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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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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글을 쓸수 있어 인생은 살맛이 난다 댓글:  조회:517  추천:1  2017-10-27
작가의 말   글을 쓸수 있어 인생은 살맛이 난다 네번째 단행본 "연장된 아빠"에 부쳐     글 많이 썼네요 이런 칭찬 아닌 칭찬을 나는 많이 듣는다. 그런데 세상에 버젓하게 내놓을만한 작품이 없는것도 사실이다.    2003년에 첫 수필집을 출간하고 꼬박 14년만에 이 수필집을 묶었다. 글인생 30여년치고는 참 미안할 일이다. 다작이라고 말하기엔 더욱 많이 부끄러운 현실이다.    솔직히 나는 글을 량으로 쓰는 타입이 못된다. 여느 친구들은 필만 들면 술술 글이 잘도 나오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가슴에 딱 맞혀올때가 아니면 거의 필을 대지 못한다.    물론 나는 굳이 글쓰기 위해서 글을 쓰는건 장난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수사가 화려하고 론리가 정연하고 문장이 매끈할지라도 결국 가슴을 시원하게 후벼주는 짜릿한 맛이 없으면 그저 소일거리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리유로 나는 락서하듯 글을 마구 뽑아내는 행위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 10년을 거의 글 한편 쓰지 못한것에 대한 변명이나 방패는 절대 아니다. 나 스스로도 왜 쓰지 못했을가고 자주 반문한다. 물론 핑계는 더러 있었을거 같다. 먹고 살기니즘에 빠져서 시간이 없었다 또는 인생에 절망했다 뭐 그런 식의 리유를 댈만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글은 그런 경우에 나오는게 참글이 아닐가싶다. 글쟁이는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이 필요하고 피가 뜨겁게 끓어올라야 할것이다. 인간의 아픔을 아파하고 세상의 부조리와 다툴수 있어야 할것이다. 서늘한 구석에 올방자 틀고 앉아 지호자야를 주절대며 도고한체 청고한체 하는건 못난 문인의 짓거리임에 분명하다.    결국 나도 참문인은 아니였던거 같다. 남을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우선 자신부터 돌아봐야 할 시점이 분명하다. 뛰여난 명작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내 가슴에 잉태되고 응어리지고 그래서 옆사람들에게 일깨움이 되고 참고가 되는 그런 글이라도 더러 썼어야 했다는 자책감은 항상 따라다니기는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것은 문학은 평생의 직업이란것이다. 퇴직시기란것이 따로 없이 눈이 꺼벅 닫혀지는 순간까지 할수 있는 일이 문학이다.    내 나이 이제 50대 초반이다. 아직 글 쓸 시간이 꽤나 남아있는거 같다. 그래서 여직 못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완성할수 있다는 생각이다.    글을 쓸수 있어 고맙고 글이 있어 인생은 그나마 살맛이 난다.     2017년 2월 청도 자택에서 
115    리포터는 덤으로 받은 행운 댓글:  조회:518  추천:0  2017-10-27
  작가의 말   리포터는 덤으로 받은 행운       가끔 내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였을가 저절로도 궁금해진다. 마을에 우리말 학교가 없어서 앞동네로 유학 다니다가 소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영문 모르게 되쫓겨와 초중까지 동네한족학교를 쭉 다녔었다. 가정이 가난해 그 초중도 끝내 마치지 못하고 그만 사회청년이 되고말았다. 내 가방끈은 대개 여기까지이다.    후에 글이란 것에 반하게 되면서 어찌어찌하다가 연변대학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운수가 좋아서였다. 넘어진게 용케 떡함지에 엎어지거나 지나가는 미인의 품에 덜컥 안겨진 형국이라 형용해도 크게 과하지는 않다. 로또 당첨같은 기적이였다. 정말이지 내딴것이 어떻게.   그만큼 내가 글을 쓰게 되였다는게 꿈만 같고 신기하다.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따분한 농촌생활이, 지긋지긋한 가난이 나를 글쟁이로 변신시켜준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신문기사는 내 글의 기반이고 모태가 틀림 없다. 시골의 통신원으로부터 시작해 료녕신문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흑룡강신문사까지 두루 전전하면서 36년동안 내가 쓴 리포트는 어림잡아 1천편은 넘어된다. 문학작품의 배가 넘는 수치이다. 작가이기전에 먼저 기자의 타이틀을 달아야 맞겠지만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공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숙명으로 믿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천만다행스럽게도 또한 사람을 잘 만난 행운을 지니고 있다. 골목마다 구비마다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감사한 분들이 있었다. 그들이 아니였다면 아마 나는 오늘날까지 뻗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선 흑룡강신문사의 리장수 선생을 꼽아야겠다. 나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준 스승이다. 그다음은 료녕조선문보의 김광명 선생님이다. 내가 전문인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멘토같은 분이다. 그리고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의 김두필 선생이다. 더 넓은 길로 나아가게 곬을 만들어준 고마운 은인이다. 끝으로 청도에서 만난 박백림, 박영만 두분 선생이다. 이분들은 나에게 운신의 플랫폼을 만들어준 지인들이다.    더불어 이날이때까지 경제적인 후원을 해주면서도 이름을 밝히지 못하게 하는 모 지성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전한다.    아마 문학작품집은 앞으로도 계속 나오겠지만 리포트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가 한다.                                                                                     청도에서                                      2017년 5월 1일  
114    타파와 재구성으로부터 보는 민족언론의 변신 댓글:  조회:619  추천:1  2017-10-24
타파와 재구성으로부터 보는 민족언론의 변신 흑룡강신문사 산동 데뷔 20주년에 부쳐         프레임(框架)은 인간사회의 질서와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또한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다. 프레임은 수시로 타파되고 재구성되면서 시대의 변혁을 이끌어왔다.    흑룡강신문사도 아마 이런 변혁의 과정을 거쳐온듯 싶다. 1996년 말 남일주, 박영만 두명 기자를 연해지역으로 파견할 때부터 이미 지역이란 계선을 타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4월 흑룡강성위 선전부와 산동성위 선전부의 비준을 거쳐 산동지사를 설립한 것은 프레임은 연장도 할 수 있다는 증명이였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흑룡강신문이 시도하고 실험한 것이다.    그러나 타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흑룡강신문은 산동에 진출한 후 고향에서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아 준정부 기능을 발휘하면서 청도조선족기업협회 등 많은 단체와 모임의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사회 형성을 주도한 외 고향에서는 없었던 외자유치 역할도 분담하게 되면서 언론매체의 또다른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1998년 8월 처음으로 산동성 청주시와 재청도한국기업인과의 친목모임을 주선한 후 해마다 1~2차례 덕주시, 유방시, 고밀시, 린이시, 강소성 련운항시, 절강성 온주상회 등 지역의 외자유치간담회 및 연변, 해림, 녕안, 화천, 연길 등 고향 정부의 청도투자설명회를 주최, 주관, 협력하는 활약상을 보여주어 좋은 평판을 받아왔다.    물론 우선 언론 매체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흑룡강신문은 당보로서 당과 정부의 정책, 방침을 제때에 전달하고 현지의 법률, 법규를 즉시적으로 소개했으며 민족사회의 동태를 가장 빠른 시간내에 보도했다. 20년간 산동지사는 발로 뛰는 모습을 보이면서 해마다 350여 편에 달하는 취재고를 발표하였다. 5명 인원임을 감안하면 평균 매년 매인당 70편씩 기사를 쓴 셈이 된다.  한편 그간 특별기획과 시리즈보도를 30여 번 조직하여 좋은 사회적 반향을 얻었다. 타이틀도 “연해진출 조선족”, “산동에서 창업하기”, “불황을 딛고 성장하는 우리기업”, “산동에 뿌리내린 한국기업”, “홀로서기에 도전한 사람들”, “맛따라 향기따라”, “우리 사는 이야기”, “산동에 뿌리 내리다” 등 다양하여 거의 모든 분야와 인간그룹을 섭렵함으로써 산동에 온 조선족은 누구나 한번쯤은 신문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란 소리를 들을 지경이였다.    이 점때문에 흑룡강신문은 새로운 탈피를 시도했다는 자부심도 가진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전통매체는 점점 생존공간이 줄어들고 있다. 뉴미디어시대에 종이매체의 틈새는 어디에 있을가를 고민하던 중 자기도 모르게 “커뮤니티 신문(社区报)”화로 나간 것이다. 조선족이 있는 곳이면 흑룡강신문이 있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뉴스거리를 찾았다. 산동은 물론 멀리 해남성, 광동성, 절강성, 상해시까지 발길이 닿았고 한국, 일본에서 벌어지는 행사도 지면에 올렸으며, 기업인과 대형행사는 물론 작게는 생일잔치, 가족모임 같은 것도 놓치지 않으면서 독자들의 관심분야에 눈길을 돌려왔다. 모든 구성원이 직접 주인공이 되여 참여했다는 것은 흑룡강신문만의 자랑거리인 동시에 치렬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은 노하우라고 평가해도 절대 과분하지 않다. 덕분에 무료배포로부터 주문 발행으로 과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였으며 독자들의 관심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뉴미디어의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종이매체의 재부활이 이루어지고 그 형식이 자칫 커뮤니티화일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흑룡강신문은 나름대로 시대의 앞장에서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물론 흑룡강신문은 언제나 사회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순응해왔다. 그 일례로 위쳇 계정의 개설을 들 수 있다. 산동지사는 위쳇 출현과 더불어 2014년에 계정을 개설했으며, 2016년에는 위쳇채팅방 “신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동하기도 했다. 2016년 1월에 “백혈병에 걸린 4살짜리 김미나 어린이에 대한 구조활동 개시”란 글을 위쳇 기사로 띄운 후 거퍼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치료 비용 20만원과 생계에 필요한 10여 만 위안을 모금하는 장거를 이루면서 위쳇의 위력을 확인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역시 백혈병에 걸린 유승리 학생 구조홍보활동을 위쳇으로 적극 벌려 총 50여만원을 모급하는 기적을 창조하였다. 현재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의 위쳇 계정을 팔로워한 독자는 5000여명에 달하며 기사 평균 조회률도 1천회를 넘기는 등 호황기를 맞으면서 산동지사는 광고수익도 올리면서 20년만에 처음으로 수지 평형을 이루고 있다.    흑룡강신문의 변신은 이로써 끝난 것이 아니다. 산동지역이 민족문화의 불모지인 점을 감안하여 진출 초기부터 문학지의 배역도 맡으면서 특별히 “푸른섬”이란 문학면을 개설해 정기적으로 조선족작가들의 작품을 발표했고 해마다 정양학교, 서원장학교, 재청도조선족대학생 작문특집을 묶기도 했으며 2000년 1월에 설립한 연변작가협회 산동창작위원회 설립식도 산동지사에서 진행되는 등 민족문학의 온실로 자리매김해왔다.    지나온 20년을 돌아보면 생존을 위해 치렬하게 경쟁해온 20년인 동시에 더 높이 부상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타파하면서 변신을 거듭해온 20년이기도 하다. 따라서 앞으로 20년은 성공을 구가하는 20년이 될 것이 틀림없다.    /장학규   
113    뉴스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이 있다 댓글:  조회:502  추천:1  2017-10-24
  뉴스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이 있다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 설립 20주년 경축행사 칭다오서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 설립 20주년 경축행사가 21일 칭다오시 청양구에 위치한 70스포츠센터에서 성대히 진행되었다.    흑룡강신문사는 1997년 4월에 흑룡강성과 산둥성 관련 부처의 동의를 거쳐 정식으로 산둥지사를 설립했다.    당시 개혁개방의 진일보 확대와 중한 외교관계의 건립에 따른 한국기업의 대거 중국진출에 힘입어 많은 조선족들이 전통 거주지를 떠나 연해지역으로 이주해 삶의 터전을 잡았다. 거기에 한국을 위주로 해외진출붐이 가세하면서 고향은 공동현상이 엄중해진 반면에 연해지역은 문화고갈로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민족언론지의 부재로 말미암아 민족사회의 정보가 두절되고 동포간의 교류가 활성화될수 없었다.    산둥지사는 설립과 더불어 칭다오, 옌타이, 웨이하이시를 중심으로 산둥성 전역을 아우르면서 민족엘리트를 찾고 민족의 뉴스거리를 발굴하는데 주력했다. 취재와 발행으로 한달에 신 네컬레를 버렸다는 박영만 현임 지사장의 일화가 유명하다.    특히 1997년 11월부터 지역 전문지인 ‘연해뉴스’를 발간하기 시작하면서 산둥지사는 현지 민족사회의 구축과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왔으며 ‘연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산둥을 떠나 멀리 상하이, 광둥, 저장 등 동부연해지역과 해외 조선족 뉴스에도 주목했다. 뉴스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사 기자가 있었고 민족이벤트가 있는 곳엔 흑룡강신문이 참여했다. 어떤 민족행사에는 신문사 기자 신분이 아닌 심부름군 또는 잔일을 도맡아하는 역할도 놀았다. 덕분에 흑룡강신문은 산둥을 비롯한 연해 민족사회 형성의 견증인과 기록인이 되었고 거의 모든 지역 민족단체의 형성에 참여한 주체가 되기도 했다.   산둥지사 직원들은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이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으며 휴일을 반납하고 무보수 특근을 밥먹듯 해왔다. 6명 인원이 취재, 편집, 교정, 조판, 광고 업무를 겸하면서 1년에 3~4백 편의 기사를 써냈다는 것은 가히 기적이라 일컬을만 한 일이다.    이날 경축행사에서 박영만 지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산둥지사 기자들은 마치 훨훨 타오르는 횃불과도 같이 우리 민족이 수요하는 곳이라면 발벗고 달려갔으며 자신의 신근한 땀방울로 조화로운 한민족사회의 융합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면서 “민족언론이라는 숭고한 사명감과 민족사업에 대한 끓어넘치는 열정이 없으면 20년 동안 견지해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자평했다.    내빈 대표로 칭다오조선족기업가협회 전동근 회장이 축사를 올렸고 독자 대표로 해안선잡지사 김재룡 총편이 발연했으며 일본 상장회사 이지반화장품그룹 중국총대료인 이광춘 사장이 축하인사말을 했다.    대회에서는 20년간 지사의 발전에 큰 경제적 지원을 준 김창호, 박성진, 이광춘, 김옥, 정도진 등 5명에게 감사패를 전달했으며 김영숙, 김철웅, 한검파, 김광춘, 박영권, 김준영, 권창순, 강상일, 최광식, 이계화, 한춘화, 한정호 등 12명 광고주에 감사장을 수여했다. 아울러 지사에 도움를 주고 지사와 호흡을 맞추어 민족의 화합과 발전에 기여한 기업협회, 여성협회, 노인협회, 대원학교, 70스포츠센터, 연변상회, 작가협회, 월드옥타, 향우회를 비롯한 칭다오, 옌타이, 웨이하이 지역 각 단체장들에 공로장을 전달했다. 동시에 최재문, 장순진, 림동호를 비롯한 12명 통신원에 격려장을 수상하고 신문사 직원들에 공로상 및 우수직원상을 표창했다.    이날 행사에는 주칭다오 대한민국총영사관 정윤식 영사를 비롯하여 산둥성 각 지역 조선족단체 대표 및 베이징, 상하이, 하얼빈 등 곳에서 온 내빈 400여 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칭다오조선족교사친목회, 칭다오아리랑민속예술단의 축하공연이 있었으며 황지희, 황금희, 남혜금씨 등 가수들이 무대에 올라 열창했다. 공연 사이사이에 추첨행사도 진행. 추점 1등상에는 아시아나항공 옌타이지점에서 옌타이-일본 왕복항공권 1매를 내놓아 축제분위기를 더해주었다.    경축행사에는 산둥에 있는 대부분 한겨레 단체 대표와 유수의 지명 인사들이 참가 및 협찬했으며 멀리 베이징민족출판사, 저장성 사오싱기업협회, 중국砖瓦工业协会 부회장, 상하이한교상무유한회사 대표외 한국 광신대학교를 비롯한 해외에서도 참석 또는 축하를 보내왔다.    /장학규 기자  
112    웅녀를 슬퍼한다 댓글:  조회:885  추천:1  2017-10-03
웅녀를 슬퍼한다     나는 술을 많이 즐기는 편이어서 일반적으로 술을 저장해두는 법이 거의 없다. 일단 어찌어찌하다가 그놈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친구 하나쯤 더부살이로 불러들여 깡치를 내고야 마는 성질이니깐,그래서 우리 집에 손님이 오면 종래로 찬장에서 술병을 끄집어 내며 "이 술 좀 맛보소." 따위로 으시대본 적이 없고 언제나 손님의 주머니를 넘보는 듯한 "술 사오라."는 재촉이 불쌍한 아내를 괴롭히기 일쑤이다.      그런데 일전 이사를 하다가 고방 한구석에서 난데 없는 술 한병을 발견하였다.그것도 다섯근 들이 대짜배기 병이었다. 병에 인삼, 오미자 명색들이 잔뜩 불궈져 있는  것을 보면 의식적으로 그렇게 해놓은 것이 틀림 없는데 언제 그랬는지는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아무튼 술이 생겨서 좋았다.땅콩을 공짜로 주어 먹는 심정이었다.꿀 본 벙어리처럼 헤벌써해진 나를 발견하고 요즘 들어 잔소리가 갑자기 늘어난 아내가 누룽지 긁는 소리로 짹짹 시까스르는 것이었다.     "왜 술 보지 못했어요?벌써 1년도 넘은 술인데..."   "그랬던가?"   "당신이 직접 불궜지 않구 뭐예요.뭐,곰 사양장 하는 기업가가 웅담분을 주더라며...하긴 잘해요.우리는 곰의 자손이라고 입버릇처럼 중얼대더니..."     아내의 빈정이 갑문이 되었던지 그날 나는 술 한모금도 넘길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의 식인종이면 또 모를가. 괜히 할머니의 담낭을 먹는 듯한 꺼름직한 환각이 얼른거려서 도무지 마음을 가라 앉힐 수가 없었다.      문학을 즐기고 그 중에서도 평론을 편애하는 까닭에 나는 남달리 문학동태에 주의를 돌린다. 아니,민감하다는 편이 나을 것이다.그래서 우리 문단에 남영전이라는 토템시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시를 잘 모르면서도 그 분의 토템시만은 꽤 읽어보았다. 물론 여러 토템가운데서도 곰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었다.단군신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곰은 틀림없는 우리의 토템이었던 것이다.       하다면 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숭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단순히 문자기록만 본다면 물론 단군할아버지때부터였을 것이다. 곰이 바로 그 어머니였으니깐.       재미있는 얘기가 되겠지만 조선족 노인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젊었을 때 모두가 한두번쯤은 범을 때려 잡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 점은 어디까지나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범은 고작 백날을 참지 못해서 우리의 선조가 되지 못했으니깐 맞아죽어도 쌍통이지.동정해줄 사람이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렇게도 인내성이 없고 우쭐거리니 생존력도 미약할 것이 아닌가?      하다면 우리의 선조가 되어진 곰은 대접 받고 행복했을까? 그런것도 아닌 것 같다. 곰쓸개가 건강에 이롭다고 말 그대로 닥치는대로 잡는 것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 민족이다. 범을 잡는 똑같은 방식으로 곰을 대처하는 우리 민족이다. 웅담은 간염에 좋고 무엇은 정력에 좋고 아무튼 우리 눈에는 곰의 모든 것이 보배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돈벌이를 위해 곰사양에 궐기한 우리 민족이 엄청나게 많다.뿐만 아니라 신문,방송,잡지 할 것 없이 웅담분 광고가 비지 않는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에 한국의 골목마다에 조선족 곰열장사군이 나타나 일대 풍경을 장식했다고 한다. 마치도 중국의 곰은 조선족이 몽땅 잡았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하긴 사는 사람이 있으니 파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누구누구라 할 것 없이 옹근 민족이 일떠나 곰 토벌을 하는 셈이 아니고 뭔가?!      토템이란 하나의 문화이다.   그것의 산생,발전,발달의 과정에 원인이 있고 계기가 있고 지속될 수 있는 도리가 있기 마련이다. 토템에 대한 숭배도 각도를 바꾸어보면 민족성의 구심력과 지구력을 대변한다.그럴진대 토템은 우리의 둘레속에 있고 마음속에 있고 머리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곰을 잡다 못해  "곰처럼 미련하다."는 비유구까지 애써 만들어내어 자기를 신고스레 세상 보게 해준 선조를 모욕하는 민족은 그래 대체 무슨 민족이란 말인가?     지금도 만족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는 신적인 존재이고 세상의 모든 사물을 초월한 마음속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만족마을에서 자랐던 나는 만족들이 개가 늙어 죽을 때까지 정성들여 키우는 것을 자주 목격하였다.죽은 후에는 또 깨끗한 땅을 골라 묻는 것이 법처럼 되어있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처럼 남들과 비교해보면 우리에겐 모자라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뿌리가 없고 철학이 없을 뿐만 아니라 까놓고 말해 토템마저도 없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어떤 사람들이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닌가고 의심할 지경이다.      하기에 우리는 웅녀를 슬퍼할 이유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의 석달 열흘간의 고행을 동정하고 자식을 갖고 싶었던 그녀의 애끓던 마음을 가엾이 여기고 더구나 그녀의 원 족속들이 오늘날 당하는 고통에 연민을 표할 수밖에 없다.    하다면 구경 누가 웅녀의 응어리진 마음에 만족할만한 답안을 적어줄 수 있을가???
111    황하의 물은 막을 수 없다 댓글:  조회:363  추천:0  2017-10-03
황하의 물은 막을 수 없다     요즘 날씨가 좀 서늘해진다. 저 앞동네 강바닥이 거의 말라갈 무렵 비방울이 드문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 오지 않으면 강에 물이 없는 요즘 세상이 하도 수상하다.   그래도 다른 고장에서는 꽤나 많은 비가 내린 모양이다. 특히 황하 류역이 물난리가 더러 난듯 싶다. 같은 하늘아래서도 색다른 세상이 펼쳐치는 것을 보면 요상하기는 하다.   하기사 황하의 범람은 하루이틀 사이의 일도 아니니까 대개 리해할만 하다.   저 머얼리 순임금시절부터 황하는 굴레벗은 망아지처럼 날뛰였다고 한다. 순임금이 동이출신이라고 적혀있다고 해서 우리민족이라고 아득바득 뻐기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던 총명이 과인했던 분인 건 틀림없었는 모양이다. 요임금의 선양을 받아 황위를 이어받은 순임금은 황하를 다스리는 사람한테 자리를 물려주기로 했었다.    그래서 나선 사람이 곤, 곤은 갈래 없이 마구 흐르는 황하를 막아 한곳으로 흐르게 함으로써 물난리를 막으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목이 날아났다.   그 아들 우가 릴레이를 이어받고 황하를 둘러보니 기가 찰 일이였다. 얼기 설기 뻗어나간 강줄기를 어찌 막을 수 있을손가. 곤이 우둔한 짓거리를 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강바닥을 준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대성공이였다. 또 결국 그때문에 순의 양도를 받아 보위에 오르게 된다.   물론 이 친구부터 자기 자식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는 세습제가 시작되여 오늘날 맑은 하늘아래에서도 세습을 일삼는 국가들이 남아있기는 하다.   여하튼 세상 대세는 소통해야지 막을 수는 없다는 도리를 수천년전 우임금이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래도 인간은 날벌레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한번 껌벅 죽어봤으면 교훈을 살려서 다시 오유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데 꼭 자기만 잘난 것처럼, 남은 모르는 것처럼 눈 감고 아웅하는 식으로 독단과 독선과 독행을 일삼는 무리들이 아직 있으니 백성을 못난 이로 여기고 마음대로 우롱하는 이런 행실들은 마침내는 그게 독초가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백성의 눈과 귀는 막을 수 없다. 마치도 황하의 흐름을 가로막을 수 없는 것처럼! 감추고 덮고 숨기고 치운다고 있는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백성을 시녀처럼 여기는 권력은 언제가는 터져나가는 황하의 보에 밀려 력사 뒤안골로 처박혀질 거란 걸 알아야 한다. 
