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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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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향문단] - 오늘도 룡정'윤동주연구회는 뛴다... 댓글:  조회:3311  추천:0  2018-12-24
룡정•윤동주연구회 2018 “룡정의 밤’ 행사 알차게 (ZOGLO) 2018년12월24일  12월 22일 오후 룡정•윤동주연구회에서 주관 주최한 제1회 2018”룡정의 밤” 행사가 룡정•윤동주연구회 사무실에서 사회, 문화계 명사들을 모시고 멤버들이 어우러진 속에서 알차게 개최되였다.      본 행사에는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전 연변주당위선전부 부부장 채영춘, 연변대학 교수 김호웅, 연변일보 전임 주필 및 평론가 장정일, 유명 소설가 리혜선, 조글로 대표 김삼, 한국시조학회 전임회장이며 연변대학 객좌교수 임종찬, 룡윤회 회장 김혁, 연변대학 교수 룡윤회 부회장 리광일 및 룡윤회 멤버와 매체기자 등 30여명이  참가하였다.     그간 룡정•윤동주연구회에서는 운동주의 옥사일을 기념하여 묘소참배, 연변1중 사생 4백여명을 대상으로 한락연의 예술생애에 대한 특강, 심련수 탄생 백주년 기념, 묘소답사, 생애 반추하는 시간, 룡윤회 설립 5주년 기념좌담회, 명동학교의 설립자 김약연 탄생 150주년 기념활동 및 책자 , 출간 기념식, 연변대학 조선문학연구소와 공동 주최한 특강 등 많은 활동들을 폭넓게 벌려왔다. 제1부에 이어 제2부에서는 룡윤회와 조글로미디어 간 사업제휴의식이 진행되였다. 조선족문화의 발전과 비전을 위한 공동의 취지를 모아 이날 룡정윤동주연구회 김혁 회장과  ‘조글로(zoglo.net)’ 김삼 대표는 문화사업 협력계약서를 교환하고 앞으로  문학과 인터넷뉴미디어의 만남으로 우리민족 문학발전의 저변을 글로벌적으로 넓혀나가기로 다짐했다. 제3부 “조선족문화의 발전과 민간단체의 사명” 간담회에서는 각계 유지인사들의 자유발언으로 이어졌다.     김혁 회장은 “향후 한국 윤동주의 루트답사, 문화총서 “룡두레”제2부 발행, “룡두레” 독서회 발족, “룡윤회 소특강”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진행, 한락연의 자취어린 신강 키질의 천불동 답사, 한락연, 강경애, 김약연 등 룡정이 낳은 인걸들을 기리는 행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해나갈 것이다”고 밝혔다. 룡정•윤동주연구회는 2014년 윤동주의 민족얼과 문학정신을 기리고 문학창작을 고양하기 위하여 윤동주의 고향인 룡정에서 설립,윤동주 및 룡정지역 인걸들의 추모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치면서 문학인들을 결집하여 문학총서를 출판하는 등 조선족문학의 새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조글로 미디어 신엽기자  
2    세계 문호들의 "참회록" 댓글:  조회:2537  추천:0  2018-12-24
못다 쓴 참회록   「참회록」하면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루소의『참회록』이다. 그 다음으로 다시 생각나는 것은 루소의 『참회록』과 함께 세계의 3대「참회록」이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의 『나의 참회』 그리고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이 있다. 윤동주 시인은 그의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참회록」이란 시(詩)를 남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바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 나온다.       윤동주 시인의 시(詩)로서의『참회록』이다. 세계3대 「참회록」과는 다른 장르 이긴 하지만 간결하고 슬픈「참회록」이 아닌가. 가톨릭에서 하는 기도문 중에는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자기 성찰의 기도문이 있다.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한국인으로서 받아드리기엔 조금 낯간지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이 또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종의 집단적 기도로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주술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참회의 형식이다. 비록‘무엇이 내 탓인지’는 알수 없지만 이 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범함이 나를 비롯한 한국인에게는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이가 들면 조금은 마음이 약해져서 가끔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자신으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은 없는가, 점검해 보기도 한다는데,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늘그막에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격상 민망하고 쑥 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사과하거나 반성의 골든타임을 놓이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함이 옳을 것 같다. 