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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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나의 40년 인생변천사
2018년 11월 09일 10시 55분  조회:1443  추천:0  작성자: 김병활
 사진으로 본 나의 40년 인생변천사
 
김병활
 
 올해는 1978년 말에 개혁개방을 선고하고 실시한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로삼계(老三届)” 고중 졸업생으로 농촌에서 10년 동안 전전하다가 1977년에 대학입시를 회복하자 제1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후 나는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분투하면서 비록 남들처럼 휘황찬란한 대업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자신이 바라는 일들을 늦게나마 하나하나 이루어 나아갔다. 늙으막에 남는건 사진뿐이라고 요즘들어 옛날 사진첩을 펼쳐들고 보노라면 우여곡절을 동반한 분투로정을 회억하면서 그야말로 감개무량하다. 오늘은 그중 일부 사진만 몇장 골라 개혁개방의 혜택으로 이룩한 나의 40년 인생변천사를 도약식으로 간단히 말해보고자 한다.
 
  1.  
(1)우리 조문학부 77학번(77级)은 1977년에 대학입시를 치르고 이듬해 3월초에 입학등록을 하였다. 그런데 본교에는 비비고 누워잘만한 기숙사가 없어 우리 조문학부는 본관 사무실에 매트과 거적을 깔고 생활하다가 인가도 없는 연집공사 황초구(慌草沟) 산골에 가서 농사일도 하면서 허술한 교실에서 수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2개월 정도 지나 연길 시내 본교에 돌아 오게 되였는데 그때 나는 웅대한 모택동 석상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우리반 “사진 촬영사”들로는 김성우,전정환 등 재간둥이들인데 그들 덕분에 나는 의미 있는 사진들을 남길수 있었다. 오늘 다시 이런 사진들을 들여다 보니 결혼후 딸애까지 둔 내가 대학입학 시 한몸에 촌티를 잔뜩 안고 흙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대학교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느껴진다. 지금 애들이 사진에 나타난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 아주 우습게 여길터이지만 그때는 여유없는 생활에 쪼들리면서 일터로 굴러다니던 시기인지라 복장이나 헤어스타일(发型) 같은것에 대해선 아예 신경을 쓰지 못했다. 다만 사진에 비친  나의 얼굴표정엔 그래도 청춘의 기백이 흘러넘쳐 무슨 꿈이라도 이루려는 야심이 차있은듯 하다.   
 
(2)지난세기 80년대에 접들면서 우리 반급 김성우가 주도해 “종소리”문학사를 창립하고 또 많은 문학관련 행사를 벌렸다. 나도 열성분자 중의 한사람으로서 다양한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당시 한국에서 “5.18” 광주사건이 터지면서 김지하 시인이 군부의 만행을 고발하는 시들을 썼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연변의 언론 매체에서 처음으로 이른바 “남조선” 시인의 이런 시들을 전재하였다. 나는 “5.18”사건에 대해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김지하 시인의 시들을 접하고 심취되였는데 그중 한수를 택해 “종소리”문학사 시랑송 모임에서 격정에 넘쳐 읊었다. 그땐 나도 한창 혈기 왕성한 청년이였던 관계로 나의 시랑송도 청중들을 깊이 감동시킨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김성우가 그때 모습을 찰칵 사진에 담았다.
 
(3)우리 77학번 52명 동창생들은 나이 차이가 많았다. 제일 "좌상"과 제일 "막내"들의 나이 차이는 무려 12세나 되였다. 30세 이상의 늦깎이 남자 대학생들은 7명이나 되는데 우리반급에서는 듣기 좋게 이들을 로장(老将)이라 불렀고 다른 반급에서는 “아즈바이”라고 부르는 데도 있다고 한다. 명절때 술마시고 오락회를 펼치면 이런 ”아즈바이”들이 집생각이 나서 일제히 베개를 끌어 안고 조선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의 주제가 “잘 자거라 아가야(아버지의 축복)”를 얼굴에 울상을 하고 곧잘 부르곤 했다. 어느해 우리는 마반산 철길아래 강변에서 봄놀이를 하였는데 술에 얼근해진 “아즈바이”들이 사진을 찍겠다며 물살이 센 강물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강 중심에 있는 바위우에 올라서서 멋진 기념을 남겼다. 지금 그때 나이라면 더 멋있게 살수 있으련만……
 

