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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최동일 신작

중편소설 * 탈
2013년 04월 03일 11시 00분  조회:2193  추천:0  작성자: 동녘해
중편소설
 
 

 
최동일
 
 
1
 
탈을 쓰고있었다. 하얀 바탕에 관골에다 빨간 칠을 진하게 한 탈밑으로 가늘고 긴 목이 흘러 내렸고 그 목이 다하는 곳으로부터 하얀 피부의 녀체가 무연하게 펼쳐졌다. 젖무덤이 풍만하다는 생각이 마지막이였다. 그 생각을 이어 하늘이 노랗게 번져가면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고 속에서는 꾸역꾸역 열물이 치솟았다. 정우는 오른손바닥을 쫙 펴서 명치끝을 꼭 누르고 허둥지둥 화장실로 달려들어가 변기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달려올 때는 내장이 그대로 쏟아질것 같았지만 던져지는 걸레처럼 변기에 머리를 틀어박고보니 그렇다할 내용물이 나오는것도 아니였다. 꽥꽥 연신 헛구역질만 터질뿐이였다. 정우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상체를 지탱한채 두손으로 변기의 변두리를 잡고는 힘껏 머리를 숙이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무엇이라도 토해보려고 바득바득 애를 썼다. 하지만 여전히 요란한 소리만 날뿐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뜻 일어설수도 없었다. 일어나려고 머리를 쳐들면 다시 속이 들볶였다.
정우는 변기에 머리를 박은채로 두눈을 꼭 감았다. 토닥토닥… 심장 뛰는 소리가 귀전에 들리는듯싶었다.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거나 아닐가?
심장 뛰는 소리와 함께 이런 엉뚱한 생각이 뇌리를 쳤다. 내장이 파도를 칠 때 같아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것만 같았었다.
진정하자, 잠간 진정하고 일어나자. 후―후―
정우는 변기에 머리를 박은채로 길게 숨을 내뿜었다. 그 바람에 역한 냄새가 직접 코속으로 날아들었다. 신듯하면서도 매운 맛이 섞인듯한 그 냄새는 사정없이 페부를 파고들더니 문뜩 정우로 하여금 비릿한 냄새를 떠올리게 했다.
꺽!
정우는 불시로 딸꾹질을 시작했다. 꺽꺽 딸꾹질이 올라올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가슴을 뻑뻑 긁었다. 정우는 가까스로 쳐든 머리를 좌우로 흔들다가 떨리는 왼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간신히 화장실을 나가 세면대에 다가섰다.
꺽꺽!
딸꾹질은 아까 파도를 치던 내장들보다 더 힘들게 잘근잘근 정우를 씹어주려는듯 무시로 가슴을 톺으며 올라왔다. 정우는 길게 들숨을 쉬였다가 그대로 뚝 호흡을 멈춰버렸다. 평소에는 그렇게 몇초가 지나면 딸꾹질이 멈출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각엔 막힌 호흡때문에 가슴이 금시 뻥 하고 터질것 같은데도 멈추어주지 않았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갔다. 정우는 두손으로 세면대를 짚고서서 다시 두눈을 꼭 감았다.
꺽꺽꺽…
끝없이 올라오는 딱꾹질을 두고 정우는 스스로가 그처럼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참 하얬어. 백설같이 하얬단 말이야. 누구의 발길 한번 닿지 않은 백설 같았지.
련속 터지는 딱꾹질로 하여 몽롱한 머리속에서 문뜩 하얀 물체가 뭉게뭉게 솟아오르고있었다. 그 힘든 상황에서 “백설같은 그 모습”이 떠오른다는게 이상했다.
그래, 너무 하얘서 선뜻 다치기조차 두려웠었지. 하얬다구, 너무 하얬다구…
―너무하얘요. 백지장 같아요.
하얀게 탈이였어. 하얀데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줄로 알았었지.
―아저씨, 불편하세요? 병원 가보세요. 떨고있어요, 아저씨.
―뭐?
백설로 뒤덮인 하얀 계곡에서 들려오는듯한 그 조용한 목소리에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정우는 간신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굴이 참 희다고 생각되였다. 그가 다가오고있었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를 내놓고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누구던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얼굴이였다.
정우는 세면대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려 그 얼굴을 다시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가 떨려 뜻대로 몸이 돌아서주지 않았다. 정우는 몸을 흠칫하면서 왼손을 뒤로 하여 다시 세면대를 짚었다.
그가 급히 손을 내밀어 비틀하는 정우의 어깨를 잡았다.
―조심하세요. 몹시 편찮은것 같은데 병원 가야죠.
―괜괜, 괜찮아요. 속이…
―속이 불편해서 딸꾹질이 나는거예요? 딸꾹질, 그게 진짜 힘든건데.
그가 정우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하얀 얼굴에서 빛나는 이가 눈부셨다.
―아니, 그런건 아니구, 종종 도지는 버릇이라서…
―그렇구나.
“너무 하얘요. 백지장 같아요.” 하던 무거운 목소리가 아니라 한결 산뜻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로 그는 “아저씨, 딸꾹질하는 버릇이 있구나.” 하면서 또 한번 빙긋이 웃음을 피워 올렸다. 정우는 그 소리에 애써 얼굴을 펴면서 “아니…” 하고 한마디 던지고는 조심조심 목소리를 고르며 아래 말을 이었다.
―딸꾹질 하는 버릇이 아니구…
―그럼? 왜 이렇게 힘들어 하시죠?
―그게…그게…
정우는 뭐라고 해석을 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우의 얼굴을 잠간 바라보던 그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놀랬잖아요? 방금은. 아, 아저씨 얼굴색이 그새 약간 피였어요.
―그래요?
―이상하네요. 얼굴색이 이렇게 빨리 변한다는게. 아저씨, 우리 저쪽 걸상에 가서 잠간 앉아요.
그가 정우의 팔을 부축하면서 말했다.
―좋겠네, 그게.
정우는 그에게 팔을 내준채 로비에 걸어 나와 걸상을 찾아 앉았다.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서 그의 숨소리가 고르롭게 정우의 귀전을 파고 들었다. 그 숨소리를 누르며 아까 보다 훨씬 뜸을 들여 딸꾹질소리가 들렸다. 그때마다 그는 머리를 돌려 정우를 훔쳐보았다. 정우도 그에게 눈길을 돌리다가 공중에서 그의 눈길과 부딪쳤다. 정우가 그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먼저 “그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림 구경 왔댔어요?
정우가 그 뜻을 넘겨 짚으며 앞질러 물었다.
―네, 김교수의 그림이 전시됐다기에.
―김교수의 그림을 좋아해요?
정우가 그의 말꼬리를 물고 다잡아 물었다.
―아니요.
그가 살래살래 머리를 젓다가 아래말을 이었다.
―김교수의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김교수라는분이 그리워서요.
―네? 김교수와 잘 아는 사인가요?
―그런것은 아니구요.
―그렇다면?
정우는 뒤말을 줄이며 그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김교수를 떠올리면 저도 행복해져요. 김교수는 행복하던 저의 한 순간을 직접 보신분이거든요. 인젠 모두 추억으로 되였지만…
―네?
정우는 웬 일이냐는듯 힘 없는 두눈을 올롱하게 치뜨며 그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그가 그 눈길을 피하며 물었다.
―이상하죠?
―뭐가?
―아저씨의 눈에 이 사람 참 이상하구나 하고 씌여져있는데요.
―아닐텐데. 내 눈에는 지금 힘들어, 너무 힘들어 하구 쓰여져있을텐데.
정우가 애써 목소리를 띄우면서 한마디 했다.
―그런것 같아요. 힘들어하는 모습이 얼굴에 력력하거든요. 하지만 궁금증도 똑똑히 보이구요.
―참, 재밌는 친구네.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때 저의 꿈이 화가로 되는것이였어요.
그의 목소리에 흥분이 실리고있었다. 정우는 삽시에 변하는 그의 얼굴을 지켜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었구나. 그럼 지금은 미대 학생? 몇살이지?
―스물 두살. 하지만 학생은 아닌데요.
―어, 뜻밖인데.
정우가 놀랍다는듯 두눈을 크게 뜨면서 입을 열었다.
―미술을 무척 좋아 하는것 같은데…
―좋아했죠, 학교때. 미술써클에 다녔었거든요.
―그랬었구나.
―김교수가 그때 우리 학교에 와서 미술써클조의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적이 있었어요. 그때 김교수는 저의 우상이였어요. 며칠전에 인터넷에서 김교수가 미술전을 열었다는 기사를 본거예요. 그래서 오늘… 헌데 일부 그림은 맘에 안들어요.
그가 분명하게 자기의 의사를 밝혔다. 그 당당함에 또 한번깜짝 놀라면서 정우가 다잡아 물었다.
―어느 작품이 맘에 안들었죠?
―얼굴에 탈을 쓴 라체화요.
―왜죠?
―자기의 라체마저 보여줄수 있는 녀자에게 탈을 씌워준 화가의 저의는 무엇이였을가요?
―네? 화가의 저의요?
정우가 “저의”라는 두글자에 악센트를 주었다.
―그래요, 화가는 입으로 라체를 신성하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라체에 대하여 말 못할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있는거예요.
―어떤 뜻이죠?
―탈은 남에게 보여줄수 없는 치부를 감추고싶을 때 쓰는거 아닌가요?
―아!
정우는 그의 말에 뭐라고 확실하게 대답을 줄수 없어 입만 쩝쩝 다시다가 화제를 돌렸다.
―근데 왜? 그냥 미술공부를 하지.
―아, 그게… 그게… 됐어요. 아저씨. 설마 진짜 대답을 듣고싶은건 아니죠?
―아, 그래. 그렇지 뭐.
정우는 순간 그의 상처를 건드리지나 않았나 하고 후회하면서 그의 눈길을 피했다. 잠간 침묵이 흘렀다. 또 다시 그의 숨소리가 고르롭게 귀전을 스쳤다. 그새 정우의 딸꾹질은 어디로 갔는지 가뭇없이 사라졌다.
토닥토닥…
숨소리 외의 그 소리는 심장 뛰는 소리라고 생각되였다.
참 조용하구나 정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도 따라 일어섰다.
―가시려구요?
―가야지. 점심시간도 훨씬 지난것 같은데.
―아저씨도 화가세요?
그의 눈이 화가라고 대답하세요 하고 말하는듯싶었다.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화가를 취재하는 기자?! 오늘 김교수의 미술전을 취재하러 왔다가 그만…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아까 그 버릇이라는게 뭔지 말씀 안했잖아요, 아저씨.
―그게… 그게… 너 설마 진짜 대답을 듣고싶은건 아니지?
―와, 진짜 제대로 먹었네요, 꼴을.
그가 소리치며 두손을 탁 마주치고는 아래말을 이었다.
―종종 만나 수다 좀 떨어요, 우리. 오늘 참 즐거웠어요. 저, 환이예요.
―그래, 나두 즐거웠다. 환!
 
