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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최동일 성장소설집-아직은 초순이야

운무의 저쪽
2012년 04월 24일 08시 37분  조회:1550  추천:0  작성자: 동녘해

 

 


봉이는 두팔로 무릎을 꼭 감아쥐고 천근같이 무거워나는 머리를 아래로 푹 숙였다. 그리고 으스러지게 어금이를 깨물며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 삼검불같이 헝클어진 머리속은 운무에 휩싸인 소택지만치나 한치 앞도 가려볼수없이 사람을 힘들게 하고있었다. 봉이는 그 운무속에서 자기를 내리누르는 무형의 쇠덩이를 보고있었다. 분명 지지리도 힘들게 자기를 괴롭히고있지만 또 그것이 사랑이라는 허울에 가려져서 숨쉴수조차 힘들게 칭칭 감겨들고있는 엄마의 눈길처럼, 담임선생님의 목소리처럼 떨어버릴래야 떨어버릴수도 없게 느껴졌다.
“후―”
세워서 꼭 감아쥐고있던 무릎이 은근히 저려오며 호들호들 떨리기 시작했다. “힘들어, 힘들어!” 하고 무릎이 하소연을 하는것 같았다. 봉이는 더욱 으스러져라 무릎을 부둥켜안았다. 어쩜 어디론가 무작정 도망가려는 자기를 고중입시라는 거대한 그물에 잡아두려고 버럭버럭 애를 쓰시는 엄마의 눈길처럼 꼼짝도 못하게 무릎이라도 잡아쥐고싶어서였다. 호들호들 떨려오던 무릎이 후들후들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억!”
봉이는 저도 몰래 가볍게 신음소리를 내며 평생 놓지 않을듯 열손가락을 쫙 펴서 깍지를 걸어 감싸쥐였던 무릎을 풀었다. 손으로 땅을 짚어 몸체를 의지하며 간신히 일어섰다.
봉이는 천천히 머리를 쳐들었다.
찌뿌둥한 마음마냥 하늘도 뿌옇게 흐려있었다. 봉이는 바위아래로 보여지는 저수지에 눈길을 주었다. 뽀얀 운무속으로 저수지 수면이 보일듯말듯 술래잡기를 하고있었다. 이름 모를 아기 새 한마리가 구슬프게 울어대며 어디론가 날아가고있었다. 보고싶지 않았다. 봉이는 다시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면서 머리를 외로 탈았다.
멀지 않은 곳에 너럭바위가 있었다. 흘러가는 운무에 받들려있는 큼직한 바위는 어딘가 서글픔까지 더해주고있었다. 그 바위우에 빠알간 운동복차림의 한 녀자애가 서있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고있었다. 가슴앞에 두손을 합장하고 서서 약간 머리를 쳐들고 하염없이 반짝이는 수면을 바라보고있는 녀자애의 모습은 마치도 드라마에서 나오는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아!”
봉이는 저도 몰래 이사이로 신음 비슷한것을 뽑아올렸다. 녀자애의 모습이 전해주는 그 어떤 감동을 읽는듯했다. 녀자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바위끝을 향해 걸어가고있었다. 뿌연 하늘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타는듯 빠알간 녀자애의 옷이 아프도록 두눈을 자극해오고있었다.
(불타는 심장?)
봉이는 그 드라마에 제목을 달아보았다. 순간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스쳤다. 과연 저 심장이 타오르려는것일가?
봉이는 두손을 눈가에 가져다대고 촬영사가 화면구도를 그리듯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어 “불타는 심장”을 그안에 집어넣었다. 운무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수면까지 화면에 잡을수있었다. 봉이는 손가락으로 만든 네모를 눈앞으로부터 멋스럽게 천천히 밀어갔다.
머리칼을 날리며 바위끝을 향해 걸어가던 “불타는 심장”이 불현듯 네모에서 사라지고있었다.
“앗! ”
봉이는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수면우로 빠알간 점이 보였다. 봉이는 그 점을 향해 정신없이 뛰였다. 점점 더 선명하게 보였다. 녀자애는 두팔로 물을 치며 허우적거리고있었다. 순간 물속에 쑥 들어갔다가는 다시 물우에 솟아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녀자애가 서있던 바위까지 뛰여간 봉이는 등에 지고있던 멜가방을 바위우에 던져버리고 주저없이 물속으로 뛰여들었다. 옷을 입은채로여서 헤염을 치기가 여간만 힘든것이 아니였다. 봉이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자맥질을 했다. 녀자애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와졌다. 녀자애는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봉이는 머리를 물속에 박아넣었다. 꾸무럭거리는 빨간 옷이 물속에서 아렴풋이 보였다. 봉이는 빨간 옷을 향해 헤염을 쳐갔다. 금방 잡힐듯한 거리였다. 봉이는 빨간 옷을 향해 오른팔을 힘껏 뻗어보았다. 빨간 옷이 쥐울듯싶더니 쑝 하고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가버렸다.
참!
봉이는 물우로 솟아올라 한껏 참고있던 숨을 푸하― 토하며 빨간 옷을 살폈다. 빨간 옷은 마치도 한마리의 빠알간 금붕어마냥 유유히 강역을 향해 헤여가고있었다.
봉이는 황소숨을 몰아쉬며 빨간 옷을 향해 헤염을 쳤다. 빨간 옷은 아무 일도 없었던듯 너럭바위에 올라섰다. 얼굴에 좋아죽겠다는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칼을 두손으로 훑어내리고있었다. 어깨에 닿을듯말듯한 머리칼끝에서 무수한 물방울이 구술인양 떨어지고있었다. 빨간색으로 된 엷은 운동복이 몸에 착 달라붙어 묘하게 곡선을 그리고있었다. 봉이는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녀자애가 머리를 숙였다가 건듯 쳐들어 머리칼을 날렸다. 그 바람에 물방울이 날아서 금방 바위우에 올라선 봉이의 얼굴을 스쳤다. 녀자애는 바위우에 놓여져있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여 유유히 얼굴을 문다지고있었다.
순간 봉이는 마음이 허전해났다.
저으기 부아통이 터지려 하고있었다.
봉이는 녀자애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뭘 하는거니?”
녀자애가 깜짝 놀라는듯 봉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두눈이 반짝 웃고있었다.
“너, 헤염을 참 잘 치던데…”
“뭐, 헤염?”
봉이는 목구멍까지 올리미는 그 무엇을 억지로 삼키며 떡하니 입만 벌리고 섰다.
“수영은 언제 배웠니?”
녀자애는 역시 두눈을 빤짝하면서 봉이에게 물어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듯 목소리까지 가볍게 뜨고있었다. 봉이는 자기의 심장이 튀여나오려고 발버둥질을 치고있음을 느꼈다.
“너, 괜찮니?”
말을 마친 봉이는 주먹으로 힘껏 자기의 허벅지를 갈겨주었다.
(이게 아닌데, 분명 이게 아닌데! 나의 허벅지가 아니라 저 애의 뻔뻔한 얼굴을 갈겨줘야 하는건데.)
봉이는 빗나가는 자기의 행동이 죽도록 미워났다.
녀자애가 봉이를 향해 또 한번 방긋 웃어주었다.
“괜찮지 그럼. 얼마나 자극적이였는데…”
봉이는 수집은듯 녀자애의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며 떠듬거렸다.


“그런걸 난 또…”
“ㅋㅋㅋ, 내가 자살이라도 하나 했지? 그래서 목숨을 건거야? ㅋㅋㅋㅋ… 그래서 목숨을 건거 맞지? 뢰봉아!”
“뭐? 너…너, 어떻게 내 이름을 아니?”
“뭐? 너의 이름? 내가 어떻게 안다구?”
녀자애가 두눈을 올롱하게 치뜨고있었다. 봉이는 점점 오리무중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너, 방금…”
“방금? ㅋㅋㅋㅋ… 너 설마 이름이 뢰봉이야 아니겠지?”
