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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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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빛공해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733  추천:0  2018-11-24
너무 눈부신 지구의 밤.. 사람도 자연도 건강을 잃는다 강찬수 2018.11.24.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너무 눈 부신 지구의 밤. 인공위성에서 열 화상 기법으로 촬영한 유럽의 모습이다. [사진 NASA]   빛 공해 Light Pollution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본 지구의 밤은 눈부시다.  북한처럼 빛이 없이 어두운 곳도 있지만, 대도시의 밤은 지나치게 환하다. 1879년 미국의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래 인간이 만들어낸 빛, 인공조명이 밤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너무 환한 야간 조명 아래에서는 사람도, 자연도 건강을 잃는다.    지구의 밤 [사진 NASA]     한반도 남쪽은 야간 조명으로 눈이 부시지만, 북한은 평양을 제외하면 캄캄하다. [사진 NASA]   ━  벼알도 제대로 맺히지 않아    밤에도 너무 밝은 도시의 밤. 도시에 사는 생물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강찬수 기자   생물에게는 태양과 마찬가지로 태양 빛이 없는 밤도 중요하다.  반딧불이에게 캄캄한 밤은 수컷이 암컷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시간이다. 밤은 또 작고 약한 동물이 포식자를 피해 먹이를 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랜 지구의 역사를 통해 낮과 밤, 사계절 변화에 익숙해진 생물들이 엉뚱한 계절, 엉뚱한 시간에 밝은 빛을 만난다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광고용 전광판이나 간판·가로등 같은 인공조명은 철새 이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철새들은 달빛이나 별빛을 보고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높은 탑이나 고층 건물의 불빛에 이끌려 잘못하면 고층 빌딩에 부딪혀 죽는 일도 벌어진다. 바닷새들이 해안의 서치라이트나 원유 채취선에서 가스를 태우는 불빛 때문에 방향을 잃고 끝없이 맴돌다 지쳐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박쥐는 가로등을 피해 멀고 위험한 길로 돌아다닌다. 가로등 불빛에 노출될 경우 포식자인 맹금류의 공격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엉뚱한 시간에 지저귀는 새들도 생긴다. 도시에 살면서 인공조명에 노출된 유럽개똥지빠귀는 한 달 일찍 성적으로 성숙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여름 도시의 매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것도 빛 공해와 관련이 있다.    눈부신 야간 조명. 강찬수 기자   인공조명 탓에 식물의 개화 시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벼 개화 때 가로등 조명이 과도하면 벼알이 제대로 맺히지 못하거나 크기가 작아지는 피해가 발생한다. 중앙환경분쟁조정위는 2015년 경기도 군포시의 한 농민이 철도역의 야간조명 등으로 들깨와 콩의 수확량이 각각 85%, 19% 줄어든 것을 인정해 77만원의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겨울철 가로수에 장식용 전구를 다량 부착하는 경우도 때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야간 조명 전구 근처에서는 열이 발생하지만, 몹시 추운 날씨에서는 상쇄가 된다. 최저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는 3월 초순부터는 전나무 잎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으로 국립산림과학원은 확인했다. ━  인공조명은 사람 건강에도 영향    조명박물관의 2006년 빛공해 사진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박영진씨의 도시인 [중앙포토]   거리의 가로등이나 옆 건물의 조명이 담을 넘어 다른 건물에 비치고, 심지어 창을 넘어 실내까지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침실에 밝은 빛이 들어오면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눈이 피로해진다. 인체의 대사 활동도 지장을 받는다.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야간에 강한 인공 빛이 발생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은 가로등이 없는 지역에 사는 여성에 비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37%나 높다. 지난해 12월 이은일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는 야간조명에 심하게 노출된 지역에 사는 여성의 경우 유방암 발생률이 24.4% 높다고 주장했다. 밤사이 체내에서 이뤄지는 멜라토닌의 생성을 빛이 억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4년 7월 미국 텍사스대학 보건과학센터 연구팀의 발표에 따르면, 야간 인공조명은 여성의 생식능력도 떨어뜨린다. 멜라토닌은 항산화 능력이 있어 활성산소가 일으키는 산화 스트레스로부터 난자를 보호한다. 뇌의 송과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은 눈 망막에 도달하는 빛의 양에 따라 분비량이 조절된다.  멜라토닌의 분비를 극대화하려면 야간에 조명을 완전히 끄고 외부로부터 스며드는 모든 불빛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명박물관의 빛공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정성주 씨의 '대교의 빛' [중앙포토]   2014년 10월 영국 맨체스터대 연구팀은 잠자는 동안 머리 위나 침대 옆 등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두고 충전하는 습관을 들이면 살이 찌거나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스마트폰 충전 시 나오는 미세한 파란색 불빛이 숙면을 방해하고 신진대사에 영향을 미쳐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2016년 서울대병원 정신과 정기영 교수 등도 야간 조명이 환한 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비만에 노출될 위험도가 높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밝은 지역 거주자는 비만율이 55%였지만, 상대적으로 어두운 지역 거주자는 비만율이 40%였다는 것이다. ━  어두운 하늘 되찾으려는 움직임도    야간 조명이 있을 때는 밤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지만 조명을 끄면 별을 볼 수 있다. [중앙포토]   당장 야외 조명이 너무 밝으면 천문대에서 우주의 별을 관측하는 일도 어려워진다.  1988년 설립된 국제 암천협회(IDA, International Dark-Sky Association)는 어두운 하늘 지키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빛 공해와 관련해 연간 3000건 안팎의 민원이 발생하고 있다.  빛 공해가 심각해지면서 인공조명을 줄이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남미 칠레 북부의 아타카마 사막에 위치한 천문대. 눈 쌓인 천문대 위 밤 하늘에 은하수가 뚜렷하다. [중앙포토]   빛 공해의 원인은 대부분 조명 디자인이 잘못돼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빛이 새나가기 때문이다. 필요한 곳에만 빛이 가도록 조명의 디자인을 바꾸고, 필요한 만큼만 비추도록 조도를 낮춘다면 곧바로 빛 공해를 막을 수 있고, 에너지 소비도 줄일 수 있다. 행인이 다닐 때만 켜지는 가로등같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하면 인공조명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미국 그린빌딩협의회(USGBC)에서는 이웃 건물·주택에 빛이 침투하는 것에 대해 기준을 정해놓고 있다. 부지 경계선을 지나 3~4.5m 지점에서 측정한 조도(빛의 밝기)가 0.1룩스가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룩스(Lux)는 조도(조명도), 즉 광원(빛)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위치한 지점(표면)에서 측정한 조명의 밝기를 나타내는 단위다. 기호는 lx로 나타낸다. 촛불 1개의 밝기인 1cd(칸델라)의 광원에서 1m 떨어진 표면의 밝기가 1lx다. 보름달이 비칠 때의 조도가 0.3룩스이고 달이 없는 밤의 조도가 0.04룩스인 점을 고려한다면, 빛이 이웃으로 거의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그린 빌딩’이 될 수 있는 셈이다. ━  2013년 빛공해방지법 시행됐지만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 진행된 빛 공해 조사 장면. 전문가가 한 광고조명의 휘도를 측정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1972년 미국 애리조나주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빛공해방지법을 제정했다.  국가 차원에서 빛공해방지법을 제정한 것 2002년 체코가 처음이다. 일본에서는 89년 오카야마 현의 비세이초(町) 지역에서 천문관측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광해(光害)방지조례’를 처음 만든 뒤 각 지역에서 비슷한 조례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98년에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 '광공해 대책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한국도 2013년부터 환경부가 ‘인공조명에 의한 빛공해 방지법’을 제정했다.  조명환경관리구역은 1종(북한산 등 자연환경지역), 2종(청계천 등 식물생장지역), 3종(주거지역), 4종(상가) 등으로 구분해서 지정되고, 조명 밝기에 각기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도시의 야간 조명. 강찬수 기자   예를 들어 1~3종 구역에서는 주거지 경계(연직면)에서 측정한 가로등 같은 옥외 조명의 조도가 해진 후 1시간 후부터 해 뜨기 전 1시간 전까지 10룩스를 넘지 않아야 한다.  4종 구역에서는 같은 기준으로 25룩스 이하여야 한다. 10룩스는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정도의 밝기이며, 25룩스는 밤에 가로등이 밝히는 도로 바닥의 밝기 정도다. 장식용 조명의 경우는 1~2종 구역에서 5룩스 이하, 3종 구역에서는 15룩스 이하, 4종 구역에서는 25룩스 이하다. 이 법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 건물의 조명이나 가로등을 기준보다 밝게 설치하면 최고 300만원의 과태료를 매기도록 하고 있다. 또, 조명환경관리구역 안에 있는 연면적 2000㎡ 또는 5층 이상 건축물의 장식조명, 도로나 공원의 공간조명, 광고조명 등의 밝기가 기준치를 초과하면 적발 횟수와 위반 정도에 따라 5만원부터 최고 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기준 초과 조명시설에 사용중지나 사용제한 명령이 내려졌는데도 이를 따르지 않는 경우는 1차 250만원, 2차 500만원, 3차 이상 10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지방자치단체, 즉, 각 시·도지사는 조례를 제정해 지역별로 구체적인 조명관리구역은 지정하게 되고, 지역 사정에 따라 규제 대상 조명 시설을 추가할 수도 있고, 조명 기준을 강화할 수도 있다.    인공위성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밤 [사진 NASA]   하지만 법 시행 5년이 지났지만, 일부 시·도에서만 조명관리구역을 지정했다. 지자체 중에서 가장 먼저 조례를 만든 것은 서울시로 지난 2010년 7월 조례를 제정·공포했으며, 2015년 8월 조례가 본격 시행됐다. 관리구역별로 정해진 기준에 맞는 조명시설을 개선해야 하는데, 적용을 5년간 유예했기 때문에 서울시에서도 조명 밝기 기준을 초과한 시설에 대해서도 2020년 8월 이후에나 과태료가 부과된다. 김영수 서울시 도시빛정책과장은 “현재 기준이 적용되기 전까지 실효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데,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  낮에 반사되는 태양광도 문제    서울 여의도의 한 빌딩에서 반사되는 태양광이 눈 부시다. 