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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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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숙명처럼 찾아든 문학(대담)
2019년 07월 11일 14시 09분  조회:289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숙명처럼 찾아든 문학

하영
 

초대작가: 우광훈(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전임 부주석)

진행자: 하영(《도라지》잡지사 전임 주필)

일시: 2017년 12월 23일 

 

 

하영: 안녕하세요? 우광훈작가님. 그동안 수없이 만났었지만 문학대담이라는 형식으로 마주하고 보니 반가운 마음이 훨씬 크네요. 얼마 전에 한국에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은퇴 후에도 우리 문학을 위해 애를 쓰시고 유익한 도움을 주시는 선생님께 진정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훌륭한 작품을 많이 쓰시여 우리 문단의 주력으로서 중견역할을 톡톡히 해오신 선생님, 오늘은 선생님의 문학인생과 창작성과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우광훈: 네, 저도 그래요. 반갑습니다.

하영: 이번 대담을 준비하기 위해 선생님의 문학인생을 살펴보는 동안 내내 가슴이 먹먹해나고 눈가가 젖어왔어요. 마음이 많이 아팠다구요. 늘 밝으시고 유머적이시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분위기를 띄워주시는 선생님의 안에 그토록 큰 아픔이 있었을지 어찌 알았겠어요. 그런 상처를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운명처럼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조여왔던 비운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선생님은 더 ‘즐거워야’ 했고 더 ‘밝아야’ 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자신의 동년을 선생님은 회색으로 단정지으시죠. 사실 처음부터 회색이였던 건 아닙니다. 연길이라는 도회지에서 6남매의 막내로, 그것도 부친이 출판사에서 번역전문가로 일하시는 지식인 가정에서 태여난 출신 자체는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분홍빛이였어요. 그러나 1954년에 태여나 한창 재롱 부리며 행복하게 자라야 할 무렵인 1958년, 선생님의 가족에는 청천벽력 같은 비운이 떨어집니다. 아버지에게 ‘우파분자’라는 모자가 덜컥 씌워졌고 직장에 다닐 자격을 박탈당한 아버지는 훈춘 로동개조농장에 가시게 되였죠.

우광훈: ‘회색의 동년’이라는 말은 그 시기를 살았던 많은 동년들의 시대적인 현실이기도 했어요. 많은 동년들은 태여나서부터 굶주려야 했고 뭐든 배가 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사회인 줄로 알고 있었지요. 사실 ‘밝아야’ 하고 ‘즐거워야’ 한다는 의미로 볼 때 아직 세상을 깨우치지 못한 천성적인 천진함과 순진함이 없은 것은 아니였습니다. 다행인지도 모르지요. 했기에 그런 동년에도 추억할 만한 순간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우파’라는 모자를 쓰고 로동개조농장에 가시자 저희 식구들은 생활난으로 하여 다섯곳으로 흩어져 살아야 했어요. 풍비박산이라는 말이 이런 건지 모르겠네요. 그 때 저와 저의 셋째누님은 심양의 소가툰에서 살던 외가집으로 갔었구요.

하영: 선생님은 동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그나마 외가에서 살던 시절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파분자 가족’이라는 딱지가 붙었음에도 아직 개구쟁이였던 어린 선생님은 불운이란 게 무엇인지 알지를 못했던 거죠. 그 시기에 3년 대기근까지 시작되였지만 외가의 사랑을 독차지한 선생님은 배고픔이란 걸 몰랐고 그냥 ‘사랑이 듬뿍’이라는 표현을 써도 걸맞을 가장 행복한 시절이였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의 3년 생활이 후날 선생님에게는 향수와 같은 정서가 되였구요. 최병우교수는 “자신의 기억에 따스함으로 남아있는 자연의 공간인 외가의 기억은 우광훈소설에서 고향에 가까운 이미지로 등장한다.”고 했어요. 때묻지 않은 자연 속의 아름답고 순수한 외가는 가장 원초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였고 선생님에게는 곧 고향이자 그리움이였죠.

우광훈: 외가에서 지낸 3년은 저로 말하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였어요. 외가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그 때 이미 홀로 난 큰이모와 이모의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의 기억에 외할아버지는 여위신 편이였으나 장대하고 외할머니는 작달막한 키에 언제 한번 큰소리 하지 않으시는 인자한 분이셨어요. 외할아버지는 어린 저를 데리고 강으로 나가 고기도 잡으셨고 습지에 가 골뱅이도 건졌어요. 외할아버지의 옷자락을 잡고 야시장에 나가 외할아버지가 산에서 뜯어온 머루를 팔고 강에서 잡은 물고기나 골뱅이를 파는 것을 동무하기도 했죠. 물론 장에서 번 돈으로 사주는 사탕이나 과자, 놀이감에 기대가 더 컸었구요. 외할아버지와 함께 야외로 나가면 들에는 벼밭이 있었고 련못에는 련꽃들이 피여있기도 했어요. 그리고 심양과 단동을 오가는 기차들이 으르렁거리는 것도 볼 수 있었구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선반 우에는 항상 저의 몫으로 감추어둔 사과나 배 반쪽이 있었고 사탕 몇알, 과자 몇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외가는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포근하고 사랑과 인자함으로 가득한 항만에 다름 아니였어요. 지금도 외가의 풍경은 한폭의 동양화로 저의 기억에 살아있습니다. 아마 그런 기억들이 저의 문학에서 표현되는 자연에 대한 숭배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는지 모르겠네요.

