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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최동일 산문집-엄마의 별

엄마의 마늘밭(제3부)
2010년 03월 11일 07시 30분  조회:4983  추천:0  작성자: 동녘해

엄마의 마늘밭(제3부)

 

1

넓직한 터밭을 반이나 메운 파아란 마늘싹들이 따스한 5월의 미풍에 시름없이 하느작이고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늘밭은 마치도 수많은 생명을 키워낸 아늑한 초원을 방불케했다. 나는 바자테를 잡고 서서 이윽히 마늘밭에서 눈을 떼지못했다. 아버지는 부지런한 지렁이마냥 왜소한 몸을 마늘밭고랑에 착 눌러 붙이고 열심히 김을 잡아나갔다. 세상밖의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는듯 묵묵히 호미질을 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아무런 부호도 없이 무표정해보였다. 흙을 가르는 호미질소리만이 쓰륵쓰륵 바람에 날려왔다. 호미질소리는 부드러운 엄마의 숨소리가 되여 나의 귀속을 파고들며 잔잔한 감동과 아릿한 괴로움을 운무처럼 내 마음밭에 뿌려주었다.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원래 저 마늘밭에는 아버지 대신 엄마가 서계셔야 했다. 머리에 올려썼던 채깝수선을 풀어내려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엄마가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셔야 했다.
“동이야. 이 마늘들을 좀 봐라. 검푸르게 독을 쓰는게 올해도 어김없이 마늘풍년이 들것같구나.”
하지만 오늘은 터밭에서 지렁이같은 아버지의 쓸쓸한 모습만이 처량하게 보여올 뿐이였다. 엄마가 안계시는 마늘밭을 바라보면서 나는 뭔가를 열심히 찾았다.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동년의 파아란 꿈을 줏던 어린시절이 마늘밭 어딘가에 숨어있을듯싶어 가슴이 설레였고 숙명처럼 마늘과 끈끈한 사랑을 나누며 마늘밭에 인생을 기탁해오시던 엄마의 향기도 마늘밭 어딘가에서 풍겨올듯 싶었다.
엄마에게 있어서 마늘밭은 유일한 생활의 기탁이셨고 마늘밭을 손질하는 그 순간들은 무한한 행복의 쪼각들이였다. 마늘밭이 있는한 생명은 이 터전에서 땅의 자양분을 만끽하며 언제나 왕성한 약동을 할것이라고 믿고있던 엄마였다.
마늘밭에 온갖 사랑을 쏟아오시던 엄마는 그 무렵, 마늘밭에 대한 미련과 사랑과 집착을 가슴에 고이 묻은채 조용히 집안에 누워계시고있었다. 멀고 가파로운 가시밭길을 허이허이 달려온 늙은 암소마냥 깊은 숨을 톺으며 병석에 누워계셨다.

2

엄마는 퍼어런 피줄이 굴뱀처럼 끔틀끔틀 살아난 누르끼레하고 앙상한 손으로 알릴듯말듯 미약하게 온돌을 두드리셨다. 방금 밖에서 들어와 엄마의 곁에 앉아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엄마의 동정을 살피고있던 나는 엄마의 그 미세한 움직임마저도 놓지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곁에 한뼘 다가 앉아 엄마의 가냘픈 어깨를 다독였다.
“엄마, 무슨 할 말이 있수?”
엄마는 왼쪽으로 기울어진 입술을 힘들게 실룩거리며 분명 뭐라고 말씀을 하고 계셨다. 하지만 소리가 너무 낮아서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나는 몸을 한것 낮추어 엄마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너의 아버지, 지금 무어…엇 하고있니?”
들릴락말락 거칠고 미약하게 새여나오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지금 터밭에서 마늘밭 김을 잡고있수.”
“마늘밭 김을 잡아? 내가 이러고 누워있는데 마늘밭 김을 잡아?”
엄마의 미약한 목소리에는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그대로 새여나왔다. 나는 가슴속 밑자락에서 올리미는 슬픔을 가까스로 눅잕히며 촉촉한 눈길로 엄마를 내려다 보았다. 왼쪽 얼굴을 다 덮은 가제밑으로 고약한 냄새와 함께 시누런 고름이 질퍽하게 배여나와 있었다. 나는 엄마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수건을 들어 가제밑으로 흘러내리는 고름을 닦으며 엄마의 귀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자냥스럽게 말했다.
“엄마, 내가 나가서 아버지를 불러 올가?”
마는 천천히 머리를 저으셨다. 우멍하게 들어간 오른쪽 눈이 초점을 잃고 슴뻑거리고있었다. 엄마가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한마디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
“동이야, 엄마는 어쩜 이렇게 숨이차고 가슴이 갑갑해나니? 자꾸 무서운 생각도 드는구나. 어째서 이렇게 무서울가? 너의 아버지, 마늘밭을 몇고랑이나 맸더니? 후~ 그래, 마늘을 잘 자래워서 호-온-자 많이 먹으라구 그래라…”
엄마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말못할 서운함이 두툼히 깔려 있었다. 나는 뭔가를 하소연하는듯한 엄마의 얼굴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찢어지는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엄마는 눈을 감은채로 한동안 입술을 푸들푸들 떨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동이야, 너의 둘째형은 언제 온다니? 보고싶구나.”
엄마는 어제 오후 둘째형수와 함께 결혼잔치를 보러 아래마을에 가있는 둘째형을 찾으며 꾹 감고있던 눈을 간신히 뜨셨다. 완전히 풀려버린 엄마의 눈은 초점 없이 허공에서 구을고있었다.
“엄마, 그럼 내가 가서 둘째형을 불러올가?”
나는 엄마의 어깨를 흔들며 조용히 물었다. 엄마는 알릴듯말듯 머리를 그떡이는것으로 대답을 가름했다.
“엄마, 기다리우, 내 가서 제꺽 불러올게.”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마늘밭고랑을 타고있었다.
“아버지, 들어가서 엄마를 지켜줍소. 방금 엄마가 아버지를 찾습데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높게 소리쳤다. 아버지는 호미질을 멈추고 천천히 허리를 펴더니 주먹으로 옆구리를 툭툭치며 머리를 돌렸다.
“이 고랑만 다 매구 들어가겠다. 동이야, 넌 어디로 가려고 그러니.”
“둘째형 데리러 아래마을에 갔다 오겠습니다. 지금 정지칸에 엄마가 혼자 계시니 인츰 들어가서 지켜드립소.”
나는 재삼 아버지에게 이르고는 헛간에 들어가 자전거를 꺼내가지고 나왔다. 자전거에 올라앉아 페달을 돌리면서도 눈앞에는 엄마의 파리한 얼굴이 떠올라서 불안을 감출수 없었다. 아버지를 찾으며 서운해하던 그 모습이 내내 가슴에 맞혀왔다.
(무슨 뜻일가? 마늘을 잘 자래워서 혼자 많이 잡수시라는 엄마의 말씀은 그대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일가? 아니면 진정 마늘밭에 대한 근심을 아버지 땜에 덜게됐다는 안도의 말씀이실가?)
돌이켜보면 엄마의 일생에서 마늘밭은 정말 엄마와 떨어져서는 안될 소중한 재부였고 숙명 그자체였다. 엄마의 진한 마늘사랑 때문에 내 인생의 첫 추억도 마늘과 얽혀있었다.

