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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서정주, 국화 옆에서, "친일시?"...
2017년 01월 30일 15시 04분  조회:4485  추천:1  작성자: 죽림
<창작과비평>(이하 창비)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3개월 전(2001년) '국화꽃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9회에 걸쳐 연재되면서 뜨거운 화제를 몰고 왔던 한 네티즌의 '국화 옆에서'에 대한 비평 논문이 마침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책의 제목은 연재 당시의 논문 제목과 같은 <국화꽃의 비밀>. 도서출판 새움이 발간했다. 

특히 인터넷 상에서 그 동안 '창비무명인'이라는 아이디로 활약했던 '얼굴 없는 논객'인 필자가 단행본 발간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자신의 실명을 밝히고 나서면서 또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문학인들의 '사이버 광장'으로 알려져 있는 창비 게시판은 이른바 내공이 뛰어난 문학판의 논객들이 수시로 뛰어들어 그때 그때의 문학계 이슈를 두고 '진검승부'를 벌여왔기 때문에 '사이버 무림(武林)'으로도 불린다. 

'창비무명인'도 그 논객들 중의 한 명. 그는 창비 게시판에 논쟁적 글을 잇따라 올리면서 '사이버 무사(武士)'로 명성을 떨쳐왔다. 그러나 '창비무명인(創批無名人)'이라는 아이디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 그는 '얼굴 없는 논객'이었다. 실제로 그는 글을 올리면서 단 한 번도 실명이나 이메일 주소를 밝히지 않는 등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겨 왔다.


창비무명인이 사이버 공간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킨 것은 지난 6월 24일. 

미당 서정주의 대표작이자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상징어 '황국(黃菊)' '거울' '누님'이 실은 일본 천황에 대한 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충격적 내용의 논문을 창비 게시판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화꽃의 비밀'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방대한 분량의 이 논문은 7월 3일까지 총 9회에 걸쳐 연재됐다. 

그의 논문이 발표되자마자 창비 게시판은 격렬한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첫 번째 글의 조회수가 1800회를 넘어섰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창비 게시판 개장 이후 가장 뜨거운 논쟁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창비 측도 사이버 공간에선 보기 드문 이 역작에 대해 최대의 의전(儀典)을 베풀었다. 창비의 상징이자 발행인인 백낙청 교수가 이 논문에 대한 장문의 평문을 게시판에 올렸으며, 편집위원 한기욱 씨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인터넷 글쓰기의 가능성-창비무명인의 미당론을 중심으로'란 평문을 실은 것이다. 

이 논문이 일으킨 파장은 창비 게시판의 담장을 뛰어넘어 곧바로 인터넷의 바다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한 네티즌(박민규)이 7월 5일 인터넷 한겨레에 기고한 ''국화 옆에서'가 친일시라구?'가 그 징검다리가 됐다. 그리고 채 3개월이 흐르기도 전에 이 문제의 논문이 <국화꽃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져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국화꽃의 비밀>에는 도대체 어떤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 아마도 책표지 뒷면에 적혀 있는 다음과 같은 4개의 도발적인 물음이 그 '열쇠'가 될 것이다.

(1)일본 만화영화 <세일러 문>의 요술봉이 왜 한 송이 국화꽃으로 이루어졌는지?
(2)<다섯 별 이야기> 주인공 이름이 왜 '아마테라스'인지?
(3)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이 왜 국화꽃인지?
(4)미당의 '국화 옆에서'는 오늘날 왜 국민적 애송시가 되어 있는지?

여기서 갑자기 우리는 궁금해진다.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일본 만화영화 <세일러 문>과 청소년에게 인기가 높은 SF만화 <다섯 별 이야기>. 이것들과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우선 물음 (1)과 (2)에 대한 필자의 답변을 책 속에서 찾아보자.

▲다섯 별 이야기의 주인공 '아마테라스'
(1)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 <세일러 문>에는 일본제국주의 및 신도(神道)의 상징물인 삼종신기(三種神器)―쿠사나기의 검, 야타의 거울, 야사카니의 곡옥―가 주인공의 마법적 장신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2)
"청소년들에게 인기있는 마모루 나가노의 공상과학만화 <다섯 별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은 아예 일본의 태양신 아마테라스입니다. 그는 미래의 우주왕국(태양성단)을 수 천년 동안 다스릴 불사불멸의 제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일본만화 속의 주인공 아마테라스는 흰색의 황제복을 입고, 목에는 곡옥 목걸이를 하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으며, 머리에는 노오란 국화꽃을 꽂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미당의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상징어인 '황국(黃菊)'과 '거울'이 예사롭지 않은 어떤 불길한 징후를 지니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논쟁의 '몸통'을 거론하기 전에 살펴본 논쟁의 '깃털'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물음 (3)에 대한 답변을 찾아볼 차례이다. 이와 관련, '황국'이나 '거울'과 관련된 내용은 책 속 곳곳에서 발견된다. 

(3)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스런 역사를 살아온 우리 국민에게 있어서 황국은 신중한 고찰이 필요한 상징입니다. 황국이 거울과 함께 등장할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황국은 일본에서 지난 14세기 이후로 일왕과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었고, <고사기>를 보면 거울은 일왕이 현인신(現人神)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란 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국화는 칼과 더불어 일본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황국은 왕실의 문장으로서 왕실가족의 모든 휘장을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일왕의 예복, 일본국가훈장, 일본우표,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무기 등등―로 일본제국주의 문화와 삶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서구에서 발간되는 각종 세계 상징사전을 살펴보아도, 국화꽃은 일차적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꽃이며 일본왕실 내지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로베르 라퐁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상징사전>의 '국화꽃'에 대한 설명에는 '16개의 꽃잎을 지닌 국화꽃으로 된 일본 문장엔 태양의 이미지와 나침반 지침면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는데, 그 중심에서 일왕이 세상을 통치하고, 우주의 모든 방향을 집약한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습니다."

●"일본 문화 속에서의 거울은 천손강림 시에 태양신이 자신의 혼을 담아 하사한 신기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태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은 삼종신기의 하나로 이세신궁에 모셔지고 있고, 또 일제 강점기엔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을 주신으로 삼는 조선신궁에도 거울이 있었습니다."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
이러한 진술 속에서, 우리는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국화꽃이 일본왕실의 상징물임을 알고 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미당의 '국화 옆에서'에 대한 문학적 해석이 진행되면서, 위에서 서술한 '황국'과 '거울'의 문화적 상징성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서른 한 살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며 살아왔고, 일장기를 아랫목에 세워두고 합장까지 할 정도로 신성하게 생각했으며,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에게 신사참배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더욱이 그의 친일작품은 시, 소설, 평론, 수필, 르포 등 거의 모든 장르를 망라할 정도로 다양했고, 또 그 내용도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그의 천황'은 그 외형만 바꾼 채 지속되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을 '제우스'와 '단군으로, 전두환을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으로 찬양한 것이다. 

아마도 질문 (4)에 대한 답변은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와 관련, 필자는 "우리는 아직도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교과서에 실어, 좋은 시의 본보기로 가르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일본문화의 제국주의적 공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할망정,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황국(黃菊)을 '관조의 경지에 이른 친근한 누님'의 비유로만 가르친다면 이는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강조한다. '국화 옆에서'의 시인에게 추서되어야 할 상은 국화문양이 새겨진 일본의 일등공로훈장이지 우리 민족의 금관문화훈장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러한 내용을 골격으로 삼은 필자는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추리소설 기법을 동원해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관련기사-서정주 '국화 옆에서' 등 시 3편 

지난주 금요일인 9월 21일 저녁. 기자는 이 책의 필자인 창비무명인과 인터뷰를 가졌다. '김환희'라는 실명을 제외하곤 나이도, 성별도, 출신지도, 출신학교도 밝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진촬영도 하지 않는다는 까다로운 전제조건을 수용한 뒤에야 성사된 인터뷰였다.

우선 필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마침 책 날개에 필자를 소개한 글이 있어 여기 그대로 옮긴다. 

김환희 씨는 네티즌 사이에서는 '창비무명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치한 논리와 해박한 이론으로 인터넷상의 글쓰기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놓았다는 평을 듣는 필자는 이 책을 출간하면서 글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도를 고려해서 처음으로 실명을 밝혔다. 이 책의 논지가 워낙 문제적이기에 자신을 숨기는 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단이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의 얼굴과 출생년도, 출생지, 출신학교를 자세히 공개하는 것은 피했다. 이 책의 문제적 발언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지만 '학연(學緣)과 지연(地緣)'이 형성한 그물과 편견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싶은 한 문학도의 소박한 소망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끝마친 후에, 미국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그 대학이 주는 장학금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1991년 단편소설의 본질과 서구단편소설 이론의 한계를 분석한 <단편소설의 수사학>(A Rhrtoric of the Short Story)이란 논문으로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지난 10년 동안 서울과 수도권에 소재한 여러 대학(이화여대, 중앙대, 인하대, 추계예술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의 여러 학과(영문과, 불문과, 비교문학과, 문예창작학과 등)에서 10여 종이 넘는 다양한 문학과목을 강의해 왔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사이버 공간에서 논쟁이 됐던 글을 현실 공간에서 단행본으로 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더욱이 첫 책이라고 하는데, 소감부터 말해 달라.
"맨처음 창비 게시판에 이 글을 올릴 때만 해도 열 몇 명 정도만 읽으면 보람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무리 공들여 쓴 글이라도 순식간에 밀려드는 다른 글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 인터넷의 생리 아닌가. 그러나 네티즌들의 반응은 나의 그런 예상을 뛰어넘고 말았다. 네티즌들의 관심과 사랑이야말로 내 글이 이렇게 단행본으로 묶여져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 인터넷에 이 글을 연재하게 된 동기는.
"지난 해 12월에 미당 서정주 시인이 작고한 후에 신문지상에 실린 문학평론가와 원로학자의 일방적인 미당 예찬론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앙일보가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학상까지 제정하지 않았는가. 미당의 예술성이 제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백일하에 드러난 그의 친일행각을 도외시한 채, 그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민족을 배신한 불행한 예술인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그가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문학상을 만들고, '단군 이래 최대 시인' 운운하며 영웅으로 받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결국 기성세대의 몰지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나라도 나서서 젊은 꿈나무 세대가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 국민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로 비판하면서도, 구체적 친일 근거가 드러난 서정주를 기리고 본받자는 문학상을 제정한다는 사회적 흐름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누가 미당 예찬론을 펼쳤나.
"유종호 교수와 김화영 교수가 대표적이다. 특히 유 교수는 미당을 (1)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 (2)부족방언의 마술사 (3)단군 이래 최대 시인으로 극찬했다. 물론 나도 미당이 부족방언의 마술사라는 점은 인정하는 입장이다. 미당은 우선 상상력이 뛰어나고 나름대로의 시작법 정신을 가지고 시를 쓴 '천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결여했다는 점에서는 '백치'이기도 했다.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은 모든 족장에게 필요한 덕목이거니와,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급한 마술사'보다 '고급한 마술사'가 더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연구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
"미당이 작고한 뒤 유종호, 김화영 교수가 신문에 올린 글을 보고 놀랐다. 다각도로 미당을 고찰하지도 않고 서슴없이 극찬하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추악한 삶에 아름다운 예술이 있는가?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의문점이었다. 사실 미당의 작품을 즐겨 읽지 않아 처음에는 주저도 됐다. 그러나 사상과 삶의 문제점을 덮을 만큼 미당의 예술성이 뛰어난지에 대해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미당의 시뿐만 아니라 자서전, 수필도 읽고, 전문가들의 자문도 구했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2월 말이었고, 6월 말에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으니, 얼추 4개월이 걸린 셈이다."

- 그렇게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성경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이 나오는데, 공부하지 않고 결론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당이 장인정신을 가지고 시를 썼으면 그렇게 인정하고 평가할 생각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미당을 3류급 시인으로 매도할 수도 없었지만, 위대한 장인으로 평가할 수도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진정한 장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문학적 거장으로서 사랑할 수 없었다."

- 기존의 미당 담론과는 다른 '국화꽃의 비밀'만의 차별성이 있다면.
"미당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진영이 있는데, 두 진영 모두 자신들의 기존의 논리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선 친(親)미당파는 미당의 예술성이 그의 삶과 사상의 허물을 덮어주고도 남을 만큼 뛰어나다는 입장이고, 반(反)미당파는 미당에 대한 신화가 문화권력자로서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며 미당은 3류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 두 입장은 현재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데, 양측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대화조차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고은 시인의 미당 비판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는데.
"고은 시인에게 가해진 반격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고은 시인도 결국 정치문인 아니냐. 둘째 고은 시인은 미당의 제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설사 '허물 있는 자'라도 '더 허물 있는 자'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미당이 고은의 실력을 인정해줬는데 배은망덕해서야 되겠느냐는 비판도 본질을 벗어난 잘못된 것이다. 나는 거꾸로 이렇게 묻고 싶다. 도대체 삶과 분리된 예술이 있는가? 사상이 담기지 않은 시와 예술이 있는가?"

- 지금 미당 담론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는 미당 담론의 디딤돌 하나를 놓는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작품을 통한 작가 연구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작가가 상징과 신화의 구조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눈여겨 살펴봤다. 반미당파는 86년에 나온 <친일문학선집>을 적절히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현대사 자체를 깊이있게 평가하는 글은 적었다고 본다. 나는 내 글이 미당 연구의 작은 참고자료가 되길 희망할 뿐이다."

- 이 책을 통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미당의 시가 친일시라는 단선적 주장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미당의 시를 교과서에 싣기 전에, 민족의 이름으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 전에, 그리고 미당상을 제정하기 전에, 미당에 대한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갖더라도 늦지 않다. 사실 장준하 선생도 은관문화훈장밖에 받지 못했다. 우리는 한번 자문해 봐야 한다. 현실순응적, 종천순일적 삶을 살아온 미당이 장준하, 함석헌보다 과연 위대한 인물인가.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형국을 보라. 시간에 쫓기듯, 뭐에라도 쫓기듯, 미당 신화를 만들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글은 그러한 일방적 흐름에 대한 절박한 반론이자 문제제기이다."

- 책 발간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사회 발언을 해볼 생각은 없나. 
"내 자신 개혁인사로 비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웃사이더의 정신을 가져야 하는 문학연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리고 평론 발표 등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할 생각도 없다. 책상물림을 벗어난 인생을 살 생각도 전혀 없다. 비교문학을 전공한 문학도로서 좋은 문학연구가가 되는 것이 나의 유일한 꿈이다. 그 과정에서 평생 두세 권의 책을 내더라도 그것이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창작자에게 좋은 참고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책을 많이 내는 것은 내 적성에 안 맞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기는 싫다."

- '국화 옆에서'를 애송하던 일반 국민들은 이 시가 친일시라는 주장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말해줄 생각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와 접하게 될 때는 두 가지 경로를 갖게 된다. 자율적 선택과 타율적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 친구의 권유를 받거나 서점에서 자신의 의지로 직접 선택하는 경우가 자율적 선택이라 할 수 있는데, '국화 옆에서'는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에 수능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 접하게 된 타율적 선택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 국민은 학창시절 문학교사가 제시하는 모법답안을 통해 이 시를 접했다. 그런 사실을 망각한 뒤, 20∼30년 뒤 마치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착각한다. 다시 말해 '국화 옆에서'에 대한 허상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굳어진 허상을 깨는 과정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작업은 그런 충격에 대한 상쇄작용인 셈이다. 내가 부지런히 미당에 대한 자료와 책을 읽고 이 글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 백낙청 교수도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했는데.
"백 교수의 논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국화 옆에서'에 대한 신화적 해석은 일리가 있지만 황국(黃菊)을 천황으로 읽은 역사적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 난 백 선생이 충분히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본다." 

- '창비무명인'이라는 필명을 가지고 창비 게시판에서 활동해 온 것은 언제부터인가. 
"작년 말에 있었던, 표절을 둘러싼 김윤식-이명원 사건 무렵부터였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이미 읽었던 터라 김 교수와 이명원 씨의 책을 구해 비교해가며 정밀검토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명원 씨가 제기한 것보다 표절의 양상이 더 참담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대학과 문학계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이명원 씨는 소영웅주의자로 몰리는 양상이었다. 이명원 씨에 대해서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표절 건과 관련된 내 생각을 정리한 글을 올렸다. (참고로 이 글은 1천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네티즌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 '창비무명인'이라고 작명(作名)한 사연이 있는가.
"당시만 하더라도 한번만 글을 올릴 생각이었는데, 그때 사용했던 아이디가 '무명씨'였다. 그런데 'S대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무명씨라는 내 아이디를 도용해 나와는 정반대의 논조로 글을 올렸다. 논쟁의 와중에 같은 이름으로 글을 올린다는 것은 독자에게 혼돈을 줄 우려가 있다고 여겨 '창비무명씨'라고 개명했다. 처음에는 '원조무명씨'라고 하려고도 생각했는데, 어감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한때는 '책상퇴물'이라는 아이디로 바꾸기도 했는데, 다른 네티즌들이 내 트레이드 마크인 창비무명씨로 돌아가라고 권고하는 바람에 바꾸게 된 것이 바로 '창비무명인'이다."

- 나이는 얼마나 되나. 
"공개하고 싶지 않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근 10년 대학에서 강사로 살면서 겪은 병폐가 바로 나이, 출신지, 학교, 학과, 종교를 따지는 것이더라. 바로 그런 것이 패거리 형성에 한몫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육십대이든, 이십대이든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만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인터넷 글쓰기에 몰입하게 된 이유다."

- 이번 연구작업에 약점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
"미당의 시 전체를 거시적으로 고찰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국화 옆에서'라는 한 편의 시를 미시적으로 고찰한 것이었다. 물론 '국화 옆에서'를 센터에 두고 '신라초' '동천' 등과 불교정신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공부했다. 미시적 고찰을 하다 전체적 시야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서정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할 생각은 없나.
"김윤식 교수는 언젠가 서정주 평전을 쓰겠다고 피력한 바 있지만, 나로서는 그런 책을 쓸 생각이 없다. 그저 내 글이 본격적인 미당 연구의 하나의 기폭제가 되길 바랄 뿐이다. 물론 더 좋은 글 나오면 내 글은 유효성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 글의 가치가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미련 없이 그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 앞으로 하고 싶은 공부는.
"나는 매년 논문을 1편씩 쓴다.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나에게 주변에서 '너 아직도 논문 쓰니?'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다세대 주택 짓던 사람이 불황에도 다세대 주택을 짓듯이, 문학을 공부하는 나는 계속 문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작가의 미학을 내 나름의 시각으로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에 전력투구하고 싶다. 네거티브한 작업에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본다."

- 그런 작가가 보이나.
"물론이다."

- 실명을 밝힐 수 있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는 그 분의 삶과 문학을 심층적으로 고찰한 책을 쓰고 싶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작가의 미학을 밝히는 것에 시간을 투여하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

/정지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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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비밀" - 서평울보공주|2006.04.06 

지은이 : 김환희
발행일 : 2001.9.
펴낸곳 : 새움


시와 시인은 다르다고?
친일시와 친일시인은 다르다고?