2
 
“저 환이예요.”라는 메시지가 들어온것은 이틀후의 아침이였다. 마침 일요일이라 정우는 그때 뭘 하면서 하루를 때울가 하고 생각을 굴리며 두눈을 슴뻑거리고있었다.
환? 아, 그날 그 애구나.
누운채로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하던 정우의 눈앞에 하얀 얼굴을 가진 환의 모습이 스쳐지났다.
정말 하얬어, 그 얼굴이. 사내라는게 계집애들보다 얼굴색이 더 하얬다니까. 이야기도 참 재밌게 했었지. 목소리도 달았구. 근데 그 애가 왜 미술공부를 하지 않았을가? 미술에 참 애착이 있는것 같았는데.
해볕이 눈을 뜨는 삼복철 아침의 아지랑이마냥 환에 대한 궁금증이 정우의 머리속에서 스물거렸다. 알고싶었다. 환이라는 얼굴색이 하얗고 이발이 눈부신 그 애에 대하여 알고싶었다. 그날 “저 환이예요.” 하고 자기를 소개하고 난 그는 정우에게 핸드폰번호를 알려주었고 그 보답으로 정우가 자기의 핸드폰으로 그 번호를 눌렀던것이다.
“환, 반갑다.”
정우는 핸드폰 메시지창을 열고 문자를 찍어 환에게 날려보내면서 어떤 답장이 올가 하는 생각을 굴렸다. 십초쯤 지나서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으로 설치된 핸드폰이 찌릉찌릉 정우의 손바닥을 자극했다.
어!
환이 메시지를 보낼것이라고 생각하고있던 정우는 뜻밖의 통화신호에 깜짝 놀라면서 막을 들여다보았다. 막에는 환의 핸드폰번호가 떠있었다. 정우는 인차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귀가에 가져대 댔다.
―아저씨, 놀랐죠? 이른 아침에 전화해서.
핸드폰에서 흐르는 목소리치고는 무척 맑았다.
―아니, 놀라긴. 잠을 깬지 오랜데.
정우도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 그거 있죠? 한번 우연히 만난것뿐인데 자꾸 눈앞에서 삼삼 거리는 사람.
―어.
―아저씨가 저에게 그런 사람 같아요.
―뭐? 환, 너 참 재밌는 꼬마네.
―아저씨, 방금 절 꼬마라고 했어요?
―그래 꼬마지. 그래 꼬마구 말구.
―저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더 이상 절 꼬마로 못 볼걸요.
환의 목소리가 좀전보다 무게를 담아가고있었다. 그 무게를 느끼며 정우는 그날 “설마 진짜 대답을 듣고싶은건 아니죠?” 하던 환의 말이 떠올랐다.
“진짜 대답”은 어떤것일가?
괜히 궁금증이 타래쳐오르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이기에 그렇게 심각해? 22살이면 아직 꼬만거지 뭐.
―듣고싶어요? 그 이야길, 아저씨.
―들려준다면 나쁠거야 없지.
정우는 그가 22살에 나는 상대라것도 잊고 그렇게 자기의 진심을 비쳤다. 핸드폰을 타고 방금전에 비해 무게가 약간 덜어진 해피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좋았어요, 아지씨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는 견지에서 오늘 제가 무상으로 아저씨께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정말이야?
―아홉시까지 공원으로 오세요. 거기서 만나요, 우리.
―공공, 공원?
―네, 사람들이 춤을 추구 노래하는 그 정자 있는데서 만나요.
―어, 어… 공…공원…
―아저씨, 아홉시예요. 잊지 마세요. 사람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는 정자예요. 그럼 이만.
정우가 일시 확답을 주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데 환이가 얼음에 박 밀듯 자기의 뜻을 밀어보내고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눈길을 벽시계에 돌려보니 시침이 일곱시를 가리키고있었다.
아홉시? 공원? 춤을 추고 노래하는 정자?
정우는 머리속으로 환이가 던져준 낱말들을 되풀이 하면서 두시간후에 펼쳐질 화면들을 그려보았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것일가? 티없이 맑아보이는 애 한테 무슨 이야기가 있다는걸가? 왜 그 이야기가 무겁다고 생각되는걸가?
정우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세면실로 들어가며 나름대로 생각을 굴렸다.
공원의 아홉시는 일찍한 시간이 아니였다. 공원은 벌써 사람들로 복새통을 이루고있었다. 오던 걸음으로 무작정 정문을 질러 들어간 정우는 잠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보니 공원에 들러본지도 몇달은 되는것 같았다. 지난번 국경절휴가때 친구들에게 끌려 와서 맥주를 마신게 마지막이니 정확히 일곱달만이였다. 그새 크게 변한데는 없었지만 사진가게에서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세운 배경들이 눈길을 끌었고 길옆 놀이감가게의 문가에 동동 매달려있는 알록달록한 고무풍선들이 화사해보였다.
어느쪽이던가, 그 정자가?
공원 어딘가에 늙은이들이 모여 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정자가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게 딱 어느쪽인지 일시 떠오르지 않았다. 정우는 옛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주변을 두리벙거렸다. 련못을 지나 서쪽으로 50메터쯤 북쪽으로 올라가서 그 정자가 있은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바로 거기야.
정우는 확신하면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홉시가 다 되여오고있었다.
정우는 머리속으로 지도를 그리면서 정자를 향해 잰걸음을 놓았다. 련못을 지나 굽이를 돌자 정자가 보였다.
맞아, 바로 저곳이야.
정우가 자기의 판단에 머리를 끄덕이고있을 때 찌르릉 핸드폰이 진동했다. 정우는 바지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집어냈다.
환이였다.
―아저씨, 어디예요? 저 이미 도착했어요.
곁이 복잡해서 그랬던지 환의 목소리가 약간 높았다.
―그래? 나도 지금 정자를 올려다보고있거든. 5분후에 아니 3분후에 만나.
정우는 핸드폰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나무가지에 앉은 새는 쌍을 이루고
록수청산은 웃음을 머금었네
오늘부터 고역에서 벗어나
부부 쌍쌍 집으로 돌아가네
 
큰 목단꽃을 앞뒤로 수놓은 치포를 차려입은 얼굴이 가무잡잡한 늙은 녀자가 목소리를 한껏 올리 틀면서 악청을 뽑고 그 곁으로 꽹과리며 아쟁을 손에 든 늙은 남자들이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썽이고있었다. 노는 사람들은 흥에 겨워 어쩔줄을 모르고있었지만 정우는 그들이 무엇을 그렇게 흥겨워 하는지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았다.
하필이면 여기야, 자식. 설마 이런 놀음을 좋아하는건 아니겠지?
정우는 야릇한 생각을 굴리면서 둘러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어쩌면 누런 이를 들어내고 히쭉히쭉 웃어주는 그 늙은이들속에서 환의 하얀 이가 반짝일것 같아서였다. 한참이나 둘러보아도 환은 보이지 않았다. 조급증이 스멀스멀 기여들기 시작했다.
분명 여기 있다고 했는데? 불과 3, 4분전의 일인데…
정우는 저도 몰래 손목을 들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저씨.
분명 환이의 목소리였다.
―어.
정우는 깜짝 놀라며 소리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없었다. 거무칙칙한 옷들에 어울리지 않게 노오란 T셔츠를 입은 사람이 얼굴에 경극을 할 때 쓰는 뻘건 탈을 쓰고 정우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분명 이쪽에서 난 소리였는데 하면서도 정우는 딱히 누가 불렀는지를 짚어낼수 없었다. 정우는 다시 머리를 돌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지씨, 여기요.
또 그 목소리가 울렸다. 방금과 반대쪽에서였다. 정우는 인차 소리나는쪽에 머리를 돌렸다. 역시 없었다. 정우는 혹시 자기가 환청을 듣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며 머리를 저었다.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똑똑한 목소리였다. 정우는 사람들로부터 약간 떨어져 살피려고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그때 누군가 정우의 어깨를 덮쳤다.
앗!
정우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본능적으로 머리를 돌렸다. 뻘건 탈이 눈에 안겨들었다. 그리고 노란색 T셔츠가 눈을 자극했다.
―놀랐죠?
그 소리와 함께 뻘건 탈이 파란 탈로 확 바뀌였다.
―환이니?
―재밌죠?
탈이 내리워지고 하얀 얼굴이 들어났다. 정우는 순간 두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분명 그 어떤 환영에 빠져 너울거리다가 돌아온듯한 기분이였다.
―이게 재밌다구?
―그럼요. 한순간에 확 바뀌는 이 탈이 얼마나 재밌어요.
―확 바뀌는게 재밌다구?
―그럼요. ㅋㅋㅋㅋ… 가요, 아저씨. 우리 저기로 가요.
환은 손에 든 탈로 정자에서 50메터쯤 떨어져있는 곳을 가리키고는 흥겹게 앞에서 걸음을 옮겼다.
좋을 때지, 근심걱정 없이 무엇이나 생각할수 있고 재미있어 할수 있어서…
―아저씨, 전 늘 이런 생각을 해요.
환이가 걸음을 옮기다 말고 머리를 돌렸다.
―무슨 생각?
―사람의 일생도 이 탈처럼 척척 생각대로 바뀔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구요?
―왜 그런 생각을 하니? 너 지금 생활이 마음 안드니?
―생각하기 나름이죠.
환이가 자기곁에 도착한 정우의 얼굴에 갑자기 탈을 쒸워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데?
정우가 얼굴을 가리운 탈을 벗어 환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전 부모들 얼굴이 생각 안나요.
―엉?
정우가 깜짝 놀라며 먹이를 본 금붕어처럼 입을 벌름거렸다.
―아버지는 내가 여섯살 때 로씨야로, 엄마는 내가 일곱살 때 한국으로 갔대요. 그래서 난 삼촌네 집에서 컸어요. 내가 열살 때 아버지는 로씨야에서 세상 떴어요. 장사를 갔다 오다가 깽단을 만나 돈을 털리구 맞아죽었대요. 내가 초중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생활비를 보내주었어요. 그래서 초중을 졸업하고 고중에도 붙었죠. 대학에도 가고싶었어요. 헌데 고중 1학년 후학기부터 엄마에게서 소식이 끊긴거예요. 누군가 그러는데 내 엄마가 남의 녀자가 됐대요. 엄마 얼굴을 못 본지 몇년 돼요. 더 이상 공부를 할 형편이 못 됐죠. 삼촌은 그래도 계속 공부하라고 했지만 그럴수 없었어요. 제 자식 싫다는 엄마도 있는데… 그래도 저를 키워준 삼촌이 얼마나 고마와요. 더 이상 신세를 질수 없었죠. 그래서 사회에 나왔어요. 안마를 배웠어요. 저 중의안마 솜씨 죽여요. ㅋㅋㅋ… 힘들 때 저를 찾아 안마를 받아요, 아저씨.
―너…너…
정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절레절레 머리만 저었다. 어쩌면 거짓말을 하는것 같았다. 그 아픈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하듯 그렇게 차분하게 엮어내려가는 환이가 22살의 애숭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아저씨. 인젠 아프지 않아요. 아, 이런 얘기는 안하려고 했는데…
환이는 왼손에 든 탈을 오른손으로 툭 쳤다. 그 바람에 뻘건색이 파란색으로 휙 바뀌였다. 그것을 다시 툭 쳐서 빨건색으로 만들어 놓으며 환이가 말했다.
―안하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궁금해 하는것 같아서… 봐요 아저씨. 저기서 지금 그림전람을 하고있어요.
화제를 돌려서야 정우는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들어 환이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소나무들 사이에 늘인 가는 쇠줄에 그림들이 가득 걸려있었다.
―아마츄어들 작품 같았어요. 하지만 괜찮은것도 있어요. 우리 가봐요, 네? 아저씨.
환이가 정우를 끌고 그림앞으로 다가갔다. 수채화도 있었고 수묵화도 있었다. 풍경화도 있었고 초상화도 있었다.
한폭의 그림앞을 지나다가 정우가 뚝 굳어졌다.
다리를 오무리고 비스듬히 누운 녀자의 라체를 그린 그림이였다. 짙은 회색배경때문인지 녀자의 몸체가 하얗게 안겨왔다.
참, 하얗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치는 순간 정우는 “악!” 하고 단말마적으로 비명을 터쳐올렸다. 정우는 저도 모르게 명치끝에 손을 가져가며 입을 앙다물었다.
―아지씨, 웬 일이예요? 불편해요?
환이가 정우를 부축하며 허리를 굽혔다.
억억!
정우는 녀자의 라체화앞에 물 먹은 담처럼 무너져 내리며 연신 구역질을 해댔다.
 
