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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위대한 어머니
2014년 07월 27일 14시 15분  조회:1886  추천:0  작성자: 동녘해
나의 위대한 어머니
 
풍립삼
 
 
나의 어머니 왕문진은 2012년 3월 7일 12:10분에 인생려정을 끝마쳤다. 그이는 인생의 사명을 완수하고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셨는데 향년 92세였다.
어머니는 1920년 1월 23일에 탄생하셨다. 원적은 산동성 창락현 왕가장이다. 18살에 나의 아버지 풍지강과 가정을 이루어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들로는 풍립삼, 풍립성, 풍계량이고 딸들로는 풍금영, 풍금아이다. 어머니께서 눈을 감으실 때 둘째아들 풍립성과 사위 최청산이 곁을 지켰다.
어머니는 해방전쟁당시 심양에서 아버지를 엄호하여 지하혁명을 하셨다. 당시 아버지의 지하당령도는 해방후에 시공안국 국장을 지냈던 우정파이다. 신분이 폭로된후 아버지와 우정파는 함께 북경으로 도망가 신가구에 거처하면서 해방을 맞았다. 북경이 해방된후 아버지는 중앙재정학원전신인 중앙세무학교의 설립에 참가하셨다. 그후 어머니는 줄곧 북경에서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나신것이다.
어머니의 아버지 즉 나의 외할아버지는 20여세에 촌장으로 되여 무장으로 토비들의 습격을 막아내다가 영용하게 몸을 바쳤다. 그때로부터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한무남짓한 밭에 매워서 겨우 목숨을 이어왔다. 어머니는 전쟁의 풍운을 겪으셨고 갖은 환난을 다 맛보면서 주린배를 끌어안고 류리걸식도 하셨다. 극좌로선이 판을 치던 년대에는 억울하게 기시와 굴욕을 당해야 했다. 한 사람이 출세를 하면 닭개짐승도 하늘에 오르고 한 사람이 사고를 치면 온 가정이 곤난에 허덕이게 된다고 했다. 천당과 지옥은 눈 깜빡 할 사이에 오갈수 있는것이다. 이러한 고험은 어머니의 강인한 성격과 응변능력 그리고 위대한 인격을 키워주었다. 만약 종교가들이 묘사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천국이 정말 있다면 어머니의 령혼은 반드시 천사들에게 받들려 생화가 가득 펼쳐진 천국의 길을 따라 천당으로 가게 될것이다.
어머니는 인격이 위대하고 품덕이 고상했으며 고생을 두려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즐겨 도우셨다. 그이는 3대를 키워내셨다. 간난신고를 다 겪으셨지만 어떠한 곤난도 그의 강인한 성격을 개변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덮쳐드는 곤난을 전승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으셨는데 그야말로 인간사회의 모범이요, 어머니들의 본보기라고 할수 있다.
어머니의 인생행로는 그대로 높고 우렁찬 어머니의 노래를 구성했다고 할수 있다. 인간세상에는 많은 죄악과 추악과 불공평이 존재한다. 그들은 어머니와 그리고 어머니와 비슷한 필생의 심혈을 조금도 남김없이 아들딸들의 성장에 쏟으신분들의 공로와 희생을 보지 못한듯이 홀시할수 있지만 천국은 그들을 포상할것이다. 동시에 인간세상에서 징벌을 받지 않았거나 징벌할수 없는 일체 죄악, 추악과 불공정을 지옥에 보내여 심판할것이다.
나의 친구이고 저명한 작가와 평론가이며 인문문학출판사 전 부총편집이였던 하계치선생이 보내온 대련에는 이렇게 씌여져있다.
 
위대한 어머니 앞길을 밝게 비춰주니
우수한 아들딸들 후세의 본보기 되네
 
전련은 십분 맞는 말이지만 후련은 나로 하여금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한다. 계치의 기대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진정으로 선을 지향하는 목적을 가슴에 담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책을 읽어야 할것이며 사고하고 자생하고 자률해야 할것이다. 또한 어머니를 따라배워야 할것이다. 인류에게 있어서 제일 가깝고 친절하고 순결하고 소박하고 원견성이 있으며 기초적인 효응이 있고 발전공간이 있고 봄날의 따스한 바람처럼 령혼을 어루쓰러주고 키워낼수 있는 교육은 우리 어머니들이 제일 먼저 실시하고 또 나중에 완성한다.
