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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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미니 텃밭 댓글:  조회:863  추천:0  2019-06-27
 미니 텃밭          언제부터인가 주택구역의 1층집을 구매하면 특혜로 자기집앞에 작으마한 텃밭을 덤으로 언저 주는 바람이 불었다. 매 소구역마다 정책이 조금씩 다르다만 대체로 20평방미만의 면적을 다룰수 있다 . 텃밭의 면적이 하도 작으니 일단 미니텃밭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떤사람들은 그 텃밭을 다루려고 전문1층을 사기도 한다. 나의 한 친구는 소일거리로 채소를 심는다며 일부러 1층을 구매하였다. 그친구의 경제실력으로 좋은 층수의 아빠트를 구매하기가 충분한데도말이다. 나는 주변에서 1층 집을 사서 채소를 심는 사람 꽃을 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들사이에서는 무슨 경쟁이라도 벌리는듯 하다. 여러가지 새소를 심는집이 있냐하면 또 여러가지 꽃이며 포도 앵두를 심는 집도 있다. 진짜로 생활을 사랑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오늘 위챗에 올린 소식을 보니 룡정에 있는 동창이 미니텃밭을 자랑하여 올린 사진과 글이 떠 있었다. 밭을 어찌나 잘 다루었는지 채소자람새가 아주 좋았다. 품종도 여러가지를 심었는데 상추 오이 고추들이 보였다. 참으로 친환경채소가 되기에 손색 없다. 모든 풀은 손으로 뽑고 살초제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배추를 보면 알수 있는데 약을 치지 않은 배추에는 벌레구멍이 숭숭하다. 반대로 상추는 약을 치지 않아도 싱싱하게 자란다. 사진과 함께 본인의 소감도 올리였는데 아주 진실하다.          «아침수확 »이라고 제목하고 아래와 같이 말한다. "요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채소밭을 둘러보구 수확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농촌에서 자란 탓에 밭일이라면 지긋지긋햇는데 남편이 열심히 다룬 밭에 애정이 가기 시작했다.  일층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지게  되였고 발걸음이 항상 정원에 머문다.        젊음이 인젠 비껴가구 잇구나 생각이 든다 . 나이가 드니 좋아하는 취향부터가 달라진다 . 조용하구 아늑한 환경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구 자기가 즐기는걸 하는게 제일 좋다.         마음으로는 아직 젊구 쌩쌩하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은 비껴못가는구나 생각이 든다  .  인젠  오십살넘은 인생을 당당하게 받아 들이면서 마음가짐은 항상 젊게 푸르게  활기차게. "       또 한친구는 향산국제(香山国际)소구역에서 사는데 정원을 공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자동차다이여며 낡은 물항아리 그리고 괴석까지 등장하였다. 사이 사이로 꽃을 심고  풀을 옮기였다. 나무로 만든 바자며 둥근상 그리고 의자까지 갗우어 놓았다. 명실공히 화원다방이다. 그리고는 봄부터 가을까지 정원의 매한포기의 꽃이며 매 한그루의 나무의 변화를 소개한다. 심지어 어항속의 금붕어도 보여준다.            봄이면 그 친구는 산에 가서 부식토를 실어다 화원에 뿌려 준다. 그리고 지난해 화원에 말라버린 식물줄거리를 거두어내고 새해 꽃 씨앗을 뿌린다. 어쩌나 품목이 많은지 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주인은 정부를 다니는 공무원이것만 원예일에도 아주 수준급이다.       우리 중국사람들은 부지런 하다. 어느곳에 땅이 보이면 그곳을 정리해내고 채소를 심는다. 우리집은 연길체육장근처다. 시내와의 거리가 멀다보니 이동네에는 아직까지는 뚜져먹을 만한 땅뙈기들이 보인다. 이른 봄부터 사람들이 꽉지 삽을 둘러메고 개간하려 나선다. 어떤 땅은 이미 부친지도 몇년이 되다보니 자기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후에 가입한 사람들은새 개간지를 개척해 나간다. 요지음 아침 운동하려 나가보니 흙이 보이는 곳에는 기본상 개간지가 보인다. 어찌나 공을 들렸는지 채소들도 잘 자랐다.          몇해전에 강변을 걷다가 글을 쓴나무 패말을 보았다. 한 개간민의 심장을 토로한 글귀였다. 원문은 중문으로 되였는데 번역하여 올리기로 한다. "존중하는 도적. 나는 네가 누군가 알고 있다. 우리 채소를 도적질하는 너는 벼락 맞을 것이다. 내가 채소에 약을 쳤다. 네가 계속 도적질하면 중독되여 죽을 것이다. "얼마나 미웠으면 이런 패말을 남기였을가.       친구가 미국에 갔는데 시골쪽에 사는 화교들도 묵은 땅을 뚜지고 채소를 심는다 한다. 어디가도 부지런한 품성은 버리지 못한다. 반면 미국사람들은 봄에 심어 놓고 별로 관리도 않는다 한다 .         우리집 살던 예술극장 그 동네에는 원체 화단이 있었다. 헌데 후에는 몽땅 채전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단위에서 관리 할 때에는 화단에 잡풀이 우거지던것이 개인으로 채소를 심으니 얼마나 깨끗한지 모르겠다. 퇴직한 분들이 가지며 도마도등을 심어 놓았는데 하나의 풍경이 되고 말았다.  물론 가두에서는 화단에 채소를 못 심는다고 통지를 내는데도 말이다. 내가 어릴때 개황(开荒)못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자본주의 꼬리를 끊기 위하여섰다. 먹을것이 부족한 세월에 하나라도 보탬하노라 한일이것만 당시는 허가하지 않았다.         언젠가 우리집 사람이 말한다. "나도 무얼 심고 싶다. "하여 소구역 화단옆에 PC상자를 놓고 부식토도 담아 놓았다. 지난 해는 촌에서 상추를 옮계 심었는데 참으로 잘 자랐다. 결국은 별로 먹지 않고 자리우는 재미를 보았을 뿐이다.        미니 텃밭 어찌보면 도시사는 사람들의 소박한 심정을 말해준다. 자연과 함께 하고 싶다. 나도 무언가 할일이 있다는 리유를 만들기 싶기 때문이리라. 우리도 소일거리가 필요 하다. 먹기 위하여서 보다 생활을 재미있게 꾸려가고 조그마한 꿈을  이루기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미니 텃밭을 단지 밭으로 보면 안된다.     
64    부모자식 댓글:  조회:1270  추천:0  2019-06-03
부모자식            일전에 장춘에서 사업하는 친구가 일보려 연길에 왔다. 우리 몇명은 친구를 청하여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였다. 친구 보고 뭘 먹겠느냐고 하니 아무것도 다 된다고 한다. 이것이 오히려 우리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친구의  한친구가 조선해물로 료리하는 집이 있다고 하며 가보자고 했다. 우리 일행은 연길법원 뒤골목에 있는 해삼물구이집을 찿아 자리에 앉았다. 조선에서 수입한 여러가지 해삼물이 즐비하게 전렬되여 있는데 이집에서는 심지어 조선산 대두로 콩나물도 기른다고 했다. 금시 초문이였다. 그럼 콩나물료리도 맛 보자하고 조개구이등 몇가지 료리를 시키였다.          "반갑다. 자주 만나자"등 이야기와 더불러 술이 몇잔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우리 나이가 되면 의려 자식들의 현황에 대한 문의가 나오기 일쑤다.  장춘에서 온 친구는 이미3살먹는 외손녀를 가진 장인이 되였다고 한다.  딸애도 아버지와 같은 경제전선에 출근다고 한다. 퇴근하면 집에가서 외손녀와 같이 놀아 주는 것도 락이라고 자랑한다. 우리 세명은 아직 자식이 결혼전이다. 그러니 아직도 완수하여야 할 일이 너무 많다.        W군은 지금 아들애가 상해에서 사업하고 있다. 그는 며칠전에 아들애가 꾸리는 외국어교육학교 오픈식에 참가하고 왔다고 하였다. 아들애는 미국에 가 연구생공부를 마치고 2년출근 하다 돌아 왔다. 실력파들이다. 처음 상해 와서는 신동방외국어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한해에 자기로 바치는 사회보험금 만도4만원을 넘기였다고 하니 어림잡아도 년봉이 50만원 이상이라는 말이다.        X군이 말한다. 아들은 중국에서 유명한 음악대학을 나왔는데 지금 미국에서 연구생공부 중이다. 전공방향은 고전음악이라고 한다. 모짜르트나 쑈팽등 유명한 음악대가들이 작곡한 것과 같은 고전교향곡이라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까무리칠것 같은 위대한 음악작곡을 시도한것이다. 원래는 독일로 지망하였는데 본인이 완강하게 미국으로 간다고 하여 그리 되였다고 했다. 친구는 독일가면 학비도 면제고 조건도 더 좋은데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별수 없었다고 한다. 한해 학비만도 4~5만 불이라고 한다. 주숙비 생활비까지 하면 엄청한 돈이 들어간다고 했다. 애들이 부모 주머니 사정을 고려 안하는 것도 문제다.          나는 술을 권하였다. "자자. 한잔 마시자구. 당신들은 다 괜찮아. 우리애는 아직 대학문도 못 나왔는데"그러니 친구들이 말한다. "당금이라구. 명년이면 졸업인데"         하긴 그렇다. 명년이면 졸업이니 무슨 타산이라도 있어야 한다. 일전에 나는 아들애와 허심탄허하게 담화했다. 직업을 찿아도 되고 연구생공부를 해도 된다. 문제는 본인의 추구와 노력이다. 하기는 북경에서 출근하겠다고 하면 뭘로 집을 마련 한다는 말인가. 씁쓸한 감정이다. 전국인민이 지망하는 북경 부자가 넘쳐나고 관리가 쫙 널린 북경에서 무엇을 믿고 출근 한단 말꼬? 한뉘 세집살이가 헐치 않을 것이다.         술이 둬잔도 들어가니 아이들의 혼인문제가 화제로 떠 올랐다. W군이 말했다. "난 애들이 결혼하고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반대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외국에 보내고 늙은이들끼리 무슨 멋인가"나는 그 한테서 오늘까지 두번째로 그 이야기 듣는다. 그가 하는 말이 애가 미국에 공부하는 기간에 그들 부부가 미국에 가 보았다고 했다. 영어를 모르고 촌보 난행이다. 친구도 없고 갈곳도 마땅치 않다.         그는 미국 갔던 걸음에 친구자식도 만나 보았다고 했다.  친구자식은 미국에서 박사하고  결혼해서 미국에서 영주권도 취득했다고 한다. 젊은 부부끼리는 행복하고 잘 보내더라 만은 부모님들이야 오죽 자식 보고 싶겠는가. 자식들은 자기 멋에 산다만 부모심정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W친구분 역시 신체가 든든한 편이아니라 한다.         X군이 말한다. "언제 우리가 자식 밑고 살겠는가. 위대한 적곡가를 배양 해보았자 나라의 인재다. "하긴 그렇다. 언제 자식을 밑고 살겠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다. 부부가 같이 있는 한은 자식들 한테 부담 안준다는 곳이 우리의 통일된 견해였다.         술을 마시니 진담이 나온다. 요지음 가장 결핍한 것이 부모자식지간의 대화다. 애들은 자기타산이 있다. 부모들은 부모들로의 바램이 있다. 우리 같은 60년대생은 위로는 부모에게 충성했지만 자식들한테서는 별로 살뜰한 이야기도 못 들어 보는 세대다. 경제적으로 부모님들의 지원을 못 받았지만 자식한테는 지속적인 경제지원을 한다. 대학에 다니는 비용도 많이 올랐다. 집값도 오르고 결혼비용도 올랐다. 헌데 로임은 제자리에서 맨돈다.    " 에라. 자꾸 생각해서 뭘라리. 끝내고 돌아가세"   술이 끝나 집에 오는데 정신은 맑아 있었다.