“맞아, 내 이름이 려봉인데.”
“뢰봉?”
“응, 려봉!”
“난 또, 너의 이름이 려봉이였구나. 난 너의 그 목숨을 걸고 남을 구하는 정신을 높이 모셔서 뢰봉이라 부른건데…”
녀자애가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너…너!”
봉이는 꺽꺽 말을 톺다가 홱 머리를 돌렸다. 녀자애가 끝내 아래배를 움켜잡고 무너져 내렸다. 찔끔찔끔 주먹으로 눈부리를 찍어대고있었다.
“얘, ‘뢰봉아’. 너 학교에서 진짜 모범생이지?”
“모범생은 무슨…”
봉이가 녀자애의 옆에 가 앉으며 뒤말을 얼버무렸다.
“ㅋㅋㅋ… 아니라네. 환히 보이는데. 너 집에서는 엄마 말을 엄청 잘 듣는 얌전한 아들이구…”
녀자애도 봉이옆에 나란히 앉으며 하얀 웃음을 배실배실 흘리고있었다.
“얌전? 흥! 얌전 좋아하구있네. 얌전하면 이렇게 가출했겠니?”
봉이가 몸을 픽 돌리며 고개를 번쩍 쳐들고 녀자애를 바라보았다.
“뭐야? 가출?!”
녀자애의 동공이 확 튀여나오려 서두르고있었다.
“그래, 가출! 왜, 안되니?”
봉이의 입가에 가는 웃음이 살짝 스쳐지났다.
“네가, 가출을 했다구?”
녀자애가 외계인이나 바라보듯 봉이를 바라보았다.
“흥……”
봉이는 녀자애를 향해 가슴을 쑥 내밀었다.
“얘, 말해봐. 어째서 가출을 했는데?”
“마음이 불편해서지.”
“저런, 저런…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으면… 말해봐라. 어째서 맘이 불편했는데?”
“……”
봉이는 여전히 쓴맛 나는 찬웃음을 씩 날리며 녀자애를 일별했다. 녀자애가 봉이의 옆으로 한뽐 더 다가앉았다.
“얘, 말해봐라. 응, 왜 가출했는데?”
“헤잇!”
녀자애의 닥달에 봉이가 저도 몰래 산이 무너지듯 긴 한숨을 내쉬였다.
“얘, 어서!”
녀자애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듯 안달이 나했다.
“어제밤, 엄마하구 한판 붙었더랬어!”
“왜, 왜? 왜 붙었는데?”
녀자애의 눈이 봉이의 심장이라도 꿰뚫고 영문을 알아내겠다는듯 번뜩거렸다.
“나도 속이 상하거든. 상당히 괴롭단 말이다.”
“알아, 알아, 원인을 말해얄게 아니니? 왜 불편하구 괴로운데?”
녀자애가 손으로 봉이의 어깨를 톡 치며 재촉했다.
“이번 기말시험에서 5등급이나 떨어졌거든. 보기 좋게 락하산을 탄거지.”
“5등급이나? 저런, 그럼 몇등이 되는데? 설마 마지막 일등은 아니겠지?”
녀자애의 눈에 잠간 긴장이 흐르고있었다.
“비슷해! 9등밖에 못했거든.”
“9등, 앞으로?”
“앞이지, 그럼!”
“앞으로 9등? 설마 너네 반에 학생이 아홉명밖에 없는건 아니지?”
“쉰일곱이다, 왜?”
봉이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나왔다.
“뭐? 얘, 쉰일곱에서 9등이면 완전히 별나라에 있는것 아니니?”
녀자애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별나라라니? 5등급이나 떨어졌는데. 그래 뭐 내가 똥별이라도 됐단 소리니?”
“와― 도저히, 내 사유로는 리해가 안 가는데. 얘, 그럼 넌 몇등이나 하면 좋겠니?”
“못해도 5등안에는 들어야지. 그래야 정상이구, 그래야 우리 엄마도 선생님도 동학들도 딴눈으로 안 본다니까.”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가능하지 못한것을 가능하게 만드는게 능력이구,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가는게 인생이래.”
말해놓고보니 봉이도 우스웠던지 제풀에 피씩 웃어버렸다. 그러는 봉이를 바라보며 녀자애가 뚫어지게 봉이의 얼굴을 주시했다.
“웃기지, 내가?”
“왜 웃긴다고 생각해?”
“인생을 론하고보니 저절로도 참 웃겨보여서. 하지만 우리 집에선 이게 하나도 웃기는 일이 아니거든. 마치도 내가 살아가는 전부의 의미가 중점고중에 붙는것인것 같아. 아직 고중시험까지는 1년이나 남아있건만 우리 집의 모든 화제는 중점고중이야.”
“그래서 힘드니?”
“폭발할것 같아.”
“가슴이?”
“그렇지. 마냥 자신이 공부하는 기계 같아 보이거든. 찰칵찰칵 고르롭게 기계가 돌아갈 때면 옆에서 착착 박수를 쳐주구, 혹시나 기름이 떨어져서 덜커덕덜커덕 힘겹게 돌아갈 때면 하늘이라도 무너질듯 온 집안이 란리법석이구…”
“알면서, 벗어나려고는 생각 안해봤니?”
녀자애가 도전적으로 물어왔다. 봉이는 놀란듯 녀자애를 빠금히 바라보다가 또 한번 피식 웃었다.
“벗어난다구? 어디서? 엄마의 잔소리속에서? 아님 선생님의 눈초리밑에서?”
“그럼 넌 어떻게 하면 편할것 같은데?”
“학급 1등, 아니 학년 1등을 하면 편하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몰라, 이렇게 죽기내기로 공부를 하는데아직은 학급 1등도 못해봤거든. 아마 1등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겠지, 잠간이지만…”
봉이의 말을 들으며 녀자애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봉이는 갑자기 자기가 그 어떤 끈에 묶여서 끝도 없이 허위허위 어디론가 끌려가는듯한 생각이 들었다. 봉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녀자애를 향해 소리쳤다.
“너, 너… 정말 이러기야?”
“왜? 내가 어쩌는데.”
녀자애도 따라 일어서며 야릇한 눈길로 봉이를 쳐다보았다. 봉이가 손가락으로 녀자애를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너무 하는거 아니니? 너…너, 왜 나만 가지구 씹어?”
“아니지. 너만 가지구 씹는게. 당전 형세를 놓고볼 때, 너의 가출이 의사일정에 오른거 아니니? 가출이란 참 무서운 개념이거든, 발등에 붙은 불부터 끄는게 당연한게 아닌가?”
“네 코도 석자 같은데? 아까 분명 보아낼수 있었거든. 너 뭔가 아주 심각해보였어.”
봉이는 아니냐는듯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녀자애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녀자애가 봉이의 얼굴을 마주보며 살짝 웃음을 날렸다.
“정말? 아까 내가 정말 그렇게 보였어?”
“정말이라니까. 난 정말 큰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니까? 너도 솔직히 말해봐! 구경 뭔 일로 물에 뛰여들었어?”
녀자애를 바라보는 봉이의 얼굴이 자못 진지해보였다. 녀자애는 여전히 까르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참, 너 눈썰미 하나는 죽여주는구나. 그래, 아까 난 사망훈련을 해보았다.”
“뭐? 사망훈련?!”
봉이가 튀여나오려는 심장을 누르며 녀자애에게 물었다.
“그래, 사망훈련! 헌데 왜 그렇게 놀라니? 사람이란 다 그런게 아니니? 태여나는 날부터 죽음을 향해 엉금엉금 기여가는거지. 죽음의 신은 언제나 호시탐탐 우리의 삶을 노리고있는거구. 이렇게 죽으면 어떨가? 저렇게 죽으면 어떨가? 한번쯤 죽음을 두고 열심히 리허설을 해보는것도 로맨틱한게 아니니?”