3
 
환의 눈에서 측은한 빛이 흘렀다. 그 빛은 고통때문에 오열하는 정우의 온몸을 실실이 감싸고있었다. 그 빛에 감긴 정우의 몸뚱이가 와들와들 떨리고있었고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둘둘 굴러내렸다.
―아저씨.
―환아. 나, 어디 가서 앉아야겠다.
―네, 아지씨. 저저, 저기 걸상이 있어요. 거거거, 거기 가서 앉아요.
환은 너무도 급해 꺽꺽 말을 더듬으며 허리를 굽혀 정우를 부축하려고 했다. 정우는 왼손을 들어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훔치고는 그대로 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환은 땀이 질퍽하게 묻어난 정우의 왼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정우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정우는 환에게 기대면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괜찮겠어요? 아지씨. 걸을수 있겠어요?
―괜찮아, 천천히 가자.
―네, 아지씨. 조심하세요.
정우는 걸상등받이에 머리를 붙이고 조용히 두눈을 감았다. 눈까풀이 무시로 파들파들 떨리고있었다. 무시로 떨어대는 그 눈까풀을 바라보다가 환이 입을 열었다.
―힘들죠? 아지씨.
―나아졌다. 숨이 좀 나오네.
정우의 목소리가 낮았지만 숨소리가 고르로와지고있었다. 환은 호―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목소리에 궁긍즘을 담아 한마디 건넸다.
―수수께기예요.
―뭐가?
―아저씨가요.
―내가?
―그런데 알것 같아요.
―뭘?
정우가 환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아저씰요.
―나를?
힘 없이 열려있는 정우의 두눈에서 동공이 커지고있었다. 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아저씨. 콤플렉스가 있죠?
―콤플렉스라니?
―맞아요. 그래요. 녀자의 라체에 대한 콤플렉스!
―너너, 너 그게 무슨 뜻이니?
정우가 와뜰 놀라 몸을 흠칫 했다. 환이가 잠간 아래입술을 씹다가 긍정적으로 짚어냈다.
―그날 미술관에서두 김교수가 그린 라체화를 보고 증상이 발작한것이였어요. 처음을 내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요. 오늘도 그랬어요. 기분 좋게 올라왔었는데 그 녀자라체화를 보고난후 갑자기 배를 움켜쥐였어요. 우연한 일치일가요? 어떻게 설명할래요? 아저씨는 정답을 알고있죠? 말해보세요.
환은 또박또박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다.
―어…어…
정우는 갓 기름을 먹은 사이문처럼 막힘없이 착착 여닫기는 환의 빨간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뭐라고 뒤말을 잇지 못했다.
―녀자의 라체에 어떤 콤플렉스가 있는게 분명해요. 이건 일종의 반사반응과 같은거지요. 바람이 불면 머리칼이 날리는것과 같은 도리죠. 제 말이 틀렸어요?
―어… 그래.
정우는 고통스럽게 두눈을 꽉 감으면서 어금이를 깨물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고있었다.
―털어놓으세요. 무슨 일인데요. 친구는 못 되더라도 믿음직한 조카는 될수 있잖아요? 도움은 못 되더라도 저 들어줄수는 있잖아요?
―그날 내가 먼저 돌아온것을 후회해야 했어. 후회해야 했다니까. 장춘으로 갔던 그번 취재가 예산보다 하루 먼저 끝났었거든.
 
노랗게 구워진 통닭이였다. 금방 가마에서 꺼내서였던지 등에 기름기가 찰찰 흐르고있었다. 한근에 13원이라고 했다. 눈짐작으로 두근이 좀더 될것 같았다. 그놈을 사고싶었다. 안해가 통닭구이를 그렇게 맛나했던것이다. 하지만 넉넉치 못한 살림때문에 먹고싶은것이라고 선뜻 사먹을수 있는 형편도 아니였다. 며칠전, 피곤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퇴근한 안해가 옷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시장을 지나오는데 튀해서 걸어놓은 통닭이 눈에 뜨이지 않겠어요? 하나같이 하얗게 튀해진게 얼마나 먹음직스럽던지. 그옆에는 노랗게 튀겨진 닭들이 주렁주렁 걸려있었구요.
정우는 그 말을 하는 안해를 바라보면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었다.
얼마나 먹고싶었으면 저럴가? 에잇, 녀편네가 먹고싶어 하는 통닭 한마리도 마음대로 먹게 못하는 이 신세…
정우는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렸던것이다. 호주머니에는 마침 출장비를 남긴 돈이 30원 푼히 있었다.
그래, 한마리 사다가 깜짝 기쁘게 해주는거야.
차에서 내린후 동료들끼리 식당에서 술까지 마셨는지라 정우는 기분이 붕 떠서 한결 흥분된 상태였다.
정우는 구운 통닭을 한마리 사 들고 집으로 잰걸음을 놓았다. 뜻밖에 집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벌써 자나? 아직 아홉시도 안됐겠는데. 피곤했나봐. 이 더운 날씨에 온 하루 시장에서 익었겠으니. 해볕에 피부가 상하기도 하겠건만 그의 피부는 왜 그렇게 하얄가?
정우는 나름대로 좋은 생각을 굴리며 조용히 열쇠를 꺼내 자물쇠에 꽂았다. 곤히 잠들어 있을 안해를 깨우고싶지 않았던것이다. 그대로 들어가 잠든 안해의 하얀 옥체를 바라보는것도 행복할것 같아서였다. 집에 들어서보니 방문이 꼭 닫쳐있었다.
잠든게 아니구 어디로 갔나?
한풀 꺾이는듯한 기분이였다. 정우는 통닭을 담은 비닐봉지를 부엌에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웃방으로 다가가 주저없이 사이문을 당겼다. 순간 침대에서 검은 물체가 벌떡 솟구치는것이 보였다.
악!
정우가 비명을 터쳐올리며 스위치를 당겼다.
너무도 하얬다. 하얘서 눈부시는 몸뚱이가 눈에 안겨들었다. 와들와들 떨어대는 그 몸뚱이옆에서 검실검실한 피부에 어깨가 떡 벌어진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몸이 떨릴 때마다 그 남자의 후줄근해진 남성이 흔들흔들 춤을 췄다. 정우는 단말마적으로 소리지르며 그 남자에게 덮쳤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는지 남자는 달려드는 정우를 잡아 침대아래에 팽개치고는 부랴부랴 옷을 찾아들고 정지칸으로 뛰여나갔다. 방바닥에 동그라졌던 정우는 악을 쓰고 기여 일어나 정지칸으로 향했다. 그때 안해가 정지칸으로 내려와 정우의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정우는 안해의 팔에서 다리를 빼려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 정우의 다리가 빠지려는 찰나 안해가 정우의 종아리를 꽉 깨물었다. 정우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다리를 뽑은후 그 힘으로 힘껏 안해를 걷어찼다. 안해는 악 소리와 함께 벌러덩 넘어지더니 몸부림을 치며 한바퀴 휙 돌아 물독이 놓여져있는 콩크리트바닥쪽에 가서 쭉 뻐드러지고말았다. 하얬다. 죽은듯이 두팔을 쫙 벌리고있는 안해의 몸뚱이는 불륜의 현장에서 남편에게 채여 실한오리 걸치지 못하고 쓰러져있는 그 순간에도 먼지 한점 묻지 않은듯 그처럼 하얬다. 미칠것만 같았다. 그 하얀 몸뚱이를 꽉꽉 밟아 꺼어먼 발자욱을 팡팡 찍어주고싶었다. 정우는 한달음에 뛰여가 안해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 하지만 발등은 안해의 몸이 아니라 안해의 옆에 있는 물독에 가 퉁 하고 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와잘랑 소리와 함께 물독이 깨여지면서 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와 함께 정우의 속에서 뭔가 욱 올리 밀었다. 저녁에 마신 술이며 채 소화되지 않은 안주가 그대로 쏟아져 발등을 적셨다.
안해는 그날밤으로 집을 나갔고 두달후 협의리혼으로 4년간의 결혼생활을 마무리했다.
18년전의 일이였다.
 