2.
(1) 나는 4년간의 대학생활에서 “문화대혁명”으로 잃어버린 10년(蹉跎岁月)을 되찾겠노라고 줄곧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비좁은 학생기숙사에는 방마다 토끼장 같은 2층 침대 4개에 8명씩 입주하였다. 나는 나이가 많다고 침대 아래층에 배정되였다. 거기에 널조각들을 주어 만든 간이“책장”까지 자리를 점해 키큰 학생들은 취침 시 다리를 쪼그리고 자야 했다. 나는 가정형편히 아주 어려웠지만 한푼두푼 아끼고 모아 졸업전에 벽돌장 크기와 비슷한 싸구려 록음기 하나를 큰마음 먹고 샀다. 그 록음기 덕분에 나의 외국어 수준은 나날이 향상되였다.
(2) 졸업 시즌이 다가오자 동창들은 잊지못할 학창생활을 기억에 남기려고 부지런히 기념촬영을 하였다. 나도 동참해 사진 몇장 남겼다. 그중 괜찮다고 생각되는 사진은 학교 정문에서 자전거를 손에 잡고 찍은 사진이다. 그 시절의 대학 정문은 민족 풍격이 다분한 오늘의 으리으리한 대문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된다. 그래도 소박한 옛 교문을 사진으로 보면서 따뜻한 정을 느끼게 된다.사진에서 내가 잡고 있는 자전거는 녀동생이 사용하던 것인데 멀리 타성으로 시집가면서 집에 그냥 남겨 두었다. 그런데 졸업전 마지막 학기에 아버님이 뇌졸증에 걸려 반신불수로 되였고 나젊은 안해가 혼자 집에서 시아버지 병 시중을 해야만 했다. 이에 나는 주말 저녁무렵이면 룡정행 버스 운행 시간을 맞출수 없어 자전거를 타고 모아산 고개를 힘들게 넘어 집으로 갔다가 월요일 새벽이면 또 자전거를 타고 모아산 고개길을 숨가쁘게 넘어 학교로 돌아와 수업에 참가하곤 했다. 그때 연길 ~ 룡정 구간에서 버스가 운행하는 도로는 경사도가 심한 산세를 따라 굽이굽이 에돌아가는 산길인데 내리막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내려올때면 잔뜩 긴장된 신경이 일초도 해이해선 안되였다. 그래도 다행히 사고가 나지 않아 오늘까지 사지가 멀쩡한대로 나다닌다.
(3) 속설에 대학생들은 4년 공부를 마치면 거개 “때벗이”를 하는데 1학년때 촌티가 나던 청년들이 4학년 졸업 시에는 신사숙녀로 환골탈태한다는것이다. 나도 례외는 아니였던지 졸업때 찍은 사진들을 입학 시에 찍은 사진들과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때벗이”를 한것 같다. 말하자면 글 읽은 사람들의 “서생의 기(书生气)”가 한몸에  차넘친다는 것이다. 
 

