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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서정 풍자시인 - 호라티우스
2017년 02월 05일 15시 00분  조회:4780  추천:0  작성자: 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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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 베노사(Venosa)에 있는 호라티우스의 동상.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Quintus Horatius Flaccus, 기원전 65년 12월 8일 - 기원전 8년 11월 27일), 고대 로마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시인이다.

생애[편집]

호라티우스의 출신 가문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그의 아버지는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신분(libertinus)으로서 로마 자유시민권을 가진 여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호라티우스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세심한 교육을 받았으며, 기원전 45년에 당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인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유학하여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다. 이 시기에 그는 역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친교를 맺게되어 그를 따라 소아시아 지방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한다. 기원전 약 40년을 전후로 호라티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젊은 문학자와 사귀면서,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주선으로 당시의 로마의 문학 애호가이자 부호인 가이우스 마에케나스(Gaius Maecenas)에게 소개된다. 이 만남은 호라티우스가 사망할 때까지 깊은 우정관계로 발전한다. 특히 마이케나스는 호라티우스에게 기원전 32년 사비나 농장을 선물함으로써,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시 창작에 열중하게 된다.





 
출생일 BC 65. 12, 이탈리아 베누시아
사망일 BC 8. 11. 27, 로마
국적 로마

요약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로마에서 활동한 뛰어난 서정 시인이자 풍자작가이다. 브루투스 진영에서 군대 호민관으로 활동하다가 패한 뒤 이탈리아로 도주한 호라티우스는 이후 금고 서기직을 맡아 일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즈음 문인 마이케나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를 통해 옥타비우누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무렵 호라티우스는 <풍자시> 제1권과 17편의 <서정시>를 쓰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찌른 뒤에는 <서정시>와 <풍자시> 제2권을 발표했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지위를 굳히자 <송가>로 방향을 바꿔 88편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3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아우구스투스가 ‘100년제’라고 부르는 고대 축제를 되살리자, <세기의 찬가>를 지었다. BC 8년 아우구스투스를 상속자로 지명한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송가 Odes〉와 운문 〈서간집 Epistles〉에 가장 자주 나오는 주제는 사랑과 우정, 철학 및 시론이다(아우구스투스 시대). 호라티우스는 아마 이탈리아 중부 산악지방에 사는 사벨리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노예였지만, 호라티우스가 태어나기 전에 자유를 얻어 경매인의 조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토지를 조금 갖고 있었고, 아들을 로마로 데려가 같은 사벨리인인 유명한 오르빌리우스(호라티우스의 말에 따르면 체벌의 신봉자)의 학교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할 만한 여유도 있었다. BC 46년경 호라티우스는 아테네로 가서,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지는 강연을 들었다. BC 44년 3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된 뒤, 아테네를 포함한 제국의 동부지역은 일시적으로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카이사르의 동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및 젊은 옥타비아누스(뒤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외종손자인 옥타비아누스를 개인 상속자로 지명했다.

호라티우스는 브루투스의 군대에 들어가 '군대 호민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의 아들에게는 이례적인 명예였다.

BC 42년 11월 필리피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토벌하기 위한 전투가 2차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호라티우스와 그의 동료 호민관들은 계급이 그들보다 높은 장교가 없었기 때문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연합 군단 가운데 하나를 맡아 지휘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참패를 당하고 전사한 뒤, 호라티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지배하는 이탈리아로 달아났지만, 베누시아에 있는 아버지의 농장은 제대 군인들에게 정착지를 제공하기 위해 몰수된 상태였다.

그러나 호라티우스는 로마로 가서, BC 39년에 일반 사면령이 내리기 전후에 금고 서기 자리를 얻었다. 36명의 금고 서기는 비록 하급직이지만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BC 38년초 그는 가이우스 마이케나스를 소개받았는데, 마이케나스는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문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라티우스를 그와 친한 작가들의 명단에 올려놓았다. 오래지 않아 호라티우스는 마이케나스를 통해 옥타비아누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무렵 호라티우스는 〈풍자시 Satires〉 제1권을 쓰고 있었다. 6보격의 운문으로 씌어진 이 10편의 시는 BC 35년에 발표되었다. 그리스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풍자시〉에서, 호라티우스는 공직생활을 단호히 거부하고 평온함을 통해 지혜를 얻고자 했다.

