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녕안의 파수꾼 시인 - 최화길
2016년 11월 11일 23시 34분  조회:3462  추천:0  작성자: 죽림

생명의 파문-촤화길 시에 나타나는 시적철리의 탐구를 두고
 

전경업


사상은 고요한 늪이다. 

백년 천년 억만년을 내려오는 사상은 고요한 늪이였다.  

부드러운 바람 한점 없이 흐르는 물도 없이 고요한 그러나 마를줄 모르고 줄어들줄 모르는 고요한 늪의 고요한 물, 물결은 없었다.  

그 고요한 늪에 령혼이 진액을 한방을 떨어뜨릴 때 사상은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이런 파문들은 서서히 펼쳐져나가면서 출렁출렁 확장해나가고 그 사상의 늪에 조용히 떠있던 일상들과 부딪치면서 새로운 파문을 일으키고 이런 새로운 파문은 또 서서히 펼쳐져나가면서 파문과 파문이 부딪치고 확장되고 출렁이면서 드디여 생명과 철리로 아름다운 선률을 엮어낸다.  

최화길의 시는 조용하다. 그 사람의 됨됨이 같이 조용하다. 
때로는 고요하다. 그리고 서서히 적막에로 찌들어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고요함과 적막속에서 움직이는 사상이 있어 바람의 가냘픈 흔들림도 생명의 연약한 파문도 커다란 선률과 악장으로 부드럽게 들려오기도 하는것이다. 

한줌의 생화를 먼 
옛날의 기적소리처럼  
휘붐히 들려오는 
구석진 어두운 흐름선에 띄워놓고 
하루가 아닌 생명의 전부를 
조심스레 기우려 
가냘프리만치 미련을 살려 
한뜸한뜸 기워가는 고된  
지독한 기다림 
지쳐 영 잃어지면 
차라리 마음 한구석은  
해볕처럼 가벼우련만 
그래도 넋없이 바라보는  
미련 한조각 
구름처럼 떠돌이로 
현주소를 지워가는 
사는 재미 몽롱한 
아픈 그속에  
아침해볕 한줌이 
커텐 지르고 눈부시다

―시 《그리움》전문

생명은 《가냘픈 미련을 살려/ 한뜸한뜸 기워가는 고된/ 지독한 기다림》이였다. 해볕처럼 무게도 없고 구름처럼 주소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런 한조각이였고 기다림이였다. 하지만 이처럼 눈앞이 캄캄하리만치 생의 려로에 커텐처럼 드리운 고독과 적막도 단 한줄기 《아침해볕》으로 눈부시게 부활하는것이다.  

기다림은 고독한것이요, 삶은 가냘프고 고된것이며 생명 또한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기다림이였지만 오로지의 그리움 해살 한줄기로, 오로지의 미련이라는 아침해볕 한가닥으로 생명은 금시 살아숨쉬고 파문을 키워가면서 자기의 령역을 확장해나가고있는것이다.  

최화길의 시에서 바위 하나도, 말 없는 바위 하나도 거기에는 철리가 담겨져있는것이다. 바위는 무언으로 천년만년 거기 그렇게 서있다. 할머니는 바위가 말이 없는것은 눌리워서 그렇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자라서 살펴보니 바위가 눌리워있는것이 아니라 바위가 외려 생명을 누르고있는것이다. 그래서 최화길은 거기서 《눌리움과 누름/ 판이한 두가지 배역이지만/ 편하지 않음은 매일반이다.》라는 생의 철리를 도출해내고있는것이다(이상 시 《바위》 참조). 편하거나 편하지 않다는것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이르는 말이며 누르는 자체가 눌리움이요, 눌리움 자체 또한 누르는것이라는 중국의 옛 성인들의 변증사상을 《바위》라는 극히 평범한 참조물과 더없이 평범하고 평이로운 언어로 풀이하고있는것이다. 

사상의 늪에 생명의 일상들이 없다면 아무리 령혼이 그 농축된 진액을 고요의 늪에 떨어뜨린다고 하더라도 생명은 다만 하나의 퍼지다가 사라지는 파문일뿐 싱싱한 삶의 악장으로 연주될수는 없으며 울긋불긋 오색현란한 생활로 경영될수는 없는것이다. 사상의 늪에 떠있는 일상들이 있음으로 생명은 비로소 자기의 삶을 찾을수가 있는것이다. 그런 삶의 기둥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최화길은 우리들이 말하는 《사랑》으로 사람이 되는것이다라는 식으로 나타내지 않고 있다. 최화길은 그런, 우리들이 날마다 부르짖고 찾아헤매고 기발처럼 추켜들고 다니는 《사랑》을 소중하오, 잊을수 없소, 생명보다 더 아름답소라는 식으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사랑 하나/ 까맣게 잊어버리면/ 세월은 무정하게/ 묻어버린다.》는 단 시에서 몇마디로 일축하고있다. 

