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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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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공부 101] - 22... 댓글:  조회:2697  추천:0  2020-03-01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사설이 길다’와 ‘사설시조’의 ‘사설’이 같은 글자라고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시조의 유쾌한 반란, 사설시조 사랑과 그리움 듬뿍 담은 ‘서정성’ 웃음보 간질이는 ‘해학성’ 권력의 횡포에 도전하는 ‘풍자성’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어른들을 보면 수다를 잔뜩 늘어놓고는 “사설이 길었다”고 하잖아요? 근데 국어 시간에 ‘사설시조’를 배우면서 설마 같은 글자는 아니겠지 했는데, 국어사전을 뒤적여 보니 웬걸 “사설(辭說)은 말이나 이야기, 잔소리나 푸념을 늘어놓는 것을 말한다. 판소리에서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는 ‘아니리’를 말한다”라고 적혀 있어요. 정말 같은 글자였어요! 시조의 유쾌한 반란, 사설시조 말씀 사(辭)에 말씀 설(說), 두 글자가 이어지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말의 잔치가 떠오르지요? 우리는 시조 하면 흔히 초장—중장—종장의 3장 6구 45자 내외의 평시조를 떠올립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시조는 거의 대부분이 이와 같은 평시조에 해당하지요. 하지만 조선 후기 시조는 더 이상 사대부만 향유하는 문학이 아니었습니다. 기녀, 중인, 상인, 몰락한 양반 등 다양한 계층이 시조를 지어 부르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이들은 사대부처럼 유교의 이념을 전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시조를 통해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표현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도 있었고 욕설이나 음담패설도 들어 있었지요. 또한 권위를 풍자하거나 세태를 비판하는 내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해야 할 이야깃거리가 많아졌기 때문에 시조의 형식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시조의 형식적인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더 많은 내용을 시조에 담아냈지요. 초장 · 중장 · 종장의 구별은 있었지만 그것들의 길이는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중장은 평시조의 두 배 내지 세 배를 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평시조보다 길어진 시조를 사설시조라고 부릅니다. ‘사설이 길다’라는 관용구가 떠오르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이지요. 사랑과 그리움 듬뿍 담은 ‘서정성’ 사설시조가 주제로 삼았던 대표적인 내용은 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대부의 시조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지요. 사대부로서 남녀상열지사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작품을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까닭에 임에 대한 사랑은 기생들의 노래에 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향유층이 넓어지면서 서민들도 사설시조를 통해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귀뚜라미, 저 귀뚜라미 가련하다 저 귀뚜라미 어찌 된 귀뚜라미인지 지는 달, 새는 밤에 긴 소리 짧은 소리 마디마디 슬픈 소리 저 혼자 울어 지낼 때 규방에 살짝 든 잠을 살뜰하게 깨우는구나 두어라, 제 비록 미물이나 외로운 밤 내 뜻 알기는 너뿐인가 하노라 작자 미상의 시조 현대어로 풀이해서 리듬감이 떨어졌지만 임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한 대표적인 사설시조입니다. 작품 속 시적 화자는 귀뚜라미에 감정을 이입하여 귀뚜라미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밤 혼자 지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서 볼 때 밤새 내내 울고 있는 귀뚜라미도 가련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임에 대한 그리움은 사설시조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고, 새들도 쉬어서 넘는 고갯길을 임이 왔다고 하면 한 번도 쉬지 않고 가겠다는 시조도 있고,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를 임 그림자로 오해했다는 내용의 시조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설시조에는 남녀 간의 애정이 우리말로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웃음보 간질이는 ‘해학성’ 사설시조의 내용상 특징 중 하나는 해학성에 있습니다. 해학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름 그림자를 임으로 착각한다든가, 답답한 심정 때문에 가슴에 창문을 내고 싶다든가, 게젓 장수가 게젓 하나를 팔면서 온갖 유식한 말을 한다는 등의 상황은 듣는 이들에게 웃음을 짓게 합니다. 개를 열 마리 넘게 기르지만 이 개처럼 얄미우랴 미운 임이 오면 꼬리를 회회 치면서 치뛰락 내리뛰락 반겨서 내닫고 고운 임 오게 되면 뒷발을 바둥바둥 물러섰다가 나왔다가 캉캉 짖어 돌려 보내는 요 암캐야 쉰밥이 그릇 그릇 난들 너 먹일 줄 있으랴 작자 미상의 시조 미운 임이 오면 꼬리를 치며 반기고 고운 임이 오면 캉캉 짖는 개가 있다면 그 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인이 개를 오래 돌보지는 않을 것 같네요. 하지만 실제로 개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잘못이 있다면 오지 않는 임에게 있지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랄까요. 원망해야 할 대상은 임인데 괜히 개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네요. 이런 상황을 지켜보노라면 은근히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지요. 