하영: 부모님이 계시는 연길로 돌아온 어린 선생님은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고 그로부터 ‘우파 자식’으로서의 외로움이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훈춘에 있는 로동개조농장에 계셨고 식구들은 3년재해로 주린 창자를 안고 살아야 했으며 더우기는 우파의 자식이라는 딱지를 쓰고 어린 마음에 그 무거운 과부하를 견디며 공부를 하고 글을 깨우쳐야 했죠. 아버지의 불운은 ‘우파분자’ 하나로 끝나지 않으셨어요. 문화혁명기간에는 또 ‘5류분자’로 지목되여 매일 투쟁받는 고투를 치러야 했고 그 바람에 어린 선생님은 기가 죽을 대로 죽어있었다죠. 그 후 중학생이 된 선생님은 ‘우파분자’의 아들이라는 리유로 학교선전대에서도 자격을 박탈당하고 제명되기까지 했었어요. 한창 천진란만하게 뛰여놀고 맑은 눈으로 세상만물을 익혀야 할 나이에 선생님에게는 너무도 일찍 짙은 회색이 찾아들었습니다.

우광훈: 연길에 돌아와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동년은 끝났다고 해야겠죠. 더우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소년으로서는 경험하지 말아야 할 정치운동의 참혹한 현실을 감내해야 했어요. 그 때 이미 ‘우파’의 모자를 벗었던 아버지였지만 출판사의 사무실에 마련된 ‘감옥’이 아닌 ‘감옥’에서 족쇄를 차고 격리돼야 했습니다. 매일 하루 세끼 밥을 나르는 일은 아직 어려서 ‘문화대혁명’에 가담하지 못하는 저의 넷째누님과 저의 몫이 되였어요. 십여리가 되는 길을 걸어서 하루 세번 왕복하게 되면 어린 나이에 지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도시락을 가지고 가서 어른들로부터 받는 수모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도시락이라고 해봐야 수수밥에 김치 몇쪼각이 고작이건만 그것을 감시하는 어른들은 밥 속에 종이쪽지나 ‘반혁명적’인 뭔가 있나 살피려고 저가락으로 꾹꾹 찔러보며 증오와 멸시로 가득찬 눈으로 노려보는데 그 눈길을 저는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어요. 인간에게, 그것도 그 시대 지식인의 눈에 그런 동물적인 눈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말입니다. 

하영: 도시에서, 그것도 조선족 집거구인 연길에서의 ‘문화대혁명’은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심각하고 치렬했던 것 같아요. 전쟁을 방불케 하는 돌싸움, 창칼싸움, 총싸움에 관한 얘기는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받는 모습이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던 저에게는 많이 생소한 것이였어요. 그만큼 선생님이 받은, 사회로부터 오는 피해도 엄청 컸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는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공부를 못한 것이겠죠. 학교는 지어 문을 닫고 학업을 중단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우광훈: 그래요. ‘문화대혁명’은 저의 인생의 행적을 결정하는 계기라고 할 수 있어요. 소학교 5학년 후학기부터 ‘문화대혁명’이 터졌고 그 때로부터 학업은 중단되였어요. 우리 또래들은 고삐가 풀린 망아지가 된 셈이지요. 어린 소년으로서는 경험하지 말아야 할 경험을 하였고 목격하지 말아야 할 참혹한 현실과 현장을 체험했습니다. 투쟁대회를 하면서 사람을 때려죽이는 자리에서 구호를 웨쳐댔고 자살을 한 사람, 총에 맞아 죽은 사람,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을 구경하러 다니기도 했어요. 연길의 ‘문화대혁명’이 가렬화되면서 총싸움으로 번졌고 열두세살이였던 저는 기관총, 99식보총, 38식 일본보총, 신형의 54식보총의 소리를 듣고도 무슨 총인가를 가려들을 수 있었어요. 무서운 현실이였죠.

하영: 그런 란리 속에서 소외까지 당했지만 다행히도 어린 선생님은 오히려 독서를 하며 외로움을 달랬다죠. 다른 친구애들이 재미나게 노는 시간에 선생님은 집에서 아동소설이나 과학서적에 심취해있었고 학교가 싫어지던 중학교시절에는 성인문학작품을 읽으며 사춘기에 들어섰다고 하셨어요.