인간은 사랑으로써 《사람》이 된다고 한다. 사랑이 있음으로 삶이 이채로워지고 사랑이 있음으로 생명은 살아 숨쉬는 만물의 령장이 될수가 있는것이다. 그런 사랑의 소중함을 최화길은 그것을 잃어버리면 세월에 묻혀버리게 된다는 소박한 시줄에 담고있다. 그 그래서 백지에 단 두글자로 인쇄된 《사람》은 금방 살아숨쉬는 사람으로 살아나고 사랑은 다시 빛나는 생명의 핵으로 영글어가게 된다(이상 시 《사람》 참조).

말없는 상봉이 이루어져 
갈증을 풀어주는 님의 손길에 
한껏 목이 메는 감동이다

사납게 들이닥치던 바람도 자고 
은은한 선율들이 춤추는 마당에서 
애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에 흐뭇하다

어느새 무지개가 곱게 비껴요  
래일은 날씨가 청쾌하다는 예고런듯 
마르는 마음을 적셔주는 싱그러운 비

때론 이렇게 준비가 없는 
자연의 조화에 갈채를 보내며 
하루의 진한 의미 떠올립니다

―시 《비 오는 날의 명상》 전문

생활의 진미는 그것이 그대로 이어지는 행복으로만도 아니요, 안일한 살림으로만도 아니라 오색찬란한 가운데 생명이 자기의 불길을 태움으로 이루어지는 대조와 조화와 어울림과 예상밖의 사건의 발생으로 다채로워지는것이다.  

그러나 최화길은 철리를 담담한 표현방식으로 《비오는 날의 명상》 한수의 시로 말하고있다.  

《목 메는 감동》도 《말없는 상봉》에서 이루어지고 《사납게 들이닥치던 바람도 자고》, 《마르는 마음을 적셔주는 싱그러운 비》도  끊기고  《어느새 무지개가 곱게 비껴》 다시 조용해지는 나날들, 그리고 거기서 최화길은 인생이란 《때론 이렇게 준비가 없는/ 자연의 조화에 갈채를 보내며/ 하루의 진한 의미 떠올립니다》고 말한다. 준비된, 예상되였던, 예고되였던 《조화》가 아닌 《준비가 없는/ 자연의 조화》에 하루의 진한 의미, 인생의 진한 의미나 아로새겨진다는 철리를 조용한 필치로 그려내고있다.  

조용한 최화길, 그리고 그 조용한 최화길처럼 조용한 최화길의 시, 그러나 거기에 깊숙이 담겨진 철리는 인생의 리치를 가르치고있다.  
그렇게 조용한 시에 참된 인생의 철리를 담을수 있음은 최화길의 사상의 늪에 항상 인생의 아름다운 일상들이 떠있고 그런 아름다운 일상들이 떠있는 사상의 늪에 령혼 심처에서 흘러나오는 진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면서 그 시들은 아름다운 인생의 조화와 철리를 읊조릴수 있었던것이다. 

고구려산성이 바라보이는 룡담산아래서

2007년 7월 6일 
 
 
<<연변문학>>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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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문학에 집착하게 된 경우