그는 여기서 윤리 문제(재산과 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 극단적 행위의 어리석음, 서로 관용을 베푸는 것의 바람직함, 야망의 해악)를 논하고 있다. 또한 그는 17편의 〈서정시 Epodes〉도 쓰고 있었다. 이 작품은 격한 어조의 조롱을 보여주며, 예로부터 인신 공격과 조롱에 사용된 운율을 채택했지만, 호라티우스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악습을 공격하고 있다.

이 시의 어투는 필리피 전투 이후 그가 느끼고 있던 불안한 기분을 반영한다.

BC 30년대 중엽에 그는 마이케나스에게서 사비니 구릉지대에 있는 안락한 집과 농장(로마에서 북동쪽으로 35㎞ 떨어진 리첸차에 있는 언덕일 가능성이 많음)을 받았다. 이것이 선물인지 빌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집과 농장은 평생 동안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 북서쪽의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찌른 뒤(BC 31), BC 30~29년에 호라티우스는 〈서정시〉와 8편의 시로 이루어진 〈풍자시〉 제2권을 발표했다. BC 27년에 승리자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확고한 지위를 굳히자, 호라티우스는 〈송가〉로 방향을 바꾸어 BC 23년에 88편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3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그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활발하게 시를 쓴 시기는 이때였다. 호라티우스는 〈송가〉에서 그리스 초기 서정 시인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지만, 낱말을 섬세하고 절제 있게 구사하는 독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랑과 포도주, 자연(거의 낭만적으로), 친구와 중용(그가 좋아하는 주제였음)을 노래했다. 〈송가〉의 일부는 마이케나스나 아우구스투스에 관한 것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던 고대 로마의 미덕을 찬양했지만, 그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그 자신이었고, 송가를 하나의 주제나 분위기에만 한정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호라티우스에게 개인비서 자리를 제의했지만, 그는 건강이 나쁘다는 핑계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거절을 괘씸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들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처음 3권의 〈송가〉 가운데 마지막 송가는 호라티우스가 그런 시를 더이상 쓰지 않을 작정이었음을 암시한다(그는 BC 23년에 시를 발표한 뒤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했을 것임). 그의 서간체 시집(BC 20~19년에 발표한 제2권으로 〈풍자시〉를 좀더 성숙하고 심오하게 변형한 문학적 '편지들')에 실린 마지막 시는 '천박한' 서정시를 버리고 좀더 교훈적인 종류의 운문을 택하겠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그 직후에 그는 3편의 서간체 시(첫번째 책에 실린 어떤 서간체 시보다 훨씬 긴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창작 활동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모든 풍자적 요소를 버리고 부드럽게 비꼬면서도 분별 있는 태도를 취했지만, 중용을 찬양하는 진부한 말도 그의 손이 닿으면 결코 따분하지 않다. 그중 2편은 2번째 책으로 묶여 나왔고, 3번째 서간시인 〈피소 삼부자에게 보내는 편지 Epistles to the Pisos〉에는 후세 사람들이 〈시론 Ars poetica〉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마지막 3편의 서간시는 느슨하고 대화적인 형식 속에 문학비평을 싣고 있는데, 특히 〈플로루스에게 보내는 편지〉(서간체 시집 제2권 제2편)는 호라티우스가 왜 서정시를 버리고 철학을 선택했는가를 설명해준다. 훌륭한 시는 즐거울 뿐만 아니라 교훈적이어야 한다고 호라티우스는 생각했다. 좋은 글의 비밀은 지혜('미덕'이라는 뜻을 함축)이다. 시인은 자신의 가장 좋은 점을 아낌 없이 주기 위해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

〈플로루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BC 19년에, 〈시론〉(이 책은 젊은 시인들에게 지침이 될 30여 개의 격언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BC 19~18년경에, 제1권의 마지막 서간체 시는 BC 17~15년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명한 이 마지막 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호라티우스에게 보낸 편지도 오늘날 남아 있는데, 여기서 황제는 그때까지 그런 헌정을 받지 못했음을 탄식하고 있다.