 

서정주는 유명한 친일 시인이다. 유명하고 말고.
처음 참고서에서 그의 [마쓰이 히데오 송가]를 읽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내가 미당처럼 토속적이라 불릴 만큼 진하게 겹칠된 느낌의 시는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일 수 있겠지만,
나는 미당이 탐탁치 않다. 정확히는 그가 최고의 문화상을 타고 민족을 대표한다고 칭송받는 일이 탐탁치 않다.
이 책은 인터넷 창비게시판에 올라왔던 창비무명인의 글을 출판한 것이다.
내용이 전 국민의 애송시인 [국화 옆에서]가 친일시임을 증명하는 것이니 미당이 죽어 추모분위기가 한창이던
시기에 출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버리기엔 글이 아까워 창비 게시판에 올렸다가 네티즌의 열성으로 출판까지
이르게 된 책이다. 서론은 그만하고 글의 내용으로 들어가자.
[국화 옆에서]는 국어 혹은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다들 잘 아는 그 시다.
어째서 친일시라 하는 지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노오란" 국화, 즉 황국이다. 황국은 천황의 상징이다. 게다가 이 국화는 여러 송이가
수북한 모습이 아니라 "한 송이" 국화꽃이다. 상징화된 꽃이라는 뜻이다. 천황의 상징과 정확히 일치한다.
둘째, 전통적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 국화꽃은 [오상고절]이라 하여 선비의 상징이다. 남성적인 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누님" 같은 꽃으로 등장한다. 일본에서 천황가의 시작은 태양신 아마테라스이며, 아마테라스는 
[누님]의 이미지에 들어맞는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인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쫓겨나
한반도로 가서 단군이 되었다는 이론이 널리 유행했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남동생, 일본은 누나라는 말이다.
시의 "누님"과 떼어놓고 생각하기에는 의심스럽지 않은가?
셋째, 이 시에는 "소쩍새", "천둥" 같은 일반적으로 우리네가 누이를 연상할 때 드는 것과 너무나 다른 어둡고 강한
시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시를 분석해보면 1연과 2연의 상황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묘사된 아마테라스의
탄생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마테라스의 아버지는 아내를 잃어 고통스러워하다가 -소쩍새의 울음- 황천국으로
여행을 하고, 거기서 아내의 변한 모습에 놀라 도망치다가 천둥신의 쫓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우연일까?
넷째, 서정주는 일본 신화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시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당 스스로 말하기를 이 시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국화 옆에서]의 창작시점은 1946년으로 일본천황이 패전을 인정하고 인간선언 -그 전까지 일본국민과 그 지배를 받던 조선인들에게 천황은 신이었다- 을
한 상황이다. 미당으로서는 느끼는 바가 많은 시기였을 것이다.
굉장히 짜임새 있게 논리를 전개해나간다. 문학이론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면 이건 아냐, 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굉장히 설득력 있는 논리였다. (물론 내가 평소 미당을 탐탁치않게 보는 사람이어서,
혹은 적어도 지난 번 미당이 죽을 때 온 신문이 난리 치는 것에 삐딱했던 사람이어서 쉽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파고 드는 것이 추리소설 같은 재미마저 있으니 일독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친일시면 어떻냐고? 그 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냐고?
나는 친일시라면 국민들이 암송하도록 권장해서는 안된다고, 적어도 교과서에서는 빼야한다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민족이니 정체성이니 운운해가며 일본만화도 못보라는 사람들이 미당이 죽자마자 미당문학상을
급조하는 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다. (그 쪽에는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니까, 라고 포기하고 있지만.)
미당이 그 많은 사람들보다 비난을 더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민족을 대표하는 최고의 시인이라는 칭송을
받기 때문이다. 그가 일개 필부라면 나같은 인간까지 알고 나쁘다하진 않을 게다. 이름값은 해야하지 않을까? 
어느 가난한 농민이 했대도 친일은 친일이되, 그에 대한 비난의 경중은 그 영향력과 자발성 등에 의해 달라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구멍가게 아저씨가 돈 들고 튀는 것과 김우중이 자산을 빼돌리고 숨는 것이 다른 것처럼. 
난 그 이름 앞에 [친일을 했던]이란 말을 지워 버리지만은 말길 바란다. 적어도 그가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반성 한 마디 안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친일을 했던 혹은 독재정권에 칭송시를 바쳤던 민족 최고의 시인, 이라고 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은 것 같으니까.
(여기서 누구처럼 그렇게 교묘하게 친일시를 완성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칭찬해 버리면, 으음..글쎄-_-;;)
시인과 시는 정말 별개의 것일까? 친일시를 쓰니까 친일시인인 거잖은가? 만들기만 하고 끝, 이젠 관계 없음?
죽은 사람은 논하면 안되는 것일까? 죽으면 모두 덮어두고 함께 쉬쉬, 그 사람은 효자였어, 그 사람은 훌륭했어.

...그러게 왜 이완용은 역적이고 미당은 위대한 예술가냐고.

 ○그 당시 일본 왕실의 국화꽃 문양은 작위를 받은 자 이상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대다수의 우리민족은 국화꽃이 일본 왕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복 
     이후 지금까지 근 55년이 넘도록 국화꽃과 거울이 지니는 이러한 문화적 상징성이 우리 문학작품의 해석에 
     있어서 고려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 문학판에선 국화꽃과 거울을 일본문화와 연계지어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스러울 정도로 금기시되어왔다고나 할까요.     -pp.30-31
 ○따라서, 미당은 1946년 가을 내지는 초겨울, 일왕 및 그 가족을 상징하는 노오란 국화꽃을 보면서, 
     적국인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현인신에서 범인(凡人)으로 몰락한 일왕을 떠올리며,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꼈을 개연성이 큽니다. 인간 선언 후, 일왕은 국화 훈장과 국화 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일왕복을 벗어 버리고
     평복을 입은 채 전국을 순례하면서 자신이 보통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다녔는데, 이러한 
     일왕의 극적인 변모를 지켜보면서 미당의 마음속이 온갖 상념으로 복잡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참고 삼아 말씀드리면, 그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나이는 46세였습니다.     -pp.56-57
 ○네 번째 마당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국화꽃의 시상 속에 중첩되어있는 여러 여인들의 영상에 대해 
     언급하면서 "산악(山岳)과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에 대해선 그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있는데, 저는 그 태모(太母)의 이미지를 지닌 여인이 
     아마테라스라고 생각합니다.     -p.91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일제강점기의 미당의 친일행위와 해방 후의 지속적인 독재정권 찬양행위를 무시한 채, 
     미당을 시인부락의 족장으로 앉힌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명실상부한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기에는 
     미당에겐 참다운 족장의 덕목 -삶에 대한 통찰력, 준엄한 자기비판, 냉철한 이성, 역사의식, 미래에 대한 비전,
     희생정신 등등- 이 결여되어있습니다. 그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은, 비판정신과 역사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에 
     종천순일(從天順日)의 정신"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주군을 섬기는 "백성의 멘탈리티" 
     내지는 주인을 섬기는 "종의 멘탈리티"를 보입니다.     -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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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시인 가운데 한 명이 미당 서정주(1915~2000)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화 옆에서'를 비롯해 '자화상', '푸르른 날', '귀촉도', '동천冬天' 등 민족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그의 많은 시는 국민적 애송시로 사랑받아 왔다.

하지만 서정주에 대한 평가는 그가 일제 말기에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했고, 독재까지 찬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친일문인의 시가 윤동주처럼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옥사한 시인의 작품과 함께 나란히 교과서에 실려 있어선 안 된다는 논리 때문이다.

이처럼 점점 역사에서, 문학사 가장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는 서정주를 다시 불러세우려는 책이 나왔다. 문학평론가인 이숭원(59) 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쓴 '미당과의 만남'(태학사 펴냄)이다.

이 교수는 미당이 남긴 1천여편이 넘는 작품 중에서 누구나 아는 대표작보다는 그에게 감동을 주거나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 80편을 골라 평설했다.

그는 13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미당의 친일이나 권력 추종의 전력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쓴 많은 좋은 시까지 다 매장하면 곤란하다"면서 "그것도 일종의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광수와 최남선이 잘못했다고 해서 초기의 업적까지 다 부정하진 않듯이 서정주 시의 시적인 가치는 가치대로 보자는 생각에서 책을 썼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가 서정주에 대한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만류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러 저작을 펴내며 문학평론가로서 성취를 인정받아온 그가 나이가 들더니 이상한 짓을 한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이 책을 썼다고 공격받아도 괜찮다"면서 "공격받음을 통해서 그게 하나의 이슈가 돼서 서정주 시인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이 교수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시인은 시 자체로써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당이 지탄을 받는 것도 그의 시에 의한 것이다. 그에 대한 논란을 고려했다면 적어도 친일시와 권력에 아부했던 시까지 포함해 균형을 맞췄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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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비밀"(1):
      ㅡ금기로서의 [국화꽃]과 [거울] 

미당 서정주의 대표시 [국화 옆에서]는 국민적 사랑을 받아 온 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를 암송할 정도로 사랑해 왔고, 또 지금도 대부분의 시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신세대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또한 이 시는, 미당의 수치스런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국정교과서에 수록되었었고 지금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리고 있을 정도로 좋은 시의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미당이 시의 제3연에서 국화꽃을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국화꽃을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걸어 온 후 관조의 경지에 다다른 중년 여인을 비유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어느 신문 기자의 다음 말은 [국화 옆에서]가 그 동안 어떻게 우리 나라에서 읽히고 있었는 지를 잘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ꡒ우리는 중․고교 국어시간에 「국화 옆에서」를 ꡐ모든 풍상을 겪고 인품이 완성된 경지에 이른 40대 누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배웠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으며 실제 미당 자신도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경향신문 2000-06-29). 

하지만 [국화 옆에서]는 기존의 이러한 원론적 해석이 모범답안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그 상징성이 단순한 시는 아닙니다. 미당이 시 속에서 "국화꽃=누님"이란 은유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고, 또 외견상 시의 의미구조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해 보여도, 이 시는 심층에 간과하기 힘든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 문제점은 대충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데, 우선 오늘은 한 가지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국화 옆에서]가 보여주는 첫번째 문제점은 3연에 등장하는 거울과 그 국화꽃이 노오란 꽃잎을 지닌 황국(黃菊)이란 점입니다. 무릇 문학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 상징은 그 의미가 다각도로 검토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국화 옆에서]읽기는 이 시에 등장하는 상징물인 황국과 거울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거의 대부분의 평론가들의 [국화 옆에서 읽기]가 "황국=친근한 누님," "거울=관조의 경지"로 등식화 시켜서 비유적으로만 해석했지, 상징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칼 융의 용어를 빌린다면, 기존의 평론가들은 국화꽃과 거울을 표지적(semiotic)으로만 이해했지, 상징적(symbolic)으로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참고자료"satgatlim님께: 융의 상징론에 관한 답변"(click)). 

우선 국화꽃의 상징성에 대해서 설명드리기 전에 그림을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왼편의 그림은 일본천황의 휘장이고, 오른편의 그림은 신궁에서 "20세기 일본의 신주(神主)가 신토(神道)의 신 태양을 상징하는 거울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칼 G. 융, {인간과 상징}, 열린책들, 22쪽). 

특히 일제 강점기라는 치욕스런 역사를 살아 온 우리 국민에게 있어서 국화꽃과 거울은 신중한 고찰이 필요한 상징물입니다. 왜냐하면 황국(黃菊)은 일본에서 지난 14세기 이후로 일왕과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었고, [고사기]를 보면 거울은 일왕이 현인신(現人神)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란 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국화는 칼과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황국은 황실의 문장(紋章)으로서 황실가족의 모든 휘장을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형태--일왕의 예복, 일본국가훈장, 일본우표,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무기 등등--로 일본 제국주의 문화와 삶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Japanese Royalty Flags. by Phil Nelson. 2000-09-09 (click)) 

서구에서 발간되는 각종 세계 상징 사전을 살펴보아도, 국화꽃은 일차적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꽃이며 일본황실 내지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소개되고 있다. 프랑스의 {상징 사전}은 국화꽃의 상징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국화의 꽃잎이 질서정연한 배열로 퍼져나가는 방식으로 인해 이 꽃은 본질적으로 태양의 상징이 되며, 따라서 장수(長壽)와 불멸(不滅)을 뜻한다. 국화꽃이 일본 황실의 문장(紋章)이 된 이유도 그러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16개의 꽃잎을 지닌 국화꽃으로 된 일본 문장(紋章)엔 태양의 이미지와 나침반 지침면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는 데, 그 중심에서 천황이 세상을 통치하고, 우주의 모든 방향을 집약한다" Jean Cheval‎!!ier & Alain Gheerbrant,, Dictionnarie des symboles (paris: Robert Laffont, 1982) 247쪽. 

일본 문화에서, 국화꽃이 태양신과 일왕의 상징물로 해석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울도 태양의 상징물로 해석됩니다. 보편적 문화상징으로서 '거울'이란 기표(signfier)는 여러 상징적 기의 (signfied)--통치자, 부부애, 자기성찰, 달, 태양, 진실, 자기애 등등--를 지닌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일본 문화 속에서의 거울은 천손강림시에 태양신이 자신의 혼(魂)을 담아 하사한 신기(神器)로 전해지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태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은 삼종신기(三種の神器)의 하나로 이세신궁에 모셔지고 있고, 또 일제 강점기엔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을 주신(主神)으로 삼는 조선신궁에도 거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근 50년이 넘도록 국화꽃과 거울이 지니는 이러한 문화적 상징성은 단 한번도 우리 문학작품의 해석에 있어서 고려의 대상이 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문학판에선 국화꽃과 거울을 일본문화와 연계지어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스러울 정도로 금기시 되어 왔다고나 할까요. 
 
 


"국화꽃의 비밀"(2):
ㅡ일본문화제국주의의 공략 

어제의 제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네티즌들께 감사드립니다. 김흥년님의 조언은 저를 배려해서 해주신 유익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쇼쇼쇼님의 따스하신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옥문수님의 냉소엔 좀 섭섭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관심의 표시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쓰는 글엔 참고자료소개가 좀 많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 가방끈이 길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학자들과 작가들의 표절이 난무하는 이 땅에서 게시판에 올리는 글이라도 참고문헌을 되도록 정확히 명시함으로써 남의 지적 재산권을 침범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티즌들께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학술적 글쓰기라는 것이, 작문(composition)의 어원이 '짜집기'(put together)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남의 글로 레고 장난감으로 집짓기 하듯 결합시키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그 '짜집기' 과정에서 내 것과 남의 것의 차이는 제대로 밝히는 관행이 이 땅에도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태 22: 20-21)" 

그럼, 일단 김흥년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과연 "미당이 일본 문화권에서의 국화꽃과 거울의 상징적 의미를 알고 그 시를 썼는 가?"를 실증적으로 증명하든지 아니면 개연성있게 풀어 나가든지 해야 할 의무가 제게는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제 논문은 실패한 논문이 되겠지요. 하지만, 제 논문의 성패 여부와는 상관없이, 저는 나름대로 제 논문이 하나의 문제제기로서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번째 이유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뼈아픈 상징일 수 있는 황국(黃菊)의 상징적 의미가 우리 국민 및 꿈나무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국화 옆에서]는 아직까지 우리나라 고교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한 때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황국(黃菊)을 "성숙한 누님같은 꽃"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듭니다. 또 제가 친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유서깊은 광주 모(某) 고교에서 처음 교기와 배지를 만들 때 그 제작을 일본에 주문했었는 데, 일본인들이 교기에 음흉스럽게도 국화꽃 문양을 넣었다고 합니다. 제가 인터넷으로 그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까 아직 그 교기와 배지가 바뀐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꿈나무들의 주체성확립을 위해서도 교육현장에서 국화꽃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광고 기법의 하나로 잠재의식적 광고 (subliminal advertising)라는 것이 있지요. 영화 필름의 한 컷에 "콜라를 마셔라"라는 문구를 새겨 넣을 경우, 사람들은 나중에 음료를 사 마실 때 콜라를 잠재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되지요(잠재의식적 광고). 

영화 필름 속의 한 컷도 그런 무서운 효과를 지니는 데, 암송할 정도의 애송시가 지닌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따라서는, 저는 아이들이 황국(黃菊)을 보고 서정주의 시만 떠올릴 것이 아니고, 그 끔찍스런 일본 황실의 휘장도 함께 떠올리길 바랍니다. 

2) 두번째 이유는, 이 시가 자랑스럽게 외국어로 번역되어 서구에 소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여러 세계 상징사전을 찾아보면, 거의 어김없이 "황국(黃菊)은 일본제국주의의 꽃"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국화꽃은 서구인들에게는 그렇게 다의적인 뜻을 가진 꽃이 아닙니다. 서구인들에게 국화꽃은 '일본황실의 꽃'과 '묘지의 꽃'을 의미할 따름입니다. netscape와 같은 인터넷 영어 검색엔진에서 "chrysanthemum" 내지 "chrysanthemum throne"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시면, 많은 자료들이 뜹니다. 또 서구인들은 일본천황제도를 한결같이 "국화 제위(菊花帝位)"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즉, 서구인들의 머리 속에 "황국=일본천황"이라는 등식이 꽉 박혀있는 데, 일본 강점기의 악몽을 치룬 우리나라에서 "황국=누님"이란 비유를 사용한 시를 좋은 시로 외국에 자랑스럽게 소개한다면, 서구인이나 일본인 눈에 우리 민족은 너무 배알이 없는 웃기는 족속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엔 미당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두 세편의 수필에서 서구인들이 <국화 옆에서>를 이해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시의 암시]란 수필에서 그는 "내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보이고 있는 그러한 고고 청순한 지조 같은 건 그런 빠리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느낌의 습관을 통해서는 전달이 잘 안된다 하는 게 알려진 셈이지요"(292)라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인들이 독일정부에 협력한 자국인들을 어떻게 혹독하게 단죄했는지를 상기한다면, 그들이 우리 민족이 황국을 예찬하는 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닐까요? 

3) 우리가 국화꽃의 상징성에 관심을 지녀야 될 마지막 이유는, 아직까지 이 땅에서 일본의 제국주의가 사라지지 않은 채, 문화의 옷을 입고, 우리 청소년들의 문화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성세대는 이 땅의 아이들이 보고 있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일본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깊게 스며들어 있는 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이 좋아하는 만화영화 {세일러 문}에는 일본 제국주의 및 신도의 상징물인 삼종신기(三種の神器)--쿠사나기의 검,야타의 거울, 야사카니의 곡옥--가 주인공의 마법적 장신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에 관하여], [Japanese Culture: Sword, Mirror, Jewel]). 또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인기있는 마모루 나가노의 공상과학만화 [다섯 별 이야기(The Five Star Stories)]의 주인공의 이름은 아예 일본 천황의 수호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입니다. 그는 미래의 우주왕국(태양성단)을 수 천년 동안 다스릴 불사불멸의 제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일본만화 속의 주인공 아마테라스는 흰색의 황제복을 입고, 목에는 곡옥 목걸이를 하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으며, 머리에는 노오란 국화꽃을 꽂고 있습니다([화이브 스타 스토리즈 홈페이지]). 이렇게 일본의 문화적 제국주의가 우리 청소년들의 내면을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음험하게 공략해 들어오고 있는 데, 우리는 아직도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문학교과서에 실어, 좋은 시의 본보기로 가르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문학 교사들이, 일본 문화의 제국주의적 공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할 말정, 황국(黃菊)을 '관조의 경지에 이른 친근한 누님'의 비유로만 가르친다면 이는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국화 옆에서>의 시인에게 추서되어야 할 상은 국화문양이 새겨진 일본의 일등공로훈장이지 우리 민족의 금관문화훈장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2):
기자는 이 책의 필자인 창비
무명인과 인터뷰를 가졌다. '김환희'라는 실명을 제외하곤 나이도, 
성별도, 출신지도, 출신학교도 밝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진
촬영도 하지 않는다는 까다로운 전제조건을 수용한 뒤에야 성사된 
인터뷰였다.

우선 필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마침 책 날개
에 필자를 소개한 글이 있어 여기 그대로 옮긴다. 