63    애 호 댓글:  조회:1004  추천:0  2019-06-03
애 호      사람애마다 애호가 있다. 어떤이는 운동을 어떤이는 문학을 또 어떤이는 예술에 대해 흥취를 가지고 있다.   흥취를 가져야 애호가 생기고 애호를 가져야 더욱큰 흥취를 불러 온다. 중국에는 정사(政事)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목수일에 애호를 가진 황제도 있었다. 바로 명나라 황제明熹宗이다. 하라는 황제일은 하지 않고  목수일과 칠을 올리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라 정사가 잘 돌아갈리 만무하였다.       애호의 발휘에도 경제조건의 좋고 나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진사가 바로 그렇다. 하기에 누구를 망하게 할려면 사진기술을 배워주라고 한다. 그만큼 사진촬영은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허나 별로 돈이 들지 않는 애호도 있다. 바로 달리기 운동인데 신 한켈레만 준비되면 바로ok이다. 나의 한친구는 접목에 애호가 있다. 한대의 과일나무에 여러가지 품종의 과일이 달려 있는데 참으로 재미난다.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각양각색의 애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애호가 같은 사람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더 높은 차원에서 애호를 발전시켜 나간다. 하여 여러가지 협회 동호회 췬(群)등이 산생되였다. 축구협회 배구협회 등산협회 자전거협회 무용협회 합창협회 문학협회 시동호회등 많고도 많다. 그들의 공동한 특징이라면 모두 민간단체들이다. 정식으로 민정부문에 등기된 것은 얼마 없고 기본상에서 몇명이 발기하고 여러명이 호응하는 방식으로 성립된 협회 동호회 췬이다. 산생방식이 자유러웠던 만큼 조직관리도 자율에 맡기는 편이다. 허나 매개협회마다 회장 비서장등관리기구가 있기에 중심축이 이루어졌다.        민간협회다보니 경비래원은 주로 회비에 의거한다. 회원중에 사업가거나 령도자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찬조금이 들어 오기도 한다. 허나 어디까지나 자원원칙이고 장부는 일률로 공개한다. 촌민위원회 장부를 공개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허나 일부촌에서는 공개하지 않고 덮어 두고 있다. 원인은 말못할 경비지출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협회의 모든 수입은 매개 회원으로부터 거두어 들이였기에 경상적으로 공개한다.       어떤 조직은 회비조차 요구하지 않지만 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된다. 바로 췬이다. 나는 지인의 소개로 요지음 몇개 췬에 가입하였다. 이런 췬이 있다는걸 나는 전에는 몰랐다. 일색 우리말과 우리글로 된 참신한 췬이였다. 사업상의 수요로하여 현재 기관에서는 조선문으로 된 문장이 별로 안통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글로 문장을 쓰는 일이 적다. 정작 우리글로 문장을 쓸려니 표기법도 틀리기가 일쑤다.       금년 4월초 단위에서 나를보고 연변방송국에 "백성열선"절목에 나가보면 어떻겠는가고 문의했다. 그러자고 답복은 했지만 실은 근심도 있었다. 중문으로된 자료를 낑낑거리며 번역에 들어 갔는데 갈수록 심산이였다. 생활상에서 조선말 중국말 섞어 가며 사용하다가 일색 조선말로 번져 놓으려니 내가 조선족인가고 의심들 정도였다. 특히 세수정책에 관한 고유명사를 어떻게 변역해야는지 아리숭하다.        그러던 와중에 그것도 규모500명이나 되는 우리말췬을 접하게 되였다는것은 매우 충격적이 였다. 오 . 원래 이런 조직도 있었구나! 우리말을 잇어 나가고 또 발전시키는데 큰 힘이 되는 췬이라고 생각 한다. 췬성원들만 봐도 어느정도 차원이 틀린다는걸 감수할수 있다. 대학교 교수님 학자 작가 시인 들을 중축으로 년령대도 다양하다. 이미 퇴직한 분들이 있냐 하면 학교를 갓 나온 친구들도 있다. 중국사람이 있냐하면 한국사람도 적지 않다. 이모든 사람들의 공동한 특징이라면 모두 우리말을 사랑하고 문학에 애호를 가진 분들이란 점이다. 열성 또한 대단하다. 앞다투어 자신의 작품을 올려 교류하고 토론을 벌린다. 그리고 시면시 소설이면 소설 수필이면 수필 다양한 쟝르들을 다룬다. 음악에 대한 흥취도 많은 것 같다.             가끔이지만 사회적 화제도 다룰 때가 이었다. 황유복교수님의 우리 민족에 관한 설명이 마음에 닿았다. 유식한 분들의 말씀을 듣는다는 자체가 행복하다. 이러한 췬의 존재로 우리들은 나라와 상관없이 국적과 상관없이 견해와 상관없이 우리글 우리 문화에 대하여 오손도손 가끔은 얼굴도 붉히고 목소리도 높혀 가며 열띤 토론을 펼쳐 갈수 있다.      단언하건대 이런 활동이 우리문화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밑거름이 될것이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화제가 있고 화제가 집중되여야 힘이 된다. 우리글 우리문화를 우리가 아끼고 영위 해나가지 않는다면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솔찍한 이야기지만 이런 췬을 통하여 나는 처음으로 디카시가 뭣인가를 알게되였고 처음으로 삼행시를 접촉해 보았다. 나는 지금 많이 경청하고 배우고 있다.  하물며 췬에는 우수한 분들이 많거늘 태도는 자기한테 달린것이라고 본다. 동일한 애호를 기초로 하여 많은 문제를 교류해 보려 한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 보고 사고하는 방법을 배워 가자 한다. 
62    6. 1국제 아동절 댓글:  조회:1011  추천:0  2019-06-03
  6. 1국제 아동절       연변에서 아동절 로인절 부녀절은 명절중의 명절이다. 아동절이 되면 온 가족이 고운 명절옷차림을 하고 거리로 교외로 공원으로 모여 든다. 특히 어린이 놀이터에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가지 놀이기구를 타기 위하여 한나절씩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자손녀들을 한가지 놀이기구에라도 더 앉히려고 여러곳에 갈라져 줄을 서기도 한다. 허나 이게 무슨 대수겠는가. 덩달아 좋아진 어린이들은 이런저런 요구를 제기하고 있다.  부모님들도 기꺼히 받아 들인다. 웬간하면 놀이터 주인들 하는 말이  놀이터는 몇개의 명절기회만 잘 포착하면 한해 벌이를 다 한다고 하겠는가. 그중에 어린이들의 공헌이 가장 크다.        아동절이 되면 제일 좋아하는것은 어린이들이다. 평소에 부모님들이 출근하는터로 어린이들이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공원놀이 하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아동절이되면 아빠엄마는 물론 할아버지할머니 게다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동참하는 일도 종종 있다. 이로부터 우리민족이 얼마나 어린이를 중시하는가를 충분히 알수 있다. 멀리는 말고 장춘쯤해도 6. 1절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다. 우리민족은 어린이를 사랑하고 로인을 존중하며 례의를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 왔다. 그러니 의례 6. 1절행사가 방대해지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를 한명 앞에 세우고 어른 대여섯명이 뒤 따르는 이색적인 풍경이 도처에서 보인다.        우리가 어릴때에는 해마다 6. 1절이되면 공원운동장에서 전시적인 소학생행사가 있었다. 검렬도하고 집단문예공연도 있었다. 조건이 좋은 학교들에서는 꽃차도 선보였다. 어릴때는 그 꽃차가 그렇게도 멋지고 대단하게 보였다.  우리학교에서는 붉은기를 선두로 녀학생들의 대고(打鼓) 소고(小鼓)방진이 앞에서고 그뒤로를 남학생들의 붉은기 방진이 따랐다. 녀자애들은 소선대복에 파란치마를 남자애들은 소선대복에 곤색바지를 입었다.            검렬의 선두에는 의례히 큰 학교들이 차지했고 우리 같은 촌학교들은 뒤쪽으로 밀려야 했다. 그런들 또 어떠하랴. 우리도 이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한달 넘게 준비를 해왔다.  로씨아 예술영화 "산촌의 녀교사"대사에서 나오듯이 "맨발바람에 보래불을 걷어 차며" 머리를 번쩍 들고 가슴을 쑥 내밀고 보무 당당하게 씩씩하게 걸었다.        주석대 앞을 지날 때면 대고 소고대가 주석대를 바라보며 요란하게 북을 두드려 댄다. 그러면 검렬대오의 남학생들이 목청 높혀 "체육운동을 발전시켜 인민의건강체질을 증강시키자" 고함 지른다. 하늘을 진동하는 각종 구호소리가 공원의 상공에 울려 퍼진다. 6. 1절이 지나고 보면 너무 고함질러 목이쉰 아이들이 많았다.       6. 1아동절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날씨다. 연변으로 말하면 6. 1절날 날씨가 좋을 때가 별로 없다. 우기(雨季)가 온것이다. 기껏 부풀어 오른 기분인데 비가 내리면 애들의 심정은 말이 아니다. 서리 맞은 풀마냥 기가 죽는다. 얼마나 학수고대 했던 날인데 . 그러니 비닐을 준비하는것은 필수다. 비가 안내리면 그날 기분 만점이다. 하늘은 푸르고 내마음 즐겁다.       고정행사가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셔 곽밥을 먹는다. 그때는 형제들이 많을 때라 형님누나따라 나무 그늘진 곳을  찿아 앉는다. 16전짜리 사이다 한병만 있어도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엄마가 정성들여 싸준 정심밥에는 계란이 필수다. 정심을 배불리 먹고 나면 오후에 진행되는 여러가지 운동경기도 구경했다. 어쩌다 시내구경도 하고 끼쑥끼쑥 도시의 이구석 저구석 기웃 거려보기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출근하던 90년대 초반이였다. 그때도 마침 6. 1절을 맞이 하게 되였다. 나와 친구는 그때 결혼은 하였으나 모두 아이는 없었다. 남들은 어린이를 안고 혹은 손목 잡고 공원으로 놀려 가는데  우리는 멋 적었다. 하여 우리 두집에서도 곽밥에 반찬을 짊어지고 연길 프라하통하강변을 찿아가 들놀이 하기로 하였다. 아이가 없으면 6. 1명절 못 즐긴다는 법이 없지 않는가. 우리에게도 장차 어린이가 있을 것이다.       그날 우리 두가정은 준비해간 음식에 맥주에 즐거운 명절을 보냈다.  식사뒤에는 자갈돌 뿌리기 돌팔매질도 하였다. 마치 세상이 다 우리의것 같았다. 그후 우리집에 어린이가 있은 후로 나는 애와같이 공원에 가본일이 몇번 없었다. 대체로 엄마와같이 놀려다닌것 같다.       그러던 어느해 6. 1절이였다. 그때 우리아이는6. 1유치원에 다니녔다. 룡정동성용에 위치한 려명농민대학에 한국인 노부부가 터밭을 다루며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그들은 밭을 여러뙈기로 나누어 시내사람들한테 세를 주는데 평소관리도 해준다고 하였다. 지금은 이런방식이 많지만 그때만해도  아주 신선한 방식이였다.       우리는 동북아여객운수소에서 뻐스를 타고 동성용에서 내리였다. 방금 꽂은 벼모가 바람에 하느작이고 개구리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논에 울려 퍼지였다.  노란색에 파란 무늬가 간 6. 1유치원 복장을 한 우리 아이는 너무도 좋아 퐁퐁 뛰였다. 벌레소리도 반갑고 새소리도 즐겁다.  돈두렁에 물이 흘러드는 소리마저 반갑다. 그날 우리는 농장참관을 마치고 개산툰으로 놀러갔다. 두만강에는 철다리와 공로다리가 놓여있었다. 같이 간 동서부부와 아들 우리집 식구까지 하여 그날 잊을 수 없는 6. 1절을 보내였다.         지금은 전시적인 6. 1행사가 있는지 모른다. 아마 각 학교별로 행사하는 같다. 운동대회나 다른 행사로 대처하는 같은데 당년의 전시적인 집단행사가 그래도 재미 있고 기억에 남는다.        금년의 6. 1절 날씨가 참 좋다. 애들도 부모님들도 즐거운 명절보내기 바란다. 