3.
(1) 개혁개방 이후 출국 대문이 열리기 시작하여 국가에서는 외국어 시험을 통해 인재들을 선발하고 국비생, 공비생 등 자격으로 출국시켰다. 당시 연변대학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국가급 외국어출국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낸 교원들을 공비생으로 출국시키는 방침을 실시했다. 이에 나는 90년대에 접어들어 대련에서 진행된 국가 통일 출국시험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취득하였다. 그때 연변대학에서 일본어학과 교원들을 제외하고 출국시험에서 성적이 제일 높은 사람은 나와 정치학과의 김선생인데 신통하게도 두 사람의 성적이 0.5까지 동일했다. 그후 우여곡절을 거쳐 일본 쯔꾸바대학에 가서 방문학자(외국인 연구자) 자격으로 공부를 하게 되였다. 국가 교육부에서 파견한 국비생이면 달마다 19만엔씩 수령하지만 우리 연변대학 공비생들은 일년간 월 12만엔씩 수령하기로 되였다. 나보다 앞서 출국한 한철씨가 내가 겉보기에도 신체가 허약한것 같다고 하면서 “당신 그 신체로 반년도 못 결딜게요. 력사학과 전선생이 일년도 채우지 못하고 미리 귀국한 걸 보라니.”라고 “엄포”를 놓는것이였다. 그러자 나는 남들이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부러워 하면서도 일년 기한전에 건강을 해쳐 조기 귀환을 할까봐 조심스레 드문드문 아르바이트를 하곤했다.
 (2) 그러나 일생에 한번밖에 올수 없는 기회인데 용돈이 적다고 여행도 못가면 후일에 후회될것 같아 나는 큰 마음 먹고 올림파스표 카메라를 사들고 여기저기 여행 다니였다. 대학 소재 도시 쯔꾸바시는 도꾜와 고속버스로 한시간 거리여서 나는 거의 달마다 한번씩 도꾜에 다녀왔다. 그중 고마운 것은 도꾜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김광림 씨가 바쁜 와중에도 하루 일정을 할애해 나와 함께 도꾜 시내 관광명소를 돌아본 일이다. 그밖에 인상 깊은 곳은 오사까(大阪), 나라(奈良), 교도(京都) 등 일본 고대 문물이 제일 많이 보존된 지역과 일본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인 군마(群马)현 구사쯔(草津) 스키장 겸 온천욕장이다. 나라의 황실공원은 아주 개방적인데 사슴들이 관광객들과 한 동아리가 되여 함께 즐기는것이 인상 깊었다. 공원의 사슴들이 밖에 뛰쳐나가 거리 복판에 서 있으면 오고가는 차들이 멈춰서서 사슴이 지나갈때까지 대기한다고 한다. 공원에서 관광객들은 동물들에게 제마음대로 먹이를 주는것이 아니고 건강에 유익한 먹이를 전문 판매점에서 사서 함께 즐기곤 하였다. 나도 사슴이 즐겨먹는 먹이를 한봉지 사들고 예쁜 사슴들과 친숙하게 사귀였는데 “천인합일(天人合一)”이란 어떤것인지 한번 체험해 보았다.
(3) 구사쯔 스키장에서 나는 3박4일 머물었는데 밤과 낮을 이어 스키 연습을 하다보니 마지막 날엔 아주 숙련된 기술로 위험도가 높은 가파른 지형을 날파람을 일구며 쌩쌩 오르내릴수 있었다. 실로 나 절로도 나에게 잠재한 이런 도전정신과 운동능력에 감탄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비를 털어 관광하는 나를 두고 역시 한철씨가 “당신이 보통이 아니구만, 일본에 온지 얼마 안 돼 벌써 카메라를 사들고 여행 다니다니.”라고 하면서 끌끌 혀를 차는것이였다. 아무튼 그 덕분에 일본에서 찍은 사진들이 너무 많아 두꺼운 사진첩 한권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그 대신 남들은 알바를 하고 돈을 모아 귀국한 후 모두 큰 집들을 샀지만 나는 그저 자그마한 집 한채를 사서 네 식구가 10년 동안 살았다. 그때 모(某)학과의 임교수가 우리 아파트 북쪽에 있는 큰 주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늘 “병활이 이 사람이 일본에 갔다왔다는게 왜 요렇게 작은 집에서 살고 있소?”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그저 “저는 일본에 공부하러 간것이지 돈 벌려고 간게 아니거든요.”라고 멋적게 대답하곤 하였다.  그리고 원 연변대학 지도자 한분이 출퇴근 할때마다 우리 아파트 현관 앞을 지나다녔는데 나를 만나면 “김선생, 이 집을 빨리 바꿔야겠구만,”라고 되네이곤 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4.
