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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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2019년 07월 31일 10시 52분  조회:1372  추천:1  작성자: 한영철
 고  모
 
      나의 아버지 고향은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 이다. 아버지는1921년도 생인데 18세 젊은 나이로 살길을 찿아 두만강을 건너 만주에 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만주땅을 바라고 고국을 떠나던 때가 바로 1938년이였다. 아버지는 동북의 여기저기서 산전수전 다 겪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 했고 또 동북해방을 맞이 했다.
 
      1947년 흑룡강성 학강에서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고  장춘포위전 료심전역에 참가했고 무한까지 밀고 나갔다. 도중 상급의 명령을 받고 안동(지금단동)에 집합하였고  나중에 조선인민군위 일원으로 조선전쟁에 참가하였다. 후일 다시 중국인민지원군 번역관 신분으로 활동하다가 조선 정전협정이 되여 중국에 돌아 왔다.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소리가 귀청을 찟던 7년간의 전투생애를 마치고 지인의 소개로 연길에 오게 되였다.  고향을 떠나온 뒤로 다시는 고향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1985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전쟁이후 조선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였고 고향으로 향하는 길은 가로 막혀버리였다. 은마(银马)는  달리고 싶어 했건만  38선에서 멈추어 서야 했다. 아버님께서는 혈육하나 없는 중국땅에서 가정을 이루고 오직 안애와 자식들만 믿고 살아 오시였다.   우리 자식들은  한씨 가문의 친척이라고는 단 한분도 만나 본적이 없었다. 친척이라고는 외가집 밖에 없었다.  어머님도 형제분이 하나 밖에 없는 고로 외삼촌은 우리의 유일한 친척이였다.
 
      어려서 학교에서 방과 하면 저도 몰래 다녀 오는 곳이 바로 외삼촌 집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몇번이고 외삼촌 집에 들려 온다. 그때는 외할아버님과 외할머님도 살아 계시였다. 남들에게는 익숙한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는 우리 형제들에게는 생소한 존재였다. 불러 본적도 없었다.
 
      우리가 어릴때 아버님께서는 고향에 대하여 곧 잘 이야기 하시였다. 조선이 통일되면 우리를 데리고 고향에 간다고 늘쌍 말씀하였다.  아버님 형제는 8남매인데 막끝의 누이 동생이 일본에 시집갔다고 했다. 고모님의 이름은 한을남인데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에 사는 조선사람한테 시집갔다고 했다. 조선전쟁후 남과 북이 갈라져 있으니 고향소식은 물론이고  일본에 사는 누이 동생의 소식도 알바가 없었다.
 
     1970년대 중기부터 남조선 소식이 조금씩 들려 왔다. 당시 메아리방송이라는 해외방송이 있었는데 정기적으로 리산가족찿기  방송을 하였다.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늘쌍 방송에 귀를 귀울리였다.  한국의 아무 아무개가 중국이나 사할린에도 살지도 모으는 자식을 찿는다 던지 중국에 사는 아무개가  한국에 사는 형제들을 찿는다는 방송을 종종 듣게 되였다.  40년째 고향과 아무 련락도 없었지만 아버님는 항상 고향을 잊지 않고 계시였다.  내가 지금도 노래하듯이  아버지 고향주소를 외우는것도 아버님의 당년의 교육과 갈라 놓을수 없다.
 
      그러다가 둘째형님이 아버님의 지시대로 메아리 방송에 편지를 하게 되였다.  중국길림성 연길에 살고 있는 한아무개가 고국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형제 여러분을 찿는다는 내용이였다.

      그뒤로 우리집에서는 메아리방송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게되였다. 얼마후 한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 사는 큰아버지께서 우리가 보낸 소식을 전해들었다는 내용이 메아리방송에서 나왔다는것이다. 그리고 고국에 계시는 친인들도 그동안 아버지를 애타게 찿았다는 소식이 무선전파를 타고 중국에 들어 온것이였다.
 
     탈곡장에서 일하던중 아버님은 이 반가운 소식을 동네분들 한테서 전해 들었다. 그날 아버님은 그토록 기뻐 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보고 남조선의 친인들을 찿았다고 그들이 살아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아마 아버지의 인생에서 이날 같이 즐거운 날이 더 없었을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혈열단신으로 만주땅에 들어와 산전수전 다겪고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 다 참가하고 갈곳 없어 연변땅에 자리 잡고 처자를 거느리던 아버님이 아니였는가. 친인이 살아 계신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얼마나 즐거워 했는지 모른다. 저녁에는 힌술도   몇잔 마시였다. 오매불망 애타게 기다리던 고향소식에 아버님은 어린애 마냥 즐거워 하였다.
 