61    결혼 댓글:  조회:1306  추천:0  2019-05-27
결   혼        결혼은 사랑의 꽃이다. 사랑이 무르익으면  대방을 종신반려로 점 찍고 사랑의 혼례청에 들어서게 된다. 혼례식에 가보면 무슨 큰 예술행사 같다. 대형스크린에는 어릴때부터 성장과정이 쭉 나오고 련애과정 결혼기념촬영 등 모든 자랑거리가 나온다. 스피커에서는 누가 듣지못할가 념려스러운지 음악소리가 귀청을 찟는다.  네온등이 번쩍번쩍하고 음악소리 광당광당하고 사회자의 고함소리 진짜로 아찔해난다. 심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식장에 적게 가는것이 좋다.         요지음은 결혼계절인지  결혼식 올리는 집이 많다. 5월달에 들어서서 결혼청첩장 5개를 받았다. 그중에는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젊은 축들이 있는가 하면 동년배들의 자식들도 있다.   우리 집은 애를 늦게 가진 편이다. 동년배 친구들은 자식들이 결혼한다고 떠들법석하는데 우리 아이는 아직 대학수업중이다. 친구들 가운데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승급한 사람도 여러명이 있다.       요지음 무슨 동창행사에 참가하면 화제가 의련히 자식들의 결혼 문제다. 뉘집 따님은 다음달에 결혼식 올린다. 뉘집 아들은 요지음 한족녀자애를 사귄다. 또 누구네는 결혼비용으로 얼마를 썼다 등등이다. 하기는 우리도 자식결혼을 의사일정에 올려야할 나이가 되였다.   또한  결혼은 자식들이 직면한 중대한 사안중의 하나다.        헌데 조화롭지 않은 소리도 적지 않게 들린다. 주요하게는 결혼비용문제다. 어느때 부터인가 남자애를 가진 집의 결혼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수직 상승하였다. 집을 사야하고 차를 마련하고 결혼당일 비용도 부담해야 한단다. 남자애를 가진 부모들은 부담이 될수밖에 없다. 돈 많은 집이 라면 별로지만 직장을 다니는 출근족들에게는 상당히 큰 부담이다.        오랜 봉건사회를 거쳐온 우리 나라에서는 어느 정도 남존녀비사상이 뿌리 박았다. 계획생육하면서  어떤 부부들은 남자애를 보려고 여러가지 노력들을 다 쏫아 부었다. 임신부들은 초기 성별감식으로 남자애를 가지려는 욕구를 실현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는 남녀 비례가 상당히 기울러진 상태다. 남자애가 많고 녀자애가 적다. 그러니 당연히 녀자애들의 몸값이 오르게 되였다.        우리 집은 남자애다. 당년에 남자애를 보았다고 우리 부부는 매우 좋아 했다. 든든한 아들 믿음직한 아들 모든 것이 즐거 웠다. 헌데 딸을 가진 어떤이들은 비앙거린다.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남자가 많고 녀자가 적다는데. . " 장래 결혼 상대를 구하기 힘들것이라는 소리다. 허나 우리는 일관하게 자식교육만 잘하면 결혼상대를 찿는건은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어느때부 터인가 사악한 바람이 불었다. 남자애들이 주견이 없고 녀자애 말이라면 그저" 예예"하는 같다. 원체 애정이란것은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돕고 하는것인데 천평이 기울기 시작했다.  남자애들이 녀자애 눈치만 보고 부모들에게는 별로 신경 안쓰는것 같다. 거기에는 학력도 지능상수도 별로 상관없는것 같다. 그저 수긍이다. 그리고 요지음 녀자애들이 남자를 다루는 수완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마치 로련한 낚시꾼마냥 당기였다 놓았다를 반복하면서 남자를 자기에게 복종시킨다. 그런 수완은 어디서 생겼는지 모를 일이다. 드라마에서 배운건지 아니면 실천속에서 총화해낸건지.        우리 연변이 결혼방면에서 특수하다. 한족식도 아니고 한국식도 나니고 연변식이다. 일전에 일본에서 온 친구가 소개하는데 의하면 일본에서는 자식 결혼에 부모가 경제적인 방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랭장고 하나라도 해준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물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감사하다고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고 한다. 우리 연변의 한족들도 우리처럼 자식한테 모든걸 쏫아붓는 일이 적다. 연변의 많은 어머니들이 한국바람에 출국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이였다.   허나 자식이나 남편한테는 빚을 지었다는 생각이 있는 같다.          요지음 들은 이야기인데 한 녀성분은 한국로무 3년에5일밖에 휴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악착스럽게 30만원을 모아가지고 집에 왔단다.  그런데 며칠휴식안하고 또 한국으로 돈벌려 나갔다 한다. 아들 결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란다. 그녀는  아들한테는 줄곳 한국산 화장품과 옷을 보내준다고 한다.  자기한테는 한푼쓰기도 아까워하는 사람이 자식과 남편에게는 너무도 대범한 것이다. 결과 아들은 부모를 사랑할줄 모르고 남편은 안해를 아낄줄 모른다. 엄마는 머슴이 아니다.        자기로동으로 벌어온 돈을 자기로 지배하는데 이렇다 저렇다할 경우는 아니지만 리해가 안된다. 요지음 결혼비용으로 들어 가는 돈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길에서도 엘리베트아파트 한채 마련하려면 7__8십만원이 든다. 거기에 자가용이다 결혼전후의 려행이다. 촬영이다. 금반지 백금목걸이 가방  두루하면  금방 100만원이 나온다. 이것도 크게 안하는 집이 란다.        우리단위의 주차장에 세운 차를 보면 감이 온다. 30대가 가장 좋은 차를 40대가 중간에 가는 차를 50대가 가장싼 차를 타고 다닌다. 오우디 벤츠 뽀마 렉싸스 좋은 차는 신혼부부들이  탄다. 50대들은 한국눅거리차나 국산SUV정도다. 고급차 값은 젊은 친구들의 노임을 가지고는 근본 꿈도 못꾸는 값이다. 어림 잡아 30만원대인데 한달 노임이 4천원정도 받고 어느 천년에 고급차를 마련한단 말인가. 그래도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다.        아들가진 집에서는 큰부담을 가진다. 부모들은 자식 뒤바지에 죽을 지경이다. 아들 낳은 것이 무슨 죄를 진것 같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어떤 녀자집들에서는" 나 모르겠소 . 요지음 다 그렇게 한다는데"라는 태도다. 어떤 집에서는 돈 많은 집에 딸 시집 보내놓고 무슨 호강하는 본새다. 외국유람이다. 출국선물이다. 고급옷 신발 별라별 자랑 다 한다. 이것이 바로 요지음 결혼진행곡이다. 음악으로 치면 아주 어설픈 작품이다. 리듬도 안맞는다.              사람에 따라 가정에 따라 결혼에 대한 태도가 다르겠지만 요지음 류행되는 결혼지출은 너무도 크다. 부모님들 덕분에 대학까지 마치고 이젠 출근까지하는 어른인데  아직까지 부모님한테 손을 내밀면 안된다. 부모님들에게 모든 것을 바라는것은 자식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가정실정에 알맞게 결혼을 해야 한다. 벌어서 갖추어야 의미가 깊다. 부모님들도 유람가고 싶고 고급호텔에서  쉬고 싶고 좋은 식당에서 료리맛 보고 싶다. 명태머리는 결코 엄마의 애호가 아니다. 아들 결혼식 때문에 구사회로 돌아가는 일이 결코 발생해서는 안된다.        준신랑 (准新郎)들이여. 머리를 식혀라. 행복한 결혼생활은 호화로운 결혼식으로 보증하는 것이 아니며 집이 크고 차가 좋다고 하여 리혼안한다는 법이 없다.        준시부모님들이여. 자식에게 모든 재산을 쏫아 붙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다. 물질생활이 너무 쉽게 얻어진다면 아이들은 분투하지 않을 것이다. 한일 부모등쳐 먹자 할것이다.        결혼 요지음 말이 많은 화제다. 허나 기피할 일은 아니다. 
60    모내기 댓글:  조회:1310  추천:0  2019-05-21
 모 내 기          우리 연변은 요지음부터 모내기가 한창이다. 조선족이 사는 동네에는 의례 논이 있고 모내기가 있다. 동북지방의 논 농사는 우리 선조들이 묶밭을 개간하여 시작한 것이다.  장자림이 심양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논농사를 장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벼모내기는 계절성이 강하고 로동강도가 높다. 그리고 집단로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다르건 그만 두고라도 벼모를 뜨고 논에 쓰레질하고 벼모를 쪽지게에 담아  내가고 모를 꼽고 이 모든 것이 어느 몇사람의 일손으로는 꿈도 꿀수 없다. 마치 생산라인 돌아 가듯 어느한 고리에 문제가 생겨도 로동이 원활해 질 수 없고 생산 효률이 떨어 지게 된다. "고양이 손도 빌려 쓴다"는 모내기철에는  학생들도 동원되였다. 그때에는 벼모방학 이라는것이 있었다. 도시학교 학생들도 촌에 내려가 며칠씩 방조하군 하였다.        모내기의 주력은 녀성이다.  가히 말하건대 논농사의 주력도 녀성이라고 할수있다. 우리 조선족 녀성들은 남성들 못지 않게 강인한 성격을 소유하였다. 나의 누님이 학교를 나와 집체 로동에 참가하였는데 겨울에도 원전화로동에  나갔다. 높은 곳의 땅은  까고 낮은 곳은 보태여 주고 논바닥은 크게 하는 일이였다. 기계화농사를 바라보고 한 준비 작업인 것이다. 지금 논이 바닥이 크고 고르고 논두렁이 곶은 이 모든 것이 70년대 원전화건설과 갈라 놓을수 없다.          이른 새벽에 논에 나가고 저녁 늦게까지 논에서 로동하고 나면 허리가 끊어 날것 같고 걷기 조차 힘들다. 우리 민족녀성들은 진짜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평소에 머리를 다소곳이 하고 말씀이 적고 수지음을 잘 타던 분들도 일단 로동현장에 뛰여 들면 그 누구보다 억척스럽고 헌신적이다.  지금 녀성들은 "그게 무슨 자랑이냐 ? 녀자들에게 많은 일 시켜놓고"할지도 모른다. 허나 기계화가 보급되지 못하고 모든 일이 사람손이 가야하던 시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민족 녀성들이 년세가 들면 허리 휘는 현상이 많다.  그 주요 원인이 바로 논농사 때문이다. 차거운 논에 들어가 진종일 허리 굽혀 모내기를 하고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리다. 그러나 대부분 한전 농사를 하는 한족들은  우리와 다르다. 한전 농사는 마른땅에서 일하고 서서 하는 로동이 많다. 단 기음매기를 놓고 봐도 한족들은 호미자루가 길기에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우리 민족의 논농사에서 녀성들이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 알수가 있다.        모내기철이면 아침부터 마을방송이 울려 퍼진다. 전투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와도 같은 유선방송이다.    모내길세 모내길세    철을 맞춰 모내길세   듣기좋은 모내기 노래를 반주로 사원들은 집을 나서 논으로 향한다. 아직 푸름한 새벽이것만 철기를 중요시하는 논농사는 단 하루도 미룰수 없다. 그리고 또하나의 욕심 모내기철의 일이 공수가 높다.  일을 더많이 해야 공을 올릴수 있고 년말의 분배에서 남보다 더 많이 받을수 있다. 그래야 애들도 자래우고 새옷이라도 살수 있다.        우리 소영촌은 80년대 초반부터 도거리농사을 실시하였다. 그전에는 모두 집단농사였다. 우리 소영촌은 마을이 비교적 크다. 10개 생산대로 나뉘여져 있었는데 모내기 철이면 마을 전체가 마치 전투장같다. 방송에서는 시시각각 어느 생산대에서 모내기를 얼마나 완성하였다던지 누가 하루에 얼마를 꼽아 모내기 기록을 돌파하였다던지하는 소식이 시시각각 방송되였다. 그리고 일터 효능을 올리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채취했다는 방법도 상세히 소개하였다.       당시 촌의 유선방송의 역할이 상당하였다. 당의 로선방침정책 선전을 담당하였고 마을 소식보도를 담당하였다. 어린시절 나의 눈에는 방송원이 곳 우상이였고 본보기였다. 나도 언제면 마이크를 잡고 원고지 들고 방송해 볼가는 꿈도 있었다. 지금 말하면 유명한 TV프로듀서보다 더욱 인기가 있는 직업이였다.       우리 연변의 입쌀은 맛있기로 소문이 있다. 주요 원인이라면 밤과 낮의 온도 차이가 크고 해볓이 충족하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부이"황제"가 연변쌀을 먹었다고 하겠는가. 몇해전에 장사하는 친구가 연변우질입쌀을 인터넷에 올려 판매하려 하였다. 헌데 조사 결과 량이 부족하단다.          벼모내기는 논농사의 시작이다. 신근한 로동은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 줄것이다. 올해도 만풍년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59    바비큐 댓글:  조회:962  추천:0  2019-05-20