우광훈: 아버지가 출판사에서 근무했던 덕으로 어려서부터 독서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습니다. 그런데다 우에 누님들과 형들이 있었기에 성인을 대상으로 한 책들이 많았고 과학서들이 많았어요. 《취미의 물리학》, 《취미의 수학》과 같은 책들이 있었고 《무엇때문에》라는 책들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죠. 뉴톤, 아인슈타인, 피다고라스와 같은 과학자들이나 수학자들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요. 책을 읽고는 여름밤 밖에 나가 북극성이나 안타레스 별을 찾기도 했고 별자리를 찾기도 했어요. 특히 물리학이 그토록 재미있었습니다. 만약 ‘문화대혁명’이 아니였다면 저는 물리학자가 되였거나 어디선가 물리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영: 그 후 문 닫았던 학교들이 수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그러나 겨우 1년이 좀더 지나 선생님은 다시 ‘하방’을 하는 가족을 따라 돈화현 쟈피꺼우夹皮沟라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백여호 되는 한족마을에서 언어도 안 통하는 마을사람들과 낯선 농촌생활을 어떻게 하였는지 생각만 해도 막막해나네요. 그 곳에서도 공부의 기회는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선생님은 학업을 그만두었다죠.

배움에 갈했던 선생님은 아마 그래서 몇십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조선족 마을의 집체호로 뻔질나게 찾아다니며 그 곳에서 문학명작들을 얻어 걸탐스레 읽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서서히 문학이 가져다주는 희미한 열망에 매료되였나봐요.

우광훈: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후학기에 아버지가 돈화현 마호공사 쟈피꺼우대대로 ‘하방’을 하게 됩니다. 그 때가 1969년 12월 13일이였어요. 이듬해 학교를 다니겠다고 공사로 갔더니 조선족학교는 중학교가 없고 소학교만 있었어요. 중학교를 다니려면 30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했고 공사의 소학교에 입학한다고 해도 역시 매일 왕복 40리를 걸어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때이르게 하향지식청년이 된 거죠. 

다행히 그 때 농촌에는 옛날 책들이 더러 남아있었어요. 도시에서는 ‘네가지 낡은 것을 타파’한다고 책이라는 책은 몽땅 불살라버렸지만 농촌에서는 그 여파가 심하지 않은 셈이죠. 그 때 단행본으로 된 《햄리트》, 《뿌쉬낀선집》 그리고 모파쌍, 뚜르게네브, 파금과 같은 작가들의 책을 얻어볼 수 있었어요. 감수성이 싹트기 시작하는 시기라 그런 책들이 ‘독초’라는 느낌보다는 책 속의 주인공들한테 매료되였습니다. 아마 문학인으로 되는 첫 시작일 수도 있겠죠. 당시 자신이 감지하지는 못했지만. 책이 많지 않았던 시기라 많은 책들은 아예 외워버리기도 했어요. 특히 《햄리트》는 그대로 외워서 집체호의 친구들과 내기를 하기도 했구요. 

하영: 세계명작을 외울 수 있었다니 정말 대단한 총기와 실력이십니다. 또한 문학을 향한 뜨거운 끌림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네요.

그 시기, 선생님에게 하나의 ‘사건’이 생깁니다. 다름아닌 ‘첫사랑’!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다 있겠지만 그러나 영화 같고 드라마 같은 선생님의 첫사랑은 선생님 인생에 너무나 큰 자리로 남은 것 같아요. 그리고 아픔과 함께 선생님은 보다 성숙해졌지요.

우광훈: 허참, 이건 젊은 시절의 비밀인데… 젊은 날의 저의 초상은 체중 54키로그람에 174센치메터의 키를 가진 마르고 허우적거리는 멋적은 총각이였어요. 그래도 젊음이라는 호기가 있어 그 동네에 살고 있던 한족처녀와 첫사랑에 빠졌습니다. 물론 앞날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 ‘우파’의 아들인 데다 호미자루 같이 생긴 저에게 딸을 맡기려는 부모는 없겠죠. 결국 녀자애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채 강제로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펑펑 울어대는 녀자애를 사람들이 억지로 결혼마차에 들어올렸지요. 아마 그 때에야 저는 저라는 존재가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차린 것 같아요. 사랑의 권리라는 것도 시대적인 상황을 따르는 것이였지요. 

처음에는 그 아픔을 일기로 적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문학적인 표현이 등장하고 이야기들이 엮어지기 시작했죠. 물론 사실에 립각한 것이였지만. 어쩌면 그 때로부터 문학이 꿈이 되여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영: 1974년, 드디여 부친께서 탄광의 총무로 공직을 회복하시며 선생님 가족은 쟈피꺼우를 떠나게 되였고 선생님은 정식으로 하향지식청년의 신분으로 3년간 집체호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1976년 12월에는 지질탐사대의 탐사공으로 인생이 바뀌죠. 어떻게 보면 매일 험한 산과 들을 누비는 고된 작업의 련속이고 또다시 적막하고 고독한 나날이 이어지는 인생일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런 환경 속에 몸 담고 있었기에 복잡한 인간세상을 멀리 떠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자연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며 그것을 원고지에 옮겨놓을 줄 아는 문학청년이 될 수 있었지 않나 싶어요. 