봉이는 자기와 나이도 비슷해보이는 이 녀자애의 머리에 이처럼 해괴한 리론이 고름처럼 들어차있다는 자체가 미스터리라고 생각하면서 녀자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얘, 넌 어디서 이런것들을 배웠니?”
“어떤것들을?”
“뭐, 이를테면 ‘엉금엉금 죽음을 향해 기여간다’는것 같은…”
“그것도 배워야 아는거니? 넌 책도 안 보니?”
“책? 어느 책에 그런게 씌여져있니?”
“ㅋㅋㅋ… 이런 샌님이라구야? 그래 맞아. 너희들이 말하는 책이야 바로 교과서 그 자체지. 그래, 열심히 교과서를 뚜져라. 그래야 떨어진 5등급을 따라잡지. 즐거웠다.”
녀자애는 어느새 건기가 들어가는 옷자락을 당겨서 두어번 툭툭 털고는 두손을 머리속에 깊숙이 넣어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마르면서 듬성듬성 엉켜 붙었던 머리칼이 떨어지면서 묘한 기분을 연출하고있었다.
“야, 너 이름이 뭐니?”
봉이는 녀자애를 향해 급하게 소리쳤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웨침 비슷한것이였다. 어쩜 이 순간을 놓치면 수수께끼 같은 이 녀자애를 다시 볼수 없다는 그런 긴박감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녀자애가 바위우에 놓여있던 파란 가방을 주어들다말고 머리를 돌렸다.
“내 이름? 알고싶어?”
“그럼! 넌 다 알아버렸잖아. 나에 대해.”
“알려달라고 한적이 없는데, 난.”
“그래두 결과적으로는…”
“넌 참 재밌는 애야!”
“뭐?”
“ ㅋㅋㅋ… 내 이름도 너만치나 재밌거든. 내 이름은…”
녀자애가 말끝을 잡고 함뿍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는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마주쳐 딱하고 소리를 내며 아래 말을 이었다.
“쿠야.”
“엉?!”
“내 이름을 물었잖아? 내 이름, 쿠야 쿠!”
“쿠, 쿠라구?”
“쿠쿠가 아니구. 쿠라니까.”
말을 마친 녀자애는 몸을 픽 돌려 걸음을 옮기더니 다시 머리를 돌렸다.
“너, 빨랑 집에 돌아가라, 너에겐 아직 가출이 어울리지 않거든. 다시 만나―”
빠알간 등이 파아란 가방을 업고 봉이의 눈에서 멀어져가고있었다. 사라져가는 녀자애를 바라보노라니 “쿡!” 하고 뭐라 해석할수 없는 소리가 봉이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뭐? 이름이 쿠라구? 설마 진짜야 아니겠지? 그게 진짜라면 어떻게 불러? 김쿠? 박쿠? 정쿠? ㅋㅋㅋ… 동쿠? 세상에…)
봉이는 마치 짜릿한 마술에 걸렸다가 풀려나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닐거야, 절대 그 이름이 진짜일수가 없어! 뭐? 사망훈련? 과연 그게 가능한걸가? 이것도 절대 진짜일수가 없어! 그 애에게는 분명 엄청난 미스터리가 있는거야. 아까 그 순간 바위 끝을 향해 걸어가는 그 발걸음은 비장하기까지 해보였는데… 혹시 배우지망생? 그래. 이거야. 그 비장함이 꾸며낸거라면 그 애는 분명 배우지망생일거야!)
봉이는 주먹으로 자기의 허벅다리를 탁 쳤다. 사흘 낮 사흘 밤을 힘들게 하던 수학문제가 일시에 풀려나가는 그런 기분이였다.
(세상에 이렇게 사는 애도 있구나.)
봉이는 바위우에 던져져있는 자기의 가방을 주어들었다.
(그 애, 그 애가 어디로 갔을가? 어디서 사는 애일가? 나이는 얼마나 될가?)
마음이 가벼워지자 엉뚱한 생각이 스멀스멀 머리속으로 기여들기 시작했다. 봉이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면서 녀자애가 사라진쪽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삐뚤삐뚤 저 멀리로 뻗어간 오솔길에는 뻘건 황토가 여미지 않은 시골아줌마의 쭈그렁가슴처럼 들어나있었다.
봉이는 그 오솔길을 딛고 어디론가 가버렸을 그 녀자애를 찾아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를 내려서 두어발작 걸음을 옮기던 봉이는 길우에 떨어져있는 손수건 한장을 발견했다. 봉이는 다가가 손수건을 주어들었다. 하얀 바탕의 손수건우에는 빨간 매화꽃 서너송이가 새겨져있었다.
접때 녀자애가 얼굴을 닦고나서 손수건을 가방끈에 걸어놓던 생각이 났다. 아까는 주의해서 보지 않았지만 분명 하얀 판에 빨간 점이 있는듯했었다. 가는 길에 녀자애가 주의하지 않아 떨어뜨린것이 분명했다. 봉이는 손수건에 눈길을 주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손수건 아래쪽에 “사랑의 집”이라는 파란 글이 새겨져있었다.
“사랑의 집?”
순간 봉이는 고아원을 떠올렸다.
소학교 6학년 때 “6.1절”을 맞으면서 학급에서 “사랑전하기활동”을 했었는데 그때 간단한 기념품과 위문편지를 가지고 시교에 있는 “사랑의 집”으로 간적이 있었다. 봉이는 그곳에 가서야 아빠도 엄마도 형제도 없는 고아라는 이름을 가진 애들이 이 하늘아래에 그렇게 많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들을 보면서 봉이는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떠올려보았다.
그날 저녁 봉이는 아빠앞에서 두팔을 머리에 올려 하트를 만들며 “아빠, 사랑해요!”를 연출했다. 아빠는 깜짝 놀라는듯하더니 봉이에게 큼직한 꿀밤 하나를 얹어주며 말했다.
“자식, 하지 않던 놀음을 하면서.”
분명 봉이가 아빠를 놀리고있는줄로 아는것 같았다. 그날 봉이는 아빠를 향해 혀를 홀랑 내밀어보이고는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일기책을 펼쳐들었었다.
“나는 정말 행복하다. ‘엄마, 아빠!’하고 부를수 있는 사람이 내곁에 있다는것이 행복하고 그들의 사랑을 받고있다는것도 눈물나게 고맙다. 불쌍한 고아원의 애들을 자주 찾아봐야겠다…”
그날이 있은지도 어느덧 3년철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봉이는 그새 한번도 고아원을 찾지 못했다. 일이란 그렇게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은가보다.
봉이는 문뜩 “사랑의 집”을 찾아보고싶어졌다. 그곳에 가 불쌍한 애들을 만나보고싶은것인지 아님 “쿠”라고 하는 그 녀자애와 어떤 인연이 닿아있을법한 그곳을 다시한번 보고싶은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꼭 한번 들려보고싶은 마음만은 간절해졌다. 봉이는 빠알간 등이 파아란 가방을 업고 사라지던 그 오솔길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반시간쯤 걸으니 오솔길이 끝나있었다. 봉이는 시내구역에 들어서서 십분쯤 더 걸어 공공뻐스들이 정차하는 간이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6선뻐스를 타고 가다가 종점에서 내려 다시 십오분쯤 걸으면 “사랑의 집”에 도착할수 있는걸로 기억하고있었다.
간이역 서쪽켠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속에서 흥겨운 기타소리가 울려나왔다.
(웬 일이람?)
봉이는 호기심이 동해 사람들이 모여선 그곳으로 다가갔다. 두세겹으로 둘러선 사람들속에서 머리를 길게 자래우고 노란 부리찌를 낸 잘생긴 남자애가 신들린듯 기타를 타고있었다.
궁금했다.
“안에서 웬 일이세요?”
봉이가 곁에 선 사나이에게 물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이곳에서 가끔 볼수 있거든. 기타를 참 잘 타지 않니?”
“저렇게 돈을 버는 앤가요?”