3

아마도 내가 네살나던 해라고 생각된다. 그해의 겨울은 춥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할 놀이도, 놀이감도 없었던 시골애들에게는 그 추위가 별로 무서운것이 아니였다. 그 무렵 나는 둘째누나가 입던 꽃부리솜옷을 고쳐서 비둥비둥 껴입고 진종일 밖에 나가 막대기로 굴암퇘지를 똘구어가지고 다녔다. 어느날, 해가 서산에 떨어져서야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고나니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뒤잔등이 으슬으슬 추워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코까지 꽉 막혀서 여간만 답답한것이 아니였다. 나는 설걷이를 하는 엄마의 옆에 붙어 앉아서 코가 멘다고 칭얼거렸다.
“진종일 밖에서 돌더니 꼬불에 걸린게로구나.”
엄마가 근심스러운 어조로 말씀하면서 물기묻은 손을 행주에 대수 닦고 나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이런이런 이걸 어떡하지? 이마가 불덩이네. 그래그래. 동이야, 조금만 참아라. 엄마가 제꺽 약을 해서 붙혀줄게.”
엄마는 설걷이를 하다말고 일어나 헛칸으로 나가더니 큼직한 통마늘을 뜯어가지고 들어왔다. 엄마는 솜씨재게 마늘쪽을 잡아서 껍질을 벗겼다. 엄마는 껍질바른 마늘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일부는 납작납작하게 썰어놓고 일부는 칼등으로 두드려 찟찧어놓았다. 나는 그러는 엄마의 솜씨를 홀린듯 바라보기만했다. 마늘이 보드랍게 찧어지자 엄마는 서랍에서 가제를 찾아내더니 잘 찧겨진 마늘을 가제에 골고르 발라놓았다. 그리고는 가마에서 뜨거운 물을 퍼서 세수소래에 담았다. 엄마는 세 “동이야, 이리 오너라. 자, 이 무릎을 베구 반듯이 누워라.”
나는 기신기신 기여가 엄마의 무릎을 베고 반듯이 누웠다. 엄마는 뜨꺼운 물에 적신 세수수건으로 나의 이마를 깨끗이 닦아주셨다. 뜨끈뜨끈한 수건이 이마에 닿자 삽시에 머리가 훈훈해나면서 말못할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마를 다 닦고난 엄마는 마늘을 바른 가제를 나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아릿한 감각이 살짝 피부를 건드리며 간질간질 묘한 느낌이 생겨났다.
엄마는 이어 빨갛게 상기된 나의 볼을 손으로 살살 만져주더니 납작납작 썰어놓은 마늘을 주어 나의 코에 한잎한잎 밀어넣었다. 맵사시글 콕 쏘는 마늘냄새가 꾹 막혔던 코속을 파고 들어오는 순간 막혔던 코구멍이 뻥 뚤리는듯한 시원함을 느낄수있었다.
“엄마~ 통했수. 뻥 뚫렸수.”
내가 누운대로 손벽을 치며 환성을 올리자 엄마의 얼굴에는 시무룩하니 웃음발이 피여났다.
“봐라. 엄마의 손이 약손이라니. 마늘이 최고지, 명약이지.”
엄마는 흐믓해서 돌아앉아 설걷이를 계속하며 마늘자랑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있어서 마늘은 꼬불에만 효험이 있는게 아니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현행반혁명”으로 몰려 늘 묵직한 “개패”를 목에 걸고 나가 조리돌림을 당해야했다. 웃쪽에 검은 색으로 죄명을 쓰고 그 아래에 손바닥만큼씩이나 큰 글씨로 명함을 쓴 네모난 널판을 가는 쇠줄에 걸어서 만든 “개패”를 메고 서있노라면 어느새 가는 쇠줄이 목살을 먹어들어갔다. 시간이 가면서 아버지의 목에서는 시누런 피고름이 흐르기 시작했다. 긴긴 겨울밤 내내 개패를 목에 걸고 조리돌림을 당하고 나면 아버지는 완전히 녹초가 되여 집으로 들어왔다. 심신이 지친데다가 고름이 흐르는 목살로하여 아버지는 뼈를 깎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조리돌림을 당하며 욕을 보는 아버지를 함께 나가 지켜보면서 역시나 심신이 지쳐버리는 엄마였지만 날마다 먼저 따쓰한 물로 피고름이 흐르는 아버지의 목상처를 정성스럽게 닦아주고 그 우에다가 마늘을 찟찧어 가제에 싸서 부쳐주군했다. 금방 부치고나서 아버지는 매운 마늘즙이 상처자리를 치면서 아프다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래도 엄마는 마늘즙을 바른 가제를 상처자리에 지긋이 눌러주며 어린아이 달래듯 어르군했다.
“그래도 참으랑께, 마늘이 균을 죽인당께, 그래야 랠 나가서 또 개패를 메지그라이.”
마음이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바쁜 삶을 살면서도 엄마는 언제나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비법과 느긋한 아량으로 그렇게 현실을 헤쳐나가군 하셨다.
엄마는 아버지가 개패를 메고 조리돌림을 당하러 나가는 날이면 또 아버지의 호주머니에 깨끗이 껍질을 바른 마늘을 몇쪼각 넣어드렸다. 그때 마을 변소들을 돌며 인분을 쳐서 비료를 만드는 일을 하셨던 아버지의 몸에서는 일년내내 인분냄새가 지독히도 났었다. 냄새도 냄새려니와 공수도 8부밖에 받지 못하는 인분치기는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제일 천한 일이였다. 생산대에서는 현행반혁명으로 몰려 계급의 적으로 락인이 찍혀져있는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변소치는 일을 맡겼다. 백여호나 되는 집들의 변소를 혼자서는 칠수가 없기에 생산대에서는 지력이 차한 나그네 한사람을 아버지에게 조수로 부쳐주었다.
형들도 누나들도 아버지를 대신해서 억울해 야단이였지만 아버지만은 그런 태도가 아니였다. 생산대에서 아버지에게 개조를 할 좋은 기회를 주었으니 감사히 생각하고 정직하게 열심히 변소를 치겠다는것이였다. 아버지가 정말 직심으로 일을 한데서 어느 집에서도 변소가 넘친다는 고소가 없었다.
엄마는 인분냄새에 펴가 나빠 진다면서 가끔 마늘즙을 내서 아버지에게 대접했고 깨끗이 바른 마늘쪼각을 호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갈 때는 먼저 마늘을 두어쪼각 씹으라고 이르기도 했다. 그러면 몸에서 나는 인분냄새가 사라지고 마늘냄새가 난다는것이였다. 마늘냄새가 인분냄새보다 백번은 더 났다는게 엄마의 신조였었다.
엄마의 마늘덕분인지 아버지의 목살은 헤쳐졌다 아물고 또 헤쳐졌다 또 아물고 하면서 그 험한 문화대혁명이라는 동란의 년대를 용케도 견뎌오셨다.