강찬수 기자   최근에는 태양광선이 대형건물의 유리창에 반사되면서 인근 주민들이 눈이 부시어 불편을 겪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2010년 9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 이용객은 호텔 유리 벽면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건물 형태가 오목하게 생긴 탓에 돋보기처럼 태양 빛을 좁은 면적에 집중시켰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실제로 2012년 부경대 건축공학과 학생들이 모형실험을 한 결과, 초고층 건물로 인해 햇살이 반사된 곳의 온도는 그늘보다 평균 37도나 높았다.  또, 직사광선을 받는 곳보다 평균 9도가 높았다.    건물 유리창에 반사되는 태양광. 강찬수 기자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N사 사옥의 경우 2010년 3월 지상 28층, 연면적 10만1000㎡ 규모인데, '그린 팩토리'(Green Factory)를 신축하면서 외벽 전체를 통유리(글라스 타워)로 시공했다.  이로 인해 인근 M 아파트(4개 동 803가구 38층) 주민들은 "통유리에 반사된 빛으로 생활에 고통을 겪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2013년 4월 수원지법 성남지원 민사합의4부는 피해 가구당 500만~1000만원의 정신적 손해배상금(위자료)과 129만~653만원의 재산상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N사 측은 항소를 했고, 2016년 1월 서울고법 민사13부는 주민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반사광을 직접 바라보지 않는 일상생활에서는 시각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커튼으로 충분히 차단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취지였다.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에 위치한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인근 주민들도 2012년 6월 여름철 일몰 직전에 햇살이 초고층 건물에 반사돼 거실로 들어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  체육시설과 주유소도 개선 필요    프로야구 기아의 새 야구장 챔피언스필드 [중앙포토]   환경부는 지난 4월 ‘빛공해방지법 미적용 조명기구에 대한 설치·관리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각 지자체에 배포했다. 2013년 마련한 법(시행령 제2조)에서 빠진 옥외 체육시설과 주유소 조명, 그리고 일부 광고 조명(허가 대상이 아닌 신고 대상)에 대한 권고기준인 셈이다. 환경부는 체육시설과 주유소의 경우도 인근 주거지에서 측정한 조도가 1~3종 구역 10룩스 이하, 4종 구역 25룩스 이하로 유지할 것을 권고했다. 또, 체육시설의 경우 경계를 기준으로 50m 거리에서는 40룩스 이하, 200m 거리에서는 20룩스 이하를 유지토록 했다. 환경부는 또 교회 십자가 등 종교시설 표지물도 사람들이 광원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하고, LED(발광다이오드) 모듈을 직접 부착하지 않도록 하는 등 조명방식을 개선하도록 권고했다. 한편, 환경부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는 ‘수인한도’, 즉 견딜 수 있는 한도를 초과하는 빛 공해가 인정될 경우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분쟁조정 신청을 제기한 시기를 기준으로 최대 3년에 대한 피해를 배상받을 수 있는데, 1년간 피해를 봤을 경우 1인당 최저 34만원에서 68만원의 배상을 받을 수 있다.    조명박물관 빛공해 사진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김성진 씨의 작품 [중앙포토]   사람의 건강도 해치고, 에너지도 낭비하는 과도한 야간조명.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은 빛과 조명에도 통하는 모양이다.
4    윤동주, 그 뒷이야기???... 댓글:  조회:2854  추천:0  2018-11-24
                               윤동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백화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나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중년 이상의 한국인이면 대개는 기억하고 있을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의 들머리다. 이 노래가 어떤 경로로 한국의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됐는지 알 수 없지만, 윤동주(尹東柱·1917~45) 시인이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뜻밖이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는 미국의 백인 작곡가 제임스 브랜드가 만든 곡으로, 흑인노예가 고향 버지니아를 그리워하는 심경을 그렸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곡 연도는 1911년이다. 당시 여건을 감안할 때 윤동주 시인에게 매우 빨리 전해진 셈이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타관(他關)’ ‘객지(客地)’ ‘이역(異域)’ 같은 단어들이 주는 울림은 반세기 이전인 윤동주 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그 무렵의 타관과 객지는 고달픔이나 서러움의 상징이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이라는 짧은 생애 중에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객지에서 생활했다.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로 이어지는 긴 유학생활 끝에 감옥에서 객사하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것. 오죽하면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1948년) 서문에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고나! 29세(한국식 나이 계산)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썼을까.   윤동주를 포함해 3남1녀의 형제자매 중 유일한 생존자로 1986년에 호주로 이민 와 살고 있는 여동생 윤혜원(82·시드니 우리교회 권사)씨는 오빠가 즐겨 부르던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에 얽힌 얘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느라 타지를 떠돌던 오빠가 고향 북간도와 부모형제를 그리면서 자주 부르던 노래였죠. 서울과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방학을 맞아 북간도에 돌아오면 동생과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아리랑’ ‘도라지’ 등의 민요와 함께 그 노래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조무래기들을 빙 둘러앉혀놓고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노래 부르던 동주 오빠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남의 나라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의 운명을 이 노래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의미심장하다.   윤동주 시인이 떠난 지 어언 60년. 그런데 이번엔 그가 남긴 시편들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부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윤동주의 시들이 어휘나 시행(詩行) 또는 연(聯) 배치 등에서 영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교과서나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들이 그의 육필원고와 영 다르다. 그래서 “윤동주가 원고지에 쓴 원래의 형태로 그의 시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16일 호주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에 강사로 초빙된 윤동주 연구가 홍장학(52·서울 동성고 교사)씨는 이러한 주장의 선봉에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사후에 늘어난 유작들     1999년 삼일절을 기해 윤동주 시인 유족들의 용단으로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이 세상에 나왔다. 1948년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이 발간된 지 51년 만의 일이다.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고독하게 살다 갔다. 그러나 오늘날 윤동주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의 생애를 우리 사회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동생인 고(故) 윤일주(1985년 작고·건축가, 시인) 교수를 비롯한 유가족과 연희전문 시절의 지기(知己)인 정병욱, 강처중 같은 이들이 기울인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윤일주와 정병욱은 윤동주의 유작 31편을 모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했는데 이는 발간 직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유고 시집은 그동안 윤동주 문학 연구의 유일무이한 원전으로 취급됐고,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윤동주 연구자들이 여기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 수백 편의 논저를 발표해왔다. 오늘날 이 시집은 일본어, 중국어, 영어는 물론 불어, 체코어로도 번역되어 출간됐다. 윤동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계속)                      윤동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윤동주의 묘를 찾게 한 사진 : 1945년에 장례를 지낸 이후 윤동주는 잊혀졌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심지어 시인이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다가 1984년 봄, 미국에 살고 있는 의학자 현봉학 선생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해 8월에 중국을 방문, 옌볜의 유지들과 자치주정부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갖지 않아 그가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또한 친동생인 윤일주 교수가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중, 옌볜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12일 옌지에 도착했는데, 옌볜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오오무라 교수는 공안당국의 허가를 받아 5월14일 옌볜대학 권철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 강사와 역사에 밝은 룽징중학의 한생철 교사와 함께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지고 간 덕분에 묘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로 단장한 윤동주의 묘소 : 1945년 3월6일 윤동주의 묘가 처음 들어섰을 땐 봉분만 있었다. 같은 해 6월14일 묘비가 세워졌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의 현봉학 선생을 주축으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연증(捐贈)하고, 룽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했다. 2003년에 두 번째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윤혜원·오형범 부부의 주도로 두어 달간 공사가 진행됐다.   윤동주의 마지막 시 : 윤동주가 일본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은 시는 1942년 1월24일에 쓴 ‘참회록’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의 마지막 시는 ‘쉽게 씌어진 시’이다. 이 시는 1942년 6월3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또 다른 작품이 남아 있을 거라고 전해줬다.   1947년 이들 부부가 옌볜 생활을 정리하고 함경도 청진에서 살고 있을 때 교회에서 우연히 윤동주의 친구 박춘애와 김윤입을 만났다. 