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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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사람과 그 후손들
2020년 05월 07일 09시 26분  조회:216  추천:0  작성자: 한영철
남도사람과 그 후손들
 
 一、이민1세

   어릴때 우리가 살던 소영마을에는 남도(南道)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기에 마을에서 경상도 말씨를 쓰는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경산도 사투리에 특별한것을 느끼지 못하였지만  동네에서는  아버지를  남도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1921년생인데 고향은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이다. 한일 합병으로 인한 일본놈들의 압박과 착취는 경산도 시골마을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경찰서에서 청년들을 강제 징병하려고 시골까지 쫓아 다니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던 그 시절 땅이 넓고 사람이 적은 만주가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18살되던 나이에 혼자서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왔다. 하지만 가진게 없는 사람에게서 만주 역시 똑같은 인간지옥이였다. 중국말 한마디도 모르는 경상도 청년은 만주허허발판에서 탄갱에서 벌목장에서 별의별 고역을 다 하다가 광복을 맞이 했다. 그뒤 지인의 소개로 엄마를 만나서 연길 근처 소영촌에서 새가정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3남1녀의  가장으로서  마른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밭도 다루고 소방목도 하고 양봉도하면서 자식들을 키웠다. 한일 고생만하다가 락을 보지 못하고  1985년 파산균감염으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몇해만  더 살아 계시였으면 고국땅을 밟아 볼수 있었으련만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릴때 우리집에는 친척이라고 해야 외삼촌 한집밖에 없었다. 내 또래 친구들은 쩍 하면 큰집에 간다거니 뭐니 했지만 우리에게는 큰집이 없었다. 어릴때 나는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였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아버지 고향이 남쪽이라는것 아버지는 홀몸으로 중국에 왔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고향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고향은 조전리(枣田里)인데 대추가 많이 나고 맛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이 통일되면 우리를 데리고 고향을 간다는 말씀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고국을 떠나 40여성상 되도록  한번도 고향땅을 밟아 보지 못하였다. 아버님께서 얼마나 고향을 가고 싶었고 부모형제들을 그리워했을가.
 
   지난세기 70년대 말부터 중국과 한국사이에는 서신거래가 통하였다. 우리 마을에도 누구네 집에서는 한국의 친척편지를 받았다고 하였다. 당시 메아리방송에서는 정기적으로 리산가족찿기  방송을 하였다.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늘 방송에 귀를 귀울리였다.
 
   당시 둘째형님이 아버님의 분부대로 메아리 방송에 편지를 하게 되였다.   중국길림성 연길에 살고 있는 아무개가 고국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형제 여러분을 찿는다는 내용이였다.
   그뒤로 아버지는 메아리방송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게 되였다.  얼마후 한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 사는 큰아버지께서 우리가 보낸 소식을 전해들었다는 내용이 메아리방송에서 나왔다는것이다.
 
   탈곡장에서 일하던중 아버님은 이 반가운 소식을 동네분들 한테서 전해 들었다.  그날 아버님은 그토록 기뻐 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보고 남조선의 친인들을 찿았다고 그들이 살아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이날 같이 즐거운 날이 더 없었을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혈열단신으로 만주땅에 들어와 산전수전 다겪고  연변땅에 자리 잡고 처자를 거느리던 아버님이 아니였는가.  친인이 살아 계신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얼마나 즐거워 했는지 모른다.  저녁먹을 때에는 힌술도   몇잔 마시였다.  오매불망 애타게 기다리던 고향소식에 아버님은 어린애 마냥 즐거워 하였다.
 
   얼마후 남조선의 큰아버지께서 혈육의 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 왔다.  주소도 아버지가 기억한것과  거의 같았다.  다만 행정구역이 재획분으로 작은 변화가 있었을 뿐이였다.
    "아우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네가 살아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만주땅에서  얼마나  고생 했느냐"
   그날 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후일 내가 당년의 소중한 편지들을 따로 묶어 놓았다.  우리집의  력사기록물이였으니 말이다.
 
二、이민2세

   중한수교가 이루어진 후로 한국방문길이 많이 열리였다. 어떤집들에서는 친척방문 요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허나 우리집의 사정은 좀 특별하였다. 글쎄 한국호적에 아버지가 언녕 돌아가신것으로 기재되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큰아버지도 우리를 요청할수도 없게 되였다.
 
