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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최동일 성장소설집-아직은 초순이야

빨간것
2012년 04월 24일 08시 36분  조회:967  추천:0  작성자: 동녘해
 

 

 



기차는 숨막히는 어둠을 삼키며 기승스럽게 질주하고있다. 분명 갈길이 정해져있는 기차여서 자기가 목적한바를 향해 달리고있을것이지만 그속에 몸을 담근 응이는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를 바라고 달리고있는지가 묘연하기만 하다.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리자.)
서정시의 한 단락 같은 아이디어 하나를 가슴에 담아들고 가방 하나를 어깨에 달랑 걸친채 무작정 떠난 길이여서 응이로서는 더욱 막연한지도 몰랐다.
(선택을 잘한거야, 나의 이 선택이 아버지를 행복하게 할수만 있다면 나도 행복한거야.)
응이는 애써 서글퍼지려는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그게 달랜다고 해서 달래지는것이 아닌것 같았다…

“헉헉…”
그때 아빠는 거칠게 숨을 톺고있었다.
“헉헉…”
숨소리가 거칠어갈수록 빨간것은 세상 무서운줄을 모르고 크게크게 부풀어졌다. 한뽐도 안되던 그 빨간것이 아빠의 입김을 받아먹고 한순간에 배뚱뚱이로 되여가는것을 신비한듯 바라보면서 응이는 짝짝 손벽을 치고 토끼뜀을 하면서 가무스름한 얼굴에 맑은 웃음발을 피워올렸다.
“커진다, 커져. 하늘처럼 커진다. 잘한다, 울 아빠. 하늘처럼 잘한다.”
호들갑에 가까운 응이의 재롱이 아빠의 신경을 건드렸던지 아빠는 연신 황소숨을 내뿜으며 응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아빠의 얼굴은 그 빨간것처럼 뻘겋게 부풀어올랐고 눈알은 당금 튀여나올듯 충혈되여갔다.
“아빠!”
응이는 갑자기 새된 소리를 질렀다. 당금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이 머리를 쳤던것이다. 그 소리에 아빠는 흠칫하면서 두눈을 더 크게 치뜨며 모두숨을 내뿜었다.
“팡!”
소리와 함께 빨간것은 산산쪼각이 나며 사방으로 뿌리워져나갔다. 응이는 파편처럼 흩어지는 빨간 쪼박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받쳐주던 하늘이 와그르르 무너지는듯한 아픔을 느끼며 단말마적으로 “아빠~”하고 실망을 터쳐올렸다.
그 서슬에 응이는 번쩍 눈을 떴다.
카텐을 뚫고 뿌우연 쪼각달이 심드렁하니 얼굴을 들이밀고있었다. (꿈이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났다. 응이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몹시도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몸은 왼쪽으로 누워져있었는데 왼쪽 겨드랑이에 끼워진 오른손이 신통하게도 심장을 누르고있었다. 몸에 깔린 왼쪽팔이 저렸다. 응이는 몸을 추스려서 천정을 쳐다보게 한 다음 오른손으로 저려나는 왼팔을 잠간 주무르다가 몸 그대로를 큰대자로 만들어버렸다. 늦가을의 누런 잔디밭에 누워있는듯한 환영이 머리속을 치고 들었다. 구름 한점 없이 푸른 하늘이 참 높다고 생각되였다. 높은 하늘에서 빨간것이 바람에 날려오고있었다. 파아란 하늘에서 한점의 붉은 점은 웬지 그렇게 처량하게 느껴졌다. 응이는 잠간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파아란 하늘의 빨간 점 하나.
기억의 저편에서 뭔가가 스멀스멀 기여나오고있었다.

응이가 여덟살 나던 해였다. 초롱초롱한 두눈에 눈물 마를 새 없던 그해 가을 내내 기별도 없이 꿈에 나타나서 응이의 새우잠을 설쳐놓던 빨간 점이였다. 꿈을 꾸고 깨여나면 그렇게 외롭고 무서울수가 없었다. 응이는 어미닭의 품을 파고드는 햇병아리마냥 아빠의 몸에 자신을 밀착시키군 했다. 벌써 길들여졌을법도 한 냄새지만 여전히 길들여지기 힘든 매캐한 톱밥냄새가 응이의 코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 냄새도 꿈을 꾸고난후의 외로움이나 무서움하고는 비길바가 못되였다. 악착스럽게 아빠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틀어박을라 치면 날 잡아갑수 하고 드릉드릉 코를 골아대던 아빠도 어느새 잠을 설치고 꺼슬꺼슬한 손바닥으로 응이의 배를 천천히 만져주면서 잠기 어린 목소리로 “오줌이 마려워?”하고 물으셨다.
“아니.”
“그럼 자야지. 랠 또 학교에 가야 하니까.”
말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아빠는 또 드릉드릉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응이는 그러는 아빠가 참 밉다고 생각되였다.
(난 무서운데. 꼭 껴안아줄거지. 엄마라면 나를 꼭 껴안고 머리를 쓸어주면서 “자장자장— 내 아들아.” 하고 자장가를 불러줄텐데.)
그런 생각이 들라치면 또 엄마가 떠나가던 날 공항의 하늘에서 보았던 그 장면이 클로즈업되여 눈앞에 펼쳐지군 했다.
엄마가 한국으로 떠나던 그날도 하늘이 파아란 늦가을의 어느날이였다. 공항 휴계실의 차디찬 대리석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범 나와라 곰 나와라 하고 발버둥질을 치며 엄마를 가지 말라고 생사결단을 하다가 아버지의 거쿨진 손에 질질 끌려 밖으로 나와서였다. 아빠는 택시를 부르느라고 허둥거리고있었고 고모는 그때까지도 두발을 동동 구르는 응이를 어찌할지 몰라 “그만해라, 그만해라~”를 련발하고있었다. 그때 무서운 굉음이 울려왔다. 따라서 고모가 소리쳤다.
“응이야, 봐라. 네가 이렇게 울어대니 엄마가 끝내 하늘로 오르는게 아니냐? 봐라, 저 봐! 엄마가 하늘로 오른다.”
고모의 잔사설에 놀라 응이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머리를 쳐들어 소리나는쪽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높고 푸르다고 생각되였다. 높고 푸른 하늘로 은색의 비행기가 앞을 가르며 치솟고있었다. 비행기의 옆구리에 붙은 뭐라고 씌여진 빨간색 타원형포스터가 한눈에 안겨들었다. 웬 일인지 비행기의 거대한 몸뚱이보다도 타원형의 그 빨간 포스터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고무풍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저게 터지면 어떡해? 고모…”
응이가 울음을 그치고 멀어져가는 빠알간 포스터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얘는, 불길하게 웬 소리냐? 비행기가 왜 터져?”
고모가 못마땅하다는듯이 응이를 째려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응이는 응이대로 하늘 어디에선가 그 빨간것이 “팡!” 하고 터져버릴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로부터 응이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가끔 그 빨간것을 떠올렸고 그러는 밤이면 또 하늘로 떠다니는 그 빨간것을 꿈에 보군 했었다. 꿈에 그 빨간것은 언제나 하늘 어디에선가 “팡!” 하고 터져버렸고 응이는 그 소리에 놀라 잠을 깨군 했다. 그때마다 응이는 외롭고 무서워서 아빠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들이밀군 했다.