4

이만치 엄마에게 있어서 마늘은 생활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엄마의 생활 구석구석에서 마늘은 언제나 엄마와 함께 하고있었다.
마늘이 잘 염글어 삭걷이를 하는 날은 일년중 엄마에게 제일 행복한 날로되였다. 이날이면 엄마는 새벽닭이 치기를 기다려 일어나서는 아침밥을 지어먹고 온 집식구들을 터밭으로 이끌었다. 엄마는 비자루로 퇴마루를 깨끗하게 쓸고는 식구들이 뽑아오는 마늘을 퇴마루에 곱게 널었다. 엄마는 마늘대가리가 벽쪽으로 가게 방향을 잡아 퇴마루가 넘쳐나게 마늘을 널어놓고는 무시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퇴마루를 바라보았다. 곰삭은 이영아래 하아얀 바람벽 발치에 잘 영근 마늘을 덮고 누운 퇴마루는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련상시켰다. 그리고 얼굴에 풍년의 희열을 그득 담고서서 행복의 미소를 날리는 엄마의 모습은 그 한폭의 풍경화를 더욱 싱그럽게 꾸며주었다.
이렇게 퇴마루에다 마늘을 사나흘쯤 건기드리고 난 다음 엄마는 제일 크고 잘 생긴 마늘을 골라서 종자마늘로 따로 남겼다. 종자마늘다래를 땋는 일은 엄마에게 신도들의 종교의식만침이나 정중한 행사로 자리잡고있었다.
엄마는 쌀뜨물에 정성들여 머리를 감은후 곱게 가리마를 내서 얹었다. 그후 깨끗하게 씻어서 다려놓은 옷을 꺼내 입으셨다. 다음은 공고리를 깨끗하게 닦은후 특별하게 골라남겼던 종자마늘을 내다가 타래를 땋아나갔다. 다 땋은 마늘타래는 추녀밑에 주렁주렁 걸어서 말렸다. 마늘삭걷이를 하고난 우리집 추녀밑은 언제나 종자마늘에 겨울나이마늘까지 해서 굵직굵직한 마늘타래들로 풍성해 보였다.
엄마는 마늘을 심는데도 자기만의 노하우가 따로 있었다. 엄마는 마늘밭고랑을 넓직하게 내고 갈지자로 촘촘하게 종자마늘을 주었다. 마늘싹이 무성하게 돋아나면서부터 엄마는 그것들을 쏙아 봄철 내내 입맛돋구는 반찬들을 만들어 상에 올렸다. 그렇게 뽑아서 먹느라면 어느새 마늘들은 보기좋게 거리들을 맞추어 나갔다. 엄마의 손에서 마늘은 신비한 도깨비방망이가 되여 눈깜짝할 사이에 맛나는 반찬으로 둔갑하군 했다.
제일 간단한 료리가 마늘싹무침이였다. 엄마는 촘촘하게 들어선 마늘싹중에서 여리고 먹음직스러운 마늘싹을 솎아 깨끗이 씼은후 마늘싹 길이 그대로에 간장을 듬뿍 두고 거기에 고추가루와 젠치가루를 뿌려 한 십분쯤 재워두었다. 그러면 마늘싹이 한풀 죽어지는데 그때 반찬으로 먹으면 사라졌던 밥맛도 금방 돌아섰다.
그때 우리는 깔깔한 옥수수가루를 반죽하여 가마굽에 부쳐서 구워낸 떡을 궈테라고 불렀다. 옥수수껍질이 떡떡 씹히는 궈테는 정말 그냥 넘기기 힘든 음식이였다. 엄마는 궈테를 부쳐낸후 칼로 사이를 자르고 그속에 간장에 재워낸 마늘싹무침을 한벌 깔아서 밥상에 올렸다. 매콤한 마늘싹이 입안에서 향긋한 봄기운을 피워주는 멋에 우리는 궈테도 별맛으로 먹을수가 있었다. 그런 궤터를 들고 친구들이 노는데로 찾아가면 저마다 한입만 한입만 하면서 나의 손에 눈독을 드리군하던 기억이 새롭다. 부러움에 찬 친구들의 눈길을 한몸으로 받으며 “한번 먹어볼래?”하고 시뚝해 하던 그 재미,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마늘싹을 넣은 궈테가 바로 그 시절 엄마만의 햄버거가 아니였을가?

5

엄마의 마늘료리는 마을에서도 유명하기로 정평이나 있었다. 엄마는 이점을 두고 은근히 기뻐하면서도 한면으로는 썩 달가와 하지 않았다.
문제는 아버지때문이였다.
아버지는 평소 무던히도 술을 반가와 하셨다. 그때 우리집은 한갑에 2전씩하는 성냥도 별러서야 사는 형편이라 아버지는 좀처럼 술을 사서 마시기가 조련치 않았다. 그 시절, 친척집에 마실을가거나 동네집 어른들의 환갑같은 군일이 있을 때면 한병에 1원씩하는 흰술을 한병 떠가지고가는것이 큰 부조가 되였다. 우리집은 친척도 많치 못하여 술을 떠가지고 찾아오는 손님이라해야 십여리 떨어져 사는 큰 매형이 고작이였다. 큰 매형이 간혹 공사마을로 볼일이있어서 왔다가는 흰술 한병에 개눈깔 사탕 한봉지를 들고 들어오면 아버지도 생신을 쇠는 기분이고 나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였다.
생각같아서는 그 흰술 한병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셔버렸으면 속이 후련하겠지만 아버지는 술이 아까와서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오래오래 두고 술충이 올라올 때 두어잔씩 마셔서 눌러야하기 때문이였다. 아버지는 3푼짜리 알각잔에다가 술을 따라서는 단목음에 쪽 마시고는 캬아~ 하고 맛있어 죽고싶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다음 마늘짠지 한쪼각을 집어 잘근잘근 씹어서 안주를 했다. 그렇게 석잔을 마시면 밥상이 끝났다. 두어시간 지나면 아버지는 또 식장문을 열고 술병을 내리웠다. 먼저 마개를 딴 술병을 코앞에 가져다 대고 크게 들숨을 들이쉬셨다. 병아구리를 따라 올라와서 그대로 아버지의 코속으로 숨어드는 술냄새를 맡으며 아버지의 얼굴에는 말못할 행복감이 어리셨다. 아버지는 술병에 엎어 씌웠던 3푼짜리 알각잔에다가 술을 따라서 또 단목음에 쪼옥~ 소리를 내며 마시고는 마늘짠지를 한쪼각 집어 입에 넣었다. 저녁후에 마시는 술은 딱 한잔, 아버지의 말씀을 빌면 술충을 누르기 위함이란다. 엄마는 그러는 아버지를 곱지않게 바라보시며 아버지 배에 있는 술충은 우물집 굴암돼지 보다도 더 크고 렴치 없을것이라고 했다. 해마다 새끼를 여라문마리씩이나 낳는 우물집 굴암돼지가 겨울이되면 늘 우리집 뒤울안에 와서 엄마가 애써 무져놓은 검불들을 주둥이로 쳐서 무너뜨려 엄마를 기분상하게 했던것이다. 그러건 말건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그렇게 아끼고 마시기를 좋아하셨다. 하기에 아버지는 괜찮은 술친구들도 몇이 되셨다. 범이네 아버지, 금자네 아버지, 성이네 아버지는 손아래 친구들이고 호일이네 아버지, 동세네 아버지같은 분들은 손우의 친구들이였다. 누가 청해서 미역쪼박에 소금알을 빨면서 다마톨이로 두어냥 마신 다음이면 아버지는 식장 아래칸에 고이 모셔둔 술이 몇냥쯤 있다고 자랑을 했다. 그렇게 자랑을 할수있을 때가 아버지에겐 제일 행복한 순간이였을것이다.
“안주가 없어서 그렇지 우리집에 가서 두어냥씩 더 하면 좋겠는데.”
아버지께서 이렇게 운을 떼시면 술친구들은 별 근심을 다 한다는듯 되려 쪽에서 손을 흔들었다.
“안주는 웬 안주여, 마늘 두어 쪼각이면 술 두대두박이라도 하겠구먼.”
이쯤 되면 아버지는 손사래를 하며 친구들에게 빨리빨리를 부르셨다. 초벌 다마톨이에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거칠어진 아버지와 친구들이 무작정 문을 열고 집에 덮치면 제일 무서운 사람이 엄마였을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싫은 내색 한번 못내시고 아버지의 술친구들을 맞아드렸다.
“빨랑빨랑 술상을 차리라이까.”
“안주가 마'잖아서 뭘 가지구 술상 볼가이.”
“갖추느라 마이소, 마늘이나 두어쪼각 올려놓으면 되지비.”
아버지의 술친구들은 웃목에 다리를 토시고 자리를 잡고앉았다. 이쯤 되면 엄마는 별수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술상을 보기 시작했다. 엄마는 헛간에 나가서 겨울나이마늘을 타래째로 벗겨들여왔다.
“마늘된장볶음”은 엄마가 손쉽게 올릴수있는 료리였다.
엄마는 먼저 솥에 물을 붓고 부엌에 내려가 불을 지폈다. 다음은 부엌아궁이에 나무를 집어넣으며 마늘껍질을 발랐다. 마늘을 한종지쯤 껍질바르고나면 솥에서 물이 끌어번졌다. 엄마는 껍질을 바른 마늘을 팔팔 끓는 물에 지긋이 데쳐냈다. 다음은 냄비에 기름을 약간 두르고 된장을 지글재글 닦다가 데친마늘을 넣어 돌려내면 구수한 된장냄새에 향긋한 마늘냄새가 섞여오르는 마늘된장볶음이 완성되였다.
“통마늘구이”도 엄마가 즐기는 료리의 한가지였다.
엄마는 먼저 잘 생긴 통마늘을 골라서 뿌리와 꼬리부분을 깨끗하게 잘라냈다. 다음 통마늘을 절반크기로 짐작을 해서 곱게 잘랐다. 잘라낸 마늘을 깨가루며 젠치가루며 소금가루며를 두루쳐서 만든 소스에 잠간 잠궜다가 채발살에 올려놓고 뽀질뽀질 마늘기름이 배여나올 때까지 연한 불에 구웠다. 그사이 양념소스가 마늘에 배여들어가서 마늘구이는 맵시그레하면서 고소한 맛을 뿜어올렸다.
잠간새에 만들어낸 마늘안주 두어가지에 김치나 된장찌개같은것을 곁들이면 제법 먹음직한 술상이 되여버렸다. 술친구들은 마늘안주칭찬에, 엄마의 작식솜씨 칭찬에, 세상사는 설음에, 세상사는 재미까지 두루 쳐서 안주를 하느라면 시간가는줄을 몰랐다. 대개 집집마다 사람들이 모실러와서야 술자리가 파해지군했다. 긴긴 겨울밤을 옆에서 말뚱한 정신으로 술안주에 끼이는 엄마의 표정이 고울리 없었다. 술친구들이 돌아간후이면 엄마는 아버지의 잠자리를 봐드리며 입속으로 웅걸거리셨다.
“귀신은 어디 가서 뭘 하구 있다니? 왜 저런 술고래들을 이승에 두고 잡아두 안가는데. 귀신할배도 술추렴에 세상이 녹두알이 되는가보다.”
그때면 아버지는 기분이 둥~ 떠서 손을 저으며 혀꼬부랑소리를 하셨다.
“내 밖에 나가서는 십년을 똥치개루 죽은듯이 살아두 집에서는 떵떵 소리나게 산다아이가, 이것들아.”
아버지는 맥이 진할 때까지 혼자서 웅얼웅얼 시설질을 하시다가 술기운이 빠져야 스르르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의 술버릇때문에 엄마는 무던히도 시집살이를 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아버지의 술친구들이 다시 오면 아무것도 술상에 안올린다며 벼르고있다가도 정작 그들이 집에 닥치면 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늘타래부터 찾으셨다.

