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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공급으로 본 중국의 식문화 형성
2013년 12월 09일 09시 57분  조회:4307  추천:0  작성자: 단비
수요공급으로 본 중국의 식문화 형성 글로벌 불균형이 없었다면, 우리는 탕수육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특정 문화권에 다양한 식문화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다양한 음식을 공급할 수도, 수요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가장 발달된 식문화를 갖게 된 배경 또한 여기에 있다.

중국이 가장 발달된 식문화를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출처: gettyimages>

먼저 수요 측면을 살펴보자. 중국은 19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 서양이 부강해진 최근의 200여 년을 제외하고는 중국은 줄곧 세계경제의 중심 국가였다. 영국의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에 따르면, 1820년대에도 중국의 GDP 규모는 전 세계 GDP 총액의 28.7%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4대 문명이 태동한 이래 중국이 줄곧 가장 부강한 나라들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수요와 공급이 음식문화를 부흥시키다

중국인은 막강한 경제력으로 왕족이나 귀족 이외의 다양한 부유층과 중산계급을 형성했다. 이로 인해 음식문화에 대한 다양한 수요를 이끌어냈다. 일례로 중국 코스 요리에 최고봉으로 평가 받는 만한전석(滿漢全席)은 중국의 궁정요리가 아니었다. 만민족과 한민족의 요리 중 최고의 요리를 결합해 만든 이 코스 요리는, 중국 지방의 부호가 중앙에서 온 관리를 접대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연회요리이자 접대요리였다. 즉, 상인들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일찍이 외식문화도 발달했다. 소위 음식점이라 부르는 밖에서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은 한나라 때부터 번성했다. 물론 음식점의 태동은 그 이전부터였는데, 문헌에 따르면 기원전 춘추전국시대의 인물인 공자 또한 외식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유럽의 경우 근대에 와서야 외식 문화가 발달했다는 점과 비교할 때, 중국 서민들의 음식문화가 얼마나 일찍부터 발달했는지 확인시켜준다. 어느 나라든 궁이나 귀족들을 위한 요리는 다양한 형태로 발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서민의 식문화를 형성한 나라는 일찍이 중국밖에 없었다.

이처럼 중국의 식문화가 왕가와 귀족층에 국한된 문화가 아니라 중국의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중국의 막강한 경제력에 근거하여 음식에 대한 다양한 계층의 수요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양한 식문화에 대한 수요가 형성되어 있다고 해서 훌륭한 식문화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부합하는 공급이 있어야만 한다. 중국은 다양한 식문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공급이 가능했던 대제국이었기에 우수한 식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기후 조건이 전혀 다른 중국 각지에서 다채로운 식자재가 공급되었기에 가능했다.

기후 조건이 전혀 다른 중국 각지에서는 다양한 음식문화가 발달했는데, 쌀농사에 적합한 양자강 지역에서는 쌀을 주식으로 한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출처: Wikipedia>

황하 강 이북 지역에는 쌀농사가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육류를 중심으로 한 요리문화와 피, 조, 콩을 주로 활용한 음식문화가 형성되었다. 한편 쌀농사에 적합한 양자강 지역에서는 쌀을 주식으로 한 음식문화가 발달하였으며, 해변에서 고기를 잡기 쉬운 환경에 놓인 중국 남부 지역에서는 생선을 활용한 요리가 발달하였다. 서역과 인접한 내륙 지역은 밀을 활용한 다양한 요리법이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이렇듯 중국은 남과 북,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에 걸쳐 해당 지역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식자재를 활용해 다양한 요리문화가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렇게 다양한 식자재를 활용한 요리들이 중국의 우수한 식문화 형성에 중요한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국문화의 높은 개방성이 발달된 식문화를 만들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경제력은 식문화를 발달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아무리 풍부한 경제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다양한 음식문화에 대한 수요가 형성되고 각 지역으로부터 다양한 식자재가 공급되었다 하더라도, 먹거리를 대하는 개방적인 태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결코 우수한 식문화를 형성할 수 없다.

이슬람 문화에는 어떤 것들은 결코 먹어서는 안된다는 문화적 규율이 있다. 이러한 요인은 식문화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출처: Wikipedia>