      얼마후 남조선에서 혈육의정을 담은 편지가 날아 왔다. 큰아버님께서 친히 보낸 편지였다. 편지봉투에는 발신지를 대한민국이라고 밝히 였고 아버지이름자 밑에 귀하(贵下)라고 적어 놓았다. 주소도 아버님이 기억하신것과  거의 같았다. 다만 행정구역이 재획분으로 적으마한 변화가 있었을 뿐이였다.
 
     "아우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네가 살아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만주땅에서  얼마나  고생 했느냐"
처음으로 온 편지는 편폭이 길지 않았지만 혈육의 정으로 가득차 넘치였다 .
" 살아 생전에  꼭 상봉하길 바란다"
편지에는 또 녀동생이 일본에서 산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후일 내가 당년의 소중한 편지들을 따로 묶어 놓았다. 우리집의  력사기록물이였으니 말이다.
 
    얼마후 일본 고모한테서도  편지가 왔다.  고모님이  조선글 야학교에서 배운 밑천을 발휘하여 한자 한자 또박 또박 쓴 편지였다.
  "보고 싶은 오빠상전"
   이렇게 시작을 뗀 고모의 편지에는 오빠를 애타게 찿던 누이동생의 절절한 감정으로 흘러 넘치였다. 그뒤로 우리집에는 거의 한달에 한번 꼴로 일본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매번 편지가 오면 나는 전화 있는 집에 가서  공장에 출근하던 누님한테 전화로 읽어 드리였다. 물론 일본에 보내는 편지는 기본상 누님과 내가 맡아했다.
 
     고모님은 광복전 일본에 시집갔는데  자식을 1남5녀를 보았다고 했다. 일본에 가서도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태평양전쟁을 겪었고 미군의 점령시절도 보내였다고 했다. 여기 저기 피난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북해도에 정착하였는데  바찐꼬집을 차리고 지금까지 줄곳 북해도에 살고 있었다 했다.
 
    고모님이 오빠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도 남달랐다. 매번 친필로 만장같은 편지를 보내여 왔다. 꼭 상봉라고 싶다고 하며 중국방문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때 총련조직에 있던 셋째사위가 고모님의 중국방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오빠와의 상봉을 실현하기 위하여 고모님께서는 많은 서류를 작성하였고 끝내 방문허가를 받았다.
 
      3~4년간 얼마나 많은 편지가 오갔는지 모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랍누이 력사적 상봉은 1981년 7월 장춘공항에서 이루어 지였다. 중국말 한마디 못하는 고모님께서 아들 영채를 데리고 북해도에서 동경을 ,동경에서 북경을 ,또 북경에서 떠나 장춘에 도착하였다. 때를 마추어  아버님은  형님과 같이 장춘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40여년 만의 력사적 상봉 그러나 고모님께서는 근심스러운것도 있었다. 혹시 못 알아 보면 어떻게 하냐가 걱정되였던 것이다.  매사에 꼼꼼하신 고모님께서는 붉은 마후라를 목에 두루고 온다도 우리한테 편지를 보내왔다.
 
      40여년만의 상봉은 그야말로 눈물이 없이는 볼수 없었다고 한다. 두분은 서로 부둥켜 안고 상봉의 기쁨에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고 했다. 왜 그렇지 않으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던 오빠와의 력사적 상봉이 아니였던가.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아무런 주저도 없이 크고 작은 보따리를 들고 중국에 달려왔을가!     
   
  
       1993년 내가 일본방문때 고모님이 말씀하였다.
"니기 아버지가 니기  형님 같이 나왔더라꼬 . 만나니 을남이냐고 말 하는데 나는 옛날 너 아버지 모습 찿지 몬했다. 서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가 내가 을남임니다하며 손을 잡았다. 금시 눈물이 앞을 가리였다.  너무 격동되여 부둥켜 안고 우는데 꿈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더라"
 
    아버지와 형님은  고모일행을 모시고 연길로 내려 오시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장춘~연길은 특별렬차가 없어 온밤을 덜커덩거리는 기차를 타고 왔다.  사람이 너무도 많아  발딛을 자리 마저 없는 기차  땀내 지린내가 나는 기차를 타고 오시면서도 고모님께서는 아무 불편하다는 말씀없었다고 한다.
 
     그날 우리집에서는 총동원하여 역에 마중나갔다. 그때만 해도  연길에 외국사람방문이 매우 적었다. 시정부 와사과에서는  모처럼 찦차를 내여 고모님을 우리집까지 모셔 주었다. 감사한 일이였다. 차에서 고모님이 형님보고 "차는 너 집에 거냐"고 묻더란다. 고모님께서는 우리집 실정에 대해 잘 모르시였다. 국정차이란  이처럼 큰것이였다.
 
