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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미국에서의 왕증기
2014년 07월 27일 14시 12분  조회:2084  추천:0  작성자: 동녘해
그는 자신을 이 통로의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1987년, 미국에서의 왕증기



손욱





지난세기 80년대, 섭화령과 그의 남편은 아이오와대학에 국제습작중심을 설립했는데 많은 대륙의 작가들이 그곳에 다녀왔다. 섭화령은 어릴 때 대륙에 살다가 1949년에 대만으로 건너갔고 후에는 미국적을 가졌다. 그는 대만에 있을 때 은해광, 호적과 같은이들과 교제를 하면서 이단자들에 대하여 깊은 감수를 가지게 되였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특점이 있었다. 국제필회중심을 설립하고 필회를 조직하는것은 바로 그의 마음속의 작가들을 위하여 모여앉을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려는것이였다.

적지 않은 중국작가들이 초청을 받고 아이오와국제필회에 참가했다. 정령, 애청, 소건, 왕몽, 소연상, 왕안억 등도 필회에 참가하여 이채를 돋구었다. 하지만 이들은 미국에 도착한후 모두 매체의 의도에 따라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문제에 대하여 함축성이 있게 서술했고 일부 사람들은 아예 발언을 거부했다. 그것은 하나의 특수한 년대였다. 1980년을 전후하여 중국은 금방 “문화대혁명”의 동란속에서 헤여나오기 시작했기에 작가들의 마음이 아직 채 열리지 않았던것이다. 그들은 외계에 대하여 거리감을 가지고있었는데 이러한 심리상태는 섭화령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다.

왕증기가 아이오와습작중심에 가게 된것은 1987년 8월이였다. 동행한이들로는 대륙작가 오조광, 대만작가 진영진이였다. 그 시절은 사람마다 능히 출국할수 있은것이 아니다. 작가로서 미국으로 갈수 있다는것은 일종의 영예였다. 왕증기에게 있어서 그번 출국은 그야말로 의외의 수확이라고 할수 있었다.

왕증기는 미국에 면목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양진녕, 리정도, 왕호, 장충하… 그들은 모두 서남련합대학시기의 관계인사들이였지만 갈라진지 몇십년이 되여있었다. 출국을 한 그 친구들은 모두 미국의 대학들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있었다. 그들 모두가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것이 자연적으로 국내사람들보다 정력이 충만되여있는것 같았다.

왕증기는 미국의 친구들에게 시끄러움을 끼치고싶지 않아했다. 그는 조용히 보고서를 쓰고 바람이나 쏘이려 했던것이다.

그들은 금방 국경을 벗어나 동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쌘프랜시스코에 도착했다. 려정이 매우 순조로왔다. 녀승무원들의 태도가 너무나도 살가와서 내심으로부터 따스함을 느꼈다. 그는 국내 승무원들의 봉사수준을 외국과 비길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재난은 나라의 기강을 크게 상하게 했던것이다. 국내에서는 사람과 사람 지간에 친밀한 교류를 바랄수 없었다. 적어도 사회적인 측면에서 보편적인 랭담성은 누구에게나 상해로 되였던것이다. 국외에서의 이같은 대비는 그로 하여금 못내 가슴이 아프게 했다.

그의 일정은 매우 느슨하게 배치되여있었다. 떠나올 때 소연상이 그에게 출국해서 장편작품을 쓰지 말라고 귀띔을 했던것이다. 왕증기는 그의 말을 듣고 “새 료재”와 같은 글이나 끄적거려보려고 마음 먹었던것이다. 그는 시간을 타서 뉴욕, 보스턴, 시카코 등지를 돌아보려고 계획했다. 그에게 제일 인상이 깊은것은 미국의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상상보다도 더 체감도가 높았다. 그곳 사람들은 수시로 사색을 할수 있고 표달을 할수 있었다. 그는 안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여러차례나 이 점을 피력했다. 그리고 후에 쓴 “링컨의 코밑에서”라는 글에서 그 감수를 전면적으로 서술했다.



…링컨묘는 흰 화강석으로 된 네모난 탐모양의 건축이다. 묘앞에는 링컨의 립상이 있고 량옆에는 각각 내전영웅들의 군상이 세워져있다. 한쪽에는 군기를 들고 전진하는 장면이고 다른 한쪽은 발굽을 치켜든 전마이다. 묘앞에서 몇발작 떨어진 곳에 있는 초석에는 동으로 주조한 아주 큰 링컨의 두상이 있다.

