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5월 2024 >>
   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시인 지구촌

"조양천"과 김조규
2016년 11월 11일 22시 52분  조회:3060  추천:0  작성자: 죽림

김조규의 재만시기 시문학 연구

장춘식

 

1. 재만시기 김조규의 행적과 의식성향

 

  김조규는 1914년 평안남도 덕천군 태극면 풍천리에서 김명덕목사의 7남5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 시절인 1929년에는 광주학생사건을 성원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게 잡혀 평양감옥에서 미결수로 복역하기도 했다. 그것이 전과가 되어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과에 다니면서도 해마다 광주사건 기념일과 메이데이를 전후로 일주일씩 평양경찰서에 예비 검속되기도 한다. 1931년 <조선일보>에 시 「변심」 등을, <동광> 10월호에 「검은 구름이 모일 때」 등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37년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는 일본유학을 시도하였으나 학생운동 전과 때문에 불온학생이라는 낙인이 찍혀 성사하지 못하고 함북 성진 보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리고 곧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여 중국에 건너가 간도에 있는 조양천 농업실천학교(1년후 조양천농업학교로 개칭)의 영어 교사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만주생활을 시작한다.1)

  1938년 문학동인단체인 “斷層”, “貘”에 참여한 바 있으며 조양천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시작활동을 하였다. 1942년에는 앤솔러지 <재만조선시인집>(연길 예문당)을 편집 간행하며 1943년 가을에는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만선일보> 편집기자로 입사하게 된다. 그리고 1945년 3월경에 조선의 향리로 돌아가 은거해 있다가 광복을 맞는다. 광복 후에도 김조규는 꾸준히 시작활동을 해오다가 1990년 12월에 작고하였다.

  이것이 김조규의 대략적인 경력이 되는데 여기서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1938년 간도에 들어 와서부터 1945년 조선에 돌아갈 때까지 김조규의 행적이다. 상기 경력에서는 김조규가 조양천농업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지냈고 1942년에 앤솔러지 <재만조선시인집>을 편집하였으며 1943년에 <만선일보> 편집기자로 입사하여 1945년 3월경까지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집을 편집하면서 쓴 서문 「編者序」가 문제 되고 있다. 먼저 그 전문을 인용해 본다.

 

  編者序

 

  建國 十週年의 聖典. 우리는 敬虔한 世紀의 奇蹟을 가지고 있다. 神恷와 計劃과 經綸, 그리고 生活, 이속에 道義의 나라 滿洲國의 建設이 있었고 그러므로 또한 우리들의 자랑도 크다.

 

  이 奇蹟과 자랑속에 뮤-즈도 자랐다. 不幸한 産聲을 울린 流浪의 夜宿으로볼(붙)어 거룩한 建設우에 絢爛한 花環을 걸기까지 二十年, 츤도라의 괴로운 旅程속에서도 우리뮤-즈는 歷史的인 自己의 位相과 方向에 銳敏하기에 怠慢치않었다. 이곳 大陸의 雄圖에서 一大浪漫을 創作하며 呼吸하는 거록한 情熱과 새로운 意慾---詞華集의 要求도 바로 여기에 있으며 우리는 이 微誠으로나마 빛난 建國十週年을 慶祝함과아울러 大東亞新秋(秩)序文化建設에 參與하련다.

 

  化裝이 매끈치 못하다면 울든凍土를 가르치겠다. 목소리가 거츨다면 密林과 平原을 보이겠다. 이제 不幸하였든 뮤-즈는 天衣를 입고 雪原우으로 도로이카를 달려도 좋을겄이다.

 

  南風이 불면 꽃씨를 뿌리겠노라

  눈이 나리면 설매에 무지개를 달겠노라

 

               壬午 여름, 編者 識.

 

  일제가 조작해낸 괴뢰 만주국 건국 열돌을 “聖典”이라 하고 세기의 기적을 가진다고 했다. 만주국을 “道義의 나라”라고 했으며 이로 하여 자랑이 크다고 했다. 그리고 시집의 발간 취지에 대해서는 “微誠으로나마 빛난 建國十週年을 慶祝함과 아울러 大東亞新秋(秩)序文化建設에 參與하련다.”고 하였다. 누가 보아도 이것은 만주국의 정치에 순응한 어용적인 성격이 짙은 글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에 수록된 53편의 시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민족적이며 “동포들의 개척초기의 애환과 궁핍한 삶, 정착의 의지와 망향의 의식 그리고 지성인들의 고뇌를 읊”고 있다.2) “기본적”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일부 친일적인 시작품은 아니라도 만주국에 대한 옹호의 작품들도 몇 편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마저도 만주국에 대한 옹호보다는 이주민의 생존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한 측면이 있어 무턱대고 비난받을 바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다시 이런 조금은 어용적인 것처럼 보이는 김조규의 글이 진짜 김조규의 의식성향을 드러낸 것이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김조규의 행적에 대해 좀더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김조규는 평양 숭실학교 시절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성원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한 바 있고 그로 하여 해마다 일주일간씩 예비 검속을 당하며 만주에 들어 온 것도 사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는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만주에 들어 오기 전까지 김조규의 의식성향은 민족적이고 저항적인 측면이 강했다고 할 수가 있다.

