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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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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봄(2) 댓글:  조회:5916  추천:0  2018-11-30
봄 / 윤동주. 봄이 혈관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ㅡ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   윤동주 /봄   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이 시는 봄을 맞아 봄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화자는 희망을 갖으며 종달새가 높은 푸른 하늘 날기를 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봄이 왔다. 시내는 돌 돌 흐른다.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이 폈다. 내 혈관에도 봄이 시내처럼 흘러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종달새가 어느 이랑에서나 즐겁게 솟구치기를 바란다. 푸르른 하늘이 아른아른 높기도 하지만 솟구쳐라.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계절적인 봄이면서 심정적인 봄이다. 이 말은 화자가 봄의 계절을 맞아 마음에도 희망을 갖는다는 말이다. 다른 시인들의 시에는 계절적인 봄은 왔으나 화자가 바라는 봄은 오지 않았다는 내용의 시를 쓰는 경향이 많다.   ‘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 돌, 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 /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은 시내가 봄을 맞아 돌돌 흐르고 시내 각까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이 핀 것을 보니 화자의 혈관 속에도 봄이 시내처럼 흐르는 것을 느낀다는 말이다. ‘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는 화자가 몸속에 생동하는 기운을 느낀다는 말이다.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 풀포기처럼 피어난다.’는 겨우내 추위를 참으며 움추렸던 화자의 마음이 봄을 맞아 꽃을 피우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는 말로 마음에 희망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에서 ‘삼동(三冬)’은 계절인 겨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시대의 배경인 일제강점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로 보면 ‘봄’은 광복의 의미가 되어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것이 되고 이는 시대상황과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동(三冬)’은 계절인 겨울을 의미하면서 일제강점기의 시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겨울의 추위와 일제강점기의 시련을 참아온 나는 봄의 계절을 맞이하여 풀포기가 피어나듯이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로 본다.   ‘즐거운 종달새야 /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 푸르른 하늘은 /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는 화자가 봄의 계절을 맞이하여 종달새가 즐겁게 푸른 하늘로 솟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푸르른 하늘은 /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에서는 화자가 바라는 하늘인 ‘광복’은 높아서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봄이 왔으니 종달새는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하늘을 향하여 솟치기를 바라고 화자의 마음도 ‘아른아른 높기도’하지만 ‘하늘’을 향해 솟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현실에서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도. ///전한성   =============================///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첫연의 표현이 참신하지? 봄기운이 온몸 구석구석 흐르는 혈액인 마냥, 시의 화자인 내 속에 스며들어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다.. 세상 만물이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을 얻어  삶의 활기가 넘치는 모습을... 참으로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지! 겨우내 따뜻한 봄날을 애타게 기다리다, 마침내 따뜻한 봄기운이 온세상을 뒤덮어 버리는 날들이 왔지만,  시의 화자는 즐겁게 푸른 하늘을 솟구쳐 오를 '종달새'만큼  행복하지 않은 듯하지? 마지막 연에서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만 한데...' 여기에서 시의 화자가 마저 하지 못한 말은 무얼까?  시의 화자는 고대하며 기다렸던 봄을 맞았건만,  왜 즐겁지만은 않을까? 각자 나름대로 마음껏 상상해서... 시의 화자가 즐겁지 않은.. 까닭에 대해 생각해 볼까...     =================///   *시인은 일제 강점기에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 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습니다.   *시인의 시는 대체로 고뇌와 슬픔이 겉으로 짙게 묻어나면서 가슴 한켠으로 울컥하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위 시는 그러한 느낌이 다소 적으면서 희망의 메시지와 함께 서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 「원초적 고향으로 가는 시간, 윤동주 '봄'」       한 사람의 업적에는 분명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담겨있다. 윤동주의 경우는 시에 그것이 녹아있을 것이다. 윤동주가 자라났던 환경에 대한 정보는 그의 시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것 같다. 유교적이면서도 기독교적인 민족주의가 녹아있는 윤동주의 세계관을 약간이나마 접하니 그가 써내려간 시에 담겨있는 단어들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자주 접했던 시가 「서시」,「십자가」,「쉽게 쓰여진 시」와 같이 식민지 시대의 암울함이 담긴 것이다보니 윤동주의 동시는 잘 알지 못했다. 물론 동시라고해서 그가 살던 시대적 배경이 녹아있지 않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과거 가볍게 읽어넘겼던 것과 달리 윤동주의 시에 담긴 본질적인 뜻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글을 읽으니 익숙했던 시가 조금은 낯설고 새롭게도 느껴졌다.   「별 헤는 밤」의 마지막 네 구절에 대해 해 위대한 자연 앞에 설 때 우리가 느끼는 무력함과 보잘것없는 모습을 극복한 의지라고 한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지않는다. 특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옴"이라는 부분을 보았을 때 이는 당연한 자연의 섭리를 말하고 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이 고달픈 일제강점시기는 언젠가 지나가고 당연히 광복은 올 것이라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느낌으로 광복을 염원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에서의 윤동주 인식」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시인이었던 만큼 일본과의 연관성이 적지 않다.  글을 읽으면서 일본인이 바라본 윤동주의 시와 그에 대한 해석, 번역에 대한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첫번째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표면적으로 같은 뜻을 나타내는 단어일지라도, 나라와 민족의 정서에 의해 그 내면의 뜻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나라의 시가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은 참으로 험난한 과정이라고 느껴졌다. 시대, 개인 등 여러가지 배경을 알지 못한다면 자칫 본래의 의미와 다른 시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글을 읽다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로 잘못 번역된 부분에 대한 해석에 의문을 느꼈다. 죽어가는 것을과 살아있는 것들이 다른 점이 무엇인지 와닿지 않았다. 죽어가는 것은 곧 살아있기 때문이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결과였나보다. 그 시대 죽어가는 것은 조선의 것이었고 살아있는 것은  일본의 것, 그들의 제국주의라 해석되었던 것이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별빛, 절대의 시간을 찾는 윤동주의 시에서 이전 카프카의 「소송」에 대한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렴풋하게 생각났다. 끝까지 절망해보아야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절망의 끝에서 윤동주는 밤이 가고 새벽이 곧 올 것임을 굳게 믿으며 희망을 쫓았던 것이라 생각된다.            
3    윤동주와 "이상한 주사" 댓글:  조회:2807  추천:0  2018-11-30
  1945년 3월 복간도 용정에서 열린 윤동주 장례식.   #외마디 비명이 품은 뜻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형무소의 한 독방 감옥에서 외마디 비명이 내질러진다. 한 간수가, 혹시 그것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아닌가 하고 바짝 청각을 돋우고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복역수 평소동주(平沼東柱, 도일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해 얻은 윤동주의 이름)가 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소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향년 만 27년2개월의 죽음이었다. 윤동주가 특수고등경찰에 체포된 것은, 42년 도쿄 닛교대학을 거쳐 편입해간 교토 도시샤 대학 시절인 43년 7월이었다.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독립운동, 이른바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2년형으로, 45년 11월30일이 출감 예정일이었다. 윤동주보다 더 오래 옥살이를 해야 하는, 또 한 사람의 핵심인물은 송몽규였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 같은 해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같이 성장한 죽마고우이며, 연희전문과 일본 유학을 함께 하고 같은 사건으로 같은 형무소에 투옥까지 된 평생의 지기였다.  