우광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출판사에서 번역편집을 하시던 아버지는 공직회복을 하시면서 연변복동탄광의 남양갱에 총무로 발령받았습니다. 갱목을 통계하고 탄갱에 들어가는 광부들에게 복리로 빵을 나누어주는 일이였어요. 그렇게 되여 저는 그 때의 화룡현 동성공사 흥성10대의 집체호로 가게 되였고 그 곳에서 3년, 후에는 연변석탄지질대의 탐사공으로 들어가 6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집체호에서의 생활은 참담한 시기이기도 했어요. 누구는 도시로 가고 누구는 참군을 하고 누구는 대학으로 추천을 받아 갔으나 저에게는 그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지질대의 탐사공으로 갈 무렵부터 중국의 정치정세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4인방’이 중국의 정치무대에서 물러나면서 아버지께서 억울하게 ‘우파’모자를 썼던 일이 개정을 받았고 1980년에는 출판사에 복귀하셨어요. 말 그대로 시대의 ‘봄’이 온 거죠. 

탐사대의 장막에서 소설을 쓴답시고 나무판자에 원고지를 끼우고 긁적거렸습니다. 사실 그 때 발표된 많은 소설은 그렇게 무릎 우에서 씌여진 것들이였어요. 농촌마을의 골방에서, 수림 속의 나무 밑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죠. 그래도 그 시기는 아름차게 행복한 순간들이였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 그리고 성취감이 있었으니까요. 일은 힘든 일이였습니다. 야외에서 모든 것이 철로 된 기계를 움직이고 공구를 다룬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체력을 필요로 했고 3대거리로 하는 일은 밤과 낮이 따로 없었어요. 그것도 야외에서 말입니다.

하영: 동년배에 비해 선생님은 누구보다 시대의 피해를 많이 받았고 삶이 굴곡적이였어요. 헤밍웨이는 “작가가 되는 선결조건은 소년시절의 고통이다.”라고 했어요. 회색의 동년, 소년시절의 실의감, 빼앗긴 첫사랑으로 선생님은 너무도 일찍 인생의 쓰디쓴 고배를 마시였고 동란시대와 하방생활과 집체호생활을 거치며 세상의 삭막함을 체험했습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비아냥 속에 말수가 적어진 선생님은 결국 소설로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기 시작했죠. 책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과 사색하는 두뇌를 가지게 된 선생님은 쌓인 게 많고 억울한 게 많았던 만큼 한번 보뚝을 터뜨리자 산사태처럼 작품을 쏟아내셨지요. 1978년, 처녀작 단편소설 <탐사대원>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선생님은 이듬해에 단편소설 <외로운 무덤>을 발표하며 곧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하향지식청년시기에 체험한 경력을 제재로 한 <외로운 무덤>은 인위적인 정치운동 속에서 인간사이의 메말라가는 정과 우파분자 자식의 고독과 아픔을 진실하게 그려냈어요. 소설은 국경 30주년 응모작품 소설문학상을 수상하며 깊은 인상을 남기였고 그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소설 <원혼이 된 나>(작자 이름을 모르겠지만), 정세봉선생의 소설 <하고 싶던 말>과 함께 조선족소설사에서 상처문학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기도 하죠. 

우광훈: 저로 말하면 운을 타고 났다고 해야겠지요. 사실 <외로운 무덤>을 발표하자 일약 작가라는 호칭을 얻게 됐으니까. 1979년 6월에 발표된 <원혼이 된 나>와 저의 작품 <외로운 무덤>은 연변에서의 첫 상처문학작품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원혼이 된 나>의 작가는 저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요. 후에 더 작품활동을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작가가 되는 선결조건은 소년시절의 고통이다.” 헤밍웨이의 이 말은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의 필수를 말한 것 같습니다만 작가가 되기 위해 이런 경험을 하라면 저는 천백번이고 다시는 그런 시대가 없었으면 합니다. 

하영: 선생님은 “체험을 바탕으로 해야 소설이 진실성이 부여된다.” 고 주장하셨으며 그러한 자세로 창작에 림하셨어요. 동년기와 소년기, 청년기의 특수한 인생체험이 선생님 소설에 폭 넓게, 진실하게 반영되여있으며 이에 최병우교수는 중한수교 이전에 발표한 선생님의 소설을 외가의 체험, 하방체험, 탐사대원 생활, 한족녀성과의 사랑과 리별… 그 체험별로 주제를 나누어보기도 합니다. 리광일교수는 또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 선생님의 중단편소설을 인간,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살펴보기도 하죠. 리광일교수는 선생님의 소설중 “인간관계에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하향지식청년생활을 제재”로 하였고 “비틀어진 정치문화 속에서 인간은 대립과 충돌의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이런 관계 속에서 인간은 고통을 겪고 비극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였다고 했어요. 또한 “인간, 자연 관계에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탐사대원생활을 제재”로 하였고 작가가 겪었던 인생경력과 많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부류의 작품은 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보여주었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자연관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 자연, 인간관계에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1990년 및 그 이후 작품들로서 자연이 배경이 되면서 그 속에서 인간들이 형성한 여러가지 관계를 보여주었고 그 과정에서 모순, 충돌 및 조화의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으며 결국 작가는 자연 앞에서 인간은 매우 왜소한 것이며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조화라는 것을 시사해준다.”고 했어요.