  조양천농업중학교 교사로 취임한 후에는 어떠했는가? 당시 그 학교 학생이었던 현룡순의 추억에 의하면 김조규는 “국문”(일본어문) 시간에 한글로 된 자신의 시작품을 가끔 읊어주곤 했다고 한다. 그 때 읊었던 시 중에는 「연길역 가는 길」, 「3등 대합실」, 「남풍」 등 작품들이 포함되는데 이들 작품들은 대체로 조선 이주민의 불행과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불러도 불온사상을 퍼뜨렸다고 하고 “‘국문’시간에 조선말로 된 시를 읊은것은 수업규정을 엄중하게 위반한 행위로 치죄”3)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한글 시작품을 학생들에게 읊었다는 것은 그만큼 민족적인 의식성향을 가지고 있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은 당시 김조규의 또 다른 제자였던 시인 설인의 추억에서 발취한 것이다.

 

  1930년대말부터 조선족중소학교에서 조선어과를 페지하게 되자 선생님(김조규-인용자)은 과외로 문학써클활동을 조직하셨는데 조선문학강의를 하셨다. 학생들에게 조선문학을 가르쳐야 하겠는데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의 명작과 함께 일본의 하이꾸(俳句)와 와가(和歌)와 같은것들도 사이사이 넣어주었다.

  (중략)

  <춘향전>은 절록한 프린트였는데 춘향이와 리도령이 갈라지는 애절한 장면과 춘향이 옥중에서 굴함없이 강포와 싸워이기는 대목이였다. 김선생님은 “어떻냐, 춘향과 리도령의 수정같은 사랑이…또 춘향이 지지누르는 권력앞에서 굽히지 않는 송죽의 절개가…” 하고는 잠간 말씀을 멈추셨다. 아이들도 어쩐지 가슴이 찡해났다.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춘향의 절개에 엄숙해졌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이렇게 살면 어떨가?” 하고.

  <춘향전>강의는 작품을 통한 애국애족의 교육이였다.4)

 

  비록 제자로서 스승에 대한 좋은 기억만을 기록하였을 수도 있으나 일제말기라는, 언론 통제가 막심한 열악한 환경에서도 민족문학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자 한 김조규의 행위는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문학을 가르치기 위해 조선의 명작과 더불어 일부 일본의 명작들도 함께 강의했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문제가 된 앞의 어용적 문구들이 민족성 혹은 민족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취했던 일종의 전략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민족적 혹은 저항적 몸뚱이를 일제의 총칼 앞에 내놓지 않기 위해 보호색의 옷을 입혀 놓은 형국이 되지 않을까 한다.

  요컨대 재만시기 김조규의 행적에서 우리는 시인이 비록 일부 어용적인 것처럼 보이는 글귀를 남기기도 했으나 그것은 일종의 방편일 뿐 기본적으로 민족적 혹은 저항적인 의식성향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2. 암울한 시대 고민하는 자의 내면풍경

 

  김조규는 일생에 수많은 시작품들을 남겼다. 현재 <김조규시전집>에 수록된 시작품만 해도 318편(그 중 해방전 작품 147편, 해방 후 작품 171편)이며 전 작품은 550여 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조규가 1938년 만주에 들어온 후부터 1945년 조선에 나가기 전까지 약 7년간에 걸쳐 창작 발표한 작품들만 해도 60편에 달한다. 본고에서는 이 60편의 작품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그 성취와 작가의 의식성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단, 미발표 작품 혹은 발표지 미상의 작품들은 비록 시인의 육필원고를 입수하여 간행했다고는 하나 시인 생전에 정리한 원고이기 때문에 가필의 가능성을 감안하였다.

  김조규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시인의 작품량이나 작품수준에 비해서도 그렇고 또 같은 시기 다른 시인에 비해서도 적게 이루어진 편이다. 그러나 관련된 연구 논문들에서는 기본적으로 김조규의 시문학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권영진은 그의 해방전 시들을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제1기인 문단 데뷔기의 작품들은 어두운 현실 인식과 고향 상실의 정서를 주로 드러냈고, 제2기인 「斷層」, 「貘」 등 同人活動期의 작품들은 지식인의 좌절의식과 당시 문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모더니즘 혹은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을 수용하여 형상화시킨 경향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제3기인 民族意識 성숙기의 작품들(在滿活動期)은 移․流浪民의 생활상과 祖國喪失 및 저항의식을 각각 드러냈다고 보았다.5) 권영진의 분석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재만시기에 이르러서도 그의 좌절의식과 실향의 정서는 큰 변화 없이 줄곧 이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단 이민지의 삶이 시작에 녹아들면서 이주민의 고난과 좌절, 실향의 정서들이 좀더 강하게 표현되며 일부 민족 민중 지향의 사실적 표현들이 엿보임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는 조규익의 주장에 공감한다.6)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좌절의식과 상실감은 비록 광복전 시 전반을 관통하고 있으나 초기 시들의 좌절의식과 상실감은 구체적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추상적인 표현에 그침으로써 상당 정도 감상에 머물고 있는 반면에 재만시기의 작품들에서는 그러한 좌절과 상실감이 뚜렷한 실체를 드러내면서 좀더 구체화되고 있으며 동시에 분노와 저항의식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室內”의 이미지가 두드러진 일부 작품들에서 화자의 자폐적인 욕구나 성향이 노출된 점은 전시기 작품의 감상성을 재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는 하나 미발표작들에서 드러나는 현실 저항과 민족정체성 보존의 의지들은 특기할 사항이라 하겠다. 비록 더러 시인이 해방후 가필한 흔적이 보이지만 일단 현존하는 텍스트에서 보여지는 시적 의미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1) 절망의 이미지와 현실 부정

 

  먼저 「素服한 行列」7)의 경우 화자는 암담한 현실과 그에서 비롯되는 상실감을 소복 입은 葬列에 기탁하여 표현한다.