권력의 횡포에 도전하는 ‘풍자성’ 사설시조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풍자성을 들 수 있습니다. 풍자란 웃음을 통해서 기존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풍자는 겉으로는 우스꽝스럽지만 속으로는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요. 좀 전에 소개했던 게젓 장수가 게젓을 팔면서 온갖 유식한 말을 지껄이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자신의 유식함을 내세우는 이들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너편 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가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펄쩍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모쳐라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했구나 작자 미상의 시조 위 작품은 탐관오리의 횡포와 허세를 풍자한 작품입니다. 파리는 힘없는 사람들, 즉 민중을 의미하고 두꺼비는 지방관리를 의미하지요. 송골매는 두꺼비를 잡아먹는 존재로 두꺼비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힘 있는 자에게는 엎드리고 힘없는 자에게는 군림하려 드는 양반, 혹은 관리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했다는 두꺼비의 독백은 그들의 자기합리화, 혹은 허세를 연상시킵니다. 풍자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설시조처럼 서민들이 즐기던 풍자적인 예술 장르로는 또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으로는 를 예로 들어 보자면, 시부모의 학대와 시집살이의 고된 노동, 남편의 외도로 인한 여성의 한스러운 삶이 풍자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작품의 일부를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아버지 호랑새요 / 시어머니 꾸중새요 / 동서 하나 할림새요 / 시누이 하나 뾰족새요 / 남편 하나 미련새요 / 자식 하나 우는 새요 / 나 하나만 썩는 샐세 / 귀먹어서 삼 년이요 / 눈 어두워 삼 년이요 / 말 못해서 삼 년이요 / 석 삼 년을 살고 나니 / 배꽃 같던 요 내 얼굴 / 호박꽃이 다 되었네 / 삼단 같던 요 내 머리 / 비사리춤(싸리나무 껍질)이 다 되었네” [네이버 지식백과] ‘사설이 길다’와 ‘사설시조’의 ‘사설’이 같은 글자라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4    [시공부 101] - 21... 댓글:  조회:2308  추천:0  2020-03-01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조에 연과 행의 구분이 있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시조 한 수가 하나의 연이 되다 유교의 이념을 실어 나르다 연시조의 슈퍼스타, 윤선도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시조는 초장—중장—종장으로 구성되었다고 배웠어요. 그렇다면 시조에는 연과 행의 구분이 없는 것인가요? 연시조라는 말이 있던데 연시조는 어떤 것인가요? 시조 한 수가 하나의 연이 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평시조는 대개 초장—중장—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45자 내외로 쓰여집니다. 시조는 현대 시처럼 연과 행의 구분이 존재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시조 중에는 평시조 여러 편이 묶여서 마치 현대 시에서 여러 연을 지닌 작품처럼 지어지는 시조도 있습니다. 이런 시조를 연시조라고 합니다. 시조 한 편으로는 담지 못할 내용을 여러 편의 시조로 묶어서 작품을 쓰는 것이지요. 각각의 시조는 독립된 작품이지만 크게 보면 여러 작품이 하나의 주제를 이루는 것입니다. 최초의 연시조는 조선 세종 때 맹사성이 지은 「강호사시가」입니다. 이 작품은 총 네 수의 시조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시조는 봄날 시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는 내용이며, 두 번째 시조는 여름날 바람을 쐬며 더위를 잊고 지내는 한가로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 번째 시조는 가을날 강가에 배를 띄우고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을, 네 번째 시조는 겨울에 눈 내린 경치를 바라보며 추위를 견디는 소박한 생활을 표현하고 있지요. 각각의 시조는 독립적이지만 그 내용이 ‘자연을 즐기며 한가롭게 살아가는 삶’이라는 점에서 주제가 하나로 모아집니다. 이처럼 연시조는 커다란 주제를 놓고 각각의 시조들이 하나의 연처럼 배열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유교의 이념을 실어 나르다 조선 전기에 지어진 연시조는 사대부들의 시조로서 유교의 이념을 전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표 작품은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이이의 「고산구곡가」, 그리고 주세붕의 「오륜가」, 정철의 「훈민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사대부의 이상과 삶의 태도가 잘 나타난 작품입니다. 「도산십이곡」은 총 열두 수로 학문하는 자세와 이상적인 자연을 노래하고 있으며, 「고산구곡가」는 총 열 수로 학문하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세붕의 「오륜가」는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의 덕목을 계몽적인 어조로 노래한 작품이며, 정철의 「훈민가」는 노래 제목대로 백성에게 유학의 도리를 가르치는 노래입니다.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이황, 「도산십이곡」 중 11곡 이 작품은 이상적인 자연을 닮고자 하는 화자의 소망이 나타난 작품입니다. 유학자들은 인간 세상보다 자연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은 질서와 조화를 갖춘, 인간 세계의 복잡한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세계로 비추어졌습니다. 이 작품에서 청산과 유수, 즉 푸른 산과 흐르는 물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모습, 즉 어떠한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는 인간이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과 대조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청산과 유수는 인간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삶의 태도를 지닌 존재입니다. 