당년에 동승인민공사에서 살 때 누군가 어머니의 손에서 나 어린 계량이를 사가겠다고 했다. 그때 우리 가정은 이미 파탄될 지경에 이르렀던것이다. 어머니는 그 사람의 청을 단마디에 거절해버렸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더 이상 영위해나갈수 없는 가정이지만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결심했던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속에서 계량은 하루하루 커갔고 오늘의 인재로 자라났다. 이것이 그래 어머니가 창조해낸 기적이 아니란 말인가? 이 아름찬 양육의 정을 무엇으로 다 보답한단 말인가!
금아는 소학교에 다닐 때 간염에 걸린적이 있는데 얼굴이 누르끄레 하고 몸집이 아주 가냘파보였다. 집에 돈이 없어 공공뻐스를 탈수 없었기에 나는 해전문 사도구로부터 우안문외 제2전염병원까지 금아를 업고 갔다. 하지만 200원이나 되는 입원담보금은 어디 가서 구할데가 없었다. 나는 끝내 금아를 입원시키지 못한채 겨우 약 한봉지를 받아가지고는 금아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금아의 병은 따로 치료를 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저절로 나아버렸다. 어머니께서 어떻게 금아의 병을 다스렸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고있다.
지난세기 삼년재해 때, 산동 창락의 농촌에 사시던 나의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선후로 굶어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북경 해전의 작은 방에서 겨우 연명을 해가는던 어머니와 우리 다섯 오누이는 뜻밖에 조금도 몸을 상하지 않았다. 우리는 천민이라 빈하중농들처럼 혁명적구호를 부르면서 인민공사의 곡식을 훔쳐올수는 없었지만 신근하게 로동하고 절약하고 참아내면서 이를 악물고 목숨을 이어왔던것이다. 어머니는 주어온 낡은 삽으로 집뒤에 있는 벽돌이며 돌멩이가 구을던 땅을 밭으로 개간했다. 그밭에다 옥수수를 심고 공장에서 나오는 페수구에서 물을 떠나다가 뿌려주었다. 가을이 되자 놀랍게도 그밭에서 수확을 할수 있었다.
인민공사에서 가을걷이를 할 때면 우리 온 식구는 아침일찍 나가서 이삭주의를 했다. 농민들이 떨어뜨린 고구마며 당근이며 콩꼬투리며 밀이삭을 광주리에 주어담았다. 돈이 없어 석탄을 살수 없었기에 립성은 늘 기차역전에 가서 코크스를 주었다. 립성은 가끔 그 지역에서 왕처럼 우쭐거리는 역전마을 애들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멍들고 옷이 찢겨져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런날 밤이면 어머니는 못내 가슴 아파하시며 찢어진 옷을 한땀한땀 기워주셨다.
풀을 베여 팔아 푼돈을 벌어들이던 그해, 립성은 겨우 12, 3살이였을것이다.
어느 토요일이였는데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져있었다. 하지만 립성이는 그때까지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었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오솔길을 따라가 립성을 마중하러 갔다. 멀리서 립성이 머리를 푹 숙인채 풀을 가득 실은 밀차를 끌고 망아지처럼 힘겹게 걸어오는것이 보였다. 나는 앞으로 달려가서 낮은 소리로 “립성아.” 하고 불렀다. 그때 립성의 두눈에는 맑은 이슬이 맺혀 반짝이고있었다. 나는 소리없이 립성의 손에서 밀차를 빼앗았다… 년세가 지긋하신분들은 개혁개방이전의 북경골목에서 늘 못사는 집 아이들이 고물을 줏는 사륜차를 끌고 다니는 풍경을 보셨을것이다. 나무판에 쇠바퀴로 된 사륜차의 페달을 두발로 밟으면서 휙휙 소리나게 나는듯이 달리는 모습들을 말이다.