“아니, 간혹 소비돈을 던져주는 사람은 있더라만 프로는 아닐거야, 저 애 입으로 직접 돈을 구걸하는걸 못 봤거든.”
“그럼 뭘 하는 애래요?”
“글쎄다…”
사나이가 머리를 저었다.
“여러분, 정말 우리의 마음마저 찌물쿠게 하는 계절입니다. 공부에 지친 자식들의 손목을 잡고 황금빛태양이 축제를 여는 광야를 향해서, 계곡을 향해서 려행을 떠나볼 의향은 없으신지요? 이 시각도 여러분의 자식들이 교과서와 씨름하느라 지쳐가고있다것은 알고계시는지요?”
남자애가 격동에 넘쳐 열변을 토하고는 흥겹게 기타줄을 튕겨댔다.
“메아리소리가 들려오는 / 계곡속에 흐르는 물 찾아 / 그곳으로 려행을 떠나요.”
“려행을 떠나요”라는 귀에 익은 노래였다. 7월의 찜통더위에 진땀을 짜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시원하게 적셔주는 싱싱한 노래였다. 둘러선 사람들속에서 무시로 박수가 터져올랐다. “좋소, 좋소~” 하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절찬속에서 남자애는 완전히 무아상태에 빠진듯했다.
봉이는 문뜩 그 남자애가 무지무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해나가는 그 용기가 부러웠고 낯선 사람들앞에서 저렇게도 당당하게 열창을 할수 있는 남자애의 자신심이 부러웠다.
“공부에 지친 자식들의 손목을 잡고 황금빛태양이 축제를 여는 광야를 향해서, 계곡을 향해서 려행을 떠나볼 의향은 없느냐”고 하던 남자애의 뜨거운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으며 일시 코끝이 물먹은듯 시큰해났다.
드디여 6선뻐스가 역에 들어섰다.
봉이는 아쉬운듯 그곳을 떠나 뻐스를 향해 뛰여갔다.
봉이는 해살을 마음껏 마실수 있는 차창 곁을 찾아 앉았다. 차창으로 불어들어오는 바람이 봉이의 머리칼을 날려주었다. 봉이는 손가락을 쫙 펴서 머리를 뒤로 쓸어올리며 스르르 두눈을 감았다.
봉이는 잠간이지만 머리속에 비여있는 하아얀 공간을 발견했다. 그 공간속에는 공부도 없었고 선생님도 없었고 아빠도 없었고 엄마도 없었다. 그 공간속에는 쿠라고 하는 녀자애도 없었고 신들린듯 기타를 탈줄 아는 남자애도 없었고 지난 기말시험에서 5등급이나 내리꽂힌 봉이라는 락방자도 없었다.
봉이는 두눈을 감은채로 달리는 뻐스에 몸을 맡겨버렸다.
시교여서 그런지 뻐스는 무시로 들추어댔다. 덜커덩덜커덩할 때마다 하얗게 비여있던 공간속으로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꾸물꾸물 기여들기 시작했다. 역시나 먼저 달려오는 모습이 쿠라고 하는 녀자애였다.
(쿠? 그것이 과연 그 애의 진짜 이름일가? 쿠하고 “사랑의 집”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을가?)
“배우지망생”이라고 믿고싶던 녀자애의 모습이 “사랑의 집”이라는 파아란 글자와 어울리면서 마음속으로부터 아릿한 기분을 만들어주고있었다. “사망훈련”이라는 말도 무딘 칼끝이 되여 봉이의 사색을 뚜져댔다. 만약 녀자애가 “배우지망생”이 아니라 할 때 “사망훈련”을 떠올릴만치 내심세계가 심각하다면 그 애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있는것일가? 봉이는 탱탱 소리가 나는체 밝은 허울을 걸치고 혼자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무형의 보따리에 눌려 힘겹게 가파로운 오솔길을 걸어가는 녀자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빨리 돌아가라. 너에겐 아직 가출이 어울리지 않거든.)
떠나가면서 남긴 녀자애의 마지막 말이 다시 귀전을 울렸다.
봉이는 지그시 두눈을 감고 자신없이 머리를 저었다.
(가출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구? 하다면 나에게 어울리는것은 과연 어떤것일가? 얌전한 애? 공부를 잘하는 애? 엄마 말씀 잘 듣는 애?)
봉이는 잠간 자기가 살아온 16년간의 발자취들을 더듬어보았다.
4살 나던 해인가 한번은 엄마의 손을 잡고 공원에 간적이 있었다. 엄마는 봉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봉이는 엄마가 볼 사이도 없이 저절로 아이스크림봉지를 벗겨버렸다.
“엄마~”
봉이가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딴에도 대단한 일을 해낸듯싶어서였다. “우리 봉이 참 용쿠나, 저절로 아이스크림봉지를 다 벗겼네.” 하면서 엄마가 어깨를 다독여주기를 바라서였다. 하지만 아니였다. 엄마는 봉이의 옆에서 뒹구는 아이스크림봉지를 가리키며 말씀했다.
“쓰레기를 저렇게 마구 버리면 나쁜 어린이가 됩니다. 빨리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세요.”
어머니의 말씀은 후둑후둑 내리치는 우박처럼 봉이의 여린 마음을 아프게 했다. 봉이는 자기가 던진 아이스크림봉지를 주어서 쓰레기통에 가져가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참 무섭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뒤로 봉이는 쭉― 생존의 두려움을 느끼고있었다.
친구들과 싸우면 나쁜 사람이 되고 주은 물건을 호주머니에 넣으면 나쁜 사람이 되고 거짓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되고 어른을 보고 인사를 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고…
봉이는 소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도 생생하게 기억할수가 있었다.
1학년 전학기 한어과 기말시험에서 75점을 맞은 시험지를 받아가지고 학교 대문을 나오던 날, 어머니는 봉이의 손을 끌고 집으로 가다가 길거리를 쓰는 청소공아저씨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봉이야, 너 봤지? 공부를 잘하지 않으면 저런 사람이 된단다.”
그후로 봉이는 길을 가다가도 길을 쓰는 사람을 만나면 피해서 걸었고 걸으면서 (저 사람들은 정말 힘들게 사는것일가?)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굴려보기도 했다. 그래서 봉이는 죽기내기로 공부를 했다. 하지만 공부도 생각대로 되는것이 아니였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도 소학교에서는 내내 10등 주위를 맴돌았다. 엄마는 내놓고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얼굴에 서운함을 떨치지 못하고있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그래도 5등 주변을 맴돌수 있었다. 엄마는 늦은 골이 튼다면서 1등을 향해 열심히 뛰라고 채찍질을 했다. 하지만 그만치라는 한계가 있는것인지 봉이는 지금껏 최고로 3등을 초과하지 못하고있었다. 봉이는 손만 내밀면 거머쥘것 같은 1등의 월계관이 어쩜 가까우면서도 아득히 멀리 있는 그림의 떡으로 생각될 때가 많았다.
봉이는 점점 학교가 무서워지고 공부가 무서워지고 시험이라는 그 자체가 무서워졌다.
갈수록 어머니가 무서워지고 아버지가 무서워지고 집이라는 그 자체가 무서워졌다.
어제밤에도 어머니는 하늘이 내려앉기라도한듯 락루를 하셨다.
“어쩌니? 어쩌니! 고중시험이 당금인데… 5등급을 뛰여올라도 모르겠는데 되려 떨어지다니. 우리 봉이를 어쩌면 좋니?”
그러잖아도 가슴이 터져버리기 5분 직전에 이른것 같은데 어머니가 붙는 불에 키질을 하니 도무지 감정을 누를수가 없었다.
“어쩔가요? 어머니! 내가 와락 죽어버릴가요?”
너무도 반상적인 봉이의 반발에 어머니는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가셨다.
봉이도 자기의 침실에 들어가 안으로 문을 잠가놓고 침대에 벌렁 들어누웠다. 온밤 머리가 아홉개 달린 도깨비들에게 쫓기워다니다가 날이 푸름히 밝아오자 어머니와 말도 없이 가방 하나를 달랑 챙겨들고 밖으로 나와버렸던것이다.