중국만큼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던 인도와 이슬람문화권에서 다채로운 식문화가 형성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도나 이슬람은 ‘이러 이러한 것들을 결코 먹어선 안 된다’는 엄격한 문화적 규율이 있다. 불교문화권 역시 육식을 금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음식의 낭비를 지양하는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적, 종교적 규율은 분명 해당 지역의 여러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불가피한 부분도 있지만, 식문화 발달이라는 측면에서는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먹거리에 대한 금기 사항은 다양한 식자재가 도처에 널려 있다 하더라도 이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문화가 형성되지 못하기 만드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인도나 이슬람 문화권과는 달랐다. 중국의 유교나 도교는 여타 종교인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와는 달리 먹는 것에 대한 특별한 금기 사항이 없다. 이러한 유교와 도교 문화 속에서 살아온 중국인들은 먹거리 문화에 있어 그 어떤 지역보다 높은 개방성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중국 식문화의 높은 개방성은 중국요리를 가장 세계화된 요리로 거듭나게 했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중국음식점은 쉽게 찾을 수 있는 이유, 세계 여러 민족이 중국음식을 즐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인은 어느 지역을 가던 해당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자재를 활용해 멋진 요리로 탄생시킬 수 있는 경험과 식문화에 대한 높은 개방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불균형은 왜 생기나

탕수육은 어떻게 탄생한 음식일까? <출처: Lusheeta at en.wikipedia.org>

그런데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중국음식인 탕수육은 의외로 경제적 요인으로 탄생했다. 19세기 중엽 청나라 때 전개된 글로벌 불균형이 탕수육 탄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글로벌 불균형(global imbalance)이란 세계적인 경상수지 불균형 상태로 정의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면서 다시 주목 받은 바 있다. 글로벌 불균형은 국가 간의 상품이나 용역의 거래 결과를 기록한 경상수지를 통해 가늠할 수 있는데, 모든 경상수지 흑자국의 흑자액과 모든 경상수지 적자국의 적자액의 합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글로벌 불균형의 예를 들어 보자. A라는 나라와 B라는 나라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만약 두 나라가 서로 비슷한 수준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교역하여 A는 B에 100을 수출하고 90을 수입해왔다면, 이 경우 A국가의 경상수지 흑자는 10을 나타낼 것이고, B국가의 경상수지 적자는 10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경상수지 흑자국의 흑자액과 모든 경상수지 적자국의 적자액의 합을 통해 파악하는 글로벌 불균형은 20 수준이다. 반면, 두 나라의 교역방향이 편향적으로 전개되어 A가 B에 100을 수출하고 10만큼만 수입했다면, A는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90일 것이고, B는 적자 규모가 90일 것이다. 이렇게 편향된 교역이 전개되었을 경우 글로벌 불균형은 180(A국의 흑자액 90+B국의 적자액 90)이 된다.

국가 간 교역의 결과가 한 쪽은 수출 위주로 다른 한 쪽은 수입 위주로 전개될 경우 글로벌 불균형은 증가한다. 실제로 2008년, 전 세계 경상수지 적자국가의 총 적자액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43%에 달했으며, 전 세계 경상수지 흑자국가의 총 흑자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24%에 달했던 적이 있다. 이러한 수치는 당시 글로벌 불균형이 왜 전 세계적인 문제로 인식되었는지 확인시켜준다.

영국과 중국 간의 글로벌 불균형, 아편전쟁

영국인들은 17세기에 막강한 부를 축적하면서 차 문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출처: wikipedia>

19세기 중반에 있었던 글로벌 불균형은 영국과 중국 간에 유발되었다. 영국인들은 1689년 동인도회사 설립 이후 막강한 부를 축적하면서 차 문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이후 차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막대한 양의 은을 주고 중국으로부터 차를 수입해 가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액을 막기 위해 처음에는 관세를 부과해 차 수입을 줄이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영국은 자신들이 인도에서 생산한 모직물을 중국에 수출하여 이러한 경상수지 적자폭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들은 주로 비단이나 명주로 된 옷을 즐겨 입었으며, 동물의 털로 만든 모직물은 오랑캐들이나 입는 저급한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모직물 수출은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결국 엄청난 무역 적자에 시달린 영국 정부와 영국 상인들은 중국에 아편을 팔기로 결정했다. 당시 영국은 이미 인도의 대부분의 땅을 식민지로 점령한 상태라서 이 광활한 대륙에 아편을 심어 중국에 판매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청나라 옹정제는 전국에 아편을 금한다는 명령을 내렸지만, 중국인들 사이에서 아편은 이미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해 군인, 상인은 물론이고 청나라의 고관대작들도 아편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황제인 도광제마저 아편을 하였다. 영국은 이러한 아편무역을 통해 18세기의 막대한 무역적자를 해소하고, 19세기에 드디어 무역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즉 무역 불균형을 극복한 것이다.