우광훈: 지금도 저는 사실주의적인 창작방법에 기대고 있어요. 체험한 것들, 경험한 것들만이 가슴 가장 가까이 다가와있습니다. 작품에서 생활의 진실은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저의 작품의 모든 소재는 제가 경험했던 것들과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있어요. 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정치에 의해 소외된 인간형상이라든가 한족들의 형상, 자연들은 바로 이런 생의 체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역시 제가 자연을 많이 쓰게 되는 원인도 돈화의 농촌에 하향했던 곳이 심심산골이였고 지질탐사대원으로 일하면서 다닌 곳 역시 순수한 자연들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영: 창작 초기부터 선생님은 주제의 심각한 발굴과 최하층 인생에 대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세련되고 류창한 언어로 문단의 각광을 받았으며 <시골의 여운>, <메리의 죽음> 등 소설로 수많은 독자군을 가지면서 30대에 벌써 우리 문단에서 중견작가로 부상합니다. 

중편소설 <시골의 여운>(1986)은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시골의 어느 한족마을의 비극과 인정세태를 기본주제로 하면서 자유분방한 문체, 섬세한 세부묘사, 서정성이 강한 일인칭서술, 산문에 가까운 구성 등으로 비교적 풍부한 사회생활을 담고 해당 시기 사회면모와 생태환경을 진실하게 구현하여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어요.

그런가 하면 198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메리의 죽음>은 동물화된 인간화신으로서의 메리가 주인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다했지만 결국 주인의 손에 죽고 마는 비극을 그렸어요. 소설은 농촌에 하향한 지식청년들이 마치 “토끼를 잡은 후에 죽임을 당하는 개의 신세”와 다를 바 없으며 “그들의 부정과 반항을 메리의 운명과 죽음을 통해 은유적으로 폭로”하였다고 보기도 하는데요, 소설은 인간이 아닌 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의 간사한 내면을 해부하고 사악한 리기주의를 타매했으며 여지없이 배반당하고 유린당한 충성심을 슬퍼했습니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비판한 소설은 “다의적인 상징성과 주제의 다층차성 등으로 예술적 매력을 풍기여” 깊은 사상미학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며 많은 호평을 받았지요.

우광훈: 저의 중편소설 <시골의 여운>은 돈화에서 생활한 저의 체험을 가장 집중력 있게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실말이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마다 실생활의 모델들이 있고 작품에 등장하는 개 ‘메리’마저 모델이 있습니다. 만일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생활의 진실이 예술적인 진실로 승화한 매력이 아니겠는가 생각해요. 주인공 소곤이가 죽는 장면을 쓰고 나서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한밤중이였는데 저의 흐느낌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놀라 일어나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소곤이가 죽었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소곤이라 부르는 것을 알고 계신 어머니는 저의 등을 두드리시며 “그래, 울어주라.”고 말씀하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메리의 죽음>을 쓸 때 저는 하향세대보다 그 암울한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들을 더 많이 생각했어요. 인간만이 자기의 리성과 관념으로 자연의 속성과 천성을 짓밟을 수 있지요. 누구는 사랑이 예술의 영원한 주제라고 하지만 저는 이것이 문학의 초심이요 영원한 주제가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부언하지만 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 역시 돈화 시골에서의 5년간 생활이 밑거름이 되여주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영: 창작에서 진실성에 힘입어 작품의 주제를 깊이 파는 한편, 소설의 예술적 기교면에서도 선생님은 남다른 탐구를 해옵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반까지의 선생님 소설은 서정성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며 그것으로 자신의 예술적 경지를 이룹니다. 지어 어떤 소설은 소설 자체가 그대로 한편의 서사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요, 선생님의 자유분방하고 환상적이며 정열적인 시인기질은 서방의 랑만주의문학의 영향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집시와 같은 지질탐사대 생활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도 보고 있어요.

이 시기에 쓴 <아, 그는…>이라는 단편소설은 그 제목부터 진한 서정을 담고 있죠. 소설은 탐사대원의 생활을 소재로 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말했다는 점도 흥미 있지만 우리 문단에서 처음으로 2인칭 수법을 써서 서사학적인 측면에서 실험적이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컸어요. 

그런가 하면 1991년도에 발표한 단편소설 <숙명18호>는 “과학탐구소설”, “소설미학적 의의가 큰 력작”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선생님은 “새로운 소설창작기교로 낡은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 량자를 유기적으로 융합시켜 참신한 양상을 부상”시키였고 자연 속의 인간을 그리여 “천인합일”의 메시지를 전달했어요.

