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http://www.zoglo.net/blog/cuishangyun 블로그홈 | 로그인
<< 5월 2024 >>
   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소설

원점
2017년 05월 22일 16시 48분  조회:2399  추천:3  작성자: 최상운
단편소설
 
                                     원점
 
                                      1
    내가 연길시립병원에 입원하여 며칠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내가 자리잡은 침대 마중켠 침대로 머리발이 하얀 남성 환자가 왔다. 밀차에 실려온 그 환자는 다리를 풍대로 칭칭감고 있었다. 그 환자를 젊은 사람이 모시고 왔는데 정성들여 그분을 침대에 눕히면서 알뜰히 간호하였다. 나는 그 젊은이를 보면서 부모님께 효성하는 자식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환자가 입원한 이튼날 저녁때 허리가 곳곳하고  인상이 좋아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녀인이 먹을것을 한 꾸럭 들고왔다. 그 녀인이 들어오자 아들로 되여 보이는 젊은이는 말없이 인츰 자리를 뜨는것이였다. 젊은이가 나가자 눈을 감고 있던 그 환자가 그 녀인을 보자 때뜸 얼굴이 환해 지는것이였다. 그 녀인도 반색해 하였다. 두사람은 크게 말을 하지않았지만 두 사람의 눈빛을 보고 다정하게 보내는 부부라는 감이 들었다. 그 남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 녀인이 가지고온 음식을 달게 자시였다. 
    그 녀인은 환자곁을 떠나지않고 뱅뱅 돌면서 호리를 하는데 때때로 두 사람은 낮은소리로 소곤대는 것이였다. 새볔녁이 되자 그녀는 침대곁에서 쪽잠을 잣다. 아침이 되자 젊은이가 왔다. 그 녀인은 부랴부랴 꾸럭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젊은이가 들어오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대뜸 사라지고 두 사람간에는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항거의 수단이기도 하며 불통이이기도 하다. 나는 침묵을 지키는 그들을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서 그 녀인이 왔다가자 어두운 침묵이 흐를가? 효자같던 아들의 태도가 급변할가? 그들간에는 어떤 피치못할 사연이 있을가? 궁금해 났다.
    나는 침대에 누어있기가 답답하여 현관으로 나왔다. 나는 복도로 왔다갔다 하다가 복도 한쪽켠에 있는 걸상에 앉았다. 내가 걸상에 앉아 있는데  그 젊은이가 나왔다. 그 젊은이도 나처럼 현관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내곁에 다가앉으면서 낮은 소리로 나한테 물었다.
   “아바이는 입원한지 오래됩닙까?”
   “며칠 되오.”
   “어디를 상하였습니까?”
   “며칠전 눈길에 번저저 그만 허리를 상하였소. 젊은이는 어제 입원한 분이 자제오?”
   “네.”
   “아까 왔던분은 어머니고.”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니라면?”
   “말하기 난처한데 뭐라고 할가? 아버지의 애인 입니다.”
   “뭐! 아버지 애인이라니!?”
   내가 의아해 하자 그 젊은이는 더 험하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그 로친과 바람을 피웠습니다.”
   “바람을 피웠다니!? 그게 무슨소리오!? 그럼 자네 어머니가 생존해 있는데두 그랬단 말이우?”
   “아닙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지 몇년이 됩니다.”
   “이사람이 말해도 분수가 있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몇년이 됐다면서, 아버지가 홀로있기 적적하여 녀자 친구를 사귀였겠는데 그게 무슨 바람이오. ”
   “아, 아닙니다. 바람은 아닙니다. 나는 어쩐지 그 할망구가 내 새어머니로 되는것이 싫어서 그랩니다.”
   “자식이 아무리 마음이 안든다해도 부친이 좋아한다면 찬성해야 하지않소.”
   “그렇긴 한데. 그래도 어쩐지...”
   말속에 가시가 있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 아들의 말을 듣고나니 똑똑해 보이던 아들이 부실해 보이였다. 그가 내뱉은 말이 역작용이되여 효자로 보였던것이 단박에 불효자로 뒤밖기게 하였다. 아들이 말을 들어보면 그녀와 그 아들 사이에는 필경 말못할 앙금이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못난자식, 아비가 좋아 하는데 제가 뭐길래 반대하는거여”나는 속으로 그 젊은이를 질책하면서 그 젊은이와 더 말하고 싶지않아 호실로 들어왔다.
   저녁이되자 아들은 집으로 갔다. 아들이 나가자 우리 두 사람만 남게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인사를 하였다. 인사를 하고 보니 그 사람은 성씨는 리씨였고 나이는 칠십이라 하였다. 알고 보니 나와 동갑이였다. 동갑이라 하자 우리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리씨는 겉보기에  매까로운 사람으로 보였는데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서글 서글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리씨를 보면서 속으로 사람은 깔깔해 보이는데 왜 아들과 그 녀인 사이에 잠적해 있는 매듭을 풀지 못할가? 궁금해 났다.
   내가 리씨를 보고 어제밤에 왔던 녀인이 마누라인가? 슬쩍 물었다. 그랬더니 리씨는 정식 마누라는 아니지만 림시 마누라라했다. 정식마루라가 아니구 림시 마누라라니?  이게 또 무슨 귀신 낱알 까먹을 소리야? 나는 리씨를 보고 마누라면 마누라였지 림시 마루누가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리씨는 시무룩히 웃으며 그녀와 가정을 이루고 싶은데 이러 저러한 여건의 여의치 않아서 정식 결혼을 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리씨를 보고 내가 볼봐엔 아들이 아버지 혼사를 달가워 하지 않느것 같아 보인다고 했더니 리씨가 하는말이 지금 아들집에 언쳐 사는 처지인데 혹 하나를 더 붙쳐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는것 같아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겠다는 말을 못했다고 했다. 나는 나같으면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자식들이고 뭐고간에 내 뱃장대로 딴 살림을 꾸리겠다고 했다. 여생이 얼마나 길다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지 자식이 책임지겠는가? 하면서, 자기 주장대로 살라고 리씨에게 권고 했다. 리씨는 내말을 듣고 한참 잠잖고 있다가 결심을 내린듯 강경한 태도로 나섰다.
   “동갑이 말이 옳소. 래일이라도 그녀를 보고 함께 살자고 제기를 해야겠소.”
   “잘   생각 했소.”