김환희 씨는 네티즌 사이에서는 '창비무명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치한 논리와 해박한 이론으로 인터넷상의 글쓰기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놓았다는 평을 듣는 필자는 이 책을 출간하면서 글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도를 고려해서 처음으로 실명을 밝혔다. 이 책의 
논지가 워낙 문제적이기에 자신을 숨기는 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
에서 내린 결단이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의 얼굴과 출생년도, 출생지, 출신학교를 자세히 
공개하는 것은 피했다. 이 책의 문제적 발언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
지만 '학연(學緣)과 지연(地緣)'이 형성한 그물과 편견으로부터 조금
이라도 자유롭고 싶은 한 문학도의 소박한 소망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끝마친 후에, 미국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그 대학이 주는 장학금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1991년 단편소설의 본질과 서구단편소설 이론의 한계를 분석
한 <단편소설의 수사학>(A Rhrtoric of the Short Story)이란 논문으로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지난 10년 동안 서울과 수도권에 소재한 여러 대학(이화여대,
중앙대, 인하대, 추계예술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의 여러 학과(영문과, 
불문과, 비교문학과, 문예창작학과 등)에서 10여 종이 넘는 다양한 문학
과목을 강의해 왔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사이버 공간에서 논쟁이 됐던 글을 현실 공간에서 단행본으로
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더욱이 첫 책이라고 하는데,
소감부터 말해 달라.
"맨처음 창비 게시판에 이 글을 올릴 때만 해도 열 몇 명 정도만
읽으면 보람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무리 공들여 쓴 글이라도
순식간에 밀려드는 다른 글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 인터넷의
생리 아닌가. 그러나 네티즌들의 반응은 나의 그런 예상을 뛰어
넘고 말았다. 네티즌들의 관심과 사랑이야말로 내 글이 이렇게
단행본으로 묶여져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 인터넷에 이 글을 연재하게 된 동기는.
"지난 해 12월에 미당 서정주 시인이 작고한 후에 신문지상에
실린 문학평론가와 원로학자의 일방적인 미당 예찬론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앙일보가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학상까지 제정하지 않았는가.
미당의 예술성이 제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백일하에 드러난
그의 친일행각을 도외시한 채, 그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민족을 배신한 불행한 예술인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그가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문학상을 만들고,
'단군 이래 최대 시인' 운운하며 영웅으로 받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결국 기성세대의 몰지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나라도 나서서 젊은 꿈나무 세대가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 국민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로 비판하
면서도, 구체적 친일 근거가 드러난 서정주를 기리고 본받자
는 문학상을 제정한다는 사회적 흐름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누가 미당 예찬론을 펼쳤나.
"유종호 교수와 김화영 교수가 대표적이다. 특히 유 교수는
미당을 (1)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 (2)부족방언의 마술사
(3)단군 이래 최대 시인으로 극찬했다. 물론 나도 미당이 부족
방언의 마술사라는 점은 인정하는 입장이다. 미당은 우선 
상상력이 뛰어나고 나름대로의 시작법 정신을 가지고 시를 쓴
'천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결여
했다는 점에서는 '백치'이기도 했다.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은
모든 족장에게 필요한 덕목이거니와,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급
한 마술사'보다 '고급한 마술사'가 더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연구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
"미당이 작고한 뒤 유종호, 김화영 교수가 신문에 올린 글을
보고 놀랐다. 다각도로 미당을 고찰하지도 않고 서슴없이 극찬
하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추악한 삶에 아름다운
예술이 있는가?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의문점이었다. 사실 미당의
작품을 즐겨 읽지 않아 처음에는 주저도 됐다. 그러나 사상과
삶의 문제점을 덮을 만큼 미당의 예술성이 뛰어난지에 대해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미당의 시뿐만 아니라 자서전, 수필도
읽고, 전문가들의 자문도 구했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2월 말이었고, 6월 말에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으니, 얼추 4개월
이 걸린 셈이다."

- 그렇게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성경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이 나오는데, 공부
하지 않고 결론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당이 장인정신을
가지고 시를 썼으면 그렇게 인정하고 평가할 생각으로 공부
했다. 그러나 미당을 3류급 시인으로 매도할 수도 없었지만,
위대한 장인으로 평가할 수도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진정한 장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문학적 거장으로서 사랑할
수 없었다."

- 기존의 미당 담론과는 다른 '국화꽃의 비밀'만의 차별성이 있다면.
"미당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진영이 있는데, 두 진영 모두 자신
들의 기존의 논리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선 친(親)
미당파는 미당의 예술성이 그의 삶과 사상의 허물을 덮어주고도
남을 만큼 뛰어나다는 입장이고, 반(反)미당파는 미당에 대한 신화
가 문화권력자로서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며 
미당은 3류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 두 입장은 현재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데, 양측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대화조차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고은 시인의 미당 비판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는데.
"고은 시인에게 가해진 반격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고은 시인도 결국 정치문인 아니냐. 둘째 고은 시인은 미당의
제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설사 '허물 있는 자'라도 '더 허물 있는 자'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미당이 고은의 실력을 인정해줬는데 배은망덕
해서야 되겠느냐는 비판도 본질을 벗어난 잘못된 것이다. 나는
거꾸로 이렇게 묻고 싶다. 도대체 삶과 분리된 예술이 있는가?
사상이 담기지 않은 시와 예술이 있는가?"

- 지금 미당 담론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는 미당 담론의 디딤돌 하나를 놓는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작품을 통한 작가 연구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작가가 상징과 신화의 구조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눈여겨 살펴봤다. 반미당파는 86년에 나온
<친일문학선집>을 적절히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현대사 자체를 깊이있게 평가하는 글은 적었다고
본다. 나는 내 글이 미당 연구의 작은 참고자료가 되길 희망할
뿐이다."

- 이 책을 통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미당의 시가 친일시라는 단선적 주장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미당의 시를 교과서에 싣기 전에, 민족의
이름으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 전에, 그리고 미당상을
제정하기 전에, 미당에 대한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갖더라도
늦지 않다. 사실 장준하 선생도 은관문화훈장밖에 받지 못했다.
우리는 한번 자문해 봐야 한다. 현실순응적, 종천순일적 삶을
살아온 미당이 장준하, 함석헌보다 과연 위대한 인물인가.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형국을 보라. 시간에 쫓기듯, 뭐에라도
쫓기듯, 미당 신화를 만들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글은
그러한 일방적 흐름에 대한 절박한 반론이자 문제제기이다."

- 책 발간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사회 발언을 해볼 생각은 없나. 
"내 자신 개혁인사로 비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웃
사이더의 정신을 가져야 하는 문학연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
했을 뿐이다. 그리고 평론 발표 등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할
생각도 없다. 책상물림을 벗어난 인생을 살 생각도 전혀 없다.
비교문학을 전공한 문학도로서 좋은 문학연구가가 되는 것이
나의 유일한 꿈이다. 그 과정에서 평생 두세 권의 책을 내더
라도 그것이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창작자에게 좋은
참고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책을 많이 내는 것은 내
적성에 안 맞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기는 싫다."

- '국화 옆에서'를 애송하던 일반 국민들은 이 시가 친일시라는
주장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말해줄 생각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와 접하게 될 때는 두 가지 경로를 갖게
된다. 자율적 선택과 타율적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 친구의
권유를 받거나 서점에서 자신의 의지로 직접 선택하는 경우가
자율적 선택이라 할 수 있는데, '국화 옆에서'는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에 수능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 접하게 된 타율적
선택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 국민은 학창시절 문학교사가 제시하는 모법답안을 통해
이 시를 접했다. 그런 사실을 망각한 뒤, 20∼30년 뒤 마치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착각한다. 다시 말해 '국화 옆에서'에
대한 허상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굳어진 허상을
깨는 과정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작업은 그런 충격에
대한 상쇄작용인 셈이다. 내가 부지런히 미당에 대한 자료와
책을 읽고 이 글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 백낙청 교수도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했는데.
"백 교수의 논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국화 옆
에서'에 대한 신화적 해석은 일리가 있지만 황국(黃菊)을 천황
으로 읽은 역사적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 난 백 선생이 충분히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본다." 

- '창비무명인'이라는 필명을 가지고 창비 게시판에서 활동해 온
것은 언제부터인가. 
"작년 말에 있었던, 표절을 둘러싼 김윤식-이명원 사건 무렵
부터였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이미 읽었던 터라 김 교수와
이명원 씨의 책을 구해 비교해가며 정밀검토를 했다. 그 과정
에서 나는 이명원 씨가 제기한 것보다 표절의 양상이 더 참담
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대학과 문학계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이명원 씨는 소영웅주의자로 몰리는 양상이었다.
이명원 씨에 대해서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표절 건과 관련된 내
생각을 정리한 글을 올렸다.(참고로 이 글은 1천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네티즌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 '창비무명인'이라고 작명(作名)한 사연이 있는가.
"당시만 하더라도 한번만 글을 올릴 생각이었는데, 그때 사용
했던 아이디가 '무명씨'였다. 그런데 'S대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무명씨라는 내 아이디를 도용해 나와는 정반대의
논조로 글을 올렸다. 논쟁의 와중에 같은 이름으로 글을
올린다는 것은 독자에게 혼돈을 줄 우려가 있다고 여겨
'창비무명씨'라고 개명했다. 처음에는 '원조무명씨'라고
하려고도 생각했는데, 어감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한때는
'책상퇴물'이라는 아이디로 바꾸기도 했는데, 다른 네티즌
들이 내 트레이드 마크인 창비무명씨로 돌아가라고 권고
하는 바람에 바꾸게 된 것이 바로 '창비무명인'이다."

- 나이는 얼마나 되나. 
"공개하고 싶지 않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근
10년 대학에서 강사로 살면서 겪은 병폐가 바로 나이,
출신지, 학교, 학과, 종교를 따지는 것이더라. 바로 그런
것이 패거리 형성에 한몫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인터넷
에서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육십대이든, 이십대이든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만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인터넷
글쓰기에 몰입하게 된 이유다."

- 이번 연구작업에 약점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
"미당의 시 전체를 거시적으로 고찰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국화 옆에서'라는 한 편의 시를
미시적으로 고찰한 것이었다. 물론 '국화 옆에서'를 센터에
두고 '신라초' '동천' 등과 불교정신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공부했다. 미시적 고찰을 하다 전체적 시야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서정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할 생각은 없나.
"김윤식 교수는 언젠가 서정주 평전을 쓰겠다고 피력한 바
있지만, 나로서는 그런 책을 쓸 생각이 없다. 그저 내 글이
본격적인 미당 연구의 하나의 기폭제가 되길 바랄 뿐이다.
물론 더 좋은 글 나오면 내 글은 유효성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 글의 가치가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미련 없이 그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 앞으로 하고 싶은 공부는.
"나는 매년 논문을 1편씩 쓴다.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나에게 주변에서 '너 아직도 논문 쓰니?'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다세대 주택 짓던 사람이 불황에도 다세대 주택을
짓듯이, 문학을 공부하는 나는 계속 문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작가의
미학을 내 나름의 시각으로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에 전력
투구하고 싶다. 네거티브한 작업에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본다."

- 그런 작가가 보이나.
"물론이다."

- 실명을 밝힐 수 있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는 그 분의 삶과 문학을 심층적으로
고찰한 책을 쓰고 싶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작가의 미학을 밝히는
것에 시간을 투여하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


菊花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松井伍長 頌歌(마쓰이 히데오 송가)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몇만 리런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 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몇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
(1987)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육천만동포의 지지를 얻어셨나니

이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국화꽃의 비밀(3) : 

제 미발표 논문에서는 각주1에 실명과 더불어 언급한 사항입니다만,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미리 밝혀야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국화 옆에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읽게 된 데에는, 제가 사부(師父)님으로 모시고 있는 어떤 교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문화권력 및 매문(賣文)과는 거리가 먼 '순수학자'이시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일제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니시고 일본어에 능통하신 사부님은 제게 3가지 사항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국화꽃은 일본황실의 문장(紋章)이다. 2) 미당은 <국화 옆에서>를 쓸 무렵, <마쓰이 히데오 송가>를 썼다. 3) "국화꽃=누님"은 한국인의 일반적 정서에는 부합되지 않는, 뭔가 수상쩍은 구석이 있는 이미지이다. 그러한 그 교수님의 견해를 참고 삼아 자료조사를 시작했습니다만, 2)의 경우엔 실증적 자료를 찾기가 힘들어서 제 논문에 반영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사부님과 나눈 대화를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기존의 <국화 옆에서>읽기가 보여주는 두번째 문제점으로 국문학자나 평론가들의 비평적 관심의 부재를 들고 싶습니다. <국화 옆에서>를 정답이 너무도 뻔한 쉬운 시, 대중적인 취향에 맞는, 격이 떨어지는 시라고 생각한 탓인지는 몰라도, 학자나 평론가들은 이 시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각주1). 제 생각엔, <국화 옆에서>를 가장 세밀하게 텍스트 중심으로 분석한 평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창작자인 미당 자신인 것 같습니다. 미당은 1949년 조지훈, 박목월과 공저한 <시창작법>이란 책에서 자신이 <국화 옆에서>를 어떻게 창작했는 지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미당은 국화에 관한 여러 편의 수필과 <시의 암시>등과 같은 시론에서 <국화 옆에서>를 전문(全文) 소개하면서 창작 배경 및 시어의 상징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미당이 <국화 옆에서>에 이토록 많은 애착을 지닌 것은 그가 이 시를 그만큼 공들여 썼을 뿐만 아니라 그 심층에 다른 많은 암시와 복선을 깔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미당이 그의 시론에서 시의 가장 중요한 특성 내지 구성으로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소량(小量)으로 정선(精選)해 가지는 언어의 그늘에 함축해 지니는 바의 무진(無盡)한 암시력(暗示力)" 내지 "언외(言外)의 암시력(暗示力)의 효과적 구성"이기 때문이다 (각주2). 

<국화 옆에서>를 새로운 각도에서 읽어야 하는 세번째 이유로, 시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의 배합이 보이는 비상식성과 반전통성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선, 시어들--소쩍새, 천둥, 먹구름, 거울, 누님, 국화꽃, 무서리--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들 사이에 부조화와 충돌이 느껴집니다. '누님'의 이미지는 친연성과 평범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누님'의 이미지를 보조하고 보강하는 다른 이미지들이 지나치게 강렬하고 비극적이고 음울합니다. 누님같은 꽃의 탄생을 노래하기 위해, 죽음과 여인의 한(恨)을 연상시키는 불길한 소쩍새와 무서리를 언급하고, 천둥까지 동원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과장이 심하다고 밖에는 달리 말하기 힘듭니다. 그래서인지 고급한(?) 취향을 가진 문학 평론가들은 이 시를 심도있게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국문학자들의 시 해설 가운데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흥규교수와 이어령교수의 견해입니다. 물론 두 분의 해설도 심도있는 고찰은 아니었습니다. 

그[미당]의 생각으로는 봄에 처절하게 우는 소쩍새, 여름의 천둥, 그리고 가을 밤 무서리와 그 자신의 잠 못 이룸이 모두 한송이 국화꽃과 어떤 신비스러운 인연을 가진 것만 같다. 그러나 상식적 논리를 넘어 생각해 볼 때 이 우주와 생명의 신비란 얼마나 깊은 것인가? 더욱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떤 인연에 따라 생긴 것이라는 불교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나 비논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주적 인연의 가능성 위에서 한 송이 꽃의 피어남을 그 앞에 있었던 수많은 괴로움과 시련의 결과로 여기는 상상력이다 (각주3) 

하지만 비상식적인 이미지 구성의 숨겨진 의미를 설득력있게 구체적으로 설명함이 없이, 불교의 인연설 내지 윤회설로 설명하거나 생명 탄생의 장엄한 신비를 노래한 것으로 확대 해석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불교적 관점을 도입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왜 하필이면, 그 많은 봄의 이미지 가운데 소쩍새인가?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여름의 이미지들 가운데 천둥인가? 왜 하필이면, 그 많은 가을의 이미지들 가운데 무서리인가? 과연 이 시를 어느 무명씨가 썼더라도, 김흥규교수가 그렇게 심오한 의미를 담아 해석하였을 지 의구심이 듭니다. 

미당의 국화꽃의 이미지가 지니는 반전통성에 대해선 이어령교수와 박광용교수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많은 학자들은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을 한국 전통의 문학적 맥락과 연계시켜 해석했습니다만, 이어령교수와 박광용교수는 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 두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국화꽃의 전통적인 한국적 이미지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정보(李鼎輔)의 시조--"국화(菊花)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三月東風) 다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매한 인품을 지닌 절개있는 선비라는 남성적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이교수와 박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미당의 국화꽃은 여성적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에 한국문화상징으로서의 전통적 "국화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박광용교수의 해석은 내일 상술할 생각이기 때문에 여기에선 생략하겠습니다). 박광용교수는 [<국화 옆에서>와 이승만,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에 대한 예찬'], <씨알의 소리, 2000년 5. 6월호>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또 이어령교수도 미당의 국화꽃의 독특성 내지 새로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각주4). 

만약 시인 서정주(徐廷柱)의 [국화(菊花) 옆에서]가 은둔을 노래한 도연명이나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예찬한 이정보의 국화였다면 우리는 이 시를 읽지도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당(未堂)의 [국화옆에서]를 읽는다는 것은 곧 국화를 노래한 다른 텍스트와의 차이를 읽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이 국화를 [누님]에 비유한 바로 그 은유이다. 봄에 피는 봉숭아가 여성적인 것이었다면, 국화는 지금까지 남성 그것도 고결한 사대부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미당은 그것을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국화의 성(性;젠다)을 바꿔 버렸다. [군자=국화]가 [누님=국화]로 패러다임을 바꿀 때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이어령교수가 말하는 "그 두가지 다른 느낌"의 첫 번째 특성은 "관념적인 이념의 남성 원리가 감각적인 미(美)의 애정의 여성 원리로" 바뀌게 됨으로써, 기존의 "'먼 남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은일자(隱逸者)'혹은 '책 앞에 앉은 선비'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또 이교수가 말하는 두 번째 특성은 "그냥 누이가 아니라 [나의] 누님이라고 했듯이 매우 가까운 개별성과 혈연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즉, 한국문학 속의 국화꽃이 고고하고 이념적인 존재를 상징하면서 "주위로부터 단절된 배제적 가치"로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당의 국화꽃은 "주위의 모든 것과 친연(親緣)관련을 이루며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당의 국화꽃이 한국고전문학 속의 국화꽃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본 이교수와 박교수의 견해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시 전반에 걸친 그들의 해석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박교수는 나름대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원인을 고찰하고 있습니다만, "국화꽃=이승만"이라는 등식만을 고집함으로써 자가당착적인 일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어령교수의 해설은 미당의 시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본질적인 질문들--'왜 미당이 하필이면 국화꽃의 탄생을 묘사하기 위해 소쩍새, 천둥, 거울, 무서리와 같은 이질적인 시어들을 선택했을까?' '미당의 국화꽃이 그 패러다임을 바꾸게 된 원인 및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미당이 국화꽃의 젠더를 바꾼 것은 그의 독창적 발상인가?' 등등--에 대해선 구체적인 답을 모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펼쳐 나갈 글에서 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모색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국화 옆에서>읽기가 보여 주는 문제점으로 신화적 해석의 부재를 들고 싶습니다. 고대 신화와 전설은 미당의 후기 시 뿐만 아니라, 시 창작 전반에 걸쳐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사>나 <귀촉도>등과 같은 초기 시에서도 살펴 볼 수 있듯이, 미당은 서양과 동양의 여러 신화와 전설에서 소재를 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미당은 외국과 한국의 신화 내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여신과 여걸--이브, 클레오파트라, 헬레네, 선덕여왕, 성모 마리아,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 황진이, 웅녀, 세오녀 등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 미당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天照大神)와 어머니 이자나미 (伊耶那美命)에 관한 창세신화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서른 살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며 살아왔고, 일장기를 아랫목에 세워두고 합장까지 할 정도로 신성하게 생각했으며,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에게 신사참배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각주5). 하지만 일본신화 내지 문화와 연계지어 미당을 해석하는 것은 기존의 학문적 논의에서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기존의 [국화 옆에서] 읽기가 보여주는 이러한 문제점 내지 한계성은, 이 시를 새로운 각도에서 심층적으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국문학자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소홀히 취급해 온 상술한 문제점들은 미당의 미학과 세계관을 보다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국화 옆에서>가 아직도 국민적 애송시로 사랑받고 있는 데다 문학교과서에 실리고 있는 만큼,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내일부터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할 이 글의 본문에서는「국화 옆에서」에 있어서의 국화꽃의 상징성과 일본신화와의 유사성을 역사사회학적인 측면과 텍스트 내재적 측면에서 상세히 고찰하고자 합니다. 
 
 

"국화꽃의 비밀"(4):
ㅡ국화꽃은 이승만일까? 