 (1) 나는 퇴직을 일년 앞두고 만년의 인생살이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 중경에 가서 한국어교육에 종사하기로 하였다. 어느 하루 조문학부 관계자가 나를 찾아와 사천외국어학원(지금의 사천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새로 설립하는데 퇴직 교수가 필요하다는 것이였다. 아마 원래는 다른 퇴직 교수들에게 요청을 했는데 모두들 삼대 화로(三大火炉)라고 하는 중경에 가기 싫다고 한것 같았다. 그런데 이미 공식적으로 퇴직교수를 보내기로 약속한 상황이여서 퇴직을 일년 앞둔 나를 찾은 모양이다. 나도 처음엔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김병민 교장과 김관웅 교연실 주임도 극구 말리는 것이였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을 고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리유는 “삼국연의(삼국지)”의 주전장이며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는 “촉도난(蜀道难,难于上青天)”으로 유명한  사천에 가서 신비한 환경에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았다. 다른 리유로는 퇴직후엔 주택 공적금이 적용될수 없다고 해서 퇴직전에 새집을 마련하느라고 서둘러 공적금을 신청하고 그동안 아껴서 모아둔 비용과 대부금을 합해 면적이 꽤 크고 환경이 괜찮은 주택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은행에서 빌린 대부금은 8년 동안 다 갚아야 하는데 나의 월급만을 가지고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생해야만 했다. 관례대로라면 내가 수년간 당총지서기를 했으니 재직시절에 나에게도 얼마간 돈을 벌수있는 출국 기회가 차려져야 하는데 무슨 영문인지 수차 제기했어도 남들이 줄지어 나가는 그런 기회가 나에겐 좀처럼 차려지지 않는다. 이 일로 김교장도 여러모로 신경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뭔가 잘 안되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제 나에게 차례진 것은 남들이 가기 싫다고 하는 중경행뿐이였다. 사실 중경행 동기에 대해 거창한 담론은 차치하고 속되게 말한다면, 비록 중국에서도 락후한 지역으로 소문난 중경의 국공립 대학이라 대우가 동부 연해지역에 비해 아주 차할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퇴직후 집에서 그저 놀기보다는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것 같았다.
(2) 막상 중경에 가보니 생활환경이 진짜 말이 아니였다. 한 학기 강의를 끝내고 방학에 집에 오니 만나는 사람마다 수척해진 나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것이였다.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손오공처럼 화로 안에서 도를 닦는것이 어디 쉬운일입니까? 라고 말하곤 하였다. 사천외대측에서는 학생들의 반응이 좋다면서 한해 두해 계속 초빙하다보니 어느덧 11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 나도 고희년에 이르게 되였다. 그동안 나는 한번도 사사로이 결근하고 휴강한 적이 없었는데 특수 사유로 휴강하게 되면 후일에 반드시 보충강의를 하곤 하였다. 그리고 여느 교원들처럼 강의를 하기싫으면 남몰래 전혀 수준이 안 되는 철부지 석사연구생(대학원생)들을 시켜 대리강의를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3) 지난해 학교측에서 규정에 따라 더는 나를 초빙하기 어렵다고 하자 나도 이젠 쉴때가 되였다고 느긋하게 생각하고 연길에 돌아 오기로 하였다. 송별 좌담회에서 사천외대 부교장을 위수로 한 인사처장, 동방어학원 관계자들이 나의 로고에 대해 극찬해 주어  나도 성취감으로 기분이 좋았다. 연길에 아주 돌아오니 나보고 “이젠 부자가 되였구만요.”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저 미소를 띠고 “물론 부자가 되였지요.”라고 대꾸하곤 하였다. 사실 그동안 주택 구매로 은행에서 빌린 대부금을 규정된 시일에 다 갚았고 또 지갑에 돈이 찰때마다 관내 지역의 수많은 관광명소들을 두루 돌아보기도 했다. 후일에 할일이 없으면 치매예방 차원에서 관광명소 기행문을 써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 분량이 너무 커서 죽기전에 다 쓸것 같지 못하다. 그리고 그동안 애들 둘이 박사학위 공부를 하게 되였는데 우리 부부는 힘 자라는대로 도움을 주었다. 그 보답으로 딸애는 연변대학과 한국 충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두개나 획득했고 아들애는 일본 규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한후 학교측의 요청으로 수년간 박사후(博士后)를 하면서 보다 깊은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무렵에 나는 내가 잘되는 것보다 자식들이 잘 되는것이 더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을 보다 깊이 느꼈다.  나는 비록 자가용도 없고 엘리베이터가 달린 고층 아파트(电梯楼)로 이사가진 못해도 자식들 덕분에 당당하게 "부자"가 된셈이다.