110    럭키 서울 댓글:  조회:383  추천:1  2017-09-15
  리포트 럭키 서울 장학규       2010년 9월 3일 한국시간 12시 10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이다. 이제부터 서울관광마켓팅(주)이 주도하는 “2010한국방문의 해 – 서울과 함께” 프로젝트에 따라 3박 4일간의 서울 취재 일정에 들어가게 된다. 나에게 서울은 완전히 생소한 도시는 아니다. 7년전인 2003년 8월에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 관광을 와서 잠간 서울을 말 타고 꽃 구경하듯 스쳐지난 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느낌은 세관인원들의 너무 딱딱하고 사무적인 인상이다. 한 나라의 관문이 지나치게 경직된것이 아니냐는 위구심은 여전했다. 하긴 매일같이 수천수만의 이국인을 대해야 하는 그들에게 아니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웃게 하는건 과분한 요구일수도 있고 또한 격에도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아무튼 1시간 30분남짓한 동안 려객기에서 대한한공 스튜디어스들의 밝은 모습과 친철한 서비스를 목격하면서 무척이나 들떴던 가슴이 차분히 가라앉는 순간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무엇보다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건 화청한 가을날씨였다. 며칠전부터 내려진 태풍주의보때문에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괜한 노파심이였다. 높이 들린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떠돌고 하느작 불어스치는 바람은 퍼그나 시원했다. 역시 서울은 친환경적인 도시라는 감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더 반전적인 기분 전환은 공항 교통안내카운터에서였다. 이번 걸음은 짧은 시간내에 많은 코스를 소화해야 했기에 오후 4시의 서울관광마켓팅(주)과의 미팅전에 꼭 들러야 하는 코스가 있었다. 경복궁이였다. 영욕의 5백년 조선을 주도했던 그 현장은 한겨레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이들이 꼭 가봐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공항버스터미널에 가서 리무진 로선을 확인해도 될걸 왜 굳이 교통안내카운터에 찾아갔던지 모르나 내가 화들짝 놀라 당황할 정도로 따뜻한 배려가 돌아왔다. 내가 중국동포임을 확인한 예쁘장한 안내아가씨는 메모지에 몇선 타고 어디서 내려 어떻게 무엇을 갈아타고를 깨알같이 박아써주고는 그것도 미심쩍었는지 한사코 괜찮다는 나를 공항밖으로 안내하여 승차역까지 가리켜주었다. 코마루가 쩡해나는 순간이였다. 례절 바른 내 민족의 나라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진한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첫 시작은 희비가 엇갈렸다. 리무진을 타고 경복궁으로 가는 시간은 내내 태조와 정도전, 그리고 무학대사간에 엉키고 설킨 고사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정도전의 로련함과 그 라이벌이였던 무학대사의 능청함이 착시적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사진이나 뉴스에서 가끔 보아왔던 경복궁은 생각처럼 그렇게 작은것도 아니였다. 대수 반시간이면 넉넉할거라고 어림잡았던 자신의 유치함을 비웃으면서 나는 자칫 미팅 약속을 어길가봐 분주히 뛰여다니지 않을수 없었다. 궁궐의 크기는 아무래도 중국 북경의 고궁에 비기기에는 너무 무리인듯 싶었다. 그러나 그 기세와 당당함은 절대 그에 손색이 가지 않았다. 특히 단청이 기막히게 화려하고 사치하고 정교했다. 중국 어디에서도 보아온적이 없는 그 섬세함과 조화로움에 한동안 대뇌는 정지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마침 한무리의 중국관광객이 지나치고있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산동성 성소재지 제남시에서 배낭려행을 왔다고 했다. 나는 청도에서 왔다고 하니 한동네 사람 여기서 만났다며 반갑게 손들을 내밀었다. 산동성의 면적은 남한의 1.5배, 인구는 1억명에 가깝다. 그걸 한동네로 아는 중국인들이다.  경복궁이 한국 관광의 첫코스라고 한다. 인상이 어떠냐고 물으니 자신을 공무원이라고 소개한 왕씨 성의 30대 녀성이 앞질러 “대장금 드라마에 들어온 느낌이예요.”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중국 대륙을 휩쓴 “대장금”의 저력을 확인하는 마당이였다. “대장금” 세트장이 따로 있다고 알려주는데 기업을 한다는 진씨 남성이 “그런데가 있어요? 코스를 변경해서라도 한번 가봐야겠네요.” 하고 역시 주제를 떠났으나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말을 했다.  별수 없이 내가 기억을 더듬어 자료에서 본대로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으로 1395년에 창건하였으며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에 대해 그들은 신기해마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과 어울려 국립민속박물관까지 함께 가면서 나는 생각지도 않게 서툰 가이드 역할을 맡게 되였다. 반만년 력사를 단 10여 분에 설명한다는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모형과 자료를 살펴보면서 수박 겉핥기로 멘트하면서 진땀을 뺐다. 옆에 붙어서서 진지하게 듣던 진씨는 언어불통때문에 출국전에 인터넷으로 가이드를 수배하였는데 그저 길안내 수준이라고 가만히 속삭였다. 다음에 또 올거냐고 물으니 한국이 참 마음에 든다면서 비즈니스거리가 생길거 같은 예감도 있어 꼭 다시 올거라고, 그것도 자주 올거 같다고 대답했다. 아는대로 하나투어, 모두투어 등 한국 유명 려행사를 알려주면서 무의식적으로 대방의 팔목을 건너다보던 나는 아차 뒤통수를 쳤다. 서울관광마켓팅(주)과의 미팅시간이 눈앞에 다가온것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에 무거운 짐을 풀고 부랴부랴 미팅 장소인 프레스센터로 달려갔지만 약정 시간을 20분이나 넘겨버렸다. 서울마케팅의 문연미씨가 예쁜 모습만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얼마나 미안하고 송구스럽던지. 서울시청측으로부터 "서울관광리포터" 위촉장을 받으면서 이제는 나도 서울 시민이 되여진듯 뿌듯했다. 고국에서의 첫날밤은 불면의 밤이였다. 잠자리가 바뀐 원인도 있겠지만 그보다 영문모를 흥분과 격동이 모질게도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취재 계획대로라면 이틑날은 서울의 옛거리를 활보하는 코스였다.  우선 명동을 가보기로 하였다. 친구 하나가 청도에서 “명동”이란 보신탕집을 운영하는데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요리 솜씨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가게명이 좋았지 않았냐고 항상 생각하고있었다.  명동은 자자한 명성과는 달리 그렇게 요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엇이라 짚이지 않으면서도 자꾸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여의도나 청량리처럼 번화하지만 세계 어느 큰 도시에서나 쉽게 볼수 있는 그런 동네가 아니였다. 꼭 한국만이 가지고있는 그런 마을이여서 명동은 다분하게 이색적인 분위기였다. 기분 좋게 이곳저곳 기울이다가 아무 가게나 무작정 들어갔다. 복장가게였다. 전에 제주 이마트에서 디자인 멋진 옷견지 여러벌 사갖고 집에 가서 보니 일매지게 “메이드인 차이나”였던 기억이 되살아나 제작사부터 살펴보니 온통 알아보지 못할 외국글 아니면 한글로 되여있어도 외래어여서 알아볼수 없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고있는데 주인아저씨인듯한 후더운 인상의 50대 남성분이 다가왔다.  “중국 동포 아니십니까?” “아, 네…” 눈썰미 하나 기막히다고 감탄하며 외마디 대답을 하다가 내친김에 되물었다. “여기 중국 사람 많이 옵니까?” “아니,별로요. 일본손님은 많이 오는 편인데 중국 사람은 흔치 않아요.” 그렇게 마주한 자리에서 주인아저씨로부터 패션 유행을 선도했던 명동의 자랑찬 력사를 살짝 얻어듣는 행운을 가졌다. 현재도 일당 백만명의 인구가 드나드는 곳이기는 하지만 밤에는 인구공동화 현상이 심하다는 얘기도 숨기지 않았다.  허탈한 감정이 엄습해왔다. 솔직히 나는 와자자하고 삐까번쩍하는 대형 타운보다는 인정미 있고 고풍적인 전통 터전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세계화 추세와 더불어 이젠 이런 옛거리도 흔치 않을것인데 중국처럼 아예 전통거리 또는 테마거리로 개조하여 관광프로그램에 합류시키면 좋지 않을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주인집아저씨는 그대로 빈손으로 나오는 나에게 환한 모습으로 근처에 남대문시장이 있으니 그리로 가면 싸고 좋은 선물을 마련할수 있을거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 센스도 보여주었다.  서울시민의 성숙한 모습에 굿소리가 저절로 나갔다. 벌써 여러번 그런 감탄을 했었다. 리무진을 가리켜주던 공항 아가씨부터 택시기사 아저씨의 자상한 서비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들의 질서정연한 질주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지하철 시스템  등은 그대로 선진적인 서울의 참모습이였다.  엎딘 김에 절이라 했던가? 단김에 쇠뿔 뽑는다 했던가? 아무튼 다음 행선지를 남대문시장으로 돌렸다. 아예 계획 자체를 접고 그때그때 사정을 보아서 다음 코스를 잡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남대문시장은 한번 다녀간적이 있는 곳이였다. 7년만에 다시 만나는 남대문시장은 그때와 별로 달라진거 같지 않았다. 쿵닥쿵닥 음악소리가 사처에서 울리고 호객소리도 다투듯 들려왔다. 재래시장은 어디나 거의 비슷한 모양이였다. 숭례문을 기점으로 눈뿌리 모자라게 끝없이 이어진 상가에는 이름을 부를수 있는 물건이면 모두 있는듯 싶었다.  잠시나마 내 사명을 잊었다. 와이프와 귀여운 딸, 그리고 회사 직원과 이웃들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다보니 두시간 넘어 소진한거 같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야 점심시간을 한참이나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에 아주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해흠루"라는 중국간판을 내건 식당이였다.  주인은 40대 장년이었는데 중국 흑룡강에서 왔다고 했다. 가끔 아르바이트로 중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안내하기도 한다면서 앞으로 한중을 오가면서 보따리 장수도 겸해볼 타산이라고 했다. 이젠 보따리 장수도 컨테이너로 한다고 산동에서 취재한 정보를 얘기하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 벌써 그렇게 변했어요. 전에는 집채같은 짐가방을 끌고 밀고 숱한 사람들이 오갔는데…” 인천과 산동성 위해를 오가는 위동페리가 승선 가격이 오른데다 한국정부에서 기준 초과부분에 세금을 징수하면서 보따리가 수지 맞지 않아 많이 한산해졌다고 얘기하자 별로 맥빠진 모습이였다. 시장을 업고있는 이점을 리용하여 중국계 관광객을 전문 접대하는 식당으로 업그레이드하는게 좋지 않냐고 제의하자 똑같이 김빠진 공이 된 표정이였다. 관광 단체가 가끔 오기는 하는거 같지만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고 식사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제로라는것이였다. 려행부문를 오래동안 전담해왔던 경력때문인지 서울의 관광시스템에 많이 아쉬운 느낌이였다. 쇼핑 천당을 관광단체에 접목시켜 관광, 쇼핑, 음식, 레저 등을 활성화시키는것도 좋은 출로가 아닐까?! 늦은 점심을 치르고 동대문에 다녀왔다. 여흥은 여전하여 다리 아픈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다. 눈뿌리 모자라게 구경거리가 많았지만 별로 혼자서 감흥을 느끼는거 같아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인사동에서 꽤나 큰 충격을 느꼈다. 중국 상해의 청황묘(城隍廟)나 항주의 허방가(河坊街)나 청도의 즉믁로(卽墨路)와 아주 흡사한 거리였다. 다르다면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중국의 그것과 달리 어딘가 한산한 모습이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동품 가게들, 고서, 서예작품, 도자기, 악세사리 등 너무나도 볼거리가 많은 특색의 이 동네가 이렇게 외롭게 방치되여있는 그 리유를 나는 알수가 없었다. 중국의 경우라면 “조작(炒作)”이라고 해서 벌써 가감없이 려행사를 끌어들여 관광객들로 꽉 채워넣었을것이다. 상기 중국 동네들은 그렇게 현실로 되여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상술만은 배워도 무방하지 않을가싶다. 인사동에서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골동품 몇가지를 고르고 효자동으로 건너갔다. 여긴 관광코스로 활용해도 좋을거 같았다. 민담과 같은 구수한 옛이야기에 고풍의 구조물이 어울려 하나의 코스가 되여지는것은 세계적인 관례이기도 하다. 인사동을 이곳과 접목시켜 쇼핑코스와 관광코스를 유기적으로 이어놓으면 꽤나 전망이 있을거 같았다. 그런데 여직 접촉한 서울관광코스에는 상기한 시장이나 동들이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한국의 려행사들은 이미 어떤 경로로 국외에 잘 알려진, 이를테면 경복궁이나 한류로 인해 잘 알려진 세트장이나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현장인 판문점 등을 판매하는데 열성을 보이는 대신 새로운 코스 개발에는 많이 라태하고 회의적인거 같은 인상이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돌아왔을때는 밤 10시가 넘어가고있었다. 분주하게 돌아친만큼 사흘째는 좀 한가한 편이였다. 중요한 코스는 다 들른 편이고 이제 편하게 서울시민이 되는 순서였다.  래일은 출국해야 하는 날이다. 오후 1시 5분 항공편인데 국제항공편은 2시간전에 도착해야 하는게 룰이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10시엔 호텔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전에 이번 취재건의 조직측인 서울관광마켓팅(주)과의 미팅도 약정되여있다. 그러니까 마지막날은 나에게 차려지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우선 신풍역 1번 출구에 위치한 흑룡강신문사 한국지사를 찾았다. 뒤늦은 신고식이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신문사 산하의 "다문화협회"에서 모임이 있었다. 김청호 다문화협회장이 협회 설립 한달동안의 활동과 그 취지를 설명했다. 타문화권에서 온 외래인들이 한국사회에 융합되여 밝고 맑은 한국을 만들어가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자는것이라고 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한국에 헌신하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모임에는 박진엽 한국지사장과 김명환 편집국장을 위시한 20여 명의 회원이 동참했다.  형제사인 산동지사에서 왔다고 꼭 점심을 대접하겠다는걸 한사코 취재라는 핑계로 물리치고 곧바로 청계천을 찾았다. 고가도로를 헐어내고 청계천을 만들 당시 말썽 많던 일이 눈에 선했다. 그래도 시멘트보다 저렇게 휴식공간이 만들어진게 보기에 더 좋은거 같았다. 소문이 자자한 63빌딩도 올라가보았다. 서울관광상품에 가끔 올라있는 메뉴가 “63빌딩”이다. 오후에는 꽉 닫힌 생활을 영위하던 해외 동포들의 눈을 틔워주고 귀를 열어준 KBS방송국을 찾았다. 남의 눈에 들킬가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밥곽만한 라디오를 귀에 대고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경청하던 30년전의 일이 불현듯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해외동포들에게 익숙하고 다정하고 고마운 KBS였다. 그 전파를 통해 “럭키 서울”이라는 노래도 배웠었다.   서울의 거리는 태양의 거리 태양의 거리에는 희망이 솟네 타이프 소리로 해가 저무는  빌딩가에서는 웃음이 솟네 너도나도 부르자 희망의 노래 다 같이 부르자 서울의 노래 에스 이 오 유 엘 에스 이 오 유 엘 럭키 서울   아, 정말 그랬다. 서울의 거리는 비전을 향해 달리는 “태양의 거리”임에 틀림없다. 생기로 끓고 활력이 넘치며 지적인 서울은 그대로 영원히 가슴 깊이 남을것이다.  2009-2010년 세계도시경쟁력 보고에 따르면 서울은 종합경쟁력, 경제규모부문, 국제영향력부문 등에서 세계 10위권에 랭킹되여있다. 그만큼 서울의 국제적 지위와 위상은 세인이 공인하는바이다. 아울러 이제 세계인의 눈길은 서울로 쏠리고있다.  어쩌면 이번 걸음에 찬사보다 콕 찌르는 말을 더 많이 한거 같다. 접시 깨지는 소리로 들어주시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행운의, 길운의, 대운의 서울을 축복한다. 럭키 서울!   2010년 9월 5일 밤 12시 서울 M호텔에서   
109    어느 하루 댓글:  조회:599  추천:0  2017-09-15
수필 어느 하루 장학규     “안녕하세요” 핸드폰 알람입니다. 옛날에 시간 맞추어서 출근하지 않으면 안될 때 설정해놓았던 모닝콜입니다. 쫓기는 꿈을 꾸다가 그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악몽이 분명한데도 진땀은 없었습니다. 어쩐지 예전같지 않습니다. 꿈도 자극이 없이 그저 심드렁해집니다. 아침 다섯시입니다. 다시 잠들기는 열두번도 틀렸습니다. 늙었다는 징표가 틀림없습니다. 허글픈 웃음이 나갑니다. 그리고 정신을 도사리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마약처럼 중독이 되여진겁니다. 열개가 넘는 위챗방들이 와글바글 끓여넘칩니다. 수십명이 수천마디는 한것 같습니다. 모두 무시해버리고 개인 대화방을 봅니다. 홍철이란 친구가 걸어온 말이 있습니다. 이 친구는 언제나 타이핑하는것이 아니라 음성메시지를 남기기 즐깁니다. 어제 죽이 되도록 술을 같이 먹은 친구가 무슨 정신에 메시지를 다 남겼냐고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혹시나가 역시나로 “잘 자소.”가 고작입니다. 그다음 마누라가 새벽녁에 언제 돌아오냐구 차문한 문자가 보입니다. 내가 그렇게 늦었던가고 끊겨진 필름을 아무리 이어봐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모멘트는 더욱 난시가 아닙니다. 동네방네 아우성소리 없는게 없습니다. 손가락으로 까닥까닥 긁어 올리면서 대수 아는 사람이면 무조건 모두 따봉을 해줍니다. 글까지 읽어줄 흥심은 아무래도 없습니다. 다시 내가 팔로우한 위챗공중계정에 들어갑니다. 할 일 없는 날이면 해종일 세월을 아쉽지 않게 보낼수 있는 수십개의 계정들이 서로 자기를 먼저 읽어달라고 빨간 유혹을 해댑니다. 그속에는 고금중외, 동서남북, 희노애락 없는게 없어 자기도 모르게 깊숙히 빠져듭니다. 밥 안 먹냐구, 출근 안할거냐구 안해가 쉴새없이 바가지를 긁어서야 마지못해 침대에서 궁둥이를 떼고 핸드폰에 그대로 눈을 꽂은채로 식탁으로 옮겨앉습니다. “우우, 핸드폰안에 쑥 들어가 살지 아예” 안해의 잔소리를 귀등으로 흘리며 아침을 먹습니다. 이제는 밥이고 채소고 맛으로 먹는게 아니라 배를 불리기 위해 먹습니다. 밖에서는 한겨울인데도 시어미 구박을 억수로 받는 시집살이 며느리의 하소연같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이넘의 동네는 참말로 말릴수 없습니다. 회사로 나가면서 구멍 뚫린듯한 하늘을 나사 하나 풀린것처럼 제정신 잃고 한동안 올려다봅니다. 저렴하게 생겼으면 단순하게 노는게 제격이리라. 나의 신조이기도 합니다. 미스 리도 나오고 미스 권도 보이고 사무실 직원들은 다 나왔습니다. 언제나 착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입니다. 컴퓨터를 켜고 큐큐에 도킹하기 바쁘게 하단에 노란 불이 깜박입니다. 대학동창 근석이가 말 걸어온겁니다. “뭐해? 점심에 술 한잔 빨자.” 이 자식은 입만 열면 술입니다. “안돼, 약속 있어.”. “그럼 저녁에 만나자.”. “저녁도 예정되여있어.”. “씨, 니 리총리보다 더 분망하구나.” 자식은 지지벌거리면서도 순순히 물러납니다. 동창은 이래서 좋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아무 말 해도 마음에 새겨두지 않습니다. 왈라당 절라당 쌍코피 터지게 회사 업무를 처리하고보니 벌써 열두시가 다가옵니다. 그간 김사장으로부터 정확히 전화 세번, 핸드폰 메시지 네번 왔습니다. 회사 근처에 왔다고 했다가 다시 식당으로 이동했다고 했다가 또 요리 주문이 끝났다고 고리때마다 알려옵니다. 포워딩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입니다. 두루 자기 회사를 좀 세상에 홍보해달라는 얘기입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를 나서지만 솔직히 나는 술보다 그 술가치만큼 돈을 나한테 주면 더 좋겠습니다. 신체가 점점 말이 아닙니다.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쑤시고 술 먹지 않은 상태에서도 괜스레 마른 구토질이 나옵니다. 이 나이에는 죽음이란 형체가 어슴프레 보이고 냄새도 조금 맡을수 있습니다. 가끔 이름 모를 두려움이 옆구리를 스치며 지나갑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술상에만 앉으면 기분은 업됩니다. 딱 누가 오르가즘을 주사놓은듯 세상이 밝고 맑고 또 따스해집니다. 사는 꼬라지는 머슴급이여도 기분은 진시황급이라고 해야 할가요. 아무튼 그런대로 크고 싼 ‘외할머니네 떡’에다 소주 두병을 말아먹고 정신이 거의 가출 상태가 되여 식당을 나서는데 맞춤하게 마누라한테서 애한테 줄 방학 선물을 사오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이젠 벼라별 선물이 다 있습니다. 김사장과 빠이빠이 하고 슈퍼에 들어가 아무거나 직원이 가리켜주는대로 한아름 선물이라고 샀습니다. 그 상태에서도 이대로 회사에 들어가기는 아무래도 무리인거 같아 집에 가려고 택시를 잡는데 회사에서 느닷없이 호출이 들어왔습니다. 무좀발로 고생하며 어슬렁 회사에 갔더니 삶아놓은 숫돼지가 눈을 번쩍 뜰것 같은 깜짝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복리를 준다는겁니다. 빈상에 파리만 분주하게 앉았다가는 집안치고 대단히 굉장히 억수로 분에 넘치는 새해의 인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홍철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시인의 ‘쥐구멍에도 빛이 들 날이 있다’란 시가 떠오릅니다. 기쁜 김에 세상이 새노랗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아직 술이 깨지지 않았는데도 저녁 미팅을 잡은 글친구들의 모임에서 전화가 오기 바쁘게 지금 당장 간다고 허드레를 떨고 도킹 길에 나섰습니다. 참 내 인생도 대략 난감합니다. 어느 랭장고에 랭장했다가 한 20년 후에 녹여서 세상에 다시 내놓으면 그럭저럭 인재 취급은 받을거 같은데 왜 이 활기찬 시대에 납셔가지고 민페가 되도록 과부집 숫캐처럼 싸다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내 삶은 덤으로 벌어진 느낌입니다. 고스톱 쳐서 따내온 나이입니다. 공짜로 얹어진 삶을 즐겁게 치렬하게 살아주는게 나의 도리이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서부터 취했는지 나는 모릅니다. 이태백을 말한거 같고 요즘 우리문단에서 화제가 되고있는 ‘단군문학상’을 얘기한거 같습니다. 1차에서 2차로 넘어간거까지는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택시에 태우고 한 말이 환청같이 들립니다. “안녕히!”  
108    고향을 조립하다 댓글:  조회:1161  추천:2  2017-08-23
      수필   고향을 조립하다   장학규     일전 내 고향에서 뜻하지 않은 소식 하나가 날아왔다. 외자녀를 두고 있으면서 부부 쌍방이 모두 일자리가 없는 경우  “외자녀 부모 장례금”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그 소위 장례금 액수를 전해 듣고는 치미는 분노를 도무지 억누를 수 없었다. (멍멍이같은 애기들!)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한달에 5원씩 1년에 고작 60원이란다. 장례금치고는 참 치사하고 낯간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부부 쌍방이 모두 무직업자여야 한다니 기가 막히고 억이 막히잖은가?! 그래놓고는 관심 어쩌구 배려 저쩌구 매체에 대서특필할 거라고 생각하니 온몸에 막 소름이 끼친다.  5원이면 요즘 시세로 저가쌀도 한근 사면 부스럭 돈이 몇잎 남지 않는 액수다. 일자리가 없는 세 식구가 쌀 한근으로 살면서 감격에 목 메여 만세라도 불러달라는 건가 뭔가?  (멍멍이같은 애기들!)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유분수지. 백성을 거지 취급하는 못난 행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흥분이 한번 대뇌를 훑어지난 다음 마음을 차분히 눅잦히고보니 그나마 어딘가 모르게 감격스러운데가 좀 있긴 했다. 어쩌면 태생적으로 우리가, 아니 내가 노예 근성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상야릇하게 감사한 마음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우리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바로 그거였다.  산해관을 넘고 황하를 건너 멀리 장강이남까지 내려갔다가 항주 서호가에서 어렵사리 자식이라고 딸을 낳아서 다시 북상하여 중원의 산동땅에 자리를 잡으면서 나의 가슴에는 시종 응어리같은 것이 있었다.  “아빠, 내 고향이 어디지?” 이제는 다 큰 딸애가 이렇게 물어올 때마다 나는 할 말이 궁해 변이 마른 사람마냥 끙끙대기만 했다.  고향의 사전적의미는 “태여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혹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그렇다면 딸애의 선차적인 고향은 마땅히 절강성 항주여야 했다. 딸애는 그곳에서 잉태되고 태여나 세살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딸애에게는 전혀 기억에 없는 고장이다. 고향은 과거가 숨쉬고 정이 살아있는 고장이라고 전제하면 항주는 아무래도 아닌듯 싶다. 지금도 딸애는 가끔 자기는 미인의 도시 항주에서 태여났다고 으시대군 하지만 일방적인 억지에 다름 아니다. 그곳에는 딸애의 연고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며 딸애를 기억해줄 사람도 거의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청도가 딸애한테는 가장 고향에 가까울듯 싶다.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쭉 살아왔고 친구들도 이곳에만 있다. 거기에다 사는 집도 이곳에 있으니 가히 고향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딸은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컴퓨터 순차(电脑排位)에 운명을 맡겨야 했다. 그건 딸애가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는 명백한 설명이다. 외지인에 대한 구박이 심한 중국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청도는 딸애가 고향으로 하고싶어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딸애의 호적이 있는 목단강은 더욱 고향일 수가 없다. 딸애는 딱 두번 목단강에 갔었다. 한번은 엄마 배속에 들어서 출생증 받으러 갔었고 또 한번은 여덟살때인가 나를 따라 려권을 만들러 가서 3일간 머문적이 있었다. 그게 고작이였다. 딸애는 지금도 목단강이 어느 성에 속해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고 목단강이 무슨 급의 도시인줄도 료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호적이 올라있는 서장안가란 거리가 있는줄조차 모르고 있다. 물론 그곳에는 딸애를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런 걸 어떻게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아닌 그 목단강이란 고장에서 아이러니하게 딸애가 외자녀라고 장려금을 줄 수 있다고 나선 것이다. 물론 부모 쌍방이 일자리가 없어야 하고 또 한달에 고작 5원밖에 주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이런 은혜는 항주도 청도도 도무지 줄 수 없는 특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특혜를 나는 방귀 한번으로 왕창 거절해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다면 딸애의 고향은 어디여야 할가? 우리세대는 엄마 배에서 나와서 만난 동네가 곧 고향이였다. 그때 임산부들은 병원이란데 가보지도 못하고 혹은 산파 혹은 시어머니나 이웃 아주머니의 손을 거쳐 자식을 해산하군 했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생물학적 탄생지가 곧바로 지리학적인 고향으로 전변되였고 그때로부터 주변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기억과 추억을 만들어갔다.  그때의 우리에게는 세상이 쳐다보이는 하늘 정도가 전부였다. 그밖의 세상은 알수도 없었고 다가가기도 두려웠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제일 편했고 내 동네가 가장 친근했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시대이다. 세계를 지구촌이라고 형용할만큼 가고싶은 고장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세월이다. 그리고 또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다. 치렬한 경쟁에서 살아남을려면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오갈수밖에 없고 이런저런 사람과 만났다 헤여져야 하고 그러다보면 삶의 터전을 자주 옮길 수밖에 없다. 옛날처럼 내 죽었소 하고 한고장에 죽치고 몇십년씩 살아가기에는 요즘 세상이 결코 록록하게 허락치 않는다.  너무 오래동안 리력서나 등록표따위를 써본적이 없어서 지금도 그런 문서에 “고향”이란 코너가 있는지 모르겠다. 력사의 퇴물같은 그런 것이 아직 살아있으리라고 믿을 수 없지만 중국이란 나라는 어차피 상리로 판단 불능이니만큼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 하등의 소용도 없는 물건짝을 두고 난감해 갸우뚱할 우리 후대들을 위해 한마디 하고싶은 말이 있다. 즉 기분 내키는대로 적어넣으라 그 말이다.  태여난 항주가 고향일 수 있다. 그곳은 서시가 활동했던 미인의 도시이다. 기분이 상쾌할 것이 아닌가. 청도 역시 고향이래도 무방하다. 다시 멀리 가더라도 언젠가 찾아오면 공부했던 학교와 살았던 마을과 친했던 친구들을 볼 수 있다. 회상이라도 할 수 있잖은가. 호적지인 목단강 역시 고향이라 칭해도 괜찮다. 부모가 그곳 사람이고 더우기 한달에 5원이라 해도 외자녀 장려금을 아끼지 않는다. 정이 붙게 당기는 멋이 있잖은가. 한마디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고향을 둘러맞추면 된다. 지금은 고향을 마음 내키는대로 조립하는 시대라고 단언하면 틀린 표현이 될가?                                                                                                                        2017년 1월   
107    황해의 시련 댓글:  조회:487  추천:1  2017-08-23
황해의 시련 청도에 진출한 겨레들     황해연안의 명주 청도는 중국에서 최초로 국외에다 개방한 항구도시중의 하나이다. 북으로 발해만경제권을 업고 있고 남으로는 최대 국제도시인 상해와 무릎을 맞대고 동으로는 조선반도와 일본을 향하고 서쪽은 광활한 중원땅을 안고 있는 청도는 그 우월한 자연 지리적환경과 따스한 기후(가장 추울 때 령하 10도 정도)로 하여 한국투자인들의 눈길을 모으는 초점으로 되고 있었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유럽식의 건축물들이 일떠서는가 하면 촌사람들도 제법 변속자전거를 타고 출근길에 나서고 있었다.  그중 정식 생산에 들어간 한국기업이 2백 여개로 외상총수의 70프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투자가 시작되였거나 허가가 나와있는 기업은 더욱 많았다. 항목으로 보면 옷, 신, 양말, 완구, 피혁 등 봉제제품회사가 대부분이고 체육용품, 전자재부속품 등 일손을 많이 쓰는 가공업체가 그다음이였다. 그곳 조선족들의 말대로 “새비들의 진출”에 불과한 것이다.  그만큼 명성높은 대기업의 투자는 공백이나 다름없고 그대신 인건비 높은 한국에서는 도무지 경쟁해나갈 방법이 없거나 이미 파산되였던 기업들이 주도였으니깐. 그래서 그 설비란 것들을 보면 눈이 감기게 졸렬하거나 형편없이 낡아빠진 것들이였다.  한번은 한국에서 기계설비가 들어와서 기중기차로 작업현장에 “모셔”가게 되였는데 반쯤 가다가 나무무지처럼 와그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이였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외자인입의 피동성과 맹목성을 쉽사리 보아낼 수 있지만 그 우렬판단은 정부측에서 할 일이다. 어쨌던 이런 기업들이 중국에서의 재기를 맛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또 실제적으로 청도에 많은 혜택을 가져다준 것도 사실이였다. 몇만을 헤아리는 여유로력을 해결해주었고 전기, 물, 연료 그리고 여러가지 원자재를 소비해주고 있으며 해관세를 포함한 여러가지 세금을 물어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유흥업소와 봉사업체들이 그들때문에 날따라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중 가장 돌출한 것이 가라OK인데 거의 모두가 한국노래들을 갖추어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구시와의 자매결연후 기자회견에서 유정성(俞正声) 청도시장은 흐뭇해서 멀지 않은 장래에 청도에다 한국촌과 한국학교를 건설하겠노라고 선포했다.  한국기업이 있으니 자연 중국조선족도 있게 되였다. 의사소통의 교량이라는 이 점만도 조선족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지 인사들의 말에 의하면 대략 7,8년전만 해도 조선족인구는 십단위로 계산되였단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단위가 천으로 뛰여올라 대략 3천에서 4천 정도로 불어났다. 물론 정부측 통계가 아니고 주먹구구라 하지만 결코 이 수자보다 적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조선족들의 견해였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증가되는 추세였다. 따라서 취업난, 대우의 하강 등 문제도 매우 첨예해졌다.  하다면 청도의 조선족들은 구경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그들의 사업 및 생활상태는 어떠하며 그들의 희로애락은 어떤 것들인가? 이러한 것들을 알고저 청도에 있는 8개월간 필자는 청도시 7대구와 그 산하의 즉묵, 교주, 래서 등 3개 시를 두루 밟아보았다. 총적으로 기쁨보다 고통이 더 많았고 자랑보다 서러움이 더 컸다. 필자가 글을 쓸 목적임을 안 후에는 자기들이 보고 겪은 일들을 실례로 들어가며 그 리해득실을 상세히 알려주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을 꼭 세상에 알려주시오. 지금 고향에서는 청도를 서울인가 압니다. 꼴을 먹어도 알고 오는 것이 좋겠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기업에서 중견으로 일하는 김모씨가 필자의 손을 부여잡고 부탁한 말이다. 그는 어찌어찌하다가 1천원을 담보금으로 잡혀놓고 마지못해 붙어있는 사람이였다.  담보금 말이 나온 김에 해석이 있어야겠다. 어떤 회사에서는 조선족들이 청도에 많이 몰려든 것을 턱대고 입사시 담보금을 낼 것을 강요한다. 리유라면 조선족들이 듬직하지 못하고 자주 자리를 뜨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속셈 밝은 한국인들의 리익계산이 주되는 원인이였다. 일단 서약서란 것을 쓰고 담보금을 낸 후에는 그 어떤 정당한 요구도 모두 거절당하고만다. 마땅히 올려줘야 할 봉급도 아니 올려주고 뚱딴지같이 무슨 명목을 내세워 많지 않은 봉급마저 제대로 내주지 않는다. 그런줄도 모르고 처음 청도에 오는 조선족들은 무작정 서약서에 사인한다. 좀 깐깐하게 볼라치면 “돌아가시오.”하는 판이라 그럴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였다. 문제는 조선족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기때문이였다. 투자를 하려는 사람보다 취업위주가 대부분이였기에 경쟁이 치렬하였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배부른 흥정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가령 조선족이 없다면 어떻게 될가? 당장 생산이 중지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근심은 하지 않아도 되였다. 아직도 청도거리바닥엔 취업을 하지 못한 조선족이 수백을 헤아린다는 것을 한국경영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때문이였다.  필자가 몸 담고 있는 회사만 해도 7명의 아가씨가 담보금 천원에 묶이워있었다. 그들의 평균로임은 250원정도이고 모두 고중졸업생이지만 일반직원(대부분 초중생)과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언제 부르면 수시로 일어나 통역을 해야 하고 조금만 늦어도 핀잔당하기가 일쑤였다. 그중 설씨성을 가진 치치할아가씨는 필자가 돌아올무렵 어린애같이 엉엉 우는 것이였다.  “장선생이 가시면 누가 또 바른 말을 해주겠어요. 저도 엄마가 보고파요. 여기서 돈도 못 벌면서 개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흑흑…” 돈 천원에 매여서 오도가도 못하는 동포아가씨, 21세 애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얼마나 보고싶겠냐만 그 가증한 서약서때문에 2년을 참아야 하는 동포아가씨를 필자는 위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향에서 지금 하는 일만큼 힘을 내면 그 곱배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무릅쓰고 회사에 온 까닭은 무엇일가? 한국회사가 돈을 무더기로 안겨줄줄 알았던가? 그래도 그녀는 행운아인셈이였다. 필자가 여직껏 만나본 사람중에서 취업하지 못한 시일이 가장 오랜 사람은 계서에서 온 23살난 김군이였다. 렴치를 무릅쓰고 사돈집에, 친구들 집에서 1년이나 얹혀 살면서 분주히 뛰여다녔지만 운명의 신은 시종 미소를 지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김군 역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니였다. 교하에서 온 최씨는 믿을데도 없는 형편에 돈이 뚝 떨어져서 피를 팔아 집으로 돌아갈 로비를 마련했던 것이다. 궁지에 빠진 림구의 박모씨는 같은 려관에 든 손님의 가방을 훔쳤다가 감방신세를 지고. 이러루한 일화는 많고도 많다.  고난의 취업길, 귀숙을 찾은 사람이나 못 찾은 사람이나 똑같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한두가지 실례로 해석이 될 현상이 아니다. 어차피 도시진출은 막을 수 없는 또 막을 필요도 없는 대추세이다. 그러니 잘 되였던 못 되였던 그런 시비는 력사에다 맡겨버리고 우선 먼저 눈앞의 생활상, 인간상부터 진실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청도의 조선족들은 그가 혼자 왔든 여럿 왔든 3년이 되든 석달이 되든 한결같이 집이란 것이 없다. 혹자는 회사 숙사에, 혹자는 세집을 맡고 생활한다. 그 옛날 땅의 부름을 받고왔던 1세들은 흙집이나마 자기 집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살았었는데 오늘날 그 후대들은 땅을 떠났기에 몸을 덥힐 “굴”도 없는걸가. 가방과 보따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방바닥에는 별 오가잡탕들이 지저분히 쌓여있는 것이 마치도 려관같은 느낌이였다. 수시로 머나먼 려행길로 떠나갈듯한 태세들이였다.  래서의 하씨는 금년에 49세인데 다섯식구의 호주였다. 6급 전공이 어느 정도의 기술소유자인지는 필자로서 알 수 없지만 자격증명서까지 보이며 으쓱해하는 것을 보면 전업수준이 꽤나 높은 모양이였다. 룡강현출신이라니까 그곳에 처가를 두고 있는 필자와는 연고가 있는 사람인셈이였다. 퍼그나 반갑다며 한사코 자기 집으로 끌기에 가보았더니 글쎄 이런 법이라구야. 10평쯤 되는 집안에 두치두께의 스폰지 석장을 펴놓고 구들 겸 침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서 밥도 먹고 잠도 잔다는 말인데 남녀성인 5명이 몇달동안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날 그 “밥상”을 마주하고 쓴지 단지를 모르게 한근 술을 들이켰었다.  “돈을 벌어서 무얼합니까? 침대두 사구 밥상두 사구 좀 사는 것처럼 꾸미면 안됩니까?” 주기를 핑계대며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들이대였더니 그 대답 또한 절승경개였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믿는다구 그따윌 다 갖추겠나. 래일 퇴사하라면 하는 판인데.” 마찬가지로 한국회사에서도 조선족을 크게 믿어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족들이 자주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였다. 쩍하면 싸움질하고 도적질하고 며칠 일하고는 나는 가겠소 하고 나눕는다.  로산구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 저녁은 조선족  6명(흑룡강 3명, 교하 3명)이 술을 잔뜩 마시고 거리에 나갔다가 길 가는 한족청년이 자기네를 본다고 다짜고짜 접어들어 육장벌레가 되도록 팼다. 