동래지역에서 전승되는 가 있다.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대활연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로구나 놀고 놀고 놀아봅시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이댁성주는 와가성주 저집성주는 초가성주 한택안에 공댁성주 초년성주 이년 성주 스물일곱에 삼년성주 설흔일곱 사년성주 마지막 성주는 설흔일곱 사년성주 마지막 성주는 쉬흔 일곱이로다.   대활연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반갑네 반가워 설리 추풍이 반가워 더디도다 한양 행차가 더디여 남원 옥중 주럼이 들어 이화 춘풍이 날 살렸구나   왕왕왕 왕왕헌 북소리난 태평년월을 자랑허고 둘이부는 피리소리 쌍봉학이 춤을 추고 소상반죽 젖대소리 어깨춤이 절로 나누나.   성주야 성주로구나 성주 근본이 어드메뇨 경상도 안동땅에 제비원에 솔씨받어 공동산에 던졌더니마는 그솔이 점점 자라나서 황장목이 되었구나 돌이 기둥이 되었네 낙낙장송이 찍벌어졌구나   청천에 뜬 기럭아 니가 어디로 행하느냐 소상으로 향하느냐 동정으로 향하느냐 소상동정 어디다 두고 내창천에 살리우느냐 녹음방초 성화시여 때는 어이 더디든고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요만하면 넉넉한가 일천간장 맺힌설움 부모님 생각 뿐이로다.   낙양성 십리호에 높고 낮은 저무덤은 영웅호걸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며 월야춘풍 미백년 소년 행락이 편시춘 아니놀고 무엇허리 한송정 솔을 비어 조그맣게 배를 모아 한강에 띄어놓고 술이며 안주 많이실어 강릉 경포대로 가자     한국신화모음주소: http://burigb.blog.me/100041877709
119    동방 전통문화 경전 묶음 댓글:  조회:2477  추천:0  201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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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상여소리 동영상 묶음 댓글:  조회:3825  추천:1  201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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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론문) 신 유학효론---림국웅 댓글:  조회:5169  추천:0  2012-08-05
新儒學孝論 林国雄   一、绪言   荀子礼论说:「礼有三本:天地者生之本,先祖者类之本,君师者治之本。」而易说卦指出:「天地定位,山泽通气。」易序卦又指出:「有天地然后有万物,有万物然后有男女。」易系辞下再指出:「天地之大德曰生。」所以,天地者生之本,确实合理。而先祖者类之本,君师者治之本,则易于直接理解。我国还以天地君亲师五者为人类之至尊者,故并举之以示崇敬。其中先祖与父母同为类之本,即天地君亲师中的「亲」〔方克立〕。   董仲舒春秋繁露基义说:「君为阳,臣为阴;父(母)为阳,子(女)为阴;夫为阳,妻为阴。」〔赖炎元〕其中,君臣系属上面治之本的一个范畴,父母子女或简称的父子系属上面类之本的一个范畴,夫妻则系与上面类之本密切相关的另一个范畴。而阴阳,一般是指元气(注1)中相互分立的两种基本势力,或事物相互分立的两个方面。老子第四十一章就以「万物负阴而抱阳」,最先说明阴阳的普遍性。系辞则提出了「一阴一阳之谓道」(注2),对阴阳的相互分立、相互依存,相互转化,作了意义上的概括〔方克立;王立德〕。   邵雍皇极经世观物外篇说:「阳不能独立,必得阴而后立,故阳以阴为基;阴不能自见,必得阳而后见,故阴以阳为唱。」阳常居于实位,阴则常居于虚位。阴阳且可相辅相成。此外,大国阳,小国阴;有事阳,无事阴;伸者阳,屈者阴;上阳下阴;男阳女阴,兄(姐)阳弟(妹)阴,长阳少阴,达阳穷阴;制人者阳,制于人者阴;客阳主阴,师阳徒阴,言阳默阴,予阳受阴,动阳静阴;诸阳者法天,诸阴者法地。这些都是中华文化中重要的阴阳之大义。   而上面的「先祖者类之本」,当然高祖父母、曾祖父母、祖父母、及父母亦为类之本。而母亲的父母(外祖父母)、祖母的父母(外曾祖父母)、外祖父的父母、外祖母的父母、曾祖母的父母(外高祖父母)、祖母的祖父母,祖母的外祖父母、外祖父的祖父母、外祖父的外祖父母、外祖母的祖父母、外祖母的外祖父母,在宗法关系下一般并不列为狭义的「类之本」,但仍可列在广义的「类之本」之下。「父为阳,子为阴」,当然,父母为阳,子女为阴。「夫为阳,妻为阴」,类推结果,当然父为阳,母为阴;祖父为阳,祖母为阴;……。   在上面「类之本」的各种关系中,其最重的基础当然就是家庭。家庭是由婚姻、血缘、或收养而产生的亲属间的共同生活组织。婚姻是家庭产生的前提,家庭则是缔结婚姻的结果。家庭的性质、职能、形式、结构、以及与它相联系的道德观念,常随生产方式的变化而有所变化。而家庭道德是调整家庭成员间关系的道德原则和规范,包括孝悌、尊老爱幼、男女平等(注3)、夫妻和睦、勤俭持家、邻里团结等。家庭就处于人的社会性与自然性的连结点,还直接承负生育的功能。   而孝的原意为子女对父母的敬重、奉养、和服从,始见于西周文献,并以祭祀先祖为华人之孝的基本规定,且视「不孝」为元恶。春秋末孔子就提出「孝悌也者,其为人之本欤」,又引「君子笃于亲,则民兴于仁」、「慎终追远,民德归厚」来加以说明。孟子离娄上甚至说:「不孝有三,无后为大」(注4)。孝经更倡导「以孝治天下」。时至今日,如何以新儒学的观点来重新看待孝道,将是本文之旨趣。   二、孝道的一般概况   道教崇尚自然,敬天法组,以两仪为教徽,奉三清、玉皇为最高之尊神,以三清掌教,以玉皇掌天地水三界(注5)威权。祖师传谕,道门弟子,须当积善修德,劝忠劝孝。虚皇天尊所命初真十戒(注6),第三戒为不得淫邪败真,秽慢灵气,当守贞操,使无缺犯;第四戒为不得败人成功,离人骨肉,当以道助物,,令九族雍和;第九戒为不得不忠不孝、不仁不信,当尽节君亲,推诚万物。道门弟子另有行持「忠孝仁信和顺」的六字真诀,其中「民族、血统、祖宗、尊亲,孝也」。由此可之,道教对孝道之重视程度,并不亚于儒教〔徐荣〕。   醒世文谈孝道,强调亲情的伦常关系,并不是「你若重它十六两,后代儿孙还一斤」,亦不是「他养我小,我养他老」,而是「父母不亲谁是亲,不重父母重何人?」不过,前两个以功利来劝孝,后一个以血缘来谈孝道,虽有其切身性,圈子还是小了些,并不如从摄智归仁的人性明善处来谈孝道。不过,醒世文也重视诚意正心的本源功夫,让动机与行为作有机的结合,如「大斗小秤(买进用大斗占便宜,卖出用小秤占便宜)吃甚素,不孝父母斋甚僧」,无诚意而只是外在机械性地供奉神明(注7),也是不会得到良好的报应。醒世文所反映的,是民间孝道常有的意识形态,可作为社会进一步改进的出发点〔郑志明〕。   醒世文所谈的孝道;还有「千两黄金万两银,有钱难买父娘身,在堂父母百年稀,生时不孝死徒悲」、「在生之时不敬重,死后空劳拜孤坟」、「在家不可言相激,一旦抛离更不回,要见面时难得见,要他归时难得归」、「枕上谗言不可听,顺妻逆母也逆天,纵然姑嫂有不着,也须看看父母面」、「妻子言语为圣旨,不念父母亲情重,未娶妻前真孝顺,各娶妻后多冤愆(注8)」等各种说法。也许更冷静地想一想,自己的父母都不亲,还有谁亲;父母生我养我育我,吃尽苦头把我拉拔大了,请问谁能给我们这样的大恩大德?所谓知恩图报,第一个要报答的,当然是父母〔刘汉铨〕。   中华民族的文化和国家,建立在家庭的基本道德上,且孝道为社会道德的根本。例如,如何善护家庭天伦之乐,如何教育子女,如何孝敬父母,如何节约喜庆筵宴,如何俭省丧葬排场,如何让子弟知道择善避恶,如何注重科技又不忘做人之道,如何使青年摆脱心灵的空虚迎向灿烂有意义的人生,如何教导青年与神明与祖先沟通,如何在祖宗牌位前每日上一炷香,如何充实二十四孝新的时代内容,如何在过年贴春联,如何过元宵赏花灯,如何清明扫墓(注9)与祭祖,如何端午划龙舟,如何中元普渡(注10),如何中秋千里共婵娟,如何重阳登高望远,如何守望相助。许多传统文化固有的孝道美德,都是值得再好好提倡的〔道教会;编辑部〕。   孝的观念早在西周时已经产生和流行。孝的观念产生,基于两个条件。一是基于血缘而产生的「亲亲」关系,这是人类一种古老的感情,包括对祖宗神的崇敬,祈求祖宗保佑后代,此种亲亲之情后来成为维系「孝」的感情纽带,而使家族繁荣绵延。另一是个体家庭经济的形成,以及与此相联系的家庭中权利与义务关系的出现,没有这种权利与义务关系,便无所谓「孝」的道德规范,有了个体家庭,一般的夫妻及其子女构成一个独立的经济单位,大家在经济上相互依赖,父母有抚养子女的义务,日后并可以有要求子女奉养的权利,孝的观念便由此而产生〔沈善洪等1985a;查昌国〕   和孝的起源相联系,孝的内容有两种形态,一为对在世父母的孝,一为对去世父母、先祖的追孝。子女之所以应孝,至少是为了报答父母的养育之恩。对已死父母及先祖的追孝,是孝的延伸和扩大,表示子孙们继承祖先的志业,将使后代繁荣昌盛,绵延下去,确信祖宗能在冥冥之中保佑他们。   孝可以是子女以其对父母充满活力的感谢之情,使其父母获得欢娱。孝也常离不开养,养则是相等地适用于子女对他们上了年纪的父母的自然秉性。父母作为子女仿效的榜样,所维系的常还有他们的祖先。子女常能听到有关他们祖先德行的生动描述,这是代代相传的程序。父母亦常有炫耀自己子女成就的欲望。如果一个孩子的成就是其父母造成的,那肯定也是孩子自身的,因而保持身体的健康,获得婚配,再培养下一代的孩子等,也满足了子女们自身在幸福、地位、以及某些掺杂道德超越的连续统一体方面的某些欲求〔墨子刻〕。   在中华文化中,儒有孝经,佛有孝论;儒说孝即是礼,佛言孝即是戒;儒以孝为百行之首,佛以孝为至道之宗。儒家讲孝道,但其孝常取决于血缘关系的亲疏远近。佛教从「一切众生,皆有佛性」出发,助世行孝,更认为一切众生皆我父母,是对血缘关系的某些超越。儒佛孝道在血亲之爱及天地之则(天经地义)上的理论根据是相同的;在生事之孝及死后之孝的基本内容上是相同的;在赡养父母、淳厚风俗、及弘道济世的社会功能上也是相同的。或许更贴切地说,随着佛教的中国化,佛教孝道也有着其不可避免的儒学化〔许宁〕。   孔子说孝道是一种人性,一种自然情愫。西方文化则强调个人独力发展,故血缘关系、家庭观念淡薄,只是将孝的内涵渗透在人文文化中。不过,热爱祖国、尊重人、爱人、孝敬父母、扶助弱小仍是全人类共有的最美好之品德,也是中西孝道共有的内涵。对老师如同父母一样看待,也是一种孝道。「师徒如父子」,「一日为师,终身为父」。西方人也同样尊敬老师。西方的文学作品,也有许多关于孝道的内容,如李尔王、董贝父子、双城记、高老头、局外人〔叶继宗〕。   成都二仙庵太上老君说报父母恩重经中,海空智藏问:「信徒等秉受发肤,皆因父母,父母恩深,无由报效……」太上老君答:「若孝悌者,一家之中,老少安乐,天人钦仰,神明守护,子孙相承,孝慈不断,招感孝顺,以为其子。若不孝者,世世相继,一门之内,总是冤家,虽为父子,甚于仇敌,招五逆以免其儿。父子兄弟,各财异食,同园别业,共田分谷,隐藏珍馔,吃食如偷,虽是人形,不如禽兽,神明不佑,天下轻欺。一生所为,诸不吉利,死入地狱(注11),受一切罪。苦毕受报为百劳鸟,供羽能飞,共时其母。百劫之后,讹生人中。聚集五逆诸不孝缘,共为父子,更相残害。死生忧苦,轮转无穷。」〔二仙庵1995a;福井文雅〕   太上老君续说:「夫人生世,父母为亲。非父不生,非母不养。是以天地覆荫寄托母胎,气识相凝,怀娠十月萦妊胞重,坐卧失常,岁满月充,诞育之候,其母恐怖;性命惙然恻怛心神忧丧,产孕之日,内触外触苦痛交切,失声号叫,受大苦恼,匍匐战惧,骇愕惊嗟。乃至生已,手摩其顶墬于草上,呱呱号啼,安藏被褥侧身三月。常怕为邪魔之所浸害,饥时需饭,非母不哺;渴时须饮,非母不乳。计饮母乳,八斛(注12)四升。千日提携,遮益尘垢。推干就湿,及年长大。……横簪向头,为索妻妇,情爱偏重。其母转疏,私房之中,共相笑语;父母年老,气力渐衰。终朝至暮,不来省问,独守空房,犹如外客;少衣少食,饥冻切身,手脚胼胝(手足皮厚)。耳聋眼暗,单床飘薄,度日如年。」   「身既尪羸,多饶虮虱,蚊虻噆体;通夕不寐,长吟叹息,何罪之有,生此不孝之子。柱杖呼唤,低头下气,欲伸所欠,未尽前言。其儿兴声,瞋目骂詈,回头却退,扶壁而归。捶胸自非,流泪目肿,连声喝苦,不如早亡。母告儿言,汝初小时,非吾不育;饮食遮蔽,非吾不养。怀汝十月,如携重担;气息奔喘,剧于走驰。或时寒热,坐卧不安。腹皮折裂,心胸填满。发落形瘦,不能饮食。临生产时,逆前一月,常怀忧怖,恐要相离。或有时安,或有时患。当生之日,命如风烛。四肢百脉,以及五脏,或如刀割,或如钩牵。或热如火,或冷如冰,比当解离,或生或死。尽世间苦,口不能述。」   「既得生已(顺利生下婴儿),喜惧交集。诸苦诸痛,更不可堪。三年携抱,日夜不离,眠时少时(睡得少,吃得少)。视儿气色,呼吸饥渴。或有疾病,父母心痛。为子忍苦,口不能食。心口干燥,万种求福。黄金白银,衣服玩具,心念子可,无所吝惜。念汝小时,东西随我(走到哪里,跟到哪里),不离寸步。食亦随我,眠亦随我,一旦无我,终日不食。一夜无我,啼哭不眠。如何长大,忽成冤对。今虽有汝,不如本无。付之于天,幽冥(注13)当鉴。愿我早过(逝),与汝相离。奈何奈何!」尔时,太上老君说斯事已,即现神变,令此大地一切震动。于震动中,忽见北方地狱之内无数众生,足践刀山,手穿剑树,拔出其舌,铁针刺之,酷痛号哭。身体脓烂,孔孔之内,患皆流血,大小狼籍(注14),流曳楚毒(苦痛)。   于是海空智藏肃寒毛竖,流泪呜咽上启太上老君曰:「斯之罪魂,何罪令尔?」是时太上老君告海空智藏言:「斯罪人也,生不慈孝,违弃父母,诽谤三宝(注15),侮慢出家。今之受报,涂炭何极!日趣长远,无可如何。」尔时太上老君,仍说偈(ㄐㄧˋ)言:「善善自会善,恶恶归恶根;生前不慈孝,死后报何恩?苦哉萦苦痛,往返十八门;非吾三赦日,何事暂蒙颜。」   尔时,太上说此偈已,大众悲号流泪不止。便即抬手弹指,于弹指中,即令大众回顾视盼于南方。即见南宫天堂之内,善男女等,威仪庠序,华容挺出。天厨百味,珍玩无有穷者。恣形妍盛,娱乐自在。海空智藏欢喜,重自道言:「不审此人,承何福对?得处天堂,衣服自然,受此快乐。」尔时,太上老君答海空智藏言:「此人生时,至心慈孝,供养父母,礼敬三宝。布施持戒,信重出家,令受福庆,果报(注16)无穷。」是时,太上老君仍说偈曰:「前缘至孝慈,供养礼无违;敬信于三宝,无期福会归。天堂里容曳,福祉高巍巍;斯乐今无极,由来福庆随。」   尔时,太上老君说斯偈已,叹息良久,告海空智藏言:「善哉善哉!父母恩重,昊天(天之泛称)罔极。呜呼慈母,云何可报。吾忆前世,诞于洪氏胞,凝神琼胎之府。积三千七百年,逮至上皇(注17),重胞李母。阴阳数极,八十一年,思报母恩。至今劫期,犹恐不复。何况子等凡流之辈,而不报恩。竭力尽心,尚亏礼敬。况犯上事,而有差违。诸教戒中不宣其目,三十六部不着斯言,千圣万圣谁不遵教。况子学道,而不报恩,汝等众人,深宜笃志,外行孝养,内蕴宏慈。粉骨縻身,亦不能尽。」接着,此经续有请福祈恩、拔度先祖(拔荐先亡灵魂而超度)、名报父母养育之恩的提倡。   二仙庵的玄天上帝(注18)说报父母恩重经、关圣帝君(注19)昭明翊汉天尊说反本报恩经、洞真部(注20)的太上真一报父母恩重经、元始洞真慈善孝子报恩成道经,对孝道也有各种相似的开导。元始洞真慈善孝子报恩成道经中更说:「下世男女,修吾孝道,与道同德。既同德已,与道同光。既同光已,与道同真。既同真已,与道同身,既同身已,与道同神。既同神已,与道同变。既同变已,与道同寿。既同寿已,与道同有。既同有已,与道同无。既同无已,无处不无。无处不无,亦无处不有。无处不有,寂寥虚豁。无处不无,随心应变。」〔二仙庵1995b,c;洞真部2000a,b〕。   三、孝经中的孝道   认识中华文化中的孝道,离不开孝经。孝经是藉由孔子与曾参之问答,揭明孝道及孝治之深义。汉书艺文志指出,夫孝,天之经,地之义,民之行。举其大者,故称孝经。吕维祺孝经或间指出,孝经何为而作?是为阐发明王以孝治天下之大经大法而作。孝经论孝,大抵在立身、行道、德教、治化上说,非只为曾参解答,盖为天下后世之君天下者而解说的。孝经之教,乃诸善百行之根本〔慈惠堂〕。 孝经开宗明义指出:夫孝,德之本。系至德要道,以顺天下,民用和睦,上下无怨。教之所由生,身体发肤,受之父母,不敢毁伤,孝之始。立身行道,扬名于后世,以显父母,孝之终。夫孝,始于事亲,中于事君(上司),终于立身。诗经大雅(注21)说:「无念尔祖,聿修厥德」,岂不追念你的祖先,好好地积功累德。   孝经依据视野之大小,依序有天子(今称总统)章、诸侯(今可称管辖区域较大的地方父母官)章、卿大夫(今可称管辖区域较小的地方父母官)章、士(今称事务官)章、及庶人(今称人民)章。   天子章说,爱亲者不敢恶于人,敬亲者不敢慢于人。爱敬尽于事亲,而德教加于百姓,行于四海(四方、天下),盖天子之孝。书经吕刑篇的甫刑说:「一人有庆,兆民赖之」,为天子的人,孝行有了好报,全国的人民都会效法。久而久之,百姓都沾了光,孝行都有好报。诸侯章说,在上不骄,高而不危。制节谨度,满而不溢。高而不危,所以长守贵。满而不溢,所以长守富。富贵不离其身,然后能保其社稷,而和其民人,盖诸侯之孝。诗经小雅小宛篇说:「战战兢兢,如临深渊,如履薄冰」,才能上为天子办好事,下为人民造好福利。   卿大夫章说,非先王之法服(先王制定或同意而合乎社会礼仪的衣服),不敢服(穿)。非先王之法言(先王教导或赞同而合乎人际礼法的言语)、不敢道。非先王之德行(先王倡导或接纳而合乎人伦盛德的行事),不敢行。是故非法不言,非道不行。口无择言(所说的话要合于人际礼法,所以出口说的都是好话,并没有什么好坏可选择),身无择行(所做的事要遵守人伦道德,所以做事都是做好事,也没有什么好坏可选择)。言满天下无口过,行满天下无怨恶。法服、法言、德行三者备,都讲求齐全而做到,然后能守其宗庙(注22),此卿大夫之孝。诗经大雅烝民篇:「夙夜匪懈,以事一人」,服从上司一人,奉公尽责〔沈善洪等1985b〕。   士章说,资于事父以事母,而爱同。资于事父以事君,而敬同。故毋取其爱,而君取其敬,兼之者父(事奉父亲的道理,是爱敬兼全)。故以孝事君则忠,以敬事长则顺。忠顺不失,以事其上(上司),然后能保其禄位,而守其祭祀,盖士之孝。诗经小雅小宛篇说:「夙兴夜寐,无沗尔所生」,每天勤劳所做的事都要不辱没了祖宗与父母,才不愧人的一生。庶人章说,用天之道,分地之利,谨身节用,以养父母,此庶人之孝。故自天子至于庶人,孝无终始,而患不及者,未之有。孝道是无始无终,无穷无尽,永恒存在的大道理,谁想要做,谁都能做得到。若忧虑力量做不到,就不是尽孝了〔慈惠堂〕。   接下来,三才章说,夫孝则天之明,因地之利,以顺天下。其教不肃而成,其政不严而治。先王见教之可以化民,是故先之以博爱,而民莫遗其亲。陈之以德义,而民兴行。先之以敬让,而民不争。导之以礼乐,而民和睦。示之以好恶,而民知禁。孝道是天经地义,三才一贯,原是人的性情所公有的,不用学习,自然就能。