어머니는 강철학원부근에서 보모를 하신적이 있는데 혼자서 두집을 돌보셨다. 어머니는 아침일찍 나갔다가 날이 어두워야 돌아오셨다. 힘들어도 앉거나 누울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약간 허리를 펴서 움직이면 그게 곧 휴식이엿다. 그야말로 숨 돌릴 기회마저 따로 없었던것이다. 다리에 부스럼이 나고 피가 흘렀으며 고름이 흐르고 부식되여 구더기가 생기기까지 했다. 그 지경이 되여도 어머니는 쉴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이면 어머니는 급히 소금물로 상처를 씻어내고 헝겊으로 꽁꽁 감싸버렸다. 이튿날아침이면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는듯 또 출근을 하셨다. 어머니는 주인집에서 상처가 곪아나는 냄새를 맡고 자기를 해고시킬가봐 제일 겁나하셨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먹여살리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셨을뿐만 아니라 또 우리의 학습에도 갖은 심혈을 다 기울이셨다. 하여 우리는 모두 소학교, 중학교에 다닐수 있었고 나는 대학까지 나오게 되였다. 나는 어머니께서 겪으신 그 고생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늘 사는게 힘이 난다고 말씀하셨다. 오직 자식들만 곁에 있으면 희망이 보인다는것이 어머니의 삶의 신조였던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역시 한순간에 귀전을 스치는 바람과 같다는것이였다.
금영은 12살좌우부터 늘 공사에 달려가 보조금을 요구했다. 공사에서는 어머니가 다섯 오누이를 힘겹게 키우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들은 또 총명한 금영이를 아주 좋아했다. 공사에서는 종래로 우리 가정을 난처하게 굴지 않았다. 금영은 매번 공사로 갈 때마다 10원, 15원 지어는 20원의 보조금을 받아왔다.
금영이는 북경녀자3중학교의 3호학생이였다. 그해 금영이는 초중이를 졸업하고 나는 고중을 졸업했다. 가정을 꾸려나가고 나를 대학에 보내기 위하여 금영이는 16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에 참가할수밖에 없었다. 금영이는 사업에 참가하자마자 교육국에 가서 포황유에 있는 20평남짓한 아빠트를 얻어왔다. 하여 우리는 사도구의 나무판대기로 뒤벽을 막아 바람이 크게 불면 수시로 넘어갈수 있었던 주인이 워낙 창고로 쓰려던 창문이 없는6평도 되지 않는 그 흙벽돌집을 떠날수 있었다.
나는 사도구의 그 흙벽돌집이 당시 중국에서 제일 좁고 초라하고 위험하고 어두워서 누구도 감히 거주하려 하지 않는 또 사실상 누구도 거주했던적이 없었던 “집”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비가 오면 집이 무너질가봐 들어갈수 없었고 우뢰가 울면 네벽에서 흙이 투둑투둑 떨어져내렸다. 그야말로 가축우리보다도 못했고 “백모녀”에서 양백로가 살던 집보다도 못했었다. 아마 희얼이 살던 산굴보다는 좀 나았다고 할가. 하여 집주인도 우리에게 집세를 내라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그곳을 “집”이라고 말하는것은 그곳에 대한 감사의 마음때문에 약간 높이 대우를 해주고 과장을 한것뿐이지 절대 “집”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기에는 과분한 곳이였다. 그처럼 악렬한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확신하고있었다. 나는 정말 나 자신의 위대한 락관주의정신에 대하여 자호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그처럼 초라하고 비천한 환경을 벗어나 하루아침에 넓고 밝고 따스하고 명실공히 사람이 거처할수 있는 능히 금영이가 학가만소학교에서 빌어온 네개의 낡아빠진 학교에서 한쪽에 밀어놓았던 손질하면 그런대로 쓸수 있는 접이침대를 놓을수 있고 손님이 오면 앉을 자리가 있는 “고층아빠트”에 이사를 오게 한것은 금영이가 평생에 느낀 제일 큰 성취감이였고 행복이였을것이다. 금영이가 우리 가정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희생을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
후에 금영이는 학력이 낮다는 관계로 교단을 떠나 농민, 공인을 거쳐 사무원으로 되였다가 공회주석이라는 중임을 짊어지기도 했다.