그때 김윤입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시 1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가지고 있다. 고향에 가면 그것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러다 이들 부부는 기다릴 형편이 못 돼 서울로 월남하게 됐다.       그러니까 윤동주가 감옥에서 김윤입이란 친구에게 보낸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다. 윤동주가 쓴 사실과 그 작품을 받은 사람까지는 확인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윤동주의 누이동생 부부가 보관자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의 실재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김윤입이 옥중에서 윤동주가 쓴 마지막 작품을 잘 보관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1942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해 오늘 날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 처럼.                                        ‘영원히 빛날 한 점의 별빛’       여러 나라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의 60주기 추모행사 소식이 호주에 전해졌다. 윤 시인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여동생 윤혜원씨가 호주 시드니에서 19년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출생지인 옌볜 자치주에서 전해온 소식부터 전한다. 옌볜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개최한 ‘윤동주 서거 60주기 추모 모임’ 소식인데, 표현방식이 특이해 분량만 줄여 원문대로 옮겨본다.   [오늘은 2월16일,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 서거 60주기 기념일이다. 옌볜인민출판사 ‘중학생’ 잡지 편집부와 옌볜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눈 내리는 야외 룡정(龍井) 동산의 윤동주 시인 묘소에서 뜻깊은 추모모임을 가지였다.   조성일 회장은 추모사에서 “윤동주는 별을 노래한 시인답게 세대와 국경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빛날 한 점의 별빛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주기에 손색이 없는 영원히 아름다운 별의 시인”이라고 격조 높이 평가하면서 “자라나는 새 일대인 중학생들은 대를 이어 윤동주의 넋을 기리면서, 윤동주와 같은 시인을 키워낸 옌볜땅에서 제2의 윤동주 제3의 윤동주로 성장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인상적인 것은 윤동주 시랑송. 석화 시인이 윤동주의 ‘서시’를 랑송한 뒤 전체 참가자들이 함께 ‘서시’를 재차 랑송하여 시랑송을 고조에로 이끌었다. 초·고·중 대표 녀학생 5명도 윤동주의 시 ‘슬픈 족속’ ‘쉽게 씌어진 시’ ‘십자가’를 읊으면서 윤동주 시랑송에 열을 올리였다.   정오가 되어 추모모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참가자들은 추위에 부르르 떨었다. 숫눈길을 헤치며 룡정시가지에서 늦게야 점심상을 받았을 때 연길고급중학교 1학년 허은희 학생이 “날씨는 추웠지만 가슴은 뜨거웠다”고 속셈을 털어놓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였다.]                 윤동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그의 시의 저항성은 시인의 주체의식의 사상적 핵이며 시의 령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항성은 후기시에 이르러 내면화에로 전향함으로써 전민족을 일제와 대결하는 투쟁에로 불러일으키지 못한 제약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극성한 객관적 요인 외에 그가 줄곧 학창생활을 하면서 인민대중의 투쟁과 격리되었고 그의 인생관에 강력한 영향을 준 기독교의 교리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관으로 인한 것이였다. 그의 시는 기법상에서도 남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상징성은 시의미의 내포와 외연을 몹시 넓히고 깊게 했으며 저항의식을 미묘하게 살려나갔다. 그것은 시의 상징성이 갖는 의미의 다의성, 암시성, 함축성, 모호성을 잘 살리였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 곧잘 하던 오빠         해마다 2월이 오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있다.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차마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내던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으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숨죽여야 했던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윤씨의 아픔과 눈물을 굳이 과거형으로 쓴 것은 언제부턴가 그 눈물자국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슬퍼하기보다 오빠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의 고고한 시편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려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북간도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공산당을 피해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주인공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중기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시가 31편밖에 실려 있지 않다. 현재 116편이 게재된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긴 채 월남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오빠 얘기만 나오면 말머리를 돌리던 윤혜원씨는 윤동주 시인 60주기를 맞는 2005년을 기점으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빠의 추모행사를 통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화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그중 하나가 ‘오빠 윤동주의 장난기’다. 세상엔 입을 꼭 다문 사진만 공개되어 윤동주는 과묵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데, 늘 조용하던 그가 유일한 여동생인 윤혜원씨에게는 무척 짓궂은 오빠였다는 것이다. 윤씨는 “앞으로 동주 오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공개하겠다. 그것들은 오빠의 밝은 내용의 시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껏 언론의 인터뷰를 한사코 피해온 그는 “동주 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 연유로 윤씨는 남편 오형범씨와 함께 서울, 부산, 필리핀, 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단식투쟁 끝 문과 진학         윤혜원씨는 1924년생으로 윤동주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독자인지라 대를 이을 장손 동주의 출생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한 윤동주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7년 만에 딸 혜원씨를 얻었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시절은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때다. 다음은 윤씨의 회고.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젖이 부족하자 동주 오빠는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 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전해듣기로는 동주 오빠가 열한 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는 워낙 책읽기를 좋아해서 오전 일찍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소떼를 몰고 산등성이로 올라가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오빠가 입었던 삼베옷 잠방이와 밀짚모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계속)         윤동주, 신사머리 왜 삭발했을까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는 왜 머리를 삭발했을까.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친 윤동주의 졸업사진을 보면, 그는 당시 ‘신사머리’라고 불렸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1942년 7월, 일본 릿교(立敎)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윤동주는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이다.  최근 한 일본 여성이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윤동주의 릿교대 시절에 대한 자료를 찾아내면서 그의 삭발이유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지난달 31일 서울 장충동 한국현대문학관에서 열렸던 ‘윤동주의 시를 읽는다·2002년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동경)’의 회원인 야나기하라 테츠코(楊原泰子)씨.  윤동주의 시에 깊이 매료돼 있던 그는 1988년 소설가 송우혜씨가 펴낸 ‘윤동주 평전’(세계사)의 일본어판(1991)에서 릿교대학을 다니던 무렵, 윤동주의 머리 모양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봤다. 같은 대학 출신이었던 그는 1942년 릿교대학신문을 샅샅이 뒤졌고 4월초 발행된 신문에서 ‘4월 중순, 학생 단발령 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윤동주는 전시상황에서 학교측이 내린 단발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아야 했던 것. 테츠코씨는 당시의 자료를 정리한 ‘윤동주의 릿교대학 시대’라는 글을 ‘한일 독자교류 모임’에서 만난 송우혜씨에게 건네줬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2년 대동아전쟁으로 전시체제 아래 있었던 릿교대학에는 군사 훈련을 위해 육군 대좌(지금의 대령)가 부임해 학생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한편 일본의 신도(神道)를 강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는 이를 견디다 못해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학교를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  윤동주가 릿교대학이 있던 동경에 머물렀던 시간은 4개월 정도로 길지 않았다. 한 학기를 보내고 바로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로 옮겼기 때문. 그러나 ‘시인 윤동주’에게 있어 동경은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송우혜씨는 “옥사할 때까지 만 3년간 일본에서 살았던 윤동주가 일본땅에서 쓴 시 중에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불과 다섯 편 뿐인데, 윤동주는 이 시를 모두 동경에서 썼다”고 밝혔다. 또 “윤동주의 시는 그의 생활과 직결돼 일기와도 같다. 당시 그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정보는 윤동주의 시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도쿄 후쿠오카 교토에서는 윤동주 관련 모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매년 윤동주의 기일에 함께 모여 헌화식을 갖기도 한다.