6

하지만 우리식구들이 마늘도 마음놓고 먹지못하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1974년 봄이라고 생각된다.
어느날 밤, 나는 잠결에 두런두런 울리는 말소리를 들었다. 묵직한 눈까풀을 겨우 떼고보니 아버지와 엄마가 나란히 누워 까아만 어둠음 가르며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참, 세상이 뭐가 될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이? 시골에 살면서 터밭에다 남새도 맘대로 심어먹지못하면 어이 하는겨…”
“자본주의 꼬리를 자른다지 않는겨? 남남이 다 제멋대로 심어먹으면 나라건설에 수요된다는 담배랑은 어디다 심겠소?”
이어 “후~”하고 길게 내쉬는 아버지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가 픽 웃으며 격하게 한마디 했다.
“나라건설에 수요되는 담배가 백성들의 손바닥만한 터밭에서 나와야 한단 말인겨? 터밭에 마저 담배구, 아마구 하는걸 심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겨? 긴긴 겨울엔 뭘 먹구 일하는겨? 안됩니더. 우리 터밭엔 그래도 남새를 심어야 합니더.”
엄마의 목소리에는 예리한 날이 서서 번뜩이는듯싶었다.
“됐십니더. 잡시다.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가면 되겠구먼.”
아버지께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셨다. 엄마는 잠간 말이 없다가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부시럭 돌아누으며 한마디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말을 따라야 합니더. 우리 터밭엔 담배를 못 심씀니더.”
엄마는 당장 그 누구하고라도 대드리로 한판 붙어볼려는듯 흥분되여있었다. 아버지와 엄마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뭔가가 잘못되여 가는구나 하고 생각을 굴려보았다.
(무었때문에 터밭에다가 담배랑 아마만 심으라 할가? 그런것만 심으면 마늘은 어디에다 심을가? 마늘을 심을 자리가 없으면 우리는 마늘을 어디가서 얻어 먹을가?)
혼자생각에도 한심한 일 같았다. 마늘이 없는 우리집 밥상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튿날 아침에도 아버지와 엄마는 아침상을 받으면서 터밭 이야기를 나누셨다. 역시 엄마쪽에서 흥분한 상태였고 아버지는 “글쎄말입니더.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합시더.” 하고 애매모호만 대답만 하셨다. 엄마는 아버지의 그 태도가 몹시도 맘에 들지않는지 가끔 아니꼬운 눈길로 아버지를 훔쳐보았다.
차츰 사원들사이에서도 귀속말로 터밭을 두고 토론이 오갔다. 그것이 사실로 되면서 도마도는 몇포기 이상을 심어서는 안되고 땅꽈리는 또 몇포기를 초과해서는 안된다는 소문까지 돌아았다. 마늘은 한고랑을 넘겨서는 안된다고 규정을 했다는것이였다. 사원들은 내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지만 모여앉으면 서로 남들은 터밭에 무엇을 심으려는지를 탐문해보군했다.
청명절이 가까와 올수록 엄마는 더구나 안절부절 못하셨다. 마늘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청명날에 씨를 뿌려야 제격이라고 믿고있는 엄마였던것이다.
그날 밤에도 한잠을 푹 자고 깨여나보니 아버지와 엄마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회의에 갔다가 돌아온 모양이였다
“기어이 마늘을 한고랑만 심을라이까?”
“그리야지, 우에서 정식으로 내리먹이는것 같은데, 어이 할 방법이 없는게 아이가? ”
“그럼 올해 겨울은 뭘 먹구 살라꼬? 긴 겨울 하마 담배잎을 삶아먹구 살라는건 아이겠져?”
엄마의 목소리는 듣기 거북할정도로 퉁명스럽게 들려왔다.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의 탁한 말소리가 또 어둠을 갈랐다.
“넬이야 어이됐드이, 우리는 마늘을 심읍시데이. 긴긴 겨울나이도 생각해야제?”
“그러다가 웃사람들 눈에라도 나면 어이할라꼬?”
아버지의 목소리는 불안에 떨리고있었다. 엄마는 더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청명날 아침, 엄마는 일찌기 일어나 아침을 짓고 쌀뜨물에 곱게 머리를 감아 얹었다. 씻어서 다려 농짝안에 넣어두었던 하아얀 적삼을 꺼내 입으셨다. 엄마는 전날 물에 퍼지웠던 종자마늘을 조리로 퍼서 큼직한 소래에 담아 이고 터밭으로 나가셨다. 온 아침을 불안스러운 모습으로 엄마를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창문에 붙어서서 터마전으로 나가는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기어코 마늘을 심을라능기요?”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종자마늘을 담은 크소래를 터밭머리에 내리워 놓고는 호미를 들고 깊숙히 쳐놓은 밭고랑을 타고 앉으셨다. 엄마는 호미로 구멍을 뚜지고는 마늘종자를 떨구어넣었다. 머리를 푹 수그리고 부지런히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엄마의 모습은 마치도 움직이는 작은 바위를 방불케했다.
아버지는 오전 내내 창문에 붙어서서 마늘을 심는 엄마를 바라볼뿐 좀처럼 밭에 나올 엄두를 못내고있었다.
엄마는 오전나절에 마늘 여덟고랑을 심으셨다. 전에 비해 두고랑이 적었다. 엄마는 머리에 쓰고있던 채깝수건을 풀어내려 이마를 닦으며 흐믓한 눈길로 마늘을 심은 밭고랑을 바라보고 계셨다.
마늘은 검푸르게 독을 쓰며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엄마는 마늘싹이 한뼘쯤 될 때부터 솎아다가는 마늘싹무침도 하고 마늘싹을 버무려 옥수가루 지짐도 부쳤다. 시걱 때마다 마늘싹으로 만든 반찬을 상에 올리는 엄마의 얼굴이 차츰 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마늘을 여덟고랑이나 심었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엄마는 그냥 무사히 이 봄을 넘기는구나 하고 시름을 놓는 표정이셨다.
나는 엄마의 덕분에 상에 오르는 마늘반찬을 맛나게 먹으면서 엄마에게 참으로 믿음이 갔고 다시 한번 엄마가 든든한 바위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끝내 터지고야 말았다.
어느날, 엄마가 오전 일을 끝내고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마늘고랑을 타고서서 한창 독이오르는 마늘을 뽑고있었다.
“여보소, 미쳤수?>.