유학자들은 청산과 유수처럼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모습을 지닌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학문을 해야 한다고 보았고 그러한 생각이 작품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사대부의 작품 속에서 자연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연시조의 슈퍼스타, 윤선도 앞에서 언급한 이황, 이이, 주세붕, 정철의 연시조는 모두 유교적 이념을 전달한다는 목적성이 분명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문학 작품에서 이념적 목적이 지나치면 독자들이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앞의 작품들은 감동을 주기에 앞서 마치 훈계와 설교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요. 이러한 목적성과 계몽성에서 벗어나 문학적인 재미와 상상력, 표현의 다양성을 갖춘 연시조 작가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윤선도입니다. 윤선도는 「오우가」 여섯 수, 「견회요」 다섯 수, 「만흥」 여섯 수, 「어부사시사」 사십 수 등 다양한 연시조 작품을 써낸 연시조계의 슈퍼스타였습니다. 그의 시조는 편수도 많지만 문학적인 상상력과 표현도 세련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드나무숲인가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하는구나 지국총 어사와 지국총 어사와 맑고도 깊은 못에 온갖 고기 뛰노는구나 윤선도, 「어부사시사」 중 춘사 4수 이 작품은 윤선도가 당쟁으로 귀양을 가 있던 보길도에서 지은 것입니다. 잠시 여러분 머릿속에 남해안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섬들을 떠올려 보세요. 배를 저어 가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섬들이 정말 아름답게 보이겠지요. 이 작품은 바로 남해의 다도해 풍경을 작가가 어부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쓴 시조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언뜻 보기에 시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초장—중장—종장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중간에 “노 저어라 노 저어라”와 “지국총 어사와 지국총 어사와”를 생략하면 온전한 시조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윤선도가 중간 중간에 반복되는 구절을 쓴 까닭은 어부가 배를 타고 노를 젓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지요.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이황 등의 연시조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지요? 이황의 시조에서 보았던 엄숙함 대신 경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가 펼쳐지고 있음을 여러분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용된 작품 이외에 윤선도의 작품을 찾아 읽는다면 그의 문학적 면모를 더욱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를 지을 때 진짜 어부로 살았나요? 아닙니다. 윤선도는 어부로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부가 되었다고 가정한 채 작품을 지었지요. 그런 까닭에 작품 속에 등장한 어부는 고기잡이의 어려움과 고통, 애환을 느끼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즐기고 있지요. 만약 진짜 어부였다면 손이 부르트게 고단한 일상, 추위에 떨며 고기를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심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을까요? 윤선도의 작품은 어부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다기보다는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그려 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그런 맥락에서 「어부사시사」에 등장한 어부는 진짜 어부가 아니라 가짜 어부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에 연과 행의 구분이 있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3    [시공부 101] - 20... 댓글:  조회:2547  추천:0  2020-03-01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한글은 조선 시대에 규방의 문자였다?     분야 고전 시가 목차 내방가사, 부녀자들이 지은 노래 봉건적 관습과 여성의 삶을 그리다 허난설헌의 「규원가」,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내방가사 그리움과 기다림의 사계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조선 시대에는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조선 후기부터는 여성도 작품을 창작했다고 하는데 어떤 작품이 있나요? 내방가사, 부녀자들이 지은 노래 조선 시대 여성들은 봉건적 관습에 얽매여 활동하는 데에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부엌일, 바느질, 손님 접대 등 주로 집안 살림을 돌보기에 바빴고, 사회적 활동이나 대외적인 문화 활동은 기대하기 어려웠지요. 그런데 부녀자들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선비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한글로 시가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학자와 문인은 훈민정음을 천대했지만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에게는 두루 보급되었습니다. 