바비큐       야외식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이 바비큐다.  이글거리는 참숫불에 구운 메돼지고기며 달군 돌우에 놓고 굽은 닭고기며  적쇠위에 올려 놓고 구운 물고기 어느 하나  빼놓을 것이 없다.         토요일날 친구들은 소영에 있는 권대장네집에 모여 바비큐를 하게 되였다.  장소로는 권대장네 화원이였다.  화원에는 여러가지 과일나무와 꽃나무 산나물들이 자라고 이었다.  민들레도 노란꽃과 흰꽃 두가지 종류로 나누어 심어놓았다.  지금은 사과나무가 꽃피는 계절이다.  흰저고리에 연분홍치마를 두른듯한 사과나무의 꽃은 매력적이였다.  수도물을 열어 놓아 정원의 화초에 수분을 보장하고 이었다.  그 덕분에 화원에서 집미나리를 서식할수도 있었다.         우리는 해탕나무 아래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권대장은 원래 바비큐를 하기로 작정한것 같았다.   화로도 만들고 밥상도 제법 불수강으로 만들어 놓았다.  쇠그물로 만든 적쇠위에는 두텁게 베여 놓은 손바닥 크기의 메되지 고기를 올려 놓았다.  지글지글거리는 고기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난다.  권대장은 불기가 살아 날때 마다 소금물을 뿌려준다.  그러면 불은 사그러들고 목탄연기가 피여 오른다.  소위말하는 훈제방식이다.  목탄연기에 그을려야 제맛이란다.  확실히 양꼬치집에 가도 체험 할수 있다.  목탄연기를 화로 밑으로 뽑아 내는 방식으로 구운 양꼬치와 화로 위로 뽑아 내는 방식으로 구운 양꼬치는 맛이 완전히 틀린다.          바비큐용 고기는 크게 저미는 것이 도리다.  굽게 쉬우라고 엷게 저미면 다 타붙고 먹을 것이 없다.  웬간히 구운 메돼지 고기를 먹고난 뒤에는 소고기를 올린다.  상대적으로 기름이 적은 소고기는 오래 구우면 땅땅하여 맛이 없어 진다.  웬간히 지글거린다 싶으면 칼로 베여 가며 쓸쩍 구우면 완성이디.  연변에서는 바비큐양념으로 꼬치구이 양념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알소금구이 또한 별맛이다.   화원에서 방금 뜯은 곰취에 소고기 한점 넣고 쌈을 싸 맥주와 같이 드셔보시라.  남의 이야기가 귀에 들려 오지 않는다.          여러가지 고기구위가 배부르다 싶을 때 물고기 구위가 또한 별맛이다.   꺼득꺼득 말리운 물고기를 화로에 올린다.  고기 껍질이 노랗게 익어 갈때 소금을 뿌린다.  적쇠의 무늬가 물고기배에 자국을 낸다 깊으면 쥐집어 놓는다.  중국사람들은 물고기를 번져 놓는다는 말을 꺼려한다.  배타는 사람들이 바다에나가 물고기 잡을 때 가장큰 재난이 바로 배가 번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륙지사람들은 별로라고 할지 몰라도 배사람은 다르다.  물고기구이 가장큰 특점이 고기가 부드럽다는 것이다.  웬손으로 물고기 한마리 잡고 후후 불어 가며 고기를 발가 내여 먹는 재미 못 해본 사람은 모른다.          닭고기 구이도 제법 맛있다.  어느해 여름 한번은 둘째동서 내외간과 우리집에서 장인장모를 모시고 하룡촌으로 야외 놀이를 갔었다.  여기저기 동네 구경도하고 해란강에 발목도 적시고 나니 정심 먹을 시간이 되였다.  나는 물에 떠 내려온 나무가지들을 주어다 불을 지피였다.  그리고 큰 자갈돌들을 불 무지안에 던져 넣었다.  불이 거이 스러질때쯤 가지고간 닭다리며 닭날개를 자갈우에 올려 놓았다.  달아 오른 돌이 자체의 열로 고기를 익혀 주는 판이였다.  찌르륵 찌으륵하는 고기 익는 소리가 고소한 냄새와 함께 강가에 펴지였다.  돌구이 가장큰 우점이 불 없이 굽는 다는 것이다.  한쪽이 다 익으면 또 다른 쪽을 굽는다.  간장양념을 닭고기 우에 한벌 바르고 먹어 보라.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구위할때 한가지 주의 할점이 있으니 뭐던 물에 씻지 말아는 것이다.  씻은 고기와 않 씻은 고기의 맛은 차별이 간다.  그날 장인 장모님께서는 처음 닭고기구이를 자신다며 즐거워 하였다.          내친김에 한가지 더 소개하면 토끼우이도 별맛이다.  왕청에 친구가 한명 있는데 그는 토끼고기구이 전문가다.   하루전에 가죽을 벗긴 토끼를 양념장에 재운다고 한다.   그리고 강가의 껍질을 벗겨낸 버드나무 가지로 토끼를 꿴다.  그의 리론에 의하면 쇠꼬챙이에 꿰면 맛이 못하다고 한다.  강가에서 주어온 마른 나무에 불을 지펴 연기를 뺀다.  불이 어느정도 사그러진 다음 나무에 꿴 토끼를 불무지 위에 걸쳐 놓는다.  자새 돌리듯 천천히 돌려가면서 고루고루 굽는다.  이맘 때면 토끼몸둥이에서 기름이 배여나와 불에 뚝뚝 떨어지며 탁탁 소리가 난다.  그때 쯤 되면 불무지 주위에 둘러서서 고기 익기를 기다리는 식객들의 입에서는 군침이 돈다.  "좀 재우재우 굽소.   배가 촐촐하다이" 친구는 놀리듯 천천히 구우며 익쌀부린다.  "안 익어써.  생고기 들란가"          말은 그렇게해도 마음씀이는 진투다.  다익은 토끼를 칼도 쓰지 않고 손으로 뚝뚝 각을 뜯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다.   우리는 나무 꼬챙이에 다시 꿰여 들고 먹어 주었다.  고기 한입 맥주 한모금 .  아 ! 잊을수 없는 왕청토끼구이.          야외 행사에서 바비큐가 맛있고 추억에 남는다.  무슨 먹새소린가 할지 몰라도 휴식의 한때를 보내는 데는 그래도 바비큐다.  ㅎㅎ            닭고기 구이       토끼구이
58    고사리 꺽기 댓글:  조회:890  추천:0  2019-05-20
고사리 꺽기                요지음이 고사리 철이다. 올해는 왕년에 비하여 조금 늦은 감도 든다.  지난해 겨울 눈이 적게 오고 금년 봄에 비가 적게 온 탓이다. 기온은 높지만 땅은 말라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집옆 산으로 향한 시골 아스팔트길에는 갖가지 차량들로 시끄럽다.  대부분 야채 뜯으려 다니는 사람들이다. 교통공구의 우세로하여 지금 산에 가면 촌사람보다 시내사람 더 많다. 오토바이쟁이들도  많은데  대체로 전업 나물 채집공들이다.        고사리 꺽어 보기는 지난해가 처음이였다. 지난해 5월중순 나는 마반산에서  형님 그리고 사돈들과 합류하여 고사리 꺽으려 시리봉으로 갔다. 요지음은 시골길도 다 포장도로로 되여 있어 운전하기도 편리하다.        마반촌에서 부암방향으로 달리다보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웬쪽으로 꺽어들면 부암촌이고 계속 원래 방향으로 달리다가 산등성이를 넘어 가면 장안진 흥가촌이다.        그날아침 7시 좌우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를 길역에  주차하는데 차가 너무 많아 애를 먹었다. 나의 생각에는  일찍 한줄로 알았는데 벌써 차들이 가득 주차되여 있었다. 어디가나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다.  요지음 산에가 나물채집하는 사람들보면 시내사람들이 오히려  집요하다.        형님이  고사리 꺽으려 몇번 시리봉에 다녀 온적이 있었기에 우리 일행은 형님의 뒤를 따르기만 하였다.  여기 저기 살펴보며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한족 부부가 산에서 나온다.  내가"고사리가 많아요" 하고 물으니 별로 없다고 했다.  그들이 든 도료(涂料)통에는 고사리가 절반 넘게 담겨 있었다.  나와 말하며 지나가던 남자가 잰걸음으로 소나무 긁 방향으로 걷는다. 그는 소나무긁에서  고사리 여러대를 꺽었다. 나도 방금 그쪽에서 걸어 오면서도 고사리를 발견도 못했는데 . 저사람이 내 코앞에서  고사리를 꺽다니.        나는 유심히 나무긁을 살피였다. 옳거니. 나의 눈에도 도사리가 들어왔다. 너무도 좋아서 냉큼   건너가 고사리를 꺽었다. 야들야들한 고사리는 손쉽게꺽을수 있었다. 한대를 꺽고보니 또 한대가 보인다. 오 . 원래 이런판이로구나. 볼줄아는것이 첫째 요령이였다.         고사리는 한대두대씩 서 있는 것도 있고 무더기로 나 있는 것도 있다. 헌데 사람들이 고사리채집에 나무 많이 나오다보니 방금 한팀이 지나가면 그뒤로 또 한팀이 들어 선다. 허나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른가보다. 고사리 꺽은 줄기에 즙이 나와있는걸 보면 방금 누가 지나간 자리다. 헌데 그옆에서 나는 또 몇대를 꺽을 수가 이었다. 아 . 원래 이런거로 구만. 하나님이 우리를 고루고루 먹고 살라 하셨나 보다.         운이 좋게 무더기로 발견될 때면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다른 사람들은 나무밭에서 두리벙두리벙 하며 고사리를 찿아 헤매일때 나는 운이 좋게 고사리 무더기를 선사 받은 것이다. 고사리가 집중된 곳은 대부분 고사리가 자라서 잎이 피고 말라버린 자리였다.  그자리에는 새순이 마른 풀 잎사이로 뾰족뾰족 가득 올라와 있었다. 큰 것은 한뽐 되고 작은 것은 한두치 정도 되였다. 푸른색도 있고 자주색도 있다. 기분 만점이다. 나는  부지런히 고사리를 꺽었다. 대는 탱탱하고 고사리손은 꼭 쥐여져 있었다.        허나 매냥 고사리 무더기가 보이는건 아니다. 나의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서 허리를 굽히고 고사리를 꺽는다. 헌데 나는 왜 못 보았지. 피장파장이다. 나만 먹고 살라는 법도 없지 않는가.       고사리를 꺽노라면 길을 잃을 때가 종종 있다. 하여 혼자서 무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팀을 리탈하였을 때는 소리쳐 불러야 한다. 나물 뜯으려 산에 들어 갈 때에는  될수록이면 붉은옷 노랑옷을 입는것이 좋다. 그래야 야외에서 선명하게 보인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전에 한단위 동료들끼리 깊은 산에 들어가 나물을 뜯다가 길을 잃은 적이 이었다. 하여 폭죽을 터친다 나팔을 울린다하며 온밤 사람찿기에 헤매였지만 날이 새도록 찿지 못했다. 길 잃은 동료들은 산에서 하루밤 로숙하고 아침에 야산에서 내려 왔다.            지금은 부암촌의 교통이 좋지만 과거에는 심심산골이였다. 나의 아버님이 지난세기 70년대초에 부암 흥가부근에서 방목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부암촌은 강냉이가 주식이였다. 라지오방송도 안 나오는 깊은 골안이였다. 하여 전화선에 수화기를 련결하여 방송도 듣고 일기예보도 들었는데 그것도 발견되여 수화기를 몰수당하고 말았다.        그때 아버님은 고사리며 곰취 도라지 더덕등 산나물을 채집하였다. 하여 다른 집에서는 맛 볼수 없는 산나물이 우리집 밥상에 가끔씩 오르군 하였다.        오늘은 나와 안해가  고사리 꺽으려 나섰다. 돌아 올때 보니 수확도 괜찮았다. 고사리로 하여 오늘은 기분 좋은 하루 였다. 
57    세무학교 댓글:  조회:1079  추천:0  2019-05-15
 세무학교         세무계통에는 성세무학교 졸업생들이 많이 근무하고 있다. 어찌 보면 세무계통의 황포군관학교 같은 곳이다. 큰령도 자리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층세무소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다. 허나 공통한 점은 모두 세무학교교문을 나왔다는것이다. 입학 할 때는 여러지역의 서로 다른 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했지만 졸업할때는 모두 가슴에 «중국세무»라는 네글자를 달고 졸업했다. 그리고 세무간부로 되였고 평생세금과 씨름하게 되였다.        세무학교와 우리 학교는 그리 멀지 않았다. 두학교 사이에는 고향친구요 동창이요 하면서 거래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하긴 장춘에는 어느 학교에 가나 조선족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니 휴식일이면 친구들끼리 여기 저기 놀려 잘 다니였다. 그 덕분에 장춘에 자리 잡은 많은 학교를 가 보았고 장춘지리에 대하여 잘 알게 되였다. 만나면 친구요 술 한잔 하기가 십상이였다. 어찌어찌하여 한번은 한반급 친구와 같이 세무학교를 가게 되였다.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날 숙소에서 술을 마시였는데 내 주량 가지고는 근본 헴에도 없었다. 가장 센  교하에서 온 친구는38도 짜리 한병을 하고도 꿈쩍하지 않았다.         성세무학교는 1987년도에 첫기 학생을 모집하였다. 학교는 2년제 중등전문학교 였는데 졸업하면 성내 각지역의 새무국에 안배하여 주었다. 금년은 첫기 학생들이  졸업한지 꼭 30년이 되는 해이다.  그때 고중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세무학교에 입학하여 왔는데 지금은 어느덧 모두50세를 넘긴 장년이 되였다. 그들은 실로 우리성 각급 세무기관에서 중견역을 담당해온 공신들이다. 지금도 당시 세무학교 교정이 머리에 떠오른다. 건물이라고 해야 교실겸 숙사로 쓰이는 이층건물 한동과 보이라방이 전부였다. 허나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오늘 전성부문공작회의 참가차로 세무학교로 오게 되였다. 모든것이 변했다. 대문부터 변했다. 동쪽을 마주했전  원래 대문은 인쇄공장문으로 변했고 지금 학교대문은 북쪽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모든 건물은 새로 건축한 것이였다. 30년전의 흔적은 찿아 볼래야 볼수도 없다. 원래 숙사 건물이며 식당도 다 철거되고 대신 새건물이 들어섰다.         세무공작하면서 딱 두번 세무학교에 와 본적이 있다. 한번은1992년도 였는데 당시 까지만 하여도 국가세무국과 지방세무국이 분리되지 않은 시절이였다. 전성 업무골간 학습반에 참가하게 되였다. 주요하게 공업회계와 소득세결산에 관한 학습반이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젊은 축들이 성학습반에 뽑혀 온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호감이 들기도 하였다.  또 한번은1994년 가을이라고 생각된다. 국가세무국과 지방세무국이 갈라져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서 조직한 전성토지증가세 (土地增值税)학습반이였다. 그때 전성 지방세무계통의 업무골간들을 모아놓고 새 세종에 관한 정책을 학습하게 되였다.  그때 까지만하여도 당년에 짓은 학생숙사와 식당건물이 있었다.           아침에 학교근처를 나가보니 화평대가(和平大街)만 알아 보겠다.  근처에는 금강공원이라고 잘 꾸려진 공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 섰고 큰 길들이 쭉쭉 빠져 있다. 더 희한한것은 학교앞까지 지하철2호선이 들어선 것이다. 당년에는 장춘의 변두리쯤이였는데 지금은 북경으로 말할라치면 3환정도쯤 되는 같다.         지금 청도에서 사업하는 친구 동천이 다니던 상업전과학교도 이 동네다. 어제 가보았는데 문을 닫은것 같았다. 대문에는 상업학원이라는 글이 보였는데 타일이 다 떨어져 나가고 볼품없었다. 과거에는 여기도 곧 잘 다니던 학교였다.  숙사옥상에 올라가 기타를 치고 노래도 부른 적도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의 아지트같은 작은 음식점이 저기 지금 금강공원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천이는 친구들이 오면 곧잘 거기로 안내했다. 돈도 없는 가난뱅이 대학생들이 손님 접대한다고 식당에 안배하는 판이였다. 친구들 보내 놓고는 밥먹을 돈이 없어서 또 돈 빌리려 다녀야 했다.          나도 돈이 없으면 다른 학교에가서 얻어 먹기도 했다. 한번은 길림대학가서 얻어 먹고 놀고하다 돌아 오게 되였다. 밤이라 친구들은 자고가라고 난리다. 술도 마시였는지라 나는 기어이 고집하고 학교로 온다 했다. 헌데 전철을 타려니 돈이 없다. 하여 동지거리(同志街)에서 홍기거리(红旗街) 록교(绿园)까지 걸어 올수 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장춘에서 총을 잃어버려 찿는다고 야단 할 때 였다. 캄캄한 밤에 철길따라 걷노라니 어디서 총을 든 괴한이 나오는 것 같아 무섭기도 하였다.       장춘은 이런곳이다. 사업상 관계로 다른 곳 들은 자주 다니녔지만 세무학교 근처는 다닌 일이 적다. 세월도 흘렀다. 우리의 기백과 리상과 도전이 공존했던 동네 장춘 그리고 세무학교는정다운 곳이였다.