제 논문의 본론은 크게 두개의 장---역사사회학적 측면의 분석과 텍스트 내재적 측면의 분석--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역사사회학적 측면에서의 분석은 제가 구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를 참고로 해서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사부님이 말씀하신 '해방 이전 창작설'은 일단 실증적 자료를 찾기 힘든 관계로 역사적 고찰에서는 제외시켰습니다. 만약에, 제 사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미당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마쓰이 히데오 송가>를 발표한 1944년 11월 무렵에 <국화 옆에서>를 쓴 것이 확실하다는 고증적 자료만 있다면, 제 글은 수정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고증적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감스럽지만 저는 일단 미당의 횡설수설하는 회고담을 중심으로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대해서 조사했습니다. 실증적 자료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역사적 고찰을 할 경우, 잘못하면 그야말로 '무당판수놀음'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미당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하려는 의도보다는 미당이라는 야누스적 인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해보자는 의도에서 글을 쓴 것입니다. 저는 비록 미당의 추악스런 삶을 혐오하지만, 예술가로서의 미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의 시집과 시론을 성실하게 읽었습니다. 도대체 유종호교수나 김화영교수 같은 원로 비평가가 미당이 작고했을 때, 그의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미당을 극찬했는 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1: 박광용 교수의 글과 발표 당시의 국내상황 

제 논문의 본론의 첫번째 장에 해당되는, <국화 옆에서>에 대한 역사사회학적인 고찰의 경우, 박광용교수가 <[국화 옆에서]와 이승만,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에 대한 예찬'>이란 글에서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고 있는 만큼, 그의 견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제가 박광용교수의 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국화꽃=이승만"으로 본 그의 견해를 지지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서정주의 국화꽃을 어떤 특정 개체나 인물을 상징한다고 보기보다는 좀 더 초월적인 존재, 즉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인 삶을 살다 간 미당이 섬긴 '하늘'과 '태양'과 같은 존재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 미당은, 일제시대에 히로히토왕과 아마테라스를 하늘과 태양으로 생각하고 섬겼듯이, 해방 후에도 여러 다른 '하늘'(天)과 '태양'(日)--이승만, 전두환, 단군, 웅녀, 세오녀, 선덕여왕 등등--을 섬기고 따랐던 것 같습니다. 미당이 섬기는 이 초월적 존재는, 종이 섬기는 주인, 백성이 섬기는 주군에 비유될 수 있으며, 미당은 주어진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그에게 하늘과 태양이 되어줄 수 있는 인물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서 살았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가 섬긴 일군(一群)의 주군(主君)들의 정점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박광용교수가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을 이승만으로 본 것은 이 시가 발표될 당시--1947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의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박광용교수가"가을에 피는 국화꽃은 외국에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나이든 독립투사"인 이승만을 상징한다고 해석한 것에 대해, 이남호 교수는 "<국화 옆에서>는 미당의 수많은 명시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시에 나오는 국화를 이승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시를 전혀 모르는 자의 무식한 소리이므로 반박할 가치도 없다. '국화 옆에서'에 표현된 우리말의 아름다움, 삶에 대한 성숙한 통찰과 의젓한 태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해석을 할 수가 없다"라고 일축하였습니다 (경향신문 2000-07-10).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국문학자가 보인 이러한 고압적인 태도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광용교수의 새로운 해석은 작년 여름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긴 했어도, 중앙 매스컴과 문단의 주목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습니다(제가 이 논문을 쓰면서 자료조사를 열심히 하고 미당의 시론과 자서전등을 찾아 읽은 것도, 저의 글이 박교수의 글처럼 문화권력적 평론가들의 희생양이 되어,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불운한 운명을 맞이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하지만, 박광용교수의 글은 시를 주로 텍스트 외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역사적 사실을 다소 자의적으로 해석한 문제점이 있긴 해도, "시를 전혀 모르는 자의 무식한 소리이므로 반박할 가치도 없다"고 혹평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형편없는 글은 아닙니다. 오히려 박광용교수의 글은 기존의 문학연구가들이 그 동안 소홀히 다루어 온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새삼 환기시킴으로써 이 시를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폭넓게 해석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박광용교수가 국화꽃을 이승만으로 본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그는 미당의 국화꽃의 이미지가 도연명이나 이정보의 국화꽃의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한국과 중국의 전통문화 속에서, 국화꽃은 "'높은 뜻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면서 살아가는 은자(隱者),' 곧 한 사람의 서민으로 살아가는 뜻 높은 선비"를 상징하는 반면에, 일본문화 속에서 국화꽃은 황실을 상징하는 고귀한 꽃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51쪽). 하지만 박광용교수는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이 일왕을 상징한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위상이 일왕과 다름없었던 이승만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 지는, <조선조설사>를 쓴 국문학자 김태준이 「단군론」에서 "국수주의적 역사 등이 천조대신(天照大神) 대신에 단군(檀君)을 가르치고, 왜왕(倭天皇) 대신에 이승만을 우상화하고 있으며 . . . "라고 경고한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박교수의 글 55쪽에서 간접인용). 즉 해방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천조대신' 대신에 '단군'을, '일왕' 대신에 '이승만'을 숭배했는 데, 그러한 외견상의 민족주의적 경향이 냉철한 역사의식과 자기성찰이 결여된, 당대의 시대상황에 순응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미당의 경우,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성향은 농후했습니다. 미당은 [내가 본 이승만 박사]라는 글에서, 이승만을 대면하기 전에, "적어도 하늘의 庶子 桓雄의 아드님--檀君 비슷한 모습에, 그렇지, 적어도 그리이스의 神들의 우두머리--제우스만큼은 천둥소리 나게 하는 눈살과 이맛살에. . ."를 상상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각주1). 일왕과 천조대신을 섬겼던 미당이 어느 사이에 민족주의자가 되어서 이승만을 상상하며 환웅과 단군을 떠올리게 되었을까요?(부연설명 드리자면, 흔히 평자들이 <신라초>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및 다른 많은 수필에서 미당이 삼국유사 내지 삼국사기를 소재로 삼아 "단군," "웅녀," "세오녀," "파소" 등등을 형상화한 것을 갖고 민족정신 운운하는 데, 그것이 진정한 민족사랑에서 출발한 것인지에 대해선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민족주의의 옷을 입은 친일의 또 다른 변이가 아닌지 살펴 보아야지요. 또 저는 <질마재 신화>에 나타난 미당의 독특한 신(神)의 개념이 지닌 독자성과 민중성이 일본의 신(神, 가미)의 개념과 많이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직관(?)을 입증하기 위해선 많은 자료를 토대로 설득력있는 글을 써야 되겠지만요.) 

박광용교수가 국화꽃을 이승만의 상징으로 본 구체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서정주가 그 당시 이승만의 전기를 집필했었다는 점입니다. 박광용교수는 1947년 여름부터 이승만의 집에 드나들면서 미당이 전기를 집필했었다는 사실과 그가 나중에 쓴 수필 <이승만 박사의 곁>(<서정주 문학전집>3)에서 회고한 내용에 주목합니다. 미당은 "그(이승만)와의 반 해쯤의 접촉은 내게 은근히 큰 힘이 되었다. 늘 짓눌리면서도 끈질기게 뚫고 나오는 민족혼의 상징을 그에게서 가까이 느끼고, 일정 말기 한 때의 엉터리였던 내 오판을 대조해 보고, 다시 살 마련과 용기를 내 속에 일으키는 데에 아주 큰 힘이 되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는 데, 박광용교수는 이러한 이승만의 이미지가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의 이미지와 동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각주1). 박광용교수가 국화꽃을 이승만의 상징으로 본 또 다른 이유는, 시 제목이 이승만과 연관되어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광용교수는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이 이승만을 상징하기 때문에, 시인이 <국화를 먹으면서> 내지 <국화와 말하면서>라는 제목 대신에 친근하게 우러러 보이는 <국화 옆에서>란 제목을 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승만을 회고하는 수필의 제목이 시 제목과 유사하게 <이승만 박사의 곁>이라고 붙여진 것도 "국화꽃=이승만"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박광용교수의 지적이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시의 창작 시기와 시어의 해석에 있어서 자의성이 짙습니다. 우선 미당은 국화를 소재로 쓴 수필 <국화III>에서, "1946년 해방 이듬해의 가을 어느 날 밤 잠이 잘 안오던 끝에 나는 뜰에 피어있는 국화꽃들을 생각하며, <국화 옆에서>라는 한 편의 시를 썼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각주2). 이 회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국화 옆에서>의 창작 시점은 발표된 시점인 1947년 11월보다 일년 남짓이나 앞선 것이 됩니다. 즉 <국화 옆에서>는 이승만을 만나서 전기를 집필하기 시작한 시점인 1947년 7월 보다 훨씬 오래 전에 씌여 진 것이 됩니다. 따라서, 「국화 옆에서」의 국화를 이승만으로 단정하기보다는 그 이전에 모델이 된 또 다른 인물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해석이 될 것입니다. <국화 옆에서>를 1946년 가을에 쓰게끔 만든 인물 내지 사건이 있었을 것이고, 여러 사유로 인해 발표 시점을 미루다가, 이승만을 만난 이후에 다소의 수정을 거쳐서 발표되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따라서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은 창작의 초기에 모델이 된 어느 인물의 이미지와 이승만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박광용교수는 창작시기와 발표시기의 편차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발표 시점만을 중시해서 국화꽃을 일관되게 이승만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박광용교수의 "국화꽃=이승만"이라는 등식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또 다른 이유는, 미당의 국화꽃이 지니는 여성적 이미지의 독특성을 인지했으면서도 이 여성적 이미지가 이승만과 어떻게 부합될 수 있는 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박광용교수는 미당의 국화꽃의 이미지가 일본문학 속의 여성의 이미지와 흡사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일본 최고 수준에 드는 단편소설로 인정받는 하야시 후미코(1903-1951)의 [철 늦은 국화]는 1948년에 발표되었는 데, 여기서도 고난의 세월을 겪은 55세라는 나이로 해서 '대단한 분별력을 가진 . .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는 단아한 표정'의 여인을 국화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마치 '거울 앞에선 누님'과 같이"(51-52). 하지만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미당의 시는 1947년에 발표되었는 데, 후미코의 소설은 1948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입니다. 1947년 이전에도, 후미코의 소설처럼, 일본문학 속에서 국화꽃이 여성적 이미지를 지닌 상징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는 지를 알아야, 미당이 일본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국화꽃=누님"이라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을텐데, 박교수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교수가 "이승만=국화꽃 누님"이란 등식을 형성한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국화꽃의 특징: 

1) 오랜 세월의 여정을 거치면서 잘 손질되어 고귀하게 우러러 보이는 품성을 지닌 꽃 

2) 명치유신 이후에는 권력의 정통성을 지닌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가진 꽃 

3) 분별력과 단아함을 지닌 여인의 이미지를 지닌 꽃 

이승만의 특징: 

1) 모든 풍상을 다 겪어서 인품이 완성의 경지에 이른 우러러 보이는 낯익은 노인 

2) 해방 후의 한국에서 천황의 위상을 지닌 존재 

3) 분별력 있는 단아한 자세를 지켜서 친근하게 우러러 보아야 할 누님같은 존재 

위의 도식에서 1)과 2)는 서로 부합된다고 볼 수 있는 데, 3)의 경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과연 이승만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지닌 양성적인(兩性的, androgynous)인 이미지를 갖는 존재인지를 좀 더 개연성있게 설명해야 되는 데, 박광용교수의 글은 이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946년 가을에 서정주로 하여금 「국화 옆에서」를 쓰게끔 만든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은 누구일까요? 이를 살펴보기 위해선, 미당의 말을 좀 더 주의 깊게 들어 보고, 당대의 한국의 역사적 상황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적 상황도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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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비밀"(5):
ㅡ[국화꽃=천황+천조대신]일까? 

역사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바로 읽기2 

그렇다면, 1946년 가을에 서정주로 하여금 「국화 옆에서」를 쓰게끔 만든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은 누구일까요? 상술한 바 있는 <시 창작에 관한 노-트>를 보면, 미당은 <국화 옆에서>의 창작시기에 대해 앞서 인용한 회고담과는 상당히 다르게 진술합니다. 이 글에서 미당은 <국화 옆에서>가 갑자기 어느 날 쓰게 된 시가 아니고,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된 다양한 여성적 이미지들이 중첩되고 결합되어 생긴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좀 쑥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마는 내가 二十代에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있는 四十代의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흥! 저 아주머니는 핼쓱한 게 밉상이야. 얼이 빠졌어!'하고 비웃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지만, 인제 이 <국화 옆에서>를 쓸 무렵에는 어느 새인지 거기에서도 한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새로 이해하게 된 것도 서상한 바와 같은 것들의 많은 되풀이 되풀이의 결과임은 물론 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일(靜溢)한 사십대 여인의 미의 영상은 꽤 오랫동안--아마 2, 3년 그 표현의 그릇을 찾지 못한 채 내 속에 잠재해 있다가, 1947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 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 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형상화 공작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각주1). 

우선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창작시점은 1946년이 아니라 1947년이 되고, 국화꽃이 상징하는 '사십대 여인의 미의 영상'이 미당의 내면에 싹트기 시작한 시점은 1945년 내지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미당이 그의 대표적인 친일시 <마쓰이 히데오 송가 (伍長頌歌)> 발표한 시점이 1944년 12월인 것을 고려할 때,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지닌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 있는 40대의 여인"의 이미지의 시원(始原)을 탐색하는 작업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은, 위 인용문보다 앞서 상술하길, 소복한 사십대 여인의 이미지에는 일련의 "격렬하고 잔잔한 여인의 영상들"이 중첩되어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첩된 영상들의 예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새로 자라오르는 보리밭에 뜬 달빛과 같은 애절한 여인 

2) 오월의 아카시아 숲을 보고 그 향기를 맡는 것 같은 신선한 여인 

3) 저 에집트의 여왕 크레오파트라와 같이 오만하고 요염한 여인 

4) 산악(山岳)과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 

5) 성모(聖母)마리아와 같이 다수굿하고 맑고 성스러운 여인 

6) 황진이 같이 스스로도 멋지고 또 고차원의 온갖 멋을 이해할 수 있는 여인 

미당은 이러한 여러 여인의 미의 영상의 체험이 중복되어서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미당의 국화꽃은 여인의 다양한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초월적인 여성, 융의 표현을 빌린다면, 태모(太母, Great Mother)의 이미지를 지닌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여성의 이미지가 일본 신화 속의 아마테라스의 이미지와 상당히 부합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미당이 언급한 4)의 여인의 경우, 미당은 그 여인을 산악에 비유하고 있는 데, 이것은 그 여인이 보통 여인이 아니고 신화적 여인, '태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누이를 산악(山岳)에 비유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미당은 그 산악과 같은 여인의 이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모 마리아, 크레오파트라를 언급하면서, 이 들보다 더 장엄한 이미지를 지닌 태모에 대해선 왜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해방 이후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 여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산악과 같은 여인=아마테라스"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1991년에 발표된 시집 <山詩>에 수록된 <일본 산들의 의미>라는 미당의 시 때문입니다. 그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옵니다. 

얼시구! 

天皇이 좋아하는 대나무에선 
나비가 여덟 마리나 날아오르며 
무우 아랫도리같이 
자는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어서 

'야 이건 우리들의 해의 女神님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께서 
손수 낳으신 나비님들이시죠'하며 
日本 사람들은 매우나 좋아했네 ({미당 시전집3}321) 

여기서 미당은 천황과 해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언급하면서 일본 산들의 의미를 수수께끼같은 말들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당이 말년에 쓴 이 시는 그가 일본신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제 논문 본론부분의 두번째 장에서 <국화 옆에서>를 일본창세신화와 연계시켜 상세히 풀어나갈 예정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미당이 <국화 옆에서>를 창작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단지 국내의 상황만 고려할 것이 아니고, 국제적인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저는 미당의 국화꽃을 일본 문화적 상징물과 연관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일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박광용교수의 연구는 거의 해방 이후의 국내상황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만, 제 생각엔 그 당시의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된다고 봅니다. 

1944년 말엽에서 1947년 중엽사이에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는, 일왕의 인간선언입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46년 1월 1일 <신일본 건설에 대한 조서>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일왕의 인간선언이 지닌 의미에 대해, 역사학자 박경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조서에서 천황은 신일본 건설의 방침으로 5개조의 서문(誓文)을 내세우고, 이어서 천황과 국민의 유대는 상호간의 유대와 경애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화와 전설에 의한 종전의 왜곡된 신적(神的) 권위를 버리고 민주주의 사회 국가의 일원으로 국민과 함께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천황을 신으로 숭상하여 천황을 위해 전쟁을 하고 왕을 위해 죽는 것이 책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각주2) 일왕의 인간선언은 일본인들에게는 패망보다도 더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루스 베네딕트도 지적한 것처럼,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일본의 패망을 연합국에 항복한 것이라기보다는 천황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각주3). 일왕의 인권선언은 1946년 11월 3일 신일본국헌법이 공포됨으로써 법제화됩니다. 이 헌법에 따르면,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주권자였던 천황은 일본국 및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의거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각주4). 즉 신일본국헌법에서, 국가의 주인은 일왕이 아니라 국민이며, 일왕은 신적 권위를 더 이상 지니지 못한 상징적 존재, 일체의 정치적인 권한을 지니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 됩니다. 

일본국헌법이 공포된 날짜가 11월3일이라는 것은 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날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죽은 뒤에도 조선신궁에 신으로 모셔진 메이지왕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리고 명실상부한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 왕이 일본인들의 정신영역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국화와 칼}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정말 큰 이변이 일어난 것은 정신적 영역이었다. 주(忠)는, 최고 사제(司祭)이며, 일본의 통일과 무궁함의 상징인 신성한 수장 곧 왕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가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주(忠)가 이처럼 쉽게 왕에게로 옮겨진 것은 황실을 태양의 여신(天照大神)의 후예라고 하는 옛 민간 신화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139-140쪽). 신화로부터 자신의 신성불가침한 권위를 끌어 왔던 왕이 11월3일을 기점으로 법적으로 한 평범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그에게 충성을 다한 일본인들에게나 친일파 한국인에게나 모두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정주는 1946년 가을 내지 초겨울, 일왕 및 그 가족을 상징하는 노오란 국화꽃을 보면서, 적국인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현인신에서 범인(凡人)으로 몰락한 일왕을 떠올리며,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꼈을 개연성이 큽니다. 인간선언 후, 일왕은 국화 훈장과 국화 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천황복을 벗어버리고 평복을 입은 채 전국을 순례하면서 자신이 보통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다녔는 데, 이러한 일왕의 극적인 변모를 지켜보면서 미당의 마음 속이 온갖 상념으로 복잡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존의 학자들이 <국화 옆에서>를 일본제국주의와 연관지어 생각하지 못한 데에는, 부분적으로는 실증적 자료에 대한 부주의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국화꽃을 파란만장한 삶을 거친 후 관조의 단계에 이른 40대의 시인 서정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는 데, 이는 <국화 옆에서>의 발표 시점 (1947)과 <서정주시선>에 수록된 시점 (1956)을 혼돈한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광용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서정주가 이 시를 발간한 때는 32세였으므로, 40대의 중년여인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그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나이는 46세 였습니다(52). 
 


"국화꽃의 비밀"(6):
ㅡ언어의 흑색 요술사 

II. 신화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1: 

1) 미당의 시작법의 특징 

미당의 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시작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의 여러 시론을 읽으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입니다. <시와 암시>라는 시론에서 미당은 시(詩)가 산문과 다른 특징은, "백마디나 천마디 혹은 만마디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다 하는 것이 아니고 요약해서 말은 되도록이면 조금만 하고 그 나머지는 암시(暗示)로써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문학작품의 뉘앙스]라는 글에서, 미당은 당시에 일고 있던 민중문학운동의 비예술성을 비판하면서 "문학의 시나 소설이나 희곡은 그 언어 매력과 의미와 영상들의 효율 높은 구상-구성을 통해서, 시는 또 산문의 언어 사용량이 무제한성과는 다른 단축되는 언어 사용권의 필연인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의 구성의 노력에 의해서 성립되어 온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도 거부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각주1) 이러한 시론에 입각해서 시를 쓴 만큼, 미당은 온갖 시작법--비유(은유+직유), 상징, 인유(引喩), 생략 등등--에 통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부족방언의 마술사" 내지 흑색 요술사의 재능이 풍부한 인물이지요. 따라서 미당이 말하는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적 모티프(motif)와 상징이 지니는 의미를 해독해야하는 데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미당은 그야말로 '기상'(奇想, conceit)과 인유(引喩)의 요술사이기 때문입니다. 상징을 시각적 청각적 암시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신화와 전설, 민담 및 다른 고전문학에서 그 모형(母型)을 빌려와 시상(詩想)을 형성하는 인유(引喩)라는 기법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니까요. 

