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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언어를 잘 다룰줄 아는 고급동물이다...
2017년 03월 29일 23시 03분  조회:2061  추천:0  작성자: 죽림

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인가.

 

신 규 호

 

(1) 언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인 것은 다른 여타의 이유도 있지만,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는 원시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세월이 흐르면서 각 지역에 흩어져 상호간의 소통 없이 살아감에 따라 종족이 형성되었고, 그들의 언어도 지역마다 서로 다르게 변형되어 여러 종족이 제각기 사용하는 현재의 언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상의 하고많은 동물 가운데 왜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는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언어 발생에 대한 여러 설들이 있지만, 가장 납득할 만한 것은 인간의 두개골 형태에 근거한 해부학적 언어 발생설이다.

인간이 직립 보행하게 되면서 곧게 선 척추에 의해 안정감을 얻게 된 두개골이 발달하게 되었고, 두개골이 발달함에 따라 안면각이 90도로 점차 변형되면서 입안의 입천장이 둥글고 깊게 형성되었으며, 입천장이 발달하면서 목청에서 발성되어 나오는 소리를 혀가 입술과 잇몸과 입천장과 목구멍을 자유롭게 왕복하며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간의 언어만이 지니고 있는 ‘자음’이 형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의 기본은 모음이 아니라 자음이다. 왜냐하면, 다른 동물들도 목청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인 모음(아, 어 으, 우 등)은 발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발로 기는 동물들의 안면각은 45도 전후밖에 되지 않아 형태상 입천장이 둥글게 발달할 수 없으며, 따라서 혀나 입술 등의 기능은 단지 먹이를 핥거나 훑는 기능으로만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인간만이 조음기구인 혀 등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자음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분절음인 언어를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개골이 커지면서 자연히 뇌수가 발달하게 되었고, 뇌수의 발달은 언어에 의한 기억력과 추리력을 발달하게 하였으며, 따라서 이 두 가지 원인으로 해서 이루어진 언어는 인간의 고도한 사고작용(시적 상상력을 포함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문명과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왜 장황하게 언어의 발생에 대해 논하는가. 시에 관해 논의하는 이 마당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점이며, 시의 표현수단인 언어가 무엇이냐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시에 관한 어떤 논의도 공론에 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이 감각에 의해 포착된 다른 대상을 보고 내지르는 발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그 대상을 지시하거나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고, 그 단어들이 축적되면서 구조를 갖춘 언어가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사고작용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본디 언어가 지시하는 바로 그 ‘대상 자체’가 아니기에 숙명적으로 그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가 사물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언어가 단지 사물 자체와 무관한 관념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그 대상을 지시하거나 상징하는 기호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언어의 관념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인간의 어떤 사고작용도 관념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스스로 만든 언어에 의해 도리어 인간이 그 언어라는 ‘감옥’(관념이나 가치관)에 갇히게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세상의 온갖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 진실 그 자체와 거리가 먼, 엉성하기 짝이 없는 허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무한한 사물에 대한 무한한 진실은 끝이 없게 되고, 그 사실 자체를 인식해 주는 것조차도 불완전한 언어라는 도구에 의존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관념이라는 감옥에 불과한 언어, 그 언어를 언어로 극복해야 한다는 숙명 때문에 인간은 언어와 싸울 수밖에 없으니, 언어예술인 문학, 특히 시야말로 그 첨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 욕망도 언어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언어의 한계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언어를 다름 아닌 언어로써 극복하고자 힘쓰게 하였다. 그 언어가 바로 ‘시어’이다. 예로부터 절대불변의 궁극적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류 사회에 종교적 언어나 철학적 언어를 발생하게 했으니, 본디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 역시 언어에 의한 시적 상상력이었다.

따라서, 나름대로 시를 정의한다면, ‘시야말로 언어의 속성을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면서 그 언어의 한계(기존의 관념)를 언어로써(새로운 언어에 의한 새로운 관념으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대상(사물들)과 언어의 관계를 시로 읊은 문덕수 시인의 다음 작품, “꽃과 언어”는 상술한 바 언어의 속성을 시적으로 잘 형상화해 보여주고 있다.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이 지점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목적은 분명해진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언어로 무한하고 유현한 사물의 숨은 진실을 밖으로 끌어내어 표현함으로써, 고정관념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미명에 갇혀 있는 새로운 진실(그것조차 또 다른 관념이지만)을 창출해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 정신의 혁명이며, 새로운 가치 창조의 길이며,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일이다. 언어와의 싸움 없이 인간 구제나 새로운 세계의 창조는 그러므로 불가능하다.