나는 링컨의 묘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깔끔해보이고 깨끗하다. 어느 한 프랑스작가는 남경에 가서 중산릉을 참관한적이 있는데 링컨의 묘는 중산릉에 비교할수 없다고 했다. 그만치 중산릉은 기백이 넘친다는것이였다. 나는 그에게 풍격이 부동할따름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바로 풍격이 완전히 다르다는데 있는것이다. 그 프랑스작가는 링컨묘는 이름 그대로 “묘”이고 중산릉은 “릉”이라는데 중시를 돌리지 못했던것이다.

우리는 묘에 들어가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링컨과 링컨의 부인 그리고 그들의 세 아들이 안장되여있었다. 묘의 중앙에는 앉은 자세로 된 링컨의 동상이 놓여져있었다. 그의 세 아들의 동상도 있었는데 비교적 작았다. 링컨의 아들들은 링컨을 많이 닮은것 같았다. 링컨묘는 링컨과 그들의 가족을 기념하기 위한것이였는데 이것 역시 미국식사상이라고 생각되였다. 링컨의 부인앞에는 “링컨의 친밀한 전우”였다는 뜻을 나타내는 어떠한 문구도 없었고 그런 뜻을 보여주는 형상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길을 따라 묘에서 나와보니 많은 사람들이 링컨의 코를 만지고있었다. 물론 두상의 코를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데리고 온 어린이를 번쩍 들어서 링컨의 두상에 가까이해주었는데 그게 좋다고 어린이들은 깔깔거리며 링컨의 코를 만져댔다. 링컨의 두상에는 검은칠이 한벌 올라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어른의 코를 만졌던지 코부분만 황동으로 된 바탕이 들어나 반짝반짝 빛을 발산하고있었다.

사람들은 왜 링컨의 코를 만지려고 할가?

링컨의 코는 보기 좋게 우뚝 솟아있었는데 그 코를 만지면 좋은 기운을 받을수 있다는 미신이 관광객들속에서 통했던것이다. 몇몇 작가들은 링컨의 코를 잡고 사진까지 찍었다. 누군가 나에게 한장 찍어 기념을 남기라고 했지만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으로 그들의 호의에 답복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시인 에드가 리 마스터의 옛집에 들렸다. 마스터는 링컨의 일부 관점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를 접대하는 한 녀사에게 마스터는 구경 링컨의 어떤 관점을 동의하지 않았는가고 물었다. 그녀는 구체적인것은 잘 모르겠지만 그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은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당신들은 그들의 관점이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똑 같이 기념하고있군요. 그렇죠?”

나의 물음에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

“오직 인류의 문화에 공헌을 했다면 우리는 모두 기념합니다. 그들의 관계가 좋았던 나빴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지요.”

“이것을 대체로 미국의 민주라고 하겠지요?”

“당신, 참 옳은 말을 하시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한술 더 떴다.

“나는 저 많은 사람들이 링컨의 코를 만지는것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나의 말에 그녀가 동을 달았다.

“나도 찬성하지 않는답니다.”

마스터의 옛집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우리는 칼 샌드버그의 옛집에 들렸다. 칼 샌드버그에 대하여 중국의 독자들은 비교적 익숙하다. 그이 시 “안개”는 중국독자들속에서 널리 랑송되고있다. 칼 샌드버그는“링컨-전쟁년대에”라는 장시를 쓴적이 있다. 그는 링컨의 관점을 찬성했던것이다.

호텔에 돌아와서 나는 이런 생각을 굴려보았다.

“링컨의 코를 만질수 있는가? 없는가?”

나중에 나는 이렇게 판단했다.

“만질수 있다. 누구의 코도 만질수 있다. 때문에 링컨의 코도 만질수 있는것이다. 누구의 코라고 특별히 신성한것은 아니다.”

링컨은 “모든 인생은 평등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나는 또 자유, 평등, 박애는 갈라놓을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자유는 평등을 전제로 하는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제창해야 할것은 바로“모든 인생은 평등하다.”는 정신일것이다.

이번 미국행에서 나는 많은 자극을 받았다. 제일 뼈저리게 느낀것은 바로 이 한단락의 사실일것이다. 중국사람들은 혁명을 거쳤지만 여전히 비굴함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문화적인 방면에서 볼 때 되려 몇걸음 퇴보한것 같다.