顺着性情去教化,好比顺水推舟,是很容易的了。诗经小雅南山说:「赫赫师尹,民具尔瞻」,周朝尹氏太师(注23)是个孝道纯全威名显赫的人,民众知道了全都要信服他,看着他,效法他。   孝治章说,昔者明王之以孝治天下,不敢遗(忽略)小国之臣,而况于公侯伯子男?故得万国之欢心,以事其先王。治国者,不敢侮于鳏寡,而况于士民?故得百姓之欢心,以事其先君。治家者,不敢失于臣妾(属下),而况于妻子?故得人之欢心,以事其亲。夫然,故生则亲安之,祭则鬼(祖先)享之。是以天下和平,灾害不生,祸乱不作。故明王之以孝治天下,如此。诗经大雅仰之篇说:「有觉德行,四国顺之」,这就是天子用至高的德行,至要的道理,顺引天下四方的人心,德化治理的恢宏效果。   圣治章说,天地之性,惟人为贵。人之行,莫大于孝。孝莫大于严父,严父莫大于配天,则周公其人。昔者,周公郊祭后稷以配天,宗祀文王于明堂(注24)以配上帝,是以四海之内,各以其职来祭(天下诸侯都各尽其职份前来参与祭祀)。故亲,生之于其膝下,为人子女者以养父母日严。圣人因严以教敬,因亲以教爱。圣人之教不肃而成,其政不严而治,其所因者本(所根据的是其本源)。父子之道,天性,君臣之义亦然。父母生之,续(传宗接代)莫大。君亲临之,厚莫重(莫不重视)。故不爱其亲而爱他人者,谓之悖德。不敬其亲而敬他人者,谓之悖礼。以顺则逆(在上位的人拿顺应天理的事不做,反而去学逆拂天理的事),民无则(教化民众就无从取用法则了)。   不在于善(领导人不在爱亲敬亲的美德上以身作则),而在于凶德(反而在不敬不爱的凶德上去忤逆上天),虽得之(就是侥幸得为领导者),君子(因不能长久)不贵。君子则不然,言思可道,行思可乐,德义可遵,作事可法,容止可观,进退可度,以临其民。是故其民畏而爱之,则而象之(可做人民模范,人民可以观摩学习)。故能成其德教,而行其政令。诗经曹风鸤鸠篇说:「淑人君子,其仪不忒」,善人君子的威仪是以爱亲敬亲做为根本,因而是一点也没有差错的。   纪孝行章说,孝子之事亲,居则致其敬,养则致其乐,病则致其忧,丧则致其哀,祭则致其严(年节祭拜追思,须克尽思念诚意,双亲生前言语动作笑貌如在眼前)。居养病丧祭五者都能作得完备,才算是能事奉双亲的孝顺儿女。事亲者,居上不骄,为下不乱,在丑不争(在无情的人群里要戒除争竞之心,不能争吵打骂)。居上而骄,则亡。为下而乱,则刑(接受法律制裁,甚或遭受天谴)。在丑而争,则兵(遭受兵刃之害,互相残杀)。骄乱争三者不除,虽日用三牲之养(天天进用三牲肉食奉养),犹为不孝。   五刑章说,需要执行古代刺墨、割鼻、截足、阉割、及斩首五种刑罚所属的犯罪法条已有三千多,而罪莫大于不孝。人民的一身,是君王护卫之,圣人教化之,双亲生养之。要是用武力胁迫要求君王接受自己的要求,眼里没有尊长及君王的存在,就是无上。要是用言语毁谤圣人,反对其行道救世,不遵法教,眼中没有法纪,就是无法。要是用行为毁谤孝道,诽谤行孝的人,眼里看不起父母,就是无亲。无上、无法、无亲,此大乱之道。   广要道章说,教民亲爱,莫善于孝。教民礼顺,莫善于悌。移风易俗,莫善于乐。安上治民,莫善于礼。礼者,敬而已。故敬其父,则子悦。敬其兄,则弟悦。敬其君,则臣悦。敬一人(恭敬上头的一个人),而千万人悦。所敬者寡,而悦者众,此谓之要道。广至德章说,君子之教以孝,非家至而日见之(不必家家户户都躬亲造访施教,也不必天天去看人人所做的事,才算教化)。教以孝,所以敬天下之为人父母者。教以悌,所以敬天下之为人兄姊者。教以臣,所以敬天下之为人君主者。诗经大雅泂酌篇说:「恺恺君子,民之父母」,非至德,其孰能顺民,如此其大者。   广扬名章说,君子之事亲孝,故忠可移于君。事兄悌,故顺可移于长。居家理,故治可移于官。是以行成于内,而名立于后世。孝悌兼全的人,先完成于内而后再通达于外,移孝作忠,工作负责尽职,出仕作官当能有政绩表现,自然就能扬名于后世。谏诤章说,昔者天子有争臣七人,虽无道不失其天下。诸侯有争臣五人,虽无道不失其国。大夫有争臣三人,虽无道不失其家(注25)。士有争友,则身不离于令名。父有争子,则身不陷于不义。故当不义,则子不可以不争于父,臣不可以不争于君。故当不义则争之。从父之令,怎能配称尽了孝道呢! 感应章说,昔者明王事父孝,故事天明。事母孝,故事地察。长幼顺,故上下治。天地明察,神明彰(天地生化万物的道理既明,且能克尽孝道,则神明主宰感其至诚,当能降幅佑助,将愈彰显孝道效能)。故虽贵为天子,必有尊,因为他还有父母亲。必有先,因为他还有哥哥姊姊等比之更先出生者。宗庙致敬,不忘亲。修身慎行,恐辱先(恐怕行为有过失,羞辱了祖先)。宗庙致敬,鬼神着(敬奉祖先的道理也就更加彰显)。孝悌之至,通于神明,光于四海,无所不通。诗经大雅文王有声篇说:「(孝悌之至)自西自东,自南自北,无思不服(四海人民没有人不想悦服)。」   事君章说,君子之事上,进思尽忠,退思补过,将顺其美,匡救其恶,故上下能相亲。诗经小雅隰桑篇说:「心乎爱矣,遐不谓矣(尽心去敬爱君王上司,人虽在远处,还不能说远)。中心藏之,何日忘之(敬爱出于至诚,永久藏在心中,何日能忘。)」丧亲章说,孝子之丧亲,哭不偯(一ˇ,哭余声),礼无容,言不文,服美不安,闻乐不乐,食旨不甘,此哀戚之情。三日而食,教民无以伤生,毁不灭性(哀毁心情不能太过),此圣人之教。丧不过三年,示民有终。为之棺椁衣衾而举之,陈其簠簋(祭品)而哀戚之。擗踊(捶胸顿足)哭泣,哀以送之。卜其宅兆,而安厝之。为之宗庙,以鬼(祖宗)享之。春秋祭祀,以时思之。生事爱敬,死事哀戚,生民之本尽,死生之义备,孝子之事亲终(有圆满的终结)。   孝经以德摄行,以行显性,以性摄教。其三才章,复摄用归体,明天地人总为一体。于其理一中可见分殊,于其分殊中亦可见理一。孝道顺人之性,即顺天地之性,故其教不肃而成,其政不严而治,犹天地之自然成化。体必具用,故以德摄行。用能显体,故以行显性。而全体作用,故以性摄教。且孝经特别突显出孝为德之本。中庸说:「唯天下至诚,为能尽其性。能画其性,则能尽人之性(可指孝)。能尽人之性,则能尽物之性。能尽物之性,则可以赞天地之化育。可以赞天地之化育,则可以与天地参矣!」〔马一浮〕   孝是发乎人心之不能自已者,只此便是天道之不息,故曰天之经。忠可移于君,顺可移于长,治可移于官,只此便是地道之承天,故曰地之义(注26)。以此顺天下,推而放之四海而皆准,无所不通,只此便是人道之法天地者,故曰民之行。以佛义通之,孝为德本是法性(注27),故谓天经;教所由生是缘起,故谓地义;终于立身是具足法智二身,故谓民行〔马一服〕。   郑玄说,孔子因诗书易礼乐春秋六经各讲了一个方面,怕后人不知根源,所以作孝经来总会。而汉人必须通过孝,来维系宗法血缘的纽带,且以孝治天下。故孝经包含着人伦之大本,穷理之要道,其文虽不多,而立身治国之道,尽在其中,清初学者姚际恒经过详细考证,否认孝经是孔子或孔子的弟子所作。梁启超认为,孝经之名,孔子时并未曾有。其书发端之仲尼居,曾子侍,安有孔子著书而作此称谓?〔沈善洪等1985c〕不过,一般仍认为,孝经以孔门后学所作说,较为合理〔中视文化公司〕。   四、新儒学孝论   新儒学系统论〔林国雄1992a,b,1993,1994a,b,c,d,1995,a,b,c, 1996a,b,   1997a,b,1998a,b,1999a,b,2000,2001a,b,c,2002a,b,2003a,b,2004a,b,c,d,   2005,a,b,2007;蔡渊辉2005a,b〕的思想源头主要在太极图说〔周敦颐〕。不论太极图说或新儒学系统论,均太极动而生阳;动极而静,静而生阴;静极复动;一动一静,互为其根;分阴分阳,于是两仪立焉。   就孝论来说,从家庭的形成处切入,将是个很好的出发点。婚姻是家庭产生的前提,是社会认可的配偶安排,用以形成夫妻关系。若将家庭看成一个小太极,家庭形成后夫为太极中之阳仪,妻为太极中之阴仪,夫妻同居,共图创立家庭。婚姻可用以建立所生子女之合法地位,可给予配偶包括居住、性行为、家务操作、财产等之权利,可为所生子女建立共同基金,可与配偶之亲属相联结而产生更广的亲属关系,可获得夫妻关系之公开承认。婚姻是男女之相当稳定而持久的结合,还与生育子女密切关系〔龙冠海〕。   理想的夫妻,应该是和谐无间,百年偕老。不过,依太极阴阳之关系,只要能从对方求得基本需要之满足,则婚姻之基本功能仍在。婚姻之主要动机有三:一为经济,二为子女,三为爱情。动机之实现即为婚姻之成功。一般认为构成成功婚姻之要素有九:一为感情融洽,二为生育子女,三为夫养家,四为妻持家,五为家庭收支平衡,六为民主,七为社会参与,八为获得社会赞扬,九为一夫一妻。夫妻双方的互相调适,特别有助于婚姻的成功。依据中华文化的观念,结婚乃是个人为社会及家庭所应负之责任,而生育子女则为其应尽之义务。礼记即规定,合二姓之好,上以事宗庙而下以继后世。   母亲的卵子与父亲的精子会合而受孕,在子宫发育,常怀孕期满,婴儿可脱离母体,独立生活。在子女出生后,父母即予扶养哺育,使其长大。父母子女的关系,于是发展出家庭太极中父母之新阳仪、子女之新阴仪。子女非父不生,非母不养。怀孕期间,母亲坐卧失常,产孕之日,内触外触苦痛交切,失声号叫,匍匐战惧,骇愕惊嗟。如今医学进步,这些痛楚皆有所缓和,但也只是缓和而已。养育期间,父母常怕子女为邪魔之所侵害,饥时需饭,非母不哺;渴时须饮,非母不乳;千日提携,维持身体之健康整洁;推干就湿(包尿布,除大便),及年长大。   其后黄金白银(今使用货币),衣服玩具,父母心念子女可,无所吝惜,食随父母,眠随父母。父母更送子女进学校接受教育,望子成龙,望女成凤之心也是非常普遍,父母所付出之辛劳自不待言。父母辛劳之付出,还须有家庭稳定的经济收入来源,于是社会为比家庭小太极更大之太极,父母产生稳定经济收入之活动为阳仪,社会其他各色各样的经济活动为相应的阴仪。子女进学校接受教育,当然也演进出与家庭小太极相似之学校小太极,此时师生关系中的师居阳而生居阴。在家庭生活及学校生活的各种物资劳务之需求中,每一种物资劳务之供需亦各别形成一小太极,需求面居阳而供给面居阴。   从经济关系来说,家庭内的夫妻一般是平等的,生活上各种物资劳务的供需一般也是平等的。但是在子女扶养长大成年而可以真正独立之前,父母在经济关系上一般只有对子女的付出,所以由于这种体谅,子女须对父母敬重和服从;父母年老体衰后,子女则更需予以奉养;这些敬重、服从、和奉养,就是孝的原意;这些父母子女的关系也就是人类得以生生不息,并谋求发展的最重要基础。在这些关系中通常父母慈而子女孝,慈通常只有当下之意义,故被有意无意地隐藏起来,而孝则能产生出其生生(注28)不息绵延不绝之动力,故孝在中华文化中一直特别被突显出来。   在西周文献中,已出现以奉养父母、祭祀先祖为孝的基本规定,这是孝的原意之扩大,也用以形成宗法(注29)制度。诗大雅既醉即说:「孝子不匮,永赐尔类」。西周时并已视不孝为元恶大憝(ㄉㄨㄟˋ,恶,怨),当刑之无赦。盖若不孝者,世世相随,一门之内,总是冤家,虽为父子,甚于仇敌;父子兄弟,各财异食,同园别菜,共田分谷,隐藏珍馔,吃食如偷,虽是人形,不如禽兽;更有甚者,还可能更互相残害。由孝与不孝的对比中,我们更能看出孝在人类生生不息发展中之重大意义。   不论太极图说或新儒学系统论,均无极生太极,其后彼此两仪互动,故无极而太极。另外,太极本自无极,即道。由于太极内阳变阴合,而生水火木金土,所以无极之真,二(阴阳)五(木火土金水)之精,妙合而凝。妙合增益。干道(注30)成男,坤道(注31)成女。因为已逝去的祖先所归之无极与现在子孙家庭之太极,可以有着阴阳两仪之互动,所以西周时早已把祭祀先祖作为孝的基本规定。此时,在世子孙的阳仪与已逝祖先之阴仪所形成的太极,是一个比家庭小太极更大的「类之本」小太极。   孝经庶人章说,用天之道,分地之利,谨身节用,以养父母,此庶人之孝,这就是人类社会最基本的孝道。孝经进入士章,毋取其爱,君取其敬,兼之者父,故以孝事君则忠,以敬事长则顺,忠顺不失,以事其上,然后能保其禄位,而守其祭祀,盖士之孝。此士之孝已进入祭祀祖先的扩大孝道中了。   若再进入卿大夫之孝、诸侯之孝,天子之孝,于是春秋末孔子能说:「君子笃(厚,忠诚老实)于亲,则民兴于仁」、「慎终追远,民德归厚」,更进一步扩大孝的尊亲之义。在卿大夫的采地食邑中,卿大夫居阳,采地食邑的所有其他人居阴。在社稷中,诸侯居阳,社稷内的所有其他人居阴。在天下中,天子居阳,天下的所有其他人居阴。卿大夫尊亲祭祀祖先,就易于治理其采地食邑;诸侯尊亲祭祀祖先,就易于治理其社稷;天子尊亲祭祀祖先,就易于治理天下。   论语为政说:「今之孝者,是谓能养,至于犬码,皆能有养,不敬,何以别乎?」其实,有形的养与无形的敬也是一种新儒学阴阳两仪之良性互动对待。务必要敬养兼具,才是最基本的庶人之孝。荀子子道主张「从义不从父,认为从父母命应以使父母安、父母荣为宜,反对把孝之从父命」绝对化,这是对无违父志、服从父命的合理修正。其实孝居阳、义居阴,也应有一种新儒学两仪之良性互动对待。由于孝义兼具,吕氏春秋孝行览才能说:「夫孝,三皇五帝(注32)之本务而万事之纲纪也。」   两汉魏晋时,孝成为三纲之一大德目,确定父母为子女纲,并引孝入律。至宋以后,更有「父要子亡,子不得不亡」的训条,被理学家进一步绝对化为天理之必然,见程氏遗书,此种愚孝之孝道已经走得太过头了。孝经进入士章、卿大夫章、诸侯章、天子章,忠孝一般都是相随的,士章有「以孝事君则忠,以敬事长则顺,忠顺不失,以事其上」,卿大夫章有「夙夜匪懈,以事一人」,而忠君之扩大就是忠于百姓,于是诸侯章有「保其社稷,而和民人」,天子章有「德教加于百姓,行于四海」。由家庭进入社会国家之后,其实忠居阳,孝居阴,忠孝亦应有其新儒学两仪之良性互动对待。   孝经三才章说,夫孝则天之明,因地之利,以顺天下,所以孝道还应遵循自然及社会的各种客观规律。孝经的孝治章、圣治章、孝行章、五刑章、广要道章、广至德章、广扬名章、谏诤章、感应章、事君章,所论者皆为孝道之扩大,故(孝、治)、(敬亲、威仪)、(孝道、不骄乱争)、(孝道,不无上无法)、(孝、悌乐礼)、(孝,至德)、(成于内,达于外)、(孝,谏诤)、(孝悌,神明)、(进,退)等亦皆宜有其新儒学阴阳两仪的良性互动对待。   不过,老子道德经第十九章说:「绝圣弃智,民利百倍;绝仁弃义,民复孝慈;绝巧弃利,盗贼无有。」第十八章又说:「大道废(客观规律性消失),有仁义;智慧出,有大伪;六亲不和,有孝慈。」此乃圣智仁义都是非常高远的,孝慈民利则都是非常切身而具体的,由于圣智仁义的高远,假圣假智假仁假义对于一般人来说,反而不易辨别出来。六亲不和的六亲,可指父母兄弟妻子,可指父子兄弟夫妇,可指「父子、兄弟、姑姐、甥舅、昏媾、姻亚(妻父曰昏,重婚曰媾,壻父曰姻,两壻相谓曰亚)」,可指「外祖父母、父母、姊妹、妻兄弟之子、从母之子、女之子」,亦可指「父、子、从父昆弟、从祖昆弟、曾祖昆弟、族昆弟」,因为有孝与不孝的对比,所以六亲不和有孝慈,自易于体会。 因而,(圣居阴,孝居阳)、(智居阴,孝居阳)、(仁居阴,孝居阳)及(义居阴,孝居阳)亦皆宜有其新儒学两仪之真正的良性互动对待,俾使假圣假智假仁假义无其可以藏匿的空间,这亦是孝治天下所应思及者。   孝经提倡以孝治天下,因为孝为德之本,所以孝治就是一种德治。西周提出以德配天,强调君子要加强道德修养,对人民要明德慎罚,施以德教,已有德治的萌芽。论语为政说:「为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而众星拱之。」又说:「导之以政,齐之以刑,民兔而无耻;导之以德,齐之以礼,有耻且格。」孔子强调德治(孝治),并不主张废除刑罚杀戮,而是反对不教而杀、不戒视成。   不论孝治、德治、或圣治,其作为都比较偏重人治。人治的根本特征是君王至上,朕即国家,春秋繁露立元神即说:「君人者,国之本也」。国家的治乱系于君主一人的道德和行为,人存政存,人亡政亡。人治特别强调德治(孝治),也重视以法治民,更有像唐律那样一套完备的法律,甚至主张法不阿贵,但君主则超越在法律之上。人治把德治(孝治)的实现,寄托于德位一体的圣王,常不免因此而不切实际。   与人治相分立的是法治。法治则关注法律在国家治理中的地位和价值。现在的法治一般以人民民主或人民主权(注33)为核心。因而,宪法具有至高无上的地位,且在法律面前人人平等。政府国家则置于人民的有效监督之下。在中国历史上,法治与德治之争,法治所讲的主要是刑法。现在的法治,人民的自由平等权利得到充分的尊重与保护。法治主张法律至上,在法律面前人人平等。在法治下,法律具有绝对至高无上的地位,排斥特权(注34)的存在,宪法及法律不是保障个人权利的渊源,而是其结果。   因为民为邦本,本固邦宁,故一般认为,德治(孝治)是基于民本而实现邦宁的关键。孟子提出「民为贵,社稷次之,君为轻」,认为得天下在于得民,得民在于得其心;而要得民心,就应施仁政德治(孝治)。孔子强调,君主本人要身正,以为人民的道德表率。其身正,不令而行;其身不正,虽令不从。国家的法治、政策要有利于人民,所欲与之聚之,所恶勿施;要制民之产,省刑罚,薄税敛,深耕易耨(耕,除苗秽)。孔子主张富而教,反对不教而诛。孟子主张在不饥不寒下,谨庠序(注35)之教,申之以孝悌之义,从而人人亲其亲,长其长,而天下太平。董仲舒还提出,教化立而奸邪皆止;教化废而奸邪并出,刑罚不能胜〔朱贻庭〕。   法治的优点一般是其制度和法律不因领导人的改变而改变,也不因领导人看法和注意力的改变而改变。对一个国家的治理来说,法治与德治,从来都是相辅相成,相互促进。法治属于政治建设,属于政治文明;德治(孝治)属于思想建设,属于精神文明。依法治国,就是依照宪法和法律规定,通过各种途径和形式去实际治理国家;以德治国,就是建立与市场经济、法律体系相配套的思想道德体系,保持良好的社会秩序和风尚,营造高尚的思想道德。   由此可知,德治(孝治)与法治亦具有其新儒学两仪之互动对待,德治(孝治)居于阳仪,而法治则居于相应的阴仪。经由本节的推论,孝的概念架构之示意大致可以绘之如右:                       五、结语   本文经由孝道的一般概况、孝经中的孝道之顺序探讨,然后以新儒学系统论进入孝论的陈述,终于完成了孝论的一些阴阳理解架构。     批注   註 1:  元气的意义是:一作为宇宙终极本原的原始物资,鹖(ㄏㄜˊ)冠子及王符潜夫论采此观点。二作为天地本原的混沌物质,是宇宙演化过程中的一个阶段,亦即太易、太初、太始、太素中「太初者,气之始也」的元气阶段。三指天地间之元气。四指人体内之元气。五指一切生命物质基础的元气,王充论衡采此观点〔方克立〕。   註 2:  王夫之认为,道在氧化过程中起着主持和分剂的作用,分剂指阴阳双方的位置关系和力量对比关系,主持是指将作用相反的阴与阳结合起来的一种亲和力〔方克立〕。   註 3:  平等意指无差别、等同。   註 4:  于礼不孝有三事:一为阿意曲从,陷亲于不义;二为家贪亲老,不为禄仕(不工作赚钱);三为不娶无子,断绝先祖的祭祀。三者之中,无后为大〔林尹等〕。   註 5:  道教所称三界有三:一为以时间来说的宇宙无极界、太极界、现世界;二为以空间来说的天界、地界、水界;三为以道境来说的欲界、色界、无色界〔李叔还;张志哲〕。欲界指深受各种欲望支配、煎熬的生物所居之处。色界指粗俗欲望已经断绝的地方。无色界指既无欲望又无形体的生存者居住的地方,已经断绝了任何物质性(色)的东西。三界亦可用以指天堂、人间、地狱〔方克立〕。   註 6:  虚皇天尊初真十戒文,规定凡初入道者,不分出家或在家,均须受此十戒:一为不得不忠不孝不仁不信,二为不得阴贼潜谋害人害己,三为不得杀生(杀人),四为戒淫邪,五为不得败人成功离人骨肉,六为不得毁贤扬己,七为不得饮食酒肉(交酒肉朋友),八为不得贪求无厌,九为不得交游非贤,十为不得轻忽言笑。一般应先受皈依戒和老君五戒后,方许受以上十戒〔张志哲〕。   註 7:  神明是神之有灵者,书经说:「至治馨香,感于神明」〔李叔还〕。   