중국 옛말에 사나운 룡도 지방뱀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영문 모를 매를 맞은 한족청년이 가만 있을리 만무했다. 친척, 친구 50여명을 동원하여 회사에 찾아왔는데 단꿈에 빠진 영웅들을 하나 하나 찰떡 쳐준 것은 물론 회사의 쏘나타승용차까지 훌딱 뒤집어놓고 가버렸다. 사장이 정신 잃게 놀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그 경제손실은 또 얼마인가. 즉묵시에서도 이와 류사한 일이 발생했었다. 다르다면 지방애들이 너무 애를 먹여서 조선족 20여명이 집단적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결과 량쪽에서 병원에 입원한 수가 30여명 되였고 조선족은 빠짐없이 퇴사를 당하고말았다. 이런 대규모적인 충돌은 물론 국부적이다. 그러나 조선족을 먹칠하기에는 충족했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강물을 흐린다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회사의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튀는 사건들이 비일비재인데야. 모 회사에서 무역일을 보던 정아무개는 어벌 크게 단번에 12만원의 거금을 가지고 어디론가 튀여버렸다. 필자가 있던 회사에서도 박아무개란 사람이 소가죽을 가져가다가 들키워서 크게 망신을 당하고 퇴사를 강요받은 일이 있었다.  “보시다싶이 조선족은 우리에게 많은 실망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동포라는 점에서 되도록이면 중임을 맡겼댔지만 지금은 그것이 꿈같이 무서워지는 실정입니다.” 모 회사의 리부장이 필자의 질문에 정색해서 하는 대답이였다. 그만큼 현재 조선족의 지위란 것은 운운할 나위도 없이 밑바닥이였다. 사무실인원중에서 최하층인 통역 겸 관리인원인 조선족들은 말그대로 하인과 같은 존재였었다. 그러니 현미경으로나 알아낼 수 있는 극히 적은 몇몇을 내놓고는 영원히 진급과는 인연이 없었다. 한국인은 입사하자마자 차간주임 명찰을 차고 다니고 얼마후면 계장, 과장으로 승급하지만 조선족은 재능이 아무리 뛰여나도 그 어떤 명분도 주지 않는다. 관리인원이란 명색뿐이지 실지는 심부름군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었다. 한국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면 그대로 할뿐이지 수하직원들을 지배하고 거느릴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원래 눈치밥을 잘 먹는 중국직원들이 그 실정을 알아내고는 “네가 뭐기에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며 빡빡 대드는데 복통이 아니 터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가슴 가득하던 웅심은 차츰 사라지고 따라서 무능하고 적극성이 모자란다는 평판을 받게 된다.  림학원 출신의 허씨는 회사에 다닌지 2년이 되여서 일에 환했다. 원체 총명한데다가 직심이여서 성적이 돌출했지만 겨우 주임의 자리를 차지했을뿐이다. 입사한지 두달이 되여서 계장으로 된 스무나문살 되는 한국총각이 그앞에서 거들먹거리다가 된 코빵을 맞았다며 림씨는 서글프게 웃는것이였다.  “일에 행방이 있나요. 제딴에는 한국인이라고 대단한줄로 알겠지만, 일을 핑계로 마구 시켜먹었지요. 사후에 눈치를 알고 노발대발했지만 회사 규정을 들이대며 따졌더니 말문이 막혀하더라구요.” 그나저나 우선 우리 자신부터 가슴에 손을 얹어야 할 것이다. 무엇무엇해도 독립의식이 강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흠집이였다. 한사코 남에게만 의지하려 하고 앉아서 뒤장을 보려한다. 서로 책임을 밀어버린 덕에 응당 받아야 할 대우도 받지 못한다.  어느 회사에서는 전무라는 사람이 채용기에 얼마를 준다고 명확한 표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받아본 사람이 없었다. 한국기업에서는 시용기 3개월이라는 규정이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채용기에 들어서는데 일반적으로 봉급이 시용기보다 50프로 좌우 늘어난다. 뿐만아니라 일종 “보너스”라는 상금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무가 낯가죽 두껍게 입을 합봉하고 있는데다가 그 권리의 향수자들인 조선족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치만 보고 있으니깐. 한편 우리의 문화소질도 확실히 차했다. 모르는 사람은 청도조선족 거개가 대학생으로 오해한다. 실은 대부분이 고중생이고 대학생은 20프로좌우밖에 안된다. 나머지는 초중이나 겨우 다닌 아줌마들과 쉰을 오르내리는 젊은 로인들과 사회부랑배들이였다. 초중생은 물론 고중생들도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전업공부를 했다는 대학생들도 기업에서는 별로 쓸데없는 문과생이 대부분이였고 그나마 거개가 영어를 모르고 있는 형편이였다. 한국회사에서는 기계명칭으로부터 보통 술어에 이르기까지 영어를 통용하고있었다. 그러니까 그 마당에 들어서면 대학생, 고중생, 초중생의 립장이 그만 똑같아지고만다. 다같이 영어를 모르고 다같이 일에 미립이 없는 형편이니깐. 게다가 현장통역이란 것은 조중 두가지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니깐. 그래서 조선족대학생이 한국초중생보다도 못하다는 평가를 들을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의 학교교육을 다시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연해지구에서 그처럼 활발한 직업교육이 우리 이곳에서는 오히려 저조기에 처해있었다. 청도에서는 새로운 형세에 적응하기 위해 적지 않은 중학교들이 직업학교로 탈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중학교들은 아직까지도 좁은 진학선에만 매달리고 있는데 그래서 락방거자가 된 고중생들은 재간은 없고 입만 퍼렇게 살아있는 “기형인재”로 되고말았다. 대학진학도 최종적으로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할때 더 많은 “락방거자”들을 위해서도 직업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외국어선택문제인데 일본어는 시기가 지난 것이라고 본다. 영어야말로 세계적인 언어인 것이다. 한번은 일본회사에 면접을 갔었는데 예상외로 간판부터 상표까지 모두 영어를 쓰고 있었다. 자명한바 영어는 세계인 모두의 필수과목인 것이다. 영어를 모르고서 세계로 진출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학교의 외국어가 새롭게 선택되여야 하지 않겠는가고 건의해본다.  보편적으로 말해서 조선족들에게는 많은 흠집이 있었다. 지식구조가 단일하고 성격이 조폭하고 술을 즐기고 자유산만하다. 그러나 일을 할 때는 몸을 내번지고 한다. 천성이 부지런한 민족이니깐. 또 남달리 총명하여 인츰인츰 일을 배워내기도 하여 한국경영인들도 꽤 만족해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리용의 목적에 그칠뿐이지 내 사람으로 만들자거나 회사의 기둥으로 배양해 보려는 타산은 꼬물도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조선족과 한국인의 모순은 날이 감에 따라 더욱 돌출해졌다.  한국인들은 의식적으로 조선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종한다. 식사를 해도 저희들 식탁을 따로 정하고 사무실, 지어는 세면실, 화장실마저 한국인용으로 따로 정해서 쓴다. 마치도 조선족들이 더러운 거지여서 코를 막고 피하려는듯한 인상을 준다. 어찌보면 한심한 인격무시였다. 자존심을 자극받은 조선족들이 일을 제대로 해줄리 만무했다. 따라서 동족의 우애란 찾아볼 자리가 없고 오히려 한족로동자들과 같은 나라 국민이라는 강한 련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회사에서는 더욱 한심한 규정들을 내세웠는데 이를테면 근무시간이외에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그 리유는 물론 아주 훌륭했다. 안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청시해야 하는데 그날의 관계자에 따라 그 기분에 따라 허락여부가 결정된다. “오늘은 안돼.” 하면 못나가는 것이다. 주관자의 싸인이 없으면 경비가 내보내지 않으니깐. 이런 규정은 휴일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래서 회사를 생감옥이라고 형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희들은 하루가 멀다하게 술집에 나가면서도 조선족더러 술을 먹지 못한다는 엄명이다. 몇푼 안되는 봉급으로 술집에 갈 주제들이 못되고 하니 숙소에서 짭짤한 채소에 술 한모금 마시며 피로라도 풀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허용하지 않으니 젊은 나이들이 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번은 모 회사의 몇몇 젊은이들이 한국인들이 밖에 나간 틈을 타서 도적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들이여서 그만 재미가 들어 시간개념을 잊어버리고말았다. 한밤중이 되여 사장님이 거나해서 돌아오는데 숙소들이 환하고 떠들썩했다. 문을 활 열고 들여다보니 술놀이가 한창이였다. 단통 욕사발이다.  “이 개놈들아. 술을 처먹구 있어? 그게 무슨 물인지나 알고나 먹어?!” 이쯤이면 세상은 끝난 거다. 억눌렸던 분노의 총폭발이랄가. 혈기의 젊은이들이 약속없이 후다닥 뛰여일어났고 사장님을 비롯해서 5명의 한국인이 잠간새에 땅바닥에 나누웠다. 할아버지를 부르며 잘못을 비는 것도 사정없이 주먹으로 치고 발로 짓밟았다. 그러고는 보따리들을 둘쳐메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사장님도 술김에 그랬겠지. 너무하지 않아. 년세도 있고 한데. 사후의 평론이다. 그러나 전후인과를 따져보면 그런 것도 아니였다. 석자 얼음이 하루에 얼구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욕설이란 것도 단번에 생기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정신병자들아. 왜 아직도 전등을 끄지 않았어?” 장부결산을 하다가 이런 소리에 후다닥 놀라 현장에 뛰여내려가 보면 규정대로 행여나를 념두에 두고 밝혀놓는 전등 하나가 고스란히 켜져 있을뿐이다. 그래도 “녜, 죄송합니다.” 한다.  “상넘들아, 창문도 걸지 않구 뭘해.” 그래서 달려가보면 창문고리가 마사진 것이다. 그래도 “예, 미안합니다.” 한다. 위촉과 타협이 한국인의 오만을 키워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족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준비를 해야 하고 저녁 늦게까지 현장정리를 해야 한다. 연장작업을 해도 연장비라는 것이 따로 없다. 그래도 즉살날 욕은 항시 떠날 줄 모르고.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곱게 자라난 조선족청년들이 그 고된 로동과 심리적고통때문에 신체가 때이르게 허약해졌다. 서란에서 온 양씨는 반년남짓한 사이에 코피만 해도 서른번은 터졌다고 한다. 연변태생의 최씨는 얄편한 몸으로 남성 두사람몫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번 드러눕기만 하면 크게 앓을 징조가 뚜렷했다.  아무렴 그렇게 해주어도 봉급만은 변동이 잘 되지 않는다. 돈에 그렇게 짠 사람들이였다. 금방 입사한 한국인에게는 하루 몇십원씩 하는 고급 호텔에 주숙시키면서도 조선족에게 10원을 더 줄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열삼일을 연구한다. 지난해초만 해도 일반 회사의 시용기 봉급이 보통 3백원이였는데 후에는 260원까지 내려간 회사도 있었다. 그래도 취직자는 줄을 서고. 어떤 도경으로 어떻게 왔든지를 불문하고 어쨌든 외가닥나무에 목매죽을 민족이라는 인상이 진하다.  여하튼 청도는 우리의 의지를 단련하고 능력을 검열하는 훌륭한 고장이였다. 거기에는 눈물도 있고 흔들림도 있지만 동시에 획득과 성공도 있었다. 4년간의 고심참담한 노력끝에 드디여 무역과장으로 날랜 활력을 보이는 김성수씨, 일반 회사 직원으로부터 서비스회사 사장으로 된 한룡태씨, 그리고 한국직원들의 헌신적인 사업정신은 우리에게 산 본보기로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청도진출을 정주영옹의 말씀대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평가하고싶다.                                                                                                                                                                                                   1994년 2월                                         
106    별찌와 초불 댓글:  조회:483  추천:1  2017-08-21
    별찌와 초불 장학규      해마다 8,9월이 되면 중국 한겨레 사회는 갑자기 자극을 받은 용암마냥 부글부글 끓어번지기 시작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꺼번에 떨쳐나와 알락달락한 새 옷을 차려입고 촌 운동회로부터 향 운동회, 현 운동회, 지구 운동회, 성 운동회, 전국 운동회까지 줄기차게 펼쳐나간다. 거기에 심심찮게 문예 경연이란 것까지 곁들여 퍼그나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양상을 나타낸다. "중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이처럼 멋지게 살아갈 줄 몰랐어요." 몇몇 고국분들의 한마디 칭찬에 모두들 정신이 혼미해져 올리 추슬러진 짧은 바지가 팬티가 되여가는 줄도 모른다. 기실 그 화려한 표피를 벗기고 안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통채로 "무깍지", 좋게 말하면 빛 좋은 개살구요 속되게 비유하면 그대로 비단보에 개똥이다. 얼씨구 절씨구를 사나흘 하고 집에 돌아가면 여전히 앞이 캄캄하지 않고 뭔가?! 배는 기름기를 재촉하고 아들은 처녀 게걸이 들어서 한숨을 톺고 어린애는 엄마를 내놓으라고 발버둥히지 않는가? 무당 굿하듯 얼씨구 절씨구를 푸닥거려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면 몰라도 이건 순전한 랑비가 아닐 수 없다. 애들이 책 한권 사도 펄쩍 날뛰던 량반들이 그런 곳들엔 잘도 찾아와서 흔전만전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 이 넘의 민족성이란 것이 해괴하다고 할 수 밖에... 그런 놀음을 한번만 중지하고 그 돈들을 한데 모으면 오상조선족사범학교는 열번도 넘게 하얼빈으로 이사했을 것이다. "여보,그런 모임도 없으면 우리 민족은 아예 죽은게 아니요?" 혹자는 이렇게 변명을 늘여놓을지 모른다. 어쩌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잠자는 고양이처럼 늘쌍 소리 소문없이 살았으니깐, "야웅"이라도 한번 질러서 살아 있음을 알릴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론을 하면 그게 바로 문제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모두들 어디 가서 죽어 있다가 한꺼번에 별찌처럼 나타나 반짝하는가 말이다. 어디가 좋다 하면 썰물처럼 와야 밀려나가고 무엇이 어떻다 하면 밀물처럼 후다닥 달려드는 여기에 우리 민족의 큰 약점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 민족만큼 시공간 공백을 자꾸 만들어내는 민족은 다시 없을 것이다. 죽었으면 고스란히 죽은 흉내를 줄창 내면서 실속을 굳히던가 아니면 살아있음을 나타낼바엔 하다못해 초불만큼 빛을 내더라도 꾸준히 가물거리는 것이 인간의 도리요 지혜가 아닐가 싶다. 심양에서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주임이라는 량반과 소위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니 마침 점심때가 되였다. '어디 가서 대충 요기하지." "그럽지요." 주임은 많이 까다로운 편이여서 조선족이 만든 음식이 아니면 절대 입에 대지 않는 성미였다. 그래서 그 "대충 요기"가 반시간이 넘도록 할 수가 없었다. 한글 간판을 보고 들어서면 여불 없는 한족 식당이였다. 다섯번째든지 여섯 번째든지 마침내 체념을 하고 척 들어 앉아 랭면 한그릇씩을 받아들었는데 소위 랭면이란 것이 차지는 않고 지독하게 달기만 했다. 주임이 저가락을 던지고 음식 타발을 하는 사이에 나는 심부름하는 아가씨와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다. "랭면도 바로 못하면서 한글간판은 왜 내걸었소?" "원 주인이 조선족이였어요." "그러니까 영업 허가서를 새로 내지 않고 그대로 물려 받았단 말이지?" "그런 셈이지요." "본래 주인은 어디에 갔소?" "듣자니 한국에 갔다더군요." 허참 역시 그런 판국이였구나. 개혁개방 초기에 우리 음식점들이 수풀처럼 왁자하게 일어섰던 진한 풍경을 독자 제씨들은 잊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대중 도시들에 어지간히 널려 있는 조선족 음식점의 주인들속에 진정 우리 민족이 경영하는 것이 얼마 안된다는 것도 직접 보고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곳에서 꾸준히 버티며 일해온 사람은 백에 한사람이나 될가 말가. 모두가 잠간 별찌가 되여 반짝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이다. 토끼가 나무에 부딪쳐 죽는 일은 우연중의 우연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렸을 때 우화를 통해 이미 배웠었다. 그리고 합리성이 배제된 우연이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철학을 통해 벌써 알았었다. 세상에 노력을 들이지 않고 공으로 생기는 덤이 어디 있겠는가? 공짜애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어디서 보았던지 들었든지 하는 우스운 이야기 한토막을 적어본다. 려객기 한대가 하프리카 사막지대를 날아지나다가 고장이 생겼다. 락하산은 충분히 갖추어졌던고로 스튜디어스는 손님들더러 급히 뛰여내릴 것을 요구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까딱 할 념을 하지 않았다. 비행기는 고도를 떨구기 시작했고 사색이 된 스튜디어스는 헐레벌떡 기장을 찾았다. "아, 글쎄 저것들이 입 아프게 동원해도 도무지 목숨들이 아깝지 않는지 통 움직일 념을 하지 않아요." 수십년 비행 경력을 갖고 있는 기장은 알았다는 듯 시무룩이 웃더니 앞에 나섰다. "여러분, 우리 한번 모험 행동을 해봅시다." 그러자 귀신에게 홀리운 듯 노랑 머리에 파랑 눈을 가진 친구들이 하나 둘 걸어나와 무작정 락하산을 집어들고 뛰여내리는 것이였다. 그들이 다 뛰여내리기를 기다렸다가 기장은 이번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그럼 이번에 경쟁을 벌려봅시다." 그러니깐 작달막한 일본인들이 부랴부랴 뛰여내리는 것이였다. 여태까지 태평무사하게 잠자코 있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우리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기장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여러분, 이번에 공짜 놀음 놀아보시죠?" 와! 려객기가 땅에 코를 박기전에 한사람도 빠짐없이 살아났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우리는 그 공짜를 바라서, 그 우연을 바라서 눈알이 동그래서 살아간다. 일단 그런 것들이 모종의 징조를 나타내면 뭘 본 오리처럼 오구구 모여들었다가 그것이 별찌처럼 사라지면 따라서 돌멩이 습격을 받은 닭무리처럼 활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에겐 초불과 같은 지구력이 필요하다. 어쩌다 땡 잡았다고 진취심을 잃고 배를 쑥 내밀고 안하무인격으로 놀아대는 사람들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남의 나온 배를 손가락질 하며 허송세월 하는 인간들도 부지기수이다. 단 한가지 착실하게 일을 배우고 해나가는 분들이 너무너무 부족하다. 지금은 21세기, 강자생존의 시대이다. 요행은 없다. 사회와 시대의 언덕에 기생하면서 안일을 자랑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오로지 꾸준히 삶을 개척하고 꾸며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105    항일 로전사 리화림을 찾아서 댓글:  조회:374  추천:0  2017-08-21
겨레의 딸 민족의 넋 항일로전사 리화림을 찾아서      얼마전 기자는 금방 92돐 생일을 지낸 로항일투사 리화림녀사를 방문하였다. 고령임에도 그이의 정신과 담소는 그처럼 정력적이였다.  기자는 첫대면이였지만 그이가 얼마전 써낸 장편회억록 “원정(征途)”의 내용을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1 리화림 녀사는 1905년 1월 6일에 조선 평양시 경창리의 한 빈한한 시민가정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여났다. 본명은 리춘실, 아시아패권을 쟁탈하기 위한 일로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매듭지어 조선의 외교권이 송두리채 뽑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다사다난한 시대에 태여나서 자란 리화림 녀사는 망국노의 설음을 한껏 맛보았었다. 다행한 것은 인자한 어머니 김인봉씨와 어려운 살림때문에 배움을 빼앗긴 민족독립활동가인 큰오빠 리춘성씨의 적극적인 추진하에 미국인전도사가 꾸린 사립학교 숭현소학교에 입학하여 초기계몽교육을 받았다. 동시에 조선인 선생님들로부터 리순신, 안중근 등 민족영웅들의 사적을 상세히 알게 되여 애국주의사상을 무르익혀갔다.  그무렵 충실한 기독교신자인 어머니는 아들 춘성씨의 반일활동을 몰래 도와주고 있었다. 어느 하루, 리화림녀사는 어머니의 불품을 정리하다가 깊히 숨겨둔 태극기를 발견하였다. 여직껏 단군신화나 춘향전 같은 고전적인 이야기만 해오던 어머니에게 이렇게 큰 비밀이 있을줄은 몰랐다. 그것이 계기가 되여 그들 모녀간의 거리는 한결 가까와졌을 뿐만아니라 어머니를 통해 민비피살사건도 료해하였으며 망국의 진정한 원흉이 어떤자들이란 것도 알게 됐다. 일제에 대한 원한의 씨앗은 어린 가슴속에 그렇게 심어졌던것이다.  그때로부터 리화림 녀사는 오빠 리춘성씨의 비밀 련락원이 되였다. 어머니는 “군자금”조달에 나섰고 그녀는 오빠네가 찍어낸 삐라를 숨겨두고 비밀문건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한번은 오빠가 금방 새로 찍은 삐라를 집에 가지고 왔는데 왜놈의 끄나불이 어느새 낌새를 맡고 뒤를 쫓아왔다. 위급한 그 시각에 불쑥 꾀가 떠오른 리화림 녀사는 재빨리 삐라를 어린 조카애가 덮고 있는 이불속에 밀어넣는 동시에 조카애를 힘주어 꼬집어놓았다. 철부지 조카애가 자리러지게 울어대자 그녀는 달래는척하면서 삐라를 조카와 함께 이불에 감싸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차례의 위험은 그녀의 민첩한 반응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하여 모면되였다.  어머니는 물론 로련한 혁명가인 리춘성씨마저 그녀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이 도화선이 되여 1919년에 “3.1운동”이 터지자 열다섯살난 리화림 녀사는 동학들과 함께 거리에 뛰쳐나가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일제군경과의 직접적인 투쟁을 통하여 리화림 녀사는 의지를 련마했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였다.  1920년 리화림 녀사는 숭의녀자중학 유아사범반에 입학하였다. 재학기간 평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조직된 “력사문학연구회”에 참가함으로써 처음으로 공산주의 리론과 접촉할 수 있었으며 학습을 거쳐 공산주의 사회란 구경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되였고 공산주의를 실현하여야 비로서 인민의 행복한 생활이 보장된다는 도리를 초보적으로나마 인식하게 되였다.  유아사범반을 졸업한 후 전라도, 함경도를 전전하면서 고험을 겪은 리화림 녀사는 1927년 11월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조선독립운동의 최전렬에서 맹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조선공산당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해산되자 방황과 고뇌속에서 모대기던 리화림 녀사는 특무와 경찰의 검문까지 받게 되여 부득불 30년도초에 조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2 1930년 3월, 리화림 녀사는 목적지인 상해에 도착하였다. “모험가의 락원”으로 유명한 상해는 당시 여러 제국주의 렬강들이 제각기 한구역씩 뜯어가지고 있는 형편이였다.  국내의 소개인이 가리킨대로 리화림 녀사가 찾은 이는 유명한 애국자인 김두봉선생이였다. 비록 조선공산당은 해체되였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과 추구를 그때까지도 고이 간직한 리화림 녀사는 고려공산당출신인 김두봉선생을 통해 상해의 조선공산당인들과 접촉할 것을 갈망했으나 그 내부의 파벌투쟁이 심하다는 소개를 듣고는 저도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국외에 나와서까지 집안다툼을 벌리는 것이 민망스럽기도 했다. 원쑤에 대한 불 타는 적개심을 한가슴 가득 안은 리화림 녀사는 무모한 파벌투쟁에 휘말려들기도 싫었거니와 직접 일제와의 혈전장에 나사고싶어 김두봉선생의 소개를 거쳐 오래전부터 숭배해오던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구선생이 친히 령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때가 바로 세계를 놀래운 “9.18사변”이 일어난 1931년 가을이였다.  “한인애국단”은 상해림시정부의 소속하에 있었는데 김구선생이 대장직을 겸임하고 할빈역두에서 조선총독 이또 히로부미를 쏴죽인 안중근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선생이 참모직을 맡고 있었다. 이 조직의 임무는 주로 일제의 요인들과 조선의 간첩과 변절자를 암살하는 행동으로 전 세계에 조선민족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따라서 조선민족을 항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는 것이였다. 원체 성격이 테러형식이였던만큼 이 조직은 성립초기부터 녀성 성원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김구선생과 면대한 자리에서 리화림 녀사가 어찌도 절절하게 자신의 경력과 애국심을 호소하였던지 김구선생은 감동된 나머지 파격적으로 그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업의 편리를 위하여 리화림 녀사는 리춘실이라는 이름을 리동해로 고쳤다.  처음 리화림 녀사의 임무는 상해에 온 조선교민, 특히는 녀성들을 고찰하고 감시하는 것이였다. 이기간 리화림 녀사는 남다른 지혜와 총명으로 조직에서 맡겨준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여 김구선생의 칭찬까지 받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일선활동에도 참가하였다.  한번은 김구선생의 애인 신분으로 변장하고 김구선생과 함께 조선에서 온 특무를 유인하여 깜쪽같이 해치운적도 있었다.  이 조직은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두고 전해질 두가지 거사를 해내였다. 그것은 리봉창의사의 일본천황암살사건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폭발사건이였다. 이 두 사건의 획책자는 김구선생, 리화림 녀사는 두 사건에 직접 참여한 력사의 견증자로 오늘날 건강하게 생존해있다.  1931년 7월초에 일제의 도발하에 발생된 “만보산사건”은 중조인민간에 불신과 반목정서를 일으켰다. 두 나라 인민을 깨우쳐 공동한 원쑤를 대적하기 위해 김구선생은 리봉창의사와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1901년 수원의 중산가정에서 태여난 리봉창의사는 일어를 류창하게 구사할 뿐만아니라 어느 한 일본귀족처녀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리봉창의사는 이 점을 리용하여 일본에 잠입한 후 천황이 열병식에 나오는 기회에 암살하려고 타산하였다. 그때 김구선생의 비서격이였던 리화림녀사는 김구선생의 부탁을 받고 리봉창의사에게 작탄 두개를 감출 수 있는 내의를 밤도와 지어주었다. 비록 1932년 1월 8일의 암살행동은 천황을 놀라게 하는 것으로 실패를 선고했지만 세상에 조선인의 기개를 널리 전했던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상해의 일본침략자들은 천황의 생일을 계기로 홍구공원에서 성대한 기념대회를 가졌다. 리화림녀사는 윤봉길의사와 부부명의로 홍구공원에 잠복하여 그번 모임을 타격하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사전에 두사람은 지형을 고찰한 후 알맞는 자리까지 잡아놓았다. 후에 리화림녀사가 일어를 잘 모르는데다가 두사람이 행동하면 목표물이 커서 불편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윤봉길의사가 혼자서 거사하기로 결정되였다. 그러나 리화림 녀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활동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1932년 4월 29일의 민족사에 당당한 한자리를 굳히게 되였던 것이다.    3 1932년 늦여름, 리화림녀사는 마침내 김구선생의 투쟁방법이 썩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결연히 혁명의 발상지인 광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조선민족당에 가입, 이름을 리화림으로 고치고 중산대학 의학원 부속병원에서 견습간호원으로 일하면서 학습과 투쟁을 결부하는 공식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에 중산대학 법률학부에 다니는 김창국씨와 결혼, 아들 우성(雨星)을 낳고 갈라졌다. 자식을 사랑하는 세상 부모들의 마음은 매한가지지만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는데 미소한 힘이나마 보태려고 안온한 가정을 버리고 선뜻 투쟁의 한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1936년 1월, 조선민족당의 파견을 받고 광주를 떠나 남경에 도착한 리화림녀사는 조선민족혁명당총부(개칭됨) 부녀국에서 위원사업을 하였다. 부녀의 지위와 권리를 제고시키는 선전활동에 몸담았고 결국 그것이 가정 모순을 초래하여 짤막한 제2차 혼인생활을 결속지었다.  이듬해 겨울, 일본군이 남경에 대한 공격을 다그치자 로약병자를 이끌고 중경으로 전이, 여기서 김구선생과 희극적인 재상봉을 하였다. “한인애국단”시절에 의식적으로 숨겼던 공산당원의 신분을 이번엔 자랑스럽고도 솔직하게 김구선생에게 고백하였다.  “그럼 이후 다시 만나지 맙시다.” 김구선생의 이 한마디 말로 그들은 지척에 있으면서도(림시정부도 중경으로 옮겼다.)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비록 김구선생을 그렇게 흠모하고 존경하였지만 리념의 차이는 거래의 장벽이 되였던 것이다.  그만큼 리화림 녀사는 이미 사상적인 전변과 성숙을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광대한 근로대중을 압박과 착취속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키려면 오직 공산주의 한길로 나갈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굳혔던 것이다. 1938년 10월 10일에 성립된 조선의용대(총대장 김약산)는 리화림녀사를 부녀대 부대장으로 임명, 무한보위전에서 그녀는 광주견습간호원시절에 익혀둔 의술로 적지 않은 부상병을 구해주었다.  그후 국민당정부의 소극항전정책에 불만을 느낀 조선의용대는 41년도에 항전의 봉화가 세차게 타오르는 태항산에로 진입하여 팽덕회, 라서경 등 팔로군지도자의 접견을 받았으며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사령원 무정)으로 개칭되였다. 리화림 녀사는 부녀대 대장으로 임명되여 가렬처절한 전투속에서 더없는 용감성을 보여주었다. 1945년 무정 사령원의 파견으로 연안중국의과대학에 20기 학원으로 들어갔으며 연안에서 일제의 무조건투항을 영접하였다.    4 일본이 투항한 후 조선의용군은 국민당의 간섭과 교란으로 하여 제때에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런 정황하에서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중국해방전쟁에 떨쳐나섰다.  1946년 리화림녀사는 조선공산당 당원으로부터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적했으며 중국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그 산하 제1분교(연변의학원 전신)에 배치받았다. 1948년에 사업의 수요로 조선인민군 제6독립군단 전선의무소 소장으로 전근하였다.  “6.25”조선전쟁이 폭발된 후 어느 한차례의 상병원 호송길에서 리화림 녀사는 미국비행기가 던진 폭탄에 다리부상을 입고 후방병원으로 이송되였다.  1952년 여름에 2등 을급잔폐증을 발급받고 선후로 료녕와방점 강복(康復)병원 기술과 과장, 심양의사학교 부교장, 교통부 위생처 기술과 과장, 연변위생국 부국장, 국장 등 직을 력임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한인애국단”에 참가한 경력으로 하여 3년간 옥살이도 하였으며 1978년에 대련시칠실 시찰원으로 조동하였다.  현재 리화림 녀사의 생활은 혁명전쟁년대처럼 소박하고 근검하다. 기자를 영접한 리화림 녀사는 곤색데트론 옷에 헝겁신을 신고 있었다. 리화림녀사는 그렇게 아낀 2만원 돈을 당비로 바쳤으며 1986년에는 연변아동문화기금회에 1.2만원을 기증하기도 했다.  기자를 마주한 자리에서 리화림 녀사는 대련시정부 판공청 로간부처에서 그의 일상 생활을 관리하고 있는데 별 불편함이나 부족점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6일 92세 생일때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 찾아와 축하해주었으며 특히 시부련회에서 병치료 귀걸이를 선물로 가져왔다면서 자신은 큰 공로도 없지만 당과 정부 및 인민은 크나큰 영예를 안겨주었을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그렇게 하고싶었던 대학공부까지 시켜줬으며 오늘은 또 즐거운 만년을 보내라고 이처럼 관심해준다고 감개무량해서 말하였다.                                                                     1996년 2월 
104    고무풍선과 성냥갑 댓글:  조회:563  추천:1  2017-08-03
수필 고무풍선과 성냥갑 장학규     주말이 되어 집이라고 찾아들어가니 아들 남이가 애비를 그 무슨 돈 퍼내는 기계로 본 듯 고무풍선을 사내라고 대번에 졸라댔다. 한주일 못본 그리움보다는 물건 욕심이 더 심했던 모양이다. 조금은 서운했다고 할가. 단통 오라지 않으면 학교에 갈 사내애가 고무풍선을 놀아서는 안된다고 호통을 쳤는데 못난 애비의 옹고집을 닮아서인지 한사코 떼질썼다. 그래서 별 수 없이 거리에 나가 큼직한 걸로 골라 사주었더니 이눔의 개구쟁이가 줄을 쥐고 노는 것만으로 만족되지 않았던지 그만 줄을 활 놓아버린것이었다. 중국인의 익살을 그대로 빈다면 자세는 고운데 행동이 미웠다고나 할가. 고무풍선은 생각밖에 자유를 얻어서 두둥실 하늘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이는 애가 나서 발을 동동 굴러댔다.   “아버지, 저거…” “임마, 저거 할 때는 이미 늦었어.”   작은 내 키가 남이에게는 하늘 높이만큼 커 보였던지 바삐 붙잡아달라는 요청이었으나 나로서는 심드렁한 대꾸밖에 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이 놈이 체념을 했던지 불시에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   "아버지,저거 계속 하늘로 올라가나?" "그럼.고무풍선은 공기보다 가볍기 때문에 공기의 부력을 받아 하늘로 떠오른단다.그렇게 세상을 두루 구경하다가 더 오르지 못할 때 기압에 의해 빵하고 터지는 것이지."   철부지 어린애가 알아 듣지도 못할 말을 주절주절 지껄이다가 느닷없이 저절로 이마를 탁 쳤다.말하자면 영감이란 것이 떠오른 것이다.   어쩐지 우리 민족 개개인이 고무풍선이고 우리 민족 사회 전체가 고무풍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여느 민족보다 격변기에 강한 민감성과 적응력을 보여주며 왁자하게 일어선 것이 바로 우리니깐.짠지 장사로 부터 시작하여 음식업,유흥업을 거쳐 연해도시 진출,출국붐에 까지 이른 것이다.수풀처럼 일어선 이 민족의 총명과 담량 그리고 에누리 없는 실천성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나가자,어디로든지 나가자." 누구라 없이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하고 있다.그래서 민족의 본거지였던 농촌이 텅텅 비게 되었고 따라서 도시 인구는 급장성을 보여 주게 되었다.사람마다 출국을 논하고 누구나 돈 벌이를 운운한다.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한국은 물론 러씨아,일본,미국,독일이 어쩌고 저쩌고 안 가본 곳이 없다.아주 멋스러운 풍경이다.높이 서야 멀리 내다 볼수 있다는 견지에서 보면 그야말로 기껍고도 흥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옛 시구에도 이르기를 "천리밖을 보려거든 한 계단 더 올라야 하리." 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와는 달리 한족 사람들은 비교적 봉페적인 삶을 살고 있다.특히 중원지방의 한족들은 현성에도 아니 가볼 정도로 움츠린 생을 영위하고 있다.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돈은 어림 짐작으로 절대 알아 맞힐 수 없다.) 돈이 아까와서이다.그들 역시 "경제 제일"을 외치는 우수한 민족이지만 구두쇠처럼 아끼고 절약해야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원시적인 철학을 극단에로 이끌어간 사람들이다.돈이 든다고 계집애는 초중에도 보내지 않고 돈이 아깝다고 하루 세끼 찐빵에 파밖에 먹지 않으며 유람이나 사회경험을 목적으로 한 소비 같은 것은 종래로 할념을 않는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1200여명의 여직원이 있었는데 고등학교이상 학력을 가진 직원은 겨우 20여명,나머지 태반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소위 "두 뇌가 간단하고 사지가 발달한 " 유형에 속했다.엎어지면 코 닿을 시내에 3,4년이나 가보지 못했다고 자랑(?)하는 직원이 얼마나 많은지 막 하품이 나갔다.그러한 그들이었기에 찐빵을 싸들고 와서 하루에 15-16시간 일해도 봉금은 200여원밖에 받을 수 없었다.그래도 그들은 만족이었다.어쩌면 만족하지 않을 수 없겠지.그들을 보면서 나는 자주 옛날에 쓰던 "우마와 같은 생활을 한다."는 비유가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용케 모은 돈으로 그들은 손바닥만하게 칸칸을 막은 벽돌기와집을 짓고 또 담장을 두른다.바깥 세상을 전혀 모르고 사는 그들의 삶을 성냥갑에 비길만 하다.진시황이 장성을 쌓았고 주원장이 "돼지는 가두어서 키운다.(猪为圈)"는 담장문화를 발명했지만 기실 알고 보면 그렇게 견고한 것도 못된다.손으로 움켜쥐면 바스라지는 그 성냥갑 같은 테두리를 중원인들은 아직까지 그냥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무풍선처럼 붕 떠오른 것이다.우리에게 테두리가 원체 없었던 원인인지 모른다.그리고 떠돌이 민족의 피가 계속 이어진 까닭이 아닐가 싶기도 하다.여하튼 우리는 시대의 앞장에서 신나게 달리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번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이를테면 나의 철부지 아들 남이처럼 고무풍선의 줄을 놓아서는 절대 안된다는 말이다.세상을 바로 알고 두루 멋진 인생을 개척하자면 고무풍선처럼 올리 뜰줄도 알아야 하겠지만 줄을 잘 조절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박하고 중요하다.자칫 놓치면 나중에 터지고 말 것이니깐.   발써 이런 실례가 우리한테는 수두룩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느 분은 장사에 출국에 해서 50여만원을 벌었으나 3년만에 남김없이 깨끗이 불어먹고 적자까지 생겨났단다.돈이 있노라고 넓은 아빠트를 사서 굉장하게 장식해놓고 날마다 술추럼에 가라 ok 출입을 하다보니까 어느새 돈이 미꾸라지처럼 달아났다는 것이다.그래서 무슨 일이든 벌리겠다고 집을 저당잡히고 여기저기서 꾸어서 시작한 것이 준비 부족으로 실패,집을 빼앗기고 바깥에 나앉게 되었다.몸이 불편하신 노모가 아빠트 출입문을 부여잡고 비감의 눈물을 줄줄 흘릴 때 5척 사내의 가슴은 말그대로 터질듯 했다고 한다.그러나 그것은 뒤늦은 후회,인생을 훼멸에로 이끌어나간 비극이었다. 부모가 한국에 간 어느 후레자식은 돈 자랑을 하느라고 자가용을 사서 하는 일 없이 온동네를 쏘다니고 땔 것, 쓸 것 할 것없이 이웃의 한족사람에게 삯을 주며 사들인다. 손군을 거느리는 할머니가 보다 못해 문밖까지 실어온 나무라도 저절로 들어놓으라고 호통하니 한다는 대답이 "까짓거 되넘에게 10원만 주면 다 해결되겠는데..."였다. 10원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빈들빈들 자기는 놀면서 허황한 돈을 쓰는 그 행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오죽했으면 그 돈을 번 한족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겠는가. "당신네 조선족 청년들은 점점 망태기오!"   우리가 연해지구에서 또는 외국에서 벌어온 돈이 지금 야금야금 타민족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그리고 이런 생활 태도로 살아간다면 그들을 부려 먹은 10배의 후과를 우리가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민족의 중국 이민 백년사가 이 점을 충분히 증명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전세대들의 역사를 답습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래서 노파심으로 하는 말이지만 고무풍선이 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좋은 일이지만 꼭 줄을 잊지 말고 잘 틀어쥐어야 하는 것이다. 줄의 역할이 관건이라 하겠다.