―텔레비죤을 보고있었어, 그날밤. 그림에 대해 소개하는거야. 라체화였어. 풍만한 몸매를 가진 녀자의 라체화였지. 몸뚱이가 하얬다구. 그 라체화를 보는 순간 어쩔 새도 없이 구역질이 올라왔고 나는 또 어쩔 새도 없이 저녁에 먹은것들을 그대로 토해버린거다. 처음이였지. 그때로부터 나는 녀자의 라체를 상상만 하면 토하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거야. 그리고 가끔 녀자의 라체화를 보기만 하면 진짜 구토가 시작되였구.
정우는 환을 건너다보며 “참, 너하구 별말을 다했구나. 어린애 하구.” 하고는 어쭙게 입을 다셨다. 그러는 정우를 바라보면서 환은 미동도 없었다. 연푸른 화판에 티없이 맑은 하얀 색으로 오롯이 그려놓은듯한 환의 모습은 충격에 굳어진듯싶었다. 정우가 환에게 얼굴을 돌리며 목소리에 힘을 넣어 말을 이었다.
―인젠 그나마 괜찮아졌다. 이렇게 한번씩 열병을 하고나도 인차 회복할수 있으니까. 전에는 아니였지. 한번씩 겪고나면 적어도 하루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더랬지.
―어쩌면 좋아요. 아저씨를 어쩌면 좋아요.
환이 정우의 손을 꼭 쥐고 안타까와 목소리를 떨었다.
―보고싶지 않아, 진심이거든.
―그게, 그게 말이 돼요?
환이 속삭이며 정우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정우의 눈길이 담담했다. 그 시각 그 눈길에는 더 이상 아픔도 고통도 슬픔도 없었다.
―아저씨.
환의 목소리가 떨리고있었다.
―환아.
정우는 목소리마저 담담했다.
환이 정우의 앞으로 한뽐 다가앉았다.
환의 얼굴이 정우쪽으로 밀착되여갔다.
환은 천천히 정우의 두볼을 감싸들었다.
환의 빠알간 입술이 정우의 이마에 닿았다…
 
4
 
토탁토닥…
정우는 그 시각 분명 높뛰는 환의 심장소리를 듣고있었다.
토탁토닥…
정우는 그 시각 분명 자기의 가슴에서도 무엇인가 높뛰고있다고 느껴졌다. 이마가 달아오르기 사작했다. 이마로부터 온 얼굴이 화끈화끈 뜨거워졌다. 정우는 꼭 감았던 두눈을 천천히 뜨고 자기의 얼굴에 뜨거운 입김을 쏘는 환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긴장때문인지 환의 왼쪽볼이 파들파들 떨리고있었다.
―환아.
 정우의 갈린 목소리가 이사이로 터져나왔다.
환이 감싸안았던 정우의 두볼에서 손을 떼고 이윽토록 정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정우도 몸을 흠칫하면서 자세를 바로 앉아 중얼거렸다.
―어, 덥네.
―아저씨, 쉬다 오세요. 저 먼저 갈게요.
말을 마친 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잰걸음을 놓았다. 환의 노오란 T셔츠가 정우의 눈에서 멀어지고있었다. 자기의 손을 떠나 저 멀리 하늘가로 날아가는 고무풍선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애들처럼 정우는 하나의 노란 점으로 되여가는 환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리고있었다. 화끈거리다 못해 이마가 지지는듯 아파나기까지 했다. 정우는 두손을 쫙 펴들고 고통스럽게 이마를 감싸쥐였다. 머리속에서 천마리의 송충이가 스멀스멀 기여다니는듯 어지럽기 이를데 없었다. 스멀거리는 천마리의 송충이들을 헤집고 하아얀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얀 왼쪽볼이 파들파들 떨리고있었다. 안해 숙이의 얼굴인듯싶었고 다시보면 환의 얼굴은듯싶기도 했다.
 
그날밤, 안마를 끝내고 숙이가 정우의 이마에 도톰한 입술을 살며시 가져다 댔을 때 정우는 그닥 밝지 않은 불그스름한 보조조명을 빌어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끝났어요. 편히 쉬세요.
숙이는 밝은 조명을 켠 후 가지고 들어온 물수건과 발을 담궜던 물통을 들고 일어서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제야 정우는 화뜰 몸을 떨면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왜왜, 왜 여기에 몸을 담게 되였소?
그렇게 당돌한 물음을 던져버린 정우는 맞선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방귀를 터쳐버린 로총각처럼 몸둘바를 몰라했다. 숙이도 정우의 물음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문쪽을 향해 세걸음째 옮기다가 굳어져서 정우쪽으로 몸을 돌렸다. 숙이의 눈길이 집요하게 정우의 얼굴을 훑고있었다. 정우는 웬지 그 눈길을 정시할 자신이 없었다. 하여 다시 자리에 등을 붙이면서 애써 목소리를 골라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수고했소.
―대학교 다니는 동생이 있어요. 잘 생기고 공부 잘하고 셈이 든 애예요. 그애의 학비를 벌어야 해요. 이 일이 돈이 빨리 벌어져요.
숙이는 그렇게 많은 말을 뱉어냈지만 목소리는 정우의 목소리만치나 담담했다. 그때 정우는 담담하게 그런 말을 더듬어내는 숙이의 왼볼이 파들파들 떨리고있다것을 느낄수 있었다. 미세한 그 떨림마저 느낄수 있다는게 신비하리만치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우는 자기가 빗본것이나 아닐가 하는 생각으로 다시 숙이에게 눈길을 박았다. 그때 숙이는 다시 나가려고 이미 몸을 돌린 상태였다. 하지만 정우는 여전히 숙이의 왼쪽볼이 파들파들 떨리고있다는 환각이 머리속을 치고들어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제야 정우는 그 느낌이 눈으로 가슴으로가 아니라 토닥토닥 높뛰는 심장소리와 함께 푸들푸들 떨어대는 이마로부터 느껴지는것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왜 꼭 그녀의 왼쪽볼이라고 믿고싶은지 알수 없었다. 정우는 벌떡 일어나 앉아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
―그럼 부모님들은?
정우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전에 숙이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정우는 숙이가 사라진 문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에 벌렁 들어누웠다.
그녀가 왜 내 이마에 키스를 했을가? 아니, 내가 키스라고 생각하지 그녀에게도 그게 키스였을가? 대학교에 간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유흥업소에 몸을 던졌다는 그녀, 어디까지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할가?
혹 떼러 갔다가 혹 하나 더 달고 온 혹부리령감처럼 정우는 그날부터 시종 머리속에서 야금야금 자리를 틀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을수 없었다.
―경운기에 옥수수를 싣고 벼랑가를 지나게 되였어요. 아버지가 경운기를 몰았고 엄마는 아버지곁에 앉았었지요.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에 고장이 생긴거예요. 경운기는 내리막길에서 쏜살같이 달렸고 아버지는 경운기에 제동을 걸려고 허둥거리다가 그만 벼랑에 굴러떨어진거예요. 세상 뜬 아버지어머니를 가슴 아파하기보다 사람들은 나와 동생을 두고 더 가슴 아파했어요. 저는 그해 고중 2학년이였고 동생은 초중 2학년이였어요. 하루새에 고아로 된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어요. 생활이 유족하지는 못해도 부모들 품에서 별 고생 못해보고 자랐거든요. 그 힘든 와중에도 동생을 꼭 공부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쳤어요. 저는 단연히 학교를 중퇴하고 사회에 나왔어요. 그해 나는 20살, 동생은 16살이였어요. 벌써 6년이 지났네요.
숙이를 찾아 다시 그 안마원으로 갔을 때 그녀는 무좀이 번져가는 정우의 발가락을 이리저리 주무르며 남의 이야기를 하듯 차분하게 엮어내려갔다. 드라마에서의 방백처럼 들려오는 숙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우의 머리속에서는 진짜 한부의 드라마가 펼쳐지고있었다.
친구들이며 동료들이 정우를 두고 “소설을 쓴다”면서 도리머리를 했다. 시골에 사는 누나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꺼이꺼이 곡까지 하면서 죽을둥 살둥 막아나섰다.
―안된다. 이것만은 절대 안된다. 네가 우리 가문에서 어떤 사람인데. 우리 가문의 유일한 대학생이라구. 가문을 떠멜 사람이라구. 그런데 농촌녀자를 데려와? 안된다. 안돼. 절대로 안된다.
그러는 누나의 마음을 모르는것은 아니였지만 정우의 귀에는 더 이상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치 정우는 자기가 숙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자신하고있었다. 정우가 기어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자 친구들은 내 놓고 “이 미친것아, 사랑은 무슨 얼어죽을 사랑이냐? 너 그 녀자의 이쁜 탈에 홀린거지?” 하면서 정곡을 찔러 댔다. 그 말에는 정우도 구구히 변명할수 없었다. 키가 1.65 메터도 되나마나한 정우는 피부마저도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사람 같지 않게 검실검실하고 몸매는 바람이 불면 훅 날아버릴것처럼 갸날팠다. 반면에 숙이는 정우의 키를 초과할만치 늘씬했는데 얼굴색마저 티 한점 묻지 않은듯 밝고 하얬다. 숙이와 나란히 거리를 거닐 때면 정우는 자기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는게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부러운 그 눈길들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능력이 있다고 손가락을 흔들어주는것 같아 그렇게 만족스러울수가 없었다.
지인들의 곱지 않은 눈길속에서 반년 가까이 련애를 한후 그들은 끝내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숙이는 농촌호구를 시내호구로 넘겨 정우의 호적에 올렸다. 그새 서시장에 옷매대도 하나 장만했다. 정우는 숙이와 함께 하는 그 나날들이 그렇게 행복할수가 없었다. 숙이도 진심으로 정우를 커하고 아끼는것 같았다. 단지 아이만은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생활이 여유가 있을 때 가지자고 해서 좀 섭섭할뿐이였다.
그렇게 아기자기 4년철을 숙이와 살아온 정우였다.
감쪽같이 숙이에게 속혀 살아온 4년을 돌이켜보면 정우는 악몽을 꾼것 같으면서도 또 그것을 악몽이라고 믿고싶지 않았다.
숙이가 자기의 옷가지들을 꿍져가지고 집을 나가자 부럽게 정우네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고 이어 이러저러한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숙이와 불륜을 태운 그 남자가 결혼전에 만나던 남자라는 말도 있었고 지난해부터 가게에 드나들다가 눈이 맞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날밤, 불륜의 현장에서 후줄근한 남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부들부들 떨고있던 그 남자를 곰곰히 떠올려보노라니 정우도 그 남자가 자기와는 비교도 안될만치 잘 생기고 건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부터 어떻게 어긋났는지 알수 없었다. 자기의 진정이 어떻게 되여 그처럼 비참하게 찟기고 짓밟혀야 했는지를 가늠할수 없었다. 지어는 숙이가 자기를 사랑한적이나 있었는지마저 의심스러웠다. 그 의심이 시종 정우의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있었고 그 앙금이 물을 만나 고요하던 정우의 가슴을 휘저어놓기도 했다. 그래서 정우는 숙이와 갈라진후 애써 자기를 숨기고 살아왔다. 세상앞에 나서서 춤을 추다가 혹시 누구에게 상처를 다치울가, 다치워 상처에서 진물이 흐릴가 내내 발걸음마저 제겨디디며 살아왔던것이다.
 