(과연 어디로 갈가?)
봉이는 어지럽게 사색을 굴리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놓다가 마주 오는 뻐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살펴보니 시교로 나가는 32선공공뻐스였다. 가방을 내리워 무릎앞에 가져오는 순간 봉이는 저도 몰래 서글픈 웃음을 날렸다. 가출을 시도하며 들고 나온 가방안에 교과서며 필기장이며 과외훈련집 같은것들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던것이다.
32선종점에서 내린 봉이는 잠간 망설이다가 홍월저수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홍월저수지는 그곳에서 반시간쯤 걸으면 도착할수 있는데 주변에 바위도 있고 나무도 많아서 제법 유원지로 통하고있었다.
빨간 옷을 입은 쿠라는 녀자애를 만난것도 바로 그 홍월저수지에서였다…
뻐스는 심술 많은 아낙네만치나 신경질적으로 삑~ 소리를 내면서 멈춰섰다. 봉이는 차에서 내려 잠간 위치를 둘러보았다. 6선뻐스종점에서 서쪽으로 잠간 가면 비포장도로가 있는데 그 도로를 따라 다시 20분쯤 올라가면 “사랑의 집”인것으로 짐작되였다.
봉이는 그 도로를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어느 예쁜 손이 심어놓았는지 길섶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소담하게 피여있었다. 마음껏 향기를 풍기며 시름없이 흐느적이는 꽃들은 봉이에게도 한가슴 그득 자연의 정취를 불어넣어주고있었다. 봉이는 힘껏 꽃향기를 마시며 큼직큼직 발걸음을 옮겼다.
“사랑의 집”이 멀리로 보였다.
봉이는 토닥토닥 가슴이 뛰였다.
“사랑의 집” 옆은 남새밭이였다. 파아란 물결이 남새밭을 덮어서 한결 아늑한 느낌을 주고있었다. 한무리의 아이들이 남새밭 중간에서 뭔가를 하느라 분주했다. 봉이는 그곳을 바라고 발걸음을 조였다. 남새밭과 가까운 3층청사 모퉁이에 이르니 남새밭의 정경이 환하게 보였다. 가담가담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재잘거리는 소리까지도 들을수가 있었다.
남새밭에는 고추가 심어져있었다. 애들은 한창 고추를 따느라 즐거워했다. 그들은 자기들 손가락보다도 더 큰 고추를 부지런히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검푸르게 독이 올라있는 고추는 여느 사람들이 보면 저도 몰래 입맛이 확 당겨할것 같았다. 하지만 봉이는 아니였다. 봉이의 어머니께서 자극성이 강한 음식은 대뇌의 발달에 영향이 있다면서 봉이를 못 먹게 한데서 아직까지 봉이는 고추맛을 모르고있었던것이다.
“누나, 점심에는 이 고추를 장에 쪄서 먹었으면 좋겠슴다.”
애티나는 남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이는 집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서서 애들쪽에 눈길을 주었다. 까까머리를 한 일여덟살쯤 되여보이는 남자애가 옆에 선 녀인에게 고추를 듬뿍 담은 바구니를 들어보이고있었다. 채갑수건을 목에 걸고 헐렁한 꽃부리적삼을 입은 녀인은 그 시각 봉이와 등을 돌리고 서있었다. 녀인은 바구니에서 고추를 한줌 움켜쥐더니 연극대사를 치는듯한 과장된 목소리로 서글서글하게 남자애를 칭찬했다.
“우리 용길이 참 용쿠나. 고추를 많이도 땄네. 그래 점심에는 주방에 말해서 이 고추를 장에 쪄서 먹자꾸나.”
말을 마친 녀인은 목에서 채갑수건을 내리워 얼굴을 닦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굴이 봉이를 마주하는 순간 봉이는 깜짝 놀라고말았다. 봉이는 정말 자기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꽃부리적삼을 입고 채갑수건을 목에 건 그 녀인은 뜻밖에도 쿠였던것이다.
애들이 좋다고 퐁퐁 뛰며 손벽을 쳤다.
“와― 좋아라. 점심엔 고추찜을 먹는다.”
“누나, 토장에 찔 때 고추는 작은걸로 하기쇼. 영미는 큰 고추를 매워서 못 먹슴다.”
용길이라고 불리운 그 남자애가 자기옆에 선 대여섯살쯤 돼보이는 녀자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쿠는 용길이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며 용길이의 옆에서 애고사리 같은 손으로 고추를 따느라 여념 없는 영미를 훌쩍 안아올렸다. 쿠는 영미의 얼굴을 당겨다가 자기의 얼굴에 몇번 비비더니 채갑수건으로 영미의 코를 닦아주며 말했다.
“그래그래, 우리 영미 맵지 않게 제일 맛나는 작은 고추를 골라 쪄달라고 해야지, 응?”
그리자 영미가 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캐득캐득 웃음을 토했다.
“야― 신난다. 그럼 점심엔 밥을 많이많이 먹어야지―”
영미의 목소리는 그처럼 신나고 맑아보였다. 어쩜 영미는 쿠라고 하는 저 녀자애를 엄마로 착각하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봉이의 뇌리를 치고 들어왔다.
(옳구나, 쿠는 정말 고아원에 사는구나. 아니면 저렇게도 스스럼없이 아이들과 한가족이 될수가 없는거야!)
봉이의 눈앞에 바위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던 빨간 그림이 또 한번 스쳐지났다.
봉이는 가방앞 호주머니에 넣었던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사랑의 집”이라는 네 글자가 네개의 예리한 칼끝이 되여 자기의 가슴을 저며내는듯 괴로왔다.
(어쩜, 어쩜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수가 있을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것이든, 아니면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것이든 얼굴에 연출되는 그 행복한 표정만은 거짓이라고 할수 없겠지?)
봉이는 스스로 얼굴이 붉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녀자애에 비하면 자기는 어쩜 고민을 하는 그 자체가 행복한 투정이라고 생각되였다. 봉이는 손수건을 움켜 가슴에 가져다댔다. 가슴속 밑자락으로부터 아릿한 그 무엇이 꾸역꾸역 올리밀어 봉이의 가슴을 괴롭히고있었다. 봉이는 녀자애를 만나서 상처받은 그 애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고싶었지만 또 선뜻 나설수도 없었다. 그처럼 도고하던 녀자애가 이 장면에서 꽃부리적삼을 입고 채갑수건을 목에 건채 자기를 만난다면 얼마나 난처해할가 하는 생각으로 저으기 주저심이 들었던것이다.
(그래, 지금은 이대로 돌아가는거야. 뭔가를 준비해가지고 다시 와서 조용히 만나는거야…)
봉이는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며 천천히 몸을 돌려 오던 길을 재촉했다.

봉이가 녀자애를 다시 찾은것은 이튿날오전 아홉시쯤이였다.
봉이가 수발실 창문을 두드리자 50대의 구레나룻을 한 아저씨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아저씨.”
봉이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래, 웬 일이냐?”
“아저씨, 쿠를 찾아왔거든요.”
“뭐라구? 누구를 찾아왔다구?”
아저씨가 턱을 약간 쳐들며 다시 물었다.
“쿠, 쿠…쿠를 찾아왔다구요.”
급하니 말머리가 잘 풀리지 않았다. 아저씨는 모르겠다는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혼자말 비슷이 웅얼거렸다.
“쿠쿠라고 했나?”
아저씨가 목소리를 한 옥타브 높이며 봉이에게 물었다.
“왜 여기 와서 쿠쿠를 찾는데?”
“꼭 볼일이 있어서요. 여기 있죠?”
“있긴 있다만… 허, 참! 너 어디서 온다 했지?”
“시3중에서 공부하거든요. 쿠가 지금 어디 있어요?”