자신의 우파생활과 “문화대혁명”중의 조우를 떠올리면 왕증기는 내심 소태를 씹은것 같을것이다. 사상이 충격을 받는 그 순간이 바로 정신이 자각을 되찾는 시각일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일부 대만작가들과 교류를 할수 있는 기회를 가질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것이다. 량안의 작가들이 다른 곳에서 만나 마음속의 고배를 털어놓느라니 자극이 컸을것이다.

진영진은 왕증기가 좋아하는 대만문인이다. 진영진의 성정은 왕증기로 하여금 적지 않는 감동을 받게 하였다. 진씨는 대만에 많지 않은 책임감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소설의 현실의식은 보통사람들보다 더 깊다. 그의 심미적인 경로에는 로신의 게시가 아주 많다고봐야 할것이다. 그는 사람을 열정적으로 대하고 인품이 후덕하다. 그들의 문풍은 많은 차이점을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마음은 한곬으로 쏠리고있었다. 어느한번, 나는 향항에서 진영진에게 왕증기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그번에도 진영진은 왕증기에 대하여 못내 탄복하는것이였다. 그러는 진영진을 보면서 나는 여러번이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렇게 부동한 두 사람이 이처럼 사이 좋게 교류할수 있다니… 그야말로 중국현대문학에서 깊이 연구해야할 현상이 아닌가?

왕증기는 안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쓴적이 있다.



18일에 “나는 왜 창작을 하는가?”라는 제목의 토론회의가 있었소. 나는 처음에 발언을 하지 않아도 되려니 생각했었는데 웬걸 회의측에서는 누구나 다 발언을 하라고 요구했소. 이번 발언은 한자의 성씨필획의 순서에 따라서 배치되여 나는 세번째로 발언해야 했소. 다행히도 회의전에 약간 생각해둔것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나는 이렇게 말했소.

“…나는 왜 창작을 하는가? 나는 어릴 때부터 수학을 잘 못했기에(웃음)…

내가 초중에 다릴 때 어느 한 선생님은 나를 보고 장래에 건축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나는 건축사가 되는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그림을 잘 그렸거든요. 하지만 건축사가 되려면 수학을 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기하를 말입죠. 그 선생님은 나의 기하재능을 키워주려고 온갖 심혈을 다 쏟으셨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맥을 버리고 탄식을 하는것이였습니다.

“각하의 기하는 동성파의 기하입니다.”

(웃음)

기하는 한걸음한걸음 론증을 거쳐야 합니다. 나의 기하는 매우 간단했던것입니다. 나는 전에 때때중이 사는 절에 머문적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여러 사람이 나에게 중이 돼본적이 있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수계》를 본적이 있었던것입니다. 이곳의 많은 중국류학생들도 《수계》를 본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중이 된적이 없습니다. 항일전쟁시기, 일본사람들이 우리 현성옆에까지 쳐들어왔었습다. 그때 나는 시골로 피난을 가서 절에 거처했던것입니다. 그대 나는 대학입학시험준비를 하기 위한 교과서외에 두권의 책을 더 가져갔었는데 그것이 바로 《심종문문집》과 《뚜르게네브선집》입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두 사람의 영향을 받고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서방현대주의의 영향을 받았기에 시를 쓰기가 매우 힘듭니다. 대학때의 어느날, 두 동창이 내앞에서 걸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누가 왕증기냐?”

다른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읽어도 알수 알수 없고 자기가 읽어도 알수 없는 그런 시를 쓰는 놈이 바로 왕중기지.”(큰 웃음) 나는 올해 67살입니다. 인생의 달고 쓰고 시고 매운 맛을 모두 봤고 춘하추동을 모두 거쳐왔다고 해야지요. 나는 부득불 구름에서 땅으로 내려올수밖에 없었습니다. OK!(박수)”

이날 토론회의는 아주 성공적이였소. 대부분 사람들이 정채로운 발언을 했는데 섭화령도 매우 기뻐했다오.

진영진의 아버지(82세)는 특히 온 가족(부인, 딸, 사위, 외손녀)을 데리고6시간이나 차를 타고 와서 중국작가들을 만나주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셨소. 그날밤, 영진의 고모부가 연경호텔에서 중국작가들을 초대했소. 연석에서 영진의 아버지가 연설했는데 감정으로 충만되였다오. 오조광도 연설을 했소. 그는 먼저번에 아이오와주에 가서 영진의 아버지를 뵈운적이 있다오. 폴 엥글이 영진의 아버지를 포옹해주었소. 두 로인이 포옹하자 모두들 무척 감동했소. 나도 영진의 아버지를 포옹했소. 저도몰래 눈물이 주르르 굴러내렸다오. 그후 나는 영진이와도 포옹했소. 우리 두 사람은 소리내여 울기직전에 이르렀소. 《중보》의 녀성편집 조우방이 나의 얼굴에 키스를 했고 오래도록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오.