 

가까운 市外의 無感한 길을 지나

지금 슬픈 行列은 沈黙한 채 이그러진 나무다리를 건느고 있다

하늘로 向한 두 손은 그래도 蒼空을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중 략)

 

失神한 風景이다

지금 靑春을 잃은 불쌍한 歲月을 지나 들을 건너

素服한 行列은 한 여름 물 흘러보지 못한 한 板橋 우를 無言한 채 건느고 있다

하눌로 향한 두 손은 그래도 蒼空을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작품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인데, “슬픈 行列”은 “無感한 길”을 “沈黙한 채” 지나간다. 그리고 건느고 있는 나무다리마저 “이그러진”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느낌은 “失神한 風景”으로 표현된다. 결국 葬列이 지나가고 있는 길은 그냥 길이 아닌, “靑春을 잃은 불쌍한 歲月”이요 “한 여름 물 흘러보지 못한” 강 위의 “板橋”이다. 생물학적인 눈에 비친 객관적 현실과 마음의 눈에 비친 역사적 현실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첫 연과 마지막 연에서 반복되는 행 “하늘로 向한 두 손은 그래도 蒼空을 그리워하는 모양이다”는 암흑 속에 실신한 채 괴로워하는 민족의 절규요 구원을 갈망하는 애처로운 몸짓이 될 것이다.

  「素服한 行列」이라는 제목 자체에 죽음이나 암울, 더러 절망에 가까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바지만 시 전반이 그러한 어둠과 죽음, 疲勞感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점철되다 시피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어둠과 죽음, 절망에 대해 화자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다. 「露臺의 午後」8)는 그러한 무기력함을 좀더 절실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쏘파의 기우러진 感情이 늙은 寢臺를 僞善하는 倦怠로운 午後”라는 첫 행에서 그러한 무기력은 잘 드러난다.

  무기력증에 이어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상태가 퇴폐적인 낭만 혹은 타락한 자기 위안이 될 것이다. 이런 상태를 드러낸 작품은 상당히 많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예로 「野獸一節」과 「野獸 第二節」을 들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시행을 나누지 않은 산문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략) 白晝에서 放逐받은 나는 音樂과 薔薇와 蒼空을 몰라도 좋다. 나의 鄕愁가 흔들리는 어두운 밤이 層層階밑에서 숨쉬고 있지 않은가? 腐爛하는 肉體와 惡臭와 賣淫婦의 乳房이 飛翔하는 나의 意慾과 더불어 霧散하는 밤. 밤. 밤.”9) 「野獸一節」의 후반부인데, 밤이라는 이미지를 폐쇄된 공간인 “層層階밑”과 연결시키고 다시 거기에서 퇴폐적인 낭만을 돌출시킨다.

  「野獸 第二節」에서는 밤이 너무 아름답다고 한다. 당연히 역설적인 표현이다. “비 오는 날 나는 雙頭馬車를 달리면서 네 血管 속에 흐르는 毒素와 淋菌과 붉어진 네 콧잔등의 腫氣를 빨고 싶은 衝動에 내 鼻汁을 핥았다.” 이와 같이 퇴폐적인 밤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절망에 빠진 자의 울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밤과 몰핀(마약), 매음부의 유방, 살육, 腐爛하는 육체, 淋菌, 腫氣, 惡德의 華花…모두가 퇴폐와 절망을 나타내는 시적 기호들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서구에서 발생한 모더니즘 시작품들에 흔히 등장하곤 하는 퇴폐적인 낭만의 이미지들이다.

 

  비 오면 흙탕 물이 흐르고 馬車가 감탕 속에 빠지고 몰핀 中毒의 黃顔이 跋扈하고 어두운 골목에선 殺戮이 으젓하고 下水口의 구데기가 寢具에 기어들고 白馬의 生殖器가 腐蝕하는 肉體와 더불어 흐린 慾望에 露出하는 밤 밤. 童話를 잃어버린 世代의 썩어지는 心室 속에 沈澱하는 毒素는 漆黑이다. 오호 夜光에 흩어지는 惡德의 華花. 꾸우냥과 더불어 밤을 먹으며 나는 미칠듯이 좋아한다. 黑眼鏡에 칼 웃음치는 모오닝 입은 紳士. 점잖은 惡魔의 頭像.10)

 