   나는 리씨의 생각이 옳다고 하면서 경제상에서 자립할수만 있다면 자식의 눈치를 볼게 없이 령감 로친이 오손도손 사는것이 옳다고 했다. 그러자 리씨는 자기는 자식들이 신세를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립할수있다고 했다. 자기는 비록 농촌 호구이지만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왔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로 당지부서기 수당금과 농업보조금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 녀인도 자식부담이 없고 자립할수 있는 경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2
 
   이튼날 나는 조용할때 리씨를 보고 그녀를 어떻게 알게 되였는가? 물었다. 리씨는 잠간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8년전이였소 내가 한국에서 몇해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 며느리가 한국으로 가는 수속을 밟았다면서 연길로 와서 손군을 맡아 키워달라고 했소. 자식들이 외국에가 돈을 벌겠다는데 어쩌겠소. 우리 부부는 할수없이 농촌의 재산을 처리하고 연길로 들어왔소. 일이 꼬이자고 그랬던지 연길에 들어와서 5년만에 마누라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사망했소. 로친이 병고로 사망했다는 부고를 받고 한국으로 갔던 아들 며느리가 돌아왔소. 로친의 장례를 치른후 얼마안되여 며느리는 돈을 벌려고 한국으로 다시 가고 아들은 아이들 때문에 가지못하고 집에 남게 되였소. 이렇게 되여 삼대가 한집에서 살게 되였소.
   나는 홀애비로 되고보니 허전하고 갑갑해나며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았소. 미우나 고우나 로친이 있을때에는 그래도 의지할데가 있고 할말이 있었는데 이제는 누구와도 말할 사람이 없이 외롭게 묵묵히 지내여야 했소. 이전에는 손군들이 말동무가 되던것이 제 아비가 오고 학교로 가면서 손군들과 대화를 나눌사이가 없게되였소.
     나는 차츰 농촌이 그리워졌소. 농촌에 있을때에는 도시 사람이 부러웠는데 정작 도시로 오고보니 농촌생활이 더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소. 도시는 농촌보다 편리한것이 많아 좋은데 평생 일로 살아온 내가 할일이 없어 빈들빈들 놀기만 하자니 답답 하기만 했소. 농촌에 있을때에는 일을 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보냈는지 몰랐는데 시내에 들어와서는 시간 보내기가 여간만 힘들지 않았소.
    로친이 돌아간 그해 나는 한해 겨울을 갑갑한대로 보내였소. 긴긴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왔소.  날씨가 따뜻해지자 내마음도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물거리기 시작했소. 나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마을 한복판에 있는 정자로 갔됐소 정자에는 마을의 로인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소. 로인들은 대개 트럼프를 치지않으면 장기를 두거나 한담을 하고 있었소. 평생 소처럼 일만 하고 놀음에는 별로 흥취가 없었던 나는 그분들과 어울려 놀기는 했다만 어쩐지 허전한 마음을 달랠길 없었소. 어떻게 한담, 다시 농촌으로 되돌아갈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농촌으로 되돌아 갈수는 없었소.
    내가 이럴가? 저럴가?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날 고향 친구가 나를 찾아왔소. 둘은 음식점으로 가서 술을 마이며 회포를 풀었소. 둘이 이야기를 나누던중 그 친구가 갑갑한 마음을 풀수있는 좋은곳이 있다고 말했소. 내가 어떤곳인가? 물었더니 그 친구가 하는말이 하남에 무도학습반이 있는데 거기로 가면 새 친구들을 사귈수 있다고 하였소. 내가 춤출줄도 모르고 무도에 대하여 흥취가 없다고 하자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모르는것은 배우면되고 다니다보면 새 친구를 사귈수 있으니 답답한 속을 풀수 있다고 했소. 그러면서 그는 무도학습반으로 다니는 사람 대개가 퇴직한 종업원들과 외국으로 다녀온 년세가 있는 분들이라 했소. 무도학습반에서는 무도를 배울뿐만 아니라 등산도 하며 명승지 유람을 다니는 등 다양한 집체활동을 조직하고 있다고 했소. 나는 그말을 듣고 귀가 솔깃 했소.
   이튼날 나는 그 친구가 알려준대로  하남무도학습반으로 갔됐소. 내가 등기처에가 등기를 하자 등기처 일군이 전화를 하여 무용선생이 오시였소. 선생님은50대로 되여 보이는 곱살스럽게 생긴 녀성 선생님이였소. 선생님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소.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무용 련습실으로 갔소. 련습실에 들어 가니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소. 학생들은 짝을 무어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있었소. 내가 들어가자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새로온 분이라고 나를 소개 하였소. 여러 사람들은 반갑게 인사를 하였소. 인사가 끝나자 선생님은 나에게 한 녀인을 알선해 주면서 두분이 오늘 부터 춤짝이 되였다고 하였소. 그러면서 무도는 남녀가 짝을 무어 추는 춤이기에 반드시 남녀가 한짝이 되여야 한다고 했소. 나는 그 녀인과 춤짝이 되여 선생님의 하시는대로 따라 하였소. 그녀는 무도학습반을 다닌지 꽤나 오래였던지 춤동작에 익숙했소. 우리가 배우는 무용은 사교무였는데 사교무를 배우려면 사교무의 기본인 “부루스”를 배워야 했소. 내가 무용지도 교사가 시키는대로 한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않고서  춤을 추려는 순간 그녀의 얼굴모습이 어디에서 딱 본것 같은 느낌이 들었소. 누구일가? 생각해도 인츰 떠오르지않았소. 춤을 배우는데 열중하다나니 그녀를 어디에서 보았던지 생각할 여지가 없었소. 한시간 춤을 추고 휴식시간이 되자 모두다 걸상에 앉아 휴식하였소. 우리 두사람은 가까이 앉게 되였소. 우리 두사람은 정식으로 인사를 하게 되였소. 내가 먼저 철남에 살고 있는 리성태라 했고 그녀는 공원가에 살고 있는 오설주라 했소.  대방의 이름을 듣고 나도 그랬고 그녀도 놀라는 기색이였소. 오설주라? 많이 듣던 이름인데?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를 찬찬히 보았소. 그녀도 나를 빠금히 쳐다보는것이였소. 안개속에 잠겨있던 산봉우리가 서서히 륜각을 나타내듯이 내 기억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소. 그녀도 기억속에서 나를 앓아보았소. 우리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것처럼 동시에 대방의 이름을 불렀소.
   “설주!”