“주방에 있겠지, 그래 저 왼쪽켠에 앉은 집, 주방으로 가봐라.”
아저씨의 말에 봉이는 기뻐하며 인사를 올린후 주방쪽으로 걸어갔다.
(쿠를 만나게 된다. 그 애를 다시 만나게 된다.)
봉이의 발걸음은 날듯이 가벼워졌다.
(그래, 조용히 불러 단둘이 만나는거야, 그리구 먼저 손수건을 건네주면서 말을 거는거야, “받아, 너의 손수건이다.” 그럼 그 앤 어떤 표정을 지을가?)
봉이는 여기서 생각을 멈추고 머리를 저었다.
(아니지. 그렇게 했다가 그 애가 괜히 모르쇠를 놓으면 어떻게 할가? 그럼 아예 “아야! 너 어떻게 여기 있니?” 하고 깜짝 놀라서 죽는 시늉을 해보여?)
두눈이 튀여나올듯 깜짝 놀라는 그 녀자애를 보는것이 그렇게도 재미있을것 같았다.
봉이는 시무룩이 웃으며 오른손으로 가방을 꾹 눌러보았다. 손가락끝으로 손수건이 맞혀왔다. 그리고 그옆에 있는 책 같은것도 느껴졌다.
그것은 빨간 하트가 찍혀진 다이어리였다. 그 다이어리 갈피에는 자기가 평소 모아두었던 소비돈 3백원이 들어있었다.
“사랑의 집”에서 생활하려면 꼭 소비돈을 넉넉히 쓸수 없으리라 생각되였던것이다. 녀자애가 받지 않으려고 하면 “사랑의 집”에 드리는 자기의 성의일뿐이라고 둘러댈 생각이였다.
주방문은 열려져있었다. 봉이는 주먹으로 열려져있는 주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50대가 푼히 됨직해보이는 아주머니가 물고기를 손질하다말고 머리를 돌렸다.
“누구를 찾니?”
“안녕하세요? 아줌마, 쿠를 찾아왔어요.”
“누구를 찾는다구?”
아주머니의 눈길이 빨리 돌아갔다. 봉이는 아주머니의 거동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기요. 쿠, 쿠를 찾는다구요.”
봉이의 말에 아주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애두 웃긴다야, 여기 와서 쿠쿠를 찾아선 뭘 하려구. 호호호호…그래 있긴 있지. 저게 아니냐?”
아주머니가 빨간 지시등이 보이는 전기밥솥을 가리켰다.
“허!”
봉이는 너무도 허무해서 입을 떡 벌리고 선채 킬킬 웃음을 흘리는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롱담이 아닌데요, 아주머니. 정말인데요. 쿠라고 하는 녀자애를…”
“나도 롱담이야 아니지. 여긴 쿠쿠라는게 저 밥솥밖에 없어. 사람이름이 쿠쿠라구 호호호호…”
아주머니가 또다시 배꼽을 쥐고 돌아갔다.
“정말 그런 애가 없어요?”
봉이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없다니까. 그렇게 못 믿겠으면 저기, 숙소에 가봐라. 그곳 복도에다가 우리 원생들의 사진을 쭉 붙여놨으니까 혹시 낯익은 얼굴이 있는가 보거라.”
아주머니는 물고기를 손질하던 손을 그대로 들어 북쪽으로 앉은 빨간 벽돌집을 가리켰다. 손에서 걸직하고 뿌연 물이 뚝뚝 떨어져 진한 비린내가 코를 찌르고있었다.
봉이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올린후 비린내만치나 찜찜해나는 마음을 걷어가지고 숙소를 향해 잰걸음을 놓았다. 아니나다를가 숙소 복도 벽에 걸린 액틀에는 원생들의 사진이 줄느런히 걸려있었다.
어림짐작으로도 20명은 될것 같았다. 봉이는 쏘는듯한 눈길로 사진들을 훑었다. 없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는 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봉이는 아쉽고 서운한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어디로 갔을가? 그래 정말 이곳에 있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제 애들과 함께 고추를 따던 모습은 어떻게 된것일가?)
갈수록 오리무중에 빠지는듯했다. 봉이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어쩔가? 방마다 돌아라도 볼가? 혹시 쿠가 제 이름이 아닐수도 있으니까, 아니야, 이름이 아니라도 얼굴이야 뛸수 없겠지. 분명 쿠의 얼굴은 사진에서 볼수가 없는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쿠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데…)
봉이는 쿠가 어제 함께 고추를 따던 애들이라도 만나 사연을 묻고싶어서 다시 아주머니를 찾아가 애들이 어디에 있는가고 물었다. 하지만 일이 안되려고 그러는지 원생들은 집체로 박물관 참관을 갔다는것이다.
“분명 봤는데요. 어제 쿠가 애들과 함께 고추를 따는것을.”
“그럼 누굴가? 이곳엔 평소 다니는 사람들이 많단다. 어제는 내가 직일이 아니라서 누가 왔댔는지 모르지…”
아주머니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참, 정말 다시 그 애를 못 보는걸가?)
봉이는 말 못할 아쉬움을 남기며 공공뻐스 간이역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간이역 서쪽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사람들속에서 건들어진 통기타소리와 함께 구성진 노래가 흘러나왔다.
“굽이 또 굽이 깊은 산중에 / 시원한 바람 나를 반기네 하늘을 보며 노래 부르세 /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 부르세…”
어제 보았던 남자애가 오늘도 그곳에서 신들린듯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봉이는 사람들 틈에 머리를 들이밀고 그 남자애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와~”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랑만으로 가득찬 푸름의 계절에 자식들의 손을 잡고 려행 한번 다녀오시는것은 어떨가요? 이 시각도 공부에 지쳐 힘들어하는 자식들이 있다는것을 잊지 마십시오.”
남자애가 열띤 목소리로 침을 튕기고있었다. 봉이는 (넋을 놓고 저 애의 설교를 듣는 어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가.) 하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그 시각 봉이는 웬지 자기보다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있는 그 남자애를 보는것이 괜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이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며 돌아섰다. 열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서 멀거니 뻐스를 기다리자니 어딘가 멋적은 생각이 들었다. 봉이는 역에 있는 간이서점으로 다가갔다. 금방 나온 신문이며 잡지 같은것들이 유리창문에 달라붙어 길손들을 부르고있었다. 봉이는 성의없이 유리창 너머로 보여오는 잡지의 표지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중학생》이라는 잡지가 눈에 띄였다. 1학년때 주문하여 보던 조선글로 된 잡지였다. 심심풀이삼아 한책 사서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신호로 한책을 골라들었다. 봉이는 먼지가 뿌연 간이걸상을 종이로 대충 닦고 앉아서 책장을 번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예상하던대로 학교소개며 공부방법소개며 학생작문이며가 책갈피를 메워가고있었다.
뒤표지 안쪽에 실려있는 “사색”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봉이의 시선을 끌었다. 백양나무에 매달린 노오란 잎새 하나를 찍은 사진이였다. 봉이는 인차 작자의 이름에 눈길을 가져갔다.
“아!”
봉이는 깜짝 놀라며 짤막하게 소리를 냈다. 분명 쿠라고 찍혀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사범학교 06년급 고사반이라고 밝혀져있었다.
봉이는 후둑후둑 가슴이 떨려났다.
(혹시 이 애가, 이 애가 아닐가? 쿠! 옳을거야, 이같이 괴상한 이름이 그렇게 흔할수가 없어! 그렇다면 이 애가, 이 애가 사범학교 학생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접때 “사랑의 집”에서 애들과 함께 고추를 따던 그 모습은 무엇일가? 혹시 “사랑의 집”에서 살다가 사범학교에 붙었을가? 그래서 휴일을 리용하여 그곳에 들린것일가?)
이런 생각이 머리를 치자 봉이는 가슴속 밑자락에서 일종의 련민이 아릿하게 솟아오르는것을 발견했다.
(그래 사범학교, 그곳에 가서 쿠를 찾아보는거야!)