념원과 현실, 재능과 출로는 현제한 차이가 있어 우울할 때가 많다. 이러한 사실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가슴아프게 하고 어떻게 그것을 보상할가를 두고 갈피를 잡을수 없게 한다.
그때 나는 책꽂이가 욕심이 났지만 집 형편으로는 살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디에서 주어왔는지 모를 나무판대기를 칼로 깎아 못을 박아서 네모난 책꽂이를 만들었다. 칠도 올리지 않아 네면의 색갈마저 다른 책꽂이였지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광명일보》에 입사할 때까지 그것을 썼다. 후에 이사를 하다가 잃어버리고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쉽기 그지없다.
구차한 집에서 효자가 난다고 했다. 물론 집이 구차하면 모리배도 나올수 있다. 리익이 있으면 정을 쏟고 리익이 없으면 돌아설수 있는것이다. 사리사욕에 정신이 팔려 불효를 저지를수 있는것이다.
대학에 올라간후 나는 본분을 지키려 했을뿐 그렇게 힘들여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대신 많이 사고하고 습작에 열중했다. 그것 역시 워낙은 정상적인 행동들이였지만 정치지도원은 “반동학생”들의 언행과 습관으로 느낀것 같았다. 나는 흑백이 전도되고 단장취의하며 없는 사실을 날조하고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리는 등 굴욕을 다 당하면서도 뭐라고 항변할수마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단잠에 든 밤에도 나는 복도의 전등불아래에서 밤을 패가며 검토서를 써야 했다. 당시 나는 죽도록 글을 읽어 “반혁명”이 된것을 한탄했고 금영이로 하여금 공부를 그만두게 한것도 뼈저리게 후회했다.
하늘이시여 왜 이렇게 사람을 알아주지 못하나이까!
나는 옥연담의 그 황량한 가을 물가에 벌써 다가서고있었다. 수면우에 갑자기 한줄로 나란히 선 어머니와 네 형제자매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충신으로 될수 없으면 효자나 되자.
가을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고 락엽이 가득 땅에 떨어져내렸다. 발걸음이 무거워나며 처량하기를 이를데 없었다. 나는 그 얼굴들이 그때 왜 거기서 떠오르는지 알수 없었다. 어쩌면 어머니께서 나를 위험에서 구하려는것은 아니였을가?
중학교, 대학교 때의 동학들이 우리 가정에 대한 동정과 관심을 나는 영원히 가슴에 아로새길것이다.
4중에 다닐 때 류소지는 산서가에서 우리 집으로 와 논적이 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간후 나는 상우에서 돈 5원을 발견했다. 사실 한잔의 물로 한수레의 장작에 붙은 불을 끌수 없듯이 당시 가난에 허덕이던 우리에게는 그 돈이 별로 큰 도움은 없었지만 정만은 부유한 사람들이 천금을 던져주는것보다 더 진하고 깊었다. 북경사범학원식당에서는 매주 금요일아침에 기름에 튀긴 떡을 하나씩 주었다. 그것은 당시 사범학원학생들이 제일 즐겨먹는 음식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먹지 않고 남겼다가 나어린 계량과 금아에게 주었다. 두군휘가 그것을 알고는 떡을 먹지 않고 남겼다가 나에게 주며 말했다.
“한 사람이 반개라니, 썰썰이나 일으킬게 아니냐? 한 사람이 하나씩 먹게 해라.”
두군휘는 대학교를 졸업하는 그후의 3년간 계속 나에게 떡을 남겨주었다. 두군휘는 그렇게 매주 금요일만 되면 온 오전을 배고픔속에서 보냈던것이다. 3년, 그 기나긴 나날을 견지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늘 우리에게 “사람이라면 꼭 정의가 있어야 하고 은정에 보답할줄 알아야 한다.”고 타이르셨다. 황경발, 왕경산과 같은 선생님들, 류소지, 두군휘와 같은 동학들, 진진, 악건일과 같은 친구들, 호춘계, 양배군 등과 같은 학생들은 영원히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는것이 없었다.