문제는 언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바람직한 시의 기능을 제대로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시어를 다루는 방법론이 그러므로 중요하며, 그에 대해 세계 시문학사상 수많은 시도가 있어왔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지만, 시가 모순 투성이인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언어예술’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않는 한, 시의 예술성을 극대화 할 언어의 특수한 용법을 찾는 것이 초미의 과제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아이러니, 컨시트, 풍자, 위트 등과 함께, 거리가 먼 엉뚱한 사물들을 시적 상상력으로 결합시키는 능력, 그리고 복잡하면서도 평이한 이미지로 이 모두를 조화롭게 아우르는 ‘형이상시’의 수법이야말로 시에 관한 논란이 거듭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2) 형이상시에 대하여

 

16세기 후반 영국의 엘리자벳 시대의 천편일률적으로 형식화된 소넷에 대한 염증과, 스콜라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조잡한 복고적 경향에 대한 안티 테제, 그리고 17세기 초엽의 과학에 대한 각성 등이 형이상시의 발생 배경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그리어슨이 “메타피지컬 시집”을 편집하면서 ‘존 단 학파’, 또는 ‘형이상학파’라 칭했는데, 20세기에 와서 엘리엇, 리쳐즈, 엠프슨, 테이트, 랜슴, 브룩스 등 영미 비평가들이 이들의 시를 재평가하면서 그것이 이상적인 시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다.

형이상시에 대한 17세기 초엽의 경멸적 비평과 대조적으로, 이에 대한 엘리엇 등의 현대적 재평가는 일차적으로 19세기 낭만주의 전통에 대한 반발이었고, 엘리엇 자신의 시가 지니는 현대적 특성, 즉 객관적 상관물, 사상의 정서화, 전통의 계승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존슨 박사 등이 강조하는 형이상적 컨시트는 외면적으로 전혀 관계없는 체험의 영역간에 놀랍고도 교묘한 유추에 의해 형성된다. 가장 이질적인 생각들이 ‘폭력적 결합’에 의해 동일화됨으로써 고정관념에 갇힌 언어를 또 다른 새로운 세계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형이상시의 의도라 할 수 있다. 아이러니, 컨시트, 풍자 등이야말로 불완전한 언어의 한계를 언어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시적 장치라고 하겠다.

이러한 형이상적 기발한 착상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교묘하고도 역설적인 논리를 형성하게 되는 바, 감정의 즉각성은 감각적 이미지에 의해서가 아닌, ‘창조적 유추작용’에 의해서 파악된다는 것이다. 상황에 대한 극적 파악 및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평이한 어법, 생략적이고도 압축적인 구문, 운율적 형식의 조화와 언어 및 사고의 불균형적 리듬 사이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긴장감, 어조를 돌연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등이 형이상시의 특징이다. 그러나, 형이상시는 자유로운 연상의 독단성이나 무의식적인 정신의 비합리적인 과정에 의해서 창작되는 것이 아니며, ‘조화’라는 이름 아래 사고하고 또한 유추 작용에 따라 추론하는 데 익숙해 있는 명철한 정신에 의해서 창작되는 것이다. (김윤식; <문학비평용어사전> 참조) 그런 의미에서, 초현실주의나 해체적, 실험적인 시와 방법적으로 서로 다르다.