이 마지막 서간체 시에서 호라티우스는 로마 초기의 문학적 배경에 비추어 당시의 시가 가진 장점을 역설하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 호라티우스 자신의 방법론을 옹호한 것이다.

이무렵 호라티우스는 사실상 계관시인의 지위에 올라 있었고, BC 17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정권과 지난해에 주창한 도덕 개혁을 종교적으로 엄숙하게 승인할 목적으로 '100년제'(Secular Games)라고 부르는 고대 축제를 되살리자, 호라티우스는 이 축제를 위해 〈세기의 찬가 Carmen saeculare〉를 지었다.

이무렵 호라티우스는 서정시 형식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찬가는 서정시 운율로 씌어졌다. 이어서 그는 15편의 송가로 이루어진 4번째 〈송가집〉을 완성했는데, 이 시들은 대부분 이전의 송가들보다 진지한(그리고 정치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이 시들 가운데 마지막 송가는 BC 13년에 씌어졌다. 지난 몇 년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참모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마이케나스가 BC 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황제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저를 기억하시듯 호라티우스를 기억해주십시오"였다.

그러나 그후 1~2개월 뒤 호라티우스도 아우구스투스를 상속자로 지명한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에스퀼리누스 언덕에 있는 마이케나스의 무덤 근처에 묻혔다.

인생의 후반기에 호라티우스는 늘 로마에서 봄을 보냈고 다른 때도 잠깐씩 로마에 와서 지내기도 했는데, 그는 로마에 집을 한 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따금 남쪽 바닷가에서 겨울을 보냈고, 여름과 가을에는 대부분 사비니의 농장에서 보냈지만, 때로는 로마 동쪽에 있는 티부르(티볼리)나 프라이네스테(팔레스트리나)에서 지내기도 했다.

짧은 〈호라티우스 전기〉(이 전기의 내용으로 보면 분명 2세기에 활동한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감)는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보낸 익살스러운 편지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편지를 보면 시인은 키가 작고 뚱뚱했던 것 같다. 호라티우스 자신도 키가 작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가 44세 때 자신을 묘사한 것에 따르면, 그는 일찍 백발이 되었고, 햇빛을 좋아했으며 성미가 급해서 걸핏하면 화를 내지만 금방 화를 푸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영향력과 성격

근대 독자들이 호라티우스를 읽을 때 부딪치는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로마의 선조들과 특히 그리스의 선조들을 끊임없이 모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방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비굴하지 않으며, 결코 그의 독창성을 훼손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호라티우스의 풍자시 1편을 보면, 처음에는 BC 37년에 가진 브룬디시움(이탈리아의 남쪽 끝에 있는 브린디시) 여행을 사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대 그리스 문학). 그러나 여행중의 2가지 사건은 로마의 풍자작가 루킬리우스의 여행기에서 표절하고 교묘하게 각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호라티우스가 무엇을 모방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옛날 그의 독자들은 알아차릴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에는 그가 모방한 작품들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근대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모델로 삼은 인물이나 작품에 대한 호라티우스 자신의 언급이다. 그는 고대나 고전시대 이전 또는 고전시대(BC 8~5세기)의 몇몇 그리스의 작가들(특히 알카이오스·아르킬로쿠스·핀다로스)을 본보기로 거론하는 경우가 많고, 이들의 작품을 라틴어로 각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문체는 헬레니즘 시대나 알렉산드리아 시대(BC 3~2세기)의 좀더 '근대적'이고 학구적이며 세련된 그리스 작가들의 문체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러나 그가 일부 중요한 로마 선배뿐만 아니라 이들의 작품도 모방했다고 보는 의견은 적당하지 않다.