상황이 이처럼 심각해지자, 중국 정부는 아편을 근절하기 위해 임칙서를 등용하기에 이르렀다. 임칙서는 외국 상인들의 아편 장사를 막기 위해 영국 상인이 주둔하던 지역을 포위하고 음식 공급을 막았다. 결국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에게 자신들이 보유한 아편을 모두 내놓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아편을 내놓긴 했지만 앞으로 아편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는 작성하지 않고 마카오로 갔다. 즉, 아편 수출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역 불균형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돈벌이의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 당시 광저우에서 싸우고 있는 영국군과 중국군의 모습 <출처: Wikipedia>

청나라와 영국 상인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1816년 12월 영국함대와 청나라 함대 사이에 사소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임칙서는 영국과의 모든 무역을 차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소식이 영국 본토에 전해지자 영국 정부 역시 중국과의 전쟁을 감행해야 할지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1840년 영국 의회는 찬성 271표, 반대 262표의 근소한 차이로 군비지출안이 승인되고 같은 해 5월 전쟁을 공식 선포했다. 1840년 4월 25일 더 타임스(The Times)는 영국 의회가 결정한 이 전쟁을 ‘아편전쟁(Opium War)’이라고 명명했다.

영국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인도에 주둔한 병력 4천여 명과 함대 18척을 중국으로 이동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중국 정부는 처음엔 비웃었다고 한다. 19세기 이전까지 세계 최강의 기술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던 중국이었기에 영국의 도발을 쉽게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청나라 군대의 참패였다. 영국 함대는 중국 연해 지방의 주요 도시인 광저우, 창하이호, 닝보, 상하이 등지를 차례차례 점령해갔으며, 급기야 청의 수도인 베이징 바로 밑에 있는 텐진까지 장악했다.

뒤늦게야 청나라는 영국정부와 정식으로 강화조약을 추진하여 1842년 8월 양국 간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강화조약의 주요 내용은 홍콩을 150년 간 영국에 넘겨주고, 광저우를 비롯한 5개 항구를 개항하여 자유로운 무역을 보장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중국에서 자유롭게 상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된 수많은 영국인들이 중국 본토에 상주하게 되었다.

글로벌 불균형이 만들어낸 음식, 탕수육

영국인들이 사용하기에 어렵고 불편한 젓가락 문화는 탕수육이 탄생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출처: Wikipedia>

이렇게 해서 중국에 상주하게 된 영국인들은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바로 음식 문제였다. 이전에는 중국 본토가 아니라 중국 인근의 선상이나 영국인 상관에 잠시 거주하며 영국에서 미리 가져온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하지만 중국 본토에서 장기간 거주하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어야 했고, 포크와 숟가락을 포기하고 중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도구인 젓가락을 써야 하는 상황이 늘어났다. 영국인들에게는 음식 못지않게 이 불편하기 그지없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영국 상인들은 중국 정부에 젓가락의 불편함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기도 하였다. 자신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불편한 도구를 제공했느냐는 것이다.

결국 중국은 영국인들의 입맛에 부합하는 음식을 만들어보자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이와 함께 젓가락 사용에 서툰 영국인들이 쉽게 집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중국인들은 영국인들이 육식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가장 주된 식재료로 육류를 택했다. 여러 육류 중 돼지고기가 최종 낙점되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영국인들이 장기간 거주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가장 쉽게 공급할 수 있는 육류인 돼지고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 고기를 간장, 후추 등으로 간을 해 가루를 입혀 기름에 넣어 튀겨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설탕과 간장, 소금 등으로 간을 내고 각종 야채를 볶아 함께 제공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음식이 ‘달고 신맛의 고기’라는 뜻의 탕수육이다.

탕수육을 맛본 당시 영국인들은 극찬을 보냈다고 한다. 다른 중국음식처럼 불편하고 어렵게 젓가락질을 할 필요가 없이 포크로 찍어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인들이 즐겨 먹는 육류를 주된 식재료로 사용하였고, 입안에서 감도는 달콤하고 시큼한 맛을 느낄 수 있으니 계속해서 탕수육을 즐길 수 있었다. 탕수육은 삽시간에 중국에 머무르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처럼 탕수육의 탄생은 글로벌 불균형으로 인해 유발된 청나라와 영국 간의 전쟁의 결과, 영국 상인들이 중국본토에 상주하게 되면서 탄생한 음식이다. 결국 탕수육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지게 된다. 19세기 인천을 통해 조선과 교역을 하던 중국인들을 통해 전해진 이후로 한국에서도 탕수육은 가장 사랑받는, 가장 친근한 중국요리가 되었다.

국가 간의 무역 불균등 정도를 나타내는 글로벌 불균형은 오랫동안 지속될 경우 어떤 형태로든 심각한 경제문제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19세기 영국과 중국 간의 글로벌 불균형이 결국 전쟁으로까지 치달은 것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국제사회에 커다란 문제를 안겨주는 글로벌 불균형이 오늘날 전 세계인이 즐겨 먹는 대표적인 중국음식 중 하나인 탕수육을 고안하게 만든 가장 큰 배경이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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