형이상 시인이나 비평가들이 배격하는 시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 바, 그 첫째는 사물만을 주로 다루고 그 밖의 것을 배제하는 형이하적 시, 그와 반대로 관념만을 주로 다루어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시, 즉 플라톤적 시가 그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시는 자연발생적, 원초적 감정의 유로를 주로 표현하는 시(범박한 낭만주의 시나 안이한 이미지즘시)이고, 후자에 속하는 시는 종교적, 철학적, 사상적 이데올로기를 주로 표현하는 시(편향적 이론에 의해 실험적으로 쓰는 시도 포함)라고 할 수 있는 바, 이는 모두 언어의 속성 중 어느 한 면만을 의지한다는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어의 두 가지 속성, 즉 음성(형식)과 의미(내용) 중 어느 하나에만 의지할 때 그것은 시 창작 방법에 있어 그 수단인 언어의 미학적 속성을 무시 내지 경시한 태도가 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형이상시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질없는 실험이나 상투적, 편향적인 표현을 최대한 회피해서 언어의 시적 효과를 최대한 살리고자 하는 창조적 태도와, 궁극적 존재나 진실에 대한 긍정적 지향의지를 형이상시가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허무주의나 리얼리즘의 현실주의로 어두웠던 20세기를 극복하고, 보다 창조적이고 수준 높은 예술성을 지닌 21세기 시를 창작하고자 고심하는 마당에 한 번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본디, 인간 존재의 두 측면, 즉 육체(형상)와 정신(내용)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분리해서도 안 되는, 둘이면서 하나인 불가분의 것이다. 육체적 형상만을 중시할 때 정신이 소외되고, 정신만을 추구할 때 육체가 소외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종교적, 철학적 명제는 이 두 가지 속성(인간의 사고 속에 존재하는 하늘과 땅, 음과 양, 천사와 악마, 선과 악, 미와 추, 남과 여, 고저 장단 등 양가치성)의 관계에 대한 어떤 궁극적 해답을 궁구한다. 사물에 대한 이런 양가치적 관념도 언어의 한계 때문에 피할 수 없음을 인식할 때, 예술이나 철학이나 종교가 왜 그것을 극복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지 분명해진다. 언어로 이루어진 인간의 의식은 그러므로 언제나 허위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한 부정적 자아를 언어를 수단으로 삼아 인식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궁극적 진실을 표현하고자 하는(그것이 또 다른 새로운 관념의 세계에 불과할 것이지만) 이상적인 시의 모습도 이런 언어의 양면적 속성을 여하히 융합, 지양하여 지극한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는 형식주의냐 역사주의냐,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 의미냐 무의미냐, 하는 이분법적 논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인은 본디 예술가이지, 논리를 앞세운 과학자나 사상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형이상 시인의 경우 오히려 한 편의 시가 예술 작품으로서 완성되었느냐, 아니면 실패했느냐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이 성패는 언어미학에 의해 판단할 일이지, 어떤 독단이나 주의 주장이 좌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형이상시의 장점은, 그것이 언어의 한계(인식의 한계)를 극복해서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 위해 지극한 수법(아이러니, 컨시트, 패러독스, 위트 등에 의한 복잡한 구조, 참신한 이미저리와 같은 객관적, 지적 방법)을 사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을 구속하는 언어(관념)로부터 끊임없는 탈출을 감행하는 시인의 정신적 모험으로서의 이상적인 예술품을 창작하고자 하는 것, 바로 그것이므로,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 해도 시가 언어의 예술인 이상, 형이상시의 창작 방법론은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3) 형이상시의 사례

 

다음으로, 한국의 현대시 가운데 형이상시라고 판단되는 작품을 예로 들어 살펴보고, 왜 그것이 형이상시인가에 대해 알아본다. 먼저 손쉽게 그 예를 들어본다면, 김춘수 시인의 시 “모자를 쓰고”, “ 나의 하나님”, 그리고 김종삼 시인의 시 “나의 본적”, “물통”, 문덕수 시인의 시 “삭개오가 보다”, “꽃과 언어” 등이다. 그 중에서 김춘수 시인의 “모자를 쓰고”를 인용하여 분석해 봄으로써 한 편의 형이상시가 지니는 수사적 특징, 즉, 아이러니, 컨시트, 풍자, 위트 등이 작품 가운데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떻게 예술성을 획득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모자를 쓰고

 

초라니/
남도 사투리로는/
초랭이/
방정초랭이라고 한다/
유카리나무는 키가 얼마나 클까 하고/
유카리나무에는 어떤 꽃이 필까 하고/
예루살렘까지 밀밭길을 가고 있다/
나귀도 없이 별만 보며,

 