註 8:  愆(ㄑㄧㄢ)指过、差失、罪、恶疾。   註 9:  扫墓是祭扫先人之墓。清通礼说:「岁寒食及霜降节,拜圹茔,届时素服诣墓,具酒馔,及芟剪草木之器,周眂(ㄕˋ,视)封树,剪除荆草,故称扫墓。」亦有生者于中元日、十月朔等节日,到墓前祭拜死者的活动,诸如献供品、焚冥钱、给坟墓培土、用土块压纸钱于坟顶等。清明扫墓的习俗,今仍沿袭〔李叔还;张志哲〕。   註 10: 道教以农历七月十五日为中元节,是地官大帝诞辰。该日地官降下,定人间善恶。道庙则日夜诵经、济度,饿鬼囚魂亦得因而解脱。该日,一般人家多持斋,荐奠祖先,抚孤判斛,屠门(关门)罢市,放灯于河中照冥〔李叔还〕。   註 11: 地狱指地下阴府之牢狱,用以治人死后之罪魂。灵宝经说:「北罗酆有十二大地狱,由十殿冥王领之。」〔李叔还〕   註 12: 斛(ㄏㄨˊ)是十斗,今制五斗曰斛,十斗曰石。   註 13: 幽冥即地下阴府。   註 14: 狼籍是纵横交错不整之貌,恶声散布亦复似之,与狼藉同。狼籍亦有行为无法纪之意。   註 15: 玉清天宝君、上清灵宝君、太清神宝君为道教的三宝,尊为最高之神。又有以学道的要旨道宝、经宝、师宝,尊为三宝者。另有以人身之精气神为修养性命之三宝。还有以慈俭让为立身行道之三宝〔李叔还〕。   註 16: 果报即因果报应。道教认为,若种下善因,则报得善果;若种恶因,则报恶果,譬如种瓜得瓜、种豆得豆。   註 17: 上皇即天皇。上古以天皇、地皇、人皇为三皇。不过尚书大传以燧人、伏羲、神农为三皇;白虎通以伏羲、神农、祝融为三皇;春秋运斗枢以伏羲、神农、女娲为三皇;史记以天皇、地皇、泰皇为三皇;尚书序以伏羲、神农、黄帝为三皇〔李叔还〕。   註 18: 玄天大帝乃元始化身,太极别体。上三皇时下降为太初真人,中三皇时下降为太始真人,下三皇时下降为太素真人。其后,托胎化生于净乐国王善胜夫人之腹。生有奇表,及长至武当山,潜形炼气,后功圆行满,白日飞升。至周武王伐商纣时,玄帝化现荡魔,大奏肤功,玉皇上帝封为玉虚师相玄天大帝〔李叔还〕。   註 19: 关圣帝君即关羽,秉性忠直,与刘备、张飞在桃园行结义,情同兄弟。初守下邳,为曹操所败。刘备奔袁绍,关羽为曹操所执!曹操礼之甚厚。关羽斩袁绍将颜良以解曹操危!曹操表奏封关羽为汉寿亭侯。关羽乃尽封所赐,辞奔刘备。后关羽守襄阳,定益州,督荆州,威震一时。孙权用了吕蒙计,袭破荆州,关羽遂被害。民国三年与岳飞合祀武庙〔李叔还〕。   註 20: 洞真部为三洞之一。道藏经分三洞:洞真部为元始天尊所流演,洞玄部为太上道君所流演,洞神部为太上老君所出。洞指通,即通达玄妙之意〔李叔还〕。   註 21: 诗经是中国最早的一部诗歌总集,编成于春秋时代,有谓由孔子删定,但近人多疑之。基本上是西周初至春秋中期的作品。分为风雅颂三大类。雅分大雅、小雅,计105首,主要是卿大夫贵族的献诗,多用于宴乐、歌颂、或反映政治得失〔中国书局〕。   註 22: 宗庙是天子、诸侯、卿大夫祭祀祖先的地方。在家天下的时代,祭祀宗庙的事是国家大典。祭祀宗庙之事,也是孔子的教学内容之一。祭祀宗庙之目的,是示民有事、教民追孝〔中国书局〕。   註 23: 太师是三公(太师、太傅、太保)之最尊者。殷纣时箕子为太师,周武王时姜太公、周成王时周公亦皆任之。其后,历代皆置之〔林尹等〕。   註 24: 明堂是明政教之堂,古时祀上帝、祭祖先、朝诸侯、养老尊贤,凡关于重大典礼者,必皆于明堂举行之,是古代政教合一的大本营〔李叔还〕。   註 25: 家是古代卿大夫的采地食邑〔中国书局〕。   註 26: 天经地义也是春秋时郑子产对礼的看法。礼,上下之纪,天地之经纬,亦即认为礼是天地的永恒法则〔方克立〕。   註 27: 法性与真如、实相、法界、涅盘等属同等涵义,主要指现象的本质、本体。方法虽异,然作为万法之体的「性」则不变,故叫「法性」。小乘佛教多不言,大乘佛教则盛论之,然大乘各派对法性的内容,又有不同的解释〔方克立〕。   註 28: 生生是指生育之仁德。易系辞上说:「日新之谓盛德,生生之谓易」,已含有赞扬阴阳生育之仁德的意思。   註 29: 宗法的中心内容是教忠教孝,强调君君、臣臣、父父、子子。而且父子有亲、君臣有义、夫妇有别、长幼有序、朋友有信,并在此基础上确立起三纲五常。君为臣纲、父为子纲、夫为妻纲是三纲,仁义礼智信五种道德规范是五常。三纲五常正式提倡于两汉。朱熹还把三纲五常纳入天理的轨道〔朱贻庭〕。   註 30: 干道指干之功能,能够无须外力,自然开通万物。   註 31: 坤道指坤之基本性质。干道健,坤道顺。阴阳变化的结果,在人则生成男女,在动物则生成雌雄牡牝,在易则生成坎离震巽艮兑〔吕绍纲〕。   註 32: 五帝可指东方青地灵威仰、南方赤帝赤熛怒、中央黄帝含枢纽、西方白帝白招拒、北方黑帝叶光纪;亦可指黄帝、颛顼、帝喾、帝尧、帝舜〔李叔还;张志哲〕。   註 33: 人民主权是指人民是国家的主体,国家的一切权力是人民赋予的,国家主权属于人民。人民主权是民主政制之本质。人民主权说最初由鲁索(J.J. Rousseau,1712-1778)创立,以其社会契约论为基础。人民的公意在国家中就表现为最高权力,而主权就是公意的具体体现。杰弗逊(Thomas Jefferson,1743-1826)继承和发展了鲁索的人民主权思想。人民主权的一切权力来自国民,国民只能通过代表,行使其权力〔朱贻庭〕。   註 34: 特权(privilege)是指国家法律上允许的特殊权利,例如可以享有豁免捐税、减免刑罚等种种特权。元朝时,将人民分为蒙古人、色目人、汉人、和南人四种,分别实行种族特权和种族歧视政策,在遴用官吏和科举、刑罚上都有所差别〔朱贻庭〕。元代通称西方各异族之民为色目人,盖色目相异,不常闻见。另外,蒙古称辽金人为汉人,称宋人为南人。 註 35: 庠序是地方所设之学校。殷曰序,周曰庠。至汉时,乡曰庠,聚曰序,皆教化之宫、养老之处、以详礼义序长幼之所。      参考文献   1.     二仙庵(1995a),「太上老君说报父母恩重经」,新儒学经济思想的开拓,慈惠堂,114-118页。 2.     二仙庵(1995b),「玄天大帝说报父母恩重经」,新儒学经济思想的开拓,慈惠堂,119-120页。 3.     二仙庵(1995c),「关圣帝君昭明翊汉天尊说反本报恩经」,新儒学经济思想的开拓,慈惠堂,121-124页。 4.     方克立(1994),中国哲学大辞典,中国社会科学出版社。 5.     中华文化公司(1999),世界辞典百科全书。 6.     中国书局(1994),孔子文化大辞典。 7.     王玉德(2003),「试论汉代文化的重要特点之一:重视孝道与孝经」,孝感学院学报,23卷4期,65-68页 8.     朱贻庭(2002),伦理学大辞典,上海辞书出版社。 9.     沈善洪与王凤贤(1985a),「孝的产生和发展」,论道,慈惠堂出版社,536-541页。 10.  沈善洪与王凤贤(1985b),「孝经的非法不言,非道不行」,论道,慈惠堂出版社,542-543页。 11.  沈善洪与王凤贤(1985c),「历代对孝经评述的变化」,论道,慈惠堂出版社,544-545页。 12.  李叔还(1979),道教大辞典,巨流图书。 13.  吕绍纲(1992),周易辞典,吉林大学出版社。 14.  周敦颐(1978),周子全书,台湾商务印书馆。 15.  林尹与高明(1985),中文大辞典,中国文化大学出版部。 16.  林国雄(1992a),「论因果与机率,并归结至阴阳思想之知识化生理论」,第九届国际易学大会,夏威夷希洛,1-53页。 17.  林国雄(1992b),「儒学阴阳两仪观念与经济活动」,儒学与法律文化,复旦大学出版社,76-84页。 18.  林国雄(1993),「经济计量时归纳逻辑机率之涵义与测量,因缘和合论及易理之运用」,交大管理学报,13卷1期,77-108页。 19.  林国雄(1994a),「新儒学经济思想的开拓」,大易集要,齐鲁书社,218-240页。 20.  林国雄(1994b),道德真经及其圣义,慈惠堂。 21.  林国雄(1994c),「预期效用的概念演化与计数属性,新儒学经济思想及因缘和合论之运用」,社会科学战线,1994年4期,29-37页。 22.  林国雄(1994d),「论矛盾」,第一届中国文化与企业管理学术会议,台南,1-29页。 23.  林国雄(1995a),「春秋繁露中的五行思想」,孔学研究,1辑,268-285页。 24.  林国雄(1995b),「新儒学经济思想的三才诠释」,太极科学,10辑,13-26页。 25.  林国雄(1995c),「金钱价值的两仪论」,交大管理学报,15卷1期,59-76页。 26.  林国雄(1996a),「论有无与场」,交大友声,354期,70-73页。 27.  林国雄(1996b),「新儒学经济思想的五行解说」,面向新世纪的中国管理,上海交通大学出版社,3-24页。 28.  林国雄(1997a),「老子道德经的仁义思想」,宗教学研究,1997年4期,15-20页及72页。 29.  林国雄(1997b),「政府所为何事的新儒学经济思考」,交大管理学报,17卷3期,147-174页。 30.  林国雄(1998a),「论道」,宗教学研究,1998年4期,15-20页。 31.  林国雄(1998b),「经营变量中五行相生致中和之力,以食品业为例」,中华管理评论,2卷1期,1-12页。 32.  林国雄(1999a),「论中和与均衡」,云南师范大学学报,1999年4期,85-91页。 33.  林国雄(1999b),「由新儒学四象结构剖析制造业厂商的会计信息(上、下)」,今日会计,77期,102-108页;78期,67-86页。 34.  林国雄(2000),「论规则与权威」,孔学研究,6辑,553-572页。 35.  林国雄(2001a),「新儒学经济活动中五行始生之序」,华人管理本土化之开拓,游汉明编,乐文书局,321-352页。 36.  林国雄(2001b),「产业与企业经营变量的卦象诠释」,2001年科技与管理学术研讨会论文集,台北,605-612页。 37.  林国雄(2001c),「企业经营因果链条的构建理性」,中华管理学报,2卷2期,43-68页。 38.  林国雄(2002a),「新儒学的文字符号逻辑」,第三届东亚符号学国际会议,武汉,1-27页。 39.  林国雄(2002b),「新儒学知识论」,新儒.新新儒,东方文化与国际社会的融合,文史哲出版社,137-189页。 40.  林国雄(2003a),「论核四释宪案的司法伦理」,暨大学报,7卷1期,59-82页。 41.  林国雄(2003b),「新儒学忠恕之道」,东亚社会及其伦理价值国际学术研讨会论文汇编,北京,8-28页。 42.  林国雄(2004a),「新道家与新儒学」,2004年海峡两岸首届当代道家研讨会,武汉,1-34页。 43.  林国雄(2004b),「新儒学因果论」,根在河洛,大象出版社,640-689页。 44.  林国雄(2004c),「新儒学组织论」,中华企业资源规划学会论文集,103-117页。 45.  林国雄(2004d),台湾政治文化发展的趋向,交通大学经营管理研究所,1-42页。 46.  林国雄(2005a),「新儒学土地论」,第九届科际整合管理研讨会,台北,1-18页。 47.  林国雄(2005b),论新儒学经营的道天地将法,交通大学经营管理研究所,1-33页。 48.  林国雄(2006a),「论道不同,不相为谋」,世界经济文汇,2006年6辑,31-47页。 49.  林国雄(2006b),「新儒学系统论」,新儒学经营管理学报,3辑,1-58页。 50.  林国雄(2007),「论制造业普查数据的新儒学信息功能」,新儒学经营管理学报,4辑,149-209页。 51.  洞真部(2000a),「太上真一报父母恩重经」,论中和与均衡,慈惠堂出版社,207-208页。 52.  洞真部(2000b),「元始洞真慈善孝子报恩成道经」,论中和与均衡,慈惠堂出版社,209-213页。 53.  查昌国(2003),「论西周孝尊祖敬宗抑制父权」,史学理论研究,67-77页。 54.  徐荣(1978),「道教徒信誓简述」,道教选论,竹山慈惠堂,19-21页。 55.  马一浮(1995),「从孝经释三才」,新儒学四象五行之混析与义利之辨,慈惠堂出版社,97-106页。 56.  许宁(1999),「儒佛孝道之比较」,论道,慈惠堂出版社,459-468页。 57.  张志哲(1994),道教文化辞典,江苏古籍出版社。 58.  道教会(1975),「呼吁提倡家庭孝道与节约」,西王金母信仰与天山瑶池圣地之研究,慈惠堂,406页。 59.  叶继宗(2002),「中西孝道之比较」,简单回归逻辑之基本思考,慈惠堂出版社,493-498页。 60.  慈惠堂(1993),「孔子孝经及其今义」,西王金母圣略之注释,177-200页。 61.  福井文雅(1992),「三教调和论与父母恩重经」,新儒学价值论,慈惠堂出版社,480-484页。 62.  墨子刻(1996),「中国家族的人文理论」,新儒学四象五行之混析与义利之辨,慈惠堂出版社,254-262页。 63.  郑志明(1990),「醒世文要点醒什么?」,西王金母信仰与皈依传度之研究,慈惠堂,313-316页。 64.  刘汉铨(2001),「醒世文今读」,微观消费理论的新儒学诠释,慈惠堂出版社,436-445页。 65.  编辑部(2003),「孝与中元法会」,香港道讯,41期。 66.  赖炎元(1987),春秋繁露今注今译,台湾商务印书馆。 67.  蔡渊辉等(2005a),「新儒学决策结构之一:阴阳系统论」,新儒学经营管理学报,1辑,266-303页。 68.  蔡渊辉等(2005b),「新儒学决策结构之二:五行系统论」,新儒学经营管理学报,1辑,304-360页。 龙冠海(1971),社会学,云五社会科学大辞典第一册,台湾商务印书馆。  
116    중국한족전통장례 댓글:  조회:3747  추천:0  2012-08-04
中国汉族传统丧礼 死,人生之终也。为人子者哀,乃人之常情,而遵丧礼,尽孝道,为我传统美德。故儒家特重视丧葬,而制有丧礼。自佛教传入之后,俗信地狱之说,遂有僧道点缀其中,成为一般之丧葬习俗。近来虽随时代演变而渐趋简化,但却另又产生不正常新恶俗,互相效尤,令人叹息。子曰:「丧,与其易也宁戚」,礼记中亦云:「敛首足形,还葬而无楟,称其财,斯之谓礼」。合礼与否,全在于心意表达是否诚敬,而不在乎竞相铺张,以奢华为荣。兹将古昔一般丧葬习俗概述于后,供识者改进参考:   一、徙铺: 当人弥留时,即移出厅堂,俗曰「搬铺」。凡男女中年以上,有配偶子嗣者,死则谓之寿终。依古例,男徒正寝(左侧),女徙内寝(右侧)。因此讣文中男称「寿终正寝」,女称「寿终内寝」,使死者能在家中最善美之处而安。俗以死在床上,魂将被吊床中、不能超度,故夭折者虽移厅堂,亦须移于床下。 二、拜脚尾饭: 待气绝即举哀。以一碗饭上插一双箸,置鸭蛋一个,称「脚尾饭」及油灯一盏,俗称「脚尾灯,或称「长明灯」,焚香哀哭,烧冥币祭拜,称「拜脚尾饭」。为死者食用、照冥路及路费。此仪,据传古昔荒芜多虫兽,为防虫蚁慕尸味而聚,乃撒饭于尸周,粒食与虫蚁,并焚火驱兽毋害尸,而相沿演变为今之拜脚尾饭、焚烧纸之仪。 三、守铺: 铺草席于尸侧,或坐或卧,日夜守尸曰「守铺」,俗传:「尸最忌猫,猫跳过尸,即尸起行走,遇人紧抱不脱,若冲阈则倒」,故日夜守铺,一尽孝心,二防不测。 四、报丧: 丧即报知亲戚,报丧不得入人家屋内。母丧,即带白布报母外家,称「报白」。女儿闻丧自外归来,半途即悲声哀哭,俗曰「哭路头」。将至家前即匍匐而进,至门前跪地哀哭,俟孝眷自内哭应点香出厅,接香跪拜后,方得进内瞻仰遗容。亲戚往吊,称「探铺」,子孙哀哭迎接。母丧,接舅、妗,曰「接外家」,即门前摆香案,孝眷匍匐哀哭跪接,外家即掀起桌帷,以示责备之意。旧时俟外家来吊,方可入殓,以示善终。 五、居丧: 死者断气起遗族即服丧,曰「居丧」。去装饰、皮鞋等,子女、儿媳、长孙改穿蓝色素衣,其他卑族穿白色素衣。居丧中遗族不入厨房理中馈,曰「断灶」。 六、竖魂帛: 尸盖上白布,自首至足,尸迹不露。又以布帷遮住神明及祖先牌位,以免触犯,俟入殓后始卸。另立以白厚纸,书上死者名讳及死亡年月日,作魂帛暂代位牌,曰「竖魂帛」,为道僧招魂之用。并请道僧(乌头司公)于死者灵前诵经,为亡灵开冥路,谓「开魂路」。 七、丧服: 央人缝制丧服,并备草鞋、草箍(麻布圈以稿绳,孝男戴)、孝杖(竹端包麻布,孝男、长孙用)等。丧服,依与死者关系亲疏,制有区别: 麻布:子女、儿媳、长孙用之,为最重孝。 苎布:孙、甥、姪用心,为次重孝。 白布:与死者同辈或外亲用之。 红布:死者第四代孙用心,含有四代同堂为荣之意。 八、入殓: 依日师择之吉日良辰,将尸安放于棺内,俗称「入木」。须经下列仪式: (1)买水:入木前,尸须先洗净。洗尸之水,须用活水。故孝男穿孝服,捧新钵至河边,焚冥纸,盛河水回家,称「买水」。以白布沾钵水,拭挣死者。 (2)穿寿衣:拭净后,为死者理发、梳妆,换寿衣,俗称「张穿」。依年龄之高低,寿衣穿有三重、五重、七重等之分。必须奇数,盖丧事只可单,不可双也。 (3)接棺:棺木将至,孝眷即匍匐出门,哀哭跪接,曰「接棺」,先烧纸,嗣奉入厅中。 (4)辞生:入殓之前,以饭、鸭蛋、豆腐、青菜等六碗或十二碗,供拜死者,称「辞生」,以为告别死者。而道僧即以供食状,吉语相告。 (5)入殓:棺木内先铺茶叶、草纸、木炭及殉葬物等,待吉辰至,孝男抬死者首足,土公仔(棺木杠夫)即助其安放棺内,头以草纸固定,俗称「入木」。此时切忌抬尸人影投于尸上,或眼泪滴下棺内。孝眷即环跪棺旁哀哭。 (6)回西方:搭棚设坛,悬挂佛像、地狱图等,于入殓之后,即请道僧诵经做法事,借佛力超度亡魂,免堕地狱而往西方佛国,曰「回西方」。 九、搁棺: 安葬须择黄道吉日,且须请地理师寻觅坟墓福地费时,致停柩日久,称「搁棺」,俗称「打桶」。如打桶过久,需雇工油漆棺木,以防尸味外泄。古时榈棺之风甚炽,今则少见。 十、出殡: 以日师择定良辰吉日出殡,俗曰「出山」。其仪式概述如下: (1)摆祭:将棺木移于屋外,俗称「移柩」后,举行「摆祭」。除丧家备牲醴等外,出嫁女儿须备猪头供祭。孝眷、女婿等依序奠酒跪拜,嗣由亲朋等吊祭。 (2)封棺:祭罢即行封棺之仪,俗曰「封钉」。孝眷环跪棺旁,随司公高唱吉语,以「有喔」呼应。男丧由死者亲族,女丧请外家行封钉。先由棺盖四端已打牢固之钉上,用斧头作打钉状,最后打棺中央一钉,称「子孙钉」。钉毕送红包与封钉人,孝男即用牙齿拔起子孙钉,供于魂帛。司公所唱吉语如左: 「一点东方甲乙木,子孙代代居福禄。   二点南方丙丁火,子孙代代发家伙。   三点西方庚辛金,子孙代代发万金。   四点北方壬癸水,子孙代代大富贵。   五点中央戊己土,子孙代代如彭祖。 」 (3)旋棺:封钉毕,个僧即引导孝券绕棺三次,曰「旋棺」。俟棺木盖上棺章,女眷即倚棺哀哭,俗称「哭棺柴头」。哭罢即发引安葬。 (4)出殡行列: A.地理师乘轿引导。 B.路鼓。 C.献纸钱(掷纸钱与路上野魂以免捣乱)。 D.孝女执草龙(俗称火把,以稻草捆束,长数尺,先端焚烧生烟)为照明引路(古昔用火把以防野兽,相沿而来)。 E.女婿、孙婿执铭旌(书死者衔名白长旗)。 F.洗路(弄铙钹)。 G.吉大门灯(书家姓之大灯笼)。 H.挽联挽幛、花环、艺阁、化装队、乐队等。 I.大鼓亭。 J.香亭。 K.子孙亭。 L.纸轿(涂纸轿,子孙扛)。 M.司公(道僧)。 N.灵柩,孝男扶棺而行。 O.大孙轿(又称魂轿)。 P.执幢幡。 Q.孝眷,女眷则由一男人用白长布条曳引,执布条一路哀哭而行,以免分静。 R.最后为执拂(送葬)来宾。 S.送葬者,亲戚幼辈头绑白布,平辈左手绑白布,长辈白布绑腰,外家白布绑半肩之分。