   “성태 오빠!”
   연분이 따로 인나 보오. 우리 두사람은 50년전의 옛 이름을 기억하고 으스러지게 손을 잡았소.
   사실 설주와 나는 한고향 사람이였소. 어릴때 우리 두사람은 친 오누이처럼 각별히 사이좋게 지내였소. 후에 두집이 따로 이사를 가면서 몇십년간 서로 모르고 지나다가 우연히 모도학습반에서 만나리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소. 우리는 부지련히 무도학습반을 다니였소. 우리 두사람은 그사이 그립던 이야기도 나눌수 있었소. 나는 인생의 모진 세파에 그을리고 패인 설주의 얼굴을 보면서 늙었구나 하는 감촉을 느끼면서도 그 얼굴에서 먼가를 찾아냈소. 설주의 예뻤던 옛 모습을 찾아냈소. 설주의 옛 모습을 찾고보니 마음이 설레이였소. 나와 설주는 자주 지나간 세월 이야기를 나누었소 나는 설주가 남편을 잃고 홀로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되였소. 처음에는 설주가 남편이 있다고 하다가 하도 내가 다잡아묻자 할수없이 홀로살고 있다고 실토했소. 나는 설주가 홀로있다는 말을 듣고 옛 련정이 되살아 나면서 잊어버린 옛날로 되돌아 가고픈 생각이 들었소, 어떤의미에서 말하면 하늘이 우리 둘에게 준 인연이라 생각했소”
  “듣고 보니 한편의 소설이야기를 들은것 같소.”
  “뭘 그렇게 평가 할게 있겠소. 그런 사연은 누구도 다 있을 수 있는 일이오.”
  “하긴 그렇기도 하지.”
 여기까지 말했는데 그녀인이 들어오자 우리 두사람은 이야기를 끊었다.
 
                                                3
 
   이튼날 우리 두사람은 이야기를 주고 받었다. 이번에는 리씨가 나를보고 무슨사업을 했는가? 물었다. 나는 간추려 말하였다.
   “내인생도 평탄하지는 않았소. 나도 리동무처럼 농민의 자식으로 태여나 고생을 많이하며 자랐소.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공부는 잘했소. 고중졸업을 앞두고 “문화혁명”이 터지면서 나는 대학시험도 못 쳐보고 부모님을 따라 농사를 지었소. 몇해 농사를 짓다가 농촌소학교 민영교원으로 취직했소. 그후 추천을 받아  연변대학에서 꾸린 성인교육학원으로 가게 되였소 학원을 졸업한후 화룡시 3중학교에배치를 받아 그곳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소. 나이 쉰다섯살이 되던해 내부퇴직을 하고 안해와 같이 로씨야 장사를 갔됐소. 우연히라고 할까 로씨야 장사를 가서 한 녀인을 만나 돈을 적잖게 벌었소. 로씨야에 갔다온후  정식퇴직을 하고 자식들을 따라 연길로 들어왔소.”
   “김선생의 말을 듣고 보니 김선생의 인생은 순이로웠다는 감이드오. 헌데 로씨야에가서 한 녀인을 만나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는데 혹 그 녀인이 로씨야사람이였소?”
  “아니, 조선족이였소. 길림지구 사람이였소.”
  “ 어떻게 로씨야에가서 그 녀인을 알게 되였소? 들어보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을것 같소. ”
  “그때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오오. 솔직이 말하면 그때 나는 돈에대한 의욕이 강했소. 농민출신이 중학교 교원으로 되는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고 편안히 만년을 보내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였소. 그당시 우리 조선족 사회에서는 로씨야에가서 장사를 하면 큰 돈을 번다는 소문이 바람처럼 펴지였소. 나는 소문을 듣고 귀가 솔깃하여 로씨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소. 로씨야 구경도 할겸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일어섰소. 그리하여 나는 학교에 내부 퇴직신청을 하여놓고  안해와 같이 로씨야 장사를 떠났소. 지금생각하면 순진하기도 했지, 교육자가 장사를 한다는 자체가 실패라고 생각되오.
   생명부지의 땅에서 장사하기가 정말로 힘들었소. 우리부부가 2년을 열심히 뛰여다니며 장사하여 겨우 본전을 뽑았소. 2년을 장사하고 나니 로씨야 말을 대충할수있고 장사에도 미립이텄소. 이제 몇년 더 고생하면 몫 돈을 쥘것 같았소. 우리가 한창 장사에 열을 올릴 때 녀동생한테서 급전이 왔소. 자기들이 한국으로 가게되므로 우리 아이들을 더는 맡아 키울수 없으니 빨리 돌아 오라는것이였소. 나는 계속 남아 장사를 하기로 하고 안해는 아이들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소. 안해가 떠난후 나는 날개개 떨어진 새 신세가 되였소. 로씨야장사는 남자들이 혼자 하기 힘들었소. 나는 어떻게 장사를 할지 몰라 한숨만 푹푹 쉬였소. 근심이 태산같아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었소.
   어느날 나는 안해와 같이 장사 할 때 팔다가 채 팔지 못한 옷견지를 들고 장마당으로 갔소. 일반적 경우에는 로씨야에서는 옷을 파는것은 녀자들이 팔고 남자들은 뒷일을 거들었소. 나는 안해가 없는지라 안해가 하던대로 물건을 진렬대에 걸어놓고 손님이 오기만 기다렸소. 반나절이 지나도 나는 옷 한 견지도 팔지 못하고있었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였지만 속은 술비지처럼 부글부글 끓고있었소. 머리속에는 온갖 잡념들이 맴돌이치면서 나를 괴롭혔소. 나는 후회하기도 했소. 왜 하필 좋은 직업을 버리고 이국땅에 와서 말 못할 이 고생을 겪는가? 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덮쳐들면서 유리쪼각을 삼키기라도 한것처럼 쓰리고 아팠소.
    내가 이렇게 골머리을 앓고 있는데 내가 옷을 팔고있는 저켠에 곱살그럽게 생긴 녀자가 옷을 팔고있었소. 조선족인지 한족인지 몰라도 하여턴 중국에서 온 녀자임은 분명했소. 넌지시 건너다보니 구매자들은 그 녀자의 애교에 반하였는지 같은 공장에서 나온 제품인데도 내것은 거들떠 보지않고 얄밉게도 그녀의 옷만 사는것이였소.