짤막한 이 한 편의 시 속에 모든 시어들은 상호간 긴밀하게 연결되고 가장 적합하게 배치됨으로써 비로소 유기적 통일체(살아있는 예술품)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특히 낱말의 배치 방법 및 행과 연의 구분, 그리고 사용된 문장 부호의 종류에 따라 민감하게 그 작품의 시적 리듬이나 공감대가 형성되기 마련임을 입증해 준다. 시의 첫 행과 끝 행은 대개의 경우 그 시의 성패를 좌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바, 이 시의 첫 행은 ‘초라니’라는 단 한 개의 낱말로 시작되고 있다. ‘초라니’는 기괴한 계집 형상의 탈을 쓰고 붉은 저고리에다 푸른 치마를 입고 긴 대의 깃발을 손에 쥔 나자(儺者)로, 일상적으로는 경망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빗대어 일컫는다.

그런데, 이 첫 행은 그것이 작품의 제목인 ‘모자를 쓰고’와 연결되면서 시작된다는 데 묘미가 있다. 전혀 수식어도 없이 독자 앞에 제시된 이 낱말은 그런 의미에서 아이러니가 된다. ‘모자를 쓰고’라는 표제와 첫 행인 ‘초라니’ 사이에 놓인 은유의 다리 위에 많은 진술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음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모자를 쓰고 인생을 살아가는 비극적이기도 하고 희극적이기도 한 인간들의 모습이 ‘초라니’라고 하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나자의 모습에 오버 랩 되면서 이 시는 출발하고 있다. 사람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모자’를 쓰고 살아가는 모습 자체---곧, 멋이니, 위엄이니, 심지어 감투니 하는 따위가 모두 ‘초라니’의 모습처럼 우습고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준다.

인생에 대한 시인의 풍자는 제 3행 ‘초랭이’의 어감에 의해 더욱 강화되면서, 제 4행의 ‘방정초랭이’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이 네 개의 행은 아이러니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시의 전반부를 형성하는데, 그것은 하나로 뭉쳐져 인생에 대한 차가운 냉소(cynicism)에까지 도달한다. ‘초라니--> 초랭이--> 방정초랭이에 사용된 음성상징(모음 ㅏ와 ㅐ의 대립에 의한)에 의해 형성된 의미론적 리듬 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제 5행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를 살펴보자.

‘유카리나무’는 열대산 교목으로 그 키가 무려 100여 미터에 이른다는 거목이다. 제 5행과 제 6행에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리듬감과 함께 의미의 강조를 의도하고 있다. 유카리나무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 작품 전반부의 ‘초라니’나 표제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엉뚱한 소재처럼 보인다. 즉, 양자는 폭력적 결합을 이루고 있으며, 이 또한 기발한 착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반부의 ‘초라니’와 대비되어 의미론적으로 볼 때 대립율을 이룬다.

열대지방의 밀림 속에 하늘을 찌를 듯이 정정하게 치솟은 거목을 상상하면서 시인은 ‘초라니’, ‘방정초랭이’들이 들끓는 현실 속에 섞여서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적인 비애를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꿈을 꾼다. ‘유카리나무는 키가 얼마나 클까’, ‘유카리나무에는 어떤 꽃이 필까’ 하고 상상하면서, ‘예루살렘까지 밀밭길을 가고 있는’ 것이 시인의 삶이다.

그러나, 그 길은 세속적 복락이나 영광으로 수놓아진 평탄한 길이 아니며, 어쩌면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는 형극의 길일 수도 있다. 스스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종류의 ‘모자’라도 써야만 하고, 그것을 쓰고 ‘초라니’처럼 우스운 모습으로 어릿광대 짓을 하며 살아야만 하는 삶---그 삶의 비극적 종말까지 예감하는 시인의 상상력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 초라니'들이 쓰고 살아가는 ‘모자’와 ‘유카리나무의 꽃’의 대비이다. ‘모자’와 ‘꽃’의 대비로 말미암아 이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도 의미론적 대립율은 나타난다. ‘유카리나무’와 대조됨으로 인해 전반부의 ‘초라니’는 더욱 ‘초랭이’, ‘방정초랭이’가 되고, 시인의 꿈은 역설적으로 예루살렘, 그 하늘나라에까지 별을 보며 치닫게 된다. 따라서, 이 시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바로 현실과 꿈의 대비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희극적인 삶의 모습과, 고고한 시인으로서의 꿈의 세계의 대조인 것이며, 이 극명한 대립율이 인생의 슬픈 ‘아이러니’를 깨닫게 한다.

