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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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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지강아, 네가 말해다오... 댓글:  조회:3177  추천:0  2018-12-26
윤동주 시인 마지막 사진 촬영  교토 우지강변에 日 3번째 시비 28일 일본 교토부 우지강변에서 열린 윤동주 기념비 제막식에서 건립위원회 관계자가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시인의 조카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다. 우지(교토)=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어리석은 역사를 마음에 새기기 위해 모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봤던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봅시다.”  28일(2017년 10월), 오전 11시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 우지강변. 하야세 가즈토(早瀨和人) 우지교회 목사의 말에 현장에 모인 시민 150여 명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도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이어 시인의 조카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가 비석에 새겨진 시 ‘새로운 길’을 낭독했다.  이날 이곳에선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제막식이 열렸다.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건립되는 것으로 일본 내에서는 세 번째 비석이다. 높이 2m, 폭 1.4m인데 일본과 한반도의 화강암이 윤동주를 상징하는 원통을 떠받치는 형태로 제작됐다. 윤 교수는 “큰아버지(윤동주)도 추억의 장소에 시비가 세워진 걸 기쁘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1943년 초여름 도시샤대 영어영문학과에 재학하던 시인은 징병을 피해 귀국을 결심했고, 학우들은 그를 위해 우지강변에서 야외 송별회를 열고 아마가세쓰리(天ヶ瀨吊り) 다리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시인은 송별회 직후인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다 1년 반 뒤 옥사했다. 시인의 마지막 사진은 1990년대 중반 NHK와 KBS가 공동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중 윤 시인의 학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 씨의 앨범에서 발견됐다. 기타지마 씨의 증언에 따르면 윤 시인은 ‘마지막이니 노래를 한 곡 불러 달라’는 학우들의 요청을 받고 쑥스러워하다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이번에 비석을 세운 자리는 아리랑을 불렀던 강변 근처다.    사진에 얽힌 사연이 알려지면서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기념비 건립 움직임이 일었다. 2005년 시민단체가 결성됐고, 2007년 각계의 모금으로 비석 제작까지 마쳤으나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10년 동안 건립을 미뤄왔는데, 이번에 시즈가와(志津川)구에서 구 소유 땅에 건립을 허가했다.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안자이 이쿠로(安齋育郞) 대표는 “시인이 청춘의 빛나는 순간을 보낸 이곳에 비석을 세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윤동주의 모교 연세대를 대표해 참석한 백영서 문과대학장은 “감격스럽다. 인간의 존엄과 세계의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발신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올해 3월 기념비 건립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를 보고 대한해협을 건너온 중학생도 있었다. 경북 구미시 광평중 3학년인 박희원 군은 “윤동주 시인을 좋아했는데 기사를 읽고 뜻깊은 행사라고 생각해 용돈을 모아 아버지, 동생과 함께 참석했다”고 말했다. 행사가 끝나자 다시 빗줄기가 굵어졌다. 시민들은 인근 교회로 자리를 옮겨 윤 시인의 서시, 자화상 등을 낭독하고 공연을 하며 시인을 기렸다. NHK PD 재직 시절 마지막 사진을 발굴했던 다고 기치로(多胡吉郞·61) 씨는 행사 후 기자와 만나 “비석이 세워진 것은 한마디로 감개무량한 일”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후에도 윤동주 관련 연구를 지속해온 그는 최근 ‘생명의 시인 윤동주’라는 책을 냈다. 현재 일본에는 윤 시인이 유학했던 교토의 도시샤대와 당시 하숙집이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에 비석이 있다. 이 중 이번에 건립되는 우지 기념비가 가장 크며, 대학 교내가 아닌 장소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우지=장원재 특파원 ====================///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 유학을 떠난 것은 1942년 3월이었다. 당시 유학을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윤(尹) 씨’는 ‘히라누마(平沼) 군(君)’이 됐다. 개명을 닷새 앞두고 ‘참회록’이라는 시를 썼다. 이후 유학 시절을 관통한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교토(京都) 도시샤대 학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 씨는 우연히 둘만 수업을 듣게 됐을 때 윤 시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둘밖에 없는데 틀리면 부끄럽겠네요”라고 말했다고 했다. ‘히라누마 군’이 한국에서 ‘국민시인’이 된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기타지마 씨는 전후 50년을 맞아 KBS와 함께 윤동주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NHK 제작진에 옛날 학창 시절 앨범을 찾아 윤 시인의 생전 마지막 사진을 제공했다. 1943년 우지(宇治) 강의 한 다리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윤 시인은 중앙, 여학생들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수줍음이 많아 수업시간이면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수업을 듣던 그였다. 