봉이는 큰 결심이나 내린듯 사범학교방향으로 가는 29선뻐스에 몸을 실었다.

29선뻐스가 사범학교 정거장에서 도착한것은 10시 반을 금방 넘겨서였다. 봉이는 당금 쿠를 볼수 있을것 같은 예감에 가슴을 들먹였다. 봉이는 조용히 가방앞주머니를 눌러보았다. 네모난것이 약간 손끝에 맞혀왔다. 봉이는 주머니의 쪼로로기를 열고 그 네모난것을 꺼내들었다. 어제 홍월저수지에서 주은 빨간 꽃이 있는 손수건이였다. 봉이는 손수건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가방앞주머니에 넣고는 사범학교 정문쪽으로 발걸음을 다그쳤다.
금방 큰길을 넘어 인행도에 올라섰을 때 사범학교 정문 북쪽으로부터 한 사나이가 쏜살같이 뛰여오고있었다. 모양이 마치도 드라마에서 경찰에게 쫓기우는 좀도적을 방불케 했다. 봉이는 달려오는 그 사나이를 눈여겨보았다. 아니나다를가 정문 북쪽의 굽인돌이에서 경찰복장을 입은 사나이 둘이 뛰여나오며 소리소리 웨쳐댔다.
“서라, 그 자리에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
봉이도 길가던 길손들도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선자리에 굳어졌다. 쫓기우던 남자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죽기내기로 뛰기 시작했다.
“범죄자구나!”
봉이는 금방 무슨 판국인지를 알것 같았다.
(싱겁게 남의 일에 나서지 말고 몸을 돌봐야 한다. 사고라도 나면 고중시험에 영향이 있으니까.)
늘 이렇게 당부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일이 생기는것이 안 생기는것보다 못하다는것이 어머니의 생활신조였던것이다.
“서라, 서라!”
경찰들이 계속 소리치며 남자를 쫓아왔다. 쫓기는 남자가 사범학교정문을 지나는 순간이였다. 문안에서 한 녀자애가 뛰여나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쫓기우는 남자에게 안걸이를 걸었다. 쫓기던 남자가 보기 좋게 한쪽으로 나가 넘어졌다.
녀자애는 잽싸게 쫓기던 남자를 가로타고 앉아 남자의 얼굴에 강타를 먹였다.
구경을 하던 길손들이 그쪽으로 뛰여갔다. 쫓아오던 경찰들도 도착하여 쫓기던 남자를 붙잡아 수갑을 철컥 채워버렸다.
몰려간 길손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봉이도 박수를 치며 그 녀자애에게 눈길을 주었다. 녀자애는 두손을 마주 쥐고 서서 손가락을 꺾으며 히쭉이 웃어보였다.
봉이는 너무도 뜻밖의 풍경에 그만 입을 떡 벌리고말았다. 긴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있는 그 녀자애는 뜻밖에도 쿠였다.
경찰들이 범죄자를 앞세우고 떠났다.
쿠도 파아란 가방을 고쳐 메고는 몸을 돌렸다. 어디론가 떠나는 행장 같았다.
“쿠야,”
봉이가 녀자애쪽으로 뛰여가며 소리쳤다. 녀자애가 걸음을 멈추고 봉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쿠야, 정말 대단해!”
봉이가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진심으로 말했다.
“너, 뢰봉?!”
녀자애가 깜짝 놀라는듯싶더니 봉이를 보고 히쭉 웃었다. 봉이도 녀자애를 향하여 웃음을 날렸다.
“네가 진짜 뢰봉이지. 방금 참 멋졌어.”
“그래?”
“방금 다 보았거든. 어쩜 그렇게 잽싸고 용감할수 있었니?”
“그래? 내가 잽싸보였어?”
“그렇지. 잽싸보였지.”
“와— 속이 다 시원하다. 난 한번 나의 태권도솜씨를 써먹어보려구 기회를 찾던중이였는데.”
녀자애의 얼굴이 악동처럼 번져갔다.
“너, 태권도를 배웠니?”
봉이가 호기심이 동해서 녀자애에게 물었다.
“그럼, 난 이미 1단을 꺾었거든. 2단도 꺾으려고 생각하다가 녀자애가 뭘 이쯤하면 되지싶어서 잠간 손을 놓고있는중이야.”
“와— 어디까지가 너의 진면모냐?”
“진면모?”
녀자애가 무슨 말이냐는듯 야릇한 눈길로 봉이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의 진짜모습! 넌 사진도 찍잖아?”
“사진? 너, 걸 어떻게 아는데?”
녀자애의 눈길이 다시 의문으로 반짝였다.
“알지, 봐라.”
봉이가 가방앞주머니에서 잡지를 꺼내여 녀자애앞에 흔들었다. 녀자애가 금시 얼굴에 밝은 웃음을 피워물었다.
“너, 그 잡지를 봤구나. 지난가을에 찍은 사진이야, 가을의 외로움을 말하려고 했는데, 맘에는 안 들어. 어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본딴것 같은 느낌이 들기두 하구.”
“바로 그 장면을 재연한것이잖아. 난 그래도 좋은데. 희망을 보는것 같아서…”
그들은 말하는 새에 간이역까지 왔다.

둘은 란간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섰다.
“봉이야, 근데 너 어디로 가는 길이였니?”
녀자애가 그제야 생각이 난다는듯 이상한 눈길로 봉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말에 봉이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녀자애를 쳐다보다가 가방앞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녀자애에게 돌려줄 손수건이며 특별히 녀자애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한 다이어리며가 손끝에 만져졌다.
다이어리 갈피에 끼워져있을 소비돈도 머리속에 떠올랐다. 봉이는 잠간 망설이다가 네모나게 개인 손수건만 꺼내 조심스럽게 녀자애앞으로 내밀면서 떠듬거렸다.
“사실은 너에게 이것을 전해주려고…”
손수건을 본 녀자애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머, 이게 내 손수건이 아니냐? 어떻게 이게 너한테 있니? 난 아예 잃어버린줄 알았는데.”
“어제…”
“홍월저수지에서? 그랬구나. 그래서 없은게로구나.”
“그래, 네가 떠난후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주었어. 어제 네가 이것으로 얼굴을 닦던 생각이 나서 네것이라고 생각했지.”
봉이는 여기서 말을 끊고 녀자애의 얼굴을 살폈다. 녀자애의 눈길이 봉이를 향해 반짝이고있었다.
“너, 내가 여기 있는것을 어떻게 알았니?”
“여기서…”
봉이가 녀자애에게 잡지를 내밀었다.
“아, 그래. 여기에 나의 주소가 찍혀있지.”
“근데 여기 ‘사랑의 집’이라는건 뭐야?”
봉이가 손수건을 내밀며 녀자애의 기색을 살폈다. “사랑의 집”이라는 말이 녀자애의 마음속 상처를 건드릴가 두려워서였다. 녀자애가 방긋 웃었다.
“왜, 궁금해?”
“아니, 그냥 조금, 어제 네가 ‘사랑의 집’에서 애들과 함께 고추를 따는걸 봤거든. 부르려다가 그만 돌아섰댔어…”
“왜?”
“네가 거기 있는걸 나에게 보여주고싶지 않아할것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했지? 오― 넌 내가 고아인줄 아는구나. 그치?”
봉이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녀자애가 까르르 웃었다.
“넌 참 재밌는 애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아니야? 그럼?”
“난 그곳의 자원봉사자야. 한달에 두번씩 토요일에 가거든. 어제가 바로 ‘사랑의 집’에 가는 날이였어. 그래서 어제 홍월저수지에 사진 찍으러 갔다가 돌아오던 맵시로 그곳에 들렸던거야. 너 진짜 나를 찾아 그곳까지 갔었니?”
녀자애는 다시한번 봉이에게 물었다. 봉이는 녀자애를 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려봉이, 난 정말 너의 자상함에 손을 들었다니까. 어쩜 이 손수건때문에 그곳까지 날 찾으러 갈 생각을 다 했니?”