이해 들면서 두 사람은 형무소 복도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그 무렵 거의 매일 규슈 제국대학의 레지던트들이 찾아와 복역수들의 팔뚝에 이름 모를 주사를 놓고는 했다. 이 주사를 두어 대 맞고부터 살이 빠지고 걸음이 느려졌다. 눈앞에 사람이 있고 물체가 있어도 그저 흐릿해 보였다. 강제 노역 때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이상 증세였다. 아니나다를까, 독방을 쓰는 사람 몇이 밤 사이에 주검이 되어 나가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송몽규는 주사를 놓으려는 의사에게 소리쳤다.  “난 이 주사가 싫어. 이 주사를 맞지 않겠소.”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한 사람이 붙드는 정도인데도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어느날 윤동주가 주사를 맞고 나오는 걸 보았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송몽규를 보며 지나가는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튿날부터 윤동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윤동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송몽규는 통곡을 할 힘이 없었다.  #이상한 주사, 끊이지 않을 증언과 발굴    윤동주가 복역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1940년대 말 모습. 윤동주의 시신을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 윤영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촌인 도쿄 유학생 윤영춘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로 갔다. 두 사람은 먼저, 살아 있는 송몽규를 면회했다. 알이 반쯤 깨진 안경을 간신히 걸치고 있는 송몽규를 두 사람은 쉽게 알아 보지 못했다. 피골이 상접한 그가 먼저 무슨 말인가 건네 오는데 그게 마치 저세상에 들려오는 말소리 같았다. 윤영춘이 간신히 입을 뗐다.  “어째 모양이 이러냐?”  “저놈들이 주사를 놓아서 이 모양이 됐고, 동주도 이 주사를 맞고….” 간수의 눈을 피해 몰래 간신히 주고 받은 우리말이었다.  두 사람이 윤동주의 유해를 찾아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3월7일 송몽규 역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47년 윤동주의 시가 경향신문에 처음 소개되고 이듬해 유고 시집이 발간된 이래, 그의 문학은 시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결코 빼놓지 않는 애송작이 되었다. 그를 거론할 때 또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그가 감옥에서 강제로 맞았다는 주사에 대해서이다. 결론을 말하면 그 주사는 일제의 생체실험용 주사다.  80년 고노 에이지(鴻農映二·문학평론가)는 그 주사를 당시 규슈 제대에서 실험하고 있었던 혈장 대용 생리 식염수라고 주장했다. 혈장은 인체의 혈액 속에 있는 유형 성분 즉,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을 제외한 나머지의 액체 성분을 말한다. 그 실험은 사람 몸에서 피를 이루는 일부 액체 성분 대신에 소금물을 넣어서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측정하는 생체실험으로, 말할 것도 없이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린 병사에게 귀한 혈장 대신 값싼 생리 식염수를 주입해 살리는 방법을 얻으려는 실험이었다.  이부키 고(伊吹鄕)도 당시 후쿠오카형무소 재소자들의 사망자 수와 사망률이 대단히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는 통계 자료에 주목하면서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의 생체실험을 외면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밝혀내고 있다.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되는 2차 대전 중의 생체실험마저도 여태 공식적으로는 부정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그 주사가 진짜 생체실험용 주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더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 윤동주의 죽음을 송몽규가 증언하면서 그 ‘주사’의 실재가 사실로 알려지게 되었다. 송몽규에게 그 말을 들은 윤영춘이 그걸 전파하고, 그 증언을 믿게 된 고노 에이지와 이부키 고가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 내지 않았는가. 윤동주의 생애를 샅샅이 추적해 역저 ‘윤동주 평전’을 낸 송우혜는 그 책에서 그들의 활약을 자세히 밝혀두고 있다.  윤동주는 그냥 시인이 아니다. 그의 몸은 역사를 증언하는 실체로 살아남아 있다.   ///박덕규/ 소설가·단국대 교수  
2    [그것이 알고싶다] - 인류는 워낙 어디에서부터?... 댓글:  조회:3822  추천:0  2018-11-30