103    극단 종족 댓글:  조회:510  추천:0  2017-08-03
수필 극단종족 장학규 타고난 자비심때문인지 아니면 못된 심리의 작간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가까운 문우나 선배들에게 편지 문안을 할때면 언제나 서두에 “못난 장학규가 인사 드립니다” 운운하기 좋아한다. 그만큼 자신의 형상에 스스로도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자주 느끼게 된다.    삼라만상이 깊은 잠에 푹 취해버린 한밤중이면 나는 한번쯤 거울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그때마다 나를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준 엄마, 아버지가 얼마나 야속한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자신의 루추함을 시인하는것만큼 비참하고 애처로운 일이 더는 없을것이다. 모두들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산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어찌보면 스스로 못났음을 승인하는데에는 일종의 용기와 도량이 요구될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 땅에서 꿋꿋이 살아갈수 있다면 그것은 그로서의 자신심과 도고함이 안받침되였기때문일것이다.    나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보잘것 없지만 나라고 남에게 미안하지 않을 구석 하나쯤이야 없겠냐 따위로 생각을 고쳐 먹고보면 전혀 그런 구석이 없는것도 아닌상싶다. 안 그러면 진작 실망해서 비천한 이 삶을 종말지었을것이지 오늘날까지 살아서 삼촌불란지설을 까불락거릴 까닭이 없을것이다. 물론 그 구석이 어디라고 찍어 말할수도 없고 또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여하튼 동서남북을 굴러다니면서 나는 주위 사람들의 기분을 잡쳤거나 부담거리로 되여본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예쁜 녀인의 추파까지는 몰라도 적어서 방색을 당한것 같지는 않다.    결국 나에게도 인기를 끌만한 한 모퉁이가 있다는 말이 되겠다. 자아감각이 좋아도 이만저만이 아닐것이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인간의 건전한 심리가 아닐가.   철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두고 이률배반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사물 내부에는 긍정과 부정의 요소가 병존하면서 끊임없는 투쟁으로 사물의 발전을 촉진한다는것이다.    어폐가 돌지는 몰라도 문화도 모종 의미에서는 사물이다,. 사물인것만큼 문화의 속성도 긍정과 부정의 통일이여야 할것이다. 이 량자중 어느 한가지라도 없으면 그 문화는 곧바로 발전을 정지하고 나아가서 자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요즘 볼라니 우리의 문화에 상기한 절대적인 긍정 또는 절대적인 부정의 징조가 나타나 저으기 불안해진다. 가장 돌출하게 표현되는것은 언어의 사용에서이다.    한국회사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부장이란 작자가 지나가는 나에게 “애, 키 좀 보자.”고 해서 딴에는 작은 내 키를 비웃는것으로 잘못 알고 크게 흥분한적이 있었다. 후에야 그 소위 “키”라는것이 “열쇠”의 영어발음이라는것을 알고 저도 모르게 하품 같은 웃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제길, 열쇠면 열쇠지 무슨 개나발같은 키야!) 속으로 주먹같은 욕설이 부글거렸다.    그런데 2년나마 편집사업을 해보니 그보다 더 한심한 일도 있었다. 사업상 관계로 고국의 책자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였는데 남쪽은 세계화를 추진합네 하고 외래어를 잔뜩 끌어들여 사전 찾기에 볼장을 다 보겠고 북쪽은 고유어화를 제창합네 하고 함축어를 길게 늘어놓아 숨이 꺽 막힐 지경이다. 말이란것은 알아듣지 못하면 그런대로 다시 해석이나 할수 있지만 글은 한번 적어놓으면 그만이니까 결국 죽어나는것이 독자제씨들이다.    “제발 불쌍한 이 창생들을 어여삐 여겨조소서”   손을 싹싹 비비며 기원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문화가 수용성(자체부정)과 배타성(자체긍정)을 모두 갖고 있는것은 좋은 일이나 그것이 두개의 공동체에서 각기 극단에로 나간다는것은 우려될바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것은 모름지기 동질성을 이질화에로 끌고나가는 결과를 초래할수밖에 없을것이다. 귀족적인 로마제국이 망한것이 “제 잘난” 탓이였다면 만족의 붕괴는 “제 못난” 탓이란 점을 우리는 명기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로서 우리는 강 건너 불모듯 할수도 있을것이다.    문제시되는것은 지금 우리 사회도 색다르게 돌아가는것이다. 어떤 작가량반들은 먹물 자랑을 하려는듯 알맞는 “언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문자”의 렬거에만 집념하는가 하면 두루 해외나들이나 한 분들은 서투른 ‘알파베트”치장에만 여념이 없어 애매한 편집들이 비지땀을 쏟게 한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우리 글”이라고 입가림만은 모두들 잘한다. 이처럼 닭살이 돋아나게 얼룩을 지우고 만신창을 만들어버린 언어가 구경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로서는 알바 없다. 모름지기 약소민족만이 할수 있는 넉두리 아니면 자기기만이 아닐가 하는 서글픔이 마음 한구석을 메울뿐이다.    한족사람들은 종래로 자기 글자랑을 아니한다. 그만큼 네모글자인 한자는 배우기도 어렵고 쓰기도 힘들다. 한평생 배워도 못다 배울 글자가 한자이다. 이 점은 한족 모두가 승인한다. 대국인다운 풍도라 할가? 그래서 략자를 만들고 미래의 대비로 병음문자까지 창제해낸 한족이다. 꼭 영어를 써야 세계진출이 이룩되는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고유문자를 고수해야 민족보전이 이룩되는것이 아니란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하여 새로 생겨나는 단어들을(어느 나라것이든) 곧잘 한문화시키고 따라서 스스로 번체자를 간체자로 바꿀수 있는 문화적 도량을 그들은 갖추고 있다.    한족과 비교해보아도 우리는 극단종족이 틀림없다는것을 승인해야 할것이다. “옳다”가 아니면 꼭 “아니다”로 해석해야 하는 직선적인 사유를 지닌것이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갑, 을 두 딱친구가 있었는데 갑의 주먹코가 을에게는 하냥 복코로 보였고 을의 껌벅눈은 매양 지혜의 섬광으로 갑에게 인정되였다. 그런데 어느날 두사람의 우정이 갑자기 깨여지자 갑의 주먹코는 을의 야유의 대상이 되였고 을의 껌벅눈은 갑의 조소의 과녁이 되여버렸다. 우리 민족의 극단적인 심리를 반추한 생동한 실례라 하겠다. 도대체 우리는 극단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모양이다. 미운 사람이라도 한번쯤 저 사람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데 또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이 사람의 말도 틀릴 때가 있군 하는 사고를 해본다면 이러루한 폐단은 적어질 것이다. 
102    디아스포라와 노스텔지어의 또다른 해석법 댓글:  조회:362  추천:1  2017-07-23
디아스포라와 노스탤지어의 또다른 해석법 -소설집 “청도로그인”(장학규 저)을 다운해본다 한영남   새삼스러울것도 없이! 중국조선족들의 민족대이동은 벌써 시작되였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처음에는 조선이나 러시아로 보따리장사를 나서더니 1992년 중한수교이후 물꼬가 트면서 급물살을 탄 한국나들이는 코리안드림으로 이어졌다. 겸하여 중국 대도시나 연해도시로의 진출 역시 만만찮은 흐름이더니 이제 청도 조선족인구가 10만명을 웃돈다는 집계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연변 내지 동북3성 조선족 집거지역의 조선족학교 페교현상과 편부모현상 및 가짜리혼과 국제결혼 등으로 말미암은 가정파탄 역시 간과할수 없는 작금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변방오지에서 부자꿈은 꿀수 있을지 몰라도 그 꿈을 현실화하는데는 어디까지나 제한성이 있었고 그래서 너나없이 외국이나 연해도시진출을 꿈꾸는것이다. 그에 따라 그런 우리 민족들의 삶의 생생현장을 리얼하게 파헤친 문학작품들 역시 신문지상이나 잡지지면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고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문학작품들을 통해 이역에 진출한 조선족들의 삶을 편린적으로나마 살펴볼수 있었고 이제 그런 작품들은 당당하게 일석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북경, 소주, 광주, 심수, 항주, 청도, 위해, 연태, 조선, 러시아, 한국 등을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소설가이며 평론가인 장학규 중국조선족 중견작가의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과 만나게 되였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장학규형을 잘 모른다. 더러 선배문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실루엣으로 알아모셨고 중국연해조선족문인회가 발족되면서 그무렵 대련에 있었던 나는 그 초기멤버로 청도행을 하게 되였다. 그날 술상에서 정식 인사를 틀면서 술 몇잔 마신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그리고 우리는 메신저로 문학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인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작년이던가 학규형의 부탁을 받고 어쭙잖게도 청도조선족작가협회 작품집에 서평을 쓰기도 했고 청도조선족문인회 문학상 심사를 맡아 청도행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문학을 생명처럼 여기는 몇 안되는 문인들가운데 학규형이 있다. 그리고 문학은 철자, 띄여쓰기부터가 기본이라고 고집하는 학규형과는 의기상투한데가 없지 않았고 그것은 기어이 우리의 인연을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부연하거니와 나는 학규형을 잘 모른다. 잘 모르면서 술과 담배와 문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턱대고 감히 형이라 불러댔고 평소 이런저런 투정질도 곧잘 하군 했다. 그런데 정작 이 글을 쓰려고 보니 잘 모르는것(잘 모른다기보다 많이 접촉하지 못한것)이 오히려 순수 작품만으로 몰입할수 있지 않나 싶어 약간은 헷갈리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제 작품을 하나씩 읽어내려가노라면 작가 장학규는 인간 장학규로 다가오지 않을가 싶어 용기를 내여 소설집파일을 열고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스토리로의 접근 일단 이번 소설집에는 순수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에 앵글을 맞추고있다. 그 스토리들을 대충 살펴볼것 같으면-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에서 주인공 봉은 회사를 말아먹고 현실도피를 꾀하면서 등산길에 오른다. 절경은 아니더라도 부르면 선녀라도 나올것 같은 산행길에서 봉은 어느 순간 환각을 느끼며 폭포아래로 추락하고만다. 그런 봉을 곁에서 지켜본 조씨는 봉의 행장을 챙겨가지고 도관에 오고 도인들에 의해 구원된 봉을 꼬드겨 어느 동굴로 향한다. 그 동굴속에서 봉은 동반자살을 앞두고 집에 전화를 했다가 기사회생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죽기 위해 쓰는 힘으로 살면 살아내지 못할리 없다고 했던가. 거의 파묻힐번한 동굴에서 봉과 조씨는 죽기내기로 탈출을 강행하고 진작에 조씨와 동반자살이 약속된 취의 합류로 탈출을 완성한다. 소설은 봉의 육체적구원으로부터 시작되여 봉의 정신적구원(동굴에서의 탈출은 봉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으로 승화되면서 시종 탕개를 늦출수 없도록 독자들을 깊숙이 소설속에 빨아들이는 강한 인력을 보여주고있다. “갈대의 뿌리는 얼마나 깊을가”에서 한국인 맹사장은 빚더미만 남긴채 어느날 잠적해버린다. 결국 통역을 해온 준호는 어쩔수없이 볼모로 잡히게 되고 쇼량과 쇼밍네 형제에 의해 컨테이너에 연금된다. 거기서 준호는 쇼량의 녀동생 링링을 만나게 되고 인적이 없는 그곳에서 준호와 링링은 사랑에 불을 붙인다. 지극히 피동적으로 연금되였던 준호는 갓 잡아올린 물고기마냥 싱싱한 링링한테서 삶의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나아갈 길을 알아차린다. 맹사장이 남겨둔 낡은 기계를 다시 작동시켜 밀린 로임도 주고 새로운 사업을 개척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면서 한국인에만 의존하던 중국인 내지 중국조선족들이 스스로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있다. 특히 소설은 홍합에 대한 연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성실한 노력만이 살길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조곤조곤 까발리고있는것이다. “가장자리”에는 청년 하나가 등장한다. 청년에 대한 일체 정보는 깡그리 삭제된채이지만 그것은 소설에서 그리 중요한것이 아니다. 요는 란희가 그 청년을 대하는 태도변화에서 비록 돈만 주무르는 장사군이라 하지만 마음속 깊이에 남아있는 우리 민족들의 순수하고 질박한 미덕이 부활하고있다는것이다.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삶의 터전을 닦는다는것은 전쟁에 다름아니다. 그런 삶의 소용돌이속에 란희라는 연약한 조선족녀성은 그래도 살아보려고 아득바득한다. 그런 란희네 상점으로 어느날 예고도 없이 문득 뛰여든 청년은 그러나 란희의 눈에 미운 사람이 아니다. 단지 조선말을 한다는 그 리유만으로도 충분히 이웃집 청년을 떠올리게 하고 그래서 란희는 라면을 끓여주고 남편앞에서 슬기롭게(?) 그 청년한테 돈 백원을 줄수가 있었다. 아리랑으로 같이 울수 있는 민족임을 다시한번 재확인할수 있는 대목이다. “바람의 옵션”에서는 약간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중국진출 한국인 준호는 조선족녀성인 춘심이한테 련정을 느끼고 모든것을 훌훌 털어버린채 둘만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은 처처에서 송곳이며 망치며를 내들고 찌르고 두드리며 못살게 군다. 돈만 부족되는 실정이라면 혹시 그들은 운명이라 체념한채 죽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집주인 진씨는 춘심이의 녀자를 넘보고있었고 위기일발의 시각에 준호가 등장한다. 욕심을 채우지 못한 진씨는 세상 소인배가 다 그러하듯 경찰에 신고했고 준호는 불법체류에 걸려 구치소에 갇힌다. 이 소설은 새로운 시각에서 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을 투영시키고있어서 이채롭다. 그런가하면 연해진출 조선족들은 “129번” 버스를 타기도 한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129번 버스에 승차한 주인공의 현실과 생각 사이를 넘나들면서 조선족들의 삶의 모습에 각광을 떨구고있는 점이 특이하다. 서두와 결말에서 “아, 미치겠네!”를 반복하면서 현실생활의 고달픔과 팍팍한 삶의 모습을 클로즈업시키고있다. 묘한 구성이라 해야겠다. 누구라도 한번쯤 시도해보았을법한 “일탈”에 이른다. 일상에 찌들고 지친 동이는 일탈을 꿈꾸면서 바다낚시에 나선다. 그는 바다낚시를 하다가 바지락을 줏는 녀인과 조우하게 되고 그 녀인을 보는 순간 언뜻 고향집 쌍가매를 떠올린다. 그리고 어쩔수없이 밀물에 포위된 두사람. 그들은 살기 위해 같이 불을 지펴야 했고 그들은 살기 위해 음식을 나눠먹어야 했으며 그들은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를 탐해야 했다. 썰물이 가고 녀인은 사라져간다. 그 녀인을 바라보는 동이의 눈에는 기어이 쌍가매가 다시 떠오르고있었다. “일탈”은 자연속에서 인간의 본모습을 적라라하게 보여주었다는데서, 또 그것이야말로 우리 본연의 모습임을 환기시켜주었다는데서 점수를 획득하고있다. “인저리타임”도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주인공 조씨는 밥집의 남주인이다. 그의 유일한 락이라면 바다서리를 하는것이다. 그러나 어느날인가 흰얼굴의 등장으로 그의 바다서리는 서리를 맞게 된다. 그렇게 등장한 흰얼굴은 “주인장, 여기 술 한잔 주시오”를 네번 정도 웨치면서 각각의 꿈과 모습으로 조씨앞에 나타난다. 한국행을 해야만 돈을 벌수 있다고 여기는, 그리고 일확천금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는 우리 민족의 못난 모습을 아프게 보여준 작품이다. 특히 인상적인것은 매번 같은 말로 나타나지만 매번 다른 옷차림인 흰얼굴은 그대로 그의 부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있으며 그런 흰얼굴의 부침으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투영시켜주었다는데서 이 소설은 성공하고있는것이다. 소설집의 타이틀로 된 “청도로그인”은 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의 축영이라 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주인공 위동의 눈에 얼비친 신우, 범철, 남수, 찐따거, 장박사 등은 각각의 위치에서 각각의 우리 신변 인물들을 대변하고있다. 특히 이 소설은 재미나는 에피소드들을 소스로 얹어주어 재미있게 읽히면서 진한 사색을 던져주고있다. 타향에서의 조선족들의 삶, 그들의 삶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니다. 살아가는 소리들의 하모니이다. 아니다. 살아있는 목숨들의 히질긴 아우성이다. 그것을 “청도로그인”은 한 사람(위동)의 스케줄에 따라 주욱 우리앞에 펼쳐보이고있다.  “사거리”는 특이한 스토리를 가지고있다. 이 소설은 같은 서두를 가지고 시작된 여섯개의 이야기가 각각의 다른 결말에 이르면서 소설의 묘미를 더해주고있다. 아파트단지를 어슬렁 나서며  천이는 두손으로 아래우 주머니를 더듬었다. 손에 잡혀나온것은10여 년간 꾸준히 피워온 쌍희표 담배이다. 입에 담배를 붙여물고 두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숙히 질러넣고 어깨를 옹송그리며 헐떡헐떡 반달음치는게 천이만의 브랜드 이미지이다.  4월의 청도 아침날씨는 유달리 변덕이 많다. 어제까지도 찬 바다바람이 몰아치던것이 오늘은 금세 얼굴을 바꾸고 사람을 지글지글 볶기 시작했다.  천이는 영문 모를 사람들의 영문 모를 바쁜 행보속에 무작정 합류하면서 일단 오늘은 걸어서 출근하기로 작심한다.  회사까지는 도보로 20분 거리이다. 대체로 비슷한 사이즈의 두갈래 코스가 있었는데 그것도 묘하게 두갈래 모두 사거리 두개씩 지나야 했다.  버스 선로도 여러개 있었으나 전에는 괜히 폼을 잡느라고 매일이다싶이 택시를 잡아타고 출퇴근했었다. 주머니친구가 매일 적자투성이라고 아우성이였지만 회사동료들이 부러운 시선을 보내오는게 그대로 풍선이 되어 둥둥 뜬 기분이였다. 에라이, 인생이 얼마나 길다고? 사람은 좋은 기억을 만들기 위해 산다고 생각하니 날마다 무덤으로 향하는 노정도 즐겁고 대견했었다. 누구처럼 미쳐서 살다가 정신 들어 죽는게다.  그렇게 나사 하나 풀린것처럼 쭉 지내오다가 문뜩 자기가 안방 호랑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뭐야? 가까운 친구들이 차례차례 집 사고 자가용 갖추고 또 어떤 넘은 느닷없이 사변을 당해 병신이 되기도 하고 아예 꼴기 없이 죽어나가기도 한다. 어제도 숱한 돈을 팔고 아가씨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집에 돌아왔다가 먼 고향에 있는 친구의 비보를 들었다. 술자리에서 그대로 엎어져 죽어버렸단다.  남자 인생 황금기라는 마흔 고개가 어쩌면 시련의 고개인지도 모른다. 망할 넘의 언덕이 어디 정해져서 따로 있나? 그러면서도 속은 텅 비여버린다. 느닷없이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세부적인 형상이 되여 우렷이 나타난다.  저 앞 태양성이 바라보이는 첫 사거리에 행인과 차량들이 막 범벅이 되여서 멈춰져 있었다. 교통사고가 난게 분명했다.  인용이 장황하지만 이런 서두로 시작된 이야기들은 그러나 각각 다른 흐름으로 번지면서 읽는 이들에게 자못 신선한 의미로 다가온다. 결국 같은 아침을 맞이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써나가는 오늘 우리 삶의 모습 그 자체인것이다. “조깅”은 만득이의 아침조깅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과 회상의 짬뽕맛이 일품이다.  눈 없는 이곳의 미적지근한 겨울이 다가오면 항상 저멀리 처마밑에 고드름을 만드는 고향의 겨울이 떠올랐고 주변 농군들이 바짝 메마른 누르끼한 땅에 인분을 퍼놓고 종자를 뿌리는 봄날이면 어린시절 늘 보아왔던 시꺼면 흙에 그대로 싱싱하게 곡식이 자라던 고향의 비옥진 들판이 눈앞에 우렷이 나타났다. 어쩌면 청도 조선족들의 노스탤지어를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아닐가 싶다. 고향의 하늘이 기억에 새롭다. 티 한점 찾아볼수 없이 맑고 깨끗했던 하늘이 태반이였다. 사람의 모습이던것이 급작스레 짐승의 형상으로 변하고 산수가 불시에 수목으로 바뀌는 흰구름의 조화는 신비하기만 했다. 봄이면 아지랑이 몰몰 피여오르는 가운데 강남 갔던 제비가 하늘을 오르내리며 회귀를 자랑했고 여름에 접어들기 바쁘게 싱그러운 꽃향기에 실려 잠자리들이 너울너울 춤춘다. 가을이면 애처로운 울음을 남기며 새로운 서식처로 자리를 옮기는 기러기떼가 줄을 이었고 겨울이면 솜같이 가벼운 눈꽃이 하늘하늘 춤추며 내렸었다. 고향은 대체로 랑만이였고 동화였다. 고향은 만득이가 남보다 더 일찍 돌아가야 할 인생역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만득이의 고향에는 그가 그토록 잊을수 없어하는 민정이가 있다. 이 소설은 타향살이에 지친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저마다의 고향생활을 떠올리면서 먼 고향하늘 우러러 눈물 글썽이게 만드는 매력 아니, 마력이 있다.  “필터링”은 다분히 기봉소설스럽다. 그러나 우연을 필연처럼 만들고 필연을 우연인듯이 받아들여야 하는게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주인공 환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마작판에 끌려들게 되고 그로부터 구레나룻의 끈질긴 추격에 시달린다. 도망치는 환에게는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저런 기회들이 생겨나고 나중에 환은 떳떳이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에서 소품으로 등장한 1원짜리 동전은 스토리전개를 위해서뿐만아니라 주인공의 성격발전변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필수불가결의 요소인셈이다. 이제 “살어리민박”에 들려 이야기를 들어보자. 민대리로 통하는 봉수는 한국사장인 한사장이 회사부도로 경영을 접게 되자 마무리를 도울 양으로 살어리민박에 머문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뚱보아줌마, 한국 김씨와 연길 김씨, 심양 신씨와 그의 녀자인 말라꽹이 등이 등장해서 나름대로의 역할에 충실한다. 민박 자체는 별 볼일 없어도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다양하게 그려보일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의 하나가 될것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할수 있는 조건부를 만족시키고 각자 부담없이 자기 편한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 없다는 여기에 민박의 재미스러움이 깃들어있는것이다. 살제 소설에서도 삶에 지친 사람들과 꿈에 부푼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재기를 꿈꾸는 무대로 살어리민박은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은 각 지역인들의 성격특점까지도 간과하지 않고 극명하게 그려보이는 세심한 배려까지 하고있다. 황혼사랑을 그려보인 “네모난 하늘”(건국댁과 해방씨라는 작명이 인상적이였음)과 사랑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석로인의 전설”(재치넘치는 대화가 읽는 내내 독자들의 입귀에 미소가 걸리게 만드는 소설), 인생은 결국 돌고 돌아 원점으로 되돌아온다는 “노오란 동그라미”(사랑놀이에 대한 묘사가 백미였음) 등 소설들도 각각의 스토리로 독특한 맛들을 내면서 우리들의 일상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모두어보면 학규형의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들은 일제히 연해지역진출 조선족들의 삶의 모습에 서치라이트를 켜고 시종 그들의 희노애락을 다루면서 우리 민족들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데서, 특히 우리 조선족들의 청도 현주소를 짚어보였다는데서 조선족문단의 한 공백을 메우는 장거로 된다고 감히 우기고싶다.   언어로의 접근 학규형은 언어야말로 문학의 기본이라고 힘주어 설파하거니와 소설적인 언어를 주조해내는 마술사적인 힘을 가지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의 소설적언어들은 자칫 쉽게 스칠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하나 곰곰 따지고 음미해보면 그 생동함과 그 풋풋함과 그 신선함에 놀라지 않을수 없다. 백마디 말하는것보다 그의 소설속에서 쉽게 채집할수 있는 례문들을 같이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것이 오히려 설레발치기보다 나으리라.   나무의 초록색보다 바위의 회색빛이 더 많이 보일 정도로 순도높은 바위산이다. 굵은 바위덩치들이 곳곳에서 힘자랑을 한다.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옆에 있어봤자 밥축이나 내는외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남편이란 인간때문에 반나절 남짓 뇌신경에 바이러스가 감겨든게 억울하기도 했다. -”가장자리” 사실 란희도 인젠 모가 다 갈리여 더이상 정 맞을 자리도 없다. 벌써 오래전부터 내릴대로 내려 더이상 내릴 꼬리도 없다. -”가장자리” 조물주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갖다붙여놓은듯한 벌름코에서 벌렁벌렁 코방울이 나왔다들어갔다할때면 세상은 완전 지옥이였다. -”바람의 옵션” 대신 심술이 온몸에 방울방울 묻어났다. -”바람의 옵션” 남보다 먼저 올라가도 어차피 시루속 콩나물처럼 허리 휠 틈도 없이 꼿꼿이 서서 가야 할 운명이 분명하지만 목숨을 걸듯이 밀고닥치며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인생이 참 더럽고 역겹다는 느낌뿐이었다. -”129번”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우울이 그대로 방울져 흐르고 있었다. -”129번” 10월 중순의 청도의 아침 해살은 미안한줄도 모르고 그저 따갑기만 하다. -”일탈” 이제는 수도 없이 돌리고 돌린 레코트판이다. 스팸메일 같은 과거로 무조건 삭제하고프기만 한 아픈 기억이다. -”일탈” 하기사 모기 배꼽마저 빼먹을 요즘 세상에 누구를 믿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였다. -”인저리타임” “아이쿠 얼마나 말을 조리있게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깜짝 속히겠더라구요.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사람이데요.” -”인저리타임” 하품이 줄달음쳐 나왔다. -”청도로그인” 사는건 머슴급인데 포부는 세종대왕급이라고나 할가. -”사거리” 희는 마침 울고싶었는데 때맞추어 뺨을 때렸다는듯 눈가에 실눈물을 떠올렸다. -”사거리” 양부장이랑은 같은 채널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끔 둘이 묘하게 도킹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조깅” “이기기 다행인줄 알어. 저 친구 숨쉬는거 내놓고 다 거짓말인데 오늘은 간만에 부처님이 되실 모양이야.” -”필터링” 어쩌면 후둑후둑 튀던 심장이 눈깜짝할 사이에 랍치당한 모양이다. -”필터링” 아무튼 정신이 약간 가출된 상태가 아니고서는 뚱보아줌마와 보조를 같이한다는건 어림 반푼도 없었다. -”살어리민박” 무지막지한걸 가문의 영광으로 아는 모양으로 김씨는 항상 대방의 기분 같은것을 념두에도 두지 않았다. -”살어리민박” 무안해진 뚱보아줌마가 왕벌처럼 왕 고아댔다. -”살어리민박” 그러나 솔직히 건국댁은 그런 자연의 위대함에는 멸치 똥만큼도 관심이 없다. -”네모난 하늘” 개 풀 뜯어먹다가 기침하는 소리하고있네. -”네모난 하늘” 물론 물고기에게 수영 가르치는 격이지만 평생 총을 가지고 논 사람으로서는 쉽지 않게 많은 지식을 가지고있었다. -”네모난 하늘” 번지수 다른 소리 고만해! 나 지금 요상한 쇼를 구경할 여유가 없거든. -”석로인의 전설” 13억 인민 모두 그가 망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석로인의 전설” 손가락으로 슬쩍 밀었다가 놓으니 씽하고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는것이 생동하게 알려왔다. -”노오란 동그라미” 작가란 모름지기 언어의 마술사여야 하고 언어의 련금술사여야 할것이다. 언어의 마술사란 언어를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될것이고 언어의 련금술사란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서 작품의 감칠맛을 더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규형의 소설에 등장하는 언어조합들은 그 아니면 아무라도 쉽게 흉내낼수 없는 오로지 그만의 소설적언어로서 이런 언어들을 씹으며 읽는 그의 소설은 그래서 그대로 농익은 감주같은 깊은 맛을 내는것이다. 화석화된 고루한 언어가 아닌, 그렇고 그런 매너리즘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살아 숨쉬는 싱싱한 소설언어들의 향연은 이 소설집의 품위를 업그레이드시키면서 우리들에게 탈상식적인 서사방법을 제시해주고있다.    테마로의 접근 전반 소설집의 15편 소설들은 일제히 청도를 배경으로 하고있으며 조선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있다. 디아스포라라는 낱말이 결코 생경하지 않는 요즘 이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자신들의 삶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엮어가고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쉽게 얼비치는것은 다름아닌 노스탤지어이다. 살다가 지쳐서 어느날 술 한잔을 하거나 비 내리는 날 창가에 서서 먼 고향하늘켠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고향에 대한 향수가 꾸역꾸역 치밀어오르는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다면 우리는 왜 이 고향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는것일가. 인간은 아무라도 모체귀환으로의 본능을 가지고있다. 잠 잘 때 자궁속 모습을 하는것이 가장 편하다는 연구결과가 보여주듯이 인간은 아무래도 그 세포마다에 본능적인것들을 소지하고있는 모양이다. 자궁-엄마-고향으로 이어지는 이런 모체귀환의식은 자궁이 곧 엄마요 엄마는 곧 고향이라는 대용을 가능케해주며 그런 의미에서 고향은 무의식속에서라도 떠올려지는 가장 따스한 품이 되는것이다. 소설집 “청도로그인”은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삶의 모습에 각광을 떨구고있다. 확대경을 대든 프리즘을 대든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우리 민족의 한 군체를 대변하고있는 청도조선족들은 지극히 상징적이다. 세계 각지에 널려있는 유태인들의 그것과도 변별되는,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들의 그것과도 변별되는 오로지 중국조선족들의 현주소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도조선족들은 다분히 상징적이고 오늘날 현시점에서 우리 민족의 또다른 양상을 보여주고있는 셈이다. 두고온 고향에는 어릴적 깜장네도 있을것이고 고향의 아무 풀가지나 꺾어보아도 거기에서는 어릴적 추억들이 까르르 웃어줄것이다. 또 어쩌면 사립문 열면 엄마의 고무신 먼저 아버지의 쿨룩거리는 기침소리가 마중나올것 같은 고향, 그래서 고향은 우리의 가장 큰 뒤심이고 그 뒤심이 있어 우리는 타향에서도 씩씩하게 살아낼수 있는지도 모른다. 전반 소설집을 관통하고있는 이런 노스탤지어는 바로 오늘날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살고있는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심층 밑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는 민족정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것을 이번 소설집에서는 하나의 올곧은 맥으로 시종 꿰주고있는것이다. 환언하면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보이면서 인간들의 궁극적인 심상을 그려보이고있다는것이다. 이것은 소설집 전반이 텍스트이기에 구태여 례를 드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아도 좋을것이다. 이상 스토리와, 언어와, 테마의 각도에서 소설집 “청도로그인”을 살펴보았다. 요약해보면 학규형의 이번 소설집은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삶의 양상에 앵글을 맞추고 그들의 디아스포라적인 삶의 궤적을 가감없이 보여주면서 우리 민족의 오늘날 현주소를 현장감있게 보여주고있다. 매끄러운 소설적언어들에 힘입은 소설들은 또 맛스러운 유머와 번뜩이는 위트까지 동원시켜 독자들의 구독을 부채질하고있으며 장학규형 혼자만의 목소리를 내고있다. 우리는 일단 “청도로그인”이라는 도어스커프를 통해 청도진출 조선족들의 삶을 엿볼수 있다는데서 이 소설의 성공을 미리 축하할수 있는것이다. 학규형의 또다른 작품들과 만날 그날을 기다려본다.   갑오년 사랑의 달에 할빈에서  
