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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문학작품을 중문번역 전파하는 한족번역가 - 진설홍
2016년 11월 12일 01시 16분  조회:3693  추천:0  작성자: 죽림

- 진설홍(陳雪鴻) 약력-

 중국 상해 출생, 연변대학졸업
역심(譯審,교수급)

중국작가협회회원, 연변작가협회부주석, 연변번역협회부회장.

출판한 번역작품으로 장편소설 《흰돛》(상, 하집), 《미로의 저쪽》, 장편보고문학 《성공의 뒤에는》, 《고향떠나 50십년》, 극본 《장백의 아들》, 《털없는 개》 등 수천만자. 

그중 중단편소설, 시가, 수필, 보고문학, 영화씨나리오와 텔레비죤드라마극본, 가사, 무용, 재담, 민간이야기 등 쟝르를 포함.

전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우수번역상, 전국 화극회보공연 우수번역상 등 상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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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 기슭에 뿌리내린 미인송
중국 전역에 조선민족 문학 알리는 한 상하이지식청년



"불의에 물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관용을 베풀면서 살아가고 있는 진설홍 번역가가 돋보인다"라고 연변작가협회 우광훈 작가는 말하면서 "진설홍 번역가는 원작에 가장 충실하고  존중하면서 원작을 주류민족에게 알리기 위해 한생을 바치고 있는, 둘도 없는 한족 번역가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현재 중국작가협회 회원이며 오늘날까지 중국전역에 중국조선족 문학을 비롯한 제반 분야 그리고 한국 문화를 중국전역에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한 한족이 있는데 그가 바로 문화대혁명시기에 편벽한 오지인 연변에 온 상하이지식청년 진설홍(陳雪鴻,1949년생)이다. 현재 중국에서 조선문을 중문으로 번역하는 조선족작가는 몇이 있지만 한족작가는 진설홍 단 한 명뿐이다.

"내 나이 60이 되고 보니 '석양이 기울어 노을이 붉은 인생'이 되는 느낌이지만  타임머신이 나타나 나를 태우고 달려 내 인생도 후회 없는 60년을 어루만지게 한다"라고 40여년전에 연변에 온 진설홍 상하이지식청년은 유창한 조선말로, 감회에 잠긴 어조로 지난날을 회고하고 있다.

진설홍이 상하이에서 학교 교문에 들어서는 그날부터 생활은 언제나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과 따스한 햇빛이 동무해주는, 글읽는 소리 낭랑한  교정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전세기 60년대 중엽, 생활은 다시는 평온하지 않았고 교정도 다시는 안녕이 깃드는 곳이 아니였다. '문화혁명'이라는 이 정치 폭풍이 대지를 휩쓸고 평화로운 시대와 걸맞지 않게 살육의 총소리를 들었고 흐르는 피를 보았다. '학업을 포기하고 혁명을 하는 초기'의 학생운동은 농촌으로 하향하는 물결로 바뀌어 버렸다.

40여년전인 1969년에 진설홍도 동료들과 함께 그때 당시 전국을 휩쓸었던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라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구슬피 우는 기선과 덜커덕거리는 기차를 타고 수천킬로미터되는 거리를 며칠밤과 낮을 쉬지 않고 장백산아래 해란강가의 마을인 용정시(당시 연길현)용신향 시골로왔다. 연변의 여러민족들은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면서 열정에 넘쳐 그들을 환영했다.

인상이 깊었던 것은 조선족들이 춤과 열정에 넘치는 마중이었단다. 그 모습은 황포강가에서 온 젊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취하게 만들어 여로의 피로와 타향으로 왔다는 낯선감을 날려버려 주었다. 그때 그는 내 인생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희미하게나마 느꼈다. 그러나 이 여정이 시작이 되자 40년을 이끌어갈 줄을 몰랐고 60인생을 맞이하는 오늘까지 이어질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조선언어 배우기에 몰두