   오후가 되자 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맥없이 숙소로 발길을 돌렸소. 고개를 수구리고 생각해보아도 어떻게 장사를 할지 별 뾰족한 수가 떠 오르지 않아 걸음걸이는 무겁기만했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녀자 파트너가 없이는 장사를 할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소. 내가 무겁게 발길을 옮기는데 “아저씨는 중국 어디에서 왔어요.” 하는 녀인의 애교스런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소.
   나는 별 싱거운 녀자가 있다면서 뒤돌아 보았소. 바로 내 매장앞 저쪽켠에서 옷을 팔던 그 녀자였소.
   “연길에서 왔소. 그런데는?
   “오, 연길! 조선족이 많아서 좋았어요. 앞으로 돈을 많이 벌면 연길에가 살겠어요.”
   “그쪽은 어디에서 왔길래?”
   “길림시에서 왔어요. 아저씨는 저를 봤을거예요. 저는 아저씨가 옷을파는 매장앞에서 옷을 파는 사람이예요. 내가 보건대 아저씨는 파트너가 없이 혼자 장사를 하시더구만요. 남성분이 로씨야에와서 장사를 하려면 녀자 파트너가 있어야 해요. 파트너가 없이 장사한다는것은 불가능해요. 왜 파트너를 하지 않았어요?”
   “나하고 무슨 사인데 내 일에 삐치오. 나혼자라도 얼마던지 잘 팔고있지않소.
   “그렇게 잘 판다는 분이? 이 물건은 어쩌고? 오늘도 공백이나 다름없지요? 달리 생각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가 해서요.”
   “뭘, 도와준다는게오.”
   “아저씨 장사를요.”
   “내 장사를? 소가 짖겠다. 내 일엔 상관말고 그쪽에서나 돈을 콱 버오.”
   “아저씨 달리 생각지 마세요.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예요. 이국타향에서 한 동포로서 서로 돕는것이 인간 도리잖아요. 짐 하나를 주세요. 제가 들고 가겠어요.”
    그녀는 비위좋게 내 짐을 빼앗다싶이 하면서 짐을 들고 나와같이 한 길을 걸었소. 나는 별난 녀자를 다 본다고 하면서도 어쩌못해 그런척 하면서 그녀에게 짐을 넘겼소. 내 숙소에 도착하자 그녀는 짐을 나한테 맡기고는 돌아섰소. 돌아서는 그녀를 보고 나는 그대로 가지 말고 집안에 들어가 커피한잔 나누자고 했소. 그녀는 그대로 갈척 하다가 집에 가도 크게 할 일이 없다면서 돌아서는 것이였소. 집안에 들어선 그녀는 이곳 저곳 흟어보고서 집안을 깔끔히 거두었다고 하면서 선생님은 정결한 분이라 하였소. 나는 정결하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소.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소. 그녀는 요사이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고 실토정했소. 내가 혼자서 힘들게 장사하는것이 보기가 구차하였다고 했소. 자기도 남편이 병환으로 귀국한후 혼자서 장사하기 어려워서 장사 파트너를 찾으려고 고려하고있는 중이라 했소. 나를 보면서 나의 외모를 보아 선비티가 나는데 장사를 할 기질이 아니지만 성실해보이더라고 했소. 그러면서 속으로 저런 순진해보이는 사람과 같이 손을 마춰 장사를 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소. 녀자로서 차마 먼저 장사를 같이 하고싶다는 말을 하지못하고 있었다고 했소. 그러면서 그녀는 나를 보고 로씨야에 오기전에 무슨 사업을했는가? 이전에 같이하던 녀자가 보이든데 요즘에는 왜 보이지 않는가? 물었소. 나는 간약해서 그녀자는 내 안해라고 말했소. 그녀도 자아소개를 했소. 그녀의 이름은 천수옥이라 하는데 길림시 영길현사람이라 했소. 그는 농사를 짓다가 남편과 같이 로씨야장사를 왔다고 했소. 그도 처음에 로씨야에 와서 많은 고생을 겪었다고 했소. 하도 시간이 오라니 로씨야말도 제대로 하며 장사 미립도 텃다고 했소.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눈치를 보니 장사를 하여 뭉치돈을 번것 같은 느낌이 들었소. 나는 그녀를 보고 내가 저녁 식사준비를 하겠으니 같이 저녁을 자시자고 청들었소. 하지만 그는 숙소에 할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떴소.”
   “그후 어떻게 되였소.”
   “그이튼날 장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그녀는 심중한 모습을 지으며 입을 열었소.선생님, 같이 동업합시다.”
   “뭐! 동업?”
   “그래요 지금 선생님과 저의 처지가 비슷하지 않아요. 서로 의지하면서 같이 장사하는게 어때요.”
   “장사엔 문맹인 내가 그쪽이 파트너로 될수 있겠소?”
   “손벽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힘과 마음을 합치면 얼마든지 잘할수 있어요.”
   “그럼 같이 해본다.”
   그때 나는 그녀가 동업하자는 말에 어떻게 확답을 주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채 멍해있었소. 그녀는 어정쩡해하는 나를 보면서 동업하는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 잘 생각해보시고 대답해도 좋다고 했소. 나는 속 타산을 해보았소. 현실 내처지에서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였소. 사실나는 장사가 안되여 물에 빠진 사람이 짚으라기라도 잡을 처지였소. 이런 때 그녀가 동업하자는 말이 마치 가물의 단비라고 생각되였소. 나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장사를 같이 하는데 동의한다고 했소.
   우리는 장사를 같이 하기로 합의한후 합의대로 리행해나갔소. 그녀는 옷을 팔고 나는 물건운수와 그녀의 안전을 책임져주었소. 그녀는 신나게 옷을 팔았소. 그녀가 어떻게 잘 파는지 곁의 장사군들이 시기할 정도였소.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그녀가 장사를 잘한다는 소문이 펴지자 중국에서 온 큰 상인들조차 그녀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내 흔들었소. 그들은 그녀가 신용을 지킨다면서 도매가겪으로 물건을 넘겨주었소.