“자야지? 랠 또 학교에 가야 하니까.”
응이를 어르는 아빠의 대사는 목수라는 변하지 않는 아빠의 직업만치나 변함이 없었다. 터져버리는 빨간것에 놀라 잠을 설치고난후 외로움에 떨고 무서움에 떨며 긴가민가 풋잠이 들면 응이는 또 호랑이에게 쫓기우고 사자에게 먹히우며 힘든 밤을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일어나면 아빠는 아빠대로 부엌에서 아침준비를 하고계셨다. 아침이라 해야 대개는 전날 저녁에 먹던 국이나 반찬물에 밥을 말아서 한공기씩 비우면 그만이였다.
“가자, 학교에 가야지.”
아빠는 매캐한 톱밥냄새가 코를 찌르는 작업복을 툭툭 털어서 몸에 걸치며 응이를 불렀다. 응이는 그 톱밥냄새를 맡으며 심드렁하니 아버지의 뒤를 따르군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어느때부터인지 그 빨간것은 응이의 머리속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응이도 다시는 밤에 가위 눌려 잠을 설치는 일이 없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응이는 어느새 아빠와 다른 침실을 쓰는 열여덟살의 소년으로 자라났고 아빠도 어느때부터인지 “자라, 랠 학교에 가야지.” 하는 걱정을 하지 않으셨다.
그랬다. 응이는 어느새 고중 1학년생이 되여있었던것이다.

오후 세번째 시간은 작문시간이였다. 명제작문이 주어졌다. 제목은 “시간의 힘”이였다.
“시간의 힘은 위대한것입니다. 좀만 노력하면 우리는 곳곳에서 시간의 힘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나에게서 시간은 어떤 위대함을 과시했는지? 살며시 두눈을 감으시오. 툭툭!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위대한 시간의 발걸음소리가 가느다란 초침의 등에 실려 나에게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수업시간이면 곧잘 이렇게 격정을 토로하군 해서 “김격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번대머리 김선생님이 또 가슴을 치며 시간의 위대함을 호소했다. 응이는 선생님의 호소에 최면에라도 걸린듯 어디론가 빨려들고있었다. 그 시각 응이는 머리속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아빠의 얼굴이 아니라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보고있었다. 너무나 익숙한듯하면서도 피뜩 떠오르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이여서 몹시 괴로왔다. (아버지에게서 “시간의 힘”이란 과연 어떤것일가?) 하는 생각이 내내 응이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날 하학하여 집에 오니 아버지가 먼저 퇴근해있었다.
“응이야, 소배필을 끓인다. 옷 갈아입구 빨랑 와라. 소탕에 시원히 밥 말아먹자.”
신을 벗는 응이를 보고 아버지께서 싱글벙글했다.
“네.”
응이는 외마디대답을 하면서 아버지를 눈여겨보았다. 아버지는 그때 뽀얀 김이 무럭무럭 피여오르는 큰 남비곁에 서서 파를 송송 썰고있었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간 10년 내내 보아오던 평범할래야 더 평범할수 없는 풍경이였다.
응이는 인차 옷을 갈아입고 나와 밥상앞에 앉았다.
“국물이 뽀오얀게 기름이 동동 뜨는걸 봐라. 제법 밥맛이 당길것 같구나.”
아버지께서 응이의 앞으로 소금통을 밀어놓으며 말씀했다.
“네.”
응이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가루소금을 한숟가락 푹 떠서 국에 넣었다.
“얘, 무슨 소금을 그렇게 많이 넣어?”
아버지가 된겁하여 소리쳤다.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국물을 먹어보니 짜기는 짰다. 하지만 응이는 밥을 말아놓으니 그런대로 먹을수 있을것 같아 술목이 부러지게 밥을 입에 떠넣었다. 그러면서도 머리속에서는 하냥 “시간의 힘”이 맴돌이쳤다. 응이는 밥술을 뜨면서 의식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어릴 때 참 멋지다고 생각되던 아버지의 쌍까풀눈이 피곤한듯 우멍하게 꺼져있었고 눈확에 얼기설기 주름이 실려있었다. (아버지도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치는 순간이였다.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니?”
응이의 반상적인 행동을 보아냈던지 아버지께서 쑥스러운듯 괜히 귀밑머리를 쓸어보며 바스음을 토했다.
“아니요.”
응이는 머리를 돌리며 밥술을 입에 밀어 넣었다. 웬 일인지 목이 꺽 메여왔다. 딸꾹질이 잇달았다.
“물을 넘겨라, 천천히 먹지 그러니…”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씀을 하시며 물고뿌를 들어 응이의 앞에 내밀었다. 응이는 물고뿌를 받아 꿀떡꿀떡 몇모금 마셨다.
“내려갔니?”
“네.”
“올해는 작년보다 김장배추를 일찌기 사야겠다. 작년에 늦었더니 괜히 비싸기만 하더구나.”
“네.”
“조선사람은 그래두 김치를 먹어야 하는거야. 김치힘이라는게 있거든. 허허허허… 로씨야마우재들이 빠다힘을 쓰는것처럼 말이다.”
“네.”
응이는 외마디대답을 하면서 다시한번 아버지를 훔쳐보았다. 아버지도 그 순간 응이를 바라보고있었다. 응이가 입가에 웃음을 피워올리며 말했다.
“아버지, 흰머리가 많이 났습니다.”
“어, 흰머리? 그래 나이가 얼만데. 휴~ 오십도 넘었구나. 응이야, 올해 내 나이 쉰 몇이던가? 허허허허…”
아버지는 애써 목소리를 맑게 내려고 소리를 한 옥타브 높이고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되려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아버지.”
“그래, 쉰둘이지. 허허허허… 너를 서른 네살에 낳았으니까. 그때 너의 엄마가 서른두살이였나? 집체호에서 제일 막차를 타고 시내에 들어와 자리를 잡느라구 고생을 하다나니 좋은 세월이 싹 흘러버린것이였어.”
“아버지도 집체호에 갔댔어요?”
응이가 밥술을 뜨다말고 뜻밖이라는듯 물었다.
“그럼, 갔댔지.”
“처음 듣는데요. 왜 그런 말씀을 일찍 안했어요?”
“그래? 허허허허… 살려구 버둥거리다나니 그런 말을 할 새가 없었나보다. 집체호로 가던 해가 열여덟살이였으니, 그게 74년도던가? 참, 그러고보니 지금 너하구 같은 나이였네.”
아버지는 일어나 응이의 앞에 놓인 수저와 빈 밥사발을 주어들고 몸을 돌려 수도앞으로 다가가며 혼자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열여덟살은 어떠했을가?
문뜩 그것이 알고싶었다. 하지만 응이는 이미 아버지와 너무 많은 말을 한듯싶어서 궁금증을 속으로 누르며 침실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열여덟살은 어떠했을가?
그 생각이 집요하게 응이를 놓지 않고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가슴이 후둑후둑 뛰기 시작했다. 오른 볼이 확확 달아올랐다. 응이는 손을 들어 자기의 오른 볼을 만지작거렸다.
“말해봐, 내가 몇번째야? 몇번짼가 말이야.”