至小段行程,丧子等即跪地向送葬来宾,拜谢并请止步。外家则送至门口止步。 十一、点主: 旧俗点主在墓地举行。俟灵柩安放墓前,即请官人或学者为点主官(通常道僧代行)行点主。将灵牌上神主之主字上面一点从缺,仿如王字。孝男背神主面向东,跪于地上。点主管执新笔,沾雄鸡冠鲜血(今则改为沾朱墨),随道僧高唱吉语,点「王」为「主」后,向东或墓后掷弃笔。再执新笔蘸墨点黑.即点主告成。孝眷即匍匐叩谢点主官,黑墨笔携回。点主吉语如下:「我今握笔对天庭,二十四山作圣灵,孔子赐我文章笔,万事由我能作成。点天天清,点地地灵,点人人长生,点主主有灵,点斤斤会拿,点脚脚会行。点上添来一点红,代子孙成富翁。王字头上加一点,子孙兴旺万年享。一笔举起指东方,孝眷人等大吉昌。王字头上加一点,世代荣华万万年。一笔举起指上天,孝门富贵子孙贤,点得房房生贵子,富贵荣华享无疆」。 十二、安葬: 良辰至,即收祀后土,将灵柩奉安入穴,俗称「落葬」。 (1)放栓:入穴前将棺木穿气孔,曰「放栓」,使尸体与地气相通。 (2)落葬:落葬之先,地理师(堪舆家)捧罗庚(罗盘)祷告,高唱:「手捧罗庚八卦神,盘古初开天地人,九天玄女阴阳法,曾传凡间杨救贫,南山石上凤凰飞,正是杨公安葬时,年通月利无忌,此日当开生龙口,紧来引进大封君太孺人。前面有山山拱秀,后面有屏镇龙基,前有朱人丁量,后是玄武镇明堂,左有青龙送财宝,右是白虎进田园,禄到山前人富贵,马到山后财丁旺,吾奉太上老君,进!」,即灵柩入穴,放正方位安棺。有时地理师嫌丧家红包薄,祷告吉语即从简,仅唱:「良辰吉日天地开,面前吉日凤凰来,前进葬,后得财,富贵即时来,进!」,寥寥几句,敷衍了事。 (3)撒五谷:埋罢,地理师高唱:「进好好,乎(给)汝子孙长古老」。嗣即孝券随道僧引导,绕墓三次。绕罢,再由地理师一面高唱吉语,一面将备于斗内心五谷、硬币、铁钉撒于墓上人吉语如下:「一撒东方甲乙木,代代子孙受天福。二撒西方庚计金,代代子孙出公卿。三撒南方丙丁火,代代子孙发家伙。四撒北方壬癸水,代代子孙富贵随。五撒中央戊已土,代代子孙寿彭祖。现在五谷撒落土,代代子孙出大官虎。五奉九天玄女勒!」。撒五谷后取墓土一块放入斗灸嗣即道僧斗内五谷丰登,财丁兴旺,家业腾达。分五谷吉语如下:「一要人丁千万口。二要财宝尽丰盈。三要子孙当量盛。四要头好聪颖。五要登科会趁早。六要牛马结成群。七要南北山府库。八要寿命真永长。九要家财石崇富。十要富贵永无疆。五谷平分,百子千孙。 (4)返主:分罢五谷,神主放入斗内,与斗久留存少许五谷等,由长孙「魂轿」携回,称「返主」。安葬仪式毕返家后,丧家备餐请道却、抬棺工人或其他工作人员。旧时餐用猪肉都切成三角形,别于平时心切法,故俗称「吃三角肉」则有参与丧式之意。而券则菜肴放置于监湖(簸箕),蹲于地上用餐,以表孝道。 丧仪完结,出嫁女儿及亲戚归家时,丧家须送发粿(含意居达)。桶箍(含意阖家园圆)、菜(台语与久音同,含意长寿)等物贴上红纸,带回家以讨吉利。而丧家不得打招呼,如请其再来等(因丧事不可再)。 十三、做功德: 它葬后搭棚设坛,长孙女执伞遮盖桌上魂帛,面向坛坐于坛前,请司公(道僧)诵经做法事,俗称「做司」。本以死者之名施功德,以赎生前罪孽,而借佛力早往生西方极乐世界。惟所做法事,不只「开魂路」、「做功德」等,且杂有走赦马(司公数人,手执纸马、纸人作追逐游戏)、弄铙(以铙钹作各种演技)、挑经(一司公挑经卷,作难分难舍状过奈河桥,使孝眷悲悯而掷钱施舍)、放焰口(口火吐火)等杂技表演。故古时有一谐联曰:「孝子报亲恩,无工无不可。儒生从道教,其然其岂然」,识者所不以为然也。 十四、围库钱: 做司后,孝眷围绕烧冥纸及纸制库官库吏,曰「围库钱」。因恐被别家亡魂劫掠,故围守库钱也。俗信库钱可付托死者,转交与早先亡故之亲属,称「寄库」,故多烧而不与子媳参加围烧,恐被亡故家属冒收也。 十五、安灵: 返主拜忏后设灵桌,上置魂身(仿死者纸像)、魂帛,两帝置桌头娴(纸制仆婢各一),魂帛前置香炉、灵烛、油灯等物件,桌旁放幢幡,称「灵」或「安灵」。富者雇「糊纸匠」设富丽孝堂,俗称「结灵坛」。灵位于除灵时撤除,灵桌往昔多弃于效外。 (1)孝饭:自灵时起,每日早晚于前供饭(饭上插箸一双,菜汤一碗)及洗脸盆、毛巾,称「拜孝饭」,祭拜烧冥纸。拜孝饭时女眷须于灵前哀哭,曰「叫起叫困」一直至除灵止。 (2)做七:死后每隔七日,做七一次,称「做七」。做七应备牲醴菜肴奠祭。倘遇农历初七、十七、二十七,称「撞七」,提前一日半夜做七。死后第七日称第七日称「头七」,俗以死者此日始知己死,亡灵将归宅哀哭,故于午夜后即哀哭致祭至中午,前延请道僧诵经,开魂路,举行法忏。二、四、六七为小七,奠祭从简。三七为「查某子(女儿)七」应早出嫁女儿奠祭,仍请道僧诵经做功德,仪式隆重。五七为「查某孙仔(姪女)七」或称「亲房七」由族亲致祭。七七为尾七,仍请道僧法忏奠祭。 做七除上寿者照七七四十九日为尾七外,未上寿者即俗所谓「死人快过日」,一般多自二七起短为六日,因此实则做尾七为第四十三日。 十六、除灵: 俗于死后一百日前后,择吉日举行奠祭,称「做百日」。饭肴须稍为丰盛,并请道房屋与「魂身」一并焚人供死者居住。古俗力有除灵次日,孝妇除孝服,理发沐浴换素衣,至寺庙行香后,始可回娘家省亲,曰「行圆」,孝男亦于除灵后始可理发。俗信百日久为不净之身,大吉祥颇受禁忌。除灵后即早「精孝」换为「幼孝」,称「换孝」。 十七、作对年: 死后一周年祭,俗称「做对年」。死者始合祀于祖先牌位,称「合炉」,并即「脱孝」。在带孝期内,丧家年节不作粿粽之类,由亲戚馈赠。                                        (摘录自「民雄乡志」)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提供  
115    (자유시) 지구는 생명을 연수하는 무대. 댓글:  조회:4005  추천:0  2012-08-04
지구는 생명을 연수하는 무대.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관찰하여 본다.) 성원 지음 2012-03-28                 사람이 지구에 오게 된것은 우주의 한가닥 정기가 지구에서 인생을 연수하기 위하여 잠깐 들린 것이랍니다.    연수과제가 단순한 사람은 며칠 과정만 마치고 돌아가고, 연수과제 변통이 어려운 사람은 어렵게 살다가 돌아가지만,   연수과제 변통이 잘 되는 사람은 오랜세월을 건강하게 잘 살면서, 파란만장부터 부귀영화까지 하나하나 겪어 보고 돌아 갑니다.   사람들은 부모로 부터 생명을 가지면서 지구와 어길수 없는 계약이 체결됩니다: 수명이 끝나면 곧 우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지구에서 장생불로해서는 절때 안된다고, 지구의 그 무엇도 가지고 가서는 안되다고.   사람들이 생명을 가진 후에는 재능도 지식도 배웁니다, 우정도 사랑도 배웁니다, 책임도 공헌도 배웁니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도 낳아 키웁니다, 돈도 벌고, 재부도 모읍니다. 인생은 대체로 이렇게 연수되는 것이죠.   인생을 연수하는 과정에서 탐욕도 생깁니다, 질투도 생깁니다, 두려움도 생깁니다, 증오도 생깁니다.   이런것들은 불량한 독소들입니다. 생명의 소질을 엄중히 떨어뜨리죠. 이런 독소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해야만 성공적인 생명을 연수할수 있습니다.   인생이 끝나게 되면 세월계약에 따라서 지구에서 얻었던 모든것을 바칩니다. 재부도 재능도 바칩니다, 우정도 사랑도 바칩니다, 신체도 생명까지도 모두 바칩니다, 사람은 결국 오던때의 그대로 다시 되여 정기만 남아서 우주로 돌아 갑니다.   정기는 우주에 돌아 가면서 더욱 고급 정기로 승화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은하구역에 가서 다른 존재형식을 연수 합니다. 이렇게 무한히 연수를 다닙니다. 밤 하늘에 반짝이는 저 별들과 함께.
114    (론문) 청명절에 관한 론문 11편--미상 댓글:  조회:8298  추천:0  2012-08-03
关于清明节的论文11篇 1、远离农耕时代 我们为什么还要过清明节? 核心提示:清明节是我国民间重要的传统节日,与古代的农业生产紧密相连,而当我们告别农耕社会奔赴工业社会之后,清明节还是否适合现代社会的发展需要呢?不仅限于清明节,多年来传统节日的味道就已越来越淡,“节日”的概念无意中被“假日”所置换,2005年圣诞节前后又冒出“保卫春节”一类的盛世危言,那么这些传统节日究竟与现代社会矛盾还是仍然有传承的必要--过or不过(清明节)已经成为现代人的一个问题。 传统节日作为我国民俗文化的重要内容,大家并不陌生,它主要是指与天时、物候的周期性转换相适应,在人们的社会生活中约定俗成的、具有某种风俗活动内容的特定节日。中国传统节日以它特有的内涵陪伴我们一代又一代人走过无数个春秋冬夏,同时也在我们心底形成了一个特殊的情结。但是随着社会的发展,这些传统的东西被越来越多的人视为落伍,而圣诞节、情人节等“洋节”则因其时尚和新奇受到人们的普遍追逐。这种现象的产生是颇为耐人寻味的。中国传统节日的历史与现状究竟是个什么样子?它们具有何种魅力?又为何遭到冷落?这些问题很值得我们去细加揣摩。因为正确地认识节日文化现象,对于发挥传统节日的社会功能,弘扬民族优秀文化,增强民族凝聚力,有着十分重要的现实意义。 现代人究竟过不过清明节 这是一个问题 清明节是我国民间重要的传统节日,是重要的八个节日:上元、清明、立夏、端午、中元、中秋、冬至和除夕之一。一般是在公历的四月五日,但其节期很长,有十日前八日后及十日前十日后两种说法,这近二十天内均属清明节。 清明节的起源,据传始于古代帝王将相“墓祭”之礼,后来民间亦相仿效,于此日祭祖扫墓,历代沿袭而成为中华民族一种固定的风俗。本来,寒食节与清明节是两个不同的节日,到了唐朝,将祭拜扫墓的日子定为寒食节。冬至后一百零五天谓之寒食,从前这天禁火,冷食,故又称“冷节”、“禁烟节”。民间传说寒食是为了纪念春秋时的介子推被火焚于绵山,晋文公下令禁火。介子推是山西人,所以冷食习俗在山西首先流行。旧时寒食断火,次日宫中有钻木取新火的仪式,民间也多以柳条互相乞取新火。 基于清明节的传统,有很多人就提出了各种各样的观点,指出传统节日清明节与现代社会的种种矛盾,典型的观点列举如下: 一、就来源而言,清明节始于古代帝王将相的“墓祭”之礼,并不是像我国另两大传统节日春节和端午节般发自民间。究其本质,清明节不过是当官为政者的一场奢侈作秀,其原始的意义压根不是为了纪念祖先,而是在特定的社会环境和落后的科学条件下,人们为追求心理平衡而进行的一种迷信活动。时至当下,清明节的思想和内涵依然保留着它的封建迷信本质,而这在人类文明高度发达、以马克思主义哲学武装国人头脑的今天,无疑是绝不可取的。 二、由于清明节的封建迷信本质使然,这使得这一所谓节日很容易变相演绎成一种“光宗耀祖”的仪式,不少为富不仁者贪赃枉法者岂能放过如此这般美好“荣归故里”、“衣锦还乡”的良机,不大摆筵席铺张浪费一番简直对不起早已被腐朽的列祖列宗哪!自从这几年清明节成为“国假”以来,张一一先生亲眼目睹攀比之风日盛,谁家的坟墓气派,谁家墓前放的鞭炮多、烧的“房子”大,甚而至于还有焚烧名贵烟酒的……清明节赫然成一场不折不扣的“烧钱秀”,而我劳动人民的疾苦,在清明节蔚为壮观的鞭炮声和火光中是如此卑微。 三、清明节盛行导致各种交通安全隐患。占道销售冥币,祭品摊点以及祭扫活动所导致的影响市容、交通拥堵、污染环境、破坏道路和绿地的问题不时发生,市区各主要街道十字路口及沿街公共绿地、广场周边的安全隐患和环境卫生得到严峻考验,极大的加重了城管人员和环卫工人的工作量。 四、将以汉文化为主要背景的清明节以“国假”形式强加给各少数民族,是对他们生活习惯的极大不尊重,有伤害他们民族感情、强奸他们民族习俗的嫌疑。 五、清明节地位的提高使“风水”等唯心主义思想抬头,助长了在人民群众中弘扬封建迷信的不良风气,不利于我国正如火如荼举行的思想道德文化建设。 现代社会传统节日味道越来越淡 不仅仅限于清明节,多年来人们就一直在感慨传统节日的味道越来越淡,而当“节日”的概念被“假日”所置换以后,节日经济以及由此被挑起的民众度假消费狂潮便成为最为壮阔的时代景观。节日观上的“政治正确”常常把我们的思维引向民族救亡法庭上了无新意的正义判词,似乎本土节日的式微都是外来洋节搞的鬼,于是,有了2005年圣诞节前后冒出来的“保卫春节”一类的盛世危言。关于本土民族文化价值应该如何保护的问题,人们已经争论了至少100年,而且还将继续在同一个层面延续下去,这遮蔽了问题的要害。 事实上,无论是在中国还是在欧洲,几乎所有的重要传统节日都面临着很大危机。作为文化身份认同仪式的节日,都打上了太多全球化时代的商业烙印。上世纪90年代,包括法国、丹麦等在内的欧洲国家就对以美国为代表的全球化时代的消费文化的渗透伤透脑筋,并试图以弘扬本土文化价值来加以抵御——结果如大家所见,收效甚微。 我们的传统节日大都与古代的农业生产紧密相连,当我们告别农耕社会奔赴工业社会之后,传统节日在工业大生产时代功能开始式微,西学东进,西节也迅速在这片土地上枝叶繁茂起来,甚至有喧宾夺主之势头!圣诞节、情人节、复活节、万圣节、感恩节似乎已经成了光辉的“中国节”,商家的精明造势加上年轻一代的盲目追随则推波助澜——传统节日渐行渐远,西方节日大行其道。 西方节日来势凶猛,但硬要说它们像当年的坚船利炮那么可怕或许有点夸大其词。西方世界的节庆文化虽然在基督教诞生之前就开始萌芽,其真正壮大则是在基督教君临天下之后。自利玛窦于万历十年(公元1582年)利用儒学经典在中国传播圣经算起,基督教来中国已经四个多世纪了。 相比之下,中国传统节日却没有得到有力保护。1949年以后,大多数节日都被视为封建残余而废除,幸存下来的也只有春节、端午和中秋,其中只有春节被列入了法定节假日。1949年以来我们的全民放假日只有7天,直至1999年国务院发布《全国节及纪念日放假办法》才增至10天。这样的水平与中国宋代的69天、日本的15天、韩国的16天、澳门的22天和美国的23天相比,明显过于低下。传统节日的被贬与洋人节日的嚣张构成了这个时代最戏剧化的景象。 远离农耕时代 现代社会还需要传统节日吗? 出生在20多年之前的人还依稀记得每天翻页的老皇历上详细标注着的时令和节日的日期。翻开当下的很多日历,传统节日只剩下了春节。中秋、元宵花灯、清明祭祖、端午悼念、七夕乞巧、重阳敬老、上巳(三月三日)、夏至、中元、冬至、腊八、祭灶等重要的节日都从日历上消逝了。同时消逝的是农业祭祀、祖先崇拜、神灵崇拜、驱邪禳灾等特殊仪式。那些有着上千年辉煌和浪漫的仪式,后人难道只能在古籍中体验? 不能否认传统节日如今确实存在水土不服的成分,但如若将之视为敝屣立刻投入洋节的怀抱无异于挥刀自宫。节日不仅仅是日常生活的调剂,更是维持民族认同感的纽带。有趣但也让人不爽的是,联合国教科文组织的世界教师节、美国的教师节、中国台湾和香港的教师节,都是定在孔子诞辰日,即9月28日,我们自己却有意回避这一天。 为什么洋节大行其道而传统节日冷冷清清?学者们认为这是文化自轻和自我殖民。近代历史留给国人的不止是无尽怨怒,还有根深蒂固的自卑。落后与挨打成了人们对近代历史的习惯性总结,麻木自卑甚至憎恨因此成了大多数人对待自身文化的态度。 人类本身只是进化树枝上一个偶然分杈,人类历史背后的如铁规律不过是人类中心论调支配下的一种癖好,现代化进程也不可能是人类历史上无法避免的归宿,更不可能成为解救人类的“上帝之城”,相反现代化进程所具有的侵略性对人类“文化生态”的打击却可能是毁灭性的。在这个看上去有点在劫难逃的境遇中,无论是中国传统节日,还是外来的各种洋节,其实都被抽空了,成为徒有其表的摆设而变了味道。比如圣诞节到了我们这里也就是一个消费日,或者时尚标签,不至于对中国传统节日造成多大的威胁。真正的危险反而来自我们自身,像中秋节这样温情的节日,却成为月饼商人炫技卖乖的秀场和无良政客们腐败和投机钻营的通道。 费孝通曾经提出作为一个世界大国和文明古国,中国应有这样的文化胸怀和文化志向:“各美其美,美人之美,美美与共,天下大同”。这样的理想同样可以用来表达我们对待节日的态度,不卑不亢。在文化认同感严重缺乏的今天,不是变着法儿打着节的旗号来赚钱来消费,而是带着虔敬之心认认真真过好我们自己的传统节日,这或许才是我们的本分。     2、清明节与现代社会的矛盾:农耕节气在工业时代的末路 核心提示:清明最初是个春天节气而非节日,在二千五百多年前的周代,清明是一个很重要的节气,清明一到,气温升高,正是春耕、春种的大好时节,故有"清明前后,种瓜种豆""植树造林,莫过清明"的农谚。农耕社会的基本特征是自足的自然经济,具有狭隘的地方性,总不能彻底改变各个民族和地区之间的闭关自守的状态。作为节气的清明节与古代的农业生产紧密相连,当我们告别农耕社会奔赴工业社会之后,传统节日在工业大生产时代功能开始式微,工业时代与农耕节气的矛盾重重,似乎农业节气与城市里的现代人已经渐行渐远。 专家称清明最初是个春天节气而非节日,在二千五百多年前的周代,清明是一个很重要的节气,清明一到,气温升高,正是春耕、春种的大好时节,故有“清明前后,种瓜种豆”“植树造林,莫过清明”的农谚。 中国古代利用土圭实测日晷,将每年日影最长定为“日至”(又称日长至、长至、冬至),日影最短为“日短至”(又称短至、夏至)。在春秋两季各有一天的昼夜时间长短相等,便定为“春分”和“秋分”。在商朝时只有四个节气,到了周朝时发展到了八个,到秦汉年间,二十四节气已完全确立。公元前104年,由邓平等制定的《太初历》,正式把二十四节气订于历法,明确了二十四节气的天文位置。 二十四节气名称首见于《淮南子o天文训》,《史记·太史公自序》的“论六家要旨”中也有提到阴阳、四时、八位、十二度、二十四节气等概念。汉武帝时,落下闳将节气编入《太初历》之中,并规定无中气之月,定为上月的闰月。 二十四节气每一个分别相应于太阳在黄道上每运动15°所到达的一定位置。二十四节气又分为12个节气和12个中气,一一相间。二十四节气反映了太阳的周年视运动,所以在公历中它们的日期是相对固定的,上半年的节气在6日,中气在21日,下半年的节气在8日,中气在23日,二者前后不差1~2日。 农耕社会的基本特征是自足的自然经济,具有狭隘的地方性,彼此闭塞;农本经济可以发展到较高水平,包括手工业、商业、以及市集、城镇等等;各个以农为本的地区之间,也可以发生不同程度的交往,并且发生不同程度的影响,但是,只要还是以农为本,总不能彻底改变各个民族和地区之间的闭关自守的状态。 大约在一万年前,古代世界开始发生了农耕和畜牧。世界上先后出现了几个各具特色的农耕中心。最早的是西亚,在美索不达米亚周围地带,这里的居民最早驯化了野生麦类,发展为种植小麦、大麦的农耕中心。其次是包括中国在内的东亚、东南亚。中国的黄河流域培育了小麦。中国长江以南以至东南亚、印度恒河一带,则以培育水稻为特色。另外有一个种植玉米的中心是墨西哥。秘鲁可能是另一个种植玉米的中心。还有撒哈拉沙漠以南的非洲内陆,学界认为也可能也有独自发展起来的农耕中心。农耕中心形成以后,就缓慢地向它易于农耕的地方发展。经过几千年后,就欧亚大陆而言,中国由黄河至长江,印度由印度河至恒河,西亚、中亚由安那托尼亚至伊朗、阿富汗,欧洲由地中海沿岸,都先后成为农耕和半农耕地带。这个地带绵亘于亚欧大陆两端之间,形成一个偏南的长弧形。