우광훈: 따지고 보면 매 한편의 소설은 성공의 여부를 떠나 새로운 시도의 시작이 아닐 수 없어요. 많은 경우 한편의 소설을 끝내고 다른 한편을 시작하려면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학이 매력적인지도 모르겠구요.

저의 초기소설이 랑만주의적인 요소가 섞인 작품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도 젊음의 작간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문학공부를 하면서 초반에 읽은 작품들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요. 제가 읽은 작품들은 ‘문화대혁명’전에 번역 출판된 외국작품들이 많았어요. 그런데다 그 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로씨야 작품들이 주종이였지요. 뿌쉬낀, 레르몬또브, 쉡첸꼬 그리고 쉐익스피어… 아무튼 그 때 중국에서 조선어로 번역된 외국소설은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시들도 읽고 외웠어요. 《예브게니 오네긴》이나 레르몬또브, 쉡첸꼬의 시들을 모방해 시랍시고 써보기도 했구요. 이런 것들이 저의 서사에서 시적인 냄새를 풍기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때 순수한 우리 민족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유감으로 남아있어요. 민족언어에 대한 공부가 모자란다는 뜻이 되겠구요.

하영: <숙명18호>(1991)를 시작으로 3년 사이에 <숙명 19호>(1992), <숙명 20호>(1993) 등 숙명계렬 소설을 련이어 써내시던 선생님은 중편소설 <가람 건느지 마소>(1995), 단편소설 <락서가 있는 곳>(1996), <귀소>(1997), <악마의 출연료>(1998) 등 소설을 륙속 발표하며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실존주의 소설 실험에 들어갑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들끓던 조선족문학은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이르러 잠잠해졌으며 곤혹과 침체 속에서 모대기던 우리 작가들은 점차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문학본체로의 접근을 더욱 의식적으로 시도했어요. “90년대 문학의 가장 큰 변화는 무명상황 속에서의 개인 창작행위”였으며 “문학은 점차 국가적 언어로부터 개인적 언어로 전이”됩니다. 개체의 정신세계나 인간생명의 원초적인 모습에 대한 발굴이 90년대 문학의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났으며 우리 문학은 보다 개방적인 자세로 공동체의식보다 개체인 ‘나’, 객관세계보다 ‘내 우주’에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모더니즘에 대한 수용도 80년대와 같은 무조건 받아들이고 모방하는 현상에서 벗어나 사실주의를 주축으로 하면서 모더니즘의 여러 요소를 적절하게 수용하여 다의적인 이미지 창조, 주체의 다의성, 구성의 다층차성, 표현수법의 다양화 등으로 퍽 활기를 띠였으며 서술시각의 다양성을 보여주면서 보다 자연스럽고 세련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런 흐름을 타고 90년대 중반부터 선생님은 실존주의소설 실험을 통해 현실적 사회문제를 초월하여 운명의 곤혹, 정신방황을 추적하면서 미망하는 세계 속에서 자아 찾기, 확실성 찾기에 나섰으며 우리 문단에서 모더니즘 창작의 선두주자적 역할을 합니다.

우광훈: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새로운 사상해방이 일어나게 됩니다. 수많은 책들이 서점에 나오기 시작하고 전에는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던 철학, 종교, 인문 서적들이 쏟아져나왔어요. 그 때 처음으로 니체를 읽었고 성경을 읽었고 쇼펜하우를 알게 되였어요. 물론 많은 책들이 있었지요. 그 때 우리 젊은 문인들은 독서에 목숨을 걸었다고 할 만큼 독서에 열을 올렸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나서는 서로에게 추천하고… 그 때를 돌이켜 우리는 “목숨을 걸고 책을 읽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저의 작품의 모티브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독서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사색을 하게 되고 인간과 개인적인 삶을 관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회적인 인간이면서도 개인적인 생명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고 불확실한 운명 앞에서 방황하는 생명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때까지 저희들이 받은 교육은 집단으로서의 개인만 있었을 뿐입니다. 즉 어느 집단의 ‘라사못’이였지요. 그것에 대한 반동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인 생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하면서도 무가내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또 작품을 쓰면서 글쓰기에서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많은 시도를 해봤어요. 언어라든가 문체라든가 구성이라든가 하는 데서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실천을 했었죠.

하영: 2004년 4기부터 《도라지》잡지에 련재하기 시작한 선생님의 장편소설 《흔적》은 그 후 《도라지》 장락주문학상을 수상, 2005년에는 책으로 출간되여 연변작가협회 ‘석화’문학상까지 받기에 이릅니다.