엄마가 터밭으로 뛰여들어가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아버지가 우뜰 놀라며 머리를 돌렸다. 타는듯한 엄마의 얼굴에서 퍼런 피줄이 꿈틀거리는 이마가 유표하게 안겨왔다. 아버지는 엄마의 성난 얼굴을 볼 자신이 없는듯 머리를 돌려버렸다. 대신 풋마늘을 뽑는 아버지의 행동이 보다 거칠어졌다.
“여보소, 그만하라이까, 왜 이럭하는데이?”
엄마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푹 잦아든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게 울렸다.
“오전에 생산대에 불리워갔었당께. 우에서 인차 검사를 내려온다는게우. 마늘을 뽑아버리지 않으면 자본주의 꼬리로 쳐서 베여버리겠다고 하더랑께.”
엄마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씽하니 달려가 아버지를 밀치며 단말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그럭하이, 싱싱하니 자라나는 마늘을 뽑아버리우. 하늘이 굽어보지, 하늘이 굽어봐유!”
“이아낙이 집을 말아 먹을려고 작정을 했는가보이. 애들도 펑펑 커가는데 누구에게 해 될락고 기어이 이까짓 마늘을 안고 살겠다는기여.”
조금 떨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차츰 제자리를 잡아갔다. 엄마에게 양보를 하지못하겠다는 시위 같았다. 어쩜 집을 지키고 자식들을 지키려는 아버지식의 자아방위가 아니였는지 모른다. 현행반혁명으로 몰리워 갖은 박해를 받으며 인분차를 끌고 마을의 변소를 치면서 터특해낸 아버지만의 인생철학이 아닌지도 모른다.
엄마도 녹녹히 물러설 태세가 아니였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당신은 상관 마이소. 내가 안을랍니더. 내가 안아여.”
엄마는 아버지를 마늘밭고랑에서 밀어내려고 빡빡 힘을 썼다. 아버지는 잠간 그러는 엄마를 쏘아보다가 팔을 휘둘러 저쪽으로 확 밀쳐버렸다. 엄마는 너무나도 볼품없이 나동댕이쳐졌다. 아버지는 일어나려고 허우적거리는 엄마를 피끗 훔쳐보고는 무엇이고 발기발기 찢어버리기라도 하려는듯 잡히는 대로 마늘잎을 잡아챘다. 마늘잎들은 중등이가 뜯기우기도 하고 뿌리채 뽑혀나오기도 했다. 그러는 아버지를 넋없이 바라보던 엄마는 홀연 땅을 치며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는 그렇게도 슬프게 터밭을 울렸다. 아버지의 손에 중등 잘려 뽑혀진대로 나뒹구는 마늘잎들도 엄마의 울음소리에 파르르 떠는듯싶었다.
그날 저녁, 엄마는 저녁을 드시지 않고 골방에 들어가 누으셨다. 둘째누나가 저녁을 차려서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 앉았다. 엄마가 없는 밥상은 초상집 밥상처럼 청승스러웠다. 밥상을 앞에 놓고 멀거니 내려다 보던 아버지가 신경질적으로 호령했다.
“동이야, 가서 술이나 받아와라.”
아버지가 바지호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 접은 일원짜리 돈 한장을 꺼내주면서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무서워 두말없이 튕겨일어나 술병사리를 찾아들었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만 꾸역꾸역 내쉬며 혼자서 랭수마시듯 벌컥벌컥 술을 마셔댔다. 그 모습에서 나는 3푼짜리 알각잔에 술을 따라 쪽~ 마시고는 캬~악 소리를 내며 짭짭 혀끝을 빨던 아버지의 모습이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스러워 보였던지를 새삼스럽게 느꼈다.련속 몇목음이나 마셨던지 아버지는 술병을 밥상우에 내리워 놓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웅크리고 앉아서 멀거니 밥상우를 내려다보셨다. 밥상우에는 마늘싹무침이며 묵은 마늘장아찌며 마늘을 듬뿍 넣어 담근 무우김치며가 옥수수가루 궈테와 함께 올라있었다. 아침에 엄마가 만들어 놓은 음식들이였다. 이 음식을 만들 때만 해도 엄마의 얼굴은 활짝 피여있었다. 터밭에서 푸릇푸릇 커가는 마늘싹들을 보면서 그 누구와의 내기에서 이겼구나 하는 그런 긍지가 피여있었다. 하지만 짧디짧은 하루해를 보내고 엄마는 락태한 고양이마냥 패배의 아픔을 누르며 상심하신채 골방에 누워계셨다. 그 싸움이 아버지와의 싸움이였을가? 아니면 마늘 한고랑도 맘대로 심어먹지 못하게 하던 그 세월과의 싸움이였을가?
언제나 엄마와의 겨룸에서 패자를 충당하던 아버지였지만 골방에서 오열을 토하는 엄마를 보면서 도무지 승자의 희열을 느낄수 없는 모양이셨다. 아버지가 별안간 저가락을 탕하고 밥상우에 내리워놓았다. 우리는 깜짝 놀라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이… 이! 못 살 세상같으니라구.”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밥상을 들어서 바당에 활 팽개쳐버렸다. 짤라당하는 소리가 어지러이 나면서 사발이며 종지며 접시들이 사처로 튕겨나갔다. 마늘싹무침이며 묵은 마늘장아찌며 마늘을 듬뿍 넣어 담근 무우김치며 옥수수가루로 만든 궈테며가 바당에 산산히 뿌려졌다.
“아부지, 왜 이러능기요?”
둘째누나가 바락바락 소리쳤다. 아버지는 술병을 들고 바당에 내려섰다.
“왜 이러능기요? 일년마늘을 다 잡아먹더니 미쳤능기요? 미쳤다이가. ”
골방에 누웠던 엄마가 시설질을 하며 뛰여나와 아버지의 손에서 술병을 앗아내려고 달려들었다.
“노라이까. 이걸 노라이까”
아버지가 술병을 가슴으로 움켜 안으며 카랑카랑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한손으로 아버지의 팔을 부여잡고 다른 한손으로 아버지가 품고있는 술병을 낚으려고 허우적거렸다. 둘째누나가 달려들어 끝내 아버지의 손에서 술병을 앗아냈다. 아버지는 누구에게라 없이 삿대질을 하며 “이것들이. 이것들이…”하고 외곬을 톱다가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 엄마는 비틀비틀 멀어져가는 아버지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다리를 후둘후둘 떨었다. 갑자기 엄마가 그 자리에 무너지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였다. 아무 말도 못하시고 꺼이꺼이 울음을 집어삼켰다. 그때 엄마는 바위가 아니였다. 설음에, 공포에, 분노에 몸을 옹송그리고 흐느끼는 엄마는 분명 가냘픈 녀인네였다. 한참이나 오열을 토하고 나서야 엄마는 찔끔찔끔 눈굽을 찍으며 일어나 어지러진 바당을 거두기 시작했다. 바당에 널려진 묵은 마늘장아찌와 옥수수궈테는 주어서 사발에 담았다. 그 와중에도 묵은 마늘장아찌와 옥수수궈테는 씻어서 다시 먹으려고 생각을 하시는 모양이였다. 나머지 것들을 비자루로 쓸어서 쓰레바끼에 담으면서 엄마는 련속 쯧쯧쯧 하고 혀를 찼다.