노골적인 표현을 방해하는 요소들, 즉 당시의 독재정치와 호라티우스 자신의 초연하고 회피적인 성격 등과 더불어 그가 이처럼 문학 전통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의 시를 보고 그의 삶을 추론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시에 나타나 있는 인물은 친절하고 너그러우며 온화하지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항상 인간미가 있고 현실적이며 엄격하고 초연한 그는 남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부드럽지만 끈기있게 조롱한다. 사랑에 대한 그의 태도는 대체로 경박하다. 그는 자신의 애정생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적절한 문학적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는 자신을 묘사하기를 좋아한다. 그가 로마의 유부녀나 처녀가 아니라, 정조관념이 희박한 그리스 이름을 가진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사실도 덧붙여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는 남자 친구들(〈송가〉에서 대화 상대로 삼고 있는 남자들)에게는 애정이 깊고 성실하다. 그런 친구들은 아마 그의 생활을 떠받쳐주는 중요한 지주였을 것이다. 그는 신을 자주 입에 올렸지만 당시의 정서를 무시하고 내세를 단호히 부인했다. 따라서 "장미꽃을 딸 수 있을 때 따라"는 것은 그의 시에 되풀이해 등장하는 주제지만, 호라티우스는 지나친 무절제를 한탄하고 거부와 비난과 충고를 끊임없이 거듭하면서 온건과 절제라는 '황금의 중용'을 강조한다.

그를 숭배하는 근대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를 인생의 밝은 측면을 노래한 시인으로 여기고, 또다른 사람들은 그를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의 시인으로 간주한다.

이 2가지 견해는 똑같이 옳다. 이런 균형과 다양성은 그의 시가 가진 성격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번째 역할은 근대 독자들에게는 다소 딱딱하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시가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은 서양에서는 인기가 없고, 호라티우스처럼 독재 정권에 봉사하는 것은 훨씬 더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독재정권에 봉사하면서도 자신의 본질적인 독립성을 확고하고도 재치 있게 주장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비서가 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적절하지 못하다고 간청해 아우구스투스의 장군 아그리파의 승리를 찬양하는 따위의 공식적이고 거드름 피우는 임무를 우아하게 회피했다. 그리고 그는 젊은시절에 브루투스의 군대에 들어가, 필리피에서 미래의 아우구스투스인 옥타비아누스와 싸웠다는 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그는 방패를 내던지고 달아났다고 하는데, 호라티우스다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 그리스 시인(실제로는 두 사람 이상의 시인)의 말을 그대로 모방했다는 점도 거기에 못지않게 호라티우스답다. 이것은 자서전이 아니라, 시인(그리고 호라티우스)은 전쟁에 걸맞지 않다는 전통적인 표현이다. 이 시는 호라티우스가 아우구스투스와 맺고 있던 관계 때문에 공화제를 지지하는 친구들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하게 해준다.

호라티우스의 지성은 아우구스투스 정권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호라티우스는 그에게 많은 실제적 이익을 준 아우구스투스를 충심으로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아우구스투스를 깊이 존경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투스가 오랫동안 계속된 내전을 끝냈기 때문이었다. 이 업적이 너무나 위대했기 때문에, 호라티우스는 새로운 정권이 드러낼 수도 있는 미숙함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때는 사람들이 자유보다는 질서를 원했던 시대였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대다수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존중하고 공화제의 겉모습을 충분히 갖추면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는 또한 신전을 복구했고, 종교적 전통과 의식을 되살렸다. 호라티우스는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신들을 믿지는 않았겠지만, 로마 국가의 종교적 전통과 의식은 로마의 위대함에 없어서는 안 될 신성한 일부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사회적 법률을 제정해 개인의 윤리를 순화하고 로마의 가문들을 보호하고 되살리고자 한 것은 좀더 미묘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호라티우스는 자신의 호색적인 방탕함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했다. 이것은 아마 그가 금욕적이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사비니인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세기의 찬가〉는 시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개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찬가를 짓기 전에 호라티우스는 이미 웅장한 〈로마 송가 Roman Odes〉를 썼다.

제3권의 1~6편을 이루고 있는 이 송가는 아우구스투스의 최고 권력에 바친 위대한 찬사로서, 그가 쓴 정치 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송가〉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로마의 풍부한 신화를 비롯해 그밖에도 수많은 소재가 뒤얽혀 촘촘하고 화려하며 꽉 짜인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이 시는 자신을 진지한 음유 시인으로 생각한 시인의 작품이다.