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아이자와 가끄(愛澤革)씨는 “일본사람에게는 윤동주의 시를 읽는 일이 매우 복합적인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맑은 운율로 의연하게 일어서 다가오는 시를 모국어로 쓰고 죽은 한국의 젊은 시인,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시인의 삶을 27년으로 끝나게 한 일본의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일”이라고 털어 놓았다. 1997년부터 일본 후쿠오카의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동경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 등을 후원하고 있는 동서문화사 전숙희 대표는 “윤동주야말로 모든 면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전세계인이 사랑할만한 시인”이라며 “일본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또 끊임없이 윤동주를 연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2002/9/12] 윤동주(尹東柱) 메모                                             미나미 구니가즈(南邦 和)   글                   이  보  혜 (李 保 慧)      옮김                          금년(1995년) 2월 16일은 조선의 시인 尹東柱의 기일이었다. 1945년 이 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 순수하고 고고한 시인이 무언가를 크게 외치고(그것을 듣는 간수는 조선말을 몰라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는 것, 필시 원통하고 절통한 가슴의 소리였을 것이다.) 숨진 그 날로부터 오십 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 서울 시내에 있는 尹東柱의 모교 연세대학교에서는 약 1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저항시인· 尹東柱를 그리는 모임'이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朝日新聞). 그 추도식의 모습은 그 후, 한·일 공동제작의 텔레비젼 프로그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尹東柱·일본치하의 청춘과 죽음' NHK스페셜로 방영되었는데 시비 앞에서 서시(序詩)를 낭독하던 젊은 여대생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일본 국내에서도 2월 16일 尹東柱가 재적해 있던 교토(京都)의 동지사(同志社)대학에서 '尹東柱詩碑완성 기념예배'와 그 제막식이 있었는데 한·일 양국에서 2백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고 있다. 제막식이 끝나고 니이지마회관에서 한·일 다섯명의 패널리스트에 의한 심포지움이 열려서 尹東柱작품의 번역을 둘러싼 열띤 공방전이 있었다고 한다.  또 2월 18일 토쿄 東京의 敎文館에서는 일본기독교詩人會의 후원으로 '尹東柱를 생각하는 모임이' 있었다. 한국에 地緣的 연고가 있는 시인 두 사람이 중심이 된 모임이었는데 나도 십여 명의 발기인 명단에 끼어 참석을 했다. 오후 두 시 발기인 대표의 인사와 尹東柱가 살던 시대상황에 자신의 체험을 통한 '식민지 통치' 해설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기조강연자인 宇治鄕毅씨가 '尹東柱의 생과 그 의미'라는 연제로 尹시인의 대표작인 를 채택하여 어휘 분석에 의한 작품론을 전개해 나갔다.(우지씨는 尹東柱의 同志社大 후배이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한 달 전인 1941년 11월 20일자에 쓰여있는 에 담긴 죽음, 하늘, 부끄럼, 바람, 고통, 별, 사랑, 길, 오늘밤… 등의 어휘가 尹東柱의 모든 작품에 이어지는 키워드이고 그때까지의 삶을 총괄하여 새롭게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이 시는 쓰여졌을 거라는 해석에는 크게 배울 점이 있었지만 내 개인적인 관심은 '치안유지법 위반' 용의의 소상한 내역이었다.  다음에 몇 사람의 발표가 있었는데 종군위안부 문제 고발詩를 썼고 한국인 피폭자 문제 등에 깊은 이해와 관심을 나타내는 이시카와(石川逸子) 시인이 등단하여 尹東柱 작품의 순수성과 그 시법의 특성을 (눈이 오는 지도)를 낭독하여 시사하고 나서 尹東柱에게 바치는 자작시를 읽었다.  다음엔 재일한국시인 최화국 씨가 "尹東柱는 나보다 세 살 연하입니다…"로 시작, 동시대를 살던 尹東柱의 너무나도 순수, 무방비로 인했던 불행을, 또 전일본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시절의 '特高'와의 교제술에 관해서 자신의 체험을 술회하였고 한글시의 일본어 번역에 대해서도 엄한 지적이 있었다. 올해 여든 한 살인 이 현역시인의 진솔한 언변도 이 날의 큰 수확이었고 특히 원문대로 낭독된 의 여운은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사실 나는 자신이 조선반도에서 성장했다는 것 외에는 尹東柱를 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므로 양해를 구해놓고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에 찍었다는 준수하고 단정한 사진의 인상을 말한 다음, 긴 세월 재판소라는 특수직장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써 '우리 말'을 사랑한 이 시인에게 그 작품의 일본어 번역을 강요한 관헌의 잔혹성과 시인 尹東柱가 받은 굴욕의 깊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후, 그 모임을 주관했던 시인으로부터 보내온 '대학통신' 속에 고당요(高堂要)라는 사람이 쓴 '모순의 사람 尹東柱'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내가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던 尹東柱와 모국어, 그리고 일본어와 윤동주에 관해서의 '언어'와 '시인'의 관계가 단도직입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인용을 해보려고 한다.  "尹東柱에 관해 일본어로 쓰는 것은 매우 적당치 않다. 일본어는 尹東柱에게 있어 어거지로 배워야 했던 이국의 언어이고 모국어로 말하는 것을 금지당하면서 강제적으로 사용해야 했던 언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모국어로 시를 썼다 하여 반일적, 항일적 행위로서 체포되었다. 경찰서에서 자신이 쓴 한국어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중략-  그는 자신의 시적 세계, 문학적 세계를 심화, 추구, 연마하기 위해서 일본어로 문학을 배워야 했다. 좋아하는 시인 릴케와 프랑시스 잼을 읽은 것도 주로 일본어였다……"  高堂씨의 문장의 일부분이지만 예리한 필치로 尹東柱에게 접근하여 "내가 그에게 끌리는 것은 '모순의 사랑', 안으로 찟긴 혼의 상처를 별 수 없이 껴안고 있는 사람, 고뇌뿐이 아니라 허무에 시달리면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모순의 사람' 尹東柱를 강조하고 있다. 나의 尹東柱 이해를 돕는 큰 길잡이이고 새삼 그 시점에서 尹東柱의 사람과 작품에 다가가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尹東柱는 일본 통치하의 가혹한 상황에서 '치안유지법'이라는 시대의 악법에 의해 체포 구류되었다. 그리고 '옥사'라는 비극적 최후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악업과 잔학성을 상징하는 '순교의 사랑'을 '저항의 사랑'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작품에 접해 가면 그 어디에도 노골적인 저항의 자세나 정치적인 문구는 없다. 오직 내성적인 우수에 찬 서정시인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사상성을 지니는 의지의 시인이다. 여기서도 현대에 있어서의 尹東柱 평가에 큰 모순을 보는 것이다.  나는 길지 않은 발언의 마지막을 尹東柱 작품 의 낭독으로 맺었지만 이 시는 그의 전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尹東柱의 이름이 일본의 시단이나 매스컴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십수년 남짓이지만 한국에선 김소월, 이육사 등과 필적되는 '국민시인'으로서 일찍이 그 작품과 사람이 크게 평가되어 있다. 작년 가을 한국에 갔을 때 윤동주시집을 입수해 왔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내 한글 실력으로 읽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 후 입수한 尹東柱全詩集 와 평론 , 또 尹棟柱詩篇의 일본어역 등을 실마리로 해서 나 나름의 '尹東柱메모'를 시도해 보고싶다. 이 작업은 나의 본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조선반도에의 뜨거운 그리움과 이국땅에서 옥사한 애절한 시인에게 깊은 애도로서 보내는 나의 頌歌이며 鎭魂歌이다.  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동북부의 북간도 明東에서 출생했다. 이 지역은 현재도 조선족의 자치구로 알려져 있지만 증조부 尹在玉시대에 이주했다고 한다. 부친은 尹永錫, 모친은 金龍, 여동생 惠媛과 역시 시인인 남동생 一柱, 光柱가 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조부 尹夏鉉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東柱는 조신하고 차분한 성격, 그 안에 강인한 의지를 지녔던 소년이었다고 한다. 소학교부터 중학으로 이어지는 친구에 한국의 간디로 불린 목사 文益煥이 있다.  1932년 東柱는 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시절부터 그의 문예활동은 시작되었다. 그 후 崇實중학, 다시 光明학원중학부로 전전하고 있으나 이미 延吉에서 발행된 「카톨릭 소년」에 , ,  등의 동화를 발표해 온 尹東柱는 이 숭실시절에 학우회지 의 편집을 맡았었고 詩 을 발표하고 있다. 空想- 내 마음의 탑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와 허영의 天空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한 나의 空想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自由로이 헤엄친다 황금 知慾의 수평선을 向하여  尹東柱가 다닌 恩眞, 崇實 이 두 중학교는 反日色이 짙은 학교였다. 총독부가 각지에서 신사를 건립하고 국민정신총동원이라는 구호아래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尹東柱의 모교인 崇實은 '참배냐, 폐교냐…'를 협박하는 총독부를 향해 'NO'를 고집하여 1938년 폐교되었다. 이 사건은 필시 尹東柱의 다감한 청춘기 정신형성 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光明학원중학부 편입 후에 4학년, 5학년을 통틀어서 '일본어의 성적이 가장 나빴다'고 하는 尹東柱였다.  그가 의식적으로 문학에 뜻을 세운 것은 중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문제에서 의과대학에 가라는 부친과 대립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택한 그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는 사촌이며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친구 宋夢奎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송몽규는 이미 중학시절에  신춘문예콩쿨 꽁트부문에 당선되었을 정도로 조숙한 文才인 한편,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는 등 과격한 사상과 행동력의 소유자였다.  윤동주가 입학한 1938년 당시의 연희전문은 민족주의의 기풍으로 꽉 찬 학원 중의 하나였으며, 이 시기에 그가 가장 신뢰하던 국어학자 최현배가 어떤 사건에 연좌되었다는 이유로 강제사직을 당했다. 그러나 이 연희에서의 4년간이 윤동주로서는 가장 여유롭고 가장 자유롭게 삶을 구가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라고들 말한다.(송우혜 지음에서).  이 시기에 그는 정병욱(후에 서울대학의 고전문학교수)이라는 생애의 지기와 만나고 존경하는 선배 시인 정지용과도 교류하고 있다. 1941년 12월 연희전문을 졸업(학제단축으로)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도일, 입교대학 영문과에, 그 두 달 후에는 교토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옮겼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연희 재학시부터 일본 유학 무렵(23∼24세)의 것이고 이 시기에 이미 自選시집 의 간행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西日本新聞의 井手俊作기자의 신문연재를 '빼앗긴 시혼-발굴·尹東柱의 옥사'에서 이 박행한 시인의 생애와 비참한 죽음의 사실, 그 슬프도록 투명하고 고고한 詩정신에 접할 수가 있었는데, 그 '빼앗긴 詩魂'이 말하듯이 우리말의 소멸 위기감을 안고 있던 국어학자 최현배에게 강렬히 기울고 있던 윤동주는 단연코 한글로 시를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內鮮一體 정책하에서의 한글교육 폐지(1938년) 강행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그러나 창씨개명 실시라는 일제통치 하에서 어쩔 수 없이 平沼東柱가 된다. 