[시의 암시]란 글에서 미당은 스테판 말라르메의 <에로디아드>라는 시에 나타난 거울을 상징적 암시의 예로 들면서 자신의 시론을 펼쳐나갑니다. 이 글에서 미당은 거울을 시각적 암시를 위한 상징물로 활용할 때 시인은 거울의 밝은 경면(鏡面) 뿐만 아니라 거울 뒷면의 캄캄한 어둠을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당산문}296-299). 상징물로서 거울이 지닌 여러 속성--빛, 어둠, 차가움, 시각적 환상등--을 다 알고 있는 미당이 <국화 옆에서>에서의 거울을 관조 내지 자기성찰을 뜻하는 단순한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은 좀 순진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징에 대한 이러한 그의 시론에 걸맞게, 미당 자신이 사용하는 상징도 다의성과 양가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당의 시들은, 초기작인 [화사], [귀촉도]로부터 [신라초], [질마재 신화],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에 이르기까지, 신화와 전설에서 그 모티프를 따온 것이 많습니다. <불교적 상상과 은유>에서 미당은 "아무리 작은 꽃잎사귀도 가로 세로 뻗쳐서 일만리는 가느니......"라고 표현한 불교적 상상력의 무한성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각주2). 그는 불교적 상상력을 지니지 못한 이들 혹은 '논리라는 속물'을 앞세우는 사람들에게는 "'무당판수' 놀음" 내지 '상상(想像)에 이로(理路)가 안 닿는 표현'으로 여겨지는 것이 실상은 고도의 상상과 은유에 바탕을 둔 것임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미당은 또한 그러한 '상상에 이로가 닿지 않는 표현'의 생성을 독자나 평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모형(母型)을 제시하는 데, 그 대부분이 신화 내지 설화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미당은 {동천}이란 시집에 수록된 <여행가>라는 시의 첫 연을 예를 들면서, 자신의 시상(詩想)의 발생과정을 설명합니다. 

행인들은 두루 이미 제집에서 입고 온 옷들을 벗고 
萬里에 
나라가는 학두루미들을 입고 

이러한 시상을 소개한 뒤에 미당은 부연설명하길, "또, 이런 표현이 근년 내 시의 어느 귀절에 보인다. 그란, 그 상상의 유니크한 이유로 혹시라도 시새워하는 이가 있다면 안심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도 그 母型이 되는 이야기가 三國遺事 속의 이야기 속에 또 들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즉 미당의 이러한 독특한 발상은 그가 유에서 무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대산 월정사 오류성중>에 나오는 일화를 세 행으로 줄여서 표현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각주3). (여기에선 글의 흐름을 신속하기 위해 설화의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읽고 싶으신 분은 각주에 링크시킨 사이트로 들어가셔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미당이 이처럼 상징과 인유를 즐겨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미당의 시는 대부분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표면서술과 심층서술 사이에 간극 내지 긴장감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작법을, 롤랑 바르트라는 이론가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제1의 기호체계(언어체계)와 제2의 기호체계 (신화체계)가 있는 서술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바르트는 그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신이 이발소에서 본 프랑스 <파리 마치 Paris-Match>지의 표지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 잡지의 표지는 프랑스 삼색기를 올려다 보면서 경례를 하는 흑인(negro)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데, 바르트는 여기에서 두 개의 기호체계를 인지하게 됩니다. 제 1의 기호체계에서는 우리는 그 그림을 보면서, '군인이 프랑스 국기를 향해 군대식 경례를 한다'라는 의미를 읽어 내지만, 제2의 기호체계에서 우리는 "프랑스 제국주의(french imperiality)"라는 것을 읽게 됩니다. 즉, 제2의 기호체계에서 그 그림은 '프랑스는 식민지인이였던 흑인도 저렇게 군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복한 표정으로 프랑스 국기에 기꺼이 경례하는 좋은 국가'라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Mythologies, Hill & Wang, 111-121). 

저는 <국화 옆에서>도 그러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화꽃과 거울이 일제 강점기를 체험한 우리에게 중요한 문화적 상징물인데다 서정주의 친일행적이 뚜렷한 만큼, 그의 시를 제1의 기호체계에서만 의미해독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에 대해선, 내일 상술할 생각이기 때문에, 여기에선 다른 시들--목화, 누님의 집, 견우의 노래--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2) 목화, 누님, 직녀의 실체는? 

서정주의 상징과 인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태껏 평자들은 미당의 시세계를 서구 고대신화 및 성경, 한국 신화와 연결지어 분석을 해왔지만, 일본신화와 연계지어 분석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일 수 있는 영역을 불모지로 남겨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은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만큼, 일본 신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메이지 일왕이 바쿠후시대를 종결지은 후 현인신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하게 된 결정적 근거가 일본의 고대신화의 천손강림설에 있었듯이, 일본인들은 우리를 통치하고 동화시키기 위해서 일본신화로부터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 제가 사부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고대창세신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최석영씨가 쓴 두 권의 책 {일제하 무속론과 식민지권력}(서경문화사, 1999)과 {일제의 동화이데올로기의 창출}(서경문화사, 1997)을 읽으면, 일본이 우리 지식인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쓴 주된 책략이 일본의 고대신화--<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술된 일화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만든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 및 일본고대신화를 연구하여 '불함문화론"을 세운 최남선은 나중에 '한민족=일본민족'이라는 등식을 마련해 "일선문화동원론(日鮮文化同原論)"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단군사상은 민족의 주체성을 부각시키는 대신 한국인이 쉽사리 자신을 일본인과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각주4). 그 일선동조론의 시원이 되는 신화는 <일본서기>에 나타난 스사노오노미꼬토(須佐之男命)라는 천신의 강림신화입니다. 이 신에 대해서는 내일 자세히 설명드릴 예정이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히만 언급하겠습니다. 이 신은 아마테라스 태양신의 친남동생으로 일본신 가운데는 두번째로 중요한 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사노오는 영웅적인 일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난폭한 탕아의 기질이 있어서 천상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일본서기}(전용신역, 일지사, 30쪽)에 따르면,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내려와서 최초로 머문 곳이 '신라국의 스시모리' 혹은 '소의 머리땅(曾尸茂梨, 牛頭)'라고 합니다(각주5).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스사노오를 신라인으로 보았습니다. 또 일제시대에 많은 학자들은 "단군=스사노오"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신궁에 스사노오신인 단군을 추가봉재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최석영의 {일제하 무속론......}113-116쪽). 얼핏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 이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쫓겨난 악왕자(惡王子)로서 일본에서 제대로 존경받지도 못하는 신일 뿐만 아니라, 조선신궁에서도 제신으로 삼지 않은 신이였기 때문에, 한일불평등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동화이데올로기' 내지 조선신도 사상의 측면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일본은 스사노오의 누님인 아마테라스가 군림하는 '누님의 집'이고, 우리나라는, 특히 신라는 '남동생의 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당의 시에 등장하는 누님 내지 신라를 좀 더 넓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선 일부 네티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방 이듬해에 발간된 {귀촉도}란 시집에 수록된 시 가운데 세 편의 시--<목화>, <견우와 직녀>, <누님의 집>--이란 시를 일본 신화와 연계지어 간략히 살펴 볼 생각입니다. 이 세 편의 시는 앞서 말씀드린 일차적인 기호체계 (표면구조)에선 순진무구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선 목화라는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목화(木花)> 

누님. 
눈물 겨웁습니다 
이, 우물 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 
다수굿이 젖어있는 붉고 흰 木花 꽃은, 
누님. 
누님이 피우섰지요? 
퉁기면 울릴듯한 가을의 푸르름엔 
바윗돌도 모다 바스라저 네리는데 
저, 魔藥과 같은 봄을 지내여서 
저, 無和한 여름을 지내여서 
질갱이 풀 지슴ㅅ길을 오르 네리며 
허리 굽흐리고 피우섰지요? 

이 시를 대부분의 평자들은 권일송씨처럼, "붉고 흰 목화꽃을 보면서 누님의 정성, 누님의 설움, 누님의 향수를 아련히 떠올리는 시의 묘법(妙法)이 펼쳐진다. 목가적, 동화적인 그리움과 현실 긍정, 잡티가 묻지 않은 영혼의 날개가 파닥이는 순간들의 기억이 묻어나 있다. 이쯤이면 굳이 시에서 시상이라든가 이미지 따위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해석합니다({시인 미당서정주-그 문학과 생애} 462 쪽). 하지만, 이러한 순진무구한 해석은 미당이 얼마나 음흉한 언어의 요술사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평자에 의해서 읽혔기 때문입니다. 앞 부분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서정주는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와 시상의 정교한 배열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 시인입니다. <木花>에서 누님은 아마테라스가 될 수도 있고, 천손강림신화의 주인공인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邇邇藝命)의 아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손(天孫) 니니기가 지상에 처음 내려와 첫눈에 반해 결혼한 여자의 이름이 '木花'(코노하나노사쿠야비메)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신화 속의 목화는 솜의 재료인 목화가 아니라, 벚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만, 어쨌건 일본 황실의 시조인 니니기의 아내 이름은 <일본서기>에서나 <고사기>에서나 똑같이 '木花'로 기록되고 있습니다({고사기}149, {일본서기}44). 일본 신화 속의 많은 신모(神母)들이 그러하듯 일본황실의 대모(大母)라 할 수 있는 목화(木花)도 극적인 삶을 산 여인입니다. 천손인 니니기는 목화에게 반해서 혼인해 하룻밤을 잤는 데, 바로 그 날로 목화가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니니기는 목화를 의심해서 그녀가 임신한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 다른 신의 자식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목화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문이 없는 방을 만들고 맹세하길, "내가 임신한 것이 다른 신의 아이라면 반드시 불행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천손의 아이라면 반드시 씩씩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자신이 방에 불을 지릅니다. 결국 세 명의 아들이 불 속에서 무사히 태어나, 지상계를 지배하는 그 다음 통치자가 됩니다. 즉, 일본황실의 대모(大母)인 목화는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자초할 정도로 한(恨)을 지닌 여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서정주가 <木花>라는 시를 1946년에 발표할 때, 자기 고장의 목화꽃만을 생각하고 토속적 정서에 젖어서 썼을까요? 다음은 <누님의 집>이라는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누님의 집> 

바다 넘어 九萬里 
山넘어서 九萬里 
등ㅅ불 들고 네려 가면, 
우물 물이 있느니라. 
먹탕 같은 우물 물 
千길을 네려 가면 
굴딱지 같은, 
도적놈의 게와집이 서 있느니라. 
大門열고 中門열고 
돌門을 열고 
바람되야 문틈으로 슴여 드러가면은 
그리운 우리누님 게 있느니라. 
도적놈은 어디 가고 
우리 누님 홀로 되야 
거울 앞에 흰옷 입고 앉었느니라. 

이 시에 우물, 게와집, 흰옷등의 이미지가 등장한다고 해서, 이것을 상복을 입은 토속적인 한국적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볼 경우, 이는 서술의 제1차 기호체계(표면구조)만을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 연을 제대로 읽어보면 화자가 말하는 공간이 흔한 동네 마을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다넘어서 구만리, 산넘어서 구만리'에 있는 어느 우물 속의 세상입니다. 즉 누님이 살고 있는 공간은 신화적 세계--지하의 세계(황천국) 내지 해저의 세계(용왕국)--입니다. 상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우물과 흰색을 단순하게 동네 우물 내지 소복한 여인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흰색은 색 중에도 가장 다의적인 상징적 의미를 포함하는 색깔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여러 세계 상징사전을 살펴보면, 흰색은 삶과 죽음, 순수와 공포, 햇빛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주적 비의 내지 신성성(神聖性)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도둑과 승려를 의미하는 색으로서, 특히 신도(信徒)의 신주(神主)의 옷이 흰색입니다 ({한국문화상징사전}참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詩}에 수록된 <흰 옷의 빛깔과, 버선코의 곡선 이야기>란 시를 보면, 미당이 흰색의 다의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환웅이 맨처음 단군에게 입힐 옷을 정할 때 웅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야 아야 아야야 치사스레 아파 하는 빛이어서는 안돼! 엉엉엉 울지도 않고, 늘 점잖고 의젓하게 웃고만 있는 그런 빛을 한번 찾아 보시오. 쓰거운 쑥 맛, 매운 마늘 맛, 두루 다 겪고 난 임자 배가 덩그랗게 나아 놓은 아이 옷이니까요" 남편 환웅이 이렇게 말하면, "그럼, 깜짱 빨강 파랑 노랑 다 아니고, 흰빛이나 그래도 그 중 어울리겠어요" 곰이 둔갑해 낸 아내는 하얀 박꽃 비스듬히 웃어도 대면서 말씀이어요. 그래, '그게 좋겠소. 하늘도 사실은 흰빛입니다. 그게 너무 멀어서 낮에는 푸르게 보이고 밤에는 캄캄해 보일 뿐이지......" 환웅께서 대답하시어, 그 흰빛으로 이 겨레의 옷빛은 처음으로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이 올시다 

이처럼, 미당은 흰옷의 다의성--생명, 성숙한 여인, 우주적 비의 내지 신성성--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물은 동양과 서양의 신화와 민담 속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물로서, 여성성(feminine principle), 재생, '대모(大母)의 자궁'을 뜻합니다. 특히 지하세계 내지 해저에 있는 우물은 많은 상징적, 신화적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또한 <누님의 집>은 <일본서기> 내지 <고사기>로 부터 인유를 발견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보면, 천손 니니기의 아내(木花)는 불 속에서 자식을 세 명 낳았는 데, 그 중 두 명--호데리노미코토(火照命)와 호오리노미코토(火遠理命)--이 서로 내기를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도구를 바꿔서 내기를 했는 데, 동생인 호오리가 형의 낚시도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해신(海神)이 사는 바다 속 궁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가 아내인 토요타마비메를 만나게 된 곳이 바다 속 궁전 밖에 있는 우물입니다. 토요타비메는 호오리에게 한 눈에 반해 결혼하게 되고, 나중에 호오리가 형의 낚시도구를 되찾아 지상계로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해산하기 위해 지상계로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호오리가 산실(産室)을 엿보아선 안된다는 자신의 금기를 깨고, 몰래 상어로 변신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자, 모욕감을 느껴서, 남편과 자식을 남겨둔 채, 홀로 바다 속의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이처럼, 아마테라스 증손부에 관한 신화의 내용이 <누님의 집>을 구성하는 시상--바다, 우물, 홀로 된 흰옷 입은 여인, 도적놈--과 상당히 흡사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견우의 노래>의 경우, 아마테라스 여신이 "베짜는 여인"(織女)이었고,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쫓겨 온 곳이 신라국의 '소의 머리땅(曾尸茂梨, 牛頭)'이었고, 또 이 시가 발표된 시기가 해방 이듬해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미당이 스스로를 지상에 유배 온 "스사노오-견우'로 생각하고, 구름 너머, 바다 건너, 천상계에서 비단을 짜는 직녀 아마테라스를 그리워하면서 쓴 시가 <견우의 노래>라고 보는 것이 아주 황당하기만 한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비단은 연오랑과 세오녀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햇빛을 상징하는 천인만큼, 그 비단짜는 직녀를 아마테라스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木花, 바다 속의 우물, 비단을 짜는 천상의 직녀를 그리워하는 견우, 국화꽃과 거울, 이 모든 것이 1946년 전후에 쓰여진 시 속에 나타난 것은 우연에 불과할까요? 이 모든 시가 한국의 목가적, 토속적 정서를 형상화한 것일까요? 

 
 
"국화꽃의 비밀"(7):
ㅡ소쩍새, 천둥, 천조대신 

II. 신화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2: 

1) <국화 옆에서>와 아마테라스 탄생신화 

어제의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제 생각에는 <국화 옆에서>가 보이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비상식적인 시상의 배열과 시어의 구성은 그 모형(母型)이 되는 이야기가 신화 속에 있기 때문에 초래된 예술적 비약 내지 단층(斷層)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화꽃의 비밀3>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시는 국민적인 애송시이긴 합니다만 평론가나 학자들의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텍스트를 분석하기에 앞서 우선 {서정주시전집1}(민음사, 1994)에 수록된 [국화 옆에서]의 전문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처럼 모두 4연으로 된 <국화 옆에서>는 국화의 탄생과정을 노래합니다. 각 연엔 핵심 단어 내지 상징물이 등장합니다. 이를 간략히 정리해 보면, 제1연에선 봄-소쩍새-울음, 제2연에선 여름-천둥-먹구름-울음, 제3연에선 뒤안길-귀환-거울-누님-국화꽃, 제4연에선 노오란 꽃잎-무서리-불면이 될 것입니다. 외견상으로 볼 때 이 시는 서로 조화를 이루기 힘든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친근한 누님의 이미지를 지닌 국화꽃의 탄생을 노래하는 시에 있어서, 소쩍새, 천둥, 먹구름, 울음, 무서리, 불면등은 너무도 어둡고, 차갑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시어들입니다. 

<국화꽃의 비밀3>에서 말씀드렸듯이 <국화 옆에서>가 보여주는 상식적 논리를 넘어선 시상의 배열을 설명하기 위해 김흥규교수는 불교적 시각을 도입해서, "우주와 생명의 신비" 내지 "우주적 인연의 가능성 위에서 한 송이 꽃의 피어남을 그 앞에 있었던 수많은 괴로움과 시련의 결과로 여기는 상상력"이라고 해석하였지만, 왜 하필 '소쩍새'와 '천둥'이 그 탄생의 과정을 형상화하기 위해 선택되었는 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미흡함을 보입니다. 이는 권일송교수나 김재홍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일송교수는 1연을 "인연과 시간"의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2연을 '천시지리(天時地利)와 우주적 섭리'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김재홍교수는 소쩍새와 천둥 혹은 먹구름을 "비상의 이미지 또는 천체 이미지," "대지로부터 상승을 뜻하는 이미지군"등으로 막연하게 해석하였을 따름입니다. 서정주의 시를 꼼꼼히 텍스트 중심으로 분석해 단행본을 출간했던 김화영교수는, <국화 옆에서>의 경우, 아예 1연과 2연은 언급조차 않고 3연만을 따로 떼어 분석하였습니다(각주1). 

제 생각엔,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소쩍새와 천둥을 가장 설득력있게 분석한 국문학자는 무속신앙과 신화에 대해 그간 많은 연구를 한 김열규교수인 것 같습니다. 김교수는 <俗信과 神話의 서정주론>이라는 글에서 분석심리학적 시각을 도입해 이 시를 분석하였습니다. 그는 미당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신모(神母) 또는 대모신(大母神)의 역할을 했던 영매자들이였다고 말하면서, <국화 옆에서>는 융이 말하는 '아니마 문디'(anima mundi, soul in the world, world-mother)를 실현하는 시라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국화와 소쩍새 사이에 일련의 대립적 징표--地/空中, 식물/동물, 정제/아픔, 빛/어둠--들이 존재하고, 또 국화와 천둥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대립--天/地, 靜/動, 광/암, 정제/혼돈--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봄은 진통, 여름은 파괴, 가을은 사멸을 뜻하는 데, 이러한 부정적인 힘을 점층적으로 연쇄적으로 받으면서 피는 꽃이 국화꽃이기 때문에, 이 시 세계에서는 이원론적 대립의 통합이 실현되고, "반대가 반대를 낳는 역설을 깔고 이룩된 <아니마 문디>적인 세계"가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김교수는 "미당의 <아니마 문디>는 상극의 극과 극끼리를 잇는 역설의 통합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미당연구}153-156). 