공부를 더 하려고 미국에 처음 갔을 때, 계량이는 춥고 배 고프고 고독해서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계량이는 젊었지만 이미 갖은 고생과 단련을 다 거친후였다. 계량이는 아주 총명했고 또 매우 견강했다. 환경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계량이는 꼭 헤쳐나오려고 마음 먹었다. 아무도 바랄이가 없는 그곳에서 새로운 천지를 열려고 결심했던것이다.
개학을 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들을수 없어 계량이는 어리둥절하긴만 했다. 이듬해에 계량이는 우수를 했고 그 다음해에는 안해를 미국으로 데려갔다. 5년만에 또 어머니를 모셔갔고 6년철에는 장모님을 데려내갔다. 어머니는 미시시피강변의 청풍명월을 향수하기 힘들어하는것 같았고 미니애폴리스의 황유로 튀겨낸 닭구이를 자시기 버거워하시는것 같았다. 어머니는 얼마 안되여 산서가 7호의 16평밖에 안되는 두칸짜리 작은 집으로 돌아와 만두며 밀국수며 오이며 가지며를 자셨고 공동변소에 다니셨다. 어머니는 이웃을 방문하고 그들과 한담을 나누는것을 락으로 아셨다.
어머니는 어디에 사시나 시종 그렇게 만족을 하셨고 종래로 자신의 생활조건을 개선할데 대하여 아무런 요구도 제기한적이 없다. 어머니는 천생 남들과 비길줄을 모르시는것 같았다. 어머니의 함의는 바로 모든것을 자식들을 위해 바치는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였다. 그만치 어머니의 념원은 오직 자식들의 평안과 행복인것 같았다. 그이는 자식들이 사업때문에 고민을 하지 말기를 바라셨고 큰 일을 할수 있기를 희망하셨으며 날마다 진보하기를 기도하셨다. 어머니는 자신이 자식들의 짐으로 되지 않는다고 이웃들이 칭찬한다며 그렇게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보는 말을 서슴없이 하셨고 또 그 말씀에 책임을 지셨다. 어머니는 정직하고 용감함을 좋아하셨고 권세에 아부하는것을 제일 하찮게 보셨으며 언제나 약자를 동정했다.
1964년, 북경사범학원 정치보도원은 군중들을 동원하여 나를 “반동학생”으로 몰아갔다. 나는 그것이 나에 대한 무함이며 시비를 전도하는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검토서를 쓰지 않았고 자료에 서명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정치보도원은 이렇게 나를 위협하였다.
“자료에 서명만 하면 능히 인민내부모순으로 처리할수 있다. 하지만 서명하지 않을 경우에는 적아간의 모순으로 처리하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상적으로 졸업을 할수 있을지는 미결이다.”
나는 하늘을 치솟을것 같은 분노를 누르면서도 머리를 숙여 서명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정상적으로 졸업을 해야 했고 취직을 해야 했으며 월급을 받아 가정을 살려야 했다. 나는 포황유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누에콩 반사발에다 집에 올 때 사가지고 온 작은 병에 넣은 “얼궈터우”술을 마셨다. 술독이 피자 나는 잠이들고말았다. 꿈에 내가 억울하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어머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어머니는 거의 명령에 가까운 어조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속에 담아두지 말고 고발하거라. 지금 바로 가거라. 네가 없으면 집이 돌아 못갈거라고 생각하느냐? 금영이 한달에 2, 30원씩은 벌어드리고 나도 보모를 하여 2, 30원씩은 나온다. 그게면 된다. 빨리 가보거라. 지금 가라는데두. 승인할것은 승인하고 승인하지 못할것은 때려죽인대두 승인하지 말거라. 너의 아버지의 교훈을 잊었느냐? 《참두아(斩窦娥)》가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있다.”
나는 학교를 찾아갔다. 하지만 원이나 계에서는 근본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착오를 견지한다고 비평하지 않았고 내가 자신을 변명한다고도 책망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내가 쓴 자료만 남겨놓고는 돌아가 기다리라고 했다. 나를 접대하는 그들은 그야말로 오만의 극치라고 할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내가 제일 근심하던 로동실습을 할 자격은 박탈하지 않았다. 인민내부모순으로 처리된것 같았다. 나는 “조직”과 맞서서는 절대 이길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것은 권리를 장악하고있는 전제자의 오만하고 광기에 가까운 권위에 도전하는것으로 되기때문이였다. 전제자가 실패를 달가와 하지 않는 도전자에게 돌려주는것은 더 거센 핍박과 박해와 굴욕과 진압일뿐이였다. 하지만 나는 실패가 정해놓은것일지라도 인격상에서 더욱 굴욕감을 느끼고 운명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기가 꺾여서 투지를 상실하고 스스로를 철저히 아Q식으로 만들수는 없었다. 하지만 닭알로 바위를 치는 식으로 고생을 사서한 결과는 어머니도 생각지 못한것이였다.