그때 중학교 교문을 금방 나선 젊은 학생인 그로 볼 때 번화한 상해라는 대도시에서 연변의 편벽한 시골농촌으로 오고 보니 견디기 힘든 것은 눈이 뒤집히게 큰 인문환경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도저히 적응하기 힘든 언어 환경의 변화였다. 언어의 불통은 감정적인 교류의 불편을 가져다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러한 언어 환경의 포위속에서 벙어리처럼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평소에 시골 젊은이들이 웃고 떠들며 장난을 쳐도 모두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조선말이여서 그는 말 그대로 꿔다놓은 보리자루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일이란 폐가 있으면 꼭 이점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었다. 이처럼 열악한 언어환경을 앞에 두고 이것은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임을 느꼈고 옆에 수시로 청할 수 있는 선생이 있고 어디서나 실천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선어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을 내리는 순간부터  그것은 그의 인생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이 되었다. 만일 금방 하향하였을 때 환경의 핍박으로 조선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뒤에 조선족문학번역사업을 평생의 사업으로 선택했을 때에는 조선어는 그가 번역작품을 생산하는 필수적인 도구요, 그 가치를 실현하는, 그를 불태울 정도로 달려가는 기관차이기도 했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일상용어와 조선족의 노래를 배우는 것으로부터 조선어를 배우는 길에 들어섰다. 마을의 노인, 아낙네들과 젊은이들, 그리고 아이들, 후에 그가 가르치게 된 어린 학생들마저 누구라 할 것 없이 그의 조선어선생이었다. 그리고 조선어를 공부하는 과정에 언어뿐만이 아니라 조선족의 소박함과 성실함, 그리고 열정적이고 도덕적인 정신까지 그의 마음속을 파고 들었다.

그에게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향(당시 공사라고 했음)의 학교에서 한어문 교사로 일하다가 연변화극단에 전근했다.거기서 그는 규범화된 조선말을 빠르게 배우게 되었고 따라서 번역사업을 시작했는데 우선 조선민족 판소리,창극,민요 등 가사번역과 민간이야기 번역을 하게 되었는데 그의 번역작품은 10여제곱미터 밖에 안되는 단칸집의 밥상위에서 완성되었던 것이다.이렇게 그는 오늘에 와서 전직번역작가로 발돋음 했던 것이다.

  
진설홍,박홍연 부부가 번역원고를 토론중이다.


조선족과 혈연의 정을 맺게 되다

하향하여 두번째가 되는 구정이었다. 집체호의 대부분 친구들은 상해로 설을 쇠러 갔고 그와 다른 친구 둘 이렇게 셋이 집체호에 남았다. 2년간의 농촌생활에서 그는 조선족농민들과 이마를 맞대고 살았고 그 과정에 감정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유대가 생겼다. 그는 겨울이라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조선족농민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가지고 싶었고 조선족의 풍속습관과 조선어를 공부하고 싶었다. 2년간의 농촌생활은 상해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조선민족에 대하여 커다란 애정을 가지게 됐고 호감을 가지게 됐다. 그는 중국이라는 대가정 속에서 숫자가 많지 않은 조선민족이지만 독특한 품격과 감정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조선족농민들은 집체호에 남은 상해지식청년들을 자기들의 집에 청했고 조선민족의 전통음식과 열정으로 환대하였다. 손님대접이라면 창자까지 빼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조선족주인은 그들을 '핍박'하여 한사발 또 한사발의 탁주와 한 잔 또 한 잔의 고량주를 마시게 했다. 전에 그는 술을 입에 대보지도 못한 풋내기 젊은이였으니 취하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다. 아니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 취함에는 술의 취함도 있었지만 마음이 먼저 취했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술에 취했다 하지만 실은 마음은 이미 조선족농민들의 그 순박함에, 진실함에, 열정적인 마음에 취한 것이었다.

사실 그해 구정에 흙이 되도록 취한 일은 그의 마음과 추억속에 너무나 깊고 잊을 수 없는 흔적을 새겼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는 술을 알게 되고 더욱이는 조선민족을 알게 되었다. 그후로부터 그는 술자리에서 친구를 만나고 그러면서 수많은 조선족친구들과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귄 수많은 조선족친구들은 후에 그가 조선족문학번역사업을 하는데 간과할 수 없는 작용을  해주었다.