7

그날 너무도 흥분을 하셨던 탓인지 엄마의 눈병은 또 발작했다. 무시로 왼쪽눈이 아파 나고 밤을 자고 나면 눈으로도 보아낼수있을 만침이나 뽀두라지가 커져있었다.
엄마의 눈병을 말하자면 그때부로부터 6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엄마는 나를 낳아서 1년반이 푼히 지난후 또 임신을 하게 되였다. 이미 나까지 자식 여덟을 낳아서 셋을 먼저 보내고 다섯을 키우고있던 엄마는 정말 더는 자식을 낳아 자래울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였다. 마침 그때 임신중절수술이라는것이 갓 보급되던 때라 엄마는 임신중절수술을 결심했다. 수술은 우리 마을에서 20여리떨어진 투도라는 진병원에 가야 할수있었다.
어느날 엄마는 드디여 수술길에 올랐다.
엄마가 임신중절수술을 끝냈을 때는 점심시간도 훨씬 지난후였다. 병원복도에 한시간가량 앉아서 아침에 가지고간 주먹밥으로 점심을 대충 에때운 엄마는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귀로에 올랐다. 찌물쿠는 삼복날씨에 방금 임신중절수술을 한 몸으로 걸음을 옮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5리가량을 걸어서 룡평에 도착하니 목에서 겨불내가 나고 다리가 천근같이 무거워 더는 걸음을 옮길수가 없었다. 엄마는 잠간 쉬기로 작심하고 룡평교밑으로 내려갔다. 그때까지 개울물은 크게 오염이 되지 않고있어서 길손들은 목이 마르면 그냥 흐르는 물을 한웅큼 퍼서 마시는것이 습관이였다. 엄마는 쪼크리고 앉아 손바가지로 개울물을 푸려고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 순간 엄마는 눈앞이 캄캄해나며 눈두덩이가 무엇에 찔리우는듯한 통통을 느꼈다. 그렇게 몇초가 흘러서 눈앞이 다시 밝아졌지만 왼쪽 눈두덩이에서 오는 쿡쿡 쏘는듯한 통증은 돌아오는 길에서 내내 가끔씩 느껴지군했다.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엄마는 왼쪽눈이 너무도 깔깔하고 아파서 거울앞에 다가섰다. 왼쪽 눈두덩이에 좁쌀알만한 뽀두라지가 튀여나와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다래끼가 났는가?)
엄마는 이정도로 가볍게 생각을 하며 아침을 짓기시작했다. 하도 바쁜 세월이라 엄마는 후에도 가끔 눈으로부터 오는 통증과 불편함을 느꼈지만 언제 특별히 그것을 챙길사이가 없었다.
보통 다래끼로 알고있던 그 뽀두라지는 없어지지 않고 피곤하거나 몹시 흥분을 하고 난 후이면 거짓말같이 커지군했다. 그로부터 3년후인가 투도에서 의사로 있는 외가편6촌형이 우리집에 왔다가 엄마의 눈을 보고 그저 일 같지 않다면서 전면검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엄마는 그해 겨울 돼지를 판 돈을 손에 들고 연길로 내려가 전면검사를 했다. 의사들은 딱히 이거다 하고 진단은 없었지만 세포조직으로 봐서 저절로 없어질 가능성이 없다면서 수술을 권고했다. 그때 엄마의 눈에 난 뽀두라지는 이미 열콩알보다도 더 큰 혹으로 번져있었다.
엄마는 수술후 일주일가량 입원해있다가 돌아오셨다. 네모꼴 안대로 왼눈을 가리운 엄마는 그때 나에게 무척이나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수술을 하고나면 금방 나을것 같던 엄마의 눈은 수술후 한달이 지나자 또 그 자리에 뽀두라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역시 전에처럼 피곤하거나 몹씨 흥분을 하고난 후이면 커졌는데 그 속도가 더 빨라졌다. 생산대에서는 엄마의 정황을 고려하여 엄마에게 생산대 탁아소에서 아기들을 돌보는 일을 맡겨주었다. 엄마는 생산대의 관심이 감사하다면서 열심히도 일에 충성을 하셨다. 눈에 난 뽀두라지도 더 커지는 눈치가 없었다. 엄마도, 식구들도 그 뽀두라지가 그냥 이 정도로 자리를 잡으려는가부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청명날 마늘밭사건으로 하여 엄마의 눈에 난 뽀두라지가 또 작간을 부리기 시작한것이였다.
엄마는 눈으로부터 오는 통증을 느낄 때마다 마늘을 찟개여 가제에 발라서는 뽀두라지가 난 눈두덩이에 부치군 했다. 엄마의 느낌 때문이였던지 아니면 정말 마늘이 림시구급효과가 있어서였던지 그렇게 마늘즙을 바른 가제를 눈두덩이에 부치고나면 뽀두리지 부위의 열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통증도 서서히 없어지군 했다. 하지만 뽀두라지가 작아지는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온집식구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엄마의 눈에 난 뽀두라지를 살피고있었다. 엄마도 무던히나 열심히 마늘치료를 견지했다.