    우리둘은 장사는 같이 하면서도 여전히 각기 딴 살림을 하고 있었소. 물건을 두곳에 보관하는것도 시끄럽거니와 두 곳에 세집돈을 내는것이 아까웠소. 신체가 펀펀한 사람들이 대방이 혼자 있는것을 빤히 알면서도 견우직녀처럼 독수공방하는것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소. 남자의 본능인 늑대 량심이 나를 못견디게 했소. 나는 주동적으로 그녀를 보고 우리둘이 비록 남남이라 하지만 이미 동업한 이상 뭘 꺼릴게 있냐?고 하면서 동거를 하자고 제기했소. 동거하자는 말에 그녀는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남이 눈이 두려워 그렇게 할수 없다고 딱 잡아뗐소. 나는 남들도 다 짝을 뭇고 사는데 우리는 외편이 부족해서 그렇게 할수 없냐고 구슬렸소. 아님보살하면서 안된다고 하던 그녀도 나의 설득에 끝내 손들고 말았소. 나는 두말 없이 짐을 꾸려가지고 그녀의 숙소로 갔소.
    세월은 빨리흘러 눈 깜박할 사이에 3년세월이 흘렀소. 그녀를 만나후 장사도 잘되고 돈도 많이 벌었소. 나는 눈덩어리처럼 굴리면 커가는 돈을 보면서 프랑스의 고전소설 “우제니그랑데”에서 나오는 그랑데 령감처럼 돈을 보고 웃음이 절로 나왔소. 그런데 웬일인지 쌓여지는 돈을 보고 웃다가도 한켠으로 위험을 느끼였소. 돈이란 애물이기도 했소. 돈이 많을수록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감촉했소. 그때 로씨야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며칠 건너 아무 아무곳에서 아무개가 강도들에게 강탈을 당하여 인명피해를 봤다는 소문이 부절히 들려와 내 마음을 불않게 했소. 생각할수록 쌓여지는 돈을 보면 웃음이 나오던것이 점차 시한폭탄과 같아 보이면서 어느땐가 터질것만 같은 우려가 들었소. 그녀는 총명한 녀자였소. 그녀는 돈이 모아지는족족 집에 두지않고 물건을 구입할만한 돈만 남겨놓고는 딸라로 바꾸어 놓고 중국에 송금하였소. 그녀는 그냥 수입에서 절반은 내앞으로 하였소.
    우리가 동거한지 3년이 되자 그녀는 귀국하자고 졸라댔소. 나는 돈 욕심에 더 있자고 했소. 그러자 그녀는 사람의 욕심은 한정이 없다면서 너무 과욕을 부리면 탈이 생긴다고 했소. 그녀는 로씨야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내 돈이 아니라 하면서 집으로 갖고가야 자기돈이라 했소. 나는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귀국준비를 하였소. 총명한 그녀는 가만히 귀국준비를 하면서도 누구한테도 귀국한다고 알리지않았소. 귀국 날자가 림박하는데도 우리는 형식상에서 그냥 장사를 하는척 하였소. 세빠트처럼 돈 냄새를 잘 맡는 깡패무리조차 눈치를 차리지 못했소. 우리는 떠나는 전날밤에 안전한 곳으로 전이하였소. 짐은 간소하게하고 행동하기 편리하게 했소. 소문에 의하면 우리가 떠난 그날밤에 강도들이 냄새를 맏고 뛰여들었다가 헛탕을 쳤다는 소문을 들었소.”
   “김선생님의 말을 듣고 보니 김선생은 돈과 녀자복을 다 가지고 있었구만 부럽소. 후에 그녀자는 어떻게 되였소?” .
   “귀국하면서 그녀는 나를 보고 중국으로 돌아가서 쌍방이 리혼하고 정식으로 결혼을 하자고 했소. 나는 그렇게 할수없다고 했소. 리혼하는 문제는 심중한 문제로서 잘 생각해 보고 결혼하자고 했소. 그랬더니 그녀는 집에 돌아가 잘 생각해 보겠다고 했소. 후에 알고보니 그녀는 로씨야에서 돌아온후 인츰 일본에 갔다가 귀국한후 다시 한국으로 갔다가 는 소문을 들었소. 후에 여러번 그녀한테서 전화가 왔됐소. 자기가 귀국하여 얼마 안되여 남편이 사망 하였다는 것과 자기가 일본에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간다는 전화였소.  그후로는 그녀에 대한 소식을 모르고 지났소.  지금도 가끔씩 그녀에 대하여 생각할때가 있소.”
 
                                            4
 
    이튼날 우리 두사람은 지나간 세월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이번에는 리씨가  리씨와 설주사이에 있었던 옛 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몇십년전 일이라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와 설주는 사춘기 시절을 겪으면서 풋사랑을 한것 같았소. 그때 고향마을 고성툰에는 오씨성을 가진 집이 두호가 있었소. 오씨네는 형제였는데 형이 되는 집에 귀엽게 생긴 딸이 있었소 그딸이 이름이 오설주였소. 우리둘은 소학생 때부터 초중학교까지 향소재지에 있는 학교를 같이 다니였소. 고성툰에서 향소재지까지 8리가 되였는데 마을의 학생들은 함께 학교로 가고 돌아올때도 함께 돌아왔소. 설주는 나보다 두살 아래였소.  설주한테는 나와 동갑인 오빠 철주가 있었소. 나와 철주가 사이좋게 지내다보니 우리는 두집을 오가면서 허물없이 보내였소. 설주는 오빠 친구인 나를 오빠라고 불렀소. 나는 은근히 설주를 좋아했고 설주도 나를 좋아하는 눈치였소. 초중을 졸업한후 나는 가정의 경제난 때문에 상급학교로 가지못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소. 설주가 초중을 졸업하던해 설주네는 길림시교의 한 농촌마을로 이사를 갔소. 설주네가 이사를 간 이듬해 우리집도 고성툰을 떠나 벌방지대인 태평촌으로 이사를 갔소. 이렇게 되여 나와 설주는 갈라지게 되였소. 설주네가 이사를 가기 전날밤 우리 두사람은 동구 밖에서 만난것으로 기억되오. 우리둘은 짧은 대화를 나누고 갈라 졌소. 그때 무슨말을 하였던지 생각나지 않지만 아무튼 앞으로 련락을 자주 하자는 말과 기다려 달라고 하는 말을 한것같소. 나는 떠나가는 설주를 보면서 못내 아쉬운 생각이 들었소. 설주도 나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는 눈굽을 닦던 일이 생각나오.
   나는 태평촌으로 이사를간후 부지런히 일하고 당조직을 따랐소. 태평촌으로 이사를가서 8년만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후에는 촌당지부서기로 되였으며 촌 당지부서기 사업을 20년을 하였소. 나이가 많아지자 젊은 사람한테 당지부서기 직무를 맏기고 연길로 들어오기 전까지 촌 로인회 회장을 맡아하였소.”