임종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후회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대단히 미안한 일이고,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사후세계에 간다면 ‘지난 생의 잘못을 통렬히 반성했으니 지난 잘못을 더 거론하지 맙시다.’하는 일종의 보험은 아닌가 하는 불경스런 생각도 해 본다.       명색이 문학도(文學徒)라면서 누구의 것이 되었던 그 유명하다는「참회록」한 편 읽어보지 않았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럽기 한이 없다. 한 동안 마음의 갈길을 잃어 불면의 밤을 지새우면서도 한 줄의 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전전 긍긍하다가 느닷없이 이 새벽에 「참회록」이라는 화두에 침몰하고 말았다. 내가 만약에‘참회록’을 쓴다면 무엇을 써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침몰해 가는 황혼이라고 해도 자신의 발가벗은 과거를 글로 남기고 죽는 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나 같은 필부가 언감생심 어찌 진솔한 마음으로 이른바‘참회록’을 남길 수 있겠는가? 또 숨 막히도록 답답해진다. 70평생을 살아오면서 몸으로, 또는 생각으로, 또 때로는 어줍잖은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했는가를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을까? 나로 인해 차마 말은 하지 못하면서 불편(不便)해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사죄해야 할까? 그 동안의 독서 경험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시작은 참회하는 글로 시작 해 놓고 그 마지막은 온통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는 소위‘회고록’이니‘자서전’이니 하는 이름이 되고 마는 경우를 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호색한(好色漢)은 수절(守節)하는 과부를 훼절(毁節)하게 해 놓고‘밤마다 외로워하는 중생을 어여삐 여겨 낙원(樂園)을 보여 줬다.’고 큰 소리치는 세상이니 어찌 조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옛 어른들의 말을 빌려‘아서라, 네 감히 참회록 이라니 개가 웃을 일’이 아니더냐고 스스로를 질타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해서 이 여름 방학에는 세계3대 「회고록」을 읽어야 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대신하기로 정하고, 내가 쓸 ‘나의 인생 참회록’은 나 하늘이 불러 떠나는 날에 마지막 쓰는 글로 남겨두기로 했다.    더불어 이제부터라도 다른 이의 눈에 티끌을 보지 않고 내 눈에 들보를 찾는 일에 더 이상 게으르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겠다. ‘잘못된 모든 것들은 남의 탓이요 잘된 모든 것들은 내 업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는 진솔한 글을 쓸 수가 없다. 함께 하면 가볍고 즐거운 일을 내 몸이 좀 피곤하다고 해서 남에게 미루는 일은 자신만 안녕하기를 바라는 이기주의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지나친 독선이다. 옛 어른들은 ‘백짓장도 함께 들면 났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어렵지 않은 일들인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그렇게 쉬운 일들을 알면서 행(行)하지 못한 스스로는 더 나쁜 죄인(罪人)임을 이 나이가 되어서 깨닫는다. 그러나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런 깨달음을 스스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슴속에 받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소귀에 경 읽기에 불과 하다.’적어도 대학에서 배운 것들 만큼은 작은 것들부터 실천해 나가는 것이 배우는 자의 태도이고 또 도리라고 믿는다. 그저 제멋에 겨워 여기 온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배운 대로 행(行)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다른 이에게 관대하고 스스로에게는 엄 하라.’는 가르침 때문에 그 다른 이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하나를 위해 둘을 잃는 것’임을 마음에 새겨둬야 겠다. 다른 이를 불편하게 해서 함께 있을 자격이 없다고 물러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고 현실도피의 비겁한 행동이라는 것도 마음에 간직할 일이다. 스스로 정한 규범을 잘 지켜 냈다는 판단이 섰을 때 비로소 나만의「참회록」을 쓸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언제가 될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때가 되면 내 모든 것, 부끄러운 짐들을 벗어던진 「삶의 참회록」을 남길 만하지 않겠나?     