101    왕로얼 별전 댓글:  조회:787  추천:3  2017-06-07
단편소설  왕로얼 별전 장학규   로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왕거장에 살고 있는 왕로얼이 위챗으로 청첩장을 보내왔다. 마누라가 둘째를 임신했다는것이다.  “모두들 큰 경사라면서 한턱 내라고 해서 방법없이 술상을 마련했어. 바쁘면 오지 않아도 돼.” 왕로얼을 알아서 꼭 20년만에 스물번째로 받는 청첩이였다. 왕로얼은 산동사내답게 번마다 오지 않아도 된다고 대범하게 말했었다. 그리고 꼭 꼬리를 달았었다.  “일 없으면 오든가.”  “그런데 나이가 얼마인데 또 애를 낳는다는거야? 딸애가 작년에 결혼했던가?” “링링이도 애를 품었어. 모녀가 같이 애 낳게 생겼단말이지. 겹경사가 났으니 한턱 쏠수밖에.” 왕로얼은 나의 로골적인 빈정거림에도 개의치 않고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왕로얼을 알기는 갓 청도에 왔을때의 일이다. 20년전의 일인데 왕로얼은 내가 세집을 맡은 집주인이였다.  청도에 와서 내가 처음 입사한 회사는 슬리퍼를 만들어 일본으로 전량 수출하는 한국 제조업체였다. 재단, 봉제, 접착, 검사, 창고 순서로 어셈블리라인으로 이루어진 회사인데 규모가 꽤나 컸다.  나는 운좋게도 여직원 수백명이 미싱기에 다닥다닥 붙어서 해종일 드르륵 드르륵 신발을 박는 봉제작업장에 배치받았다.  출근하다보면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단조로움과 지루함이 동반하게 된다. 재단 현장에서는 한달에 한번 꼴로 꼭 사고가 난다고 선배들이 가만히 알려주었다. 조금만 신경을 다른데로 돌려도 재단기는 원단을 자르는게 아니라 사람손을 썩둑 해버린다고 소름 끼치는 소리로 귀띰했다. 창고에서 무료한김에 잠들었다가 사장한테 발각되여 쫓겨난 친구도 여럿이 되였다. 접착 현장은 그대로 살인적인 냄새로 진동했고 제품 마무리 단계인 검사 작업장은 해종일 긴장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넌 보기는 안 그렇는데 참 복있는 친구야.” 나보다 한달 먼저 입사하여 재단 일을 보는 화룡에서 온 선배가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말했다.  나는 내가 복있는 사람인줄 전혀 모르고 살아왔었다. 선배의 말을 듣고서도 그저 덕담을 해주는것으로 생각했을뿐이였다. 그런데 세집을 찾으러 나가면서 정말 내가 복을 가진 사람이 맞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좋게 왕로얼을 만난것이다.  화학약품을 쓰는 관계로 우리회사는 청도 시내서 꽤나 멀리 떨어진 왕거장에 자리잡았다. 그때만 해도 청도는 매일이다싶이 한국기업이 무더기로 쓸어들고 있었지만 왕거장은 상대적으로 구석진 고장이라 고작 세개 기업만 자리를 틀었을뿐이였다. 우리회사가 그중 컸는데 직원이 500여명이 되였다.  산동사람들은 듣던 말대로 정말 부지런했다. 거의 집집마다 공장에 출근하는 사람이 있었다. 휴일에는 농사일을 하면서 억척스레 살아가고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왜 예전에는 못살아서 관동으로 떠났을가고 갸우뚱했었는데 정작 그들의 농작지란것을 보고 경악했다. 세상에 그걸 어떻게 경작지라고 말할수 있단말인가?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새노란데다가 풀기 하나없이 푸실푸실 갈라졌다. 그것도 한집에 차례진 면적이 1.5무 아니면 고작 2무 정도였다. 거기다 땅콩 심고 고구마 심고 오이 심고 가지 심고 고추 심고 별의별거 안 심는게 없었다.  그 척박한 땅을 대처하는 그들만의 비법이 따로 있었다. 그 비결은 화장실에 있었다. 집집마다의 화장실에는 배설물을 받아주는 큰독이 묻혀있었다. 그것들을 모아두었다가 요긴하게 써먹는것이였다. 물론 이것은 후에 할 이야기이다.  여건이 여건이였던만큼 왕거장 사람들은 일찍부터 다종경영을 하고있었다. 밭농사, 바다고기잡이는 물론 회사 출근에 거리 장사에 닥치는대로 돈이 되는 일이면 다했다. 특히 집집마다 세집을 내고있었다. 마을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외지인이 갑작스레 늘어난것이다.  나도 회사에 직원숙사가 따로 없어 세집을 찾아야 했다. 하여 첫날 퇴근하자마자 마을로 내려갔다. 집집마다의 벽에 나붙은 임대광고를 훓어보다가 아무렇게나 찾아들어간 집이 바로 왕로얼네 집이였다. 출입문을 떼고 들어서니 주방 겸 식당이였고 량쪽으로 사랑채가 달린 구조였다.  마침 왕로얼네는 손님이 와서 일찍한 저녁식사를 하는 중이였다. 내 나이또래인 왕로얼은 산동사람답지 않게 왜소한 체구를 가졌었지만 성격은 역시 호방하고 시원했다.  “세집 찾으러 왔습니다.” 내가 미안해 두손을 비비며 겨우 내뱉는데 출입문을 등지고 앉았던 왕로얼이 냉큼 돌아보며 손짓했다. “일단 한잔하고 봅세. 들어오면 모두 손님이라구. 마침 잘 왔어. 한잔 해.” 초봄이라지만 한쪽 구석에 난로가 있어 집안은 별로 춥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왕로얼은 솜옷에 국방색 군용외투까지 걸치고있었다. “임대 놓는다해서 들어왔는데…” “좋아좋아, 그건 문제 아니야. 술 먹구 취하면 저 서쪽방에 들어가 자면 된다구. 어서 앉아.” 왕로얼은 나의 해석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 옆에 눌러앉혔다.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단단하고 힘이 있었다.  “오늘 운수 좋게 큰 우럭을 낚았어. 이거 우럭찜이니까 한번 맛 보시지?” 왕로얼은 생면부지인 나와 몇십년은 친한듯 어깨를 다독이더니 술잔을 넘겨왔다. 나는 마지못해 한잔을 받아 마시고 다시 세집 얘기를 꺼내려고 하는데 왕로얼이 고기 한점을 집어 나의 입가에 가져왔다. 내가 자리에 앉았을무렵 우럭은 이미 반나마 먹은 상태였었다. 한모금 집어보니 다른 고기와는 달리 쫀득하고 맛이 독특했다. 국물이 멀건것이 흠이라면 흠이랄가. 내 성깔같았으면 고추가루를 벌겋게 뿌리고 숟가락으로 국과 고기를 듬뿍 떠서 술 한잔과 함께 넘기면 제법 좋을거 같았다.  “친구야, 이 술은 꼭 다 먹어야 돼. 여기 법이거든. 주배 석잔, 부배 석잔은 기본이야.” 왕로얼은 코물을 벌렁거리면서 술상에서 자기가 주인이고 마누라는 부주인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자기네 두사람이 붓는 여섯잔 술을 무조건 마셔줘야 하는게 례절이란다.  “고기는 그렇게 헤집으면 안돼. 여기 바다가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때 절대 번지지를 않아요. 고기가 배처럼 생겼거든. 고기를 뒤집으면 배가 번져진다는 말과 같단 말이야.” 날씨도 안 더운데 괜히 머리가 어떻게 헤까닥해졌지 않나 의심될 지경으로 왕로얼은 시도때도 없이 나의 실수를 교정해주었지만 왠지 기분이 잡쳐지지는 않았다. 넘쳐나는 열정이 에때움을 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한잔두잔 마시다가 나중에는 술이 당겨서 나절로 찾아먹으면서 어지간히 취해버렸다.  이틑날 퇴근하고 트렁크를 끌고 다시 찾아가니 왕로얼은 서쪽 방을 벌써 비워두고있었다. 내눈에는 중학생 같아 보이는 왕로얼의 마누라가 세살난 딸애를 앞세우고 이부자리를 갖다 펴주는 사이 나는 왕로얼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임대비 얼마 주면 돼?” “좋아좋아.” 왕로얼은 너스레만 떨었다.  “얼마 받을거냐고 묻는데 좋아가 뭐니?” “좋아좋아, 괜찮다니까.” 그 “좋아좋아”가 한달후에도 이어졌다. 첫달 로임을 받고 집세 얘기를 꺼내니 왕로얼이 또다시 넉살 좋게 “좋아좋아”하는게 아닌가? 자식이 꽈배기를 쳐드신것도 아닌데 밸밸 태극권을 꼬는 모양이 꽤나 유치찬란했다. 나는 미리 회사 동료들한테 물어서 이 동네 세집 시세를 알고있었다. 하여 800원 월급에서 200원을 꺼내 왕로얼의 딸 링링의 조그마한 손에 쥐여주었다.  “엄마를 갖다줘 응?” 저녁에 왕로얼이 채소 두가지를 볶았다. 하나는 땅콩 볶음이고 다른 한가지는 매운 맛조개였다. 바지락에 말린 붉은 고추를 썰어서 볶아내는 매운 맛조개는 청도 생맥주와 궁합이 아주 맞았다. 그사이 나는 이삼일에 한번꼴로 비닐봉지에 생맥주를 받아와서 왕로얼하고 마셨기에 왕로얼이 채소를 한다고 처음 왔을 때처럼 미안해하거나 어색해하지 않았다.  “우리 친구하기로 했잖아?” 왕로얼이 맥주를 부어주며 말했다.  “그런데?” “친구란게 써먹자구 있는게 아니야?” “그렇지” “슬리퍼 좀 갖다주라마. 마누라가 욕심내서 말이야.” “아…그거 말이야…알다싶이 난 봉제팀이야. 내 뒤로 접착이 있고 큐시가 있어. 완성품은 창고로 들어가. 어디 볼수 있어야 말이지.” “관리인들은 모두 너희들 사람이잖아. 한두컬레야 못 얻겠나 아무렴.” 그 친구 한마디에 나는 빡세게 거절 못하고 며칠동안 혼자서 낑낑 갑자르다가 결국 생산을 책임진 한국인 마과장을 찾았다. 세집에서 신으려고 그러니 슬리퍼 둬개 살수 없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전량 수출인데다가 미처 생산이 따라가주지 못해 재고품이 없다는것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내가 념두에 둔것은 검사팀에서 골라낸 불량품이였다. 불량품은 하루 작업이 끝날무렵 작두로 자르는것이 회사 규정이였다. 그것이 절대 회사밖으로 흘러나가서는 안되였다. 마과장도 물론 내가 어벌크게 그것을 노리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마과장이 웬일인지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지나가는 어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퇴근하고 찾아와.” 후에 마과장은 어느 술자리 끝에 나에게 불량 슬리퍼를 준 리유를 설명했다. 처음에는 머리 많이 다쳐 헛소리치는 놈팽이로 보여 화가 꼭뒤까지 치밀어 순간이지만 회사에서 짜를 생각까지 했었다. 겁대가리 상실한게 참 건방져보였다. 염병지랄도 가지가지라고 언감생심…그러다가 문뜩 이넘이 진실하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놈 같으면 슬쩍 서리할 궁리부터 할터인데 돈 주고 사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적어도 도적넘 컨셉은 아니였다. 잠간 더위 먹은것쯤으로 생각하자. 그렇게 마음을 돌리니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더란다.  “나가서 절대 누구하고도 말하지마. 사장 귀에 들어가면 나부터 목이 날아난다. 알겠어?” 마과장은 내가 찾아가니 도적이 강아지를 꾸짖듯 낮은 소리로 다짐을 주고 책상밑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싼 물건을 건네주었다.  물론 나도 세집에 돌아와서 왕로얼한테 단단히 을러멨다.  “신은 집에서만 신고 밖에 끌고나가지마. 내 쫓겨나는거 보기 싫으면 말이야.” 이듬해 날씨가 좀 풀리자 왕로얼은 고기배를 팔아버렸다. 주변 해역에 고기가 적어진것도 원인이였지만 해상사고가 빈발하여 도무지 무서워 못하겠다는것이였다.  그때문에 왕로얼은 아버지와 대판 싸우기도 했다. 평생을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왕로얼의 아버지는 거쿨진 체격에 우락부락한 성격을 가지고있었지만 또 쉽게 마음을 풀기도 했다. 50대 중반의 젊은 할아버지인 그는 언제 다퉜냐싶게 손녀인 링링을 안고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기야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못하는 법이니까 맥버린 모양이였다.  그렇지만 나는 왕로얼이 무엇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것을 육감적으로 느꼈다.  3월달에 접어들면서 왕로얼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콩을 심는 계절이라면서 며칠동안 부지런히 돌아치더니 하루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야. 래일 쉬지? 나하고 밭에 나가자.” 이틑날 왕로얼은 나를 깨워서 밥을 먹으라고 다그친후 뭐가 그리 급한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왕로얼의 녀편네가 차려준 밥을 느직느직 먹고 집문은 나서던 나는 그만 못볼거 보고 동공이 작살나고말았다. 왕로얼이 변소간에서 똥물을 퍼내고있었던것이다! 주위에는 지린내와 구린내가 진동하고있었다.  “이넘아, 웬 짓거리냐? “ 일년간 그 일을 볼 때마다 똘랑똘랑 주루룩주루룩 소리내며 큰독에 떨어져서 이상했었다. 저게 꼴똑 차면 어쩔가 궁금하기도 했다. 아예 더 넓고 깊게 구뎅이를 파놓는게 실용적일거 같았다. 그런데 넘쳐나는 경우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왕로얼이 내가 출근한 사이에 내다버린 모양이였다.  “자식이 자기 똥 보고 짓는 강아지와 똑 같네.허허허” “그런데 퍼런 대낮에 뭐하는거야? 밭에 가자 했잖아?” “맞지, 이걸 메고 가야해” 왕로얼은 시무룩히 웃으며 멜대로 인분을 담은 물통을 메고 어슬렁 대문을 나섰다.  왕로얼네 밭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뒤산에 있었다. 멜대를 멘 왕로얼이 저만치 앞에서 휘청휘청 걸어갔다. 물통이 몸 률동에 맞추어 흔들거렸고 액체의 인분이 출렁이면서 두줄의 가느다란 금을 그어가고있었다. 나는 엄지와 식지로 코를 틀어막고 소에게 물린 상통을 하고 저만치에서 따라갔다.  밭에 이르자마자 왕로얼은 바가지로 인분을 퍼서 부지런히 밭에다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냄새도 냄새지만 무슨 일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 멀찍히 물러나 서성이기만 했다. 한참을 왔다갔다 하면서 인분을 밭에다 골고루 뿌린 왕로얼이 한옆에 널부러진 삽을 가리키면서 나한테 말했다. “내 집 가서 한번 더 메고 올테니 그사이 저기 뿌린데 땅을 삽으로 파서 번져.” “이눔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저런 일 시켜. 안한다 안해.” “자식이 싸대기 왕복으로 쳐맞을라.” “주둥이 세탁하고 다녀. 깐죽대다간 발에 밟힌 빈 맥주캔 모양이 될수도 있다구.” 그러면서도 나는 순순히 삽을 찾아들고 땅을 번지기 시작했다. 포크레인 놔두고 삽질한다는 말이 그른데 없었다. 하기사 1무3푼밖에 안되는 땅뙈기에 포크레인이 무슨 소용이랴. 그날 저녁 왕로얼의 마누라가 수고했다면서 술상을 차려내왔다. 여전히 땅콩 볶음과 매운 맛조개에 생맥주였다. 왕로얼과 몇년 붙어살더니 왕로얼 음식솜씨까지 따라배운 모양이였다. 한가지 더 늘어난거 있다면 토란국이였다. 토란은 쪄서 먹는줄로만 알았는데 국도 제법 맛있었다.  “우리 둘을 좀 너희 회사에 취직시켜주라.” 술이 좀 얼근해지자 왕로얼이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요구해왔다. 기실 왕로얼이 고기배를 팔아치울때부터 이런 요구를 해올줄 미리 짐작했었다. 하긴 우리회사도 미싱사가 모자라 죽는 판이였다.  “너는 모르겠고… 니 마누라 미싱할줄 알지?” “그거야 말해서 아나? 우리집 옷견지 몽땅 마누라가 손수 지은거야.” “배 고플때 흰소리가 잘 나온다더라. 너 만날 굶고 다니는건 아니니? 허허허” “너 혹시 곤충인거니? 왜 사람말 통 알아듣지 못하니? 그러지 말고 잘 말해달라. 그러면 음력 6월달에 한잔 잘 살게.” “근데 왜 하필 6월이야?” “링링이 세살 생일이 그때야.” 그것은 왕로얼을 알아서 처음으로 받은 공식 청첩인셈이였다. 물론 붉은 청첩장을 직접 받은건 아니여도 왕로얼의 표정에서도 초청이 분명한것을 알수 있었다.  왕로얼의 마누라는 내가 관리하는 미싱현장에 취직이 되였고 왕로얼도 운수 좋게 접착부서에 배치받았다.  그해 음력 6월 초하루날에 나는 동네 식당에서 벌어지는 링링의 세돐생일잔치에 부조돈 200원을 내고 참석하였다. 마침 그날은 또 산동사람들이 꽤나 륭중하게 쇠는 “과반년(过半年)”날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동석하여 즐겼다. 그날 밤 왕로얼네 부부가 건너방에서 밤을 패면서 부조돈을 세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소리가 내 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때로부터 나는 해마다 왕로얼의 초청을 받고 이런저런 파티에 참가했다. 산동사람들은 무슨 관습이 그리도 많은지 달포에 한번씩 꼭 무슨 명목의 명절이 있었다. 그리고 법도 많았다. 봄철이면 사위가 장인장모한테 싱싱한 고등어를 가져다준다. 나이가 쉰만 넘으면 자식들이 알아서 상복을 미리 준비해둔다. 어린 자녀한테 양부모를 만들어주는것도 큰행사에 속했다. 그때면 친척, 친구들이 모여 한바탕 축하연을 베풀군 했다. 링링도 양부모를 찾았고 나도 그 주연에 초청받아 갔었다.  취직한지 5년이 된 어느날 나는 나의 직접 상급인 마과장과 트러블이 생겨 밸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과장은 나에게 불량 슬리퍼를 가만히 챙겨준 당사자였다. 어지간히 정이 들었던 사람이였는데 별로 큰 일도 아닌걸 가지고 천둥같이 화를 내더니 다시는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거기에 비하면 왕로얼은 코마루가 찡하게 따스한 면이 있었다. 내가 왕거장을 떠나던 날 왕로얼은 여전히 땅콩 볶음과 매운 맛조개에다 생맥주로 대접했다.  그후 나는 시내의 다른 회사를 이곳저곳 전전하면서도 왕로얼과는 자주 련락이 통했고 1년에 적어도 한번꼴로 꼭 왕거장에 다녀갈 일이 생겼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왕로얼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아버지 돌아가셨어!” “왜 앓는다는 말도 없었잖아?” “그렇게 되였어. 그저 알리는거니 오지 않아도 돼.” “어디지?” “집이야.” 그럴려니 했다. 재작년인가 왕로얼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때도 병원에 모시라는데도 왕로얼의 아버지부터 쓸데없는 돈을 판다면서 왼고개를 틀었었다. 동네 의사를 보이면 된다면서 한사코 집에서 운명을 맞이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달려가보니 짐작대로 왕로얼의 아버지는 전에 내가 들었던 방에 반드시 눕혀져 있었다. 이제 고작 예순 중반이 좀 넘은 사람인데 모질(耄耋)의 노인같아 보였다.  왕로얼은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을 거의 찾을수 없을만큼 평온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손님들에게 담배를 권하면서 가끔 가벼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나한테 다가온 왕로얼은 미안하다는듯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조문 오는 사람들이 많아 너만 붙들고 있을수 없구나. 량해해다구.” “괜찮아, 나 좀 마당에서 바람이나 쐴게.” 그 사이 왕로얼네 집은 변화가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는 왼쪽 편으로 창고 비슷한 건물이 한채 늘어난것이다. 작년 늦가을에 왔을때만 해도 오른쪽에 창고가 있어서 웬간한 물건은 거기에 챙겨두고있었다. 솔직히 세사람의 살림에 창고는 그 하나면 충분했다. 굳이 창고 하나를 다시 지어야 할 리유가 없었다.  장례식이 끝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진후 나와 왕로얼은 어느 허름한 간이식당에 마주 앉았다. 여전히 땅콩 볶음에 매운 맛조개를 두고 생맥주를 기울렸다.  “창고 하나 새로 지었더구나.” “응” “괜히 마당이 좁아터졌더라. 쓸데 없이.” “지금 그 말씀 웃기려고 하신거 아니지? 쿡쿡…” “왜 내가 무시당할 말이라도 한거니?” “그게 아니구 오라잖으면 이곳이 개발된대. 동네가 철거된단 말이야.” “아!” 정확히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초겨울에 왕로얼네는 마침내 새아파트 세채를 분배받았다. 그것도 개발상이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맞바꾸었다면서 왕로얼은 은근히 으시댔다.  “너두 얼른 집을 마련해야지.” “내야 집 살 돈 어디 있어?” “청도 온지도 이젠 16년이 됐잖아. 자꾸 움직이니까 돈은커녕 먼지도 안붙잖아.” 왕로얼은 새끼손가락으로 코구멍에서 코딱지를 훑어내며 정색해서 훈계하기 시작했다. 몸에 걸친 국방색 군용외투는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때 입었던 그 옷인듯 옷소매가 때로 반들반들했다.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살면 안되니? 지금 데리고 사는 녀자가 몇번째야? 이번에는 끝까지 갈거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보니 왕로얼네 부부간은 그때까지도 내가 소개해준 슬리퍼회사에 다니고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딸 링링이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모가 다니는 회사에 들어가 일하고있었다.  “기집애들 공부시켜 쓸데 없어. 돈이나 쾅쾅 벌게 해야지. 링링아, 니 찐아저씨 봐라. 저게 대학생이야.” 왕로얼은 심심하면 나를 끌어넣어 공부 무용론을 펼쳐내군 했다.  그날 왕로얼네 새 아파트를 둘러보면서 나는 난생 처음 비애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모름지기 촌놈이라고 은근히 무시했던 왕로얼이 산같은 무거운 압력이 되여 나를 지지누르고있었다. 다음다음해 나는 큰 마음을 먹고 여기저기서 돈을 꿔서 선불금을 내고 다시 은행대출을 받아 70평 남짓한 아파트 한채를 구입했다. 아무렴 왕로얼한테 업수임을 그대로 당할수만은 없었다. 대출 갚을 일때문에 마음이 많이 얼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마침내 내집이 생겼다는 성취감이 모든것을 압도했다.  소식을 들은 왕로얼은 휴일날을 잡아 마누라와 딸을 대동하고 진둥한둥 찾아왔다. 새집을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쉴새 없이 주절댔다.  “좋아좋아, 집이 구조가 마음에 들어. 네모반듯하고 칸마다 창문이 달려 환하구. 작은 면적에 비하면 분포가 합리하고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들어졌어. 봐, 이러니 얼마 좋아. 여기서 밥 먹구 넌 책 좋아하니 저기 책장 놓으면 좋겠구. 정말 인테리어 내가 책임질게. ” 나는 왕로얼이 이렇게 긴 말을 조리있게 하는걸 처음 보았다.  “내 집 장식하면서 남은 재료가 적잖아. 아마 이 집 하나 장식해도 될거 같아. 일단 먼저 시작하자구.” 이틑날 왕로얼은 차로 타일이며 바닥재며 목재들을 가득 실어왔다. 집 세채를 장식하면서 남은것인데 버리자니 아깝고 어디 보관할데도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차에는 면목 모를 장정 둘이 묻어왔다.  “내 친구들이야. 여기는 목수고 저 넘은 미장이야. 돈은 줄 필요없고 그저 밥만 먹여주면 돼.” 그날따라 왕로얼은 어색하기는 해도 양복차림새였다. 아마 왕로얼을 알아서 양복차림새는 처음인거 같았다. 언제나 낡아빠진 구두를 궤차고 있던 발에 반들반들한 새구두가 신겨있었다. 아마 그 새구두에 맞추느라고 양복을 찾아입은 모양이였다. 왕로얼은 투박한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내 동생이야. 유명 대학 졸업생이라구. 대단한 인물이니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돼. 나와는 거의 20년 사귀여왔어. 저 친구자 나라고 생각하고 일 잘해주어.” 그날부터 왕로얼은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와 인테리어 진척 여부를 물어왔다. 그리고 휴일만 되면 꼭꼭 달려왔다. 왕로얼이 오는 날 점심이면 새집 바닥에 신문지를 펴고 술상을 벌렸다.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바를 몰라 그저 때만 되면 좋은 안주에 술을 대접하는것으로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한달이 채 안되여 인테리어가 완성되였다. 왕로얼이 재료를 많이 가져다주었지만 그래도 인테리어를 하다보니 이것저것 모자라고 보태야 할것들이 많아서 적잖은 돈이 들어갔다. 결혼증은 타지 않았지만 몇년째 같이 사는 녀자가 친정에서 돈을 얻어온것이 좀 남아서 나는 조용히 왕로얼을 불러 물었다.  “저 친구들 거의 한달이나 일했는데 하다못해 수고비라도 얼마쯤 줘야 하는게 아니여?"” “좋아좋아.” 왕로얼은 동에 닿지 않은 대답을 하며 돌아서 친구들옆으로 가려고 했다. 나는 무작정 왕로얼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일이 아니야. 친형제도 장부를 맞춘다고 했잖아. 하루도 아니고 한달씩이나 어떻게 공짜로 일 시켜먹어.” “좋아좋아…” 왕로얼은 말귀를 흐리면서 은근히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 그도 친구들을 맨손으로 보내기에는 어딘가 미안했던 모양이였다. 그렇다고 나에게 구체적인 액수를 제출하기는 더욱 어려웠던게 분명했다. 왕로얼의 눈에는 또다시 그를 처음 만났을떄의 그런 희미하고 아리숭한 표정이 어려있었다. 나는 시무룩히 웃으면서 미리 준비해둔 2만원을 슬쩍 왕로얼의 주머니에 질러주었다. 왕로얼은 생각밖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손으로 막거나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들이 떠나간지 사흘이 되여서 내가 한창 새집에 들어가려고 짐을 싸고있는데 난데없이 모를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본능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기 바쁘게 억센 톤을 가진 사람이 성급하게 물었다.  “당신 왕로얼한테 장식비 안줬어?” 나의 머리는 순식간에 수백번 회전했다.  “준적 없는데요. 그런데 누구시지요?” “붕붕…” 전화가 대답도 없이 끊어져버렸다. 통화질이 별로여서 목소리를 판별할수 없었지만 꼭 어딘선가 많이 들었던 목소리가 틀림 없었다.  그해 음력 섣달에 왕로얼의 딸 링링이 결혼식을 올렸다. 링링의 남편은 조선족이였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관리원이였는데 계장 직책을 꿰차고있었다.  “대학생이야. 우리 링링이는 고중도 다니지 못했잖아. 복이 덩쿨채로 굴러온거야. 한번 와봐. 역시 너같은 조선족이야.” 나는 왕로얼의 지청구에 못이겨 한번 가서 만나보았다. 여러모로 삐여난 총각이였다. 신수도 멀끔했지만 례절도 밝아 왕로얼은 그저 끔뻑 죽는 시늉을 했다.  “너네 민족 참 훌륭해. 술도 몸 돌려서 먹구. 사람은 그래서 배워야 한다고 했어.” “그런 넌센스가 어디 있어? 포인트 못잡고 횡설수설하는 특기 참 부럽다.” “왜 사람을 욕해. 지금 니까지 올리춰주는 중이잖아. 어이 상실한거냐?” “니가 십수년 나를 공부 필요없는 전형으로 몰았잖아?” “언제 쌍팔년도 소리하고 자빠졌어?!” 왕로얼은 나의 어깨를 한번 쥐여박고 허허 웃었다. 나도 덩달아 시원하게 웃었다.  “마침이다. 너도 이 참에 링링이 결혼날 마누라한테 웨딩드레스 입히구 결혼식 신고해라.” 왕로얼 덕분에 나도 안해한테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등장했다. 안해는 그날따라 더없이 행복해보였다. 부부 관계도 나이를 먹는다더니 이젠 미운정 고운정 들대로 든 안해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안해는 왕로얼네 일이라면 만사불구하고 등을 밀었다.  “얼른 가봐요. 그 나이에 둘째를 임신했다니 정말 축하해줄 일이예요. 가서 배 한번 만져보고 와요. 우리도 생길지..” 안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있었다. 마침 안해는 출근해야 해서 시간을 낼수 없었던것이다. “남의 녀자 배를 어떻게 만져?” “가까운 사이에 그게 뭐 대수예요. 제가 미리 전화해둘게요.” “하긴 그 자식한테 부조돈만 해도 숱해 빼앗겼다. 마누라 배 한번 만져본다고 야단은 하지 못하겠지.” 나는 실없는 웃음을 킬킬 웃으며 문을 나섰다. 소태 씹은듯 입을 쩝쩝 다실 왕로얼의 모습이 눈에 선히 떠올랐다.                               2017년 1월 19일 청도에서 
100    향이의 맞선 댓글:  조회:763  추천:1  2017-05-23