하얬어,
정우는 생각을 굴리면서도 환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가 여전히 화끈거리고있음을 느꼈다.
왼볼이였다니까.
파들파들 떨고있던 숙이의 얼굴이 눈가에 클로즈업되고 또 클로즈업된 그 얼굴이 환의 얼굴로 바뀌여지는 환각이 무시로 덮쳐드는것을 정우로서도 어쩔수 없었다.
왜왜, 왜 숙이의 얼굴에서 환의 얼굴이 떠오르는것일가? 쳐죽이고싶었던 그 징글징글한 얼굴이 왜 환의 얼굴로 바뀌는것이냐구?
정우는 두눈을 꼭 감고 부르르 몸을 떨다가 벌떡 일어섰다.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정우는 허리를 굽혀 두손으로 걸상등받이를 짚고서서 잠간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뻘건색이였다.
환이가 들고왔던 탈은 뻘건색 얼굴로 정우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정우는 뻘건 탈을 주어들었다. 주어드는 순간 탈에 힘이 갔던지 탈은 퍼런색으로 변했다. 정우가 왼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퍼런 탈을 툭 치자 탈은 다시 뻘건색으로 돌아왔다. 정우는 다시 탈을 툭 쳐서 퍼런색으로 만든 후 몸을 돌려 정자가 있는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자가 가까와 왔다.
앞뒤에 큼직한 목단꽃을 수놓은 치포를 차려 입은 그 녀인이 그때까지도 노래를 부르고있는것이 보였다. 올라올 때 시작한것이 그때까지인지 아니면 그새 한쉼 쉬고 다시 부른는것인지 알수 없었다. 정우는 정자곁을 지나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이 밭을 다루면 나는 천을 짤게요
당신이 물을 길어오면 나는 정원을 가꿀게요
집은 낡았어도 비바람을 막을수 있고
우리 살림 힘들어도 달콤하기만 해요
 
녀인은 노래를 부르면서 요리조리 몸까지 탈았다. 곁에 앉은 남자들이 꽹과리를 두드리고 아쟁을 치느라 열을 올리고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정우는 새삼스럽게 외롭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치고들었다.
환, 얘는 어디로 갔을가? 왜 그렇게 총망히 떠났을가?
환의 빨간 입술이 닿았던 이마가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정우는 오른손바닥을 쫙 펴서 이마를 문지르다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5
 