그것이 일본 유학에의 渡航증명서를 얻어낼 수 있는 필수 요건이어서였다.  최현배에 의해 우리말에 눈을 뜬 윤동주에게 있어 한글에 의한 詩행위는 글자 그대로 죽음을 건 선택이었다. 그의 작품으로서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이 다음의 작품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작품의 제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독자 개인의 감수성에 맡겨질 일이지만 나는 프롤로그로서의 그것이기보단 오히려 에필로그로서의 죽음을 예감한 終詩(유서)로도 생각되어진다. 24세에 이미 이 경지에 도달해버린 요절시인의 천재성과 비극성을 거기서 보며 마음이 아파온다. 尹東柱의 작품에는 거의 삶의 정의와 생활의 추구에 괴로움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의 尹東柱 이해를 위해서는 그 작품들 저변에 깔려있는 기독교적 윤리관과 유교적 정신의 자세, 그리고 조선어가 갖는 표현의 깊이에 관해서의 학습과 인식이 요구된다. 이번 봄의 京都·同志社大 심포지움에서도 尹東柱작품의 번역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한다. 그 一例로서 序詩의 첫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에 관해서 번역자인 伊吹鄕씨와 주최측과의 질의응답이 있었다고 듣는다.  伊吹씨 번역에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라고 되어있는 하늘은 우리들의 표면적인 지식으로선 하늘 이외로는 생각할 수 없는 어휘이지만 어원적으로는 이 나라의 고유 數詞인 '하나'에 유래하고 있어 空, 天, 神 또는 天國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죽는 날까지 天을 우러러'로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森田進씨 번역에는 '天을 우러러'로 되어 있으며 이 두 줄에 대해 森田씨는 '동남아세아적 윤리관인 恥…는 여기선 수직적인 天上에의 視線과 이어져 있다. 이 청렬하기까지 한 의지야말로 조선의 기독인이 터득한 순절의 의지이다'라고 尹東柱를 찬양하고 있다.  윤동주가 체포된 것은 1942년 7월 14일이었다. 완전한 기습체포였으니 그의 경악과 실망은 어떠했으랴 상상이 간다. 그의 구체적인 용의사실이 밝혀진 것은 1970년이 한참 지나서 윤동주 연구가인 宇治鄕毅씨에 의한 '特高月報' 복각본의 열람에 의해서였다. 윤동주의 수난의 계기는 사촌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친형제처럼 성장해 온 宋夢奎의 사상과 행동을 눈여겨오던 '特高'의 먹이로 말려들은 불행이었다.  그 부분의 사정을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었던 高熙旭(당시 三高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사건은 송몽규씨가 경찰의 要觀察人이었기 때문에 생긴 거지요. 宋을 경찰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줄 모르고 함께 '우리 민족의 장래' 또는 '독립운동' 등을 주거니받거니 한 거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경찰이 깡그리 엿듣고 미행해서 사건을 만든 거였어요…"  그리고 高熙旭은 尹東柱의 인품을 "체격은 마른 편이고 흰 얼굴에 목소리는 좀 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온화하고 침착한 면이 있으면서 반면 정열적이었지요. 무척 공부를 잘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전형적인 창백한 인텔리라는 인상이었구요. 항상 우리 민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민족주의적인 색조가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산 동지의 증언인 만큼 현실감이 있다. (宋友惠 지음 에서)  그러나 생체실험의 희생이 되어 숨졌다고도 말해지는 尹東柱 옥사의 진상은 아직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                   ⊙ 미나미 구니가즈가 윤동주獄死 50년을 맞아                                         1994년 봄호에 발표한 문장    
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개(2) 댓글:  조회:2705  추천:0  2018-11-24
             개                           윤동주   「이 개 더럽잖니」 아 ― 니 이웃집 덜렁수캐가 오늘 어슬렁어슬렁 우리 집으로 오더니 우리 집 바둑이의 밑구멍에다 코를 대고 씩씩 내를 맡겠지 더러운줄도 모르고, 보기 흉해서 막 차며 욕해 쫓았더니 꼬리를 휘휘 저으며 너희들보다 어떻겠냐 하는 상으로 뛰여가겠지요 나 ― 참. 1937.봄(추정).   ==================//////////////// 자화상’에 나타난 연약한 자아 윤동주 시인 작품 '자화상' 전문. 이 교수는 1939년 본격적인 자기만의 시 세계를 구축한 첫 작품, ‘자화상’에 대한 시 분석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은 작품을 남기면서 창작 년, 월 종종 일자까지 자세히 기록했는데, 마치 일기를 쓰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연희전문 2학년 2학기를 앞두고 여름방학에 쓴 시 '자화상'은 연약하고 예민한 자아를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시 '자화상'의 배경은 고향 북간도 명동촌으로 알려졌다. 시에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라는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 후에 유족들은 당시 집 가까이 우물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교수는 “시에는 자기 분신에 대해 미웠다가 가엾다가 다시 그리워지는 여러 갈래의 심정이 들어있다”며 “식민지 지식인이자 대학생 청년으로서 역사와 민족을 위해 나설 수 없는, 나약한 자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후 1941년 2월 7일 쓴 시 ‘무서운 시간’, 같은해 6월에 완성한 ‘바람이 불어’ 등의 작품도 결을 같이 한다. 민족 현실에 대해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두려움과 공포가 상존한다. 이 시기에도 나약한 존재로서의 자아가 나타난다. 자아의 변환, ‘십자가’       반면 1941년 5월 31일 쓴 작품 ‘십자가’에서는 두려움과 의지 두 가지의 감정을 가진 자아가 교차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아 세례를 받고, 기독교적 가정에서 자라온 윤동주 시인이 희생에 대한 의지를 엿보인 대목도 나온다. 이 교수는 “시 ‘십자가’의 전반부는 무력하고 나약한 자아가 나타나지만 후반부에는 희생을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겠다는 반대의 자아가 있다”며 “암담한 현실에 조용히 순교의 피를 흘리겠다는 구절을 통해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진 자아로 변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1941년 9월에 쓴 작품 ‘또 다른 고향’은 2학기를 앞두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완성한 시다. ‘백골’이라는 시어를 통해 표현된 무력하고 약한 존재는 ‘지조 높은 개’로부터 각성해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향한다. 이듬해 윤 시인은 1942년 1월 24일 ‘참회록’, 같은 해 6월 3일 ‘쉽게 씌어진 시’를 남겼다. 특히 쉽게 씌어진 시는 친구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에 수록돼 세상에 공개됐다. 이후 2년 8개월 후인 1945년 2월 16일 청년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교수는 “그의 죽음으로부터 몇 달 후 조국은 해방됐고, 이후 그의 시는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됐다”며 “암흑의 시대에 쓴 그의 시와 안타까운 죽음이 민족사의 어둠을 밝힌 구원의 불꽃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시인 윤동주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지핀 순결한 영혼의 불꽃은 생생하다는 점도 재차 강조했다. 그는 “유족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세월을 보냈다”며 “하지만 결국 윤동주 시인은 한국시사에서 십자가에 피 흘린 예수의 상징성을 지닌 시인으로 남게 됐다”고 강조했다. ===============================///   “슬퍼 하는자......” 윤동주를 만나다   “언니! 이거 선물이야, 졸업 축하해...... ” 경희가 수줍은 목소리로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하나 내민다. 옆집 살던 한 살 아래 경희가 내게 내민 것은 시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열세 살 이후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30년 동안 늘 함께 하는 시집 ,오늘 나는 또다시 윤동주의 시집과 함께 추억속의 경희의 모습을 회상한다. 국민 학교 때 오빠는 무슨 이유에선지 어느 날 이육사의 를 외우게 시켰고 그날 밤 나는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 해 두렴’을 수없이 반복하다 잠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오늘의 주인공 윤동주 시인과 더불어 일제하의 민족 시인으로 대표됨을 알기도 했다. 또한 텔레비전에서 윤동주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를 보며 연희전문 교복에 모자를 쓰고 뱃전에 서서 현해탄(당시 명칭-지금은 대한해협)을 건너던 청년 윤동주의 가없는 슬픔을 나 역시 느끼기도 했다.   슬픔을 자아내는 시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서시’나 ‘별 헤는 밤’을 교과서에서 배우며 시인의 섬세하고 여리며 순수한 서정에 감동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인이 된 내게 더욱 뭉클히 다가오는 세편의 시를 소개하고 싶다. 그 첫째가 ‘자화상’이다 인간의 고뇌와 나약함이 잘 드러나 있어서 애틋한 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  전문   이 시에는 사람의 마음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과 시인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다음으로는 ‘팔복’이란 시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12절의 내용을 시로 썼지만 물론 마태복음의 내용은 이와 다르다.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전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시인이 성경을 잘못 이해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내면에 꽉 찬 슬픔을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는 시인의 마음,여과 없이 다가온다. 다음의 시는'쉽게 씌어진 시'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 하나,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홀로 침전 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전문   이 시속에서 시인은 학비를 받아 공부하는 유학생이다.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며 땀내 나는 학비 받아 공부를 하러 다니면서도 속살거리는 밤비 소리도 들으며 쉽게 씌어지는 시에 대한 회한을 한다. 그럼에도 등불을 밝혀 어두운 조국에 아침을 몰고 올 그날을 기다리는 조국을 사랑하는 청년이다. 그리고 어쩌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적은 손”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가엾이 여긴다.여러 시가 다 심금을 울리지만 특히 ‘쉽게 씌어진 시’는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나 잃어버린 조국을 가진 청년의 서글픔이 잘 드러나 있다.   슬픔 속에서 더 강해지는 것이 인간  아무리 어려운 상황, 슬픔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남았고 역사를 창조했고 그리고 시를 썼다. 그래서 시인은 아름답다. 나 역시 슬퍼도 복이 있는 자 시인으로 남고 싶다.  