  단편소설   향이의 맞선       향이는 눈 오는 길을 질척질척 걸었다. 올들어 처음 오는 눈이다. 눈은 내리면서 그녀의 마음처럼 녹고있었다.  올 겨울은 참 유별나다. 살얼음이 새벽에 좀 생겼는가싶다가도 거퍼 점심전에 녹아 없어지는것도 그렇고 시도때도 없이 비가 실실 내리는것도 그렇고 많이 반상적이다. 왕년엔 그래도 겨울 흉내를 내느라고 손바닥 두께의 얼음이 얼기는 했었다. 그리고 하다못해 일년에 둬서너번 눈이랍시고 날리기도 했었다. 음달진 구석에는 아직 봄은 꿈도 꾸지 말라는듯 흰눈이 소복히 쌓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올해는 전혀 아니다. 어쩌다 온다는 눈이 하늘하늘 발밑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물로 변해버린다. 그리고는 인차 또 비를 뿌린다. 도대체가 말릴수 없다. 겨울인지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하늘만 보고는 전혀 판단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향이는 기쁘다. 실없이 자꾸 킬킬 웃음이 나가는것을 참을수 없다.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이 캡처되여 우렷이 떠오른다. 집을 나설때 하던 엄마의 말이 새삼스럽게 귀가에서 쟁쟁거린다.    “왕청 총각이라는구나. 정말 이전에 그 애 …이름 뭐더라? 건이든가 맞지? 그 애도 왕청애였지 아마?” “몇천번 얘기했어? 왕청사람이 아니라고? 청도서 태여났단 말이야.” “글쎄 말이다. 아무래도 니 명에 왕청이 찰거마리처럼 들어붙었는 모양이구나.” 엄마가 이렇게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반듯하게 차리고 나서면 아직도 30대로 착각하게 하는 엄마는 딸이 어느새 그 착각하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위기감에 젖어들면서 갑자기 로쇠해진듯 싶었다. 남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할가봐 좀체로 화장도 할념을 하지 않았다. “딸을 과년시켜놓고 무슨 체면에 얼굴 분칠이냐고 욕할거잖아...” 고작 2년이였다. 2년만에 엄마는 백기투항해버렸다. 처녀 귀신이 되여도 왕청 총각은 절대 안된다며 바락바락 악을 쓰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거퍼 1천날의 3분의 2를 조금 넘기고 더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그만 엔진이 펑크나버린것이다.  어느날 엄마가 조용히 향이를 불렀다.  “엄마네 뜨개 모임에 새로 흑룡강 언니 하나가 왔는데 참한 총각이 있다면서 소개해주겠다는구나.” 청도에는 다른 동네에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희한한 모임들이 많았다. 어투와 습관이 서로 다른 동네에서 오구작작 모여와서 함께 어울릴수 있은데는 그런 모임들이 한몫 단단히 하고있었다. 처음에는 옴니암니 다투고 모순도 많았었지만 점점 청도의 날씨처럼 미지끈해지고있었다.  “싫어.”   향이는 단마디에 거절해버렸다. 아직도 건이를 밀어내지 못한 향이의 마음에는 다른 남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것이다.  “글쎄 나도 좀 께름직하긴 하더라. 어쩌면 방정맞게도 또 왕청 총각이라니 말이다.” 엄마는 차라리 잘되였다는듯 중얼거리더니 인차 얼굴을 흐리고 난색을 지었다.  “총각은 좀 괜찮은 모양이더라. 포장회사를 꾸린다던가? 왕청사람이면 뭐라니? 사람이 똑똑하고 돈 잘 벌면 되는거지.”   엄마는 우왕좌왕 말에 두서가 없었다. 웬간해서는 물러서지 않던 원칙도 저절로 마구 허물어버렸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뒤에다 붙이는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래도 니 명에 왕청이 찰거마리처럼 들어붙었는 모양이구나.” 엄마가 왕청사람을 싫어하는 리유는 연길에서 왕청사람한테 사기를 당하면서부터였다. 세집살이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2만원이면 한국로무 보내준다고 꼬셔서 그 돈을 가로채서 도망간 사람이 바로 왕청 출신이였던것이다. 엄마는 5년동안 고리대금 본전에 리자를 갚으면서 어느 하루 이를 갈지 않은 날이 없었다. 피난민처럼 한밤중에 이불짐을 꿍져지고 연길을 도망나온 엄마는 평생을 두고 그 아픔을 잊지 못할듯싶었다. 물론 아버지는 곁불에 매일매일 들볶이군 했었다. 그 왕청사람을 집에 끌어들인 사람이 다름 아닌 아버지였기때문이였다.   “이젠 니 나이도 서른이다. 사람 좋으면 되잖아. 왕청사람도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 더 많더라. 우리가 딱 나쁜 왕청사람 만나서 그렇지. 그리고 그 언니한테 둘이 한번 만나게는 하겠다고 언질을 주었다.”   향이는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엄마가 성격적으로 강세적이여서인지 향이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종래로 엄마와 정면으로 대든적이 없었다. 엄마 역린을 건드려서 결코 좋은 일이 없다. 자칫 일년내내 들들 들볶이면서 지청구를 들어야 한다. 만나라고 하면 만나면 무난하다.    그래서 향이는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거나 얼굴이 스르르 붉어지는 그런 스릴은 느낄수 없었다. 남자만 봐도 쥐구멍을 찾게 되는 그런 나이는 이미 지나가있었다. 그보다도 남자란 동물에 감흥 자체가 사라져버린것이다.   눈 오는 겨울날이였다. 눈은 내리면서 비물처럼 흐르고있었다. 요즘 겨울은 칼라가 선명하지 않다.  향이는 질척이는 거리에서 블랙션 커피숍을 마주하고 섰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바엔 들어가긴 들어가야겠는데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맞선 장소를 이런곳으로 선택했는지 알수 없었다. 폼 한번 잡아보느라고 그런건가? 자기가 이렇게 우아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뭐 그런 냄새를 풍기기 위해서인가?    향이는 자기도 놀랄 정도로 힝하고 코방귀를 뀌였다. 향이는 녀자이고 또 처녀지만 커피숍같은 곳은 좀 서먹하다. 아니, 서먹하기보다는 적응이 잘되지 않는다. 차라리 식당같은데서 미팅하는게 더 적성에 맞다. 좋기는 소주를 깔쭉댈수 있는 장소면 많이 자유스럽다. 손삿대질이랑 하면서 인생이 어떻고 사랑이 저떻고를 재잘거릴수도 있을거 같다. 향이는 입을 오므리고 호호 하면서 낮고 천천히 얘기를 주고받는데는 습관이 잘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벌써 이렇게 진부하게 변했다는 점에 또한번 소스라치듯 놀란다. 아직 인생 시동도 제대로 걸지 못했는데 벌써 시들시들 꺼지고있는게 억울하기도 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홀안에는 오가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등불을 빌어 홀안을 한바퀴 둘러보아도 눈에 띄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빈상에 파리만 앉았다가 가는 집인듯싶었다.    이때 구석쪽에서 누군가 그녀를 향해 손짓하는게 언뜻 보였다. 아주 잠간이긴 했지만 향이는 전률하듯 몸을 흠칫 떨었다. 그때 귀가에 엄마가 언니라고 부르는 뜨개 모임의 그 흑룡강아줌마가 전화에서 하던 말소리가 들렸다.  “커피숍에 가면 너를 한눈에 알아볼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 그대로 가면 돼.”   하다못해 상대의 전화번호라도 달라고 하니 아줌마는 근심걱정 붙잡아매두라는듯 달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향이는 상대가 자신을 알고있을 확률이 높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가 홀에 들어서기 바쁘게 누군가 손을 젓고있었다. 아직 어두운 홀안에 적응이 되지 않은 눈은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있었으나 어딘가 익숙한 느낌에 저도몰래 불안해지고있었다.    그때 향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화면에 그녀가 그렇게 두려워하면서도 또 애타게 기다리는 이름이 떠올랐다. 건이였다. 2년전에 소리없이 사라진 건이였다. 열흘동안 꼬박 미친듯이 전화했지만 줄곧 전원이 꺼진 상태로 흔적도 찾을수 없었다. 그 뒤로 향이도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언젠가는 부재중전화를 보고 련락해오리라 믿었지만 2년동안 건이는 다른 전화로도 다시 걸어오지 않았다. 철저히 잠적해버린것이다.    “킬킬…”   향이는 눈물과 함께 터져나오는 웃음을 도무지 참을수 없다. 어쩌면 그렇게 의뭉스럽고 능청스러울수 있는지 생각만 해도 건이가 대견스럽다. 스러워 스러워 스러워를 곱씹어 내뱉어도 건이가 매파를 내세울 궁리까지 했다는건 정말로 믿을수 없었다. 그토록 마음이 여렸던 건이가 얼마나 안달이 났으면 2년동안 갈고닦아서 매파를 보냈을가 싶었다.    커피숍의 희미한 구석에서 건이를 확인했을때 향이는 가슴이 미여져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수 없었다. 건이의 마음속에 자신이 차지하고있는 분동을 알게 된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자신이 건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다시한번 절실히 느꼈기때문이였다. 여느 남자에게 마음 한번 준다는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지만 그 한번 준 마음을 거둔다는것이 얼마나 더 어렵다는것을 향이는 2년이란 시간을 통해 새삼스레 다시 터득한셈이다.  “그간 공장을 세우고 길을 닦느라 많이 바빴어.”   건이가 변명삼아 말했지만 향이는 고깝다거나 괘씸하다는 그런 서운함이 없었다. 건이는 썰렁한 개그를 펼칠 정도로 계산적이지 않다는것을 향이는 너무 잘 알고있었다.    이 남자를 어떻게 만났던지 향이는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의 일거일동을 지금도 레코드판처럼 오차없이 기억하고있다.    4년전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가 자리잡은 청도에 뿌리를 내린 향이는 우연한 기회에 월드옥타에서 조직한 차세대리더양성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였다. 화이트칼라 생활보다는 창업쪽에 더 집념하던 차에 쉽지 않게 만난 기회였다.    그날도 눈이 내렸다. 그것도 펑펑 내렸다. 모두들 청도 와서 처음 보는 폭설이라고 말했다. 차가운 바다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눈꽃을 날려 제법 한겨울의 풍경을 도출하고있었다.    그러나 호적문제로 부모를 떠나 멀리 동북 고향에 가서 3년간 공부하면서 대학입시를 맞았던 향이에게는 이 정도의 눈은 말그대로 눈에 차지도 않았다. 동북 겨울의 차가움과 매정함에 결코 비길수 없이 많이 누그러져있는 청도의 겨울이였다.    그런데도 캠프에 참가한 원우들은 춥다고 야단이였다. 집에서 옷견지를 더 가져오지 않았다고 후회하는 친구들이 생각밖으로 많았다. 오구작작 침실에 모여앉아 카드를 치면서 수료식이 시작될 저녁시간을 기다리고있었다.    유독 한사람만이 흩날리는 눈보라를 헤치면서 눈사람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건이였다. 향이가 건이의 존재를 알게 된것은 그때가 처음이였다. 건이는 특별히 잘 생긴것도 아니였다. 보통 키에 어딘가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였다. 특히 먹물을 쏟아부은듯 짙은 눈섭이 위엄기를 더해주고있었다.   수료식은 열광의 도가니속에서 끝났고 향이는 어느새 많이 취해있었다.    녀자가, 그것도 처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는게 말도 되지 않을법하지만 향이는 고중시절부터 가끔 취하군 했었다. 그때는 엄마가 그리우면 비슷한 애들이 모여서 독한 빼갈을 홀짝거리기가 일쑤였다. 대학때는 남자동창들한테 업혀서 숙소로 돌아간적도 많았다.    한번은 졸업을 앞두고 남녀 동창 10여명이 가을놀이 캠핑을 나간적이 있었다.  캠핑 첫날밤 향이는 남자 동창들의 권유에 못이겨 죽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 어떻게 쓰러졌는지 자신도 몰랐다. 아무튼 한밤중에 방뇨가 급해 뛰쳐나가 아무렇게나 숲속에 엉치를 까고 내버리고 자기 잠자리로 돌아온다는것이 그만 흐리멍텅 남자들 텐트에 기여들어가 그대로 코를 박고 잠들었다. 그러다가 가슴이 답답해 눈을 떠보니 웬 남자의 다리가 배우에 올라와있었다. 다행히 남자들도 모두 돼지처럼 뻐드러져있었다.    향이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부끄러움보다는 참 다행이였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런 상황에서는 신사가 따로 없다. 하물며 술 먹은 남자는 짐승의 본질을 드러내기 마련이잖은가. 그런데도 향이는 짐승의 무리에서 용케 자신의 처녀성을 지켜낸것이다.    그후부터 향이는 취해도 정신만은 도사린다. 처녀성이 중요해서만이 아니였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처녀로 남아있는 녀동창은 보호동물처럼 적었다. 향이는 그보다도 흐리멍텅하게 녀자의 첫번을 멋대가리 없는 사람한테 주고 평생을 후회할가봐 더 걱정이였다.    수료식에서도 그랬다. 향이는 눈앞이 흐려왔지만 신경의 끈은 놓지 않았다. 짐작했던대로 술상에서 화끈했던 친구들은 시탐삼아 몇번 향이곁에 와서 넌지시 지껄여보았다가 여의치 않았던지 인차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향이는 시무룩히 웃으며 여유작작 와인잔을 즐겼다. 그러다가 향이가 이젠 집에 갈때가 되였다고 생각하며 비칠거리면서 일어서는데 누군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했다. 언제 나타난지 알바 없는 건이였다. 술 마실때 그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이틑날 향이가 눈을 떠보니 자기 방이였다. 건이가 아파트단지앞까지 차로 데려다준 기억까지는 났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건이한테서 핸드폰 메시지가 벌써 들어와있었다. 아마도 원우 통신록을 뒤져서 향이의 전번을 알아낸 모양이였다.    “일어났으면 점심에 해장술 한잔 할가요?” “데이트 신청이신가요?” “그렇게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구요.” “저 주사가 심해요. 자칫 후회막급이예요.” “같이 취합시다. 인생 너무 맑아도 피곤하네요.”   향이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주저없이 건이가 오라는 “청향관”이라는 한식당으로 찾아갔다. 2층으로 올라가니 건이는 먼저 와서 료리를 주문해놓고 기다리고있었다. 테이블에는 갓 보글보글 끓여낸 된장국이 군침을 당기고있었다. 향이는 건이에게 눈인사를 마치기 바쁘게 방약무인인듯 숟가락으로 된장국을 듬뿍 떠서 입에 넣었다. 뜨거운것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배속을 후끈 덮혀주었다.    ‘와, 속이 시원하다!” 건이는 말없이 시무룩히 웃기만 한다. 향이는 다시 숟가락을 집어들었다가 싱거운듯 내려놓는다.  “여자가 꼴불견이지?” “아니, 난 그런 니가 좋아.” “별걸 다 좋아하고 자빠졌네. 변태냐?” “응, 변태 맞아,”   둘은 금세 어색함을 털어버리고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학창시절 얘기도 나눴고 창업이야기도 했으며 주변의 시시껄렁한 에피소드도 털어놓았다. 왔다리 갔다리 이야기가 설왕설래하는 사이 주변손님들은 하나둘씩 가버리고 2층에는 그들만 남았다.    해장술에 다시 취한다는 말이 틀림없었다. 향이는 거퍼 맥주 두병도 채 마시지 못하고 해롱해롱 취해버렸다. 엊저녁 술이 채 깨지 못한 탓이다. 향이는 점점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건이는 할 말이 무진장 남아있는지 정력이 뻗쳐 끝없이 중얼거렸다.    향이는 희미해져오는 의식을 붙잡으려고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이 좀 드는듯싶었다. 그러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으려고 변기쪽에 있는 휴지에 손을 뻗치는 순간 몸이 평형을 잃으면서 향이는 벌러덩 화장실 바닥에 넘어졌다. 머리는 어쩔새도 없이 변기통을 들이박았다. 입에서는 저도모르게 악 소리가 터져나갔고 심한 통증이 밀물처럼 엄습해왔다.    “웬일이야? 어디 많이 다쳤어?”   건이가 화장실로 후다닥 달려들어왔다. 무작정 뒤로 향이의 량쪽 겨드랑이에 손을 질러넣고 일으켜 세웠다. 다급한 김에 큼직한 손이 향이의 두툼한 가슴우에 얹혀진것도 모르고있었다. 향이는 허우적거리면서 건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 그럴수록 건이는 향이가 더 큰 사고를 낼가봐 그러는지 뒤에서 더욱 억세게 끌어안았고 향이는 점점 건이의 품속으로 파묻히고있었다. 향이는 더이상 발버둥치지 않았다.    밀폐된 공간탓인지 괴괴하고 적막한 느낌까지 주었다. 향이는 건이의 단단한 가슴이 기둥처럼 듬직했다. 거기에 소리없이 기대고있을라니 불현듯 잠들고싶다는 욕망이 간절해졌다. 빙빙 돌던 머리속도 진정이 된듯 조용해졌다.  “자 이젠 나가자.” 건이는 향이를 끌어안은 손을 풀기 아쉬워하면서도 조용히 말했다. 귀가에 스쳐오는 건이의 숨결이 급촉했다.  “아니, 좀만 더 있어.”   향이는 자극을 받은듯 부시럭거리면서 몸을 돌려 건이의 품에 다시 파고들었다.    그러고보니 향이는 건이를 적잖게 알고있는상 싶었다. 차세대프로그램에 건이란 남자외에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눈사람을 만들었고 수료식때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고있었다는것도 알고있었다. 그런 감각은 누가 귀띰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몸의 세포가 먼저 느끼고있는것이였다.   향이는 고개를 들고 건이의 얼굴을 물그러미 쳐다보았다. 잘난 얼굴은 아니였다. 그렇지만 모난 얼굴은 틀림없었다. 어딘가 고집이 어리고 포기를 잘 모르는 그런 얼굴이였다. 향이는 이런 개성적인 얼굴이 좋다. 아니, 전형적인 호인보다는 각이 선명하게 나져있는 사람이 향이는 더 좋았다.    “나를 좋아했던거야?” “응.” “그래서 멀찌감치 나를 따라다녔어?” “알고있었구나.” “새침을 뗀게 아니고 나를 끝까지 챙기나 지켜봤지.”   향이가 손을 뻗쳐 건이의 얼굴을 만지려는 찰나 건이의 입술이 허둥지둥 덮쳐왔다. 투박하고 어설픈 건이의 손이 향이의 옷우에서 방향을 잃고 마구 헤맸다.    이듬해, 그 이듬해 겨울에도 꽤나 눈이 왔다. 얼음도 손바닥 두께쯤 얼었붙었다. 바다바람은 역시 청도가 틀림없다는듯 기승을 부렸다. 아마 바람만 아니였어도 청도의 겨울은 결코 춥지가 않았을것이다.    그해가 다 가는 어느날 건이는 선물을 사들고 향이네 집을 찾았다. 2년간의 열애사실을 신고하기 위해서였다. 향이의 통보를 미리 받은 부모들도 손님 접대 준비에 바빴다. 사위 마중에 장모님이 신을 거꾸로 신고 나간다는 말처럼 엄마가 더 부산을 떨었다. 그런데 첫마디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사람이유?” “청도에서 태여났습니다.” “부모의 고향이 어딘가 말이지.” “왕청입니다.”   그때 엄마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신경질적으로 손사래를 치더니 느닷없이 언녕 향이를 통해 알고있는 사실을 물었다.  “지금 무슨 일하고 있소?” “뭐 좀 해볼가고 여기저기 알아보는중입니다.” “무직업자로 놀고있다고 하면 될 일가지고…”   엄마가 괜히 트집을 잡고있다는것을 향이는 대뜸 알아차렸다. 왕청이라는 지명이 엄마한테는 알레르기이고 스트레스라는것을 향이는 잘 알고있었다. 청도로 이주한지도 10년이 가까워오지만 고향에서 형성된 그 프레임에서 엄마는 시종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젊디나 젊은 사람이, 그것도 대학공부까지 한 사람이 지금까지 부모 등 쳐먹고 산다니 말이나 되우. 이 혼사 우리 동의 못하겠으니 얼른 나가우.”   엄마는 건이가 가져온 선물꾸레미를 통채로 문밖에 내다놓으며 무작정 건이를 쫓아냈다.    엄마와의 마라톤식 전쟁은 그때로부터 시작되였다. 향이는 울며불며 사정도 해보았고 입을 악물고 단식도 해보았다. 그러나 엄마한테는 만사가 통하지 않았다.    건이가 열번쨰로 엄마에게 쫓겨나던 날 둘은 “술독”이란 간이식당으로 기여들어가 깡술만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청도의 밤거리를 정처없이 걸었다. 야심한 밤에 행인도 드물었다. 그사이 날씨가 많이 풀려있었다. 훈훈한 바람이 눈물범벅이 된 두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지고있었다. 둘은 손잡고 걷다가도 문뜩 멈춰서서 취한듯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한번 붙은 두 입술은 좀체로 떨어질념을 하지 않았다. 어눌한 건이에 비해 향이는 많이 공격적이였다. 기어코 건이의 입을 열고 혀를 깊숙히 들이밀었다. 허공에서 떠도는 건이의 손을 잡아 가슴속에 넣어주기도 했다. 향이는 이제 이 남자를 놓아주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거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우리 어디 가요. 저기 저 집에 가요.”   향이는 취한듯 노끈한 어조로 주절댔다. 길 건너편에 “쉼터려관”이란 간판이 손저어 부르고있었다.    2년간 그들에겐 서로를 탐할수 있는 기회가 참으로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사고없이 넘겼었다. 순결을 지킨다는 그런 고루한 리유는 아니였던거 같다. 사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관념 자체를 모르고있다고 해도 무방할것이다. 향이도 특별히 그 욕구를 거절하려는 본능같은것을 가진것은 아니였다. 건이가 싫지 않았고 그가 막 충동적으로 달려들때는 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꼭 그 대목에 가서 건이가 아니면 향이가 리유없이 제어기능을 작동한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들은 왜서 여직껏 남들이 다 하는 그것도 못하고 지내왔는지 스스로도 모르고있었다. 오늘에 와서 향이는 그러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고있었다.    자그마한 려관의 프론트에는 신수가 말쑥한 중늙은이가 있었다. 건이가 신분증을 더듬는 사이 중늙은이는 향이를 힐끔힐끔 건너다보고있었다. 그러건말건 향이는 수속을 끝마친 건이를 따라 룸안으로 들어갔다.    절망감때문인지 건이는 험하게 향이를 다루었다. 룸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벽쪽으로 밀어부치더니 긴 키스부터 퍼부었다. 전에는 둘데가 마땅치 않아 갈팡질팡하던 손이 어느새 로련하게 변신해 스스럼없이 궤춤안으로 쑥 들어왔다. 그건 처음으로 있는 일이였다. 향이는 웃몸을 건이한테 오픈한지는 꽤나 오랬다. 그러나 하신을 침범당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사랑행위를 할때마다 허우적대던 그때의 건이가 아니였다. 당돌한데가 있었다. 향이는 저도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갔다. 건이가 하는대로 몸을 맡겨버렸다. 건이는 무대공연을 하듯 그녀의 옷을 한견지 한견지 벗겨냈다. 연후 훌쩍 들어 침대로 던져버렸다. 희미한 등불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출렁거렸다. 건이는 야수마냥 그녀의 몸우에 덮치더니 한입에 향이의 왼쪽 젖가슴을 물었다.  “아!” 아픔보다 짜릿한 느낌이 먼저 엄습해왔다.    건이는 부지런히 애무하면서 아래몸을 움직여 그녀의 다리를 벌리려고 무등 애썼다. 향이도 어느덧 황홀한 경지에 깊이 빠져들고있었다. 머리속에 무수한 꽃보라가 터졌다가 하얗게 비여가는 느낌이였다.   바로 그때 출입문이 벌컥 열리면서 향이의 아버지가 한달음에 뛰여들어왔다. 손에는 야구방망이같은 물건이 들려있었다. 그뒤로 프론트의 중늙은이도 따라들어왔다.    “쿵!” 미처 반응할사이도 없이 건이는 아버지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저만치에 나가 넘어졌다. 순식간에 얼굴이 피범벅이 되였다.   “자식이, 오늘 죽여치우고말테다!” 아버지가 사나운 짐승마냥 울부짖으면서 몽둥이를 다시 쳐드는 찰나 향이는 부끄러움도 잊은채 알몸뚱이채로 건이의 몸우에 엎어졌다.    “아빠, 죽일려면 나부터 죽여요. 내가 건이를 여기까지 끌고왔어요. 이렇게 살고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빨리 죽여줘요!”   아버지는 라체의 딸이 민망했던지 얼굴을 외면하더니 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겼다.    “옷 입고 얼른 꺼져. 꾸물거렸다간 이 참에 죽여버릴테다.”   아버지는 건이에게 호통치고 프론트의 중늙은이를 끌고 나가버렸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들은 마작친구였다. 향이가 언젠가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놀음돈을 갖다준적이 있었는데 그때 향이를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떠나간 건이는 다시 향이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향이를 철저히 잊으려는듯 전화를 꺼버리고 잠적하더니 얼마후에는 살던 아파트마저 팔아버리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하긴 머리가 깨진것보다 가슴속에 생긴 피멍이 더 아팠을것이다.    향이는 지금껏 건이를 려관으로 끌고들어갔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기어코 그런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좀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부모를 설득했더라면 혹시 성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항상 향이를 괴롭혔다.     그런데 다시는 이 세상에서 만날수 없을것만 같던 건이가 갑자기 나타난것이다. 그것도 자기가 직접 미팅을 요구하지 않고 매파를 내세워 맞선보는 형식을 취한것이다. 어쩌면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할수 있었을까?   건이는 아버지한테 한번 되게 맞으면서 정신이 펄쩍 들었다고 한다. 정말 자기가 무슨 체면에 향이를 허락해달라고 했던지 알수 없었다고 한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벌어둔 돈도 없었다. 여느 친구들처럼 늙은 부모들의 등을 쳐먹으면서 살수는 없었다.  얼마후 건이는 부모를 설복하여 아파트를 팔고 세집을 잡았다. 집 판 돈을 투자하여 친구 몇이서 포장회사를 설립했다. 아이템이 좋았던 관계로 회사는 설립 당해로 투자금을 회수하였고 이듬해부터 이윤이 나오기 시작했다.    “며칠전에 새 아파트를 샀어. 이젠 당당하게 청혼해도 될거 같더라.”   건이는 향이 엄마의 반대 리유에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원래 건이는 청도사람이였다. 청도에서 태여났고 청도에서 자랐다.    “킬킬…”   향이는 집에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맞선 소식을 기다릴 엄마가 떠올라 걷잡을수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가 궁금했다.    “아무래도 니 명에 왕청이 찰거마리처럼 들어붙었는 모양이구나.”   맞선 상대가 건이란것을 알고서도 이런 말이 나올수 있을지 의문이였다. 어쨌던 엄마한테는 엄청난 난제이겠지싶다.    향이는 눈 오는 길을 질척질척 걸었다. 올들어 처음 오는 눈이다. 눈은 내리면서 그녀의 마음처럼 녹고있었다.  왕년에 비해 올 겨울 청도는 많이 따스했다.    2017년 2월 2일  
99    경험자의 전통 답습이 주는 계시 댓글:  조회:590  추천:0  2017-02-19
경험자의 전통 답습이 주는 계시 한춘옥 수필 “어처구니가 돌리는 맷돌”의 묘미 장학규   경험자는 모종 의미에서는 베테랑을 지칭한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겪었지만 그것에 대한 리해나 상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경험자라고 일컬을 수 없다. 경험자는 비단 몸소 현장을 체험했을뿐만 아니라 동시에 관련 지식을 장악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이여야 할 것이다.  한춘옥선생에게 경험자란 타이틀을 스스럼없이 달아주게 된데는 모름지기 그런 경우를 여러차례 귀동냥했거나 목격했기 때문이다. 청도라는 이민족지역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떡메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 한춘옥이다. 타민족한테 페가 될가봐 모두가 출근한 한낮에 화장실에서 떡메로 찰떡을 쳤다는 일화는 사뭇 감동을 자아낸다. 슈퍼에 나가면 손쉽게 사먹을수 있는 장류나 김치류를 직접 담궈 먹는 건 물론 가끔 엿까지 달여서 열린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그 향기롭고 달달한 냄새에 갈가던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기도 한다.  한춘옥은 어머니가 살림살이를 참 깐지게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또한 손재주가 비범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너나없이 배고픈 어린시절을 보냈었지만 그래도 색다른 음식을 바꿔가면서 해먹는 재미로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한다. 부모의 솔선수범이 전통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였다.  맷돌에 대한 설파도 우선 그런 생활적인 토대가 있었기에 한폭의 자연화마냥 진실하다.  서두에서 작자는 맷돌을 돌리면서 등장하고 있다. “온집안에 그윽한 향기를 날리며 사락사락 절주있게 돌아가는 맷돌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엄마 손때 묻은 맷돌은 기나긴 사연과 이야기를 담고 돌아가고 있다.”는 지문으로 미루어 아마 지금쯤 작자가 아파트에 맷돌을 갖추어두었다고 믿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참 난감한 일은 요즘 젊은이들이 맷돌이 무엇인지 모르는것이다. 그래서 “편평한 돌 두개를 위아래로 겹쳐놓고 아래돌의 중심에 박은 중쇠에 윗돌 중심부의 구멍을 맞추어 손잡이인 어처구니로 회전시킨다.”고 맷돌의 생김새와 구조를 설명하는 자상함을 선사하지 않을수 없다. 자칫 군더더기 같은 이 대목이 전반 글을 살아나게 하는 역할을 놀고 있다. 민족과 더불어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맷돌”이 이젠 “믹서기”에 의해 대체되고 “박물관”에 전시된 처지가 되여 그 모양과 역할마저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의식은 코마루부터 찡하게 만든다.  물론 맷돌에는 과거세대의 많은 추억이 묻어있는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작자에게 맷돌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마주 앉아 가난을 갈고 고부갈등을 가는 매개물이였으며 까칠한 메밀이 매끌매끌한 묵으로 변신하는 먹거리였으며 콩을 많이 넣어도 되는 놀이감이기도 했다.  그러나 작자가 노린 것은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에 대한 아쉬움만은 아니다. 생활 절주가 빨라지면서 “여유와 정”을 점차 잃어가는 인간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깔려있다. 인내와 믿음, 사랑과 화합의 소중함을 “맷돌”이라는 상징물에 접목했다면 틀린 표현이 아닐 것이다.  하기에 작자는 분명 젊은이들에게 많이 생소한 “맷돌”을 청도에도 갖다놓는다. “암맷돌바다와 숫맷돌육지는 서로 껴안고 수많은 충돌과 마찰로 백사장을  펼치는 “ 장관을 만들어낸다. 가히 녀장부다운 호매로움이라 하겠다.  한편 동시에 어쩔수 없이 감성적인 녀성이라는 “한계성”때문에 향수를 자아내는 이률배반적인 장면을 여기저기 흘러놓는다. “엄마의 삶을 분쇄하면서 가족들의 주린배를 채우고 생활의 편리와 윤택을 가져다준 맷돌은 참 많은 옛말을 갈아냈다.”, “세대주들은 빙빙 돌면서 비벼 갈아내는 화해의 맛과 멋에 한가닥 곤두서는 자신감을 키웠다.”, “엄마의 긴긴 날 설움은 하나로 망울져 하냥 사락대는 맷돌소리에 마음 싣고 부모형제와 생이별한 애통과 그리움을 갈고 갈았다.”, “맷돌같은 부대낌에서 화해로 가는 옛날 부모님들처럼 서로 껴안고 따뜻하게 살아보고 싶다.” 등 섬세하고 부드럽고 감칠맛나는 말마디들을 조미료로 많이 섞어넣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통문화와 사회 비전을 유기적으로 이어놓은 성공작이다.        부록:   수필 어처구니가 돌리는 맷돌 한춘옥     온집안에 그윽한 향기를 날리며 사락사락 절주있게 돌아가는 맷돌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엄마 손때묻은 맷돌은 기나긴 사연과 이야기를 담고 돌아가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맷돌은 생활속에서 사용하기에는 비효율적인 물건이요 단지 옛날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인테리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 청도의 어처구니는 자연의 맷돌을 하루도 쉼없이 잘도 돌리고 있다.   옛날에 석기인들이 최초로 회전축을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어낸것이 바로 맷돌이였다. 편평한 돌 두개를 위아래로 겹쳐놓고 아랫돌의 중심에 박은 중쇠에 윗돌 중심부의 구멍을 맞추어 손잡이인 어처구니로 회전시킨다. 마치 부부가 서로 만나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둥글게둥글게 갈아가듯이...    요즘 커피세대들과 자판기세대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맷돌이지만 옛날에는 집집마다 맛깔나는 음식을 하는 생활의 필수품이요 보물이였다. 지금은 믹서기가 자리바꿈을 했지만 오랜 세월동안 돌고 돌아야 했던 맷돌은 박물관에 모셔졌어도 그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겼다.     엄마의 삶을 분쇄하면서 가족들의 주린배를 채우고 생활의 편리와 윤택을 가져다준 맷돌은 참 많은 옛말을 갈아냈다. 어쩌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서로 마주 앉아 맷돌의 어처구니를 돌리며 가난을 갈고 고부갈등을 갈아 냈으리라. 단단한 돌로 다듬어진 맷돌은 이민의 삶과 설움을 갈아내며 인내와 사랑을 키워냈다. 아이들은 사락사락 돌아가는 맷돌소리만 들려도 맛있는 밥상을 상상하면서 달콤한 군침을 흘리며 코를 벌름거렸다. 어린시절에는 딱딱한 콩알이 부드러운 젖빛두부로 까칠한 메밀이 매끌매끌한 묵으로 변신시키는 맷돌의 마술이 너무도 신기했다. 엄마는 무더운 삼복철에 메밀을 물에 불려서 맷돌에 곱게 갈아 묵을 만든다. 암맷돌과 숫맷돌이 서로 껴안고 갈아 만든 묵은 천하일품이다. 들깨와콩을 갈아서 고소하고 선들선들한 콩물을 만든다.   물같은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빠른것이 지!” 하면서 신나게 묵그릇에 바가지로 콩물을 푹푹 떠담는다. 콩과 메밀에 삶도 조곤조곤 갈아내시는 아버지는 허허하하 만족스럽게 웃으시며 가족들에게 인정을 팍팍 심어준다. 암맷돌과 숫맷돌이 서로 껴안고 수많은 충돌과 마찰이 만들어낸 부침개와 떡, 묵과 두부는 우리에게 진수성찬이였고 천국같은 행복이였다. 세대주들은 빙빙 돌면서 비벼갈아내는 화해의 맛과 멋에 한가닥 곤두서는 자신감을 키웠다. 덕분에 자식농사와 벼농사를 부지런하게 잘도 하셨다. 아마도 부드러운 두부에 양념장을 듬뿍 올려놓고 술잔을 쭉쭉 내면서 체력을 키웠는가 보다.    엄마의 긴긴날 설움은 하나로 망울져 하냥 사락대는 맷돌소리에 마음 싣고 부모형제와 생이별한 애통과 그리움을 갈고 갈았다. 부대끼며 마찰로 돌아가는 맷돌에서 여유와 인정을 터득했다. 부모님의 깊은 마음을 알수없는 나는 두부콩을 갈때면 그냥 신나는 놀이처럼 덤벼본다.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돌리지만 둥글소처럼 떡 버티고선 맷돌은 심술부리며 어처구니 없는 나를 골탕 먹인다.    엄마와 마주 앉아 어처구니를 잡고 돌리면서 나는 여유의 매력에 인정이란 따뜻한 선물을 받았다. 맷돌은 욕심부리지 않고 물과 콩의 맞춤형에 따라 적절하게 걸쭉한 콩즙을 갈아낸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조급해서 맷돌 아가리에 콩을 많이 넣어준다. 변성기같은  이상한 소리와 더불어 콩 알맹이가 줄줄 흘러 나온다. 머들머들한 콩짜개가 보이니 엄마는 나를 흘겨보며 “맷돌을 속힐려구? ”하면서  옆구리에 흘러나오는 콩즙을 숫가락으로 아가리에 떠넣는다. 맷돌은 성실과 기다림을 가르치는 어르신처럼 참신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요즘은 빨리빨리 공회전을 어지럽게 돌리며 여유와 정을 많이 잃어버리는 어처구니가 많다. 세상이 많이 각박해진다. 맷돌같은 부대낌에서 화해로 가는 옛날 부모님들처럼 서로 껴안고 따뜻하게 살아보고 싶다. 단번에 갈아버리는 믹스기보다는 맷돌이 갈아내는 구수한 맛과 멋이 그립다.     나는 청도에서 해안선을 바라보며 바다와 육지의 멋진 맷돌에 빠져든다. 하얀포말은 엄마의 넋이 되여 파도어처구니를 끝없이 돌린다. 암맷돌바다와 숫맷돌육지는 서로 껴안고 수많은 충돌과 마찰로 백사장을 펼친다. 맷돌아, 우리마음에 애환과 갈등을 갈며 여유와 정으로 사락사락 돌고 돌아라!