―보고싶었어요, 아저씨.
이렇게 시작된 환이의 전화를 받은것은 이틀이 지난 그날이였다. 그때 정우는 점심식사를 금방 끝내고 사무실에 올라와 커피를 타서 상우에 올려놓고있었다.
환의 목소리는 사뭇 맑았다. 하지만 그날 공원에서 서운하던 생각이 떠올라 그닥 반갑지 않은 투로 응부했다.
―보고싶었다니? 설마…
―기다릴게요. 나와 주세요.
환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들렸다.
웬 일일가? 얘가.
환의 얼굴이 삼삼 눈앞에 클로즈업되였다. 순간 환의 빨간 입술이 대였던 이마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정우는 저도 몰래 오른손을 이마에 가져다댔다. 이상했다. 그 새 잊고있던 그 느낌이 그처럼 진하게 그 시각 다시 나타나는것이 놀라왔다.
그날 환이, 그애는 왜 그렇게 돌아져 내려갔을가?
그 의문을 풀고싶었다. 환이라는 수수께끼같은 그 애를 헤쳐보고싶었다. 하얀 피부에 숨겨진 그 속에 뭔가가 살아 숨 쉬고있을것이라는 예감이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그래, 한번 만나는거야.
정우는 고뿌를 들어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는 급히 문을 나와 서시장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얬다. 너무 하얘서 티 한점 묻지 않을것 같은 셔츠를 들고 정우를 바라보면서 환이 물었다.
―어때요? 이 셔츠가?
너무 어이없다고 생각되였다.
전화로 자기를 불러내서 하려는 일이 고작 자기의 셔츠가 어떠냐고 묻기 위한것이였단 말인가? 정우는 쩝쩝 입을 다시다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좋네, 깨끗해 보이는게.
―그렇죠? 아저씨.
환의 얼굴에 기쁨이 찰랑이고있었다.
―그래, 네가 입으면 딱이겠다. 네 얼굴색과 잘 어울려.
그러는 정우를 향해 환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죠, 아저씨.
―아니라니?
두서를 잡지 못해 망연하게 자기를 바라보는 정우를 향해 씩 웃어보인 환은 두손으로 셔츠를 들어 정우의 몸에 대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저에게 딱이면 안되죠.
―그럼?
―아저씨 몸에 맞아야죠.
―뭐? 내 몸에?
정우는 깜짝 놀라면서 환을 쳐다보았다. 환이 웃고있었다. 웃는 얼굴에 이가 눈부셨다.
―이틀간 내내 고민했어요. 아저씨를 다시 만나지 말가 하고 생각도 해보았어요.
―그런데?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어요. 제가 아니면 아저씨가 계속 고독하구 외롭게 살것 같았어요. 그리구 사실 아저씨가 보고싶었어요. 그래서 큰 마음을 먹구 오늘 시장에 와서 이 셔츠를 샀어요. 공원에 가서 아저씨를 부를가 하고 생각하다가 그래두 여기가 좋을것 같았어요. 시장 가까이니 편하잖아요. 혹시 아저씨에게 어울리지 않으면 뛰여가 바꿀수도 있으니까요.
좋은 일을 해놓고 칭찬을 기다리는 애들같이 순진한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며 환은 술술 이야기를 엮어 나갔다. 그러는 환을 쳐다보면서 정우는 점점 오리무중에 빠져드는듯싶었다.
나에게 셔츠라니? 웬 일루 얘가… 내 옷이 람루해보였나?
정우는 생각을 굴리면서 머리를 숙여 자기가 입고있는 웃옷을 내려다보았다. 새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환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낡아서 초라한것은 아니였다.
그럼 얘가 도대체 왜 이 셔츠를 샀을가?
눈덩이를 굴리듯 의문이 점점 더 커졌다. 그줄도 모르고 환은 여전히 맑은 목소리로 씨뚝해서 말했다.
―제가 얼마나 애썼는데요.
―왜?
―아저씨 몸에 어울릴만한것을 고르느라구그랬죠.
―왜?
―왜 자꾸 왜 하구 물어요? 아저씨는.
―왜 샀느냐구 왜 하구 묻는거지 왜 왜 하구 묻겠니?
―대답했잖아요. 아저씨께 드리자구 샀다구요.
―참!
정우가 입을 다시며 다시 환을 쳐다보았다. 정우의 눈길이 집요했다. 영문을 알아 내고야 말겠다는듯싶었다. 환의 입가에 아지랑이 같은 실웃음이 피여 올랐다.
―불쌍했어요.
―누가?
―아저씨 말이죠. 웃옷 벗어요.
환이 정우의 몸에 걸쳐진 웃옷을 벗겨내며 말했다.
―내가 왜 불쌍한데?
정우는 환에게 웃몸을 맡겨버린채 바투 들이댔다. 환은 벗겨낸 웃옷을 들어 툭툭 털면서 정우쪽에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밉기까지 했어요.
―누가?
―아저씨 말이죠. 입어보세요.
환은 셔츠를 정우의 어깨에 씌우며 말했다.
―아저씨가 바보, 멍청이, 천치 같았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지?
―저 아직 어려서 어른들 세계가 뭐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사람 사는게 다 똑 같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행복해지려는 그 욕망 말이죠. 아저씨가 행복해지려면 그때 아저씨와 근사한 직업을 가진 아주머니를 찾아야 했어요.
―그때두 지금두 나는 그 녀자와 결혼한것을 후회는 안한다.
―지금두요?
환의 눈길이 커지고있었다.
―그렇지, 지금두. 내 선택이였거든. 글구 그때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었구.
―세상에, 이처럼 비참하게 상처를 받고서두 후회를 안한다구요?
환이 되려 년장자라도 되는듯 두팔을 쭉 펴며 어깨를 뜰썩해보였다.
―후회라면 내가 못나구 돈이 없은것을 후회해야지…
정우가 뒤말을 흐리며 환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어쩌면. 아저씨를… 쯧쯧쯧…
환이 혀끝을 차면서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래쪽으로부터 단추가 하나하나 채워져 올라올수록 정우는 가슴이 쿵쿵 높뛰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머리속이 하얗게 바래지고있었다. 그 하얀 운무속에서 정우는 자신이 너무도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 무기력한 자기의 몸에 하아얀 껍질을 씌워놓고 이리저리 료리해나가는 환이가 자기에게 무엇으로 비쳐지는지는 그로서도 아리송했다.
그때 숙이가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생활의 여유가 있을 때 아이를 갖자”고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쯤은 환이또래의 자식이 있을것이였다.
그게 아들이였다면 지금 이 순간 환이처럼 살뜰하게 나를 바라봐줄수 있을가?
환의 손이 정우의 가슴을 건드리고있었다. 네번째 단추를 채우려는것이였다.
―여기까지만 해요. 셔츠는 그래도 제일 웃쪽 단추 하나는 남겨둬야 제멋이 나거든요.
환은 네번째 단추까지 다 채운후 두손으로 정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한결 겨벼운 목소리를 뽑아올렸다.
―바로 이 화면이잖아요? 셔츠 한장 바꿔 입었을뿐인데 와늘 다른 사람이 됐잖아요. 남자는 나이 들수록 몸을 가꿀줄알아야 해요. 그래야 남에게 꿀리지 않고 당당해질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아저씨.
―어, 왜?
정우가 괜히 놀라면서 환을 쳐다보았다. 환이 식지 두개를 펴서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아저씨가 웃는것을 보지 못했어요. 웃을줄 모르는거예요? 아님 일부러 웃지 않는거예요?
환의 물음에 정우는 잠간 두서없이 두눈을 슴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웃지 않는가? 어, 그렇네. 웃을 일이 없는게지뭐.
―어쩌면… 어쩌면… 웃어보세요. 아저씨, 스마일, 이렇게요.
환이 정우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정우가 힘들게 입귀를 실룩거렸다. 정우의 홀쭉한 두볼이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그 모습을 잠간 지켜보다가 환이 말했다.
―그래요, 아직 어색해보이긴 해도 딱딱한 얼굴보다는 훨씬 보기 좋아요. 됐어요, 아지씨. 저 오늘 소원을 풀었어요.
제 손으로 다듬어 내놓은 련인을 바라보듯 그윽한 눈길로 한참이나 정우를 바라보던 환이가 기쁘게 말했다.
―뭐, 소원을 풀었다구?
정우가 흠칫 놀라면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래요. 저 꼭 아저씨 같은 남자를 상대루 이걸 해보고싶었어요.
환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차분하게 들렸다. 정우는 헉 하고 숨을 멈췄다가 푸 하고 내쉬며 뚫어질듯 환을 바라보았다. 날아오는 환의 눈길과 공중에서 부딪쳤다. 환의 눈길이 반짝이고있었다.
―환아! 너…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는거니?
―아버지가 불쌍했어요. 돈을 벌어 식구들 호강시키겠다구 이국 타향에 갔다가 깽단에 맞아 죽으면서 울 아버지 뭘 생각했을가싶었어요. 아버지만 생각하면 지금 한국에서 남의 마누라로 되여 아양을 떨어댈 내 엄마가 찢어죽이고싶게 미웠어요. 엄마를 생각하면 녀성이라는 그 존재가 싫었어요. 녀자들 모두가 제 잘 살겠다고 자식 버리는 비정의 인간들로 생각되였어요. 물론 영화며 텔레비죤에서는 모성에 대하여 하늘높이 가송하고있지만요.
―너너, 너 그게…
―저도 힘들구 외로왔어요. 스스로 제가 허허 벌판에 던져진 고양이 같이 생각될 때가 많았어요. 그때마다 어떤 아저씨가 저를 주어다 키워주었으면 하는 꽃 같은 꿈을 꾸었더랬죠.
―물론 삼촌이 자주 전화를 걸어와서 저의 걱정을 해주었지만 그게 되려 저에게는 부담이였어요. 자기 자식 셋을 뒤바라지 하느라 큰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소처럼 엉기엉기 기여가는 삼촌에게 저는 완전 천덕꾸러기였으니까요.
―시루속같이 비좁은 뻐스에 오르기를 좋아했어요. 올라가 아저씨들 뒤에 서기를 좋아했어요. 차가 들추는 기회를 타서 앞에선 아저씨의 어깨에 얼굴을 대보고싶었어요. 그리구 내 손으로 고른 셔츠를 그 아저씨에게 입히고싶었어요.
―너 그게 얼마나 허황한 생각인지 아니?
―그날 아지씨를 보는 순간, 웬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는 아저씨를 안아드리고싶었어요. 과연 저의 느낌이 적중했던거죠. 그날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련민이라 할가요? 아니, 그보다도 진한 동지애를 느끼게 된거죠.
―나는 막부득이한 환경에서 막부득이 하게 그런 습관이 생겼지만 넌…
정우는 열변을 토하려다가 그만 뒤말을 얼버무려버렸다. 환의 말대로라면 환 역시 충분하게 엄마를 싫어할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치고들어왔던것이다.
뭐라고 말해야 할가? 정녕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얼어든 얘 가슴을 녹여줄수 있을가?
정우는 스르르 두눈을 감고 얼굴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해볕이 정우의 얼굴을 아프게 찌르고있었다. 찌르는듯한 그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싶었다. 그 아픔을 받아서 삼검불같이 엉켜지는 머리속이며 터질듯이 갑갑해 지는 가슴이며에 골고루 보내주고싶었다. 그러느라면 되려 아픔이 사라지고 마음이 따스하고 푸근해질것만 같았다.
해살처럼 퍼져나가는 아픔을 뚫고 쌕쌕 고르롭게 내쉬는 환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르로운 숨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콩콩 하는 강아지 짖음소리가 바람에 날려왔다. 정우는 그 소리에 두눈을 천천히 뜨고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시장광장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은 많은데 그들처럼 걸상에 자리를 하고 앉은 사람은 몇이 안되였다.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진 분수대옆의 걸상에 앉아 하얀 털의 강아지 두마리를 지켜보고있는 두 녀인도 그 몇 안되는 사람들중의 일부였다. 앞발에 약간 까만 털이 있는 강아지가 쏘세지를 먹고있는 코등이 까만 강아지를 향해 짖어대고있었다. 하지만 코등이 까만 강아지는 앞발에 까만 털이 있는 강아지가 짖건 말건 여전히 열심히 쏘세지만 먹어댔다.
―꼬미야, 짖지만 말구 너두 와서 먹어라. 얘가 다 먹어버리겠다.
선글라스를 건 녀인이 코등이 까만 강아지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놈은 쏘세지에 관심이 없는듯 여전히 앞발에 까만 털이 있는 놈을 향해 콩콩 짖어댔다. 그러자 코등에 까만 털이 있는 놈이 아쉬운듯 쏘세지를 곁눈질 하면서 앞발에 까만 털이 있는 놈곁으로 다가갔다. 두놈은 한순간 얼굴을 맞대고 킁킁거리더니 무슨 약속이라도 한듯 나란히 앞을 바라고 뛰여갔다.
선글라스를 건 녀인이 강아지들을 가리키며 옆에 앉은 친구인듯한 녀인에게 말했다.
―쟤들이 눈이 맞았나봐요. 련애하러 가는것 같아요.
녀인의 목소리가 별로 높지 않게 들렸지만 정우는 웬지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듯싶어 그쪽에 아니꼬운 눈길을 날렸다가 천천히 환에게로 돌렸다. 환의 눈길이 달려가는 강아지들에게 쏠려있었다.
―그놈들, 털이 참 하얗지?
정우가 환의 기색을 살피며 담담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조조, 조 앞발이 까만년이 나빠요. 코등이 까만놈을 홀렸다니까요. 조조, 조 꼬리질을 하는 꼴을 좀 봐요.
환이 강아지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코등이 까만 강아지가 앞발이 까만 강아지의 궁둥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꼬리를 하늘거리고있었다. 환이가 성난듯 그 모양을 지켜보다가 격하게 내뱉었다.
―저놈도 바보, 천치, 부실이예요. 그년이 뭐가 좋다고 궁둥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지…
―환아.
정우가 환의 말을 중둥무이했다.
환이 정우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저 구름이 참 하얗지?
생각과는 달리 정우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에 환은 머리를 들어 하늘가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하얀구름에 눈길을 가져갔다. 환이 잠간 하얀 구름송이들을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하얀 구름속에 얼마나 많은 비가 섞여있을가요?
―거야 비로 변해봐야 알겠지. 저 하얀 구름속에 얼마나 많은 비가 숨어있을지는…
―탈을 좋아해요? 아저씨는.
환이 문뜩 화제를 돌렸다.
―뭐, 탈?
정우가 깜짝 놀라며 뒤말을 얼버무렸다. 노란 셔츠에 뻘건 탈을 쓴 환의 모습이 머리속에 또렷이 떠올랐다. 정우는 환에게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너, 혹시 경극을 좋아하니?
―아니요, 경극보다 경극에서 쓰는 탈을 좋아해요. 특히 뻘건 탈을 좋아 하죠.
―왜?
―뜨거워 보이잖아요. 뻘건색이. 스스로 초라해 보일 때 그리구 가슴이 시릴 때 전 뻘건 탈을 쓰군해요. 뻘건 탈을 쓰면 자신이 생기거든요. 안마방, 참 재수 없을 때가 많아요. 별별 손님들이 다 있거든요. 가끔은 제가 버러지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뻘건 탈을 쓰고 버러지처럼 벌벌 방안에서 기여다녀요. 그럼 함께 있는 애들이 제가 청승을 떤다면서 제 궁둥이를 걷어 차요. 그 발길질에 저는 다시 일어서게 되죠.
 환의 목소리에는 제법 유머감까지 녹아 흐르고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환은 이 이야기를 이처럼 쉽게 가볍게 할수 있을가?
정우는 그런 생각을 굴리다가 환의 눈길을 정시하며 말했다.
―다시 일어날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환아.
―생각하기 나름이죠. 아저씨…
환이 그렇게 정우를 부르고는 아래말을 끊어버렸다. 정우는 환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며 아래말을 기다렸지만 환은 점도록 아무 말 없이 씩 웃기만 했다.
궁금했다.
환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가?
정우는 환의 곁으로 한뽐 다가 앉으며 물었다.
―왜 불러놓고 말이 없니?
―좋아서요.
―뭐? 좋아서?
―네.
―뭐가 그렇게 말까지 잊을 정도로 좋은데?
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꿈을 꾸고있어요.
―무슨 꿈을?
―아저씨하구 시장에 가서 남새를 사구 그 남새를 다듬어서 료리를 하구 그 료리를 마주 앉아 맛나게 먹는 꿈을요. 아저씨, 저의 꿈이 너무 큰거죠?
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환아!
순간 정우는 코등이 시큰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얼마나 외로왔으면… 얼마나 외로왔으면 얘가 이런 꿈을 다 꿀가?
―아니야, 환아. 우리 함께 시장에 가서 남새를 사자, 함께 다듬구 함께 료리를 만들자.
―정말이예요? 아저씨. 음… 일요일날 어때요? 이번주 일요일날 말이죠. 제가 그날 온하루 쉬거든요. 일요일날 말이예요.
―그래, 일요일날 우리 함께 시장 가서 남새 사구 다듬구 료리해 먹는거다.
―아저씨. 이게 꿈은 아니죠?
―환아!
정우는 으스러지게 환의 손을 잡아주었다.
 