 나는 지난 40년을 되돌아보면서 개혁개방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대학 교수로 될수 있고 또 애들 둘다 어떻게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겠는지 전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라고 깊이 느끼면서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5.
 (1) 지난해 여름에 내가 연길에 돌아오자 연변대학 관공위(关心下一代工作委员会) 주임 김영춘 교수(원 연변대학 기률검사위원회 서기)가 소문을 듣고 나에게 전화로 조한학원 관공위 주임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였다. 사실 나는 이제부터 모든 짐을 내려놓고 건강관리나 잘 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주임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와 나는 77학번 동기생으로서 일찍 내가 공청단 책임을 맡았을때 나의 상급이였다. 황차 연변대학이 나를 양성하였는데 나로서는 퇴직한 몸일지라도 필요할때 응당 보답을 해야할 립장이다. 그래서 두말없이 수락하고 생소한 관공위 사업에 뛰여들었다. 1년 남짓한 기간에 나는 PPT사용방법을 배우면서 남들이 하기어렵다고 손대지 않는 당과(党课)강의와 19차 당대회 관련 특강을 모두 4차 진행하였다.
(2) 그동안 나는 원고료를 일전한푼도 지급하지 않는 인터넷 사이트에 관공위에서 개최한 행사들을 글과 사진으로 소개하곤 하였다. 그 리유로는 인터넷 사이트가 상대적으로 독자도 많고 영향력도 비교적 크기 때문이다. 돈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기에 구수한 토장국 냄새가 풍기는 글들을 자유롭게 올리고있어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로서는 친근감도 생긴다. 비록 나젊은 독자들이 재미없다고 외면하기도 하겠지만 "한명의 로인은 하나의 박물관과 같다"는 말처럼  백년후에 민족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로인들이 남겨놓은 인생회억록들을 수집해 책으로 출판한다면 살아숨쉬는 훌륭한 력사자료로 될것이라고 의심치 않는다.
(3) 내가 관공위 직무를 열심히 책임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일부 사람들은 세속의 사유방식대로 내가 액외의 경제 대우를 많이 받기때문이라고 미리짐작을 하고 여러모로 시탐하는것 같았다. 이에 나는 어이없어서 그저 “자원봉사라고 생각하고 일하는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학교측으로부터 수당금 일전한푼 받은적이 없다. 후일에 지급할지는 모르겠으나 애초부터 그걸 바라고 한일이 아니기에 아무런 불평불만도 없다.
 옛날 공자님 시대에는 70세가 되면 고희년(古稀之年)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요즘엔 100세 시대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류행되고 있다.  또 일부 선진국들에서는 75세가 돼야 로인 대접을 받을수 있다고 하는데, 이에 비하면 나는 이제 방금 70세를 넘어선 초등생이나 다름없다(초등생이라고 하면 좀 과장된 말이긴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미혹돼 나도 남들처럼 100세까지 살고 싶은 욕망이 굴뚝처럼 솟아 오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여기저기 아픈데가 생기고하니 두루 실망스러울때가 있다. 하지만 집에 앉아 놀기만 한다고 장수하는 것도 아니다. 힘자라는대로 사회활동을 하고 자원봉사도 하면 심리 건강도 누릴수 있어 장수 비결중의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나는 지난 40년 동안 개혁개방의 혜택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부터 아무런 경제적리득이 없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즐겁게 성심성의로 하려고 한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안 좋은 관습에는 따라가지 않고 여생에 나라와 가족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보내는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고 사명이다.

 
 
                                                                               2018.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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