징병을 피해 귀국을 결심한 그를 위해 학우들이 열어준 송별회였던지라 당당하게(?) 중앙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사진을 찍고 1, 2개월 후 윤 시인은 일본 경찰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일본 남학우들도 대부분 전선으로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마지막 사진에 얽힌 사연이 알려지면서 우지에선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자는 자발적인 움직임이 생겼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의 곤타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이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는 윤 시인을 만난 후 인생이 바뀌었다. 2002년부터 매년 시를 읽고 꽃을 강에 던지는 추모 행사를 열었고, 2005년 기념비 건립을 위한 시민단체를 조직했다. 각계의 모금을 받아 2007년 기념비를 만든 후에는 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자치단체를 돌아다녔다. 2009년에는 6358명의 서명을 받아 교토 부(府) 지사에게 제출했다.    곤타니 사무국장의 바람은 지난해 우지 시 시즈가와(志津川) 구에서 용지 제공을 결정하며 이뤄지게 됐다. 주민 110가구의 작은 자치단체지만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됐으면 좋겠다”(구청장)며 기념비 건립을 받아들였다. 10월까지 건립될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에는 한국과 일본의 화강암에 양국 언어로 시 ‘새로운 길’이 새겨진다. 그리고 시인을 상징하는 돌기둥이 그 위에서 양국을 연결하는 디자인이다.   얼마 전 기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드디어 우지 강변에 기념비가 세워진다는 기사를 썼다. 여러 독자들이 ‘기사를 잘 봤다’며 연락해 왔다. 이번 비석은 일본 내에서 3번째다. 윤 시인을 기리는 일본 시민들은 매년 2월이 되면 시인이 유학했던 도쿄(東京) 릿쿄대와 교토 도시샤대, 숨을 거둔 후쿠오카(福岡) 등에서 추모 행사를 연다. 일본인 중에는 중국에서 시인의 무덤을 찾아낸 학자도, 30년 넘게 일본 내 행적을 추적한 전직 언론인도 있다. 모두 시인의 ‘부끄러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이들이다.  곤타니 사무국장은 기자에게 보낸 e메일에서 “현재 한일 관계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시민들은 윤동주를 통해 이어질 수 있다”며 “개막식에 꼭 와 달라”고 초청했다.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가 12년 동안 한국 시인 기념비 설립을 추진했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마음에 기자는 그 자리에서 ‘당연히 가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 제99회(2018년 3월), 삼일절을 맞은 오늘(1일) 대표적인 ‘저항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시인 윤동주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윤동주를 ‘저항시인’으로 소개한다. 독립운동연구소 박민영 연구원은 “총칼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은 만주 독립군이라면, 저항시인은 총칼 대신 펜을 들었던 독립군”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윤동주가 남긴 마지막 사진. KBS1     현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님의 침묵’의 한용운, ‘그날이 오면’의 심훈, ‘광야’의 이육사 그리고 ‘서시’의 윤동주가 저항시인의 반열에 올라 독립기념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윤동주는 독립운동의 본거지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던 명동촌은 독립운동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는 평양 순실중학교 편입 중 신사참배를 강요받자 자퇴를 결심한다. 윤동주는 자신의 첫 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지었으나, 주변의 권유에 따라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로 제목을 바꾸게 된다. 윤동주는 송몽규가 일본유학을 고민할 때 시 ‘참회록’을 써내려갔다. 해당 시에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적혀있다. 참회록을 쓰고 며칠 뒤 그는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이후 도쿄 릿쿄대학교에서 1년여 간 공부를 하다, 윤동주는 교토 도시샤대학교로 학적을 옮겼다. 당시 유학생 윤동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언제나 경찰들의 감시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시샤대학에서 윤동주와 함께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 기타지마 마리코는 윤동주가 남긴 마지막 사진을 함께 찍은 이로 알려져있다. 그녀는 “윤동주는 굉장히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한편 “그가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진 못했다”고 답했다. 또한 “그가 형무소에 들어갔다는 것은 전해 들었지만 이유 같은건 듣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이 같은 내용은 KBS의 다큐맨터리 프로그램 '시인과 독립운동'을 통해 전해진 바 있다. 이민재 기자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3    서로 누워있는 자리는 달랐어도 같은 꿈을 꾸었으리... 댓글:  조회:2983  추천:0  2018-12-26