이러한 김열규교수의 글은, 다소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고 이분법적인 등식에 있어서 작위성이 짙긴 하지만, 소쩍새와 천둥을 어둠과 혼돈의 세계로 파악하고 국화꽃을 이에 대립되는 빛과 고요(靜)의 세계로 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화꽃의 이미지 속에서 태모(太母)를 발견한 것 등은 섬세한 고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교수는 폭넓은 신화적 맥락 속에서 태모(太母)의 실체를 파악하지 않고 미당의 주변 여성들에게만 지나치게 천착하였기 때문에, 국화꽃이 암시하는 <아니마 문디>(太母)의 실체라 할 수 있는 아마테라스를 인지하는 데 있어서 한계성을 보인 것 같습니다. 아마테라스 신은 그야말로 대립되는 두 세계--지하/지상, 어둠/빛, 지상/천상, 죽음/탄생--가 결합해서 생긴 태모(太母)의 이미지를 지닌 여신입니다. 이를 미당의 시론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시 창작을 위한 노-트]에서 미당이 특별히 소상히 설명한 부분은 평자들이 소홀히 다룬 첫번째 연입니다 (104-109). 첫번째 연을 쓸 때 그의 마음 속에 찾아든 여러 상념들에 대해 미당은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면, '저 우리 이전의 무수한 인체가 사거(死去)하여 부식(腐蝕)해서 흙 속에 동화된 그 골육(骨肉)은 거름이 되어 온갖 풀꽃들을 기르고, 그 액체는 수증기로 승화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우리 위에 퍼부었다가 다시 승화하였다가 한다'는 상념이라든지, '한 개의 사람의 음성에는--그것이 청하건 탁하건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거기에는 반드시 저 먼 상대본연(上代本然)의 음향이 포함되리라'는 상념이라든지, '저 많은 길거리의 젊은 소녀들은 사거(死去)한 우리 애인의 분화(分化)된 갱생(更生)이다'는 환상이라든지-- 이런 것들입니다 (107). 

즉, 그는 '인체윤회(人體輪廻)', '음성원형(音聲原型)', '애인갱생(愛人更生)'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념이나 환각이 자신의 내면에 중복된 습성으로 한동안 자리잡아 오다가, 어느 가을날 국화꽃을 앞에 대하게 되었을 때, 소쩍새의 울음과 국화꽃의 이미지가 결합이 되어, 첫 연을 쓰게 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연은 단지 생명체의 탄생을 예고하고 진통의 과정을 노래한 구절이라기보다는, 부식하는 시체를 거름 삼아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체를 노래한 구절입니다. 썩어가는 시체 속에서 태어나는 생명의 윤회과정과 상대본연의 음향을 상징하기에 가장 적합한 새로 미당은 소쩍새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귀촉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촉제(蜀帝) 두우(杜宇)의 한을 안고 있는 소쩍새가 사랑하는 님과 사별하고 단장의 슬픔과 그리움에 젖어있는 연인의 정서를 그 어느 새보다 청각적으로 잘 표출할 수 있는 상징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시론에서 미당은 소쩍새를 끌어 온 것과 같은 이치로 2연에서 "국화개발(菊花開發)의 원인"으로서 여름의 천둥소리들을 끌어 올 수 있었다고 간략히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생명 탄생의 과정은 파괴, 소멸, 부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미당은 본 것 같습니다. 

<국화 옆에서>의 1연과 2연이 담고 있는 이러한 내용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묘사된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탄생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너무도 흡사합니다. 일본 창세신화에 따르면, 아마테라스는 일본 국토를 만들고 수많은 일본 신들을 창조한 남신(男神) 이자나기노미꼬토(伊邪耶岐命)와 여신 이자나미노미꼬토 (伊邪耶美命)의 딸입니다. 비록 이자나기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왼쪽 눈을 씻어 아마테라스를 홀로 낳았지만, 불의 신을 낳다가 죽은 아내 이자나미를 찾아 황천국(黃泉國)으로 여행한 결과 생긴 딸이기 때문에, 이자나미가 어머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사기} 제2장에 서술된 이자나기의 황천국 여행의 주요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각주2). 

이자나기는 아내가 불의 신을 해산하다 죽자, 그 자식을 죽이고 아내를 찾아 황천국으로 여행한다. 하지만, 이자나미는 이미 황천국의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즉각 남편을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나미는 이자나기에게 황천국의 신들과 의논할 수 있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다. 이자나미는 그동안 자신의 모습을 보지 말아달라고 남편에게 신신당부한다. 하지만, 이자나기는 아내의 모습이 보고 싶어 금기를 깨고 만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꽂힌 빗의 굵은 살을 떼어 내 횃불을 만들어 아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 때 여신의 신체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고, 온몸에는 8종의 뇌신(雷神)이 생겨나고 있었다. 결국 이자나기는 아내의 모습이 끔찍스러워 도망치고 만다. 

이자나미는 금기를 깨고 자신을 치욕스럽게 한 후 달아난 남편이 괘씸해서 귀녀, 8종의 뇌신, 황천국 군사를 보내 남편의 뒤를 적극적으로 좇지만 실패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게 된다. 이자나기는 많은 고초를 겪은 후에 황천국 입구를 바위로 막음으로써 아내로부터 자유로와진다. 황천국에서 탈출한 이자나기는 "나는 아주 부정스럽고 더러운 나라를 다녀왔으므로 몸을 깨끗이 씻어 재계하여야겠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옷과 온갖 장신구를 벗어 던지고 바다 속을 들어가는 데, 몸을 씻는 동안 10명의 신이 탄생한다. 그 신들 가운데 맨 마지막에 태어난 세 명의 신을 이자나기는 가장 사랑하였다. 그 세 명의 자식은 이자나기가 왼쪽 눈을 씻었을 때 태어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오른쪽 눈을 씻었을 때 태어난 달의 신 쯔쿠요미노미꼬토(月讀命), 코를 씻었을 때 태어난 스사노오노미꼬토(須佐之男命)이다. 이 세 명의 자식 가운데, 아버지 이자나기는 딸인 아마테라스를 가장 사랑해서 자신의 구슬 목걸이를 주면서 천상계를 다스릴 것을 명하였고, 아들 쯔쿠요미에게는 밤의 세계를, 막내 스사노오에게는 바다의 세계를 다스릴 것을 명하였다. 

이와 같이, 아마테라스는 이자나기가 명부의 세계로 내려가 아내인 이자나미의 구더기가 들끓는 끔찍스런 시체와 그 시체의 여러 부위에 존재하는 8종의 천둥신--머리엔 대뢰(大雷), 가슴엔 화뢰(火雷), 배엔 흑뢰(黑雷), 음부엔 석뢰(析雷), 왼손엔 약뢰(若雷), 오른손엔 초뢰(土雷), 왼발엔 명뢰(鳴雷), 오른발엔 복뢰(伏雷)--을 접촉함으로써 탄생하게 된 존재입니다. {일본서기}에도, 비록 {고사기}에 서술된 8종의 천둥신과는 다소 종류가 다를지라도, 똑같이 천둥신이 등장합니다. 박시인교수가 {일본신화}(탐구당, 1995)에서 기술한 바에 따르면, 죽은 이자나미의 머리에는 큰 천둥, 가슴에는 흙천둥, 등에는 어린 천둥, 엉덩이에는 검은 천둥, 손에는 산 천둥, 발에는 들 천둥, 국부에는 찢어진 천둥(裂雷)이 있었다고 합니다 (각주3). 

이러한 아마테라스의 탄생과정은 '인체윤회(人體輪廻)', '음성원형(音聲原型)', '애인갱생(愛人更生)'으로 설명되는 국화꽃의 탄생과정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특히 서정주는 일제 강점기에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의 사람의 음성 속에서 상대본연(上代本然)의 음향"을 들을 수 있는 시인인 만큼, '인체윤회'와 '애인갱생'이 연상되는 아마테라스 탄생 신화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국화 옆에서>의 1연에 등장하는 소쩍새의 울음은 사별한 아내가 그리워 황천국으로 찾아간 이자나기의 고통에 상응하고, 2연에 등장하는 천둥의 울음은 자신의 부패한 몸을 보고 놀라서 달아난 남편을 좇기 위해 천둥신을 보낸 이자나미의 고통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합니다. 부연설명하자면, 일본신화와 연계지을 경우, 미당이 1연과 2연의 시작과정을 설명하면서, 왜 "우리 이전의 무수한 인체가 사거(死去)하여 부식(腐蝕)해서 흙 속에 동화된 그 골육(骨肉)은 거름이 되어 온갖 풀꽃들을 기르고", "젊은 소녀들은 사거(死去)한 우리 애인의 분화(分化)된 갱생(更生)이다"라고 말했는 지를, 왜 소쩍새와 천둥이 서로 같은 이치로 형성된 시상들이라고 말했는 지를, 쉽사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테라스의 탄생과 국화꽃의 탄생에 똑같이 천둥이 등장하고, 사거한 애인의 시상이 그려지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간주하긴 힘든 것 같습니다. 
 
 

"국화꽃의 비밀"(8):
ㅡ거울, 누님, 천조대신 

II. 신화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2: 

2) <국화 옆에서>와 아마테라스 동굴 칩거신화 

제3연의 경우, '젊음의 뒤안길,' '거울,' '누님'의 상징성을 풀이하는 것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국화꽃의 비밀6-언어의 흑색 요술사1>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거울을 상징물로 활용할 때 거울의 밝은 경면(鏡面) 뿐만 아니라 거울 뒷면의 캄캄한 어둠을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상징의 다의성--빛, 어둠, 차가움, 시각적 환상 등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언어의 요술사입니다({미당산문}296-299). 많은 평자들이 <국화 옆에서>에서의 거울을 관조 내지 자기성찰을 뜻하는 단순한 상징으로만 본 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재홍교수는 3연의 처음 두 행을 젊은 날을 "살냄새와 피냄새가 섞여 있는 무겁고 어두운 모습"으로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고, 뒤의 두 행을 "성숙한 정신의 가벼움"을 나타낸 것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그는 거울을 "정관과 명상의 가벼움"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각주1). 또한 천이두교수와 김화영교수는 거울 속의 누님을 시인 자신으로 보았습니다. 천이두교수는 이 3연을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 머언 먼 젊의 뒤안길>을 영원히 이별할 수 있을 만큼,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조용히 살피는 관조의 거울 앞에 설 수 있을 만큼, '나이든' 시인 된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고, 김화영교수는 ''<거울>은 여기서 현재의 나와 욕망에 휘말리던 젊은 시절의 나 사이에까지도 <머언 먼>를 만들어 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단절이 아니라 거리들 둔 親和를 의미한다. 거울에 비친 나도 여전히 어떤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菊花는 그러니까 거리를 둔 친화의 꽃이요, 그 인식이 피워낸 꽃이다"라고 해석합니다(각주2). 

하지만 "국화꽃=시인=누님"이라는 천이두교수와 김화영교수의 생각은, 미당 자신의 회고담과 발표 시기의 미당의 나이, 또 시 속의 화자의 역할을 고려할 때, 억지스런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3연과 4연--"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 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을 연결지어 해석할 경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우선 누님이 관조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경우, 그런 누님의 내면은 불면의 밤을 보낸 시인의 내면과는 서로 대립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누님=시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기 힘듭니다. 미당 자신은 <시 창작에 관한 노-트>에서 3연 속의 누님을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는 40대의 여인'으로 풀이하면서, 그 이미지는 오랫동안 그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온 여러 여인들--달빛같은 여인, 아카시아 숲 같은 여인, 산악같은 여인, 클레오파트라, 성모 마리아, 황진이 등등--의 영상이 중첩되어 생긴 결과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서정주는 자신이 4연을 완결지었을 때 "밖에선 무서리가 오는 듯한 늦가을의 싸늘한 새벽이었는 데, '내가 안 자고 혼자 깨어 있다'는 호젓한 생각 끝에, 밖에서 서리를 맞고 있을 그놈을 생각하자, 그것은 용이히 맺어졌습니다"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즉, 마지막 연의 국화꽃은 싸늘한 새벽의 무서리 속에서 고독하게 홀로 피어있는 존재,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 있는 존재입니다. 모든 고통을 초탈한 채 관조의 경지에 이른 존재는 아닙니다. 

<국화꽃의 비밀5>에서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국화꽃의 시상 속에 중첩되어 있는 여러 여인들의 영상에 대해 언급하면서 "산악(山岳)과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에 대해선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있는 데, 저는 그 태모(太母)의 이미지를 지닌 여인이 아마테라스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우선 텍스트 내재적 측면에서 말씀드리면, 어제 상술한 바와 같이, 아마테라스의 탄생에 등장하는, 사별한 아내가 그리워 황천국으로 간 남편, 모체(母體)의 부식과 천둥신 등의 시상(詩想)이 <국화 옆에서>의 소쩍새와 천둥이 형성하는 시상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아마테라스 동굴칩거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화소들--동굴칩거, 누이의 귀환, 거울 앞에 선 여인--이 <국화 옆에서>의 3연과 4연의 시상과 맞물리는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당의 국화꽃이 황색이라는 것은, 굳이 일본문화권과 연계지어 해석하지 않아도, 태양빛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본문화권에서 거울이 태양신의 상징이 된 것은 아마테라스의 동굴칩거 신화 때문이었습니다. {고사기}에 기록된 동굴신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자나기는 황천국에 내려가 불결해진 자신의 몸을 바닷가에서 씻는 동안, 십여 명의 자식을 낳았는 데, 이자나기는 특히 딸인 아마테라스를 사랑해서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다스리게 하고, 스사노오에게는 바다를 다스리게 하였다. 하지만, 스사노오는 황천국에 있는 어머니가 그리워 산천초목이 모두 죽어갈 정도로 울었다. 이에 화가 난 이자나기는 아들에게 황천국으로 갈 것을 명하였고, 스사노오는 누님에게 작별인사를 한다는 핑계로 천상계로 올라온다. 난폭한 동생의 등장에 놀란 태양신은 그가 천상계를 찾아온 이유를 의심하게 된다. 스사노오는 자신의 결백을 자식낳기 경쟁을 통해 증명한 뒤에, 기쁨에 도취되어 천상계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마테라스가 경작하는 논두렁을 부수고, 개천을 메워버리고, 제물로 바쳐진 신전의 햇곡식에 똥을 뿌리는 등 목불인견의 행동을 한다. 이러한 그의 망나니 짓을 선의로 받아들이려 애쓰던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자신이 거쳐하는 '기복실'(忌服室: 신의 옷을 짜는 청정하고 신성한 건물)의 천장을 뚫고 얼룩말 가죽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베짜는 하녀가 베틀북에 음부가 찔려 죽자, 동생이 두려워 '천석옥호(天石屋戶)'라는 동굴로 숨어 버린다. 이에 천상계와 지상계가 암흑으로 변하고, 각종 재앙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던 신들은, 결국 거울을 만들어 여신을 동굴 밖으로 끌어 낼 계획을 세운다. 아마테라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 위해, 신들은 동굴 밖에서 소란스런 축제를 벌리고, 여신은 암흑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상치 않던 축제가 궁금해서 동굴 문을 살짝 열고 내다 본다. 이에 다른 신들은 준비한 거울로 여신을 유혹한 후 손을 잡아 채서 동굴 밖으로 완전히 끌어 낸다. 다시 세상은 빛으로 가득차게 되고, 난폭한 동생 스사노오는 벌을 받은 후에 천상계에서 추방된다. 나중에 아마테라스는 자신의 손자 니니기(邇邇藝命)에게 지상계를 다스리도록 명하면서, 자신을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한 거울을 징표로 준다, 이 때 아마테라스는 니니기에게 "이 거울을 오로지 나의 혼(魂)으로 여기고, 내 자신을 모시는 것처럼 우러러 모시도록 하여라"라고 말하였다. (각주3) 

이처럼 일본신화에서 거울은 아마테라스의 귀환과 천손강림을 다룬 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상징물입니다. 문제아 동생 스사노오의 횡포로 인해 동굴로 피신 갔던 착한 '누님-아마테라스'가 밀폐된 동굴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동굴 틈새로 보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천손강림시 아마테라스가 손주 니니기에게 자신의 혼(魂)이 담긴 것이라고 하면서 주었다고 하는 이 거울(八咫鏡)은 그 진품이 이세신궁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데, 일본인들이 천손강림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일본 황실이 만세일계의 혈통, 즉 영원성을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화 옆에서>의 3연과 4연은, 아마테라스 신화가 보여주는 여러 시상들----베짜는 하녀의 죽음, 아마테라스의 동굴 칩거, 거울을 들여다보는 스사노오의 누이 아마테라스, 아마테라스의 귀환 등등--과 태양신의 후손인 일왕의 인간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형상화되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종천순일파적인 삶을 살아온 미당에게 있어서, 젊은 시절 광영의 길을 걷던 '국화꽃-일왕'이 패망 이후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와 상징적 군주로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 가슴 속에 한(恨)을 지닌 채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는 40대의 여인'의 모습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특히 늦가을 무서리를 맞으며 홀로 새벽의 어둠을 견디는 국화꽃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국화 옆에서>의 3연에 등장하는 거울엔 두가지의 상징적 의미--동굴에서 귀환한 아마테라스 태양신의 혼이 담긴 신기(神器)로서의 거울과 영욕(榮辱)의 삶을 살아온 인간이 본래적 자아와 대면하는 장(場)으로서의 거울--가 중첩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 외에도, 아마테라스 신화를 구성하는 여러 다른 화소(話素)들--사별한 님을 향한 통곡, 수놓는 혹은 베짜는 지고지선(至高至善)한 누이, 여인의 고독한 은둔, 천상계에서 추방되어 세상을 떠도는 탕아(蕩兒) 등등--은 미당의 시세계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견되어지는 화소들과 유사합니다. 

그럼, 본론을 마무리 지으면서, 제가 미당의 국화꽃을 일왕과 아마테라스의 영상이 중첩되어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여러 근거들을 다시 간추려 적어보겠습니다. 

1) 일본제국주의시대에 황국(黃菊)은 일본 황실과 태양을 상징했다. 조선신궁의 제신이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이었는 데, 그 곳에 삼종신기의 하나인 거울이 있었다. 신도(神道)의 신주(神主)들이 신궁이나 신사에서 흰색의 승복을 입은 채 둥근 거울 앞에 서서 기도할 때, 그 거울이 아마테라스를 상징했다. 

2) <국화 옆에서>의 창작시점과 천황의 인간선언 시점이 다같이 1946년 무렵인 데다, 인간선언 후 현인신에서 평범인으로 돌아 온 히로히토왕의 이미지와 4연에 묘사된 늦가을 무서리 속에 피어있는 국화꽃의 이미지가 많이 유사하다. 

3) 미당이 말하는 국화꽃 여인들의 영상 중에 하나인 산악(山岳)같은 여인이 말년에 쓴 <일본 산들의 의미>라는 시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일 개연성이 높다. 

4) 아마테라스 탄생신화에 등장하는, 이자나기의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 황천국으로의 여행, 모체(母體)의 부식(腐蝕)과 천둥신의 등장이 <국화 옆에서>의 1연의 소쩍새와 2연의 천둥에 상응한다. 또한 아마테라스 동굴칩거 신화에 등장하는 거울과 누님의 귀환이 제 3연의 시상과 유사하다. 

5) 일본신화 속의 大母들--이자나미, 木花, 토요타비메--이 한결같이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있는 여인' 내지 '서릿발 속의 국화꽃'의 이미지를 지닌 여인들며, 특히 시집<귀촉도>에 수록 된 시 <木花>가 천손강림설의 주인공 니니기의 아내 이름과 동일하다. 