최화길


문학이라는 성스러운 전당에 접근해온지도 어언 20여년을 헤아립니다. 이 20여년간 한일자로 변함없는 마음을 가지고 딴데는 눈 한번 안 팔고 곧게 걸어올수 있은데는 자연 나의 운명을 떠올리게 됩니다. 한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다 잃은 불운한 내 생명은 아마 태여나면서부터 무엇인가 깨쳐야 하는 남다른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자란 나의 동년입니다. 12년간 할머니의 뜨거운 품에 안겨 《왕자》로 컸습니다. 할머니는 나를 정말이지 쥐면 깨여질가 불면 날려갈가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나의 유일한 의탁이였던 할머니의 슬하에서 커온 12년은 나에게 아름다운 정감세계를 만들어준 12년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식구들이 없는 우리 집이다보니 우리 집에는 매일 할머니의 로인친구들이 한구들씩 차고넘쳤습니다. 나는 아마 내 귀로 말을 들을수 있던 그 시절부터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옛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감세계가 깃든 그 하나하나의 옛말들에서 나는 선한 사람에게는 복이 차례지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소박한 정감세계를 형성하였다고봅니다. 하지만 순진한 동심에 바야흐로 아름다운 동경의 세워져갈シ?나의 《하늘》은 무너졌습니다. 나는 12살에 혈혈단신이 되였습니다. 더는 그 따뜻한 품에 안길수 없었습니다. 나의 눈앞은 캄캄했습니다. 나는 문뜩 자신이 벼랑가에 선 아이로 느껴졌습니다. 무정한 현실앞에서 나는 눈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생활은 아름다움만 선사하는것이 아님도 너무 이른 12살 눈높이에서 깨우쳤습니다. 

70년대중반 모두가 넉넉치 못한 생활고를 겪었습니다. 농촌에 살면서도 쌀고생이 막심하던 시기였습니다. 의지가지 없게 된 나의 운명은 결국 오촌숙이 맡았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독자이고 아버지의 큰집에 아들 하나 둔 가문이다보니 우리 아버지는 사촌형이 제일 가까운 친지였습니다. 당시 대학생출신이였던 큰아버지는 우리 경주 최씨가문이 퍼렇게 살아있는데 어찌 조카를 고아원 같은데로 보낼수 있느냐고 당시 내가 살던 곳의 촌간부들과 재삼 협상하여 고아원에 보내려고 했던 사람들을 설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후사처리를 깨끗이 처리하고 나를 선뜻 맡으셨습니다. 그 고마움은 두고두고 기억에 새롭습니다. 그만큼 큰집일가는 인정이 풋풋한 화목한 가정이기도 했습니다. 큰집에 짐을 풀고보니 웬걸 내가 맏이였습니다. 원래 대학공부하느라 장가를 우리 아버지보다 늦게 드신 큰아버지다보니 맏아들이 9살이였고 아래로 6살에 나는 녀동생, 그리고 3살짜리 막둥이 이렇게 3형제였습니다. 자연 나는 큰형님이 되였습니다. 그때 나의 학습성적은 좋았습니다. 20여명이 되는 우리 5학년 기말시험에서 나는 총점 2등을 따내여 큰집은 물론 학교 선생님들의 총애를 한몸에 안기도 했습니? 그후로 줄곧 2∼3등에서 벗어나본적이 없었으며 선생님들로부터 덕, 지, 체 모든 방면이 우수한 3호학생으로 평선되여 장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다보니 큰집에서 얹혀사는 몸이였으나 큰집의 각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타고난 복이였는지는 몰라도 우리 큰엄마가 어려서부터 부모없이 자랐답니다. 하여 나는 아마 갑절 더 행복을 누려본것인지도 모릅니다. 큰엄마는 내가 좀만 어색한 빛을 띄여도 인차 내속을 알아내여 따뜻한 마음으로 풀어주군 하였습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서먹서먹한 큰집에 짐을 푼 나에게 제일 눈치보이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가? 바로 무엇인가 손을 내밀어야 할 일들이였습니다. 원래 마음이 약한 나는 자신이 요구되는걸 입으로 내뱉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인가 달라는 말은 당초에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큰어머니는 내 속내를 보기라도 하는듯 차거운 나의 손가락을 펼쳐 손바닥에다 정히 놓아주군 하였습니다. 그때 그 고마움에 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바로 감동의 눈물이였지요. 속으로 우러나오는 뜨거운 눈물이였습니다. 물론 남모르게 가만가만 흘린 눈물이기도 합니다.  