떠난 지 50년, 여전히 뜨거운 이름 시인 -'김수영' 이영경 기자  2018.12.26.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경향신문]  ㆍ‘50주기’ 두 권의 책 나와 ㆍ21명 모여 그에 대한 글 묶고 ㆍ‘연구회’선 시 해설집 내놔 ㆍ“사후에 더 문제적 인물 돼” 한국 문학에서 김수영은 여전히 뜨거운 이름이다. 196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수영이 올해로 50주기를 맞았다. 48세의 나이에 작고했으니, 죽음 이후 그가 우리 곁에 머문 시간이 그의 생보다 길다. ‘김수영’이란 큰 이름과 달리 그가 생전에 남긴 시집은 한 권과 합동 시집 한 권이 유일하다. 오히려 그의 사후에 여러 권의 전집과 선집이 출간됐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그는 생전보다 사후에 더 문제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 50주기를 기념해 김수영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두 권의 책이 출간됐다. (창비)는 문학평론가 백낙청, 염무웅, 이어령, 황석영, 나희덕, 심보선, 송경동 등 21명의 작가와 학자들이 김수영에 대해 쓴 글들을 묶었다. 백낙청·염무웅은 대담에서 김수영이 활동했던 당시를 회고했다. 어디서나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내던 김수영의 생전 모습부터 한국문학사에서 김수영이 차지하는 위상을 짚으며 제대로 된 ‘김수영 읽기’의 방법론까지 모색한다. 당대 김수영과 ‘순수/참여 논쟁’을 벌였던 이어령은 ‘맨발의 시학’이라는 이름으로 김수영 시론을 재정립하며 “오랜만에 향을 피우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며 “서로 누운 자리는 달랐어도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희덕 시인은 “제대로 보려는 부단한 노력 없이는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김수영을 통해서 배웠다. 낭만적 미화마저 거부하고 구질구질한 생활의 발견과 반성적 의식을 견지하는 태도야말로 김수영을 ‘끝까지 바로 보려는 자’로 남게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권여선은 “세상에 두 종류의 감수성이 있다면, 한편엔 십대에 김수영을 읽은 쪽이, 다른 편엔 그렇지 못한 쪽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고 말한다. 소설가 황석영은 “김수영의 시는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낡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현대성을 유지하고 있다”며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도래한 가슴 벅찬 오늘의 현실에서 김수영의 시정신은 여전히 왕성한 현대적 핏줄을 가지고 살아 꿈틀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이영준, 고봉준 등 ‘김수영연구회’ 회원 14명이 집필한 김수영 시 해설집 (민음사)도 출간됐다. 김수영의 대표시 116편을 선정, 김수영의 시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썼다. 제목은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쓴 전후의 첫 작품 ‘달나라의 장난’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너도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이영경 기자
2    [세상만사] - 낯선 곳에서 도전하며 자신을 발견하기... 댓글:  조회:2601  추천:0  2018-12-26
URL 줄이기페이스북트위터   [앵커] 지구의 끝, 남극은 누군가에게는 한번 가보고 싶다는 분들이 있죠.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도 얼마 전 뉴스룸에 출연해 남극 여행을 꿈꾼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낯선 남극 대륙, 그 곳을 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강나현 기자입니다.
1    [세상만사] - 뛰고 또 뛰고... 24시간 뛰고...262km... 댓글:  조회:2823  추천:0  2018-12-26
졸려도 뛰고 또 뛰고.. '24시간 동안 262km' 달린 철인 백수진 2018.12.26.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앵커] 사람이 24시간 동안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달릴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하다면 24시간 동안 뛴 거리는 또 얼마나 될까요. 이것을 해낸 철인 중의 철인이 탄생했습니다. 백수진 기자입니다.   [기자] [5...4....3....2....1...] < 24시간 달리기 대회 /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 카운트다운과 함께 레이스를 마친 마라토너. 달릴 때는 몰랐는데 걸음을 멈추자 비틀거립니다. 결국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서 기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른 여섯, 미국의 카밀 헤론은 오전 8시에 출발선을 떠나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24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해가 저물고 밤이 오고 다시 동이 틀 때까지 뛰고 또 뛰어 400m 트랙을 655바퀴 반, 돌았습니다. 뛴 거리는 262km. 서울에서 광주광역시까지 직선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 하루 만에 도착한 꼴입니다. 24시간 달리기 세계기록입니다. 동시에 100마일, 즉 161km를 13시간 25분 만에 돌파한 새 기록도 세웠습니다. 정해진 거리를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닌, 정해진 시간 동안 더 많이 달리는 것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레이스. 철인이 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이 뒤따릅니다. 졸음이 쏟아져도 뛰어야 했고, 너무 힘들 때는 쉬지 못하고 걷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21번의 마라톤 완주에 만족하지 않고 더 극한의 도전으로 자신을 내던진 헤론은 24시간 달리기가 올림픽 종목이 되는 날까지 질주를 계속하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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