응이는 볼을 만지던 손을 내리워 자기의 오른쪽 허벅다리를 만졌다. 접때 그 허벅다리를 꼬집으며 소리소리 질러대던 지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여 눈앞에 떠올라서였다. 그날 응이가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네가 나의 첫 키스상대라고 아무리 해석해도 지려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당황함이 없이 키스를 하는 그 자세가 너무 로련해보인다는것이였다. 응이가 더 어떻게 해석할수 없어 쩔쩔매고있을 때 지려가 갑자기 덮쳐들어 응이의 볼을 할켰다. 응이는 오른쪽볼이 따끔해남을 느끼면서 손을 볼에 가져갔다. 빨간것이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까불구있어. 내가 몇번째냐구? 난 처음이야, 누구에게도 나의 첫 키스를 허락한적이 없었다구. 알아둬. 넌 나의 첫 키스를 훔쳐간 도둑놈이야.”
지려는 발뒤꿈치를 들어 빨갛게 피가 맺힌 응이의 오른 볼에 뻑 소리를 내고는 응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이 도둑놈아.”
그날 응이는 학교에서 단지부활동을 한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지려와 함께 맥주 두병을 마셨다. 지려의 말대로라면 열여덟살 성인식을 치르는것이요 소녀에 대한 고별식을 치르는 자리라는것이였다.



첫 키스를 도적맞혔다고 응이의 허벅다리를 꼬집을 때와는 달리 그렇게도 담담하게 맥주잔을 홀짝이며 키득거리는 지려를 보면서 응이는 과연 “고별식”이라는 낱말로 이렇게 소녀의 첫 키스를 대체할수도 있을가를 생각해보았다. 어쩜 충분히 그럴수 있을것 같았다. “고별”이란 무엇인가를 떠나보낸다는 말일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엇인가를 떠나보낼 때면 늘 이런 식을 하게 될것이니 “고별식”이란 역시 그렇게 가슴을 들먹일 필요는 없는것이요 첫 키스란 역시 간단한 “고별식”으로도 스쳐버릴수 있는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도둑놈아!” 하는 소리를 가슴 쩡하게 들으며 지려에게 끌려올 때의 흥분이나 공포 같은것이 우수경칩에 대동강 녹아내리듯 맹랑하게도 응이의 뜨거운 가슴속에서 사라지고있었다. 응이는 그러는 지려를 묘한 눈길로 지켜보다가 컵을 들어 맥주 두어모금을 입에 쏟아넣으며 시까스르듯 말했다.
“지려, 너 알지. 넌 나한텐 고마와해야 하는거야?”
“엉? 건 또 무슨 얼어 죽을 론린데?”
“당신을 도와 소녀에서 고별시켜준 그대! 고맙잖아.”
“야, 이 짭새야, 누가 소녀와 고별했어? 너 남의 규수를 로처녀귀신 만들 일이라도 있냐? 꿈에라도 그런 소리를랑 말어라. 나 시집 못 가면 너 책임질라니?”
“허, 시집은 가야겠는 모양이지?”
“시집을 안 가면? 짜식, 총각귀신은 몽당귀신이라는데 처녀귀신은 크크크크… 미칠한 비자루귀신이라도 되려나?”
지려는 키득거리며 오른손을 쑥 내밀어 할퀴워서 뻘건 줄이 나있는 응이의 오른 볼을 뻑 쓸어주었다.
바로 그 뻘건 줄이 새삼스럽게 회억의 쪽문을 열어젖히는것이 이상하다고 응이는 생각했다. 그날 밤 잠들기전까지 그 뻘건 줄은 내내 응이의 사색을 삼뭉치로 만들어버렸다.

아버지의 열여덟살은 과연 어떠했을가?
큰대자로 누운 응이는 은은하게 당겨오는 아래배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손으로 지그시 아래배를 눌러보았다. 방광이 째지듯이 아파왔다. 전에 없던 일이였다. 저녁때 아버지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소고기국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은것이 탈이 난 모양이였다. 못 견디게 목이 타며 물이 당겨서 자리에 눕기전에 생수를 벌컥벌컥 몇 고뿌 들이켰던것이다. 딱 일어나기 싫었다. 응이는 잘 튀겨진 새우처럼 한껏 몸을 옹송그리고있다가 저려오는 아래배를 슬슬 문지르며 부시시 일어나 어정어정 침실문을 열었다.
“어!”
응이는 잠간 선자리에 굳어졌다. 화장실에 전등이 켜져있었던것이다. 웬 일일가? 응이는 머리를 돌려 동쪽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는 새벽 1시 5분을 가리키고있었다.
(참, 아버지가 화장실을 쓰고 깜빡해서 전등을 끄지 않은 모양이구나.)
응이는 주저없이 화장실문을 당겨 열었다.
“앗!”
순간 응이는 새된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버지가 알몸으로 화장실 거울앞에 서있었던것이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간후 꼭 십년간 밥하고 빨래하고 돈 벌어들이던 그 거쿨진 손으로 뭔가를 꾹 거머쥐고 거울앞에 서있었다.
“수… 수… 수으응아.”
아버지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응이는 두눈을 꽉 감고 본능적으로 머리를 돌리며 “탕!” 소리나게 화장실문을 닫아버렸다. 다리가 후둘후둘 떨려나서 좀처럼 걸음이 되여주지 않았다. 응이는 허둥지둥 벽을 짚으며 용하게 침실을 찾아들어갔다. 가슴이 활랑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났다. 더 이상 생각을 굴리고싶지 않았다.
밤은 길기도 했다.

“얌마, 응이 너 오늘은 좀 변태스럽다.”
지려의 손이 어느새 응이의 어깨우에 찰싹 떨어졌다.
“짜식, 뭐가?”
응이는 웬 일이냐는듯 지려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니야, 그럼?”
“그게 뭔데.”
지려가 모니터에 뜬 남색으로 된 아이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두눈을 올롱하게 치떴다.
“너 언제 그런데 관심이 생겼어?”
“어떤데?”
“파란 아이디에…”
“오~ 아냐, 그저 그런게 있어.”
“설마 너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버리는건 아니지?”
“짜식, 너 날 뭘루 보구 떠벌이는거야? 떠벌이긴.”
응이는 악의없이 지려의 어깨를 툭 치며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지려가 역시 아니라는듯 응이를 뚫어지게 건너다보며 말했다.
“그럼 아니냐? 다른 때는 나의 눈을 피해서 녀자애들을 꼬시느라 정신없더니만 오늘은 웬 일이야? 웬 남자사냥이냐구?”
“남자사냥?”
응이가 되물으며 두눈을 커다랗게 뜬채 지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 시각 지려의 눈길은 뭔가를 알고싶어 죽겠다는듯 무시로 반짝이고있었다. 응이는 지려의 얼굴로부터 머리를 돌리고 모니터에 나타난 남색아이디들을 훑어보다가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그런게 있어.”
“어떤게?”
“녀자애가, 자꾸 설레발을 떨래?”
“설레발이라니? 거 무슨 뜻인지나 알구 써먹어? 난 지금 진지하단 말이야.”
지려가 응이옆에 바싹 다가앉으며 노려보고있었다. 응이는 그러는 지려를 한참이나 더 지켜보다가 서글프게 픽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나 지금부터 남자들을 연구해보려구.”
“뭐? 너 끝내는 미쳤구나.”
지려가 발딱 일어섰다.
“50대의 남자들을 연구해보려구 그런다.”