56    어머니 날 댓글:  조회:1016  추천:0  2019-05-13
 어머니 날            오늘이 어머니 날 이다.       아침부터 위챗에서는 어머니를 칭송하는 글 그림들이 가득 떠올랐다. 과거에는 명절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명절이 많다. 이런 저런 명절가운데서 어머니 날이 가장 마음에 닿는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지2563돐이 되는 날이다. 우연한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어머니와 부처님사이에는 많은 류사성이 있다.       나의 어머님은1926년6월5일생이다. 1985년에 돌아가시였으니 딱 59세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중국에서는 60년을 하나의 갑자(甲子)이라고 한다. 60년을 하나의 주기로 세월이 돈다는 말이다. 지금 주변의 60세대 사람들은 청년같이 분장하고 다닌다. 헌데 어머니는 59살밖에 살지 못했으니 하나의 갑자도 못 만들고 너무도 일찍 돌아가신 것이다.       어머님은 형제가 딱 2명이다. 남동생이 한분이 계시였는데 우리에게는 유일한 친척집이였다. 아버님이 고향이 경상북도 월성군이였으니 항미원조 전쟁이후로 다신 고향에 다녀 오지 못하였다. 모든 소식도 단절 되였다. 하기에 우리에게는 외가편외에 친척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어머니는 매우 부지런하시였다. 자식4명을 자래우려니 쉴사이가 없었다. 우리 집에는 손재봉기가 있었다. 어려서 나의 바지는 기본상 어머님께서 손수 재봉하여 만든 것이였다. 어릴때 어머니에 대한 인상이라면 늘 바느질하는 모습이였다.  하나라도 절약하려고 천을 끊어서 자식들 바지를 만드시였다. 낮에는 로동하시고 저녁이나 새벽이면 바느질 하시였다.      그때는 집체농사를 할때녔는데 특히 모내기철이 되면 어머니는  해가 뜰때 논에 나가서 해가 지어야 돌아 왔다. 모를 뜨고 모를 꼽고 어느 하나도 다 허리를 굽히고 하지 않는 로동이 없다. 집에 돌아오면 또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해야 한다. 로동간식으로 내주던 월병 같은 것을 받으면 아까와 안 드시고 집에 가져와 나에게 주었다. 평공을 하고 년말분배을 해보아야 수입이 얼마 안 되였다. 백원정도 나올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었다. 누나가 사회에 나오고 형님들이 출근해서야 생활이 좀씩 향상되기 시작했다.        고된 로동으로하여 어머님은 너무 일찍 허리가 휘였다. 하여 무거운 짐을 들기 불편해 하시였다. 80년대 초반이였다. 한번은 어머니는 뻐스를 타고 나는 자전거에 살구를 싣고 장 볼려 갔다. 지금 진학소하교 근처에 장터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사람들로 붐비였다. 헌데 어머니를 찿을수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찿고 나는 어머니를 찿는 판이였다. 8월달 가장 무더울때 땡볓에서 사람찿기가 너무도 힘들다. 어머니를 만나는 찰라 나는 투정부터 부리였다. "엄마는 어디 갔댔소. 따갑아 죽겠는데" 기실 휜 허리로 하여 걷기도 힘든 어미니가 더 고생했는데 철없는 내가  어머니를 탓했다.       어머니는 동네분들과 아주 잘 어울리였다. 무슨 사정이 있으면 동네분들이 곳잘 어머니를 찿아 상론하시였다. 어머니는 교원을 존중하시였다. 길에서 선생님들을 만나면 아주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리였다. 내가 인사를 잘 하는데 역시 어머니의 본보기를 따라 배운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화룡고중다닐때 돌아가시였다. 원래 심장이 좋지 않으시였는데 뇌졸증으로 돌아가시였다. 어느 토요일 내가집에 오니 어머님이 편찮으시였다. 둘째형님이 집에서 주사를 놓아 들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감기라고 하시며 근심 말라고 하였다. 학교에 돌아와서 몇일 안되였는데 집에서 련락왔다. 어머님이 위급하시단다. 내가 집에 왔을때 어머니는 연변정신내과병원에 주원하시였다. 병세가 위급하여 중환자실에 모시였는데 사람도 알아 못본다고 했다. 아버지는 몹시 괴로워하시였다. 병원측에서는 후사를 준비하라고 한다. 몇일뒤에 어머님이 돌아가시였다.        마음이 괴롭고 눈물이 앞을 가리워 글을 잇지 못하겠다.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33년이 되였다. 오늘 이글로서 어머님을 회억하고 또어머니 날을 보낸다.
55    련휴일 나들이 댓글:  조회:1245  추천:0  2019-05-08
련휴일 나들이          5월4일날 친구가 모임을 갖자고 련락해왔다. 친구는 특별히 양고기 맥주 백주등을 준비하여 가지고는 고향에 있는 절친의 집으로  놀려 가자고 했다.  나는 대뜸 찬성했다. 고향마을에 다녀 온 지도 꽤나 오래되였고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친구의 차를 타고 고향 마을에 도착하였다.       친구의 소개에 의하면 양고기는 팔가자장에서 사온것이라 한다. 내가 연길에도 양고기가  많은데 하필이면 먼 팔가자장에 다녀 왔는가고 하니 장구경 삼아 갔다 사온거라 한다. 정을 중히 여기는 친구열정은 그 누구도 못 말린다.        우리는 각자 분공을 맡았다. 고기를 써는 사람 목탄불을 일구는 사람 상을 차리는 사람 심부럼하는 사람 하여간 각자 일사분란하게 맡은바 일을 해낸다. 지인은 전화련락도 없이 무턱 대고 찿아 왔건만 우리를 너무나도 반긴다. 지인은 우리가 불시로 찿아 와서 준비가 없어 미안하다고 한다. 가져간 식자재만도 충분한데 말이다.        지인은 호남성에서 왔다는 이웃집 한족에게 부탁하여 향어물고기찜 양배추복음  가지복음등 료리를 시키였다. 이웃집의 복음료리는 맛도 일품이였다. 진짜 향신료향기가 나는 중국료리였다. 거기에 또한 고소한 양고기 굽는 냄새가 사람의 목방아를 찢게 한다. 잠간사이에 풍성한 음식상이 차려졌다. 뜨락에 상을 차리고 보니 그것 또한 오래만에 보는 이색풍경이다.           술은 마실수록 사람간의 우정을 깊이 하는가 보다. 3시간 넘게 마시였는데도 끝날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반갑다 기쁘다 좋다 이야기도 끊임 없다. 술이 약한 나와 다른 한친구는 이만하고 먼저 돌아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지인은 일단 만류하다가 안되니 우리를 택시에 앉혀 보낸다고 야단이다. 먼저 일어난것도 미안한지라 우리는 지인의 권고를 마다하고 선로 뻐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하였다.         하기는 5. 1절휴가 기간에 북경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집에 왔는데 같이 한 시간이 얼마 없었다. 애가 엄마와 하는 말이 아버지는 나를 오라해 놓고 만날새도 없다고 하더란다. 그사이 나도 밭갈이도 하고 강냉이도 심을려니 일도 많았다. 안해한테서 그이야기를 들으니 속이 알알해나며 아들한테 미안한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러니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 가야 다는 생각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자가용이 있은 뒤로 공중뻐스를 타는 일이 적게 되였다. 특히 교외를 빠져 나갈때면 운전하는 일이 더욱  많았다.  24선 선로 뻐스를 리용해 본일도 오래전의 일이다. 시내선로와는 달리 외각뻐스는 사람사는 냄새가 나고 이야기도 많다.       과거에는 24선로 뻐스에 오르면  고향의 아는분들을 만날수 있었지만 지금은 완판 다르다. 외지에서 이사온 사람이 대부분이고  또 한족주민들이 많이 이사해 들어 와있다. 하기에 뻐스를 타도 면목있는 사람보이지 않는다. 간혹 조선족들이 섞겨 있지만 말없이 조용하다.           좀 지나니 다음 뻐스역이 나타났다. 몇사람이 오르는데 그중에 한 할머니가 두손에 커다란 꾸러미를 들고  힘겨웁게 오르는 것이였다. 그때 뻐스앞부분의 좌석은 빈자리가 없고 뒤쪽의 높은 좌석에만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키도 크고 여윈 얼굴을 가진 할머니는 옷매무시가 초라하다. 검은 꾸러미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장볼려 가는 가람으로 추측되였다.         할머니는 한족말로 내가 든 짐이 많아서 그러는데 뉘가 차앞부분의 자리를 내여주지 않겠는가고 사정 한다. 헌데 누구도 못들은척 한다. 나이를 봐서 60대가 될가하는 몇사람은 눈알을 데굴거리기도 한다.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대하듯 말이다. 나는 차뒤측 좌석이라 별도가 없다.       이때 한 중년녀성이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노인 보고 앉으라고 한다. 표정이 하도 말이아니라 할머니는 량보안해도 좋다고 했다. 중년의 녀인은 일어나서 문쪽으로 이동하였다.  노인은 비칠거리며 그자리에 찿아 앉는다. 사람들은 할머니의 행색이 초라하다고 업수히보는 같았다.          새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우르르 올랐다. 40대 초반의 부부가 초중에 다닐법한 여자애를 데리고 올랐다. 자리차지 하기에 이골이 튼 승객들이였다. 그 법석판에서 용케도 자리두개를 차지하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이야기가 끝이 없다. 특히는 부인네가 남편을 보며 뭐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남편은 집에서도 직위가 낮은 모양인지 닭이 먹이 쫏듯 연신머리를 끄덕인다. 딸애는 부모님들을 번갈아 보며 새물거린다. 남자의 오른손은 시종 큼직한 종이함을 붙잡고 있는데 함표면에는 영어로 "판다"라고 씌여져 있다. 아마 참대곰표TV인가 보다. 대략30촌좌우가 되는것 같다. 요지음은TV를 새로 구입하면 집까지 배송해 주는데 집적 자기로 운반하고 또  뻐스를 리용하는걸 보면 어느정도 비용삭감을 받은것 같기도 하다. 일짜 짠돌임이 틀림 없다. 새로 구입한TV는 그들가정에 더 없는 행복을 가져다 줄것이다.           한참 지나니 젊은 부부가 차에 올랐다. 대략 30대 중반인것 같아 보였는데 차에 빈자리가 나도 시종 서서 간다. 녀자가 남자보고 저기 자리가 났다고 알려주자 남자는 약소군체들에게 내주어야 한다면서 앉기를 거절 한다. 아마 경상적으로 대중교통을 리용하는  뻐스족인가 싶다. 그들은 뻐스를 타는 내내 열심히 핸드폰으로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두눈에서는 대방에 대한 흠상의 표정이 차넘쳐 났다. 그 젊은 부부들의 행동에 나는 저도 몰래 감탄하게 되였다.         앞에서 이야기한 할머니가 내릴 준비를 했다. 친구가 얼른 일어나 꾸러미를 들어 문어구어 놓으며 " 먼저 내리세요.  내가 짐을 내려 줄게요 "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연신 조선말로 "감사하오"라며 인사한다. 아. 원래는 조선족 할머니였구나. 나는 속으로 얼마나 생활이 힘 들었으면 저렇게하고 다닐까 하는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공중뻐스는 사회의 한 모퉁이를 보여 주고 있다. 대중교통으로써 여러 계층 여러 년령대 여러부류의 사람을 싣고 나른다. 뻐스가 어찌 보면 사회축소판이라 하겠다. 이 작은 무대에서 비록 매개 승객의 연출시간은 짧지만 각자는 별라별 연출을 다 한다. 특별히 준비하고 하는 연출이 아니지만 그토록 생동하고 진지하다. 생활의 진면모를 반영한 단막극 같은 것이다. 승객모두가 연원이자 관중인 셈이다.       새로운 도시를 유람가면 나는 곳잘 공중뻐스를 리용한다. 그것도 출발역에서부터 종착역까지 말이다. 그것을 통하여 도시의 교통 건축 등 다양한 방면의 정보를 입수 할 수 있어 좋다. 특히 그 도시의 사회풍모와 사람들의 문명수준을 느낄 수가 있다.       한국에 있는 친구가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 서울강남과 동대문동네는 수준이 틀려. 지하철을 타보면 알아. 동대문역에서 오르는 사람들은 옷매무시가 수수하고 자리 차지히기에 급급하는데 강남에서 오르는 사람들은 넥타이에 양복차림을 한 사람이 많고 자리에도 별로 신경안써" 。갈때는 자가용 올때는 대중교통 같은 거리를 달리면서 얻는 소감은 너무도 판이하다. 사람사는 것이 다 그렇다. 자기 수준에 맞게 자기 편리한대로 살아 가는 것이다. 그것이 일반 서민의 생활모습이다.        저녁에는 애와 같이 많이 교류해야겠다.       필경 세대차이가 나지만 우리사이에는 공동의 화제도 많다.