어머니는 백성을 위하여 단비를 뿌려주는 청관에 대한 극을 너무 많이 보셨던것이다. 어머니는 이 시대에 포공이 너무나 적으며 시키면 시키는대로 절대 복종하는 관리들이 너무나 많다는것을 모르셨다. 어머니는 또 시비야 어떻게 되여있든 이른바 “조직”의 리익, 영예, 존엄과 권위는 절대 모독을 당하면 안되고 “조직”을 대표하고 “조직”에 속하는 사람의 사고와 실천이 곧 최고의 원칙으로 된다는것을 알지 못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정치지도원은 학교에서 “조직”을 대표하여 학생들에게 사상교육을 진행하고 정치적감독을 실시하는 간부라는것을 모르셨고 “조직”은 아무 재간도 없는 보잘것 없는 사람도 위세가 당당해지게 하고 비할수 없이 강대해지게 하기에 절대 그와 평등해질수 없으며 반드시 그들이 말하는 “진리”에 굴복해야 한다는것도 알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학교가 더 이상 “도리를 전도하고 학업을 전수하며 의혹을 풀어주는 곳”이 아니며 이미 행정급별이 있는 “무산계급혁명사업의 후계자”를 양성하는 국가기구와 “계급투쟁리론”을 리용하여 “의식형태령역의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전쟁마당이라는것도 알지 못하셨다.
“조직”에서 어느 학생에게 “생각과 행동이 같지 않다”는 모자를 씌우면 그 학생은 아무리 학습성적이 좋아도 어쩔수 없는것이였다. 한장의 졸업감정이 그 학생의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데 절대 스스로 그 모자를 벗어내칠수 없었던것이다.
내가 온 가정의 생사가 불구하고 결사적인 각오로 달려들어도 정치보도원들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쟁취할수 있게 되여있는것이였다.
사회주의공유제도와 로동취업권이 나라에 장악되고 정치, 경제, 문화가 일체화 된 체제하에서 중국에는 정부에 목숨으로 대항하는자들이 나타나기 어려울것이다.
나는 나에게 억지로 씌워놓은 “반동학생”이라는 결론을 반대하고 나의 력사적인 진면모를 회복해달라고 요구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나는 “우경번안급선봉”으로 몰리워 감금을 당했고 구타를 당했으며 비평과 투쟁을 받았다. 나중에 맞아서 허리가 부러져서야 “특혜”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을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워낙 머리칼이 검으셨는데 백날도 안되는 사이에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여버렸었다. 어머니도 놀라셨다. 어머니가 급해서 안절부절 못했다. 어머니는 큰 근심에 빠져버렸다.
아들이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미안합니다. 어머니!
나는 두무릎을 꺾으며 고통스럽게 어머니를 불렀다. 눈물이 얼굴을 적셨고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어머니께서 나를 당겨시며 날이선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게 다 너의 아버지라는 그 물건짝때문에 생긴 일들이다.”
나는 어머니가 사람을 욕하는것을 그때 한번밖에 본적이 없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셨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용감성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때 응당 누구의 책임을 추궁해야할지를 모르고 계셨다. 이것은 어머니의 비애였다.
어머니는 평생을 정직하게 로련하게 도리를 따지면서 존엄있게 살아오셨다. 그이는 종래로 다른 사람을 업신보지 않았고 다른 사람도 당신을 업신보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의 그같이 소박한 독립과 민주의적인 정신은 나로 하여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감화되게 하였다. 나는 어머니의 그 이신작칙하는 가르침을 깊이깊이 머리속에 기억하고있다.