그런데, 작자는 이처럼 극명한 대조를 이룬 전반부와 후반부를 각각의 연으로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 경우 연 구분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과의 차이는 크다. 작자가 연 구분을 하지 않은 의도는 분명히 전, 후반부의 대조적인 의미를 나란히 병치시킴으로써 더욱 그 효과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전반부의 풍자적 어조는 후반부의 안정된 시상과 직접 충돌함으로써 의미를 강화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시의 끝 부분을 살펴본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7행과 8행의 도치다. 이는 두 가지 의도에서 도치시킨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하나는 7행 ‘예루살렘까지 밀밭길을 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8행을 종결어미가 아닌 연결어미(--며)로 끝나게 함으로써 한없는 시적 여운을 지니게 하여, 이 작품을 폐쇄된 상태에 빠뜨리지 않고, 신성한 것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과 비애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여운을 얻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 시의 마지막 행의 끝에 쉼표( , )를 사용한 의도와 서로 상관성이 있다. 만약 이 자리에 쉼표 대신 마침표( . )를 사용하였다면 이 시의 시적 효과 또한 상실되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4) 맺는 말

 

이상으로 형이상시가 추구하는 창작 방법론이 시적 예술성을 구축하는 데 있어 바람직한 모델이 된다는 것과, 그 사례가 될 수 있는 작품을 예로 들어 살펴보았다. 언제나 관념의 껍질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언어, 이미 낡은 언어의 구속을 벗어나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고자 하는 형이상시의 창작 방법은 시가 언어의 예술인 이상, 바람직한 시의 모형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형태의 시이든지, 심지어 ‘무의미시’까지도 시는 관념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과, 관념을 무화한다는 것은 그것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새로운 관념을 제시 내지 암시해 준다는 의미이지, 말 그대로 관념을 ‘제로화’ 할 수 없기 때문에,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언어의 모순을 여하히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완성된 예술품으로서의 작품을 창작할 것이냐, 하는 점에 관심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뛰어난 비유는 천재의 소유’라고 했듯이, 형이상시에서 강조하는 현대적 수법인 아이러니, 컨시트, 패러덕스, 풍자와 함께 시어의 폭력적 결합을 통해서 잘 짜여진 한 편의 완성된 작품을 이루기 위해 시인들은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예술 작품의 창작이란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러기에 가치와 보람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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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현대시는 "단절의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2017-03-29 0 2013
347 시는 추상적인 표현과 원쑤지간이다... 2017-03-29 0 2343
346 시심의 모든 밑바탕은 지, 정, 의를 근본으로 한다... 2017-03-29 0 1796
345 시가 "디지털혁명시대"와 맞다들다... 2017-03-27 0 2027
344 프랑스 시인 - 폴 엘뤼다르 2017-03-27 0 2919
343 시어는 삶과 한 덩어리가 된, 육화적인 언어로 련금술해야... 2017-03-27 0 1976
342 시는 한점의 그늘 없이 화창해야 한다... 2017-03-27 0 2023
341 시인아, 어쨌든 있을 때 잘해야지...그리고...상투는 없다... 2017-03-24 0 1706
340 시인의 "적막한 키스"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것인가... 2017-03-23 0 1947
339 시와 련관성이 없는 "무의미시"의 낱말로 제목화할수도 있어... 2017-03-22 0 2053
338 이순신 장군 시 모음 2017-03-21 0 2638
337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것들이 많단다... 2017-03-21 0 2160
336 류시화 시 모음 2017-03-21 0 5170
335 새가 나무가지를 못떠남은?!ㅡ 2017-03-21 0 2139
334 <새(鳥)> 시 모음 2017-03-21 0 2286
333 시제는 그 시의 얼굴로서 그작품의 질과 수준을 예감할수도... 2017-03-21 0 2387
332 시의 제목을 첫행이나 끝행으로 할수도 있다... 2017-03-20 0 2119
331 시의 제목에 의하여 시의 탄력이 생긴다... 2017-03-18 0 2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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