史学界称此长弧形地带为农耕世界。农耕最初是与畜牧结合的。在欧亚大陆,易于农耕的地带基本偏南,即从东到西形成了农耕世界。 农耕经济对中国文化的发展有重大影响。这种农耕经济能够创造出世界上最早的最先进的文明。但是,它使中国形成农业和家庭手工业相结合的自给自足的自然经济。男耕女织,规模小,分工简单,不用于商品交换。农耕文明,受封建思想束缚,闭关自守。中国古代并没有形成典型的农牧结合的经济结构。农耕文明发展的后期,越来越限制了中国社会的发展。 我们的传统节日大都与古代的农业生产紧密相连,当我们告别农耕社会奔赴工业社会之后,传统节日在工业大生产时代功能开始式微,工业时代与农耕节气的矛盾重重,似乎农业节气与城市里的现代人已经渐行渐远。另一方面,又在西学东进,西节也迅速在这片土地上枝叶繁茂起来,甚至有喧宾夺主之势头!圣诞节、情人节、复活节、万圣节、感恩节似乎已经成了光辉的“中国节”,商家的精明造势加上年轻一代的盲目追随则推波助澜--传统节日渐行渐远,西方节日大行其道。   3、清明节与现代社会矛盾:帝王宗教迷信强加给百姓习俗 核心提示:清明节始于古代帝王将相“墓祭”之礼,并不是像我国另两大传统节日春节和端午节般发自民间。对此,有学者就指出,清明节像是当官为政者的一场奢侈作秀,其原始的意义并不是为了纪念祖先,而是在特定的社会环境和落后的科学条件下,人们为追求心理平衡而进行的一种迷信活动。时至当下,清明节的思想和内涵依然保留着它的封建迷信本质,另外,将以汉文化为主要背景的清明节以“国假”形式强加给各少数民族,也在某种程度上是对他们生活习惯的极大不尊重,有伤害他们民族感情、强奸他们民族习俗的嫌疑。 传统节日是原始崇拜和宗教禁忌观念的存储器 从人类对自然的认识来看,农业文明起源于远古时期人们在采集、渔猎等生产活动中对自然物候的观察。自然因其与人类生息相关的天然优势而成为了苗族祖先崇拜的第一个对象。“这些自然现象和外界物体,同人一样能说会道,有喜怒哀乐,并有善恶之分。”崇拜导致了宗教禁忌观念的形成。这样的传统节日,直接体现了苗族先民的原始崇拜和宗教禁忌观念。 例如,黔东南地区的苗族为了祭祀“谷神”一年来给人们带来的好收成,而在每年稻谷将熟之际举行“吃新节”;为了祭祀祖先对自己一年生产生活的护佑,而在冬月的第一个卯日举行隆重的“苗年节”。贵阳地区的苗族为纪念传说中抗击官军在喷水池附近遇难的英雄亚努,而于每年农历四月初八到喷水池附近聚会,逐渐形成了“四月八”节日。 在上述节日中,把曾经为自己民族立下汗马功劳的神话英雄视为自己的保护神,是苗族先民在生产力相对落后的情况下,对自然界拟人化理解的结果,蕴涵了某种古朴的自然崇拜观念;而在“吃新节”前禁止人们在田里收谷子食用,则是“谷神”崇拜导致的禁忌观念的体现。由此来看,原始崇拜正是通过制度化了的节日祭祀仪式或禁忌,符号化为集体记忆的一部分。 清明节与现代社会的矛盾:帝王宗教迷信强奸百姓民族习俗 清明节的起源,据传始于古代帝王将相“墓祭”之礼,后来民间亦相仿效,于此日祭祖扫墓,历代沿袭而成为中华民族一种固定的风俗。本来,寒食节与清明节是两个不同的节日,到了唐朝,将祭拜扫墓的日子定为寒食节。冬至后一百零五天谓之寒食,从前这天禁火,冷食,故又称“冷节”、“禁烟节”。民间传说寒食是为了纪念春秋时的介子推被火焚于绵山,晋文公下令禁火。介子推是山西人,所以冷食习俗在山西首先流行。旧时寒食断火,次日宫中有钻木取新火的仪式,民间也多以柳条互相乞取新火。 对于,湖南学者张一一还有以下的观点仅供参考: 一、就来源而言,清明节始于古代帝王将相的“墓祭”之礼,并不是像我国另两大传统节日春节和端午节般发自民间。究其本质,清明节不过是当官为政者的一场奢侈作秀,其原始的意义压根不是为了纪念祖先,而是在特定的社会环境和落后的科学条件下,人们为追求心理平衡而进行的一种迷信活动。时至当下,清明节的思想和内涵依然保留着它的封建迷信本质,而这在人类文明高度发达、以马克思主义哲学武装国人头脑的今天,无疑是绝不可取的。 二、由于清明节的封建迷信本质使然,这使得这一所谓节日很容易变相演绎成一种“光宗耀祖”的仪式,不少为富不仁者贪赃枉法者岂能放过如此这般美好“荣归故里”、“衣锦还乡”的良机,不大摆筵席铺张浪费一番简直对不起早已被腐朽的列祖列宗哪!自从这几年清明节成为“国假”以来,张一一先生亲眼目睹攀比之风日盛,谁家的坟墓气派,谁家墓前放的鞭炮多、烧的“房子”大,甚而至于还有焚烧名贵烟酒的……清明节赫然成一场不折不扣的“烧钱秀”,而我劳动人民的疾苦,在清明节蔚为壮观的鞭炮声和火光中是如此卑微。 三、将以汉文化为主要背景的清明节以“国假”形式强加给各少数民族,是对他们生活习惯的极大不尊重,有伤害他们民族感情、强奸他们民族习俗的嫌疑。 四、清明节地位的提高使“风水”等唯心主义思想抬头,助长了在人民群众中弘扬封建迷信的不良风气,不利于我国正如火如荼举行的思想道德文化建设。 4、清明节与现代社会矛盾:郊游恋爱变平常 习俗渐消亡 核心提示:清明郊游之俗由来已久。先秦时期,史书记载践巨人迹而生弃(后稷),是最早的女子因郊游而生子,自然是男女欢会的结果。周代,郊游之俗“会男女”的内容被明文写进国家法典。到了春秋时期,郊游之俗已经与狂欢节无异了。魏晋时加进了文人的流觞和赋诗,唐宋又发展为踏青。而现代人工作忙碌、人际关系愈来愈疏离,郊游、恋爱也已经变成平常事,现在的中国人在清明节,除了扫墓祭拜,也并不清楚在这一天里还有插柳、蹴鞠、放风筝的风俗。对此,作家冯骥才说:当这些民俗消失殆尽时,清明节的内涵也将随之消亡。 清明,“节日”仍存在 “感觉”已消亡 “清明不只是扫墓祭拜,这一天里还有插柳、蹴鞠、放风筝的风俗”,知名作家、中国民间文艺家协会主席冯骥才在第三届中国清明(寒食)文化论坛上说,“当这些民俗消失殆尽时,清明节的内涵也将随之消亡。” 冯骥才表示,国家舍弃3天的GDP,而将清明节、端午节和中秋节增补为法定节日,不是件小事。他说,当前有不少公众特别是年轻人不了解节日文化内涵。因此在平常的节日里,生活也是空空荡荡、无事可做。久而久之,传统节日便退化为普通的假日,失去了原有的意义。 他举例,韩国的端午节至今仍保留着荡秋千等传统,日本的樱花节也必须穿和服。而中国人在清明节,除了扫墓祭拜,却并不清楚在这一天里还有插柳、蹴鞠、放风筝的风俗。“当这些民俗消失殆尽时,清明节的内涵也将随之消亡。” 冯骥才还表示,人民是节日遗产的携带者,更是节日的传承者。他说,节日建设不应只由政府、专家打造出来,而更需要符合节日的主题。“政府工作报告提出文化是一个民族的精神和灵魂。”因而他提议,促使全民对节日实现集体认同,需从下一代抓起。同时,节日文化应该更多地与地域文化特点相结合,使之切实浸润到孩子们的心灵深处,“让孩子们在节日中享受中华文化是我们的目标、更是我们的责任。否则,节日文化传承就是空谈”。 英国平均每十个人里面,就有一个感到寂寞,分析原因,现代人工作忙碌、人际关系愈来愈疏离是主要原因。网络可能让人封闭起来,不过即使不出门,它也可以让你和全世界联系,然而这样的联系,和面对面的互动,毕竟不同。调查显示,18到34岁的受访者,有将近六成经常、或是有时感觉寂寞。 清明郊游文化蕴涵三次演变:男女欢会,文人雅集,士女踏青 清明有郊游之俗。每至此日,多有青年男女结伴出行郊外,寻青山绿水之地纵情游玩,或藉草饮宴,或临流高歌,好不畅快!正如宋人吴惟信《苏堤清明即事》一诗所咏:“梨花风起正清明,游子寻春半出城。日暮笙歌收拾去,万株杨柳属流莺。” 其实,清明郊游之俗,早在先秦时期就已经有了。《商颂·玄鸟》说:“天命玄鸟,降而生商。”玄鸟即燕,契为殷人之祖。简狄吞玄鸟之卵而生契,虽是知其母而不知其父时代的一种传说,但燕子来时即仲春时节,古代有娀氏的女子简狄一行三人正浴于河中却是事实。这与周人女祖先姜嫄春天出行郊外,践巨人迹而生弃(后稷)的故事,同为史书所记载的两次最早的女子郊游。因郊游而生子,自然是男女欢会的结果。后世讳言,故以“吞卵”、“践迹”之说而为其蒙上一层神秘的色彩。但我们却可以据此说,这种以春天、水边和男女欢会为背景的郊游习俗,远在4000多年前即已经出现了。 到了周代,郊游之俗不但持续不衰,而且还得到了官方的正式承认,并将“会男女”的内容也明文写进了国家的法典。在仲春之月(即夏历的二月),不但民间恋爱自由,“奔者不禁”,而且政府又发布命令鼓励男女相会。而对于那些没有正当理由而不执行命令的,还要“罚之”。当然,这是指那些还没有成家的男女而言,若已有家室者,不在此例。但就是这样,郊游的场面也便空前地热闹起来了。在那桃花盛开、春水涣涣的溱河和洧河岸边,一群群的青年男女正手执香花香草,边互相调笑,边沿河游观。诗篇还用特写的镜头,记录了一对恋人的谈话。只听女的说:“到前面看看吧!”男的说:“已经看过了。”女的又说:“再看看吗!那洧河岸边,场面真是太盛大而又令人快乐了。”可以想见,春秋时期郑国的郊游之俗,实与后世的狂欢节差不多了。 到了汉代,随着礼教的加强,郊游之俗已由周代的“仲春之月”而缩减为三月上旬的第一个巳日,即所谓“上巳节”。而节日期间,无论帝王还是百姓,都要到水边洗濯,以除不祥,从而更突出了郊游中的祓禊(除去不祥,祈求福祐)习俗。据《汉书·外戚传》记载,汉武帝即曾“祓霸上”,《汉书》注引孟康曰:“祓,除也,于霸水上自祓除,今三月上巳祓禊也。”但即使是官方在有意往祈祷仪式方面引导,而民间的上巳日却仍然是男女欢会的佳节。自魏以后,郊游的日子又被固定在每年的三月三日。王羲之与谢安、孙绰等41人在会稽郡山阴县(治所在今浙江绍兴)西南的兰亭所进行的郊游,便是一次典型的文人雅集。王羲之《兰亭集序》记其盛况云:三月三日,王羲之与谢安、孙绰等41人在会稽郡山阴县(治所在今浙江绍兴)西南的兰亭所进行的郊游,便是一次典型的文人雅集。王羲之《兰亭集序》记其盛况云: 永和九年,岁在癸丑。暮春之初,会于会稽山阴之兰亭,修禊事也。群贤毕至,少长咸集。此地有崇山峻岭,茂林修竹;又有清流激湍,映带左右。引以为流觞曲水,列坐其次,虽无丝竹管弦之盛,一觞一咏,亦足以畅叙幽情。 虽然春天和水边的背景不变,而男女欢会的主题则变为文人的流觞和赋诗了。觞即酒杯,所谓“流觞”,即用耳杯盛酒置于环曲的水上,任其漂浮,杯子到了谁的面前,谁就饮酒赋诗。这便形成了以文人雅会为主要特征的魏晋郊游习俗。 唐宋以降,踏青又成为清明郊游的一大主题。陈元靓《岁时广记》引唐人《辇下岁时记》云:“三月上巳,有赐宴群臣,即在曲江。倾都人物,于江头禊饮踏青,豪家缚棚相接,至于杏园。”杜甫《丽人行》诗亦云:“三月三日天气新,长安水边多丽人。”其所谓水边,即长安城南的曲江池。池为汉武帝所造,至唐又大加兴建,遂成为一处水波荡漾、佳木如荫的郊游胜地。宋代郊游与唐代大致相似。孟元老《东京梦华录》记清明期间“都城人郊游”玩赏的情形说:“四野如市,往往就芳树之下,或园囿之间,罗列杯盘,互相劝酬。都城之歌儿舞女,遍满园亭。抵暮而归。……轿子即以杨柳杂花装簇顶上,四垂遮映。”而张择端《清明上河图》所描绘的,便是当时东京(今开封)的清明时节,人们扫墓、踏青归来的真实景象。 明、清迄今,清明郊游也仍以踏青为主。刘侗、于奕正《帝京景物略》(卷五)记明人郊游云:“水从玉泉来,三十里至桥下……岁清明,桃柳当候,岸草遍矣。都人踏青高粱桥,舆者则褰,骑者则弛,蹇驱徒步。既有挈携,至则棚蓆幕青,毡地藉草,骄妓劝优,和剧争巧。”清人钱琦《台湾竹枝词》亦云:“提壶挈榼坐平沙,恣意春游到日斜。”直到今天,那些清明郊游者不到日暮也是不肯回归的。所不同的是,今人郊游多半为男女结伴而行,于出行地的选择,也越来越倾向于清幽之处,在领略自然风光、感受春情春意的同时,又把郊游作为畅叙友情和爱情的大好时机了。 由男女欢会,而文人雅集,而士女踏青,这是清明郊游文化蕴涵的三次演变;由仲春、而上巳、而三月三、而清明节,则是清明郊游在时间上的逐渐固定。在这种演变中,清明郊游又同其它所有的文化习俗一样,经历了一个由原始自发到礼仪固定,最后又回到民间的过程。 5、“祭祖”是中国传统国教 祭奠死人为对活人产生意义 祭奠死人是为了对活人产生意义 中国自古就有祭拜先人的孝道传统,对于中国人“入土为安”的生死观,夏学銮教授认为清明祭奠对活着的人存在更大意义,“进行对后代孝道的教育;与家人有个团圆的机会,比如家庭成员不和睦的,看在先人的面也能稍微冰释前谦”。人们并不是真的相信去世的人还有知觉,能感受到我们的情意,而更多的是一种中华民族的孝道传统,所以祭奠死去的人是为了对活着的人产生更大的意义。 “敬天祭祖”是中华民族最重要的宗教传统 祭祖是由于祖先崇拜而产生的一种仪式。祖先崇拜是鬼神崇拜的发展,也是鬼神崇拜的一种形式。祖先崇拜和一般的鬼神崇拜不同的是它有长期固定的崇拜对象,并且与崇拜者有血缘关系。人们尊崇祖先的亡灵,定期举行祭祀,认为祖先的亡灵会保佑子孙后代,赐予他们幸福。后来人们又用这种民间信仰来维护宗法制度,因此,中国古代特别重视祖先崇拜。从商周开始,丧葬、祭祀便成为重要的礼仪系统。重丧,所以尽哀;重祭,所以致敬。中国古时的祭祖活动都是在宗庙里举行的,祭祀时所用的器具、摆设、祭者的服饰、仪仗与祭祀的程序,都依主祭人的身分等级及祭祀名目的不同而有着详细、严格的规定。祭祖成了维持统治秩序与道德关系的一种伦理手段,其目的在于增加整个社会的凝聚力,所谓「报本反始,民德归原也」。因而,祭祖以及由此而形户的一系列宗庙制度,就成了中国伦理文化的中心。 牟教授是这样评价这一宗教传统的重要性的:“研究中国中世纪的宗教而不研究传统的祭天祭祖祭社稷,就不只是部分的短缺,而是主导线索的丧失,其失误是根本性的。” 其实,只要我们粗略翻一下二十五史中的《礼志》或《礼乐志》,就会承认:在中国历史上,这一“敬天祭祖”宗教信仰的社会地位和所产生的影响要远远超过其它任何宗教。无论对皇帝、官员、还是对普通百姓来说,佛教、道教只是“业余爱好”,可以信也可以不信;但祭天地、祭宗庙、祭社稷等则是皇帝必须履行的政务,各级官员也都有明文规定的官祭对象和官祭制度,军民人等也不能不敬“天地君亲师”(民国后改为“天地国亲师”)、不能不祭祖。 西方人遇事时是祈祷“上帝保佑”;而中国人的传统则是祝告“上天”、“苍天”、“上苍”或“皇天”。如果遇到什么意外,西方人脱口而出的是“MyGod!”而大多数中国人脱口而出的则是“天哪!”“老天爷!”西方人得到什么福泽,总是说“感谢上帝”、“感谢主”;而中国人则习惯说“谢天谢地”。西方人总爱说“上帝的意旨”、“上帝的指引”;而中国人则是说“天意”、“天命”。 西方人举行婚礼是去教堂,由牧师代表神做见证;而中国人举行婚礼则是“一拜天地,二拜高堂(指父母双亲)”。西方人将去世称为“见上帝”;而中国人将去世称为“归天”。佛教传入后,中国人去世有时也说“归西”;但百姓平民去世可以说“归西”,而皇帝、大臣、重要人士去世还是要称“殡天”、“归天”。西方人的丧礼由牧师主持仪式;东南亚一些佛教国家的丧礼据讲是由僧侣主持。据《仪礼》,中国古代丧礼是由一种叫“祝”的人来主持。后来佛教传入后,中国人的丧礼也可以请僧道,但并非必定;而且僧道只管诵经、做法事,没有担任主持人的。 将这种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传统宗教称为“中国民间宗教(Chinesefolkreligion)”的确是太小瞧这一宗教传统了,因为“敬天祭祖”一直是各朝代皇家最重要的崇拜祭祀活动。有些西方著作将这种敬天祭祖活动放在“中国古代宗教(Chineseancientreligions)”的标题下进行叙述,这一名称还比较说得过去。如上所述,利玛窦也将这种宗教传统称为“古代的”宗教。 但“中国古代宗教(Chineseancientreligions)”这一名字会使人产生误解,以为这种宗教传统后来就消失了。但如我们所知,直到辛亥革命,这种“敬天祭祖”始终是举国上下最重要的宗教活动。还有的西方著作中将这种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称为“原初的基本的中国宗教(theoriginalbasicChinesereligion)”,感觉这一称呼与“中国古代宗教”相仿,有合理性,但也会给人以这种宗教后来消失了的错觉。 从世界范围看,像基督教、伊斯兰教、佛教那样有明确创始人、有特别入教仪式、有特别名字的宗教在数量上反倒是少数。大多数古代宗教都是没有明确创始人、没有特别入教仪式、没有特别名字、由该地区上古先民自发形成的“全民性宗教”;如果一定要命名的话,一般是用其国家或民族的名字来命名。例如,谁知道古代埃及宗教、古代希腊宗教、古代罗马宗教的创始人是谁?有什么入教仪式?叫什么特别的名字?都没有。如果一定要给个名字来称呼的话,一般是用其国家或民族的名字来命名,称之为“古埃及宗教”、“古希腊宗教”、“古罗马宗教”。犹太教、印度教也都是这种用其国家或民族的名字来命名的宗教。 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这一中国传统宗教也是这种没有明确创始人、没有特别入教仪式、没有特别名字、由中华上古先民自发形成的全民性宗教。如果一定要给个名字来称呼的话,那好像也应该用国家或民族的名字来命名,所以称之为“中国传统宗教(Chinesetraditionalreligion)”或“中国传统国教(Chinesetraditionalstatereligion)”似乎比较合适。如果仿照“印度教”“犹太教”的称呼,称之为“中国教”或“中华教”(China-ismorChinese-ism)似也均无不可。 当然,这一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由于与儒学“合作相处”时间最长、“交集”部分也很大,特别是与“上古儒学”的“交集”部分更大,所以如果将这一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称为“儒教”,人们也能理解。我们甚至可以认为“儒教”是这一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的“别名”。但应当明确,这一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与“儒学”并不完全是一回事;不能误解为只有“儒者”信奉,如前所述,源于中国本土的各家各派都没有不“敬天祭祖”的。 做一个也许并不很恰当的比喻:周树人一生用过很多笔名,直到38岁才用“鲁迅”这个名字。但由于他用“鲁迅”这个笔名时间最长、所发表的有影响的作品最多,所以“鲁迅”这个名字反倒比他的本名“周树人”更为人所知。但“鲁迅”这个名字并不代表周树人的全体、与周树人并不完全是一回事。“周树人”这个名字不仅比“鲁迅”更原本,而且涵盖范围也更广,因为周树人不仅仅用过“鲁迅”这个笔名,还用过很多其它的名字。 同理,儒学虽然与这一中国传统宗教“合作相处”时间最长,人们也可以习惯性地称这一中国传统宗教为“儒教”。但“儒教”这个名称并不能代表这一中国传统宗教全体,因为这一中国传统宗教要比“儒教”这一名称更本源、涵盖范围更广,而且这一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与儒学之间彼此都有一些并不“交集”的部分。 请本文作者与本栏目联系。 6、清明缅怀故人的至深精神是为做生死沟通 清明节不仅是一个传统节日,还应该是今天和未来的大众节日,应该强调其“保存记忆,沟通心灵”的功能。 近年来常听到这样的议论:现在的年轻人越来越爱过洋节日,却忘了我们的传统节日。又有人感叹,为什么洋节日可以过得热热闹闹,我们的传统节日“味”却越来越淡?其实,东方也好,西方也罢,任何节日都离不开它的宗旨和内容。圣诞等节日是宗教性的,所以只要这种宗族信仰存在,节日就会延续。世俗的节日则离不开具体的活动。如果那些活动吸引不了民众,或者无法再进行,这个节日就名存实亡,除非找到新的、有吸引力的活动。 