6) 일제 강점기에 팽배해 있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에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를 단군 내지 신라인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국화 옆에서>, <누님의 집>, <木花>에 등장하는 누님을 일본 내지 아마테라스로, 남동생을 우리나라 내지 서정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7) 일본어를 국어로, 일장기를 국기로 생각해 온 미당이 국화꽃에 대한 여러 편의 시와 다양한 내용의 수필을 쓰면서도 이상스러울 정도로 단 한번도 일본문화권에서의 국화꽃의 상징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즉, 국화꽃을 보면서 단군, 웅녀, 신시(神市)을 연상하는 미당이 일본의 상고시대를 연상하지 않았을 리 없는 데, 이를 고의적으로 은폐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화꽃의 비밀"(9):
ㅡ<요술사-족장>의 사상 

IV. 결론: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어서는 안될 '부족방언의 요술사' 

저는 지금까지 글을 써오면서 <국화꽃 옆에서>의 국화꽃이 의미하는 바를 밝히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비록 하나의 작품에 제 노력을 집중시키긴 했지만, 미당의 많은 작품들--시, 수필, 시론, 자서전--을 읽으면서, 제 생각의 균형을 잡기 위해, 미당의 예술적 재능을 이해하기 위해, 예술가로서의 미당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제가 미당의 국화꽃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그토록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국민적 애송시로 칭송받는 그 시가 함축하고 있는 위험스런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습니다. 미당의 시를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는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이 지니는 언외(言外)의 부정적 암시력이, 즉 미당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량(小量)으로 정선(精選)해 가지는 언어의 그늘에 함축해 지니는 바의 무진(無盡)한 암시력(暗示力)"의 이면(裏面)이, 지난 반세기 동안 평자들에 의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국화꽃으로 상징될 수 있는 미당의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인 세계인식은 그 이후의 시세계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는 만큼, 저는 그 시원(始原)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어제 쓴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가 왜 "국화꽃"이 천황과 천조대신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형성된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지에 대해선 정리해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오늘 쓰게 될 결론에선 미당의 다른 작품 속의 종천순일적 사상에 대해 제가 그간 공부해 온 바를 간략히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미당이 죽은 지 반년 남짓한 시점에, 미당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이 땅의 평론가들과 언론은 서둘러 졸속으로 <미당문학상>을 제정했습니다. 그 상은 미당의 작품 속에 드러난 사상을 철저히 도외시한 채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온당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미당이 작고했을 때, 원로 평론가 유종호교수는 동아일보에 미당 서정주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유교수는 서기 2000년을 문학사에 있어서는 "이 나라 최고의 시인이 시쓰기를 그친 해"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하며, 미당의 "1000여편의 시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호칭을 극히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고 극찬하였습니다 (각주1). 유교수의 미당 사랑은 애도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미당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일등공신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신문이나 미당평론모음집에 반복적으로 실리는 유교수의 글은 놀라울 정도로 늘 똑같은 평문입니다. 1994년 {작가세계}에 실린 <소리지향과 산문지향-미당 시의 일면>이라는 글은, 미당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잣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평문의 결론부분에서 유교수는 미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미당은 청년기에 {시인부락}이란 시 동인지의 동인이었다고 한다. 반세기 후 그는 인용부호 빠진 이 나라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이 되었다. 족장의 사상을 깊이 검토하는 일은 이 자리에서는 불가능하다. 이 족장에 대해서는 시인부락 쪽에서 이런저런 비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작품을 읽고 그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그런 일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 부족방언의 요술사이자 시인부락 족장인 미당 시가 좀 더 널리 향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씌어진 이 글은 어디까지나 미당론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각주2) 

이 글에서 유종호교수는 미당을 '이 나라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이며 '부족방언의 요술사'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당을 '부족방언의 요술사'라 평가하는 유교수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미당은 한 송이 연꽃 속에서 끝없는 공간의 확장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한 송이 국화꽃 속에 담겨있는 바다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을 지녔습니다. 현재의 삶 속에서 '상대본연의 음향'을 듣고, 고대 설화와 현대시를 하나로 엮어내고, 죽은 영혼들과의 혼교(魂交) 내지 영통(靈通)을 통해 영원한 삶을 살고자 할 정도로, 뛰어난 신화적 상상력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은유와 상징을 통해 수(繡)를 놓듯, 베를 짜듯, 정교한 예술품으로 형상화할 줄 아는 예술적 능력을 지녔습니다. 아마도 유교수가 말한대로 "오묘한 부족 방언"의 마술사 내지 요술사로 평가될 수 있을 정도로 미당은 "'부족방언(部族 方言)'의 순화와 세련"에 큰 기여를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당은 '부족방언의 요술사' 내지 마술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시인부락의 족장'이 될 수 없는 인물, 되어서도 안되는 인물입니다. '족장의 사상을 깊이 검토'할려고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고, 족장이 만든 작품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여러 각도에서 고찰하지도 않고, 유교수와 같은 원로 평론가가 미당을 성급하게 "인용부호 빠진 이 나라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 내지 "단군이래 최대의 시인"이라 극찬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일제강점기의 미당의 친일행각과 해방 후의 지속적인 독재정권 찬양행위를 무시한 채, 미당을 시인부락의 족장으로 앉힌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각주3). 명실상부한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기에는 미당에겐 참다운 족장의 덕목--삶에 대한 통찰력, 준엄한 자기비판, 냉철한 이성, 역사의식, 미래에 대한 비전, 희생정신 등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은, 비판정신과 역사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에, '종천순일(從天順日)의 정신'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주군을 섬기는 '백성의 멘탈리티' 내지 주인을 섬기는 '종의 멘탈리티'를 보입니다. 

1988년에 발간된 {팔할이 바람}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從天順日派?]란 시에서, 미당은 회고하길, 일제강점기에 자신이 친일행위를 한 것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일본의 패망을 상상하지 못한 탓에 일본의 장기 지배 속에서 호구 연명할 길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어서 한 행위였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각주4). 또한 그는 자신의 친일행적을, "이조 사람들이 그들의 백자에다 하늘을 담아 배우듯이 하늘의 그 무한포용을 배우고 살려 했을 뿐"이고, "지상이 풍겨 올리는 온갖 美醜를 하늘이 <괜찮다>고 다 받아들이듯 그렇게 체념하고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친일파' 내지 '부일파(附日)'라고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스스로를 '從天順日派'로 칭하였습니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미당이 자신을 종천순일파로 칭한 저의는 스스로의 친일행위를 '하늘'의 뜻을 따른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 했던 많은 국민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였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명칭은 미당의 삶 전반을 통해 지속되어온 그의 독특한 인생관 내지 세계관을 가장 잘 정의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제 생각에도, 미당을 '친일파'라 칭하기보다는 '종천순일파'라 칭하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친일파'라 칭할 경우, 그가 섬긴 '하늘'이 일왕과 아마테라스에 국한되기 쉽고, '섬김받는 자'와 '섬기는 자'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 부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제시대에 국화꽃으로 상징될 수 있는 히로히토왕과 아마테라스를 하늘과 태양으로 떠받들어 섬겼듯이, 해방 이후에도 여러 다른 '하늘'(天)과 '태양'(日)을 섬기고 따랐습니다. <국화꽃의 비밀4>에서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이승만을 만나기도 전부터 그를 "하늘의 서자 환웅의 아드님-단군" 내지 "제우스만큼은 천둥소리 나게 하는 눈살과 이맛살"을 가진 하늘같은 존재로 생각하였습니다(각주5). 그 이후로도 이승만을 향한 미당의 존경은 '숭배' 내지 '짝사랑'으로 그 스스로 표현할 정도로 맹목적인 것이었습니다 (각주6). 즉 미당에겐 이승만은 '국부'이며 '한국혼'이고, 단군과 제우스에 필적할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미당의 '하늘' 내지 '주군'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은 이승만에게만 보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당은 1987년에 쓴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란 시에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이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전두환에 대해 '새로운 햇빛'과 '하늘의 찬양'이란 거창한 표현을 쓰면서, 마치 그가 단군이나 아마테라스에 필적하는 초월적 존재이기나 하듯,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으로 찬양하였습니다(각주7). 

이러한 그의 종천순일파적인 인생관은 그의 일부 작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전 작품에 팽배해 있는 것이 그의 현실순응주의 내지 패배주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방 이후엔 민족주의의 옷--신라정신, 풍류, 영원성, 영통, 혼교, 환웅, 웅녀, 단군 등등--으로 재빨리 갈아입고 나타나기 때문에 텍스트의 표면구조 속에서는 쉽게 간파되지 않습니다. 유종호 교수가 '전통 창제' 내지 '독자적인 신라정신의 구축'으로 평가한 {신라초}나 미당이 '득도의 경지'에 이르러서 썼다고 극찬한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그리고 그의 수필에 나타난 '신라정신,' '풍류도' '영원성' 등은 그의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 인생관의 변형일 가능성이 큽니다. 미당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에 수록된 <神市와 仙境>에서 풍류를 "살을 가진 사람의 한정된 목숨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한정 없는 하늘 속의 마음만의 나이로 사는" 신선의 길로 정의하고 있는 데, 이는 최남선의 풍류사상에 영향이 받아 내린 정의입니다. <風流>란 시에는 최남선의 풍류사상을, <한국적 전통성의 근원>이라는 글에선 최남선의 무속이론을 소개합니다 ({서정주문학전집2}299). 즉, 미당의 단군사상 내지 신라사상의 근간이 되는 것이 최남선의 <불함문화론> 내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남선의 사상을 연구한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육당의 단군연구라는 것이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의 바탕이 된 <내선일체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며, 육당이 삼국의 신라시대의 화랑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은 "풍류"라는 것은 "조선신도(朝鮮神道)"에 불과하고, 화랑도는 무사도의 한 변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각주8). 

미당은 신라에 관해 쓴 여러 편의 시와 수필에서, '처용(處容)'이나 '검군(劍君)'과 같이 현실도피적 내지 체제순응적인 자세로 인생을 산 숙명론자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한 현실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수동적으로 감내한 신라인들을, 풍류도를 아는 '영원인'으로 거듭 부각시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암 조광조론>에선, 체제개혁적인 지조있는 선비 조광조를 풍류를 모르는 졸장부로 부각시키면서 우스개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당의 종천순일의 정신은 그의 초기 작품 뿐만 아니라 말기의 작품에서도 무수히 발견됩니다. 여기에선 구체적인 예로, <처용의 춤>이라는 그의 글을 간략히 소개드리겠습니다. <처용의 춤>은 소위 그가 말하는 신라인의 풍류도 내지 영원인을 기린 산문입니다. <처용(處容)의 춤>에서 미당은 자신의 아내를 탐한 마귀를 향해 보인 처용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신라 서울 경주에 달이 밝은 날 밤에, <처용>이란 이름의 사내는 밤깊도록 딴 데에서 놀다가 이슥해서 집에 들어와 제 침실의 잠자리를 본다. 그런데, 그 자리에 보이는 것은 아내의 두 다리뿐이 아니라, 딴 샛사내의 두 개를 더해서 다리가 네개가 있었다. 그래 '그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웬 놈거냐'고 한다. 그러나, 신라왕조의 고급관리였던 사내는 長劍도 쓸 만한 걸로 한 자루쯤은 가졌었을 테지만, 성급한 <오델로>처럼 그걸 뽑는 일은 하지 않았음은 물론, 별다른 욕지거리 한 마디도 퍼부어 대는 일도 없이, 다만 '본래는 내것이었지만 빼앗은 걸 어찌 하리꼬'하고, 빼앗겼으니 그만 할 수 없는 일이라고만 하고 있다 (......) 

그리고 이 두 길 [오델로의 길과 처용의 길] 중에 <처용>의 珍客歡迎의 길을 차라리 가리킨 건 물론 고대 인도의 석가모니다. 어차피 오기로 되어 있는 진객(珍客)을 칼 뽑아 대항하거나 피해 봤댔자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측 출혈만 심할 바에야 흥분 고스란히 가라앉히고 그냥 좋게 맞이해 대접해서 보내자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이 빤한 교훈은 그대로 인류의 정신사상 최상의 것이 된다 (각주9). 

여기에서 미당은 처용의 패배주의를 석가모니의 지혜로 미화시키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처용과 석가모니의 지혜를 빙자해서 자신의 종천순일적 인생관을 정당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당이 자주 쓰는 수법 중의 하나가,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끌어드리는 것입니다. <從天順日派?>란 시에서, 적극적으로 친일행각을 일삼았던 자신을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무수한 조선인들과 같은 부류에 넣은 것처럼, 그는 자신의 철저한 현실순응주의 내지 패배주의를 지혜로 포장하기 위해 그 근거를 신라인들과 석가모니에게서 끌어오는 수법을 종종 씁니다. 그가 특히 석가모니가 가르쳐 준 지혜로 최대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석가모니가 죽음에 처해서 보인 독살자(毒殺者) <춘다>에게 베푼 관용성입니다. <석가모니에게서 배운 것>({미당 산문})이란 글을 보면, 미당은 석가모니의 죽음에 관한 무수한 해석 가운데 아직 정설로 인정되지 않는 '<춘다>에 의한 독살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합니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이 중에 한 사람은 나를 팔았다"라고 지시해서 가롯 유다를 목매달아 죽게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석가모니는 독살을 당하면서도 춘다를 고발하지 않았다는 점을 미당은 가장 높이 삽니다. 즉, 자신의 종천순일적 인생관--'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에 석가모니적 지혜의 옷을 입히고 자신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소인배로 부각시키는 것이 그의 왜곡된 불교정신의 핵심 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삶과 글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요술사적 재능을 지닌 미당이 자가당착적인 일면을 극명히 노출시킨 것은 그의 보들레르 인용입니다. 그는 <문학작품과 독자>라는 글에서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 내지 '민중문학 운동'을 비판하면서, 뛰어난 예술가의 본보기로 보들레르를 내세웁니다. 

샤를르 보들레르도 프랑스 혁명 때에는 다수 민중의 편이 되어 그 시가전의 전위대열에도 참가했으며, 또 그들의 신문 발간에까지도 앞장서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시집 <악의 꽃>이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을 통독해 보라. 거기 어디에 다수의 군중심리에 아첨하여 인기를 얻으려 한 작품이 단 한편인들 보이는가? 거기에는 시의 발견 노력자 보들레르 개인의 구전(俱全)의 자유와, 정밀한 심미탐구와 그래서 도달한 상징적 표현의 선각자로서의 면면한 창작노력의 흔적들만이 역연할 따름이다. 

미당은 보들레르의 삶과 예술을 다 알면서도, 보들레르가 걸어온 삶의 진정성과 순수성에 대해선 눈뜬 장님이 되고, 오로지 그의 기법만을 배웠을 따름입니다. 석가모니의 참다운 지혜, 보들레르의 참다운 순수성에는 눈을 감은 채, 그에게 유리한 일면 만을 보았다고나 할까요? 자신의 나이 20대에 쓴 <자화상>에서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라고 선언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삶을 준엄한 자기비판 없이 철저한 순응주의로 일관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평생을 종천순일적 인생관에 충실하게 현실순응적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은밀한 형태로 작품 속에 담아 우리의 민족혼을 어지럽혀 온 미당을, 그의 빈곤한 사상에 대한 충분한 연구도 하지 않고 또 공개적인 논쟁의 장도 제대로 펼쳐보지 않고, 그에게 서둘러 "20세기 최대의 시인"이란 월계관을 씌우고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을 제정한다는 것은 너무도 졸속으로 내려진 위험스런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족방언의 요술사'라 평가될 정도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닌 자가 '시인부락의 족장'으로 섬겨질 때, 그 '요술사-족장'의 종천순일파적 사상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너무도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전세계인들이 알고 있는 "황국(黃菊)=일본황실"이라는 등식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하고 {국화와 칼}을 읽었던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간과해 온 것은 미당이란 '부족 방언의 요술사'가 보인 마술적인 힘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당의 <국화 옆에서>의 황국과 거울을 "국화꽃=친근한 누님" 내지 "거울=관조의 경지"로만 획일적으로 해석해 온 것도 모두 단순한 표피 아래 자신의 비밀스런 생각을 은폐해 온 흑색 마술사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이 땅의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미당의 마술사 내지 요술사 능력에 매혹당해, 혹은 미당의 실체를 알면서도 자신들 패거리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아직도 미당의 빈곤한 사상과 볼품없는 실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많은 평론가들과 어른들은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에 등장하는 어른들처럼 벌거벗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하길 주저하고,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들이 보지도 못하는 화려한 겉옷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니까 한 아이가 말하더군요. 안데르센 동화 속의 순진한 아이처럼, "하지만 임금님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걸요"라고. 

저는 제 길고 긴 논문의 맺음말로, <간디학교>를 다니는 문학평론가 지망생인 그 아이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그 학생은 대학입시를 위해 모 대학의 집단면접에 응시했다가 미당 서정주에 대해 평가하라는 교수들의 질문을 받았다더군요. 그 아이는 수많은 지원자들 가운데서 자신 홀로 올바른 답을 말했기 때문에 당연히 시험에 붙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 데, 의외로 떨어져서 실망이 커 보였습니다. 그 아이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머뭇거리듯 천천히 또박또박 한 말은 아직도 내 마음에 아프게 와 닿습니다. 

"미당 서정주의 친일시를 접하고,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보면서 ...... 자기 사상의 뿌리가 썩어 있는 데 ...... 그 작가의 작품이 아름답다고,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이라고 해서, 그 꽃이 진짜 진실된 꽃일까요?" 

그동안 제 길고 긴 논문을 참을성있게 읽어주신 여러 창비네티즌들께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창비웹팀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미당 '菊花옆에서'는 친일시 / 이주하

 

유신말기, 고등학교 3학년 막바지에 교내 서클에서 한 선생님이 '미당 서정주와 노천명은 친일파'라며 그의 행적

을 이야기(낮은 톤으로) 해주셨을 때, 함께 있던 친구 몇 명과 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한 친일파 장교놈이 총칼 앞세워 헌법을 유린하고 그것도 모자라 유신헌법을 만들어 종신 대통령 해먹던 시절이니, 

감히(?) 사석에서 '친일'이라는 말 조차도 꺼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거니와 서정주의 '국화옆에서'와 노천명의 '사

슴' 따위의 시들은 당시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청소년 세대의 유일한 문화창구였던 교회 <문학의 밤> 행사들에서 

단골로 애송되던 시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교육을 받고 있는 거지?"
친구들과 나는 그날 저녁, 북한산 계곡으로 가서 소주 몇 병을 축냈다.

 

그 이후에 '친일문제'는 내게 매우 큰 문제의식의 하나가 되었고 대학 물 먹으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임종국님의 

'실록 친일파'를 읽었는데, 그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적나라한 친일행적들과 해방 이후 뻔뻔하게도 미군정과 독재

정권에 기어들어 가 호의호식 함에 대해 혀를 내두르기도 하였다.

 

얼마 전 모 방송사 TV에서 기획된 '천황' 시리즈물을 보면서, 문득 소스라치게 놀란 대목이 있다.

 

 



 


메이지신궁 정문 문양

 


일본의 國花는 사꾸라가 아니다. 단지 일본인이 좋아하는 꽃일 뿐.
굳이 있다면, 일본왕실의 상징인 국화다.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도 국화문양을 따랐다.

 

저 일본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국화 한 송이...
일본 천황이 계승하는 삼신기..거울,구슬,검

 

혹 우리가 순수시로 알고 있는 서정주의 '국화옆에서'도 적나라한 "친일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니 나도 

모르게 그랬다.  

 

서둘러 인터넷에서 시를 다시 검색했다.

 


국화옆에서(1947)

 

                  서 정 주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응? 1947년이라..친일시라면 응당 해방 전의 작품이라야 하는데, 이건
해방 후에 발표한 시가 아닌가?
그럴 리가 있나?

 

그래서 다시 '천황 국화꽃'으로 검색해 들어갔다.
그랬더니 놀랄 만한 책이 한 권 소개되어 있다. 
서정주의 이 시를 비판한....바로 김환희 님이 쓴 "국화꽃의 비밀"이다.


 


"황국(黃菊)은 일본에서 지난 14세기 이후로 일왕과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 거울은 일왕이 현인신(現人神)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상징물"

 

요약내용은 아래 유알엘 참조 (글쓴이 : 황인산님)

 

황인산 ... '국화꽃의 비밀'을 읽고

 

2001년에 이 책이 나온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니 하는 생각에 내 무성의를 후회했다.
(이글은 '뒷북'인 셈이다. 둥둥...)
미당의 이 시는 해방 전에 쓴 것으로 추측된다는 세간의 이론에 공감한다.

 

예술 작품에 작가의 삶과 사상이 배제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미당의 '일본인 같은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답은 저절로 나온다.
서정주는 이광수처럼 절대 '순수문학인'이 아니다.
노천명, 모윤숙, 주요한, 김동명, 김남조등도 그렇다.


(일본군 만행..사진 올리자면 한이 없다.)

친일파의 시가 이처럼 '순수'의 탈을 쓰고 교묘히 위장하여 우리의 고정관념에 
박혀 있듯이 친일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닌 현재의 족쇄다.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고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양심'의 문제며 '삶의 이야기'다.

 

이러저러한 핑게로 과거사에 대해 물타기를 하는 부류(한나라당과 조선일보 같은) 가 있다면, 그들은 분명 '뒤가 

구린 부류들'일 것이다.
 