이들은 사대부들의 노래 중에 우리말 위주로 창작되는 가사 문학에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되었고 작품까지 창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방가사는 주로 영남 지방에서 크게 발전하였는데 학자들에 따르면 영 · 정조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지어져서 일제 강점기 시절과 해방 직후까지 약 6,000여 편의 내방가사가 창작되었다고 합니다. 내방가사가 영남 지방에서 주로 지어진 까닭은 영남 지방에 한글을 깨우치고 교양을 갖춘 부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서민들이 지어 부른 민요 대신 사대부의 가사를 선택하여 자신들의 감정과 정서를 노래했을 것입니다. 봉건적 관습과 여성의 삶을 그리다 내방가사의 주요 내용은 상당수가 양반 부녀자들의 생활 주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양반 사대부가 유교적인 이념을 전달하기 위해 골몰했던 것과 달리 실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 놓고자 했지요. 따라서 사대부의 가사와는 큰 차이를 보였고 어떤 점에서는 서민들이 지은 가사와 그 성격이 유사했습니다. 관념이 아니라 실제 생활을 다루었기 때문에 내방가사는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표현할 수 있었지요. 내방가사의 주요 내용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부녀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노래한 작품들이 다수 있습니다. 시집간 딸이 지켜야 할 내용을 노래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사친가」도 있고, 자신의 환경을 탄식하는 「여탄가」, 「여자탄식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봉건적 인습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여성들의 고민과 정서를 호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내방가사라고 해서 현실이나 환경을 한탄하는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화전가」나 「향원행락가」와 같이 때로는 여성들이 지닌 취미라든가 놀이도 노래로 지어 불렸고 당시의 문물이나 풍속도 소재로 활용되었습니다. 허난설헌의 「규원가」,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내방가사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방가사 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허난설헌의 「규원가」를 들 수 있습니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로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뛰어난 문학적 재주를 지녔던 허난설헌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한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으니까요. 문학적인 재주가 뛰어난 그녀였지만 삶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극은 결혼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허난설헌은 열다섯 살에 김성립과 혼인을 합니다. 그런데 김성립의 집안은 허난설헌의 집안과는 달리 지극히 가부장적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지요. 더군다나 남편은 무뚝뚝하고 고집스러웠으며 허난설헌을 버거워하여 집안을 돌보지 않은 채 밖으로만 돌아다녔습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허난설헌이 낳은 두 아이도 돌림병에 걸려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아버지와 오빠의 잇따른 죽음으로 상심이 컸지요. 마침내 그녀도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리움과 기다림의 사계 「규원가」는 작품 제목대로 규방에서 지내는 여인의 원한을 그린 가사입니다. 작품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허난설헌에게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지어졌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의 사랑을 잃고 슬픔에 잠긴 채 원망과 그리움을 함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규원가」의 일부를 현대어로 풀이하여 감상해 보겠습니다. 삼삼오오 어울려 다니는 기생집에 새 기생이 나타났는가? 꽃 피고 날이 저물 때 정처 없이 나가 있다가 좋은 말을 타고 어디어디를 머물며 놀고 있는가? 원근의 지리를 모르는데 임의 소식을 어찌 알까. 인연을 끊으려 한들 임 향한 생각이 없을까. 임을 못 보거든 그립지나 말 것을, 하루 열두 때 길기도 하고 한 달 서른 날이 지루하기만 하다. 창밖에 심은 매화 몇 번이나 피고 졌는가? 겨울 밤 차고 찰 때 눈이 섞어 내리고, 여름날 길고 길 때 궂은비는 무슨 일인가? 아름다운 봄철에 좋은 풍경을 보아도 아무 감흥이 없다. 가을 달이 방에 비치고 귀뚜라미가 침상에서 울 때에 긴 한숨 떨어지는 눈물에 헛된 생각만 많다.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렵겠구나. 허난설헌, 「규원가」 중에서 자, 감상한 부분이 어떻습니까. 일단 남편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도 봉건적인 질서 속에서 부녀자는 집 안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겠네요. “원근의 지리를 모르는데”라는 구절을 보면 당시 부녀자들의 바깥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지을 당시 허난설헌은 남편에 대한 기대를 버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임 향한 생각이 여전하며,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가슴속에 남아 있음을 표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용된 뒷부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변하도록 임이 오지 않는 것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겨울밤 눈이 섞어 내리고 여름에 궂은비가 내리며 가을날 귀뚜라미가 우는 상황은 임과 떨어져 지내는 시적 화자의 정서를 더욱더 애달프게 하는 데 기여하는 객관적 상관물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에서 이 작품의 문학성이 드러나는 것이겠지요. 