1    "일본의 윤동주" - 마키무라 고 댓글:  조회:2557  추천:0  2018-12-24
[잊혀진 의인들- 마키무라 고] 한국인만큼 뜨겁게 대한독립을 노래한 '일본의 윤동주'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2018-11-27    마키무라 고.   고치시 ‘The 創’ 연극단원들이 마키무라 시인의 사후 80주년을 맞아 대표작 ‘간도 빨치산의 노래’를 한국어로 낭독하고 있다. 한일 울린 ‘간도 빨치산의 노래’  ‘분노의 울림을 담아...쏟아져오라!  격분의 물방울을 높이...용솟음쳐라’  한국인인듯 민족혼 대변한 서사시  발표 직후 日에 체포돼 옥고끝 요절  민족·국가 초월한 비운의 반전시인  日 절대 존재 천황도 서슴없이 비판   펜으로 치열하게 평화 부르짖어  의인의 삶, 시대 초월한 감동 선사  윤동주(1917년 12월~1945년 2월)의 ‘서시(序詩)’는 아마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애송하는 시일 것이다. 또 윤동주 시인의 고결한 삶과 민족혼이 깃든 주옥같은 시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상당한 카타르시스와 영혼의 안식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민족시인’ 윤동주가 살고 있던 시기에 비슷한 삶을 살다가 같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옥고를 치르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일본의 반전(反戰) 시인이 있다고 하면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바로 마키무라 고(전村浩, 1912년 6월~1938년 9월)다. 일부에서는 ‘마키무라 히로시’로 부르기도 하지만 자신은 마키무라 고라고 불렀다. 본명은 요시다 도요미치(吉田豊道)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났다. 그는 1912년 6월 일본 서남부 시코쿠의 고치현에서 태어났다. 올해 9월3일은 서거 8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일본 경찰의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8년 9월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치 윤동주의 시 원고를 친구인 정병욱이 전남 광양에 있던 자신의 집에 묻어뒀다가 일제 패망 이후 다시 찾았듯이 마키무라의 원고 역시 일본 군국주의가 발호하고 있던 1930년대 일본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출판사 사장이 기름종이에 싸서 땅에 묻어뒀다가 그가 죽은 지 25년 만인 1963년에야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1년 뒤인 1964년 10월에 ‘간도빨치산의 노래 -전村浩시집(신일본출판사, 1964)’가 최초로 간행됐다.  그가 남긴 시는 모두 26편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생전에 발표된 것은 대표작 ‘간도 빨치산의 노래’ 등 6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첫 작품은 ‘살아있는 총가(銃架)’다. 그는 만 20세에 ‘간도빨치산의 노래(間島パルチザンの歌)’를 ‘프롤레타리아문학(プロレタリア文學)(1932년 4월 임시 증간호)’에 발표했다. 이 시는 모두 12연 187행에 달하는 방대한 서사시다. 그러나 그는 이 시 발표 직후 고치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치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 시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오오, 3월 1일 / 민족의 피가 가슴을 치는 우리의 그 누가 / 무한한 증오를 한순간에 내동이친 우리들의 그 누가 / 1919년 3월 1일을 잊을쏘냐! / 그날 /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방방곡곡을 뒤흔들고 / 짓밟힌 일장기 대신 / 모국의 깃발이 집집마다 휘날렸다 / 가슴에 다가오는 뜨거운 눈물로 나는 그날을 생각한다! / 반항의 우렁찬 소리는 고향마을까지 울려 퍼지고 / 자유의 노래는 함경의 봉우리마다 메아리쳤다. (중략)   우리들은 함경도 사내와 여자 / 착취자에 대한 반항으로 역사를 새로 쓰는 내 고향의 이름에 맹세코 / 온 조선 땅에 봉화를 올렸던 몇차례 봉기에 피를 흘린 이 고향의 흙에 맹세코 / 고개를 숙이고 순순히 진지를 적에게 넘겨줄 수 있단 말인가 (중략)   바람이여, 분노의 울림을 담아 백두에서 쏟아져오라! / 파도여, 격분의 물방울을 높이 올려 두만강에서 용솟음쳐라 / 오오 일장기를 휘날리는 강도들아 / 부모와 누나와 동지들의 피를 땅에 뿌리고 / 고국에서 나를 쫓아내고 / 지금 칼(劍)을 차고 간도(間島)로 몰려오는 일본의 병비(兵匪: 병사 비적떼)여! / 오오, 너희들 앞에 우리가 다시 굴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려는 거냐 / 뻔뻔스런 강도들을 대우하는 법을 우리가 모른다고 하는 거냐”(후략)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간도(중국 연변)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던 젊은 청년 일본인이 이렇게 감동적이면서도 빼어난 서사시를 썼다. 물론 한국인과의 교류가 이 시의 토대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마키무라를 연구한 전문가 미야자키 키요시(宮崎淸)는 그의 시가 일본에서 사랑받고 높이 평가받는 이유를 ①청춘의 모든 것을 쏟아서 시인 자신의 혁명운동에 대한 정열과 체험을, 무엇보다도 그 마음의 진실로 표현해 객관화한 점, ②당시 일본인들이 부딪히고 있던 전쟁, 억압 등 냉엄한 현실과 그 역사적인 명운(命運)을 전위(前衛)의 입장에서 분명히 형상화해 보여줬던 것에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위의 시는 무엇보다도 일본인인 마키무라가 마치 한국인인 것처럼 너무나 생생하고 투철한 혼연일체의 몰입과 동일시, 철저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매우 놀랍다. 