호라티우스는 자신을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인 테베의 핀다로스(BC 518~438)가 환생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호라티우스는 4번째이자 마지막 책에 실린 공식 송가에서 빈번히 핀다로스를 본보기로 삼았다.

〈세기의 찬가〉 이후 교육받은 로마인들은 모두 호라티우스의 작품을 읽고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호라티우스가 죽었을 때, 그의 〈송가〉는 이미 그가 그렇게도 거부했던 운명의 길을 걸어 학교 교과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는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 작가들(암브로시우스·프루덴티우스·파울리누스)이 비록 시에 담긴 정신은 다르지만 호라티우스의 형식을 이따금 흉내낼 때까지 그의 뒤를 이을 고대 서정시인은 거의 없었다.

그후 중세에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신앙심과 거리가 먼 그의 〈송가〉는 거의 쓸모가 없었지만, 그의 〈풍자시〉와 〈서간집〉은 교훈적인 색채 때문에 널리 읽혔다. 〈송가〉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합당한 명성을 다시 얻게 되었고, 〈시론〉과 함께 19세기 전반에 걸쳐 서양 시문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 빅토리아 왕조의 시인 앨프레드 테니슨은 〈송가〉를 "5개 낱말로 이루어진 보석/모든 시대의 한껏 뻗은 집게손가락 위에서/그것은 영원히 빛나리"라고 찬양했다. 수많은 면을 가진 이 '보석'의 복잡함은 수세기 동안 번역가들의 도전을 받았다. 그것은 완전히 정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송가는 수백 번, 어쩌면 수천 번이나 번역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새로운 번역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매우 훌륭하다.
============================호라티우스의 시학=

문예미학에 대한 성찰은 시대를 초월한다. 글 관련 사색이나 작법은 역사 이래 철학자들의 최대 관심거리 중의 하나였다. 고대 그리스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철학자마다 시작(詩作)에 관한 나름의 생각들을 풀어놓기를 즐겼다. 당시는 연극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그 중에서도 비극은 문학의 최고 형식이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각 철학자들의 `시론`은 대개 비극에 관한 사유와 작법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딱히 비극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문예 전반에 관한 사유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근대 이후의 문학인들이나 철학자들이 지녔음직한 고뇌들이 그때 이미 넘쳐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신기하다. 내게 있는 `시학` 관련 책은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호라티우스 그리고 롱기누스 등의 것이 같이 실려 있는데, 호라티우스 편의 글쓰기 기술에 관한 부분은 글로 고민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뜨끔하면서도 웃음이 난다. 

호라티우스의 말을 맥락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내 식으로 편집해보았다.

`쓰는 자들은 대개 올바른 것의 겉모양만 보고 속아 넘어간다. 간결하게 쓰려고 애쓰다가 모호하게 쓰고, 섬세하게 쓰려다가 맥없고 힘없는 글을 선보이고 만다. 장엄하게 쓰려다 보면 부자연스러워지고, 감정의 비약을 피하려다 보면 소심하게도 땅바닥을 기는 꼴이 되고 만다. 단일한 소재에다 대담한 변화를 꾀해 생기를 불어넣고자 한다더니 숲에다 돌고래를 그려 넣고 파도에다 멧돼지를 그려 넣는다. 기술이 없으면 잘못을 피하려다 또 다른 실수를 한다.`
 

맞는 말만 하는 호라티우스. 그의 지적 앞에서 다시 반성문이다. 써놓고 보면 모호하고, 고치고 보면 맥없고, 다시 보면 부자연스럽고, 완성이다 싶어도 땅바닥을 기는 글을 생산할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퇴고할 때마다 멧돼지가 있어야 할 곳에 돌고래가 날뛰고, 돌고래가 있어야 할 곳에 멧돼지가 튀어나오는 경우는 쓰는 한에서는 평생 지속되리라. 디테일한 호라티우스의 짧은 시론에 깜짝 매력을 느낀 한나절이었다.  