연석이 파한후 섭화령이 우리 모두를 초청해서 그의 집으로 가 술을 마시며 한담을 하자고 했소. 우리는 한담을 하고 노래도 불렀소. 갈라질 무렵에 섭화령은 정추여선생의 부인을 포옹했소. 람릉이라고 부르는 녀작가는 크게 울음을 터치기까지 했다오.



왕증기는 이 편지를 정성들여 섰다. 화면감이 강하고 여러가지 감정을 보는듯이 그려낸것이다. 만약 당시 국내에 있었다면 이렇게 자유로울수 없었을것이다. 잔혹한 내란을 겪은후 다른 곳에서 국내를 바라보며 감상에 빠지게 된것은 당연한 일일것이다. 중국의 근 백년의 운명은 수많은 문인들로 하여금 시름을 놓고 길을 선택할수 없게 했다. 그야말로 만면에 상처자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때문에 소부분 사람들만이 자유롭게 글을 쓸수 있었던것이다.

따져보면 모두들 어느정도 답답하게 살고있다.

왕증기는 말 타고 꽃 구경하는식의 그번 방문으로 미국사회의 근본면모를 다 보아낼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는 미국의 여러 곳들을 돌면서 언제나 흥에 겨워했다. 하지만 영어구사능력이 수수해서 그렇게 자유자재로운것만은 아니였다. 하여 그는 젊었을 때 영어공부를 홀시하여 능란하게 영어를 구사할수 없는것을 못내 후회했다. 외출을 하려면 자연적으로 모임에 참가해야 하고 연설을 해야 했다. 왕증기는 선후하여 예일대학, 하버드대학,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에서 연설을 했다. 그때 중국대륙에서는 한창 사상해방운동을 벌리고있었다. 서양사람들은 왕증기가 정치문제에 대하여 거론하기를 바라고있었다. 하지만 조심성이 많은 왕증기는 묘하게도 그런 민감한 문제들을 회피했다. 그는 흥미진진하게 언어와 책임감 문제에 대해서만 피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에도 숨어있는 가시가 있었다. 심미리론상에서는 완전히 국내의 주류와 달랐다. 그의 사고의 맥락은 이미 문학가의 상태로 돌아가있었다. 언어의 심처에는 개성적인 물건들이 많다. 다른 사람의 눈에 그는 총명하고 자연적이며 사랑스럽게 비춰졌다. 주덕희는 지어 “왕증기는 미국화인들과 인연이 깊다. 모두들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냄새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왕증기는 당시 중국문단에서 제일 큰 문제는 언어의 표달에서 시끄러운 일들이 발생하는것이라고 보고있었다. 보편적인 팔고문과 보편적인 무미건조함이 문단을 가득 채우고있다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는 사처로 다니면서 문자의 맛에 대하여, 지혜로운 어구의 중요성에 대하여 연설했다. 그는 보건대 형식주의와 같은 문제도 실제상에서는 정신의 육체가 부식되는것이라고 믿고있었다. 미국으로 가기전에 왕증기는 《문예연구》에 “소설의 언어에 대하여(잡기)”를 발표하였는데 미국의 대학들에서 강연을 할 때도 그 내용들을 들먹였다. 이를테면 하버드대학에서 연설할 때의 제목은 “중국문학의 언어문제”였다. 그는 연설에서 옛날 사람들이 운운하던 “기”에 대한 문제를 피력했다.

“언어의 아름다움은 언어의 본연이나 표달하고저 하는 의의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얼마나 되는 내용을 암시하는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가 하는데 있다. 즉 독자들로 하여금 보고싶은 정경이 얼마나 광대무변한가를 느낄수 있게 하는것이다. 옛 사람들이 ‘언외지의’, ‘현외지음’이라고 하는것은 바로 이러한 도리이다.