어머니께서 멀리로 떠나가신다. 우리는 그이와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할 때가 되였다. 이것은 우리가 어머니를 더욱 깊이 료해할수 있는 적당한 기회이다. 어머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전통리론도덕이 가정에 대한 제약과 합리성 및 필요성을 인식해야 할것이다. 이것은 우리 가정의 임무일뿐만 아니라 지어는 우리 전반 민족이 짊어져야 할 임무라고 해야할것이다.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하면 나는 위안도 느끼지만 가슴이 아프고 부끄럽기도 하다.
어머니는 흉금이 넓으시고 패기가 있으며 결단성이 있는분이셨다. 어머니의 패기는 내성적인것이였고 겸손한것이였다. 하기에 분노했을 때나 즐거우실 때 절대로 초조해하거나 거만하지 않으셨다. 전쟁으로 혼란스럽던 40년대에도 그이는 비발치는듯한 초연탄우를 무릅쓰고 애어린 금영이를 품에 안은채 남편을 찾으러 천리길에 올랐었다. “3반운동”시기에도 어머니는 도리에 의거하여 자기의 권리를 찾으려고 중앙세무학교에 찾아가 다시 아버지의 사건을 심리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를 제기하였다. 하지만 같은 곳에 감금되여 심사를 받던 류초는 누구도 관심을 돌려주는 사람이 없은데서 고민을 하다가 실망하고 동맥을 끊어 자살을 하고말았다. 삼년재해시기, 극도로 되는 기아때문에 사람마다 몸이 부어나던 때에도 어머니는 놀랍게 백여근이나 되는 전국통용량표를 모아서 급할 때를 대비하셨다. “문화대혁명”의 광란속에서도 어머니는 금아와 계량이 면회를 오는 기회를 리용하여 나에게 절대로 “몸에다 온 가정의 운명을 짊어졌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으며 만약 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들어간다고 해도 꼭 살아남아야지 절대로 남에게 맞아죽거나 스스로 기막혀 죽어서는 안된다고 타일러주셨다.
한 녀인과 다섯 자식으로 무어진 가정은 취약해서 비바람을 이여내기 어렵다고 생각할것이다. 하지만 이 가정에 어머니가 계셨기에 우리 가정이라는 이 함선은 그 어떤 풍랑고초도 꿋꿋이 이겨나갈수 있었으며 죽음의 문턱에서도 의연히 살아남을수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뛰여난 감화력이 있었다. 하기에 우리 자식들은 모두 자각적으로 형세에 다라서 큰 국면에 복종할수 있었으며 목숨을 내걸고라도 가정을 보위하고 위험속에서 가정을 구해낼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 가정의 생존, 성장, 발전 장대를 위하여 자존자강하고 정의를 중히 여기며 간고분투하고 불요불굴하는 우량한 가풍을 형성하셨다.
어머니에게도 어쩌면 약점이 있을것이다. 이를테면 남존녀비와 같은 관념이나 모든것은 명에 따른것이라는 숙명관념 같은것들을 들수 있다. 하지만 력사적인 국한성이나 문화적인 국한성으로 볼 때 이것을 착오라고 할수 없다. 오직 리해를 해야 하지 구태여 다른것을 바랄수 없는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신선을 흥량하는것과 같은 표준으로 보통사람을 볼수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관용을 베풀거나 자아방종하고 도덕의 자아완성을 거절해도 안된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시기 1년전부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는 자신의 건강, 수명, 동통, 치료, 음식, 기거, 호리, 지어는 후사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지시나 교대도 없으셨다. 어떻게 하는게 쉬우면 어떻게 처리하라는 뜻이였다. 어머니께서 유일하게 근심하시는것은 내가 근 20년간 시종 혼자 사는것이였다. 어머니는 나를 뽈 때마다 물으셨는데 어쩌면 그게 마음의 병으로 되셨는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어머니께서 림종하시기 두달전에 나는 류미를 집으로 데리고 갈수 있었다. 류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이 매우 부드러웠다. 그리고 량미간이 활짝 펴졌으며 얼굴에 웃음이 가득 번지셨다. 어머니는 수척한 손으로 미래의 며느리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좋네, 참 좋아. 다투지 말게. 일이 있으면 서로 앞장서서 하게나. 재밌게 살게.”