할머니께서 나를 키운 12년은 뜨거운 품이였다면 그후 옮겨앉은 큰집은 뜨거운 손길이였습니다. 큰집에 와서 3년만에 나는 초중졸업생으로 자랐습니다. 바로 1974년 나는 역시 좋은 성적으로 녕안중학교로 진학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생활형편으로 나를 현성중학교에 보낸다는것은 정말 그림의 떡이나 다를바가 아니였습니다. 그때는 생산대별로 가을에 분배하게 되였는데 농사가 안된 해는 한공에 십전씩 차례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일년내내 일해서 3백공을 벌었다 해봐야 겨우 30원에 맞먹는 돈이니 그 돈으로 쌀값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농사하는 농민이 되려 국가량곡을 얻어먹는 신세였습니다. 그것도 말짱 강냉이였습니다. 실로 강냉이밥을 신물이 나게 먹었습니다. 그러하니 한학기에 입쌀 두마대를 내야 하는 현성중학교로 어찌 갈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또 억지로 떼를 쓸수도 없는 신분이다보니 그렇게 소원하던 현성고중으로는 갈수가 없어 향한족중학교밖에 갈수 없었습니다. 역시 아름다운 리념이 돌바위에 부딪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15살의 어린 나이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좌절이였습니다. 그래도 속수무책이기도 했습니다. 그 어떤 주관노력으로는 도저히 넘어설수 없는 조건앞에서 나는《하늘같은 자존심》을 꺾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3년간의 고중공부는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공부였습니다. 처음 한두달은 반벙어리신세로 눈치보기 했고 말 좀 알아들을만하니 뒤처진 공부에 전혀 신심이 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까운 황금시기를 한족말 몇마디 얼버무릴수 있는것으로 마무리게 되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고중공부는 이렇게 시원섭섭하게 끝마쳤습니다.  

1979년 7월 나는 속에 별로 넣은것 없는 귀향청년으로 탈을 바꾸었습니다. 졸업이라고 교문을 나서는 그 마음은 아프다고밖에 형언할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고중생이라고 촌에서는 막로동은 시키지 않고 농업기술원을 따라다니며 농업기술을 배우라고 배치하였습니다. 촌의 농업기술원이라야 논에 칠 농약을 비례맞추어 버무리고 치는 기술을 지도하고 함께 치기도 하는 체력로동이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벼에 피해가 있으면 그 모든 후과는 기술원의 몫이고, 한 일년 이렇게 토박이농군보다는 월등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촌에 수도꼭지공장이 서게 되였는데 고중생인 내가 선반공의 적임자로 꼽혀 선반공으로 한 2년간 보내다가 그것도 경기가 시원치 않아 부도나는바람에 촌소학교의 민영교원으로 들어가게 되였습니다. 그때가 1983년 10월이였습니다. 내가 촌소학교에 민영교원으로 아주 쉽게 발탁될수 있은데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습니다. 모든 아픔과 슬픔을 속으로 삭여야만 했던 나는 자연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 책읽기에 전념하였습니다. 하여 그때 당시 중국청년들이 꼭 읽어야 한다는 필독명작은 다 읽었으며 그것이 끈이 되여 문학작품이면 닥치는대로 읽었습니다. 오직 책과 동무할 때만이 쌓였던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때이르게 쓰고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하여 1980년 당시 《연변문예》잡지 제7월호에 풍자성을 띤 시《이런 간부 있다오》가 활자로 찍히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불씨가 되여 나는 밤을 패면서 책을 읽었고 글을 쓰기에 여념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열광의 힘으로 나는 1983년도까지 시를 비롯한 통신, 수필 등 수십편이 해볕을 보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쳐서 합격되여야 등용하던 민영교원을 나는 시험이라는 절차를 빼버리고 합격하는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물덤벙 술덤벙 앉을 자리 설자리가 확실하지 못했던 나에게 어떤 집착을 심어주었던것 같습니다. 그 집착은 나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여 나의 불운을 메워주었으며 나에게 차례지는 모든 불합리와 불평등을 느긋이 짓밟아나갈수 있는 힘과 용기 그리고 분출구가 되였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시가 아주 예리한 상대성을 띤다고 봅니다. 나의 시 한수 한수는 모두 내 마음의 심한 갈등에서 불꽃이 튕기여 씌여지고 이어집니다. 그속에 바로 아름다운 공중루각이 서고 칠색의 무지개가 찬연합니다. 그것이 순간의 반짝임이지만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쏟아지는 긴 마음의 려과가 있다는것을 선언하면서 나는 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시도 나 같은 인간을 좋아한다고 떳떳이 선고하고싶습니다. 한것은 20여년간 눈길 한번 다른데 돌릴세라 변함없이 사랑하는 《랑군님》을 어떤 《아가씨》면 외면하고 돌아서랴! 

모든 지배권에 대하여 전혀 흥취가 없는 나지만 자신의 마음 지배권만은 꼭 잡고있습니다. 하기에 나는 떳떳하게 말할수 있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과 나의 생명은 한줄에 함께 가지런히 놓여있다고.  



<<연변문학>> 2007년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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