허난설헌이 남긴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허난설헌은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창작을 했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죽기 직전에 모든 작품을 다 태우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그런 까닭에 남아 있는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지요. 지금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은 허균이 죽은 누이의 작품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예전에 보았던 누이의 작품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난설헌집』에 실려 있는데 한시 142편 정도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난설헌집』에는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도 극찬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교녀가 / 계녀가사작자, 연대 미상의 규방가사. 평소 시집가기 전의 딸을 교훈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한글은 조선 시대에 규방의 문자였다?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력사의식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595  추천:0  2020-03-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홍범도   [ 洪範圖 ] 이미지 크게보기   이칭별칭 기타 홍범도(洪範道)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868년(고종 5) ~ 1943년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평안북도 양덕 성별 남 관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대표관직(경력)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정의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개설 일명 홍범도(洪範道). 평안북도 양덕 출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해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분노하여,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과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킨 뒤,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甲山)·삼수(三水)·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조맹선(趙孟善) 등과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교포들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소집과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3~6월 사이 대한독립군을 창설했다. 같은 해 8월,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감을 갖고 정예부대를 인솔,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을 습격한 뒤 자성에서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하여 70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후 동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를 결성하자, 1920년 5월 합작하였다. 간도대한국민회와 대한독립군의 합작 군사조직으로 제1군사령부가 결성되었고 홍범도는 정일 제1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0년 5월 27일 북로사령부로 개명되었고, 이후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도독부(都督府)와 통합하였다. 최진동이 독군부 부장, 안무가 부관, 홍범도가 북로제1군사령에 임명되었다. 확대 개편된 500여 명의 대부대로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종성(鍾城) 삼둔자(三屯子) 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며,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큰 성과를 올리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또한 같은 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이 계속해서 추격해 오자 독립군조직을 총망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부총재에 선임되었다. 그 뒤 간도지방의 김좌진·최진동부대와 함께 노령(露領)으로 이동, 흑룡강 자유시(自由市)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무장해제 된 뒤 많은 단원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된다. 이 사변 이후 1922년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었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되어 이곳에서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매천야록(梅泉野錄)』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 東文社書店, 1946)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4(국가보훈처, 1987)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1·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3)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신재홍, 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1967)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관련이미지 18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홍범도 원본보기 출처: Wikimedia [네이버 지식백과]홍범도 [洪範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거 77년 만에 고국 땅 묻히는 홍범도 장군   세계일보     2020.03.01.          