“왜?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너 설마…”
지려가 자기의 무릎을 탁 치며 발딱 일어섰다. 세기의 말일이 도래했다면 그보다 더 놀랄가싶을 그런 표정이였다. 응이가 목소리를 낮추어 킥킥거렸다.
“크크크크… 아가씨. 소설을 쓰지 마세요. 나 오늘부터 아버지와 친해질려구 그런다. 안되니? 아버지들을 알아야 친해질거 아니냐? 알려면 연구를 해야 할거구. 됐어? 까불긴, 계집애가.”
응이는 50대방에 들어가 마우스로 모니터에 뜬 남색아이디들을 눌러 “안녕? ” 하고 인사를 보내며 지려를 까박주는것도 잊지 않았다. 지려는 그러는 응이의 태도를 개의치 않고 응이의 옆에 한뽐 다가앉으며 입을 열었다.
“재밌네, 넌 참 미스터리하단 말이다. 왜 아버지를 연구하려고 했는데? 동기가 있을거 아니야? 말해봐. 내가 내심하게 들어줄거니까.”
응이는 필요이상으로 흥분하는 지려를 바라보며 (너도 필경은 녀자구나.) 하는 생각을 굴렸다.
고중에 입학하여 지려와 친해지던 이 몇달사이 지려는 사실 필요이상으로 기본에도 없는 웅성적인것을 나타내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런지 응이를 부르는 칭호도 항상 “얌마”가 아니면 “짜식”이였다. 그래서 응이는 지려라면 여느 애들처럼 그렇게 어지간한 일에 놀라거나 흥분을 하지 않을거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있는터였다. 하지만 아니였다. 응이는 “픽” 하고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계집애들은 참. 뭐가 그렇게 궁금하니?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려구 그런다. 왜? 녀자만 심청이 되라는 법이 있냐? 내가 남자심청이 되자구 그런다. 됐냐?”
“암튼 못 말린다니까. 너 진짜 소설을 쓰렴. 뭔가 될것 같은데. 근데 네가 연구하고싶은 남자들 부류는 어떤 부륜데.”
“둔하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면 되지. 50대 초반, 와이프가 한국 간지 10년! 됐냐?”
“뭐야? 어머니가 한국 간지 10년이나 됐니? 그럼 그사이 넌 어떻게 살아왔는데?”
“……”
응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잠간 입술을 씹었다. 얼굴에 한가닥 서글픔이 흐르고있는듯했다. 지려는 좀전의 흥분을 누르며 잠간 응이를 지켜보다가 혼자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싫으면 관두구. 암튼 남자 낚는데는 내가 전업대가 아니냐. 내가 금방 하나 낚아줄게.”
자신있다는듯 자기의 컴퓨터앞에 다가앉으며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는 지려의 목소리가 지려답게 명랑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지려를 바라보며 응이가 “흥!” 하고 코방귀를 뀌였다.
“너의 아이디로 들어갔다가는 네가 먼저 낚일걸.”
“뭐야? 사람 어떻게 보구.”
“쳇, 채팅방을 몰라 그래? 남자와 녀자가 만나서 무슨 말들을 하는데? 아가씨, 또 무슨 고별식을 하지 않도록 자중하세요~”
응이가 지려를 보며 벌씬 웃을 때 “반갑습니다~” 하는 문자가 모니터에 떴다. 문자의 주인은 “영원한 신사”라는 아이디를 가진분이였다.
“어, 한마리 물렸다.”
응이는 모니터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흥분한듯 소리치며 자판을 두드렸다.
-네, 저도 반가와요. 선생님은 50댄가요?
-그래요, 50대 초반이거든요. 근데 남성분이신가봐요???
“영원한 신사”가 물음표 세개를 달아서 날려보냈다. 응이의 얼굴에 알수 없는 웃음기가 짧게 피여올랐다.
“봐, 싫다잖아? ‘나는 녀사님들을 기다리고있습니다.’ 하는 말이거든 저건.”
지려가 모니터를 손가락끝으로 톡톡 치면서 말했다. 그러건말건 응이는 잽싸게 자판을 두드렸다.
-맞아요. 저 남자거든요.
-남성분이라면 무슨 일로 저에게…
-이러고보니 미안하네요. 선생님은 꼭 녀자들하고만 대화하나보죠?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할수 있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환영이죠. 하지만 챗방에 와서는 이렇게 대놓고 남자들을 찾는 남성 대화상대가 적어서요. 제가 결례를 범했나요???
“영원한 신사”는 이번에도 물음표 세개를 달아서 날려보냈다. 응이는 그 물음표들이 마치도 큰 갈구리 같다고 생각되였다. 그 갈구리라면 대방의 무엇도 모두 걸어낼수 있다는 무언의 장담이나 되는듯이 생각되였다. 이렇게 자신있는 사람이라면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원하는 대화를 이어갈수 있을듯싶기도 했다. 응이는 더 뜸을 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했다.
-결례라면 제가 되려 미안하죠. 오늘 선생님의 시간을 좀 허비시켜야 할것 같은데요.
-재밌네요. 마치도 어떤 인터뷰석상에 앉은 기분이네요. 대방이 어떤 화제를 던져올가 하는 궁금증? 아니면 대화에 대한 기대감이라 할가요? 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필요이상으로 긴 웃음이 문자끝에 달려서 넘어왔다. 응이는 마치도 눈확에 주름이 얼기설기한 나그네의 석쉼한 웃음소리를 듣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웃음이 가슴 편하게 느껴지면서도 또 어딘가 누군가에게 자기의 유치함을 보인듯싶어서 기분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다. 응이는 짐짓 무게를 넣어 문자를 꾸며보았다.
-무언가에 대해 기대를 가진다는것은 참 좋은 일이죠. 저도 그런 기대감에 들떠있다구요. 선생님은 50대 초반의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50대 초반의 남자라면 대개 모두들 누군가의 아버지가 돼있겠죠? 잘 나가는 자식을 두었다면 대학생 아버지로 돼있을거구요.
-행복하세요? 그들은 행복할가요?
-네? 선생님은 년세가…………
역시 필요이상으로 이어지는 줄임표를 보면서 응이는 “웬 일이냐?” 하고 눈을 치뜨는 나그네의 형상을 그려보았다. 눈확에 주름이 쪼록쪼록할 아저씨가 녀자들처럼 올롱하게 눈을 치뜨는 모습이 꼭 렵기스러울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응이는 갑자기 “영원한 신사”를 골려주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크크크크… 년세까지는요. 아저씨, 저 올해 열두살이거든요.
“얘는 미쳤구나, 미쳤어. 쯧쯧쯧…”
방금까지도 진지해서 자판을 두드리는 응이를 한참이나 지켜보고있던 지려가 깜짝 놀라며 응이의 허벅다리를 꼬집었다.
-뭐야, 애들이 왜 이 시간에 pc방에 온거야. 너 오늘 학교를 땡땡이 쳤지?
“맞아요, 땡땡이. 아저씨 이 자식 볼기짝을 쳐주세요.”
지려가 키득거리며 응이의 엉뎅이를 두드려댔다.
“까불구있네. 그만해라.”
응이는 지려에게 눈을 흘기고는 진지하게 다시 시작했다.
-아저씨, 미안해요. 롱담했어요. 저 올해 열여덟살이거든요. 학생이구요. 10년간 아버지의 손등을 씻어먹으면서 자랐어요. 오늘 문뜩 아버지를 알고싶어졌어요.