  이야기는 거슬러 만주국시절이 였다. 한번은 도문에서 막일을 하던 아버지가 의외로 고향친구를 만나게 되였다. 아버지는 너무도 반다워 무작정 친구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술도 사주고 식사도 대접하였다. 고향의 부모님 안부도 묻고 자신의 근황도 소개하였다.  헤여질 때에는 권연도 한보루 사주면서 고향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자기의 소식을 전해줄것을 부탁했다. 헌데 무슨 원인이 였는지 그 친구가 고향에 가서 아버지가 사망했다고  한다. 하여 고향에서는 아버지가 사망한것으로 기록되여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한국 호적이 제명되지 않았다면 후손들인 우리의 초기 한국방문이 가능했었다. 헌데 관공서에서는 사망으로 기록된  사람의 후손이라니  요청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법을 통하여 아버지가 중국에 살아 있었다는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것이 매우 힘들었다. 하여 남들보다 일찍이 혈육을 찿은 우리가 오히려 남들이 다 가는 한국을 가지 못하게 되였다.
 
    2001년 큰형님은 한국기업의 요청으로 고국을 방문하였다. 그뒤 한국에서 일하고 생활하게 되였다. 그당시 형님은 우리집의 대표로 처음으로 아버지의 고향집을 찿았다. 그때 아버지의 형제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시고 산내면에는 사촌형님 부부만 살고 있었다. 형님은 고향에 찿아온 동생을 그토록 반겨 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집안 제사때면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냈다고 했다. 진짜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였다. 한번 본적도 없는 삼촌의 제를 지내주다니 너무도 감동되는 일이였다.
 
   당시 형님이 한국에 장기체류하려면 친척 요청이 있어야 했다. 사촌형님은 요청에 필요한 서류를 마련하려고 관공서에도 여러번 다녀 왔다. 머리칼을 잘라DNA검사를 마친 결과 혈육의 가능성이 99. 99% 로 나왔다. 그리하여 형님은 혈육감정에 통과되였고 또 한국영구체류권을 획득하게 되였다.
 
    2019년설 우리집 세식구는 한국에서 설을 쇠게 되였다. 한국에 도착하자 형님이 이번 걸음에 고향방문을 다녀오자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고향을 참배하는것이 응당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초사흩날 형님 누나 나 조카까지 네명이 아버의 고향을 찾아 떠났다. 평택에서 떠난차는 경주방향을 바라보며 달리였다.  차창밖을 내다보니 온통 산이다.  
 
   차가 경주에 가까워질수록 공연히 심장이 두근 거리였다.  아버님의 동년의 발자취가 남아있을 그 땅을 밟게 된다는 격동 때문이다.  사전에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받은  형수님이  여러번 전화를 해왔다.  어떻게 오냐고 몇시에 도착하냐고 말이다.  그리고 포항에 사는 딸에게 전화를 하여 올라와 우리를 배동하도록 분부하였다.
 
   차는 경주에 들어서기전에 오른쪽으로 돌려 산 내면 방향으로 달렸다.  나는 차창밖의 모든 것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어떤곳일까 옛날에는 어떠했을가 지금은 어떨가.  나로 말하면 조상의 발자욱과 숨소리가 슴배여 있을 고향에 다가선다는 그 자체가 격동이였다.
   "다왔어.  여기야"
  차에서 내려보니 완전한 시골 풍경이다.  새로지은 아담한 집은 널판자로 울타리를 둘었고 뜰안에는 경인기한대와 네바퀴오토바이가 서있었다.  집뒤에는 참대나무가 빼곡히 자라있다.   출입문을 열고 들여다보는데 형수님이 나온다.
  "아이고야.  너들이 왔꼬나"
  "형수님 안녕하셨습니까?"
   형님과 형수님이 정좌하시였다.  우리는 옛법대로 큰절을 올리였다.
  "너들이 오니 참 반갑다.  오노라 욕보았다.  "
  "많이 기다렸다.  고생했다.  "
   처음으로 듣는 한씨집안의 이야기였다.
 
   저녁때가 되니 밥상을 갖추어 올린다.  아마 큰집에서 맨날 제사상차리던 연고인지 형수님의 일솜씨가 재빠르다.  올해75세의 나이지만 목소리가 챙챙하고 기억력이 비상하다.  
 