/김살로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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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의 명언

 

 [지혜롭게 결단]하고 -

<과감하게 시작>하라!

 

 일의 [쾌감]은 <고됨을 잊게 한다>.

 

 인생은 수고가 없는 자에게 - 

축복을 베풀지 않는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세상을 헤매지만 -

정작 [행복]은 <손에 잡힐 만한 곳>에 머물러 있다. 

즉, 먼저 [마음 속]에서 <만족>을 구하지 못하면,

행복이라는 것은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질투심 많은 사람은 -

이웃 사람들이 살이 찔 때 마르게 된다.

 

 [행복] 하고 싶다면,

일단 <웃기>부터 해야한다.

 

 [참된 삶]이란 -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분노]는 순간적인 <광기>다.

분노를 다스려라. 그렇지 않으면,

광기가 너를 지배라리라.

 

 사랑과 웃음이 없으면 즐거움이 없다.

[사랑]과 [웃음] 속에서 살자.

 

 [악을 피하는 것]이 <덕의 시작>이다.

마찬가지로 [지혜의 시작]은 -

<어리석음을 피하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

그대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기대하지 않았던 내일이 온 것을 - 

기쁨으로써 맞이하라.

->Carpe diem : 현재를 즐겨라!

 

 

 

 

 

 미래가 무엇을 줄 지 묻지말고 - 

오늘이 주는 것은 모두 선물로 받아라.

 

 내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비장한 말]은 - <슬픈 얼굴>로,

[위협적인 말]은 - <성난 얼굴>로,

[변덕스러운 말]은 - <익살스러운 얼굴>로,

[진지한 말]은 - <엄숙한 얼굴>로.

 

 [자기자신을 신뢰]하는 자는 -

<군중을 지도하고 지배>한다.

 

 종종 [농담]은 진지함보다도 -

더욱 효과적이고 만족스럽게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한다.

 

 진주로도, 값진 염료로도, 황금으로도 -

평화와 행복을 살 수는 없는 일!

황제의 부도, 제후의 권세도, 황금으로 치장한 지붕도,

마음속의 혼란과 근심을 떼어낼 수 없구나!

그는 가난하면서도 행복하고,

식탁 위에는 물려받은 소금 항아리가 빛나니,

분잡한 걱정과 욕심도,

그로부터는 고요한 단잠을 빼앗지 못하는구나.

 

 부자가 곧 행복한 사람은 아니다. 

 

 

 [문학]은 <즐겁고>도 <유익>하다.

 

 [시인의 소망]은 - 

<가르치는 일>,

또는 <쾌락을 주는 일>,

그리고 이 둘을 겸하는 일.

 

 실천되지 않는 덕은 -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일이면 늦으리니 -

오늘을 붙잡도록!

 

 미소는 미소를 부르고 -

슬픔은 슬픔을 부른다.

 

 넘치는 순잔 그것이 -

누구를 웅변가로 만들지 못하겠는가.

 

 로마는 -

게르만이나 한니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 때문에 무너지리라.

 

 무엇 때문에 웃고 있는가?

주인공만 바꾸면 그 우화는 -

바로 당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명한 사람은 -

평화로울 때 전쟁을 대비한다.

 

 너의 이웃집이 불타면 -

너 자신의 안전도 위태롭다.

 

 이 세상의 어떤 부나 권력도,

결코 이겨내지 못하는 한계 -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가장 큰 축복]은 <유쾌한 친구>이다.

 

 사회에서 떨어져 사는 것 -

이 얼마나 행복한가!

 

 [시골]은 -

철학자의 <정원>이자 <도서관>이다.

그것은 그의 <음식>이자 <책>이며,

그에게 지식과 깨달음을 준다.

번잡함과 소음을 벗어난 이 [아름다운 자연]은 -

그에게 <성찰의 기회>를 허락하며,

그를 위한 <최상의 사색거리>를 제공한다.