54    돈화북산공원 댓글:  조회:1092  추천:0  2019-04-25
돈화북산공원              돈화시가지에는 대체로 두가지 구경거리가 있다. 륙정산5A급 유람구와 북산공원이다. 륙정산의 정각사가 개혁개방이래의 돈화시 유람업의 변모를 보여 준다면 북산공원은 돈화의 홍색력사를 자랑하고 있다.         돈화시가지에서 남쪽방향으로 5공리쯤 떨어진 곳에는 륙정산(六顶山)이있다. 그곳에 바로 유명한 정각사(正觉寺)가 자리 잡고 있다. 산등성이에는 금정대불이 모셔있는데 워낙 높은 지대고 금정대불 또한 높은지라 차를 타고 지나 가면서도 환히 바라 볼 수있다. 두번째로 구경거리는 북산공원이 있다.               공원의 가장큰 특징이 바로 산마루에 세워진 렬사기념탑이라 하겠다. 렬사릉원은 1946년11월에 건설 되였고 1975년에 재수건하였다. 산 아래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는바 아침 저녁으로 운동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북산 공원을 통하여 돈화사람들의 사는모습을 엿볼수 있어서 좋다. 매번 출장길에 돈화에 오면 나는 될수록이면 이 두곳을 둘러 본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는 북산공원으로 향했다. 북산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채소사려 나온사람 운동하려 나온사람 할일없이 빈둥거리는 사람 사람천지다. 촌에서 도마도 빨간무우 배추 부추 가지 파등을 가져다 파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무순둘레 가시오갈피 드릅 꿀등을 파는 사람도 있다. 크기로 볼때 연길 아침시장보다는 매우 작은 규모다. 허나 돈화로서는 거의 유일한 아침시장이다. 장사군들은 사구려를 웨쳐대며 주의력을 자기한테 쏠리게 하려고 애쓴다. 어떤사람은 양푼두개를 들고 맞두드려 대기도 한다.  가장 원시적인 홍보방식이라 하겠다.           아침시장을 지나 광장에 들어서니 운동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귀구멍에 수화기를 꼽고 무표정하게 수걱수걱 걷는 사람 있냐하면 젊은 축들은 허리를 곳게 펴고 다리를 쭉쭉 뻣히며 씩씩하게 걷는다.          스피카에서는 귀청을 째는 듯한 음악이 울려 나오는데 무리지어 광장무를 추는 패거리들도 여러 군데 있다. 특히는  음악에 맞춰 줄 넘기 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이색적이다. 동작이 어쩌나 현란한지 눈앞이 언뜰거린다. 광장 한 모퉁이에서는 로인들이 탁구치기에 여념 없다. 방금 배운 재간이라 삐꺽하면 탁구공이 땅에 떨어지기 일수다.         길을 따라 산에 올라 가노라면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이른 아침이라 놀이 기구들은 비닐로 덮어 놓인 상태다. 조금 더 올라 가면 절이 보인다. 붉은 칠한 나무기둥 높이 솟은 지붕 꽃무늬를 놓은 문 모두가 웅위롭고 화려하다. 돌을 쫓아 다듬은 석상들이 보무당당하게 렬을 짓어 절 주위를 지키고 있다.           절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한참 산을 올랐다. 소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나무숲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김 소리가 들려 온다. 고요한 산림속에서 울리는 새들의 울음소리는 더더욱 청아하다. 절까지 등산했다 돌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산등성에 오르는 사람은 적다. 산등성이에는 세멘트로된 포장도로가 나져 있었다.            동쪽방향으로 얼마간 걸어가니 렬사기념탑이 나타난다. 탑기석위에 우뚝 솟은 렬사탑이 돈화시를 바라고 서있다. 주위에는 울울창창한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아침 등산운동을 하려온 시민들은 렬사탑주위에서 가벼운 정리운동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렬사들의 생명으로 바꾸어 온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자연히 마음을 다잡게 되고 경건한 모습으로 렬사탑을 바라 보며 묵레하게 된다.           시간도 웬간히 지났으니 하산해야 한다. 배도 어느 정도 출출하다.  저멀리로는 륙정산우에 정좌하고 있는 금정불상이 보인다. 래일 아침에 륙정산을 둘러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북산의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53    화룡과의 인연 댓글:  조회:1254  추천:0  2019-04-24
  화룡과의 인연         화룡과 나는 인연이 있다.  34년전 나는 화룡고중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비록 다닌 시간은 짧았으나 그로 인하여 많은 화룡친구들을 사귀게 되였다.  그후 대학을 나와 팔가자진 하룡촌에서 사회주의교양을 3달남짓이 받은 적도 있다.   이러한 연유로 화룡은 시종 나의 심중에서 친구 같기도 하고  항상 그리워지는 련인같기도 한 존재다.         매번 화룡에 다녀 올 때면 감회가 깊다.  특히 화룡고급중학교 옆을 지나갈 때면 더욱 그렇다.  저기 보이는 저창문이 내가 들어 있던 숙소였는데 지금은 어떤 친구들이 들어 있을가.  그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고 앞으로는 어떤 사람이 될가 .  오지랍이 넓은 생각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이런 실없는 궁리 할 때가 있다.  헌데 언제인가 그 숙사건물도 철거되였다.         30여년전의 학교건물이 남은것 이라고는  단 한채도 없다.  지난해 학교설립75주년차로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드넓은 운동장  커다란 창문이 달린 학생기숙사 현대화시설이 갖추어진 교실  모두가 새롭다.           내가 화룡고중에 다닐때 연길에서 화룡에 오려면 기차나 뻐스를 리용해야 했다.   특히 기차편을 리용하는 경우 역전에서 시내까지 가려면 상당히 먼 거리다.  당시 화룡역전에 내리면 당나귀차가 많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인상이 깊다.  다른 동네서는 못 보던 이색적인 장면이였다.  그때 학교까지 차값이 얼마였던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어느 겨울날 당나귀차가 번저져 차에서 굴러 떨어졌던 일은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보면 별로 먼길도 아니것만 당시에는 그렇게도 먼거리로 인식되였다.        화룡영극원은 내가 화룡에 있을 때 몇번 영화구경을 했던 곳이다.  대학입시를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 보는 영화는 너무도 재미 있고 또 휴식을 취할수 있는 좋은 시간이 였다.  그때 일본영화 "노랑손수건"을 본적이 있었다.  멀리 떠나간 남자를 기다리는 녀인은 매일 같이 바줄에 노랑손수건을 걸어 놓음으로서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를 발사하고 있는 것이였다.        영극원 오른쪽에 순대집이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배고플때 순대국 한사발은 우리에게는 사치와 같은 소비였다.  우리는 출출할때 학교 북쪽에 위치한 남의 집 가을 배추밭에 기습하여  훔쳐 먹기도 했다.  학교 숙사 삶은 계란도 훔쳐 먹었다.  배고품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불순한 행위를 도발시키였다.  변명이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수 없었다.         화룡백화점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서 부흥으로 가는 길이 나있다.  옛날에는 게딱지 같은 낮고 허름한 줄집이 다닥자닥 붙어 있었다.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은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여 걷기도 힘 들었다.  하긴 80년대 중반만 하여도 시가지 범위는 매우 작았다.  오늘 아침에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노 라니 옛 흔적은 몽땅 사라지고 길도 많이 확장되여 있었다.  다만 길거리에 사람이 적고 가게도 별로 생기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시골 같은 느낌도 들었다.          좀 더가니 다리가 나타난다.  지난해 란주에서 허시인이 왔을 때 차를 운전하여 저다리를 건너 가 본적이 있다.  차를 몰고 가보니 그 이상 길이 없어 돌아온 적이 있었다.  해란강 강변은 잘 꾸미여져 있었다.  돌로 만든 란간이며 대리석을 깐 강변 도로 옆 화단에는 여러가지 꽃들이 피여져 있었다.       강역에 뿌리 박은 버드나무들은 마치 풀어 혀친 녀인의 머리발인냥 긴 나무초리를 드리 우고 있었다.  화룡고중에 다닐때 이동네까지는 와 본적이 없었다.  광장도 나타나고 아침 산보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가두 넣은 해란강표면은 마치 거울 같이 반듯하다.  바람 한점 없는 이 아침 강물에 비낀 대안의 풍경이 한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고요하다.          얼마 더걸으니 역전으로 가는 길과 다리가 나타 난다.  다리목에는 건장한 수소(黄牛)석상이 우뚝 서있다.  마치 미국유욕 증권교역소 앞에 세워진 동으로 만들어진 소 형상 같다.  수건한 사람들의 진짜 속내를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건대 힘과 기세를 상징하리라.  화룡의 제반사업이 저 충천하는 수소 마냥 승승장구하고 수소의 내구력과도 같이 오래가서 경제가 번영하고 인기가 넘치고 생활이 편리하고 살기 좋는 고장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화룡이 번영하면 내 마음도 즐거워 지리라.  우리 사이에는 필경 인연이 있으니까. 
52    봄바람 댓글:  조회:979  추천:0  2019-04-19
 봄 바 람       봄 바람이 세다. 어제 까지만 해도 바람 한점 없고 날씨도 따뜨하더니만 오늘은 새벽부터 바람이 세차다. 왱왱 바람 소리 나고 나무들이 바람에 몸부림 친다. 오늘 바람이 5~6급이라고 한다. 우리 연변으로 말하면 큰 바람이다.          며칠전 사평에 있는 친구가 위챗에 글을 오렸다.  사평의 개코같은 날씨에 곱게 피였던 복숭아 꽃잎이 큰바람에 마구 날리고  따뜻한 봄날 황사가 휘몰아쳐 눈뜨기 조차 힘드네. 이 봄이 나의 맘을 어수선하게 하고 맘은 더없이  구겨지네. TMD!        봄날에 대한 아름다운 동경이 마구 휘몰아치는 봄 모래 바람에 형편없이 구겨지는 심정을 토로한 것이였다. 웬간 했으면 특유의 TMD까지 등장했겠느가.           며칠전 나는 사평시 이통현에  다녀왔다. 그동네 또한 봄바람이 세차고 모래바람에 눈뜨기 조차 힘들었다. 어디를 보나 뿌였다. 그동네가 원래 평원지구라 바람이 세다. 봄에 강수량이 적었던 탓에 밭은 바싹 마른 상태였다. 그런 땅에 보습을 대고 밭을 갈았으니 흙먼지가 더욱 기승 부릴수 밖에 없다. 산림도 있고 풀밭도 있고 해야 흙먼지가 적으련만 자연에 대한 과도한 개발은 재앙을 불러 오고 있다.         우리 연변은 그동네에 비하면 흙먼지가 적다. 바람은 불어도 깨끗한 바람이란 말이다. 아침도 보운동하려 밖에 나왔다. 바람은 비록 강하게 불지만 기온은 따뜻한 편이다. 일본에서 다년간 생활해온 친구의 말에 의하면 일본은 비에 옷이 젓어도 더럽지 않다고 한다. 기만큼 공기가 깨끗하다는것 말한다. 오늘은 낮최고 기온도 18도라고 하니 기온이 높은 셈이다.            바람이 다 귀찮은것 만은 아니다. 봄바람에 고목이 움튼다고 하지 않는가. 하니 슬그머니 봄바람이 기다려 지기도 한다. 연길시 장백로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길손들로 하여금 즐겁게 한다.  어제 나도 그 꽃길을 감상하노라니 연길에서 사는 자호감이 든다. 바람은 계절을 재촉한다. 봄바람이 불지 않고서야 어찌 봄이 오랴.           바람센 동네는 방풍립이라는 것이 있다. "백양례찬"이란 문장이 교과서에 이었다. 밀집된 백양나무가 방풍림 작용을 한다. 채소전을 다루는 동네는 보통 방풍림이 있었다. 지금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바람 막는데 큰 몫을 한다. 요지음 사람들은 빠른 효익을 선호한다. 나무를 심어 언제 혜택보랴는 투기 심리에 장기투자를 하려 않는 것이 보편심리다. 그파장이 결국은 자기한테로 돌아 온다는 도리를 모른다.         오늘 훈춘합작구에 출장나왔는데 평원답게 바람이 세차다. 전기선에서는 무슨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마냥 앵앵소리난다. 호텔에서 나오려고 문을 내미는데 엄청 힘이 든다. 길을 걷는 사람들 모두 바람에 몸이 휘청거린다.          바람이 산생되는 주되는 원인은 기압차이다. 한쪽은 기압이 낮고 한쪽은 기압이 높다면 기압이 높은 쪽에서 가압이 낮은 방향으로 바람이 불게된다. 평형원리가 작용한 것이다. 연변은 보통 서북풍 바람이 분다. 여름에는 동풍이 불때도 있는데 대부분 비오기 전야에 불어친다.        바람에 대한 여러분들의 소감은 다양 할것이다.  따뜻한 바람 선들바람 칼바람 비바람 봄바람 가을바람 바람종류도 여러가지다. 그중에서도 봄바람은 생명을 잉태하게 한다는 점에서  기대된다. 자연현상 봄바람이 불어침으로 하여 대지는 푸른단장 할것이고 새 희망을 가지게 된다. 봄바람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새 생명에 대한 동경이라 하리라.
51    절주(节奏) 댓글:  조회:902  추천:0  2019-04-16
 절주(节奏)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절주가 빠르다 . 절주가 느리다. "라는 말을 자주하게 된다. 절주란 자연 사회와 사람들의 활동중에서 일종의 운률(韵律)과 같이 하던 규률의 돌변을 가르킨다.          대체적으로 농촌생활보다 도시생활의 절주가 빠르다. 농사일은 철기를 놓히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 임의로 로동시간 안배가 가능하다. 허나 도시에서는 출근시간이 고정되여 있고 무슨 일이나 시간의 촉박을 받게 된다. 호상 협력하여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자기로 시간안배하기가 쉽지 않다.           사장님과 직원의 구별이 많겠지만 가장 큰 구별은 시간 배치다. 작은 사장님이라도 자기 임의로 시간설정이 가능한 반면 아무리 고급직원이라도 월급쟁이는 시간을 자유로 안배할수 없다. 우로 눈치보랴 아래사람 관리하랴 눈코뜰새없이 돌아치는것이 실정이다. 소위 말하는 고급신봉쟁이들은 회사의 절주에 맞추어야 하지만 작은 사장님은 자기절주에 맞추면OK다.         우리는 기본상 고정된 절주속에서 일하게 된다. 사업절주가 빠르게 변하면 거기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뭐가 선(先)뭐가 후(后)인지 갈팡질팡하게 된다. 사람들은 늦은 절주를 즐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발전은 느린 절주를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변화는 너무나도 빠르다. 지금 사람들이 가장 흔이 쓰고 있는 핸드폰의 변화를 보면 시대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되는가를 알수있다.  새로운 형호(型号)가  방금방금 나온다. 그러니 느릿느릿하다는 사회의 발전을 따를수 없어 도태되고 말것이다.         절주가 변했다. 환경이 변했다. 그러면 거기에 따라야 하는 것이 도리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응하여야지 자기로서 절주를 개변시킨다던지 환경을 개변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작은 도시에서 생활하던 젊은이들이 대도시에 진출하면 부딛치는 문제가 바로 절주 문제다.  집에 눌러 있던 본새로 느릿느릿하다가는 도태되기 쉽상이다. 과거 우리는 환경을 개변시키는 거사들을 많이 해왔다. 결과적으로 후배들이 선배들이 자연에 진 빚을 고스란히 넘겨 받게 되였다. 례를 들면 자원을 너무 많이 채취했다던가 높은 리윤을 목적으로 환경을 오염시킨 사례들이다.         내가  근무하던 단위는 기구개혁의 요구에 따라 다른단위와 합병하게 되였다. 매개 단위 마다 다 자기의 공작절주가 있고 고정된 틀(架构)이있다. 오래 동안 한 단위에 몸을 담구고 있다보면 자기로는 그률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다른 단위와 합병하고 보면 금방 그 차이점이 보인다.           새로운 공작임무가 시시각각 하달 된다. 상급단위의 각부서에서는 새로운 요구를 끊임없이 하달한다. 심지어 오전에 포치하고 오후에 결과를 내 놓아야 한다. 다음으로 요구가 높다. 뭐던지 표준이 있고 격식이 있다. 대충 얼버무려 놓으려다가는 큰코 치기 쉽상이다. 한가지 일을 안배한뒤에는 반드시 독찰감독이라는 것이 따른다.         절주에 적응 못하면 밀린다. 밀리면  밀릴수록 힘들다. 그러나 절주를 잘 맞추어 놓으면 일하기도 쉽고 효률도 높아 진다. 그리고 여유도 생긴다. 왜냐하면 빠른 절주를 알고 있기에 뭐던지 먼저 연구하고 먼저 움직이게 된다. 한국 사람들은 일 절주가 빠르다. 뭐던지 빨리빨리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어찌 남을 초과할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빠른 절주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빠를것은 빠르고 늦게해야 할것은 늦추어야 한다. 시공속도를 너무 빨리하여 부실공사를 낸다던지 너무 빠른 경제성장을 촉구하여 경제질이 떨어진다던지 하는것은 취할바가 아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재직에 있을때 날아다니던 사람들이 퇴직하고나서 방금 건강상태가 나빠진 사례들을 볼수 있다. 왕왕 퇴직절주에 적응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니 자기에게 맞는 절주를 선택해야 건강도 지킬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앞으로 퇴직하면 뭘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해볼 여를도 없이 농사짓고 려행하고  글 쓰겠다고 대답 했다. 그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있다.  라지오는 주파수를 맞추어 놓을 때야만 방송이 잘 나온다. 미리미리 주파수를 잘 마추어 놓는 것도 총명한 처사다.   나에게는 하나의 꿈이있다 천정에 창문이 달린 집에 살고 싶다 나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다 천정에 창문이 달린집에 누워 밤 하늘의 별을 세고 싶다 나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다 눈 내리는 새벽 천정에 창문이 달린집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싶다.