6
 
환의 료리솜씨는 과연 일품이라고 할수 있었다. 주방에서 잠간 지지고 볶고 하더니 향기롭고 색갈이 고운 료리를 네가지나 만들어 상에 올렸다.
정우가 곁에서 도와주려고 했지만 환이 기어코 정우를 걸상에 눌러앉혔다.
―아저씨, 오늘은 꼼짝 말구 앉아 향수만 하세요. 제 솜씨를 구경하다가 나중에 맛이나 제대로 평가하면 된다니까요.
―그럼 오늘은 진짜 환의 덕에 향수나 한번 해볼가?
―그럼요. 천만 지당한 일이죠. 아저씨, 이렇게 있으니 우리 진짜 가족 같지 않아요?
환이 얼굴에 홍조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파르르 떨리는 그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려왔다.
―가족?
정우는 속으로 그 말을 되네이다가 머리를 돌렸다. 예고도 없이 눈시울이 젖어올랐던것이다.
가족, 가족!
정우에게는 익숙하면서도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지는 낱말이였다.
가족, 정녕 나에게 가족이 있었던가?
숙이가 짐을 꾸려 가지고 나간후로 정우는 가족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비록 우로 형님이며 누나들이 계시지만 그들도 진작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얼마전에 모두 한국에 진출했던것이다. 하기에 정우는 내내 혼자였고 그것이 습관이 되여 크게 외로운것도 모르고 살아왔었다.
―그래, 정말 우리 가족 같구나.
―그래요, 아저씨. 우리가 쭉 이렇게 함께 살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말을 마친 환이가 혀를 홀랑 내밀며 정우를 훔쳐 보았다. 정우는 일순 환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할수 없어 어어 하고 입만 쩝쩝 다셨다.
―놀랐죠? 괜히 해보는 소리예요. 깊이 듣지 마세요. 아저씨, 맥주컵이 어디 있죠?
환이 인차 화제를 돌렸다. 그제야 정우는 걸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내리울게. 인젠 너 상에 와 앉아라.
정우는 뿌옇게 먼지가 오른 맥주컵을 찬장에서 내리워 물에 씻기 시작했다. 그새 환은 맥주병 두개를 들어 아구리를 맞붙여 마개를 따면서 말했다.
―시원할것 같아요. 어서요, 아저씨.
정우는 한손에 컵 하나씩 들고 상으로 다가왔다.
―그래, 시원하게 한잔씩 마시자.
―자요, 아저씨.
환이 두손으로 정우의 컵에 맥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래, 환아. 너도 한잔 받어.
―네.
환이 두손으로 정우앞에 컵을 내밀었다. 하얀 손이 떨리고있었다.
―이렇게 집에서 맥주를 마시기는 오랜만이네.
―행복해요. 아저씨.
환의 눈에 이슬이 맺혀 가랑거리고있었다.
―참…
환이 맥주컵을 상에 올려놓고 주먹으로 질끔질끔 눈확을 눌렀다. 그러는 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정우가 입을 열었다.
―마음껏 행복해 해두 돼. 환아.
―그래두 돼요? 제가 진짜 그래두 돼요? 아저씨.
―그럼, 그렇구 말구.
정우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환의 입가에 아지랑이 같은 실웃음이 하늘하늘 피여나고있었다.
더 이상 이 애가 외롭게 하지 않을거다, 얘게 모자라는것들을 내가 보상해줄거다.
―환아, 너 스물 두살이라구 했지?
―네.
―아직은 늦지 않아.
―뭐가요? 아저씨.
환이 정우를 바라보며 동공을 키웠다. 정우가 잠간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너 아직 어리거든. 이렇게 사회에 나와 안마방을 전전하며 허송세월하기는 아까운 나이라구.
―그럼 어떻게 해요. 저에게 중요한건 제 한 목숨을 먹여살리는 일이거든요.
―아저씨를 믿어. 환아. 아저씨가 너를 다시 학교에 보내줄거야. 그래, 미술공부를 그냥 하고싶은 생각은 없니?
―아저씨!
환이 정우를 바라보며 머리를 저었다.
―저 환이예요. 오다가다 만난 남남이라구요. 저 큰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이렇게 가끔 아저씨와 함께 앉아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것만으로도 족하다구요. 가족처럼 이렇게 한순간을 행복하게 보낼수 있게 하는것만으로도 아저씨는 저에게 너무나 많은것을 주는거예요.
환은 흥분으로 하여 쌕쌕 거친 숨을 몰라쉬며 가슴을 들먹였다. 정우가 그러는 환의 얼굴에 눈길을 박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두 꼭 이것을 해보고싶었단다.
―……
―나두 늘 아들과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고 아들의 손에 학비를 쥐여주는 꿈을 꾸었더랬지. 하지만 그게 그냥 꿈으로만 끝날것이라고 생각했거든. 고맙다. 환아. 잠자던 나의 꿈을 깨워줘서.
―아저씨, 저저, 저 정말 이렇게 행복해두 돼요?
환이 솟구치는 격정을 참을수 없다는듯 잘근잘근 아래입술을 씹어댔다.
바로 그때 찌르릉 환의 핸드폰이 울러댔다.
환은 흠칫 놀라면서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환이 얼굴색을 흐리우며 걸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정우도 놀라며 걸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누구의 전화니?
―삼삼, 삼촌의 전화예요.
환이 꺽꺽 말을 더듬었다.
―왜 그래? 빨리 전화를 받아야지.
―네.
환이 핸드폰을 귀가에 가져다댔다.
―네, 숙모님, 저 환이예요. 네? 뭐라구요?
환의 목소리가 높아지고있었다.
―네네, 그래 어떻게 됐어요? 입원 했다구요? 수술을 해야 한다구요?
환이 입술을 감빨며 왼손에 들었던 핸드폰을 오른손에 빠꿔지고는 다시 귀가에 가져다 댔다.
―그래서요? 네? 보증금 만원을 내야 수술할수 있다구요? 어쩜 좋아, 어쩜 좋아. 저에게 그런 큰 돈이 어데 있어요? 알았어요. 숙모님.
환이 핸드폰을 힘없이 상우에 내려 놓고는 머리를 숙였다. 환의 어깨가 물결을 타고있었다.
―웬 일이야? 천천히 말해봐. 아저씨께.
―어쩌면 좋아요. 아저씨. 삼촌이 차사고를 당했대요. 경운기를 몰고 밭에 비료치러 갔다 오다가 그만 벼랑에서 경운기를 굴렸대요. 경운기는 파철이 되였구 아저씨는 의식을 잃은 상태래요. 병원에서 검사를 거쳤는데 뇌에 피가 고였대요. 당금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대요.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입술을 감빨며 그렇게 말하고난 환이가 벌떡 걸상에서 몸을 일으켜 문쪽으로 뛰여갔다.
―환아, 너 어디로 가려는거니?
―이러고만 있을수는 없잖아요.
환의 두볼에서 콩알같은 눈물이 둘둘 굴러내렸다.
―안마원에 가야겠어요. 가서 로반(老板)하구 사정얘기를 해야겠어요.
―뭐? 로반하구?
―그 방법밖에 없잖아요. 제가 손을 내밀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어요. 그가 도와줄지는 모르지만. 노력은 해봐야할게 아니예요?
환은 허리를 굽혀 급히 신을 찾아신었다.
―잠간만.
정우가 소리치고는 방으로 들어가 웃옷을 들고 나왔다.
―가자.
―어디루요?
―급하다며.
―어디루 가냐구요?
―내가 났겠지. 너의 로반보다 내가 났겠지. 먼저 급한 불부터 끄고보자.
―아저씨!
―환의 목소리가 피터지게 울렸다.
―가자는데두.
어느새 신을 찾아신은 정우가 소리쳤다. 환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럴수 없어요. 절대 아저씨 돈을 쓸수 없어요. 아저씨를 도와드리지는 못할망정 이런 부담을 줄수 없어요.
―가족끼리는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니다. 가자.
정우는 환의 손을 끌고 문을 나섰다.
―무사해야 할텐데. 너의 삼촌이 이 고비를 무사히 넘겨야 할텐데.
―무서워요, 아저씨. 우리 삼촌을 어쩌면 좋아요.
환이 다시 울음을 터쳐올렸다. 정우가 머리를 돌려 환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괜찮다구. 힘을 놓지 말어. 아저씨가 있잖니? 꼭 좋아질거야.
―아저씨, 고마와요. 잊지 않을게요. 오늘 식사를 끝내구 아저씨랑 “탈놀음”도 놀려구 했는데… 잘 할게요. 아저씨께. 그리구 우리 “탈놀음”을 놀아요. 담날.
―환아!
정우는 꺽 메여 오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짜내며 가슴으로 웨쳤다. 그 와중에도 자기를 위해 뭔가를 준비하고있는 환이 목이 메이도록 고맙고 믿음직스러웠다.
 
7
 
“담날”은 언제쯤일가?
기다려졌다.
정우는 소풍가는 날을 기다리는 악동처럼 환이 “탈놀음”을 하자고 하던 그 “담날”이 기다려졌다. 그러다가도 자기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현금 인출기에서 만원을 뽑아 아무 담보도 없이 환에게 들려보내놓고도 돈 근심보다 “담날”에 하게 될 “탈놀음”이 어떤것일가를 상상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가끔 머리를 쳐들었던것이다. 그러다가도 스스로 머리를 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거야? 그 돈을 남에게 줬는가? 환에게 준거라구, 환에게!
 그러자 그날 공원 정자에서 황매희)를 구경하는 사람들속에 숨어있던 노란 셔츠에 뻘건 탈을 쓴 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탈놀음”이란 얼굴에 탈을 쓰고 색갈 바꾸기를 하는것일가?
환의와 똑 같은 탈을 쓰고 앉아 “뻘건색, 파란색” 하는 구령에 따라 누구 얼굴에 씌여진 탈이 더 빨리 색을 변화시키는가를 내기하는것도 제법 재미있을것 같았다.
정우는 시무룩이 웃음을 지으며 인터넷에 올라 검색창에 “탈놀음”이라고 처넣었다. 눈 깜박할 새에 수많은 글들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정우는 순간 “헉!” 하고 숨을 멈췄다. 평소 생각조차 하지 않던 “탈놀음”을 두고 이렇게 많은 글이 인터넷에 올라있다는 사실앞에서 정우는 세상구석의 먼지알갱이보다도 더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는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졌다.
“탈놀음”, 도대체 어떻게 하는것일가?
정우는 마우스를 굴려 이것저것 클릭하기 시작했다. “탈놀음”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놀음방식은 각양각색이였다. 미녀의 얼굴에 눈이며 코며 입이며를 나름대로 바꿔 달거나 해괴망칙한 옷이며 액세서리 같은것들을 갈아주는 놀음이 대부분이였다.
누구의 착상인지는 몰라도 미국대통령 오바마에게 탈을 씌우는 놀음도 있었다. 오바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우는 허허허… 웃음을 터쳐 올렸다.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럴수가, 이럴수도 있는것일가?
정우는 모니터앞에 한뽐 다가 앉아 놀음방법을 소개한 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간단했다. 바탕에 찍혀있는 오바마의 거무스레한 얼굴에다 옆에 준비되여 있는 부위들을 옮겨 붙이면 되였다. 정우가 손가락을 한번 까딱하면 흑인인 오바마가 백인으로 변했고 또 한번 손가락을 까딱하면 황인종으로도 변했다. 완전히 정우의 뜻에 따라 미남으로도 될수 있고 추남으로도 될수 있었다. 마우스 하나로 하늘같이 높은 대통령어르신을 마음대로 료리하는 그 기분이 참으로 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웬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우는 걸상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스르르 두눈을 감았다. 정우의 눈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고 갑삭갑삭 허리꺽기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으며 살룩살룩 개다리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춤을 추는 자세는 저마다 달랐지만 한결같이 얼굴에 탈을 쓰고있었다. 정우는 자기도 그 인파속에 밀려들어가는 환영을 보고있었다.
―이놈아, 네놈이 여태 사람의 탈을 쓰고 짐승처럼 사는줄을 몰랐구나. 아이구, 원통해라. 저 인피를 뒤집어 쓴 짐승을 남편이라 믿고 살아오다니…
갑자기 웬 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깜짝 놀라며 두눈을 번쩍 떴다. 소리는 문밖에서 들려오고있었다.
―잘못했소. 잘못했다니까. 다시는…다시는…
―개소리라구 해라. 누가 그 소리를 믿어. 왕과부나 믿을가.
녀인의 목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정우는 웬 일인가싶어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다가가 출입문을 열었다.
목소리 임자는 웃층에 사는 한족녀자였다.
녀자는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며 입에 거품을 물고있었다. 녀자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풀 꺾인 그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정우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니라는데 왕왕, 왕과부는 무슨…
―이 짐승보다도 못한것아. 그래두 체면은 있는감? 아까 활동실에서 네놈이 왕과부에게 웃음을 슬슬 던지며 발정난 수캐처럼 헐떡거리는걸 내 이 두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두 발뺌을 해? 그러느라구 반나절에 200원이나 잃었지. 아니, 잃은게 아니라 네놈이 그 과부년에게 그 돈을 그저 찔러준거야.
―아아, 아니라는데… 아니라는데.
녀자는 입만 열면 청산류수로 거침없이 욕을 쏟아냈지만 남자는 입이 물꼬처럼 막혔는지 그저 아니라는 말만 똑똑 떨구고있을뿐이였다. 복도를 딱 때기기라도 하려는듯한 녀자의 욕지거리를 들으며 정우는 웬지 기분이 잡쳐 출입문을 닫았다.
거리에서 과일장사를 하는 웃층의 남녀는 평소에도 가끔 부부싸움을 할 때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복도에 나서서 동네사람들을 놀래우기는 처음이였다.
정우는 녀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싶지 않았다. 얼굴이 검실검실하고 몸집이 둥글소처럼 튼실하게 생긴 남자는 절대 녀자가 말하는것처럼 무슨 탈을 쓰고있는 짐승 같지 않았다. 되려 거짓말을 모르고 수걱수걱 일만 하는 우직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는것이 나을상싶었다. 헌데 그 남자가 “왕과부에게 웃음을 슬슬 던지며 발정난 수캐처럼” 헐떡거렸다는것이다.
 정우는 저도 몰래 쿡 하고 허구프게 웃음을 터쳤다.
“발정난 수캐”는 어떤 모양일가?
정우는 어쩜 자신이 세상과 점점 멀어져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구경 어떤 탈을 쓰고 사는것일가?
 