우리는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깊숙히 허리를 꺾었다. 우리는 어머니께서 림종전에 해주신 마지막 축복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있다.
어머니께서는 일생동안 충후하고 인간적이셨고 탁월했으며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요구는 매우 엄하셨다.
내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어머니의 몸에서 강렬하게 보여지는 전통문화의 감동적이고 빛나는 자각을 섭취해야만 우리의 인격이 고상하게 될수 있고 어머니께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것 같은 느낌을 진정으로 감수할수 있을것이다.
어머니의 유체고별의식은 장엄하고 경건하게 진행되였다.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을 담은 유상은 여전히 생전의 모습을 보는듯싶었다. 추모시와 대련들이 유상량옆에 걸렸다. 화한은 고별청에 겹겹이 둘러쌓였다.
나의 대학교 스승님들인 왕경산, 왕몽, 나의 스승이자 친구들인 원응, 리국문, 소연상, 나의 문학계, 예술계, 신문계, 교육계, 기업계의 친구들인 진진, 정이청, 진건공, 왕덕추, 리치국, 호옥룡, 안성신, 류옥산, 최군연, 류소지, 장서발, 륙려나, 리기, 장락산, 리영, 리려, 수려군, 진단진, 류석성, 부활, 고엽매, 왕소용, 라정문, 악건일, 장덕녕, 허지운, 소립군, 주정, 한소혜, 로약강, 리명생, 조대붕, 전혜생, 두군휘, 리춘유, 목상신, 왕조건, 호춘계, 부문하, 양배군, 송평, 왕복명, 성아야, 량옥존, 증진남, 장왈개, 조애진, 방화, 호계금, 차매, 풍하, 경육민, 조옥지, 복운진, 왕성도 등도 화환을 들고 찾아왔다.
원응선생이 화환에 남긴 서명은 “우질원응(愚侄袁鹰)”이였다. 나는 그에게 “우질”이라는 두 글자를 삭제하자고 제기했지만 원응선생은 기어코 남겨야 한다고 고집했다. 원응선생의 그 겸손함에 나는 지금도 황공함을 느낀다.
전에 “당대지식청년문학의 아버지”로 불리운, 당년에 내가 협화골과에서 척주를 수술할 때 밤도와 나를 간호해주던 악건일, 장덕녕 부부는 “왕문진로인님을 추모하여”라는 만사를 지어왔다. 그리고 나의 중학교, 대학교 때의 동창이며 당년에 격렬하게 사범학원의 압제와 타격에 반항하여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일생을 방황하던 재능이 있지만 운명이 기구했던 류소지는 추모시 “풍백모송”을 보내왔다.
태두식, 정영식의 성취가 있고 업적이 있는 스승과 친구들이 나의 어머니를 위하여 마지막길을 바래준것은 어머니의 영광이다. 나는 이로하여 긍지를 느끼면서도 얼마간 놀라왔다.
“장군이 가니 큰 나무가 잎이 떨어진다” 했던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나는 삽시에 넋이 나가버린것만 같아 눈앞이 아찔해났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실적에는 어머니가 없는 자리를 상상해본적이 없었지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비여있는 그 자리가 그렇게 크게 느껴질수 없었다.
내가 무너진다면 누가 나를 잡아줄가? 내가 비통해한다면 누가 나의 하소연을 들어줄가? 내가 의혹스러워 한다면 누가 와서 해답을줄가? 내가 충동되였을 때, 너무 흥분하여 모든것을 잊어버렸을 때 누가 와서 나를 깨워주고 랭정을 되찾게 충고해줄가?
어머니를 잃은 고통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고통이요, 신심을 잃은 비통함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비통함일것이다. 그리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려 하지만 친인이 계시지 않는것이 이 세상의 제일 큰 유감이라는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가정의 지난날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어머니의 아들딸들이라는것때문에 자호감을 느낀다.
인간의 길에서 어머니를 바래주는 대오가 점점 멀어져 간다.
천국의 길에서 어머니를 맞아주는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 편히 가십시오!
어머니, 감사합니다!
 
《중국당대문학작품선집》조선문판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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