   “농촌에서 사업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소. 리서기가 농촌에서 20년 지부서기 공작을 했다니 정부에서 주는 수당금을 얼마나 받고있소.”
   “매달 500원을 받소이다. 지금돈 500원이 뭐요. 하지만 그만큼이라도 받으니 감사하다고 생각하오. 고생을 겪은 사람이야 행복을 안다고 지금 젊은 이들은 우리가 젊었을때 고생했던 말을 하면 리해가 안간다고 하오.”
   “내 자식도 그러오. 리서기는 어느때 결혼하였소.”
   “천구백 칠십년도 였소”
   “나와 같은해에 결혼하였구만 결혼하기 전에 설주씨를 만나 보았소.”
   “설주네가 길림으로 이사간 후로는 소식을 모르고 지났소. 우리집이 태평촌으로 이사를 간후 3년만에 나는 한동네에서 사는 처녀와 결혼하였소. 내가 장가 가던날 친구 철주가 먼 길림에서 모처럼 오시여 내 결혼식에 참가하였소. 그날  철주한테서 처음으로 설주의 안부를 듣게 되였소. 설주네는 길림시교의 영길현으로 이사를 간후 설주는 초중을 졸업하고 몇해 농사를 짓다가 한 농촌소학교 교원한테 시집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소. 철주의 말에 의하면 설주네 부부간은 화목하게 잘 산다고 하였소.”
    저녁때가 되자 설주녀인이 왔다. 어제와  다름없이 음식을 장만하여 가지고 왔다. 리씨는 나를보고 함께 자시자고 했다. 그녀도 같이 자시라고 했다. 나는 이미 저녁을 먹었는지라 그들이 식사를 하는데 방애를 주지 않으려고 현관으로 나왔다. 현관걸상에 한참 앉자 있다가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로 들어가니 그들도 이미 식사를 끝마치고 마주보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리씨는 나한테 그녀를 인사시키였다.
   “설주 인사를 하오. 북산가에 계시는 김선생이오.”
   “저는 공원가에서온 오설주라 합니다. 옛날에 이 오빠와 한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앞으로 선생님께서 우리 오빠를 잘 돌봐주십시오.”
   “다 같은 환자인데 뭘 도와줄게 있겠습니까. 리서기 한테서 아주머니에 대한 말을 들었습니다. 리서기와 아주머니가 어린시절부터 한마을에서 살았고 두분사이가 각별히 좋은 사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두분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이고 옛날에 서로 사랑을 할만큼 가깝게 보내였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늦지않으니 두분께서 부부가 되여 만년을 즐겁게 보내기를 바람니다. ”
그녀는 얌전하게 “네”하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리고는 리씨를 처다보면서 투정삼아 한마디 하였다.
   “오빠두 참, 벌써 우리의 옛날이야기를 다 했어요. 마치 우리가  부부로 되기라도 한것처럼 말이얘요”
   “말한것이 잘못됐나 어차피 부부로 될텐데.”
   “내가 언제 오빠와 결혼하겠다고 말했어요.”
   “말은 안했어도 내가 결혼하자는 말을 하기만 기다렸겠지.”
   “거짓말.”
   “긴말 말고 내가 퇴원하는날 정식으로 결혼등록하려 가기오.”
   “뭐가 그리 급해요. 먼저 자식들의 의사를 물어 보고 결정 합시다.”
   “우리둘의 의사만 맞는다면 자식들이 다 뭐요. 내가 하자고 하는대로 따라 하오.”
   “네, 그렇게 하겠어요.”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시계를 보더니 밖에가 무엇을 살게 있다면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이야기는 잠시중단 되였다.
 
                                               5
 
   그녀가 나가서 한참지나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리씨를 보고 말했다.
    “내가 보건대 두분이 신체 조건과 대화가 잘되는것을 보아 궁합이 잘 맞는것 같아 보이오”
    “동갑이 보건대도 우리둘이 궁합이 잘 맞을것같소.”
    “잘 맞구 말구, 그런데 두분은 궁합이 잘 맞는것 같은데 내가 보건대 당신 아들이 저 아주머니를 소가 닭보듯이 외면하는것이 보기 어색했소. 혹 아버지 혼사를 바대하는게 아니오.”
   “동갑이 보건대도 그렇게 보입데. 나도 아들녀석이 설주와 응대를 하지 않는걸  보고 꼴 사납게 보았소. 그러면서도 한켠으로 아들이 초하루 보름에도 보이지 않던 녀인이 불세로 나타나 아버지 간호를 하니 리해가 안가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을 했소.”
    “아들이 그런 태도를 보이면 리동무가 아들에게 설주씨와의 관계를 똑똑히 알려주는게 옳지않소.”
    “동갑이 말이 옳소. 언녕 아들한테 설주가 한고향 사람이며 서로 내속을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하여야 하는데 말하지 않자 그걸 모르는 아들은 오해를 할수 있다고 생각되오.”
   “내 생각엔 아들이 설주를 무도장에서 친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가? 생각되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보았소. 아들은 설주를 내가 모도장에서 친한 “우발”이라고 생각 할수도 있소.”
   우리둘이 여기까지 말하는데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리씨에게 드릴 보건품을 잔뜩 사가지고 왔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내가 화제를 그녀한테 돌렸다.
   “아주머니는 길림지구에서 살았다고 들었는데 언제 연길로 왔습니까?”
   “연길로 들어온지는 10년이 됩니다.”
   “연길로 온지 십년이면 꽤나 오랩니다. 연길로 온후 리서기를 찾았됐습니까?”
   “나는 연길로 오면서 오빠의 행적을 찾았습니다. 내가 태평촌까지 갔됐는데 그때 오빠네 부부간은 한국로 가고 없었어요. 그후 나는 오빠를 기다리지 않았어요.”
   “리서기한테서 아주머니와 리서기간에 있있던 지난 이야기를 재미 있게 들었습니다. 듣고 보니 궁금한것이 하나 있습니다. 실레이지만 아주머니는 길림지구로 이사를 간후 어떻게 보내였는지?”