그로서는 조선어를 공부하기 시작해서부터 조선어는 그의 모어인 한어와 마찬가지로 모어가 되어 버렸다. 가정생활에서부터 생활의 일상용어, 그리고 조선족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작품토론을 할 때에도 조선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심지어 문제를 생각하는 언어조차 조선어를 쓰게 되었다.

솔직히 거의 모든 것에 조선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가 조선족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떠날 수 없게 되고 문학번역사업을 위하여 인생의 전부를 청춘과 반평생을 바치게 된 것은 생명의  선택이고 숙명이고 바랄 것 없는 삶의 전부가 아닌가 생각했다.

진설홍의 책장에는 그가 필수로 생각하는 공구서적과 그의 인생과 노동을 장식하는 번역성과들이 줄지어서 있다. 어쩌면 이 보배같은 이 번역성과들을 딸(진훼,하얼빈이공대 졸업 현재 상하이에서 근무)에게 남기는 유산이기도 하단다. 쥐면 녹을 것 같은 딸의 직업은 자기 엄마와 아버지의 직업과 다르다. 그러나 딸은 문과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문학을 좋아한단다. 물론 딸애가 문학의 길에 들어서지 않고 있지만 그가 남긴 이 유산을 받을 때 그가 평생 조선민족문학 번역사업을 위하여 바친 노력과 피나는 분투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있다.

사실 그와 애엄마가 의식적으로 진훼를 조선족유치원과 조선족초등학교로 보낼 때 진훼는 부모의 깊은 뜻을 이해했을 것이다. 진훼가 그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생으로 공부를 마치고 상하이에서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집으로 전화를 하면 꼭 조선어를 고집한다. 물론 딸은 역시 그의 인생의 자랑스러운 결정체임에 틀림없다.

하긴 이 '자랑스러운 결정체'에는 지금까지 애를 지켜주고 화기로 넘치는 가정을 선사해준 조선족인 집사람의 몫이 절반 있기도 하단다. 그의 집사람 박홍연(동북사범대 중문과 졸업,연변교육출판사에서 근무)은 일에 대한 열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여성이다. 바로 이런 집사람의 이해와 지지가 있었기에 가정, 나아가서는 일에도 조선족분위기가 향기처럼 넘칠 수 있었다.

  
장백산미인송


그는 한족으로서 연변에 와서 조선족사회와 운명을 함께 하자고 약속한 것은 지금의 부인 박홍연과의 만남이었다. 사랑하는 조선족 여인을 만나면서 내 뼈를 이 연변 땅에 묻으려고 맹세까지 했단다.이 한마디 맹세는 실지 부인과 머리가 파뿌리가 되어도 사랑은 변치 않는다는 맹세였다.물론 서로 민족이 다르다보니 양측의 부모가 동의할 리 만무했다. 당시  상해에 있는 진설홍의 부모는 조선족이라는 자체도 몰랐기에 조선족 여성을 며느리로 맞이한다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그러나 두 민족 청년의 사랑은 민족이라는 한계를 훨씬 뛰어넘게 되었다.

조선족문학과 한국문화를 중국제반에 알리기 위해 좋은 기회를 포기

사실 연변에서 40년 세월을 주름잡으면서 그의 인생의 행로를 개변할 뻔한  기회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 1979년, 지식청년들이 도시로 돌아가는 바람이 불었을 때 부모님들이 그를 위해 찾아놓은 상하이의 교원직을 포기했다. 그때 그는  조선족친구들을 떠나기 아쉬웠고 금방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조선족문학번역사업을 포기하기에는 아름찼다.

개혁개방 초기, 수많은 한국기업이 중국시장으로 진출했다. 청도, 위해, 남경의 한국기업들에서 높은 연봉과 우대조건을 내놓으면서 그를 초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업들에서 일하게 되면 그가 일생을 맡기려고 결심한 조선족문학번역사업과 거리가 너무 멀어 결국은 포기했다. 2000년 초, 상하이복단대학에서 한국어과를 설치하면서 추천자인 정판룡 선생이 그의 의견을 물어왔다.