98    개미 댓글:  조회:774  추천:0  2017-01-13
단편소설   개  미   장학규        9월달이 맞냐 의심할 정도로 이제 아침 일곱시인데 대지는 벌써 열기로 후끈후끈 달아있었다. 아직 몸을 몇번 휘젓지도 않았는데 몸이 끈적거려나면서 목덜미에 땀이 번져나기 시작했다.  이 동네는 대개 이렇다. 이맘때가 가을 호랑이라고 불리우는 무더위가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는 시기이다. 서둘러 가을을 불러들이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곳의 초가을은 오히려 여름을 압도할 지경으로 살인적이다.    경이는 여직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6학년이 되도록 매일매일 두드려 깨워서 학교에 보내고있었다. 오늘도 엄마한테 질리게 난시 맞고도 면역이 되였는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밥상에 마주앉아 느적느적 밥을 먹었다. 통학뻐스가 올 시간이 되였는데도 막무가내로 늑장을 부리는 경이를 보다못해 창학이는 딸애의 책가방을 한손으로 들고 무작정 집밖으로 나왔다. 매일이다싶이 반복되는 액션이였다.  (자식이 딱 개미같아. 밟혀죽을 걱정도 안하고. 아니 개미가 아니고 완전히 배짱이야.) 창학이는 저혼자 실실거리다가 탁 하고 침을 내뱉었다. 마침 길가던 개미 한마리가 난데없이 날아온 걸직한 액체에 파묻혀 허우적거렸다.  (어, 미안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다가가던 창학이는 한무리의 개미가 줄쳐서 어디론가 가는것을 보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병사들처럼 일렬로 길게 행렬을 지어 걸음을 재우치는것이 장관이였다. 어떤 넘은 재주를 부리는지 갈지자 걸음을 하면서 다른 넘들의 앞길을 막고있었고 간혹 오던 길을 부랴부랴 되돌아가는 넘도 보였다. 아마 급히 나오다보니 집에 뭔가 두고 온 모양이라고 창학이는 생각했다.   창학이는 불교도는 아니지만 동물에 남달리 련민을 가지고있는 사람이였다. 특히 몸체가 작은 곤충류는 그저 불쌍한 생각만 들었다.  이른 아침에 개미들은 무얼하려 가는지 알수 없었다. 일개미들이 먹이 찾으러 나가는지 모를 일이였다. 아직 날씨가 좋을때 미리 겨울 량식을 준비해야겠지.  찬찬히 여겨보니 놀랍게도 개미들의 집이 아파트단지내의 대리석바닥길 밑에 있는상싶었다. 대리석이 서로 이어진 틈서리에 작은 흙무지가 여러개 보였다. 그것도 한곳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개미의 집이 보였다.    “아빠 뭘해?” 창학이가 혀를 차면서 개미의 생존능력에 찬탄을 아끼지 않고있는데 어느새 왔는지 경이가 물었다.  “아니야.” “아니긴 뭐 아니야. 혀까지 낄낄 찼잖아?” “개미가 너보다 더 부지런해서 그랬다. 왜?” “그럼 개미 아빠 해” “그럴가?” 경이는 이젠 제법 입씨름을 할줄 안다. 전에는 고분고분하던 애가 요즘 들어서는 자주 대들군 한다. 저절로는 반항기라서 그렇단다. 세상 모르는게 없는 요즘 애들이다. 그래도 창학이는 딸애와 매일 토크쇼를 하는게 꽤나 재미있다.   부랴부랴 애를 다그치면서 대문을 빠져나갔지만 통학뻐스는 그때까지 오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늦다고 실컷 애를 들볶아도 열에 아홉번은 뻐스보다 먼저 도착하여 10여분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아마 경이가 심드렁해진것도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번에 딱 한번 통학뻐스보다 늦어지면 바로 전화가 날아온다.  “경이 아빠,  왜 아직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냥 안면몰수하고 버럭 한소리할가 하다가도 괜스레 애가 학교에서 미운 털이 박혀서 구박을 받을가봐 참군 했다. 바람 줄창 맞다가도 통학뻐스가 다가오면 허리를 굽석이는 퍼포먼스를 일삼아야 하는 자신에 비해 상대는 항상 당당했다는 억울함은 언제나 창학이를 불편하게 했었다. 그래도 뻐스보다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게 맞다고 항상 경이앞에서는 대범하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다가 전번 학기에 한번은 하학시간을 한시간이나 넘겼는데도 뻐스가 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전화를 할가말가 수십번을 견주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전화를 넣었다.    “여보세요…” 자기도 한번쯤은 “왜 아직도 오지 않아요?”하고 말하고싶다는 충동이 일어날 즈음이였다. “아, 경이 아버님, 미안합니다. 이제 곧 떠날게요.” 통학뻐스 지도사 선생님은 이쪽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나름대로 련주포처럼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창학이는 한동안 어리벙벙한 상태에 빠졌다. 전화 씹은거 맞지? 그래 전화를 씹은거잖아. 스스로 자문자답하다가 불시에 울화가 울컷 치밀어올랐다.  사람 말 잘라먹어? 선생이란게? 생선 토막도 아니구 제멋대로 남의 말을 잘라먹어? 목구멍에 걸려 큰일 나려구 어디서 감히?  그러나 인차 화산같이 부풀어올랐던 분노가 허무하게 내려앉았다. 쳐든 핸드폰을 째지게 노려보면서 창학이는 이가 빠져서 말이 헛나가는것은 용서가 되여도 말이 저절로 빠져서 이가 헛나가면 큰일이라고 자신을 힘겹게 위안하고 있었다.    통학뻐스는 다시 반시간을 훌쩍 넘어서 왔지만 지도사 선생님은 왜서 한시간 반이나 늦어졌는지는 해석치 않고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다시 훌쩍 떠나가버렸다.  (이런 제길!) 창학이는 지도사 선생님에 대한 불만을 경이한테 쏟아붓듯 저도모르게 꽥 소리질렀다.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어떤 사람이 학교 정문에다 흙을 잔뜩 가져다가 쌓아놓았어. 뻐스가 나올수 없어서 다른 뻐스를 불러서 그걸 타고 오느라고 늦었어.” 경이는 묘하게도 아버지가 화를 내는 대목을 잘 알고있었다. 그런 날에 정면으로 충돌하면 자기만 손해라는걸 잘 아는 경이는 또렷또렷하게 설명했다.  “흙은 왜? 웬놈이 흙은 왜 정문에 쌓아놓았는가말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창학이는 그 길로 학부모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전 내린 폭우로 인해 학교 담장이 무너지면서 이웃공장의 창고 벽을 짓뭉개놓았다고 한다. 학교서 사람을 파견하여 보수해주겠다는것을 공장주가 거절하고 수만금을 내라고 협박했고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니 저렇게 양아치 수작을 부린다는것이였다.    경이가 다니는 학교는 사립학교이다. 공립민족학교가 없어서 애를 한족으로 만들고싶지 않는 사람들은 목돈을 팔면서 그곳으로 보내고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웃사이더의 처지가 늘 그러하듯이 뜻하지 않는 불상사들이 자주 발생하군 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너무 엄중했다. 지랄도 가지가지라지만 나어린 학생들을 볼모로 잡고 협박하는건 범죄행위나 다름없었다.    창학이는 그날로 시장 공개메일에 민원편지를 발송했다. 자신이 기자신분임을 먼저 밝히고 다시 국가지원이 전혀 없는 민족사립학교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이어 저런 불법행위를 엄단할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단순한 분쟁을 넘어 이미 법에 저촉했다고 강조했다. 며칠후 답복 메일이 날아왔다. 학교 담장이 무너져서 공장벽을 파손시켰다는 점을 강조하고 쌍방이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했다고 알려왔다. 흙무지를 학교 정문에 쌓아놓은 행위가 학생들을 볼모로 잡은 위법행위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석도 없었고 그 흙무지를 어떻게 한다는 처리의견도 없었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창학이는 그런 답복이 돌아올줄 미리 알고있었다. 그래서 입만 쩝쩝 다셨을뿐 다시 질의를 하지 않았다. 정신님이 마실 다녀가신것도 아니고 알아서 말을 줄여야지 아니면 명이 먼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였다.    경이를 학교에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안해는 출근이 늦어졌다고 야단법석을 놓고있었다. 손바닥만한 사무실을 하나 내고 몇년간 오바마보다 더 바쁘게 돌아치는 안해이다.  창학이는 주방으로 직행했다. 생각대로 그릇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안해가 과장된 제스처로 설레발을 칠때면 대개 설겆이를 하지 않고 바로 나가기 위해서라는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있는 창학이는 심드렁하게 밥사발을 들고 식탁에 마주앉았다.  오늘은 주말이여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나흘을 출근하고 사흘은 자기절로 지배하는 화이트맨이다. 거꾸로 일주일동안 매일 열시간이상 인터넷을 헤매야 하는 “오타쿠”식 인간이기도 했다. 안해도 그걸 알고있어서인지 금요일만 되면 꼭 회사에 일찍 나가야 할 일이 생긴다. 창학이는 시무룩히 웃었다.    밥을 다 먹고 설겆이를 끝내고 치솔질하고 담배 한가치 피워 물고 쏘파에 다가가 티비를 켜기 바쁘게 폭발적인 뉴스가 흘러나왔다. 방금 조선 풍계리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약 5.0의 인공지진파가 감지됐다는것이였다. 후다닥 서재로 달려들어가 컴퓨터부터 켰다.    창학이는 뉴스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다. 영상화면이 아무리 직관성을 가진다해도 인터넷 속도와 규모를 당하지 못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인터넷밭은 벌써 발칵 뒤집혀져있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로 글을 볼수 있는게 창학이의 최대 우세이다. 그래서 한시간도 채 못되여 지진의 상세한 위치와 강도, 진원의 깊이 그리고 세계 각국의 즉시적인 반응 같은것을 인차 료해할수 있었다.    (오늘 주식이 또 폭락이겠구나!) 07년의 폭락사태와 지난해의 널뛰기장을 모두 겪어본 창학이는 속이 철렁했다. 10년이 다 되도록 본전도 못 찾아오고있는 창학이다. 그때문에 안해한테 심심하면 몰려댄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주식시장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창학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이제는 도가 틀때도 되였는데 아직도 조건반사적으로 술덤벙 물덤벙인 자신이 꽤나 멍청해보인다.  중국은 세계의 보편적인 논리와 질서로 판단하면 잘못이다! 바로 그거였다. 미국 연방 기준금리가 또 동결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을때 증시가 올리 솟구칠줄로 믿었던 대부분 개미들은 곤두박질치는 주가로 인해 가슴을 졸여야 했다. 반대로 중국 증시가 신흥시장 지수 편입이 불발되였을때는 되려 선방했고 영국의 브렉시트 공포에도 상해종합지수는 상승폭을 키웠다.    도대체 이넘의 시장이 뭐가 어떻게 된 갈래판인지 창학이는 도무지 알수 없었다. 페어플레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마당에서 뛰여봤자 벼룩이지 싶다. 머리 썩이지 말자. 타률에 짓밟혀 사는 중생에게 사고력 요구는 사치가 분명했다. 자기 인생 자체가 사건사고에 세상에 이런 일이인데 무얼 더 바라겠는가. 운명이란 소리도 하지 말자, 진짜 운명할수도 있는것이다.   창학이는 모니터에 박았던 눈길을 베란다로 돌렸다. 이 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공간이 바로 베란다이다. 웬간한 방 반쪽은 될 정도로 넓은 공간이다.    처음 입주했을때는 별로 폼을 잡는라고 인테리어를 멋지게 하고 의자와 차탁을 갖다놓고 식후 휴식공간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초라한 인생은 아무래도 말릴수 없었던지 하나둘 쓰지 않는 물건이 그곳에 쌓여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만 창고로 전락해버렸다.    그래도 풍류기는 그나마 남아있어서 해빛이 잘 드는 쪽에 흙을 반쯤 담은 스티로폼박스를 비치해놓았다. 그것은 경이의 시험전이였다.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면서 거기에 일년내내 채소를 심는다. 요즘은 배추씨를 뿌려서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고있었다.     불현듯 스티로폼박스벽에 시커먼 물체가 기여다니는것이 보였다. 눈이 별로 안좋은 창학이는 부시시 일어나 휘청휘청 베란다로 다가갔다. 개미였다. 설마 하고 둘러보니 그것도 한두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오가고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어느새 스티로폼박스 흙속에 개미구멍이 생겨있었고 베란다바닥은 물론 서재 마루바닥에서도 몇마리 넘실넘실 춤추며 보란듯이 기여다니고있었다.    (아, 어느새 이것들이…) 개미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개미는 한번 침입하면 거침이 없다. 그것도 굴을 만들 정도면 심각하다.    창학이는 급히 살충제를 찾아들고 일단 기여다니는 개미부터 저격했다. 한번 살충제를 맞은 개미는 몇발작 움직이지 못하고 바로 몸을 쪼그리고 죽거나 아니면 훌렁 번져져서 죽어버렸다. 내친 김에 흙속의 굴을 뚜져서 그곳에도 한줄기 시원하게 살충제를 분사했다. 개미들이 떼를 지어 죽어나가는 환영이 방불히 눈앞에서 얼른거렸다.  (아차, 잘못 죽였나? 하나하나 잡아서 집밖으로 내버리면 될걸 가지고…) 창학이도 주식시장에서는 개미이다. 개인투자인으로서도 그렇고 약육강식으로 죽어나가는것도 개미와 그대로 닮아있다.  올해 주식시장에서 완커(万科)가 많은 화제를 몰아왔다. 바오넝(宝能)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맞서 6개월 넘게 주식 거래를 중단했던 완커가 거래를 재개하자마자 련속 며칠 하한가를 기록했었다. 그러나 왕스(王石)는 분명 개미는 아니였다.    점심을 먹고 오후장이 시작될때 마춤하게 깨여난다는것이 그만 막장쯤에야 소스라치듯 뛰여일어났다. 장세가 외부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오히려 전날보다 조금 상승한 포인트에서 장을 마감하고있었다.    조금 있으면 경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창학이는 부랴부랴 옷을 차려입고 문을 나섰다. 애를 맞이하기전에 저녁장을 보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6학년이면 이제 저절로 갔다왔다할수 있는 나이이다. 그런데 아파트 앞 거리가 무법천지 차량들로 너무 붐벼 위험하다. 요즘에는 녀학생 실종사건도 자주 터져 도무지 마음 놓고 혼자 내놓을수 없다.    경이는 래년이면 중학교로 올라간다. 그게 창학이에게는 큰 골치거리이다. 어차피 현지 중학교로 진학해야 하는데 받아줄 학교가 마땅치 않다. 지금 살고있는 아파트 소속 중학교는 시골중학교이다. 단층으로 된 교실에 6~70명씩 가두어놓고 공부랍시고 시키는 락후하고 원시적인 학교이다. 시설이나 설비나 거의 80년대 수준이였다.   경이는 공부도 잘했다. 반급에서 항상 앞자리를 다투는 애다. 그래서 선생님들도 좀 좋은 학교에 보낼것을 충고하고있다.    그런데 창학이는 이곳에 호적이 없다. 인맥을 찾더라도 일단 호적이 있으면 좋은 학교에 붙기가 그만큼 우세를 가진다. 거기다 학교 소속 구역에 집까지 있으면 거의 입학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창학이는 안해와 상의하고 현재 사는 140평 되는 집을 팔고 실험중학교 부근의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곳으로 가면 겨우 80평되는 집밖에 사지 못한다. 그래도 애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창학이는 1년전부터 호적을 올리는 방법을 여러모로 수소문했었다. 시정부 규정에 따라 100평이상짜리 새 분양 주택을 구매하면 호적을 얻을수 있으나 창학이가 현재 사는 집은 중고주택이다. 대학생도 왕년의 졸업생은 호적 혜택에서 제외됐다.    그러다가 루적 점수로 호적을 얻을수 있는 방법이 생겨났다. 그 점수제대로 자기절로 두루두루 맞추어보니 요구 커트라인인 백점을 훨씬 웃도는 150점이 되였다. 무슨 수능시험도 대입시험도 아니고 그저 시민이 되는건데 커트라인이라니 한참 웃기는 일이지만 그래도 창학이는 진지하게 모든 서류를 챙겨들고 인력자원과사회보장국이라는 부서를 찾아갔다.    창학이를 맞아준 사람은 메주를 아무렇게나 주물러놓은듯한 20대 초반의 햇내기 처녀였다. 입가를 실룩거리면서 창학이가 내민 서류를 꺼내 훑어보는가싶더니 뭔가 하나를 던져왔다.    “이건 아니예요.” 보니 문학상증서였다. 성급이상 수상증서는 20점을 준다고 해서 하루종일 서재를 뒤져서 겨우 찾아낸것이였다.  “왜 안되죠? 거기에 성위선전부와 성민족사무위원회의 공인이 찍혀있잖아요?” “성위나 성정부의 공인이여야 해요.” “성위 선전부는 성급이 아닌가요?” “그건 청급이지 성급이 아니예요. 통지를 알아보지 못했나요?” 수평이 모자라다는 소리로 들렸다. 요런 발칙한것 봐라. 사타구니 습기도 안마른 계집년이 참한건 배우지 않고 나쁜 행실만 먼저 흉내내잖아. 자료나 받아서 정리하고 보관하는 자질구레한 심부름이나 하는 주제에 어디다 대고 함부로 주둥이 놀리지? 넌 수평이 높아서 좋겠네. 비행기에다 물병 달고 온거냐? 창학이는 괜스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주머니에서 기자증을 꺼내 던져주었다.  “이건 몇점 되겠습니까?” 메주처녀는 한눈으로 흘끔 보더니 그대로 다시 던져왔다.  “이것도 안돼요.” “자격증도 30점이라고 했잖습니까?” “기술자격등급증서를 말합니다.” 그러더니 뭔가 다시 던져왔다.  “이것도 쓸데 없어요.” 작가증이였다.  “다른 자격증은 없어요? 용접공 자격증이라던가 아니면 하다못해 전기수리공 자격증이라던가 하는걸 말이예요.” 그러니까 붓쟁이보다 땜쟁이가 더 좋다는 말이잖은가. 창학이가 입을 하 벌리고 억이 막혀있는데 메주처녀는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컴퓨터를 뚝딱거리더니 모든 서류들을 한꺼번에 테이블에 던져왔다.  “2점이 모자라요. 안되겠네요.” 어디서 또 2점이 떨어져나갔는지는 알바 없지만 아무튼 창학이는 안달아나서 금방 울화가 치밀어오르던것을 모두 잊고 톤을 낮추어 비굴하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가요?” “혹시 봉사활동같은데 다닌적 있어요?” “취재로 자주 다니기는 합니다만 별도 증명은 없습니다.” “그럼 헌혈은 해봤습니까. 헌혈 1차에 1점이거든요.” “아, 그래요?”   창학이는 두말없이 서류들을 챙겨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퇴근한 안해에게 2점이 모자란다는 얘기를 하기 바쁘게 안해의 입에서 고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독주 한잔 마시고 횡설수설하듯이 한동안 중국식 “카스트”제도를 성토하더니 맥이 진했는지 쇼파에 주저앉았다. 사업을 하면서 승자는 강한 자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라는것을 잘 아는 안해는 결국 가슴으로가 아니라 뇌로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였다. 슬그머니 창학이쪽으로 몸을 옮겨와 의논조로 물었다.    “피 한번 뽑으면 1점이라고 했나요?” “그렇게 말하더군.” “그럼 우리 둘 한사람 한번씩 뽑아요. 2점 모자란다고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내 한사람이 헌혈해야 할걸.” “한사람 이름으로 해달라지요뭐. 피 공짜로 주겠다는데 그런 요구 안 들어주겠어요?”   이틀이 지나서 시내로 일보러 나갔던 안해가 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에 헌혈차가 있네요. 그런데 다른 사람 이름으로 피를 뽑을수 없다네요. 아무래도 당신이 와야겠어요.”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달려가니 안해는 헌혈차의 그늘밑에 맥없이 쪼크리고 앉아 나무꼬챙이로 바닥에 뭔가 신경질적으로 긋고있었다. 기진맥진하듯 어깨가 축 처진 왕짜증난 모습이였다. 창학이는 코마루가 찡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사장 명색을 여러해동안 하면서 안해가 저렇게 기가 죽어서 있는 모습을 거의 본적이 없었다.    (자식이 뭔지 쯔쯔) 창학이는 안해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곧바로 헌혈차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안해도 뒤따라 들어왔다.  이젠 몸매가 망가질대로 망가진 사십대의 중년 녀인 둘이 무슨 이야기인가 속삭이다가 창학이가 들어서니 하던 말을 멈추고 별로 반갑지 않다는듯 심드렁한 어투로 물어왔다.    “헌혈하시겠어요?” 창학이는 말하기도 귀찮다는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두사람이 번갈아가며 아침에 기름기 있는 음식 먹었냐 술은 먹었냐 요즘 감기 걸리지 않았냐 약은 먹었냐 몸에 무슨 질병은 없냐고 물어왔다. 창학이는 무작정 머리만 가로저었다.    “선생님의 키와 몸무게로 보아서 400ml은 뽑아도 괜찮겠네요. 400ml 뽑을가요?” “아니오. 200ml 만 하세요.” “너무 적은데요.” “그럼 300ml 하세요.” “아예 400ml 뽑으면 안돼요? 많은 분들이 그 정도로 헌혈하는데요.” “헌혈도 강박으로 하는겁니까?” “아, 아니예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해가 알수 없다는듯 물어왔다.  “400이나 300이나 별 차이 없겠는데 왜 그렇게 화내고 그랬어요?” “사장님, 장사 그렇게 하세요? 며칠후 또 한번 헌혈해야 하는데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뽑고 나중 죽어라구요?” “아…” 안해는 그제야 무슨 영문인지 알았다는듯 고개를 까닥까닥해댔다.  그러나 며칠후 창학이는 단숨에 천길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전번날 헌혈한 증서를 가지고 다른 헌혈차를 찾아가니 그곳 사업일군이 외성인을 보듯이 창학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는것이였다.  “공익사업에 동참하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규정상 안되겠습니다.” “왜요?”   창학이는 사색이 되여 외마디 소리를 뽑았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유일한 희망이 동강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강하게 엄습해왔다.    “전날에 의사가 400ml를 헌혈하라고 충고하는걸 무서워 300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이 며칠 지내보니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고해서 200쯤 더 헌혈해도 괜찮겠다싶어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건 알겠습니다만 헌혈량에 따르는것이 아니라 헌혈차수로 판단합니다. 두 헌혈사이 시간은 반년이 되여야 합니다. 손님의 신체건강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글쎄 제가 괜찮다는데도 안됩니까?” “국가규정이 그래요. 감사합니다.”   창학이는 풀이 죽어 돌아왔다. 점수제 신청은 이번달로 마감한다. 반년후에야 다시 헌혈할수 있다면 결국 점수제에서도 1점에 목매달게 된것이다. 창학이는 비참한 마음에 아무나 붙잡고 푹 취하고싶었다.    그후 며칠동안 창학이는 안해앞에서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았다. 깔아준 멍석우에서도 못했다는 자책감은 쉽사리 가셔지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생각이 항상 무협지수준이라는 느낌도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였다. 차라리 사막에다 배를 띄우고 말지 그렇게 자책하고 있는 와중에 하루는 안해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걸어왔다.    “여보세요.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우리 순리에 따라요. “ 하느님 맙소서. 아침 메뉴 같은걸로 먹었더니 견해도 같아졌네. 부부란 이심전심으로 정말로 통하는데가 있다고 속으로 한탄했다.    늘어지게 시장을 보고 돌아왔지만 그때가지도 통학뻐스는 오지 않았다. 늦은 오후 시간에도 해볕은 마냥 따갑다. 창학이는 가로수 그늘밑으로 찾아들어갔다. 10년도 더 되였을법한 플라타나스 나무이다. 여러해전에 다 큰 나무를 기중기로 심던 장면이 떠올라 창학이는 허글픈 웃음을 떠올렸다. 식수는 애목을 골라 심는걸로 알았던 창학이는 기중기로 그것도 10메터가 넘어보이는 나무를 옮겨다 심는 장면을 보고 그저 입을 딱 벌렸었다. 저런 나무들을 어디서 파오는지 알바 없었고 저렇게 심어서 살아날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나무들은 용케도 살아났다. 물론 어떤 나무는 일년내내 링거를 달았었다. 좀 학문이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건 영양제라고 했다.  전에 링거를 맞던 자리가 아직도 남아있냐를 살피던 창학이는 장관의 장면에 또한번 전률했다. 개미 대군이였다. 한줄로는 줄쳐 올라가고있었고 다른 한줄로는 쉬임없이 내려오고있었다.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를 살펴보았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려서 가는 길도 어디인지 끝없이 줄이어 행군하고있었다.    창학이가 싱겁게 아래우를 살피고있는데 웃통을 벗어던진 웬 청년이 이상한지 다가와 따라서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웬 영문인지 알았다는듯 갑자기 땅바닥의 개미행렬을 구두발로 사정없이 짓밟기 시작했다. 머리나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개미들이 여기저기 나딩굴었다. 그래도 개미들은 용감하게 계속 줄이 이어나갔다. 청년은 그것도 모자랐는지 나무에 다가가더니 우로 기여오르는 개미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질러 죽이는것이였다. 그렇지만 개미들은 여전히 포기를 모르고 뒤를 이어 오르고 또 올랐다.    창학이는 차마 눈뜨고 그 란폭한 거동을 지켜볼수 없어 거리로 눈길을 돌렸다. 저만치에서 통학뻐스가 달려오고있는것이 보였다.                                                        2016년 9월 청도에서 
97    산동, 그 무궁한 문학공간과 발전 잠재력 댓글:  조회:748  추천:1  2017-01-06
평론   산동, 그 무궁한 문학공간과 발전 잠재력 과거, 현재와 미래로 살펴보는 산동조선족문학   장학규     □ 들어가는 말 중국 조선족문단으로 놓고 말하면 산동은 많이 생소하고 후진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산동쪽으로 눈길을 돌려주는 평론인들이 거의 없다. 문단 행사를 해도 동북3성과 북경 등 전통적인 문단 구조내에서만 진행하고 산동은 아예 념두에도 없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 조선족이 대규모로 산동반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20년이 되여온다. 저그만치 강산이 두번 변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그리고 인구도 이젠 20만 명을 훨씬 웃돈다는 말이 있다. 필자가 태여난 흑룡강성 목단강지구의 조선족인구보다 더 많은 수치이다. 그런데도 이곳에는 여직 우리의 문화 터전이 전혀 마련되여 있지 않다. 공립 민족학교가 단 한곳도 없는것은 물론 문화관이나 예술관도 없고 합법적인 잡지사도 없다. 이곳의 문인들은 한마디로 고군분투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행한 일이 있다. 고향문단에서 이미 자리를 굳혔거나 또는 문학에 뜻을 둔 문인들이 하나둘씩 자꾸 이곳으로 합류하고 있는것이다.  이보다 더 다행한것은 각자 도생하던 이곳 문인들이 민간단체이기는 해도 “작가협회”란 이름으로 한데 뭉친것이다. 그리고 회원작품집을 해마다 간행하고 있는것이다.  이제는 산동에 주목해도 괜찮을것이다. 아니, 산동을 간과할수 없을것이다. 문단에서의 산동분동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는 리유는 산동의 과거, 현재에 대한 점검과 미래 가능성에서 보아낼수 있을것이다.      □ 조선족의 산동진출 시대배경과 현황  중국은 1976년 문화대혁명을 종결시키면서 세계 대가정으로 귀환했다. 특히 80년대 초반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의 문호를 대외로 개방하면서 새로운 경제건설의 붐이 일어났다.  산동성 청도시는 중국에서 최초로 대외로 개방한 14개 연해개방도시중의 하나로서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물가의 루대가 먼저 달을 얻는다고 그중에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이 가장 선참으로 기회를 포착했다. 청도의 닭울음소리가 인천에서 들린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과 산동은 지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으로 많은 인연을 가지고있었다.  한편 인근의 연태시와 위해시 등 연해지역에는 신라방이 여러곳 있었고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법화사 등 우리민족 선조들의 흔적과 발자취가 력력히 남아있었다.  이런 연고로 산동에는 일찍 우리민족 후예들이 더러 살고있었다. 그당시 청도를 비롯한 산동지역에는 퇴직군인, 과학기술자, 교사, 의사 및 특수 공업분야에 종사하는 전문 기능공 등 수백명에 달하는 우수한 조선족들이 자리를 잡고있었다.  연태시 량가(梁家)촌에 사는 문분녀씨는 한국에서 화교인 남편을 따라와 70여년 말동무 하나 없는 동네에서 외롭게 살아왔다. 산동에는 이렇게 말할수 없는 사연으로 이름없이 살아온 조선족녀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제남군구 모부 참모장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박인혁씨의 회억에 따르면 일찍 60년대에 중조어업협정에 의하여 연태와 석도 등 항구 부근에는 조선어선들을 위한 조선족 통역들이 배치되였었다. 70년대 초반에는 조선족 군인들로 꾸려진 축구팀만 해도 3~4개 정도였다고 하며 그후 70년대 중반 46군단이 길림에서 산동으로 교체 주둔하면서 더 많은 우리민족 군인과 가족들이 이주해오면서 우리민족 여성군인 아홉자매의 사연이 “연변일보”에 실릴 정도였다고 한다.  연태개발구에 위치한 연태동성(집단)공사에는 100여 세대 300여명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 연태동성공사의 전신은 길림성 반석시 모 산골에 위치해있던 국가병기공장이였다. 개방후 국가 지령에 따라 1988년에 병기공업부로부터 수도강철공사에 귀속되였고 에어컨 생산합작자를 찾아 1993년도에 연태개발구로 집단 이주하게 되였다고 한다.  이런 기회와 배경으로 인해 산동의 첫번째 외자 기업은 당연히 한국의 몫이였다. 세계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은 중국과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까왔을뿐만 아니라 200만에 달하는 중국국적의 동포들을 가지고있었기에 언어 인문적으로도 우세를 가지고있었다.  아직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전인 1989년에 토프톤전자회사가 첫 한국독자기업으로 아름다운 해변도시 청도에 자리매김함에 따라 한국기업의 청도진출은 터진 봇물마냥 줄을 이었다.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07년에 이르러 재 청도 한국 기업수는 이미 6,000여개에 달했으며 한국 교민수도 12만 명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중국 동북3성 등 전통적인 거주지에서 조선족들이 대거 이주해왔다.  2008년에 만난 청도시민족사무위원회 마전진(马前进) 부국장에 따르면 2000년도 전국인구보편조사에서 청도시소수민족 호적인구가 3만 3천명으로 밝혀졌으며 3개월 이상 거주하는 유동인구는 20만 명이 넘는것으로 파악되였다. 그중 조선족인구가 절대대부분이라고 한다.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불황으로 떠나간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전체 산동성적으로 계산하면 현재 역시 2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살고있는것으로 추산되고있다. 호적인구도 8만명에 접근하는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정부와 학술계 차원의 조사연구사업이 간간히 이어지고있다. 