从先秦发展到近代,清明节的主要活动是扫墓、祭祀、寒食、踏青等,其中最重要的还是生者与死者的沟通。先秦和秦汉时代,“视死如生”是人们的普遍观念,一般人都相信,人死了后还继续以另一种形式存在于地下或另一个世界。所以除了在安葬时为死者提供必要的“生活”基础外,还得有经常性的维护和补充。经过一个寒冬的冰霜雨雪,死者的居所需要维护、清扫和美化,这就是扫墓和祭祀的出发点。也正因如此,清明扫墓和祭祀,历来不限于自己的祖先或亲人,还包括民族共同的祖先和圣贤先烈。 清明节不是一年中唯一的祭祀,也不是最隆重、丰盛的祭祀,但清明是离死者最近的祭祀——一般都在墓地举行。所以除了祭祀的形式和物质部分外,还必然包括生者与死者之间的心灵沟通。在这过程中,个人、家族、人群、民族、国家的重大往事,必然得到一次次的回顾和追忆,对历史的记忆就这样形成和保存。就国家和知识阶层而言,历史可以通过书面记载或传统典籍加以保存。但对绝大多数并不具备文字记载的权力和能力的人来说,这样的记忆是他们传承历史的唯一途径。 在世界文明古国中,只有中国的历史和传统没有中断,一个重要的原因,就是中华民族无比珍视自己的历史,而其中的绝大多数人正是通过无数次与先人的心灵沟通,口耳相传地保存着对先人的记忆。例如,中华民族通过不断的迁徙使疆域得到扩展,文化得到传播,人口得到繁衍。但不管迁到哪里,移民的后裔都会追根寻源。直到今天,山西洪洞大槐树、湖广麻城孝感乡、江西瓦屑坝、苏州阊门外、南京杨柳巷等地还是亿万移民后裔祖先的圣地、心中的根。这些移民过程,正史中很少提及,它们能流传至今,就是靠一次次清明节扫墓和祭祀,将祖先筚路蓝缕的迁移、艰苦卓绝的开拓和种种嘉言懿行告诉子孙后代。这些记忆还随着人口的迁移,传播到海外的华人聚居区,遍布世界。 今天,多数国人不再相信死者存在于另一个世界,多数死者已实行火葬,甚至不再保留骨灰,不建坟墓。清明节的扫墓和祭祀的形式已发生很大的变化,但保存记忆和沟通心灵的功能不仅依然需要,而且应该不断加强。近年来,各地已经恢复或新设了不少祭典,但大多只注重形式,忽略了它们“保存记忆,沟通心灵”的功能。如果我们真的希望清明节不仅是一个传统节日,还应该是今天和未来的大众节日,那就得为保存记忆、沟通心灵创造相应的活动内容和形式。 (作者葛剑雄,复旦大学教授) 7、缅怀逝者保存共同记忆 清明节成家族团圆日 中新网杭州4月5日电(记者龚读法 实习生金斌)清明节是中国著名的传统节日之一,这一天的主要活动是扫墓、祭祀、寒食、踏青等。在这万物复苏、吐故纳新的时节里,缅怀祖先,祭奠亲人是中华民族的共同仪式,而借助清明这一特殊的日子,家族的成员在这一天聚首,分享回忆、交流感情。4月4日清明节,记者在杭州市区以及周边县市采访发现,在清明节,人们已不再单纯的表达对逝者的缅怀,更多了生者之间的交流与沟通。 4月4日一大早,家住杭州市桥西直街的王大妈便开始动手准备清明节的祭奠物品。“清明节之前,家里就已经准备今天要去给去世长辈扫扫墓的,孩子们都放假了,过一会儿就都会过来了。”王大妈一边准备着一些特色寒食,一边对记者说道,“平时大家都忙着工作,想聚一下都很难,不过清明节这一天意义重大,不用通知,每个人都会自发的放下手头的工作去看望自己的过世长辈,一家人也可以趁机好好地聚一聚了。”说话间,王大妈脸上显出满足的笑容。 据了解,杭州的许多市民在清明节这一天都不约而同地选择了一个家族的成员共同扫墓的形式。长辈原本就是属于一个家族里的所有人的长辈,大家共同前往祭奠,不但能够表达对逝者最大的尊重,对于这个家族来说,也是一个很好的交流沟通的机会。 在杭州半山公墓,一位手捧洁白雏菊的市民表达了自己对清明节的独到见解,“清明节主要是祭祀与踏青,但是它作为中国最重要的传统节日之一,清明节与除夕、中秋一样,也可以说是每一个家族大团圆的日子,在清明这一天,大家因为共同的记忆而聚集在一起,因为有共同的亲人而使得相互之间的亲情变得更加牢固。” 记者在采访中了解到,在清明节,杭州市民都会选择在上午出门扫墓踏青,祭奠先辈亲人之后,一家人便会好好团聚一番,那情景颇有些类似于除夕夜的大团圆。生者的团聚,给这个阴雨绵绵、思亲断肠的特殊时日增加了许多暖意。保存大家共同的记忆,并由此增加彼此之间的沟通,成为清明节大家的共同愿望。 8、清明关注“死”更赞美“生” 精神安顿是主要功能 核心提示:清明是一年之中万物最具生机的时节。也是人们外出、踏青、沐浴清新空气、享受自然情趣的时节。清明关注“死”,更加赞美“生”,清明的精神是将“生死并置”。清明时节更需要更多地关注人们的生活和生命——珍爱生活、珍爱生命。清明祭奠先祖、先烈,应当突出一个‘敬’字。对先祖要敬,对先烈要敬,对祖国要敬,对人民要敬。儒家学说,“修德之功,莫大于敬”。“敬”要敬天、敬地、敬祖、敬民、敬业、敬己。心存虔敬,行必谦恭;做人处事,谦虚谨慎。“满招损,谦受益”是普遍真理。   随着中国城市化的进程加快,现代化的快节奏、流动性强的生活方式也正被越来越多的人接受和适应。而与此相对应的是,春节、中秋、清明等许多传统节日的内涵也在逐渐变化,那么如何赋予传统节日新的内涵和活力,这将是保护中国文化遗产、维护和继承传统节日的重要课题。 就在清明将至的时候,北京市委宣传部主办了“清明节文化论坛”,大家共商现代化之下如何过好传统节日。专家们提出,可通过“家训堂”等途径传承家庭传统美德,让公众在清明节养成自省的习惯,利用清明踏青对孩子开展教育等。此外,在清明节植树、美化小区等亲近自然的做法,也适合城市居民的节日生活。还有专家建议,让节日出游比平时更有文化味儿。 传统节日与自然的和谐 传统节日往往不仅仅包含着社会文化的内涵,有时候还具有浓厚的人与自然和谐的内涵,中国社会科学院旅游研究中心副主任,北京联合大学教授刘德谦表示,研究这些节日会给我们新的启示,“清明节和中国许多传统节日一样,它的文化内涵是异常丰富的。它融合了中国的三个传统节日,即寒食、清明、上巳。这三个节日的来源和文化内涵并不雷同。比如‘上巳’,这个远古用洗浴来‘祓除不详’的‘修禊’的日子,后来渐渐地发展为了在水边休息娱乐的日子。这在春秋时代就是这样了。虽然它包容的活动很多,但是如果我们今天意识到在水边的环境才是它的核心所在,而不用‘戴柳’‘踏青’去误导民众,那么它就有可能摆脱旧时活动产生的生态负效应。如果我们又注意到了其诸多健身娱乐活动中的蹴鞠(被公认为现代足球的起源),有意去发扬它,也许能提升中国足球界旧貌换新颜的决心。” 清明关注“死”更赞美“生” 即将到来的清明节不仅是祭祖的日子,同样也是二十四节气之一,北京市哲学社会科学规划办公室副主任、研究员李建平表示,发挥节日本身所具有的内涵,更能让人悟到生活的美好。他说:“首先,清明节是祭祀日,其文化内涵是祭祖不忘祖,缅怀先人业绩,感谢先人的恩惠,核心是传递人类之情感。同时,清明还是中国农历二十四节气之一,是一年之中万物最具生机的时节。也是人们外出、踏青、沐浴清新空气、享受自然情趣的时节。清明关注‘死’,更加赞美‘生’。了解这样一个道理,我们在清明时节就不要异化祭扫活动,一味烧纸钱,奢侈大办,而是要更多地关注人们的生活和生命。特别要关心青少年,要倡导他们珍爱生活、珍爱生命。” 精神安顿是节日主要功能 文化部民族民间文艺发展中心主任李松认为,节日是以安顿社会精神为主要功能的时间节点,是全社会的,不应该落下任何一个人,尤其是清明节。李松还建议:“首先要明确节日是以精神安顿为主要目的的社会安排,不宜过分强调其中的经济因素。其次,通过不同层级政府部门对先烈、先贤祭奠的官方活动与民间传统活动的互动,强化国家意识、集体意识和价值观念、伦理道德的认同。其三,选择植树造林等公益事业与清明踏春的习俗结合。其四,遵循以人为本的服务理念,尽可能地为节日中广大民众的实际需求提供服务,如扫墓路上的交通、祭奠用品等。其五,利用现代科技手段和传媒,为新时期节日文化提供与时俱进的活动空间和文化平台,如网上祭奠等。此外,还要特别关注和尊重少数民族的文化传统。” 9、活着是一种修行 人生无常责任为大 核心提示:三毛曾说:“人生的聚散本来在乎一念之间,死只是进入另一层次的生命,聚散无常也是自然的现象,实在不需太过悲伤。”人说生命是初生的无知、少年的天真、青年的成熟、中年的练达、老年的愤世疾俗;人说生命是母亲的慈爱、父亲的严厉、爱人的柔情、朋友的关切,是世上一切情感的组合体,我们每个人来到了这个世间,短短数十载的光阴,我们又回到了天堂。生命,是一项随时可以终止的契约。生命,更是一个荒谬的玩笑,总是在最精彩时刻戛然而止,然后留下无数破碎片段,苦苦地折磨每一个活着的人。 以往我每次回乡下老家,儿时的几个伙伴都要上门来与我聊上一阵子,我也去他们家走走。这次“十一黄金周”回老家,我震惊不已:他们中一个遇车祸身亡,另一个染急病去世,还有一个患上不治之症!我顿觉生命的无常,产生对生命的敬畏之感。 死亡,本是一个残酷的字眼,而不到一年,竟有三个同龄人与我天人相隔,让人情何以堪! 生命是什么?人说生命是初生的无知、少年的天真、青年的成熟、中年的练达、老年的愤世疾俗;人说生命是母亲的慈爱、父亲的严厉、爱人的柔情、朋友的关切,是世上一切情感的组合体;人说生命是余晖衬夕阳、青松立峭壁、万里平沙落秋雁、三月阳春映白雪,是宝刀快马、金貂美酒、冷月孤歌的漂泊。 生命,又是一只无常的手,翻过来又覆过去,让人瞬间直达云霄,瞬间跌入深渊。伴随着一阵哭声,我们每个人来到了这个世间,短短数十载的光阴,我们又回到了天堂,这就是人生,两点一线式的生命历程。有多少人结伴而行?有多少人印证了“不求同年同月同日生,只愿同年同月同日死”? 生命,还是一项随时可以终止的契约,撕毁太过简单。可以和谁相约一生,携手走到尽头?终究,还是聚散无常。没有谁能知道下一秒会发生什么,没有谁能肯定自己还能抓紧些什么,没有谁能预言生命的明天是个什么模样,没有谁能知晓上天会突然带来什么带走什么。我们,只能小心翼翼。 生命,更是一个荒谬的玩笑,总是在最精彩时刻戛然而止,然后留下无数破碎片段,苦苦地折磨每一个活着的人。三毛说:“其实人生的聚散本来在乎一念之间,死只是进入另一层次的生命,如果这么想,聚散无常也是自然的现象,实在不需太过悲伤。”真的可以这么想么?真的可以这么做么?当你在亲身经历那种生离死别的时候,真的可以这么豁达淡然么?怎么可能! 自古以来,女子的生命似乎特别轻贱。女子的生命是貂婵轻舞的团扇,是昭君出塞的风沙,是杨玉环抛上树的白绸,是西子坠湖时的涟漪,是绿珠溅落的鲜血,是黛玉葬花的悲吟,是窦娥赴刑场的怒火,是白娘子被压塔下的凄苦——红颜薄命啊! 那么男儿呢?“对酒当歌,人生几何。譬如朝露,去日苦多……”曹丞相横槊赋诗慨叹人生苦短。列御寇御风而行,超然洒脱;庄周不被世俗所累,归隐田园;李白淡薄名利,留下千古佳话……反观周兴、来俊臣之辈贪图钱财,使自己一生不得安宁;卫青曾与霍去病抵抗匈奴立下大功,却为了功名害死李广,自己也忧郁而终。生命应得到善待,但凡追名逐利而不折手段者,其生命也将暗淡无光。 一次聚众讲道时,佛祖问众弟子:“人生有多长?”有个弟子回答:“50年。”佛祖说:“不对。”弟子又说:“40年。”“30年。”“20年”……答案越来越小,最后有个弟子甚至回答:“一个小时。”佛祖依然笑着摇了摇头。有个弟子忽然茅塞顿开,说道:“人生难道只在一呼吸间?”佛祖听了,笑着点点头。 不错,人的生命就在一呼吸间,即使长命百岁,也无非是一呼一吸的多次重复。“人生七十古来稀,三分之一要睡去……”朱自清先生曾在《匆匆》中为我们算这一笔账时,告诫青年们要珍时、惜时。鲁迅先生也曾当头棒喝青年们:“时间就是生命。”虽然都欣赏“生命诚可贵,爱情价更高,若为自由故,二者皆可抛”的人生哲学,但生命乃是人们最初的珍爱。惟有生命的存在,才有可能言及其它。 卡缪认为:“如果有罪,不是因为你对生命感到绝望,而是因为你把希望寄托在来世,放弃今生无可取代的美好。”表面上他的主张正好与宗教家们唱反调,实际是他看到了生命的短暂和无常,呼吁世人要善待生命,要利用这难得的人生去寻找自心的清净,还心灵一片宁静的天地。因为有生就有死,死亡等归于零,“生往何来,死往何去”,人死了,就不存在了,但人活着,就存在着,并非一无所有。“众生皆有佛性”,只要还活着就有了悟的机缘,就有显现佛性的机率,就有弘扬真、善、美的可能。 契诃夫说过:“要是已经活过来的那段人生只是个草稿,另有一段誊写的人生该有多好啊!”台湾作家余光中也曾有“假如我有九条命就好了”的慨叹,他希望用第九条命从从容容的过日子,看花开花谢,人来人往,并不特别追求什么,也不被“截止日期”所追迫。其实我们又何尝不是时常产生如此的念头?但这只是我们不切实际的想法,充其量也只是个不能实现的梦想而已。正如著名作家蒋丹所言:“人来世上是个偶然,而走向死亡是个必然。” 人生短短几十年,何其短暂又是何其宝贵啊!“逝者如斯夫,不舍昼夜。”大江东去,浪淘尽千古人物,有名的、无名的,都曾在我们所站立的地方生活过,而今却化为一抔黄土。于是又想起保尔·柯察金的那段名言:“人,最宝贵的是生命,生命对于每个人只有一次,这仅有的一次生命应该怎样度过呢……”谁都知道生命的可贵,但是又有多少人真正懂得去善待生命呢? 生活在这个物欲横流的时代,我们每天都在忙着学习、工作、考试、应酬……还有必不可少的吃喝拉撒睡玩。我们每天都生活在快节奏当中,于是不管事实如何,“忙”成了我们生活中最经常的慨叹与借口。我们没有时间去思考。也许只有当我们身体有恙时,我们才会意识到生命是如此的脆弱。 “生命不仅可以用年月计算,有时事件也是最好的日历。”谁都知道生命是最宝贵的,但很少有人懂得善待生命。除了生与死能引起几声欢呼、几阵痛哭外,健康生活在世上的人很少会想起生命,认为拥有生命是一种幸福。 “你活在世上幸福吗?”我问。“幸福?我还赶不上百万富翁的一半儿呢!”有人如是答。于是在他们的眼里,生命就是手中的巨额支票、股市上跳跃的荧光屏、餐桌上的珍馐佳肴、豪华的别墅加豪华的轿车。 打开报纸,触目惊心的关于生命的消息:洪灾、绝症、饥饿、暴虐、谋杀、事故……满眼是苦苦挣扎的生命。放下报纸,又整个人投在紧张的生活中,把那些令人心悸的事抛在脑后:“想那些干嘛?我总要活嘛。”我们只顾埋头生活,忘记了生命的存在。我们挤在熙熙攘攘的人群中,行走在车水马龙的街上,毫不在意多少生与死曾经或也许发生在身旁。 生命原是一个危险的旅程,当我们跨出生的一步,也同时迈向死亡。意外、疾病,随时都可能夺去我们的生命,我们又有什么理由不使这仅有的一次生命变得绚丽呢?善待生命,生命就将幻化为七色燃烧的彩虹。 或许,在现实生活中,我们遇到了太多的虚伪、脆弱、冷漠、麻木、颓废……使我们怀疑生命的真谛,会琢磨怎么样才能使生命绽放绚丽的光芒,怎么样才能寻找生活的多姿多彩,坚定“黄沙百战穿金甲,不破楼兰终不还”的信念,加深“月是故乡明,露从今夜白”的思念,执着地追逐自己那个美丽的梦。然而,在我们跋涉了一段人生之路后,驻足回首,会感到一种心灵的疲惫与迷茫,“衣带渐宽终不悔,为伊消得人憔悴”!如何才能走出这无尽的迷宫?山重水复,柳暗花明,我顿悟到,一个睿智的人绝不会因为路途的风险与坎坷而懈怠,放弃那本来美好的梦。这样,七尺男儿才能披荆斩棘,以更大的热情与毅力继续生命的旅途,完成我们生命的使命。 我想,每一个活着的人,都要时常地问自己:属于自己的生命还有多少呢?当我们不得不承受离别的痛苦,不要流泪,要笑对生命的无常。因为在另一个世界里,你的亲人在默默地看着你,他们希望看到的是一个坚强、好好活下去的你。 不要等到生命的最后一刻才感悟出生命的美好。在拥有生命的每一天里,学会善待生命,善待身边的每一个人,每一件事,每一份情感。 10、死亡是人类的节日 落叶归根死于安乐 核心提示:史铁生《我与地坛》中说:“死是一件无须乎着急去做的事,是一件无论怎样耽搁也不会错过的事,是人类的一个节日。”席慕蓉《幕落的原因》中写:“在掌声最热烈的时候/舞者悠然而止/在似乎最不该结束的时候/我决定谢幕……上帝需要有足够的智慧/来决定/人生幕落的时间。”人们害怕死亡不是缘于害怕“死”的本能,而是因于喜欢“生”的习性。一是“怕生”。每个小孩都怕见生人,成人不仅依然怕见“生人”,而且怕见“生事”。二是“有话”。朋友相聚,有话要说,依依不舍。 在2010年最后一天黎明时分,史铁生离开了人世。他的《我与地坛》第一次指引我思考生存和死亡的意义。“死是一件无须乎着急去做的事,是一件无论怎样耽搁也不会错过的事,是人类的一个节日。” 死亡是人的各种可能性中唯一必须由自己承担,而且必须实现的可能性。在日常生活状态中,我们避而不谈自己的死亡,是因为我们畏惧死亡。一旦我们明确了死亡的不可逃避,必须自己担当,死亡的可能性就直接剥离了人与他人、与社会的关联,使之成为自己最本己的事情。但这也同时催生出“人的存在的意义”问题,人的生存只有在生活世界中才能赢获荣光与尊严。 在一项调查中,73.9%认为追求生命质量是实现生命价值的重要目标,人应当维护生命尊严或者应该活得有质量,26.1%认为生存是最基本的人权,保障个人生存是无条件的。作为人的生命过程中的死亡阶段的一种良好状况和达到这种良好状况的方法,安乐死不是一种人工死因或一种致死手段,其目的在于避免死亡的痛苦和折磨,改变死亡前的自我感觉状态,维护死亡时的尊严。 关于生死,许多人在孩提时代都一定朦胧地想过,因为每个“幼稚”的人都渴望:我能永远活下去就好了。孩提时代的人生,刚刚尝到人生的甜头,不谙世事,无忧无虑,在心里对世界充满着好奇和求生的欲望。可是人长大了,以为死是人生理所当然的事情,除了怕死,就不再去思考“死”的问题;二十岁以后再去思考“死”的人,就多半不是生活中的常人。所以思考“死”问题的只有两种人:极幼稚和极成熟的人。 人为什么会死啊?我的回答是:因为“人”注定要死,任何人对“死”都没有回天之力。那么“死”是谁“注定”的呢?读过我的人生理论的人一定会推测出我的回答:“死”是超人力量决定的。其实这个回答没有新意,在人类最早的智慧中就已经发现“死”的定数,如产生于古巴比伦的人类第一部史诗《吉尔伽美什》就说过:“当神造了人,就把死亡给了人类。”那为什么“神”这个超人力量要安排每个人都有“死”的命运呢?这是因为超人力量给人生安排的内容是折腾,而生活循环和生死循环是折腾展开的重要形式。人生可“玩”的宇宙内容是恒定的,而人生折腾必须折腾出新鲜花样,人才会对生活有兴趣并充满热爱之情。可是人生几十年,几十年就看完看透了,几十年就玩腻了,如果不死,那干什么啊?如果不死,拿200年来给人活的话,那么每个人都会活得极其不耐烦,都要努力地自寻死路。我家乡老百姓骂那些患有“折腾癖”的人时爱说一句:“你活得不耐烦了是吗?”的确有不少人是活得很不耐烦了,活三十年、四十年,就已经活得很不耐烦了,怎么还能永远活下去啊? 超人力量的造物能力有一种局限,就是送给人的“玩物”始终是有限的。如果超人力量规定每个人都活一百岁以上,那么每个人都会因为“玩尽一切”而成为无聊之人和疯子,然后疯疯癫癫地玩到130岁、150岁或200岁以后,通通都会迫不及待地自寻死路。他们这时对“死”的渴望,就像年轻时对“生”的渴望一样心切。这时如果他们的子子孙孙苦苦哀求他们多活几年,他们也是绝对不会同意的;而实际上所有的子子孙孙都不会希望他们100岁以上的老人继续活着,而是希望他们赶快死去,因为上上下下、老老小小的人都已经享福和伺候得很“腻”了、折腾得很“腻”了,必须要有“死人”的事情发生,才能使下一代的生活折腾换一种暂新(非“崭新”)的局面。所以超人力量就规定:你们玩吧,尽情地玩我赐予你们的“玩物”吧,并且玩够了就死吧。就像任何运动游戏都有时间和场次的规定,都有“完结”的时候,玩多了就没意思了;人生这场“大游戏”也是如此,必须有完结的时候,活多了就没意思了。就像人在深夜玩到一点、两点、三点钟就想睡觉一样,人玩到90岁、100岁和100岁以后就想死了;这时死和睡完全是一个概念,没有恐惧和痛苦,只不过死了就不再醒来。 超人力量规定人应该在什么时候死去、活的极限在哪里,一定是颇费周折的。