8

생산대의 검사 때문에 마늘을 한고랑밖에 살리지못한데서 그해 마늘은 약처럼 귀했다. 종자마늘을 남기고 나니 그해 김장마늘도 부족한 형편이였다. 엄마는 가끔 헛간에 들어가서 몇줄밖에 안되는 마늘다래를 멀거니 바라보며 한참씩 서있기도 했다.
엄마는 마늘관리를 알뜰하게도 하셨다. 전에 마늘이 많을 때는 가끔 통마늘을 뜯어다가 화로불에 구워서 호호 불어 식히며 군입질도 했지만 그해는 웬간해서 그런 호사를 못하게 막았다. 애들의 마음이란 그런것인지 엄마가 막을수록 마늘의 매력은 점점 더 유혹적이였다.
그날 오후, 엄마가 일을 나간후 룡이랑 상호랑 우리집에 놀러왔었다. 우리는 화로불을 사이에 놓고 앉아 호랑이 담배피울 적의 이야기며 여우가 닭사냥을 나갔던 이야기며를 한컬레씩 해나갔다. 그러면서 상호가 호주머니에 넣어가지온 옥수수를 화로불에 넣어서 튀겨먹기도 했다. 어쩌다가 마늘꼬치에 대한 말이 나오게되였다. 마늘꼬치라면 내가 그래도 전문가나 다름 없었다. 나는 애들에게 손을 저으며 마늘꼬치가 여차여차하게 맛있다고 구구이 자랑을 늘여놓았다. 아니나다를가 친구들이 화로불에 마늘꼬치를 해먹자고 나를 꼬드꼈다. 나는 우쭐우쭐 헛간으로 나가서 잘 염근 통마늘과 낡은 자전거살을 가지고 들어왔다. 나는 엄마가 하던대로 통마늘을 터뜨려 쪼각을 뜬후 겉껍질을 발라버리고 깨끗해진 마늘쪽을 낡은 자전거살에 쭉 꿨다. 그렇게 꿴 마늘꼬치를 이글이글 타는 화로불 우에 올려놓고 돌렸다. 잠간 지나자 마늘에서는 뽀지직뽀지직 노르스름한 기름이 돋아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군침을 삼키며 가므스름하게 타들어가는 마늘을 뚫어지라 지켜보았다. 우리는 잘 구워진 마늘쪼각을 자전거살에서 빼내여 껍질을 바른후 참깨가루와 가루소금을 섞어 만든 소스에 찍어 맛나게 먹었다. 마늘꼬치도 맛있고 마늘꼬치와 함께 엮어가는 옛말도 재미났다. 그리고 재미나는 옛말과 함께 흐르는 시간들도 그렇게 즐거울수가 없었다.
어느새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드디여 엄마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셨다. 온집안에 가득찬 연기며 구들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마늘껍질을 보아낸 엄마는 너무도 억이막혀서인지 한동안 말없이 멍하니 서있었다. 엄마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져 가고있었다. 순간 큰일을 쳤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나의 머리를 쳤다. 친구들도 엄마의 표정이 무서운지 기신기신 기여일어나서 자기의 신을 찾아신고 몸을 뺐다. 나도 엄마의 불호령이 터지기전에 친구들을 따라 집을 나와버렸다. 상호를 따라 상호네 집으로 간 나는 저녁 때가 되여도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못했다. 상호의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권해도 도리머리만 하면서 상호네 웃방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엄마가 어떻게 아셨던지 나를 데리러 상호네 집으로 오셨다. 엄마의 뒤를 따라 집으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나는 정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심정이였다.
“마늘꼬치가 그렇게 먹고싶데?”
엄마가 한마디하셨다. 나는 불시에 설음과 무서움이 머리를 쳐서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얘가 왜 이러니? 엄마가 어디 욕이라도 했데이?”
엄마가 부드럽게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엄마의 손이 무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 나는 엄마의 그 따뜻한 손이 외려 나를 엄청 두드려 준다면 속이 더 시원할것만 같았다.
그날 엄마는 한마디도 나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말없은 엄마의 그날 모습에서 나는 반성이란 무엇인가를 배운것 같다.
그후에도 밥상에서 마늘반찬을 보기가 어려웠다. 엄마는 혹시 손님이 오거나 아버지의 술친구들이 닥쳐야 마늘반찬 두어가지를 상에 올리군했다. 마늘을 매일같이 먹을 때는 사실 마늘반찬이 질린적도 있었지만 정작 맘대로 먹을수가 없으니 마늘비위가 은근히 나는것을 참을수가 없었다. 그런 느낌은 나만이 아닌듯 싶었다. 마늘반찬에 대한 유혹은 둘째누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밤, 나는 웃방에 앉아 옛말을 해달라고 둘째누나를 졸랐다. 둘째누나는 정지칸을 내려다보더니 얼굴에 묘한 웃음을 띄우며 나를 당겨 앉혔다. 둘째누나는 나의 귀가에 입을 대고 소곤소곤 말했다.
“동이야, 너 헛간에 나가서 마늘을 뜯어오너라. 마늘구이를 해먹으며 옛말을 해줄게.”
며칠전의 일이 생각히워서 나는 도리머리를 했다. 그러자 둘째누나가 한술 떴다.
“괜찮다. 엄마가 뭐락하면 누나가 막아줄게.”
“정말이제?”
“그래 정말이지!”
둘째누나가 확실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엄마 몰래 바같문으로 해서 헛간으로 들어갔다. 손더듬으로 스위치를 찾아 켜고 마늘타래를 걸어놓은 동쪽벽에 붙어섰다. 나의 키로는 까치발을 해도 손이 마늘타래에 닿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살피다가 벽구석에 세워놓은 네모난 나무판대기를 발견했다. 나는 나무판대기를 마늘타래 밑에 있는 작은 오지독 우에 올려놓고 딛고 올라섰다. 손은 마늘타래 중간쯤까지 뻗을수가 있었다. 한손으로 통마늘을 당기니 잘 뽑히지가 않았다. 나는 까치발을 하며 두손으로 통마늘을 당겨뽑았다. 까치발을 하고 웃몸에 힘을 너무 많이 준 탓인지 몸이 균형을 잃으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마늘타래를 더욱 힘스레 당겼다. 오지독이 넘이지면서 나는 오지독우에서 떨어졌고 그때까지 잡고있던 마늘타래도 따라 떨어졌다. 마늘타래가 풀리며 통마늘이 사처에 흩어져버렸다. 오지독안에 있던 마늘장아찌도 쏟아지고 간장도 흘러서 바닥을 적셨다. 넘이지면서 어디에 박혔던지 이마가 빠개지는듯 아팠다. 벌컥하고 문이 열리더니 엄마가 헛간으로 달려들어오셨다. 헛간안의 살풍경에 너무도 억이막혀서인지 엄마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말 한마디 없으셨다. 나는 그러는 엄마가 무서워 바들바들 떨었다. 그제야 엄마는 달려와 나를 안으며 손으로 이마를 만져주었다. 이마에는 어느새 아기주먹 만침이나 큰 혹이 생겨났었다.
“왜 이럭하니? 왜?”
엄마는 나의 이마에 난 혹을 문다지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에게 따지셨다. 나는 엄마의 가슴을 파고들며 개미소리만치나 낮게 떠듬거렸다.
“엄마, 다…다신 아…안 그럴게, 잘못했수.”
엄마는 무서움에 떠는 나를 품으로 꼭 당겨 안아주셨다. 나는 엄마의 품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엄마의 젖가슴을 뚫고 토닥토닥 세차게 높뛰는 엄마의 심장소리가 나의 귀속을 파고 들었다. 어쩐지 코끝이 시큼해나며 와~ 하고 울음이 터졌다. 엄마는 꼭 안았던 나를 품에서 밀어내며 유심히 나의 얼굴을 살피더니 쯧쯧쯧 혀를 찼다.
엄마는 오지독을 일켜세우다가 오지독 옆에 있는 네모난 널판자를 발견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엄마는 널판자를 주워들어 보다가 별안간 그 널판자를 바닥에 메쳐버렸다. 엄마는 벽구석에 세워놓은 도끼를 찾아서 그 널판자를 패기시작했다. 널판자는 삽시에 두 동각이 나고 네 동각이 났다. 엄마는 여러 동각이난 널판자들을 주어서 부엌에 가져다 던져버렸다.
(저 널판자가 무엇이기에 엄마가 저렇게도 격분해서 도끼로 패버리는것일가?)
나는 못내 알고싶었다. 나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웃방으로 올라갔다. 둘째누나는 진작 무서워서 이불을 쓰고 자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나는 둘째누나에게 방금 사연을 말하면서 그 널판자에 대해 물었다. 무척이나 궁금하던지 슬그머니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온 둘째누나가 나에게 조용히 알려주었다. 그 널판자가 바로 아버지가 조리돌림을 당할 때 목에 메고 다니던 개패라는것이였다.
아버지의 목을 지지리도 무섭게 누르던 개패는 이틀날 아침 엄마에 의해 부엌으로 들어가 활활 타버렸다. 빠알간 재로 내려 앉는 개패를 보면서 엄마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셨을가?
오늘까지도 나는 내내 그것이 궁금해진다.