카자흐스탄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묘지. 1943년 서거 후 7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제101주년 3·1절 기념식에서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가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인 가운데 문 대통령은 국가보훈처에서 신년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두 전투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취지의 특별 지시를 내릴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홍범도 장군이 주도한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합작한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에 각각 벌어졌으며 나란히 올해 100주년을 맞는다. 문 대통령은 이날 3·1절 기념사에서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국민들과 함께, 3·1 독립운동이 만들어낸 희망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다”며 “오늘 저는 온 국민이 기뻐할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고 운을 뗐다. 이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가속화하던 1907년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 일제에 맞서 싸웠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부하들을 이끌고 중국 만주의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고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4개월 뒤에는 김좌진 장군을 도와 청산리 전투도 대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군을 이끌던 홍범도 장군은 1937년 소련 정권의 고려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사후 그곳에 묻혔다.   이날 문 대통령은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홍범도 장군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하여 안장할 것”이라며 “협조해주신 카자흐스탄 정부와 크즐오르다 주 정부 관계자들, 장군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주고 묘역을 보살펴오신 고려인 동포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해 특히 카자흐스탄 측에 고마움을 전했다. 홍범도 장군과 늘 함께 거론되는 김좌진(1889∼1930) 장군의 묘소는 충남 보령에 있으며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73호로 지정돼 있다. 김좌진 장군의 고향은 충남 홍성이다. 김좌진 장군의 경우 청산리 전투 후에도 중국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30년 1월 *****에 의해 암살당했다. 김좌진 장군이 워낙 투철한 반*주의자이다보니 **진영의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좌진 장군의 유해는 장례 절차 후 동지들에 의해 비밀리에 고국으로 운구, 임시로 안장됐다가 1957년 지금의 묘지로 이장됐다. /김태훈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1일 발표한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정부의 숙원이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카자흐스탄 방문 때 독립유공자인 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를 봉환하면서 홍 장군의 유해 봉환도 추진했다.     하지만 홍 장군의 유해는 지난해 돌아오지 못했다. 분단의 현실과 장군의 묘역이 여전히 동포 사회의 구심점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 정부는 당시 “홍 장군의 유해도 봉환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장군의 유해 봉환은 1992년 우리나라가 카자흐스탄과 국교를 맺은 뒤부터 추진됐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추진했지만, 북한은 카자흐스탄 정부에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란 점을 들어 연고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카자흐스탄 정부나 동포 사회는 남북 사이에서 장군 유해 봉환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장군이 여전히 카자흐스탄 동포 사회에서 정신적 구심점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도 있었다. 고려인들은 크질오르다에 장군의 묘역을 조성하고 장군을 민족 지도자로 기린다. 카자흐스탄 정부 역시 1994년 ‘홍범도 장군 거리’를 선포할 정도로 장군을 존중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해 봉환에 가장 동의가 필요한 장군 후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점도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홍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 의병 투쟁에 몸을 던졌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에 올라 간도와 연해주에서 일제와 싸웠다. 3·1 독립운동 이듬해에는 독립운동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다. 하지만 장군은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정책 탓에 연해주에서 크질오르다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장군은 이후 움막집에서 살며 고려극장 경비 생활로 생계를 이을 만큼 힘든 말년을 보내다가 75살로 숨졌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한겨레신문 /성연철 기자  ================================= "봉오동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모셔온다" 박정엽 기자 네이버블로그 공유 100자평 좋아요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기사 URL공유   2020.03.01    [제101주년 3·1절 기념식] 文대통령,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 때 洪장군 유해 봉환 소식 전해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 국가 존재가치 일깨우고 선열 애국심 되새기는 계기 되길"   홍범도 장군/반병률 교수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1일 3·1절을 맞아 청산리 전투와 함께 항일(抗日) 무장독립운동사의 대표적 전승(戰勝)으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이뤄질 예정이다. 