알제리서 240만년 전 석기 발견.. 60만년 더 거슬러 올라가  2018.11.30.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아프리카 동부 '인류의 요람' 지위 흔들릴 수도 알제리 앵 부셰리 석기시대 유적지서 발굴된 초기 올두바이 초기 석기 [AFP=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인류의 요람'은 아프리카 동부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에티오피아에서 약 280만년 전 사람속(屬·Homo)의 고대 인류가 출현하고, 20만년 뒤 처음으로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현생인류로 이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고대 인류는 아프리카 동부에서만 생활하다 약 180만년 전쯤 아프리카 북부로 처음 진출한 것으로 추정돼 왔다. 이곳에서 발굴된 '올두바이(Oldowan)'로 불리는 가장 오래된 초기 석기가 그때쯤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국제 고고학 발굴단이 알제리 북부에서 24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올두바이 석기와 절단 흔적이 있는 동물 뼈 화석을 발견해 이런 기존 학설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동아프리카가 인류의 발상지라는 지위도 까딱하다간 흔들릴 수도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스페인 인류진화 연구센터(CENIEH)의 모하메드 사누니 연구교수가 이끄는 국제 발굴단은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동쪽으로 약 300㎞ 떨어진 고원지대인 세티프에서 찾아낸 250점의 원시 석기와 296점의 동물 뼈 화석에 관한 연구결과를 과학저널 '사이언스(Science)' 최신호에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석기들은 지금까지 동아프리카에서 주로 발견된 올두바이 석기를 많이 닮았으며, 석기 옆에서는 석기로 자른 흔적이 있는 동물 뼈 화석 20여점도 발견됐다. 동물 뼈에는 악어와 코끼리, 하마 등의 조상 등도 포함돼 있다. 세티프의 앵 부셰리(Ain Boucherit) 유적 발굴지 상단에서는 약 190만년 전 유물이, 그 밑에는 240만년 전 유물이 발굴됐다. 지금까지 북아프리카에서 발굴된 석기시대 유물은 인근에서 발굴된 180만년 전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번 발굴로 북아프리카의 석기시대 역사는 60만년가량 더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그러나 앵 부셰리 유적지에서는 초기 인류의 뼈는 발굴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누가 이 석기들을 사용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중국 란톈(藍田)현의 210만년 전 지층에서 발견된 석기 [신화=연합뉴스] 연구팀은 "고대 인류가 사용한 석기의 탄생지는 동아프리카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시기는 26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서 "이번 발굴은 앵 부셰리를 초기 인류가 석기를 이용해 고기를 다룬 증거가 발견된 곳 중 북아프리카의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적지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앵 부셰리와 인근 퇴적분지의 연구결과가 보여준 잠재력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동아프리카에서 발굴된 것처럼 오래된 초기 인류 화석과 석기가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 7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1천200㎞ 떨어진 황투(黃土)고원 상천의 절벽에서 약 210만~212만년 전의 석기가 발굴된 것으로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된 바 있다. 이 역시 고대 인류가 아프리카를 일찍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학설을 뒤흔드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고래 떼죽음",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961  추천:0  2018-11-30
뉴질랜드서 고래 51마리 또 떼죽음.. 일주일새 200마리 숨져  2018.11.30.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30일(현지시간) 뉴질랜드 채텀 아일랜드의 바위쪽으로 휩쓸려온 죽은 고래들[로이터=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전성훈 기자 = 뉴질랜드에서 들쇠고래(Pilot Whale) 145마리가 떼죽음을 당한 지 일주일도 채 안 돼 51마리가 또 한꺼번에 죽었다. 뉴질랜드 동쪽 채텀 섬 인근 핸슨 베이에서 약 90마리의 들쇠고래가 해안으로 떠밀려왔다고 AP통신이 뉴질랜드 자연보호부를 인용해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가운데 40마리는 자력으로 바다로 돌아갔으나 나머지 50마리는 해변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죽은 돌고래 중 한 마리는 가까스로 숨을 쉬고 있었으나 상태가 심각해 안락사 됐다. 30일(현지시간) 뉴질랜드 채텀 아일랜드 해안에서 죽은 고래들을 묻을 준비가 이뤄지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앞서 지난 24일에는 뉴질랜드 스튜어트 섬 메이슨 베이 해변에서 들쇠고래 145마리가 모래사장에 걸려 숨졌다. 뉴질랜드에서 고래들이 해변으로 왔다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로 알려졌다. 그 이유는 명확지 않으나 질병, 항법 오류, 지형적 특성, 급하게 빠지는 썰물, 약탈자의 추적, 극한 기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뉴질랜드 스튜어트 섬의 모래사장에서 떼죽음한 고래들[뉴질랜드 환경보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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