     때는 무더위로 가득한 7월달이였다. 비좁은 우리집에서 같이 자고 식사하면서도 고모님은 전혀 불편하다는 말씀 없었다. 일본땅에서 나고 자란 영채는  그당시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후일 내가 일본에 가서야 알았는데 중국방문전 고모님께서는 아들한테 단단히 교육하였다고했다. "불편한 사항이 있더라도 말하지 말아라. 참고 견디여라. 아니면 초면의 외삼촌 립장이 곤난하게 된다. "고모님의 우심 깊은 처사에 나는 다시 한번 탄복하고 말았다.
 
     아버님과 고모님은 얼굴 모습이 많이 닮아 있다. 혈육은 속일수 없는가 보다. 허나 당시 우리집에 머물면서도 처음에는 고모님이 우리 아버지를 진짜 오빠인지  두루 걱정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물론 내가 일본에 갔을때 나보고 하는 말씀이였다. 그러다 어느날 고모님이 아버지 머리에난 흉터를 보아내고 진짜 내 오빠라고 단정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릴때 오랍누이가 장난라다가 낸 흉터자욱이라고 했다.
 
    옛날  고향집에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 형제들 사이에만 간직하고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은 두분으로 하여금 다시 40여년전의  고향마을로 돌아가게 하였다. 아버님와 고모님사이에는 많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참으로 꿈같은 상봉의 한때였다.
 
   고모님은 우리집에는  채색TV한대를 누나한테는 자전거를 형님한테는 사진기를 나한테는 록음기를 선물했다. 아버지한테는 프랑스나폴레옹 양주를 특별히 선물하였다. 그때 우리집에는 매일 손님으로 가득했다. 일본에서 손님이 왔다니 무슨경사가 난듯이 동네분들이 많이도 찿아 주었다. 그때마다 고모님은 이국땅에 사는 오빠한테 잘 해준 분들이라고 하며 오는 손님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를 드리였다.
 
    사람마다 어느 한시기 혈육중의 그  누구와 닮는것 같다. 지금은 보면 누님이 당년의 고모모습과 흡사하다. 금년설 한국의 아버님 고향마을을 방문하기 전까지 나는 한씨네 혈육이라고는 고모님밖에 뵙지 못하였다. 형님과 누님들은 한국나들이 하면서 여러번 고향집에 다녀 왔었다. 사춘형님을 뵙는 순간 나는 우리 형님과 모습을 닮은데 놀라고 말았다. 실로 피는 속일수 없나 보다.
 
     1993년 고모님의 요청으로 누님과 내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우리는 고모님한테 선물한다고 고사리며 버섯등속도 한박스 준비했다. 옛날 상해를 소개한 영화에서 여우목도리가 고급스레 보이길래 그것도 3000여원주고 사가지고 갔다.
 
    우리는 북경에서 비행기편으로 동경에 도착했다 . 그때는 북경과 북해도 사이에 직항이 없던시절이 였다. 출국이라고 해야 조선에 가본것이 전부인 나에게는 설레이기도 한 려행길이였다.
 
    동경 나리타공항에 내리니 북해도 사촌누님의 아들이 마중 나왔다.  우리말을 하도 잘하기에 어디서 배웠냐고 하니  조선학교에서 배웠고 지금은 조선대학 재학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호텔에서 하루밤 묶고 이튼날 북해도를 바라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시간 정도 지나서 북해도 지도세공항에 도착하였다. 중국에 다녀왔던 영채형님과  처음 뵙는 동경누님이 마중나왔다.
 
      그때는 겨울이라 길에 눈이 많았다. 원래 북해도에 눈이 많이 내린다고 했다.  고모네는 바찐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 아래층은 영업방이고 웃층이 살림집이였는데 어림잡아도 1000평방이 넘을 같았다.
   아래층 입구에서 고모님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너희들이 왔꼬나. 오느라 욕 봤다. 얼른 올라가자"
 
  12년전에 중국에 왔을 때보다 조금 년로하여 보였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챙챙하였다.
   거실 정면에는 외손자가 쓴"중국에서온  손님을 환영합니다"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고모님이 중국을 다녀간후로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를 여이였고 고모님은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다. 만일 당년에 고모님이 용단을 내리고 중국에 오지 않았다면  오랍누이 상봉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2006년 나는 다시  한번 고모를 만나려 일본에 다녀 왔다. 그번 걸음에 보니 고모님은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안타까운 심정이였다.
 
   력사는 되돌아가지 못한다.  고모님께서는 자신의 행동으로 우리에게 혈육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었다.  하여 우리는 혈육의정이 무엇인가를 더 깊이 깨닳게 되였고 형제자매지간의 우정을 더욱 귀중하게 여기게 되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우리는 같은 피가 흐르는 혈육이기에 못 할 말이 없고 해결 못 할 일이 없다.
  오늘 고모님을 그리는 글을 적으며 다시 한번  고모님께서 만수무강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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