최삼룡 평론가는 “작가는 《흔적》에서 ‘문화대혁명세대’의 정신타락과 신앙위기 그리고 사랑이 죽은 시대에 대한 조명에 필묵을 많이 들였다.”고 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사람들에게 남긴 집단적 트라우마였어요. 그 리념과잉의 시대가 지나간 후 개혁개방의 시대가 되자 급작스럽게 실리가 시대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였고 이런 변화는 리념을 추구하면서 한 시대를 살았던 ‘문화대혁명세대’들이 시대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지요. 최병우교수는 우광훈작가님이 《흔적》에서 개혁개방과 중한수교 이후 조선족사회에 일어난 변화와 ‘문화대혁명’시기의 치렬한 삶과 비극적인 체험이 현재의 삶에 드리운 상흔을 다루었으며 ‘문화대혁명’이라는 트라우마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에게 미치고 있는 상흔의 양상과 그 의미를 밝혀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트라우마의 길고 어두운 턴넬을 벗어나는 길은 ‘문화대혁명’시기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기억하여 정확히 인식하고 그를 통해 진정으로 그 시대를 애도하고 리해하고 사랑하는 데 있다는 깨달음을 소설적으로 보여주었으며 그런 ‘문화대혁명’의 상흔과 치유의 서사는 풍요로우나 고통스러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고 말합니다.

우광훈: ‘문화대혁명’은 인류의 력사에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남을 겁니다. 그 시대를 경험한 우리 세대로서는 그 참상의 흔적을 지울 수 없어요. ‘네가지 낡은 것을 타파’한다는 바람에 문화재라는 문화재는 하루아침에 박살이 나고 불태워졌습니다. 책이라는 책은 모두 다 불살라졌으니까요. 력사와 문화에 대한 철저하고도 잔인한 청산이였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증오를 너무나 쉽게 배웠어요. 우리 세대는 그 시대의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가해자라는 점에서 반성을 하려고 하지 않지요. 인간적인 측면의 반성이 필요했지만 몽땅 시대의 탓으로만 돌려버렸어요. 이건 정말로 심각하고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악을 동조했다는 걸 내놓고도 그 죄악을 무시했다는 점만으로도 우리는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없다면 우리 세대는 여전히 그 슬픈 력사의 ‘턴넬’을 계속 걷지 않을 수 없어요. 저는 《흔적》에서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던 겁니다. ‘밑바닥’을 살아가는 평범한 지식인의 반항과 추구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힘이 빠져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지요. 아직도 진행형이기는 하지만.

부언하고 싶은 건 저의 《흔적》이 빛을 보게 된 건 김홍란선생의 끈질긴 원고 청탁과 독촉이 큰 힘이 되여준 덕분입니다. 선생님이 아니라면 이 소설이 제대로 끝을 봤겠는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영: 아니, 제가 오히려 감사드릴 일이죠. 좋은 작품으로 밀어주셔서 저에겐 큰 힘이 되였는데요.

일찍 지질탐사대에서 탐사원으로 일하시던 선생님은 1983년 3월부터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문학반에서 공부하게 되셨죠.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조선족사회에서 유일한 문학양성반이기도 한데 문학적 기량이 보이는 열혈 문학청년들로 꾸려진 반으로 알고 있어요. 1987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선생님은 연변작가협회에 전직작가로 취직하여 본격적으로 창작에 전념하시였고 그 후 창작련락부 주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셨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에 가입하십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위원회 제8기 위원, 제9기 상무위원이셨고 길림성 정치협상위원회 제9기 위원에 이어 제10기 위원으로 활약하셨죠.

현재까지 선생님은 <시골의 여운>, <락서가 있는 곳> 등 중단편소설 60여편을 발표하시였고 소설집 《메리의 죽음》, 《가람 건느지 마소》, 장편소설 《흔적》을 출간하셨어요. 또한 제6회 전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 제6회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 제5회 길림성 소수민족문학상, 연변조선족자치주 국경 30주년 문학상, 제1회 연변작가협회 중장편소설문학상, 제2회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천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도라지》문학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하여 화려한 업적을 쌓으셨고 우리 문학을 빛내셨습니다.

한편, 오래 동안 연변소설가학회 중책을 떠맡고 계시면서 우리 소설의 발전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소설가들의 창작을 격려하고 우리 소설의 제고와 번영을 기하는 일에서 연변소설가학회의 계속되는 역할을 기대해봅니다.

우광훈: 연변대학교 문학반에서 공부한 4년은 저로서는 황금시기였다고 할 만합니다. 농촌에서, 지질대에서의 문학공부는 사실상 멋모르고 여기저기를 쑤셔대는 게릴라전이였어요. 대학교에서 체계적인 문학공부를 하게 되고 특히는 체계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로서는 행운이였지요.

문학상을 두루 받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이 오히려 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잊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일 수도 있지요. 본의든 타의든 사회활동에도 많이 참여하기는 했지만 이제 정년퇴직을 했으니까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정력을 집중하고 싶어요.

하영: 조선족은 중국 56개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생활과 일에서 다른 민족과 어울려 살게 되여있어요. 그중에서도 한족과는 상당 부분을 함께 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우리 문학에 그것이 반영되는 건 극히 드물었어요. 선생님의 소설에 특별히 한족이 많이 등장하고 한족과 어울려 사는 조선족의 삶의 양상이 많이 취급되는데 그래서 진실감이 더 안겨오는 것 같아요. 그것이 선생님 소설의 특징이자 우세이기도 하구요.