사실 그는 그때 흔들리기도 했었으나 결국은 포기했다. 오랫동안 번역사업 실천을 하면서 그는 중국의 주류문학계의 조선족문학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조선족문학번역사업 인재도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숫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조선족과 조선족문학번역사업은 상하이보다 더욱 나를 필요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 또 한 번의 포기, 어떤 사람은 그를 바보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어쩌면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후회는 커녕 자기가 걸어온 길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진설홍은 이미 조선족작가들의 문학작품을 40여권이나 한문으로 번역했고 또 한국문화를 중국에 알리기 위해 장편소설, 시집 5권 그리고 한국의학저서, 인물전기 등을 5권이나 번역해 냈다. 참으로 거창한 일을 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한국작품을 번역하려고 하지만 진설홍은 그것이 아니고 한국의 문화를 중국에 알리기 위함이라고 솔직히 고백하면서 반드시 돈이 아닌, 마음으로 작품을 번역해야 훌륭한 번역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취재를 마치면서 진설홍 작가는 이렇게 번역작가로 발돋음할 수 있었던 것은 선량하고 아름다운 조선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겸손을 잃지 않았다.


흑룡강신문

================인생 60 닐리리 / 진설홍=====================

 


향긋한 향기를 피여올리는 차 한잔을 앞에 놓고, 하얀 연기를 내뿜는 담배 한대를 꼬나물고 내 사색은 무한정 나래를 펼친다...

위대한 공화국의 60돐 창건기념일을 맞으면서 내 인생도 어쩌다 60고개를 맞게 되였다. 공화국이 60살이라면 아직 찬란한 미래가 보이지만 내 나이 60이고보니 <석양이 기울어 노을이 붉은> 인생이 되고말았다. 나는 길게 한모금 담배를 빤다. 하얀 연기가 작은 동그라미가 되여 사슬을 이룬다. 눈앞에 갑자기 타임머신이 나타나 나를 태우고 달려 내 인생의 한도 후회도 없는 60년을 어루만지게 한다...

사실 나는 공화국의 탄생일보다 두달 늦게 이 세상에 왔다. 그러니까 개국대전에서 울리는 례포소리와 광환의 환호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붉은기 아래에서> 태여난것만은 사실인 행운아이다. 내가 학교교문에 들어서는 그날부터 내 생활은 언제나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과 따스한 해빛이 동무해주는, 글읽는 소리 낭랑한  교정이였다. 그러다가 전세기 60년대 중엽, 생활은 다시는 평온하지 않았고 교정도 다시는 안녕이 깃드는 곳이 아니였다. <문화혁명>의 폭풍이 대지를 휩쓸고 평화로운 시대와 걸맞지 않게 나는 살육의 총소리를 들었고 흐르는 피를 보았다. <학업을 포기하고 혁명을 하는> 초기의 학생운동은 인차 농촌으로 하향하는 물결로 바뀌여버렸다. 

  피끗 <장백산>표 담배곽이 눈가에 다가온다. 생각은 다시금 40년간 생활해온 연변으로 돌아온다...