    “선생님이 알고싶다고 하니 할수없이 말해야 하겠어요. 우리집이 길림지구 영길현으로 이사를 가서 3년이 되던해 나는 스므살 나이에 나보다 5년 년상인 남편과 결혼 하였어요. 그분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어요. 그분과 결혼하여 자식 오누이를 두었어오. 여늬 가정과 다름없이 30년을 평범하게 살았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고향에 있을때 성철 오빠를 무척 좋아했던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빠도 나를 좋아 했구요. 하지만 그때는 학생 시절이라 사랑한다거나 사랑에 대하여 운운할 시기가 아니였어요. 다만 마음속으로 생각했으리라 짐작돼요. 지금 생각하면 만약에 내가 길림지구로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두 사람은 부부로 되였을지 몰라요.
     내가 쉰 살 데던해 한국에서 초청장이 왔됐어요. 남편의 고모님의 보낸 초청장이였습니다. 초청장을 받고 남편은 어떻게 할가? 고심하던 끝에 학교에서 내부퇴직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내부퇴직 비준이 내리자 우리 부부는 한국으로 가게 되였습니다. 우리가 한국으로 갈때는 친척 방문이였기에 비자기일은 석달이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지금처럼 한국에가 일하지않고 친척들의 배동하에 한국의 곳곳을 다니며 유람하였습니다. 귀국할때 친척들이 주는 약간한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두번째로 한국으로 갈때는 산삼, 록용, 령지, 사향과 북경동인당 약방의 약과같은 귀한 약재와 약품들을 가지고 갔습니다. 기회를 잘만나 우리는 약장사를 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사람의 금욕이란 한정이 없었어요. 그만하면 만족해야 할터인데 돈을 더 벌려고 한국인들중에서 전문 조선족들을 상대로 하여 진행한 불법 (한국초청)사기군들과 손잡게 되였어요. 처음에는 부로그들이 진짜 초총장을 보내여 신용을 얻어 나도 적지않은 돈을 벌었어요. 그러던것이 출국하려는 사람들이 차츰 많아지자 부로그들이 위조 초총장을 보내 왔습니다. 가짜위조 사기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의 피해를 보았습니다. 피해자들은 대리인으로 나선 우리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우리는 모아논 돈과 가정 재산을 다팔아 드리 댔지만 원체 피해 금액이 많아 다 보상할수 없었습니다. 우리집의 집과 재산은 몽땅 차압을 당하여 우리는 하루아침사이에 빈털털이로 나 않게 되였습니다. 그번 사건으로 인하여 남편은 병을 얻어 62세 되던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죄책감이 들어 자결까지 할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남편의 무휼금이 나와 일부를 빚을 무는데 쓰고 나머지는 내가 한국으로 가는 수속을 하였습니다. 나는 한국에가 8년동안 있으면서 별별고생을 다겪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초청사기로 인하여 피해를 본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습이 아픔니다.”
 
                                                    6
 
    이튼날  리씨는 아들에게 조용히 그녀에 대한 말을 간단히 하면서 병원에서 퇴원하면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고 림시 그녀의 집으로 가서 살겠다고 말했다. 아버지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아들이 이상한 말을 했다.
   “아버지, 다른 분과 결혼하시면 새 어머니로 받아줄수있지만 그분만은 안됩니다. ”
   “안된다니?”
   “그 리유을 알고싶으면 그분과 물어보십시오.”
   “그분과 물어보라니!? 너 그럼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냐?”
   “네”
   “알고 있으면서 왜 나 한테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그분과 한국초청사기를 한적이 있는가? 물어보십시오.그럼 알것입니다.”
   “한국초청사기라니!? 그건 웬 뚱당지같은 소리냐?”
   “그리고 천수옥이를 아는가고 물어 보십시오.”
   “가도록 심산이라더니, 천수옥이란? 또 어떤녀자야?”
   “내 장모입니다.”
   “네 장모라니! 그럼 니 장모와 오설주간에 이미 잘 안는 사람이며 그들간에 어떤 말못할 사연이 있었단 말이냐?”
    “네, 나한테 묻지마시고 그분한테 확인해보십시오.”
   아들이 이렇게 말하자 리씨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리씨는 끙끙 거리며 깊은 고민에 잠겨 잠을 못이루고 있었다.
   나도 “천수옥”이란 이름을 듣는순간 가슴이 덜컥하면 문짝이 떨어지는 감이 들었다. 천수옥! 내가 로씨야에서 친하였던 그 천수옥이 아닐가? 하는 느낌이 번개같이 스치였다. 나는 그 천수옥이 옳은지 묻고 싶었지만 참으며 내색을 내지않고 그들이 말을 귀담아 듣노라니 어쩐지 살얼음위로 걸는 기분이였다.
    이튼날 저녘 종전대로 아들이 집으로가고 그녀가 음식꾸럭을 들고왔다. 그녀가 리씨를 보고 살짝 웃으며 인사를 하여도 리씨는 응대를 하지않고 그녀만 쳐다보는것이였다. 그녀의 몸에 숨겨놓은 비밀이라도 있는것처럼 아래우를 훝어 보았다. 그녀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지 리씨를 보면서 물었다.
    “오빠 웬일이세요. 내 얼굴에 뭔가 묻었어요?”
   리씨는 정색해서 말했다.
    “아니, 설주한테 한가지 묻겠소. 제대로 대답해주오. 설주는 내 아들을 이미 알고 있었소?”
    “오빠 아들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 오빠가 병원에 입원하면서부어 오빠 아들인줄 알게 되였어요.”
    “설주는 모른다고 하고 아들은 당신과 물으면 안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판국이요. 다시묻겠소. 정말 내 아들을 모르오.”
    “오빠도 참 답답해요. 내가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서 오빠는 내 말을 못믿어요.”
    “그럼 좋소 설주한테 한가지 더 묻겠소. 설주가 한때 “한국초청사기”에 휩싸인 적이 있다고 하지않았소. 그때 사건에 련류된 천수옥이란 사람을 알고 있소? ”
   “천수옥!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오빠는 왜서 그 천수옥이에 대해 물어요.”
   “천수옥이가 내 사돈이오. 내 아들 장모오.”
   “아들의 장모라! 세상이 좁다고 하더니 수옥이가 어떻게 오빠와 사돈이 되였어요.”
   “어쩌다가 그렇게 됐소. 설주, 이제는 천수옥에 대한 얘기 해주오."