 

 새벽이 주는 교훈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리고는 오늘을 바라 보십시오.오늘은 삶이요,

삶 중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존재의 진실성과 실재성,

그리고 성장의 기쁨과 영광스러움, 장엄함 아름다움이 모두

오늘 하루의 짧은 여정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사람도 신도 사원의 기둥도 -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

심술굳은 시간은 달아날 것이다.

 

 자연은 웅장한 집 보다는

편리한 집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 장소로

시골을 택할 것이다.

 

 중간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 

오히려 그리스가 미개한 정복자를 지배했다.

 

 기쁨은 부자들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다.

 

 그림은 말없는 시 - 

시는 노래하는 그림.

 

 시를 그림처럼.

 

 현명해지는 것이 -

좋은 글을 쓰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좋은 글을 썼다고 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도덕을 사랑함에 있어서 -

[절도를 잃으면], 현자는 <몰상식한 자>로,

정의로운 자는 <의롭지 못한 자>로 불릴 수 있다.

 

 소금과 빵은 -

기아를 정복하고 뺨의 색깔을 붉게 한다.

 

 말할 때는 신중하라!

놓아 버린 말은 -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충고를 하건 -

결코 말이 길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올바르게 말하고 행할지라도 -

그것으로 말미암아 친구의 감정을 손상시켜,

친구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꿈에 목표를 설정해 두고 -

욕구에는 고삐를 매고,

분노는 길들이도록 하라.

 

일하는 틈틈이 책을 읽고 현자들에게 물으라.

경박한 네가, 어떻게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 좋을지를!

그리하여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욕망과, 두려움과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에 대한 염원도 사라질 수 있도록!

 

 [자신만]의 <재능을 발견>하라.

어떠한 기술이라도 [타고난 재능] 없이는 획득될 수 없으며,

타고난 재능도 전문적인 [훈련]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돕고 보태어져 하나가 되어 나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 때,그대는 비로소 <성공이라는 결실>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정작 행복은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다.

​부자가 곧 행복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절개를 황금보다 소중히 여기고 분수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화려한 궁전 생활도 부럽지 않다.

​이웃집이 불타면 당신의 안전도 위태롭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친구의 그늘은 빛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사랑에 능숙한 사람은 정열을 지배할 줄 알지만

​사랑에 무능한 사람은 사랑의 정열에 사로잡힌다.

​지금도 심술궂은 시간은 달아나고 있다.

​어떤 충고이건 간에 말이 길어서는 안 된다.

​★입을 떠난 말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말을 할 때는 늘 신중하도록 하라.

​구두쇠는 항상 가난하다.

​때때로 농담은 진지함보다 더욱 효과적이다.

​아무리 정의와 진실이 중요하다고 해도

​소중한 사람의 감정까지 손상시키는 것은 어리석다!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하라.

​그릇이 맑지 않으면 무엇을 넣어도 더러워지는 법이다.

​자신의 어깨가 무엇을 짊어지려고 하는지

​또한 무엇을 거절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욕구에 고삐를 매고 꿈에는 목표를 매달아라.

​인생은 고생하지 않는 자에게 축복을 주지 않는다.

​항상 동일한 악기로 연주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지 않는다.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그래도 화가 나면 백까지 세도록 하라.

​현명해지는 것이야말로 좋은 글을 쓰는 비결이다.

​현재를 즐겨라(Carpe Diem)!

​그림은 말 없는 시, 시는 노래하는 그림이다.

​시인의 역할은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교훈과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Tip​:퀸투스 호라티우스(BC. 65 ~ BC. 8)는 고대 로마의

​시인으로서 카르페디엠(Carpe diem)이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아테네로 유학하여 철학과 문학을 배웠고 장군으로도

​활약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깊은 신임을 얻었지만 공직자로

​활동하기보다는 시 창작에 전념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호라티우스는

​풍자적이거나 교훈적인 시를 많이 썼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송가​』​와

​『풍자시​』​, 『서정시』 등이 있다.

 

 

 






 

 




 

 

[출처] 퀸투스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의 명언|작성자 필로소피아

 
호라티우스 / Quintus Horatius Flaccus

근면하지 않으면, 인생은 우리와 같은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Life grants nothing to us mortals without hard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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