문 대통령은 홍 장군을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이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101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국민들과 함께, 3·1독립운동이 만들어낸 희망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다"면서 "오늘 저는 온 국민이 기뻐할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계봉우·황운정 지사 내외분의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며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조국으로 봉환하여 안장할 것"이라며 "협조해주신 카자흐스탄 정부와 크즐오르다 주 정부 관계자들, 장군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주고 묘역을 보살펴오신 고려인 동포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이 우리에게 국가의 존재가치를 일깨우고 선열의 애국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는 일이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열어갈 힘을 키우는 일"이라며 "정부는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홍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경과에 대해서는 "1920년 1월 13일,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대한독립군 홍범도 의용대장의 권고문을 실어 무장투쟁의 정당성과 국토회복을 위한 각오를 다졌다"며 "1월 30일에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 될 76명의 졸업식이 열렸다"고 했다. 이어 "그해 6월,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로 전면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며 "바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였다. 임시정부는 이를 독립전쟁 1차 대승리라 불렀다"고 했다.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와 체코군 간에 무기 매수계약이 이뤄졌다"며 "9000명의 인간사슬로 연결해 운반해온 이 무기들이 10월 ‘청산리 전투’ 승리의 동반자가 되었다"고 했다. 홍 장군은 1907년 의병이 일어나자 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며 일제에 맞서 싸웠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부하들을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고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을 지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연해주에서 독립군을 이끌던 홍 장군은 1937년 러시아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사후 이곳에 묻혔다.     홍범도 필적   ===================================///   '봉오동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연선옥 기자 네이버블로그 공유 100자평0 좋아요0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기사 URL공유    2019.12.30    최진동 장군 동생, 운산 추정 사진도 공개 일제강점기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 승리를 이끈 최진동(1882∼1945) 장군의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최진동 장군은 독립군 부대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을 지냈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30일, 레닌에게 선물 받은 권총을 찬 최진동 장군이 홍범도 장군과 함께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반 교수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있는 인물을 고려인 출신의 볼셰비키 적군(赤軍) 장교로 추정했는데 유족의 증언으로 최진동 장군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면서 "홍 장군과 함께 레닌에게 권총과 군복을 선물 받았다면 그에 버금가는 독립군 대장으로 예우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 교수는 지난해 7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의 사진·영상물보관소에서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 소극장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영상을 입수해 그해 8월 공개했다.  당시 반 교수는 최진동 장군을 비롯해 김규식·여운형·조봉암·홍범도·김단야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참가 접수증과 사진 여러장을 확보했지만 홍범도 장군과 함께 사진에 찍힌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하다가 유족의 증언으로 최진동 장군임을 확인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이 레닌에게서 선물 받은 권총을 차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반병률 교수 제공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1885∼1945) 장군의 손녀인 최성주(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 씨는 "이 사진을 미국 하와이에 사는 당고모(최진동 장군의 딸 최경주 씨)에게 보내 '아버지가 홍범도 장군과 함께 찍은 이 사진이 어릴 때 집에 걸려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최경주(87) 씨는 최진동 장군 자녀 가운데 홀로 생존해 있으며 현재 최진동·최운산 형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홍범도 일기'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소련 최고지도자 레닌을 접견하고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 레닌이 친필 서명한 '조선군 대장' 증명서 등을 선물 받았다. 