  작품의 후반부인데 여기서는 상기 이미지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해 준다. 밤을 즐기며 몰핀 중독을 “상속” 받은 매음부와 성적인 쾌락을 즐기는 “紳士”, 그러나 그것은 “黑眼鏡에 칼 웃음치는” “점잖은 惡魔의 頭像”이다. 절망에 빠진 화자의 분노를 시인은 이런 식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憤怒도 섫음도 水晶이 되엿다”고 고백한다.11)“喪失當한 나의 存在” 때문이다. 이 점을 화자는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더 분명하게 표현한다. “(부셔라, 깨트려라. 담배를 던진다/허나 風船의 倫理다. 남는 것은 또 하나의 自嘲)” 결국 현실에 분노하면서도 그것을 분출하지 못하는 처지 때문에 화자는 퇴폐적인 낭만에 빠져버린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것을 달갑게 여기지는 않는다. “自嘲”한다는 것은 아직도 한가닥 저항의 의지를 내면에 묻어두고 있다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기력과 자조가 좀더 강조된 작품이 바로 「病든 構圖」12)가 되지 않을까 한다. “病든 構圖”라는 제목 자체도 그렇거니와 “弔服”, “夜霧”, “어두운 構圖” 등 이미지들은 앞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혹은 그것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들이 다수다. 그리고 화자에게 있어 현재의 삶은 분노도 병들고 자조마저 지친 상태다. 왜? 그것은 “眞實을 虛構로 僞善하는 層層階의 倫理” 때문이며 “歪曲된 思索”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화자는 “葬地를 머언 異域으로 選擇하여 보”지만 여전히 “室內의 靜寂이 끝없이 무서웁다”. 현실의 암흑과 왜곡된 현실을 무시해 보고자 하지만 그것이 왜곡된 삶이기 때문에 끝까지 무섭고 괴로운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어쩌면 무기력이나 자조를 넘어 삶에 대한 체념마저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이상 살펴본 작품들은 대체로 모더니즘적인 성격을 짙게 드러낸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성격이 좀더 짙은 작품은 아무래도 「P少年一代記」13)가 아닐까 한다. 먼저 작품 제1연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墓碑銘의一節

「女人의 恥毛가 날리우는날 少年은 다시 復活한다」

버러지들은 無目이엿다 窓박에서 밤ㅅ비 코쓰모쓰의 孤獨을울리는 밤은 無數한 産卵의 期間이엿다, 石榴와 갓튼 少年의微笑에서 女人은 試驗管의 透明體를 感覺하엿고 밤마다 로-마 廢墟의 風化헌 記憶을 슬퍼하는 少年은 가마귀의 豫告를 귀아프게 들은 아침 轉地의 勸告를 밧덧다.그날밤 女人은 送別의 食卓을 저즌手巾과 造化로裝飾하엿다.

 

  기본적으로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일상적인 시작품 해독 방법으로는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하다. 다만 상기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여기서도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이들간의 상호 관련성을 염두에 두면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이미지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무섭다”, “喪輿”, “늣가을 찬바람”, “黃昏”, “무덤”, “女人의 恥毛”, “林檎”, “墓碑”, “殉死”, “로-마 廢墟의 風化헌 記憶”, “가마귀의 豫告”…모두가 죽음과 어둠, 성(性), 폐허와 관련되는 이미지들이다. 여기에 인용하지 않은 부분의 이미지들, 가령 “氷雨가 車窓을 두드리든 黃昏”, “쥐새기의 搖籃인 女人의 불근 寢室”, “가마귀의 華麗한 分列”, “도마도와 갓튼 불근 피덩이를 吐하면서 운명할 ”, “허이연 한울이 문허지고”, “地下室의 饗宴”, “점잔은 殺戮” 등을 연결시켜보면 그러한 암울함의 정서는 보다 강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모더니즘시운동을 감정 및 의식의 퇴폐화와 관련시키는 주장은 일부 합리적인 면을 가지기도 한다 하겠다.

 

少年의 喪輿는 늣가을 찬바람에 饌送되어 黃昏속에 잠기엇고 少年의 무덤압헤는 女人의 恥毛로 包裝한 林檎 한알을 고여노앗다. 女人은  한포기 고이지 안헛고 뭇俗物들의 무덤과 무덤새에 홀로 하이얀 墓碑만이 지터가는 黃昏 黃昏을 지키고잇섯다.

  高邁한 精神少年의 殉死之地

 

  이 작품의 마지막 연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앞에서 墓碑銘의 一節이라 하여 인용한 “女人의 恥毛가 날리우는날 少年은 다시 復活한다”와  “少年의 무덤압헤는 女人의 恥毛로 包裝한 林檎 한알을 고여노앗다.”는 문구의 대응 관계이다. 소년의 죽음은 “市民이여 언제 점잔은 殺戮을 종말하겟느뇨?”라는 표현을 감안하면 아마도 전쟁과 관련된 듯 싶은데 그렇다면 화자는 이제 새로운 희망을 다음 세대에 기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女人의 恥毛”는 성기→자궁→잉태와 출생에 연결되기 때문에 이 시에서 말하는 “復活”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라기 보다는 새 생명의 탄생을 의미할 것이다.

  이 작품은 김조규의 작품에서 가장 모더니즘적이며, 또 초현실주의 시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한다. 시인 자신도 많이 아꼈던 모양으로 1939년에 <詩學>에 게재했던 이 작품을 다시 1942년에 간행된 <滿洲詩人集>에 수록하고 있다. 그만큼 모더니즘 시운동에 상당히 깊이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조규의 이러한 시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 중에서는 「馬」도 빠트릴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품의 무의식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띄어쓰기마저 무시해 버리고 있다. 4장으로 된 이 작품의 제1장을 들어 보이면 다음과 같다.