40년전, 나와 나의 동료들은 그때당시 전국을 휩쓸었던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라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구슬피 우는 륜선과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장백산아래 해란강가의 마을로 내려왔다. 연변의 여러민족들은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면서 열정에 넘쳐 우리들을 환영했다. 인상이 깊었던것은 조선족들의 춤과 열정에 넘치는 마중이였다. 그 모습은 황포강가에서 온 젊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취하게 만들어 려로의 피로와 타향으로 왔다는 낯선감을 날려버려주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새로운 려정이 시작되였음을 희미하게나마 느꼈다. 그러나 이 려정이 시작이 되자 40년을 이끌어갈줄은 몰랐고 60인생을 맞이하는 오늘까지 이어질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그때, 학교문을 금방 나선 젊은 학생인 나로 볼 때 번화한 상해라는 대도시에서 연변의 편벽한 시골농촌으로 왔으니 견디기 힘든것은 눈이 뒤집히게 큰 인문환경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도저히 적응하기 힘든 언어환경의 변화였다. 언어의 불통은 감정적인 교류의 불편을 가져다주는것은 자명한 일이였다. 이러한 언어환경의 포위속에서 벙어리처럼 산다는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였다. 평시에 시골 젊은이들이 웃고 떠들며 장난질을 쳐도 모두 도저히 알아들을수 없는 조선말이여서 나는 말 그대로 꿔온 보리자루였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일이란 폐가 있으면 꼭 리가 있으리라는것을 믿었다. 이처럼 <악렬한> 언어환경을 앞에 두고 나는 이것은 새로운 언어를 배울수 있는 유리한 조건임을 느꼈고 옆에 수시로 청할수 있는 선생이 있고 어디서나 실천을 할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조선어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을 내리는 순간부터  그것은 내 인생의 다시는 돌이킬수 없는 전환점으로 되였다. 만일 금방 하향하였을 때 환경의 핍박으로 조선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뒤에 조선족문학번역사업을 평생의 사업으로 선택했을 때에는 조선어는 내가 번역작품을 생산하는 필수적인 도구요 내 가치를 실현하는, 나를 태우고 정도를 향해 달려가는 기관차이기도 했다. 

  나는 가장 기본적인 일상용어와 조선족의 노래를 배우는것으로부터 조선어를 배우는 길에 들어섰다. 마을의 로인, 아낙네들과 젊은이들, 그리고 아이들, 후에 내가 가르치게 된 어린 학생들마저 누구라없이 나의 조선어선생이였다. 그리고 조선어를 공부하는 과정에 그들은 언어뿐만이 아니라 조선족의 소박함과 성실함, 그리고 열정적이고 우량한 도덕적인 정신까지 나에게 배워주었다.

나는 찻잔을 들어 이미 우려날 때로 우려난 향긋한 차를 한모금 마신다. 그러면서 60년 인생을 살면서 거두어들인 잊을수 없는 추억을 되살린다...

그것은 하향을 하여 두번째가 되는 구정이였다. 집체호의 대부분 친구들은 상해로 설을 쇠러 갔고 나와 다른 친구 둘하여 셋이 집체호에 남았다. 2년간의 농촌생활에서 나는 조선족농민들과 코를 맞대고 살았고 그 과정에 감정적으로 떨어질수 없는 뉴대가 생겼다. 나는 겨울이라는 농한기를 리용하여 조선족농민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가지고싶었고 조선족의 풍속습관과 조선어를 공부하고싶었다. 2년간의 농촌생활은 상해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조선민족에 대하여 커다란 애정을 가지게 했고 호감을 가지게 했다. 나는 중화민족의 대가정속에서 숫자가 많지 않은 조선민족이지만 독특한 품격과 감정을 가진 민족이라는것을 거의 직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조선족농민들은 집체호에 남은 우리 상해지식청년들을 자기들의 집에 청해갔고 조선민족의 특유한 음식과 열정으로 우리를 환대하였다. 손님대접이라면 밸까지 빼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주인들은 우리를 <핍박>하여 한사발 또 한사발의 탁주와 한잔 또 한잔의 <빼주>를 마시게 했다. 전에 나는 술을 입에 대보지도 못한 풋내기 젊은이였으니 취하지 않고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아니, 뭐 취해서 흙이 되였다고 해야 했을것이다.  그 취함에는 술의 취함도 있었지만 마음이 먼저 취했을것이였다. 사실 사람이 술에 취했다 하지만 실은 마음은 이미 조선족농민들의 그 순박함에, 진실함에, 열정적인 마음에 취한것이였다.

 허참, 내가 웬 영문이지? 넘어가는것은 분명 향기로운 차인데 왜 술에 대한 생각을 하고있는걸가?...