-그래? 그 말이 진짜라면 감동이구나. 아버지를 알고싶다?
-그래요. 아버지를 알고싶어요. 아저씨네 열여덟살은 어떠했어요?
약지로 자판을 눌러 문자를 띄워보내면서 응이는 잠간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저녁 아버지와의 대화가 머리속에 떠올라서였다. 대방에서 인차 문자가 날아왔다.
-집체호라고 들어봤니?
-네. 저의 아버지도 집체호에 갔었다고 했어요.
-그럼 아버지에게서 많이 들었겠네. 그 시절 열여덟살의 이야기를.
-전 불효자거든요. 아버지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여직 생각 못했어요.
자판을 두드리는 응이의 얼굴이 스스로 붉어졌다.
-그럼 오늘 돌아가서 들려달라구 해라.
-네?
응이는 순간 가슴이 꺽 막혀오는감을 느꼈다. 오늘 돌아가서 들어보라구? 과연 내가 오늘 아버지를 마주하고 아버지의 열여덟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를수 있을가?
생각하고싶지 않은 어제밤이 또 머리속에 찾아들었다.

응이는 창문으로 비쳐드는 괴괴한 초생달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아버지를 두고 그렇게 많은 생각을 굴려보았다. 하지만 응이에게서 아버지는 밥하고 빨래하고 몸에서 톱밥냄새를 풍기는 평범할래야 더 평범할수 없는 아버지일뿐이였다. 아버지는 워낙 그런줄로만 알고있었다. 아버지는 응당 그렇게 살아야 하는줄로만 알고있었다. 그런것에 길들여진 응이였기에 지친 다리를 끌며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고도 그렇게 덤덤할수가 있었고 그런것에 길들여진 응이였기에 어지러워진 옷도, 지어는 뭔가 묻어있는 팬티까지도 스스럼없이 벗어서 세탁기에 던져넣으며 “씻어줘요.” 하고 말할수가 있었다.
응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쉼터였고 항구일뿐이였다.
동틀무렵에 깜빡 재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시계는 여섯시 반을 향해 달리고있었다. 지루하게도 긴 밤을 치렀지만 생물시계는 용하게도 기상시간을 기억하고있은 모양이였다. 응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문을 밀어 열려다가 흠칫했다. (아버지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있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치는 순간 평소처럼 스스럼없이 아버지를 대할 자신이 좀처럼 서지 않았던것이다. 응이는 잠간 서서 궁리를 하다가 침실문손잡이를 놓고 돌아서서 옷장문을 열었다. 아버지 몰래 조용히 학교에 갈 생각이였다. 시간이 약이라고 아침만이라도 아버지 얼굴을 보지 않으면 덜 난처할것 같아서였다.
응이는 조용조용 옷을 찾아 입은후 책가방을 손에 들고 조용히 침실문을 밀었다. 객실이며 주방쪽이 너무도 조용해있었다. (웬 일일가?) 무겁게 느껴지는 고요가 부담스럽다고 생각되였다. 응이는 발볌발볌 주방쪽으로 다가가 목을 쑥 빼들어 주방안을 살펴보았다. 아버지가 없었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아버지는 주방에서 아침준비를 하고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 주방의 밥상우에는 고추가루를 곱게 올려 볶아낸 두부반찬이 있었다. 한 접시가 그대로 있는것을 보아 아버지는 수저도 댄것 같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고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들자 차마 그대로는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응이는 출입문가로 다가가며 아버지의 침실쪽에 대고 소리쳤다.
“학교 갑니다.”
신을 다 신을 때까지도 대답이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침실이 아니라 화장실에 앉아서도 “알았다∼” 하고 한마디 던져줄 아버지였다. (웬 일일가?)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쳐드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응이는 아버지의 침실로 다가가 침실문을 밀었다. 침실도 비여있었다. 화장실에도 없었다. 아버지는 분명 집에 계시지 않았다.
(아침도 안 드시고 어디로 갔을가? 아직 출근시간이 안됐는데.)
응이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아버지의 행방을 찾지 않고는 시름을 놓을수가 없어서였다. 마침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밥 먹어라. 먼저 간다.”
아버지가 보내온것이였다.
일단 “후—” 하고 안도의 숨이 새여나갔다. 응이는 몇 글자밖에 안되는 문자를 세번이나 읽었다. 거쿨진 손으로 문자를 때렸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웬지 목이 메고 코끝이 시큼해났다. 응이는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내 아버지의 얼굴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힘들고 지루한 하루를 용케도 마치고 응이는 하학하는 길에 곧추 pc방을 찾아들었다. 막연하지만 인터넷에서는 뭔가를 찾아낼수 있을것만 같은 기대 비슷한 생각이 충동을 했던것이다. 응이가 금방 번호판을 받아들고 컴퓨터를 찾아 앉았을 때 지려가 pc방에 나타났다. “불여우 같은 계집애.” 하고 응이가 선수를 치자 지려도 “매너 없는 곰탱이.” 하며 응이의 옆에 찰싹 붙어앉았다.
“얌마, 안해?”
지려가 응이의 어깨를 톡 쳤다. “엉?” 응이는 흠칫 놀라며 지려쪽에 머리를 돌렸다.
“안하니?”
“뭘?”
“그 아저씨하구…”
지려가 손끝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바빠?
“영원한 신사”로부터 어느새 문자가 날아와있었다.
-아니요. 잠간 뭔가 생각을 굴리느라구요.
-그래? 난 또…
-근데 어쩌죠? 전 오늘 아버지에게서 열여덟살의 이야기를 들을것 같지 못한데요.
-하긴 아버지도 아들앞에서 흘러간 그 이야기를 하고싶지는 않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이는 리해할수 없다는듯 물었다.
-회억이란 즐거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으니까. 힘들었던 그 세월을 아들을 상대로 이야기한다는것, 어쩜 즐거운 일이 아닐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세요?
-넌 소고기 몇점때문에 울어본적이 있니?
-……
“무슨 뜻일가?”
응이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수 없어 지려쪽에 머리를 돌렸다.
“놀구있네, 생뚱같이. 얌마, 있다구 해. 난 소탕을 먹기 싫어서 구정물통에 던져넣다가 엄마한테 엉뎅이를 맞아 운적이 있거든. 왜? 실감이 안 나? 크크크크…”
지려가 캐득거리며 손사래를 칠 때 모니터에 문자가 날아들었다.