   “워나 수옥이와 나는 영길현에 있을때 한 마을에서 살았어요. 내가 한국으로 가기전에 천수옥이네 부부는 로씨야 장사를 갔됐어요. 그때 소문에 의하면 수옥이 남편은 로씨야에 가서 강도들한테 맞아 죽다 살아났다고 들었어요 수옥이 남편은 할수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수옥이 혼자 남았는데 후에 장사가 잘되여 수옥이가 큰 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수옥가 로씨야에서 돌아와서 얼마 안되여 수옥이 남편이 사망했어요. 수옥이는 일본으로 시집간 딸이 초청으로 일본에 가서 한국기업소에가 일하다가 석달만에 불법취업을 했다는 죄명으로 추방을 당하여 왔어요. 로씨야 장사를 가서 돈을 벌었는데 안되자고 그랬던지 그돈을 “다단계”사기군에게 사기를 당하여 미천을 다 날려버렸어요.  
  수옥이가 로씨야로 간사이 우리는 한국으로 갔다왔어요. 어느날 수옥이가 나를 찾아와서 자기를 한국으로 갈수있는 방법을 돼달라고 하였어요. 나는 친구의 딱한 사정을 아는지라 저렴한 가겪으로 한국으로 갈수있는 수속을 해 드렸어요. 한국 에서 전문 조선족을 상대로 하여 불법으로 초총장을 보내는 부로그들에게 부탁하여 초청장을 보내왔던 것이였어요. 수옥이는 무사히 한국으로 갔어요. 한국에서는 외국인들이 불법취업을 하는것을 단속하고 있었어요. 수옥이는 2달만에 불법으로 식당에서 일하다가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 강제로 추방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후 수옥이는 여러번 한국으로 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번번히 불법체류자란  검은 딱지가 붙어 비자 신청이 기각되여 한국으로 갈수없었어요. 이렇게 이리 저리 돈을 뜯기우다나니 수옥이는 빈털털이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돈 욕심이 많았던 수옥이는 경제적, 정신적 타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하였어요. 후에 들은 말에 의하면 수옥의 유품에서 편지 한통과 사진한장이 있더랍니다. 그 편지와 사진이 한때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답니다. 그 편지는 로씨야에 있을때 같이 장사를 했던 김모모선생에게 전하려고 했던 편지이고 사진은 그 남자의 사진이라고 들었어요. ”
    나는 그말을 듣고 속이 꿈들하면서 얼음장이 떨어지는 감이 들었다. 분명 그 편지는 나에게 보내려던 편지였고 사진은 내 사진이였을것이였다. 나는 당황하여 어쩔봐를 몰라했다. 하지만 다년래 심리조절을 할줄아는 기능을 닦가온터라 당황한 기미를 보이지 않으려고 태연한척했다.
    그런 나의 심리상태를 간파못한 리씨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듣고보니 설주의 잘못은 크게 없는것 같은데 왜서 우리 아들이 설주를 자기의 장모를 죽음으로 몬 장본인이라 여길까?”
    “그러니 말입니다. 선의로 한일이 잘못되니 남의 탓으로 보기때문일것이예요. 앞으로 내가 아드님한테 잘 이야기 할터이니 오빠는 근심 말아요.”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자책감에 들었다. 내가 가장 어려울때 수옥이는 나한테 따스한 손길을 보내여 나를 도와주어 궁지에서 빠저나오게 하였으며 어려움을 헤치고 치부하도록 도와 주었다.그러나 나는 수옥이한테 무었을 주었나? 할말이 없다. 받기만 할뿐 수옥이가 어려움에 처한줄도 모르고 무심히 지나왔다. 지난일들을 생각 하니 수옥에게 미안한 감이 들면서 자신이 파렴치한 인간이라 후회를 했다.
 
                                                       7
 
    뒷산에 살구꽃이 피는 어느날 리씨한테서 청첩장이 왔다. 오늘 설주녀인과 코스모스호텔에서 결혼식 한다면서 결혼식에 꼭 참가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점심때가 되자 불야불야 례식장으로 달려 갔다. 잘 꾸며진 례식장에 들어서니 이름모를 생화 향기가 풍겨나와 기분이 좋게 하였다. 식장에는 이미 많은 축객들이 와있었다.
     곱게 화장을 하고 한복을 차려입고 나선 두 로신랑신부의 모습은 보기좋았다. 신랑은 벙글웃고 신부는 방긋웃었다. 량가의 자식들과 친척 친우들이 모이여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 눈길을 제일  끄는 사람은 다름아닌 리씨의 아들이였다. 아버지와 설주녀인의 결혼을 슬그머니 반대했던 그 아들이 오늘따라 태도가 달라졌다. 리씨의 아들며느리는 밝은 웃음을 짓고 손님을 맞이 하느라 바삐보내고 있었다. 더 인상이 깊은것은  량집의 자손들이 모두 참가하여 두분께 축하를 보내는 장면이였다. 량가의 자식들의 부모님들께 큰 절을 올려 축하였고 깜직한 손군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꽃다발을 안겨드렸고 나풀 나풀 춤을추면서 조부모들의 결혼을 축하하는것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그날 나는 기쁜 심정으로 그분들의 결혼을 축하하였다. 결혼식상이 끝나자 나는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거리량켠에 있는 가로수들에서 떨어지는 아롱다롱한 색갈띤 꽃입들이 미풍에 날는것이 마치 원점으로 돌아온 리씨부부의 결혼을 축하하는것 같았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9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9 새봄맞은 찔레꽃 (6) 2023-06-06 0 394
18 새봄맞은 찔레꽃 (5) 2023-06-01 0 198
17 새봄맞은 찔레꽃 (4) 2023-05-27 0 188
16 새봄맞은 찔레꽃 (3) 2023-05-23 0 201
15 새봄맞은 찔레꽃 (2) 2023-05-19 0 174
14 새봄맞은 찔레꽃 (1) 2023-05-16 0 230
13 쏙덕 령감 2018-02-19 0 2553
12 홍씨네 형제 (2) 2017-12-20 0 1500
11 홍씨네 형제(1) 2017-12-19 0 1498
10 배신자 2017-11-17 0 1659
9 그녀들의 운명 2017-07-13 0 958
8 원점 2017-05-22 3 2399
7 꼬인 바줄 2017-03-09 1 2448
6 싱글들의 이야기 2017-02-12 0 3086
5 신이 준 선물 2016-08-19 0 1802
4 단편소설 붉은기미 2016-04-27 6 2121
3 첫사랑 2015-01-07 0 2170
2 황혼의 로맨스 2014-12-19 1 2153
1 마음이 돌고 돌아 2014-12-16 0 174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