席慕蓉《幕落的原因》中的极妙诗句写道:“在掌声最热烈的时候/舞者悠然而止/在似乎最不该结束的时候/我决定谢幕……我需要有足够的智慧/来决定/幕落的时间”——这最后一句照我的意思可以改为:“上帝需要有足够的智慧/来决定/人生幕落的时间。”因此超人力量决定:人应该在折腾的乐趣意犹未尽、但大戏已完的时候死去,而不要等到对“生”充满厌倦、活得不耐烦了才死。有的人正活在兴头上就突然要死,他很遗憾,其实根据超人力量的规定,他“落幕的时间”已到,再活下去就没意思了。 超人力量规定给人“玩”的东西,无论有生命和无生命,其运动形式都是循环的,生与死——无疑是人生内容循环折腾最重要的形式。人类生活中的前后、左右、上下、高矮、大小、圆缺、黑白、好坏、优劣、进退、取舍……等等,这许多数不清的循环语意,都是反映人生内容的循环形式。循环折腾是一个非常关键的人生概念,要读懂人生,必须看懂循环。在人类历史上,只有佛法大道是真正看懂人生循环的;在中国历史上,只有《易经》和《老子》是基本看懂人生循环的。看懂人生循环的人,他就不会畏惧死亡,死亡只是生命形式的转变。宇宙内容是有限和循环的,更不要说整个动物世界了。在动物界,最主要的生死循环是转变。人死了变牛变马,也可能再变为人;动物死了变人,也可能变为其它动物。动物界循环不已的个体数量是恒定的,人多了别的动物就少,人少了别的动物就多,这其间作为连接点的就是一个“死”字。 苏格拉底说死亡只有两种可能状态:一是死后无知觉,二是死后灵魂从一个世界移居另一个世界。如果死亡是前一种失去知觉的状态,那其实是一种安详得连梦都不会来打搅的深睡,苏格拉底说这样的深睡是一种收获——难以言说的安然无梦的愉快收获——永恒不过就是一夜。这样地“深睡”的“一夜”有什么可怕呢?如果死亡是死者迁往另一世界永居,那么死亡就应该是像旅游观光和搬迁新居一样令人高兴,这样地从“生”到“死”的旅行和迁居,也没有什么让人可怕的啊。死亡的两种状态都不存在可怕的理由,因此当苏格拉底被判处死刑时,他便毫无惧色地把毒酒喝下,并且平静地微笑着向朋友、法官告别:“分离的时刻到了,我们各自上路吧——我走向死亡,你们继续活下去;至于生死孰优孰劣,只有上帝知道。” 死亡不存在可怕的理由。如果把这个道理讲给所有人听,所有人都听懂了,并且都认为事实的确如此,但所有人依然会害怕死亡。这是为什么呢?当然怕死是超人力量植入人体的本能,但超人力量规定的每一件世事都有其因果机制。根据超人力量的规定,人害怕死亡不是缘于害怕“死”的本能,而是因于喜欢“生”的习性。 这样的习性至少有两种。第一种是“怕生”。每个小孩都怕见生人,成人不仅依然怕见“生人”,而且怕见“生事”。人人都有安于现状的习性,人的现状是“活着”,因此每个人都有安于“活着”的习性。相比“活着”的习惯而言,死亡只有一次,不可能有习得的经验,每个人对“死亡”都是生疏的,在生死之间并不能像走路从第一步迈到第二步一样心无所碍、游刃有余。因此所谓“怕死”其实是“怕生”——害怕一件完全“陌生”的事情。 第二种习性是“有话”。朋友相聚,有话要说,就不愿离去,不得不散时也总是依依不舍。为什么人们会感慨“天下没有不散的宴席”,就是由于人们都依恋聚谈的美好时光。人生的内容是知识折腾,想要发泄、表达的话语数以万计,就像聚谈不忍分离一样,人们聚在世上折腾知识,总是害怕死去。如果一个人完全超越知识,面对万千世象和亲友众生无话可说,那么他就生死无谓,也无畏了。禅宗高僧能够像如履平地一般轻松自如地死去,就是因为他明心见性、超越死生而无话可说,许多僧徒想在禅师示灭之际请求一字一句偈语而不可得。世俗之人对后代总是有操不完的拳拳爱心、道不完的谆谆教诲,所以他们害怕死亡;他们害怕死亡,就是因为死亡是一件剥夺“发言权”的天大事情。 11、生如夏花绚烂死如秋叶静美 恐惧死亡因着对世界的眷恋 核心提示:泰戈尔在诗中曾这样描绘生命:“生如夏花之绚烂,死如秋叶之静美。”人们从对死亡的恐惧转变为对死亡冷静的思考。人与其他物体的区别在哪里?人这种物体是在通常我们自己认为的物体的“要素构成”上又加入了记忆、情感、心理及特殊物体(身体)等。人这种物体是更加复杂的复合体,其在“实”的基础上“承载”、包涵了更多的“虚”。虚并非空,因为一切虚中皆蕴涵了实,尽管这“实”有时并非以某种真实形体存在。怕死即等价于怕自身生命体的消失,也等价于怕消灭自我复合体所拥有的恒久性。 泰戈尔在诗中曾这样描绘生命:“生如夏花之绚烂,死如秋叶之静美。”人们由原来对死亡的恐惧转变为对死亡冷静的思考。 宇宙间的生命体有生就有灭,非生命体也该同样。事实上呢?没有生命的物体有何生灭可谈呢?一句话,只要存在于宇宙间的物体就应归入生命体的范畴。而为什么出现了非生命体这一概念呢?这实在是人类为了表述的需要而做的不得已的“分类”结果。通常人们对是否属于生命体多从“细胞学”的角度来评判而非“分子学”。于是绝大多数的动植物、微生物被归入生命体,其他(比如星座、山石等)则被称之为非生命体。这样来讲,可能有人会感到比较玄奥。细想一下:腐水有生命吗?一个去世的人在没有被火化前即使他(它)已停止了思维、停止了心跳,他(它)身体上还存在局部的生命吗?我相信是有的。只有当生命体已经无“体”可言,已经全部“融入”宇宙时,我们可以说生命体消失了。生命体的消失所对应的是新生命体的诞生而并非是非生命体的诞生。 世间万物(生命体)的生灭是无法逾越的必然,为什么我们不能对自身的“灭”坦坦然接受?为什么我们对生命之终如此之怕呢?人怕死的根源是什么?人为什么怕死实在是一个不好讲述的问题,我们先从与人密切相关的物体谈起。 奥地利的物理学家马赫这样来定义物体:由颜色、声音、压力等在时间和空间方面(函数方面)联接而成的相对恒久性的复合体。我们给这些宇宙间的复合体起了一个特别的名称,这便是物体。人属于物体吗?平心而论,无疑也是。人这种物体与其他物体的区别在哪里?主要在于人这种物体是在通常我们自己认为的物体的“要素构成”上又加入了记忆、情感、心理及特殊物体(身体)等。也就是说,人这种物体是更加复杂的复合体,其在“实”的基础上“承载”、包涵了更多的“虚”。虚并非空,因为一切虚中皆蕴涵了实,尽管这“实”有时并非以某种真实形体存在。人是主要以“虚”(特指思维、智慧等。)来控制领导“实”(整个有形身体)的一种极其特殊的物体。怕死即等价于怕自身生命体的消失,即等价于怕消灭自我复合体所拥有的恒久性。自我的恒久性随时都有消灭的可能,而一般来说自我恒久性的消灭是按照一定的规律经过时间的消耗而逐步、局部进行的。它并非一促而就,局部的消灭在时刻进行。当局部消灭积累到一定程度,整体消灭(人的死亡)降临。思维、智慧高的人相对越看重貌虚内实的“精神”,对精神越看重的人越易体验到生命的丰富性与曲折性的乐趣,如此以来便极易对现实世界产生更大的留恋。思维、智慧低的人相对越看重貌实内虚的“物质”,对物质所取的缺乏使其很难体验到生命的丰富性与曲折性的乐趣,如此以来便极易对非现实世界产生更大的向往。前者因对宇宙主观求索而导致了对世界之不二法“从哪来到哪去”追问不休,后者因对宇宙懵懂无知而导致了对世界之不二法“从哪来到哪去”期冀奇迹。一个人死后是进入天堂还是下入了地狱?另一个“世界”有没有悲欢离合?天大的笑话,绞尽脑汁的追问什么!?不思不想的期冀什么?宇宙间的一切物体都是从无中来到无中去,既然你我都要成为了“无”、都要成为了不存在,哪来的实(形体)虚(精神)?没有了实虚,一切感受(包括怕)全部消失。生命之门越临近关闭时人的恐惧越大,对于一个曾经存在过思维、智慧等的特殊物体来说,在其思维、智慧等就要殆尽时,他已经处在了从“有”向“无”转变的临界点。在这个临界点上如果人还有些清醒,他会在自己的大脑中“释放”生命中曾经存在过、潜隐过的“虚体”形式:悲欣交集、万千滋味!“释放”的终结落在对自我恒久性的消失:存在过的自己就要不存在了! 人为什么怕死?你我明知生命体有始有终,自己仍抱有对生命尽可能延长直至不老的奢想;你我明知时间没有恒久,自己仍要妄待特例的出现;你我明知“无中生有”,自己仍做着“无中生无”(生命体结束希望生出“非生命体”的“生命”)的美梦。 人为什么怕死?只要你我对整个宇宙的认识不是彻底的了无挂碍,只要你我在清醒状态下意识到对整个宇宙还有未知,人怕死实在是正常。人为什么怕死?因为存在过。 人类在整体上保持怕死是一件好的事情,否则人类将急剧走向灭亡。在这一点上讲,人对死的害怕是推动人类发展的极大动力。另一方面,如果一个社会、国家几乎没有不怕死的人(或者认识极高、极低导致不怕死、或者信仰导致不怕死),这样对于人类自身的发展也是不太有利的。
113    (故鄕悲) 고향의 슬픔 댓글:  조회:4670  추천:1  2012-08-03
(故鄕悲) 고향의 슬픔  약암동 지음 2011년10월   고향​의 슬픔(故鄕悲) ​ 고향 마을은 쓸쓸히 비였습니다, 거리에 사람하나 보이질 않습니다. 골목에는 풀이 무성하여 발목을 잡고 주인없는 집집마다 문이 잠겼습니다​ ​ 눈앞에 삼삼하는 익숙한 그 얼굴들 저절로 불려지는 정다운 그 이름들 외국으로 갔답니다, 관내로 갔답니다, 도회지로 갔답니다, 어디론가 갔답니다.     한고향에 모여 산것이 연분이였다면 오늘에 흩어진것은 운명이였으리라. 웃고 울면서 살았던 그 시절이 이대로 잊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워 당년에 불렀던 내고향 그 노래 입속으로 씁쓸히 되뇌여 봅니다. ​ 세월속에 이 마을 결국 사라지겠죠. 하지만 이곳에서도 봉과 용들이 나왔고​ 많은 화려한 꿈들이 있었으며 유구한 역사가 묻혀 있다는 것을 저 앞산 약바위는 기억하고 있으리라!​ ​ 현용수 지음 2011년 추석 부모산소 성묘 가는 길에 고향마을에 잠깐 들렸다.  
112    조선족 장례복무 사회성 기제를 건립할데 관한 보고 댓글:  조회:2943  추천:0  2012-08-02
关于建立朝鲜族殡仪服务社会性机制的报告   延边州文化局: 2009年6月,延边州政府和吉林省政府将“朝鲜族丧葬习俗”分别确定为州级和省级的非物质文化遗产,保护责任单位指定为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州级代表性传承人指定为玄龙洙先生。 2011年6月1日,国家正式施行《非物质文化遗产法》,从此,“朝鲜族丧葬习俗”的保护工作和传承活动也有法可依了。   延边朝鲜族处理丧事的现状 目前,延边朝鲜族处理丧事还是以家庭为单位进行,延边境内以城市为中心的大部分地区已经基本上施行火葬,遗体搬运、遗体保管、遗体火化等三项服务规定为基本殡葬服务,一律归政府殡仪馆负责执行,入殓、守灵、遗体告别、安神祭祀等补助性殡葬服务方面在各地殡仪馆不分民族,一律按统一规格、统一标准提供服务。 如今,延边朝鲜族保存下来的传统色彩的丧葬习俗主要表现在寿衣和入殓上,家里有临终病人,寿衣和入殓是每一家朝鲜族家属首要关切的事情。 家里出丧事或即将出丧事,朝鲜族家属一般到市面的寿衣店里去购买相关朝鲜族寿衣,并约定一位民间入殓人员解决相关入殓事宜。入殓结束后联系殡仪馆灵柩车把遗体运走,保管在殡仪馆冷藏箱里,很少有安排夜间守灵,家属一般都回家,在家设灵座接待吊唁客人。出殡当天先把遗体迁移到殡仪馆告别厅,举行简单告别仪式,而后把遗体直接送到火化室火化,接到骨灰盒,一同到殡仪馆后院去举行安神祭祀,最后把骨灰盒寄放在殡仪馆纳骨堂或其他处理。这是朝鲜族丧户举行葬礼的基本过程。   二、延边朝鲜族在办丧方面的问题和困难 1、熟悉朝鲜族丧葬礼仪规范的老年人大多已经过世,办丧时家族里没有人指导具体丧葬礼仪规范。 2、办丧需要很多人手,民间固有“办婚可不去,办丧不可不去”之说法。如今的朝鲜族出国的人多了,进城的人多了,去关内的人多了,一旦家里出丧事,往往欠人手搭理后事,而且,这种情形今后会越来越严重。 3、寿衣等殡仪用品和入殓等殡仪服务的费用过高,服务内容没有规范,服务质量不能保证。 4、延边境内殡仪馆里没有设立朝鲜族的殡葬服务设施和项目,朝鲜族只能因地发挥,勉强完成所谓的朝鲜族式的葬礼。   三、我们的方案 1、2009年,民政部《关于进一步深化殡葬改革促进殡葬事业科学发展的指导意见》中明确指出;“政府主导,市场参与。…对基本殡葬服务(运输、保管、火化—编者注),政府要加大投入。对其他选择性殡葬服务(入殓、用品、仪式等—编者注),注重发挥市场调节作用,满足人民群众多层次需求。” 根据民政部的上述《指导意见》精神,我们准备建立社会性朝鲜族殡仪服务机制,主要经营选择性殡葬服务项目,在筹备阶段先以“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白花相助服务中心”(已有工商注册),的执照进行服务活动,筹备一些运营资金,待到今后确保一定业务量以后,正式注册成立正规的朝鲜族殡仪服务机构。 我们认为建立社会性朝鲜族殡仪服务机制是时代的需要,是为朝鲜族谋福利的民心工程,可以为朝鲜族解决时代性的两个大难题;一是办丧难问题,二是传统葬孝文化保护难问题。 2、建立朝鲜族殡葬服务从业人员培训机制。 如今社会上从事朝鲜族殡葬服务业的人员基本上是文化素质浅薄的社会闲散人员,他们是为了生计不得不选择这一行的。对这部分人实行有组织的培训制度和持证上岗制度,这对于实现朝鲜族殡葬服务行业规范化和提高朝鲜族殡葬服务质量方面有着很积极的意义。 3、大幅度降低收费标准。 我们拟定的朝鲜族选择性殡葬服务项目的新收费标准和旧收费标准的对比参照表如下; 号 服务项目 旧的收费标准 新的收费标准 1 寿衣及配套 500.00元起价 300.00元起价 2 入殓 300.00元/俱 100.00元/俱 3 迁坟 1.000.00元/座 800.00元/座 4 葬礼总费用 5.000.00元/次 2.000.00元/次   四、我们的困难和问题 1、殡仪领域是政策性很强,问题也很多的是非之地,关于“朝鲜族丧葬习俗”传承活动方面,因为没有政府的针对性文件,卫生部门、民政部门、延边医院等有关部门和单位无法制定有效的配合或协助的相关制度。 2、有关朝鲜族殡葬管理方面没有针对性的政策或法律,例如,延边地区至今还没有出台有关朝鲜族的《殡葬管理方法》,因此,朝鲜族在殡葬习俗方面的一些合法权益得不到认可和保护,我们的“朝鲜族丧葬习俗”传承活动也得不到有关部门的有效配合和协助。 3、经费来源没有保障。进行“朝鲜族丧葬习俗”传承活动需要很多经费,例如;办公经费、传承活动经费、建设传承基地经费…等等,这些经费只能靠我们的有偿服务收入来解决。可是如今我们的市场竞争能力和经营能力都很有限,亏损很严重。 4、目前,朝鲜族寿衣、入殓等选择性殡葬服务市场被社会的一些寿衣店老板所垄断,成为他们谋取暴利的手段,搞独立王国、抢生意、乱收费等泛滥成灾,我们的合法传承活动无法正常开展下去。   五、我们的建议和请求 1、我们建议,州文化局以州非遗工作主管局的身份,充分考虑我们工作的特殊性和艰巨性,破例采取措施,制定一份关于扶持“朝鲜族丧葬习俗”传承活动的政府级文件,保障我们的工作正常运行。 2、我们请求,州文化局以我们研究会主管局的身份,与民政部门、卫生部门、延边医院等有关部门和单位进行沟通,争取这些部门和单位对我们“朝鲜族丧葬习俗”传承活动的理解和配合,为建立社会性朝鲜族殡仪服务机制而创造有利的环境。 望州文化局重视我们的建议和请求,予以宝贵的指示为盼。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二0一二年六月廿0日  
111    (해석시) 중국 력사상 영향력이 컸던 열수의 시 댓글:  조회:3721  추천:0  2012-08-02
중국 력사상 영향력이 컸던 열수의 시 조선글 해석 배합—성원   第一首;李白的《静夜思》 床前明月光,疑是地上霜。 举头望明月,低头思故乡。   우물가의 밝은 달빛은 땅우에 내린 서리런가. 머리들어 달을 보고는 머리숙여 고향 그리네.     第二首;孟郊的《游子吟》 慈母手中线,游子身上衣。 临行密密缝,意恐迟迟归。 谁言寸草心,报得三春晖。   자애로운 어머니손 떨리는 바느질로 먼길가는 아들한테 전포지어 입혔네. 출발을 앞두고도 빼곡빼곡 깁는것은 혹여나 갔다가 너무늦게 돌아올가봐. 한 포기 풀과 같은 자식의 마음으로 석달봄날 모정에 보답할수 있으리까?     第三首;白居易的《赋得古原草送别》 离离原上草,一岁一枯荣。 野火烧不尽,春风吹又生。  … …   들판에 자라나는 파릇파릇 풀잎들 해마다 시들었다 해마다 푸르다네. 들판에 타는불에 탄다한들 다타랴 봄바람 불어오면 또다시 소생하리.      第四首;曹植的《七步诗》 煮豆燃豆萁,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   콩을 콩깍지로 삶으니 콩은 솥에서 슬피운다 워낙 한뿌리에서 자랐건만 어찌하여 이리도 모질게 구느냐?     第五首;王之涣的《登鹳雀楼》 白日依山尽,黄河入海流。 欲穷千里目,更上一层楼。   밝은해 서산에 넘어가고 황하는 바다로 흘러드네. 천리를 내다보고 싶다면 한층더 올라서야 하리라.     第六首;乐府诗《长歌行》 青青园中葵,朝露待日晞。 阳春布德泽,万物生光辉。 常恐秋节至,焜黄华叶衰。 百川东到海,何时复西归? 少壮不努力,老大徒伤悲。   푸르른 채마전원 파초잎 우에서 아침이슬 해가뜨니 사라 집니다.   양춘가절 베푸는 혜택을 입어서 만물은 생기얻어 빛갈이 곱다만.   해마다 소슬소슬 가을철 오면은 잎사귀 누렇게 말라 떨어집니다.   동해로 흘러간 천만갈래 저강물 언제면 서쪽으로 되돌아 올손가?   일찍 젊어서 노력하지 않고보면 장차 늙어서 헛되히 슬퍼하리다.     第七首;《诗经》第一首《关雎》 关关雎鸠,在河之洲。 窈窕淑女,君子好逑。 参差荇菜,左右流之。 窈窕淑女,寤寐求之。 求之不得,寤寐思服。 悠哉悠哉,辗转反侧。 参差荇菜,左右采之。 窈窕淑女,琴瑟友之。 参差荇菜,左右毛之。 窈窕淑女,钟鼓乐之。   원앙새 한쌍 걀걀걀 강숲에서 노래부르네 아름다운 요조숙녀야 너는 나의 천생배필.   오쫄오쫄 물미나리 이리저리 도망 가는데 아름다운 요조숙녀야 자나 깨나 보고싶다.   보고싶어도 볼수없어 자나 깨나 너의생각 이밤도 지루하다 엎치락 덮치락 못자겠다.   오쫄오쫄 물미나리 이리저리 뜯어 넣자야 아름다운 요조숙녀야 비파치며 친해 보자.   오쫄오쫄 물미나리 여기저기 쟁여 넣자야 아름다운 요조숙녀야 종고치며 즐겨 보자.     第八首;于谦的《石灰吟》   千锤万凿出深山, 烈火焚烧若等闲。  粉骨碎身全不怕, 要留清白在人间。    천만번 캐고깨여 심산에서 끌어내여 세찬불로 태워도 예사로운 일이여라.   이몸이 가루돼도 두려울것 무엇이냐 오로지 청백함을 이세상에 남기리라.     第九首;王勃的《送杜少府之任蜀州》 城阙辅三秦,风烟望五津。 与君离别意,同是宦游人。 海内存知己,天涯若比邻。 无为在岐路,儿女共沾巾。   삼진에 둘러싸인 장안성 올라서니 연기속 저멀리 다섯 나루터 보이네.   정작 그대와 갈라지자고 하니까 우리 모두가 떠도는 신세였구려.   사해내에 지기가 있다면 천애지각 이웃과 같노라.   인젠 저앞에 갈림길도  나졌으니 공연히 녀인처럼 눈물찍지 맙시다.      第十首;李绅的《悯农》 锄禾日当午,汗滴禾下土。 谁知盘中餐,粒粒皆辛苦。   땡볓을 무릅쓰고 기음 매노라니 땀방울 곡식밭을 흠뻑 적시누나. 그누가 알리오 그릇에 담긴 이 음식들 알알이 모두가 땀방울로 바꿔 온 것을.