 

  네가魚族이되여보풀은여름밤을헤염칠때나는네의華美를슬퍼할줄몰으는나를슬퍼하였다너는네皮膚를欺瞞하며네의肝線을異國産品으로封鎖하나네가먹는冷性飼料는花瓣과같은高熱을낯울수는있을망정레-쓰실같은네의血管을속일수는없다密生한羊齒類植物의불타올으는意慾. 너는버얼서휘파람부는魚族일수는없다14)

 

  띄어쓰기를 무시한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무의식의 표현을 좀더 강화하기 위한 시도일 수도 있겠거니와 실제로도 이 작품은 매우 난해하다.

  요컨대 김조규는 식민지 현실을 암담한 밤의 세계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러한 현실을 부정하고 또 분노하고 절망하지만 좀체로 그러한 분노와 절망을 표출할 수 있는 출구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퇴폐적인 낭만, 무기력한 자조에 빠지기도 하지만 암울한 현실을 탈출하고자 하는 노력은 포기하지 않고 있다. 현실의 암울함을 시작 속에 표현하고 있는 자체가 곧 그러한 노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특히 초현실주의 표현기법의 선택이 검열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한 시인의 노력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2) 도피와 침잠(자폐)의 욕망

 

  그러나 퇴폐적인 낭만이나 무기력에서 비롯된 자조 그리고 체념에는 현실을 잠시나마 도피하려는 욕구, 혹은 자폐의 욕구가 동반된다.

  그러한 도피와 자폐의 욕구를 잘 보여주는 것이 “層層階”와 “室內”, “猫(고양이)”, “蛇(배암)”와 같은 특정 이미지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여기서  “猫(고양이)”와 “蛇(배암)”는 결국 비슷한 의미를 나타낸다. “밤이면 室內에 毒蛇와 같이 웅크리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나의 불상한 習性이다.”15)라는 예문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예문에서 우리는 동시에 이 두 이미지가 “室內”라는 공간의 이미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層層階”는 더구나 실내에서도 가장 음침한, 뱀이나 고양이가 움츠리고 있기에 적당한 공간임은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조규의 시작품에 등장하는 “猫(고양이)”는 대체로 “黑猫” 즉 검은 고양이이며 “蛇(배암)”는 “毒蛇”가 다수라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모더니즘 시작품에서 흔히 풍기는 암울하고 음침한 분위기 조성을 위한 장치로서 뿐만이 아니라 실내가 잠시 현실을 도피하여 머물고 있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영원히 도피할 수 있는 포근한 공간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왜 화자의 울분과 그것을 표출하려는 욕구를 항상 자폐의 공간에 감추고 있는가를 은연중에 드러낸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다시 도피의 욕구와 직결되는 이미지인 “室內”의 경우를 살펴 보자. 김조규는 「室內」라는 제목으로 시 2편을 창작 발표하였다. 1940년 6월 <斷層> 第4冊에 게재한 「室內」에서 실내는 은닉의 공간, 자폐의 공간이다. 이 점은 “蛇의 思考가 달빛 같은 肉體에 남었을 뿐”이라는 표현에서 단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은닉의 공간을 “테라쓰를 적시는 달빛 「쏘나타」/오오 郊外를 걷든 네 자욱소리가/壁으로 숨는다 밤새 ……” 식으로 아늑하게 설정해 놓는다. 도피와 자폐의 욕구가 짙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피의 욕구는 「獸神」16)에 오면 앞 항에서 논의한 바 있는 퇴폐적인 낭만과 연결된다. “계집”과의 개와도 같은 성적인 유희가 자폐적인 공간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계집은 勿論 女人은 안입니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매음부 정도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자폐적 표현들은 「밤의 倫理」17)에 와서 그 원인이 일부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 밤을 幸福할련다./華麗한 밤의 倫理로 잠시 幸福할련다.”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와 같은 동물적인 쾌락의 추구는 밝음에의 지향성이나 희망, 기대에 찬 추구가 막힌 화자의 자폐적이고 체념적인 행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1942년 2월 14일부 <滿鮮日報>에 앞의 「獸神」과 함께 게재된 「室內」18) 또한 앞의 「室內」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파아란 煙環속엔 天使가 산다

天使는 憂愁를 宿命 진엿다

오늘밤도 말업시

나의 室內로 天使를 조용이 불너들이다

天井으로 올으는 煙氣는 외로운 憂愁의 舞라한다

회오리 落葉도 안인 휘파람도 안인

天井과 벗하는 쓸쓸한 思想이라 한다

가슴을 콕 쑤신다 오란다 卓上時計

손을 드니 오오 열손가락이 透明코나

고양이도 안산다 花盆도 업다

울지도 안흘련다 외롭지도 안흘련다

室-內

우리 슬픈 天使는 숨소리 하나 업는 房속만이 좃탄다

 