2    [그것이 알고싶다] - 달(월)과 요일의 유래?... 댓글:  조회:4307  추천:0  2018-11-24
일주일은 왜 7일일까? 달과 요일의 유래   달(month)의 유래는? 1월/ JANUARY -  Latin어로 "문(門)"을 의미하는 "Janus"가 어원 새해를 여는 문이 바로 1월이기 때문이며,   Janus는 Rome의 "문의 신"이기도 하다 . Janus는 얼굴이 두개인데 하나는 미래를 보고 다른 하나는 과거를 본다 "야누스" .......* Janus-face : 얼굴이 둘 있는, 표리 있는 , 사람을 속이는 초기 로마력(Roman Calendar)에는 없었던 달이었다. 고대 로마 초기에는 춘분일을 1년의 시작으로 하여 1년이 10개월 밖에 없었는데 Numa 왕이 기원전 710년 경에 2개월을 더 추가해 12개월을 만들었다. January는 한해의 끝쯤에 자리한 달이었는데 Julius Caesar에 의해 1월로 자리잡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다시말해 라틴어로 Martius(1월), Aprilis(2월), Maius(3월), Junius(4월), Quintilis(5월), Sextilis(6월), Septembris(7월), Octobris(8월), Novembris(9월), Decembris(10월) 이었는데 2개월을 추가해 Januarius(11), Februarius(12)가 되었다.  춘분일 즉 봄을 한 해의 처음으로 잡았으니까 고대 초기 로마 시대에 1월은 March였다. 하지만 Julius Caesar가 B.C. 46년에 계절과 달력을 일치시키기 위해 나중에 January를 1월로 만들어 March는 3월로 밀려나게 되었다.  January는 로마의 시작과 끝, 문의 신인 Janus 이름에서 유래한다. Janus는 앞 뒤로 얼굴이 두 개 있는 신이었는데 초기 로마시대에는 그가 새벽에 천국의 문을 열어 아침을 오게 하며 황혼 무렵에는 천국의 문을 닫았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를 모든 문, 입구의 신으로 숭배하였다고 한다. 즉 1월을 Janus의 달로 믿었던 것이다.  2월/ FEBRUARY - Latin에로 "정화, 깨끗이 함"이라는 뜻의 "februs" 가 어원.옛 Rome인들은 매년 2월에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의식을 가졌다한다. February 도 January와 같은 이유로 Numa 시대에 추가된 달이며 Julius Caesar에 의해 밀려난 달이다.  태양의 주기와 달(month)의 길이가 일치하지 않아 Numa 시대에 한 해의 끝이었던 February의 길이를 조절하게 되었고 이후 태양의 주기와 달(month)의 길이가 일치하지 않으면 February를 수정하였다. 그래서 윤년(leap year)이 들어가는 달이 2월이 되었다.  February는 정화의 신인 februa 에서 유래한다. 이 달에 로마 사람들은 정화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라틴어로 februare 는 “죄를 속죄하다(expiate)” 혹은 “정화시키다(purify)” 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 달에 마음을 정화시키고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자는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3월/MARCH - 로마의 전쟁신 "Mars"가 어원. 대개 전쟁은 봄(3월)에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용감한" 뜻의 martial이나 "화성"이라는 뜻의 Mars도 여기서 비롯된것이다... * martial law : 계엄령. martial art : 호신 공격술 로마력으로 첫번째 달이다. 로마의 전쟁신(god of war)인 Mars에서 유래한다.  로마 역사 초기에 Mars는 봄(Spring), 성장(growth), 비옥(fertility)의 신이자 가축의 수호신(protector of cattle)이었으며 지옥의 신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래서 나중에 죽음의 신으로 결국은 전쟁의 신이 되었다.  4월/APRIL - 꽃이 벌어지듯이 "to open"이라는 뜻을 가진 Latin어 "aperire"가 어원 꽃은 4월에 핀다.... ‘열다(open)’라는 의미를 지닌 aperire 에서 유래했는데 이 달은 새싹들이 싹을 틔우고 꽃이 피는 달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5월/MAY -  위대하다는 뜻의 Latin어 "maior"가 어원. Maia는 고대 로마 신화 속의 "어머니 신" 그래서 5월엔 어버이날도 있다.... 로마력으로 3번째 달이다. 어떤 사람은 성장의 여신(goddess of growth) maia 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로마의 명예, 영광(honor)과 존경(reverence)의 여신 maiesta 에서 왔다고 한다. 6월/JUNE - 여성을 보호하는 로마의 여신 "Juno"가 어원 . Juno는  Jupiter의 wife , 결혼의 여신 로마력으로 4번째 달이다. 로마의 수호 여신인 Juno 에서 유래한다. Juno는 모든 신의 우두머리인 Jupiter의 아내이며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Zeus의 아내 Hera와 동일시되는 신의 여왕이다(queen of the gods). June이란 이름이 젊은 사람들(young men), 나이어린 사람들(juniors)을 의미하는 iuniores 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May는 성장한 사람들(grown men), 나이든 사람들(majors)을 의미하는 maiores 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다른 견해로 원래 2월(April), 3월(May), 4월(June)은 곡식과 가축의 성장 단계를 반영하여 이름지었다는 의견도 있다.  7월/JULY - 로마의 지도자 Julius caesar의 이름을 딴것.로마황제 Julius Caesar가 살해당한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to honor) 원래 이름인 Quintilis(라틴어로 5번째 달을 의미)를 그의 이름을 딴 Julius(July)로 다시 이름지었다. 이 달은 그가 태어난 달이기도 하다. 8월/AUGUST - Julius caesar의 조카이며 첫 로마의 황제인 Augustus     Caesar의 이름에서 비롯된것. 2월에서 1일을 빼어다가 8월에 끼어넣어 8월은 31일 . Julius Caesar의 조카이며 Caesar의 뒤를 이은 로마황제 Augustus Caesar의 이름을 땄다. 그의 뛰어난 업적에 보답하고자 원로원(Roman Senate)은 그가 태어난 달인 Septembris(라틴어로 7번째 달을 의미)를 Julius Caesar 처럼 그의 이름을 따 지을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Sextilis(라틴어로 6번째 달을 의미)에 운이 좋은 일이 여러 번 있어 이 달을 대신 택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지었다. 9월/SEPTEMBER - 라틴어로 seven(7)을 의미하는 septem에서 유래 로마 달력으로는 march가 첫째 달이기 때문 이며 9월은 7번째 달. January가 한 해의 첫 달이 되었으므로 원래 7번째 달이었는데 밀려나 9월이 되었다. 이름은 라틴어의 7을 의미하는 숫자 ‘septem’에서 유래한다. 10월/OCTOBER - 8을 의미하는 oct 에서 유래 . 10월은 8번째 달. September와 같은 이유로 원래 8번째 달이었는데 밀려나 10월이 되었다. 이름은 라틴어의 8을 의미하는 숫자 ‘octo’에서 왔다. 11월/NOVEMBER - nine(9)을 의미하는 movem에서 비롯된 말 . 11월은 9번재 달. September 와 같은 이유이다. 이름은 라틴어의 9를 의미하는 숫자 ‘novem’에서 유래한다. 12월/DECEMBER - ten(10)을 의미하는 decem에서 온말 ,  12월은 10번째 달.September와 같은 이유다. 이름은 라틴어의 10을 의미하는 숫자 ‘decem’ 에서 유래한다 요일이름은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SUNDAY -  sun + day  = Sunday   해의 날  . 해 -> 日(일) *일요일. 태양에게 바쳐진날 "주님"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 MONDAY - moon + day  = monday 월(月달)의 날 . 월 -> 月(월) *월요일 TUESDAY - Tues  + day = Tuesday   _ 북유럽의 전쟁신. 전쟁의 신 티르 또는 티브와 마르스에게 바쳐진 날 WEDNESDAY - wednes + day = wedenes     _ 북유럽의 폭풍의 신  wind(바람) wendy(방랑자)최고신 보탄 또는 오딘에게 바쳐진날 THURSDAY  - Thurs + day  = Thursday   _ 북유럽의 벼락의 신 .thunder(천둥, 우레)번개의 신 주피터 또는 토르 또는 조베에게 바쳐진날 FRIDAY  - fri  + day  = Friday   _ 북유럽의 사랑의 신 .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쳐진날 SATURDAY  - saturn + day  = Saturday   _로마의 농업신. 신의 조상 사투르누스에게서 유래 일주일은 왜 7일일까.  아주 오래 전 원시적인 날짜 세기를 하던 사람들에겐 "주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문명이 진보하면서, 사람들은 하루보다는 길고 한달보다는 짧은 기간 개념을 필요로 하게 됐다. 뭔가 계획을 짜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맺고 끊을 수 있는 새로운 시간의 정의가 있어야 했다.  처음의 "주일"은 장날의 간격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가령 일부 서아프리카 종족들은 4일, 이집트인들은 10일, 로마인들은 9일마다 장을 열었다. 그들은 그 기간을 일주일 삼아 생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일주일이 7일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지금의 일주일은 그중 하나가 아니라 몇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이루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보름 상현 하현 그믐 등 달의 위상변화 간격이 대략 7일이라는 것,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7을 신성한 숫자로 생각했다는 것, 오래 전 인류가 하늘에 7개의 천체가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것, 유태교의 안식일 의식에서 영향받았다는 것 등이 자주 인용되는 설이다.  그 가운데 천체의 숫자와 관련이 있다는 설은 현재의 요일명이 실제 그 천체들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망원경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하늘에 별을 제외하고 7개의 천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그것이다. 영어로 된 요일명은 이 천체들, 또는 각 천체에 해당하는 신화 속 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들이다   //   ===================/// [1-4] 달력이야기 누구든 달력을 보면 한 두 가지 궁금증이 있다.  초등학교 산수시간에 시 분을 계산할 때에 12진법이라 어려움도 겪었다.  왜 윤년을 두는 것일까? 요일이 변하지 않는 달력은 없을까? 하는 점들이다.  