110    좋은 운명을 만들어 내는 몇가지 법칙과 원칙 댓글:  조회:2685  추천:0  2012-08-02
命运修造的几大定律与原则   术数命理只能解释命运,而不是命运本身。人生的命运本质上是人的业力牵引而造作,由天、地、人三种力量不断互动影响而显现出来的。主宰命运的不是别的,正是人自己。命运修造的几大定律与原则:   一、因果定律:世界上没有一件事是偶然发生的,每一件事的发生必有其原因。这是宇宙的最根本定律。人的命运当然也遵循这个定律。认同因果定律的不仅是佛教,还有基督教和印度教等等。古希腊哲学家苏格拉底和大科学家牛顿等人,也认为这是宇宙最根本定律。人的思想、语言和行为,都是“因”,都会产生相应的“果”。如果“因”是好的,那么“果”也是好的;如果“因”是坏的,那么“果”也是坏的。人只要有思想,就必然会不断“种因”,种“善因”还是“恶因”由人自己决定。所以欲修造命运者,必须先注意和明了自己的每一个想法(起心动念)会引发什么样的语言和行为,由这些语言和行为会导致什么样的结果。   二、吸引定律:人的心念(思想)总是与和其一致的现实相互吸引。比如:一个人如果认为人生道路充满陷阱,出门怕摔倒,坐车怕交通事故,交朋友怕上当,那这个人所处的现实就是一个危机四伏的现实,稍有不慎,就真的会惹祸。又比如:一个人如果认为这个世界的人很多人都是讲义气的血性之人,那这个人就总会碰到跟他肝胆相照的朋友。大家知道为什么吗?因为人都是选择性地看世界,人只看得见和留意自己相信的事物,对于自己不相信的事物就不会留意,甚至视而不见。所以人所处的现实是人的心念吸引而来的,人也被与自己心念一致的现实吸引过去。这种相互吸引无时无刻不在以一种人难以察觉的,下意识的方式进行着。一个人的心念是消极的或者丑恶的,那他所处的环境也是消极的或者丑恶的;一个人的心念是积极的善良的,那他所处的环境也是积极的或者善良的。人如果能控制自己的心念(思想),使之专注于有利自己的、积极的和善良的人、事、物上,那这个人就会把有利的、积极的和善良的人、事、物吸引到其生活中去,而有利的、积极的和善良的人、事、物也会把这个人吸引过去。所以控制心念(思想),是命运修造的基本思想。   三、深信定律:人如果真正深信某件事会发生,则不管这件事是善是恶、是好是坏,这件事就一定能会发生在这个人身上。比如一个人深信积极的事物一定会发生在自己身上,积极的事物就一定会发生。又如果一个人深信自己命不久矣,那这个人很快就会死去。所以用好的信念,取代不好的信念,是命运修造的原则。由此看来,有好的信念是一种福,想给自己种福,必须建立好的信念。   四、放松定律:人只有在心态放松的情况下,才能取得最佳成果。任何心态上的懈怠或急躁,都将带来不良结果。什么心态是最佳心态呢?答案是越清明无念越好!把目标瞄准在你想要的理想人格、理想境界、理想人际关系和理想生活等等东西上,然后放松心态、精进努力,做你该做的,不要老惦记着这些东西什么时候到来,则这些东西的到来有时候能快到令你吃惊;相反,如果你对结果越焦躁,你就越不能得到理想的结果,甚至会得到相反的结果。举个例子:大热天晚上停电,你躺在床上大汗淋漓,睡不着觉备受煎熬,老在想着这该死的电什么时候才来,电总是在你着急的时候偏偏不来,但当你最后受够了,人清静安定自然凉快了,快沉沉睡去的时候,电就来了,倏忽间你的房里灯火通明,电风扇转起来了。这不是巧合不是迷信,这是定律,这是放松定律。《了凡四训》中云谷禅师要了凡先生念准提咒要达到无念无想的地步,就是这个道理。值得注意的还有:所谓的无念并不是心里一个念头也没有,而是有念头但不驻留,“无所住而生其心”。   五、当下定律:人不能控制过去,也不能控制将来,人能控制的只是此时此刻的心念、语言和行为。过去和未来都不存在,只有当下此刻是真实的。所以修造命运的专注点、着手处只能是“当下”,舍此别无他途。根据吸引定律,如果人总是悼念过去,就会被内疚和后悔牢牢套在想改变的旧现实中无法解脱;如果人总是担心将来,人的担心就会把人不想发生的情况吸引进现实中来。正确的心态应该是不管命运好也罢坏也罢,只管积极专注于调整好做好目下当前的思想、语言和行为,则命运会在不知不觉中向好处发展。   六、80/20定律:人在达成目标前80%的时间和努力,只能获得20%的成果,80%的成果在后20%的时间和努力获得。这是个非常重要的定律,很多人在追求目标的时候,由于久久不能见到明显的成果于是失去信心而放弃。须知命运修造是长久的事,要有足够的耐心。不要预期前80%的努力会有很大收获,只要不放弃,最后20%的努力就会有长足的进步。   七、应得定律:人得到应得到的一切,而不是想得到的一切。云谷禅师对了凡先生所说的拥千金者值千金,应饿死者必饿死,就是这个道理。所以命运修造者,必须要提高自我价值,自我价值提高则人应得的不管质和量都会提高。   八、间接定律:要提高自我价值(包括物质和精神两方面),必须通过提高他人价值间接实现。例如:你要提高自己的自尊,必须通过首先提高别人的自尊间接实现。你要有所成就,必先通过成就别人间接达成。又例如:有些公司创立的目的只是赤裸裸地追求最大利润,这些公司往往昙花一现,一两年内就消失;而那些致力于为客户为社会提供优质服务和优质产品的公司往往长盛不衰,越做越大。这就是间接定律在起作用。值得一提的是,间接定律中提高自我价值和提高他人价值往往是同时发生的,即当你在提高别人价值的时候,你的自我价值马上就提高。   九、布施定律:布施就是“给出去”的意思。这个定律是说,你布施出去的任何东西,终将成倍地回报到你身上。例如:你布施金钱或物质,你将会成倍地获得金钱或物质回报;你布施欢喜心,让他人衷心愉悦,你将会成倍地得到他人回报给你的欢喜;你布施安定,让他人心安,你将会成倍地得到安乐。相反,如果你施加于别人的是不安、憎恨、怒气、忧愁,你将成倍地得到这些报应。   十、不图报原则:这是布施定律的补充。这个原则是说:你布施的时候永远不要企望获得回报,你越不望回报,你的回报越大。“善有善报,恶有恶报,不是不报,时候未到”。例如类似的情况不知你有没有碰到过:一天你开车赶着去会见重要客户,路上看到一对年老夫妇的汽车爆胎了。你因为赶时间不想管,但又觉得必须管,于是你停下车帮他们换轮胎。你把轮胎换好了,老人家想付你一笔钱表示感谢,你婉拒了老人家并且祝他们好运然后你继续上路。当你赶到约会地点,却发现客户比你来得还晚,而且客户很爽快地就和你签了协议。你会不会觉得很走运呢?但这不是运气,而是定律。所以请记住:施比受更有福,施本身就是很大的福,而无需从受者处获得回报。给大象(施)称重量,大家说如果再给大象加一条丝巾(回报),大象的重量会增加多少呢?   十一、爱自己原则:一切利他的思想、语言和行为的开端,就是接受自己的一切并真心喜爱自己。只有这样,你才能爱别人,才能爱世界,你才可能有真正的欢喜、安定和无畏,才可能有广阔的胸襟。你如果不喜欢不满意自己,那么你是无法真正喜欢别人的。这点非常重要。有些人把爱自己等同于自私自利,这是误解。如果仔细体会,就会发现你如果对自己不喜欢、不满意,就会很容易生出嫉妒心和怨恨心。自己也是众生中的一员,爱众生的同时为何把自己排除在外?所以请先好好认识自己,先跟自己做好朋友,再谈爱其他众生。   十二、宽恕原则:如果把消极思想比作一棵树,那么其树根就是“嗔心”,把这个树根砍掉,则这棵树就活不长。要砍掉这个树根,必须懂得如何宽恕。第一个需要宽恕和原谅的对象是父母,不管你的父母对你做过或正在做什么不好的事,都必须完全、彻底地原谅他们;第二个需要宽恕的对象,是所有以任何方式伤害过或正在伤害你的人,记住你无需与他们勾肩搭背嘻皮笑脸,你无需与他们成为好朋友,你只要简单地、完全地宽恕他们,就可以砍掉消极之树的树根;第三个需要宽恕的对象,是你自己!不管你过去做过什么不好的事,请先真诚地忏悔并保证不再犯,然后——请宽恕自己。内疚这一沉重的精神枷锁不会让你有所作为,相反会阻碍你成为面貌焕然一新的人。从前种种,譬如昨日死,以后种种,譬如今日生。   十三、负责原则:人必须对自己的一切负责,当人对自己采取负责任的态度时,人就会向前看,看自己能做什么;人如果依赖心重,就会往后看,盯着过去发生的、已经无法改变的事实长吁短叹。事实上,对你负责的也只能是你自己。请时刻提醒自己:“我对自己的一切言行、境遇和生活负完全的责任”   十四、不对抗原则:切忌有与命运对抗的想法和心态,这容易使人生不平之心。你想和命运对抗,其实是在和自己较劲,这样越对抗越难摆脱。最好的心态是不管命运是好是坏,我只管修自己,一日修来一日功,这样坏者变好,好者更好。所以“改变命运”应称为“修造命运”。   十五、除草原则:人的杂念妄念就像花园里的杂草。杂草不需要专门的照料和养分,它自己就能长得茂盛。如果不管它,花园就会“杂草丛生”。所以一个好的花园,必须时常进行除草。所谓“时时勤拂拭”。相反正见善念就像花园里的花朵,必须细心种植栽培,才能生长得好。所有善知识和有用的有利的资讯,都必须时时接触和复习。重复重复再重复,把性格修造这种脑力劳动彻底变成体力劳动。   十六、行动原则:有行动才有吉凶,无行动则无吉凶。例如一个人有了病,却不配合治疗,不进行体育锻炼,病会好吗?做了善事种了善因,就会产生一股力量,把人的行动向吉处推,但是没有行动,这股力量如何显现呢?所以学佛行善所带来的吉祥,也必须在行动中才显现出来。
109    한국 상조(相助)서비스가 뜬다 댓글:  조회:4304  추천:0  2012-07-31
 한국 상조(相助)서비스가 뜬다   전국 300여개 업체… 회원 300만명 시장규모 계속 늘어 수조원대 예상 ‘삶을 잘 마무리하는 것(well-dying)’이 ‘잘 사는 것(well-bing)’만큼이나 중요한 요즘, 상조(相助)서비스를 찾는 소비자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과거 대가족 제도에선 관혼상제 등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를 가족 구성원 스스로의 힘으로 너끈히 해결했지만 저출산과 핵가족화가 심화되는 이때 장례 문화에 익숙지 않은 젊은 세대에겐 이런 일들이 두렵고 벅찬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죽음 이후를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준비해 놓겠다는 실버세대의 관심도 상조서비스로 쏠리고 있다. 어느날 경황없이 찾아온 부모의 죽음을 맞아, 불친절한 대접과 바가지 요금 등 장례식장 횡포를 울며 겨자먹기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변의 얘기가 적지 않다. 적은 돈으로 미리 준비해 큰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상조서비스 업체들의 광고에 귀가 솔깃해지는 이유다. 月 2만~10만원씩 5~10년 불입하면 장례식 때 패키지 서비스 총액 200만~400만원 상품 인기… 1000만원대 프리미엄급도 본래 상조는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조서비스는 혼인이나 장례식 등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관혼상제 행사에 따르는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월부금 형식으로 일정한 금액을 일정 기간 동안 납입하고, 나중에 행사가 있을 때 가입한 업체로부터 장례용품과 전문 인력, 행사 진행 등을 패키지 형식으로 제공받는 서비스를 말한다. 상조업체들은 보통 장례식은 물론 결혼이나 돌잔치, 회갑·고희연 등 가족 모임까지 경조사를 모두 서비스 대상으로 삼지만 대부분은 수익성에서 앞서는 장례 서비스에 주력하고 있다. 상품 가격은 서비스의 내용과 업체의 지명도에 따라 천차만별. 싼 것은 100만원대부터 비싼 것은 1000만원대 프리미엄급까지 다양하며 보통 200만~400만원대 상품에 대한 선호가 높다. 매달 2만원에서 10만원 안팎의 돈을 5년(60개월)에서 10년(120개월) 동안 불입하게 된다. 업체들은 물가가 아무리 올라도 처음에 계약한 가격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30~40대가 주 고객… 연예인 모델 내세운 홍보전 가열 ‘마지막 가시는 부모님께 난 무엇을…’ 감성적 카피로 승부 인터넷 검색창에 ‘상조’라는 단어를 치면 수십 개의 상조업체가 줄줄이 명함을 내민다. 업체 홈페이지를 이용한 광고전도 치열하다. ‘대한민국 대표 상조 전문기업(보람상조)’ ‘효를 으뜸으로 섬기는 기업. 당신의 효 라이프(효원라이프상조)’ 등 업계 대표 주자임을 내세우거나 ‘임종에서 장지까지 원스톱으로(고려라이프상조서비스)’ 등 서비스의 특장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마지막 가시는 부모님께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현대문화상조)’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내 부모를 모시듯 정성을 다하겠습니다(아산상조법인)’ ‘함께 하는 귀천(歸天),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교원상조)’ 등 가슴이 뜨끈해지는 광고 문구를 앞세우기도 한다. 최근 상조업체들은 공중파와 케이블TV, 인쇄 매체를 망라해 인지도가 높고 친근한 유명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기용해 공격적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보람상조는 탤런트 전광렬과 김해숙을 내세워 30~40대 수요 계층을 타깃으로 홍보전을 펼치고 있다. 효원라이프는 탤런트 이순재, 아산상조법인은 송재호를 각각 밀고 있다. 현대문화상조는 엄앵란, 홍익상조는 전원주가 홍보 전면에 나섰다. 일본 상조회가 모델… 전국 영업망 갖춘 메이저도 최근 등장 케이블 TV 홈쇼핑에서도 판매… 하루 수천 건 계약되기도 우리나라의 상조서비스의 모델은 1947년 시작된 일본의 상조회다. 상조서비스가 생활 깊이 뿌리내린 일본에서는 2300여만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상태다. 전체 장례식의 40%인 35만건 정도가 상조업체에 의해 치러진다. 우리나라 상조서비스의 시발점은 1982년으로 본다. 부산에서 설립된 부산상조가 시작이며 이후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상조업체들이 세력을 키웠다. 현재 영업 중인 상조회사의 원적(原籍)을 따져보면 10곳 중 7곳은 영남 지방에 근거를 두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상조 회사에 가입한 회원 비율을 따져보면 부산 지역이 인구 대비 13%, 마산이 12% 안팎, 울산이 10% 정도로 나타난다. 1% 정도인 서울에 비해 엄청난 수치다. 영남 지역이 한국 상조업의 본산(本山)인 셈이다. 최근 주요 업체들이 서울로 본사를 이전하며 전국적인 영업 활동을 펼쳐 빠른 속도로 회원 수를 늘리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현재 전국적으로 운영되는 상조업체는 300여곳 안팎이다. 상조 관련 단체도 너댓곳에 이른다. 업계에서는 상조서비스에 가입한 회원 수를 대략 200만명에서 300만명으로 추산한다. 업체들이 내세우는 가입 회원수를 모두 합치면 추산치를 훨씬 상회해 ‘거품’이 적지 않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사실. 하지만 앞으로 핵가족화와 고령화 사회의 진전에 따라 회원 수는 1000만명 선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시장 규모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고객 불입금을 기준으로 상조서비스의 시장 규모가 연간 7000억원대에 이른다고 보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1조원을 넘어 3조원대에 이른다는 추정도 내놓고 있다. 최근 인기 연예인을 앞세운 케이블TV의 홈쇼핑 방송에는 하루 수천 건의 상품이 판매됐다는 뒷얘기도 들린다. 특급 리무진 장의차, 왕실 전통 장례인 ‘궁중렴’… 사망 접수 2시간 내 출동… 준비부터 추모까지 토털서비스 상조업체들이 내건 상품에는 우선 관(棺)과 수의(壽衣), 관보·결관바·명정·운아·혼백·위패·습신·폐백·예단·다라니·수시포·한지·알코올·베개·탈지면·칠성판·고깔 등 고인을 입관할 때 쓰는 용품이 있다. 다음으로는 △남녀 상복과 수질·요질·행전·두건·리본·완장·상장(지팡이) 등 의전용품 △리무진 차량 등 장의차와 장의 버스 △염과 입관을 하는 장례 지도사와 조문객을 접대하는 도우미 등 일손 지원 △꽃 장식과 기타 서비스 등이 항목별로 분류된다. 보람상조는 국내 최초로 링컨컨티넨털 특급 신형 리무진 차량을 고인 전용 장의차로 사용한다는 점을 앞세운다. 여기에 옛 왕실의 전통 장례에서 볼 수 있었다는 ‘궁중렴’으로 고인을 모신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별세를 맞은 가입자들은 가장 당황스러울 때로 상조업체와 곧바로 연락이 되지 않을 때를 꼽는다.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중무휴 24시간 콜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그래서 꼭 필요하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편안한 마지막 길을 맞을 수 있도록 호스피스 활동과 장의 준비 컨설팅 등 사전 서비스로 시작해 장의가 발생하면 2시간 안에 전문 장례 지도사를 파견하고 운구와 장례식장 선정, 수시, 입관까지 고객 만족 컨설팅을 펼친다는 점도 홍보 포인트다. 고인의 영상과 장의 영상, 사진을 기록하고 돌아가신 뒤에도 고인에게 메시지나 편지를 전할수 있는 인터넷 추모관 서비스를 운영하는 등 ‘원스톱 토털 서비스’를 내걸고 있다. 상품의 가격 차이는 크게 △관의 재질 △수의의 재질 △의전용품을 대여하는 개수 △장의차 보조비 금액에서 발생한다. 보람상조의 프리미엄 상품은 가격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뉘는데, 360만원 상품은 오동나무관(2치2단)을 사용하지만 480만원 상품은 은행나무관(1치5푼)을, 780만원짜리는 향나무관(1치5푼)을 쓴다. 링컨컨티넨털 리무진과 리무진 장의 버스의 경우에도, 360만원과 480만원 상품은 각각 왕복 200㎞, 400㎞까지만 무료로 지원하고 넘어서면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하지만 780만원 상품에서는 전국 어느 곳이든 추가 요금이 없다. 꽃 장식의 크기와 모양, 장례 도우미의 숫자와 봉사 시간에도 가격대별로 차이가 있다. 보람상조 콜센터 관계자는 매달 3만원씩 120회(또는 6만원씩 60회)를 납부하는 360만원짜리 프리미엄 상품의 인기가 가장 높다고 말했다. 어느 업체에서나 문상객을 접대하는 음식 비용은 상조서비스 상품 가격에 포함되지 않는다. 병원 영안실을 이용했을 경우 시신 안치실료도 따로 내야 한다. 어떤 서비스에 대해 추가요금을 내야하는지 꼼꼼히 챙겨봐야 한다. 출처/ 위클리조선. 채성진 기자 dudmie@chosun.com   [相助] 상조와 보험은 어떻게 다른가 약정금액 완납 전에 행사 치르면 남은 회비 일시불로 내야 예금자보호법 적용 안돼 부도·폐업 때 보상 받기 어려워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 매달 일정한 금액을 적립한다는 점에서 상조서비스와 보험은 비슷해 보인다. 모집원을 통하거나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 없이 온라인 상담, 콜센터로 쉽게 가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하지만 상조서비스와 보험에는 성격상 확실히 구분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문제는 상당수의 상조서비스 이용자들이 이같은 차이에 대해 잘 모르고 가입하고 있다는 데 있다. 치열한 업체 간 경쟁 탓에 상조서비스가 마치 보험 상품의 하나인 것처럼 소비자를 현혹해 가입을 유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상조서비스와 보험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본다. 먼저, 상조서비스는 가입한 회원들이 장례나 결혼, 회갑 같은 대소사(大小事)를 치를 경우 해당 회원에게 물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보험은 질병이나 사고, 사망 등의 경우에 현금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소비자들의 오해가 가장 많은 부분은 계약에서 지정한 행사가 발생할 경우, 이후 납입금을 계속 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것이다. 매달 약정한 금액을 완납하기 전에 행사가 발생할 경우, 상조서비스는 행사가 끝난 뒤 남은 회비를 일시불로 모두 납부해야 한다. 보험 계약에서는 가입자가 보험료를 내는 도중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사유가 발생하면 미리 약정된 보험금을 받고 그 이후에는 보험료 납부가 면제된다. 관혼상제 행사를 치른 뒤, 잔여 대금을 낼 것을 요구하는 상조업체와 소비자의 마찰은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다. 소비자에 대한 보호의 정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신고제에 의해 설립이 자유로운 상조회사의 서비스는 보험이나 금융업과는 달리 예금자보호법에 의해 보장을 받을 수 없다. 업체의 부도나 폐업의 경우, 따로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고객들이 상조서비스 가입에 앞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일부 상조업체는 “고객이 맡긴 예탁금 중 일부를 이행보증업체에 맡기기 때문에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다”고 선전하지만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행보증업체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약정 내용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안전성 측면에서는 불안한 감이 없지 않은 것이다. 피보험자를 지정해 피보험자에게만 혜택이 제공되는 보험 상품에 비해 상조서비스는 피보험자를 지정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양도·양수할 수 있다. 보험 상품은 가입할 때 성별이나 연령, 병력(病歷) 여부에 따라 제한이 따르지만 상조서비스는 남녀노소 누구나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최근에는 손해보험사들이 ‘상조보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보험 상품을 내놓고 있다. 질병이나 상해에 대한 위험 보장과 함께 장례 대행 서비스를 추가한 것이다. 피보험자가 사망할 경우 전문 장례지도사와 도우미가 장례 의전을 진행하고, 계약자가 직접 설계한 상·장례용품을 현물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피보험자가 100세까지 생존할 때는 백수(百壽) 축하금으로 만기환급금을 지급하는 상품도 있다.   출처/ 위클리조선. 채성진 기자 dudmi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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