50    뢰봉정신은 영원히 빛난다 댓글:  조회:785  추천:0  2019-04-15
 뢰봉정신은 영원히 빛난다         올해 3월5일은 모택동주석께서 "뢰봉을 따라배우자"라는 제사를  쓴지 56주년이 되는 날이다. 뢰봉은 우리가 따라 배워야할 영웅인물이다.        지난해 중앙과국무원의 기구개혁에 관한 정신으로 국가세무국과 지방세무국이 합병되여 국가세무총국연변세무국이 성립되였다. 기구가 갓합병된 어느날 업무회의통지를 받고 나는 처음으로  국가세무국주반공청사로 갔다.  회의지점은  뢰봉학습활동실이였다.       활동실 한면에는 뢰봉동상이 모셔져 있고 책서랍에는 뢰봉에 관한 서저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선전란에는 뢰봉학습 여러가지 활동장면을 찍은 사진과 설명이 부가 되여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신선한 장면이였다. 내가 이처럼 잘 꾸며진  뢰봉학습활동실을 보기는 처음 이였다.        보매 국가세무국에서는 뢰봉학습과 실천활동을 아주 정규적으로 쭉 이어온것이다. 선전자료를 펼쳐보니 뢰봉학습과 지원자활동은 국가세무국의 명품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2017년3월 국가세무국은 영광스럽게도 중공중앙선전부에서 발급한 뢰봉학습 국가급최고 영예인 "전국뢰봉따라배우기활동시범기지"영예를 취득했다.  그리고2018년5월에는 길림성문명판공실 길림성지원자복무련합회로부터제7기 길림성우수지원자봉사조직표병칭호를 수여받았다. 또한 2016년9월에는 중국사회복리기금회뢰봉학습기금관리위원회로주터 "뢰봉학습교육기지"영예를 수여 받기도 했다.        이처럼 중앙과 성의 굵직굵직한 영예를 취득하기까지는 국가세무국 지도부와 전체 간부들의 끊임 없는 노력과 헌신을 갈라 놓을수 없다. 이런 영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는 단위의 한개 성원으로 된데 대하여 나는 자호감을 느끼는 동시에 깊은 사명감을 받았다.        올해 3월5일 모주석께서 "뢰봉을 따라배우자"는 제사를 쓰신지56주년을 기념하여  단위에서는 계통회의를 열고 전주세무계통"뢰봉학습"과"뢰봉학습"지원자 복무활동 가동식을 가지였다. 회의에서는 또 "뢰봉학습"지원자 11개단위들에"뢰봉학습"지원자기발을 수여하였다. 주국국장의 손에서 지원자기발을 넘겨 받는 기층단위의 령도들 얼굴에는 근엄한 기색이 어리였다. 해야할 일들은 많고 표준이 높았다.          전주국가세무계통에서 뢰봉학습활동을 전개해온지 오래다. 그러다가2015년  연변주국가세국과 주문명판공실에서는 련합으로《연변주국가세무국“뢰봉학습”활동실시방안》을 발부하여 전주국가세무계통내에서 뢰봉서적을 읽고 뢰봉영화를 보고 뢰봉발자취를 밟고 뢰봉을 따라배워 좋은 일을 하고 뢰봉학습감상을 말하고 뢰봉학습표병을 학습하는등 10가지 활동을 벌여  전주범위내에서 뢰봉학습 새고조를 일으키였다. 방안의 실시와 더불어 계통내에서는 세무특징이 돌출하고 효과가 현저한 여러가지 활동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였다.          습근평총서기는" 뢰봉은 한개시대의 모범이며 뢰봉정신은 영원한 것이다. 뢰봉정신을 학습함에 있어서 숭고한 리상신념과 도덕품질에 대한추구를 일상 공작과 생활에 융합시켜 자기의 사업터에서 하나의 영원히 녹쓸지 않는 라사못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국가세무총국 연변주세무국의 뢰봉학습활동은 계속하여 전개될것이며 뢰봉정신은 새시대 세무일군들을 고무격려하여 더욱 휘황한 성과를 취득하게 할것이다.
49    식중독과 혈육의정 댓글:  조회:952  추천:0  2019-04-15
 식중독과 혈육의정        식중독이라면 보통 여름에 발생하는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무더운 여름날에 음식물이 쉽게 부패하여 질수있기 때문이다.  하여 집단화식을 하는 단위들에서는 음식물위생에 대하여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된다.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큰 사건으로 번질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 어느 주말이였다. 늦은 오후 북경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설사한다는 것이다. 하여 정심에 뭘 먹었냐고 물으니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고 한다. 직감적으로 음식중독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달하는 음식들이 위생조건이 열악하다고 신문보도에 나있었다.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말했으나 아들은 좀 지나면 낫겠지하며 말 안듣는다.       저녁이 지나서부터는 지탱하기 힘든가 보다. 같은 침실에 있는 친구들은 외출중이라 혼자있다고 한다. 너무 고통스러웠던지 북경에 있는 고모한테 전화했다고 한다. 나의 누님은 퇴직하고 북경에서   외손자를 봐주고 있었다. 조카의 전하를 받고 누님은 인차 학교로 달려갔다.      병원에가서 병보이고 닝게르 맞고 하니 한밤중이 되였다. 병세는 호전되였다. 엄마가 화상전화하니 아들은 웃는 얼굴로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밤도 깊고 시름을 놓지못한 누님은 아들애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고모가 북경에 있으니 얼마나 도움이 되고 시름놓이는지 모른다.       그런데 설을 지나 얼마 안되여 우리 부부도 식중독의 고배를 마시게 되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였다. 정심을 집에서 먹고난 나는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오후쯤 되였을때 속이 메쓰거워졌다. 이상하다 하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점점 더 심해진다.    몇번 토했는데도 끝이 없다.   헌데 안해도 토한다. 야단이 났다.  번갈아가면서 토하다보니 맥이 나른해지고 병원에갈 힘도 없다. 어떻게 할가. 필경 음식에 문제가 생긴것이다.       나는 형님한테 전화를 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전화받은 형님은 인츰 우리집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뭐고뭐고해도 어려움에 봉착하면 처음 생각나는것이 혈육이고 형제다. 좀 지나 형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구급차를 련락해가지고 오겠다 한다. 나는 아직 그정도는 아니니 같이 병원에 가면 될것같다고 말했다.          형님의 집은 223병원부근이고 우리집은 체육장근처다. 연길 제일끝에서 다른 한끝으로 이동해오는것이다. 형님이 우리집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부부가 모두 맥없이 쓰러진 상태였다.        형님과 형수님은 우리를 택시에 앉히고  연변제2병원으로 향했다. 구급실에가서 의사를 보이였다. 약을 받고 주사실까지 가니 힘이없다. 한사람이 닝게르 3병맞고 나서야 조금씩 제상태로 돌아오는것 같았다.       형님과 형수님은 우리를 주사실에 눕혀 놓고 돈물려 간다 약받으러 간다 하며 달아다니였다. 닝게르맞는 과정에는  또 약수 사러 간다 휴지 사러 간다하며 바삐 보내였다.       제하사람으로서 참 미안한 일이였다.  나와 안해가 연신 감사하다고 어디 련락할데가 맞같지 않아서 전화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형님말씀이 이럴때 전화해야지 언제 전화하겠느냐 늦어지면 큰일 날번했다고 말씀한다. 형수님도 형제끼리 뭐 미안할것이 있냐며 의사처방대로 약을 제때에 복용하라고 말씀하였다.        혈육의정이란 이런것이다. 누가 아프면 달려오고 누가 힘들면 도와 주고 하나라도 더 해주지 못해서 안달아해하는 마음 그자체다. 독자들은  당신 형제들에 대한 자랑이 아니냐고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은  확실히 화목하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신지30여년이 지났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상의하고 서로 돕고 아낀다. 하기에 조카들도 부모님들의 교육을 받아 자기들끼리 사이 좋게 보내고 또 꾸밈이없이 가꾸어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48    369시장 댓글:  조회:1003  추천:0  2019-04-14
 369시장         연길에는 369시장이있다.  매달 3자 6 자 9자가 들어가는 날 장을 연다고 붙인 이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내에는 매일 보는 장도 많은데 하필이면 369시장이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369시장이름 전칭(全称)이 369농무(农贸)시장이다. 장이 서게된 주되는 원인이 농촌에서 온 장군들을 돌보기 위해서다.      농촌사람들이 시내에 들어가 장 볼려면 자리가 없다. 시장안에는 매대가 다 고정되였다. 그렇다고 길거리에 앉으려면 성시관리인원들에게 쫓겨 다녀야 한다. 시장 성립초기에는 파는 사람들이나 사는 사람들이나 농촌사람들이 위주였는데  지금은 많이 변하였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도시사람 위주다. 그러나 특수품목  이를테면 과일나무  백양나무  경관나무묘목이던지 다량의 채소묘를 판다던지 농기구 쟁기를 파는 곳은 369시장이 거의 유일한 상황이다.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장마당이다.      369시장은 원래 대흥로이북 연길강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장마당은 평소에는 공터로 방치 되였다가 장날에만 장터로 사용되고 이었다. 헌데 오늘 가보니 369시장이 주요하게 삼꽃거리에 자리 하고 있었다. 잠시 이사를 했는지 아니면 쭉 이렇게 할 건지는 모르겠다. 다시 말해 요지음은 연북로와 대흥로사이 삼꽃거리를 차지하고 장을 본다.      평소에 넓게 보이던 삼꽃거리는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로 하여 복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스피커로 자기 물건을 홍보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목피줄에 힘을 넣어가며 사구려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물통우에 올라서서 고함치기도 한다. 물건파는 사람들은 손짓발짓 해가며  자기물건 홍보에 혼신을 다한다. 진짜로 영화배우가 따로 없다.        369시장이 번성하는 주요인소를 본다면우선 교통이 우월하다. 자가용이 보급되는 요지음 교통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연길사람들은 장에 다녀도 차를 운전하고 다닌다. 이전에 들은 말인데 웬아낙네가 빨래함지를 이고 나오더니 5원주고 택시 타고 빨래터로 가더란다.           369시장이 원래는 치벽한 곳으로 여겨지였지만 도시의 확장과 더부러 지금은 교통이 많이 편리하여 지척으로 느껴진다. 애단로로 진입해도 되고 삼꽃거리로 진입해도 된다. 웬만한 인파로 해서는 차도가 막힌다던가 인행이  불편을 겪을 일이 없다.        둘째로 시내와 거의 붙어 있어 거리가 가깝다. 걸어 가도 별반 부담 없는 거리다. 장에 다니는 멋중의 하나가 시간을 늘게 잡고 여기저기 구경도하고 구입도 하는것이다. 그러니 시장주변의 주민들에게는 딱히 물건구입이라기 보다도 구경거리 놀거리 먹을거리 듣을 거리의 집산지(集散地)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 할같다. 만일 369시장이 없어진다면 연길시민들은 좋은 생활의 한 모퉁이를 잃을거 같다             시장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도 많고 사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구경군들은 더욱 많다. 시장주변이 주민구역이다 보니 자가용이다 뻐스다 장사군차량이다그저 북적거리기만 한다. 자동차 나팔소리는 끝힐새도 없다. 멀리에서 바라보면 사람들 행렬이 마치 꿈틀거리는  룡같다.  어디서 이많는 사람이 나왔는지 알수조차 없다.        물건들을 두루 살펴보니 육류 면식류 채소류 과일류 옷가지 신발 잡화농기구따위가 위주다. 이전에는 시장을 여러가지 전문구역으로 나누어놓고  물건판매를 하더니 오늘은 그런 규정이 잘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유장터다. 앉기 싶은 대로 앉은 같다.        고기류를 볼진대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바다고기  민물고기 건어 말린 새우며 별라별 고기가 다 있다. 심지어 얼린 뀅이라던지 산림돼지 고기도 팔리고 있었다. 지금은 물건이 풍부하여 돈만주면 아무때건 먹고 싶은 고기를 다 살수있다. 진짜로 고양이뿔 빼고는 없는 것이 없다.        채소류를 볼진대 지난해가을에 걷우어들인 감자 무우 배추등이 보이는가 하면 온상에서 나온 오이 도마도 가지 고추 부추 상추등이 보인다.  감자는 알이 얼마나큰지 한알에 한근 넘어갈듯 하다. 농들이 감자  무우  양파등 지난해 수확한 채소들을 빠른 시일안에 처리못하면 손해다. 싹이나면 버려야기 때문이다.           369장마당은 자기로서의 특점이 있다. 첫째로 가격대가 저렴하다. 내가 터밭을 붙이 노라니 고추묘 가지묘며 여러가지 남새묘를 사는 일이 종종 있다. 수상시장에서 한포기에 50전하는 고추묘를 여가서는 30전이면 살수있다. 둘째로 구경거리가 많다. 지금 가정성원이 적어 웬만한 채소를 구입하는데 슈퍼나 전문시장이나 돈이 별반 차이가 없다. 허나 어떤이들은 장터를 선호한다. 369시장의  고객의 년령구조를 보면 알수있는데 젊은 축은 없고 중장년대가 위주다. 어찌 보면 과거 장터에 대한 애수가 작용한 것이다. 셋째로 농촌생산에 필요한 도구라던지 씨앗같은것들이 집중되여 있다. 하여 369시장에서 많은 일을 해결 볼수있다. 물건 구입도라고 정심도 해결하고 이런 재미도 안해본 사람은 모른다.        앞으로369시장이 연길의 특색시장으로  자리매김 하기를 바란다. 외지에서 친구가 오거나 손님이오면 구경도 하고 자랑도 할수 있게 말이다. 더욱 북적거리고 상품이 넘쳐나고  즐거운 비명소리가 들리는 시장이 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3월상순 연길