  「室內」 전문이다. 이 작품에서 외로움, 상실감이나 슬픔은 숙명으로 받아 들여지며 그 것마저도 폐쇄된 공간 속에 갇혀 버린다. 이 정도가 되면 일종의 도피라 볼수도 있겠는데, “고양이도 안산다 花盆도 업다/울지도 안흘련다 외롭지도 안흘련다”라는 표현에서 그것은 반전된다. 즉 숙명이나 체념은 일종의 아이러니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도피하려는 주체는 화자가 아닌, “天使”이기 때문이다. 결국 화자와 천사의 두 얼굴의 주체가 시 속에서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즉 암울하고 무정한 현실에서 폐쇄된 공간으로 도피하려는 의식과 그러한 타락에 반항하려는 의식의 충돌이 이 시의 기본적인 정서가 된다는 말이다. 시인의 모순된 사상 혹은 의식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3) 뿌리 뽑힌 자들의 방황과 鄕愁

 

  조선족의 문학은 이민문학으로 출발하였다. 조선족의 역사가 이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민의 정서가 이민시인들의 시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조규도 많은 조선족 이민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민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가령 「胡弓」19)의 경우 이국적인 정서와 이민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일차적으로 호궁이라는 중국인을 상징하는 악기를 등장시킴으로써 만주 지역 중국인 이주민의 삶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주민인 조선인 이주민의 삶을 호궁이라는 이미지로써 표현한 것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어머니의 자장노래란다”, “일어버린 南方에의 鄕愁란다” 라는 두 행의 의미는 오히려 조선인의 이미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새 늣길려느뇨? 胡弓”과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라는 마지막 행의 표현은 이주민들이 공유하는 암울한 삶과 슬픈 운명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사실 김조규에게 있어서 만주 이민의 문제는 그 자신이 이민으로서 간도에 들어오기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각각 1936년과 1937년에 발표한 「다시 北으로―破波에게」20)와 <北으로 띄우는 便紙―破波에게」21)가 이 경우에 속한다. 두 작품은 모두 破波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로 되어 있다. 전자는 추운 겨울 이국 땅에서 얼고 있을 친구를 걱정하는 내용이고 후자는 여름 날 남쪽을 향해 향수에 젖어 있을 친구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서 한결같이 흐르는 정서는 향수이다. 「다시 北으로」의 경우, “한여름 부풀었던 네 노스탈쟈가/지금은 들판 白楊木 가지에서 어이없이 떨겠고나”나 “아무리 치워도 南쪽 바라지만은 封하지 말어라/어름ㅅ길 천리-아득한 南녘 地平線을 바라보기에”와 같은 표현들에는 향수의 정서가 짙게 드러난다. 「北으로 띄우는 便紙」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南쪽 그리우면 黃昏을 더부리고 먼- 松花江ㅅ가으로 逍遙해라”, “異域의 胡弓소리는 미칠 듯한 鄕愁를 눈물겨운 寂寞으로 이끈다드라”와 같은 표현들이 그에 속한다. 鄕愁의 정서를 “노스탈쟈”라는 같은 의미의 외래어까지 동원하여 표현한 것은 그만큼 절실하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향수는 자신의 체험이 아닌, 친구의 체험을 통해 그려진다. 친구를 객관화시킴으로써 이주민의 정서를 드러내고자 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鄕愁」라는 제목의 시에서도 향수의 정서는 여전히 주로 “나타샤”라는 이방인을 통하여 표현되지만 동시에 화자인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쫓겨온 에트란드의 설음은 나도 깊단다”에서 이 점은 곧 드러나는데, 더구나 “나타샤, 너는 아직 白薔薇를 안고 있느냐?/꿈을 잃었다, 故鄕도 없다, 사랑마저 南쪽에 묻고,” 라는 표현에서는 나타샤라는 이방의 처녀를 빌어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처지와 향수를 드러내고 있다. “하이랄”이라는 중국 동북부의 도시에서 만난 나타샤라면 대체로 당시 러시아에서 추방당한 백계 러시아인 여인이 될 것인데 “사랑마저 南쪽에 묻고”에서 보여지는 고향은 러시아인의 고향이 아니라 조선인의 고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茶店 <알라라드> 2章」22)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시인은 자신의 향수를 표현하고 있다. “너는 한 마리 ‘슬라브’의 파랑새”나 “너는 너를 낳아준 볼가강 잔디 푸른 언덕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에미 그란드,” 등의 표현에서 우리는 차점 여급쯤 되는 이 아가씨가 러시아인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23) 그러나 “나는 나대로 추방당한 신세라 차잔을 앞에 놓고 창문 밖 비에 젖는 행길을 虛寂하고 있었다.”24) 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방인 아가씨의 운명은 결국 조선 이주민의 운명을 표현하기 위한 상관물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향수는 김조규의 시에서, 특히 재만시기 시작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정서가 된다. 그런데 향수라는 정서는 인간이 흔히 느끼는 정서이기는 하나 대체로 개인적인 정서의 범주를 넘지는 않는다. 따라서 향수라는 정서로 이주민의 고달프고 비참한 운명을 표현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아마 그래서 김조규는 列車나 驛의 이미지에 집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주민의 설음과 고달픔을 좀더 객관화 시키기 위한, 혹은 뿌리 내리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는 이주민의 운명을 표현하기 위한 한 장치로 적당하기 때문이다.