태양력도 달력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음력이 우리에게 먼저 쓰였나보다.  (1) 달력의 종류 태음력 달을 기준으로 하여 만든 것이 달력으로, BC 14세기에 중국 은나라에서 1년이 360일에 12개월이며,  1개월이 30일인, 고도로 발달된 달력이 있었다.  이 시대부터 중국인의 문자가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달'(moon)이 '달'(month)의 상징이 되었다.  달력은 양력과 음력을 모두 인정하였으며, 양력의 계절적인 현실성에 음력을 근본적으로 조화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는 윤달을 더하였다.  태양은 변화속도가 느려 구별이 잘 안되었으나 달의 변화는 쉽게 알 수 있어 태음력을 자연이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달력의 가장 중요한 필요성은 계절의 변화를 알아내어 농사를 짓거나 생활에 필요한  때를 알아보는 것인데 계절은 태양에 관계가 있으므로 음력은 사용이 불편하였다.  그래서 (태음 + 태양)을 합쳐서 사용하게 되었다.  아직도 회교권은 태음력만 고집하여 회교력을 사용하므로 그들의 순례절기는 해마다 다르게 되었다.  태양은 일년이 365.25인데 달은 354.36일이다. 3년이면 33일의 차이가 나게 되어 3년에 윤달을 한 달씩 두게 되었다.  달이 지구를 한바퀴 도는 시간은 27일 이며, 보름에서 다음 보름은 29일 12시간 44분이다.  약 2일이 차이가 나는데 그것은 지구의 공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달은 매일 50분 늦게 뜬다. 태양력 고대 이집트인이 사용하였으며, 그때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알았다고 한다.  시저가 이집트정복시 태양력을 배워 1년은 12달 365과 4년에 윤년을 두는 현재와 비슷한  달력을 만들었다. 이 달력은 율리우스(카이사르)달력이라 한다.  이 달력도 1600년 후에 10일이 늘어나 오차가 생기게 되었다 .  이 정도면 계절에 영향을 줄만큼 큰 오차여서 AD 1582년 그레고리 13세는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였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이다.  이것 역시 일년에 26초의 오차가 생겨 3300년 되면 하루 오차가 나게 되었으나 당분간 별 염려가 없게 되었다.  세계력: world calendar 이 달력은 일년 364일÷4=91일을 1개 군으로 하여 1월 31일 2월 30일, 3월 30일,  마찬가지로 2개 군이 4월은 31일, 5월, 6월 은 30일이 된다.  1개군 1월, 4월, 7월,10월의 첫날은 일요일이다. 1 개 군의 마지막날은 토요일이다 (3.6.9.12월) 그러므로 요일은 변함이 없다.  남은 하루는 12월 30일을 뒤에 두고, 윤년은 6월30일 다음에 두어 이날은 세계의 날이라 부르고  휴일로 한다는 개념이다. 세계가 동시에 사용한다는 어려움과 종교계에 반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U. N의 힘에 의하여 사용하려고 하나 언제가 될지 의문이다.  유대력: Juda calendar  이 달력은 태음 태양력인데 매우 까다롭다. 4세기 무렵 제정되었다. 특징은 19년 동안에 7번의 윤년을 둔다는 것과 평년의 1년은 12 달로 353, 354, 355 일과  윤년은 13 달 에 383, 384, 385 일 3가지가 있다. 이유는 유월절 절기 때문인데 이날은 월, 수, 금, 요일이 되지 않아야 하므로 복잡하게 되어 있다.  유월절의 뜻은 애굽의 바로 왕이 노예같이 부리든 유대인을 가나안땅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그 중에 마지막 재앙이 장자들의 죽음이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유대인은 이 재앙이 그냥 넘어(구원되었다) 갔다는 뜻으로  유월절(逾越節) 또는 과월(過越)절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된다는 징표이다. 바로가 굴복한 이 날은 8월(니산 월)15일인데 유대인은 가장 큰 명절로 지킨다.  하루의 시작은 오후 6시(일 몰 시간) 부터이고 다음 오후6 시까지가 하루이다.  신년은 유월절 163일 뒤가 된다.   1주일 24시간  하루를 24시간 1시간을 60분 1주일은 7일로 사용한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이들은 12 진법을 사용하였다.  (2) 달력의 이름과 역사 로마인들이 쓰던 최초달력은 11월과 12월은 농한기이라 이름도 없이 1월을 March로 시작하여  10월의 December까지 1년의 달 이름이 10개 밖에 없었다고 한다. 기원전 8세기경 로마 왕 누마 폼필리우스는 1년을 나타내는 달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1년을 355일로  정하는 음력을 만들었다. 비어 있는 11월과 12월 자리에 January와 February의 두 달을 추가하여 12달이 되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짝수를 불행한 숫자라고 믿어 12달 중 일곱 달은 각각 31일, 4달은 각각 29일로 정하다보니 1달은 어쩔 수 없이 28일의 짝수 달이 생겼다.  1년의 마지막 달인 February(현 2월)를 28일 선택하였다고 한다. 이 1월이 January, 2월이 February로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1월:'January'  헬라 신 야누스에서 유래하였다.  이 신은 신전의 문을 열고 닫는 신으로 새해를 연다는 의미로 이 신의 이름이 쓰여졌다. 이 신의 이름에서 야누스적이라는 단어가 생겼는데, 이는 이중적 또는 양면이 다르다는 의미로 쓰여진다. 예로 치킬 박사와 하이드로서 선과 악의 의미이다.  이 신은 전쟁시 문을 열고 평화시 문을 닫혔는데 악티움 전쟁 전에는 3번 문이 닫혔고,  그 후로는 거의 열려 있었다고 한다.   2월:'February'  '양을 잡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화를 의미하는데, 옛날에 죄를 용서받는 제사 형식에 양, 염소, 낙타, 소 등의 짐승을  잡아 피는 제단에 뿌리는 제사 형식이 있었다.  아마도 이 달에 이런 제사를 드리는데서 유래 한 것 같다.  이 달이 28일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이 달을 로마인들이 좋은 달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3월:'March'  헬라 신 마르스신에서 유래하였다. 이 신은 군신으로 용감무쌍하고 웅변의 신으로 로마의 기원이 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임신시킨 신이다. 이 달이 춘분이(황도'0') 있는 달이다.  4월:'April' '꽃이 핀다' 또는 '열다', '틈새가 생기다'에서 유래되었다.  식물이 나오고 꽃이 피는 때라 그런가보다.  로마에서는 BC173년부터 플로라리아(꽃 주제 여신-Flora) 축제가  4월 28일부터 5월3일까지 성대하게 거행 되였다.   5월:'May' 헬라 신 메리크리우스신(Mercury)의 머리자에서 유래되었다.  이 신은 여행(나그네)과 상업, 풍요의 신이다. 여행과 장사하기에 좋고 풍요의 계절인가 보다.  6월:'June'  헬라 신 유노(juno)에서 유래되었다. 이 신은 제우스 부인으로 젊음과 왕성한 의미를 갖는다.  식물도 왕성한 계절이다.  7월: 'July'  율리우스 시저(케사르 = 가이사르)이름의 율리(Julius)에서 유래한다.  이 달이 시저의 생일이 있어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8월이 시저의 양자이자 조카인 '옥타비아누스'가 자기 달로 정하면서 아버지의 존경의 뜻으로 앞에 아버지의 이름을 두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8월:'August'  '아구스도(Augustus)'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제2 삼두정치 후에 패권을 잡았을 때 원로원에서 그에게 준 이름으로 '존엄한자'의 뜻이다.  아구스도는 본명은 옥타비아누스 이다. '옥타'는 그리스어 (헬라어)로 '8'이라는 뜻이다.  옥타비아누스는 8을 대단히 좋아하였다고 한다.  모든 '옥타'는 옥타비아누스 때문에 즐겨 사용하였는데, 음악에 1 옥타브는 8 음(도)을 의미한다.  8개를 한 조로 하는 것은 옥타브라하고, 화학의 8가도 '옥타브가'라고 한다.  이 달은 전쟁에 많은 승리를 하여 자기이름을 붙였다고 전하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불만은 이 달이 로마인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30일의 짝수 달이다.  본래 홀수 달은 31일 짝수 달은30일인데 짝수 달인 8월을 31일로 만들기 위하여 2월 달에서 하루를 빼내어 31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기가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래서 7, 8 월은 연이어 31일 되었다.   9월: 'September'  헬라어 7의 뜻 'septa'에서 유래한다. 'ber'는 몇 번 '째' 의미이다.  원래는 6월 다음에 있어 7번째의 달인데, 시저와 아구스도에 두 달이 들어가 2달씩 밀리게 되어  9월이 되었다고 하며, 원래는 달력은 3월(March)이 1월로 3월에서 7번 째 달이라고 한다.   10월: 'october'는 헬라 어 8의 뜻 'octa'에서 유래로 8번 째 달이다.  11월: 'november'는 헬라 어 9의 뜻 'nova'에서 유래로 9번 째 달이다.   12월: 'december'는 헬라 어 10의 뜻 'deca'에서 유래로 10번 째 달이다.  (3) 요일이름 일곱 요일은 AD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앗시리아에서 음력 28일을 4로 나눈 것이 유래이라고 하였고,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7을 신성한 숫자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유태교가 받아 드리어 안식일 의식으로 만들었고 그것에 영향받았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로 여기고 있다.  만원경이 발명되기 전 오래 세월 동안 인류가 하늘에 7개의 천체가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것도  하나의 설로 받아 드리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똑 같은 이름을 붙이고 있다.  불(火-화성), 물(水-수성), 나무(木-목성), 금속(金-금성), 흙(土-토성)의 다섯 개와 해(日),  달(月)을 포함해서 7개가 요일이름이 되었다.  요일의 배열은 잘 알 수 없으며, 태양계 별들 이름에 해당하는 신화에서 왔다.   일요일(日: sunday) 'sun(선)'은 '태양'이므로 한문'(日)'에서 일요일이 되었다.  독일어의 SONNTAG은 SONNE (태양)+TAG(날)이다.  특히 이날은 '주일(主日)'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the lord's day'이다. Load(로드)는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를 '주(主)님'라고 부른다.   월요일(月: monday) 'MON'의 달의 뜻으로 '月(월)'에서 월요일이 되었다. 독일어 Mond (달)+TAG(날) 이다.   화요일(火: Tuesday)  행성 중에 화성(Mars:마르스)가 있다. 헬라어로 'Twesd(영어Tuesd)'는 마르스의 번역어이다.  화성(火星)에서 화요일이 되었다.   