현혹되지 말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니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서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 백범(白凡) 김구 <나의 소원> 中에서 -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의 문제성 혹은 위험성(1) 

창비무명인님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 종천순일의 상징, '노오란 국화']를 경이와 경탄의 눈으로 읽었습니다. 
방대한 글을 인터넷 게시판의 특성을 적절히 살리며,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며 글을 잘 마무리하신 데 대해 우선 경하합니다.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알 기회도 갖기 어려웠던 일본 신화의 세계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님의 글을 읽노라니, 근대문학작품의 해석에 일본문화와 일본체험의 존재를 살펴야 할 필수적인 예들이 적지않을 터인데 이 부분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고 넘어가는 학계 및 평단의 '공모'적 풍토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 밑바닥엔 일본콤플렉스가 있고, 민족주의적 감정에 의해 왜곡된 도덕주의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님은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을 '누님'의 은유로만 생각하는 일반 사람들의 의식에 파문을 던질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가 글을 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는 조심스런 서두로 글을 시작합니다. 그런만큼 이 글이, 미당은 친일 친독재 인사므로 그 작품도 모두 쓰레기다라는 식의 인터넷상의 많은 감정배설적인 단평들과는 현저히 구별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진지하고 많은 자료를 동원하고 큰 공력이 들어 있는 만큼이나 문제점과 위험성도 크게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글이 시작될 때는 거의 외경에 가까운 느낌으로, 이 글의 모험이 그 폐해를 훨씬 뛰어넘는 유익한 탐색이 될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만, 전문이 발표된 후에는 그것이 과연 유익한 탐색인지 단정할 수 없는 유보적인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나온 김흥년님의 몇몇 중요한 지적과 백낙청님의 날카로운 논평(과 앞으로의 집필 약속) 등을 볼 때 미당시와 근대시를 보는 시야를 한차원 높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는 믿음이 다시 생기기도 합니다. 

저는 창비무명인님의 글로 미루어, [국화 옆에서]의 국화의 상징성을, 혹은 미당 시의 어떤 요소들을 일본황실의 상징 혹은 일본문화와 연결시켜 보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국화 옆에서'의 국화를 일본황실의 상징, 나아가 히로히토를 나타낸 것으로 파악하는 논지는 거의 설득력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오상고절과 구별되는 '누님' 비유의 새로움에 대한 논의, 창작시기를 둘러싼 문제, 시인 자신이 '국화 옆에서'를 얘기한 글의 문제 등 주요 논제가 대부분 성립할 수 없거나 잘못된 가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국화꽃의 비밀 3'에 덧붙여서 쓴 글과 시 전문 소개](6월 26일 글)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 중 1) 창작시기 2) 미당의 애착 3) 해방 후 창작? 4) 소쩍새와 천둥의 울음 문제 5) 국화꽃=남성, 여성 문제의 다섯 가지는 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거나 오도되어 있습니다. 

1) 창작시기 문제는 국화꽃=천황 상징, 아마테라스 상징이라는 가정이 없다면 문제될 것이 없고 
2) 미당의 창작시기와 창작의도에 대한 횡설수설은 자기 작품에 대해 많이 얘기하면 할수록 사실상 횡설수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대부분 사후의 창작이니까. 또는 사후의 창작이라는 개연성을 갖고 읽는 것이 상식이지요.) 
3) 거울과 황국. (거울 얘기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런데 너무 심오한 해석이었어요. 저는 [국화 옆에서]는 아주 상식적인 독해를 하면 족한 시라고 판단합니다. 김재홍 교수 등등의 독해는 해석을 위한 해석, 참고서 만들기 위한 해석의 범주 아니겠어요.) 천황을 누님이라? 결국, 해방전 창작이든 해방후 창작이든 거울과 황국을 일본상징의 차용으로 보는 것이 무리하다는 질문 아닙니까. 뒤의 논증에서 그 무리가 해소되었나요? 
4) "그 많고 많은 봄과 여름의 이미지 가운데 왜 하필이면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의 울음을 택했는지": 왜 '하필이면'이라고 생각하는지 저는 도저히 모르겠군요.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종달새는, 까마귀는, 비둘기는/그렇게 울었나보다"나 "봄부터 개구리는/그렇게 울었나보다"가 돼야 하나요? 
5) 여성 패러다임: 현대시인이 오상고절을 그대로 읊어서는 그 시가 기억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국화 옆에서'는 오상고절 거의 그대로예요. 오상고절의 현대적 변용의 한가지지요. 

6)번 질문은 '예'라고 답해야겠네요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양상, 한일 카프문학 비교 등도 있었지만, 금기가 강했죠. 그것은 우리의 자신감의 부족, 서양이론 중심주의 등등에 기인하죠. 그런데 서양이론에 매달린 사람들의 학문이 매판성을 보유하듯, 일본을 공부하다보면 역시 매판성을 보유하게 되기 십상이라는 점도 경계해야죠. 

소개하신 국화꽃=이승만 설정도 흥미는 있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근거는 못 찾겠어요. 
[일본 산들의 의미]가 91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은(그 무렵 쓴 것일 텐데), 저로서는 오히려 80년대 이후에 와서 이런 투의 시를 썼지 그 전에는 [신라초]니 [동천]이니 이런 세계에 몰입한 증거가 아니겠어요? 가령 "그가 일본신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긴 하지만 그게 언제부터 드러나는지 주밀하게 살펴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1)에서 이어집니다.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의 문제성 혹은 위험성 (2) 

그리고 종종 사부님 말씀을 거론하시는 것은 글을 재미있게 해주는데, '사부님 말씀'이니까 님에게 어떤 신뢰가 저절로 내면에 생긴 것이란 느낌을 우선 줍니다. 또 독자들에게 뭔가 거역할 수 없다는 느낌을 심어주기도 하는데, 사실 가만히 보면 사부님이 '편견'에 집착해 있어요. 물론 거기에 예리한 직관이 없지 않은데, 님의 말씀의 분위기로는 사부님의 직관이 어떤 증거나 치밀한 반증에 의해 변동될 수 있는 직관이라는 판단이 전혀 안되거든요. 

미당의 '행사시'들을 보면 차이가 있어요. 
인용하신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를 봅시다. 그게 제목입니까? '탄신'이라니! 그리고 "새맑은 나라…" 운운은 그게 미당 시입니까? 아니, 그냥 시입니까? 중학생 작문도 요즘엔 그렇게 안 써요. 
[마쓰이 히데오 송가]는 종천순일파의 '시'라고 할 수 있어요. 친일시지만 그래도 미당 시다운 솜씨가 조금은 있는 시죠. 그런데 이 축시는 종천순일파도 아니에요. 미당이 아니라면, 좀 과장해서 전두환을 희롱한 시라고까지 읽을 수 있겠어요. 미당의 친일작품으로 단편작품도 있지요. 전황을 전하는 우체부를 그린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인물 구성 묘사 문체 주제표출방식 모두 빼어나요. 이것은 미당의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미당이 이미 80년대에 접어들면 예전의 미당이 아니라 많이 풀려버린 것이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미당은 이런 행사시에는 분명하게 메시지를 드러냈어요. 사실 그가 무얼 그렇게 의뭉하게 감추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런 점도 고려해서 다른 시들을 읽어야겠지요. 

종천순일파란 얘기가 언제 나온 겁니까? 보니까 88년 무렵인가 보네요. 미당이 40년대에도 종천순일파라고 생각했나요? 친일문학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탐구가 깊이 있어야겠어요. 
물론 미당의 이런 자기규정이 재미있고 정곡을 찌른 면도 있지만, 그것도 오히려 미화된 것이라 보아야 하겠고, 오히려 마름 기질에 가깝죠. 줏대 없는 삼류 광대죠. 그렇다고 그의 시가 이런 규정에 모두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적하신 '현실순응주의' '패배주의'의 미학을 좀더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종요로운 과제겠습니다. 

미당시에 씌워진 신화를 벗겨야겠습니다. 사실 분단 후, 많은 뛰어난 시인들의 월북, 사망 등으로 남한문단에서 행세할 시인이 별로 없었고, 미당은 게다가 장수한 덕분에 많은 신화가 생기고 문단 부대가 생겼어요. 이제 그의 시의 본질, 그의 미학의 정체를 똑바로 짚어보는 첫걸음이 조금씩 진전되는 것 같네요. 

백낙청님의 '부족방언의 마술사' '언어의 마술사'의 의미를 더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사실 김수영이나 신동엽, 신경림, 박노해, 정희성, 윤동주 이런 시인들을 떠올릴 때 '부족방언(모국어)의 요술사'나 '언어의 마술사'란 말은 안 어울리고, 극히 제한적인 부면만을 바라보는 용어가 돼요. 따라서 이 말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내용도 시의 총체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매우 한정적인 영역밖에는 안 되죠. '시인부락의 족장'---과연 유종호님은 명명의 마술사입니다. 지금은 '족장'의 시대가 아니죠. 민주주의의 시대, 시민의 시대, 내가 왕이다의 시대 등등이겠는데, 그렇다면 역으로 '족장'의 비유가 정곡을 찌른 것이군요. 

님의 이번 논문은 역작임에 틀림없지만, '국화꽃은 천황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앞서 있습니다. 시와 삶을 분리하자는 분리주의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전체성의 인간을 가정하는 것 또한 곤란합니다. 

가령 미당 시의 이런 대목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6·25사변과 1·4후퇴의 
긴 4년의 피난살이도 피난살이였지만 
1960년에 이박사가 올빼미표 선거를 하게 두고 
중고등 학생들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총으로 쏘게 한 건 
웃기네. 

-[8·15의 은어] 

오히려 {문학과 역사적 인간}에서 김흥규가 김영랑과 최재서, 이육사 등을 분석한, 작가의 생애와 그 물적 토대를 짚어보며 작품의 전반을 살펴본 논문들이 새삼 떠오르네요. 그런 작가론이 씌어진다면 일차적인 서정주의 세계관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백낙청님의 논평에 대해 답하신 님의 글이 저의 이 글에 대한 답도 어느정도 되었다 싶고, 그런 톤이 오히려 님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80년대 중반 이후 미당 시를 거의 안 읽었어요. 다시 그의 시 전반을 보고 글을 써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어 그대로 감상을 적었습니다. 그래서 제 기존관념과 새로운 생각이 뒤섞이는 느낌입니다.) 
 



@@@@@@@@@@@@@@@@@@@@@이어령 교수 시평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소쩍새 : 올빼미과의 새. 일명 귀촉도, 자규. 한(恨)과 원(怨)의 심상으로 고
전 작품에도 자주 등장함.
* 뒤안길 : '뒤꼍'의 뜻을 지닌, 으슥하여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
* 무서리 : 그 해의 가을 들어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



...
가장 한국적인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미당의 대표작이자 우리나라 
현대시를 대표하는 명시의 하나이다. 국화의 개화(開花) 과정을 통하여 어떠
한 생명체라도 치열한 생명 창조의 역정을 밟고 태어난다는 것을 선명히 보
여 주는 이 시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 因緣說)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것이 단독으로 이루어 지는 것
이 아니며, 강한 힘을 부여하는 인(因)과 약한 힘을 보태는 연(緣)과의 상호 
결합의 결과로 본다. 이 시에서도 국화 자체의 힘(因)과 소쩍새·천둥·무서리
가 봄부터 가을까지 작용(緣)함으로써 국화가 꽃을 피우는 것이다. 여기서 
국화는 모든 생명체의 대유이자, 나아가 생명이 그러한 아름다움으로 승화
된 상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시적 자아의 '누님'과 같은 40대 중년 여인이 도
달할 수 있는 원숙하고 평온한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원래 국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꽃이지만, 
이러한 관습적 상징의 차원을 넘어서서 시인은 생명 탄생의 고귀함과 원숙
한 중년 여인의 불혹(不惑)의 미를 상징하는 창조적 상징의 차원으로 국화를 
노래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함축미를 지닌 국화의 개화를 위해서 외적(外的)
으로는 소쩍새의 울음·천둥· 무서리 등의 협동이 필요했고, 내적(內的)으로
는 설움과 번민의 시련과 고통 등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을 통
하여 국화는 마침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피우게 되는 것이고, 무수한 괴로
움과 역경을 극복한 인간은 거울 앞에 앉아 조용히 자신을 투영, 성찰하는 완
전한 모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
모든 풀들이 시드는 가을철, 서리 속에서도 국화는 홀로 향기롭게 핀다. 그 
고고한 품격 때문에 국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시인 묵객(詩人墨客)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중양절(重陽節)에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의 꽃이라 
하여 술에 담그고 전(煎)으로 부쳐 먹는 풍습도 있었다. 은군자(隱君子)의 유
교적 이념이든 혹은 신선을 나타낸 도교적 상징이든, 국화는 워낙 우리 의식 
깊숙이 배어있는 꽃이어서 잘못 노래하다가는 그야말로 똑같은 틀로 찍어낸 
국화빵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서양에는 「맨 처음 장미를 미녀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지만 그 말을 두번다
시 쓴 사람은 바보다」라는 속담이 있다.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국화를 군
자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지만 두번째로 그와 똑같은 말을 한 사람은 바보」
가 되고 만다.
만약 시인 서정주(徐廷柱)의 <국화(菊花) 옆에서>가 은둔을 노래한 도연명
이나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예찬한 이정보의 국화였다면 우리는 이 시를 읽
지도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당(未堂)의 <국화옆에서>를 읽는다는 것은 곧 국화를 노래한 다른 텍스
트와의 차이를 읽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가장 돋보이
게 하는 것이 국화를 「누님」에 비유한 바로 그 은유이다.
봄에 피는 봉숭아가 여성적인 것이었다면, 국화는 지금까지 남성 그것도 고
결한 사대부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미당은 그것을 「머언 먼 젊음
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
고 국화의 성(性;젠다)을 바꿔 버렸다. 「군자=국화」가 「누님=국화」로 패
러다임을 바꿀 때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첫째는 관념적인 이념의 남성 원리가 감각적인 미(美)의 애정의 여성 원리
로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거울 앞에 선 누님」의 모습은 췌언(贅言)할 필
요없이 「먼 남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은일자(隱逸者)」 혹은 「책 앞에 앉
은 선비」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군자라고 할 때의 도덕적 가치 규범과는 달리 「누님」이라고 하면 아무리 
나이 든 여성이라도 심미성이나 애정과 관련된 세계를 연상하게 된다. 「거
울 앞에 선」이라는 「거울」은 용모를 가꾸고 다듬는 도구로 '책-선비'에 
대응하는 '거울-여성'의 환유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시의 평자(評者)들은 누님의 모습을 흔히 「오랜 세월 격정과 
고통을 견디어 낸 성숙한 인간의 인고(忍苦)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해 왔
다. 그렇게 되면 서정주의 국화 역시 군자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윤리적인 원숙이 아니라 미(美)의 원수성,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관능적인 애욕이나 유혹에 들떠 있던 젊음의 미(美)가 아니라 실연의 고
통이나 삶의 환멸과 좌절같은 것을 다 겪고난 뒤에 비로소 얻어지는 중년 이
후의 여인에게 맛볼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봄에 피
는 붉은 도화(桃花)와 가을꽃인 노란 국화의 의미론적 차이를 결정짓는 서정
주의 시적 전략이다.

「머언 먼 젊음」이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거울 앞에선 누님은 인생의 
봄과 여름을 지나 겨울철로 접어든, 적어도 중년을 넘어선 여인이다. 그 얼굴
의 화장 밑에는 처연하면서도 침잠된 미-젊음의 미와는 또다른 진짜 여성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두번째의 지향점은 그냥 누이가 아니라 「나의」 누님이라고 했듯이 매우 
가까운 개별성과 혈연성을 느낀다. 
군자는 이상적이고 이념적인 존재로 우리와는 먼 존재로 느껴진다. 은자
(隱者)는 세속과 단절된 것으로 그 품격은 오상고절처럼 주위로부터 단절된 
배제적 가치로 이루어진다.

미당의 국화가 다른 국화와 차이성을 지니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지나고 /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느냐 /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라는 전통
적인 그 국화는 「네 홀로」, 「너뿐인가 하노라」로 강조되어 있듯이 홀로 
있는 절개(고절)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미당의 국화는 정반대이다. 주위의 모든 것과 친연(親緣) 관련을 이
루며 피어난다. 시간의 단위로 볼 때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이 하나의 고리쇠
로 지속하고, 사물의 층위에서 보면 모든 사물이 무생(無生), 유생(有生)의 
담쟁이를 넘어 일체화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화는 봄의 소쩍새, 여름의 천둥과 인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연과 대응되는 인생의 경우에서는 「누님」과 「나」와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너뿐인가 하노라」의 초절성(超絶性)이 아니라 모든 것과 결합된 친연성
(親緣性)으로 새롭게 태어난 미당의 국화는 봄의 소쩍새 소리와 여름의 천둥
소리와 인과 관계를 갖게 된다.
국화꽃은 가을에 피는 꽃이다. 그것은 봄철에 우는 소쩍새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하나는 식물이고 하나는 동물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 향기를 지닌 것
과 날개를 지닌 것, 땅에서 사는 것과 공중에 사는 것, 국화꽃과 소쩍새는 어
느 모로 보나 같은 자리에 앉힐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전설과 시의 상상적 세계라고 해도 소쩍새는 지금까지 국화가 아니라 같은 
봄철에 피는 진달래 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서정주의 시 속에서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
는 밤마다 운」 것으로 되어 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고 되어 있
다. 「봄부터」란 말에서 우리는 금시 국화꽃의 시원(始源)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시간적 인과 관계만이 아니다. 꽃은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는 시각과 후
각의 대상물이다. 그런데도 미당의 국화는 소쩍새의 울음소리와 먹구름 뒤
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의 청각물과 어울려서 감각적 세계에 있어서도 통합 
관계를 이루고 있다.

'왕이 죽었다. 그리고 왕비도 죽었다' 라고 하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왕의 
죽음과 왕비의 죽음에 슬픔이라는 인과성을 부여할 때 비로소 소설의 플롯
(plot)은 형성된다.
이 유명한 정의처럼 미당은 관계없이 흩어져 있는 사물이나 그 현상 속에서 
어떤 인과율을 찾아내는 것으로 시의 구성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최종적으
로는 「봄-소쩍새-국화」, 「여름-천둥소리-국화」에서 「가을-서리-국화
」에 도달한다. 그리고 서리는 직접적으로 노란 꽃잎을 피운다. 그리고 동시
에 거울 앞에 선 나의 누님과 국화의 관계 역시 「나」와 국화의 관계로 옮겨
지면서 「노란 네 꽃잎이 필라고 /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 내게는 잠
도 오지 않았나 보다」의 마지막 시행이 되는 것이다. 처음엔 한 송이 「국화
꽃」이라고 부르던 것이 마지막에 오면 「네 꽃잎」으로 그 인칭이 바뀐다. 
너라고 직접 불린 국화는 이미 밖에 있는 꽃이 아니라 은유의 거리마저 소멸
한 「나-국화」의 동일성으로 변한다.

봄과 여름의 계절, 그리고 누님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이 나에게 오면 「
간밤」이라는 아주 가까운 시간이 되고, 가슴 조이는 그 의미 역시 무서리와 
직접 연결된다. 시가 진행되어 갈수록 먼데서 가까운 곳으로, 넓은 데서 좁은 
데로 국화는 우리 옆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국화옆에서」의 그 「
옆」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국화 속에서는 모든 생명을 죽이는 서리가 오히려 꽃을 피우는 초월의 힘으
로 작용한다. 누님도 나도 이 서리의 역반응에 의해서 비로소 삶의 「노란 꽃
잎」은 그 아름다움을 얻는다.
누님의 그 노란 꽃잎이 여성으로서의 최종적인 아름다움의 도달점이라고 
한다면 잠 오지 않은 간밤의 무서리 속에서 피어나는 「나」의 그 노란 꽃잎
은 시인이 고통 속에서 얻어낸 아름다운 몇 줄의 시일 것이다.

신라의 스님 월명(月明)이 밤길을 가며 피리를 불면 가던 달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이 천체의 운행이 멈추는 순간, 만물이 교감하고 조응(照
應)하는 그 순간에 시가 태어난다. 가을에 피는 국화꽃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거울 앞에선 누님, 그리고 밤에 잠 못이루는 나(시인)는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그 행복한 은유는 서리 내린 이 현실 세계를 교감과 조응
으로 가득 채우는 시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어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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