9

그후에도 엄마의 눈에 난 뽀두라지는 검푸르게 독을 쓰며 날마다 더 커졌다. 마늘즙을 말라도 더는 열이 내리지 않았고 통증도 가셔질줄 몰랐다.
자본주의 꼬리를 자르노라고 온 나라가 악마구리 끓듯 끓어 번지던 그 해의 겨울은 몹시도 길고 추웠다.
이듬해 봄, 엄마는 큰형님과 함께 연길병원으로 눈을 검사하러 갔다. 병원에서는 또 수술을 권장했다.
힘든 수술을 거쳤지만 한달쯤 지나자 엄마의 눈두덩이에는 또 뽀두라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번 보다 커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내가 아홉살 나던 해의 봄, 세번째 수술을 할 때는 병근원을 뽑아버려야 한다면서 완전히 눈까풀을 제게해버렸다. 하지만 밉살스러운 그 뽀두라지는 엄마의 왼쪽 눈귀에 뿌리를 박고 또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렇게 다섯번이나 대형수술을 하면서 나중에는 눈알까지 도려냈지만 그 악착스러운 뽀두라지는 여전히 머리를 쳐들군했다.
나중에 엄마는 다시 수술을 하지않겠다고 나누웠고 식구들도 번마다 수술을 마치고는 또 다시 절망에 빠지는 엄마를 보기가 괴로와서 더는 수술을 권장하지 못했다.
아픈 눈때문에 그렇게도 심신의 고통을 'M으면서도 엄마는 봄만되면 명심해서 마늘밭을 가꾸셨다. 행운스럽게도 그 이듬해부터 생산대에서는 터밭에 대한 공제를 더는 하지 않아서 엄마는 엄마대로 마음껐 마늘을 심을수가 있었다. 엄마의 마늘밭이 해를 거듭하며 마늘을 생산해내듯이 우리집에도 해를 이어 많은 변화가 생겼다.
1976년 10월에 “4인무리”가 분쇄된후, 옹근 10년이나 남의 집 변소치기를 하면서 최하층으로 살아오신 아버지도 “현행반혁명”이라는 모자를 벗고 변소치기에서 해탈되여 집에서 잡일들을 보시며 만년을 보내게 되였다. 하지만 동란의 그 년대에 받은 심신의 상처때문인지 아버지는 모든 일에 소극적이셨고 언제나 시비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명철보신을 하셨다.
그 몇해사이 형님 두분이 다 장가를 들고 둘째누나도 시집을 갔다. 형님들이 춰서면서 가정살림도 많이 펴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마늘 말고도 간소하게 나마 밥상을 둥글게 꾸밀수가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봄이오면 숙명처럼 마늘심기에 집착을 보이셨다.
1981년 봄에 들어서면서 엄마의 다른 한쪽 눈마저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엄마는 기력도 날로 못해지면서 바같출입도 하기 무서워했다. 하루 대부분 구들장을 등지고 누워서 앓음소리를 내시던 엄마가 청명이 가까와 오자 기적처럼 일어나 아버지를 보고 마늘밭고랑을 짓지 않으신다고 푸념을 했다.
“여보, 터밭을 엎어야제? 오라잖아 청명인데 마늘밭고랑을 잡아야제.”
그날 엄마는 창문밑으로 가새다리를 하고 누워 담배를 껌벅껌벅 태우시는 아버지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며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여전히 뻐끔뻐끔 담배만 태울뿐 가타부타 대답이 없으셨다.
“령감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궁리가 없구서야, 마늘은 청명날에 심어야 제격이랑께. 올해도 내가 나가서 마늘밭고랑을 지어야 하나보네…”
아버지 옆에 다달은 엄마는 뼈만 앙상하니 남은 까슬까슬한 손으로 아버지를 흔들며 힘겹게 숨을 톺았다. 그제야 아버지는 누운채로 담배를 재털이에 부벼끄며 마땅치 않다는듯 중얼거렸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을라고 그러나? 아픈 사람이 곱게 앓아야제, 괜히 참견은 뭔 놈의 참견이 이렇게 많노?”
“내사 참견하고 싶어서 참견하끄마? 말 안하믄 리태백이 갑수청산 구경하는 꼴이 돼서 그래제이. 어느 해, 내손 안바라고 마늘을 심었데이?”
“알았다. 알았다 아이가.”
아버지는 등에 졌던 구들장을 털어버리고 일어나 주섬주섬 신발을 찾아신었다. 아버지께서 터밭으로 나가시자 엄마는 후둘후둘 떨리는 다리를 끌며 기어이 밭머리에 따라나가 아버지께서 밭고랑을 일구는것을 구경하셨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밭고랑은 좀 더 넓게 잡아야하고 고랑깊이도 반뼘은 더 내려가야한다고 지휘를 하셨다. 아버지는 그러는 엄마를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흘겨보셨다. 하면서도 수걱수걱 엄마의 지휘에 따라 삽날을 깊숙히 박아서 넓적넓적 밭고랑을 잡아나갔다. 그러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엄마는 얼굴에 그렇듯 행복한 미소를 띄우셨다.
“저 엄마를 좀 보오. 어쩜 마늘밭에 저렇게 집착을 할가?”
마늘타래에서 통마늘을 뜯어내여 쪽을 잡으며 큰 형수가 넌지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 아무래도 엄마는 한생에 마늘하구 떨어져서 못살 명인가 보지무.”
나는 큰 형수의 말을 받으며 시무룩히 웃었다.
엄마의 병이 위태로와 질수록 아버지는 명심해서 마늘밭을 돌보셨다. 어쩜 병으로 신음하는 엄마를 보면서 그 동안 엄마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못했던 자신을 후회하는지 그해 봄 마늘밭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은 집착에 가까우리 만침 강했다. 엄마는 간혹 자리에서 힘들게 일어나서는 창문턱을 집고 서서 아버지를 멀거니 바라보군했다.
부지런한 지렁이마냥 묵묵히 마늘밭을 손질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엄마는 가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오른쪽 눈을 슴뻑거리기도 했다. 그때면 우멍하게 패여들어간 엄마의 눈에서 맑은 이슬이 맺쳐 반짝이였다…

10

1981년 5월 2일.
그날 오후 한시가 다 되여서야 나는 둘째형과 형수를 불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엄마는 이미 운명을 하신 후였다. 엄마의 시신은 웃방에 모셔져있었고 시신에는 엄마가 평소에 쓰던 이불이 덮여져있었다. 거짓말같이 싸늘한 시신이 되여 누워있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울음좇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자는듯 눈을 꼭 감고있는 엄마의 검푸른 얼굴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나는 그 시각52세라는 너무도 짧은 인생을 험악하고 힘들게 살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계시는 엄마의 령혼을 찾아 어디론가 달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고있었다.
1929년 윤 2월 19일, 장인이라고 하는 작은 산골마을에서 전주최씨로 태여나신 엄마는 최신옥이라는 자신의 이름보다도 누구네 딸냄이, 누구의 엄마로 더 많이 불려지면서 자신의 진정한 삶은 잊은채 험난한 인생을 허이허이 달려오셨다.
엄마의 시신은 농촌의 풍습대로 3일장을 했다. 장성덕에다가 엄마의 시신을 묻고 오던날 저녁, 큰형수는 밥상을 앞에 두고 엄마를 기리며 또 찔끔찔끔 눈굽을 찍으셨다.
그날 내가 둘째형님을 데리러 간 후에도 엄마는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 큰형수가 엄마께 아버지가 마늘밭을 손질하고 계신다며 불러오라는가고 묻자 엄마는 힘없이 도리머리를 하더니 스르르 마지막 눈을 감더라는것이였다.
“그날 엄마가 나에게 아버질 보구 마늘을 잘 자래워 혼자 많이 자시라고 합디다.”
나는 끝내 입안에 맴돌던 말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어쩜 살아계시는 아버지에게 한생 못이되여 가슴에 박힐것 같아서 차마 이 말만은 하지말자고 그렇게 자신을 단속했건만 림종을 하던날, 엄마의 서운해하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며 나는 아버지에게 이 말을 털어놓지 않으면 안될것 같은 일종의 의무감 비슷한 충동을 느끼고있었다.
형님들도 형수들도 머리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때까지 모색하리만침 눈물을 아끼시던 아버지께서 머리를 돌리며 억 하고 소리를 꺾으셨다. 주먹같은 눈물이 아버지의 두눈에서 주르르 굴러떨어져 내렸다.
“마지막 길까지도 그렇게 맘속에 옹이를 박아가지고 갔구나. 마늘밭이 뭐기에… 내가 마지막 길에 곁을 서주어야 하는건데…”
아버지는 주먹으로 구들을 탕탕 내리치며 황소처럼 꺼이꺼이 울음을 터치셨다. 아버지의 얼굴은 고통으로 하여 무섭게 일그러지고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엄마가 없는 집안에서 창문을 뚫고 새여 들어오는 별들을 바라보며 나는 가끔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마늘냄새를 맞는듯한 환각을 느낀적이 있다.
그때면 엄마의 마늘밭이 파아란 주단처럼 눈앞에 펼쳐지군 했다. 엄마는 여전히 혼자 마늘밭고랑을 타고서서 김을 매고 계셨다. 김을 매는 엄마의 얼굴에서는 늘 말못할 쓸쓸함이 새여나오는듯싶었다.
이듬해 1월 3일, 바람 세차고 무지도 춥던 그날 밤에 아버지는 간경화복수로 60세의 험난한 일생을 마치셨다.
어쩜 저승에 가서라도 두분이 다시 만나 오손도손 마늘밭을 가꾸며 이승에서 채 못나누신 사랑도 진하게 한번 나누어 보고 이승에서 누려보지 못한 호강도 맘껏 누렸으면 하고 그렇게 간절히 빌고 빌건만 엄마는 여전히 혼자 꿈길에 나타나시여 숙명처럼 마늘밭을 가꾸고있다.
“마늘을 잘 자래워 혼자 많이 먹으라 해라!”
꿈에 엄마를 보고 깨여 난 아침이면 나는 늘 피고름같은 엄마의 이 말씀이 세차게 귀전을 치는것을 어쩔수 없다.
과연 엄마는 아직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것일가?
오늘도 엄마의 마늘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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