  「北行列車」25)의 경우 조선인의 북행 이민을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노라”고 표현함으로써 이민의 피동성을 설파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니라 고향에서의 삶이 파탄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떠났음을 강조한 것이다. “大肚川驛에서”26)나 「三等待合室」27), 「한 交叉驛에서」28) 등 작품에서 역은 이주민의 삶의 현장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길을 찾아 도착한 이민지의 삶 역시 빈궁과 서러움 뿐이다. 한때 모더니즘에 심취했던 김조규는 이러한 이주민의 삶을 보면서 새로운 리얼리즘을 지향해 이주민의 삶의 모습을 시상에 담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延吉驛 가는 길」29)은 그 좋은 예가 된다.

 

벌판 우에는

갈잎도 없다. 高粱도 없다. 아무도 없다.

鍾樓 넘어로 하늘이 묺어져

黃昏은 싸늘하단다.

바람이 외롭단다.

머얼리 停車場에선 汽笛이 울었는데 나는 어데로 가야 하노?

 

호오 車는 떠났어도 좋으니

驛馬車야 나를 停車場으로 실어다 다고

바람이 유달리 찬 이 저녁

머언 포풀라 길을 馬車 우에 홀로.

 

나는 외롭지 않으련다.

조곰도 외롭지 않으어다.30)

 

  「延吉驛 가는 길」 전문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김조규의 대표작을 들라면 「P少年 一代記」, 「胡弓」과 함께 이 작품을 꼽을 수 있을 정도로 「延吉驛 가는 길」은 뛰어난 작품이다. 기교적으로도 정제되었거니와 당시 김조규가 추구했던 주제의식, 시적 표현 장치 등을 두루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제1연에는 만주 벌판의 황량함과 싸늘한 황혼의 분위기가 그려지고 있다. 특히 “鍾樓 넘어로 하늘이 묺어져” 라는 표현은 뒤에 나오는 “바람이 외롭단다”와 맞물려 곧바로 작품의 주제에 접근해 간다. 압권은 제1연의 마지막 행 “머얼리 停車場에선 汽笛이 울었는데 나는 어데로 가야 하노?”가 될 것이다. 뿌리 뽑힌 자의 방황이 이 한 행에 압축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고향을 잃고 떠돌다가 이국 땅에서 이민으로 살아 가면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주민의 불행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제2연에서는 그러한 방황하는 자의 불안과 외로움이 표현되고 있다. 차는 떠났어도 정거장에 가고 싶다고 한 것은 정착지의 삶이 불안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바람이 유달리 찬 이 저녁/머언 포풀라 길을 馬車 우에 홀로” 라는 표현은 방황하는 자의 고독 그 자체가 된다. 마지막 연은 2행으로 되어 있는데 상기 방황하는 자의 외로움을 극대화 시킨다. “조곰도 외롭지 않으련다”는 사실상 외로움을 강조한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는 “벌판”, “高粱”, “먼 포풀라 길”, “馬車” 등 延吉驛 근처에 펼쳐진 이민지의 황량한 환경이 이주민의 삶의 불안과 외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요컨대 김조규에게 있어 기차와 역은 탈향과 조국 상실이라는 슬픔을 표상하는 리얼리즘의 구현체인 동시에 이민지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주민의 불행한 삶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한편 이 유형의 작품들에는 나라 잃은 백성의 고난과 비애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민족 정체성의 위기와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표현들이 많이 보이며 그에 의할 경우 상당히 저항적인 성격을 띤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유의 작품 다수가 당대에 발표되지 못하고 최근에야 시인의 육필원고에 근거하여 시집에 수록한 것이기 때문에 시인이 수정 가필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그렇지 않은 작품이라 해도 당대에 발표되지 않은, 혹은 발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씌어진 작품을 들어 저항성을 논의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가령 이런 경우다. “경상도, 평안도, 관북 사투리/제 고장 기름진 땅 누구에게 빼앗기고/이리도 멀고 먼 이역 땅/두메 막바지에 흘러왔담?” 혹은 “할머니는 천리길 걸어 아들 면회 갔다가/‘비적’의 어머니라 구두발에 채여/감옥 문간에서 쫓겨났다지요?”31) 「大肚川驛에서」라는 이 작품은 창작 연대를 1941년 4월로 밝히고 있는데 그 시점에서 이런 표현들은 도무지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특히 ‘비적’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후자의 경우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작품을 전부 해방후 시인 자신이 가필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가령 “오늘도 또 한사람의 ‘통비분자’/묶이어 성문 밖을 나오는데/‘王道樂土’ 찢어진 포스타가/바람에 喪章처럼 펄럭이고 있었다”32)에서 앞의 2행은 가필 흔적이 엿보이지만 뒤 2행은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당시 시인의 이미지 구성 습관에 맞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감성적인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 표제 자체가 「찌저진 포스타가 바람에 날리는 風景」으로 되어 있다. 다분히 당대에 발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썼을 것이라는 가정을 가능케 하는 부분이다.