이 시를 읽는 누구나 작자가 한국인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1931년 9월 일본이 중국 동북(만주) 침략 이후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어떻게 이처럼 우리의 독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깊은 감동과 동참을 토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 그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과 반일투쟁에 깊이 공감하고 국제적 연대를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키무라 시인은 만 열 살 때 고치시를 방문한 황족 앞에서 세계사를 강의하고 시를 짓는 등 조숙한 천재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특히 일본이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만주사변’ 직후부터 이를 비판하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반전 문예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1932년 2월 고향 고치시에서 열리는 우익단체 ‘신무회(神武會)’의 연설회를 반대하는 삐라를 뿌리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다리 주변에 붙였다. 역시 이달 27일에는 고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육군 보병 제44연대가 중국 상하이로 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반대하는 삐라를 제작 살포하는 등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반대하는 구체적 실천행동을 벌였다. 특히 마키무라는 반전 삐라의 원고를 주로 군대신문 ‘병사의 벗(兵士の友)’에 활용했는데 병사용 삐라는 카페 광고와 흡사하게 해 봉투에 넣거나 성냥에 넣어 외출병사에게 전하기도 했다. 또 밤에는 병영 안으로 직접 잠입해 전쟁에 반대하는 삐라를 뿌리기도 했다.  그는 같은 해 4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고향인 고치경찰서와 형무소에서 3년이 넘게 옥고를 치렀다. 특히 마키무라는 일본인들에게 절대적 존재인 천황에 대해서도 비판적 내용의 시 ‘떡의 노래(餠の歌)’를 지어 더욱 탄압을 받기도 했다. 고치형무소 수감 동안 심한 고문과 학대를 받아 심신에 큰 상처를 입었다. 특히 마키무라는 일본 당국의 전향 요구를 거부했는데 출옥 후 끝내 도사의 한 정신병원에서 불우하게 일생을 끝마치고 말았다.  감옥에 있던 마키무라는 조선 출신으로 일본 도쿄에서 활동한 좌익작가이자 운동가인 김용제(金龍濟, 1909년~1994년)의 ‘조풍(潮風)’ ‘사랑하는 동지에게’ ‘성장한다는 것’, 이 세 편의 시를 자신의 노트에 필사해놓았다. 마키무라는 충북 음성 출신의 김용제와 교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인 학자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에 따르면 김용제는 일본에서 맹렬한 프롤레타리아문학 활동과 좌익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 7월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는 변절, 전향해 오히려 맹렬한 친일분자로 일본 군국주의의 앞잡이로 활동했다고 한다. 마키무라의 초지일관한 행적과 너무나 대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키무라는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964년 10월 유고 시집 ‘간도 빨치산의 노래’가 출판되고 고치시 출신 작가 도사 후미오(土佐文雄)가 1966년에 소설 ‘인간의 뼈(人間の骨)’를 내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좌익작가로서 반전 시인으로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됐다. 그의 대표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는 정말 대단한 시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이 시는 서사시라는 문학작품 형식을 띠고 있지만 작자가 마치 한국인인 것처럼 느껴지고 진정으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고무하고 찬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역사학자나 역사학계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키무라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민족시인’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지만 윤동주보다 1년이 더 짧은 비극적 삶을 살았다. 우리 민족의 저항에 깊이 공감하고 이웃 중국 침략을 비판하며 저지하려 한 마키무라 시인의 뛰어난 저항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와 일련의 저항시를 읽고 이 천재시인의 사상과 삶을 기억, 추모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가끔 논란이 되는 독도나 일본군 ‘위안부’, 교과서 문제 등 한중일 사이의 복잡한 현안과 역사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중일 3국 국민과 민중, 학생들의 진정한 상호이해와 연대·성신(誠信)에 바탕한 교류가 도움이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윤동주 시인이 주목받듯이 우리에게 아직 낯선 미키무라 고 시인의 시와 반전 평화사상, 민중연대에 대한 이상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음미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치열한 반전 평화사상을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실천하면서 일제 당국의 모진 탄압을 받은 마키무라 고 시인. 간절히 한일 민중연대를 꿈꿨다는 점에서, 그리고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 진정한 공공선과 피압박 근로대중이 주인인 사회, 나아가 인도·정의·평화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의인’이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마키무라 고의 시 ‘간도빨치산의 노래’를 한국어로 낭독하는 ‘The·創’ 연극단원들. 마키무라 고의 묘. 일본 고치시 성서(城西)공원 옛 고치형무소 자리에 있는 ‘간도 빨치산의 노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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