국내의 한 평론가는 나의 작품을 평론한적이 있는데 그는 ‘왕증기의 언어는 참으로 괴상하다. 뜯어보면 구절마다 평범하지만 그것들을 모아놓으면 그만의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건대 모든 사람들의 언어도 이러할것이다. 만약 마디마디가 경구라면 사람들이 받아 당하기 어려울것이다. 언어는 한구절 한구절 써내는것이 아니라 모여서 만들어지는것이다. 언어는 집을 짓는것처럼 한장 또 한장의 벽돌을 쌓아서는 안된다. 그렇게 한다면 언어를 쌓아놓는것밖에 안되는것이다. 언어의 아름다움은 한구절 한구절의 말에 있는것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의 관계에 있는것이다. 포세신은 왕희지의 글을 론하면서 “한글자 한글자씩 보면 그다지 멋을 느낄수 없다. 하지만 글자의 여러 부분, 글자와 글자 사이는 ‘로옹이 어린 손자를 이끄는듯 해서 정을 느끼게 되고 강약이 서로 통하는듯하다.’ 고 말했다. 중국사람들은 글자를 쓸 때 행기(行气)에 중시를 돌린다. 언어는 곳곳에서 서로 통하게 되는데 내재적인 련계를 가지고있다. 언어는 나무와 같아 나무가지와 나무잎이 있어야 하고 진액이 흘러내려야 한다. 가지 하나가 움직이면 곁에 있는 나머지 가지들도 함께 움직이게 되여있다. 언어는 ‘살아있는것’이다.”

왕증기의 몇차례 연설은 모두 상투적이여서 얼마나 중시를 받았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보건대 왕증기의 중요한 창작심득은 그의 일생의 경험을 몇마디에 모두 담았다는것이다. 당시 청중들은 왕증기의 연설을 귀담아 들었다고 한다. 그의 언어가 일부분 학생들을 감동시킨것 같다. 미국사람들은 워낙 자유정신에 대하여 깊은 중시를 돌리기에 표달하려는 내용에 대하여 크게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들속에서 그 점을 의식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할것이다.

비록 3개월밖에 안되는 시간이지만 왕증기는 크게 시야를 넓혔을것이다.

그는 차츰 집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중국의 좋은 점에 대하여 생각을 굴리기 시작했던것이다.

미국으로 가서 제일 좋은 감수는 적막감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일부 류학생들은 “미국은 산이 좋고 물이 좋고 적막이 좋다. 국내는 어지럽고 혼란하고 정말 즐겁다.” 고 말한다. 왕증기도 그러한 감수를 받았는지는 알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한달이 지나자 그가 안해를 생각하고 자식들을 그리워한것만은 사실이다. 재미나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어느날밤, 그가 잠이 들었는데 숙소에 도적이 들어와 돈을 훔쳐갔다. 이 일은 왕증기를 대단히 기분상하게 했다. 그는 미국사회는 비록 평등할지라도 사람들은 매우 복잡하다고 느꼈다. 이것은 그의 강렬한 감수였다. 그는 이 일을 안해에게만 말했을뿐 다른 장소에서는 크게 떠들지 않았다.

미국을 떠나기전에 왕증기는 섭화령에게 편지를 써서 많은 감사의 말을 했다. 섭화령은 량실추를 좋아했고 심종문을 존경했으며 빙심, 애청에 대해서도 극도로 추앙했다. 그렇게 본다면 왕증기의 가치도 알수 있지 않는가? 왕증기는 섭화령이라는 미국 화인학자에게서 존재의 의의를 느꼈을것이다. 그는 량실추와 같지 않았고 심종문과도 달랐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 비슷한 배경이 있다는것만은 사실이다. “량실추를 추억하여”라는 글에서 섭화령은 심종문에 대한 호감을 썼다. 그것은 경파(京派)의 여맥이라고 할수 있다. 아무튼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라 해야겠다. 왕증기 등이 미국으로 간것은 섭화령에게 있어서 옛꿈의 련속이라고 할수 있었지만 왕증기에게는 새로운 꿈이나 다름이 없었다.

몇년이 지난후 나는 미국으로 가서 뉴욕의 거리를 활보하다가 당년의 왕증기의 감수를 돌이켜보게 되였다. 그는 자기의 “껍질이 갈라졌다.”고 말했는데 그야말로 생동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에 다녀온적이 있는 적지않은 작가들의 창작풍격이 변화를 가져왔다. 왕몽, 왕안억이 바로 그 전형이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왕증기는 되려 자기의 선택에 대한 자신감을 강하게 했다. 동방인들이 예로부터 가지고있는 문명은 때로 이 세간에서 서양인들과의 대비중에 진화를 하는것이다. 문화는 사실 일종의 살아가는 방법에 불과하다. 즉 정신을 표달하는 통로인것이다. 왕증기는 고국의 정신통로가 아직 완전하게 열리있지 않다는것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야말로 이 통로의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최동일 역)



《중국당대문학작품선집》조선문판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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