일찍 2007년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민족리론정책연구실 박영일처장이 청도시를 방문하여 조선족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경청하였으며 2008년에는 천진시민족사무위원회 유홍원 연구실 주임이 남개대학 연구생들을 데리고 “도시진출 조선족사회”란 쩨마로 현지 답사를 다녀갔다. 2008년 산동성 중국공산당간부학교와 산동성민족사무위원회에서는 공동으로 “산동반도 진출 조선족현황 조사”를 실시했으며 2010년에는 중국해양대학교 한국연구중심에서 “청도지역 조선족사회의 어제와 오늘”이란 테마로 좌담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어 2011년 말에는 북경 중앙민족대학에서 중앙통전부 민족종교국 조학의 국장,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김성화 당위 부서기, 정책법규사 심림 처장 등 10여 명 관원이 참석한 가운데 “청도조선족사회문제 해결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 민족사회의 형성과 문화형태 1992년 8월 24일 중한수교는 조선족들이 대량으로 산동에 유입된 촉매제였다. 정부 산하의 투자유치국을 중심으로 세관, 은행, 병원, 관광, 법률, 호텔 등 분야의 조선족 인재들이 속속 전근되여 왔으며 한편 대학졸업생 위주로 시작된 한국기업관리일군들도 수요량이 늘어나면서 고중이하 출신들로 서서히 범위를 넓혀갔다.  조선족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는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은 민족교육문제였다.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킨다는 조선족들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반면에 애들은 민족학교가 없어 동화될 위험에 노출되였다. 공립학교 설립을 위해 퇴직 군간부인 현귀춘씨를 위시한 유지들이 뛰여다녔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2000년 8월에 이르러 청도에 사립조선족학교가 세워지면서 그나마 민족교육의 명맥을 이어갈수 있었다. 현재 청도에는 정양학교와 서원장학교 등 2개의 사립조선족학교가 있고 연태에는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가 주관하는 주말학교가 수년간 가동되고있으며 위해시에도 여성협회 주도로 조선족어린이한글반을 운영하고있다.  다음은 조직의 부재이다. 고향에는 조선족마을이 있었고 정부에도 민족간부가 따로 있었지만 이곳에는 조선족을 통일적으로 관리할수 있는 시스템이 전혀 없었다. 현재까지도 각종 민간단체들이 난립하고 각자가 먹고 즐기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래도 문화의 기갈이였다. 민족이 생존해나가는데는 문화가 우선적인 요건이다. 교육이 상실되고 조직이 전무한 상태에서 문화의 전승이란 한낱 빈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1997년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의 설립은 하나의 리정비적인 사건이였다. 이 지사는 자체로 지역면신문을 발행하여 산동한겨레사회소식을 전달하는 한편 “푸른섬”이라는 문학 부간도 창간하여 처음으로 산동진출 조선족문인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지면의 제한으로 부간이 취소된 상황이지만 여전히 작품 특집을 짬짬히 펴내고 있다. 이 신문을 통해 알려진 작가들로는 리문혁, 김건, 류일복, 김미령, 송련옥, 리화, 최재문, 김운천, 홍걸, 리길룡 등을 들수 있다.  2005년에는 문학전문지인 “송화강”잡지가 청도에 진출했다. 이로써 산동조선족문인들은 비로서 자기의 진지를 가지게 되였고 본격적으로 문학창작활동을 줄기차게 벌려나갈수 있었다. 2010년 초에 할빈 본사로 전략적인 철수를 하기까지 “송화강”잡지는 산동조선족문학창작활동에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했다. 이 잡지를 통해 활약한 작가들로는 김기덕, 리호원, 김춘택, 리홍철, 조광명, 홍군식, 유해금, 홍순범, 박영희, 장학규 등을 들수 있다.  이에 앞서 2005년 4월에 창간된 “꽃노을”잡지(주필 김재룡)가 있다. 청도조선족로인협회 회간으로 출발한 이 잡지는 10년간 32기를 발행했으며 현재 잡지명을 “해안선”으로 고치고 더 넓은 독자층을 상대로 하게 되였다. 해안선문화전파유한회사로 소속을 바꾸면서 비교적 합법적인 신분이 된 “해안선”은 상업잡지가 판을 치는 치렬한 경쟁속에서도 광고 등재를 한사코 거절하면서 종합잡지의 길을 고집하고있다. “해안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된 작가들로는 김재룡, 홍영빈, 한춘옥, 정순금, 김명숙, 전향미, 최균필, 차설매, 홍태수, 장향화 등이다.   □ 문학단체의 설립과 주요 활동  문인 동아리나 문학지가 전혀 없는 신 개간지에서 산발적으로 “연변문학” 등을 통해 문학창작활동을 벌려오던 산동지역문인들에게 고향에서 원격 지원을 나온 언론매체와 문예지는 그대로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2000년 1월, 청도에 위치한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 회의실에서 연변작가협회 산동창작위원회 설립식이 있었다. 산동진출 조선족문인들의 첫 모임이기도 한 이날 설립식에는 산동성 각 지역에서 14명 대표가 모여왔으며 그중에는 한문으로 창작하여 중국주류문단에도 알려진 김창용씨와 백결씨가 들어있었다. 창작위원회 주임으로는 “김구평전”을 쓴 김운룡 작가가 선출되였고 부주임에는 김기덕과 장학규 그리고 청도대학의 리춘자 교수가 당선되였다. 당시 통계로 산동성에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12명 있었다.  이 창작위원회는 2002년에 “연해문학”이란 회원작품집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김운룡선생이 암으로 투병하다가 작고하면서 흐지부지해지게 되였다.  이에 이어 2006년 하반기에 원로시인 리상각의 후원하에 김춘택의 창도로 재청도시인들로 '시조협회'를 설립했다. 여기에는 김기덕, 홍영빈, 리호원, 조광명, 홍군식, 송련옥, 김춘택, 리홍철, 박창묵 등 기성시인들이 참여했다. 아울러 청도조선족학교인 벽산학교에서 시조경색을 조직하는 등 나름대로 문학창작을 진행하는 동시에 사회활동에도 참여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그러나 시조협회는 문인들을 다시 한자리에 모이도록 이끈 촉매역할을 놀았지만 문체의 국한성 때문에 산동에 거주하고있는 많은 작가들이 함께 어울리기 어려웠다.  당시 인구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더욱 많은 문인들이 산동에로 유입되였으며 청도대학, 중국해양대학, 청도농업대학 등 고등학교들에 한국어학부가 설립되면서 전업적인 문학리론가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후비력도 성장하고있었다.  이런 형세하에서 시조문인협회는 더 이상 문인들의 터전이 될수 없어 그 사명을 다하게 되였다. 대신 새로운 문학단체가 잉태하게 되였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청도연해조선족문인협회'이다.  이 협회는 2007년 12월 28일 청도에서 설립되였으며, 초기 회장에 리호원이 당선되고 김춘택이 수석 부회장 겸 비서장으로, 장학규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였다. 그후 2기, 3기 회장에 리홍철이 련임했고 현재 제4기 회장에 리문혁이다. 2013년 12월 이 협회는 회장단 회의를 통해 “청도조선족작가협회”로 명칭을 변경시켰다. 비록 청도라는 지역명을 사용하지만 회원은 산동성 전 지역에 포진해있으며 연변작가협회 회원만 18명 포함되여있다.  2008년 7월에 리호원 주임, 장학규 부주임으로 된 연변작가협회 청도창작위원회를 재설립하면서 청도조선족작가협회와 더불어 투톱 역할을 하고있다. 지금까지 모든 활동은 두 단체의 련합 성격을 띠고 있으며 사실상 수뇌부는 하나로 통합되여있다.  이 협회는 해마다 계절에 따른 정기모임을 이어오고있을뿐만 아니라 “갯벌의 하얀진주”로 명명된 회원작품집을 이미 5권이나 발간했다. 30만자가 넘는 대형작품집인 “갯벌의 하얀진주”는 산동조선족문학인들에 대한 집중 조명인 동시에 산동조선족문학의 기념비로 점차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울러 2009년 2월 재중한국인회 정효권 회장의 후원을 받아 “리커문학상”을 시상했고 2011년 12월에는 청도시 성양구조선족기업협회의 협찬을 받아 전국을 상대로 “연문컵문학상”을 공모하여 성공적으로 시상식을 치르기도 했다.  한편 2012년부터 해마다 청도정양학교와 청도서원장학교를 상대로 백일장을 펼치고 있다.   ∋ 창작활동과 성과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게 된다.  산동지역의 작가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 와중에도 창작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단체의 힘을 살려 “청도특집”으로 각 잡지사에 등업했다. “송화강’은 모태였던만큼 해마다 특집이 실렸고 “연변문학”은 2011년 7호와 2013년 12호에 게재되였으며 “도라지’잡지는 2014년 2기에 발표되였다.  물론 개인별 작품 창작은 더욱 풍성했다. 김운룡, 김기덕, 조광명, 장학규, 리홍철 등이 선후로 각 문예지의 집중 조명을 받았으며 허강일은 2014년 4기부터 장백산 잡지에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을 련재하기 시작했다.  개인작품집도 줄기차게 출간되였다.  김운룡은 2000년에 인물전기 “김구평전”을, 2002년에는 중단편소설집 “화려한 시절의 동화”와 대하력사소설 “광야의 아리랑”을 출간했으며 김기덕은 2001년에 시집 “천년이 가도 잠들지 않는 파도”를, 장학규는 2003년에 수필집 “머리잃은 곤혹”과 2014년에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을, 홍영빈은 2006년에 시집 “바람의 색갈”과 2013년에 시집 “바람가는 길”을, 조광명은 2012년에 수필집 “그리하여 마침내 도시여”를, 김춘택은 2008년에 동화집 “닭털비를 맞고 무너진 로마제국”을, 홍군식은 2006년 시집 “360℃고독”, 2008년에 르포 “시대를 클릭하는 CEO”(합저)를, 김운천은 2015년에 수필집 “언덕길은 걷기가 좋아”를 출판에 교부했다.  문학상 수상 정황도 가히 대풍년이라고 할수 있다.  김기덕은 2001년에 한국 월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수상을 시작으로 겉잡을수 없이 2009년에 시 “부엉이 바위(외3수)로 문학세계 제5회문학상 시부문 금상을, 2011년 시 “알고싶은 영일만”으로 제1회 청마문학상 부상을, 2011년 시 “못 다간 그 길”로 “연문컵” 대상을, 2012년 8월 시 “정미소(외3수)”가 제2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문학상을,  2013년 8월 제3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문학상 공로상을, 2014년 시 “가을빛”으로 료녕일보 기원컵 압록강문학상 시 부문 금상을, 2014년 8월 제4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문학공모 공로상을 획득하는 등 장거를 이루어냈다. 조광명도 2009년 11월 도라지 수필 대상을 따안은데 이어 2010년에는 단편소설 “날개를 심다”가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대상을 획득하였으며 2011년에도 소설 “하품”으로 제31회 “연변문학상” 우수상을 거머쥐였다.   장학규는 2005년에 수필집 “머리잃은 곤혹”으로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3등상을 수상했다. 리화는 2012년에 수필 “선녀야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로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부상을 받은데 힘입어 2014년에는 수필 “겨울수채화에는 그리움이 물들고”로 “흑룡강신문 제2회 랑시문학상” 우수상을 차지했다.  이외 홍영빈은 2008년 “리커문학상”을, 리홍철은 시 “이 계절 추락하는 나무잎에”로 한국해외문화교류회 대상을, 전향미는 2015년 수필 “고향에는 지금도 눈이 내린다”로 한국 “동포문학” 수필부문 우수상을, 최재문은 2014년 수필 “코끼리아저씨의 족쇄”로 제3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인터넷문학상 최우수상을, 한춘옥은2009년 수필 “하나 하나의 아픔을 이기면서”로 제1회 연변인민방송국 생활수기 대상과 2011년 시 “하늘나라”로 “연문컵” 가작상을, 김명숙은 2009년 수필 “엄마야 아빠야”로 “료녕조선문보” 제1회 “기원컵”압록강문학상 우수상과 2010년 수필 “파란 꿈을 이루기까지”로 연변인민방송국 생활수기공모에서 우수상을, 김미령은 2000년 수필 “바다가 준 행복”으로 “은하수”잡지 “영동컵” 2등상을 수상했다.  작품수가 방대한것은 물론 창작성과 역시 눈부시다는것을 알수 있다.    ∋ 대표작가 및 작품 분석 1, 김운룡과 대하력사소설 “황야의 아리랑” 김운룡은 1943년에 길림성 부여현에서 태여났다. 36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지만 왕성한 창작열정을 보이면서 선후 단편소설집 “사랑의 그림자”, 장편소설 “밀림의 딸”(공저), “새벽의 메아리”, 전기 “리홍광의 이야기”, “남만봉화”, “김구평전”(한문) 등 10여권 작품집을 출판했으며 조선족문단에서 널리 명성이 알려져있다.   “황야의 아리랑”은 미완성의 대하력사소설이다. 김운룡은 이 소설을 9부작으로 설정하였지만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1권 3부만 완성하고 아쉽게 저 세상으로 떠났다.  소설은 우리민족의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사를 쓰고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험난한 가시밭길과 그 수난의 과정에서 펼쳐지는 줄기찬 투쟁, 그리고 주인공들의 애잘한 사랑이야기를 엮고있다. 특히 주목되는것은 작자의 남다른 용단으로 리념적금기지대에 깊숙이 들어가 소외되고 외곡되고 굴절된 력사의 진실을 밝힌것이다. 이 대하력사소설에서 나오는 인물 대부분은 실명이며 이들의 사상에 덧칠하지 않고 그대로 비추었는바 안중근, 홍범도, 김좌진, 김구, 리동휘 등 민족주의자들의 반일투쟁을 정면에 놓고 직접 묘사해 금구를 돌파하여 력사의 진실에 다가섰다는 평을 받았다. 이 소설은 또한 반세기에 걸친 우리민족의 반일투쟁사를 전면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혹은 편면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극복한것으로 하여 역사자료적가치를 가지고있다. 한편 이 소설은 또한 가족사와 민족사를 밀착시켜 한 가족의 가족사로부터 민족사, 특히는 우리민족 독립투쟁의 투쟁사를 엮고있다. 뿐만아니라 애정선과 민족수난사의 밀착, 서사와 서정, 철리의 밀착도 이 소설이 안고있는 특징이다.  2, 김기덕과 시집 “천년이 가도 잠들지 않는 파도” 김기덕은 1950년 길림성 교하시에서 출생하여 1972년부터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선후 연변제일사범학교와 연변대학 통신학부 정치전업을 졸업했으며 1993년에 청도에 진출했다. 1981년 시 “코스모스”로 등단한 김기덕은 현재까지 3000여 수의 시와 수십편의 수필을 발표하여 조선족문단의 다산작가로 손꼽히고있다.  한편의 좋은 시를 세상에 출품시키는 작업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시를 써본 시인들은 잘 알 것이다. 한 수의 시를 완성하기 위하여 여러 번 갈고 깎고 다듬고 지우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몸에 깊숙이 배여있다.  일년에  수백편의 시를 써오면서 한 수의 좋은 시를 내여놓으라면 그리 만만치 않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시속에 시인의 예리한 초점이 맞춰지고 최대의 카리스마로 압축시킨 강도 높은 함축이 시행마다 깊게 깔려 있는 시, 읽어보면 손으로 만져질것 같고 코를 대면 예상했던 글향이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을 할것만 같은 시를 일년에 한수를 창작한다는것이 그리 쉽지를 않은것이다 2002년 저자가 한국 월간 문학세계에서 출판한 시집 “천년이 가도 잠들지 않는 파도”에서 “풀잎”이란 시가 그 례로 들수 있다. 즉 100년이 넘는 시간을 세개의 단어로 함축시키고 다이아몬드처럼 강도 높은 빛을 발산하게 하는 노력이 뚜렷하게 엿보여주는 것이 자랑스럽다. 풀 잎//그 어느날 밤/짚신이 지나가고/그 어느날 밤/ 고무신이 지나가고/그 어느날 밤 구두신이 지나가며/厄이 풀잎에 길게 누웠다//넘어진 풀잎은 누워서/설레는 소리를 연습하고/그 뒤에 황소같은/ 구름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밟히면 일어서고/또 밟히면 또 일어서고…/끝끝내 일어서는//풀잎에도 厄을 딛고 일어서는/뼈가 있나 보다//그것으로 끝이 없는 들/만경창파에/책 한권 쓰나보다// 풀잎은 이 세상의 높이를 전부 남에게 사양하고 자신은 가장 낮은 바닥을 선호하며 짚신에 밟히고 고무신에 밟히고 구두신에 밟혀 사는 흔히 볼수 있는 우리민족의 력사와 너무나도 가까운 일이다. 짚신 고무신 구두신으로 한백년의 력사를 함축시키며 강한 뼈로 밟히면 일어서고 또 밟히면 또 일어서는 기백과 지혜가 력력히 숨쉬고 있음을 감지할수 있는것이다. 3, 홍영빈과 시집 “바람 가는 길” 1939년 흑룡강성 통하현에서 태여난 홍영빈은 병약한 신체와 가난한 살림때문에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굳은 의지와 이악스런 노력으로 1973년에 처녀작 “봄은 어디에”로 등단, 현재까지 시집 2권과 300여 수의 시를 발표했다.  “바람 가는 길”은 1장 “나를 찾아서”, 2장 “세상과 세월”, 3장 “바람과 나무와 별과 시”, 4장 “생명예찬” 등 총 4장으로 나뉘여졌다. 홍영빈의 시는 시골집 무쇠솥에 우려낸 구수한 숭늉같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것 같다. 현란한 언어가 없지만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솔직한 표현과 알송달송한 몽롱미가 없어도 마음까지 편한 시어의 선택은 홍영빈만의 창작풍격이다.  막차 //밤 아홉시 정각 /나는 집에 가려고 막차에 올랐다/ 네온등 꽃 수놓아 협곡을 달리는/ 막차에 앉아서 해보는 자문 / 이제 훗날 그 어느 역에서/ 마음 놓고 안식처에 내려야 할 / 막차를 탈 승차권은 / 마련 되었는지? 시에서의 막차는 마지막 뻐스가 아닌 시인이 살아온 전반 인생에 대한 회고의 시간인것 같다. “막차”를 보면  시인 자신이 보인다.  자맥질 // 물속 자맥질로 먹이 사냥하는 물새가 / 물의 깊이를 다는 모르고 살 듯 / 하늘을 자맥질하며 노니는 날새도 / 하늘의 높이를 다는 알지 못하지만 / 새들은 저마다 즐거운 삶을 사는거다 /… 주어진것에 만족하고 주어진것을 누리는 삶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홍영빈 시인도 스스로를 날개를 펼줄 아는 한마리의 새라고 했다. 좋아하는것을 마음껏 할수 있는 자유를 가진 스스로가 날개를 펼줄 아는 새라는것은 홍시인의 만족스러운 삶을 말하는것이 아니겠는가? 4, 최균필과 중편소설 “봇나무” 최균필은 1939년 길림성 룡정시에서 출생했다. 할빈농업기계학원을 졸업하고 문화대혁명때 투쟁을 받으면서 그토록 사랑했던 문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아픔이 있다. 1955년 “연변문예”에 단편소설 “부임’을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선후 “연변문예” 신춘문예상, “연변문예” 가작상을 수상했다.  “봇나무”는 자서전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이 일인칭인 “나”로 시작하는것도 그렇고 이름이 작자가 쓰고있는 필명인 “최해”인것도 그렇고 또 “할빈농업기계학원의 재교생”이라고 밝힌것도 그렇고 틀림없는 작자 자신이다. 앞날이 창창한 대학생이 하루아침에 우파로 몰려 대흥안령 오지에 있는 군마장으로 끌려간다. 사랑하던 러시아 처녀 올랴를 잃은 대신 대도시 상해에서 온 소연이라는 처녀와 극적인 만남을 이루게 된다. 조선족총각과 러시아처녀 그리고 상해 한족처녀란 삼각관계는 그 자체가 취미성을 한층 돋구게 된다. 물론 두 감정이 모두 성사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그대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다. 그보다 그런 애끓는 사랑을 통해 그 저주스런 년대에 대한 타매 강도가 한결 강해질수밖에 없는게 묘한 장치가 아닐수 없다. 사람들은 행방이 묘연해진 올랴로 인해 아쉬움을 느끼는 한편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그 비인도적인 세상을 탓할수밖에 없고 소연이의 결과를 통해 사람에게 지역과 신분의 차별을 만들어놓은 인간세상을 한탄할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 소설의 력사적 사명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싶다. 5, 김건과 그의 “돌” 계렬시 1941년 길림성 연길시에서 출생한 김건은 1962년 통화시지질탐사학교를 졸업하고 지질탐사사업에 종사했으며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중화전국공상업련합회 석재업상회 회장직을 력임했다. 1979년 처녀작 “진달래”로 등단한 로익장으로 현재까지 400여 편(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원로 시인 김건은 석재사업을 하면서 시를 다작하였는데 특히 연변시인협회 "시향만리" 2012년 제9호에 발표한 시 "돌"(외 44수)이 대표성을 띠고있다.  김건은 입이 없는 돌과 특별한 사랑을 나누면서 특이한 초인간적인 감각으로 돌과 남다른 대화를 하고있다. "돌"// 태초에 철없는 돌은/정에 뜯기워 다듬어졌다/골 지나 벼랑에 부딪친 모래알 같은 정소리/심산에 부셔져 아픔으로 헤매이다/ 거치른 손에 내려/ 장알이 되여 못으로 박혔다//​돌은 광음에 실려 발돋움하고/인간은 초침 우에 걸음마를 익혔다/어느덧 돌은 톱에 썰리여  다듬어졌다/다이아몬드의 굳음에 찢기여/돌이 훤칠한 몸매로 계단에 오를 때/거치른 아픔에  제몸을 가누기 어려웠다.//기구한 돌의 운명은/한때의 기억으로 빛나다/광풍이 몰아치던 어느날/돌은 물에 베이어 다듬어 졌다/돌은 처음으로 아픔을 잊었다/그리고 멀지 않아 호텔로 들어설/그 날을 머금고 눈부시고 있다// 못난 돌이 석공을 만나면 이미지가 변화되듯이 돌이 김건 시인을 만나면 좋은 시가 되는 리유가 바로 돌에 대한 오랜 기간 깊은 애착과 세심한 관찰 그리고 끈질긴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시 “돌”의 첫 련에서 “철 없는” 돌을 석공의 정에 의해 새롭게 변신되는 돌의 리성적인 성찰을 밝은 재 조명에 맡겨두고 시의 2련과 3련에서는 눈부신 호텔로 이주하는 참신한 결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한 대목이 유난히 이색적이었다. “돌”외에 깊이 있고 무게 있는 수편의 시가 있었다. 선인들의 말씀처럼 돌 하나로 탑을 세울수가 없듯이 향후 청도작가협회의 영예로운 앞날은 수많은 돌로 일어설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6, 장학규와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 장학규는 1964년 흑룡강성 해림시에서 태여났으며 선후 료녕신문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흑룡강신문사에서 편집, 기자로 근무해왔다. 1984년에 데뷔하여 현재까지 여러가지 쟝르의 작품 300여 편을 발표했으며 수필집 “머리 잃은 곤혹”과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을 출간했다.  “청도로그인”은 15편 단편소설 전부가 청도를 배경으로 하고있다는데서 다소 이색적이다. 그리고 연해진출 조선족들의 삶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재현시켰다는데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는 절망의 변두리까지 몰린 사업가가 기적적으로 생의 의욕을 되찾는 과정을 그리고있다. “갈대의 뿌리는 얼마나 깊을가”에서는 젊은 창업자의 밑뿌리를 파내고있다. “가장자리”에서는 약세군체의 고달픈 삶을 보여주고있으며 “바람의 옵션”에서는 뿌리를 함께 하고있는 두 남녀가 이역타향에서 펼치는 눈물겨운 사랑이야기를 다듬고있다. “인저리타임”은 민족렬근성이 객지에 와서도 근절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여주었고 “조깅”은 민족의 출로를 탐색하고있어 주목된다.  이외 글들도 역시 동일한 배경에 놓인 부동한 인물들의 형상을 통해 조선족들의 창업사, 이민사를  재생하고있으며 나아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점과 향후 나아갈 길 등을 고민하고있다. “청도로그인”은 제목이 제시하는바와 같이 문학작품집에 앞서 조선족의 새로운 이민력사기록과 같은 존재로 봐도 무방하다.  7, 리홍철과 단편소설 “줘마” 1972년 길림성 화룡시에서 출생한 리홍철은 1988년 연변일보에 시 “이발자국”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99년 “연변일보” 대성상을 수상했다. 현재까지 시, 수필, 실화 등 300여 편(수)를 발표했으며 청도조선족작가협회 2,3기 회장을 담임했었다. “줘마”는 작자가 목격한 실생활을 소재로 삼고있다. 현재 청해성에서 음식업을 하고있는 작자는 가게도우미로 일하면서 세살난 아들을 키우는 열아홉살난 녀자를 보면서 타민족의 생활습관과 혼인관에 깊이 들어가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700킬로를 달려 직접 무리초원을 답사했으며 무리대초원에서 열여덟살난 젊은 며느리와 조우하면서 장막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였다. “줘마”는 그렇게 탄생했다. 너무나도 원시적이고 태고연한 자연환경에서 넋을 잃었던 반면 그 고요한 수면밑에서 소용돌이치는 아픔도 감지했으며 타민족의 안광으로 “줘마”들이 장막을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사슬을 벗어던지는 용기를 가지기를 바라게 되였다. 하지만 “줘마”는 결국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장막으로 되돌아오면서 문화의 속성과 막무가내를 다시한번 감내해야 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그대로 생소하고 낯설은 환경을 보여주었으며 미지의 신비세계와 이색적인 민족문화와 렵기적인 사건들을 그려내여 시각 충격과 더불어 예술적인 심미향수를 받게 한다.  8, 허강일과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 허강일은 1964년 길림성 화룡시에서 출생했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길시조선족구연예술단, 연변인민방송국 등에서 사업하다 2005년부터 연변일보사 경제부 기자, 주청도 특파기자로 일하고있다. 장막극, 소품 등 100여 편 발표했으며 이외 약간의 수필과 시작품이 있다.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은 허강일의 첫소설이다. 소설은 개혁개방의 선두도시 청도를 배경으로 하고있으며 조선족 만도와 미나, 그리고 한국인 민호의 사랑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있다. 슈제트의 기교나 인물형상의 다채로움보다는 약세군체들이 주류사회에서 생존해나가는 실태를 핍진하게 그리고있어 시사하는바가 크다. 만도는 혼자서 10여 명 깡패를 상대할만큼 주먹세계에서 한다하는 사람이지만 돈을 앞세우는 민호와 암흑세력을 달고다니는 공안국 왕부국장과 장소장의 간계에 빠져 감옥에 들어가고 미나를 민호한테 빼앗기고만다. 소설은 만도가 출소한후 복수하는 과정을 그리고있지만 개인영웅주의보다 경찰출신의 의형제 종수와 그 종수의 동창생 왕형사라는 매개물을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쪽에 무게를 더하고있다. 작자가 현실에 너무 집념한 나머지 사회악에 대한 일반 리해에 멈췄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지만 우리문단에서 쉽지 않게 깡패세계를 다루었다는 점과 조선족의 연해진출 과정이 그토록 치렬했다는 력사를 까밝혔다는데서 높은 점수를 받게 된다.  9, 기타 리화는 흑룡강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그 문학적재능이나 창작성과를 봐서 별도로 코너 하나를 만들어도 무방하나 아직은 경력이 모자라 “기타”에 넘어온 케이스이다. 그만큼 애연한 외모와는 달리 스케일이 크고 시원하게 쑥쑥 나가는 스찔이다. “도반은 지금 수련중입니다”, “내 머리에 꽃핀 하나 달아줄수 있나요”, “내 DNA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등 제목만 봐도 대범함이 철철 넘친다.  한춘옥은 교원 출신답게 많이 경험적이고 지적미가 풍기는 녀류작가이다. 그녀의 수필들에서는 “생각체력”이거나 “근육저축”,”건강은행”과 같은 생경한 단어들이 시도때도 없이 불쑥 튕겨나온다. 한편 “숭늉세대”, “컴퓨터세대”, “굴뚝시대”, “밥가마가 말하는 세월”과 같은 너무 생동하고 형상적인 표현들이 모든 글들에 관통되여있다. 그래서 글에 많이 로련하다는 생각이다.  최재문은 론쟁형 수필가이다. 성공작 “고양이와 물고기 그리고 지렁이”나 “인생의 네비게이션”이나 또는 “10분이상 고민하지 마라”를 포함하여 그의 모든 글은 론리가 정연하고 론점이 명백하다. 빈틈 하나 없이 잘 다듬어져있어 마치도 쇼핑에 나선 귀부인의 모습이다.  전향미는 글이 많지 않지만 글마다 잘 여물어 혼자 보기 아쉬울 정도이다. 필력이 자유분방하고 전개가 일사천리로 달린다. 수상작품은 물론 “바다와 중년의 녀인 그리고 친구”, “아버지와 술” 등 거의 모든 작품이 툭툭 튀는 개성으로 한눈에도 전향미의 글이란것을 알수 있게 한다. 앞날이 기대되는 재치군이다. 김미령은 생활형 수필가이다. 한번씩 아플때마다 글이 나오고 그 글은 또 그렇게 아프다. 글을 아프게 처절하게 다룰줄 아는 진정한 글쟁이이다. “나 슬퍼서 산다”, “엄마가 필요해”, “빌려쓰는 인생” 글제목부터 상처가 보인다. 김명숙은 항상 생김새나 성격처럼 무덤덤한 스타일이다. 들끓는 격정이 없는대신 사연을 한올한올 풀어주는 센스맨이다. “신깔개를 파는 할머니”, “돌려받지 못한 책”처럼 덤벼침이 없이 차근차근 설명하는 이야기형이다.  유해금은 대학교수이지만 시인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많이 흥분형이고 즉흥형이다. “당신속에 머무는 순간”같이 절절한 사랑 웨침도 있고 “눈 내리는 밤의 비소리”처럼 정서적인 표달도 있으며 “만추의 리별”과 같은 되새김도 있다.  리문혁은 기업인답게 “받은 사랑은 베풀어야 한다”, “배려의 예술”과 같은 인생돈오의 글을 많이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다.  이외 김재룡, 김철우, 김운천, 정순금, 차설매, 홍걸, 장향화, 김국화, 윤명해, 리정복 등 특색있는 작가들이 있지만 지면상 일일히 거론하지 않는다.  나가는 말 산동은 역전이라는 말이 있다. 북방에서 남방으로 나가거나 해외와 국내를 드나들때나 산동을 거쳐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오간다. 문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돌이켜보면 낯익은 얼굴들이 알게모르게 많이 사라졌다. 리호원은 할빈으로 금의환향했고 김춘택은 연변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조광명은 광주로 남하했고 홍군식은 태평양 넘어 미국으로 떠났다. 류일복은 고국땅에 자리잡았고 송련옥도 선조의 고향으로 귀환했다. 대개는 날개가 언녕 굳세진 거물급들이여서 못내 섭섭하고 안타깝지만 격정의 시대에는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 또 다른 익숙한 얼굴들이 느낄새도 없이 조용히 다가와 감격을 주기도 했다. 벽소설 대왕으로 널리 알려진 박일선생이 퇴직후 청도로 옮겨왔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음력설야회에 소품을 가장 많이 내놓은 허강일씨가 만리길도 멀다하지 않고 역시 산동땅에 뿌리를 내렸으며 심양조선족문학회 평론분과 주임이던 김례호씨도 청도에 집을 마련하고 그루를 박았다. 저명한 평론가 리장수선생이 위해쪽으로 이사왔고 청도에서 항주로 떠났던 장학규는 다시 청도에 세번째로 입성했으며 한때 문학과 등지고 살았던 김건도 활기찬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보다 신진들의 약진이 더 돋보인다. 리화, 최재문, 한춘옥, 전향미, 유해금, 김미령 등은 송화강잡지에서 수필특집을 묶어줄 정도로 어느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김재룡, 김철우와 김명숙은 기성문인의 길을 드팀없이 지켜나가고있다.  여기에 200여명의 방대한 그룹을 형성하고있는 청도조선족대학생련합회 회원들이 근거리에서 호응하고있다. 앞날이 훤하게 뚫린 형국이다.  이제는 들어올 사람들만 있지 나갈 사람은 거의 없는걸로 알고있다. 모두가 집을 사고 뿌리를 내렸다. 그렇다면 산동은 앞으로 더 멋진 문학의 터전이 닦아진다는 반증이 아닐까? 아무튼 두고볼 일이다.    주: 본 론문 저술과정에서 김기덕, 리홍철 등 많은 분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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