그것은 정우가 리혼한 이듬해 겨울이였다. 당시 정우가 사는 도시에도 하루 새롭게 안마방이 들어서고있었다.
그때 정우는 경제부에서 기자로 뛰였다. 민영기업에대한 취재가 많았다. 기업의 홍보효과를 높이기 위해 기업주들은 기자들의 필끝에 눈길을 모으고있었다. 하기에 취재가 끝난후이면 주최측 사람들에게 끌려 안마방으로 가는 기회가 많았다. 정우는 브래지어까지 다 들여다보이는 적삼만 달랑 걸치고 앉아 웃음을 살살 흘리며 자기의 몸뚱이를 주물럭거리는 그녀들이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녀들의 몸뚱이를 볼 때마다 자기를 무참히 꺼꾸러 뜨린 숙이의 하얀 몸뚱이가 떠올랐던것이다. 그때마다 정우는 그곳에서 나오고싶었지만 주최측 사람들의 성의를 봐서 그렇게 할수도 없었다.
그날도 주최측에서는 정우를 끌고 2차로 안마방에 갔다. 말이 정우를 초대하는것이지 주최측 사람들이 다섯이나 따라붙었다. 그날도 브래지어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야하게 차려 입은 녀자안마사들이 주르륵 들어섰는데 다섯뿐이였다. 마담이 죄를 진 노비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나불거렸다.
―어쩔가요? 귀한 손님들이 모처럼 오셨는데… 애들이 청가를 맡아서…
―뭔가? 안마사가 모자란다는 말인가?
들어오자 바람으로 침대에 벌렁 들어 누웠던 김경리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무뚝뚝하게 쏘아붙였다. 마담은 흠칫 몸을 떠는체 하다가 김경리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아이, 죄송스러워라. 그렇다니까요? 두시간쯤 지나면 서넛이 오기는 오겠는데, 급하시면 먼저 남자안마사를 부를가요? 그 애 안마솜씨가 좋아요. 생기기두 잘 생기구요.
마담의 말을 듣는 순간 정우의 머리에는 내가 왜 여태 남자안마사를 부를 궁리를 못했을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랬다. 남자안마사라면 녀자애들의 야한 브래지어를 보는 불편함이 없을것 같았다. 정우가 마담을 건너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남자안마사, 괜찮아요. 나는 힘 있는 안마사가 좋거든요.
정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김경리가 입을 열었다.
―그럴수야 없지. 어찌 손님을 푸대접할수 있소? 먼저 이분께 제일 이쁜 아가씨를 붙여요. 그래, 저 애가 좋겠네.
김경리가 제일 이쁘게 생긴 녀자애를 가리키며 입가에 묘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아니, 괜찮대두. 괜찮다는데…
정우는 그저 “괜찮다”는 말만 더듬을뿐 끝내 “녀자의 손길이 싫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후에도 정우는 안마방에 갈적마다 남자안마사를 부르고싶었지만 남들의 눈이 무서워 소원 성취를 못하고 녀자안마사들의 손에 몸뚱이를 맡기군 했었다. 그렇게 남들이 예쁜 녀자가 좋다면 자기도 따라서 예쁜 녀자가 좋다고 더 크게 웃으며 “호색”의 탈을 써보이려고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것이다.
 ―아저씨같은 남자를 상대루 이걸 해보고싶었어요.
순간 정우의 귀전에 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김없이 진실한 자기를 남에게 보여줄수 있는 환이 참 당당하다고 생각되였다. 지어는 그 당당함이 부럽기까지 했다.
환이 보고싶었다.
정우는 컴퓨터상우에 놓여져있는 핸드폰을 집어다가 환의 핸드폰번호를 눌렀다.
환의 목소리가 기다려졌다. 하지만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환의 해맑은 목소리가 아니라 “대방의 전화기가 꺼져있습니다.”라는 쇠붙이 부딪치는듯한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 시간에 왜 핸드폰이 꺼져있을가?
정우는 야릇하게 생각하며 다시 번호를 눌렀다. 전화기에서는 여전히 “대방의 전화기가 꺼져있습니다.”라는 소리만 반복되였다.
웬 일일가?
정우는 괜히 불안해나기 시작했다. 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것이 아닐가?
정우는 불길한 생각을 누르며 환이 삼촌의 수발을 드느라고 핸드폰을 꺼놓았을것이라 나름대로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이지 스멀스멀 몰려드는 근심은 도무지 쫓을수가 없었다. 정우는 다시 환의 핸드폰번호를 눌렀다.
그후에도 십여번이나 반복했지만 환의 핸드폰은 번마다 꺼진 상태였다.
이튿날아침, 정우는 다시 환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핸드폰에서는 여전히 쇠붙이 부딪치는것 같은 녀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올뿐이였다. 정우는 또 다시 몰려드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어제 환이가 사준 셔츠를 꺼내 입고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의 거울앞에 마주섰다.
하얬다.
하얀 셔츠에 감긴 자기의 몸뚱이도 하얗게 변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가무잡잡한 얼굴은 되려 하얀 몸뚱이와 대조를 이루어 더 검어보였다. 정우는 세면대에서 흰수건을 내리워 얼굴을 가리웠다. 그러자 까만 눈만 남아 판들거리는것이 스스로도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정우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크게 꾸짖었다.
―왜 얼굴이 하얗게 질렸냐?
정우는 인차 목소리에 비굴함을 가득 발라서 대답했다.
―대왕마마, 질리다니요? 소인은 하얀 탈을 썻는데요.
―네놈이 무슨 나쁜 심보를 품고 탈을 뒤집어쓴게냐?
―나쁜 심보라니요, 대왕마마. 소인은 앞으로 하얗게 살려구 결심했는데요.
정우는 연극무대에서 대사를 치듯 그렇게 혼자 말하고는 스스로도 어이없다는듯 크게 웃어버렸다. 하지만 그 웃음의 꼬리를 물고 코등이 시큰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가끔은 제가 버러지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뻘건 탈을 쓰고 버러지처럼 벌벌 방안에서 기여다녀요. 그럼 함께 있는 애들이 제가 청승을 떤다면서 제 궁둥이를 걷어 차요. 그 발길질에 저는 다시 일어서게 되죠.
환의 차분한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 울리는듯싶었다.
환아, 너 지금 뭘하고있는거니? 왜 핸드폰은 꺼져있지?
 
*월 *일, 화요일.
환의 핸드폰은 온 하루 꺼진 상태이다.
혹시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긴거나 아닐가?
 
*월 *일, 수요일.
꿈을 꾸는것 같다.
내가 실지 환이라는 애를 만난적은 있었던가?
 
 
*월 *일, 목요일.
두렵다.
내가 그 어떤 환각속에 사는것은 아닐가?
 
8
 
―환이라구요? 그런 애가 없는데요.
경리가 정우를 바라보며 머리를 저었다.
―그럴수가 없겠는데요. 그 애 분명 여기서 일한다고 말했다니까요.
정우가 경리앞으로 한발 다가서며 긍정적으로 말했다. 경리는 그러는 정우를 바라보며 막무가내라는듯 쩝쩝 입을 다시다가 어조에 가시를 박아 한마디 던졌다.
―진짜라니까요. 정 믿기지 않으면 저쪽에 가보세요. 거기 남자안마사들의 사진이 다 붙어있으니까요.
정우는 경리가 가리키는쪽으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가 벽에는 남자안마사들의 사진이 여라문장 붙어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환의 얼굴이 없었다. 정우는 속에서 뭔가 쿵 하고 떨어져내리는듯한 진동을 감지하고있었다. 정우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 다시 경리실로 들어갔다.
―없네요. 그 애 사진이. 그럼 요새 일을 그만둔 애는 없나요?
―없다니까요. 저 사진에 있는 애들이 반년째 쭉 여기서 일하고있어요.
―미미, 미안합니다. 시끄러움을 끼쳐들여서요.
정우는 경리의 야릇한 눈총을 받으며 문을 밀고 나왔다. 정우는 힘겹게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머리를 돌렸다. 커다란 안마원간판이 눈을 치고 들어왔다.
―동시장앞에 있는 왕부안마원 있잖아요. 거기서 48호를 찾으면 바로 저예요.
환의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 울리는듯싶었다.
환아, 너 지금 어디에 있는거니?
정우는 끝내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 세상 어딘가에 홀로 던져진듯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머리속으로 기여들었다. 정우는 두손을 머리에 가져갔다. 오른주먹을 들어 쿡쿡 머리통을 쥐여박다가 두손으로 와락와락 머리칼을 잡아뜯었다. 머리속이 하얗게 바래지는듯싶었다. 정우는 몸부림을 멈추고 머리를 쳐들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정우는 자기도 그 소용돌이에 실려 저 멀리 하늘가로 휠훨 날아오르는듯싶었다.
이게 아니지, 이건 아니야!
정우는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려고 한껏 옹송그리며 와들와들 몸을 떨었다.
검은 구름에 쌓인 하늘이 커다란 탈을 쓰고 정우를 내려다보며 찬 웃음을 짓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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