-내가 열여덟살에 집체호에 가서 이듬해 추석이였으니 열아홉살 나던 해였겠지. 생산대에서 추석이랍시고 소 한마리를 잡았거든. 인구가 3백명도 넘는 생산대에서 소 한마리라니 상상할수 있잖아. 한 사람당 고기 3냥씩 돌아갔단다. 그 주일 식사당번을 서는 녀자애는 손부리가 여물기로 소문난 애였거든. 두고두고 썰썰할 때 먹는다며 얼마 안되는 소고기를 세등분 냈어. 추석날 저녁에 그중 한등분을 삶았었는데 소가 장화를 신고 지나간 물 4촌이나 됐겠지. 긴긴 여름 고기냄새를 맡아보지 못한 우리들이였는지라 그날 소탕은 큰 유혹이였다. 고기 두어점씩 놓은 소탕을 큰 사발에 그득 담아들고는 얼마나 가슴이 부풀던지. 우리 남자애들은 옥수수쌀을 섞어 지은 밥을 사발에 넘쳐나게 말아서 먹기 시작했단다. 못사는 년이 고추가루 팔러 가면 바람질이라고 그 며칠 나는 감기때문에 코물을 훌쩍거리며 다녔었다. 뜨끈뜨끈한 소탕에 밥을 말아서 후룩후룩 먹어대는데 그놈의 코물이 어떻게나 흘러내리는지. 연신 코물을 훔치며 밥을 조겨주는데 그만 그 렴치 없는 코물이 소탕에 똘랑 떨어져 들어가는거다. 고기는 아까와서 얼마 먹지 않고 소탕에 만 밥만 먹고있었는데 코물이 떨어져 들어갔으니 사발에서 고기를 건져먹을수도 없는짓이고, 아쉬운대로 구정물통에 넣는수 밖에 없었지. 고기는 한점씩 헤여서 사발에 담았는지라 남은것이 있을리 만무하고, 멀건 국물을 다시 떠서 밥을 말아먹느라니 그때까지도 소고기를 입에 넣는 애들이 얼마나 밉고 부럽던지. 그날 밤따라 열이 나고 목이 마르고 해서 잠은 잘 안 오구, 던져버린 그 소고기 몇점이 눈앞에서 아롱아롱 춤을 춰대는것이… 저절로 눈물이 두르르 굴러떨어지더라.
“크크크크… 이 나그네 웃긴다야. 그렇게 먹고싶었으면 코물 떨어진 소고기를 건져 먹지 그랬니? 이 나그네 아마두 식충인가봐. 소고기 몇점이 뭐라구 남자가 울기까지.”
“영원한 신사”가 보내오는 문자를 도정신해서 읽어보던 지려가 갑자기 키득거리며 배를 끌어안았다. 여느때 같으면 뭐라고 몇마디 손벽을 쳐주었을 응이지만 웬지 그 시각만은 그럴 흥미가 없었다.
“지려,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사뭇 정색해있는 응이의 얼굴이 놀음 같지 않아서였던지 지려가 혀를 홀랑 내밀며 한마디 했다.
“아니, 그렇다는 얘기지 뭐. 너라면 울겠니?”
“모르겠다.”
“크크크크… 재밌다야, 그냥 옛말을 시켜라.”
지려가 응이의 손등을 쳤다. 응이는 못마땅한듯 지려를 흘겨보며 자판을 두드렸다.
-아저씨,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퍼요?
-생각하기나름이지. 슬플 때 생각하면 슬프구 성공의 희열에 벅찰 때 생각하면 감동이구. 돌아보면 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응이는 “영원한 신사”의 문자를 읽으면서 은은한 아픔이 느껴져오는듯싶었다. 응이는 잠간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을 놀렸다.
-아저씨는 어느때가 더 많아요?
-너의 아버지는 어떨 때가 더 많았니?
-네?
응이는 또 한번 가슴을 흠칫하며 할 말을 잃었다. 지려가 못 참겠다는듯 자판을 자기앞에 당겨다가 두드려댔다.
-리해가 안되네요. 소고기 몇점때문에 울지 말고 소를 가득 길러서 매일 잡아먹지 그랬어요?
-크크크크, 너 역시 아직 어리구나.
-네? 제가 어리다구요?
지려가 바람소리 쌩 나게 문자를 날리며 약이 오른 고양이처럼 쌕쌕 모두숨을 몰아쉬였다.
-그래. 너희들이 아직 태여나지 않았던 그 세월에 우리 나라도 배고픈것이 젤로 무섭던 시절이 있었단다.
-그때는 쌀들이 다 어디 갔었게요? 지금은 농민들은 쌀을 팔지 못해 아우성이구만.
-글쎄다. 그 쌀들이 다 어디루 갔었는지… 배가 고프면 잠이 잘 안 온단다. 배에서 꼬륵꼬륵 소리가 나 잠을 못 이루는 밤이면 옆에 누운 친구를 깨우기 마련이지. 그러느라면 어느새 한칸에 자던 친구들이 모두 눈을 뜨구 합의가 맞는 애들은 슬그머니 일어나 나가는거다. 여름이면 농민들집 채소밭에 기여들어 오이며 가지며 닥치는대로 따서 먹구 겨울이면 하다못해 부엌에다 감자라도 집어넣어 익혀먹군 했더랬지. 그것도 없으면 김치움에 들어가 생무우를 꺼내다 무우추렴을 하든가, 그럴 때면 벽 저쪽에 자던 녀자애들도 솜옷을 우에 걸치고 슬금슬금 남자들 호실에 마실을 오는거다. 그런 날 밤이면 옛말잔치가 벌어지는데 이야기를 할라치면 시내에 두고 온 엄마가 그립구 아버지가 보고싶다구 녀자애들은 엉엉 울구. 그러면 남자애들도 보통은 눈굽에 손이 올라가거든. 언제면 시내로 돌아갈수 있을지. 정녕 부모들옆으로 돌아갈수는 있을지? 정말 한치 앞도 안 보이더라. 그때는 힘든 일에 몸이 힘들고 암담한 전도에 심신이 피로하고…
-크크크크… 아저씨 소설을 쓰는거 아니예요? 녀자애들과 벽 하나를 사이 두고 살았다면서요, 함께 술두 마시구 노래도 부르구 춤도 추구 맘 맞는 애들끼리 서로 좋으면 련애도 하구. 부모들의 잔소리도 없는데서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요?
-참 재밌는 애네. 그 세월 농촌을 벗어날수 있는 도경이라면 빈하중농들의 추천을 받아 군대에 가거나 공농병대학에 가거나 아니면 쌀에 뉘만치도 안되는 명액을 얻어서 시내에 로동자로 들어오는것뿐이였지. 그런 판국에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 추고 련애하면 빈하중농들의 추천을 받을수가 있었겠니? 죽기내기로 일하는 길밖에 없었지?
-크크크크… 새파란 나이에 남자애 녀자애들이 벽을 사이 두고 련애도 못하면 어떻게 살아요? 그 말 누가 믿어요?
“야, 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응이가 문자를 날리려는 지려의 손을 잡았다.
“왜, 재밌잖아? 그냥 듣자야.”
“그래두 그렇지 아무 소리나 하겠니? 상대는 어른이야. 50 고개를 넘긴 선배라구.”
“크크크크… 세상을 먼저 산 선배들의 무용담, 어떻니? 날아라.”
지려는 끝내 오른손 약지를 살짝 눌러 문자를 날려보냈다. 응이는 지려앞으로부터 자판을 활 나꿔채오며 볼 부은 소리를 했다.
“그러는거 아니지. 오늘 저 아저씨의 정서가 슬플수도 있잖아. 적당히 하자, 응? 이 철 없는 아가씨야.”
“온다, 온다.”
지려가 응이에게 혀를 홀랑 내밀어보이며 손끝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넌 상상할수 없다는거지? 그래.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도 놀랍지. 벽을 하나 사이 두고 녀자애들의 잠꼬대를 들으며 어떻게 그 시절을 지나왔던지가. 한번은 우리 남자애들이 내기를 했단다.
-무슨 내기를요?