 

3. 남는 과제

 

  앞에서도 이미 언급된 것처럼 김조규는 76년간의 생을 살면서 양적으로 엄청난 시작품들을 남겼을 뿐만아니라 창작년대 또한 해방전과 해방후를 망라하여 수십년에 걸쳐 있다. 따라서 그의 시작품들은 주제의식, 표현기교, 스타일 등 여러 측면에서 시기마다 각이한 특징 을 보여준다. 본고에서 다룬 작품들은 비록 김조규의 시작 생애에서 감성과 성숙미를 동시에 구비한 20대 중후반에 쓴 작품들로서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김조규의 시세계 전모를 알아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김조규는 재만조선인 문단 특히 시단에서는 지도자적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만큼 탄탄한 시적 역량과 문단적 리더십을 가졌다는 말이 된다. 또한 작품의 완성도에서도 문학사에서 자주 다루는 당대의 시인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앞으로 김조규와 그의 시세계에 대한 연구는 좀더 많이 이루어 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조선족문학의 입장에서 뿐만아니라 한국문학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참고문헌

 

박팔양 편, <滿洲詩人集>, 第一協和俱樂部文化部, 1942.

金朝奎 編, <在滿朝鮮詩人集>, 間島 藝文堂, 1942.

崇實語文學會 編, <金朝奎詩集>, 숭실대학교출판부, 1996.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연구소 편, <김조규시전집>,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

조규익, <해방전 만주지역의 우리 시인들과 시문학>, 국학자료원, 1996.

 

권영진, 「金朝奎의 생애와 문학-해방이전의 작품을 중심으로」, <崇實의 文學(詩文學篇)>, 숭실대출판부, 1992.

설인, 「김조규선생님과 <춘향전>」, <김조규시전집>,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

최삼룡, 「김조규와 조양천」, <문학과 예술>, 2006년 2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162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842 실존주자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다... 2016-11-14 0 3010
1841 윤동주의 시 속에 마력이 없다?... 있다!... 2016-11-14 0 2595
1840 윤동주는 "북간도"가 낳은 시인이다... 2016-11-14 0 4133
1839 생태문학이 세계문학의 최고봉이다?... 아니다!... 2016-11-14 0 3170
1838 창작이냐?... 모방이냐?... 이것이 문제면 문제로다... 2016-11-14 0 3273
1837 중국 조선족 동시의 흐름을 알아보다... 2016-11-14 0 2879
1836 동시의 다양화에 관하여 2016-11-14 0 3100
1835 윤동주와 동시 2016-11-14 0 2813
1834 "우화시"와 허두남 2016-11-14 0 3122
1833 동시때벗기기 = 동시도 시로 되여야... 2016-11-14 0 3102
1832 채택룡 / 김만석... 랑송동시도 창작해야/ 김만석... 2016-11-14 0 2912
1831 박영옥 / 김선파 2016-11-14 0 2879
1830 김득만 / 김만석 2016-11-14 0 3115
1829 詩란 고독한 사람의 고독한 작업속에 생산되는 미적량심 2016-11-14 0 3173
1828 시 한수로 평생 명인대가로 인정되는 사람 없다?...있다?!... 2016-11-12 0 3251
1827 김영건 / 고 한춘 2016-11-12 0 3128
1826 심련수 / 한춘 2016-11-12 0 3343
1825 적어도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한다면,ㅡ 2016-11-12 0 2865
1824 "동시엄마" - 한석윤 2016-11-12 0 2830
1823 최룡관 / 최삼룡 2016-11-12 0 3452
1822 김동진 / 최삼룡 2016-11-12 0 3604
1821 詩人은 뽕잎 먹고 비단실 토하는 누에와 같다... 2016-11-12 0 3288
1820 [자료] - 중국 조선족 문학 30년을 알아보다... 2016-11-12 0 3481
1819 조선족 문학작품을 중문번역 전파하는 한족번역가 - 진설홍 2016-11-12 0 3693
1818 베이징 "등대지기" 녀류시인 - 전춘매 2016-11-12 0 3326
1817 화장터 굴뚝연기, 그리고 그 연장선의 값하려는 문사-정호원 2016-11-11 0 3242
1816 고 최문섭 / 전성호 2016-11-11 0 3428
1815 녕안의 파수꾼 시인 - 최화길 2016-11-11 0 3461
1814 한국 최초의 모더니스트 시인 - 정지용 2016-11-11 0 3147
1813 "등불을 밝혀"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려는 지성인 2016-11-11 0 3384
1812 詩人은 태작을 줄이고 수작을 많이 만들기 위해 정진해야... 2016-11-11 0 3388
1811 늘 "어처구니"를 만드는 시인 - 한영남 2016-11-11 0 3824
1810 늘 "서탑"을 쌓고 쌓는 시인 - 김창영 2016-11-11 0 3185
1809 장르적인 경계를 깨는 문사 - 조광명 2016-11-11 0 3246
1808 김철 / 장춘식 2016-11-11 0 3580
1807 "조양천"과 김조규 2016-11-11 0 3060
1806 "국어 교과서 편찬"과 김조규시인 2016-11-11 0 3217
1805 "만주"와 유치환 2016-11-11 0 3151
1804 {자료} - "두루미 시인" - 리상각 2016-11-11 0 3450
1803 중국 조선족 문단 "문화독립군"들 2016-11-11 0 2904
‹처음  이전 4 5 6 7 8 9 10 11 12 13 1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