   식사하는 내내 우리는 많은 것을 이야기 했다.  처음으로 중국에서 편지가 왔던이야기 그편지를 받고 그처럼 즐거워하던 큰아버지의 이야기 등이다.  전에 한국에 있는 할아버지와 삼촌들은 만주로간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간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다.  하여 아버지의 제사까지 지내였던 것이다.  
 
  三,이민3세

   큰형님의 아들은 2006 년에 아버지를 찿아 한국에 갔다. 우리 아버지가 당년에 살길을 찿아 만주에 왔는데 지금 조카애가 돈벌이를 떠난 아버지를 찿아 한국에 간것이다. 조카는 한국에가서 처음에 건설현장등에서 용역으로도 뛰였다. 지금은 꼬치집을 경영하였는데 장사가 잘 된다고 했다.
 
  누님의 딸 그러니 나의 외조카도 한국서울에서 사업한다. 원래 공부를 잘하던 조카는 중국의 유명대학을 나와 일본에가서 석사연구생을 마치였다. 그뒤로 중앙텔레비전방송국 등 여러곳에 취업하다가 지금은 중국유명게임회사의 한국주재관리직을 맡아 보고있다. 한국은 게임산업이 엄청 발달하였다. 조카는 지금  중국과 한국 일본등 여러개 나라를 넘나들며 사업을 넓혀가고 있다.
 
  다음 나의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은  2016년북경건축대학에 입학하였다.  아들의 대학교 전업교수님은 한국전균관대학의 박사졸업생이다. 아들이 대학1학년일때 교수님은 아이의 시야도 넓혀 주는겸 여름방학에 전균관대학에가서 견습할것을 건의하였다. 마침 본인도 가고 싶다고 하여 아들은 여름방학에 집적 서울에 갔다.
 
   헌데 어릴때부터 한족유치원을 거쳐 줄곳 한족학교를 다닌 금진이는 그때만해도 한국말에 서툴었다. 공항에서 전철타고 학교가는데 의사소통이  안되여 많은 고생했다고 한다. 그뒤 아들은 어머니따라 한국글과 말공부를 시작하였다. 아들은  올해 대학 졸업이다.
 
  맺는말

   아버지는  전형적인 이민1세였다. 아버지는  홀몸으로 중국에 들어와 많은 고생하다가  어머니을 만나 결혼하고 우리3남1녀를 보았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는 갑산집이요 용포동집이요하는 고향마을 이름을 붙인 집들이 많았다.  그법대로라면 우리집은 조전리집이였을 것이다.
 
   남도(南道) 생활의 특징는 우리집 여기저기에서 표현되였다. 과거에 동네에서고추장을 담그는 집은 우리집이 유일하였다. 아버지는 비빔밥도 좋아하고 냉국도 즐긴다. 학교에서 들놀이 갈때 내가 고추장에 묻혀 구운 더덜기반찬을 가져가니 모두 맛있다고 야단이였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세상을 뜬지도35년이 된다. 중한수교이후 두 나라사이의 경제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조금만 더 오래 살아도 아버지는 고국으로 돌아 가려던 념원을 실현하였을 것이다. 지금 형님이 한국가서 일한지도 근 20년이 된다. 나도 한국에 여러번 다녀 왔다. 한강의 기적은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한 경산도 청년의 만주 이민사는 많고 많은 이민사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별과 상봉 슬픔과 환락은 우리 가정의 진실한 력사였다. 그 후대로서 우리는 아버지가 못 이룬 념원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고 있다. 이민1세에서 이민2세로 이민3세로 내려가면서 끊어지였던 가정 력사도 잇었고 또 고국땅에가서 젊음의 꿈도 이루고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우리는 혈육이 였기에 40여년의 이별속에서도 잊지 않고  끈끈한 정을 안고 살았으며 우리는 동포이기에 방문취업의 길이 열리여 시름 놓고 로동하고 돈을 벌수 있으며  우리 두 나라의 우호적 관계가 지속되기에  젊은 세대들간의 친선교류가 끊임 없이 이루어 지고 있다.
 
  아버지세대의  만주 이민은 일본놈들의 핍박에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피눈물의 력사의 한부분이 였다. 우리 민족은 지나온 과거를 영원히 잊지 말고 분발노력하여 경제의 발전과 사회건설에 힘다해야 할것이다.
 
두나라가 사이 좋게 보내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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