응이가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
-여름날 아침에 일어나면 보통 집체호 마당앞의 빨래줄에 밤을 잔 빨래들이 걸려있었단다. 보통은 너무 씻어서 색바랜것들이구 또 진때가 잘 나가지 않아서 거무칙칙 꼴불견인것도 있었지. 그러다가도 가끔 옷가지들사이에 꽃부리팬티가 걸려있을 때도 있었지. 어느날 우리 남자애들 몇이 그 꽃부리팬티임자를 맞출 내기를 했단다. 지는 놈이 다음번에 석탄이 오면 굴에 퍼들이기로 약정하구. 맞춰봐. 결과가 어떠했을가? 기실은 누구도 못 맞췄단다. 애들마다 제 맘에 두고있는 녀자애의 팬티라는거다. 기실 그 팬티임자는 집체호 웃집 아주머니의 팬티였으니까. 얼마나 맹랑하던지. 허허허허허허허허허…
“영원한 신사”는 또 긴 웃음을 끝에 달아보냈다. 응이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 문자를 보면서 (정녕 이런 이야기도 저렇게 웃으면서 할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며 자판을 때렸다.
-아저씨는 지금 행복하신가봐요. 이렇게 통쾌하게 웃을수가 있으니 말이죠.
-너의 아버지는 지금 행복해하고있는것 같니?
“영원한 신사”가 보내온 문자를 읽으면서 응이는 손으로 자기의 넙적다리를 탁 하고 내리쳤다. 알고싶은 문제마다에 아버지를 거드는 신사가 미웠던것이다. 응이는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때려 문자를 날렸다.
-아저씨는요?
-50대는 불행한 사람들이란다.
-왜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집체호라는 소택지에 빠져 몸도 마음도 그리고 파아란 소년도 힘든 세례를 받은것이 우리 50대거든. 배운게 없이 시내에 올라와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으니 세상은 변했지. 아까 너 십년이나 아버지의 손등을 씻어먹었다고 했지? 안해가 없는 그 10년을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너 아니? 사람들은 40대를 인생의 두번째 사춘기라 하거든. 너의 아버지의 두번째 사춘기도 열여덟살 첫 사춘기때처럼 그렇게 힘들고 비참했을거다. 얘야, 너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려야 한다. 그게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길일것이다.
-네?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리라구요?
응이는 뽀얀 운무속에 가려진듯한 “영원한 신사”의 묘한 글을 읽으며 또 한번 오리무중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뭔가 잡을듯하면서도 또 그것을 잡기에는 너무나 자신의 힘이 작은듯한 느낌이였던것이다. 응이는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고 속으로 외워보았다.
“아싸… 걸렸다.”
갑자기 지려가 신명나서 소리쳤다. 응이는 깜짝 놀라며 지려쪽에 머리를 돌렸다. 지려가 득의양양해서 너스레를 떨었다.
“얌마, 이 짭새가 날 보구 밥 사준단다. 이걸 어떻게 차놓을가?”
“그만하자. 지려야, 날이 저물었거든.”
응이는 흥미 없다는듯 지려에게 한마디 하며 “아저씨, 대화 감사했습니다.” 하고 인사말을 날렸다.
“왜? 재밌잖아? 잠간 데리구 놀다가 뻥 차버리는 멋!”
“엄마가 기다려요. 아가씨, 집에 가자 응?”
응이는 모니터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려도 아쉽다는듯 컴퓨터를 돌아보며 못마땅한듯 응이를 따라 일어섰다.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깃들어있었다. (벌써 어두워졌나?) 응이는 낮이 참 짧다고 생각되였다.

“집에 갈래?”
밖에 나서자 지려가 물었다.
“그럼 집에 가야지. 넌 또 어디로 가고싶은데?”
“아냐, 집에 가야지. 반기는 사람은 없지만.”
지려도 언제 까불었냐는듯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어둠이 지려에게 시름을 얹어주는가보다고 생각하며 응이가 물었다.
“반기는 사람이 없다니? 지금쯤이면 할머니께서 ‘왜 오늘두 이렇게 늦냐?’ 하며 층계를 내려와 기다릴텐데.”
“그래, 할머니가 불쌍해서라도 집에 들어가야겠다.”
지려의 목소리는 흐려있었다. 응이는 그러는 지려를 돌아보고는 기분 나쁜 대화를 더 하고싶지 않다는듯 낮은 목소리로 “그만하자.” 하고 한마디 하고는 앞에서 씨엉씨엉 걸어갔다.
“랠 만나.”
지려가 뒤에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시각 지려의 목소리가 참 처량하게 들렸다. 그렇게 소탈하게 살려고 애쓰는 지려도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시는 집으로 들어가는 이 시간만큼은 두렵고 부담스러운 모양이였다. 응이는 돌아보지 않고 뒤에 대고 손만 흔들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지금쯤 뭘 하고계실가?)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리라던 “영원한 신사”의 문자가 또 머리속을 헤집어 기분이 착잡해났다. (내가 50대 초반의 남자를 알겠다고 채팅방에서 사이버세계를 헤집고 다닐 때 아버지는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셨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치자 아버지도 오늘 꼭 일손이 잡히지 않았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평소처럼 아버지를 대하자. 어제밤에 있었던 일때문에 아버지께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 하자.)
아빠트앞에 도착해보니 다행히도 집에는 전등이 켜져있었다. 응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응이는 1층 슈퍼마케트에 들어가 맥주 세병을 사들고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술을 부어드리면서 “오늘도 수고했습니다.” 하고 너스레라도 떨고싶어서였다. 비록 전에 없는 행동이여서 아버지가 좀 어색하게 생각은 하겠지만 맥주가 두어병 속에 들어가면 모든것이 편해질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밖으로 전등불빛이 새여나오던 집인데 출입문은 잠겨진대로 있었다. 응이는 일부러 주먹으로 문을 탕탕 두드려댔다. 아버지가 달려나올 시간이 지났건만 집안은 조용한대로 있었다. (못 들으셨나?) 응이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역시 집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이상하네! 혹시 잠이라도 드셨나?) 응이는 생각을 굴리며 옆구리에서 열쇠뭉치를 꺼내 자물쇠구멍에 꽂았다. 객실엔 전등이 켜진대로 있었고 문가에는 아버지의 구두가 놓여져있었다. 응이는 신을 벗자 바람으로 주방쪽에 머리를 기웃거려보았다. 주방에도 전등만 켜져있었다. 응이는 주방에서 나와 아버지의 침실로 다가갔다. 침실문은 닫긴대로 있었다. 응이는 조용히 침실문을 밀어 열었다. 아버지는 침실바닥에 쓰러져있었고 옆에는 술병 하나와 김치사발이 댕그러니 놓여져있었다. (혼자서 술을 마셨나?) 응이는 이상한 생각을 굴리며 술병을 주어들었다. 병은 이미 굽이 나있었다. “조양왕?” 응이는 상표에 눈길을 주었다. 집에서 본적이 없는 술병인것으로 보아 올라올 때 사들고 온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혼자서 흰 술 한병을 다 마신것이 아닌가?