사실 그해 구정에 흙이 되도록 취한 일은 나의 마음과 추억속에 너무나 깊고 잊을수 없는 흔적을 새겼기 때문이다. 그때로부터 나는 술을 알게 되고 더욱이는 조선민족을 알게 되였다. 그후로부터 나는 술좌석에서 친구를 만나고 그러면서 수많은 조선족친구들과 사귀게 되였다. 그리고 이렇게 사귄 수많은 조선족친구들은 후에 내가 조선족문학번역사업을 하는데 간과할수 없는 작용을 놀아주었다. 나로 놓고 볼 때 내가 조선어를 공부하기 시작해서부터 조선어는 나의 모어인 한어와 마찬가지로 나의 모어가 되여버렸다. 가정생활에서부터 생활의 일상용어, 그리고 조선족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작품토론을 할 때에도 조선어를 사용하게 되였고 심지어 문제를 생각하는 사유의 언어조차 조선어를 쓰게 되였다. 솔직히 거의 모든 것에 조선어를 사용하게 되였다. 내가 조선족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떠날수 없게 되고 문학번역사업을 위하여 내 인생의 전부의 청춘과 반평생을 바치게 된것은 내 생명의  선택이고 숙명이고 바랄것 없는 삶의 전부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또다시 담배 한대를 부쳐문다. 피여오르는 연기의 건너편으로 벽 한면을 차지한 책장이 보인다. 책장에는 내가 필수로 하는 공구서적을 내놓고 내 인생과 로동을 장식하는 나의 번역성과들이 줄지어서있다. 어쩌면 내 보배같은 딸에게 남기는 유산이기도 하다. 쥐면 녹을것 같은 딸은 나나 자기 엄마의 직업을 따르지 않았다. 물론 문과공부를 전공으로 하지 않았지만 기막히게 문학을 좋아했다. 물론 딸애가 문학에 흥취가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남긴 이 유산을 받아안을 때에는 내가 평생 조선민족문학 번역사업을 위하여 바친 노력과 피타는 분투를 리해해 줄것이라 믿는다. 사실 나와 애 엄마가 의식적으로 자기를 조선족유치원과 조선족소학교로 보낼 때 애는 나와 안해의 깊은 뜻을 리해하고있었다. 그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생으로 공부를 마치고 상해에서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집으로 전화를 하면 꼭 조선어를 고집한다. 물론 이 딸은 역시 내 인생의 자랑스러운 결정체임에 틀림없다. 하긴 이 <자랑스러운 결정체>에는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고 화기로 넘치는 가정을 선사해준 조선족인 집사람의 몫이 절반 있기도 하다. 나의 집사람은 사업열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사람이였다. 바로 이런 집사람의 리해와 지지가 있었기에 우리 가정, 나가서는 나의 사업에도 조선족분위기가 향기처럼 차넘칠수 있었다.

 찻잔에 차물이 서서히 식어가고 손가락사이에 끼인 담배의 불도 사위여간다. 그러나 나의 사색은 고삐를 끊은 말처럼 달려만 간다. 나는 일어서서 차고뿌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리고나서는 느긋하게 <장백산>표 담배 한가치를 꺼내 불을 단다. 그러면서 내 인생의 60년에 대한 추억을 이어간다...

 사실 연변에서 40년 세월을 주름잡으면서 내 인생의 행로를 개변할번한  기회가 없은것은 아니였다. 1979년, 지식청년들이 도시로 돌아가는 바람이 불었을 때 나는 부모님들이 나를 위해 찾아놓은 상해의 교원직을 포기했다. 그때 나는 이미 친구로 되여버린 조선족친구들을 떠나기 아쉬웠고 금방 걸음마를 떼놓은 조선족문학번역사업을 포기하기에는 아름이 찼다. 개혁개방 초기, 대량적인 한국기업이 중국시장으로 진출했다. 청도, 위해, 남경의 한국기업들에서 높은 년봉과 우혜조건을 내놓으면서 나를 초빙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기업들에서 일하게 되면 내가 일생을 맡기려고 결심한 조선족문학번역사업과 거리가 너무 멀다는데서 결국은 포기를 선택하여버렸다. 2000년 초, 상해복단대학에서 한국어과를 설치하면서 추천자인 정판룡선생을 통하여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사실 나는 그때 흔들리기도 했었으나 결국은 여전히 포기를 선택했다. 오랫동안 번역사업 실천을 겪으면서 나는 중국의 주류문학계의 조선족문학에 대한 리해가 너무나 결핍하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조선족문학번역사업 인재도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수자라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조선족과 조선족문학번역사업은 상해보다 더욱 나를 수요하고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한번 또 한번의 포기, 어떤 사람은 나를 바보스럽다고 생각할수도 어쩌면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공화국과 동갑이 되여 60년을 살아오고보니 오히려 후회하는 마음은 없고 가슴 가득히 부풀어오르며 기쁨으로 흐뭇하다.