한편 최운산 장군 유족은 반 교수가 입수한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영상 속에서 최운산 장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샤프카(러시아식 털모자)를 쓴 외투 차림의 세 인물 중 가운데가 최 장군이라는 것이다. 왼쪽은 여운형이고 오른쪽은 알 수 없다. 최성주 씨는 "제대로 된 할아버지 사진이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영상 속에서 발견하고 반가웠다"면서 "하와이의 당고모께서도 '작은아버지가 맞는다'고 확인해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 교수는 "참가 접수증에서 최운산의 이름을 확인하지 못해 사진 속 인물이 최운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중국의 경우 옵서버로 참가해 참관기를 남긴 사람도 있어 최운산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독립운동 지도자들. 왼쪽은 여운형이고 가운데가 최운산 장군으로 추정된다./반병률 교수 제공 최진동·운산 형제는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북간도 옌볜(延邊) 관리책임자(도태) 최우삼의 아들이다. 이들은 동생 최치흥과 함께 만주에서 무장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다. 최진동 장군은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 승리를 이끈 주역이다. 봉오동 전투는 '임진왜란 이후 한·일 정규군이 맞붙은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리'로 기록돼 있다. 봉오동을 본영으로 하는 독립군 이름은 북로독군부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간도국민회군과 최진동-최운산의 군무도독부군이 연합한 부대였다. 1군사령관은 홍범도, 독군부 부장(연합사령관)은 최진동이었다. 축산, 미곡, 무역에 주류, 제면, 성냥, 비누 공장까지 운영해 간도 제1의 거부가 된 최운산은 독립군에 자금을 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다.  
1    프랑스 시인 - 폴 엘뤼아르 댓글:  조회:3515  추천:0  2020-03-01
두산백과 폴 엘뤼아르     요약 다다이즘 운동에 끼어들고, 이윽고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시인으로 활약한 프랑스 시인.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 라고 한결같이 생각했다. 유명한 시 《자유》가 수록된 《시와 진실》,《독일군의 주둔지에서》는 프랑스 저항시의 백미로 알려졌다. 원어명 Paul Éluard 출생-사망 1895.12.14 ~ 1952.11.18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프랑스 생드니 주요저서 《고통의 도시》(1926) 파리 교외의 생드니 출생. 젊었을 때 폐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1∼1913년 스위스에서 요양생활을 하였다. 제l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선에 종군하였으며, 그 경험에서 얻어진 평화주의적 사상이 최초의 시집 《의무와 불안 Le Devoir et l'Inquiétude》(1917)에 짙게 나타난다. 그후 J.폴랑, A.브르통, L.아라공, P.수포 등과 알게 되어 다다이즘 운동에 끼어들고, 이윽고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에는 초현실주의의 원리가 된 꿈과 무의식의 세계나 자동기술법 등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물론 브르통과 공저(共著)로 《무원죄수태(無原罪受胎) L'Immaculée Conception》(1930)를 내어 정신착란이 펼쳐 보이는 새로운 시세계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걸작의 하나인 《고통의 도시 Capitale de la douleur》(1926)는 초현실주의자다운 언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우애를 시의 가장 큰 사명으로 삼는다. 이러한 경향은 1936년의 스페인 전쟁을 계기로 더욱 짙어지고, 이 때부터 그의 시는 사랑과 자유라는 두 가지 주제로 일관되었다. 시는 이미 신비로운 꿈을 통해서 밝고 조화된 세계를 계시하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사랑으로 한몸이 되어 자유와 평화를 향해 굳세게 전진하기 위해 서 있는 것이다. 그의 언어는 날이 갈수록 투명하고 서정적이며 서민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적극적으로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1942년에는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그의 시는 좌우익을 불문하고 프랑스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시가 되었다. 또한 초현실주의로부터 출발한 모든 시인들 중에서 후대의 시인들에게 그만큼 큰 영향을 준 사람도 드물다. 그것은 '시는 실천적인 진실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로트레아몽의 말을 자신의 모토로 삼고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라고 한결같이 생각해 온 그의 투철한 사명감의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그 유명한 시 《자유》가 수록된 《시와 진실 Poésie et Vérité》(1942), 《독일군의 주둔지에서 Au rendez-vous allemand》(1944)는 프랑스 저항시의 백미로 알려졌으며, 전후에도 《교훈 Une leçon morale》(1949), 《불사조 Le Phénix》(1952)를 비롯한 많은 시집을 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폴 엘뤼아르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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