응이는 아버지의 주량을 알고있었다. 혹시 친척집 군일에라도 가서 흰 술 서너냥을 마시면 얼굴이 새빨개나서 몹시 힘들어하군 했던것이다. 그러던 아버지가 김치쪼박에 흰 술 한병을 다 마셨으니 아버지의 상태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것 같았다. 순간 응이는 아버지를 푹 쉬게 하고싶었다. 응이는 빈 술병과 김치사발을 주어 주방으로 가져간후 베개를 내리워 아버지의 머리에 베여드렸다. 아버지는 두어번 손을 흔들며 뭐라고 입속으로 우물우물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한껏 몸을 옹송그렸다. 응이는 이불을 내리워 옹송그린 아버지의 몸에 덮어드리고는 불을 끄고 침실문을 닫았다. 응이는 객실로 나와 쏘파에 쪼크리고 앉았다. 현관등만 켜놓은 집안에서는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응이는 그 괴적속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두손으로 턱을 받쳐들었다.
이때 갑자기 “따르릉~”하고 전화벨이 울었다. 응이는 와뜰 놀라며 튕겨일어났다. “따르릉따르릉~” 전화벨이 련속 울어댔다. 전화기의 번호판을 여겨보니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어머니구나!) 하는 직감이 머리를 쳤다. 응이는 수화기를 거머쥐기 바쁘게 소리쳤다.
“어머니, 맞죠? ”
“응이니!”
“어머니.”
응이는 절절하게 어머니만 불러댔다. 응이의 다급한 반응에 놀랐는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무섭게 떨리고있었다.
“응이야,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니?”
“어머니, 돌아오세요. 네? 어머니. 돌아오세요. 어머니는 돌아와야 해요.”
“응이야, 도대체 웬 일이냐? 낮에는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와서 다짜고짜 들어오라구 그러더니, 너도 두마디 안짝에 돌아오라구 그러니? 말해봐라,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니?”
“어머니, 제발 빌어요. 돌아오세요. 네? 어머니. 인젠 돌아올 때가 됐잖아요?”
어느새 응이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있었다. 그러건말건 어머니가 전화 저쪽에서 소리치고있었다.
“다 큰 사내애가 울기는. 말해봐라.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거니? 돌아오라면 당금 돌아갈수 있는줄 아니? 나도 여기서 많은 일들을 벌여논게 있어서 당분간 돌아갈수 없구나. 그리구 돌아가서는 어떻게 하겠니? 10년간 쌓아놓은 공적이 다 이곳에 있는데 중국에 돌아가서 내가 과연 무엇을 할수 있겠니? 안된다. 못 돌아간다. 나는 못 돌아간다.”
“못 돌아오면 어떻게 해요? 우리 집은 어떻게 하구 아버지는 어떻게 해요?”
“10년이나 이렇게 잘 견뎌오지 않았니? 차라리 네가 한국에 나오너라. 여기서 고중공부를 하구 여기 대학에 들어가거라.”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츰 리성을 찾아가고있었다. 응이도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정말 집에 돌아오지 못하겠다는거예요? 정말 그런 말씀인가요?”
“영 못 간다는것은 아니구, 당분간은 안된다는 말이지. 어머니도 여기서 힘들거든. 하루도 너의 생각을 안하는 날이 있는줄 아니?”
“그런데 왜 못 돌아와요? 아버지를 버리고 저를 혼자 한국에 오라구요?”
응이의 목소리는 저도 몰래 날이 서갔다.
“그럼 어쩌겠니? 엄마는 한국에 일자리가 있구 아버지는 중국에 자신의 생활이 있는것을. 낮에 아버지와 이야기가 통했다. 나는 돌아갈수 없으니 동의되면 너의 한국수속을 시작하라구 말이다.”
“참으로 감사하네요. 하지만 저 한국으로는 안 갈거예요.”
응이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내버렸다.
(어머니는 어떻게 아버지를 집에 두고 나를 한국에 데려갈 궁리를 했을가? 나까지 한국으로 간다면 아버지에게는 무엇이 남는걸가?)
“영원한 신사”와 나누던 이야기들이 귀전을 스쳤다.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리라던 “영원한 신사”의 이야기가 귀전을 스쳤다.
(정녕 어떻게 해야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렸다고 할수 있을가? 아버지는 스스로 아버지 자신을 버리고있는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있는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없다면 아버지는 자기 스스로를 찾으려고 하시지 않을가? 나에게 쏟던 정성을 자기 스스로에게 쏟지 않을가…)
순간 응이는 아버지를 보고싶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한껏 몸을 옹송그린채 잠들어있었다. 연신 “푸푸~” 하고 입바람을 불 때마다 입가에 흘러내린 느침이 파르르 떨리고있었다. 응이는 손으로 아버지의 입가에 흘러내린 느침을 닦아주며 이윽토록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이 순간만이라도 아버지를 편하게 쉬게 하고싶었다. 응이는 아버지를 침대우에 올려 눕히려고 허리를 굽혀 아버지를 안았다. 한숨에 건뜻 들렸다. 키가 한메터 칠십을 넘기는 아버지가 이렇게 가벼울줄은 정말 생각밖이였다. 응이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수 없었다. 사실 이제까지 응이는 아버지를 산으로 알고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면 아버지가 받쳐주고 홍수가 오면 아버지가 막아줄것이라고 든든하게 믿고있었다. 그래서 괜히 아버지에게 밥투정도 부리고 옷투정도 부리군 했었다. 그래서 어제밤에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버지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냥 그러려니만 생각했던것이다.
(아버지는 52년 세월속에서 과연 자신을 위한 인생을 몇년이나 살아오셨을가? 아버지도 열여덟살에 집체호로 나갔다니 역시 그 아저씨처럼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미래에 대하여 고민했을거고 항상 배를 곯으며 허기를 느꼈을거고 벽 하나를 사이 두고 들려오는 녀자애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힘겨운 밤들을 보냈었겠지? 가정을 이루고는 또 이렇게 나를 돌보느라 10년세월을 덧없이 흘려보내고있구나.)
응이는 아버지를 침대우에 곱게 눕힌후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바지를 벗겨드렸다. 앙상한 아래도리를 감싼 꽃부리팬티밑으로 뭔가가가늘게 꿈틀거리는것이 보여왔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푸하푸하~” 입김을 불며 단잠에 빠져있었다. 응이는 아버지에게 이불을 덮어드린후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래, 나도 인젠 자립을 할수 있는 나이다. 아버지곁을 떠나는거야. 넓디넓은 이 땅우에 내가 살아갈수 있는 땅이 없을가? 하지만 한국에는 안 갈거야. 아버지와 한하늘아래에서 아버지의 행복을 지켜보면서 살거야.)
응이는 아버지에게 자기의 생각을 적어내려갔다. 꽉 막혀서 터져버릴것 같던 가슴이 펑 뚫리는듯싶었다…

“덜커덩덜커덩…”
레루를 씹어삼키는 둔중한 기차바퀴소리가 어둠의 장막을 헤치며 불안하게 들린다.
(래일아침 나를 기다리는것은 구경 어떤 풍경일가? 이 밤이 새고나서 내가 정착해있을 항구는 과연 어디일가?)
응이는 천근같이 무거워지는 두눈을 스르르 감았다. 머리속 한구석으로부터 갑자기 천길나락으로 떨어져들어가는듯한 막연함이 덮쳐들면서 말 못할 피곤이 몰려들었다. 10년전 어머니를 싣고 가던 비행기 옆구리에서 보았던 빨간 타원형포스터가 클로즈업되여 눈앞에 나타났다. 응이는 그 빨간것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빵!” 하고 터져버릴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며 천천히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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