녀자애는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듯 봉이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냥…”
봉이는 녀자애의 얼굴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잠간 발끝으로 땅을 뚜지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진짜 정체가 뭐니?”
“정체라니?”
“난 네가 정말 미스터리처럼 생각된다.”
“웃긴다. 너 참! 봉이야, 너, 나를 몰라서 그래. 나처럼 세상앞에 다 들어나있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구.”
녀자애는 보라는듯 봉이앞에 두팔을 쫙 펴보였다. 하지만 봉이는 녀자애를 향하여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아직도 못 믿겠다구?”
“그럼.”
“말해봐, 뭔데?”
“우선 너의 그 ‘사망훈련’이라는것이…”
봉이가 녀자애를 바라보며 뒤말을 얼버무려버렸다.
“왜? 믿기지 않아? 물론이겠지. 문제는 네가 모든 일을 그렇게 정식으로 심각하게 생각하는거야. 왜 그래? 그냥 개구쟁이녀자애의 렵기적인 행동쯤으로 생각하면 안돼? 그 시각 난 뽀얀 운무속에서 빠끔히 머리를 내미는 물속에 풍덩 빠져보고싶은 충동이 생겼거든. ㅋㅋㅋ… 글구 내가 물에서 허우적거리면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가도 궁금했구. 사실 어제 네가 머리를 숙이고있을 때 내가 너의 옆으로 지나갔던거야. 사실 난 너의 정체가 더 궁금했거든.”
녀자애는 구수한 옛말이라도 엮어가는듯싶었다. 그러는 녀자애를 바라보면서 봉이는 외계인을 보고있는듯한 기분이였다.
(뭐? 내가 궁금했다구? 큰일이 났다고 내가 놀라서 허둥댈 때 나의 행동을 깨고소하게 살펴보고있었다구?)
봉이는 마치도 전라의 몸으로 네거리에 나선 기분이 들었다. 가슴속 밑자락으로부터 뭔가 욱하고 머리를 쳐들었다. 봉이는 반상적으로 소리쳤다.
“글구 너, 그 이름은 뭐야!”
“이름이 왜?”
녀자애도 봉이 못지 않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이름이 왜, 왜 쿤가 말이다.”
“멋지잖아? 필명이야, 쿠! 넌 쿠를 어떻게 생각해?”
“쿠쿠가 생각되거든.”
“밥솥?”
“그럼. 나뿐이 아니야.”
봉이는 아까 “사랑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너뿐이 아니라구?”
녀자애가 바투 들이댔다. 그 바람에 봉이가 도리머리를 했다.
“아니야. 괜히 해본 소리거든.”
봉이는 녀자애쪽으로 한발 다가서며 약간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무슨 뜻이야? 쿠라는게.”
녀자애의 얼굴에 가는 웃음발이 스쳐지났다.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는듯했다.
“없어! 아무 뜻도. 너 생각해봐! 한어에서 쿠라면 무슨 뜻이 되니?”
“잔혹하다고 해석되는가?”
봉이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다음은?”
“극도로? 깊게?”
“그렇지 뭐. 깊게, 찐하게, 대개 그런 뜻이야. 간단해!”
“간단해?!”
봉이는 또 한번 혀를 빼물었다. 이렇게 “간단한것”을 두고 어제밤에 무척이나 심각하게 생각을 했던 자신이 못내 한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럼 너 진짜 이름은 무엇인데?”
봉이가 끝을 보고야말겠다는듯 바투 들이댔다.
“무척 알고싶어?”
“그냥 궁금해서.”
녀자애의 얼굴에는 여전히 만만한 여유가 내비치고있었다. 봉이는 멋적은듯 뒤말을 얼버무려버렸다. 녀자애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알려주지 뭐. 내 진짜 이름은 김순녀야, 김순녀! 어때? 나하구는 잘 안 어울리지? 그래서 그냥 부르기 좋게 쿠라고 필명을 단거야. 사는게 그런거지 뭐. 쿨하게… 재밌잖아!”
세상을 손안에 넣은듯 당당하게 말하는 녀자애의 모습이 말 그대로 쿨하고 당당하게 느껴졌다. 이런 애라면 정말 “사망훈련”도 할법하다고 생각되였다.
“난 오늘 등산을 가는 길이야. 마반산이라구 알지? 기차 타구 도문으로 가는 길옆에… 산이 보통이 아니래. 오를 맛이 난다는거야. 한번 가보고싶잖아?”
녀자애가 봉이를 바라보며 말하다가 인차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아니지. 넌 공부를 해야 하니까. 궁금증이 풀렸으면 인젠 집에 돌아가거라. 나 떠나야 하거든.”
“아니, 함께 가자.”
봉이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 그럴거 없어. 넌 나하구 한길이 아니거든.”
“뭐? 한길이 아니라구?”
봉이가 도전적인 눈길로 녀자애를 찍어보며 물었다.
“그래, 난 진작 보아냈어. 넌 지금 잠간 방황을 하고있을뿐이야. 지난 기말시험에서 5등급이나 떨어졌다면서, 너의 새로운 목표는 그 5등급을 따라잡는거야. 그게 너의 진정한 기쁨이고 부모님들의 기대일거야.”
“그게 너무 힘들어, 난.”
봉이는 어느새 녀자애를 향해 진심을 토로하고있었다. 봉이의 진심을 읽으며 녀자애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서 네가 방황하고있는걸! 중점고중, 그것은 마치도 좁디좁은 외나무다리 같은거야. 천군만마가 그 다리를 지나서 어디론가 가려고 헤덤벼치니까. 마치도 다리 저켠에 노아의 방주가 있는것처럼 말이야! 갈수만 있다면 다리 저켠으로 가보는것도 참 좋은 일이지. 하지만 문제는 모두가 그렇게 될수 없다는거야!”
녀자애는 흥분했는지 제법 손사래까지 해가면서 열변을 토했다.
“나도 한때는 너 같은 고민을 하고 방황을 했었어. 부모님하구 엄청 싸우기도 했지.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알고있었거든. 난 분명 아니였던거야, 나의 흥취는 애들을 고와하는것, 나의 꿈은 마음껏 사진을 찍는것,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나보는것이였어. 교원이라면 꼭 훌륭한 교원이 될 자신이 있었거든. 그래서 부모들을 설복하여 사범학교에 온거야. 첨에 부모들은 나의 선택을 동의하지 않았어. 돈을 내고라도 중점고중에 붙여준다는거야. 부모들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거든. 평범한 출근족으로서 자식 뒤바라지를 하기가 어디 쉬운거니? 난 그런데 돈을 쓰고싶지 않았어. 내 인생의 목표대로 하고싶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쿨하게 살고싶었단 말이야!”
녀자애는 말을 마치고 어깨를 으쓱하며 봉이를 바라보았다. 봉이는 쿠라고 부르는 남다른녀자애- 김순녀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있었다.
이때 역전으로 가는 30선공공뻐스가 들어섰다. 녀자애가 사뿐 일어서며 가방을 주어들었다.
“봉이야, 믿는다. 아자!”
녀자애는 손가락 다섯개를 쫙 펴보이며 봉이에게 웃음을 날리고는 어느새 뻐스에 뛰여올랐다. 봉이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선자리에 서서 부르릉 소리를 내며 떠나가는 30선뻐스를 바라보았다. 녀자애는 차창 너머로 봉이를 향해 손을 저었다. 봉이도 녀자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뻐스와 함께 멀어져가는 녀자애의 빨간 옷이 한점의 뜨거운 태양으로 되여 봉이의 가슴속 구석구석에 서려있던 뽀얀 운무를 걷어가는듯싶었다.
봉이는 으스러지게 주먹을 틀어쥐였다.
그랬다.
운무의 저쪽은 파아란, 빠알간, 노오란 칼라가 살아 숨쉬는 황홀한 채색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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