47    봄 그리고 꽃 댓글:  조회:871  추천:0  2019-04-13
 봄 그리고 꽃          봄이 왔다. 산에도 들에도 봄이 왔다. 여러가지 꽃들이 다투어 피여 나는 봄이다. 내가 관찰해 본데 의하면 목본(木本)식물은 대체로 꽃이 먼저 피고 잎사귀가 나오는것과 잎사귀가 먼저 나오고 후에 꽃이 피는 것으로 나뉜다. 나는 꽃이 피는 봄이 좋다. 비록 화기(花期)가 짧더라도 말이다. 사꾸라꽃의 매력은 순간에 피였다 지는 미(美)라고도 하지 않는가.       내가 사평시 이통현 초피구에 위치한 계통학습기지(基地)에 온지도 꼭 한주일이되였다. 봉페식으로 운영되는 기지는 요구 또한 엄격하기로 이름 있다. 특수한 사유가 없이는 대문밖을 나갈 수도 없고 청가하기란 더욱 어림도 없다. 기지에 상점이 설치되여 있지만 술을 팔지 않는다.      이곳의 생활과 학습은 아주 규칙적이다. 번화한 도시의 사업터를 떠나서 고적한 산골에 들어와 학습하는것도 어찌보면 조직에서 하사한 향수라 하겠다.     간단한 생활일수록 사람들은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또 거기서 그 무엇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아침이면 나는 등산길에 오른다. 산에서는 이름모를 여러 종류의 새울음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 온다. 수업중간 휴식시간이면 호수가에 나와 물고기 떼가 노니는것을 볼수도 있다. 오후에는  기지의 오솔길을 걷는다.       갓싹이 올라온 잡초들은 푸른 잎사귀를 한껏 뽐낸다. 이곳 산과 들이 아직 옅은 록색을 보여주는 마당에 잡초들만이 대지에 활발한 생명을 자랑한다. 허리 굽혀 풀 한포기를 뽑아 손바닥에 올려 놓고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잎은 몇개가 나왔고 뿌리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그것이 궁금하여서다. 얼었던 자연은 점점 생기를 찿고 있고 절기(节气)는 바야흐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골안에 있어도 현대문명 의 힘을 입어 세상 어디 소식도 다 잘 알아 보고 있다. 위챗의 막강한 힘이 지구덩이를 한개 마을로 만들어 놓았다. 올세는  자기만 노력하면 세상끝 어디 소식이라도 알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다.         꽃소식이 유난히 많다.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 하겠다. 위챗에 오른 이름을 모를 여러가지 아름다운 꽃사진을 감상하노라면 마치 자기도 꽃속에 묻혀 있는듯 한 느낌이다. 우리 동사자들은 사꾸라꽃 볼려고 일본에 다녀 오기도 했다.  몇해전 우리 부부는  무한대학울안에 사꾸라가 유명하다고 하여 찿아 갔는데 시기를 놓혀 잠화(残花 )만을 감상하고 돌아 와야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렇듯 사람들은 꽃을 좋아 한다.        이쯤이면 연길장백로의 복숭아꽃이 만발해있을 것이다. 연분홍색의 복숭아꽃은 장백로를 환상의 거리로 변신시킨다.  차를 운전하고 그 속을 달리노라면 마음마저  즐겁고 행복해진다. 겨우내 컴컴하고 비좁아 보였던 차도(车道)는 환하고 넓게 변한 느낌이고 향기 풍기는 꽃길은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연변으로 말하면 제일먼 저 피는 꽃이황화(黄花)다. 전에 예술극장울안에 많이 있었다. 다음으로 살구꽃이다. 우리 연변의 산들에는 개살구 나무가 많이 서식되여 있다. 수수하나 마음을 사로 잡는 꽃이다. 꽃피는 마을이라고 말할진대 내판단에는 그꽃이 바로 살구꽃이다. 살구나무는 마을에도 자리지만 산에는 더욱 많다. 살구꽃피는 계절이되면 산은 새하얗게 변한다. 마치 흰구름이 내려앉은것 같은 느낌이다. 살구나무는 꽃봉우리가 붉은색을 띠는 원인으로 어느정도의 분홍빛도 띠고있다.     내가 사는 고향은   꽃피는 마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살구꽃이 떨어 질때면 진달래꽃이 피여난다. 진달래는 연변의 주화(州花 )다.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 꽃이다. 요지음 생활수준의 제고로 많은 사람들이 자가용을 운전하여 꽃구경에 나서고 있다. 진달래가 붉게 피는 계절이면 산에는 꽃구경에 나선 사람들로 가득하다. 연길동쪽에 위치한 하룡촌이라던가 성자산에는 진달래가 가득피여나고 있다. 엷은 꽃잎은 바람에 하느작이고 무더기로 피여난 진달래는 봄놀이에 나선 사람들을 반긴다.         다음으로 피여나는것이 배꽃이다. 룡정에는 아세아에서 제일큰 만무과원이 있다. 룡정정부에서는 배꽃절을 만들어 손님을 끌어들이고 있다. 배꽃절이면 연출도 하고 음식거리도 만들어 룡정을 대내외에 홍보하기에 혼신을 다 한다. 즉 정부가 무대를 만들고 기업이 춤을 추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항목건설사업인 것이다.  남들은 유채꽃절이니 살구꽃절도 만들라니 우리라고 뒤져서야 될말인가.         꽃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식물 본체로 말할진대 꽃이 피는것은 대를 이어나가기 위한 수단이다. 비록 꽃이 피지않고 과일을 맺는 식물도 있지만 말이다. 꽃은 수분을 하여야 열매를 맺는다. 전에 집 화분에 딸기를 심은 적이 있었다. 잎도 푸르고 자람새도 좋다만 꽃이 피여도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 하여 꽃에 수분을 하여주었더니 글쎄 딸기가 열리는 것이였다.         꽃이 있음으로 하여 식물은 대를 잇고 열매를 맺는다. 자연에 꽃이 있음으로 하여 꿀벌은 꿀을 채집 할 수 있고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달콤한 당분을 흡취 할 수 있다.            봄과 꽃은 련결되여 있다. 봄은 시작을 알리고 꽃은 열매를 련상시킨다. 사람들은 청춘을 꽃에 비유라기도 한다. 그만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청춘이기 때문이리라. 꽃이 있음으로하여 자연은 더욱 아름답고 꽃이 있음으로하여 사람들은 더욱 생활을 사랑하는것이 아닐까.
46    녀성은 꽃이라네 댓글:  조회:1191  추천:0  2019-03-03
녀성은 꽃이라네          3. 8국제부녀절이 다가온다. 연변으로 말하면 3. 8절은 대단히 중요한 명절이다. 녀성들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남성들도 기다리는 명절이다. 6. 1절과 3. 8절은 가히 연변특색의 중대명절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것은 어린이를 사랑하고 녀성을 존중하는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과 갈라 놓을수 없다. 허나 다른 지방에서는 3. 8절의 중요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과거에 먼곳는 그만두고 장춘쯤하여도 3. 8부녀절이란 개념이 없다. 지금도 기껏하여야 영화나 관람하고 반날 휴식시키면 ok다.     "녀성은 꽃이라네     생활의 꽃이라네    한가정 아뜰살뜰    돌보는 꽃이라네    정다운 안해여 누나여    그대들 없다면    생활의 한자리가    비여있으리"        꽃의 명절인데 가만 있을 수 없다. 우리 동창들도 3. 8절을 쇤다. 이것이 아마 불문률이 된 것 같다. 응당 그러니 한다. 내일 모임을 가진다는 통지를 받은지 며칠된다. 3. 8절 경축활동은 3. 8절 앞뒤로 쭈욱  이어지는데 상가들은 대단히 반기는 기색이다. 전에는 단위에서도 식사를 안배하였지만 8항규정이 나온 뒤로는 모두 취소되였다. 하지만 민간단체들에서는 거개행사를 조직하는 편이다. 식사안배는 물론 노래방까지는 기본이다.         어떤 부서에는 녀성이 한분 밖에 없지만 그래도 3. 8절을 쇤다. 오히려 한명밖에 안되기 때문에 더욱 소홀히 대할 수 없다고 한다. 녀성이 한명도 없는 부서에서는 다른 부서의 녀성들을 청하여 명절을 쇠는 경우도 있다. 딱히 명절을 쇤다기 보다는 이런행사를 통하여 녀성들을  관심하고 녀성들을 존중하는 사회적기풍을 조성하자는 의도가 내포되여 있다. 그밖에도 명절행사를 조직함으로써 사람들지간의 료해를 증진하고 우의를 깊이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3. 8절 당일 많은 가정에서는 남편이 밥을 짓고 료리를 함으로써 단 하루라도 안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달한다. 녀성들이 가정에서의 작용은 너무도 중요하다. 어린이를 양육하고 교육을 책임지고 집안의 큰일 작은일 모두 녀성들이 맡아한다. 농촌이라면 남자들이 나무도 하고 장작을 패고 집수리도 하겠지만 도시생활중에 집안에 무거운 일이라고는 별로 없다. 웃으개 소리지만 집안의 힘든 일은  남자들 몫이라고 한다. 헌데 온 일년치고 힘든 일이 한번도 없단다.        중국으로 말할진대 5. 4운동을 계기로하여 녀성들의 사회적직위가 높아지게 되였다.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녀성들의 작용이 점점 두드러지게 되였다. 사회각분야에서 활약하는 녀성들이 증가되는 추세다. 모택동주석께서는 녀성을 절반하늘이라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과거에 우리민족의 녀성들은 너무도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격어왔다. 고달픈 생활고를 이겨내야했고 자식들을 먹여살려야 했다. 집에서는 한밥상에도 같이 못앉아 식사하는 불평등도 받아 내였다. 농촌으로 말할진대 수전농사는 녀성들위주의 농사다. 차거운 물에들어서 벼모를 뜨고 묘를 꼽고 기음을 매고 어느 하나 녀성들의 손이가지 않은 일이 없다. 가을하고 탈곡하고 허리가 휘여진다. 과거에 우리 민족녀성들이 타민족에 비하여 일찍히 허리가휘는 원인이 벼농사와 집적적 련관이 있다. 나의 어머님은61세에 돌아가시였는데 너무 일하시여 허리가 휘였다. 고생 고생하시다 락을 못 보시고 너무 일찍 돌아가시였다.        전세기 90년대초에 한국드라마"사랑이 뭐길래"가 방송되였다. 대발이 아버지같은 대남자주의 남성도 후에는 집에서 밥도하고 애기도 봐주는 자상한 남편으로 변하였다. 헌데 요지음 다른 한 극단으로 나가는 현상이 있다. 녀자애들이 세고 남자애들이 약하다. 맥주집에 가면 젊은 녀자들끼리 술하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술이 얼근하게 되면 소리도 높고 행동거지도 곱지 않다. 녀성들끼리 못 신다는 법은  없지만 어째든 남자들 취한것 보다도 더 보기 안 좋다.        녀성들의 사회적직위는 목소리 높혀서 얻은 것도 아니고 억지를 부려 얻은건 더욱 아니다. 현재 많은 직장에서 녀성들은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올려 뭇 사람들의 존중과 긍정을 받고 있다. 녀성특유의 섬세함으로하여 교육 의료 금융등분야에서 좋은 업적을 쌓고있다. 정계에서도 녀성지도자들이 적지않다.         명절의 의미는 결코 먹고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자리을 마련하여 녀성들에게 명절의 축하를 표시함과 더불어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녀성들에 대한 존중과 감사와 지지가 더욱 중요하다.        공존하는 시대 우리가 갗추어야할 자세는 높은 차원에서의 남녀평등이다. 처처에서 녀성을 우대하고 녀성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녀성들의 꿈을 이루겠끔 온 사회가 도와주는 것이다.                                                                                                                                                2019. 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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