우광훈: 저의 작품에서 한족이 많이 등장하는 건 저의 생활경력과 관련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의 문학은 이민문학에 속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어요. 예술의 진실은 생활의 진실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도 있구요. 우리는 한족이 주민족을 이루고 있는 중국이라는 땅에서 태여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족들이 더 많이 살고 있고 우리의 령혼에는 이미 수많은 중국문화의 요소들이 들어와있지요. 이런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이민 민족으로서는 조선족의 문학이 이민문학의 범주가 아닐가요? 하물며 저는 우리 민족의 이민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학은 이 부분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영: 90년대 후반기의 어느 《도라지》문학상 시상식에 선생님께서 가족동반으로 모셔오셨던 어머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고결하시고 단아하시고 지적이신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였어요. 선생님은 어머님께서 고령이심에도 독서를 즐기시고 신문이나 잡지에서 좋은 내용을 읽으시면 가위로 곱게 잘라서 잘 건사해주신다고 했지요. 작가인 아드님의 창작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라고. 

우광훈: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니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1926년에 저의 외할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이주해오셨어요. 장춘과 할빈 사이의 도래소라는 곳이였는데 그 곳에서 중국사람이 꾸린 학교에서 5년간 소학교를 다녔습니다. 조선어는 저의 이상 형제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배웠고 연길에 오신 후에는 문맹을 퇴치하는 습자반에 다니면서 익혔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독서를 하셨고 림종의 순간에도 머리맡에 책이 있어야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저의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희생적인 것이였어요. 그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저의 문학이 있을 수 있었고 저의 오늘의 인생이 있을 수 있었어요. 

아득히 먼 날의 어느 날이였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집체호로 찾아오셔서 습작으로 써둔 저의 작품 원고들을 태워버리면 안되겠냐고 조심스레 물으셨어요. 수많은 작가들이 필화로 감옥에서, 로동개조농장에서 ‘사상개조’를 당하고 ‘문화사업위험론’이 유령처럼 드리워있던 그 시대에 자식이 혹여 피해라도 입을가 마음 졸이신 어머니였지요. 그 애잔하고 피어린 사랑 앞에서 저는 오래 고민하지 못하고 동의를 했어요. 그렇게 저의 원고들과 일기는 몽땅 부엌 아궁이로 들어갔고 작가로 성장한 썩 후날에도 불살라진 원고 이야기는 어머니 앞에서 금기사항으로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한 작가에게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잘 아시는 어머니는 그 때의 미안함에 그 후 평생을 두고 후회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책은 저의 책상 앞에 눈에 띄는 곳에 놓아주셨고 좋은 글이 실린 잡지는 문장이 실린 부분을 접어서 저에게 주셨으며 신문에 좋은 글들이 있으면 스크랩을 해두었다가 저에게 주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운 가위질로 이 아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으신 것 같아 가슴이 아려납니다.

하영: 문학얘기만 나오면 항상 흥분하시던 선생님, 청년기를 넘어 중년에 와서도 문학에 흠뻑 취해 살으셨죠. 일찍 숙명처럼 찾아들었다는 문학이 선생님께는 언제나 끓어넘치는 용광로 같았고 아무리 소모해도 끝없이 솟아나는 에너지 원천 같았죠. 지금 차분히 돌아보셨을 때 선생님께 그 문학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가요?

우광훈: 저로 말하면 문학이 숙명인 건 분명했습니다. 저의 인생과 오늘의 저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준 것이 문학이니까요. 문학이 있었기에 그 우울한 시대를 견딜 수 있었고 세상과 대화하는 길을 찾을 수 있었어요. 지금도 문학의 의미는 이것 이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영: 누구보다 삶을 아프게 살아오신 선생님, 그 무게 만큼이나 소설의 깊이를 보여주며 많은 력작을 펼쳐내시였고 새로운 창작수법의 실험에서도 선두자적 역할을 하시며 우리 문단에 신선함과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선생님께서는 우리 소설의 중심에 우뚝 서계셨어요. 한동안 창작을 거의 멈추고 계시는 선생님께서 이번을 계기로 다시 필을 들고 주옥 같은 소설을 써내시여 우리 소설사를 계속 이쁘게 장식해주실 걸 기대해봅니다. 그 보석같이 소중한 작가적 재능을 묵혀두지만 말고 아낌없이 다 사용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선생님과의 대담을 통해 삶과 문학에 대한 고뇌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감사합니다.

우광훈: 과거형은 이제 다 잊으려고 해요. 새롭게 시작을 해야겠지요. 지금도 문학에 정진하고 계시는 림원춘선생 같은 분들을 보면 제가 많이 노력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물론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발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차분한 마음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게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번 대담을 통해 저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였어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고 고마운 일도 많았는데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하여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여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장백산>2018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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