수요일(水: Wednesday)  북유럽(스칸디나비아 반도=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신화에 'Odin(오딘)'또는 'Wodin'이라는 주신이 있는데, 이 신은 로마 신화 주피터(Jupiter)와 격이 같은 신이다.  이 신에서 'Wednesday (웬즈데이)'가 왔다. 또 5월 달에 들어가 있는  메리크리우스(Mercury)를 수성이라고 한다. 수성(水星)에서 수요일이 왔다.   목요일(木: Thursday)  북유럽의 신중에 'Thor(쏘르)-Thur(터즈)'가 있는데 이 신은 벼락(뇌)의 신으로 로마신화 주피터가  다루는 무기가 '뇌'였다. 이 '뇌'는 이 신의 상징인 독수리가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격이 같은 신으로 목성(주피터)라 하는데 목성(木星)에서 목요일이 되었다.   금요일(金: Friday)  북유럽 오딘(Odin)의 아내 'Frigg(프리그)-Freya(프레아)'에서 왔다.  이 여신은 금속계열의 마법에 능하다고 한다.  로마신화에 비너스(Vennus)가 금성인데 금성(金星)에서 금요일이 되었다.  토요일(土: Saturday) 유대교 Sabbat(사바타)는 안식일이라는 뜻인데 어원을 찾기가 힘든다. 로마 신화에는 이날에 해당하는 신이 크로노스로 제우스의 아버지인데 영어로  '새턴(saturn)'이라고 하고, 토성을 말하는데, 이 토성(土星)에서 토요일이 되었다.  안식일은 유대교에서는 금요일 해가 지면서 토요일 해 질 때까지가 안식일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부활한 일요일은 안식일로 정하여 지금의 휴일이 되었다. 회교는 금요일이 안식일이다. (4)크리스마스와 신년  [12월 25일은 중요한 3가지 행사가 있었다.]   1. 동지절기이다  로마는 이날을 동지제는 사투르누스(Saturnus;농업의 신)의 제사의 날, 또는 야누스의 날로 지켰다.  동지제는 카니발과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되었는데 이유는 그리스도교도가 계승할 때 12월 25일부터  시작해서 신년 축제와 12일제의 양쪽을 결합시켰다.  이것이 유럽의 남국에서는 옥외 축제를 주로 하는 카니발이 되었고,  북국에서는 종교적 의의를 가진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또 이때는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농신절이기도 하였는데 농신절에는 농민은 쉬고 형벌은 중지된다.  선물을 교환하였으며, 상전이 농민을 섬기며 시중을 들었고 언론은 자유가 되었다. 또 많은 촛불을 켰는데, 지금의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이유는 기독교 사상과 농신절 행사가  서로 부합되므로 합쳐져서 한 행사가 되여 지금과 같은 화려한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2. 성탄절이다 성탄절은 두개의 날이 행하여 졌는데 이유는 예수님 탄생은 비밀이라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후세에 성탄절은 첫 번째는 1월6 일로 주현절로 지켰는데, 이유는 제1아담이 창세기에 보면 6일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제2 아담인 예수님도 같다는 개념으로 탄신일을 1월 6일로 정하였으며,  동방정교회가 이 날을 성탄절로 지킨다.  둘째는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어두움을 이긴 동지 다음날인 12월 25일로  정하였다. 이날은 AD 273 년 에레리안의 명령으로 현재의 성탄절이 되었으며,  카톨릭과 개신교가 이 날을 성탄절로 지킨다. 츄리(Tree)는 1605년 독일서 처음 시작하여 퍼졌고, 캐롤(carol)도 독일서 13세기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캐롤은 본래 불란서 말 carole에서 온 말로 주로 중세불란서에서 둥근 원을 만들어 춤을 추었던  원무(圓舞)를 일컫던 말이었다. 이 원무는 동지때 가졌던 축제에서 사용한 이교도들의 무곡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캐롤은 춤출 때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 말이어서 캐롤이 모두 크리스마스와 반드시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캐롤은 본래 교회의 절기 때마다 부르는 모든 노래를 일컬었지만,  특별히 크리스마스 노래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캐롤을 크리스마스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많은 캐롤이 크리스마스를주제로 하여 씌어 졌기 때문이다.  카드(card)는 1846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절부터 시작한 것이 유래가 되었고,  산타클로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핀란드의 성 니콜라스가 자선 사업시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시작한 것이 유래이다.  또 크리스마스 때 거리엔 어김없이 자선 냄비가 등장하는데,  그 이야기는 1891년 12월 빈민들의 식사를 고민하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의 구세군 사관 조셉 맥피  정위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오클랜드 부두의 다리 위에 큰솥을 걸고 그 위에 '국솥을 끓게 합시다'라고 써 붙였다.  빈민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한 기금이 모였다.  지금은 '솥' 대신에 냄비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 사업은 구세군이 하고 있다.  구세군은 군인 복장을 하고 있는 이유는 영국의 윌리암 부스가 창설 할 때 구세군은 '사탄과 싸우는  군사' 란 뜻으로 군복과 군 호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또 청교도 혁명에 성공한 '올리버 크롬웰'은 성탄절의 거룩한 날이 '인간 발광'의 날로 더럽히자,  성탄절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고(1644년) 성탄절을 지키는 자들에게 군대를 보내어 잡아 가두었다.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도 한때는 벌금형이 있었으나 1681년 폐지 하였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Christ(그리스도)+Mass(미사)를 합친 말로 '그리스도 예배'라는 뜻이다. 이것을 X-mas라고 쓰기도 하는데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희랍어 'Χρισ(크리스토퍼)'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따라서 X-mas는 '크리스마스'라고 읽어야지, '엑스 마스'라고 읽으면 안 된다.  X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100년대 정도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글자로 통용되고 있지만, 영어의 알파벳 X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뜻이 10달러지폐나 미지수  또는 연애편지 끝이나 겉봉투에 표시하는 키스 부호, 포르노 영화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므로  절대로 'X-mas'라고 쓰면 안 된다.  3. 신년이다. 로마 동지제는 사투르누스(Saturnus;농업 신)의 제사로서, 농신제 또는 수납제(收納祭)라고 하였다. 동지제는 카니발과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도었다고 한다. 이어 그리스도교도가 계승할 때 12월 25일부터 시작해서 신년 축제와 12일제의 양쪽을 결합시켰다  또 동지 다음날부터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므로 일년의 첫 날(야누스의 날)로 삼았다.  동지절기인 농신절과 성탄절이 성대하여지자, 신년(야누스의 날)은 1주일 뒤로 미루어 졌다. 그래서 지금의 1월 1일이 의미 없는 날에 정하여 졌다.  (5) 24절기와 삼복  인간들이 농사를 지을 때 계절의 변화를 알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중국 '주' 나라시대 때  화북지방 기후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후와는 다소 차이가 있게 되었다. 24절기는 태양운동에 근거를 두고 365÷15=24절기가 된다. 지구가 태양을 15도 만큼 돌때마다 황하유역에 나타나는 기후 변화에 대하여 용어를 하나씩 붙여  24개의 절기를 완성하였다. 절기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4절기  1)입춘: 봄이 온다.   2)우수: 눈이 오다 비가 처음 오기 시작한다.   3)경칩: 개구리나 벌레가 봄인줄 알고 깨어났다가 꽃샘추위 추위에 놀라 다시 들어간다는 날.  4)춘분: 황 경 '0'도 이르는 춘분점   5)청명: 황하의 물이 맑음을 뜻한다. 날씨가 좋고 흙탕물이 생기지 않으므로 물이 맑다.   6)곡우: 곡식에 비가 내려 힘을 얻게 된다.  7)입하: 여름이 온다.  8)소만: 여름기분이 나기 시작한다.  9)망종: 까끄라기 곡식의 씨를 뿌린다. 10)하지: 태양이 북회귀선에 다 달았다. 11)소서: 작은 더위가 시작  12)대서: 큰 더위 13)입추: 가을의 시작 14)처서: 더위가 물러간다. 15)백로: 흰 이슬이 내린다.  16)추분: 태양이 추분 절에 도달하였다. 17)한로: 찬이슬이 내린다.  18)상강: 서리가 하강 (내린다)  19)입동: 겨울이 온다. 20)소설: 작은 눈이 온다. 21)대설: 큰 눈이 온다. 22)동지: 태양이 남 회귀선에 도달한다. 23)소한: 작은 추위시작 24)대한: 큰 추위 지독한 추위를 뜻한다.   삼복  삼복도 24절기와 마찬가지로 달의 관계가 아닌 태양과의 관계로 정하는데 삼복의 기준점이 되는 날이 하지와 입추인데 이 하지로부터 세 번째로 돌아오는 경일(庚日)이 초복이다.  네 번째 돌아오는 경일이 중복이 되고, 그리고 말복은 입추로부터 첫 번째 맞는 경일이다.  여기서 경일이란? 10간(갑, 을, 병.. 경(庚)...계) 12지(자, 축, 인,.. 해)가 어우러져 갑자, 을축, 병인,  정묘...경신, 신유, 임술, 계해 등 60갑자를 형성한다.  해마다 갑자년(甲子年), 경신년(庚申年), 하듯이 날짜도 갑자일((甲子日), 경신일(庚申日)이 있다.  이 중에 경(庚)자가 들어가는 날을 경일(庚日)이라고 하는데, 이 삼경일(三庚日)을  삼복(三伏)이라고 하고, 1년 중 가장 더운 이 기간을 '삼복더위'라 한다. 삼복, 한식, 추석, 단오 등은 24절기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1    [작문써클선생님께] - 달력의 월(달)별 영어로 어떻게 쓸가ㅠ... 댓글:  조회:4707  추천:0  2018-11-24
우선 1월~12월은 달이라고 하는데  'month' 라는 단어를 쓰고 있구요  (참조 한글발음 )  January(재뉴어리), February(페브러리),  March(마알취), April(에이프럴)  달력(calendar)에 쓰는 월 영어로  5 ~ 8월은 May(메이), 6월 - June(준),  7월 July(줄라이), August(어거스트)    September(셉템버), October(악토버),  November(노벰버), December(디셈버)    이상 달력에 표기하는 1년 12달 단어를  월 영어로 어떻게 쓰는지와  약자도 알려드렸습니다.  맨 앞글자에는 소문자가 아닌  대문자로 써야하구요 앞에 세글자만  줄임말로 쓴다는거 기억해두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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