향기 그윽한 차 한잔과 맛갈스러운 담배 한모금, 그러면서 느긋이 더듬어보는 인생의 60년, 더 무엇을 바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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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 실존주자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다... 2016-11-14 0 3009
1841 윤동주의 시 속에 마력이 없다?... 있다!... 2016-11-14 0 2595
1840 윤동주는 "북간도"가 낳은 시인이다... 2016-11-14 0 4133
1839 생태문학이 세계문학의 최고봉이다?... 아니다!... 2016-11-14 0 3170
1838 창작이냐?... 모방이냐?... 이것이 문제면 문제로다... 2016-11-14 0 3273
1837 중국 조선족 동시의 흐름을 알아보다... 2016-11-14 0 2879
1836 동시의 다양화에 관하여 2016-11-14 0 3100
1835 윤동주와 동시 2016-11-14 0 2813
1834 "우화시"와 허두남 2016-11-14 0 3122
1833 동시때벗기기 = 동시도 시로 되여야... 2016-11-14 0 3102
1832 채택룡 / 김만석... 랑송동시도 창작해야/ 김만석... 2016-11-14 0 2912
1831 박영옥 / 김선파 2016-11-14 0 2879
1830 김득만 / 김만석 2016-11-14 0 3115
1829 詩란 고독한 사람의 고독한 작업속에 생산되는 미적량심 2016-11-14 0 3173
1828 시 한수로 평생 명인대가로 인정되는 사람 없다?...있다?!... 2016-11-12 0 3251
1827 김영건 / 고 한춘 2016-11-12 0 3128
1826 심련수 / 한춘 2016-11-12 0 3343
1825 적어도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한다면,ㅡ 2016-11-12 0 2865
1824 "동시엄마" - 한석윤 2016-11-12 0 2830
1823 최룡관 / 최삼룡 2016-11-12 0 3452
1822 김동진 / 최삼룡 2016-11-12 0 3604
1821 詩人은 뽕잎 먹고 비단실 토하는 누에와 같다... 2016-11-12 0 3288
1820 [자료] - 중국 조선족 문학 30년을 알아보다... 2016-11-12 0 3481
1819 조선족 문학작품을 중문번역 전파하는 한족번역가 - 진설홍 2016-11-12 0 3693
1818 베이징 "등대지기" 녀류시인 - 전춘매 2016-11-12 0 3326
1817 화장터 굴뚝연기, 그리고 그 연장선의 값하려는 문사-정호원 2016-11-11 0 3242
1816 고 최문섭 / 전성호 2016-11-11 0 3428
1815 녕안의 파수꾼 시인 - 최화길 2016-11-11 0 3461
1814 한국 최초의 모더니스트 시인 - 정지용 2016-11-11 0 3147
1813 "등불을 밝혀"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려는 지성인 2016-11-11 0 3384
1812 詩人은 태작을 줄이고 수작을 많이 만들기 위해 정진해야... 2016-11-11 0 3388
1811 늘 "어처구니"를 만드는 시인 - 한영남 2016-11-11 0 3824
1810 늘 "서탑"을 쌓고 쌓는 시인 - 김창영 2016-11-11 0 3185
1809 장르적인 경계를 깨는 문사 - 조광명 2016-11-11 0 3246
1808 김철 / 장춘식 2016-11-11 0 3580
1807 "조양천"과 김조규 2016-11-11 0 3059
1806 "국어 교과서 편찬"과 김조규시인 2016-11-11 0 3217
1805 "만주"와 유치환 2016-11-11 0 3151
1804 {자료} - "두루미 시인" - 리상각 2016-11-11 0 3450
1803 중국 조선족 문단 "문화독립군"들 2016-11-11 0 2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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